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古史의 西海交涉史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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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2009_KEEI_연차보고서

Transcription:

高麗時代 邑司 硏究 李 樹 健* 머리말 Ⅰ. 問題提起와 關係資料 Ⅱ. 邑司의 槪念과 그 種類 Ⅲ. 郡縣의 區劃과 土姓分定 Ⅳ. 邑司의 形成過程과 그 組織體系 Ⅴ. 邑司의 職務와 그 機能 맺는말 머리말 최근 필자는 고려시대 土姓 문제와 麗末鮮初 郡縣制 정비 및 鄕吏문제를 천착하는 과정에 서1) 토성과 향리, 군현제와 지방행정체계 및 鄕村社會의 실상 등을 究明하는데 불가분의 관 계에 있는 邑司 의 중요성에 대하여 그 연구의 필요성을 재삼 인식하게 되었다. 고려의 군 현제하에서 군현구획이 邑格에 따라 州 府 郡 縣으로구분되듯이, 邑司도 결국 州司 府司 郡 司 縣司 鎭司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러한 읍사는 外官이 파견되기 전이나 후에도 있었고 主邑과 任內에 관계없이 폐읍이나 直村化하지 않고 그 군현)의 생명이 존속하는 한 존재하 였다. 邑司 연구는 지방행정 구획으로서의 고을 인 邑과 그 읍의 행정실무를 총괄하며 향리의 상층인 戶長層의 吏廳인 司 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자연히 군현제와 향리제도와는 서로 표리관계에 있다. 따라서 읍사 연구에는 첫째 군현이란 일정한 행정구역의 구획과 개편과정, 둘째는 그 구역의 행정업무를 장악했던 읍사의 구성원, 즉 향리의 형성과 그 조직체계 및 직임의 演變과정을 동시에 결부시켜 고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邑司문제와 관련하여 기존 학계의 연구 경향을 일별해 볼 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반성과 비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 하나는 羅末麗初의 지방세력을 대표했던 이른바 豪族(鄕豪)의 존재를 실제보다 과장하여 국초의 정권을 豪族聯合政權 이라 한다든지3), 外官 이 설치되기 전까지의 지방통치는 호족에게 일임되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논조는 시정되어 야 하며, 다른 하나는 고려의 군현제를 설명하면서 신라의 그것과 단절한 채 군현의 편성과 領屬관계를 단지 고려의 성립기에 王建과 호족 또는 대소 호족과의 역관계와 지배 복속관계 * 嶺南大學校 國史學科 敎授. 1) 拙稿, 韓國中世社會史硏究 (一潮閣, 1984)., 朝鮮初期 郡縣制 整備에 대하여 ( 嶺南史學 1, 嶺南1971)., 朝鮮朝 鄕吏의 一硏究 戶長에 대하여 文理大學報 3, 嶺南大, 1974). ) 고려시대에는 邑格의 고하에 따라 京 州 府 郡 縣으로, 수령의 유무에 따라 主邑과 屬郡縣으로 구분되기도 하였다. 본고에서는 서술의 편의상 州 府 郡 縣을 일괄할 때는 그냥 군현으로 약칭 하기로 한다. 3) 李基白, 고려귀족사회의 성립 ( 한국사 4, 국사편찬위원회, 1981). 河炫綱, 高麗王朝의 成立과 豪族聯合政權 (위의 책).

- 55 - 에서 보려는 시각,4) 또한 향리의 유래를 호족에서 찾으면서 성종, 현종, 문종조에 걸친 일련 의 중앙집권화와 향리에 대한 부단한 억압책에 의하여 中期 이후의 향리는 苦役 내지 賤役 視될 정도로 그 지위와 권한이 급격히 저하되었다는 식의 논조도5) 역시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읍사연구는 이러한 기존 시각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토대 위에서 출발해야 할 것 이다. 邑司에 관해서는 그동안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고려시대의 군현제, 향리문제와 결부하여 많은 연구 성과를 거둔 바 있다. 그러나 邑司에 관해서는 淨兜寺石塔造成記 를 통해 고려 초기 若木郡司의 조직체계와 그 기능 및 성격 등을 분석한 武田幸男의 논고를6) 제외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 당시의 군현제와 향리 문제에 관련해서 부분적으로 언급한데 불과하다.7) 본고는 이러한 선행연구에 도움을 받으면서 필자가 그동안 토성, 군현제, 향리문제를 천착하 는 과정에서 얻은 자료와 지식을 동원하여 고려시대 邑司문제를 개괄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Ⅰ. 問題提起와 關係資料 高麗의 邑司와 鄕吏제도, 外官制와 事審官, 其人制 등을 포괄한 郡縣制는, 안으로는 신라 의 그것을 계승하고 밖으로는 唐 宋의 제도를 수입 모방하면서 점차 고려적인 모습으로 改 定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래로는 조선왕조로 이어져서 15세기 획기적인 개혁과 정비 과정을 거치면서 守令制와 향리제도를 근간으로 한 군현제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협소한 국토에서 그나마 후삼국 통일 이래 中央政府와 병렬해 있는 地方政權의 존재를 일 찌기 경험하지 못했던 고려조의 역대 집권층은 중국의 군현제를 근간으로 하는 중앙집권 체 제를 발전된, 또는 최상의 지방통치방식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周代의 封建制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秦漢 이래 唐 宋의 군현제를 지방통치의 기본방식으로 채택해 놓고 그 위에서 신 라의 군현제를 계승하는 한편, 고려의 역사적인 전통과 당시의 실정에 부합되게끔 독자적인 고려의 군현제를 창출해 놓았던 것이다. 郡縣制의 개혁과 鄕村社會의 변동 내지 성장이란 측면에서 볼 때 羅末麗初와 武臣執權期 및 麗末鮮初는 획기적인 시기였다. 즉 9州 5小京을 중심으로 편제된 신라의 군현제가 와해 4) 旗田 巍,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에 실린 그의 일련의 고려 군현제 연구 논문들. 5) 金鍾國, 高麗時代の鄕吏について ( 朝鮮學報 5, 196). 朴敬子, 高麗鄕吏制度의 成立 ( 歷史學報 63, 1974). 6) 武田幸男, 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の硏究 1 ( 朝鮮學報 5, 196). 7) 앞에 열거한 논저 외에 邑司와 관계있는 논고를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李基白, 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에 실린 관련 논문들. 李佑成, 高麗朝의 吏 에 대하여 ( 歷史學報 3, 1964). 李純根, 高麗初期 鄕吏制의 成立과 實施 ( 金哲埈華甲紀念史學論叢, 1983). 趙榮濟, 高麗初期 鄕吏職의 由來에 對한 小考 ( 釜大史學 4, 1980)., 高麗前期 鄕吏制度에 대한 一考察 ( 釜山史學 6, 198). 有井智德, 高麗の鄕吏について ( 東洋史學論集 3, 1954). 武田幸男, 高麗時代の鄕職 ( 東洋學報 47-, 1964)., 高麗 李朝時代の屬縣 ( 史學雜誌 7-8, 1963)., 高麗 李朝時代の邑吏田 ( 朝鮮學報 39, 40, 1966). 北村秀人, 高麗末 李朝初期の鄕吏 (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3, 1976).

- 56 - 되고 전국에 산재한 豪族과의 力關係에서 신분적이며 多元的인 특징을 지닌 고려의 군현제 가 정착되는 동시에, 군현 名號의 개정과 구획의 재편성, 邑司의 조직과 土姓分定8) 및 향리 제도가 정비되어 갔다. 고려의 집권화의 진전에 따라 外官의 계속적인 增派와 屬郡縣의 主 邑化가 중기 또는 후기로 올수록 격증하였고, 속현과 향 소 부곡의 소멸에서 任內의 主縣化 와 直村化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기성 官人들의 낙향생활과 土姓吏族에서 성장한 在地品官 들이 邑治를 이탈하여 외곽의 향촌과 任內지역에 확산되어 활발한 地域開發을 추진하는 과 정에서 향촌사회의 성장을 가져왔다.9) 한편 인구의 증가와 自然村의 성장에 따른 군현의 하 부행정구역이 점차 面里制로 개편되고 군현의 지배세력이 邑治의 土姓吏族 에서 이른바 留 鄕品官 또는 在地士族 으로 대체되어가는 과정에서 사심관제가 고려말 조선 초기에 와서는 京在所와 유향소로 분화 발전해 갔던 것이다. 우리는 邑司 향리 군현제와 같은 고려의 지방제도를 인식함에 있어 최근까지 너무 형식이 나 用語에 집착한 나머지 피상적인 관찰에 그친 감이 없지 않다. 가령 고려와 중국의 군현 제나 지방통치방식과 같은 것을 제도사적인 측면에서 그 형식이나 용어만을 대비해 본다면 양자 사이에는 크게 다른 것이 없다. 어떻게 보면 중국으로부터 수용된 군현제는 고려라는 역사적 전통과 재래의 지방통치방식이란 고유한 몸체에 입힌 衣裳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 다. 사실 그 구체적인 내용이나 발전과정을 천착해 보면, 양자사이에는 엄청난 차이점이 있 으며, 고려의 外官制 邑司 향리제도와 같은 군현제의 발전과정을 고려왕조의 진전추세에 맞 추어 추적할 때 비로소 고려의 군현제를 비롯한 지방제도와 지방통치방식의 실체가 제대로 밝혀질 것이다. 가령 군현제하에 있어서 土姓吏族과 邑司의 조직체계, 属군현의 광범한 존 속, 특수행정구획인 향 소 부곡 處 莊, 越境地, 군현의 관내에 任內와 直村의 竝列, 토착향리 의 鄕役세습, 사심관 및 其人制 등과 같은 것은 중국의 군현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이상과 같은 고려 군현제의 특징을 염두에 두고 당시 지방행정의 기초단위인 邑司 의 연 구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군현제를 비롯한 고려의 지방제도에 관한 기존의 연구에서는 신라의 군현제가 고려조의 그것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가 거의 구명되지 않고 있다. 후삼국시대라는 군현제의 단절 내지 공백기간을 설정해 놓고 그 이전의 신라 군현제와 그 이후의 고려 군현제가 서로 接木 되지 않은 채 양시기가 별개로 따로 떨어져 있다. 어떤 제도나 체제가 계기적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8세기에 정비된 신라의 군현제가 비록 후삼국시대라는 격동기를 맞아 瓦解 되었다 하더라도 고려의 군현제는 전대인 신라의 그것과 無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 서는 우선 이러한 문제에 착안하여 邑司의 기원과 형성과정을 후삼국시대를 중간에 두고 신 라의 군현제가 고려초기 지방제도 정비에 어떻게 작용하고 개혁되어 나갔는가를 살펴 볼 것 이다. 邑司 문제는 크게는 군현제 내지 지방통치체계, 작게는 군현행정을 담당했던 향리문제와 표리관계에 있다. 그런데 邑司가 지방통치와 지방행정체계상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은 고려의 군현제가 중국의 그것과는 판이한 체계를 갖고 있다는데 있 다. 군현제하에서는 일반적으로 군과 현이란 행정구역이 설정되고 거기에 守令이 파견됨과 동시에 지방관청이 설치되면서 군현행정이 비로소 가동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비록 후삼국시대 일부 군현의 통폐합과 구획의 개편이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州 郡 縣의 구획 이 신라시대의 것 그대로 유지되었고, 신라시대에 설치되었던 330邑의 外官은 후삼국시대 8) 拙稿, 韓國中世社會史硏究 pp. 60 69 참조. 9) 拙稿, 古文書를 통해 본 朝鮮朝社會史의 一硏究 ( 韓國史學 9, 1987).

- 57 - 모두 소멸되었지만 그 군현 단위의 官府시설은 존재했다고 본다. 또한 고려 태조가 후삼국 을 통일한 그 19년(936)부터는 전국 군현에 外官은 파견되지 않았어도 각기 邑司는 형성되 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成宗 년(983) 외관이 파견되기 이전부터 각 군현마다 邑司는 존재하고 있었다. 고려초기 守令없는 邑司의 존재기간이 근 50년간이나 된 데다가 성종 년부터 일부 州 府 郡 鎭에 常駐外官이 파견되었다 하더라도, 睿宗 元年(1106) 監務가 설치되기 이전까지는 전국 군현 580邑 가운데 360邑에는 아직 守令이 파견되지 않고 유일한 군현행정의 기관인 邑司만 있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邑司는 고려시대 지방행정사 연구 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고려시대 군현의 재지세력을 대표했던 계층은 각 읍사의 구성주체인 戶長層이었다. 군현 의 戶長정원과 世宗實錄 地理志 소재 각읍 土姓數는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10) 따라서 군 현행정의 기초인 邑司는 戶長層에 의해 조직되었고 土姓의 주체는 후삼국시대 豪族의 후예 인 호장층이었다. 이는 동시에 麗初 이래 麗末까지 지방에서 중앙으로 진출하는 官人을 산 출시키는 공급원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마치 중앙의 집권세력이 그 권세를 계속 유지하려 면 高官要職을 놓치지 않고 부지해 나가는 데서 家門의 영광을 지킬 수 있는 것과 같이, 군 현吏族은 호장층의 확보 여부가 그들의 세력 消長에 직결되었다. 그러므로 군 현향리에서 上京從仕하는 계층은 대개 호장층의 子弟였고 후대에 大姓名門으로 성장한 姓貫의 始祖 가 운데는 戶長이 많았다. 곧 고려시대에 상경종사했던 재지세력의 진출발판은 그 邑司를 영도 하였던 호장층이었던 동시에 그 읍사가 그들의 세력기반의 立脚點이기도 하였다. 문벌귀족 또는 권문세족의 지배하에서 邑司를 발판으로 군현 행정실무를 세습해 왔던 향 리들의 법제상의 대우와 실제 행정상의 기능은 鄕邑社會에서 차지했던 위치와는 상당한 거 리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군 현행정상 중앙의 政令을 鄕邑社會에 하달하고 지역주민 에게 徵税 調役과 貢賦 수납 등 행정 실무를 담당했던 향리들은 비록 역사의 표면에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중앙정부와 지방관청 또는 官衙와 官員 사이를 연결하면서 실제 지방행 정체계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더구나 守令없는 군현, 외관의 잦 은 교체에도 행정상의 공백과 혼란이 야기되지 않고 고려왕조의 지방통치체제가 유지 될 수 있었던 것은, 각읍 호장층이 邑司를 중심으로 군현행정 실무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江流石不轉 이라 표현하듯이 향리들은 각기 군현과 休戚을 같이 하면서 고려초기 이래 邑司를 장악하여 향역을 세습해 나갔다. 그들이 격변기마다 그 시대적 전환기를 잘 포착하 여 다음 시대의 새로운 실력자로 성장해 나간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이와 같이 邑司 연구는 군현제와 향리제도 등 지방제도사는 물론, 고려의 사회구조와 사회변동을 체계 적으로 구명할 수 있다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고려의 군현제에 관한 연구는 旗田 巍를 비롯한 일본 학자들의 연구에서 영향받은 바가 크다.11) 그런데 이들의 연구는 고려 군현제의 특수성이 그 형성기에 있어서의 고려왕실과 호족 또는 호족 상호간의 力關係에서 형성된 것으로 본다든지, 군현과 향 소 부곡 등의 구획 편제와 주민의 존재상태를 너무 혈연적인 집단과 신분적인 지배 복속관계로 보는 한정된 시 각을 보여왔다. 또한 그러한 연구는 신라의 군현제와 접목시키지 못한 채 顯宗代 이후 정비 된 고려 지방제도와의 일정한 차이성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따라서 고려의 중앙정부가 지 향하던 지방통치정책, 지방제도의 실제 및 편성 배경 등에 관한 명확한 규명이 요구된다. 邑 10) 拙稿, 土姓硏究 其一 ( 東洋文化 16, 1975). 11) 고려의 군현제에 관한 旗田 巍의 논저는 그의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에 실려 있으며, 武 田幸男 江原正昭 北村秀人 등의 고려시대 군현제 향리관계 연구가 이 부류에 속한다.

- 58 - 司는 지방행정의 말단기구인 동시에 지역주민 또는 農民을 직접 지배하는 향리의 집합체이 다. 법제상으로는 중앙정부 또는 外官에 의해 조직되고 任免되는 것 같지만 실제는 慣行에 의하여 구성원의 자율적인 규제와 자치적인 직무에 의하여 邑司가 운영되고 있었다고 본다. 고려시대 邑司 관계자료는 당시의 기본 史書인 高麗史 와 高麗史節要 에서 단편적 으로 발견되지만 너무 소략하기 때문에 그 보완책으로 조선시대의 관계자료를 援用하지 않 을 수 없다. 邑司의 주체는 향리이며 그 관계자료는 바로 향리 관계자료이다. 향리의 신분적 지위가 고려왕조의 진전에 따라 오히려 격하되어 갔기 때문에 그들의 후예인 후기의 신흥사 대부나 조선조의 양반들은 도리어 향리를 천시하였다. 그로 인해 邑司 관계자료는 후대에 올수록 개변되거나 인멸되고 말았다. 고려사 소재 향리 관계자료가 邑司 연구에 기본이 되겠지만, 더 일차적인 자료는 당시의 金石文이나 古文書에서 찾을 수 있다. 淸州龍頭寺鐵 幢竿記, 若木郡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 등을 비롯하여 慶州府戶長先生案, 安東 江陵 押海 善山 등지의 邑司에서 전래된 戶長層의 家系와 戶口單子, 族圖 등은 읍사의 구성 과 조직체계나 향리세계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한편 邑司 관계자료는 조선초기 實錄 과 호구단자, 各姓 族譜 등에서 그 편린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조선 태조에서 성종조(15세기)에 걸쳐 정력적으로 추진된 군현제를 비롯한 지 방제도의 정비과정에서 고려시대 邑司 관계자료가 부분적으로 노출되고 있으며, 세종실 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도 읍사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이다. 비록 조선후기에 편 찬된 것이지만 향리의 관계자료를 집성한 掾曹龜鑑 安東鄕孫事蹟 및 각 邑誌 類 도 읍사 연구에 많은 참고가 된다.1) 우리는 이러한 자료를 통하여 邑司의 내부구조와 조직, 기능 및 향리들의 혼인과 존재 상태 등을 밝힐 수 있다. Ⅱ. 邑司의 槪念과 그 種類 邑은 중앙의 수도(京都)에 대칭되는 지방의 郡縣 곧 고을 이란 뜻으로서 읍의 관아 소재 지를 邑治 (內), 그 읍치를 둘러싼 城을 邑城, 군현의 향리들을 邑吏 라 호칭하듯이 고려초 기 이래 지방의 행정구획인 州 府 郡 縣의 향리 가운데 그 상층부를 구성했던 戶長層의 執 務廳을 그 邑格에 따라 州司 府司 郡司 縣司 라 했으며 이를 통칭하여 邑司 라 하였다. 司 란 각종 행정업무를 관장하는 官廳 官衙 官舍란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의미의 司란 중앙 官 署나 지방관청을 막론하고 사용되지만, 邑司라 했을 때는 지방 군현의 특정 기관을 지칭하 였다. 한국은 고대국가 성립 이후 중국의 군현제를 수용하면서부터 州 郡 縣 또는 州 府 郡 縣으로 읍격이 구분되었지만 하나의 행정구획으로서의 고을 을 의미하는 邑字을 써서 邑治 邑城 邑吏 등의 용어가 나오게 되었다. 이처럼 邑司란 그 邑格에 따라 州府郡縣司를 통칭하 는 것으로 실제 자료상에서는 주사 부사 군사 현사로 나타나며 실제 고려사 를 비롯한 史書에서는 邑司란 用例는 거의 없다. 邑司는 군현제 향리제도와 표리관계에 있으며, 邑格의 고하와 守令의 有無에 따라 그 조 직체계와 권한 및 기능이 상이했다고 본다. 즉 成宗 년 외관 파견 이전의 邑司와 守令13) 1) 최근 국내외 학자들의 향리관계 논문을 살펴보면, 각 姓 족보의 향리 관계자료와 연조귀 감 소재 향리가문의 유래와 先祖 및 起家의 배경 등에 대한 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하거 나, 그것을 본인 주장의 근거로 삼는 등 오류를 범한 예가 있다. 13) 고려사 에는 성종 년 1牧에 牧民之官인 수령을 판견할 때 이를 外官 으로 표기하였다. 외관은 京官에 대칭되는 용어로서 사실 외관에는 수령외에 감사 병사 안찰 轉運使 등도 외관

- 59 - 설치 이후의 읍사 및 屬郡 縣司는 그 권한과 기능면에 있어서 각기 성격을 달리했던 것이 다. 한편 조선시대 군현의 대표적인 公廨시설로서는 왕의 상징인 殿牌를 봉안하고 中外官人 의 접대소로 사용되던 客舍(館), 守令의 집무소인 衙舍(官衙, 俗名 東軒) 吏廳(作廳) 軍官廳 使令廳 官奴廳 등과 함께 향리의 首班인 戶長의 집무소를 읍격에 따라 주사 부사 군사 현사 라 불렀다. 또한 고려이래 都部署使 감사 병사 수사의 本營인 도부서사영 감영 병영 수영과 같은 지방 官衙를 두는 것을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置司慶洲 (東南海都部署使本營), 置 司淸州 (충청도 감영), 置司昌原 (경상우도 兵營)이라 하였다.14) 邑司는 그 형성 이래 외관의 파견, 향리제도의 정비, 중앙집권체제의 강화 및 향리 권능의 消長문제와 상관관계를 가지면서 끊임없이 변천해 왔던 것이다. 고려시대 邑司는 開京(松岳 郡)과 西京(평양)을 제외하고 東京(慶州)을 비롯한 전국의 州 府 郡 縣 鎭 즉 향리가 있는 군 현에는 으례 있기 마련이었다. 實地 15) 소재 각읍 姓氏條의 성씨들은 바로 該邑의 邑司 을 구성했던 戶長層의 성씨였으므로 同地志에 성씨조가 있는 군현은 고려초기부터 邑司가 있었다. 이에 반해 開京(開城縣에는 土姓과 향리가 있음)과 西京에는 성씨조가 없었으니 따 라서 향리가 없었고, 향리가 없으니 邑司가 있을 리 없다. 또한 삼국사기 地志 소재 군 현 가운데 태조 3년(940) 土姓分定 이전에 폐읍된 未詳邑 (소재지 미상)과 폐합된 合屬邑 에는 성씨조가 없었으니 邑司가 없었던 것이다.16) 이상과 같은 의미의 邑司와는 전혀 다른 뜻의 읍사가 있다. 즉 唐의 官制에 公主 또는 翁 主(王女)의 所封之地와 그 재산을 관리하는 기관을 가리킨 것으로 본고에서 다루는 읍사와 는 무관하다. 公主의 采地나 재산을 관장했던 읍사에 대해서는 新 舊唐書 와 唐會要 에17)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으며, 이러한 의미의 邑司는 신라 말기의 金石文에서도 나오고 있다.18) 邑司의 종류로는 먼저 州 府 郡 縣이란 邑格에 따라 주사 부사 군사 현사가 있으며 같은 군사 현사라 하더라도 主邑이냐 任內이냐에 따라 主邑司와 속군사 속현사로 나눌 수 있다. 또 특수행정구획인 鄕 所 部曲 處 莊도 각기 개별적인 행정구역인 동시에 각기 土姓吏民을 갖고 있으며 각기 長吏가 행정실무를 맡고 있었으니 여기에도 鄕司 所司 部曲司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縣 以上을 邑이라 하였으니 이러한 향 소 부곡사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邑司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의 개별적인 행정구획인 데다가 각기 長吏가 그 곳 행정실무를 담당하 였으니 그 권한과 기능은 속군현의 읍사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먼저 邑格에 따른 邑司의 용례를 찾아보면, 신라 景明王 1년(87)에 세운 谷城大安寺慧徹 禪師塔碑에 武州(光州)의 州司가 나온다.19) 이 州司를 武州의 邑司로 볼 수도 있으나 그것 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주 부 군 현의 치읍 목민관을 의미할 때는 다른 외관과 구분하는 뜻 에서 오히려 수령이 보다 타당한 개념이라 하겠다. 14) 世宗實錄地理志 忠淸道道總, 慶尙道道總條. 15) 본고에서는 편의상 高麗史地理志 를 麗史地, 世宗實錄地理志 를 實地, 新增 東國輿地勝覽 을 輿地 로 각각 약칭하기로 한다. 16) 三國史記 권34, 雜志 3 地理 1-3 참조. 17) 舊唐書 권44, 志 4 職官 3 王府官屬公主邑司條, 新唐書 권49, 下志 39下 百官 4下 王 府官公主邑司條 18) 朝鮮金石總覽 上 p. 9 聞慶鳳岩寺智證大師寂照塔碑(新羅 景明王 8년, 94) 咸通五年冬 端儀長翁主未亡人 爲稱當來佛是歸敬 謂下生厚資上供 以邑司所領賢溪山安樂寺 富有泉石之美 請爲 猿鶴主人. 19) 위의 책 p. 118, 谷城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 (839년) 遂於武州管內雙峰蘭若結夏時 遭陽 亢山高川渴 不獨不雨 亦無片雲 州司懇求於禪師.

- 60 - 을 당시 武州의 官衙 또는 그 곳 外官을 지칭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읍사의 형성시기를 언제로 잡느냐가 문제로 제기된다. 읍사의 시작을 신라의 군현제가 정비되고 군 현마다 守令의 파견과 그 하부의 행정실무를 담당했던 吏屬이 구비된 뒤부터 보느냐, 또한 후삼국통일 후 왕건이 전국의 군현명호을 개정하고 각읍 土姓을 分定할 때(태조3년, 940) 부터 보느냐, 그렇지 않으면 향리제도가 공식적으로 성립하는 성종부터 잡느냐에 따라 달라 진다. 邑司의 종류에 관계되는 자료를 적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始爲東南海都部署使本營( 가) 州司 天福己亥(태조 년, 939) 改爲安東大都護府 邑號慶 州司 首戶 慶尙道地理 慶州府條), 至正二十一年 辛丑(공민왕 10년, 1361) 正月日慶 州司 印信戶長掌之 不惟移文村 長行案( 慶州府首戶長先生案 ), 各道大小各官 皆有 州司 落 作弊多端( 太宗實錄 권11, 太宗 6년 6월 丁卯條). 按府司即今戶長所( 太師權公(權 나) 府司 羅麗之際 祠廟之制未備(안동부) 三功臣位版在 府司 邑 幸)實記 권3, 權重顯 편, 1909년 廟祠考), 江陵之人 以金氏爲著姓 藏其族圖於 府司 吏世守( 江陵金氏派譜世德篇 소재 嘉靖譜 金添慶 명종 0년, 1565, 서문). 戶長仁勇校尉李元敏 副戶長應律 李成 郡司戶長別將柳瓊 攝戶長金甫 戶正 다) 郡司 (若木) 郡司 成允 副戶正李希( 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 현종 년, 1031). 良中 課吿出食 (우왕 11년, 라) 縣司 道內興安府任內仁同縣接今音尚田 課吿不得 仁同 縣司 而帶印施令 (((世祖 1385, 張戢所志), 今也任內郡縣 古號旣革 而其吏猶存 稱爲 縣司 實錄 권46, 世祖 14년 6월 戊申條). ( 世宗實錄 地理志 마) 鎭司 文川郡屬鎭一雲林 高麗顯宗六年築城 以爲守禦之所 今稱 鎭司 함경도) 報之州 州報之王( 三國史記 권48, 向德列 바) 鄕司 向德熊川州板積鄕人也 (向德孝行) 鄕司 傳) 사) 谷司 (部曲司) 谷司二 花開 矢川 右二司其長吏削髮 稱爲僧首( 慶尙道地理志 晋州牧) 境天王堂九十里二步 (同志 咸陽郡條). 南距晋 州任內 花開司 <첨자> /첨자 <첨자> <첨자> <첨자> </첨자> </첨자> </첨자> <첨자> <첨자> </첨자> </첨자> <첨자> </첨자> <첨자> <첨자> <첨자> <첨자> </첨자> </첨자> </첨자> </첨자> 위에 열거한 읍사의 用例를 미루어 보아 직접 관계자료는 찾지 못했지만 鄕司 部曲司 (谷司) 와 같이 所司 處司 莊司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단 邑格의 고하와 任內의 형세에 따라 읍사의 조직체계와 그 시설규모에 격차가 심했던 것이다. 麗初 이래 외관이 파견된다든지, 이제까지 외관이 없던 任內에 守令이 新置된다든지 할 때는 군현 통치권이 향리에서 수령으 로 인계됨에 따라 군현 행정의 중심이 종전의 읍사에서 官衙(東軒)로 옮겨가게 되었다. 고려중기 이래 任內의 승격과 移屬이 부분적으로 실시되고 있을 때 그 邑格의 승강과 이 속은 그 임내의 통치기관인 邑司의 승강과 이속을 의미하였다.0) 고려이래 戶長을 읍사의 首班이란 뜻으로 司首 또는 民戶의 업무를 총괄한다는 뜻으로 司戶 라고 호칭하듯이, 호장 층이 읍사의 주인공이었다.1) 따라서 邑司의 지위와 권한 및 기능도 그 주인공인 호장층의 그것과 沿革을 같이 하여 호장이 군현의 실질적인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견지할 때 그 읍사 0) 壽城 靈(顯)宗時 以壽城郡司 屬于鶴林府(경주) 太宗時甲午(1414) 合屬大丘 己亥(世宗元年) 以壽城縣司 屬大丘任內 ( 慶尙道地理地 大丘府 任內 壽城縣條). 陞三岐縣司爲監務 王師自超(無學大師) 鄕也 ( 太祖實錄 권5, 太祖 3년 3월 癸丑條). 1) 完山誌 全州邑誌 府司重修記 余(張應斗) 高祖張綱爲司首 而董其事 左右堂屋 冬夏異 所 無慮百餘間 한편 李奎報를 비롯한 고려후기의 문인들은 호장층의 후예에서 出仕한 官人의 묘지를 서술 하면서 邑司의 戶長 을 司戶 權知戶長을 權戶司 로 표현했는데, 이는 唐의 관제에서 보는 司戶 와는 별개였던 것이다.

- 61 - 도 명실공히 군현행정의 중심 기관이었지만, 고려후기 이래 향리의 지위가 계속 격하 되면 서 그것도 따라서 격하되어 조선시대에 오게 되면 단지 향리세계의 한 직과인 戶長의 집무 소에 불과하였고 그나마 양반사회로부터 천대를 받는 존재가 되었다. 한편 邑司의 건물이나 시설 규모도 읍사의 권능과 향리의 지위 저하에 따라 후기로 올수 록 축소되고 왜소화해 갔다. 그것은 外官派遣 이전과 이후, 大邑과 小縣 또는 主邑과 任內에 따라 규모에 현저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대는 자료의 결여로 구체적인 시설규모는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의 자료에 의거 살펴볼 때 그렇게 유추할 수 있다. 단편적인 자료를 남기고 있는 慶州 安東 尙州 全州 羅州와 같은 界首官의 邑司는 백여 간 또는 수 십간이 된 것 같으며 中小郡縣은 십여 간, 任內의 小縣은 4 5간이며 특히 僻邑들의 邑司는 규모가 작 을 뿐만 아니라 草家도 있었다고 본다. 그러한 사실은 高麗圖經 )이나 李奎報의 南行 月日錄 3)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에 오게 되면 향리신분의 격하와 함께 邑司도 천대 를 받아 客舍 또는 官衙와 逼近하다는 이유로 이건되는 경우가 있으며 17세기 이후에 가서 는 심지어 戶長의 所管인 柴炭 炬火 藁草 등을 저장하는 창고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Ⅲ. 郡縣의 區劃과 土姓分定 邑司란 일정한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邑(고을)과 그 邑의 행정업무를 관장하는 邑吏(향 리 의 官司, 즉 司라는 중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읍사의 연구에는 먼저 邑의 생성과 편 성 및 置廢와 邑格의 승강과정을 구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군현의 구획문제는 또한 邑司의 구성주체인 土姓吏族의 형성과정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邑司 관계자료는 읍사 의 구성주체인 전국 군현의 土姓을 각 邑別로 수록한 實地 를 편찬했던 世宗朝(15세기 전반)를 전후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同地志를 편찬하던 15세기 초만해도 각 성씨의 本貫이 州 府 郡 縣과 村 또는 鄕 所 部曲 處 莊別로 구분 기재되어 있었다. 위 地志 소재 姓氏는 麗初 이래 전래된 古籍 에 기재된 것이므로 우리는 읍사의 구성 주체인 각 성 씨의 유래가 꽤 오래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1세기 전반에 편찬된 三國史記 地理志에서 16세기 전반의 輿地 에 이르기까지 역 대 地志에 의거 군현의 연혁과 그 구획의 변동을 살펴보면, 古來의 城邑國家시대의 國 城 村 이 삼국 내지 통일신라의 발전과정에서 중국의 郡縣制를 수용하여 州 郡 縣으로 개편되어 갔다. 그후 고려시대에 와서 군현 명호와 邑格 및 領屬관계는 끊임없는 변천을 거듭했지만 原區域 그 자체의 분할이나 분해작용은 극히 드물었던 것이다. 이러한 군현 유래의 특징을 염두에 두고 邑司의 형성문제와 결부하여 먼저 읍사의 관할 구역인 邑의 생성과 그 변천과 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일정한 區域과 주민 및 官舍를 가진 읍은 우선 읍격과 읍세 또는 행정, 군사, 교통을 고려 한 위치에 따라 京 州 府 郡 縣 및 향 소 부곡 처 장 등으로 나뉘어지지만, 그러한 구획의 기 ) 高麗圖經 권3, 郡邑條 州縣之建 實不副名 特聚落之繁處 惟牧守都護公海數楹 令長則隨所 在舍於居民 夷政租賦之外 無健訟 在官者公田不足以資用 則亦仰給於富民云. 3) 李相國全集 권3, 南行月日錄 에서 그는 전주와 그 任內諸縣의 사정을 거론하면서 전주 는 人物繁浩 屋相櫛比 有故國之風 故其民不椎朴 吏皆若衣冠士人 한데 반해 전주의 임내인 馬靈 鎭安 雲梯 高山 朗山 伊城 등 속현은 山谷間古縣也 其民質野 面如獼猴 柸盤飮食 腥腥有 蠻貊風 有所詞詰 則狀若駭鹿 似將奔遁也, 民戶凋耗 籬落蕭條 客館亦草覆之 吏之來者 不過 繁繁四 五人而已 見之惻然可傷 이라 하였다.

- 6 - 초적인 구성단위는 村落이었다. 그 촌락은 인구와 면적에 있어 각양각색이지만 三韓이래 國 邑과 別邑 또는 邑落이 있고 都邑과 鄕邑 등이 竝列해 있듯이 처음에는 각기 邑治를 중심으 로 邑域이 확장되어 갔고 인구의 증가에 따른 新生村의 계속적인 생성은 결과적으로 각읍의 외곽지대에 屬縣과 향 소 부곡을 발생케 하였다. 역대의 地志에 의거 각 읍 구획의 유래를 분석해 보면 삼국, 신라, 고려로 이어진 千餘 年 을 경과하였지만, 고래의 城邑의 殘骸는 최근까지 남아 있다. 더구나 麗末鮮初까지도 이들 구역에는 각기 邑司의 주체인 土姓吏族이 존재했기 때문에 동국여지승람 편찬자들은 각 읍 성씨조를 정리하면서 그 廢邑이나 향 소 부곡 등은 비록 혁파, 소멸되었다 하더라도 그곳 邑司 吏族의 出自地, 즉 本貫을 밝혀야 했기 때문에 이미 혁파되고 소멸된 구역들도 각읍의 古跡條에 수록했던 것이다. 同地志 편찬자들의 말처럼, 군현이나 향 소 부곡 처 장 등 諸所 에는 모두 각기 土姓吏民 이 있다. 이제 그 성씨들을 수록하고 보니 그 성씨의 출자지, 곧 본관을 지리지 에 기입하지 않을 수 없다 했으며,4) 그 地志를 수정 보완하는데 주역을 맡았던 金宗直은 그 跋文에서 各邑의 속현 및 향 소 부곡 가운데 이미 혁파되어 村落이 된 것도 모두 古跡條에 실었다 5)라고 하였다. 고려시대 州府郡縣의 대부분이 고래의 國 城 村에서 유래했음은 삼국사기 와 고려 사 의 두 地志를 대비하는 데서 쉽게 알 수 있다. 한국 고래의 城邑國家에 대한 제모습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三國志 東夷傳 소재 三韓지역의 諸小國이 뒷날 군현제의 수용과정 에서 거개가 州 郡 縣化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扶餘와 高句麗에는 邑落마다 豪民과 下戶가 있다 했으며, 東沃沮에는 큰 君王은 없고 邑落에는 각기 長帥가 있었는데 이는 곧 고래의 縣國之制 6)라 하여 漢의 군현제를 토착의 邑落制에서 수용하고 있었다. 백제, 신라의 군현 제가 옛 三韓지역의 성읍국가를 중심으로 정비되어 갔듯이 삼한시대의 이른바 馬韓 54개국, 辰韓 弁韓(弁辰) 각 1개국 합계 78개국은 나중 군현제의 수용과정에서 각기 주 군 현으로 개편되어 갔던 것이다. 同書 東夷傳에 의하면 부여 고구려 동옥저 濊 삼한지방에는 모두 國邑과 邑落이 있고 국 읍과 別邑 및 諸小國의 관내에는 小別邑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각기 邑勢에 따라 크고 작은 渠帥가 있었다.7) 梁書 新羅傳에 其俗呼城曰建牟羅 其邑在內曰啄評 在外曰邑勒 亦中國 之言郡縣也 國有六啄評 五十二邑勒 이라 한 것은 바로 신라의 6부와 지방의 군현을 啄評과 邑勒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한편, 三國遺事 紀異 第 1 七十二國條에 通典 을 인용하면 서, 馬韓在西 有五十四邑 皆稱國 辰韓在東 有十二小邑稱國 弁韓在南 有十二小邑各稱國 이라 한 데서 삼한시대 존재했던 78소국은 곧 小邑을 나타내는 것으로 성읍국가의 규모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뒷날 군현제의 수용과정에서 주 군 현으로 개편되었는데, 당시 중 4) 新增東國輿地勝覽 권7, 경기도 驪州牧 古跡條 今旣著姓氏 則其姓氏所本之地 不可不載 故 據 周官六翼 而質之 當今有所可攷者 纔十之一二 竝附入于逐邑古跡之下云. 5) 위의 책 末尾 金宗直 跋文 各邑屬縣及鄕所部曲 今廢爲村落者 竝附古跡. 6) 三國志 ( 二十五史, 경인문화사) 권30, 魏志 東夷傳 扶餘 高句麗 東沃沮 濊 韓傳 참조 7) 위의 책 韓傳. 馬韓在西 其民土著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散在山海間 無 城廓有爰襄國 凡五十餘國 大國萬餘家 小國千家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又 諸國各有別邑 辰韓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弁韓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 63 - 국측 기록에서는 國=邑 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中國에서도 春秋時代의 國 城이 秦의 군현제하에서 군현으로 개편된 과정은 한국의 경우 와 다를 바 없다. 史記 에 國除爲郡 이라든지, 以諸侯爲郡縣 이라8) 한 바와 같이, 신라 末王 金傅가 擧國來降하자 고려는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國除爲慶州 라 했는가 하면, 出討 甘文國破之 以其地爲郡縣 ( 三國史記 권45, 昔于老傳), 骨伐國王阿音夫 率衆來降 以其 地爲郡 (同書 권)과 같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제각기 고대국가의 발전과정에서 삼한이 래의 취락의 지역 단위명인 國 城 村이 중국의 군현제를 수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 군 현 으로 개편되었다. 沙伐國 沙伐州 召文國 聞韶郡 骨火國 臨川縣 國原城 中原京(忠州) 任存城 任城郡(大興) 阿英城 雲峰縣 朱烏村 新繁縣 屈火村 河曲縣(蔚山) 林下村 永順縣 實地 와 輿地 소재 주읍과 속현 및 향소부곡 등은 전국적으로 읍사제도가 정착된 고려초기 이래 지방행정 체계상에 있어서는 개별적인 행정구획인 동시에 성씨상으로는 각기 본관이 됨과 함께 읍사 조직의 단위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획은 그 규모와 형세에 있어서는 대소 강약의 차이가 있었다. 먼저 輿地 에 의거 15세기를 기준, 전국의 군현과 속현, 폐읍 및 향 소 부곡 등을 통계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표> 輿地 소재 郡縣 기타 區域의 道別統計 道別 京畿 忠淸 慶尙 全羅 江原 黃海 平安 咸鏡 合計 區分 主 邑 數 37 54 66 59 6 4 4 330 屬縣數 5 7 44 1 7 廢 縣 數 18 13 19 65 8 5 11 141 部 曲 數 18 69 09 78 10 3-377 鄕數 11 1 3 50 3 7 6-130 所數 7 61 4 90 33 10-43 處數 14 9 3 3 4 35 莊數 4 1 1 1 9 </표> 상기 표 소재의 主邑 330읍, 속현 7현, 폐현 141현의 합계 543邑은 신라의 9州 所管 郡縣 450여에다 고려시대 北境 개척에 따른 兩界의 新設州鎭縣이 모두 가산된 것인데, 고려 성종 조 전국을 10道로 나눌 때 10道 所管州郡이 모두 580餘라 한 邑數와는 맞지 않다. 자료의 상이에 따른 전국 邑數의 不一致는 신라에서 조선초기까지 그 사이 군현의 邑格 승강과 병 합, 폐합과 향 소 부곡 둥의 승강이 잦았기 때문에 邑數 계산에 차이가 나는 것은 오히려 당 연하다 하겠다. 麗史地 에 의거 읍사의 치폐과정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地志 소재 9州 소관 州郡縣이 여초에도 그대로 존속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단 同地志 소재 未詳 또는 合屬 된 군현은 고려 태조 3년(940) 이전에 邑 으로서의 생명이 끝났기 때문에 읍사가 없 8) 史記 5 史 秦始皇本紀 6.

- 64 - 는 것은 물론 그 읍사를 구성했던 土姓集團(향리)도 없었다. 삼국사기 地志에서 未詳 과 合属 된 군현을 적기하면 다음과 같다. 合屬 慶州府合屬 東安郡 臨關郡 商城郡 南畿 中畿 西畿 北畿 莫耶停 東畿停 約章縣 永川郡合屬 臨川縣 道同縣 新寧縣合屬 黽白縣 安康縣合屬 音汁火縣 淸道郡合縣 烏岳山縣 荊山縣 蘇山縣 蔚山郡合屬 虞風縣 東津縣 未詳 化昌縣 日谿縣 尔同兮縣(尙州圈) 密津縣(良州圈) 屈村縣 河邑縣 蚊火良縣(晋州圈) 新腹縣 壽同縣 都山縣(星州圈) 善谷縣 隣豊縣(榮州圈) 軼雲縣 豨嶺縣(交州圈) 蘭山縣 蒜山縣 松山 縣 幽居縣(登州圈) 海曲縣 竹嶺縣 滿卿縣 海利縣(三陟圈) 目支縣(公州圈) 상기 合屬 또는 未詳 군현 이외에 邑司 또는 姓氏條가 없는 곳으로는 開城郡과 합쳐 開京 이 된 松嶽郡과 甫城府(眞寶縣)에 합쳐진 眞安縣이 있다. 신라시대 9州 소관 450邑 내외 가 운데(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잇는 線의 이남지역 통일신라의 영역) 상기 合屬과 未詳의 군 현은 태조 3년 이전에 이미 폐읍되었거나 他邑에 합쳐졌기 때문에 邑司 또는 그 읍사를 구 성했던 성씨조가 15세기 地志에 실리지 않았던 것이다. 9) 다음은 고려사 지리지에 의거 고려시대 군현의 치폐와 邑格의 승강문제에 대하여 살펴 보기로 한다. 邑司가 형성된 뒤부터는 군현의 치폐와 읍격의 승강은 동시에 읍사의 치폐와 승강을 의미하였다. 태조 3년(940)을 전후한 고려의 군현 편성은 첫째 前王朝인 신라의 군 현제를 바탕으로 하면서 그 위에 부분적인 개혁이 단행되었다. 고려사 의 표현처럼 王建은 草創未違하여 군현 명호 개정에 그쳤고 外官 설치 등 실 질적인 지방제도 개혁은 미쳐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후삼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지방 豪族들의 고려에 대한 忠逆度와 力關係를 고려하여 적절한 지역편제를 진행시켰다. 그 의 통일정책은 첫째 각 지방을 할거해서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호족을 卑辭厚幣 로써 회유하고 또 결혼정책을 써서 그들을 연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주체적인 입장에서 호 족을 연합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대대적인 군현 개편이 수반되었다. 弓裔의 기반을 인수한 왕건은 즉위하면서부터 이미 확보해 놓은 중부지역을 철저히 장악 하는 동시에 平壤을 경략하여 그 곳을 북진정책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그리하여 潜邸時에 자신이 이미 경략해 놓은 나주를 중심한 西海岸 일대를 끝까지 확보하였다. 이렇게 확보한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개편은 불가능했지만 기존의 군현체제에다 당시 高麗와 현지세력과의 向背와 역관계에서 부분적인 개편이 가해졌다. 이러한 기존 영역에 대한 부분적인 개편 작 업과 함께 새로 경략한 군현에 대해서는 호족세력을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高鬱(永川) 甫城 (眞寶) 興麗(蔚山) 義城 京山(星州) 安東 天安 등 여러 府 가 설치되었다.30) 이러한 府의 설치 로 기존의 군현 편성에 合屬과 移屬의 변화는 수반되었지만 구역의 분할이나 획기적인 개혁 은 없었다. 9) 三國史記 地志에 合屬 의 시기를 麗初 라 했으니 太祖 3년 이전임이 분명하다. 未詳 은 金富軾 등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 (고려 仁宗朝)를 기준하여 표현한 것이니 廢合된 확실 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同 地志 소재 군현이 고려 인종 때 그 소재지를 확인할 수 없 을 정도였다면 그 폐합시기는 고려 太祖朝 군현제 정비 이전이라고 볼 수 있다. 30) 旗田 巍, 高麗王朝成立期の 府と 豪族 ( 法制史硏究 10, 1959).

- 65 - 후삼국 쟁패기에는 우선 호족연합을 위한 회유책이 크게 작용했으나 통일 후에는 종전의 부분적인 개편보다는 신왕조의 획기적인 지방통치체제의 개혁이 발동되었다. 그것이 곧 태 조 3년에 전국의 군현 名號 개정을 비롯하여 慶州府의 6部와 鄕吏層 개편, 三韓(太祖)功臣 책정, 役分田 제정 및 土姓分定 등이 그것이다.31)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옛 辰韓 1국 가운데 하나인 斯盧國이며, 三國遺事 에 의하면 사로국의 6村에는 謁平 등 6인이 天降하여 6村의 長이 되고 동시에 6姓(6部)의 시조가 되었 다고 한다. 6촌은 말하자면 진한 1국 가운데 하나인 사로국을 구성한 6개의 씨족이 정착한 곳으로 각 村에는 각기의 首長인 村長이 있었다. 이 6촌지역은 신라의 발전과정에서 王京으 로 성장했지만, 신라의 멸망과 동시에 종래의 6촌 또는 6부가 敬順王의 귀부와 함께 경주부 라는 지역적 구획이 개편되었다. 그리고 기존의 6촌씨족이 신라의 宗姓인 3姓과 함께 경주 의 州司 를 구성함과 동시에 그 곳의 土姓이 되었다. 이들 6姓과 3姓의 世居地가 麗初 이래 경주의 邑治(府內)가 됨과 동시에 그들이 경주부의 읍사를 장악하는 향리의 주체가 되었다. 신라의 멸망으로 王京이 慶州라는 일반 州 府로 개편되고 金傅의 食邑이 됨과 동시에 그는 경주의 사심관을 맡아 副戶長 이하의 鄕職을 관장하게 되었다. 이때 金富軾의 先祖인 魏英 은 邑司의 首班格인 州長 (戶長)에 선임되었다.3) 그로부터 5년 뒤인 태조 3년에 경주를 大 都督府로 승격시키고 후일의 戶長格인 堂祭(堂大等) 10명을 크게 改差하는 한편, 전국의 군 현 名號를 대대적으로 개정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하였다. 慶州府先生案 (東都歷世諸 子記)와 同府 首戶長先生案 에 의거 관계자료를 적기하면 다음과 같다. 가) 天福五年(태조 3)庚子 廣平(評)省吏白文色 以除羅號 爲安東大都護府 邑號慶州司都督府 大改 差慶州堂祭拾 是年功臣數等第 東南海都部署使本營始排( 慶州府先生案 )33) 나) 太祖統合三韓敎是時 率領百官 郊迎順命 始終輔佐敎等用良 新羅乙良 京號不動東京留守官 州 號乙良慶州爲等如設排敎是 千丁以上乙束給敎是遣 堂祭十乙爻定敎是良 光宗朝良中 堂祭乙段 號戶長爻八乙制定敎事是置 (同府 戶長先生案 ).34) 위 두 자료에서 나타나는 堂祭 는 戶長의 전신인 堂大等을 지칭한 것이며 千丁 이상인 경 주는 당초 堂祭가 10명이었다가 光宗代에 가서 호장으로 개칭됨과 동시에 8명으로 정해졌다 고 하였다. 상기 자료에서와 같이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다음 그 3년을 기해 전국의 군 현 명호 개정, 삼한공신의 책정과 功臣堂 建立, 役分田 제정, 郡縣戶長 정원책정, 土姓分定과 31) 拙著, 韓國中世社會史硏究 (一潮閣, 1984) pp. 63 69. 3) 이에 관한 자료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ㄱ) 三國史記 地志 末王金傅 以國歸我太祖 以其國爲慶州 ㄴ) 高麗史 권, 太祖 18년 1월 辛酉條 除新羅國爲慶州 乃賜爲食邑. ㄷ) 위의 책 권75, 事審官條 太祖十八年 新羅王金傅來降 除新羅國爲慶州 使傅爲本州事審 知 副戶長以下官職等事. ㄹ) 위의 책 권97, 金富佾傳 太祖初置慶州 以魏英爲州長 即富佾 曾祖也. 그런데 후일의 增補文獻備考 帝系攷附氏族慶州金氏條에는 州長이 戶長으로 표기되어 있 다. 33) 許興植 編, 韓國中世社會史資料集 p. 156. 그런데 이 자료를 고려사 와 대비시켜 보면 年紀가 맞지 않은 것도 있으나 大改差慶州堂祭拾 은 고려사에도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34) 위의 책 pp. 59 63 및 許興植, 韓國의 古文書 (民音社, 1988) pp. l78 180에서 이 자료의 중요성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를 고려사 와 비교할 때 年紀가 맞지 않은 것이 있지만, 그것이 경주부의 邑司에서 유전된 고문헌이라는데서 읍사관계 자료로서는 매우 귀중한 것이 라 생각된다.

- 66 - 邑司의 조직체계 등 실로 획기적인 사업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시책은 서로 상관관계를 가 지면서 추진되었고, 그 결과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군현 토성의 분정이 경주의 堂祭數 정액처럼 각 읍사의 호장수 정액과 동시에 추진되었다고 본다. 慶州는 이상과 같은 과거의 王京體制에서 大都督府 내지 東京留守官체제로 점차 개편되어 갔다. 이와 함께 9州體制下의 梁州가 경주부의 관내로 예속되고 종래 양주에 영속되었던 군 현이 경주부로 移屬된 것은, 동남부 지역을 총괄하는 重鎭, 또는 對倭관계상 경주를 거점으 로 하는 새로운 군현의 領屬관계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경주부와는 정반대로 개편된 開京은 羅末의 松嶽과 開城 兩郡地域이 왕건의 定都로 인해 종래의 郡에서 새 수도로 개편된 것이다. 송악군과 개성군은 본래 별개의 兩郡으로서 삼 국사기 地志에서 15세기 地志까지 역대 地志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35) 末 松保和는 고려의 王畿는 옛 松嶽郡, 왕기 주위의 城外지역은 옛 開城郡의 땅으로 고려후기 의 開城縣令 또는 조선초의 開城廢縣의 지역임을 밝힌 바 있다.36) 羅末의 송악군과 개성군이 왕건의 定都로 인해 양군지역이 開京에 편입되었지만 原松嶽郡 은 王畿가 되고 그 주위의 開城郡域은 뒷날 개성부, 개성현으로 개편을 거듭했지만 군현으 로서의 생명이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세종실록 지리지에 송악군에는 성씨조가 없는 대 신 개성부(현)에는 성씨가 있음을 보아,37) 전자에는 羅末의 邑司가 王畿로 개편됨에 따라 폐쇄되었고 후자는 定都 후에도 군현으로 존속한 데에서 開城府司 또는 開城縣司가 있었다. 毅宗朝에 侍中을 역임한 王冲은 개성왕씨로서 그 외조부는 開州(城)兵正(향리) 金俊陽이며 그의 妻父도 開州吏 金代卿이었다.38) 그러니 개성토성에는 士族 외에 邑司를 구성했던 吏族 이 있었다. 고려왕실의 出自地 松嶽郡은 開京으로 존재한데 반해 開城郡은 외방의 군현과 같이 邑司가 존속되는 한편 그 읍사를 구성했던 土姓吏族들은 鄕役을 받고 있었다. 조선 태조 7년(1398) 개성현이 폐쇄됨으로써39) 그 동안 존속되었던 邑司가 소멸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유래로 인해 조선시대 開城府에는 일반 군현과는 다르게 邑司 또는 鄕吏制가 없었다.40) 平壤은 大同江 이북에 위치하여 왕건이 경략하기 전까지 신라의 領域밖에 있어 다른 군현 과 같이 土姓과 邑司를 갖지 못한 채 女眞族이 遊獵하던 荒廢地로 남아 있었다. 이에 왕건 의 즉위 후 평양 재건에 착수하여 築城設都하고 기성귀족과 군현의 良家子弟들을 徙民하는 등 제 의 수도를 건설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신설한 兩界의 州 鎭 縣마다 姓氏條가 있어 入鎭姓 來姓 入姓 續姓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독 평양부 에 限해 성씨조가 없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邑司 대신에 西京으로서 開京과 비슷한 京畿體 制와 후일 土官制度를 두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읍사 또는 향리가 없었다.41) 仁宗朝 妙 淸亂을 계기로 江東 三和 둥 6 縣을 西京畿로부터 분리시켜 속현을 析置할 때 각 縣마다 縣 司를 두고 향역을 담당할 향리를 배정한 데서 지리지에 이들 6현에는 각기 姓氏條가 기재되 35) 三國史記 地志, 高麗史 地理志, 世宗實錄 地理志, 新增東國輿地勝覽 및 徐兢, 高麗圖經 권 16, 官府條 참조. 36) 末松保和, 高麗開城府考 ( 稻葉博士還曆記念 滿鮮史論叢 ), 1938 ; 靑丘史叢 所收). 37) 實地 開城府 姓氏條 土姓五 高 金 王 康 田 來接姓一李. 38) 李蘭暎 編, 韓國金石文追補 pp. 151 15 王冲墓誌 참조. 39) 太祖實錄 권14, 太祖 7년 閨 5월 丁丑條 罷開城縣 隷開城留後司. 40) 松都志 (1648 년 金堉 편) 土俗條 참조. 41) 實地 평양부에는 성씨조가 없고 輿地 의 평양부 성씨조에는 (本府)趙(祥原) 외에 다 른 성씨는 기재되지 않았다. 그 趙씨는 趙仁規가문을 지칭한 것이지만, 이 가문은 본래 祥原 縣의 來姓이었다.

- 67 - 어 있다. 麗末의 楊州(南京, 漢陽)가 새 왕조의 서울이 되자 종래의 楊州 邑司와 土姓吏族은 原邑治 를 王京인 漢城府로 넘기고 그 동쪽 大洞里에 옮겨 새 양주목 읍치가 되었다가 태조 6년에 다시 楊州牧 屬縣인 見州로 옮겼다. 그 결과 實地 의 한성부(서울)에는 성씨조가 없고 見 州로 옮긴 楊州府에 성씨조가 있다.4) 麗史地 소재 전국의 京 州 府 郡 縣 鎭 가운데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잇는 이남지역의 군현은 거개가 신라시대부터 유래한 것이며 그 이북지방의 주 진 현은 고려시대 북경개척에 의해 신설된 구획이다. 邑數는 곧 邑司數를 나타내 주는 것으로 전술한 특수지역을 제외하 면 주읍과 임내를 막론하고 邑으로서의 생명이 존속하는 한 邑司는 있기 마련이다. 小縣 생 성의 특수한 例로서 羅州牧의 榮山縣 長山縣과 黃州牧의 鐵和縣은 각기 黑山島 長山島 鐵島 人을 內地에 수용하여 縣이 되었고 稷山의 속현 慶陽縣은 河陽倉에서 승격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 島嶼는 성격상 강화 진도 거제 남해와 같은 고래의 기성군현과 독자적인 섬으로 그냥 존속한 것의 두 가지가 있었다. 전자에는 邑司와 土姓吏族이 있으나 후자는 그것이 없 을 뿐만 아니라 죄인들의 유배지 또는 賤隷들의 거주지로 간주되었다. 이상과 같이 신라의 군현제가 태조 3년(940)을 전후하여 일차로 전면 개편된 뒤 고려의 군현편성은 成宗 顯宗朝를 거치면서 정비되어 갔다. 먼저 고려사 에 의거 邑司 또는 읍 사를 구성했던 향리가 있었던 군현을 邑格과 守令의 有無에 따라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 다.43) 가) 10세기 말까지 外官이 설치된 군현 開城 楊州 抱州 富平 衿州 水原 廣州 竹州 忠州 淸 州 鎭州 公州 洪州 天安 牙州 林州 慶州 河州 金州 咸州 密州 晋州 許州 固州 尙州 龍州 (宮) 善州 岱州 安東 剛州 全州 南原 瀛州 羅州 潭州 朗州 貝州 昇州 光州 交州 春州 東 州 漳州 漣州 海州 鹽州 安州 豊州 黃州 鳳州 信州 平州 洞州 谷州 安北 雲州 延州 博 州 嘉州 郭州 德州 撫州 肅州 慈州 順州 渭州 泰州 殷州 登州 和州 高州 宜州 文州 江 陵 金壤 翼嶺 陟州 등. 나) 11세기 말까지 외관이 파견된 군현44) 長湍 仁州 江華 原州 堤州 蔚州 禮州 梁州 陜州 南海 巨濟 瓮津 白翎 長州 定州 德州 元興鎭 寧仁鎭 耀德鎭 長平鎭 龜州 宣州 龍州 麟 州 朔州 鐵州 靈州 孟州 寧德鎭 威遠鎭 定戎鎭 寧朔鎭 安義鎭 成州 淸塞鎭 平虜鎭 寧遠 鎭 朝陽鎭 陽岩鎭 樹德鎭 安戎鎭 등. 다) 睿宗 元年(1106)이후 속군현에 외관이 신설된 군현45) 牛峰 貞州 德水 江陰 臨江 兎 4) 實地 京都 漢城府 및 楊州府條 참조. 43) 고려시대의 邑格은 주 부 군 현이란 명호보다는 외관의 유무에 따라 결정되었다. 태조 왕건의 읍명개정에서 중소읍에까지 州 字의 읍명이 남용된 데서 읍명에 명실이 상부하지 않은 예가 많았던 것이며, 명호상 격이 높은 府나 郡이 任內가 되는가 하면, 縣令이 설치된 현이 屬府 郡 위에 있었다. 44) 常駐外官이 成宗 년 1牧을 시작으로 파견되자 穆宗 顯宗 이후 증파되는 추세에 있었지만, 邑官의 고하와 치폐가 무상하였다. 대체로 邑司는 읍격에 따라 州司 府司 郡司 縣司 鎭司로 명명되었지만, 中小郡縣의 名號에 붙은 州字邑는 명호보다는 실제 邑官의 官品이나 외관의 유무에 따라 郡司 또는 縣司가 되었던 것이다. 45) 顯宗 9년 군현의 영속관계가 정리된 뒤 任內에 대한 監務官의 파견은 睿宗 元年부터 시작하 여 조선초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임내에 설치한 감무관도 고려 중기 또는 후기에 걸쳐 치폐가 반복되어 한 때 설치되었다가 뒤에 다시 폐지하는 예가 많았다. 여기에 열거한 군현 은 麗末까지 감무관이 한번 설치된 것은 모두 대상으로 하였다.

- 68 - 山 臨津 松林 麻田 積城 坡平 見州 峰城 童城 陽川 金浦 守安 唐城 安山 振威 陽城 喬桐 川寧 利川 果州 砲平 龍駒 楊根 槐州 陰竹 陰城 淸風 寧越 平昌 丹陽 黃驪 文義 木州 靑 塘 燕岐 懷仁 懷德 扶餘 連山 鎭岑 石城 定山 尼山 沔州 大興 結城 保寧 德豊 伊山 唐津 餘美 驪陽 貞海 溫水 新昌 禮山 稷山 安城 西林 庇仁 鴻山 藍浦 韓山 瑞山 泰安 興海 慶 山 壽城 安康 新寧 迎日 解顔 長鬐 東萊 彥陽 英陽 平海 盈德 松生 漆原 合浦 機張 昌寧 淸道 玄風 靈山 江城 河東 泗州 鎭海 宜寧 三岐 山陰 感陰 草溪 居昌 聞慶 開寧 報令 咸 昌 永同 靑山 山陽 安定 軍威 高靈 仁同 知禮 沃州 陽山 利山 大丘 禮安 義興 奉化 安德 豊山 基州 興州 義城 醴泉 益州 朗山 沃野 鎭安 高山 咸悅 任實 淳昌 雲峰 求禮 保安 扶 寧 井邑 大山 仁義 興德 高敞 臨陂 萬頃 錦州 富利 龍潭 朱溪 茂豊 珍同 金堤 金溝 務安 谷城 樂安 南平 昌平 珍原 和順 長興 靈光 長城 咸豊 長沙 茂松 道康 高興 同福 兆陽 玉 果 荳原 麗水 珍島 綾城 耽羅 金城 狼川 麟蹄 橫川 洪川 楊溝 金化 朔寧 平康 僧嶺 伊川 安峡 永興(平) 白州 安岳 儒州 靑松 嘉禾 長淵 永康 鐵和 長命 俠溪 遂安 豫州 龍津 靜邊 鎭 雲林鎭 隘守鎭 鎭溟鎭 歙谷 高城 杆城 蔚珍 旌善 咸州(興) 吉州 端州 北靑 甲州 江東 江西 中和 順和 靜州 義州 昌州 江界 泥城 隨州 通海 永淸 咸從 龍岡 三和 三登 등. 라) 麗末까지 임내로 존속된 小縣 46) 交河 幸州 高峰 豊壤 沙川 通津 載陽 永新 雙阜 龍 城 鎭江 河陰 長延 長豊 永春 酒泉 全義 淸川 道安 德恩 市津 德津 儒城 新豊 高丘 興陽 靑陽 新平 豊歲 平澤 地谷 慈仁 淸河 神光 杞溪 甫城 靑鳧 義安 熊神 東平 桂城 豊角 岳 陽 永善 昆明 班城 嘉樹 丹溪 加祚 利安 新繁 冶爐 蘭浦 平山 鵝洲 松邊.溟珍 海平.化寧. 單密.比屋 中牟 虎溪 禦侮 多仁 靑理 加恩 孝令 缶溪 若木 加利 八莒 金山.黃澗.安邑 花 園 河濱 臨河 一直 殷豊 甘泉 紆州 雲梯 馬靈 礪良 利城 福興 長溪 赤城 居寧 九臯 長水 澮尾 富潤 沃溝 山 平臯 巨野 鐵冶 會津 潘南 安老 伏龍 栗原 餘艎 長山 遂寧 會寧 長 澤 耽津 壓海 森溪 陸昌 海際 牟平 臨淄 黃原 昆眉 海南 竹山 福城 南陽 泰江 富有 突山 光陽 嘉興 臨淮 長楊 嵐谷 通溝 岐城 和川 嘉平 基麟 朝宗 文登 方山 瑞禾 殷栗 海安 永 寧 土山 新恩 端谷 派川 泣山 衛山 翼谷 鶴浦 霜陰 羽溪 連谷 臨道 雲岩 碧山 安昌 烈山 洞山 등. 마) 고려시대 鄕 所 部曲 處 莊 등에서 속현으로 승격된 군현47) 深嶽(鄕) 貞松(部曲) 富原 (處) 迷元(莊) 翼安(所) 慶陽(倉) 梨旨(所) 龜山(所) 莞浦(鄕) 守山(部曲) 彰善(部曲) 永順 (村) 功城(部曲) 吉安(部曲) 春陽(鄕) 才山(部曲) 奈城(部曲) 宜仁(部曲) 龍安(所) 榮山 (島) 道化(部曲) 豊安(部曲) 連豊(莊) 鐵和(島). 이상 열거한 군현에는 각기 읍사가 존재했는데, 邑格의 승강과 군현의 치폐에 따라 읍사 도 승격과 강등 및 치폐가 거듭되었다. 위에 열거한 군현을 다시 邑勢上으로 분석해 보면 大小州縣에 따라 격차가 너무 심하였다. 성종 년 주 부 군 현의 公廨田柴를 정할 때 군현의 규모를 보면 千丁 이상의 州府가 있는가 하면 500丁 以上, 00丁 以上, 100丁以上의 군현이 있으며 심지어는 30丁 以上, 0丁 以下의 小縣도 다수 있었다.48) 實地 의 전국 군현의 戶 數 통계에도 그와 같은 현상이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같은 邑司라 하더라도 州府 46) 睿宗初 尹瓘 등에 의해 한 때 동북면에 9성이 설치되었으나, 여기에는 넣지 않았다. 그 9성은 잠깐 설치되었다가 곧 철수했기 때문에 읍사가 미처 설치되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47) 고려시대 振威縣은 淵達部曲에서 승격, 明宗 년에 감무가 설치되었고, 高興縣은 高伊(猫)部 曲에서 승격, 충렬왕 때 역시 감무가 설치되었으며, 공주 소속 鳴鶴所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 한 회유책으로 명종 6년 忠順縣으로 승격, 令과 尉를 둔 바 있으나 곧 혁파되고 말았다 48) 高麗史 권78, 食貨 1 公廨田柴條.

- 69 - 郡縣의 邑格과 邑勢의 盛殘에 따라 그 권한과 기능에 격차가 심했던 것이다. Ⅳ. 邑司의 形成過程과 그 組織體系 고려가 신라의 지방통치체제인 郡縣制를 계승한 이상 邑司의 형성문제도 자연히 羅末로 소급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다. 군현제하에서 州 郡 縣이란 일정한 행정구획에다 守令이 파견 되고 그 수령의 하부행정체계에 일군의 吏屬이 행정실무를 맡게 되어 있다. 그러나 邑司 또 는 鄕吏制라는 법제적인 규정이 成宗 년 外官 설치와 동시에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읍사 또 는 향리의 전신은 신라시대부터 있어 왔다고 본다. 편년적인 순서에 의하여 읍사의 형성문 제를 살펴 볼 때 크게 外官 설치 이전과 이후 및 任內의 읍사로 3分할 수 있다. 新羅의 9州 5小京체제하에서 縣이상의 전국 州郡縣에는 都督 太守 縣令 등 外官이 설치되 었으니,49) 守令의 官衙가 있었음은 물론 군현의 행정실무를 담당한 토착의 吏屬이 있기 마 련이며, 그러한 吏屬이 있었다면 그 吏屬의 집무소인 邑司와 같은 吏廳이 있었다고 봄이 타 당할 것 같다. 신라의 군현제하에서는 鄕吏制度 대신에 村主制를 거론하기도 하지만, 中國의 경우와 같이 군현이라는 지방행정 구역이 설정되고 거기에 外官이 파견되었다면 마땅히 그 외관 밑에 행정실무를 담당할 吏屬과 그 이속의 집무소인 邑司 형태의 관사가 있었을 것이 다. 신라 景文王 1년(87)에 세운 碑文에 州司 (武州)50)와 삼국사기 에 熊川州의 板積 鄕司 가 나타나며,51) 삼국유사 文虎王條에 (武州)州吏 安吉과 上守吏 (其人)관계 기록이 5) 있는가 하면, 眞聖王 5년(888 891) 사이에 折中(澄曉大師)이 公州와 武州를 역방할 때 그의 단월인 公州吏 宋嵒과 武州吏 金思 두 사람은53) 바로 土姓 分定 후의 토성이족 과 같이 羅末 該邑의 州吏였던 것이다. 한편 羅末麗初의 金石文 碑陰記 소재 명단과 후삼국시대 호족들의 幕僚를 통하여 당시 邑 司와 관련된 조직체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러한 자료를 例示하면 다음과 같다. 가) 醴泉鳴鳳寺慈寂禪師塔碑(태조 4년, 941) 輔州官班 上沙飡元吉 第二純保 第三英希 寺鄕村主 吉萱 官班 上沙飡宗偘 第二今岳 第三主道 村主行悟 村主能直 村主宣直 나) 前揭興寧寺澄曉大師碑陰記 與一正朝 乎直阿干溟州 剋奇奈溟州 金芮卿溟州 連世大監溟州 王 侃奈原州 德榮沙干竹州 弟宗沙干竹州 宋喦史上公州 平直村主提州 貴平一吉干提州 堅必村主 冷州. 堅奐沙干新知縣 世達村主奈生郡. 式元大監冷水縣 明奐村主洒淵縣 康宣助別斤縣 吉沙 村主丹越馹. 다) 江陵普賢寺朗圓大師(開淸)塔碑文 開淸이 보현사 주지에서 경애왕으로부터 國師의 첩지를 받을 때 瞑州將軍 王順式(荀息)은 齊携僚佐 直赴禪關 함. 그 비음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 이 있다. 當州都領令佐丞王乂 執事郞中俊文 執事郞中官育 員外金乂 色執事仁悅 純忠."54) 49) 三國史記 권40, 雜誌9 職官下 外官條에 의거 州 小京 郡縣에 설치된 외관의 수를 통계해 보면 9주 5소경 115군 01현 합계 330읍이었다. 50) 朝鮮金石總覽 上 p. 118. 谷城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 51) 三國史記 권48, 向德傳. 5) 三國遺事 권, 文虎王 法敏條. 53) 朝鮮金石總覽 上 pp. 157 161. 寧越興寧寺澄曉大師寶印塔碑. 그런데 公州吏 宋喦은 위 碑陰記(黃壽永 編, 韓國金石遺文, 1976, pp. 105 107)에 宋喦 史上 公州 로 기재되어 있다. 한편 實地 에 의하면 公州宋氏와 武(光)州金氏는 각기 그 곳 의 대표적인 토성이었다. 54) 許興植, 高麗佛敎史硏究 (一潮閣, 1986) p. 667.

- 70 - 라) 原州興法寺眞空大師(忠湛)塔碑陰記 在家弟子 州官 郞中 旻會奈麻 金舜奈麻 侍郞興林奈麻 秀英奈麻上奈 信希奈麻.55) 마) 高麗史太祖世家 高鬱府將軍能文 率士卒來投 以其城近新羅王都 勞慰遣還 唯留麾下侍郞盃近 大監明才 相述 弓式等.56) 이상과 같이 신라말 고려 초의 자료에는 輔州官班에 侍郎 郎中 執事 大相 大等 大奈 奈末 村主 등의 직함이 나온다. 이는 신라의 官名을 모방한 것이나 실제는 지방 군현 邑司 구성 원들의 존칭이라 생각된다. 한편 신라의 竅興寺鐘銘(文聖王 18년, 856)에 上村主 第二村主 第三村主 57)가 군현 관내에 배열되어 있음을 보아 羅末의 村主層이 麗初 邑司의 형성과정에 서 戶長層化한 것을 구체적으로 읽을 수 있다.58) 邑司와 鄕吏의 전신은 벌써 신라시대부터 유래한 것이지만 고려적인 체제로 정착되기 시 작한 것은 고려 태조조부터라 생각된다. 곧 그것은 후삼국을 통일한 다음 전국의 군현 名號 개정과 邑格 邑域의 재조정과 함께 읍사의 구성주체인 土姓分定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왕건 의 토성분정책은 後魏 孝文帝의 姓族分定 이나 唐太宗의 氏族志 편찬과 맞먹는 사업이라 하겠다. 邑司의 구성 주체인 土姓은 邑治(內)의 支配姓團인 人吏姓과 村落支配姓인 百姓姓으로 구 성되었다. 토성의 首長들은 후삼국시대에는 城主 村主 등의 직함을 지니면서 지방세력을 대 표했던 이른바 鄕豪 들이었으며, 고려의 개국과 통일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각 출신지 또는 거주지별로 州 府 郡 縣의 토성이 되어 갔다. 토성의 수장들은 왕건과의 연결과정에서 개국 관료와 三韓功臣이 되거나 읍사를 구성하거나 각기 姓貫을 分定 또는 下賜받기도 하며 또 自稱姓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각 읍 토성들은 흑은 본관을 떠나 上京從仕 함으로써 在京官人이 되었고 그대로 토착하던 토성은 읍사를 발판으로 상급 향리층을 구성하여 군현 을 지배하였다. 왕건의 토성분정책은 일차적으로 반도통일 후 論功行賞을 겸한 신분제의 재편성이란 의도 도 작용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효율적인 지방통치체제의 재편성에 근본 취지가 있었던 것 이다. 즉 신라의 군현제를 그 바탕으로 하고 후삼국시대 각 지역 세력과의 力關係를 고려하 면서 徵税 調役과 같은 농민지배를 보다 효과적으로 하려는데 근본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왕조의 집권화는 지방호족을 흡수하고 그들의 군현지 배권을 收斂하는 과정에 서 점차적으로 확립되어 갔다. 고려초기부터 각 읍마다 邑司를 중심으로 盤根錯節되어 있던 土姓吏族은 上京從仕, 流移, 소멸 등의 과정을 밟아 지역적 이동과 신분적 분화를 계속했던 것이다. 그 결과 기존 토성 의 流亡에서 亡姓이 생기고 北境 개척에 따라 新設州鎭에 鄕役을 담당시킬 鄕戶를 徙民入居 케 한 데서 入鎭姓이 생겼는가 하면 지역적인 이동에서 來姓 入姓 등이 발생했던 것이다. 특히 고려후기 列邑間의 鄕吏調整策에 의하여 續姓이 대량 발생하였다. 實地 소재 각 읍 姓氏는 결국 읍사를 干성했던 향리들의 성씨이며, 토성을 제외한 다른 姓種은 歸化姓을 제 하면 모두 토성에서 분화된 것이다. 필자가 그동안 토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고려 초기부 터 여말까지 각종 金石文과 문헌자료에서 노출되는 군현 향리들의 姓貫을 實地 의 該邑 55) 朝鮮金石總覽 上 p. 149. 56) 高麗史 권1, 太祖 8년 10월 己巳條. 57) 藤田良策, 靑丘史草 pp. 3 30. 58) 후삼국시대 호족과 官班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이 참고된다. 金光洙, 羅末麗初의 官班 ( 韓國史硏究 3, 1979).

- 71 - 姓氏條와 일일히 대조해 본 결과 그 성씨는 고려시대 각 읍의 邑司를 구성했던 향리들의 성 씨였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래에 제시한 표가 위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예들이다. <표> 實地 소재 土姓과 該邑鄕吏姓과의 關係 </표> 郡縣名 該邑鄕吏로 典據 나타나는 姓氏 慶 州 府 朴 昔 金(天降姓), 朴 金 李 崔 鄭 慶州府戶長先生案 李 崔 鄭 孫 裴 薛 孫 裴 (土姓) 安東府 權 金 姜 曺 張 高 權 金 張 姜 曺 金得雨戶 口單子, 安東權 李 趙(村姓) 李 高 趙 氏族譜, 永嘉誌, 安東鄕 孫錄 豊山縣 金 林 柳 洪 康 金 林 柳 洪 康 永慕錄 (柳成龍 편), 豊山 (安東府屬縣) 柳氏族譜草, 豊山金 洪氏族 譜 若木縣 李 柳 韓 金(村姓) 李 柳 金 淨兜寺石塔造成記 (顯宗 (仁同屬縣) 년, 1031) 醴泉郡 林 尹 權(昕) 黃 邦 林 尹 權 黃 邦 開心寺 石塔記 (顯宗 元年, (村姓) 1010), 醴泉邑誌 醴泉權 林 氏族譜 居昌縣 劉 丁 章 愼 朱 劉 章 愼 朱 掾曹龜鑑, 居昌邑誌, 居昌愼氏族譜 楊 州 牧 韓 趙 閱 申 韓 趙 申 世宗實錄, 楊州趙氏族 譜 淸 州 牧 韓 李 金 郭 孫 慶 韓 李 金 孫 郭 龍頭寺幢竿記 (光宗 13년), 宋 高 俊 楊 鄭 東方 鄭 慶 韓國金石文追補 p. 7, 太 祖實錄, 忠淸道營吏案 (1580년경) 羅州牧 金 羅 吳 鄭 陳 孫 金 羅 鄭 陳 朴 錦城日記 (世宗 6년 立案), 南 朴 柳 吳 曺(屬縣土姓) 圓鑑錄, 掾曹龜鑑 押海縣 朴 朱 丁 江 南 朴 朱 丁 江 押海丁氏述先錄, 押海丁 (羅州屬縣) 氏族譜 江陵府 金 崔 朴 郭 咸 王 金 崔 朴 郭 咸 江陵金氏 崔氏 咸氏族譜 한편 實地 소재 군현의 토성 가운데 僻姓, 稀姓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大東韻府群 玉 이나 연조귀감, 기타 자료에 의거 예시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 實地 소재 土姓 僻姓들의 鄕吏關係 資料 </표>

- 7 - 大東韻府群玉 邑 名 姓種 姓氏 大東韻府群玉 邑 名 姓種 姓氏 기재 내용 기재 내용 其先本州吏 孝令縣 土姓 司空氏 今則皆是縣吏村 尙州牧 土姓 周氏 間有脫吏籍 民無顯者 爲士族者 淳昌郡 邕氏 淳昌郡吏之姓 平海郡 丘氏 其先郡吏也 濟州牧 夫氏 州吏及村民多有 昌原府 甘氏 本府吏之姓 夫姓 八莒縣 都氏 中爲八莒縣吏 堤川縣 智氏 本吏姓 聞慶縣 錢氏 縣吏村民之姓 潭陽府 鞠氏 本府吏之姓 宜寧縣 玉氏 倉正玉恩宗之後 海平縣 吉氏 其先縣吏也 우리는 위 표 소재 吏族姓을 통하여 實地 의 각 읍 성씨는 그 군현의 邑司를 구성했던 향리姓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또 그러한 자료를 통해 고려시대 邑司의 조직체계를 살필 수 있었다. 사실 향리는 군현 유지의 3대 요소인 구역 주민과 함께 필수 불가결한 존재였다. 군 현의 치폐와 邑格의 승강 및 구획 개편에는 戶口 田結數가 문제되었듯이, 군현의 유지에는 일정한 향리자원이 확보되어 있어야만 했다. 한번 확보된 향리는 시대의 진전에 따라 이동 과 분화가 계속되었고 후기로 올수록 향리姓이 다양화해 졌다. 그 결과 邑格과 본관에 따라 州姓 府姓 郡姓 縣姓 村姓 鄕姓 所姓 部曲姓 등이 있고 성의 형성과정과 변동에 따라 土姓 次姓 續姓 人吏姓 百姓姓 亡姓 來姓 入姓 등으로 구분되었다. 고려시대 군현 구획이 크게 邑 治 直村 任內로 구성되어 있듯이 邑司의 吏族들도 人吏姓 百姓姓 村姓 任內姓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앞 장에서 邑域의 편성과 邑格의 승강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지만 邑司의 吏族들도 시대의 진전에 따라 그 消長이 무상하였다. 9州 5小京 및 麗初의 1牧과 같은 大邑은 일찍부터 土 姓分定과 함께 읍사가 中小郡縣에 앞서 정착되었다고 본다. 신라의 수도였던 慶州는 태조 18년부터 王京에서 일반州府로 개편됨에 따라 종래의 6部名稱 개정과 함께 6姓과 3姓으로 정해지고 후일의 戶長層인 堂祭(堂大等)들을 改差한 데서 경주부의 읍사가 비로소 정착되었 던 것이다. 경주부의 토성들은 邑司의 首班인 호장층을 세습하면서 外官이 설치되기 전에는 邑司가 경주를 통치하는 명실상부한 官府로 존재했다가 외관이 파견된 뒤부터는 향리세계를 총괄하는 수반으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城 또는 村에서 성장한 군현의 土姓은 그 전신이 그 군현을 형성했던 城姓 또는 村姓에서 유래하였다. 大丘의 속현 壽城縣은 본래 壤城, 勾具姓 仍助伊城의 3城, 解顔縣은 省火城 無價 城 佛坐城 鳴城의 4개성으로 각각 구성되었고, 수성현의 4개 土姓과 해안현의 5개 토성은 각 기 城姓에서 유래하였다.59) 陽川縣과 永順縣은 본래 孔岩村과 林下村에서 뒷날 縣으로 승격 됨에 따라 종래의 村姓인 孔岩許氏와 永順太氏는 縣姓으로 승격되어 각기 縣司를 구성했던 土姓吏族이 되었다.60) 한편 군현의 구획과정에서 토성과 직결된 것은 아니지만 慶山 淸道 永川郡의 경우를 보아 군현의 읍사를 구성했던 土姓數는 그 군현 구획시 참가한 구역수와 대체로 상관관계를 갖고 59) 輿地 권6, 大丘府姓氏條. 60) 孔岩許氏族譜, 永順太氏族譜 및 高麗史 권57, 地理 尙州牧條 참조. 그런데 永順 太氏 世系는 大金就(校尉) 孝美(戶長中尹) 廣甫(戶長) 自奇(戶長) 으로 이어져 있다.

- 73 - 있다. 즉 慶山은 그 전신이 古浦城 金城 亐谷城의 3개 城이 합쳐 구획된 데서 토성의 수도 金, 全, 白 3姓이며 이들이 慶山縣司를 구성하는 주체였다.61) 淸道郡은 왕건의 후삼국 통합 때 烏岳 荊山 蘇山 伊山 茄山 등 5縣과 烏刁山城을 합친 고을로 그 土姓은 5姓이었다. 영천 군의 경우는 麗初 金剛城將軍 皇甫能長의 출신지인 臨皐縣이 중심이 되어 인접 4개현이 병 합된 것으로 그 임고와 骨火縣地가 邑治가 되고 그 나머지 苦也火 臨川 道同 3縣은 모두 直 村이 되어 읍치주위의 珍村里 骨山里 求利內里로 개편되었는데 이 곳 토성은 4성이었다.6) 왕건의 후삼국 통합과정에서 合屬縣을 갖게 된 경주 울산 청도 영천처럼 당초부터 邑域이 넓은 것이 아니라 주위의 수삼개 小縣들을 합친 데서 邑治지역이 확장되고 따라서 읍사에 참가하는 토성 수도 많아졌다. 이러한 군현의 구획에 따른 병합 폐합이나 任內의 移屬과 與 奪은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초기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구획의 변동은 동시에 읍사의 구성 주체인 향리의 조직에도 변화가 수반되었다. 晋州牧과 昆明縣처럼 주 또는 현으로 성립되기 전에 읍사에 참가한 姓團인 토성과 그후에 새로 첨가된 성씨인 立州後姓 또는 立縣後姓이 있는데 이는 읍사에 참여한 시간적 선후에 따라 구분되었다.63) 이는 마치 南原의 人吏姓과 百姓姓과의 관계와 같다고 생각된다.64) 이는 또한 성질상 實地 소재 廣州牧의 토성과 加屬姓과의 관계와65) 동일하다 하겠다. 즉 진주 남원 광주는 각기 原邑治가 구획될 때 그곳을 장악하고 있던 姓團이 읍사를 구성하 는 토성이 되었던 것이며, 그후 邑域의 확장에 따라 흡수된 지역의 성씨가 새로 읍사에 참 가한 데서 立州後姓 百姓姓 加屬姓으로 명명한 것 같다. 여기에서 토성과 백성성 또는 村姓 과의 형성시기에 있어서 선후문제가 제기된다. 백성성은 본래 촌락지배 성단으로서 그 읍사 형성시 참가하여 이미 邑治의 人吏姓과 함께 土姓이 된 것이며, 村姓은 토성이 확정된 후에 도 그 군현 관내에서 독자적인 구역을 보유한 채 任內와 병렬해 있던 촌락의 성단을 지칭한 것이다.66) 이러한 촌성도 읍사에 참여함으로써 읍사 구성에 村姓吏族도 많았다. 邑司 또는 土姓 형성의 시간적 선후관계는 상기 예에서 살펴 본 것처럼 군현마다 邑治 邑 治의 인접 촌과 외곽촌으로 편성된데서 人吏姓 百姓姓 村姓이 구분되며, 다른 한편에서는 主 邑과 屬縣 또는 향 소 부곡에 따라 성씨 형성에도 차이가 있었다. 가령 麗史地 나 實 地 의 군현 가운데 토성은 없고 續姓만 있는 곳은 토성이 있는 읍에 비해 읍사 형성이 늦 61) 輿地 권7, 慶山縣 古跡條 古浦城 金城 亐谷城(周官六翼 新羅時 合三城爲押梁郡 統合 後改爲三城), 實地 同縣 姓氏條 百姓姓(土姓)三 金 全 白. 6) 慶尙道地理志 永川郡 沿革 및 人物條. 63) 實地 晋州牧 姓氏條 土姓四 河 姜 鄭 蘇, 立州後姓三 柳 任 康, 晋陽誌 권3, 姓氏條 소재 晋州河氏族譜序(河演, 文宗 년 145) 土姓出自三韓者四 曰河 曰鄭 曰姜 曰蘇 立州之 後 又有三姓 曰柳曰康曰任 其他雜姓庶人也. 實地 昆明縣 姓氏條 土姓三 全 文 俞, 立縣後姓二 玄 白. 64) 實地 南原府 姓氏條 土姓十一 梁 鄭 晋(爲人吏姓) 尹 楊 甄 皇甫 廉 裵 柳 黃(百姓姓). 65) 實地 경기도 廣州牧 姓氏條 土姓三 李 安 金 加屬姓三 朴 盧 張(此六姓者 據古籍及本道 關 錄之 其云加屬者 古籍所書也). 그런데 광주의 가속성인 朴氏도 토성과 함께 고려시대 본주의 호장을 세습하였다. 朝鮮金 石總覽 上 p. 60 廣州神福寺重興記 (忠肅王代 李穀 撰) 참조. 66) 고려시대 百姓 에 대해서는 李佑成, 武田幸男에 의해 연구된 바 있다. 그 결과 백성은 麗代의 村正 村長層을 지칭하며, 百姓姓은 人吏姓과 함께 군현토성의 대구성 요소임이 밝혀졌다. 李佑成, 麗代百姓考 ( 歷史學報 14, 1961), 武田幸男, 高麗時代の百姓 ( 朝鮮學 報 8, 1963). 그런데 高麗判定 의 百姓과 實地 소재 百姓姓과는 물론 관련이 있지만, 별개로 보아야 할 것 같다.

- 74 - 었기 때문인 것이다.67) 일반 군현의 토성들이 각기 邑司를 근거로 戶長層을 세습해 갔듯이, 濟州島의 경우도 土 姓인 高 梁 夫 3姓이 本邑의 읍사를 중심으로 星主 王子직함을 세습하면서 중앙정부로부터 武散階를 받기도 하며 혹은 上京從仕하기도 하였다. 고려후기부터 제주에 대한 지배가 강화 되자 충렬왕 6년 本邑 治所외에 東 西道縣을 설치하자 村이 縣으로 개편되어 17개현으로 구획된 바 있었다. 이 17縣이 태종 16년(1416) 濟州牧 旌義 大靜 3邑으로 개편될 때 나머지 14현은 모두 직촌이 되었다.68) 麗史地 소재 모든 군현과 實地 에 각 읍사 구성 성씨들이 모두 같은 시기에 형성 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같은 토성이라도 人吏姓과 次吏姓, 土姓과 次姓이 동일 읍사내에 공 존하는 것은 양자가 시간적 先後를 두고 형성되었기 때문이다.69) 즉 人吏姓과 토성 다음에 형성되었다는 데서 次吏姓 또는 次姓이라 했던 것이다. 實地 의 姓氏條 기재순서에 있어 서 차리성 또는 차성은 반드시 土姓과 亡姓 다음에, 그리고 村姓과 任內姓 앞에 놓인 것은 바로 토성 다음가는 그리고 토성 다음에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70)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태조 3년(940)을 전후하여 그 이전에 폐합된 군현과 11세기 이후에 신설된 군현에는 土姓이 없었다. 이는 바로 麗史地 소재 州 府 郡 縣 鎭의 邑司의 구성주체인 實地 소재 군현 토성의 형성시기를 대변해 주는 것이며, 속현과 향 소 부곡성 으로 分貫, 分派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읍과 임내의 주종관계도 그 읍사를 구성했던 주 읍향리와 任內吏의 姓貫관계에서 찾아 볼 수 있다.71) 한편 고려 건국 초부터 점차적으로 개척해 나간 兩界의 新設州 鎭에는 기존의 土姓吏民 이 없기 때문에7) 拓境 設邑과 동시에 州司 또는 鎭司 를 구성할 남부지방(대동강에서 원 산만 이남 지방)의 주민을 徙民入居시켰던 것이다.73) 고려사 에도 양계주 진에 대한 徙 民記事가 단편적으로 나타나지만 가장 구체적인 자료는 역시 實地 의 성씨조이다. 조선 초기의 북경개척에 따른 徙民의 궁극적인 목표는 下三道처럼 각 邑 土姓이 각기 鄕邑을 아 67) 實地 에 의거 토성은 없고 속성만 있는 현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長連 歙谷 廣德 慶陽 吉安 奈城 才山 靑杞 宜仁 梨旨 永順 鐵和 海安 水入 安昌, 臨道 雲嵓 등 속현이 대부분이며, 또한 향 소 부곡 島에서 승격된 것이다. 68) 興地 권38, 濟州牧 古跡條 大村(合三徒居爲大村 即今之州城 州人謂城內爲大村), 太宗 實錄 권31, 태종 16년 5월 丁酉條, 東文選 권 101, 星主高氏家傳 및 南宦博物 (李衡 祥) 誌蹟條 참조. 69) 實地 洪州牧 姓氏條 土姓五 李 洪 韓 宋 白, 亡姓一 趙, 次吏姓三 尹 甫 盧, 瑞原縣 姓 氏條 土姓二 徐 廉, 次姓一 夜. 70) 次吏姓과 次姓의 次 字의 의미는 그 형성과정에서 人吏姓과 土姓 다음에 나왔다는 뜻과 姓 格의 優劣에서 人吏姓과 토성 다음에 가는 성이라는 뜻도 동시에 지녔다고 생각한다. 이는 마치 신라시대의 眞村主와 次村主의 관계와 같다 하겠다. 實地 의 姓種에 人吏姓 次吏姓 次姓 村姓 外村姓 등이 있듯이 신라시대의 촌주에는 上村主 本村主 第二 第三 村主 外村主 外 眞村主 鄕村主 등이 있었다(村上四男, 新羅の村主 について 東洋史學論集 1, 1953). 71) 主邑과 任內 사이에 향리의 왕래와 移屬이 잦았다. 實地 의 각 읍 성씨의 분포를 분석해 보면 主邑土姓이 소속 任內로 이동된 예가 많다. 慶州 또는 密陽府의 土姓이 소속 임내로 이 속된 것을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慶州府 北安谷(部曲) 續姓二 洪(本未詳), 金(本府來 皆爲 長役), 省法伊(部曲) 續姓二 金 崔(本府來 皆爲長役), 密陽府 守山縣來姓三 朴 卞(本府來), 伊冬音(部曲) 續姓二 孫(本府來) 尹(漆原來 今爲長役). 7) 世宗實錄 권76, 세종 19년 정월 乙未條 平安道人民 在高麗 皆下三道入居人也 無一土姓. 권 95, 세종 4년 正月 壬申條 其在高麗 咸吉道永興 平安道平壤以北 皆鞠茂草 爲野人狩獵之 地乃徙下三道之民 實之. 73) 拙稿, 高麗時代 北方移民에 대하여 ( 徐廷德敎授華甲紀念 學術論叢, 1970).

- 75 - 끼고 자체 守禦하는 방어체제를 新設州 鎭에도 移植해 보자는데 있었다. 고려시대도 이와 마찬가지로 拓境設邑과 동시에 남부지방의 군현토성을 抄定, 집단 이주시켜 각 州 鎭마다 入鎭姓과 入姓 또는 來入姓을 확보케 한데서 첫째, 州鎭의 행정요원인 향리자원을 확보하여 지방통치체제를 정립하며 둘째, 현지에 생활기반을 둔 土兵을 확보함으로써 외적의 침공으 로부터 국경을 지키고 여기에 다시 남부지방의 농민을 집단 이주시켜 개간, 정착케 함으로 써 국토의 균형적인 개발과 현지 농업생산성의 향상 및 軍需物資의 현지조달이란 이중삼중 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양계주 진에 徙民된 入鎭姓은 州鎭司의 행정실무 를 담당해 나갈 향리자원, 현지방어의 土兵 확보상 군현의 土姓吏族과 富實多丁戶가 주로 抄定대상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邑司의 형성과 그 조직체계를 구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鄕吏制의 성립과 그 정비과정을 살 펴보아야 한다. 신라의 관직체계에 京位職과 外位職이 있듯이 弓裔와 고려국초의 관제에도 京職과 鄕職이 혼용되고 있었다. 더구나 후삼국시대의 爭霸期에는 羅制 唐制 泰封制 등이 혼 효되었는가 하면 지방의 豪族들도 중앙의 관제를 외람되게 모방한 데서 그들의 官班과 幕僚 또는 僚佐에는 그러한 官位 官名이 혼용되고 있었다. 궁예에 의해 정해진 官號인 正匡 元輔 大相 元尹 佐尹 正朝 甫尹 軍尹 中尹74) 등이 高麗史 鄕職條에 대부분 그대로 실렸다.75) 이러한 향직과 관명은 중앙관료와 지방 호족 또는 그 자제에게 함께 쓰이고 있었다. 成宗 년(983) 州 府 郡 縣의 吏職名을 개정할 때를 기준하여 그 이전과 이후의 명칭을 정 리하면 다음과 같다.76) 가) 성종 년 전의 명칭 兵部 倉部 堂大等 大等 郎中 員外郞 執事 兵部卿 筵上 維乃倉 部 卿 나) 성종 년 개정된 명칭 司兵 司倉 戶長 副戶長 戶正 副戶正 史 兵正 副兵正 兵史 倉正 성종 년 개정전의 군현 吏職名은 대개 신라의 중앙관제, 특히 執事省과 兵部, 倉部에서 유래 하였다.77) 그러니 성종 년 이전의 邑司조직은 신라의 중앙관제 가운데 執事省의 侍中 (令) 侍郞 郞中 員外郞 史의 체계를 그대로 모방했음을 알 수 있다. 성종 년 군현 향리 들의 직명을 개정하기 전에 吏職이 있어온 것처럼 읍사와 군현 吏屬도 고려 국초 내지 羅末 로 소급되어야 할 것이다. 羅末에 대두한 지방의 호족들은 각기 군현 단위로 그 세력기반을 가졌던 것이며 그들이 나중에 城主 將軍의 칭호를 가졌지만 起兵 당초에는 郡吏 또는 縣吏 의 신분에서 출발한 예가 있었다.78) 74) 三國史記 권40, 雜志 9 職官 外官 右弓裔所制 官號條. 75) 高麗史 권75, 選擧 3 鄕職條 一品曰三重大匡 重大匡 二品曰大匡 正匡三品曰大丞 佐丞四品 曰大相 元甫 五品曰正甫 六品曰元尹 佐尹 七品曰正朝 正位 八品曰甫尹 九品日軍尹 中尹. 76) 高麗史 권75, 選擧 3 鄕職條 成宗二年 改州府郡縣吏職 以兵部爲司兵 倉部爲司倉 堂大等 爲戶長 大等爲副戶長 郞中爲戶正 員外郞爲戶正 執事爲史 兵部卿爲兵正 筵上爲副兵正 維乃爲 兵史 倉部卿爲倉正 77) 三國史記 권38, 雜誌 7 職官上 執事省條에 典大等 侍郞 郞中 員外郎 史와 兵部條에 兵部 司兵 大監 및 倉部條에 倉部 司倉 등의 官名이 각각 나오고 있다. 78) 慶尙道地理志 와 輿地 에 의거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金洪述 高麗太祖時 以吏爲城主將軍焉 ( 경상도지리지 의성현조). 金萱述本縣吏也 高麗太祖統合三韓時 有輔佐之功 (동상, 海平縣條). 世傳(密陽)府吏孫兢訓佐高麗太祖有功 追贈三重大匡 ( 여지 권6, 밀양부). 金宣弓(太祖征百濟 至嵩善募從軍者 宣弓以吏應募 (동상, 선산부).

- 76 - 성종 년 이전의 군현읍사와 그 구성체계를 엿볼 수 있는 자료는 淸州龍頭寺幢竿記 에 서 나타난다. 金氏 金芮宗(堂大等) 金希一(芮宗의 從兄, 堂大等, 正朝) 金守 (正朝) 韓氏 韓明寔(奈末, 學 卿), 慶氏 慶柱洪(前兵部卿) 慶奇俊(大舍, 時司倉) 孫氏 孫熙(奈末, 前侍郞), 孫仁謙(學院郞中) 위 4姓은 모두 청주의 토성이며,79) 특히 金芮宗과 金希一 종반은 후일의 호장에 해당되는 堂大等을 맡고 있던 그야말로 州里豪家 鄕閭冠族 으로 慶氏 孫氏 등 다른 토성들과 함께 당 시 淸州司를 장악했던 것이다. 幢竿鑄成에 관여한 인사만 나타난 데서 邑司 구성원의 전모 를 알 수는 없으나 거기에 나타난 堂大等 正朝 兵部卿 司倉 侍郞 郎中 등은80) 바로 성종 년 郡縣吏職을 개정하기 전의 직명이나 鄕職이다. 고려초기 향리제도의 성립과 정비에 관해서는 金鍾國 朴敬子 趙榮濟 등의 연구가 있어 더 이상 천착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지만, 당시의 향리문제는 土姓과 邑司문제와 관련짓지 않고 는 그 실체를 제대로 밝힐 수 없다. 향리에 대한 기존의 연구에서 그 직제를 戶長層 밑에 司兵(兵部), 司倉(倉部)과 함께 司戶 를 병렬시키는 데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趙榮濟는 논문 에서 이미 司戶 가 없었음을 논단하였다.81) 사실 고려시대의 향리직명에는 戶正 副戶正은 있지만 司戶는 없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성종 년 이전의 향리직명은 신라의 중앙관서인 집사성 병부 창부에서 유래한 것으로 거기에 戶部가 없으니 따라서 司戶가 있을 리 없다. 그 런데 고려후기 자료에서 郡司戶 副司戶, 權司戶 란 用例가 나오는데8) 이는 司戶 가 아니 고 郡司戶長, 州司副戶長, 邑司의 權知戶長 을 지칭한 것이다. 위의 분석에서 자명해지듯이 고려초기 鄕吏職制의 설명에서 司兵 司倉과 함께 司戶 를 억 지로 끼워 넣을 필요가 없다. 사실 호장층이 民戶의 長으로서 戶長 副戶長 戶正 副戶正 史로 이어진 계열이 그 업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邑司의 조직체계가 성종 년 향리직 명 의개정으로 그 모습이 비로소 구체적으로 나타났지만, 현종 9년 邑格에 따른 향리의 직급별 정원이 다음과 같이 정해진 데서 그 내용이 소상하게 드러났다.83) <표></표> 79) 實地 淸州牧 姓氏條 土姓十二 ;韓 李 金 郭 孫 慶 宋 高 俊 揚 東方 鄭 이들 성씨는 來姓 續姓과 함께 고려시대 淸州 邑司를 구성했던 것이다. 80) 나말여초의 자료에 나타난 관위나 관직명은 아직 체계화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가령 위 幢 竿記에는 兵部卿과 司倉이 동시에 기재되어 있다. 물론 倉部卿과 司倉은 모두 신라 시대의 관명이지만 성종 년 향리직명 개정 때 倉部를 司倉으로 바꿨던 것이다. 81) 趙榮濟, 앞의 논문 pp. 67 83 참조. 8) 그러한 용례는 李奎報가 찬한 묘지를 비롯하여 후기에 나타나고 있다. ㄱ) 吳闡猷墓誌(고종 5년, 138) 海州人也 版籍世皆爲州吏 考某爲州副司戶 外祖某亦其州人 也爲權司戶. ㄴ) 田元均墓誌( 李相國集 소재, 고종 5년, 118) 曾祖諱某祖某 皆爲郡司戶. 韓國金石 文追補 p. 195 田元均墓誌 曾祖講淑鱗 祖講 皆爲郡司戶長. ㄷ) 동서 p. 05 薛愼墓誌(고종 38년, 151) 淳昌郡人也 曾祖諱子 爲郡司戶. 83) 高麗史 권75, 選擧 3 鄕職條.

- 77 - 鄕吏의 職名 戶 副 州縣의 丁敎에 따른 長 戶 鄕吏數 長 州 1000丁 이상 8 4 府 500丁 이상 7 郡 300丁 이상 5 縣 100丁 이하 4 1 兩 1000丁 이상 6 界 100丁 이상 4 州 100丁 이하 1 鎭 兵 副 倉 正 兵 正 正 1 1 1 1 1 1 副 倉 正 1 1 史 兵 倉 公 史 史 須 史 0 10 10 6 14 8 8 4 10 6 6 4 6 4 4 3 10 6 6 4 10 10 6 4 6 4 4 食 祿 史 6 4 4 3 4 4 0 客 舍 史 4 1 藥 店 史 4 1 司 獄 史 4 0 合 計 84 61 51 31 5 54 9 고려일대의 군현제가 顯宗 9년 개혁으로 확립되었듯이 향리직제도 위 표와 같이 정비된 뒤 麗末까지 큰 변동없이 존속되었다.84) 국초 이래 무질서하게 미분화, 미분업화된 邑司의 조직체계가 成宗 년 개정을 거쳐 이때에 와서 邑格과 丁數 및 5道 兩界地方을 고려한 바탕 위에서 정비되었다.85) 향리직제는 크게 戶長 正 史의 3층으로 구분되고 업무 분장도 戶 兵 倉 및 公須 食祿 客舍 藥店 司獄 등으로 세분되었다. 현종 9년의 향리직제에서 戶正 副戶正이 高麗史 에서는 누락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若木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 와 文宗 5년 향리들의 昇進階梯條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 다. 현종은 향리의 직급별 정원을 정한데 이어 外官이 호장을 擧望할 때의 자격요건을 정했 으며,86) 그 13년에는 崔士威의 건의대로 군현과 향 소 부곡을 구분하여 戶長 과 長 으로 호 칭케 하였다.87) 고려의 향리직제는 문종 5년 10월에 향리의 직급별 昇進階梯를 정함으로서 향리제도가 일 단 완비되었다. 그 승진 순서는 後壇史에서 출발하여 兵倉史 州府郡縣史 副兵 倉正副戶正 戶正 兵 倉正 副戶長 戶長의 아홉 단계를 밟아 향리의 최고 지위인 戶長에 이르게 되 었다. 이를 다시 표로써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88) <그림>000000067896_0091.jpg</그림> 84) 慶州府戶長先生案 소재 李弼 등의 序文(공민왕 10년, 1361) 끝에 호장 8명(호장 4, 섭호장 4), 부호장 4명, 호정 명, 부호정 명 등이 기재된 사실을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다. 85) 현종 년(1031)에 작성된 若木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의 분석을 통해 동왕 9년에 정비된 향리의 직제가 실제 군현의 읍사조직에 적용되고 있음이 밝혀졌다(武田幸男, 淨兜寺五層石塔 造成形止記의 硏究 1 참조). 86) 高麗史 권75, 選擧 3 鄕職 顯宗 9년條 是年判 諸道外官 戶長擧望時 考其差年久近 壇典行 公年數 具錄申省 方許給貼. 87) 위의 책 顯宗 13년 4월條. 88) 高麗史 권75, 選擧 3 鄕職文宗 5년 10월修.

- 78 - 이러한 향리의 승진계제는 중앙관료와 같이 가문의 고하에 따라 승진에 遲速의 차가 있어 가령 누대에 걸쳐 家風이 지속된 吏族의 子弟는 兵 倉史에 初授되고 그 다음은 後壇史에 初 授되었던 것이다.89) 여기 가풍이란 군현의 토성이족 가운데 족세가 강성하여 호장층을 세습 했던 가문을 의미한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같은 吏族이라 하더라도 그때 그때 각기 家格의 고하와 家勢의 성쇠에 따라 혹은 위의 아홉 계제를 다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兵倉正이나 戶 正에서 출발하여 戶長으로 올라가는 경우도 있겠고, 혹은 최말단의 後壇史에서 시작하여 차 례로 승진되는 경우도 있겠고, 혹은 아무리 올라가봐야 州縣史나 副正, 倉正에서 머무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史 이하의 色吏層은 거의 승진의 길이 막힌 최하위 吏屬으로 서 고려말에 올수록 이 계층이 늘어났던 것이며 이들은 대개 土姓吏族이 아닌 假吏層이며 후기 이래 鄕役을 천시 내지 苦役視했던 것은 바로 이들 계층이었다. 우리는 이상에서 고려사 의 鄕職 條을 통하여 향리직제의 정비과정을 살펴보았지만 여 기서는 慶州府戶長先生案 과 여말선초의 향리관계 자료 및 掾曹龜鑑 을 통하여 향리 의 出自와 그 내부구조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먼저 경주호장안에 의거 명단이 기재되기 시 작한 고려 충렬왕 7년부터 조선전기까지의 경주부 역대 首戶長의 성씨별 통계를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이 표의 戶長數 가운데 ( )안 숫자는 再任 또는 三任한 호장을 모두 합산한 것이 다. 시기 首戶長數 성씨 朴 金 李 崔 孫 鄭 其他 합계 忠烈王 7년 麗末(181 139) 0(0) 6(34) 1() 8(10) (3) 3(3) 0(0) 5(70) 1393년 159년 3(4) 46(85) 1() 16(8) (4) 7(10) 0(0) 9(158) <표></표> 實地 에 의하면 경주는 토성 6에 天降姓 3으로 위 표 소재 首戶長姓 가운데 朴 金氏 는 천강성, 李 崔 孫 鄭氏는 토성이나 본관상으로는 모두 경주에서 出自하였다. 이처럼 경주 부의 역대 수호장은 위 기간 동안 예외없이 경주를 본관으로 한 토성이족 출신들이었다. 이 러한 현상은 충렬왕 7년 이전에서 고려초까지 소급할 수 있으며, 단 같은 토성이족이라 하 더라도 그 姓勢, 家勢의 성쇠소장에 따라 戶長數에 있어 다과의 차이가 있으며 또 시기에 따라 차이가 많았을 뿐이다. 安東鄕孫錄 과 安東權 金氏族譜에 의하면 안동부도여초 이 래 3太師(權幸, 金宣平, 張吉)의 후예들이 다른 同邑土姓들과 함께 邑司를 구성하는 吏族이 었으나 특히 權 金兩姓이 우세하여 호장층을 거의 독점하다시피하였다. 강성한 土姓吏族이 邑司를 장악하여 향리세계를 배타적으로 주도해 갔던 현상은 각읍이 거의 공통적이었다. 고려시대 향리관계자료에서 읍사를 장악했던 향리들의 家系와 그 通婚 圈을 살펴보면, 그들의 직역이 철저히 세습되고 있었으며 혼인도 계급내혼제와 지역내혼제 를 취하고 있었다. 역시 경주부호장선생안 에 의거 역대 수호장 중 4祖가 명기된 것을 통계해 보면 麗末까지는 4祖(父, 祖, 曾祖, 外祖)가 모두 戶長이 16, 3祖가 4, 非戶長 외조가 3, 합계 3명이었다. 대체적으로 여말 이전으로 올라 갈수록 首戶長의 4祖가 모두 호장인 예 가 많고 후기로 올수록 4祖 중 非戶長이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통시대적으로 볼 때 4 祖 중 적어도 祖 이상은 戶長 記官 등 향리의 상층부에 속하며 4祖 중 모두 향리와 무관 89) 동상 (향리의 승진단계를 설명한 다음) 其公須 食祿正准戶正 副正准副兵倉正 客舍 藥店 司獄 正 准副戶正 副正准州府郡縣史 以家風不及戶正副兵倉正差之 若累世有家風子息 初授兵倉史 其次初授後壇史.

- 79 - 한 가계는 거의 없다. 이러한 현상은 金石文 戶籍 榜目 族譜 등 향리신분의 世系에서는 동일 하게 나타난다. 그러한 예를 차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吳闡猷墓誌(高宗 5 년, 138) 海州人也 版籍世皆爲州吏 考某爲州副司戶(副戶長)外祖 某亦其州人也 爲州權司戶(權知戶長) 朝鮮金石總覽 上 附 6). 나) 麗朝科擧事蹟(공민왕 년, 1353) 鄕貢進士金承遠 定州人(父戶長正朝演 祖戶長平曾 祖 戶長異 外祖戶長金角年)( 國朝榜目 ). 안동부 7개 토성 가운데 李氏를 제하면 나머지 權 金 張 曺 姜 高氏는 향리관계 자료가 나 타난다. 고려사 와 權適墓誌, 戶口單子 및 權氏族譜에 의거 權幸의 後裔 세계를 여말까지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90) [그림제목] 高麗後期 安東權氏의 世系 위를 통해 우리는 안동부의 邑司조직을 權氏의 世系에서 그 일면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다. 후삼국시대 古昌郡의 호족인 權幸(行)은 城主인 金宣平 및 張吉 등과 함께 왕건을 적 극 도와 三韓功臣과 三重大匡이란 최고의 鄕職을 하사받고 본관이 안동부로 승격됨과 동시 에 모두 그 곳 土姓이 되었다. 그들은 즉시 上京從仕하지 않고 읍사를 장악한 호장층을 형 성하여 戶長 副戶長 兵正 戶正 倉正 등과 같은 吏職과 正朝 中尹 軍尹과 같은 鄕職, 校尉 副 尉와 같은 武散階 및 一品別將 保勝別將 郞將 隊正과 같은 州縣軍의 將校職을 겸하기도 하 였다. 同邑土姓吏族끼리는 철저한 지역내혼제와 계급내혼제를 지켜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90) 위 표는 成化譜(1)와 權適墓誌() 및 18세기 이후에 나온 족보(3)를 참고하여 작성한 것이다.

- 80 - 권씨의 경우는 안동김씨인 金得雨의 호구단자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래표와 같이 金氏 世系는 여말에서 고려 중기까지 소급되며 후기로 올수록 통혼권이 인근 군현의 土姓吏族으 로 확대되었다. 安東權 金 兩姓吏族의 세계 분석에서 고려시대 각 읍사의 구성주체인 토성이족들의 직역 이 철저히 세습되고 있으며 그들의 통혼권도 극히 배타적이고 폐쇄적임을 알 수 있다. [그림제목] 金得雨家門의 世系와 通婚圈 위에서 호장층에 든 안동부 土姓으로서 권 김 장 조 강씨 등이 나타나며 특히 권씨와 金 氏吏族들은 족내혼이 많았다. 또한 여기에 고려시대 군현호장층은 호장 부호장과 같은 吏職 名 외에 鄕職 州縣軍의 將校職, 武散階 및 同正職까지 겸대하는 예가 많았다. 라) 善山府는 여초 이래 嵩善 善州로 邑名의 개정과 刺史 屬郡 縣令 知州事 등으로 읍격의 승강이 있었지만 대개 主邑의 邑司로 존재하였다. 이곳 제일의 토성이족으로서 여초이래 여

- 81 - 말까지 府司의 호장직을 세습해 온 金宗直의 先代 世系와 그 통혼권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 음과 같다. [그림제목] 高麗後期 善山金氏의 世系와 通婚圈 麗末 이전의 그 선대는 줄곧 향리의 상층부를 세습해 온 데다가 그 외조들도 모두 호장층 이었다. 그들의 통혼권은 士族化 전에는 同本의 토성이족에 한하며, 심지어는 9대 가운데 7 대가 동성동본의 김씨끼리 혼인하였다. 또한 여기에도 김씨 외에 善山土姓인 林氏 文氏 白 氏가 호장층으로 나타난다.91) 마) 위에 예시한 안동과 선산부의 이족세계는 주읍의 읍사를 구성했던 향리들의 가계인데 반하여 다음에 예시한 押海縣은 任內의 邑司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림제목] 高麗後期 押海丁氏의 世系와 通婚圈 위 표는 押海土姓인 丁氏의 世系圖로서 그 성씨의 세계와 통혼권 뿐만 아니라 압해현 토 91) 金宗直이 세조 4년(1458)과 성종 7년(1476)에 걸쳐 그 선조의 계보를 정리함에 있어 본관에 세거해 왔다는 사실과 자신이 본관 수령에 재직하고 있다는 잇점을 살려 善山府司 소장의 자료, 麗代 전래의 戶籍斷簡 및 戚族의 族圖까지 동원하여 世系를 밑에서 上系로 소급 추심 하는 작업과정을 거쳐 완성한 것이므로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 8 - 성들의 재지상태와 직역관계, 신분의 상승과 변천 및 당시 압해 縣司의 조직체계를 구명하 는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9) 압해현의 5개 토성 가운데 南氏만이 위에 나타나지 않고 나머지 丁 朴 朱 江氏가 호장층으로 나타나며 丁氏의 同姓同本婚, 丁氏와 朴氏 朱氏 또는 江 氏와의 同本異姓婚이 시행되고 있었다. 이상에서 몇 개의 土姓吏族을 예시하여 경주 안동 선산 압해 등의 읍사 구성체계를 살펴 보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다른 군현의 읍사조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본다. 향리관계 자료 를 남긴 邑司의 조직을 보면 시대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호장층의 4祖는 대개 戶長 上詔文 記官 등 향리의 상층부였다. 이러한 현상은 각 읍사마다 토성이족의 가계가 호장세 계를 거의 배타적으로 독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한 가계내의 祖 父 子 孫에 걸 쳐 호장직이 세습되는 것은 물론, 兄弟叔姪도 모두 향리세계에 布列되어 있었고 그들의 자 녀혼취도 호장직을 세습하는 名門吏族끼리 하였으므로 위에 열거한 것과 같은 현상이 나타 나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 향리의 직제는 전술한 바와 같이 성종 현종 문종조에 걸쳐 정비, 일단락되었지 만, 읍사의 조직체계는 향리의 명단인 壇案 이 크게 上 中 下 3단으로 구분되었듯이 문종조 이래 戶長 諸正(記官) 史(色吏)로 대별되었다. 그리고 관료제의 발전에 따라 모든 中外의 관 직체계가 文武兩班 또는 吏 戶 禮 兵 刑 工의 6部로 구성되어 갔듯이 향리의 직임도 점차 吏 任과 軍任 또는 6房으로 나누어져 갔다. 三班 三公兄 또는 六房官屬이란 말이 守令의 하부 행정체계에서 거론되듯이 여말에 오게 되면 향리직제도 결국 戶長 記官 將校의 三班체제로 보다 계열화하였다. 邑司를 구성한 향리의 각종 직함과 그 승진체제를 살펴보면, 호장과 부호장은 성종 년 (983) 종전의 堂大等과 大等에서 개칭된 것이며, 목종 원년 3월에는 호장으로서 70세 일 때 는 七十致仕의 의미에서 安逸戶長의 호칭이 주어졌다. 국초에는 堂大等이 堂祭로 표기되기 도 하였고 三國遺事 에는 致仕戶長 致仕上戶長 上戶長의 용례가93) 보이는데 여기 致仕戶 長이란 退任, 즉 安逸과 같은 것으로 추측된다. 또 致仕上戶長은 致仕한 호장 가운데 가장 우두머리란 뜻이며 上戶長은 일명 首戶長 또는 頭戶長이라고도 했는데 현임 호장 중 수석호 장을 뜻하였다. 또한 호장 다음에 攝戶長과 權知戶長이 있으며 또 직임에 따라 여러 호칭이 주어졌던 것이다. 같은 戶長이라 하더라도 종류에 따라 지위와 권한이 상이하였다. 副戶長 攝戶長 또는 權 知戶長 戶長 首(上)戶長 安逸戶長으로 승진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로이지만 때로는 섭호 장, 권지호장 혹은 안일호장의 직함을 갖고 수호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현종 9년 判에 諸道의 外官이 戶長을 擧望할 때는 임명된 기간의 久近과 壇典行公의 年 數를 고열하여 尙書省에 具錄 신청하면 給帖을 허락한다 94)는 규정과 같이 호장의 임명에 대한 제청권은 該邑守令이 갖고 있었다. 그리고 제청을 받는 곳은 상서성으로서 승진 給帖 時에는 대상자의 근무연한과 吏職 경력을 참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호장을 비롯한 향리의 任免節次는 시대와 외관 유무에 따라 사정이 상이했다고 본다. 외관이 파견되기 전인 고려 초기에는 該邑守令의 제청없이 그 군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호족을 당시의 鄕職體 9) 壓(押)海郡은 본래 海中島로서 麗初 羅州 속군으로 있다가 중기에 靈光郡에 속한 바 있고, 뒤에 다시 나주에 귀속되었다. 麗末에 왜구로 인해 本土(島)를 버리고 나주 남쪽 40리 지점 에 橋居하면서 조선초기까지 나주의 속현으로 존속된 바 있다. 93) 三國遺事 권4, 義解第五 寶壤梨木條. 94) 高麗史 권75, 選擧 3 鄕職條.

- 83 - 制로 개편했던 것이며, 중앙에서 일방적으로 향직개편을 했다기보다는 각기 군현을 지배하 고 있던 土姓吏族 중심의 향직편성을 그대로 승인해 주는데 불과했다고 본다. 그리고 태조 18년(935) 事審官制가 생기면서 군현의 副戶長 이하의 향직은 사심관의 추천에 의하였다. 물 론 고려의 성립과정에서 그 때 군현을 장악하고 있던 호족의 향배에 따라 그대로 승인되기 도 하고 혹은 교체되기도 했을 것이다. 한편 각읍의 향직편성과 구성원은 그 토성세력의 대 소강약에 따라 상이했던 것이며, 麗末의 戶長案이나 吏族世系에서 보아 온 것처럼 벌써 여 초부터 몇몇 토성집단이 향리세계를 독점하면서 면면히 후대에까지 내려왔던 것이다. 성종 에서 문종조에 걸쳐 군현제, 향리제의 정비와 함께 외관의 계속적인 增派, 향리직제의 개편 에 따라 군현향리의 재량권의 범위가 축소되어 가는 한편, 외관 내지 중앙정부의 감독권이 점차 강화되어 갔다. 邑司의 지위 저하는 무엇보다 외관 설치에 가장 큰 원인이 있었다.95) 외관이 설치된다는 것은 읍사가 이제까지의 군현지배권을 외관에게 넘겨주고 수령의 하부행정체계하에 들어갔 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기까지 3백여 개가 넘는 屬郡縣에는 아직 邑司가 명실상부한 治邑기 관으로 존재했지만, 睿宗朝부터 15세기초까지 속현에도 외관이 설치됨으로써 향리의 지위와 권한은 계속 저하되고 위축되어 갔다. 이에 따라 邑司 구성원의 임명권은 수령에게 일임되 었고 때로는 호장이 되기 위하여 중앙의 상서성에 청탁하는 사례가 있었다.96) 비록 후대의 자료지만 경주나 안동 등 邑司관계 기록을 살펴보면 읍사의 향리세계도 양반 의 범절못지 않게 위계질서가 정연하고 내부규율이 매우 엄격하였다. 특히 향리의 상층부를 이루는 首戶長이나 三公兄의 선임에는 가문과 개인이력을 철저히 보아 만약 가문에 하자가 있거나 본인의 부정행위가 있을 때는 그러한 직임에서 제외되고 현임의 경우는 사임해야 하 였다.97) 문종 5년 향리의 직급별 승진계제가 정해진 뒤 읍사의 조직체계는 크게 上 中 下의 3壇으로 구분되어 각각 壇案, 이 작성되어 있어 함부로 그 壇典을 넘을 수 없었고 호장이나 三公兄은 반드시 상단에 드는 자가 임명되었다.98) 고려초기 邑格과 丁數에 따른 호장층의 정원은 주 부 군 현의 토성수와 대체로 일치하였 다. 즉 邑格에 따른 호장층의 정원은 각기 그 고을의 토성수를 감안해서 정했다고 생각된다. 당시 호장층은 바로 그 군현의 대표적인 성씨집단의 수장급에 해당되며 각 씨족의 수장인 호장층이 각기 군현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일종의 집단지도체제였다. 한편 향리업무의 실질적 주역층은 兵 倉 戶正 등 記官層이었을 것인데도 여기의 정원은 각 명인데 반해 호장층은 그보다 배 내지 4배가 많았음을 보아 호장은 일종의 대우직인 동시에 각기 토성이족의 수장자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또 국가에서는 그들을 정책적으로 회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연유로 해서 고려후기 내지 조선초기로 내려오면서 호장수는 감소되는 반면, 記官層 내지 色吏層이 증가해 갔다. 일반적으로 후기로 내려올수록 95) 掾曹龜鑑 권1, 吏職名目解條 治民者稱戶長 又質其子弟於京師 遣王官監之 至成宗時 令王 官監 邑者率眷 戶長隊降爲鄕吏. 96) 高麗史 권100, 鄭世裕傳 又在尙書省 永州吏崔安戶長公牒已成 世裕納水州吏崔少赂 改永爲 水安爲少 以其牒給少 事覺法當流. 97) 慶州戶長先生案 소재 戶長正朝李秀敏(세조 6년)과 戶長 鄭自良(세조 7년)은 각각 賤妾對 坐 또는 正妻不顧 賤妾對坐 로 인해 首戶長印을 맞이할 수 없었다. 98) 安東鄕孫錄 花山(안동) 古例 士夫則有鄕案 而視三參(父母妻) 鄕吏則有壇案 而別三等 (上 中下) 壇案完議公兄之任 必以案內人擬差 案內人 若與假吏 或庶類通婚 則黜案. 晋陽 誌 (인조 10년 成汝信 편) 권4, 叢談條 盖鄕吏有上中下三壇 而吏房之任 鄕所必以上壇吏擇 之. 完山誌 公廨 府司條 一曰座目 悉書曾任戶長姓名 有上中下三級 以別三壇之坐次 所謂三端者吏族有正端 中端 下端之謂也.

- 84 - 향리의 상층부인 호장층이 축소되고 기관층이 점차 6房體制로 나아갔던 것이다. 향리직급에 따른 服飾규정은 전술한 바이지만 그러한 향리직제의 유제는 조선초기까지 존 속되었다. 세종 0년 의정부에서 향리의 복식문제와 관련하여 고려 舊制에는 의방향리가 朝官의 文 武班에 비견하여 戶長 記官 및 都軍들로 구성되어 있고, 戶長에는 大相 中尹 左尹 의 호칭이 있으며, 記官에는 兵正 獄正의 호칭이 있으며 都軍에는 都令(領) 別(隊)正 校尉의 호칭이 있다 99)하였다. V. 邑司의 職務와 그 機能 邑司의 직무와 권한 및 기능은 먼저 外官 파견 이전과 이후 또는 主邑과 任內에 따라 다 르며 시기와 지역에 따라 각기 양상을 약간씩 달리하였다. 외관이 설치되기 전의 향리는 각 기 읍사를 중심으로 군현의 실질적인 지방통치자로서 군림하였고, 외관이 설치된 大邑에는 많은 任內를 보유하여 이곳 읍사는 외관의 하부행정을 담당함과 동시에 임내의 읍사까지 통 할하였다. 중기까지 수령이 없는 속군현이 전국적으로 수백이 넘었으니 이러한 임내 邑司는 비록 주읍의 감시를 받는다 하더라도 속현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비록 같은 읍사 라 하더라도 主邑과 속현의 그것은 서로 상하관계에 있었다. 邑司는 이상과 같이 外官의 유 무, 邑格의 高下, 시기와 지역에 따라 그 직무와 권한 및 기능에 현저한 차이가 있지만 한 고을의 행정실무를 총괄하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하겠다. 즉 읍격에 관한 모든 행정실 무는 총괄하되 읍사의 향리직제에 따라 업무가 분담되었던 것이며 현종 9년 향리직제의 개 정에서 그 내용이 밝혀졌지만, 가장 중요한 업무는 결국 향리 세계의 통할과 徵税, 調役에 있었다고 본다. 아래의 자료는 비록 조선시대의 것이지만 호장을 중심한 읍사의 권한과 기 능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될 것이다. 가) 戶長州之土官 而一邑民戶之長 朝家賜之以印而行公 又有安逸慰功之資級 自府定給書員 急唱 房子 庫子 食母 而土地所產 使之專管 ( 安逸房考往錄 序文). 나) 戶長者 擇於諸吏中可者 必看履歷人器 所謂戶長者 長於民戶 爲一鄕之標率 故自朝家 鑄給印信 官司有故 則使用其印 代行公事 每歲元朝 各官守令 謹遣戶長 替行問安( 掾曹龜鑑 권 1, 戶長疏). 읍사의 중요 업무를 차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首戸長의 掌印行公 邑司 또는 수호장 권위의 상징은 戶長印信(章)을 장악, 행사하는 데서 비롯된다. 호장인신은 외관이 파견된 군현에는 관인과 함께 존재하지만 외관이 파견되 기 전이나, 외관이 설치되지 않은 任內는 호장인신이 바로관인으로 행세했던 것이다.100) 그 것은 1邑 1개씩이므로 호장이라 해서 모두 인신을 갖는 것이 아니라 首(上)戶長에 한해 戶 長印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수호장으로서 선임되어 집무하는 첫째 조건은 그 인신 을 갖고 公務를 집행한다는 즉 掌(開) 印行公 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경주부호장 선생 안 에 의하면 수호장으로서의 첫째 임무는 바로 掌印行公이었다. 그래서 비록 수호장에 임 99) 世宗實錄 권81, 世宗 0년 4월 甲寅條 高麗舊制 外方鄕吏比朝官文武班 戶長有大相 中尹 左尹之號 記官有兵正 獄正之號 都軍有都令 別正 校尉之號 故都軍至今稱爲將校. 100) 世祖實錄 권46, 世祖 14년 6월 戊申條 今也任內郡縣 古號旣革 而其吏猶存 稱爲縣司 而 帶印施令 主邑守令懶於親理 以一縣之氓 委一吏之手 租賦徭役 悉出其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