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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인도 성지 순례기(1) (현성스님, 2005.2.20) 미국 시카고 불타사에서는 인도성지 순례를 위해 2004년 1년동안 준비하여 2005년 1월12일 시카고 시간으로 낮12시에 대한항공편으로 오해어(O'Hare) 공항을 출발하여 13시간 정도 걸려 서울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서 4시 간동안 대기한 후 다시 대한항공편으로 인도로 향하여 9시간 걸려 뭄바이 (Mumbai)공항에 인도 시간으로 1월14일 금요일 새벽3시10분에 도착하여 숙소 인 리란(Leelan)호텔에 도착하니 오전4시10분이었다. 우리 일행은 유명성행, 손예숙, 이해심, 이현숙, 원자현심, 김유심화, 조덕인화, 김수경심, 강창근, 이성자, 나 그리고 서울에서 합류한 두 분의 불자님과 이기만 금강여행사 사장을 합하여 모두 14명이었다. 호텔은 별등급이 7개(7 Star)라 고급이었고 호텔에서 처음 만난 인도 사람들 은 친절하면서도 침착하게 보였다. 보살님들에 의하면 호텔에서 일하는 남자들이 모두 잘생겼다고 말씀하신다. 시카고 묘우 보살에게 전화하였다. 인도 시각으로 14일 금요일 새벽5시36분이 시카고는 13일 오후6시16분이었다. 시차가 인도가 시카고보다 12시간30분 빠 르다. 예를 들면 시카고 아침6시가 뭄바이는 같은 날 오후5시30분이라고 알면 되겠다. 1월14일 금요일 오전8시30분 기상하여 9시에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였 다. 부테스타일인데 다양한 메뉴와 음료수가 준비되어 있어 모두 식사를 즐겁게 먹었다. 아침10시에 간디박물관, 웨일즈박물관을 관람한 후 중국식당에가 점심을 먹었는데 별로 입에 맞지 않았다. 그 후 영국 조지(George)세자가 인도를 방문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인디아게이트(India Gate)를 보고 난 후 한 시간정 도 배를 타고 엘레판트 섬에 있는 힌두교 석굴암에 갔다. 조각한 돌로 된 힌두신 들과 남근( 男 根 ) 석상이 있었다. 그 가까이에서 남근을 쳐다만 보고 있는 우리들 에게 그 곳 사람이 우리들에게 절을 하라는 시늉을 하여 우리도 합장 배례하였 다. 남근을 만물의 창조신으로 숭상하였던 힌두신앙 시대를 보이고 있었다. 남녀 의 사랑을 음양이 조화하는 창조의 과정으로 묘사하는 웅장한 조각이다. 아쉽게 도 동굴안이 너무 어두워 사진기가 그것을 잡을 수 없었다.

간디박물관에서는 간디를 인도의 아버지로 숭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도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 인도가 낳은 가장 위대하신 분이 간디가 아닌가 생각되어 미국에 돌아가면 그의 생애를 한 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일즈박물관에는 돌로 된 조각품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불교, 자이나교, 힌두교 작품들이 섞여 진열되어 있었다. 주로 6-8세기 작품들인데 자 연석을 채취하여 모양을 새기고 다듬어 진열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옛날에 바위 에 새겨진 불상을 도굴하여 일본으로 가지고 갔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조각에 아 무런 손상 없이 거대한 암석을 떼어낼 수 있었을까 생각했었는데 진짜 그렇게 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자이나교 불상과 불교 불상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똑 같았다. 다만 앞가슴의 두 젖꼭지 선과 가슴 중앙선이 만나는 점에서 약간 위에 위치한 조그마한 다이아몬드형 세모선이 있는 것은 자이나교 부처님 좌상이고 없는 것은 불교 부처님 좌상이라고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입상의 경우에는 자이나교 불상은 나체모양을 하고 있고 불교 불상은 가사를 걸 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오늘 느낀 점은 인도사람들이 주는 인상이었다. 너무나 사람들이 정중하고 공손 한 모습, 그리고 불만이 없고 서두르는 모습이 없는 듯 보이는 점이다. 이들은 평 화와 편안을 상징하는 아름다움으로 비춰졌다.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모습들은 이 나라의 미래를 약속하여 주는 듯하였다. 하지만 한국에 6.25동란 시절 개천가 에 줄지어 있던 난민들의 천막집같이 생긴 동네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렇다고 인 도사람들이 다 이렇게 가난한 것은 아니다. 인도 사람들 가운데는 세계적인 재벌 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말을 잘하는 인도사람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인도에는 지금 힌두교도가 65%로 점차 하향세를 보이고 있고 이슬람교도는 35%로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 며 불교도는 0.5% 정도라고 했다. 1월15일 토요일 오전6시에 기상하여 아침식사를 먹은 후 뭄바이 역을 출발하 는 기차편으로 5시간 걸려 오랑가바드 역에 도착하여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엘로 라 석굴사원로 향하였다. 도중에 잘 꾸며진 큼직한 식당에 들러 밥과 김치, 라면 등으로 점심을 먹기 위

해 기다리는 중에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물으니 밖을 가리켰다. 문 밖을 나가 보 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화장실이 없다고 하니 우리 안내원이 자연화장실을 이 용하라고 했다. 우리 일행은 인도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넓고 시원한 자연화장실 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그 곳은 바로 식당 밖의 넓은 밭이다. 확 트여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간에서 볼 일을 보지 않을 수 없는 우리들은 제각기 알아서 볼일을 보 고 돌아와 의자에 앉아 자연화장실이 얼마나 시원하고 좋았는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재미있는 광경이 벌어졌다. 유심화보살이 저기 봐! 청소부가 와 서 청소하고 있다 고 했다. 손을 가리키는 쪽으로 밖을 쳐다보니 정말 돼지가 와서 우리들이 볼 일 본 것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이를 본 우리는 모두 폭소를 금할 수 없었다. 이곳에는 돼지를 놓아기르는데 볼일 본 냄새를 맡고 돼지들이 모여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큰 식당에 어떻게 화장실이 없나 했더니 자연의 섭리를 이용하는 자연화장실이 여러 가지 시설이 필요한 현대식 화장실보다 환경 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깨끗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돼지가 우리들 입맛을 돋우 어줘 안내원이 준비한 밥, 김치, 라면, 그리고 시카고에서 준비해 온 밑반찬 등을 너무나 맛있게 먹었다. 점심 공양 후 5시간 걸려 엘로라(Ellora) 석굴사원에 도착하였다. 이 석굴은 거대한 바위산에 인조동굴을 만들어 그 안에 불상을 조각하여 모셨 고, 대중 집회를 하는 법당 그리고 스님들이 공부하고 휴식하는 방들이 있었다. 불교 동굴이 1번에서 12번까지 12개 동굴이 있고, 힌두교 동굴이 13번에서 29 번까지 17개, 자이나교 동굴이 30번에서 34번까지 5개 동굴로 모두 합쳐 34개 의 동굴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동굴들은 서기 4세기경에 불교 석굴사원이 조각되기 시작하였는데 인도 왕 조의 바뀜에 따라 불교석굴 사원건축이 12번째에서 중단되고 힌두사원 건축이 시작되어 150년간에 걸쳐 조성된 후 7세기경에는 자이나교 사원 건축이 조성되 기 시작되었다고 한다. 사진을 통하여 약간이나마 볼 수 있지만 우리는 그 규모의 웅장함, 건축술, 조 각술 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동굴 하나가 넓이 5천 sq ft, 높이 15 feet 정도는 되어 보였다. 불상을 모신 상단이 있고, 상단을 중심으로 좌우 벽에 스님들이 거처하는 방들이 연이어져 조성되어 있고, 낭간이 있고, 낭간과 법당 사 이에 천장을 받치는 돌기둥이 있으며, 좌우 기둥 사이가 법당인데 법당 넓이가

아마도 3천 sq ft는 되어 보였다. 법당은 물론 대중 법회에 사용하는 공간이다. 불상은 결가부좌상이 아니라 의자에 앉아 있는 좌상이었다. 어떤 부처님은 두 려워하지 마라 라는 뜻을 상징하는 무외시수인, 삼매수인, 설법수인 등을 하셨 다. 천장은 돔 형식으로 된 것도 있고 평평한 것도 있는 데 평평한 것에는 부처 님의 생애 혹은 보살상 등이 그려져 있고, 기둥에도 연꽃 보살상 혹은 신장상 등 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4세기경에 어떤 공구를 가지고 이렇게 거대한 암석을 뚫고 파내어 동굴을 만들었고 그 안에 이런 위대한 조각 작품을 만들었을까. 정말 놀 라지 않을 수 없었고 신앙의 위대성과 신비성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기에 비하 면 시카고에 반반한 절하나 없는 것이 너무나 부끄럽게 여겨졌다. 이와 같이 위대한 종교의 유산을 두고도 종교 의식을 집행하는 성직자들은 없 고 다만 제복을 입은 경비원 2명만이 사원을 지키고 있어 아쉬운 감이 있었다. < 사진은 일반게시의 기본 앨범 참조 >

인도 성지 순례기(2) (현성스님, 2005.3.2.) 1월16일 일요일 오전8시에 오랑가바드에서 버스편으로 호텔을 출발하여 아잔 타(Ajanta) 석굴사원으로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에 간단한 점심을 먹고 운행시간 7시간 정도 걸려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아잔타에는 30개의 석굴로 구성되어 있 는 불교 최대( 最 大 ) 최고( 最 古 )의 인조 석굴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석굴사원이다. 서기 기원전(BC)300년에서 기원후(AD)100년 사이에 완공한 석굴도 있고 기원후460-500년 사이에 완공한 두 그룹이 있다. 바카타카 (Vakataka)왕조에 하리세나(Harisena)태자가 AD460년경에 왕위에 오른 후 그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건축가와 미술가들을 파견하여 석굴 불사에 전념하게 하였다. 그 때 석굴 26, 17, 18, 19, 2번이 완성되었다고 서기1800년대에 월 터 스핑크(Mr. Walter Spink)라는 유명한 영국 역사학자가 주장하였다. 스핑크(Mr. Spink)보다 천년전 현장법사의 인도 기행문에 이 동굴에 대한 기 록이 있다고 한다. 현장법사는 중국 당나라 스님으로 서기650년경 15년간 인도 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난후 당나라로 돌아와 유명한 현장법사가 되었다. 이 동굴들은 하리세나 왕이 5세기말에 죽은 후 이 석굴에 사는 사람이 없어지 기 시작하여 풀과 나무 먼지 등으로 가려져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석굴을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 1819년에 영국군 장교 존스미스(John Smith)가 호랑이 사냥을 나갔다가 어 느 굴로 달아난 호랑이를 좇아가 그 굴에서 호랑이를 찾다가 불상이 모셔져 있는 동굴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이 영국학계에 알려지자 많은 영국 역사학자 미술 가 등이 방문하여 이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해서 그 동굴은 기원전 200년경에 조 성된 것으로 알려지게 되고 30개의 동굴 모두 찾아내게 되었다. 영국 학자들에 의하여 많은 연구가 있었고 1951년에 이르러서야 인도 정부에 의하여 국보로 지 정되고, 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한다. 영국학자들에 의하여 아잔타라는 그 동내 이름은 현세가 아닌 내세부처 라 는 뜻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내세에 미륵부처님이 오실 땅이라고 해석된 다.

기원전300년에 인도사람들은 돌산을 파고 들어가 동굴을 만들었는데 50피트 정도의 넓이에, 70피트 깊이, 20피트 높이 정도가 한 동굴이다. 이러한 동굴이 30개나 있다. 중앙 가장 깊은 곳에 불상을 모셨는데 돔 형식으로 된 천장에 닿을 정도로 불상이 크다. 불상은 가부좌, 의자좌상, 입상 등이 있고 돔형식의 천장은 갈비뼈와 같은 형식으로 조각되어 있고 문도 말발굽 형으로 약간 긴 홍시 같이 생겼다. 천주교회에서 정문과 창문에 많이 쓰는 형식이다. 벽 쪽으로는 돌로 깎은 기둥이 천장을 받치고 있고 기둥과 기둥 사이는 20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법당이 있다. 벽에는 한 사람이 서서 다닐 수 있는 넓이와 높 이의 문이 있고 그 문 안에서 혼자 충분히 자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있 었다. 이것은 스님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는 방으로 사용된 듯 했다. 어떤 동굴에는 천장을 평평하게 하여 여러 가지 벽화가 천장과 벽에 그려져 있 었다. 지금은 벽화들이 많이 퇴색되었으나 1800년대에 영국 사람들이 찍은 사진 은 식별할 수 있는 정도인데 이들이 책으로 나와 있다. 벽화는 주로 부처님의 전생담, 그리고 현세 등이 주제가 되어있다. 기원전에 이 미 단청색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나, 지상도 아닌 석굴 건축술, 돌을 조각하는 조각 술, 미술 등이 지금도 놀라울 정도로 발달하였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기원전 200년에서 기원후 600년, 800년간에 꽃 피웠던 찬란한 인도불교문화, 당대에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 조각가, 미술가들이 여기에 다 모여 그들의 기예( 技 藝 )를 마음껏 아낌없이 표현한 작품들이 아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 기에 모여 부처님께 기도하고 법을 배우고 깨침을 얻기 위해 수행하였기에 30개 나 되는 걸작의 석굴들을 조성하였을까. 그렇게도 융성하고 번화하던 석굴도 세 월의 원에 따라 변화하여 모든 사람들이 흩어지고 자랑하던 동굴사원이 잡초와 나무 먼지 등에 가려져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사라져 버렸다. 그 후 1000년이란 기간 동안 밤과 낮이 바뀌면서 세월은 무심( 無 心 )할 수만은 없었던 모양이다. 석굴사원을 조성한 건축가, 조각가, 미술가들의 혼이 호랑이로 화현하였던지 관 세음보살이 호랑이로 화현하여 사냥꾼 영국군 장교 존스미스를 1819년에 부처님 을 모신 이 석굴로 인도하여 그 당시 영국과 유럽에 유명하다고하는 건축가, 조 각가, 미술가들이 모두 이곳에 몰려와서 감탄하여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그 결과 를 발표하기도 하여 후에 아잔타의 30개 석굴이 불교 최대( 最 大 ) 최고( 最 古 )의 인조 석굴로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석굴사원이 되었다. 지금

은 인도 내국인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오는 관광객들, 그리고 건축, 조각, 미술, 실내장식 등을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이 이를 보고 연구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자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이 가운데는 물론 한국에서와 몇 달씩 머물고 있는 젊은 학생들도 있었다. 우리 일행은 아잔타 석굴사원 순례후 버스편으로 부사발에 와서, 부사발에서 열 차를 타고 가며 밤을 세고 새벽3시경에 보팔에 도착하여 호텔에 투숙하였다. <사진설명> 022와 023: 동굴 안 가장 깊은 중앙에 조각된 불상, 020: 동굴 좌측 벽 입구에서 시작하여 벽 끝까지 조각된 부처님 열반상 014, 015, 016, 017: 동굴 전경 028과 030: 돌산과 동굴들의 외형

인도 성지 순례기(3) (현성스님, 2005.3.13.) 1월 17일 아침 식사 후 버스 편으로 산치로 이동하여 기원전 300년 전에 아 쇼카대왕이 세운 불교 조형미술의 원형( 元 型 )이라고 할 수 있는 산치 대탑을 참 배하였다. 산치 대탑에 얽혀 있는 전설이 있다. 아쇼카가 왕자시절에 하도 말을 듣지 않고 장난이 심하여 왕가에서 쫓겨나 이 도시 저 도시로 돌아다니다가 한 여인을 알게 되어 재미있게 살고 있었다. 그 때 왕가에서는 이웃 나라와의 전쟁에 패하여 왕이 고민하고 있을 때 한 대 신이 왕에게 혹시 아쇼카 왕자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전쟁에 임하 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건의하였다. 왕도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아쇼카를 찾 아오게 하였다. 왕의 칙명을 받은 아쇼카는 그 때 아쇼카의 여인이 임신했을 때라 정표를 하나 주며 급한 일이 있으면 이것을 가지고 나를 찾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 후 그 여인은 아들을 낳았다. 아쇼카 왕자는 왕명을 받아 장군으로서 군사를 일으켜 그 이웃 나라와 다시 싸 워 그 나라를 완전히 항복받았다. 왕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다시 왕자에게 또 다 른 이웃을 정복할 것을 명하였고, 왕자는 왕명을 받들어 싸워 그 이웃도 정복하 였다. 이 두 전쟁에서 왕은 아쇼카 왕자가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히 있다 고 확신하여 왕위를 아쇼카에게 계승시켜 주었다. 왕위에 오른 아쇼카왕은 계속 이웃 나라들을 정복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아쇼카왕의 여인은 자기가 낳은 아들이지만 이 아들은 왕자의 몸이라 더 이상 자기가 기를 수 없다는 생각에 아들에게 아버지가 준 정표를 가 지고 아쇼카왕을 찾아가게 하였다. 아쇼카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그 여인을 왕궁으로 모시고 오게 하였으나 그 여 인은 (서민이 아니면 천민이었는지 모르지만) 병을 빙자하며 한사코 왕궁에 가는 것을 거절하고 편지 한 장을 보냈다. 내용인즉 나는 부처님을 의지하면서 살고 싶고 또 이 곳에 부처님을 의지하 여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으니 이 곳에 부처님의 사리탑 하나를 조성하여 주 시면 더 이상 대왕에게 바랄 것이 없습니다. 였다. 이를 읽은 대왕은 그 당시 최 고 건축가와 조각가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사리를 구하여 그 여인이 살고 있는 곳 에 부처님의 사리 대탑을 세우게 하였다.

그리고 그 대탑의 사방에 문을 세우고 그 문에 부처님의 상을 조각한 대문을 조성하게 하였다. 이것이 불교 조형미술의 원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쇼카왕 이 이 탑을 세운 후 이 탑에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참배하는 것을 보고 아쇼카왕 은 전쟁보다 탑을 조성하여 백성들의 신앙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데 정성을 모으 게 되었다. 아쇼카대왕은 인도 전국을 통일하고 가는 곳마다 사리탑을 세워 8만4천 개의 탑을 조성하여 불법을 전하여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전륜성왕( 轉 輪 聖 王 ) 이 되었다. 당시 인도에 사성( 四 姓 ) 계급이 성하던 시대에 서민과 왕자와의 사이 에 얽힌 애절한 사랑의 표현인 동시 그 사랑의 힘의 신비성과 위대성을 보여주는 대왕의 성업( 聖 業 )이다. 산치대탑 참배 후 우리 일행은 특급열차편으로 아그라에 도착하여 호텔에 투숙 하였다. 1월18일 화요일 아침 식사 후 세계 5대 불가사의 건축물인 타즈마할(Taj Mahal)과 15, 6, 7세기 인도를 지배한 무굴왕조의 도성인 아그라성을 관람하였 다. 1612년에 무굴제국(Mughal Emperor)의 대왕 샤자한(Shah Jahan)은 세 번 째 왕비로 19세의 뭄타즈마할(Mumtaz Mahal)을 맞이하였다. 그 후 19년 간 왕비로서 뿐만 아니라 왕의 정치고문으로 훌륭한 참모역할을 하였으며 전쟁터 에까지 가서 왕을 보필한 명실상부한 왕의 반려자가 되었다. 그러나 1631년 6월 17일 14번째 애기를 분만하던 중 39세로 이 세상을 마감 하였다. 그 때 왕은 버한퍼(Burhanpur)를 공략하는 전쟁 중이었으나 돌아와 그 의 왕비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였다. 그는 그들의 사랑이 불멸하는 사랑으로 영원이 남아 있게 하기 위해 왕궁(무덤) 을 조성할 것을 결심하고 착공한지 22년만에 완공하였다. 그러나 이 왕은 왕궁은 완성하였으나 왕자의 난을 만나 왕위를 찬탈 당하고 감옥에 갇혀 지낸지 8년 만 에 죽었다. 그러나 왕이 감옥에서 타즈마할 왕궁을 볼 수 있게 배려하여 주고 죽 은 후에 왕비의 묘 옆에 안장하였다 한다. 이 건물은 세계적인 건축 조각 미술 그리고 사랑의 표현으로 세계 5대 불가사 의한 건축이 되어 유명하다. 아그라 성은 무굴제국의 왕실이 있었던 곳이다. 그 장엄하고 웅장한 규모에 감 탄하였다. 우리 일행은 버스 편으로 아그라를 출발하여 기차정거장에 와서 침대 열차편으로 8시간 걸려 바라나시에 19일 아침7시 경에 도착하여 호텔에 투숙하

였다. 침대차에 누워있으니 앞의 두 여인 생각이 났다. 한 여인은 아쇼카의 야인시절 같이 산 여인으로 왕이 다시 왕자를 찾는 행운을 아쇼카에게 안겨주었고, 아쇼카의 아들을 낳아 아쇼카대왕이 대군을 지휘하며 이 웃 나라들을 정복할 때 아버지의 손발이 되게 하여 주었으며, 무력으로 나라를 정복하고 사람을 죽이는 전쟁보다 부처님의 사리탑을 세워 부처님 법을 전함으로 서 전 인도를 통일하여 만백성이 존경하는 전륜성왕( 轉 輪 聖 王 )이 되게 하였다. 그 러면서도 자기 스스로에게는 서민인 자기의 분수를 알아 왕비의 자리를 마다하고 자기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부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여생을 보냈다. 또 한 여인인 뭄타즈마할은 19세 꽃다운 나이에 왕비가 되어 왕의 사랑을 독차 지하여 나라를 좌지우지하였으나 단명하여 39세에 죽었다. 죽은 왕비는 산 왕을 22년간이나 타즈마할 궁(무덤)을 건축하는데 전력하게 하여 사랑을 받고, 전 세 계에서 5대 불가사의한 궁전 건축을 완공하게 하고 난 후, 왕자의 난(조선시대 방원의 난과 같은)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타즈마할 궁 을 바라보는 것으로 8년간의 여생을 마치고 그 여인의 무덤 옆에 묻혔다. 정말 남녀관계의 일은 묘( 妙 ) 자( 字 ) 그대로 묘하고 묘하다. 아쇼카의 여인과 같이 남자에게 항상 은은한 사랑과 행운을 전하여주는 사랑을 좋아하는 남자와 여자도 있겠지만 샤자한 왕과 뭄타즈마할 사이와 같이 말기가 불행하더라도 짧으 나 한 없이 깊은 미로 속에서 화끈한 사랑을 해보고 죽고 싶은 남자와 여자도 있 을 것이다. 한 없이 엮어가도 끝이 보이지 않고 닮은꼴이 하나도 없는 것이 남녀의 묘한 사랑이 아닌가? 남녀의 만남에 좋은 연도 있고 나쁜 연도 있으니 어떠한 인연이 좋은 연이 될 수 있는 인연일까? 사진첨부 37, 40, 42: 산치 대탑과 정문 41: 산치 대탑 33: 4문 중 한 문 35, 36, 38, 39 : 사방 문의 조형미술 43: 우리 일행과 타즈마할 44: 타즈마할 전경

46: 우리 일행과 아그라 왕궁에서 바라보이는 타즈마할 궁. 우리 일행이 앉아 있 는 자리가 당시 왕의 자리이고 그 앞이 대신들이 앉는 자리였다고 한다. 모두 인도 무굴왕조의 왕이 된 기분으로 이 자리에 앉았다. 45: 우리 일행과 당시 타즈마할 궁 관리인의 숙소;

인도 성지 순례기(4) (현성스님, 2005.3.20.) 1월 19일 수요일 오후에 초전법륜지 바라나시 사르나트 녹야원에 도착하였다. 초전법륜지란 부처님께서 우주의 진리를 깨달으신 후 처음으로 법을 설하신 진 리의 수레바퀴를 굴리신 곳이라는 뜻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우선 부처님 당시 어린 고타마 싯달타가 문제가 있다고 본 인도의 사회상이 무엇인지 먼저 아는 것이 좋 겠다. 당시 인도에는 사성( 四 姓 )계급 제도가 있었는데 하나님께 제사( 祭 祀 )를 지내는 바라문족은 하나님에게 선택된 선민으로 제일 상위계층에 속하고, 국가를 보호하 기 위해 외적을 막고 치안을 유지하는 왕족은 바라문족 다음에 위치하는 귀족이 고, 대다수의 백성들은 서민과 천민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으 로부터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이에 불복하지 말고 절대 순종하여야 한다고 하 였다. 그리고 혼인은 각 계급 간에만 허용되고 다른 계급과는 허락되지 않으며, 그것 을 범하였을 때는 바라문족은 죄가 없고 다른 계층사람들은 엄한 벌을 받았으며, 같은 계급 간에도 여성은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왕이 될 수 없으며, 또 여인과 천민은 출가 수행하는 것이 금지 되어 있었다. 따라서 천민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하였다. 이 비참한 모습을 보고 당시 카필라국의 태자 고타마 싯달타는 어떠한 이유로 저 사람들은 저렇게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고타마 싯달타는 태자의 직위와 부인과 아들을 뒤에 두고 29세 청춘에 출가하여 수행생활 6년만에 사람과 모든 살아 있는 중생이 받는 고 통의 원인을 깨달으셨다. 그가 깨달은 우주의 진리는 첫째, 하나님은 모든 사람과 일체 중생에게 평등하 시다. 그렇기 때문에 사성계급은 물론 인종간의 차별을 만든 그런 하나님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남녀의 차별을 만든 하나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녀를 포함한 일체 중생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견해( 見 解 )로 만들어진 구속으로부터 해탈하 여 자유로워야 한다. 둘째, 상( 償 )을 주고 벌( 罰 )을 주는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은 오직 나의 자유로

운 의사에 의하여 나의 책임 하에 나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신다. 내가 남에 게 해롭게 하든 이롭게 하는 마음가짐, 말하는 버릇, 몸으로 행하는 동작 등으로 짓는 업장( 業 障 )이 내가 받을 행 불행 그리고 고통의 원인이다. 이렇게 하여 받 는 고통을 과보( 果 報 )라고 한다. 이것은 내가 한 일에 대한 결과는 내가 받고 그 결과는 다시 새로운 행동의 씨앗이 된다는 뜻이다. 내가 심은 씨앗의 결과를 내 가 받고, 내가 받은 결과가 새로운 씨앗이 되어 새로운 행동을 하게 한다. 이것이 행복의 방향으로든 불행의 방향으로든 내가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셋째, 하나님은 저 먼 하늘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에 충만하시니 우주의 작은 우주인 내 안에 계신다. 이를 우리 불가( 佛 家 )에서는 법신( 法 身 ), 진여( 眞 如 ), 불성( 佛 性 ), 참나, 주인공 등으로 부른다. 그러므로 내가 행복한 삶을 사는 극락( 極 樂 )을 누리기 위해서는 과거에 지은 업장을 소멸하고 새로운 악업( 惡 業 ) 을 짓지 않게 하기 위해 많은 선업( 善 業 )을 쌓아 가야하며 세상의 이치를 아는 도( 道 )를 깨닫기를 원하면 선정( 禪 定 ) 수행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팔정도 ( 八 正 道 )를 닦아야 인간이 받는 모든 구속에서 해탈하여 대자유( 大 自 由 )를 누릴 수 있다. 부처님께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중생의 평등과 자유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깨달으시고 이를 제창하셨다. 이 진리를 처음으로 설하신 곳이 바로 이 바라나시 녹야원이며 이 설법을 최초로 들은 사람이 고타마 싯달타가 출가하여 수행하실 때 같이 수행한 바 있는 다섯 비구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고타마 싯달타가 성불 ( 成 佛 )하였음을 믿지 않았으나 부처님의 거룩한 덕과 위의( 威 儀 )에 감동받아 무 릎을 꿇고 예의를 갖추어 법을 청하였다. 부처님께서 드디어 말문을 여셨다. 그대들은 나를 여래( 如 來 )라고 부를 것이 요, 고타마라고 하지 말라. 무슨 까닭인가. 나는 이미 감로의 도를 발견하였고, 나는 이제 감로의 법을 증득하였기 때문이니라. 나는 곧 바로 부처로서 일체지 ( 一 切 智 )를 완전히 갖추었으며 고요하고 번뇌가 없어서 마음에 자재로움을 얻었 느니라. 그대들이 나의 가르침을 받아 지녀 따르고 청정히 수행한다면 곧 해 탈 락을 얻으리라. 출가 수행자에게는 반드시 버려야할 두 가지의 장애가 있 다. 첫째는 마음이 욕망의 경계에 집착하여 쾌락에 빠지는 것이니 이는 어리석은 범부들이 찬탄하는 바이며 출가인의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는 무익한 것이다. 또 하나는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괴롭히는 고행에 빠지는 것이니, 이는 출가의 목적 과 수단이 전도된 것으로써 심신이 모두 고통의 과보에 떨어질 뿐 출가인의 숭고 한 목적을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해탈의 원인이 아니며 욕망을 소멸하는 원인이 아니며, 부처를 성 취하는 원인이 아니므로 반드시 버려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치우침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깨달았다. 수행자들이여, 중도( 中 道 )란 무엇인가? 이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말함이 니, 곧 정견( 正 見 ) 정사유( 正 思 惟 ) 정어( 正 語 ) 정업( 正 業 ) 정명( 正 命 ) 정정진( 正 精 進 ) 정념( 正 念 ) 정정( 正 定 )이니라. 이 중도는 모든 것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알 수 있는 통찰력과 직관이므로 지혜를 낳아 범부의 눈을 뜨게 하고 이들은 마음의 평화와 진리의 크나큰 체험으로 열반을 성취케 하리라. 고 설하시고 부처님께서 이들을 직접 지도하시어 이 비구를 모두 득도( 得 道 )하게 하셨다. 그들은 그들이 오랜 세월 동안 수행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던 도( 道 )를 깨닫게 되 니 감개무량하여 부처님께 귀의하고 제자가 되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부처님은 이들을 비롯하여 2년 사이에 천이백오십명의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을 제자로 두 게 되고 당시 가장 큰 나라인 마갈타국의 빈비사라왕도 부처님께 귀의하게 되어 자유와 평등을 전 인도에 선양하는 막강한 교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불교나라 바라나시 초전법륜지에서 2500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우 리들 모두 5비구가 되어 부처님의 설법을 다시 새겨 보며 참배하는 이 감격을 어 디에 비할 수 있을까! 나무 석가모니불. 첨부 사진 50, 53: 바라나시 초전법륜상. 부처님께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여 대해탈을 성취하여 대자유와 평등을 누리게 하라는 수인( 手 印 )을 하고 계신다. 56, 57, 60: 아쇼카왕이 세운 초전법륜지 기념탑에서 일행이 예불을 모시고 있다. 58, 59: 아쇼카왕이 세운 초전법륜지 기념탑 탑돌이 하는 우리 일행. 55: 아쇼카왕이 세운 초전법륜지 기념탑과 우리 일행. 49: 바라나시 입구에서의 일행 54: 녹야원 5비구상

인도 성지 순례기(5) (2005.3.27, 현성스님) 1월20일 목요일 새벽 일찍 바라나시를 출발하여 수자타 마을의 대탑을 참배하 고 니련선하를 건너 보드가야에 들어와 마하보디 대탑에 도착하였다. 이 때는 이 미 해가 상당히 저물어 대탑 사진을 찍기에는 너무 어두워 대단히 아쉬웠다. 보드가야는 고타마 싯달타가 위없이 높은 우주의 진리를 깨달으시고 성불( 成 佛 ) 하신 지명이고 마하보디 대탑은 부처님의 성도( 成 道 )를 기념하기 위해 기원후 2 세기경에 지어졌다고 하는 170피트, 그러니까 거의 60미터 높이의 대탑사원이 다. 탑 안에는 대형 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수많은 순례자들이 기도하고 있었다. 이 탑 바로 뒤에 보리수가 있고 보리수 아래 넓고 평평하게 생긴 바위가 있는 데 이 바위가 부처님이 성도하실 때 앉으신 자리라 하여 금강보좌라고 한다. 그 곳에서 부처님의 발자국이 새겨진 바위가 발견되었다 한다. 우리 일행은 많은 순례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108배 하고난 후 예불을 모시고 기도하고 난 다음 탑과 보리수 주위를 탑돌이 하였다. 이 탑 주위에 많은 순례자 들이 자리를 펴고 앉아 기도하는 사람, 참선하는 사람, 티벳식 오체투지하는 사람 등으로 가득하여 빈틈이 없었다. 이 탑 밖에는 티벳, 일본 등 많은 외국인 사원들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불교용 품 상가들이 매우 활발한 영업을 보이고 있었다. 부처님 성도지( 成 道 地 )에 너무 늦게 도착 하였는데다 사람이 너무 많아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갖지 못 하고 아쉽게 호텔로 가야했다. 1월21일 금요일 새벽5시에 버스편으로 보드가야를 출발하여 오전10시경에 나 란다 대학에 도착하였다. 나란다 대학터는 보드가야에서 62키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부처님께서 이 곳에 여러 번 오셔서 설법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 해 기원전 300년에 아쇼카왕이 스님들이 기거하며 수행할 수 있는 사원을 건립 하였다. 5세기 경에 굽타(Gupta)왕이 부처님과 인연 깊은 이 사원을 확장하여 나란다대학을 건립하였다. 이 대학에서는 스님들을 교육하고 불교를 연구, 발표할 뿐만 아니라 불교, 미 술, 천문, 의학, 출판술, 도서관 등 다양한 종합 교육기관으로 발전시켜갔다. 인 도 학생은 물론 중국 한국 등 세계 각국에서 오는 유학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는 교육기관으로 발전하면서 7세기와 9세기 두 차례 더 크고 더 넓게 증축되었다. 폭 5키로미터 길이 10키로미터에 자리한 이 대학에 1만여명의 학생에 2천여명 의 교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2세기에 이슬람교도들이 인도를 침입하여 모

든 도서와 건물을 불태워버려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그 터에서 부처님을 모 셨던 법당, 강당, 학생들의 공부방 등을 안내원이 설명하여 주었다. 이 곳은 또 사리불의 출생지라 하여 사리불탑이 현재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이 곳에서 서울 동국대학교 동창 비구니 두 스님을 만났다. 이 두 스님은 보드 가야에서 2개월간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날 아침에 나란다 대학에 가 보고 싶어 왔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오늘 왕사성으로 먼저 갈 예정이었으나 왕사성 으로 가는 길에 다리가 파손되어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나란다 대학에 오전에 들 리게 된 것이었다. 정말 신기하게 만난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그 중 유진스님은 내가 미얀마에 갔을 때 한 수행처에 한국스님들이 약 30명이 수행하고 있다고 하여 호기심으로 한번 방문해 보고 싶어 1시간 정도 짬을 내어 방문하였는데 그 때 그 곳에서도 기이하게 만난 적이 있는 스님이다. 오후에 마갈타국의 수도 왕사성에 도착하여 법화경 설법지인 영취산에 올라가 영취산 봉에 독수리바위 옆 평평한 바위 위에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신 자리 가 있었다. 우리 일행은 이 곳에서 관음기도 염불을 하고 부처님께 예불하였다. 부처님 성도 후 1년에 마갈타국 국왕 빔비사라왕이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 과 제자들에게 공양을 올리던 중 부처님이 거처하실 건물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부처님의 허락을 받아 사원을 건립하여 부처님께 기증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사 원이고 대나무 숲에 있다고 하여 죽림정사( 竹 林 精 舍 )라 하였다. 이 곳에는 현재 이슬람 사원이 들어와 있었으나 부처님 당시 아주 넓게 자리 잡은 사원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이슬람 사원이 된 죽림정사의 비운( 悲 運 )을 무엇으로 형용할 수 없는 요동이 우리 일행의 가슴을 한 없이 치고 있었 다. 가슴을 치는 요동 소리를 들으며 불멸 후 최초의 경전 결집장인 칠엽굴을 향하 였다. 칠엽굴을 본 후 3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파트나에 도착하여 투숙하였다. 지난 주 탐방기에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바는 사성계급( 四 姓 階 級 )을 만든 하느 님( 梵 天 )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남녀의 차별을 만든 하느님도 없고 상을 주고 벌을 주는 하느님도 없다고 하였다. 그 시대에 이 혁명적인 깨달음을 부처님께서 어떻 게 설하셨기에 네 계급 중 가장 높은 계급인 바라문족이 그를 해( 害 )하지 못하였 을 뿐만 아니라 국왕들이 오히려 그에게 귀의하였을까?

한 때 바라문의 한 청년이 부처님께 와서, 고타마여 사문은 어떻게 하여 하느 님( 梵 天 )의 율법을 무시하고 바라문을 능멸하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젊은이여, 나는 내 부모님을 1대로 할 때 그 위로 4대까지는 왕족인 것을 분명 히 알고 있소. 그러나 그 위는 내가 분명히 알 수 없으므로 내가 왕족이라고 주 장할 수 없소. 젊은이는 본인이 바라문족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증조아버지와 할머니의 족보를 찾아보십시오. 젊은이의 증조할머니가 바 라문족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이 사실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만일 증조할머니 께서 바라문이 아니었다면 할아버지는 바라문족입니까 아닙니까. 그리고 내 앞에 서 계시는 젊은이도 바라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부처님을 해( 害 )할 작심을 하고 그렇게 당당하게 대들던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 고 그것이 사실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풀이 죽어 가슴을 조아리고 부 처님 발에 절을 하고 물러났다. 이 부처님의 말씀에는 지나간 천년동안 소수의 바라문족이 인도를 지배하여 오 면서 천민여인들과의 관계가 혼잡하여져 100% 바라문의 피를 가진 바라문족은 없어졌다. 바라문족이 없어졌으니 왕족도, 서민도, 천민도 없으니 사성( 四 姓 )이 평등하다. 그러하니 사성계급을 만들었다고 하는 하느님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의 미가 깔려 있다. 한 바라문 남자와 천민 여인 사이에 관계가 있었다고 하여 바라문이 남자에게 는 죄를 묻지 않고 천민여인에게만 가혹한 형벌을 내리고 있는 광경을 부처님이 목격하셨다. 부처님이 바라문에게 말하였다. 똑 같은 장소에서 똑 같은 시간에 남녀가 똑같은 행동을 했는데 어떻게 남자 에게는 죄가 없고 여자에게는 죄가 있는가? 만일 남자에게 죄가 없다면 여자에게 도 죄가 없어야 할 것이요, 만일 여자에게 죄가 있다면 남자에게도 당연히 죄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남녀의 사랑에는 본래 귀천이 없는 법이니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은 모 든 사람들이 존중하여야 할 것이오. 어서 그 여인을 풀어 놓아 주시오. 부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바라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여인을 놓아 주 었다. 부처님의 이 말씀에는 남녀간에 차별을 만든 하느님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 이요, 남자에게는 상을 주고 여자에게는 벌을 주는 하느님도 역시 없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사진 첨부 파일> 070: 나란다대학 입구에서 073: 나란다대학 유적지에서 074, 076: 나란다 대학 내 부처님의 가장 훌륭한 제자 사리불의 탄생지에 세 워진 대탑, 기원전 3세기에 아쇼카왕이 세운 후 증축됨. 현성스님과 일행. 086: 부처님이 출가하신 후 계속 나무 아래에서 기거하셨는데 우기에는 어려움 이 많았다. 성도 후 1년에 마갈타국 빈비사라왕이 죽립정사를 지어 부처님에게 기증하니 이것이 부처님이 거하신 첫 건물정사이다. 이 곳의 죽림( 竹 林 )과 우리 일행. 083: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신 신령스런 독수리 산 이라고 알려진 영취산( 靈 鷲 山 )을 배경으로 찍은 우리 일행. 오색 천으로 만든 장식은 티벳 불교신자들이 신령스러움을 장엄하는 장식이다. 078, 079, 080: 향로가 있는 곳이 부처님이 앉으셔서 법화경을 설하신 자리 라고 한다. 062: 보드가야에 있는 마하보디 대탑. 저녁 때라 사진이 명확하지 못하다. 063, 065: 마하보디 대탑 바로 뒤에 보리수가 있고 보리수 아래 평평한 바위 가 있는데 이 곳이 부처님이 성도하신 금강보좌라 한다. 장식한 천은 티벳 사람 들이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066, 067: 마하보디 대탑 안의 조각과 불상.

인도성지 순례기(6) (2005.4.4, 현성스님) 1월22일 토요일 새벽5시반에 파트나를 출발하여 8시간 걸려 바이살리에 도착 했다. 바이살리는 인도의 유명한 상업도시였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100여년 사이에 화폐가 유통되기 시작하였는데 신도 들이 탁발하던 스님들에게 동전을 시주물로 공양하기 시작하였다. 부처님 당시에 는 화폐가 유통되지 않았기 때문에 돈을 시주물로 받는 것에 대한 규정이 없었 다. 이에 대해 노스님들은 스님이 시주물로 돈을 받을 때는 반드시 일반 신도가 스님 대신 돈을 받아야 하고, 받은 돈은 스님이 가지고 있으면 안 되고 신도가 돈을 가지고 있다가 스님이 필요시 그 분을 불러 무슨 물건을 사 달라고 부탁하 고 그 신도로 하여금 필요한 물건을 사오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노스님들의 규정에 대해서 젊은 스님들은 스님이 돈을 받고 안받는 것 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살행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주장하여 세력 을 얻게 되니 그로부터 대승불교 운동이 태동되어 중국, 한국, 일본에 이 대승불 교가 전파되어 왔다. 스님이 돈을 시주물로 받을 때 스님을 위해 일반 신도가 대신 받아야 한다는 규정은 현재도 남방불교에서 엄격히 지켜지고 있다. 이는 스님들로 하여금 돈으 로 인한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계율로 태국이나 미얀마 등 지금까지 남방불교가 건재하게 유지되고 신도들로부터 지극한 신뢰와 존경을 받는 중요한 한 원인이라 고 생각된다. 그리고 바이살리는 유마경의 설법지로 유명하다. 바이살리가 상업도시로 발전함 에 따라 서민들 가운데 돈 많은 장자( 富 戶 ) 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유마거사는 장자의 아들이기는 했지만 서민 출신으로 사성계급이 엄격하였던 당시로서는 서민이 경전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혁명적인 일이 었을 뿐만 아니라 출가한 스님들도 도를 깨치지 못하면 도를 깨친 일반신도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승단 내외적으로 경각심을 일으키 게 하는 경전이고 이 경전을 설하신 곳이 바로 이 바이살리이다. 이 경전은 어떠한 성( 姓 )을 가진 사람이라도 불문( 佛 門 )에 들어오면 모두 평등 하고, 그리고 불문의 위계( 位 階 )질서는 사회계급은 물론 출가와 재가에 상관없이 깨달음의 깊이가 누가 더 깊으냐에 따라 정하여짐을 설하는 경전이다. 그리고 이 바이살리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시어 다비식을 하고 난 후 수습된 사

리를 8몫으로 나누어 8나라 왕들이 나누어 가지고 자기 나라에다 사리탑을 세웠 는데 그 중 하나가 이 바이살리에 세워진 탑이다. 이 진신사리탑을 기원전 300년경에 아쇼카왕이 대탑으로 증축하고 그를 기념 하기 위해 석주( 石 柱 )를 세웠는데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우리 일행은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에 참배하고 난 후, 원숭이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 다는 원숭이 연못을 본 후 케사리야 대불탑에 도착하였다. 케사리야 대불탑은 부처님의 생애에서 제일 마지막 설법하신 곳을 기념하기 위 해 세워진 탑이다. 그 때 부처님께서 병을 얻으시어 그 근처에서 수행하고 있는 모든 제자들을 그 자리에 모이게 하여 최후의 설법을 하신 후 본인은 30일 후에 세상을 하직하기 위해 케사리야를 떠나 쿠시나가라에 가시겠다고 하시며 제자들 에게 물을 것이 있으면 지금 물으라고 하셨다. 질문이 없자 길을 떠나 쿠시나가라로 향하셨다 한다. 우리 일행은 부처님이 30 일 후에 열반에 드실 것을 예언하신 최후의 설법지인 이 대불탑에 참배 후 쿠시 나가라에 있는 열반사에 도착하였다. 열반사에서 금빛 부처님 열반상에 참배하고 난 후 라마브하르 스투파 부처님 다비장에 참배한 후 호텔에 투숙하였다. 1월 23일 일요일 쿠시나가라를 출발하여 7시간 걸려 코살라국의 수도였던 스 라바스티(사위성) 기원정사에 도착하였다. 기원정사는 수닷타장자가 부처님께 기 증한 정사( 精 舍 )인데 금강경 설법지로 유명하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 집터만 남아 있는 유적지이지만 정원은 대단히 넓고 아름다웠다. 수닷타장자의 집터와 앙굴리 마라의 집터를 구경한 후 네팔 룸비니동산으로 이동하던 중 부처님의 고향인 피 프라하와에 도착, 부처님의 진신사리탑 및 카필라성의 유적지를 참배한 후 네팔 국경에 도착, 입국수속 후 룸비니에 도착, 석식 후 투숙하였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셨을 때 유명한 예언자들이 태자는 대성왕( 大 聖 王 )이 되시거나 대도( 大 道 )를 깨치신 성자( 聖 者 )가 되실 것이라는 예언을 하셨다. 결국 부처님께서는 대도를 깨치신 성자가 되시었지만 부처님의 나라 카필라국은 부처 님 살아생전에 코살라국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코살라국은 마갈타국에 의하여 멸 망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비운( 悲 運 ) 속에서도 카필라국, 코살라국, 마갈타국에서 부처님을 배척 하기보다 카필라국에서는 부처님의 양모 마하프라자파티, 부인 야쇼다라, 아들 라 훌라를 비롯하여 사촌 왕자들까지 부처님께 귀의하여 스님이 되고, 마갈타국에

패한 코살라국의 왕자들 가운데도 부처님께 귀의하여 스님이 되신 분들이 많아 부처님을 공경하는 분위기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마갈타국왕은 부처님이 왕이 되었더라면 자기와 적대관계가 이루어졌을 텐데 부처님이 되셨으니 다행한 일이라 여겨 부처님 성도 후 죽림정사를 지어 보시하 고 부처님을 항상 공경하여 왔다. 1월24일 월요일 룸비니 대성석가사에서 동국대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금강스님 이 우리 호텔로 마중 나왔다. 정말 반가웠다. 여기에서 스님을 만날 인연이 있었 으니. 그는 우리 일행을 석가사로 안내하였다. 석가사는 금강스님의 은사이신 법 신스님이 10여년 전에 불사를 시작하여 경주 황룡사를 모델로 하여 4층 규모의 건물 법당을 신축 중에 있다. 50동이나 되는 제일 요사체를 7년 전에 완성하고, 같은 크기의 제이 요사체를 3년 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즉 100명을 함께 수용 할 수 있는 절이다. 법당 건물이 완성되면 50동짜리 요사체를 하나 더 지을 예정 이라 한다. 그 곳에는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방문하고 수행자들을 위한 시설이 필 요하다고 했다. 1 acre 정도의 땅에 상당히 규모 있게 불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 곳에는 이미 불란서 사람, 독일 사람, 일본 사람, 티벳 사람들이 지은 사원 들이 나름대로 웅장한 모습을 갖추고 그 나라의 불교를 이 땅에 심기 위해 노력 하고 있다. 대성석가사 창건주 법신스님은 바른 한국 불교의 모습을 이 땅에 전 파하시고자 노력하심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법당에서 예불하고 스 님의 간단한 법문도 듣고 스님을 격려해 드리고자 우리들의 정성을 모아 건축불 사 보시도 하고 돌아왔다. 룸비니동산에는 마야부인당이 있고 그 안에 태자가 태어난 곳이 부인당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쇼카석주가 상단부분은 파손 된 채 서 있었고, 구룡못 등을 관람하였다. 돌아와 점심을 먹고 금강스님과 헤어져 우리 일행은 전세낸 비행기편으로 포카 라에 도착 투숙하였다. 원래 일정은 룸비니에서 포카라까지 버스로 이동할 예정 이었으나 이곳 반군들의 방해로 버스가 움직이지 않아 전세 비행기를 이용하게 되었다. 1월25일 화요일 우리 일행은 새벽4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사랑콧트에 등정하여 해뜨는 광경을 보기 위해 기다렸다. 그날따라 안개가 너무 자욱하여 일출을 보지 못하고 우리 일행은 산에서 내려와 버스를 타고 하산하는 길에 뜨는 해를 마중하

였다. 너무나도 장엄한 히말라야 영봉이 있는 빛나는 산맥을 바라볼 수 있었다. 히말라야 영봉이 바로 유명한 에베르스트(Everest)산봉이고 설산( 雪 山 ) 수도지 ( 修 道 地 )로 알려진 곳이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은 동경하는 산 이다. 오늘로서 인도여행기를 마감하려 한다. 이 여행 동안 만났던 모든 이웃들에게 감사드리고 귀중한 지면을 할애해 주시고 내용을 잘 정리하여 주신 중앙일보와 이 글을 같이 읽어주신 모든 애독자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항상 행복하시기 를 축원 드린다. <첨부사진> 088: 바이살리 부처님 진신사리탑 091: 부처님이 열반하시어 나온 진신사리를 8몫으로 나누어 8개의 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이 곳 바이사리에 세워졌다. 기원전 300년에 아쇼카왕이 이 탑을 증축하고 기념 석주(돌 기둥)를 세웠는데 원형그대로 현존한 다. 현성스님과 일행 093, 094, 095: 부처님 생애에 최후의 설법지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바이 사리 케사리아 대불탑 098: 쿠시나가라 열반사 102: 2,549년 전에 쿠시나가라에서 열반하신 부처님의 열반상을 열반사 내에 모시고 있다. 우리 일행은 부처님께 참배하고 부처님 주위를 세 번 돈 후 기념사 진을 찍었다. 110: 스라바스티(사위성) 금강경 설법지 기원정사 유적지 참배 113: 카필라성 유적지 116: 룸비니 대성석가사 법신스님, 금강스님, 우리 일행 117, 125: 대한불교조계종 법신스님이 한국불교를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에서 세계에 펴시고자 하는 원력을 세워 경주 황룡사를 모델로 룸비니 대성석가사를 창건하고 있는 웅장하고 장엄한 모습이다. 현재 100동 요사체 건물이 완성되어 이용 중이다. 118: 룸비니 대성석가사 임시 법당 내 우리 일행과 법신스님 132: 룸비니 대성석가사 좌측 요사체

133: 룸비니 대성석가사 우측 요사체 141: 룸비니 마야부인당 144: 룸비니 마야부인당 내 부처님 탄생하신 곳 145: 룸비니 마야부인당 내 참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