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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私撰邑誌에 관한 연구 - 61 - 서북부지방의 읍지들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각항을 설정한 이유를 항목이 시작되기 전 에 序의 형태로 밝히고 있는 점이다.29) 이것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남부 지방의 읍지 양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면이다. 예를 들면 部坊 의 설치 는 民居를 높이고, 民數를 안정시키는 소이이니, 이로써 賦를 정하고 이로 말미암아 役을 給하므로 읍지에 쓰지 않을 수 없다. 30)고 하여 部坊 조를 읍지에 기록한 목적이 민생에 가장 중요한 부 담이 되는 定賦 給役 에 있음을 명시하였다. 남부 지방의 읍지들과 북서부 지방의 읍지들의 전체적인 체제와 항목 설정 등을 종합 해 보면, 조선 전기에 나타난 두가지 성격의 전국지리지 즉 세종대에 편찬된 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 계통의 양대 지리지의 성격을 종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전국 지리지 들이 지니고 있었던 일면에 편중되는 점을 극복하고, 세종대 지리지의 장점인 정치 경제 군사 사회적인 내용과, 동국여지승람 의 장점인 인물 예속 시문 등을 겸비한 체제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읍지가 자료로서 지니는 가치와 내용의 풍부함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6세기말 임란 직전의 수령의 苛政, 豪民과 猾吏의 발호, 백성의 피폐와 流離, 부역의 불균형 등 정치 사회 경제의 문란은 당시 읍지를 편찬케 하는 배경이 되었으며, 또한 읍지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지방 상황에서 16세기 후반 의 읍지들은 치정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초 자료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2. 향촌질서의 재편과 안정 17세기에는 임란을 경과하면서 무너진 사회 질서의 복구와 안정을 위하여 읍지가 편찬 되었다. 1617년경 李埈이 편찬한 商山志 에는 우리나라의 田賦와 土貢은 일정한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병란을 겪고난 후부터 판적이 모두 불타버려서 구부구공의 법을 상고할 만한 곳이 없어졌다. 경계를 바로하고 공부를 군 등히 하는 것이 지금의 가장 급선무인데, 고식적으로 대처하여 개혁을 하지 않으니 식자들 의 한이 된다.31) 고 바람이 불면 풀이 눕듯이 敎化가 행해져 집집마다 仁讓의 기풍이 일어나고 사람마다 군자 의 陶成함을 행하리니 국가 승평지락의 단서가 읍지에 있는 것이다. 29) 항목명 다음에 항목의 설정 이유를 밝히고 있는 양식은 平壤志 에서 처음 보인다. 그밖에도 성천의 成川志, 영변의 寧邊志 등도 이러한 체제를 취하고 있다. 중국 읍지들에서는 이러 한 형식이 자주 발견된다. 경상도 지방 읍지 중에는 商山志 에서 일부 사용되었다. 30) 成川志 제2책, 部坊. 31) 商山志 (고 4790-31) 貢賦.

- 62 - 國史館論叢 第81輯 고 하여 전후의 가장 시급한 일이 正經界 임을 지적하였다. 전쟁 후 개인적인 측면에서나 조세에 의해 유지되는 국가의 입장에서나 가장 큰 문제는 토지나 산림 등의 경계를 바로 잡는 일이었다. 賦役을 균등히 하는 일 또한 민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으니, 이는 촌 락과 인구의 안정이 이루어지고, 그에 대한 파악이 있어야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임진왜란으로 인해 이전부터 동요되어 가던 사회 질서는 완전히 붕괴되고 전국이 황폐화됨에 따라 전쟁으로 파괴된 향촌질서의 복구 자료로서 임란 이전에 편찬되 었던 읍지들이 편간되기도 하고 혹은 새로이 편술되기도 한다. 우선 함주지 의 경우를 보면, 1587년에 편찬되었던 것을 임란 직후인 1600년에 함안 출신 사족인 吳澐이 그대로 재간한다. 吳澐은 발문에서 임란으로 인한 인명과 토지의 손 실, 그에 따른 촌락의 황폐화를 자신의 향리를 예를 들어 당시(1587년: 필자주) 기록된 호구수가 850여호이었는데 이제 한사람도 토지로 돌아온 자가 없다. 한 벽촌이 이와 같 으니 사방을 가히 알 수 있다. 32)라고 하였다. 이에 함주지 를 재간하는 목적을 하물며 세가사족으로서 문물이 풍부하고 윤택한 자 들은 한번 병분을 겪음에 그 화가 묘지에까지 미쳐서 보완된 것이 거의 없다. 후예들이 선세의 일을 알고자 해도 막연히 찾을 바가 없는데 홀로 이 함주지 가 남아 이를 의존 할 수 있다. 某山某壟은 우리 선묘가 있는 곳이고 某水某丘는 우리 父祖가 살던 곳이라 하여 지나간 자취와 선세의 행적이 환히 전일 일처럼 드러난다. 33)라고 서술하였다. 즉 임란을 겪고 난 후 국토가 분탕되어 田土, 森林, 墓地 등이 蕩失되고 居民의 生還도 희소 한 상태 하에서 촌락 내에서의 연고권을 확인하고 前蹟을 살피는 근거 자료로서 전쟁 이 전에 편찬된 함주지 를 중요시 한 것이다. 특히 토지나 삼림, 묘지 등의 소유권을 되찾 는데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재지적 기반을 가지고 있던 사족, 부유층이었을 것이다. 그들 은 임란 이전에 지녔던 세력 기반의 확보와 향촌 주도권의 새로운 장악을 위하여 촌락의 안정을 꾀하게 되며 이에 따라 읍지를 재간한 것이다. 壬亂으로 파괴된 향촌 질서를 재지사족층이 중심이 되어 회복함으로써 향촌 사회에 대 한 지배력을 계속 확보하였던 현상을 잘 보여 주는 읍지로 경상도 晋州의 晋陽志 를 들 수 있다. 이 책의 各里 조에는 各里의 위치, 인접한 사방의 里名, 屬坊의 수와 이름, 토 지비척도, 주민 성분, 풍속 등이 상세하게 기재되었으며, 특히 전쟁 후의 各里의 廢合 내 용까지 기록되어 있다. 지역 실정을 이렇게 세부적으로 기록한 것은 어느 읍지보다도 상 세한 것으로서 매우 특징적인 것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진주지방은 亂前의 112개 里가 亂後에 59개 리로 감소하였다. 폐지된 지역을 살피면 士族이 거주하는 지역보다 平民 거 32) 咸州志 吳澐跋.. 33) 위의 책, 吳澐跋.

조선 중기 私撰邑誌에 관한 연구 - 63 - 주지나 士族의 거주가 없는 지역의 廢合이 높은 비율을 보여, 전자가 29.7%인데 비하여 후자는 60%에 이르렀다. 또한 토지비옥도와 결합하여 살펴 보면, 사족의 거주가 많고 비옥한 里는 11개에서 10개로 큰 차이가 없었으나, 사족의 거주가 없으며 평민이 거주하 면서 비옥한 里는 25개에서 6개로 감소하였다.34) 이를 통해 사족이 자기중심적 지방 재 편을 하였으며, 지역사회와 촌락의 재편 과정에 士族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各里가 존속, 폐합, 복구되는 요인으로서 戶口나 土地 보다도 사족의 존재여부 가 중요하였던 것이다. 읍지인 진양지 는 지방사회에서 공인된 문헌이었으므로 재편된 지방 사회의 질서를 확인하고, 공인하는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3. 재지 세력의 현양 지방의 기반을 둔 在地勢力들이 자신의 위세를 현양할 목적으로 읍지를 편찬하기도 하 였다. 읍지의 이러한 성격은 晋陽志 에 잘 나타나 있다. 진양지 姓氏조에는 河家族譜 序 柳氏族譜序 河氏世係辨 등이 실려 있다.35) 공적인 문헌인 진주목의 읍지에 한 두 성씨의 족보와 세손에 관련된 글을 싣고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이는 편찬을 주도하였던 인물과 관계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진양지 는 成汝信이 완성 하였지만, 본래 책의 구성을 발의한 이는 河忄登이다. 그는 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별세 하였지만36) 책의 체제나 내용에 그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河氏世係辨 은 바로 그가 작성한 것이며, 인물 조에 하씨가 가장 많이 수록되는 것도 이러한 배경 하에 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즉 지방에서 편찬되는 읍지들, 특히 재지사족들의 주관 하에 편찬되는 읍지 가운데는 지방 세력가들의 위세를 현양하려는 의도가 반영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淳昌郡誌 에서는 벗(읍지 편찬자인 한징명: 필자주)이 내게 발문을 청한 까닭 이 어찌 다른 데에 있겠는가. 근세 이래로 풍속이 옛같지 않고 문자를 쓰는 자들은 사정 에 많이 이끌려서 남잡의 폐단이 없지 않았다. 이것이 사람들에 신뢰를 받지 못하는 까닭 이다. 37)라고 하여 글을 쓰거나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私情에 이끌리기 때문에 신뢰를 34) 李海濬, 17世紀初 晋州地方의 里坊再編과 士族 ( 奎章閣 6, 서울大學校圖書館, 1982) pp. 91 113 35) 河家族譜序 에서는 삼한 때부터의 土姓으로 河 鄭 蘇 康의 4姓을, 그리고 立州後의 四姓 으로 柳 任 康의 3姓을 들고, 나머지 新姓들은 庶人이라고 하면서 족보 편찬의 경위를 밝히 고 있다. 柳氏族譜序 에서는 各家所藏之譜에 있는 오류를 교정하고, 河氏世係辨 에는 임란 후 족보를 새로 만들게 된 경위와 世係에 있는 혼동을 바로 잡는 내용이 실려 있다. 36) 晋陽志 (고4790-17) 人物. 37) 淳昌郡誌 (고4790-24). 유응수발. 이 읍지는 1760년에 작성된 것으로서 16 17세기의 읍 지는 아니다. 읍지에 나타나는 私弊를 지적한 후, 淳昌郡誌 는 이러한 폐단에서 벗어나 있음

- 64 - 國史館論叢 第81輯 받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에서 당시에 개인 또는 몇몇 유사들이 읍지를 자신들의 가문을 현양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함으로써 읍지 작성에 사사로운 이해가 작용하고 있 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특히 인물 조를 통해서 표현되므로 읍지 작성에서 인 물 관계의 제 항목은 항상 분란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범례 를 수록하고 있는 읍지들의 대부분이 인물 조의 수록 범위에 대해 상세한 주석을 달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점 때문이 다. 이처럼 지방의 사족 세력가들이 자신들의 지위 위세를 진작시키려는 의도 하에서 편 찬되는 측면이 강한 읍지들을 또 하나의 다른 유형으로 간주할 수 있다. 4. 군현의 역사지리서, 역사서 자기 지역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자긍심의 발로에서 읍지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이러 한 성격의 읍지로 永嘉誌 를 들 수 있다. 영가지 편찬의 동기는 임란으로 말미암아 붕괴된 촌락 질서의 복구 및 안동이 사림 들의 중심지라는 성리학적 자부심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38) 그위에 동국여지승람 의 소략함에 대한 불만 등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촌락 질서의 복구나 안동의 연혁에 대한 자부심은 各里 조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는 四隣疆界, 屬坊을 기록하고 이어서 各縣(屬坊)에 소속된 촌과 그 위치, 지형, 고적이나 奇異 등 특징적인 사항, 사족 과 편민들의 거주 정도, 촌락 명칭의 유래, 토지의 비옥함과 척박함, 복거명사들의 배출 따위를 상세히 기록하였다.39) 그러나 무엇보다도 영가지 편찬의 직접적인 동기는 동국여지승람 의 소략함에 대한 불만에 있었다. 永嘉誌 序에 우리 안동부의 산천의 뛰어남, 인물의 훌륭함, 토산의 풍 부함, 풍속의 아름다움 및 기이한 자취가 승람에 기재되어 있는 것은 백중에서 하나 둥에 불과하다. 그 나머지는 옛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사라져 침몰한 것이 몇천만이 되는지 알 수 없다. 40)라는 기록은 그러한 사정을 잘 반영해 준다. 영가지 는 안동 지방의 자연 역사 풍속 토산 인물 문헌 기이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내용이 매우 풍부하고 다양 하다. 그 결과 안동의 독자적인 역사지리서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게 되었다. 서산의 읍지인 湖山錄 에도 한가지의 사적과 한가지의 물건이라도 모두 기재하여 후 일에 참고하기 위하여 읍지를 편찬하였음을 밝혀 놓았다. 을 강조한 것이다. 38) 永嘉誌 權紀 序. 39) 이 외에도 土品 土産 鄕校 조가 매우 자세하다. 鄕校 조에는 配位 祝文 祭服 次 序 祭享物種 學令 差祭完議 등을 일일이 기록하였다. 40) 永嘉誌 權紀 序.

조선 중기 私撰邑誌에 관한 연구 - 65 高縣監(고경명)이 말씀하기를 전에 국왕의 명령을 받들고 京師에 들어가 天子께 조회하 고 玉河館에서 2년을 있으면서 중국의 풍토를 문의하고 또 大明一統志를 열람해 보았더니 중국에는 대체로 군현과 주읍에 각각 기록한 바가 있어 인쇄하여 보장한 다음 장래에 國史 의 자료를 삼으며, 후일에 역사가의 수집하는 바가 된다. 그러므로 비록 한 마을의 작은 일 이라도 모두 유실하지 않거든 하물며 풍속의 순화와 정치의 교육이며 인물이 배출한 큰 일 의 관계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우리나라의 인심은 편협하고 풍속이 소박하여 사리를 통 달하고 옛 일을 믿는 습관이 없으므로 누구가 누구 일을 기록하면 다투어 서로가 코웃음치 면서 경솔하다고 지적하기 때문에 국가에서도 따라서 野史를 금지하여 종종 史獄의 참혹한 일이 있다. 그러므로 평일 通儒와 博士로 호칭받는 자로도 천만대 이상의 三皇五帝의 사적 을 물어보면 즉시 응답하기를 물흐르듯 하여도 시골의 사적과 자기 집 사적을 물어본즉 비 록 수십년 전 일이라도 어두움으로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가소롭지 않겠는가? 한가 지의 사적과 한가지의 물건이라도 모두 기재하여 후일에 유실됨이 없이 고람하는데 구비하 도록 한 것이다.41) 동국여지승람 의 소략함을 보완하는 입장에서 편찬된 읍지로는 이 밖에도 昇平志 42) 平壤志 成川志 東京雜記 龍城誌 43) 등을 꼽을 수 있다. 이후의 많은 읍 지에서 국가에 실록이 있듯이 각읍에는 사승으로서 읍지가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 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5. 군사 방어의 강화와 대비 16 17세기의 읍지 중 변경 지방의 읍지들은 군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1612년경 에 편찬된 東萊誌 는 임란을 겪고 난 후 특히 군사 방어적인 측면에 목적을 두고 찬술 된 읍지였다. 임진란 당시를 상시키면서 일이 없을 때에 미리 환난을 걱정하여 도모를 해 두어서 산천의 險夷와 도리의 원근과 성 곽의 高低와 卒伍의 多寡와 軍校 粮餉의 수와 戈甲 旗幟의 종류를 한책에 갖추어 기록해 서 府中에 장치해 두면 亂에 당했을 때 반드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44) 라고 편찬 목적과 대요를 밝히고 있다. 즉 환난에 대비하는 수단의 일환으로서 읍지를 만 들며, 대요는 산천, 도리, 성곽, 졸오, 군교, 粮餉, 戈甲, 旗幟를 위주로 하면서 아울러 當亂抗節人의 忠烈事蹟 전말을 상세히 실어 놓았던 것이다.45) 41) 湖山錄 韓汝賢 序. 42) 昇平志, 我東志記之作 唯輿地勝覽一書 而疎略亦甚. 43) 龍城誌 房斗天跋. 盖龍城地誌載勝覽古矣 而土地物産山川形勝 已略焉不詳. 44) 東萊府誌 (규11904) 朴師昌 序. 박사창이 1740년에 重修하면서 쓴 서문에 실린 내용인데, 府使 成晋善이 東萊誌 를 만든 뜻이 여기에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 66 - 國史館論叢 第81輯 이처럼 군사적인 면을 강조한 읍지로는 함경북도 北關 지방 즉 지금의 함경산맥 이북 에 위치한 鏡城 吉州 明川 富寧 會寧 茂山 鍾城 穩城 慶源 지역의 읍지를 수록 한 北關誌, 제주도내 濟州 大靜 旌義의 읍지를 수록한 耽羅志, 강화의 읍지인 江 都志 등이 있다. 일례로 탐라지 에서는 防護所, 水戰所, 鄕約, 將官, 工匠, 奴婢, 果園, 牧養, 醫藥 등의 항목이 수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여기에는 군사 방어적인 측면이 강하게 표출되어 있으면서도, 지방의 특색이 드러나고 있어서 읍지들이 각 지역의 실정을 나타내 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江都志 의 65개 항목 중에는46) 鎭堡 形勝 把守 성곽 墩隍 津渡 船舶 公廨 倉庫 軍餉 軍器 屯田 壬辰零談 丁卯錄 丙丁錄 등의 항목이 수록되어 있어 군사 시설, 군비, 그리고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과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강화는 고려 말 이래 국가적인 차원에서 군사적 요충지로 중시되 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서울로 들어 오는 입구에서 서울을 보호하는 외곽 방어기지 로서 중요시되었다. 강도지 는 군사적 요충지였던 강화의 지역적 특성을 잘 보여 주는 읍지이다. 체제상으로 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강도지 는 지나간 자취와 事目 등을 자 세히 기록하여 놓아, 지역의 역사적 자료와 전통을 잘 보존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6. 교화의 수단 孝 悌 忠 烈 등 敎化的 성격을 강조한 읍지들이 있다. 경상도 함양의 읍지인 天嶺 誌 에 이러한 측면이 잘 나타나 있다. 찬자는 병자 정묘 양란 후 풍기가 寢薄 陵夷해 가는 사회 현실을 목도하면서 孝 悌 忠 烈 사상을 고취하고자 본읍지를 편찬하였 다.47) 성리학적인 윤리관에 의거하여 변모하여 가는 향촌 질서를 재통제하고자 하는 의 도가 읍지 편찬에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天嶺誌 는 표방 명목은 동국여지승람 의 대요를 일탈하지 않으면서 人物, 軌躅, 孝悌 45) 위의 책, 朴師昌 序. 46) 江都志 는 上下 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항목은 다음과 같이 총 65조항이다. <上> - 序, 幅員, 沿革, 姓氏, 民戶, 官員, 名宦, 郎廳, 差除, 久勤, 山岳, 海島, 川浦, 古跡, 祠壇, 烽燧, 土産, 人物, 風俗, 忠臣, 孝子, 烈女, 將校, 軍兵, 官屬, 屬邑, 鎭堡, 形勝, 把守, 城郭, 墩隍, 津渡, 船舶, 宮闕, 影殿, 史閣, 鄕校, 祠宇, 陵墓, 佛宇, 樓觀, 公廨, 倉庫, 軍餉 <下> - 軍器, 內帑, 諸宮, 各司, 橋梁, 堤堰, 泉井, 風雨, 田畓, 屯田, 職役, 料祿, 試才, 謫 居, 畜物, 題詠, 摠論, 麗朝遷都記, 壬辰零談, 丁卯錄, 丙丁錄 47) 天嶺誌 (국립 한-62-62) 鄭光淵 序, 然而變亂之屢經 風氣之寢薄陵夷 至于今彷佛乎古昔者 什無二三焉. 鄭秀民 跋, 吾東里先生 自遭丙丁禍變以來 忠孝憤激 隱忍含黙 遂托意於是志 而其 文史也 其義則春秋也.

조선 중기 私撰邑誌에 관한 연구 - 67 - 忠烈, 隱坉, 高趣 부문을 더욱 상세히 함으로써 用心 공부에 힘쓰게 하고자 하였다.48) 때문에 천령지 에는 戶口 軍丁 土産 徭役 도로 제방 등 경제적인 내용들이 많이 제외되고 人物 學校에 관한 항목 들에 중점이 두어졌다. <표 8>을 보면 천령지 는 28 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성씨 풍속 인물 烈婦 祠廟 향교 서원 旌 門 司馬齋 鄕射堂 서당 누정 분묘 사찰 고적 名宦 拾遺 題詠 詩什 雜著 등 20개의 항목이 사회 풍속 인물 예속 관계 내용이다. 이러한 성격의 읍지는 거의 비숫한 시기에 편찬된 松都志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표 8> 天嶺誌 와 松都志 의 수록 내용과 항목 읍지명 天嶺誌 松都志 내용 분류 (沿革), (疆域), 部坊, 公廨, 府先 행정 관계 地圖, 建置沿革, 邑號 生案, 經歷, 都事 경제, 재정 관계 土産, 橋梁 橋梁 군사 관계 城郭, 驛院 城郭, 驛院 姓氏, 風俗, 人物, 烈婦, 祠廟, 鄕校, 宮殿, (樓亭), 學校, 古跡, 寺觀, 사회, 풍속, 書院, 旌門, 司馬齋, 鄕射堂, 書堂, 諸陵, 人物, 忠臣, 孝子, 烈女, 才 인물, 예속 관계 樓亭, 墳墓, 寺刹, 古跡, 名宦, 拾遺, 行, 文科, 武科, 生員, 進士, 土俗, 題詠, 詩什, 雜著 (雜記) 자연 관계 形勝, 山川 山川 * ( )의 항목은 題目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내용이 기록된 것임. 松都志 에서는 家國의 흥망, 敎化의 得失, 인재의 성쇄, 고금의 풍속 등을 간략히 기 록하고 음풍영월이나 駁雜無用한 글들은 수록하지 않았다.49)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와 같이 풍속 인물 예속 등이 강조되는 경향으로 변화하는 것은 병자호란을 경과하면서 성리학적 명분론이 강화되는 사상사적 변화와 문벌형성의 추세에 따라 신분의식이 강화되는 사회사적 변화가 읍지 편찬에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국에서 明淸 교체에 따른 국제 질서의 변화와 두차례의 호란을 겪은 조선 사 회에서는 춘추대의와 명분론에 입각한 復讐雪恥가 강조된다. 이에 따라 小中華 의식이 강 화되고 崇禎 연호의 사용, 북벌론의 대두 등과 짝하여 사상사적으로 주자학 절대주의로 경도하게 되는데 이러한 분위기가 읍지 편찬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안동의 영가지 坊里 조에는 고금의 유명인사들의 거주처를 기록하였다. 이 가운데 48) 위의 책, 鄭光淵 序. 49) 松都志 (일사고 915.12-So58) 松都志舊序, 金堉. 그러나 1700년부터 1855년에 이르기 까지 7차례에 걸친 증보 개수과정을 통해 제외되었던 위의 내용들이 보충되었다.

- 68 - 國史館論叢 第81輯 에는 烈女 모씨의 거주처라는 기록들이 보인다. 여성에 대한 이러한 파격적인 대우가 의 도하는 바는 가부장적 사회 질서를 규범으로 설정하여, 뭇사람들로 하여금 동일한 길을 가게 하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측면은 읍지가 지닌 윤리적, 교화적 성격에서 연유하는 것 이다. 읍지는 지역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이다. 그러면서도 읍지의 편찬자들은 인간의 도덕적 품성을 함양하여 윤리적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지향하려는 이념을 읍지에 강하게 표출하 였다. 충청도 燕岐邑誌 에서는 읍지의 작성 과정과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이곳에 부임한 초에 먼저 옛날의 사실을 모으고 마침내 마을의 속담까지 채집하여 학식이 많은 이에게 물어 우리 고향의 花山誌의 범례를 따라 一編文字를 纂成하여 이곳에 거주하는 자들로 하여금 상고할 바가 있게 하고 이곳에 오는 자로 하여금 의지할 바가 있게 하였다. 벼슬하여 가히 전할만한 자와 行義로 가히 칭송할 만한 자는 더욱 상세하게 하고 삼갔다 이읍 人士들이 혹시 이 읍지로 인하여 興起感發하는 바가 있어 서로 이끌어 忠 君孝親에 삼가고 힘써서 입신양명의 열매가 있게 된다면 이 읍지가 어찌 風化의 一端을 보 조 했다고 하지 않겠는가?50) 그 지역에 관한 참고 서적을 만들어 지방민과 외부인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읍지를 편 찬하였음을 술회하였다. 특히 주안점을 둔 부분은 유교윤리의 기본 강령인 충군효친에 힘 써서 입신양명하기를 바라는 것이었으니, 유교적 질서를 심어 풍화와 교화에 목적을 두었 던 측면이 읍지 편찬에 강하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人物에 관계된 항목들에서 두드러졌다. 人物 조를 읍지에 수록한 것은 善行德業의 행적을 길이 포장하고 지역인들과 후대인들로 하여금 이들을 본받도록 분기 시키고자 함이었다. 특히 忠臣 孝子 烈女 는 三綱에 관계된 내용으로서 가장 중요 하게 여겼던 덕행이므로 이에 관계되는 사실은 사회적 신분의 高下 貴賤을 막론하고 모 두 읍지에 실었다. 그중에서도 孝 는 일상적인 생활규범으로서 백행의 근본으로, 貞 은 婦人의 절개로서 중시하였다. 칭송할만한 효행, 절조의 행적이 있는 자에게 국가가 포상 하고 旌閭를 세워주는 것은 바로 世道와 風敎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그러 한 사실을 읍지에 기록하여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한 것이다.51) 賤人도 교회의 대상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엄격한 신분질서관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 조 사회에서 파격적인 人物 조의 기술형식과 범위가 가능하였던 것이다.52) 동국여지승 50) 燕岐邑誌 (규 17381) 序. 51) 平壤志 (규 4885) 孝烈. 52) 충청도 아산의 읍지인 新定牙州誌 (규 17384)에서는 읍지를 新增하면서 범례에 다음과 같 이 기록하였다. 교화에는 그 무리가 따로 없었으니 孝烈을 포상하는 것이 실로 貴賤에 상관 이 없다. 귀천을 모두 수록하기는 하되 그 순서는 구별을 하여 士夫를 앞에 기록하고 賤類

조선 중기 私撰邑誌에 관한 연구 - 69 - 람 에서는 人物 조를 설정하고 여기에 그 지방 출신의 유명 인물을 기록한 후 충신, 효 자, 열녀등을 附記하였다. 그런데 후기로 가면서 읍지에 보이는 현저한 특징은 인물조가 더욱 강조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물에 관계되는 항목의 세분화로 나타났으며, 충효열 이 외의 인물 관련 내용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다. 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리학적 이념이 형식성과 보수성을 띠게 되는 경향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선초에 새로운 사회건설의 이념으로 등장한 성리학이 공적인 기능을 지닌 사회성과 진 취적 기상이 퇴색되고 17, 18세기를 경과하면서 사적이며 일개 가문을 과시하려는 윤리 로 변모하는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도덕성의 사회적인 함양을 통하여 조선 사회를 건설하려는 방편으로 읍지의 교화적인 성격이 중시되었던 전기의 경향으로 부터 후기로 가면서 개인적인 이해가 반영된 인물과 先祖 들을 읍지에 수록하여 개별가문의 사적인 명예를 현양하려는 형태로 변모하였다. 學校 조와 鄕約 조를 읍지에 기록하였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된다. 학교는 風化 의 바탕이며 首善의 장소53)였다. 학교 시설의 숫자와 규모, 제향인물 등을 통해 그 지방 의 文風과 교화의 정도를 짐작할수 있으니, 학교조를 읍지에 설치한 것도 지방민들을 興 起感發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鄕約을 실시하는 것은 춘추로 강신을 함으로써 선을 상하고 악을 징벌하여 백성을 층 효돈목의 뜻으로 가르치고자54) 한 것이다. 前代에 실시된 또는 당대에 실시되고 있던 향 약의 내용을 읍지에 수록하여 그 뜻을 반포하고, 공고히 하며 그 문화를 길이 후대에 전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인물 이나 학교 향약 등의 항목 외에도 祠宇 塚墓 題詠 叢談 등의 조항도 교화적 효과를 기대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읍지의 찬자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촌 락을 하나의 도덕적 유기체로 보고 도덕적 이상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여 향촌 사회의 안정과 질서 조화가 나아가 中庸이라는 유교의 기본 이념을 읍지를 통하여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읍지의 기본적인 성격의 한 측면은 성리학이 지니고 있었던 위계적인 가 치체계와 중세적 속성을 유지 강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특징 은 기본적으로 조선조 지식인들의 정신적인 환경이었던 주지학적 세계관, 철학관, 지역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이 밖에도 조선 중기의 읍지에는 새로운 지식 체계를 정리하고, 그것을 지역에 수용하 를 뒤에 기록하되, 시대를 더욱 존중하여 舊誌는 구지의 순서대로 사부와 천류를 기록하고, 구지의 뒤에 新增 人物들을 기재함으로써 교화와 명분을 겸한다고 하였다. 53) 成川志 (규 12399) 學校. 54) 湖南邑誌 (규 12175) 제7책, 淳昌郡, 風俗.

- 70 - 國史館論叢 第81輯 는 측면도 엿보인다. 16세기에 의학과 약학이 발전하고 지리지를 편찬하는 사업이 활발 히 벌어짐에 따라 우리 나라에서 자라는 동식물과 광물에 대한 생물학적, 박물학적 지식 들이 또한 매우 풍부해졌으며 그러한 지식들을 일정한 체계에 따라 분류하고 정리하는 사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실례로 해주읍지 에서는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140여종의 토산물들을 크게 10개의 류로 나누고 그 안에서 또다시 여러 개의 문으로 분류해서 정리 하였는데 이것은 동물과 식물, 광물들을 박물학적 각도에서 구별하고 그 특성과 용도, 가 공방도 등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세분된 지표별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 기에서 설정한 10개의 류는 알곡류 과일류 남새류 나무류 약재류 짐승류 새류 물 고기류 조개류 및 그 밖의 것들을 묶은 류였다. 그리고 평양지 에서 217종의 토산물을 분류 정리할 때에 설정한 11개의 류는 해주읍지 에 있는 짐승류를 집짐승류와 짐승류로 더 세분하여 하나 보충한 것이다. 55) Ⅵ. 맺 음 말 邑誌는 각 고을(읍)의 지리지로서, 지방 행정 단위인 부, 목, 군, 현 등을 단위로 하여 작성되었다. 16세기 이후에는 읍지가 광범위하게 편찬되어 조선 시대의 지리지를 대표한 다. 16세기 부터 읍지가 지방에서 편찬되기 시작하여, 조선 중기인 16 17세기에 내용이 풍부하고 충실한 私撰邑誌가 50여 종 제작되었다. 이 시기의 읍지편찬은 하삼도가 중심 이 되었는데, 이것은 성리학적 소양을 지닌 사족들이 다수 거주하면서 學脈을 형성, 文風 을 진작시킨 것과 관련이 있다. 특히 경상도와 전라도의 읍지 중 사찬읍지의 비율이 높고 다른 지역은 상대적으로 사찬읍지의 비율이 적다. 같은 이유로 읍지의 편찬, 제작활동은 邑規模와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牧 府 등 大邑이 郡 縣 등 小邑에 비하여 많 은 읍지가 편찬되었으니, 당시 행정구역 수와 비교해 보면 牧 60. 0%, 府 33.3%, 郡 12.5%, 縣 5.8% 등 현저한 차이가 있다. 大邑 중심의 읍지 편찬은 16 17세기의 특징 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문화 수용의 1차 거점지이며, 사족의 거주가 풍부하였던 지방 중심지에서 일차적으로 읍지 편찬이라고 하는 새로운 문화가 꽃피웠던 것이다. 읍지의 내용과 성격은 16 17세기, 18 19세기 중엽, 19세기 후반 등 3시기로 대별 된다. 16 17세기는 읍지가 싹트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사찬읍지가 중심이 되었으나, 관찬읍지도 혼효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의 관찬읍지도 지방의 사족들의 협조, 또는 제작 55) 리용태, 앞의 책, p.201.

조선 중기 私撰邑誌에 관한 연구 - 71 - 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찬읍지와 관찬읍지 사이에 내용상의 큰 차이가 없으며, 후 대의 읍지에서 보는 바와 같은 상세함이나 질적인 면에서의 차별성도 없다. 따라서 조선 중기에는 사찬읍지와 관찬읍지의 구별이 큰 의미가 없다. 또한 조선 중기의 읍지들은 지 방통치 자료, 향촌 질서의 재편과 안정, 재지 세력의 현양, 군현의 역사지리서, 군사 방 어의 강화와 대비, 교화의 수단 등 여러 유형의 읍지들이 편찬되어 사회적 요구, 각 지역 의 지역적 특성을 나타냈다. 16 17세기에는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과 같은 전쟁으로 전 국토와 백성이 피 폐한 가운데에서도 지리지의 새로운 조류인 邑誌가 다수 편찬되었다. 이것은 당시 읍지가 실용적인 측면에서 활용되고 있었던 것을 보여 주며, 읍지에 대한 사회적인 필요성과 요 구를 반영한다. 寒岡 鄭逑는 임진왜란 중에도 강원도 강릉에서 臨瀛志와 關東志를 편찬하 였다. 賊이 강역에 가득하고 나라의 온 힘을 그에 맞서 싸울 때 地志를 撰集하는 이유를 묻는 崔睍에게 寒岡은 완급이란 것은 진실로 다름이 있다. 마땅히 해야할 바를 경황이 없다고 해서 지나쳐 버리는 것은 안된다. 하물며 지금 서적이 완연히 흩어지고 없어졌으 니, 만약 견문을 수습하지 않는다면 장차 무엇으로써 후대에 보여주겠는가? 56)라 설명하 였다. 지역 의식의 자각과 성장을, 지역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자료 축적의 필요성을 인 식하고 있었음을 이에서 살필 수 있다. 조선 중기는 조선의 역사에서 흔히 전란과 그로 인한 침체된 시기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지리학의 변화와 地理志의 변화 과정을 살펴 보면, 16 17세기는 중요한 변환기 였다. 읍지 편찬의 활성화, 東國地理志 등 주제별 지리서 실학적 지리학의 출현, 서양 지리학과 서양 세계에 대한 지식의 유입과 수용 등 지리학은 큰 전환을 맞이하고 있었다. 특히 읍지 편찬의 활성화는 자기 고장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공간 인식의 자각 이라는 측면에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지역의 사족들이 편찬에 주도적, 능동적으로 관여하면서 지역에 관한 상세하고 정확한 파악을 할 수 있었으며,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당시의 지역 실정에 관한 상세한 자료를 남겨 국토의 옛 모습을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전쟁과 그 수습으로 어려웠던 16 17세기에, 자료적 가치가 풍부한 많은 사찬읍지를 편 찬하였던 것은 조선 중기 사회의 문화적 역량을 재평가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동시에 이 시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이해를 위한 다양한 측면에서의 연구의 필요성을 제시한 다. 56) 寒岡集 권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