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는 데에 결코 지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데에 지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언제나 우리의 기쁨을 되찾아주시는 온유함으로, 우리가 고개를 들고 그분을 향해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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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 전 한국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며칠 뒤 저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한국에서 많은 분들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이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모든 신앙 순교자들의 증거를 거울삼아 우리를 비춥니다. 서울에서 이분들을 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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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마이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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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2015 사순 시기 묵상집 PONTIFICAL MISSION SOCIETIES IN KOREA 교황청전교기구 한 PONTIFICAL MISSION SOCIETIE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는 데에 결코 지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데에 지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언제나 우리의 기쁨을 되찾아주시는 온유함으로, 우리가 고개를 들고 그분을 향해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니다. 예수님에게서 도망가지 맙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우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2015 사순 시기 묵상집 돌아섬 PONTIFICAL MISSION SOCIETIES IN KOREA 교황청전교기구 한 PONTIFICAL MISSION SOCIETIE

짜임 03... 묵상 시 1 04... 복음 묵상 43... 묵상 시 2 44... 전례 안내 48... 복음 묵상 표지 이미지 출처 :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사순 시기 묵상집은 후원과 기도로 선교에 동참하시는 회원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엮었습니다. 이 묵상집이 여러분 곁에 있고 매일 읽혀져,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는 은총의 사순 시기를 보내시는 데 도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는 변승식(교황청전교기구 한국지부 지부장, 의정부교구 고양동성당 주임) 신부님께서 집필해주셨습니다.

묵상 시 1 주님의 기도 만일 나의 모든 관심과 취미가 세상 것들에만 있다면, 나는 하늘에 계신 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나의 믿음이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어려움에 대한 여유를 갖고 있지 않다면, 나는 우리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매일의 삶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는 관계를 증명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버지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모든 일에서 하느님께 대한 존경과 영광과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나의 마음 안에, 우리 집에, 우리 학교에, 우리 성당에, 우리나라에, 그리고 전 세계에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마지못해 한다면, 나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나의 삶에서 아버지의 뜻을 마지못해 따르거나 화를 내며 실천한다면, 나는 아버지의 뜻이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나 자신을 내어놓을 진정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나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매일의 양식을 얻고자 정직한 노력을 하지 않고, 가족과 친구, 이웃의 분명한 요구를 무시한다면, 나는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계속해서 원한을 품거나 비방한다면, 나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유혹받을 상황에 고의적으로 남아있다면, 나는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하느님의 과 기도라는 무기를 가지고 영적 세계에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나는 악에서 구하소서.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정직하게 어떠한 값도 치르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기도입니다. 하고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멘. 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3

2월 18일 요엘 2,12-18 2코린 5,20 6,2 마태 6,1-6.16-18. 재의 수요일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우리는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먼지로 돌아갈 우리 육신의 허망함을 기억합니다. 이 허 약한 육신을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구원하시는 파스카의 신비를 우리 각자의 삶으로 맞아들이기 위해서는 참된 회개가 필요합니다. 참된 회개의 표지는 무엇일까요? 간절하고 순수한 지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모두 회개의 표지 입니다. 이기적인 욕심과 쾌락을 따르는 육적인 삶을 떠나 하느님의 뜻을 찾고 사 랑을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삶으로 돌아서려는 노력이고 그 열매입니다. 하지만 그 행위가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면, 사람들의 인정을 얻기 위한 도 구가 되어 버린다면 우리는 하느님도 복음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이의 신앙을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나의 신 앙을 다른 이의 것과 비교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내가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열심 히 하는 것처럼 보일지 의식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기도나 봉사를 할 때에 다른 이 의 눈을 의식한 적은 없나요?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됩니 다. 우리의 회개가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을 정도로 간절하다면 사람의 일을 생각 할 여유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 (2코린 6,2)이니 그 은총 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찾아가고 너는 내려오고... 자캐오가 나무 위로 올라간 것은 결국 자신의 죄의식, 약점,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하 늘 높이 세운 자격지심과 헛된 자존심의 높이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시당한 것 같고 상처를 받았다 고 해서 짐짓 콧대를 세우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어깨에 힘을 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작은 키 그대로, 쓰러지고 싶은 마음 그대로, 아래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집으로 갈 수 있습니다. 주님 품에 안겨 울 수 있습니다. 치유 받 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심이란 어떻게 보면 사람이 하느님을 믿기로 마음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끝까지 믿어 주시는 그 마음에 그제야 우리의 시선을 돌리는 것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 하느님께로 돌아서지 못하게 하는 결점은 무엇인지요? 그 결점을 고칠 수 있는 좋은 습관 하나를 찾아 실천하기로 결심합니다. 그 결심을 가족과 이웃에게 나누어 주세요. 흔들리지 않게^^ 4 하느님의 선물은 고통이란 보자기에 싸여 있다.

2월 19일 민수 6,22-27 야고 4,13-15 루카 12,35-40. 설 새해에 복을 많이 받으라고 우리는 서로 인사합니다. 지나간 우리 의 모든 시간이 그렇듯이 새로이 주어진 한 해는 주님의 선물이기 때 문입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새해는 좋은 생각 과 좋은 일을 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우리 스스로가 다른 이의 기쁨이 요 축복이 되기 위한 시간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이며 우리의 소명 입니다. 주인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으면 종은 주인을 시중들기 위해 당연히 깨어 기다 려야 합니다. 그런데 돌아온 주인은 그 종을 보고 오히려 그를 식탁에 앉히고 시중 을 들어줍니다. 세상에 이런 주인이 있을까요? 이는 주인과 종의 모습이라기보다 는 마치 남편을 기다리는 착한 아내의 모습이나, 졸린 눈을 비비며 아빠 오시기를 기다리는 어린 자녀와 맛난 것을 사 들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연상시킵니 다. 이런 기다림은 의무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기다리는 기다림은 고난 이 아닌 축복이고 만남은 더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것은 곧 그분의 뜻을 기억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 다. 내 뜻대로, 내 욕심대로 살고자 하면 그것이 우리 삶의 장애물이요 무거운 짐으 로 느껴지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이미 천상의 것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뜻이 이 땅 에서도 이루어지기를 희망하고 있다면 그것은 천상의 기쁨을 미리 누리는 복된 기 다림이 될 것입니다. 이런 기쁨으로 모두 복된 새해를 맞으시길 빕니다. 한 대학교수가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주었다. 빈민가에 사는 청소년 200명의 생활을 조사하고 그들의 미래 모습을 써서 제출하시오. 그들의 생활은 생각보다 더 열악했다. 범죄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데다, 부모는 술과 약에 찌들고 교육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학생들은 약 90%의 청소년이 감옥에 갈 것 이라는 예측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 한 교수가 이 보고서를 발견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보고서 내용이 얼마나 맞는 지 조사해 보도록 지시했다. 200명 중 180명과 연락이 닿았다. 그런데 감옥에 간 사람은 단 네 명뿐 이고 나머지는 변호사, 의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그들과 일일이 만나 인터뷰를 했 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등학교 선생님 덕분 이라고 입을 모았다. 학생들은 이미 은퇴한 그 선생님을 찾 아가 교육 비결을 물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저는 그저 아이 모두를 사랑했을 뿐 입니다. 그저 사랑했을 뿐입니다 가족들에게 마음이 담긴 칭찬을 선물합니다. 빛을 퍼뜨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은 촛불이 되거나, 그것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아디스 워튼 5

2월 20일 이사 58,1-9ㄴ 마태 9,14-15.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금육재를 지키라는 어머니의 말에 중학생 아들이 화를 내었답니 다. 왜 맛난 것을 먹는 것을 참아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풍요로운 세 상에서 먹는 것을 참아야 하는 상황 자체가 낯설었던 그에게 어머니 는 쉽게 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욕망에 충실할 것을 가르 치는 이 세상에서 절제의 미덕은 의미를 잃는 것일까요? 해답은 엉뚱하게도 이 세 상이 스스로 준 것 같습니다. 외모 지상주의와 다이어트 열풍으로 말입니다. 사랑 받기 위해서는 절식이나 단식이라는 고행을, 그리고 다른 욕구들을 누리기 위해서 는 공부와 일이라는 고행, 즉 욕구의 절제를 세상은 요구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단식은 자기 욕구를 절제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 록 의지를 정화하고 단련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멀어져 있는 세상, 유배지 의 삶을 슬퍼하면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을 희생하면서 그분께로 돌아갈 길을 찾 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언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분의 뜻은 찾지 않고 외적인 행위에만 골몰한다고 비판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단식은 불의한 억압을 풀어주는 것, 굶주린 이와 떠도는 이, 헐벗은 이를 돌보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로잡 고 있는 욕구와 욕망들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고서는 정의와 자비를 실천할 수 없 기 때문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식과 희생은 영혼을 단련하는 것입니다. 욕망의 군살을 빼고 선한 의지의 근 육을 키워서 두려움이나 주저함 없이 주님을 따라 걸어갑시다.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육신을 돌보는 데 지나치게 마음을 쓰지 마라. 교만을 미워하라. 자주 기도하라. 인색한 사람은 덕성에 있어 결코 진보할 수 없다. 하느님을 등지는 사람은 아주 쉽게 육욕에 빠진다. 유혹을 받게 되면 곧바로 주님께 매달려라. 자기를 내세우지 마라. 조금씩 시작하여 꾸준히 하라. 페스트를 경계하듯이 거짓말하는 것을 경계하라. 게으름을 경계하라. 사람들이 너에게 거두어 간 영광은 하느님께서 반드시 되돌려 주신다. 성 필립보 네리의 권고 6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묵주 기도 고통의 신비 를 바칩니다. 하느님께 가는 길에는 세 단계가 있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성 아우구스티노

2월 21일 이사 58,9ㄷ-14 루카 5,27-32.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저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시는 구원은 이사야가 알려주는 대로 굶주리는 이, 고생하는 이, 어둠 속에 있는 이를 돌보고 일으키는 것입니다. 폐 허를 재건하고 오래 버려진 기초와 성벽과 거리를 복구하는 것입니 다. 그래서 그분은 가장 어려운 이들, 보잘것없는 이들, 죄인들을 먼 그런데 이런 폐허 가운데에서도 자리를 잡고 잘 지내던 이들이 있으니 바리사이 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변의 많은 어려운 이들과 관계없이, 아니 어쩌면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스스로에게 만족하면서 살아갔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그들은 그분도 당연히 자기들이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그분을 비난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자들에게서도 이런 모습을 봅니다. 자신들이 누리는 것을 지 키고 물려주기만 바랄 뿐,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위해 일하는 데는 너무나도 소심 합니다. 부의 불균형이 날로 심화되는데도 오히려 그것이 완화되면 사회가 무너지 기라도 할 듯이 기겁을 합니다. 수많은 어려운 이들 가운데서 떵떵거리는 것보다 함께 행복할 수 있도록 서로 돌보아 주는 데 참된 기쁨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병든 이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주님의 부르심에 우리 모두가 기꺼이 나아가 기쁘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맞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우분트를 아시나요? 어떤 인류학자가 아프리카 한 부족의 아이들에게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근처 나무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매달아 놓고 먼저 도착한 사람이 그것을 먹을 수 있다고 하고 시작! 을 외쳤다. 그런 데 아이들은 각자 뛰어가지 않고 모두 손을 잡고 가서 그것을 함께 먹었다. 학자는 아이들에게 한 명이 먼저 가면 다 차지할 수 있는데 왜 함께 뛰어갔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우분트(UBUNTU) 라고 외치며, 다른 사람이 모두 슬픈데 어떻게 한 명이 행복해질 수 있나요? 라고 대답했다. 우분트 는 반투족 말로,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I am because you are) 라는 뜻이다. 이 말은 넬슨 만 델라 대통령이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작은 관심 하나하나가 모여서 사랑과 기적을 만들어 낸다. 당신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 우분트!!! 오늘은 무조건 용서해 주는 날. 당신을 만나는 모든 사람이 당신과 헤어질 때에는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하라./마더 데레사 7

2월 22일 창세 9,8-15 1베드 3,18-22 마르 1,12-15. 사순 제1주일 홍수 이야기를 들으면 하느님의 분노가 두렵기도 하지만, 한편으 로는 오죽하면 그러셨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고도 2천 년이 지났는데 세상은 대체 나아지고는 있는 건지, 우리가 정말 로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갑니다. 교회의 목소리가 충분히 간절하지 못한 것인지 세상은 그 소리에 코웃음만 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 일을 단식하시고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는데, 오늘 복 음에는 없지만 우리는 그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빵의 유혹, 권세의 유혹, 하느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유혹입니다. 그 유혹들을 이겨 내시고 나서야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됩니다.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 모두가 겪는 것도 같은 유혹입니다. 세상의 재 물과 권세의 유혹, 그리고 하느님을 따르는 중에도 확신을 갖지 못하고 이런 저런 핑계로 하느님을 시험하려는 유혹을 우리는 겪습니다. 이 유혹들은 참으로 강력하고 끈질깁니다.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 의 홍수처럼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다는 마음으로 시작을 해도, 사탄은 물러가 기회를 엿볼 뿐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 리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 힘입어 이 유혹에 대항하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사순 시기에 우리는 주님과 함께 사십 일 간의 성찰과 고행과 회개의 때를 갖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 우리도 승리할 것입니다. 금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가득 찬 은을 버려야 하고 다이아몬드를 얻기 위해서는 어렵게 얻은 그 금마저 버려야 한다. 버리면 얻는다. 그러나 버리면 얻는다는 것을 안다 해도 버리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쉬운 일이 아니다. 버리고 나서 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봐, 그 미지의 공허가 무서워서 우리는 하찮은 오늘에 집착하기도 한다. 공지영, 수도원 기행 버리면 얻는다 8 나를 붙들고 있는 욕심은 무엇인지 곰곰이 성찰합니다. 광야에서 받는 유혹은 세 가지이다. 빵을 움켜쥘 것인가, 하느님 을 품을 것인가, 아니면 내 마음대로 살 것인가./송봉모

2월 23일 레위 19,1-2.11-18 마태 25,31-46. 사순 제1주간 월요일 회개하라는 말, 하느님께 돌아서서 그분의 뜻을 실천하라는 말은 하기는 쉽지만 따르기는 어렵습니다. 추상적이기 때문에 각자 해석 이 다를 수 있어서 구체적인 내용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백성 에게는 십계명과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십계명을 더 상세하게 규정 한 것이 율법이고 그 율법에 대한 해석이 붙고 또 붙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많아질수록 그것을 지키는 것은 힘든 짐이 되어 갔고, 율법에 대 한 주해는 그것을 잘 지키기 위한 것보다 지키지 않을 핑계를 마련하는 방편이 되 어 갔습니다. 형식적인 것이 강조되고 핵심적인 것은 희미해졌습니다. 어린 아이 가 부모님 을 철석같이 믿고 따르다가 머리가 크면 슬슬 반항하듯이 핑계를 대고 이유를 따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에는 무조건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해를 시켜야 합니다. 규칙들을 이해시키고 자기 것으로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느님의 사랑과 그 뜻을 깨닫고 그전까지 규정으로만 주어진 율법의 정신을 삶의 원리로 바꾸어 영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참사랑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자칫 원리와 정신을 강조하다 보면 복음은 다시 추상적으로 빠질 수가 있 습니다. 그래서 오늘 은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을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못 알아들을 수 없게 일러 주십니다. 지금 내 곁에 가장 작은이는 누 구이며, 내가 그에게 해 줄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오늘, 나를 위한 하느님의 뜻 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오십니다 시외버스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버스가 출발하려는데 승객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말했다. 저기 할머니 한 분이 오시는데요?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짐을 한가득 인 채 걸어오시는 할머니는 버스를 향해 최선 을 다해 걸어오셨지만, 연세와 짐 탓인지 속도가 나지 않았다. 어서 출발합시다. 언제까지 기다릴 겁 니까? 승객들은 출발을 재촉했다. 그때 버스 기사님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우리 어머니 가 오십니다. 잠시 기다렸다가 같이 가시지요. 죄송합니다. 기사님의 어머님이라 하니 더 이상 재촉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창가에 앉았던 청년이 벌떡 일어나 버스에서 내려 할머니를 향해 달려갔 다. 그러고는 할머니의 짐을 받아들고 할머니를 부축하며 버스로 돌아왔다. 할머니와 청년이 버스에 오 르는 순간 누군가가 박수를 쳤다. 그러자 너나 없는 박수가 이어졌다. 물론! 그 할머니는 버스 기사의 어머니도. 청년의 어머니도, 아니었다. 삼위일체를 찬미하는 마음으로 식사 때마다 정성을 다해 성호경을 긋습니다. 이웃에게 선교가 됩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의 불행은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9

2월 24일 이사 55,10-11 마태 6,7-15.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 십니다. 가슴이 뜨끔합니다. 사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얼마나 많은 빈말을 하고 얼마나 많은 말을 흘려듣습니까? 헛된 말들은 나의 삶 도, 인간관계도, 사회도, 신앙도 부실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하느님 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의 은 헛된 것이 없습니다. 그분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도 헛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기 도의 중심이 하느님께 있어야 합니다. 내 생각, 내 뜻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 다. 기도를 통해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헛된 기도, 헛된 신앙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이것이 점 집과 성당의 차이입니다. 물론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삶 속 에서 깊이 소망하는 것을 기도하되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간절히 찾아갈 때, 우 리의 소망은 정화되고 성숙하여 하느님의 뜻을 만나게 되고, 우리는 온 힘을 다하 여 그것을 이루어 가는 진실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를 위해, 가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세상을 위해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하느님은 우리의 소망을 당신 의 길로 인도하시고, 우리가 갈 길도 일러 주실 것이며, 마침내 우리를 통해 당신의 뜻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내가 사는 세상은 우리를 통해서만 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부님만이 이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음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선교하던 어느 사제가 전해 준 사연이다. 무섭게 퍼지는 전염병으로 쉴 틈 없이 일하다가 겨우 시간을 내어 인디언 신자들이 사는 공소로 향했다. 그러나 길에서 나는 보았다. 영하 40도의 추위에 얼어붙은 열한 구의 시신을! 가까이 다가갔을 때 나는 더 놀랐다. 누워 있는 모든 시신의 손에, 고이 접은 자작나무 껍질이 쥐어져 있었던 것이다. 순간 섬뜩한 의혹이 일었다. 미신 행위가 아닐까? 그러나 그 조각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 신부님만이 이 글 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해성사였다! 그 가련한 사람들은 전염병으로 죽어 가는데 죄를 고해할 수 없자, 나무껍질에 자신들의 죄를 남겼던 것이다. 모든 조각이 미사예물만 다를 뿐 거의 같은 말로 끝맺고 있었다. 제 영혼의 안식을 위하여 미사를 드려 주시기를 신부님께 청합니다. 미사예물로 비버 모피를, 담비 모피를, 나의 가장 좋은 도끼를 신부님께 남깁니다. 내 눈에서는 회한의 눈물이 흘렀다. 10 신앙생활을 쉬고 있는 가족을 위해 내가 먼저 고해성사를 보고, 그를 대신해 기도합니다. 저는 주님께서 바라보신 죄인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월 25일 요나 3,1-10 루카 11,29-32.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요나서는 다른 예언서에 비해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 적인 사실보다는 예언자의 갈등, 백성들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 등을 중심 주제로 하고 문체도 우화에 가깝습니다. 요나 예언자는 첫 번째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니네베로 가는 데 주저합니다. 나쁜 소식을 전 하는 이는 누구나 미움을 받습니다. 그들이 돌아서지 않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또 너무 쉽게 돌아서서 멸망을 피하면 얄미울 것 같기도 합니다. 또 그들의 회개가 얼 마나 갈지도 의심스럽습니다.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내면서 그는 뉘우치고 이 모든 의심과 걱정을 이겨 냅니다. 그는 엄청나게 큰 도시 니네베로 가서 하느님의 을 전했고, 온 백성이 악한 길에서 거짓말처럼 돌아섭니다. 그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예언자는 하느님께 투덜거림으로써 하느님의 깊은 뜻을 알려 줍니다.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지만 사실 예언자들이 실제로 겪은 것은 그 반대 경우가 더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에게 왜 요나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물론 예수 님의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할 결정적인 표징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는 니네베 사람들처럼 모든 이가 그 표징을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그리 고 악하고 믿음이 없는 세대는 그러지 못하더라도 예언자의 숙명대로 백성을 사랑 하고 아버지께 순종하면서 당신이 가실 십자가의 길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을 표 현하신 것은 아닐까요? 오늘 우리에게도 이어져서 회개를 촉구하는 이 표징을 우 리는 니네베 사람들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믿기를 두려워하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도 처음부터 삶이 순탄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사제가 되자마자 오상을 받고 많은 어 려움에 휩싸이셨습니다. 오상이 마귀의 힘에 의해서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회는 조사를 마 치고 비오 신부님의 오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근거가 희박하여 신자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게 합 니다. 비오 신부님은 아무런 말없이 2년 동안 경당에서 복사와 단둘이서 미사를 거행합니다. 그의 전기 에 보면 비오 성인도 끊임없이 마귀와 싸웁니다. 마귀는 그 오상이나 기적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 이 아니라고 의심을 품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개인의 명성보다는 교회의 뜻을 따를 줄 알았습니다. 사 실 그분을 성인품에 올리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이 순명 이었습니다. 이 분의 순 명으로, 현재 교회가 자신들을 박해한다고 말하는 모든 집단들이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전삼용 신부 오늘 하루, 하고 싶은 말보다는 해야 할 말을 하는 데 집중해 보세요. 내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들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이석원 11

2월 26일 에스 4,1712.1714-17.17-17 마태 7,7-12.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에스테르 왕비는 자신과 유다민족 모두에게 닥쳐온 죽음의 위협 을 맞아 이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 주님께 간절한 기도를 바칩니다. 그녀는 사자와 같이 두려운 왕 앞에 무방비로 나아가 목 숨을 걸고 백성을 위한 청원을 하려는 결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두렵고 간절한 상황은 없을 것입니다. 왕비는 이 기도를 통해 용기를 얻 고 그의 백성 전체를 구원합니다. 세상은 신앙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별로 차별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믿는 사 람이 로또에 더 잘 당첨되지 않으며, 불의의 사고나 재난, 질병과 온갖 고난과 좌절 들이 열심인 신앙인들을 비껴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들의 삶은 다른 이 들과 다릅니다. 그들은 불행을 더 잘 이겨 내고 행운에서 더 큰 행복을 만들어 냅니 다. 그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하고 좋은 일이 있어도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그 것은 그들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분명히 세상을 바꿉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당의 부적과 같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는 미운 사람을 해코지하지도 않고 복권 번호나 성적을 조작 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간절한 기도는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나를 통해 다른 이 들을,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우리가 남에게서 원하는 것을 먼저 베 풀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사랑받기보다 사랑하고 이해받기보다 이해하고 용 서받기보다 먼저 용서하도록 해줍니다. 늘 감사하고 기뻐하며 기도합시다. 예수님, 저희가 영광 속에 예수님께 가게 될 때에 어느 나치 수용소 벽의 낙서 착한 뜻, 좋은 뜻을 가진 사람만을 기억하지 마십시오. 나쁜 뜻을 가졌던 사람들까지도 기억해 주십시오. 그들이 저희들에게 한 모든 잘못된 행동만을 기억하지 마시고, 오히려 이러한 그들의 행동 때문에 저희가 쌓을 수 있었던 열매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저희들은 이 고통 때문에 더욱 든든한 동료 의식을 가질 수 있었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또한 커다란 마음을 기를 수 있었고, 더욱 겸손해 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 때문에 받은 고통으로 얻어진 열매들입니다. 12 입에서는 좋은, 그러나 몸에는 해로운 음식 를 절제합니다. 가끔씩 오래 기도하기보다 짧게, 자주 기도하시오./성 베네딕토

2월 27일 에제 18,21-28 마태 5,20ㄴ-26.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어느 청년이 자살하기 직전에 피에르 신부님을 찾아와서 자신이 자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신부님은 청년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청년에게 충분히 자살할 이유가 있군요. 그러면 살 수가 없겠 어요. 그런데 죽기 전에 나를 좀 도와주고 죽으면 안되겠어요? 하고 물었다. 어차피 죽을 건데, 신부 님이 필요하다면 얼마간 돕도록 하지요. 청년은 집 없는 사람을 위해 집을 지어 주는 신부님 일을 도왔 다. 그리고 얼마 후 청년은 이렇게 고백했다. 신부님께서 제게 돈을 주었거나, 살 집을 지어 주었더라 면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그런데 신부님은 제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도움 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과 같이 일하면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고,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 습니다. 아베 피에르, 단순한 기쁨 우리의 삶은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회 개는 구체적인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서는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악인이라도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고 의 인이라도 불의한 짓을 저지르면 죽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죄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보다는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 각하고 낙인을 찍어 새로운 삶을 살기 어렵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높은 명성이 나 지위가 있는 사람은 죄를 짓고도 같은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 리나라 법에는 벌금 제도가 많아 돈이 없어서 감옥에 가거나 돈이 많아서 감옥에 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기업이나 권력에 대항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거액의 소송을 해서 생활을 어렵게 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자살로까지 이끄는 비인 간적인 일들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라는 말이 있습니다. 높은 사회적 지위에는 그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가 따른다는 뜻입니다. 이를 실천하는 사람은 칭송을 많이 받곤 하는 데, 이는 현실적으로 그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사 회 안에서 더 큰 혜택을 누리고 여러모로 여유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이 최소한의 규정인 법을 넘어서는 도덕적인 여유도 보여 주기를 바라는 것은 욕 심일까요? 예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이런 것인데 말입 니다. 살아야 할 이유 예수님의 다섯 상처(손과 발의 못, 가시관)를 묵상하며 주님의 기도를 5번 바칩니다. 좋은 선생은 말로 가르치고 위대한 스승은 행동으로 가르친다. 13

2월 28일 신명 26,16-19 마태 5,43-48.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규정과 법규들을 일러준 뒤 에, 이들이 그 율법을 충실히 지켜야 하는 이유를 정리해 줍니다. 그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또 한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냥 율법 규정을 잘 지키 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닮은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어쩌면 너 무 큰 부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율법 규정 을 더 중시하고 하느님의 백성,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은 그들이 누려야 하는 특권 을 뜻하는 것으로만 여기게 됩니다. 예수님도 유다인들에게 이런 한계를 뛰어넘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웃을 사랑 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율법에 비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의 사랑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니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신명기의 과 같은 맥락인데, 예수님께서는 그들 이 하느님의 자녀이니 아버지와 같은 사람,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 십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십니다. 벗을 위하여, 모든 이를 위 하여, 심지어 악인들과 원수들을 위해서도 목숨을 바치는 가장 큰 사랑을 보여 주시 고 그것을 새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옛 계명이 새 계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율법과 달리 이것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그분의 자녀가 되어 서로 그 사 랑을 나누는 이들에게 복음은 죽음마저 이기는 참으로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하였는가를 떠나서 내가 그를 사람 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벗이지만, 내가 그를 사람으로 대할 수 없다면 그는 나에게 원수입니다. 벗과 원수의 차이는 상대방을 향한 나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들과의 불편한 관계를 피하지 않는 것, 그들의 악의를 나의 선의로 정화시키는 것. 그들이 새 삶을 살도록 꾸준히,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으로 적대자들마저 살리신 예수님처럼 사람을 사랑할 때,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벗과 원수의 차이 14 힘들고 짜증나려는 순간에 평화이신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성실함의 잣대로 스스로를 평가하라. 그리고 관대함의 잣대로 남들을 평가하라./존 미첼 메이슨

1일 창세 22,1-2.9ㄱ.10-13.15-18 로마 8,31ㄴ-34 마르 9,2-10. 사순 제2주일 아브라함이 하느님께서 주신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한 사건은 윤리적으로 논란거리가 됩니다. 학자들은 이 대목이 기원전 6세기까지도 위급할 때 이스라엘에서 자행되었던, 사람을 제물로 바 치는 행위를 함축적으로 단죄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에 비해 결코 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윤리관에서는 그런 시험을 하신 하느 님까지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교부들은 이 사건에서 파스카의 표징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이사악을 바치려 한 것이 놀라운 사랑과 믿음과 희생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당 신의 외아들을 사람들을 위해 내어 주신 것은 얼마나 더 큰 사랑과 희생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희생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얼마나 큰 은총 을 입은 것이며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을 통해 제자들을 준비시키 십니다. 당신의 희생이 얼마나 큰 하느님의 선물인지, 당신이 어떻게 아버지에게 순종하여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을 드러내실 것인지, 지금은 모르더라도 수난과 부 활을 겪고 나서는 그 모든 뜻을 알 수 있도록 복선을 깔아 주신 것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신 예수님의 정체, 그리고 그분의 신성을 분명히 드러냅 니다. 하지만 그 영광은 그분이 걸으실 수난의 길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플라시도 도밍고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났고, 호세 카레라스는 스페인 카탈로니아 지역에서 태 어났다. 카탈로니아는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투쟁했고, 두 지역의 적대심은 갈수록 높아 져만 갔다. 세계적인 두 테너는 항상 한 무대에 올랐으나, 카탈로니아 출신인 카레라스는 마드리드 태 생인 도밍고를 싫어했고, 결국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결별하게 된다. 그 후 카레라스는 백혈병에 걸렸 고, 수년 동안 이어진 치료로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기적같이 Hermosa 재단의 도움을 받아 백혈병을 이겨내게 된다. 그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재단에 회원으로 가입하려던 카레라스는 놀 라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도밍고가 카레라스의 치료를 위해 이 재단을 설립했고 카레라스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그 사실을 숨겼다는 것을. 카레라스는 도밍고의 공연장에 찾아가 많은 군중들 앞에서 무 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전했다. 두 테너 이야기 물 한 통을 얻기 위해 하루 8Km를 걷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양치 컵을 사용 합니다. 나 하나쯤이야가 아닌 나 하나라도...^^ NO를 거꾸로 쓰면 전진을 의미하는 ON이 된다./노먼 빈센트 필 15

2일 다니 9,4ㄴ-10 루카 6,36-38. 사순 제2주간 월요일 하느님의 사랑은 그분의 한없는 자비와 용서에서 드러납니다. 그 분께서 잘잘못을 따지자고 하시면 이 세상에 떳떳한 이는 누구도 없 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시듯이 완전하게 되라고 하셨지만 스스로 그렇다고 나서는 이는 뻔뻔하거나 어리석은 것에 불과합니 다. 모든 선과 진리와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그분 앞에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가 어 떻게 나설 수 있겠습니까? 결코 우리가 스스로 떳떳이 나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겸손하게 우리의 부족 함을 인정하면서, 그것마저도 감싸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힘입어 그분께 나아갈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완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만 가능 합니다. 마치 갓난아기가 어머니에게서 젖을 먹기 위해 무슨 대가를 치를까 고민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그분의 그런 사랑을 본받아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합 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부족하듯이 서로에게도 언제나 서툴고 부족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듯이 서로에게도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심판하고 단 죄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서로를 심판하고 단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의 부족함 을 받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완전하게 되고 실수나 잘못을 하지 않음 으로써 하느님을 닮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을 겸허하게 인정하며 서로를 받아 주고 서로에게 감사함으로써 하느님을 닮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힘 국민 엄마 로 불리는 배우 김혜자 씨는 첫 임신 때 입덧이 너무 심했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는 데, 그때부터 그녀의 손에는 늘 담배가 들려 있었다. 독실한 신자이면서도 담배만은 포기할 수 없어 교 회에 갈 때마다 이것만은 좀 봐 주세요 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1997년 봄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아침 에 일어나 담배부터 피워 물었는데 이때껏 피던 맛이 아니었다. 깜짝 놀라 껐다가 다시 붙이기를 거듭 했지만 역겨운 맛뿐이었다. 그날 밤 미국에 사는 딸과 통화하던 중 정말 이상하다. 담배 맛이 싫어졌 어. 라고 했더니 딸이 갑자기 하느님, 감사합니다! 라며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가 담배를 끊게 해 달라 고 하느님께 기도했는데 이렇게 빨리 들어주실 줄 몰랐어. 딸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담배를 피워 온 엄마에게 차마 담배를 끊으라는 말은 못하고, 100일 동안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날마다 새벽 기도를 다녔다고 했다. 그날 이후 김혜자 씨는 담배를 완전히 끊을 수 있었다. 금단 현상도 전혀 없었다. 받은 축복을 꼽아 보세요. 적어도 세 가지를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그리고 주님께 감사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16 무엇이든 나에게 들어올 때는 감사 하게 받아들이고 나갈 때는 사랑 으로 나가게 하라.

3일 이사 1,10.16-20 마태 23,1-12. 사순 제2주간 화요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시비를 가려보자 하십니다. 두려워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 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그분이 시비를 가려보자는 것은 우 리를 심판하고 단죄하겠다는 이 아닙니다. 옳은 길로 이끌어 주 시겠다는 것입니다. 언제든 진심으로 뉘우치고 그분께 돌아가면 모든 죄가 용서되 고 그분 안에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우리가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악습과 죄에 물 들어 우리 영혼이 더럽혀지면 두려움과 부끄러움 등으로 우리 스스로가 그분께 나 아가지 못합니다. 냉담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형식적인 신앙으로 우리를 포장하기 도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그랬습니다. 하느님 앞에 나아가 자신을 성찰하기보다는 외적인 치장과 행동, 명성과 명예, 지위나 대접 등으로 자신을 둘 러싸고 오히려 그런 것들을 기준으로 남들을 판단하고 단죄하기만 하였습니다. 그 들의 생활은 철저하게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들만을 의식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삶은 겸손하고 소박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는 탕자의 마음처럼 부서지고 낮추 어진 마음으로 그분 앞에 서게 됩니다. 사람들에게서 스승이라, 아버지라, 선생이 라 불리게 된다면 깜짝 놀라 만류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이야 말로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다윗 왕은 궁중 세공인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를 위한 반지를 하나 만들도록 해라. 반지에는 내가 큰 승리를 거두어 기쁨을 억제하지 못할 때 그것을 차분하게 다스릴 수 있는 글귀가 새겨져야 한 다. 또한 내가 큰 절망에 빠졌을 때 용기를 줄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어느 상황 속에서도 마음을 다 스릴 수 있는 글귀가 새겨진 반지 하나를 만들 것을 명령한 것이다. 세공인이 무슨 수로 다윗 왕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글귀를 만들 수 있겠는가. 그는 솔로몬 왕자를 찾 아가서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솔로몬이 말했다. 이 글귀를 반지에 넣으시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승리에 취한 순간에 이 글을 보게 되면 왕께서는 자만심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절망 중에 이 글을 본다면 큰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다윗 왕의 반지 사순시기 동안 영적독서 한권을 정해서 읽습니다. 추천도서 1 프란치스코 교황,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 2 제임스 마틴,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 3 이인옥, 갈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4 송봉모, 생명의 빛이 가슴 가득히 만사에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만사를 보라./성 이냐시오 17

4일 예레 18,18-20 마태 20,17-28.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음모가 꾸며지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제자들과 함 께 올라가십니다. 그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고, 회개하도록 힘을 다해 설득하였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을 죽일 궁리를 합니다.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되느냐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탄식과 반 대로 예수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가장 큰 사랑으로 이겨내기 위해서 당신 자신의 목숨을 바치러 가십니다. 이 비장한 때에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아주 구체적으로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나아와서 아들들을 위해 청탁을 합니다. 이들은 야고보와 요한 사도이지만 마태오 사도는 구태여 그 이름을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명예를 생각해서였다고 여겨집 니다. 예수님의 대로 그들은 수난의 잔을 마실 것이고, 이미 그들은 주님의 사 랑을 받고 있으며 야고보는 첫 순교자요, 요한은 초대교회의 기둥이 될 것이었지 만, 이 시점에서 하느님 나라의 자리를 청한 것은 참으로 적절하지 못한 것이었습 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윗자리란 자신을 종으로 내어 주고 섬기는 것, 그리고 목숨까 지 바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길을 걷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온 힘 을 다하여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본당 공동체 안에서, 가정 안에서, 이웃들 사이 에서, 우리 사회 안에서 우리는 섬기는 이가 되어야 하고 목숨을 바치는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특히 그 사랑에 보답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순교 - 경계를 두지 않는 사랑 저는 순교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한 사랑에 경계를 두지 않는 것 입니다. 자기 자신이나 생명, 나아가 자신의 행복을 구하고자 긋게 되는 자연스러운 제한선 마저 포기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교자들은 우리에게 예 하고 대답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예 는 주님을 위한 사랑에 아무런 조건이나 제한 없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또한 아니요 라고 답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며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들지라도 유혹과 타협과 불의에 아니요 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유산은 영웅적 행동이 아니라 충절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 충절은 예수님께 시선을 돌릴 때 얻을 수 있습니다. 반투안,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18 말하는 것보다 3배 더 많이 듣는 하루를 보냅니다. 오늘 밤 순교자의 죽음을 맞을 것처럼 살아라!/샤를르 드 후코

5일 예레 17,5-10 루카 16,19-31.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당신이 어떤 차를 모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태워 주느냐는 것입니다. 당신이 사는 집의 크기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느냐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당신의 삶을 어떤 계층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남에게 무엇을 베푸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친구를 가졌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신을 친구로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당신의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 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을 의지하는 이는 망할 것이요, 주님께 신 뢰를 두는 이는 복을 받을 것이라는 주님의 을 전합니다. 이것은 저주나 축복이 아니라 예언이고 하느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 것 에 희망을 두고 덧없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은 당연히 하느님으로부 터 멀어질 것이고 하느님의 뜻과 어긋난 삶으로 그의 생명과 시간과 그에게 주어 진 하느님의 뜻을 허비하여 망할 것입니다. 라자로가 어떻게 천국을 가게 되었는지는 우리가 판단할 수 없지만 부자와는 반 대로 그는 세상 것으로 위안을 받지 못하고 하느님 나라만을 바라며 살았을 것이 라고 생각됩니다. 부자가 라자로를 보며 호소했지만 이제는 늦어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전에 그가 이웃이었던 라자로를 알아차리기만 했더라면. 하지 만 그가 걱정하는 그의 형제들처럼 그는 모세와 예언자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뜻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죽은 이가 찾아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는 부자의 청을 아브라함은 거절하지 만, 사실 라자로라는 이름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일으킨 이의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어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유혹은 너무나도 큽니다. 세상 것에 희망을 둔 이는 세상과 함께 헛되이 스 러집니다. 신앙인들의 의식조사를 해보면 가장 중요한 가치의 1, 2위는 늘 건강과 가정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좋은 동네에 사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이웃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것입니다. 내 삶의 우선순위를 점검합니다. 예수님은 몇 번째이신가요? 가족은요? 사람은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행복해진다./헨리 소로 19

6일 창세 37,3-4.12-13ㄷ.17ㄹ-28 마태 21,33-43.45-46.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요셉은 그 형들의 질투와 시기와 증오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믿었던 형들에게 배신당하여 죽을 고비를 겪고 은전 스무 닢에 팔려 갑니다. 그러나 그는 이집트에서 살아남아 아버지와 형제들을 굶주 림과 죽음으로부터 구원합니다. 포도밭의 주인은 포도밭을 만들어 소작인들이 먹고 살 수 있게 해 주지만 그들의 탐욕을 이해하지 못하고 야곱이 그 랬던 것처럼 사랑하는 아들을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들은 주인을 배신하고 아들 을 죽였지만 은전 서른 닢에 팔려갔던 그 아들은 죽음에서 돌아와 믿는 이들을 구 원하였습니다. 내버려졌던 그 돌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어리석게 보이는 사랑과 무모하게 보이는 믿음이 결국 구원을 이룹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온갖 고난과 역경과 죽 음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묵묵히 견뎌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발길은 더 이상 어 리석고 무모하기보다 숭고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권력자들은 끝까지 그것 을 거부하고 적대합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부르시는지를 환히 드러내 줍니다. 그 길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나 의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따르지 않으면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도, 하느님의 사랑과 계획도, 나의 삶 속에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 게 됩니다. 주님이 앞장서신 그 길을 나도 걸어야만 합니다. 산양 고르기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그 크기에 따라 값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성질에 따라 값을 정한다고 한다. 그런데 양의 성질을 테스트하는 방법이 매우 재미있다.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본다. 이때 양이 비탈 위로 풀을 뜯 으러 올라가면 몸이 마른 양이라도 값이 오르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살이 쪘더라도 값이 내려간다.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는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의 미래를 갖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는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시선은 보다 쉬운 것들에 집중하라는 유혹을 받고 있다. 그러나 현실 이면의 그림을 볼 수 있어 야 한다. 땀과 눈물을 흘려야만 보이는 세상을 진정으로 볼 수 있는 사람만이 값진 인생을 살 수 있다. 오후 세 시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고통의 신비 5단 을 바칩니다. 20 대문자만으로 인쇄된 책은 읽기 힘들다. 일요일 밖에 없는 인생도 그것과 마찬가지다./장 파울

7일 미카 7,14-15.18-20 루카 15,1-3.11ㄴ-32.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미카 예언서의 마지막 부분은 이스라엘 민족이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에 쓰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비옥한 땅은 이방인들에게 빼앗기고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의 처지가 돌아온 탕 자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진 탓에 이 런 처지가 되었으니 하느님께서 다시 돌보아 주실 것을 기도하면서 동시에 백성들 에게 하느님께로 회개할 것을 호소합니다. 재산을 탕진한 아들은 굶어 죽을 때가 되자 비로소 제정신이 들어 아버지 집으 로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소위 바닥을 친 것이지요. 지금까지 의지해 온 허세와 헛 된 희망을 버리고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를 받아 줄 아버지의 집에 종으로라도 좋으니 받아 달라고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결단이 아니었습니 다. 아버지는 노심초사 기다리던 아들을 먼발치에서 이미 알아보고 측은히 여겼습 니다.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겼고 그를 환영하는 잔치를 열어 주었 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 여러 해 동안 순종해 온 큰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동생을 맞이하는 잔치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 자들도 마찬가지로 세리들과 죄인들을 받아 주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 니다.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이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형제와 도, 하느님과도 멀어지는 길을 택합니다. 그분 곁에서 충실히 머물렀다지만 그분 의 마음과 뜻으로부터는 멀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도의 위대한 영혼으로 불리는 간디는 열다섯 살 때 형의 팔찌에서 금 한 조각을 훔쳤다. 그러나 죄책감 때문에 오랫동안 고민하던 간디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편지를 써서 드렸다. 아버지는 천 천히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아버지가 편지를 읽는 동안 간디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는 무슨 벌이든 달게 받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편지를 읽는 아버지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려 종 이를 적셨다. 아버지는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그 편지를 찢어 버렸다. 그러고 나 서 편지를 읽기 위해 일으켰던 몸을 다시 침대에 뉘였다. 어린 간디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가 흘린 사랑의 눈물이 간디의 양심을 온전히 정화시켰던 것이다. 이때의 경험은 간디에게 사랑의 힘이 얼 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마하트마 간디, 간디 자서전 아버지의 용서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가족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하고, 그를 위해 미사 한 대를 봉헌합니다. 훌륭한 가정이란 용서가 베풀어지는 장소다. 21

8일 탈출 20,1-17 1코린 1,22-25 요한 2,13-25. 사순 제3주일 예수님 시대에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은 율법과 성전이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유다인들은 하느님 의 뜻을 따르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배웠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정신을 잃고 왜곡된 해석으로 백 성들을 이끌었고, 대제관들은 권력과 결탁하여 서민들을 착취하였습니다. 성전 뜰에 있는 산 제물을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은 성전에 빌붙어 백성을 착취 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제관들은 흠 없는 제물이어야 한다는 이유로 이들이 파는 제물만을 받아들였고 성전세도 유다의 화폐로만 받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몇 갑절 의 돈을 내고 이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쫓으신 것을 보고 많은 이들의 속이 시원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항의하며 표징을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 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2,19)라는 수수께끼 같은 만 하십니다. 성전 관계자들에게 이것은 또 하나의 신성모독이었고, 그 말로 예수님을 고발하기 도 했지만,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만이 그 참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벗어난 율법과 성전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저 기득권의 상징일 뿐입니다. 주 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삼아 과 성찬의 새로운 제사, 곧 성체성사 를 마련하셨고 믿는 우리들의 몸을 당신 성전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한 사제가 어떤 교우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사제의 머릿속에는 항상 그 교우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마음의 평화를 잃어 더 이상 경건히 기도할 수도, 미사를 제대로 거행할 수도 없었다. 사제는 점 점 커져만 가는 혐오감을 억제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이 교우가 지닌 좋은 점들을 적기 시작했 다. 그러나 한참을 생각해도 한 개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성령의 도우심이 찾아왔다. 사제는 그 사 람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기도하기로 결심하고 생각날 때마다 이 말을 되풀 이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얼마 뒤에 그 교우는 완전히 변화되어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느님께서 4주도 채 되지 않아 그 사람 안에 아주 철저한 변화를 이루셨다는 것이다. 사제는 이 방법을 더욱 자 주 사용했다. 그리고 언제나 똑같은 효과를 얻었다. 어느 신부님의 사랑법 오늘의 독서와 복음을 천천히 읽고,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소리 내어 다시 읽고, 마음에 새깁니다. 22 끝없는 친절이 악의를 없앤다./키케로

9일 2열왕 5,1-15ㄷ 루카 4,24ㄴ-30.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참 운이 좋았습니다. 인복이 많았다고 할 까요? 노예로 잡혀 온 소녀를 통해 엘리사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자 기를 만나주지도 않은 엘리사의 성의 없는 처방에 발끈하여 돌아가 려 하였으나 현명한 부하들의 만류로 결국 하느님의 표징을 체험하 였습니다. 오만했던 그가 하느님을 알게 되는 데는 이렇게 자신을 넘어서는 과정 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했던 고향 사람들도 이런 시험을 받았지만, 나아만의 이야기를 듣 고도 깨닫지 못한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장사도 아니고 서비스업도 아닙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는 많지만 선택되는 이는 적으니, 하느님의 복음을 달콤한 당의정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복음은 교회가 부유하고 권력을 누릴 때가 아니라 가난하고 박해를 받을 때 그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소탈하고 유머가 넘치는 매력적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많은 이들이 사랑합니 다. 그러나 그분도 복음의 핵심 가치에 있어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조금이라도 그것이 왜곡될까봐 가장 강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날 것 그대로의 복 음을 내놓으십니다. 많은 이들이 인간적인 실망과 갈등, 사회 교리에 대한 반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신앙과 교회를,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을 떠납니다. 안타까운 일 이긴 하지만 더 절실하고 성숙된 신앙을 가지고 돌아오라는 부르심이라고 생각합 니다. 인간적인 기대에 의지해서는 결코 주님의 복음을 받아 삼킬 수 없기 때문입 니다. 돌아오라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는 주님을 위해 시중을 들고 봉사를 하던 언니 마르타의 태도를 닮아가고 있습니 다. 주님을 위해 행사를 열고 외향적인 형식에 매달려 많은 세상일에 다 마음을 쓰면서도, 마리아처럼 주님의 을 귀담아듣고 죽어가는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붓고 그것을 닦아드리는 기도와 희생, 그리고 드러나지 않는 헌신과 가난한 마음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교회를 향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교회여, 마르타의 교회여, 너는 많은 일에 다 마 음을 쓰면서 걱정을 하고 있구나. 너는 너무 물질적이며 청빈을 잊고 있구나. 너는 기도보다는 행사에, 보다는 형식에 치우치고 있구나. 내 곁으로 다가오너라. 너는 내 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구나. 필요한 것은 오직 뿐이다. 참 좋은 몫, 마리아의 교회로 돌아오너라. 최인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오늘 10분만 사랑과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는 데 쓰세요. 칭찬을 받아가며 위대한 일을 하는 것보다, 순수한 사랑으로 하는 조그만 선행이 하느님을 더 기쁘게 한다./성녀 소화 데레사 23

10일 다니 3,25.34-43 마태 18,21-35.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남아프리카 미개 부족의 하나인 바벰바족은 마을에 죄지은 사람이 생기면 다음의 방법으로 죄를 다스 린다. 죄지은 자를 마을 한복판 광장에 데려다 세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광장에 모 여들어 죄인을 중심으로 큰 원을 이루며 둘러선다. 그리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모두가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한마디씩 외친다. 그 외치는 말의 내용은 죄를 지어 가운데 선 사람이 과거에 했던 좋은 일들이 다. 그의 장점, 선행, 미담들이 하나씩 열거된다. 어린아이까지 빠짐없이 말한다. 과장이나 농담은 일절 금지다. 심각하고 진지하게 그를 칭찬하는 말을 해야 한다. 광장은 마치 변호사만 수백 명 모인 법정과 같다. 아무도 죄를 묻지 않는다. 며칠이 걸려 칭찬을 다하고 나면 그때부터 축제가 벌어진다. 이러한 칭찬 폭격(?)의 결과, 이 마을에는 범죄행위가 거의 없어서 이런 행사를 하는 일이 극히 드물다 고 한다. 세상에는 억울한 일이 많습니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것이라 고 말하기도 합니다. 수업에 지각하는 친구들이 있으면 먼저 와 있 는 사람들이 야단을 맞습니다. 예언서를 보면 의인들이 하느님께 이 스라엘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지만 정작 죄인들은 개의치 않 고 오히려 그들을 박해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는 사람들은 아무런 변 명 없이 불구덩이에 들어간 다니엘서의 젊은이들처럼 그것을 전혀 불공평하다 여 기지 않고 자기 믿음을 지켜내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죄를 지은 형제를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예수님께 묻습니 다. 용서를 받고도 되풀이하여 죄를 짓는 상습범들을 무작정 용서할 수는 없지 않 느냐는 물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호의를 악용하고 기대와 믿음을 저버리는 이들 이어서 선을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억울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는 단호하게 하십니다.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기준이 사람이나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이나 세상에 판단 기준을 두는 사람은 흔들리지만, 하느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흔 들리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은 세상이나 사람에 대해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친구가 백 데나리온을 갚지 않아도 만 탈렌트를 탕감해 주신 하느님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백 데나리온을 받을 생각이 아니라, 만 탈렌트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마음이 그의 삶을 이끌기 때문입니다. 칭찬 폭격 24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을 위해 희생 봉헌합니다. 눈길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걷지 말기를, 오늘 내가 걸어간 길이 훗날 다른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백범 김구

11일 신명 4,1.5-9 마태 5,17-19.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면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이끄시고 가르 치시며 지켜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을 이제 백성들과 맺으십니다. 그 표징이 바로 십계명이요, 율법입니다. 하느님의 법을 받아 지키는 이스라엘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 될 것이고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전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것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렇다고 율법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키기 어려운 율법보다 부담이 적은 율법들을 강조하기 시작합니다. 핵심을 빼고 지엽적이고 형식적인 껍데기에 집중 합니다. 쓸데없이 복잡한 규율들을 만드니 근본적인 회개의 부담이 줄어듭니다. 역시 나무는 숲에다 숨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 아니라 기득권을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그들만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율법학자들의 말잔치를 배격하십니다. 하지만 율법 자체를 부정하시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의 근본정 신을 당신의 과 삶으로 되살리고 완성하려고 하십니다. 그분의 참된 사랑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은 바오로 사도의 과 같이 이미 율법을 완성한 것이 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따르는 우리도 복잡한 세 상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그 근본정신이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일본의 평범했던 한 여류 작가가 조그만 점포를 열었을 때 장사가 너무 잘 돼 매일 트럭으로 물건을 공 급할 정도였다. 그에 반해 옆집 가게는 파리만 날렸다. 그때 그녀는 남편에게 솔직한 심정을 털어 놓았 다. 우리 가게가 잘 되다 보니 이웃 가게들이 문을 닫을 지경이에요. 이건 우리가 원하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의 뜻에도 어긋나는 것 같아요. 남편은 그러한 아내가 너무 멋있고 사랑스러웠다. 이후 그녀는 가게 규모를 줄이고 손님이 오면 이웃 가게로 보내주곤 했다. 그 결과 시간이 남게 되었고, 평소에 괸심 을 두던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렇게 써진 글이 바로 당시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빙점 이라는 소설이고, 그녀는 미우라 아야꼬 이다. 이 소설로 번 돈이 가게에서 번 돈의 몇 백 배가 되었다. 이러한 부와 명성은 그녀의 빛나는 배려 덕분이었다. 배려가 낳은 명작 내 동료와 나의 옆자리에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다른 사람과 연결되지 않고서는 사람의 영혼이 피어날 수 없다./캔 가이어 25

12일 예레 7,23-28 루카 11,14-23.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생각의 깊이보다 목소리가 더 큰 사람, 얕은 이치를 깨닫고 성자가 된 듯이 설치는 사람, 조금 쉬우면 시시하다 하고, 조금 어려우면 포기하는 사람, 자신의 지혜가 짧은 줄도 모르고 지혜로운 사람에게 설교하는 사람. 작은 일도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큰 것만을 생각하는 사람, 자신의 주장은 열심히 피력하고 남이 이야기할 땐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 자기보다 조금 못나 보이면 경멸하고 조금 나아 보이면 주눅 드는 사람, 절대로, 죽어도,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등 극단적인 단어를 많이 쓰는 사람 여러분은 아니시겠지요? 정치인들의 선거전에는 비윤리적인 행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 히 유권자들이 후보자들의 도덕성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면 선거는 더욱 진흙탕의 개싸움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해로운 것이 인신공격입니다. 정직한 후보자를 별로 기대하지 않는 유권자 들은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자극적인 인신공격을 반깁니다. 어차피 지켜지지 않을 공약을 검증하는 것보다 선거판의 흥을 돋우는 폭로전에 열광합니다. 이쯤 되면 선거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회 자체가 심각한 상태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 라의 이야기는 절대 아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주장한 이들은 특히 질이 나쁜 선동꾼들입니다. 이런 무책임한 고발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성령의 활동을 싸잡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거나 순종하지 않다가 사악한 길로 빠졌 다는 하느님의 을 전합니다.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는 것입 니다. 악한 행위는 사람을 더 큰 악으로 끌고 갑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반대하다가는 그 자신이야말로 공동체를 거짓으로 물 들여 마귀 두목에게 넘겨주는 하수인이 되어 버릴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경고하 십니다. 시기나 질투와 같은 인간적인 나약함에서 시작된 사소한 대립이 복음 자 체를 적대시하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번지는 일이 없게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진짜 바보 승강기 대신 계단을 이용해 보세요. 계단을 오르며 주님의 기도를^^ 26 출발하게 하는 힘이 동기라면 나아가게 하는 힘은 습관이다.

13일 호세 14,2-10 마르 12,28ㄴ-34.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이동우씨는 1990년대 개그맨 5인방으로 구성된 틴틴파이브의 맴버로 개그맨과 가수 활동을 병행하 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하고 100일쯤 지난 뒤 망막색조변성증 이라는 불치병으로 점차 시력을 잃게 되 었다. 그 사연을 들은 천안에 사는 40대 남성이 눈을 기증하겠다는 뜻을 전해 왔다. 기쁜 마음으로 한 걸음에 달려갔지만 동우씨는 눈을 기증받지 않고 돌아왔다. 왜 그냥 돌아오셨나요? 이미 받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저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주셨거든요. 눈을 기증하겠다는 그 남자는 근이영양증 이라는 근육병을 앓는 환자, 임재신 씨였다. 팔다리를 못쓰 는, 성한 곳은 오직 눈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동우씨가 말했다. 나는 하나를 잃고 나머지 아홉을 가지 고 있는 사람인데, 그분은 오직 하나 남아 있는 것마저 주려고 합니다. 어떻게 그걸 달라고 할 수 있겠 습니까?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 중에도 물론 훌륭한 사람들이 많았습 니다. 그들은 형식주의에 빠져 본래의 정신을 잃어버린 율법을 다시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율법의 핵심, 다 시 말해 가장 중요한 계명에서 출발하여야 합니다. 모든 계명 가운 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마르 12,28)라는 질문은 바로 그런 관심사에 서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체없이 신명기의 을 인용하십니다. 첫째가는 계명만 물었 지만 그것과 뗄 수 없는 둘째 계명까지도 하십니다. 율법학자는 그것까지도 정확히 알아듣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그를 칭찬하십니다. 과연 호세아 예언자가 예언한 대 로입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 에서 비틀거리리라. (호세 14,10)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두 계명을 철저히 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고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느님의 가장 큰 사랑을 보여 주셨 고 그것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이렇게 완성되는 사랑은 더 이상 옛 계명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으로 사랑 그 자체가 되신 예수님은 옛 계명을 뛰어넘어 기쁜 소식을 이루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이기고 죽음 을 이기는 사랑입니다. 그것을 믿고 따르는 이는 구원을 얻습니다. 왜 그냥 돌아오셨나요? 오늘도 부모님 덕분에 친구 덕분에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 덕분에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해 보세요. 가난하다는 것은 적게 가진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세네카 27

14일 호세 6,1-6 루카 18,9-14.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정치가가 있었다. 그를 한 번이라도 만난 사람들은 겸손하고 배려 깊은 마음 에 감동을 받았고 그의 인기 또한 나날이 높아졌다. 어느 날, 신문기자가 그를 찾아왔다. 성공 비결을 묻는 기자에게 그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비결 같은 건 없어요. 그저 나의 등을 보는 마음으로 살아 왔을 뿐입니다. 기자가 등을 보는 마음이 무엇이냐고 되묻자 그는 대답했다. 기자님, 자신의 등을 한 번 보세요. 다른 사람의 등은 잘 보이지만 자신의 등은 쉽게 볼 수 없죠.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결점은 잘 보지만 스스로의 결점은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누구에게나 결점은 있습니다. 그렇기에 타인의 단점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을 때마다 저는 등을 보는 마음으로 참아 냈지요. 행복한 동행 중에서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여서 늘 자신을 다른 이와 비교합니다. 비 교를 통해 스스로를 평가하고 남들에게 평가를 받습니다. 그래서 적 당한 경쟁은 함께 성장하는 좋은 결과를 낳습니다. 좋은 맞수가 그 래서 필요합니다. 그런데 경쟁이 심해지면 정당한 경쟁을 통한 성장 보다 결과 그 자체에 연연하게 되어 스스로 노력하기보다 다른 이를 깎아내리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회 안에는 경쟁도 있지만 협력도 있습니다. 경쟁만 갖고는 공동선을 이루어 갈 수가 없습니다. 개인적인 경쟁이건 단체적인 경쟁이건 함께 나아가기 위한 협 력을 그 목표로 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경쟁은 투쟁이 됩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약한 이들은 먹이가 되고 맙니다. 그런 사회는 누구도 살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립니다. 교만한 바리사이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루카 18,11) 혼잣말이라 해도 그것은 옳지 않은 생 각입니다. 타인의 불행을 자기만족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이는 제가 혼자 살아가는 줄 압니다. 하느님도 타인도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누구도 혼자 살 수 없으며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도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그 의 불행에 무관심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은 남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이요, 형제입 니다. 나의 등을 보는 마음 28 오늘 만나는 사람의 작은 목소리를 크게 들어주는 세심한 배려를 선물하세요. 세상에 약한 사람은 있어도 악한 사람은 없다.

15일 2역대 36,14-16.19-23 에페 2,4-10 요한 3,14-21. 사순 제4주일 우리가 누구인지, 왜 이 세상에 있는지 철학자들은 묻지만 그 답 은 신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거나 부정한다 면 그 답을 얻을 곳이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며 우연의 소 산일 뿐 아무 의미도 이유도 없다는 결론만을 얻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 하느님을 안다면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 알려 주신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결정적으로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삶으로 하느님이 누구신지, 또 어떤 분인지를 알려 주셨고 그래서 우리가 누 구인지를 알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 신 나머지 외아들을 보내신 분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 원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순식간에 아무 의미도 없는 티끌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고 있는 귀한 존재가 되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이요 기쁜 소식이며, 구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에페 2,10)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의미 없이 세상 것에 붙 들려 살다가 어둠 속에서 스러질 존재가 아니라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 하 느님을 닮은 자녀가 될 소명을 받은 존재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부르심인지요! 10대 자녀가 반항을 하면 그건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옷이 몸에 좀 낀다면 그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고, 닦아야 할 유리창과 고쳐야 할 하수구가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집이 있다는 것이고, 정부에 대한 불평불만의 소리가 많이 들리면 그건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고, 난방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면 그건 내가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고, 세탁하고 다림질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면 그건 나에게 입을 옷이 많다는 것이고,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고, 옆 자매의 성가 소리가 견디기 어렵다면 그건 내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이고,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감 사 선교사들을 위해 인류 복음화를 위한 기도 를 바칩니다. 하느님께서 너도 몰래 너를 보살피셨다. 29

16일 이사 65,17-21 요한 4,43-54.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과 이적을 보여 주셨지만 그것은 양날의 검과도 같았습니다. 표징을 보여 주시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많은 이들은 표징만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에 오히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특히 그분의 고향 갈릴래아에서 그런 갈등이 더 컸던 모양입니다. 이적을 요구하 는 군중과 믿음을 요구하는 예수님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은 갈릴래아 카나에서의 두 번째 표징을 전해 주는데, 여기서도 그런 긴장이 드러 납니다. 왕실 관리는 아파서 죽어 가는 아들의 아버지로서, 지위도 체면도 상관없 이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서 아들을 고쳐 달라고 애원합니 다. 예수님께서는 왕실 관리라는 그의 신분을 존중해 주지도 않으시고 거절하십니 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요한 4,50) 이것은 듣기에 따라 그냥 내쫓는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왕실 관리는 더 간청하거나 실력 행사를 하지 않 고 그 을 믿고 물러났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은 이런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시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 (이사 65,17)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땅에 머물러 내 생각과 내 방식대로의 구원을 청합니다. 믿음이란 나의 것을 포기하고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도약이 우리를 해방시키고 구원의 표징을 체험하도록 해 줄 것입니다. 제가 나는 친구를 선물 받아서 기뻐하고 있는데 어쩜 당신은 떠날 생각만 하느냐 며 짜증을 내면, 그분 은 미소를 날리면서 제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자네처럼 좋은 친구를 선물로 보내 주신 하느님께 너무 감사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떠나고 싶은 거야! 내 뜻은 내려놓고 모든 선교적 파견의 목적은 성부께서 성자를,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을 파견하신 목적의 연장선 상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입니다. 파견을 통해 내 자신과 선교지 백성들의 삶이 구원의 상태 에 이를 수 있도록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일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 신 앞에 놓인 운명의 잔을 기꺼이 마실 수 있었던 성자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 역시 아버지의 뜻을 이루 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결코 내 뜻을 이루기 위해 일하지 마십시오. 내 뜻은 오늘 지금, 이 미사 중에 모두 내려놓고 떠나십시오. 거추장스러운 짐만 됩니다. 최강, 너무 깊이, 너무 오래 감추지는 마세요 30 10분만 불필요한 인터넷과 전화를 줄여봅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앞질러 가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뒤를 걷지 않게 하시며 언제나 당신과 함께 걷게 하소서.

17일 에제 47,1-9.12 요한 5,1-16.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니다. 38년 동안이나 누워서 앓고 있던 병자가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 께서는 못에 들어가기도 힘들었던 그에게 일어나서 자신의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그럴 수 있었습니다. 자 신이 누워 있던 들것을 들고 걸어가는 이 사람, 기적이 일어난 것입 그런데 이것은 안식일 규정에 어긋난 일이어서 유다인들이 그것을 지적했습니 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그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증언할 기회였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오늘 어떤 분이 38년이나 누워 있던 나를 고쳐 주셨는데, 그분 이 나에게 그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를 고쳐 주신 분이 누구신지 물었고 그는 나중에서야 그들에게 그분에 대해 말해 줄 수 있었습 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전이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이 놀라운 기적을 보여 주신 분이 궁금했던 것이 아니라, 율법을 어기고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완고함이지만 그것이 현실이었습니 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 때 누군가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기 위해 세월호 리본을 떼실 것을 권했다는 일화가 생각납니다. 그 사람 덕분에 인간의 고통 앞에 서 중립이란 없다 는 교황님의 명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교황님은 유족들의 고 통을 보았지만 어떤 이는 정치를 보았습니다. 이웃의 고통을 보지 못하는 눈으로는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 눈은 지금 어디를, 누구를 보고 있습니까? 세미나실에 50명의 사람이 모였다. 강사는 각자 풍선을 받은 뒤 그 위에 이름을 쓰라고 했다. 그러고는 모든 풍선을 다른 방에 넣었다. 이후 강사는 자기 이름이 쓰인 풍선을 5분 안에 찾으라고 했다. 사람들 은 정신없이 풍선을 찾았다. 서로 부딪히고 밀리며 방안은 아수라장이었다. 5분이 흘렀다. 하지만 단 한 명도 자신의 풍선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강사는 아무 풍선이나 집어서 거기에 적힌 이름을 보고 그 사람에게 주도록 했다. 그러자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모든 사람이 자신의 풍선을 갖게 되었다. 강사가 말 했다. 지금 우리가 한 것은 인생과 같습니다. 모두 필사적으로 행복을 찾아다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 디에 있는지는 모르죠. 그런데, 우리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 함께 있습니다. 그들에게 풍선을 찾아 주듯 행복을 주세요. 그러면 어느 순간 여러분도 이웃을 통해 행복을 찾아 누릴 것입니다. 행복 찾기 격려가 필요한 가족이나 친구에게 맛난 간식을 선물합니다. 인생은 남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와 비교하는 것이다. 31

18일 이사 49,8-15 요한 5,17-30. 사순 제4주간 수요일 미국발 대공황에 1929년 일본의 겨울은 혹독했다. 그때 한 계열사가 위기를 맞았다. 판매가 격감하고 재고는 쌓였다. 35살의 마쓰시타 사장은 직원들을 모았다. 근무를 반나절로 줄인다. 매주 이틀은 휴무 다. 생산도 반으로 감축하겠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드디어 해고와 임금 삭감이구나. 그러나 사장은 월급 전액 지급을 약속했다. 감격한 종업원들의 가족까지 판매에 나섰다. 휴일도 잊었다. 두 달 만에 재 고가 소진되고 공장은 정상으로 돌아섰다. 유다인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구원이 선포되고 있음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율법을 넘어 아버지의 뜻을 직접 실천하시는 아드님의 표징을 눈앞에 두고도 보 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책을 읽으면서도 사람을 만나면서도 자기 생각만을 확인하려 하고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은 무조건 배척합니다. 두려워 하고 난폭해집니다. 고집을 부리고 음모를 꾸밉니다. 고립되어 썩어가는 늪과 같 습니다. 그들은 표징을 보아도 믿지를 못합니다. 자기 것만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욕 심껏 꽉 쥐어진 손을 펴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집을 수가 없는데, 그들은 자기가 쥐 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그저 움켜쥐는 그 자체에 집착합니 다. 전통도 중요하고 무언가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우고 성장하려는 용기 가 없으면 아무 것도 지킬 수 없습니다.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하는 새는 죽고 맙니 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아무것도 겁낼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을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이 주시는 새로운 세상을, 복음을, 하느님 나라를 기쁘게 받 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은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힘차게 따를 수 있게 도와줍 니다. 어리석고 완고한 생각과 두려움을 버리고 그분을 따릅시다. 마쓰시타는 직원들에게 고객이 무엇을 만드는 회사인가? 라고 물으면 마쓰시타 전기는 인간을 만드 는 회사입니다만, 전기 제품도 만듭니다 라고 말하도록 가르쳤다. 사람 다루는 솜씨가 능숙하다는 주 위의 평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유를 생각해 보니 짐작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부하 직원 모두가 나보다 위대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모두 나보 다 배운 것이 많고 재능이 많은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32 나의 시간, 재능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찾아 실천합니다. 나의 역경은 축복이었다. 가난했기에 성냥팔이 소녀 를, 못생겼기에 미운 오리새끼 를 쓸 수 있었다./안데르센

예수님의 탄생은 구약에서 예언된 구원의 시작입니다. 예언대로 다윗의 후손에게 왕권을 이어 주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 의 양아버지로 요셉을 택하셨습니다. 그는 목수였고 의로운 사람이 었습니다. 그 외에는 요셉에 대해 알려 주는 말이 없습니다.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도 그의 행동을 통해 추측할 수밖에 없 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의 일, 당시로서는 죽을 죄였던 그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물러서려고 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의로움 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 곧 어려운 이들을 도와 살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그 는 자신이 겪어야 했던 배신감, 수치심, 분노, 슬픔 등 모든 것을 떠안고 조용히 그 가 사랑했던 여인을 떠나보내려 하는 사나이였습니다. 그런데 꿈속에 나타난 천사는 그에게 더욱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겨우 마음 을 추스르고 결심을 굳힌 그에게 마리아와 배 속의 아기를 모두 받아들이라고 분 부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하였으며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라 고 합니다. 꿈속이라서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난 그 는 그 분부에 순명합니다. 참으로 손해만 보는 우직함, 그것이 그의 의로움입니다. 성 요셉은 성모님과 함께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이십니다. 조금도 손해를 보지 말 것을 가르치는 각박한 우리 사회가 그분의 의로움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 니다. 19일 2사무 7,4-5ㄴ.12-14ㄱ.16 로마4,13.16-18.22 마태 1,16.18-21.24ㄱ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아버지 요셉 예수님께서 한 인간으로서 체험하신 아버지 모습은 바로 요셉 이었습니다. 그 대로 표현하면, 하느님께서 요셉을 통하여 당신의 아버지상을 드러내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우리 모든 아버지들의 모범일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대할 때 상처받지 않게 배려해 주는 것,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믿 고 그 사랑을 놓치지 않는 것, 그래서 어떤 불이익을 기꺼이 감수하고서라도 자 신의 운명을 기꺼이 떠안는 것, 이것이 요셉 성인의 모습입니다. 이 땅의 모든 아버지가 자신의 모범으로 삼아야 할 아버지상입니다. 전원, 의 빛 속을 걷다 요셉(Joseph)의 뜻은 하느님을 돕다 곧 돕는 사람 입니다. 요셉 성인의 삶은 이름처럼 돕는 이의 삶 이었습니다. ㅊ요셉 성인의 도움을 청하며 성 요셉 호칭 기도 를 바칩니다. 세상은 특별한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로 가득하다./세스 고딘 33

20일 지혜 2,1ㄱ.12-22 요한 7,1-2.10.25-30.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오늘 복음은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깔린 예루살렘에 예수님께 서 올라가시는 장면으로 예수님 수난의 배경을 소개합니다. 예수님 도 유다인들의 음모를 알았기에 유다 지방을 피해 갈릴래아를 돌아 다니셨습니다. 그 후에 남몰래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그분을 보고 주 민들이 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돌아다닐 수 있지 라고 수군댑니다. 이미 유다인 들의 음모는 훤히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서는 의인을 박해하고 그를 죽일 음모를 꾸미는 악인들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악행을 탓하고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는 의인을 성가셔 하고 그에게 열등감을 느낍니다.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려 그의 말이 틀리 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죄인의 회개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욱 더 악한 길로 빠져듭니다. 그들의 악이 눈을 멀게 한 것입니다. 이미 악인들은 돌이킬 수 없이 악에 물들어 의기양양하게 음모를 꾸미지만 그들 은 하느님의 계획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들이 꾸민 덫 안으로 걸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분이야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 고 있는지, 하느님의 계획이 어떻게 준비되고 있는지를 아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아버지의 계획에 순명하여 나아가는 그분만이 아버지를 아십니다. 그래서 때가 오 기 전에는 그들이 그분께 손을 댈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악인의 음모 가 아니라 의인의 순종을 통해 드러납니다. 1936년, 스페인에 내란이 일어났을 때였다. 어느 날 한 무리의 군인들이 늙은 신부를 사형장에 데려왔 다. 내란군을 보호해 준 죄 때문이었다. 재판을 거쳐 사형이 확정되고 바로 그날 총살에 처해지게 되었 다. 신부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이 처형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신부의 얼굴은 평화로워 보 였다. 군인들이 그를 사형대에 난폭하게 묶으려고 하자 신부가 말했다. 여보시오, 마지막 소원이 있습 니다. 제발 들어주십시오. 신부가 간절히 부탁하자 지휘관이 유언을 허락했다.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 는 전부입니다. 이것을 팔아 고아들을 돌보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신부는 시계를 풀 어 군인에게 건네주었다. 사격 준비! 지휘관이 외쳤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격 명령을 기다리는 사병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그는 신부에게 걸어갔다. 당신 같이 훌륭한 분을 죽이는 것은 나 라의 손해입니다. 나는 아무런 재량권이 없지만 신부님을 죽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지휘관은 신부를 풀 어준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떤 유언 34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칩니다. 그리스도인과 낙타의 공통점은 무릎을 꿇고 짐을 받는다 는 것이다./비어스

21일 예레 11,18-20 요한 7,40-53.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의 뜻은 드러납니다. 예레미야의 고백은 예수님의 상황과도 일치합니다. 예언자는 사 람들의 악의와 음모를 알면서도 그들에게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 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이 악에는 선으로, 음모 에는 진심으로 대합니다. 무모한 일로만 보이지만, 그 안에서 하느님 예수님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시자 군중들 사이에 그분에 대한 관심과 논란이 일어납니다. 성전의 경비병들조차 감히 그분을 잡을 수가 없 었습니다. 이들이 진실을 추구할 때, 예수님을 죽이려고 손을 잡은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부정하고 그에게 호의를 품는 군중들을 저주합니다. 율법을 근거로 예수님의 권리를 옹호하는 니코데모를 모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반 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내실 것이라는 시메온의 예언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대로 장애물과 같은 예수님을 죽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예 전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하며,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거부할 때, 나의 생각을 고집하며 선한 사람 을 박해하고 악한 길로 빠져들 때, 그때에 우리는 자신마저도 철저히 기만합니다. 우리의 완고함과 억지와 무례함을 우리가 스스로 돌이켜 볼 수만 있다면, 진리와 선을 찾으려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혼 란스런 이 세상의 논란 속에서 지금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보스는 사람들을 몰고 간다. 그러나 지도자는 그들을 이끌고 간다. 보스는 권위에 의존한다. 그러나 지도자는 선의에 의존한다. 보스는 나 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도자는 우리 라고 말한다. 보스는 가라 고 명령한다. 그러나 지도자는 가자 고 권고한다. 보스는 남의 공을 가로챈다. 그러나 지도자는 남의 잘못을 도맡는다. 보스는 겁을 준다. 그러나 지도자는 희망을 준다. 보스는 복종을 요구한다. 그러나 지도자는 존경을 모은다. 보스는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나 지도자는 대중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보스와 지도자 신앙생활을 쉬고 있는 가족과 이웃을 위해 숨은 희생 실천합니다. 비싼 값을 치르지 않으면서 삶을 바꿀 수 있는 것, 그것이 희망이다./카트린 팡콜 35

22일 예레 31,31-34 히브 5,7-9 요한 12,20-33. 사순 제5주일 그저 내가 더 잘 들어주기만 해도 사람들은 내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마음을 열수록 나는 그들에게 깊이 공감했다. 나는 가슴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들도 마음을 터놓고 내게 이야기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내가 몸의 많은 기능들을 상실하면서 나 라는 대명사도 기꺼이 버렸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들이 주인공이었고 그들이 먼저였다. 그 사람들의 삶, 그 사람들의 생각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했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도 어떤 식으로 바 꿔야 한다거나 발전시켜야겠다는 부담감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내 자리에 앉아 조용히 듣고 배울 뿐이 었다.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진정 사람을 아끼고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발견했다. 대니얼 고틀립, 마음에게 말걸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집안과 새 계약을 맺으실 날이 온다고 예레 미야 예언자는 선포합니다. 그 계약은 주님께서 당신 법을 그들의 가슴에 넣어 주시고 마음에 새겨 주시는 계약입니다.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든 이가 그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 아드님을 통해 그분을 뵙고 그분의 사랑을 목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다가오고 있 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지만 그 고난의 날을 아무렇지도 않게 맞이하실 수는 없었습니 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 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요한 12,24-25) 당신 자신을 위한 이요, 다짐입니다. 마음이 산란하다고 아버지께 고백하십니 다.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사 기도하고 싶다고도 고백하십니다. 그러나 이내 마 음을 다잡으십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 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요한 12,27-28) 겟세마니에서의 기도와 함께 너무나도 인간적인 예수님의 고뇌를 드러내 주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이시니까 고통도 고뇌도 없었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아시니 더욱 힘든 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셨기에 받아들이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셨기에 끝까지 순명하실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15분 일찍 성당에 도착하여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36 성체조배는 삶을 바꿀 수 있는 눈길 교환입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23일 다니 13,41ㄹ-62 요한 8,1-11.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오늘 다니엘서와 요한복음의 두 재판 이야기는 비슷하면서도 차 이점들이 있습니다. 비교해 봅시다. 둘 다 간음죄로 고발된 여인이 살아나게 된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다니엘서에서는 두 원로가 수 산나를 함정에 빠뜨렸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합니다. 다니엘은 하느님이 주신 지혜로 두 원로의 속임수를 꿰뚫어 보았지만 예수님께 서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여인의 상처와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시고 측은히 여기셨 습니다. 다니엘은 하느님의 지혜로 무고한 수산나의 누명을 벗기고 두 원로를 단 죄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죄를 지은 여인의 단죄를 단념하도록 하고 당신 도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니엘서는 정의가 성취되는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요 한복음은 자비와 용서, 사랑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다니엘은 구약의 영웅으로 율법이 정의롭게 실현되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서는 율법대로라면 죽어야 했을 여인을 살려 내심으로써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 셨습니다. 한 사람씩 돌을 버리고 떠나간 그들은 그날 밤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의 마음에는 무엇이 남았을까요? 죽을 줄 알았다가 살아난 그 여자는 이후 어 떻게 살았을까요? 심지어 그 여인을 예수님을 옭아매기 위한 미끼로 사용했던 율 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조차도 그날, 그 자리에서는 뭔가 특별한 것, 새로운 것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까요. 바라보는 것 과 지켜보는 것 은 다르다. 본당에서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신자들을 바라보기보다 지켜 보는 자세로 대할 때가 많다. 마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서 음식을 드실 때 손을 씻는지 씻지 않는지 지켜보았듯이, 안식일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 지켜보았듯이 그런 자세로 신자들이 무엇 을 하는지 지켜보는 것은 사목적이지 않다. 그런 눈에서는 자비의 빛이 발할 수 없다. 예수님처럼 자비 의 눈을 가진 사람은 신자들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바라본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을 지켜보신 것이 아 니라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시고 그 자비심으로 그를 고쳐주셨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가까 이서 인간을 지켜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분은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오셨다. 우리는 지 금껏 보아 온 방법과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남을 지켜보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 게 눈먼 존재가 되어 살아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민, 예수는 정말 부활했을까? 바라봄과 지켜봄 커피 한 잔 절제하여 모은 돈을 이웃돕기 성금으로 내어놓습니다. 당신이 올라갈 때 만나는 사람들에게 잘하세요. 당신이 내려올 때 다시 만날 사람들이니까요. 37

24일 민수 21,4-9 요한 8,21-30. 사순 제5주간 화요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불 뱀과 구리 뱀을 만났습니다. 불 뱀 은 그 광야에 하느님께서 그들을 돌보시며 함께하신다는 것을 잊어 버리고 부정했을 때 만나게 된 죽음이었고, 구리 뱀은 그들이 회개 했을 때 바라보면 그들을 구원해 주실 생명의 표징이었습니다. 불 뱀에 물린 사람도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고, 많은 이가 쳐다볼 수 있도록 모세 는 기둥 위 높은 곳에 달아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서에서 당신이 들어 올려져야 한다는 을 여러 번 하 십니다. 이것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당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면서, 그렇게 당신 자신이 구원의 표징으로 현양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설적인 영광입니다. 가장 수치스러운 죄인의 표지가 가장 숭고한 희생이며 가장 큰 사랑의 표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죽이려는 자들이 또한 그분을 영 광스럽게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당신을 믿지 않으면 당신이 가시는 곳에 갈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자살이라도 하시겠다는 말인가 수군댔 는데, 그것도 역시 모르는 사이에 진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당신의 목숨 을 내어 주신 그 길을 믿는 이들은 따를 것이지만 믿지 않는 이들은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이루시는 일임을 나중에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미신은 내가 가진 소유물과 정성으로 그릇된 신을 어르고 달래어 자기 뜻을 주입시키는 행위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기 뜻을 비워내고 하느님의 으로 가득 채우는 일입니다. 날마다 자신 을 비워내고 그곳에 주님이 들어오시는 일입니다. 영국 시인 맥도널드는 신뢰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 보다 상대방에 대한 더 큰 찬사 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안기듯 하느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행위입니다. 만일 열심히 드린 기도와 봉헌으로 하느님을 잘 달래어 내 목 적을 성취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미신 행위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 충만해질 때 주님은 우리가 상상치도 못한 일들을 성취시켜 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상에서 신앙의 승리를 거두며 구원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송현,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미신과 신앙 38 불평하고 싶을 때마다 인내와 온유함을 주시도록 화살기도를 바칩니다. 세상살이가 힘겹게 느껴지는 까닭은 세 가지 믿음 탓이다. 난 성공해야 하고, 누구나 내게 잘 대해 주어야 하며, 세상은 반드시 살기 쉬워야 한다는 기대다.

25일 이사 7,10-14; 8,10ㄷ 히브 10,4-10 루카 1,26-38.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우리는 항상 성모님의 믿음에 경탄하고, 그에 비해 얕기만 한 우리의 믿음을 한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께 인사를 건네며 믿음이 가득하다고 하지 않고, 은총이 가득하다고 한 사실 을 기억해야 한다. 마리아가 하느님께 응답한 예 는 그녀의 의지력이나 강인한 성품에서 나온 것이 아 니라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총의 결과물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결국 믿음은 우리 스스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비롭고 관대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 는 선물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쏟아 부으시는 은총이요, 우리의 마음이라는 땅속에 파묻히 기를 기다리는 강력한 씨앗이다. 우리 스스로는 믿음이 약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느님은 항상 우 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넘치도록 주셨다. 우리가 성모님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이 위대한 선물을 어떻 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뿐이다. 파스카의 신비를 묵상하는 이 시기 중에 우리는 강생의 신비의 서 막이라 할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 탄 생 대축일로부터 열 달을 역산한 날짜입니다. 성모님의 순명으로 오 늘 예수님께서 잉태되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외아드님을 우 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이 사람이 되시고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보내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분의 수난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여 당신의 목 숨을 바치셨을 때 그 목적은 완성됩니다. 곧 강생의 신비는 파스카의 신비로 이어 지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아드님을 보내셨고 아 드님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순명하시고 인간들에 대한 사랑으로 당신 목숨을 내어 주셔서 죽음을 이기는 구원의 표징이 되신 것입니다. 여기에 성모님의 순명과 협조가 있었습니다. 위대한 구원의 역사가 저는 주님 의 종입니다. 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라는 겸손 한 순명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 은 율법에 의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일이기에, 이는 목숨을 건 순명이었던 것입 니다. 성모님은 이렇게 처음부터 예수님의 사명을 똑같이 지고 가셨습니다. 아드 님의 길을 아드님에 앞서 따르신 것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분 실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기억하며,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앙드레 말로 39

26일 창세 17,3-9 요한 8,51-59.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설교하시면서 그들이 당신을 믿고 구 원을 얻을 수 있도록 설득하십니다. 유다인들은 믿기도 했다가 배척 하기도 합니다. 믿고 귀를 기울이다가도 그들이 이해하거나 받아들 이기 어려운 내용이 나오면 그분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은 개의치 않으십니다. 어차피 그분의 때가 되지 않으면 그들은 예수님을 잡을 수 없고, 또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다하신 후가 아니면 그들은 어차피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신 것을 그대로 전해주십니다. 아브라함 이야 기는 유다인들이 먼저 꺼내었지만 예수님을 통한 구원은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의 실현입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는 아버지의 약속 이 실현되는 표징이므로 아브라함의 주님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만 물을 앞서 계신 분입니다. 물론 유다인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그분을 죽이려 하였 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마른 땅에 뿌려 두는 씨앗과도 같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행하신 표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믿는 사람들도 아직은 미망 속에 있습니다. 그분의 수난과 부활이라는 가장 결정적인 표징, 파스카의 표징이 주어지기 전까지 그 씨앗은 싹을 틔울 수 없습니다. 씨를 뿌릴 때가 있으면 비가 내릴 때가 있고 싹 이 틀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을 것이니 그저 아버지의 계획에 순명할 뿐입니다. 손님, 어떤 빵을 찾고 계십니까? 20분 째 뒤적거리기만 하는 청년에게 편의점 주인은 참다못해 말을 걸었다. 그러자 청년이 하는 말이란 유통기한을 봤어요. 혹시 유통기한이 지난 빵을 진열하지 않았나 해서 몇 개는 유통기한이 오늘까지지만 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그렇군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고 있는 청년은 언뜻 보기에도 지저분했다. 몸에선 이상한 냄새도 났지만 주인 은 그를 내쫓지 않았다. 자정 무렵이 되자 청년은 조심스레 빵 하나를 집어 진열대 위에 올려놓더니, 열 두 시를 막 넘어서는 순간 그 빵을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얼마 못 가 털썩 주저앉은 청년의 어깨 위 로 누군가의 손이 다가왔다. 돌아보니 놀랍게도 편의점 주인이었다. 당황한 청년은 들고 있던 빵을 서 둘러 내밀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며칠째 아무 것도 먹지 못해 훔쳤습니다. 이 빵은 자정이 넘었기 때 문에 유통기한이 지난 거예요. 그러자 편의점 주인은 우유를 건네주며 말했다. 젊은이, 사랑에는 유통 기한이 없으니 이것과 함께 천천히 들게나. 유통기한 40 좋아하는 성가 한 곡을 가사를 음미하며 부릅니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바라는 것 없이 사랑하라.

27일 예레 20,10-13 요한 10,31-42.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예레미야 예언자는 가장 고독했던 비탄의 예언자로 꼽힙니다. 거 짓 예언자들과 반대자들로 둘러싸인 그의 고뇌가 그의 예언서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예언자의 소명임을 잘 알고 있 었고 그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 결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죄로 물든 백성들로부터 그가 당하는 배척과 고난은 그가 참된 예언자로서 주님의 길을 따르 고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지치지 않고 아버지께서 담아 주시는 을 그대로 유다인들에 게 전해 주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도 아직 되지 않았고 그들이 그분을 결 정적으로 믿고 받아들일 때도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계획이 아직 완성 되지 않았으니 예수님의 참된 정체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믿고 구원을 받을 이들은 이 백성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체험한 이후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증언하십니다. 당신께서 하느님 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 증언은 자신을 위한 증언이기도 하지만 당신을 통해 하느 님의 자녀가 될 백성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 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 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0,38) 이 역시, 당 신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 당신의 사명을 이어갈 제자들 을 위해 하시는 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사람들은 남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다. 그래서 남을 쳐다볼 때는 부러워서든, 불쌍해서든, 그 저 호기심이나 구경 차원을 넘지 않는다. 2.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든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든 중요한 것은 그 내용물이다. 3.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은 TV에서 보거나 거리에서 구경하면 되고, 내 실속 차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4.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다.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 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남의 마음속에 좋은 추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다. 장영희 내가 살아 보니까 기회 있을 때마다 주변 동료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하는 것, 작지만 끝까지 꾸준히 밀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삶의 길이다./박노해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