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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高麗末 趙浚과 鄭道傳의 改革 방안 柳昌圭* Ⅰ.머리말 Ⅱ. 趙浚과 鄭道傳의 통치체제론 Ⅲ. 趙浚과 鄭道薄의 경제개혁안 Ⅳ. 趙浚과 鄭道傳의 병제개혁안 Ⅴ. 鄭道傳과 趙浚의 개혁 안의 의미 Ⅵ. 맺 음 말 Ⅰ. 머 리 말 趙浚과 鄭道傳이 조건 건국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던 인물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 다. 李成桂가 가지고 있었던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준과 정도전이 중심이 되어 내세운 개혁 방안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우는 중요한 골격이었다는 점에 대하여 별로 의의가 없을 것이다. 조준과 정도전에 대하여 지금까지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고려말의 상황을 이해하고 조선 건국 과정을 파악하여 조선 건국의 의미 및 조선의 정 치 사회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가를 살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고 하겠다. 조준과 정도전에 대한 연구는 주로 각각의 정치 사회 사상 측면에 초점을 두고 이 루어졌다. 조준의 경우에는 그의 생애와 정치적 활동 및 사회 개혁 방안 등에 관심이 모아졌으며,1) 정도전에 대해서는 주로 그가 언급하였던 여러 분야에 걸친 사상적 측 면을 중심으로 하여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2) 두 사람에 관한 연구 가운데서도 정 * 正善實業專門 大學 專任. 1) 조준과 관련하여 다음의 논문이 참고된다. 李貞信, 趙浚硏究-1388 1389년의 土地改革案을 중심으로 한 麗末鮮初 社會의 變化 (고려 대 석사학위 논문, 1980). 文炯萬, 趙浚의 生涯에 關한 一考察 ( 부산여대논문집 12, 1982)., 朝鮮王朝 建國의 硏究-趙浚의 活躍을 中心으로 (동아대 석사학위 논문, 1982). 張得振, 趙浚의 政治活動과 그 思想 ( 史學硏究 38, 1984). 韓嬉淑, 趙浚의 社會政策方案 ( 淑大史論 13 14 15 합, 1989). 조준의 가계와 관련하여는 다음의 논문이 참고된다. 閔賢九, 趙仁規와 그의 家門 上 中 ( 震檀學報 42.43, 1976 1977). 2) 정도전에 관하여는 많은 논문이 있다. 여기서는 그의 사상에 주로 초점을 맞춘 논문은 생략 하고, 이 글의 주제와 직접 관련되는 논문만을 들어둔다.

- 127 - 도전에 관한 연구는 비록 사상적인 면을 부각하고 있으나, 그의 생애나 여러 가지 제 도적 개혁론 및 儒佛觀 등에 걸쳐 폭넓게 이루어져 왔다. 여기에 비해 조준에 대한 연구는 그의 생애와 정치 사회의 개혁론에 주로 국한되고 있다. 이것은 두 사람에 대 해 남아있는 자료에서 빚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조선 건국 이후 정도전의 활약이 조준에 비해 더욱 두드러진다는 점에도 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그런데 고려 말 조선 건국초 조준과 정도전의 활동이나 그들의 개혁론을 비교하여 어느 한쪽의 비중을 따지기는 어렵다. 한편 종래에는 이들의 고려말 당시 행동을 기준 으로 급진 개혁론자 또는 역성혁명파 등으로 이들을 묶어 이성계 세력이라는 동일한 집단의 일원으로 보기도 하였다.3) 물론 두 사람을 조선 건국 과정과 고려말 이성계 세 력이라는 테두리에서 바라본다면 동일한 세력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이 글을 통하여 다시 두 사람의 개혁 방안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고려말 이성계 세 력으로 묶을 수 있는 이들의 개혁 노선을 비교하여 봄으로써 그 당시 개혁 방향과 이 성계 세력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지금까지 두 사람 개인에 대한 연구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지만, 두 사람에 대한 비교 검토는 소홀하였던 실정이다. 조준과 정도전이 표방한 여러 개혁안을 비교하여 보고, 이를 통하여 조선 건국을 주도한 세력들이 동일한 개혁론을 주장한 것인가 검 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고려말 사회가 안고 있던 모순을 개혁 욕구를 가진 이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는가를 더욱 구체적으로 접근하도록 하여 주리라 믿는다. 또한 두 사람의 개혁안을 비교함으로써 조선 건국 주도세력의 개혁 입장을 분명히 할 수 있으며, 조선 사회가 출발하는 시점의 정치 사회 측면에서의 구 李相但, 三蜂人物考 ( 진단학보 2 3, 1935 ; 朝鮮文化史硏究論攷, 1947). 韓永愚, 鄭道傳의 政治改革思想 ( 創作과 批評 26, 1972)., 鄭道傳의 社會 政治思想 ( 韓國史論 1, 서울대, 1973)., 鄭道傳의 人間과 社會思想 ( 진단학보 50, 1980)., 鄭道傳 思想의 硏究 (개정판, 서울대, 1983). 金元東, 鄭道傳외 統治理念과 制度에 관한 硏究 (경희대 박사학위 논문, 1979). 尹絲淳, 鄭道傳 性理學의 特性과 그 評價問題 ( 진단학보 50, 1980). 鄭杜熙, 三峰集에 나타난 鄭道傳의 兵制改革案의 性格 ( 진단학보 50, 1980). 김대용, 정도전의 정치이념과 배불론-조선왕조 창건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를 중심으로 ( 호서문화연구 10, 1992). 江原謙, 三峯 鄭道傳の改革思想 朝鮮史硏究會論文集 9, 1972). 그리고 정도전에 관한 기존의 연구를 묶어 놓은 책이 있다. 三峰先生紀念事業會, 三峰鄭道傳硏究 (1992). 3) 고려말 이성계 세력에 대한 분류는 아직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종래에는 조선 건국을 주동한 이성계 세력을 급진개혁론자 또는 역성혁명파라고 하여 집단내 갈래를 짓지 않았다. 다만 정몽주의 경우 이성계 세력의 일원으로 분류하고, 이성계 세력을 역성혁명을 지 지하는 세력과 고려를 인정하는 상태에서 개혁을 추구한 세력으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대체 로 사전 개혁에 반대한 신진사대부를 온건개혁론자로, 사전 개혁에 찬성하고 이성계의 왕위 즉위에 찬성한 사람을 급진개혁론자로 분류하고 있다.

- 128 - 國史館論叢 第46輯 도를 파악하는 데에도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개혁론을 살펴보는 데에 있어서 통치체제에 관한 부분에 많은 관심을 두고자 한다. 이는 이들이 기대한 국가 조직의 형태가 어떠한 것이었나를 살펴보는 데 중요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며, 다른 개혁방안보다도 비교적 자료상의 제약을 덜 받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조준과 정도전이 생각한 경제적 측면에서의 개혁안을 비교하고자 한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무엇보다도 과전법을 둘러싼 두 사람의 입장을 찾아보는 것이 우선적인 것이나 이에 대한 기록이 충분하지 않기에 경제에 관한 단 편적인 사안들을 종합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고려말 관심 사안 가운데 하나일 수밖 에 없었던 兵制에 관하여서도 두 사람의 입장이 어떠하였는가 찾아보고자 한다. 이 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들을 바탕으로 조선 건국과 발전과정에서 두 사람의 개혁론이 갖는 의미를 나름대로 정리하기로 하겠다. 그러나 조준과 정도전의 사상적 맥락 즉 性理學의 수용과 실천을 둘러싼 입장이 나, 두 사람의 가문이나 정치적 활동 등을 직접 검토하지 못함으로써 두 사람의 개 혁론에 대한 비교에 불충분한 면을 갖는다. 이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통하여 메꾸기 로 하고, 글 전개상의 오류에 대해서는 질정을 바란다. Ⅱ. 趙俊과 鄭道傳의 통치체제론 威化島 回軍으로 이성계를 주축으로 하는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됨에 따라 조준 은 이성계의 측근으로 부상하였다. 그는 대사헌에 발탁된 이후 몇 차례 상소를 통하 여 여러 분야에 걸쳐 제도적 개혁을 건의하고 있다.4) 그가 여러 분야에 걸쳐 주장한 개혁안 가운데는 통치체제에 관한 부분도 상당히 할애되고 있다. 당시 통치체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王과 宰相 그리고 일반 관료를 중심으로 한 권력 체계였다 고 하겠다. 특히 일부 재상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고려말 상황을 염두에 두고 조 준이 재상의 권한을 어떻게 설정하였는가 살펴보기로 하자. 재상과 6部의 역할에 대하여 조준이 주장한 바를 살펴보면, 그가 재상의 지위에 대하여 어떠한 견해를 가졌는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생각하건대, 우리 太祖(王建)가 개국하던 처음에 官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었습니 다. 재상을 두어 6部를 통솔하고, 監 寺 倉庫를 두어 6부를 뒷받침하게 하였으니 대단 4) 조준이 언제부터 이성계와 가까웠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가조준을 知密直司事兼 大司憲으로 발탁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대사헌에 있으면서 5차례에 걸친 상소를 통하여 여러 가지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 다( 고려사 권118, 趙浚전 참고).

- 129 히 좋은 제도였습니다. 법이 오래 되어 폐단이 생겨 典理(吏部)를 맡은 사람이 選擧 (관리 등용 제도)를 몰라 流品이 범람하여지게 되었으며, 軍簿를 맡은 사람이 병액을 알지 못하여 武備가 해이하게 되었습니다. 대개 6부는 百官의 근본이요, 政事가 나오는 곳입니다. 근본이 어지러운데 나머지가 잘 다스려지는 것은 없습니다. 원 하건대 6典의 일은 6部로 돌리고, 각 司를 6부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宰臣은 侍中 이 하가 判司事를 맡고, 密直은 또 兼判書를 맡아서 위에서 대강을 제시하도록 하십시 오. 奉翊으로 6부 判書를 삼고, 여러 郎官과 소속하여 일을 보는 관리를 거느려 각기 맡은 직책으로 밑에서 명령을 듣게 하고, 큰 일은 6부 郞官이 작은 일은 6부 色掌이 맡아서 때때로 명령을 받들여 일을 수행하도록 하십시오. 人主(왕)외 직책은 재상과 논의하는 것뿐이요, 재상의 직책은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물리쳐 백관을 바르게 하 는 것뿐입니다( 고려사절요 권33, 창왕 즉위년 8월 大司憲趙浚陳時務). 조준은 고려 초 재상이 6부를 관할하고, 감 시 창고 등을 두어 6부의 행정업무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 통치 편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그 이후 6 부가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을 비판하고, 다시 6典의 임무를 6부에 귀속시 키고 각 司 역시 6부에 소속되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조준의 복안은 6부가 명실공히 실제 행정 업무를 관장하고 수행하는 관부로서의 역할을 다하도록 하자는 것으로 이해된다. 비록 재상이 6부를 관할하는 고려초의 제도를 모범으로 삼고 있으 나, 이는 상급 귀족 중심의 재상권을 강화하려는 조치이기보다는 6부의 실제 권한을 강조하고 재상이 이를 감독하도록 하려는 의도라고 하겠다. 고려말 조준은 도평의사사의 구성원이 늘어났음을 비판하고 그 수를 제한하자는 의사를 표명하고 있으며, 재상이 백관을 바르게 하는 책임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도평의사사를 통한 재상의 권한을 인정하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하겠다. 이러한 입장과 아울러 재상이 6부의 직위를 겸함으로써 6부를 관할할 수 있도록 하여 재상 의 권한을 인정하고 있으나, 이를 재상 중심의 통치체제를 구상한 것이라 단언하기 는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조준이 6부의 실질적인 업무 관장을 주장하고 각 司가 6 부에 속하여 업무를 처리하도록 한 점이 그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비록 조준이 재상 중심의 도평의사사를 최고의 관부로 인정하고 있지만, 6부를 통 한 행정 담당 부서의 임무를 독립적으로 인정한 점으로 보아 조준은 재상에게 권력 이 집중되는 것을 바람직한 형태로 보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5) 조준은 재상이 중 심이 된 도평의사사가 모든 행정을 감독하고, 집행에 이르기까지 직접 관장하여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재상이 왕을 보좌하고 모든 관료를 감독한다 5) 장득진은 조준이 주장한 통치체제론은 재상을 중심으로 하고 그 밑에 6부가 행정체계의 중심이 되는 체제라고 하고 있다(앞의 논문 p.194). 결국 조준이 재상 중심의 통치체제를 유지하고자 한 것으로 해석하였다(앞의 논문 p.195). 하지만 조준은 재상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재상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통치체제를 추구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 130 - 國史館論叢 第46輯 는 다분히 상징적인 지위를 가진 존재로 보려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조준은 각 관부에 걸맞는 고유 권한을 인정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한 면은 臺諫에 대한 권한을 언급한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요근래 守令을 임명함에 대부분 士林이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원하건대, 지금부 터 각 관사의 높은 직을 역임하여 명망있는 자가 아니거나 서울과 지방에서 관직을 거쳐 명성과 업적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임명하지 마십시오. 원하건대, 대간과 6 曹에서 천거한 재간있는 사람을 파견하되 參上官으로 품계를 올려 州牧과 동렬로 하 여 그 임무를 소중히 하고, 安集은 일체 혁파하시기 바랍니다( 고려사 권75, 選擧3 凡選用守令, 창왕 즉위년 8월 趙浚言). 조준은 대간과 6曹(部)가 지방관을 천거하도록 하고 그 직위도 참상관 이상으로 하자고 건의하고 있다. 조준은 지방관으로 감무와 현령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종 래에 安集使의 경우는 왕이 비준하지도 않고 재상이 천거하여 임명하였으며, 수령 천거에도 도평의사사의 영향력이 강하였다.6) 재상이 지방관 파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조준이 안집사를 없애고, 지방관 추천을 대간과 6조에 돌리고자 한 것은 바로 재상이 가지고 있던 권한을 축소하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각 도에 파견 된 都觀察黜陟使는 조준이 주장하였던 것처럼 대간이 천거하여 임명되었다.7) 조준이 이러한 주장을 펴던 시기는 이성계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지방관마저 자신에게 가까운 인물로 임명하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었던 때이다. 우왕 14년(1388) 崔瑩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일부 지방관에 대한 교체가 있었으나 당시 지방관은 우왕 대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던 李仁任 일파와 관련된 인물들이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겠 다. 따라서 지방관을 이성계 세력에 대하여 반대 의사를 갖지 않은 인물로 교체하여 야 할 필요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조준이 6조와 대간으로 하여 지방관을 천거하도록 하자는 것은 이성계 세력의 일원으로서 6조와 대간직에 임명된 이들이 새로운 지방 관을 선발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이기도 하겠지만, 결국 재상들이 독점하고 있던 인사권의 일부를 6조와 대간에 돌림으로써 재상의 권한을 축소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조준 자신이 위화도 회군 이후 대사헌으로 임 명되었던 사실을 주목하면 대간이 중심이 되어 이성계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에 서 비롯한 측면도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8) 6) 고려사 권75, 選擧3 凡選用守令, 공민왕 8년, 22년 9월. 7) 고려사절요 권33, 창왕 즉위년 7월 大司憲趙浚等上書. 창왕 즉위년 8월에는 안집사를 고쳐 도관찰출척사를 파견하였는데, 이들의 주 임무는 量田 사업이었다(위의 책 권33, 창왕 즉위년 8월). 그리고 수령도 대간과 6曹가 천거하였다(위와 동일). 8) 조준의 위와 같은 주장은 자신이 대사헌으로 있었고 이성계 세력 가운데 일부가 내간이나 6

- 131 - 또한 조준은 지방군 지휘권자인 將帥를 도평의사사와 대간이 천거하도록 주장하였다. 원하건대, 도평의사사와 대간으로 하여금 위엄과 덕이 뛰어난 사람을 각기 천거하 여 장수로 삼아 軍政을 살피도록 하십시오( 고려사절요 권34, 공양왕 원년 12월 大司憲趙浚等上琉). 지방군 지휘권자로 임명되는 장수는 그 지역의 병권을 장악하는 중요한 임무를 띠 고 있었다. 특히 각 道별로 임명되는 군지휘관은 그 도의 군사를 마치 私兵과 같은 군사로 장악하여 통솔하였던 것이 고려말의 상황이었음을 염두에 두면 장수의 임명 은 군사력의 확보 및 군지휘권의 확보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었다.9) 이러 한 장수의 임명에 비록 도평의사사의 재상과 함께 천거권을 갖는 것이기는 하나 대 간이 일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은 상당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 이다. 종래 도평의사사의 재상이 중심이 되어 병권을 장악하거나 장수를 천거하던 것에 대하여 제동을 걸고 대간에게도 그 권한의 일부를 나누어 가지도록 함으로써 재상의 권한 집중을 방지하고 대간의 지위를 높이려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조준의 생각 역시 그 자신이 대사헌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만은 아니고, 재상 중 심의 고려 통치체제를 재편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조준은 대간이 갖는 권한을 확대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대간을 재상의 권한 아래 매이지 않고 나름대로 활동할 수 있는 관직으로 분명히 인정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 였던 것 같다.10)이는 재상 중심의 통치 기구 운영에 변화를 가하여야 하겠다는 의지 의 표현이었다고 하겠다. 비록 재상의 권한을 지극히 상징적이거나 형식적인 정도에 국한하려고 하였던 것은 아니나 실제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각 관부의 고유 역할을 강조하였던 것은 그러한 기본적 발상에서 가능하였던 것으로 생 각된다. 특히 6조의 실제 행정 업무 관장을 주장하고, 대간의 권한 강조를 주장한 것 은 관료 기구가 도평의사사의 재상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반대하여 권한이 각기 업무에 따라 나누어진 새로운 관료기구의 운용을 기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조준은 이러한 의도가 왕권 강화로 곧 바로 이어지기를 바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왕 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왕은 재상과 더불어 의논하는 것으로 그의 직임을 다하는 것 부에 속하여 있었기 때문에 나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역시 주요 목적은 재상 위주의 통치체 제를 변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9) 민현구, 朝鮮初期의 軍事制度와 政治 (한국연구원, 1983) p.102 참고. 10) 臺官은 일찍부터 독립적인 관부를 통하여 활동하고 있었지만, 諫官은 여전히 門下府에 소속 한 채로 존속하였다. 조준은 사헌부 소속 糾正의 품계를 높이고자 하고 있으며, 대간의 천거 권 및 규찰 탄핵권 등을 강화하자는 의사를 나타내 대간의 권한을 강조하고 있다( 고려사 절요 권33, 창왕 즉위년 7월, 8월의 조준 상서 참고). 비록 간관의 독립적인 관부설치로까지 조준의 입장이 진전되지는 않았지만, 대간의 고유 권한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도평의사사 를 중심으로 한 재상의 권한에 제한을 가하려는 의도가 분명하였다고 하겠다.

- 132 - 國史館論叢 第46輯 이라는 듯한 입장에서 더 나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도전이 고려말 어떠한 통치체제를 구상하였는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 다. 정도전 자신이 고려말 통치체제에 관하여 직접적인 개혁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기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글들을 묶어 놓은 三峰集 에 나오는 내 용을 통하여 조선 왕조에서 그가 기대한 통치체제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11) 그런 데 삼봉집 에 보이는 통치체제에 관한 내용은 고려말 정도전이 개혁세력의 핵심 으로 등장하면서 어느 정도 생각하였던 바가 아니겠는가 추정된다. 비록 고려말 사 료에 정도전의 통치체제에 관한 견해가 보이지는 않으나, 조선 건국에 가장 앞장섰 던 그가 고려말 정치적인 면에 변화의 틀을 전혀 상정하지 않았다가 조선 건국 이후 에야 생각하였다고 보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이 다. 정도전이 주장한 통치체제론 가운데 가장 먼저 주목되는 것은 宰相의 권한 및 그 위치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재상의 직책은) 위로는 陰陽을 조화롭게 하고, 아래로는 庶民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며, 안으로는 백성을 공평하고 밝게 다스리고, 밖으로는 사방의 오랑캐를 진무하는 것이다. 국가의 포상과 형벌을 이로 말미암아 관계하고, 천하의 정치와 교화 및 가르 치고 명령하는 것이 이로 말미암아 나오는 바다( 삼봉집 9, 經濟文鑑 上 宰相之職). (冢宰는) 위로는 君父를 받들고 아래로는 百官을 통솔하며 萬民을 다스리는 것이 니 그 직임이 매우 크다(위의 책 13, 朝鮮經國典 上 治典 總序). 정도전은 재상을 인사권, 군사권, 재정관할권, 형벌권 등 국정 전반에 걸친 최고 정책집행 결정권자로서의 지위에 설정하고 있다.12) 또한 재상은 일반 관료를 전부 통 솔하고 왕을 보좌하는 일을 담당하는 유일한 직책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왕과 관련하여 재상은 왕의 보좌는 물론 왕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항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고 있다. 특히 왕을 보좌하는 일에서부터 왕 과 왕 주변 사람의 모든 행동마저 알고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13) 이것은 재상이 정 책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왕과 왕실에 대하여 견제할 수 있는 역할을 갖도록 하고 11) 三峰集 가운데 정도전의 정치 경제 사회 병제 등에 관한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으로 朝 鮮經國典, 經濟文鑑 등이 있다. 조선경국전 은 태조 3년(1394) 3월에, 경제문감 은 4년(1395) 6월에 편찬되었다. 12) 삼봉집 9, 經濟文鑑 上 宰相, 相業 참고. 정도전이 재상의 권한에 대하여 언급하였던 내 용에 대하여는 한영우의 鄭道傳思想의 硏究 pp.137 141에 잘 나와 있다. 13) 삼봉집 13, 朝鮮經國典 上 治典 總序. 정도전은 왕실 재정과 왕실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까지 재상이 알아야 한다고 하고 있다. 정도전은 왕이 비록 최고의 권력자이지만 그것도 관념상 부여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한다(한영우, 鄭道傳思想의 硏究 p.136). 江原謙은 정도전이 절대적 왕권을 상정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것을 매개로 사 대부의 주체성을 관철시키려는 것이었다 하였다(앞의 논문 p.92).

- 133 - 자 한 것이라 하겠다.14) 정도전이 재상에 관하여 설정하고 있는 지위와 임무를 통하여 그가 宰相中心의 통 치체제를 구상하였던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15) 그렇지만 이 같은 재상 중심의 통치체제론이 고려 후기 도평의사사에 참여하는 재상의 권한 강화와 맥을 같 이 하는 것은 아니다. 고려 후기의 도평의사사에는 실직을 가진 宰臣과 樞臣 뿐만 아니라 商議職을 가진 재추까지 참여하여 수적인 면에서 비대해졌다.16) 따라서 도평 의사사의 고유 권한이 제기능을 발휘하기에는 부적합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 다. 즉 귀족 합의체로서의 역할을 하기에는 도평의사사에 참여하는 인원이 너무 많 았던 것이다. 하지만 재추에 오른 관리들은 여전히 도평의사사를 통하여 권한을 행 사하였으며, 재추 가운데서도 內宰樞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도평의사사의 실질적인 실력자로서 막중한 권한을 행사하였다.17) 즉 합의체로서의 도평의사사의 역할이 중 요시되기 보다는 일부 권력의 상층부에 있던 인물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기구로서 성 격이 변모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정도전이 추구한 재상의 권한 강화가 도평의사사라는 기구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당시 상황을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도평의사사 자체의 권한 강화라고 보기 도 어렵다. 정도전은 재상의 권한을 강조하면서 특히 周代의 총재를 가장 이상적인 재상의 형태로 보고 있다.18) 이는 소수의 재상이 막강한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라기보다는 총재에 해당하는 특정 재상이 권한을 독점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정도전의 재상 권한 강화는 재상 중심의 통치 체제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총재권을 강조한 총재 중심의 통치체제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나 생각된 다. 그는 朝鮮經國典 治典 總序에서 治典은 총재가 관장하는 것이라고 명확히 규 정하고, 나머지 다른 임무도 총재에 속한다고 하고 있다. 정도전은 총재 중심의 재상 정치를 추구하였다고 보았는데, 한편 그가 내세운 각 관부의 역할은 어떠한 것이었나 궁금하다. 정도전 역시 朝鮮經國典 에서 6典으로 나누어 각각의 행정 업무를 명시하고 있다. 그는 治典, 賦典, 禮典, 政典, 憲典, 工典 14) 조준의 경우는 재상이 왕권을 견제할 수 있도록 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도평의사사가 왕실에서 사용하고자 하는 물건을 공급하도록 하자고 한 견해가 보인다. 이는 왕실을 견제하려는 목적이라기보다는 內整(內僚)가 마음대로 왕실의 재정을 처리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고려사절요 권33, 창왕 즉위년 8월 大司憲趙浚陳時務). 15) 한영우는 정도전이 재상 중심체제, 내지는 재상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지배체제를 추구하였 다고 보았다( 鄭道傳思想의 硏究 p.137). 그는 정도전이 이러한 통치체제를 추구한 것은 民本政治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위의 책 p.146). 16) 邊太燮, 高麗都堂考 ( 歷史敎育 11 12 합, 1969 ; 高麗政治制度史硏究, 1971) pp.99 102 참고. 17) 변태섭, 위의 논문 p.103 참고. 18) 정도전은 周代의 제도가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보고 있으며, 주대의 총재를 재상 가운데서 도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서술하고 있다( 삼봉집 9, 經濟文鑑 上 宰相). 그는 조선경국 전 에서도 총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 134 - 國史館論叢 第46輯 의 조항을 설정하여 吏, 戶, 禮, 兵, 刑, 工曹에 해당하는 관부의 역할을 정리하여 놓 았다. 그런데 이러한 6典의 구분은 행정 담당 관부로서의 6部의 역할과 다른 점이 있다. 治典條에 관제나 관리의 입사로 등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총재가 치전을 관장 한다고 하고 있다. 이는 총재를 중심으로 치전에서 말하는 사안들이 이루어져야 한 다는 정도전의 입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임무에 있어서는 여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 고 있으면서도 재상과 별개의 독자적인 관부로서의 명확한 역할 분담을 설정하고 있 다고 보기 어렵게 하는 부분이다. 정도전은 조준과 달리 6조의 고유 업무가 각기 해당 관부와 관료를 통해서 이루어 지기를 바라기 보다는 총재에게 권한을 집중시킨 상태에서 해당 관부가 총재의 지휘 를 받아 임무를 수행하는 통치체제를 지향하였다고 할 수 있다.19) 따라서 정도전이 6典을 설정하여 비록 임무에서는 분야별로 나뉘어지고 해당 관리가 업무를 담당하여 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정책 집행에 대한 재상의 권한을 부인하고 직접 행정 업무를 관할하는 6부의 조직을 인정하였다고 해석하기는 어렵다. 한편 정도전은 대간에 대하여 經濟文鑑 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가 생각하였 던 대간의 지위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대간 특히 그 가운데 諫官은 지 위는 낮지만 그 맡은 임무는 재상과 대등할 정도라고 하여 간관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20) 그런데 그의 간관과 대관에 대한 입장이 앞서와는 다른 면을 보여주 는 대목이 있다. 예전에는 課官職으로 정하여진 인원이 없어 言路가 더욱 넓었으나, 후대에 諫官이 상설직이 되어 언로가 더욱 막히게 되었다( 삼봉집 10, 經濟文鑑 下 諫官). 古人이 官을 설치함에 반드시 臺諫의 권한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대간직을 중요 시 여긴 것이 아니었으며, 대간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 朝廷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위와 같음). 정도전은 간관의 임무를 전담하는 관직이 생긴 이후로 언로를 간관이 독점하게 되 었다고 지적하였다. 이는 상설직으로 설치한 간관제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표현하 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정도전은 간관이 언로를 독점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모든 관료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언로가 열려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와 같은 정도전의 생각은 군주가 모든 백성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으로 해 19) 한영우는 조준 역시 정도전과 같이 재상 중심의 통치체제를 주장하였다고 하였다( 鄭道傳 思想의 硏究 p.147). 비록 조준도 재추 가운데서 6부의 최고 지위를 겸임하여야 한다고 하 고 있지만, 그들은 중요한 정책의 제시를 주목적으로 하고 실제 일의 집행에서는 6부 소속 관료가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비하여 정도전은 총재가 6부의 일의 집행에 이르기까지 관할하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고 하겠다. 20) 삼봉집 10, 經濟文鑑 下 諫官.

- 135 - 석할 수 있다. 하지만 정도전이 언로 개방을 주장한 것은 군주의 권한을 약화시키려 는 방편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한다.21) 언로가 개방됨으로써 왕은 언제나 비판을 수용 할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하며, 비판에 의해 왕의 권한은 제약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도전은 대간을 중요시 여기는 것은 결코 대간직 자체가 중요시해서라기 보다는 朝廷을 중요시 여기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정도전이 말하는 조정은 총재에 의해 통 솔되는 정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된다.22) 정도전은 기본적으로 권력은 총재에게 집중되어야 하고, 대간은 총재에 의하여 운용되는 관부에 대한 비판적 기능만을 유 지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대간이 맡고 있는 직무 그 것은 군주와 관료를 견제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라 인정하지만 별도의 관부로 서 독점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대간이 총재의 권한 행사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음을 감안하였던 것은 아 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23) 정도전은 經濟文鑑 에서 지방관에 대한 임무도 규정하고 있다. 지방관의 임명 에 대하여는 달리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조선 건국 직후 정도전은 수령을 임 명하는데 도평의사사, 대간, 6조로 하여금 각기 천거하여 뽑도록 하되 천거자가 책임 을 지도록 주장하였다.24) 조준이 6部와 대간으로 하여금 지방관을 천거하도록 한 것 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정도전이 도평의사사에게 지방관 천거권을 부여하고자 한 것은 재상이 지방관 파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겠다. 조준이나 정도전 모두 지방관의 역할이나 考課 방법 등에 있어서는 비슷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田野 개간, 戶口 증가 등을 지방관의 주요 임무로 파악 하고 있다.25) 조준은 도평의사사에 참여할 수 있는 재추의 수를 규정하고, 6부 등 행정 관부가 본래 맡은 바 실제 업무를 담당할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다른 관부 의 임무 및 지방관이나 장수 등의 임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제시하고 있다. 또 한 사대부, 향리, 일반 양인, 천인 등 각 신분에 맞는 역과 호적 편성 등을 주장하여 21) 정도전이 주장한 대간의 권한 강화와 언로 개방에 대하여 한영우 역시 왕권 견제라는 측면 에서 해석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이를 정도전의 민본정치 실현과 관련지어 이야기하고 있다 ( 鄭道傳 思想의 硏究 pp.147 155). 한편, 江原謙은 정도전이 대간을 대단히 중요시 여겼 는데, 이는 권력 기관(재상과 대간)의 상호 견제를 통하여 사대부 계층의 주체성을 확보하고 자 한 것으로 이해하였다(앞의 논문 p.94). 22) 삼봉집 9, 經濟文鑑 上 相業. 23) 정도전은 대간의 직임을 중요시 여기고 있으며, 특히 御史는 재상을 비롯한 모든 관료를 탄 핵할 수 있는 주요한 직책이라고 하였다( 삼봉집 10, 經濟文鑑 下 臺官). 이는 정도전이 사헌부의 권한을 강조하고자 한 의사를 반영하고는 있지만, 실제로 대간이 총재를 보좌하는 역할을 넘어 총재를 견제하는 것까지 정도전이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24) 太祖實錄 권 1, 원년 7월 丁未. 25) 고려사절요 권33, 창왕 즉위년 7월 大司憲趙浚等上書와 태조실록 권2, 원년 9월 壬寅 및. 삼봉집 10, 經濟文鑑 下 監司條 참고.

- 136 - 國史館論叢 第46輯 신분 질서를 명확히 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26) 이러한 조준의 태도는 이른바 사대 부 관료를 중요시하여 이들이 활발하게 참여할 수 있는 통치체제의 구상과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이에 비해 정도전은 특정한 재상(총재)을 위주로 통치체제가 운용되 는 집권적 정치를 구상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조준은 사대부 관료가 중심 이 되어 권력을 분장하는 통치체제를, 정도전은 재상 즉 총재가 중심이 되고 일반 관료와 일반 백성이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 구도를 설정하였다는 추정도 가능하다.27) Ⅲ. 趙浚과 鄭道傳의 경제개혁안 고려말 이성계 세력은 권력을 장악하여가는 과정에서 경제적인 측면에도 많은 관 심을 기울였다. 지금까지 고려 말 경제적 측면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하고 비중있게 다루어진 것은 私田혁파 및 科田法의 시행에 관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사전과 과전 법 자체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과전법의 시행에 따른 경제적 변화가 이성계 세력의 경제적 개혁 방안을 살펴보는데 필수적이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과전법 자체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진행되어 있으며,28) 따 로이 이를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와 이 글의 성격상 기존의 연구 성과를 수용 하는 선상에 머물고, 주로 조준과 정도전이 주장한 경제적 개혁 방안의 틀만을 살펴 보고자 한다. 26) 조준은 良賤에 따른 호구 구분을 제시하였으며, 향리에게 역을 제대로 부과하도록 주장하였 다.. 그리고 工 商 賤人이 각기 맡은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사대부에 대한 경 제적 우대 및 朱子家禮 실천을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각 신분에 맞는 사회질 서를 바로 잡고자 한 것이라 생각된다. 조준이 내세운 사회 질서에 대하여는 한희숙, 앞의 논문 pp.99 106이 참고된다. 27) 정도전은 모든 民을 良人과 賤人 신분으로 양분하고, 직업에 있어서는 士 農 工 商으로 구분 하였다 한다(한영우, 鄭道傳思想의 硏究 pp.118 119). 한영우가 주장한 양천제에 대한 논 의는 접어두고, 정도전이 民,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정도전이 사대부보다 우선적으 로 일반 백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유교의 명분론적 측면이 지극히 강하며, 사대부의 반발 을 누르고 자신의 입지를 넓혀 총재 중심의 통치체제로 정부를 이끌어가기 위하여 民에 대한 정치를 강조하였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정도전의 통치체제론이 사대부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나(江原謙, 앞의 논문 p.96), 실제로 정도전은 사대부 보다는 총재 에 중심이 두어지는 통치체제를 구상하였으며 일반 백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28) 과전법의 시행이나 과전법과 관련된 논문은 여기서 다 언급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이 글의 진행에 도움을 많이 받은 저서를 적어둔다. 金泰永, 朝鮮前期土地制度史硏究 (1983). 李景植, 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 (1986). 姜晋哲, 韓國中世土地所有硏究 (1989). 浜中昇, 朝鮮古代の經濟と社會と (1986).

- 137 - 먼저 토지제도의 변화와 관련하여 두 사람의 입장에 주목하고자 한다. 조준은 위 화도 회군 이후 대사헌에 오른 후 여러 가지 제도 개편을 위하여 상소를 올리고 있 다. 당시 이성계 세력을 대표하여 제도적 개혁을 추구한 이는 바로 조준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준의 입장은 이성계 측의 입장을 강력하게 대변하고 있다고 하겠 다. 조준은 토지제도의 개혁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데, 그러한 그의 노력이 결국은 과전법의 시행으로 귀착되었다고 하겠다. 그 과정에서 그가 주장한 토지제도의 골격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겠다. 田制를 바르게 하여 國用을 풍족하게 하며 民生을 후하게 하고, 인재를 선택하여 기 강을 진작하고 政令을 거행하는 것이 지금의 급무입니다. 나라 운명의 길고 짧음은 민 생의 괴롭고 편안함에 있으며, 민생의 괴롭고 편안함은 田制의 고르고 고르지 못함에 있습니다. 文王 武王 周公이 井田으로써 백성을 기른 때문에 周나라는 천하를 800년 차지하였으며, 漢은 田税를 적게 하여 400년 동안 천하를 차지하였고, 唐은 民田을 고 르게 하여 거의 300년 동안 천하를 차지하였으며, 秦은 井田을 철폐하여 천하를 얻은 지 2대 만에 망하였습니다( 고려사절요 권33, 창왕 즉위년 7월 大司憲趙浚等上書). 조준은 정치제도면에서는 3代 가운데 특히 周代의 정치제도를 가장 이상적인 형태 로 파악하였다. 하지만 그는 토지제도에 관해서는 특정한 시기의 모형을 지목하여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설정하고 있지는 않는 듯하다. 다만 주대의 井田制에 대하여 가장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고려 태조가 취한 경제적 조치에 대하여 서도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면서 고려전기의 授田收田의 법 즉 전시과 제도가 무너지 고 兼并이 행하여지면서 토지제도 자체가 문란해졌다고 보고 있다.29) 그런 점으로 보아 조준은 고려전기의 토지제도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조준은 量田을 실시하여 경작하는 토지의 많고 적음 을 살펴서 戶를 상 중 하 3등급으로 구분하고자 하였다. 원하건대 지금 量田을 함에 그 경작하는 토지(所耕田)를 살펴 토지의 많고 적음으 로써 호를 上 中 下 3등으로 매기고, 아울러 良人과 賤人을 기록하여 (그 籍을) 수 령은 按廉에게 바치고 안렴은 版圖(戶部)에게 바치게 하면 조정에서 무릇 징병하고 역을 지게 할 때 근거에 의하여 때에 맞추어 행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고려사절 요 권33, 창왕 즉위년 8월 大司憲趙浚陳時務). 위 기록은 조준이 양전 방법에 대하여 직접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당 시 조준 이 의도한 양전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양전하면서 경작하는 토지를 29) 고려사절요 권33, 창왕 즉위년 7월 大司憲趙浚等上書.

- 138 - 國史館論叢 第46輯 살펴 그 많고 적음에 따라 戶를 구분하고자 한 것으로 미루어 그 토지는 사유지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 이다. 만약 조준이 가리킨 토지가 收租權이나 免租權이 주어 진 토지라면 토지의 다과에 따른 호의 구분이라는 것은 일정한 역에 대한 대가로 토 지를 분급받은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며, 군역과 다른 역 부과에 토지를 기준으로 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리고 단순한 경작지일 경우라면 군역 부과나 역 부과기준으로 차라리 人丁의 다과에 따른 호의 구분이 바람직하였을 것이다. 조준은 소유권을 인 정하는 입장에서 고려말 토지 개혁의 방향을 잡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조준은 고려말 토지제도가 문란하게 된 것은 국가에서 지급하는 토지의 地 目이 늘어나고 급기야는 이것이 제대로 회수되지 않아 겸병이 늘어나게 됨에 따라 벌어진 상황이 라고 이해하고 있다.30) 조준은 私田 혁파를 통하여 이러한 폐단을 없 애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조준이 문제 삼았던 사전의 핵심은 겸병에 의한 토지였다 고 할 수 있다. 조준이 지적한 겸병의 폐단을 살펴봄으로써 겸병을 통하여 확대된 토지의 성격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근년에는 兼井이 더욱 심하여 간악하고 흉악한 무리가 州에 걸치고 郡을 포함하여 산천을 경계로 하여 모두 祖業田이라 지칭하고, 서로 흉치고 서로 빼앗아 1 敢의 주 인이 5, 6명이 되고, 1년에 租를 거두기를 8, 9차례나 합니다. 위로는 御分田으로부터 宗室 功臣 朝廷 文武官의 토지와, 外役 津 驛 院.館의 토지와, 다른 사람이 여러 대에 걸쳐 심은 뽕나무와 지은 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뺏아 가지니 애석하게도 우리 무고 한 백성이 사방에 흩어져 돌아다니게 되고 골짜기에 빠져 죽습니다. 先代 임금이 토 지를 나누어 관료들과 백성들을 후하게 대우하고자 한 것이 도리어 신하와 백성을 해치게 합니다. 이것은 私田이 어지럽게 하는 근원입니다. 겸병하여 租를 거두는 무 리들이 兵馬使, 副使, 判官을 칭하고 혹은 別坐라 칭하여 따르는 자 수십 명이 말 수 십 필을 타고 다니면서 수령을 능멸하고, 안렴사들을 꺾으며, 음식을 진탕 먹고 주막 에서 비용을 마음대로 씁니다( 고려사절요 권33, 창왕 즉위년 7월 大司憲趙浚等上 書 및 고려사 권78, 食貨 1 田制). 당시 겸병을 통하여 얻어진 토지는 祖業田이라 일컬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업전 은 본래사적 소유권에 입각한 토지로 소유주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토지였다고 한다.31) 따라서 겸병은 사적 소유권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조준은 겸병의 지목으로 왕실이나 관료에게 지급된 토지, 기타 국가에 대한 일정한 역 부담에 대한 대가로 지급된 토지 등을 들고 있다. 이러한 토지에 대한 겸 30) 위와 같음. 31) 이경식, 高麗末期의 私田問題 ( 東方學志 40, 1983 ; 앞의 책) pp.8 11 참고. 그는 위에 서 문제가 된 조업전은 그 본체가 수조지로서의 사전이었다고 하고 있다(p.8).

- 139 - 병이 불법으로 소유권을 확보한 것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소유권에 바탕을 둔 토지라면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지목에 대한 겸병이 쉽지 않 았을 것이며 소유권을 침탈할 명분도 약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겸병하여 조를 거 둘 때 병마사나 부사, 판관, 별좌 등을 사칭하였다는 것은 겸병 자체가 소유권의 확 보였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음을 시사한다. 즉 불법적인 소유권의 확보였다면 소 유권을 둘러싼 분규가 벌어질 것을 대비하여 관직을 사칭하였다는 해석이 가능한데,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하여 관직을 사칭하여 조를 거두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느낌이 든다. 이들이 관직을 사칭한 것은 불법으로 점유한 수조권에 의하여 조를 거 두기 위한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한다.32)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준이 경작하는 토지의 다과를 기준으로 戶를 나누자는 것은 종래의 사유지를 인정하는 선상에서 토지 개혁을 이루고자 하는 조준의 의도를 반영 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조준이 고려말 토지와 관련하여 문제가 있다고 주목 한 私田은 당시 사유지가 주대상이 되는 지목이라기보다는 불법으로 확보한 수조권 에 기반을 둔 토지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다. 그는 고려전기의 전시과 제도 에서 설정된 지목을 긍정적인 입장에서 수용하고 있으며, 새로 분급하고자 한 토지 지목도 기본적으로 그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여겨진다. 조준이 제시한 지목은 祿科 田, 口分田, 軍田, 外役田 등 관직 내지는 특정한 역에 대한 대가로 지급하고자 하는 지목과 寺社田, 驛田, 公廨田 등 사원이나 관청 등에 지급하고자 하는 지목으로 구성 되어 있다.33) 이러한 토지 분급은 수조권의 지급이었다. 조준이 처음 의도한대로 과 전법에서 모든 지목이 설정되고 양전도 그대로 시행된 것은 아니나, 조준이 위화도 회군 이후 제시한 토지 개혁의 방침은 사전 혁파로 귀착되고 경기에 한하여 관료에 게 수조권을 분급하는 사전을 인정하는 선에서 마무리 되었다. 비록 지방에 군전 등 의 명목으로 사전이 인정되었으나, 중앙 관료에게 지급되는 사전이 경기 지역에 제 한됨으로써 종래 에 발생한 사전의 폐해를 방지하려는 노력이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고 할 수 있다.34) 결국 조준이 겸병을 통하여 불법적으로 사전을 확대하여 문란하게 된 토지제도를 개혁하고자 하는 의향은 수조권의 정리로 표출되었다고 하겠다.35) 한편, 정도전은 唐의 永業田과 口分田 제도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36) 비록 아주 32) 이경식은 고려말 토지 겸병은 소유지에서도 수조권지에서도 이루어졌지만, 토지 겸병의 주 류는 수조지의 집적과 점탈에 있었다고 하고 있다(위의 논문 p.30). 그는 또한 개인 수조지 가 官의 개입없이 사적으로 주어지고 世傳되었기에 조업전으로 지칭되었다고 하였다(위의 논문 p.11). 고려말 겸병의 양상에 대하여는 洪承基, 高麗末 兼併에 대하여 ( 사학연구 39, 1987)를 참고. 33) 고려사 권78, 食貨 1 田制, 창왕 즉위년 7월 大司憲趙浚等上書. 34) 고려사 권78, 食貨 1 田制, 공양왕 3년 5월의 科田法 시행 내용 참고. 자세한 내용은 김태 영, 科田法의 성립과 그 성격 한국사연구 37, 1982 ; 앞의 책) pp.63 85가 참고된다. 35) 김태영도 과전법을 통하여 불법적인 수조지로서의 사전은 혁파되었지만 정당한 소유지는 온 존되었다고 하였다(앞의 책 p.71).

- 140 - 國史館論叢 第46輯 이상적인 형태로 당의 토지제도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니나, 이 제도가 인구수에 따라 토지를 주어 경작하게 하고 租를 받아 국가의 재정으로 충당하였다는 점에서 긍 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역시 周代의 井田制를 가장 이상적인 토지제도의 모형으로 삼았던 것 같다. 37) 그는 모든 토지는 국가의 소유이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 지고 있었다. 비록 개인이 사적으로 점유하는 토지를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그 토지는 국가의 공적인 토지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38) 그런데 그는 토지 분 배에 있어서 計口授田(計民授田). 즉 인구수가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39) 인구수가 토지 분배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토지를 다시 재분배하자는 의 도이며, 인구수를 역 부과의 기준으로 삼자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40) 정도전이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고려말 私田의 폐해를 바라보는 시각 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前朝의 田制에는 苗裔田, 役分田, 功蔭田, 登科田, 軍田, 閑人田이 있어 그 租를 받아 먹게 하였으며, 백성이 경작하는 것은 스스로 개간하여 점유하는 것을 허락하여 官에 서 간섭하지 않았다. 노동력이 많은 사람은 개간하는 땅이 넓고 세력이 강한 사람은 점유하는 토지가 많았으며, 힘이 없고 약한 사람은 강하고 힘 있는 사람을 쫓아 빌려 서 경작하여 그 수확의 반을 나누었으니 경작하는 사람은 하나인데 먹는 사람은 둘이 었다. 법이 심하게 무너져 세력 있는 집에서는 서로 겸병하여 한 사람이 경작하는 토지에 주인은 7, 8명에 이르게 되었다( 삼봉집 13, 朝鮮經國典上 賦典 經理). 정도전은 고려시대 국가에서 조를 받아먹도록 지급한 토지의 지목을 언급하고 난 후, 일반 백성은 자신의 노동력에 따라 토지를 개간하여 점유하도록 하였다고 하고 있다. 정도전의 견해가 고려시대의 토지제도에 관한 정확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의 고려시대의 토지제도에 관한 견해에는 이미 자신이 지향하 고자 하는 토지제도의 방향이 깔려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정도전이 고려말 토 지제도의 문란과 관련하여 주목하고 있는 것은 개간과 겸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 다. 36) 삼봉집 13, 朝鮮經國典 上 賦典 經理. 37) 한영우, 앞의 책 pp.207 208 참고. 정 도전 자신이 정전제에 대하여 직접 언급하고 있는 것 은 아니지만, 중국의 三代의 토지제도를 이상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38) 한영우는 정도전이 주장한 공전제는 국유제와는 달리 소유권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 고 보았다(앞의 책 p.206). 江原謙은 정도전이 권문세족의 부재지주적 사유지는 인정하지 않 았지만 사대부의 재지지주적 사유지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였다(앞의 논문 p.86). 정 도전은 사유지를 국가에 귀속시켜 인구수에 따라 재분배하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재분배한 이후 과연 사유지로서 인정하자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비록 사적인 점유권을 인정하고자 하 였으나, 계속적인 소유지의 확대까지 인정하고자 하지는 않았다고 판단된다. 39) 삼봉집 13, 朝鮮經國典 上 賦典 經理. 40) 한영우, 앞의 책 pp. 213 214 참고.

- 141 - 그는 세력있는 자들이 개간을 통하여 토지를 확대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강도 높 게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이들이 다른 토지를 겸병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도 비판적 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정도전이 생각한 세력있는 자란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겠다. 즉 많은 노비를 소유하고 있거나 불법으로 양 인 농민을 동원하여 토지를 개간할 수 있었던 사람들을 지목한 것이다. 고려후기에 고위 관직에 있거나 권문세족에 해당하는 귀족층에서는 개간을 통해 토지를 확대하 기도 하고, 賜牌를 받아서 토지를 개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賜牌田의 경우 원 래의 의도와는 달리 허위로 주인 없는 토지 또는 황무지라 사칭하거나 다른 사람의 토지를 점탈하는 현상으로 비화되어 광범위한 토지 집적을 야기하였다.41) 정도전이 토지제도의 문란을 가져오게 된 이유로 파악한 개간은 수조권의 확보라기보다는 소 유권의 확보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한편 그는 세력가들이 겸병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토지를 탈점한 것도 토지제도를 문란하게 한 중요한 이유로 들고 있다. 정도전이 개간의 확대와 겸병을 동일한 것으 로 여겼는지는 불명확하지만, 겸병을 통해 토지제도가 붕괴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 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는 겸병에 관하여 위의 기록뿐만 아니라, 같은 조항 윗 부분에서 이미 언급하고 있다. 田制가 무너지면서 세력이 강한 사람들이 兼井을 하여 부자는 토지가 천백에 이어지 게 되었으며, 가난한 사람은 송곳을 꼽을 토지도 없게 되어 부자의 토지를 빌려(借耕) 일년내 부지런히 고생하여도 식량이 오히려 부족하게 되었고, 부자는 편안히 앉아서 경작을 하지 않아도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사람(傭個人)을 부려 수확량의 태반을 먹 었다. 국가에서는 손을 끼고 구경만 하니 그 이득을 차지하지 못하고, 백성은 더욱 가 난하여지고 나라도 더욱 가난하여졌다( 삼봉집 13, 朝鮮經國典 上 賦典 經理). 여기에서 정도전이 말하고 있는 겸병은 수조권의 확보에 따른 토지를 가리키는 것 은 아니다. 겸병의 확대로 인하여 토지를 잃어버린 농민은 차경을 하였다는 점으로 보아 그러하다. 차경을 하였다는 것은 소작을 말하는 것으로 겸병이 결국 소유권에 바탕을 둔 토지의 확대를 가져왔으며, 이로 말미암아 빈부의 격차도 커지고 국가의 재정도 어려워지게 되었음을 정도전은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정도전은 이러한 겸병 41) 사패전은 원래 공로가 있는 신하에게 수조지로 분급되는 토지였다 한다. 그런데 고려후기에 閑地(황무지, 無主地)에 사패가 지급됨으로써 수조권과 소유권이 동시에 주어지는 결과를 초 래하였다고 한다(강진철, 高麗末期의 私田改革과 그 成果 진단학보 66, 1988 ; 앞의 책 pp.292 293 및 이경식, 高麗末期의 私田問題 앞의 책 pp.18 29). 浜中昇은 사급전 즉 사패전은 수조지의 분급이라고 보고, 이에 근거하여 개간과 탈점이 이루어졌으며 이것이 고 려후기의 토지 겸병의 주요 원인이라고 하였다( 高麗後期の賜給田 朝鮮史硏究會論文 集 19, 1982 앞의 책 pp.201 202).

- 142 - 國史館論叢 第46輯 과 개간의 확대로 발생된 폐해를 고려말 私田의 폐해로 보았다. 그러므로 정도전은 고려말 사전의 폐해를 개간과 겸병을 통한 불법적인 소유권의 확대로 인한 사유지의 증가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42) 그는 고려말 토지제도의 문란을 수조권을 매개로 사전을 불법으로 확대하여 가던 현상이라기 보다는 소유권에 바탕을 둔 세력 가의 토지 불법 확대와 이에 기인한 자영농 및 하층농의 몰락이라는 점에 비중을 두 고 파악했던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정도전의 위와 같은 시각은 소유권에 기반을 둔 토지제도를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게 하였을 것이다. 그 자신이 예전에는 국가에서 토지를 소유하여 백성에게 주었으 며, 백성 가운데 토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고 경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로 인하여 백성의 빈부의 차이가 심하지 않았다고 朝鮮經國典 經理條의 서두에서 내 세운 것은 바로 그러한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정도전은 소유권에 입각한 사유지의 인정과 불법적인 사유지 증대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지주 전호제가 부의 불균등을 가 중시키고 일반 농민을 몰락시키는 커다란 요인이 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43) 殿下(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몸소 그(토지제도) 폐단을 보고 개탄스럽게 여겨 私田을 혁파하는 일을 소임으로 하였습니다. 나라 안의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인구를 헤아려 토지를 나누어 주어(計民授田) 옛날의 田制의 올 바름을 복구하고자 하였으나, 당시의 舊家 世族이 자기에게 불편한 까닭으로 입을 모아 비방하면서 여러 가지로 방해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지극한 다스림의 혜택을 입 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2 3 명의 뜻을 같이 하 는 대신과 함께 앞 시대의 법을 강구하고 지금의 마땅함을 참작하여 나라 안의 토지 를 양전하였습니다. 토지를 結로 계산하여 그 가운데 上供田, 國用田, 軍資田, 文武役 科田으로 나누고, 閑良 가운데 서울에 있으면서 왕실을 호위하는 사람과 과부로 수 절하는 사람, 鄕 驛 津 渡의 吏와 庶民 工匠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역을 맡은 사람에 게 모두 토지를 주었습니다( 삼봉집 13, 朝鮮經國典 上 賦典 經理). 정도전은 고려말 이성계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私田 혁파를 위하여 노력하였 는데, 그 방향은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인구수에 따라 토지를 지 급하는 방식을 취하고자 함에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즉 모든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 킨 상태에서 노동력을 고려하여 토지를 분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는 정도전이 42) 김태영은 고려말기 私田의 기본적인 형태는 수조권이 아니라 소유권에 입각한 토지 지배의 유형으로 변해 있었다고 보고 있으며, 정도전이 서술한 기록 역시 그러한 점을 반영하고 있 다고 하였다(앞의 책 p.34 36) 강진철은 수조지 계열 사전과 소유권에 바탕을 둔 사전을 거 론하면서 고려말 사전 혁파에서 부정된 것은 수조권에 바탕을 둔 사전이라고 하였다 (앞의 책 pp.302 316). 43) 한영우, 앞의 책 pp.203 206 참고.

- 143 - 고려말 사전의 폐단이 소유권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졌다는 인식 아래 토지개혁을 이 루고자 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정도전 자신이 밝히고 있다시피 당시 권문세족의 반대에 봉착하여 실패하였다. 비록 정도전은 권문세족의 반대에 의하여 이성계를 중심으로 자신이 주장한 토지개혁 방안이 실패한 것처럼 말 하고 있으나, 이성계 세력 가운데서도 모두가 정도전이 의도한 바의 토지개혁 방안 에 찬성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서 보았듯이 조준의 경우만 보아도 정도전과는 다른 시각에서 고려말 사전의 폐해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이 의도한 바대로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양전을 실시하여 국 가에 대하여 직역이나 특별한 역을 부담하는 사람들에게는 토지가 지급되는 형식으 로 토지개혁이 이루어졌음을 정도전은 언급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공양왕 3년 5월 에 이르러 과전법 시행으로 귀결된 사전 개혁을 두고 하는 말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정도전은 고려말 私田 개혁과 관련하여 자신의 입장과 토지개혁 이후 자신에게 쏟아 지는 불평에 대하여 나름대로 변명하고 있다. 私田 혁파 논의에 대하여 저(정도전)는 처음에 모두 국가의 토지로 하여 國用을 두텁게 하고 군량을 충족하게 하며, 관료의 녹봉을 주고 군역 부담자에게 공급함으 로써 상하에 부족함의 우려가 없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臣(정도전)의 뜻이 었습니다. 그런데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이윽고 전하(공양왕)에게 청하여 提調官을 그만 둔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토지를 분급하는데 고르지 못한 원망이 모두 저에게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작은 일이며 전하가 명백히 아시는 일인데 저는 변명 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려사 권 119, 鄭道傳전). 정도전이 사전 개혁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을 재삼 밝히면서, 자신이 원래 의도한 바와 같이 사전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자 사전 혁파와 관련하여 맡은 직임을 그만두 었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도 사전 개혁으로 말미암은 불평이 자신에게 쏟아져 억울 하다는 심정을 토로하였다. 당시 정도전은 군제 개편 등 다른 문제에 있어서도 자신 의 뜻과는 달랐음을 말하고 있다.44) 이처럼 이성계 세력에 의해 단행된 조치에 대하 여 자신의 의사가 아니었다고 변명하는 것은 일련의 개혁에 따른 불만 세력만을 염 두에 두고 말하였던 것만은 아닐 듯하다. 비록 군제 개편이나 사전 개혁에 따라 불 만을 가진 사람들이 정도전 자신을 비난한 데 대하여 변명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당 시 정도전이 그러한 원망을 두려워할 만큼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렸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45) 정도전 자신이 이성계 세력 가운데 상대적으로 반대 세력의 반발을 심하 44) 고려사 권119, 鄭道傳전. 45) 위 사료는 공양왕 3년(1391) 6월경에 정도전이 한 말로 추정된다. 당시는 정도전 자신이 신 변에 위협을 느낄 만큼 불안한 시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 144 - 國史館論叢 第46輯 게 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성계 세력에 의해 추구되어온 개혁 자체에 대하여 자신의 책임을 면하려는 입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정도전은 위에서 언급하고 있다시피 사전을 혁파하여 국가에 귀속하고 왕실과 국 가의 재정 및 사대부와 일반 백성 가운데 국역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재정 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소유권에 기반을 두고 확대되었던 사전 을 혁파의 주대상으로 삼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정도전의 토지 개혁안은 상당히 과격한 방법을 수반하는 토지 개혁안이었으며, 그 시대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느 낌마저 주는 것이었다. 이미 고려말 소유권에 기반을 둔 사유지가 확대되었으며, 그 러한 추세가 정착되어갔음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 정도전의 입장은 이성계 세력의 개혁방침으로 수용되지도 못하였으며,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계층으로부터 광범위한 반발을 살 소지가 많았다. 그러므로 정도전은 사전 개혁에 자신의 의사가 반영되지 도 않았으며, 자신에게 비난이 퍼부어지는 것도 잘못이라는 태도를 취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 가운데 핵심적인 인물로 꼽혀왔다. 그 의 사상적 검토를 통하여 고려말 개혁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높게 평가되어 왔다. 하지만 토지제도에 대한 그의 인식은 공적인 것을 강조한 나머지 당시의 추세 나 개혁의 노선에 적합한 것이었다고 판단하기는 곤란하다. 일부 세력가의 소유권에 바탕을 둔 불법적인 토지 확대를 막아보고, 일반 농민의 몰락을 방지하려는 그의 노 력은 사전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던 당시 사회를 바꿔보려는 의도로 이해되지만, 방 법에 있어서는 국가의 토지 관리라는 공적인 틀만을 너무 이상적인 형태로 파악하여 개인이 직접 경영할 수 있는 토지 이외의 사유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차원에까지 이른 것이다. 정도전은 일반 농민의 토지 경작에 관심을 표명하면서 특히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 하였다. 그는 국가 재정의 근본은 농업이라고 보았으며, 다른 경제적 행위에 대해서 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농업을 중시하는 것은 당시 일반 관료에게 대부분 해 당하는 사고였지만, 개혁 주도 세력 가운데 조준과 비교하여 볼 때 더욱 두드러진다 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은 朝鮮經國典 賦典條에 工商税 항목을 설정해 두고 있는 데, 거기에 따르면 예전에 공상세를 제정한 것은 末作 즉 공업과 상업을 억제하여 本實 즉 농업에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고 있다. 정도전은 농업을 강조하면서, 공상에 관한 제도가 없어서 백성들 가운데 게으르고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공과 상에 종사하여 농사짓는 백성이 줄어든다고 하고 있 다. 이는 정도전이 상업과 공업을 비판하기 위한 표면적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 겨진다. 당시 농업 인구가 줄어들었으나 그것이 공상에 종사하는 수가 증가하였던데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고려말 불법적인 사전의 확대와 농민층의 몰락으로 자소작농이 줄어들고 일부 유이민이 발생하였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 145 - 그 수가 工商에 종사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이성계 세력이 집권하고 난 이후 공상에 관한 규제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종래 이인임 세력 가운데 상업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는 점과 공상에 종사하는 사람 가운데 재물을 통하여 관직을 얻은 사람이 있었기에 나온 조 치의 하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46)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한 언급없이 정도전 은 농업 이외의 다른 경제적 행위에 대하여 제동을 걸고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정도전이 공상세를 설치하고자 한 것은 이성계 세력이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세력의 재원 통로를 막아보자는 정치적 의도나 국가의 재원을 확보한다는 측면에서 나온 것 이라기보다는, 士農工商의 직업상의 차별을 염두에 두고 그 가운데 공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일반 양인 가운데 가장 하위의 직업에 종사하는 계층으로 규정하고 자 하는 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준의 경우 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계층에 대한 구체적인 규제나 자신의 태도 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상서문에 의하 면 농업 이외의 경제적 행위에 대하여 아주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대목을 찾 아보기는 어렵다. 그는 都摠都監을 혁파하고 5部를 개성부에 소속하도록 하고 1 里 마다 社長을 두어 자제를 교육하도록 하자면서, 아울러 천인과 工商의 자제로 하여 금 각기 자신의 일에 종사하도록 하고 그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풍속을 경박하게 하 지 않도록 하자고 하였다.47) 이러한 그의 주장은 개성의 각 部에 里를 두고 사장으 로 하여금 각 마을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애초부터 막아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간접적으 로 보여주는 것이다. 조준은 상업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서북면의 상업 세력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이는 이성계 세력에 불만을 가지고 있거나, 이성계 세력에 속하 지 않는 인물들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온 것이지 상업 자체를 억제하기 위한 조치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조준은 상업을 빙자하여 불법적으로 재물을 모으는 것 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는 있지만, 이는 정치적인 고려에서 비롯한 것이 지 상업 자체를 억누르려는 입장이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여겨지는 반면, 정도전은 상업 자체를 억제하기 위한 정책을 추구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서로의 생각에 차이 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조준은 당시 사회의 추세를 수용하는 범위에서 경제적 개혁을 시도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준은 당시 어느 정도 자리잡은 소유권에 기반을 둔 사유지를 인정하는 선상에서 수조권의 문제를 해결하여 사전의 폐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조준의 생각이 과전법에 영향을 미쳤으며, 불법에 의한 수조권을 매 46) 고려사절요 권33, 창왕 즉위년 8월 大司憲趙浚陳時務 참고. 47) 위와 같음.

- 146 - 國史館論叢 第46輯 개로 한 사전을 혁파하기에 이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정도전은 같은 개혁 집단의 핵심이었지만 좀 더 과감한 개혁을 요구하였던 것 같다. 그것은 수조권 뿐만 아니라 소유권 자체까지 무시하고 모든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키는 조치를 통하여 다시 분배 하는 과정을 선택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정도전의 입장은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 지만, 시대적인 추이와는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며, 3代의 제도를 너무 이상적인 모 형으로 주장한 느낌이 든다. Ⅳ. 趙浚과 鄭道傳의 병제개혁안 고려 말 군사제도의 개편은 권력의 이동과 관련하여 주요한 관심사였다. 고려전기 중앙군 편제인 2軍 6衛制와 지방의 州縣軍制가 무너진 후 고려후기 사회에서는 중앙 군과 지방군을 어떠한 체제로 유지할 것인가 하는 점이 통치체제의 정비와 아울러 매우 시급한 사안 가운 데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제도는 체계적으로 정 비되지 못하고 필요에 따라 임시 방편으로 보완 수정되었다.48) 위화도 회군 이후 군 지휘권은 차츰 이성계 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성 계 세력에 반대하거나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은 사람들은 군지휘체계 선상에서 멀 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 일파가 추구한 군사제도에 관한 개혁 방안에 커다란 영 향을 미친 인물은 역시 조준과 정도전이었을 것이다. 물론 일부 이성계 세력 가운데 武人 세력이 군사 문제와 관련하여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지만, 군사제도의 개혁과 관련하여는 조준과 정도전의 입장이 우선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준과 정도전은 과거를 통하여 관직에 진출한 文人 출신이지만 이성계 세력의 핵 심으로서 공양왕 3년에는 이성계와 함께 군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49) 이것은 이들이 고려 말 개혁을 주도하면서 군사적인 문제에까지 깊이 관여하였음을 암시하여 주는 것이다. 조준이 위화도 회군 이후 상소를 통하여 국가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 면서 군사제도에 대하여서도 관심을 기울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고려말 사전의 폐해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조준은 고려의 토지제도가 무너지게 되면서 군사제도도 무 너지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50) 이는 군사제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아니나 고 려전기의 토지제도와 군사제도를 긍정적으로 조준이 이해하고 있음을 시사하여 준다. 48) 고려 후기의 군제에 관하여는 內藤雋輔, 高麗兵制管見 ( 靑丘學叢 15, 16, 1934; 朝鮮 史硏究, 1961)과 민현구, 高麗後期의 軍制 ( 高麗軍制史, 1983)를 참고하기 바람. 49) 공양왕 3년 1월에 3軍都摠制府가 설치되고, 이성계가 都摠制使에, 배극렴이 中軍摠制使에, 조 준이 左軍摠制使에, 정도전이 右軍摠制使에 임명되었다( 고려사절요 권35, 공양왕 3년 1월). 50) 고려사절요 권33, 창왕 즉위년 7월 大司憲趙凌等上書.

- 147 - 실제로 조준은 고려전기 군인을 府兵制 아래의 군사인 府兵이라 인식하고, 부병에 게 토지가 지급되었다고 하고 있다.51) 나아가 군사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면서는 고려 전기의 체계를 언급하면서 당시의 법이 무너졌음을 안타까워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 고 있다. 府兵은 8衛(2군 6위)에 영속되고 8위는 軍簿司에서 통솔하며, 42都府의 병사는 12 만 명이었습니다. 隊에는 正이 있고, 伍에는 尉가 있어 上將軍에 이르기까지 서로 통 속되어 있었으니 왕실의 호위를 엄하게 하고 외적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元나라를 섬긴 이후로 태평한 세월이 이어지니 文武가 안일하여 호위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 니다. 이에 近侍와 忠勇에 모두 護軍 이하의 官을 설치하여 호위의 임무를 대신하게 하고 祿을 주니 祖宗의 8위 제도가 모두 헛것이 되어 한갖 祿을 허 비하게 되었습니 다( 고려사 권81, 兵 1 兵制, 공양왕 원년 12월 憲司上疏). 위의 기록은 조준이 올린 상소 가운데 일부인데 고려전기 군인제가 부병제에 입각 하여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2도부의 군인 12만이 8위(2군 6위)에 소속하였으며, 8위는 군부사(병부)의 지휘를 받았다고 하고 있다. 조준이 고려전기 군제를 부병제로 파악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는 이미 비판되어진 바 있다.52) 고려전 기 부병제에 입각하여 군인 선발이 이루어졌다는 조준의 견해는 부병제를 이상적인 군제로 보려는 시각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53) 그런데 조준은 고려전기 군 사제도가 漢의 南北軍제도와 唐의 부병제를 모방한 것으로 설정하였다.54) 군인의 신 분과 토지 지급에 관한 사항은 당의 부병제와, 군대의 편제나 운용은 남북군제와 유 사한 것으로 파악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준이 고려 말 군사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정비하고자 한 군제는 그가 인식한 고려전기의 군제처럼 큰 틀에서는 병농일치에 의한 부병제 형태 라고 할 수 있다. 즉 20세에서 60세에 이르는 일반 농민 출신 가운데서 군역을 짊어 지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었다. 한편 종래의 8위는 그대로 존속하도록 하 고, 각 위에는 무반 품계를 두어 각 위에 소속한 군인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조준은 또한 8위가 명실공히 군사편제의 핵심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고려후기 임시로 조직 되었다가 정착된 다른 시위 숙위 기구는 8위에 통합하도록 건의하였다.55) 그리고 농 민 가운데 군역을 지고 군인으로 선발된 사람은 8위에 소속하여 일반 군인으로 활동 51) 위와 갈음. 52) 李基白, 高麗 初期 兵制에 관한 後代 諸說의 檢討 ( 亞細亞硏究 1-2 1958 高麗 兵制史硏究, 1968) pp.8 14. 53) 이기백, 위의 논문 p.14. 54) 고려사 권81, 兵 1 兵制, 공양왕 원년 12월 憲司上疏. 55) 위와 같음.

- 148 - 國史館論叢 第46輯 하도록 하였다. 한편 여기서 고려말 군지휘체계와 관련하여 당시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조준이 주장한 군사 편제가 당시 실상과 어떻게 다르며, 당시 실상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를 파악하기 위하여 그러하다. 고려 후기에 들어서 중앙군의 역할을 하던 2군 6위는 유명무실해지고 무반직도 전문적인 군인이 임명된 것이 아니라 음직 이나 공로의 대가로 주어지는 사례가 빈번해지게 되었다. 중앙군의 역할을 한 것은 원간섭기 동안 만들어진 특수부대였으며, 공민왕대에는 忠勇衛라는 새로운 부대가 편제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고려전기에 중앙군을 구성하였던 전문적인 군인 신분이 사라지고, 중앙군의 지휘체계도 일원적이지 못했다. 그러한 와중에 농민 출신 군인의 군사적 역할이 증대되었다. 각 軍目道별로 일반 농민을 주축으로 하여 군적을 작성 하고, 이들 가운데 중앙의 시위군과 지방 주둔군을 뽑았던 것이다. 농민 출신 군사는 도별로 임명된 장수(절제사, 원수)에 의하여 장악되었으며, 이들은 마치 각 장수 휘 하의 私兵처럼 인식되기도 하였다.56) 조준은 이러한 상황 아래 있던 군사 조직을 개편하여 중앙군은 8위 가운데 소속하 도록 하여 일원적인 지휘체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종래의 특수부대 구성원을 흡수 하여 무관은 그에 맞는 직을 주고, 8위에 소속한 일반 군사는 병농일치 하의 농민 출신 군인으로 충당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체제를 설정하면서도 조준은 각 지 방의 군지휘권자인 장수를 어떠한 편제 아래 둘 것인가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언급 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는 동북면과 서북면을 제외한 나머지 도에는 절제사를 한 명만 두자고 하였다.57) 이는 각 도의 軍政과 軍令을 일원화하자는 의도였다. 이들 각 절제사가 거느린 군사가 지휘체계상 중앙의 어떤 군사기관과 연계되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부병이 8위에, 8위가 병부에 통속되어야 한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절제사가 거느린 지방 출신 군인 역시 8위-병부로 이 어지는 지휘체계에 속하여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8위-병부로 이어지는 군지휘체계 이외에 5軍 조직이 있다. 조준은 5軍과 병부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다. 5군 조직은 공양왕 3년 1월에 3군으로 바뀌게 되고, 아울러 3군도총제부가 설립되었다. 비록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가 중앙과 지 방의 군사를 관할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고는 하지만,58) 3군도총제부를 설치함으 로써 명실공히 이성계 세력이 중앙과 지방의 군사를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고 하겠 다. 3군도총제부에서는 모든 군사적인 사항을 관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군지휘상 56) 민현구, 高麗後期의 軍制 pp.332 339 및 朝鮮初期의 軍事制度와 政治 pp.94 100 참고. 57) 고려사절요 권34, 공양왕 원년 12월 大司憲趙浚等上疏. 58) 이성계는 창왕 즉위년 8월에 都徳中外諸軍事로 임명되었다( 고려사절요 권33, 창왕 즉위년 8월). 하지만 元帥의 印章을 전부 회수한 것은 공양왕 2년 11월이었다(위의 책 권34, 공양왕 2년 11월). 이로써 지방의 군지휘권자 자체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이성계 세력이 병권을 완 전히 장악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각 도별로 절제사가 계속 군지휘권을 장악하였다.

- 149 - 최고의 관부라고 할 수 있다. 조준 자신이 3군도총제부 좌군총제사에 임명되었다. 조준 자신이 이러한 군사 기 구를 원하였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조준은 부병-8위-병부의 관계에 대해서는 명시하 고 있지만, 3군도총제부나 지방 군사의 지휘권자와의 지휘체계상의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재상이 지나치게 병권을 장악하는 것에 대하여는 경계하 였던 것 같다. 재능에 관계없이 재상이 절제사로 파견되는 것에 반대하여 도평의사 사와 대간이 절제사를 천거하도록 한 것이나 조선에 들어서 재상으로서 병권까지 겸 하는 것이 불합리하다 하여 병권을 반납한 것으로 미루어 그처럼 판단할 수 있다.59) 그가 병부에 대해 군정이나 군령상 일정한 위치에서 역할을 하여주기를 바랐던 것만 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조준은 군제 개혁에 있어서도 재상이 군지휘권 을 독점하기 보다는 병부의 관료가 그에 참여할 수 있는 체계를 구상하였다고 할 수 있다. 조준이 재상의 지위를 인정하면서도 6부의 임무를 강조한 통치체제의 구상이 군사적인 사안에도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정도전은 조선 태조대에 자신의 정책을 실행하면서 군사적인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60) 따라서 그가 고려말에는 어떠한 군사제도를 원하였는가를 찾아내기 란 어렵다. 조선 건국 이후의 정치적 상황 변화를 고려하면 정도전의 군제 개혁안이 고려말부터 생각해 온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가 주장 한 군제 개혁안이 통치구도와 동떨어지게 구상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조선에 들어서 그가 내세운 군제 개혁안이 고려말 시기에는 전혀 예상하 지 못했던 것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아닐까 한다. 정도전의 조선 태조대 군제 개혁의 요지는 私兵을 혁파하자는 것으로 집약될 수 있다.61) 그런데 그는 사병 혁파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이전에 군 편제를 정 비하려는 노력을 보인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초 군제를 말하면서 唐의 부병제를 현 실에 맞게 고쳐 10衛를 설치하였으며 義興三軍府62)가 이를 통솔한다고 하였다. 그러 면서도 한의 남북군 체제를 준용하고 있다고 보았다.63) 이는 당의 부병제 및 한의 남북군제와 당시의 군제가 유사하다고 인식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입장은 조준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시기적으로 다르지만 조준의 경우 8위-병부의 지 휘체계를 설정하였던 데에 비하여 정도전은 10위-의흥삼군부의 지휘체계를 상정하였 던 차이가 보인다. 정도전이 사병을 혁파하고 새로이 편제하려는 군 조직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궁금 59) 위의 책 권34, 공양왕 원년 12월의 조준 상소와 태조실록 권2, 원년 12월 壬戌 기록 참고. 60) 정두희, 앞의 논문 pp.140 142 참고. 61) 정두희, 앞의 논문 p.146. 62) 의흥삼군부는 태조 2년(1393) 3군총제부가 개편되어 설립된 것이다( 태조실록 권4, 2년 9 월 丙辰). 63) 삼봉집 10, 經濟文鑑 下 衛兵.

- 150 - 國史館論叢 第46輯 하다. 사병 혁파라는 말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가 내세운 군 편제는 사병을 국가의 병사로 편입시키는 작업과 아울러 실행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정도전은 조선의 중앙군을 이야기하면서 府兵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정도전이 말하고 있는 부병이라는 것은 병농일치 하의 부병제를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정도전이 말하 고 있는 부병이라는 것은 조선 건국 이후 성립한 의흥삼군부에 소속한 무관직을 가 진 중앙군사를 지목하고 있다고 보여진다.64) 이는 사병의 성격을 갖는 군인과는 다 른 국가의 군인 즉 官兵(公兵)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즉 정도전이 의도한 사병 혁파는 부병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정도 전이 군사를 어떠한 편제 아래 두고자 하였는가 하는 점을 파악하여 보기로 하겠다. 국가에서 唐의 府兵制를 알맞게 가감하여 10衛를 세우고, 1衛마다 5領을 거느리게 하였다. 上將軍 이하 將軍에 이르기까지, 中郞將 이하 尉正에 이르기까지 義興三軍 府에 통할되도록 하였다. 재상으로 하여금 의흥삼군부의 일과 衛의 일을 맡게 하여 중함으로써 경함을 통제하게 하고, 小로써 大에게 속하도록 하여 체통이 엄하도록 하였다. 각 道에는 節制使를 두고 州郡兵으로 하여금 番上 숙위토록 하였으니, 중앙 과 지방이 서로 통제되도록 하고자 하는 뜻에서이며, 주군병을 의흥삼군부의 鎭撫所 에 속하도록 한 것은 중앙이 지방을 제어하고자 하는 뜻이다( 삼봉집 13, 朝鮮經 國典 上 治典 軍官). 정도전은 중앙군의 골격인 10위가 의흥삼군부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 시하고 있다. 아울러 의흥삼군부와 10위의 일을 관장하는 것은 재상이어야 한다고 하고 있다. 물론 재상이 무관과 일반 군인을 직접 장악하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군정과 군령을 관장하는 최고 지위에 재상이 임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재상이 군지휘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특히 재상 가운데 총재가 병권마 저 장악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종래 사병의 성격을 띤 군사로 알려진 절제사가 관장하던 지방군 가운데 중앙으로 올라와 시위나 숙위를 담당하던 군사도 의흥삼군부의 진무소에 소속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사병을 혁파하고 의흥삼군 부가 모든 군사를 관장하여야 한다는 주장과 상통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도전은 절제사의 권한을 축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가 군제에 대한 광범위 64) 정도전이 조선의 군사제도와 관련하여 사용하는 부병은 병농일치 아래의 부병이나 番上의 의미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조선의 군제를 설명하면서 부병이라고 하고, 이어 의흥 삼군부와 10위를 거론하는 것으로 보아 부병은 의흥삼군부의 지휘를 받는 군사라는 의미로 해석함이 마땅할 듯하다. 특히 후대에 私兵을 혁파하여 의흥삼군부에 귀속시켜 부병이 되도 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의 관료에게 부병이란 의흥삼군부라는 국가의 공 식적인 군사기구에 편제되어 私兵과 대비되는 군인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 151 - 한 개혁안을 제출하였던 태조 3년(1394) 의 상소문을 보면 각 도의 절제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65) 각 도의 절제사는 종실이나 재상 가운데서 맡도록 하고, 실제 지방 군은 병마사가 지휘하도록 하며, 절제사는 병마사를 감독하는 권한을 갖도록 하자고 하였다.66) 이는 각 도의 절제사가 지방 출신 군사를 사병처럼 장악하는 것에 제동을 걸기 위한 주장이었다. 비록 정도전이 내놓은 무반의 관제개혁 등은 실현되지만, 의 흥삼군부를 통하여 각 衛의 무관과 절제사를 장악하려는 의도는 손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도전은 진법 훈련을 통하여 군사를 일원적 지휘체계 아래 두려고 하였다. 정도 전이 태조 말기 사병 혁파를 염두에 두고 실시한 진법 훈련도 의흥삼군부의 관할 아 래 실시되도록 하고 있다.67) 이는 10위에 소속한 중앙군을 의흥삼군부의 관할 아래 두고자 하는 의도일 뿐만 아니라, 종래 각 절제사에 의해 장악된 군사 즉 지방 출신 시위군(私兵) 을 의흥삼군부에 속하게 하여 지휘를 받도록 함으로써 공적인 군사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68) 물론 태조 말기의 진법 훈련은 요동공략이라는 명분과 맞물려 시행된 것이지만, 정도전이 의흥삼군부를 통하여 군지휘체계를 일원화하고자 한 것과 무관하지는 않다고 여겨진다. 정도전은 공양왕 3년 3군도총제부가 설립되어 우군총제사에 임명되었을 때 그 직 을 사양하였다. 그 이유로 자신은 3군도총제부의 설립과 무관한데 元帥를 폐지하고 3군도총제부를 설립하면서 자신이 총제사에 임명되면 여러 원수가 자신을 원망할 것 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69) 그는 왕으로부터 보호를 약속받고 그 직을 승낙하고 있다. 비록 그가 총제사직을 사양하였지만 그가 추구한 통치체제나 조선 건국 이후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병권 장악은 그가 바라던 바였을 것이다. 정도전이 군사편제에 대하여는 광범위하게 언급하고 있으나, 군인의 신분이나 지 위에 대하여는 이렇다 할 지적을 하고 있지 않다. 주군병이라고 표현된 지방 군인은 농민 출신 가운데 군역의 담당자였을 것이다. 지방군 가운데는 중앙으로 번상하는 군사와 지방에서 군역을 담당하는 육수군과 기선병이 있었다. 중앙군이 소속한 10위 에는 기본적으로 무관만이 존재하였다. 정도전 자신이 10위의 실제 군인을 충원하려 는 구체적 방안을 말하고 있지 않다. 이는 10위 소속 중앙군은 무관을 중심으로 운 용하려는 의도와 무관하지는 않을 듯하다. 정도전은 고려말 현직에 있지 않은 관료 65) 태조실록 권5, 3년 2월 己亥. 66) 위와 같음. 정두희는 정도전의 병제 개혁안이 절제사에게 직접적인 군대 통솔권을 주지 말 자는 구상이었다고 하고 있다(앞의 논문 p.146). 67) 태조실록 권 12, 6년 8월 戊子. 68) 진법 훈련이 지방출신 시위군 전원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정두희, 앞의 논문 p.143), 절제사와 그 휘하 무관 및 무예가 뛰어난 사람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아 사병의 사적 성격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다고 하겠다(민현구, 앞의 책 p.111). 69) 고려사 권 119, 鄭道傳전.

- 152 - 國史館論叢 第46輯 까지 중앙의 숙위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70) 이로 보아 중앙의 시위와 숙위는 관 료 계층에 맡기고자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러한 정도전의 입장을 종합하여 볼 때 그는 중앙군과 고려말 사병으로 파악된 각 절제사에 의하여 장악된 군사를 하나의 군사 기구를 통하여 일원적으로 통제하고 자 하였다. 조준은 8위의 조직을 정상화하여 병농일치제 아래 운용되는 군역 담당자 를 여기에 속하도록 하고, 그 편제를 정비함과 아울러 병부의 역할을 확대하려고 하 였던 반면에, 정도전은 의흥삼군부를 통한 군지휘체계의 일원화와 중앙 시위 숙위군 조직의 강화에 더욱 초점을 두고 군제 정비를 꾀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정도전 은 의흥삼군부라는 군사기구를 통하여 재상이 군권을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는 발판 을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재상이 군사적인 면에서도 최고 의 지위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Ⅴ. 鄭道傳과 趙浚의 개혁안의 의미 조준과 정도전은 고려말 이성계 세력이 집권하여 새로운 정책을 펴나가는 데 가장 중요 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인물이다. 조준의 경제개혁안은 과전법에 반영되었으며, 통치체제론도 공양왕대 일부 수용되었다. 그런데 조선 건국 전후 상황이 변하였다. 두 사람 사이의 정책에 별로 차이가 없었다면 조선 건국 이후 하나의 정책이 조선 사회의 지침으로 작용하였을 것이지만, 두 사람간의 정책상의 차이가 결국은 조선 건국 전후 통치체제에서의 갈등을 가져왔으며, 새로운 선택이 불가피하도록 하는데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물론 이 두 사람의 개혁 노선의 차이로 조선 건국 이후 정 치적 대립이 빚어졌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둘의 정책상 차이가 정치적인 대립을 통하 여 표출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개혁안이 갖는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조준과 정도전은 사실상 가장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면서 정 치적 활동을 계속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영향력은 서로 비중을 가누기 어렵다고 하 겠다. 그런데 태조대에 실행된 정책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정도전의 주장이 중앙 정 부에서 더욱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고 보여진다. 비록 조준 역시 재상으로서 활 동을 하지만 정도전이 주장한 정책이 우선적으로 채택되고 있음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 이후 조선의 통치체제 전반의 틀을 세우기 위하여 朝鮮 經國典, 經濟文鑑 등을 저술하여 자신의 입장을 표출하고 있으며, 그러한 그의 견해는 실지로 정책에 많이 반영되었다. 70) 위와 같음.

- 153 - 정도전이 태조대에 실행에 옮긴 정책을 모두 검토할 여유는 없다. 핵심적인 사항 을 검토하기로 하겠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왕위에 즉위한 이후 도평의사사에 참여하 여 중요한 사항을 논의하고 인사권을 관장하였다.71) 이후 관계의 정비나 관부의 정 비 등에 정도전의 견해가 거의 그대로 수용되었다. 그것은 정도전의 문집의 내용과 태조실록 의 기록을 대조하여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정도전은 관제와 관계를 정 비하면서 재상의 정치 운영 기구인 도평의사사의 권한을 고려 말과 별로 다름없이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재상 중심의 통치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하겠다. 그런데 재상 중심의 통치체제를 추구하면서도 앞에서 언급했듯이 특정한 재상이 강 력한 권한을 갖는 즉 총재 중심의 통치 구도를 지향하였다. 정도전이 총재 중심의 통치체제를 지향하고자 하였다는 것은 군사적인 사항과 관 련하여 살펴볼 때 두드러진다. 정도전은 判義興三軍府事를 겸직하였는데, 이는 재상 으로서 병권을 아울러 관장하고자 하는 뜻이었다. 그는 의흥삼군부를 축으로 중앙군 과 지방군을 통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사병을 혁파하려는 의도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정종대에 사병이 혁파되지만,72) 이때의 사병 혁파는 정도전이 의 도한 바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사병을 혁파하여 의흥삼군부에서 군사를 관할하게 되 었다는 점에서는 정도전이 일찍이 시도한 바와 일치하지만, 정도전이 사병을 혁파하 고 병권을 재상 가운데 판의흥삼군부사를 겸임하는 사람이 장악하도록 하려는 것과 는 달리 재상이 병권에 참여하는 길이 차후 봉쇄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73) 정도전은 왕권에 대하여서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려고 하였 던 것 같다. 분명하게 왕권 자체를 제약하는 요소를 찾기는 힘들지만 이미 재상의 권한과 관련하여 살펴보았던 것들을 시도함으로써 왕권은 어느 정도 제약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도 전이 태조 즉위 이후 지은 敎書를 보면 왕실 재정과 관련된 부분이 있다.74) 이에 따르면 왕실의 창고와 궁실의 재정을 三司에서 회계하도록 하 였다. 이는 왕실의 재정에 대하여 재상이 감독하도록 하자고 한 정도전의 의도가 그 대로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통하여서도 정도전이 재상은 왕실에서 일어나는 전반적인 사항을 파악하여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실현하려 하였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조준 역시 태조대에 재상으로서 활동하였다. 조준도 도평의사사의 일원으로서 상 소문 등 을 통하여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조준이 제시한 대부분의 정책은 고려말 71) 태조실록 권 1, 원년 7월 乙亥. 72) 定宗實錄 권4, 2년 4월 辛丑. 73) 위와 같음. 이때 도평의사사가 議政府로 개정되고, 中樞院과 의흥삼군부가 합하여져 삼군부로 개정된다. 그리고 삼군부를 관장하는 사람은 의정부의 구성원이 될 수 없도록 하였다. 태종대 에 들어서 의정부의 구성원이 다시 삼군부의 직책을 맡을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취하여진다. 하지만 태종은 재상이 병권을 장악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왕위에 있는 동안 계속 노력했다. 74) 태조실록 권1, 원년 7월 丁未.

- 154 - 國史館論叢 第46輯 그의 상소문을 통해 주장된 바와 별로 커다란 차이가 있지는 않다. 이는 고려말 그 가 구상한 개혁을 계속 시도하려는 의도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조선 건국초 조준은 고위 관직에 있으면서 어느 정도 정책구상에 참여는 하지만 대단히 중요하거나 특별 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통치체제나 군사제도 등 건국 초기 중요 하였던 사안에 대하여 조준이 깊이 간여하였던 흔적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태조대에 정도전은 통치체제 및 군사적인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견해를 적극 펴 면서 정책에 반영시키는가 하면, 明과의 대외 관계에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 다. 조준은 재상으로서 도평의사사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지만 재상의 권한을 강화하 기 위한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75) 그는 재상으로서 병권을 장악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군지휘권마저 반납하고 있다. 이러 한 그의 태도는 재상에게 百官을 감독하는 권한 이상의 권력이 집중됨을 반대하였음 을 은연 중에 보여준 것이라 해석된다. 정도전은 사병을 혁파하고 의흥삼군부를 통하여 군지휘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진 법 훈련을 강화하는 한편, 명의 조선에 대한 태도에 불만을 가져 요동공략 의지를 표명하였다. 조준 은 이에 비해 요동공략 계획을 반대하였으며, 고려말 자신이 주장 한 8위 중심의 군사제도 개편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이 는 현실적으로 명을 공략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인식하였던 데에서 비롯하였으 며, 병농일치에 의한 부병제에 바탕을 둔 군사제도의 실현이 곤란할 수밖에 없는 현 실적 여건을 고려한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조준이 주장하였던 개혁 방안은 태종대에 들어서면서 빛을 보게 된다. 물론 경제 적인 측면에서는 고려 공양왕대에 과전법의 시행으로 조준이 주장한 바가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통치체제나 병제에 관한 조준의 주장은 태종대에 이르 러 수용되고 있다. 태종은 즉위한 이후 재상들의 권한을 약화시키려는 정책을 펴 나 갔다. 6조의 행정 업무 관장을 위하여 의정부 재상의 권한을 축소하고 인사권마저 이조와 병조에 돌렸다.76) 이로써 의정부가 가지고 있던 인사권, 군 지휘권, 재정에 관한 권한 등이 축소되고 6조가 실제 해당 업무를 관장하는 체제로 전환하였던 것이 다. 이는 조준이 비록 왕권 강화와 연계한 것은 아니지만 고려 말 주장한 바와 유사 75) 조준은 태조가 즉위한 이후 우시중, 좌시중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실록 권9, 5년 6월 辛卯 條 참고). 그리고 병권도 장악하게 되었다. 여기서 조선 건국 이후 조준과 정도전 등 일부 문신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도평의사사 체제를 극복하고 집권적 통치체제를 구축하려는 것으로 생각한 정두희의 견해가 주목된다( 朝鮮初期 三功臣硏究 역사학보 75 76 합, 1977 ; 太祖-太宗代 三功臣의 政治的 性格 朝鮮初期政治支配勢力硏究, 1983, p.26, 註 40). 물론 조준도 정도전과 함께 태조대 권력의 정점에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고위직에 있었다고 하여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통치체제를 추구하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76) 태종실록 권9, 5년 1월 壬子.

- 155 - 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 건국 이후 군사제도의 변화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정종대의 사병 혁파 조치다. 그런데 태종대에 들어서 명실공히 사병적 성격을 가진 군사가 모 두 公兵으로 귀속되었으며, 병조가 군 지휘권에서 우월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아울러 무반 가운데 중앙군의 핵심이었던 甲士도 번상제를 실시함으로써 半官半農의 지위에 머물게 하였다. 이는 병농일치 아래의 군사는 아니더라도 부병제라는 형식을 빌려 군사제도를 정비하고자 하는 의도의 발로라 하겠다.77) 이 같은 조치들은 고려 말 조준이 의도한 바와 유사한 점이 있다. 조준은 소위 1차 왕자난 이후 定社功臣에 올랐다. 조준이 李芳遠 등에게 적극적으 로 협조하였다기 보다는 소극적이나마 협력하였기에 가능하였던 것 같다.78) 이방원이 즉위한 이후 책봉된 佐命功臣에 조준이 끼지는 않았지만, 조준은 태종 초반에 의정부 의 정승으로 활동하였다.79) 이는 조준이 태종이 추구하던 정책에 협력할 수 있는 인 물로 판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그의 자식이 태종의 사위가 되는 것으로 보아 태종은 조준을 자신 측근의 인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을 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특정한 재상을 중심으로 관료구조를 개편하고 권한을 집중시키려던 정도전은 결 국 1차 왕자난으로 죽음에 이르렀으나, 조선 건국에 정도전과 같이 중요한 역할을 한 조준은 재상 에게 권한이 집중되는 권력체제보다는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하는 관 료기구의 정비와 권한 강화를 주장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태종대에 이 르기까지 재상으로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80) 태종대에는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 이 한층 강화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6 부 등 실제 업무를 관장하는 행정부서의 권한 이 강하여지고 재상들의 권한은 약화되어 가는 현상을 보였다. 태종이 의도한 통치 구도는 이미 조준이 의도한 바와 유사한 측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준이 구상 한 통치체제는 정도전의 구상보다는 진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귀족사회가 몰락 하고 양반 관료사회가 성립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77) 민현구, 앞의 책 pp.122 123. 78) 정두희, 앞의 책 p.33. 79) 태종실록 권9, 5년 6월 辛卯條 趙浚 卒記 참조. 80) 조준은 정도전 남은 등과 더불어 추호의 틈도 없었는데 요동공략을 둘러싸고 입장에 차이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정종실록 권2, 원년 8월 庚子). 비록 이들이 조선을 건국 하는 데에 있어서는 함께 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조준을 중심으로 한 개혁론과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혁론에 차이가 있었으며, 여기에 바탕을 둔 갈등이 세자 책봉이나 요동공략 문제 등을 통하여 드러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 156 - 國史館論叢 第46輯 Ⅵ. 맺 음 말 조준과 정도전은 고려말 정치, 경제, 사상적 측면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으며, 이는 조선 건국의 디딤돌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두 사람의 개혁안을 비교하여 봄으로써 종래 동일한 세력 집단으로 묶어 하나의 개혁노선으로 파악하였던 고려말 이성계 세력에 대해 다시한번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미 이성계를 중심으로 조선 건국에 앞장섰던 인물들에 대한 분석이 여러 가지로 이루어졌지만, 대체로 그것은 가문이나 신분, 출신 지역을 중심으로 분석된 것이었다. 또 조준과 정도전에 대한 개별적 연구도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의 차이에 대한 부각은 미흡한 점이 있다. 조준은 고려말 상소문을 통하여 자신이 의도한 개혁 방안을 그런대로 자세히 밝 히고 있다. 여기에 비해 정도전은 조선 건국 이후 여러 가지 제도적 개편 방안을 내 놓고 있다. 비록 시간적인 차이는 있으나 이들이 내놓은 개혁 방안은 고려말 상황을 전환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하겠다. 여기에서는 통치체제, 경제 개혁에서의 시각, 병제개혁안을 중심으로 이들의 입장을 살펴보고, 이들의 개혁 방안이 조선에 미친 영향과 그 의미를 찾아보았다. 조준이 구상한 통치체제는 재상의 권한을 약화하고 실제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부 서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일부 재상이 도평의사사를 통 하여 모든 행정업무에 대하여 간여하고 결정하였던 고려말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하 여 6부의 권한과 대간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준은 통치체제의 개편을 끌고 가려 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조치가 왕권 강화에 맞물려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소 수의 재상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고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사대부 관료의 입지를 넓히려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私田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런데 그가 사전 발생 원인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불법적인 수조권의 확대였다. 그래서 사전 개 혁이 수조지를 혁파하고 국가에 특정한 역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수조권을 재분배 하려는 방향에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는 소유권에 입각한 사유지를 인정하는 선 에서 수조권에 대한 국가 관리를 엄격히 하여 불법적인 사전 확대를 방지하려는 것 이었다고 하겠다. 조준은 당시 소유권이 성장하여가고 있음을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한 토지 개혁을 추구하였으며, 국가에 역을 지는 사람 특히 관 료들에게 토지를 분급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관료계층 위주의 개혁을 추구하였다고 도 할 수 있다.

- 157 - 한편 조준은 병제 개혁에도 나름대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병제개 혁안의 골격은 병농일치제 아래의 부병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고려전기의 중앙군 제인 8위 (2군 6위)를 부병제 유지의 골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府兵은 8위 에 소속하고, 8위는 병부의 지휘 아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고려말 성립한 3 군도총제부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재상이 병권을 장악하는 것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는 병권도 병부를 통해 관장되어야 한다는 그의 통치 체제의 구도와 맞물려 있는 것이라 하겠다. 정도전은 재상 가운데 총재에 해당하는 사람이 모든 권한을 독점하여야 한다는 견 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비록 행정 업무를 周代의 편제와 마찬가지로 6典으로 나누고는 있으나 이를 총괄하여 책임질 사람은 冢宰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언로 개 방 등을 주장하면서도 대간이라는 특정한 관부의 직책 담당자가 언로를 장악하는 것 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정도전이 내세운 통치체제의 근본은 총재가 국정 전반을 책임지고 모든 관료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총재의 권력 집중을 통한 권력 체제를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왕이나 왕실에 관한 일도 총재가 알고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총재가 왕권 자체도 견제할 수 있어 야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정도전은 고려 말 사전 개혁의 초점을 소유권의 진전에 따른 사유지의 확대에 맞 추고 있다. 비록 수조권의 불법적인 확대도 인정하고 있으나, 사전 개혁의 방향이 소 유권에 기반을 둔 토지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키는데 두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물론 사유지가 확대되었던 현실을 고려하여 국가 귀속 조치라는 형 식을 거쳐 다시 분배하여야 한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측면도 깔려 있지만, 기본적으 로 소유권에 바탕을 둔 사유지를 인정하지 않는 방향에서 토지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의도는 현실적으로 들어 맞지 않는 과격한 것이었으며, 실제로 수용되지도 못하였다. 정도전은 통치체제에서 총재 중심의 권력 집중 형태를 추구하였던 것처럼 병제개 혁안의 골격도 총재에게 병권이 귀속되는 방향으로 마련하였다. 그는 조선 건국 이후 10위를 중앙의 시위 숙위군의 근간으로 인정하고, 지방군은 병농일치 아래의 군인으 로 설정하였다. 그런데 이 모든 군사가 의흥삼군부를 통하여 지휘되도록 하였다. 결국 이는 의흥삼군부의 최고 책임자인 재상이 병권을 장악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 고 조준이 일반 군사를 8위에 소속시켜 8위-병부로 이어지는 군사체계를 강조하였던 반면에, 정도전은 10위는 무관이 소속하는 군사편제로 그리고 지방군은 중앙 번상군 과 지방 주둔군으로 편제하고, 이들이 의흥삼군부에 연계되는 체제를 추구하였다. 정도전이 의도한 개혁안 가운데 경제적인 측면은 자신이 밝혀 놓았듯이 수용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추구한 통치체제나 병제 개혁안은 조선 태조대에 상당한 부 분 수용되었다. 특히 병제개혁안의 문제는 이른바 왕자의 난을 야기시키는 계기로도

- 158 - 國史館論叢 第46輯 작용하여 결국 정도전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조준이 의도한 개혁안 가운데 경제적 인 측면에서의 개혁방안은 상당한 부분 수정되기는 하였지만 과전법의 시행으로 귀 착되었다. 정도전이 내세운 총재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권력 형태는 건국 초기 상황 에서 수용되었던 것이며 조선의 새로운 지배계층에게 적합한 것은 아니었다. 조준이 내세운 통치체제는 태종이 즉위한 이후 왕권 강화 노력과 결합되어 수용되었다. 그 리고 조준이 내세운 병제개혁안의 경우 병농일치에 의한 부병제 실시가 군사제도의 골격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어느 정도 수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전기의 군사제도는 신분에 따른 병종의 차이로 편제되기는 하였지만, 중앙의 일부 병종을 제외하고는 병농일치라는 틀 아래 운용되었다. 정도전은 총재 권력 집중 형태의 통치구조를 추구하면서 일반 백성 즉 民을 위한 정치를 강조하였다. 이는 관료가 될 수 있는 지배계층보다는 일반 백성 위주의 정치 를 실현하고자 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총재 중심의 권력 체계를 유 지하기 위하여서는 특정한 지배계층보다는 일반 백성을 권력 기반으로 상정하는 것 이 명분에서나 현실적으로 이로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정도전의 이러한 의도는 과격 한 개혁을 지향한 것이기는 하지만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듯한 느낌이 든다. 이에 비해 조준은 이른바 사대부 계층에 주안점이 두어지는 통치 구조를 설정하였 다. 이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수용하고 앞 시대의 모순을 현실에 맞게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