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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기사에 대한 전말보고서(원문) 1 3 2 4 16 동아일보기사에 대한 전말보고서(원문)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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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申의장 등을 비난한 벽보사건에 관하여(원문) Ⅰ - 국무총리실 공개재분류 중요 기록 해제집Ⅰ 무하였다. 전쟁 중에 전역하였다가 1952년 1월 준장으로 다시 현역에 복귀했으며, 5월에는 영남 지구 계엄사령관으로 부산정치파동 을 연출하여 이승만정권에 충성을 다하였다. 이러한 공적 을 인정받아 1953년 3월 24일에는 헌병사령부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신태영, 김석원, 원용덕 이들 3인은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었으며, 1951년 2월 당시 한직으로 1 밀려나 있거나 해임된 상태였다. 이들 3인이 의기투합하여 신익희 국회의장과 만나 감투운동을 전개했을 것이라는 정황을 포착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 고 있어 사실관계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이 사건에 대한 군법회의 공판이 4월 6일 대구지방법원 법정에서 진행되었고, 피고인 전원이 무죄판결의 언도를 받았다. 이 문서는 1951년 2월 당시 김석원 신태영 원용덕의 동향을 파악 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1951년 당시 군 내부의 권력관계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의의가 있다. 임송자(성균관대학교) 2 22 국회 申의장 등을 비난한 벽보사건에 관하여 23
국회 申의장 등을 비난한 벽보사건에 관하여(원문) 3 5 4 6 24 국회 申의장 등을 비난한 벽보사건에 관하여(원문)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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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군 신원면 사건조사서(원문) 1 3 2 4 32 거창군 신원면 사건조사서(원문) 33
거창군 신원면 사건조사서(원문) 5 7 6 8 34 거창군 신원면 사건조사서(원문) 35
거창군 신원면 사건조사서(원문) 9 004 괴문서 진상에 관한 설명보고 관리번호(건번호) : BA0774248(6-1) 쪽수 : 9쪽 생산일자 : 1951년 4월 17일 작성자(생산기관) : 대한민국 주일대표부 공사(公使) 김용주(金괟周) 1951년 4월 3일 대한민국 주일대표부 공사(公使) 김용주(金괟周)가 재일본대한민국 민단 중앙총회 후 구간부파가 대한민국 각 요로에 발송한 문서에 대해 그 진상을 장면 국무총리에게 보고한 문서이다. 문서에서 주일대표부 공사 김용주는 각지에 보낸 문서는 주일대표부와 공사를 중상하기 위한 목적으로 재일본대한민국민단 구간부파가 보낸 것 이라고 보고하였다. 재일본대한민국 민단과 주일대표부와의 갈등관계는 1951년 들어서 면서 첨예화되었고, 4월 3일의 민단 중앙총회에서 폭발하였다. 1951년 4월 3일,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 중앙총회가 끝난 후 구(舊)간부파가 대한 민국 각 요로에 발송한 문서에 대해 대한민국 주일대표부 공사 김용주(金괟周)가 그 진상을 4월 13일 장면(張勉) 국무총리에게 보고한 문서이다. 주일대표부 공사 김용주가 국무총리에게 보낸 문서에 의하면, 민단 구간부파가 주일대표부와 공사를 중상모략하는 내용의 문서를 대한민국 각 요로에 발송한 것은 민단을 개혁하고 인사를 쇄신하기 위해 노력하는 주일대표부와 공사에 대항하기 위해서라고 보고한다. 그리고 구간부파 는 일제시대 토목노동에 종사하거나 상애회(相愛會)에 소속되었던 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 쟁이 끝난 후 일본사회의 혼란을 틈타 폭력을 행사하는 등 교포사회 전체에 막대한 악영향을 미 치고 있을 뿐 아니라 민단을 장악하고 있어 민단을 개혁하려고 하자 이에 대한 저항의 한 방편으 로 괴문서를 대한민국 각 요로에 발송하였다는 것이다. 36 37
괴문서 진상에 관한 설명보고(원문) Ⅰ - 국무총리실 공개재분류 중요 기록 해제집Ⅰ 중앙총회에서 김용주 공사 추방운동을 결의하였다. 4월 3일 민단 제11회 임시 전체대회가 개최되었다. 내 1 외정세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내부적 파벌투쟁을 청산하고 재일동포의 정치적 경제적 활동을 강화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던 시기에 치러진 대회 였지만 이때도 파벌적 양상 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회는 김재화 세력 대 원심창 세력 1953년 일본을 방문 중인 이승만 대통령이 재일한국거류민단 대표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CET0019079) 사이의 대결구도로 나타났 지만 결국 단장으로 원심창 이 선출되었다. 원심창이 김 2 재화 세력의 거센 방해에도 불구하고 단장에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은 주일대표부의 적극적인 지 원책 덕분이었다. 선거에서 패배한 김재화 세력은 이에 대한 반발로 대한민국 각 요로로 문서를 발송하여 항의한 것으로 보이며, 이 문서는 김재화 세력이 보낸 문서에 대해 김용주 공사가 해명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6월 16일 김용주 공사는 본국으로 소환되고, 6월 30일 주일대사에 국방부장관이었던 신성모(申性模)가 부임하게 된다. 신성모도 주일대사직을 맡은지 며칠 안되어 교체되어 7월 10일 신성모의 후임으로 김용식(金溶植)이 대사로 부임하였다. 임송자(성균관대학교) 40 괴문서 진상에 관한 설명보고 41
괴문서 진상에 관한 설명보고(원문) 3 5 4 6 42 괴문서 진상에 관한 설명보고(원문) 43
괴문서 진상에 관한 설명보고(원문) 9 7 괴문서 진상에 관한 설명보고(원문) 8 44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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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농회 감찰보고에 관한 건(원문) Ⅰ - 국무총리실 공개재분류 중요 기록 해제집Ⅰ 시 대한농회의 실질적인 최고책임자인 부회장의 공금횡령을 포착하고 경무대경찰서가 혐의자를 구속하여 수사하였다. 그러나 수사 도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대한농회 간부진에 대한 비리혐 의 수사는 중단되었다. 이 문서는 대한농회 해산의 중요한 계기를 보여주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전형적인 감사의 내 1 용을 담고 있지만 그 배경에는 정부가 일제시기 조직된 농업경제지도단체를 정책적으로 재편하 는 과정에서 대한농회의 해산이 필요한 상황과 맞아떨어지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 순한 비리감사 이상의 이승만정권의 농업정책의 전체적 내용을 읽어낼 수 있는 자료로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일제시기 조선농회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축적되어 있음에도 해방 후에도 상당기간 농업경제지도단체의 위상을 유지하고 활동했던 대한농회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 따라서 앞으로 해방공간 농업경제사 내지 농업정책사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위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 자료로 생각된다. 배석만(부산대학교) 2 50 대한농회 감찰보고에 관한 건 51
대한농회 감찰보고에 관한 건(원문) 3 5 4 6 52 대한농회 감찰보고에 관한 건(원문) 53
대한농회 감찰보고에 관한 건(원문) 7 9 8 10 54 대한농회 감찰보고에 관한 건(원문) 55
대한농회 감찰보고에 관한 건(원문) 11 13 12 14 56 대한농회 감찰보고에 관한 건(원문) 57
대한농회 감찰보고에 관한 건(원문) 15 17 18 16 19 20 58 대한농회 감찰보고에 관한 건(원문) 59
대한농회 감찰보고에 관한 건(원문) 대한농회 감찰보고에 관한 건(원문) 22 25 23 60 21 24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