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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사 刊行趣旨 오늘 우리의 韓國史 연구는 지난날 民族史 탐구에 몸 바쳐 온 先人의 精神과 業績을 바탕으로 하여 여러 分野에 걸쳐 큰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또한 韓國史에 관한 국내외의 관심은 한층 더 높 아가고 있읍니다. 이에 우리는 韓國史 硏究成果를 집대성하고 체계화할 단계에 이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올바른 韓國의 歷史와 文化를 모 든 사람에게 인식시켜야겠다는 사명감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硏 究成果를 현재의 수준에서 일단 총정리, 검토함으로써 앞으로의 硏究方向을 제시하기 위하여 꼭 이루어져야 할 일이라 믿기 때문 입니다. 國史編纂委員會가 한국사 를 편찬 간행하는 취지가 여기 에 있읍니다. 한국사 를 편찬함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목표를 세웠습니다. 첫째, 民族의 歷史와 文化의 성장 발달을 바탕으로 한 韓國史를 편찬한다. 둘째, 民族主體性에 입각하여 내재적 발전을 부각시키는 韓國史 를 편찬한다. 세째, 모든 硏究成果를 종합하고 체계화하며, 새로운 韓國史를 편찬한다. 한국사 가 간행됨으로써 앞으로의 硏究에 새로운 길잡이가 되 고 또 널리 韓國史를 올바로 인식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國史編纂委員會 委員長

6 槪 槪 要 要 1 高麗王朝의 기반이 확립되고 그의 社會構造가 定立된 것은 成 宗代이다. 高麗 초기에는 王權이 확립되지 못하고 地方豪族들의 세력이 강성하여 豪族聯合政權的 성격을 띠었으나, 太祖 定宗 光宗 등 역대왕의 강력한 集權化政策에 의하여 마침내 成宗 때에 이르 러서는 高麗의 國家基盤이 확립되게 되었다. 이러한 高麗王朝의 기반의 확립은 곧 高麗의 社會構造의 定立을 의미하였다. 高麗의 政治 經濟 社會 등 모든 國家體制는 成宗 이후 더욱 정비되고 顯宗 을 거쳐 文宗 때에 이르러 완성되지만, 그의 기틀이 마련된 것은 역시 成宗代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成宗 때 성립된 高麗王朝의 社會構造는 두 가지 성격 을 들 수 있으니 그 하나는 中央集權的인 점이다. 전술한 바와같이 高麗 초기에는 지방 豪族들의 세력이 강성하였는데 반하여 中央의 王權이 미약하여 高麗王朝는 豪族聯合政權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역대왕의 과제는 어떻게 豪族의 세력을 누르고 王權을 강화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렇게 성립된 高麗 왕조의 지 배체제가 中央集權的 性格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高麗의 社會構造의 또하나의 성격은 貴族的이라는 점이다. 高麗 초기의 集權化政策은 곧 地方豪族을 中央官僚로 편입시키는 운동 이기도 하였다. 즉 麗初의 역대왕은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 던 豪族勢力을 高麗 왕조의 中央權力에 흡수하여 中央官僚化하는 데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中央官吏는 일정한 정치적 사 - 1 -

7 高麗 貴族國家의 社會構造 회적 특권을 누리는 貴族的 신분으로 화하였으니, 高麗의 사회 구 조는 貴族的 성격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高麗王朝는 中央集權的이며 貴族的인 두 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高麗는 초기의 豪族聯合政權的 성격에서 中央集 權的인 지배체제로 개편되고 그 지배체제의 주인공인 中央官吏는 귀족적 존재였던 것이다. 우리가 高麗를 集權的인 貴族社會라 하 는 것은 바로 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高麗의 사회 구조가 어떻게 조직되고 그 성격은 어떠하였는가를 政治 經濟 社會 로 나누어 검토해 보기로 한다. 2 高麗의 政治制度는 高麗王朝의 기반이 확립된 成宗代에 정비되 었다. 이때 唐制를 參用한 中央의 政治機構가 마련되고 地方에 外 官이 파견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중앙에 京軍이 조직되었던 것 이다. 건국 직후의 임시적인 중앙의 政治機構와 독자적인 豪族勢 力下에 노였던 지방의 行政力과 軍事力은 成宗 때에 이르러 집권 적이며 귀족적인 지배체제로 개편된 것이다. 高麗의 中央政治機構는 唐制를 모방한 3省 6部를 기본으로 하 였다. 이 3省 6部制는 成宗 때 성립된 것으로 그 이전에는 泰封과 新羅의 제도를 襲用한 임시적인 政治機構를 이용하였다. 高麗 초기의 中央政治機構는 廣評省 內奉省 內議省의 3省을 기간으로 하였다. 內奉省이 行政機構로서 王權을 배경으로 하였는데 대하 여 廣評省은 群臣들의 政策決定機關으로서 강력한 豪族勢力의 지 위를 대변하는 것으로 高麗 초기의 정치형태가 國王을 중심으로 한 豪族聯合政權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軍事的으로 국왕의 명 령 밑에 있는 兵部와 함께 豪族勢力의 협의체적인 徇軍府가 병치 - 2 -

8 槪 要 되고 있었던 것도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內議省 은 儒學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한 政策建議機關으로서 장차 高麗에서 貴族政治가 형성되는 기반이 되었음이 주목 된다. 이러한 豪族聯合政權의 성격을 띠었던 高麗 초기의 정치기구는 高麗王朝의 기반이 확립된 成宗代에는 集權的인 제도로 개편되었 으니, 그것이 唐制를 모방한 3省 6部制이다. 즉 高麗는 成宗 때 3 省 6部를 기간으로 集權的이며 貴族的인 統治機構를 정비하였던 것이다. 高麗에서 국가정치의 중심기관은 3省이었다. 高麗史 百官志 序 文에 宰相이 6 部를 통할하고 6 部가 寺 監 倉庫를 통할하였다 라 한 것은 高麗의 행정체계가 宰相 6部 寺 監 倉庫(百司) 로서 宰相의 官府인 3省이 최고의 정치기관이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高麗의 宰相은 3省(실제로는 中書門下省)에서 議政을 하는 동시에 式目都監과 都兵馬使에 合坐하여 國家內外의 軍國重事를 회의 결 정하고 특히 尚書 6部의 判事를 겸하여 행정기구도 관할함으로써 中樞院의 樞臣과 함께 宰栖 로 불리어 그 권한이 극히 컸으니, 여기에 귀족적 성격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高麗에서의 國家行政의 기본적 기구는 尙書 6部였다. 尚書 6部는 高麗의 政府機構로 모든 國務를 분담하여 아래로 百 司를 통할하고 위로 王에게 直奏하는 중심기관이 되었다. 위에서 본 바 高麗史 百官志 序文에서는 6部가 3省의 宰相에 통할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6部가 각각 해당 정무를 직접 국왕에게 上聞하 여 王과 6部는 直結되는 행정체계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 서 우리는 高麗의 정치구조가 國王을 중심으로 한 집권적 성격도 지니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高麗의 3省 6部制는 唐制를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高麗의 全般 - 3 -

9 高麗 貴族國家의 社會構造 的인 정치체제나 그 사이의 權力關係는 唐의 그것과는 판이한 독 자적인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3省 6部制 자체도 唐制와는 차이가 많았다. 3省이라 하지만 高麗에서는 內史門下省(뒤의 中書 門下省)이 한 기관이 되고 門下侍中을 수반으로 一元的體制를 이 루고 있었으며, 尙書 6部도 吏 兵 戶 刑 禮 工部의 특수한 서열로 구 성되고 屬司가 감축되는 등 唐制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러 나 무엇보다도 커다란 차이는 高麗의 독자적인 정치기구 사이의 權力關係라 하겠다. 高麗의 정치기구는 唐制만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 아니고 거기 에는 또한 宋制系統과 高麗 獨自的인 제도도 섞여 있었다. 中樞院 (樞密院)과 三司는 宋制를 채용한 것이고, 都兵馬使와 式目都監은 高麗 자체의 필요성에서 생긴 것이다. 이렇게 보면 高麗의 政治的 權力機構는 唐制系統의 3省 6部와 宋制系統의 中樞院 三司 그리고 高麗 獨自的인 都兵馬使 式目都監의 세 요소가 복합된 제도라 할 수 있다. 이것은 高麗 政治制度의 특수성을 말하는 것이다. 高麗는 中國 의 제도와는 전혀 관계 없는 독자적인 權力機關인 都兵馬使와 式 目都監을 설치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唐制와 宋制의 여러 계통이 혼합되어 그 사이에 독특한 권력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세 요소의 複合的 구성 위에 성립된 高麗의 정치체제가 唐이나 宋의 그것과 다른 특수성을 가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高麗王朝는 中央政治機構의 정비와 함께 地方制度의 개편에도 착수하였다. 成宗 때의 12牧의 설치는 이때 高麗가 中央制度와 함 께 地方統制에도 힘을 기울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高麗 초기에 는 豪族들이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어 중앙에서 外 官을 파견하지 못하고, 다만 租税를 징수하는 今有 租藏과 이를 중 - 4 -

10 槪 要 앙으로 수송하는 轉運使가 全國에 파견되고 또 군사적 요지인 西 京 安東 安南 登州 등에 군사권을 가진 外官을 설치하였을 뿐이었 다. 그런데 成宗 2년에 12牧을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高麗 는 地方 制度가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高麗의 地方制度는 成宗 때부터 시작하여 穆宗을 거쳐 顯宗代에 정비되었다. 顯宗 9년에 4都護 8牧 56知州郡事 28鎭將 20縣令이 설 치됨으로써 高麗의 지방제도는 그 기본이 완성된 것이다. 高麗의 기본적인 郡縣制를 기록한 高麗史 地理志도 顯宗 9년 이후의 지방 제도를 기준으로 구성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면 高麗의 지방제 도는 어떻게 구성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高麗史 地理志에 의하면 高麗의 지방제도가 道 主牧 領 郡 屬縣 의 4層構造로 기록되고 있다. 가장 上位의 行政單位 가 5道 兩界이고 그 밑에 京 牧 都護의 界首官(主牧)이 있으며 다 시 그 아래 일단 守令이 설치된 州縣(領郡), 그리고 外官이 없는 屬縣이 달려있다. 高麗史 地理志에는 5道 兩界 밑에 14개의 主牧 과 115개의 領郡, 그리고 361개의 屬縣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高麗史 地理志의 서술은 오늘날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특히 5道 兩界가 主牧과 中央政府 사이의 中間 機構였다는 점에 대한 비판에 그 초점이 놓여져 있다. 실제로 근 래의 연구에 의하면 5道按察使가 中間行政機構로서의 기능을 나 타내기 시작한 것은 中期 이후의 사실이고, 그 이전에는 中央政府 가 外官이 파견된 主縣을 통하여 지방을 다스렸으며 다만 主牧인 界首官이 鄕貢의 選上이나 外獄囚의 監檢 등 몇몇 한정된 기능에 있어서 중간기구의 역할을 담당하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高麗 前期의 지방제도는 中央政府가 外官이 있는 州府郡縣 (主縣)과 直牒關係에 있는 것이 基本形態이고, 어떤 한정된 기능 - 5 -

11 高麗 貴族國家의 社會構造 에 있어서 主牧 界首官이 중간기구의 역할을 代行하고, 外官이 없 는 屬縣은 그 옆의 主縣을 통하여 間接支配를 받았음이 원칙이었 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高麗 전기의 지방제도의 특정으로 가장 먼저 들어야 할 점은 중간기구의 未熟性이었다. 몇몇 한정된 기능만을 主牧으 로 하여금 중간기구로서의 기능을 代行케 한 허술한 지방제도의 構造는 高麗의 集權的인 地方統制에 결정적인 결함이 되었다. 이 것이 主牧制에 대신하여 새로이 道의 按察使制가 中期 이후에 짜 여진 중간기구로 등장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高麗 지방제도의 성격으로 들어야 할 둘째 특징은 外官이 없는 屬縣이 많았다는 점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高麗史 地理志에는 外 官이 설치된 主縣(主牧과 領郡)이 129개였는데 대하여 外官이 파 견되지 않은 屬縣은 361개나 되고 있다. 이와 같이 高麗시대에 屬 縣이 많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중앙의 집권적인 行政力이 지방에 침투하는데 한계가 있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세째 특징은 高麗시대에는 鄕 所 部曲이 광범하게 分布하고 있 었다는 점이다. 高麗에는 新羅 이래 존재하였던 賤民集團의 特殊 行政區劃인 鄕 所 部曲이 각지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것은 역시 高麗社會의 후진성에서 비롯된 지방제도의 未熟性이라 할 수 있 다. 軍事組織에 있어서도 中央集權的인 改編이 진행되었으니 그것 은 京軍인 2軍 6衛의 편성과 지방에서의 州縣軍의 설치로 나타났 다. 成宗代에는 中央 京軍의 기본이 되는 6衛가 형성되고 그후 顯 宗 때에는 2軍이 성립하여 이른바 2軍 6衛制가 완성되었는데, 이 것은 건국 직후에 地方豪族들이 거느리던 私兵을 해체하고 또한 太祖 때 중앙의 部將들이 거느리던 독자적인 군대를 國軍으로 개 - 6 -

12 槪 要 편하는 과정을 통하여 성립한 것이다. 이러한 中央軍에 대하여 지 방에는 中央政府의 통할하에 놓인 州縣軍이 편성되었는데 이것도 지금까지 地方豪族들이 지배하던 군사력을 집권적인 中央統制 속 에 흡수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成宗 顯宗 代에 형성된 京軍과 州縣軍은 高麗 초기의 豪族 및 部將들의 독자 적인 私兵을 中央政府 統制下의 國軍으로 개편한 것으로 軍事制度 面에서도 中央集權的 體制가 이룩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3 전술한 바와 같이 高麗 초기에는 地方의 豪族들이 제가끔 독자 의 武力과 經濟的基盤을 보유하고 割據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太 祖와 그 후 역대왕의 노력은 이들 分權的인 세력을 어떻게 재정비 하여 集權的 體制 안에 편입시키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中央集權的 體制의 확립을 위한 사업은 여러 면으로 강 구되어 위에서 본 바와 같이 中央의 정치기구를 정비하고 地方의 統治制度를 강화하며 中央統制下의 國軍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그 러나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사업은 土地制度의 재정비였으니, 高 麗는 田柴科體制의 토지제도를 마련함으로써 豪族勢力와 經濟的 基盤을 제거하고 그들을 集權體制 안에 편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高麗의 田柴科制度는 太祖 23년의 役分田의 分給에서 비롯하여 景宗 원년의 始定田柴科, 穆宗 원년의 改定田柴科를 거쳐 文宗 30 년의 更定田柴科로서 완성을 보게 되었다. 田柴科의 最終形態인 文宗 때의 更定田柴科에 의하면 1科로부터 18科로 나누어 모든 官吏에게 차등 있게 田과 柴를 나누어 주었으니 1科는 田 100結 柴 50結로 中書令 尚書令 門下侍中이 받았으며 18科는 田 17結로 閑人과 雜類가 해당되었다. 이러한 田柴科 이외에 중요한 것은 功 - 7 -

13 高麗 貴族國家의 社會構造 蔭田이었으니 이는 5品 이상의 高官에게 일정한 토지를 주어 이 를 子孫에게 세습케 하였다. 이 밖에 王室에는 內莊田이 있고 寺 院에는 寺院田이 달려 있었으며 內外의 官司에는 公廨田이 지급 되었다. 田柴科體制下의 高麗 토지제도의 가장 중요한 성격은 公的 색 채가 강하다는 점이었다. 관리가 죽거나 現職을 그만두면 科田을 국가에 返納케 한 점이나 科田所有者가 경작자로부터 직접 租를 받지 못하고 國家에서 받아줌으로써 地主와 佃戶 사이에 國家權 力이 개입한 것 등은 公的 性格이 강함을 표시하는 것이다. 비록 功蔭田은 자손에의 세습을 허용하였으나 이것도 科田과 같이 국 가의 간섭에 의하여 間接支配밖에 못하게 함으로써 地主制土地經 營을 방지한 것은 주목할 점이다. 더우기 科田과 功蔭田 등의 私 田에서도 田主가 거둬 들인 租에서 다시 5升 7升 5合의 稅를 국 가에 내게 한 것은 高麗의 토지제도가 公的 性格이 농후하였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5品 이상의 高官에게 功蔭田을 지급하고 이를 자손에게 세습케 한 것은 高麗王朝가 貴族身分의 經濟的基盤을 마련하여 주려는 의도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5品 이상 官吏의 子孫에게 자 동적으로 官職에 오를 수 있는 길인 蔭叙制를 설정한 것과 같은 취지로 高麗사회가 貴族制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끝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民田이다. 高麗의 民田은 일반 농민이 경영하는 가장 보편적인 土地形態로 高麗에서는 이를 公 田으로 간주하여 租를 바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民田國有 論은 사실은 普天之下 莫非王土 라는 東洋的인 王土思想에 분 식된 것으로 이는 현실적으로 祖上 대대로 전래한 家田인 것이다. 이 民田은 오히려 個人的所有의 토지로 私有化 촉진의 媒介體 - 8 -

14 槪 要 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高麗시대에는 農業生產을 주로 하였고 따라서 手工業이나 商業 活動은 대단한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貴族의 사치생활을 위한 수요에서 手工業과 商業도 발달할 수 있는 여건 이 마련되었다. 高麗시대 手工業의 중심이 된 것은 官廳手工業이었다. 高麗에서 는 政府의 用途와 王室 貴族의 需要에 따라 官廳手工業이 분류되 고 여기 각종 工匠이 專屬되었는데, 특히 高麗의 官廳手工業은 武 器의 제조와 貴族層의 生活品製造를 중심으로 편상되었으니 이는 高麗의 對外關係와 貴族社會의 일면을 표시하는 것이다. 또한 高麗시대에는 農村社會에서도 專業的인 手工業者인 工匠 이 존재하고 특히 所 에서는 常貢 및 別貢을 납부하는 手工業이 발 달하였으나 農村手工業의 중심은 역시 농민의 家內手工業이었다. 이들 농민의 가내수공업은 대체로 自家의 需要를 위한 衣料生產 과 官府에 납부하기 위한 布物類의 생산이 주가 되었다. 이 밖에 佛敎가 발달한 高麗시대에는 織布業과 製瓦業 및 製鹽業 釀酒業 등에서 寺院手工業이 발달한 것은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經濟力이 영세한 高麗 사회에서 商業이 발달하지 못하였을 것 은 당연하다. 다만 中央集權的이며 貴族的인 高麗에서는 官府의 수요품을 조달하고 王室 貴族層의 生活品을 공급하기 위한 官衙都 市의 市廛商業이 활기를 띄었다. 특히 수도인 開京에는 長廊으로 된 대규모의 市廛이 세워져 御用商業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그 밖 에 西京도 官衙都市로서의 市廛商業이 발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官衙都市의 상업은 外國貿易과 직결되고 있었다. 高麗시 대에는 宋 日本 및 大食國 등과의 對外貿易이 활발하였는데 이것 은 王府 및 貴族層의 수요품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宋나라 - 9 -

15 高麗 貴族國家의 社會構造 상인들이 高麗에 가져오는 商品은 그 대부분이 高麗 귀족들의 사 치생활을 충당하기 위한 生活品이었으니, 여기에도 高麗 貴族社會 의 일면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4 高麗는 身分社會로서 身分은 모든 사람의 政治的 經濟的 社會的 지위를 결정하는 기본 조건이 되어, 개인적인 私的 능력보다도 그 身分과 家門이 중요시 되었다. 따라서 高麗 사회에서는 貴族 良民 賤人 등의 身分 秩序가 엄격히 구분되고 身分制度가 엄중히 유지 되었던 것이다. 高麗 사회의 最高身分階層은 貴族이었다. 第一身分인 貴族은 자 동적으로 政府의 要職에 오르고 그에 상응하는 經濟力을 소유하 며 社會的 特權을 향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高麗를 貴族社 會로 규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高麗의 貴族制는 高麗王朝의 기 반이 확립된 成宗代에 성립하게 된다. 高麗 초기의 豪族勢力이 高 麗의 集權化政策에 의하여 中央官僚化되었는데 이들이 特權的인 貴族의 身分으로 고정됨으로써 高麗의 신분체제는 재편성되고 貴 族制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들 高麗의 貴族은 門閥과 家門을 중요시하였다. 高麗의 貴族 을 門閥貴族이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高麗의 貴族은 그들 상호간에 閉鎖的인 婚姻關係를 맺으며 특히 最高貴族이라 할 수 있는 王室과의 通婚을 열망하였다. 그럼으로써 貴族은 그들 의 門閥을 높이고 그에 부수되는 政權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 다. 이렇게 王室의 外戚이 되어 政權을 오로지 한 貴族家門의 대 표적인 존재가 安山 金氏와 慶源 李氏라 할 수 있다. 高麗시대에도 文班과 武班이 兩班官吏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文

16 槪 要 班과 武班은 官制上 同列的으로 編制되면서도 실제로는 양자 사 이에 커다란 차이가 게재되고 있었다. 文班職이 우대되었는데 반 하여 武班職은 천시되는 차별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高麗시대의 貴族이 모두 文班職을 가지고 武班으로 貴族家門이 된 예가 없었 음은 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支配階層의 영역에 들면서도 실제로는 被支配層과의 사이에 개 재하여 中間的인 補助역할을 담당하는 존재가 中間階層이다. 高麗 의 中間階層은 高麗 초기의 群少豪族의 轉化된 後身으로서 中央 各司의 末端行政實務者인 胥吏와 지방의 土着行政 담당자인 鄕吏 를 主軸으로 하고, 여기에 常備的 正規軍인 下級將校와 宮中의 內 僚職인 南班을 포함한 광범한 부류를 지칭한 것이다. 高麗 사회의 기본적인 構成員은 良人이었다. 이들은 비록 被支 配層으로 下部階層에 속하였으나 주로 農耕生產에 종사하여 중요 한 존재가 되었다. 高麗의 良人은 白丁이라고 불리는 광범한 農民 層이 주가 되었는데, 이들은 租税 貢賦 力役을 부담하여 國家 財政 의 源泉이 되고 국가 존립의 支柱가 되었다. 高麗 신분사회의 最下階層이 賤民이다. 高麗의 賤民은 奴婢를 비롯하여 鄕 所 部曲人과 津尺 驛民이 포함된다. 이 가운데 奴婢는 身分的으로 主從關係에 의하여 소유주에게 예속되어 있을 뿐 아 니라 買賣 相續 贈與의 대상이 되는 최하층의 신분으로 法制的인 賤人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鄕 所 部曲人은 어떤 면에서는 良人農民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고 더우기 津尺 驛民은 朝鮮時代의 身良役賤의 계층에 비유될 수 있는 존재이지만 크게 보아서는 역 시 賤民의 범위에 드는 계층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高麗王朝의 사회 구조를 政治 經濟 社會의 세

17 高麗 貴族國家의 社會構造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이에 의하면 高麗社會體制는 왕조의 기반이 확립된 成宗代부터 정비되기 시작하고 그 성격은 中央集 權的이면서도 貴族的인 양면이 있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高麗의 貴族社會는 文宗 때 그의 最盛期를 맞이하였으나 그 내부의 모순이 확대되어 점차 동요되기 시작하고 마침내 武臣 亂에 의하여 붕괴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邊 太 燮

18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3. 軍事組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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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1) 廣評省과 內奉省 太祖 王建의 건국 이래, 몇 차례의 정치적 진통을 겪으면서 3省 을 중심으로 한 高麗的 政治機構가 어떻게 정비되어갔는가, 그리 고 그렇게 정비된 政治機構의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자는 것이 本稿의 목적이다.1) 高麗의 政治機構가 太祖 2년(919)에 3省 6部 9寺로 정비되어 있었다는 高麗史의 기록이 잘못이라 함은 이미 지적되어 있는 바 와 같다.2) 太祖 때의 政治機構로는 그가 王位에 오른 며칠 뒤에 행한 人事移動에 관한 기사에 나타난 것이 가장 신용할 만한 것이 다. 이제 그 기사에 나타난 政治機構를 一覽表로 작성하여 보면 表 1 과 같다.3) 1) 商麗의 政治制度에 대한 硏究는 최근 많은 성과를 거둔 분야의 하나이다. 邊太 變氏의 高麗政治制度史硏究(1971) 및 李泰鎭氏의 高麗 宰府의 成立, 歷史學報 56(1972)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本稿는 이들 硏究에 크게 힘입었음을 여기에 밝혀 두고자 한다. 2) 高麗史 卷1 太粗世家 2년 1월 條에 置三省 六尚窗官 九寺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비판은 李基白 高麗京軍考 李丙燾紀念論叢(1956) 高麗兵制史硏究(1968) p.50 및 邊太燮 高麗時代 中央政治機構의 行政體系 尙書省 機構를 중심으로 歷史學報 47(1970) 高麗政治制度史硏究(1971) pp.3 5 참조 3) 高麗史 卷1 太祖世家 원년 6월 辛酉 條에 나타난 해당 人事移動의 기사를 인용 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a) 遂以韓粲金行濤爲廣評侍中 韓粲黔剛爲內奉令 韓粲林明弼爲徇軍部令 波珍粲 林曦爲兵部令 蘇判陳原爲倉部令 韓粲閻萇爲義刑臺令 韓粲歸評爲都航司令 韓 粲孫逈爲物藏省令 蘇判秦勁爲內泉部令 波珍粲秦靖爲珍閣省令 是皆禀性端方 處事平允 咸從創業之始 俱罄佐命之勳者也. (b) 閼粲林積璵爲廣評侍郞 前守徇軍部卿能駿 倉部卿權寔並爲內奉卿 閼粲金堙 英 俊並爲兵部卿 閼粲崔汶 堅術並爲倉部卿 一吉粲朴仁遠 金言規並爲白書省卿 林 湘煖爲都航司卿 姚仁暉 香南並爲物藏卿 能惠 曦弼並爲內軍卿 是皆夙達事務 淸 謹可稱 奉公無怠 敏於決斷 允愜衆心者也

21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表 1 太祖元年의 主要 官府와 官職 廣 評 省 ① 侍中(金行濤) ⑪ 侍郞(林積璵) 內 奉 省 ② 令 (黔 剛) ⑫ 卿 (能 駿) ⑬ 卿 (權 寔) 徇 軍 部 ③ 令 (林明弼) 兵 部 ④ 令 (林 曦) 倉 部 ⑤ 令 (陳 原) 義 都 刑 航 臺 ⑥ 令 (閻 萇) 司 ⑦ 令 (歸 評) 物 藏 省 ⑧ 令 (孫 逈) 內 珍 泉 閣 部 ⑨ 令 (秦 勁) 省 ⑩ 令 (秦 靖) 白 書 省 內 軍 ⑭卿 ⑮卿 ⑯卿 ⑰卿 (金 (英 (崔 (堅 ㉖ 郎中 (申一) ㉗ 郎中 (林宴) ㉘ 員外郞 (國鉉) ㉕ 監 (康允珩) ㉙ 理決 (倪 言) ㉚ 評察 (曲矜會) ㉛ 郎中 (劉吉權) 堙) 俊) 汶) 術) ⑳ 卿 (林湘煖) ㉑ 卿 (姚仁暉) ㉒ 卿 (香 南) ⑱卿 ⑲卿 ㉓卿 ㉔卿 其 餘 司 省 (朴仁遠) (金言規) (能 惠) (㬢 弼) 郞 史 數字는 列記된 순서 이 表 1 에 의하면, 그 이름을 알 수 있는 12개의 官府가 있 고, 그 밖에도 이름이 전하지 않는 몇 개의 官府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위의 12官府는 모든 官府 중에서도 특히 중 요한 것들이었다고 생각된다. 太祖가 즉위 한 극히 초기 위의 人事移動은 太祖가 즉위한지 불과 6일 만에 행해진 것이었다 에 존재하던 이들 政治機構의 기본 구조는 대체로 景宗 때까지 유지되었다고 믿어진다. 그것은 (c) 前廣評郞中康允珩爲內奉監 前徇軍部郞中韓粲申一 林寔並爲廣評郞中 前廣評 史國鉉爲員外郞 前廣評史倪言爲內奉理決 內奉史曲矜會爲評察 前內奉史劉吉 權爲徇軍郞中 (d) 其餘司省 各置郞 史 用備員數 一無所缺 盖開國之初 妙簡賢材 以諧庶務也

22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景宗 원년(976) 10월에 新羅의 마지막 王인 金傅를 尙父로 책봉 하는 册尚父誥에 서명한 官吏들을 정리해서 제시한 다음의 表 2 를 보면 알 수가 있다.4) 表 2 景宗元年 册尙父語에 副署한 官職 廣 評 省 ①侍 ②侍 內 奉 省 軍 兵 中 中 (署) (署) ⑧侍 ⑨侍 郞 郞 (署) (無署) ③令 (署) ⑩侍 ⑪侍 郞 郞 (無署) (署) 部 ④令 ⑤令 (署) (無署) ⑫卿 ⑬卿 (無署) (署) 部 ⑥令 ⑦令 (無署) (署) ⑭卿 ⑮卿 (無署) (署) 數字는 列記된 순서 金傅에 대한 册尚父詰에 서명한 官吏는 곧 廣評省 內奉省 軍部 (徇軍部) 兵部의 長次官에 한하며, 그들이 서명한 순서도 太祖 원 년의 人事移動에 나타난 순서와 일치한다.5) 그러므로 이들 官府 야말로 太祖 때부터 景宗 때까지에 이르는 高麗 초기의 중요한 官 府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들 4官府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것과 같이, 다른 여러 官府들도 원칙적으로 그대로 존속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그러면 초기의 여러 官府들 중에서 가장 중요시된 이들 넷은 어 4) 金傳에 대한 册尚父誥는 高聰史 2 景宗世家 즉위년 10월 甲子 條에도 나타나 있지만, 여기에는 마지막 副署한 부분이 없다. 이 副署는 三國遺事 2 紀異 金傅大 王 條에 나온다. 一然은 아마 이 誥書의 原本을 보고 직접 베낀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데, 이제 끝의 著名 부분만을 여기에 인용하면 다음과 갈다. 開寶八年 十月 日 侍中署 侍中署 內奉令署 軍部令署 軍部令無署 兵部令無署 兵部令署 廣坪侍郞署 廣坪侍郞無署 內奉侍郞無署 內奉侍郞署 軍部卿無署 軍部 卿著 兵部卿無署 兵部卿署 5) 册尚父誥의 廣坪省이 廣評省의 잘못일 것임은 분명하다. 評은 評議의 뜻을 나타낸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軍部가 徇軍部의 改稱임은 高麗史 76 百官志 兵曹 條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文書에 서명하지 않은 관리가 6명이나 되는데 그 이유는 잘 알지를 못하겠다

23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떤 官府였을까. 우선 알 수 있는 것은, 이들 4官府 중에서 앞의 둘 즉 廣評猶과 內奉省은 정치적인 성격의 것이고, 뒤의 둘 즉 徇軍 部(軍部)와 兵部는 군사적인 성격의 것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文武의 양자로 나누어져 있다. 이같이 文武의 양자가 같은 비중을 가지고 高位官府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당시의 後三國時代가 內 亂期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그리 모순되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면 이들 4官府 중에서 처음의 政治的인 2官府는 어떤 성격 의 것이었을까. 우선 廣評猶에 대하여는, 여기에 侍中이 있고 또 그 기능이 활발한 것으로 보아, 이것이 新羅의 執事省과 같은 政 務의 중심 기관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6) 한편 이를 新羅의 執 事部에 비기는 데에 의견을 같이하면서도, 더 나아가서 廣評省이 유력한 豪族들의 최고 出仕 자리가 되어왔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豪族 세력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7) 그 런데 이 廣評省을 후대의 中書門下省(內史門下省)에 비기는 三國 史記 撰者의 견해와 尚書省에 비기는 高麗史 撰者의 견해가 엇갈 리고 있는데,8) 이에는 三國史記 撰者의 견해가 옳을 것이라는 의 견이 정당하게 여겨진다.9) 廣評省이 여러 官府 중에서 序列이 첫 째인 가장 중요한 官府인 것은 분명하지만, 만일 그것이 中書門下 省에 비교되어 진다면, 이것이 新羅의 執事省에 비겨질 가능성은 적어지는게 아닌가 한다. 廣評省이 글자 그대로 널리 評議하는 기 관이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에 더욱 그러하 다. 그렇다면 이 廣評省은 차라리 新羅의 和白會議의 전통을 이어 내려온 것으로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6) 邊太變 高麗時代 中央政治機構의 行政體系 尚書省 機構를 중심으로 歷 史學報 47(1970) 高麗爾政治制度史硏究(1971) p.4 7) 李泰鎭 高麗 宰府의 成立 歴史學報 56(1972) p.4 및 p.13 8) 三國史記 50 弓裔傳 및 高麗史 76 白官志 尙書省 條 참조 9) 李泰鎭 高麗 宰府의 成立 p

24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廣評省은 弓裔의 泰封에 있어서도 首位를 차지하는 官府였고, 그 弓裔는 專制的인 君主였기 때문에, 이 수위의 官府는 專制的 행정 기구의 성격을 지닐 가능성이 있다고도 하겠다. 그렇다고 弓 裔가 豪族들의 세력을 무시하고 中央集權的인 專制主義 행정 기 구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10) 廣評省은 新 羅의 和白會議의 전통을 이어받고, 뒤에 中書門下省으로 발전하여 갔을 것이다. 다만 和白會議가 중앙의 眞骨貴族 세력을 대변하는 기관이었던데 대해서, 廣評省은 지방의 豪族들의 세력을 대변하였 고, 그것이 內史門下省으로 변함으로써 다시 중앙의 門閥貴族 세 력을 대변하는 기관으로 변하여 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廣評省의 성격과 견주어 생각할 때에, 그 長官인 侍中이 2명이었던 점이 주목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즉 金傅에 대한 册 尚父誥를 보면 廣評省의 長官인 侍中이 2명이며, 그 2명이 실제로 임명되고 있었음은 그 文書에 2명이 모두 서명한 것으로 보아 알 수가 있다.(表 2 참조) 다만 太祖 원년의 人事移動에서는 廣評省 侍中이 金行濤 1명으로 되어 있어서 항상 2명이 임명되었던 것인 지 어떤지를 의심케 한다. 그런데 金行濤가 임명된 바로 그 다음 날 또 1명의 侍中 朴質榮이 임명되고 있으므로, 이것은 侍中의 경 질이기보다도 추가였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11) 따라서 侍中 2명 을 임명하는 제도는 원칙적으로 지켜졌을 것이다. 長官이 2명인 것은 그것이 王命을 받들어 행하는 行政機構이기보다는 어떤 政 10) 佛敎信仰에 바탕을 둔 弓裔의 관념적인 專制主義 경향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절실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는 泰封도 기본적으로는 豪族聯合政權的 성격 의 국가였다고 믿고 있다. 弓裔의 悲刺은 그가 현실과 동 떨어진 관념직 세계에 머물러 있었던 데에서 싹터난 것이 아니었을까. 11) 朴質榮의 侍中 임명 기사는 高麗史 卷1 太祖世家 원년 6월 壬戌條에 나온다. 단지 同年 8월 癸亥의 기사에서 金行濤를 前恃中 이라고 한 것이 문제가 되기는 한다. 그러나 그가 임명된 지 하루만에 그만두었다기보다는. 그 뒤의 어느 시기에 다른 누구와 교체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25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治勢力들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나타내 준다고 볼 수 가 있다.12) 高麗 太祖의 경우에 그 政治勢力이 豪族이었을 것임 은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정확할 것으로 믿는다. 이에 대해서 內奉省은 이미 지적되어 있는 바와 같이 王命을 받들어 行政을 실시하는 관부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 명칭의 뜻으 로 보나, 그것이 후일의 尙書都省에 비겨지는 것으로 보나, 그러 한 관점은 정확하리라고 믿는다.13) 그렇다면 이 內奉省은 新羅의 執 事省에 해당하며, 그 전통을 이어내려온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執事省도 王命을 받들어 이를 집행하는 王權과 밀착된 행 정 기구로 생각되기 때문이다.14) 더구나 執事省의 장관인 侍中이 1명이었던 것과 같이 이 內奉省의 장관이 또한 1명이었던 것도 주목되어야 하겠다.15) 또 執事省 차관인 侍郞에는 六頭品 계열의 儒臣들이 많이 임명되었던 것과 같이, 이 內奉省에도 崔凝과 같이 學問에 능통한 인물이 그 차관인 內奉卿에 임명된 사실도 이를 증명하는 하나의 자료가 된다.16) 內奉省이 맡은 일 중에서 중요 12) 이러한 점은 新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并上秀雄 新羅 政治禮制의 變遞 過程 古代史講座 4(1962) 新羅史签提硏究 (1974) p.435 및 李홉白 禀主考 李 相街紀念論叢(196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4) pp 참조 13) 邊太燮氏는 內奉省에 대해서 뒤의 尚窘都省과 같다 하였고. 또 그 명칭으로 보아 王 측근에 있어 奉命 實踐하는 기관이 아니 었던가 추측한다 고 하였다. 高麗時代 中央政治機構의 行政體系, 高麗政治制度史硏究 p.4 14) 李甚白 新羅 執事部의 成立 震檀學報 合併號(1964) 新羅政治社會史 硏究(1974) p.152 참조 15) 金傅에 대한 册尚父誥에는 廣評省 內奉省 軍部 兵部 중에서 오직 內奉省의 장 관만이 1명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表 2 참조). 新羅의 執事省도 다론 官府들과는 달리 그 장관이 1명으로 되어 있었다.(李基白 新羅 執事部의 成立, 新羅政治社會 史硏究 p.155 참조) 16) 執事部 侍郞에 대하여는 李基白 新羅執事部의 成立 新羅政治社會史硏究 pp 참조. 內奉卿에 임명된 崔凝에 대하여 처음 주목한 것은 李泰鎭이지 만(高麗 宰府의 成立 p.10) 高麗史 卷79 崔凝傳에 의하면 旣長 通五經 善屬 文 이라 하였고, 또 曉達吏事 甚獲時譽 라고 하였다. 특히 그를 內奉卿에 임명하는 대목에서 (太祖) 嘗謂曰 卿學富才高 兼職治體 憂國奉公 匪躬蹇蹇 古之名臣 無以過也 遷內奉卿 이라고 되어 있다

26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한 일은 人事으리라는 설은 그럼직한 것으로 생각되지만,17) 內奉 省이 지니는 기본적인 성격을 따지면 王命을 받드는 行政官府的 인 데 있었을 것이다. 軍事的 성격을 지닌 徇軍部와 兵部는 바로 각기 廣評省과 內奉 省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필자는 일찌기 徇軍部를 軍令을 담당하는 軍事指揮權의 統帥府로 규정하고, 그것이 뒤에 重房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이에 대해서 兵部는 軍政을 장악했 을 것이라고 한 바가 있다.18) 그런데 한 걸음 나아가서 徇軍部를 諸豪族의 軍事力과 연결된 협의체제적인 軍指揮權의 統帥府로 보 고, 兵部를 王命을 이행하는 官府였으리라는 견해가 제시되었 다.19) 이 해석은 타탕할 것으로 생각되며, 이들이 각기 廣評省과 內奉省에 상응한다는 사실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 보겠다. 이상에서 설명한 4개의 기본적인 官府 이외의 것들은 요컨대 이 들을 補完하거나 뒷받침하는 官府들로 생각된다. 우선 그 당시의 時代的 背景을 반영해서 軍事的인 면이 중요시되었던 것은 都航 司 物藏省 內軍 등의 군사적 기관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서 알 수 가 있다. 都航司는 新羅의 船府, 泰封의 水壇, 高麗의 水部에 해당 하는 것으로서 水軍을 관장하는 官府였을 것이다.20) 物藏省은 泰 封 때에도 그렇게 불리었지만, 후일의 小府監에 해당한다. 工技 寶藏을 관장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그것이 실은 兵器를 관장하 는 官府였음은 이미 舊稿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21) 內軍은 필시 國王의 親衛軍이었을 것이다.22) 이렇게 보면 이 3官府는 결국 군 李泰鎭 高麗 宰府의 成立 p.9 李基白 高麗京軍考 李丙僚把念論叢(1956) 高麗兵制史硏究(1968) p.55 李泰鎭 高麗 宰府의 成立 p.8 三國史記 卷50 弓裔傳 및 高_ 卷76 百官志 工曹條 참조 21) 李基白 高麗京軍考 李丙燾紀念論叢(1956) 高麗兵制史硏究(1968) pp 참조 22) 李基白 同上 pp.55一56 참조 17) 18) 19) 20)

27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사적인 면을 補完하는 官들이었다고 하겠다. 그 다음으로는 倉部 內泉部 등 경제적인 성격을 띤 官府들이 주 목된다. 倉部는 국가의 公的인 財政을 담당하는 官府로서, 政治 나 軍事에 대한 경제적인 뒷받침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倉部가 공적인 재정을 담당한데 대하여 內泉部는 王宮의 財政을 담당하 였을 것으로 보인다.23) 아마도 이 2官府는 軍事的인 兵部와 內軍 에 각기 해당시켜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임이 흥미롭다. 어떻든 이 2官府가 政治 軍事의 경제적인 뒷받침을 해준 官府로서의 구실을 담당하였을 것임은 분명하다. 이밖에 義刑臺의 존재가 주목된다. 義刑臺는 이미 泰封 때부터 그렇게 불리어왔지만. 이것이 新羅의 左右理方府, 후기의 刑部에 해당된다는 것에는 의심이 없다.24) 政治 軍事 經濟의 각 방면에서 있을 수 있는 非違行爲를 처벌하는 官府로서의 義刑臺의 중요성 은 敵對하는 政權이 존재하는 內亂期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 해될 수 있을 것이다. 白書省은 아마도 內書省의 전신이며, 그 명칭으로 미루어 보아 泰封 때의 禁書省에 해당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經籍祝 疏를 담당했다는 秘書省 典校寺와 연결되는 것으로서, 요컨대 學 問的인 官府였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25) 이상으로서 太祖 초년에 형성된 政治機構에 대한 분석은 대체로 끝낸 셈이다.26)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豪族 세력을 대변 하는 政治機構가 우위를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廣評省이나 徇軍部가 그것인데, 廣評省은 豪族勢力에 의한 국가의 政策決定機 23) 李泰鎭 高麗 宰府의 成立 p.6 참조 24) 李泰鎭 同上 pp.5一6 참조 25) 高麗史 76 白官志 典校寺 條에 掌經籍祝䟽 國初稱內書省 成宗十四年改秘書 省 이라고 하였다. 26) 단지 表 1 에 나타난 珍閣省은 그 직무를 잘 알 수가 없다

28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關이었음직하고, 徇軍部는 軍事面에서 이와 마찬가지 기능을 발휘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요컨대 이 시대의 政治가 豪族聯合 政治였음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한편 王 權을 배경으로한 行政機構로서 內奉省이나 兵部와 같은 官府가 존 재하였음도 또한 주목된다. 內奉省은 王命을 받들고 政策을 시행 한 기관이었고, 兵部가 軍事面에서 이에 상응하는 구실을 행하였 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內軍이나 內泉部와 같은 國王의 親衛軍이 나 王宮의 經濟的 뒷받침을 해주는 官府도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 한 점에서 혹은 정치기구상에서 볼 때 國王의 권력이 강대한 것으 로 비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國王은 豪族聯合體의 중심이 되 는 존재였으며, 豪族들 각자도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그에 상응하 는 것들을 거느리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만큼, 이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크게 말하여 高麗의 초 기에는 國王을 중심으로 결합한 豪族들의 聯合에 의하여 政治가 운영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2) 內議省의 設置 앞 장에서 설명한 高麗 초기의 정치기구는 대체로 新羅와 泰封 의 제도를 따른 것이었다.27) 그러나 王建이 弓裔의 部將으로서 활약하고 있었던만큼, 어느 편인가 하면 泰封의 제도를 많이 따랐 었다. 그러한 사정은 新羅 泰封의 官制와 太祖 때의 그것과를 연결 지어 본 다음의 一覽表 表 3 를 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으 로 믿는다. 27) 高麗史의 撰者도 高願太祖 開國之初 參用新羅 泰封之制 設官分職 以諧庶 務 (高賭史 76 百官志 序)라고 하였다

29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表 3 高麗 太祖時 官府의 新羅 泰封 官府에 대한 比定 新 羅 泰 和 自 廣 爸 內 執 事 封 太 祖 評 省 廣 評 省 奉 省 內 奉 省 徇 軍 部 (?) 徇 軍 部 部 兵 部 部 兵 部 兵 倉 部 大 龍 部 倉 左 右 理 方 府 義 刑 臺 義 刑 臺 船 水 壇 都 航 司 部 物 藏 省 物 藏 省 納 貸 府 內 泉 部 珍 閣 省 白 書 省 禁 書 省 內 軍 그런데 太祖는 뒤에, 이같이 대체로 과거로부터 계승되었다고 생각되는 것들 이외에 새로운 官府를 첨가하기에 이르렀다. 그것 이 內議省이었다. 이 內議省에 대하여 그것이 政事의 協議 諫靜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고 이를 설치하는데는 儒敎의 政治的 理想 을 실현시키려는 儒臣들의 노력이 개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고 추측하는 견해가 있다.28) 이러한 견해는 이 기구가 지니는 의 의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데, 이러한 의견을 토대로 內議省에 대한 몇 가지 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內議省이 언제 설치되었는가 하는 문제인데, 현재 불행히 도 이에 대한 분명한 기록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우리가 알 수 있 28) 李泰鎭 高賴 宰府의 成立 歷史學報 56(1972) pp 참조

30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는 한, 太祖 13년(930) 2월에 白書省의 郞中인 行順과 英式을 內 議舍人으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에 속한다.29) 뒤에 나오는 바와 같이 內藏省에는 그 장관으로 令이 있었는데 그 令에 대한 기록은 光宗 때에야 비로소 나타나고 있다.30) 그러나 위의 두 舍人의 임명은 아마도 內議省의 설치 자체를 의미할 가능성이 크다고 믿는다.31) 왜냐하면 太祖 13년(930)에는 여러 면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 들 이 일어났으며, 그러한 사건들은 太祖가 後三國을 통일할 기틀 을 마련해 주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중대한 사건들이었기 때문이 다. 즉 그해 1월에 太祖는 古昌郡(安東)에서 甄萱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는데, 이것은 新羅의 근거지였던 慶尚道 지방에서 後百濟 의 세력을 몰아내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고, 그 결과 後百濟 와의 대립은 忠南 지역으로 축소되기에 이르렀었다.32) 그리고 이 해 2월에 新羅의 敬順王이 太租와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太祖는 昵於鎭(安康)으로 갔을 뿐 金城(慶州)까지는 가지를 않고 돌아왔 었다. 그러다가 다음해에 드디어 太祖는 金城으로 가서 敬順王을 만나게 되었다. 이로써 볼 때에 太祖는 統一에 대한 어떤 서광이 비치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음직하다. 이에 따라서 內議省과 같은 새로운 行政機構를 생각하기에 이르지 않았나 한다. 혹은 內 29) 高麗史 1 太祖世家 13년 3월 條에 白書省郞中行順 英式 並爲內議舍人 이 라고 하였다. 30) 加子伷元服, 立爲王太子 內史 諸軍事 內議令 正胤 高麗史 卷2 光宗世家 16 년 2월 31) 李泰鎮은 太祖 즉위 이후 그 13년 사이의 언젠가에 신설되었을 것이라고 하였 다. 高麗 宰府의 成立 p.11 32) 이때 東海岸의 溟洲(江陵)로부터 興禮府(蔚山)에 이르는 110여城이 高麗에 항복해왔었다. 高隨史 卷1 太祖世家 13년 2월 乙未 條 참조 그리고 大丞 弟弓을 天安都督府使. 元甫 元式을 副使로 임명한 것은 忠南지방의 戰線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생각된다. 同上 8월 己亥 條 참조 河炫綱 高鹿王朝의 成立과 豪 族研合政權 한국사 4(1974) pp 참조

31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議省의 장관인 令이 아니라 하급 관리인 舍人의 임명을 해당 官府 의 始置 로 볼 수 없지 않느냐고 할는지 모르지만, 그러한 경우는 종종 있어왔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33) 그 때 官府가 學問 특히 儒敎와 깊은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함은 이미 지적된 바이지만, 수긍이 가는 견해이다. 이와 관련해 서는 우선 白書省의 郞中으로 있던 인물들이 內議舍人으로 임명 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白書省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學 問的인 일에 관계되는 기관이었다. 그렇다면 內議省도 學問과 관 계가 깊은 기관이었다고 생각해서 좋지 않을까 한다. 다음으로는 그 해 12월에 太祖가 西京으로 가서 學校를 세웠다는 것이 비록 직접적은 아니지만 이와 관련이 있음직하다. 太祖는 學問을 진흥 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을 이해에 더욱 굳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學問을 진흥시켜야겠다는 것은 결국 그것이 政治에 필요하다고 생각된 때문이겠는데, 같은 해에 설치된 內議省이 바로 이러한 學 問과 政治와를 연결시켜주는 기관으로 추측해도 좋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뒤에 王融과 같이 여러 차례 知貢擧가 되었던 大學者나, 또 崔知夢과 같이 經史를 널리 섭렵하고 天文 卜筮에도 정통한 學 者가 內議令으로 임명되고 있는 것은 이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다.34) 內議舍人이 中書門下省(內史門下省)의 中書舍人(內史舍人)이 되 고, 中書舍人이 省郞의 구성원으로서 諫靜 封駁을 맡았다는 사실 에 근거해서, 內議省을 政事의 協議와 諫靜을 담당한 기구로 생각 한 견해도 적절한 해석이었다고 믿는다. 다만 內議省이 차지하는 33) 李基白 稟主考 李相佰紀念論叢 (196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4) p.139 참조 34) 王融이 內議令이었던 것은 三國遺事 卷2 紀異 金傅大王 條에 보이는 册尚父誥 에, 崔知夢이 內議令이었던 것은 高觀史 92 崔知夢傳에 나온다

32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行政機構上의 공식적인 위치는 그리 높았다고는 생각되지가 않는 다. 위에서 언급한 金傅에 대한 册尚父誥에서 內議令이 副書를 할 위치에 있지 못했던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內議令이 國王 의 정치적인 顧問機關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때문이 아닐 까 한다. 內議省이라는 명청에 內 字가 붙어있는 것은 그러한 國王과의 친밀성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해석해서 좋을성 싶다.35) 그러나 그들의 건의가 政策의 결정에서 무거운 비중을 차지하 게 되었던 때문에, 內議省의 실질적인 중요성은 증가되어갔던 것 이 아닐까. 가령 太祖가 돌아갔을 때. 百官이 內議省 문 밖에 나란 히 서서 遺詔를 받들었다는 것은 그러한 결과일 것이다.36) 그리 고 景宗의 金傅에 대한 册尚父誥에서 內議令이 副署는 하지 않았 지만 이를 奉行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사실도 그 표현일 것이 다.37) 그리고 光宗이 아들 伷를 太子로 책봉할 때에 그에게 동시 에 內議令이란 관직을 수여한 것도 역시 주목되어야 하겠다.38) 또 光宗 23년에 宋으로 파견된 使行에서 內議侍郞이 內奉卿이나 廣評侍郞보다 위인 正使로서 파견된 사실에도 이 점이 나타나 있 다.39) 요컨대 內議省은 처음엔 그 공식적인 지위가 높지를 못했 으나, 學問的 識見이 높은 인물들이 임명되면서 國王의 정책 결정 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크게 발휘함으로 해서 점차 그 중요성이 커 져갔다고 할 수 있겠다. 35) 그런 의미에서 內奉省 혹은 內軍의 內 字와 상통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고 하겠다. 이에 대해서 이와 대조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廣評省의 廣 字가 아닐까 한다. 36) 有頃而薨 太子 諸王 室 近臣 皆擗地哀號 百官列位於內議省門外 王規 出宣遺命 高雜史節要 1 太祖 26년 5월 丁酉條 37) 위의 册尚父誥에는 大匡 內議令 兼 摠翰林 臣融宣奉行 이라고 하였다. 38) 註 30) 참조 39) 高麗史 2 光京世家 23년 條 및 李泰鎭 高麗 宰府의 成立 歷史學報 56(1972) p.13 참조

33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그러나 이러한 점을 고려해서 內議省을 곧 專制政治에 봉사하 는 기관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內議省의 非專 制的 성격이 강조되는 견해는 옳은 것이라고 믿는다.40) 內議省은 國王과 직결되어 있는 기관이긴 하였으나, 國王의 命을 받들어 행 하는 行政機構이기보다는 國王에 대한 政策의 建議機關이었을 것 이다. 그리고 이들의 건의는 學問的 권위 혹은 儒學의 권위에 뒷 받침된 것으로서, 國王에 게도 상당한 압력을 가지고 받아들여졌 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內議省이 장차 諫靜 封駁을 맡은 中書 門下省의 郞舍로 발전하게 되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內議 省의 등장은 장차 高麗에서 貴族政治機構가 형성될 싹이 돋아나 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徐弼과 徐熙의 父子 가 內議省의 官職에 임명되었었다는 사실이다. 徐弼은 歸化한 中 國人을 지나치게 우대하지 말도록 光宗에게 直諫한 것으로 유명 하며, 아마도 그러한 이유로 해서 뒤에 光宗의 配享功臣으로 책명 된 것이 아닌가 한다.41) 徐熙는 光宗代에 科擧에 합격하여 평탄 한 出世의 길을 밟아 成宗 후기에는 內史令에 임명된 巨物이었다. 그 도 또한 成宗의 지나친 儒敎政策을 비판한 것으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이들은 모두 學者이긴 하지만 新羅 이래의 學問的 전통을 이어온 學者家門 출신이 아니라, 지방 豪族 출신의 學者였다. 말하자면 새로운 타입의 學者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의 견은 결코 崔承老와 같은 新羅 六頭品 계열의 儒學者와는 같지가 않았다.42) 이러한 인물들이 光宗代에 內議省에 奉職하고 있는 것 40) 李泰鎭 高麗 宰府의 成立 p.11 41) 高麗史 93 徐弼轉 및 李基白 貴族社會의 形成 한국사 4(1974) p.167 참조 42) 李基白 高麗 貴族社會의 形成 pp 참조

34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이다. 그러므로 光宗은 이때에 새로운 側臣들을 중시하고 內議省 을 疏外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주목에 오르는 것이 崔承老가 光宗을 평 하여 雙冀를 등용한 이래, 文士를 崇重하여 恩禮가 지나치게 많 아 이로 말미암아 才가 아닌데도 濫進하고 차례가 아닌데도 갑자 기 승진하여 歲時가 차지 못하여 곧 卿相이 되고, 혹은 매일밤 引見하고 혹은 매일 낮 延容하여 이로써 즐거움을 도모하고 政事 에 게으르니, 軍國의 要務가 막혀서 통하지 않았다 라고 한 사실 이다.43) 여기서 軍國의 要務가 막혀서 통하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까지 위에서 서술한 行政機構들이 제대로 운용되지 않았다는 뜻임이 분명하다. 그런 속에는 廣評省이나 徇軍部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또 內議省까지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배제되지는 않는 다. 그 대신 科擧에 합격한 卿相이 깊이 政治에 참여하고 있었다 고 보여진다. 그러나 光宗이 죽은 뒤에 모두 숙청되어 그 이름조 차 전혀 전하지 않는 南北庸人 출신의 젊은이었다고 하는 이들 卿 相이 어떤 기구에 소속되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光宗 때에 內史令이 새로 등장하고 있으므로, 혹은 內史省 이 있어서 그것이 새로운 政策樹立機構로써 중요성을 띠게 되었 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현재로써는 이 內 史令의 존재를 곧 內史省의 설치로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史 料의 뒷받침이 되어 있지가 못하다.44) 內史令은 景宗 초년에도 43) 高麗史 卷 93 崔承老傳 44) 內史令에 대한 기록으로는 光宗이 아들 伷를 太子로 책봉할 때에 內史 諸軍 事 內議令으로 삼았다는 기사(高麗史 卷2 光宗世家 16년 2월)와, 景宗이 荀質 申 質을 左右執政에 임명하면서 內史令 을 겸임케 했다는 기사(高麗史 2 景宗 世家 元年)가 있을 뿐이다. 이같이 廣評省이나 內奉省 內議省 등의 경우와 같이 그에 소속한 여러 官職이 나타나지 않고, 다만 그 長官職인 內史令만이 나타나고 있어서, 이를 독립된 官府로 성립되었다고 보기에는 불안한 점이 있다

35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나타나기는 하지만, 필자는 차라리 景宗의 후년에 崔知夢을 중히 써서 內議令으로 임명한 사실을 중시하고, 高麗의 政治가 儒學者 인 貴族 중심으로 전환해가는 점에 도리어 주목하고자 한다. (3) 三省體制의 成立 高麗의 政治機構가 貴族政治를 구현하는 형태를 갖추게 된 것 은 成宗 때였다. 成宗代에 高麗가 中央集權的인 貴族社會로의 방 향을 잡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필자가 따로이 강조한 바가 있었 다.45) 이와 같은 큰 흐름 속에서 그 政治機構도 또한 貴族政治的 성격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成宗이 즉위한 다음해인 원년(982) 3월에 高麗는 百官의 명칭 을 고쳤다고 전한다. 高麗史에는 다만 그 사실을 전할 뿐 그 구체 적인 官號 변경의 실제를 설명해 주지는 않고 있다.46) 그런데 高 麗史節要를 보면 이때에 內議省을 內史門下省으로, 廣評省을 御事 都省으로 고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47) 이러한 견해는 高麗史 百官志에도 나타나고 있다.48) 그러나 이러한 高麗史 및 高麗史節 要의 이해는 잘못된 것이며, 그것이 是正되어야 하리라고 함은 이 미 지적된 대로이며,49) 또 위에서 언급해온 바와 같다. 이제 이에 따라서 成宗 원년에 성립된 3省과 그 前身과의 관계를 一覽表로 작성 하여 제시하면 다음의 表 4 와 같다. 그러나 이 3省 이외의 官府에 대하여는 그 명칭이 어떻게 변경 45) 李基白 高麗 貴族社會의 形成 한국사 4(1974) 46) 高麗史 卷3 成宗世家 원년 3월 庚戌條에 改百官號 라고 하였다. 47) 高麗史節要 2 成宗 원년 3월 條에 改百官號 以內議省爲內史門下 廣評省爲御 事都省이라고 하였다. 48) 高麗史 卷76 百官志 1 門下府條 및 尙書省條 49) 李泰鎭 高麗 宰府의 成立 歴史學報 56(1972) pp 참조

36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되었다는 기록이 없으 表 4 太祖 및 成宗元年의 三省 關係 며, 따라서 이것만으로 太 서는 百官의 명칭을 고 廣 評 省 쳤다는 것이 과장된 표 內 議 省 현이 아닌가 하는 의심 內 奉 省 祖 成 宗 원 년 內史門下省 御 事 都 省 을 갖게 된다. 그러나 만일 高麗史 百官志에 國初 라고 되어 있는 부분의 것들 중에 이 成宗 원년에 고쳐진 官號들이 있다고 보는 경우에는 위의 기사가 노상 과장된 것만이 아님을 알게 된다. 가령 이제 高麗史 百官志 에서 國初 로 되어 있는 官號들을 뽑아서 一覽表로 만들어 보면 다음의 表 5 와 같다. 이런 때의 國 初 를 어느 시기 로 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은 퍽 어 려운 문제이긴 하 다. 그러나 內議 省의 경우만을 뺀 다면, 成宗 14년 이전의 시기로써 表 5 高越史 百官志에 나타난 國初 官府 國 內 初 議 省 成宗원년 成宗 14년 內史門下省 選 官 尙 書 吏 部 司 績 尙 書 考 功 民 官 尙 書 戶 部 禮 官 尙 書 禮 部 工 官 尙 書 工 部 臺 御 史 臺 秘 書 省 司 憲 史 館 이렇게 中國化된 內 書 省 官號를 사용할 가 太 卜 監 능성이 가장 많은 太 史 局 시기는 成宗 원년 典 獄 署 大 理 寺 이 아닐까 한다. 掖 庭 院 掖 庭 局

37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그 첫째 이유는 兵部와 義刑臺의 官號 변경에 대한 다음과 表 6 같은 사실이 이와 비교되기 때문이다. 表 6 兵部와 義刑臺의 官號 變更 太 租 兵 義 刑 後 成宗 14년 이에 따르면 위 의 表 5 에서 部 兵 官 尙 書 兵 部 國初 로 되어 있 臺 刑 官 尙 書 刑 部 는 選官 民官 禮官 工官과 같은 시기 에 들어가야 할 兵官 刑官이 太祖 때로 되어 있지가 않다. 太祖 이 후 成宗 14년 이전으로서 兵官 刑官의 명칭이 쓰여질 가능성이 가 장 큰 시기는 아무래도 成宗 원년이 첫째로 예견된다. 그러므로 위의 國初 는 결코 太祖 때일 수가 없다. 물론 百官志에는 內議 省의 경우와 같이 太祖 때를 國初 로 표현한 경우도 있으므로, 위의 表 5 에 나오는 國初로 되어 있는 官府의 모두가 成宗 원 년에 改稱되었다고는 할 수가 없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選官 民 官 禮官 工官과 兵官 刑官의 6官을 비롯한 그 대부분이 成宗 원년 의 改稱이었다고 믿는다. 다음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둘째 이유는, 종래 전혀 나타나지 않 던 이들 官號가 成宗 원년 이후에 비로소 나타나기 때문이다. 가 령 高麗史에 나오는 것을 골라 보면, 成宗 원년에 崔承老가 行選 官御事에, 2년 5월에 徐熙가 兵官御事, 鄭謙儒가 工官御事에 임명 되었다. 그러므로 적어도 選官 兵官 工官 등은 成宗 원년 3월에 改百官號 할 때에 그렇게 고쳐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50) 50) 6官이 成宗 원년에 설치되었다는 것은 이미 邊太资氏가 지적한 바 있다. 高麗 時代 中央政治機構의 行政體系 高麗政治制度史硏究 p.6. 李泰鎭은 6官이 成宗 원년에 설치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國初 는 太租 때로 봄이 타당하며, 成宗 원년에 설치된 6官을 高麗史 撰者가 太祖 때부터 廣評省 밑에 정연한 6官의 체계가 갖추어져 있던 것으로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생긴 過誤일 것이라고 하였 다. 李泰鎭 高麗 宰府의 成立 pp 이 견해는 어쩌면 지나친 해석이 아닐는

38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이같이 成宗의 官制 정비작업은 官府의 명칭을 개정하는 작업 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이러한 명칭 개정의 원칙은 고유한 전통적 용어보다는 漢化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었다.51)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용어의 개칭만이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명 칭이 고쳐진 官府들을 두루 조사해 보면, 거기에는 일정한 체계가 엿보이며. 그러한 체계는 미리 마련된 어떤 腹案에 입각해서 이루 어졌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 計劃案은 그것 이 짜여진 원년 3월에 모두 그 실질적인 내용이 갖추어졌던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것은 이 새로운 官府들에 대한 人事措處가 그 것이 成案되었다고 생각되는 원년 3월에 모두 정해지지 않고 있 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러한 制度의 내용까지가 실질적으로 갖추어지기는 成 表 7 成宗 初年의 새 人事措處 年 代 成宗 원년 (982) 成宗 월 成宗 월 成宗 월 成宗 월 2년 (983) 1 2년 (983) 5 2년 (983) 5 2년 (983) 6 官 職 人 名 行 選 官 御 事 崔 承 老 門下侍郞平章事 崔 承 老 兵 官 御 事 徐 工 官 御 事 鄭 謙 儒 刑 官 御 事 薛 神 祐 典 據 高 麗 史 崔承老傳 高 麗 史 世 家 熙 지 모르겠다. 高麗史 撰者는 정확한 설치 연대를 모르는 것들을 막연히 國初 에 설치되었다고 표현한 것이 아니었을까. 어떻든 6官이 成宗 원년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던 것임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51) 이러한 원칙은 成宗이 地名율 개정하는 작업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改州府 郡縣及關驛江浦號 (高麗史 卷3 成宗世家 11년 11월 癸巳)했다는 것의 구체적 인 예가 高雜史 地理志에 成廟 所定의 別號로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몇 개의 예를 들면, 幸州가 德陽, 水州가 漢陽, 廣州가 淮安, 果州가 富安. 牙州가 寧仁으 로 되어 있는 따위이다. 이들이 모두 전통적인 地名을 무시하고 漢式으로 雅化된 것임을 알 수 있다

39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宗 2년(983) 5월의 일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것은 이때에 처음 으로 3省 6曹 7寺를 정했다 고 하였는데,52) 이것이 바로 이 사 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官府들에 대한 人事措處도, 表 7 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2년 5월경까지 행해지고 있다. 이런 여러 면에서 볼 때에 成宗 원년 3월에 시작된 政治制度의 改革은 2년 5월경에 이르러 일단 락 지었다고 생각된다.53) 이렇게 보아오면 成宗 원년으로부터 2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高 麗의 政治機構는 內史門下省과 御事都省을 중심으로 하고, 御事都 省 밑에 選官 兵官 民官 刑官 禮官 工官의 6官이 예속된 것으로서, 3 省 6官制度라 부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高麗史에서 이를 3 省 6曹 7寺라고 한 것은 반드시 근거가 있는 서술이었으리라고 생 각된다.54) 이를 一覽表로 작성하면 다음의 表 8 과 같이 될 것 이다. 表 8 三省 六官 一覽表 [三省] 內史 門下省 御使都省 그러나 일단 이렇게 成宗 2년 [六官] 에 갖추어진 官制가 成宗 14년 選官 兵官 民官 刑官 禮官 工官 (995) 5월에 다시 改定되기에 이르렀다.55) 그 이유는 成宗 2 년의 것이 諸官司의 事體는 비록 禮典에 따랐으나 額名은54) 52) 高賭史 卷3 成索世家 2년 5월 條에 始定三省 六曹 七寺 라고 되어 있다. 53) 成宗 원년 3월에 이미 官制를 새로 마련하고 있옴에도 볼구하고, 成宗 2년 5월에야 3省.6曹.7寺를 정했다고 한데 대하여, 邊太资氏는 基本官制의 完成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高願時代 中央政治機構의 行政粗系 p.6, 李泰鎭氏는 6官御事의 임명에 의한 그 기능의 발휘 를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高麗 宰府의 成立 p.29 54) 6官을 6曹라고 적은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그것이 6部의 체제인 것은 분명 하다. 이때의 寺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잘 알 지를 못하겠다. 그러나 6官 이외에 7寺에 해당하는 官府들이 있었을 것임은

40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자못 權稱한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典常을55) 살피고 그 가부를 가려서 假號를 모두 除하고 通規를 잘 나타내도 록 한 것이 成宗 14년의 官制 改定이었다 한다.56) 이러한 원칙에서 행해진 成宗 14년 改革의 결과로 이루어진 高 麗 官制의 내용은 高麗史 百官志에도 그 일부가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百官志에 제시된 내용은 극히 제한된 것이어서, 成宗 14년 에 이루어진 官制의 全貌를 이것만으로써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때에 이루어진 官制의 내용을 거의 완전하게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穆宗 원년에 改 定된 田柴科이다.57) 이미 다 아는 바와 같이, 高麗의 田柴科는 景宗 원년에 비롯한 다. 그런데 景宗 원년의 田柴科는 官吏의 色服制와 文 武 雜의 차 별에 따라서 일정한 品을 정하고, 그 品에 따라서 지급하는 田柴 의 量을 규정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구체적인 官職이 표 시되어 있지가 않았다. 그런데 穆宗 원년에 개정된 田柴科는 田柴 를 지급받는 官職을 18科로 나누어서 그들이 받아야할 田柴의 量 을 규정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田柴科 규정에는 원칙적으로 모 든 中央官職名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옳다. 그리고 穆宗 원년 (998)의 田柴科 규정에 나타난 官職名은 그보다 3년 전인 成宗 능히 추측할 수가 있다. 이때의 6官制가 中國의 어느 制度를 모범으로 한 것인가 에 대하여는 李泰領氏의 상세한 고중이 있으나 高麗 宰府의 成立 pp.30一31. 필자는 이에 대하여 赞反間에 이를 판단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55) 高麗史節要 2 成宗 14년 5월 條에 下敎 改定官制 라고 하였다. 56) 成宗 14년에 官制를 개정할 때의 敎書는 高麗史 卷3 成宗世家 14년 5월 戊午條 에 나타나 있다, 이제 그 개정의 취지를 나타내주는 대목만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今以諸官司事體, 雖遵於禮典, 額名頗有所權稱 (中略). 考厥典常, 分其可否, 悉 除假號克示通規. 57) 穆宗 원년 田柴科의 田柴 支給 規定은 高麗史 78 食貸志 田制 田柴科 條에 나타난다

41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表 9 穆宗元年 田柴科에 나타난 文班職 一覽表 官府名 內 史 門下省 尙書都省 1 科 2 科 3 科 4 科 5 科 內史侍郞 平章事 內史令 門下侍郞 左散騎常侍 侍 中 平章事 參知政事 右散騎常侍 (致仕侍中) 6 科 7 科 8 科 諫 議 給 事 大 夫 (散左僕射 ) 左僕射 (致仕左僕射 左 丞 ) (散右僕射 右 丞 右僕射 (致仕右僕射 ) 六 部 六 尙 書 諸侍郞 ( 散 侍 (散六 尙書) 郞) 御史臺 御史臺夫 中 丞 (散卿 諸少卿 監 監 大常少 卿 軍器少 卿 寺 監 大常府 軍器監 秘書省 殿中省 少府寺 將作監 秘書監 殿重監 小府監 將作監 國子司 業 國子監 掖庭局 諸 局 (六 局) 中尙署 京市署 諸 武庫署 大官署 大倉署 典廐署 署 供御署 典客署 大樂署 開城府 諸陵署 檢 校 將仕郞 開城尹 檢校太師

42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9 科 10科 11科 12科 13科 內常侍 諸陵令 15科 16科 17科 18科 起居郞 左補闕 左拾遺 主 書 起居舍 右補闕 右拾遺 錄 事 直 省 都 事 直 省 諸 員 外 散員 諸郎中 郞 (散 (外郞 ) 郞中) 殿中侍 侍御史 御史 監察御 使 (散少 (散寺 寺 監 寺 監丞 卿 監) 監丞) 主簿 大常博 士 軍器少 軍器丞 監 秘書丞 秘書郞 殿中丞 內給事 國子博 士 14科 國子助 敎 大 學博士 主 事 令 史 錄 事 令 史 知 班 正八品 八品丞 令 九品丞 書 史 丞 令 (散正八品) 四門博 士 大 學助敎 大常司 儀齋郞 大 祝 監 事 秘書敎書郞 秘書正字 楷 書 主 事 監 事 監 作 四門助敎 錄 事 書 史 國子典 學 內 閥 者 內侍伯 內諸者 東西頭 (散供奉官) 監 供奉官 諸 局 奉 (散諸 六 局 直 (散直 書令史 御 奉御) 長 長) 中尙令 京市令 武庫令 司 庫 大官令 大倉令 司 廩 典廐令 供御令 典客令 大樂令 濟陵丞 製述明 經登科 將仕郞

43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14년(995)에 이루어진 官制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 지 않을까.58) 그것이 불과 3년밖에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그 3년 사이에 官制가 개혁되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成宗 14년의 官制를 이해하기 위하여 穆宗 원년 田柴科에 나타나는 官職名 중에서 文官職에 해당하는 것만을 一覽表로 작성하여 제시하면 앞의 表 9 와 같다.59) 이 表 9 에 나타난 바와 같은 3省을 기본으로 하는 高麗의 政治機構의 成立은 곧 高麗의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으로 이해 되지만, 이 政治機構 속에 나타난 貴族政治的 性格은 章을 달리해 서 검토해 보아야 하겠다. (4) 三省體制의 性格 高麗의 政治機構는 成宗 14년에 일단 정비되었고, 그 내용이 穆宗 원년의 田柴科 規定에 나타나 있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언급 한 바와 같다. 이제 穆宗 원년의 田柴科 規定에 나타난 官職에 의 거 해 高麗의 政治機構에 대한 검토를 꾀하여 볼까 한다. 우선 지적하고 싶은 것은, 成宗 14년의 政治機構는 크게 보아 文班 武班 雜業 南班의 네 부문으로 나뉘인다는 사실이다. 穆 宗 원 년 田柴科의 各科에 배정된 官職들이 列記된 순서를 자세히 검토 58) 이 점은 필자가 高麗 兵制의 幣備過程에 대한 分析을 행할 때에 이미 언급해 둔 바가 있다. 이때에 同田柴科에 나타나는 武官職의 一覽表도 제시되었었다. 李基白 高麗 二軍 六衛의 形成科程에 대한 再考 黃義敦記念史學論叢(I960) 高麗 兵制史究硏(1968) pp ) 원래 田柴科의 규정에는 官府名이 기 록되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一覽表를 작성하는데 있어서는 高麗史 百宫志를 두루 참조하였다. 혹 잘못된 점이 있으면 敎示가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致仕職과 散職은 이를 ( ) 안에 넣어서 구별을 지었다

44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해 보면, 그것은 일정한 서열을 갖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맨 처음에 文班에 속하는 官職을 쓰고 다음에 武班, 그리고 雜業 南班 의 순서로 적혀 있는 것이다. 이 순서는 원칙적으로 흐트러지지 않고 있다. 다만 16科 이하의 吏層에 관한 부분만이 혼란이 있는 듯하게 보이나, 실상 이 부분은 이들 吏屬을 어느 官府에 배정시 켜야 될지도 잘 모르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지금으로써는 무어라 말하기 곤란한 처지이다.60) 따라서 적어도 品官인 경우에 는 분 명히 그 소속을 가려낼 수 있는 武班職을 기준으로 하고, 그 앞에 기록된 것은 文班, 그 뒤에 기록된 것은 雜業과 南班으로 판정하 면 틀림이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雜과 南班을 가려내기란 그리 힘든 일이 아닌 것이다. 表 9 는 이러한 기준에 입각해서 各科 에서 武班職 앞에 기록된 文班職을 가려내서 一覽表로 작성해 본 것이다.61) 本稿가 政策을 결정하는 政治權力의 所在를 찾아보는 작업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文班職에 대한 검토로서 충분 하다고 믿기 때문이다.62) 우선 전체를 크게 볼 때에, 3科 이상의 高位職이 內史門下省과 尚書都省, 즉 3省에 한하고 있는 사실이 주목된다. 田柴科에서의 60) 가령 16科에서 武班인 諸尉隊正보다 앞서 雜業인 書學博士 篇學博士 司辰 可 曆 卜博士 卜正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諸尉隊正이 品外인데 대해서 書學博士등이 從九品이었던 데에 원인이 있지않나 한다. 그러므로 지금 16科 이하에 있어서의 서열의 혼란은 단순한 혼란이기보다는 그 정당한 이유를 모르 기 때문에 혼란된 것으로 보이는데 지나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61) 武班職보다 서열이 앞서는 것을 文班職으로 판정하는 경우에 12科의 六衛長 史와 14科의 六衛錄事는 文班職에 소속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長史는 文班職인 六局直長보다 서열이 앞서며, 錄事는 역시 文班職인 正八品承 令보다 앞선다. 이것은 이들이 文班職인 때문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잠시 文班職 一覽表에서 제외하였다. 62) 이 田柴科 規定에는 몇 가지 빠져 있는 官職이 있는 것 같다. 가령 7科에 散卿監이 있는데, 정작 卿監은 없는 것이다. 諸少卿監이 8科이고 散少卿監이 9科인 것을 보면 6科에 卿監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는 軍器監이 있다. 散軍器監(8科)은 있는데 정작 軍器監은 없는 것이다. 이들은 아 무래도 누락일 것만 같다. 이 같은 약간의 누락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당시의 政治機構의 대체를 이해하는데는 지장이 없다고 믿는다

45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3科 이상은 官品으로서는 곧 2品 이상이 된다.63) 그리고 이 2品 이 상의 高位官職은 위의 3省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2 品 이상이 高麗에서는 형식상 文武를 초월한 宰臣에 해당한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바와 같다.64) 穆宗 원년 田柴科에 나타난 官職에서 의문이 나는 것은 2品 이 상의 官職이 있는 官府로서 3省과 함께 흔히 兩府 혹은 宰樞라 불 리어온 中樞院 소속의 중요 官職이 빠져 있는 점이다. 中樞院 소 속의 것으로 분명한 것은 16科의 中權別駕 뿐인데 이것은 吏展에 속하며, 18科의 通引도 中權院 소속임즉 하나 이 역시 吏屬인 것 이다. 그러므로 吏展만이 여기에 나오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中 63) 현재 樹宗 원년 田柴科의 各科에 배정된 官職을 官品과 정확하게 비교할 자료 는 가지고 있지를 못하다. 高麗史 百官志에 기록되어 있는 官職들의 官品온 文宗 때의 것이고, 그 이전 것은 없다. 그런데 그 사이에는 官品의 변동이 있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약간의 변동을 예상한다 하더라도, 各 科의 배정은 이미 李佑成氏가 주장한 바와 같이 官品에 상응하며 (閑人 白丁의 新解 釋, 歷史學報 19(1962) p.60) 원칙적으로 다옴과 같은 방식으로 田柴科와 官品이 비정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一 科 從 一 品 二 科 正 二 品 三 科 從 二 品 四 科 正 三 品 五 科 從 三 品 六 科 正 四 品 七 科 從 四 品 八 科 正 五 品 九 科 從 五 品 十 科 正 六 品 一 一 科 從 六 品 一 二 科 正 七 品 一 三 科 從 七 品 一 四 科 正 八 品 一 五 科 從 八 品 一 六 科 正 九 品 一 七 科 從 九 品 一 八 科 吏 屬 이점은 가령 表 9 에서 14科에 正8品承 令이, 15科에 8品丞 令(아마도 從8品 丞 令)이, 그리고 16科에 9品承이 배정되어 있는 것으로써 알 수가 있다. 그리 고 가령 3科의 參知政事는 高麗史 百官志에 從2品으로 되어있고, 6科의 諫議大 夫는 高麗史 百官志에 正4品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도 또한 알 수 있다. 그러나 3科의 左右僕射는 高麗史 百官志에서는 正2品으로 되어 있어서 위의 表에 들어 맞지가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官職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약간의 변동을 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약간의 변동이 위의 큰 원칙을 뒤흔드는 정도의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朴菖熙氏는 高麗의 兩班功陰田柴法의 해석에 대한 再檢 討 韓國文化硏究院論叢 22 (1973) pp 에서, 이러한 약간의 예외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田柴科의 科가 官品과 일치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나, 이것은 大原則과 小變則과를 정당히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 결과라고 생각된다. 但 16科 이하에 끼어드는 吏屬에 대하여는 현재의 필자로써는 이를 정리할 능력 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64) 邊太燮 高麗宰相考 歷史學報 合輯(1967) 高麗政治制度史硏究(1971) p

46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樞別駕는 宣別駕 銀臺別駕와 나란히 기록되어 있어서, 이것만으로 판정한다면 南班 소속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어떻든 中柩院의 使 副使 등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혹은 이들이 兼職이었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으나 後考를 기다릴밖에 없다. 그리고 3科에 배정된 檢校太師는 주로 王子에게 주는 勳官이었으 므로 그것이 정치적으로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65) 이같이 3省은 2品 이상의 宰臣을 독점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行政機構들이 이에 예속되고 있었다. 가령 6部 7寺 3監 6 局 諸署를 대표로 하는 모든 行政機構들이 이 3省을 頂點으로 하 고 짜여져 있었다. 6部는 곧 吏 兵 戶 刑 禮 工의 諸部를 말하는 것임은 다 아는 사 실이지만, 이것은 行政官府의 대표적인 존재로써 尚書都省의 직속 기관이었다. 뿐 아니라 6部의 長官인 尚書 위에는 內史門下省의 宰臣들이 겸직하는 判事가 있어서, 이들이 실질적인 6部의 최고 실권자였던 것임은 이미 밝혀진 바와 같다.66) 그러므로 6部는 3 省에 소속되어 실무를 분담하는 官府였던 것이다. 寺 監은 7寺 3監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67) 7寺는 아마도 衛尉寺 太僕寺 禮賓省 司農寺 大府寺 司宰寺 司水寺일 것 이지만,68) 3 監은 지금 언뜻 어느 官府를 말하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를 않는 다. 6局은 尚食局 尚藥局 尙衣局 尚舍局 尚乘局 등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69) 이러한 7寺 3監 6局을 비롯해서 단독으로 그 官府名 65) 韓㳓劤 勳官檢校考, 震檀學報 合併號 (1966) pp ) 邊太變 高麗宰相考 pp.79一82 67) 高願史 卷78 食貨志 田制 田柴科 條의 文宗 30년 田柴科 11科 및 高麗史 84 刑法志 公牒相通式 京官 條에 7寺 3監이 나오고 있다. 68) 高麗史 百宫志에 나타난 여러 寺監들 중에서 表 9 의 一覽表에 단독으로 그 이름이 나오는 것을 빼면 本文에 적은 7寺가 나온다. 69) 但 나머지 하나는 잘 알 수가 없다

47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이 나오는 大常府 軍器監 등의 行政官府들은, 御史臺를 제외하고 는 모두 6部를 통해서 3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3省은 高麗 政治機構의 總她府였다고 할 수가 있다. 이 사실을 高麗史의 撰者는 宰相은 6部를 거느리고, 6部는 寺 監 倉 庫를 거느린다 (高麗 史 卷76 百官志 序) 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高麗의 政治制度는 三省體制였다고 해도 좋으라라고 믿는다. 그런데 그 3省, 특히 內史門下答의 宰臣들은 合坐制에 의하여 政策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70) 內史門下省의 宰臣은 百挨庶務 를 관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구체적인 것은 國政의 議政 이었던 셈이다. 이것이 新羅의 和白, 太祖 때의 廣評省에 內史門 下省 을 비유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 穆宗 원년 田柴科에 의하면 內史 門下省의 2 品 이상 官職으로는 內史令 侍中 內史侍郞平章事 門下侍郞平章事 衆知政事의 다섯이 있는데, 바로 이들 다섯이 소 위 5宰에 해당하였을 것이다.71) 이들 5 宰가 會議에 의하여 政策 을 결정하는 宰臣會議의 구성원이었음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國王은 行政機構인 6部가 上奏한 案件을 결정함에 있어 서 宰臣會議의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따라서 內史門下省의 宰府 는 議政機關이지 行政機關이 아니었다.72) 高麗 政治機構의 總帥 70) 高麗史 卷76 百官志 門下府條에 掌百揆庶務 라고 하였다. 71) 5宰에 대하여는 李齊賢이 櫟翁稗說에서 侍中 平章事 參知政事 政堂 文學 知門 下省事의 5職으로 보았고(櫟翁稗說 前集), 李丙燾氏가 이 견해에 따르고 있다 (韓國史 中世篇(1961) p.130 및 p,132). 이러한 견해는 文宗 때의 中書門下省 官制를 중심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5宰의 시초는 이미 成宗代에 있었을 것이므로, 이 成宗 14년의 官制를 중심으로 생각해야 하리라고 믿는다. 그렇게 되면 5宰를 人員數로 보아야 한다는 관점과도 들어맞아서 아무 矛盾이 없어진 다

48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府格인 內史門下省이 議政機關이었다는 것은 高麗의 政治機構가 官僚的이기 보다는 貴族的이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풀이될 수 가 있다.73) 內史門下省의 官職 중에서도 諫議大夫 이하 拾遺까지는 郞舍 혹은 省郞이라 하여 宰臣과는 다른 직무를 맡고 있었다.74) 그 임 무를 高麗史 百官志에서는 諫靜 封駿을 맡았다고 하였다.75) 그런 데 諫靜 封駿이라 한 것을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國王의 잘못을 시정하는 임무에 국한되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물론 郞舍가 國王에 대한 靜靜을 해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가령 穆宗 때에 諫議大夫였던 柳邦憲에 대해서, 穆宗이 狩獵을 즐겨하 자 그가 諫職에 있었기 때문에 누차 이를 諫했다 하고, 혹은 諫職 에 있으면서도 諫하는 임무를 게을리했다고도 한 것 따위가 그것 을 말한다.76) 그러나 실제로는 諫靜에 국한되지 않고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 친 의견을 올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국가의 전반적인 政 策의 건의를 그들의 임무로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成宗 7년 (988)에 左補闕 겸 知起居注인 李陽이 月令에 따라서 立春 전에 72) 邊太燮 高麗時代 中央政治機構의 行政體系, 高麗政治制度史硏究 pp 참조 73)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金龍德氏가 高麗時代의 署經에 대하여, 李丙燾紀念論 叢(1956) p.483에서 강조한 바가 있다. 74) 內史門下省의 品官으로서는 가장 낮은 主書와 錄事는 末端의 事務官吏이며, 그들은 郞舍에 돌어가지 않았을 것이다.(邊太燮 高麗의 中書門下省에 대하여, 高龍政治制度史硏究 p.39) 75) 高麗史 卷76 百官志 1 鬥下府 條에 門下府의 職務를 掌百揆庶務 라고 규정 한 뒤를 이어 其郞舍章諫諍封駁 이라고 하였다. 76) 柳邦憲墓訪에는 穆宗即位 制可禮部侍郞 右諫識大夫 餘如故 時穆宗頗好畋 獵行幸 公旣居諫職 故頻抗章疏辭 甚勁直 引古論今 不避諱斥 (朝鮮金石總覽 上 p.266)이라 하였고, 또 高麗史 卷93 柳邦憲傳에는 在諫官 或责以久不言 徐对云 奸以爲直 非吾所取 라고도 하였다. 위의 두 史料는 내용이 반대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後者가 옳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어떻든 諫官의 임무가 무엇인가 를 잘 말하여 주고 있다

49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土牛를 내야 한다든가, 王后가 獻種儀를 행해야 한다든가, 혹은 봄 에 암짐승을 희생으로 쓰지 말고 伐木을 금하자든가 하는 건의 를 올리고 있다.77) 분명히 郞舍인 李陽은 단순한 諫靜이기보다도 국가의 儀禮에 관한 몇 가지 새로운 政策的 건의를 하고 있는 셈 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는 右補闕 겸 起居注였던 金審言의 경우에 서도 알 수가 있다. 그는 成宗 9년 (990)에 說苑의 6正 6邪와 漢 書의 刺史 6조를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이 龜鑑으로 삼을 것과, 西 京에도 司憲官을 두어 糾理케 하자는 건의를 올렸었다.78) 역시 郞舍였던 金審言도 단순한 君王의 非를 諫하는 것이기보다도 국 가의 기본 정책에 대한 건의를 하였다. 이렇게 볼 때에 郞舍의 임무는 단순한 諫靜이기보다도 광범한 政策의 건의였다고 할 수가 있지 않을까 한다. 諫評 封駁 이라고 한 것 중의 封駿이 혹은 바로 이 政策의 건의를 말하는 듯도 싶 다. 왜냐 하면 위의 두 경우에 이들은 모두 封事 를 올린 것으 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封駿인 경우에는, 駿이 란 말 이 적극적인 건의이기보다도 기정 사실에 대한 부정적인 공박을 뜻하는 것일 터이므로, 글자대로라면 역시 諫靜과 마찬가지 뜻으 로 취할 수 있다. 다만 실제 郞舍들의 封事는 위에서 그 실례를 보아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보다 적극적인 政策의 건의를 내용 으로 하였다. 그리고 郞舍의 중요한 임무의 하나가 바로 이 政策 의 건의였다고 생각해서 잘못이 없을 것으로 믿는다. 물론 封事를 올려 政策을 건의하는 것은 항상 郞舍들만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宰臣들도 했을 것이며, 때로는 內史門下省의 소속 이 아닌 官吏들도 王命에 의하여 封事를 올려 政策을 건의하기도 77) 高麗史 卷3 成宗世家 7년 2월 壬子 條 참조 78) 高麗史 卷93 金審言傳 참조

50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하였다. 가령 成宗 원년(982)에 行選官御事였던 崔承老가 올린 긴 封事는 國政 전반에 걸친 政策에 대한 건의였다.79) 그리고 成 宗 6년(987)에 四門博士였던 柳邦憲도 政策 건의를 한 것으로 되 어 있다.80) 그러나 이것은 모두 王命에 의하여 특별히 행해진 것 이었다. 전자에 있어서는 5品 이상 관리들에게 成宗이 時政得失을 논하도록 요구한데 대한 응답이었으며, 후자에 있어서는 儒臣들에 게 對策을 물은데 대한 응답이었었다.81) 그러므로 이것은 말하자 면 특별한 경우이고, 그들이 직책상 행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그 직책이 아닌데도 政策的인 건의를 하였다가 越權行爲 로 규정된 예가 있다. 供賓令이었던 鄭又玄의 경우가 그러한데, 徐熙의 옹호로 處罰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다른 宰相들은 모두 그 의 處罰에 찬성하였었다.82) 이것은 결국 政策의 건의를 포함한 時政에 대한 의견을 封事로 올리는 것은 郞舍의 정책에 속하는 일 이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렇게 건의된 政 策들이 宰相들의 會議에 의하여 논의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郞舍는 政策의 건의나 諫靜 뿐 아니라 또 署經의 권한 을 행사하고 있었다. 署經은 官吏의 人事에 있어서 임명장인 吿身 에 일정한 官職者의 署名을 거치는 것을 말하지만, 그 署經의 권 한을 郞舍들이 지니고 있었다. 만일 이 署經을 거치지 못하면 그 79) 高麗史 卷93 崔承老傳 참조 80) 柳邦憲墓誌, 朝鮮金石總覽 上 p.265 참조 81) 高麗史 卷3 成宗世家 원년 6월 甲申 條에 后德惟臣 古今所同 朕新摠萬機 恐有闕政 其京官五品以上 各上封事, 論時政得失 이라 하였고. 柳邦憲墓誌에는 雍 熙西年丁亥 成宗初踐祚 命儒臣封策 公又中科首 上褒之 (朝鮮金石總覽 上 p.265)라고 하였다. 82) 高麗史 卷94 徐熙傳에 供賓令鄭又玄上封事 論時政七事 忤旨 成宗會宰相議 曰 又玄敢越職論事 罪之何如 皆曰 惟命 熙曰 古者諫無官 越職何罪 臣以不才 謬居宰相 竊位素餐 使官卑者論政敎得失 是臣之罪也 况又玄論事甚切 宜加褒獎 成宗感悟 擢又玄監察御史 라고 하였다

51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吿身은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는 것이었으므로, 비록 郞舍들의 官 品이 높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정치적 지위가 중요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貴族의 이익을 위하여 王權의 專制的 성격을 제약하는 것으로써, 高麗 政治機構의 貴族的 性格을 말하 여 주는 것이라 함은 이미 지적된 바와 같다.83) 그런데 이 署經의 권한은 內史門下省의 郞舍뿐 아니라 御史臺 에서도 가지고 있었다.84) 앞서 필자는 6部를 비롯한 거의 모든 行政機關이 3省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御史臺만은 예외였다고 언 급한 바가 있었다. 왜냐하면 御史臺는 行政的인 체계의 圈外에 위 치하고 있어서 이를 옆에서 견제하는 구실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 문 이었다. 御史臺의 임무에 대해서는 高麗史 百官志에 時政을 論執하고 風俗을 鱗正하고 糾察 彈劾하는 임무 를 지닌다고 하 였는데,85) 이것은 그들이 주로 官吏들의 違法的인 행위를 감찰하 는 책임을 맡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御史 臺가 內史門下省의 郞舍와 더불어 臺諫 혹은 臺省이라 併稱되며, 폭넓은 言官으로서의 임무를 같이 수행하였다.86) 그리고 이 御史 臺가 또한 署經의 권한을 쥐고 있던 데에서도 짐작할 수가 있듯 이, 王權의 專制化를 제약하는 貴族的 성격의 기관이었던 것이다. 이제 表 9 에 나타난 成宗 14년의 政治機構에서 끝으로 致 仕職과 散職, 그리고 檢校와 將仕郞에 대해서 언급해두어야 하겠 다. 致仕職은 2品 이상의 官職에 대하여 그리고 散職은 3品 이하 83) 金龍德 高麗時代의 署經에 대하여 李丙燾紀念論叢(1956) p.488 및 李丙燾 韓國史 中世篇 (1961) pp.6 8 참조 84) 金龍德 高麗時代의 署經에 대하여 p ) 高麗史 卷76 百官志 1 司憲府 條에 掌論執時政 矯正風俗 糾察彈劾之任 이 라고 하였다. 86) 金龍德 高麗時代의 署經에 대하여 p.473 및 朴龍雲 高麗朝의 臺諫制度 歷史學 報 52(1971) pp 참조

52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의 官職에 대하여 주는 待遇職으로 생각할 수가 있겠는데, 穆宗 원년 田柴科의 규정에 나타난 대로 한다면 반드시 모든 官職에 두 루 주어진 것으로는 되어 있지가 않다. 그 이유는 잘 알 수가 없 으나, 이 致仕職과 散職이 現職主義 또는 實職主義의 원칙과는 어 긋난다는 점에서 官僚 身分에 대한 일정한 保障策으로 생각할 수 가 있다. 그렇다면 이 制度는 官僚的 성격의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貴族的 성격의 일면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지 않을 까 한다. 檢校職에 대해서는, 그것이 勳官이라고 함은 이미 밝혀진 바와 같으며, 檢校職이 실제로는 더 많이 있었으나 穆宗 원년 田柴科에 檢校太師만이 나오는 것은 그것이 주로 王子에게 주어진 勳官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점도 또한 이미 지적되어 있다.87) 이러한 實職 이 아닌 勳官 제도는 역시 官僚的인 것이기보다는 貴族的인 성격 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將仕郞 제도는 科擧의 登科者가 實職에 취임하기 이전에 일정 한 대우를 해주는 제도라고 하겠다. 이것은 致仕職이나 散職과는 반대되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 역시 現職主義의 원칙 과는 어긋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역시 주목을 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이상에서 成宗 14년의 政治機構에 대하여, 穆宗 원년 田柴科에 나타난 官職을 기준으로 하고, 그 機構上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 三省體制라고 불러서 좋을 이 政治機構가 國王을 頂點으로 한 官僚的 行政體系를 갖추고 있었다기보다는, 오히려 行政機關을 合議制的인 機構 밑에서 통제케 하고, 또 위로는 王權 을 견제하고 옆으로는 行政機關을 감찰하는 機構들을 중요한 위 87) 韓㳓劤 勳官檢校考 震檀學報 합병호(1966) pp 참조

53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치에 놓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을 貴族的이라고 규정지을수 있으리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이 政治機構속 에서 구체적인 官職을 지니고 있던 人間들의 활동상황에 대한 分 析을 통해서 더욱 밝혀질 것을 기대하는 바이다. 李 基 白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1) 地方官制의 整備 高麗 王朝가 建國이래 가장 力點을 두어 온 정책의 하나는 地方 勢力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통제하며, 나아가서는 中央의 行政力을 전국 각 지방에 효과적으로 침투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課題에 대한 執權層의 관심은 우선 地方官制의 整 備로 나타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地方官制는 단시일에 성립되지 는 못하였다. 오랜 시일에 걸쳐 점진적으로 整備되어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다음에 이를 몇 시기로 구분하여 地方官制의 정비과정 과 그 시기에 있어서의 地方官制의 특성 등을 차례로 검토하여 보 고자 한다. 1) 高麗 國初의 地方官制 여기서 高麗 國初라 함은 편의상 太祖에서부터 제5대 景宗까지 의 기간을 의미함을 미리 밝혀둔다. 먼저 太祖연간(918一943)에 있어서는 太祖가 後三國을 통일하

54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기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통일한 이후에도 地方官을 파견하지 못 하였다. 이것은 崔承老가 成宗에게 올린 그의 封事文에서, 우리 聖祖(太祖)께서 (後三國을) 통합한 뒤에 外官을 두고자 하였으나, 대저 草創으로 因하여 일이 번거로와 겨를이 없었읍니다 1)라고 언급하고 있는 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太祖가 地方官을 설치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위에서 崔承老는 새 王朝의 草創 期여서 일이 번거로와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라 언급하고 있지만, 물론 이 말은 올바른 評價가 되지 못한다. 地方官을 파견하지 못 한 이유는 中央行政力이 극도로 미약한 반면 地方의 豪族勢力이 강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독 太粗 일대에 걸쳐 太祖가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적 극적으로 經營해 간 地方이 있었다. 平壤이었다. 太祖는 그가 王位 에 오른 지 불과 석 달만에 平壤 경영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高麗 史 卷 77 百官志(外職) 西京留守官條에 의하면, 太祖는 이 해에 平 壤大都護府를 설치하고, 重臣 2人을 보내어 이곳을 지키게 하고 叅佐 4 5人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記事에서는 풀지 못하는 궁금증을 高麗史節要가 풀어주고 있다. 高麗史節要 卷 1 太祖 원 년 9월條에 의하면, 太祖는 群臣에게 말하기를, 平壤은 古都인데 황폐한지 이미 오래 되어 荆棘이 滋茂하여 蕃人들이 그 사이에서 遊獵하고 因하여 侵奪하니 마땅히 徙民하여 그곳을 충실하게 함 으로써 藩屏을 굳게 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黃州 鳳州(鳳山) 白州(延白) 鹽州 등의 人戶를 나누어 平壤에 살게 하고 大都護府로 삼았으며, 堂弟 王式廉과 廣評侍郞 列評을 보내 어 이를 지키게 하고, 이와 함께 衆佐 4 5人을 두었음을 알 수 있 다. 우리는 이러한 高麗史節要의 記事를 통하여 太祖 의 平壤經營 1) 高麗史 卷 93 崔承老傳

55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의 動機와 그 내용을 볼 수가 있다. 이 記事의 核心은 한 마디로 말해서 北方民族의 침략에 대비한 國防上의 의의가 강조되고 있 는 점이다. 그러나 뒤에는 國防面보다는 國內政治上의 필요성에서 平壤에 대한 經營이 더욱 활발히 추진되어 나갔던 것으로 생각된 다. 高麗史 世家에 의하면, 太祖 2년 동 10월條에 城平壤 이라 는 記事가 보이지만, 同 4년 동 10월 壬申條에는 幸西京 이라 는 記事가 나타나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記錄上으로 이때부터 平壤 에 대신하여 西京 이라는 號稱이 사용되는 점이다. 이 러한 호칭의 변경은 太祖 2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平壤을 西京으 로 昇格시키는 데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표면상에 나 타난 명칭의 변경 그 자체보다는 그 명칭의 변경이 西京經營에 대 한 政 策의 전환을 나타내고 있지 않나 추측된다. 端的으로 말해 서 大都護府(平壤)에서 留守京(西京)으로의 전환은 곧 군사적 목 적에서 정치적 목적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왜 냐하면 당시 太祖 王建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時急한 과제는 국 내의 豪族 勢力들을 견제하고 아울러 王權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 는 새로운 勢力基盤의 構築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진 바와 같이, 新羅 말기부터는 豪族들이 각 지방에 강력한 세력기반을 가지고 등장하였으므로 高麗王室에서는 이들과 聯合함으로써만 겨우 그 政權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高麗 왕실은 豪族聯合政權의 대표자로써의 지위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首都圈內에서조차 豪族들의 중 압을 견디어 내기란 심히 어려웠었다. 太祖 때에 일어난 몇 차례 의 반역 사건이 이 사실을 잘 立證하여 주고 있다. 특히 중앙에서 벼슬하던 豪族이 자기 출신지의 세력과 직접 제휴할 때에는 더욱

56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더 큰 위협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高麗史 卷 92 洪儒傳附 裴玄慶傳에 의하면, 太祖가 靑州人 玄律을 徇軍郞中으로 삼은 데 대하여 裴玄慶이 申崇謙과 함께 이에 반대하였는데, 그 이유가 지 난번에 林春吉이 徇軍吏가 되어서 不軌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伏 辜 당했는데, 그것은 兵權을 장악하고 그 출신지인 靑州와 결탁했 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보더라도 豪族들의 출신지가 큰 세력배경을 이루었던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太祖 王建은 그의 세력기반인 松嶽에서조차 豪族들의 세력을 단호하게 제어할 수 없는 실정에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名實相符 하게 豪族들의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太祖 王建은 보다 강력하게 王 室을 지지하고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세력 기반을 찾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 여건으로써는 남쪽에서 새 로운 세력기반을 얻을 수는 없었다. 남쪽에는 新羅와 後百濟의 세 력이 버티고 있었으며, 각 지방은 그 지방 豪族의 세력기반으로 이미 홉수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가 눈을 돌리게 된 곳이 西京이었던 것 같다. 西京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先史時代부터 古朝鮮 漢四郡을 거쳐 高句麗의 멸망까지 政治勢力의 중심지로써 또는 首都로서 유서 깊은 곳이었다. 게다가 앞서 인용한 高麗史節要의 記錄에서도 볼 수 있듯이, 高麗 건국초에는 蕃人의 遊獵場으로 化하였을 정도로 황폐되어 있었다. 황폐하다는 것은 그곳을 基盤으로 한 旣成 土着 勢力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과거의 유서 깊은 古都로 써 國防上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土着勢力이 전무하다는 것은 太 祖 王建이 그의 經綸을 펴나가는 데 있어서 어느 모로나 가장 적 합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자기의 절대적인 지지

57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세력을 扶殖해 나갈 계획을 세우게 된 것 같다. 이에 따라 太祖 5 년에는 다시 西京에 대한 徙民과 함께 새로운 施策이 단행되고 있 다. 즉 이 해에 大丞 質榮 行波 등 父兄子弟 및 여러 郡縣의 良家 子弟를 西京에 옮겨 살게 하였으며, 또한 西京에 거동하여 宮府와 員吏를 새로 두고 처음으로 在城을 쌓았던 것이다.2)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西京에 있어서의 본격적인 行政機構 의 설치는 위에서 말한 太祖 5년의 施策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 이다. 위의 記事에는 막연히 官府와 員吏를 새로 설치하였다고만 되어 있지만, 高麗史 卷 77 百官志 西京留守官 屬官沿革條에는 그 상세한 내용이 나와 있다. 즉 太祖五年 置廊官(廊者官號 方言曹設 ) 侍中一人 侍郞二人 郞中二人 上舍一人 史十人 이라는 記事 내용이 그것이 다. 앞서 太祖 원년에 平壤大都護府를 설치하고 重臣 2人을 보내 어 지키게 하고 衆佐 4, 5人을 두었다는 記事와 비교하면, 이때에 西京官制가 括目할 만큼 정비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3) 이처럼 太祖 연간에 西京 자체의 行政機構는 整備되었으나, 이 것은 특수한 예외였을 뿐, 다른 地域에 대한 地方官制의 정비는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었다. 太祖 연간에 있어서의 地方에 대한 施策은 西京을 제외하고는 軍事的인 목적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 었다. 우리는 이 시기에 군사적 要地에 설치되는 鎭을 통하여 그 사실을 알 수가 있다.4) 太祖의 뒤를 이어 惠宗 定宗이 차례로 王位에 올랐으나, 이들 두 王은 地方에 대한 中央統制策을 강구할 겨를이 없었다. 우선 그 王權은 敵對勢力에 의해 심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고, 그 在位 2) 西京經營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는 河炫綱 高麗西京考, 歷史學報 35 36合辑 참조 3) 河炫綱 西京의 行政構造, 韓國史硏究 5 참조 4) 李基白 高麗太祖時의 鎭, 高麗兵制史硏究 所收

58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年數도 극히 짧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光宗의 등장과 함께 서서히 地方에 대한 체계적인 中央統制가 이루어져 나갔다. 우리는 그 端 的인 예의 하나로써, 光宗이 즉위한 뒤에 처음으로 地方 각 州縣 에서 바치는 歲貢物에 대하여 그 額數를 定하였다는 記事를 들 수 있을 것이다.5) 이 記事와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今有 租 藏의 制度이다. 高麗史 卷 77 百官志 外職條에 의하면, 今有 租藏 並外邑使者 之號 國初有之 成宗二年罷 라는 記事가 보이고 있다. 그러면 위 에 든 今有 租藏은 대체 어떤 성격의 관직이었을까? 우선 첫째 이 들 관직이 地方에 常駐하는 外官이 아니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 것은 위에 든 記事 중의 並外邑使者之號 라는 것이 이 사실을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그리고 또한 地方官의 파견은 成宗연간에 이르러서야 實現되었음은 周知의 事實이다. 따라서 그 이전에 地 方에 常駐하는 外官의 파견은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今有 租 藏은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地方에 파견되어 부과된 任務를 遂 行하고 돌아오는 臨時職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任務는 租藏 이라는 官號에서 엿볼 수 있듯이, 아마도 租賦의 징수였 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은 今有 租藏이 설치된 시기이다. 위에 든 高麗史의 기록에는 다만 國初有之 라고 하여, 國初에 설치되 었다고만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그 任務가 租賦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설치 연대를 光宗초로 잡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光宗이 즉위초에 처음으로 地方 각 州縣에서 바치는 歲貢物에 대하여 그 額數를 定하였을 때에는 그 歲貢物의 5) 高麗史 卷 78 食货志 貢賦條에 定宗四年 光宗即位 命元甫式會 元尹信康等 定州縣歲貢之額 이라 되어 있다

59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징수를 담당할 관직까지 설치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崔承老가 그의 上書에서 光宗의 治績을 논평하는 가운데, 光宗 때 에 朝廷의 儀制가 자못 볼만한 것이 있다고6)한 것도 그 설치 가 능성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高麗史 卷 77 百官志 外職條를 보면, 國初 有諸道轉運 使 라는 記事가 나온다. 이 記事에 의하여 國初에 諸道에 轉運使 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轉運使 라는 명칭으로 미루어 각 地方에서 징수한 租税를 中央으로 轉運하는 任務를 맡은 것으 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이 轉運使도 光宗초에 설치된 것이 아닌 가 한다. 바꾸어 말하면, 光宗은 즉위초에 각 地方의 歲貢物에 대한 額數 를 定하고, 그 歲貢物 등을 今有 租藏과 轉運使 등의 臨時職을 통하 여 中央으로 거두어들이는 制度的인 整備를 하게 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7) 이러한 조처는 비록 부분적이나마 中央의 行政力이 地方에 침투하는 효과를 거두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체계적인 行政組織에 의해서 각 地方이 파악된 것은 아니었다. 여 기에 당시 中央行政力의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地方 은 여전히 地方의 豪族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 은 崔承老가 그의 上書에서 外官의 설치를 건의하는 이유로써 鄕豪가 매양 公務를 빙자하여 百姓을 侵暴하므로 백성은 이를 견 뎌내지 못하니 請컨대 外官을 두소서 한 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民政的인 성격을 가진 外官은 成宗 연간까지에도 地方 에 常駐하지 않았으나, 軍事的인 任務를 띤 外官은 일찍부터 地方 6) 高麗史 卷 93 崔承老傳에 光宗八年之理 可方三代 又朝廷儀制 頗有可觀 이 란 記事가 보인다. 7) 高麗史 卷79 食貨志 漕運條의 國初南道水郡 置十二倉 이란 記事도 이때의 制度的인 整備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60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에 常駐하고 있었다. 太祖 元年 9月에 太祖는 平壤을 大都護府로 삼고, 堂弟 王式廉 과 廣評侍郞 列評을 파견하여 그곳을 지키게 하였음은 이미 앞에 서 말한 바가 있었다. 한편 남쪽으로 後百濟와의 관계로 太祖 13 년에는 天安都督府를 설치하여 大丞 弟弓을 都督府使, 元甫 嚴式 을 副使로 삼았다.8) 그리고 後三國을 통일한 뒤에는 後百濟의 首 都였던 完山(全州)에 安南都護府를 설치하였으며, 太祖 23년에는 新羅의 故都인 慶州를 大都督府로 삼았다는 記錄이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軍事的據點에는 高麗 中央軍의 일부가 배치되었을 것 으로 추측되고 있으며,9) 동시에 그 책임자로써 軍政的인 外官이 파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太祖 때에 설치된 都護府나 都督府는 짧은 기간을 존속하 였을 뿐이었고, 따라서 制度化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後代에 制 度化되는 四都護府 혹은 五都護府의 실질적인 기원은 光宗을 거쳐 景宗 때에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10) 高麗史 卷 2 景宗 世家 6년 7월條에 의하면, 景宗은 堂弟인 開寧君 治(成宗)를 불러 內禪하며, 遺詔하여 가로되, 西京 安東 安南 登州 등 諸道에 서 鎭守의 任務를 맡고 軍旅의 權을 가진 者는 그 任務가 가볍지 않 으니, 어찌 마땅히 잠시라도 任所를 비울 수 있겠는가, 任地를 떠 나 宮闕에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각각 任地에서 擧哀 하여 3일 만에 喪服을 벗도록 하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 로 景宗 때에는 이들 네 곳에 外官이 常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 다. 그런데 이들 네 곳에 常駐하는 外官의 성격은 軍事的인 임무 를 맡고 있었을 것임은 景宗의 遺詔 내용에 鎭守之任 軍旅 8) 高麗史 56 地理志 1 天安府 9) 李基白 高麗地方制度의 整備와 州縣軍의 成立, 高麗兵制史硏究 所收 참조 10) 上同

61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之權者 로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다만 西京만은 다른 세 곳에 비하여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 다.11) 西京을 제외한 세곳은 軍事的인 要地로서 都護府 都督府였 던 점에 공통성이 있었다. 이와 같이 軍事的인 필요에 따라 설치된 것이기 때문에 뒤의 民 政的인 地方官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지만, 地方官 파견의 先 駆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게 평가되고 있다. 2) 成宗朝의 地方官制 高麗 시대에 있어서 본격적으로 地方官制가 성립되는 것은 제6 대 成宗( )대 부터였다. 成宗은 高麗 초기의 歷代國王 중 새로운 國家體制의 整備에 가장 큰 공적을 남긴 王이었다. 成宗이 地方官制의 盤備에 처음으로 착수한 것은 成宗 2년 2월 이었다. 즉 이때에 처음으로 全國에 12牧을 설치하는 한편 今有 租藏을 罷하였다.12) 그리고 이때의 12牧은 楊州 廣州 忠州 淸州 公 州 晋州 尙州 全州 羅州 昇州 海州 黃州였음이 高麗史地理志에 나타 나 있다. 그런데 이둘 12牧은 成宗원년 6월의 崔承老 上書 결과 이루어진 것임은 周知의 사실이다. 崔承老는 時務 28條 중의 하나 로서 다음과 같이 建議하고 있다. 我聖祖가 統合한 뒤에 外官을 두고자 하였으나, 대저 草創으로 因하여 일이 번거로와 겨를이 없었읍니다. 이제 가만히 보건대 鄕豪가 매양 公務를 빙자하고 百姓을 侵暴하니 百姓이 견뎌내지 못합니다. 請컨대 外官을 두소서. 비록 일시에 다 보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먼저 十數州縣을 아울러 한 사람의 官員을 두고 官에 11) 河炫綱 高麗西京考 참조 12) 高麗史 77 百官志 外職

62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각각 兩三員을 두어 愛民하는 일을 맡기소서. 우리는 위의 建議에서 地方官의 설치가 地方勢力에 대한 統制 策의 一環으로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다. 地方官의 설치를 통하 여 中央行政力이 地方에 浸透하는 것은 地方勢力에 대한 統制의 결과를 가져올 것은 自明한 일이다. 그리고 사실 成宗은 12牧의 설치를 起點으로 하여 서서히 地方勢力의 統制策을 並行하고 있 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검토는 다음 으로 돌리고자 한다. 여기서는 12牧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우선 成宗 2년에 설치된 12牧은 統一新羅時代 이래 高麗 초기에 이르는 동안에 地方行政上의 要地가 되던 곳임을 알 수 있 다. 이미 다 아다시피 統一新羅時代에 地方行政上 중요시되던 것 은 尙州 良州(梁山) 康州(晋州) 漢州(廣州) 朔州(春川) 溟洲(江陵) 熊州(公州) 全州 武州(光州)의 9州와 中原京(忠州) 北原京(原州) 金官京(金海) 西原京(淸州) 南原京(南原)의 5小京이었다. 成宗 2 년의 12牧과 新羅의 9州 5小京을 비교하여 눈에 띠는 地域上의 차 이는 다음과 같다. 즉 9州 5小京制에서는 지금의 江原道 地方이 地方行政區劃으로 편입되어 있는 반면 黃海道 地方이 빠져 있다. 이것은 新羅의 行政力이 黃海道 지방에 조직적으로 침투하지 못 하였음을 나타내어 준다 할 것이다. 그러나 12牧制에서는 江原道 지방이 빠져 있는 대신 黃海道 지방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高 麗國初 이래 北方을 중요시하던 정책의 결과 黃海道 지방이 地方 行政上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까닭이 아닌가 생각 된다. 어떻든 12牧이 설치된 지역으로 보아서 成宗 2년에는 지금의 黃海道와 京幾道 지방, 그리고 忠淸 慶尚 全羅道 지방에 비록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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