- 294 國史館論叢 第92輯 믿었다. 甲午年(1594)에 盧志夫와 더불어 灆溪書院 院任을 맡았는데 丁酉再亂 후에 志夫 가 죽고 혼자서 書院과 鄕賢祠의 復元에 노력하였다. 庚子年(1600)에 盧院長이 부임하였으 나 곧 죽고, 이어 盧益山이 院長이 되어 書院 移建을 發議하여 터를 정하여 일을 시작하였 으나 또 곧 죽으니 完工을 기약할 수 없어 姜克修에게 일을 넘겼다. 甲辰年(1604)에 아내를 잃었다. 姜渭瑞 姜應璜(1559 1636)의 字, 호는 白川 와 死生의 交分을 맺고 心肝相照하 였다. 乙巳年(1605) 이후에는 오직 三賢祠의 일에 전력하였는데 주위에서 流言蜚語를 捏造 하여 죄에 빠뜨리고자 하였다. 姜克修는 成均館에 공부하러 가서 돌아오지 않고, 일을 완공 하여 落成함에도 참여자가 많지 않고 渭瑞와 克修까지 함께 口舌에 빠지게 되었으니, 외로 운 鶴은 짝을 잃고 뭇 갈가마귀떼가 많은 것과 같다. 이로부터는 세상사에 뜻을 멀리하고 문을 닫고 허물은 반성하여 허물이 있으면 고칠 것이고, 허물이 없으면 웃어줄 것이다.13) 이를 볼 때, 그는 매우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이 과정에서 운명처럼 알고 살았 던 兄嫂에 대해서 지극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는 일기의 곳곳에서 그러한 심정을 표현하 고 있는데, 甲午年(1594) 4월 23일. 형수의 병이 심해져 말이 통하지 않고 手足이 굳어져 거의 구할 수 없기에 이르렀다. 내가 울면서 神主에게 告하여 罔極之情을 호소하 면서 꿇어 앉아 한참 동안 기도하였다. 날이 저물자 형수의 병이 조금 낳았는데, 어찌 神 佑의 功이 아니겠는가? 14)고 한 것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그는 25세에 善山 金氏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이듬해부터 평생 동안 지극히 尊慕한 來 庵 鄭仁弘의 門下에 들게 된다. 이후 그는 隣近의 선비들과 講磨하면서 점차 향리에서 활 동범위를 넓혀 나가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환경에서도 그가 사회적 위상을 提高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祖父의 後光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祖父는 唐谷 鄭希輔 13) 余二歲早孤 依外祖考鞠養 九歲外王父又沒 十三歲慈母見背 孤衰中 從伯兄受學 衣食於外王母 十五又失之 自是 視兄如父 視嫂如母 十九又失兄 學未知魚魯 形影相弔 自庚午至己卯 仰嫂爲命 猶韓愈於鄭夫人 至庚辰始有室 孤困之中 有知義理之辨 家近城市 亦未嘗有折擅之失 心慕希賢 少 有自得於黃卷 而與朴公幹 朴景實 盧志夫 鄭玄卿 姜克修等相友善 辛巳始知尋師之道 請見於 來庵先生 先生不斥之以無似 厥後夤緣出入 每思秋月照寒水之句 仰之如父母 信之如神明 甲午與 盧志夫同受院任 丁酉再亂後 志夫以毁而滅性 余獨還鄕 經理一蠹書院及鄕賢祠 粗有萬分之報 庚 子盧丈爲山長 同起移院之議 卜地創立 盧丈遽殞 言無聽唱 無和者一歲 而爲衆楚所困 未幾 盧益 山丈爲山長 志同興學 而繼殞未就 事無訖期 傳任於姜克修 窮鄕晩學 旣無立雪之苦 又乏切磋之益 終未免墻面 與道岸相隔 則如雁之落於草澤之中 沒首無所見 而策慮駑鈍 趨拜於先生 多獲書信之 敎 時或折簡 以候起居 而連承誘掖之賜 甲辰室人棄逝 問禮治喪 得免扣盆之失 與姜渭瑞 定爲死 生之交 同卜牛山之坡 情同志同師友同學業同几案同謗毁同 托爲峨洋 心肝相照 絶如雁之思 群奮 飛志 遠也 乙巳遭服之後 元意人事 只恐三賢之祠 埋沒於草棻之間 而姜克修遊泮不歸 奉安未易期 强起衰慷 多般措畫 擇日移安于時 鄕人或以有愆 或以遺漏 或有不參於盛禮者 懷憤磨牙 捏造飛語 吹沙伺影 必欲陷之於有過之地 與渭瑞克修同受口舌 罔有紀極 如孤鶴之寡侶 而鴟鴉之衆多 自是 意欲謝絶人事 杜門省愆 若有則改之 無則笑之 如雁之不飮不啄不聞不見 斂翼雲霄色 斯簡出則庶 免網羅之厄矣 因詠以自警. 14) 嫂病轉苦 不通言語 手足痿木 幾至難救 余泣告于神主 訢以罔極之情 跪檮移時 日晡 嫂病少間 豈非神佑之功耶.
壬辰倭亂 關聯 民間日記 鄭慶雲의 孤臺日錄 硏究 - 295 - (1488 1547)인데, 당곡은 남해로부터 함양으로 이주한 인물로 一蠹 鄭汝昌 이후 이 지 역에서 性理學을 계승하고 교육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리하여 당대에 강우지역에서 명 성을 날린 많은 인물들이 당곡의 門下에서 배출되었으니, 盧玉溪 李靑蓮 梁九拙 姜介 庵 吳德溪 蘇暘谷 鄭梅村 曺梅庵 林灆溪 盧徙庵 都養性軒 梁竹庵 禹愚泉 등 이 대표적인 인물이다.15) 이로 인해 孤臺는 이미 이 지역에서 士族으로의 확실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孤臺는 37세에 壬辰倭亂을 당하자 同志들과 起兵하여 義兵有司로 활동하면서 松 菴 金沔을 도와 義兵活動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또한 그는 임진왜란이 한창인 시기인 39세부터 灆溪書院의 院任을 맡아 先賢 尊崇의 일에 앞 장섰다. 특히 정유재란 때 함양이 함락되는 상황에서 서원의 책을 옮기고 神主를 埋沒하 였고16), 전쟁이 끝난 뒤에는 남계서원과 鄕賢祠의 복원을 위한 노력에 총력을 경주하였 으며, 결국 이 일과 연관되어 지방 儒林의 갈등이 유발되기도 하였는데, 이 문제는 당시 강우지역 士林의 상황과 연계하여 別稿를 통해 연구되어져야 할 사항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와중에서 그는 정유재란에서 당시 14세이던 장녀 貞兒를 잃고17), 다음해에는 어린 아들 周復을 잃었으며18), 그 2년 뒤에는 次女 端兒를 잃게 된다19). 또 4년 뒤에는 아내마저 死別하게 되고20), 평생 절친한 사이였던 박여량의 아내인 從妹마저 죽게 되자 人事를 끊고 杜門不出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그는 전쟁 중인 1594년 지방의 別試 에 及第하고 科擧에 응시하지만 낙방하는 등21) 벼슬길과도 인연이 멀었다.22) 1609년 이후 그의 행적은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沒年에 대해 晉陽鄭氏世譜 에 서는 庚戌年(1610) 1월 15일 享年 55세로 死亡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박여량의 문집인 感樹齋集 을 보면 孤臺가 광해군 3년(1611)에 죽은 감수재의 祭文과 輓詞를 지 은 것이 수록되어 있고, 光海君日記 권43 3년 7월 4일조에는 咸陽儒生鄭慶雲等上疏 라 하여 정경운 등이 스승인 정인홍이 誣告를 당한 것을 辯論하는 上疏를 올린 기사가 있으며, 광해군 9년(1617)에는 灆溪書院의 院長을 歷任한 것으로 되어 있다.23) 또 德川 15) 唐谷의 學問과 師友關係 등에 관한 내용은 1889년에 간행된 唐谷實紀 참조. 16) 孤臺日錄 정유년 8월 7일조 참조. 17) 고대일록 정유년 8월 21일자 참조. 18) 고대일록 무술년 6울 27일조 참조. 19) 고대일록 경자년 11월 26일조 참조. 20) 고대일록 갑진년 12월 30일조 참조. 21) 고대일록 갑오년 10월 12일조 및 11월 23일조 참조. 22) 咸陽郡邑誌 人物儒行條에 의하면, 鄭慶雲 希輔之孫 以學行 宣廟除敎官이라 하여 孤臺가 벼 슬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光海君 元年까지 기록한 일기에서는 그러한 내용이 보이지 않고 있다. 23) 嶧陽先生文集 권4. 雜著 通諭咸陽士林 丁巳條 : 今聞 以鄭慶雲爲院長 此中公論 又以尹信
- 296 - 國史館論叢 第92輯 書院의 院生錄 에 광해군 원년에서 15년까지의 院生 名單과 仁祖 元年(1623)에서 7년 까지의 원생 명단에 정경운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그는 대략 70세 내외 까지 살았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보다 정확한 고증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Ⅳ. 壬辰倭亂 關聯 內容 1. 鄭慶雲의 義兵活動과 丁酉再亂 1) 義兵活動 狀況 전쟁이 발발하고 한 달이 채 안되어 招諭使 金誠一이 함양에 도착하면서 정경운이 포 함된 함양 선비들의 의병활동이 시작되는데, 그 내용을 壬辰年부터 癸巳年까지 날자별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임진년(1592) 5월 8일. 임금이 平壤附에 臨御하여 金誠一을 招諭使로 삼았다. 성일이 郡에 이르러 먼저 士人들을 부르는 글을 내었다. 나도 召募有司가 되어 흩어진 군졸을 불러 모았다.24) 5월 13일. 招諭使가 山陰으로 향하면서 [함양]읍의 일을 깊이 부탁하였다.25) 5월 15일. 盧志夫가 글을 발하여 鄕人을 모아 의병 일으킬 일을 논의하였는데, 나 또한 그 논의에 참석하였다.26) 5월 22일. 노지부가 다시 通文을 내어 의병 일으킬 일로써 향인을 모았는데, 나도 또한 참 석하였다.27) 5월 23일. 나는 栢田에 있으면서 군사를 모았다.28) 5월 24일. 本郡에서 흩어진 군졸을 모은 것이 대략 400여 명이었는데, 官軍에 속하게 하였다.29) 6월 6일. 초유사가 有司에게 傳令을 보내 의병 일으키는 일이 늦음을 책망하였다. 6월 9일. 지역의 선비들이 모여 擧事를 논의하였는데, 盧士豫와 盧士尙을 都有司로 삼고 書 記 軍器 軍糧 聚軍 戰馬 運餉 등의 有司를 설치하였다. 나와 姜克修는 記事를 맡고, 朴公 幹과 鄭玄卿은 弓矢를 감독하며, 鄭士古 및 盧景承은 軍資를 모으고 군량에 힘쓰며, 그 나 머지의 鄕友들도 힘 쓸 수 있는 일을 맡아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姜兄 君望은 武器를 맡아 힘을 씀이 또한 많았다.30) 男爲上有司 咸陽有司一員 在院長所擇定耳. 24) 上御平壤府 以金誠一爲招諭使 誠一到郡 首招士人 余爲召募有司 召集散卒. 25) 招諭使向山陰 請余深勸邑事之托矣. 26) 盧志夫出文 會鄕人義擧義兵 余亦叅論焉. 27) 盧志夫再出通文 會鄕人 以擧義旅 余亦叅焉. 28) 余在柏田 聚軍. 29) 本郡招募散卒 凡四百餘名 屬于官軍.
壬辰倭亂 關聯 民間日記 鄭慶雲의 孤臺日錄 硏究 - 297 6월 10일. 境內의 모든 人民을 헤아려서 그 富裕한 정도에 따라 軍資를 정했는데, 선비는 각각 화살촉 五同과 깃털 15개를 내어 긴 片箭에 충당토록 하였으며, 민간의 오래된 활을 수습한 것이 모두 294杖이었다. 戰馬를 搜探하여 모으고 군졸을 불러 모으니 날로 정상적 인 군마가 되어갔다.31) 6월 11일. 스스로 원하여 의병으로 일어나는 자가 점차 모여들었다. 民間의 愚夫愚婦들이 모두 討賊의 義를 알고 敵愾心을 갖는 것은 유식한 선비들이 唱導한 까닭이다. 6월 12일. 安陰과 居昌 두 고을에 통문을 내어 의병 일으킬 일을 논의하였다. 6월 14일. 초유사와 都事 金英男에게 글을 올려 의병 일으키는 일의 어려움과 崔汴을 將帥 로 삼을 것을 논의함 6월 15일. 초유사와 도사의 답서를 받음. 초유사의 답서에서 최변을 장수로 삼을 것을 허락함. 6월 16일. [의병의] 모든 点考를 하였는데 騎馬와 槍兵이 모두 337명이었다.32) 6월 17일. 군대를 점고하고 군사를 먹인 뒤 龍升亭에 陳을 치고서 최변을 장수로 삼아 知禮 로 향하였다.33) 6월 18일. 적이 지례현을 침범하여 의병이 추격하여 長谷驛에서 전투를 벌여 적의 머리 2급 을 베다.34) 6월 21일. 의병군을 牛旨縣의 伏兵處로 보냄 6월 23일. 초유사의 명령으로 晉州에서 화살대를 가져오다.35) 6월 27일. 초유사가 裨將을 郡에 보내어 흩어진 군졸을 불러 모으다. 8월 6일. 의병 각 유사의 성명을 巡察使 招諭使 義兵大將 都事 등에게 적어 올림36) 11월 6일. 鄭仁弘 金沔 朴惺 등이 聚穀에 대한 통문을 보내옴. 이에 대해 박여량 노사상 등 과 같이 취곡유사로 결정됨.37) 11월 29일. 동지들과 함께 지례 石谷에 진을 치고 있는 김면 대장을 찾아보다. 김 대장이 노고를 위로하다. 12월 19일. 本郡의 義穀은 모두 96石이었는데, 이를 적어 朴正郞 惺 에게 올리니 정랑이 칭탄하였다.38) 12월 25일. 내가 집에서 片箭을 쏘고자 하여 後園에서 연습하다가 잘못하여 왼손을 맞추었 다. 화살이 合曲으로부터 長指를 꿰뚫어 왼손이 썩어가려하니 걱정이 어떻겠는가? 심하도 다 왜적의 피해여! 진실로 이 왜적이 아니라면 어찌 활쏘기 연습을 할 이치가 있겠는 가?39) 30) 闔境士子 會議擧事 以盧士豫 盧士尙爲都有司 設書記 軍器 軍糧 聚軍 戰馬 運餉等有司 余與姜克修主記事 朴公幹與鄭玄卿督弓矢 鄭士古曁盧景承聚軍資務調饋 其餘鄕友 各主辦措 不遺 餘力 而姜兄君望 主張戎器宣力亦多. 31) 都計境內人民等 隨其饒富 卜定軍資 士者則各出鏇鐵五同羽十五介 以備長片箭 收拾民間舊弓 摠 二百九十四丈也 收括戰馬 招捕軍卒 日以爲常數日之軍馬. 32) 行都點考 騎槍凡三百三十七名. 33) 點軍犒軍 結陣于龍升亭 以崔卞爲將 赴于知禮. 34) 賊來犯知禮縣 義兵軍追戰于長谷驛 斬首二級. 35) 以招諭使令 取箭竹于晉州. 36) 自起軍之後 諸有司協心擧事 而迄不能報稟于道主 故書記聚軍軍器軍糧戰馬刷馬等各有司 各塡姓 名 上于巡察招諭大將都事等處. 37) 鄭大將金大將朴正郞惺 出聚穀通文 而列邑各定有司 咸則朴公幹盧志夫及余等五人也. 38) 本郡義穀 摠淂九十六石 成冊上于朴正郞 正郞稱歎矣.
- 298 國史館論叢 第92輯 계사년 2월 2일. 右道兵使가 된 김 대장에게 함양 의병소 각읍유사의 성명과 군기 군량 의 병군의 숫자 등을 기록하여 보고하다. 2월 15일. 의병소 각읍의 유사 성명과 군기 군량 의병수를 조목에 따라 기록하여 대장에 게 보고했는데, 대장이 啓聞하고자 한 까닭이었다.40) 10월 6일. 나와 盧院長 盧志夫 鄭士古 鄭玄卿 盧景升 陳君述 盧賓夫 趙守甫 李子 胖 河子明 姜渭瑞이 鄕校의 亭子에 같이 모여 의병소의 군기 군량등의 일을 의논하였 다.41) 12월 2일. 鄕校에 가서 義兵 먹일 일을 논의하다. 이를 보면, 의병의 組織과 활동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즉, 의병의 주도세력은 고대 를 포함하여 거의 士人들로서 전투를 지휘할 장수를 구하기가 힘들었던 실정이었고, 실제 전투를 하는 병사들은 鄕兵보다도 오히려 패전한 官軍의 散卒들이 중심이 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면에 향인들은 군량과 무기 등을 모으는 데 많은 협조를 한 것이라 하겠다. 고대는 文士이면서도 직접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꾸준히 군량을 모으고 무기를 조 달하며 의병과 관계된 문서들을 처리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흩어진 군졸 400여 명을 모 집한 5월 24일자의 기록 뒤에 작은 글씨로 내가 힘을 다하여 군사를 모아 관군에 속하게 하였는데, 의병 일으키는 일이 쉽지 않음이 이와 같다. 42)고 한 것은 의병군의 고충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던 중 활쏘기 연습을 하다가 부상을 당한 후에는 거의 의병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가, 계사년 年末에 가서야 다시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계사년 이후 그를 비롯한 의병유사들의 주된 당면 문제는 의병의 양식을 조달하는 것 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뒤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2) 丁酉再亂 時 咸陽陷落 狀況 講和를 논의하며 다소 小康狀態를 유지하던 전쟁이 정유년에 왜적의 再侵으로 다시금 남부지방에 일대 격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정유재란은 일기의 3월 28일조에 秀吉이 병사를 모으고 督戰한다는 소식을 싣고 있고, 4월 18일에는 적의 간첩 3人이 공산산성을 정탐한 사실 및 5월 21일조에 듣건대 要時羅가 兵使에게 와서 말하기를 賊將 등이 6월 朔日을 택해서 병사를 움직여 충돌할 것이다 운운 43) 하는 내용 등으로 보아 이미 예견 39) 余在家欲射片箭 習射于後園 誤中左手 箭自合曲 穿于長指 左手將枯 憂悶如何 甚矣 倭賊之害也 苟非此賊 安有習射之理哉. 40) 義兵所各邑有司姓名軍器軍糧義兵軍數 遂條列錄 報于大將 大將欲啓聞故也. 41) 余與盧院長盧志夫鄭士古鄭玄卿盧景升陳君述盧賓夫趙守甫李子胖河子明姜渭瑞 共會于校亭 以議 義兵所軍器軍糧等事也. 42) 余之渴力募軍付官 義兵之未易起者如此也. 43) 聞 要時羅來言兵使曰 賊將等擇日於六月朔日 動兵衝突云云.
壬辰倭亂 關聯 民間日記 鄭慶雲의 孤臺日錄 硏究 - 299 - 하고 있었던 사태였다. 왜군은 우익 총대장인 毛利秀元이 휘하의 27,000 병력을 이끌고 7월 25일 西生浦를 출발하여 전라도 전주 공략을 목적으로 양산을 경유하여 낙동강을 따라 창녕으로 진격했 다. 전선의 방어선이 돌파당한 조선군은 <淸野對邊策>으로 대항하였다. 都元帥 權慄은 금 산으로, 都體察使 李元翼은 선산의 金烏山城에, 慶尙右兵使 金應瑞는 합천으로 후퇴하고, 당시 慶尙防禦使였던 郭再祐는 밀양 영산 창녕 현풍 등 4읍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花旺山 城에 고립되어 있었다. 왜장 嘉藤淸正은 이 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一晝夜를 對峙하다가 山勢의 험함과 병사들의 숙연한 태세를 보고서 攻城을 단념하고 물러나, 이들이 힘을 합 쳐 黃石山城으로 방향을 바꾸어 진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산성은 고대가 정월 26일 에 일찍 산성에 올랐는데 산성의 험함은 하늘이 만든 것이다. 만약 수년간의 군량만 있 다면 비록 倭奴와 충돌할지라도 어찌 두려워하겠는가? 44) 한 정도였고, 6월 12일에도 조카를 산성에 보내 축성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이 산성이 함락되는 상황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8월 6일. 듣자하니 壁堅山城을 버리고 지키지 않는다고 한다. 적이 가까이 다가 오지도 않 았지만 兵使가 먼저 아내를 내보내어 피난갈 생각을 보였음으로 士卒들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질 생각을 품었다.45) 8월 7일. 들리는 바에 의하면 壁堅 岳堅 正介 3城 모두를 지키지 않고 버린다고 한다. 탄식 할 노릇이다. 부모님의 木主를 받들어 묘 옆에 묻고, 陳君述과 더불어 書院에 이르 러 書冊을 옮기고 神主를 묻었다.46) 8월 8일. 새벽에 식구를 거느리고 우선 開心寺로 피하였다. 人心이 흩어지고 마을이 텅 비 었지만 한 사람도 산성으로 들어가지 않으니 장차 어찌할 것인가?47) 8월 9일. 흉적이 下道에 가득하다고 한다. 그러나 傳通이 단절되어 소식이 아득하다. 아아! 평소에는 많은 병력을 가지고서 군량을 모으면서 백성들을 멋대로 학대하더니, 아루 아침 에 어려운 지경을 만나자 바람만 보고도 달아나면서 적들은 많고 우리는 적다 는 말로 핑 계를 댄다. 장황하게 허튼말을 하면서 하늘까지 속이니 통탄할 만하다.48) 8월 12일. 내가 北面의 길로 갔는데 길에서 鄭士古와 趙由仁을 만났다. 산성소식을 들었는 데 지극히 허소하다. 申陰 북쪽 3里는 단지 다섯 사람만 들어왔고, 거창은 들어온 사람이 하나도 없고, 함양 백성들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서 성에 들어갈 뜻이 없다. 필경은 지키 지 못할 것이니 비참함을 어찌하랴!49) 44) 早登山城 山城之險 天所作也 若有軍糧數年之儲 雖倭奴衝突 其足畏乎. 45) 聞壁堅山城棄而不守 賊不迫境 而兵使先自送妻 以示避去之意 故士卒皆懷四散之計. 46) 聞壁堅岳堅正介三城 皆棄不守 可歎可歎 奉父母主木主 埋于墓側 與陳君述至院 移書冊埋 神版. 47) 黎明 率家累姑 避于開心寺 人心潰散 村落一空 無一人入山城者 其將奈何. 48) 凶賊彌滿下道云云 而傳通斷絶 聲息昧昧 噫 平居擁重兵聚軍糧 恣虐生民者 一朝臨難 望風而走 以彼衆我寡爲辭 張皇虛語 厚誣天聽 可痛可痛.
- 300 國史館論叢 第92輯 8월 15일. 왜적이 안음에 들어왔다. 盧景承을 만나 피난할 곳을 의논하였다.50) 8월 16일. 왜적이 함양에 들어와 사방으로 흩어져서 분탕질을 하였다. 급히 寶國庵으로 들 어갔다.51) 8월 18일. 크고 작은 피난민들이 산위에 모였는데,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해질 무렵 인 심이 해이해지자 왜적 10여 인이 몰래 다른길을 경유하여 크게 소리지르고 검을 휘두르면 서 사방으로 돌입하니 사람들이 모두 산골짝이에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그 재물을 잃은 것 이 헤아릴 수 없었다. 날이 저물어 돌아와 모여 집안 식구들을 찾으니 큰딸과 작은딸 그 리고 奴婢 세 사람이 간 곳을 알 수 없으므로 정신이 아득하여 통곡하고 또 통곡하였 다.52) 8월 19일. 흉적이 사방으로 나다니면서 분탕질하며 노략질한다. 게다가 白雲山까지 수색을 하였다. 우리는 山谷에 잠복해 있으면서 흉적이 겁이나서 내 딸아이를 찾을 수도 없었 다.53) 8월 21일. 조카가 산에 이르러 정아의 시신을 찾았다. 머리가 반쯤 짤린 채 돌 사이에 엎어 져 있었는데, 차고 있던 칼로 휘두르려고 하는 것이 마치 살아있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아아! 내 딸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내가 처음 왜적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차고 있던 칼을 주면서 만약 불행한 일을 만나더라도 너는 적의 뜻에 따르지 말라 고 하였었 다. 이후로는 한 번도 머리를 빗지도 않고 얼굴을 씻지도 않으면서 큰 적이 이제 이른다 니 내가 살 수 있는지는 期必하기 어렵다 는 말을 그 어미와 늘상 말했다고 한다. 마침내 흉적을 만나 당당하게 겁도 없이 왜적을 나무라면서 生을 버리고 절개를 온전히 하였으니 곧도다 내 딸이여!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다. 아아! 네가 생을 버리고 義를 취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내가 한 딸의 목숨도 구하지 못하여 흉적의 칼 아래 운명케 하였구나! 붙 들고 데리고 다니면서 피난하여 시종을 함께 하다가, 다른날 구천에서 손을 잡으며 다시 만나면 내가 실로 너를 져버렸으니 무슨 낯으로 너를 위로하겠느냐? 너의 우뚝한 절개에 대해서는 내 마땅히 傳을 지어 기록해 두겠다. 의복을 다 잃어 몸을 殮襲할 도구도 소략 하기 그지 없으니 통곡 통곡이라.54) 8월 22일. 적들이 산골짝이의 안팎을 다 수색하여 거의 다 殺戮하였다.55) 8월 26일. 함양의 적이 철거하여 全州로 향했다.56) 49) 余往北面路 逢思古及趙由仁 聞山城消息 極爲虛䟽 申陰北三里則 只入五人 居昌則無一人來入者 咸陽之民 亦皆四散 遑無入城之意 畢竟難保 悲慘如何. 50) 倭賊入于安陰 見盧景承 議其避難之處. 51) 賊入于咸陽 四散焚蕩 急投寶國庵. 52) 大小避亂之人 屯聚于山上者 不知其數 日晡時 人心解怠 倭賊十餘人 潛由他路 大叫呼揮劒四 突 人皆顚覆於山谷 喪其財寶 不可勝計 日暮還聚 問其家屬 則長女季女及奴婢三人 莫知去處 心 魂俱喪 痛哭痛哭. 53) 凶賊四突焚掠 又搜白雲山 潛伏山谷 畏賊而不得根尋我女 悲痛罔極. 54) 猶子到山 得貞兒屍身 斬首過半 覆於石間 所佩刀子 及投手皆菀若平生 嗚呼 我女 至於此極耶 我始聞賊 奇解所佩刀子遣之曰 若遇不幸 汝不從賊云云 自後 一不梳頭洗面曰 大賊今至 我生難 必之焉 與闕母每每說道云云矣 卒于凶賊 屹然無㥘 罵詈賊奴 捨生全節 貞哉我女 不愧其名矣 嗚呼 汝之捨生取義 善則善矣 我不能救一女息 殞命兇鋒之下 扶携避亂 以共終始 他日九泉 握 手重逢 則我實負汝 何面慰汝 至於汝卓立之節 則我當敍傳以志矣 衣服盡失 殮身之具 草草莫甚 痛哭痛哭. 55) 賊搜括內外山谷 殺戮幾盡.
壬辰倭亂 關聯 民間日記 鄭慶雲의 孤臺日錄 硏究 - 301 8월 28일. 河子悅을 만나 從弟 德將과 朴兄 景實과 趙兄 幹甫와 鄭兄 士古가 害를 입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들으니 五臟이 찢어지려고 하였다. 아아! 친구들이 떨어짐이 한결 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외톨이로 남은 나는 누구와 이야기를 나눌 것인가? 생각해 봄에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인다. 이 세상에 태어나 운명도 불행하다.57) 8월 29일. 내가 寶谷庵에 가서 갈무리 해 두었던 서적 상자를 파내어 왔다. 9월 27일. 梧峴 雨落洞을 지나 君子亭을 완상하다. 우러러 산성을 바라보고 굽어 적진을 보 았다. 인하여 養靜의 죽음을 생각하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아아! 양정이 白士霖에 게 속아서 헛되이 흉봉에 죽었으니 슬프다! 사림이 城 중에 있을 때에 老弱한 사람은 성 에서 내 보내라는 體察使의 전령을 숨겼다. 또 몰래 자기 어머니와 두 妾을 내 보내고도 안음 거창 두 고을에는 알리지도 않았다. 마음씀이 왜적과 무엇이 다르리오?58) 이 내용들을 통해 보면, 당시 함양의 함락은 民 官 軍이 서로 不信하여 협력하지 못 한데에서 일차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특히 白士霖은 산성의 수비 책임을 맡았으면서 도 자기 一身을 위하고 가족만을 먼저 도피시켜 백성들의 인심을 수습하는 작전에서 큰 과오를 저질렀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 당시 왜적의 만행과 백성의 폐해를 대단히 사실 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그 慘狀을 알 수 있게 해주며, 일기는 그 해 12월까지 이와 관련 된 내용을 곳곳에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2. 壬辰倭亂 戰亂史로서의 意義 1) 南冥學派의 義兵活動 임란 초기에 일어난 의병은 지역적 특성에 의해서 慶尙右道로부터 비롯되었다. 관군이 潰滅하고 패전한 군졸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이들을 규합하고 집안의 노비 및 향인을 모아 왜적을 토벌하려고 나선 義兵將은 대부분 南冥의 門人이 주축을 이루었다. 가장 먼 저 의병을 일으킨 인물은 남명의 문인이자 外孫胥이기도 한 忘憂堂 郭再祐였으며, 뒤를 이어 松菴 金沔과 來庵 鄭仁弘 등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이들을 이른바 壬辰倭亂 3대 義兵將이라고 稱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남명문인의 의병활 동은 이미 상당 부분이 자세히 연구되어 있으므로59), 여기서는 창의의 단초만을 다룬다. 56) 咸陽之賊撤去 向全州. 57) 遇河子悅 聞從弟德將朴兄景實趙兄幹甫鄭兄士古被害消息 聞來 五內欲絶 嗚呼 親舊零落 一至此 哉 孑然此生 誰與晤語 思之不覺嗚咽 人生斯世 命之不幸矣夫. 58) 歷梧峴雨落洞 賞君子亭 仰看山城 俯見賊陣 因思養靜之死 不覺淚下 嗟乎 養靜見欺於白士霖 空 死兇鋒 可哀可哀 士霖曾在城中 匿体相老弱出城之傳令 又潛出其母兩妾 而不告於安陰居昌兩衙處 心行事與賊何異. 59) 이 부분에 대해서는, 李在浩, 壬辰義兵 一考察 ( 歷史學報 35 36, 歷史學會, 1967), 羅 鐘宇, 嶺 湖南 義兵活動의 比較檢討 ( 慶南文化硏究 14, 慶尙大學校 慶南文化硏究所,
- 302 國史館論叢 第92輯 임진년 5월 10일. 來庵 鄭선생과 松菴 金선생이 합천의 崇山洞에서 회의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고 동지들과 규합할 것을 계획하니 郭䞭 河渾 權瀁 등이 의병 일으킬 논의 를 정하였다.60) 5월 22일. 김송암이 列邑에 통문을 내어 起兵有司를 정했는데, 안음은 鄭惟明, 成彭年이 고, 함양은 盧士尙 盧士豫 朴선이며, 산음은 吳俔 吳長 林應聘이며, 丹城은 李魯 金景謹 李惟諴이며, 三嘉는 盧欽 李屹 朴思齋이고, 宜寧은 李雲紀 郭再祐 郭走日 등이었다.61) 草溪의 幼學 李大期와 全雨도 기병하여 왜적을 토벌하였다.62) 6월 22일. 정대장 내암과 김대장 송암이 병력을 거느리고 거창에 모여 초유사 김성일과 토 적의 방책을 상의하였는데 신기한 계책이 다른 사람의 意表를 넘어섰다. 우도의 여러 읍이 병화를 면하고 오늘이 있음과 愚夫愚婦로 하여금 모두 토적의 義를 알게 한 것은 모 두 두 선생의 공이다. 아! 선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미 오랑캐에게 속했을 것이다.63) 1992), 李南姬, 慶尙右道의 義兵活動과 實錄記事 ( 慶南文化硏究 14, 慶尙大學校 慶南文化 硏究所, 1992), 金康植, 壬辰倭亂 義兵活動과 性格 ( 釜山史學 17, 釜山大學敎 史學科, 1993), 金康植, 壬辰倭亂 義兵의 性格變化 ( 釜山史學 19, 釜山大學敎 史學科, 1995), 金 康植, 義兵長 金沔 軍의 慶尙右道에서의 位置 (釜山大學校 碩士學位論文, 1991), 金康植, 忘憂堂 郭再祐의 義兵運動과 政治的 役割 ( 南冥學硏究 5,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5), 高錫珪, 鄭仁弘의 義兵活動과 山林基盤 ( 韓國學報 51.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1988), 高錫珪, 來庵 鄭仁弘의 義兵活動 ( 南冥學硏究 2,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2), 李章熙, 紅衣將軍 郭再祐에 對한 綜合的 考察 ( 忘憂堂郭再祐硏究 1, 郭忘憂堂記念 事業會, 1988), 李章熙, 忘憂堂 郭再祐의 義兵活動 ( 南冥學硏究 2, 慶尙大學校 南冥學硏 究所, 1992), 崔永禧, 郭忘憂堂과 壬辰倭亂 ( 忘憂堂郭再祐硏究 1, 郭忘憂堂記念事業會, 1988), 崔永禧, 壬辰倭亂에 대한 몇 가지 意見 ( 南冥學硏究 7, 南冥學硏究所, 1997), 金 錫禧, 郭再祐의 起兵과 社會的 基盤 ( 忘憂堂郭再祐硏究 2, 郭忘憂堂記念事業會, 1989), 金潤坤, 忘憂堂 郭再祐의 義兵活動 ( 忘憂堂郭再祐硏究 2, 郭忘憂堂記念事業會, 1989), 許 捲洙, 大笑軒 趙宗道 硏究 ( 南冥學硏究 1,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1), 金德珍, 濯 溪 全致遠과 雪壑 李大期의 義兵活動 ( 南冥學硏究 2,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2), 李 相弼, 壬亂時 在朝 南冥 門人의 活動 ( 南冥學硏究 2,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2), 李相弼, 壬亂 倡義人脈 小考 ( 慶南文化硏究 17, 慶南文化硏究所, 1995), 李樹健, 南冥學 派 義兵活動의 歷史的 意義 ( 南冥學硏究 2,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2), 李樹健, 忘 憂堂 郭再祐 義兵活動의 社會 經濟的 基盤 ( 南冥學硏究 5,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5), 李樹健, 南冥 曺植과 南冥學派의 재조명 ( 嶺大文化 17, 嶺南大學校, 1984), 鄭震 英, 大笑軒 趙宗道와 存齋 郭䞭의 義兵活動 ( 南冥學硏究 2,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2), 鄭震英, 壬辰倭亂과 南冥曺植 弟子의 義兵活動 ( 嶺大文化 17, 嶺南大學校, 1984), 김해영, 郭再祐의 義兵 活動 事蹟에 대한 一考察 ( 慶南文化硏究 17, 慶南文化硏究所, 1995), 정현재, 慶尙右道 壬辰義兵의 戰跡 검토 ( 慶南文化硏究 17, 慶南文化硏究所, 1995), 김준형, 진주 주변에서의 왜적 방어와 의병활동 ( 慶南文化硏究 17, 慶南文化硏究 所, 1995), 지승종, 16세기말 晋州城戰鬪의 배경과 전투 상황에 관한 연구 ( 慶南文化硏究 17, 慶南文化硏究所, 1995) 및 崔錫起, 忘憂堂 郭再祐의 節義精神 ( 南冥學硏究 6, 慶尙大 學校 南冥學硏究所, 1996) 등 참조. 60) 來庵鄭先生 松庵金先生 會議于陜川崇山洞 謀擧義旅 畫計糾合 與同志之士郭䞭河渾權瀁等 定論 擧義. 61) 金松庵通文于列邑 定起兵有司 安陰則鄭惟明成彭年 咸陽則盧士尙盧士豫朴선 山陰則吳俔吳長林 應聘 丹城則李魯金景漢李惟諴 三嘉則盧欽李屹朴思齋 宜寧則李雲紀郭再祐郭기等也. 62) 草溪幼學李大期 全雨 起兵討賊.
壬辰倭亂 關聯 民間日記 鄭慶雲의 孤臺日錄 硏究 - 303 - 위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물들의 절대 다수가 남명의 門人 또는 私淑人으로 山海師友 淵源錄 과 德川師友淵源錄 에 그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이를 보면 남명의 문인들이 국 난을 당하여 국가에 기여한 공로를 쉽게 집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임란과 관련한 在朝 남명 문인의 활동 중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 내용을 일기에서 살펴보면, 병신년(1596) 11월 26일. 沙斤察訪 金丈 志和가 서울로부터 郡에 이르렀는데 그 말에 黃 璡이 密啓를 올린 후 임금의 생각이 크게 놀라 드디어 遼東으로 건너가려는 방책을 정하 고 적과 싸우다 죽을 뜻이 없었다. 司諫 金弘微가 諫하기를 임금은 社稷과 같이 죽어야 하는 것이 바른 義인데 殿下께서는 이를 버리고 떠나려 하십니까? 운운 하니, 傳敎에 이 르기를 마땅히 천천히 의논하라 고 하였다 고 한다.64) 라고 되어 있는데, 金弘微(1557 1605, 字는 昌遠, 호는 省克堂)는 남명의 문인으로서 덕천사우연원록 에 38번째로 등재되어 있는 인물이다. 위 인용문의 내용은 임금이 피난 갈 생각을 함에 대해서 國君死社稷 의 명분을 내세워 이를 저지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이 명분은 남명이 그 학문의 要諦를 그림으로 표시하여 이른바 神明舍圖 라 고 한 것의 핵심이 바로 國君死社稷 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로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조정에서 실천한 하나의 예로써 중시할 필요가 있으며, 실천을 중시하는 南冥學 의 특징을 드러낸 것이라고 하겠다. 2) 알려지지 않은 義兵活動과 義兵의 弊害 壬亂에서는 수많은 의병이 궐기하였는데, 그 중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경우도 많은 것으로 보여진다. 일기에 나타나는 기록에서도, 임진년 10월 6일. 義僧 印俊이 또한 僧軍 200여 명을 이끌고 이르렀다.65) 11월 1일. 義僧將 李公像이 僧軍을 이끌고 開寧城 隍帖에 埋伏하였다가 적을 만나 돌진하여 활을 쏘아 맞춘 것이 매우 많았으며 왜군의 말 4필과 中銃 3자루 火藥 1斤 鐵丸 800개를 빼앗았다.66) 63) 鄭大將來庵金大將松庵 領兵來會于居昌 與招諭使金誠一 相議討賊之方 神謀奇計 出人意表 右道數邑 得免焚燹 以有今日 使愚夫愚婦 皆知討賊之義者 皆兩先生之功也 噫 微先生 吾其被髮 左衽矣. 64) 沙斤察訪金丈志和 自京到郡 其言曰 黃璡密啓之後 上意大警 遂決渡遼之策 無控制效死之志 司 諫金弘微諫曰 國君死社稷 義之正也 殿下捨此 焉往云云 傳曰 徐當議之. 65) 義僧印俊 亦率僧軍二百餘名而至. 66) 義僧將李公像 率僧軍 埋伏于開寧城隍帖 遇賊突進 射中甚衆 奪倭馬四匹 中銃三柄 火藥一斤 鐵 丸八百介.
- 304 國史館論叢 第92輯 8월 6일. 巡使가 各邑의 僧軍을 발하여 진주성 전투에서 죽은 자들의 遺骨을 埋葬했다.67) 고 하여 僧侶의 의병활동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러한 점들은 향후 보다 자세히 검토되어 학계에 알려져야 할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승려들의 경우 당시의 사회적 인식에서 는 특별한 인물을 제외하고는 거의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데에서 기인하는 이유 때 문에 역사에서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일기에서는 다른 지방의 의병활동 상황과 義兵軍의 名稱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 는 내용이 있으므로 참고로 인용하면, 8월 5일. 永川義兵將 權應銖가 精兵 천여 명을 거느리고 영천 城中에서 크게 싸워 왜적 300여 급을 베었다. 慶山 의병장 白蘭과 더불어 힘을 모아 적을 토벌하니 左道의 적들 이 조금씩 두려워하는 것이 있게 된 것은 두 사람의 공이다.68) 8월 24일. 여러 道의 의병이 다투어 일어나 적을 토벌하니 많은 것은 수천 명이고 적은 것 은 8 9백이었다. 慶尙道는 來庵 鄭先生 松菴 金先生 郭再祐(宜寧) 金弘毅(尙州의 忠 報軍) 金覺(尙州의 尙義軍) 盧景任(善山의 崇報軍) 權應銖(永川) 白蘭(慶山) 金垓 (禮安) 李大期 全雨(草溪) 金大鳴(晉州)등이고, 全羅道는 崔慶會(鶻字軍) 任啓英(虎字 軍) 高敬明 金千鎰 成天祉 任希璡 邊士貞 閔如壎(熊字軍) 高從厚(復讎軍) 崔時望 등이며, 忠淸道는 洪戒男 趙憲 沈守慶 申湛 李山謙 朴春茂 趙謹恭 등인데 이들은 모 두 현저히 드러난 자들이다. 그 나머지도 대소 의병들이 곳곳에서 호응하여 일어났으나 남북이 막혀 소식이 단절되었으니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선 耳目이 미치는 바 를 기록하여 후일의 상고함에 대비코자 한다.69) 라고 한 것이 그것으로, 이는 앞으로 임란의병사 연구에 있어 활용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보여진다. 반면에 관군의 산졸과 노비 및 향병들로 구성된 의병군은 軍律이 서지 않아 명령계통 에 차질이 있기도 하였으며, 의병을 매도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 가장 중요한 점은 어려운 시기에 의병의 식량을 조달하는데 많은 문제가 있었다. 임진년 6월 18일. 行軍하여 鄕賢祠에서 숙박하였다. 本郡의 병력이 진을 친 뒤부터 남의 말 67) 巡使發各邑僧軍 埋晉州戰亡之骨. 68) 永川義兵將權應銖 率精兵千餘 大戰于永川城中 斬倭三百餘級 與慶山義兵將白蘭 恊力討賊 左道之賊 少有所畏者 二人之功也. 69) 諸道義兵 爭起討賊 多者數千 少者八九百 如慶尙道則 來庵鄭先生 松庵金先生 郭再祐(宜寧) 金 弘毅(尙州忠報軍) 金覺(尙州號尙義軍) 盧景任(善山崇報軍) 權應銖(永川) 白蘭(慶山) 金垓(禮 安) 李大期全雨(草溪) 金大鳴(晉州) 如全羅道則 崔慶會(鶻字軍) 任啓英(虎字軍) 高敬明金千鎰 成天祉任希璡邊士貞閔如壎(熊字軍) 高從厚(復讎軍) 崔時望 忠淸道則 洪戒男趙憲沈守慶申湛李 山謙朴春茂趙謹恭等 此皆章章著顯者也 其餘大少義兵 處處響起 而南北阻梗 音耗斷絶 不能悉記 故先錄耳目所及 以備後日之考耳.
壬辰倭亂 關聯 民間日記 鄭慶雲의 孤臺日錄 硏究 - 305 을 빼앗고 남의 재산을 약탈하며 횡포를 심하게 하여 사람들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 였으나, 능히 제어할 수 없었다.70) 6월 24일. 奉事 崔汴이 스스로 병력을 다스리고자 하여 대장 김면 의 명령를 듣지 않으므 로 대장이 최변을 轅門에서 곤장을 쳤다.71) 6월 26일. 의병 100여 명이 군으로 도망쳐왔다.72) 7월 13일. 招諭使 金誠一 가 山尺 鄭欠을 거창현에서 斬首하였다.(그가 말을 만들어 일을 훼방하고 義兵을 罵倒한 까닭이었다)73) 11월 30일. 金大將이 將士를 보내어 밤에 開寧에서 賊을 치라고 하였으나 將士등이 大將의 節制를 듣지 않고서 아무일도 하지 않고 왔다. 대장이 매우 怒하여 衛將 黃應男 이하 여 러 사람을 매질하였다.74) 이를 보면, 의병이 오히려 적과 같은 횡포를 부리는 사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초 기 송암 김면의 군대는 軍容이 매우 엄숙하고 號令이 엄하였 75)지만 그렇지 못한 군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의병대장이 상부 조직과의 협조체계를 어기려고 하다가 매를 맞기도 하였고, 전투에서 쉽게 도망치는 의병들도 속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의병을 훼방하고 매도하는 사람까지도 있어 이를 斬首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 병활동에서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을 조달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초기 의병활동에 서부터 전쟁의 전 기간을 통하여 이 문제는 항상 심각한 일이었음을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3) 明軍의 動向과 橫暴 임진전란사에 있어 明軍의 參戰에 대한 연구는 이미 상세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대체 적으로 명군의 조직과 전투 상황에 대한 것이고, 救援活動에 대한 美化의 측면에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전쟁의 와중에서는 明의 구원병들 로부터 받은 백성 및 官의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 러한 관점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별로 연구되어지지 아니한 明軍의 횡포를 중심으로 고대 의 기록들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그의 명군에 대한 기록에서 특징적인 면은 그들을 표기하는 방식이 明軍 天兵 唐兵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명군에 대한 그의 감정적 느낌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70) 行軍宿于鄕賢祠 本郡之兵 自結陣之後 奪人之馬 掠人之財 橫行汎濫 人不堪其苦 而莫之能즙. 71) 奉事崔汴 謀欲自制 不受大將軍之令 大將杖崔汴于轅門. 72) 義兵百餘人 逃來于郡. 73) 招諭使 斬山尺鄭欣于居昌縣 (以其造言毁事 詆侮義兵故也). 74) 金大將遣將士 夜斫于開寧 將士等不用大將節制 無所爲而來 大將怒甚 杖衛將黃應男以下數人. 75) 임진년 6월 24일조 참조.
- 306 - 國史館論叢 第92輯 있다. 그는 함양이라는 한 지방에 거주한 士族으로서 명군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정보를 듣고 있었다. 우선 명군의 조직에 대한 기록으로는, 계사 2월 2일. 天兵 將帥 등의 姓名이다. 天使 薛藩이고 大將은 2명인데 侍郞은 宋應昌이 다. 遊擊將은 錢世英 吳淮忠 沈惟慶이고 摠兵은 楊祖訓 祖承勳이며 都司는 張三畏이다. 摠兵은 玉必迪이고 指揮는 登幡이며 都司는 王文이고, 또 摠兵 王夢波와 劉廷長官 等 6명이 다. 遼東摠兵官 李成樑의 아들 李如松 李如栢 李如梅 李如梧 등이 각각 家兵 千餘名을 이끌고 와서 왜적을 토벌하니, 참으로 聖天子의 은혜로움이 아닌가? 우리나라가 회복되기를 기약하는 것은 분명한 일이라, 天子께서 한결같이 同仁의 德으로 보는 것이 참으로 지극하 다.76) 고 하여, 그 대략을 비교적 상세히 적고 있다. 또한 그는 明將의 身上에 관한 기록도 남 기고 있는데, 계사년 8월 29일. 駱尙志는 나이가 65세인데 身長은 7尺에 불과하나 모습은 살찌고 눈빛은 빛나며 筋力이 절륜하여 능히 千斤을 들 수 있어 駱千斤이라 불린다. 士卒들과 즐거움과 고통을 같이하며 하루에 여섯 되를 먹고 고기도 數斤을 먹는다. 몸소 노력함을 쉬지 않고 힘써 비근한데로 나아간다. 창과 검을 연습함에 잠시도 쉬지 않고 청렴함을 몸에 지녔다. 전투에 임하면 용맹함이 天將 중에서 제일이다.77) 갑오년 4월 6일. 遊擊將 周弘謨가 任實縣에서 죽었다. 天將이 萬里밖에서 客死했으니 슬프 도다.78) 라고 하여, 특정 인물에 대한 장점과 객사에 대한 슬픔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명의 원군은 함양과 거창에 많이 주둔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출정하였는데, 그로 인해 함양지역이 명군으로부터 받은 피해는 매우 심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들이 함양 으로 도착하는 경위부터 살펴보면, 계사년 2월 15일. 判校 吳澐 草溪郡守 郭율 山陰縣監 金洛 丹城縣監 趙宗道 學瑞 金廷 龍 正字 成安義 등이 군에서 함께 모여 天兵 접대의 일을 의논했다. 또 우도 열읍에 통 문을 보내어 유사를 분정하고 큰 邑은 술 50동이 소 3마리, 작은 邑은 술 30동이 소 2마 리를 배당하고 천병이 南下할 날을 기다렸다.79) 76) 天兵將帥等 姓名云 天使薛藩 大將二員 侍郞宋應昌 遊擊將錢世英 吳淮忠 沈惟慶 摠兵楊祖訓 祖承勳 都司張三畏 摠兵玉必迪 指揮登幡 都司王文 摠兵王夢波 遊정長官等六人 遼東摠兵官李成 樑之子李如松 李如栢 李如梅 李如梧等 各率家兵千餘 來討倭奴 苟非 聖天子字惠 我國則恢復之 期 不可以日月計也 天子一視同仁之德 嗚呼至哉. 77) 駱尙志年六十五 身長不過七尺 形貌肥厚 目光浻然 膂力絶倫 能擧千斤 故號駱千斤 與士卒同甘 苦 日食六升 肉數斤 服勞不輟 致力邊鄙 用槍習劒 未嘗少休 廉於持己 勇於臨戰 爲天將第一. 78) 周遊擊弘謨 卒于任實縣 天將客死萬里之外 可哀. 79) 吳判校澐 郭草溪율 金山陰洛 趙丹城宗道 金學瑞廷龍 成正字安義 共會于郡 以議天兵支待之事
壬辰倭亂 關聯 民間日記 鄭慶雲의 孤臺日錄 硏究 - 307 5월 30일. 羅州 高山 萬境 興德 任皮 등의 수령들이 모두 군에 도착하였으니, 唐兵을 접대하기 위해서이다. 7월 9일. 天將 劉摠兵의 군대가 郡에 도착했다. 12월 4일. 劉摠兵이 郡에 이르렀다. 군의 士人들이 소 2마리 술 10동이 꿩 6마리 큰 접시 의 과일 1접시 각색의 과일 7,8접시를 뜰에 진설하고, 禮單의 목록을 적은 글을 東軒 앞 에서 올렸다. 한 고을의 선비들이 뜰 아래에 서서 再拜하였다.80) 라고 되어 있어 명군을 접대하기 위한 준비에 얼마나 많은 노력과 정성을 쏟았는지 짐 작하게 하며, 그 어려운 전쟁의 와중에서 백성들의 고통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게 한다. 유총병을 접대할 때에는 盧院長과 朴公幹 그리고 孤臺가 郡의 士人을 대표하여 정중히 인사를 올린 것으로 나타나며, 총병 劉廷은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승전을 다짐하는 등 호의를 베풀고 있지만, 이는 장군의 말일 뿐이고 그 병사들의 횡포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전쟁 중에 명군이 조선의 백성들에게 가한 弊害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極限의 상황이 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계사년 7월 11일. 天兵이 사방으로 나가 搜探하니 사람들이 집을 비웠는데, 백성들이 그 고 통을 이기지 못해서였다.81) 7월 14일. 천병이 郡에 가득하고 백성들은 한결같이 집을 비웠다. 약탈하는 피해가 왜노와 다름이 없었다.82) 7월 15일. 내가 집으로 와서 家廟를 살피니 窓戶와 門戶 및 屛風 冊子 등은 모두 천병이 가 져가 버렸고 큰 대나무 千竹도 하나도 남음이 없었다.83) 8월 1일. 志夫를 毆打하여 얼굴이 깨지고 피가 흘렀으며 몸도 重傷이라 한다.84) 그러나 그 폐해가 無異倭奴 한 이러한 정도는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11월 17일 에는 고대가 南原의 노비집에서 말을 빼앗기고, 갑오년 11월 14일에는 과거 시험차 서울 로 향하던 중에 노지부의 활 등을 빼았기며, 을미년 2월 23일에는 鄭士古가 唐人에게 매 를 맞아 중상을 입고 앉기도 어려운 상태였으며, 10월 18일에는 거창 수령이 명장의 접 대 부실로 杖刑을 당하기도 했고, 10월 29일에는 함양의 城主가 당인에게 심하게 맞고 又出通文于右道列邑 分定有司 大邑則酒五十盆牛三首 小邑則酒三十盆牛二首 卜定以待天兵南下 之日. 80) 劉摠兵到郡 郡之士人 備牛二首酒十盆雉六首大盤果一盤各色果實七八盤 設于庭面進呈文陳弊禮 單于軒前 一鄕士子 立庭下 再拜. 81) 天兵四出搜探 人空家 民不勝其苦矣. 82) 天兵滿郡 居民一空 搜括之害 無異於倭奴矣. 83) 余下家 省觀家廟 窓戶及門戶屛風冊子等物 盡爲天兵所取去 巨竹千挺 無一介遺者. 84) 毆打志夫 破面流血 身亦重傷云.
- 308 - 國史館論叢 第92輯 횡포가 더욱 심해지므로 모두 사방으로 흩어질 생각을 품게 되었으며, 병신년 3월 14일 에는 함양의 성주를 끌고 다니며 구타하고 곤장을 치고 있는데, 이에 대해 고대는 其威 稜 甚於猛虎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를 보면, 당시에 지방의 수령 뿐만 아니라 의병유사 로 활약하고 있었던 선비들에게 가한 폐해가 이런 상황이었으니 일반 백성들이 당한 고 통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는 실정이라고 하겠다. 4) 戰爭 中 百姓의 困窮狀況 전쟁이 발발하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계층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일차적 인 타격을 받고 전쟁의 전 기간을 통하여 왜군의 거점이 되었던 경상도 지방의 피해는 일기의 임진년 4월 26일조에 오직 우리 道의 人民은 풀숲에 숨고 土窟에 숨어 지내면서 도 魚肉이 되어 한 푼의 살 뜻도 없었다 85)라고 한 것처럼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이러 한 와중에서, 계사년 4월 25일. 鄭士淵을 만나 開寧 金山에서는 난을 격으면서 官人이 서로 (사람 을 먹는다는 소식을 듣고 驚愕을 이기지 못하였다. 시세가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탄식하였는데, 이는 누구의 잘못인가? 슬프도다!86) 라고 한 것처럼, 백성의 곤궁은 극한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겠다. 더구나 지방의 士族으로서 일정한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孤臺 자신도 양식이 떨어져 鄭汝啓가 白粒 1말을 보내주었는데(갑오년 5월 4일), 이 해에는 특히나 비가 많이 내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사정이었다. 즉, 계사년 5월 30일의 기록에 한 달 동안 비가 내려 백 가지 곡식이 모두 상했는데, 木花가 더욱 심해 모두 다시 갈았 다. 겨울이 오면 배고픔과 추위가 함께 極에 이를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87) 고 되어 있어, 어려운 실정을 알 수 있다. 또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여 식량에 손을 댄 병사 3인을 朴天鳳이 참수하여 梟示하기도 하였고(갑오년 정월 13일조), 3월 29일에는 정사고가 고대에게 쌀을 보내 주었으며, 을미년과 무술년 5월 15일에는 祭物을 준비하지 못해 조부의 祭祀를 지내지도 못했으며, 무술년 4월 13일과 6월 13일에는 자신이 인근 에 양식을 구걸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이 해에는 그 자신이 시장에 장사하러 나서기도 하 고(7월 5일, 7일, 13일조 등), 8월 7일에는 시장에 소를 팔러 가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 85) 惟我道人民 草伏林竄 穴居土寢 爲魚爲肉 無一分生意也. 86) 見鄭士淵 聞開寧金山經亂等 官人相食云 不勝驚愕 竊歎時世之至於此極者 伊誰之過歟 噫. 87) 遙雨一月 百穀皆傷 而木花尤傷 盡爲反耕 來冬則飢寒兼極 不占而知矣.
壬辰倭亂 關聯 民間日記 鄭慶雲의 孤臺日錄 硏究 - 309 - 라 전쟁이 끝난 후에도 田畓의 疲弊와 氣候의 不順 등으로 인하여 계속되는 식량부족 현 상에 시달리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朝廷에서는 救荒御使 李時彦을 함양에 보내 流民들에게 죽을 하사하 고 있는데(갑오년 3월 4일), 한편으로는 지방의 수령들이 농사는 권하지 않고 酒肉으로 자기 배만 채우고 있는 현상을 개탄하고 있기도 하다(4월 7일). 이와 같은 일부 지방관 들의 학정은 전쟁 중에도 계속되었고88), 전쟁이 끝난 뒤에도 武功으로 지방관이 된 인물 들이 私腹을 채우기에만 급급한 실정89)이어서 윤4월 18일에는 도원수 권율이 함양에 도 착하였으나 관아에 한 되의 쌀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계사년 2월 28일의 기록 에는 왜적이 尙州를 습격하여 牧使 金澥를 殺害하였다. 고 하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澥가 州民을 侵虐하므로 州民이 적을 끌어들여 掩襲하여 殺害하였다. 90)는 사태가 발생 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형편이 어려워진 백성들이 도적떼가 되어 분탕질을 자행하기에 이르렀으니, 갑오년 8월 23일. 화적떼가 崔別監집을 약탈했다고 하니 지극히 통탄하고 염려할 일이다. 슬프다! 농사는 되지 않고 사람은 굶주리니 도적이 서로 일어나 혹은 산중에 모이고 혹은 白晝에 사람을 억압하여 사람들에게 해를 입힘이 끝이 없다. 인생이 이 세상에서 어찌 이 리도 불행한가?91) 10월 19일. 尙州牧使 鄭起龍, 고대의 8촌 가 令을 내어 北面의 적을 체포하니, 兩班 朴弘 翎이 함께 있었다. 인심이 흉악해짐이 이에 이르렀는가?92) 라고 하여, 당시 극도로 어려운 민생의 실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5) 身分秩序의 變化 7년간에 걸친 전쟁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 중의 하나가 신분질서 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즉 사회계층에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던 노비들이 전쟁을 틈 타 도망함으로써 良民으로 身分을 바꾸게 되었고, 이로 인해 조선후기에는 兩班과 良民의 수가 급격히 팽창하게 되었다. 88) 갑오년 12월 21일. 聞居昌守朴廷琬 虐民如仇 人皆四散云 可憎 및 을미년 12월 20일조 참조. 89) 기해년 3월 19일. 亂離之後 列邑守令 皆以武升差遣 故唯以剝民利己爲事라 하였고, 경자년 12월 19일조에는 관에 이름없는 세금을 납부하고서 그 행패를 剝民如虎 로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90) 倭賊襲尙州 牧使金澥殺之(澥虐使州民 州民有引賊 掩襲而殺之). 91) 聞火賊焚掠崔別監籬下云 極爲痛慮 嗟呼 歲饑人窮 盜賊幷起 或相聚于山中 或禦人于白晝 成害 人民 無有紀極 人生斯世 何其不幸. 92) 尙牧令公出捕北面之賊 兩班朴弘翎與焉 人心之惡 至於此哉.
- 310 - 國史館論叢 第92輯 이를 일기에서 확인해 보면, 계사년 4월 21일조에 우리 형제의 집안에 굶어 죽은 노 비가 7,8명이나 된다 고 한 것처럼 士族으로서 많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던 孤臺의 집 안에서 6월 9일에는 婢 今春의 4父子가 도망갔다 고 되어 있고, 정유재란 때 함양이 함 락되는 상황에서 8월 25일조에 조카 집의 노비 태반이 달아났으니 가증스러운 일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고대의 집안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고 전반적인 문제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로 인해 전쟁 후에는 도망간 노비를 색출하는 政策이 시행되었고, 그 결과 친구이자 종매부인 박여량의 도움으로 임인년 4월 21일에는 도망갔 던 자기집 노비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Ⅴ. 南冥學派의 動向 孤臺는 그 자신이 來庵의 門人으로서 자연스럽게 南冥의 私淑人이 되는 것이지만, 남 명의 사후 그는 광해군 때와 인조 때에 德山 德川 書院에 출입하여 院生錄 에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그가 덕산서원에 출입한 기록을 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병오년(1606) 9월 11일. 渭瑞 克修와 더불어 덕산서원에 갔는데, 先生 鄭仁弘 께서 장 차 서원에 枉臨하신다고 들었기 때문이다.93) 9월 14일. 서원에 머물면서 謁廟한 후에 또 남명선생께서 사시던 집을 참배하고 선생께서 은 둔하여 머물면서 참으로 後學을 興起시킨 느낌과 懦夫를 일으켜 세운 뜻을 追想하였다.94) 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를 보면, 그가 南冥을 尊崇하는 정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1. 南冥集의 刊行 孤臺는 來庵의 主導하에 이루어 지고 있던 南冥集 의 간행에도 관계하였다.95) 남명의 93) 與渭瑞克修 往德山書院 聞先生將臨書院故也. 94) 留院謁廟後 又拜南冥先生宿草 追想先生 隱遁盤桓之樂 眞可以起後學之感 而立懶夫之志矣. 95) 내암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남명집 의 편찬 간행 및 그 이후의 남명집 간행에 관해서는, 吳二煥, 南冥集板本考(1) ( 韓國思想史學 1, 韓國思想史學會, 1987), 吳二煥, 南冥學 硏 究의 意義 ( 慶南文化硏究 11, 慶尙大學校 慶南文化硏究所, 1988), 吳二煥, 南冥集板本考 (2) ( 東洋哲學 1, 韓國東洋哲學會, 1990), 吳二煥, 山海師友淵源錄 의 編纂 ( 次山安晉 吾博士回甲紀念 東洋學論叢, 同刊行委員會, 1990), 吳二煥, 山海師友淵源錄 의 出版 ( 南 冥學硏究論叢 2, 南冥學硏究院, 1992), 吳二煥, 실증과 진실 ( 南冥學硏究論叢 5, 南冥學
壬辰倭亂 關聯 民間日記 鄭慶雲의 孤臺日錄 硏究 - 311 - 遺文은 戰爭 중에 대부분이 燒失되었다. 왜군이 덕천서원을 비롯한 남명의 사적지들을 분 탕한 이유를 임란 중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한 의병활동의 중심세력이 대부분 남명의 제 자 또는 사숙인들이었다는 사실에서 추측해 볼 수도 있는데, 일기의 계사년 7월 5일조에 적이 진주의 德山洞을 분탕하였다 고 보이는 바와 같이 대체적으로 이 시기에 남명의 詩文이 거의 없어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리하여 전쟁 후에 실질적으로 남명학파의 領 袖로서 자리잡고 있었던 내암이 선생의 글들이 전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文集의 편찬 사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간행된 남명집 의 板本을 壬寅本 이라 하는데, 이 는 간행 후에 印布가 넓지 못하여 곧 火災로 인해 목판이 燒失되었으며, 현재 이 책은 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간행경과에 대해서 孤臺日錄 은 가장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辛丑年(1601) 5月 8日. 나는 盧禮山 姜渭瑞와 더불어 陝川으로 가기로 약속하였다.96) 5月 9日. 午後에 孚飮亭에서 先生께 배알하였다. 先生은 인하여 渭瑞와 더불어 海印으로 들어가셨다. 崔德久는 禮山을 초대하고 星州로 돌아갔다.97) 5月 10日. 食後에 가서 君變[文嶧陽의 字]을 만났다. 李敬修도 왔다.98) 5月 12日. 河性原이 海印으로 와서 서로 이야기하였다. 禮山과 작별하였다. 食後에 벗들이 제각기 歸鄕하였는데, 나 홀로 절에 남아 看役하였다.99) 5月 14日. 先生과 작별하고 海印으로 돌아 왔다. 成辨圭가 星山에서 절로 왔다.100) 5月 15日. 아침 식사 후 [歸鄕]길에 올랐다. 7月 20日. 밀로 빚은 술을 海寺로 보내고, 因하여 先生前 문안 편지를 드렸다.101) 12月 12日. 사람을 海寺로 보냈다. 先生 및 雲叟에게 문안 편지를 드렸다.102) 이를 보면 壬寅 전해인 辛丑年 5月에 來庵의 여러 門人들이 海印寺로 모여 들어 壬寅 本 刊行을 위한 기초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그해 말까지 海印寺에 서는 계속 작업이 진행되어 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임인본은 판본이 불에 타고 2년 뒤인 갑진년에 남명집이 다시 간행되었는데, 이 갑진본에 내암이 쓴 跋南冥集說 에 退溪를 排斥하는 내용이 있어 西 南人이 내암을 硏究院, 1997), 吳二煥, 南冥集 諸板本の成立とその思想史的背景-17 18世紀の初刊本を中 心としてー (京都大學 文學博士學位論文, 1997) 등을 참조할 것. 96) 余與盧禮山 姜渭瑞 孤臺知己白川姜應璜字 相約往陜川. 97) 午後拜先生于孚飮亭 先生因與渭瑞投海印 崔德久邀禮山歸星州. 98) 食後往見君變 文嶧陽字 李敬修亦來. 99) 河性源來海印相話 與禮山相別 食後諸友各歸鄕 余獨留寺看役. 100) 辭先生歸海印 成辦圭自星山來寺. 101) 送小麥麴生于海寺 因修狀于先生前問安. 102) 送人于海寺 折候狀于先生及雲叟.
- 312 - 國史館論叢 第92輯 공격하게 된다. 즉 다음해인 을사년 宣祖實錄 7월 丙申條에 성균관 유생인 丁好誠 許宲 柳希亮 崔誠元 등이 八道列邑의 鄕校 및 諸書院에 通書하여, 鄭仁弘의 跋南冥集 說 을 욕하다. 103)라는 기록이 있고, 여기에 대한 사신의 논평이 兩家[退溪 南冥]의 門徒가 二公 學問의 深淺을 밝히 알지 못하고서, 부질없이 그 자취에 집착하여 서로 헐뜯 기를 數世에 이르도록 더욱 甚하니, 뜻있는 선비들이 慨嘆한지 오래라 104)고 한 것이 그 것이다. 여기에 대해 고대일록 에서는, 乙巳年(1605) 7월 4일. 先生을 공격하는 자, 丁好誠 韓 이 倡首가 되어, 西 南人이 일어 났다고 들었다.105) 7월 9일. 公幹[朴汝樑의 字]의 편지를 보다. 편지에 이르기를, 서울의 儒生들이 선생을 모 함하고자 하여, 南冥(缺) 跋尾에 退溪를 略議한 것을 말로 삼아 各道에다 通文을 내었으 며, 바야흐로 上章하고자 할 무렵에는 權潗이 舘掌議로서 처음 글을 내었고, 뒷 모임에는 나가지 않았다 한다. 權이란 사람이 장차 澍[梁弘澍]와 合勢하고자 하니 한탄할 일이 다.106) 7월 17일. 아침에 출발하여 오후에 선생을 찾아 뵈었다 退溪가 黃俊良에게 答한 편지를 論及하시며 보신 바의 기록을 꺼내 보이셨는데, 詞意가 烱然하여 예상했던 정도가 아니었 다. 大谷과 南冥을 위하여 義理를 辨析하시는데 江河를 가르는 듯하니, 만약 退溪가 죽어 서도 앎이 있다면 이마에 땀이 나지 않을 수 있을까?107) 9월 20일. 權潗이 다시 舘掌議로 되었다고 들었다. 이는 先生을 모함하고자 하는 계략이니, 人心이 山川보다 험하다는 것이 정말이다.108) 12월 8일. 江左의 儒生들이 上疏하여 來庵先生을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趙月川이 굳이 禁하 여 中止시켰다고 들었다. 또 館中에서 退溪先生의 行事가 差誤된 점을 殿 廡 아래에 내 걸었다고 한다. 해괴한 일이다.109) 丙午年(1606) 정월 5일. 館學의 儒輩가 鄭輝遠을 誣陷하여 士林에서 削迹하고, 영영토록 과 거를 보지 못하게 했다고 들었다. 이는 필시 某가 사주한 바이다. 이보다 앞서 右道의 선 비들이 咸陽에 함께 모여 를 削迹했는데 분을 품고, 同類의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先賢 을 謀陷하여 온 힘을 다해 공격하니, 이것이 도깨비들이 先生을 공격하는 원인이다.110) 103) 成均館儒生丁好誠 許宲 柳希亮 崔誠元等 通書于八道列邑鄕校及諸書院 醜詆鄭仁弘跋南冥 集說. 104) 兩家 退溪 南冥 門徒 不能明知二公學問之深淺 徒執其迹 互相訾謷 迄數世而滋甚 有志之士 慨嘆久矣. 105) 聞攻先生者 丁好誠 韓 爲倡 而西南人起云. 106) 見公幹書 書曰 京中儒生欲陷先生 以南冥 缺 跋尾略議退溪爲言 出通文于各道 方欲上章之際 權潗以館掌議 始出文 後會不赴云 權之爲人 將與澍也合勢 可歎. 107) 早發 午後拜先生 論及退溪答黃俊良書 出示所見之記 詞意烱出乎人意表 爲大谷 南冥辨 析義理 若決江河 若使退溪死而有知 能不顙泚乎. 108) 聞權潗復爲館掌議 此欲陷先生之計也 人心險於山川 信矣. 109) 聞江左儒生上疏欲攻來庵先生 趙月川固禁中止 又館中掛退溪先生行事差誤處于殿廡下云 可怪.
壬辰倭亂 關聯 民間日記 鄭慶雲의 孤臺日錄 硏究 - 313 3월 13일. 丁好誠 등이 邪論을 만들어 내어 八道에다 通文을 내고, 江左의 사람이 泮宮으로 答通했다고 들었다. 尹珙이 사사로이 스스로 答을 草하여 그 邪慝함을 極하였는데, 글 내 용이 支煩하지는 않으나 살모사나 물여우보다 심하며, 泮에 이르러 소매 속에서 꺼내어 諸儒의 이름을 列書하고서, 다시 江左로 通文하였다고 한다. 심하도다, 邪類의 忌憚없음이 여! 珙은 尹承勳의 아들이다.111) 丁未年(1607) 7월 11일. 南邊人인 許筬 등이 倡議하여, 李珥를 罪준 연후에 先生을 공격할 계획이라고 들었다. 이보다 앞서 李珥가 著書하여 晦齊 退溪의 出處 學問을 論하였는데, 德을 온전히 한 實이 없으며, 口耳의 學을 말함에 불과하다. 퇴계는 다만 依樣人일 뿐이 니, 依樣이란 前人이 論한 바에 依하여 改頭煥面한 說이며, 전혀 自得의 實이 없다 고 云 云하였고, 南冥을 論하여는, 世道를 挽回한 功이 마땅히 東方 諸賢의 아래에 있지 않다고 하였으니 그의 見識한 바가 보통을 지남이 萬萬하다. 이로하여 南人이 그를 싫어해서, 장 차 上疏하여 李珥의 罪를 請한 연후에 다음으로 先生에게 미치고자 하니, 그 틀과 함정을 만듦이 참혹하다 하겠다. 尹承勳 許筠 등이 그 議論의 주동이다.112) 라고 하여, 이 사건이 退溪를 옹호한다는 명분 아래 成均館의 儒生들을 중심으로 한 西 南人이 연합하여 北人의 영수인 來庵을 공격한 것임을 알 수가 있고, 이것은 결국 후에 仁祖反正으로 내암이 處刑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2. 來庵을 中心으로 한 南冥學派의 動向 一. 壬亂 당시 倡義하여 많은 戰功을 세우고 講和를 거부하면서 끝까지 決死抗戰을 주 장했던 來庵은 전쟁이 끝난 후에 정치권에서의 위상이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德 溪 吳健과 守愚堂 崔永慶이 죽고 없으며 東岡 金宇顒과 寒岡 鄭逑가 벼슬로 인해 外地에 赴任해 있었던 관계로 인해 자연스럽게 강우지역 남명학파를 주도하는 영수로 위치를 굳 히게 되었다.113) 이러한 내암의 행적에 대해 일기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데, 내 110) 聞館儒輩誣陷鄭輝遠 削迹于士林 永永停擧云 此必某之所嗾也 先是 右道士子共會于咸陽 削迹含 憤 指囑同類之人 以謀陷先賢 攻之無餘力 此怪鬼輩攻擊先生之地也. 111) 聞丁好誠等做出邪論 通于八道 江左之人 答通于泮宮 尹珙私自草答 極其邪慝 辭不支煩 而甚於 虺 到泮 出自袖中 列書諸儒之名 又通于江左云 甚矣 邪類之無忌憚 珙乃承勳之子也. 112) 聞南邊人許筬等 倡議欲罪李珥 然後攻先生計 先是 李珥著書 論晦齋 退溪出處學問 而無全德之 實 不過曰口耳之學 退溪只是依樣人耳 依樣者 依前人所論 改頭換面之說 了無自得之實云云 論 南冥 則曰 挽回世道之功 當不在我東方諸賢之下 其所見識 出尋常萬萬矣 以此 南人疾之 將欲上 疏 請罪李珥 然後次及先生 其爲機穽 可謂慘矣 尹承勳 許筠等 主其議也. 113) 이 시기 來庵의 정치적 위상과 관련해서는, 權仁浩, 朝鮮中期 士林派의 社會政治思想 硏究 (成均館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0), 權仁浩, 來庵 鄭仁弘의 至治主義的 學問傾向性과 改革 思想 ( 南冥學硏究論叢 6, 南冥學硏究院, 1998), 李離和, 鄭仁弘의 政治思想과 現實認識 ( 南冥學硏究論叢 2, 南冥學硏究院, 1992), 및 李離和, 鄭仁弘의 政治思想과 現實認識 ( 慶南文化硏究 11, 慶尙大學校 慶南文化硏究所, 1988) 등을 참조할 것.
- 314 - 國史館論叢 第92輯 암이 남명집 의 간행을 주도하고 있던 신축년 10월 12일에 내암이 安陰으로 움직일 때 지방의 儒生과 門人 수백 명이 운집했다는 사실과 내암이 大司憲을 제수받고 上京하려는 임인년 윤2월 7일에는 來庵의 居處인 浮飮亭에 門徒만 해도 수백 명이 운집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게다가 조정에서는 연이어 내암에게 벼슬을 제수하고 있으나, 내암은 이를 계속 사임 하였는데 이를 일기에서 살펴보면, 임인년(1602) 5월 3일. 선생께서 사직소를 여러 차례 올리고 호연히 歸鄕한다고 들었는데, 이른바 鳳凰이 千仞을 날으는 기상이라 하겠다.114) 7월 7일. 초2일에 임금이 3公을 물러 묻기를 鄭某는 어찌하여 決然히 돌아가는가? 임 금께서 말씀하시기를 病痛이란 사람마다 없기 어려운 것이다. 이 사람은 당대에 있어 견 줄 사람을 얻기 어렵다. 百折不屈의 바르고 곧은 선비이니, 곧은 선비가 조정에 있으면 그 른 것을 다스릴 수 있지만 여러 소인들이 조정에 있으면 비록 그른 것을 다스리고자 해도 할 수 없는 것이다.115) 丁未年(1607) 3월 4일. 慶尙監司가 狀啓하여, 先生 寒岡 및 曹好益 張顯光 徐思遠 琴應 薰을 院長으로 삼아 士習을 지어서 伊川의 學訓에 依할 것을 請했다고 들었다. 主上께서 그대로 允許하시어, 先生을 灆溪 德山 香川[龍巖] 院長으로 삼으셨다고 한다.116) 3월 17일. 先生께서 年老하시므로 세 곳의 院長을 사양하시고, 有司로 하여금 官에 보고하 고 監司에게 轉報하여 이로 하여금 朝廷에 다다르게 하셨다고 들었다.117) 라고 하여, 來庵의 出處에 대한 자신의 관점과 당시에 宣祖가 내암을 信任하고 있었던 정 도에 대해 알게 하고, 右道에서의 내암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光海君을 폐하고 永昌大君을 世子로 冊封하려는 선조의 시도에 대해 내암이 극 력 반대하게 되고, 또 請斬柳永慶疏 로 인하여 선조의 미움을 산 내암이 귀양길에 오르 게 되자, 고대는 무신년 2월 11일에 이 소식을 접하고서 다음날 선생을 전송하기 위하여 길을 떠나고 2월 13일에 金陵에서 스승을 만나게 된다. 이 일을 그는, 2월 13일. 닭이 2번 울 때 길을 나섰다. 길에 올라 재촉하여 황혼에 금릉에 도착하여 선생 을 배알하니 河性源 裵君吉 文君燮 李景修 鄭淸叟 洚叟 梁桓 등 諸君이 陪行하고 있었고, 鄭德淵도 또한 그 중에 있었다.118) 114) 聞 先生呈辭屢度 浩然歸鄕 所謂鳳凰翔于千仞者也. 115) 上引見三公 問曰 鄭某何故決然而歸耶 上曰 病痛人所難免 此人在當代難得其雙 百折不毁正 直之士也 直士在朝 則可以治逆 衆少人在朝 則雖欲治逆 不可得也. 116) 聞慶尙監司狀啓 請以先生 寒岡及曺好益 張顯光 徐思遠 琴應薰爲院長 以作士習依伊川學訓 自上依允 以先生爲灆溪 德山 香川 龍巖 院長云. 117) 聞先生以年老 辭三處院長 令有司報官 轉報于監司 使之達于朝廷云. 118) 鷄二鳴發程 倍道馳進 黃昏到金陵 謁先生 河性源 裵君吉 文君燮 李景修 鄭淸叟 洚叟 梁
壬辰倭亂 關聯 民間日記 鄭慶雲의 孤臺日錄 硏究 - 315 2월 14일. 바르고 곧은 기상과 변하지 않는 뜻은 나이 들수록 더욱 굳세어지고 어려움에 처 해서 더욱 드러나니 아찌 孟子가 말한 大丈夫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선생의 한마디는 足히 나라를 일으키고 奸凶들로 하여금 머리를 오그라 들게 하여 감히 凶謀를 드러내지 못하게 한다. 위기의 시기에 國勢를 泰山과 같이 편안하게 한 것은 누구의 힘이었던가? 史家가 기록하고 나라 사람이 전할 것이며, 위로는 列宿에 응하고 아래로는 어린아이까지 감동시겼다. 나라의 大老이며 斯文의 正脉이고 功은 社稷에 있고 이름은 北斗星 같이 높을 것임을 확신한다.119) 라고 하여, 내암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곧이어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내암은 풀려나 이후 大北政權時代를 열게 되지만, 이 시기에 대한 일기의 기록이 없어 광 해군대의 내암의 활동 및 仁祖反正까지의 구체적인 행적을 살필 수 없어 아쉬움으로 남 는다. 二. 한편, 이 시기에 있어 내암과 함께 남명학파의 중추적 인물이었던 동강과 한강에 대해서도 일기에서는 더러 언급하고 있다. 인조반정 이후 오늘날까지, 남명집 의 간행에 대한 내암과 한강의 의견 차이와, 동강의 죽음에 대해 한강이 지은 輓詞를 내암이 비판했 다는 내용을 근거로 두 사람이 絶交하였다는 設이 旣定事實처럼 여겨져 왔다. 그리고 이 로 인하여 남명학파가 분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고대일록 에 수록된 한강이나 동강에 대한 내용을 보면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다. 고대는 그 이전부터 두 사람에 대한 소식을 접하는 것이 있으면 일기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기록하고 있는데, 먼저 동강의 사망 소식에 대한 기록으로는, 癸卯年(1603) 11월 22일. 金東岡의 訃音을 들었다. 아, 슬프다! 金丈은 愷弟樂易한 분으로 서,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閑地에 계신지 十餘年에 뜻을 깨끗이 하여 沒하시니, 悲嘆을 어 찌 이루 말하리오!120) 12월 21일. 金東岡의 棺이 淸州로부터 이르렀다고 들었다. 아, 이 분은 守愚堂을 伸寃하고, 斯文에 裨益한 바가 많았으나, 時輩에 合하지 아니하고 오래토록 散地에 있어 當世에 有 爲함을 얻지 못했으며, 또 자신의 실패를 만회해 줄 아들도 없으니, 어찌 天道가 아니고서 그러하리오!121) 甲辰年(1604) 4월 19일. 姜渭瑞를 방문하여, 先生께서 東岡 및 文汝中[泰巖 文弘道의 字] 桓諸君陪行矣 鄭德淵亦在其中. 119) 正直之氣 不變之志 愈老而剛 處困而亨 豈非孟子所謂大丈夫乎 然先生一言 足以興邦 使奸魁 縮首 不敢逞凶謀 於危疑之際 措國勢於泰山之安者 伊誰之力歟 太史書之 國人傳之 上應列宿 下 動髦倪 信乎 爲國大老 斯文正脉 功存社稷 名高星斗者也. 120) 聞金東岡訃音 嗚呼 哀哉 金丈以愷弟樂易之人 不爲世用 在閑地十餘年 齋志以沒 悲嘆何極. 121) 聞金東岡旅襯 至自淸州 噫 斯人伸寃守愚堂 多有裨益於斯文 不合於時輩 久在散地 不得有爲於 當世 又無幹蠱 豈非天道之然耶.
- 316 國史館論叢 第92輯 을 祭한 글을 보았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慘然케 하였다.122) 무신년(1608) 10월 10일. 오늘 밤 꿈에 선생을 뵈었고, 또 金東岡을 뵈었다.123) 이라 하여, 동강의 죽음을 슬퍼하고 생애의 不運을 한탄하였으며, 내암이 동강을 위해 지 은 祭文이 절실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특히 동강이 죽고 甲辰本이 出刊된 이후 寒岡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丙午年(1606) 7월 24일. 鄕人이 크게 會議하여 鄕賢祠의 位次를 고치다 西 南에 사람이 없다는 說로써 겁을 주어, 西 南人의 老少가 모두 모였다. 나에게는 영원히 절교하는 벌 을 주고, 渭瑞와 任重[省翁 盧脊의 字] 역시 그 당시의 有司였으므로, 넉 달 동안 무리로 부터 축출한다 云云. 回文을 요약하면, 一蠹書院이 設立된 것은 애초 他鄕의 議論에 관계 없이 모두 鄕人이 스스로 정한 바다. 來庵 寒岡 兩先生이 位次의 (缺)을 지휘하여 李維 가 또 單字를 올려, 改位의 論이 누구에게서 나와 누구에게서 定해졌느냐 하며, 말이 先生 을 건드렸다. 무뢰배가 감히 士林의 宗匠을 모욕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世道를 알 수 있어 기가 찬다.124) 11월 12일. 渭瑞와 더불어 山陰의 道士軒으로 가 寒岡先生을 배알하였다. 얼굴을 못뵈온지 이제로 12年인데, 모습이 潤澤하시고 조금도 쇠약하신 기색이 없으시니, 어찌 後學의 행 복이 아니겠는가? 다음날 院基를 둘러보고 저물녘에 작별 인사를 드렸다.125) 11월 18일. 寒岡先生께서 德山으로부터 龍湫[安義의 龍湫瀑布]에 노니시다가 書院에 臨하셨 다. 오후에 先生께서 一蠹先生의 墓에 祭하셨는데, 내가 祝文을 읽었다. 黃昏에 모시고 鄭 家로 향하였다. 다음날 이른 아침 光風樓에 올라 玩賞하시고, 또 追慕祠와 昌[居昌?] 李 和彦의 집을 尋訪하셨다. 우리들은 點風臺에서 작별인사를 올렸다.126) 11월 28일. 鄭寒岡께서 火界를 거처 武屹에 도착하셨다고 한다.127) 정미년(1607) 2월 3일. 한강선생이 安東府使에 나아감 이라고 하여, 孤臺는 자신이 주도했다고 할 수 있는 향현사의 복원에서 내암과 한강에게 같이 諮問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고, 한강이 덕산서원을 방문할 때 내암의 문인이었던 동 지들과 함께 극진히 영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당시 남명의 사 122) 訪姜渭瑞 見先生祭東岡及文汝中文 令人慘然. 123) 是夜夢見先生 又見金東岡. 124) 鄕人大會 議定鄕賢祠位次 㥘之以西南無人之說 西南人老少皆會 罰余以永損 渭瑞 任重 亦 以其時有司 四朔損徒云云 回文略曰 一蠹書院之設 初不關於他鄕之議 皆自鄕人之所定也 指斥來 庵 寒岡兩先生指揮位次之 缺 李維又呈單字曰 改位之論 出於何人 而定于何人耶 語觸先 生 無賴之輩 敢侮士林宗匠 至於此極 世道可知 令人氣塞. 125) 與渭瑞往拜寒岡先生于山陰之道士軒 自阻顔面 于今十二年 形貌潤澤 少無衰容 豈非後學之幸耶 翼日周覽院基 日昳拜辭而歸. 126) 寒岡先生 自德山遊龍湫 臨書院 余與猶子 往拜于院 午後 先生祭一蠹先生墓 余讀祝文 黃昏陪向 鄭家 翼日 早朝登光風樓賞玩 又尋追慕祠 昌 李和彦家 余等拜辭于點風臺. 127) 聞鄭寒岡路由火界 抵于武屹云云.
壬辰倭亂 關聯 民間日記 鄭慶雲의 孤臺日錄 硏究 - 317 - 숙인들은 來庵과 寒岡 東岡을 같은 尊慕의 마음으로 대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으 로, 당시 南冥學派內에 심각한 분열이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三. 그 외에도 우리는 일기에서 임란으로 소실되었던 덕산서원이 중건되어 계묘년 (1603) 9월 18일에 남명의 위패 봉안이 있었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른바 淫 婦事件 으로 알려진 일로 인하여 남명과 絶交한 龜巖 李楨의 祠宇 건립 논의가 있었으며, 이 논의에 참여한 凌虛 朴敏에 대하여 德山書院을 중심으로 벌을 주어야 한다는 의논이 일어나 덕산서원 院長이 박민으로 하여금 과거시험을 보지 못하도록 결정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128) Ⅵ. 結 語 본고는 壬辰義兵史에 있어 지금까지 學界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孤臺日錄 을 통하 여 이 일기가 지니는 史料的 價値를 중심으로 분석해 보았는데, 이상의 서술을 요약하면 서 結語에 대신하고자 한다. 이 일기는 孤臺 鄭慶雲이 쓴 原本으로 남아있는 상태는 아니 지만, 이를 筆寫할 당시 원본이 많이 훼손된 상태였음을 알 수 있음으로 해서 缺落된 부 분들에 대한 미확인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지만 현재의 상태에서도 이는 壬辰倭亂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당시의 江右地域을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사료적 가치가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어, 앞으로 이러한 분야에 대한 연구에 일차적인 근 거로 활용될 측면이 대단히 많다고 하겠다. 咸陽에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정경운은 어려운 중에서도 꿋꿋이 士族으로 서의 위치를 지키고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義兵有司로서 맡은바 任務를 성실히 행하였으니, 義兵을 모집하고 義穀을 모으는데 총력을 경주하였으 며 실제로 戰鬪에 참가하여 倭賊을 討伐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또한 灆溪書院의 院任을 맡아 서원의 수호와 복원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전쟁 후 서원과 鄕賢祠의 복원에서는 지방 儒林들과의 갈등이 유발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별도로 연구되어져야 할 문제로 보여 진다. 丁酉再亂 당시 함양의 함락 경위와 明軍의 횡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임진왜란의 慘 狀을 상세히 전하고 있는 몇 안되는 중요한 일차 자료로서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 특히 128) 乙巳年(1605) 7월 18일 및 8월 7일조 참조.
- 318 - 國史館論叢 第92輯 당시 강우지역 義兵將들의 대부분이 南冥學派의 인물들이었던 상황과 관련하여 이들의 활동상을 그린 부분들은 임진왜란과 남명학파와의 관련을 연구하는데 결정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다른 지역의 의병활동과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의병장들에 대한 내용도 담고 있어 壬辰戰亂史로서의 가치는 더욱 돋보인다. 게다가 義兵軍 자체의 횡포와 문제점을 지 적한 것들은 歷史를 의식하는 객관적인 시각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전쟁 중이나 전쟁 후 피폐해진 民生의 실정을 전하고 있는 부분도 사료적 가치는 충분한 것이며, 奴婢의 離 脫 등으로 惹起되는 신분질서의 변화에 대한 단초도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쟁 후 來庵을 중심으로 하는 남명학파의 동향에 대한 자료들에서는 이 시기 남명학 파의 실상을 알려주는 일차 자료로서의 의의가 충분하다고 하겠다. 이 외에도 그의 일기 는 당시 조정의 政策이나 人事에 대한 자신의 견해, 호랑이의 출몰 소식, 농경에 대한 내 용, 지방관들의 폐해, 北人과 西 南人간의 갈등관계, 전쟁 후 功臣錄 작성 당시의 비리, 과거 시험의 제목 및 급제자의 지역별 상황, 이순신 등 관군의 동향, 전라도 의병장 김덕 령의 살해에 대한 소식, 기상의 이변, 일본의 지진 소식, 전쟁 후 명군의 頌德碑 건립 등 대단히 폭넓고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 고대일록 은 많은 분야에 걸쳐 연구 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본고에서는 이 일기가 지니는 몇 가지 중요한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는데 치중함으로 해서 다른 자료들과의 충분한 비교 검토를 수행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러한 점은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겨 두고자 한다.
壬辰倭亂 關聯 民間日記 鄭慶雲의 孤臺日錄 硏究 - 319 - 參考文獻 著書類 鄭慶雲, 孤臺日錄, 4권 4책 文 緯, 茅谿先生日記 文 緯, 茅谿先生文集 李 魯, 龍蛇日記 趙慶男, 亂中雜錄 吳希文, 鎖尾錄 金 沔, 松菴實紀 鄭希輔, 唐谷實紀 宣祖實錄 德川師友淵源錄 德川書院院生錄 德川書院院任案 湖南節義錄 慶尙南道輿志輯成 崔永慶, 守愚堂實紀 (南冥門徒 德川及門諸賢集, 서울: 亞細亞文化社, 1982). 鄭 逑, 寒岡集 ( 韓國文集叢刊 53, 서울: 民族文化推進會, 1990). 金宇顒, 東岡先生全書, 慶北: 晴川書院. 1995. 姜 翼, 介庵集 ( 韓國文集叢刊 38, 서울: 民族文化推進會, 1990). 文景顥, 嶧陽集 盧士尙, 弘窩實紀 鄭仁弘, 來庵集, 서울: 亞細亞文化社, 1983. 朴汝樑, 感樹齋集 曺 植, 南冥集 郭 율, 禮谷先生文集 ( 南冥集 ), 서울: 亞細亞文化社, 1982. 郭再祐, 國譯 忘憂先生文集 (洪瑀欽 譯), 韓國巫俗博物館出版部, 1996. 趙宗道, 大笑軒逸稿 ( 韓國文集叢刊 47, 서울: 民族文化推進會, 1990). 金 沔, 松菴實紀 ( 南冥學關係資料目錄 ( 南冥學硏究, 創刊號, 1992), No. 786. 梁弘澍, 西溪遺稿 ( 南冥學關係資料目錄 ( 南冥學硏究, 創刊號, 1991) No. 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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