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본문, 다른 설교 축복을 위한 떠남 (창 12:1-3) 이동원 새로운 천년이 밝아 왔습니다. 저는 이 밝아온 새 천년, 새해의 길을 출발함에 있어서 우리 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있다면 미래지향적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지향적 사고방식의 반대가 무엇일까요? 과거 지향적인 사고이겠지요.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어떤 과 거로 자꾸만 회귀하고 싶은 그런 과거지향적인 사고방식의 틀이 매우 견고하다는 생각이 듭 니다. 서양 사람들의 문화적 배경이 유목민이어서 계속 양떼를 몰고 옮겨 다니는 그런 전통을 갖 고 있었습니다. 한국은 농경문화의 전통에서부터 문화가 형성되어서 한 곳에 집을 짓고 대 대로 이렇게 식구들이 살아가면서 울타리를 쌓고 우리의 것을 지키고 또 낯선 것에 대해서 저항하는 그런 전통을 가꾸어 왔기 때문에 개방적이기보다는 폐쇄적이고 미래적이기보다는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본능이 훨씬 더 강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의 최대의 욕 가운데 요즘에는 별로 쓰지 않는 것 같은데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많이 썼던 표현이 있 습니다. 객사할 놈 이란 욕입니다. 객사할 놈. 고향을 떠나서 집을 떠나 바깥에서 죽는 것 을 최대의 그런 비극으로 생각했던 전통이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산업화의 시대 그리고 지식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이런 농경문화적 사 고의 유산은 아직도 우리의 생각의 밑바탕에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과거에 대한 향 수, 고향에 대한 향수. 한국인처럼 그렇게 끈끈한 그런 민족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선거 때가 되면 다시 한국인들에게는 혈연과 지연이 맹렬한 위력을 발휘할 것 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것은 사실 미래지향적이 아니죠. 우리가 이런 것을 뛰어넘어야 세계 의 시민으로서 앞을 향해서 발전해 갈 수가 있습니다만은 한국인은 자꾸 과거 회귀적인 그 런 본능을 깊이 지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노래방에 가서 노래 카탈로그를 한번 뒤져 보면 아마 대종을 이루는 제일 많은 노 래의 내용들이 고향에 대한 노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성가대도 지금 "그리운 본향" 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사역자들하고 근처 식당에 갔는데 식당 2층에 노래방을 차려 놓아서 카타로그를 쭉 훑어봤습니다. 그랬더니 고향에 관한 노래가 쫙 나왔 습니다. "고향무정, 고향이 남쪽 이랬지. 고향이 좋아, 구름 나그네, 귀국선, 귀로, 꿈에 본 내 고향, 나그네의 설움, 남행열차, 눈물에 젖은 두만강, 부산 갈매기, 돌아와요 부산항에, 이 별의 부산 정거장, 떠나가는 배, 머나먼 고향, 비 내리는 호남선, 산 넘어 남촌에는, 새벽기 차, 이별의 인천항, 한 많은 대동강, 흙에 살리라. 흙에 살리라 가 뭔가 봤더니 가사가 초가 삼간 집을 지은 내 고향 정든 땅 아기 염소 벗을 삼아 논밭 길을 가노라면 이 세상 모두가 내 것인 것을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고향을 버릴까 나는야 흙에 살리라 내 사랑 명자와 손을 잡고서 명자가 아니고 아마 순이 일거예요. 순이와 손을 잡고서 흙에 살리 라.
연말에 보니까 지나간 30,40년 동안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했던 이런 대중가요말고 이런 가 곡 가운데도 리스트에 빠지지 않는 것이 가고파 같은 노래들이었습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이런 고향에 대한 회 귀적 본능이 우리 마음 속에 가장 깊이 자리잡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고향을 좋아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사고가 고향에 얽매여 있다면 이것은 매 우 폐쇄적입니다. 개방적인 세계, 세계화의 시대,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 이것 은 매우 중요한 장애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은 세계 시민의 사고 방식의 저해물일 뿐만 아니라 신앙에도 장애 요인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삶의 양식, 사고 방식에는 항상 미래적인, 미래 지향 적인 그런 깃발이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자꾸만 가족에 연연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 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이제 내 제자로 따라 나섰으면 그 미래를 향해서 가자고 주께서 말 씀하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창세기 12장에서 시작해서 고향을 떠나 미래를 향해서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나아갔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 가 누굴까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 그런데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고향을 떠남으로써 그 이야기가 시작이 됩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창세기 12장 1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아 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떠나라. 는 명령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떠나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지시하는 그 땅으로 가라. 이런 말씀으로 시작이 됩니다. 세 가지를 떠나라고 그랬어요. 본토를 떠나라. 네 잔뼈가 굵어 왔던 그 삶의 터전을 떠나 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삶의 근거를 바꾸라는 주님의 도전이기도 합니다. 네 친척을 떠나라. 너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네게 영향을 주었던 과거의 영향력에서부터 이제는 벗어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네 아비 집도 떠나라. 아비는 소중하고 중요하지만 그러나 새로운 가치관과 미래 를 향해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영향에서부터도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삶의 주인이 필요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는 안목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우리는 새로운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의 나라로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관으로 이 제 수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가 우리를 위해 서 준비하신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 이게 바로 신앙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심의 가장 중요한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떠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떠나는 것은 포기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포기는 단순한 희생이 아닙니다. 그것은 축복을 위한 떠남이라 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떠나라 내가 준비한 땅이 있다. 그러면 서 2절 이하에 내가 너로 커다란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천하 만민이 너를 복되다고 일컫게 될 것이다. 너의 떠남은 축 복을 위한 떠남이다. 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떠날 때는 아픔이 있습니다. 떠날 때는 포기가 있습니다. 떠남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떠남은 축복에 대한 떠남인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새해를 떠나가는 출발선상에 있습니다. 우리가 새해를 떠나면서 우리의 떠 남이 축복의 떠남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그 교훈을
배우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의 출발이 축복의 출발, 축복의 떠남이 되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어요. 아브라함은 그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 그것이 그의 새로운 삶의 출발점을 형성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7장 2절과 3절을 보면 본문의 내용이 먼 훗날 스데반이란 사람의 입술을 통해서 보다 자세히 설명됩니 다. 아브라함이 하란 땅에 있기 전에 본래 고향이었던 메소포타미아에, 갈대아 우르라는 도 시에 살았는데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안에 있었던 도시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 있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렇게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되어 있어요.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셨어요.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 게 보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가 지시하는 그 땅으로 가라.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그 땅을 향해서 가라 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보고 하나 님의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조그만 성경공부모임을 인도한 적이 있었는데 창세기 12장을 공부하고 있었 어요. 갑자기 한 분이 그 이야기를 하니까 말하기를 목사님 저도요 하나님이 한번만 나타 나서 나에게 말씀하시면 저 하나님 잘 믿을 거예요. 한 번만 저도 나타났으면 한 번만 나에 게 나타나신다면 저는 그냥 하나님을 잘 믿을 거예요. 제가 그 분에게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송사장님, 이미 하나님께서 사장님에게 나 타나셨고 혹은 이미 말씀하셨는지도 모르는데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셨는지도 모르지요. 글쎄요 저는 말씀을 음성을 들은 일이 없는데요. 이러더라구요. 그래서 사장님, 우리가 지금 성경 공부를 지금 하고 있는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십니까? 믿고자 합니다. 그래요. 부인 따라서 온 분이라 별로 믿음이 없었던 상태였습니다. 잘, 믿고자 합니다. 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 동안 성경공부를 벌써 몇 차례 했는데 이 성경 말씀을 나눌 때 이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다 이러한 마음으로 성경을 같이 나누고 계셨다면 송사장님도 하나님 음성 들은 거예요. 그래요? 그거 아세요? 가만히 계시더라구요. 히브리서 1장 1절에 보시면 "옛적에 여러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습니 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방법, 하나님이 인간에게 커뮤니케이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뭐 진짜 이렇게 형상으로 나타나실 수도 있죠. 하나님이 원하시면 왜 그런 방법으로 못하시겠어요? 기적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그런 방법을 쓰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초자연적이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운 방법으로도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 방법을 채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예요.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이렇게 나타나 주셨으면 좋겠다. 라는 우리의 어떤 선입관같은 기 대감이 있습니다. 내가 기대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성경은 하나님은 말씀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수년 전에 세상을 떠나간 유명한 기독교 철학자인 프랜시스 쉐이퍼 박사가 쓴 책 가운데 이 런 책이 있어요. 그 분은 거기에 계신다. 그리고 그는 말씀하신다. (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 그리고 그 분은 침묵하지 않으신다. 그는 거기에 계시고 그 분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우리가 듣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말씀하시는데 이 우주 속에는 소리가 가득합니다. 라디오에 다이얼을 맞춰 보세요. 당 장 소리가 들려요. 그러나 우리에게 그 중간 방법이 없기 때문에 듣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 니다.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바울이 그 당시 세계의 수도인 로마에 들어갑니다. 전도를 해 요. 어떤 사람만 믿어요.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답답해 하면서 사도행전 28장 26절 이하에 이런 말씀을 기록합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그 다음절에 보시면 이 백성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고 그리고 그 눈을 감았으니 보지 못하는도다. 가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 그 바울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확하게 같은 메시지를 우리는 히브리서 3장 15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 을 강퍅하게 말라" 다시 말하면 성경은 우리 마음이 준비만 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준비가 되면 얼마든지 들을 수가 있어요. 어린 소년 사무엘이 엎드려서 자기 일생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리면서 제가 여기 있 나이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그랬을 때 어린 소년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저는 여러분 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좀 엎드려서 진지하게 새해 벽두에 성경 좀 읽어보세요. 그리고 기도해 보세요.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 나에게 부딪쳐 오는 하나님 의 말씀이 뭔가? 그 말씀 속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세요. 하나님의 음성을 한 번 들으면 인생이 달라져요. 그것이 새로운 출발이 될 수가 있습니다. 혹시 QT하다가 중 단하신 분이 있으면 다시 말씀 읽고 기도하는 생활을 회복하세요. Quiet Time이란 것에 익 숙하지 못한 분은 이번 기회에 QT훈련도 받으시고 또 QT가 잘 안 되시는 분들은 새벽기 도에라도 나오셔서 엎드리세요. 그리고 주님을 사모하세요. 그리고 주의 말씀을 듣고 싶다고 말하세요. 하나님 말씀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신다 한 번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인생이 달라질 줄 믿습니다. 아브 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새로운 출발이었습니다. 그것이 새로운 인생이 었습니다. 그의 위대한 영적 여정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축복을 위한 떠남을 할 수가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계획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여러분, 그 음성 속에서 나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내 인생을 향하여 내 삶을 향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이 바로 내 인생의 꿈이 됩니다. 비전이 됩니다. 그리고 그 계획이 나의 계획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새해가 되면 이 제 새해 계획을 세웁니다. 일기도 쓰고 새해를 향해서 요즈음은 잘 정리된 수첩을 가지고 하루를 계획하기도 하고 한 달을 계획하기도 하고 일 년을 계획합니다. 중요한 일이죠. 그러 나 믿지 않는 사람들의 계획과 우리 성도들의 계획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냥 계획하는 거예요. 자기 생각대로, 자기 소견대로 계획하는 것입니 다. 그러나 우리는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한다면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
해야 될 것 아닙니까? 하나님 어떻게 살까요? 하나님 내 일생을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습니 까? 좀 보여 주세요. 인도해 주세요.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어떤 뭔가가 들려와요. 내 마음 속에 어떤 인상이 다가 옵니다. 그리고 어떤 감격이 있습니다. 감동이 있습니다. 우 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계획을 붙잡는 순간 하나님의 계획이 나의 비전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달라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어요. 내가 너로 내가 너를 통해서 그 땅에 가면 민족을 이루겠다. 그리고 너를 축복의 근원처럼 써 주겠다. 그래요 하나님? 그 순간부터 아브라 함의 마음 속에는 위대한 민족에 대한 비전, 내가 위대한 민족을 이끌어가는 그 첫 출발점 이 될 수가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의 근원이 될 수가 있다. 는 희망이 생겼습니 다.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비전이 생겼어요. 꿈이 생겼어요. 하나님의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브라함의 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중요해요. 사랑하는 여러분, 두 사람이 꼭 같이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고 말씀을 들어요. 한 사람은 예 배 끝나고 성령충만해서 용기백배하여 새로운 의욕을 가지고 벌떡 일어나서 찬양을 하며 인 생을 향해서 도전을 시작합니다. 또 한 사람은 예배 드리고 가는데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 은 것처럼 또다시 무기력하게 또 다시 방황하는 모습으로, 또 다시 좌절하는 모습으로 그냥 인생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똑 같이 두 사람이 성경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말씀을 통해서 내 인생의 새로운 비전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을 발 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자기 인생에 대한 새로운 설계를 통해서 벌떡 일어나서 나아갑니다. 그러나 똑 같은 한 사람은 아무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무기력하고 좌절된 모습으로 그 자리를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 니다. 무슨 차이예요? 그 차이가 뭘까요? 같이 말씀을 들었어요. 그리고 한 사람은 믿었어 요. 그것은 바로 믿음의 차이입니다. 자, 본문은 아브라함의 일생을 추적하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에서 강조된 단어는 믿음으로 입니다. 믿음으로, by faith, 믿음으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믿은 거예요. 나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그렇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향해서 이런 놀라운 준비를 하셨구나! 그것을 믿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은 것이예요. 믿음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4장2절에 보시면 "들은 바 말씀이 유익 되지 못한 것은 들은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한 번 따라서 같이 해 보세요. 들은 바 말씀이 유익 되지 못한 것은 들은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함이라. 똑 같은 사람 이 말씀을 들었어요. 두 사람이 꼭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들은 바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 유익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차이가 뭐라고 그랬어요? 믿음을 화합하지 아니함 입니다. 믿음에 응답이 없었습니다. 내가 그 말씀을 믿음으로 수용할 때 받아들일 때 하나님 믿습 니다. 그래요 나를 향해서 놀라운 비전을 준비하셨군요. 믿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어떤 사람이 와서 그 가 나안 땅에 관한 사전을 전달한 것이 아니란 말이죠. 여러분, 아브라함이 절대로 갈대아 우르라는 그 고향이 나빠서 떠난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고고학이 발달되면서 이 갈대아 우르라는 메소포타미아 우르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인 발견 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옛날에 무려 25만 명이나 살았대요. 우르 지역에. 25만 명. 고고학적인 발굴을 하면 이 지역에서 2, 3층의 벽돌집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괜찮은 도시 이고 발전된 도시고 문명이 있었던 도시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에게는 그 지역을 떠나는 것 이 더 어려웠을 것 이예요.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말씀을 믿었습니다. 믿음으로 출발 한 것입니다. 사전 지식이 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었습니다. 또 뭐 하나님이 꼭 아 브라함에게 어떤 환상으로 딱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무얼 보여주지 않을 수도 있어 요. 그래도 믿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뭐라고 했습니까? 믿음의 본질을 설명할 때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의심 많았던 제자 도마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본 고로 믿느냐" 그 다음에 뭐라 고 그랬어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더 복되다" 아브라함은 보지 못하고 믿었어요. 그 래서 그의 믿음은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 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십니까? 이 말씀 속에 내 생애 가운데 다가오는 하나님의 계 획, 하나님의 계획. 여러분, 만물의 영장인 이 인간, 그 소중하게 지어주신 여러분과 저의 인 생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이 없겠어요? 있어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계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예요. 축복을 위한 떠남의 출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세요. 둘째로 하나님의 계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의 인도를 순종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시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순종하여" 그랬습니다. 그래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 자, 우리는 순종하여 단어 하나만 딱 기록되어 있기 때 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래 맞았어. 나는 그 축복의 땅으로 가야 해. 아브라함이 직통으로 그 땅을 향해서 나아갔다.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우리 가 아브라함의 그 역사적 상황을 추적해보면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상 아브라함은 치열한 고뇌와 갈등의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 순종의 자리에 도달한 거예 요. 마침내 마침내 순종의 자리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의 순종이 완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본래 떠났던 곳이 어디라고 그랬어요? 그의 고향이 어딥니까? 갈대아 혹은 메 소포타미아 지역입니다. 창세기 11장 31절입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 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 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본래 있었던 고향은 어딥니까? 갈대아 우르라는 지역의 우르라는 도시 에서 떠났습니다. 중간에 어디에 왔습니까? 하란에 왔어요. 하란에 한 동안 머물러 있었던 거예요. 성경학자들에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란에 6년까지 머물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합니 다. 직통으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중 에 중간에 하란이란 곳에서 한 동안 머물러 있었어요. 그 지리를 살펴보면 유프라테스 강을 끼고서 서쪽으로 오는 도상의 길에 있어서 이 하란까지의 길은 비교적 쉬운 것입니다. 거기 까진 잘 왔어요. 그런데 하란에서 한 동안 머물러 있었어요. 12장 4절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 였더라" 하란을 떠날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얼마였습니까? 칠십 오세였습니다. 아주 늦게 떠났어요. 뒤늦은 순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란에서 왜 이렇게 오래 머물렀느냐? 하란을 다시 떠날 수 있었던 결정적 전기에 대한 이유를 사도행전 7장 2절 이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 다. 이 하란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죽었습니다. 죽고 나서 비로소 떠났습니다. 그러 니까 그 아버지라는, 그 가족이라는 존재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계속 나아가지 못하게 만 든, 하란에서 상당한 기간을 머물게 한 어떤 장애요인이었을 지 모릅니다. 사실 하나님이 아 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은 떠나라 너 혼자 먼저 떠나라! 였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전도하면 우리 가족이 안 믿기 때문에 못 믿겠습니다. 가족이 다 믿을 때까 지는 믿지 못하겠습니다. 우리는 가면 같이 온 가족이 지옥에 함께 갈 예정이고 천국도 함 께 갈 예정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족을 천국으로 다 인도하려 면 누군가 한 사람이 먼저 결단을 해야 해요. 한 사람이 먼저 떠나면 나중에 따라 와요. 그 런데 같이 가겠다 기다리면 아무도 안 와요. 아마도 그런 비슷한 의식 구조가 아브라함에게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온전한 순종이 아닙니다. 네 친척을 떠나. 그랬는데 아버지 도 모시고 조카 롯도 데리고 다 데리고 떠났어요. 아브라함의 순종은 결코 완전한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데라가 죽음으로서 비로소 떠날 수 있었습니다. 불완전한 순종, 부분적인 순 종,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중간 과정을 다 생략합니다. 제가 만약 아브라함의 전기를 기록한다면 전 틀림없이 그렇게 기록했을 거예요. 아브라함 이 막 고민을 계속했다. 떠날까 말까 갈대아 우르를 갈까 말까 떠날까 말까, 그러다가 아무 래도 하나님 편을 따라가는 편이 유익하다고 판단한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그 다음에 또 하란에서 계속 갈까 말까 여기서부터 더 커다란 어려운 사막길이 기다리고 있는 데 주저하다가 고민하다가 할 수 없이 아브라함은 떠나서 그리고 어느날 드디어 가나안 땅 에 들어왔다. 뭐 나 같으면 그렇게 기록할텐데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어요. 그냥 아 브라함이 믿음으로 순종했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결론을 보세요. 저는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믿는다고 그러지만 우리의 믿음이 결코 온전한 것이 아님을 깨 달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복잡한 동기가 섞여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 속에 회의도 섞여 있어 요. 우리의 순종 속에도 불순종이 섞여 있습니다. 우리의 불완전한 믿음, 불완전한 순종.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이 결코 온전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순종이 결코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뭐 어떤 사람은 믿는다면 깨끗하게 믿는다. 그냥 100% 확 믿고서 나간다. 이런 사람도 있을지 모르죠. 그러나 이것은 극히 예외에 속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그 러나 이 불완전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첫 걸음, 순종의 첫 걸음, 또 한 걸음, 또 한 걸음. 여러분, 이 걸음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몰라요. 그래서 드디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약속한 그대로 두 가지 축복을 자기 개인의 명예로운 축 복을, 그가 위대한 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영향이 온 세계 사람들에게 그의 후손 가운 데서 메시야가 오시고 메시야를 믿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던 놀라운 삶. 그러나 이 위대한 축복의 삶은 아브라함의 불완전했던 한 걸음의 믿음, 한 걸음의 순종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 걸음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 걸음.
에디슨이 인류역사상 최초의 전구 실험을 할 때였습니다. 드디어 전구 실험에 성공했어요. 그러나 그 전구가 얼마나 희미한지 촛불을 밝혀야 볼 수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재 미있습니까? 전구를 만들긴 만들었는데 촛불을 비춰 놓고 볼 수가 있었던 전구. 그러나 이 것이 첫 걸음이었어요. 그 첫 걸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처 음 만들어 날렸을 때, 그 비행기는 공중에 불과 12초를 머물다가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불완 전한 첫 걸음, 그 첫 걸음이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위대한 걸음의 첫 걸음이었습니 다. 불완전했지만 그 첫 걸음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을까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스팀배가 미국 뉴욕에서 알바니아를 향해서 배가 나아갈 때 30시간이 걸렸습니다. 뉴욕에서 알바니아 까지 지금 배를 타면 천천히 가도 30분이면 갑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30시간이 걸렸어요. 30시간. 그러나 이 최초의 첫 걸음에 그 스팀엔진의 고동소리와 함께 떠나갔던 배의 첫 운항이 얼마 나 중요했을까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자동차 실험은 1시간에 2마일을 갔다고 합니다. 1시 간에 2마일. 그러니까 마차하고 달리면 자동차보다 마차가 먼저 갑니다. 그래서 마차 타고 가는 마부들이 자동차를 비웃습니다. 내 마차나 타라! 차라리 그러나 그렇게 출발했던 그 불완전한 자동차의 시운전의 첫 스텝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 까? 사랑하시는 여러분, 불완전해도 괜찮아요. 불완전하지만 우리의 믿음의 첫 스텝, 이 한 해를 향한 우리의 믿음의 첫 걸음, 헌신의 첫 걸음, 봉사의 첫 걸음. 이 첫 걸음이란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탄생한 지 6주년을 맞이합니다. 꼭 6년을 맞이합니다. 우리가 6년 전 탄생 준비 이전에 우리는 두 달 동안 우리는 수지 선경 마그네틱 카세트 테이프를 만드는, 저 앞 에 있는 공장 5층 복지관 강당에서 우리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미국 살다가 한국 나 와서 개척교회를 처음 시작하고자 했을 때 처음에는 같이 돕는 분들이 강남에 있었기 때문 에 강남에서 시작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장소를 구할 수가 없더라 구요. 그래서 강남 아래 분당이라는 데가 있는데 분당에서 장소를 찾아보자 고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너무 비싸요. 개척하는데 비싼 장소를 구할 수가 있나요? 조그만 장소도 빌리려고 하니까 억, 억 하더 라구요. 그것도 구할 수가 없고 그런데 어떤 분이 분당도 여의치 않은데 분당 건너편에 수 지라는 곳이 있는데 그 곳이 어떠냐? 고 해서 수지로 갔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수지라는 곳이 있다는 소식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수지에 아파트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 채의 아파트도 없었던 수지에 선경 카세트 테이프 만드는 공장이 있는데 거 기에 5층인가 6층인가 강당이 있는데 한 이삼백 명 들어갈 수가 있을 것 같다고 해서 거기 에 가 봤어요. 조그만 강당인데 그래도 시작하기에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세트 테이프 만드는 공장 안에 들어가니까 케미칼 화학 냄새가 코를 찔러요. 거기 한 65명이 모 여 처음 시작했던 모임, 그것이 우리교회의 시작입니다. 거기 5층 쭉 올라가면서 5층, 6층 건물인데 신기하게 엘리베이터가 없더라구요. 어떻게 6층인데도 엘리베이터가 없을까? 또 층계가 얼마나 가파른지 몰라요. 그래서 그 당시 우리가 제일 좋아했던 찬송이 올라가면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그러면서 축복된 교회, 위대한 공동체에 대한 꿈 을 꾸면서 시작했던 6년 전 바로 이 무렵. 6년이 지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에 대해서 아직까지 모릅니다. 하나님만이 완벽한 그림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다시 불완전하지만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서 형성하는 공동체지만 그러나 우리는 전능하 신 하나님을 믿고자 합니다. 또 그 분을 순종하고자 합니다. 또 우리의 그 모든 불완전한 동
기들과 사람들이 섞여 있는 우리들의 생각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또다시 믿음으로 한 걸음 그리고 순종함으로 한 걸음 내디딜 때 우리의 걸음 가운데는 마침내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 의 영광의 땅에 도달시키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비전이 약속된 줄 믿습니다. 창세기 12장 4절에 보시면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말씀을 따라서 갔 다. 고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성경은 간단히 처리하지만 천신만고의 과정들이 있는 거예요. 5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거기서 인상적인 단어가 무엇입니까? 마침내 다같이 마침내. 마침내 가나안 땅에. 그렇습니 다. 그 불완전한 믿음의 첫 걸음 그러나 순종의 첫 걸음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달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의 걸음이 불완전한 걸음이라고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리고 하나님의 비전과 계획을 신뢰하면서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믿음과 순종의 걸음을 옮겨갈 때 마침내 우리에게 영광을 주실 하 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우리를 하늘의 비전에 도달시키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여러분과 저의 삶의 장에도, 우리의 생업의 장에도, 우리 인생의 장에도 함께 하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지구촌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