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금상 이 후 경 당선소감.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타이페이 동물원에 가기 위해 모노레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 소 식을 알린 최초의 포유류는 팬더였다. 이 모든 게 따뜻하고 유머러스했다. 혹독한 시절을 품은 채 오 랫동안 집도 없이 떨던 이 글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이제 이 녀석에게 아늑한 지붕 하나 마련해 주었으니 나도 짐을 내려놓았다. 떠날 일만 남았으니 더욱 기쁠 뿐이다. 이후경(본명 이경혜)은 1960년 진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한국외국어대학 불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과거순례 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2004년 한국문 화위원회 창작 지원금 대상에 선정되었으며 2006년에는 소설집 저녁은 어떻게 오는가 (실천문학 사)가 우수 문학 도서로 선정되었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51
저녁의 편도나무 나는 편도나무에게 이렇게 말했네 <누이여, 나에게 신에 대해 말해다오.> 그러자 편도나무는 꽃을 활짝 피웠네 - 니코스 카잔차키스 <프롤로그> 잠에서 깨어보니 트럭 안이었다. 차 안의 시계는 푸른 불빛으로 막 새벽 3시를 찍고 있었다. 경부 고속 도로, 이 시간에 달리는 차들은 대부분 화물차들이었다. 간이휴게소에 는 잠시 휴식을 취하는 화물차들만 몇 대 서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졸 음이 덮쳐 차를 이리로 뺀 다음 운전석에 앉은 채로 눈을 붙였던 기억 이 났다. 5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꿈이었구나, 나부끼는 눈발 속으로 사라지던 은희의 뒷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처음 그의 곁에 누워 있던 여자는 영애였다. 그는 영애 의 손을 잡고 있었다. 잠든 그녀의 얼굴 위로 달빛이 어른거렸다. 그는 눈꺼풀이 내려오는 것을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기에 그녀의 편안한 잠 이 한없이 부러웠다. 그가 잠들어 있을 때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곁을 떠났다. 그가 잠들어 있을 때 누이는 불에 타 죽었고, 그가 잠들어 있을 때 은희 는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제 마지막 여자 영애, 그가 잠들면 이 여자도 떠날 것이다. 텅 빈 그녀의 방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저절로 감기는 눈 꺼풀을 또 하나의 그가 바라보고 있다. 그의 손의 힘이 빠진다. 영애의 손을 놓치고 만다. 이미 그는 체념했다. 이 여자도 가버릴 것이다. 영애가 일어난다. 체념한 그는 잠든 그를 바라볼 뿐이다. 영애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방문 쪽으로 걸어간다. 이렇게 되어 있었다. 그의 운명은 늘 이랬다. 그때 문득 영애가 알몸이라는 사실이 떠오른다. 밖은 엄동설한, 그런 몸으로 나섰다가는 얼어 죽고 만다. 떠나는 여자라도 그렇게 죽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녀를 불러 세우려고 눈을 뜬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친 것은 푸른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뒷모습이다. 소매 없는 여름 원피스, 그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옷. 그것은 은희의 뒷 모습이다. 당황한 그의 눈앞에서 은희는 문을 열고 나간다. 열린 문 밖으로는 하얀 눈발이 나부끼고 있다. 그 얇은 옷을 입은 채 은희는 나부끼는 눈발 속으로 들어가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53
1. 발렌타인 제과 고급 초콜릿과 비스킷을 만드는 그 공장의 모습은 어딘가 기묘해 보 였다. 공단의 모든 공장들이 길을 향해 얼굴을 내밀고 있는데, 유독 그 공장만은 길을 외면한 채 서있었다. 여느 공장처럼 건물이 한쪽 대지 쪽으로 밀려 있는 게 아니라 공장 대지의 한가운데를 가르며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탓이었다. 기차처럼 기다란 2층 건물의 좌우로는 거의 같은 비율의 넓은 마당이 놓여 있어서 가운데의 공장 건물은 마당을 갈라놓는 칸막이같이 서 있 었다. 상품 운반의 편리만을 위해 고안된 특이한 구조였다. 그래서 그 공장은 안정되게 땅에 박혀 있는 게 아니라 막 어딘가로 떠나려는 배처 럼 불안해 보였다. 게다가 그 건물은 회색도 갈색도 아닌 분홍빛 페인 트로 온몸을 두르고 있었고, 길을 향한 건물의 좁은 측면에는 주식회 사 발렌타인 제과 라는 커다란 간판이 세로로 길게 붙어 있었다. 그래 서 그 건물은 낮에는 러브호텔처럼 보였고, 밤이 되어 조명이 들어오면 성인용 카바레처럼 보였다. 현장에서 수위실로 가기 위해서는 서쪽 현관으로 나가는 길과 동쪽 현관으로 나가는 길이 있었다. 서쪽 현관 길은 수위실에 가까운 데다 여자 탈의실까지 그쪽에 있어서 언제나 직원들의 왕래가 많았다. 대부 분의 직원이 여자들이었으므로 서쪽 마당은 이름도 앞마당이었고, 보 안등까지 설치되어 밤에도 훤했다. 그러나 동쪽 현관 길은 이용하는 사 람이 없었다. 남자 탈의실이 이쪽에 있긴 했지만 통틀어야 서른 명 남 5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짓한 남자 직원들조차 아가씨들이 들끓는 서쪽 현관을 이용해 수위실 로 갔기 때문이다. 카드에 출퇴근 시간을 찍어야 했기 때문에 수위실은 반드시 거쳐야 했다. 늘 그랬듯이 정석은 동쪽 현관으로 나섰다. 수위실까지 걸어가는 짧 은 시간조차 사람들과 섞이기가 싫었다. 사람 사이에 있는 일이 그에게 는 버거웠다. 공장 마당의 어둠이 짙어졌다. 지난 한 달은 주문이 많지 않아 정석 처럼 주간 근무만 하는 경우, 여섯 시면 정확하게 일이 끝났다. 한 달 만에 오늘 모처럼 아홉 시까지 잔업을 했다. 하지만 이제 곧 크리스마 스, 연말연시, 발렌타인데이, 고급 초콜릿이 진열대에 화려하게 전시되 는 시즌이 된다. 한동안 잔업 없이 끝나는 날은 없을 것이다. 잔업 없이 끝날 때에도 늦가을 해라 어둡기는 했다. 그래도 그 때의 어둠에는 어 딘가 빛의 그림자랄까, 보이지 않는 빛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희미한, 순도 純 度 가 떨어지는 어둠. 하지만 지금의 어둠은 무섭도록 생생해서 단 한 번도 빛이 닿지 않은 짐승의 내장 속 같았다. 이쪽으로는 주로 자 재과 창고가 있는 데다 보안등조차 없어 다른 곳보다 더 어두웠다. 옆 공장도 잔업이 없는지 불이 꺼져 있었고, 그 너머로는 제법 넓은 논밭 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이미 어둠에 잠긴 지 오래였다. 밤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정석은 그 어둠 속으로 발을 디뎠다. 어둠이 몸에 닿는 느낌이 촉감으로 왔다. 낯선 느낌이 아니었다. 등줄 기가 시려오고, 그 시린 덩어리가 온몸으로 번져 간다. 뼈의 구멍마다 찬바람이 파고 들어와 그를 진저리치게 한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눈 을 감는다. 그의 둘레에 검은 강이 흐른다. 모든 것을 빨아들여 그에게 닿지 못하게 하는 그것. 다시금 통증이 밀려온다. 언제부터 이런 통증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55
에 시달려 왔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은 너무도 익숙하고 오래 된 느낌이라 말도 못하던 갓난아기 시절 혼자 잠이 깬 어둠 속에서부터 그것을 만나온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런 것이 왔다 가는 줄도 몰랐고, 문득문득 깨닫게 되다가 이제는 오래 앓은 지병처럼 점점 깊어져 제 것이 된 통증. 그때였다. 웬 여자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정석의 뒤통수에 와 박 혔다. 이봐요, 웬 똥폼이예요? 정석이 돌아보자 손전등 불빛이 확 덮쳤다. 그가 부신 눈을 가리며 바라보자 거기엔 하얀 니트 모자에 하얀 목도리를 두른 여자가 청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꽂은 채 다른 손으로는 손전등을 휘휘 두르며 날건달 같은 자세로 서있었다. 자세히 보니 제빵부에 근무하는 여자였다. 이 름은 몰라도 낯은 익었고, 날씬한 몸매와 투명해 보이는 갈색 눈동자가 제법 괜찮아 보였던 여자였다. 맨날 이쪽으로만 다니기에 한번 쫓아와 봤어요. 볼 때마다 잔뜩 무 게만 잡고 다니더니 이렇게 깜깜한 데서도 혼자 폼을 잡고 있네요! 정석은 웃었다. 대답할 말도 마땅치 않았기에 그는 다시 몸을 돌렸 다. 그러자 그녀가 달려와 그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말했다. 야, 이 자식아,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니? 말은 거칠어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그녀의 성난 눈동자는 불빛 탓인 가, 놀랄 만큼 깊고 맑았다. 똥폼은 그 쪽이 더 심한 것 같은데? 정석이 그렇게 맞받자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미안해요. 나, 정석씨가 좋아서 말 걸어본 거예요. 내 이름은 서은 5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희예요. 얼굴은 알죠? 정석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은희는 당장 그의 옆으로 와 스스럼 없이 팔짱을 꼈다. 수위실을 통과할 때도 그녀는 팔짱을 풀지 않았다. 어머머, 은희야!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어? 그래도 너무한다, 얘! 회사에서! 서쪽 현관으로 먼저 나온 은희의 동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놀려댔다. 우리 이런 사이야. 정석씨 내 거니까 건드릴 생각 마! 평소에 정석과 친하게 지내던 경비원 김씨도 눈이 둥그레져 그를 바 라보았다. 하지만 정석의 마음속에는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즐거 운 마음도, 설레는 기분도, 창피하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막 거리로 나섰을 때, 아주 낮고 우울한 음성이 정석 의 귓가로 들려왔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정석은 고개를 돌렸다. 삶을 다 살아버린 노파의 것처럼 삭막한 목소 리가 정말로 이 여자의 것인가, 의심스러웠다. 은희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었지만 그의 눈길에도 무심한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술집의 네온사인 불빛이 여자의 얼굴 위에서 어룽거렸다. 붉고 푸른 불빛이 번 갈아 가며 여자의 얼굴을 핥아댔다. 그럴 때마다 그 투명한 갈색 눈동 자는 붉은 눈동자로, 푸른 눈동자로 바뀌었다. 은희씨가 원하는 대로. 그럼, 내 방으로 가요. 정석은 고개를 끄떡였다. 정석은 은희를 따라 골목길을 굽이굽이 돌고, 비탈진 언덕을 올라가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57
꼭대기에 자리 잡은 낡고 허름한 방 앞에 섰다. 그 방은 주인집 옆에 별 채처럼 따로 지어져 있었다. 주인집에선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와 텔레 비전 소리가 스며 나왔다. 언덕 꼭대기라 그런지 주변에 다른 집은 보 이지 않았다. 옆으로는 공터가 펼쳐져 있었고, 공터에는 쓰레기와 낡은 리어카, 자갈 더미가 쌓여 있었다. 은희가 방문을 열 동안 정석은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 버 섯처럼 다닥다닥 붙어 피어난 집들, 그 집집의 창에선 아늑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이는 불 켜진 창을 바라보기 좋아했다. 어린 그 를 업고, 성냥팔이 소녀처럼 남의 집 창을 보며 오래도록 서 있곤 했다. 석아, 보래이, 참말 이쁘제, 내는 와 그리 저 불빛만 보면 고마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알이 그렁해지는지 모르것다. 니가 얼라였을 때 니를 업 고 강둑에 나가 엄마를 기다릴 때가 다 저녁 때 아니겄나, 나도 뭐 니 보다 두 살 위 누분께 마카 얼라였제. 얼라가 얼라를 업고 엄마를 기다 리는데, 와 그리도 방마다 켜진 불빛에 맴이 짠하던지. 거기다 카텡 달 린 창문을 보면 지금도 마 환장한다 아이가, 내가 크면 꼭 옆집 미야 새 이처럼 미싱사가 돼갖고 내 손으로 이삔 카텡을 만들어서 온 방마다 달 거래이, 보래이, 니 방에도 달아주꾸마. 누이는 미싱사가 되기 위해 국민학교를 마치자마자 시다로 들어갔 다. 그리고 두세 차례 고만고만한 가내공장들을 전전하다가 열다섯에 처음으로 그럴듯한 봉제공장에 들어갔다. 거기서는 시다 중에서 최고 로 높다고 했다. 1, 2년만 꾹 참으면 미싱사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누 이는 미싱사는 아니어도 자투리 천을 구해다 카텡 만은 열심히 만들 었다. 방안의 창문으로 모자라 부엌 입구, 선반 위, 찬장, 온갖 곳에다 카텡 을 달았고, 심지어는 냄새 나는 재래식 화장실 창에도 시늉 같 5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은 카텡 을 달아놓았다. 어머니는 무당집 같다고 질색을 했지만 누이 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들어가요. 은희가 정석의 손을 잡고 끌었다. 선뜩할 만큼 차가운 손이었다. 그 는 무심결에 그 손을 제 두 손으로 감싸 비볐다. 이 손은 더 차요. 은희는 남은 한 손도 그 손 사이로 밀어 넣었다. 정석은 정성껏 그 손 들을 비볐다. 손이 따뜻해지자 그는 그녀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닿는 순간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는 그녀를 잡아 당겨 입 술을 찾았다. 두 혀가 얽혔다. 그러는데 갑자기 그녀가 그를 밀어냈다. 은희는 돌아서더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녀는 그에게도 담배 를 내밀며 말했다. 겨우 못된 놈 하나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여자들한테 얼음장처 럼 냉정하다는 건 헛소문이었나봐. 또 착한 남자라, 후후. 정석은 길게 담배 연기를 뿜었다. 그러자 아까의 조용한 정념과는 다 른 격렬한 욕정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는 담배를 내던졌다. 그리고는 은희의 입에 물린 담배도 뽑아 버리며 그녀의 입술을 다시 덮쳤다. 그 녀는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이번에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정석은 은희를 덥석 들어 안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펼쳐져 있는 이부 자리 위에 그녀를 눕히고, 버둥거리는 그녀의 옷을 벗겼다. 어두워서 보이는 것은 없었다. 맨살의 감촉에 흥분한 그가 마구 몸을 더듬거리는 데, 그녀가 그를 밀쳐내며 소리쳤다. 이 새끼야, 너도 벗어! 정석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일어나 옷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59
을 벗었다. 은희는 이제 버둥거리지 않았다. 정석은 알전구의 불을 켰다. 갑자기 환해진 방안에 알몸이 된 은희가 누워 있었다. 언제 더듬어 찾았는지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물고 막 불을 붙이려는 참이었다. 긴 생머리의 늘씬한 여인이 낡은 나일론 이불 위에 벌거벗은 채 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모습은 현실의 장면이 아 닌 것처럼 낯설었으나 참을 수 없을 만큼 도발적이었다. 정석은 은희의 몸 위로 올라가 그녀의 몸을 핥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은 채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허겁지겁 그녀의 몸 안으로 자신의 몸을 밀어 넣었으나 그 순간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담배를 피우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 여자에게 지지 않으려 기를 쓰면 서, 그 역시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가 졌다. 가득 차올랐던 그의 몸이 단박에 위축되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집어던지고, 그녀의 눈물을 혀로 핥기 시작했다. 미친 새끼, 먹을 게 없어? 왜 남의 눈물은 핥아먹고 그러는 은희의 입술을 정석은 다시 덮었다. 담배의 싸한 향기가 그의 혀로 옮아왔다. 죽어버렸던 그의 몸이 다시 부풀었다. 그는 정신없이 그녀의 몸을 파고들었다. 싸늘했던 그녀의 몸도 어느 새 뜨거워졌다. 두 사람은 굶주린 짐승처럼 뒹굴고 뒹굴었다. 그렇게 싸움 같은 정사를 치르고 어둠 속에서 까무룩히 잠이 들 때 정석은 무심코 요 밑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방은 따뜻했다. 어렸을 때 부터 유난히 발이 쉽게 차졌던 그는 자면서 요 밑으로 발을 집어넣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오래 전 습관이었다. 그날 그는 무심코 어린 시 절의 습관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차가운 발에 닿던 따뜻한 방바닥의 기 6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억. 그 따뜻함은 발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이 방은 따뜻하구나. 그는 중얼거렸다. 그는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고 그대로 잠이 들었 다. 새벽녘이었다. 정석이 아직 잠에 취해 몽롱할 때 무언가 귓전에 흔들리는 소리가 있 었다. 난 말야 아이를 못 낳아. 정석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가까스로 가늘게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보자 천장을 보고 누워 있는 은희의 옆모습이 들어왔다. 그래, 어 젯밤에 나는 이 여자와 잤지. 그녀는 전보문을 불러주듯이 또박또박 되 풀이해 말했다. 아. 이. 를. 못. 낳. 는. 다. 구 이번엔 정석도 제대로 알아들었다. 남자가 있었어. 결혼한 남자였는데, 참 착했어. 착하니까 약했지. 그 남자는 말야. 내가 아이를 가질 때마다 낳으라고 했어. 자기는 곧 이 혼을 할 거라고, 빌어먹을, 착한 남자가 이혼을 어떻게 해? 날 보면 마 음이 약해지듯이 자기 마누라를 보면 또 마음이 약해지는데. 그래서 매 번 결심하고 매번 실패했어. 그 덕에 내 아기는 뱃속에서 속절없이 커 가다가 은희는 말을 끊더니 머리맡의 티슈를 집어 코를 풀었다. 코 푸는 소 리가 팽 하고 나자 그녀는 정석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그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하던 말을 이었다. 기어코 긁혀져서 나왔지. 그렇게 버린 아이가 셋이야. 하나도 아니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61
고, 둘도 아니고, 셋 은희의 목소리가 어느 사이에 노래처럼 경쾌해졌다. 그러고 나니까 그 남자를 보기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왔어. 아무리 쫓아내도 왔는데, 미친 시늉을 하면서 칼을 들이대니까 새파랗게 질려 서 달아나더라. 그 길로 불임수술을 받아버렸지. 나이 스물 둘에 명색 이 법률상 처녀니, 그것도 잘 안 해주더라고, 꼬치꼬치 캐묻길래 장사 하려면 귀찮아서 그렇다고 했지, 뭐. 나, 이 얘기, 자기한테 첨 하는 거 야. 은희는 여전히 그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흐흐흐 웃겨. 나이 스물 둘에 죽인 애가 셋이야. 이제 더 죽일 일은 없으니 다행이지. 침묵이 흘렀다. 정석은 무슨 말인가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은희의 결 좋은 머리카락만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래서인가, 그의 가슴을 쓸어내리던 손길이 멎더니 곧 편안한 숨소리 가 들려왔다. 잠든 여자를 품에 안은 채 정석은 희부윰하게 밝아지는 방안의 공기 를 바라보았다. 그는 문득 지금 이대로 자리를 박차고 도망가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거기에는 그로 하여금 뒷걸음질 치게 하는 어떤 것 이 있었다. 이 여자는 다르다. 수많은 여자와 밤을 보내고 이렇게 새벽 을 맞았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무엇인가가 그에게 지금 도망쳐야 한다고 재촉했다. 그에게는 언제나 다가오는 여자들이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평범한 공장 근로자였고, 잘난 구석도 없었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다른 남자들처럼 여자들을 향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뿐 6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식물처럼 한 자리에 머물렀다. 그래서 여 자들이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에는 남자의 쓸쓸 하고 어두운 분위기에 환장을 하고 달려드는 이상한 취미의 여자들이 나 남아도는 모성애를 주체하지 못하는 여자들이 적지 않은 탓일까. 어 쨌든 다가오는 것은 늘 여자 쪽이었다. 그 여자들만으로도 충분했기에 그는 자기 쪽에서 여자에게 다가가는 법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 아왔다. 여자들에게 그는 무심했다. 은희가 말한 대로 여자들은 분명 자신을 얼음장처럼 차가운 남자라고 했을 것이다. 몇 번 육체관계를 맺 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는 게 그의 대응방식이었다. 때로는 그의 무심 함, 냉담함에 질려 여자 쪽에서 먼저 떠나기도 했다. 그의 심장은 방수 처리된 비옷처럼 모든 감정을 거부했다. 그런 감정들은 심장의 표면에 서 물방울로 맺혀 굴러 떨어졌다. 그는 세상 어떤 일에도, 어떤 존재에 게도 관심이 없었다. 지난 10년의 삶이 온통 그랬다. 아무 것에도 관여 하지 않고 그저 삶을 덤덤하게 이어가는 것, 그것만이 자신에게 어울리 는 삶의 태도라고 믿었다. 그러나 자신은 하나도 내주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 은 생각만큼 달가운 일이 못되었다. 떨쳐낼 때도 힘들었다. 여자들은 자기들이 제 발로 다가와 그의 애정을 요구했음에도 그가 떠나려 하면 빚쟁이처럼 굴었다. 그를 저주하고, 책임을 요구하고,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쳤는가를 가계부 들이대듯 세목세목 따져댔다. 그래도 그 런 관계는 불안하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그런데 서은희, 이 여자는 달 랐다. 그는 자신이 질기고 끈적거리는 어떤 것에 휘감겼다는 느낌이었 다. 결코 떨쳐낼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함. 그러나 지금 몸을 빼면 된다. 지금 몸을 빼면 이 여자와 얽히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도 그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63
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미 늦었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니면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일까. 그때 은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어머, 몇 시야? 회사 늦겠다. 정석은 그러는 여자를 다시 끌어 눕혔다. 아침 햇살에 그녀의 알몸이 상아처럼 빛났다. 그의 손길에 봉긋이 솟아나는 갈색의 유두에 그는 입 술을 댔다. 지극히 섬세한 것을 다루듯 그는 그녀의 유두를 입안에 문 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온다. 비온 뒤 쏟아져 내리는 계곡의 폭포처럼 그의 온몸에서 싱싱한 열정이 솟구쳐 올라온다. 이미 늦은 것이다. 수문은 열려버렸다. 이제 정석은 그것을 조절할 힘이 없다. 갈 데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 왜, 왜 이래, 늦어 조금 전에 아이 셋을 죽였다고 냉소적으로 말하던 이 여자가 신음까지 뱉으 면서 회사에 늦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정석은 이 여자가 한없이 사랑스럽다. 아침과 밤이 이토록 다른 여 자, 그는 새로운 여자의 몸을 새로운 남자가 되어 파고든다. 늦, 늦는다 니까, 입으로는 신음을 내뱉으면서도 어젯밤보다 더 앙탈을 부리는 이 여자의 귀에 대고 그는 뜨거운 숨을 내뿜으며 말한다. 늦었어, 이미 늦 었다구. 결국 두 사람은 무단결근을 한다. 무단결근 하루면 사흘 치 임금이 깎인다. 그 아침, 두 사람 분의 엿새 치 임금이 어김없이 깎여나간다. 6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2. 새벽 커피 바지를 내리며 변기에 걸터앉는데,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주민등록증이다. 진우는 몸을 구부려 그것 을 줍는다. 다행히 물기 없는 곳에 떨어졌지만 그래도 화장지를 뜯어내 몇 번이고 닦아낸다. 어려 보이게 머리를 짧게 자르고, 노란 티셔츠를 입고 찍은 증명사진이 거기 붙어 있다. 분명히 윤진우, 자신의 사진이 다. 하지만 김영애, 650511로 나가는 주민등록번호, 경기도 김포군 김 포읍의 본적, 거기 적힌 인적사항은 그녀의 것이 아니다. 65년 생, 86년 현재 만21세, 헤는 나이로 스물두 살. 검정고시로 중 졸 자격 따냄, 여덟 형제나 되는 아주 가난한 집안의 맏딸, 부모는 일찍 이 여의고, 형제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음. 진우는 주민등록 증을 들여다보며 거기 적혀져 있지 않은 김영애의 운명까지 떠올려본 다. 영애는 야학에서 만나 의형제까지 맺은 사이인 만큼 그녀의 신상에 대해서 진우는 막힘이 없었다. 석고상처럼 말끔한 용모에 깡마르고 눈빛이 날카로웠던 주임이 떠오 른다. 입사 면접 때, 그는 진우가 내민 주민등록증을 뚫어지게 바라보 았다. 그녀의 남편이며 지도선인 명수가 숙달된 솜씨로 영애의 사진을 벗겨내고, 그녀의 사진을 대신 붙여 위조해준 그 주민등록증은 누가 보 기에도 완벽했다. 그런데도 그는 몇 번이고 그것을 뒤집어 보며 꼼꼼히 살폈다. 그녀의 등으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여섯 번째 공장이었다. 모든 공장들이 위장취업자에 대해 신경이 곤 두서 있었다. 다섯 군데의 공장에서 차인 다음, 진우는 면접을 보러왔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65
던 여자들을 되새겨 보았다. 그러고 보니 허름한 옷을 입거나 맨 얼굴 에 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어깨 너머로 넘겨다 본 이력서의 글씨들 도 또박또박 정성 들인 글씨였다. 그러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학생 출신들은 하나같이 낡고 허름한 옷에, 화장은커녕 머리도 잘 빗지 않고, 이력서 글씨는 대충 흘림체로 써서 가지고 갔다. 그것이 그들 머리에 박혀있는 노동자의 상이었다. 아직 멀었구나, 그녀는 자신 의 한계를 절감했다. 그래서 이번에 그녀는 분홍색 블라우스에 검정 스 커트를 입고, 화장도 하고, 서툴지만 정성스럽게 보이는 글씨로 이력서 를 써서 이 공장에 온 것이다. 마침내 주임은 진우의 주민등록증을 내어주며 한 마디를 더 물었다. 어디 김씨예요? 하마터면 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뻔 했다. 비수 같은 질문이 날 아 올까봐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광산 김씨요. 아, 그래요? 경비원 아저씨가 종씨라고 좋아하겠네. 나가면서 인 사해둬요. 출근은 당장 내일부터 하고. 의심 섞인 눈초리를 버리지 않은 채 주임은 그렇게 말했다. 하긴 그 눈길은 지금까지도 가끔씩 그녀의 등 뒤로 날아와 꽂히곤 한다. 얼른 나오지 않고 뭐혀! 누가 화장실 문을 마구 두드린다. 놀란 진우는 얼른 옷을 추스르고 문을 연다. 죄송해요. 바깥에 서있는 사람은 박춘자라는 중년의 기혼 직원이다. 진우의 사 과에 대꾸도 없이 그녀는 화장실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곧 이어 요란 6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진우가 손을 씻고 있는 등 뒤로 뒤늦은 답변이 흘러나온다. 죄송허긴 뭐가 죄송혀? 나가 갑재기 설사가 나서 그랬제. 맨날 야 밤에 라면만 먹어쌓니 속이 견뎌내남? 나 땜에 일 덜 보고 나간 건 아 니여? 닫힌 문 뒤에서 나오는 그 한 박자 늦은 답변에 진우는 웃음을 참고 대답한다. 아니에요. 늑장 부리고 있었는 걸요. 그럼 천천히 오세요. 먼저 갈 게요. 식당에 가니 박춘자와 한동네 이웃인 고효순이 큰 냄비 두 개에 라면 을 끓이고 있다. 식당이래야 현장 옆의 빈 사무실에 식탁 두 개하고, 가 스레인지랑 싱크대 하나 갖다 놓고 시늉을 낸 곳에 불과하다. 따로 식 당이 없는 이 공장에서는 부서마다 이런 빈 공간에 야식 장소를 마련해 쓰고 있었다. 야식은 새벽 3시에 라면을 끓여 먹는 것이 전부였다. 얼른 온나, 안 그래도 라면 불까봐 걱정 안 했나. 고효순이 진우를 보며 말한다. 고효순과 박춘자는 둘 다 마흔 다섯 동갑이었지만 하는 짓을 보면 아이와 어른처럼 비교가 되었다. 박춘자 는 주책인데다 눈치가 없어서 사람 좋고, 잘 웃고, 천성이 순진한데도 일할 때면 동료들에게 싸잡아 놀림을 당하곤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본인은 자기가 놀림을 받는 것도 모르는 형편이었지만. 그에 반해 고효 순은 사리가 분명하고 경우가 발라 어딘가 위엄이 있었다. 영애야, 얼른 와. 오, 안 그래도 미스 김이 빠져서 어디 갔나 했네. 동료들이 한 마디씩 말한다. 부서별로 먹어도 스무 명 되는 인원이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67
한꺼번에 먹기는 힘들어서 열 명씩 교대로 먹었다. 말이 없고 부끄럼을 많이 타는 미선이 얌전히 그릇들을 꺼내놓는다. 뽕짝이라면 이미자 저 리 가라로 부르는 기혼 직원 김말심이 김치를 꺼낸다. 서로 당번을 정 하지 않아도 기혼 직원들은 야식 시간이면 번갈아 김치를 싸왔다. 박춘 자는 뒤늦게 와서 불어터진 라면을 누구보다도 말끔히 먹어 치웠다. 라면 때문에 설사병 도졌다며 와 그리 먹어쌓노? 고효순이 한 마디 한다. 참, 남이사 똥을 싸지르든, 똥이 맥히든 뭔 참견이람? 하여간 하는 짓이 하나부터 열까지 얼라라. 나이 헛먹었제. 참, 니 웃긴다. 내 나이 먹을 때 니가 한나라도 보태준 게 있나, 와 그리 심통이여? 그리고 내가 얼라면 니는 능구렁이 잡아묵은 칠십 노 파다. 이봐라, 안 그러나? 경실이 입에 라면을 넣은 채로 킥킥거린다. 그 모습을 박춘자가 놓칠 리 없다. 마침 잘 걸린 것이다. 니 왜 그리 웃어대는 겨? 꼭 하는 짓이라곤 전라도치 같이 박춘자의 또 다른 특징은 전라도 사람이라면 이를 악물고 싫어하는 점이었다. 그러자 고효순이 얼른 쐐기를 박는다. 하여튼 아무데나 전라도 갖다 부치는 데는 학을 띠겄다 아이가. 어 디 느그 충청도는 마카 다 좋은 사램이가, 그기 다 사람 나름이다. 내 사 보니 느그 충청도나 우리 경생도나 악바리는 악바리고, 미친놈은 미 친놈이더라. 전라도 아니라 전라도 할애비래도 순둥이는 내동 순둥이 고 어데가 그려? 우리 충청도야 양반만 있구만. 박춘자는 지지 않고 구시렁거린다. 6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아줌만 옛날에 전라도 사람한테 되게 당한 적이 있나 봐요. 왜 그 렇게 전라도라면 난리예요? 뜨거운 음식을 잘 못 먹는 경실은 라면을 식혀서 한 가닥씩 입에 말 아 넣으며 묻는다. 중신 서준 할마시가 전라도 댁이었다고 안 저러나? 고효순이 혀를 차며 말한다. 어데 그 중신 할멈 하나로 그러남? 그 뒤로도 내내 겪었으니까 그 러는 거제. 박춘자의 말에 경실이 다시 말한다. 중매 서줘서 시집갔으면 고마운 사람인데 왜 그래요? 아저씨한테 시집 온 게 싫으신가 봐. 그러자 박춘자는 이제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을 마당이 생겨 신이 나 는 기색이다. 그러니께 내 말 들어봐. 내가 꽃다운 열일곱에 중매할멈인가 뭔가 전라도 할마시가 신랑을 데꼬 와서 선을 보는데, 한나도 맴에 안 차는 거여. 내가 그때 좀 고왔남? 길 가던 남자치고 뒤돌아보지 않는 놈이 없었다니께. 지금 이쁘다는 저기 미스 홍이나 미스 박은 저리 가라로 훤했던 거여. 달밤에 핀 박꽃 같았제. 아닌 게 아니라 박춘자는 지금이야 살이 붙고 늙어서 전형적인 중년 여성이지만, 뜯어보면 뽀얀 얼굴에 쌍꺼풀이 진한 눈이며, 높은 콧대 와 선명한 입매로 미루어 젊었을 때는 꽤나 고왔을 얼굴이었다. 평소에 도 자신의 인물 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여직원이 새로 들어오면 인물부터 따졌고, 인물이 눈에 안 찬다 싶으면 처음부터 눈을 내리깔고 대하는 게 그녀의 버릇이었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69
그래서 퇴짜를 딱 놓을라고 하는디, 그 여시 겉은 할마시가 내 맘 을 알고 야밤에 찾아오더니 하는 말이, 선 본 걸 깨면 돈을 많이 내야 한다고 거짓부렁을 한 거여. 어리디 어린 내가 고걸 알았남? 그때 우리 집이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는디, 돈을 많이 내야 된데니께 간이 철 렁하드라고. 그래 비단 겉은 여린 마음에 부모 생각이 짠해서 밤새 울 곤 그냥 시집을 간 게 아닌감? 헤, 아줌마도 뻥이 보통이 아니네. 홍섭이 혀를 내밀며 말한다. 설마! 정말 그렇게 시집을 갔단 말예요? 옛날도 아니고, 요새 세상 에! 경실이 끼어들어 묻는다. 왜 아녀? 그래서 이날 입때꺼정, 오마나, 몇 년만 있으문 30년이 여, 아이구, 징그러, 내 인물로 돈 많은 남자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 는디, 그렇게 순진해번져갖고, 하이고, 기가 맥히제.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박춘자는 뭐가 좋은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 다. 지가 바보 겉은 건 생각 못 허고, 애꿎은 중신 할멈 농담 갖고 전라 도라면 이를 갈아대냐? 아휴, 그려, 니, 용호 엄마, 아니, 고효순씨, 차암 잘났다! 하도 잘 나서 손자 볼 나이에 쪼꼴레트 공장 다니면서 야밤마다 라면 끓여 안 먹나 몰러. 고효순은 그 말에는 대꾸도 안 하고 일어나 설거지를 챙긴다. 나머지 사람들도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뒷정리를 한다. 늘 보는 풍경이 었다. 두 사람은 노상 붙어 다니면서도 그렇게 노상 대거리를 했다. 금 7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방 잡아먹을 듯 대들다가도 금세 할 말이 있으면 쪼르르 고효순에게 달 려가 귓속말을 하는 박춘자였다. 반면에 고효순은 철없는 박춘자와는 전혀 달랐다. 버들치처럼 옆으로 긴 눈은 살아온 통찰로 가득했고, 뒷 말이라고 안 하는 대신 싫은 말도 면전에서 거리낌 없이 했다. 반장이 고, 사장이고, 그녀는 박춘자 앞이나 똑같이 할 말을 다 했다. 내사 마 겉다르고 속 다른 말은 못한데이. 쫓아내면 나갈끼고, 놔두면 돈 받고 일하는 거제. 사장 아니라 사장 할애비래도 내를 잡아먹을끼가 어데, 하며 아무 것도 겁내하지 않았다. 경실은 진우가 뒷설거지를 도울 동안 자리를 잡아놓고 있겠다며 현장 으로 달려갔다. 다른 팀이 라면을 마저 먹고 올 동안 10분 정도의 시간 이 생긴다. 그 때의 단잠이야말로 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어떤 초콜릿보 다도 달콤한 맛인 것이다. 따뜻한 초콜릿 통에 등을 기대고 쉴 수 있는 그 휴식을 위해선 빨리 달려가야 했다. 늦게 가면 상자나 깔고 새우처 럼 옹크렸다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는 드럼통만한 거대한 초콜릿 통들이 있었다. 초콜릿이란 게 온도가 높아야 액체 상태가 유지되는 거라 그 통들은 하나같이 따뜻했 다. 물론 틀에 넣어 제품을 만들 때는 급속냉각을 시켜야 해서 콘베이 어 벨트가 있는 작업 현장에는 냉기를 유지할 수 있도록 따로 유리문이 달려 있었다. 설거지를 마친 진우가 가보니 두 사람쯤은 너끈히 등을 기댈 수 있는 큰 초콜릿 통 앞에 경실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그새 꾸벅거리며 졸던 경실은 진우의 기척에 잠에서 깨어 말한다. 따뜻해서 너무 좋아. 얼른 등 기대봐! 경실은 진우의 손을 잡아당기며 그 말만을 하더니 마음이 놓였는지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71
금방 잠에 빠져버린다. 경실의 잡은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진다. 진우는 초콜릿 통에 기댄 채로 신기할 만큼 빨리 잠드는 경실의 얼굴 을 들여다본다. 경실은 진우가 이 공장에 들어와 처음으로 친해진 친구 였다. 실제 나이야 진우가 스물일곱이니 여섯 살이나 위였지만, 여기서 의 나이는 한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너나들이 친구를 하고 있었다. 경실은 셋째 딸이라고 했다 넌 첫째니까 좋았겠다. 난 6남매 중 간에 껴서 언니 크는 거, 동생 자라는 거 훔쳐보면서 따라서 컸다니까, 하하, 정말이야. 한번은 친척집에 말 안 하고 가서 사흘을 있다 왔는데 도 없어졌는지도 모르더라니까. 기가 막혀서. 그러니 중학교 보내준 것 만도 감지덕지였지. 하지만 친구들은 거지반 다 진학했으니까 서러워 서 며칠이나 울었어. 다른 집들은 학교를 못 보내면 부모들이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우리 집은 웃긴다니까. 내가 집에 처박혀 있는 꼴 을 못 보는 거야. 다른 집 딸들은 서울 가서 돈만 잘 벌어오는데, 너는 방구석에서 밥이나 축내냐고 어찌나 구박을 해쌓는지 할 수 없이 안양으로 올라와서 공장 다니는데, 그 동네에 공민학교란 게 있어서 거 길 2년 동안 다녔어. 진짜 좋았어. 거기 다니던 때는 내 인생에서 별처 럼 빛나는 시절이었어. 별처럼 빛나는 시절, 문어체의 그런 표현을 잘 쓰는 경실은 낭만적인 친구였다. 그래도 평소 그녀의 얼굴에는 일찍이 제 손으로 생활을 책임 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어른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눈을 감고 자고 있는 모습에는 숨길 수 없는 앳된 기색이 흘러넘친다. 볼록한 뺨에는 아직도 솜털이 보송송하고, 작게 다물어진 입매는 어린 아이 같다. 1980년, 그해 진우는 스물 한 살이었다. 광주에서 엄청난 학살이 있 7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었던 그 해, 그녀에게 광주는 어머니의 자줏빛 입술로 먼저 떠올랐다. 어머니는 그 무렵 어느 일간지의 기자였다. 그날 대문을 열어주면서 진 우는 어머니의 립스틱 빛깔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죽은 자줏빛의 입 술. 빳빳이 올린 마스카라도, 갈색의 아이세도우도, 실크처럼 잘 퍼진 파운데이션도 모두 신문사로 출근할 때의 어머니 모습 그대로였는데, 붉게 칠하고 나갔던 립스틱만 빛깔이 바뀌어 있었다. 집에서도 언제나 화장을 단정히 하고 있는 어머니였기에 그녀는 그 빛깔이 맨 입술의 빛 깔이라곤 생각 못한다. 잘 먹은 화장은 새파랗게 질린 어머니의 표정을 감추어 주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덧발라야 유지되는 립스틱만은 주 인이 그 절차를 잊자 죽은 빛깔의 입술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어머니는 그 죽은 자줏빛 입술로 진우에게 몇 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외국 기자 들이 찍은 사진이었다. 금방 피가 묻어나올 것 같은 생생한 살육의 장 면들, 몇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친구들의 집이 있는 도시에서 벌어진 끔 찍한 학살. 어머니는 그 중 한 장의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내가 아는 기 자가 직접 찍은 거야. 숨어서 찍었는데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다더라. 나만 보라고 준 거야. 절대로 내돌리지 말라고. 이 사진 들어가는 날이 면 끝장이니까. 망원렌즈로 찍은 데다 떨면서 급히 찍었는지 초점도 어긋난 거친 사 진이었다. 공수부대 병사가 방망이로 웅크리고 있는 남자를 강타하고 있었다. 누워 있는 남자는 태아처럼 온몸을 웅크린 채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남자가 얼마나 공포에 질려 있는지 사진을 보는 것만으 로도 몸이 떨렸다. 그 위를 내리치는 단단한 방망이의 속도감은 거친 입자의 사진 속에서도 생생했다. 카메라의 초점이 우연히 거기에 맞춰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73
졌는지 공수부대원의 등에 멘 검은 장총만 선명했다. 세상에, 내가 립 스틱 지워진 것도 모르고 다녔구나. 아이, 창피해라, 화장실에 다녀온 어머니는 그새 붉은 립스틱을 완벽하게 새로 바르고, 거실의 전축에 레 코드판까지 새로 건다. 그런 다음 어머니는 사진을 들고 소파에 가서 앉는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시 한 장씩 찬찬히 들여다본다. 꽃잎처럼 붉게 피어난 입술 때문에 그 모습은 파티의 사진이라도 들여다보는 것 처럼 보인다. 그 장면 위로 포레의 레퀴엠 이 성능 좋은 오디오로 흘 러나오고 있었다. 진혼곡, 우연이었을까, 어머니의 선곡은 너무도 아귀 가 맞아 오히려 희극적이었다. 때르르르르릉, 고막을 찢을 듯한 요란한 소리가 온 공장에 울려 퍼진 다. 초콜릿 통 만큼 커다란 자명종이라도 틀어놓은 것만 같다. 그 사이 언제 잠이 들었던가. 진우는 꿈속에서 이미 기계 앞에 앉아 있다가 벌 떡 일어난다.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꿈까지 이 공장에 입사 를 한 모양이다. 감옥에서 처음으로 감옥 꿈을 꾸던 날, 꿈마저 함께 수 감된 것 같아 씁쓰레해했던 기억이 딸려온다. 경실도 진저리를 치며 달 디 단 잠에서 깨어난다. 부르르릉, 철컥, 드르르르 콘베이어 벨트는 벌써 돌아가고 있었다. 빨리들 안으로 들어가요! 물건 나가요! 최 반장이 쫓아다니며 소리를 질러댄다. 하지만 그가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사람들은 잽싸게 제자리를 찾아든다. 일감이 그냥 흘러가서 불 량이 되게끔 두고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실도 잽싸게 제자리에 가 있다. 진우 역시 어느 틈에 면장갑을 손에 끼고, 눈앞으로 흘러가고 있는 몰드 속의 초콜릿 액체에 스틱들을 박아 넣고 있다. 지금 나오는 7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몰드는 한 판에 여덟 개의 곰 모양이 파여 있다. 거기에 녹은 초콜릿이 들어 있어 그 칸칸마다 재빨리 스틱들을 박아 넣어야 했다. 완성되면 아이들이 손에 들고 빨아먹는 곰 모양의 초콜릿이 될 것이다. 진우는 아직 일에 익숙하지 못해 근무를 끝내고 아침에 돌아갈 때면 어깨가 빨래판처럼 딱딱해져 있곤 했다. 그녀가 겨우 일 속도에 적응을 해서 한숨 돌리느라 경실을 돌아보니 그녀는 방긋 웃어준다. 잘 했어, 많이 늘었어, 말은 안 해도 그런 뜻이란 걸 진우는 느낄 수 있다. 마음 속으로 따뜻한 물이 흐르는 것 같아 그녀 역시 생긋 웃어준다. 경실이 그런 진우를 보더니 한 마디 한다. 너, 그냥 볼 땐 하나도 안 이쁜데 웃는 모습은 참 이뻐. 함부로 웃 지 마. 남자들이 반하겠다. 진우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다. 진짜 경실의 또래 친구인 것 처럼. 안 웃어도 이쁘다, 뭐. 이그, 욕심은! 머리는 남자애같이 깡충하게 깎아놓곤 뭐가 이쁘 냐? 제발 머리 좀 길러라. 머리만 길면 이쁘다고 해줄게. 진우는 손으로는 계속 스틱을 박으면서 경실의 머리에 눈길을 준다. 현장의 수칙대로 그녀의 긴 머리는 깔끔히 올려 묶여진 채 하얀 머릿수 건에 가려져 있지만, 풀어 내리면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다. 얼마 전 에 헤어진 첫사랑의 남자가 긴 머리를 좋아해서 언제나 머리를 기른다 는 그녀였다. 아직도 경실은 그 남자를 못 잊고 있었다. 어떤 사연인지 진우는 알지 못했지만 그 긴 머리 하나만으로도, 아니 지금 자기에게 건네는 괜한 시비 한 마디로도 경실이 지금 그 남자를 생각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경실은 무언가 말할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콘베이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75
어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이제 야식 시간의 후유증에서 벗어 났다고 생각한 최 반장이 속도를 한꺼번에 올린 모양이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빠르노? 정신이 하나도 없다! 저쪽에서 고효춘이 벌컥 소리를 지른다. 오늘 목표 생산량 채우려면 이 속도로 가야 돼요! 최 반장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지른다.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눈앞에 서 마구 흘러가는 몰드들처럼 강한 채찍은 없었다. 말할 틈이라곤 없었 다. 손을 놓는 날이면 밀려오던 몰드는 쌓여서 산을 이룰 터였다. 진우 와 경실의 손끝도 정신없이 빨라지고 있었다. 우리 조금만 있다 나가자. 일이 끝나자 경실은 진우를 야식 식당으로 끌고 간다. 그녀는 가스레 인지 위에 주전자를 올리더니 작업복 주머니에서 커피믹스 두 개를 꺼 내며 말한다. 너랑 일 끝나고 마시려고 갖고 왔어. 이거 마시는 맛에 야근 버틴 다, 정말. 경실이 타주는 커피를 한 모금 넘기자 밤을 샌 피곤이 싹 달아난다. 정말 좋네. 넌 맨날 여기서 커피 마시고 가나봐? 진우의 말에 경실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응. 혼자 몰래 여기 와서 마시고 가. 새벽 커피, 진짜 죽이지? 이걸 마시면서 창밖을 보면 동이 터오거든. 그럼 정말 짜릿해. 그 끔찍한 밤 일을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도 들고 히히. 이러고 있으면 말야. 내 가 꼭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멋진 커리어 우먼처럼 여겨져. 그럴 때 면 제법 살 만해. 7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경실은 자신의 꿈을 말한다.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서, 가슴 울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경치가 아름다운 곳들을 여행하면서, 사랑하는 사람 에게 긴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새벽 커피를 즐기면서 살고 싶다고. 이 곳의 공장 생활은 그녀가 원하는 생활이 아니다. 그녀는 남은 인생을 결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자기가 사랑했던 군인 오빠에 대해서도 말한다. 몹시 사랑했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한테 약혼자가 있어서 헤어 졌다는 것이다. 그 오빠, 미치게 보고 싶어. 나, 밤마다 그 오빠에게 긴긴 편지를 울면서 쓰다 잠든다. 웃기지? 보내지 않은 그 편지들이 상자에 가득 쌓 였어. 슬픈 음악 틀어놓고 그 편지를 한 장씩 읽으면 가슴이 무지 아픈 데도 쬐끔은 달콤한 게 입안에 고이거든. 나, 언젠간 그 오빠 찾아 갈 거야, 살도 쏙 빼고 날씬해져서, 예쁜 옷도 사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 고, 오빠의 부대 앞에 있는 다방에 어느 날 앉아 있을 거야. 그럼 무심 코 들어왔던 오빠가 날 보고 깜짝 놀라겠지? 그 옆에는 그 약혼녀가 함 께 있을지도 몰라. 그 여자는 내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질투를 느끼고,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겠지 뜨겁게 탄 커피를 앞에 놓고 경실은 자기만의 공상에 잠겨 있다. 그 런 그녀를 바라보던 진우는 경실이 커피에 입도 대지 않는 것을 보고 묻는다. 근데 왜 커피는 타놓고 안 마셔? 난 식혀서 마셔. 원래 뜨거운 거 잘 못 먹잖아? 뜨거운 거 잘 못 먹는 줄은 알지만, 그래도 커피까지? 응. 웃기지? 넌 진짜 잘도 마신다, 그 뜨거운 걸! 이 정도가 뭐가 뜨거워? 그럼 넌 동태찌개도 다 식혀서 맛도 없는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77
걸 먹겠다! 응. 난 뜨거운 게 제일 싫어. 방도 뜨거우면 숨이 막혀서 윗목에서 자. 한겨울에도 창을 꼭 열어야 자고 몸에 열이 많은가 봐. 와, 넌 되게 정열적인가봐. 사랑도 열렬히 하고, 난 몸이 차서 뜨거 운 것만 찾아다니는데 경실이 갑자기 머뭇거리듯 입을 뗀다. 근데 영애야! 응? 나 말야 응 난 니가 좋다! 나도 니가 좋아. 하지만 이런 말 쑥스럽다, 얘! 진우의 말에 경실은 미지근해진 커피에 입을 대면서 말한다. 널 보면 내가 중학교만 나온 게 안 부끄러워. 진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경실을 바라본다. 중학교만 나와도 너처럼 교양 있고 멋있을 수 있으니까. 널 처음 봤을 땐 당연히 고등학교 나온 앤 줄 알았어. 아니, 그 애들하고도 달랐 어. 넌 어딘지 모르게 많이 배운 사람 같았다. 그런 니가 중졸이란 걸 알았을 땐 얼마나 좋은지 몰랐어. 나도 너같이 되고 싶어. 컥컥! 그만 진우는 삼키던 커피에 사레가 들리고 만다. 경실이 놀라서 그녀 의 등을 쳐준다. 진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괜찮아? 정말? 경실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진우를 들여다본다. 진우는 그 눈을 마주 7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칠 수가 없다. 진우의 손을 꼭 잡고 탈의실로 가면서 경실은 말한다. 내가 방 치워놓고 한번 부를게. 꼭 와. 이사 간 지 얼마 안 돼서 아 직 정리가 안됐거든. 그래도 월부로 오디오도 들여놨다. 이제 집엔 돈 안 부치기로 했거든. 몰라. 나도. 나 살기도 바쁜데, 뭘. 집에서도 이젠 시집갈 돈이나 모으래. 하지만 모으긴 뭘 모으냐. 난 나한테 아무 것도 안 바라고 나만 사랑해주는 사람한테 시집갈 거니까 그런 돈 필요 없 어. 그런 사람 없으면 혼자 살지, 뭐. 진우는 가만히 고개만 끄떡인다. 꼭 와야 돼! 니가 오면 얼마나 좋을까! 경실은 활짝 웃는다. 진우도 활짝 웃어 주었지만 그 억지웃음의 뒷맛 은 씁쓸했다. 3. 황해도집 근무를 끝낸 정석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동쪽 현관을 통해 수위실로 걸어갔다. 경비원 김씨의 둥근 코끝이 벌갰다. 벌써 한 잔 걸친 모양이 었다. 뭐야, 자네, 아침부터 잔소리하는 게 안 좋을 것 같아 내가 출근할 땐 말 안 했는데, 여자한테 푹 빠져 갖고 무단결근을 다 하고! 그렇게 팔짱 끼고 나가서 둘 다 똑같이 결근을 해? 그냥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79
죽은 아버지의 마지막 직업이 경비원이었던 탓에 정석은 김씨한테만 은 곁을 주어왔다. 그리고 아까들 우르르 한 잔 하러 몰려가던데, 자네는 또 빠졌잖 아? 남자 직원들은 서쪽 현관을 통해 벌써 술집으로 몰려간 모양이었다. 정석은 늘 외돌토리로 찍혀 있어서 이제는 직원 전원이 참석하는 회식 자리를 빼고는 그에게 의례적으로 권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도 그러 는 편이 좋았다. 김씨는 여전히 잔소리를 했다. 그나저나 조신한 처녀들 다 놔두고 하필 미스 서야? 몸이야 잘 빠 졌지만 영 사내 겉은데다 까불어나 대는 철딱서닌 걸. 자네야 워낙 얌 전하고 순진한 총각이니 그 망나니 아가씨가 눈독을 들였구먼. 에그, 원! 정석은 웃기만 했다. 사내 같고 까불어나 대는 철딱서니 없는 여자, 얌전하고 순진한 총각,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모습들의 허망함. 그나저나 한잔 걸치셨나 봐요? 정석이 말머리를 돌렸다. 응, 잠깐 나가서 한 잔 하고 왔지. 고향 친구가 올라 와서 말야. 거, 괜찮은 과부집 하나 알아냈는데 눈꼬리가 새침하니 올라간 게 깎아놓 은 밤톨겉이 이뻐. 자네랑도 한번 가자구. 아주 사내들 애간장 태우게 생겼다니까. 아저씨 비번이실 때 한번 같이 가죠. 그래, 그래, 꼭 한번 가. 자네도 이런 여자, 저런 여자, 자꾸 겪어봐 8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야 여자 보는 눈이 생기는 법이거든. 공부 삼아서 잔소리 끝이라 민망했던지 김씨는 주석을 달았다. 은희는 같은 반의 여직원들과 몸단장을 마친 다음에나 나올 것이다. 정석은 카드함에서 카드를 꺼내 타임 체커에 꽂았다. 찰칵, 기분 좋게 딱 떨어지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명쾌했다. 21시 18분, 정확한 시각이 찍혀 나왔다. 그때 정석의 등 뒤로 수위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낭랑한 여자 의 음성이 들려온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어, 어서 와! 우리 종씨 아가씨 오시네. 어때, 날씨가 많이 추워졌 지? 근데, 왜 또 야근조야? 주간할 차례 아냐? 친구가 야근조를 하겠다고 해서요. 그냥 같이 그래, 야무지구먼. 몸은 좀 힘들어도 야근이 짭짤하지. 월급봉투 받을 때면 뿌듯하다구. 정석은 김씨가 누구를 보고 저렇게 살뜰하게 구나 싶어 고개를 돌려 보았다. 어머, 이정석씨 아네요? 여기 다니셨어요? 여자 쪽에서 먼저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석 역시 뜻밖이었 다. 그래, 김영애라고 했지, 열흘 전쯤인가 그가 사는 집에 세 들어온 여자였다. 그런데 저 여자가 언제 우리 공장에 들어온 걸까. 아니, 우리 종씨 아가씨하고 아는 사이야? 김씨의 둥그런 눈이 당장 호기심에 빛났다. 정석이 얼떨떨한 채 있자 김영애가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옆방에, 아니 옆의 옆방에 사는 분이예요. 허허, 그랬다구?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81
그때 누가 문을 홱 열어젖히며 들어온다. 어휴, 좆나게 추운 날씨네. 안녕하세요? 어, 미스 김도 안녕! 야, 정석아, 너, 잔업 했냐? 야근 조에서 일하는 홍섭이었다. 김씨가 홍섭을 보고 신이 나서 떠든 다. 이봐, 양군, 글쎄, 우리 종씨 아가씨가 저 이군하고 옆방에서 사는 사이라는데? 어쭈, 이놈 봐! 미스 김 같은 미인하고 한 지붕 아래 살면서 숨겼단 말야? 홍섭이 정석의 옆구리를 푹 찌르며 말했다. 아니, 나도 모르고 있었어. 정석이 대답하는데 영애가 얼른 나선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줄 몰랐어요. 입사한 지 꽤 됐는데, 저도 지금 막 알았어요. 야, 그래도 그렇지. 같은 집 살면서 어디 다니냐고 물어보지도 않 았냐? 나 같으면 일단 여자가 나타났다 싶으면 잽싸게 신상파악부터 쫙 하는데, 원래 저놈은 숫뵈기라서요, 하하 홍섭의 말에 정석은 피식 웃는다. 홍섭 역시 그를 여자라곤 모르는 순진한 남자로 아는 것이다. 짜아식, 여자들 속이나 태우더니 임자 만났네. 홍섭이 정석을 툭 치며 말했다. 근무가 달라 아직 서은희와의 얘기를 못 들은 모양이었다. 저 먼저 들어갈게요. 정석씨, 그럼 영애가 목례를 하고 들어가자 홍섭이 정석에게 말한다. 8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야, 너도 인제 인생이 필 모양이다. 저 아가씨, 아주 괜찮아. 내가 유심히 봐뒀다니까. 내가 찍어놨는데, 너라면 내가 양보하지. 옆방 산 다는 데야 내가 승산이 없지. 그럼 두말하면 잔소리지. 광산 김씨 우리 종씬데 하나 버릴 것 없 는 처녀야. 얼굴 이쁘지, 인사성 밝지. 눈꼬리만 좀 올라갔으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하하 은희와 정석이 사귀는 게 못마땅했던 김씨는 홍섭의 말에 장단을 맞 춘다. 그러는데 정석이 홍섭에게 물었다. 저 여자, 몇 살이야? 뜬금없는 질문인데다 정석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김씨와 홍섭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다. 얌전한 강아지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딱 너를 두고 하는 말이네. 나이부터 묻다니, 엉큼하긴! 스물 둘이다, 스물 둘! 기똥찬 나 이지. 근데 나인 안 많아도 속이 깊은 아가씨야. 정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흐흐흐 웃겨. 나이 스물 둘에 죽 인 애가 셋이야. 이제 더 죽일 일은 없으니 다행이지 그 텅 빈, 황 량한 스물 둘, 그리고 밝고 맑고 낭랑한 스물 둘, 똑같은 스물 둘의 빛 깔이 저렇게도 다른가. 어쨌든 저 여잔 나보다 어리구나, 정석은 그 생 각에 마음이 놓이는 자신을 보고 스스로도 놀란다. 그러고 보니 처음 영애를 본 순간, 그때 정석은 영애를 자신의 죽은 누이로 착각했던 것 이다. 물론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래, 그랬지, 잊고 있었는데, 다시 영 애를 만나니 일부러 각인시켜 둔 것처럼 그날의 기억이 또렷이 떠올랐 다. 그날은 월급날이었다. 직원들은 회식에 갔지만 정석은 홍섭이 악착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83
같이 붙드는데도 소주병 하나 꿰차고 방으로 기어 들어갔다. 얼마 안 되는 월급이었지만 뭉칫돈이 주어질 때면 누이의 생각이 그를 뒤덮었 다. 아카시아 이파리 같은 돈 뭉치. 일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정석과 누이는 버스 정류장 옆길에 앉아 가위 바위 보로 아카시아 이파리를 떼 어내는 놀이를 하곤 했다. 아카시아 이파리는 따도 따도 있었다. 이게 돈이면 억수로 안 좋겄나, 누이는 말했다. 그러는 누이의 얼굴에 기미 처럼 내려앉던 그늘. 그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 그늘을 지우고 싶었 다. 하얀 아카시아, 무더기로 핀 그 꽃처럼, 그 꽃의 향내처럼 환하게 웃게 하고 싶었다. 누부야, 내가 커갖고 이 아카새 이파리만큼 돈을 벌 끼다, 그라먼 누부야 다 줄끼다, 이층집도 지어줄끼다, 두고 보래, 그 러면 누이는 생글거리며 웃으면서도 핀잔을 주었다. 니가 벌면 그기 다 니 돈이재, 내 꺼가 어데, 니 각시나 실컨 호강시켜줘라 마. 그러면서도 누이는 웃었다. 누이의 웃음은 무더기로 핀 아카시아 꽃무리 같았다. 향기로웠다. 그 월급날은 누이의 기일이기도 했다. 기일이래야 사실 아 무것도 할 건 없었다. 누이의 뼈가 묻힌 부산은 너무 멀었고, 혼자 제사 흉내를 낸다는 것도 부질없었다. 그저 소주에 노가리나 들고 들어가 라 면이나 끓여놓고 취하면 혼자 중얼거리듯 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그의 방식의 제사였다. 이 총각 보게. 불이 꺼져서 아무도 없나 했잖아. 앞방에도 애기들 뿐이고, 쥔아줌만 어디 갔어? 갑자기 복덕방 영감이 부엌문을 밀어 제쳤다. 마침 방문을 연 채 앉 아 있었던 정석은 고스란히 제 모습을 그 노인네 앞에 드러내고 말았 다. 그는 짜증이 일어 노인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다른 경우에는 성정 이 사나워지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혼자 있는 자신을 방해하거나, 자신 8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의 세계 속으로 예고 없이 들어오는 무례함 앞에서는 언제나 이성을 잃 을 만큼 격분하는 그였다. 그런데 영감의 등 뒤로 갸웃이 고개를 내미 는 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앞방의 불빛에 비친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술탓이었던지 그는 그 여자를 누이 가 살아 돌아온 걸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금세 정신을 차리고 보 니 처음 보는 여자였다. 누이하고 닮은 얼굴도 아니었다. 어딘가 눈빛 이 누이를 떠올리게 하는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해사한 얼굴이었 다. 갸름한 얼굴에 사내아이처럼 짧게 자른 머리, 뒤에서 비치는 불빛 탓인지 머리 빛깔과 눈빛이 유난히 짙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 여자 가 먼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치약처럼 싸한 웃음 이었다. 그 역시 얼결에 고개를 숙였다. 아, 참, 서로들 인사하지. 요 옆에 옆방에 새로 들어올 아가씨야. 아가씨가 들어오니까 총각도 좋지? 거 참, 불이나 켜고 술을 마시지, 젊디젊은 사람이 이게 웬 청승이야? 그나저나 이거 낭팰세, 어쩌나? 복덕방 영감이 너스레를 떠는 동안 그는 어느새 술이 확 깨어버렸다. 괜찮아요, 이 방하고 똑같이 생겼댔죠? 그럼 됐어요. 아저씨한테 계약금 드리고 갈게요. 그래그래, 더 볼 것도 없어. 20에 4만 원짜리 방은 눈을 씻고 찾아 도 여기뿐이니까. 요새 이런 집이 어디 있나? 겉보기는 이래도 이런 데 가 속 편한 거야. 신간 좀 편하자고 어먼 데다 돈 쓰는 것처럼 바보짓 도 없다구. 부엌문 닫아걸면 제 혼자 밥을 해먹든 떡을 해먹든 상관하 는 사람 없구. 딱 아가씨가 찾던 집이라구. 이런 구옥도 이제 남은 데가 없어.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하는데, 잘 생각했어. 이 아가씨가 보기보다 야물딱스럽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85
복덕방 영감의 목소리가 당장에 밝아졌다. 영감은 정석을 보며 히죽 웃어보이고는 부엌문을 닫았다. 영감의 얼굴과 여자의 얼굴이 동시에 사라졌다. 그녀는 다음 날 이사를 왔다. 마침 담배 사러 나간 길에 정석은 이불 보따리랑 세간살이가 든 라면 박스를 택시에서 내려놓는 그녀와 마주 쳤다. 그는 말없이 다가가 짐을 들어주었다. 그녀는 직장을 구하는 중 이라면서 김영애라는 자기 이름도 말했다. 방에 들어서며 그녀는 또 고 개를 까딱하며 생긋 웃었다. 예의 치약처럼 싸한 웃음. 그 여자를 여기 서 또 만났다. 뜻밖인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별달리 반가울 것은 없었다. 단지 그녀를 볼 때마다 자꾸 누이가 연상되는 점이 걸렸을 뿐 이다. 홍석에게 대뜸 나이부터 물은 것도 그런 연유였다. 영애는 앳된 모습이었지만, 만에 하나, 나이까지 자기보다 많다면 어쩐지 기묘한 기 분이 될 듯싶었다. 홍섭은 단지 젊은 여자를 밝히는 남자의 속성으로 그 질문을 이해했지만, 정석은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내가 지원사격 해줄 테니까 잘해 봐! 홍섭이 카드를 찍고 막 들어서는데, 마침 은희와 친구들이 우르르 몰 려나왔다. 어머, 멋쟁이 홍섭씨! 안녕하세요? 정미가 소리치자 저마다 한 마디씩 놀려대기 시작했다. 그새 눈썹이 더 짙어졌네! 애인 있으면 차버리고 나한테 와요! 홍섭씨 보고 싶어서 나, 병났는데! 넉살 좋은 홍섭이었지만 몰려서 떠들어대는 여자들은 감당을 못 하겠 던지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 마침 정석을 발견한 정미가 반가워하며 외 8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쳤다. 얘, 은희야, 너희 낭군님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계시다! 그 말에 은희가 친구들을 밀치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검은 원피스를 입은 은희의 늘씬한 모습 앞에 정석은 숨이 막혔다. 청바지에 하얀 모자를 썼던 그 날의 건들거리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놀라웠다. 어제야 종일 거의 알몸으로만 방안에 서 뒹굴었고, 오늘 아침에는 먼저 가라고 밀어내서 따로 출근을 했다. 정석은 당연히 청바지에 하얀 모자를 썼던 그 건들거리는 은희만 생각 하고 있었다. 검은 원피스를 입으니 그 희미한 갈색의 눈동자는 더욱 더 어렴풋하게 보였다. 정석은 자기도 모르게 은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은희는 얼른 그 손을 받아 제 허리에 감더니, 고개를 돌려 친구들에게 잘 가라는 손짓을 했다. 모두들 두 사람의 분위기에 약간 멍해진 채 그 들이 나가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완전히 영화 찍네, 영화 찍어! 내 참, 아니꼬워서 봐줄 수가 없잖 아? 정미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한 마디 한다. 허허, 저 총각, 큰일 났네. 김씨도 고개를 흔들며 말한다. 홍섭이야말로 어찌나 놀랐는지 입까 지 벌린 채 멍하니 서있다. 아, 안 들어가고 뭐해? 얌전한 강아지 뭐 어쩐다고, 자네가 안 그 랬어? 김씨가 호통을 치자 그제야 홍섭은 머리를 긁으며 들어갔다. 다부진 중키에 운동으로 딱 벌어진 넓은 어깨를 가진 그의 뒷모습 뒤로 딸깍, 문이 닫혔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87
공단거리는 온통 술집, 나이트 홀의 네온사인으로 번쩍거렸다. 공장 마다 교대시간이거나 잔업이 끝날 시간이라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버스 정류장 앞에는 호떡장수들이 진을 치고 있고 그 앞에는 퇴근길의 여공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우리 호떡 하나씩 먹고 가자. 정석의 팔을 끌며 은희는 벌써 호떡 수레 앞으로 다가갔다. 은희는 옷에 묻을 새라 엉덩이를 뒤로 빼고, 팔을 앞으로 내민 채 조 심스레 호떡을 베어 문다. 섹시하고 성숙해 보이는 검은 원피스 차림의 아가씨가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호떡을 먹고 있는 모습이 신기 한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낏흘낏 곁눈질을 했다. 정석 역시 그런 은희 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호떡을 먹으며 슬며시 웃었 다. 날이 추워지면 어머니는 그 동안 이고 다니며 팔던 떡 장사를 그만 두고 호떡을 팔기 시작했다. 정석이 다니던 국민학교 바로 앞 골목에다 어머니는 호떡 수레를 세워 놓고 팔았다. 그 근방에는 공장도 꽤 몰려 있어서 장사가 제법 잘 되었다. 누이는 일부러 자기 친구들을 데리고 어머니에게로 몰려갔다. 물론 엄마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야 호떡 값을 받기가 좋았다. 하긴 엄마라고 해도 아무도 곧이듣지 않을 정도로 어머니는 폭삭 늙어 있었지만. 그러나 정석은 절대 어머니가 호떡 파는 곳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기 웃거리기는커녕 어머니가 지나가는 그를 보고 소리쳐 불러도 돌아보지 도 않고 마구 뛰어 달아났다. 아이구, 저 자식, 호떡 파는 게 어드러하다구 저러나 늙은 어머니는 나란히 늘어선 다른 호떡집 아주머니와 소리 내어 웃 으며, 달아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들이 8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자신을 부끄러워한다고 해서 괴로워하기에는 세상의 풍파를 너무 겪었 다. 어머니에게는 낯선 남쪽 땅에 내려와 뒤늦게 얻은 두 아이를 굶기 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젊 은 시절 북쪽에서 낳았던 자식 셋을 피난길에 모두 잃은 그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바쳐 남은 두 자식을 지켜내려 했다. 그러나 그것조 차 그들에게는 너무 큰 희망이었던가. 누이의 죽음은 결국 그의 부모에 게서 마지막 남은 삶의 기력마저 앗아가 버렸다. 호떡집에서 나온 정석과 은희는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정석은 끊이 지 않고 여자를 상대해왔지만 깊이 빠져들지 않도록 늘 거리를 두어왔 다. 그는 깊은 인연, 그러니까 서로의 몸만이 아니라, 그게 넋인지, 영 혼인지, 무엇인지는 몰라도, 보이지 않는 어떤 파장 같은 것이 겹쳐지 고 스미는 것을 두려워했다. 붙었던 몸은 자석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한 점 빈틈없이 달라붙었어도 떨어지는 순간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존재가 서로 달라붙어 스며들면 끝장이었다. 그것을 분 리시키려면 끔찍한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정석은 자신을 그런 상태로 몰아가는 것이 싫었다. 가벼운 인연이면 족했다. 서로 상처주지 않고, 즐겁고 상쾌하고, 때로는 짜릿한 기억으로 서로 남을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었다. 은희 같은 여자를 만나서는 절대로 안 되었다. 이제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몸 한 구석에서는 아직도 움츠린 채 저항 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사귀려면 차라리 김씨나 홍섭이 강력하게 추천 하는 김영애 같은 여자와 사귀어야 했다. 그녀의 낭랑한 음성과 생긋, 눈부시게 웃는 얼굴, 정석과는 결코 한 종족일 수 없는 여자, 그런 여자 라면 결코 매몰될 일이 없을 터였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89
하긴 하마터면 그 여자를 좋아할 뻔하기도 했다. 얼핏 누이로 착각했 던 그 순간의 방심에 그만 그녀가 스며들었는지 처음 며칠간 그는 영애 의 방을 향해 촉수를 뻗고 지냈다. 나쁘지 않았다. 소년 시절의 추억처 럼 조금은 유치한 두근거림, 이상하게도 김영애란 여자를 생각하는 마 음은 그랬다. 그러는 자신이 우습기도 했지만 새록새록 즐거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메말라 버짐이라도 필 것 같은 그의 삶에 윤기가 흐르는 기분이랄까. 그러나 금세 그 마음을 끊어낸 것은 누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누이로 인해 시작된 감정이었는데도 누이를 배반하 는 기분이 들었다. 짐승처럼 죽어간 누이, 누이를 떠올리면 그런 감미 로운 감정조차 불경스러웠다. 삶이란 밝고 환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팻말에 큰 글씨로 써서 누이를 향해 들이대는 것만 같았다. 잔인한 일 이었다. 헤헤거리고, 간질거리고, 달콤하고, 눈부시고, 그런 게 삶이라 면 누이의 죽음은 너무도 억울했다. 삶이란 게 그가 매일 만들고 있는 달콤한 초콜릿 같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정석이 김영애를 떠올리는 마 음의 빛깔은 어딘가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는 이제 헤헤거리고, 간질 거리고, 달콤하고 눈부신, 그런 삶의 옷을 입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 런 욕망이 제 속에 있다는 것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누이의 참혹한 죽음이 그를 방해했다. 김영애란 여자는 비록 첫 순간 누이로 착각하긴 했어도 햇살 같은 여자로 보였다. 밝고 따사롭고 행복하고, 불행이 감히 근접할 수 없을 것 같은, 불행이, 참혹이, 그녀 곁에 가 덮 치려 하면 그들을 보고 생긋 웃으며, 누구세요, 할 것만 같은 여자. 그 래서 정석은 그 감정을 정리했다. 차마 누이에게 못할 짓이었기에. 그 감정은 또한 그렇게도 쉽게 정리될 만한 하찮은 것이었다. 그러다 은희 를 만났다. 은희에 대한 자신의 저항은 전혀 다른 성질이었다. 은희는 9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영애의 반대편에 서있는 여자였다. 누이에 대한 배반감은 전혀 주지 않 는. 그러나 이번에 정석은 자신의 매몰이 두려웠다. 구( 舊 )사거리를 벗어나면 큰 길을 따라 쭉 걷는 길이었다. 공장은 내 내 이어졌지만 상점이나 술집이 없었기 때문에 신( 新 )사거리 전까지는 어둡고 한적한 길이었다. 정석이 사는 집은 그 사거리를 지나서 있었 다. 회사부터 치면 20분쯤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걷다보니 어느 새 신 사거리에 다다랐다. 신호등이 막 붉은 색으로 바뀌었다. 사거리를 지나 면 흰 벽이 쭉 이어지는 안양교도소가 나왔고, 교도소의 담장을 따라가 다 길을 건너고 다시 골목으로 접어들면 허술한 바라크 건물인 그 집, 자신과 김영애가 나란히 세 들어 사는 그 집에 다다를 것이다. 신호등 이 다시 녹색으로 바뀌었다. 정석이 길을 건너려 발을 내딛는데, 은희가 그를 붙잡았다. 어딜 가는 거야? 응? 글쎄, 내 방에 가고 있었나? 그러는데 은희는 정석을 잡아끌며 시장 쪽으로 향했다. 술이나 한 잔 사줘. 정석과 은희는 시장통으로 들어섰다. 저기 갈까?. 정석이 황해도집 이라는 간판을 가리켰다. 웬 황해도? 우리 부모님이 황해도 출신이거든. 두 분 다. 부산이 아니고? 부산에서 나고 자랐지, 나는.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91
어휴, 뭐가 그렇게 복잡해? 우리 집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다 원주 토박인데 황해도라니 너무 이상하다. 난 황해도하면 배우 황해 밖에 안 떠오르는데. 전영록 아버진가 그렇잖아? 정석은 말없이 은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빙글거리며 그의 시선을 받는다. 정석은 도무지 그녀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 진짜 의 그녀일까, 이럴 때의 그녀는 영락없이 자신의 팔짱을 끼고 친구들에 게 손을 흔들어대던 바로 그 경망스런 은희였다. 흐흐흐 웃겨. 나이 스물 둘에 죽인 애가 셋이야. 이제 더 죽일 일은 없으니 다행이지 그 스산한 은희는 어디 숨어 있는 걸까. 그러나 그는 경망스런 그 은희 가 더 좋았고, 더 편했다. 그런 은희라면 그도 자신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들이 문을 밀고 들어가자, 뜻밖에 젊은 주모가 그들을 맞았다. 삼 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정갈하고 고운 태가 남아 있는 여자였다. 어 디로 보나 황해도 집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간혹 그런 걸 묻는 분이 있어요. 먼젓 사람 간판을 고쳐달지 못했 을 뿐이예요. 이름을 바꿔야 하는데. 워낙 경황이 없어서 말씨조차도 깍듯한 서울말이었다. 그런 깍듯한 답변조차 습관처럼 몸에 밴 기품대로 답변하는 것일 뿐 손님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은 없어 보였다. 머릿수건에 앞치마에 고무줄 몸뻬 바지를 입고 안주를 장 만하고 있었지만 술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다. 가게의 분위기도 썰렁했다. 드럼통에 양철 덮개를 씌운 흔한 탁자 서너 개가 의자들을 거느리고 놓여있을 뿐이었다. 가운데 있는 연탄난로는 발갛게 달아 있 고, 난로 위에는 술국이 뜨끈뜨끈하게 끓고 있었지만 손님이라곤 구석 에 앉아 있는 등이 구부러진 중년 남자 하나밖에 없었다. 그의 감색 작 업 점퍼는 낡아 헤어져 궁상맞아 보였다. 정석은 단번에 이 술집이 마 9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음에 들었다. 은희 역시 그런 모양이었다. 그녀는 주모를 보더니 갑자 기 말이 없어졌다. 삼겹살로 할까? 순대국을 먹을까? 정석이 의견을 묻는데도 은희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 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삼겹살을 시켰다. 그녀는 주모도 그렇게 물끄러 미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주모가 심상한 얼굴로 묻자 은희는 그녀답지 않게 고개를 숙이며 부 끄러워했다. 주모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반듯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분 위기를 풍겼다. 술을 팔면서도 헤픈 웃음 한번 흘리지 않았다. 그건 그 녀의 단정한 기품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삶에 몹시 지친 탓인 듯했 다. 그녀는 장사꾼답지 않게 모든 것에 무심했다. 감색 점퍼가 안주를 가져온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자 그녀는 손에 붙은 검불이라도 떨어내 듯 아무렇지도 않게 그 손을 떨쳐냈다. 주모란 게 방석처럼 푸근해야 장사가 잘 되는 게야. 그래야 아무나 털퍼덕 편하게 깔고 앉아보지. 이건 원, 부잣집 별당아씨같이 어려우니 인물이 암만 좋아도 사내들이 꼬일 리가 있나, 쯧쯧. 무안해진 감색 점퍼는 정석네가 들으라는 듯이 한참을 구시렁거렸 다. 은희는 지나칠 만큼 명랑하게 지껄이며 홀짝홀짝 술잔을 비웠다. 정석은 말없이 그녀의 얘기를 들어주며 술잔을 채워 주었다. 하얗던 은희의 얼굴이 연시처럼 붉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마시다 말 고 은희가 무슨 생각에선지 벌떡 일어났다. 정석은 화장실에라도 가는 가 싶었는데, 그녀는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주모에게로 걸어가는 것이 었다. 그새 구시렁거리던 감색 점퍼마저 가버린 뒤라 손님이라곤 그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93
뿐이었다. 주모는 아까부터 그렇게 등을 보이고 앉은 채 유리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척을 느낀 주모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는데, 그 녀는 그대로 다가가더니 주모를 뒤에서 덥석 안아버렸다. 깜짝 놀란 주 모가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튀어 올랐다. 그러자 그녀는 죄 지은 사람 처럼 팔을 내린 채 풀이 죽어 가만히 서있었다. 주모는 그런 은희를 바라보다가 정석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 역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인 것을 보자 주모는 다시 은희를 보았다. 언, 언니 은희는 밑도 끝도 없이 주모를 언니라고 부르면서 선 채로 울음을 터 뜨렸다. 주모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가가 은희를 품에 안아 주었다. 언니, 언니 흑흑 주모의 품에 안긴 채 은희는 기어이 통곡을 뱉었다. 정석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그 광경을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 은희가 겨우 울음 을 그치자 주모는 은희를 데리고 정석의 자리로 왔다. 자, 갑자기 아우도 생겼는데 나도 술 한 잔 줘요. 정석이 술을 따르는데, 이번에는 주모가 정석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까 내가 아는 사람을 닮았네요. 정석이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변명을 했다. 그렇게 술자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박순애라고 소개했다. 은희는 실례가 될 정 도로 꼬치꼬치 여러 가지를 물었다. 박순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 지만, 선선히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안 그래도 사연이 많아 보이던 주 모 박순애에게는 실제로 고달픈 삶이 매달려 있었다. 남편이 폭력으로 안양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어 바로 앞인 이곳에 가게를 얻어 생활도 하 고 옥바라지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일곱 살, 다섯 살의 9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남매가 딸려 있었다. 손님이 없는 낮에는 저기 저 구석 드럼통에 앉아 둘이서 소꿉놀이 를 해요. 그럼 난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앉아 있지요. 그럴 땐 꼭 남의 아이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술이 좀 오르자 박순애는 그런 말도 했다. 그때 문이 드르륵 밀리더니 새 손님 하나가 들어온다. 잘 있었수? 내 보고 싶어서 또 왔어. 오늘은 안 올라고 했는데 우 리 순애씨 얼굴이 아른거려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이 밤중에 일부러 차려 입었는지 막 다린 듯한 양복에 넥타이까지 맨 비쩍 마른 남자였다. 전작이 있는지 벌건 얼굴로 그 남자는 박순애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그녀의 얼굴이 한 순간 구더기라도 삼킨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녀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자기 앞의 술잔을 비웠다. 나, 제육볶음 한 접시하고 소주 한 병 줘. 그 남자는 주방 앞쪽으로 앉으면서 박순애를 보고 말했다. 누구예요? 은희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길 건너 전기 수리상하는 홀애빈데 꼭 저렇게 야밤에 찾아와서 귀 찮게 해요. 박순애 역시 소리를 죽여 말한다. 이봐, 순애씨, 여기, 제육볶음 달라니까. 그 남자가 소리를 높인다. 박순애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일어서더니 부엌으로 가 안주를 마련한다. 무안해진 남자가 다시 한 번 똑같은 내 용으로 소리를 지르자 그녀는 벌겋게 양념한 돼지고기 접시를 그의 상 위에 말없이 내려놓는다. 그는 얼른 박순애의 팔목을 잡으며 제 옆 의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95
자에 끌어 앉힌다. 좀 앉아봐, 주모라는 사람이 술도 한잔 따르는 맛이 있어야지. 그의 목소리는 이미 꼬부라져 있었다. 박순애는 여전히 입 한번 열지 않고 그의 잔에 술을 따르더니, 동생이 왔어요, 하면서 휙 일어선다. 미 처 그가 잡을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술잔에 입을 대며 혀를 쯧쯧 찬 다. 박순애는 소주 한 병과 안주접시를 새로 챙겨 정석의 자리로 온다. 정석은 술을 따르려는 박순애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그녀의 잔을 먼 저 채워 준다. 그녀는 술잔을 한 번에 들이키더니 정석에게 잔을 넘겨 준다. 애들은 자요? 은희가 묻는다. 응, 저 방에서요. 박순애가 턱 끝으로 안쪽 방을 가리킨다. 창호지 방문이 눈에 들어온 다. 아픈 데는 없이, 탈 없이 잘 커요? 은희는 마치 오래 알아온 아이들인 양 안부를 묻는다. 그런 은희를 보고 박순애는 피식, 웃더니 대답한다. 탈날 게 뭐가 있겠어요? 입으로 들이부으면 뒷구멍으로 쏟으면서 걸러지는 대로 크는 거지. 취한 탓일까, 그녀의 입에서도 제법 걸진 말이 나왔다. 애들 아빤 얼마나 더 살아야 돼요? 아직도 1년 남았어요. 교도관이랑 싸웠대나, 성탄절 특사도 어림 없구 그때 새 손님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세 명이나 되는 일행이다. 노가 9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다 판에서라도 일하는 사람들처럼 얼굴이 구리빛인 젊은이들이다. 그 녀는 힘없이 일어선다. 온몸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정석의 가 슴으로 찬 소주가 내려가는 것 같다. 그의 기억 속의 누이도 저렇게 늘 피곤해했다. 누이가 지상에서 누린 최후의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그런 데도 박순애의 몸에서 묻어나는 피곤이나 누이의 몸에서 느껴지는 피 곤은 흡사했다. 누이가 살아서 박순애처럼 나이를 먹었다면 꼭 저런 피곤을 달고 있었으리라. 그 피곤, 삶의 벅찬 무게 앞에서 휘청거리는 그 모습이 박순애와 누이를 같이 묶어 떠올리게 했다. 누이 생각이 나 자 그는 안주도 집지 않은 채 거푸 술을 들이켰다. 식도를 통해 내려가 는 찬 소주가 하얗게 보이는 것 같았다. 은희도 무슨 생각에 잠겨 있 는지 눈을 내리깐 채 혼자 술잔을 비우고 있다. 그래, 저 여자, 은희, 도망쳐야 돼, 나는 저런 여자를 만나서는 안 되지, 암, 안 되고말 고 정석도 조금씩 취하고 있었다. 취하면 그는 이렇게 머릿속부 터 중얼거림이 시작되었다. 그랬다가 그 중얼거림은 입 밖으로 나온다. 끊임없이 중얼중얼 그래, 김영애가 나와 같은 공장에 다니고 있단 말씀야 밤마다 우리 공장으로 출근하고 있는 것도 몰랐어 괜 찮은 여자라고? 홍섭이랑 김씨 아저씨랑 뭐라도 받아먹은 사람처럼 죄 다 야단이었지. 당신들이 그러지 않아도 이미 내가 점찍어 두었소. 처 음 봤을 때부터. 그만하면 괜찮지. 암 괜찮고말고. 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참한 아가씨지, 그래, 난 그런 여자를 만나야 해. 은희, 저런 년은 안 돼, 저년을 나는 이길 수 없어, 저년한텐 내 심장을 다 파 먹힐 거야, 영애같이, 그렇게 상큼한 년, 그런 년을 먹어야 내가 안 먹히고 살아남 지 정석은 다시 소주를 목구멍에 털어 넣는다. 밤이 깊었는데도 줄 줄이 손님들이 들어왔다. 몇 개 안 되는 자리가 다 찼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97
가자, 이제. 자리도 모자라. 은희가 먼저 일어서며 정석을 일으켰다. 참, 오늘따라 웬일인지 모르겠네요. 그들이 나오는 걸 보고 미안한 듯 순애가 말했다. 5천원만 내요. 뒤에건 내가 낸 거니까. 박순애는 사무적으로 돈을 받았다. 가 봐요! 그렇게 고개 돌려 한 마디 하고 박순애는 뒤돌아 일에 매달린다. 그 녀의 뒷모습은 여리여리해서 처녀처럼 보였다. 저 꼬라지에 이만큼이 라도 손님이 모여 준다면 다행이지. 정석은 혼자 또 풀풀 웃으며 은희 가 이끄는 대로 끌려 나갔다. 앉아 있을 때는 취기가 돌아 어룽어룽했 는데, 일어나 나오니 그런 대로 걸을 만했다. 기분이 썩 좋았다. 너, 많이 취했어. 은희가 정석을 붙잡으며 말했다. 은희, 이년아. 우리 누나가 죽은 지가 벌써 12년이야. 어머니도 따 라 죽었으니까 12년, 아버지는 그 다음해 갔으니까, 거기서 하날 빼서 11년 정석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웅얼거렸다. 은희는 그 모습을 흘낏 보더 니 킥킥 웃었다. 뭘 웃어, 이 못된 년, 난 온통 귀신들을 바글바글 끌고 다닌다구. 아마 내 뒤엔 귀신들이 일렬종대로 졸졸 따라오고 있을 걸. 어디 뒤돌 아볼까, 꺼억 정석은 발을 멈추고 뒤로 휙 돌아선다. 불 밝히고 북적거리는 포장마 차들만이 줄지어 서있다. 9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히히, 귀신들도 술 마시는 시간이야. 정석은 계속 히죽거리며 길을 걷는다. 술기운이 기분 좋게 퍼지고 있 었다. 정석은 끝없이 웅얼웅얼하고 있었다. 꼭 비 맞은 중 같네, 뭘 그렇게 혼자 끝도 없이 씨부렁거려? 보통 땐 말도 되게 없더니, 참. 은희가 핀잔을 준다. 술만 취하면 정석은 누가 옆에 있든 혼자 중얼 거렸다. 술만 취하면 그는 길가의 풀에게도, 지나가는 떠돌이 개에게도 말을 걸었다. 그것이 그의 술버릇이었다. 은희는 그런 그의 중얼거림을 들으면서 기가 막히다는 듯 몇 번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횡단보도를 건 너고 또 건너자 하얀 망루가 등대처럼 서 있는 안양교도소가 눈에 들어 왔다. 불빛에 망루는 흰 옷을 입은 유령처럼 보였다. 그래, 귀신들은 여기 다 있어. 이 안에 있는 놈들이 죽인 귀신도 우 글거릴 거고, 여기서 죽어나간 귀신들도 차마 발 떨어지지 않아 뱅뱅 맴돌고 있을 거구. 정석이 또 웅얼거렸지만, 이제 은희는 저 혼자 생각에 잠겨 있다. 두 사람은 교도소의 담을 따라 천천히 걸어간다. 이상한 교도소야, 도둑놈, 살인자가 우글거리는 교도소를 이렇게 제일 번화한 사거리 가운데다 딱 놓다니, 그러다 잘못해서 감옥 문이 열려봐, 큰일 아냐? 정석은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중얼거리며 걷고 있다. 그러다 저 속에 박순애의 남편이 있다는 생각이 불쑥 난다. 하이고, 여기가 누님 댁인데 갑자기 그곳이 박순애의 집 같다. 정석은 그 속에 갇혀 있을 얼굴도 못 본 남자에게 괜한 친밀감을 느낀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99
자형, 잘 주무시구려. 교도소의 흰 망루를 향해 꾸뻑 절을 하는 그를 보고 은희는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미쳤어, 정말. 나도 미친년이지만 정석이 너도 참 알고 보니 미친 놈이야. 잘 만났네. 미친년하고 미친놈하고 조금 더 올라가자 다시 횡단보도가 나왔다. 씨발, 웬 찻길이 이렇게 많어. 술 처먹고 까딱하단 철길 위에 납작 해진 개구락지 신세 되겠구만. 좆겉은 세상. 술기운이 돌면 정석은 중얼거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입도 걸어졌다. 끝도 없이 자꾸자꾸 욕을 했다. 길을 건너자 얼핏 지나치면 보이지도 않을 좁은 골목이 하나 쑥 뚫려 있다. 그 골목 끝에 정석이 사는 방이 있었다. 날이 많이 서늘해졌다. 목에 닿는 밤바람이 오싹했다. 정석은 팔을 내밀어 은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검은 원피스만을 입은 은희는 떨고 있었다. 골목에는 그 흔한 외눈알의 전등 하나 서있지 않았다. 하지만 창마다 불빛들이 새어나와 발을 딛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근방에서 유일하게 구옥이 남아있는 이 골목의 집들은 낡을 대로 낡아 낮에 보면 허름하기 짝이 없었지만, 밤 의 불빛 속에서는 그런 대로 정답게 보였다. 골목의 막다른 곳에 있는 대문도 없는 무허가 슬레이트집이 정석이 사는 집이었다. 집이라고 부르기도 모호한 건물이었다. 방 한 칸을 짓 고, 한참 잊고 살다가 또 생각난 듯 한 칸씩 열차 칸처럼 이어 붙인 듯 한, 집이라기보다는 그냥 방들 이라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리는 괴상한 건물이었다. 주변의 건물들이 80년대 중반 수도권 위성도시의 위용에 맞게 조금씩 용트림을 하며 바야흐로 겉모습을 바꿔가고 있는 것에는 10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아랑곳하지 않고, 그, 집도 방도 아닌 건물은 안채에선 난리굿이 벌어 지든 말든 골방에서 코를 골며 잠들어 있는 종년처럼 그렇게 우두커니 50년대나 60년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모습으로 버티고 서있었다. 대문도 없는 입구 앞에 섰을 때 갑자기 은희가 걸음을 멈추었다. 들어가. 난 안 들어갈래. 정석이 깜짝 놀라서 은희를 붙잡는다. 같이 들어가. 이 밤중에 어딜 갈려고? 걱정 말고 들어가. 나, 순애언니한테 갈 테니까. 거길로 다시? 응. 정석은 몸을 돌린다. 그럼 내가 데려다 주지. 은희가 다시 소리를 죽여 킥킥거리며 웃는다. 웃기지 말어. 그럼 내가 또 데려다 줘야 되잖아? 취해 갖고 비틀거 리는 주제에. 바로 요 앞인 걸. 혼자 갈래. 얼른 들어가. 정석은 돌아서서 은희를 본다. 아까 저 옷을 입고 나온 모습을 보았 을 때 숨이 막혔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러지 말고 나랑 자. 너, 보내기가 싫어. 혼자 자기 싫단 말야. 그러면서 정석은 은희를 불쑥 껴안았다. 은희는 순순히 안기면서 그 의 입술에 따뜻한 키스를 해준다. 그는 그녀를 더 힘주어 안는다. 온몸 이 달아올랐다. 그의 손이 어느 새 그녀의 엉덩이를 주무른다. 그녀의 손도 그의 아랫도리로 온다. 그녀의 손이 닿자 정석은 더욱 미칠 것만 같다. 그런데 갑자기 은희가 정석의 아랫도리를 힘주어 세게 비튼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01
아얏! 정석은 불시의 급습에 아랫도리를 움켜쥐며 떨어져 나간다. 히히, 꼴좋다! 내가 니 맘대론 줄 알아? 난 오늘 순애 언니한테 가 고 싶단 말야. 그런데 왜 보채고 야단이야? 그렇게 꼴리면 니 손으로 혼자 풀고 자라구! 병신 같은 게. 은희는 정석의 얼굴에 다시 한 번 소리 나게 입맞춤을 해주고는 홱 돌아 골목길을 나가버린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화도 나고 어이도 없어서 정석은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다 집으로 들어섰다. 집으로 들어서자 양 옆으로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방들이 일제히 그 를 향해 노란 불빛을 내뿜었다. 자그마치 여덟 세대가 모여 사는 집이었 다. 네 칸씩 서로 마주보고 있는 그 집의 방 여덟 칸에는 칸마다 다른 집 들이 살고 있었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방들 사이론 양쪽의 처마 끝이 만나면서 사람 둘이 겨우 빠져나갈 만큼 좁은 통로를 만들고 있었고, 그 통로의 흙바닥에는 비오는 날에도 신발이 더럽혀지지 않게 네모난 시멘 트 블록이 징검다리처럼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그 징검다리의 끝에는 여덟 세대가 함께 쓰는 공동수도가 있었고, 그 옆께로 장독대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방마다 한참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지 떠드는 말소리 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먼 나라의 나팔 소리처럼 퍼져 나왔다. 왼쪽 첫 방인 영애의 방과 셋째 방인 그의 방만 어둠 속에 잠겨 있었 다. 정석은 영애의 방 앞에 가만히 서 보았다. 자물쇠가 잠긴 어두운 방. 에이, 씨팔. 니년이나 있으면 데꼬 잘까 했더니 말야. 그래, 니년은 지금 좆빠지게 일하고 있겠네. 아냐, 아냐, 니년은 빠질 좆도 없지, 히 히. 10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그러다 정석의 눈에 영애의 방에 걸린 커다란 자물쇠가 들어온다. 그 는 물끄러미 선 채로 그 자물쇠를 만져 본다. 갑자기 술이 깨는 기분이 었다. 나무 기둥에 박힌 이런 자물쇠는 하등의 역할도 할 수 없다. 방마 다 이런 자물쇠들을 걸어 놓기는 했지만 자기들부터도 열쇠를 잃어버리 면 장도리로 경첩을 통째로 따기가 일쑤였다. 그것은 그저 주인이 없다 는 것을 알려주는 허울 좋은 장식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허 술해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딸 수 없다. 다시금 그의 심장 속으로 예리한 통증이 뚫고 지나갔다. 정석은 힘없이 자물쇠에서 손을 뗀다. 드르륵, 맞은편의 주인 방 부엌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니 거기 서서 뭐하고 있어? 그 아가씨 요새 야근이야. 주인집인 종태 엄마였다. 아, 아니요. 그저 잠깐 참, 이달치 월세 드릴게요. 며칠 늦었 죠, 꺼억 죄송함다 마침 월세 낼 생각이 난 게 다행이었다. 정석은 얼른 지갑을 꺼냈다. 손이 헛놀아서 돈이 잘 세어지지 않았지만 간신히 4만원을 꺼냈다. 종 태 엄마는 기가 막힌지 그 돈을 건네받으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참,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이겠네. 내가 꼭 돈 받으려고 말 붙인 거 같잖아? 지금이 몇 시야? 새벽 2시에 월세 내는 건 또 뭘까? 괜히 그 방 앞에 있는 게 들켜서 그러지? 술 한 잔 해놓고도 숫기 없기는 총각이 처녀한테 관심 갖는 게 뭐가 그리도 부끄러우실까? 그러니 꽁 생원을 못 벗어나지 잘해봐, 난, 사람 많이 겪어봐서 잘 알아. 저 아가씬 드문 아가씨라구. 하긴 안팎이 다르게 만나야 하는데 어찌 보면 둘이 판박이 같은 데가 있어 그것도 걱정이긴 하지만, 후훗.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03
아니, 그런 게 하다 말고 정석은 고개를 꾸뻑하고는 제 방 앞으로 갔다. 또 김영애 칭찬이군, 오늘은 아주 세상이 작당을 했어, 작당을. 정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종태 엄마의 뒤로 방에서 남편이 찾는 소리가 들린다. 물이라 도 달라는 모양이었다. 아휴, 저 버릇, 물 한 접시 제 손으로 안 떠먹으니, 노가다 십장 버 릇에 내가 죽어나. 투덜대며 들어가는 종태 엄마의 뒤로 미닫이 부엌문의 마찰음이 기분 좋게 퍼져 나갔다. 제 방 앞에 선 정석은 문득 종태 엄마의 말을 되씹는다. 둘이 판박이 같은 데가 있어 그것도 걱정이긴 하지만 우리가 판박이 같은 데가 있다고? 썩은 동태눈깔도 그보다는 잘 보겠다. 그 여자하고 나하고는 종자가 틀려. 전혀 다른 족속이올시다. 생긋, 햇살같이 눈부신 웃음, 치 약처럼 싸한 그 웃음에는 한 점의 그늘도 묻어 있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 누이로 착각했음에도 그랬다. 하긴 누이도 선량하고 밝은 여자였다. 단지 누이의 삶이 참혹하고 어두웠을 뿐이다. 누이까지 어두워지기 전 에 죽음이 누이를 채어가 버린 것뿐. 그러나 살아남은 그는, 아직 죽음 이 채가지 않은 그는, 이제 어둠에 뿌리까지 절었다. 영애의 밝음과 자 신의 어둠. 밝음과 어둠의 어느 요소가 판박이같이 닮을 수 있을까. 정 석은 자물쇠 따윈 걸어놓지 않은 자신의 부엌문을 드르륵 호기롭게 밀 고 안으로 들어간다. 귀퉁이에 있는 백열전구의 스위치를 비틀어 불을 켜자 아궁이 곁으로 무언가 스르르 사라졌다. 이 추운 날씨에도 따뜻한 아궁이 곁에서 목숨을 이어가는 벌레가 있었나 보다. 정석은 방문 미닫이를 밀고 작업복 점퍼를 벗어 던진다. 연탄불도 들 10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여다본다. 불은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새 탄 에 불을 옮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얼른 재가 된 탄을 꺼내고 새 탄 을 넣었다. 술에 취했어도 연탄불 구멍은 그림같이 잘 맞추었다. 그는 연탄불 위에서 끓고 있는 양동이의 물을 대야에 받고, 거기다 구석에 놓인 다른 양동이의 찬물을 섞어 얼굴을 씻고 발을 씻고, 양치질을 했 다. 아무런 잡념 없이 말끔한 기분으로 잠들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방으로 들어가 스위치를 켜자 형광등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켜졌다. 방은 따뜻했다. 정석은 속옷 바람으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아, 좋다, 좋아. 김영애의 검은 눈이 떠올랐다. 유난히 검다는 느낌을 주는 사랑 스러운 눈. 자그맣고 가는 몸매, 귀염성스러운 해사한 얼굴. 은희의 눈 동자는 갈색이고 투명했다. 의안처럼 자기를 보면서도 늘 먼 곳을 보는 눈. 자신이 그곳에 없는 양 자신을 뚫고 지나가는 그 시선. 그는 누운 채 손사래를 쳤다. 은희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괘씸한 년, 싫어. 넌 저리가. 난 저 여자를 택할 거야. 넌 저리 가라 구. 난 니 년이 꼴 뵈기 싫어. 싫단 말야. 확대된 화면처럼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두 여자의 겹친 눈동자 는 서서히 줄어들면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여체가 그의 뇌리를 덮었다. 그러나 정석은 그 몸이 서은희의 것인지 김영애의 것인 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아니 누구라 도 좋았다. 알몸의 여체는 그의 몸을 뜨겁게 만들었고, 그는 불붙은 자 신의 몸을 분출시키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미친 놈, 은희 그년이 시키 는 대로 하고 있군, 낄낄.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아직도 은희에게서 끊임없이 도망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05
4. 깊고 짙은 위로 늦게 온 손님들은 또 그만큼 빨리 빠져나갔다. 술을 다 마시고도 꾸 물거리고 있던 마지막 손님들은 문 닫을 시간이라고 등을 떠밀어 내보 냈다. 순애는 한숨을 몰아쉬며 문을 안으로 잠근다. 몸이 무겁다. 하지 만 뒷설거지를 해놓아야 잘 수 있다. 새벽에는 또 수산 시장에 해물을 사러 가야 했다. 시장에 다녀오면 해는 하늘 한가운데 뜰 것이다. 그 환 한 햇볕 속에서 심란한 주방을 보는 일은 자신의 지금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아 정나미가 떨어졌다. 아무리 넋 놓고 사는 삶이었지만 그 녀는 그것만은 싫었다. 순애는 벽에 걸린 비닐 앞치마를 꺼내 앞에 두른다. 잠시 앉아서 쉬 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랬다간 정리를 못하게 된다는 걸 잘 알 고 있었다. 상에 남아 있는 그릇들을 쟁반에 담아 옮기고, 행주로 닦아 냈다. 그런 다음 비를 들고 바닥을 쓸어냈다. 다행히 오늘은 바닥에 토 해 놓거나 가래침을 뱉은 손님들이 없었다. 그것만 해도 운이 좋은 날 이라 해야 할 것이었다. 개수대에 가득 쌓인 그릇이 한숨부터 나오게 만들었지만 순애는 느릿느릿 걸어 그 앞으로 간다. 오늘은 어떻게 보냈는가, 어떤 손님들이 왔던가, 아무 생각이 없었 다. 방 앞의 연탄보일러 위에 올려놓은 물통을 개수대로 들고 온다. 삼 겹살이나 제육볶음 그릇은 뜨거운 물이 아니면 지지 않았다. 고무장갑 을 끼고 기름 묻은 그릇들에 뜨거운 물을 끼얹었다.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기계적으로 그릇을 닦는다. 오늘이 며칠인지, 오늘 매상이 얼마인 지, 순애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쉬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채우 10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릇을 닦는 손길이 빨라지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사는 것 전체가 뒷설거지처럼 고된 일이었다. 아니 뒷설거지야말 로 사는 일 중에서 가장 수월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 순애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보나마나 머리끝까지 취한 주정뱅이가 술을 내놓으라고 고함을 쳐댈 것이다. 저런 놈은 상대를 안 해주는 것이 상책이란 것을 순애는 잘 알 고 있었다. 순애는 말없이 설거지만 계속 했다. 단지 잠든 아이들이 깰 까봐 마음이 쓰였다. 언니, 언니! 순애는 수도꼭지를 잠근다. 여자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언니, 나야, 은희야. 순애는 얼른 문을 열어준다. 문 밖에는 아까 정석과 함께 나간 은희 가 혼자 서있었다. 이 아이는 대체 또 왜 온 것일까. 언니, 나 좀 재워줘요. 정석이랑 자려다가 언니 옆에서 자고 싶어 서 도로 왔어요. 순애는 기가 막혔다. 아까는 술 마시고 응석 부린다 싶어 받아 줬지 만 이렇게까지 엉기는 건 딱 질색이었다. 하지만 이 밤중에 내쫓을 곳 도 없었다. 들어와요! 은희는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온다. 순애는 문을 잠그고 돌아서서 은희를 본다. 도대체 언제 본 사이라고 이렇게 오두방정을 떠는 걸까. 짜증이 울컥 치밀었다. 난 정리를 해야 되니까 먼저 들어가서 자요. 자리는 펴놨으니까. 냉기가 도는 목소리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07
아냐, 언니랑 같이 들어갈래요. 여기 앉아 있을게요. 순애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하던 설거지를 마저 한다. 그 동안 순애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은희 역시 더 이상은 말을 시키지 않는다. 일을 다 마치자 순애는 식당의 불을 끄고 방문을 연다. 은희는 조용 히 일어나 따라 들어온다. 순애가 불을 켜자 두 어린 것이 이불을 내친 채 엉켜 잠들어 있는 모습이 드러난다. 은희는 가만히 선 채로 그 아이 들을 내려다본다.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무릎을 구부리고 아이들의 얼 굴을 살며시 쓰다듬는다. 순애는 서랍을 뒤져 은희에게 편하게 입을 내 리닫이 치마 하나를 꺼내준다. 은희는 그 자리에서 스스럼없이 옷을 훌 훌 벗어 던지더니 그 옷으로 갈아입는다. 쭉 빠진 아름다운 몸이라고, 순애는 무심코 생각한다. 순애와 은희는 불을 끄고 나란히 누웠다. 언니, 미안해요. 은희가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요. 얼른 자요. 난 또 새벽에 나가야 되니까. 그렇게 누워 있자니 순애는 은희란 아이가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내 무엇이 이 아이의 마음을 끈 것일까. 마음의 상처가 깊은 아이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아까 가슴에 안겨 통곡을 터뜨렸을 때 순애는 자신의 가슴까지 찢어지는 듯했다. 그래서 평소의 냉정했던 태도를 허물고 그네들과 허물없이 술자리를 같이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뿐, 그들의 고통이 아무리 깊은 것인들 순애는 상관하고 싶지 않았 다. 자신의 삶조차도 의미가 없어 질질 끌려 사는 주제에 남의 삶까지 퍼담을 오지랖은 없었다. 가끔 술집에서 울음을 터뜨리거나 자신에게 하소연을 하는 손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장소 10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를 가릴 리 없었다. 피는 그렇게 아무 곳에서나 흐르는 것이었고,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자신은 그 피를 닦아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랬기에 은 희네가 나간 다음 순애는 그들을 잊었다. 순애에게는 오히려 정석이 한 남자를 생각나게 했다. 무심코 자리에 앉다가 순애는 그를 보고 조금 놀랐다. 그는 순애의 첫 남자를 닮았다. 가슴 속으로 서늘한 것이 지나 갔다. 하지만 감정이란 걸 표현한 지가 워낙 오래된 탓일까. 순애는 조 금도 내색하지 않고 술을 마셨고, 기실 그 사실을 금방 잊었다. 이미 잊 은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은희가 찾아와 이렇게 한 이불 속에 누워 있으려니 새삼스레 그 남자가 떠올랐다. 부드럽고 자상한 남자였다. 순애를 떨어 지기 쉬운 연한 꽃잎 다루듯 소중히 대해주던 사람, 그녀를 보기만 해 도 저절로 입이 벌어져 환히 웃던 남자, 만나고 있으면 내내 그 웃음을 지우지 못하던 남자, 한 인간이 자신으로 인해 이렇게도 행복해 할 수 있는가, 신기한 생각까지 들게 하던 사람. 그렇게 자상하고 부드러운 남자가 어쩌다 깡패에게 걸려 한 쪽 다리를 못 쓰게 됐다. 순애에게 그 것은 아픔이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허물어내는 장애가 될 수는 없었 다. 그러나 그 남자는 달랐다. 부드럽고 자상한 사람이 빠지는 함정, 그 는 그녀의 마음을 지나치게 넘겨짚었다. 그리고 그녀의 미래를 지나치 게 걱정했다. 그게 그녀를 위하는 길이라며 그녀를 냉정하게 잘라냈다. 그래, 잘난 당신, 이게 당신이 그렇게 배려한 미래의 내 꼴이야, 순애는 자조적으로 웃는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게 어찌 그의 탓이겠는가. 자신 을 생각한다며 오히려 자신을 밀어내는 그에 대한 오기로 순애는 바로 그의 한쪽 다리를 잘라내게 만든 그 포악한 남자에게 보란 듯이 몸을 맡겼다.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그 남자 앞에서 충분히 불행해진 자신의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09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그래서 그가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망, 그것은 어느 악마가 불어넣은 아둔하기 짝이 없는 독기였을까. 그렇게 해서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 부드럽고 자상한 남 자는 순애가 충분히 불행해진 모습을 보이기도 전에 달리는 기차에 몸 을 던져 죽어 버렸다. 그것조차도 자신을 행복하게 하려는 배려였을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으니까. 그리고 자기는 지금까지 저 포 악한 남자의 손찌검 밑에서 끝없는 노름빚 감당과 옥바라지를 천형처 럼 묵묵히 받아내고 있다. 피곤하고 피곤한 삶, 저 포악한 남자가 자기 에게 낳게 한 두 마리의 순한 아이들조차 자신을 이 피곤한 삶에 동여 매기에는 약했다. 그녀가 지금 이렇게나마 삶을 버티고 있는 건 오로지 청춘의 그 불같은 어리석음에 대한 회한의 힘인지도 몰랐다. 순애의 그 런 첫 남자를 정석은 닮았다. 그러다 순애는 설핏 잠이 든다. 잠결에 움직임이 느껴져 눈이 떠졌 다. 깨어보니 은희가 소리를 죽인 채 울고 있었다. 어찌나 이를 악물 고 울고 있는지 소리는 들리지 않고 몸만 들썩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안쓰러워 순애는 가만히 은희를 끌어 아까처럼 가슴에 안아 주 었다. 은희는 스러지듯 순애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 은희의 절절한 울 음 탓인가. 아니면 모처럼 지난 인생을 돌이켜 본 회한에 가슴이 쓰라 렸던 탓일까. 어느 새 순애도 자기 슬픔에 울음을 쏟고 있었다. 그랬 다. 울어본 것도 언제인지 몰랐다. 우는 것조차도 열정이 필요한 일이 었다. 순애는 자신이 오랫동안 울음마저 잊고 살아왔다는 것을 무섭게 깨닫는다. 어둠 속에서 두 여인은 그렇게 부둥켜안은 채 울었다. 순애의 눈물 이 은희의 머리를 적시고, 은희의 눈물이 순애의 목으로 흘렀다. 순애 11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는 은희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은희가 피 흘리며 제 품 안에 뛰어 들어온 노루 새끼처럼 여겨졌다. 은희는 젖을 찾는 아이처 럼 순애의 가슴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순애는 무심코 은희의 입 술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러자 은희의 혀가 순애의 입안으로 파고들었 다. 순간 순애는 깜짝 놀라 몸을 떨며 은희를 밀어내려 했으나 은희는 그녀를 잡아당기며 더 깊이 파고들었다. 이상했다. 순간 순애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접촉이 너무도 따듯해서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은희는 순애의 눈물에 뺨을 비비며 순애의 앞가슴을 열고 맨살에 얼굴을 비볐 다. 순애는 그러는 은희를 내버려두었다. 은희는 순애의 젖가슴을 만지 고 입을 맞추었다. 온몸이 따뜻한 물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순애 역시 어느 새 그 아름다운 은희의 온몸을 부드럽게 애무하고 있었다. 그 밤, 두 여인은 얽힌 채 피 흘리는 두 마리의 노루처럼 그렇게 서로 를 위로했다. 순애는 문득, 철길에 제 몸을 던져 죽은, 노루처럼 순한 그 남자가 피 흘리며 지금 자기에게 온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 멀리 어디선가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은희는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일어나 불을 켰다. 이미 순애의 자 리는 비어 있었다. 그러자 머리맡에 놓여 있는 자리끼가 보였다. 방금 바깥에서 떠온 것처럼 사발의 물은 차가웠다. 순애가 나가면서 갖다 둔 모양이었다. 찬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역시 순애가 덮어주고 나갔는지 아이들은 목까지 이불을 얌전히 덮은 채 잠 들어 있었다. 은희는 잠든 아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일곱 살짜리가 누나고, 다섯 살짜리가 남동생인가 보았다. 두 아이가 다 같은 모형으로 뜬 인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11
형처럼 속눈썹이 길고, 뺨이 볼록했다. 겨울바람에 실컷 놀아서인지 그 볼록한 뺨이 터서 까끌까끌해 보이는 것까지 똑같았다. 순애의 어둡고 차가운 분위기와는 달리 아이들은 제과부에서 갓 구워낸 말랑말랑한 고급 쿠키처럼 부드럽고 따뜻해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은희는 손을 뻗 어 아이의 볼록한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잠결에 아이는 코를 찡그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은희는 얼른 손을 떼어내고 혼자 미소를 지었다. 아이를 좋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도 깔끔하고 새침하던 언 니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똥 기저귀를 갈고, 포대기에 아이를 질끈 업고, 시장바구니를 든 채로 언제나 똑같이 라면처럼 꼬불거리는 파마 를 하고, 우는 아이를 쥐어박고 하는 모습들에 은희는 진저리를 쳤다. 유난히 깔끔하고, 가꾸기를 좋아하는 은희에게 그런 모습은 혐오스럽 기만 했다. 처음 어린 나이에 잘못해서 아기를 가졌을 때는 갈등 한번 하지 않 고, 산부인과로 갔다. 열아홉 살 때의 일이었다. 제 몸 안에 무언가 살 아있는 것이 생겼다는 게 회충이나 촌중이 생긴 것처럼 끔찍했다. 그 일은 30분도 안 걸리는, 아주 간단한 일이라는 말을 때마침 어느 소설 속에선가 읽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막 입덧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다 뚝 떨어진 그 아이는 막상 사라진 다음부터 은희에게 사무쳤 다. 뱃속에 있을 때는 회충이나 촌충 같이만 생각했는데, 거짓말처럼 구역질이 사라지고, 끊어졌던 생리가 시작되면서 이상하게도 은희는 자신의 몸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회충이나 촌충의 자리가 이렇게 공허할 리는 없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아이와 정이 든 것만 같았다. 꿈을 꾸면 나팔꽃 씨앗만한 태아의 새까맣고 작은 눈을 보았다. 꿈속에 서 은희는 물고기처럼 뜨고 있는 아기의 눈이 아플 것 같아 감겨주려고 11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손을 내밀었지만 아기의 눈은 아무리 쓸어내려도 감겨지지 않았다. 겨 우 나이 열아홉에 새삼 없던 모성애가 생겼을 리는 없었다. 그것은 그 냥 한 존재와 짧게 든 정이었다. 실제로 그 아기를 만났다 헤어진 것처 럼 그리웠다. 그것은 죄책감과도 달랐다. 그 첫 아기 때, 은희는 자신이 그 아기를 죽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자리가 너무 허해 두 번째 아이가 들어섰던 것일까. 이번에 남자 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스무 살이 되었으니 애를 낳아도 될 거라고 했 다. 자신과 은희 사이에 낳은 아기를 품에 안고 싶다고 말했다. 아내와 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할 테니 걱정 말고 몸조리나 잘 하라고 했다. 그는 퇴근하기가 무섭게 날마다 찾아왔고, 그녀가 먹고 싶어 하는 것이 면 한밤중이라도 나가서 구해왔다. 신혼의 아내를 위하는 남편의 모습 그 자체였다. 은희는 깜빡깜빡 자신을 신혼의 새댁으로 착각했다. 그때 는 일도 쉬고 있을 때라 주변에서도 두 사람을 영락없는 신혼부부로 알 았다. 아이가 다섯 달이나 되어, 병원의 청진기를 통해 쿵쿵쿵 뛰는 심 장 소리를 듣고 온 날, 그 남자는 폭우 속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돌아왔다. 그리고 말했다. 이혼은 시간이 걸리겠다고, 이번 아이 는 지워야겠다고. 쿵쿵쿵, 심장 소리까지 들은 아이를 죽이러 가는 길은 첫 번째와는 달랐다. 은희는 심장이나 자궁을 떼어내러 가는 것만 같았다. 혼자서라 도 낳아 기르고 싶었다. 두렵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남자의 슬픈 눈빛 이 문제였다.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했다. 어린 그녀가 그런 가시밭길 을 걸어가는 건 볼 수 없다고, 꼭 이혼을 하고, 결혼을 해서 축복 받은 아기를 낳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축복 받을 수 없는 그 아기는 그렇 게 또 스테인리스 통으로 갈기갈기 찢겨 떨어졌다. 이번 아기는 그립지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13
않았다. 그립다는 건 그래도 거리감이 있을 때의 얘기였다. 이 아기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 너덜너덜해진 심장이 몸속에서 흔 들리는 것만 같았다. 너무 아팠다. 은희는 그 남자와의 섹스를 거부했 다. 아기에게 미안했다. 꿈속에서 은희는 그 남자와 의사와 함께 앉아 자신의 수술 장면을 보 고 있었다. 테이프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스테인리스 통에 떨어져 있던 갈기갈기 찢긴 살점들이 다시 그녀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 몸들은 재빨리 합쳐졌으며, 마침내 온전한 아이가 되어 그녀의 뱃속 에서 작은 토끼처럼 웅크렸다. 쿵쿵쿵 심장 소리가 북소리처럼 울려 퍼 졌다. 그런 꿈을 꾸고 난 날이면 은희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저녁 햇살이 창으로 스며와 얼굴을 쓰다듬을 때까 지 꼼짝 않고 누워 있곤 했다. 어느 날 그 착하디착한 남자는 기뻐서 눈물을 흘리며 찾아왔다. 아 내가 이혼을 승낙했다는 것이었다. 가진 것 다 줘버리자고, 미안하니 까 다 줘버리고, 우리끼리 새로 벌어서 오손도손 살자고 말했다. 이제 는 우리 아기를 낳아 정말 행복하게 살자고, 그 동안 정말 미안했다고 했다. 그 말을 꼭 믿었던 건 아니지만 마음이 느슨해진 것은 사실이었 다. 그리고 은희는 간절하게 아기를 갖고 싶었다. 이미 죽은 두 아기가 새로운 생명 속에서 함께 살아날 것만 같았다. 아니 그때는 그런 생각 도 없었다. 그저 양쪽에 치여 어쩔 줄 모르며 쩔쩔매는 그 남자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더 컸던지도 몰랐다. 거짓말같이 그 밤의 정사는 생명 이 되었다. 그 다음날부터 한참 동안 남자가 오지 않았으니 그 생명이 그 밤에 발아되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남자는 두 달 동안 연락을 끊었 다. 피가 말랐다. 그가 연락을 하지 않으면 그녀로서는 연락할 길이 없 11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었다. 은희는 혼자서 입덧을 치르며 공장을 다녔다. 아마도 이혼 수속 을 깨끗이 밟아놓고 깜짝 놀래주려고 그러는 게지, 생각은 하면서도 입 술이 바짝바짝 탔다. 석 달 만에 나타난 남자는 헛구역질을 하는 은희 를 보며 새파랗게 질렸다. 은희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 여자의 마 음이 변했을 것이다. 모든 것은 그 여자에게 달려 있었으니까. 그 착한 남자는 제 몸에 붙은 벌레 하나 떼어내 버릴 위인이 못 되었다. 모진 데 라곤 한 구석도 없는 남자였다. 결국 제 몸에 붙은 벌레 하나도 가엾어 서 못 떼어낼 그 남자를 위해 은희가 제 몸 속에 자라는 생명을 포기해 야 했다. 이번에 은희는 재빨리 결단을 내렸다. 남자는 조금만 더 기다 려 보라고 했지만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혼자서라도 낳아 기르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랬다가 만약 나중에 자신이 없 어져 마음이 바뀌면 지난번처럼 심장 소리가 쿵쿵쿵 북소리처럼 들리 는 아이를 지우게 될까봐 겁이 났다. 그 세 번째, 마지막 아이를 긁어내면서 은희는 모질게 이를 악물었 다. 그토록 어릴 때 만나 깊이 사랑했던 그 남자를 그녀는 버리기로 마 음먹었다. 죽은 아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만으로도 그래야 했다. 그리 고 다시는 아이를 갖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는 새로운 아기를 낳더 라도 죽인 아이들의 얼굴이 어른거려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열아홉부 터 스물두 살까지 거의 매년 아이를 긁어내다가 ㅊ마침내 난관을 묶었 다. 그러면서 은희는 청춘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핏기가 제 몸에서 사라 진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제 곁에 죽음이 함께 누워 있는 기분이었다. 그토록 밝고, 명랑하고, 철딱서니 없었던 자신의 모습은 이제 껍데기로 만 남았을 뿐이었다. 몸부림을 안 쳤던 것은 아니다.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보려고도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15
했고, 돈을 열심히 벌어 패션 디자인 공부를 해야겠다는 기특한 생각 도 품어 보았다. 친구들이나 남자와 어울릴 때면 여전히 누구보다도 까불고 경망스럽게 굴었고, 예전보다 더 공들여 옷차림을 신경 썼다. 밖에서 보이는 모습은 어쩌면 달라진 게 없는지도 몰랐다. 그 남자를 떨쳐내고 난 다음에 들어온 이 공장에서도 은희는 철저히 예전의 모습 대로 살았다. 그런 사실을 운이라도 떼어 말해본 것도 정석이 처음이 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게 있었다. 그건 그렇게 까불고 경망스럽게 굴고, 공들여 옷치장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로 자신이 바라보게 되었 다는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 판박이 그림을 손톱으로 긁어 베낄 때, 종 이에 그려진 밑그림과 어긋나게 베끼게 된 것처럼, 수동 카메라의 초점 이 안 맞는 파인더를 들여다 볼 때처럼 이전에는 제 몸 속에 딱 맞게 맞 춰져 있던 어떤 꺼풀이 홀로 허공에 떠서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에 사로잡히면 은희는 까불고, 경망스럽고, 공들여 옷치장을 하 는 자신이 남처럼 느껴졌다. 안쓰러운 눈길로 그러는 자신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자신, 그 분리감, 그것은 삶이 자신에게 이제는 맞지 않는다 는 경고 같았다. 정석에게 다가갔던 것도 그 탓인지 몰랐다. 그런 분리감에서 도망치 고 싶은 은희는 아무하고나 어울렸지만, 그에게는 어떤 끌림이 실제로 있었다. 그의 얼굴에 깃들인 그늘이었을 것이다. 어둠이 박쥐를 끌어들 이듯, 그녀는 그에게 끌렸다. 사랑은 아니었다. 그녀는 때로 그가 안쓰 럽고, 애처로웠다. 자신이 언젠가 그에게 다시는 회복되지 못할 상처를 줄 것을 알았다. 그는 이미 죽은 여자를 사랑하는 것과 같을 터이니. 순애에게 끌린 것도 그 그늘 탓이었을까. 어제의 일은 은희 자신에게 11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취해 있었고, 모든 것은 본능에 따라 행해졌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어떤 후련함이 있는 것도 아니었 다. 아마도 다시는 이런 밤이 없을 것이다. 그 한 밤으로 두 여자는 서 로를 온몸을 다해 위로해 주었다. 그것은 서로의 상처를 몸에서 빼내 바꿔 넣어주는 의식과 비슷했다. 이상한 느낌, 은희는 제 몸에 닿아 저 를 따듯하게 덥혀 주었던 순애의 혀와 손길을 떠올려 보았다. 그 모든 행위는 엄밀한 성적 행위였음에도, 그리고 그에 따른 나른한 쾌락에 분 명 온몸을 맡겼으면서도 이상하게도 그것은 조금도 성적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깊고 짙은 위로였다. 그런 느낌은 순애도 마 찬가지였으리란 걸 은희는 알 수 있었다. 은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아이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불을 껐다. 적어도 이 아침에 다시 순애를 볼 용기는 없었다. 며칠 뒤면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지금은 자신이 없었다. 며칠만 지나면 이 밤이 두 여자에게는 실감나지 않는 꿈처럼 여겨지리라. 은희는 방문을 닫다 말고 순애가 벗어놓고 간 몸뻬 바지가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본다. 저토록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저런 것을 걸치고 있다 니, 다음에 올 때는 그녀에게 어울리는 옷을 사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밖은 아직도 어두웠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충분했다. 집에 들러서 새롭게 단장하고 출근할 수 있을 것이다. 걸어가는 내내 오늘 무엇을 입을지, 그리고 순애에게는 어떤 옷이 어울릴지를 궁리해야 할 터였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17
5. 박쥐 진우와 경실은 오늘도 새벽 커피를 마시고 가장 늦게 카드를 찍었다. 아니, 일은 둘이서 다 하나? 맨날 둘만 왜 이렇게 늦어? 김씨가 물었다. 우리 둘이 일 다 한다니까요. 월급 더 받아야 해요. 경실이 얼른 대꾸한다. 타임 체커에 찍히는 대로 잔업 수당이 나오기 때문에 새벽 커피를 즐기다 나온다는 얘기는 할 수 없었다. 밖으로 나가니 거리는 안개에 잠겨 있었다. 경실은 역시나 감탄을 쏟 는다. 어머, 멋져! 완전히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긴 머리 여인이겠지? 이 거 관객이 많아야 하는데! 내가 잘 보고 소문 퍼뜨릴게. 얼른 가. 내내 졸았잖아? 그래, 너도! 경실이 손을 흔들며 그 안개 속으로 뛰어간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가 통통하고 탐스러운 경실의 몸 위에서 찰랑거린다. 진우가 가는 쪽으로는 공장과 유흥가와 시장과 집들이 이어지는데, 경실이 뛰어간 쪽으로는 나무들이 두 팔을 뻗치고 서있고, 널따란 벌판이 펼쳐져 있 다. 안개 속에 벌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런 아침이면 하얗게 서리가 내려 있을 것이다. 기혼 직원들은 대부분 그쪽에 있는 시골집에서 살았다. 진우도 방을 구하러 다닐 때 그쪽 집들을 다녀 보았다. 그곳 사람들은 모두 오랫동 안 한 터에서 살아온 터라 온 동네가 한 집 같았다. 개인의 사생활이란 11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보장될 수가 없어서 그녀처럼 위험한 활동을 하는 사람으로선 발도 디 딜 수 없는 곳이었다. 집을 보러 다니느라 저 길로 버스를 타고 갔을 때 진우는 어느 정류 장에선가 화장을 짙게 한 젊은 여자들이 우르르 타는 장면과 마주친 적 이 있었다. 이상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가 바로 골프장 앞이었다. 그 동네의 처녀나 젊은 새댁들은 거기서 캐디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고효순은 그 일이 제일 못해먹을 일이고, 젊은 여자들 바람 들기 딱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동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가 하기 때문에 특별히 정분이 난다거나 추잡한 일은 좀체 일어나지 않았지만, 매일 상 대하는 게 돈 많고 잘 노는 남자들이다 보니까 자기 사는 꼴이 허무해 진다는 거였다. 그런 게 바람 드는 거제, 꼭 딴 남자랑 붙어먹어야 일 나는 게 아이다, 여자하고 무시하곤 바람 들면 못 써묵는데이. 그런 꼴 보다 집에 와서 10원, 20원 아끼는 살림을 우예 하노? 고효순은 강력 하게 그 일을 부정했지만 박춘자는 자기가 늙어 그 일을 못 하는 게 유 감인 기색이 역력했다. 안개 속으로 경실의 모습이 잠기고 난 다음에야 진우는 발을 떼었다. 신사거리를 지날 때까지도 안개는 사방에 가득했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도 안개에 가려 교도소가 보이지 않았다. 길을 건너고 나서야 비 로소 하얀 건물이 눈앞에 다가왔다. 진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망루를 올려다보았다. 복덕방 할아버지를 따라 이 길을 올라가면서 그녀는, 하필 안양교도소 앞이라니, 하고 혀 를 찼다. 그 교도소에는 선배와 동기가 각각 국가보안법 위반과 집시법 위반으로 들어가 있었다. 공장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두어 차례 그들에 게 면회를 간 적도 있었다. 시골의 작은 역사 驛 舍 처럼 조촐한 교도소였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19
다. 감옥 속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오래된 교도소라 겉모습은 다른 교 도소보다 정취가 있었다. 진우는 교도소 앞길을 건너고, 골목을 걸어 들어가 집안으로 들어갔 다. 부엌문에 걸어놓은 자물쇠를 열다가 그녀는 정석의 방을 돌아보았 다. 저 사람이랑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구나, 이제 출근 준비를 하고 있겠지, 좋은 청년인 것 같은데. 그녀는 부엌문을 밀었다. 방으로 들어 서기 전에 아궁이부터 들여다보았다. 다행히 연탄이 꺼지지 않았다. 그 녀는 얼른 불을 갈았다. 방에 들어가 옷을 벗고, 씻으려고 부엌으로 나 가보니 부뚜막에 올려놓은 물은 밤새 끓어 너무 뜨거웠다. 찬물을 받아 와야 했다. 부엌엔 배수구는 있지만 수도시설은 없었다. 부엌문을 열고 나가니 바깥은 그새 분주한 아침으로 바뀌어 있었다. 닫고 있던 문으로 막혀졌던 생생한 소리와 싱그러운 아침 공기가 확 밀려왔다. 수돗가에는 인주네와 종태 엄마가 쪼그리고 앉아 설거지를 하고 있었 다. 안녕하세요? 진우가 인사를 건네자 인주네가 먼저 반색을 한다. 어머, 야근인가 봐, 우리 애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어쩌지? 낮에 푹 자얄 텐데. 괜찮아요. 한번 잠들면 업어 가도 몰라요. 진우의 대꾸에 종태 엄마가 답한다. 오죽 고단하겄어. 밤새는 게 보통 일인가, 어디? 그래도 열 두 시간이 아니라 여덟 시간 교댄걸요. 참, 오늘은 왜 안 나가셨어요? 야간이세요? 인주네는 발렌타인제과 바로 옆에 있는 삼일라면 공장에 다니고 있었 12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다. 야간 하면 좋게? 돈 벌고? 난 애들 땜에 주간밖에 못해. 설거지만 해놓고 후딱 나가야지. 아줌마들이 이래서 매일 종칠 때나 들어간다니 까. 인주네가 거품을 하얗게 내서 그릇을 비비며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저 사람은 어떤 일 앞에서도 자기기만이나 연출 없이 명랑할 사람 같 아, 슬픔조차도 거품처럼 명랑하게 풀어내겠지, 그냥 확 울고 끝나 버 리는, 채 울음이 끝나기도 전에 배시시 웃음꼬리를 다는 천진한 아이들 처럼, 진우는 속으로 생각했다. 먹고 사는 일이 뭔지 그러나 종태 엄마의 입에서 탄식이 섞여 나오자 그 밝은 분위기는 착 가라앉는다. 운동권을 다룰 때 흑백화면과 천연색 화면을 번갈아 보여 주는 영화관의 대한뉴스 같다. 늘 밝고 까불까불한 인주네는 아이 둘 의 엄마이긴 해도 스물 너덧 살이 넘지 않았을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 한 집에서 고생고생하며 살다가 어린 나이에 결혼했으리라. 인주네는 모든 것이 작고 단단해 보이는 여자였다. 눈도 코도 입도, 몸피도 작았 지만 어느 한 구석 가냘파 보이지는 않았다. 암팡진 눈은 야무진 생활 력을 보여 주었고, 웃을 때면 없어지는 작은 눈은 그녀의 천진한 성정 을 보여주었다. 여러 가구가 어울려 사는 중에도 언제나 인주네의 종달 새같이 높고 발랄한 목소리는 다른 여자들의 삶에 찌든 목소리와 구별 되어 들리곤 했다. 반면에 주인아줌마인 종태 엄마는 얼핏 보면 젊어 보여, 어린 나이에도 아줌마의 주책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인주네나 몇 살 차이 안 나 보였지만 그 어두운 눈빛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당황하 지 않을 것 같은 침착한 태도를 보면 산전수전 다 겪고, 나이도 꽤 먹었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21
음이 분명했다. 물이 거의 차 올라올 즈음, 인주네가 다시 진우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씬 시집 안 가? 참하고 얌전해서 사내들 땡기게 생겼는데, 고 럴 때 잽싸게 물어야지, 때 놓치면 말짱 황이야. 아가씬 맨날 일만 하는 것 같애. 멋도 안 부리고 인주네는 진우에게 언제나 큰 언니처럼 살뜰히 굴었다. 애인 있어요. 군대 가 있는 걸요. 아휴, 이제 군대 갔어? 동갑내긴가봐? 얼결에 진우는 고개를 끄떡였다. 대학을 안 가면 일찍 군대에 간다는 걸 셈에 넣지 못했다. 군대 갔으면 끝이지, 언제 기다려? 나도 첫사랑은 군대 갈 때 빠이 빠이 한 사람이야. 그러지 말고 내가 좋은 사람 소개해 줄까? 인주네는 진우에게 눈까지 찡긋한다. 그녀의 한 쪽 볼에만 패는 보조 개가 귀여워서 진우는 미소를 짓는다. 그때 정석이 부엌문을 열고 나왔다. 출근하는 모양이었다. 인주네가 다 씻은 그릇을 들고 일어서며 소리쳤다. 얌전이 총각, 지금 출근해? 같이 가. 이것만 두고 나오면 돼. 잠깐 만! 아, 네. 정석이 얼떨떨해하며 대답을 한다. 인주네는 얼른 겉옷을 걸치고 나 와 정석의 팔짱을 낀다. 오늘 모처럼 버스비 벌었다. 거기다 얌전이 총각 팔짱도 끼고 가 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누군 좋겠네. 12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종태 엄마가 놀린다. 출근길은 같았지만 인주네는 늘 준비가 늦어 버 스를 타고 갔기 때문에 같이 가는 일은 드물다고 종태 엄마가 설명해준 다. 저 총각은 언제나 울적해 보여. 두 사람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걸 보다가 종태 엄마가 슬쩍 진우를 보 며 말한다. 어제 출근하다 부딪쳤어요. 같은 공장에 다니는 걸 몰랐네 요 진우가 말하자 종태 엄마는 놀란 눈으로 진우를 쳐다본다. 그래? 그랬구나. 저 총각이 좋아했겠네? 종태 엄마의 눈길이 의미심장해지는 것 같아 진우는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제가 반가웠죠. 처음 들어간 공장인데, 한 집 사람이 있으니까 든 든하더라고요.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포항댁의 걸지고 꺼칠꺼칠한 목소리가 들려왔 다. 아따, 다들 꼬시랑 거리느라고 봉창에서 배춧잎이 삐져나온 것도 모르나베. 그 말에 종태 엄마는 얼른 바지주머니를 내려다본다. 만 원 짜리 한 장 이 반쯤 주머니 바깥으로 나와 있다. 그녀는 얼른 돈을 쑥 밀어 넣는다. 돈도 따닷하게 들고 다니지 않음 감기 든다. 만 원짜리 감기 들면 만원 주고 병원 가야 한데이. 그러면서 포항댁은 설거지 거리를 함지박 하나 가득 들고 나와 털퍼 덕 내려놓는다. 진우가 인사를 했지만 포항댁은 받는 둥 마는 둥이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23
두 식구 살림에 웬 설거지가 그렇게 많아? 종태 엄마가 퉁기듯 말한다.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하고 내가 같나?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새빠 지게 일해보래. 하루 밀린 살림이 남의 집 열 식구 먹고 난 자리 같데 이. 포항댁의 말에도 잔가시가 묻어 있다. 포항댁은 병원에서 간병부 일 을 하고 있었다. 하루 꼬박 일하고, 다음 날은 쉬는 격일제 근무였다. 포항댁은 허우적거리며 설거지를 한다. 비눗물이 깨끗이 닦아놓은 종 태 엄마의 그릇에 튀어도 포항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이 참, 좀 살살 해. 기껏 다 해놓으니까. 왜 이렇게 퍼덕거려? 종태 엄마가 짜증이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만 말에 다소곳 해질 포항댁이 아니었다. 보래, 니가 지금 주인이라고 유세하나. 내가 뭣을 우째 한다고? 유세는 무슨 유셀해? 좀 살살하라구. 비눗물 튀잖아? 진우는 가운데서 입장이 난처해 차오르는 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이고, 내 방귀는 뽕하고, 남 방귀는 푸지직 한대더니, 지는 얼마 나 얌전하게 한다꼬? 어휴, 포항댁 상대하단 내가 흰머리만 늘지, 흰머리만 늘어. 종태 엄마는 재빨리 그릇을 헹구고 일어선다. 마, 잘 생각했다. 퍼뜩 들어가래. 신랑 있는 여자야 좀 좋나. 비눗 물 먹어도 괘안타. 신랑 껴안고 절구질만 쿵덕쿵덕 잘 하면 땀으로 다 나간다. 흰머리도 좀 생기면 어떻노. 신랑이랑 드러누워 너 하나 나 하 나 번갈아 뽑아주면 재미만 좋제. 그저 불쌍한 건 나 겉은 과부뿐이 여. 12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물통의 물이 마침 다 차올랐다. 진우도 자리 뜰 구실이 생겨 얼른 물 통을 든다. 먼저 들어갈게요. 온냐, 후딱 들어가 자야제. 밤일 하느라꼬 쌔가 안 빠지나? 밤일이라는 말의 어감에 진우는 혼자 웃었다. 부엌으로 들어온 그녀 는 불 위에 있던 뜨거운 물에 찬물을 섞어 몸을 씻었다. 작업복도 빨았 다. 하얀 작업복엔 스넥 가루와 초콜릿이 잔뜩 묻어 있어서 더운 물로 빨아야만 했다. 먹다 둔 밥그릇도 꺼내와 쪼그리고 앉아 설거지를 한 다. 구석에 팽개쳐 놓았던 걸레도 깨끗이 빤다. 꼭 짠 걸레에서 모락모 락 김이 오르는 게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진우는 방에 들어가 들창을 닫고 창 위에 말려 올려져 있는 얇은 군 용담요를 커튼처럼 내렸다. 방이 동굴처럼 어두워졌다. 아침의 햇살도 침입할 수 없는 아늑한 방. 그녀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이불 밑으 로 들어가 눕는다. 모두들 출근한 뒤라 주위는 비교적 조용했다. 눈을 감으니, 인주하고 종태가 떠드는 소리가 텔레비전 소리에 간간이 섞여 밀려온다. 바로 옆 방이 인주네였다. 인주네가 나가고 나면 종태는 인주네 방에 와서 살 다시피 했다. 종태가 네 살, 인주가 다섯 살, 인주 동생 인호는 네 살이 다. 다들 민혁이 또래였다. 민혁이, 우리 민혁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널 보면 내가 중학교만 나온 게 안 부끄러워, 중학교만 나와도 너처럼 교양 있고 멋있을 수 있으니까, 나는 또 이 친구들에게 상처나 주는 걸까, 그러자 다시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의 빈정거리 던 입매. 진우가 학생운동에 빠져들고, 사회주의자가 되었어도, 감옥에 가고,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25
그 감옥 안에서 아이를 낳았을 때도 어머니는 진우의 삶에 대해 간섭하 지 않았다. 자기 삶은 자기의 삶이고, 딸의 삶은 딸의 삶이라는 게 그녀 의 원칙이었다. 니 아버지 일찍 가시길 잘 했지, 딸이라면 껌뻑 죽는 그 양반이 지금 네 꼴을 봤으면 아마 심장이 터져 버렸을 거다, 그런 말로 딸에 대한 불만을 대신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 날, 어머니가 광주의 사진을 들고 온 날에서 6년이 흐른 후 의 그 날, 어머니는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타임지를 들추고 있었다. 사 전 하나 없이 그것을 줄줄 읽어내는 어머니, 젊은 시절 미국 유학을 다 녀오고, 신문 기자로 일했던 그녀는 그 무렵엔 여성잡지사의 편집장 일 을 하고 있었다. 나, 공장 들어가려고 해. 엄마. 진우는 어머니에게 다가가 기습이라도 하듯 불쑥 말했다. 어머니의 손끝이 잠시 멈칫했던가, 그러나 모처럼 친정 나들이를 온 딸의 터무니 없는 말을 듣고도 그녀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은 채 읽던 페이지를 찬 찬히 마저 다 읽고서야 진우를 올려보았다. 그녀는 쉰 살이 넘은 여자 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우아했다. 그녀가 내뱉는 말투 역시 나직하 고 침착했다. 어떻게 용케 조용히 살고 있나 싶었다. 너같이 정의감이 넘치는 애 가. 명백한 비아냥거림이었다. 언제부터 우린 이런 모녀가 되었을까, 진 우의 혀 밑으로 쓴 물이 고였다. 어머니를 멋있게 생각하고, 어머니처 럼 멋진 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 볼펜을 든 어머니의 손가락은 길고 아름다웠다. 손끝에는 붉은 매니큐어가 꽃잎 처럼 곱게 칠해져 있었다. 12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나야 뭐, 내 이익에 눈먼 부르주아니까. 네 깊은 속을 알겠니? 워 낙 잘난 딸이니까 알아서 내린 결정이겠지. 내가 니 고집에 이긴 적도 없구. 그런데 민혁이는 누가 키우니? 내가 집에 있는 여자도 아니구. 그러면서 어머니는 어깨 위에 걸친 카키색의 가디건을 새로 추슬렀 다. 그녀의 말투는, 오늘 저녁엔 뭘 해먹을까, 하고 묻는 것처럼 심상했 다. 진우는 목구멍이 콱 막혔지만 간신히 입을 열었다. 엄마가 엄마가 어떻게 해줘. 엄마 돈으로 사람을 두든 가 진우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맺혔다. 어머니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경멸의 웃음. 순간 진우의 얼굴이 수치감으로 붉어졌다. 니 신념하고는 안 맞는 행동 같은데? 내 돈으로 사람을 둬서 아이 를 기르게 하고, 너는 공장 들어가서 노동자를 위해 일하겠다고? 그거 모순 아니니? 그 사람의 노동을 착취해서 니 양심이나 만족시키는 아이 맡겨놓고 수영장 다니는 유한마담하고 다를 게 있어? 어머니는 빙글거리며 진우를 바라보았다. 그 말은 진우의 가슴을 회 칼로 도려내는 말이었다. 스스로 고민하고, 갈등하고, 찢어졌던 바로 그 핵심의 문제에 어머니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정면으로 비수를 들이 댄 것이다.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진우는 어느 순간, 고개를 치켜들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너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도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꼿꼿이 고개를 쳐들 수 있었다. 독 오른 코브라처럼 꼿꼿이 세운 그녀의 고개는 기실 궁지에 몰린 쥐가 몸을 돌 려 고양이에게 대드는 마지막 오기에 불과했다. 그런 딸의 모습을 어머 니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바라보았다. 여전히 빙글거리는 미소를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27
띤 채. 어머니의 긴 속눈썹이 마스카라로 아름답게 치솟아 있었다. 그 속눈썹 아래에 있는 검은 눈동자는 바로 진우의 것이었다. 같은 눈동자 를 가진 두 여자가 같은 눈동자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어머니였다. 확실히 내 딸은 내 딸이구나. 좋아, 알아서 하렴. 니가 세상을 바꾸 는 게 나한테 좋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느 단계까지는 내게도 도움이 될 걸. 언론 자유라곤 없는 나라니까. 거기서 더 나가면 나부터 위험해질 테지. 하지만 내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렇게까지 갈 리는 만무하니 내가 위험할 일은 없을 것 같구나. 그래, 내가 투자하지. 나는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부르주아니까. 하지만 민혁이가 가엾구나. 어린 게 팔자도 모질지. 어머니는 말을 끊더니 한 마디도 보태지 않고 다시 타임지를 읽었다. 거실에는 6년 전의 그 날처럼 포레의 레퀴엠 이 성능 좋은 오디오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머니는 진혼곡들을 좋아했다. 모차르트도, 브람 스도, 브루크너도 좋아했다. 대낮인데도 거실은 어두웠다. 고음의 여자 목소리, 여성 독창 부분. 인간의 목소리로 여겨지지 않는 그 청아하고 높은 목소리, 하늘을 떠도는 영혼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깨어 있을까, 아직 단잠에 빠져 있을까. 아 이가 보고 싶은 마음에 진우는 가슴이 얼얼했다. 가엾은 것, 하지만 내 가 지금 이 일을 피하면 그건 언젠가는 고스란히 네 몫으로 가게 될 거 야. 일그러진 세상의 모난 모서리는 그 속에 담긴 모든 것을 찔러대니 까, 엄마는 그 일그러진 걸 바로 펴놓고 싶은 거야. 네가 그 모서리에 다치지 않게. 아이는 그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떡이리라. 그 애는 그랬다. 아무 말도 할 줄 모르는 아기 때에도 진우가 어른에게 하듯 무 12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언가를 하소연하면 의젓한 눈길로 엄마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떡이곤 했다. 무엇이든 다 이해하겠다는 듯이. 그러면 그녀는 고해성사라도 끝 낸 사람처럼 마음의 위로를 받곤 했다. 민혁이는 드물게 의젓한 아이였 다. 뱃속에서부터 너무 많은 고통을 겪어서 아이가 저렇게 된 건 아닌 가 하는 가책감이 들 정도로. 지금도 그랬다. 마음으로라도 아이에게 그런 단순 논리의 변명을 하 고 나니 오히려 자신이 위로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어머니의 빙글거리는 입매가 맴돌았고, 널 보면 내가 중학교만 나 온 게 안 부끄러워, 중학교만 나와도 너처럼 교양 있고 멋있을 수 있으 니까, 경실의 애틋한 고백이 진우를 괴롭혔다. 난 꼭 박쥐 같구나. 하지만 누운 등 밑으로 온기가 퍼져나가자 걷잡을 수 없이 졸음이 몰 려왔다. 창 밖에는 아침햇살이 넘칠 듯 흐르며 연신 그 어두운 방을 기 웃거리고 있었지만 국방색 군용담요는 제 온몸으로 햇살의 침범을 막 아내고 있었다. 동굴처럼 어둡고 아늑한 그 방에서 진우는 한 마리 박 쥐처럼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떠보니 시계는 저녁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밥 챙겨먹고 출근 하기도 빠듯했지만 진우는 선뜻 일어나지지가 않았다. 이맘때의 바깥 풍경을 누운 채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맘때면 부엌문끼리 쪼르르 마주보고 있는 통로는 찌개 냄새와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는 소리, 엄마들이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면서 목청만 돋워 앞 부엌, 옆 부엌 엄마들과 떠드는 소리들로 생기를 띠었다. 진우는 눈을 감은 채 그 소리들을, 냄새들을 즐겼다. 보지 않아도 눈앞에 떠오르는 따듯한 풍경, 이 삽화 속에다 내 아이도 끼워놓고 싶다는 갈망.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29
그녀의 친정은 고층 맨션 아파트였다. 들어설 때마다 무언가 고여 있 는 느낌을 주는, 그 점잖은 곳에서 아이는 갇힌 채 자라고 있었다. 그곳 엔 또래의 아이조차 없어서 민혁이는 그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을 터였다. 혼자서 저렇게 잘 노는 앤 처음 봤다, 네 살짜리 같 지가 않아. 어떤 때 날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땐 꼭 어른 눈길 같아서 깜 짝 놀란다니까, 어머니는 아이가 아이답지 않게 크는 걸 걱정했다. 너 야 니 멋대로 사는 애 아니니, 자라는 내내 한 번도 속 안 썩이다가 그 거 한꺼번에 갚듯이 다른 애미들 평생 속 끓일 짓 모아서 하는 년이니. 그래도 저걸 보면 마음이 아파. 세상에 무슨 팔자가 저렇게 기구하니, 예수는 마구간에서나 태어났지. 저 녀석은 감옥에서 난 애가 아니냐. 그것도 모자라서 저러고 있고. 하여튼 요상한 에미 애비를 만나서 새끼 가 고생이야, 어머니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가슴은 충분히 쓰라렸 다. 여기서 이렇게 아이를 데리고 함께 살 수만 있다면, 불가능한 그 생 각이 되풀이 떠올랐다. 위장취업이란 사실 하나만으로도 구속되는 시 대였다. 구속은 둘째 치고, 어떤 고문을 당할지, 그로 인해 자기만이 아 닌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피해를 입힐지도 몰랐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권인숙 성고문 사건도 그 와중에서 생긴 일이 아니던가. 남편과 같이 사는 것조차 만약의 경우 두 사람의 몰살을 의미했기에 따로 떨어 져 사는 그들이었다. 이 조그만 공장에 입사하는 데에도 제출하는 서류 가 열두 가지가 넘었다. 진우는 머릿속의 생각을 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간근무는 잠 이 쏟아지는 것만 빼면 주간 근무보다 좋았다. 관리자라곤 반장뿐이니 일하기가 편했다. 반장이야 동료나 마찬가지라 위에서 채근하는 사람 이 있을 때는 그도 다른 관리자 못지않게 사람들을 들볶았지만 일단 그 13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들이 사라진 뒤면 거의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다 는 것만 해도 훨씬 일할 만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자기 네들끼리만 밤에 깨서 일한다는 상황도 서로를 더 밀접하게 해주었다. 게다가 잠을 깨기 위해서라도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서로의 속내 이야 기가 쏟아지는 시간이었다. 진우는 쌀을 들고 수돗가로 나갔다. 뜻밖에도 정석이 쪼그리고 앉은 채 청바지를 빨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벌써? 기계가 고장이 나서 잔업이 취소됐어요. 아, 예. 자신은 이제야 일어났는데, 벌써 근무를 끝내고 돌아온 사람을 보는 게 낯설었다. 진우도 쪼그리고 앉아 쌀을 씻기 시작했다. 방을 보러 왔 을 때, 어두운 방구석에 혼자 앉아 소주병을 불고 있던 그의 모습이 떠 올랐다. 눈빛이 ㅇ어두웠던 청년. 야근, 힘들지 않아요? 진우가 자기 생각에 너무 골똘히 잠겨 있었던가. 정석이 불쑥 말을 건넸다. 할 만 해요. 잠을 못 자고 들어갈 때 빼면 절대로 그러면 안돼요. 까딱하다간 사고 나요. 정석이 청바지를 빨던 손까지 멈추고 정색을 하고 말하는 바람에 진 우는 조금 당황했다. 우리 회사야 특별히 사고 날 게 없지 않나요? 안 그래요. 공장은 다 위험해요. 기계란 건 곧이 곧대로잖아요? 얼 마 전에도 졸다가 포장기에서 손가락 마디가 잘리는 사고가 있었어요.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31
2년 전에는 컨베이어에 목걸이가 끌려 들어가 얼굴이 벗겨진 사고도 있 었고 모두 야근 때 일어난 일이에요 아, 괜한 얘길 했군요. 정석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끊었다. 진우는 고개를 끄떡거리며 그 를 바라보았다. 오늘 그는 그답지 않게 말을 많이 한다. 그때 인주네가 저녁거리를 씻으러 수돗가로 다가왔다. 마침 수돗가 에 둘만 앉아 있는 걸 입빠른 인주네가 놓칠 리 없었다. 야, 그림 좋네, 처녀 총각이 그러고 있으니 몸살 나게 좋다! 그러자 당장에 통로 양쪽으로 고개들이 길게 빠져 나오더니 한마디씩 보탰다. 저 얌전이 총각이 바람나겠네! 내 몸이 다 후끈거리네, 어쩌나? 총각, 책임져 줄래? 자네 몸이 왜 달아올라? 오늘 밤에 큰일 났네, 안 그래도 자네네 방 합궁 소리에 밤마다 잠을 설치는데 아유, 사돈 남 말하네. 어젯밤 저 방 소리 들었지? 왜 한밤중에 흐 느껴? 흐느끼긴? 으흥 으흐응 이보래, 과부 속 뒤집을 일이 있나? 와 그리 난리들이고? 통로가 걸쭉한 음담과 폭소로 왁자했다. 아이들까지 영문도 모른 채 좋다고 웃어댔다. 진우는 고개를 숙인 채 이미 충분히 씻은 쌀만 계속 문지르고 있었다. 저 사이를 뚫고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옆 눈으로 보 니 정석 역시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그때 정석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빨랫줄에 청바지를 철퍼덕 팽개 치듯 널었다. 그 서슬에 놀란 탓인지, 아니면 얹어 놓은 찌개냄비들이 넘치기라도 했는지 통로에 내밀어졌던 고개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인주네도 무안한지 입을 다물었다. 13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정석이 진우를 보더니 말했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근무하세요. 아, 예. 들어가세요. 정석의 뒷모습을 보면서 인주네가 진우를 보고 속삭였다. 저 총각이 맨날 방구석에서 소주만 나발로 불었거든. 빈 병이 문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니까. 근데 아가씨가 온 다음부터 달라졌 어. 아가씨가 좋은가 봐, 딴 총각한테 소개할랬더니 안되겠네, 호호. 아니에요. 그냥 우연이에요. 진우는 어색한 이야기라 얼른 일어나 부엌으로 돌아갔다. 부엌문을 여는데 맞은편 부엌에서 종태 엄마의 얼굴이 쑥 나왔다. 아가씨, 이것 좀 가져가. 그녀는 작은 냄비에 든 된장찌개를 내밀었다. 어머, 이런 걸 밥 지어먹으니ㄷ까 이뻐서 주는 거야. 어떻게든 끼니 잘 챙겨먹어. 나도 아가씨처럼 혼자 살 때 속 다 버렸거든. 챙겨먹기 귀찮아서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진우는 찌개 냄비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된장찌개 냄새를 맡자 밥 생각이라곤 없던 속이 회가 동하는 것처럼 난리를 쳤다. 전기밥솥에 밥을 안쳐놓고 그녀는 문지방에 앉아 한 숟갈 두 숟갈 된장찌개부터 떠 먹었다. 그제야 명수 형은 오늘 저녁 무얼 해먹었을까, 하는 생각이 떠 올랐다. 이런 찌개 한 그릇 놓고 도란도란 밥상을 마주해 본 일이 아득 하기만 했다. 남편을 본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이번 주말에는 약속 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문득 그 동안 자기가 남편 생각을 거의 하지 않 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 생각이 하도 넘쳐서 그러리라.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33
진우는 남편을 사랑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너무나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도록, 게다가 그녀 의 인생은 그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가. 미혼의 몸으로 5공의 시퍼런 법조문 아래 냉방에 처박힌 채 점점 배가 불러오던 자신의 모습 이 바로 엊그제의 일처럼 떠올랐다. 데모란 당시만 해도 처절한 선택 이었다. 80년 초, 5분이면 끌려가는 그 행위가 도대체 저 무딘 가슴들 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도 그들은 누군가 그 일을 해야 만 한다고 생각했다. 4학년이 되어 드디어 진우에게도 차례가 왔다. 원 래 진우와 함께 데모를 하게 된 파트너는 용식이 아니었다. 원래 하기 로 했던 친구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용식이 나서서 자기 가 대신 뛰겠다고 자원했다. 강용식, 그와 진우는 결코 연인 사이가 아 니었다. 그들은 함께 데모를 주동하고 같이 감옥에 끌려갈 동지일 뿐이 었다. 게다가 진우는 용식을 같은 길을 가는 동지로서도 좋아하지 못했 다. 이유도 없이 그를 볼 때마다 어떤 거부감이 구토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디데이 전날, 그들은 마지막으로 만났다. 점검할 것들을 다 점검한 다음, 비장한 절망감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불안 속에서 그들은 함 께 술을 마셨다. 용식은 격하고 용감한 아이였지만 자기만 믿고 있는 가난한 홀어머니에게 그런 고통을 주는 데 태연할 수만은 없었다. 그 점에서 진우는 상대적으로 홀가분했다. 그녀의 어머니에게도 그 일은 충격이겠지만, 어머니는 잘 받아낼 터였다. 괴로워하는 용식 앞에서 그 녀는 미안함을 느꼈다. 자신의 홀가분한 처지가 특권처럼 죄의식을 부 추겼다. 그때까지 용식을 까닭 없이 미워해 온 자신의 감정에도 회한이 일었다. 왜 그렇게 나는 이 애를 싫어했을까,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13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그 순간에도 그녀는 자신의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구역질을 느꼈고, 그 구역질을 억지로 참으면서 다시 그 구역질에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 의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용식의 입장에서 본다면 억 울한 일인가 하는 참괴감도 몰려왔다. 구역질을 억누르기 위해 그녀는 그 참괴감을 부풀렸다. 언젠가 선배인 명수가 세미나를 하다가 용식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넌 너무 독선적이고 과격해. 진정한 혁명정신은 애정이야, 그건 이해의 정신이야, 다른 계급에 대한 이해, 독선은 교조와 통하는 거야. 그것처 럼 위험한 건 없어. 그러자 용식은 눈에 파랗게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형 같은 자유주의자, 똑똑히 알아둬요, 형이야말로 그 미적지근한 태도, 소시민적 성실성, 썩어빠진 부르주아, 회색의 기회주의자 그때도 진우는, 저 애는 그저 앵무새처럼 남의 말을 빌어다 자기가 싫어하는 사 람을 공격할 때 교활한 무기로만 쓰는구나,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때 난 정당했을까, 그 말들은 용식의 피 속에서 나온 말들 인지도 모르는데, 난 그걸 아무 근거도 없이 매도했다. 나야말로 용식 을 이유도 없이 짓밟아 온 건지도 몰랐다. 게다가 난 그때 용식은 구역 질나게 싫어하고, 명수 형은 터무니없이 존경하고 있었다, 그런 감정이 내 판단을 좌우했을지도 모른다. 나야말로 정말 엉터리였는지 몰라. 그 래도 구역질은 끊임없이 솟아올랐기 때문에 그녀는 기를 쓰고 용식의 편이 되려고 자신을 몰아세웠다. 어쨌든 다음 날이면 두 사람은 감옥에 가야 할 처지였다. 그리고 그 일은 그녀에게보다 그에게 훨씬 힘든 결 단이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었을 때, 진우는 벌써 녹초가 되어 있었다. 구역질 을 억누르기 위해 참괴감을 부풀리고, 무조건 용식을 긍정하는 일은 그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35
만큼 힘이 들었다. 그녀는 얼른 그 자리에서 벗어나 쉬고 싶은 생각밖 엔 없었다. 다음 날의 거사에 대한 불안조차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악 수를 하기 위해 그녀가 내민 손을 그는 오랫동안 잡고 있었다. 그의 눈 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 눈빛에서 그녀는 숨길 수 없는 갈망과 참혹한 절망을 읽었다. 그녀는 그만 힘이 빠졌다. 진우의 입에서는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엉뚱한 말이 새어나왔다. 어디 가서 나랑 자고, 아침에 같이 가자. 그 말에 용식보다 더 놀란 것은 진우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싸구려 여인숙, 너덜너덜하고 때가 찌 들은 베개와 이불, 음란한 낙서투성이의 그 방에서 그녀는 역시 별다른 느낌 없이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구역질조차 나오지 않았다. 난 지금 산부인과에 와있어, 치료를 받고 있는 거야. 그녀의 마음이 변할 새라 허겁지겁 올라탄 그의 몸 밑에서 그녀는 그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 고 있었다. 그리고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순간이 왔고, 그것은 병원 이라는 상상에 매우 잘 어울렸다. 어느 정도 징역에 익숙해질 무렵, 문득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걸 깨 닫고, 이상한 토악질을 해대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배가 불러왔다. 진 우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불러오는 배를 그저 남의 일처럼 바라보았다. 같은 방에 간통죄로 들어온 중년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 죄명이 주는 혐오감과는 달리 그 방의 누구보다도 정이 많고, 정결해서, 진우 가 가장 따르고 속내 얘기를 털어놓는 상대였다. 그 여자가 진우를 보 고 물었다. 만약 애 아빠가 발뺌하면 혼자 키울 각오가 서 있어? 아, 혼자 키운다, 그럴 수도 있구나. 진우는 그 사실을 깨달은 게 기 13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뻤다. 그녀는 버림받을 게 두려운 게 아니라 그 일로 용식과 맺어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녀는 어쩌다 충동적으로 아이의 육신의 아버지 로 그를 받아들였지만, 그 아이의 정신과 운명의 아버지로 그를 택할 수는 없었다. 그래, 혼자 키우리라. 그녀는 그 결정으로 마음이 편안해 졌다. 대체 누구야? 빨리 말하지 못 하겠니? 이 에미 고꾸라지는 꼴을 안 보려면! 배가 점점 더 불러와 펑펑한 바지저고리의 넓은 자락으로도 숨길 수 없게 되었을 때, 까무라칠 정도로 놀란 진우의 어머니는 평소의 그 우 아함과 침착함을 다 잃고 철창을 붙들고 다그쳤다. 진우는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때 그녀의 입에서는 또다시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명수 형을 오라고 해줘. 그 상황에서 그 말이 갖는 의미가 어떠한 것인지를 깨달은 것은 철창을 붙든 어머니의 손이 떨어져 나가며 그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오르는 것 을 본 순간이었다. 명수 형이 애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야만 했 다. 단지 그를 지금 보고 싶다는 것뿐이라는 것을. 그러나 진우는 어머니 의 안도의 표정을 차마 깨뜨릴 수 없었다. 아니, 무엇보다도 명수 형, 그 가 간절히 그리웠다. 그리고 명수, 그가 어머니와 함께 면회를 왔다. 구멍이 뚫린 면회 창을 사이에 두고, 입덧으로 훌쭉 여윈 진우의 얼 굴과 볼록하게 튀어나온 보기 흉한 배를 앞에 두고 명수는 들어서자마 자 울었다. 진우야, 언제고 네가 나를 절실히 필요로 할 때 나를 불러 라. 너의 힘이 되어 주고 싶은 게 내 소망이구나. 감옥에서 그 편지를 받았을 때, 이 남자는 왜 이제야 고백하는가, 진우는 아득했지만 그를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37
부르고 싶은 갈망을 누를 길이 없었다. 그녀는 그가 보고 싶었다. 어떤 오해를 받더라도 그때 그가 꼭 보고 싶었다. 명수가 눈물을 닦았다. 진우는 백치처럼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생 긋, 웃었다. 그를 만나니까 좋았다. 그도 숨을 한 번 크게 쉬더니 빙긋 이 웃었다. 임마, 이래도 내 청혼을 거절할 거야? 나, 혼인 신고한다! 그게 명수의 첫 마디였다. 진우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처음엔 그 말뜻을 이해조차 할 수 없었다. 청혼이라니, 그와는 따로 데이트도 해 본 적도 없는 사이였다. 멍하니 서있던 그녀는 마침내 그의 의도를 알 아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형, 억지 쓰지 마. 그래서 부른 게 아냐. 진우는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냥 그냥 형이 보고 싶었어. 그것뿐이야. 그러나 명수의 눈빛을 보자 진우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은 안타깝게 말하고 있었다. 그냥 입 다물고 있어, 그냥 내가 하는 대로 해. 내가 널 구해 줄게. 그리고 그는 소리 내어 말했다. 네가 거절해도 난 혼인신고 할 거야. 어머님 허락도 받았어. 넌 이 제 내 신부가 되는 거야. 명수의 눈빛은 간절했다. 진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장면에서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명수는 혼인신고를 하고, 탄원서를 냈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로 나올 때까지 진우는 내내 감옥에 있어야 했다. 그 사이 경찰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감방으로 돌아가, 결국 그녀의 아들 민혁이 두 달을 채울 때 까지 그 안에서 아이를 길러야 했다. 그녀의 진실을 아는 건 그 간통 13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아줌마뿐이었다. 자기를 낳은 어머니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는 진실이 었다. 민혁이 엄마, 죽을 때까지 그 신랑 잘 섬겨야 돼. 자긴 진짜 행복하 다, 부러워 죽겠어. 얼마나 사랑하면 그럴 수 있을까. 나 같음 죽어도 원이 없겠어. 진우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명수 형의 사랑에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치솟을 때면 그만큼 견 디기가 힘들었다. 이제라도 물러야 하는 게 아닌가, 이건 거짓인데, 난 미혼모로 얼마든지 아이를 키울 수 있다고 마음먹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명수 형이라는 밧줄을 이렇게 덥석 붙잡은 건가. 그런 갈등은 진우가 출소하여 명수와 결혼식을 올린 뒤에도 가셔지지 않았다. 그들의 결혼은 행복했다. 그렇지만 그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선 그녀의 마음속에서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그 혐오감과 끊임없이 싸워야 만 했다. 용식은 엉뚱하게도 그 형기 동안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것도 자기 는 반드시 공안검사가 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한 자신의 변화는 모두 진우의 배반 탓이라고 했다. 언제는 그가 자기 때문에 운동을 시작했던 가, 진우는 그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비웃었다. 용식은 내내 그들을 괴 롭혔다. 그는 감옥 안에서, 그리고 출소 후에도 줄기차게, 진우와 명수 에게, 그리고 다른 친구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띄웠다. 그 여자는 내 거야, 그 아들놈도 내 아들이야. 그 썩어빠진 문구에 진우는 진저리를 쳤다. 그녀는 출소하자마자 명수 에게 모든 사실을 말했다. 그는 그녀의 고백을 아무 말 없이 들었다. 그 는 벌써 모든 사실을 나름대로 추리해서 이미 그 고통을 벗어나 있었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39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넌 좀 위태위태한 데가 있는 애거든. 피 명수의 애정에 힘입어서 진우는 토라지는 시늉까지 할 여유를 보였 다. 내 말은 경망스럽다는 게 아니야. 하지만 넌 하여튼 엉뚱한 데가 있어. 옛날부터. 그 말이 그 말이지, 뭐. 명수는 진우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진우야, 난 네가 정말 좋아.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민 혁이도 밉지가 않아, 이상하지. 진우는 고개를 들어 명수를 바라보았다. 진우, 네 아이라는 생각뿐이야, 용식 하는데 진우는 자신의 입술로 명수의 입술을 막았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그들의 입맞 춤은 길고 따뜻했다. 그녀의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키스하는 기술을 보니까 형도 베테랑이네. 어디 숨겨 논 자식이 있 는지도 모르겠는 걸. 명수가 어이없어 하며 웃었다. 이 녀석아, 참, 기가 막혀서 네 처지에선 그런 농담을 하면 안 되는 거야, 임마. 명수가 진우의 볼을 잡아 당겼다. 그러면서 그는 그녀를 다시 힘주어 안았다. 나 말야, 형 애기 갖고 싶어. 형 닮은 애, 나 닮은 민혁이는 있으니 까. 진우는 명수의 품 안에서 말했다. 그녀는 확실히 응석을 부리고 있었 14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다. 그들을 누르는 그 비극적이고 음습한 불행의 중압감을 떨쳐 버리고 싶었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다보았다. 그녀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가 결국 먼저 웃었다. 임마, 참, 나니까 너 데리고 살지, 넌 어떻게 하는 말마다 그렇게 정면대결이냐? 그제야 진우도 웃었다. 그녀는 바로 그런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이다. 전기밥솥의 스위치가 보온으로 넘어갔다. 막상 밥이 되자 이미 다 먹 어치운 찌개 그릇을 보며 진우는 혼자 씁쓸히 웃었다. 순간적인 극적 감동, 그건 삶의 일탈이었다. 그러나 삶이란 극적인 것으론 유지되지 않는다. 삶이란 엄연한 일상이었다. 그것은 팽팽한 극적 감동을 유지시 킬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도 우린 그걸 유지하고 있다, 그건 진짜일까, 그걸 유지하기 위해 피 흘리는 일상은 없는 것일까. 너무도 훌륭한 사람, 명수 형의 존재는 그 너무도 훌륭함으로 인해 가끔 진우의 숨통을 조였다. 마치 빚쟁이, 그러나 빚을 전혀 독촉하지 않고, 아니 깨끗이 탕감해준 빚쟁이와 사는 기분을 그녀는 가끔 느꼈 다. 아무리 빚 독촉을 받지 않아도 빚을 진 사람은 그것을 갚아내기 전 엔 언제나 채무자인 것이다.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다 다시 도저히 갚을 길 없는 채무감, 이게 극적 감동을 유지하는 대가로 우리가 지불하는 피 흘리는 일상일까. 그 생각까지 가다가 그녀는 혼자 화들짝 놀란다. 참 못된 년이구나, 너는, 복에 겨워서 그딴 생각까지 하다니, 그녀는 숟 가락으로 죄 없는 찌개그릇을 두드렸다. 아이들이 인형놀이를 하면서 인형한테 야단을 치는 것처럼. 그러자 다시 삶은 가볍게 느껴졌다. 그 냥 행복하면 된 거야, 우린 행복하잖아, 그게 겸손한 태도야. 진우는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개고, 들창의 담요를 걷어 올렸다. 창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41
밖으로는 짧은 겨울해가 저물고 있었다. 창밖이래야 왼쪽으로는 악취 가 나는 재래식 화장실에 오른쪽으로는 연탄 광이 두 개 있는 게 모든 풍경의 전부였지만 블록 벽돌로 쌓은 담 너머로 저물어 가는 하늘빛까 지 가리지는 못했다. 잠시 먹물처럼 짙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서있던 진우는 얼른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망연히 서 있는 시간은 없애야 하였다. 지금의 삶은 내 시간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야만 해, 양 끝에서 타들어 가 는 초처럼, 팽팽하고 철저하게, 긴장을 잃지 말고, 헌신적으로, 분산될 정력은 없어, 감상에 젖을 시간 따윈 없단 말이야, 감상은 또 언제나 감 상을 불러오는 법이구. 자기 전에 빨아놓았던 작업 가운은 부뚜막 위의 따뜻한 공기로 보송 보송하게 말라 있었다. 깨끗한 면장갑도 챙겨 넣고 진우는 꽃분홍색 니 트 스웨터로 갈아입었다. 언제나 무채색이나 갈색의 옷만을 즐겨 입던 그녀였지만 이제는 조금이라도 어리게 보이기 위하여 밝은 색 옷만 입 었다. 부엌문을 잠그고 집을 나섰다. 시간 여유가 있었기에 그녀는 버스를 타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6. 기분 좋은 잠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전구를 찾는다. 매끈하고 차가운 알전구 의 감촉이 손끝에 전해져 온다. 순간 명수는 아내의 몸의 감촉을 떠올 14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렸다. 아내의 몸은 매끄럽고 차가웠다. 그녀의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 는 경우란 거의 없었다. 절정의 순간에서조차 그녀는 매끄럽고 차가웠 다. 털 없는 짐승, 알몸의 뱀처럼 차가운 몸. 그래서 그는 그녀가 손아 귀에서 빠져나갈 것만 같은 불안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매끄럽고 차가 운 그녀의 몸은 언제나 섬세하게 반응했다. 그 섬세한 반응에 그의 몸 또한 언제나 뜨거워졌다. 매끄럽고 차가운 몸과 그 섬세한 반응은 그로 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공존이었다. 그러나 체온만 그럴 뿐 그녀의 다른 모든 생리적 기능들은 그 섬세한 반응이 연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 여주곤 했다. 차갑고 매끄러운 살갗 위에 맺히는 땀방울들, 그것은 윤 진우라는 여자의 두 가지 특성이 육체에도 고스란히 반영된 상징 같았 다. 명수는 피식, 웃으며 소켓을 찾아 불을 켰다. 아내를 만난 지 오래 된 탓이리라. 내가 이렇게 엉뚱한 상념에 젖는 것은. 불을 켜자 허름하지만 정갈하게 정돈된 자취방이 드러났다. 명수는 예리한 눈길로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조금이라도 남의 손이 닿은 흔적 이 있는가를. 창은 안으로 잠겨있고, 문틈에 끼워둔 머리카락도 그대로 있으니 걱정할 것은 없었다.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일 뿐이었다. 구석 에 놓인 비닐 옷장, 나란히 쳐진 못 위에 걸려있는 옷 나부랭이들, 전기 밥솥과 커피포트, 작은 트랜지스터라디오, 모든 것이 깔끔하게, 조금도 손 탄 흔적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구석에 놓인 작은 밥상 위에도 단정하게 펼쳐진 육법전서와 아무 거나 마구 갈겨쓴 연습장 노트와 볼 펜이 그가 해놓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연출을 워낙 잘했는지, 그 모습 은 자신의 눈에도 방금 전까지 누군가 법률 공부를 하고 있다 나간 것 처럼 느껴졌다. 불규칙하게 드나드는, 직장도 없어 보이는 30대 남자라 는 수상한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희석시키기 위해 그는 이곳에서 고시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43
공부를 하는 노총각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그 육법전서는 이를테면 전 시용이었다. 누구든 불쑥 문을 열 때를 대비해 언제나 같은 페이지가 펼쳐져 있는 책. 공장에 다닐 때는 렌즈를 꼈는데,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었다. 해고되자마자 명수는 안경을 도로 찾아 썼다. 주변의 충고대로 원래 쓰 던 검은 뿔테 안경 대신 금테안경을 썼지만, 그래도 끝이 뾰족한 그의 높은 콧대며 가늘고 예리한 눈빛은 누구의 눈에도 지나치게 지적으로 보였다. 이제 올해만 지나면 서른하나가 되는데도 운동권의 대부분 사 람들이 그렇듯 그는 나이까지 어려 보여 아무리 허름하게 입어도 대학 생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래서 아예 그런 특징을 살려 팔자에 없는 고 시생 노릇을 하는 중이었다. 처음 그 생각을 얘기했을 때 진우는, 하필 고시생이야,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용식을 떠올린 게 분명했다. 그때 명수는 무언가 농담을 한 마디 할까 하다가 그만 두어 버렸다. 바로 그날, 살던 집에 전세보증금 을 돌려받으러 갔다가 용식에게서 날아온 편지를 또 받아온 탓이었다. 그 편지는 그녀에게 보여주지 않을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라 용식에 대 한 얘기를 하는 게 마음에 꺼려졌다. 처음으로 수신인을 장명수로 적은 편지였다. 그때까지 용식은 편지의 내용이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될지 라도 겉봉에는 언제나 윤진우란 이름만을 적었다. 명수는 그 편지를 읽 기를 미루고 있다가 진우가 간 다음에야 겉봉을 뜯었다. 불쾌한 내용일 게 뻔한 편지,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연탄불 위에 올려놓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해 뜯었을 뿐이었다. 그 동안 용식이 그들 부부에게 보내온 편지는 야비하기 짝이 없었다. 거의 공갈 협박범 수준이군, 공안검사보다는 강력계 쪽에 가면 형님, 14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아우 하면서 잘 놀겠는데, 진우는 냉기가 뚝뚝 흐르는 어조로 그렇게 평을 하곤 했다. 지난번에 받았던 편지에는 진우와 밤을 보낸 날의 정 황이 세밀화처럼 상세히 적혀 있었다. 명수형, 진우의 몸에서 나온 붉은 피를 보고 느낀 희열만은 죽었다 깨도 형이 갖지 못할 몫이지. 나는 그 애의 첫 남자였어. 그러리라고 기 대도 안 했는데, 그날 진우가 얼마나 어여뻤는지 나는 그 밤의 한 순간 도 망각하지 않고 있어. 돌에 새긴 조각처럼 영원히 그럴 거야 용식의 편지는 둘 중 누가 받아도 함께 뜯어서 읽는 게 불문율이 되 어 있어서 두 사람은 그런 사연조차 같이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명수 는 진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았다. 그만 읽자, 읽을 필요도 없어, 편지를 낚아채려는 명수를 그녀는 노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 속에 일던 파란 불꽃을 그는 잊을 수 없었다. 그 눈은 그가 편지 를 끝까지 읽기를 원했다. 끝까지 그런 내용이었다. 편지를 다 읽자 진우는 말없이 일어나 화장실로 가더니 잠시 후 돌아 왔다. 명수는 그새 편지를 재떨이에 놓고 태워버렸다. 그는 그녀가 울 고 왔나 싶어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그런 그를 보고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토했어. 그러더니 그녀는 경쾌한 어조로 덧붙였다. 내용 때문이 아니고, 문장이 하도 유치해서, 돌에 새긴 조각처럼, 어쩌구라구, 가히 압권이야. 그런 문장 갖곤 백 번을 시험 쳐도 떨어질 거야. 아무리 사법고시라도 논술력은 볼 거 아냐. 진우는 한참 동안 그렇게 딴 소리를 했다. 용식의 편지쯤은 늘 콧방 귀를 뀌던 그녀였지만 아무래도 그 편지만은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45
명수 역시 언제나 불쾌했던 편지 중에서도 그 편지는 가장 불쾌했다. 그 역시 속이 울렁울렁했지만, 담배를 뽑아 피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끝으로 몇 달간 편지가 오지 않았다. 진우가 한번 은 장난스럽게, 그 미친놈, 혹시 고시된 거 아냐, 편지가 안 오네, 했다. 왜 기다려져, 명수 역시 농치듯 말을 받자, 그녀는 아예 한술을 더 떴 다. 피 얘기까지 썼는데, 이제 저도 쓸 게 없겠지, 마치 남의 일을 얘기 하듯 그렇게 말하더니 그를 보고 생긋, 웃기까지 했다. 그 웃음에는 한 편으론 편지가 이제 안 올지 모른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지난 번 편지에 서 받은 생생한 충격이 함께 묻어 있었다. 명수가 아는 진우는 언제나 그랬다. 가장 힘든 것, 가장 고통스러운 것 앞에서 그녀는 돌아가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정면대결이었다. 그것 도 노골적으로. 그의 생각에 정면대결이란 가장 순수한 사람이 택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택하는 방식이었다. 그럴 때 의 그녀는 어리석다 못해 아둔해 보였다. 그것은 총명하고 지혜로운 그 녀의 본질을 갉아먹는 모습이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슬쩍 넘어가도 될 일을, 입 밖에 내놓아서 하등 좋을 게 없는 일을 그녀 는 꼭 그렇게 일부러 가 몸을 부딪히고, 일부러 입 속에서 씹어 밖으로 뱉어냈다. 그런 생각에 그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던가. 그녀의 입가에 조롱기가 밴 웃음이 맴돌았다. 그럴 때의 그녀는 제 어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피를 그렇게 좋아하니 그 녀석은 평생 살인자나 상대하는 게 맞다 니까. 다시 한 번 그 말을 강조하면서 진우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명수 를 바라보았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고 만 것은 명수였다. 14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그 뒤로 두 사람은 용식의 편지에 대해서는 농담으로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행히 편지는 더 이상 오지 않았고, 진우가 공장에 가게 되어 함께 살던 방도 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명수는 그 편지를 꺼내 다시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진우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그녀가 어쩌다 보이는, 그 입가에 뱅글뱅글 조롱기를 띠는 모습만은 정이 떨어졌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 었다. 그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편지를 뜯었다. 언제나 날림의 천박 한 글씨체로 문방구에서 파는 양면괘지에 써 보내던 그가 이번에는 얇 은 타이프 용지에 깨끗하게 타자로 친 편지를 보냈다. 제법 두툼했다. 그는 접힌 종이를 펼쳐 보았다. 명수형, 이번 편지는 명수형에게만 보냅니다. 혼자 읽어주기 바래 요. 말까지도 깍듯한 경어체였다. 명수형,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우선은 그간의 내 행동에 대한 나의 사과를 받아주기 바랍니다. 빈 말 이 아닙니다. 사실 그 동안 나는 무엇엔가 씌인 사람 같았습니다. 내 정 신이 아니었습니다. 미친 듯이, 형과 진우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었어요. 그 복수를 위해서라면 내가 평생을 걸었던 신념을 배반 하든, 나를 지탱해주는 자존심을 진창에 처박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습 니다. 4년 전, 나는 그때 스물 세 살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눈에 보이는 게 없었어요. 이 미친놈의 세상, 확 뒤집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나 는 세상 전체에 대해 이를 갈았습니다. 도대체 세상은 내 편이 아니었 으니까요. 그때 진우를 알았지요. 그 애에 대한 내 감정은 묘한 것이었 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것이 사랑이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47
아니, 사랑이란 게 원래 그렇게 잡감정이 섞여서 이루어진 거라면 또 그렇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어쨌든 나는 그 애를 탐냈으니까요. 그러나 기묘한 것은 탐내면서도 짓밟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 애는 나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습니다. 불공평했지요. 그 애는 모든 것을 다 갖고 있는데다 똑똑하고 착했고, 거기다 뭐랄까, 이해할 수 없이 매 혹적인 데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한텐 절대로 손 뻗쳐서는 안 될 대상 같은 느낌을 주었단 말입니다. 그거, 아주 더러운 느낌이었 습니다. 실제로 그 애의 태도도 그랬습니다. 나한테 더할 나위 없이 정 중하게 대하는데도, 그러니까 다른 남자애들을 대하는 태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데도(왜 형도 알지 않습니까? 걔가 얼마나 표정관리를 잘 하는지) 나는 진우가 나를 얼마나 싫어하고 경멸하는지, 마치 더러운 병에 걸린 짐승처럼 여기는지 너무도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취급, 아니죠, 행동으로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그 애의 지나 칠 정도의 정중함 속의 싸늘함은 나를 미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애 가 따르는 형에게 사사건건 더 시비를 걸고, 형까지 미워하게 되었는지 도 모릅니다. 하긴 두 사람은 다 고상했으니까요. 종류를 가른다면 고 상한 두 사람은 인품이 넘쳐흘렀고, 야비한 내게서는 오물더미의 악취 가 났겠지요. 나는 두 사람이 다 미웠어요, 원래부터. 그 고상한 인품들 을 확 긁어주고 싶다는 충동으로 내 몸이 얼마나 떨렸던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애타게 진우를 갖고 싶었습니다. 한창때 아니었 습니까? 그 애의 옆에만 가도 몸이 뜨거워졌어요. 그래요. 쓰다 보니 그 애는 나를 두려워한 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내게는 감출 수 없 는 살기가 흘렀을 테니까요. 그 애가 특별히 미모가 뛰어난 것도, 그 애 가 특별히 성적인 매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요. 그런데도 나는 왜 14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그렇게 그 애에게 혹해 있었던지. 그러다 같이 데모를 하게 된 거였지요. 나는 동을 뜨고, 그 애는 야 사. 원래 하기로 돼있던 승호가 못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진우가 그 디엠 의 야사라는 이유 하나로 뒷생각 하나 없이 그 일에 나섰던 겁니다. 맹 세하지만 그때 그 애에게 어떤 흑심을 품고 그렇게 한 건 아니었습니 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게 됐지만 결코 많이 마시지는 않았습 니다. 다음 날 동을 떠야 하는데,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냥 입가심 정 도의 술이었습니다. 나 역시 전혀 취하지 않았습니다. 알지 않습니까? 걔가 언제 취했다고 흐트러진 적이 한번이라도 있습니까? 그날도 그랬습니다. 나는 그날 기분이 엉망이었지요. 우리 어머니, 형도 알다시피 청상과부 홀어머니로 우리 형제 키워냈습니다. 내가 공 부를 좀 한다는 이유 하나로 형까지 자기 인생을 나한테 걸었습니다. 고등학교도 중간에 때려치우고 공장 들어간 우리 형입니다. 거기서 어 머니와 함께 내 학비를 모은 겁니다. 그리고 형은 그 공장에서 프레스 에 손이 나가 버렸어요. 형 손 얘기는 나도 처음 합니다. 학교 때 했다면 모두들 나를 우러러 봤겠지요. 혁명정신이 투철할 수밖에 없는 투사로 말입니다. 하지만 형 이 공장 다니는 얘기는 자랑스럽게 할 수 있었지만 손이 잘린 얘기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생각할 때마다 목이 메이기도 했 고, 어쩐지 형의 손을 팔아먹는 것 같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서 야 이런 얘기를 하니 기분이 묘합니다. 그것도 이런 편지에서. 아마도 얼마 전 착한 여자 만나 형이 결혼을 하게 된 게 내게 이런 말 도 하게 하나 봅니다. 하여튼 그때 동 뜰 때 상황이 그랬단 말입니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49
내가 도무지 동을 떠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머니와 형을 생각 하니 미칠 것 같았지요. 언젠가 갈 길이긴 했지만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아마도 그런 내 감정이 내 얼굴에 드러났는 지 모릅니다. 진우가 나더러 여관에 가서 같이 자자고 합디다. 먼저 말 을 꺼낸 게 진우란 말입니다. 아,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 새삼 내가 이런 고려를 한다는 것도 같잖지만 내 생각에 진우 같은 애가 절대로 그런 면에서 거짓말을 했을 것 같지 않으니까 그대로 말하 겠습니다. 같이 자자곤 해도, 집에 들어갔다 나오기가 어려우니까 그 냥 같이 자자는 건가 했습니다. 우리야 사실 그때 얼마나 도덕적이었습 니까? 한방에서 남자 여자 둘이 추워서 껴안고 그냥 잤다고 해도, 정말 추워서 껴안고 그냥 잤나보다고 믿을 수 있는 풍토가 아니었습니까? 그냥 곁에서만 자도 어딘가 싶었지요. 그래서 여관방에 들어갔는데, 내가 미친 척하고 덤비니까 가만히 있는 겁니다. 정신이 없었지요. 일 은 그렇게 저질러진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명수형, 진우를 범하고 난 느낌은 내가 편지에 노상 썼듯이 황홀한 기분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참담하고 비참한 느낌은 태어나서 처음이었습니다. 진우가 처 녀였다는 걸 알자 이상하게도 그 감정은 더 끔찍했습니다. 진우란 애가 얼마나 냉정하고 무서운 애인지 나는 처음 안 느낌이었습니다. 얘는 도 대체 뭘로 만들어진 인간인가, 나는 그 애가 두려웠습니다. 그 애는 무 언가 나와는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인간 같았어요. 칼로 베면 붉은 피 가 아니라 청록색 피가 나올 것만 같았어요.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짓 밟는 방법도 있구나, 그때 내 솔직한 느낌이 그랬습니다. 그 여자라면 다시는 길 가다가도 만나기가 싫을 지경이었어요. 15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그랬는데도 감옥에서 진우하고 형하고 결혼을 했다는 소식,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으니까 눈이 뒤집히더란 말입니다. 도무지 사람 속이란 게 자기도 모르는 법인가 봅니다. 거기다 어떻게 따져 봐 도 그 애는 내 아들이란 게 분명했으니까요. 형하고는 잠을 잘 기회가 없지 않았습니까? 그날 밤 진우는 분명히 남자의 몸을 처음 받아들인 거였고. 하지만 내가 그 젊은 나이에 무슨 자식 욕심이 있었겠습니까? 진우에 대해서도 여전히 무서운 여자라는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그런데도 열 이 받는 건, 형과 진우가 또 그렇게 너무도 고상하게 결합한다는 사실 이었습니다. 세상에 그런 인품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형은 고매한 인 격자였습니다. 그거야 둘이 비슷한 타입이니 잘 만났고, 어울리는 짓거 리다 싶었지만, 내 못된 소가지가 일단은 훼방을 높고 싶어진 거지요.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기분이 나빴던 건 내가 버러지보다 못한 취급 을 받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도대체 나는 뭐였습니까? 적어도 한 여 자의 첫 남자였는데, 그리고 아이까지 배게 했는데, 두 사람의 결합 속 에는 내 흔적이라곤 하나도 없이 모든 게 너무도 말끔하고 고상했단 말 씀입니다. 내가 진짜 열이 받은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꿈틀하는 인간이다, 그런 걸 보여주고 싶었겠지요. 그 다음에 내가 한 짓거리에 대해선 형이 잘 알 테니까 적지 않겠습니다. 나는 내 상한 자존심, 아니 그건 자존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지요. 그야말로 내 존재가 깡그리 무시된 데 대한 분노로 그런 미친 짓들을 해왔습니다. 진우를 차지하고 싶다거나 그 애를 내 아이로 삼겠다든가 그런 생각은 티끌만 치도 없었습니다. 그냥 훼방을 놓고 싶었습니다. 괴롭히고 싶었던 것입 니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51
명수형, 그런데 왜 갑자기 내가 이런 편지를 쓰는지 궁금할 것입니 다. 여태까지 그렇게 야비하게 굴다 말입니다. 사실은 나도 명확히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젠 지쳤는지도 모르고, 그만하면 충분히 괴롭혔다 는 생각이 드는지도 모릅니다. 벌써 4년 째, 나는 미친 짓을 해오고 있 었으니까요. 진작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어쩌다 광기처럼 그 분노가 되살아나면 나는 또 미친놈이 되어버리곤 했습니다. 고시도 계 속 떨어지고 떨어지는 게 당연하지요. 그런 과시욕과 복수심으로 하는 연극 같은 공부가 무슨 공부가 되겠습니까. 나는 그냥 그렇게 핑계를 대서 운동에 서 도망치고 싶었던 생각이 더 컸을 겁니다. 어머니와 형을 위해 살고 싶었습니다. 지난 번 편지는 고시에서 다시 낙방을 하고, 거의 발악적 으로 쓴 편지입니다. 발악, 그렇습니다. 발악이었어요. 이렇게까지 긁 어대도 너희들이 그렇게 말끔한 얼굴로 살아내겠어, 그런 마음이었습 니다. 그런데, 형, 그 편지를 보내고 나니 난 갑자기 내 자신이 싫어졌습니 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병신 같은 놈이 나라는 깨달음이 들더 군요. 이 사람들은 내가 아무리 긁어대도 긁힐 인간들이 아니다, 너만 혼자 허송세월 보낸 거다, 그런 절망감도 들었습니다. 그 길로 나는 고 시도 때려치웠습니다. 그냥 학원 강사로 나갑니다. 고시학원, 속 편해 요. 삼 년 고시 공부한 게 그래도 헛된 게 아니게 되었지요. 돈도 적당 히 법니다. 어머니도 이제야 기뻐하시고, 형도 좋아합니다. 무엇보다 도, 아까도 썼지만 형이 결혼한 게, 그것도 아주 좋은 형수를 얻은 게 너무도 기쁩니다. 저렇게 좋은 형수를 일찍 얻을 걸, 그 동안 내 나쁜 마음씀이 그들의 만남을 막았다는 가책도 들었습니다. 15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제는 돈을 모아 지금 코딱지만 한 형의 구멍가게를 깨끗한 슈퍼로 바꿔주는 게 내 꿈의 전부입니다. 사과가 됐는지 어쨌는지. 그냥 형에게, 남자 대 남자로 속을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그게 내 방식의 사 과입니다. 나도 이제야 감옥에서 해방된 기분입니다. 그렇군요. 나는 그날의 감옥에 아직도 갇혀 있었습니다. 명수 형, 내가 이런 말 할 필요도 없이 잘 산다고 들었지만, 잘 사십 시오. 그리고 이 편지는 태워버리십시오. 왜냐하면 나는 그 모든 악몽 같은 기억들을 모두 잊을 작정이니까요. 진우와의 그날 밤부터 오늘까 지는 내 인생에서 이제 지워집니다. 없었던 일입니다. 내가 떠벌리고 다녔던 친구들이나 후배들에게도, 내 상사병이 지독해서 그런 환상에 사로잡힌 정도로 처리하겠습니다. 하긴 굳이 그러지 않아도 아무도 내 말은 믿어주지 않았고, 나는 이미 미친놈으로 취급받고 있지만요. 정말 속이 후련합니다. 이젠 형이나 진우, 누구도 밉지 않습니다. 진우에게 도 내가 개과천선했다고, 그 동안 미안했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만 전해주기 바랍니다. 이 편지는 보이지 않는 쪽이 진우에게도 좋을 것입니다. 빨리 태워 버리십시오. 읽는 대로. 보안용 문건 태우듯이 말입니다. 갑자기 어딘 가 구석에 있다가 어느 날 아이 손에 들어갈까 겁이 나는군요. 잘 사십 시오. 다시 한 번 내 결심을 약속드리면서, 용서는 바라지 않겠습니다. 86년 10월 25일, 용식.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상했던 것처럼. 불쾌하지도, 그렇다고 안도의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냥 명수는 피곤했고,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용식의 말대로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53
그 편지를 태워버렸다. 그러나 진우에게 전하라는 용식의 말은 아직도 전하지 않고 있었다. 명수는 외투를 벗어 못 위에 걸고 전기장판의 코드를 꽂았다. 연탄가 스가 새서 죽을 뻔한 뒤로는 아예 이것 한 장에 의존해 살고 있었다. 드 나드는 시간이 불규칙한 그로서는 속이야 편했지만 하룻밤에도 몇 번 씩이나 잠이 깨곤 하였다.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어도 차가운 윗바람 때문에 장판 쪽이 아닌 부분은 금방 싸늘해졌다. 엎드려 자면 등판이 시렸고, 바로 누우면 얼굴과 가슴이 추웠다. 그럴 때마다 자세를 바꾸 어 몇 번이나 엎드렸다 바로 누웠다를 되풀이하면서 자야했다. 엉덩이 밑으로 미지근한 열기가 전해오기 시작했다. 이제 전기가 흐르기 시작 했으니 곧 따뜻해질 것이다. 그는 깔고 앉은 장판 밑에 손을 집어넣어 얇은 공책 한 권을 꺼냈다. 그리고는 공책 사이에 끼워 놓은 사진을 꺼 내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진우가 공장 들어가기 직전에 가족이 함께 놀러가 찍은 사진이었다. 관악산,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하는 단풍이 배경색을 아름답게 하고 있었 다. 진우는 그 나무 앞에서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슬퍼 보였 다. 이제 네 살이 된 민혁이를 떼어놓고 시작해야 하는 생활 앞에 아무 리 의지가 강한 그녀였지만 여러 가지 감회가 드는 걸 막을 수는 없었 으리라. 이 얼굴의 그늘 속에 나와 헤어지는 데 대한 쓸쓸함도 섞여 있 을까. 명수는 순간적인 생각이었지만 자신의 유치한 생각 앞에 고개를 흔들었다. 영락없는 의붓애비군, 민혁이를 받아들이는 데 추호의 갈등 도 없었던 자신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결정을 후회한 적도 결코 없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입으로 말한 대로 진우의 아이로만 여겨졌 다. 그러나 때때로 그는 그 작은 아이에 대해 찌르는 듯한 통증 같은 걸 15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느낄 때가 있었다. 알았다, 자신은, 그것이 어떤 심정인지를. 그것은 추잡하게도 질투라는 감정이었다. 그 작은 아이는 객관적으 로 용식은 전혀 닮지 않았다. 신기할 정도로 제 에미인 진우만을 닮고 있었다. 게다가 진우가 용식을 어떤 인간으로 취급하고 있는지는 진우 자신보다 자기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아내의 애정과 신망 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때 그는 오히려 민혁이, 용식 따위가 아닌, 아내가 사랑했던 남자의 자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 다. 차라리 그렇다면 자신의 질투는 그 연적 戀 敵 에 대한, 아이의 얼굴에 서 읽어내는 성인인 다른 남성에 대한 질투가 될 것이 아닌가. 그러면 자신은 적어도 어른을 상대로 질투를 하는 것이 되고, 그것은 누구에게 나 납득이 가는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 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는 죽었다 깨도 자신이 용식에 대해 질 투를 느낄 수는 없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민혁을 낳게 한 용식과 아 내의 현실적인 결합의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그걸 용식 은 그토록 생생하고 리얼하게 그려 보내주지 않았던가. 그 감정은 거짓 이었더라도.) 그는 아내가 그 정사에 조금도 자신을 내주지 않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용식의 참괴감은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어쩌면 용식이야말로 가장 큰 피해자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용식은 결 코 자신과 대등해질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는 달랐다. 진우가 아이에 대해 갖는 집착은 남달랐다. 어렵게 낳았고, 고통 속에 길렀기 때문인가. 그녀와 아이의 결합에는 자신이 끼어들 수 없는 어떤 결속력이 있었고 명수는 그것에 대해 질투 하는 치졸한 자신의 모습 앞에 진저리를 쳐야만 했다. 내가 질투하는 것은 차라리 용식이다, 하고 자신을 달래보고 아이의 얼굴에서 일부러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55
용식과 닮은 구석을 찾아보는 그였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질투 를 느끼는 것은 그 작은 아이, 민혁이라는 것을. 그 사실이 명수를 숨쉬기가 괴로울 만큼 곤혹스럽게 만들곤 했다. 그 는 사진을 다시 공책 속에 넣고 장판 밑에 밀어 넣었다. 민혁이의 사진 은 진우의 사진 뒷장에 있었지만 그는 들춰 보지 않았다. 이런 심정으 로 아이의 사진을 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진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같은 날 찍은 사진이었다. 천진하게 웃고 있는 네 살 박이 사내아이였다. 엄마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너랑 잠시 떨 어져 있어야 해. 하지만 자주 놀러가고 편지도 쓸 거야, 민혁아, 우리 씩씩하게 잘 견디면서 함께 살 날을 기다리자, 외할머니랑 이모 말씀 잘 들어야 해, 진우의 차근차근한 설득에 그 어린 것은 무조건 고개를 끄떡였고, 다음 날이면 엄마랑 헤어질 것도 잊고 즐겁게만 놀았다. 총 명하고 의젓한 아이였다. 민혁이는. 총명하고 의젓한 아이, 명수의 가슴에 예의 찌르는 듯한 통증이 지나 간다. 진우의 아이임에도 그는 아이가 단순하고 평범하기를 바라는 자 신의 속마음을 본다. 내 자식이라면 그럴 것인가, 생각은 자꾸만 갈래 를 쳤다. 명수는 자신의 그런 생각들이 짜증스러워 담배를 피워 물었다. 좁은 방은 금방 담배연기로 자욱해졌다. 마약을 들이키듯이 그는 한참동안 창을 열지 않고 연기만 피워냈다. 담배연기로 자신을 정화시키기라도 할 듯. 한참을 그런 뒤에야 그는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두 시간 뒤면 정세 토론을 위해 사람들 이 모일 것이다. 어젯밤 대충 팜플렛은 읽어 두었지만 다시 꼼꼼히 보 면서 토론 요점을 잡아야 했다. 15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창을 열었다. 찬 공기가 뺨에 닿자 비로소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 다. 진우도 올 것이다. 주간 근무에서 야간 근무로 바뀌는 주말이 시간 이 가장 많았다. 토요일 저녁에 주간근무의 일이 끝나면 월요일 밤에나 야간 근무로 들어가면 되었다. 진우는 여기서 밤을 보내고 내일은 민혁 이를 보러 갈 것이다. 그는 일이 많아서 함께 갈 수 없었다. 오늘은 밤 을 새워야 할 것이고, 사람들이 새벽에 가고 나면 몇 시간 정도 아내와 둘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금 알전구의 매끄럽고 차가운 감촉이 떠올랐다. 언제나 체온이 오르지 않지만 부드럽고 섬세한 아내의 육체. 창밖으로는 검은 어둠 속에 불빛들이 멀리 뻗쳐 있었고, 네온으로 밝 힌 붉은 십자가들이 셀 수 없이 솟아 있었다. 저렇게 십자가가 많았던 가, 낮에 볼 때는 잘 몰랐는데, 밤에 보니 도시는 흡사 공동묘지처럼 여 겨졌다. 맑은 공기를 좀 더 마시고 싶었지만, 그는 그 붉은 십자가들이 흉측스럽게 느껴져 소리 나게 창을 닫아버렸다. 명수는 잠결에도 코끝이 시려 눈을 떴다. 밤새도록 피워댄 담배연기 를 뽑아내느라 새벽녘에 창을 열어둔 채로 잔 탓에 아침 공기가 선뜩했 다. 바깥 창이 파랗게 빛나는 걸 보니 7시가 넘은 모양이었다. 진우는 그의 팔을 베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가만히 뺨을 쓰다듬어보니 뺨이 찼다. 그녀는 그의 손길에 잠결에 코를 찡그렸지만 깨지는 않았다. 그 는 조심스레 아내가 베고 있는 팔을 뺐다. 정세토론을 마치고, 술자리 까지 벌리고 사람들이 간 것은 새벽 5시쯤이었다. 한 두어 시간 업어가 도 모르게 깊은 잠이 들었나 보았다. 명수는 일어나 창가로 갔다. 방은 2층에 있었기 때문에 아래쪽 시장 이 내려다 보였다. 배추거리를 실어오는 리어카, 한 구석에서 불을 때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57
고 앉아있는 청소원들, 들여놓았던 생선상자들을 내오는 사람, 시장은 벌써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응, 왜 깼어? 등 뒤에서 졸음기가 잔뜩 묻어있는 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수 는 문을 닫으며 돌아보았다. 창문이 열려서 닫으려구. 어서 더 자. 나도 잘 거야. 그러면서 명수는 아내의 곁에 누웠다. 아휴, 추워. 싸늘해, 윗 공기가. 진우가 중얼거리며 명수에게 파고들었다. 비누냄새인지, 로션냄새인 지 아내의 독특하고 익숙한 내음이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몸은 이 미 팽팽해져 있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아내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나중에 지금은 너무 졸려 더 자고 싶어 나중에 거의 잠꼬대처럼 말하던 아내는 그대로 그의 품안에서 잠이 들었다. 그는 그녀가 깨지 않게 부드럽게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자신의 몸 을 달래느라고 애썼다. 피곤한 아내를 더 자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 한 편으론 그대로 깨워서 자신의 정열로 그녀를 불붙게 하고 싶다는 욕망 이 싸웠다. 아내의 가슴돌기는 잠결에도 그의 손길로 일어나 있었다. 휴우 명수는 한숨을 쉬며 아내의 몸에서 손을 떼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천장 위로 연기가 똑바로 올라갔다. 참는 게 올바를 것이다. 아내를 사 랑한다면. 아내의 말대로 한숨 잔 뒤에 서로 느긋하게 즐기는 것도 좋 으리라. 그는 담배를 끄고 자기도 눈을 붙여보았다. 그러나 한번 깬 잠 은 쉽사리 다시 찾아올 것 같지 않았다. 한판의 정사를 치르고 그 기 분 좋은 아늑함 속에서 따뜻한 물에 잠기듯 잠이 드는 기분이 그리웠 15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다. 아내의 피곤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엔 아내 가 서운하기도 했다. 자신의 열정에 함께 반응하지 않는 열정이란, 그 게 단순히 시간의 불일치라 할지라도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잠이 들 성 싶지 않았다. 그새 진우는 다시 잠들어 새근새근 아늑한 숨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차라리 부엌에라도 나가 먹을 걸 준비해두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러면 함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 수 있었다. 아 내는 또 아이한테 빨리 가고 싶어 안달을 할 터였다. 겉으로 표 내지 않 으려고 기를 쓰면서. 더 보기 싫은 모습이었다. 명수는 조용히 일어나 부엌으로 나갔다. 밥은 남아 있었다. 석유풍로 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찌개거리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풍로 위에 보리차를 얹어놓고 얼른 밖으로 나가 동태 한 마리와 무를 사왔다. 얼 큰한 동태찌개가 먹고 싶었다. 진우도 어제 술을 많이 마셨으니 이런 게 먹고 싶을 것이다. 잠시 바깥바람을 쐬고 온 게 좋았다. 명수는 찌개냄비를 올리고 펄 펄 끓는 보리차 물에 커피를 타서 마셨다. 따끈한 커피 한 잔이 겨울 아 침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동태 냄새를 맡았나, 부엌 구석 쥐구멍 에서 생쥐 한 마리가 고개를 내밀었다가 쏙 들어가 버렸다. 찌개냄비가 끓으면서 구수한 냄새를 풍길 때쯤 진우가 문을 열고 나왔다. 냄새 죽이네. 동태야? 응. 더 자지. 되게 피곤해 보이던데. 명수가 불을 줄이면서 진우를 보고 말했다. 아니, 개운해. 잘 잤어. 근데 형은 언제 일어났어? 시장에도 갔다 왔나본데. 아까 깼을 때 그냥 일어났어. 잠도 잘 안 오고 해서.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59
언제 깼었어? 난 한 번도 안 깨고 잤네. 명수가 진우를 돌아보았다. 안 깨긴? 아까 깼잖아? 내가 할려고 폼 잡았더니 졸리다고 칭얼거 려서 다시 재웠잖아? 진우는 금시초문이란 표정이었다. 내가 깼었다구? 정말? 난 아무 생각도 안 나네. 고개를 갸우뚱하던 진우는 갑자기 장난기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뭘 할려고 폼 잡았는데? 매타작 좀 할려고 했다. 현장 들어간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활동 성과라곤 하나도 없잖아! 명수가 장난스럽게 말했는데도, 진우는 당장 풀이 죽는다. 글쎄말야. 난 아무래도 무능한가 봐. 내가 공들여 놓으면 시골로 내려가 버리고, 아니면 시집가서 공장 그만두고 잘 안 돼. 나한테 비밀은 잘 털어 놓는데. 비밀? 웬 비밀? 그냥 내가 편한가봐. 연애 얘기도 해주고, 집안 고민도 얘기하고, 자기 몸의 비밀 같은 것도 어떤 얘긴데? 어젠 얘기 안 했잖아? 한번 말해봐. 싫어! 좋아, 하기 싫으면 말아. 하지만 그거 다 담고 있을려면 니가 힘들 겠다. 응, 힘들어. 걔네들 비밀을 담고 있는 게 힘든 게 아니라 내 비밀을 말하지 못하는 게 나 혼자 옷 다 갖춰 입고, 아이들은 발가벗고 있 는 걸 보는 느낌이야. 16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괜한 감상에 젖지 마. 그러다 또 너 감정이 격해져서 다 불어버리 는 거 아냐? 아주 물가에 내 논 애기 같다니까. 명수가 짓궂게 말하자 진우는 눈을 흘기면서 발끝으로 그를 툭 쳤다. 날 뭘로 보는 거야? 부지깽이 시집 보내논 것 같다니까. 내가 아주 마음이 조마조마 해. 어, 형, 정말 이러기야? 하도 감동을 잘 하니까 그러지. 조심해야 돼. 넌 프락치한테도 감 동 받는 애잖아? 진우는 그 말에 대꾸도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예전에 야학을 할 때, 야학 학생으로 들어온 아이 중에 경찰에서 집어넣은 프락치가 있었다. 여러 가지 수상한 점이 발견되면서, 그 아이를 족치기 위해 진 우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 애를 족치기는커녕 그 애의 얘기 에 흠뻑 넘어가 뭘 알아내기는커녕 같이 펑펑 울다 돌아온 적이 있었 다. 그녀는 다른 강학들한테 심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명수 역시 날카 롭게 그녀를 추궁했지만, 그는 그녀 자신이 이미 스스로에 대해 말할 수 없는 혐오감과 열패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서 시체에 칼 질을 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진우는 약간의 당혹스러운 표정만을 내비쳤을 뿐 태연한 태도 로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 어떻게 보면 뻔뻔스러울 만큼 그녀의 겉모 습은 침착했다. 아이 참, 난 왜 이 모양인지 몰라. 한심하다니까! 그녀 는 장난스럽게 웃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명수에게는 그녀의 속마음이 겪는 그 참괴감이 자기 일같이 전해져 왔다. 왜 그랬을까. 그때 이미 그 녀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얘기 도중에 그녀는 배가 아프다며 나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61
갔는데, 그때 아주 잠시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찰나에 불 과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표정을 봤더라도 복통 때문이려니 짐작했 을 그런 종류의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런 표정이라도 흘릴 정도 라면 그 고통이 어떤 정도인지 그는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개인적 감정에 대해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자제력이 뛰어난 진우였다. 언젠가 명수는 진우에게 그런 말까지 한 적이 있었다. 넌 애 인 장례식에 다녀온 길이래도 다른 사람 만나면 웃어줄 아이야, 생긴 거랑 다르게 무서운 데가 있어, 그때 그녀는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 다. 내가 그래요? 하고 되묻는 눈길이었다. 자신이 그런 사람이란 걸 그 자리에서 비로소 알게 된 사람처럼. 그러다 그녀는 말했다. 어릴 때 부터 난 이기주의자가 될까봐 겁이 났어요, 이기주의자가 안 되는 게 내 삶의 목표였어요, 그가 비웃듯이 퉁기며 물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 야, 내 말이랑? 그녀는 다시 물끄러미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이 섞인 눈빛. 그러니까 내 감정은 내 몫이라는 거예요. 그걸 남에게 강요하는 게 내겐 이기주의로 느껴져 요. 그때부터였던가, 저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게, 명수에게 진우는 그 순 간 한없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스스로 감옥을 지어놓고 그 속에서 외롭 게 앉아있는 아이처럼. 그런 그녀가 사람들 앞에서 저만큼이라도 자신 을 허문다는 것은 그런 독한 자제력으로도 통제가 되지 않을 만큼 아프 다는 얘기였다. 아마도 변소라도 가서 혼자 울고 있을 것이다. 그래놓 고는 저 혼자 눈물을 다 닦고 생긋거리면서, 똥 누고 와서 시원해진 듯 한 표정을 짓고 돌아올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그녀는 생긋거리며 돌아 왔다. 그러나 그와는 절대로 눈길을 맞추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가면 16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을 뚫어보는 사람이란 것을 알고 기분 나빴던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길 싫어하고, 가면 뒤로 숨고 싶어 하는 그녀의 의도를 방해하는 것이었으 니까. 하지만 명수로서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그런 진우가 남의 일에 대해서 는 거의 백치 수준으로 감동해버린다는 점이었다. 그럴 때의 그녀는 자 기 자신이란 존재를 완전히 망각하고 아예 상대방이 되어버렸다. 모든 비판의식을 잃고 그대로 상대에게 빨려 들어가 버렸다. 명수처럼 합리 적이고 어떤 경우에도 명철함을 잃지 않는 사람으로선 이해가 안 될 뿐 더러 짜증스럽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자신에게 저렇게 철저하게 통제 력이 강한 사람이 동시에 타인의 감정에 대해선 어떻게 그렇게 헤퍼질 수 있는 것인지 불가사의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명수가 그런 진 우의 이상한 모습을 사랑하는 여자의 모습으로 싸안을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것은 혁명운동에 있어서 지극히 위험한 기질이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무화시켜 버릴 수 있는. 그래서 아 플 줄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 경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언제나 진 우에 대해 위태위태하게 여기고 있는 점은 결코 노파심이 아니었다. 무 너지랴, 정성껏 돌을 하나씩 숨죽여 같이 쌓아나가다가 어느 순간 무 심하게 손끝 하나로 그 돌탑을 무너뜨려 버릴 위험을 품고 있는 사람 이 바로 진우였다. 그런 기질이 그녀에게는 농후했다. 용식과의 일이야 말로 그 증거가 아니던가. 경계하고 경계하고 늘 주의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역시 진우다웠다. 그녀는 풀죽은 얼굴을 얼른 숨기고 생긋, 웃으며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근데 정말 나 때리려고 했어?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63
진우는 명수 앞에서 늘 어리광을 부렸다. 결혼 전에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늘 그에게 빚진 느낌을 갖고 사는 것이다. 그는 그게 싫 었다. 그 부담을 그녀에게서 걷어내 주고 싶었지만 말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때리려고 했지. 요 맹추야! 명수는 일어나서 진우에게로 다가가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나, 목욕하고 올까? 진우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허 참, 속보인다, 속보여. 그러면서도 명수는 웃었다. 이 녀석이 아직도 많이 아프구나. 안 하 던 짓을 하는 걸 보니,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웃음이 나왔다. 목 욕한 직후의 진우의 몸을 그는 몹시 좋아했다. 그녀는 가끔, 나 목욕 갔 다 왔는데, 그러면서 그를 유혹하기도 했다. 목욕이란 말은 그들만의 은어였다. 그녀는 그새 수건과 비누를 챙겨 벌써 신발을 꿰차고 있었 다. 밥 먹어야지. 어딜 가? 찌개도 다 끓었는데. 이따가 뎁혀 먹지, 뭐. 난 지금 갔다 와야겠어. 하고 싶어 죽겠는 걸. 금방 갔다 올께. 샤워만 후다닥 하구. 명수가 붙잡을 새도 없이 진우는 벌써 계단을 내려갔다. 바로 맞은 편 건물이 목욕탕이었다. 이 방에 처음 왔을 때도 그녀는, 목욕탕 가까 워서 좋네, 하고 만세를 불렀다. 다른 친구들은 속도 모르고, 혼자 깨끗 한 척 하네, 난 장가가기 전날에나 목욕할 건데, 소크라테스처럼, 어쩌 구 하면서 떠들었다. 그들 위로 두 사람만이 눈길을 나누며 웃었던 기 억이 상큼했다. 명수도 그러는 아내가 싫지 않았다. 새벽참에 속상했던 16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마음이 풀리기도 했다. 그는 자신도 몸을 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찌 개를 내리고 풍로 위에 양동이를 올렸다. 물이 미지근해지기만 하면 부 엌문을 닫고, 한번 뒤집어쓰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물을 뒤집어쓰자 공기가 너무 찼다. 수건을 걸치고 방으 로 뛰어 들어갔지만 연신 재채기가 쏟아졌다. 방이라고 다를 것도 없었 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명수는 벗은 채로 장판 위에 누워 이불을 푹 덮 어썼다. 이미 그의 몸은 아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얼른 아 내가 왔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정말 흐벅지게, 뜨겁게 살을 나누고 싶 은 욕망이 끓었다. 그러나 등판이 뜨뜻하니 새벽에 못 채운 졸음이 슬 며시 몰려왔다. 명수는 어느 새 잠이 들고 말았다. 꿈속에서 그는 욕조 속에 있었다. 얼마나 기분이 나른한지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욕조 속에는 물고 기들이 있었다. 그것들이 헤엄을 치며 지느러미로 그의 몸을 스칠 때마 다 그는 참을 수 없는 관능의 느낌에 몸을 떨었다. 그때, 아, 아내를 기 다려야지, 하면서 그는 잠이 깼다. 눈을 떠보니 속치마만 입은 진우가 옆에 누워 그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 언제 왔어? 명수는 너무 반가워 진우를 자신의 몸 위로 끌어올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내려다보더니 그의 이마와 눈과 코에 입을 맞추었 다. 가늠할 수 없는 쾌락의 느낌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아직도 꿈속 의 욕조에 있는 것만 같았고, 그녀의 손길이 그 아름다운 물고기들의 지느러미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그의 목과 귀에 입맞춤을 했다. 그가 입술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살짝 대기만 할 뿐 금세 떼었다. 그의 혀가 허공에서 헛놀았다. 그는 그녀가 지금 즐기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65
는 지금 기운을 회복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나누는 이 정사를 오래 즐 기고 싶어 했다. 그렇게 감질나게 입술을 지나간 그녀는 그의 가슴 한 복판의 골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끈 솟아오른 그의 물건에 는 입술을 스치듯 감질나게 스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젠 그녀도 달아 오를 대로 달아올랐는지, 자신의 입술을 그의 입술에 포갰다. 이번에는 뜨거운 입술이었다. 그들의 혀는 다정하게 엉켰다. 그는 열정적인 입 맞춤을 하며 그녀를 아래로 눕혔다. 장판의 따뜻한 바닥에 그녀의 등을 대주고 싶었다. 그녀의 속치마를 벗겨 내리자 아무 것도 입지 않은 그 녀의 알몸이 그대로 쏟아지듯 나타났다. 그는 그녀의 가슴을 입 안 가 득 집어넣었다. 이제 그에게 희롱하고 놀 여유는 없었다. 희롱은 그녀 에게 당한 것으로 충분했다. 그녀 역시 이제는 속도를 요구했다. 그녀 의 입이 가쁜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옆에 놓인 라디오 의 버튼을 눌렀다. 라디오에서는 주부들이 보낸 편지가 읽혀지고 있었 다. 김창선, 하은정씨, 제 말 좀 들어보세요. 글쎄, 어제는 우리 부부 의 결혼기념일이었거든요. 3주년 되는 날이었는데, 그이는 그날 아침 까지도 모르는 것만 같았어요. 그래도 설마 했지요. 저러다 날 놀래킬 려고 그러겠지, 작년에도 그랬으니까요. 저는 종일 집을 치우고, 꽃을 꽃고, 술도 사다놓고, 고기도 볶고, 화장도 예쁘게 했어요. 칭얼거리는 아이도 일찍 재웠구요. 그이의 퇴근시간에 맞춰 화장대 위에 촛대를 놓 고 촛불도 켜놓았지요. 왜 화장대 위에다 했냐구요? 그야 우리 살림이 아직 단칸방이라 식탁이 없기 때문이지요. 전 우리 집만 사게 되면 제 일 먼저 식탁을 사고 싶어요. 식탁 위에 촛불을 놓게요. 어쨌든 촛불도 켜놓고, 그이하고 연애할 때 잘 다니던 다방에서 매일 흘러나오던 필 16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링 이란 노래도 다 준비해 놓았어요. 바깥에서 부르는 소리만 나면 탁 틀게요 진우는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고 있었다. 틀어막은 입 사이 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알전구처럼 매끄럽고 차가운 그녀의 살갗 에 땀이 맺혔다. 그리고 나는 소리를 죽인 채 텔레비를 틀어놓고 보 고 있었어요. 남편의 목소리를 못 들으면 안 되니까요. 텔레비젼 속에 서는 예쁘고 잘 생긴 탈렌트들이 모두 붕어처럼 입을 뻐끔뻐끔해서 아 주 우스웠어요. 그런 대로 잠깐은 볼 만했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은 자 꾸 가는데 그는 오지 않았어요. 그렇게 기다리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아침 일찍 주인 아주머니가 방문을 두드렸어요. 새댁, 새댁, 전화 받아. 애기 아빠 전화야, 그 소리에 깨어보니 나는 쓰러져 맨 바닥에 잠들어 있고, 텔레비는 혼자 지직거리고, 촛불은 다 타서 저절로 꺼져 있었어 요. 눈물이 왈칵 치밀었지만, 그냥 전화를 받으러 갔지요. 미안해, 안 무서웠어? 남편의 첫 마디에 그래도 마음이 좀 녹았는데, 하는 말이 어 제 친구 아이 돌이었는데, 깜빡 잊고 얘길 못하고 나왔다는 거였어요. 원래는 잠깐 들렸다가 올려고 전화도 안 하고 있ㄲ다가 자리가 늦어져 서 나중엔 주인집에 미안해서 전화를 못했다구, 끝까지 그이는 어제가 우리 결혼기념일이란 걸 잊고 있었어요. 나는 아무 말도 안하고 방에 돌아와 혼자서 볶아놓은 고기를 다 먹었어요. 물론 사놓은 술도요. 엉 엉 울면서요 광주에서 그렇게 피비린내가 났어도, 지금도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고 죽음을 당하고 있어도 세상은 저렇게 작은 일에 연연하 면서 돌아가고 있구나. 명수는 문득 라디오 속의 세상이 전혀 다른 세 상처럼 여겨졌다. 진우가 그의 허리를 꽉 잡아당긴다. 참고 참은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라디오에서 떠들어줘서 정말 다행이었다. 편지를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67
다 읽은 남녀 진행자가 서로 촌평을 나누었다. 깔깔깔, 행복한 얘기예 요, 그래도 얼마나 서운했을까, 남자들은 그런 거 원래 못 챙겨요, 하 하 무지하고 징그러운 소시민의 삶. 아니다. 벌써 6년의 세월, 세 상은 조금이라도 나아지고 있는가. 명수는 진우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이 여자를 죽이고 싶다, 그 순간 한 줄의 섬광 같은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왜 그런 생각이 났는지 그도 몰랐다. 그는 찰나였지만 자신의 생각 속에 묻은 증오심에 몸을 떨었다. 놀랍고 두려운 생각이었지만 그는 그녀의 몸 안에서 움직이며 그 충동을 즐겼다. 그 순간만은 아무것도 부정하거나 비판하거나 분석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여자를 죽여 버리고 싶다. 그 생각으로 그의 몸은 힘이 넘쳤다. 진우가 몸을 비트는 순간, 그 역시 참았던 힘을 모아 자신 을 분출했다. 다른 어느 때보다도 커다란 쾌감이 그의 몸을 타고 흘렀 다. 그녀 역시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은 채 울음 끝처럼 그쳐지지 않는 숨소릴 잦히고 있었다. 달콤했었지 그 수많았던 추억 속에서 흠뻑 젖 은 두 마음은 우리 어떻게 잊을까 아- 다시 올 거야 너는 외로움을 견 딜 수 없어 아- 나의 곁으로 다시 돌아올 거야 그러나 그 시절에 라디오에선 부드럽고 관능적인 목소리로 나미가 슬픈 인연 을 부르고 있었다. 이 집은 방음을 많이 고려해 얻은 방이었지만, 그래도 소리는 잘 들렸다. 두 사람의 몸에서 동시에 힘이 풀렸다. 진우가 눈을 떴다. 명수를 올려다보고 웃었다. 그 모습이 어여뻤다. 그는 그녀의 몸에서 나오고 싶지 않아 그대로 그 위에 엎드렸다. 내가 이 애를 죽이고 싶어 했다, 한 순간일지라도, 왜 그랬던가. 그는 애틋한 마음에 그녀의 눈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헐떡이는 가슴이 느껴졌 다. 행위가 끝나면 지금까지 느껴지지 않던 무게가 느껴지리라. 그는 16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그녀의 몸 위에서 내려와 옆에 누워 그녀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그의 겨드랑이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등으로부터 온기가 스며 올라왔다. 땀에 젖어 더웠지만 그는 이불을 코까지 끌어올렸다. 땀이 식으면 추울 것이다. 이제 그는 아침 내 원하던 그 기분 좋은 잠이 자신을 덮칠 것을 알았다. 어느 방에선가 뻐꾹 시계 우는 소리가 뻐꾹, 뻐꾹, 하고 울려나오고, 라디오에서는 어느새 아침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 아침 7. 푸른 보랏빛 저녁이 내리 깔리고 있었다. 서서히 푸른 보랏빛의 하늘이 퍼져 나갔 다. 서울로 가는 버스 속이었다. 파란빛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보랏빛 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섞인 듯한 빛깔이 수채화 물감을 풀 어놓은 것처럼 번져갔다. 민혁이가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까, 달리는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진 우는 자신을 나무랐다. 명수와 기분 좋은 정사를 나누고 다시 잠들었 다 깨어 보니 이미 오후 햇살이 기울고 있었다. 진우는 자신이 정말 야 속한 엄마라는 생각이 들었고, 괜히 명수까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 가 더 당황해하며 허겁지겁 밥상을 차려오는 모습을 보고는 또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오히려 늑장을 부렸다. 일부러 천천히 밥을 먹었 고, 설거지는 자기가 하겠다고 떼를 썼다. 명수 앞에서는 아이에게 가 겠다고 안달하기가 미안했다. 그는 표 내지 않아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69
너무 잘 알아 늘 앞서 배려해 줬는데, 그녀는 그러는 그가 고맙다기보 다는 오히려 버거웠다. 두 사람의 지나치게 서로를 위한 행동은 그녀로 하여금 민혁이 명수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명수는 진우의 손을 쥐며 말했다. 난 니가 안쓰러워.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다친 상처가 견딜 만하다가 누군가 아프겠다고 한 마디 하면 갑자기 눈물이 핑 돌듯이. 하지만 그 녀는 자기들의 분위기가 그렇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안쓰럽긴. 난 재미만 좋은데. 우리 꼭 불륜에 빠진 연인 같다, 그치? 그녀는 그러면 서 그의 손을 잡아다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그가 픽 웃었다. 그러자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 형, 나니까 너 데리고 살 지, 그 말 한 번 더 해볼래, 응? 그는 어이없어 하며 그녀를 보고 웃었 다. 그래. 정말 나니까 너 데리고 살지. 누가 너 같은 앨 감당하겠니?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형은 모를 거야, 그 말이 나한테 얼마나 따뜻하게 들리는지, 그 말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가 손을 뻗어 그 녀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버스가 왔다. 혼자가 되었을 때 진우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었 다. 비로소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 때문일까. 자신이 그렇게 명수 를 좋아하고, 존경하고, 그에 대해 무한한 감사까지 바치고 있는데도 그와 헤어져서 그를 생각하는 쪽이 함께 있는 것보다 편한 이유는. 그 녀는 자신이 그와 있을 때면 지나치게 긴장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거 의 연기처럼 그녀는 명랑을 가장하고, 어리광의 가면을 썼다. 무엇인가 가 그녀를 자꾸 그렇게 몰아갔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시작부터 대등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그와의 정 사에 몰입하는 걸까. 17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명수 형 진우는 속으로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힘들었다. 그 이 름을 부를 때면 커다랗고 무거운 배 한 척이 서서히 심연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그와 몸을 섞는 일이 훨씬 편했다. 그와 정사를 나눌 때면 그녀는 언제나 행복했다. 그때에만 그 녀는 그와 대등하게 만났다. 아무런 부채감 없이, 모든 것을 잊고, 그와 그녀는 어린 짐승들처럼 티 없이 놀 수 있었다. 진우의 옆자리에 앉은 중년 남자가 자꾸만 졸면서 머리를 기대왔다. 작은 키에 깡마른 그 남자는 초라한 행색이었다. 그녀가 굳이 몸을 비 틀지 않아도 그녀의 어깨에 닿을 때마다 제풀에 놀라 깜짝 깼다가는 또 다시 조느라 어깨에 기대오곤 했다. 그녀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 피곤한 남자의 짧은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몇 정류장 안 가 그 남 자는 차가 멈췄을 때 깜짝 놀라 밖을 보더니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가 내 렸다. 과천 지나서 있는 시골마을이었다. 어둠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내비치고 있었다. 그는 그 어둠 속의 길로 재빨리 사라졌다. 진우는 어깨 위로 피곤을 느꼈다. 그 남자가 내리면서 자신의 피곤을 그녀에게 넘기고 간 것처럼. 자신의 무능함이 유리칼로 긋듯 가슴을 아 프게 갈라왔다. 어제, 활동 보고에서 다른 친구들의 성과는 눈부셨다. 벌써 독서회를 조직한 친구도 있었고, 노조 설립 준비에 들어선 후배도 있었다. 자기만이 아무것도 내세울 만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부드럽게 말했지만, 명수의 질책하는 마음도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평 판이 좋다는 것도, 좋은 처녀란 말을 듣고 있다는 것도. 무엇이든 열심 히 했고, 누구에게든 잘 대하려 했으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 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이들에겐 고민이 많았다. 좋아하는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71
남자, 집안 문제, 돈 문제, 건강, 친구 사이의 갈등 그런 것들에 대 해 속살속살 얘기하다 보면 현장에 대한 불만이나 이 사회 구조의 문제 에 대해선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꺼낼 수 없는 게 아니라, 꺼내기가 미안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언제나 얘기를 이끌어 가는 게 아니라 상대 방의 이야기에 끌려가 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꼭 텔레비전을 보면서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 엉엉 울고 있는 한심한 아줌마처럼 여겨졌다. 그녀 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그 애의 심정이 되어 버려서 다른 생각을 할 여 지가 없었다. 자신이 그들을 속이고 있다는 가책 또한 그녀를 자유롭 지 못하게 했다. 나는 무능하다, 그냥 공장생활을 잘 하는 게 무슨 소용 이 있단 말인가. 공장생활이야 정말 잘했다. 이제는 일도 능숙해졌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반해버렸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도 살갑 고 예뻤다. 하나같이 매혹적이었다. 선하면 선한 대로, 악하면 악한 대 로 그들에게선 사람 냄새가 났다. 가식과 위선, 냉소와 조롱의 세계에 찌들어온 그녀에겐, 아니 자기 자신부터 그런 것들로 방벽을 두른 그녀 에겐 그 자체만으로도 매혹적이었다. 깡통에 담긴 공기만 마시다가 진 짜 신선한 공기를 들이킨 것처럼. 하지만 그 뿐이다. 아무것도 성과는 없었다. 아이까지 떼어놓고, 남편하고도 떨어져가며 하는 일이란 게 고 작 공장 잘 다니고, 친구들 잘 사귀는 것인가. 아이 맡겨놓고 수영장 가 는 유한마담하고 뭐가 다르니, 어머니의 그 비수 같던 말이 다시 날아 와 그녀를 찔렀다. 그것도 모자라 남편하고 노느라고 아이에게 갈 시간 까지 축내다니. 꼴좋다, 윤진우, 니꼬라지, 개꼬라지, 잘코사니다 하다 말고 그 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심코 뱉은 그 말에 하나의 기억이 딸려온 것이다. 벌써 명치끝이 얼얼했다. 17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어느 저녁, 진우가 명수와 살기 시작한 지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 지 않았을 때. 이해 받고 사랑 받는다는 느낌에 온몸으로 스며들 것같 이 행복한 정사를 마치고 누운 자리에서 그녀는 말했다. 늘 그랬듯이, 어리광처럼. 형, 나 형 닮은 아이 낳고 싶어. 나 닮은 민혁인 있으니까. 그러자 명수는 말없이 진우의 눈을 바라보더니, 한참 뒤에야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나, 정관수술 했어. 너무도 놀란 진우는 얼결에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뭐라구? 소리를 치긴 했지만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거짓말이지, 하고 묻고 싶었지만 명수의 얼굴을 들여다본 진우는 그것이 사실이란 걸 알 수 있 었다. 명수가 말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어. 난 민혁이를 진심으로 사랑해. 하지 만 내 자식을 낳아도 그럴 수 있을까, 난 정말 자신이 없다, 진우야. 난 그냥 아무 갈등 없이 너와 민혁이를 사랑하고 싶어. 민혁이는 정말로 내 자식 집어치워! 진우는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벗은 몸 그대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갔다. 문을 열면 부엌이었고, 부엌은 한데였다. 봄이라곤 해도 알몸 에는 추운 날씨였다. 진우는 부엌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눈물 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직은 연탄을 때고 있어 아궁이에서는 훈기가 스 며 나왔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선반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73
위에 놓아둔 담배 생각이 났다. 기관지가 나빠 학생운동을 할 때에도 피우지 못한 담배를 그녀는 명수와 살게 되면서 가끔 피우게 되었다. 행복했는데도 온몸이 담배를 원할 때가 있었다. 가슴팍은 따뜻했지만, 등이 시렸다. 담배에 불을 붙인 채 진우는 일어나 부엌문을 잠갔다. 주인아주머니 라도 불쑥 들이닥칠지 몰랐다. 방문도 밖에서 자물쇠로 잠가버렸다. 명 수가 나올지 몰랐다. 그가 보기 싫었다. 항아리처럼 옹크린 채 한 손으 론 무릎을 껴안고, 그녀는 담배를 빼어 물었다. 그제야 하나 둘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예비군 훈련, 분명히 그 훈련 때 수술을 받았을 것이 다. 그녀가 받은 쪽지엔 기간이 일주일로 되어 있었는데, 그는 몸이 아 파 그냥 왔다며 첫날부터 일찍 돌아왔고, 내처 나가지 않았다. 몸이 아 파 다음번에 받아야겠다고 했다. 약간 미열도 있는 것 같아 그녀는 아 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생강차니, 파국이니 하는 것만 끓여주었다. 남 편은 병원에서 약도 받아왔다고 했다. 생전 병원이라곤 가지 않던 사람 이라,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랬는데 그는 그때 정관수술을 받고 돌아온 것이다. 한마디 말도 없이! 그러나 그게 서운한 게 아니었다. 그 점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진우 가 펄펄 뛰며 말릴 거야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 그녀가 화가 난 것은 명 수가 그런 이상한 박애정신 같은 걸로 자기 자신의 아이를 포기한 점 이었다. 정말 미치도록 화가 났다. 담뱃불이 뱃속에서 지글지글 타들 어 가는 것만 같았다. 민혁이를 사랑하기 위해서라구. 그랬다. 그 말처 럼 그가 민혁이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내주는 말 도 없었다. 제 자식까지 희생시켜서 민혁이를 사랑하려는 그의 위대한 결심 앞에 감동을 해야 하는가. 그래야 하리라. 그래야 할지도 몰랐다. 17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감동은커녕 토악질이 나왔다. 그 토악 질을 막기 위해 자기는 지금 담배연기를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다. 아 니다. 분노가 아닌지도 몰랐다. 그것은 슬픔이었다. 슬프고 슬펐다. 자 꾸만 눈물이 비질비질 흘렀다. 왜 이래야 하나. 왜 이래야 하는 거야, 왜? 왜 우리의 사랑은 이 모양인가. 왜 이렇게 서로에게 고통을 강요하 는가. 서로에게가 아니었다. 그에게. 그에게 그녀는 왜 이런 고통을 주 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나쁜 놈, 장명수, 나쁜 놈, 개 같은 놈, 그래, 너 혼자 성인군자 다 해쳐먹어라, 난 세상에서 제일 나쁜 년이고 너는 세상 최고의 성인군자다. 예수도 그런 일은 못했겠다. 차라리 날 그냥 놔두지, 왜 받아들였니, 왜 받아들여서 이렇게 나쁜 년으로 만드니, 니 자식이 성인군자 되는데 왜 날 이용하는 거니, 그녀는 그가 원망스럽고 너무 슬퍼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원망을 씹으며 흐느꼈다. 왜 몰랐겠는가. 그녀는 자기가 생각은 그렇게 하지만 조금만큼도 장 명수라는 인간을 욕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자기의 생각이 얼마나 억 지인지 다 알았다. 그가 얼마나 진실한 인간인지, 조금도 잘난 척하지 않고, 관대하고 아름다운 인간인지 그녀는 너무도 잘 알았다. 살면 살 수록 깨달았다. 그의 진실과 그의 관대함에는 작위성이 없었고, 위선도 없었다. 그는 맑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고민 했을 것이다.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민혁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의 지나치게 발달한 예지는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상황까지 들여다보 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을 것이다. 사실 아이 하나도 운동을 하기에는 많았다. 모든 걸 포기하고 다 바 쳐서 일해야 할 사람한테 가정이란 최고의 방해물이었다. 그래도 너무 외로우니 결혼은 하더라도 아이는 안 낳는 게 운동권의 도덕이라면 도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75
덕이었다. 제 자식을 위해 살 여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누구보다도 가 장 철저했던 명수는 진우와 민혁이를 받아들였다. 모든 것을 숨긴 채. 그것만도 그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모두들 놀랬다. 무언의 비난도 있었 다. 그러나 그는 그깟 일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의 비 난 따위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벌써 많은 곤란이 다가오 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공장 활동을 시작했지만, 아이가 낀 가정의 생 활비를 벌 수는 없었다. 한 사람의 중요한 일꾼이었던 진우조차 평범 한 가정주부로 눌러앉아 잡다한 일로 생활비를 보태느라 쩔쩔맬 뿐이 었다. 그런 데다 또 아이를 낳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다른 사람은 하 나도 낳지 않는데, 둘씩이나 낳아서 어떻게 할 것인가. 언제 끌려가 고 문당하다 죽을지, 언제 최루탄에 맞아 병신이 될지, 언제 잡혀가 몇 년 의 징역을 살아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민 혁의 일이 그렇게 꼬여서 생긴 게 아니었다면, 그녀와 그가 자연스럽 게 동지로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면, 아마 입장이 바뀌었을 것이다. 아 이 하나만 낳자는 그를 그녀가 펄펄뛰며 비난했을지도 몰랐다. 아이를 또 낳으면 자기는 어떻게 일을 하냐구, 우리는 모든 것을 바쳐서 이 독 재정권과 싸워야 한다구, 아무것도 제 것을 챙기지 못하고 죽어간 젊은 사람들이 얼마냐 많냐구, 우리가 어떻게 그런 제 행복만 챙기며 살겠느 냐구,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비로소 진우는 명수가 그런 명분을 이유로 대지 않은 데 감사함을 느 꼈다. 그가 그런 그럴듯한, 그녀의 입을 콱 막을 수 있는 거창한 대의명 분을 대지 않고, 솔직히, 위선자의 오명을 쓸 수도 있는 사실을 솔직히 말해준 데 대해 그녀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 그것만도 어디니. 어느 새 남아있던 담뱃갑 속의 담배도 다 피웠다. 안에서는 여전히 기척이 17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없다. 그는 나와 보지 않았고, 민혁이도 깨지 않고 잘 자고 있는 모양이 다. 자물쇠 따위는 걸지 않아도 되었다. 눈물로 젖어있는 팔뚝이 추웠 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문득 그녀는 낄낄거리며 혼자 웃었다. 제 꼴을 보자니 웃음이 나왔 다. 발가벗고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는 꼬나물고, 질질 짜고 있는 모습, 주인아주머니라도 벌컥 문을 제껴 열었다면 얼마나 기가 막 혀했을 것인가. 웬 미친년인가 했겠지. 진우는 몸을 일으켰다. 오래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탓에 오른쪽 다리 가 저렸다. 잠시 그대로 서있었다. 아궁이 앞을 떠나니 그나마 가슴팍 따뜻한 것도 사라져서 온몸이 떨렸다. 칫솔꽂이에 달린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눈물에 얼룩이 져서 얼굴이 가관이었다. 물을 틀어 얼굴을 씻 었다. 찬물이 오싹했다. 앉은 채 오줌까지 누었다. 한밤중에 마당에 있 는 변소에 가기 싫을 때면 가끔 그런 짓을 하기도 했지만 방안에 있는 명수에게 창피했다. 그럴 때면 물 마시러 나온 척 물그릇 딸그락거리는 소리도 냈고, 물그릇이라도 부시는 양 수도를 세게 틀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히히, 꼴좋다, 윤진우, 니 꼬라지, 개꼬라지, 잘코사니다. 찬물에 아랫도리까지 씻고 일어서니 몸은 떨려 도 상쾌했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그녀는 자물쇠를 따고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진우는 등 뒤로 문을 닫으며 그대로 서있었다. 아침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민혁이는 아랫목에서 잘 자고 있었고, 명수는 누운 채 진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부부로 살아왔지만 그의 앞에서 알몸으로 서본 것 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처음엔 눈을 맞추지 못 해 괜히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한번 심호흡을 하고는 그의 눈을 똑바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77
로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먼저 웃었다. 그러자 명수의 굳었던 얼굴이 허물어졌다. 그가 나직히 말했다. 너, 참 예쁘다 진우가 말했다. 예쁘면 와서 데리고 가. 명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불을 젖히고 벌떡 일어났다. 그의 알몸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는 당황스러웠지만 고개를 세운 채 자기에게 다가오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휘익, 일부러 휘파람도 불었다. 그 가 웃었다. 그는 다가와 그녀를 안고 그녀의 귓볼에 입김을 불었다. 그 의 뜨거운 몸이 차가운 그녀의 몸에 닿으니 따뜻하고 좋았다. 그는 그 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그는 이부자 리 위에 그녀를 눕혔다. 너무 예쁜 신부야. 골치 덩어리인데다 그러면서 명수는 찬찬히 진우의 몸을 살피며 어루만졌다. 그녀는 눈 을 감았다가 그의 시선을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어 그의 목을 끌어당겼 다. 그러고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질문이 있는데 명수가 거친 숨결 사이로 뱉듯이 말했다. 말해봐. 두 박스나 사놓은 콘돔은 어쩌지? 약국에 가져가면 환불해줄까? 명수는 말없이, 아무런 애무조차 없이 그대로 진우의 몸 안으로 자신 의 몸을 집어넣었다. 그녀가 정신을 잃을 때쯤 그는 그녀의 귀에 대고 아주 점잖게 말했다. 그걸 전부 동네 개들한테 씌우면 어떨까? 걔네들도 산아제한을 해 17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야지. 진우는 정신이 아득한 중에도 키들키들 웃었다. 세상에 웃지 못할 일 이 어디 있으랴. 모든 것이 우스웠다. 세상은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랬다. 그 일은 그렇게 키들키들 웃어넘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 을 떠올릴 때면 언제나 그날 그 말을 처음 듣던 순간의 노여움에 명치 끝이 얼얼해오고, 몸이 떨리곤 했다. 그리고 그날 아궁이 앞에 쪼그리 고 앉아 그 감정을 삭히고, 그를 이해하게 되는 절차를 그대로 다시 밟 곤 했다. 한번 걸러내고 정리한 감정인데도 언제나 똑같이 그 감정의 경로를 되풀이 겪었다. 뱃속의 태아가 이미 진화를 끝마쳐서 인간으로 태어나면서도 물고기로부터 시작하는 그 긴 진화의 과정을 매번 후르 르 훑는 것처럼. 결국 납득하고 이해하고 심지어는 미안해하고 감동하 게 될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그 기억의 시작은 분노로부터 출발하였다. 숨이 막히고 답답했다. 윤진우, 니 꼬라지, 개꼬라지, 잘코사니다 때로 진우는 자기들의 삶이 폭탄이 장착된 삶 같다고 생각했다. 자기 들의 운명이 뇌관을 향해 달려가는 도화선의 불꽃처럼 여겨졌다. 우린 너무 훌륭해, 너무 훌륭해서 터질 것 같단 말야. 그러나 그녀는 그런 불 만이야말로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인가를 알았다. 어떻게 이런 불만을 가진단 말인가. 그녀의 머릿속의 검열관이 그 부분의 생각을 가위로 싹 뚝 잘라낸다. 아니, 험악한 인상으로 겁을 줘서 그녀로 하여금 알아서 그 생각을 잘라내도록 했다. 진우는 다시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차는 어느새 들판을 지나 서울로 들어서고 있었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79
8. 놀이, 기이하고 유치한 이번 주에 정석은 근무가 바뀌어 김영애와 같은 조로 묶이었다. 남자 들의 일은 제품 운반처럼 힘을 요하는 일이라 일 자체의 내용은 변동이 거의 없었지만 근무 부서는 일손의 필요에 따라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 었다. 반면 콘베이어 라인에서 하는 여자들의 일은 어느 것이나 별다른 숙련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어서 그 날의 생산량 계획에 따라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일이 많았다. 영애는 주로 초콜릿과의 일을 했지만, 일손이 모자라면 스넥부에도 불려 다녔다. 초콜릿 몰드에 스틱을 박거나, 하나씩 밀려오는 하트 모 양의 초콜릿에 금박종이를 씌우기도 했고, 튀겨져 나오는 스넥을 계량 봉으로 휘저어 봉지마다 넣으면서 찌그러진 불량 스넥을 골라내는 일 을 하기도 했다. 일의 종류는 많았지만 어느 것이나 간단한 작업이었 다. 그런데도 그녀는 일이 바뀔 때마다 그 일을 익히느라 매번 고생했 다. 어느 공장이나 일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 단순 노동의 경우에는 설명을 요구하는 경우도 없었다. 그저 어깨 너머로 익힐 뿐이었고, 어느 아가씨든 쉽게 익혔다. 그런데 그녀는 그 런 과정을 납득하지 못했다. 명쾌한 설명 없이 그냥 눈썰미로 일을 배 워야 하는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꼬치꼬치 캐물었는데, 그런 풍경은 흔하지 않은 것이었다. 겨우 납득을 해도 그녀의 손은 서툴렀 다. 옆 자리 동료에게서 넘어오는 제품을 따라잡지 못해 허둥대는 모습 까지 볼 수 있었다. 별로 일을 한 경험이 없는 여자가 분명했다. 이런 곳에 들어온 걸 보면 유복한 환경이라고는 볼 수 없어도 비교적 평탄하 18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게 살아온 사람인 듯싶은데, 홍섭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몹시 어려운 집안의 맏딸이라고 했다. 오늘 영애는 과자봉지에 파란 도장으로 날짜를 찍어서 박스에 챙겨 넣는 완성 라인 일을 맡았다. 정석도 그 라인에 배치를 받았다. 그녀가 채워놓은 박스에 테이프를 붙여 창고에 나르는 일이 그의 일이었다. 그 라인은 달리 사람이 더 필요치 않아 그들 둘만이 있게 되었다. 그녀로 선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그는 먼저 일의 요령을 설명해주었다. 요령 이랄 것도 없었다. 콘베이어를 타고 오는 과자봉지들에 스탬프 잉크를 묻혀 날짜 도장을 찍고 박스에 담기만 하면 되었다. 콘베이어 속도를 급하게 올리지 않는 한 현장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다. 간혹 뚫어진 봉 투가 있거나, 유별나게 가벼운 봉투가 있을 때 불량품으로 골라놓는 일 외에는 신경 쓸 게 없었다. 아, 알겠어요. 영애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얗게 동여맨 머리 수건 뒤로 짧게 커 트한 뒷덜미가 보였다. 언뜻 하얀 가운 어깨 위에 머리카락 하나가 붙 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정석은 무심코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떼어냈 다.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예민한 목덜미 근처였던 탓인가. 머리카락이 당황해서 말하는 정석에게 영애는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영애는 금세 자신을 회복했다. 조금 전의 그 작은 접촉에 정석을 당 황하게 할 만큼 예민하게 반응했던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오히려 그 의 붉어진 얼굴이 얼른 식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을 짐작하 는 손위 누이처럼 그의 얼굴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81
이 흘렀지만 곧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침착하게 일의 요령 을 익혔다. 콘베이어 속도가 조금씩 빨라짐에 따라 그녀의 손놀림도 빨 라졌다. 다른 라인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던 그녀는 손끝에 착착 달라붙 어 재빠르게 돌아가는 자신의 손놀림에 도취된 것처럼 보였다. 기계의 속도는 자꾸 올라갔지만 그녀의 손놀림은 그 속도를 능가했다. 힐끗 영애를 쳐다본 정석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얼굴이 대단한 일이라도 정복한 것처럼 몰아지경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얼굴 전체가 일에 집중해 생생하게 빛났고, 눈빛은 자랑스러움과 기쁨으로 가득 차 보였다. 나중에는 과자봉투들이 밀려 쌓이도록 일부러 손을 놓 고 있다가 재빨리 몰아서 해치우는 장난까지 쳤다. 득의만만한 표정이 었다. 하하 자기도 모르게 정석이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영애는 무안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더니 자기도 웃었다. 웃으면서도 그는 그녀의 그간의 열등 감이 생각보다 깊었던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정석씨, 고향이 어디예요? 이제 일감을 가지고 내놓고 장난을 치면서 영애가 물었다. 부산입니다. 전혀 사투리를 안 쓰시는데요? 안양 온 지 오래 됐어요. 그래도 경상도 사투리는 잘 안 고쳐지던데 부모님은 이북 사람들인데도 우린 어릴 때 부산 말을 썼지요. 부 산에서 왔지만 지금 서울말을 쓰는 것처럼.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 냥 소속감이 별로 없나봅니다. 18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그리고 또 잠시 말이 끊어졌다. 한참 밀린 일을 영애는 재빨리 따라 잡았다. 어찌나 열중해 있는지 그녀는 옆에 있는 사람 따위는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살짝 휘파람까지 불었다. 제법 능숙한 휘파람이었다. 손이 많이 빨라졌어요. 정석이 말했다. 영애가 그를 쳐다보며 생긋, 웃는데 얼굴까지 발그레 했다. 그깟 일을 잘 하게 되었다는 게 저렇게도 좋은 모양이구나, 그는 혼자 생각했다. 이 회사 다닌 지 오래됐어요? 일부러 손을 놓고 쉬면서 영애는 정석에게 말을 시켰다. 눈은 일감에 서 떼지 않은 채. 예. 얼마나요? 고등학교 때 왔어요. 올해로 딱 10년이군요. 부모님은 그냥 부산 계세요?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 다. 어머! 미안해요! 당황한 영애가 정석에게 고개를 돌렸지만 콘베이어 속도가 갑자기 빨 라진 데다 일부러 밀려놓은 것까지 겹쳐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 하고 일에 몰두했다. 괜찮습니다. 오래된 일인 걸요. 정석은 일을 따라잡느라 정신없는 영애의 옆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 녀는 일에 빠져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녀 역시 고아라고 홍섭이 알 려준 적이 있었다. 고아라, 정석은 열네 살 무렵 부모를 잃었기 때문에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83
자기가 고아라는 의식이 없어서 그 말이 낯설었다. 고아라 군대를 가지 않게 되었을 때, 내가 고아구나 하는 생각을 한 번 하긴 했다. 영애는 학교는 국민학교만 나왔지만 검정고시로 중학졸업 자격을 얻었다고 했 다. 그 역시 홍섭이 물어다준 정보였다. 하지만 그녀에게선 아무리 뜯 어봐도 그렇게 거칠고 힘들게 자란 흔적이 엿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밝 은 표정이라 그런지도 몰랐다. 천성이겠지, 그는 혼자 고개를 끄떡였 다. 다시 일을 따라잡았을 때, 이번에는 정석이 질문을 던졌다. 박스를 포장하면서, 영애 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 다. 애인 있어요? 말이 없는 정석이 기껏 한 질문이 그런 거라 뜻밖이었는지 영애는 일 손까지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곧 환하게 웃으며 대답 했다. 그럼요, 아주 심각한 사이에요. 굳이 심각한 이란 말을 붙여 강조하는 저의가 느껴져서 정석은 웃 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헛된 기대를 품지 말라는 뜻일 터였다. 잠시 딴전을 피운 덕에 과자 봉지들이 다시 밀렸다. 정상 속도로 따라잡기 위해 바쁘게 손을 놀리는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그는 질문했을 때와 마 찬가지로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리라고 생각했어요. 영애는 밀린 일을 따라잡느라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정석은 영애가 확실히 누이를 떠올리는 데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누 군가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을 때의 영애의 분위기에는 어딘가 은희 18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같은 곳도 있다고 느꼈다. 그렇다. 심지어는 정석, 자기 자신과 판박이 같다는 말도 듣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김영애는 전혀 다른 존재 였다. 자기들이 음화라면 양화 같은 여자, 자기들이 겨울이라면 여름 같은 여자, 자기들이 그늘이라면 양지 같은 여자. 정석은 김영애가 그 런 여자라고 생각했다. 일에 몰두해 있는 영애를 보다 정석은 담배나 한 대 피울 생각으로 마당으로 나섰다. 공장 안보다 바깥 날씨가 더 따뜻하게 여겨졌다. 담 배에 불을 붙였다. 햇빛 속에서 성냥의 불빛은 애잔했다. 그 애잔한 불 빛이 영애를 연상시켰다. 어둠 속에선 그토록 강하고 힘찬 불빛이 햇 빛 아래에선 오히려 애잔해 보인다. 그녀는 너무 밝아 오히려 안쓰러 움을 불러일으켰다. 너무 밝으면 때론 애잔할 수도 있다는 느낌을 이즈 음 정석은 영애에게서 처음으로 느꼈다. 정석은 폐 속 깊이까지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뱉는다. 담배연기가 폐 속을 훑고 나가자 그런 잡념 따위 도 깨끗이 청소된 것만 같다. 문득 은희는 지금쯤 무얼 할까 하는 생각 이 들었다. 밤 근무니까 깊은 잠에 빠져 있을까. 어쩌면 벌써부터 일어 나 오늘 저녁 출근할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런 날, 은희는 어 떤 차림일까, 짙은 회색의 바바리코트에 장밋빛 스카프를 가슴 위에 대 각선으로 메고 나타날까? 아니면 녹을 듯이 부드러운 낙엽 무늬의 갈 색 실크 원피스를 입을까? 수많은 여자를 만났어도 그 여자들의 옷차 림의 변화에 한 번도 마음 써 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그의 관심의 대상은 오직 그 껍질을 벗겨낸 몸뚱이에만 있었고, 그 몸뚱이를 싸고 있는 것 은 무엇이든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은희 때문에 새로운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은희는 타고난 멋쟁이였다. 워낙 아름다운 것을 좋아했고, 자 신을 표현하길 좋아했고, 거기다 뛰어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85
미모가 뛰어난 축은 아니었다. 그래서 공장에서 가운을 입고 있을 때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사복을 입고 나서면 어디서나 돋 보였다. 그녀가 그 남자, 그 약하고 착한 그 남자의 눈에 띈 것도 우연 은 아니었다. 여상을 다닌 그녀가 실습 나간 회사, 실습 기간 내내 단발 머리에 감색 교복에 싸인 은희를 그 남자 역시 알아보지 못했지만 마지 막 회식 날,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은희는 단박에 그날의 주인 공이 되었다고 했다. 그랬으리라. 그 착하고 약한 남자는 그날로 은희 에게 빠져들었으리라. 은희가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데에는 어찌 보면 병적이다 싶게 느껴 지는 구석까지 있었다. 날마다 무엇을 어떻게 입는가가 그녀의 큰 과제 였다. 그녀의 방에서 보냈던 처음 얼마간 정석은 매일 아침 놀랍게 변 신하는 그녀를 보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방 모습부터가 그 특 별한 습벽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허름한 방구석의 한쪽 벽은 전체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곳이 그녀의 간이 탈의실이었다. 그 뒤 벽 에 그녀의 옷들이 걸려 있었고, 전신용의 긴 거울이 세워져 있었다. 방 문 옆에는 세탁소처럼 나무로 만들어진 입식 다리미판과 제법 품질이 좋아 보이는 수입품 다리미가 놓여 있었다. 그날 입을 옷이 결정되면 그녀는 그 앞에 서서 정성껏 제 옷을 다렸다. 무슨 작품이라도 만들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것 말고는 개어놓은 이불 한 채, 전기밥솥 하나가 다였다. 그 흔한 라디오 하나 없는 방이었다. 서양의 꼬마 아이들이 어른들처럼 양복과 양장을 차려입고 나란히 앉 아 서로 옆의 아이에게 뽀뽀를 하고 있는, 길거리에서 흔히 파는 판넬 한 장이 그 방에 걸려 있는 유일한 장식이었다. 부엌에도 석유풍로 하 나 빼곤 냄비 두 개, 밥공기 두 개, 수저 두 벌 밖에 없었다. 그런 홑살 18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림에 그 거창한 다리미대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 방은 철저히 은희의 옷을 위한 방이었다. 그녀는 방에서 고기도 구워먹지 못하게 했 고, 그 좋아하는 담배도 못 피우게 했다. 옷에 냄새가 밴다는 이유였다. 옷에 습기 찰까봐, 옷에 냄새가 밸까봐, 그 방의 작은 창이 열리는 이유 는 그런 이유들뿐이었다. 옷이 많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은희는 한 벌의 옷을 살 때도 결혼 상대라도 고르는 양 심사숙고했다. 한번 동행한 뒤로 정석은 나가 떨어졌다. 서점에 가서 의상 잡지를 뒤지고, 백화점을 돌고, 시장을 돌 고, 그런 다음에도 반드시 입어보고, 바느질이며 재봉선이며 꼼꼼히 들 여다보고 나서야 옷을 샀다. 하긴 그녀에게도 그런 일은 일 년에 두세 번 정도밖에 없는 나름의 축제였다. 그 대신 마음에 꼭 드는 옷은 값이 아무리 비싸도 기어코 사고 말았다. 몇 달치 월급을 붓는 한이 있어도 계약금 걸어놓고 사는 식이었다. 라면만 먹고 쫄쫄 굶어도 그녀는 좋은 옷을 샀다. 그러나 그 몇 벌의 옷들은 수 십 벌의 옷처럼 여겨졌다. 날 마다 그녀는 그 기본적인 옷들에 티셔츠나, 값싼 스웨터, 스카프, 목걸 이 같은 것들을 바꿔서 전혀 다른 옷처럼 느끼게 했다. 정석에게 은희는 단순히 옷을 바꿔 입는 게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분 위기를 만들어내는 마술사처럼 여겨졌다. 그날 그에게 처음 말을 걸던 그녀가 하얀 토끼처럼 보였다면, 검은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성적 매력 이 물씬 풍기는 여배우 같았고, 비오는 날의 그녀는 성숙한 미망인처럼 보였고, 또 어떤 날의 그녀는 지적인 여대생처럼 보였다. 그것은 결코 남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옷을 챙겨 입은 자신의 모 습은 어디까지나 서은희 자신의 시선을 위한 것이었다. 정석의 눈길조 차 그녀는 조금도 의식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를 하루하루 버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87
텨주는 힘일까. 자신의 시선이 자꾸만 끌려가는 제 속의 참혹한 덩어리 에서 어떻게든 눈 돌리고자 하는 안간힘일까. 그 기이한 행동이야말로 은희의 철없던 시절의 남은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스산한 날들 의 최저한의 위안일 것이다. 은희에게 자신은 그 옷들이 주는 위안조차 주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정석은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 속 깊이 또다시 찬바람이 불었다. 은희라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늪. 정석 은 의식적으로 다시금 영애에게 눈길을 던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느낀 다. 은희라는 늪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본능적인 노력이었다. 조그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정석은 몇 모금 더 깊이 담배를 빨아들이고 꽁초를 힘주어 발로 비벼 껐다. 아마도 정석은 이즈음 그 도망을 전략적으로 준비하고 있는지도 몰랐 다. 그만큼 은희에 대한 불안감이 깊어졌다. 어차피 은희에게서 도망치 지 못한다면 그 늪에 완전히 머리가 잠기는 순간이라도 늦추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잠시라도 붙잡을 수 있는 기슭의 가지로 선택한 것이 영애 였다. 그것은 참 기이한 전략이었고, 유치한 놀이였다. 정석은 김영애 라는 존재에 대해 일부러 자신의 모든 촉수를 내뻗었다. 그는 의식적으 로 그 짓을 했다. 마침 은희와는 근무가 달라지고 영애와 근무 주기가 겹치기도 했다. 은희는 근무가 다를 때는 잘 만나주지도 않았다. 영애가 머무는 공간은 그의 촉수가 닿기에 너무도 이상적인 위치에 있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라디오의 주파수를 고정하듯 그녀에게 자 신의 의식을 고정시켰다. 한 칸 건너 방에서 들리는 숟가락 달그락거리 는 소리, 문 여닫는 소리, 발자국 소리, 연탄불 가는 소리, 물소리, 시 계 소리에 자신의 의식을 집중했다. 바로 옆방은 살림 사는 집이라 애 들 장난 소리에 정신이 없는데도 정석은 그 범벅된 소리 속에서 영애의 18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소리를 용케도 구별해내었다. 으음, 이거, 내 귀가 제법 순정파군, 그는 그런 것들에 즐거이 귀 기울였다. 뜨뜻한 방바닥에 누운 채, 낡은 이불 밑에 온몸을 묻은 채, 그는 눈조차 뜨지 않고 그녀를 음미했다. 그녀가 제 낡은 이불 속에 함께 누워 있는 느낌. 그것은 하도 아련한 느낌이라 때론 현실의 정사 情 事 가 가져다 줄 수 있는 감미로움을 능가했다. 그럴 때면 그는 무언가 은희에게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듯한 안도감을 느꼈 다. 웃기군, 하지만 좋아. 그런 자신을 스스로 가소롭게 느끼면서도 그 는 제가 판 함정에 스스로 들어가는 사람처럼 그 감정에 더 깊이 몸을 담갔다. 정석의 겨울 아침은 이제 그렇게 시작되었다. 출퇴근을 할 때에도 그 는 일부러 영애가 먼저 가기를 기다려 저 멀리서 뒤따라갔다. 처음으 로 같은 부서에서 일하게 된 날, 일을 마쳤을 때 그에게 같이 가겠냐고 말을 붙인 건 오히려 영애였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 역시 예의상 한 말이었는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인사를 하고는 쪼르르 달 려 나갔다. 그러나 지금 정석은 영애가 나가고 나면 조금 시간을 둔 뒤 에 그녀를 따라나선다. 회사에서 집까지의 길은 일단 큰 길로 나오기만 하면 사거리를 두 번 지나치며 쭉 이어진 한길을 걷는 거라 아무리 떨 어져 있어도 앞에 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데 지장이 없었다. 저녁근무를 마치고 나오면 사람이 꽤 많았지만 그 대신 불빛이 환했다. 가끔 동행 이 있어도 그들은 버스 정류장쯤 가면 다 떨어져 나갔다. 대개의 직원 들은 그 근처에서 살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차를 타고 가야 할 만큼 먼 거리에서 살았다. 야간근무를 끝내고 나오면 거리는 비어 있었다. 멀리 지나가는 고양 이까지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이니 영애를 놓칠 일은 전혀 없었다. 조금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89
씩 동이 터 오는 새벽하늘 아래 그녀를 쫓아 바람만바람만 걸어가는 귀 가 길은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자신이 일부러 고안해서 하는 놀이란 걸 빤히 알면서도, 때론 감정마저 놀이에 맞게 스스로 조작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놀이는 즐거웠다. 놀이 속에서 정석은 사춘기의 소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에게는 없었던 사춘기, 설레임이라곤 없이 박제되 어 버렸던 사춘기, 그 놀이에 굳이 제목을 붙인다면 그것은 삶을 연습 하는 놀이였다. 갓난아기처럼, 오랜 병상에서 다시 살아난 환자처럼. 새벽 거리의 어둠은 날마다 그 빛깔과 농도가 달랐다. 어둠이 걷히는 속도도 매일매일 달라졌다. 물 속으로 파란 물감이 번져가듯이 새벽이 스며오는 거리는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에 때 론 겨울바람이, 때론 씁쓰름한 내음을 품은 겨울 안개가, 때론 자디잔 새소리들이, 때론 빈 거리를 내지르는 자동차의 굉음이 더해졌다. 그 아름다움은 가끔은 너무 아찔해서 폐활량 이상의 공기를 마신 것처럼 정석을 숨 가쁘게 할 때도 있었다. 때론 그 느낌에 자신이 중독되어 가 는 듯한 아슬아슬함을 감지할 때도 있었다. 일부러 시작한 심심풀이 놀 이에 인생을 다 바치게 되는 아편쟁이나 노름쟁이처럼 때론 놀이도 위 험했다. 영애는 그가 자기의 뒤를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 했다. 눈치 채기에는 그가 만들어놓은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는 자신 의 시야에서 그녀를 잡아둘 수 있는 정도의 거리만을 유지했다. 그것이 진심으로 그가 원하는 거리였다. 그는 결코 그녀와 얽히기를 원하지 않 았다. 그저 이 정도의 거리를 두고 즐겨 바라보기만을 원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시력이 좋았다. 교도소 앞을 지날 때면 영애는 우두커니 서서 그 망루를 올려보곤 했 다. 그저 걷다가 심심해서 바라보는 것일까. 망루 외에 보이는 것은 아 19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무 것도 없었다. 긴 담벼락이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나고 있을 뿐. 그 럴 때면 정석도 멈춰 서서 망루를 쳐다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럴 때 그녀는 푸르스름한 새벽 공기 속에서 어찌나 어슴푸레하게 여겨지 는지 연기 같기도 하고 혼백 같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녀가 평소에 풍 기는 그 밝고 따뜻한 분위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놀이의 끝은 무엇일까. 정석은 영애의 아득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에 잠기 기도 했다. 담배를 줄이기 위해 은단을 입안에 굴리는 사람이 담배 대 신 은단의 맛에 중독될 수도 있는 걸까. 이러한 유희도 사라지면 견딜 수 없는 공허가 닥칠 것인가. 하지만 그는 그 놀이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그가 서은희라는 늪에 함몰되는 것을 막아줄 수 있을 것 같았 다. 벗어나게 할 수는 없더라도. 때로 정석은 일부러 골목길에서 기다렸다가 영애보다 한참 늦게 집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대문이 없는 그 집은 어느 때고 바람처럼 드 나들 수 있었다. 방들은 나란히 두 줄로 자리 잡고 있었지만 출입구는 모두 가운데 좁은 통로로 나있어서 변소가 있는 뒤란으로 돌아들면 왼 쪽 방들의 뒤창들을 볼 수 있었다. 벽 가운데 시늉처럼 내놓은 구멍에 다 잘 맞지도 않는 나뭇살로 창살을 만들어 창호지로 대충 붙여놓은 여 닫이창은 요새 세상에 보기 드문 창이었다. 그러나 그는 창호지로 발라 놓은 그 허술한 창이 좋았다. 영애가 연기 같고 혼백 같고 그렇게 아득 하게만 여겨질 때 그는 그 방 창에 귀를 갖다 댔다. 그러면 딸그락거리 며 새벽참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하고, 몸을 씻는 물소리가 들 려오기도 했고, 때로는 그녀의 잠든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창호지 문은 귀에 닿는 감촉도 부드러웠고, 방안의 동정도 잘 전달해 주었다. 간혹 연탄이 꺼진 날이면 창호지의 감촉도 냉랭했다. 그러면 그는 얼른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91
자기 방으로 들어가 기다려야 했다. 불이 꺼지면 그녀가 밑불을 빌리러 오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제법 친해진 덕택에 불이 꺼지면 서로 밑불 을 빌리는 정도는 스스럼없이 하게 되었다. 그도 연탄이 꺼지면 그녀에 게 갔다. 방에 누워 그녀가 자기 방 앞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가 늠하다 부엌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그는 시치미를 떼고 문을 연 다 어쩌죠? 구멍을 막는다고 막았는데도 다 타버렸어요. 미안해 요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말을 꺼내고, 그는 밑불을 꺼내 들고 가 그녀의 부엌 아궁이에 넣어준다. 눈물겨운 순정이야, 새 연탄을 밑 불 위에 올려놓고 불구멍을 맞추면서 그는 혼자 클클, 웃기도 했다. 밤 새 불이 잘 피어올라 방이 따뜻하면 창호지의 감촉도 따뜻했다. 그럴 때면 그는 한참을 더 느긋하게 그러고 있다가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살아만 있으면 되지, 어쩌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입안에서 맴돌아 그는 흠칫 놀라기도 했다. 누구에게 한 말이었을까. 영애에게? 아니면 은희에게? 정석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동쪽하늘로 희끄무레한 파아란 빛이 번져나간다. 새벽이 아침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야근이 한 시간 더 늦게 끝난 탓이었다. 첫 번째 네거 리를 지나는데 벌써 어둠이 걷혀가고 있었다. 환한 길에서 김영애를 쫓 아간 경험은 없었다. 주간근무는 어두워진 다음에 끝났고, 야간 근무는 어둠이 가시기 전에 끝나 언제나 어둠 속에서 그녀의 뒤를 쫓아갔기 때 문이었다. 교도소 앞에 이르러야 겨우 어둠 속에 희끄무레한 파란 빛이 스미곤 했다. 아직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영애가 혹시라도 뒤 를 돌아본다면 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며 따라오고 있는 정석의 시선 과 딱 부딪힐 터였다. 집이 같으니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었지 19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만 정석은 자신의 이 놀이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몰래 그녀를 바라보 며 걸어가는 이 은밀한 시간의 비밀이 깨지는 것이 싫었다. 그는 얼른 사람들이 나와 그와 그녀의 사이를 가려주길 바랬다. 하지만 영애는 오늘따라 거의 뛰다시피 종종걸음으로 가고 있었다. 제 앞의 무엇을 쫓아가는 듯 잰걸음으로 가는 그녀가 한가롭게 뒤를 돌 아볼 것 같지는 않았다. 정석도 그만큼 걸음 속도를 더했다. 오늘 아침 엔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엊그제부터 도로를 뒤집어 놓은 공사 탓 일까, 아니면 갑작스런 기온 하강 때문일까. 오늘 아침 날씨는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가 될 거라는 기상예보가 있었다. 살갗에 닿는 서 늘한 촉감이 상쾌했다. 긴장을 풀기 위해 숨을 몰아쉬자 입김이 하얗게 뿜어져 나왔다. 주위의 어둠이 가시자 초록색 점퍼를 걸친 그녀의 뒷모 습이 아침 거리 속에서 싱싱하게 솟아올랐다. 여름의 나뭇잎 같은 그 빛깔은 이런 날씨에 추워 보였다. 그녀는 예상대로 한 번도 뒤돌아보 지 않았다. 갈수록 점점 걸음이 빨라지더니, 집 가까이 가서는 아예 뛰 어갔다. 언제나 걸음이 느려지던 교도소 앞에서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 다. 추운 걸까, 정석은 골목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보곤 천천히 길을 건 너 골목 입구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낙엽 태우는 냄새가 스민 겨 울 아침, 그 공기와 섞인 담배의 첫 모금은 몹시 만족스러웠다. 등교하는 학생들의 무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길 건너 정류장엔 하 나둘씩 기다리는 사람들이 늘었다. 골목에서 나오던 고등학생 하나가 그를 보고 꾸뻑 인사를 했다. 포항댁의 아들이었다. 학교 가니? 네. 그래, 얼른 가봐라.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93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그 아이는 마침 차가 뜸해진 길을 잽싸게 달 려서 건넜다. 건너편 정류장에 버스가 막 도착하고 있었다. 교복 자율 화가 되어 사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초라하여 학생 같지 않고 음식점의 배달원같이 보였다. 정석은 천천히 걸어 집으로 들어갔다. 영애의 방 앞을 지나는데, 불 빛이 어슴푸레하게 배어 나왔다. 씻고 잘 준비를 하겠지, 어쩌면 밥을 먹을지도 몰랐다. 정석은 제 방으로 들어갔다. 매일 하던 대로, 옷을 벗고, 부엌으로 나 가 연탄을 갈고, 몸을 씻었다. 변소에도 다녀와야 했다. 트레이닝복으 로 갈아입은 그는 부엌문을 밀고 나와 주인 방 귀퉁이에 걸려있는 열쇠 를 집었다. 이 시간이면 까딱하면 줄을 서야 하는데, 지금은 비어있는 모양이었다. 변소는 뒤뜰로 돌아들어, 영애의 방 옆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볼일을 보고 나오던 정석은 힐끗 그녀의 방 뒤창을 돌아 보았다. 여닫이 창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무슨 객기가 일었는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끌리듯이 그 열린 창 앞으로 다가갔다. 그쪽은 길이 없 는 뒤뜰이었다. 눈길이라도 부딪힌다면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차마 열린 창을 들여다보지는 못하고 벽에 붙어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잠시 멈칫거렸지만 그는 용기를 내어 불쑥 안을 들여다보았다. 영애는 앉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그 초록색 점퍼를 입은 채로 벽에 등을 기댄 채, 무릎 위에는 밥과 김치가 놓인 쟁반까지 얹혀져 있다. 고 개는 푹 수그러져 있고, 손 역시 힘없이 방바닥에 떨어져 있다. 숟가락 도 그 옆에 뒹굴고 있었다. 정석이 그와 똑같은 자세로 밥을 먹다가 자 본 경험이 없었다면 그녀가 밥 먹다 숨이 끊어진 줄 알았을 것이다. 정 19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석은 그 순간, 그 때까지 제 가슴 속에 매달려 있던 무언가가 그만 줄이 끊어지면서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잠시 몸에 힘을 뺀 순간 급소에 적의 치명타를 입은 기분이었다. 그는 돌아서서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자신의 전열을 수습할 필요가 있었다. 애처로운 감정, 그깟 감상적 기분에 왜 자신은 기습이라도 당한 듯 가슴이 내려앉은 것 일까. 김영애는 어제 새벽, 야간근무를 끝낸 뒤에 집으로 가지 않고 버스에 올랐다. 정석은 종일 자다 깨다 할 때마다 그녀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 지만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회사에 출근해보니 그녀가 와있었다. 남 들 다하기 싫어하는 무거운 박스 나르기를 맡겠다고 자청했을 때, 그녀 가 한숨도 못 자고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일은 남자들에게도 힘 든 일이었다. 주로 남자들이 돌아가면서 했고 간혹 가다 정 졸린 사람 들이 스스로 나서서 하는 일이었다. 계속해서 긴장하고 몸을 움직이기 때문에 가만히 서있거나 앉아서 콘베이어에 오는 물건들을 처리하는 단조로운 일보다는 졸음을 쫓기에 좋았다. 그러나 영애는 박스를 나르 면서도 졸다시피 했다. 미스 김, 눈 좀 뜨고 다녀! 영애야! 이불 갖다 줄까? 동료들이 자기 옆을 지나는 영애를 일부러 큰소리로 놀려대며 잠을 깨워주려고 애썼다. 그 검은 눈동자가 내려앉은 눈꺼풀로 덮이다시피 했다. 그렇게 게슴츠레 눈을 뜬 채 무거운 박스를 겨우 들고 다니는 그 녀의 모습은 안쓰럽기보다 우스웠다. 새벽 3시, 야식 시간에 라면 먹으 러 식당에 갈 때도 그녀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따뜻한 기계 사이에 몸 을 파묻고 쪼그리고 앉아 30분 내내 잤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95
정석은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폐의 구석구석까 지 스미는 연기가 진정제처럼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그가 서있는 옆 창은 꼭 닫혀있는데도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와 텔레비전 소리로 소란 스러웠다. 연탄 광 옆으로 늘어서 있는 뒷담 너머론 아직 일꾼들이 찾 아오지 않은 빈 공장건물이 을씨년스럽게 서있었다. 그 위로 벌써 환한 햇살이 그 치맛자락을 펼치고 있었다.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 다. 처음으로, 영애를 알게 된 후 처음으로 그런 분명한 한 줄의 생각이 그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담배연기를 가능한 오랫동안 폐 속 에 넣고 있었다. 참을 수 없게 되어서야 그 연기를 뿜어내면서, 힘들여 서서히 그 연기를 뿜어내면서, 그는 그 담배연기가 빠져나갈 동안만 그 감정에 제동을 걸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연기가 남김없이 그의 폐를 빠져나가자 그는 자신과의 약속대로 본래의 자신을 되찾았다. 이 것은 가벼운 놀이에 불과했다. 은희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그 위험을 다 른 곳에서 다시 만날 생각은 없었다. 정석은 고개를 돌려 다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영애는 여전히 그렇 게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창을 넘어 들어가 저 여자를 편하게 눕혀 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쟁반도 치워주고 점퍼도 벗겨주고 베게도 베어주고 싶다. 불도 꺼주고 창도 닫아주고 감은 눈 위에 입맞 춤도 해주고 싶다. 오그리고 있는 몸도 펴주고 오그리고 있는 몸도 펴주고 누이의 시신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다고 사람들이 그랬다. 그것은 깜빡 정신을 놓았다 새까맣게 탄 석쇠 위의 생선 같기도 하고, 복날이 면 동네 뒷산에 올라가 어른들이 때려잡아 그슬려 놓은 개고기 같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을 따라 울었지만 그것이 누이의 몸이라고는 믿지 않 19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았다. 늘 늦되었던 그는 열네 살이나 되었는데도 누이의 시신을 누이의 것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처참하게 타서 오그라든 짐승의 시신 일 뿐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는 그 짐승의 시신이 바로 누 이의 몸이었다는 사실을 점점 더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몸을 펴주고 싶었다. 누이가 죽은 그때 그렇게 못해준 게 내내 가슴에 맺혔 다. 이제라도 그는 누이의 팔도 펴주고 다리도 펴주고 목도 펴주고 그 몸에 새까맣게 붙어있는 그을음도 다 벗겨내 주고 싶었다. 몸도 다 씻 겨주고 정결한 몸에 어울리는 흰 수의를 깨끗이 입혀 부슬부슬 흘러내 리는 흙이 아니라 긁어내도 뭉쳐 떨어지는 찰진 흙 속에 묻어주고 싶었 다. 가끔 그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언덕을 올라간다. 언덕 위에 는 사람들이 모여서 개를 때려잡아 불에 그슬리고 있다. 그들이 그를 오라고 손짓한다. 그는 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리로 간다. 다가 가 보면 그것은 개가 아니라 누이의 시신이었다. 검게 오그라든 잿덩이 가 되어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누이는 그를 보자 눈을 반짝 뜬다. 순간적으로 흠칫 놀랐던 그는 그 놀랐던 마음이 미안해 누이에게로 다 가간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를 막지만 그는 그들을 다 떨쳐낸다. 그 리고 누이를 묶은 밧줄을 풀어준다. 그러나 오그라들어 구부러진 그 몸 뚱이는 아무리 기를 써도 펴지지 않는다. 팔도 다리도 구부러진 목도 모든 것을 편하게 펴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것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꿈속에서도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꿈에서 깬 날이면 그는 누이는 혼백조차도 오그리고 있으리라는 느낌이 들어 온몸이 오싹해지곤 했다. 어떤 때는 꿈속의 꿈을 꾸기도 했다. 그는 누이의 팔도 펴주고 다리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97
도 펴주고 목도 펴주고 그 몸에 새까맣게 붙어있는 그을음도 다 벗겨내 준다. 몸도 다 씻겨주고 그 정결한 몸에 어울리는 흰 수의를 깨끗이 입 혀 부슬부슬 흘러내리는 흙이 아니라 긁어내도 뭉쳐 떨어지는 찰진 흙 속에 묻어준다. 꿈속에서도 그는 너무나 행복해서 이제는 마음 편히 살 겠구나, 생각하는데 잠을 깬다. 꿈이었구나 하는데 다시 거기서도 잠이 깨는 그런 꿈. 그는 자신이 지금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갈망들이 누이에게 해주고 싶었던 갈망들과 흡사하다는 걸 깨닫는다. 아침 공기가 찼다. 정석은 영애가 깨지 않게 창문을 살며시 닫아준 다. 그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그저 연민만으론 매 몰되지 않아. 저 여자에겐 공허도 격정도 없으니까. 내가 두려워하는 그 수렁들만 없다면 괜찮아. 내가 익사할 일은 없을 테니까. 영애는 조금 있으면 깨어나, 어, 밥 먹다가도 잠을 자다니, 하고 혼자 놀라워하며 배시시 웃을 것이다. 9. 또 다른 놀이, 역시 기이하고 유치한 은희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무겁게 들고 온 옷 봉투들을 끌러 본다. 일요일인데도 늦잠조차 자지 않고 새벽부터 남대문 시장을 뒤지고 돌 아다녀서, 내내 마음에 품고 있던 순애의 옷과 정석의 옷을 한 보따리 샀다. 오늘 저녁에 정석과 만나서 황해도집에 가기로 했으니, 한꺼번에 다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은희는 며칠 전 예전 남자가 부어주던 적금을 깼다. 헤어지고도 그는 19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꾸준히 그 돈을 집어넣고 있었다. 그 돈으로 이것들을 장만한 것이다. 그 남자, 그의 이름은 한상민이었지만 한 번도 그를 상민씨라고 불러본 적은 없었다. 열아홉 살의 은희를 만났을 때 그는 서른 세 살이었다. 그녀보다 열 네 살 위의 어른이었고, 회사의 상관이었다. 처음엔 그를 부장님이라고 불렀고, 어느 때부턴가는 그를 부르지 않게 되었다. 한상민, 그는 보통 남자들보다 훨씬 더 여리고 섬세하고 순하고 착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를 흠모했다. 까불거리고 선머슴애 같았던 그녀는 묘하게 여성적인 그에게 이끌렸다. 아버지가 너무 강하고 거친 남자였던 탓일까. 어머니 는 언제나 그런 아버지 밑에서 숨죽여 살았다. 폭력을 휘두르고, 제멋 대로 굴던 아버지, 은희는 남자는 다 아버지 같은 줄 알았고, 그래서 남 자를 싫어했다. 막연한 흠모가 구체적인 한 남자에 대한 사랑으로 바뀐 것은 한 잔의 커피 때문이었다. 커피 심부름을 하던 은희가 잘못해서 그의 옷에 커피 를 엎지르고 말았다. 유난히 하얗고 잘 다려진 그의 와이셔츠가 순식간 에 갈색으로 얼룩졌다. 당황한 은희가 어쩔 줄 모르고 멍하니 서있을 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둘지도 않은 채 천천히 화장실로 들어 갔다 나왔다. 그 안에서 얼룩 부분을 빨고 나왔는지, 커피 얼룩은 말끔 히 졌지만 와이셔츠는 앞이 몽땅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그 장면. 은희는 망연히 그 대로 서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서있는 은희의 등을 그가 자상하게 두드 렸다. 왜 이러고 있어? 됐어. 금방 말라. 내가 원래 커피 마시다가 잘 엎 지르거든. 이러고 들어가면 우리 와이프가, 이 덜렁이, 또 엎질렀구나,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199
그러는걸. 그렇게 말하면서 그가 싱긋 웃어주었을 때였을까. 은희의 마음이 커 피가 쏟아지듯 그의 마음 위로 온통 쏟아진 것은. 그의 입에서 정답게 발음되던 와이프란 말, 또 그 와이프가 했다는 덜렁이란 말, 그 말들은 그녀의 가슴에 하얀 레이스 커버를 덮은 식탁을 연상시켰다. 그 식탁 위에 꽂혀 있는 핑크 빛 튤립 세 송이까지 차례로 떠올랐다. 크지도 작 지도 않은 키, 날렵하고 가는 편인 체격, 좁은 어깨, 하얗고 갸름한 얼 굴, 말소리도 조용조용했던 그. 은희는 그길로 당장 돈을 빌려 깨끗한 와이셔츠 한 벌과 넥타이를 사 서는 퇴근하는 한상민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갈아입고 가세요. 아직 젖어 있잖아요. 아니, 이럴 필요 그가 안 받을까봐 두려워 그대로 돌아 나와 도망쳤던 은희였다. 다음 날 그는 은희가 사준 와이셔츠를 입고 나왔다. 파란 바탕에 은빛 사선 이 그어진 넥타이와 그 와이셔츠는 그의 모습을 이십대 청년처럼 상큼 하게 보이게 했다. 그는 출근해서 은희를 만나자마자 그녀를 툭 치면서 농담을 했다. 글쎄, 와이프가 은희 안목이 보통이 아니라고 칭찬하던데? 사이즈 도 딱 맞고, 나한테 너무 잘 어울린대. 이담에 누군지 은희 데려갈 남자 는 멋쟁이 소리 들을 거라고 전해 달래. 상민은 그렇게 예의 와이프 의 얘기만을 전해줬지만, 자신이 골라 준 옷을 입은 그 남자의 모습을 본 순간, 은희는 그것만으로도 황홀했 다. 너무도 잘 어울렸던 것이다. 그날 사원들은 모두 그를 부러워했다. 그녀가 커피를 나를 때마다 나한테도 좀 엎질러 봐, 하고 농담을 하기 20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도 했다. 나이 어린데 참 염치 있고, 예의바르다는 칭찬도 들었던가. 하 지만 그때 이미 그녀는 그를 마음에 품었던 것이다. 당장 그를 가슴에 품고 어루만지고 싶었던 마음을 자신은 그 옷으로 대체했을 뿐이었다. 그 옷의 천이 그의 피부를 감싸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의 온몸은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아찔했다. 단발머리에 감색 교복을 입고 있는 그 녀는 지극히 평범한 여상 학생일 따름이었다. 그 누구도 그녀의 은밀한 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를 혼자 마음 졸이며 지냈던가. 마침내 창사 기념 회식이 있던 날, 은희는 공들인 차림으로 나타났고, 단연코 시선을 집중시켰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를 보는 순간, 그의 얼굴에 이는 홍조를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은희는 풀던 옷 보따리를 팽개둔 채 담배를 찾는다. 그가 보고 싶었 다. 혼이라도 되어 찾아가고 싶을 만큼 그가 그리웠다. 그녀는 일어서 서 작은 들창을 열고 담배를 깊이 빨았다. 그를 기다리고 기다렸던 많 은 날들, 그와 사랑을 나누던 행복했던 순간들, 그의 따듯한 눈동자와 자상한 입맞춤과 섬세한 손길과 그 모든 것이 다 그리웠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헤어져 있으면 이렇게 그리워 할 수 있어 도, 그를 보는 순간이면 온 혈관이 곤두섰다. 천천히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연기를 완전히 몰아낸 다음에야 은희 는 다시 옷 보따리를 잡아 당겼다. 순애를 위해서 산 자줏빛 터틀넥 스 웨터와 회색 플레어스커트, 정석을 위해서 산 카키색 반코트와 검정 모 직 바지가 나왔다. 자신을 위해서 그녀는 갈색 스웨이드 부츠를 샀다. 오랫동안 인조 가죽이 아닌 진짜 가죽으로 만든 고급 부츠를 신고 싶었 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에 들 정도면 몇 달을 굶어야 할 돈이었다. 마음 에 쏙 드는 제품이 아니라면 차라리 인조 가죽의 싼 부츠 중에서 고르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01
는 게 나았다. 상민에게 말하면 당장 사주었겠지만, 그녀는 입덧할 때 먹을 것을 사달라고 한 것을 빼고는 그에게 어떤 물건도, 돈도 요구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처음으로 그의 돈으로 원하는 것을 샀다. 새로운 애인의 옷까지, 흐흐. 은희는 옷들을 잘 펴서 옷걸이에 걸어 놓는다. 그리고 다시 주저앉아 조심스레 봉투 속의 것을 꺼낸다. 볼이 발그레한 아기 인형이 나왔다. 긴 속눈썹이 달린 눈깜빡이 인형이었지만 몸체는 부드러운 헝겊으로 되어 있었다. 입에 뚫린 구멍에 우윳병을 넣었다 뺐다 할 수 있게 만들 어진 인형이었다. 옷을 사러 돌아다니다 문득 마주친 진열창의 인형이 었다. 유모차에 앉혀져 있던 인형은 그녀를 보고 미소를 짓는 것만 같 았다. 끌리듯이 아기용품점인 그 가게로 들어갔다. 주인은 파는 인형이 아니라고 했다. 외국에서 사온 인형이라 구할 수가 없는 데다 아기 옷 을 입혀 전시하는 인형이라 팔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은희는 간절 하게 졸랐다. 주인은 난색을 표했다. 마침내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우리 아기가 얼마 전에 죽었거든요. 딱 저만 한데다 얼굴까지 닮았 어요. 그래서 그래요. 주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연민보다는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주인은 아무 말 않고 그 인형을 싸주었다. 그냥 선물하겠다고, 돈도 받 지 않았다. 은희는 쫓겨나듯이 그 집에서 밀려 나왔다. 그녀는 가만히 인형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는 천진스런 얼굴이었다. 입에 뚫린 작은 구멍에 우윳병을 넣고, 우유를 먹이듯이 품에 안아 보 았다. 폭신한 몸뚱이가 품에 쏙 들어왔다. 은희는 인형의 뺨에 뺨을 비볐다. 벽에 걸린 판넬의 사진이 눈에 들 어왔다. 저것도 그런 식의 충동으로 산 것이었다. 남자 아이 둘과 여자 20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아이 하나가 앉아 있는 사진. 내 아이들은 남자 아이였을까, 여자 아이 였을까, 저 사진의 아이들에게 시선이 붙들린 채 그런 생각을 했고, 방 에 걸면 예뻐요, 하는 판넬 장사의 권유에 그냥 사들고 왔던 사진. 그 아이들 하나 하나에게 영이, 원이, 희야라고 이름도 붙여 주었다. 영 원히 에서 따온 말이었다. 가끔씩 그 앞에 서서 영이야, 원이야, 희야 야, 하고 불러보기까지 했다. 물론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그런 밥맛없 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가 보기에도 가증스러웠다. 쇼하고 있네, 놀고 있어, 정육점 도마 위에서 썰리고 있는 시뻘건 고깃덩이를 떠올리는 게 백 번 낫지, 흐흐, 쓰디쓴 웃음이 피를 뱉듯이 흘러나왔다. 그런데도 또 이런 짓을 저질렀다. 그녀는 인형을 들어올린다. 내동댕이치고 싶다. 뭐 하는 짓이야, 웃 기고 있지, 내가, 내가 왜 이러는 거야, 네가 새끼를 낳아보기를 했어, 아직도 넌 처녀야, 스물 둘밖에 안됐어, 이런 일 흔한 일이야, 제발 이 러지 마, 은희야, 제발 이러지 마, 그 애들은 어디선가 좋은 부모 만나 서 새로 태어났을 거야, 네가 이러고 있는 게 더 안 좋아, 풀어 줘, 그 애들을, 풀어주라고!. 언제부터 니가 이렇게 모성애가 있었단 말이야, 철부지 스물 두 살짜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도덕적이었다고 죄의식에 시달리는 거야, 이러지 마, 이러지 마 그녀의 귀에는 그런 음성이 쟁쟁하게 울렸다. 그녀는 들어 올린 인형의 얼굴을 다시 본다. 한없이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이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다. 그녀의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래, 쇼라도 좋아, 쇼라도 하고 싶어, 내가 하고 싶은 걸, 이 애에게 옷을 지어주고 싶어, 내 손으로, 그래, 그러자. 은희는 인형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나 커튼 뒤로 들어간다. 거기서 그녀는 반짓고리를 들고 나왔다. 뚜껑을 여니 여러 가지 자투리 천들이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03
나왔다. 그녀는 아이보리 빛깔의 벨로아 천을 꺼냈다. 그리고 인형의 몸을 줄자로 재어가며 재단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 눈썰미가 좋아 동생 의 옷도 얼추 그럴듯하게 지어내던 그녀였다. 가위로 천을 잘라내고, 바늘에 실을 꿰어 꿰매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녀의 눈빛이 고요해졌다. 그 옆에 눕혀져 있는 인형은 이미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10. 룸펜프롤레타리아 어느 썩을 년놈이 또 수도를 잠궜어-어-? 포항댁의 악쓰는 소리에 정석은 잠에서 깼다. 그의 방은 바로 수돗 가 옆이라 거기서 나는 소리들이 속속들이 잘 들렸다. 더군다나 포항댁 의 커다란 고함 소리는 고막에다 대고 직접 소리를 쏟아 붓는 것만 같 았다. 누가 또 깜빡 잊고 수돗물을 잠근 모양이었다. 여덟 식구가 한꺼 번에 쓰는 그 공동 수도는 종태 엄마가 종태 어릴 때 쓰던 포대기와 비 닐로 정성껏 꽁꽁 싸매 놓았지만 틀어놓지 않으면 얼어버렸다. 그래서 날이 추워졌다 싶으면 사람들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수도꼭지를 조 금씩 틀어놓았다. 밤새 졸졸 흘러내린 물이 작은 빙산처럼 솟아있는 게 보이면 또다시 겨울이 온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습관이란 게 무서운 건지 누군가 꼭 무심결에 수도를 잠그는 사람이 생겨나 언 수도꼭지를 붙들고 악다구니를 쓰는 아침이 사흘들이로 벌어지곤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결백을 증 명하기 위해, 대체 누구야, 이젠 밤마다 보초를 세워야지, 이거 살겠어, 20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라든가, 안 그래도 내가 12시에 나와서 물이 잘 틀어져 있나 한 번 더 확인을 하고 잤는데, 이게 또 웬일이야, 라는 둥 더 큰 목소리로 보이지 않는 범인을 성토하고, 자신의 알리바이를 떠들어댔다. 그 또한 이 집 안의 매년 되풀이되는 낯익은 겨울 풍경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 이른 소동인 듯했다. 사방이 아직도 깜깜했다. 머 리맡의 라이터를 켜서 시계를 들여다보니 바늘은 다섯 시 정각을 가리 키고 있었다. 정석은 다시 잠을 청했다. 수도가 어는 일은 골치 아픈 일 이었다. 모두들 뜨거운 물을 쏟아 부으며 한바탕 난리를 치를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더 자고 싶었다. 주간 근무지만 일곱 시까지는 잘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부엌에는 세수하고 양치질할 물 정도는 늘 구비 되어 있었다. 그는 다시 이불을 코까지 끌어당기고 눈을 감았다. 그때 였다. 내 방 연탄 빼간 육시럴 놈이 누구랑께? 가뜩이나 홀애비가 긴긴 동짓달 밤에 방구들이 등짝이 구워지게 뜨끈거려도 잠을 못 이룰 판인 디, 시상에, 살다 살다 생연탄 훔쳐가는 놈은 봐도 이런 미친놈은 첨 본 당께, 첨 봐. 아, 글씨, 척하니 잘 붙은 불을 빼가고 다 탄 연탄재 위에 생연탄만 얹어놨으니, 그기 뭔 짓거리여? 가져 갈라면 제대로 불이나 갈아놓고 가져가든가, 내 이 도둑놈을 어데서 찾아? 내 손에 잡히기만 해봐라. 눈알을 후벼파 버릴 거니께. 이번에는 주인 방 옆에 사는 홀아비 박씨의 구성진 목소리였다. 홀아 비 박씨의 방은 이 집의 방 중에서도 가장 작은 방이었고, 부엌도 딸려 있지 않은 달랑 방 한 칸이라 문 앞에 신발이 놓여있는 유일한 방이었 고, 아궁이도 그대로 바깥에 드러나 있었다. 원래 홀아비는 아니었고, 여름까지도 처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같이 살았는데, 어느 날 여자가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05
아이를 데리고 도망가 버린 뒤로부터 졸지에 홀아비로 불리게 된 것이 다. 하지만 그런 비극을 겪었어도 그의 악다구니는 청승맞은 가락이 있 어서 오히려 그렇게 욕할 기회를 얻어 신이 난 사람처럼 보였다. 아저씨 방 불도 빼갔어요? 그저껜 내 방 불을 빼가서 냉방에서 자 는 바람에 벽돌 나르다 등골이 쑤셔서 죽을 뻔했는디 우리 집에 도 둑놈인지 년인지 있기는 있는 게 확실한 게벼. 굵직하고 느릿한 음성, 장단을 맞추는 총각은 박씨의 옆방에 사는 노 가다 총각이었다. 이 집 식구들은 정석은 얌전이 총각이라 부르고 막노 동을 하는 그는 노가다 총각이라 불렀다. 왜 이렇게 꼭두새벽부터 시끄러워?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종태 아빠의 약간 쉰 듯한 걸걸한 목 소리도 덧붙었다. 그 역시 공사 현장에서 십장 노릇으로 뼈가 굵은 사 람이었다. 하관이 빠른 얼굴이 검객처럼 날카롭게 생긴 데다 눈빛까지 살기가 돌 만큼 예리해 웬만한 사람들은 한번만 쳐다봐도 주눅이 들 지 경이었다. 보통 땐 잘 지냈지만, 종태 엄마랑 어쩌다 부부싸움을 할 때 면 실제로 시퍼런 부엌칼을 들고 설쳐댔고, 종태 엄마 역시 절대로 지 는 법이 없이 달려들어 두 사람의 싸움은 여느 집 부부싸움하고는 차원 이 달랐다. 술집에 있는 년을 빼왔더니 은혜도 모르고 그가 싸울 때면 하도 큰 소리로 그런 말을 떠들어대서 이 집 사람들은 어느새 종 태 엄마가 술집 출신인 것을 다 알게 되었다. 누가 빼 달랬어, 빼다가 이렇게 죽도록 고생만 시키면서, 내가 미쳤지, 그때 눈이 뒤집혀서 너 겉은 놈한테 붙어오다니, 이제라도 갈라서. 그럼 끝이야. 아직 신고도 안 했는데, 너나 나나 둘 다 처녀 총각이라구 종태 엄마의 악다구 니 속에서 그들이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아직 혼인신고를 안 하고 있 20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다는 것까지도 사람들은 다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일만 없다면 그 부부는 다른 누구보다도 경우 바르고 정 많은 사람들이었다. 주인이라 고 텃세를 부리거나 싫은 말 하는 법도 없었다. 하긴 주인 방이 이 집에 서 홀아비 박씨 방 다음으로 가장 작은 방이기도 했다. 뭐야? 수도 녹인 지 며칠 됐다구 또 잠궈 놨어? 아유, 내가 미 쳐! 허겁지겁 나왔는지 종태 엄마의 목소리까지 섞여 들렸다. 새벽 출근 자들이 총출동을 했군, 총출동을 했어. 정석은 시끄러워 잠이 들지 못 해 투덜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노가다 총각의 얘기를 듣다보니 그 역시 며칠 전에 자다가 불이 꺼져 새벽참에 깬 생각이 났다. 그냥 뭐 가 잘못돼서 꺼졌나, 없던 일이라 이상하게 생각됐지만 그대로 내처 자 고 저녁에 돌아와 불을 피웠다. 그런데 아궁이를 열어보니 분명 저녁에 불을 갈 때 밑불이 좋았는데, 덜렁 하나도 타지 않은 새 탄이 놓여져 있 었다. 그때도 이상하다,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오늘 소동을 들으니 뭔가 짚이는 데가 있었다. 누군가 연탄불을 갈 줄도 모르는 사람이 자 기 딴에는 새 연탄을 가져다주고 불붙은 연탄을 바꿔간 모양이었다. 그 런데 거의 다 타버린 재 위에 덜렁 생연탄만 올려놨으니, 불이 그대로 꺼지고 말 수밖에. 바깥사람들의 말하는 품도 자기들끼리 떠든다기보 다는 마음에 짚이는 데를 두고 들으라고 함께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옆방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나 작게 소 곤거리는지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당황해서 의논을 하는 소리임엔 분명했다. 그냥 모른 척해야지, 어떻게 해, 어휴, 니가 불을 잘못 갈아 서 그래, 그런 말들이 간간이 섞여 들렸다. 그 전에 살던 노점상 아저씨 네 식구가 나가고 옆방의 세 사람이 새로 이사 온 지는 일주일도 안 되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07
었지만 그들은 이 집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들은 젊은 남자 하나와 젊은 여자 둘이었는데, 우 선 그 관계가 참 묘했다. 자기들이 얘기하기론 두 남녀는 남매이고, 한 여자는 그 여동생의 친구라는데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사람들 은 앞에서는 믿어주는 척 고개를 끄떡였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 았다. 남매 좋아하네, 언젠가 그 방을 가리키며 인주네는 정석에게도 입을 삐쭉거렸다. 그렇지만 달리 납득이 가는 관계도 없었다. 다 큰 남 녀가 남남인데 그런 식으로 살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두 남녀가 애인 이나 부부 사이라면 다른 여자의 관계는 도무지 아리송했다. 어쩔 수 없는 형편에 그리 살 수도 있겠는데, 그렇다면 굳이 숨길 리가 없었다. 어쨌든 그들의 분위기는 전혀 남매 같지 않아 보였다. 그들은 모든 데서 이상했다. 얼굴은 세 사람이 모두 생전 구정물 근 처에도 안 가본 사람인 양 희멀갰고, 나이도 모두 어려 보였다. 게다가 한 여자만 빼고 두 남녀는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상한 점은 그들이 종일 방에서 뒹군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남자 하나와 여자 둘이서 하루 종일 문 밖 출입을 안 했다. 어쩌다 가끔 나갔다 오는 일도 있었지만 아주 드문 일이었고, 그 외에는 수돗가에 나와 물을 뜨거나 빨래하는 일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큰 어른이 그렇게 하루 종 일 방구들만 지고 있으면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여겨진다는 사실 자체 를 모르고 있는 듯했다. 며칠 전에 수돗가에서 종태 엄마가, 뭘 해먹고 살아, 그 방구들에서 돈이라도 나오나, 하고, 마침 쌀을 씻으러 나온 여자한테 말을 건넨 적 이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월세만 밀리지 않으면 되지 않아요, 하고 몹시 화가 난 목소리로 톡 쏘아대고는 씻던 쌀도 다 20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씻지 않고 팽하니 들어가 버렸다. 어느 집 종잔지 싸가지는 쥐뿔도 없 네, 종태 엄마는 그 뒷모습에 대고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말했다. 하 지만 그 여자는 돌아보지 않고 얼른 부엌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그 모양이니 그 방 식구들과 이 집의 원래 구성원 사이에는 어느 새 보이 지 않는 팽팽한 전선이 형성되고 말았다. 정석만은 별로 그런 생각이 없는데도, 아주머니들은 그를 볼 때마다 적의 동정이라도 알려주듯이 하나씩 흉볼 거리를 찾아 속삭여주곤 했다. 하여튼 모든 게 이상한 이 방인들이어서 졸지에 이 집 식구들은 토박이로서의 텃세를 부리게 된 것이었다. 하이고, 연탄가스 마실까봐 부엌문도 열어놓고 잤는데 이젠 그 짓 도 못하겄네. 문둥이 콧속에 마늘을 빼묵제, 그래, 자고 있는 사람 연탄 을 빼가? 포항댁, 내 보아허니 연탄 빼간 그 년인지 놈인지가 분명 그 수도 꼭지도 고러크름 야무지게 잠궜을 끼요, 아, 하나를 보면 열을 알지, 안 그러오? 포항댁과 박씨, 그러고 보니 과부와 홀아비 한 쌍이 서로 대거리를 하는 그 말들은 누가 들어도 옆방 사람들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옆 방에서 또 무언가 소곤소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 날카로운 여 자 목소리 하나가 그 소곤거림을 깼다. 그 소리는 정석의 귀에까지 똑 똑히 들려왔다. 빌어먹을 룸펜 프롤레타리아, 여자의 목소리처럼 생급 스럽고 똑똑 부러지는 말이었다. 룸. 펜. 프. 롤. 레. 타.리. 아 정 석은 그 말을 입 속으로 한 음절씩 따라 해보았다. 알듯 말듯 한 말이 었다. 룸펜이라면 그가 알기로 직업도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을 뜻했 다. 우리말로 놈팽이였다. 프롤레타리아라면 학교 때 반공도덕이나 국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09
민 윤리에서 많이 들은 말이었다. 공산주의에서 사람을 그렇게 가른다 고 했다. 그의 생각에 부르주아는 돈 많은 사람, 프롤레타리아는 가난 뱅이였다. 그렇다면 룸펜 프롤레타리아란 무슨 말일까, 가난한 놈팽인 가, 가난한 놈팽이라면 저렇게 새벽부터 일하러 나가는 포항댁이나 박 씨한테는 맞는 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난하긴 해도 놈팽이일 수는 없 었다. 그러고 보니 옆방에서 뒹굴고 있는 저 사람들이야말로 그 말에 딱 맞았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욕하는가. 그러나 그런 의미의 분석보다는 어떤 경우에도 종이 위의 글자로나 써있을 것만 같은 그런 말이 사람의 입에서, 그것도 빌어먹을 이라는 낯익은 말과 함께 아주 자연스럽게, 흔히 쓰는 말처럼 흘러나왔다는 사 실이 그에게는 묘하게 느껴졌다. 룸펜 프롤레타리아, 그는 한 번 더 그 말을 입 속에서 뇌어 보았다. 그 말은 계장이 즐겨 쓰는 인스피레이션 이니, 아이덴티티 같은 말처럼 허공에서 겉돌았다. 뜻을 알아도 무언가 녹아들지 않는 느낌, 꼭 외래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 저 사 람들은 뭐 하는 사람들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이상한 사람 들이었다. 바깥에서 한참들 떠들던 소리도 어느새 사라졌다. 저들에게 무엇보 다도 다급한 일은 밥벌이였다. 잘못하면 늦을 판이었다. 정석은 다시 눈을 붙였다. 잠은 쉽게 들지 않고, 룸펜 프롤레타리아, 룸펜 프롤레타 리아란 말만 입 속에서 계속 굴렀다. 정석씨, 출근 안 해요? 정석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영애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 다. 시계를 보니 7시 반이 넘었다. 새벽에 깼다 잠드는 바람에 깊이 잠 21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뛰쳐나가 부엌문을 열었다. 출근 준비를 끝낸 그녀가 문 앞에 서있었다. 피곤해서 못 깨는 것 같아서요. 자명종은 아까 울렸는데 계속 기척 이 없잖아요 그랬다. 얼결에 시계를 눌러 끄고 내처 잔 것이다. 고마워요. 정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얼른 준비하세요. 그럼 먼저 나갈게요. 정석은 부리나케 준비를 서둘렀다. 나갈 때 보니 종태 엄마가 수돗가 에서 연신 뜨거운 물을 퍼붓고 있었다. 아직도 녹여내질 못한 모양이었 다. 옆방은 깊이 잠들었는지 기척도 없었다. 또 얼었나 봐요. 정석은 막상 종태 엄마를 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어 괜히 빈말을 던졌 다. 종태 엄마가 옆방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소리 없이 종주먹질을 했 다. 그는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못 도와드리고 나가야겠네요. 그러자 종태 엄마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휴, 무슨 말이야, 출근하는 사람이야 나가야지. 방구석에 있으면 서도 코빼기도 안 내미는 사람들도 있는데. 제 발이 저려서 그런 건지, 내 참. 똥 싼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고. 정석은 말없이 고개만 까딱이고 집을 나섰다. 골목에는 허연 연탄재 가 뿌려져 있었다. 아침 내 그 집안에서 울려 퍼지던 진득한 욕설들이 부서져 쌓인 듯한 그 허연 연탄재는 그 집 입구부터 골목 끝까지 발 디 디기 좋게 잘 뿌려져 있었다. 포장 안 된 그 진흙길은 비가 오거나 눈이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11
온 뒤면 꽁꽁 얼어붙어 걸음을 떼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 골목길은 지금 연탄재로 포장이 되어 있는 셈이었다. 그가 그 연탄재 길을 종종걸음으로 걸어 막 골목을 벗어나는데, 뜻밖에도 영애가 거기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려도 안 나와서 막 가려던 참이었어요. 할 얘기도 있고 해서 같이 가려고 기다렸거든요. 근데 혹시 나랑 소문날까봐 무서워서 일부 러 피하는 건 아녜요? 영애의 웃음기 묻은 말에 정석도 그냥 말없이 웃었다. 겨울바람이 찼 다. 매일 그녀의 뒤를 멀찌감치 떨어져 따라가는 데 익숙해진 탓인가. 그는 그녀와 나란히 걸어가는 일이 어색했다. 진작 얘기하려고 했는데, 계속 정석씨랑 근무가 달라서요. 다른 게 아니고, 애들이 오늘 내 방에 놀러오기로 했거든요. 오늘은 잔업 안 한 다고 했잖아요. 그냥 집들이 겸 크리스마스 파티 겸 크리스마스요? 벌써? 다음 준데요, 뭐. 하지만 그땐 우리 회사 제일 바쁠 때잖아요? 내 일부턴 휴일도 없이 내내 연장근무 한다던데요, 구정까지? 오늘이 놀 수 있는 마지막 날이래요. 그랬다. 지금은 발렌타인 제과가 일 년 중 가장 바쁜 때였다. 그렇게 돌리기 위해 오늘 마지막으로 잔업을 빼준다고 한 것이다. 남자들은 안 불렀지만, 정석씨는 한 집 사니까. 이따 저녁이나 같 이 먹어요. 홍섭씨나 연락되면 야간 들어가기 전에 들렀다 가라고 하던 가요. 정석은 약간 당황스러웠다. 그런 자리는 늘 피해왔던 것이다. 그가 대답이 없자 영애는 부드럽게 덧붙여 말했다. 21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뭐, 그냥 떡볶이나 잔뜩 할 거예요. 국이나 끓이고 부르러 갈 테니까 다른 데만 가지 마세요. 내가 끼면 어색하지 않을까요? 방도 좁을 텐데 정석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녜요. 애들이 정석씨는 꼭 부르래요. 한집 사는데 부담이 되 면 그냥 잠깐, 저녁만이라도 같이 먹어요. 정석은 고개를 끄떡였다. 한 집에 있으면서 같은 공장 사람들이 놀러 왔는데 모르는 척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는 홍섭을 불러야겠다고 생각 했다. 저 사실은 영애는 무언가 아주 힘든 얘기를 꺼낼 듯이 뜸을 들였다. 정석은 고 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언제나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얘기하는 그녀의 모습 에 익숙해 있던 정석은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힘들어 하나 싶어 의 아했다. 찬바람에 텄는지 그녀의 뺨이 갈라져 있는 게 보였다. 어느 순 간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눈길이 그의 시선과 딱 부 딪혔다. 둘은 엉겁결에 서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영애는 금세 보통 때의 모습으로 돌아와 다시 그를 바라보더니 결심한 듯 줄줄 얘기를 쏟 았다. 애들이랑 모임을 하나 만들기로 했는데요. 우리 사는 게 사실 책 한 줄 읽을 여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같이 모여 책도 읽고 느낌도 얘기 하고 그러다 쫄면도 같이 먹으러 가고, 뭐 그런 모임이에요. 근데 홍섭 씨 말 들으니까 정석씨도 책을 좋아한다고 그래서요. 같이 해볼 생각 없으세요?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13
영애는 암기 숙제를 선생님 앞에서 외우는 학생처럼 숨도 쉬지 않고 그 말을 쭉 뱉더니 그제야 다시 그를 보고 생긋, 웃었다. 다 외웠죠, 하 고 묻는 것 같은 천진한 웃음. 그 말이 그렇게 힘들었던가, 정석은 긴장했던 자신이 우스웠다. 이즈 음 영애는 집에 곧장 가는 법이 없었다. 친구들과 늘 어울려 다녔다. 떡 볶이집 앞이나, 다방 앞에서 그녀를 좇는 일을 멈춰야 할 때가 많았다. 친구네도 많이 놀러 가는지, 다른 방향으로 가는 날도 있었다. 그러더 니 아예 그런 모임을 만들기로 한 모양이었다. 정석은 자신을 그런 모 임에 끼울 생각을 한 게 우스워, 허허, 웃었다. 나더러 거기 끼라구요? 끼면 안 되나요, 뭐? 영애는 이제 편안해진듯 경쾌하게 말했다. 애초에 기대를 안 했던 게 분명했다. 그냥 해본 말이었나 보았다. 에이, 다 큰 남자가 무슨 정석도 장난스럽게 말했다. 참, 정석씨가 나이를 먹었으면 얼마나 먹었다구, 겨우 스물여섯이 면서 하지만 영애 역시 혼자 쿡쿡, 웃었다. 정석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같 이 자기들 모임에 끼여 있는 게 상상이 된 모양이다. 더 이상은 그녀도 그 일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어딜 그렇게 자주 가요? 잠도 안 자고 이제는 긴장이 풀린 정석이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영애는 외출이 잦 아서 제대로 자지도 못한 채 출근하는 날이 많았고, 주말에도 자고 들 어오는 일이 흔했다. 이즈음에는 주말이면 거의 언제나 방을 비웠다. 21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그녀는 그를 한번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언니네 가요, 조카 보러 회사 친구들이랑 놀러가기도 하구 요. 언니가 있어요? 홍섭이가 맏딸이라던데. 아, 사촌 언니요. 주인 방에 대고, 아주머니, 언니네 가서 자고 올게요, 하고 외치는 영 애의 목소리를 정석은 주말마다 듣곤 했다. 외박을 할 때마다 꼬박꼬박 종태 엄마에게 보고를 하고 가는 모습도 신기했다. 누가 뭐라나, 하지 만 그녀는 언제나 주변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집안에서도, 공장에 서도 언제나 깍듯하고, 무엇이든 몸을 아끼지 않고 했다. 공장 사람들 이나 집안사람들이 그녀라면 입에 거품을 물고, 요즘 처녀 같잖아, 하 고 칭찬을 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정석에게는 그 모습이 무언가 주변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있는 사람처럼 여겨져서 안타까웠다. 잠시 말이 끊어 졌다. 두 사람은 앞만 바라보고 걸었다. 길 건너 하얀 망루 옆에는 키 큰 은사시 나무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있었다. 그것들은 손이라도 잡고 서있는 것처럼 옆옆이 서있었지만 어쩐지 한 그루씩 따로 서있는 것처 럼 보였다. 이파리가 다 떨어진 벗은 나무인 탓일까, 하얀 줄기가 추워 보인 탓일까. 그 나무들은 외로워 보였다. 그렇게 영애가 주말에 긴 시 간 집을 비울 경우 그 방의 연탄은 반드시 꺼졌다. 그녀는 일하느라고 꺼뜨린 연탄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밑불을 빌리러 왔지만, 놀러갔다 꺼 뜨린 연탄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느끼는지 매번 번개탄으로 힘들여 불 을 붙이곤 했다. 그가 말없이 연탄을 빼서 들고 가면 그녀는 어쩔 줄 몰 라 했다. 방을 비울 때면 자기가 불을 갈아주겠다고 그가 먼저 제안을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15
했다. 그녀는 몹시 당황스러워했다. 내가 비울 땐 영애씨가 갈아주면 되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즈음 그는 집을 비우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은희와 근무가 같을 때도 그녀가 만나자고 하지 않는 이상 정석은 먼저 그녀를 찾아가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노력하고 있었다. 일부러 그러 시진 말고, 그냥 집에 계실 때면 영애는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 다 음부터 영애는 긴 외출을 할 때면 방에만 자물쇠를 걸고 부엌의 자물쇠 는 치웠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아예 회사에 갈 때에도 그렇게 하기 시 작했다. 그렇게 하는 쪽이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훨씬 낫기도 했 다. 사실 부엌에야 가져갈 것도 없었다. 연탄 도둑도 낮에는 사람 눈이 무서워 못할 터였다. 그 심각한 사이 인 애인한테도 가겠지요? 전혀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는데, 정석의 입에서는 불쑥 그런 말이 나왔다. 장난기가 묻어있는 말이었다. 물론이죠. 영애 역시 산뜻하게 대답하면서 정석을 보고 웃었다. 그도 그녀를 보 며 웃었다. 그의 웃음을 바라보던 그녀가 잠시 멈칫하더니, 조용히 말 을 덧붙였다. 난 비밀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정석은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어쩌면 그녀가 한 번 결혼했던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하고 스쳐 지나갔다. 비밀이라는, 은밀한 단어 탓이었을까. 때로 그녀는 스물 둘이라는 나이 에 비해 지나치게 침착해 보일 때가 있었다. 처음 정석은 그녀를 밝고 철모르는 처녀로만 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겐 그런 분위기가 확실히 있 었다. 하지만 어떤 순간, 그녀가 또래의 다른 아가씨들과는 전혀 다른 21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분위기를 풍길 때가 있었다.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지만 지워버릴 수 없는 모습이었다. 사연이나 상처 같은 걸 많이 지닌 듯한. 비밀이 많다는 건 그런 뜻인가. 스물 둘은 얼마든지 사연과 상처를 지닐 수 있는 나이였다. 하긴 상관없는 일이었다. 한 번 결혼했던 여자 든, 지금 남자랑 심각한 관계든 그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아무 것도 더는 묻지 않았다. 잠시 두 사람은 어색한 침묵 속에 걸었다. 정석씨, 형제는 어떻게 돼요? 영애의 그 질문은 어색한 침묵을 깨려는 억지 질문 같았다. 지금은 혼자예요. 누나가 있었는데 죽었어요. 정석은 심상하게 대답했다. 왜요? 영애 역시 다른 질문과 똑같이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봉제공장 시다였는데 공장에 불이 났어요. 영애가 걸음을 멈추고 정석을 바라보았다. 밖에 자물쇠를 걸어놓는 바람에 안에 있던 사람은 다 죽었어 요. 네 사람이 있었는데 정석은 아주 이상하게 누이 얘기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 도 하지 않은 얘기였다. 은희에게조차 그저 누이가 어려서 죽은 걸로 만 얘기했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은희야 제 상 처만으로도 너무 무거워 보여 그런 얘기까지 할 마음이 나지 않기도 했 다. 세상엔 젊어 죽는 사람이 하도 많으니, 그녀는 궁금해 하지도 않았 다. 죽을 일이야 널려 있었다. 물에 빠질 수도 있고, 차에 치일 수도 있 고, 병들어 죽을 수도 있었다. 죽는다는 일은 흔한 일이었고, 나이 어려 죽는다는 것도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17
영애가 물었다. 사람이 안에 있는 줄 모르고 그랬군요. 너무도 굳은 신뢰, 확신이 가득한 영애의 눈을 보자 정석은 왠지 반 발이 일었다. 모르긴요. 그 네 사람은 다 거기서 먹고 자던 시다였어요. 누나가 열여섯 살이었는데, 제일 나이가 많았죠. 시다들 중에서는. 나머지는 열다섯 살이 두 사람이었고, 열네 살짜리도 있었지요. 정석은 멈춰 선 채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근데 왜 자물쇠를? 영애의 눈동자는 이제 풀리지 않는 의혹으로 가득 찼다. 정석은 다시 앞을 보고 발걸음을 떼었다. 점퍼 만드는 공장인데, 물건 훔쳐갈까봐서 그랬지요. 사장이 그렇 게 밤마다 잠가놓고 집에 갔어요. 그 날만 그런 게 아니고 네 사람 모두 문 앞에 엉켜서 타죽었어요. 영애는 한 발짝 뒤쳐져 그를 따라왔다. 더 이상 그녀는 아무 말도 하 지 않았다. 정석은 혼자 앞서 걸어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 는 당황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얼굴은 온통 눈물범 벅이었다. 참, 어떻게 소리도 안내고 저렇게 울 수가 있나, 정석은 혀를 찼다. 그는 내처 말없이 걸음을 빨리 했다. 그녀도 눈물을 닦고 그의 걸 음을 따라잡았다. 괜히 얘기를 꺼냈구나, 후회가 몰려왔다. 생각할수록 영애의 눈물이 불쾌했다. 그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자 기가 뭐라고 눈물을 저렇게 쉽게 흘린단 말인가. 괜히 얘기했다. 어릴 때 만화방에서 읽었던 만화의 한 장면이 까닭 없이 떠올랐다. 앞뒤 줄거리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어떤 부잣집 딸이 있었다. 그리 21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고 가난한 남자가 있었다. 사연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 든 그는 어느 날 그 부잣집의 자가용을 몰고 그 여자를 태우고 빈민가 를 지나게 되었다. 그 여자는 처음으로 그렇게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을 본 것이다. 그 여자는 차를 세우게 한다. 그러더니 내려서 멀리 있는 그 들을 보며 눈물을 주르르 흘린다. 그러자 그 남자가 그 여자에게 다가 가 뺨을 후려갈긴다. 여자는 놀라서 뺨을 붙잡고 소리친다. 왜 때리느 냐고, 그러자 남자는 말없이 운전석에 올라타 그곳을 빠져나가 버린다. 왜 갑자기 얼토당토않게 그 만화가 떠오른 걸까. 그걸 처음 읽었던 어린 시절, 정석은 이상하게도 그 장면이 며칠 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남자의 행동이 몹시 후련했던 것이다. 그 우는 여자를 어린 정석 역시 그 순간 증오했으니까. 하지만 잊고 있 었다. 원래 제목이고, 줄거리고 다 잊어버리고, 그 장면만 기억하고 있 기도 했지만.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난 것일까. 동정 받았다는 느낌에서 오는 불쾌감은 절대로 아니었다. 가벼운 동정 따윈 그 사람의 자유이 다. 어린 시절 그 만화의 장면에서 느낀 감정도 그랬다. 그때로선 그렇 게 분명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일종의 무례함에 대 한 분노였다. 그 여자가 운 것은 월권행위였다. 혼자 웅크리고 있는 방 문을 노크도 없이 확 열어 제친 사람에 대한 불쾌감, 그런 것이었다. 생각할수록 정석은 화가 났다. 제가 말하긴 했지만 일부러 건조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것부터가 영애의 접근을 차단하는 철문이었다. 그 랬는데, 저 여자는 자신의 철문을 소리도 없이 훌쩍 뛰어넘어 왔다. 아 주 더러운 기분이었다. 그들은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었다. 아무 도 그 어색한 침묵을 깨려고 하지 않았다. 찻길을 두 번이나 건넜다. 그 러고도 한참이나 되는 길을 그들은 묵묵히 각자의 생각에 잠겨 걸었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19
저 멀리 발렌타인 제과의 분홍빛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따라 그 공장의 진분홍빛 페인트색은 더욱 묘하게 보였다. 그렇게도 선명히 눈 앞에 보이는 진분홍빛 공장 건물을 보면서 그는 거기까지 이르는 길이 한없이 멀다고 느꼈다. 그 날은 근무하는 내내 하루 종일 누이의 생각이 정석을 둘러쌌다. 그는 입 속으로 새벽녘에 들었던 그 단어, 룸펜프롤레타리아, 라는 말 을 계속 웅얼거려 보았다. 그 말이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룸펜프 롤레타리아, 룸펜프롤레타리아, 룸펜프롤레타리아, 룸펜프롤레타리아, 룸펜 프롤레타리아 그러자 그 말은 음악처럼 울렸다. 뜻도 모르고 따라 부르는 팝송의 가사 같았다. 그는 그 단어를 도레미파솔라시도 에 맞춰 한번은 올라 가는 음계로, 그리고 다음번엔 도시라솔파미레도 에 붙여 한번은 내 려오는 음계로 불러보았다. 그랬다가 그것조차 허물고 아무렇게나 가 락을 붙여 그 아름다운 이국의 단어를 노래처럼 불러보았다. 그 짓도 한참을 되풀이하니 지쳤다. 그는 오늘 제빵부 포장 일을 했다. 독감으 로 결근한 여공이 세 명이나 되어 그도 라인 작업을 해야 했다. 빵이 담 긴 비닐봉지가 한 면만 입을 벌린 채 콘베이어에 누워서 다가온다. 그 러면 그는 그걸 압착기에 갖다 대면 되었다. 그 벌린 입은 그 순간적 압 력과 열로 단단히 봉해졌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의 기억은 그렇게 봉해 지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그 벌려진 입들을 다물렸다. 눈앞에 오는 대 로 그것들은 하나씩 입이 봉해졌다. 누이가 봉제 공장에서 시다로 일하다 타죽었을 때, 정석의 나이는 열 네 살이었다. 그들은 유난스레 의가 좋은 오누이였다. 그들 오누이의 22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부모는 젊어서 얻은 세 자식을 피난길에 몽땅 잃었고, 옛날 같으면 손 자를 봐도 좋을 나이에 다시 그들을 얻었다. 그들 오누이는 일가붙이 하나 없는 이 남쪽 땅에서 그들의 유일한 혈육이고 삶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그 나이까지도 그들 남매를 키우기 위해 종 일을 저자거리에서 보내야 했고, 막상 자식들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같이 늙은 부모 밑에서 하늘 아래 딱 둘만 있는 그 들 오누이가 의가 좋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에 그들은 도랑에 종이배를 띄워 놀고, 잠자리를 좇느라 맨발로 뛰어 다니고, 풀 각시를 엮어서 엄마 아빠 놀이도 하던 단짝이었다. 겨우 두 살 차이였 는데도 정석의 누이는 그보다 훨씬 어른스러워서 꼭 엄마 같았고, 그는 또 늘 늦되어서 온 세상의 일들을 누이의 설명을 통해서만 하나씩 배워 나갔다. 엄마가 밥을 씹어 갓난쟁이 입에 넣어주듯 누이는 그의 하늘이 었다. 정석이 더 조그말 때에 누이는, 겨우 이태 먼저 태어난 죄로, 일 나간 부모가 돌아올 때까지 그를 업고 먹이고 재우기까지 했다. 그의 누이는 노래를 잘했다. 누이 등에 업혀 누이가 자기를 재우느라 불러주는 노 래를 듣고 있노라면 그는 늘 누이가 자기를 두고 어디론가 가 버릴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누이는 그렇게 구슬픈 노래만 불렀다. 커서 봉 제공장 시다가 된 누이는 낡고 지저분한 그 공장에서 아예 살았다. 공 장이래야 은행과 중국집이 있는 건물의 3층을 쓰고 있는 것일 뿐이었 다. 그곳에는 미싱 16대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고 귀퉁이에는 합판으 로 가리개만 해놓고 얼추 방 모양새만 갖추어놓은 기숙방-누이는 그곳 을 그렇게 불렀다. 빈말로라도 기숙사라곤 차마 부를 수 없는 몰골이었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21
으니까-이 있었다. 누이는 거기서 먹고 자며 차비와 식비를 아껴 정석 의 중학교 학비를 대주었다. 화재가 나던 날, 그 기숙방에 자고 있던 여 공은 네 명이었다. 혹시 여공들이 물건이라도 빼서 달아날까 사장은 일 이 끝나 집으로 돌아갈 때면 늘 문밖에서 자물쇠를 잠갔다. 그 날도 그 랬다. 물론 명분이야 그럴 듯했다. 그들을 불량배들로부터 보호한다는. 누이가 한 번은, 그럼 안에서 우리가 잠굴랍니더, 했다가 사장으로부 터 2시간이나 설교를 지겹게 들었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니년들부 터 바람이 날지 모르는데 그따위 말을 한다는 거였다. 악마의 유혹이란 간교해서 어리고 무지한 영혼들이 감당할 수 없다, 그러니 내가 보호해 야 한다고 했다던가. 그는 바로 옆 건물 1층에 있는 교회의 충실한 장 로였다. 그 자물쇠가 그녀들을 불량배가 아니라 삶으로부터 차단시켰 다. 그의 누이와 누이의 동료들은 바로 그 문을 쥐어뜯는 자세로 숯덩 이로 변했다. 죽은 사람 중에는 그때 정석의 나이와 동갑인 열 네 살짜 리도 있었다. 화인은 담뱃불로 밝혀졌다. 그 공장에 남자라곤 사장 하 나였다. 그가 분명 문을 닫으며 꺼진 줄 알고 다 피운 담배를 던졌으리 라. 그녀들은 그날따라 11시까지의 작업에 지쳐 씻지도 않고 잤을 거라 고 사장보다 먼저 빠져나간 동료들이 증언했다. 그러나 사장은 용의주도하게 들어둔 보험으로 별로 손해를 보지 않았 고, 며칠간 조사를 받았을 뿐 어떻게 손을 썼는지 구속도 되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정석은 생각했다. 그 역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을 테니. 비록 피해보상을 받더라도 그가 그때까지 쌓아놓은 것들은 어쨌든 잿 더미로 변해버렸다. 그 역시 잃은 것이다. 사장은 죽은 여공들의 부모 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자기에게도 중학교 다니는 딸이 있다고 했다. 자기 딸처럼 걱정이 되어서 그렇게 한 게 비극을 불러왔다고 사죄했다. 22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그는 상종 못할 나쁜 사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일요일 특근을 시킬 때마다 열렬하게 예배를 진행하던 충실한 장로답게 자비로운 낯 으로 부슬부슬 흙이 그대로 흘러내리는 시립공원 싸구려 묘지까지 선 뜻 제공했고, 보상금이랍시고 지폐를 한 다발씩 건네주기도 했다. 그 리고 그 돈의 위력으로 그는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치룰 것을 주장했고, 그 주장은 당연히 받아들여졌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죽은 사람들의 가족 중 그 누구도 감히 그것을 거부하지 못했다. 누이를 묻던 그 봄날 아침은 공기의 입자 하나하나, 슬프게 뜨문뜨문 울어대던 뻐꾸기 소리의 횟수까지도 기억해낼 만큼 정석의 뇌리 속에 선명하게 살아있다. 죽은 네 여공의 합동 장례식. 근엄한 목사가 앞에 서서 열정적으로 장례 예배를 진행하고 있었지 만, 무덤 앞에 앉은 부모들 중에는 묵직한 염주 알을 굴리며 뜻도 모를 긴 불경을 외우는 사람까지 있었다. 열 네 살짜리 여공의 부모는, 연신, 우리 막내, 우리 막내, 불쌍해서 우짤꼬, 하고 외쳐 대서 목사의 기도를 방해했다. 이 푸른 초장에 이들의 육신을 눕히시고 거둬 가시는 우리 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여, 하던 목사의 장례 기도는 그 기묘한 발음의 ` 그리스도 - 기리시도 같기도 하고 `그리씨도 같기도 한- 때문에 그의 기억에 새겨졌다. 그는 그 뒤 며칠간을 누이 때문에 목이 메일 때 마다 그 발음을 흉내 내곤 했다. 이 푸른 초장에 이들의 육신을 눕히시 고 거둬 가시는 우리들의 주 예수 기리시도여,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 씨도여, 하다보면 갑자기 그 모든 것이 한바탕의 웃음거리처럼 생각되 어 누이의 죽음을 실감나지 않게 하곤 했다. 그건 어린 그의 최저한의 자기방어였다. 그는 그때 술을 마시고 취하거나 엉엉 통곡하고 울 만큼 도 자라있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다시는 누이를 볼 수 없다는 생각이,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23
그의 머리에 덧씌워지기 시작하면, 그 불길 앞에서 그 텅 빈 건물 속에 서 문을 부수려고 몸부림쳤을 누이의 마지막 공포를 떠올리게 되면 더 이상 기리시도 도 그리씨도 도 무력해지곤 했다. 그러면 그는 그만 악몽을 꾸다 가위 눌릴 때처럼 모든 것이 콱 막히고 답답해져서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누부야, 그는 죽은 누이를 조용히 불러 보았다. 벌써 10년이 넘은 일 인데도 그 슬픔은 앙금이 되어 가라앉아 있을 뿐, 그가 조금만 휘청이 면 그 슬픔의 조각조각들이 그의 온 몸을 깨진 사금파리같이 사정없이 찔러대곤 하였다. 누이를 잃었을 때 아버지의 나이는 예순 셋, 어머니의 나이는 쉰셋이 었다. 그 나이에 또다시 자식을 앞세운 것만도 견디기 힘든 일인데, 누 이는 죽음의 복조차도 타고나지 못했다. 그녀의 죽음은 너무도 참혹하 고 한스러웠다. 그때 식당에서 일을 하던 어머니는 누이 또래의 처녀만 보면 달려가 붙잡고, 정희야, 정희야, 하고 누이의 이름을 부르며 헤매 고 다니다 누이가 죽던 그 해를 못 넘기고 뺑소니차에 치여 목숨이 끊 겼고, 작은 공장에서 수위 노릇을 하던 아버지는 연이은 불행에 직장도 팽개지고 날마다 술만 퍼마시다 그 이듬해에 잠든 채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의 죽음에는 보상금을 주는 사람도, 부슬부슬 흙이 떨어져 나오 는 시립공원 싸구려 묘지 한 평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 시신들은 같이 피난 온 이웃사람들의 손에 차례로 불태워졌다. 그들이 만약 제 정신으 로 유언을 하고 갈 수 있었더라도 화장을 원했으리라고 정석은 생각했 다. 누이가 타죽은 고통을 죽은 몸으로나마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그 도 그랬으니까. 그는, 죽으면 꼭 화장을 시켜달라는 유언을 써놓았다. 누이는 무덤 속에 눕혀졌지만 이미 살았을 때 불탄 몸이었다. 22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누이의 죽음으로 얻은 보상금과 누이가 그간 푼푼이 모아놓은 돈과 방을 줄인 돈으로 그는 중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야간 공고를 간신히 끝냈다. 하지만 학교에서도 정석은 늘 외톨이였다. 그는 늘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듯 없는 듯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삶은 그에게 너무 참혹해서 그는 그것을 정면에서 들여다보 고 싶지 않았다. 그는 누이와의 추억을 몇 번이고 들춰내어 들여다보면 서 기쁨이라는 감정이 저한테도 있었다는 걸 확인했고, 누이의 참혹한 죽음을 짓씹으면서 슬픔이라는 감정에 몸을 떨곤 했다. 그 외에 그는 식물 같았다. 남들 하는 것을 조용히 다 따라했지만 그 역시 무심한 탓 이었다. 그는 다른 모든 것에 감각을 쓰지 않았다. 더듬이를 잘려버린 곤충처럼. 누이는 생전에 늘 그에게, 나는 니한테 바라는 거 하나 없데이. 그저 니가 포한 안 지게 공부해서 남한테 빌붙지 않고만 살 수 있으면 좋은 기라, 하고 염불처럼 외워댔다. 그 말 덕분에 그나마 그는 그만큼의 공 부라도 할 수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이 도시로 올라와 학교를 마치 고는 곧장 이 공장에 들어와 벌써 10년째이지만 역시 하루하루를 무심 히 남의 일 보듯 지내왔을 뿐이었다. 서은희, 그 여자에게만 잠시 흔들 리고 있지만 그조차 삶의 의욕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저 살 아지고 있었다. 그는 가끔 자리에 누워 자기의 시신이 불길에 활활 타 는 것을 상상해보곤 했다. 언제 죽어도 아무런 회한도 없었다. 일부러 제 목숨을 끊을 의욕조차 그에게는 없었다. 그런 사람들은 그래도 삶 에 대해 어떤 기대가 있었던 게 아닐까. 그는 기대할 게 없으니까 실망 할 것도 없었다. 때로 재가 된 자신을 생각하면, 온몸이 따뜻해지기도 했다. 불에 탔으니 온기가 남아 있을 것이다. 차가운 시체로 땅속에 묻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25
혀서 오래오래 썩어가고 싶진 않았다. 자신의 몸을 태울 불이 그에게는 뜨거운 게 아니라 따뜻하게 여겨졌다. 하긴 그가 설사 관에 담겨 땅 밑 에 묻히고 싶어한들 그래 줄 사람도 그럴 돈도 없을 것이다. 굳이 유언 을 남겨놓지 않더라도 행려병자로나 처리 안 되면 다행이리라. 그는 누 이의 죽음 이후 내내 그렇게 살아왔다. 이즈음에야 겨우 희미하게나마 따뜻한 삶에 대한 그리움이 조금씩 피어오를 때가 있었다. 전 같으면 당장에 잘라냈을 그 그리움이 이제는 반갑기도 했다. 아니다. 다 한때 의 감상일 뿐. 그는 빵 봉지를 밀착시키면서 제 마음도 그렇게 출구를, 혹은 입구를 막아버리고 싶었다. 룸펜프롤레타리아, 룸펜프롤레타리아 다시금 그 야릇하고도 아름다운 단어를 그는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11. 길고도 조용한 우리의 만찬 야, 이게 니 방이야? 꼭 옛날 시골집 같다. 진우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경실이 소리쳤다. 창호지를 바른 창문 때 문에 그런 인상이 든 모양이었다. 니 방이나 내 방이나 삐까삐까지. 부뚜막에 올려놓은 풍로에 불을 붙이면서 진우는, 새로 산 오디오만 이 방 한가운데를 다 차지하고 있던 경실의 방을 떠올렸다. 경실은 음 악을 좋아했다. 가요를 좋아했지만 감미롭고 낭만적인 영화음악이나 경음악도 좋아했다. 경실의 방은 산꼭대기에 있었는데, 그렇게 높고 외 22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진 데 있는 탓에 월세에 비해 방과 부엌이 깨끗했다. 저 옆에 있는 게 변소야? 창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둘러보던 경실이 물었다. 응. 별로 안 써. 꾹 참았다가 회사 가서 볼일 봐, 후후. 진우는 부엌문을 열어 놓은 채 경실과 얘기를 하면서 풍로 위에 놓인 프라이팬에 떡볶이 재료를 풀어놓고 있었다. 방에는 포항댁에게서 빌 려온 큰 상이 놓여 있었다. 근데 여름엔 여기 못 살겠다. 이 방, 냄새가 엄청나겠다, 얘. 파리 랑, 으이, 끔찍해. 경실이 어찌나 실감나게 말했는지 진우는 파리떼가 지금 막 달려든 것처럼 저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여덟 집이 저걸 다 쓸 거 아냐? 그래. 아, 넌 그 변소 혼자 쓰지? 경실의 변소 역시 진우네 변소와 별다를 게 없었다. 단지 그녀의 변 소는 대문 밖에 따로 세워져 있었다. 응. 주인네 변소는 마당에 따로 있어. 수세식은 아니래도 타일 바 르고, 사기 변기 붙여놓아서 좋아. 주인네 없을 때면 내가 슬쩍 실례하 지. 나갈 때 그것까지 잠그지는 않더라구. 그 더러운 변소 없애고 같이 쓰게 하지. 그 사람들도, 참. 아냐, 차라리 속 편해. 혼자 쓰니까 자주 안 쳐도 되잖아? 자기들 이 다 싸놓고도 자꾸 똥 치는 값 내라 그럴 때면 속상했거든. 우리야 한 푼이 아까운데. 떡볶이 재료에 고추장을 풀면서 진우는 고개를 끄떡거렸다. 여덟 집 이 한꺼번에 쓰니 이 집 변소는 걸핏하면 넘쳤다. 돈 내라는 것보다 빨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27
리빨리 쳐내면 좋겠는데, 종태 엄마는 변소가 넘치기 직전에야 사람을 불렀다. 저러다 넘치지. 좀 미리미리 불러요. 우리도 치기가 나쁘네. 똥 을 치러 온 사람들이 오히려 불평을 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똥지 게로 져내는 게 아니라 커다란 진공 호스로 빨아내는 그 일은 이제 양 에 상관없이 차 한번 부르면 같은 값을 치러야 했다. 조금만 기분 나쁜 걸 참으면 허투루 돈을 낭비하는 게 안 되는데, 그걸 못 참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겨울이면 그 변소의 분비물은 다 차기도 전에 얼어서 위로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제대로 쭈그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채 일을 봐야 했다. 게다가 그 안에 들어가면 방금 누고 나간 사람의 내용 물이 너무도 노골적으로 김을 내고 있어서 아주 급하기 전에는 뒤에 사 람이 없을 때에만 살짝 들어가 일들을 치렀다. 하긴 세상에는 인주네 같은 사람도 있다. 어느 날이던가, 진우는 수 돗가에서 그녀와 종태 엄마가 나누던 말을 들었다 진짜 생거짓말 같더라구요, 변소가 우리 집 부엌보다도 깨끗한 게, 하얀 타이루가 쫙 박혀있고, 사기로 된 변기에다 제 것만 딱 누고 줄을 땡기니까 물이 콸 콸 나와서 싹 씻어내더라구, 텔레비에서야 그런 걸 봤어도 그거야 텔레 비에나 나오는 걸로 알았지 처음 공장에 가서 수세식 변소를 써보 았을 때의 심정을 얘기한 것이었다. 아이구, 이런 덜 떨어진 여자가 어 딨어, 아니 그래, 수세식 변소를 첨 봤어? 하다못해 어디 유원지라도 놀러 가면 그런 거 다 있는데, 그래 그걸 첨 봤단 말야, 종태 엄마가 어 이가 없어 놀리자 인주네는, 몰라, 우리넨 그런 거 없었어. 그냥 사기변 기 씌워놓은 덴 봐도 물로 그렇게 감쪽같이 씻어내는 건 첨 봤다니까, 하고 부끄러워하면서도 깔깔 웃었다. 으이구, 병신,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원 남세스럽지, 늙은 할망구도 아니구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22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내 참, 어디 산골서 화전 파먹다 왔나, 종태 엄마는 제 일처럼 화를 내 며 면박을 주었다. 그러나 그때 인주네 말에 정말로 놀란 건 진우였다. 너무 놀라서 종태 엄마처럼 놀라는 표시도 할 수 없었다. 안 도와줘도 되는 거야, 부엌일은? 경실이 부엌으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응, 하는 게 뭐 있어야지. 밥은 주인집 전기밥솥에 해놨으니까 이 따 가져오면 되고, 국도 잘 끓고 있고, 이것만 마저 볶으면 끝이야. 그럼, 난 방을 꾸밀 테니까, 문 잠깐 닫는다! 그러면서 경실은 방문을 닫았다. 그녀가 부엌문을 닫자 갑자기 바깥 소리가 잘 들려왔다. 홀애비 박씨와 노가다 총각의 목소리였다. 홀애비 박씨의 방에는 부엌이 딸려 있지 않아서 그는 언제나 통로에 쪼그리고 앉아 요리를 했다. 밥 냄새가 구수한 걸 보니 저녁을 짓는 모양이었다. 노가다 총각한테 무언가 떠벌이고 있는지 그의 목소리만이 높게 들렸 다. 자네 경양식 집에 들어가 봤나? 그 레스또랑인가 하는데 말야. 아니요. 한 번도 못 들어가 봤어요. 여잘 꼬시려면 그런 델 자꼬 데꼬 가야 한당께. 뭐던지 투자를 해 야 건지제. 아까워말고 투자를 해야 평생 데꼬 부려먹으면서 밑천을 뽑 지라. 아저씬 많이 가보셨나 보네요? 많이 가보긴, 내가 돈이 어딨어? 그러니까 내 꼬락서니가 요 모양 요 꼴이제. 우리 여편네야 호떡이나 멕여서 꼬셨응께 조러코롬 홀라당 내삐부리지 않어? 아저씨도 못 가봤나 보네요, 뭐.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29
허허, 그런 소리 말어. 가보기야 했제. 내가 지금 이래도 한창 잘 나가던 때가 있었는디, 그때 내가 모시던 성님이, 요런 데도 알아야 사 람 꼬라지를 한다고 데꼬 가셨당께. 그래서 내 평생에 딱 한번 가봤는 디, 와따, 요상시럽기는. 말이야 바른 말이제, 그기야 음식이라고 할 수 야 없제. 우리야 고양이헌티도 그리는 안 주겄다. 국이라고 납딱한 접 시에다 핥아먹을 맨큼 딱 한 국자 떠다주고, 그것도 요상스런 밀가루 국이여. 그리고 밥도 딱 고렇게 개밥맨키로 접시에다 납짝 얇게 퍼발라 서 던져 주는디, 참말로 만정이 떨어지더라고. 고기는 덩어리를 통째로 튀겨다 주는디, 거기다 서양고추장인가 뻘건 걸 발라다 먹는디, 상한 것맨키로 시큼헌 기 참말 비위 상해 못 먹겠더라고. 그 형님은 맛있게 잘만 드시드만 난 그 성님이 사람 겉이 안 보이더랑께. 그렇게 못 먹을 음식이에요? 하문. 목까지 내려가는데 벌써 미식거려서 다 토해버렸제. 히히 웃지 말더라고. 내야 베린 인생이니께 고렇제만 자네야 고런 걸 맛 나게 쩝쩝 잘 먹어야 아가씰 꼬셔서 잘 데꼬 살제. 참, 고것이 이름이 돈까시여, 돈까시, 잘 기억해뒀다가 갑자게 여자랑 가게 되면 고걸 시 키라고. 돈까시, 외우기도 쉽제? 돈까시요? 히히 진우는 문득 맥이 풀려서 떡볶이를 볶던 나무주걱을 내려놓았다. 돈 까시 지금은 1986년이 저물려는 시점이다. 2년 뒤면 올림픽이 열 린다고 날마다 떠들어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죽어라고 일하면서도 저렇게 다른 혹성의 사람처럼 살고 있다. 그것도 서울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이 도시에서. 23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밖에서는 여전히, 돈까시니, 레스토랑이니 하는 말이 들려왔다. 아직 도 그 화제가 끝나지 않았나 보다. 그러나 진우의 귀에는 더 이상 그 얘 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떡볶이 국물이 졸아들려고 했다. 그녀는 얼른 나무주걱을 쥐고 볶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경실이 방문을 살며시 열며 수줍은 듯 말했다. 다 했으면 들어와 볼래? 벌써 끝냈어? 금방 들어갈게. 진우는 풍로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새 경실은 방을 딴 방처 럼 바꿔놓았다. 어머, 근사하다! 진우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자 경실은 얼른 불을 껐다. 그러 자 상 위에 켜놓은 두 개의 초와 구석에 있던 스탠드의 불빛만이 방안 을 떠돌았다. 그 불빛이 벽에 붙여놓은 반짝이 별들과 구슬들을 비추 자 그 낡은 방은 한없이 아늑하고 아름다운 방으로 변했다. 크리스마 스, 그 말이 줄 수 있는 모든 아름답고 따뜻한 것들이 순식간에 그 방으 로 다 모여들었다. 경실은 제 가방에서 테이프를 꺼내더니 카셋트 플레 이어에 꽂았다. 첫 월급을 타서 진우가 유일하게 마련한 5만원짜리 금 성 제품이었다. 스위치를 누르자, 아임 드리밍 오브 어 화이트크리스마 스 하는 감미로운 캐럴 음성이 흐르기 시작했다. 진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경실의 따뜻한 마음과 그 아름답고 낭만적인 성격에 코 끝이 시큰해왔다. 그 방에만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먼저 와있었다. 진우 는 진심으로 예수가 이 세상에 온 것에 감사했다. 그가 오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이런 순간은 없었을 테니까, 잘 왔어요, 예수 아저씨, 진우는 무언가 더 감탄을 표하고 싶었지만, 입 밖에 낸 어떤 말도 오히려 그 감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31
동을 제한시킬 것만 같아 입을 다물었다. 어때? 괜찮지? 경실이 진우를 보며 물었다. 이미 그녀는 진우의 감동을 눈치 채고 있기 때문에 그 말에는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진우는 말없이 고개만 끄떡였다. 경실은 그런 진우의 표정을 보고 활짝 웃더니 갑자기 서두르 기 시작했다. 얼른 차려놓자. 사람들 올 때 다 됐어. 경실이 먼저 설치며 부엌으로 나갔다. 야, 영애야, 떡볶이 장사해도 되겠다. 진짜 맛있다! 부엌에서 경실이 소리를 쳤다. 두 사람은 부지런히 수저를 놓고, 음 식을 차려놓았다. 테이프가 막 루돌프 사슴코 로 넘어가고 있을 때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루돌프 사슴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코코 만일 누 가 봤다면 불붙는다 했겠지 와! 모두들 감탄사를 연발했다. 진우는 살며시 정석을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도 놀라움과 들뜬 기운이 모처럼 스며 나왔다. 홍섭도 왔고, 미선 과 재경, 그리고 민자도 왔다. 좁은 방에 남자 둘과 여자 다섯 사람이 앉자 방은 꽉 차버려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밥을 다 먹고 나자 경실이 사다놓은 포도주를 한 잔씩 돌렸다. 종이 컵에 따라진 붉은 포도주의 빛깔이 불빛에 일렁였다. 모두들 아늑하고 행복해 보였다. 상을 치우고 과자와 과일들을 앞에 놓고 술잔을 돌리면서 얘기는 자 연스럽게 무르익었다. 진우는 정석을 걱정했지만 그는 조금도 어색해 하지 않았다. 23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에이, 제껴 버릴까, 이렇게 이쁜 아가씨들을 정석이한테만 맡겨놓 고 갈라니까 배알이 뒤틀려서, 일이 손에 잡히겠나.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홍섭이 근무 때문에 일어서면서 투 덜댔다. 그의 표정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때 말없이 앉아 있던 미선이 무언가를 부스럭거리며 꺼냈다. 홍섭씨, 이거 하나 먹고 가요. 그게 뭐야? 모두들 떠들어대며 들여다보더니 환성을 질렀다. 아니, 우리 회사 초콜렛이잖아? 이 비싼 걸 왜 샀어? 주먹 힘이 유난히 세서 별명이 오함마-아주 커다란 망치를 뜻했다- 인 재경이 상자의 뚜껑을 열면서 소리를 질렀다. 자기들이 만드는 물건 이었지만 초콜릿 한 통 값이 쇠고기 몇 근에 해당되는 그 사치품을 그 들은 결코 사지 않았다. 우리가 만든 건데 한 번 사고 싶었어. 회사에서 사서 좀 싸게 샀어. 미선은 수줍게 웃으며 작게 말했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희미하지만 조용하고 착한 미선은 스무 살이었다. 촛불과 스탠드 불빛 아래 반짝이 는 금빛 종이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싼 그 초콜릿들은 보석처럼 보였 다. 초콜릿마다 가운데에 가느다란 띠가 둘러져 있고, 거기에는 각기 다른 종류의 술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위스키, 브랜디, 진, 와인, 샴페 인, 꼬냑 열 두 개의 초콜릿 속에 저마다 다른 술이 들어있었다. 가 끔 초콜릿 포장 일을 하다가 불량이 난 것을 한 두 개 몰래 먹어본 경험 들은 있지만 이렇게 제 돈으로 완제품을 사먹어 보기는 다들 처음이었 다. 워낙 단가가 세게 치는 제품이라 불량제품도 먹다가 들키면 창피를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33
당해야 했다. 이야, 이거야말로 오늘 같은 날 먹는 거다. 가만있어. 난 위스키를 먹어야겠다! 경실이 얼른 가느다란 금띠에 위스키라고 써진 초콜릿을 들었다. 난, 브랜디! 눈도 크고 입도 크고, 손도 공장에서 제일 빨라 일을 귀신같이 하는 민자도 하나 집었다. 홍섭씨도 먹고 가세요. 미선이 한 번 더 권했다. 그러자 홍섭은 어울리지 않게 낯을 붉혔다. 진우는 그런 그의 모습에 놀랐지만 모르는 척했다. 슬쩍 보니 미선의 하얀 얼굴에도 홍조가 스몄다. 혹시 저 초콜릿은 홍섭에게 주려고 샀던 건 아닐까, 진우는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초콜릿은 특히 여자가 남 자에게 보내는 마음의 고백이라고 했다. 발렌타인 제과가 초콜릿을 팔 아먹을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그 서양의 풍습, 미선은 힘들여 큰 맘 먹고 저걸 샀을지 몰랐다. 단지 용기가 안 나서, 차마 주지 못하고, 그럴 바 엔 그에게 하나라도 먹이고 싶어서 이제야 그걸 꺼냈는지도 몰랐다. 진 우의 가슴 속으로 따뜻한 물줄기가 흘렀다. 그래요. 얼른 먹고 가요. 뭘로 드릴까? 이미 일어서 있는 홍섭에게 오함마 재경이 물었다. 아니, 내가 먹을게요. 홍섭은 다시 자리에 앉아 잠시 고르더니 그 중에서 분홍빛 띠가 둘러 진 마티니를 집었다. 정석씨도 골라요. 재경이 정석을 그 센 주먹으로 툭 치며 말했다. 23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아, 아파요. 정석이 맞은 데를 문지르며 엄살을 떨었다. 모두들 웃었다. 그는 보 드카를 집었다. 미선이도 골라. 지가 사와 놓고는 진우가 말하자 미선은 눈을 내리깐 채 진을 집었다. 거기에도 분홍빛 띠가 둘러져 있었다. 진우는 꼬냑을 집어 종이를 벗기고 입에 넣었다. 작은 양이었지만 초콜릿이 파삭 부서지면서 나오는 꼬냑의 탁 쏘는 맛 이 그지없이 좋았다. 모두들 그렇게 하나씩 집어먹자 몇 개 남지 않게 되었다. 이제 다들 하나씩 먹었으니까 나머지는 미선이가 집에서 애인 생 각할 때마다 먹으라고 하자. 진우가 초콜릿 통을 미선에게 넘기려 하자 경실이 얼른 그것을 빼앗 아 홍섭에게 넘겼다. 혼자 추운 데 일하러 가는 불쌍한 남자한테 주자구. 미선아, 괜찮 지? 역시 경실이었다. 경실은 진우보다 더 깊이 미선을 챙긴 것이다. 그럼 미선의 말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과 고마움이 묻어 있었다. 경실 이 홍섭에게 초콜릿 상자를 내밀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직접 접어 만든 상자였지만, 그 상자는 자기들이 만든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 큼 아름다웠다.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아름다운 사랑의 여신 아프로 디테가 온몸이 하늘하늘 비치는 드레스만 걸친 채 나른하게 누워있는 그림. 홍섭은 상자를 봉투 속에 담았다. 그답지 않게 고개를 숙여 진우 는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35
모두들 집 앞까지 나가 홍섭을 배웅했다. 시간이 별로 없어 버스를 타야 했다. 정석이 정류장까지 배웅하고 오겠다고 하자 미선이 저도 같 이 가겠다고 말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미선은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여 말했다. 정석씨도 따라 가버리면 어떡해? 잡아와야지. 모두들, 맞아, 맞아, 하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다들 방안에 들어가 앉 자 민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미선이 조 계집애, 홍섭씨 좋아하는 거 아냐? 왜 너도 홍섭씨 맘에 뒀어? 재경이 또 민자를 툭, 건드렸다. 아야, 누가 오함마 아니랠까봐 어지간히 때려 쌓네. 홍섭씰 내가 왜 맘에 둬? 난 공장 다니는 사람한테 시집갈려면 차라리 독신으로 살 겠다. 어쭈, 그럼 뭐 하는 사람한테 시집갈 건데? 선생님! 난 선생님 하는 남자가 젤 좋더라. 그럼 진짜 사모님 되잖 아. 어느 선생이 널 데려가냐? 꼬셔야지. 돈 벌어서. 교양도 쌓고. 그래서 우리, 책 읽고 공부하기 로 한 거잖아? 아이구, 속셈은 멀쩡하네. 테이프는 어느새 다시 화이트 크리스마스 로 돌아가 있었다. 벌써 세 번째 돌아가는 중이었다. 아유, 이거밖에 테이프 없어? 지겹다, 이제. 민자가 카세트를 꺼버렸다. 진우는 비닐옷장 위에서 김수희와 심수 23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봉, 조용필의 테이프를 꺼냈다. 아, 좋다! 수희언니 거 듣자. 난 그게 젤 좋더라. 민자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언니는 무슨, 김수희가 니네 언니냐? 또 재경이 민자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럼 언니지, 동생이냐? 경실이 테이프를 꽂자 김수희의 고독한 여인 이 흘러나오기 시작했 다. 고개 들어 나를 봐요 슬퍼하지 말아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난 벌써 알고 있어요 오늘만은 정말이지 날 울리지 말아요 예전처럼 한 번 더 나를 꼬옥 안아주세요 아무리 몸부림쳐도 헤어져야 하는데 어차피 떠날 사람을 붙잡을 수 있나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요 책임질 수 없다면 사랑의 슬픔도 사랑의 아 픔도 모르는 사람들처럼 모두들 금세 김수희의 애조 띤 음성에 젖어 들었다. 캐롤을 들을 때 모두들 행복한 추억만 떠올렸다면, 김수희의 노래는 슬픈 상처만을 떠 오르게 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의 음성은 막 남자를 떠나 보내고 온, 아니 지금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우는 여자처럼 노골적이도 록 생생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현장의 노래였다. 걸러지지 않고 삭혀 지지 않은,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현장의 노래.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37
공장에 들어오기 전에 진우는 그런 원색적인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 다. 술자리에서나 가끔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젓가락 장단에 맞춰 부르 긴 했어도 그런 노래들은 약간 우습게 여겨졌지 심금을 울려오지는 않 았다. 그런데 공장에 들어오니 사람들이 김수희나 심수봉의 노래를 너 무 좋아했다. 그래서 진우도 사다놓고 듣게 된 건데, 그런 노래들은 들 을수록 마음 깊숙한 곳을 찌르는 데가 있었다. 코맹맹이 소리로 떨어대 는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정말로 애간장이 끊어지는 기분이 되곤 했 다. 그녀의 노래는 귓속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심장으로 촉촉히 젖 어 들어왔다. 정말 처음 깨닫는 느낌이었다. 왜 똑같은 노래가 예전에 는 우스꽝스럽게만 들렸던 걸까. 그녀가 속한 문화가 그런 원색적인 감 정들을, 원시성과 야만성을, 그 거친 도발성과 노골성을 눈살 찌푸리며 싫어했기 때문일까. 그녀가 속한 문화가 원색을 싫어하고 거기에 무언 가 덧칠을 하거나 긁어내거나 해서 기어코 세련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탓이었을까, 아무리 몸부림쳐도 헤어져야 하는데 어차피 떠날 사람을 붙잡을 수 있나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요 책임질 수 없다면 사랑의 슬픔도 사 랑의 아픔도 모르는 사람들처럼 김수희는 온몸을 비틀듯 몸부림치는 목소리로 후렴구를 반복하고 있 었다. 어느새 진우도 입속으로 그 귀절을 따라하고 있었다. 촛불만이 일렁대는 어둠 속에서 모두들 벽에 등을 기댄 채 저마다 자신의 추억에 잠겨 말이 없었다. 그때 구석에서 그만 참지 못해 넘친 물처럼, 흑, 하는 소리가 들려왔 다. 경실이었다. 그녀가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흘낏 바라볼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애를 달래겠다는 생각조차 안 들 만큼 23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모두들 제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격해졌다. 아직도 많이 아픈 아이, 진우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렇게 정 많은 아 이가 오죽 속이 쓰라릴까. 그러면서 진우는 문득 경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굴 저렇게 좋아하고, 헤어지면 저렇게 쓰라려하고 그럴 수 있는 걸까. 어쩐지 진 우에게는 그런 감정이 낯설었다. 언제나 그녀의 감정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그녀는 사랑을 먼저 받았다. 그게 꼭 남자가 아니더라도 그랬다. 친구든, 환경이든 그녀가 애끓게 갈망하기 전에 먼저 다가와 주는 갈망 의 대상. 그런 것을 남들은 복이라고 불렀다. 진우 역시 자신을 복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불공평하게 복을 많이 받아서 죄의식을 느 꼈다. 채무감까지 느꼈다. 나만 가져서 미안하다는 생각, 그걸 갚고, 나 눠야 한다는 생각, 그 생각이 오늘 이 자리까지 그녀를 끌고 온 힘이라 면 힘이었다. 그러나 그건 과연 행복일까, 이전에도 가끔 그런 의문이 들 때가 있었지만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가책을 느 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 그녀의 그런 복에 갈증 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녀는 차마 의식 속에서라도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 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문득 자기야말로 불행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명수를 사랑했지만 그건 이성적인 감 정이랄까, 노래로 치면 박인희나 해바라기 의 노래처럼 조용하고 잔 잔한 감정이었다. 만나면 좋고 헤어질 땐 쓸쓸하지만 설혹 그가 그녀를 버린다 한들 저렇게 울고불고 할 만큼 애간장이 끊어지는 슬픔을 주진 않을 것이다. 진우의 친구들이라고 다 진우 같지는 않았다. 남자가 떠나서 동맥을 끊고 죽으려 했던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진우는 그런 애들을 조금도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39
동정하지 않았다. 흘러가는 감정에 충실한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 각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은 소유욕이나 의존성으로만 비쳐졌다. 그래 서 그런 지독한 감정은 때론 추악한 욕심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렇 지 않은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상하게도 지금 경실의 눈물은 진우의 가슴을 때리고, 자신이 형편없이 건조하고 빈약 한 인간이라는 부끄러움을 주었다. 자신의 인생이야말로 복을 받은 게 아니라 신의 무관심 속에 버려진 인생은 아닐까. 내가 확실히 얘네들을 좋아하는구나, 좋아하니까 그냥 모든 게 좋게 보이나봐, 아니면, 저 여 자, 김수희의 저 무장해제시키는 목소리 때문인지도. 어느새 노래는 바 뀌고 있었다. 이즈음 현장의 사람들이 일하면서 가장 많이 흥얼거리는 노래였다. 마지막 한마디 그 말은 나를 사랑한다고 돌아올 당신은 아니지만 진 실을 말해줘요 떠날 땐 말없이 떠나가세요 날 울리지 말아요 너무합니다 너무합니다 당신은 너무합니다 그때 홍섭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정석과 미선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들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왜들 그래? 미선이 그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모두들 눈을 감고 노래를 듣고 있 는데다 구석에서 경실은 울고 있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 왔어? 진우가 먼저 자세를 고쳐 잡으며 그들을 맞자 다른 아이들도 그제야 24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갑자기 와글거리며 부산을 떨었다. 경실도 금세 눈물을 닦고 무안한 듯 웃었다. 난 김수희 노래만 들으면 눈물이 나. 그러나 다행히도 노래는 이제 남행 열차 로 넘어가고 있었다.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에 저 노래 들어도 눈물 나냐? 재경이 경실을 또 그 주먹으로 툭 때렸다. 아야, 또 때린다! 누가 널 데려갈지 오래 못 살 거야. 멍투성이가 돼 갖고 잃어버린 첫사랑도 흐르네 깜빡 깜빡이는 와, 눈물 나네! 경실이 몸을 흔들며 장난스럽게 노래를 따라 불러서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삶이란 어쩌면 저런 것이리라. 따지고 입히고 벗겨내고 치장 하는 게 아닌, 노골적이고 원색적인 것, 그런 게 삶의 진실이리라. 수세 식 변소가 아닌 재래식 변소, 돈까스가 아닌 돈까시. 진우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똥은 똑같이 더러운 것이다. 그걸 눈앞에서 노골적으로 보고 냄새 맡느냐, 깨끗이 흔적도 없이 물로 숨겨버리느냐의 문제일 뿐. 더럽다는 말 때문이었을까, 불현듯 용식의 편지 귀절들이 떠올랐다. 명수형, 진우의 몸에서 나온 붉은 피를 보고 느낀 희열만은 죽었다 깨도 형이 갖지 못할 몫이지. 나는 그 애의 첫 남자였어 진우는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나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더 러운 인간일지도 몰라. 만날 순 없어도 잊지는 말아요 당신을 사랑했어요 김수희의 목울대를 진동시키는 노래가 여전히 방안을 가득 채웠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41
밤이 늦어 다들 버스를 태워 보내고 돌아오면서 정석은 진우에게 말 했다. 고마워요, 영애씨, 불러줘서. 아니, 와주셔서 고맙죠, 제가. 묵묵히 허연 연탄재를 밟으며 걷던 그가 다시 말했다. 그런 자리, 얼마만인지 몰라요. 사람들을 피하기만 했는데 즐 거웠어요. 정석이 허공을 보면서, 진우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나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그런 그의 모습을 올려 보았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가 그를 더 쓸쓸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12. 퍼붓는 눈 허벅지가 다 드러나도록 짧은 스커트를 입은 레지가 컵을 놓고 갔다. 하얀 사기로 된 컵에는 분홍빛 립스틱 자국이 묻어 있다. 한번 닦지도 않고 그대로 물만 따라 가지고 온 것이 분명했다. 기희는 왈칵 눈물이 솟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 더러운 컵은 그저 이 더러운 다방의 관 례일 뿐이었다. 그녀에 대한 무시에서 나온 처사가 결코 아니었다. 그 런데도 그것에 서러움을 느끼는 자신의 비굴한 초라함이야말로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다방을 둘러보았다. 중년 남 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형적인 소도시의 분위기 없는 다방이었다. 예 의 그 레지는 어느새 웬 남자들의 자리에 합석하고 있었다. 빨리 떠나 24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고 싶은 곳이었다. 아까 만나 본 진우의 생생한 표정이 떠올랐다. 근로자 회관의 화장실 앞에서 공장 친구들과 줄 서 있는 진우를 찾아냈을 때의 반가움이 가시 자마자 기희는 그녀가 부러워 가슴이 쓰라렸다. 스물 두 셋밖에 보이지 않는 그 어린 친구들 옆에 서있는 진우 역시 그 나이 또래로 보였다. 기 희의 눈에 그런 진우의 모습은 세상의 변화를 위해 온 힘을 바쳐 살아 갈 수 있는 그녀의 자유와 보람의 힘으로만 여겨졌다. 학창 시절,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기희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속 을 털어놓지 못해 남들처럼 단짝 친구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진우는 그래도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서로 일이 다르고 바쁘다 보니 자주 보 거나 연락하진 못해도 몇 달 만에 봐도 늘 엊그제 본 것처럼 편한 사이 였다. 진우와 기희, 기희의 남편 병욱은 모두 같은 대학 친구였다. 서로 활 동한 써클은 달랐어도 한 길을 가는 동지로서의 친밀감이 있었다. 병욱 은 지금 뛰어난 활동가로 노동 단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고, 기희는 그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아이까지 있는 기희는 시댁 옆으로 이사가 시어머니에게 매일 아이를 맡겼다 찾 았다 하면서 정신없이 살고 있었다. 직장생활, 육아, 가사, 시댁 문제, 운동만 뺀 모든 것이 그녀의 어깨에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출발로 본다면 기희야말로 가장 절실하게 운동에 뛰어든 사람 이었다. 기준이 기준이만 생각하면 목이 메었다. 그 피비린내 나는 5월, 집안의 외아들이었던 동생 기준은 그때 고등학생이었다. 집에서 는 당연히 이불보에 싸놓듯이 그 애를 꼼짝 못하게 했지만, 그 애는 몰 래 빠져나갔다. 그리고 골목길 막다른 집의 재래식 변소 안에서 시체로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43
발견되었다. 쫓기다 그리 숨었지만 살해당한 것이다. 기희는 그때까지 도서관학파였다. 학과 수석으로 들어온 그녀는, 그 때 외무고시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일이 그녀의 인생을 뒤 바꾸었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백주 대낮에, 전쟁도 아닌 평화시에, 고향에서 자기 나라 군인한테 맞 아죽은 동생의 시신은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봐도 믿어지지 않는 현실 이었다. 그녀는 흥분했다기보다 납득이 가지 않았다. 과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그것을 캐내고 싶었다. 기희는 죽은 기준도 꼭 그러리라 싶었다. 더군다나 어린 고등학생이 었던 그 아이,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어떻게 해서 죽임을 당해야 했 는지도 모른 채 그 아이는 숨이 끊어졌다. 죽어서도 그 아이는 납득을 못 할 것만 같았다. 그런 동생을 위해서도 그 모든 원인과 과정을 알아 내야만 했다. 그녀는 대학 입시를 공부하던 그 열정으로, 외무고시를 공부하던 그 부지런함으로 운동권의 이론을 섭렵해 갔다. 그리고 그녀 는 가장 과격하고 똑똑하고 철저한 여성 전사가 되었고, 꼭 저처럼 과 격하고 똑똑하고 철저한 병욱과 결혼했다. 그때만 해도 그 결합은 누구의 눈에도 이상적으로만 비쳐졌다. 그러 다 병욱이 조직사건에 걸려 옥에 갇히자 기희는 취직을 해서 옥바라지 를 했다. 그가 옥에서 나오면 함께 현장 활동을 하려 했지만, 그녀는 덜 커덕 임신을 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그들은 역할 분담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워낙 철저했던 그녀는 아이만 조금 더 크면 자신도 다시 일을 할 수 있도록 그 바쁜 와중에도 잠을 줄여 문건들을 읽었고, 집회에 참 석했으며, 끊임없이 제 자신을 벼리며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씩 24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지쳐갔다. 그녀는 결코 초인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있는 젊음을 모두 가불하듯 당겨써야만 그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어쩌다 진우를 만날 때면 자존심 강한 기희는 늘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지만, 눈 밑에서 점 점 짙어지는 검은 그늘을 숨길 수는 없었다. 컵 안에 뭐가 들었니? 물 컵만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는 기희에게 진우가 농을 던졌다. 아, 왔구나! 기희는 진우를 보자 저도 모르게 또 눈물이 솟구쳐 가까스로 억눌렀 다. 반가웠다. 오늘 얼마나 진우를 만나고 싶었던가. 기희는 진우의 손 을 꼭 잡았다. 미안해. 바쁠 텐데 기희는 힘없이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진우는 기희의 손을 소리 나게 탁, 때렸다. 계집애, 입에 발린 소리는 기희가 웃었다. 술 한 잔 하러갈까? 모처럼 안양까지 행차하셨는데, 내가 대접할 게. 기희는 어린아이같이 천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진우는 안양 시장 안에 있는 곱창 골목으로 기희를 데려갔다. 한쪽으 로 쭉 늘어져 있는 가게들이 모두 곱창볶음을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천장 밑에 한 칸을 더 만들어 간이 2층을 만들어 놓은 집이 많았다. 진 우가 기희를 끌고 간 곳도 그런 곳이었다. 앉으면 머리가 천장에 닿을 듯한 그곳이 그래도 사람이 북적대는 아래쪽보다는 나았다. 커다란 검 은 철판 위에 곱창과 깻잎, 고추, 양배추 등 온갖 야채들이 양념장과 함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45
께 섞여 나왔다. 진우는 숟가락으로 그것들을 볶으며 말했다. 애들하고 첫 월급 받고 여기 왔었는데, 너무 맛있더라. 난 곱창볶 음이란 걸 처음 먹어봤기도 했지만. 다른 데 곱창볶음하고도 다르다는 데? 그래, 야채가 많아서 그런가? 들깨도 듬뿍 넣고, 꼬소하네. 두 여자는 소주잔을 건네며 한참 동안 시시한 얘기나 건넸다. 힘들지? 기희는 안쓰러움과 부러움을 반쯤 섞어 물었다. 괜찮아. 나야 뭐 그냥 내 재미로 일하는 걸. 우리 엄마 말대로, 내 양심이나 편하게 하려고 사람들이 전부 제 양심 하나만 챙겨도 세상이 이 모양은 안됐겠 지. 아니, 내 능력은 별로 운동에 보탬이 안 돼. 순전히 참가에 의의를 둘 뿐이야. 민혁이랑 명수 형이랑 많이 보고 싶지? 민혁이는 말할 것도 없지, 뭐. 하지만 이상하게 명수 형은 하 나도 안 보고 싶다. 물론 만나면 좋지. 그렇지만 안 보면 또 아무렇잖 아. 그러니, 너두? 기희는 자기도 모르게 너두? 란 말이 새어나와 당황하고 말았다. 그래서 얼른 아니, 내 말은 하고 덧붙였다. 됐어. 왜 그래, 그 정도 말 갖고? 니가 정말 힘든 모양이다. 자기 신념하고 다르게 산다는 거 너 보면 예전의 내 생각 나. 너무 잘 알 24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겠어. 기희는 갑자기 수저를 놓고 고개를 숙였다. 눈병이라도 걸린 노파처 럼 왜 이렇게 눈물이 자꾸 나는지 미칠 것만 같았다. 진우가 제 술잔을 비우고 기희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잔 받아! 너답지 않게! 네가 그 유명한 권기희 맞아? 기희는 눈물을 닦고 술잔을 받았다. 기준이 생각이 많이 나. 걔한테 미안해. 기준이도 이해할 거야. 니가 얼마나 힘들게 버티고 있는데 기희는 눈을 들어 진우를 바라보았다. 진우는 그 눈을 보며 생각했 다. 저토록 여린 아이, 너무 여린 살 때문에 딱딱한 껍질로 싸야만 하 는, 자신을 언제나 강한 갑옷으로 무장해야만 하는 아이. 진우는 다시 기희의 잔에 술을 따른다. 진우야, 나, 병욱이가 혐오스러워. 사람을 잘못 봤어. 진우는 쥐고 있던 술병을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기희는 자존심이 대 죽처럼 시퍼런 아이였고, 제 삶의 원칙에 추호도 타협을 용납치 않는 아이였다. 누구보다 진우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렇게 살 고 있는 모습조차 기희의 삶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보다 큰 대의를 위해, 제 개인의 권리까지도 유보하고 있는 것에 불과 했다. 실제로 병욱은 철저하게 제 자신을 헌신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 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이루었을 몫보다 더 많이. 그렇게 능력을 발휘하는 병욱이었지만 다른 모든 몫은 기희에게 넘기 고 있기에 병욱도 비난을 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기희는 행여 그렇 게 말하는 친구들에 대해 오히려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기희가 저렇게 말한다, 저만큼을 말하려면 저 애는 엄청난 시간을 고민했을 터였고,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47
갈등했을 터였고, 그리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일 터였다. 진우는 아 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제 잔을 따를 뿐이었다. 이제는 내 자신을 속일 수가 없어. 내내 나를 속이면서 살아왔어. 오늘 아침 일이야. 나, 어제 밤 샜거든. 시댁에 일이 있어서 밤늦게까 지 일하고 집에 와서 집안일 하고 자려는데 아이가 열이 펄펄 났어. 밤 새 물수건 바꿔 갈아주느라 꼬박 밤을 샜지. 새벽녘에야 겨우 열이 내 렸어. 그 사람 밤늦게 들어왔는데, 내가 언제나 어련히 알아서 잘 하니 까 그냥 믿고 잠들더라. 바쁘게 뛰다 온 사람이니까. 그건 아무렇지도 않았어. 오히려 그 사람 숙면이라도 방해할까봐 소릴 죽이며 들락거렸 지. 새벽녘에 그러고 한 시간이나 잤을까, 그 사람 아침에 약속 있단 말 이 생각나서 벌떡 깼어. 밥 안 먹고 나가면 돈이 있니, 제대로 못 먹고 다닐 게 뻔한데, 납덩이 같은 몸을 이끌고 겨우 아침 준비를 하고 상 차 려 들고 들어가 깨웠지. 그때만 해도 오늘 행사, 와볼 생각도 안 했어. 애도 아프지. 아마 내가 상을 내려놓고 힘든 표정을 지었던가봐. 털썩, 주저앉았겠지. 그 사람이 그런 나를 보더니 뭐랬는 줄 아니? 기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흥분도 안 해. 아주 차분히, 침착하게 넌 열심히 일하고, 혼자 바쁘면서도 성과라곤 없다는 거야. 생활이 비조직화되어 있어서 그렇 다나. 기희는 얼른 제 잔의 소주를 삼켰다. 진우가 다시 잔을 채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겠어. 왜 핀이 간다는 말 있지? 뭔가 확 도는 느낌이었어. 그냥 상을 뒤엎고 그대로 나와 버렸어. 무덤에서 기어 나오는 것처럼 힘들게 차린 그 상을, 그 하얀 쌀밥을 그냥 엎어버 렸다니까. 그놈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나를 쳐다보는데, 그냥 핑하니 24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나와 버렸어. 오늘 중요한 약속 있다고 했는데 몰라, 나도 이젠. 기희야 불렀지만 진우는 여전히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랐다. 곰곰히 씹어보면 그 말, 아무 것도 아니야. 종일 생각했어. 하지만 그 말에 내가 그렇게 반응한 건 우리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야. 적 어도 그가 인간이라면, 내가 믿고 존경해온 정의로운 인간이라면, 그런 말은 할 수 없어. 그 말 한 마디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쌓아온 시 간이, 우리가 쌓아온 생활이 그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을 주진 못해. 무 얼 했는데? 도대체 그 작자가 무얼 했기에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 어? 수명을 줄이며 살아온 나한테? 어떤 인간도,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하는 인간이라도 그렇게 할 순 없어. 그 남자, 혐오스러워. 이미 오래 전에 혐오스러웠어. 단지 그걸 인정할 수 없었을 뿐이야. 그럼 내가 무 너지니까. 지금까지 내 삶을 다 부정해야 하니까. 그냥 오늘 일은 마지 막 비등점이었어. 아무도 이해 못할 거야, 너밖에는. 행사 보러 온 게 아냐. 널 보고 싶어서 왔어. 미칠 것같이 보고 싶어서. 여기 오면 니가 있을 것 같아서. 기희는 기어코 술상에 엎드린 채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무슨 일인 가 아래층에서 주모가 올라왔다. 진우는 손짓으로 그녀를 내려 보내고, 기희의 옆으로 가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 서 벗어나야 했다. 지금 자신을 놓아버렸지만, 기희의 자존심은 그것을 견디기에는 너무도 섬세했다. 진우는 기희를 일으켰다. 기희야, 나가자. 나가서 우리 어디 여관방에라도 들어가서 밤새 마 시는 거야. 집에 들어가지 마.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49
밤새 술을 마시고 쓰러져 잠든 새벽녘에 진우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나야, 기희. 응? 그제야 진우는 그 방에 기희가 없다는 걸 알았다. 더 자게 둘까 하다가 혹시 출근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깨웠 어. 괜찮니? 어떻게 하지? 결근하면 안 되니? 기희의 목소리는 어느 새 단정한 평소의 어조를 찾고 있었다. 너, 어디야? 언제 간 거야? 여기 집 앞이야. 새벽이라 빨리 왔어. 희은이가 눈에 밟혀서, 걔, 열이 많이 났거든. 계집애, 그 하룻밤을 못 참아서! 어련히들 알아서 하겠니? 병욱씬 뭐 손이 없니, 발이 없니? 그러면서도 진우는 기희의 마음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진우야, 어제, 너무 고마웠어. 그냥 어떤 모습을 보여도 창피하지 않은 친구가 있다는 게 너무 좋아. 나, 그것 하나만으로도 헛되게 산 것 같지 않아. 출근해야 하는 너를 힘들게 했지만. 그래, 너한텐 나, 미안 해하지 않아도 되지? 야, 너 이름이 뭐야? 진우가 소리를 높였다. 이름이 뭐냐니까? 왜 그래? 기희잖아? 똑똑히 대봐. 성까지. 권. 기. 희. 25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기희는 영문을 모른 듯 시키는 대로 대답을 했다. 잘 아네. 그럼 제발 그 이름값만 하고 살아. 약해빠진 소리 하지 말 고. 알겠어, 진우야,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타협은 안 할게. 그럼 더 자. 끊을게. 그새 힘없고 자신 없어진 기희의 목소리, 전화는 끊겼다. 다시 잠들었다 깼을 때는 이미 출근하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입에서 술 냄새를 풍기며 회사에 나갈 수도 없었다. 진우는 회사에 전화해 최 반장을 찾았다. 어떻게 하죠? 몸살이 심하게 나서 어디, 많이 아파요? 어쩌나, 푹 쉬고 내일은 나와요. 내가 월차로 잘 처리해 놓을게요. 최 반장은 시원스레 대답했다. 그는 가능하면 관리자보다는 직원들 의 입장에서 일을 처리하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 파업이라도 일어나 면 분명히 관리자 쪽에 설 사람이었지만 마음만은 곧고 정 많은 좋은 청년이었다. 진우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 들 어갔다. 방에는 소주병만 네 병이 놓여있었다. 그것도 기희 혼자 세 병 은 마셨을 것이다. 진우는 오직 기희를 덜 마시게 하기 위해 억지로 들 이부었지만 중간에 다 토하곤 널부러져 버렸다. 기희의 힘없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제는 어제였다. 오늘은 벌써 진 우 앞에서 자신을 쏟아놓은 행동을 부끄러워하는 기희. 말로는 무어라 고 하든 진우는 그녀가 수치스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아만 턱없이 강해 자기를 잘 털어놓지도, 던지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불쌍한 비애, 진우는 잘 알 수 있었다. 기희가 가여웠다. 그 생각 외에는 아무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51
생각도 들지 않았다. 병욱에 대해서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냥 기희의 심정만이 고스 란히 전해져 올 뿐이었다. 병욱은 병욱대로 제 입장이 있을 터였다. 어 쩌면 병욱이 그렇게까지 둔감해진 건 기희의 탓도 컸으리라. 집안일이 나 절반씩 갈라서 하는 것을 지상 최대의 과제처럼 말하는 기계적 페미 니즘에 대한 기희의 경멸과 강박관념이 오히려 병욱에게 기희를 이해 할 기회를 빼앗아 갔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또렷한 이성적 비판은 그냥 머리속의 것이었다. 마음의 고통은 누를 수가 없었다. 병욱의 말에 격 분한 게 진우 자신인 것처럼, 밥상을 엎고 뛰쳐나온 게 바로 자신인 것 처럼. 점심때가 되어서야 겨우 여관을 빠져 나오는데, 여관 골목에 쏟아지 는 햇살에 간밤의 토사물들이 벌겋게 드러나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것은 역겨움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진우는 걸음을 멈추고 얼어붙은 그 토사물을 내려다보았다. 마음 깊 숙한 데서 측은함 같은 것이 올라왔다. 자기를 포함해서 모두의 삶이 하나같이 측은했다. 세상을 뒤집어엎는 꿈을 지녔든, 저 한 몸 호사하 려고 눈이 뒤집혀 있든 그 모두의 삶은 결국 저런 끝을 지니고 있다. 뜨 물 같은 액체에서 생겨나 결국은 그 비슷한 진물이 되어 사라질 인간이 라는 존재, 무엇이 다를까, 거기서 거기로 가는 동안의 과정이 다르다 고 해서. 그런데도 우리는 괴로워하고 번뇌하고 몸부림치며 구더기가 끓는 진물이 될 자신을 들볶고 있다. 진우는 눈길을 돌리고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문득 기희와 함께 이와 나미 문고에서 나온 베베르의 일어판 부인론 을 같이 읽어내던 기억 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들은 세상의 여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 25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들은 결코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믿었다. 세상이란 자신들이 가장 비난 한 것을 겪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하나씩 자신이 비난했던 존재를 이 해하고 용서해 가는 것, 어쩌면 삶이란 그것뿐인지도 몰랐다. 방으로 돌아와 보니 아직 퇴근 시간이 되지 않은 탓인지 빈 집처럼 조용했다. 아이들도 어디 놀러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종태 엄마도 시 장에 갔는지 방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진우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 다. 공장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결근을 했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그녀 는 출근을 했다.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처리야 월차휴가로 된 다지만 내용으로 보면 오늘은 첫 결근이었다. 이제 두통은 가셨지만 몸 이 영 개운치 않았다. 목욕이나 갔다 와서 푹 쉴까, 했지만 모처럼의 이 런 한적한 시간이 너무 좋아 그렇게 시간을 보내버리기가 아까웠다. 옷 을 갈아입고 창을 열었다. 오랜만에 걸레질도 구석구석 했다. 그러자 불현듯 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솟아올랐다. 하지만 무엇을 적을 수 있으랴. 사람 이름이든 날짜든 보안이 문제가 되는 일들을 전 혀 적을 수 없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감정이나 생각에 대한 것조차 지금의 그녀는 적을 수 없었다. 지금 진우는 윤진우라는 자신의 이름, 존재까지도 부정하고 있었으니까. 연탄불은 잘 타오르고 있었다. 정석이 말하지 않아도 갈아준 것이다. 그때 무언가 낯익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몸에 익은 경계심으로 진 우는 벽에 귀를 기울였다. 비가 새는 판자집에 새우잠을 잔대도 고운님 곁이라면 즐거웁지 않더-냐 오손도손 속삭이는 밤이 있는 한 한숨일랑 쉬지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53
설거지를 하는지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그 노래는 사노 라면 이란 노래의 2절이었다. 진우는 가슴이 철렁했다. 노래는 끝방의 그 쨍쨍한 목소리를 가진 여자가 부르는 게 분명했다. 그 노래는 구전 민요이긴 했지만 운동권에서 널리 애창되는 노래였지 사람들이 잘 아 는 노래가 아니었다. 어제 집회에서도 아이들이 모두 좋아했던 노래였 다. 가사 하나가 다 자기들의 현실이었으니 마음에 와 닿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리 아니고는 배우기 힘든 노래였다. 이미 진우는 한참 전부터 그 방 사람들이 아무래도 학생 같다고 의 심을 품고 있었다. 학생들이 꼼짝 않고 그렇게 이상한 구성원으로 갇 혀 있다면 그것은 수배자임이 분명했는데, 하는 짓이 하나에서 열까지 덜 떨어지고 철이 없었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로 화가 솟구 쳤다. 하지만 심증이 갈 뿐 정확한 계기를 못 잡고 있어 주의를 줄 수 도 없었는데, 이제 거의 분명하다고 보아야 했다. 그래도 저 노래는 구 전민요이니 우연한 경로로 배울 수도 있다. 함부로 주의를 주다 진우의 신분이 의심받으면 큰일이었다. 그러나 그 덜 떨어진 여자는 진우의 그런 생각을 눈치라도 챈 듯 보 다 더 확실한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왜 쏘았니 왜 찔렀니 트럭에 싣고 어딜 갔니, 망월동의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있네 세상에, 진우는 그만 대야를 쾅, 내리쳤다. 그러자 저쪽도 놀랐는지 소리가 툭, 끊겼다. 미친년이 따로 없지, 아니면 둔해빠졌던가. 이 집이 얼마나 소리가 잘 들리는지도 모른단 말인가. 지금 자신이 학교의 써클 룸에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저런 행동은 자살 행동이었다. 까딱하 면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몰살시키는 행동이었다. 25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진우는 너무도 화가 치밀어 손이 다 떨렸다. 이 골목 입구에 있는 집 이 통장집, 주민신고의 집이었다. 그리고 이 골목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아주 잘 통했다. 가뜩이나 전두환 정권은 지금 운동권에 대해 발악을 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이사 오기 직전에도 일제 조사가 있었다. 자 취하는 사람들도 하나하나 주민등록증을 검사했고, 서류를 작성했다. 통장은 진우와는 얼굴을 익힌 사이였는데도 주민등록증을 뜯어보는 그 의 눈길은 날카로웠다. 사람들의 신뢰를 받고, 직업이 확실해도 위험은 도사리고 있다. 까딱 수상하게 여겨지면 당장에 신고가 들어갔다. 그런 데 저 사람들은 도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걸까. 아냐, 어쩌면 아무것도 모 르는 평범한 젊은이들인지도 몰라. 어쩌다 행사 같은 데 쫓아가서 노래 만 몇 개 배워온 건 아닐까, 적어도 단련된 자기훈련을 거친 운동권 학 생들이, 더구나 위험한 신분이라면 절대 저럴 수가 없었다. 마침 걸레를 빨러 수돗가로 나가니, 바로 그 여자가 나와서 옷을 빨 고 있었다. 진우가 다가가 옆에 앉자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공손 하게 인사를 했다. 이 방 사람들이 오직 잘 대해주는 사람이라고는 정 석과 진우뿐이었다. 그 두 사람의 공통점은 공장 노동자, 그들의 말로 레이버, 미래의 사회를 만들 주역이었다. 그녀는 진우에게 아주 살갑게 굴었다. 발렌타인 공장에 다니세요? 어떻게 알았나 싶었지만 진우는 고개를 끄떡였다. 참, 얼마나 힘드세요? 야간에도 일을 하시죠? 살살 녹을 것같이 부드러운 말투였다. 한 주씩 교대로 해요. 생리휴가는 있나요?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55
그럼요. 진우는 피식 웃었다. 아마도 이들이 학생이라면 분명히 1학년이리라. 제대로 공부한 것도, 무엇을 겪을 새도 없이 그냥 밀려나온 그들은 관 념 속에만 있는 고통 받고 무지하지만 미래의 주역인 노동자에 대해 터 무니없이 신성한 경외감을 품고 있으리라. 마치 흠모하던 배우를 만난 청소년처럼 그녀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잘 알고 있었다. 저 기대는 그 렇게 환상적인 거라 또 믿을 수 없을 만큼 삽시에 무너진다는 것을. 이전에 야학을 할 때만 해도, 노동자가 이렇게 야비하고 비굴한 줄 몰랐다고 한 달도 안 돼 때려치우고 간 강학이 있었다. 진우는 문득 그 녀가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아까까지 그 철딱서니 없는 행동에 노여움 이 치밀었던 마음이 다 사라졌다. 좋은 세상이라면 저 나이에는 그저 청춘의 즐거움에 젖고, 배움에 젖으면 된다. 그런데 이 여자는 저 모양 이고, 진우의 공장 친구들은 초콜릿 속에 청춘을 묻고 있다. 하지만 그 렇게 생각해도 그 철부지 냄새는 무언가 녹슨 철에서 나는 쇳내나 썩은 생선에서 나는 비린내처럼 거슬렸다. 지극히 단순한 사고방식, 그녀의 앙칼지면서도 한없이 순진한 눈망울에 씌워져 있는 백내장 막 같은 관 념의 껍질을 당장에 터뜨려 주고 싶었다. 우둔하고 어리석은 것, 진우 는 자신을 달래기 위해 그 죄 없이 빛나는 눈에서 눈길을 떼었다. 걸레 를 다 빨았다. 진우는 다시 그녀에게 눈길을 돌리고 말했다. 이 집은 소리가 한방처럼 들려요. 신경 쓰셔야 될 거예요. 그녀의 얼굴이 하얘졌다. 진우는 그런 그녀를 남겨두고 방으로 들어 왔다. 아무것도 확실치 않으니 실제적인 충고 외엔 할 수 없었다. 다행 히 그들은 이제 연탄불 도둑질이라도 멈추었다. 25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방에 들어오니 피곤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시간 있을 때 다음 모임을 위해 준비를 해둬야 했다. 진우는 아까 사온 노동조합에 대한 책을 펴 들었다. 오늘 친구들을 몰고 간 새해맞이 안양 지역 노동자 잔치 는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 지역 노동 단체들에서 개최한 합법적인 공개 행사였던 만큼 주로 나온 이야기들은 노동자들의 권익 쟁취에 대한 것 이었다. 흥겨운 자리였던 탓일까. 아이들은 임금 인상이나 권익 투쟁보 다는 각 공장의 노조에서 나온 사물놀이 패나 촌극 공연, 노래 공연 등 에 더 관심을 보였다. 매일 공장과 자취방만을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청춘을 다 보내고 있는 그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우리도 저런 서 클이 있으면 회사 다니기가 훨씬 재미날 거야, 맞아, 노조가 있으면 저 런 것도 다 만들 수 있나 봐, 그런 얘기 끝에 진우가 다음 모임에서 노 동조합에 대해 조사해 오기로 했던 것이다. 저녁때가 되어 진우가 밥을 차려 먹으려고 부엌으로 내려서는데, 술 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어머, 니네들이! 경실이와 미선이였다. 어떠니, 좀 낫니? 누워 있지 왜 나왔어? 괜찮아. 근데 잔업 어떻게 뺐어? 방으로 그들을 이끌며 진우가 말했다. 최 반장한테 부탁하니까 우리 둘만 살짝 빼줬어. 나, 괜찮은데 니가 괜찮으면 빠질 애냐? 어디 봐,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얼굴색이 말이 아니다. 약은 먹었니?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57
경실이 진우의 머리를 짚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침엔 힘들었는데, 이젠 다 나았어. 정말 괜찮아. 그럼 어디 가서 뜨끈한 우동이라도 먹을래? 우리가 사줄게. 미선이 들릴 듯 말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잰 홍섭씨랑 잘 되고 있 나, 진우는 미선을 쳐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지만 묻지 않았다. 미선은 하도 수줍음이 많아서 그런 얘기를 차마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일할 때 가끔 그녀의 하얀 얼굴이 이유 없이 발갛게 물들 때가 있는 걸 보면 잘 진행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럴 때, 미선아, 하고 불러보면 영락없 이 그 애의 눈빛은 꿈이라도 꾼 애처럼 몽롱해져 있었다. 그래, 그러자. 안 그래도 국물이 먹고 싶었어. 진우가 일어서자 모두들 따라 일어섰다. 단단히 입어. 밖에 추워. 아픈 애가. 경실이 입으로 챙긴다면 미선은 마음 씀이었다. 슬며시 진우의 손을 잡는 미선의 손을 진우는 꼭 쥐어주었다. 골목에 들어서자 웬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진우가 바라 보니 박씨가 어떤 여자에게 매달려 애원을 하고 있었다. 여보, 제발 내 다시는 술 안 마신다니까. 일만 열심히 할 거라 구. 우리 호철이가 보고 싶어 미치겠어. 제발 박씨의 아내인 듯한 그 여자는 너무 작아서 얼핏 보면 아이처럼 보였 다. 그녀도 울고 있었다. 진우는 박씨가 무안할까봐 재빨리 외면한 채 친구들 손을 끌고 골목을 빠져 나갔다. 어둠 속이라 그는 진우를 못 알 아본 것 같았다. 평소에 그렇게도 명랑하고 껄렁껄렁해 보이던 박씨의 그런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헤어져 돌아올 때 골목의 어둠 속에 박씨는 없 25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었다. 어떻게 됐을까, 그 여자는 돌아왔을까. 집에 들어가 박씨의 방을 보았지만 그 방은 창이 없는 나무문으로 되어 있어서 불이 켜져 있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댓돌 위에 신발이 없는 걸 보니 결국 박씨는 아 내를 데려오는 데 실패한 모양이었다. 어디 가서 화해주라도 마시고 있 는 중이라면 좋을 텐데, 그러나 어쩐지 그럴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진우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얼른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보았다. 경 실이 아까 집에 가면서 살짝 집어넣은 편지였다. 우체통에 부치려다가 전에 눈 오던 날 밤에 니 생각이 나서 썼 어. 진우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즈음 진우는 그 친구들에게도, 자신은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는 얘기를 몇 번 하곤 했다. 정해진 것들에 대한 대답은 하지만 어쩐지 제 속을 털어놓지 않는 것 같은 진우에 대해 아 이들이 불평할 때면 너무 미안했던 것이다. 언젠가는 말해주게 될 거 야, 미안해,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고는 자기를 점점 더 사랑해주는 친 구들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진우는 편지를 뜯었다. 새로 시작한 새해를 축복하듯이 거리엔 하얀 눈이 펄펄 내리는구나. 빨리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왔으면 좋겠어. 영애야! 난 마음이 못됐나 봐. 난 남자를 이미 사귀었으면서도 영애, 니가 남 자를 사귀게 되면 막 질투할 것 같으니 걱정된다, 그치? 영애야! 내가 일하면서 생각한 게 뭔지 아니? 너하고 나 둘이서 조그마하고 아담하고 예쁜 아파트 하나 얻어서 같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59
이 살 걸 생각한단다. 이런 말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날 때려준다고 쫓 아다닐 거야. 너처럼 예쁘고 착한 여잘 탐내는 남자가 많으니까 말야. 여자인 나도 반했으니까 남자들은 반해도 홀딱 반할 거야. 그래서 난 너 좋아하는 우리 회사 남자들(좀 있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치만 영애야! 나보단 좋아하지 마, 알았지? 만약에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하면 이를 거야. 누구한테 이를 거냐구? 아 참, 그게 고민이구나. 그래도 말 안 들으면 난 울어버릴 거야. 이 만큼 난 널 좋아한단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야! 난 너한테 내 고민을 다 털어놓았는데, 넌 나에게 베일에 싸인 신비 의 친구 같다는 생각만 드는 건 웬일일까. 넌 나에게 아주 좋은 친구라 는 것 이외엔 사소한 것밖에 모르고 있으니, 어떻게 내가 너의 진정한 친구라 할 수 있겠니. 영애야! 난 너의 소중하고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단다. 난 너의 어떤 과거라 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단다. 네가 살인자라 할지라도 난 널 사랑하 고 좋아할 거야. 그러니 영애야, 너 혼자 괴로워하지 마. 괴롭고 슬픈 일은 서로 나누어 가지고 기쁜 일은 같이 기뻐해 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가 아니겠니? 너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란다. 우리 서로의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해. 영애야! 우리 서로 사랑하고 모든 일을 용서하며 격려해주는 그런 진정한 우 26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정을 나누며 살자. 그럼 언제나 건강 조심하고! 아프면 안 돼! 밝고 해맑은 웃음을 잃지 말고 예쁘게 예쁘게 살아가자. 너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경실이가 진우는 편지를 접었다. 네가 살인자라 할지라도 난 널 사랑하고 좋아 할 거야. 누군가 뒤에서 등이라도 친 것처럼 숨이 막혀왔다. 그러자 예 전에 경실이 한 말도 따라 떠올랐다. 난 널 보면 내가 중학교만 나온 게 안 부끄러워, 중학교만 나와도 너처럼 교양 있고 멋있을 수 있으니까. 자신이 하는 일이 너무도 아득하고 두렵게 여겨졌다. 그 눈부시게 따뜻 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그녀를 오히려 괴롭혔다. 자신이 그들에게 끔찍 하게 무서운 상처를 주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그녀를 휘감았다. 집안은 점점 소란해졌다. 진우는 일찍 자리를 깔고 누웠다. 몸도 힘 들었고, 마음도 힘들었다. 밤이 깊었을 때 누군가가 문을 마구 흔들면서 두드리는 바람에 진우 는 잠에서 깼다. 아가씨, 아가씨, 문 좀 열어 보드라고! 문 좀 열어 보드라고! 그것은 술에 곤드레가 된 박씨의 목소리였다. 깜짝 놀란 진우가 부엌 으로 나가 문은 열지 않은 채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저씨? 그라지 말고 문 좀 열어 보랑께! 난 아가씨가 좋아, 제발 문 좀 열 어 보드라고, 잉! 아저씨, 취하셨어요. 방에 들어가서 주무세요.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61
박씨의 아내는 그를 버리고 다시 떠난 모양이었다. 마음이 약해 보였 던 그 작은 여자, 그녀는 아마도 두고 간 이 불쌍한 남자가 궁금해 들르 기는 했지만 머무를 생각은 아니었나 보다. 아가씨, 제발 한 번만 문 좀 열어 보랑께, 제발! 난 아가씨가 좋단 말이여, 꺼억, 빌어먹을 시상, 나, 아가씰 안고 자고 싶당께. 하룻밤만, 적선하는 심치고 하룻밤만 딱, 꺼억! 딱 하룻밤만! 부탁이랑께, 아가씨 이! 박씨의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통곡으로 바뀌어 온 집으로 퍼져 나갔 다. 다른 방들의 문 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더니 종태 아빠의 살기 도는 목소리가 쨍하고 뒤를 이었다. 이 새끼가 미쳤나? 지 여편네도 간수 못한 게 넘볼 게 따로 있지, 야, 새꺄, 빨리 니 방에 처박히지 못해? 박씨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닫히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려왔다. 분명히 종태 아빠가 들어다 던져 넣었을 것이다. 닫힌 부엌문 안으로 종태 아빠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많이 놀랬겠네. 걱정 말고 얼른 자요. 곧이어 그의 부엌문이 드르륵,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부엌문 들이 닫히는 소리도 이어서 들려왔다. 그러자 다시 집안은 괴괴해졌다. 박씨는 그대로 잠이 들었는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문득 진우는 귀를 기울여 정석의 기척을 들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 방에서는 어떤 기척 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직 그는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계를 보 니 2시가 넘어 있었다. 어쩌나, 불을 갈아줘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자리에 드는데, 문 밖으로 낯익은 발자국 소리가 저벅저벅 들려왔 다. 주위가 조용하니까 골목 입구에서부터 연탄재 밟는 소리가 고스란 26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히 들려왔다. 그 발자국 소리처럼 그녀의 가슴이 갑자기 저벅거렸다. 정석씬가, 야근이 늦어졌나 보구나. 그 발자국 소리는 그녀의 방 앞에 서 잠시 멈춰졌다. 진우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 발자국 소리는 다시 이어 져서 정석의 방 앞으로 갔다. 부엌문에 뭐가 끼였는지, 덜커덕거리며 잘 열리지 않는 듯했으나 곧 수습이 되었다. 이윽고 주위는 또 다시 괴괴해졌다. 연탄 갈기가 귀찮았는데, 잘 됐 네, 진우는 누가 옆에 있다가 제 가슴의 동요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일 부러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쨌든 그녀의 가슴은 더 이상은 두 근거리지 않았다. 13. 우리들의 아름다운 변소 출근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정석은 얼른 회사 에 가서 화장실을 쓰려고 서둘러 골목으로 나섰다. 하지만 더 이상 참 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도로 돌아가 주인 방 앞에 걸린 열쇠 를 찾았다. 그러나 열쇠가 없었다. 사람이 들어가 있다는 말이었다. 자 기 앞의 배설물이 누구 것인지를 알지 않기 위해서라도 보통은 방에 들 어가 기다리는 게 예의였지만, 그는 너무 급해 변소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염치 불구하고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곧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은 바로 영애였다. 정석은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영애 역시 그를 보더니 얼굴이 새하얗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63
게 질린 채 자기 방으로 달려가 버렸다. 차마 그곳으로 들어갈 수가 없 었다. 하지만 그에게 갈등할 여유라곤 없었다. 그는 문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들이밀던 한 발을 그는 도로 뺐다. 정석은 이를 악물고 골목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이를 낳을 때도 이렇 게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만 같았다. 그는 손톱으로 다른 손을 마구 꾹 꾹 눌러댔다. 손등 위에 손톱자국이 여기저기 찍혔다. 다른 데를 아프 게 해서라도 그 고통을 잊고 싶었다. 골목 옆 슈퍼는 문을 열지 않았다. 거의 숨이 막혔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저 밑으로 다방이 하나 보 였지만 역시 열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입에서 하느님, 소리가 절로 나 왔다. 손에서 진땀이 흘렀다. 그래도 차마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다급한 정석은 골목길 옆에 있는 대문을 두드렸다. 파란 양철대문의 집, 전혀 모르는 집이었다. 마당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늙수그레한 아주머니가 다행히 문부터 연 다음에 물었다. 누구시오? 저, 아침부터 죄송하지만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서 죄송 하지만 화장실을 좀 정석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던 탓인지, 아주머니는 마당 안에 있 는 변소를 가리켰다. 그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정석이 변소에서 나와 머리를 긁적이자 마당에 앉아 김치를 절이고 있던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수돗가를 비워주었다. 와서 손 씻으시오. 총각이 엔간히도 급했나 보요. 정석은 손을 씻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26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아주머니는 고무장갑 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웃더니 말했다. 아, 사람 탈을 쓰고 그만 일을 못 허겄소. 나가던 길인가 본데 후딱 가보시요. 예. 그럼 안녕히 계세요. 정석은 멋쩍고 부끄러워 얼른 양철대문을 닫고 나섰다. 회사를 향해 걸어가던 정석은 잠시 선 채로 망설이다 다시 골목길을 거슬러 집으로 돌아갔다. 영애의 방에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직 출근하지 않은 모양 이었다. 그는 결심한 듯 뒤란으로 돌아들었다. 영애 방의 창호지 창문 은 잘 닫혀 있었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놀란 영애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창문을 열려고 일어선 그녀의 그림 자가 창호지 문에 어른거렸다. 열지 말아요! 오히려 정석이 놀라 소리쳤다. 그러고는 얼굴이 안 보이는 그 상태에 서 재빨리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요, 거기 안 들어갔어요. 다른 변소에 갔다 왔어요. 정석은 영애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얼른 자리를 떴다. 다행히도 오늘 정석은 자재과에서 일하게 되었다. 자재과 창고는 별 도 건물이라 다른 과의 직원들과 만날 일이 없었다. 연말이라 자재정리 점검 때문에 남자직원들이 총동원되었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쯤은 영 애와 부딪히지 않는 쪽이 좋았다. 아침의 일 때문에 서로 바라보기가 쑥스러울 것이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65
그러나 잔업을 마치고 정석이 늘 그랬듯이 서쪽 현관을 피해 동쪽 현 관으로 돌아서 수위실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선 뜻밖에도 영애와 경실 이 막 카드를 찍고 나가는 중이었다. 여공들은 이미 다 빠져나가고 없 었다. 두 사람만 좀 늦게 나온 모양이었다. 정석씨도 이제 나오세요? 경실이 정석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그날의 파티 이후로 거기 모였 던 사람들과는 제법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영애는 말을 못하 고 눈길을 피했다. 목에 두른 빨간 목도리처럼 불빛에도 얼굴이 발그레 했다. 잘됐네. 둘이 같이 가면 좋겠다. 나도 같이 회사 다니는 남자가 한 집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서 경실은 빨리 카드 찍고 나오라고 정석을 독촉했다. 그럼 잘 가! 정석씨도 잘 가요! 경실이 반대 방향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두 사람만 남았다. 그들은 말없이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곧 영애가 침묵을 깼다. 아침에 힘드셨죠? 너무도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그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어조의 말이 뜻하는 내용에 생각이 미치자 정석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걸 음까지 멈추고, 푸하하하, 큰소리로 웃었다. 그가 웃자 영애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치자 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두 사람 사 이에 있던 쑥스러움은 깨끗이 사라졌다. 후후 아침엔 정말 고마웠어요. 26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영애가 말했다. 똥 때문에요? 정석이 짓궂게 되물었다. 예! 똥 때문에요! 영애도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러자 정석은 아침의 그 고통스럽던 과정을 무용담처럼 신나게 말해 주었다. 정말 고마워요 사실 난 창피해서 죽고 싶었거든요. 영애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어딘가 고상해 보이고,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그녀에게 그런 상황은 정말 못 견딜 노릇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때 나온 게 영애씨가 아니고 인주네나 포항댁이었다면 코를 박고 엊저녁에 뭘 먹었나 요리조리 관찰도 했을 겁니다. 아유, 정석씨! 영애는 정석의 짓궂음에 나무라듯 말하면서도 다른 때와 전혀 달라진 그의 모습에 놀라는 눈치였다. 정석 스스로도 자신의 그런 모습이 신기 했다. 내가 왜 이러지, 하지만 기분이 정말 좋았다. 이것도 다 그놈의 똥 때문인가, 하하, 마음속에서도 웃음이 나왔다. 그는 이제 영애가 허 물없게 느껴졌다. 목덜미에 칼날처럼 달려와 박히는 찬바람조차 상쾌 하게 여겨졌다. 교도소 앞의 사거리까지 왔을 때 정석은 영애를 보고 말했다. 술 한 잔 살래요? 은혜를 갚는 의미에서. 영애는 시원스레 대답했다. 아, 좋아요! 나, 술 잘 마시는데 그래요? 그럼 소주도 괜찮아요?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67
그럼요. 한 잔을 마셔도 독한 게 좋죠! 큰소리치는 거 보니까 불안하지만 뭐, 같은 집 사니까 따로 데려다 줄 것도 없고 정석은 앞장서서 군포시장 쪽으로 길을 건넜다. 아는 데가 있나 봐요? 예. 잘 아는 누님이 있어요. 뜻밖이네요. 난 세상천지 외톨인 줄 알았는데 외톨이는요. 이렇게 영애씨 같이 예쁜 술친구도 있는데 정석은 자기 입에서 그런 말들이 술술 나오는 게 신기했다. 그런데 제가 말을 뱉고도 그렇게 말하고 나니 가슴속이 훈훈해졌다. 정석은 영애를 데리고 황해도 집으로 갔다. 간판을 보고 그녀가 물었 다. 누님이 황해도분? 아뇨. 먼저 사람이 붙여 논 간판이래요. 황해도는 우리 부모님 고 향이에요. 어머, 장길산처럼? 누구요? 아, 아니에요. 황해도 분이라니 멋지네요. 두 사람이 문을 밀고 들어서자 고구마줄기를 볶고 있던 박순애가 돌 아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박순애는 정석 에게서 영애에게로 눈길을 옮겨갔지만 그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 었다. 왔니? 그 말 한 마디만 던지고 박순애는 다시 볶던 프라이팬으로 고개를 돌 26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리는데, 정석이 그 눈길을 낚아채듯 재빨리 말했다. 같은 집에 세든 친구예요. 회사도 같고 영애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제야 박순애는 영애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하지만 그 표정이나 말투에는 어떤 호기심도 깃들지 않 았다. 아, 그래요? 그리고 곧 박순애는 돌아서 버렸다. 정석은 영애를 데리고 구석자리 로 가서 앉았다. 원래 저러니까 마음 상해하지 말아요. 저래도 속정은 깊어요. 괜찮아요. 그러나 영애는 눈치가 보이는 듯 편치 않아 하는 표정이었다. 전에도 정석은 한두 번, 여자를 데리고 온 적이 있었다. 예전의 여자들이 몇 번 정석을 찾아왔을 때였다. 그때는 일부러 그러는 마음도 있었다. 자신이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사실을 박순애가 은희에게 알려주기를 바랐다. 그렇게라도 은희를 자극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박순애는 도 무지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은희를 그렇게 친동생처럼 아끼 고 사랑하면서도, 그리고 정석과 은희가 애인 사이란 것을 알면서도 마 치 그가 데리고 오는 여자들이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양 박순애의 시선 은 여자들을 무심히 통과했다. 어쨌든 예전의 여자들이 가끔씩 찾아올 때면 정석은 갈 곳이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제 방에 여자를 데려간 적은 없었다. 자기 방에 가자고 졸라본 사람도 은희가 유일했다. 그러나 은희한테는 그가 거부당했다. 어쨌든 그랬으니 갈 곳은 여자의 방이든가, 여인숙뿐이었다. 그것 말 고는 함께 영화를 보거나 술집에 가는 것이 유일한 오락이었다. 하지만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69
그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집중해 보려 하여도 몰입이 되지 않았다. 원래 얘기 자체가 지어내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가짜인 데다, 배우들조차 직접 나오지 않고 사진으로 찍은 걸 빨리 돌려, 실제로 움 직이는 것처럼 속임수를 쓰는 그런 수법이 그에게는 도무지 마음에 들 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스크린에 비친 내용 속으로 빠져들어 제 일 처럼 여기고 울고 웃고 하는데도, 그에게는 그 순간 영사실에서 필름을 돌려서 환등기로 비추면 벽면 위에 사진이 재빨리 돌아가는 그 지극히 실제적인 장면이 앞서 떠올랐다. 중국 무술영화는 아예 황당하니까 재 밌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차라리 대한뉴스가 좋았다. 어떤 때는 가볍 게 스쳐 가는 뉴스의 기사 하나에도 눈물이 나올 때가 있었다. 그건 책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홍섭이 표현한 대로 다른 남자들보다 는 책을 좋아하는 편이긴 했지만, 텔레비전이 없으니까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것저것 집어서 읽는 것에 불과했다. 아무 생각 없이 있으면 자 꾸 잡념이 들었고, 그의 잡념이라는 것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지점은 언 제나 누이였기 때문에 거기서 도망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도망가 기 위해 그가 골라잡는 책은 아예 황당한 게 분명한 무협지나 만화든 가 그렇지 않으면 수기나 전기나 실용서였다. 정석이 가장 싫어하는 책 은 소설책이었다. 그것은 영화를 싫어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는 남이 지어낸 얘기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언젠가 사귀었던 어떤 여자가 너무너무 재밌다며 빌려준 김홍신의 인간시장 도 그는 열 장 을 넘기지 못했다. 거기 나오는 장총찬인가 하는 주인공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해결사였지만, 무협지의 검객들 처럼 하늘 위로 날아다니고, 둔갑술을 부리는 능력은 갖고 있지는 않았 다. 그런 소설을 읽느니 그는 차라리 2차 대전사 나 건강 요리책 27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을 읽었다. 취향이 그 모양이니 갈 데가 없었다. 간혹 여자를 위해 영화관에도 갔지만 그는 영화를 보면서도 혼자 내내 딴 생각에만 잠겨 있었고, 어 떤 때는 아예 소주병을 꿰차고 들어가 옆의 여자가 영화에 빠져 울고 웃을 동안 자기는 혼자 병나발 불어가며 소주를 마시곤 하였다. 그러니 같이 잠잘 때를 빼고 그가 여자와 같이 즐길 수 있는 건 술밖에 없었다. 또한 정석은 이미 지난 사랑과 다시 몸을 섞는 피곤한 일은 가능한 피 했다. 그러니 갈 곳은 술집뿐이었고, 또 술집은 황해도집밖에 아는 데 가 없으니 늘 이리로 데리고 오곤 했다. 그러나 여자가 아무리 바뀌어도 박순애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녀에게 정석의 여자란 건 서은희와 서은희가 아닌 여자들로만 나뉘어 졌다. 김영애도 서은희가 아닌 여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같은 집, 같은 회사라는 말 때문이었는가. 아까 김영애를 바라보는 박순애의 눈빛 속 에는 다른 때와는 다른 유심함이 들어 있었다. 여기 안주는 뭐가 맛있어요? 진우가 물었다. 다 괜찮아요. 누님이 손맛이 있어서 오늘 같은 날은 뭘 먹나? 닭똥집을 먹을까요, 하하? 정석이 농담을 던지자 영애가 손을 내저었다. 똥은 이제 충분해요. 하하, 그럼 뭘 먹나? 내가 가서 오늘 뭐가 제일 맛있게 되는지 알 아서 시켜오죠. 가리는 거 있어요? 똥자만 안 들어가는 걸로요! 좋아요!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71
정석은 일어나 주방 앞으로 갔다. 여자와 함께 올 때면 그는 자기가 직접 시중을 들었다. 혼자일 땐 그런 생각이 안 드는데, 서은희가 아닌 여자와 같이 와서 박순애에게 시중을 들게 하기는 왜 그런지 미안했다. 그가 다가가자 박순애는 벌써 한 쟁반을 챙기고 있었다. 오징어가 하도 좋아 보여서 무쳤어. 맨날 하는 게 아니니까 먹어 봐. 술은 소주하고? 박순애가 턱 끝으로 영애 쪽을 가리켰다. 무슨 술을 더 놓아야 하는 지 묻는 것이었다. 소주면 돼요. 박순애가 쟁반 위에 오징어무침과 밑반찬, 수저와 물, 소주를 챙겨 올리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결혼한 여자야? 예? 아, 아니예요. 정석이 깜짝 놀라 대답하며 무심결에 영애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벽에 붙어있는 메뉴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점퍼를 벗고, 회색과 빨간 색이 어우러진 털 스웨터를 입고 있는 화장기 없이 해사한 그녀의 모습 은 여느 때처럼 앳되게 보였다. 그의 눈에는 오히려 스무 살 밖에 안 되 어 보였지만, 아무리 많이 본다 해도 스물 둘을 넘게 보이지는 않았다. 정석은 다시 순애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보여요? 나이도 어린데 나인 안 많아 보여. 하지만 어딘가 결혼한 여자 같애. 모르지. 내가 잘못 봤을 수도 누님도 참 아무리 내가 유부녀를 데리고 오겠어요? 박순애는 눈길을 들어 정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물었다. 27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사귀는 사이야? 아유, 누님도 나야 은희 말고 있나요! 그냥 집에 같이 오다 술 생각나서 들린 거예요. 정석은 평소 때의 그답지 않게 영애와의 관계를 강력하게 부정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평소 때와 다른 걸 말한다면, 박순애야말로 그랬 다. 한 번도 정석이 데려오는 여자에 대해 가타부타 관심도, 평가도 없 었던 그녀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소주잔 두 개를 쟁반 위에 올려놓으 면서 마침표를 찍듯 단호하게 아퀴를 지었다. 절대로 마음 주지 마. 내가 언제 이런 말 하든? 알았지? 평소와 다른 박순애의 태도에,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우려 섞인 눈빛 앞에 정석은 당황했지만, 쟁반을 받아들며 아무렇게나 해석될 수 있는 웃음으로 그 말에 대꾸했다. 누님이 왜 저러지, 혹시 은희 마음이 요즘 흔들리고 있나. 어머, 맛있겠다! 군침이 넘어가네요. 쟁반 채로 식탁 위에 올려놓자 영애는 탄성을 질렀다. 정석이 먼저 술을 따라주자 그녀도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우리의 변소를 위해서! 술잔을 부딪히면서 영애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정석은 웃었지만 아 까 같은 유쾌한 감정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난 비밀이 많아요, 언젠 가 그녀가 했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그때 제 머릿속을 섬광같이 스쳐 지나간, 한 번 결혼한 여자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누님이 그것을 알아 본 것일까. 소주 두 병을 둘이 나눠 마시고야 그들은 일어섰다. 그는 얼굴 근육 이 조금씩 당기기 시작하고, 그래서 주위의 사물이 갑자기 낯설어지는,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73
그러나 아직은 제 취기를 제가 조절할 수 있는 이 상태의 취기를 가장 사랑했다.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갈게요, 누님. 안녕히 계세요. 정석과 영애의 인사에, 박순애는 여전히 그 무표정하고 지친 눈빛으 로 그들을 배웅했다. 다른 날과 달리 그녀는 문 앞까지 나와 그들이 시 장을 벗어나는 걸 바라보고 서있었다. 쓸쓸하고 힘들어 보여요, 저 분. 그렇게 서있는 순애를 돌아보며 영애가 말했다. 그래요. 남편이 바로 우리 집 앞에 있는 안양교도소에 들어있지 요. 네? 왜요? 영애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폭력사건에 물렸나 봐요, 나도 더는 몰라요, 은희하곤 친하지 만 정석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취했구나, 내가. 은희가 누군데요? 영애가 무심하게 물었다. 아, 은희요? 몰랐어요? 우리 애인이에요. 우리 회사에 다니는 데 자기도 모르게 정석은 호기를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쏟아져 나 온 말은 거둘 수 없었다. 은희의 무게가 오히려 그에게 반발을 불러일 으키고 있었다. 어머, 그랬어요? 몰랐어요. 애인도 있고 부자네요. 정석씬. 27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영애가 웃으며 말했다. 영애씬 심각한 부자죠. 심각한 사이인 애인도 있고. 호호, 그래요. 정말 심각한 부자예요. 이렇게 좋은 술친구도 있으 니. 그 말에 정석은 자기도 모르게 영애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렇게 좋 은 술친구, 그 말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그 말이 그 순간 너무도 정다웠다. 그녀는 놀란 것 같았으나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나오면서 꼈는지 그 손에는 털장갑이 끼어져 있었다. 정석은 그녀의 손에서 장갑 을 벗겼다. 그러자 비로소 작고 부드러운 손이 기분 좋게 그의 손 안에 잡혀왔다. 그녀는 가만히 있었지만 체온은 느껴지지 않는 손이었다. 그 래도 그는 오기처럼 그 손을 더 힘주어 잡고 걸어 나갔다. 은희씨 얘기 해봐요. 영애가 말했다. 은희 그년이요? 아주 못된 년이에요. 정석은 이미 꼬부라진 혀로 말했다. 어떻게 못된 년인데요? 영애의 목소리 역시 평소 때의 단아함은 풀어져 있었다. 어떻게 못된 년인가 하면 쥑일 년이지요. 왜요? 쥑일 년이 나를 사랑하지 않거든요. 저런! 영애가 진지한 어조로 딱하다는 듯이 말하자 정석은 속으로 웃음이 났다. 취기가 올라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있는데 이 순진한 여자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재미가 났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75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어요. 아주 마음속에다 칼로 새겨 놨더라 고요. 장난처럼 말했지만 정석은 말하고 보니 자신의 가장 큰 번민은 그것 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은희는 자기가 버린 그 남자에 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몸을 섞고 마음을 나누어도 은희 는 정석에게 조금도 집착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여태껏 그렇 게 자신에게 집착하는 여자들에게나 시달려오고, 자신은 결코 그 중 누 구에게도 집착하지 않고 살아온 그는, 그렇게도 마음 닫고 무심하게 살 아온 그는, 은희를 만나 처음으로 무섭게 빨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영애가 취중에도 놀란 눈으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런 그녀를 흘낏 바라보고는 잡은 손을 낚아채듯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뭐, 괜찮습니다. 영애씨처럼 예쁜 술친구가 있으니까, 꺼 억 영애는 말이 없었다. 그들은 말없이 시장을 빠져 나와 걸어 올라갔 다. 한참 걸어 올라가니 안양 교도소가 나왔다. 이 밤에 희미한 불빛 아 래 키가 껑충한 나무들은 감시자처럼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어느새 정석과 진우는 그들의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골목은 발 딛을 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깜깜했다. 이미 밤이 깊어 방들마다 불이 꺼진 탓이었다. 발밑에서 나는 연탄재 밟히는 바스락 소리만이 그 골목이 자기들의 골목이란 걸 말해주고 있었다. 정석이 어둠 속에서 불쑥 말했다. 씨팔, 당신이 뭘 알아. 바보 같은 여자가, 히히. 정석은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의 마음속 버팀목 같은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렇다. 은희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그것을 무너뜨 27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리고 있었다. 이 불안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모호한 불안감, 그것 때 문에 그는 영애를 찾았고, 지금 영애를 만나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 는 이 바보 같은 여자. 그는 다시금 그 검은 강이 자기를 둘러싸는 걸 느꼈다. 등골이 시려 오고 온몸으로 찬 기운이 퍼져나갔다. 은희를 사랑한다는 것은, 살아 있더라도 그 여자 같은 눈빛을 갖는다는 의미였다. 그나마 이미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고만 있던 그에게. 이제 겨우, 운명이 자신에 대해 무관심해졌나, 눈치 보며, 삶 쪽의 색깔, 그 연하고 푸른 새순 같은 것, 요 밑으로 넣어보는 발바닥에 닿는 온기처럼 훈훈한 것에 저도 모르게 기대를 품었나보다, 바보같이. 당황하고 있는 영애의 떨림이 손끝에 느껴졌다. 겁이 난 걸까. 영애 는 살며시 자기의 손을 정석의 손에서 빼낸다. 그러자 그는 그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아아! 영애가 낮은 비명을 질렀지만 정석은 힘을 풀지 않았다. 그는 그 손 을 잡아 올려 손바닥에 자신의 입술을 댔다. 은희에게 했듯이. 영애의 손이 떨렸다. 그는 그녀를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바람찬 길을 걸어와 마르고 갈라진 그녀의 입술은 단호 하게 닫혀 있었다. 그녀는 결코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의 품에 저항 없이 안겨 있었다. 그 몸은 겁에 질린 듯 떨고 있었다. 그러 나 그녀의 몸은 뜨겁고, 그녀의 심장 박동은 강하고, 그녀의 온몸에서 는 그의 몸을 받아들이려는 무서운 전류가 흘러나와 그에게로 스며들 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입술을 열지 않았다. 그는 그 마르고 갈 라진 입술 위에 역시 마르고 갈라진 자신의 입술을 마구 비벼댈 뿐이었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77
다. 결국 힘없이 그가 떨어져 나갔다. 제기랄, 먼저 들어가요. 정석이 말했다. 깜깜한 어둠 속, 달도 없는 밤, 멀리서 흘러오는 불빛으로 겨우 어슴 푸레한 윤곽만이 보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어둠 속이 고마웠 다. 영애의 표정을 보기 싫었다. 뺨이라도 갈길 것만 같았다. 그는 빈말 로도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그대로 서있었다. 그 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가만히 서있던 그녀는 잠시 후 어둠 속으 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집안으로 들어갔다고 생각될 쯤에야 그는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냈다. 라이터를 켜자 회색 담벼락 이 눈앞에 들어왔다. 그는 다가가 그곳을 어루만졌다. 어쩐지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는 팔을 벌려 온몸을 벽에 밀착시켰다. 은희 이년아, 미친년, 죽일 년, 은희야 그 벽이 은희인 것처럼 그는 그녀를 불렀다. 그녀를 마구 부르고, 마 구 그리워하고 싶었다. 그는 그 차가운 벽에다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 차가운 벽 역시 입술을 열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담배가 떨어졌다. 며칠이 흘러갔다. 정석은 내내 자재과 근무를 자원했다. 생산과 정석 의 자리는 자재과에서 일하던 박성호가 대신 근무했다. 여자직원이라 곤 눈을 씻고 찾아도 없던 곳에서 근무하던 그는 수많은 여자들에게 둘 러싸이자 흥분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미스 리, 나하고 딱 6개월만 살아보지 않겠어? 최아줌마, 아저씨 버리고 나한테 시집오면 어때요? 미스 김, 저녁에 시간 있어? 27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박성호는 박스를 나르면서도, 지나치는 여자마다 이 여자 저 여자 집 적거리며 농담을 해댔다. 하도 실없는 소리만 해대니 대개 아가씨들은 상대도 않고, 콧방귀만 뀌었지만 때로 그의 능글맞은 농담 때문에 여기 저기서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같은 작업지시라도 그는 혀 를 굴리면서 야한 말로만 골라서 했다. 자, 애인이 젖가슴 만져주듯이 부드럽게, 부드럽게 다뤄요. 고효순이 듣다못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따, 우리 영감은 마구잽이로 주물러대는데 그러란 말인교? 그만 모두들 일손을 놓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야간 근무를 끝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어둠 속에 눈이 하얗게 내리고 있었다. 와, 너무 이쁘다! 눈 내리는지도 모르고 일만 했네. 아가씨들은 좋겠다. 눈도 내리고 하니 데이트 약속 해야지. 참, 졸려 죽겠는데, 눈에다 성냥개비 끼우고 데이트해요? 애인이 베개로 보이겠다, 호호. 작업장에서 나오자마자 모두들 한 마디씩 했다. 온몸이 무너질 듯 노 곤해도, 하얗게 세상을 덮어가는 눈은 사람들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눈이 내리는구나, 사람들과 헤어져 내리는 눈을 맞으며 진우는 그 생각 만을 했다. 그 날 이후 그녀는 정석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마도 눈 은 밤새 내렸던 모양이었다. 아직도 한밤중처럼 깜깜한 길이 눈빛으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눈길을 걸어 집안에 들어서는데 뜻밖에도 진우는 정석과 부딪혔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79
그러나 그곳에는 그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모두들 통로에 나와 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얼핏 눈길이 끝방의 못 보던 자물쇠에 닿았다. 큼지막한 낯선 자물통이 그 문에 채워져 있었다. 등골로 오싹한 기운이 흘렀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진우가 물었다. 글쎄 말야, 아유, 무서워, 끝엣방 사람들을 형사들이 와서 다 잡아 갔어. 인주네가 입술이 새파래져서 말했다. 네? 진우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불안했던 일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데모하고 도망친 대학생들이래, 현상금도 딸린 수배자라지 뭐 야? 종태 엄마가 덧붙인 말이었다. 하는 짓은 싸가지가 하나도 없어 얄밉더만 그렇게 잡혀가니까 불 쌍해 죽겠어. 인주네가 다시 말했다. 그래도 많이 배운 티가 나더라구. 우리 같으면 형사가 수갑 채워 데려가는데 어떻게 그럴 생각을 감히 하겠어? 진우는 종태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사람은 난사람들이야. 남자나 여자나, 그렇게 잡혀가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오히려 우리한테 죄송하다고 인사까지 챙기고 가는 걸 봐, 그러면서 또 살인마 전두환을 어쩌라든가, 그렇게 외치기까지 하더라구, 그 여자애들까지. 28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몰라, 난 그냥 무서워서 아직도 몸이 떨려. 아유, 무서워, 우리 집 에서 그런 일이 있다니, 그애들이 형사한테 두드려 맞는데, 꼭 내가 맞 는 것 같앴어. 어린 인주가 걱정이 되는지, 바르르 떠는 제 엄마의 손을 찾아 쥐었 다. 방문턱에 앉아 그때까지 팔짱만 끼고 있던 종태 아빠가 갑자기 끼 어들었다. 새끼들이 배아지가 불러서 그래, 부모 잘 만나 호강하면서 데모는 왜 해? 공사장 가서 하루만 벽돌 날라보라고 그래, 허리도 못 펼 새끼 들이! 아휴, 자꾸 새끼, 새끼 하지 말아요. 당신 새끼야? 데모한다고 상 주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잡혀가면서까지 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아무리 우리같이 제 앞가림만 하고 살겠어? 종태 엄마가 은근히 비난 섞인 말을 하자 종태 아빠의 치뜬 눈에 불 꽃이 일었다. 여편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대? 그렇게 쫑알거리다간 골목길에서 칼 맞아도 시체도 못 찾아. 세상 무서운 거 모르고, 숭어가 뛰니까 망둥 이도 뛴다고 죄다 인주네가 이번에는 울상을 짓고 소리쳤다. 아유, 그만해요, 그만해! 안 그래도 무서워 죽겠는데, 그렇게 무서 운 얘기만 해요? 뒷전에 서있던 정석이 말없이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래, 인주네도 일 나갈 준비해야지, 얼른. 몰라, 무서워서 어떻게 일을 해? 인주네가 계속 떨고 있자 종태 엄마가 소리를 꽥 질렀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81
아니, 자네 서방이 잡혀갔어? 자네 새끼가 잡혀갔어? 팔자 좋은 년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빨리 회사나 가! 알았어요, 괜히 신경질이야. 진우도 방으로 들어갔다. 가뜩이나 힘이 다 빠진 것 같던 몸이 빈 자 루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이 방도 위험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에게 더 위험한 것은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자신의 마음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이 방을 뜰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루라도 빠를수록 좋은 일이었 다. 14. 이상한 아침 정석은 눈길을 걸어 출근했다. 이상한 아침이었다. 새벽녘 형사들이 들이닥쳐 잠에서 깼을 때는 강도라도 든 줄 알고 뛰쳐나갔다. 사람들이 방마다 쏟아져 나왔다. 새벽 다섯 시 쯤 됐으리라. 그때는 진우만 빼고 온 방 사람들이 다 있었다. 그때 이미 끝 방 학생-이제 학생인 줄 알았 으니까-들은 수갑이 채워져 문 앞 시멘트 바닥에 무릎이 꿇린 채 발길 질을 당하고 있었다. 남학생의 코에서 코피가 나자 박씨가 얼른 달려가 피를 닦고 휴지로 막아주었다. 형사는 세 명이나 되었고, 형사 옆에는 골목 입구에 사는 통장이 서있었다. 그들은 몹시 피곤해 보이는 몰골이 었고, 눈빛은 종태 아빠 같은 데가 있었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 한 얼굴들이었다. 학생들에게는 그렇게 잔혹하게 대하던 그들이, 그 집 식구들에게는 28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공손하게 말했다. 새벽에 곤히 주무시는데,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놈들이 워낙 악질 이라 순순히 잡히질 않아서요. 이렇게 순진한 척하고 있어도 이것들 다 빨갱입니다. 현상금도 다 붙어있어요. 이런 놈들, 표가 안 나요. 언제든 수상한 사람이 있으면 지체 없이 신고하셔야 합니다. 아주 무서운 놈들 입니다. 그때 코피를 흘리던 남학생이 소리를 크게 질렀다. 광주학살 원흉 살인마 전두환을 처단하라! 처단하라! 여학생들이 곧 처단하라는 뒷말을 따라 하려했지만, 그들은 다시 발 길질에 채이고 말았다. 그리고 끌려 나가던 그들의 모습, 그들은 조금 도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그 싸가지 없고, 연탄불이나 훔쳐가던 사람 들 같지 않아 보였다. 룸펜프롤레타리아 다시금 음악 같은 이국의 그 아름다운 말이 떠올랐다. 이상한 아침이었다.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텔레비전도 잘 못 보는 정석으로선 말로만 들었지 처음 보는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더군 다나 여학생들까지. 그들이 주장하는 게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는 일 단 그들이 놀랍고 신기했다. 광주학살 원흉 살인마 전두환, 그들은 대 통령을 그렇게 불렀다. 광주학살? 분명히 광주 사태를 말하는 것이었 다. 광주 사태는 폭도들이 일으킨 내란이었다. 간첩이 끼어들었다고 했 던가, 서울역 앞에서 독침을 날렸다던가, 그냥 뒀으면 북한이 내려와 다시 6.25 같은 전쟁이 났을 것이다. 그게 그가 생각하는 광주 사태의 전모였다. 전두환 대통령이나 이순자 여사의 인상이 좋지는 않았다. 그들을 좋 아하는 사람은 주변에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상관없는 일이라 별 관심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83
을 두지 않았다. 누가 대통령이든 그것은 그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광 주 사태란 것도 그냥 그런 게 있었나 할 뿐이었다. 그때 그는 공고 3학 년이었다. 안양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광주가 집인 아이가 딱 하 나 있었는데, 그 애는 마침 폐렴에 걸려서 집에 돌아가 치료를 받느라 고 장기 결석 중이었다. 그런데 그 애는 다시 학교로 돌아오지 못했다. 나중에 교사의 말은, 그 애 어머니가 불행하게도 그 사태 때 다리를 못 쓰게 되어서 그 친구가 어머니를 모시고 돈벌이를 해야 된다는 것이었 다. 정석은 그 어머니의 다리를 못 쓰게 한 것은 당연히 폭도들이라고 만 생각했다. 선생은 아무 말도 안 했지만, 학생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 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두환더러 살인마고, 광주의 원흉이라고? 그 렇게 생각한 탓일까? 떠올려 보면 그 사람의 얼굴은 그런 이름에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설마 직접 총칼을 들고 광주에 가서 사람을 쏘거나 찌르지는 않았겠지만. 하얀 눈을 맞으면서 그 학생들은 형사들의 손에 끌려갔다. 그들은 어 떻게 될까? 어떻게 해서 그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알게 됐 을까? 대학에서 그런 것을 가르칠 리는 없는데, 어디서 그런 것들을 알 게 됐을까? 그리고 알았다고 한들 어떻게 겁내지 않고 그런 무서운 일 들을 할 생각을 하게 됐을까?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자기 같은 인생도 아닌데, 그들은 자신감과 희망으로 빛나는 인생일 텐데. 모르겠다, 사람은 다 제 눈앞의 운명과 싸우거나, 아니면 마음대로 하라고 내뻗든가 거기서 도망치려고 할 뿐이다, 그 길 외에 길은 없다. 눈이 많이 오겠구나, 온몸 가득 눈을 덮어쓰고 눈사람처럼 들어오던 영 애, 나와 부딪힌 그 검고 깊은 눈길, 왜 그 여자의 눈은 그렇게 깊고 깊 을까. 비밀이 많아서인가, 나를 거부한,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강한 거 28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부가 오히려 가장 깊이 나를 받아들인 것만 같던 묘한 기분, 그래서 놓 아줄 수 있었는지도 모르는. 눈은 그칠 생각을 않고 내리고 있었다. 그 눈 속에서 영애의 검고 깊 은 눈이 그를 계속 쫓아왔다. 이상한 아침이었다. 그 이상한 아침은 회사에 도착해서도 이어졌다. 카드를 찍으러 수위 실에 들어가자 난로를 쬐고 있던 경비원 최씨가 언제나 그랬듯이 음침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젊은 사람인데도 김씨와는 정반대로 음울하 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 모두들 좋아하지 않았다. 미스 오가 좀 올라오랍디다. 미스 오? 오늘 아침은 계속 이상하군. 무슨 일이래요? 내가 어떻게 압니까? 월급 계산 때문에 그런가 보죠. 최씨는 싸움이라도 걸듯이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정석은 천천히 2층 사무실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미스 오는 이 회사의 경리직원이었 다. 그리고 그와 1년 전쯤 우연히 친해져 몇 달 사귄 적이 있었다. 그 여자는 정석 이상으로 남자관계에 무심했다. 남자에 대해 도통 어떤 기 대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하고나 가볍게 사귀었다간 헤어지는 일을 되 풀이하고 있었다. 그 여자가 정석에게 수많은 여자들 중의 그저 하나에 불과했듯이, 정석 역시 그 여자에게 수많은 남자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 다. 그때 헤어진 뒤로 가끔 수위실 같은 데서 부딪힐 때가 있어도 두 사 람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인사를 나누곤 했다. 그만큼 서로 긁어대지 않고 개운하게 헤어진 사이였다. 서로 줄 수 있는 것들의 한계 내에서 서로 나누고, 이제 끝났네요, 하며 장부 계산하듯이 헤어진 사이. 그녀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85
는 프로 경리다웠다. 끝난 계산에 대해서는 어떤 군소리가 없는. 그런 그녀인 만큼 그를 따로 부르는 일이라곤 없었다. 주변에서도 감쪽같이 모르는 일이었다. 무슨 부탁이 있나 보지, 정석은 별다른 부담감도 없 이 사무실로 올라갔다. 사무실 문을 열자 미스 오는 기다렸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난로 곁 에 의자를 놓았다. 아직 사무직들은 출근할 시간이 아니어서 사무실 엔 아무도 없었다. 석유난로는 피운 지 한참 되었는지 사무실 안이 온 통 아늑하고 훈훈했다. 미스 오는 체크무늬의 짧은 주름치마에 갈색 스 웨터를 입고 있어서 여대생처럼 보였다. 찰랑찰랑한 단발머리가 잘 손 질된 가발처럼 단정했다. 연한 화장, 함부로 침입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단정함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눈가의 그늘 같은 것이 몹시 관능적인 느 낌을 주는 여자였다. 그녀는 두 잔의 커피를 따끈하게 끓여냈다. 뿌옇 게 흐려진 유리창 밖으로 쏟아지는 눈발이 아늑한 커튼처럼 여겨졌다. 잘 지냈죠? 미스 오는 정석의 앞으로 앉으며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매끈하고 아 름다운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앉았다. 그는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끄 떡였다. 보고 싶지 않았어요? 미스 오는 웃지도 않고 물었다. 정석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저런 질문을 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 질문에는 그런 질문에 으레 따르는 정다움 같은 건 조금도 묻어있지 않았다. 예뻐졌어요. 정석은 겨우 그 말 한 마디를 꺼냈다. 미스 오는 그제야 씁쓸한 미소 28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를 지었다. 나는 남자가 떠나면 예뻐져요. 만나면 예뻐져야 하는데, 거꾸로예 요. 누가 떠났어요? 예, 실연이라고나 할까? 미스 오가 비로소 명랑하게 말했다. 미스 오한테 실연이란 말은 어째 안 어울리죠? 근데, 이번엔 달라요. 정말 빠져들었어요. 남들이 떠 들어대는 사랑 같은 거. 안됐군요. 정석은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는 그를 미스 오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 말했다. 오늘 밤, 나한테 와주실 수 있어요? 예전처럼 잠시만 들렸다 가요. 나, 너무 힘들어서 꼭 죽을 것만 같아요. 이런 일이 나한테 생길 줄 몰랐어요. 그냥 좀 도와줘요. 옛날 인연으로. 재빨리 말을 뱉은 미스 오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가죠. 잔업을 뺄 수 있다면 일곱 시면 갈 수 있을 거예요. 그러지 못하면 아홉 시 지나야 되고 그럼 정석이 커피잔을 내려놓고 문가로 다가서는데, 등 뒤에서 미스 오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잔업까지 마치고 거리에 나서자 한밤의 공기가 날 선 칼처럼 살갗을 파고들었다. 눈은 그쳐 있었지만 쌓인 눈이 꽁꽁 얼어 길은 환하고 미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87
끄러웠다. 미스 오는 비산동 아파트에 살았기 때문에 정석은 조금 걸어 나와 버스를 탔다.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13평 아파트의 부엌으로 길게 난 좁 은 복도가 미스 오의 얼굴보다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낮에도 빛이 들어 오지 않아 언제나 불을 켜놓는 그 좁은 복도 때문에 이 집은 3층인데도 언제나 지하실처럼 느껴졌다. 울고 있었는지 그녀는 눈이 부어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는 타월로 된 하얀 목욕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저 가운 밑에는 속옷 하나 입지 않은 알몸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 또한 언 제나 그랬으니까. 각 방에 아궁이가 딸려서 난방을 하는 이런 구조의 집에서는 어울리 지 않는 차림새였다. 부엌도, 복도도, 화장실도 난방이 되지 않아서 미 스 오는 겨울이면 화장실에만 다녀와도 온몸이 얼음처럼 차가워지곤 했다. 정석은 좁은 현관에 선 채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는 그의 품 안에 파고들듯이 안겼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입술을 찾지는 않았 다. 그들은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 아파트는 집에 비해 꽤 커다란 안방 과 아주 작은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큰 안방에는 그녀의 생활 을 말해주듯 커다란 더블 침대 하나와 작은 옷장, 텔레비전 하나, 그리 고 일인 용 소파 두 개와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어 좀 크다 싶은 오디오 가 없었다면 영락없는 여관방이었다. 그녀의 삶 자체가 여관방과 비슷 한 데가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미스 오는 말없이 정석의 옷을 하나씩 벗겼다. 외투와 목도리를 벗겨 옷걸이에 걸고 스웨터와 바지를 벗겨 의자에 걸쳐놓고, 그리고 런닝셔츠와 팬티를 벗겨 곱게 개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 의 그런 행위는 연인의 행위가 아니라 무표정하고 착실한 하녀의 행위 28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같았다. 그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안방의 형광등은 그녀가 떼어버 리고 없었다. 그 방에는 침대 옆의 스탠드가 유일한 조명이었다. 지금 도 스탠드의 불빛만이 그 큰방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오디오에 서는 일곱 송이 수선화 라는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노래에는 그녀의 첫사랑의 추억이 얽혀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테이프 한 면 을 온통 그 노래로 녹음하였다. 그 테이프의 뒷면은 또 아드린느를 위 한 발라드 로만 도배되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1년 전과 똑같았다. 미스 오가 가운을 벗어 의자에 걸치고 정석을 향해 다가올 때, 그 느 낌은 절정에 달했다. 가운을 벗어 의자에 걸치는 자세도, 자신을 쳐다 보며 두 팔로 가슴을 가리고 걸어오는 모습도 1년 전에 본 영화를 또 보는 것처럼 똑같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숏커트를 했던 그녀의 머리 가 단발머리가 된 것이고, 남자가 떠나서 그녀의 얼굴이 더 예뻐지고, 피부가 더 매끄러워 보이는 것뿐이었다. 그보다 두 살이 많아 이제 스 물여덟이 된 그녀의 몸은 농염하고도 불온했다. 그는 일곱 송이 수선 화 의 배경 음악 속에서 그 농염하고 불온한 몸을 애무하고 애무했다. 그녀는 빨아들일 것처럼 그를 요구했다. 그의 몸이 힘을 잃었을 때도 그녀는 그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녀의 몸 안에서 그의 몸의 한 부분이 서서히 줄어 들어갔다. 그래도 그녀는 그를 놓지 않았다. 그녀가 쓸쓸 하게 말했다. 할 수 있다면 한 번만 더해주고 가요. 그러나 정석은 미스 오의 몸에서 떨어져 일어났다. 이제 테이프는 자 동으로 뒷면으로 돌아가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의 피아노 곡조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화장실로 갔다. 그곳에는 샤워기 따윈 없이 나지 막한 수도꼭지만 하나 있었다. 예전에 그는 씻지 않고 그대로 돌아갔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89
다. 그러나 오늘은 꼭 씻어내고 싶었다. 이제 다시는 그녀와 만나고 싶 지 않았다. 그는 아랫도리만 찬물로 씻고 돌아와 그의 옷을 하나씩 챙 겨 입었다. 그녀는 침대 속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녀를 한번 흘낏 돌 아보고 그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 좁은 현관에서 신을 신고 대문을 열 고 나갔다. 살짝 닫았는데도 문은 쾅, 소리를 내며 세게 닫혔다. 그녀는 침대에서 문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걸 그녀는 알아야 했다. 정석이 일어나 나온 것은 그녀가 추악해 보인 탓 도, 자신이 쓸쓸해진 탓도 아니었다. 그냥 모든 것이 허망했다. 너무 허 망해서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1층으로 내려오니 유리가 달린 입구의 문은 거친 겨울바람에 시달리 느라 덜컹대고 있었다. 그는 그 문을 활짝 열어 제쳐 놓고 바깥으로 나 왔다. 다시금 그 익숙한 느낌이 그의 등골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찬물에 닿듯 등줄기가 시려오면서 온몸으로 번져 가는 얼얼한 느낌, 그 는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검은 강물, 막막한 공간에 허랑하게 떠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뼈의 구멍구멍마다 찬바람이 휘몰고 들어와 그의 육체를 고통에 전율케 하는. 자신의 둘레를 휘도는 검은 강. 이제는 삶과 똑바로 맞서야 한다. 이대로 비켜 서서만 살 수는 없다. 피하지 말아라, 피하지 말아라. 거친 겨울바람이 그의 귀에 대고 연신 속살대고 있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정석은 은희의 집 앞으로 갔다. 아직 잠들지는 않았 는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은희야, 은희야! 29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작은 목소리로 은희를 불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그녀가 문을 열었다. 정석은 그대로 그녀를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사랑해, 은희야, 절대로 내 곁을 떠나면 안 돼. 그러면서 정석은 은희의 입술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곳에 정 신이 팔린 사람처럼 건성으로 입술을 내주었다. 그러더니 곧 그를 밀어 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야심한 시각에 웬 일이야? 딴 남자 있었음 어쩔려고? 정석은 조금 머쓱했지만 다른 여자를 만나고 온 미안함 탓에 그런 은 희의 태도도 서운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딴 남자 있나 감시하러 왔다! 그러면서 방안에 들어서던 정석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온 방바닥에 울긋불긋한 천이 늘어져 있고, 못 보던 아기 인형이 놓여져 있었다. 그 의 가슴이 다시금 서늘해졌다. 이 여자의 가슴은 내가 아닌 다른 것들 로 가득 차 있다. 어떻게 해도 내가 비집고 들어갈 구석은 없구나. 술 줄까? 은희가 부엌에서 물었다. 그래, 술이나 마시지. 술이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았다. 가슴 한 구석이 뚫려버린 것처럼 속 이 공허했다. 은희는 소주에 언제 부쳤는지 계란 부침을 안주로 술상을 봐왔다. 그러나 잔은 하나였다. 나 혼자 마시라고? 정석이 불만스런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은희는 그의 말 따위는 귀에 들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예의 그 넋 나간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돌아 와 있었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91
은희는 정석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눈길은 그를 그대로 넘어 어딘 가 다른 곳을 향한 듯 아득했다. 혼자 마셔. 난 이걸 마저 만들고 자야 돼. 그러면서 은희는 하다 둔 바느질감을 집어 들고 다시 바느질을 시작 했다. 그 인형의 옷을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벌써 여남은 벌의 멀쩡한 아기 옷이 만들어져 있었다. 옷 만드느라 바쁘다고 약속도 매일 미루기 에 정석은 은희가 자기 옷을 만들고 있는 줄만 알았더니, 이런 무당 짓 거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석은 혼자 잔에 술을 따랐다. 부엌에 있던 소주는 냉수처럼 차가웠 다. 이 여자에게 다가갈 길은 정녕 없는 것일까. 정석이란 존재는 염두 에도 없다는 듯이 은희는 아기 옷을 만드는 데 빠져 있었다. 그런 모습 을 보고 있자니 그는 화도 나고, 짜증도 났다. 한편으로는 오죽하면 저 러랴 싶어 마음 한 구석이 짠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렇게까지 꼭 해 야 하냐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술상을 뒤엎고 뛰쳐나 가거나 바느질감을 뺏어 던지고 그녀를 덮치고 싶었다. 하지만 정석은 그 모든 마음을 꾹 누른 채 은희의 하는 양을 그대로 바라보았다. 도망쳐야 돼, 저 여자를 사랑해서는 안 돼, 도망쳐야 돼. 이제 피하지 말고 삶에 똑바로 맞서야 한다던, 겨우 몇 시간 전의 깨달음은 다시 부 정되었다. 정석은 은희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자신 앞에 놓여있는 깊 고 검은 웅덩이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 나는 그를 은희는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그가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등덜미에 꽂히는 걸 알면서도 정석 역 시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고 나왔다. 쓸쓸했다. 그렇게 마음 닫고 살 때는 쓸쓸함이라곤 모르겠더니, 은희 29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로 인해 열린 그 바늘구멍같이 좁은 구멍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온몸을 뒤흔들었다. 정석은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었다. 그가 언덕 밑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끝끝내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골목길은 동네 사람들의 알뜰한 손길로 다시 연탄재의 길이 되어 있 었다. 뽀드득거리는 눈길 대신 정석은 파삭거리는 연탄재의 길을 미끄 러지지 않고 걸어 들어갔다. 사방은 괴괴했다. 골목이나 마찬가지로 집 안 어느 방에서도 불빛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에는 이 제 한 귀퉁이만 차오르면 만월이 될 환한 달이 구름 한 자락을 거느리 고 떠있어 수돗가가 환했다. 중간의 통로에 쳐진 슬레이트 차양이 쌓인 눈의 무게로 축 늘어져 있었다. 눈 때문에 통로에는 달빛도 희미하게만 흘러 들어왔다. 어느 방에선가 피곤에 지쳐 잠든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요란한 코 고 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수도꼭지에서는 잊지 않고 틀어놓은 가느다란 물줄기가 달빛 아래 졸졸 흘러내리고 있었다. 구석에 있는 장독대 위 에는 하얀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 윤기 나는 검은 장독들은 하얀 모자를 쓴 중년 신사들을 연상시켰다. 그 뒤로 쥐라도 발견했는지, 캬오, 하는 도둑고양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부엌문을 열고 들어서던 정석의 머리에, 문득 영애의 연탄을 갈아줘 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날이 많이 차졌다. 출근할 때 갈아 넣고 갔 다면 분명 꼭꼭 막아놔서 새벽에 돌아왔을 때도 방은 절절 끓지 않을 것이다. 가서 지금 갈아 놓든가, 불구멍을 열어놓고 새벽녘에 한 차례 갈아주든지 해야 했다.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나다니, 어디 가서 실 컷 울고 싶은 마음뿐인데.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93
정석은 영애의 부엌문을 밀었다. 언제나 저항감 없이 스르륵 열리던 그 문은 그러나 덜컥, 소리만 날 뿐 열리지 않았다. 자물쇠는 걸려있지 않았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그녀는 분 명 야간 근무였고, 이 시간이면 공장에 있어야 했다. 뭐가 걸렸나 싶어 다시 문을 흔들자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구세요, 하는 영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석은 놀라 문에서 손을 떼었다. 그녀가 있었구 나, 다시 한 번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예요. 정석은 할 수 없이 대답했다. 영애가 문을 열었다. 부엌도, 열려있는 방도 창호지 너머 희미하게 들어오는 달빛 외에는 어두웠다. 없는 줄 알고 정석이 얼버무리듯 얘기하자, 영애는 고개를 끄떡였다. 잘 왔어요. 안 그래도 얘기할 게 있었어요. 정석씨 기다리다가 깜 빡 잠이 들었나 봐요. 영애는 방안으로 들어서며 정석에게 말했다. 잠깐 들어올래요? 정석은 신을 벗고 방으로 들어섰다. 영애가 형광등 줄을 잡아당기려 고 손을 내미는데, 그가 그 손을 잡았다. 불, 켜지 말아요. 불을 켜면 영애를 볼 자신이 없었다. 그 뿐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어 둠 속에서 마주 본 채 잠시 앉아 있었다. 할 말이 있다던 그녀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술 한 잔 하고 싶네요. 29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정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술이요? 영애가 당황스런 목소리로 되물었다. 걱정 말아요. 지난번엔 미안했어요. 요즘 내가 좀 이상해서요. 정석의 말에 영애는 대답 없이 일어나더니 부엌으로 나갔다. 그녀는 쟁반에 소주와 김치와 불붙인 양초를 들고 들어왔다. 상위에 그것들을 놓은 다음 그녀는 카세트 레코드를 틀었다. 곧 감미로운 외국 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영화 음악이에요. 소리가 너무 잘 들리니까 영애는 나직나직 말했다. 정석의 귀에 남자 가수가, 문 리버, 하고 노 래 부르는 부분이 들어왔다. 문 리버(moon river) 달의 강물을 말 하는가, 그 음악은 그의 귀에도 익숙했다. 그녀가 술잔을 채웠다. 두 사 람은 잔을 부딪혔다. 말해야 할 게 있어요. 영애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말하지 말아요. 정석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오늘은 너무 피곤하고 슬프다. 이 여자는 또 무슨 얘기로 나를 힘들게 하려는가. 그는 지금의 분위기 가 좋았다. 비로소 은희에게서 받았던 슬픔이 조금 위로를 받는 기분이 었다. 어린 날의 고향집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엄마를 기다리며 누이 와 이렇게 어둠 속에서, 혹은 촛불 앞에서 그림자놀이도 하고, 누이의 옛날이야기도 듣던 추억이 사무쳐왔다. 하지 않으면 안돼요. 그래도 하지 말아요.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95
나, 이곳을 떠날 거예요. 작별 인사할 기회도 마땅치 않을 것 같아 서 정석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 여자마저 떠나는가. 이 여자마저.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어요? 비로소 정석이 또렷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직 이울지 않고 마지막 빛 을 흘려주고 있는 달빛에 영애의 눈이 반짝였다. 정석씨, 나는 나쁜 여자예요. 영애가 어찌나 심각한 어조로 말하는지 정석은, 흐흐, 웃었다. 잘 알고 있어요. 그 말 하려고 그랬어요? 그러자 영애도 긴장이 풀린 듯 희미하게 웃었다. 정석씨가 아는 것보다 훨씬 나빠요. 내 얘기를 다 듣고 나면 구역 질을 할지도 몰라요. 한 번의 웃음 탓인가, 영애의 어조에도 아까 같은 심각함은 사라졌 다. 얘기해 봐요. 나는 결혼한 여자예요. 영애가 망설이듯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정석은 간단히 대답했다. 역시 그랬구나. 현재형이란 말예요, 과거형이 아니고. 정석의 반응이 너무 미지근한 탓인가, 영애의 나직한 어조가 흥분하 고 있었다. 방바닥이 따뜻했다. 갑자기 견딜 수 없이 졸음이 몰려왔다. 그래, 나는 하루 종일 일하고, 또 여자와 섹스를 나누고 왔지, 졸릴 만 도 해. 촛불이 어른거리는 따뜻한 방, 그는 도무지 잠을 참을 수가 없었 29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다. 몰려드는 잠에 간신히 버티며 정석이 말했다. 잠깐만 누울 게요. 잠깐만 말 끝나면 내 방으로 갈 거예요. 정석의 끝말은 어눌했다. 그는 쓰러지듯 옆으로 드러누웠다. 그 상태 로 그는 필사적으로 수마 垂 魔 와 싸우고 있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영 애가 웃었다. 그래요. 편한 대로 들어요. 무슨 말인데요? 빨리 말해요. 여전히 졸음이 가득한 말이었다. 정석의 눈은 벌써 반쯤 감겨 있었 다. 나는 아이까지 딸린 유부녀예요. 그리고 이름도, 나이도 다 가짜였 어요. 난 김영애가 아니에요. 정석은 여전히 쏟아지는 잠과 싸우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 다. 그녀가 하는 말들이 놀라운가. 이상하게도 그 모든 일들은 예상하 고 있었던 일처럼 놀랍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단지 감기는 눈을 겨우 버티며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난 윤진우라고 해요, 나이도 정석씨보다 많아요. 그래요? 그럼, 이제부턴 진우씨라고 부를 게요. 정석씨! 뭐가 문젠가요? 정석이 가느스름하게 눈을 뜬 채 영애, 아니, 진우의 얼굴을 바라보 았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97
나는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이에요. 위장취업을 한 거예요. 아침에 잡혀간 학생들이나 비슷한 오늘은 아침이나 밤이나 이상한 날이군, 정석은 도무지 모든 것이 실 감나지 않았다. 그것만은 잠결에도 놀랍기는 했다. 그러나 이렇게 따뜻 한 방에 달빛을 받으며 누워있는 그에게는 어떤 것도 대단치 않게 여겨 졌다. 그게 다인가요? 정석이 여전히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요. 다예요. 진우가 허탈한 어조로 답했다. 비밀이 많긴 많았군요. 하지만 구역질나진 않아요. 정석은 눈을 감은 채 웅얼거리듯 말했다. 어쨌든 가지 말아요. 당신까지 가버리면 나는 너무 힘들 거예 요. 하지만 이제 더 말하지 말아요. 여기 있단 그대로 잠들겠어요. 이대로 잠 들고 싶지만 영애씨가, 아니, 아까 누구랬죠? 진우요, 윤진우. 으응,,, 영애란 이름이 훨씬 이쁘군요. 그래요, 진우씨가 욕먹을지 모르니까. 이제 내 방으로 갈게요. 그러나 정석은 거의 잠이 들고 있었다. 그의 귓전에 무언가 체념한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자요. 내가 새벽에 깨워서 보내 줄게요. 그 말을 듣자 정석은 그때까지 쥐고 있던 연줄을 놔버리듯이 까무룩 29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히 잠이 들었다. 진우는 일어나 상을 치우고 그의 머리에 베개를 베어 주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 옆에 조용히 누웠다. 몇 시나 됐을까, 달까지 져서 숯처럼 까만 어둠 속에 진우가 그를 흔 들어 깨웠다. 가 봐요. 불 갈아놨으니까 방 따뜻할 거예요. 정석은 팔을 뻗어 진우를 안았다. 잠결이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그 팔을 밀쳤다. 그리고 다시 그를 흔들어 깨웠다. 정석은 꿈결 같은 어둠 속에서 더듬어 옷을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 그는 부엌 문 앞에서 진우에게 말했다. 문 걸고 자요. 그럴 게요. 정석씨 돌아서 나가는 정석을 영애가 붙잡았다. 아녜요. 그냥 말은 그렇게 해놓고, 영애는 가만히 정석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 다 댔다. 아이 같은 입맞춤이었다. 그는 꿈속에서처럼 그녀의 입맞춤을 받았다. 그는 여전히 잠에서 깨지 않은 채 비틀거리듯 걸어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 엎어지듯 이불 위에 쓰러진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의 몸은 이미 잠이 들었는데도 그의 손은 저절로 뻗어 나가 자명종의 꼭지를 빼놓았다. 언제나 시각은 똑같이 맞춰져 있었다. 달은 벌써 이울었고, 수돗가에서 졸졸 흐르는 물줄기만이 잠들지 않 고 얼지 않으려 기를 쓰고 있었다. 장독대 뒤로는 고양이를 피해 살아 남은 생쥐 한 마리가 찍찍 소리를 내며 쏘다니고 있었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299
진우는 종태 엄마가 일어난 기척이 들리자 챙겨둔 짐을 들고 방에서 나왔다. 벌써 여섯 시였다. 어제 얘기는 다 해놓았지만 그래도 종태 엄 마에게만은 인사라도 하고 가고 싶어 진작 준비를 하고도 기다리고 있 었다. 비닐 옷장과 이불과 소소한 그릇들은 어제 인주네로 넘겨버렸기 때문에 짐은 라면 박스 하나로 올 때보다도 단촐했다. 그새 수돗가에는 인주네와 종태 엄마, 포항댁이 모두 나와 쪼그리고 앉아 아침준비를 하고 있었다. 진우는 수돗가로 다가가 인사를 했다. 아이, 서운해서 어째? 이렇게 가면 또 언제 봐? 인주네가 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됐어요. 그 동안 신세만 지고 집안에 식구가 갑재기 확 줄었다 아이가. 포항댁도 쉬는 날인지 함지박 가득 밀린 설거지를 철퍼덕대며 말했 다. 여유 돈만 있으면 두 번 걸음 안 하게 할 텐데. 종태 엄마가 보증금을 못 돌려주는 걸 미안해하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 핑계 대고 한 번 더 오죠. 그래, 종종 연락해. 그래야 방 빠진 것도 알려주지. 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종태 엄마가 갑자기 정석의 방문 앞으로 종종 걸음을 쳤다. 진우는 얼른 다가가 그녀를 말렸다. 아네요. 깨우지 마세요. 어젯밤에 늦게 들어오는 것 같았어요. 그래도 한 회사 다니는데 안 알리면 서운해 하잖아? 회사에서 인사 다 했어요. 그랬으면야 어여, 먼 길 가는데 빨리 나가봐. 30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그럼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하고 돌아 나오는데, 종태 엄마가 따라 나와 진우의 등을 두 드려 주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잘 되어서 다시 오면 좋겠어. 난 아가씨가 동 생같이 정이 들었는데 예, 저도 그만 진우는 목이 메어 말을 맺지 못했다. 수돗가에 앉아 있던 인주 네가 그녀의 뒷꼭지에 대고 말했다. 언제든지 시집갈 맘 있으면 연락해, 아가씨랑 딱 맞는 총각을 내가 봐뒀으니까. 진우는 뒤를 돌아보며 그냥 멋적은 듯 웃고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데, 포항댁의 걸걸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야, 인주네야, 그런 총각 있으면 내부터 소개해도고. 저 처니야 니 가 갖다 안 붙여도 줄줄이 따라붙게 생겼다. 두 사람이 킬킬거리며 소리 죽여 웃는 소리가 수돗가에 물결처럼 자 르르 퍼졌다. 이른 시간이라 그들도 소리를 낮추고 있었다. 종태 엄마 는 말려도 기어코 따라 나와 택시를 잡아주면서, 역전까지 차비라도 하 라고, 천 원짜리를 우격다짐으로 쥐어주었다. 택시는 떠났다. 진우는 차창 밖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지나는 차의 불빛에 종태 엄마가 서서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진우는 목 에 뭔가가 걸린 것만 같아 자꾸만 기침을 뱉어냈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301
15. 장갑 두 켤레 잔업을 마치고 나왔을 때, 뜻밖에도 은희가 경비실에서 기다리고 있 었다. 그 날 이후 열흘도 더 지났다. 근무도 어긋나긴 했지만 정석이 그 녀를 찾지 않은 것이다. 그 동안 정석은 그녀를 잊어보려고 애썼다. 영 애가 떠나버린 일이 오히려 은희를 잊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모아졌다. 그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달려간 영애의 방. 부엌문도 방문도 활짝 열려 있는 걸 보는 순간 정석은 모든 것을 깨 달았고, 순식간에 모든 것을 체념했다. 그러나 체념이 그의 고통을 덜 어주지는 않았다. 종태 엄마가 손에 걸레를 쥔 채 그녀의 방안에서 걸어 나오면서 말했 다. 어휴, 걸레질까지 말끔하게 해놓고 가서 내가 치울 게 없네, 꼭 정 을 떼고 간 것 같아 서운한 생각이 다 들어. 참, 떠난다고 얘기했다던 데, 미리? 말을 다 하고 떠났음에도 정석은 그 모든 일들이 꿈결 같았다. 그는 죽은 누이가 살아났다 다시 사라진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누이를 잃 었을 때의 상처가 다시금 그를 옥조였다. 몸이 졸아들었다. 그것은 곧 은희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그랬던 것이다. 이제 다시 상처 입 는 일이 못 견디게 두려웠다. 상처 입은 짐승이 되어 동굴 속의 어둠에 갇힌 채 자신의 상처를 핥으며 지내는 세월이 끔찍하게만 여겨졌다. 은 희에 대한 감정은 여기서 끊어야 했다. 그는 그녀와 정말로 헤어지리 라 마음먹었다. 떠나간 여자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그 빈 방 앞을 지 30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날 때마다 다친 상처의 딱지를 억지로 떼어낸 것처럼 마음 한 켠이 욱 신거렸다. 그럴수록 은희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고, 당장에라도 그녀에 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는 그 마음을 누르고 또 눌렀다. 지금이 좋다. 그녀가 인형 옷 따위에 넋이 팔려 있을 때, 지금 그녀를 잊어야만 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지나가면 그녀도 스치는 바람처럼 여겨질 날이 올 것 이다. 그때까지만 참자. 그러지 않았다가는 언젠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를 날이 올 것이다. 지금 끊어내야 한다. 언제나 그랬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은 자신을 떠나갔다. 누이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영애도 은희에게 다시 그런 상처를 입는다면 그는 아마도 피를 쏟으며 쓰러 질 것이다. 그런데 넋 나간 눈길로 인형 옷만 깁고 있던 은희가 정석을 찾아온 것이다. 그녀를 보는 순간 그는 자신의 그 동안의 모든 노력이 아무 소 용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날 그가 피를 쏟고 쓰러지는 한이 있더 라도 그는 이제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길을 받아들여야 했 다. 은희는 눈에 익은 빨간 스웨터에 검은 모직 바지, 털로 짠 검은 망토 를 걸치고 있었다. 망토에는 털실로 만든 동그란 방울이 달려 있었다. 구두까지 반들반들하게 잘 닦여 있었으며, 팔에는 망토와 잘 어울리는 털실로 짠 가방도 들려 있었다. 정석은 그런 그녀를 보고 피식 웃었다. 옷차림에 이렇게 공을 들였을 때의 은희는 밝고 경망스러운 은희였다. 그날같이 멍한 눈길을 보이는 일은 없을 터였다. 정석이 말없이 경비실을 나오자 은희는 곧 따라와 팔짱을 꼈다. 그녀 의 팔이 옆구리에 닿자 그는 가슴이 뭉클했다. 아, 어쩌다 이렇게 이 여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303
자를 좋아하게 된 걸까. 뭐 하러 왔어? 쳐다도 안 보더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석은 은희의 손을 당겨 꼭 쥔다. 삐쳤을 까봐 달래주러 왔지. 삐치긴, 내가 뭐 너한테 반한 줄 알아? 정석도 장난스럽게 말한다. 여자 많은 줄은 잘 알아. 그래서 안심했는데 나한테 너무 빠져있는 것 같아서 걱정돼서 은희가 생글거리며 말한다. 흥 말문이 막힌 정석은 괜히 콧방귀를 뀌는 척한다. 하지만 은희가 다시 이렇게 명랑하게 돌아온 게 너무 좋아서 자꾸만 입이 벌어진다. 술 사줘. 순애언니네 가서 은희가 말했다. 뭐 오늘은 다른 데 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봐. 정석은 좀 더 오붓한 시간을 갖고 싶어 말한다. 아냐, 순애 언니도 봐야 해. 오랫동안 안 갔어. 비로소 정석은 은희가 그 동안 혼자 힘들어했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 는 잘 안 만났어도 박순애는 자주 찾았을 줄 알았다. 아닌 게 아니라 황해도 집에 들어서자 순애는 눈을 크게 뜨고 반가워 했다. 어서 와. 살아 있었네. 하도 안 오니까 죽은 줄 알았잖아? 그렇게 드나들었어도 왔냐? 소리밖에 안 하는 순애로서는 파격의 환대였다. 다행히 손님이 별로 없던 차라 순애는 처음부터 합석을 했 30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다. 은희는 그 앙증맞은 털실 가방에서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 두 켤레 를 꺼냈다. 분홍색과 노란색의 보기에도 귀여운 장갑이었다. 순애의 두 아이를 위한 선물이었다. 어머, 이쁘네. 니가 떴어? 순애가 다시 반색을 했다. 은희는 수줍은 듯 고개를 끄떡거리더니 또 무엇인가를 꺼냈다. 이건 언니 덧버선, 이건 정석이 네 목도리. 회색 바탕에 벽돌색의 기하학적 무늬가 들어있는 덧버선과 검은 바탕 에 카키색 줄무늬가 들어간 목도리였다. 참, 크리스마스도 아니고 웬걸 이렇게 다 떠서 선물하니? 오늘 순애는 평소와는 너무 다르게, 어색하다 싶을 만큼 감정을 드러 냈다. 정석은 자신의 목도리를 만져보았다. 이것들을 침침한 불빛 아래 앉아 뜨고 있었을 은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방구석에 앉아 인형 옷을 만들던 은희, 어쩐지 정석은 그 목도리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 옷 위에 걸쳐 봐. 어울리나 봐줄게. 정석은 시키는 대로 했다. 검은 반코트 위에 그 목도리는 잘 어울렸 다. 왜 이렇게 뭘 자꾸 주니? 지난번에 옷도 너무 좋은 걸 사와서 영 마음이 무거운데 나는 받기만 하고. 언니까지 그러면 어떻게 해. 난 그게 낙인데 순애는 특히 아이들의 장갑을 몇 번이고 만져보며 좋아했다. 감정 표 현을 여간해서 안 하는 사람인데,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순애가 그렇게 내내 웃었기 때문에 그 자리는 오랜만에 대단히 유쾌한 술자리가 되었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305
애들 머리맡에 놔줘야지. 시커먼 장갑이나 끼고 있었는데, 은희 이 모가 떠준 거라고 하면 팔짝팔짝 뛰겠다. 둘이 문을 나설 때에도 순애는 그 장갑을 어루만지며 기뻐하였다. 언니, 잘 있어. 그러면서 은희는 순애를 꼭 껴안았다. 그래, 잘 가라. 정말 고맙다. 순애는 은희의 등을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정석은 그 순간 순애의 얼굴에 검은 그늘이 져있는 것을 보았다. 잘못 봤겠거니, 그는 그저 그 렇게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술을 더 달라고 보채던 손님이 겨우 빠져나갔다. 순애는 한숨을 몰아쉬며 문을 안으로 잠근다. 돌아서 문에 기댄 채 기운 없이 식당 안을 둘러본다. 드럼통 탁자마다 먹다 남은 음식들, 뱉어놓은 음 식 찌꺼기, 담배꽁초, 더러워진 그릇들이 널려있다. 머리 꼭대기부터 피가 다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힘이라곤 없다. 그녀는 오늘만은 그것 들을 다 내버려 둔 채 자리에 들려고 마음먹는다. 귀찮다. 손끝 하나 움 직이고 싶지 않다. 종일 몹시 피곤한 날이었다. 새벽부터 서울까지 가서 수산물을 받아 왔고, 오전에는 아이들이 아파 두 군데 병원을 쏘다녔다. 그런가 하면 오후에는 관할 파출소 경관이 찾아와 말도 안 되는 시비를 한참 붙이다 갔다. 오후에 남편 면회를 갔을 때도 영치금 타령을 해대는 바람에 머 리가 지끈거렸다. 가게 문을 열고서도 내내 손님이라곤 몇 들지 않더니 은희가 다녀간 뒤로 한꺼번에 만취한 손님들이 들어 애를 먹었다. 그들 이 가고 나자 거머리 같은 주정뱅이 하나가 줄창 들러붙어 끝까지 속을 30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긁어 놓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순애를 흔들어 놓은 것은 은희였다. 순애는 은희 가 준 아이들의 장갑 두 켤레를 주머니에서 꺼내 가만히 들여다본다. 은희의 감각과 솜씨가 그대로 드러난 예쁜 장갑이다. 그러나 순애가 그 장갑을 보고 평소와 다르게 호들갑까지 떨어댄 것은 꼭 그 장갑이 예뻐 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무언지 알 수 없어도 마음속으로 불길한 검 은 바람이 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순애는 제 속에 이는 그 검은 바람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그것에서 눈길을 떼기 위해 그녀는 악착스레 그 앙증맞은 장갑 두 켤레에 매달렸다. 은희를 친딸처럼 아꼈고, 정석 을 친동생처럼 생각해온 순애에게 그들 두 사람은 측은한 노루 새끼들 만 같았다. 그런 순애의 눈에 은희는 오늘 숨길 수 없이 불안해 보였다. 정석은 또 천진하게 자신의 기쁜 마음을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드러내 기만 했다. 은희를 벗어나려고 했던 정석을 순애는 옆에서 지켜보아왔 다. 그 몸부림이야말로 정석이 얼마나 은희에게 깊이 사로잡혀 있는가 를 드러내는 증거였다. 이제 그는 제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인 모양이었 다. 은희와 헤어지겠다는 마음은 포기한 것 같았다. 가엾은 것. 며칠 전 그 영애라는 여자가 갑자기 떠났다며 정석은 순애를 찾아왔 다. 그 여자가 떠나버린 일은 그의 묵은 상처를 헤집었고, 은희에 대한 두려움을 더 증가시켰다. 은희에 대한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오직 영애라는 그 여자에 대한 얘기만 했음에도 순애는 그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그 날 순애는 비로소 그 여자, 김영애에 대한 이 야기를 들었다. 순애는 그 여자를 처음 보았을 때 자기가 가졌던 직감 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김영애를 단 한 번 보았지만 순 애는 한눈에 그 여자가 뭐랄까, 제 얼굴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 여자라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307
는 것을 직감했다. 이를테면 그 여자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세상의 더 러움이라곤 모른다는 듯이 무구한 얼굴로 천진하게 웃고 있었지만 순 애에게는 밖으로 내민 그 환한 얼굴이 아니라 그 뒤의 그늘진 성숙한 얼굴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그 얼굴이 바로 자신의 얼굴과 같은 것이기에 보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정석에게, 결혼한 여자 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순애가 그 여자를 불길해 한 것은 그 여자가 혹시 결혼한 여 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그 여자가 그렇게 가면을 잘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여자가 냉정하다는 것을 말했다. 냉정하지 않은 인간은 가면을 잘 다룰 수 없는 법이다. 피가 찬 여자였어, 순애는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을 뱉는다. 피가 찬 여자, 햇살처럼 따뜻한 얼굴로 찬피를 가진 여자, 바로 그 점이 불길했다. 그 피가 찬 여자가 정석에게 줄 상처를 순애는 그때 이미 두려워했다. 서은희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피를 가진 아이였다. 순애는 비를 맞고 뛰어 들어온 노루 새끼처럼 그녀를 보듬어 안았다. 그런데도 그 피 흘리는 상처를 자신이 꿰매주지 못했다는 것을 새삼 아프게 깨닫는 다. 언제부턴가 삶이란 걸 무거운 짐으로만 여겨온 순애에게 은희는 어 쩌면 제 속으로 낳은 자식보다도 애틋했음에도 그랬다. 그건 정석에 대 한 마음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아니, 그에 대한 마음은 조금 달랐을까. 순애의 첫 남자를 닮은 정석,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석에게 정다운 웃음 한번 흘리지 않는 무정함에는 어쩌면 그런 제 마음의 불안 이 숨겨져 있는지도 몰랐다. 순애는 앞치마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드럼통 앞의 의자에 걸터앉 는다. 손님들이 남겨놓은 소주를 한 잔 따른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담 30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배를 꺼내 한 개비 불을 붙인다. 엄마!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자다 깼는지 막내가 엄마를 찾는다. 순애는 얼른 불만 붙인 담배를 뭉개버리고 아이에게 달려간다. 그녀는 아이를 안아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그녀의 덕지덕지 묻은 피곤이 그녀와 함께 딸려 들어간다. 16. 푸른 원피스 나 오늘 니 방에서 자고 가게 해줄래? 시장통을 돌아 나섰을 때 은희가 말했다. 흥, 웬일로? 그렇게 싫다더니? 정석은 괜히 퉁겨본다. 그는 이제 제 마음을 억누르지 않는다. 오랫 동안 떨어져 있던 엄마를 만난 어린 아이처럼 그는 그렇게 그녀에게 매 달린다. 내 맘이지. 왜? 싫어? 은희가 가만히 팔짱을 끼며 말한다. 응, 싫은데! 그래도 말은 여전히 장난스럽다. 니가 싫어도 할 수 없어. 내 맘이니까. 은희가 웃으면서 말한다. 내 방은 방음 따윈 안 돼 있는 데니까, 각오해야 할 걸?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309
후후, 어느 정돈데? 고스란히 거의 생방송 수준이지. 그럼 넌 밤마다 그 소리들을 즐기니? 즐기는 게 아니라 넘치는 자극으로 미칠 지경이야. 그럼 오늘은 니가 복수하는 거야. 그 동안의 괴로움에 대해, 내가 협조해줄게! 복수는 무슨 자극 받으면 다들 난리가 나지. 그 치들이야 옆에 다 다 끼고 자는 걸. 야, 거 굉장하겠다. 오늘 밤 그럼 섹스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열리 겠네! 하하, 진짜 그렇겠다. 안 그래도 바이올린 연주는 밤마다 울려 퍼 지니까! 바이올린이라니? 하하, 그런 게 있다니까. 오늘 밤 있어 봐. 볼 만 할 거야. 정석은 인주네를 생각하며 슬며시 웃는다. 한밤중에 갑자기 옆방에 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그 일이 시작된다는 징조였다. 밤에 깨있을 때면 종종 겪는 일이었다. 그 어설픈 집의 벽은 도배지로 가려놨을 뿐 구멍이 숭숭 뚫린 블록 벽돌집이라 소리들은 무례할 만큼 제 자유를 구사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방 부부의 가쁜 숨소리 가 정석의 방으로 넘어온다. 그때쯤이면 그들도 자기들의 소리를 의식 하고 찰칵, 라디오를 튼다. 깊은 밤,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트는 탓인지 인주네의 라디오에서는 매번 심야 음악 프로의 바이올린 소리가 쏟아 져 나왔다. 한밤의 정적을 일거에 부숴 버리는, 깽깽거리는 그 악기의 날카로운 선율. 31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그들은 그 소리만 믿고 더 이상 숨죽이지 않고 마음껏 신음소리를 내 뱉는다. 그러나 그 가쁜 숨소리와 낮으나 절절한 교성은 바이올린의 높 고 예리한 소리에 전혀 녹아들질 않는다. 그 소리들은 따로따로 어둠을 헤집으며 온 집안으로 퍼져나간다. 그래도 좋다. 정석은 은희가 자기 방에서 자고 가겠다고 말한 게 너무나 기쁘다. 그는 오늘 그녀와 보내 는 시간이 말할 수 없이 정답고 소중했다. 경계하지 않고 마음을 풀어 버리는 데서 오는 아늑한 평화였다. 그는, 아예 방을 합쳐버릴까, 같이 사는 거야, 그런 생각까지 한다. 그러면 그 돈으로 그녀의 옷 한 벌이라 도 더 장만해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속의 닫혀있던 작은 문들이 일제 히 열리는 기분이 든다. 이거 밤에 보니까 전혀 달라 보인다. 교도소 앞을 지날 때였다. 은희가 교도소를 가리키며 말하더니 나직 나직 말을 이었다. 전에 서울서 공장 다닐 때, 어떤 언니가 하나 들어왔거든. 나처럼 긴 머리인 여자였는데, 눈이 엄청나게 컸어. 얼굴 반이 눈이야. 그런데 눈도 그렇게 크고, 코도 오똑하고, 입도 작고, 얼굴도 갸름하고, 하나씩 뜯어보면 죄다 잘 생겼는데 한 번에 보면 이상하게도 이쁘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드는 사람이었어. 화장을 너무 진하게 해서 그랬어. 떡칠 하듯 화장을 하고, 속눈썹도 누가 봐도 가짜인 줄 알 만큼 지나치게 길고 바짝 치켜선 걸 달고 다녔 거든. 옷은 그렇게 유별나게 안 입었는데, 화장이 그렇게 술집 여자 같 으니, 공장 사람들이 누가 좋아해. 처음 들어온 사람한테는 누구나 친절하게 대하는 게 보통인데도 아무 도 그 여자 옆에 가질 않았어. 그 여자는 언제나 뚝 떨어져 저 혼자 있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311
었어. 어쩌다 사람들 속에 있어도 마치 그 여자가 없는 것처럼 그 여자 를 건너뛰어서 자기들끼리만 얘기를 하는 거야. 밥 먹을 때도 식당에서 혼자 식반을 들고 구석에 가서 밥을 먹고 아무도 해꼬지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해꼬지가 딴 게 아니더라. 그렇 게 말없이 따돌리는 것처럼 무서운 게 없더라. 나도 그 여자 인상이 마 음에 들지는 않았어. 쌀쌀맞아 보이기도 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것 같 기도 하고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그러니까 안 돼 보였어. 그래서 어느 날인가 식반을 들고 그 여자 앞에 가서 앉았지. 같이 먹어요, 그러 니까 그 여자, 아니 그 언니의 환해지는 얼굴이라니 아주 순식간에 그 얼굴이 딴사람처럼 변하는 거야. 너무 이쁘고 천진스럽게. 그 얼굴 하나에 본성이 다 나타나는 거야. 세상에, 그렇게 이쁜 얼굴 을 덕지덕지 화장을 해서 미움을 받고 있었으니. 나는 그 언니랑 금세 친해졌어. 정말 애기같이 마음이 고운 여자였어. 왜 그렇게 화장을 하 고 다니냐니까 자기가 못 생긴 것 같아서 그렇대, 내가 아무리 아니라 고 해도 그 버릇은 못 고쳤어. 게다가 자기 애인은 그런 언니의 얼굴을 좋아한다는 거야, 그 애인이라는 사람이 그때 감방에 들어가 있었던 거 야. 우리 공장이 바로 그 서대문 감옥에서 가까운 데 있었거든. 그 공장은 3교대여서 주간근무는 새벽 일찍 출근하고 오후 3시면 일 이 끝났어. 그리고 야간이나 오후는 수당이 붙지만 주간 근무는 붙지 않아서, 원하는 사람들은 교대를 하지 않고 계속 같은 근무를 해도 됐 어. 그 언닌 그래서 거길 들어온 거야. 원래는 미장원에서 일했는데, 미 장원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내내 지키고 있어야 했대. 주인이 까탈스러 워서. 그러니까 애인 면회를 가기 위해 그 공장으로 들어온 거야. 끝나 기만 하면 부리나케 사라졌던 게 다 이유가 있었지. 4시 반까진가 접수 31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를 하면 3분인가, 7분인가 면회를 할 수 있었대. 그렇게 날마다 면회를 다니던 언니가 언제부턴가 들떠서 어쩔 줄을 모르더라구. 재판 날이 가까워온다고, 변호사가 이번 재판에서 꼭 집행 유예로 나온다고 했다는 거야. 언니는 일하다 말고, 내 손을 자기 가슴 위에 대면서, 은희야, 내 가슴 뛰는 소리 들리지,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그이가 나온다, 엿새만 있으면 나온다, 닷새만 있으면 나온다, 하고 어 쩔 줄을 몰라 했어. 나는 언니의 기대가 하도 커서 불안했어. 아무것도 그런 쪽에 대해선 몰랐지만 그래도 그래서 일부러 야단을 치곤 했어. 방정맞기는, 재판이야 판사 맘이 지, 변호사가 내보내 줘? 그러니까 언니는, 그거 너 모르는 소리야, 그 치들 다 한 통속이라서 재판 결과는 다 꿰고 있어. 그래서 돈이 얼마나 들었는데, 나 3년 동안 든 적금도 헐었는 걸, 그이도 벌써 쓰던 담요랑 옷이랑 같이 있는 사람들한테 다 줘버렸대, 그 안에서 쓰던 건 재수 없 다고 안 가지고 나온대지, 그래서 내가 막 다 줘버리고 나오라고 그랬 어, 내가 다 사준다고 시간이 갈수록 언니는 한정 없이 들뜨고, 나는 날마다 초조해졌어, 만약 못 나오면 어쩌나, 어쩌나 그리고 그 날이 됐어. 그 언니는 아 예 결근을 했어. 저녁에 그 사람이 나오면 꼭 제 손으로 저녁을 먹이고 싶다고 저녁 준비 해놓고, 재판 가본다고 보통 5시 넘어 나오니까 끝나는 대로 나더러도 자기 방에 오라고, 내 얘기 많이 해놨다고 그래서 갔지. 가보니까 부엌은 먹음직한 냄새로 가득 차있는데, 기척이 없어. 문을 열어보니까 언니가 방구석에서 울고 있는 거야. 그 옆에는 깨진 두부가 놓여있고 날 보고 고개를 드는데, 마스카라 때 문에 시커먼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어. 변호사한테 속았다고, 2년 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313
형 그대로 받았다고, 그 사람은 담요도 다 줘버렸는데 어떡하냐고, 이 제 난 어떡하냐고 은희는 그렇게 긴 얘기를 쉬지도 않고 조용조용 말했다. 혼자 얘기하 는 사람처럼 나직하고 쓸쓸한 목소리로. 정석은 가만히 듣다가 물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게 끝이야. 또 그렇게 매일 면회 가면서 사는 거지, 뭐. 근데 나 그때 그 언니가 그렇게 부러웠거든. 너무 부러워서 죽을 것 같 았어. 뭐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가둬놓고 찾아가는 게. 그게 부러웠어? 넌 순애누님도 부럽겠구나. 순애언니는 또 달라. 너무 바짝 말라있어. 건드리면 가루처럼 부서 질 것 같아. 바짝 마른 가랑잎처럼. 가엾어, 순애언니는. 은희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래도 말야. 그건 내가 찾아가는 거잖아. 내가 보고 싶을 때면 찾 아갈 수 있어. 그게 반대가 되면 얼마나 괴롭다구. 언제 찾아올지 모르 구, 연락할 곳은 없구, 갈 때마다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 들 구, 그거 지옥이다, 너 넌 그런 거 모르지? 그러면서 은희는 정석을 툭, 때렸다. 정석도 장난스럽게 대꾸를 했 다. 내가 저 안에 들어갈까? 오늘이라도 한 건 해서? 들어가서 순애누 님 자형도 만나고, 매일 찾아오는 너나 기다리고. 그 말에 은희는 정석을 바라보며 말한다. 31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정석아, 넌 산산조각이 난 유리컵을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정석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난 이 여자를 안 사랑하니까, 괜찮아, 아 무렇지도 않아, 당장에 그는 좀 전의 제 마음을 부정하고 속으로 중얼 거렸다. 그런 정석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던 은희는 다시 밝은 어조로 말했 다. 난 서른 살이 되면 뭘 하고 있을까? 바가지 긁는 내 마누라가 돼 있겠지. 정석의 화난 말투에 은희는 놀란 듯 그를 보았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넌 저녁마다 내게 돌아오겠지. 난 네가 저 녁마다 돌아온다는 걸 믿으니까 날마다 장을 봐서 된장찌개도 끓이고, 그래, 우린 아이가 없을 테니까 저녁마다 산책을 나갈 수도 있을 거야. 근데, 정말 괜찮니? 아이가 없어도? 안 괜찮은데! 일부러 정석이 그렇게 말하자 은희는 히히, 하고 웃는다. 괜찮다고 했으면 너랑 결혼 안 할려고 했더니 잘 말하네. 그럼, 마 흔이 돼도 우리는 똑같은 모양으로 살겠다. 변한 게 없으니까. 넌 저녁 마다 돌아오고, 나는 그걸 믿고 너를 기다리고, 쉰이 돼도 그러겠지. 넌 저녁마다 돌아오고, 나는 네가 꼭 돌아오리란 걸 믿고 너를 기다리고, 예순이 돼도 너는 저녁마다 돌아오고 세상이 조용하구나. 은희는 갑자기 주위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벌써 상당히 깊은 밤이라 주위는 고즈넉해져 있었다. 날 좀 안아줄래?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315
정석은 길가에 선 채 은희를 꼭 안아주었다. 그녀의 날씬한 몸은 사 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추운 날씨였다. 내가 그 날 밤 널 처음 꼬셨어, 그거 용서해줄래? 정석의 품에 안긴 채 은희는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조만간 내가 꼬셨겠지. 용서해준다는 말이구나, 고마워. 은희는 취해 있었다. 취하면 그녀는 말끝에, 해줄래, 하는 어미를 갖 다 붙이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날과는 어딘가 달랐다. 어쩐지 그는 방을 합치자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해야겠 다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밤의 오케스트라를 벌이고, 깊고 달콤한 잠 끝에 새벽에 깼을 때 은희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자리끼를 놓 아둔 쟁반 위에 곱게 접은 쪽지 한 장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정석아, 나 오늘 원주 집에 내려갈 거야.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 울 엄마 갑자기 너무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났어. 나, 막내잖니? 아직도 울 엄 마 찌찌 만진다, 히히. 사흘쯤 있다 올 거야. 내가 올라오면 연락할게. 아니다, 사흘 뒤에 니가 내 방에 와라. 수요일 날 아침에, 근무 끝나는 대로. 그 전날 밤이나 그 날 새벽에 꼭 올 테니까. 좀 변한 모습일지도 몰라. 머리를 자를까 생각 중이거든. 못 알아 보지 마. 그럼 그때 보자. 잘 있어 316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정석은 속이 탔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그래, 올라오면 방을 합치고 같이 살자고 말하자. 이제는 다가올 고통을 두려워해서 비실비 실 몸을 피하는 비겁한 짓은 하지 말자. 괴로울 때 괴롭더라도 똑바로 삶을 바라보자. 은희를 절대로 놓치지 말자. 그 사흘은 참으로 더디 갔다. 사흘 뒤 야간 근무가 끝난 수요일 아침, 정석은 그 방으로 달려갔다. 은희야, 은희야! 정석은 보통 때처럼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부엌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은희는 약속대로 집에 와 있는 것이다. 아직 자나보다 싶 어 한 바퀴 돌고 들어올까 하다가 너무나 간절히 그녀가 보고 싶었다. 잠을 깨워서라도 마구 살을 비벼 대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마침내 참 지 못하고 정석은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정석은 점점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 나중엔 은희를 큰소리로 부르며 문을 흔들어댔다. 결국 아침잠을 자던 주인아저씨까지 나와 보게 되었다. 그때쯤엔 정석도 불길한 기분에 식 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주인아저씨도 얼른 장도리를 갖고 달려왔다. 어여, 따봐요. 혹시 가스 마신 거 아냐? 부엌문을 따고 들어가자 싸늘한 냉기와 이상한 냄새가 확 덮쳤다. 방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정석은 문을 확 열어 제쳤다. 은희의 몸은 그새 부풀어 그녀 같지 않아 보였다. 그 긴 머리카락만이 살아있는 가느다란 갈색 실뱀의 무리처럼 헝클어진 채 그녀의 마지막 단말마의 고통을 말 해주고 있었다. 못 알아보지 마, 그 말을 적을 때의 그녀의 마음은 이미 이 순간을 보고 있었다. 못 알아보지 마. 그 말을 떠올린 순간 모든 것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317
이 일시에 선명해졌다. 그녀 옆에서 뒹굴고 있는 빈 약병과 거기서 쏟 아져 나온 한 무더기의 알약을, 이미 말라붙어 얼룩처럼 된 청녹색 토 사물을 굳이 보지 않아도.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안타깝게 말하고자 하는 진실. 그것이 정석에 겐 예정된 것, 운명이 휘두르는 칼날이란 것도. 은희는 유서 따윈 남겨놓지 않았다. 이사 갈 사람처럼 그렇게 아꼈던 옷들을 하나하나 신문지에 싸서 차곡차곡 사과 상자 안에 담아 놓았을 뿐. 그 상자 위에는 우유병이 입에 물려 있는 예의 그 아기 인형과 방에 걸려 있던 아이들 사진의 판넬과 그리고 그토록 정성껏 만들던 열 벌도 넘는 인형 옷들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행여 못 보랴, 성냥개비가 가 득한 커다란 팔각 성냥통까지 놓여 있었다. 그 모든 게 유서였다. 다른 물건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디다 어떻게 처리했는지 이불이며, 숟가 락, 아끼던 다리미, 그 어떤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은희는 소매 없는 푸른 여름 윈피스를 입고 있었다. 여름내 한 번도 입는 걸 보지 못한 옷이었다. 언젠가 정석이 걸려 있는 그 옷을 보고, 잘 어울리겠다, 입어봐, 했을 때, 그 남자가 사준 옷이야, 누구 줘버린 다는 게 못 그랬네,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던 그 옷. 날씬한 은희의 몸에 잘 어울렸을 그 옷은 이제 부어오른 그녀의 몸을 지탱하지 못해 곧 터질 것처럼 보였다. 저 옷을 어떻게 입었을까, 사람들은 그렇게 생 각할 것이다. 그녀의 삶처럼. 처음엔 그녀에게 딱 맞았을 날씬했던 삶 이 그만 부풀어 올라 그녀를 파괴시킨 것처럼, 어떻게 저런 삶을 살았 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사람들. 사흘쯤 있다 올 거야. 내가 올라오면 연락할게. 아니다, 사흘 뒤에 니 가 내 방에 와라. 수요일 날 아침에, 근무 끝나는 대로. 그 사흘 동안 은 318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희는 원주에 가지도, 엄마를 만나 찌찌를 만지지도, 머리를 자르지도 않았다. 그건 다 거짓말이었다. 그것은, 적어도 사흘 동안, 자기가 확실 하게 죽을 수 있는 그 시간 동안 정석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고안된 작전일 뿐이었다. 용의주도하게도 그녀는 대문을 따로 써서 돌아 들어 있는 주인에게도 며칠간 원주에 다녀오겠다고 말을 했다. 물론 주인네 는 그런 말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보통 때도 열흘에 한 번이나 얼굴이 부딪힐까 말까 한 사이였다. 혹여 세상에 다시 돌아오는 일이 있을까봐 그녀는 불안했던 것이다. 그녀의 용의주도한 계획은 아귀가 다 잘 들어 맞아 그녀는 성공적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이 세상으로 다시는 돌아오 지 않았다. 은희의 날씬한 몸뚱이를 태우는 시간보다 그녀가 챙겨둔 물건들을 태 우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녀가 정성 들여 사 모아둔 세련된 고급 옷들 을 태우는 데는 더더욱 시간이 걸렸다. 그건 그녀를 태운 쪽의 화력이 훨씬 셌던 탓일까. 그 옷들 중에는 정석이 사준 싸구려 티셔츠도 한 벌 들어 있었다. 살 았을 때도 은희는 그런 싸구려 옷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몇 번 걸치지 않았던 그 옷을 그는 불길 속에 던져 넣었다. 내키지 않아 마지막으로 미루어둔 인형과 인형 옷도 한꺼번에 던져 넣었다. 헝겊으로 만들어진 인형의 몸통은 옷들과 함께 금세 타올랐지 만 고무로 된 인형의 얼굴은 오그라들며 오래도록 탔다. 몸통이 사라진 채 얼굴만 남은 그 인형은 불길 속에서 마치 제 인생이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정석은 그 얼굴이 검은 콜타르처럼 다 타들어가도록 끝까지 지켜보았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319
<에필로그> 새벽 3시, 고속도로 위 운전을 하다 졸리는 일은 좀체 없는 일이었다. 정석은 언제나 낮에 충분히 잠을 자고 길을 떠났다. 그는 이 일이 좋았다. 한밤의 고속도로 를 달리는 일, 아무도 없이 혼자서 트럭을 모는 일을 그는 즐겼다. 그래 서 그는 언제나 조는 일 없이 목적지에 닿았고, 그곳에서 맞는 새벽의 단잠을 좋아했다. 그런데 오늘은 충분히 잠을 자고 떠났는데도 그렇게 수마가 몰아쳤던 것이다. 은희, 네가 찾아오려고 그랬던가. 그는 차 앞에 매달린 작은 달력을 보았다. 그랬구나, 오늘이 1월 11일, 모레가 은희의 기일이었다. 정석은 운전석 옆 차창을 열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폐를 휘돌아나간 연기가 어둠 속으로 퍼져 나갔다. 밤공기가 찼다. 화물차들이 내는 굉 음이 밤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가 사랑하게 된 소리였 다. 그 소리에 섞여 한밤의 고속도로 위를 질주할 때면 그는 비로소 살 아있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혼을 할 수 도 없었을 것이고, 결혼 생활을 견뎌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일은 어 쩌면 그에게 있어 하나의 배설작용이었다. 자신 속에 있는 어떤 것을 그는 이 속에서 풀고, 그리고 생활로 돌아갔다. 정석은 아내를 사랑했고, 여섯 살짜리 딸아이를 눈동자처럼 아꼈다. 이제 잔인한 운명의 여신은 그에게서 눈을 뗐는지도 몰랐다. 그는 행복 했다. 그러나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새벽 세 시의 고속도로, 그 길 위의 어두운 시간 덕분에 그가 이 행복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뺨에 손을 대보니 축축했다. 꿈을 꾸며 울었나 보았다. 다시금 꿈속 320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의 통증이 되살아났다. 누군가 날것인 염통에 담뱃불로 지져대는 것 같 은 통증. 11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어제같이 생생한 통증, 그러나 오랜 만에 떠올린 통증이었다. 그 동안 세월은 어떻게 흘렀던가. 정석은 다시 묵묵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변한 건 없어 보였다. 은희 의 자살은 공장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동시에 지루한 노동 시 간 내내 입에 올리고 구구한 억측을 하며 떠들어댈 수 있는 흥미로운 얘깃거리였다. 제빵부의 임주임은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한눈에도 색기 가 가득한 30대 초반의 유부녀 김선옥을 서은희 자리에 대신 들임으로 써 또 다른 얘깃거리를 제공했다. 박순애는 매년 은희의 기일마다 그녀의 재를 뿌린 섬강으로 갔다. 거 기서 혼자 술과 음식으로 제사를 지내고 돌아왔다. 정석은 단 한 번도 그 길에 동행하지 않았다. 박순애는, 이번에도 안 갈 거니, 하고 매번 물으면서, 하긴 나도 그래, 쓸데없는 짓거린 줄 알면서도, 다 날 위해 하는 일이지, 그게 그년 위해 하는 일이겠니, 하며 한숨을 쉬곤 했다. 박순애의 남편은 감옥에서 나온 다음에도 여전히 노름빚을 늘려갔 고, 아내를 두드려 팼다. 어느 날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져 버렸 다. 어디로 갔는지, 소식 한 장 없기는 그녀의 남편에게나 정석에게나 마찬가지였다.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김영애의 편지를 받았다며 경실이 한번 찾아오기도 했다. 친구들에 게 말없이 떠난 데 대한 사과 편지였다. 정석에게 말했듯 자신에 대한 진실을 털어놓기도 한 편지였다. 수배 중이라며 주소는 써있지 않았다. 정석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321
영애의 방은 겨우내 빈방으로 남았다. 봄기운이 스밀 때 비로소 그 방도 주인을 맞았다. 복숭아빛 뺨을 가 진 어린 아가씨였다. 스물두 살, 그녀도 스물두 살이었다. 하지만 그녀 는 열일곱 살처럼 보였다. 천진하고 건강하고 어여뻤다. 정석은 계속 나이를 먹어갔는데, 여자들은 언제나 스물 두 살이었다. 진우도 그에게 는 스물 두 살이었다. 진우라니, 그녀는 언제나 그에게 영애로 남아 있 었다. 복숭아빛 뺨의 그 아가씨는 어느 날부턴가 정석을 볼 때마다 뺨을 붉 혀서 그 집 아줌마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그런 그녀를 정석은 측은하게 바라보며 세월을 보냈다. 그녀는 너무도 곱고 깨끗해서 그가 만난 어떤 여자와도 달랐다. 그는 그 순진하고 수줍은 여자에게 차마 접근할 수 없었다. 그 해는 격동의 해였다. 정석의 신변에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가끔 씩 라디오에서 듣는 뉴스들이 연초부터 심상치 않았다. 박종철이라는 학생이 고문을 받다 죽은 사건이 불씨처럼 타오르더니 최루탄을 맞아 죽어가는 이한열 학생의 소식이 기어코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그는 그런 뉴스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쓰게 웃었다. 그 것은 영애에 대한 그리움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전 같으면 소화제 광고만큼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자신과 무관한 뉴스들이었다. 하지만 세상 역시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6월 항쟁의 물결은 안 양까지 파고들었다. 홍섭의 팔에 끌려 시내로 나섰을 때, 이미 인파는 대로를 채우고도 넘쳤다. 놀라웠다. 흥분한 홍섭과 휩쓸려 다니다가 정 322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석도 사흘간의 유치장 신세를 졌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그에겐 무 의미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 6.29 선언으로 시민들은 가라앉았는데, 전국의 공 장들이 들고 일어났다. 안양에서도 수많은 공장들이 파업을 했다. 어느 유인물에선가 그것을 7, 8월 노동자 대투쟁 이라고 쓴 것을 그도 읽 은 적이 있었다. 발렌타인 제과도 파업을 했다. 처절했다. 물건을 빼 가는 차를 막기 위해 여공들은 차 앞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정석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 다. 하지만 그때도 그에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홍섭이 열심히 하 니까 같이 참가해줄 뿐이었다. 정석의 그런 성향을 아는 회사 측에서 그를 구사대쪽으로 넣으려 했지만, 그것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는 어느 쪽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사람들의 열정을, 분노 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에게는 남아있는 열정도, 분노도 없었 다. 그럼에도 정석은 기물파손죄라는 죄명으로 한 달간 구류를 살아야 했고, 회사에선 잘리고 말았다. 한 번도 옮기지 않고 11년을 다닌 회사 였다. 그는 미련이 없었다. 한 달간 구류를 살 동안 종태 엄마가 면회를 왔다. 종태 엄마의 치마 꼬리에 매달리듯이 쫓아온 복숭아빛 뺨을 가진 그 여자는 결국 회사도 그만 두고 매일 면회를 왔다. 그녀의 뺨은 행복으로 더 발그레해졌다. 정석은 그녀의 모습에서 은희를 보았다. 갇혀있는 애인에게 매일 면회 를 가는 여자를 부러워하던 은희. 출소하던 날, 정석은 그녀의 방에서 잤다. 둘은 방을 합쳤다. 그는 화 물차 회사에 취직했고, 그녀는 고만고만한 공장들을 전전했다. 돈이 모 였을 때, 그들은 작은 전세방을 얻었다. 그 방에 들어가기에 앞서 구민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323
회관을 빌려 조촐한 결혼식도 올렸다. 그의 나이 서른일 때였다. 그 사 이 그 집의 식구들은 많이 갈려서 그의 결혼식에 와 준 사람은 종태 엄 마와 박씨 아저씨뿐이었다. 박씨 아저씨는 도망친 부인 생각에 결혼식 내내 울었다. 그 세월 중에 홍섭은 복직하여 노조위원장이 되었다. 정석도 복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한밤에 고속도로 위를 달 리는 이 일이 더 좋았다.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날로부터 치면 벌 써 12년, 영애라면 서른넷이 되었을 것이고, 진우라면 서른아홉이 되었 을 세월. 결혼을 하면서 그 방을 떠날 때, 정석은 비로소 울었다. 그 울음은 은 희에 대한 것이었고, 영애에 대한 것이었다. 은희가 죽었을 때, 정석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영애가 떠났을 때도 그는 울지 않았다. 그때까 지 고여 있던 눈물이 한꺼번에 흘러 나왔다. 그는 그 여자들을 마음속 에서 깨끗이 베어냈다. 방 값 남은 걸 줘야 하는데, 생전 연락을 안 해, 모질기도 하지, 내가 그리 정을 쏟았는데, 가끔 수돗가에서 종태 엄마 가 그를 보면 푸념을 하곤 했다. 정석은 누구 얘긴가 싶어 한참을 어리 둥절해하기도 했다. 이제 정석은 누이의 꿈도 꾸지 않았다. 어쩌다 꿈을 꾸어도 누이와 의 어린 시절 행복했던 꿈만을 꾸었다. 누이도 이제 편히 잠든 모양이 었다. 은희의 꿈은 이상하게 단 한 번도 꾸지 않았다. 오늘 처음으로 꾼 것이다. 그것도 영애와 겹쳐져서. 나는 누구의 꿈을 꾼 것일까. 정석은 문득 자신이 정말로 은희를 만난 적이 있던가 의심스러웠다. 푸른 원피스를 입고 있던 퉁퉁 부어오른 그녀의 모습도 어느 영화의 한 324 제2회 김만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장면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또한 영애의 곁에서 남매처럼 잠들었던 그 밤의 추억도 어쩐지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면 자신이 윤진우 따위의 이상한 이름을 기억할 리 없었다. 핸드폰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시계는 4시를 넘어서고 있다. 복숭 아빛 뺨을 가진 여자임이 분명했다. 아내는 정석 없이 혼자 잠드는 밤 이면 언제나 한 번씩 잠에서 깼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졸리지는 않는지, 배고프지는 않은지, 다감한 아내는 세세하게 물을 것이다. 그리고 딸아이의 새로운 재롱에 대해 종알종알 얘기할 것 이다. 정석은 천천히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당신이죠? 안 졸려요? 아내의 귀여운 음성이 핸드폰에서 새어나왔다. 잠들어 있던 다른 차들도 서서히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저 어둠 속으로 하나씩 스며들 것이다. 시간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지는 인간들처럼. 정석 역시 곧 차를 출발시킬 것이다. 소설부문 금상 이후경 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