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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사 刊行趣旨 오늘 우리의 韓國史 연구는 지난날 民族史 탐구에 몸 바쳐 온 先人의 精神과 業績을 바탕으로 하여 여러 分野에 걸쳐 큰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또한 韓國史에 관한 국내외의 관심은 한층 더 높 아가고 있읍니다. 이에 우리는 韓國史 硏究成果를 집대성하고 체계화할 단계에 이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올바른 韓國의 歷史와 文化를 모 든 사람에게 인식시켜야겠다는 사명감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硏 究成果를 현재의 수준에서 일단 총정리, 검토함으로써 앞으로의 硏究方向을 제시하기 위하여 꼭 이루어져야 할 일이라 믿기 때문 입니다. 國史編纂委員會가 한국사 를 편찬 간행하는 취지가 여기 에 있읍니다. 한국사 를 편찬함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목표를 세웠습니다. 첫째, 民族의 歷史와 文化의 성장 발달을 바탕으로 한 韓國史를 편찬한다. 둘째, 民族主體性에 입각하여 내재적 발전을 부각시키는 韓國史 를 편찬한다. 세째, 모든 硏究成果를 종합하고 체계화하며, 새로운 韓國史를 편찬한다. 한국사 가 간행됨으로써 앞으로의 硏究에 새로운 길잡이가 되 고 또 널리 韓國史를 올바로 인식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國史編纂委員會 委員長

6 槪 槪 要 要 1 高麗王朝의 기반이 확립되고 그의 社會構造가 定立된 것은 成 宗代이다. 高麗 초기에는 王權이 확립되지 못하고 地方豪族들의 세력이 강성하여 豪族聯合政權的 성격을 띠었으나, 太祖 定宗 光宗 등 역대왕의 강력한 集權化政策에 의하여 마침내 成宗 때에 이르 러서는 高麗의 國家基盤이 확립되게 되었다. 이러한 高麗王朝의 기반의 확립은 곧 高麗의 社會構造의 定立을 의미하였다. 高麗의 政治 經濟 社會 등 모든 國家體制는 成宗 이후 더욱 정비되고 顯宗 을 거쳐 文宗 때에 이르러 완성되지만, 그의 기틀이 마련된 것은 역시 成宗代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成宗 때 성립된 高麗王朝의 社會構造는 두 가지 성격 을 들 수 있으니 그 하나는 中央集權的인 점이다. 전술한 바와같이 高麗 초기에는 지방 豪族들의 세력이 강성하였는데 반하여 中央의 王權이 미약하여 高麗王朝는 豪族聯合政權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역대왕의 과제는 어떻게 豪族의 세력을 누르고 王權을 강화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렇게 성립된 高麗 왕조의 지 배체제가 中央集權的 性格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高麗의 社會構造의 또하나의 성격은 貴族的이라는 점이다. 高麗 초기의 集權化政策은 곧 地方豪族을 中央官僚로 편입시키는 운동 이기도 하였다. 즉 麗初의 역대왕은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 던 豪族勢力을 高麗 왕조의 中央權力에 흡수하여 中央官僚化하는 데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中央官吏는 일정한 정치적 사 - 1 -

7 高麗 貴族國家의 社會構造 회적 특권을 누리는 貴族的 신분으로 화하였으니, 高麗의 사회 구 조는 貴族的 성격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高麗王朝는 中央集權的이며 貴族的인 두 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高麗는 초기의 豪族聯合政權的 성격에서 中央集 權的인 지배체제로 개편되고 그 지배체제의 주인공인 中央官吏는 귀족적 존재였던 것이다. 우리가 高麗를 集權的인 貴族社會라 하 는 것은 바로 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高麗의 사회 구조가 어떻게 조직되고 그 성격은 어떠하였는가를 政治 經濟 社會 로 나누어 검토해 보기로 한다. 2 高麗의 政治制度는 高麗王朝의 기반이 확립된 成宗代에 정비되 었다. 이때 唐制를 參用한 中央의 政治機構가 마련되고 地方에 外 官이 파견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중앙에 京軍이 조직되었던 것 이다. 건국 직후의 임시적인 중앙의 政治機構와 독자적인 豪族勢 力下에 노였던 지방의 行政力과 軍事力은 成宗 때에 이르러 집권 적이며 귀족적인 지배체제로 개편된 것이다. 高麗의 中央政治機構는 唐制를 모방한 3省 6部를 기본으로 하 였다. 이 3省 6部制는 成宗 때 성립된 것으로 그 이전에는 泰封과 新羅의 제도를 襲用한 임시적인 政治機構를 이용하였다. 高麗 초기의 中央政治機構는 廣評省 內奉省 內議省의 3省을 기간으로 하였다. 內奉省이 行政機構로서 王權을 배경으로 하였는데 대하 여 廣評省은 群臣들의 政策決定機關으로서 강력한 豪族勢力의 지 위를 대변하는 것으로 高麗 초기의 정치형태가 國王을 중심으로 한 豪族聯合政權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軍事的으로 국왕의 명 령 밑에 있는 兵部와 함께 豪族勢力의 협의체적인 徇軍府가 병치 - 2 -

8 槪 要 되고 있었던 것도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內議省 은 儒學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한 政策建議機關으로서 장차 高麗에서 貴族政治가 형성되는 기반이 되었음이 주목 된다. 이러한 豪族聯合政權의 성격을 띠었던 高麗 초기의 정치기구는 高麗王朝의 기반이 확립된 成宗代에는 集權的인 제도로 개편되었 으니, 그것이 唐制를 모방한 3省 6部制이다. 즉 高麗는 成宗 때 3 省 6部를 기간으로 集權的이며 貴族的인 統治機構를 정비하였던 것이다. 高麗에서 국가정치의 중심기관은 3省이었다. 高麗史 百官志 序 文에 宰相이 6 部를 통할하고 6 部가 寺 監 倉庫를 통할하였다 라 한 것은 高麗의 행정체계가 宰相 6部 寺 監 倉庫(百司) 로서 宰相의 官府인 3省이 최고의 정치기관이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高麗의 宰相은 3省(실제로는 中書門下省)에서 議政을 하는 동시에 式目都監과 都兵馬使에 合坐하여 國家內外의 軍國重事를 회의 결 정하고 특히 尚書 6部의 判事를 겸하여 행정기구도 관할함으로써 中樞院의 樞臣과 함께 宰栖 로 불리어 그 권한이 극히 컸으니, 여기에 귀족적 성격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高麗에서의 國家行政의 기본적 기구는 尙書 6部였다. 尚書 6部는 高麗의 政府機構로 모든 國務를 분담하여 아래로 百 司를 통할하고 위로 王에게 直奏하는 중심기관이 되었다. 위에서 본 바 高麗史 百官志 序文에서는 6部가 3省의 宰相에 통할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6部가 각각 해당 정무를 직접 국왕에게 上聞하 여 王과 6部는 直結되는 행정체계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 서 우리는 高麗의 정치구조가 國王을 중심으로 한 집권적 성격도 지니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高麗의 3省 6部制는 唐制를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高麗의 全般 - 3 -

9 高麗 貴族國家의 社會構造 的인 정치체제나 그 사이의 權力關係는 唐의 그것과는 판이한 독 자적인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3省 6部制 자체도 唐制와는 차이가 많았다. 3省이라 하지만 高麗에서는 內史門下省(뒤의 中書 門下省)이 한 기관이 되고 門下侍中을 수반으로 一元的體制를 이 루고 있었으며, 尙書 6部도 吏 兵 戶 刑 禮 工部의 특수한 서열로 구 성되고 屬司가 감축되는 등 唐制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러 나 무엇보다도 커다란 차이는 高麗의 독자적인 정치기구 사이의 權力關係라 하겠다. 高麗의 정치기구는 唐制만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 아니고 거기 에는 또한 宋制系統과 高麗 獨自的인 제도도 섞여 있었다. 中樞院 (樞密院)과 三司는 宋制를 채용한 것이고, 都兵馬使와 式目都監은 高麗 자체의 필요성에서 생긴 것이다. 이렇게 보면 高麗의 政治的 權力機構는 唐制系統의 3省 6部와 宋制系統의 中樞院 三司 그리고 高麗 獨自的인 都兵馬使 式目都監의 세 요소가 복합된 제도라 할 수 있다. 이것은 高麗 政治制度의 특수성을 말하는 것이다. 高麗는 中國 의 제도와는 전혀 관계 없는 독자적인 權力機關인 都兵馬使와 式 目都監을 설치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唐制와 宋制의 여러 계통이 혼합되어 그 사이에 독특한 권력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세 요소의 複合的 구성 위에 성립된 高麗의 정치체제가 唐이나 宋의 그것과 다른 특수성을 가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高麗王朝는 中央政治機構의 정비와 함께 地方制度의 개편에도 착수하였다. 成宗 때의 12牧의 설치는 이때 高麗가 中央制度와 함 께 地方統制에도 힘을 기울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高麗 초기에 는 豪族들이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어 중앙에서 外 官을 파견하지 못하고, 다만 租税를 징수하는 今有 租藏과 이를 중 - 4 -

10 槪 要 앙으로 수송하는 轉運使가 全國에 파견되고 또 군사적 요지인 西 京 安東 安南 登州 등에 군사권을 가진 外官을 설치하였을 뿐이었 다. 그런데 成宗 2년에 12牧을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高麗 는 地方 制度가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高麗의 地方制度는 成宗 때부터 시작하여 穆宗을 거쳐 顯宗代에 정비되었다. 顯宗 9년에 4都護 8牧 56知州郡事 28鎭將 20縣令이 설 치됨으로써 高麗의 지방제도는 그 기본이 완성된 것이다. 高麗의 기본적인 郡縣制를 기록한 高麗史 地理志도 顯宗 9년 이후의 지방 제도를 기준으로 구성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면 高麗의 지방제 도는 어떻게 구성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高麗史 地理志에 의하면 高麗의 지방제도가 道 主牧 領 郡 屬縣 의 4層構造로 기록되고 있다. 가장 上位의 行政單位 가 5道 兩界이고 그 밑에 京 牧 都護의 界首官(主牧)이 있으며 다 시 그 아래 일단 守令이 설치된 州縣(領郡), 그리고 外官이 없는 屬縣이 달려있다. 高麗史 地理志에는 5道 兩界 밑에 14개의 主牧 과 115개의 領郡, 그리고 361개의 屬縣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高麗史 地理志의 서술은 오늘날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특히 5道 兩界가 主牧과 中央政府 사이의 中間 機構였다는 점에 대한 비판에 그 초점이 놓여져 있다. 실제로 근 래의 연구에 의하면 5道按察使가 中間行政機構로서의 기능을 나 타내기 시작한 것은 中期 이후의 사실이고, 그 이전에는 中央政府 가 外官이 파견된 主縣을 통하여 지방을 다스렸으며 다만 主牧인 界首官이 鄕貢의 選上이나 外獄囚의 監檢 등 몇몇 한정된 기능에 있어서 중간기구의 역할을 담당하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高麗 前期의 지방제도는 中央政府가 外官이 있는 州府郡縣 (主縣)과 直牒關係에 있는 것이 基本形態이고, 어떤 한정된 기능 - 5 -

11 高麗 貴族國家의 社會構造 에 있어서 主牧 界首官이 중간기구의 역할을 代行하고, 外官이 없 는 屬縣은 그 옆의 主縣을 통하여 間接支配를 받았음이 원칙이었 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高麗 전기의 지방제도의 특정으로 가장 먼저 들어야 할 점은 중간기구의 未熟性이었다. 몇몇 한정된 기능만을 主牧으 로 하여금 중간기구로서의 기능을 代行케 한 허술한 지방제도의 構造는 高麗의 集權的인 地方統制에 결정적인 결함이 되었다. 이 것이 主牧制에 대신하여 새로이 道의 按察使制가 中期 이후에 짜 여진 중간기구로 등장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高麗 지방제도의 성격으로 들어야 할 둘째 특징은 外官이 없는 屬縣이 많았다는 점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高麗史 地理志에는 外 官이 설치된 主縣(主牧과 領郡)이 129개였는데 대하여 外官이 파 견되지 않은 屬縣은 361개나 되고 있다. 이와 같이 高麗시대에 屬 縣이 많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중앙의 집권적인 行政力이 지방에 침투하는데 한계가 있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세째 특징은 高麗시대에는 鄕 所 部曲이 광범하게 分布하고 있 었다는 점이다. 高麗에는 新羅 이래 존재하였던 賤民集團의 特殊 行政區劃인 鄕 所 部曲이 각지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것은 역시 高麗社會의 후진성에서 비롯된 지방제도의 未熟性이라 할 수 있 다. 軍事組織에 있어서도 中央集權的인 改編이 진행되었으니 그것 은 京軍인 2軍 6衛의 편성과 지방에서의 州縣軍의 설치로 나타났 다. 成宗代에는 中央 京軍의 기본이 되는 6衛가 형성되고 그후 顯 宗 때에는 2軍이 성립하여 이른바 2軍 6衛制가 완성되었는데, 이 것은 건국 직후에 地方豪族들이 거느리던 私兵을 해체하고 또한 太祖 때 중앙의 部將들이 거느리던 독자적인 군대를 國軍으로 개 - 6 -

12 槪 要 편하는 과정을 통하여 성립한 것이다. 이러한 中央軍에 대하여 지 방에는 中央政府의 통할하에 놓인 州縣軍이 편성되었는데 이것도 지금까지 地方豪族들이 지배하던 군사력을 집권적인 中央統制 속 에 흡수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成宗 顯宗 代에 형성된 京軍과 州縣軍은 高麗 초기의 豪族 및 部將들의 독자 적인 私兵을 中央政府 統制下의 國軍으로 개편한 것으로 軍事制度 面에서도 中央集權的 體制가 이룩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3 전술한 바와 같이 高麗 초기에는 地方의 豪族들이 제가끔 독자 의 武力과 經濟的基盤을 보유하고 割據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太 祖와 그 후 역대왕의 노력은 이들 分權的인 세력을 어떻게 재정비 하여 集權的 體制 안에 편입시키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中央集權的 體制의 확립을 위한 사업은 여러 면으로 강 구되어 위에서 본 바와 같이 中央의 정치기구를 정비하고 地方의 統治制度를 강화하며 中央統制下의 國軍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그 러나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사업은 土地制度의 재정비였으니, 高 麗는 田柴科體制의 토지제도를 마련함으로써 豪族勢力와 經濟的 基盤을 제거하고 그들을 集權體制 안에 편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高麗의 田柴科制度는 太祖 23년의 役分田의 分給에서 비롯하여 景宗 원년의 始定田柴科, 穆宗 원년의 改定田柴科를 거쳐 文宗 30 년의 更定田柴科로서 완성을 보게 되었다. 田柴科의 最終形態인 文宗 때의 更定田柴科에 의하면 1科로부터 18科로 나누어 모든 官吏에게 차등 있게 田과 柴를 나누어 주었으니 1科는 田 100結 柴 50結로 中書令 尚書令 門下侍中이 받았으며 18科는 田 17結로 閑人과 雜類가 해당되었다. 이러한 田柴科 이외에 중요한 것은 功 - 7 -

13 高麗 貴族國家의 社會構造 蔭田이었으니 이는 5品 이상의 高官에게 일정한 토지를 주어 이 를 子孫에게 세습케 하였다. 이 밖에 王室에는 內莊田이 있고 寺 院에는 寺院田이 달려 있었으며 內外의 官司에는 公廨田이 지급 되었다. 田柴科體制下의 高麗 토지제도의 가장 중요한 성격은 公的 색 채가 강하다는 점이었다. 관리가 죽거나 現職을 그만두면 科田을 국가에 返納케 한 점이나 科田所有者가 경작자로부터 직접 租를 받지 못하고 國家에서 받아줌으로써 地主와 佃戶 사이에 國家權 力이 개입한 것 등은 公的 性格이 강함을 표시하는 것이다. 비록 功蔭田은 자손에의 세습을 허용하였으나 이것도 科田과 같이 국 가의 간섭에 의하여 間接支配밖에 못하게 함으로써 地主制土地經 營을 방지한 것은 주목할 점이다. 더우기 科田과 功蔭田 등의 私 田에서도 田主가 거둬 들인 租에서 다시 5升 7升 5合의 稅를 국 가에 내게 한 것은 高麗의 토지제도가 公的 性格이 농후하였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5品 이상의 高官에게 功蔭田을 지급하고 이를 자손에게 세습케 한 것은 高麗王朝가 貴族身分의 經濟的基盤을 마련하여 주려는 의도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5品 이상 官吏의 子孫에게 자 동적으로 官職에 오를 수 있는 길인 蔭叙制를 설정한 것과 같은 취지로 高麗사회가 貴族制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끝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民田이다. 高麗의 民田은 일반 농민이 경영하는 가장 보편적인 土地形態로 高麗에서는 이를 公 田으로 간주하여 租를 바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民田國有 論은 사실은 普天之下 莫非王土 라는 東洋的인 王土思想에 분 식된 것으로 이는 현실적으로 祖上 대대로 전래한 家田인 것이다. 이 民田은 오히려 個人的所有의 토지로 私有化 촉진의 媒介體 - 8 -

14 槪 要 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高麗시대에는 農業生產을 주로 하였고 따라서 手工業이나 商業 活動은 대단한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貴族의 사치생활을 위한 수요에서 手工業과 商業도 발달할 수 있는 여건 이 마련되었다. 高麗시대 手工業의 중심이 된 것은 官廳手工業이었다. 高麗에서 는 政府의 用途와 王室 貴族의 需要에 따라 官廳手工業이 분류되 고 여기 각종 工匠이 專屬되었는데, 특히 高麗의 官廳手工業은 武 器의 제조와 貴族層의 生活品製造를 중심으로 편상되었으니 이는 高麗의 對外關係와 貴族社會의 일면을 표시하는 것이다. 또한 高麗시대에는 農村社會에서도 專業的인 手工業者인 工匠 이 존재하고 특히 所 에서는 常貢 및 別貢을 납부하는 手工業이 발 달하였으나 農村手工業의 중심은 역시 농민의 家內手工業이었다. 이들 농민의 가내수공업은 대체로 自家의 需要를 위한 衣料生產 과 官府에 납부하기 위한 布物類의 생산이 주가 되었다. 이 밖에 佛敎가 발달한 高麗시대에는 織布業과 製瓦業 및 製鹽業 釀酒業 등에서 寺院手工業이 발달한 것은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經濟力이 영세한 高麗 사회에서 商業이 발달하지 못하였을 것 은 당연하다. 다만 中央集權的이며 貴族的인 高麗에서는 官府의 수요품을 조달하고 王室 貴族層의 生活品을 공급하기 위한 官衙都 市의 市廛商業이 활기를 띄었다. 특히 수도인 開京에는 長廊으로 된 대규모의 市廛이 세워져 御用商業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그 밖 에 西京도 官衙都市로서의 市廛商業이 발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官衙都市의 상업은 外國貿易과 직결되고 있었다. 高麗시 대에는 宋 日本 및 大食國 등과의 對外貿易이 활발하였는데 이것 은 王府 및 貴族層의 수요품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宋나라 - 9 -

15 高麗 貴族國家의 社會構造 상인들이 高麗에 가져오는 商品은 그 대부분이 高麗 귀족들의 사 치생활을 충당하기 위한 生活品이었으니, 여기에도 高麗 貴族社會 의 일면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4 高麗는 身分社會로서 身分은 모든 사람의 政治的 經濟的 社會的 지위를 결정하는 기본 조건이 되어, 개인적인 私的 능력보다도 그 身分과 家門이 중요시 되었다. 따라서 高麗 사회에서는 貴族 良民 賤人 등의 身分 秩序가 엄격히 구분되고 身分制度가 엄중히 유지 되었던 것이다. 高麗 사회의 最高身分階層은 貴族이었다. 第一身分인 貴族은 자 동적으로 政府의 要職에 오르고 그에 상응하는 經濟力을 소유하 며 社會的 特權을 향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高麗를 貴族社 會로 규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高麗의 貴族制는 高麗王朝의 기 반이 확립된 成宗代에 성립하게 된다. 高麗 초기의 豪族勢力이 高 麗의 集權化政策에 의하여 中央官僚化되었는데 이들이 特權的인 貴族의 身分으로 고정됨으로써 高麗의 신분체제는 재편성되고 貴 族制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들 高麗의 貴族은 門閥과 家門을 중요시하였다. 高麗의 貴族 을 門閥貴族이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高麗의 貴族은 그들 상호간에 閉鎖的인 婚姻關係를 맺으며 특히 最高貴族이라 할 수 있는 王室과의 通婚을 열망하였다. 그럼으로써 貴族은 그들 의 門閥을 높이고 그에 부수되는 政權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 다. 이렇게 王室의 外戚이 되어 政權을 오로지 한 貴族家門의 대 표적인 존재가 安山 金氏와 慶源 李氏라 할 수 있다. 高麗시대에도 文班과 武班이 兩班官吏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文

16 槪 要 班과 武班은 官制上 同列的으로 編制되면서도 실제로는 양자 사 이에 커다란 차이가 게재되고 있었다. 文班職이 우대되었는데 반 하여 武班職은 천시되는 차별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高麗시대의 貴族이 모두 文班職을 가지고 武班으로 貴族家門이 된 예가 없었 음은 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支配階層의 영역에 들면서도 실제로는 被支配層과의 사이에 개 재하여 中間的인 補助역할을 담당하는 존재가 中間階層이다. 高麗 의 中間階層은 高麗 초기의 群少豪族의 轉化된 後身으로서 中央 各司의 末端行政實務者인 胥吏와 지방의 土着行政 담당자인 鄕吏 를 主軸으로 하고, 여기에 常備的 正規軍인 下級將校와 宮中의 內 僚職인 南班을 포함한 광범한 부류를 지칭한 것이다. 高麗 사회의 기본적인 構成員은 良人이었다. 이들은 비록 被支 配層으로 下部階層에 속하였으나 주로 農耕生產에 종사하여 중요 한 존재가 되었다. 高麗의 良人은 白丁이라고 불리는 광범한 農民 層이 주가 되었는데, 이들은 租税 貢賦 力役을 부담하여 國家 財政 의 源泉이 되고 국가 존립의 支柱가 되었다. 高麗 신분사회의 最下階層이 賤民이다. 高麗의 賤民은 奴婢를 비롯하여 鄕 所 部曲人과 津尺 驛民이 포함된다. 이 가운데 奴婢는 身分的으로 主從關係에 의하여 소유주에게 예속되어 있을 뿐 아 니라 買賣 相續 贈與의 대상이 되는 최하층의 신분으로 法制的인 賤人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鄕 所 部曲人은 어떤 면에서는 良人農民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고 더우기 津尺 驛民은 朝鮮時代의 身良役賤의 계층에 비유될 수 있는 존재이지만 크게 보아서는 역 시 賤民의 범위에 드는 계층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高麗王朝의 사회 구조를 政治 經濟 社會의 세

17 高麗 貴族國家의 社會構造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이에 의하면 高麗社會體制는 왕조의 기반이 확립된 成宗代부터 정비되기 시작하고 그 성격은 中央集 權的이면서도 貴族的인 양면이 있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高麗의 貴族社會는 文宗 때 그의 最盛期를 맞이하였으나 그 내부의 모순이 확대되어 점차 동요되기 시작하고 마침내 武臣 亂에 의하여 붕괴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邊 太 燮

18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3. 軍事組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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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1) 廣評省과 內奉省 太祖 王建의 건국 이래, 몇 차례의 정치적 진통을 겪으면서 3省 을 중심으로 한 高麗的 政治機構가 어떻게 정비되어갔는가, 그리 고 그렇게 정비된 政治機構의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자는 것이 本稿의 목적이다.1) 高麗의 政治機構가 太祖 2년(919)에 3省 6部 9寺로 정비되어 있었다는 高麗史의 기록이 잘못이라 함은 이미 지적되어 있는 바 와 같다.2) 太祖 때의 政治機構로는 그가 王位에 오른 며칠 뒤에 행한 人事移動에 관한 기사에 나타난 것이 가장 신용할 만한 것이 다. 이제 그 기사에 나타난 政治機構를 一覽表로 작성하여 보면 表 1 과 같다.3) 1) 商麗의 政治制度에 대한 硏究는 최근 많은 성과를 거둔 분야의 하나이다. 邊太 變氏의 高麗政治制度史硏究(1971) 및 李泰鎭氏의 高麗 宰府의 成立, 歷史學報 56(1972)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本稿는 이들 硏究에 크게 힘입었음을 여기에 밝혀 두고자 한다. 2) 高麗史 卷1 太粗世家 2년 1월 條에 置三省 六尚窗官 九寺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비판은 李基白 高麗京軍考 李丙燾紀念論叢(1956) 高麗兵制史硏究(1968) p.50 및 邊太燮 高麗時代 中央政治機構의 行政體系 尙書省 機構를 중심으로 歷史學報 47(1970) 高麗政治制度史硏究(1971) pp.3 5 참조 3) 高麗史 卷1 太祖世家 원년 6월 辛酉 條에 나타난 해당 人事移動의 기사를 인용 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a) 遂以韓粲金行濤爲廣評侍中 韓粲黔剛爲內奉令 韓粲林明弼爲徇軍部令 波珍粲 林曦爲兵部令 蘇判陳原爲倉部令 韓粲閻萇爲義刑臺令 韓粲歸評爲都航司令 韓 粲孫逈爲物藏省令 蘇判秦勁爲內泉部令 波珍粲秦靖爲珍閣省令 是皆禀性端方 處事平允 咸從創業之始 俱罄佐命之勳者也. (b) 閼粲林積璵爲廣評侍郞 前守徇軍部卿能駿 倉部卿權寔並爲內奉卿 閼粲金堙 英 俊並爲兵部卿 閼粲崔汶 堅術並爲倉部卿 一吉粲朴仁遠 金言規並爲白書省卿 林 湘煖爲都航司卿 姚仁暉 香南並爲物藏卿 能惠 曦弼並爲內軍卿 是皆夙達事務 淸 謹可稱 奉公無怠 敏於決斷 允愜衆心者也

21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表 1 太祖元年의 主要 官府와 官職 廣 評 省 ① 侍中(金行濤) ⑪ 侍郞(林積璵) 內 奉 省 ② 令 (黔 剛) ⑫ 卿 (能 駿) ⑬ 卿 (權 寔) 徇 軍 部 ③ 令 (林明弼) 兵 部 ④ 令 (林 曦) 倉 部 ⑤ 令 (陳 原) 義 都 刑 航 臺 ⑥ 令 (閻 萇) 司 ⑦ 令 (歸 評) 物 藏 省 ⑧ 令 (孫 逈) 內 珍 泉 閣 部 ⑨ 令 (秦 勁) 省 ⑩ 令 (秦 靖) 白 書 省 內 軍 ⑭卿 ⑮卿 ⑯卿 ⑰卿 (金 (英 (崔 (堅 ㉖ 郎中 (申一) ㉗ 郎中 (林宴) ㉘ 員外郞 (國鉉) ㉕ 監 (康允珩) ㉙ 理決 (倪 言) ㉚ 評察 (曲矜會) ㉛ 郎中 (劉吉權) 堙) 俊) 汶) 術) ⑳ 卿 (林湘煖) ㉑ 卿 (姚仁暉) ㉒ 卿 (香 南) ⑱卿 ⑲卿 ㉓卿 ㉔卿 其 餘 司 省 (朴仁遠) (金言規) (能 惠) (㬢 弼) 郞 史 數字는 列記된 순서 이 表 1 에 의하면, 그 이름을 알 수 있는 12개의 官府가 있 고, 그 밖에도 이름이 전하지 않는 몇 개의 官府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위의 12官府는 모든 官府 중에서도 특히 중 요한 것들이었다고 생각된다. 太祖가 즉위 한 극히 초기 위의 人事移動은 太祖가 즉위한지 불과 6일 만에 행해진 것이었다 에 존재하던 이들 政治機構의 기본 구조는 대체로 景宗 때까지 유지되었다고 믿어진다. 그것은 (c) 前廣評郞中康允珩爲內奉監 前徇軍部郞中韓粲申一 林寔並爲廣評郞中 前廣評 史國鉉爲員外郞 前廣評史倪言爲內奉理決 內奉史曲矜會爲評察 前內奉史劉吉 權爲徇軍郞中 (d) 其餘司省 各置郞 史 用備員數 一無所缺 盖開國之初 妙簡賢材 以諧庶務也

22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景宗 원년(976) 10월에 新羅의 마지막 王인 金傅를 尙父로 책봉 하는 册尚父誥에 서명한 官吏들을 정리해서 제시한 다음의 表 2 를 보면 알 수가 있다.4) 表 2 景宗元年 册尙父語에 副署한 官職 廣 評 省 ①侍 ②侍 內 奉 省 軍 兵 中 中 (署) (署) ⑧侍 ⑨侍 郞 郞 (署) (無署) ③令 (署) ⑩侍 ⑪侍 郞 郞 (無署) (署) 部 ④令 ⑤令 (署) (無署) ⑫卿 ⑬卿 (無署) (署) 部 ⑥令 ⑦令 (無署) (署) ⑭卿 ⑮卿 (無署) (署) 數字는 列記된 순서 金傅에 대한 册尚父詰에 서명한 官吏는 곧 廣評省 內奉省 軍部 (徇軍部) 兵部의 長次官에 한하며, 그들이 서명한 순서도 太祖 원 년의 人事移動에 나타난 순서와 일치한다.5) 그러므로 이들 官府 야말로 太祖 때부터 景宗 때까지에 이르는 高麗 초기의 중요한 官 府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들 4官府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것과 같이, 다른 여러 官府들도 원칙적으로 그대로 존속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그러면 초기의 여러 官府들 중에서 가장 중요시된 이들 넷은 어 4) 金傳에 대한 册尚父誥는 高聰史 2 景宗世家 즉위년 10월 甲子 條에도 나타나 있지만, 여기에는 마지막 副署한 부분이 없다. 이 副署는 三國遺事 2 紀異 金傅大 王 條에 나온다. 一然은 아마 이 誥書의 原本을 보고 직접 베낀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데, 이제 끝의 著名 부분만을 여기에 인용하면 다음과 갈다. 開寶八年 十月 日 侍中署 侍中署 內奉令署 軍部令署 軍部令無署 兵部令無署 兵部令署 廣坪侍郞署 廣坪侍郞無署 內奉侍郞無署 內奉侍郞署 軍部卿無署 軍部 卿著 兵部卿無署 兵部卿署 5) 册尚父誥의 廣坪省이 廣評省의 잘못일 것임은 분명하다. 評은 評議의 뜻을 나타낸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軍部가 徇軍部의 改稱임은 高麗史 76 百官志 兵曹 條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文書에 서명하지 않은 관리가 6명이나 되는데 그 이유는 잘 알지를 못하겠다

23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떤 官府였을까. 우선 알 수 있는 것은, 이들 4官府 중에서 앞의 둘 즉 廣評猶과 內奉省은 정치적인 성격의 것이고, 뒤의 둘 즉 徇軍 部(軍部)와 兵部는 군사적인 성격의 것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文武의 양자로 나누어져 있다. 이같이 文武의 양자가 같은 비중을 가지고 高位官府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당시의 後三國時代가 內 亂期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그리 모순되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면 이들 4官府 중에서 처음의 政治的인 2官府는 어떤 성격 의 것이었을까. 우선 廣評猶에 대하여는, 여기에 侍中이 있고 또 그 기능이 활발한 것으로 보아, 이것이 新羅의 執事省과 같은 政 務의 중심 기관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6) 한편 이를 新羅의 執 事部에 비기는 데에 의견을 같이하면서도, 더 나아가서 廣評省이 유력한 豪族들의 최고 出仕 자리가 되어왔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豪族 세력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7) 그 런데 이 廣評省을 후대의 中書門下省(內史門下省)에 비기는 三國 史記 撰者의 견해와 尚書省에 비기는 高麗史 撰者의 견해가 엇갈 리고 있는데,8) 이에는 三國史記 撰者의 견해가 옳을 것이라는 의 견이 정당하게 여겨진다.9) 廣評省이 여러 官府 중에서 序列이 첫 째인 가장 중요한 官府인 것은 분명하지만, 만일 그것이 中書門下 省에 비교되어 진다면, 이것이 新羅의 執事省에 비겨질 가능성은 적어지는게 아닌가 한다. 廣評省이 글자 그대로 널리 評議하는 기 관이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에 더욱 그러하 다. 그렇다면 이 廣評省은 차라리 新羅의 和白會議의 전통을 이어 내려온 것으로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6) 邊太變 高麗時代 中央政治機構의 行政體系 尚書省 機構를 중심으로 歷 史學報 47(1970) 高麗爾政治制度史硏究(1971) p.4 7) 李泰鎭 高麗 宰府의 成立 歴史學報 56(1972) p.4 및 p.13 8) 三國史記 50 弓裔傳 및 高麗史 76 白官志 尙書省 條 참조 9) 李泰鎭 高麗 宰府의 成立 p

24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廣評省은 弓裔의 泰封에 있어서도 首位를 차지하는 官府였고, 그 弓裔는 專制的인 君主였기 때문에, 이 수위의 官府는 專制的 행정 기구의 성격을 지닐 가능성이 있다고도 하겠다. 그렇다고 弓 裔가 豪族들의 세력을 무시하고 中央集權的인 專制主義 행정 기 구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10) 廣評省은 新 羅의 和白會議의 전통을 이어받고, 뒤에 中書門下省으로 발전하여 갔을 것이다. 다만 和白會議가 중앙의 眞骨貴族 세력을 대변하는 기관이었던데 대해서, 廣評省은 지방의 豪族들의 세력을 대변하였 고, 그것이 內史門下省으로 변함으로써 다시 중앙의 門閥貴族 세 력을 대변하는 기관으로 변하여 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廣評省의 성격과 견주어 생각할 때에, 그 長官인 侍中이 2명이었던 점이 주목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즉 金傅에 대한 册 尚父誥를 보면 廣評省의 長官인 侍中이 2명이며, 그 2명이 실제로 임명되고 있었음은 그 文書에 2명이 모두 서명한 것으로 보아 알 수가 있다.(表 2 참조) 다만 太祖 원년의 人事移動에서는 廣評省 侍中이 金行濤 1명으로 되어 있어서 항상 2명이 임명되었던 것인 지 어떤지를 의심케 한다. 그런데 金行濤가 임명된 바로 그 다음 날 또 1명의 侍中 朴質榮이 임명되고 있으므로, 이것은 侍中의 경 질이기보다도 추가였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11) 따라서 侍中 2명 을 임명하는 제도는 원칙적으로 지켜졌을 것이다. 長官이 2명인 것은 그것이 王命을 받들어 행하는 行政機構이기보다는 어떤 政 10) 佛敎信仰에 바탕을 둔 弓裔의 관념적인 專制主義 경향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절실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는 泰封도 기본적으로는 豪族聯合政權的 성격 의 국가였다고 믿고 있다. 弓裔의 悲刺은 그가 현실과 동 떨어진 관념직 세계에 머물러 있었던 데에서 싹터난 것이 아니었을까. 11) 朴質榮의 侍中 임명 기사는 高麗史 卷1 太祖世家 원년 6월 壬戌條에 나온다. 단지 同年 8월 癸亥의 기사에서 金行濤를 前恃中 이라고 한 것이 문제가 되기는 한다. 그러나 그가 임명된 지 하루만에 그만두었다기보다는. 그 뒤의 어느 시기에 다른 누구와 교체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25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治勢力들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나타내 준다고 볼 수 가 있다.12) 高麗 太祖의 경우에 그 政治勢力이 豪族이었을 것임 은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정확할 것으로 믿는다. 이에 대해서 內奉省은 이미 지적되어 있는 바와 같이 王命을 받들어 行政을 실시하는 관부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 명칭의 뜻으 로 보나, 그것이 후일의 尙書都省에 비겨지는 것으로 보나, 그러 한 관점은 정확하리라고 믿는다.13) 그렇다면 이 內奉省은 新羅의 執 事省에 해당하며, 그 전통을 이어내려온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執事省도 王命을 받들어 이를 집행하는 王權과 밀착된 행 정 기구로 생각되기 때문이다.14) 더구나 執事省의 장관인 侍中이 1명이었던 것과 같이 이 內奉省의 장관이 또한 1명이었던 것도 주목되어야 하겠다.15) 또 執事省 차관인 侍郞에는 六頭品 계열의 儒臣들이 많이 임명되었던 것과 같이, 이 內奉省에도 崔凝과 같이 學問에 능통한 인물이 그 차관인 內奉卿에 임명된 사실도 이를 증명하는 하나의 자료가 된다.16) 內奉省이 맡은 일 중에서 중요 12) 이러한 점은 新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并上秀雄 新羅 政治禮制의 變遞 過程 古代史講座 4(1962) 新羅史签提硏究 (1974) p.435 및 李홉白 禀主考 李 相街紀念論叢(196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4) pp 참조 13) 邊太燮氏는 內奉省에 대해서 뒤의 尚窘都省과 같다 하였고. 또 그 명칭으로 보아 王 측근에 있어 奉命 實踐하는 기관이 아니 었던가 추측한다 고 하였다. 高麗時代 中央政治機構의 行政體系, 高麗政治制度史硏究 p.4 14) 李甚白 新羅 執事部의 成立 震檀學報 合併號(1964) 新羅政治社會史 硏究(1974) p.152 참조 15) 金傅에 대한 册尚父誥에는 廣評省 內奉省 軍部 兵部 중에서 오직 內奉省의 장 관만이 1명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表 2 참조). 新羅의 執事省도 다론 官府들과는 달리 그 장관이 1명으로 되어 있었다.(李基白 新羅 執事部의 成立, 新羅政治社會 史硏究 p.155 참조) 16) 執事部 侍郞에 대하여는 李基白 新羅執事部의 成立 新羅政治社會史硏究 pp 참조. 內奉卿에 임명된 崔凝에 대하여 처음 주목한 것은 李泰鎭이지 만(高麗 宰府의 成立 p.10) 高麗史 卷79 崔凝傳에 의하면 旣長 通五經 善屬 文 이라 하였고, 또 曉達吏事 甚獲時譽 라고 하였다. 특히 그를 內奉卿에 임명하는 대목에서 (太祖) 嘗謂曰 卿學富才高 兼職治體 憂國奉公 匪躬蹇蹇 古之名臣 無以過也 遷內奉卿 이라고 되어 있다

26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한 일은 人事으리라는 설은 그럼직한 것으로 생각되지만,17) 內奉 省이 지니는 기본적인 성격을 따지면 王命을 받드는 行政官府的 인 데 있었을 것이다. 軍事的 성격을 지닌 徇軍部와 兵部는 바로 각기 廣評省과 內奉 省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필자는 일찌기 徇軍部를 軍令을 담당하는 軍事指揮權의 統帥府로 규정하고, 그것이 뒤에 重房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이에 대해서 兵部는 軍政을 장악했 을 것이라고 한 바가 있다.18) 그런데 한 걸음 나아가서 徇軍部를 諸豪族의 軍事力과 연결된 협의체제적인 軍指揮權의 統帥府로 보 고, 兵部를 王命을 이행하는 官府였으리라는 견해가 제시되었 다.19) 이 해석은 타탕할 것으로 생각되며, 이들이 각기 廣評省과 內奉省에 상응한다는 사실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 보겠다. 이상에서 설명한 4개의 기본적인 官府 이외의 것들은 요컨대 이 들을 補完하거나 뒷받침하는 官府들로 생각된다. 우선 그 당시의 時代的 背景을 반영해서 軍事的인 면이 중요시되었던 것은 都航 司 物藏省 內軍 등의 군사적 기관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서 알 수 가 있다. 都航司는 新羅의 船府, 泰封의 水壇, 高麗의 水部에 해당 하는 것으로서 水軍을 관장하는 官府였을 것이다.20) 物藏省은 泰 封 때에도 그렇게 불리었지만, 후일의 小府監에 해당한다. 工技 寶藏을 관장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그것이 실은 兵器를 관장하 는 官府였음은 이미 舊稿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21) 內軍은 필시 國王의 親衛軍이었을 것이다.22) 이렇게 보면 이 3官府는 결국 군 李泰鎭 高麗 宰府의 成立 p.9 李基白 高麗京軍考 李丙僚把念論叢(1956) 高麗兵制史硏究(1968) p.55 李泰鎭 高麗 宰府의 成立 p.8 三國史記 卷50 弓裔傳 및 高_ 卷76 百官志 工曹條 참조 21) 李基白 高麗京軍考 李丙燾紀念論叢(1956) 高麗兵制史硏究(1968) pp 참조 22) 李基白 同上 pp.55一56 참조 17) 18) 19) 20)

27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사적인 면을 補完하는 官들이었다고 하겠다. 그 다음으로는 倉部 內泉部 등 경제적인 성격을 띤 官府들이 주 목된다. 倉部는 국가의 公的인 財政을 담당하는 官府로서, 政治 나 軍事에 대한 경제적인 뒷받침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倉部가 공적인 재정을 담당한데 대하여 內泉部는 王宮의 財政을 담당하 였을 것으로 보인다.23) 아마도 이 2官府는 軍事的인 兵部와 內軍 에 각기 해당시켜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임이 흥미롭다. 어떻든 이 2官府가 政治 軍事의 경제적인 뒷받침을 해준 官府로서의 구실을 담당하였을 것임은 분명하다. 이밖에 義刑臺의 존재가 주목된다. 義刑臺는 이미 泰封 때부터 그렇게 불리어왔지만. 이것이 新羅의 左右理方府, 후기의 刑部에 해당된다는 것에는 의심이 없다.24) 政治 軍事 經濟의 각 방면에서 있을 수 있는 非違行爲를 처벌하는 官府로서의 義刑臺의 중요성 은 敵對하는 政權이 존재하는 內亂期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 해될 수 있을 것이다. 白書省은 아마도 內書省의 전신이며, 그 명칭으로 미루어 보아 泰封 때의 禁書省에 해당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經籍祝 疏를 담당했다는 秘書省 典校寺와 연결되는 것으로서, 요컨대 學 問的인 官府였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25) 이상으로서 太祖 초년에 형성된 政治機構에 대한 분석은 대체로 끝낸 셈이다.26)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豪族 세력을 대변 하는 政治機構가 우위를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廣評省이나 徇軍部가 그것인데, 廣評省은 豪族勢力에 의한 국가의 政策決定機 23) 李泰鎭 高麗 宰府의 成立 p.6 참조 24) 李泰鎭 同上 pp.5一6 참조 25) 高麗史 76 白官志 典校寺 條에 掌經籍祝䟽 國初稱內書省 成宗十四年改秘書 省 이라고 하였다. 26) 단지 表 1 에 나타난 珍閣省은 그 직무를 잘 알 수가 없다

28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關이었음직하고, 徇軍部는 軍事面에서 이와 마찬가지 기능을 발휘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요컨대 이 시대의 政治가 豪族聯合 政治였음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한편 王 權을 배경으로한 行政機構로서 內奉省이나 兵部와 같은 官府가 존 재하였음도 또한 주목된다. 內奉省은 王命을 받들고 政策을 시행 한 기관이었고, 兵部가 軍事面에서 이에 상응하는 구실을 행하였 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內軍이나 內泉部와 같은 國王의 親衛軍이 나 王宮의 經濟的 뒷받침을 해주는 官府도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 한 점에서 혹은 정치기구상에서 볼 때 國王의 권력이 강대한 것으 로 비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國王은 豪族聯合體의 중심이 되 는 존재였으며, 豪族들 각자도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그에 상응하 는 것들을 거느리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만큼, 이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크게 말하여 高麗의 초 기에는 國王을 중심으로 결합한 豪族들의 聯合에 의하여 政治가 운영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2) 內議省의 設置 앞 장에서 설명한 高麗 초기의 정치기구는 대체로 新羅와 泰封 의 제도를 따른 것이었다.27) 그러나 王建이 弓裔의 部將으로서 활약하고 있었던만큼, 어느 편인가 하면 泰封의 제도를 많이 따랐 었다. 그러한 사정은 新羅 泰封의 官制와 太祖 때의 그것과를 연결 지어 본 다음의 一覽表 表 3 를 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으 로 믿는다. 27) 高麗史의 撰者도 高願太祖 開國之初 參用新羅 泰封之制 設官分職 以諧庶 務 (高賭史 76 百官志 序)라고 하였다

29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表 3 高麗 太祖時 官府의 新羅 泰封 官府에 대한 比定 新 羅 泰 和 自 廣 爸 內 執 事 封 太 祖 評 省 廣 評 省 奉 省 內 奉 省 徇 軍 部 (?) 徇 軍 部 部 兵 部 部 兵 部 兵 倉 部 大 龍 部 倉 左 右 理 方 府 義 刑 臺 義 刑 臺 船 水 壇 都 航 司 部 物 藏 省 物 藏 省 納 貸 府 內 泉 部 珍 閣 省 白 書 省 禁 書 省 內 軍 그런데 太祖는 뒤에, 이같이 대체로 과거로부터 계승되었다고 생각되는 것들 이외에 새로운 官府를 첨가하기에 이르렀다. 그것 이 內議省이었다. 이 內議省에 대하여 그것이 政事의 協議 諫靜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고 이를 설치하는데는 儒敎의 政治的 理想 을 실현시키려는 儒臣들의 노력이 개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고 추측하는 견해가 있다.28) 이러한 견해는 이 기구가 지니는 의 의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데, 이러한 의견을 토대로 內議省에 대한 몇 가지 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內議省이 언제 설치되었는가 하는 문제인데, 현재 불행히 도 이에 대한 분명한 기록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우리가 알 수 있 28) 李泰鎭 高賴 宰府의 成立 歷史學報 56(1972) pp 참조

30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는 한, 太祖 13년(930) 2월에 白書省의 郞中인 行順과 英式을 內 議舍人으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에 속한다.29) 뒤에 나오는 바와 같이 內藏省에는 그 장관으로 令이 있었는데 그 令에 대한 기록은 光宗 때에야 비로소 나타나고 있다.30) 그러나 위의 두 舍人의 임명은 아마도 內議省의 설치 자체를 의미할 가능성이 크다고 믿는다.31) 왜냐하면 太祖 13년(930)에는 여러 면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 들 이 일어났으며, 그러한 사건들은 太祖가 後三國을 통일할 기틀 을 마련해 주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중대한 사건들이었기 때문이 다. 즉 그해 1월에 太祖는 古昌郡(安東)에서 甄萱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는데, 이것은 新羅의 근거지였던 慶尚道 지방에서 後百濟 의 세력을 몰아내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고, 그 결과 後百濟 와의 대립은 忠南 지역으로 축소되기에 이르렀었다.32) 그리고 이 해 2월에 新羅의 敬順王이 太租와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太祖는 昵於鎭(安康)으로 갔을 뿐 金城(慶州)까지는 가지를 않고 돌아왔 었다. 그러다가 다음해에 드디어 太祖는 金城으로 가서 敬順王을 만나게 되었다. 이로써 볼 때에 太祖는 統一에 대한 어떤 서광이 비치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음직하다. 이에 따라서 內議省과 같은 새로운 行政機構를 생각하기에 이르지 않았나 한다. 혹은 內 29) 高麗史 1 太祖世家 13년 3월 條에 白書省郞中行順 英式 並爲內議舍人 이 라고 하였다. 30) 加子伷元服, 立爲王太子 內史 諸軍事 內議令 正胤 高麗史 卷2 光宗世家 16 년 2월 31) 李泰鎮은 太祖 즉위 이후 그 13년 사이의 언젠가에 신설되었을 것이라고 하였 다. 高麗 宰府의 成立 p.11 32) 이때 東海岸의 溟洲(江陵)로부터 興禮府(蔚山)에 이르는 110여城이 高麗에 항복해왔었다. 高隨史 卷1 太祖世家 13년 2월 乙未 條 참조 그리고 大丞 弟弓을 天安都督府使. 元甫 元式을 副使로 임명한 것은 忠南지방의 戰線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생각된다. 同上 8월 己亥 條 참조 河炫綱 高鹿王朝의 成立과 豪 族研合政權 한국사 4(1974) pp 참조

31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議省의 장관인 令이 아니라 하급 관리인 舍人의 임명을 해당 官府 의 始置 로 볼 수 없지 않느냐고 할는지 모르지만, 그러한 경우는 종종 있어왔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33) 그 때 官府가 學問 특히 儒敎와 깊은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함은 이미 지적된 바이지만, 수긍이 가는 견해이다. 이와 관련해 서는 우선 白書省의 郞中으로 있던 인물들이 內議舍人으로 임명 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白書省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學 問的인 일에 관계되는 기관이었다. 그렇다면 內議省도 學問과 관 계가 깊은 기관이었다고 생각해서 좋지 않을까 한다. 다음으로는 그 해 12월에 太祖가 西京으로 가서 學校를 세웠다는 것이 비록 직접적은 아니지만 이와 관련이 있음직하다. 太祖는 學問을 진흥 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을 이해에 더욱 굳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學問을 진흥시켜야겠다는 것은 결국 그것이 政治에 필요하다고 생각된 때문이겠는데, 같은 해에 설치된 內議省이 바로 이러한 學 問과 政治와를 연결시켜주는 기관으로 추측해도 좋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뒤에 王融과 같이 여러 차례 知貢擧가 되었던 大學者나, 또 崔知夢과 같이 經史를 널리 섭렵하고 天文 卜筮에도 정통한 學 者가 內議令으로 임명되고 있는 것은 이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다.34) 內議舍人이 中書門下省(內史門下省)의 中書舍人(內史舍人)이 되 고, 中書舍人이 省郞의 구성원으로서 諫靜 封駁을 맡았다는 사실 에 근거해서, 內議省을 政事의 協議와 諫靜을 담당한 기구로 생각 한 견해도 적절한 해석이었다고 믿는다. 다만 內議省이 차지하는 33) 李基白 稟主考 李相佰紀念論叢 (196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4) p.139 참조 34) 王融이 內議令이었던 것은 三國遺事 卷2 紀異 金傅大王 條에 보이는 册尚父誥 에, 崔知夢이 內議令이었던 것은 高觀史 92 崔知夢傳에 나온다

32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行政機構上의 공식적인 위치는 그리 높았다고는 생각되지가 않는 다. 위에서 언급한 金傅에 대한 册尚父誥에서 內議令이 副書를 할 위치에 있지 못했던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內議令이 國王 의 정치적인 顧問機關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때문이 아닐 까 한다. 內議省이라는 명청에 內 字가 붙어있는 것은 그러한 國王과의 친밀성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해석해서 좋을성 싶다.35) 그러나 그들의 건의가 政策의 결정에서 무거운 비중을 차지하 게 되었던 때문에, 內議省의 실질적인 중요성은 증가되어갔던 것 이 아닐까. 가령 太祖가 돌아갔을 때. 百官이 內議省 문 밖에 나란 히 서서 遺詔를 받들었다는 것은 그러한 결과일 것이다.36) 그리 고 景宗의 金傅에 대한 册尚父誥에서 內議令이 副署는 하지 않았 지만 이를 奉行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사실도 그 표현일 것이 다.37) 그리고 光宗이 아들 伷를 太子로 책봉할 때에 그에게 동시 에 內議令이란 관직을 수여한 것도 역시 주목되어야 하겠다.38) 또 光宗 23년에 宋으로 파견된 使行에서 內議侍郞이 內奉卿이나 廣評侍郞보다 위인 正使로서 파견된 사실에도 이 점이 나타나 있 다.39) 요컨대 內議省은 처음엔 그 공식적인 지위가 높지를 못했 으나, 學問的 識見이 높은 인물들이 임명되면서 國王의 정책 결정 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크게 발휘함으로 해서 점차 그 중요성이 커 져갔다고 할 수 있겠다. 35) 그런 의미에서 內奉省 혹은 內軍의 內 字와 상통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고 하겠다. 이에 대해서 이와 대조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廣評省의 廣 字가 아닐까 한다. 36) 有頃而薨 太子 諸王 室 近臣 皆擗地哀號 百官列位於內議省門外 王規 出宣遺命 高雜史節要 1 太祖 26년 5월 丁酉條 37) 위의 册尚父誥에는 大匡 內議令 兼 摠翰林 臣融宣奉行 이라고 하였다. 38) 註 30) 참조 39) 高麗史 2 光京世家 23년 條 및 李泰鎭 高麗 宰府의 成立 歷史學報 56(1972) p.13 참조

33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그러나 이러한 점을 고려해서 內議省을 곧 專制政治에 봉사하 는 기관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內議省의 非專 制的 성격이 강조되는 견해는 옳은 것이라고 믿는다.40) 內議省은 國王과 직결되어 있는 기관이긴 하였으나, 國王의 命을 받들어 행 하는 行政機構이기보다는 國王에 대한 政策의 建議機關이었을 것 이다. 그리고 이들의 건의는 學問的 권위 혹은 儒學의 권위에 뒷 받침된 것으로서, 國王에 게도 상당한 압력을 가지고 받아들여졌 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內議省이 장차 諫靜 封駁을 맡은 中書 門下省의 郞舍로 발전하게 되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內議 省의 등장은 장차 高麗에서 貴族政治機構가 형성될 싹이 돋아나 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徐弼과 徐熙의 父子 가 內議省의 官職에 임명되었었다는 사실이다. 徐弼은 歸化한 中 國人을 지나치게 우대하지 말도록 光宗에게 直諫한 것으로 유명 하며, 아마도 그러한 이유로 해서 뒤에 光宗의 配享功臣으로 책명 된 것이 아닌가 한다.41) 徐熙는 光宗代에 科擧에 합격하여 평탄 한 出世의 길을 밟아 成宗 후기에는 內史令에 임명된 巨物이었다. 그 도 또한 成宗의 지나친 儒敎政策을 비판한 것으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이들은 모두 學者이긴 하지만 新羅 이래의 學問的 전통을 이어온 學者家門 출신이 아니라, 지방 豪族 출신의 學者였다. 말하자면 새로운 타입의 學者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의 견은 결코 崔承老와 같은 新羅 六頭品 계열의 儒學者와는 같지가 않았다.42) 이러한 인물들이 光宗代에 內議省에 奉職하고 있는 것 40) 李泰鎭 高麗 宰府의 成立 p.11 41) 高麗史 93 徐弼轉 및 李基白 貴族社會의 形成 한국사 4(1974) p.167 참조 42) 李基白 高麗 貴族社會의 形成 pp 참조

34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이다. 그러므로 光宗은 이때에 새로운 側臣들을 중시하고 內議省 을 疏外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주목에 오르는 것이 崔承老가 光宗을 평 하여 雙冀를 등용한 이래, 文士를 崇重하여 恩禮가 지나치게 많 아 이로 말미암아 才가 아닌데도 濫進하고 차례가 아닌데도 갑자 기 승진하여 歲時가 차지 못하여 곧 卿相이 되고, 혹은 매일밤 引見하고 혹은 매일 낮 延容하여 이로써 즐거움을 도모하고 政事 에 게으르니, 軍國의 要務가 막혀서 통하지 않았다 라고 한 사실 이다.43) 여기서 軍國의 要務가 막혀서 통하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까지 위에서 서술한 行政機構들이 제대로 운용되지 않았다는 뜻임이 분명하다. 그런 속에는 廣評省이나 徇軍部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또 內議省까지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배제되지는 않는 다. 그 대신 科擧에 합격한 卿相이 깊이 政治에 참여하고 있었다 고 보여진다. 그러나 光宗이 죽은 뒤에 모두 숙청되어 그 이름조 차 전혀 전하지 않는 南北庸人 출신의 젊은이었다고 하는 이들 卿 相이 어떤 기구에 소속되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光宗 때에 內史令이 새로 등장하고 있으므로, 혹은 內史省 이 있어서 그것이 새로운 政策樹立機構로써 중요성을 띠게 되었 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현재로써는 이 內 史令의 존재를 곧 內史省의 설치로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史 料의 뒷받침이 되어 있지가 못하다.44) 內史令은 景宗 초년에도 43) 高麗史 卷 93 崔承老傳 44) 內史令에 대한 기록으로는 光宗이 아들 伷를 太子로 책봉할 때에 內史 諸軍 事 內議令으로 삼았다는 기사(高麗史 卷2 光宗世家 16년 2월)와, 景宗이 荀質 申 質을 左右執政에 임명하면서 內史令 을 겸임케 했다는 기사(高麗史 2 景宗 世家 元年)가 있을 뿐이다. 이같이 廣評省이나 內奉省 內議省 등의 경우와 같이 그에 소속한 여러 官職이 나타나지 않고, 다만 그 長官職인 內史令만이 나타나고 있어서, 이를 독립된 官府로 성립되었다고 보기에는 불안한 점이 있다

35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나타나기는 하지만, 필자는 차라리 景宗의 후년에 崔知夢을 중히 써서 內議令으로 임명한 사실을 중시하고, 高麗의 政治가 儒學者 인 貴族 중심으로 전환해가는 점에 도리어 주목하고자 한다. (3) 三省體制의 成立 高麗의 政治機構가 貴族政治를 구현하는 형태를 갖추게 된 것 은 成宗 때였다. 成宗代에 高麗가 中央集權的인 貴族社會로의 방 향을 잡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필자가 따로이 강조한 바가 있었 다.45) 이와 같은 큰 흐름 속에서 그 政治機構도 또한 貴族政治的 성격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成宗이 즉위한 다음해인 원년(982) 3월에 高麗는 百官의 명칭 을 고쳤다고 전한다. 高麗史에는 다만 그 사실을 전할 뿐 그 구체 적인 官號 변경의 실제를 설명해 주지는 않고 있다.46) 그런데 高 麗史節要를 보면 이때에 內議省을 內史門下省으로, 廣評省을 御事 都省으로 고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47) 이러한 견해는 高麗史 百官志에도 나타나고 있다.48) 그러나 이러한 高麗史 및 高麗史節 要의 이해는 잘못된 것이며, 그것이 是正되어야 하리라고 함은 이 미 지적된 대로이며,49) 또 위에서 언급해온 바와 같다. 이제 이에 따라서 成宗 원년에 성립된 3省과 그 前身과의 관계를 一覽表로 작성 하여 제시하면 다음의 表 4 와 같다. 그러나 이 3省 이외의 官府에 대하여는 그 명칭이 어떻게 변경 45) 李基白 高麗 貴族社會의 形成 한국사 4(1974) 46) 高麗史 卷3 成宗世家 원년 3월 庚戌條에 改百官號 라고 하였다. 47) 高麗史節要 2 成宗 원년 3월 條에 改百官號 以內議省爲內史門下 廣評省爲御 事都省이라고 하였다. 48) 高麗史 卷76 百官志 1 門下府條 및 尙書省條 49) 李泰鎭 高麗 宰府의 成立 歴史學報 56(1972) pp 참조

36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되었다는 기록이 없으 表 4 太祖 및 成宗元年의 三省 關係 며, 따라서 이것만으로 太 서는 百官의 명칭을 고 廣 評 省 쳤다는 것이 과장된 표 內 議 省 현이 아닌가 하는 의심 內 奉 省 祖 成 宗 원 년 內史門下省 御 事 都 省 을 갖게 된다. 그러나 만일 高麗史 百官志에 國初 라고 되어 있는 부분의 것들 중에 이 成宗 원년에 고쳐진 官號들이 있다고 보는 경우에는 위의 기사가 노상 과장된 것만이 아님을 알게 된다. 가령 이제 高麗史 百官志 에서 國初 로 되어 있는 官號들을 뽑아서 一覽表로 만들어 보면 다음의 表 5 와 같다. 이런 때의 國 初 를 어느 시기 로 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은 퍽 어 려운 문제이긴 하 다. 그러나 內議 省의 경우만을 뺀 다면, 成宗 14년 이전의 시기로써 表 5 高越史 百官志에 나타난 國初 官府 國 內 初 議 省 成宗원년 成宗 14년 內史門下省 選 官 尙 書 吏 部 司 績 尙 書 考 功 民 官 尙 書 戶 部 禮 官 尙 書 禮 部 工 官 尙 書 工 部 臺 御 史 臺 秘 書 省 司 憲 史 館 이렇게 中國化된 內 書 省 官號를 사용할 가 太 卜 監 능성이 가장 많은 太 史 局 시기는 成宗 원년 典 獄 署 大 理 寺 이 아닐까 한다. 掖 庭 院 掖 庭 局

37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그 첫째 이유는 兵部와 義刑臺의 官號 변경에 대한 다음과 表 6 같은 사실이 이와 비교되기 때문이다. 表 6 兵部와 義刑臺의 官號 變更 太 租 兵 義 刑 後 成宗 14년 이에 따르면 위 의 表 5 에서 部 兵 官 尙 書 兵 部 國初 로 되어 있 臺 刑 官 尙 書 刑 部 는 選官 民官 禮官 工官과 같은 시기 에 들어가야 할 兵官 刑官이 太祖 때로 되어 있지가 않다. 太祖 이 후 成宗 14년 이전으로서 兵官 刑官의 명칭이 쓰여질 가능성이 가 장 큰 시기는 아무래도 成宗 원년이 첫째로 예견된다. 그러므로 위의 國初 는 결코 太祖 때일 수가 없다. 물론 百官志에는 內議 省의 경우와 같이 太祖 때를 國初 로 표현한 경우도 있으므로, 위의 表 5 에 나오는 國初로 되어 있는 官府의 모두가 成宗 원 년에 改稱되었다고는 할 수가 없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選官 民 官 禮官 工官과 兵官 刑官의 6官을 비롯한 그 대부분이 成宗 원년 의 改稱이었다고 믿는다. 다음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둘째 이유는, 종래 전혀 나타나지 않 던 이들 官號가 成宗 원년 이후에 비로소 나타나기 때문이다. 가 령 高麗史에 나오는 것을 골라 보면, 成宗 원년에 崔承老가 行選 官御事에, 2년 5월에 徐熙가 兵官御事, 鄭謙儒가 工官御事에 임명 되었다. 그러므로 적어도 選官 兵官 工官 등은 成宗 원년 3월에 改百官號 할 때에 그렇게 고쳐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50) 50) 6官이 成宗 원년에 설치되었다는 것은 이미 邊太资氏가 지적한 바 있다. 高麗 時代 中央政治機構의 行政體系 高麗政治制度史硏究 p.6. 李泰鎭은 6官이 成宗 원년에 설치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國初 는 太租 때로 봄이 타당하며, 成宗 원년에 설치된 6官을 高麗史 撰者가 太祖 때부터 廣評省 밑에 정연한 6官의 체계가 갖추어져 있던 것으로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생긴 過誤일 것이라고 하였 다. 李泰鎭 高麗 宰府의 成立 pp 이 견해는 어쩌면 지나친 해석이 아닐는

38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이같이 成宗의 官制 정비작업은 官府의 명칭을 개정하는 작업 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이러한 명칭 개정의 원칙은 고유한 전통적 용어보다는 漢化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었다.51)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용어의 개칭만이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명 칭이 고쳐진 官府들을 두루 조사해 보면, 거기에는 일정한 체계가 엿보이며. 그러한 체계는 미리 마련된 어떤 腹案에 입각해서 이루 어졌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 計劃案은 그것 이 짜여진 원년 3월에 모두 그 실질적인 내용이 갖추어졌던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것은 이 새로운 官府들에 대한 人事措處가 그 것이 成案되었다고 생각되는 원년 3월에 모두 정해지지 않고 있 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러한 制度의 내용까지가 실질적으로 갖추어지기는 成 表 7 成宗 初年의 새 人事措處 年 代 成宗 원년 (982) 成宗 월 成宗 월 成宗 월 成宗 월 2년 (983) 1 2년 (983) 5 2년 (983) 5 2년 (983) 6 官 職 人 名 行 選 官 御 事 崔 承 老 門下侍郞平章事 崔 承 老 兵 官 御 事 徐 工 官 御 事 鄭 謙 儒 刑 官 御 事 薛 神 祐 典 據 高 麗 史 崔承老傳 高 麗 史 世 家 熙 지 모르겠다. 高麗史 撰者는 정확한 설치 연대를 모르는 것들을 막연히 國初 에 설치되었다고 표현한 것이 아니었을까. 어떻든 6官이 成宗 원년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던 것임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51) 이러한 원칙은 成宗이 地名율 개정하는 작업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改州府 郡縣及關驛江浦號 (高麗史 卷3 成宗世家 11년 11월 癸巳)했다는 것의 구체적 인 예가 高雜史 地理志에 成廟 所定의 別號로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몇 개의 예를 들면, 幸州가 德陽, 水州가 漢陽, 廣州가 淮安, 果州가 富安. 牙州가 寧仁으 로 되어 있는 따위이다. 이들이 모두 전통적인 地名을 무시하고 漢式으로 雅化된 것임을 알 수 있다

39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宗 2년(983) 5월의 일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것은 이때에 처음 으로 3省 6曹 7寺를 정했다 고 하였는데,52) 이것이 바로 이 사 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官府들에 대한 人事措處도, 表 7 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2년 5월경까지 행해지고 있다. 이런 여러 면에서 볼 때에 成宗 원년 3월에 시작된 政治制度의 改革은 2년 5월경에 이르러 일단 락 지었다고 생각된다.53) 이렇게 보아오면 成宗 원년으로부터 2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高 麗의 政治機構는 內史門下省과 御事都省을 중심으로 하고, 御事都 省 밑에 選官 兵官 民官 刑官 禮官 工官의 6官이 예속된 것으로서, 3 省 6官制度라 부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高麗史에서 이를 3 省 6曹 7寺라고 한 것은 반드시 근거가 있는 서술이었으리라고 생 각된다.54) 이를 一覽表로 작성하면 다음의 表 8 과 같이 될 것 이다. 表 8 三省 六官 一覽表 [三省] 內史 門下省 御使都省 그러나 일단 이렇게 成宗 2년 [六官] 에 갖추어진 官制가 成宗 14년 選官 兵官 民官 刑官 禮官 工官 (995) 5월에 다시 改定되기에 이르렀다.55) 그 이유는 成宗 2 년의 것이 諸官司의 事體는 비록 禮典에 따랐으나 額名은54) 52) 高賭史 卷3 成索世家 2년 5월 條에 始定三省 六曹 七寺 라고 되어 있다. 53) 成宗 원년 3월에 이미 官制를 새로 마련하고 있옴에도 볼구하고, 成宗 2년 5월에야 3省.6曹.7寺를 정했다고 한데 대하여, 邊太资氏는 基本官制의 完成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高願時代 中央政治機構의 行政粗系 p.6, 李泰鎭氏는 6官御事의 임명에 의한 그 기능의 발휘 를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高麗 宰府의 成立 p.29 54) 6官을 6曹라고 적은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그것이 6部의 체제인 것은 분명 하다. 이때의 寺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잘 알 지를 못하겠다. 그러나 6官 이외에 7寺에 해당하는 官府들이 있었을 것임은

40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자못 權稱한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典常을55) 살피고 그 가부를 가려서 假號를 모두 除하고 通規를 잘 나타내도 록 한 것이 成宗 14년의 官制 改定이었다 한다.56) 이러한 원칙에서 행해진 成宗 14년 改革의 결과로 이루어진 高 麗 官制의 내용은 高麗史 百官志에도 그 일부가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百官志에 제시된 내용은 극히 제한된 것이어서, 成宗 14년 에 이루어진 官制의 全貌를 이것만으로써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때에 이루어진 官制의 내용을 거의 완전하게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穆宗 원년에 改 定된 田柴科이다.57) 이미 다 아는 바와 같이, 高麗의 田柴科는 景宗 원년에 비롯한 다. 그런데 景宗 원년의 田柴科는 官吏의 色服制와 文 武 雜의 차 별에 따라서 일정한 品을 정하고, 그 品에 따라서 지급하는 田柴 의 量을 규정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구체적인 官職이 표 시되어 있지가 않았다. 그런데 穆宗 원년에 개정된 田柴科는 田柴 를 지급받는 官職을 18科로 나누어서 그들이 받아야할 田柴의 量 을 규정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田柴科 규정에는 원칙적으로 모 든 中央官職名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옳다. 그리고 穆宗 원년 (998)의 田柴科 규정에 나타난 官職名은 그보다 3년 전인 成宗 능히 추측할 수가 있다. 이때의 6官制가 中國의 어느 制度를 모범으로 한 것인가 에 대하여는 李泰領氏의 상세한 고중이 있으나 高麗 宰府의 成立 pp.30一31. 필자는 이에 대하여 赞反間에 이를 판단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55) 高麗史節要 2 成宗 14년 5월 條에 下敎 改定官制 라고 하였다. 56) 成宗 14년에 官制를 개정할 때의 敎書는 高麗史 卷3 成宗世家 14년 5월 戊午條 에 나타나 있다, 이제 그 개정의 취지를 나타내주는 대목만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今以諸官司事體, 雖遵於禮典, 額名頗有所權稱 (中略). 考厥典常, 分其可否, 悉 除假號克示通規. 57) 穆宗 원년 田柴科의 田柴 支給 規定은 高麗史 78 食貸志 田制 田柴科 條에 나타난다

41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表 9 穆宗元年 田柴科에 나타난 文班職 一覽表 官府名 內 史 門下省 尙書都省 1 科 2 科 3 科 4 科 5 科 內史侍郞 平章事 內史令 門下侍郞 左散騎常侍 侍 中 平章事 參知政事 右散騎常侍 (致仕侍中) 6 科 7 科 8 科 諫 議 給 事 大 夫 (散左僕射 ) 左僕射 (致仕左僕射 左 丞 ) (散右僕射 右 丞 右僕射 (致仕右僕射 ) 六 部 六 尙 書 諸侍郞 ( 散 侍 (散六 尙書) 郞) 御史臺 御史臺夫 中 丞 (散卿 諸少卿 監 監 大常少 卿 軍器少 卿 寺 監 大常府 軍器監 秘書省 殿中省 少府寺 將作監 秘書監 殿重監 小府監 將作監 國子司 業 國子監 掖庭局 諸 局 (六 局) 中尙署 京市署 諸 武庫署 大官署 大倉署 典廐署 署 供御署 典客署 大樂署 開城府 諸陵署 檢 校 將仕郞 開城尹 檢校太師

42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9 科 10科 11科 12科 13科 內常侍 諸陵令 15科 16科 17科 18科 起居郞 左補闕 左拾遺 主 書 起居舍 右補闕 右拾遺 錄 事 直 省 都 事 直 省 諸 員 外 散員 諸郎中 郞 (散 (外郞 ) 郞中) 殿中侍 侍御史 御史 監察御 使 (散少 (散寺 寺 監 寺 監丞 卿 監) 監丞) 主簿 大常博 士 軍器少 軍器丞 監 秘書丞 秘書郞 殿中丞 內給事 國子博 士 14科 國子助 敎 大 學博士 主 事 令 史 錄 事 令 史 知 班 正八品 八品丞 令 九品丞 書 史 丞 令 (散正八品) 四門博 士 大 學助敎 大常司 儀齋郞 大 祝 監 事 秘書敎書郞 秘書正字 楷 書 主 事 監 事 監 作 四門助敎 錄 事 書 史 國子典 學 內 閥 者 內侍伯 內諸者 東西頭 (散供奉官) 監 供奉官 諸 局 奉 (散諸 六 局 直 (散直 書令史 御 奉御) 長 長) 中尙令 京市令 武庫令 司 庫 大官令 大倉令 司 廩 典廐令 供御令 典客令 大樂令 濟陵丞 製述明 經登科 將仕郞

43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14년(995)에 이루어진 官制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 지 않을까.58) 그것이 불과 3년밖에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그 3년 사이에 官制가 개혁되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成宗 14년의 官制를 이해하기 위하여 穆宗 원년 田柴科에 나타나는 官職名 중에서 文官職에 해당하는 것만을 一覽表로 작성하여 제시하면 앞의 表 9 와 같다.59) 이 表 9 에 나타난 바와 같은 3省을 기본으로 하는 高麗의 政治機構의 成立은 곧 高麗의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으로 이해 되지만, 이 政治機構 속에 나타난 貴族政治的 性格은 章을 달리해 서 검토해 보아야 하겠다. (4) 三省體制의 性格 高麗의 政治機構는 成宗 14년에 일단 정비되었고, 그 내용이 穆宗 원년의 田柴科 規定에 나타나 있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언급 한 바와 같다. 이제 穆宗 원년의 田柴科 規定에 나타난 官職에 의 거 해 高麗의 政治機構에 대한 검토를 꾀하여 볼까 한다. 우선 지적하고 싶은 것은, 成宗 14년의 政治機構는 크게 보아 文班 武班 雜業 南班의 네 부문으로 나뉘인다는 사실이다. 穆 宗 원 년 田柴科의 各科에 배정된 官職들이 列記된 순서를 자세히 검토 58) 이 점은 필자가 高麗 兵制의 幣備過程에 대한 分析을 행할 때에 이미 언급해 둔 바가 있다. 이때에 同田柴科에 나타나는 武官職의 一覽表도 제시되었었다. 李基白 高麗 二軍 六衛의 形成科程에 대한 再考 黃義敦記念史學論叢(I960) 高麗 兵制史究硏(1968) pp ) 원래 田柴科의 규정에는 官府名이 기 록되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一覽表를 작성하는데 있어서는 高麗史 百宫志를 두루 참조하였다. 혹 잘못된 점이 있으면 敎示가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致仕職과 散職은 이를 ( ) 안에 넣어서 구별을 지었다

44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해 보면, 그것은 일정한 서열을 갖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맨 처음에 文班에 속하는 官職을 쓰고 다음에 武班, 그리고 雜業 南班 의 순서로 적혀 있는 것이다. 이 순서는 원칙적으로 흐트러지지 않고 있다. 다만 16科 이하의 吏層에 관한 부분만이 혼란이 있는 듯하게 보이나, 실상 이 부분은 이들 吏屬을 어느 官府에 배정시 켜야 될지도 잘 모르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지금으로써는 무어라 말하기 곤란한 처지이다.60) 따라서 적어도 品官인 경우에 는 분 명히 그 소속을 가려낼 수 있는 武班職을 기준으로 하고, 그 앞에 기록된 것은 文班, 그 뒤에 기록된 것은 雜業과 南班으로 판정하 면 틀림이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雜과 南班을 가려내기란 그리 힘든 일이 아닌 것이다. 表 9 는 이러한 기준에 입각해서 各科 에서 武班職 앞에 기록된 文班職을 가려내서 一覽表로 작성해 본 것이다.61) 本稿가 政策을 결정하는 政治權力의 所在를 찾아보는 작업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文班職에 대한 검토로서 충분 하다고 믿기 때문이다.62) 우선 전체를 크게 볼 때에, 3科 이상의 高位職이 內史門下省과 尚書都省, 즉 3省에 한하고 있는 사실이 주목된다. 田柴科에서의 60) 가령 16科에서 武班인 諸尉隊正보다 앞서 雜業인 書學博士 篇學博士 司辰 可 曆 卜博士 卜正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諸尉隊正이 品外인데 대해서 書學博士등이 從九品이었던 데에 원인이 있지않나 한다. 그러므로 지금 16科 이하에 있어서의 서열의 혼란은 단순한 혼란이기보다는 그 정당한 이유를 모르 기 때문에 혼란된 것으로 보이는데 지나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61) 武班職보다 서열이 앞서는 것을 文班職으로 판정하는 경우에 12科의 六衛長 史와 14科의 六衛錄事는 文班職에 소속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長史는 文班職인 六局直長보다 서열이 앞서며, 錄事는 역시 文班職인 正八品承 令보다 앞선다. 이것은 이들이 文班職인 때문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잠시 文班職 一覽表에서 제외하였다. 62) 이 田柴科 規定에는 몇 가지 빠져 있는 官職이 있는 것 같다. 가령 7科에 散卿監이 있는데, 정작 卿監은 없는 것이다. 諸少卿監이 8科이고 散少卿監이 9科인 것을 보면 6科에 卿監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는 軍器監이 있다. 散軍器監(8科)은 있는데 정작 軍器監은 없는 것이다. 이들은 아 무래도 누락일 것만 같다. 이 같은 약간의 누락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당시의 政治機構의 대체를 이해하는데는 지장이 없다고 믿는다

45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3科 이상은 官品으로서는 곧 2品 이상이 된다.63) 그리고 이 2品 이 상의 高位官職은 위의 3省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2 品 이상이 高麗에서는 형식상 文武를 초월한 宰臣에 해당한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바와 같다.64) 穆宗 원년 田柴科에 나타난 官職에서 의문이 나는 것은 2品 이 상의 官職이 있는 官府로서 3省과 함께 흔히 兩府 혹은 宰樞라 불 리어온 中樞院 소속의 중요 官職이 빠져 있는 점이다. 中樞院 소 속의 것으로 분명한 것은 16科의 中權別駕 뿐인데 이것은 吏展에 속하며, 18科의 通引도 中權院 소속임즉 하나 이 역시 吏屬인 것 이다. 그러므로 吏展만이 여기에 나오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中 63) 현재 樹宗 원년 田柴科의 各科에 배정된 官職을 官品과 정확하게 비교할 자료 는 가지고 있지를 못하다. 高麗史 百官志에 기록되어 있는 官職들의 官品온 文宗 때의 것이고, 그 이전 것은 없다. 그런데 그 사이에는 官品의 변동이 있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약간의 변동을 예상한다 하더라도, 各 科의 배정은 이미 李佑成氏가 주장한 바와 같이 官品에 상응하며 (閑人 白丁의 新解 釋, 歷史學報 19(1962) p.60) 원칙적으로 다옴과 같은 방식으로 田柴科와 官品이 비정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一 科 從 一 品 二 科 正 二 品 三 科 從 二 品 四 科 正 三 品 五 科 從 三 品 六 科 正 四 品 七 科 從 四 品 八 科 正 五 品 九 科 從 五 品 十 科 正 六 品 一 一 科 從 六 品 一 二 科 正 七 品 一 三 科 從 七 品 一 四 科 正 八 品 一 五 科 從 八 品 一 六 科 正 九 品 一 七 科 從 九 品 一 八 科 吏 屬 이점은 가령 表 9 에서 14科에 正8品承 令이, 15科에 8品丞 令(아마도 從8品 丞 令)이, 그리고 16科에 9品承이 배정되어 있는 것으로써 알 수가 있다. 그리 고 가령 3科의 參知政事는 高麗史 百官志에 從2品으로 되어있고, 6科의 諫議大 夫는 高麗史 百官志에 正4品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도 또한 알 수 있다. 그러나 3科의 左右僕射는 高麗史 百官志에서는 正2品으로 되어 있어서 위의 表에 들어 맞지가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官職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약간의 변동을 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약간의 변동이 위의 큰 원칙을 뒤흔드는 정도의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朴菖熙氏는 高麗의 兩班功陰田柴法의 해석에 대한 再檢 討 韓國文化硏究院論叢 22 (1973) pp 에서, 이러한 약간의 예외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田柴科의 科가 官品과 일치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나, 이것은 大原則과 小變則과를 정당히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 결과라고 생각된다. 但 16科 이하에 끼어드는 吏屬에 대하여는 현재의 필자로써는 이를 정리할 능력 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64) 邊太燮 高麗宰相考 歷史學報 合輯(1967) 高麗政治制度史硏究(1971) p

46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樞別駕는 宣別駕 銀臺別駕와 나란히 기록되어 있어서, 이것만으로 판정한다면 南班 소속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어떻든 中柩院의 使 副使 등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혹은 이들이 兼職이었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으나 後考를 기다릴밖에 없다. 그리고 3科에 배정된 檢校太師는 주로 王子에게 주는 勳官이었으 므로 그것이 정치적으로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65) 이같이 3省은 2品 이상의 宰臣을 독점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行政機構들이 이에 예속되고 있었다. 가령 6部 7寺 3監 6 局 諸署를 대표로 하는 모든 行政機構들이 이 3省을 頂點으로 하 고 짜여져 있었다. 6部는 곧 吏 兵 戶 刑 禮 工의 諸部를 말하는 것임은 다 아는 사 실이지만, 이것은 行政官府의 대표적인 존재로써 尚書都省의 직속 기관이었다. 뿐 아니라 6部의 長官인 尚書 위에는 內史門下省의 宰臣들이 겸직하는 判事가 있어서, 이들이 실질적인 6部의 최고 실권자였던 것임은 이미 밝혀진 바와 같다.66) 그러므로 6部는 3 省에 소속되어 실무를 분담하는 官府였던 것이다. 寺 監은 7寺 3監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67) 7寺는 아마도 衛尉寺 太僕寺 禮賓省 司農寺 大府寺 司宰寺 司水寺일 것 이지만,68) 3 監은 지금 언뜻 어느 官府를 말하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를 않는 다. 6局은 尚食局 尚藥局 尙衣局 尚舍局 尚乘局 등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69) 이러한 7寺 3監 6局을 비롯해서 단독으로 그 官府名 65) 韓㳓劤 勳官檢校考, 震檀學報 合併號 (1966) pp ) 邊太變 高麗宰相考 pp.79一82 67) 高願史 卷78 食貨志 田制 田柴科 條의 文宗 30년 田柴科 11科 및 高麗史 84 刑法志 公牒相通式 京官 條에 7寺 3監이 나오고 있다. 68) 高麗史 百宫志에 나타난 여러 寺監들 중에서 表 9 의 一覽表에 단독으로 그 이름이 나오는 것을 빼면 本文에 적은 7寺가 나온다. 69) 但 나머지 하나는 잘 알 수가 없다

47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이 나오는 大常府 軍器監 등의 行政官府들은, 御史臺를 제외하고 는 모두 6部를 통해서 3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3省은 高麗 政治機構의 總她府였다고 할 수가 있다. 이 사실을 高麗史의 撰者는 宰相은 6部를 거느리고, 6部는 寺 監 倉 庫를 거느린다 (高麗 史 卷76 百官志 序) 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高麗의 政治制度는 三省體制였다고 해도 좋으라라고 믿는다. 그런데 그 3省, 특히 內史門下答의 宰臣들은 合坐制에 의하여 政策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70) 內史門下省의 宰臣은 百挨庶務 를 관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구체적인 것은 國政의 議政 이었던 셈이다. 이것이 新羅의 和白, 太祖 때의 廣評省에 內史門 下省 을 비유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 穆宗 원년 田柴科에 의하면 內史 門下省의 2 品 이상 官職으로는 內史令 侍中 內史侍郞平章事 門下侍郞平章事 衆知政事의 다섯이 있는데, 바로 이들 다섯이 소 위 5宰에 해당하였을 것이다.71) 이들 5 宰가 會議에 의하여 政策 을 결정하는 宰臣會議의 구성원이었음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國王은 行政機構인 6部가 上奏한 案件을 결정함에 있어 서 宰臣會議의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따라서 內史門下省의 宰府 는 議政機關이지 行政機關이 아니었다.72) 高麗 政治機構의 總帥 70) 高麗史 卷76 百官志 門下府條에 掌百揆庶務 라고 하였다. 71) 5宰에 대하여는 李齊賢이 櫟翁稗說에서 侍中 平章事 參知政事 政堂 文學 知門 下省事의 5職으로 보았고(櫟翁稗說 前集), 李丙燾氏가 이 견해에 따르고 있다 (韓國史 中世篇(1961) p.130 및 p,132). 이러한 견해는 文宗 때의 中書門下省 官制를 중심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5宰의 시초는 이미 成宗代에 있었을 것이므로, 이 成宗 14년의 官制를 중심으로 생각해야 하리라고 믿는다. 그렇게 되면 5宰를 人員數로 보아야 한다는 관점과도 들어맞아서 아무 矛盾이 없어진 다

48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府格인 內史門下省이 議政機關이었다는 것은 高麗의 政治機構가 官僚的이기 보다는 貴族的이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풀이될 수 가 있다.73) 內史門下省의 官職 중에서도 諫議大夫 이하 拾遺까지는 郞舍 혹은 省郞이라 하여 宰臣과는 다른 직무를 맡고 있었다.74) 그 임 무를 高麗史 百官志에서는 諫靜 封駿을 맡았다고 하였다.75) 그런 데 諫靜 封駿이라 한 것을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國王의 잘못을 시정하는 임무에 국한되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물론 郞舍가 國王에 대한 靜靜을 해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가령 穆宗 때에 諫議大夫였던 柳邦憲에 대해서, 穆宗이 狩獵을 즐겨하 자 그가 諫職에 있었기 때문에 누차 이를 諫했다 하고, 혹은 諫職 에 있으면서도 諫하는 임무를 게을리했다고도 한 것 따위가 그것 을 말한다.76) 그러나 실제로는 諫靜에 국한되지 않고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 친 의견을 올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국가의 전반적인 政 策의 건의를 그들의 임무로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成宗 7년 (988)에 左補闕 겸 知起居注인 李陽이 月令에 따라서 立春 전에 72) 邊太燮 高麗時代 中央政治機構의 行政體系, 高麗政治制度史硏究 pp 참조 73)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金龍德氏가 高麗時代의 署經에 대하여, 李丙燾紀念論 叢(1956) p.483에서 강조한 바가 있다. 74) 內史門下省의 品官으로서는 가장 낮은 主書와 錄事는 末端의 事務官吏이며, 그들은 郞舍에 돌어가지 않았을 것이다.(邊太燮 高麗의 中書門下省에 대하여, 高龍政治制度史硏究 p.39) 75) 高麗史 卷76 百官志 1 鬥下府 條에 門下府의 職務를 掌百揆庶務 라고 규정 한 뒤를 이어 其郞舍章諫諍封駁 이라고 하였다. 76) 柳邦憲墓訪에는 穆宗即位 制可禮部侍郞 右諫識大夫 餘如故 時穆宗頗好畋 獵行幸 公旣居諫職 故頻抗章疏辭 甚勁直 引古論今 不避諱斥 (朝鮮金石總覽 上 p.266)이라 하였고, 또 高麗史 卷93 柳邦憲傳에는 在諫官 或责以久不言 徐对云 奸以爲直 非吾所取 라고도 하였다. 위의 두 史料는 내용이 반대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後者가 옳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어떻든 諫官의 임무가 무엇인가 를 잘 말하여 주고 있다

49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土牛를 내야 한다든가, 王后가 獻種儀를 행해야 한다든가, 혹은 봄 에 암짐승을 희생으로 쓰지 말고 伐木을 금하자든가 하는 건의 를 올리고 있다.77) 분명히 郞舍인 李陽은 단순한 諫靜이기보다도 국가의 儀禮에 관한 몇 가지 새로운 政策的 건의를 하고 있는 셈 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는 右補闕 겸 起居注였던 金審言의 경우에 서도 알 수가 있다. 그는 成宗 9년 (990)에 說苑의 6正 6邪와 漢 書의 刺史 6조를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이 龜鑑으로 삼을 것과, 西 京에도 司憲官을 두어 糾理케 하자는 건의를 올렸었다.78) 역시 郞舍였던 金審言도 단순한 君王의 非를 諫하는 것이기보다도 국 가의 기본 정책에 대한 건의를 하였다. 이렇게 볼 때에 郞舍의 임무는 단순한 諫靜이기보다도 광범한 政策의 건의였다고 할 수가 있지 않을까 한다. 諫評 封駁 이라고 한 것 중의 封駿이 혹은 바로 이 政策의 건의를 말하는 듯도 싶 다. 왜냐 하면 위의 두 경우에 이들은 모두 封事 를 올린 것으 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封駿인 경우에는, 駿이 란 말 이 적극적인 건의이기보다도 기정 사실에 대한 부정적인 공박을 뜻하는 것일 터이므로, 글자대로라면 역시 諫靜과 마찬가지 뜻으 로 취할 수 있다. 다만 실제 郞舍들의 封事는 위에서 그 실례를 보아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보다 적극적인 政策의 건의를 내용 으로 하였다. 그리고 郞舍의 중요한 임무의 하나가 바로 이 政策 의 건의였다고 생각해서 잘못이 없을 것으로 믿는다. 물론 封事를 올려 政策을 건의하는 것은 항상 郞舍들만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宰臣들도 했을 것이며, 때로는 內史門下省의 소속 이 아닌 官吏들도 王命에 의하여 封事를 올려 政策을 건의하기도 77) 高麗史 卷3 成宗世家 7년 2월 壬子 條 참조 78) 高麗史 卷93 金審言傳 참조

50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하였다. 가령 成宗 원년(982)에 行選官御事였던 崔承老가 올린 긴 封事는 國政 전반에 걸친 政策에 대한 건의였다.79) 그리고 成 宗 6년(987)에 四門博士였던 柳邦憲도 政策 건의를 한 것으로 되 어 있다.80) 그러나 이것은 모두 王命에 의하여 특별히 행해진 것 이었다. 전자에 있어서는 5品 이상 관리들에게 成宗이 時政得失을 논하도록 요구한데 대한 응답이었으며, 후자에 있어서는 儒臣들에 게 對策을 물은데 대한 응답이었었다.81) 그러므로 이것은 말하자 면 특별한 경우이고, 그들이 직책상 행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그 직책이 아닌데도 政策的인 건의를 하였다가 越權行爲 로 규정된 예가 있다. 供賓令이었던 鄭又玄의 경우가 그러한데, 徐熙의 옹호로 處罰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다른 宰相들은 모두 그 의 處罰에 찬성하였었다.82) 이것은 결국 政策의 건의를 포함한 時政에 대한 의견을 封事로 올리는 것은 郞舍의 정책에 속하는 일 이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렇게 건의된 政 策들이 宰相들의 會議에 의하여 논의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郞舍는 政策의 건의나 諫靜 뿐 아니라 또 署經의 권한 을 행사하고 있었다. 署經은 官吏의 人事에 있어서 임명장인 吿身 에 일정한 官職者의 署名을 거치는 것을 말하지만, 그 署經의 권 한을 郞舍들이 지니고 있었다. 만일 이 署經을 거치지 못하면 그 79) 高麗史 卷93 崔承老傳 참조 80) 柳邦憲墓誌, 朝鮮金石總覽 上 p.265 참조 81) 高麗史 卷3 成宗世家 원년 6월 甲申 條에 后德惟臣 古今所同 朕新摠萬機 恐有闕政 其京官五品以上 各上封事, 論時政得失 이라 하였고. 柳邦憲墓誌에는 雍 熙西年丁亥 成宗初踐祚 命儒臣封策 公又中科首 上褒之 (朝鮮金石總覽 上 p.265)라고 하였다. 82) 高麗史 卷94 徐熙傳에 供賓令鄭又玄上封事 論時政七事 忤旨 成宗會宰相議 曰 又玄敢越職論事 罪之何如 皆曰 惟命 熙曰 古者諫無官 越職何罪 臣以不才 謬居宰相 竊位素餐 使官卑者論政敎得失 是臣之罪也 况又玄論事甚切 宜加褒獎 成宗感悟 擢又玄監察御史 라고 하였다

51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吿身은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는 것이었으므로, 비록 郞舍들의 官 品이 높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정치적 지위가 중요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貴族의 이익을 위하여 王權의 專制的 성격을 제약하는 것으로써, 高麗 政治機構의 貴族的 性格을 말하 여 주는 것이라 함은 이미 지적된 바와 같다.83) 그런데 이 署經의 권한은 內史門下省의 郞舍뿐 아니라 御史臺 에서도 가지고 있었다.84) 앞서 필자는 6部를 비롯한 거의 모든 行政機關이 3省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御史臺만은 예외였다고 언 급한 바가 있었다. 왜냐하면 御史臺는 行政的인 체계의 圈外에 위 치하고 있어서 이를 옆에서 견제하는 구실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 문 이었다. 御史臺의 임무에 대해서는 高麗史 百官志에 時政을 論執하고 風俗을 鱗正하고 糾察 彈劾하는 임무 를 지닌다고 하 였는데,85) 이것은 그들이 주로 官吏들의 違法的인 행위를 감찰하 는 책임을 맡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御史 臺가 內史門下省의 郞舍와 더불어 臺諫 혹은 臺省이라 併稱되며, 폭넓은 言官으로서의 임무를 같이 수행하였다.86) 그리고 이 御史 臺가 또한 署經의 권한을 쥐고 있던 데에서도 짐작할 수가 있듯 이, 王權의 專制化를 제약하는 貴族的 성격의 기관이었던 것이다. 이제 表 9 에 나타난 成宗 14년의 政治機構에서 끝으로 致 仕職과 散職, 그리고 檢校와 將仕郞에 대해서 언급해두어야 하겠 다. 致仕職은 2品 이상의 官職에 대하여 그리고 散職은 3品 이하 83) 金龍德 高麗時代의 署經에 대하여 李丙燾紀念論叢(1956) p.488 및 李丙燾 韓國史 中世篇 (1961) pp.6 8 참조 84) 金龍德 高麗時代의 署經에 대하여 p ) 高麗史 卷76 百官志 1 司憲府 條에 掌論執時政 矯正風俗 糾察彈劾之任 이 라고 하였다. 86) 金龍德 高麗時代의 署經에 대하여 p.473 및 朴龍雲 高麗朝의 臺諫制度 歷史學 報 52(1971) pp 참조

52 1. 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 의 官職에 대하여 주는 待遇職으로 생각할 수가 있겠는데, 穆宗 원년 田柴科의 규정에 나타난 대로 한다면 반드시 모든 官職에 두 루 주어진 것으로는 되어 있지가 않다. 그 이유는 잘 알 수가 없 으나, 이 致仕職과 散職이 現職主義 또는 實職主義의 원칙과는 어 긋난다는 점에서 官僚 身分에 대한 일정한 保障策으로 생각할 수 가 있다. 그렇다면 이 制度는 官僚的 성격의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貴族的 성격의 일면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지 않을 까 한다. 檢校職에 대해서는, 그것이 勳官이라고 함은 이미 밝혀진 바와 같으며, 檢校職이 실제로는 더 많이 있었으나 穆宗 원년 田柴科에 檢校太師만이 나오는 것은 그것이 주로 王子에게 주어진 勳官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점도 또한 이미 지적되어 있다.87) 이러한 實職 이 아닌 勳官 제도는 역시 官僚的인 것이기보다는 貴族的인 성격 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將仕郞 제도는 科擧의 登科者가 實職에 취임하기 이전에 일정 한 대우를 해주는 제도라고 하겠다. 이것은 致仕職이나 散職과는 반대되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 역시 現職主義의 원칙 과는 어긋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역시 주목을 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이상에서 成宗 14년의 政治機構에 대하여, 穆宗 원년 田柴科에 나타난 官職을 기준으로 하고, 그 機構上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 三省體制라고 불러서 좋을 이 政治機構가 國王을 頂點으로 한 官僚的 行政體系를 갖추고 있었다기보다는, 오히려 行政機關을 合議制的인 機構 밑에서 통제케 하고, 또 위로는 王權 을 견제하고 옆으로는 行政機關을 감찰하는 機構들을 중요한 위 87) 韓㳓劤 勳官檢校考 震檀學報 합병호(1966) pp 참조

53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치에 놓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을 貴族的이라고 규정지을수 있으리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이 政治機構속 에서 구체적인 官職을 지니고 있던 人間들의 활동상황에 대한 分 析을 통해서 더욱 밝혀질 것을 기대하는 바이다. 李 基 白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1) 地方官制의 整備 高麗 王朝가 建國이래 가장 力點을 두어 온 정책의 하나는 地方 勢力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통제하며, 나아가서는 中央의 行政力을 전국 각 지방에 효과적으로 침투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課題에 대한 執權層의 관심은 우선 地方官制의 整 備로 나타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地方官制는 단시일에 성립되지 는 못하였다. 오랜 시일에 걸쳐 점진적으로 整備되어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다음에 이를 몇 시기로 구분하여 地方官制의 정비과정 과 그 시기에 있어서의 地方官制의 특성 등을 차례로 검토하여 보 고자 한다. 1) 高麗 國初의 地方官制 여기서 高麗 國初라 함은 편의상 太祖에서부터 제5대 景宗까지 의 기간을 의미함을 미리 밝혀둔다. 먼저 太祖연간(918一943)에 있어서는 太祖가 後三國을 통일하

54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기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통일한 이후에도 地方官을 파견하지 못 하였다. 이것은 崔承老가 成宗에게 올린 그의 封事文에서, 우리 聖祖(太祖)께서 (後三國을) 통합한 뒤에 外官을 두고자 하였으나, 대저 草創으로 因하여 일이 번거로와 겨를이 없었읍니다 1)라고 언급하고 있는 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太祖가 地方官을 설치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위에서 崔承老는 새 王朝의 草創 期여서 일이 번거로와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라 언급하고 있지만, 물론 이 말은 올바른 評價가 되지 못한다. 地方官을 파견하지 못 한 이유는 中央行政力이 극도로 미약한 반면 地方의 豪族勢力이 강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독 太粗 일대에 걸쳐 太祖가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적 극적으로 經營해 간 地方이 있었다. 平壤이었다. 太祖는 그가 王位 에 오른 지 불과 석 달만에 平壤 경영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高麗 史 卷 77 百官志(外職) 西京留守官條에 의하면, 太祖는 이 해에 平 壤大都護府를 설치하고, 重臣 2人을 보내어 이곳을 지키게 하고 叅佐 4 5人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記事에서는 풀지 못하는 궁금증을 高麗史節要가 풀어주고 있다. 高麗史節要 卷 1 太祖 원 년 9월條에 의하면, 太祖는 群臣에게 말하기를, 平壤은 古都인데 황폐한지 이미 오래 되어 荆棘이 滋茂하여 蕃人들이 그 사이에서 遊獵하고 因하여 侵奪하니 마땅히 徙民하여 그곳을 충실하게 함 으로써 藩屏을 굳게 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黃州 鳳州(鳳山) 白州(延白) 鹽州 등의 人戶를 나누어 平壤에 살게 하고 大都護府로 삼았으며, 堂弟 王式廉과 廣評侍郞 列評을 보내 어 이를 지키게 하고, 이와 함께 衆佐 4 5人을 두었음을 알 수 있 다. 우리는 이러한 高麗史節要의 記事를 통하여 太祖 의 平壤經營 1) 高麗史 卷 93 崔承老傳

55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의 動機와 그 내용을 볼 수가 있다. 이 記事의 核心은 한 마디로 말해서 北方民族의 침략에 대비한 國防上의 의의가 강조되고 있 는 점이다. 그러나 뒤에는 國防面보다는 國內政治上의 필요성에서 平壤에 대한 經營이 더욱 활발히 추진되어 나갔던 것으로 생각된 다. 高麗史 世家에 의하면, 太祖 2년 동 10월條에 城平壤 이라 는 記事가 보이지만, 同 4년 동 10월 壬申條에는 幸西京 이라 는 記事가 나타나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記錄上으로 이때부터 平壤 에 대신하여 西京 이라는 號稱이 사용되는 점이다. 이 러한 호칭의 변경은 太祖 2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平壤을 西京으 로 昇格시키는 데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표면상에 나 타난 명칭의 변경 그 자체보다는 그 명칭의 변경이 西京經營에 대 한 政 策의 전환을 나타내고 있지 않나 추측된다. 端的으로 말해 서 大都護府(平壤)에서 留守京(西京)으로의 전환은 곧 군사적 목 적에서 정치적 목적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왜 냐하면 당시 太祖 王建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時急한 과제는 국 내의 豪族 勢力들을 견제하고 아울러 王權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 는 새로운 勢力基盤의 構築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진 바와 같이, 新羅 말기부터는 豪族들이 각 지방에 강력한 세력기반을 가지고 등장하였으므로 高麗王室에서는 이들과 聯合함으로써만 겨우 그 政權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高麗 왕실은 豪族聯合政權의 대표자로써의 지위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首都圈內에서조차 豪族들의 중 압을 견디어 내기란 심히 어려웠었다. 太祖 때에 일어난 몇 차례 의 반역 사건이 이 사실을 잘 立證하여 주고 있다. 특히 중앙에서 벼슬하던 豪族이 자기 출신지의 세력과 직접 제휴할 때에는 더욱

56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더 큰 위협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高麗史 卷 92 洪儒傳附 裴玄慶傳에 의하면, 太祖가 靑州人 玄律을 徇軍郞中으로 삼은 데 대하여 裴玄慶이 申崇謙과 함께 이에 반대하였는데, 그 이유가 지 난번에 林春吉이 徇軍吏가 되어서 不軌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伏 辜 당했는데, 그것은 兵權을 장악하고 그 출신지인 靑州와 결탁했 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보더라도 豪族들의 출신지가 큰 세력배경을 이루었던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太祖 王建은 그의 세력기반인 松嶽에서조차 豪族들의 세력을 단호하게 제어할 수 없는 실정에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名實相符 하게 豪族들의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太祖 王建은 보다 강력하게 王 室을 지지하고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세력 기반을 찾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 여건으로써는 남쪽에서 새 로운 세력기반을 얻을 수는 없었다. 남쪽에는 新羅와 後百濟의 세 력이 버티고 있었으며, 각 지방은 그 지방 豪族의 세력기반으로 이미 홉수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가 눈을 돌리게 된 곳이 西京이었던 것 같다. 西京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先史時代부터 古朝鮮 漢四郡을 거쳐 高句麗의 멸망까지 政治勢力의 중심지로써 또는 首都로서 유서 깊은 곳이었다. 게다가 앞서 인용한 高麗史節要의 記錄에서도 볼 수 있듯이, 高麗 건국초에는 蕃人의 遊獵場으로 化하였을 정도로 황폐되어 있었다. 황폐하다는 것은 그곳을 基盤으로 한 旣成 土着 勢力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과거의 유서 깊은 古都로 써 國防上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土着勢力이 전무하다는 것은 太 祖 王建이 그의 經綸을 펴나가는 데 있어서 어느 모로나 가장 적 합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자기의 절대적인 지지

57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세력을 扶殖해 나갈 계획을 세우게 된 것 같다. 이에 따라 太祖 5 년에는 다시 西京에 대한 徙民과 함께 새로운 施策이 단행되고 있 다. 즉 이 해에 大丞 質榮 行波 등 父兄子弟 및 여러 郡縣의 良家 子弟를 西京에 옮겨 살게 하였으며, 또한 西京에 거동하여 宮府와 員吏를 새로 두고 처음으로 在城을 쌓았던 것이다.2)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西京에 있어서의 본격적인 行政機構 의 설치는 위에서 말한 太祖 5년의 施策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 이다. 위의 記事에는 막연히 官府와 員吏를 새로 설치하였다고만 되어 있지만, 高麗史 卷 77 百官志 西京留守官 屬官沿革條에는 그 상세한 내용이 나와 있다. 즉 太祖五年 置廊官(廊者官號 方言曹設 ) 侍中一人 侍郞二人 郞中二人 上舍一人 史十人 이라는 記事 내용이 그것이 다. 앞서 太祖 원년에 平壤大都護府를 설치하고 重臣 2人을 보내 어 지키게 하고 衆佐 4, 5人을 두었다는 記事와 비교하면, 이때에 西京官制가 括目할 만큼 정비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3) 이처럼 太祖 연간에 西京 자체의 行政機構는 整備되었으나, 이 것은 특수한 예외였을 뿐, 다른 地域에 대한 地方官制의 정비는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었다. 太祖 연간에 있어서의 地方에 대한 施策은 西京을 제외하고는 軍事的인 목적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 었다. 우리는 이 시기에 군사적 要地에 설치되는 鎭을 통하여 그 사실을 알 수가 있다.4) 太祖의 뒤를 이어 惠宗 定宗이 차례로 王位에 올랐으나, 이들 두 王은 地方에 대한 中央統制策을 강구할 겨를이 없었다. 우선 그 王權은 敵對勢力에 의해 심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고, 그 在位 2) 西京經營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는 河炫綱 高麗西京考, 歷史學報 35 36合辑 참조 3) 河炫綱 西京의 行政構造, 韓國史硏究 5 참조 4) 李基白 高麗太祖時의 鎭, 高麗兵制史硏究 所收

58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年數도 극히 짧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光宗의 등장과 함께 서서히 地方에 대한 체계적인 中央統制가 이루어져 나갔다. 우리는 그 端 的인 예의 하나로써, 光宗이 즉위한 뒤에 처음으로 地方 각 州縣 에서 바치는 歲貢物에 대하여 그 額數를 定하였다는 記事를 들 수 있을 것이다.5) 이 記事와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今有 租 藏의 制度이다. 高麗史 卷 77 百官志 外職條에 의하면, 今有 租藏 並外邑使者 之號 國初有之 成宗二年罷 라는 記事가 보이고 있다. 그러면 위 에 든 今有 租藏은 대체 어떤 성격의 관직이었을까? 우선 첫째 이 들 관직이 地方에 常駐하는 外官이 아니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 것은 위에 든 記事 중의 並外邑使者之號 라는 것이 이 사실을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그리고 또한 地方官의 파견은 成宗연간에 이르러서야 實現되었음은 周知의 事實이다. 따라서 그 이전에 地 方에 常駐하는 外官의 파견은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今有 租 藏은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地方에 파견되어 부과된 任務를 遂 行하고 돌아오는 臨時職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任務는 租藏 이라는 官號에서 엿볼 수 있듯이, 아마도 租賦의 징수였 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은 今有 租藏이 설치된 시기이다. 위에 든 高麗史의 기록에는 다만 國初有之 라고 하여, 國初에 설치되 었다고만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그 任務가 租賦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설치 연대를 光宗초로 잡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光宗이 즉위초에 처음으로 地方 각 州縣에서 바치는 歲貢物에 대하여 그 額數를 定하였을 때에는 그 歲貢物의 5) 高麗史 卷 78 食货志 貢賦條에 定宗四年 光宗即位 命元甫式會 元尹信康等 定州縣歲貢之額 이라 되어 있다

59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징수를 담당할 관직까지 설치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崔承老가 그의 上書에서 光宗의 治績을 논평하는 가운데, 光宗 때 에 朝廷의 儀制가 자못 볼만한 것이 있다고6)한 것도 그 설치 가 능성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高麗史 卷 77 百官志 外職條를 보면, 國初 有諸道轉運 使 라는 記事가 나온다. 이 記事에 의하여 國初에 諸道에 轉運使 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轉運使 라는 명칭으로 미루어 각 地方에서 징수한 租税를 中央으로 轉運하는 任務를 맡은 것으 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이 轉運使도 光宗초에 설치된 것이 아닌 가 한다. 바꾸어 말하면, 光宗은 즉위초에 각 地方의 歲貢物에 대한 額數 를 定하고, 그 歲貢物 등을 今有 租藏과 轉運使 등의 臨時職을 통하 여 中央으로 거두어들이는 制度的인 整備를 하게 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7) 이러한 조처는 비록 부분적이나마 中央의 行政力이 地方에 침투하는 효과를 거두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체계적인 行政組織에 의해서 각 地方이 파악된 것은 아니었다. 여 기에 당시 中央行政力의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地方 은 여전히 地方의 豪族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 은 崔承老가 그의 上書에서 外官의 설치를 건의하는 이유로써 鄕豪가 매양 公務를 빙자하여 百姓을 侵暴하므로 백성은 이를 견 뎌내지 못하니 請컨대 外官을 두소서 한 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民政的인 성격을 가진 外官은 成宗 연간까지에도 地方 에 常駐하지 않았으나, 軍事的인 任務를 띤 外官은 일찍부터 地方 6) 高麗史 卷 93 崔承老傳에 光宗八年之理 可方三代 又朝廷儀制 頗有可觀 이 란 記事가 보인다. 7) 高麗史 卷79 食貨志 漕運條의 國初南道水郡 置十二倉 이란 記事도 이때의 制度的인 整備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60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에 常駐하고 있었다. 太祖 元年 9月에 太祖는 平壤을 大都護府로 삼고, 堂弟 王式廉 과 廣評侍郞 列評을 파견하여 그곳을 지키게 하였음은 이미 앞에 서 말한 바가 있었다. 한편 남쪽으로 後百濟와의 관계로 太祖 13 년에는 天安都督府를 설치하여 大丞 弟弓을 都督府使, 元甫 嚴式 을 副使로 삼았다.8) 그리고 後三國을 통일한 뒤에는 後百濟의 首 都였던 完山(全州)에 安南都護府를 설치하였으며, 太祖 23년에는 新羅의 故都인 慶州를 大都督府로 삼았다는 記錄이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軍事的據點에는 高麗 中央軍의 일부가 배치되었을 것 으로 추측되고 있으며,9) 동시에 그 책임자로써 軍政的인 外官이 파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太祖 때에 설치된 都護府나 都督府는 짧은 기간을 존속하 였을 뿐이었고, 따라서 制度化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後代에 制 度化되는 四都護府 혹은 五都護府의 실질적인 기원은 光宗을 거쳐 景宗 때에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10) 高麗史 卷 2 景宗 世家 6년 7월條에 의하면, 景宗은 堂弟인 開寧君 治(成宗)를 불러 內禪하며, 遺詔하여 가로되, 西京 安東 安南 登州 등 諸道에 서 鎭守의 任務를 맡고 軍旅의 權을 가진 者는 그 任務가 가볍지 않 으니, 어찌 마땅히 잠시라도 任所를 비울 수 있겠는가, 任地를 떠 나 宮闕에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각각 任地에서 擧哀 하여 3일 만에 喪服을 벗도록 하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 로 景宗 때에는 이들 네 곳에 外官이 常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 다. 그런데 이들 네 곳에 常駐하는 外官의 성격은 軍事的인 임무 를 맡고 있었을 것임은 景宗의 遺詔 내용에 鎭守之任 軍旅 8) 高麗史 56 地理志 1 天安府 9) 李基白 高麗地方制度의 整備와 州縣軍의 成立, 高麗兵制史硏究 所收 참조 10) 上同

61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之權者 로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다만 西京만은 다른 세 곳에 비하여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 다.11) 西京을 제외한 세곳은 軍事的인 要地로서 都護府 都督府였 던 점에 공통성이 있었다. 이와 같이 軍事的인 필요에 따라 설치된 것이기 때문에 뒤의 民 政的인 地方官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지만, 地方官 파견의 先 駆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게 평가되고 있다. 2) 成宗朝의 地方官制 高麗 시대에 있어서 본격적으로 地方官制가 성립되는 것은 제6 대 成宗( )대 부터였다. 成宗은 高麗 초기의 歷代國王 중 새로운 國家體制의 整備에 가장 큰 공적을 남긴 王이었다. 成宗이 地方官制의 盤備에 처음으로 착수한 것은 成宗 2년 2월 이었다. 즉 이때에 처음으로 全國에 12牧을 설치하는 한편 今有 租藏을 罷하였다.12) 그리고 이때의 12牧은 楊州 廣州 忠州 淸州 公 州 晋州 尙州 全州 羅州 昇州 海州 黃州였음이 高麗史地理志에 나타 나 있다. 그런데 이둘 12牧은 成宗원년 6월의 崔承老 上書 결과 이루어진 것임은 周知의 사실이다. 崔承老는 時務 28條 중의 하나 로서 다음과 같이 建議하고 있다. 我聖祖가 統合한 뒤에 外官을 두고자 하였으나, 대저 草創으로 因하여 일이 번거로와 겨를이 없었읍니다. 이제 가만히 보건대 鄕豪가 매양 公務를 빙자하고 百姓을 侵暴하니 百姓이 견뎌내지 못합니다. 請컨대 外官을 두소서. 비록 일시에 다 보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먼저 十數州縣을 아울러 한 사람의 官員을 두고 官에 11) 河炫綱 高麗西京考 참조 12) 高麗史 77 百官志 外職

62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각각 兩三員을 두어 愛民하는 일을 맡기소서. 우리는 위의 建議에서 地方官의 설치가 地方勢力에 대한 統制 策의 一環으로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다. 地方官의 설치를 통하 여 中央行政力이 地方에 浸透하는 것은 地方勢力에 대한 統制의 결과를 가져올 것은 自明한 일이다. 그리고 사실 成宗은 12牧의 설치를 起點으로 하여 서서히 地方勢力의 統制策을 並行하고 있 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검토는 다음 으로 돌리고자 한다. 여기서는 12牧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우선 成宗 2년에 설치된 12牧은 統一新羅時代 이래 高麗 초기에 이르는 동안에 地方行政上의 要地가 되던 곳임을 알 수 있 다. 이미 다 아다시피 統一新羅時代에 地方行政上 중요시되던 것 은 尙州 良州(梁山) 康州(晋州) 漢州(廣州) 朔州(春川) 溟洲(江陵) 熊州(公州) 全州 武州(光州)의 9州와 中原京(忠州) 北原京(原州) 金官京(金海) 西原京(淸州) 南原京(南原)의 5小京이었다. 成宗 2 년의 12牧과 新羅의 9州 5小京을 비교하여 눈에 띠는 地域上의 차 이는 다음과 같다. 즉 9州 5小京制에서는 지금의 江原道 地方이 地方行政區劃으로 편입되어 있는 반면 黃海道 地方이 빠져 있다. 이것은 新羅의 行政力이 黃海道 지방에 조직적으로 침투하지 못 하였음을 나타내어 준다 할 것이다. 그러나 12牧制에서는 江原道 지방이 빠져 있는 대신 黃海道 지방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高 麗國初 이래 北方을 중요시하던 정책의 결과 黃海道 지방이 地方 行政上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까닭이 아닌가 생각 된다. 어떻든 12牧이 설치된 지역으로 보아서 成宗 2년에는 지금의 黃海道와 京幾道 지방, 그리고 忠淸 慶尚 全羅道 지방에 비록 부분

63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적이나마 中央行政力이 미치기 시작하였으나, 江原道 지방은 제외 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江原道 지방은 여전히 地方 豪族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아울러 成宗 2년의 12牧制는 전국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통할하는 완전 한 地方官制가 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 은 위에서 이미 제시한 崔承老의 上書 속에서도 당시의 實情을 엿 볼 수가 있다. 즉 전국의 각 지방에 一時에 모두 地方官을 파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선 중요한 12州에 牧을 설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12牧의 설치를 계기로 高麗의 地方官制가 점차 軌 道에 오르게 되었다는 점에서 12牧 설치의 의의를 높이 평가해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12牧의 설치 당시에는 地方官만이 任地에 부 임하였으며, 家族의 同伴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같다. 그렇지만 時 日이 경과함에 따라 成宗 5년 8월에는 12牧에 대하여 처음으로 妻子를 거느리고 부임하게 하는 제도적인 조처가 단행되기에 이 르렀다.13) 또한 成宗 6년 8월에는 12牧마다 經學博士 醫學博士 各 1人씩을 뽑아 보내어 地方敎育을 담당하게 하는 한편 儒敎的 敎養이나 醫術이 있는 人材는 中央에 천거 하도록 하였다.14) 그 리고 成宗 12년에는 兩京과 함께 12牧에 常平倉을 설치하여 物價 調節의 機能을 맡게 하였다.15) 또한 이해 8월에 州 府 郡 縣 驛路에 公須柴地를 지급하였다.16) 이미 成宗 2년 6월에 州 府 郡 縣 館 驛 에 田地를 지급한 사실을17) 감안하면, 成宗 12년에는 地方 각 官 衙의 경비 지출을 위한 公廨田柴의 法이 整備되었음을 알 수 있 高麗史節耍 2 成宗 5年 8月條에 始令十二牧 挈妻子赴任 이라 되어 있다. 同上 成宗 6年 8月條 참조 高麗史節要 2 成宗 12年 春 2月條 高麗史 78 食貨志 1 田柴科 17) 同上 13) 14) 15) 16)

64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다. 우리는 이러한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하여, 成宗 2년에 서 12년에 이르는 10년 동안에 地方官制의 整備作業이 꾸준히 진 행되었으며, 그 결과 地方行政의 機能이 크게 강화되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12牧의 설치와 함께 주목할 것은 軍事上의 필요에 의한 外官 설치도 並行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高麗史 地理志에 의하 면 12牧이 설치된 같은 해에 北界의 順州 殷州 肅州 慈州 渭州에 防 禦使가 설치되었으며, 寧州에는 安北大都護府, 溟州에는 河西府가 설치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이미 제시한 바와 같이 公廨田柴가 지급된 行政區劃 단위로서 州 府 郡 縣이 列擧되고 있 는데, 여기서 우리는 12牧이 설치된 地方에도 牧 이외의 行政區劃 이 별도로 설치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高麗史 의 關係記事를 통해서도 명백하게 立證할 수가 있다. 가령 高麗史 卷3 成宗世家 7년 2월條의 成宗의 敎 가운데 十二牧 知州縣 鎭 使等 이 열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知州 知縣 등이 설치되 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民政的인 地方行政에 있어서는 12牧이 根幹이 되고 따라서 가장 중요시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地方官制의 整備와 함께 中央行政力이 각 地方에 직접 침투하게 되면서, 각 地方의 號稱에 대한 改定 작업이 이루어져 갔다. 가령 高 麗史 卷 3 成宗世家 11년 11월條의 州 府 郡 縣 및 關 驛 江 浦의 號 를 고쳤다는 記事 등은 그 좋은 例가 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서, 成宗 2년에서 10년대초에 걸쳐 시행된 地方官制의 整備作業 은 그 자체가 지닌 의의도 크지만, 한편으로는 成宗 14년에 단행 되는 보다 더 본격적인 地方官制 整備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도 그 공헌한 바는 크다고 할 것이다. 地方官制에서 十道制를 실시한 것은 成宗 14년 9월이었다. 우

65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리 나라 역 사상 地方官制의 最高單位로서의 道制는 이 十道의 制 定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 점에서 보더라도 十道制 실시의 역사적 의의는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十道制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다음에 十道의 構造와 性格 등을 검토 하여 두고자 한다. 우선 高麗의 十道는 唐의 十道制를 모방하여 제정하였던 것 같 다. 唐의 十道는 唐太宗이 太宗 원년에 山川의 形便에 따라 天下 를 나누어 十道를 만들었다는 新唐書 卷 37 地理志의 記事에서 볼 수 있듯이, 十道의 境域이 地인 條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 었다. 이것은 또한 十道의 명칭이 關內 河南 河東 河北 山南 願右 淮 南 江南 劍南 嶺南으로 되어 있는 것에도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高 麗의 十道도 그 명칭으로 보아서 地理的인 조건을 고려하여 제정 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關內 中原 河南 江南 嶺南 嶺東 山南 海陽 朔 方 浿西라는 道名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唐 十道와 高麗 十道의 차이와 그 특성을 비교하 여 살펴보아야 할 것같다. 먼저 唐의 十道는 唐太宗에 의해 一時 에 制定된 것이 아니고, 從來부터 慣用되어 오던 地理的인 區分을 중심으로 마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唐에서는 그대로 쉽사리 通用 될 수가 있었다. 그러나 高麗에서는 대부분 成宗 14년에 처음으로 制定된 것이기 때문에 당시 社會에 대한 適應性이 상당히 적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十道의 構成에 있어서도 唐에서는 처음 임시로 설치한 州府의 數가 많았으므로 全國을 크게 十道로 구분 하여 統治의 便宜를 꾀한 것이었다. 즉 唐太宗 때에는 州府가 358, 縣은 1551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제일 작은 州가 淮 南道의 12州였고, 그 반면에 嶺南道 같은 곳은 73州까지 되었다. 그러나 高麗에서는 그 사정이 달랐다. 高麗의 十道는 각각 몇개의

66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州, 심지어는 1州의 所管으로써 1道를 구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高麗史 地理志에 의하면, 嶺南道는 尚州 所管만으로 구성되 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道의 構成은 결국 道制의 실시 이후 에도 地方行政은 각 地方의 주요한 州 중심으로 運用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면 唐의 道制를 모방한 生疎한 道制보다는 新羅의 九州制 이래 韓國社會 에 익숙해 온 중요한 州 중심의 地方行政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 다. 高麗의 十道制가 그 實施 이후 오랫동안 존속하지 못하고 이 내 消滅하게 되는 원인도 이러한 與件에 起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十道制 자체는 곧 消滅하지만, 地方 官制의 最高單位로서 일단 受容된 道制는 從來의 州 중심의 地方 官制와 折衷하면서 새로운 모습의 道制로 전환되어 간다는 사실 이다.18) 여기에서 우리는 十道制 실시의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같다. 한편 高麗의 十道制는 唐의 十道制와 같이 地方官制의 最高單 位이기는 하였으나, 그것을 行政區劃으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巡察 또는 監察區劃에 불과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는 唐의 十道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道에 常駐하는 道의 長官이나 道의 行政을 맡아보는 行政機構는 설치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한다. 十道의 長官으로써 觀察使를 比定하는 견해가 있으나,19) 이미 그것을 부정하는 새로운 주장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道의 長官 자 체를 否定하지는 않고 있다. 즉 十道의 長官으로 觀察使보다는 轉 運使를 추정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는 것이다.20) 그러나 觀察 18) 十道의 實施 構造 性格 등에 대한 구체적 인 檢討는 河炫鋼 高麗地方制度 의 一硏究, 史學硏究 13 14號 참조 19) 李基白 高麗地方制度의 整備와 州縣軍의 成立 20) 邊太燮 高麗前期의 外官制, 高麗政治制度史 所收 참조

67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使는 물론이며, 轉運使를 十道의 長官으로 추정하는 데에도 의문 의 여지가 있다. 그리므로 이에 대하여 약간의 檢討를 가하여 두 고자 한다. 高麗史 卷 76 百官志 外職 轉運使條에 의하면, 國初에 諸道 에 轉運使가 있었으며, 顯宗 20年에 罷하였다 는 짤막한 記事만 이 실려 있다. 위의 記事에 나타나는 國初는 十道制가 실시된 成 宗 14년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그렇다면 十道制 실시 이전 의 轉運使에게 十道制 실시와 함께 道長官職을 맡게 하였을까가 우선 문제된다. 왜냐하면 國初의 轉運使에게는 이미 그 임무가 별 도로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轉運使는 그 官職名으로 미루어 地 方의 歲貢은 交通路를 통하여 轉運하는 것이 任務였을 것으로 생 각된다. 그러나 十道의 配置는 交通路와 구별되어 각 지방의 중요 한 州 중심으로 되었다 함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諸道와 十道의 地域이 一致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시 말 하면 일찌기 轉運使가 배치되었다는 諸道는 十道의 道와는 그 성 격을 완전히 달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轉運使는 顯宗 20년까지 존속한 데 반하여 十道는 그뒤에도 완전 히 소멸되지 않고 殘存하는 記事를 볼 수 있다.21) 만약 轉運使가 十道 長官이었다면, 顯宗 20년 이후에는 長官 없는 十道制가 존속 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十道의 長官으로 轉運使 를 추정하는 것은 아무래도 無理가 따르게 마련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高麗의 十道制는 行政區劃이 아니라, 監察 또는 巡察區劃으로서의 地方官制였으며, 따라서 常駐하는 道長官 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필요할 경우 隨時로 中央官을 21) 가령 高麗史 文宗世家 元年 11月 丙申條의 今伏審浿西 山南道州牧 務劇員 少 事多壅滯 甚爲不便 의 記事에서, 浪西道 山南道의 道名을 볼 수 있다

68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파견하여 그 區域을 巡察시켰던 것이 아닌가 한다. 成宗 14년에 단행된 地方官制의 整備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 은 節度使體制로의 개편이었다. 우리는 앞에서 成宗 2년에 12牧 이 설치되었음을 살펴본 바 있으나, 成宗 14년에는 바로 이들 12 牧에 節度使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成宗 2년 이래 실제로 地方行 政의 根幹이 되어 오던 12牧을 12節度使로 개편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할 것이다. 우선 그것이 단순한 명칭상의 변 경만이 아니었음은 명백한 일이다. 즉 地方行政에 있어서 軍事的 인 面이 크게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高麗史 地理志 등 關係史料 에 의하면, 牧 을 파하여 軍 으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牧 楊 海 廣 忠 淸 公 州 州 州 州 州 州 左 右 奉 昌 全 安 軍 神 策 神 策 國 化 節 節 牧 軍 軍 軍 軍 軍 軍 晋 尙 全 羅 昇 黃 州 州 州 州 州 州 定 歸 順 鎭 哀 天 軍 海 德 義 海 海 德 軍 軍 軍 軍 軍 軍 그러나 12 節度使 이외에 7 都團練使, 11 團練使, 21 防禦使, 15 刺史 등의 地方官制가 새로 설치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成宗 14 년의 地方官制 개편의 근본목표가 唐에서 이미 安史의 亂 이후에 편성한 것과 동일한 軍事的인 節度使體制로의 地方官制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22) 그러면 成宗이 이러한 地方官制의 편성을 서 두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물론 確證할 關係史料가 없지만, 軍 政的인 行政을 통하여 地方의 豪族勢力을 統制함으로써 완전한 中央集權을 꾀한 措置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23) 22) 邊太變 高麗前期의 外官制 참조

69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그러나 成宗의 그러한 의도는 별로 큰 成果를 거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成宗 14년에서 20년 뒤인 穆宗 8년(1105)에 地方 官制에 대한 再整備作業이 대대적으로 추진된 사실을 통해서 짐 작할 수 있다. 즉 穆宗은 다만 12 節度使 4 都護府와 東西北界防 禦鎭使 縣令 鎭將만을 두고, 그 나머지 觀察使 都團練使 團練使 刺史 는 모두 罷해 버렸던 것이 다. 이와 같은 地方官制의 혁파는 결국 당시 高麗社會의 實情으로서는 中央行政力을 그러한 地方行政 單 位에까지 침투시킬 수 없었던 힘의 한계성을 나타내어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3) 顯宗朝의 地方官制 高麗時代의 地方官制는 成宗朝에 이어 穆宗을 거쳐 顯宗 때에 대대적인 整備작업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특히 顯宗 9년의 地方官 制 整備로써 高麗일대의 地方官制의 基本構造가 완성된다는 점에 서 顯宗朝의 地方官制 정비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할 것 이다. 高麗의 地方制度를 기록한 高麗史 地理志가 顯宗 9년의 地 方官制를 기준으로 편성되어 있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나타내 어 주고 있다.24) 顯宗 9년 이전에도 地方官制의 개편이 추진되고 있었다. 이미 顯宗초에 成宗 14년 이래 지속되어 오던 12節度使를 혁파하고, 그대신 五都護 七十五道安撫使를 설치하였다는 記事가 보이고 있 다.25)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75道安撫使 라 23) 千寬宇 閑人考 社會科學 2號(1958) 참조 24) 가령 高麗史 56 地理志 楊廣道 楊州의 屬部인 見州에 대한 叙述에서 顯宗 九年來屬 後置監務 라 한 것이 그 例가 될 것이다. 25) 高麗史 56 地理志序 高麗史 77 百官志 2 外職 安撫使條 高麗史 94 崔士威傳 高 麗史節要 3 顯宗 3年 正月條 참조

70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는 記事의 내용이다. 75 에 달하는 엄청나게 많은 安撫使의 수 를 記錄 그대로 믿어도 좋은가 하는 것이 문제된다. 75 란 數 를 額面 그대로 믿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으 나,26) 여전히 共感할 수가 없다. 필자는 일찌기 75 道安撫使는 7 州安撫使의 잘못일 것이라고 推定한 바 있었다.27) 이렇게 추정하 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高麗史 地理志에 의하면, 顯宗 3년에 安撫使가 설치된 곳 으로는 楊州 廣州 忠州 淸州 晋州 吉州(安東) 黃州의 7州만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당시 高麗社會의 實情으로서는 일시에 75에 달하는 엄청나게 많은 安撫使를 설치할 정도로 中央行政力이 강화되지도 않았던 것같다. 또한 위의 安撫使가 설치된 7州는 모두 地方行政 에 있어서 큰 比重을 가지고 있던 州들이다. 바꾸어 말하면 安撫 使가 설치된 州는 地方行政의 根幹이 되는 곳이었다. 이와 동일한 수준에 들 만한 州의 數가 75에 달할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었다. 또한 高麗史 卷 94 崔士威列傅에 의하면, 安撫使의 설치는 崔士 威 張延祐 皇甫俞義의 獻議에 의해 된 것이다. 즉 이들은 東京 留 守를 罷하고 慶州防禦使를 두며, 12州節度를 폐하고 5都護 75道 安撫使를 둘 것을 獻議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東京留守를 慶州防禦使로 개편한 것과 같이 12州節度使를 개편하여 설치된 것이 12州와 동일한 數인 5都護 7州安撫使가 아니었던가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崔士威 등의 獻議 당시까지는 12州 節度使가 地方 行政의 基幹이었는데, 이에 대신해서 갑자기 75라는 많은 數의 安 撫使를 설치하자고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6) 李基白 高麗地方制度의 整備와 州縣軍의 成立에서는 이 七十五道는 실은 이 州縣軍의 道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믿는다. 그러므로 七十五道 安撫使가 설치된 사실은 文字 그대로 믿어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로 서술되어 있다. 27) 河炫綱 高麗地方制度의 一硏究 참조

71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顯宗朝의 대폭적인 地方官制 개혁은 顯宗 9년에 이루어졌다. 즉 이 해 2월에 諸道의 安撫使를 罷하고 4都護 8牧과 56知州郡事 28鎭將 20 縣令을 설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高麗의 地方官 制는 4都護 8牧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中央에서 地方官을 常駐시 키는 56개의 州 郡, 28개의 鎭, 20개의 縣 으로 편 성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中央의 行政力이 비로소 顯宗 9년 에 이르러 郡 縣 級의 行政單位에까지 직접 침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全國의 각 지방이 中央의 統制 속에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다만 일부 지역만이 中 央의 직접 統制를 받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顯宗 9년의 地方 官制 改定은 그것이 高麗一代의 地方官制의 基本構造를 마련하였다는 데에 역사적 의의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顯宗 9년에 改定된 地方官制를 중심으로 高麗時 代의 地方行政構造를 살펴보고자 한다. 4) 地方官制의 內容 高麗의 地方行政構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 던 것은 四都護 八牧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그 성격을 달리하고는 있으나, 兩京 혹은 三京을 첨가할 수가 있을 것이다. 사실상 地方行 政의 根幹으로서 그 最上單位가 되었던 것은 이들 兩京(혹은 3 京) 4都護 8牧이었다. 高麗시대에는 이들 이외에도 地方官이 설치 된 州 府 郡 縣 등이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京 牧 都護府에 領屬되 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領屬關係를 高麗史 地理志의 溝成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高麗史 地理志에 수록된 京 牧 都 護府의 所管關係를 圖表化하면 다음과 같다

72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所管 都護府 南京 樹州 (揚州 (安南 ) 防禦郡 知事府 知事郡 仁州 水州 天安 公州 洪州 鎭 ) 忠州 原州 淸州 東京 (慶州 縣令官 江華 蔚 禮 金 梁州 嘉林 富城 密城 ) 晉州 陜州 固城 巨濟 南原 古阜 長興 靈光 靈岩 寶城 昇平 臨陕 進禮 金堤 金溝 海陽 珍島 陵城 耽羅 瓮津 尙州 京山 安東 全州 羅州 海州 (安西 豊州 白翎 ) 黃州 登州 平州 谷州 和 高 宜 湧 文 長 定 豫 德州 25 遂安 鎭溟 金壤 등 8系 元興 寧仁 耀德 長 平 堡有 등 11鎭 寧州 6 12 (安北 ) 寧州의 所管 郡 縣 鎭은 그 數만 提示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高麗史 地里志 安北大都護府 寧州條 참조 물론 앞에서 제시한 4都護府 8牧 등이 固定된 것은 아니고, 그 명칭이나 形式上의 組織에는 가끔 변동이 따르는 경우가 있었지 만,28) 이들의 行政單位가 地方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는 가장 강력 한 핵심적인 基點이 되었던 것은 명백하다. 우리는 이를 분명히 밝힐 만한 많은 關係史料를 제시할 수가 있다.29) 다음으로 高麗史 記錄에 나오는 地名에서 명칭상으로 州 府 郡 28) 同上 29) 尹武炳 高麗時代 州府郡縣의 領屬關係와 界首官, 歷史學報 17 18合輯(1982) 참조

73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縣의 行政單位가 되어 있다고 해서, 이것이 곧 단계적인 행정 단위 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州 에도 牧 知事郡 屬郡 屬縣 등의 차별이 있었다. 가령 南京留守官 楊州의 所管 郡縣 중 屬郡縣인 見州 抱州 幸州 등에서, 見州 抱州는 屬郡, 幸州는 屬縣이었으며, 仁州 水州는 地方官이 설치된 知事郡이었던 것이다 (高麗史 56, 地理志 楊廣道). 郡 은 知事郡과 屬郡으로 구분되 었다. 知事郡인 密城郡의 屬郡으로서 昌寧郡 淸道郡이 있었던 것이 그 例가 될 것이다(高麗史 57 地理志 慶尙道). 縣 도 縣令官과 屬縣의 둘로 나뉘었다. 예컨대 縣令官인 江華縣은 鎭江縣 河陰縣 喬 桐縣을 屬縣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例에서 보더 라도 楊州의 屬郡인 見州 抱州와 密城郡의 屬郡인 昌寧郡 淸道郡 등 이 州 郡 이었지만, 地方行政上으로는 縣令官인 江華縣보다는 下 位 였 다. 所管 이 에 대 한 설 명 을 보 충 하 기 大都 大都 都護 知事 縣令 京 護府 牧 督府 府 府 郡 官 鎭 屬府 屬郡 屬縣 王 楊 京 廣 慶 尙 全 交 羅 州 西 海 3 14 東 北 界 界 合計 위하여 高麗史 地理志에 의해 地方行政單位別로 이를 도표화하면 위와 같다. 우리는 위의 도표에서도 볼 수 있는 知事郡과 屬郡, 그리고 縣 令官과 屬縣 등이 地方行政構造上 엄격히 구분되어 있으므로 이

74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를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 다. 즉 知事郡과 縣令官은 地方官이 설 치되어 부분적으로는 독자적인 行政이 행하여지고 있었으나, 屬 郡 屬 縣은 地方官이 설치되지 않아 완전히 어떤 고을에 예속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위의 도표에서 地方官이 설치된 行政單位의 總數가 146個所였 는 데 비하여 地方官이 배치되지 않은 그것은 무려 361 個所나 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결국 地方官의 설치를 통한 地 方에 대한 中央統制가 強力하지 못했음을 나타내어 주는 것이기 도 하다. 따라서 高麗史 纂者가 高麗史 56 地理志序에서 領京 4 牧 8 府 15 郡 129 縣 335 鎭 29 라고 서술한 데에는 많은 문제 점이 있음을 알 것이다. 즉 실질적으로는 엄격히 구별해야 될 知 事郡 61과 屬郡 68, 그리고 縣令官 30과 屬縣 305를 동일한 성격 의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더우기 大都護府 2, 大都督府 1, 都護 府 2, 知事府 9, 屬府 l에 대해서 그 差等을 무시하고 이를 통틀어 府 15라고 서술한 것 등은 高麗의 국세를 올바르게 파악하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 高麗의 地方行政組織은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여러 王 朝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地方行政의 最上單 位인 4都護府 8牧 등은 顯宗년 간에 이미 整備되었으나, 屬郡 屬縣 등에 대한 地方官의 설치는 오랜 時日에 걸쳐 점차적으로 행 하여 지고 있었던 것이다. 縣監務와 郡監務의 設置 연대 및 그設置 數 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75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縣 監 務 設 置 表 設 顯 置 宗 一 年 代 年 睿 仁 宗 宗 二 元 十 一 年 年 明 同 同 忠 恭 禑 同 同 恭 同 同 年 敬 愍 讓 宗 王 王 王 王 代 十 二 五 六 十 二 四 九 二 元 二 三 未 午 二 年 年 年 年 年 年 年 年 年 年 年 詳 設 置 一 二 一 三 數 一 七 五 二 六 四 一 一 一 一 二 六 九 二 二 여기서 年代未詳이라 한 것은 高麗史 地理志에 後置監務 라 한 것을 말함 郡 監 務 設 置 表 四 年 仁 宗 二 二 年 明 宗 二 年 一 二 二 八 設 置 年 代 睿 宗 元 年 同 設 置 數 五 五 年 恭 讓 王 二 年 年 代 未 詳 三 五 一 同 위와 같음. 위의 도표에도 나타나 있듯이, 屬郡 屬縣에 대한 監務의 설치는 睿宗 때에 비롯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容 宗 때부터 서서히 中央行政力이 地方의 末端組織에까지 침투하게 됨을 의미하고 있다. 高麗史 百官志에 의하면, 睿宗 3년에 여러 小 縣에 監務를 두었다고 되어 있어,30) 마치 일시에 일제히 監務를 설치한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위의 도표에도 나타나 있듯이 睿 宗 원년에 이미 監務를 둔 記錄이 보이며, 그 설치 기간도 高麗말기 까지 걸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점차 高麗말기로 내려오면서 中央의 행정력이 屬郡縣에까지 침투하게 된다는 의미 로 해석된다. 그리고 또 많은 屬郡縣에는 朝鮮王朝에 들어와서 비 30) 이것은 아마도 高麗史 12 睿宗世家 3年 秋 7月 辛酉條의 置土山等四十一縣 監務 란 記事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76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로소 監務가 설치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5) 五道兩界의 問題 高麗史 地理志는 전국을 크게 京幾 및 五道兩界로 구분하여 서 술되어 있다. 그리고 五道兩界는 高麗時代의 가장 대표적인 地方 最高行政區劃으로서 그 형성시기는 顯宗년간 또는 高麗초기인 것 으로 생각되어 왔다.31) 그러나 이미 일찌기 五道兩界 중 五道가 顯宗년간 또는 高麗초기에 형성되었다는 記事에 대해서 이를 비 판적으로 검토한 바가 있었다.32) 과거에 五道의 형성시기를 顯宗년간으로 추정한 것은 顯宗 9년 에 改定된 地方官制가 高麗 地方制度의 基本骨赂이 된 것과 연관 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高麗 地方官制의 전체적인 특색은 軍事的인 行政體制를 갖춘 兩界와 民政體制의 이른바 五道로 大 別 된 데에 있었다. 高麗國初부터 國防上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兩界, 즉 지금의 平安道와 咸鏡道 지방에는 鎭과 防禦使州 등이 설치되었으며 兩界의 장관으로서는 兵馬使가 임명되었던 것 이다. 그리고 특수한 지 방행정구획인 兩界는 高麗國初 이래 高麗 末期까지 존속하고 있었다. 그러면 兩界와 對稱되는 五道는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던가에 대해서 언급해 두고자 한다. 우리는 앞서 顯宗 9년에 4都護府 8牧制가 성립되었음을 살펴본 바 있었다. 따라서 高麗의 地方行政은 4都護府 8牧을 중심으로 운 영되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점차 새로운 道制로서의 五 道의 윤곽이 잡혀가기 시작하였다. 즉 成宗 때 실시한 十道制는 그것이 高麗社會에 適應하지 못하여 소멸해 가는 대신, 高麗 中期 31) 가령 高麗史 地埋志序와 慶尙道地理志의 叙述이 그러하다. 32) 河炫綱 高麗地方制度의 一硏究

77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이후에는 주요한 州 中心의 道制가 서서히 대두하게 되었던 것이 다. 그러나 高麗의 道制는 그것이 地方最高行政區劃으로서의 機構 를 갖추고 있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이것이 朝鮮왕조의 道制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종래에 五道의 長官은 按察使였던 것 으로 알려져 왔고, 근래에 이를 구체적으로 論證한 연구성과가 발 표되기는 하였으나,33) 그렇다고 按察使가 실질적으로 道의 最高 行政責任을 맡은 長官이었다고 단정하기에는 여전히 의문의 여지 가 있다. 우선 按察使가 道의 長官이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서 行政區劃으 로서의 道制가 확정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高麗中期 이후 비록 道制의 윤곽이 잡혀가고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高麗일대에 걸쳐 시대에 따라 그 所管區域이나 名稱의 변동이 빈번하였던 것 이다.34) 다시 말하면 行政區劃으로서의 道制가 확정되지도 않았 는데, 固定的인 道 長官을 云謂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 다. 다음으로 按察使의 任期이다. 按察使는 1년에 두 번 春秋에 更 代하게 되어 있었다.35) 즉 그 임기는 6개월이었다. 6개월 동안에 道의 行政責任者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를 기대할 수는 도저히 없다. 高麗 후기에 일반 地方 守令의 임기가 3년이던 것과 는 좋은 對照가 될 것이다. 끝으로 按察使의 官秩이 낮은 것이 특 징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5品 내지 6品의 微官이 임명되었던 것이 다. 물론 按察使는 그 使命의 重大함에 비추어 侍從 郞官 등 젊고 유능한 人材가 발탁되기는 하였으나, 그 官秩이 낮은 것이 주목되 33) 邊太燮 高麗按察使考, 高麗政治制度史硏究 所收 34) 河炫綱 高麗地方制度의 一硏究 참조 35) 國制重外寄 遺按察使 巡察州縣 問民疾苦 以春秋更代 高麗史 75 選擧志 銓注 凡選用監司 明宗 11年 9月條

78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지 않을 수 없다. 당시 大都護府 牧 등의 大邑 守令으로는 3品 이 상의 官員이 임명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按察使와 守 令을 行政組織上의 上下관계로 보기에는 位階秩序上의 모순이 있다. 과 연 5品 내지 6品의 微官인 按察使가 3品 이상의 守令에 대해서도 指揮權을 행사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은 커다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按察使는 地方行政上 어떠한 위치에 있었던 것 일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王命에 의해 地方行政의 監察 임무를 띠 고 파견되던 직책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道制도 그것이 行政區劃으로서가 아니라 監察區劃의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 다. 수시로 道의 所管區劃에 변동이 있었던 것도 監察區劃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다가 점차 高麗말기가 되면서 道의 所管區域이 固定化되고 按察使의 비중이 높아지게 됨에 따라 按察 使의 성격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高麗말 기에는 任期는 6개월에서 1년으로 연장되고 官秩은 兩府大臣으로 승격되었으며, 京官口傳은 除授를 別用하여 專任케 하는 동시에 그 아래에 經歷司라는 사무 기구까지 설치하였으며, 官職名도 都觀 察黜陟使로 개칭되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개혁과정에서 점차 道 長官으로서의 성격을 띠어 가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엄밀 한 의미에서의 명실상부한 道長官은 朝鮮 太宗 때에 8道觀察使制의 제정과 함께 비로소 성립되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러나 高麗의 按察使制가 뒤에 朝鮮시대 觀察使制 성립의 先驅를 이 루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크게 평가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와 함께 우리가 高麗말기의 地方官制 개혁에서 주목할 것은 東北面과 西北面의 兩界 및 京親 지방에도 都觀察黜陟使가 파견되 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高麗는 전국 各道에 都觀察黜陟使를 파

79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地方官制의 개편으로써 全國이 單一的인 行政組織으로 편성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高麗地方制度의 커다 란 반전을 의미하는 것으로서,36) 朝鮮 8道制의 성립은 이러한 기 반 위에 비로소 가능하였던 것이다. (2) 地方勢力 統制策의 實態 高麗시대에 있어서 地方勢力에 대한 中央統制가 制度的으로 강 구되는 것은 地方官制의 整備와 때를 같이하고 있다. 따라서 地方 官制에 대한 본격적인 整備作業이 시작되는 成宗( )대부 터 地方勢力의 統制策이 制度化되고 있다. 물론 成宗 이전의 高麗 國初에도 地方勢力의 統制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 다. 가령 우리는 太祖의 對豪族政策에서나 제4대 光宗의 豪族勢力 숙청과 王權強化政策에서 그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먼저 언급한 바 있으므로,37) 여기서는 새 삼 중복을 피하거니와 地方勢力에 대한 統制가 조직적이며 체계 적이지 못하였다는 데에 그 공통적인 한계성이 있었다 할 것이다. 즉 地方官의 파견을 통한 中央行政力의 地方침투가 없는 상황에 서의 地方統制란 아무래도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地方官制의 整備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成宗대와 顯宗대에 焦點을 맞추어, 이 시기에 실시되는 地方勢力 統制策의 實態가 어떠했던가를 차례로 살펴나가 보고자 한다. 1) 成宗代의 地方勢力 統制策 36) 邊太燮 高麗兩界의 支配組織, 高麗政治制度史硏究 所收 37) 1. 高麗王朝의 成立과 豪族聯合政權 3, 豪族과 王權 한국사 4. 참조

80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成宗대의 地方勢力 統制策은 成宗 원년(981) 崔承老의 새로운 政策건의에서 비롯되고 있다. 崔承老는 成宗에게 올린 時務 28條 중 제6조에서 地方官의 설치를 건의하고 있는데, 그 목적은 地方 勢力을 통제하자는 데 있었던 것이다. 즉 제 6조에는, 이제 가만 히 보건대 鄕豪가 매양 公務를 빙자하여 백성을 侵暴하매 백성이 견뎌내지 못하오니 請컨대 外官을 두소서 하는 내용이 보이고 있다.38) 崔承老의 地方官 설치 건의는 成宗 2년의 12牧 설치로 그 實現 을 보았다.39) 따라서 12牧의 설치는 地方民을 직접 지배하고 있 던 地方豪族勢力에 대한 統制의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 예상된다. 이와 동시에 崔承老는 문란해져 있었던 家舍制度의 整備를 통해서 도 地方勢力의 성장을 제재하려고 하였다. 이에 관한 정책 건의로 서 崔承老는 그의 時務 제 16조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禮에 말하기를 天子는 堂을 9尺으로 하고 諸侯는 堂을 7尺 으로 한다하니 이로부터 制度가 定해 있는데, 近來에는 사람의 尊卑가 없으므로 만약 財力만 있으면 모두 室堂 營造하기를 먼 저 하여 이로 말미암아 여러 州 郡 縣 및 亭 驟 津 渡의 豪右들이 다투어 큰 집을 지어 制度를 넘게 되니 비단 한 집의 힘만 다할 뿐 아니라, 實로 백성을 괴롭히게 되니 그 弊가 심히 많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禮官에게 命하여 尊卑의 家舍制度를 酌定하여 中外로 하여금 遵守케 하고 이미 營造된 것으로 制度를 넘는 것 도 또한 毁撤하기를 命하여 後來를 징계하소서 (高麗史 93 崔 承老f專) 우리는 위의 記事를 통해서 地方勢力家의 家舍에까지 法的制裁 38) 高隨史 93 崔承老傅 39) 本稿 第:I車 第2節 참조

81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를 가하려는 執權層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地方勢 力이 崔承老의 時務 28條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당 시 地方勢力이 地方에서 막강한 실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 을 反證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대체로 高麗국초에 있어서는 地 方勢力이 독자적인 軍事力을 기반으로 그 地方을 직접 지배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40) 그러나 成宗대에 시작되는 地方官의 설치는 동시에 地方勢力에 대한 中央統制를 서서히 가능하게 하였다. 이것은 12牧이 설치되 던 成宗 2年에 地方의 吏職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진 사 실로써도 미루어 알 수 있다. 高麗史 卷 75 選擧志 鈴注 鄕職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이고 있다. 成宗 2년에 州府郡縣의 吏職을 고쳐 兵部를 司兵으로, 倉部 를 司倉으로 하였으며, 堂大等을 戶長으로, 大等을 副戶長으로, 郞中을 戶正으로, 員外郞을 副戶正으로, 執事를 史로, 兵部卿을 兵正으로 筵上을 副兵正으로, 維乃를 兵史로, 倉部卿을 倉正으 로 삼았다 위의 記事를 지금까지의 硏究成果를 土臺로 하여 改定 이전과 이 후의 吏職을 圖表化하면 다음과 같다.41) 40) 이에 대한 論攷로는 李基白 新羅私兵考 歷史學報 9輯(1955) 千寬宇 閑人考 社會科學 2號(1958) 旗田巍 高麗王朝成立の 府 と豪族, 法制史硏究 10(1960) 참조 41) 李基白 上揭論文 참조. 그 뒤 다른 분의 論著에도 이 圖表가 많이 引用되고 있다

82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改 定 以 前] ( ) 郞中 員外郞 執事 堂大等 大等 兵部 兵部卿 筵上 維乃 倉部 倉部鄕 [改 正 以 後] ( ) 戶正 副戶正 史 戶長 副戶長 司兵 兵正 卿兵正一兵史 司倉 倉正 위의 圖表 중 ( ) 부분에 해당하는 記事는 없다. 그러나 ( ) 부분이 改定 이전에는 戶部였을 것이라고 지금까지 추정되어 오고 있다. 이 推定에 따른다면 改定 이전의 吏職體系는 堂大等 大等 아 래에 戶部 兵部 倉部가 並列的으로 설치되어 있었던 셈이 된 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보기에는 커다란 의문이 있다. 앞에서 든 鄕職 成宗 2년條의 記事를 다시 한번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위의 記事에는 兵部와 倉部에 대해서만 언급되어 있어 戶部에 관한 것은 記事의 누락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 戶部란 部署는 없 었기 때문에 언급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史料에 보다 충실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만약 戶部가 있었다면, 그 책임자는 兵部나 倉 部의 책임자와 같이 戶部 卿 이라고 불렸을 법하다. 그러나 실제 로는 郞中 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郞中 이라는 職名에서는 책 임자로서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郞中 員外郞 執事가 속해 있었던 기관은 兵部 倉部 와 同列的인 기관이 아니라, 보다 上位의 기관이 아니었던가 하는 추측을 낳게 한다. 이와 같은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史例의 하나 로서, 우리는 泰封時代에서 高麗國初까지 中央의 最高行政機關이

83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었던 廣評省 을 들 수 있다. 三國史記 卷 50 弓裔傳에 의하면 弓 裔는 처음으로 廣評省을 설치하여, 匡治奈(侍中) 徐事(侍郞) 外書 (員外郞)의 관원을 두고, 또한 兵部 大龍部(倉部) 이외에 많은 官 府를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高麗太祖는 이러한 泰封의 制度 를 좇아 廣評省을 설치하여 百官을 徳領케 하고, 侍中 侍郞 郞中 員外郞의 관원을 두었던 것이다.42) 우리는 廣評省의 관직인 郞中 員外郞이 吏職의 職名에도 나타나 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따라서 地方勢力家의 支配體制에서도 中央의 廣評省에 해당하는 機構를 想定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다. 즉 堂大等은 侍中, 大等은 侍郞격에 해당하며, 그 下位職으로 서 郞中 員外郞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 조직이 同 一系統임을 뒷받침하는 것으로서는 吏職 개정에서 각각 戶長 副戶 長 戶正 副戶正이 되어 戶 에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郞中은 體制上으로 兵部 倉部의 책임자와는 同格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成宗 2년의 改定 이전에는 堂大等은 그 명칭 은 알 수 없지만 中央의 廣評省과 비슷한 機構의 首班이 되어 자 기 세력 아래 있는 地域율 지배하였는데, 實務 下位機構로서 兵部 와 倉部를 설치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概 稱? 職 堂大等 大 等 名 郞 中 兵 部 卿 倉 部 卿 員外郞 執 事 筵 上 維 乃 그런데 成宗 2년의 吏職改定은 우선 機構上의 개편을 보이고 42) 高麗史 卷 76 百官志 尙書省條에 太祖 仍泰封之制 置廣評省 摠領百官 有侍 中 侍郞 郞中 員外郞 이라 되어 있다

84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있다. 郞中을 戶正으로 개편한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兵部卿과 倉 部卿을 각각 兵正과 倉正으로 고친 것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機構上의 개편은 堂大等으로 대표되는 地方勢力家의 支 配基盤을 制度的으로 약화시키기 위한 조처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인 조처가 곧 地方勢力 統制에 있어서 그 實效를 거두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地方官의 파견을 통한 中央行政力의 地方浸透는 극히 완만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 다. 우리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成宗 2년에는 겨우 12牧에만 地 方官이 파견되었음을 想起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각 지방은 그 지방에 地方官이 설치되기까지는 여전히 戶長이 守令格이 되어 그 지방을 다스리면서 中央政權의 간접적인 관할을 받는 형태를 취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43) 그렇지만 한편으로 地方勢力에 대한 統制策은 계속 추진되고 있었다. 즉 成宗 6년 6월에는 州郡의 兵器를 거두어 農器를 鑄造 하였는데,44) 그 목적이 부족한 農具의 보충에 있었다기보다는 地 方의 武器를 거두어들이려는 데 있었다 함은 이미 지적된 바 있었 다.45) 이와 동시에 成宗 6년 9월에는 吏職改定이 縣 아래의 單 位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즉 諸村의 大監 弟監을 고쳐 村長 村正으 로 삼았던 것이다.46) 이것은 地方勢力에 대한 中央統制의 관심이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확대되어 감을 나타내는 하나의 좋은 例 가 되기도 한다. 成宗대의 地方勢力 統制는 成宗 14년의 地方官制 개편으로 보 43) 千寬宇 前揭論文 참조 44) 高麗史 卷 79 食貨志 農桑條 45) 李基白 前揭論文 참조 46) 高麗史 卷 3 成宗世家

85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다 強化된다고 생각한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成宗 14년에는 12牧을 12節度使 體制로 개편하는 동시에 都團練使 團 練使 刺史 등의 새로운 外官職이 설치되었는데, 이러한 地方官制 의 整備는 상대적으로 地方勢力을 통제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 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地方勢力은 集權的인 地方官制의 정비 와 반비례해서 그 지위가 약화되어 갔을 것으로 생각한다. 2) 顯宗代의 地方勢力 統制策 우리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顯宗 9년(1018)에 대 대 적인 地方官制의 정비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 즉 이해에 4都護 8 牧과 56知州郡事 28鎭將 20縣令의 설치라는 새로운 地方官制가 성립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地方官制의 개정은 地方勢力에 대 한 통제책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顯宗 9년에는 地方勢力에 대한 구체적인 통제책이 단행되고 있 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地方行政單位의 丁의 大小 에 따라, 戶長 副戶長 兵正 副兵正 倉正 副倉正 史 兵史 倉史 公須史 食 祿史 客舍史 藥店史 司獄史의 인원수를 규정 하고 있는 것이다.47) 이와 함께 주목되는 것은 顯宗대에 와서는 公須史 이하 司獄史에 이르기까지 史 級의 末端吏職이 첨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것은 鄕吏의 기능이 전대에 비해 分化되었음을 나타내어 주는 것 으로 추측되고 있다.48) 47) 高麗史 卷 75 選擧志 鄕職 顯宗 9年條. 가령 千丁以上의 吏職定員에 대한 記 事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顯宗九年 定凡州府郡縣, 千丁以上 戶長八人 副戶長四人 兵正 副兵正 各二人 倉正 副倉正各二人 史二十人 兵倉史各十人 公 須 食祿史 各六人 客舍 藥店 司獄史各四人 48) 千宽宇 前掲論文 참조

86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吏 職 公 服 表 吏 職 名 公 服 戶 長 紫衫 靴 笏 副戶長 兵 倉 正 緋衫 靴 笏 戶 正 司 獄 副 正 綠衫 靴 笏 史 深靑衫 笏 天碧笏 笏 兵 倉史 諸 壇 史 둘째는 史職의 公服 제정이다. 즉 戶長 이하 史 級에 이르기까 지의 公服을 그 職의 高下에 따라 구분하였던 것이다.49) 이를 圖 表化하면 위와 같다. 위의 도표에서 제시한 바와 같은 吏職의 公 服 제정은 吏職에 대한 체계적인 통제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 이 아닌가 한다. 세째는 地方官이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로서 吏職에 대 한 監察을 강조하게 되었다. 가령 顯宗 9년 2월에 州府의 官員이 奉行할 6條를 새로 제정하였는데, 그 가운데 2조목이 贞職에 대 한 監察로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제2조는 黑絞長史의 能否를 살피 는 것이고, 제6조는 鄉吏의 錢穀散失을 살피는 것이었다.50) 이것 은 地方官制의 정비가 곧 地方勢力의 통제를 촉진한다는 하나의 구체적인 史例도 될 것이다. 그리고 각 지방에 파견된 地方官은 그 지방의 戶長을 직접 擧望하여 給貼하게 까지 되었다.51) 우리는 위에 든 몇 가지 사실을 통하여 顯宗 9년에는 地方勢力 을 규제하는 제도적인 조처가 취하여졌으며, 특히 地方官이 파견 49) 高麗史 卷 72 輿服志 冠服. 여기에 司獄正 副正이라는 새로운 吏職이 나타나 있는 것이 주목된다. 50) 商賊史 卷 75 選擧志 3 選用守令 顯宗 9年 2月條 참조 51) 前揭書 鄕職條에 (顯宗 9年) 諸道外官 戶長學望時 考其差年久近 壇典行公 年數 具錄申省 方許給貼 이라 되어 있다

87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된 地方의 地方勢力은 中央行政力의 강력한 통제를 직접 받게 되 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顯宗대에 이미 地方勢力은 地方官의 行政을 보좌하는 鄕吏의 지위로 전락하게 된 것 같다. 따라서 그 吏職도 地方官에 의해 그 任免이 결정되기까지 하였다. 가령 顯宗 16년에는 州縣의 長吏가 病으로 100일 동안 吏職에 종 사하지 못하면 京官의 例에 따라, 그 地方官은 해당 長吏를 罷職 하고 지급하였던 土地를 還收하는 조처를 취하였던 것이다.52) 이와 같이 顯宗대에 정비된 地方勢力 통제책은 그 뒤 德宗 靖宗 을 거쳐 文宗대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더욱 補強된다. 따라서 우리 는 文宗대의 地方勢力 통제책에 대해서 잠깐 언급해 두는 것이 좋 을 것 같다. 우선 文宗대에 이르면 鄉吏의 정치 사회적 지위에 대하여 法的 制約이 따르게 됨을 볼 수 있다. 즉 科擧 중 製述 明經業에 응시 할 수 있는 鄕吏 신분계층은 副戶長 이 상의 孫, 副戶正 이상의 子로 한정시킨 데다가, 그들이 만약 科擧에 응시하고자 할 경우에 는 地方과 中央에서 엄격한 審查를 거쳐야만 가능하도록 규제하 였던 것이다.53) 이것은 高麗에서 貴族門閥 중심의 새로운 지배신 분계층이 형성됨에 따라서, 鄕吏 신분층이 보다 높은 지배신분계 층으로 상승할 수 있는 門戶를 되도록 좁히자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制裁는 점차 鄕吏 신분층을 귀족적인 신분계층과 일반 피지배계층의 중간적 위치에 놓이게 하였던 것 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地方吏職에 대해서 그 昇進 코오스를 明文化하 52) 前揭書 顯宗 16年 2月條 참조 53) 高麗史 卷 73 選擧志 1科目條에 (文宗 2年 10月) 各州縣 副戶長以上孫, 副戶正以上子 欲赴製述 明經業者 所在官 試貢 京師尙書省 國子監審考 云云하는 記事가 보인다

88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고 있다. 즉 文宗 5년 10월에 州縣의 吏職은, 後壇史 兵 倉史 州 府郡縣史 副兵 倉正 副戶正 戶正 兵 倉正 副戶長 戶長의 순 서로 승진하도록 규정하였던 것이다.54) 地方吏職의 승진 과정에 대한 규정은 地方吏職의 中央統制를 더욱 용이하게 하기 위한 조 처가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高麗시대에 있어서의 地方勢力에 대한 中央 統制는 成宗 顯宗 文宗대의 여러 施策을 통하여 地方勢力의 사회적 지위를 中央行政力의 보조자로서의 지위로 전락하게 하였으며, 따 라서 제도적으로는 地方勢力(地方吏職)이 中央行政力의 統 制 속 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렇다고 해서 地方勢力이 완전히 無力해졌다는 뜻으로 생각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地方勢力이 地方에 미치는 영 향력은 위에서 말한 제도상의 통제책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상 당히 강대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우선 전국의 각 지방행정 단위에 地方官이 고루 파견되 지 못하였던 조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高麗후기까지 地 方官이 배치된 지방행정 단위보다는 배치되지 못한 곳이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55) 따라서 地方官이 배치되지 못한 곳에서는 地方 吏職이 그 地方行政의 實務를 담당하였을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직접 地方官의 統制를 받는 地方吏職의 경우도 그 세력은 컸을 것 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高麗말기까지 地方官이나 地方에 隨時로 파견하던 臨時職의 가장 큰 任務의 하나가 바로 地方吏職의 監察 이었다는 사실로써 미루어 알 수 있다. 끝으로 地方勢力에 대한 54) 高麗史 卷75 選擧志 3 鈴注 想職條에 文宗五年十月判 諸州縣吏 初職後壇史 二轉兵 倉史 三轉州府郡縣史 四轉副兵 倉正 五轉副戶正 六轉戶正 七轉兵 倉 正 八轉副戶長 九轉戶長 이라 되어 있다. 55) 本稿 第1章 第3節 참조

89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中央統制의 施策인 事審官制度나 其人制度가 高麗말기까지 존속 하였던 사실은 高麗社會에 미치고 있던 地方勢力의 커다란 영향 력을 反證해 주고 있다 할 것이 다. 그러므로 이제 事審官制度와 其人制度를 통하여, 地方勢力의 中 央統制策을 또 다른 측면에서 검토하여 보고자 한다. 3) 事審官 制度 이미 다 아다시피 事審官의 起源은 太祖 18년에 新羅의 降王 金 傅를 慶州事審으로 삼아 副戶長 이하의 官職等事를 관장하게 하 였으며, 이와 함께 여러 功臣들도 그 本州 의 事審으로 삼은 데에서 비롯하였다.56) 여기서 本州 란 本貫의 州를 의미한다. 당시 功臣들은 거의가 豪族 출신으로서 中央貴族化되어 있었지 만, 그 本貫에는 여전히 전통적인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어서 그 지방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따 라서 中央政府에서는 이러한 功臣들의 在地勢力基盤을 이용하여 그 지방의 鄕吏勢力을 통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地方官 이 파견되지 않은 시대에 있어서는 地方勢力에 대한 中央統制의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事審官의 監督權이 鄕史勢力을 대 표하는 戶長에게까지 미치지는 못하였다는 데에 그 권한의 한계 가 있었다. 이것은 한편 地方에 있어서 戶長의 지위와 비중이 그 만큼 독자적이고 컸음을 나타내고 있다 할 것이다. 事審官의 설치목적이 地方勢力의 통제에 있었던만큼, 中央에서 는 事審官과 戶長의 聯通을 꺼렸을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실제로 56) 高麗史 卷 75 選麟志 3 取審官條에 太祖十八年 新羅王金傅來降 除新羅國爲 慶州 使傅爲本州事審 知副戶長以下官職等事 於是, 諸功臣亦効之 爲其本州事審 事審官始此 라 되어 있다

90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事審官과 戶長이 血緣을 토대로 聯通함으로써 많은 폐단을 일으켰 던 것 같다. 가령 顯宗 초년에 父나 親兄弟가 戶長으로 있는 사람은 事審官에 임명되지 못한다는 것이 法制化되기까지 이른 사실57)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즉 父나 親兄弟가 戶長으로 있는 사람이 事審 官으로 임명되었을 때에 地方勢力의 中央統制에 있어서 所期의 목 적을 달성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한편 太祖 18년에 설치된 事審官은 그뒤 地方官制의 整備가 진 행됨에 따라 事審官도 그 제도적인 정비를 보게 되었다. 즉 成宗 15년(996)에는 事審官의 定員을 500丁 이상의 州에는 4員, 300丁 이상의 州에는 3員, 그 이하의 州에는 2員으로 규정하게 되었던 것이다.58)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太祖 18년의 創設 당시는 事審 으로 되어 있던 것이 成宗 15년에는 事審官 이라 하여, 官 字가 부가되어 있는 점이다. 이것은 事審 을 官僚 體系에 편 입시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즉 당초의 豪族的인 것에서 官 僚的인 것으로의 개편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59) 그 리고 위의 규정에도 나와 있듯이, 事審官은 아무리 작은 地方이라도 最低 2員이 임명되고 있다. 이와 같은 複數 임명은 1員의 임명으로 인한 權力의 集中을 막으려는 정책 때문으로 생각되고 있다.60) 한편 우리는 成宗 15년에는 事審官의 人員數가 크게 激增하였 음을 생각할 수 있다. 成宗 14년의 全國 郡縣總數는 약 600에 달 하였다. 따라서 最低 2員으로 보더라도 事審官의 總數는 1,200명 이나 되었던 셈이 된다. 이것은 成宗대의 中央官僚 대부분이 事審 官에 임명되었으리라는 추측을 낳게 한다. 이것은 또한 당초 事審 57) 前揭書에 顯宗初年判 父及親兄弟爲戶長者 勿差事審官 이라 되어 있다. 58) 前揭書 成宗 15年 59) 旗田巍 高鹿の事審官,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1972) p.120 참조 60) 旗田巍 前揭論文 참조

91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官이 지녔던 豪族的인 성격을 解消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成宗대까지만 하더라도 事審官과 事審官이 관할하는 地 方의 鄉吏는 同鄕일 뿐만 아니라 同族일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이 兩者가 血緣關係를 맺고 있는 이상 地方勢力의 中央統制는 큰 장애를 받게 될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므로 中央에서는 양 자의 血緣的 紐帶를 斷絕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그 결과 顯宗 초 년에는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은 규제조처를 취하였던 것 이다. 그리고 이러한 規制는 시대가 내려올수록 보다 더 엄격해져 갔다. 븍 事審官과 鄕史의 血緣關係를 완전히 단절시키는 제도적 인 조처가 취해졌던 것이다. 가령 仁宗 2년(1124)의 規制를 보면, 鄕吏의 자손은 비록 鄕役을 免除받았다 하더라도, 妻의 親黨이 아직도 鄕役을 하는 者는 事審官에 임명되지 못한다 (高麗史 卷 75 事審官) 라고 하고 있다. 우리는 위의 記事에서 現職에 있는 鄉吏의 子孫은 당연히 事審 官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비록 그 父 祖가 鄕役을 免除받아 現職 鄉吏가 아니더라도 妻의 親黨, 즉 가까운 妻族이 鄕役에 있 는 者까지도 事審官에 임명될 수 없는 엄격한 규제가 가해지고 있 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事審官과 鄉吏의 관계에서 同鄕의 관계 는 유지시키되 血緣的인 관계는 단절시키겠다는 執權層의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내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한편 창설 당시의 事審 은 本賞의 州縣을 관할하였으나, 成 宗 14년 이후 전국 州縣에 定員대로 事審官을 임명하게 되면서부 터 本貫에 국한시키기에는 어려운 문제가 생겼던 것 같다. 따라서 그 범위를 확대하는 조처가 취해졌다. 仁宗 12년의 規定을 근거로 이미 작성된 圖表를 인용하면 앞의 표와 같다.61) 61) 高麗史 卷 75 事審官 仁宗 12年判 圖表는 旗田巍 前揭論文 p.127 참조

92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地位 鄕 內鄕 宰 幅 外鄕 妻鄕 5鄕內 3鄉兼差 上將軍以下3 品以上 4鄕內 2鄕兼差 4 品以下 參 3鄕內 1鄕差 參 2鄕內 1鄕差 上以上 外 員 祖妻鄉 曾祖妻鄉 위의 도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事審官의 임지 선택 범위가 前 에 비하여 광범하여 졌으나, 父系 母系 妻系와 無關한 지방에까지 는 확대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즉 血緣的으로 因緣이 있는 지 방이 그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이러한 제도 의 변천에서 事審官制度가 그 創設 당시와는 달리 官僚機構의 일 부로서 地方統制의 職務를 담당하게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면 事審官의 職務내용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앞서 창 설 당시에 事審官이 副戶長 이하의 官職等事를 관장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史料의 부족으로 잘 알 수가 없 다. 다만 후대의 史料이기는 하지만, 忠肅王 5년(1318)의 下敎를 통해서 그 職務 내용을 추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忠肅 王이 내린 敎書에 의하면, 事審官은 본래 人民의 宗主, 流品의 甄 別, 賦役의 均平, 風俗의 表正을 위하여 설치되었던 것이라 하였 다.62) 즉 事審官은 관할 지방민의 宗主가 되어 流品을 심사하고, 賦役을 均平히 하며, 風俗을 表正하는 등의 職能을 맡아보았던 것 이 된다. 이러한 職能은 바로 地方官의 職能과 비교될 수가 있다. 따라서 일부 地方에만 地方官이 파견되었던 高麗前期에 있어서는 62) 高麗史 卷 84 刑法志 1 職制

93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事審官이 地方統制에서 차지하던 비중은 매우 컸던 것이다. 이처럼 事審官이 地方統制上 강력한 權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은 한편으로는 事審官에 의해 不法行爲가 저질러질 가능성이 많다 는 뜻도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임지에 내려가 民弊를 끼치는 事審官도 많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制裁 조처가 강구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 결과 文宗 11년(1057)에는 事審官으 로서 歸鄕하여 作弊한 者는 按廉使 監倉使가 京師에 推送하여 科 罪하고, 그 후임은 事審主掌使로 하여금 啓達하여 選任하도록 法 制化하였던 것이다.63) 여기 보이는 事審主掌使는 職名 그대로 事 審官에 관한 일을 전체적으로 主掌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직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러나 이러한 法的規制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내려올수록 事審 官의 작폐는 심각해졌던 것 같다. 事審官으로 인한 폐단은 忠肅王 5 년 5월의 下敎의 내용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事審官은 맡겨진 임무와는 반대로, 任地의 公田을 廣占하고 民戶를 多匿하는 한편, 上京한 鄉吏에게 감히 私門에서 決杖 徵銅의 私刑을 가하고 국가의 祿轉을 還取하는 등의 폐단이 지적되어 있는 것이다.64) 전국적으 로 事審官이 不法占匿한 土地와 民戶가 어느 정도의 규모였던 가 는 高麗史 卷 34 忠肅王世家 6년 9월 丁亥條에 잘 나타나 있다. 이때 국가에서 事審官이 占匿하였던 土地와 民戶를 推刷한 내용 은 다음과 같다. 즉 民 2,360戶, 奴婢 137口, 田 19,798結, 賜 田 1,227結, 位田 315結이었다. 위에 나타난 田 賜田 位田의 合 63) 高麗史 卷 75 事審官 文宗 11年判 64) 高麗史 卷 84 刑法志 1 職制 忠肅王 5年 5月條에 下敎一 事審官之設 本爲 宗主人民 甄別流品 均平賦役 表正風俗 今則不然 廣占公田 多匿民戶 小有差役 例收祿轉 則吏之上京者 敢於私門 決杖徵銅 還取祿轉 擅作威福 有害於鄕 無益於 國 云云하고 있다

94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計는 21,330結에 달하는데. 이것을 高麗 말기의 耕作土地인 實田 약 62萬結, 荒遠田 약 17萬結, 合計 약 79萬結과 대비해 보면,65) 全國土地의 약 40분의 1이 事審官에 의해 不法的으로 占有되었음 을 알 수 있다. 위의 結數는 물론 還收한 것만으로서, 還收되지 않 고 그대로 不法 占有된 土地는 相當數에 달했을 것이다. 이것은 民과 奴婢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러한 事審官의 作弊는 事審官制度의 폐지를 가져오게 하였다. 事審官制度는 忠烈王 9년에 임시로 폐지된 적이 있다가,66) 그보 다 약 30년 뒤인 忠肅王 5년에는 완전히 폐지되기에 이르렀던 것 이다. 이때 民이 甚히 이를 기뻐하였다는 것으로67) 미루어, 事審 官이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일반 민중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었던가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事審官制가 폐지된 뒤에 몇 차례 이 제도의 부활을 주장하는 건 의가 나오기도 하였으나,68) 그것이 실현되지 못하고 事審官制는 아주 소멸해 버리고 만 것이다. 事審官制의 완전 폐지는 高麗社會 가 후대에 가서는 事審官의 제도 자체가 불필요하게 될 만큼 변화 하였음을 의미한다. 만약 여전히 事審官이 필요한 사회체제였다면 事審官의 폐단만을 시정하고 그 제도 자체는 존속시킬 수도 있었 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高麗社會의 質的變化를 엿보게 된다. 본래 事審官을 설치한 의도가 地方官制의 불비를 補完하자는 데 있었다. 즉 전국의 각 행정단위에 모두 地方官을 파견하여 地 65) 高麗史 卷 78 食貨志 1 田制 恭讓王 3年 5月條 참조 66) 高麗史 卷 29 忠烈王世家 9年 4月辛亥條에 權罷州 府 郡 縣 事審官 이라 되어 있다. 67) 高麗史 卷 34 忠肅王世家 5年 4月 庚申條 68) 가령 恭愍王 때에 執權者인 辛旽에 의해 事審官의 부활이 강력하게 건의된 바 있었다. 즉 高麗史 卷 132 辛旽傳에 (恭愍王 18年) 旽欲自爲五道都事審官 令 三司上書請復之 云云하고 있다

95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方統制를 할 수 없는 社會的與件에서 나온 臨機應變的인 地方勢 力 통제책의 하나였던 것이다. 따라서 事審官制의 완전 폐지는 高 麗후대에 가서는 事審官이 그 시대적인 사명을 다하였다는 뜻이 될 것이다. 高麗에서는 中期 이후 점진적으로 새로운 國家體制가 安定되고 또 많은 地方官이 전국의 각 지방행정구획에 파견됨으로써 이들이 地方統制의 主役을 맡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서 이제까지 地方官 鄕吏 農民이라는 機構와 事審官 鄕吏 農民이라는 機溝의 二 重的 組織이 前者의 地方官制로 一元化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一元的 組織은 高麗 地方統制策의 발전을 의미한다 할 것 이다.69) 4) 其人制度 高麗의 其人制度는 中央과 地方勢力과의 관계에서 마련된 독특 한 제도였다. 高麗國初에 있어서, 地方勢力이 강대하여 中央에서 그들의 협력이 절실히 요망되었을 때에는 上京한 地方勢力家의 子弟들도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나, 그뒤 中央의 行政力이 점차 地 方에 침투되고 그와 함께 地方勢力이 약화됨에 따라서 上京한 其 人에 대한 대우도 달라져 갔다. 其人의 기능에 대해서, 高麗史에 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國初에 鄉吏의 子弟를 뽑아 京城에 볼모로 삼고 또한 出身地 의 일에 대하여 顧問에 備케 하였는데, 이를 其人이라말한다. (高麗史 卷 77 選擧志 其人) 그러나 우리는 위의 記事만으로써는 其人에 대하여 정확한 이 69) 여기서는 地方統制와 관련하여 事審官의 문제를 되도록 간략하게 서술해 보았 다. 事審官에 대한 전반적이고 상세한 論攷에 대해서는 旗田巍 前揭論文

96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해를 가지기가 곤란하다. 왜냐하면 其人은 시대적 변천에 따라 그 성격을 크게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高麗의 其人制度는 高麗사 회에 있어서의 地方豪族의 勢力消長을 測定하는 尺度가 되고 있 다. 따라서 우리는 其人制度의 변천을 살펴봄으로써 中央의 地方 勢力 통제책과 地方勢力의 盛衰를 엿볼 수 있게 될 것이다. 其人制度의 변천과 其人의 성격 등, 이 制度에 대한 연구는 일 찍부터 활발하였으며, 그에 따라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70) 따라서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하여, 其人制度를 地方勢力 統制策 의 實態라는 측면에서 잠깐 다루어 보고자 한다. 高麗國初, 특히 太祖가 後三國을 통일하기 이전에는 高麗王朝에 好意를 가진 地方豪族들이 자진해서 자기들의 子弟를 上京시키는 例가 많았으며, 이에 대하여 中央에서는 그들에게 高位의 官等을 주는 한편 國王 측근세력의 딸과 혼인시키는 등, 극진한 대우를 아끼지 않았다.71) 이것은 高麗가 유력한 地方豪族의 협력을 얻어 야만 後百濟와의 統一戰爭에서 유리한 高地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地方豪族子弟의 中央 選上에는 강 제성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地方豪族의 自意에 의한 자발적인 選 上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점차 地方官制가 정비되고 이와 동시에 中央行政力이 地方에 침투함에 다라 強制性을 띠어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役의 내용도 달라져 갔다. 우리는 地方官制와 吏職에 대하여 대대적인 整備와 개편을 단행 70) 其人制度에 대한 論攷로는 李光麟 其人制度의 變遷에 對하여, 學林 3(1954) 金成俊 其人의 性格에 對한 考察, 歷史學報 10 11輯(1958) 轉佑劤 古代國家成長 過程에 있어서의 對服屬民 施策, 歷史學報 12 13輯(1960) 同 麗代의 其人選上 規制, 歷史學報 14輯(1961) 등이 있다. 71) 가령 高麗史 卷 1 太祖世家 3年 春正月條에 의하면 地方豪族의 하나인 康州 (晋州)將軍 閏雄이 자진해서 자기 아들 一康을 開城에 보내어 볼모로 삼게 하였 는데, 이에 대한 보답으로 太祖는 一康에게 阿粲의 位를 주고, 卿行訓의 누이와 혼인시켰으며, 한편으로 郞中 卷讓을 康州에 보내어 慰諭하였던 것이다

97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한 成宗대 顯宗대의 其人政策이 어떠하였는지를 밝혀볼 史料가 없 는 것을 아쉽게 생각하지만, 文宗 31년의 其人選上規定을 통하여 其人의 신분과 役의 내용 등이 高麗국초에 비하여 크게 변질하였음 을 살필 수 있다. 물론 그 記事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문과 論難이 제기되고 있으나,72) 우리는 그 記事에서 몇 가지의 새로 운 변화를 찾을 수는 있는 것이다. 첫째는 其人의 신분이다. 文 宗 대에 와서는 戶長 신분층은 其人選上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것 같다. 兵 倉正, 副兵 倉正 등이 云謂되고 있는 사실에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것은 高麗국초에 地方豪族이 子弟를 上京시킨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신분상의 변화는 其人의 役이 달라지는 데 연유하고 있다. 둘째는 役의 내용이다. 高麗국초의 其人은 地 方豪族의 國王에 대한 忠誠의 담보로서의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다른 身役을 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文宗때의 其人은 그 役의 내용은 분명치 않으나 身役을 지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文宗 대의 規定에 40세 이하 30세 이상이라고 年齡을 밝힌 것은 身役 의 부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시대의 변천으로 地方勢 力의 지위가 下落됨에 따라서 中央에 選上된 其人을 勞動의 人的 資源으로 轉用한 것이 아닌가 한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文宗代의 其人은 前代만은 못하였지만, 그러나 役의 代價로 어느 정도의 대 우는 받았던 것 같다. 그것은 일정 기간 근무하면 同正職을 받게 되고 役을 마치면 加職한다고 明文化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高麗中期 이후 地方官의 파견이 전국적인 규모로 점차 확대되고, 이와 동시에 集權的인 國家體制가 갖추어지면서 鄉吏의 72) 高號史 卷 75 選擧志 3 其人 文宗 31年條의 記事 내용은 다음과 같다. 判凡 其人 千丁以上州則足丁 年四十以下三十以上者 許選上 以下州則半足丁 勿論兵 倉正以下副兵 倉正以上 富强正直者 選上 其足丁限十五年 半丁限十年立役 半丁 至七年 足丁至十年 許同正職 役滿加職 이 史料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는 金成俊 上掲論文과 韓㳓劤 麗代의 其人選上規制 등에서 행해져 있다

98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정치적 사회적 지위는 더욱 轉落되고, 이에 따라서 其人의 성격 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高麗 후기에 이르면 其人은 苦役에까지 종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령 高宗은 諸道가 兵火를 입고 调殘해져서 租賦가 적어지니, 그 州縣의 其人으로 하 여금 閑地를 耕作케 하여 租를 거두어서 經費를 보충하도록 하 라 73)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其人이 閑地耕作 에 동원될 정도로 그 지위가 하락한 사실을 볼 수 있다. 그 뒤 其人은 더욱 그 신분이 전락되어, 忠宣王대에 오면, 주로 宮室의 修營과 官府의 使令役을 맡아보게 되었으며,74) 드디어 忠 肅王 5년의 敎에 의하면, 其人의 役使가 奴隷보다 甚하여 그 고 통을 견디지 못해서 逋亡함이 끊이지 않는다 라고 할 정도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폐단은 其人制度 자체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75) 우리는 위에서의 검토를 통하여, 其人의 성격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크게 변질되었음을 보아 왔다. 즉 高麗國初에는 극진한 대우 를 받았던 地方勢力 신분층이 高麗후기에 이르러서는 奴隷보다도 더 甚한 賤役에 종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其人의 성격 변화는 바로 鄉吏의 사회적 지위의 변화를 그대로 반영하여 주고 있다 할 것이다. 鄉吏의 사회적 지위는 時代가 내려올수록 점차적 으로 전락되어 간 것이다. 이것은 高麗社會에 있어서 地方勢力에 대한 集權的인 統制策이 오랜 시일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갔음을 의미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곁들여 밝혀둘 것은 其人의 役이 奴隷보다도 더 고 73) 高麗史 卷 79 食貨志 2 農桑 高宗 43年 2月條 74) 高麗史 卷 83 兵志 3 工役軍 忠宣王 元年 3月條에 其人者 主宮室修營 官府使 令之役 郡縣吏之子 必經是役 然後得補吏職 이라 되어 있다. 75) 高麗史 卷 75 選擧志 3 其人 忠蹄王 5年 條

99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되고, 그 신분이 전락되었다고 해서, 鄕吏 신분층이 모조리 전락 되었다고 一律的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奴隷보다 더 甚 한 苦役에 종사하는 鄕吏 신분층이 있는가 하면, 귀족적 관료신분 층으로 상승한 鄕吏 출신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점이 朝鮮시 대와 다른 것이었다. 말하자면 高麗시대에 있어서는 地方勢力에 대한 집요한 中央統制의 결과, 鄕吏 신분층이 크게 分化되었던 것 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地方勢力은 그뒤 朝鮮王朝의 成立 이후 에도 韓國社會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 다. 즉 地方勢力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無力해진 것은 아니 었다. 새로운 성격, 새로운 모습으로 轉身하여 또 다른 문제를 제 기하게 되는 것이다. 河 炫 綱 3. 軍事組織 (1) 京軍의 形成 高麗의 군사 조직은 太祖 王建이 後三國의 통일을 위한 전쟁에 동원했던 군대가 기간이 되어 조직되었다. 太祖는 본래 松岳城主 로서 자기 자신의 독립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浿江鎭 (平山)의 육군이나 穴口鎭(江華)의 해군이 太祖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그 병력이 많이 동원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太祖의 部將 중에는 庾黔弼 朴守卿 등 平山 출신이 많으며, 한편 太祖가 羅州를 경영할 때에 거느리고 간 해군은 穴口鎭의 것이 주가 되었 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리고 弓裔를 축출한 뒤에는 桓宣吉

100 3. 軍事組織 같은 일부 반란 분자의 군대를 제외한 泰封의 군대가 太祖의 지휘 밑에 들어갔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 중에는 특히 靑州(淸州) 지방 출신의 군대가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太祖의 지휘 밑에 중앙에 있던 군대 이외에 지방에 있는 여러 城主들이 거느린 諸城軍이 필요에 따라서 원군으로 동원되곤 하였다. 太祖가 거느린 이러한 여러 요소의 군대들 중에서, 諸城軍이 지 방군인 州縣軍으로 편입되는 이외에, 太祖가 城主로서 거느리고 있던 군대나 그의 지휘 밑에 있던 여러 部將의 군대는 중앙군인 京軍으로 편입되었다. 太祖가 거느리던 군대가 京軍을 이루었음은 太祖가 죽은 뒤에 軍籍에 올린 자들을 成宗이 모두 鄕里로 돌려보 낸 사실로 알 수가 있다.1) 그리고 또 太祖가 後百濟를 멸할 때에 거느리고 출동한 군대 중에서 지방 城主의 군대나 女眞의 蕃兵을 제외한 군대가 후대의 京軍과 다음 일람표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 이 서로 대응한다는 점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가 있다.2) 支天軍 (1 萬) 左右衡 左綱一左衛 神號衛 六 衛 ( 4 2 興威衡 馬 軍 (1 萬) 補天軍 (1 萬) 領) 金吾衡 右綱 右衛 千牛衡 馬 軍 (1 萬) 監門衡 祐天軍 (1 千) 天武軍 (1 千) 中軍 二軍(3領) 杆天軍 (1 千) 鷹揚軍 { 龍虎軍 그러면 太祖가 거느리던 군대를 二軍 六衛의 새로운 조직으로 개편한 것은 언제일까. 우선 六衛가 형성된 것은 成宗 14년(995) 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穆宗 원년(998) 田柴科의 지급대상 1) 高麗史 3 成宗世家 7年 10月 條에 武班 年老無子孫 自癸卯年錄軍籍者 皆放還 鄕里 라고 하였다. 癸卯年온 太祖가 돌아가던 해(943)였다. 2) 李基白 高麗京軍考 高麗兵制史硏究(1968) p.51 참조

101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자 규정 속에 六衛라든지 諸衛라든지 하는 문귀가 나오는데, 穆宗 원년 이전으로서 六衛가 형성되기에 가장 알맞는 시기는 그보다 3년 전인 成宗 14년(995)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成宗 14년에 는 중앙과 지방의 官制가 대폭 정리되었으므로 이러한 행정조직 의 정비와 아울러 군사 조직도 정리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3) 이 러한 成宗의 군사 조직 정비는 두 면에서 진행되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지방의 豪族들이 거느리고 있던 私兵의 해체였다. 成宗 은 그의 2년(983)에 豪族의 지위를 격하하여 鄕吏로 하고 그 지 배하의 兵部를 격을 낮추어 司兵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독립된 城 主로부터 鄕吏로 전락한 豪族의 독자적인 兵權을 박탈한 것이었 다. 이어 6년(987)에는 지방의 兵器를 몰수하였다. 이것은 豪族의 私兵에 대한 무장 해제와 같은 것이었다. 둘째로는 中央軍의 개편이었다. 太祖의 部將들이 거느린 군대는 그들의 私兵과 같은 것이었고, 그들 部將의 太祖에 대한 충성심을 통해서 國家와 연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國王의 지휘를 받 는 國軍으로 개편할 필요가 있었다. 成宗 3년 (984)에 부대별로 군인의 服色을 정한 것은 부대에 있어서의 개별적인 지휘권을 부 인하고 그들의 임무를 기준으로 한 부대 조직의 원칙을 세운 것으 로 생각된다. 이어 7년 (988)에는 太祖 때 軍籍에 있던 자와 그 자손을 제외한 모든 군인을 향리로 돌려보냄으로써 새로운 부대 편성의 인적인 토대를 정비하였다. 이어 9년(990)에는 左右軍營 을 두었는데, 이것은 중앙군을 左衛와 右衛로 나눈 것을 말하며 이를 토대로 하고 六衛가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成宗이 六衛를 정비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唐의 府兵 制를 참조한 듯한 느낌이 짙다. 우선 六衛의 명칭은 唐의 중앙군 3) 李基白 高麗 二軍 六衛의 形成科程에 대한 再考 同上書 pp 참조

102 3. 軍事組織 과 흡사한 점을 많이 지니고 있다. 또 六衛에 소속된 군인은 흔히 府兵이 라고 불리었다. 唐의 경우에 있어서 府兵은 지방의 折衝府 소속의 在鄕軍人을 부르는 것이요, 上番하여 시위하는 군인은 衛 士라고 불렀다. 이에 대해서 高麗에서는 중앙군 자체를 府兵이라고 부른 데에 차이가 있으나, 하여튼 같은 府兵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 은 주목할 만하다. 高麗에서는 또 折衝府라는 군사 조직이 成宗 때 에 있었다. 이 折衝府에는 折衝都尉 果毅 別將 등의 관직이 있었다 고 생각되는데, 이들 관직은 唐 折衝府의 장관 차관 보좌관의 직명 과 일치하는 것이다. 高麗의 折衝府는 그 소속 관직들이 穆宗 원 년 田柴科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중앙에 설치되었다고 생각 되 므로 역시 唐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기는 하나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사실들에서 中國의 제도를 받아들이는 데 열심인 成宗 이 唐의 府兵制를 받아들이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즉 成宗은 지방의 豪族들이 거느리 고 있던 군대를 府兵制를 통하여 중앙 정부의 지배 아래 놓으려고 의도했던 것이 아닐까고 생각된다. 중앙으로부터 地方官이 대폭적 으로 파견되던 成宗 14년(995)에 六衛가 완성되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高麗의 군사 조직을 府兵制의 형식에 맞추어 넣으려던 成宗의 의도는 결국 계획만으 로 그치고 말았다고 생각된다. 穆宗 8년(1005)에 행해진 地方官 의 대폭 적인 감축이 이를 시사해 주고 있다. 비록 顯宗 9년 (1018)에 지방 제도는 다시 확대되어 재정비되지만, 이미 折衝府 라는 것은 중앙에서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중앙과 지방의 군대는 일원화된 조직이 아니라 다원적인 조직으로 굳어지고 말았던 것 이다.4) 4) 高麗의 兵制를 府兵制로 본 견해로는 다음과 같은 논문들이 있다

103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이 六衛에 더하여 二軍을 첨가함으로써 高麗의 중앙군은 그 형 태를 완전히 갖추게 되었다. 二軍이 형성된 시기는 더욱 모호하여 이를 잘 알 수가 없으나, 太祖의 親衛軍이 光宗 때에 더욱 증대 강화되었다가, 成宗 때 일단 축소시되었던 것인데, 顯宗 때쯤 해 서 二軍으로 낙착된 것이 아닌가 한다. 顯宗 때에는 契丹의 침입, 金訓 崔質의 반란등 특히 宮城의 侍衛軍을 강화하고 조직화할 필 요를 느끼게 할 사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二軍 六衛는 어떠한 조직과 임무를 지니고 있었던 것일까. 二軍 六衛의 조직은 실상 임무의 분장 을 토대로 하고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메어서 생각 할 수가 없는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를 살펴 보기 위하여 먼저 그 조직의 일람표를 작성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5) 二軍 膺揚軍 1領 { 龍虎軍 左右衛 神虎衛 興威衛 六衛 金吾衛 千牛領 監門衛 2領 保勝10領 精勇 3領 保勝 5領 精勇 2領 保勝 7領 精勇 5領 精勇 6領 役領 1領 常領 1領 海領 1領 1領 二軍의 鷹揚軍과 龍虎軍은 혹은 또 控鶴軍과 牽龍軍이라고 하 內藤雋輔 高麗兵制管見 靑丘學叢 (1934) 末松保和 高麗四十二都府考略 朝鮮學報 14 (1959) 改稿 高麗の四十二都府につ いて 靑丘史草 1(1965) 姜晋哲 高麗 初期의 軍人田 淑明大論文集 3 (1963) 이에 대해서는 李基白 高麗軍人考의 附說 및 高麗 府兵制說의 批判, 高麗兵制史 硏究(1968)에서 필자의 의견을 상세히 진술한 바 있다. 5) 高麗史 81 兵志 1 兵制 條 참조

104 3. 軍事組織 는 것 같으며,6) 宮城을 시위하는 親衛軍으로서 모두 합하여 3領 즉 3천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宮城에 있으면서 國王 과 가까이할 기회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출세에 퍽 유리한 지위 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는 文班의 內侍와 대비시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軍人들은 일반으로 이 二軍에 소속되 기를 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二軍은 六衛보다 上位를 차지하였고, 특히 鷹揚軍의 지 휘관인 上將軍은 班主라 하여 二軍 六衛의 上將軍으로써 구성되는 重房회의의 의장의 구실을 담당하며, 온 武班의 대표자 노릇을 하 였던 것으로 보인다.7) 게다가 이들이 國王과 가까운 지위에 있었 다는 것은 다른 어느 군사 조직보다도 정권에 참여할 수 있는 기 회를 많이 주었던 것이다. 장차 武臣亂을 일으키는 대표자 격으로 된 鄭仲夫가 牽龍軍 출 신이었다든지, 또 그와 더불어 武臣亂을 일으킨 三巨頭로 꼽히는 李義方과 李高가 모두 牽龍軍 將校였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증 명하여 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六衛는 京軍의 중심을 이루는 부대였다. 우선 숫적 으로도 京軍 45領 45,000명 중 六衛가 42領 42,000명으로서 9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 은 左右 神虎 興威의 세 衛였다. 이 三衛의 군사 수도 32領 32,000 명으로서 전체 중앙군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 고 아마도 이들은 다른 衛와는 구별되어 三衛라고도 부른 것이 아 6) 鷹揚軍과 龍虎軍을 곧 控鶴軍과 牽龍軍이라고 한 직접적인 사료는 발견되지가 않는다. 그러나 이 양자가 모두 宮城을 시위하는 군대였다는 점, 그리고 高麗圖經 (11 仗衛 序)에서 鷹揚軍 대신 控鶴軍을 제시하고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서 짐작 할 수가 있다. 7) 班主에 대하여서는 鷹揚軍上將軍 兼軍簿典(尙?) 書者 稱班主 (高腐史 77 百官志 2西班 鷹揚軍) 라고 한 것을 참조

105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닌가고 추측된다. 이 들은 國王의 행차에 대한 雇駕, 外國 사신의 송영 등을 위시한 국가의 여러 행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는 出征 과 防戍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들은 국가의 國防常備軍인 것이 며, 평상시에는 邊境에 교대로 防戍할 뿐 아니라 戰時에는 전투에 출동하였다. 전쟁에 출동할 때에는 五軍이라는 특수 편제가 이루 어지곤 하였다. 五軍은 평상시에는 실무를 담당하는 기간요원만 임명되어 있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六衛 특히 위의 三衛 소속의 군 대를 편입시켜 전투 편제를 이루고 출동하였는데, 이때에 전군을 지휘할 元帥 副元帥 등이 임명되어 司令部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끝으로 力役의 의무가 있었다. 전투가 없는 평상시에 이들은 유휴 노동력으로서, 군사 훈련이나 防戍를 위한 출동을 제외하고는, 늘 土木工事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표현하여 무릇 扈駕나 내외의 力役으로서 하지 않음이 없었다 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8) 이들 三衛에 속해 있는 精勇과 保勝의 구별은 馬軍과 步軍의 兵種別 구분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金吾衛는 뒤에 備邊衛라고 그 명칭이 고쳐진 일도 있지만, 이것 은 警察部隊였다. 首都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은 이들의 책임이었 던 것이다. 가령 雜類들이 작당하여 못된 일들을 하는 경우에 이 를 금지시키는 일은 金吾衛의 임무였던 것이다. 또 市裏 街衢나 東 郊의 炭視 등 소위 虞犯地帶에는 檢點軍이 巡檢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9) 이렇게 정기적으로 순검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군대는 金吾衛였을 것이다. 아마 그것은 金吾衛 중에서도 특히 精勇軍의 임무였을 것이다. 같은 金吾衛에 속해 있으나 精勇과는 다른 役領 8) 高麗史 81 兵志 1 兵制 靖宗 11年 5月 揭榜에 凡置駕內外力役無不爲之 라고 하였다. 9) 高麗史 88 兵志 3 檢點軍 條 참조

106 3. 軍事組織 은 복역하는 죄수의 監督軍이 아니었을까고 추측된다. 千牛衛는 儀衛에서 王에 侍從하는 儀仗隊였을 것이다. 같은 千 牛衛 소속이라도 常領과 海領의 구별이 있었다. 海領은 문자 그대 로 海軍이었을 것이므로 海上 혹은 水上에서의 侍從을 담당한 것 이라면, 常領은 陸上에서 그러한 임무를 맡은 陸軍儀仗隊였을 것 으로 생각된다. 끝으로 監門衛는 宮城 내외의 여러 문을 수위하는 守門軍이었 다. 그러므로 질적으로 가장 떨어지는 군대였다. 이러한 관계로 해서 現役에 복무하지 않는 休暇兵이나 老兵 혹은 患者兵에게 명 목상으로 이에 속하게 하는 구실도 담당하였다.10) 위와 같이 각기 그 맡은 바 임무를 따로 지니고 있는 二軍 六 衛는 그 밑에 領 이하의 보다 작은 단위 부대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下級 將校를 그 지휘관으로 따로 임명하고 있었 으며, 또 그러한 단위 부대장들의 會議體가 구성되어 있었다. 이 제 그 관계를 알기 쉽게 표로 작성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11) 單位部隊 軍 衛 兵 員 數 (各 異) 領? 伍 隊 1, 000명 200명 50명 25명 指揮官 上將軍 大 將軍 中郞將 將軍 會議機關 重房 將軍房? 郞將 別將 散員 郞將房? 伍(校)尉 隊 正 散員房 校 尉 房? 이에 의하여 高麗의 군사 조직이, 高麗史 兵志 序文에 언급되어 있는 바와 같이, 上下가 서로 연결되고 體統이 서로 속해 있 음 을 알 수가 있다. 그런 속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동일한 등 급의 단위 부대별로 房이라고 하는 회의기관이 광범하게 존재했 10) 이상 서술한 二軍 六衛의 임무에 대해서는 李基白 高麗京軍考 高麗兵制史硏 究 pp 및 高麗軍役考 同書 pp 에 주로 의거하였다. 11) 李基白 高麗京軍考 同上書 p.74 참조

107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회의 기관은 武臣執權時代에 더욱 활발한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원래는 高麗 초기부터 조직되 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重房이 文臣에 대하여 武臣의 권리를 대변 하여 주었던 것과 같이, 이들 여러 房도 각기 그들 將校의 권리를 대변해 주었을 것이다. (2) 軍班制의 成立 그러면 二軍 六衛의 京軍을 구성한 일반 軍人은 국가에 의하여 어떻게 파악되고 충원되었으며, 또 그 사회적 지위는 어떠하였는 가. 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新羅 말기의 私兵에서부터 살펴 볼 필요가 있다. 新羅 말기에는 중앙의 貴族이나 지방의 豪族들은 저마다 私兵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의 私兵은 대체로 그들의 一 族을 지휘관으로 하고 奴僮을 병졸로 하여 조직된 것이었는데, 점 차 流民을 모집하여 이에 편입시킴으로써 그 규모가 확대되어 갔 었다. 이러한 私兵은 처음엔 전문적인 병사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後三國의 전란이 장기간 계속해 내려가는 동안에 점차 전 문적인 병사가 되고, 이에 따라서 그들의 身分도 향상되어 가는 경향을 나타냈던 것이다.12)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高麗시대 의 독특한 軍人 身分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高麗의 새로운 군사 조직을 형성하는 기초 작업으로서 成宗은 군사의 수를 조절한 바가 있었다. 즉 高 麗는 太祖 때에 이미 軍籍에 올라 있던 자를 토대로 하고 군사 조직을 짰던 것이다. 이렇게 高麗는 軍籍에 오른 일정한 氏族 즉 軍班氏族으로부터 군인이 나오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文宗 18 12) 李基白 新羅私兵考 歷史學報 9 (1957) 참조

108 3. 軍事組織 년(1064)에 兵部가 軍班氏族의 籍을 만든 지가 이미 오래여서 좀먹고 썩었기 때문에 軍額이 분명치 않으니, 청컨대 舊式에 의하 여 다시 帳籍을 만들자 고 上奏한 말 속에 이 사정이 잘 나타나 있다.13) 이 軍班氏族의 籍을 혹은 武班의 그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그것은 무리한 해석이다. 왜냐 하면 帳籍이 좀먹고 썩어서 軍額이 불분명하게 되었다고 하였는 데. 이때의 軍額을 武官의 그것으로 생각하기는 힘들 것이기 때문 이다. 그러면 軍籍을 작성하되 軍人 본인만을 하지 않고 氏族을 단위 로 한 것은 무슨 뜻에서일까. 이것은 일정한 軍額을 확보하기 위 하여 그 후계자를 국가에서 장악하여 두자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 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軍人의 직분은 자손에게 세습 되었던 것이다. 자손이 없으면 그의 친족이 대신 그 직업을 이어 나가야 했다. 軍人으로서 늙고 병든 자는 아들 손자 친족으로 하여금 이를 대신케 한다 고 한 것이 이를 말하여 주고 있다.14) 종래에 흔히 高麗史 食貨志 戶口條 序文에 國制에 民은 나이가 16세면 丁으로 하여 비로소 國役을 짊어지게 되는데, 60이면 老 라 하여 役을 면하였다. 州郡이 매년 人口를 세어 籍에 올려서 戶部에 바치니, 무릇 徵兵이나 調役은 戶籍으로써 抄定하였다 고 한 기록에 현혹되어서, 戶籍이 곧 軍籍인 것으로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趙浚의 上疏文을 그대로 옮겨놓은 이 글은 高麗 초기의 자 료로서 충분한 신빙성을 지닌 것이 못되는 것이다.15) 우리 는 이 13) 高麗史 8 文宗世家 18年 5月 條에 兵部奏 軍班氏族成籍旣久 蠹損朽爛 由此 軍額不明 請依舊式 改成帳籍 從之 라고 있다. 14) 軍人年老身病者 許令子孫親族代之 高麗史 81 兵志 1 兵制 文宗 23年 10月 判 15) 李基白 高麗 初期 兵制에 관한 後代諸說의 檢討 高麗兵制史硏究 (1968) p.9 참조

109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것보다는 위에서 든 보다 근본적인 사료들을 존중해야 할 것이라 고 믿는다. 그런데 軍班氏族이란 말은, 특히 氏族으로 되어 있음으로 해서, 軍役 파악의 대상이 된 일정한 村落에 거주하는 혈연적인 小共同 體로 이해되는 경우가 있다.16) 그러나 軍籍을 작성하는 목적이 軍 役을 세습할 자를 파악하여 軍額을 확보하자는 데에 있고, 실 제로 子孫親族으로 하여금 대신케 한다고도 하였으므로, 軍班氏族 의 籍은 실은 軍戶의 籍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高麗에 서는 軍戶가 軍役을 담당하고 세습하는 단위였다고도 할 수가 있 는 것 이다. 高麗 말기의 기록이긴 하지만 軍戶連立 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高麗 군사 제도의 대원칙으로서 그 본질을 이해 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고 믿는다.17) 비록 軍戶連立이란 말이 초기의 기록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앞서 軍人이 늙고 병들면 子孫 親族으로 하여금 대신케 하였다는 것이 곧 軍戶連立을 뜻하는 것 이다. 이같이 軍役을 세습하는 軍班氏族(혹은 軍戶)에 소속되어 있는 軍人의 身分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만일 府兵制說의 입장 에 선다면 그들은 곧 農民이 되는 것이다. 有事면 軍이 되고, 無 事면 農이 되므로 軍民一致였다 고 한 高麗말기 개혁론자들의 의견에 따르지 않더라도,18) 農民 이외에 軍人의 존재를 별도로 생각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19) 물론 高麗 軍班氏族의 기원을 더듬어 올라가 보면 아마도 그 대부분이 農民이었을 것이다. 그러 16) 姜晋哲 高麗 初期의 軍人田 淑明大論文集 3 (1963) p ) 高酿史 81 兵志 1 兵制 恭愍王 5年 6月 條에 凡軍戶素所連立 이라고 하였 다. 18) 高麗史 81 兵志 1 兵制 恭讓王 2年 12月 憲司의 上狀에 我國百姓 有事則爲軍 無事則爲農 故軍民一致 라고 있다. 19) 姜晋哲 高麗 初期의 軍人田 淑明大論文集 3 (1963) p.159 참조

110 3. 軍事組織 나 일단 軍班에 소속된 氏族으로 지정되어 農民과는 다른 帳籍, 즉 軍籍에 등록이 되고, 軍役을 세습하고 보면 자연히 그들은 일 정한 社會的 身分層을 형성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같이 軍役 을 세습하는 軍班 소속 氏族출신의 軍人이 高麗의 京軍을 형성하 였던 것이다. 필자가 高麗의 군사 제도를 軍班制라고 부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20) 요컨대 高麗의 京軍은 軍人職을 전문으로 하는 전문적 軍人으로써 구성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이 것은 물론 자유로이 선택된 직업이 아니라 세습에 의하여 강요된 것이었다. 이러한 高麗의 京軍 소속 軍人이 세습적으로 짊어지는 軍役은 따라서 일반 農民이 짊어지는 徭役과는 성질이 다론 것이었다. 唐 에 있어서는 均田制에 의하여 국가로부터 土地외 지급을 받은 農 民이, 보통은 租 庸 調의 의무를 지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府兵 으로 뽑히면 租 庸 調 대신에 軍役의 의무를 지고 교대로 上京侍衛 를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軍役과 租 庸 調의 의무와는 서로 맞먹 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런데 高麗에서는 軍役을 職役의 일종으로 간주하여 農民의 租 庸 調와는 다론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職 役은 雜職 胥史 工匠 鄕吏 및 軍人이 짊어지는 役을 말하는 것이 다. 위의 雜職과 胥史에는 中禁 都知 三司計史를 위시해서 南班員 등이 이에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工匠은 말단 匠人둘이 아니라 軍器監의 皮甲匠指諭 牟匠指諭를 위시한 각종 技術 관계 官府에서 지휘적 위치에 있는 工匠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鄕吏는 지방에서 실제로 행정을 담당하는 세력가임은 널리 알려져 있는 20) 軍班制에 대해서는 李基白 高麗 軍班制 下의 軍人 高麗兵制史硏究(1968) 중 의 제2장 軍班制 참조. 여기서의 高麗軍人의 身分에 대한 서술은 대체로 이 論文에 따른 것이다

111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사실이다. 즉 이들은 貴族官僚의 支配層과 農民의 被支配層과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身分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과 마찬가지로 職役을 담당한 軍人도 高麗에서는 일종의 중간층을 이루고 있는 身分이었던 것이다. 이같이 軍人이 鄉吏와 吏屬 내지는 지도적인 工匠과 견줄 수 있 는 職役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의 말단 관료 체계 속에 포함되는 자리라고 할 수가 있다. 적어도 국가에서 軍人을 그와 비슷한 위치에 놓고 생각하였음은 분명하다. 이 점은 軍人이 職役 의 담당자라고 생각된 점에서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田柴科의 규 정에 의한 土地를 지급한 사실에서도 알 수가 있다. 다만 軍人은 吏屬이나 鄉吏와 같이 행정적인 기능을 직접 행사하는 것은 아니 었다. 그러므로 국가의 권위를 등지고 일반 農民에게 임하는 존재 가 아니었다. 게다가 軍役의 부담이 실제에 있어서 무거운 것이었 고, 또 국가의 軍人에 대한 처우가 규정과는 같지 않았기 때문에 점점 그 지위가 낮아져 갔던 것이다. 더구나 평상시에는 흔히 力 役에 동원되는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보면 이러한 身分의 下落 현 상은 더욱 촉진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상에서 高麗의 軍人은 특수한 사회 신분층인 軍班氏族(혹은 軍戶)의 세습적이며 따라서 軍班氏族의 籍이 확보되어 있는 이상 은 일정한 軍額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실제에 있 어서는 力役의 고됨에 시달리고, 또 田柴科에 의한 軍人田의 지급 도 제대로 되지가 않아 그 생활이 어려움으로 해서 도망하는 경우 가 생겨났다. 이런 경우에는 子孫親族으로써 이를 계승케 할 수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일정한 軍額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 를 보충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 보충방법이 곧 選軍이었다. 府兵制 說을 주장하는 학자들 중에는 이 選軍을 上京侍衛할 番上兵을 선

112 3. 軍事組織 정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高麗의 選軍의 예에는 그 러한 경우가 없으며, 이는 軍人의 보충을 말하는 것이었다.21) 따 라서 이 選軍의 존재도 高麗의 군사 제도가 唐의 府兵制와는 다른 특수한 것이었음을 말하여 주는 하나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選軍 즉 軍人의 簡選을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官府가 있었는데 이도 또한 選軍이라고 하였다. 이 選軍이라는 관부는 選 軍廳이라는 독립된 청사를 갖고 있었으며, 여기에는 選軍을 위한 광장이 있어서 때로는 다른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選軍의 長을 選軍別監이 라고 하였는데, 別監은 전 임의 常任官職이기보다는 필요에 응하여 겸임으로 임명되었던 것 으로 생각된다. 이 選軍別監 밑에 記事라는 하급 관리가 배속되어 그를 사무적으로 보좌하였다. 選軍은 일정한 기간마다 규칙적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중 국측의 기록에 의하면 高麗의 選軍은 3년마다 행해진 것으로 되 어 있다.22) 그러나 실제로 高麗史에 나타난 구체적인 기록들을 보면 3년마다 행해졌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필요할 때마다 행 해졌다고 보는 것이 옳지는 않을까 한다. 選軍의 총책임을 지는 選軍別監은 點軍使 등을 각지에 파견해시 選軍을 실시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방의 행정기관들도 이 選軍의 업무에 협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選軍의 기준은 壯勇에 있었다. 軍人을 뽑는 것인 이상 被選者의 자격이 壯勇에 있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러한 점은 자연히 選軍 대상자의 연령에도 영향을 끼쳐서 되도록 젊은 壯丁을 뽑도록 하였다. 아마 15歲 이상 50歲 이하가 원칙이 21) 千寬宇 閑人考 社會科學 2 (1958) p.26 참조 22) 宋史 高麗傳에 六軍三衛 常留官府 三歲而選 이라고 하였다

113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아니었나 한다. 50歲면 약간 연령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 지만, 그러나 軍人의 복무가 60歲까지인 것을 생각하면, 10년의 軍役 복무가 가능한 셈이다. 일단 지방에서 選軍되면 그들은 즉시 開京으로 올라오도록 되어 있었다. 上京한 그들은 다시 일정한 절 차를 거쳐 部隊의 배치가 결정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選軍되 면 上京하여 있으면서 京軍 소속의 軍人이 되어 60歲까지 복무하 게 되는 것이므로, 이것이 唐에서와 같이 地方의 軍府에 소속되어 있다가 교대로 上京하여 복무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면 이렇게 選軍을 하는 對象者의 社會的 階層은 어떠하였을 까. 이것은 賤役까지를 포함해서 일체의 役이 있는 자를 제외하고 남는 開京의 六品 이하 兩班과 內外 白丁의 子였다.23) 만일 六品 이하 兩班의 子를 閑人이라고 보는 견해에 따른다면24) 이것은 곧 閑人과 白丁이 그 대상자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실제에 있 어서 兩班의 子는 별로 중요한 選軍의 대상자가 되지를 못했을 것 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대상자는 白丁이었던 것이다. 일반 農 民인 白丁은 국가에서 필요할 때에는 언제나 뽑아서 軍人을 삼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일반 農民인 白丁뿐 아니라 특수한 경우에는 奴라도 뽑아서 軍人으로 만드는 예를 발견할 수가 있다. 이 選軍制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때로는 자발적인 응모 예가 나타나는 것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慕兵制의 원칙에서 있으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강제적인 徵兵이 행해졌다는 사실이 다. 點軍使가 지명을 하였을 경우에 白丁들이 이를 거절하기란 실 23) 高麗史 81 兵志 1 兵制 靖宗 11年 5月 揭榜에는 이 選軍의 對象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京中五部坊里 除各司從公令史 主事 記官 有蔭品官子 有 役賤口外 其餘兩班 及內外白丁人子 十五歲以上 五十歲以下, 選出充補 24) 李佑成 閑人 白丁의 新解釋 歷史學報 19 (1962) 참조

114 3. 軍事組織 제로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둘째로는 이 選軍制를 통해서 農民이 나 심지어는 賤人까지도 軍人이 되고, 이 軍人이 됨으로 해서 武 班으로도 승진할 수가 있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軍人 身分은 高 麗의 사회에서 身分 변동의 매개체와 같은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다만 軍人의 출세는 文班보다 열세에 놓여 있는 武班에 한정된 것 이었기 때문에, 이 身分 변동에는 일정한 제약이 있었던 셈이다. 군사 제도의 면에서 본다면 選軍制는 軍戶連立의 원칙을 보완하 는 부수적인 제도에 지나지 않았다.25) 그러나 사회적인 면에서 본다면 이것은 高麗의 身分 변동을 가능케 한 제도로서 주목되어 야 할 것으로 믿는다.26) (3) 軍班制의 經濟的基盤 軍人이 職役의 일종인 軍役의 담당자로서 말단이나마 국가의 관료 체계 속에 포함되는 것이고 보면, 이에 대한 국가의 경제적 고려가 없을 수 없었다. 그 구체적 표현이 軍人田의 지급이었다. 軍人田은 軍役을 확보하기 위한 국가의 경제적 시책이었으며, 軍 班制를 유지하는 경제적 기반을 이루는 것이었다. 軍人에게 국가에서 土地를 지급하기는 이미 太祖 때부터였다. 太祖 23년(940)에 朝臣과 함께 軍士에게도 지급했다는 役分田이 그것이었다.27) 그 뒤景宗 원년(976)에 처음 실시된 田柴科나, 혹 은 이어 몇 차례에 걸쳐 개정된 田柴科에서 모두 軍人에게 토지를 25) 選軍制에 대해서는 千寬宇 閑人考 社會科學 2(1958) p.25 및 李甚白 高麗軍人 考 高麗兵制史硏究 (1968) pp 참조 26) 李基白 高麗時代 身分외 世猫과 變動, 民族과 歴史(1971) pp 합조 27) 太祖二十三年 初定役分田 統合時 朝臣軍士 勿論官階 視人性行善惡 功勞大 小 給之有差 高麗史 78 食貨志 1 田制 田柴科

115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지급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것이 高麗 말기에 이르면 一足丁 17結로 낙착되기에 이르는데, 이제 그 변천 과정을 알기 쉽게 일 太祖 23年 (940) 役分田 軍士 景宗元年 (976) 始定田柴科 穆宗元年 (998) 改定文武兩班及軍 馬 軍 人田柴科 17科23結 德宗 3年 (1034) 未及此年科等者 15結 改定兩班及軍閑人 田柴科 文宗 30年 (1076) 更定兩班田柴科 步軍 18科 20結 軍人 馬軍 役軍 步軍 監門軍 15科25結 16科 22結 17科 20紹 軍人 1足丁 17結 恭愍王 5年 (1356) 敎書 람표로 작성하여 보면 위의 표와 같이 된다.28) 우선 이 軍人田에 대한 규정에서 첫째로 주목되는 것은, 거기에 지급 대상자로 적혀 있는 것이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 있기는 하지 만, 요컨대 그들이 京軍에 소속되어 있는 일반 軍人이었다는 사실 이다. 이 지급 대상자 속에는 지방의 州縣軍은 포함되어 있지가 않았다. 그것은 田柴科가 중앙관리에 한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가 있다. 京軍에 소속되어 있는 軍人들 중에서도 일부의 특수층 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29) 그러나 文宗 30년의 更 定田柴科에 의하면 監門軍도 들어 있는데, 高麗의 京軍 중에서 가장 질이 낮은 監門軍이 들어 있는 이상, 여기의 軍人을 특수층으로 보 기는 힘든 것이다. 게다가 閑人도 이 田柴科 속에 포함되어 있는데, 閑人은 軍人을 뽑는 대상자에 속하고 있었던만큼, 京軍 소속 軍人 들이 閑人보다 많은 土地를 받았다고 해서 안될 것은 없다. 28) 이 일람표는 千寬宇씨의 것을 참고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千寬宇 閑人考 社會科學 2 (1958) p.32 및 李基白 高麗軍役考 高麗兵制史硏究(1968) p.148 참조 29) 예컨대 姜晋哲 高麗 初期의 軍人田 淑明大論文集 3 pp 에 나타난 견해는 그 하나이다

116 3. 軍事組織 둘째로 주목되는 것은 馬軍 步軍 役軍 監門軍 등 兵種에 따라서 지급되는 토지의 結數가 달랐다는 점이다. 이것은 兵種의 차별이 곧 軍人이 질적으로 우수하고 열악함과 또 장비가 많고 적응 을 나타내주는 것이고, 田柴科에 의한 토지의 지급은 그에 대한 代償 이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가장 질적으로 우수하고 또 장비 가 많이 필요한 馬軍에게는 가장 많은 토지가 지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가는 步軍과 役軍은 토 지의 지급도 그보다 적어지고 監門軍과 같이 가장 질이 떨어지고, 또 약간의 장비밖에 필요 없는 軍人에게는 가장 적은 토지가 지급 되었던 것이다. 세째로 주목되는 것은 이 軍人田이 田柴科 속에 포함되어 있다 는 점이다. 太祖 때에는 그것을 役分田이라고 하였으며, 이 役分 田은 後三國을 통일한 뒤에 실시된 論功行賞의 성격을 다분히 지 니고 있었다. 그러나 役分田은 근본적으로는 田柴科의 선구가 되 는 것이었으므로 위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恭愍 王 때의 一足丁 17結의 지급은 이미 田柴科제도가 무너진 뒤의 것 이었으므로 이를 田柴科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 다. 그러나 이 때에는 동시에 軍班制도 무너진 뒤였으므로 이는 일종의 軍班制 복구 운동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高麗 전기에 軍班制가 실시되고 있을 때에는 軍人에게 田柴科에 의한 토지 지급을 하였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田柴科는 文武 兩班의 관리를 비롯해서 吏屬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통치기구 속 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는 자에 대한 국가의 경제적 보상이었 던 것이다. 앞서 軍人의 身分을 논하면서, 軍人이 비록 말단이나 마 국가의 통치 기구에서 일정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주장

117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하였는데, 그 점을 여기서 다시 확인할 수가 있게 된 셈이다. 高麗의 軍人은 이 軍人田으로부터의 수입을 가지고 가족의 생활 과 또 軍人 자신이 필요로 하는 食糧 被服이나 武器까지를 장만해 야만 하였다. 물론 특별한 重武器라든지 혹은 또 風雪의 추위가 심할 때의 防戍兵을 위한 被服이 국가로부터 공급되는 일이 있기 는 하였으나 이것은 예외에 속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高麗에서는 養兵費가 따로 마련되지가 않았다. 軍人田은 실로 高麗의 兵制 軍班制 를 뒷받침해 주는 기본적인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면 軍人田은 軍人의 장비와 가족의 생활을 유지시키기에 충 분한 것이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軍人田이 어떻게 경영 되었나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軍人은 그가 받 은 토지를 직접 경작하는 耕作者가 아니라 그로부터 租를 거둬들 이는 收租權者였다. 이 점은 軍人이 農民이 아니라 鄕吏나 吏屬과 같이 職役을 담당하는 댓가로 田柴科에 의한 토지의 지급을 받았 다는 사실의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비록 職役을 담당하는 댓 가로 받는 토지는 文武兩班의 그것과는 달리 田丁이라고 해서 구 별을 지었다 하더라도 그 경영 형태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軍人田의 경작자는 養戶였다. 養戶는 軍人田을 경작하여 軍人에 게 양곡을 보내도록 되어 있었다. 睿宗의 制書에 근래 州縣官은 오직 宮院田과 朝家田만을 사람을 시켜 耕種케 하니, 軍人田은 비 록 기름진 땅이라고 하더라도 경작을 권장하는 데 힘쓰지 않고 또 한 養戶로 하여금 양식을 보내지 않게 하니, 이로 인해서 軍人은 굶주림과 추위로 도망하여 흩어졌다. 지금부터는 먼저 軍人田에 각기 佃戶를 정해서 경작을 권장하고 양곡을 보내도록 하는 일을 담당관리는 자세하게 아뢰어 재가를 받도록 하라 고 한 데서 이

118 3. 軍事組織 를 알 수가 있다.30) 즉 이에 의하면 州縣官이 軍人田의 경작을 권 장 독려하고 또 養戶로 하여금 양곡을 수송시켜야 하는 것으로 되 어 있다. 글귀에 나타난 대로 한다면 반드시 養戶가 경작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가 양곡을 수송만 한다는 것은 이상하므로, 경작도 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이 때에 새로이 佃戶를 정하여 경작을 권장하고 양곡을 수송하도록 고치었다면 그 때까지는 養戶가 바로 이 佃戶의 일을 맡았다고 보 아야 옳을 것이다. 軍人이 養戶로부터 받는 租는 수확량의 2분의 1이었을 것이 다.31) 그것은 국가에서 직접 收租를 하는 公田 이외의 永業田에 서는 2분의 1의 租를 받았기 때문이다. 만일 軍人들이 실제로 田 柴科에서 규정된 만큼의 토지를 받고, 또 제대로 收租를 하였다면 軍人 가족의 생활이나 軍資의 조달이 나를 위하여 충분한 것이 아 니었을까고 생각된다. 가령 田柴科 규정에서 최하인 20結에, 1結 당 수확량의 최하인 7石으로 계산한다면,32) 전 수확량은 140石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절반을 租로 받는다면 70石이 되는 셈 이다. 만일 4분의 1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35石이 되는 셈이다. 이 것을 祿俸만으로 생활하는 工匠이 최고 20石, 최하 6石을 받는 것 과 비교한다면 결코 적은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30) 高麗史 79 食貨志 2 農桑 睿宗 3年 2月 制에 나타난 原文은 다음과 같다. 近來 州縣官 祗以宮院 朝家田 令人耕種 其軍人田 雖膏腴之壤 不用心勸稼 亦 不令養戶輸粮 因此軍人飢寒逃散 自今先以軍人田 各定佃戶 勸稼輸粮之事 所司 委曲奏裁 31) 姜晋哲氏도 軍人이 수확량의 2분의 1을 취하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氏는 軍人과 養戶는 軍人田을 공동으로 경작하였다고 보고 있으며, 또 비록 2분 의 1을 취하더라도, 그 중의 절반 즉 전 수확량의 4분의 1을 軍資를 위하여 국가에 바쳤다가 다시 祿의 형식으로 받았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軍人이 어떠한 형식으로든 祿을 받았다는 증거를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32) 高麗史 78 食貨志 1 田制 成宗 11年 判에 의하면 최하의 수확량은 1結당 7石 으로 되어 있다

119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軍人職이 子孫親族에 의해서 세습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軍人田 도 물론 세습되었다. 軍人田이 永業田이라고도 불리는 까닭이 여 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軍人田의 세습을 보통 田丁連立이 라고 불러왔다. 田丁은 鄕史田이나 其人田과 같이 職役 담당자에 대하여 지급하는 토지를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軍人田도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田丁連立이 곧 軍戶連立 의 다른 반면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명백한 일이다. 그런데 軍人이 도망을 하거나 혹은 軍役을 계승할 子孫親族이 없어서 軍額에 결원이 생기면 選軍을 하였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이렇게 選軍을 하여 새로이 충원된 軍人에게 軍人田을 지급한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흔히 選軍 給田 혹은 立戶充役이라고 하였다.33) 立戶라는 말은 좀 애매하긴 하지만 요컨대 하나의 軍戶를 성립시켜 軍人田을 준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여튼 選軍給田 혹은 立戶充役이 田丁連立을 보완하는 제도임은, 選軍이 軍戶連立의 보완 제도였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가 있다. 이상에서 軍班制의 유지를 뒷받침해 주는 경제적 기반의 원칙적 인 면을 살펴본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규정대로 실시되 지가 못하였다. 우선 국가에서 田柴科에 규정된 만큼의 토지를 軍 人에게 지급할 의사가 있었는지조차 의문스러운 것이다. 왜냐 하 면 규정된 軍人田을 지급하려면 100萬結 가량의 토지가 필요한데, 高麗는 그만한 토지를 가지고 있지를 못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규 33) 選軍給田에 대해서는 選軍給田, 已有成法, 近年, 田制紊亂, 府兵不得受田, 殊失 募軍之意 高麗史 81 兵志 1 兵制 恭愍王 20年 12月 敎, 立戶充役에 대해서 는 宜令諸道按廉及守令 窮詰還主 如無主者 其給內外軍閑人 立戶充役 高願 史 78 食貨志 1 田制 經理 忠烈王 24年 正月 忠宣王 敎라고 한 것을 참조하기 바란다

120 3. 軍事組織 정을 해 놓고도 애당초 이를 실시할 의사가 없든지, 그렇지 않으면 지급할 최고액을 규정한 것뿐이든지일 것이다. 顯宗 때에는 심지 어 지급했던 軍人田을 국가에서 빼앗았기 때문에, 上將軍인 崔質 金訓 등이 軍人을 충동하여 반란을 일으킨 일까지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므로 軍人들은 가난에 허덕이는 경우가 많았 다. 일부의 軍人들 중에는 富強者가 되어 세력가와 결탁해서 軍役 을 면하는 자들도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적은 수였 고 대부분의 軍人은 식량 피복 무기를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軍役을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로 몰락하여 갔다. 능히 軍役을 감당할 만한 부강한 軍人은 軍役을 면하고, 그 의무를 질 능력이 없는 가난한 軍人만이 軍役을 짊어지게 되면 그 결과는 뻔한 일이다. 도망으로 인한 軍額의 감소요, 이로 말미암는 軍班制 자체의 붕괴인 것이 다. 그러므로 府田이 망하매 府兵도 또한 망하였다 고 한 것은 高麗 軍班制의 붕괴과정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잘 말해주고 있다 고 하겠다.34) (4) 州縣軍과 農民 京軍 소속 軍人이 軍班氏族으로서 軍籍에 오른 특수 身分層만이 되는 것이라면, 일반 農民은 전혀 군사 조직과는 관계가 없었던 것 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비록 農民들이 上京侍衛하여 京軍이 되지 는 않았지만, 지방에 조직된 州縣軍이라는 별도의 군사 조직 속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高麗史의 편찬자는 府兵制說에 입각해서 州縣軍이 京軍에 속해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고, 이 의견은 府兵制 34) 高麗史 78 食货志 1 田制 禑王 14年 7月 條에 실린 趙仁沃의 上疏文 속에 府田亡而府兵亦亡 이라고 있다

121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說을 주장하는 학자들에게 오늘날까지도 계승되어 오고 있다. 그 러나 구체적인 증거는 하나도 제시 된 바가 없으며, 다만 府兵制 라면 그랬을 것이라고 하였을 뿐인 것이다.35) 그러므로 보다 구 체적인 사료들에 입각해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高麗 州縣軍의 성립 과정은 두 면에서 살필 수 있다고 생각한 다. 그 하나는 지방에 토착하고 있는 豪族들이 지배하는 군사력을 중앙 정부의 통제 속으로 흡수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과도적인 군사 조직이 光軍이었던 것이다. 光軍은 定宗 2 년(947)에 契丹이 침입해 오리라는 정보에 입각해서 이에 대처하 기 위하여 조직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사실만을 놓고 본다면 전 투부대로서 조직된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 상비군이기보다는, 언제든지 동원될 수 있는 일종의 예비군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병력이 30만에까 지 이르렀다는 이 예비군은 중앙군이 아니라 지방군이었던 것이 다. 慶北 醴泉의 開心寺 石塔을 쌓은 光軍은 결코 중앙군일 수가 없는 일이다. 그리고 開心寺 石塔을 쌓은 인물들이 그 지방의 鄕 吏였으므로 光軍의 지휘관은 鄕吏였을 것이다. 다만 중앙에 설치 된 光軍司를 통하여 중앙 정부의 지휘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光軍의 구성원은 그 지 방의 農民이었을 것이며, 전투보다는 오히 려 力役에 더 동원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光軍은 중앙 정부의 통제 밑에 조직되고 지방 호족의 지휘 아래 놓인 農民 豫 備軍이라고 말 할 수가 있다. 이 光軍이 州縣軍 안의 品軍이 되는 35) 高龍史 83 兵志 3 州縣軍條의 序에는 高麗兵制 大抵皆倣唐之府衛 則兵之散 在州縣者 意亦皆屬乎六衛 非六衛外 別有州縣軍也 然無可考 姑以此目之 라고 하였다

122 3. 軍事組織 것으로 추측 된다.36) 州縣軍을 형성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중앙에서 지방으로 배치되 었던 鎭守軍이었다. 十二軍과 五都護府는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都護府는 원래 새로 정복한 지역에 대한 군사적 통제를 위해서 설 치된 것이었다. 後百濟의 지역에 安南都護府, 新羅의 옛 땅에 安 東都護府, 북방의 東西兩界에 각기 安邊都護府와 安北都護府, 거 기에다 黃海의 돌출부에 安西都護府를 설치하여, 군대를 상주시 켜 치안과 국방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南道地方이 변경으로 서의 의미가 없어지면서 都護府는 국경지대인 兩界의 것만이 여 전히 중요성을 지닐 뿐이고, 그 밖의 것은 거의 무의미한 존재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 成宗 2년(983)에 설치되었던 十二牧이 成宗 14년(995)에 十二軍, 즉 十二州節度使로 개편되면서 군사적인 지 방통치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에 대폭적으로 증설 된 지방행정구획은 전체적으로 군사적인 성격을 농후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행정 구획들에 배치된 군대는 중앙으로부 터 직접적인 지휘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顯宗 3년(1012) 에 순전한 행정 기구인 七十五道安撫使가 설립되고, 이어 顯宗 9 년(1018)에 지방 조직이 완성되면서, 이 행정 조직과는 별 도로 군사조직인 州縣軍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그 과정에서 十二軍 을 위시한 중앙으로부터 배치된 군대는 州縣軍의 保勝과 精勇으로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37) 만일 이러한 추론이 사실과 부합하는 것이라면, 高麗의 州縣軍 이 保勝과 精勇이라는 京軍과도 연결이 닿는 전투부대적 성격을 지닌 것과, 品軍이라는 토착하는 노동부대적 성격을 지닌 것이 합 36) 光軍에 대해서는 李蔽^ 高麗光현考 高麗兵制史硏究 (1968) 참조 37) 李甚白 高麗 地方制度의 整備와 州縣軍의 成立 同上書 참조

123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쳐진 이중적인 구조를 지닌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다. 그런데 高麗史의 兵志를 보면 州縣軍은 중앙으로부터 지방관 이 파견된 행정구획을 단위로 해서 保勝軍 精勇軍 一品軍의 구별에 따른 군대수가 적혀 있는 것이다. 兩界를 제외한 南道 지방 에 한 해서 보면 保勝軍이 8,601명, 精勇軍이 19,754명, 一品軍이 19,882명으로서 모두 합하면 48,237명으로 되어 있다. 이들이 기 록상에 이렇게 남아 있는 것은 그것이 중앙 정부에 보고된 숫자이 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들은 중앙 정부가 직접 파악하여 지휘하 는 군사 조직이었던 것이다. 중앙으로부터 지방관이 파견되는 행 정구획을 단위로 병력이 기록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 다. 그러나 이것은 중앙으로부터 지방관이 파견된 행정구획의 治所 에만 그들 州縣軍이 배치되어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高麗 史 兵志 州縣軍 條의 기록이 春州道內 등 內 자를 붙여서 기록 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즉 州郡縣뿐만이 아니라 그 屬 縣에도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방 행정의 최하단위 인 村에는 위의 保勝 精勇 一品과는 다른 二品軍 三品軍이 있었다. 이 들도 크게 보면 州縣軍 속에 포함이 되기는 하지만, 중앙 정부에 까지 보고가 되지 않은 村 단위의 군사 조직이었다. 이렇게 생각 해 오고 보면,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건 안되건 간에 高麗가 지방의 통제를 위하여 구획한 모든 수준의 지방 행정 단위에 州縣 軍이 배치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良人인 농민장정으로서 州縣軍의 조직망에서 빠질 수 있는 자가 없을 정 도의 광범한 전국적인 군사 조직이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高 麗圖經에는 高麗의 병력이 60만에 이르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데,38) 이것은 아마 이 州縣軍까지를 포함한 숫자일 것으로 생각

124 3. 軍事組織 된다. 그러면 이들 州縣軍의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임무는 州 縣軍을 구성하는 여러 軍에 따라서 달랐었다. 우선 保勝과 精勇은 京軍의 그것과 같이 전투의 임무를 띠고 있었다. 외국의 군대가 침략해온 데 대한 방어도 있지만 내란의 진압도 있었다. 이 중에 서 내란의 진압과 같은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는 것이 그 주된 임 무였던 것 같다. 국방을 위한 동원에는, 당연한 일이지만 京軍과 함께 출동하게 되는데, 이 때 이들 州縣軍은 주력 부대이기보다도 후원 부대 내지 엄호 부대의 구실을 담당하였고, 때로는 土山을 쌓는 것과 같은 노역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비록 명칭은 같은 保勝이요 精勇이지만 그 훈련이나 무기나가 京軍의 그것과 같을 수 없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전투 이외에 또 하나의 임무는 防戍였다. 州縣軍의 保勝과 精勇도 京軍의 그것과 같이 防戍의 임무를 짊어지고 있었고, 피복과 부임 도중의 식량을 스스로 장만하여 행하는 1년간의 防戍는 이들의 무거운 부담이 되었고, 그 때문에 도피하는 자가 상당히 많았던 것이다. 끝으로 이들은 城을 쌓거나 배를 건조하는 工役에도 동원되었다. 京軍도 또한 그러했으므로 이들도 예외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工役은 주로 品軍의 임무로 되어 있었다. 같은 品軍이라 도 우선 一品軍은 중앙 정부에 의하여 파악되어서 그 명을 받고 工役에 동원되는 군대였다. 그들은 二番으로 나뉘어서 가을에 교 대되어 동원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해서 一品軍은 工役軍 혹은 秋 役軍이라고도 하였으며, 또 때로는 外方役軍 혹은 단순히 役夫 丁 夫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이렇게 一品軍은 무장한 군대이기보다도 38) 高麗圖經 11 仗衛炫 序에 初高麗在魏世 戶不過三萬 至唐高宗下平壤 牧其兵 乃三 萬 今視前世 又倍增矣 라고 하였다

125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노동 부대였으며, 그것도 무슨 기술을 지닌 工兵이 아니라 단순한 육체적인 노동을 제공하는 부대였다. 같은 노동 부대라도 一品軍 이 중앙 정부에 의해서 파악되고 동원된 데 대해서, 村을 단위로 조직되고 동원된 것이 二 三品軍이었다.39) 이들 州縣軍은 農民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保勝과 精勇 에는 때로 鄕吏 중에서 되기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역시 農民 軍이었을 것이다. 다만 保勝 精男은 永業田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 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自營地를 경작하는 自營農民이었을 것이 다. 一品軍도 그것이 중앙 정부에 의해서 파악되어 있는 점에서 미루어 保勝 精勇과 큰 차이가 없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村 에 있는 二 三品軍은 油軍으로서 집단적으로 科田의 경작에 동원 되는 佃戶와 같은 지위에 있었다고 생각된다.40)그러므로 州縣軍 은 요컨대 農民軍이 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農民의 노 동력을 지배하려는 국가의 강력한 의욕 위에 조직된 것이었다. 다 만 이러한 의욕은 모든 농민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된 것이 아니라 農民들의 현실에 적합한 각종 군사 조직으로 구체화하였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41) (5) 州鎭軍과 國防體制 여기의 州鎭軍이란 高麗의 북방 국경 지대에 설치된 특수 행정 지대인 兩界에 배치된 지방군을 말하는 것이다. 高麗史 兵志에서 는 이 州鎭軍도 南道 지방의 지방군과 함께 州縣軍 속에 포함시키 39) 李佑成 麗代百姓考 歴史學報 14(1961) p.41 참조 40) 李佑成 高麗의 永業田 歷史學報 28(1965) p.12 참조 41) 州縣軍의 임무 조직 등에 대해서는 李基白 高麗州縣軍考 高麗兵制史硏究 (1968) 참조

126 3. 軍事組織 고 있다. 그러나 南道의 州縣과는 달리, 兩界의 행정 구획은 항상 州鎭이라 불렀으며, 특수한 군사적 성격을 지닌 지역으로 되어 있 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배치된 군대도 응당 이는 南道의 그것과는 달리 州鎭軍이라고 불러야 하리라고 믿는다. 원래 鎭이라는 것은 국경 지대에 군사적인 거점으로서 설치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高麗가 後三國을 통일하기 이전에는 新羅와 後百濟와의 접경지대에도 설치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後三國 통일 이후에는 남쪽의 鎭은 모두 없어지고, 오직 북쪽의 契丹 및 女眞 과의 접경 지대 즉 兩界에만 남게 된 것이다. 단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국경을 북쪽으로 넓혀감에 따라서 새로이 高麗 영토로 편 입한 지역에는 점차 鎭을 증설하여 그 수가 증가해 갔다. 顯宗 9 년(1018)에 지방제도를 정비했을 때 그 鎭은 28개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鎭들은 城郭으로 둘러싸인 武裝都市로서 독립 된 전투적인 단위 부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南道 지방의 州縣과 같이 屬縣을 거느리지 않는 것이 그 특징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여러 鎭이 安北과 安邊의 두 都護府에 의해 서 거느려졌던 것이다. 이 兩界의 諸鎭에 배치된 군대의 병력은 高麗史 兵志의 州縣軍 條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州鎭軍도 그 인원이 중앙 정부에 의해 서 파악되고 있었으며, 또한 그 직접적인 지휘하에 놓여 있었음 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諸鎭에 배치된 군대는 크게 둘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가 있다. 그 하나는 抄軍(精勇軍) 左軍 右 軍 및 保昌軍 寧塞軍이다. 이들은 州鎭軍의 기간이 되는 부대로서 州鎭의 城 안에 배치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때로는 諸城 軍이라고도 불린 것으로 보인다. 그 병력은 대략 5만이 좀 넘는 수였다고 생각된다. 다른 하나는 北界의 神騎 步班 白丁隊, 東界의

127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工匠 田匠 投化 鉎川 沙工隊 등의 諸軍이다. 이들은 상비군이기보다 도 예비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馬)을 필요로 하는 神騎軍 같 은 것은 富裕層이었다고 생각되므로, 이와 비슷한 步班과 함께 城 안에 거주하였을 것이며, 그 수도 약 2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 白丁隊는 城 밖의 촌락에 사는 농민들로써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그 수도 많아서 北界만도 약 7만에 달하고 있었다. 東界에는 白丁隊가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나 역시 있었음 직하다. 東界에 있는 工匠 등도 城 밖에 거주하는 특수 부대들이 었을 것인데, 그 수는 1천명을 약간 넘을 정도였다. 이리하여 전 체를 합치면 州鎭軍의 총 병력은 약 14만에 달하는 것으로 추측 되는 것이다.42)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州鎭軍의 핵심이 되는 것은 抄軍 左軍 右 軍과 保昌軍 및 寧塞軍이었다. 이 중에서도 抄軍과 左 右軍이 특히 중요하였는데, 그것은 거기에만 馬隊와 弩隊가 포함되고 있고, 또 이들이 전투시에 中 左 右의 三軍을 형성하였으리라고 미루어지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에 대해서 나머지 保昌軍과 寧塞 軍은 步兵으 로서 일종의 후원 부대가 되지 않았나 한다. 이 밖의 白丁隊 등은 상비군이 아니라 예비군이었을 것이며, 따라서 적군이 침략하여 오는 위급한 때에 한하여 출동하였을 것이다. 또 白丁隊는 白丁 즉 일반 농민으로써 구성된 것이었고, 神騎 같은 것은 반대로 兩 班層이 많이 차지하는 등 그 구성 요소에 차이가 많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 각 鎭의 상비군의 군사적 지휘권은 都領이 쥐고 있었 으며, 이 都領은 가장 관등이 높은 武官인 中郞將이 임명되는 것 이 보통이었다.43) 그러나 州鎭의 예비군이나 屯田 등의 民政까지 42) 과거에는 약 25만 가량으로 추측해 왔으나, 그것은 중복된 계산과 또 1隊 25명을 50명으로 잡은 때문에 생긴 잘못으로 인한 것이었다

128 3. 軍事組織 를 포함한 모든 책임은 州의 防禦體와 鎭의 鎭將이 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兵馬使에 의하여 통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州鎭軍의 임무는 무엇보다도 國防에 있었다. 高麗는 북쪽으로 契丹 女眞 蒙古 등의 이민족과 늘 대립해 있었고, 또 침략을 받아 이와 자주 전투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국방을 위한 전 투에는 京軍이나 州縣軍도 동원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침략하여 왔을 때에 이에 대항하여 가장 먼저 전투를 하는 것은 州鎭軍이었 다. 그리고 이들이 적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가 하는 것은 여러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들의 전술은 적의 대부대와 맞서서 결전을 벌이는 그 런 방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앙에서 동원된 군대의 임무였던 것 이다. 물론 중앙에서 동원된 군대가 오면 이를 도와주는 일도 있 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들 州鎮軍의 주된 임무는 城門을 굳게 닫 고 지키는 일이었다.44) 이것은 언뜻 생각하면 비효과적인 소극적 방법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침략해 오는 적군에게 큰 위협이 되 었다. 이들 여러 城을 그대로 내버려두고는 깊이 침입해 들어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침입해 들어온다 하더라도 이들 여러 州鎭으로 인하여 본국과의 연락로가 끊기고 말기 때문에 오랜 동안 머물러 있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가령 顯宗 원년(1010)에 契丹 의 대군이 開京까지 침입해 들어오기는 하였으나, 이렇다할 성과도 없이 곧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는 이러한 때문이었을 것 43) 이 都領을 歸化女眞人에게만 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江原正昭 高麗 の州縣軍に關ける一考察, 朝鮮學報 23(1963) pp 이것은 잘못이다. 만 일 이러한 의견에 따른다면 兩界의 군대는 모두 女眞人의 지휘 밑에 있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44) 堅壁固守의 한 예를 들면 다옴과 같다. 以通州振尉戶長金巨 別將守堅當庚 戌丹兵之來 堅壁固守 又禽其大夫馬首 加金巨郞將 守堅贈郞將 高麗史 5 德宗 世家 元年 2月 壬寅

129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이다. 또 契丹이 끈질기게 江東六州를 요구해 온 것도 이들 여러 城을 高麗가 지키고 있는 이상은 高麗를 항복시키기가 어렵다고 생각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高麗가 이를 거절하자 契丹은 자주 이 를 무력으로 뺏으려고 쳐들어왔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던 것 이다. 이러한 國防의 제일선을 굳게 지키기 위하여 이들 州鎭, 특히 長城이 통과하는 국경 지대의 州鎭은 戍를 설치하고 있었다. 이 戍는 한 鎭城에도 여러 개가 딸려 있어서 약간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마치 本城의 전방 哨所와도 같은 것이어서, 적군 의 동태를 탐지하여 이를 本城에 통보하며, 때로는 적군의 소규모 침입에 대하여 직접 전투를 벌여 격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戍는 육지에서는 長城에 연한 鎭城에 주로 설치되었으나, 東海岸에서는 해적이 자주 침입해 오는 해안 지대에 설치되기도 하였다. 끝으로 州鎭軍의 社舍的 身分읍 보면, 兩班으로부터 白丁에 이 르는 광범한 것이었다. 西京軍에는 兩班이 분명히 기록상에 나타 나 있고, 抄軍 같은 데에는 鄕吏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州鎭軍의 대부분은 역시 農民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어떤 형태 의 토지건 농경을 하면서 동시에 군대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 었다. 그리고 그들이 경작한 토지로부터의 租는 開京으로 보냄이 없이 軍糧으로 에축하여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屯田이란 명목의 토지를 경작하건 안하건간에 屯田軍的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45) (6) 高麗前期 軍制의 崩壞 45) 이상의 州鎭軍에 대한 서술은 주로 李基白 高麗 兩界의 州鎮軍 高麗兵制史硏 究 (1968)에 의거하였다

130 3. 軍事組織 後三國 시대의 내란기에 軍人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계층이 등장 하였다. 이들은 專門的 軍人으로 화하여 주인인 豪族과는 주종 관 계에 의하여 맺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전쟁에서의 공로로 인하여 武班으로 출세할 가능성을 지닌 계층이었다. 대개는 농민 출신이었을 이들을 기반으로 하고 高麗의 軍班氏族이 성립되고, 軍 班制라고 부를 수 있는 군사 제도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통일이 이루어진 뒤 에 이들 軍人이 太祖 王建이나 혹은 그의 부하 장군 및 豪族들과 맺고 있던 주종 관계의 끈은 점점 희 미해져 갔다. 그런가 하면 力役의 의무는 더욱 무거워져서 軍人은 마치 賤役의 담당자와도 같이 되었다. 게다가 軍人의 경제적 뒷받 침이 되었던 軍人田은 제대로 지급되지가 못하였으며, 따라서 가 난한 軍人의 수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피복 식 량 무기를 스스로 장만해야 하는 軍役을 감당하기에는 그 경제적 힘이 부치었다. 그 결과는 결국 軍役을 피하여 도망하는 길밖에 없었다. 이들은 流民이 되어 흘러다니다가 결국은 佃戶가 되거나 奴婢로 전락하거나 하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軍班氏族은 소멸되어 가고 軍班制가 와해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대 규모의 군사 동원을 위하여서는 새로운 병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 다. 그리고 그 한 예가 別武班이었던 것이다. 肅宗 때에 女眞의 정벌을 위하여 조직된 別武班은 항구적인 성 격을 지닌 군사 조직은 아니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京軍의 六衛나 州縣軍의 保勝 精勇, 혹은 州鎭軍으로써 능히 감당해낼 수 있던 군 사 동원이 불가능해지고, 別武班이란 새로운 군사조직을 필요로 하였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즉 別武班은 종래와는 다른 인적 자원으로 조직된 군대였는데, 이에는 文武의 散官과 吏胥로 부터 商人 奴僕 및 州府郡縣民과 僧徒에 이르기까지가 징발되었다

131 I. 貴族的 統治機構의 整備 고 한다.46) 즉 현직에 있는 文武官을 제외한 모든 국민이 그 징 발 대상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여러 대상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州府郡縣民 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州府郡縣民은 일반 농민인 白丁이 그 주 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귀족의 자제들은 비록 징발이 되었더라도 결국은 풀려서 귀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僧徒란 것도 절에 소속된 토지를 경작하는 佃戶와 같은 존재였으므로 그 사회적 성 격은 白丁과 비슷한 것이었다. 白丁과 같은 일반 농민이 강제로 전투에 징발된 것은 반드시 別武班이 시초인 것은 아니었다. 州縣 軍 속의 品軍이라든지, 州鎮軍 속의 白丁隊로 생각하면 쉽게 납득 이 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工役部隊이거나 혹은 예비 병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別武班은 바로 농민인 白丁을 主力으 로 하는 전투 부대였던 것이다.47) 비록 女眞 정벌이 끝남과 함께 別武班은 해체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러나 임시적인 군사 조직일망정 이러한 農民 중심의 군사 조직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은, 高麗 군사 제도의 새로운 변화를 나타내 주는 것으로 보아 야 할 것이다.48) 46) 高麗史 96 尹瓘傳에 於是始立別武班, 自文武散官 吏胥 至于商賈 僕隷及州 府 郡縣 又選僧徒 라고 하였다. 47) 李基白 高麗別武班考, 金載元紀念論叢 (1969) 참조 48) 高麗 전기의 군사 제도가 실질적으로 그 기능을 정지한 것은 武臣亂 이후였 다. 武臣亂은 단순한 武臣들만의 반란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몰락 과정에 처해 있던 軍人들의 모든 현실적인 불평이 집약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武臣亂은 일반 軍人의 뒷받침 속에서 성공한 셈이다. 이렇게 수립된 武臣政權 하에서 高麗의 군사조직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국가의 公兵은 무너지고 武人의 私兵이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새로운 軍人層의 탄생을 뜻한 다고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초기 군사 제도의 관념으로서는 이해 할 수가 없는 것이다. 武人政權이 몰락하면서 거기에는 군사제도상의 공백 상태가 초래되었다. 국가 의 公兵도 武人의 私兵도 모두 없어졌기 때문이다. 民은 있어도 軍은 없다고 한 것이 이 사정을 단적으로 말하여주고 있는 것이다. 蒙古측의 동원 요구를 거절하 는 이유를 여기서 찾은 것은 단순한 구실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아

132 3. 軍事組織 李 基 白 래서 別抄라는 임시의 특별 부대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던 것이다. 外患이 없는 시 기에는 그래도 무방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방에서 蒙古와의 관계가 험악하여 지 고 남쪽에서는 外寇가 창궐하게 되면 高麗는 많은 군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상비군을 갖추지 못한 高麗는 위급한 사태를 당하면 그 때마다 농민을 동원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점차 國民皆兵, 혹은 兵農一致의 원칙에 입 각한 군사 제도가 짜여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새로운 검토의 대상이 되 는 문제인 것이다

133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2. 手工業 3. 商業과 對外貿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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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1) 建國 직후의 狀態와 役分田의 設置 9세기말一10세기초의 後百濟의 혼란상태는 高麗王朝 및 개창 자인 王建에 의하여 수습되었다. 그는 일찌기 후삼국의 하나인 泰 封의 왕 弓裔의 副將으로 활약하다가 918년 궁예를 타도하고 스스로 새 왕조를 세워 高麗라 청하더니, 점차적으로 舊泰封領內의 不順勢 力을 복속시키고, 935년에는 新羅를 평화리에 병합하였으며, 그 다 음해에는 숙적 後百濟를 멸하여 일단 국내통일의 과업에 성공하였 다. 그러나 그 당시에 국내에 널리 산재하고 있던 각지의 호족들 은 비록 신왕조 高麗에 귀순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제각기 독자의 武力과 經濟的 地盤을 보유하여 마치 분권적 소왕국과 같 은 세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王建이 완수해야 할 다음의 과제는 이러한 분권적 세력을 정비 제거하여 전국에 중앙집권적 인 지배권력을 확립하는 데 있었다. 王建에게 지워진 이 과업은 물론 그 당대에 이루어지지는 못하 고 제6대 成宗 때에 이르러 비로소 달성되기 시작하였는데, 王建 이래 高麗王朝 초기의 정책은 주로 이 과업의 완수에 촛점을 두고 있었다. 중앙집권적 체제의 확립을 위해서는 여러 대책이 강구되었 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 土地制度의 재 정비였다. 高麗王朝의 토지정책은 太祖 때에 시작하여 景宗에서 文宗에 아르는 사아에 정비 완성되는데, 그 根幹이 된 것은 田柴 科制度였다. 이하 田柴科制度를 중심으로 한 高麗前期의 토지정책 에 대하여 언급하기로 하겠다

136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新羅를 멸망으로 이끈 내외의 여러 모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이 토지지배관계의 문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高麗太祖 王建은 건국 직후에 맨 처음으로 田制의 개혁 에 착수하여 우선 토지제도의 정비에 노력하였다. 高麗史 卷78 食貨志 서문을 보면, 太祖는 즉 위하여 먼저 田制를 바로잡아 백성을 收取함에 法度가 있게 하고 農桑에 정성을 기울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때 太祖가 首正田制 했다는 것의 내용과 그 성과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太祖가 왕위에 올랐을 당시의 高麗의 토지제도는 대체로 新羅의 그것을 계승한 것이었으며 아직 高麗的인 특색은 없는 것이었다. 개국 직후의 토지지배관계의 상태를 살펴보면 당시 이미 內庄 食 邑 祿邑 등이 있었음이 주목된다. 1) 內庄 食邑 祿邑 內庄(內莊)은 王室 소속의 특수한 莊園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 은 왕실재정의 기반이 되는 御料地였다. 高麗의 건국 당시의 內庄 에 관해서는 太祖 원년 6월 乙丑의 詔에 소유하고 있는 內庄 및 東宮食邑에서는 穀糧을 쌓아둔지 세월이 오래되어 반드시 많이 朽 損되었을 것이므로 內奉郞中 能梵을 審穀使로 삼는다 1)라는 기록 이 있다. 원년 6월 乙丑은 즉위한 지 불과 10일 후의 일이므로, 여기에 보이는 內虫이나 東宮食邑은 물론 高麗王朝의 제도라고는 볼수가 없고, 弓裔시대의 제도를 承襲한 것에 불과하다. 이때의 內庄과 東宮食邑의 규모가 과연 어느 정도이었는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이것은 후일 점차 확대의 일로를 밟게 되어 왕실재정에 있어 압도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 자리 를 바꾸어 다시 상술하기로 한다. 1) 高麗史 卷 1 太租世家 同年條

137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食邑에 관한 기록은 위에서 본 東宮食邑 이외에 太祖가 통일 직 전에 後百濟의 頸菅과 新羅의 敬順王 金傅에게 각각 楊州와 慶州 를 식읍으로 사급한 예가 보인다.2) 高麗의 식읍은 후대의 예로 미루어 보아 실속이 없는 형식상의 허례를 취하는 경우가 적지 아 니하였으나, 위에 든 楊州를 甄萱의 식읍으로 삼고, 慶州를 金傅 의 식읍으로 삼은 사례는 단순히 그들을 優待하기 위한 허례의 형 식이 아니라, 실제로 그 지역에 대한 일정한 수취의 특권을 부여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의 식읍은 그의 성격 내용이 대체로 新羅 의 그것을 계승한 것이며, 공로가 탁월한 고관이나 宗室의 貴戚에 대하여 사급한 것으로 보인다. 공로가 탁월한 인물들 중에는 지방 의 豪族들이 많이 포함되며 그들에게도 물론 식읍이 지급되었다. 食邑에 대한 지배의 내용은 단순한 租의 수취뿐 아니라 貢 賦 力 役도 수취하였을 것이 라고 생각한다.3) 祿邑에 관한 기록도 비교적 일찍부터 보이고 있다. 즉 太祖는 동왕 17년 夏 5월 乙巳에 詔하여, 王親權勢之家 나 혹은 公卿將 相食祿之人 들이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祿邑의 編戶人을 불쌍히 여겨 사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4) 여기에 보이는 녹읍은 직접적으로는 泰封, 간접적으로는 新羅의 제도를 계승한 것 이 분명하나, 그의 구체적인 내용은 新羅의 경우에 있어서와 마찬 가지로 잘 알 수가 없다. 추측컨대, 이 녹읍은新羅의 제도가 그대로 남은 것이며 이것은 토지 그 자체에 대한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 니라, 생산노동력을 가진 인간과 그들이 거주하는 村落에 대한 일 정한 지배 租稅 貢賦 力役 를 의미한 듯하다.5) 건국 직후에 2) 高麗史 卷 2 太租世家 18年 夏 6月및 12月條 3) 河炫綱 高麗食邑考, 歷史學報 26輯 참조 4) 高麗史 卷 2 太祖世家 同年條 5) 姜晋哲 新羅의 祿邑에 대하여, 李弘稙博士回甲紀念韓國史學論叢

138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있어 관료들 전부에 대하여 녹읍이 사급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 으며, 아마 이 녹읍은 詔書에 보이는 王親權勢之家 나 혹은 公卿將相食祿之人 등 특수층에 국한하여 사급한 것으로 추측된 다. 太祖가 귀순한 城主 將軍들에 대하여 녹읍을 사급한 기록은 흔 히 보이며6) 요컨대 이것은, 그들 地方豪族이 가진 과거의 支配 圈 域을 녹읍의 형식으로 용인한 것을 의미한다. 식읍과 녹읍은 그 성격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여튼 이것은 호족의 경제지배의 큰 기반이었다. 뒤에 田柴科가 설정되어 科田 功蔭田 등 토지를 매개로 하는 경제적 우대가 이들 호족출신에게도 적용되자, 녹읍은 물론 식읍도 그의 대부분이 정 리되어 왕실토지로 편입되고, 이러는 과정에서 庄 處 등이 설 립된 것으로 이해된다. 2) 役分田의 설치 위에서 본 內庄 食邑 祿邑 등은 新羅 이래 내려오던 토지지배 관 계의 類型을 高麗가 계승한 것에 불과하며, 하등 高麗王朝의 창 안에 의한 것이 아니다. 高麗가 새 왕조로서 처음으로 시행한 토지 제도에 관한 정책은 太祖 23년에 설정한 役分田이었다. 役分田은 太祖가 後三國 통합시에 자기와 노고를 같이한 朝臣 軍 士에게 官階를 논하지 않고 각 인의 性行의 선악과 功勞의 대소를 보아 전토를 차등 있게 지급한 것이었다.7) 여기서 性行의 선악이 란 신왕조에 대한 충성도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이 給田의 기준으 로 되었다. 役分田의 제정은 뒤에 보이는 田柴科의 설치와 같이 토지제도 전반에 걸친 어떤 법제적 개편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오 6) 高麗史 卷 92 列傳 5 李忩言 興達 襲直條 등 참조 7) 高麗史 卷 7_ 食那志 1 田制 田柴科條

139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히려 論功行賞을 목적으로 하는 표창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役分田의 지급에 있어 官階가 給田의 第一義的인 기준 이 되지 아니한 것은 草創未暇의 당시에 있어 신왕조의 官階가 아 직 확립되지 아니하였음에도 이유가 있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役分田의 성격이 論功行賞的인 것이었으므로 반드시 給田의 기준 을 官階에 두어야 할 필요도 없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비록 이 役分田은 실질적으로 官階에 의한 給田은 아니었지만 高麗 신 왕조의 지배적 신분이 일원적으로 결성되는 제일보를 이루는 데 에 큰 의의가 있었다. 役分田은 흔히들 田柴科의 전신으로 이해하고 그와 계열이 같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功勳田 같은 性格도 상 당히 짙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役分田 지급의 자료로서 남은 유일 한 기록은 朴守卿에게 田 200結을 特賜한 것이 보일 뿐이다.8) 그 런데 여기서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당시 高麗의 국가권력은 아직 지 방에까지 깊이 침투하지 못하고 있던 실정이었으므로, 役分田 授 給의 범위도 대체로 국가의 지배권력이 확립된 京親 주변을 위주 로 삼았으리라는 점이다. 이 밖에 개국 초기의 공신들에게는 일반 적인 賜田이 널리 행하여진 기록이 列傳에 보이나 더 자세히 언급 치 않는다. 일반적 賜田의 예는 대개가 役分田 설정 이전의 일로 서 아마 이것은 그후 役分田으로 흡수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2) 田柴科의 制定과 土地支配의 諸類型 田柴科는, 高麗史 卷 78 食貨志 田制 冒頭에 설명이 있는 바와 같이, 文武百官으로부터 府兵 閑人에 이르기까지 무릇 국가의 관 8) 高麗史 卷 92 朴守卿 列傳

140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직에 복무하거나 또는 職役을 부담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들의 지 위에 따라서 응분의 田土와 柴地를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田柴科 이외에 공신 고급관료에 대해서는 세습이 허용 된 勳田 功蔭田柴가 사여되었고, 武散階 僧侶 地理師 등에도 田柴가 支給되었으며 中央과 地方의 각 官司에는 公廨田柴가 지급 되었 다. 高麗朝에 있어서 田柴科는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제정 변개되었 다. 즉 景宗 원년에 始定 된 田柴科는 穆宗 원년에 改定 을 보았고, 다시 文宗 30년에 更定 되었다. 우리 들은 편의상 이 를 각각 始定田柴科 혹은 改定 更定田柴科 라 부르기로 한 다. 1) 始定田柴科 田柴科가 창설된 것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景宗 원년 11월의 일 이다. 高麗史 卷 78 食貨志 田制 田柴科 同王 同年條에 의하면, 職散官 各品의 田柴科를 始定하였는데 官品의 고저를 논하지 아 니하고 단지 人品으로써 정하였다 라는 前文을 싣고, 이에 이어서 四色公服制에 의한 급전대상자의 신분 서열을 ① 紫衫 이상 ② 文 班丹衫 이상 ③ 文班緋衫 이상 ④ 文班綠衫 이상 ⑤ 雜業丹衫 이 상 ⑥ 雜業緋衫 이상 ⑦ 雜業綠衫 이상 ⑧ 武班丹衫 이상이라는 四階八層으로 나누어, 각 층 밑에 다시 여러 品階를 細註하고, 이 렇게 細註된 각 품계에 대해서 응분의 田柴配定額을 규정하고 있 다. 이 始定田柴科의 내용을 알기 쉽게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前文에 보이는 職散官은 직관과 산관을 의미하는 것인데, 직관 은 正職 또는 實職을 가진 벼슬을 말하며, 散官은 閑散無職事 하 여 實職이 없는 額外 의 벼슬, 즉 단지 품계만을 가진 階官을 말

141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하는 것이다. 始定田柴科 역시 관품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만 인품 紫 衫 1-18品 文班 1-10品 丹 衫 雜業 1-10品 武班 1-5 品 文班 1-8 品 緋 衫 雜業 1-8 品 文班 1-10品 綠 衫 雜業 1-10品 雜 吏 其未及此年科等者 최고 최하 최고 최하 최고 최하 최고 田 110結 田 32結 田 65結 田 30結 田 65結 田 30結 田 65結 柴 110結 柴 25結 柴 55結 柴 18結 柴 55結 柴 18結 柴 55結 최하 田 45結 柴 39結 최고 최하 최고 田 田 田 50結 27結 40結 14結 缺 柴 柴 柴 缺 최하 田 27結 柴 14結 최고 최하 최고 田 田 田 45結 21結 35結 10結 缺 柴 柴 柴 缺 최하 田 21結 柴 10結 支 給 不 一律的으로 田 15結 同 의 우열에 따라서 전토와 시지를 분급한 것이라고 표방하기는 하 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官品 人品을 병용한 급전제였다. 紫 丹 緋 綠의 四色公服에 의한 구별은 관품의 표시일 것이 분명하고, 각 色 內에 細註된 품계는 아마 人品 役分의 표시였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게시한 表記에 의하면 文班 雜業과 아울러 武班이 형성되 어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절대적 우위에 놓인 紫衫은 文 武 未 分, 나머지 三衫은 文 雜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단 武班은 丹衫 에만 국한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그리고 始定田柴科 규정의 말미에 이하의 雜吏는 각기 人品에

142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따라 지급이 不同하며 其未及此年科等者는 일체 15結을 給田한다 라는 단서가 붙어 있어, 위에서 말한 급전 규정에서 누락된 자들을 위해서 별개의 조처가 취해져 있다. 이것이 이른바 限外科 인데, 여기에 포함된 雜吏는 雜種吏屬의 뜻임이 분명하다. 일률적으로 15結의 급전을 받은 其未及此年科等者 의 실태는 분명치 않다. 혹시 앞으로 등용 될 관료를 말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요컨대 始定 田柴科는 초창기의 科田法인만큼 職 散官의 四色公服制에 의하여 급전의 차등을 설정하면서도 太祖時의 役分田의 정신을 계승하여, 인품도 급전의 기준으로서 고려치 않을 수 없는 미묘한 측면을 가 지고 있었다. 2) 改定田柴科 景宗 때에 창설된 始定田柴科는 그후 成宗代를 거쳐 穆宗 원년 12월에 이르러 일대 개편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지배질서의 성장 과 이에 따르는 官人體制의 발전에 호응하여 마련된 토지제도의 재정비를 의미한다. 成宗代에는 각 지방에 外官이 설치 파견되고 文 武散階가 각 29階씩 분립 제정되는 등 자못 주목할 만한 지배 질서 및 관인체제의 진전이 있었다. 高麗史 卷 78 食貨志 田制 田 柴科條를 보면, 이때 개정 보수한 田柴科의 細則을 기술하는 본문 冒頭에 穆宗 원년 12월에 文武兩班 및 軍人田柴科를 改定하였 다 라는 前文을 싣고, 이에 이어서 田柴科 수급자의 科等을 모두 18科, 즉 18계층으로 나누어 제1과로부터 제18과에 이르기까지 각기 차등을 두어 각 科等에 대해서 응분의 田柴受給額을 규정하 고, 또 그 밑에 수급할 자의 해당 관직명을 細註하고 있다. 이를 表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穆宗代의 改定田柴科를 景宗代에 창설된 始定田柴科와

143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비교해 보면 다음의 몇 가지 특징이 주목된다. 즉 첫째로 改定 田 柴科는 始定田柴科에 비하여 그 규정 내용이 퍽 간편하고 체계

144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支給額數 科 田地 柴地 (結) (結) 科外 17 受 給 者 內史令 侍中 內史侍郞平章事 門下侍郞平章事 致仕侍中 參知政事 左右僕射 檢校太師 六尙書 御史大夫 左右散騎常侍 大常卿 致仕左右僕射 致仕 太子太保 秘書監 殿中監 少府監 將作監 開城尹 上將軍 散左右僕射 左右丞 諸侍郞 諫議大夫 大將軍 散六尙書 軍器少卿 大常少卿 給舍中丞 太子賓客 太子詹事 散卿 散 監 散侍郞 諸少卿 諸少監 國子司業 諸衞將軍 太卜監 散軍器監 散上將 軍 太子庶子 諸郞中 軍器少監 秘書丞 殿中丞 內常侍 國子博士 中郞將 折衝都尉 太醫監 閣門使 宣徽諸使 制事 散少卿 散少監 諸員外郞 侍御史 起居郞 起居舍 諸局奉御 內給事 諸陵令 郞將 果毅 太卜少監 太史令 閣門副使 散郞中 散大將軍 散 閣門使 散太醫監 散太子諭德 散太子家令 散太子率更令 散 太子僕 殿中侍御史 左石浦闕 寺丞 監丞 秘書郞 國子助敎 大學博士 太醫少監 尙藥奉御 通事舍人 宣徽諸副使 太子中允 中舍人 散員外郎 散太卜少監 散太史令 散諸奉御 散閣門副使 大常博士 左右拾遺 監察御使 內謁者監 六衞長史 六局直長 軍器丞 太子洗馬 四宮正 散諸衞將軍 散寺丞 散監丞 散太 醫少監 散尚藥奉御 散宣徽諸副使 主書 錄事 都事 內侍伯 寺注簿 監注簿 四門博士 大學助敎 中尙令 享市令 武庫令 大官令 大倉令 典廐令 供御令 典客 令 大樂令 諸陵丞 別將 太卜丞 太史丞 侍御醫 尙藥直長 內殿崇班 大理評事 閣門祗候 散宣徽諸使 散直長 散中郞將 散折衝都尉 散四官正 藥藏郞 典膳內直 宮門郞 典設郞 六衞錄事 正八品丞 正八品令 內謁者 東西頭供奉官 散員 指 揮使 協律郞 太子監丞 散寺注簿 散監注簿 散郞將 散果毅 散內殷崇班 散閣門祗候 散太卜丞 散太史丞 散侍御馨 散尙 藥直長 散宣徽副使 (從)八品丞 (從)八品令 秘書郞 校書郞 四門助敎 諸尉 校尉 靈臺郞 保章正 挈壶正 太醫丞 太醫博士 律學博士 左右侍禁 左右班锻直 散正八品 散別將 散指揮 散供奉官 大祝 司廩 司庫 九品丞 主事 錄事 秘書正字 製述登科將仕 郞 明經登科將仕郞 書學博士 算學博士 司辰 司曆 卜博士 卜正 監候 食醫 醫正 醫佐 律學助敎 篆書博士 宣徽諸使判 官 諸衞隊正 殿前承旨 中樞別駕 宣徽別駕 銀臺別駕 散校尉 散左右班殿直 散侍禁 諸業將仕郞 含史 書史 監事 監作 書令史 楷書內承旨 客省 承旨 閣門承旨 借殿前承旨 親事 內給事 馬軍 散殿前承旨 散隊正 散殿前副承旨 大常司儀 大常齋郞 國子典學 知班 注藥 藥童 軍將官 通引 廳頭 直省 殿驅官 堂引 追仗 監膳 引謁(等流 外雜職) 諸步軍 不及此限者 皆給田十七結 以爲常式 (高麗史 卷 78 食貨 志田柴科)

145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화되어 전체 官人을 한 계통 안에 망라하고 있다. 文武兩班을 중 심으로 제정된 이 田柴科는 종전의 始定田柴科와는 달리 田柴의 급여에 있어서 소위 人品이라는 막연한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고, 오직 관직과 位階의 고하만을 표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은 확 실히 官人體制의 진전을 의미하는 것이며, 官人體制內에서 이미 階層制 가 확립되었음을 말하여 준다. 이러한 階層制 에 의한 전시 급여의 원칙은 이 시기 이후 高麗 朝鮮의 두 왕조를 통하여 일관되었다. 給田基準으로 人品을 고려한 始定田柴科 같은 것은 하나의 과도적 현상에 불과하였다. 다음 둘째로 주목되는 것은 始定田柴科에서는 受給對象에 군인층 이 포함되어 있지 아니하였는데, 이번 改定田柴科에서는 뚜렷이 군 인층이 田土의 수급대 상자로서 나타나 제17과에는 馬軍, 제18과 에는 步軍에 대한 전토의 배정액이 명시되어 있다. 군인뿐 아니라 始定田柴科에서는 限外科 에 속해 있던 諸種의 流外雜職이, 改定田 柴科에서는 科內에 편입되어 步軍과 더불어 제18과에 배치되어 있 다. 군인과 流外雜職 雜種吏屬 은, 그의 신분은 양반과 구별 되지만, 국가에 대하여 職役을 부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수로서 전토의 급여를 받았다. 改定田柴科 그 자체에서 주목 되 는 것은 文 武의 관직 사이에 큰 비중의 차이가 있어 무관에 대한 문관의 우위가 현저히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무관의 최상위인 上將軍(正三品)은 제5과, 그 다음 大將軍(從二品)은 제6 과에 속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文官 四品官의 대우를 받고 있었음을 말하여 준다. 이러한 文 武의 차별대우는 散職의 경우에 도 그대로 나타나서 문관의 散職者는 時職者에 대해서 대개 1科 를 강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관의 경우에 있어서는 3과 내지 4과를 강등하고 있다. 이러한 역대의 重文主義가 무관들의 반발

146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을 초래하여 후일 무신반란의 한 도화선이 되었음은 다시 말할 필 요가 없다. 田柴科라고 해서 전체의 科等에 대하여 골고루 田土 柴 地를 並給한 것이 아니라, 제16과부터는 田土만 지급되고 柴地는 급여되지 아니하였음은 앞의 도표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다. 改定田柴科도 限外科가 附置되어 있었음은, 관계 기사 말미에 不及此限者는 모두 田 17結을 지급함을 常式으로 삼는다 라고 明記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始定田柴科에서는 流外雜職이 限 外科 에 속하고 있었으나, 改定田柴科에서는 그들이 科內에 편입 되었으므로 限外科 의 대상은 流外雜職을 포함하는 것은 물 론 아니다. 限外科 의 대상이 된 계층의 실태는 명료치 않으나, 아마 이것은 始定田柴科의 경우와 같이 앞으로 새로 등용될 신임 관 료와 관계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限外科 의 수급액수는 始定田柴 科의 15結이 改定田柴科에서는 17結로 증가한 것이 또한 주목된 다. 穆宗代의 改定田柴科는 그후 德宗 3년 4월에 이르러 兩班及軍 閑人田柴科 가 다시 개정되고 있다.9) 이때 새로이 개편된 田柴 科의 내용은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가 없으나, 여기서 크게 주목되 는 것은 田柴科의 수급대상자로 兩班 軍人과 더불어 閑人 이 새 로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閑人과 閑人田에 관해서는 자리를 바꾸 어 따로 언급하기로 한다. 3) 更定田柴科 德宗 3년에 개편된 田柴科는 그 후 文宗 30년에 이르러 또다시 전면적인 재편성을 보게 되었다. 즉 高麗史 卷 78 食貨志 田制 田柴 科條에 의하면, 文宗 30년 兩班田柴科를 更定하였다 는 前文 9) 高麗史 卷 78 食貨志 田制 田柴科條

147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을 싣고, 이에 이어서 갱정된 田柴科의 소상한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이 更定田柴科는 穆宗代의 改定田柴科의 체제를 그대로 承 支給額數 科 田地 柴地 (結) (結) 受 給 者 中書令 尚書令 門下侍中 門下侍郞 中書侍郞 參知政事 左右僕射 上將軍 六尚書 御吏大夫 左右常侍 太子詹事 太子賓客 大將軍 七寺卿 秘書監 殿中監 國子祭酒 尚書左右丞 司天監 太子少 詹事 諸衛將軍 右少詹事 吏部諸曹侍郞 將作監 少府監 单器監 太醫監 左右庶子 左右 諭德 諸中郞將 七寺少卿 秘書少監 殿中少監 將作少監 少府少監 司天少監 給事中 中書舍人 御史中丞 國子司業 太子僕 太子率更令 太 子家令 諸郞中 太醫少監 軍器少監 內常侍 閣門引進使 太子左右贊 善大夫 太子中允 太子中舍人 閣門使 國子博士 諸郞將 秘書丞 殿中丞 閣門副使 諸員外郞 起居郞 起居舍人 侍御史 六局奉御 殿中內給事 太 史令 諸陵令 太廟令 內謁者監 太學博士 中尚令 四官正 太 子藥藏郞 典膳郞 太子洗馬 通事舍人 左右補闕 殿中侍御史 七寺丞 三監丞 司天丞 秘書 郞 六衛長史 國子助敎 京市令 內直 典設郞 宮門監 侍御醫 諸別將 監察御史_ 左右拾遺 閣門祗候 門下錄事 中書注書 軍器丞 六 局直長 四門博士 詹事府司直 內侍伯 內殿崇班 諸散員 六相 左丞 尙書都事 七寺主簿 三監主簿 太學助敎 太官令 大樂令 大盈 令 典廐令 內園令 供驛令 掌冶令 太史丞 諸陵丞 大廟丞 司 天主簿 東西頭供奉官 諸校尉 元甫 正朝 六衛錄事 軍器主簿 四門助敎 京市丞 中尚丞 武庫丞 大樂丞 大盈丞 大倉丞 大官丞 典廐丞 內園丞 供驛丞 掌冶丞 秘書 校書郞 良醞令 司儀令 守宮令 典獄令 都染令 雜職令 都校 令 掌牲令 太醫博士 太醫丞 挈壶正 保章正 律學博士 左右 侍禁 左右班殿直 諸隊正 元尹 都染丞 雜職丞 都校丞 掌牲丞 守宮丞 司儀丞 典獄丞 良醞 丞 司廩 司庫 太史 司辰 司曆 監候 尙食 食醫 律學助敎 書 學博士 算學博士 司天博士 太醫正 醫正 司天卜正 秘書正字 諸主事 御史臺錄事 中樞院別駕 門下待詔 文林郞 將仕郞 殿 前承旨 都知 船頭 典丘官 司引 馬軍 諸令史 書史 主事 中書書藝 秘書書藝 史館書藝 太史書藝 醫計師 司天卜師 卜助敎 副殿前承旨 禮賓承旨 閣門承旨 獸 醫博士 堂印 堂直 監膳 典食 典設 役步軍 諸書令史 諸史 尙乘內承旨 副內承旨 太史 典史 注藥 藥童 道引 直省 知班 呪禁師 供膳 酒食 供設 掌設 堂從 追仗 引 謁 計史 試計史 試書藝 監門軍 閑人 雜類

148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襲하여 18科等制를 채택하고 있으나, 科等에 따르는 田柴의 結數 는 전에 비하여 상당한 차이가 있고, 또 科等에 연결된 관직도 앞 의 표와 같이 전후의 출입이 심하다. 그리고 이 更定田柴科에는 武散階 와 別賜科 에 관한 田柴配分制가 병설되어 있음이 주목 되는데, 이것을 요약해서 표시하면 앞의 표와 같다. 文宗代에 갱정된 이른바 更定田柴科는 高麗前期의 토지제도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田柴科로서는 최종적 결정판이었다. 이 것을 그 이전의 穆宗代 改定田柴科에 비교해 보면 다음의 여러 가 지 사실이 주목된다. 첫째 更定田柴科에서는 지급하는 田柴의 액 수가 前制에 비하여 일반적으로 감소된 대신 무관에 대한 대우가 현저히 상승되어 있는 것이 주의를 끈다. 前制인 改定田柴科에서는 무관의 최상위인 上將軍은 제5과에 위치하고 大將軍은 제6과에 위치하였으나 이번에는 제3과 제4과로 올라갔다. 諸衛將軍 諸中郞 將 이하 馬軍 步軍 등에 이르기까지 科의 등급이 상승하였다. 다음 에 주목되는 것은, 종전까지 田柴科의 대상으로 되어 있던 散官이 更定田柴科에서는 배제되어 수급대상에서 완전히 탈락되어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現職主義의 철저를 의미하는 것인데, 급여 규정 에 이러한 변화가 생긴 것은 아마 文宗 3년에 시행된 功蔭田柴科 의 설치와 서로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종전까지 시행된 散官 에 대한 급전은 功蔭田柴科로써 대치된 모양 같다. 功蔭田柴科에 관 해서는 자리를 바꾸어 다시 언급하겠다. 끝으로 주목되는 것은, 종전까지 병설되어 오던 이른바 限外科 가 이번 更定田柴科에서 는 완전히 자태를 감추어 버렸다는 것이다. 限外科 가 없어진 것 은 그의 수급대상이 科內에 편입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제도 그 자체의 완비와 일원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更定田柴科에서 부대적 조항으로 武散階와 別賜科에 대한 田柴

149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科가 병설되었음은 이미 위에서 말한 바 있거니와, 그 내용은 다 음과 같다. 예에 따라서 武散階 田柴科를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武 田 田 田 田 30結 柴 8結 30結 25結 22結 5 田 20結 6 田 17結 散 階 冠軍大將軍 雲麾將軍 掌武將軍 宣威將軍 明威將軍 寧遠將軍 定遠將軍 遊騎將軍 遊擊將軍 耀武校尉 同副尉 振威校尉 同副尉 致果校尉 同副尉 翊 麾(威 )校尉 同副尉 宣折校尉 同副尉 禦侮校尉 同副尉 仁勇校尉 同副尉 陪 戎校尉 同副尉 大匠 副匠 雜匠人 御前部樂伴樂人 地理業 僧人 위의 표시에 의하면 武散階라는 명목으로 지급되는 전토의 액수 는 6등급으로 구분되어 있다. 제1급으로부터 제5급에 이르기까지 의 지급대상은 冠軍大將軍 이하 陪戎副尉까지로 되어 있다. 冠軍 大將軍은 무산계 29級 중에서 제4급에 속하는 정3품직이며, 陪 戎副尉는 말단의 제29級에 속하는 종9품 하직이므로, 이들이 무 산계 라는 명목의 급전규정에 따라서 전토를 받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제6급에 속하는 大匠 副匠 雜匠人 御前部樂伴樂人 地 理業 僧人들이 무산계라는 명목의 급전을 받은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 해서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에 관한 의혹을 풀기 위해서 는 우선 武散階에 대하여 좀더 살필 필요가 있다. 무산계에 대해서는 종전까지 막연히 武官散職階 혹은 武官職階 級의 뜻으로 해석하여 왔는데, 이 견해는 잘못인 듯하다. 무산계 는 成宗 14년에 문산계와 거의 시기를 같이 하여 제정되어 같은 시기에 서로 병존한 것으로서, 文散階는 문무양반, 즉 高麗의 관료 층에 부여되었는데 대하여, 武散階는 이와는 반대로 문무관료에 대해서가 아니라 관료층과는 별개의 계열에 속하는 老兵士 鄕吏 耽 羅의 王族 女眞의 替長 工匠 樂人 등에 대해서 수급되는 것이었다

150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문산계와 무산계는 그의 수급대상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즉 高麗 王朝는 관료를 대상으로 수여하는 문산계 이외에 무산계를 따로 설정함으로써, 이 두 개의 체계에 입각하는 位階制에 의 하여 문 무관료층과 그에 속하지 않는 다른 계층의 인간들을 명확히 구분 하였다. 무산계 설정의 가장 큰 의도는 문무관료를 지방호족(그의 후신이 鄕吏) 기타로부터 구별함에 있었던 모양이며, 무관도 아닌 향리층이 무산계 수여의 주요 대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아마 그 이유가 여기에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더 억측을 가한다면, 향리 는 노동부대인 諸州 一品軍의 校尉 隊正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으 므로, 이러한 면에서 무직과 전혀 관련이 없는 바는 아니었다. 무 산계는 본래부터 무관직과는 관계가 없는 별개의 계열의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여기에는 향리는 물론 耽羅王族 女 眞酋長 工匠 樂人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단 工匠 樂人은 그의 전부가 武散階田柴科 지급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라 그 중의 특수 한 계층만이 이에 포함되었음은 前揭 表記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다. 工匠 樂人에 무산계가 수여된 것은 그들이 맡은 바 임무가 군 역과 같은 職役으로 간주되어, 일종의 기술 군인의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10) 原文에 武散階田柴科 제6급의 말미에 붙어 있는 地理業 僧人은 분명히 잘못이며, 이것은 高麗史 卷 78 食貨志(田制) 본문에 계속 되는 別賜 즉 別賜科 의 형용사로서, 別賜 위에 連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別賜田柴科는 僧人 地理業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別賜田柴科에 대하여 말하기로 하겠는데, 이것은 大德 10) 武散階에 관해서는, 旗田巍 高麗の武階 朝鮮學報 第 合併特輯號 참조

151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大通 副通 등의 僧職과 地理師 地理博士 地理生 地理正 등의 풍수지 리에 관계되는 이른바 地師들을 수여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고 려시대에 불교와 풍수지리설이 성행하였음은 유명한 사실이며, 이 에 종사하는 僧侶 地師가 특별한 사회적 우대를 받았음은 당연한 일로 생각되거니와 그들에 대한 給田이 제도화된 것은 이번이 처 음인 듯하다. 그의 내용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別 田 田 田 田 田 田 賜 40 結 柴 10 結 35 結 柴 大徳 大通 副通 地理師 地理博士 地 理 生 地 理 正 8結 30 結 25 結 20 結 17 結 위에서 田柴科制度의 설치와 그 내용에 대한 일반적인 개관을 하였다. 田柴科制度의 성격에 관해서는 뒤에 다시 말하기로 하겠 지만, 형식상으로 볼 때 이것은 관직을 가진 문무양반과, 職役을 부담하는 胥吏 鄕吏 軍人 工匠, 樂人 등에 대하여 토지를 분급해 주 는 제도였다. 그들에 대한 토지의 급부는 그들이 국가에 봉사하는 일정한 공적인 복무에 대한 대가를 의미하였다. 田柴科 급부의 대 상은, 하나는 관직을 가진 귀족관료층이었고, 하나는 직역을 부담 한 이와는 구별되는 계층이었다. 이러한 일반 田柴料 이외에 官僚 및 그 遺族에 대해서는 功蔭田柴 閑人田 口分田 등의 名目으로 별 도로 土地가 支給되었으니, 우선 이에 대한 설명을 가하고 또 특 히 향리에 대한 外役田과 군인에 대한 軍人田 같은 것은 그의 역 사적인 의의가 중요하므로 좀더 자세한 해설을 붙이기로 하겠다. 아울러 公廨田柴 및 기타의 토지지배의 유형에 대해서도 설명을 가할 예정이다

152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4) 功蔭田柴 特殊田柴科에 속하는 功蔭田柴는 양반신분 그 자체에 대한 우대 의 특전으로 지급된 것으로서 일반 田柴科, 즉 兩班科田이 當代限 인 것에 대하여 자손들에게 상속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 큰 특 색이었다. 官人國家인 高麗는, 일단 官人의 신분을 취득한 특권층 에 대해서 그들이 자자손손으로 그 신분을 계승할 수 있도록 염려 해 주었고 또 그 신분을 유지함에 필요한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 주는 배려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蔭職과 功蔭田柴의 제도가 바로 이것을 입증한다. 高麗에서는 功蔭田柴의 제도가 실시되기 이전에 景宗 2년에 제정된 勳田의 제도가 있었다. 이 勳田은 아마 처음에 는 문자 그대로 공훈이 현저한 공신에 한하여 사급해서 자손에의 상속을 인정한 것인 모양인데, 그후 文宗代에 이르러서는 훈공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官人身分 그 자체 에 대한 우대 보호책으로서 5品 이상의 문무양반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功蔭田柴를 지급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다. 高麗史 卷 78 食貨志 1 田制 功蔭田柴 文宗 3 년 5월條를 보면, 功蔭田柴는 1品부터 5品 이상의 고급관료에게 저들의 品秩에 따라서 최고 1品 田 25結 柴 15結, 최하 5品 田 15 結 柴 5結을 지급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散官은 각 品마다 원액에서 5結을 감하여 지급하였으며, 樂工 賤口에서 放良된 員吏 는 이 우대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아울러 밝히고 있다. 功蔭田柴가 제정된 근본 취지는 5品 이상의 特權的 高級官人에 대해서 그들이 高級官人으로서 그들의 특권적인 생활을 세습적으 로 누릴 수 있는 경제적 생활 토대를 마련해 줌에 있었다. 官人은 그가 관직에 재임하고 있는 동안은 兩班科田을 받았으나, 이 兩班 科田은 세습이 허용된 것은 아니었다. 本人이 身歿하면 兩班科田

153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은 국가에 환납되기 마련이었다. 5品이상의 官人의 자제는 대개 科擧 를 거치지 않더라도 蔭仕를 통하여 官途에 취임할 수 있는 특혜가 부여되어 있었으나 연령 관계 기타의 이유로 父가 死殁한 이후에도 관직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었다. 이럴 경우 高級官人層 의 가족은 官人으로서의 특권적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길이 막연하 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고 또 兩班科田이 當代限의 것이라 는 조건을 고려해서 제정된 것이 功蔭田柴였다. 세습적 상속이 허 용된 이 功蔭田柴는 私有財產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功蔭田柴 의 경영에 있어서는 受給者인 兩班이 代理人을 現地에 두어 경작 자인 佃戶의 생산을 감독 관리 하고 그들과 仙戶 사이 에 私的인 支 配 隷屬의 관계가 성립되어 小作制가 이루어질 가능성 같은 것도 생각된다. 5品 이상의 관인층에 대해서는 功蔭田柴가 설정됨으로 써 그들의 官人身分을 세습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이 마련되었다. 그러면 같은 관인층에 속하는 6品 이하의 官人에 대 해서는 어떠하였는가.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閑人田 口分 田에대한 설명이 필요하다.11) 5) 閑人田 口分田 功蔭田柴가 5 品 이상의 官人 및 그들의 자제를 상대로 그들의 官人身分을 유지하기에 필요한 경제적 조건을 마련해 주기 위하 여 설정된 것이라면, 閑人田은 이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6品 이하 의 관인자녀를 상대로 그들의 경제적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 하여 설정된 것이었다. 閑人田의 이러한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우 선 口分田에 관해서 먼저 살펴보는 것이 편리하다. 高麗史 卷 78 食貨志 1 田制 田柴科條를 보면, 文宗 원년 2월 11) 功蔭田柴에 관해서는. 李佑成 閑人 白丁의 新解釋 歷史學報 19輯 참조

154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의 判으로서 口分田을 지급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 음과 같다. [口分田支給規定] ① 無連立子孫者之妻 6品 7品 8結 8品 以下 5結 戰亡軍人 5結 ② 夫妻皆死無男而有未嫁女子者 5品 以上 8結 6品 以下? 이 규정은 ① 連立할 자손이 없는 자의 妻와 ② 夫妻가 모두 사 망한 뒤, 남자는 없고 未嫁女子만 있을 경우에 대하여 국가가 일 정한 口分田을 지급하여 생활을 보장해 준 것을 말하여 주고 있다. 분명히 高麗時代의 口分田은 적어도 전기에 나타나는 그의 用例 를 보면, 官人 및 군인 유족의 보호를 위하여 지급하는 토지였다. 그런데 口分田의 지급규정에서 하나 크게 주목되는 것은, 그것 은 모두 자식 자손이 없을 경우에 대한 것이며, 자식 자손에 관한 규정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여 주는 것이 바로 閑人田이다. 閑人田은 功蔭田과 等質視되는 토지로써 未仕 未嫁者, 특히 未仕者에게 주어 생활을 보장케 하는 토지였 다.12) 여기서 未仕者라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이 관직을 취 득치 못한 사람을 의미 하는데, 이 未仕者는 응당 그 신분이 官人 層이면서도 아직 官途에 오르지 못한 사람, 즉 官人의 子弟를 의 12) 自是以來, 閑人 功蔭 投化 入鎭 加給 補給 登科 別賜之名 代有增益 已仕已 嫁者 尙食閑人之田 不踐行伍者 冒受軍田 旣食役分 又食閑人 又食軍田 授受 之官 不問其已見任在官 而當食役分者耶 未仕未嫁 當食閑人者耶 其身果府兵歟 (高随史 卷 78 食貨志 1 田制 辛禑 14年 7月 趙浚上書) 李佑成 閑人 白丁에 대한 新解釋, 歴史學報 19輯

155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미한다. 官人出身의 신분으로 아직 官途에 오르지 못한 자에 대하여 그 가 5品 이상의 양반의 자제일 경우에는 功蔭田柴가 지급되어 그 들 생활이 보장되었음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그러면 功蔭田柴와 等 質視되는 동시에, 그것과는 구별되는 閑人田을 받는 官人出身 의 未仕者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그들은 논리상 功蔭田柴 를 받지는 못하면서도, 그것을 받는 사람들과 같은 官人身分에 속 하는 6品 이하의 양반의 자제일 것이 분명하다. 田柴科 末尾에 규 정되어 있는 閑人田 17結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지급한 토지 였다. 閑人田은 6品 이하 官人의 未嫁女子에게도 지급되었는데 그 액수는 물론 남자에 비하여 훨씬 적었을 것이다. 5品이상 官人의 未嫁女子에 대하여 口分田 8結을 준 것을 감안해서 생각할 때 女 子에 지급된 閑人田은 8結보다는 더 적은 土地였을 것이 분명하 다. 閑人田의 문제에 있어 하나 의문으로 남는 것은 未仕閑居하는 6品 이하의 官人子弟에 대하여 무조건 閑人田이 지급되었는지 혹 은 官職은 아니더라도 國家에 대한 다른 일정한 奉仕라는 조건을 매개로 해서 비로소 지급되었는지 이 점이 분명치 않다. 이 문제 에 관해서는 장래의 연구가 기대되는 바이다. 6) 鄉吏 外役田 文武兩班에 대하여 田柴가 지급된 것과 마찬가지로, 중앙 및 지 방의 胥吏들에 대해서도 田柴가 지급되었다. 중앙의 서리들에 대 한 급전은 이미 표시한 田柴科 규정의 세칙에 비교적 소상히 나와 있으므로 이에 관해서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鄉吏들에 지급한 토지 즉 外役田은 이에 관계되는 기록이 매우 애 매모호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에 관해서는 좀더 설명이 필요할

156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이 外役田은 高麗初期의 豪族의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으므로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도 그에 대한 설명은 좀더 보충되어야 한다. 향리들에 대하여 職田이 지급되었던 사실은, 穆宗 원년 郡縣의 安逸戶長에게 職田之半 을 賜給하도록 조처한 기사와,13) 顯宗 16년 諸州縣의 長吏가 병이 들어 100일이 된 자는 京官의 사례에 의거하여 파직하고 田土를 회수하도록 명령하고 있는 기록으로14) 알 수 있다. 여기서 安逸戶長이란 나이 70이 되어 퇴역한 戶長을 말하며, 이들에게 職田의 절반을 사여한 것은 散職에 대해서 일정 한 액수를 감하여 토지를 지급한 田柴科의 예와 같은 정신에 입각 하는 것이다. 그리고 高麗王朝는 官吏가 병이 들어 100일이 넘도 록 出仕치 못하는 경우에는 罷職收田 하였던 것인데, 향리도 이 예에 따라서 出仕치 못하는 기간이 100일을 넘으면 그들에게 급 여 한 職田이 회수당하였던 것이다. 이같이 高麗時代의 향리에 대해서 職田 즉 外役田이 지급된 사 실은 충분히 확인되지만, 이 鄕吏外役田에 관한 지급규정은 高麗 史 기타의 기록에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그 구체적 내용은 알 수 가 없다. 이에 관해서는 高麗史 卷78 食貨志 田制 公廨田柴의 成 宗 2년 6월의 기사에 보이는 州府郡縣 의 長田 이 바로 外役 田(戶長)이라고 규정한 견해도 있지만15) 이에는 상당한 의문이 없지도 않다. 즉 公廨田柴의 기록에 의하면 長田은 公須田 紙田 등 과 더불어 지방 公廨田의 일환으로 지급되고 있는데 州府郡縣의 경우 丁 의 다과에 따라 그 액수가 5 3結로 제정되어 있다. 이 를 鄕 吏外役田으로 볼 때 그 지급액이 너무나도 적은 것이 잘 납 13) 高麗史 卷 78 食貨志 1 田制條 14) 高麗史 卷 75 選擧志 3 銓注 鄕職條 15) 武田幸男 高麗 李朝時代の邑吏田, 朝鮮學報 合併特輯號 참조

157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득되지 않는다. 특히 일반 田柴科에서 流外雜職(胥吏)이 20結 정 도의 土地를 받고 있음에 비교해 보면 의혹의 느낌은 더욱 깊어진 다. 高麗는 그의 초기에 있어 향리들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돌리 고 있는데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新羅末期 이후 高麗 건국 직후에 이르기까지 중앙정부는 전국의 각 지방을 집권적으로 파악할 능력이 없었고 지방 각 처에서는 호족세력이 대두 성장하 여 이들은 중앙정부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분권적인 소왕국을 형성 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들은 새 왕조 高麗가 성립하는 과정 에서 지대한 정치적 군사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이들이 바로 高 麗 향리의 전신이었다. 건국 이후에 高麗의 호족들 중에는 적극 신 왕조 건국에 협력하여 중앙관료로 진출하는 부류도 있었으며 이와 는 반대로 몰락의 과정을 밟은 부류도 있었으나, 본고장에 그대로 남아 처진 부류도 적지 않았다. 지방에 잔류한 호족들은 대체로 뒤 에 향리로 편성되어 국가권력의 말단을 장악함으로써 租稅 貢賦룔 수취하고 軍役 力役을 징발하며 또 간단한 소송을 재결하는 등 지 방통치의 중요한 기능을 행사하였다. 향리는 본래 지방의 호족으로서 많은 재산을 축적하여 광대한 토지를 사유하고 있었으리라고 짐작되는데 이 토지가 건국 이후의 국가적 토지제도의 정비 개편에 즈음하여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아마 그의 상당한 부분이 勳田으로 사급되어 종전 의 지배권이 계속 공인되고, 나머지의 부분은 일단 국가에 흡수되 어 비교적 근소한 토지가 職田이라는 명목으로 지급된 것이 아닌 가 생각한다. 高麗史 卷 78 食貨志 田制 功蔭田柴條 景宗 2년의 기사에 의하면, 向義歸順城主 즉 신왕조의 개국에 협력한 지방호 족들은 개국공신과 더불어 국가로부터 50 20結의 토지를 勳田으

158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로서 받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 勳田은 그것이 功蔭田柴科에 들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시피 鄕吏 豪族의 사회적 배경을 고려해서 우대한 優給田이지 그들이 받은 職役의 대가로서 준 職 田은 아니었다. 요컨대 高麗의 향리는 職田 이외에도 위에서 본 바와 같이 勳田 (50 20結) 武散階田柴科(35 20結) 등의 형식으로 일정한 토지 를 그들의 지배하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鄉吏로서 勳田 武散階田 柴 등을 받은 자는 그의 범위가 과히 넓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아 마 향리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경제적 토대를 주로 그들이 받은 職 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의 호 족이 향리로 떨어져 그들이 경제적으로 몰락의 길을 밟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거니와 그렇다 하더라도 향리 특히 그 長인 戶長에 대한 給田이 불과 5 3結이었다는 것은 그 액수가 너무나 적은 것 같아 좀처럼 수긍이 가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鄕吏外役田과 公廨 田柴에 보이는 長을 일단 구별해서 취급하기로 하며 鄕吏外役田 의 實態는 앞으로 더 깊은 연구에 의하여 해명될 것을 기대할 수 밖에 없다. 향리의 職田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밝혀 두어야 할 문제는 鄕 職과 外役田의 관계에 관해서이다. 종래 우리는 鄕職을 단순하게 鄉吏의 職 또는 鄉吏의 階로 이해하고, 따라서 文宗 30년의 更定 田柴科內에 보이는 제12과의 佐丞(3 品) 大相(4品), 제13과의 元 甫(4品) 正甫(5品), 제14과의 元尹(6品)과 같은 鄕職에 주목하여 이에 해당하는 田柴의 지급이 바로 鄉吏에 대한 職田의 지급인 것 같이 설명하여 왔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해였다. 鄕職은 鄉吏의 職 또는 階와는 하 등의 관계가 없는 별개의 질서체계이며, 따라서 향직에 대한 田柴

159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의 지급을 향리에 대한 職田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16) 향직은 高 麗國家의 공적 조직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兩班官職 鄕吏職 등 국 가적 관직과 같은 實職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爵과 같이 국가 적 신분질서 체계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리고 鄕職의 鄕 이 뜻 하는 것은, 唐樂에 대하는 鄕樂의 用例와 같이, 唐 즉 中國風에 대 하는 鄕으로서 國風 高麗風을 의미한다. 高麗王朝는 국가기구를 정비함에 있어서 중국적 요소를 많이 채용하였고 또 표면적으로는 그것을 완성시켜 나아갔다고 보이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같은 경향과는 반대로 따로이 高麗的 특색을 유지 존속시킨 공직 질서체 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鄕職이었다. 鄕職은 高麗王朝를 중심으로 하는 高麗的 질서체계의 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 鄕職을 소유할 수 있는 계층은 특정의 소수자에 불과하였다. 즉 향직을 보유한 계층으로서는 鄕吏 無官의 老人 武散階를 가 진 자 軍人 兩班 胥吏와 또 女眞의 齒長 등이 보인다. 향직은 양반계급 과는 일단 별개의 체계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저들과 비등한 국가 적 사회적 대우를 받았다. 전술한 更定田柴科의 향직에 대한 田柴 의 지급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향직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여 그 전부가 柴田의 지급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田柴 지급의 혜택을 받은 것은 元尹(6品)이상의 상위에 속하는 향직이었고 佐 尹(6品) 이하의 하위 향직은 여기에서 제외되었다. 여기에 향직의 階層性이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향직을 보유하는 계층에 鄉吏가 그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鄕職은 모든 鄉吏가 이것을 가진 것은 아니며 또 鄕吏들만이 가지는 職階도 아니었 다.17) 16) 武田幸男 高麗時代の鄕職, 東洋學報 第47卷 참조 17) 同上

160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7) 軍 人 田 군인은 軍役에 복무하는 대가로서 국가로부터 軍人田의 지급을 받았다. 高麗 역대의 田柴科 제정에서 軍人田이 처음으로 설정된 것은 穆宗 원년의 改定田柴科에서였다. 高麗의 군제인 府兵制가 성립되는 것은 대체로 成宗 이후에 속하는 시기이므로 그 이전에 는 府兵制의 재정적 기반으로서 軍人田이 설치될 계제는 아니었 던 것이다. 改定田柴科에 나타난 급전의 내용에 대해서는 위에서 圖解한 바 있거니와, 군인들은 馬軍이 田 23結, 諸步軍이 田 20結 의 토지를 받아 각각 제17과와 18과의 대우를 받았다. 改定田柴科에서 제정된 이 군인들에 대한 급전 규정은 다음의 文宗 30년의 更定田柴科에 이르러서는 科等이나 또는 수령 액수 에 있어 현저한 대우의 향상을 보이고 있다. 즉 馬軍이 제15과로 田 25結, 役步軍이 제16과로 田 22結, 監門軍이 제17과로 20結을 받고 있다. 아마 이것은 고려가 그간 契丹과의 오랜 전쟁을 겪는 사이에 그만큼 군인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높아진 결과라 생각된 다. 高麗의 병제는 府兵制 에 입각하고 있었으며, 府兵制의 본질 은 兵農一致의 원칙에 있었다. 高麗의 府兵制는 많은 특수성을 가 지고 있기는 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唐의 府兵制와 성격을 같이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唐의 府兵制는 均田農民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租 庸 調의 면제를 조건으로 府兵을 확보할 수가 있었으나, 高麗의 경우에 있어서는 唐과 같은 均田制度가 시행되 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府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별도로 軍人田을 설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田柴科 규정에서 특히 軍人田이 설치 된 역사적 사정은 여기에 있었다. 다만 주로 관료에 대한 급전을

161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규정한 一般田柴科에서 농민출신인 軍人 府兵 이 그들과는 출신계급이 다른 兩班 등과 동렬로 취급되어 있다는 점에 의문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 퍽 후기에 속하는 자료이지만, 恭愍王 5년의 下敎에, 국가가 田 17結로써 1 足丁으로 삼아 군인 一丁에게 주었 으니 이것은 옛날 田賦의 遺法이다 라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18) 여기에서는 군인에 지급된 토지는 일률적으로 1足丁 즉 17結로 되어 있어, 이것은 兵種에 따라서 25結 20結을 차등 있게 지급한 상기의 更定田柴科 규정과는 전혀 다르다. 이 두 개의 자료를 조절 하여 어떤 하나의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田柴 科의 細則에 나타나는 군인들에 대한 급전규정은 당초에 제도가 마련될 때의 것이며, 恭愍王의 敎書에 나타나는 것은 처음의 규정 이 시대의 경과와 주위의 제반사정으로 인하여 改變을 면치 못하 게 된 결과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여튼 文宗 이후 상당한 시기 를 경과한 일정한 시대에 이르러서부터는, 군인은 일률적으로 田 17結의 지급을 받게 된 모양이다. 高麗의 府兵制는 上番軍과 非番軍이 3년마다 교대 근무하는 조 직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軍戶編成은 單一家戶에 의하여 형 성된 것이 아니라 三家가 一戶를 형성하는 일종의 行政戶에 입각 한 것이며, 一軍戶를 형성하는 三家는 각기 軍丁 1명씩을 내어 합 계 3명의 軍丁이 한 軍戶에 배치되었다. 이 중에서 府兵으로서 정 식으로 立役하는 것은 上番侍衛의 正丁 1명뿐이며 나머지 2명은 非番의 休閑兵으로서 농경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軍人 田은 府兵 전체에 대해서 지급된 것이 아니라, 지급의 대상이 되 는 것은 형식상으로는 上番侍衛하는 正丁에 한한 것이며, 실질적 으로는 正丁을 내고 또 正丁으로써 대표되는 軍戶였다. 高麗王朝 18) 高麗史 卷 81 兵志 1 兵制條

162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에서 軍人田을 지급받는 兵員數는 대략 42,000명으로 추산되 며19) 이들에게 1足丁 즉 17結씩 지급한 것으로 계산하면 모두 70만여 결이 군인층에만 배당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는데, 실제에 있어 과연 이렇게 막대한 토지가 군인들에게 지급되었는지 극히 의심스럽다. 軍人田은, 田柴科에 속하는 토지의 대부분이 收租權에 입각하는 土地支配였으며 收租權者와 耕作者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이러한 양자의 분리 관계가 없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軍 人田은 非番의 休閑兵이 주로 토지의 경작을 담당하였다. 이때 토지를 경작하는 休閑兵은 正丁에 대하여 養戶가 된다. 養戶란 朝 鮮時代의 奉足과 비슷한 성격의 것이었다. 주로 養戶의 경작에 의 하여 수확된 軍人田의 소출은, 그 일부는 軍戶를 형성하는 三家의 생계에 충당되고, 그 일부는 養兵之費 즉 국가의 군비에 충당되었 다. 국가에서는 軍人田을 설정하는 이외에 별도로 군사관계의 재 정예산을 편성하는 일이 없었으며, 그 비용은 軍戶 스스로가 부담 하기 마련이었다. 養戶制에 입각하고 있던 軍人田의 경영이 睿宗 3년 이후에 이르러 佃戶에 의한 경영으로 바뀌어지는 것 같이 전하 는 기록이 있다.20) 그러나 이것은 養戶制에 의한 경영이 어떤 중 대한 애로에 빠진 결과 일부지역에 한하여 부득이 仙戶制를 채택 한 것을 의미하는지 혹은 軍人田의 경영이 전면적으로 바뀌어지는 것을 의미하는지 확실한 것을 알 수가 없다. 여기에서는 일단 前 者의 경우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 둔다. 軍戶는 전체 농민들에 의하여 편성되는 것이 아니라 軍班民族이라는 農民의 特殊層만에 의하여 편성되었다.21) 19) 高麗 六衛의 兵力은 42領, 1領은 1000名 20) 高麗史 卷 79 食貨志 2 農桑 睿宗 3年 2月條

163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高麗의 군인에 대하여 그들은 職役의 담당자로서 향리와 더불어 高麗社會에 있어 일종의 중간층을 형성하는 신분이었으며 저들이 받는 軍人田은 순수히 收租權에 입각하는 토지였고 또 그들은 토 지를 경작하는 농민신분이 아니라 양반에 준하는 收租權者의 위 치에 있는 신분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22) 위에서 열거한 兩班科田 功蔭田 閑人田 口分田 胥史田 鄕 吏外役 田 軍人田 武散階田 別賜田 등은 다 私田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8) 宫 院 田 宮 院은 왕족, 주로 妃嬪이 사는 住居를 의미한 듯하며 宮은 院 보다 더 格이 높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 宮 院에는 그것을 관리하 는 직원이 있고 또 田庄 魚梁 舟揖 鹽盆 奴婢 등의 재산 이 부속되 어 있었다. 이 宮 院에 소속된 토지를 宮院田이라 하였으며 이것은 妃嬪을 비롯한 왕족들이 지배하는 토지였다. 高麗 田柴科의 규정 에 의하면 왕족들에 대해서는 兩班의 경우와 같이 田柴를 지급한 細則은 보이지 않고 다만 食貨志 田制 序文에 宮院에 대해서 公廨 田을 주었다는 말이 있을 뿐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宮 院에 公廨田이 지급되었다면 宮院田은 아마 宮院公廨田 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과연 宮 院에 公廨田이 지급되었는지 어떤 지 여기에는 상당히 큰 의문이 있다. 宮院田은 後述하는 바와 같이 高麗史에서는 분명히 私田으로 취급되어 있는데 宮院田을 宮院公廨田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 를 취하면 公廨田 역시 私田에 속한다는 결론이 나와 여기에 큰 문제가 있다. 公廨田이 公田이냐 私田이냐의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을 보지 못하고는 있으나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公 21) 高麗 軍人田에 대해서는 姜晋哲 高麗初期의 軍人田, 淑大論文集 第3輯 참조 22) 李基白 高麗軍役考, 高麗兵制史硏究 所收 一潮閣 (1968) 참조

164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田을 公田, 二科公田에 比定하는 해석이 가장 합리적인 듯하다.23) 이 見解에 따르면 아마 宮院田은 公廨田과는 그 성격이 다른 토지 인 듯하며 따라서 宮 院에 公廨田이 지급된 양으로 高麗史에 기록 되어 있는 것은 高麗史 撰者의 어떤 오해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라 고도 해석할 수 있다.24) 이 문제에 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가 크 게 기대된다. 그것은 그렇다 하고 宮 院에는 많은 土地 奴婢 등의 재산이 부속 되어 있었다. 顯宗은 宮人 金氏(延慶院 德宗 生母)에게 金銀 匹段 田庄 奴婢 鹽盆 魚梁 등을 賜給한 일이 있고25) 또 文宗 때에는 왕 이 景昌院 소속의 田柴를 興王寺에 移屬케 하여 큰 물의를 일으킨 예가 있다.26) 국왕 혹은 국가가 宮 院에 대하여 土地 奴婢 등의 재 산을 賜給한 것은 왕족들에 대한 융숭한 禮遇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 재산은 子孫萬世에 遺傳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점 宮院田 은 양반들에게 내린 賜田 및 兩班功蔭田과 그 성격이 비슷하며, 왕족들의 중요한 재정기반이었다. 여기서 나는 宮院田을 왕족들의 토지로 간주하고 왕실소속의 御料地와는 일단 구별해서 생각했으나 이에 대해서는 異說도 있 다. 宮 院은 왕을 비롯한 왕족의 宮殿이며 여기에 부속된 토지 즉 宮院田 안에는 王領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 에 의하면 宮院田은 일종의 왕의 私領地이며 왕의 公領地인 王室 御料地와는 별개의 것이라 한다. 이러한 해석도 있다는 것을 아울 러 소개해 둔다.27) 단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高麗 史나 高麗圖經에 나오는 用例에 비추어 보면 宮 院은 주로 왕족들 旗田巍 高麗の公田,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同上 旗田氏의 견해에 따름 高願史 卷 4 顯宗世家 7年 5月條 高麗史 卷 8 文宗世家 12年 7月條 27) 前揭 旗田氏 論文 註 5 23) 24) 25) 26)

165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의 住居를 의미하며28) 왕족재산과 宮院田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 는 것을 거듭 말하여 둔다. 宮 院도 寺院과 더불어 庄 處를 소유하고 있었다. 宮院 寺院 소속 의 庄 處와 王室의 公領 御料地로서의 庄 處가 그 성격에 있어 같은 것인지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인지 이 점은 아직 잘 알 수가 없다. 앞으로의 연구가 기대된다. 9) 寺 院 田 佛敎寺院들에 소속되는 田莊 기타의 토지를 寺田 혹은 寺院田 이라고 한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수입된 이래 크게 융성하였음은 주지되고 있는 바이거니와, 高麗王朝에 있어서는 특히 불교를 숭 상하여 건국 당초부터 사원은 국가의 두터운 보호를 받아 왔다. 이 결과 사원은 국가의 보호와 국민의 신앙을 바탕으로 거대한 세 속적 財富를 지배하여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기에 이르렀다. 太祖 이후 高麗의 역대왕들은 막대한 토지를 사원에 기진하였는 데, 그 가장 현저 한 예로서는 成宗이 長安寺에 田地 1050結을 喜 捨하고 顯宗 11년 8월에 王이 安西道의 屯田 120結을 玄化寺에 施納한 것을 들 수 있다.29) 寺院田은 국가로부터의 기진뿐 아니 라 계급의 상하를 막론한 신도들로부터의 막대한 시납이 있었으 므로 날로 비대해 갔다. 사원뿐 아니라 승려들에 대한 토지의 사급이 또한 많았을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僧職에 대해서 別賜田이 지급되었음은 이 28) 高麗史 卷 77 百官志 2 內職條 高麗圖經 第5 6卷 宮殿條 29) 至若舊有之田 依國法以結計之 千有五十其在咸悅 仁義縣者各二百 扶寧 幸 州 白州各百五十 平州 安山各一百 即成王所捨也(新增東國輿地勝覽新 卷 47 淮 陽 佛 宇長安寺) 以安西道屯田一千二百四十結 施納于玄化寺(高麗史 卷4 顯宗世家 11年 8月條)

166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미 文宗 30년의 更定田柴科의 규정에서 본 바와 같다. 사원의 토지는 절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할 경우도 있고 또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도 있었는데 대체로 그 경영은 仙戶를 부려 경작 하는 것이 지배적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사원의 토지가 절 근처 에 위치하고 있을 경우 승려의 노동 혹은 사원노예의 사역에 의하 여 경작하는 일도 물론 있었으나, 隨院僧徒라는,30) 일종의 승려이 기는 하나 修道의 승려가 아니라 사원토지에 예속된 농민들에 의 하여 경작되는 것이 보통이었던 모양이다. 寺院田은 특히 免稅 免役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것이 또한 寺院田 확대의 큰 원인이 되었다. 사원경제의 비대 확장은 국가의 재정수입을 감소케 하는 큰 요인이 되었으며 또 불교의 세 속적 타락을 초래하였다. 高麗末에 이르러 불교배척운동이 크게 일어나게 된 것은 이러한 데에도 그 원인이 있는 것이었다. 寺院 田은 宮院田과 더불어 私田의 대표적인 한 유형이었다. 寺院의 莊 處 지배에 관해서는 위에서 언급하였다. 10) 投化田 기타 私人 소속의 토지 고려에서는 宮院田 寺院田 兩班科田 功蔭田 閑人田 口分田 胥吏田 鄕 吏外役田 軍人田 武散階田 別賜田 등등의 명목으로 나오는 土地(私 田) 이외에, 그 양은 많지 않으나 몇몇 유형의 私人에 소속된 토 지가 또 있었다. 投化田 入鎭 加給 補給田 登科田 賜田 등이 그것이 다, 投化田은 외국인이 본국에 내투 귀화하였을 때 그들에게 지급한 땅이며, 入鎭 加給 補給田은 邊鎭에 入戍한 군인에 대해서 그의 노 30) 肅宗九年十二月 又選僧徒 爲降魔軍 國初 內外寺院 皆有隨院僧徒 常執 勞役 如郡縣之居民 有恒産者 多至千百 每國家興師 亦發內外諸寺隨院僧徒 分屬 諸軍(高麗史 卷 81 兵志 1 兵制條)

167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고에 보답하는 의미로 일정한 토지를 가급 보급하는 토지였다. 登科田은 科擧에 합격한 登科者에 대해서 지급된 토지였다. 등 과자는 비록 관료는 아니지만 앞으로 관료가 될 후보자이기 때문 에 국가는 그들에게 특별한 우대를 가한 것이다. 文宗 30년의 제 정에 의하면 製述 明經 明法 明書 算業 출신자에게는 그해에 製述 甲科에는 20結, 기타에는 17結을 지급하고, 何論業 출신자에게는 그 익년에 급전하고, 기타 手品雜事 출신자는 합격 4년 후에 급전 하였으며 이외에 醫 卜 地理業 출신자에게도 明法 明書 算業의 구례 에 준하여 土地를 지급하는 새로운 제도를 세웠다. 또 어떤 州縣 에서 20 내지 50년 만에 나온 製述 明經科의 급제자에 겐 田 17 結을 지급하고, 100년 만에 나온 급제자에게는 20結을 지급하였 다.31) 이 이외에 국왕이 특별히 사급하는 賜田이 있었다. 국초 賜田의 예는 이미 말한 바 있거니와, 그 이후 高麗 역대의 국왕들은 兩班 田柴 功蔭田柴 등 일정한 명목을 붙인 토지 이외에 임시 임의로 특별히 賜田을 내리는 예가 많았다. 이러한 토지들도 다 私田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 11) 王室御料地 高麗時代에는 왕실이 지배하는 광대한 御料地가 있었는데, 이 토지는 內庄 庄宅田 內庄宅田 庄 處 등의 이름으로 알려졌다. 庄宅 혹은 內庄宅은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기관이며 왕실의 御 料地 31) 文宗三十年十二月 判 凡州縣闕榜至三十年 或四五十年 登製述 明經科者 給田 十七結 百年後登者 給田二十結 奴婢各一口 是月判, 國制製述 明經 明法 明書 算 業出身 初年給田 甲科二十結 其餘十七結 何論業出身 義理通曉者 第二年給田 其他手品雜事出身者 亦於四年後給田 唯醫 卜 地理業未有定法 亦依明法 書 算 例 給田(高麗史 卷 74 選擧志 2 科 崇獎條)

168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는 이 기관에 부속되어 있었다. 王室은 국초부터 광대한 넓은 토지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왕실의 지배토지는 高麗 一代를 통하여 전국의 토지중에서 가장 큰 비중 을 차지하는 것의 하나였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실 의 토지인 內庄 이 太祖의 즉위 당시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 은 매우 주목된다. 高麗末期에는 料物庫소속의 庄 處가 적어도 360개 이상이나 전국 각처에 산재하고 있었는데 초기에는 이것은 內庄宅의 관리하에 있었다.32) 主은 후기에 나타나는 處와 아울러 이른바 庄 處를 형성하였다. 庄 處는 주로 왕실에 부속된 특수한 형태의 莊園이며 단순히 일정한 면적의 토지의 集成이 아니라 郡 縣制度의 일환으로 특수한 地方行政區域의 한 단위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왕실의 토지는 이러한 특수형태의 莊園뿐 아니라 一定 量의 토지면적으로 형성되어 宮中의 奴婢가 경작하는 경우도 있 었으며, 또 주변 농민의 徭役으로 경작되는 것도 있었다.33) 內庄 등 왕실의 御料地는 王室財政의 기반이었다. 莊 處에 대한 왕실의 수탈은 단지 租뿐만 아니라 庸 調, 즉 徭役과 貢賦도 포함되어 있 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밖에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宮院田 도 왕의 私領으로서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는데 설령 그렇다 하 더라도 이것은 왕의 公領인 內皮宅 소속의 土地 庄 處 등에 비하 면 훨씬 그 비중이 약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高麗史 食貨志 1 田制 序文에 의하면 內庄宅에도 公廨田이 지급 된 양으로 되어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內庄宅 소속의 王室 御料地는 일종의 公廨田으로 이해하여야 하겠는데 王室御料地를 公 廨田과 같은 범주로 취급하는 것은 어떨까, 이것은 아마 高麗史 撰 32) 周藤吉之 高麗より朝鮮初期に至る王室財政 東方學 東京 10册 33) 姜晋哲 高麗前期의 公田 私田과 그 差率收租에 대하여, 歷史學報 29輯

169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者의 오해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본래 公廨田은 中央 地方의 官司에만 지급되어 內庄宅에는 지급된 예가 없는 듯 하며 따라서 王室御料地는 公廨田과는 그 성격이 다른 地目인 것 같이 이해된다.34) 公廨田이 이른바 二科公田으로 比定되는 것인 듯함에 대하여 王室御料地는 이와는 범주가 다른 公田으로 比定되 며 그 대표적인 庄 處의 계보는 新羅의 祿邑에 연결되는 것으로 믿 어진다. 王室御料地와 公廨田의 관계는 아직 확실한 것 을 알 수 없으며 앞으로의 연구가 크게 기대된다. 12) 公廨田柴 公廨라는 말은 관청과 같은 국가의 公的인 기관을 말하는 것이 며 公廨田柴는 국가의 각 公廨에 지급된 田土와 柴地를 의미한다. 公廨田柴를 설정한 목적은 각 公廨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 한 것이었다. 公廨田柴는 庄宅 宮院 百司 州縣 館驛에 각각 차등 있게 지급되었 다 한다.35) 그러나 실제로 公廨田이 지급된 것은 이미 宮院田 王室御料地 등의 항목에서 본 바와 같이 百司 州縣 館 驛 등에 제 한되었으며 庄宅 宮院에 대해서는 이것이 지급된 예가 없었던 것으 로 본다. 公廨田 중에서 그 설치 연대와 내용이 가장 상세한 것은 州縣 館驛公廨田뿐이며 百司에 관해서는 그 내용을 알만한 구체적 사료가 거의 없다. 순서가 뒤바뀌는 느낌이 없지는 않으나 여기에 서는 그 실태를 비교적 잘 알 수 있는 地方(州縣 館驛) 公廨田柴부 터 먼저 설명하겠다. 地方公廨田柴가 처음으로 성립한 것은 成宗 2 년(983)의 일이며 그 지급규정은 다음과 같다.36) 34) 旗田 巍 高麗の公田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35) 高麗史 卷 78 食貨志 1 田制 序文 36) 高麗史 卷 78 食貨志 1 田制 公廨田柴條

170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州縣 公廨田 州縣等級 公 須 田(結) 紙 田(結) 長 田(結) 1000丁 以上 300 (15) (5) 500丁 以上 丁 以上 缺 缺 缺 100丁 以上 (4) 100丁 以下 60 (7) 4 60丁 以上 40 (7) (3) 30丁 以上 20 (7) (3) 20(30?) 丁 以下 公 須 田(結) 紙 田(結) 長 田(結) 1000丁 以上 20 (3) (2) 100丁 以上 15 (3) (2) 50丁 以上 鄉 部曲 公廨田 鄕 部曲等級 館 驛 公廨田 館 驛等級 公 須 田(結) 紙 田(結) 長 田(結) 大路驛 中路驛 少路驛 20 2 (2) 大路館 5 中路館 4 少路館 3 여기서 말하는 丁은 國役을 부담하는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171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壯丁을 말한다. 20(30?)丁 이하의 州縣이 있었다는 것은 잘 이해 가 되지 않으나 아마 실제로 그런 州縣(縣)이 있었던 모양이다. 公須田은 賓客의 支待를 포함한 지방관청의 경비에 쓰기 위한 토 지이며 또 外方官吏의 祿俸도 그 절반이 公須田의 수입에서 지출 되었다.(절반은 左倉에서 지출함) 紙田은 사무용 紙類를 공급하기 위한 재원으로서 설정된 것이다. 長田은 驛의 경우 驛長에 대한 보수로 지급되었으며 館의 경우도 같았을 것이다. 州 縣 鄕 部曲의 경우 長田이 어떻게 쓰여진 토지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종래 이것 은 州縣의 吏屬 따위에 주어진 땅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였으나 그래서는 長 의 뜻이 잘 풀리지 않는다. 이 長 을 戶長으로 보고 州縣의 長田을 戶長田 즉 鄕吏田(邑吏田)으로 해석하려는 견해도 있는데37) 戶長田으로서는 그 액수가 너무 적어 보이는 데 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 成宗 12년(993)에는 公須柴地가 分給되 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38) 州 縣 柴地 驛 柴 地 驛區 州縣等級 結 東西道 西界 東西南北 1000丁 以上 80 大 路 驛 50結 40結 500丁 以上 60 中 路 驛 30結 20結 500丁 以下 40 小 路 驛 15結 100丁 以下 20 驛等 中央(百司)公廨田에 관해서는 참고할 史料가 없어 그 내용을 밝히기 어렵다. 中央의 각 官司는 官司의 格, 소속人員의 多少, 職 務의 성격 등에 따라 각기 응분의 公廨田을 받았을 것이며 각종의 운영경비는 물론이요 官吏의 午料 및 소속 下人들에 대한 보수같 37) 武田幸男 高麗 李朝の邑吏田 朝鮮學報 合併號 38) 註 36) 公廨田柴條

172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은 것도 그 수입에서 충당되었다. 公廨田은 후술하는 이른바 二科 公田에 해당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國用 즉 官司의 운영경비를 주로 하여 祭祀 賓客 등의 경비는 아마 원칙적으로 이 公廨田의 수입으로 支辨되었으며 公廨田 이 외에 다른 큰 재원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관해서는 뒤 에 다시 언급하겠다. 13) 學田 籍田 屯田 學田은 학생을 양성하는 學校에 지급되어 그들의 교육비에 충 당된 토지였다. 學田은 완전한 公廨田은 아니지만 그와 극히 성격 이 비슷한 것이었다. 新羅時代에 학생을 양성하기 위한 재정적 기초로서 學生祿邑이 있었거니와, 高麗도 儒敎를 지배통치의 이념으로 삼았던만큼 주 로 양반들의 자제를 유교이념으로 교양시키고 유교이념으로 무장 된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서 학교기관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학교 의 운영재원이 된 것이 學田이었다. 學田이 어느때 창설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成宗代에 내려와 서 學校에 田庄을 지급한 예가 보이며,39) 睿宗代에 이르러서는 國 學에 養賢庫를 설립하였다.40) 養賢庫를 설치함에 있어 그의 재정 기반으로 많은 토지가 國學에 지급되었을 것은 다시 말할 필 요가 없다. 學田 이외의 公的 財源의 토지로서 籍田과 屯田이 있었다. 籍田 은 국왕이 이른바 親耕을 실행하고 그의 수확으로 神農 后稷을 제 사하기 위한 토지인데 高麗에서는 成宗代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39) 高麗史 卷 3 成宗世家 8年 夏4月條 40) 高麗史 卷 74 選擧志 2 學校 睿宗 14年 7月條

173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親耕은 국왕이 농업생산에 솔선수범한다는 重農思想의 한 표현이 었다. 籍田은 왕이 親耕하는 토지로 되어 있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였으며, 실제 그 경작을 담당하는 것은 籍田 에 붙어 있는 官奴婢였다. 그리고 屯田은 주로 邊境지대에 설치되어 鎭戍피과 移植농민들 이 경작하여 그 수확을 주로 군량에 충당하는 토지였다. 屯田은 국가에 직속된 토지의 한 유형인데, 그 경작이 군인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는 점에 큰 특징이 있었다. 이밖에 州縣에 설치된 屯田 도 있었으니 이것은 州縣의 경비를 보충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이러한 官屯田의 耕作은 주로 官奴婢가 맡은 것으로 생각된다.41) 學田 籍田 屯田은 다 公田으로 보아 둔다. 14) 民 田 田柴科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로 국가의 관직에 종사하 는 官僚와 職役을 부담하는 丁戶를 대상으로 지급된 것이며 그들 의 경제적 생활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단 순수히 收祖權에 입각하는 官僚田柴科와 대표적인 丁戶인 軍人에 지급된 軍人田은 그 성격에 있어 상당히 큰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田柴科 土地支配體制에 있어서는 종래 주로 田柴科制度에서 규정된 分給收租地만 주목되어 왔으나 高麗前期 사회에서는 이 밖에 또 매우 중요한 토지지배의 유형이 있었다. 관직에 있는 관료도 아니고 職役을 부담한 丁戶도 아닌 광범한 농 민계층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이들의 토지지배관계가 비 교적 등한시되어 왔다. 高麗史에 흔히 보이는 白丁은 바로 이러한 농민계층이며 이들은 국가로부터 토지의 지급을 받지는 아니하였 41) 姜晋哲 韓國土地制度史 上 韓麴文化史大系 Ⅱ p

174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으나 조상 대대로 전래한 그들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토지가 바로 民田이었다. 이 民田은 官僚나 丁戶의 田柴科 와는 구별되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土地다.42) 民田은 高麗의 전 기간을 통하여 국가의 전 지역에 걸쳐 널리 존재하였다. 白丁農民이 존재하는 곳에는 반드시 民田이 존재하였 다. 東西兩界에서는 다른 지역과 다른 토지정책이 시행되어 모든 토지를 국가의 직접적 지배하에 두고 私人에 대한 分給收租地는 설정되지 아니하였으나 여기에도 民田이라고 불리어진 土地는 있 었다. 이것은 民田이 이른바 私田 과는 구별되는 매우 큰 특징 이었다. 民田은 高麗前期에 있어서는 그 존재가 뚜렷하였으나 중 기 이후 권력자의 大土地兼併이 진행되자 그들에 점거되어 침탈을 당하고 白丁農民의 토지라는 본래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民田의 소유자는 주로 광범한 白丁農民의 계층이었다. 그러나 祖上 전래의 토지는 白丁農民뿐 아니라 관료계층도 이를 가지고 있 었으니 民田의 소유자를 白丁農民에만 한정하여야 할 이유는 없다. 양반관료들은 分給收租地 이외에 祖上 전래의 家田도 갖고 있었는 데 아마 이것도 民田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이 民田 家田은 국가에 대하여 税役을 부담하였다. 예를 들면 姜邯贊은 開寧縣에 땅 12結을 갖고 있다가 이를 軍戶에 寄進한 일이 있었다.43) 이것 은 그가 가진 民田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鄕吏가 갖고 있던 所 耕田 도 이 民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44) 民田은 문자 그대로 42) 民田에 관해서는 旗田 巍 高麗の民田について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有井智 德 高麗朝に於ける民田の所有關係につい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8 참조 43) 高麗史 卷 94 姜邯贊列博 44) 鄕吏는 그들의 外役田 이외에 所耕田을 따로 갖고 있었다. 外方人吏等 以所 耕田賂諸權勢 干請別常 謀避其役者有之 (高麗史 卷 85 刑法志 2 禁令 忠烈王 11年 3月 下旨)

175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국민의 각 계층에 의하여 광범하게 소유되었으며 국가에 대한 일반 적 稅役을 부담하는 土地라고 생각한다. 稅役의 내용은 租 庸 調였 다. 富民은 自家經營의 범위를 넘는 비교적 넓은 民田을 지배하여 여기에서는 小作制經營이 성립할 가능성도 있었으나 이러한 경영 이 民田經營의 전체에 있어 점하는 비중은 그렇게 대단 한 의미를 가졌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民田은 私田과는 다른 토지였다. 그러면 民田은 公田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같이 이해되어 왔다. 종래 民田을 公田으로 보 는 것은 다들 주저해 왔다. 그래서 民田을 公田도 아니고 私田도 아닌 특수한 토지의 범주로 생각하는 견해도 나왔다.45) 그 이유는 高麗史에서 民田을 公田과 대립시켜 이와는 대조적인 토지의 종목 인 것같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民田에 대한 연구가 진전된 결과 지금은 民田이 公田에 속한다는 견해가 거의 定說로 되어 있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公田은 一科公田, 二科公田, 三科 公田으로 구별되어 있는데 民田은 三科公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광범한 國民層 특히 白丁農民이 民田의 소유자로서 주목되는데, 이들의 民田에 대한 소유의 내용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民田所有 權의 내용은 매매의 권리를 비롯해서 耕作 貸與 贈與 相續 등 광범 한 제권리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상속에 있어 서는 文契가 없는 한 嫡長爲先決結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규정이 토지의 嫡長子單獨相續을 의미하는 것인지 혹은 嫡長子에 게 유리한 優先權을 주는 것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우며 이 문제는 앞으로의 더 깊은 연구가 요청되는 바이다.46) 45) 姜晋哲 高麗前期의 公田 私田과 그의 差率收租에 대하여 歷史學報 29輯 46) 이 문제에 관해서는 旗田 巍 高麗時代における土地の嫡長子相續と奴婢の子 女均分相續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有井智德 高麗朝における民田の所有關係に ついて 朝鮮史硏究會論文集 8 참조

176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전국 토지의 총면적에서 民田이 차지한 비율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굉장히 큰 것이었을 것만은 사실이다. 民田의 租는 주로 開 京의 大倉 右倉에 수송되어 國用에 충당되기도 하고 左倉에 수송 되어 祿俸에 충당되기도 하였다. 文宗 당시 일반 관리의 녹봉을 취 급하는 左倉의 歲入은 139,736石 13斗였으며 西京 官祿을 취급하 는 西京 大倉의 歲入은 17,722石 13斗로 기록되어 있으니 도합 약 16萬石이 관리의 녹봉으로 지출된 셈이다.47) 이 밖에 東界 西界의 兩界의 民田租는 현지에서 軍需에 충당되었다. 民田은 公田의 四分 取一의 租率에 입각하여 收穫高 25%의 租를 국고에 부담하였다. 民田은 國庫收租地라는 개념으로도 이해되고 있다. 民田의 수량은 左倉에 納租하여 祿俸의 財源이 되는 것만으로도 줄잡아서 대략 10 萬結 정도로 짐작되며 이에 大倉과 右倉 등에 納租하는 것을 가산 하면 막대한 수량에 이르러 전국의 총 토지면적에 있어 다른 地目 에 비하여 압도적인 큰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믿어진다.48) 15) 食邑制度의 發展 食邑은 위에서 말한 여러 유형의 土地支配 관계와는 크게 그 성 격이 다른 특수한 土地支配의 유형이었다. 高麗初에 왕실의 재정 기초로서 東宮食邑이 있었다는 것과, 또 新羅의 왕인 金傅에게 慶州를, 그리고 後百濟 왕인 甄萱에게 楊州 47) 高麗史 卷 80 食貨志 3 祿俸 序文 48) 民田 1結의 出租額을 평균 2石 정도로 잡으면(실제는 그 이하일 것이다) 民田 의 총액은 약 8萬結로 계산되며 이에 兩界의 民田을 합치면 대략 10萬結 정도가 되리라는 推算을 내릴 수 있다. 전국의 토지는 대개 가 下等田이었으므로 民田의 出租額을 下等田 出租額 1石 11斗 정도를 기준으로 삼고 여기에 災免 기타의 減免規定을 고려 감안해서 국가가 매년 結當 1石 정도의 租税收取를 하였으리라 는 하나의 가정을 세울 수 있다면 民田의 총액은 16萬結 정도로 推算된다. 여기에 兩界의 民田을 합치고 제반사정에 대한 계산을 아주 넉넉히 잡으면 民田의 총액 을 약 20萬結 정도로도 추산할 근거가 서게 된다

177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를 食邑으로 給封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말한 바 있거니와 이 食邑 制度는 그 이후에도 계속 발전하였다. 食邑給與의 대상자들은 王子, 王室의 戚臣, 공로가 많은 高級官 僚들이었다. 食邑은 公 侯 伯 子 男의 5등으로 구분되는 爵位를 표 준으로 하여 수여한 것으로 보이는데 爵位와 食邑지급에 관한 文 宗代의 규정은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爵 位 國 公 郡 公 縣 侯 縣 伯 開國子 縣 男 食邑 3,000戶 2,000戶 1,000戶 700戶 500戶 300戶 品階 正 2品 從 2品 正 5品 正 5品 正 5品 從 5 品 49) 이 爵位는 형식상 국가에 특별 한 공훈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수 여하였는데 여기서 爵位에 붙어 있는 品階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 인지는 잘 알 수가 없다. 爵位는 忠烈王 이후에는 전혀 폐지되었 다가 恭愍王代에 일시 부활되었는데 그 후 얼마 안가서 다시 폐지 되었다. 그런데 恭愍王代에 부활된 爵位制度에 의하면 公 侯 伯 子 男 並正一品 50)으로 되어 있어, 爵位에 붙은 品階의 성질이 더 不可思議하게 되어 있다. 하여튼 이 爵位에 붙은 품계는 일반품계 의 뜻과는 다른 모양이다. 위의 규정에 보이는 爵位에 따르는 食邑의 給俸은 아마 대개가 실속이 없는 虛禮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食邑을 封할 경 우에는 우선 食邑 몇 戶라고 기재를 하고, 이에 부수하여 食實 封 몇 戶라는 것이 대개의 경우에는 병기되어 있는데,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 食實封 몇 戶에 대한 것 뿐이며, 이에 한해서 해당 戶數의 租税와 貢賦 力役 등을 취득할 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食實封 조차 과연 어느 정도로 실질적 내 49) 高麗史 卷 77 百官志2 廨條 50) 同上

178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용을 가진 것인지 의문이 없지 않으나,51) 여기서는 일단 실속이 있는 것으로 보아 둔다. 高麗時代에 가장 많은 食邑을 받은 것은 王子를 비롯한 王族들 이었다. 王子들은 親等 地位 年齡에 따라서 거의 자동적으로 公 侯 伯 의 爵位를 받고 이에 따르는 食邑이 給封되었다. 이들 王族에 대한 食邑 給封의 예는 高麗史 宗室列傳에 거의 빠짐없이 나타나 있으므 로 일일이 예시치 않는다. 王의 戚臣에 대한 食邑 給封의 예로서는 반드시 戚臣이라는 의미만으로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 대 표적인 것을 仁宗의 丈人 李資謙의 경우에 구할 수 있다. 즉 그는 食邑八千戶 에 食實封二千戶 를 받고 있는데52) 이것은 高麗 일대를 통하여 가장 방대한 食實封의 예가 될 것이다. 이 외에 일반 高級官僚가 食邑을 받은 예는 金富.試이 食邑一千戶 에 食 實封 四百戶 를 받은 것을 비롯하여53) 高麗史의 기록에 보이는 것만 해 도 40명 내외에 달한다. 위의 事例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食邑은 일정한 戶數로써 封하 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食邑으로 給封되는 것은 이러한 형태 이 외에 州나 府 같은 행정구역 전체가 食邑으로 賜給되는 예가 있었 다. 晋州(晋陽)가 崔怡의 食邑이었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 다.54) 이러한 형태의 食邑은 그의 성격이 戶를 分給하는 食邑과 는 상당히 달랐다. 戶를 分給하는 食邑은 일정한 개별적인 戶의 합쳐진 것을 수취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崔怡의 경우와 같은 식읍은 일정한 행정구역을 한 단위로 해서 그것을 집단적으로 지 51) 河炫網 高鹿食邑考 歷史學報 26輯 참조 52) 高麗史 卷 127 李資謙列傳 53) 高鹿史 卷 98 金富軾列傅 54) 左倉納晉陽稅 王以晉陽已爲怡食邑 命黜倉別監王仲宣 有司又請論仲宣及倉 官 怡奏曰 臣重違上命 雖已受封 今年稅 請依舊納倉 赦仲宣等罪 王從之(高麗史 卷 129 崔怡列傳)

179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食邑은 그 성격이 內庄과 비슷한 것이었 으나, 그 규모는 더 큰 것이었다. 田柴科的인 토지의 지배는 대개 그것이 단순한 收租를 매개로 하는 것이었는데, 食邑은 단순한 收 租만이 아니라 그의 수탈이 貢賦 力役까지도 포함한 것으로 이해 되며, 여기에 食邑에 의한 토지지배의 특징이 있었다. (3) 田柴科體制下의 土地支配關係에 수반된 諸問題 위에서 田柴科體制下의 土地支配관계가 어떤 것인지 주로 각 土 地地目의 구체적 성격을 해설하면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田柴科體 制下의 토지지배관계는 이밖에 해명해 두어야 할 많은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많은 문제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田柴科體 制下에서 말하는 公田 私田이 무엇이며 이에 대한 差率收租는 무 엇을 의미하느냐는 문제다. 종전에는 公田租 私田租를 다 같이 일 종의 地代라고 보아 왔으나 여기에는 큰 의문이 있다. 다음 土地와 國家財政關係도 간단히나마 한번은 정리해 두어야 할 문제다. 또 田柴科體制下의 農民의 토지지배가 均田制度에 기초를 두는 것인 지 그렇지가 않은 것인지 이에 대해서도 약간의 언급이 없을 수 없다. 田柴科體制下의 토지지배관계에 수반된 제문제를 대강 이 정도로 줄여 간단한 해설을 붙여 둔다. 1) 公田 私田과 그 差率收租의 문제 高麗時代에는 公田 私田이라는 토지의 종목이 있었다. 이에 관 해서는 과거에 많은 學者들이 주목하여 논급한 바가 있었는데 대 체로 公田과 私田을 구분하는 기준은 收租權의 歸屬關係에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公田은 그 租가 국가에 귀속하는 토지이며 私

180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田은 그 祖가 私人에 귀속하는 토지라고 이해되어 왔다. 이 견해 는 어느 정도의 타당성도 있지 마는 公田과 私田은 단순한 收租權 의 귀속관계만으로서는 풀 수 없는 매우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으 므로 여기에 어려운 큰 문제가 남아 있다. 顯宗 14년 윤 9월에 내린 判에 의하면, 무릇 州縣 義倉의 法은 都田丁(土地豪帳)에 기재된 土地의 수 량을 기초로 해서 收敛하되 一科公田에서는 1結에 租 3斗, 二科 公田과 宮 寺院 兩班田에서는 租 2斗, 三科公田과 軍 其人戶丁에서 는 租 1斗를 거두는 것이 이미 成規로 되어 있다. 만약 흉년을 만 나 백성이 阻飢하면 이것으로써 救急하고 가을에 還納하며 濫費 해서는 아니 된다 고 하였다. 이것은 公田과 私田의 성격을 구명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史 料이므로 이 사료의 분석을 통하여 公田 私田의 문제를 살펴보기 로 하겠다. 이에 의하면 公田은 一科公田 二科公田 三科公田 으로 구분되어 있고 公田과 구별되는 私田으로서는 宮院田 寺院 田 兩班 田과 軍戶丁 其人戶丁 등을 열거하고 있다. 우선 公田의 문제인데 公田을 구분한 기준은 토지의 귀속 혹은 토지지배자의 차이에 있 었으며 이 차이에 따라서 토지의 格이 다르고 또 義倉租를 내는 額이 달랐다. 公田의 성격에 있어 주목되는 것은 王이 그것을 임의 자유로 처 분할 수 있는 토지였다는 것이다. 軍人田의 名田이 부족할 경우에 왕은 公田을 떼어 加給한 일이 있으며 왕이 寺院에 토지를 寄進할 경우에도 公田으로써 賜給하였고 또 宮院田이 어떤 이유로 減額되 었을 경우 왕은 역시 公田을 移給하여 보충하였다.55) 이러한 사례 55) 姜晋哲 高麗前期의 公田 私田과 그의 差率收租에 대하여 歷史學報 29輯

181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들은 公田이 왕의 임의로 자유롭게 처분될 수 있는 토지였다는 것 을 말하여 준다. 이러한 公田의 특성을 염두에 두고 이에 가장 알 맞는 토지의 종목을 구하여 보면 우선 王室 소속의 광대한 御料地 가 머리에 떠오른다. 이리하여 왕실의 御料地가 公田일 것은 거의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 왕실의 御料地는 一科, 二科, 三科 의 公田 중에서 어디에 속하는 것이었을까? 위에서 본 바와 같이 一科公田은 다른 토지와는 대비가 되지 않는 독자의 토지였다. 이 독자성이야말로 一科公田의 특색이었다. 이러한 一科公田의 특색 에 비추어 그것은 王室에 부속되어 다른 것과는 대비가 허용되지 않는 토지 즉 왕실의 御料地이며 구체적으로는 內庄宅에 소속하는 토지가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二科公田은 宮院田 寺院田 兩班田과 대비되는 토지였다. 宮 院 寺院 兩班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당시의 지배층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二科公田은 지배층과 무슨 관계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지배층에 지급된 토지는 私田이며 公田은 아니다. 二科公田이 지 배권력과 무슨 관계가 있으리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 성 격을 추리해 보면 이 二科公田은 국가의 지배기관 즉 중앙 지방 의 관청 에 부속된 公廨田 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마 屯田도 군사적인 기 관의 부속지 였다는 의미에서 二科公田에 해당하는 것같이 이해된 다. 二科公田을 公廨田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는 매우 합리적이며 二科公田 즉 公廨田으로 규정할 수만 있다면 二科公田의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56) 그러나 여기에는 약간의 의문이 남는다.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시피 公廨田이 公田이냐 私田이냐의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된 56) 旗田 巍氏는 公廨田을 二科公田으로 보았다. 同氏 高麗の公田, 朝鮮中世社會 史の硏究

182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것은 아니며 公廨田을 私田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57) 이러한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自認 하면서도 여기에서는 公廨田을 일단 二科公田에 比定해 둔다. 이 公廨田은 官司公廨田에 국한해서 생각한 것이다. 三科公田은 軍 其人戶丁 즉 軍人田과 其人田에 대비되는 토지 였다. 군인은 군역이라는 職役을 부담하는 광범한 농민층이었다. 따라서 三科公田은 농민층과 깊은 관계가 있으리라는 것이 추측된 다. 군인은 군역을 부담하였기 때문에 그 보수로서 軍人田(私田) 의 지급을 받았다. 그러나 농민들은 그 전부가 職役을 부담한 것 이 아니고 직역의 부담이 없는 白丁이라는 농민층에 광범히 존재 하고 있었다. 이들이 토지를 소유하여 국가에 租 庸 調를 부담하고 그들이 소유한 토지를 民田이라고 불렀음은 이미 언급해 둔 바와 같다. 농민층과 관련이 깊은 三科公田은 바로 이들 白丁이 소유한 民田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一科公田 二科公田 三科公田의 윤 곽은 밝혀졌다. 公田에 대비된 私田의 종목에 관해서 는 이미 설 명한 바가 있으므로 거듭 말하기를 피하거니와 私田은 私人이나 寺院에 지급된 토지다. 其人戶丁은 上守의 직역을 부담하는 其人 에 지급된 토지며 이것은 鄕吏外役田과 그 성격이 비슷한 것이나 상세한 내용은 관계된 史料가 없으므로 알 수가 없다. 公田과 私田에 대한 수취는 크게 그 비율을 달리하고 있었다. 公田租의 收取率은 四分取一 즉 생산고의 을 취득하는 것인데 대하여 私田租의 收取率은 二分取一 즉 생산고의 을 취득하는 57) 宮院田은 高麗史에서는 분명히 私田으로 취급되어 있다. 宮院田을 宮院公廨 田과 같은 것으로 보면 公廨田 역시 私田에 속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宮院에는 公廨田이 지급된 例가 없으며 宮院에 대하여 公廨田을 지급한 양으로 기록된 것은 高麗史撰者의 어떤 오해에 기인하였으리라는 전제 밑에서 公廨田율 公田으로 간주해 두었다

183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것이었다. 이 중에서 私田主는 5升 내지 7升 5合의 税 를 국가 에 바쳤다.58)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私田租率은 公田租率의 2배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公田과 私田이 본질적으로 그 성격이 같은 토지 였다면 이렇게 엄청나게 틀리는 租率의 차이를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종래 公田의 租와 私田의 租는 다 같은 地代 인 양으로 이해되 어 왔다. 문제의 소재는 아마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우선 私田의 租인데, 수확의 절반을 수취하는 이 私田租는 일종의 地代라고 해 석해서 아마 무방할 것이다. 後代의 並作半收制의 조율이 二分取 一이었으며 이 租의 내용이 地代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와 같은 비율인 초기의 私田租를 地代라고 해석하는 것은 적어도 私田租의 일부에 한해서는 무리가 없다. 이에 대하여 公田租는 私田租의 절 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이 公田租도 私田租와 같은 地 代로 이해되어 왔다. 이와 같이 收取率에 현격한 차이가 있는 公 田租와 私田租를 다 같은 地代라고 同質視한 것은 잘못이며 公田 私田의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기본적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公田租는 地代 가 아니라 地稅 였으며 公田은 국가가 地代를 수취하는 토지가 아니라 단순한 課稅地였다.59) 여기서 말 하는 公田은 三科公田 즉 民田에 해당하는 것이며 王室御料地로 서의 一科公田과 公廨田으로서의 二科公田과는 일단 분리해서 생 각하였다. 王室御料地는 물론 公廨田에서도 直營의 형태를 취하는 경영을 하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 예상된다.60) 이럴 경우에는 수 조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王室御料地 특히 庄 處 58) 姜晋哲 註 55) 論文 59) 旗田 巍 高麗の公田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60) 同上

184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에 있어서는 收租에 입각하는 경영이 기본적 형태였으므로 여기서 收取되는 租는 역시 地稅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庄 處의 토지는 왕실에 부속되어 租를 왕실에 바치기는 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일반 民田과 그 성격이 비슷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이 公田은 대체로 地税를 부담하는 課税地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課税地인 公田에 대해서 私田은 일종의 地代관계가 성립하는 토 지였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특히 양반에 지급된 分給收租地의 경 우는 그렇다. 私田도 직영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있었는데61) 이 럴 경우에는 물론 지대관계는 성립치 않는다. 단 私田의 경영은 田 主와 耕作者 佃戶의 私的인 지배 예속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며 佃戶 경작의 관리, 田租의 수송은 지방관의 책임에 위임되 어 있었다. 私田 兩班科田의 田主는 일정한 기간 동안 分給된 토 지의 租를 취득하는 收租權者에 불과하였으며 토지에 대한 매매처 분권을 갖는 것도 아니고 그 토지의 경영 관리에 책임을 지는 地 主 도 아니었다. 私田에 관해서는 아직 그 연구가 충분치 못하여 그 실태가 잘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私田에 있어서의 田主 佃戶의 관계는 대체로 郡縣制에 의한 농민지배에 의하여 실현된 것으로 보 아도 좋다. 따라서 田柴科制度下에서 주로 兩班 田主(科田主)들이 佃戶로부터 거두어들이는 租는 그것이 비록 일종의 地代 였다 고 본다 하더라도 그 성격은 매우 미숙한 것이며 地主制 土地經營 위에 성립하는 지대관계와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田柴科體制下 의 私田을 일종의 地代를 수취하는 토지, 즉 지대관계가 성립하는 토지로 이해하는 것은 분명히 합리적인 해석이지마는 그 地代 의 성격이 지주제 토지 경영 위에 성립한 地代의 성격과는 매우 61) 姜晋哲 註 55) 論文

185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큰 차이가 있었다는 점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私田 중에서 아마 그 태반을 점하는 것은 軍人田이었다고 생각 한다. 그런데 이 軍人田은 이미 위에서 보아 온 바와 같이 科田의 경우처럼 순수한 佃作關係에 입각하는 토지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다. 따라서 軍人田의 租를 순수한 地代로 보기 위해서는 지대 자 체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정리해 두어야 할 많은 어려운 문제를 남 기고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私田의 토지 전체에 대하여 일률적 으로 地代理論을 적용하는 것은 아직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2) 土地와 國家財政 田柴科制度는 이미 살펴본 그 내용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王室 王族 文武兩班 등 특권계급의 물질적 경제적 기반을 준비 하고 鄕吏 軍人 工匠 등 職役을 부담하는 丁戶의 생활토대를 마련 하며 또 국가의 각 기관에 그 운영경비를 조달케 하는 등 국가재정 의 원천을 확보하기 위하여 편성한 土地法이었다. 田柴科의 대표 적 형태는 兩班田柴科라고 볼 수 있거니와 양반관료에 토지를 지 급하는 제도는 이미 統一新羅期에도 존재한 일이 있었다. 統一新 羅期에 시행된 관료에 대한 토지지급법은 얼마 안가서 폐지되고 그 대신 옛날에 시행된 祿邑制가 다시 부활하였다. 이 녹읍 제도는 토지 그 자체에 대한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일정한 지 역과 그 지역에 거주하는 人間 주로 인간의 노동력 에 대한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62) 그런데 高麗의 건국 이후 田柴科가 제정되고 관료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가 다시 부활하였다. 즉 統一新羅期에 있어서는 잠시 시행되었다가 실패한 관료에 대한 給 62) 祿邑에 관해서는 姜晋哲 新羅의 祿邑에 대하여 李弘植博士回甲紀念韓國史 學論叢 참조

186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田制度가 高麗에 이르러서는 확고한 제도로서 성립되어 오래 존속 하였다. 田柴科制度에 있어서의 양반관료의 토지에 대한 지배는 대체로 郡縣制에 의한 農民支配에 바탕을 두어 地方官의 도움을 받 아 실현되는 지극히 미숙한 것이었으나 하여튼 토지 그 자체에 대 한 지배가 수립되어 祿邑 대신으로 田柴科가 제정되었다는 것은 토 지지배관계에 있어 하나의 주목할 만한 전진이라고 볼 수 있겠다. 國家財政은 원칙적으로 국민으로부터 징수하는 租 庸 調의 税赋 로써 충당되었는데 이 중에서 토지를 과세대상으로 한 경우에 한 하여 생각해 본다면, 田租가 바로 재정의 원천이 되는 것이며 따 라서 田租의 수입이 증대하면 국가재정이 풍부해지고 그것이 감 축되면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高麗의 국가재정의 基本大綱을 살펴보건대 財政用途의 가장 중요한 항목은 上供 즉 궁중의 御需 와 國用 즉 政府 各官司의 財政費用 祿俸 즉 왕족 양반관료와 雜 職 胥吏 工匠 등에 대한 보수 지출 그리고 軍需 즉 군사비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런데 재정운영의 방식을 살펴보면 전국 에서 수취하는 田租를 일단 歲入으로 잡아 일괄적으로 국고에 수납해 서 그것을 다시 재정용도별로 각 기관에 분할해서 지출하는 것이 아니라 田租가 소출되는 토지를 국가재정의 각 항목에 맞추어 구 분하고 토지 그 자체를 각종 재정의 항목에 따라 분할해서 재원을 미리 분배 고정시켜 놓았다. 이러한 재정운영의 원칙에 따라서 전 국의 토지는 각기 그 독자의 재정용도를 갖게 되었다. 供上 즉 御需를 위해서는 주로 內庄宅 소속의 광대한 御料地가 준비되어 왕실의 재정을 도맡았다. 祭祀 賓客 田役 喪荒 등에 소용 되는 재정비용 즉 國用은 麗末 鮮初의 제도에 의하면 주로 豊儲倉 이 이를 요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63) 麗初의 상황은 이 점이 애 63) 國家置豊儲倉 凡祭祀 賓客 田役 喪荒之用 皆於此出焉 謂之國用 朝鮮經國典

187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매하게 되어 있다. 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右倉(豊儲倉)은 다만 供上米廩만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되어 있을 뿐 國用과의 관계에 는 언급이 없다.64) 高麗史 食貨志 序文에 國用의 절약으로 大倉 의 粟이 紅腐相因하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아마 주로 大倉이 국용의 지출을 담당한 듯하며 그 재원은 左倉(廣興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民田의 出租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右倉이 국용과 전혀 관계가 없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高麗圖 經에 의하면 右倉이 兵革 水旱의 준비를 儲蓄하고 있었음이 明記 되어 있으니65) 右倉이 국용과 깊은 관계가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리 하여 국용은 주로 大倉과 右倉에서 관장 된 것으로 설명해 둔다. 이 밖에 中央 및 地方 各官司의 운영경비 는 해당관사에 分結된 公廨田의 수입에 의하여 支辨되었다. 祿俸의 재원이 되는 것은 民田이었으며 民田의 租는 廣興倉(左 倉)에 수납되었다가 주로 祿俸으로 지출되었다, 祿俸의 지급을 받 는 계층, 주로 양반관료는 이 밖에 그 신분 직위에 따라 각기 응 분 의 토지도 받았다. 軍需, 즉 군사비를 부담하는 재원은 軍人田이었다. 軍人田을 受 給한 府兵은 피복 군량 병기 기타의 비용을 自辨하였으므로 국가에 서는 軍人田 이외에 군사비의 재원을 따로 책정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兩界의 田租가 軍需에 충당되었음은 이미 말해 둔 바와 같다. 高麗末期의 私田改革論者들은 量田의 결과 얻은 전국(兩界除外) 의 墾田 약 50萬結에서 供上 國用에 13萬結, 祿俸에 10萬結, 科田 에 10萬結을 각각 책정 하였는데 이로써 供上 國用 및 祿俸을 염출 賦典 國用 64) 高麗史 卷 77 百官志 2 豊儲倉條 65) 高麗圖經 卷 16 官府 倉廩條

188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하기 위한 토지와 科田의 양적 비중이 어떠했는지 대략 짐작된다. 위의 供上 및 國用에 배당된 土地 13萬結은 右倉(豊儲倉) 소속이 10萬結, 四庫(供上) 소속이 3萬結로 되어 있는데 麗末 鮮初의 제도 에 의하면 豊儲倉位田은 祭祀 賓客 田役 喪荒 등 國用의 재원이 되 는 것이라 한다. 이 점 高麗前期의 右倉과 麗末 鮮初의 右倉은 그 재정적 기능에 있어 약간 차이가 있어 보이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가 기대되는 바이다. 이와 같이 田柴科體制下의 전국의 토지는 국가재정의 용도에 따라서 그 소속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집권자들은 이 러한 토지들을 國田, 즉 국가소유의 토지라고 인정했다. 이것은 普天之下 莫非王土 라는 전통적 王土思想에 입각하는 관념의 所 產으로 역사적 사실과는 맞지 않는 이야기다. 이러한 王土思想에 분 식되어 전형적인 농민의 사유지인 民田도 公田 으로 의식되었 다. 民田뿐 아니라 丁戶에 지급된 토지도 丁戶의 세습재산이었으 며 양반의 功蔭田도 세습재산으로서 私有地와 다름이 없는 것이 었다. 이러한 토지들을 국유토지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王土思想과 이에 수반된 여러 관념적 所產에 의하여 誤導된 土地國有論은 지 양되어야 한다. 3) 均田制의 施行與否에 관한 문제 高麗時代의 토지제도에 관해서는 均田制가 시행되었으리라는 주장이 종래 유력하게 논의되어 왔다. 高麗初의 토지법 제정의 요령 을 개괄적으로 설명한 高麗史 食貨志 田制의 序文은 高麗의 田制 는 대개 唐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라고 해서 高麗의 토지제도가 마치 唐의 田制를 모범으로 삼은 것같이 말하고 있다. 唐의 田制 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均田制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食貨志 田

189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制의 序文에 따른다면 高麗에서도 均田制가 시행된 것으로 볼 수 밖에는 없다. 그러나 高麗時代의 토지 제도를 소상히 살펴보고 그 실태를 검토해 보면 均田制가 시행된 것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많은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다. 토지제도와 수취체계가 서로 表裏一體의 관계에 있음은 설명을 요하지 않는 바이거니와 高麗初의 수취체계 특히 租税制度는 均田 制下의 그것과는 아주 딴판이다. 唐의 均田制下에서는 수취체계는 租 庸 調로 구체화되어 이것이 농민 每人當 얼마씩 일정한 量으로 均等 固定化되어 있었다. 그런데 高麗의 경우를 보면 이와 같이 수 취량이 균등하게 고정화된 혼적은 보이지 않고 특히 田租의 수취 는 면적 단위를 기준으로 每結當 얼마씩이라는 일종의 累進稅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경작면적에 대해서 田租를 차 등 있게 부과한 것이며 高麗의 토지제도가 均田制를 채택한 것이 라면 이러한 형태의 田租 수취는 있을 수 없다. 高麗에서는 唐과 비슷한 일종의 府兵制가 실시되었다. 高麗의 府兵義務(軍役負擔)는 軍班民族이라는 특수층에 제한되어 있기는 하였으나 府兵은 광범한 농민으로 구성되었다고 이해된다. 高麗에 서는 부병에 대하여 一定量의 軍人田을 별도로 배정 지급하였다. 고려의 부병 즉 농민이 唐과 같은 均田農民이었다면 응당 高麗는 唐의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여 租 庸 調의 면제를 조건으로 府兵을 확보하는 합리적 방법을 채택하였을 것인데 이러한 방식을 취하 지 않고 軍人田을 따로 설정하였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 다. 가령 高麗의 농민이 均田農民이었다면 정부는 그들에게 이중 적으로 軍人田을 加給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도 均田制 시 행에 관한 큰 의문이 남아 있다

190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高麗에서는 白丁이라는 광범한 농민층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들에게도 國家로부터 토지가 지급된 사실이 없었다는 것이다. 均田制가 시행되어 토지가 국민들에게 균등하게 配分되었다면 이러한 현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職役을 부담하 는 丁戶에 대하여 국가가 토지를 지급하였음은 이미 말한 바와 같 다. 高麗에서는 白丁을 丁戶로 삼을 경우에는 반드시 토지를 지급 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토지의 지급을 받음으로써 白丁은 丁戶가 되었다. 이것은 均田制 이론과는 맞지 않는 이야기다. 高麗의 토지상속은 嫡長子의 단독상속이었거나 혹은 적어도 嫡 長子에게 우선적으로 유리하게 傳給되었다. 이것도 均田制 시행을 전제로 해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위에서 말한 바를 요약 하면 高麗에서는 전체 국민에게 토지를 均給하는 均田制는 시행 된 일이 없고 다만 軍人 기타의 職役 담당자에게만 직역부담의 댓 가로서 일정한 토지가 배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高麗史를 읽어 보면 均田制가 시행된 것 같은 강렬한 인 상을 주는 史料를 간혹 발견한다. 예를 들면 高麗말기의 토지개혁 론자들은 당시의 토지소유관계의 혼란을 시정하기 위하여 先王均 田의 제도를 부활하자고 주장하였고, 또 전기의 史料에서도 民田의 多寡 膏塉이 不均하니 이것을 바로잡아 均其食役 하라느니 혹은 均定 하라는 말이 보인다.66) 전기의 사료는 토지의 均給 그 자 66) 右常侍許應等上䟽曰 臣等近與司憲府 版圖 典法 交章申聞 請復先王均田之制 而殿下依允, 四方聞者 莫不欣悅 (高麗史 卷 78 食货志 1 田制 祿科田다음 辛昌 即位年 9月條) 戶部奏 尙州管內中牟縣 洪州管內橻城郡 長湍縣管內臨津 臨江等縣 民田多寡膏 塉不均 請遣使量之 均其食役 從之 (高麗史 卷 78 食货志 1 田制 經理 靖宗 7年 正月條) 尙書戶部奏 楊州界內見州 置邑已百五年 州民田畝 累經水旱 膏塉不同 請遣使 均定 制可 (高麗史 同上 文宗 13年 2月條) 西北面兵馬使奏 安北都護及龜 泰 靈 渭等州, 通海縣民田 量給已久 肥塉不同 請 遣使均定 從之 (高麗史 同上 文宗 13年 3月條)

191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와 課役負擔의 균등화를 도모한 것이 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데 설령 이 사료를 토지의 均給과 같은 의미 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항구적 보편적 제도로서의 농민에 대 한 土地均給을 입증하기는 어렵다. 특별한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하여 일부 극히 제한된 지역에서 임시적 방편으로 농민에게 토 지를 균급하였을 가능성은 있으나 이러한 시책이 高麗의 토지정책 전체에 있어 갖는 의의는 그렇게 큰 것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말 기의 토지개혁론자들이 거론한 先王의 均田制라는것은 文武兩班 吏 屬 軍人 樂人 工匠 등 국가의 官職 職役을 맡은 계층들에 대하여 토 지를 지급하여 준 초기의 田柴科 土地支配秩序를 말기의 改革論者 들이 선망의 뜻으로 회고한 것이며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姜 晋 哲 2. 手 工 業 (1) 官廳手工業 1) 官廳手工業組織 新羅시대에도 이미 官需品과 귀족층의 생활품 및 武器의 제조를 목적으로 하는 官廳手工業組織이 이루어져 있었지만, 高麗시대에 이르러서도 그 조직이 한층 더 확장 발전하였다. 新羅시 대에는 官廳手工業을 관리하는 각 官署가 그 제조되는 물품의 종류에 따라 조직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皮革製品의 제조 를 관리하는 기관으로서 皮典이 설치되어 있었고, 麻布 생산을 관 장하는 기관인 麻典과 絹織物 생산을 관장하는 綿典 등이 있었던

192 2. 手 工 業 것이다. 그러나 高麗시대에는 官廳手工業이 정부의 用途와 需要에 따라 분류되었고 각 官廳마다 생산을 담당한 물품을 제조하는데 필요 한 각종 工匠을 전속시켰다. 예를 들면 정부의 영선작업 일체를 담당한 繕工寺는 土工 石工 金屬工 등을 소속시키고 있었던 것이 다.1) 高麗시대의 官廳手工業은 新羅시대의 그것보다 한층 더 규 모가 커졌고 각 官廳手工業場마다 그 기능이 다양화한 것이었다. 高麗시대의 官廳手工業場을 관장하던 기관과 그것에 소속된 工 匠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2) 繕工寺 이 관서는 일명 將作監이라고도 하며 정부의 건축 및 토목공사를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이를 관장하는 官吏로서 從 3品 의 判事 1人과 그 밑에 正 4品의 監 1人, 從 4品의 少監 1.人, 從 6品의 丞 2人, 從 7品의 注簿 2人이 있었고, 또 監作 6人과 記官 3人, 算士 1人이 있었으며, 이들의 지휘 감독 아래 건축 및 각종 토목 공사에 종사하는 工匠, 즉 石工 木工 土工 등이 소속되어 있 었던 것이라 추측된다. 軍器寺 일명 軍器監이라고도 하며, 주로 武器를 제조하는 기관 이다. 官吏로서는 判事(從 3品) 1人과 監(正 4品) 1人, 少監(從 5 品) 1人, 丞(正 7品) 2人, 注簿(正 8品) 4人, 監吏 8人, 記官 4人, 算士 2人이 있었고, 그 밑에 皮甲匠 牟匠 和匠 白甲匠 長刀匠 角 弓匠 漆匠 鍊匠 弩筒匠 箭匠 箭頭匠 皮匠 등의 工匠이 소속되어 있었다. 掌服署 王族의 衣服類를 제조 조달하는 기관으로서 尚衣局이 라고도 한다. 管理職으로서 正 6品의 奉御 1人. 正 7品의 直長 1 1) 趙璣濬著 韓國經濟史 149面 2) 高麗史 志卷 30 白官 1 高麗史 志卷 34 食貨

193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人, 書令史 4人, 記官 2人, 注衣 1人과 工匠으로써 繡匠 幞頭匠 靴 匠 帶匠 花匠 鞁鞋匠 笏袋匠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供造器 中尚署라고도 하며 귀족계층이 사용하는 각종 장식품 을 제조하는 기관이었다. 管理官으로써는 正 6品의 令 1人과 正 8 品의 丞 2人, 史 6人, 記官 2人, 爲士 1人이 있었으며, 工匠은 畫 業 小木匠 韋匠 紅鞓匠 朱紅匠 雕刻匠 螺鈿匠 漆匠 花匠 紙匠 珠 簾匠 竹篨匠 御盖匠 黄丹匠 梳匠 磨匠 등이 전속되어 있었다. 掌冶署 鐵物과 金銀細工品을 제조하는 기관으로서 그것이 폐 쇄되었을 때는 대신 營造局이 설립되었다. 管理官으로서는 從 7品 官의 令 2人과 正 8品官의 丞 2人, 史 4人, 記官 2人, 算士 1人이 있었고, 工匠으로서는 銀匠 咊匠 白銅匠 赤銅匠 鏡匠 皮帶匠 金箔 匠 生鐵匠 등이 있었다. 都校署 그것이 폐쇄될 때는 대신 雜作局이 설치되었던 바와 같이 宮中과 宮府에서 사용하는 각종 雜細工品을 제조하는 기관 으로서 管理官은 從 8品의 令 2人, 正 9品의 丞 4人, 監作 4人, 書 令史 4人, 記官 2人이 있었고, 그 밑에 전속 工匠으로서 木業 石業 雕刻匠 石匠 粧覆匠 泥匠 등이 있었다. 都染署 각종 染料를 제조하고 染色작업을 담당하던 기관으로 서 어떤 때는 雜織署와 併合하여 織染局이 되기도 하였다. 그 管 理官으로서는 正 8品官의 令 1人과 正 9品官의 丞 2人, 史 4人, 記官 2人이 있었는데, 이들 밑에 일정한 수의 染料匠과 染色匠이 소속되어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雜織署 각종 織物의 제조를 담당한 기관으로서 管理官으로서 正 8品의 令 2人과 正 9品의 丞 2人, 史 4人, 記官 2人이 있었고 工匠으로는 劇匠 繡練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掖庭局 국초에는 掖庭院으로 불리었고 宮中에 있어서 王命을

194 2. 手 工 業 전달하고 왕이 사용하는 문방구와 열쇠 등의 관리를 담당하는 한 편 궁중용 絹織物 등을 관장하던 기관으로서, 正 6品의 內謁者監 1人, 正 7品의 內侍伯 1人, 從 8品의 內謁者 1人, 監作 1人, 각 3 人씩의 書令史 記官 給使 등 管理職이 있었으며, 그 밑에 錦匠 羅 匠 綾匠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奉車署 王室用의 車類를 관장하던 기관으로서 尙乘局이라고 도 하였다. 管理官으로서는 正 6品의 奉御 1人, 正 7品의 直長 2 人, 書令史 4人, 承旨 50 人 등이 있었고 工匠으로는 大韂匠 鞍㘘 匠 鞍褥匠 鞍鞽匠 馬匠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조직상황을 통하여 살펴보면 高麗시대의 官廳手工業 은 주로 무기제조와 귀족층의 生活品 제조를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그 管理職의 배속도 또한 대단히 강화되어 있었던 것이 라 할 수 있다. 2) 官廳手工業에 있어서의 作業條件 高麗시대의 官廳手工業에 종사하는 工匠들은 新羅時代의 관청 수공업에서 실시된 奴隷的 給付形態에서 벗어나서 勞賃的 形態로 발전하고 있었다.3) 관청수공업 에 동원된 공장들은 관부에 의하여 奴隷的으로 예 속된 것이 아니라 모두 專業的이고 獨立的인 수공업자로서 평상 시에는 도시에서 주로 주문생산에 종사하다가 일정한 기간 동안 관청 수공업장에 經濟外的 강제권에 의하여 동원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製造活動은 新羅시대의 그것과 달리 완전히 官府에 예속된 상태의 것이 아니라 公役日을 제외하고는 自己經 理에 종사할 수 있었으며 公役에 종사하는 경우에 있어서 이들에 3) 趙璣濬 前揭書 151面

195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게 지급되는 給付 역시 노예적인 급부상태에서 賃勞動的으로 변 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高宗 36년(1249) 江華島에 있던 정부가 開城으로 옮길 때 그 宮闕復舊공사에 종사한 工匠들에 대하여 銀 20斤 布 200疋을 下 賜한 것이나4) 元宗 15년(1260)에 元나라의 요청에 의하여 日本 원정을 위한 戰艦 300艘을 건조할 때 이에 동원된 工匠과 人夫 30,500名에게 3개월분 급료 34,312硕 5斗를 지급한 사실5) 등을 미루어 보면 이들은 賦役동원된 것이기는 하지만 일정한 勞賃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高麗시대의 工匠, 특히 首都에 거주하는 工匠 중에는 中央 官廳의 수공업장에 전속된 자들이 있었고 이들에 대해서는 일정 한 祿俸이 지급되었으며 田地 대신으로 지급되는 이 祿俸을 別賜 라 하였다.6) 그러나 예외적으로 工匠들에게 田地가 지급되는 경우도 있었으 니 예를 들면 文宗時代 田柴科를 다시 정할 때 大匠 副匠 雜匠 등 에게 田 17結을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7) 田柴制度의 대상이 된 이들 工匠은 대체로 관청수공업장에 부 역 동원된 일반 工匠들 중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뛰어난 장기근무 자들이었으며, 또 무기제조분야 등 가장 중요한 생산분야에 종사 하였던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정한 田地를 지급받은 이상 이들은 평생을 관청수공업에 종사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高麗시대에도 工匠案이 작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8) 4) 高麗史 世家卷 23 高宗 36年 夏4月 丙辰 5) 高麗史 世家卷 27 元宗 15年 正月 6) 高麗史 志卷 34 食貨 3 祿俸炫 以至雜職胥吏 工匠 凡有職役者 亦皆有常俸 以代其耕 謂之別賜 7) 高麗史 卷 78 志卷 32 食貨 1 田柴科 8) 高麗史 卷 75 選擧

196 2. 手 工 業 工匠들의 公役에의 동원은 이 工匠案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라 생각되며, 관청수공업장에서는 그 工程도 비교적 세분화되어 있었 으니 예를 들면 軍器寺에서 弓類를 제조하는데 있어서도 角弓匠 弓袋匠 弩筒匠 箭匠 箭頭匠으로 세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官廳手工業場에 종사하는 工匠들은 그 취업기간과 기술수준에 따라 指諭承旨 指諭副承旨 行首指諭 指諭 行首校尉 行首大匠 行 首副匠 등으로 그 계층이 나누어져 있었으며 일반 工匠들은 이들 의 지휘 아래 官需品 제조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한편 관청 수공업 에 종사하는 工匠들은 撲頭를 착용하지 못하 는 등 사회적 법률적 제재를 받으면서도 工匠職의 영역에서 벗어 나 관직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諫官들이 功勞 있는 工匠일지라 도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게 할 것을 주장하고, 이미 관직에 나아 간 자는 이를 박탈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사실이 허다한 것이다.9) 高麗의 공예 기술이 대단히 뛰어 났으나 모두 公家에 귀속되 었다 10)고 말한 바와 같이 전체 高麗시대를 통하여 가장 기술이 우수한 工匠들은 대부분 官廳手工業場에 동원되었으며, 따라서 관 청수공업장은 高麗시대의 가장 대규모적이며 또 그 기술 수준이 높은 手工業場이었다. 官廳手工業은 중앙관청의 그것이 대표적인 것이었지만 地方官 廳에서도 武器와 官需品 생산을 위한 작업이 이루어져서 地方工 匠을 동원하였다. 官廳手工業場에서의 생산활동이 시장생산은 아니었고, 따라서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관청 수공업장에서의 작업기간이 길어질 9) 한가지 예를 들면 高麗史 選學志 3 辛禑 5年 正月條에 諫官言 工匠之徒 雖或有勞 勿許授職 其已授者 追奪職牒 이라 하였다. 10) 高麗圖經 第19卷 工技條 高麗工技至巧 其絕藝 悉歸於公

197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수록 도시나 농촌에서의 民間手工業의 발달은 저해되는 것이었다

198 2. 手 工 業 (2) 民間手工業 1) 農村手工業 高麗시대에 이르러서 農村社會에서도 일부의 手工業 分野에서는 專業的 수공업자 즉 工匠이 존재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갔다. 따라서 각 地方官廳 隷下에도 工匠이 등록되어 있어서 종종 지 방관청의 수공업 생산에 동원되었으며, 평상시에는 농촌사회의 注 文生產 등에 종사하였다. 忠烈王 22년의 中賛 洪子藩의 건의에 의하면 당시 鍮銅匠들이 지방에 많이 살고 있었는데 각 州縣의 官吏들이 鍮銅을 거두어 器 皿을 만들었으므로 민간의 器皿이 날로 줄어들고 있다 하고 그 대 책으로서 鍮銅匠들을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서울에 돌아오게 할 것을 제의하고 있다.11) 이것에 의하여 鍮銅匠들이 서울로 옮기게 되었는지는 의문이지 만, 원래 귀족계층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에만 이들 工匠이 집중 되어 있었으나 지방에 있어서의 鐵器需要가 증가함에 따라 지방 으로 옮겨 가는 자가 생겨났고 그것이 곧 지방관리들의 수탈의 대 상이 되었던 것이다. 기록이 부족하여 상세한 사정을 알 수 없지만 지방에 발달한 專 業的 수공업자는 鐵器匠 이외에도 농기구를 제조하는 冶匠을 비 롯하여 陶器匠 등이 있었으며 이들 역시 일정한 기간 지방관청에 동원되어 官需品 제조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한편 삼국시대부터 발달하였던 所의 手工業生產도 高麗시대에 11) 高麗史 卷 84 志 38 刑法 1 忠烈王二十二年五月 中贊洪子藩 條上便民事 一近有鍮銅匠 多居外方 凡州縣 官吏 及使命人員 爭斂鍮銅 以爲器皿 故民戶之器 日以耗損 宜令工匠 立限還京

199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이르러서 더욱 발달하였다. 所에서 수공업생산도 농민수공업은 아 니었으며, 지방의 특수지역에 국가의 요구에 응하는 常貢 및 別貢 收納의 대상지로서 존재하였다. 각 所는 모두 그 특유의 생산물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에 따라 命名되었다. 예를 들면 金所 銀所 銅所 鐵所 絲所 紙所 瓦所 炭 所 鹽所 墨所 瓷器所 魚梁所 薑所 등이었다.12) 所에서 수공업생산에 종사하는 工匠들도 비교적 專業的인 수공 업자들이었다고 생각되지만, 官府에 대하여 常貢 및 別貢納付의 의무를 안고 있었던 이들은 지방의 일반 工匠보다 한층 더 나쁜 조건에 처해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睿宗 3년의 기록에 의하면 銅所 鐵所 瓷器所 紙所 墨所 및 雜 所 에 대한 別貢色의 수탈이 극심하였으므로 匠人들이 모두 괴로 움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하였다 하고 각 所의 別貢物과 常貢物의 양을 다시 작정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13) 이와같은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所는 순수한 民間의 수공업생 산장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관청수공업장에서 필요로 하는 原料 를 생산 貢納하였거나 혹은 직접 手工業品을 생산하여 납부하는 국가에 예속된 手工業生產場이며, 그곳에 살면서 수공업품 생산에 종사하고 있는 工匠들 역시 중앙의 관청 수공업장이나 지방 官府 의 수공업장에 동원되는 일반 工匠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 되고 있다. 예를 들면 慶尙道 河陽縣의 梨合銀所가 본래는 縣이었으나 그 住民 중에 國命을 어긴 자가 있어서 그 縣이 銀所로 格下되고 그 12) 增補東國輿地勝覽 13) 高麗史 卷 73 志卷 32 食货 1 睿宗三年二月 銅 鐵 瓷器 紙 墨 雜所 別貢物色徵求過極 匠人艱苦而逃避 仰所司 以 其各所 別常貢物 多少酌定奏裁

200 2. 手 工 業 주민이 모두 所民으로 전락하였으며14) 이와 같은 사실은 高麗시 대를 통하여 허다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所의 주민은 郡縣의 주민 에 비하여 여러가지 사회적 차별 대우를 받고 있었으며, 또 죄인 을 수용하는 곳으로도 이용된 것 같아서 慶尚道의 梁山에 있었던 於谷所는 俗號를 水輕獄이라 하며 본래 죄인을 감금해 두는 곳이 었다는 기록도 있다.15) 이와 같이 所의 주민들이 신분적으로 대체로 賤民層에 속한 것이 라 생각되고 있지만 그들의 수공업 생산활동 자체는 奴隷勞動的 인 것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고 있다. 그들의 생산활동은 자기경 영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다만 그들에게 부과된 貢納品을 제조 납부하는 것이었으니, 부담에 있어서의 輕重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일반 농민들과 같은 여건 밑에 있은 것이라 생각되고 있다. 所의 수공업생산은 일반 농민수공업에 비하여 한층 더 專業的 인 것이었고 그러므로 그 기술과 생산품의 질에 있어서도 농민수 공업 보다 우수한 것이었으리 라 추측된다. 따라서 官府 需要品이나 귀족층의 생활품으로 관청 수공업생산 품과 함께 所의 생산품 즉 그 別貢品이 충당되었으며, 이와 같은 여건은 또 농민수공업의 발전을 자극하지 못한 원인이 되기도 하 였다. 농촌지역에도 專業的인 工匠이 일부 발달하고 있었고 또 所에 서의 수공업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농촌수공업의 중심은 역 시 농민의 家內手工業이었다. 농민의 가내수공업생산은 대체로 자가수요를 위한 衣料생산과 14) 新增東國輿地勝覽 卷 27 河陽縣 古跡條 永州梨 旨銀所 古爲縣 中以邑子違 國 命廢而藉民税白金 稱銀所者久 15) 新增東國輿地勝覽 卷 27 梁山郡 古跡條 於谷所 在郡西五里 有小域 俗號水 蛭獄 古爲所時 囚罪人之地

201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官府에 납부하기 위한 布物類의 생산이었다. 농민들이 가내수공업 으로 생산하는 衣料는 대개 麻布類와 苧布類 그리고 絹布類 등이 었으며, 그것은 또 官府에 貢納되어 軍服地 등으로 이용되었다. 농촌의 가내수공업에서 생산하는 織物類가 일부 귀족층의 衣料 로 충당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귀족층의 의복지는 관청수공업 생산품이나 所에서의 別貢 등으로 충당되었으므로 농촌 가내수공 업에 있어서의 기술적인 향상을 자극할 만한 기회는 적었다. 2) 寺院手工業 高麗시대에는 불교가 국교화하여 모든 寺院이 국가와 귀족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므로 寺院經濟가 크게 발달하였다. 불교가 발 달하고 사원경제가 향상되었으므로 寺院의 수와 僧侶의 수가 증가 하였고, 따라서 사원의 수공업품 需要가 중대되어 스스로 이를 자 급하기에 이르렀으니 여기에 사원수공업이 발달하게 된 것이었다. 사원수공업은 대개 織布業과 製瓦業 그리고 製鹽業 酿造業 등 에서 발달하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자체내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 하여 운영된 것이었으나 차차 생산이 중대하여 민간의 수요품을 조달하기에 이르렀다. 寺院에서의 織布業은 본래 僧侶들과 寺奴婢 등의 衣料로 공급 하기 위하여 발달한 것이었는데 사원마다 織機를 두어 주로 尼僧 과 寺婢 등이 織造한 것이었다. 高麗史 列傳의 齊國大長公主條에 의하면 어느 尼僧이 公主에게 花紋이 들고 대단히 섬세한 白苧布를 보이면서 寺婢가 직조한 것 이라 말한 기록이 있으며16) 漢江邊에 있었던 彌陁寺란 尼舍에서 16) 高麗史 列傳卷 2 后妃 2 忠烈王 國齊大長公主條 有一尼 獻白苧布 細如蟬翼, 雜以花紋 公主 以示市商 皆云前所未覩也 問尼何從 得此 對曰 吾有一婢 能織之 公主曰 以婢遺我如何 尼愕然 不得已納焉

202 2. 手 工 業 도 尼僧들이 질 높은 면포를 제조 판매하였다는 기록도 있다.17) 당시의 포물생산이 주로 농촌의 가내부업으로 이루어졌던 것을 생각해 보면 尼僧이나 寺婢들에 의한 寺院織布業이 오히려 專業 的인 것이었다 할 것이다. 寺院製瓦業 역시 사원의 건축자재를 제조하기 위하여 발달한 것이었으나 점차 그 기술이 발달하여 일반 민간 製瓦場의 제품보 다 우수한 것이 생산되었다. 忠烈王 3년의 기록에 의하면 大然이란 僧侶를 江華岛에 보내어 琉璃瓦를 제조하게 하였는데 黃丹을 이용하고 廣州 義安에서 생 산되는 原料土를 사용하여 제조하는 琉璃瓦는 상인들이 관매하는 瓦類보다 우수한 것이었다 한다.18) 琉璃瓦는 靑瓦나 혹은 釉藥을 사용한 瓦類 등을 가리킨 것이라 생각되지만 어떻든 사원의 製瓦業은 이후 朝鮮시대까지 연결되어 朝鮮초기의 製瓦場인 別瓦窯는 僧侶들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한편 寺院 酿造業 역시 크게 발달하여 사원 영리사업의 핵심을 이루었다. 高麗시대에는 寺院의 酿酒를 금지하는 조처가 자주 내리고 있 는데 예를 들면 顯宗 원년에 僧尼의 양주를 금지한 것이나19) 同 王 12년의 復禁寺院酿酒 20)한 조처 및 仁宗 9년의 內外寺社 僧徒 寶酒霞葱 21)한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17) 朝鮮佛敎通史 下編 南山之下 漢江之上荳毛 浦有一尼舍 名曰 彌陁寺 尼姑等 皆以織極細綿布爲業 18) 同上 遣僧大然于江華 燔琉璃瓦 其法多用黃丹 乃取廣州義安土燒作之 品色愈於南商 所賣者云 19) 高麗史 卷 85 志卷 35 刑法 2 禁令 禁僧人奴婢相爭 又禁僧;^酒 20) 高跋史 同上 21) 高麗史 同上

203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사원양조업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하게 알 만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顯宗 18년의 楊州地方의 보고에 의하면 이 지 방의 㽵義 三川 靑淵 등 사원에서 禁令을 어기고 360餘石이나 酿 酒한 사실이 드러나 처벌을 받은 일이 있는 것으로 보아22) 각 寺 院에서의 양조업은 비교적 큰 규모의 것이었으며, 전국 사원에서 의 양조용 미곡소모량도 막대한 것이었다고 추측된다. 한편 製鹽業에 있어서도 寺院이 차지하는 위치는 높은 것이었 다. 예를 들면 蒙古의 지배 밑에서 高麗의 王權強化政策을 감행하 였던 忠宣王은 그 즉위년에 鹽의 國家 專賣法을 실시하여 재정 사 정을 개선하려 하였는데, 이때의 傳旨에서 우리 나라의 모든 宮 院과 寺社 및 權勢家가 鹽盆을 사사로이 설치하여 그 이익을 독점 하고 있으므로 국가 재정이 넉넉하지 못하다. 장차 內庫常積倉과 都鹽院 安國社와 모든 宮院 및 內外 寺社가 소유하고 있는 鹽盆을 모두 入宮시킬 것이라 하였다.23) 그리고 이 때 정부 소유로 만든 전국의 鹽盆數는 모두 600餘個 所에 달하고 있는데, 본래 이 가운데 寺院에서 경영하던 鹽盆이 얼마나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국가와 귀족층의 보호를 받고 막대한 寺院田과 寺奴婢를 보유하고 있던 高麗시대의 寺院은 鹽 盆 소유에 있어서는 宮院과 권세가에 뒤지지 않았던 것이다. 姜 萬 吉 22) 高麗史 世家卷 5 顯宗 18年 5月癸未 楊州奏㽵義 三川 靑淵等寺僧 犯禁釀酒 共米三百六十餘, 請依律斷罪 從之 23) 高麗史 志卷 33 食貨 2 鹽法 忠宣王元年二月 傳旨曰 古者 榷塩之法 所以備國用也 本國諸宮院 寺社及權勢 之家 私置塩盆 以專其利 國用何由可贍 今將內庫常積倉 都塩院安國社及諸宮 院 內外寺社 所有鹽盆 盡行入官

204 3. 商業과 對外貿易 3. 商業과 對外貿易 (1) 國內商業 1) 都市商業 高麗시대에는 서울인 개성을 비롯하여 西京인 平壤, 東京인 慶 州, 南京인 漢城 등 큰 도시가 발달하였다. 이들 도시는 행정 중심 지로서의 官衙都市였지만, 이곳에는 現物로서 收納되는 租稅를 비 롯하여 많은 物資가 집중되었다. 따라서 자연히 활발한 交易이 이 루어졌으며 이 때문에 상업기관이 발달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것 이 市廛이었다. 市廛은 이들 도시민들의 생활품을 판매하기도 하지만 한편 官 需品을 조달하고 租税와 貢納品 등 國庫의 剩餘品을 처분하는 기 능을 가지는 것이었으니 官衙都市에 있어서도 市廛의 존재는 불 가결한 것이었다. 開城의 경우 市廛이 설치된 것은 國初부터여서, 기록에 의하면 太祖 2년에 그곳을 首都로 개발할 때 부터 市廛이 설치되었다.1) 설치 초기의 市廛 규모에 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서 그 상 세한 것을 알 수 없으나, 12世紀 초엽에 開城市廛의 北廓 건물 65 間이 불타 버렸다는 기록이 있고2) 13세기 초엽의 기록에도 開城 의 廣化門에서 十字街에 이르는 도로의 좌우변에 1,008楹의 長廓 을 건축하였는데 이 役事에는 開城시내 五部坊里의 양반들이 처 음으로 그 비용을 부담하였다 한다.3) 1) 高麗史 世家卷 1 太祖 2年 春正月 定都于松嶽之陽 創宮闕 置三省六尙書 官九寺 立市廛 辨坊里 分五部 置六衛 2) 高麗史 志卷 7 五行 睿宗 7年 9月 乙丑 京市樓北廊六十五間火

205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면 開城의 시전도 長廊建物로 구조 되어 있었고 官府가 이를 건조하여 시전상인들에게 대여하였던 것이라 생각되는데, 이 경우 시전물건을 대여받은 상인들은 일정 한 公廓税를 바쳤을 것이다. 開城市廛의 규모를 한층 더 상세히 전해 주고 있는 것은 역시 12세기 초엽의 기록인 高麗圖經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開城의 시 전들은 廣化門에서 府及館까지 長廊을 이루고 있으며 각 商廛의 門樓에는 永通 廣德 興善 通商 存信 資養 孝義 行遍 등의 廛號를 쓴 간판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4) 市廛商業은 흔히 御用商業이라 하는 바와 같이 官府가 그 필요에 의하여 개설한 상업기관이었으므로 그것에 대한 官府의 關與度도 대단히 높은 것이었다. 시전을 감독하는 관서로서 京市署가 있어서 항상 물가를 조종하 였다. 예를 들면 忠烈王 8년(1282)에는 都評議使司에서 京市署로 하여금 농사의 豊凶度에 따라 미곡가를 정하게 한 것이나5) 隅王 7년(1381)에 開城시내의 물가 등귀를 막기 위하여 京市署로 하 여금 물가를 評定하게 한 후 이를 어긴 사람은 처형하게 한 사실 등은6)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3) 高麗史 世家卷 21 熙宗 4年 秋7月 丁未 改營大市左右長廊 自廣化門, 至十字街 凡一千八楹 凡五部坊里兩班 戶歛米粟, 就賃供役, 兩班坊里之役, 始此. 4) 宜和奉使 高麗圖經 卷 3 城邑坊市條 王城本無坊市 惟自廣化門至府及館 皆爲 長廊 以蔽民 居 時於廊間 榜其坊門 曰永通 曰廣德 曰興善 曰通商 曰存信 曰資養 曰孝義 曰行遜 5) 高麗史 志卷 33 食貨 2 市估 忠烈王八年六月 都評議使司榜曰 民生之本 在於米穀 白金雖貴 不救飢寒 自今銀 甁一事折米 京城率十五六石 外方率十八九石 京市署 視歲豐歉 以定其價 6) 高麗史 志卷 33 食貨 2 市估 辛禑七年八月 京城物價踴貴 商賈爭利錐刀 崔瑩疾之, 凡市物 令京市署 評定物 價 識以稅印 始許買賣 無印識者 將鉤脊筋殺之 於是懸大鉤於署以示之, 市人震 慄. 事竟不行

206 3. 商業과 對外貿易 한편 高麗時代의 市廛이 가지는 이와 같은 官府와의 관계로 미루 어 보아 이들 시전들도 專賣特權 같은 것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되지만,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전해 주고 있는 기록은 없다. 다만 高麗時代의 도시상업에 있어서도 買占商業이 성행하고 있 었다. 忠肅王 8(1321)의 기록에 의하면 開城 시내에 4個處의 鹽 廛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판매하는 소금이 모두 권세가에 의하여 買占되었으므로 官府에서 발급하는 標牒을 가지지 않은 자에 대 한 소금 판매를 금지한 일이 있다.7) 高麗時代에는 宋나라 日本 등 외국과의 교역이 발달하였으므로 도시 상업계도 직접 외국무역과 연결되어 거래가 활발히 전개되었 다. 高麗圖經의 기록에 의하면 외국의 사절이 高麗에 오면 으례 큰 시장이 형성되고 공예품과 직물류 및 금은세공품의 거래가 활 발히 이루어지는데, 그 가운데는 王府의 물건으로서 거래의 대상 이 되는 것도 있었다 한다.8) 市廛은 도시에 있어서의 常設廛舖이지만 이 밖에도 도시 안의 일 정한 장소에 市場이 서고, 이곳에서는 일반 도시 민의 일상생활용 품이 매매되었다. 여러 도시 중에서도 開城의 시전상업 이 가장 활발하게 발달하 였다. 開城 市廛은 중앙정부의 調達商으로서의, 혹은 首都를 찾아 오는 외국인을 대상으로하는 국내 최대규모 상인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였으며, 따라서 정부의 보호를 받으면서 그들의 활동을 외 국무역으로 연결시켰던 것이다. 7) 高麗史 志 卷 33 食货 2 稱法 忠肅王八年三月 民部以京中四塩鋪所賣鹽 皆歸權勢親 故 不及踈賤 榜曰 非受本 部牒者 不得賣 8) 高麗圖經 卷 3 贸易 高麗故事 每人使至 則聚爲大市 羅列百貨 丹漆繪帛 皆務華好 而金銀器用 悉王府 之物 及時鋪陳 蓋非其俗然也

207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이에 비하여 西京 즉 平壤의 상업활동은 그다지 활발하지 못하 였다. 肅宗 7년(1102)의 한 기록에 의하면 西京民의 習俗이 상업 에 힘쓰지 않아서 그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留守官의 보고에 따라 貨泉別監 2名을 임명하여 市肆를 감독하게 하고 西京의 상 업 발전을 도모하였다.9) 高麗시대의 도시상업은 일반적으로 官衙都市 내부에 있어서의 官府 調達商으로서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으나, 官府가 商品의 최 대 소비자였고 또 관아도시가 가장 많은 소비인구를 포용하고 있 는 곳이었으며, 농민의 생산품이 現物로 납부되고 농촌사회에서는 화폐가 거의 유통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관아도시 내부에서는 화폐유통이 일반화하고 있었던 점, 官衙都市의 상업이 외국무역과 직결되고 있었던 점 등 여러 가지 경제적 여건 때문에 고려시대에 있어서의 가장 활발한 국내상업의 일환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2) 地方商業 開城 平壤 慶州 등 몇 도시의 상업이 常設廛舖로서의 시전상업 중 심으로 발달하고 있었던 데 반하여 농촌지 방의 상업은 非常設的 場市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농촌지방의 일정한 교통중심지에 정해진 시기마다 장시가 서고 주변의 1일 왕복 거리에 있는 농민들이 모여 물물을 교환하는 형 태의 상업이 발달하였던 것이다. 高麗圖經 著者의 표현에 의하면 高麗시대의 농촌지 방에는 常 設的인 商店이 없고 하루 동안만 서는 장마당에 男女老幼와 官吏 및 手工業品 生產者 등이 모여 각자의 가진 것으로 다른 물품을 9) 高麗史 志卷 33 食货 2 市估 肅宗七年九月 制曰 四民各專其業 實爲邦本 今聞西京習俗 不事商業 民失其利 留守官其奏 差貨泉別監二員 日監市肆 使商賈 咸得懋遷之利

208 3. 商業과 對外貿易 교환하여 金屬貨幣는 없고 貯布와 銀瓶으로 값을 치른다고 하였 다.10) 이와같은 場市가 대개 며칠 만에 한 번씩 열렸으며 또 전국적으로 그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 전혀 확인할 길이 없지 만 開市日과 장시 의 수는 농촌상업의 발전정도에 따라 빈번하고 또 많아졌을 것이다. 농촌 장시에 있어서의 교환의 매개체는 布物이 주가 되었고 銀 瓶이 일부 유통되었지만 엽전과 같은 鑄造貨幣는 통용되지 않았으 므로 貨泉之法이 없다고 표현하였던 것이며, 이 사실은 또 高麗시 대에 있어서의 海東通寶와 같은 鑄貨의 통용한계를 말해 주는 것 이라 하겠다. 한편 농촌 場市에는 물물교환하는 농민과 자기의 생산품을 판매 하는 일부의 소생산자들 이외에 이 장시들 사이를 순회하며 그 商圈 을 연결하는 行商이 있었고 또 농민층이 官府에 바치는 貢物을 代 納하는 상인들이 있었다. 高麗시대에도 농민들이 각 州縣에 매년 常貢으로 바치는 牛皮 筋角 등을 平布로 折價 代納하는 제도가 있 었던 것이다.11) 지방 場市에서 활동한 비교적 專業的인 상인으로써의 행상은 주로 負商들이 었다고 생각되지만 그들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전 하지 않고 다만 恭讓王 때 黃海道 寧丁浦의 소금을 負商으로 하여 금 운반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또 당시 負商들이 전국적으 로 활동하고 있었던 혼적도 보인다.12) 10) 高麗圖經 貨易 其俗無居肆 唯以日中爲墟 男女老幼 官吏工技 各以其所有 用以交易 無泉货之 法 惟貯布銀瓶 以準其直 11) 高鹿史 志卷 32 食貨 1 文宗二十年六月 判諸州縣 每年常貢 牛皮 筋角 以平布折價代納 12) 惠商公局 序 完文 使負商運鹽寧丁浦 其說不記於靑管 微著於骨亭澹翁日記中可頌 天道循環 無往不復

209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朝鮮王朝가 성립된 15년 후인 太宗 7년(1407)에는, 行商 활동 이 성하여 전국적으로 미치고 있으며 특히 中國과의 국경지방에까 지 드나드는 사실을 들고 이를 억 제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행상 들에 대한 行狀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13)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 어 보면 高麗시대에도 行商 활동이 활발하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朝鮮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그 抑商政策에 의하여 통제된 것이었 다. 지방의 行商 활동과 관련하여 발달한 것이 院이었다. 院은 정부 가 지방의 교통 및 상업중심지에 설치하여 여행자와 행상들의 宿 所로 이용하게 한 것인데, 院主人을 정부가 모집하여 이들이 경영 하게 하는 한편 大路에 설치된 院에는 5結, 中路의 院에는 4結, 小路의 院에는 3結의 院田을 배당하여 그 경비에 충당하게 하였 던 것이다.14) 3) 寺院 및 僧侶의 商行爲 高麗시대의 商業 발달에 있어서 僧侶 및 寺院의 상업활동을 들 지 않을 수 없으니 僧侶의 상행위와 사원의 高利貸業은 그 규모에 있어서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寺院들은 대부분 수공업생산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본래 寺院의 수요품을 自給하기 위하여 구비된 것이었으나 잉여생산이 이루어져서 그 생산품을 민간에 판매하기에 이르렀고, 이와 같은 여건을 계기로 하여 점차 寺院 生產品과 관계 없이도 僧侶의 상행 13) 太宗實錄 卷 14 太宗 7年 10月 己丑 平壤府尹尹穆 上便宜事目八條 一貪財小人 惟利是求 輒憑行貨 往來諸道 以民 間日用不切之物 誑誘愚民婦女 謀奪人産 是可慮也 願自今 凡行貨者痛禁 拔本塞源 使安其業 如有違令敢行貨者 以盜論 政府議得 東西北面 境連彼土 其面入歸行商者 京中漢城府外方都觀察使 都巡問使印信行狀成給 無行狀者 一依啓本痛禁 14) 高麗史 食貨志 公麻田柴科

210 3. 商業과 對外貿易 위가 자행되었으며, 그것은 또 전체 상업계를 통하여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顯宗 18년(1027)의 기록에 의하면 楊州 지방의 庄義 三川 靑淵 寺 등에서 法禁을 어기고 쌀 360餘石을 酿酒하였다가 처벌된 일이 있으며,15) 文宗 10년(1056)에도 國役을 피하는 무리들이 寺院에 의탁하여 고리대업이나 農牧을 경영한다는 기록이 있다.16) 또한 忠 宣王 원년(1309)에 榷鹽法을 실시할 때도 그 傳旨에서 옛부터 榷鹽法은 국가의 경비에 충당하기 위하여 실시하는 것인데 우리나 라는 모든 宮院과 寺社와 권세가가 鹽盆을 사사로이 설치하여 그 이익을 독점하니 국가 財政이 어찌 넉넉할 수 있겠는가 17)하고 사원 등의 제염과 판매를 금지하고 鹽盆을 모두 官府에 귀속시켰 다. 僧侶들의 영리행위가 거의 모든 부문에 걸쳐 널리 성행하였고 그것이 여러 가지 폐단을 초래하였으므로 정부는 빈번하게 승려 들의 商行爲를 금지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나 僧侶나 寺院의 상행위는 이미 일반화하였고 또 사원의 경제적 여건에 있어서도 불가결한 것이 되어 정부의 禁令은 이행되지 못하였다. 예를 들면 승려들이 酒類를 판매하고 또 願文 이나 勸善符 등 을 팔기 위하여 京外의 市井과 민가에 출입하여 치부하는 일이 많았 으므로 忠宣王 4년(1312)에는 僧人推考都監 을 설치하여 僧侶 들의 상행위를 금지하려 하였으나18)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 같아 15) 高麗史 世家 顯宗 6月 癸未條 楊州奏 㽵義 三川 靑淵等寺僧 犯禁釀酒, 共米三百六十餘石 請依律斷罪 從之. 16) 高麗史節要 卷 4 文宗 10年 9月 制曰 釋迦闡敎 淸淨爲先 遠離垢陋 斷除貪欲 今有避役之徒 杔號沙門 殖货營生 耕畜爲業 估販爲風 17) 高麗史 志卷 33 食貨 2 鹽法 忠宣王元年二月 傳旨曰 古者榷塩之法 所以備國用也 本國諸宮院 寺社及權勢之 家 私置塩盆 以專其利 國用何由可贍

211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서 이후에도 忠肅王 3년(1316)에 有職人과 함께 승려의 商販을 금 지한 것을 비롯하여19) 계속 승려들의 상행위가 논의의 대상이 되 고 있었다. 한편 寺院과 僧侶들에 의한 고리대업도 그 상행위에 못지않게 성행하고 있었다. 高麗시대에도 일반적으로 고리대업이 발달하여 정부가 子母停息之法 을 만들어 殖利率을 公定化하고 있었지 만20) 寺院이나 僧侶들에 의한 고리대업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었 던 것이라 하겠다. 明宗 18년(1118)에는 승려들이 麤惡한 紙布를 부민들에게 강 제로 貸與하고 取利하는 일을 금지한 기록이 있고21) 崔璃의 孽子 로 승려가 된 萬宗과 萬全 등이 無賴한 惡僧들을 모아 그 門徒로 삼고 고리대업을 營爲하여 많은 金銀 穀帛을 축적하는 한편 그 門 徒들이 이름 있는 사찰을 모두 점거하였는데 그들이 慶尚道에 備 蓄한 米穀 50餘萬硕을 백성들에게 貸與하여 取息하였다는 기록도 있다.22) 불교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高麗시대에 있어서 佛僧들이 사찰 의 경제력을 배경으로 하여 고리대업에 종사할 수 있었던 여건은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며 특히 寺刹에 있어서의 寶의 발달 은 고리대업을 촉진시켰던 것이다. 寺刹에 있어서의 寶는 經寶 八 18) 高麗史 志卷 39 刑法 2 忠宜王四竿九月 置僧人推考都監 諸寺勸化僧 來集京師, 聚錢財 肆爲穢行者 19) 高麗史 志卷 39 刑法 2 忠肅王三年三月, 禁有職人及僧人商販 20) 高麗史 志卷 33 食貨 2 借貸 凡公私借貸 以米十五斗 取息五斗 布十五匹 取息五尺 以爲恒式. 21) 高麗史 志卷 38 刑法 2 禁令 明宗十八年 三月, 制曰 道門僧人 諸處農舍冒認 貢戶良人以使之 又以麤惡 紙布 强與貧民 以取其利 悉皆禁止. 22) 高麗史節要 卷 16 高宗 27年 12月條 崔瑀孼子僧萬宗 萬全 皆聚無賴惡僧爲門徒 唯以殖貨爲業 金銀穀帛 以鉅萬計 門徒分據名寺 慶尙州道所畜米穀五十餘萬碩貸民收息

212 3. 商業과 對外貿易 關寶 廣學資 등의 佛寶가 발달하였는데 寶의 본래의 목적이 일정한 기본적인 財團을 마련하고 그것에서 얻어지는 利息으로서 특정사 업을 경영해 나가려는 것이었으므로 자연히 殖利的인 성격을 가지 게 된 것이었다. 佛寶의 재원은 정부나 귀족들의 施納으로 마련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惠宗이 7萬硕의 곡물을 국내의 큰 寺刹들에 施納하여 經寶와 廣學寶의 재원으로 삼게 한 일 등이다.23) 그러나 이와 같 은 佛寶의 財源이 그 殖利過程에서 고리대업으로 변하는 것이었 으니, 이 佛寶의 錢穀을 승려들이 지방의 각 州郡에 差人들을 시 켜 長利를 놓음으로써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었던 일 등이24) 그것 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高麗시대의 寺院이 가지는 경제적 위치는 대단히 높은 것이었 지만, 특히 商工業 부분에 있어서는 사원이 紙物類 陶瓦類 등의 生產場으로써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僧侶들에 의한 상행위와 殖利事業 역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2) 外國貿易 1) 宋과의 交易 新羅시대에도 이미 中國대륙과의 교역이 활발히 전개되었지만, 高麗시대에 들어와서도 그것은 계속되었고 특히 高麗와 宋나라와 의 교역이 역사상 그 유례를 보기 드물게 발달하였다. 高麗가 건국 23) 高麗史 世家卷 2 惠宗 元年 惠宗 以穀七萬硕 納諸大寺院 各置佛名 經寶及廣學寶 以勸學法者 24) 高麗史節要 卷 2 成宗 元年 6月 崔承老上書 佛寶錢穀 諸寺僧人 各於州郡 差人勾當 逐年息利 勞擾百姓 請 皆禁之 以其錢穀 移置寺院田莊 若其主典有田丁者並取之 以屬于寺院莊所 則 民弊稍减矣

213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한 후 宋나라와의 교역이 처음으로 열린 것은 962년(高麗 光宗 13년, 宋나라 太祖 3년)부터였다. 두 나라 사이에 외교관계가 수 립된 것은 遼 金 등 북방 유목민족과의 정치적 관계 때문이기도 하 였고, 따라서 공식적인 외교관계는 국가 사이의 정책적 변화에 따 라 끊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간 중심의 교역관계는 비교적 외 교관계의 영향을 덜 받으면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高麗와 宋나라 사이의 민간 상인의 교역관계를 이와 같이 활발하게 한 원인은 두 나라 측이 모두 가지고 있었다. 高麗측의 경우 新羅시대부터의 활발하였던 해상활동을 계승하여 太祖 초부터 벌써 中國측과의 교역을 벌일 수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太祖 7년에 이미 高麗의 상선이 中國의 登州에 가서 교역을 하였으며, 같은 해에 高麗의 使船이 靑州에 가서 무 역을 벌인 기록이 있는 것이다.25) 한편 이와 같이 건국초기부터 활발히 전개된 高麗 민간상인들의 외국무역은 高麗왕조의 기반이 확고해짐에 따라 더욱 발전하였고 마침내 역사상 가장 활발한 외 국무역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朝鮮시대에는 철저한 쇄국주의 때 문에 민간상인들의 대외무역이 전혀 금지되었던 사실과 비교해 보 면, 高麗 가 한반도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외부세계에 알려지게 한 高麗 상인들의 대외활동은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며, 그 활동의 중심 대상지가 바로 宋나라였던 것이다. 한편 宋나라의 경우도 북방에 있어서의 遼 金과의 대치상태에도 불구하고 국내상업이 크게 발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부가 적극 對 外貿易을 장려하였다. 특히 高麗와의 사이에는 비록 민간상인이라 하더라도 遼 金과의 외교관계와 관련하여 공식 외교의 일익을 담 당하는 경우도 있어서 그 교역이 특히 활발하였다. 25) 册府元龜 卷 999 互市條 金庠基著 高麗時代史 東國文化史 200面 註

214 3. 商業과 對外貿易 한반도와 中國 사이의 항로는 고대사회에서부터 이미 열려 있었 고, 특히 統一新羅시대를 통하여 더욱 발달하였지만 高麗시대에도 그것을 이어받아 대개 北線航路와 南線航路의 두 길을 이용하였 다. 北線航路는 대체로 王朝의 초기에 사용된 항로로서 禮成江에 서 黃海道의 甕津 앞바다를 돌아 大同江口의 椒島에 이르고, 여기 에서 西南쪽으로 직선으로 항해하여 中國의 登州 山東 방면으로 가는 항로였다. 이 항로는 新羅시대에도 가장 빈번하게 이용되던 것으로서 高麗 초기에 그대로 계속된 것이다. 한편 南線航路는 禮成江에서 西海岸의 도서지역을 거쳐 黑山島 에 이르고 여기에서 西南쪽으로 항해하여 中國의 明州에 도착하는 항로였다. 南線航路는 대체로 王朝의 후기에 많이 이용된 항로로 서 대개 高麗 및 宋나라와 遼 金과의 관계가 악화하여 北線航路의 이용이 위험해짐으로써 개척된 항로라 생각되기도 하지만, 한편 이 항로가 항해에 편리하고 또 무거운 화물을 많이 적재할 수 있 기 때문에 개척된 것이라 생각되고 있기도 하다.26) 뿐만 아니라 이 무렵에는 南中國沿岸에 서남아시아제국과의 무역이 크게 발달 하고 있어서 高麗의 對宋貿易 중심지가 되고 있었으므로 이곳에 직접 갈 수 있는 항로의 개척이 요청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高麗와 宋나라 사이에 안전한 항로가 열리게 되자 高麗의 상인 들이 이 항로를 통하여 특히 南中國地域과 교역을 벌여 중국상품 은 물론 그곳에 모여드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상품을 무역하여 高 麗의 문화와 경제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高麗상인의 활동도 활발하였지만 高麗와 宋나라 사이의 무역 활동은 대체로 宋나라 상인들이 그 주도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宋나라 상인들이 高麗와의 무역에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26) 震檀學會 韓國史 中世篇 390면 참조

215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것은 대체로 11세기 초엽, 즉 高麗 顯宗 때부터였다. 1014년(顯宗 3) 부터 1278년 (忠烈王 4)까지 약 260여년 동안에 高麗에 온 宋나라 상인의 수를 高麗측의 기록에 의해서만 통계하여도 약 5 천여 명에 이르고 있으며, 그들이 온 回數도 120여회나 된다.27) 그리고 宋나라상인은 일년 중 7월부터 8월 사이에 가장 많이 왔던 것으로 통계된다. 기록상에 나타나는 120여회의 내항횟수 중 7월과 8월에 온 것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 체 로 이 시기의 西南 季節風을 이용하여 항해한 데 원인이 있으 며, 이 밖에도 특히 11월에 내항한 예가 많은데 그것은 이때 高麗 에 서 국가적 행사로 실시되는 八關會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라 생 각 되고 있다.28) 宋나라 상인들의 고려와의 무역은 대개 高麗정부를 대상으로 하 여 方物 土物 등을 바치고 下賜品을 받아 가는 일종의 進獻貿易과 高麗의 민간상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역으로 나눌 수 있다. 진헌무 역은 八關會 때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八關會 행사가 실시되 면 으례 宋商을 비롯한 女眞人 耽羅人 등이 方物을 바치는 순서가 있었고 高麗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下賜品을 내렸다. 宋나라 상인 들과 高麗의 민간상인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역도 활발하였던 것이라 추측된다. 宋나라측의 기록에 의하면 開城에는 중국인 수 백명이 있는데 福建地方 사람이 많으며 상행위를 목적으로 온 사 람을 가만히 그 능력을 시험해 보고 祿과 벼슬로 유인하거나 혹은 억지로 평생 머물게 한다고 하였다.29) 고려에 중국인으로서 귀화 한 사람이 많은 것은 이들 상인의 귀화가 많았기 때문이라 할 것 27) 金庠基著 東方文化交流史論攷 65面 28) 同上 66面 참조 29) 宋史 高麗傳 王城有華人數百 多閩人 因質舶至者 密試其所能 誘以祿仕 或強 留之終身云云

216 3. 商業과 對外貿易 이다. 高麗에 내항한 宋나라 상인은 남중국의 泉州와 福州 明州 臺 州 지방 출신이 많았다. 高麗와 宋나라와의 무역에 서로 거래된 상품은 宋나라 상인이 高麗의 조정에 바친 進獻品과 高麗 조정이 그들에게 내린 下賜品 을 통하여 추측할 수 있다. 高麗에서 宋나라 상인들에게 하사하는 물품은 金 銀 銅 人参 松子 皮物 漆器 硫黃 苧麻布 紙物 螺鈿器 扇子 莞草席 金銀粧刀 筆墨 등을 들 수 있다. 민간무역에 있어서 도 대체로 이들 물품이 수출된 것이라 하겠다. 반면 宋나라 상인 들이 高麗의 조정에 바친 물품은 綾絹綿羅 등 각종 비단과 특히 宋나라 시대에 발달한 磁器를 비롯하여 藥材 書籍 樂器 衣帶 玉 犀 鞍馬 茶 燭 등을 들 수 있다. 민간의 교역에 있어서도 비단과 약재 등이 그 대종을 이루었을 것이다. 한편 宋나라 상인들은 中國의 생산품만을 高麗에 수출하는 것 이 아니라 서남아시아지역의 생산품을 仲介貿易하기도 하였다. 그 상품은 대개 香藥 沈香 犀角 象牙와 鸚鵡 孔雀 등의 鳥類 등이었 는데, 그것은 아라비아 쟈바 등지의 상인에 의하여 남중국지방에 전래된 것이었다. 宋나라 상인들이 高麗에 가져 오는 상품은 그 대부분이 高麗 귀 족들의 생활품이어서 그들의 사치생활에 충당되었다. 따라서 宋나 라 상인들의 교역 때문에 高麗의 재정적인 손실이 컸음도 간과할 수 없다. 예를 들면 1107년(睿宗 2)에 궁중의 사치생활을 위하여 花園을 만들고 각종 화초를 재배하는 한편 宋나라 상인에게서 사 치품을 사들여서 內带金幣가 허비된다 하였다.30) 1231년(高宗 18)에도 宋나라 상인이 집권자 崔璃에게 水牛 4마리를 바쳤던 바 30) 高麗史 卷 13 睿宗 2年 2月 庚寅條 置花園二于宮南西 時宦寺 競以奢侈媚王 起台榭峻垣墻 括民家花草 移栽 其中 以爲不足 又購於宋商 費內帑金幣不貲

217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崔璃는 그 댓가로 人蔘 50근과 廣布 300필을 준 기록이 있다.31) 宋나라 상인들의 高麗에의 내항이 빈번하고 그 수가 많아짐에 따 라 자연히 밀무역도 성행하였던 것 같다. 1205년(熙宗 1)에는 禮 成江의 監檢御史 安院이 宋나라 상인의 밀수상품을 적발하여 그 들에게 笞刑을 가한 기록이 있다.32) 王 宋나라 상인들의 무역품 이 高麗 官府의 수탈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1260년 (元宗 1)에는 宋나라 상인 陳文廣 등이 大府寺와 內侍院에게 綾 羅絹 6000여필을 빼앗기고 당시의 집권자인 金仁俊에게 호소하였 으나, 그도 그것을 금할 수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33) 武臣政權이 무너지고 蒙古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宋나라 상인들이 여러가 지 핍박을 받게 된 것이라 생각되며, 이와 같은 사정이 곧 高麗와 宋나라 사이의 교역을 쇠퇴시킨 원인이 된 것이다. 2) 契丹 및 女眞과의 交易 高麗와 契丹과의 교섭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은 922년(太祖 5) 에 契丹이 낙타와 말, 그리고 모직물을 보내옴으로써 시작되었 다.34) 그러나 契丹이 渤海를 멸망시키고 高麗의 북진정책과 충돌 함으로써 처음부터 두 나라 사이의 평화적인 교역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924년(太祖 25)에 契丹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낙타 50필 을 바쳤을 때 高麗측에서 그 사신 일행을 귀양보내고 낙타를 모두 굶어 죽게 한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35) 이와 같은 두 31) 高麗史節要 卷 16 高宗 18年 7月條 宋商 獻水牛四頭 崔璃給人參五十斤 廣布三百匹 32) 高麗史 世家卷 21 熙宗 元年 8月條 宋商船 將發禮成江 監檢御史安琓 行視闌出之物 得犯禁 宋商數人 笞之太甚 33) 高藤史 世家卷 25 元宗 元年 10月 甲寅條 宋商陳文廣等 不堪大府寺 內侍院侵奪 道訴金仁俊曰 不予直而取綾羅絲絹六千 餘匹 我等將垂橐而歸 仁俊等 不能禁. 34) 高麗史 世家卷 1 太祖 5年 2月條

218 3. 商業과 對外貿易 나라의 관계가 결국 여러 차례의 무력충돌을 가져오게 하였던 것 이다.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이 끝난 후 피차간에 사절이 왕래하였지만 교역은 역시 활발하지 못하였다. 유목민족으로서의 契丹은 농경민 사회인 高麗에 대하여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進貢이나 開市貿易 등 여러가지 방법의 교역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高麗측 으로서는 宋나라와의 교역에서 그 경제적 문화적 욕구를 충족하 고 있었으므로 契丹과의 관계는 탐탁치 않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契丹측이 압록강 연안에 互市場을 설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모 두 거절하고 끝까지 의례적인 소위 國信物을 교환하는 데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國信物의 교환에 있어서 高麗정부가 契丹에게 보낸 물품은 명시 된 기록이 없으나 契丹측에서 高麗에 보낸 물품은 대체로 車輅 冠 服 腰帶 絹織物 鞍具 馬匹 銀器 弓箭 羊 등이었다. 전후 200년간 에 걸친 高麗와 契丹과의 관계는 대부분 긴장상태가 계속될 뿐이 어서 통상과 무역관계에 있어서는 그다지 긴밀하지 못하였다. 한편 高麗와 女眞과의 관계는 契丹과의 그것에 비하여 훨씬 오 래고 밀접한 것이었다. 高句麗의 지배를 받은 靺鞨의 후신인 女眞 역시 목축생활 중심의 부족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농경사회인 고려에 대하여 부단하게 경제적 문화적 혜택을 입지 않을 수 없었 으며 따라서 두 지역 사이의 교역은 간단없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高麗와 女眞과의 사이에 교역이 이루어진 최초의 기록은 10세 기 중엽에 나타난다. 즉 948년(定宗 3)에 東女眞의 大匡 蘇無盖 35) 高麗史 世家卷 2 太租 25年 10月條 契丹遣使來遣槖駝五十匹 王以契丹嘗與渤海連和 忽生疑貳 背盟殄滅 此甚無道 不足遠結爲隣 遂絶交聘 流其使三十人于海島 繫槖駝萬夫橋下 皆餓死

219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등이 말 700필과 方物을 가져와서 바쳤다. 이에 高麗 조정에서는 이들 말을 3등으로 나누어 값을 치르었는데, 1등 말은 銀注子와 錦 絹 각 1필을, 2등 말은 銀鉢과 錦 絹 각 1필을, 3등 말은 錦 絹 각 1필을 준 기록이 있다.36) 이후 女眞의 각 부족은 高麗와의 교역을 계속하여 주로 馬匹과 鐵甲 蕃米 麩金 弓矢 船舶 豹皮 水獺皮 靑鼠皮 駱駝 黃毛 등을 진 헌하였다. 특히 高麗정부가 女眞에 대하여 討伐과 慰撫정책을 아 울러 실시하면서 內附해 오는 女眞부족에 대해서는 納貢의 방법 을 통한 高麗와의 교역을 권장하였으므로 內附하는 부족이 많아 짐에 따라 교역의 폭이 넓어 갔다. 高麗에 內附하는 여진 부족에 대하여 納貢 형식의 교역을 허가하 는 경우 일정한 제한을 가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1081년(文宗 35)에 東女眞의 酋長 陳順 등 23명이 와서 말을 바쳤는데 이때부 터 여진인이 조공을 바치러 오는 경우 15일 이상 서울에 머물지 못하게 하였다.37) 여진인들이 진헌물을 가지고 開城에 오면 이들 을 客館에 머물게 하고 관리의 입회 아래 물품을 교환하게 하였던 것이라 추측되며, 이와 같은 방법의 교역이 金나라가 성립될 때까 지 계속 되었던 것이다. 1115년(睿宗 10)에 完顔部의 阿骨打에 의하여 金나라가 건국 되고 난 다음에는 高麗와의 교역관계도 종래의 納貢의 방법에서 宋나라의 경우와 같은 國信物 교역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女眞 때 와 같이 저쪽에서만 일방적으로 교역을 위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 36) 高麗史 世家卷 1 定宗 3후 9月條 東女眞大匡蘇無盖等 來獻馬七百匹及方物 王御天德殿閱馬 爲三等評定其價 馬一 等 銀注子一事 錦絹各一匹 二等 銀鉢一事 錦絹各一匹 三等 錦絹各一匹 37) 高麗史 卷 9 文宗 35年 5月條 東女眞酋長陳順等二十三人來獻馬 制曰 凡蕃人來朝者 留京毋過十五日 並令起 館 以爲永式

220 3. 商業과 對外貿易 高麗 측에서도 사신이 파견되어 일종의 使行貿易이 실시된 것이 었다. 1183년(明宗 13)의 한 기록에 의하면 매년 金나라 사신으 로 가는 사람들이 상품 교역의 이익을 노려 국내의 토산품을 많이 가져가므로 그것을 수송하는데 많은 폐단이 생긴다 하여, 그 폐단 을 없애기 위하여 사신이 휴대할 수 있는 물품의 양을 제한하고 그것을 어긴 사람은 파면시킬 것을 정하였으나, 사신 일행의 요청 에 의하여 그들의 휴대품의 양이 다시 옛과 같이 되었다고 한 다.38) 金나라의 건국이 이루어진 후에는 두 나라의 사신의 왕래와 관 련하여 私貿易도 상당히 발달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高麗와 宋나 라 그리고 金나라 사이의 삼각 외교관계가 미묘하여 高麗측으로 서는 언제나 중립정책을 취하였으므로 교역관계도 이와 같은 외 교적 문제에 제약되어 항상 일정한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라 하겠다. 3) 蒙古와의 교역 蒙古는 高麗와 관계를 맺게 되자 우선 그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 기에 급급하였다. 蒙古의 공격으로 金나라가 약화되자 그것에 복속 되어 있던 契丹의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이 몽고군에게 쫓겨 高麗 경내로 도망해 옴으로써 그들에 대한 토벌작전에서 蒙 古군과 고려군은 처음 만났고, 이를 계기로 하여 두 나라 사이의 교섭이 열렸다. 蒙古는 교섭 당초부터 高麗에 대하여 과중한 공물 의 납부를 요구하였다. 1221년(高宗 8)에 高麗에 온 蒙古의 사신 著古與 일행은 수달피 10,000領, 細轴 3,000필, 細苧 2,000필, 緜 38) 高麗史節要 卷 12 明宗 13年 8月條 宰樞奏 每歲奉使如金者 利於懋遷 多齋土物 轉輸之弊 驛吏苦之 挾帶私樻 宜有定 額 違者奪職 從之 居無何 將軍李文中 韓正修等 使金 恐失厚利 請復舊例 王又許之

221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子 10,000근, 龍團墨 10,000정, 筆 200자루, 紙物 100,000장, 梁 料인 紫草 5근과 葒花 藍荀 朱紅 등 각 50근, 그 밖에 雌黃 光㯃 桐 油 등 각 10근을 요구하였다.39) 이 경우는 물론 교역이 아니고 일방적인 진헌물의 요구이지만 그것을 통하여 蒙古가 필요로 한 高麗의 생산품을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교섭이 열린 당초에 있어서의 高麗와 蒙古와의 교역관계는 몽고 측의 일방적인 요구에 의한 이와 같은 收奪的인 것이었고, 그것에 대하여 고려정부가 어느 정도 응하였지만 결국에는 무력침략을 받 게 되었다. 무력 침략이 계속됨에 따라 高麗정부는 江華島로 들어 가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 동안 거의 모든 국토가 몽고군의 점령하 에 들어가 무제한적인 약탈이 감행되었다. 武臣政權이 무너지고 蒙古와의 화의가 이루어진 후 공납 형식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忠烈王 때 蒙古의 황제에게 바친 물건을 보면 金盞 銀鏤葵花盞 金瓶 金鏤銀尊 壺 湯瓶 酒瓶 半鏤銀尊 胡瓶 銀盂 銀鍾 紫羅 細苧 豹皮 水獺皮 등으로 되어 있다.40) 이들 물품은 蒙 古 成宗의 即位式에 대한 진헌물로 바친 것인데, 蒙古 황실에서는 그 댓가로 銀 30,000냥을 하사하였다. 高麗가 蒙古와 화의를 맺고 두 왕실 사이에 결혼관계가 이루어 진 후에는 高麗王과 왕족들의 몽고행이 잦았고 그때마다 많은 수행 원들이 따라가서 교역행위를 하였다. 1285년(忠烈王 22)의 경우를 39) 高麗史 世家卷 22 高宗 8年 8月 乙未修 蒙古使著古與等十三人 東眞八人 幷婦女一人來. 甲子王迎詔于大觀殿 蒙古皇 太弟鈞旨 索獺皮一萬領 細紬三千匹 細苧二千匹 綿子一萬觔 龍團墨一千丁 筆二 百管 紙十萬張 紫草五觔 葒花. 藍筍 朱紅各五十觔 雌黃 光漆 桐油各十觔 40) 高麗史 卷 31 忠烈王 20年 4月條 王與公主 如上都 皇迎太子 甲午 皇太子 卽皇帝位 是爲成宗. 王與公主 獻金盞 銀鏤 葵花盞 各一副 金甁 金鏤銀尊 壺 湯甁 酒甁各一事 半鏤銀尊 胡甁各一事 銀盂八 十一事 銀鍾十八事 紫羅九匹 細苧八十六匹 豹皮十八領 水獺皮八十一領 乙 巳 帝賜王銀三萬兩

222 3. 商業과 對外貿易 예로 들면 왕과 元나라 출신 왕비가 蒙古에 갈 때 이를 수행한 사람 은 從臣 243명, 傔從 590명이며 이에 필요한 말이 990필이나 되 었다. 그리고 이때 바친 方物은 金鍾 金瓶 各 2事, 鏤銀壶 銀湯瓶 各 1事, 銀盞 1副, 銀胡瓶 銀大樽 各 1事, 半鍵銀胡瓶 2事, 銀大鍾 1事, 銀盂 50事, 虎豹皮 各 13領, 水獺皮 76領, 紫羅 10匹, 白苧布 100 匹, 玳瑁鞘子 10遂 등이었고, 이와 같은 方物에 대한 답례품은 왕 에게 金 4錠, 金段 2匹, 絹 2匹을 내리는 한편 從臣들에게는 銀 50 錠, 金段 18匹, 繡段 10匹, 綾素段 578匹, 絹 486匹을 내리고, 또 婦寺에게 綾絹 27匹을, 그리고 僕從들에게 木縣과 絹 각 411匹을 내렸다.41) 方物과 下賜品의 교환은 곧 高麗와 蒙古 사이의 공식적인 교역 관계라 할 수 있겠지만, 한편 이와 같은 공식적 교역 이외에도 200 명이 넘는 從臣과 특히 600명에 가까운 傔從들에 의하여 사사로운 교역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高麗와 蒙古와의 교역은 두 나라 왕실 사이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대개 宮中貿易 중심으로 유지되었던 것 같다. 忠惠王 때의 기록에 의하면 內帑金을 가지고 元나라에 드나들면서 상행위를 하는 사람 들에게 모두 將軍職을 준 기록이 있다.42) 蒙古와의 교역이 왕실 의 자본을 사용하는 어용상인에 의하여 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다만 이 교역에 있어서의 왕실의 역할이 대금업적인 것이었는지 혹은 직접 그것을 지휘하였는지는 의문이다. 결국 高 麗와 蒙古와의 교역은 두 나라의 정부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方物과 下賜品의 형식을 통한 것과, 두 나라 사이의 使行에 수행하는 상 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경우로 나눌 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도 41) 高麗史 卷 31 忠烈王 22年 12月條 42) 高麗史 卷 36 忠惠王 4年 9月條 以商賈 賫內帑入元行販 並授將軍

223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그 자금은 주로 왕실에서 조달된 것이라 할 것이다. 4) 日本 및 大食國과의 교역 高麗의 건국 당초에는 日本과의 교역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976년(光宗 26)에 日本의 交易使가 고려에 왔었다 는 기록이 있으나 구체적으로 교역을 한 내용은 없으며,43) 이후 11세기 즉 高麗의 文宗時代에 이르기까지는 뚜렷한 교역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高麗와 日本과의 교역관계가 기록상에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文 宗 10년(1056)에 榺原朝臣 賴臣 등 30명 이 金州 즉 지금의 金海 에 왔던 일부터라 하겠다.44) 이 때 어떤 물품들이 교환되었는지 전 하지 않지만 金海지방에는 日本의 사절을 위한 客館이 있었던 것 같다. 日本과의 교역물품 종류가 밝혀져 있는 기록은 이보다 17년 후 즉 1073년(文宗 27)에 보인다. 이때의 東南海都部署의 보고에 의하면 日本國人 王則貞과 松永 年 등 42명이 와서 螺鈿鞍橋 刀 鍾匣 碩箱 櫛 書案 畵屛 香爐 弓箭水螺 甲 등을 바칠 것을 청하고 壹岐島 句當官도 藤井安國 등 33명을 보 내어 方物을 바치려 하였다. 이에 高麗정부에서는 이들이 海路로 서 울까지 올 수 있게 허가하였다.45) 이때 온 王則貞은 日本측 기록에 의하여 상인이었음이 분명하며 그는 文宗 34년 (1080)에도 高麗에 온 기록이 있다. 즉 이때 高麗의 禮賓省에서는 文宗의 風疾을 치료 43) 日本紀略 後篇 6 天延 2年 閏10月 甲戌條 44) 高麗史 卷 7 文宗 10年 10月 己酉 日本國使 正上位權隷 滕原朝臣賴忠等 三十人 來館于金州 45) 高麗史 卷 9 文宗 27年 7月條 東南海都部署奏 日本國人王則貞 松永年等 四十二人來 請進螺鈿鞍橋 刀 鐘鏡 匣 硯箱 櫛 書案 畵屛 香爐 弓箭 水銀螺甲等物 壹歧島勾當官 遣藤井安國等三 十三人 亦請獻方物東宮及諸令公府 制許由海道至京

224 3. 商業과 對外貿易 하기 위하여 倭商 王則貞에게 牒을 주어 日本측에서 醫人을 구하 려 하였으나 日本에서는 그 牒書에 그들을 경멸한 문구가 있다는 이유와 정식 사신을 파견하지 않고 상인편을 이용하였다는 이유로 醫人의 파견을 거절하였다는 것이다.46) 어떻든 이 무렵부터는 민강상인에 의한 日本과의 교역이 점점 빈번해졌다. 王則貞 등이 온 다음해에도 日本의 船頭 重利 등 39명 이 와서 물건을 바쳤고,47) 그 다음해에도 日本상인 大江 등 18명과 朝元時經 등 12명이 와서 土物을 바쳤으며 또 59명의 일본상인이 왔다는 기록이 있다.48) 武臣政權 시대에 들어가서 반독립적 위치를 가지고 있던 각 지방의 추장들, 특히 九州地方의 추장들이 高麗와의 교역을 벌림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교역관계가 활발해진 것이었다. 11세기 중엽, 특히 文宗時代를 통하여 日本측과의 교역이 가장 빈번하였지만 이후에도 그것은 다소 빈도가 떨어지기는 하였지만 꾸준히 계속되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 1084년(宣宗 元년)에 日 本의 筑前州 상인 信通 등이 水銀 250근을 바친 것을49) 비롯하여 1085년(宣宗 2)에는 對馬島의 句當官이 사신을 보내어 柑橘을 바쳤 고50) 이보다 2년 뒤에도 日本상인 重元 親宗 등 32명이 와서 方物 을 바쳤고,51) 또 대마도의 元平 등 40명이 와서 東南道都部署에 眞珠 水銀 寶刀 牛馬 등을 바쳤으며52) 다시 2년 후에는 日本 大宰 府의 상인이 와서 水銀 眞珠 弓箭 刀劒을 바쳤다.53) 46) 金庠基著 高麗時代史 198面 참조 47) 高麗史 卷 9 文宗 28年 2月條 日本國船頭重利等三十九人 來獻土物 48) 高麗史 卷 9 文宗 29年 閨4月條 6月條 7月條 참조 49) 高麗史 卷 10 宣宗 元年 6月條 50) 同上 卷 10 宣宗 2年 2月條 51) 同上 卷 10 宣宗 4年 3月條 52) 同上 卷 10 宣宗 4年 7月條 53) 同上 卷 10 宣宗 6年 8月條

225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 基盤 이후에도 두 나라 사이의 민간상인들에 의한 교역은 일정 한 수 준대로 유지되었으며 그것은 대체로 高麗말기의 倭寇 침략기까지 계 속되었다. 高麗와의 교역에 실제로 참여한 일본상인은 대체로 日 本 중앙정부나 지방 추장세력의 보호를 받거나 그 어용적인 상인 들이었다고 생각되지만, 倭寇는 대체로 이들의 기반에서 벗어난 일부의 海賊 세력이었으며 따라서 왜구의 날뜀이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을 끊어지게 하였던 것이다. 高宗 14년(1227)에는 曰本國에 서 國書를 보내어 倭寇의 침략행위를 사과하고 다시 修好하고 互 市할 것을 청원한 일이 있다.54) 그러나 이후 왜구의 침략은 계속 빈번 해졌고 따라서 정부 사이의 혹은 민간상인 사이의 교역은 완 전히 단절된 것이다. 大食國 즉 사라센帝國의 상인들이 宋나라와 교역관계를 맺어 오 다가 宋나라 상인들의 高麗 진출에 힘입어 高麗에까지 그 무역로 를 연장하게 되었다. 大食國人이 高麗에 처음 나타난 것은 1024년 (顯宗 15)이었다. 이해에 悅羅慈 등 100명의 大食國인이 高麗에 와서 方物을 바쳤다.55) 100명의 大食國인이 본국에서부터 高麗와 의 교역을 목적으로 출발하였는지, 宋나라에 와 있던 상인이 모여 왔는지 의문이지만 처음으로 교역을 열면서 100명이나 왔던 사실 은 그 교역의 규모도 그만큼 컸음을 짐작하게 한다. 더구나 다음해 두번째의 내항 때도 역시 夏詵羅慈 등 100명이 와서 方物을 바쳤 음은56) 흥미롭다. 100명씩 두 차례 내항한 大食國상인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바치고 또 무엇을 가져갔는지 알 수 없지만, 大食國상인의 교역품목이 밝혀 54) 同上 卷 22 高宗 14年 5月條 日本國寄書謝賊船冠邊之罪 仍請修好互市 55) 同上 卷 5 顯宗 15年 9月條 56) 同上 卷 5 顯宗 16年 9月條

226 3. 商業과 對外貿易 진 것은 그들의 세번째 내항 때였다. 즉 靖宗 6년(1040)에 大食 國 客商 保那盍 등이 와서 水銀 龍齒 占城香 沒藥 大蘇木 등을 바쳤는데 이 에 대하여 高麗측에서는 金帛을 후하게 내렸다 한다.57) 大食國 상 인들이 高麗에 내항한 기록은 단 세번밖에 없지만 그것은 高麗시대 대외무역이 폭이 넓고 다양하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姜 萬 吉 57) 同上 卷 6 靖宗 6年 11月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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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1. 中間階層 2. 農民과 村落 3. 賤民 4. 家族制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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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1. 中間階層 1. 中間階層 (1) 高麗前期의 體制整備와 中間階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사회구조 속에는 대체로 中間階 層 으로 표현해 볼 수 있는 사회계층이 있기 마련이다. 高麗時代 에도 그 지 배구조상 넓은 의미에서는 지배계층의 영역에 들면서 도 실제로는 핵심지배층이 피지배층을 통치함에 있어서 中間的 役割 내지는 補助的 任務 를 담당하고 신분적으로도 그 사이 에 介在하는 tt# 身分層이 있어 왔다. 여기서 中間階層 이라 일컬음은 바로 그러한 高麗시대의 사회 계층을 의미하고자 하는 것이 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高麗의 정치질서가 어느 정도 정비된 후에 있어서 中央各司의 末端行政 實 務者인 胥吏, 常備的 正規軍의 下級將校, 宮中의 內僚職인 南班, 그리고 地方의 土着 行政擔當者인 鄉吏 등 高麗의 통 치 체제에서 下級職役을 담당하던 사회집단이 그에 해당되는 것으 로 이러한 부류를 한데 뭉뚱그려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1) 高麗시대의 이러한 중간계층은 물론 羅末麗初의 사회변동에 부 응하면서 豪族聯合的인 고려왕조의 새로운 질서가 출발하던 建國 期에 이미 그淵源이 이루어졌다. 즉 거의 독자적이던 羅末의 豪族 勢力이 민중을 통치함에 있어서 그 일선을 담당하던, 따라서 당시로 서는 중간계층이라고도 할 수 있는, 群小土豪들이 大土豪와 구분되 어 高麗왕조의 새로운 체제에 吸收編制됨으로써 고려시대의 중간 1) 高麗시대의 경우 中間階層이란 아직 역사적으로 개념화 된 예가 없다

231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계층은 그 바탕이 마련된 셈이었다. 이러한 초기 중간계층은 대체로 光宗代부터 적극화되어 成宗代 를 지나면서 그 윤곽이 확연해지는 高麗의 集權的 官僚體制의 정 비과정에서 그에 적응하면서 高麗시대의 중간계층으로서 새로운 성격을 구비해 갔다. 우선 관직체제의 정비에 따라 초기의 중간계 층에 해당되던 群小土豪들에게는 大土豪勢力과의 前代的 인연에서 벗어나 새로이 제시되는 관료적 국가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지배 계층으로서의 보편적 자격이 일단 부여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일면 현실적으로는, 그 관료체제에 따른職分의 분화과정에서 전대 로부터의 신분적 屬性에서 오는 制約과 결부되는 가운데 대부분의 경우 그 통치체제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중간 역할의 職任으로 구 속되어 갔다. 즉 그 대부분이 관료적 국가운영 에서 오는 새로운 지배신분층으로서의 官 이 대두됨에 官의 범주에 들면서도 그 말단인 胥吏, 鄕吏등에 奉職하게 되었다. 그리고 公職上 最末端의 일부는 役으로, 또 公職에 미처 참여하지 못한 경우는 庶 로 官 과 분리되어 피지배층으로 전락 고정되어 가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高麗시대의 중간계층은 결과적으로 초기 군소토호층을 그 계층적 바탕으로 하면서, 또 공직참여의 일반적 자격을 지니면 서도 실제로는 官 의 범주에 드는 공직상의 실무직인 胥吏 將 校 南班 鄕吏 등의 직제를 통한 새로운 성격상의 범주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관료체제적 신분분화에 따른 중간 계층적 사회집단은 대략 顯宗代이후 高麗의 중앙 고급관료집단이 文班을 정점으로 하는 貴族化의 경향을 보임에 그 예하에서 신분 적 속박이 더욱 가중되었다. 대략 文宗代를 전후한 체제의 개편은 바로 그러한 새로운 高麗사회의 계층분화를 일단 마무리 짓는 것 이라고도 생각된다

232 1. 中間階層 1) 豪族聯合政權의 成立期 高麗왕조의 성립기는 新羅 下代의 정치 사회적 혼란 속에서 새로 운 지배세력이 浮上하던 시기이다. 新羅진골귀족의 왕위 쟁탈, 후 삼국의 鼎立 등 연이은 동란 속에서 新羅的 질서가 마비되어 감에 따라 新羅의 국가운영에 있어서 주로 실무를 관장했던, 제2의 계급 이라고도 할 수 있는, 六頭品 계열의 지식인들은 좀더 職能爲主의 새로운 질서를 주창하면서 신분적으로 상승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와 병행하여 지방의 전통적 實權者였던 토호세력들은 그들 지식 인들과 연결되면서 地域社會에서나마 이제 정치 사회적인 면에서 최고 主宰者로 군림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지배세력들은 그들의 지배자로서의 입장을 영속시 킬 수 있는 사회적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그 지배자적 위치의 표시로서 姓氏를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그 閥族의 유래를 명확히 하고자 世系譜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영역의 표시로서 本貫을 칭하였으며 新羅의 宗姓으로 外居하여 토착화한 세력들도 分貫으로써 독자적인 입장을 뚜렷이 하였다.2)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회적 움직임은 高麗 太祖의 중첩된 각 지 대토호 세력과의 결혼에서 시사되듯이 새로운 階層運動이 일 어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상호관계의 새로운 정 립을 위하여 儒學이 한층 강조되었으며, 그에 따라 각지의 호족들 에게도 그들의 기본적 소양으로 儒敎的 倫理가 받아들여지기 시 작하였다.3) 한편 이러한 새로운 세력의 성장 속에서 新羅의 권위가 2) 金哲俊 新羅時代의 親族集團 韓國史硏究 1 (1968) p.77 李基白 新羅 六頭品硏究 省谷論叢 2 (1971) 金光洙 高麗太祖의 三韓功臣 史學志 7 (1973) p.53 3) 金光洙 羅末麗初의 地方學校問題 韓國史硏究 7 (1972)

233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甄萱 弓裔 등의 新政權에 의해 직접적으로 도전받기 시작하는 眞 聖女王代를 지나면서부터는 四方의 대토호세력은 城主 將軍 등을 칭하면서 그 독립적 자세를 뚜렷이 하여갔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국가적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民衆統 治를 위하여 侍郞 卿 郞中 員外郞 大監 등으로 이루어진 마치 新 羅 관제를 방불케하는 독립된 官府마저 가졌다. 그리고 그 관부의 운영자들은 대체로 新羅의 지방 말단행정 실무자가 그러했듯이 土着 村主級의 群小土豪들로 짜여졌던 것이다.4) 그런데 이러한 羅末의 사회변동 속에서 高麗초기의 지배계층은 위와 같은 호족세력의 내적 지배구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미 그 권력 구조에 따라 권력의 主宰者로서의 城主 將軍級의 대토호 와 그 施行者로서의 일반 村主級의 群小土豪둘로 상하 2층으로 나뉘어진 셈이었다. 따라서 그 중 下位의 群小土豪들의 경우는 당 시로서는 그 나름대로 바로 중간계층적 의미를 갖는다고도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또한 앞으로 전개될 高麗사회의 중간계층의 淵源 을 이르는 계층이기도 한 것이다. 잠시 高麗 건국기의 사회변동의 일면을 살펴보았거니와 高麗왕 조의 성립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토호적 기반 위에 構築된 것이다. 또 그 韓半島의 재통일 역시 이러한 사회적 전환 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진행되었고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高麗왕조의 통일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豪族聯合政權의 수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룩되는 새로운 高麗사회의 질서는 사실상 위와 같은 사회 변동의 추세를 高麗왕조 중심으로 이끄는데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실제 高麗 太祖는 통일과 더불어 論功行賞의 의미를 지니는 것 4) 金光洙 羅末麗初의 地方學校問題 pp

234 1. 中間階層 이지만, 실질적인 면에서는 그에게 협조했던 전국의 대토호세력을 망라하여 高麗왕실과 君臣관계로 연결짓는, 三韓功臣을 등급지어 책정함으로써 새로운 高麗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신분층의 구 축을 획책하였다. 그리고 그들 대토호들간에는 결혼을 권장하는 등의 방법으로 지배신분층의 의미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또 현실 적인 면에서도 그들 대토호출신의 功臣勢力에게는 事審官이라는 명칭으로 그들이 지방사회에서 지녔던 旣存의 지배권을 留保하여 줌으로써 명실공히 제1의 지배신분층임을 인정하였던 것이다.5) 한편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앞서 그들 대토호세력의 예하에서 민중 통치의 一線을 담당하였던 보다 格이 떨어지는 村主계열의 군소토 호들은, 후대의 예이지만, 副戶長 이하의 任免權이 事審官에게 주 어지고 있다는데서 알 수 있듯이 事蕃官을 통 하여 高麗의 통치 질서에 重層的으로 연결되었 다. 다시말하자면 이들 지방의 통치에 있어서 실무자인 군소토호들은 대토호세력과의 사이에 일단의 격차를 두고 새로운 高麗의 사회질서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초기 지배계 층의 重層的 구조는 당시 모든 지배계층의 位 階秩序였던 麗初의 官階에서도 뚜렷이 나타나 고 있다. 오른편 도표는 바로 그 초기 官階이다. 그것은 이미 泰封 때 마련되었던 것으로 高麗에서 襲用 한 것인데 원래는 9등급이었던 것이 통일후 16 등급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런데 그 중 元尹 이 상은 대체로 전술한 바 城主 將軍級의 대토호 및 5) 金光洙 高麗太祖의 三韓功臣 麗初의 官階 統一前 統一後 三重大匡 重大匡 大匡 大匡 正匡 大丞 大丞 佐丞 大相 大相 元甫 元甫 正甫 元尹 元尹 佐尹 佐尹 正朝 正朝 正位 甫尹 甫尹 軍尹 中尹

235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그 子弟에게 주어졌던 것으로 元尹과 佐尹의 사이에는 일단의 단 층이 획정되어 있었다.6) 물론 이러한 현상은 高麗 성립기의 호족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 단층의 強度는 불분명하지만, 대체로 高麗 초기의 전 지배계층을 上下로 크게 兩分하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佐尹 이하 가 곧 당시 통차구조에서 말단 실무에 臨하던 군소토호들의 계층 임을 의미하는 것이며 여기서 우선 高麗 중간계층의 출발을 찾아 볼 수 있다. 실제 이 佐尹 이하의 계층은 후대의 景宗朝 田柴科 에 나타나듯이 곧 해체되어 文 武 雜으로 나뉘는 官職으로 代替되 고 있어 그것이 당시 지배구조의 하부에서 機能하는 중간계층적 부류임을 더욱 뚜렷이 해주고 있다. 2) 集權的 官僚體制의 整備期 高麗왕조의 호족연합적인 정책은 韓半島의 재통일을 가져왔지 만 일면 그것이 지닌 한계는 王朝의 安寧에는 아직도 많은 불안을 남기는 것이었다. 동란은 종식되었지만 全國은 그대로 독자적인 토호의 手中에 있는 형편이었다. 자기 세력기반을 지니고 중앙에 진출한 功臣, 系列의 위세는 사뭇 王室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 리고 그러한 추세는 통일의 求心體였으며 北進政策으로 내적 갈 등의 돌파구를 찾던 太祖가 死去함에 결국 표면화하고 말았다. 廣州의 대토호이자 外戚이었던 王規의 惠宗, 定宗 兩代에 걸친 발호는 바로 그러한 당시 政情의 불안을 대변해 주는 사건이다. 王規의 亂은 결국 西京의 鎭將 王式廉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그러 한 사건은 또한 王權의 안정을 위해 근본적인 體制改編이 불가피 6) 武田幸男 高麗初期의 官階 高鹿王朝 確立過程의 一考察 朝鮮學報 41 (1966)

236 1. 中間階層 함을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적 使命에 부응 하고자 한 것이 곧 다음의 光宗미었다. 光宗은 바로 그러한 王室의 불안을 目 睹하고 성 장한 사람으로 崔承老가 시사하고 있듯이7) 초년에는 자기 안정을 위하여 時勢에 편승하는 기미마저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기 기반이 어느 정 도 구축되었다고 추측되는 在位 7년경부터는 일대 개혁정치를 단 행하였던 것으로 주지하는 바 公服制, 奴婢按檢法, 科擧制 등의 시행이 그것이었다. 당시의 개혁은 물론 한결같이 왕권의 伸張에 직결되는 것이었 다. 그 중에서도 특히 科擧制의 실시가 지니는 의미는 매우 중대 한 것 이다. 당시 현실에서 현상적으로만 본다면 한마디로 文治的 官僚 體制를 지 향함으로써 왕권강화의 근본적 인 해결을 보고자 한 것이 었다. 실제 이 光宗代에는 公服制실시와 더불어 文散階 적용 등 관 료적 질서의 새로운 시도가 병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좀더 주목해야 할 것은 과거제 시행이 결과적으 로는 당시 호족사회에 있어 온 내적 연결구조에 대한 일단의 전반 적인 부정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다시말하자면 과거제는 당시 전 지배계층인 대소토호세력을 개별화하여 等距離로 왕권과 직결시 킴으로써 그들 대소토호세력의 縱的 연결 속에서 이루어졌던 왕 권의 상대세력인 지역세력의 구성체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현상적일 망정 군소토호를 下限으로 하는 모든 지배계층의 정치참여에 있어서 현실적인 권력의 等差를 배제하고 새로운 等 質的인 자격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점은 아직도 高麗시대의 과거 응시자격에 관한 연구가 미진 하여 단언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군소토호세력의 후신인 鄕吏들에 7) 高麗史節要 卷 2 成宗元年 6月條 崔承老 上書

237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게 과거응시의 자격이 부여되고 있음을 보면,8) 대략 과거제 실시 와 더불어 군소토호급을 下限으로 하는 전 지배계층에 보편적으로 응시자격이 부여된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참여의 일반 적 자격이 부여된 지배신분층이 현실적인 職任을 갖지 못했을 때 는 후술하다시피(제3장 제1절) 대체로 당시 개념으로는 관리가 될 수 있는 姓氏族이라는 의미에서 쓰여 졌다고 추측되는 高麗的 인 百姓 으로 호칭 되었다고 생각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高麗 국가의 관료체제적 운영에 따라 당시 현실적인 지배계층인 대소토 호세력에 정치참여의 보편적 자격이 부여될 때, 그러한 의미에서 의 관료체제적 개념으로 등장한 것이 百姓 으로서, 그것은 곧 정치참여 및 그 受惠의 자격과 국가적 의무를 지니는 公的 領域의 自由民的 성격을 띠는 지배층의 새로운 개념이자 범주라는 것이 다. 그리고 이에서 公的 職任을 가질 경우 胥吏 兩班 등으로 된다 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계층적 넓은 의미로는 이 百姓層이 당시 中 間階層의 새로운 下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百姓에 대한 이해에서 더욱 부연되듯이, 光宗의 科擧制 실시가 군소토호들을 그들이 예속되었던 대토호들과의 前 代的 인연에서 벗어나 왕권과 직결시키고, 그들에게 새로운 高麗 국가의 정치현실에 참여할 수 있는 지배계층으로서의 보편적 자격 을 부여하는 것이라면, 光宗의 그러한 시책은 물론 현실적 세력의 優位를 강조해야만 하는 功臣勢力에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功臣勢力의 반발은 이미 당대에 심각했던 것으로 이에 光宗은 일련의 대대적인 功臣系列의 숙청으로 그 돌파구를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가 死去함에 그의 개혁에 대한 불만은 일시에 폭발하였다. 景宗 원년에는 일시 그 8) 許興植 高賭科舉制의 檢时 韓國史硏究 10 (1974) pp

238 1. 中間階層 희생자들에 의한 복수의 풍조마저 나타났으며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파동은 崔承老가 지적하였듯이 太祖代의 勳臣宿將이 살아남은 자 불과 40여명이라는 결과를 초래케 하였다.9) 사태가 이에 이르매 高麗 조정은 다시 지배계층내의 自律의 길 을 모색하기에 이르렀으며 그것은 특히 成宗代에 본격화하기 시작 하였다. 成宗은 즉위와 더불어 널리 정치적 助言을 구했으며 그에 부응하여 당시 政界의 元老였던 崔承老를 비롯하여 儒者的 성격을 띠는 一群의 정책입안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崔 承老의 時務 28條에 나타나듯이 자신들의 官僚的 生理와 豪族社會 의 현실을 참작하는 가운데 호족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강력한 중 앙집권적 관료체제의 정비를 실천하기에 이르렀다.10) 그리하여 成宗 2년에는 12牧에 外官이 파견되고 다음 도표와 같 이 호족적 속성을 지니는 지방관부가 鄕吏職으로 전면 格下 개편을 成宗 2年 鄕吏職改編內容 堂大等 大等 (戶長) ( 副戶長) [戶部] 郞中 員外郞 執事 (戶正) ( 副戶正) (史) (司戶) [兵部] 兵部卿 筵上 維乃 (司兵) (兵正) (副兵正 ) (兵史) [倉部] 倉部卿 [ ]는 추정한 것 (司倉) (倉正) ( )는 개정된 것 보게 되었다. 同 14년에는 唐制를 모방하는 3省 6部 중심의 官 制 와 中央軍制가 마련되는 등 통치구조의 쇄신을 보게 되었다. 이 어 穆宗代에는 이미 景宗時 현실적 세력의 等差를 고려하면서 전 국의 지배세력을 포괄할 수 있게끔 마련하였던 田柴科가 중앙관 직 위주로 전면 개편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적 개편과 더불어 9) 高麗史節要 卷 2 成宗元年 6月條 崔承老 上書 10) 金哲埈 崔承老의 時務28條에 대하여 趙明基博士華甲記念論叢 (1965) 李基白 高麗 成宗代의 政治的 支配勢力 湖南文化硏究 6 (1974) pp

239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成宗時부터는 鄕豪子弟의 中央官界 진출 즉 관료화가 적극 유도 되었던 것이다.11) 물론 이러한 당시 관직제도의 정비는 앞서 科擧制 시행에서 언 급하였듯이 당시 지배계층 즉 대소토호세력에 정치참여에 있어서 보편적 자격이 주어진다는 그러한 원칙 위에서 성립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관료체제적 직능에 따른 새 로운 계층분화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다시 언급되겠지만 (제2장 1절) 당시 몇몇 자료에 나타나는 바로 작성한 다음 도표에서 와 같이 실제 成宗代의 관제정비에 따라 高麗의 관직체계에는 핵 심관료인 品官과 말단 실무직인 吏屬의 구분이 확연해졌다. 또 대 략 현실적으로는 행정말단의 담당자들이었던 군소토호들에까지 정 치 참여의 보편적 자격을 부여했던 당시 현실의 반영이라고 생각되 高麗時代 官職上의 區分 品 官 (員 員察) 宰 檢 樞 校 參 上 吏 屬 (吏 吏人) 參 職 同 入 仕 下 正 人 吏 掌 固 職 職 는 바, 文班을 기준으로 할 때, 人吏라고 호칭되는 상충 吏屬職부 터 入仕職으로 간주하는 지배층으로서의 官 의 범주가 이루어 졌다. 그리고 그러한 職制上의 분화와 더불어 그에 따른 계층형성 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散官制度도 정비 적용했다. 그러나 특히 官階 적용에 있어서는 일찍부터 中國式 文武散階가 적용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上述한 바 吏屬職에까지 官의 의미를 부여했던 高麗의 현실에는 그대로 적용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대 략 그러한 이유 등에 의한 것으로 추측되는 바 실제에 있어서는 11) 金光洙 商麗太祖의 三韓功臣 p

240 1. 中間階層 변태적인 형태로 적용되어 갔다. 그리고 高麗는 그러한 현실적 모 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되는 바 그나름 새로운 관료층의 位階秩序며 散官制度인 同正職船系 를 마련하였다. 同正職禮系란, 역시 후에(제2장 제3절) 詳述하겠지만, 중앙 지 방을 막론하고 앞서 말한 入仕職 이상의 전 正職體系에 준하여 上 層은 檢校職, 下層은 同正職으로 나누어 설정한 實職 기준의 散秩 體系이자 散職制度였다. 따라서 그것은 正職의 定혔의 한계를 극 복하고 정직체계에 준한 官ffi身分層음 형성시킬 수 있는 직제이 다. 나아가서는 高麗의 관료체제의 정비에 따라 토호직 지배계층을 새로운 관료적 지배계층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직제이기도 한 것이 다. 그리고 이 同正職體系는 그 內的 구분인 檢校職과 同正職의 分 岐點이 品官職內에 있어 品官과 吏屬에서 우선의 上下 區分을 하 고 있는 정직체계와는 다르다. 그러나 실제로는 실직보다 몇 등급 높게 除授되며, 특히 下部의 同正職은 대체로 胥吏 내지는 후대에 胥吏職으로 格下되는 정식 品官이 아닌 權務職을 띤 자들에게 주 어지고 있어 실질적으로 同正職體系의 내적 구분이 品官 吏屬의 정 직상의 구분과 부합되는 면이 있다. 그러므로 同正職體系의 적용 은 현실적으로는 品官과 吏屬에서 兩分하려고 하는 관직체계상의 직능분화에 일치되는 지배계층내의 계층분화마저 가능케 하는 것 이다. 이상으로 光宗代 이후의 관료체제의 정비와 그에 준한 새로운 관료적 지배신분층의 형성 및 그 내적 계층분화의 가능성을 一瞥 해 보았다. 그런데 이렇듯 관료체제에 따른 신분분화가 이루어진 다면, 물론 그 중에서 새로운 관료적 지배계층의 범주에 들면서도 실무담당으로 그 하부구조를 이루는, 정직상으로는 入仕職 이상의

241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吏屬 그리고 同正職體系로는 下位의 同正職에 머무는 부류가 곧 새로운 中間階層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된다. 실제 이러한 부류들 은 관료체제에 따른 고급 관료들의 귀족화 현상 속에서 더욱 그 신분적 성격을 뚜렷이 하여 갔다. 3) 文班貴族勢力의 形成期 成宗代의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의 정비는 결과적으로 새로운 중 앙관료지배층의 형성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科擧制에 서 지배계급간의 정치참여의 보편적 원리가 주어졌다 하더라도 관료로의 진출은 현실적 권력과 결부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새로이 형성되는 관료지배층의 형성에는 역시 前代로부터 오는 傳統的 身分的 構造의 屬性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현 실적으로는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이 오히려 큰 것이기도 하다. 그 리고 실제 高麗의 지배계층의 내적 구조는 전통적 속성과 관료적 기능분화가 상호 작용하면서 새로운 귀족적 성격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관료적 귀족세력을 제1의 신분으로 등장시 켜 그 밑에 직능에 따른 신분분화가 이루어져 갔다. 그러한 발전은 특히 成宗代 후반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穆宗 顯 宗代의 정치적 主導權을 장악했던 중부지방의 대토호출신 관료세 력이 등장함에서 본격화하였다.12) 그리고 顯宗 이후 일부 중앙 권력층이 왕실을 중심으로 한 姻戚關係로 결속되어 감에 귀족적 성격을 더해 갔다. 당시 顯宗은 단 하나 남은 왕실의 正統을 잇는 후계자로서 그의 정치적 입장은 극히 외로웠다. 契丹의 침입시 그 후견인이었던 康 兆가 戰殘하고 羅州에까지 避難할 때는 지방 향호의 위협에 공포 12) 李基白 高麗 成宗代의 政治的 支配勢力

242 1. 中間階層 심마저 지닐 정도로 그 세력은 위약했다. 아마도 그러 한 까닭에 서였으리라고 믿어지지만 그는 결국 중부지방의 여러 호족세력과 姻戚으로 연결된 기반을 가졌으리라고 믿어지며 당시 公州節度使 였던 安山 金氏 金殷傅에게 의탁하였다. 즉 그 女 3人을 차례로 妃로 맞게 되었고, 그 결과 이후 3代(顯 德. 靖宗)에 걸친 40여 년 간의 高麗의 정권은 安山 金氏가 오로지하는 바 되었다. 그리고 文宗代로부터는 다시 金殷傅의 妻조카였던 仁州 李氏의 李子淵이 文宗에게 3人의 女를 納妃함으로써 이후 그의 孫李資 謙에 이르기 까지 7代(文 順 宣 獻 肅 睿 仁宗) 80여년간은 仁州 李 氏의 專横의 시대가 되었다. 그리하여 高麗중기는 결과적으로 安 山金氏, 仁州李氏를 중심으로 그와 姻戚關係로 결속된 閥族들의 貴族集圃이 형성되고 그들이 최고의 권세를 향유하는 시대가 되 었다.13) 한편 이들 귀족적 중앙 고급 관료세력은 당시 만연되고 있었던 文治的 경향 속에서 그에 부합되는 또하나의 사회적 권위의 표시로 서 과거급제를 내세우며 文人으로서 自處하게 되었다. 예컨대 中期 중앙관료 귀족의 一員으로 海東孔子의 칭을 듣던 崔冲이 곧 그 대 표적인 인물이 되는 셈이며, 당대 제일의 外戚貴族인 李子淵도 실 상 그 정계진출이 장원급제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 과적으로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高麗는 새로운 관료적 의미에서 文班이면서도 신분적 입장에서는 왕실을 중심으로 한 姻戚集團이 라는 성격을 지니는 文班貴族勢力의 형성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일단 文班貴族勢力이 형성되자 그들은 政策立案者로서의 권력 을 남용하면서 배타적인 최고 신분집단으로 자신을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그에 따라 일단 정비되었던 諸般 體制上에는 이러한 현실 13) 藤田亮策 李子淵과 그의 家系 靑丘學叢 ( )

243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에서 오는 수정이 가해지게 되었다. 즉 그들은 중앙의 고급관료를 전반적으로 우대하고자 5品 이상의 관료에게 적용되는 蔭叙 및 功蔭田柴制를 성립시켰다. 한편 그 정치기구상에서도 中書 門下省 을 合稱하여 宰相들의 최고 合坐的 권력기관으로 발전시켰으며, 宰相들에게는 他官署의 判事를 兼帶케 하여 모든 國家權力을 그 들에게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 宰相職은 곧 文班만이 진출할 수 있게 하여 그 중 文班을 최고 지배층으로 부상할 수 있게 하였 다.14) 뿐만 아니라 과거제 역시 私學의 발달에서 느낄 수 있듯이 중앙귀족에 의해 독점되어 갔으며 學校의 입학자격 또한 官品에 따라 구분되었다. 또 관리 임용에 있어서도 蔭叙 胥吏 科擧出身 모두를 일단 散職인 同正職에서 대기시킴으로써 그 실제 임용에 있어서 현실적 권력이 행사될 수 있는 여유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추세와 병행하여 이미 주어졌던 지배계층의 정치참여에 있어서의 보편성도 사실상 현실적인 면에서 그 의미가 점차 상실 되어 갔다. 胥吏出身은 물론 及第者도 그 閥族이 寒微할 때는 그 官道가 散職인 同正職에서 마치는 수가 허다하였다. 관직의 하부 구조를 이루던 기능직에서의 진출도 직접적으로 규제되기 시작하 였다. 鄉吏들의 관직진출은 三子中 一子 라는 단서가 붙게 되 었다. 애당초 4品職까지 보이던 南班은 宮內雜職이라 하여 7品에 서 限職되었다. 下級將校는 때로는 그 진출이 빠를 수도 있었지만 武班 전체가 格下되어 갔으며 將校職은 고된 身役으로 바뀌어 갔 다. 또 未入仕職에 해당되는 末端 吏屬職은 아예 役으로 간주되었 으며 그 일부는 雜類 라고 하여 賤視되었다. 軍人은 軍班氏族으 로 특수 職役 담당의 세습적 신분집단으로 발전되어 갔다.15) 그리 14) 邊太燮 高麗時代의 文班과 武班 史學硏究 11 (1961) 15) 金光洙 高麗時代의 同正職 歷史敎育 11 12合 (1969)

244 1. 中間階層 고 전술한 바 정치참여의 자격이 주어졌던 高麗的 百姓層은 점차 被支配的인 庶人으로 고정되면서 국가에 대한 의무만이 加重되어 갔다. 그런데 이러한 관료체제에 따른 새로운 고려 지배계층내에서 의 계층분화는 주지하는 바 대체로 文宗代의 체제상의 대대적인 재정비에서 일단 제도적으로 마무리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서 전제한 바와 같은 胥吏, 鄉吏, 將校, 南班 등 고려의 새로운 職制 를 통한 관료적 중간계층의 윤곽 또한 한층 뚜렷해진다. 다음과 같은 肅宗朝 前後한 시기에 살았던 李永에 관한 자료는 대략 그러 한 시대적 상항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李永은 字가 大年이고 安城郡人이다. 父는 仲宣인데 本郡의 戶長으로서 선발되어 京軍이 되었다. 永은 어려서 스승을 따라 배웠는데 父가 죽음에 永業田을 계승하기 위하여 胥吏가 되고자 하였다. 狀을 가지고 政曹主事에게 나아가 揖하고 拜하지 않았 더니 主事가 노하여 꾸짖으므로 永은 즉시 그 狀을 찢고 말하기 를, 나도 가히 登第하여 조정에 벼슬할 수 있는데 어찌 너 같은 무리들에게 禮를 차릴까보냐 라고 하고 肅宗朝에 乙科에 합격하 여 直史館이 되었다 16) 즉 이 자료에서 李永이 戶長의 子이며 또 登科함을 보면 그는 대체로 전술한 바 초기 호족의 후예로서 지배계층에 속하는 인물 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그들 父子가 戶長 京軍 胥吏 등 직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이 또한 永業田이 라는 토지와 결부되어 이루어지 金鍾國 高麗時代의 鄕史에 대하여 朝鮮學報 25 (1962) 李丙燾 高麗 南班考 서울大學校 論文集 人文社會科學 12 (1966) 李基白 高麗軍人考 震檀學報 21 (1963) 洪承基 高麗時代의 雜類 歷史學報 57 (1973) 16) 高麗史 卷97 列傳 卷第10 李永傳

245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는 것임을 보면 그것은 곧 그러한 직들이 현실적으로 동일한 계층 의 직이며 경제적 문제와 결부되어 이미 신분적 제약마지 주어지 고 있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高麗전기의 중간계층의 대략의 흐름을 일별하였다. 이 제 그러한 발전과정을 전제하면서 대강 그 중간계층의 제반 조건 을 검토한다면 그것은 물론다음과 같은 점을 염두에 두어야 될 것 이다. 즉 그 하나는 高麗 지배층의 기층이 되었던 호족세력의 속 성으로 전통적인 大 小土豪의 내적 신분질서이며 다음은 관료체제 의 정비에서 오는 직능에 따른 새로운 신분분화이다. 그리고 끝으 로 이러한 전후하는 신분분화의 기준을 바꾸기 위한 토호세력의 보편화와 그에 따른 직제상에 나타나는 진급의 가능성이다. 사실 高麗는 그 재래의 토호적 신분체제가 관료적 기준에 의해 재분화 되는 시기로 그러한 점을 고려하면서 다음에 장을 바꾸어가며 중 간계층의 직제상 내지는 신분상의 여건을 정리하여 보겠다. (2) 中間階層과 職制 職制上의 구조는 곧 기능상의 구분을 반영하는 것이며 나아가 서는 사회계층분화의 한 기준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高麗 시대의 중간계층의 범주 또한 우선은 당시 職制上의 上下的 구분 에서 획정지어 볼 수 있다. 이제 다시 앞서 제시했던 관직구조표를 참고하여 보면 高麗시 대의 전 관직체계는, 文班系列을 기준으로 할 때, 우선 上層의 品 官 職과 下層의 吏屬職으로 크게 兩分되고 있어 당시 중간계층의 직 제상의 범주는 우선 吏屬職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전술 한바 당시 이러한 公職運營의 기반계층인 고려적 百姓層 을

246 1. 中間階層 지배계층의 下限으로 할 때는 이 吏屬職이 전부 중간계층적 의미 를 지니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隨時로 公事에 동원될 의무를 지 니는 그 百姓層마저 일면 그에 결부시켜야 될 성질의 것이 된다. 그러나 이 吏屬職은 다시 통치상의 實務職인 일반 胥史職으로서 人吏職 과 그 보조적 역할을 하는 官府의 下役人인 掌固 等類 로 나뉘어진다. 그러한 기능상의 구분과도 관련된다고 생각되는 바 그 중 人吏는 入仕職으로 간주되어 여기에는 또한 官 役 의 구 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제 다시 관료체제라는 면에서 官 을 지배신분층의 의미로 취한다면 중간계층의 범주는 관으로 취급 되면서도 그 말단인 人吏로 축소된다. 사실 이러한 官 과 役 내지는 庶 의 새로운 계층분화는 高麗가 관료체제적 국가운영을 시도하면서 지향했던 것이기도 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人吏 類는 고려 중간계층의 직제상의 핵심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고려는 이러한 관료체제에 따른 새로운 계층분화를 가능 케 할 수 있는 직제로서 전술한 바 散職體系인 同正職制를官의 의 미를 지니는 人吏以上에 설정하고 있어 직제상의 중간계층에 해 당되는 人吏 또한 계층형성이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同正職體系 역시 내적으로 檢校職과 同正職으로 兩分되는데 그중 하부의 同正職은 初入仕職으로 취급된다는 점으로 보아 대체로 實職上 品官職에 오르지 못한 자들의 散秩上의 진급의 한계가 된 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 중 同正職은 중간계층의 散秩上 의 범주가 된다고도 하겠다. 이렇듯 직제를 통한 중간계층의 파악에는 또하나 고려할 점이 있다. 그것은 곧 당시 관직체계상의 班列이 역시 기능상의 구분이 기도하며 그 때문에 편제상으로는 횡적으로 대등하나 현실적으로 는 文班 武班 南班의 순으로 차등이 주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

247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나 이 점은 일면 이미 실제로는 그 관직제도에 반영되고 있어 구 체적인 분석에서 自明해진다. 1) 職制上의 範曝 高麗 관직체계 전반에 걸쳐 다시 그 관직구조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그 위에서 末端實務 내지는 補助的인 역할이 라는 면에서 통치상의 중간역할에 해당되는 職任을 찾아보면 그 것은 물론 정식 통치자라는 의미를 지닌다고도 할 수 있는 品官을 제외한 品外職이 그 우선의 범주가 되겠다. 그리고 그것은 관직체 계상 엄연히 구분되고 있다. 그러나 일면 그 구체적인 職任을 고 려할 때 일부 品官職도 때로는 포함되며 그 범주는 대략 黑線으로 싸인 부분까지 확대된다. 中間階層載의 範疇 鄕 吏 南 班 武 班 文 班 宰 樞 郎 將 以 上 殿 前 以承 上旨 人 吏 記 官 匠 人 百 姓 匠 人 ( 長 典 以 散 上 員 校 尉 隊 正 1 品 2 3 參 4 5 上 6 權 參 務 下 7 8 官 9 ) ( ) 人 吏 人 吏 吏 都 旗 典 頭 掌 固 下 典 屬 軍 人 庶 人 百 姓

248 1. 中間階層 먼저 그 上限을 검토해 보면 文班의 경우는 品外職의 핵심인 胥 吏職으로서의 人吏職과 品官職 사이에 權務職이 介在되어 있다. 그런데 이 權務職은 대체로 參下職에 비견되는 대우를 받지만 정 식 品官은 아니다. 그뿐 아니라 參下職이라도 品官은 독립된 官署의 長이나 外官의 任을 떨 수 있지만 權務職은 주로 臨時官署의 성격을 띠는 諸 司 都監의 실무직에 종사한다. 同正職體系에서도 下級의 同正職만이 除授된다. 따라서 權務職 또한 우선은 중간역할적인 職任으로 보아 마땅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일면 登科者들 도 임명되며 또 品官進出의 關門格인 직임으로 여기에는 아직 再 考의 여지가 있다.17) 武班의 경우는 校尉가 9品職이지만 자료상으로는 高麗史 百 官志 에 그 品位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隊正과 함께 흔히 將校로 호칭된다. 또 대략 文班의 人吏 내지는 權務에 비교되고 있어 校 尉 이하를 중간역할의 직에 해당시켰다. 실제 이들 下級將校는 參 謀級이 되지 못하고 末端 지휘관으로 전술한 바와 같이 身役이 고 된 職種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18) 南班은 애당초 4品職까지 자료에 보이나 대략 文宗代에 이르러 7品職에서 限職된다. 아울러 그 임무 자체도 宮中의 典禮 관계의 보조적인 것이다. 따라서 南班은 모두 중간역할에 해당한다고 보 아야 될 것이다. 그리고 班行이 따로 있다 하여도 극히 小數이며 品官이라도 文班의 參下職과 서로 對比되는 경우가 적다. 현실적 으로도 南班의 승진은 文 武 兩班으로 准職改班 되는 예가 많아 적어도 兩班보다 한 단 下降한 감이 있다.19) 17) 金光洙 高麗時代의 胥吏職 韓國史硏究 4 (1969) pp ) 金光洙 高麗時代의 胥吏職 p.14 19) 李丙燾 高麗 南班考 및 高麗史 卷12 世家 卷第12 睿宗 3년 2월 辛卯條

249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끝으로 鄉吏의 경우는 물론 모두 吏屬職으로 간주되며 실제 임 무도 민중통치의 일선을 담당하는 것으로 중간역할의 핵심이 되 는 직이다. 그리고 이외에도 高麗 관직제에는 僧官職이 있으나 그 職位가 분명치 않아 제외하였다. 다만 이들 僧職 모두가 자료상 參下職 이하로 간주될 수 있는 흔적이 있어 위와 같은 下位職任과 상관관계가 있으리라는 점이 추측될 뿐이다.20) 다시 下限의 경우를 보면 文班系列에서는 각 官署의 下役人인 掌固 等類가 職制上 末端이다. 그리고 鄉吏의 경우도 대체로 戶長 副戶長級으로 믿어지는 長典 밑에 記官이 있어 명확히 掌固 等類 와 대응되고 있다. 그러나 南班의 경우는 한 단위인 人吏로 호칭되 는 承旨에서 그친다. 흔히 匠人이 承旨가 되는 예로 보아 대략 국 가적 임무를 띠는 官工匠이 곧 下典類에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하 지만 南班 전체가 한 단 下降하는 감이 있고 또 匠人은 이미 賤視 되는 경향이 짙어 여기서는 일단 人吏를 그 下限으로 하였다. 그와 반대로 武班系統의 경우는 下限이 물론 軍人이지만 그 중 특수한 임무를 띤 旗頭 都典이 掌固 等類에 준하고 있어21) 일반 軍人은 한 단 내려가게 된다. 그리고 실제 일반 군인의 경우는 공 적 임무를 띠긴 하지만 일면 庶人과 별차이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또 전술한 바, 공적 임무에 참여할 자격과 의무를 지녔다고 생각 되는 고려적 百姓이 실제 人吏 鄕吏 등과 공무에 동원되는 예가 많 아22) 이 표에서와 같이 그 百姓과 同級으로 취급될 수도 있다. 이상으로 職制上의 중간역할에 해당하는 직의 범주를 획정해 보 았는데, 그것은 물론 그 직임의 성격상 넓은 의미에서 중간계층적 20) 安啓賢 麗代 僧官考 東國史學 5 (1957) 21) 金光洙 高麗時代의 胥史職 p.14 22) 李佑成 麗代 百姓考 高麗時代 村落構造의 一斷面 歷史學報 14 (1961)

250 1. 中間階層 직임의 우선의 범주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듯 중간 역할에 해당되는 직의 범주가 하급 公務 담당이라는 기능적인 의미를 바 탕으로 한다면, 규정된 직은 없어도 항시 국가 공무에 동원되고 그러한 의미에서 軍人과 同級일 수도 있는, 고려적 百姓의 역할도 넓은 의미로는 이러한 통치상의 중간적 역할에 결부시켜 볼 수 있 는 여지가 있다. 2) 官僚的 性格 高麗시대의 관직구조에서 통치상 중간 역할을 하는 職任의 범 주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중 品官職, 準品官格인 權務職 그리 고 그 임무가 단순한 일반 軍人 등을 제외한 핵심 品外職은 앞서 제시한 도표에서와 같이 서로 대응되면서 上下二層으로 구분되고, 서로 기능상의 차이를 지닌다. 그리고 그러한 기능상의 上下구분 과 성격상의 차이는 위로는 品官 權務, 아래로는 軍人으로 전 중 간역할적인 職任에 확대 적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 먼저 文班系列의 경우를 보면, 權務職을 우선 論外로 할 때, 品 外職은 크게 人吏와 下典 또는 掌固로 묶어 표현하고 있으며 그 내역은 다음 표와 같다.23) 人吏職의 경우를 우선 보면 그 職種이 多樣할 뿐 아니라 正職과 權務로 다시 구분된 듯하며 그나름 序列 도 정해져 있다. 그러나 同正職이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 중 主事, 令史, 書令史, 史 등이 그 기준이 되는 핵 심 正職으로서 정식관청의 중심적 胥吏職이며 그 定額 또한 월등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職의 職務가 곧 人吏職의 성격을 대변할 수 있다 고 하겠는데, 그 職務는 대체로 文簿 符目 등을 처리하는 刀筆의 23) 金光洙 高麗時代의 胥吏職 pp

251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胥吏職의 內的 構進 人 吏 下 典 (入仕職) (未入仕) 分類 正 序列 2 (權 記事 掌固 待詔 書藝(同正) (記事) 醫針史 (記事) 3 務) 主事(同正) 令史(同正) 史(同正) 記事 書令 錄事 書史 史 (同正) 監事 計史 正 職 別駕 (權務) 1 職 書者 書手 算士 (記事) 孔目 給士 丁吏 醫士 任을 띠는 것으로 명실공히 行政實務職이다. 그리고 여타 人吏職 도 명칭상 이미 그 성격을 느낄 수 있는 것이므로, 세세한 언급은 생략하거니와, 대략 위와 같은 임무 내지는 그에 비견할 임무를 띤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들 職의 行政實務라는 기능은 準品官의 성격을 띠기는 하지만 주로 임시 관서의 實務職에 불과한 權務職 과도 相通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下典類는 그 내적구조가 단순하다. 職任도 역시 단순 한 보조적 직능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그 職任을 보면 대표격인 掌固는 관부의 下役人으로 이미 언급한 바 있고, 丁吏와 給使는 비슷한 것으로 官員의 從卒이며, 나머지는 역시 명칭에서 충분히 짐작이 가는 것들이다. 따라서 文班의 경우 人吏 下典의 구분이 우선은 통치상의 行政實 務와 그 보조적 역할이라는 기능상의 구분에서 연유된 것이라 하 겠다. 그런데 前節의 관직구조표에서 중앙의 胥吏와 그 임무가 유 사한 鄕吏의 경우도, 지방행정의 핵심이 되는 자들이라고 생각되 는 長典과 그 보조원격이라고 믿어지는 記官으로 나누어, 人吏下

252 1. 中間階層 典에 대비되고 있다. 또 鄕吏에 대한 표현에서도 人吏라는 명칭 이 쓰여지고 있다. 따라서 鄕吏의 경우도 중앙의 胥吏와 비슷한 내적 구분이 되어 있었다고 믿어진다. 실제 다음 표에서와 같이 鄕使들은 首長級이며 同正職이 나타 나는 戶長 副戶長級과 그 직무가 세분된 그외의 부류로 크게 兩分 되는 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 외에도 其人選上法規에 나타 나는 바와 같이 副兵正 이상의 선에서 또하나의 구분이 있는 듯하 여 아직 미진한 점이 있음을 밝혀 둔다.24) 鄉吏職의 內的 構造 長 典 記 官 (司兵) 兵正 副兵正 兵史 戶長 副戶長 (司戶) 戶正 副戶正 史 (司倉) 倉正 副倉正 倉史 한편 武班系列의 경우는 그 기능이 文班系列과는 전혀 다르지만 그 구분이 성격상 매우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武班의 경우, 上層 은 將校인 셈인데, 그것은 역시 말단 지휘관으로서 兵事에 있어서 武官의 범주에 들 수 있는 실무자인 셈이다. 그에 비해 旗頭 都典 은 명칭상으로 볼 때 단순한 軍士指揮의 보조적 역할을 함을 느낄 수 있으며, 일반 軍人은 물론 그 역할이 旗頭 都典에도 못 미치는 被指揮者들이다. 그리고 실제 직제상으로도 將校는 人吏에 旗頭 都 典은 掌固에 對比되고 있다. 南班의 경우도 직제상으로는 文班의 경우와 같이 人吏라는 호칭 이 쓰여지지만 기능면에서는 역시 전혀 다른 전체적으로 보조적인 역할이다. 또 밑의 下典級에 속하는 부류도 官工匠이 아닌가 하 는 추측이 될 뿐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9品 이하의 24) 金鍾國 高麗時代의 鄉吏에 대하여 pp

253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南班職의 명칭인 承旨라는 명칭을 가진 직중에는 匠人을 거느리 는 指諭承旨가 있고, 또 같은 역할을 하는 직에 行首校尉라는 武 班系統의 職名이 있음을 보면25) 南班 人吏 역시 그 기능상의 일 면에는 文武班의 人吏 將校와 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와같이 高麗시대의 관직 중 통치상의 중간역할에 해당되는 직 임은 다시 上下二層으로 구분되며 그것은 대체로 上層의 통치상의 실무와 下層의 단순한 보조적 역할이라는 성격상의 차이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구분에는 위와 같은 성격상의 차이와 결 부된다고 생각되는 또하나의 실질적인 차이점이 주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곧 그 上層部가 鄉吏의 경우는 뚜렷하지 않지만 그외에는 모두 入仕職으로 간주되며 그 下層部는 役으로 간주되어 여기서 관료체제적인 면에서의 지배계층인 官 과 피지배계층적인 役 내지는 庶 의 구분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우선 위에서 본 品外職의 성격상의 兩分과 상관관계에서 오는 것이라 하겠다. 사실 品外職이라도 그 上層은 기능상 말단이나마 통치라는 면에서의 성격을 지녀 官 의 의미를 지니는 일면이 있다. 그러나 특히 중국식 관제에서 나타나는 官 의 범주를 대략 品官에 국한시키고자 하는 현상과 다르다는 점에 서 볼 때는 그것은 일면 고려가 관료체제적 정비과정에서 생기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데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한다. 唐制를 그대로 모방하기 이전의 고려 관제에서는 후대의 胥吏職 의 母體가 된다고도 할 수 있는 말단직인 史 가, 品階制가 아직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 上層職과 현상적으로 구분이 뚜렷하 지 않았다. 그리고 후대의 鄕吏職의 前身인 초기 지방관직도 당시 로서는 그나름 官의 의미를 띤 것이었다. 또 그러한 직에 종사했던 25) 高麗史 卷80 志 卷第37 食貨3 雜別賜條

254 1. 中間階層 초기의 群小土豪들을 고려는 관료체제의 정비과정에서 공직참여의 일반적 자격의 범주내에 포함시켰던 것이며, 현실적으로 지배계층 인 그들에게 그러한 대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뿐 아 니라 그 집권화과정에서 관직체제의 정비와 더불어 관료적 지배층 이 형성되어 갈때 관료 임용이 品官에 直補될 수 있는 科擧制의 未備로 많은 경우 胥吏職을 통하였었다.26) 따라서 高麗王朝는 그 관료체제 도입과정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지 않 을 수 없었다고 생각되며 그 결과 吏屬職의 일부를 官 의 범주 내에 포함시켰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그러한 구분의 이유가 어떻든 간에 품외직의 일부가 새 로운 지배층인 官 의 범주에 포함된다면, 전제한 바 지배층의 영역에서 민중통치의 말단임무의 수행자인 중간계층의 직제상의 범주는 다시 품외직의 상층부로 국한되게 된다. 사실 관료체제적 지배의 모색이 高.麗의 指向하는 바였다면, 전대적 신분상의 인연 이나 그 관료체제의 운영에 있어서의 기반계층에 관한 문제 등이 있어 단언하기는 어렵다고 해도, 적어도 이들 官 의 범주에 드 는 중간역할의 직임 즉 人吏 將校 南班 上級鄕吏 등이 指向的인 의 미에서 보다 진정한 고려의 중간계층적 직임이 된다. 실제 그러한 직에 종사하는 부류들은 高麗중기 이후는 그나름 대표적인 중간계 층으로 부각되고 있다. 3) 散職制度와 階層化 前近代社會에서의 職能上의 分化는 곧 身分化될 수 있는 것으로 중국식 관제에는 이미 일찍부터 직능과 신분을 연결지울 수 있으 며 官人層의 位階制度의 역할을 하는 散官制度가 그 일환으로 마 26) 金光洙 高麗時代의 胥吏職 pp

255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고려도 그 중국식 관제의 도입과정에서 일 단은 散官制度까지 도입 적용하였다. 그러나 高麗시대에서의 그러한 中國式 文武散階의 적용은 현실 적인 면에서는 그 의미가 원래의 그것과는 달라졌다. 아직 그 명 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고 있는 바이지만 文散階는 대략 중앙의 관료에게 주어지고 武散階는 지방의 토호급에게 주어지는 형태였 다.27) 그리고 보다 정확한 散官制度의 구실을 할 수 있는 제도는 별도로 다시 제정되어 있었다. 高麗가 마련한 새로운 散官制度는 대략 穆宗年間까지는 설정되 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전술한 바 同正職體系였다.28) 그것은 중복 되는 감이 있지만 좀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다음 표와 같이 전술한 바 入仕職 이상의 전 正職體系에 준하여 설정된 散秩體系이자 散 職體系였다. 그 내적 구조는 文班은 5 6品 武班은 4 5品 사이에서 上層은 檢校職 下層은 同正職으로 구분되어 짜여졌다. 그 설정 범 위는 文 武班은 물론 南班 및 僧職 그리고 그 品外職과 鄕吏職의 일부까지 高麗의 전 관직 체계에 걸치는 것이었다. 同 正 職 體 系 表 檢校職 同 正 職 文 班 五品 六 品 人吏(吏) 武 班 四品 五 品 八品(散員) 南 班 七 品 人吏(承旨) 鄕 吏 長典(副戶長) 신분적인 대우나 班行 등도 正職에 상당하는 것이었다. 또 實職 27) 旗田巍 高麗의 武散階 鄕吏 耽羅의 王族 女眞의 酋長 老兵 工匠 樂人의 位 階 朝鮮學報 21 22合 (1961) pp ) 金光洙 高麗時代의 同正職

256 1. 中間階層 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 하부구조를 이루는 同正職의 경우 대략 田柴科의 末端部에 상당하는 토지취득의 혼적이 보이듯이 일정한 경제적 보장마저 딸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同正職體系는 正職 의 定額의 한계를 극복하고 그에 준한 계층의 형성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직제였으며 사실상 그러한 역할과 아울러 그리하여 형성 되는 官僚的 文配層 내부의 位階의 구실까지 하였던 것이다. 高麗王朝가 이러한 散職制度를 마련한 이유는 언급된 바 없다. 아마도 그것은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 中國式 散階制가 品官에 국 한되는데 비해, 品外職의 일부까지를 官 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 을 수 없었던 高麗의 현실에서 그 극복책으로 취해진 조처가 아닌 가 한다. 그리고 정직체계에 준하여 설정되었다는 점에 느낄 수 있 듯이 同正職體系는 새로운 관직체계에 따른 계층형성을 모색할 때 좀더 실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高麗시대에는, 물론 이러한 직제로 인하여 가능했으리라고 믿어지지만, 이미 당시 자료에서 그 관료적 지배층을 의미한다고 여겨지는 文武兩班及南 班凡有職者 라는 文句가 가끔 보이고 있어29) 이후 指向的 社會體 制인 兩班中心의 班常體制 의 기초가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同正職體系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설정범위가 入仕職으로 간주되는 그리고 관직체계의 면에서 볼 때 좀더 핵심 중간계층의 직임이 되는 品外職에까지 미치고 있다. 따라서 그 직 제를 통한 관료적인 새로운 중간계층의 형성마저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내적구분인 檢校職과 同正職에서 下級의 同 正職의 경우 현상적으로는 參上職에까지 미치고 있으나 실질적으 로는 品外職의 實職을 지닌 자들의 진급상의 限界가 되고 있다. 그 러므로 이 同正職體系에 따른 관인신분층의 형성에 있어서도 이미 29) 金光洙 高麗時代의 同正職 pp

257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중간계층은 그 한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즉 이 同正職體系는 除授時에 있어서 實職보다 대체로 몇 등급 上位가 주어진다. 그리고 그중 특히 同正職은 初入仕時에 주어지 는 初入仕職의 의미를 띠며 그것은 品外職에서 뿐만 아니라 品官職 으로 진출함에서도 적용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品官으로 진 출할 때도 우선 同正職으로 먼지 진급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品官의 實職에서 同正職을 띠는 경우는 있지만 品外職에 있는 자 가 散秩로서 同正職의 한계를 넘어 檢校職에 오를 수는 없는 것이 며 결과적으로 同正職은 散秩로서 중간계층의 범주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 同正職은 品外職外에도 전술한 바 중간계층적 직의 범주에 들었던 전 관직의 散秩上의 범주가 되는 듯하다. 文班의 경 우 準品官格이기도 한 權務도, 역시 정식 品官으로 入仕한 것이 아 니므로 그렇다고 생각되거니와, 실제 檢校職을 띠는 예가 나타나 지 않고 있다. 武班의 9品관인 校尉도 그와 함께 庫職의 임을 띤 자의 散秩이 同正職을 띠고 있어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다 만 將校의 직에는 同正職이 나타나지 않아 의심되는 바가 있지만 散職將校에 관한 자료가 있음을 보면 자료상 나타나지 않을 뿐 실 은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南班의 경우는 실제 7品 限職 임으로 檢校職은 없으며 그 이상의 진급은 대체로 准職改班 인 듯 하므로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된다.30) 따라서 高麗시대의 중간역할의 직을 띤 모든 부류들은 同正職體 系를 통하여 수적으로 팽창할 수 있고 그것은 곧 계층화를 가능케 함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 散職上의 범주는 대체로 下級의 同正 職이라고 결론지어 볼 수 있겠다. 30) 高麗史 卷12 世家 卷第12 睿宗 3년 2월 辛卯條

258 1. 中間階層 (3) 中間階層의 身分 社會經濟的인 조건의 파악은 한 사회계층의 성격과 그에 따른 신분적 범주를 부각시키는데 있어서 보다 현실적인 방법이다. 대 략 전게한 바 李永에 관한 자료는 당시 중간계층의 그러한 社會經 濟的 조건과 아울러 그 신분적 범주의 대강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제 이미 그 내용을 통하여 느낄 수 있었던 점을 재정리해 보 면 우선 戶長 京軍 胥吏 등의 중간계층적 직임에 해당하는 직에 종사하는 자들이 대략 동일 신분층으로서 이미 중간계층이라 할 수 있는 하나의 계층을 이루고 있었음이 지적된다. 그리고 그들의 신분적 성격이 다분히 지배계층적 의미를 띠면서도 일면 경제적 문제와 결부되어 그 신분적 제약이 주어진다는 점이다. 사실 高麗중기의 중간계층은 다분히 아직도 지배계층으로서의 속성이 강하였다. 그것은 물론 이 자료에서도 李永이 麗初의 지방 토호의 후신이기도 한 戶長의 子였다고 되어 있듯이 초기 지방토 호로부터 연유되는 전대적인 속성인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계승 되었던 永業田이라는 경제적 기반도 그 실은 초기 토호적 기반의 殘滓였다. 그의 登科 또한 高麗王朝가 관료체제적 국가운영의 체 제를 정비해 갈 때 그 초기의 지배계층인 전국의 대소 토호층을 그 정치 참여의 기반계층으로 한데서 연유된 것이다. 그런데 高麗王朝는 국가운영의 기반계층인 이 토호적 지배층에 관료체제의 정비와 더불어 그에 따른 새로운 개념의 호칭을 적용 시켰던 것이다. 즉 앞서 시사한 바 있거니와 그들 초기 지배계층인 대소 토호계층에게는 관리가 될 수 있는 姓氏族이라는 의미에서 정치참여의 일반적 자격이 부여된 高麗的인 百姓 이라는 개념이

259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百姓층의 기반 위에서 관료 체 제적인 운영원리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 원칙 위에 서면서도 일면 高麗사회는 관 료 체제적 통치구조의 정비에 따라 前代的인 身分的 屬性과 現實 的인 職務에서 오는 문제와 결부되면서 새로운 계층분화를 이루 어 갔다. 그러한 과정에서 職制를 통해 현상화하는 관료체제적 중 간계층도 형성되어 갔던 것으로, 앞서 본 그 세습적인 永業田이 胥吏職의 反對給付로 전환하는 현상은 바로 그러한 새로운 중간 계층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계층분화는 중앙의 고급관료가 귀족화하는 현상을 나타 냄에 이르러서는 더욱 가속되어 갔으며 중간계층에 대한 신분적 제약 또한 더욱 가중되어 갔다. 중간계층의 관료적 진출은 제도적 으로 또는 기타 사회적 여건에 의해 점차 폐쇄되어 갔다. 그와 병 행하여 지배계층의 하한이자 중간계층의 계층적 범주에 포함될 수도 있었던, 그러면서도 현실적 직임이 없는 백성층은 점차 被支 配的인 庶人으로 그 性格이 저하되어 갔으며, 下典類의 職任者들 은 役으로 간주되어 갔다. 따라서 高麗시대는 어느 면에서는 초기의 土豪的 支配階層이 官僚體制的 階層分化를 보는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위 자료에 보이는, 강한 관료적 계급성과 관료진출의 보편성이 충돌 함을 의미한다고 생각되는, 胥吏이면서도 上級인 主事가 새로 胥 吏가 되고자 하는 李永에게 拜하기를 요구하는데 대하여 李永이 반발하는 장면은 바로 위와 같은 高麗의 현실을 단적으로 표현하 는 것이 아닌가 한다

260 1. 中間階層 1) 支配身分的 屬性 高職시대의 지배계층은 이미 누차 언급한 바와 같이 초기 대소 토호세력을 기초로 하여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집권적 관료체제 가 정비됨에 따라 그들 대소 토호세력은 일단 정치참여의 보편적 자격이 부여됐으며, 그 기초 위에서 관료체제적 국가운영을 시도하 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 대소 토호세력에는 또한 관료체제 적인 개념에서 정치참여의 자격과 공적 의무를 지니는 그리고 공 적 영역의 自由民의 의미를 띠는 百姓 이라는 호칭이 부여됐다. 高麗時代의 百姓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기왕의 연구에서 이미 다분히 시사되고 있는 바이다. 高麗시대에 있어서 人吏와 더불어 公的 事項에 관련되는 특수한 신분층으로서의 百姓이 있었음과 후 기의 관료들이 그들로부터 도 나오고 있음이 보고되고 있다.31) 그런데 여기서 좀더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자면 百姓은 실상 주지 하는 바 그 語源부터가 이미 官吏가 될 수 있는 姓氏族이라는 뜻 을 담고 있어 그 의미 자체가 위와 같은 百姓에 대한 이해를 뒷받 침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百姓의 의미는 이미 연구된 바와도 상통됨은 물론 여타 자료를 통하여도 반영되고 있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各姓氏의 氏族譜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지난날의 신분적 사회에서 관리가 될 수 있는 지배신분층이 그러 한 姓氏族임을 확연히 하기 위하여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各姓氏의 氏族譜를 보면 혼히 고려 이후의 公職을 가진 자들을 그 실질적인 始祖로 하고 있으며 그 公職의 下限은 대체로 麗初의 土 豪勢力의 후예들인 戶長 副戶長에까지 미치고 있다.32) 따라서 이 31) 李佑成 麗代 百姓考 32) 朝鮮氏族統譜 世昌書館 (1966)

261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러한 氏族譜의 현상을 통하여 볼 때 高麗시대의 관리가 될 수 있 는 姓氏族의 범주는 대략 초기 토호세력을 바탕으로 하며 그것은 그들 토호세력이 鄉吏로 개편된 뒤에도 마찬가지임을 시사받을 수 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副戶長까지의 上級鄕吏가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은 물론 그 자체가 아예 官 의 의미마저 띠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실제 高麗시대의 이들 上級鄕吏의 子弟가 科擧에 응시할 수 있음은 이미 法規上 뚜렷이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또 高麗시대의 관리의 _體系이며 入仕職의 의미까지 띠는 同正職이 品外職이 면서도 入仕職으로 간주되는 중앙의 人吏 職과 더불어 지방의 鄕吏職의 副戶長에까지 설정되어 있다는 점은 副戶 長 이상이 아예 官 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는 느낌을 더욱 짙게 한다.33) 그뿐 아니라 淸州 지방의 경우 光宗代의 龍頭寺 鐵幢記에 는 戶長의 前身인 堂大等인 자에게 國王과 官僚 사이에 이루어지 는 賜丹銀魚袋 라는 단서가 있어 적어도 鄕吏職으로 개편되기 이전의 지방관부의 高位職은 분명히 高麗조정에서 인정되는 官 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 같다.34) 그런데 다시 顯宗代의 若木郡의 淨兜寺五層石塔 造成形止記를 보면 그러한 鄕吏와 같은 신분이면서도 현실적인 職任이 없는 자 가 百姓으로 호칭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同形止記에는 郡 百姓光賢 이라 하여, 이미 추측되고 있듯이 일반적 의미가 아닌 특수 신분집단을 뜻한다고 생각되는 百姓이라고 지칭되는, 이 탑 을 發願한 光賢이라는 자가 보이는데 그 同生兄이 副戶長으로 되 어 있다는 것이다. 換言하자면 上述한 바 관리가 될 수 있는 姓氏 族에 해당될 수 있었던 副戶長과 兄弟間이므로 같은 신분층으로 33) 金光洙 高麗時代의 同正職 pp ) 金光洙 羅末麗初의 地方學校問題 p

262 1. 中間階層 보아 마땅한 자가 百姓으로 특별히 호칭됨은35) 百姓이라는 명칭 이 前提한 바와 같이 관리가 될 수 있는 姓氏族이라는 의미에서 통용됨을 전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高麗시대의 百姓의 의미는 곧 당시 사회변화의 추 세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羅末麗初의 새로운 姓氏의 대두나 현재 전하는 각 姓氏譜에 나타나는 현상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姓氏는 대체로 羅末麗初에 크게 확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 은 물론 전술한 바와 같이 새로운 지배자적 입장을 취하는 전국의 토호들이 자기표시의 방법으로 그 영역의 표시인 本貫과 氏族의 유래를 밝히는 氏族譜를 곁들이면서 姓氏를 사용함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한 현상은 高麗사회의 진전에 따라 더욱 확대되었 으며 그에 대한 일단의 국가적 정리가 곧 百姓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 선진지역이긴 하지만 淸州의 경우 上揭한 龍頭 寺 鐵幢記에 나타난 바로는 신라의 官階로는 5頭品에 해당하고 대략 당시로서는 村主級에 비견되는 大奈末까지의 그 지방 官吏 들이 이미 모두 姓氏를 사용하고 있었다. 다만 이러한 당시 현실의 정리로서 지배계층의 새로운 범주로 百姓의 개념이 도입되는데 있어서 高麗왕조의 의지가 작용하였다 면, 과거제가 지니는 의미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내적으로 종적 연결이 강하였던 초기의 지방세력을 개별화 내지는 보편화하여, 관료적 입장에서 왕실과 等距離로 연결시킴으로써, 지역세력을 해 체하고 새로운 왕조중심의 지배층의 편제를 시도하였다는 점일 것 이다. 이러한 국가적 시도는 高麗의 향리직제에 반영되고 있다. 초 기 지방세력은 다분히 城主 將軍級의 대토호세력의 예하에 군소토 35) 武田幸男 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의 硏究 (Ⅰ) 高麗 顯宗朝에 있어서 의 若木郡의 構造 朝鮮學報 25 (1962) pp

263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호들이 예속된 형태로 연결되고 각 지역세력간에도 上下관계로 연 결된 감이 컸다. 그러나 중기 향리직제에서 首長級 鄕吏인 戶長職 은 郡縣의 크기에 따라 다르지 만 대략 定員이 4一8명이며 여러 姓氏로 구성되어 있다.36) 그리고 후대의 자료지만 鮮初의 地理志 에 나타나는 각 지방의 土姓과 그 姓氏 내용이나 수가 거의 대응 되는 감이 있다. 그러므로 高麗시대의 초기 호족의 후신인 戶長이 란 일면 그 지역의 각 토호적 姓氏族의 대표급의 집합체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곧 지방의 토호세력들이 횡적으로 대등한 관계가 되며 왕실과 等距離로 연결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음 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百姓의 개념이 도입될 때 高麗시대의 신분제상의 여러가 지 문제점 또한 스스로 해결된다고 생각된다. 이미 언급한 바 入仕 職의 의미를 지닌 同正職이 胥吏 내지는 鄉吏의 일부에까지 미친 다는 현상이나, 이미 지적되고 있듯이 그리고 아래에 그 내용을 정 리한 바와 같이 郡縣의 일에 흔히 人吏 百姓 이라 하여 향리 와 더불어 百姓이 참여하는 현상, 그리고 대표적으로 高麗 전기의 경 우 高麗史 및 金石總覽의 鄕吏 胥吏出身만 정리하여 보았지만37) 人吏 百姓의 役制 人吏 百姓의 役割 出 典 2 数 育 對 象 兩 班 軍 役 代 理 高麗史 3 世家 3 成宗 6 年 8月條 高麗史 82 志 36 兵 2 鎭戍條 3 事 高麗史 75 志 29 選擧 3 銓注事審官條 4 5 租 税 收 納 貴 任 地方 土地 文書 管理 高麗史 78 志 32 食貨 1 田制踏驗損實條 高麗史 78 志 32 食貨 1 田制經理條 6 官 高麗史 84 志 38 刑法 1 職制條 1 審 職 官 擧 取 望 得 36) 武田幸男 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의 硏究 pp ) 金鍾國 高麗時代의 鄕吏에 대하여 p

264 1. 中間階層 鄕吏曆의 達官 人名 出身地 年代 最後官職 冲 海 州 文 宗 門下侍中 中書令 1 崔 2 拓 俊 京 谷 州 仁 宗 吏部尙書 參知政事 3 李 俊 陽 全 州 仁 宗 中書侍郞平章事 4 崔 濡 溟 洲 仁 宗 中書門下平章事 5 朴 義 臣 密 城 仁 宗 工部尙書 6 崔 婁 伯 富 平 毅 宗 翰林學士 7 崔 渉 卿 全 州 毅 宗 禮部侍郞 8 崔 遇 淸 忠 州 明 宗 左僕射 그 외에도 京軍 등은 물론 다만 郡人 縣人 내지는 家世가 한미하다 는 등으로 표시되는 많은 사람들이 達官하는 예 등이 이해될 수 있 다. 그리고 高麗의 과거 응시 자격에 보이는 氏族에 付한 자 라 는 단서38)도 또한 이와 같은 百姓으로서의 姓氏族에 올라 그 系譜 가 뚜렷한가의 여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 흔히 그 下 限을 의심케 하는 高麗史에 자주 보이는 官吏 를 前提로 하는 호칭이라고도 할 수 있는 庶人 의 한계도 곧 百姓과 일치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백성이 비록 관리가 될 수 있는 姓氏族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현실적인 職任이 없을 때는 다만 백성일 뿐이고 그것은 곧 官을 전제로 할 때 庶가 된다. 그리고 庶人이라 할 때는 경제적 反 對給付마저 수반되는 관료적 신분분화에 따라 피지배적 입장을 취 하게 된다. 실제 사회발전에 따라 그러한 경향은 두드러지며 高麗 사회의 내적모순의 한 실마리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 도 전형적인 高麗시대의 의미로는 역시 지배계층의 범주에 든다. 아직 그 제반조건이 더 밝혀져야 하겠지만 대체로 神宗代의 金州 38) 高麗史 卷73 志第27 選擧1 科目

265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地方의 豪族人과 雜族人의 相爭의 기사는 그들이 설혹 현실적인 職任을 갖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방사회에서 갖는 族的 기반 위에 서 그 사회경제적 지위가 어느 정도 보장됨을 시사한다고 생각된다. 金州의 雜族人이 무리져 모여 亂을 모의하고 豪族人을 죽이 니 豪族이 城外로 피해 도망했다. 이에 亂兵이 副使의 衙門을 포위 하니 副使 李迪儒가 屋上에 올라 首謀者 應絞을 쏘아 꺼꾸 러뜨렸다. 그 무리가 四方으로 흩어졌다가 이내 다시 되돌아 와 서 吿해 말하기를, 우리는 強暴하고 貪汚한 자를 제거하여 우리 의 邑을 맑게 하고자 한 것인데 어떤 연고로 우리를 쏘느냐고 하 니 迪儒가 놀라는 듯 비치며 말하기를, 내가 그런 줄을 모르고 외적인 줄로만 알았다고 하고 이어 몰래 城外의 豪族들에 전하 여 挾擊해서 그 무리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39) 즉 이 자료에서 알 수 있듯이 高麗시대의 한 지방의 주민은 크 게 호족인과 잡족인으로 나뉘어진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특히 그 豪族들을 強暴 貪汚하다고 표현함을 보면 그들은 대략 정치 사회 경제 등 諸部面에 있어서 지방사회의 지배자적 입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들 豪族의 실체는 곧 그 지방의 말단 행정담당 자인 鄉吏와 때로 公務에 동원되며 鄉吏와 같은 閥族이기도 한 百 姓들로 연결지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배집 단이 豪族으로 總稱됨을 보면, 그것은 위와같은 조건을 수반하는 族的 기반 위에서는 지배신분 집단으로, 바로 高麗 백성들의 현실 적인 지배계층으로서의 諸條件에 실질적인 기반이며 또 고려 지 배계층의 기층 조직이 아닌가 한다. 또 그러한 聚族들을 副使가 비호함을 보면 그들의 지배자적 지위는 官權의 배경과 결탁된 가 운데 사회발전에 대처하면서 지속되어 가는 것이라고 믿어진다. 39) 高麗史 卷21 世家 卷第21 神宗 3年 秋 8月條

266 1. 中間階層 高麗시대의 특수신분집단으로서의 百姓이 호족의 후예이며 관 리가 될 수 있는 姓氏族으로서 당시 지배계층의 범주이자 下限이 됨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百姓層의 성격이 그렇다면 그들이 實 職을 가질 때는 胥吏 鄉吏는 물론 중앙의 고급관리도 될 수 있다 고 하겠다. 실제 전제한 바 高麗시대는 當代의 귀족 崔冲을 위시 하여 鄕吏의 宗支로서 達官한 자들의 예가 數多하며 軍人 胥吏를 통하여 진급하는 자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고 高麗史 에 나타 나는 바 郡人 縣人은 물론 家世가 寒微하다는 자의 顯達도 역시 이러한 百姓層의 진출로 보아야 될 것이다. 따라서 중간계층적 현직에 종사하는 자들도 그 신분적 성격은 職任에서 주어지는 신분적 조건에 앞서 이러한 百姓層의 성격에 서 이미 지배신분층의 범주에 들게 된다고 이해해야 될 것이다. 또 그러한 현실은 제도적으로 중간계층에 해당되는 品外職의 일 부를 入仕職에 포함시키게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사회적으 로는鄕吏 의 品格이 많이 저하된 후대까지 大官鄕吏 라는 위 세가 당당한 鄕 吏가 있게끔 하였다고 생각된다.40) 그러나 지배계층이면서도 현직이 없을 때의 百姓은 결국 그대로 百姓으로 남게 되며 지배계층의 말단이 된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러한 단순한 百姓은 후술하는 바 관료체제적 신분화의 심화 속에 서 그 진출이 현실적으로 구속되어 갈 때는 점차 庶人으로써 피지배 적인 입장으로 전락될 수 밖에 없는 일면을 스스로 지닌셈이 된다 2) 身分的 制約 百姓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전 지배계층에 관직참여의 자격을 부여함으로써 지배계층내에 관료체제적 운영원리를 적용하고자 40) 金成俊 其人의 性格에 대한 考察 下 歷史學報 11 (1959) pp

267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하였더라도, 그러한 새로운 통치체제에 따른 신분분화는 전대로부 터의 신분적 속성과 현실적 권력의 等差에 결부되면서 새로운 체 제가 정비되는 애당초부터 있어 왔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신분 분화는 곧 새로운 통치구조의 職分의 分化에 따른 신분적 제약의 강화에서 초래되는 것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 심화된 것은 대략 전술한 바 중앙의 고급관료들의 귀족화 현상이 두드러지는 顯宗 文宗 年間이며 文宗代의 체제상의 재정비는 바로 그러한 의미를 담은 것이기도 하다. 당시 중간계층적 직임에 대하여는 전장에서 살펴보았거니와, 그 러한 직임에 대한 신분적 제약은 우선 그들에게도 부여됐던 관리 진출의 자격이 사실상 폐쇄되어 가고 있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도적인 면에서 볼 때 무엇보다도 먼저 직능상의 성격을 규 정짓는다고 할 수 있는 교육의 혜택이 아래 표와 같이 官等에 의 해서 구별된다는 점은 직분에 의한 신분분화가 이미 현실화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에 의하면 대략 下級官僚 이하 國 學 入 學 資 格 表 國 子 大 學 文武官三品以上孫 勳官二品帶縣公以上子 京官四品以上勳封者之子 學 文武官五品以上子孫 正從三品 曾孫 勳官三品以上有封者之子 四 門 學 勳官三品以上無封者之子 勳官四品有封者之子 文武官七品以上之子 律 學 州 書 算 及 學 八品以上子 庶人 七品以上子情願者 縣

268 1. 中間階層 庶人은 그 교육자체가 律 書 算學 및 地方學校로 제약되고 있 다.41) 그리고 이미 언급한 바 있거니와 5品官以上의 子가 蔭叙로 자동적으로 入仕함에 반하여 鄉吏는 그 官職進出이 三子中 一子 로 규제되었고, 南班은 7品에서 限職되었다. 또 私學 12徒의 융성 에서 알 수 있듯이 귀족적 풍토 속에서 科擧制를 통한 진출도 權貴 층이 못 되는 자들에게는 그 의미가 현실적으로 상실되어갔다. 이러한 官界進出의 폐쇄성은 관직상의 진급에서 보다 현실적으 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高麗시대에 庶人 의 경우 科擧가 아니라도 下典으로 出役하여 胥吏가 되고 다시 品 官으로 진급하도록 제도상으로는 진출의 길을 열어 놓았다. 그러 나 그 진급의 길은 우선 蔭叙의 혜택으 로 人吏職 以上의 同正職으로 자동적으 로 入仕하고 實職 진출에도 특전이 주 어지는 고급관리의 자제와 또 品官職의 同正職으로 入仕하는 登科者들과는 그 출발부터 격차가 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진출을 보다 더 불리하게 하는 官吏進出過程表 5年 7年 待 期 (同 正 으로 진출할 때나 모두 登科者마저 포함 하여 우선 同正職으로 受官하고 待期 (閑)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대기에는 品 官으로 진출할 경우 胥吏出身은 8년, 登 登 科者는 5년까지로 그 기간이 정해져 있 科 듯이 제도적으로 규정된 기간이 있다. 그 者 41) 高麗史 卷74 志 卷第27 選擧2 學校 品 官 人 吏 待 期 (同 正 職) 조건은 人吏職으로 진출할 때나 品官職 러나 그것은 또한 현실적 權力이 작용할 7年 職) 10 餘 年 五 品蔭 以 上敍 之者 子 3 下 4 年 出 典 役 六 品 以蔭 下 庶敍 人者 之 子

269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것이다. 사실상 寒微한 家世의 중간계층이 高 麗와 같은 귀족적 풍토에서 고급 귀족관료의 자제들과 경합하여 그 벽을 뚫고 진급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설형 그 벽을 뚫고 진 급할 수 있다고 하여도 다시 정식 품관이 되기까지는 參下職에 대응 되는 權務職이 있어 다시 한동안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따라 서 그 族的 기반이 寒微한 중간계층의 직임에 있는 자들이나 庶人의 경우는 登科나 특수한 공로가 있기 전에는 기껏해야 權務 職에서 마치게 되며 散秩로는 同正職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리 고 登科者의 경우라도 보다 특전이 주어지는 丙科까지의 우수한 성 적이 아닐진대 역시 同正職에서 많은 세월을 보내기 쉬우며 심지어 는 평생을 權務職조차도 맡지 못하는 예가 있다.42) 한편 이러한 중간계층적 직임에 대한 신분적 구속은 보다 본질 적인 의미를 지니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작용되고 있다. 다음 장 에서 상술하겠지만, 당시 중간계층적 직임을 띤 자들이 지배신분 층으로서의 전대적 인연에서 가지고 있었던 私田的 요소가 짙은 土地가 전시과 체제에 용해되면서 직역에 대한 반대급부의 의미 를 지니는 永業田으로 전환되고 있다. 그것은 곧 그들의 직임이 경제적 여건과 결부되어 세습화되고 신분화됨을 의미한다고 하겠 으며 永業田을 바탕으로 軍人을 배출하는 氏族을 획정지어 놓은 것으로 풀이됨을 전술한 바 軍班氏族制에서 더욱 고정화되고 있 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렇듯 지배자의 의미로 官이 대두되고 경제조건이 職役 의 반대급부로 전환함은 반대로 현직이 없는 일반 百姓層을 결국에 는 被支配層으로 실추시키는 것이 된다. 忠肅王代의 戶口에 관한 開城府五部及外方州縣 以百姓爲兩班 以賤人爲良人 偽造戶口者 42) 金光洙 高麗時代의 同正職 p

270 1. 中間階層 據法斷罪 43)라는 下敎는 그 百姓 과 良人 이 어떠한 것인지 좀 더 추구해 볼 문제지만 일면 兩班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적 신분 분화 다시 말하자면 官 庶의 차이가 더욱 강화됨을 느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같은 吏屬이라도 전술한 바 同正職體系안에 포함되 어 入仕職으로 간주되던 人吏級을 제외한 下典類의 직 또한 官의 범주 밖이 된다. 이 점은 그 명칭 자체가 그럴 뿐 아니라, 일찌기 睿宗代의 기록에 그러한 직에 종사하는 것을 出役 한다고 표현하 고 있어44) 官職이 아닌 役의 범주에 들어감을 전하고 있다. 그리 고 鄉吏의 進級規定에서 公須 食祿 客舍 藥店 司獄 등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雜役系統의 일부직에는 그 家風이 戶正 副倉正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을 임용한다는 단서가 있음을 보면,45) 吏屬職 중에도 하급직인 그리고 未入仕職인 下典類의 일부에는 근본적으로 高麗 身分構造上의 中間階曆 43) 高麗史 卷79 志 卷第33 食貨 2 戶口 忠肅王 12年 10月下敎 44) 金光洙 高麗時代의 胥吏職 p.17 45) 高麗史 卷115 志 卷第28 選擧3 鄕職

271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官人이 될 수 없는 신분층에서도 임용될 수 있었지 않았는가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료체제적인 새로운 신분분화라는 면에서 본 다면 위의 도표와 같이 전 지배계층이 다시 上下로 細分된다. 그 리고 그에 따른다면 결국 중간계층의 새로운 범주가 관의 의미를 지니는 入仕職 이상의, 同正職體系에 편성되면서도 그 하부인 同正 職의 범주에서 끝나는, 胥吏 鄕吏 南班 將校 등으로 축소된다. 그러 나 이러한 지배층의 내적 신분분화는 전술한 바 百姓의 개념이 그 근저에 흐르는 것으로 완벽한 혈족제적 기반 위에 성립된 것이라기 보다는 현실적 권력의 차이가 작용하는 면이 큰 것이다. 그러므로 중간계층의 경우 일면 그 신분적 제약에는 가변성을 내포하는 것 이며 그것은 高麗사회의 변동에 중요한 하나의 요소로 남는다. 3) 經濟的 基盤 高麗시대의 중간계층의 경제적 기반을 보면 우선 그 중 官의 범 주에 들었던 品外職의 上層職任을 띤 중앙의 人吏 南班 將校와 아 中間階層職의 受田內容 科 田 柴 受 田 者 13 (結) 35 (結) 諸主事 御史臺錄事 中樞院別駕 門下待詔 殿前承旨 都知船頭 典丘官 司引馬軍 諸令史 書史 主事 中書書藝 秘書書藝 史館書藝 太史書藝 醫針師 副殿前承旨 閣門承旨 役步軍 諸書令史 諸史 尙乘內承旨 副內承旨 試書藝 試計史 計史 監門軍 閑人 雜類 諸校尉 諸隊正 左右班殿直

272 1. 中間階層 울러 京軍의 馬軍 步軍까지의 경제적 대우는 대체로 公職의 의미 에서라고 생각되거니와 위의 표와 같이 전시과체제의 말단에 포 함되어 있다. 즉 대략 13科의 35結부터 17科 20結까지이다.46) 한편 鄉吏의 경우도 그 내용은 전혀 알 길이 없으나 70이 넘어 퇴임하는 安逸戶長에게 職田의 半을 주는 예가 있어 科田과 같은 성격의 土地가 적어도 戶長級에게는 지급됐던 혼적이 있다. 그리 고 특히 鄕吏들에게는 軍人과 함께 田柴 43結부터 田 20結까지의 田柴를 지급받도록 되어 있는 武散階가 주어지고 있어 별도의 경 제적 혜택을 받을 경우가 있다. 또한 同正職에도 17結 정도의 田 이 지급될 가능성이 있어 同正職에 해당되는 경우에는 田柴支給의 가능성이 있다.47) 그러나 이러한 토지지급은 그 相互關係가 전혀 알 길이 없으며 그 實効性 또한 애매한 점이 있다. 그리고 그에 반해 오히려 앞서 본 李永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 중간계 층의 경제적 기반으로는 그 세습적 私有田이라고도 생각되는 永 業田이 보다 현실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永業田이란 대체로 초기 토호세력의 私有田的 經濟基盤에서 연 유된 것으로, 高麗의 새로운 경제질서의 편제를 의미하는 景宗朝 田柴科體制가 이루어질 때 일률적으로 國家的 統制 속에 용해되었 던 것이며, 그것이 자손에게 전승될 때 永業田이라는 명목으로 세 습적 私的 성격을 다시 인정받은 토지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따라 서 초기 토호세력에서 출발되는 高麗시대의 전 지배층의 실질적 인 경제적 기반은 바로 이 永業田이라고 하겠으며 그 중에 포함되 는 중간계층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실제 永業田을 가진 자들 46) 高麗史 卷118 志 卷第32 食貨1 田制 47) 金鍾國 高麗時代의 鄉吏에 대하여 pp.108一112 旗田巍 高麗의 武散階 pp 金光洙 高麗時代의 同正職 pp

273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의 현상적 범주도 위로는 兩班으로부터 胥吏 鄕吏 軍人 등으로 넓 은 의미에서 지배계층에 드는 부류이다.48) 그러나 이 永業田은 고려국가의 정비과정에서 국가에 대한 功勞 나 職 役 의 반대급부의 성격으로 발전된 것이다. 대략 兩班의 경우는 功勞나 職에 대한 것이며 餘他는 그 役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전승의 의미도 功勞에 대한 경우는 傳 그외 職役에 대 한 경우는 遞 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특히 胥吏 鄕吏 軍人 등 의 경우 이 永業田이 바로 그들의 任務에 대한 반대급부의 성격 마 저 띠는 그 핵심 경제기반이 되는 셈이며,49) 이 점은 당시 田柴科 體制의 實効性에 많은 의구심이 생기는 추세에서는 좀더 강조될 수 있다고 본다. 실제 이러한 중간계층의 직무와 永業田의 결부는 위에서 본 李 永 夫子가 戶長 京軍 胥吏 등 직에 轉轉할 때 永業田이 결부되어 있는 점과도 부합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막연한 추측이지만 앞서 본 중간계층에게 주어질 수 있는 다양한 경제적 대우도 바로 이러한 永業田이 그 赏體가 되어 그에 대한 국가의 平準化 내지는 추인의 의미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가 한다. 사실 당시 永業田 의 額數는 아직 불분명한 점도 있지만 대체로 田柴科에 비교해 볼 때 그 下位에 속한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듯 永業田이 職役에 대한 반대급부의 의미를 지닌다 면 그것은 이미 그러한 의미에서 受取하는 자들에 대한 좀더 근본 적인 신분적 구속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되며 이에 서 중간계층의 신분적 의미는 한층 부각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일 면 그 額敷는 적다 하여도 永業田의 私田的 요소는 결국 그 소유 48) 金光洙 高麗太祖의 三韓功臣 pp ) 李佑成 高麗의 永業田 歷史學報 28 (1965)

274 1. 中間階層 자들이 地主層에 해당되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 서 그를 소유한 중간계층 역시 군소지주층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이 점은 곧 중간계층이 경제적인 면에서도 지배계층에 속함을 뜻 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비록 永業田이 職役에 대한 반대급부의 성격을 지닌다고 하여도 그것이 또한 초기 토호적 기반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현실적 직임이 없는 당시 지배계층으로서의 百姓과도 연결될 수 있는 소지 가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그 百姓들에게는 항시 鄉吏와 더불어 公 務에 동원된다든가 그들의 지방사회에서의 기반이 호족적인 족적 기반 위에 있다는 점 등에서 느낄 수 있듯이 다분히 그러한 地主的 인 입장에서의 土地를 소유하고 지속시킬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文宗代의 경우 三韓功臣의 후예이긴 하지만 현실적인 職 任이 나타나지 않는 契丹으로부터 도망온 廉可偁에게 父租 永業田 을 還給함을 보면50) 어떤 방법이 있었으리라고 믿어진다. 淨兜寺 石塔 建立에 郡百姓 이 發願함도 그러한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 는 현상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중소지주적인 것이긴 하지만 이러 한 중간계층에게 주어지는 경제적 여건은 앞서 본 그들에게 부여된 관리진출의 자격과 더불어 거의 全代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중간계 층의 達官에 근본적인 가능성을 이루는 것이라고 믿어진다. (4) 高麗社會의 變質과 中間階層 한 사회의 핵심 지배세력의 와해는 그 사회적 변동을 급격히 현 상화시키기 마련이다. 이러한 뜻에서 1170년 武臣亂에 의한 高麗 전기의 귀족적인 文班官僚세력의 몰락은 이후 고려사회의 변동에 50) 金光洙株 高麗太祖의 三韓功臣 pp

275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획기적인 계기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武臣 亂 이후 내적 외적 요인에 의해 계속되었던 정치 사회적 혼란은 그러한 사회변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물론 중간계층의 변화도 병행되었던 것으 로, 사회적 변동에 있어서 항시 중간계층이 한층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는 속성과 더불어, 앞서 보아온 고려 중간계층의 성격상에 내재한 관료적 진출의 가능성은 고려 후기 사회계층적 변동에 커 다란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계층적 변화는 지향 적이던 관료적 신분분화가 더욱 심화되는 방향에서 전술한 바 고 려적 百姓層을 포함하는 廣義의 중간계층이 새로운 分解를 보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하자면 지배계층의 전대적 기반계층이 지향적인 관료적 직능에 따른 새로운 신분분화를 본다는 것이다. 武人政權이 새로운 文人을 필요로 함에서 시작되는 중간계층의 급격한 관료적 진출의 확대는 이후 계속되는 정치적 혼란에서 더 욱 현저해졌다. 그리고 관료적 신분분화의 심화에서 오는 중간계 층의 신분적 제약의 확대와 정치적 혼란에서 주어지는 그들에 대 한 과중한 임무상의 부담은 관료적 진출이라는 그들의 신분적 상 승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그리하여 급기야에는 신왕조의 기반세력 이 되는 새로운 관료세력인 士大夫階層을 배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계속되는 권력정치에 따른 중간계층에 대한 압력은 중간계층의 성격을 저하시켜 그 직임을 하나의 身役으로 실추시켜 갔다. 그리고 이미 庶人의 입장으로 전화하던 지배계층 으로서의 고려적 百姓層은 물론, 현실적인 직임이 있는 좁은 의미 의 중간계층의 일부까지도, 확대되는權貴의 農莊에 흡수되는 등 隷民의 處地로 몰락해 갔다. 이러한 중간계층의 분해는 결국 高麗왕조의 기반세력을 상실케

276 1. 中間階層 하는 것으로 왕조 붕괴에 근본적인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歷代 諸王들의 그러한 변화에 대한 개혁이 추진되기도 하였으나 無爲 에 끝나는 것이었으며, 좀더 심화된 儒敎的 政治觀을 지니고 등장 하는 士大夫 세력이 개혁의 주체로 등장함에 새로운 계층변동은 비로소 안정세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중간계층 또한 官의 범주에서 탈락되어 身役의 성격이 강화되면서 한층 신분적 으로 고정화된 새로운 범주를 갖게 되었다. 한편 南班의 경우도 이러한 사회적 변동과 더불어 성격상의 변 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특히 蒙古지배기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그 를 통한 정치적 진출을 꾀하는 현상으로 나타났지만, 內察職이라 는 직임의 성격은 儒敎的 政治觀의 심화라는 커다란 추세에 따라 그 班行의 저하현상으로 발전하였으며, 결국은 宦官 內侍 및 기술 적 등으로 해체되어 버렸다. 1) 官僚的 進出과 身分的 低下 武臣 亂이 일어나자 文臣勢力은 붕괴되고 行政은 일시 마비되 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미 鄭仲夫 자신이 殘存文臣을 포섭하고자 하였듯이 武臣執權者들은 자기 政權을 받침할 새로운 文臣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政情이 한층 안정된 崔氏政權 에 이르러서는 政房 書房 등을 설치하여 그 정치적 목적의 달성과 아울러 많은 文士를 유치 우대하였다. 또한 崔氏政權은 그러한 文 士 양성을 위하여 敎學機關을 보호육성하기도 하였으며, 文人의 수요라는 이유에서라고 생각되거니와 武臣執權期 전반에 걸쳐 科 學의 設行이 계속되었을 뿐 아니라 그 取士額數도 오히려 증가하 고 있었다.51) 51) 闕丙河 高麗 武臣執權時代에 대한 一考 武臣政治의 性格과 文臣의 地位를 中心으로 史學硏究 6 (1959)

277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이렇듯 武臣政權이 새로운 文臣을 필요로 함에 이미 관직진출의 자격이 주어졌고 군소지주층으로 어느 정도 경제적 여건도 마련되 어 있었으며 또 이왕에 行政實務에 종사하였던 관계로 정치적 識 見이나 학구적 추구에도 그나름 바탕을 지녔다고 생각되는, 鄉吏 를 주로하는 중간계층의 文班으로 진출이 현저해졌던 것이다. 그 리고 특히 집권층이 武臣이었던 까닭으로 文才와 吏才가 동일시되 고 나아가서는 能文能吏 의 文士를 이상적인 관료형으로 삼고 자 하는 경향마저 일게 됨에 따라 鄕吏 胥吏들의 文班으로의 진출 은 더욱 용이한 면이 있었다.52) 중간계층의 이러한 관으로의 진출은 특히 관료체제적 신분분화 라는 면에서 그 지방적인 성격 때문에 좀더 일찌기 직제상 중앙관 리와 단절되어 나갔던 지방 鄕吏 내지는 그들과 同類에 속할 수도 있는 百姓層에서 보다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蒙古의 침입 이후 鄕 吏 百姓 이 관작을 띠고 避役함이 자주 문제가 되고 있듯이 蒙古 내지는 權貴의 수탈과 계속되는 戰費의 지출 등으로 그들에 대한 경제적 수취상의 압박이 급증함에 이르러서는53) 鄕吏 百姓 의 관료화 경향은 더욱 현저해졌다. 그런데 그러한 입장에서의 중앙 관료로의 진출은 고급관료로의 득명만이 목적은 아니었으며 科擧라는 한정된 入仕路는 그러한 추세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趙浚의 상소 문54)에서 알 수 있듯이, 혼탁한정치풍토속에서 科擧뿐 아니라軍 功을 빙자하거나 혹은 權貴에 의탁하여 또는 몽고 침입 이후 급증 했던 納粟補官 등 갖인 방법을 다해 일단 중앙관리의 신분만이라 52) 李佑成 高麗朝의 吏에 대하여 歷史學報 23 (1964) pp ) 金成俊 其人의 性格에 대한 考察 下 pp.92_98 54) 高麗史 卷75 志 卷第28 選擧3 鄕職

278 1. 中間階層 도 취득하여 鄕役을 면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경우는 우선 중앙의 胥吏 내지는 伍尉 등의 下級職에 취임하여 同正職體 系로 品官 신분을 취득함으로써 鄕役을 탈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리하여 일단 중앙직을 얻은 자들은 當代에 바로 고급 관료로 현달하지는 못하였서도 또한 기회있는 대로 핵심 관료층 으로 상승할 수도 있었으니 그것은 武臣亂 이후 지향되던 能文 能吏 型의 새로운 관료형의 발전에도 양적 질적으로 기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신진관료들은 점차 비대하여 구귀족과 대립하는 형세를 보이기에 이르렀다. 또 그들에게 性理學이 영향 하면서부터는 學究的인 면을 더욱 강조하였으며 能文能吏 라 는 면에서 士大夫 를 자처하였던 것으로, 다음과 같은 당시 신 진관료의 대표적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鄭道傳의 家系는55) 이 상과 같은 鄕吏層을 주로하는 중간계층의 士大夫로의 진출과정을 단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高祖 公美 (戶長) 曾祖 英粲 (秘書校書郞同正) 祖 均 考 云敬 (檢校軍器監) 道傳 그런데 蒙古침입 이후 鄕役者에게 지워지는 과중한 부담은 그들 의 관료화를 촉진시키는 한편 그 일부를 소극적인 避役의 방법으로 流亡케 하였다. 당시 흔히 거론되는 郡縣이 一空 하다는 형편은 그들이 모두 관료화에 의해 소모되지는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하겠 다. 그리고 流亡者는 결과적으로 權貴의 農莊으로 흡수되어 隷民 化하는 경향을 보였던 것으로 특히 몽고 지배기에 많이 나타나는 55) 鄭道傳 三蜂集 卷4 行狀

279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權貴들의 押良爲賤 認民爲隷 등의 문제에는 물론 鄕吏 百姓 등의 몰락 현상도 내포하는 것이라 하겠다. 당시 權貴들의 農莊이란 특히 武臣亂 이후 전기적 경제질서가 완 전 붕괴되면서 크게 확대되어 간 것으로 계속되는 정치적 혼란 속 에 山川爲標 라는 현상까지 이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 農莊은 權貴들의 權力의 그늘아래 전혀 私的인 영역의 감이 짙은 것이었으 며, 農莊의 油客 藏獲 등은 신분적으로 鍊民이었으나 그 의무는 당 시의 잡다한 공적 의무에 비해 農莊主에 대한 일원적인 의무로 단 순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공적 영역에서 현실고에 허덕이는 鄕役者 들은, 押良爲賤하는 權貴의 권력의 작용이 물론 主된 원인이겠지 만, 일면 농장에 投託 寄進 등의 명목으로 그 토지와 함께 예속됨으 로써 과중한 공적 부담에서 피할 수 있는 일면도 있었던 것이다.56) 한편 이러한 지방사회에 있어서의 중간계층에 대한 가중한 압박 은 鄕吏 자체의 성격마저 저하시키는 것이었다.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 그러한 중간계층의 이탈현상이 곧 避役으로 표현되고 있듯이 그들의 임무는 이제 일종의 身役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人質的인 요소로서 출발하였던 鄉吏의 子弟인 其人은 아예 力役의 부담자로 징발되기에 이르렀다.57) 따라서 이제는 당시 중간계층 의 기반세력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 鄕豪층의 지방의 중간계층이 지배자적 입장에서 단순한 役人으로 전락되었다고 하겠으며, 초기 토호적 속성을 지녔던 高麗의 지배신분층이 관료체제에 따른 단순 한 官 庶 로 兩極分化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계층적 분화는 나아가서는 지방사회의 토착지배 층이 이제는 官 다시말하자면 兩班으로 그 성격을 전화시켜 시 56) 宋炳基 高麗後期의 農莊에 대하여 韓國史硏究 3 (1969) pp ) 金成俊 其人의 性格에 대한 考察 下 pp

280 1. 中間階層 세에 부응하는 새로운 지배자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지배적 속성을 지속시켰으며 광범한 在地 群小 兩班地主層이 형성되었음을 의미 한다고 하겠다. 사실 이때의 官僚化란 실제에 있어서는 이미 시사 한 바와 같이 대부분 同正職體系로의 散職이었던 것으로 職制上으 로도 兩班層의 확대가 가능하였으며, 그 정도는 그러한 地方의 散 職者들에게 職税를 징수하기 위한 使人을 파견할 정도였다. 그리 고 京師의 兩班도 그러한 兩班이 기층세력을 이루고 있었다고 생 각되며 다음에 제시하는 朝鮮시대의 이름있는 兩班 家門인 驪興 李氏의 高麗에서의 四代에 걸친 家系表는 地方社會에 족적 기반을 麗末 李秀海 家系表 仁德(仁勇校尉) 元傑(副戶長) 孝溫(戶長 軍尹) 喬(郞將同正 郞將) 秀山(書勸司 正) 秀海 尙衣院直長同 正 戶部主事 謙(檢校軍器監) 允培(司醞令同正) 球(檢校郞將) 秀龍 謹 允成(司醞令同正) 止(學生) 允芳(司醞令同正) 惠根 皐(成均進士) 乙升(五尉) 가졌던 鄉吏들의 兩班化의 한 표본이 된다고 생각된다.58) 즉 이 世系에 의하면 戶長 家門이 同正職體系로 兩班化하고, 外族系는 생 략했지만, 대략 좀더 格이 높은 兩班家와 姻戚관계를 맺으며 존재 58) 金光洙 高麗時代의 同正職 pp

281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하다가 그 가문에서 科擧를 대상으로 하는 學生 成均進士들을 배 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면 그들의 職이 同正職이 많다든가 그 실직에 主事 五 衛 등이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그러한 兩班층은 대부분 현 실적으로는 중간계층적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 서도 그들이 兩班의 입장에서 公役에서 이탈되고 있음은 농장으 로 몰락한 경우와 아울러 국가적 재정비를 불가피하게 하는 것이 며 결국 왕조 교체와 병행하여 새로운 신분적 정리가 진전된다. 2) 新進官僚勢力에 의한 再整備 지방사회의 중간계층이 上下로의 兩極分解됨에 따른 국가운영 의 기반계층인 公的 영역민의 감소는 고려 국가 운영상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특히 蒙古 지배기 이후 흔히 거론되어 오던 州縣이 一空하였다는 표현은 그러한 국가 운영상의 모순을 통감한 소치일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시도 또한 歷代 諸王에 의해 추구되었던 것으로 그러한 일련의 왕실 중심의 개혁의 시도 는 蒙古세력에서 벗어나면서 추진된 恭愍王代의 개혁에서 절정을 이룬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개혁의 시도는 그 주체세력이 갖는 복고적 성격 과 현실적 인연으로 자기 한계를 가지는 것이었으며 근본적인 해 결점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性理學的 차원에서 한층 새롭 고 심화된 儒敎的 정치 이념을 수반했던, 그리하여 고려적 체질에 서 이탈코자 하였던, 신진관료층이 등장함에 이르러서야 그 개혁 은 실천력을 지니게 되었으며 社會的 혼란은 새로운 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일련의 개혁에서 특히 사회구조적 문제는 우선

282 1. 中間階層 復古的인 刷還의 각도에서 추진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에서 취해진 조처의 하나는 곧 田民辨正都監 의 설치였다. 이 都監의 설치는 물론 農莊에 흡수된 公的 영역의 민중을 원상 복구시키자는 데 있었던 것으로 그 안에는 지배자적 입장에 있었던 鄕豪層의 몰 락자에 대한 쇄환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목적 이 얼마나 달성되었는가는 알 수 없어도 대략 이때의 그러한 환원 을 의미하는 것이 라고 느껴지는 후대 世宗實錄 地理志 의 地方 姓氏에 관한 기록에 高麗制定百姓姓 이라는 文句가 있음을 보 면59) 다소간에 추진은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특히 지방행정의 복구라는 면에서 鄕吏층을 확보하기 위 한 조처는 그들 鄕吏층의 보다 보편적인 탈출구였던 중앙관리로의 진출의 억제 내지는 폐쇄라는 면에서 이루어졌다. 지방향리의 중앙 관직 진출에 대한 제한은 누차 시도되었던 것이지만, 특히 麗末의 개혁의 주역이었던 趙浚에 이르러서는 전게한 그의 上書에서 일부 향리출신관인을 쇄환시킴과 아울러 정식 入仕路인 科擧의 경우라도 明經 혹은 雜科로서의 出身免役은 不許하도록 건의하고 있으며, 이 러한 움직임 또한 당시 趙浚의 정치적 비중으로 보아 실천성이 강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쇄환정책은 이미 그 原型을 상실한 것일진대 復 古的일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개혁의 주된 의도였던 公的 영역민의 확보라는 의미 이상의 것은 되지 못하였으며, 결과 적으로 그들의 지배자적 속성은 다분히 상실된 상태에서 국가적 의무만이 남는 항태였다. 실제 당시 쇄환되는 百姓은 전혀 國役담 당의 특수한 신분층의 성격으로 나타났으며60) 향리들의 경우는 59) 武田幸男 高麗時代의 百姓 朝鮮學報 28 (1963) pp ) 武田幸男 高麗時代의 百姓

283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趙浚의 주장에서와 같이 그 관료적 진출이 현실적으로 폐쇄되는 경향 속에 신분적으로 더욱 고정되어 갔다. 한편 이러한 새로운 계층적 정리의 추세는 일단 중앙관이 된 자 들에게도 가해졌다. 前節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당시 중앙의 兩班 職을 지닌 자들은 대부분 同正職體系의 散職을 띤 자들이며 그 현 실적 직임은 또한 胥吏 將校 등 중간계층직에서 출발하는 것이었 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그 이상의 진급의 문이 열려 있었 던 것으로 外官의 增派 등으로 수요가 급증하는 하급관리의 경우 는 대부분 그러한 胥吏出身으로 충당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특히 학문적 소양을 내세우는 신진 관료층의 정치적 비 중이 상승해갈 때 중앙의 정치질서는 점차 登科者 중심의 체제로 개편이 시도되었으며 그러한 경향 속에서 胥吏出身의 진출은 폐 쇄되어 갔다. 그리고 恭愍王代의 全以道가 舊制를 근거로 하여 監務 縣令을 登科士流로 專任케 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음은 대체로 그러한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趙浚 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府史胥吏之徒를 단지 權務職에 한하여 진급시키자 고 주장하고 있듯이 胥吏進出은 이제 전반적으로 규 제되는 감마저 보이고 있다. 그리고 실제 그들 사대부계층에 의해 정비되는 조선의 관직체계상에는 高麗시대의 權務職의 중심을 이 루던 錄事職이 上級 胥吏職으로 개편되고 있어 그러한 주장은 어 느 정도 관철되었다 고 보아진다.61)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중간계층에 대한 재정비는 물론 정치적 기능면에서는 登科士流 즉 士大夫층을 중심으로 하는 직제상의 정 비를 의미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그에 따른 한층 심화된 관료체 제적 신분의 분화, 고정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개혁자 61) 金光洙 高麗時代의 胥吏職 pp

284 1. 中間階層 들은 그러한 신분분화에서 새로운 지배계층의 기반이 되는 舊來의 兩班層에 대한 일대 정리작업이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그 개혁의 막바지인 恭讓王 2年 7月의 兩班戶籍整理에 관한 都堂의 啓에 서62) 兩班戶口는 반드시 三년에 한 번 하여 一皆 備錄하여 考閱을 쉽게 한다. 近年이래 戶籍法이 廢하여 兩班의 世系를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혹은 壓良爲賤하고 혹은 以賤從良하여 訟獄이 뜰에 차 고, 안건이 분분하니 원컨대 지금부터 舊制를 모방하여 시행하고 戶籍이 없는 자는 吿身立朝를 不許하고 라고 하고 있음은 그러한 정리 사업이 추진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으며, 다음해 朝鮮田制의 기축인 科田法이 공포됨은 그러한 새로운 신분정리에 의미 심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 리를 통하여 이미 중앙관직을 취득함으로써 그 지배적 성격을 兩 班이라는 새로운 개념에서 지속시킬 수 있었던 지방의 鄕豪勢力 은 다시 朝鮮의 기반 지배층으로 흡수되어 갈 수 있었다. 한편 이러한 추세 속에서 관료적 진출이 점차 폐쇄되었던 중간 계층직의 현임자들은 그 신분적 성격이 더욱 심화 고정화되었던 것으로 이미 麗末부터 그러한 새로운 징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禑王代의 기록은 胥吏들에게 이미 조선시대의 衙典의 表徵이 라고도 할 수 있는 白方笠을 씌우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63) 3) 南班의 變質과 消減 高麗후기의 사회신분적 변동은 南班系列의 경우에서도 마찬가 지로 커다란 變化를 초래케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방향도 62) 高麗史 卷99 志 卷第33 食貨2 戶口 63) 金光洙 高麗時代의 胥吏職 p

285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그 자체 內察職이라는 성격이 儒敎的 職分觀에서는 輕視되는 것으 로 관료적 신분분화의 추세 속에서 전반적으로 身分的 저하의 형 태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그 出仕 성분이 祖宗苗裔 도 있지만 良賤不明의 兩班의 修養子, 雜路人의 外孫, 宦者 僧人의 子 등 대체로 신분상의 흠이 있는 자들이 포함되고 있어 한층 賤 視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것이었다.64) 실제 이러한 속성에서 南班은정치적 기강이 한층 문란해지는 蒙 古 지배기에 들어와서는 대체로 內笠 伶人 樂工 등 賤隷들의 出仕 路로 전락해 갔으며 결과적으로 南班 자체가 더욱 천시되는 경향 을 보였다. 그러나 일면 정치적 혼란 속에서 그 入仕職이라는 면 의 속성은 또한 그러한 성분들이 顯達할 수 있는 관문의 역할도 하였던 것으로 어느 면에서는 高麗 신분제 동요에 일익을 한 일면 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南班의 현상은 물론 당시 정치 사회적인 면에서 커다란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으로 그에 대한 재정리의 논 의도 있었다. 다음과 같은 忠烈王代의 內笠 上將軍 金子廷을 東京 副使로 임명함에 대한 忠烈王과 그 妃인 齊國大長公主와의 問答 의 내용은 這間의 사정을 보다 실감하게 한다.65) 公主가 말하기를, 家奴로서 邑宰를 삼음이 可합니까 南班人으 로서 中外의 重任을 얻게 된 것이 어느 代부터입니까 하니, 王이 말하기를, 元廟로부터 입니다 하였다. 公主가 말하기를, 王은 진 실로 元王의 子입니다 하니 王이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王은 音律에 留意함이 있어 일찌기 內笠 伶人 등을 시켜 鼓樂케 하였 는데 公主가 사람을 보내어 고하기를, 絲竹으로써 國家를 다스림 은 들은 바가 없읍니다 하니 드디어 그것을 파했다 64) 李丙燾 高麗 南班考 pp ) 高麗史節要 卷之20 忠烈王 11년 8월

286 2. 農民과 村落 그런데 이미 여기에서도 나타나듯이 南班職은 그 성격상 대체로 宦者들의 직임으로 발전한 듯하다. 그리고 恭愍王代에 이르러서 南 班이 속하였던 掖庭局과 별도로 宦者 內侍를 통괄하는 內侍府가 성립됨을 보면 대략 이때부터 南班은 현실적으로 消滅된 것이 아 닌가 한다.66) 金 光 洙 2. 農民과 村落 (1) 農民의 負擔 農民은 그 당시의 사회에 있어 비록 下部의 被支配階層이기는 하였으나 그 역할이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이들은 農耕에 종사하 여 사회적 생산의 거의 전부를 담당하였고 그들이 부담하는 稅役 은 國家 財政의 기초가 되었다. 이들의 생산적 활동과 税役부담이 없이는 국가는 존립할 수가 없었다. 農民은 크게 나누어 丁戶와 白丁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丁戶는 국가가 강제적으로 부과한 職役(身役)을 부담하는 戶이며 그 대 표적인 것은 軍人戶 其人戶 驛戶 같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白丁은 職役의 부담이 없는 사람들을 가르키며 광범한 農民層이 이 白丁 에 속하였다. 丁戶와 白丁이 어떤 기준에 입각해서 구분되었는지 지금 그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丁戶의 職役, 특히 軍役에 관 해서는 다른 항목에서 벌도로 취급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주로 白丁의 부담 즉 그들이 국가에 바치는 税役의 부 66) 高麗史 卷 77 志 第30 百官 2 內侍府

287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담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田柴科體制下의 農 民(白丁)이 부담한 税役의 내용은 보통 租税 貢賦 力役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1) 租 稅 租稅는 토지의 耕作者인 농민이 국가나 혹은 그 토지의 지배자 인 私人(주로 관료)에 대하여 납입하는 租(田祖)를 말하는 것이 며 公田의 경우 租稅는 국가에 수입되고, 私田일 경우에는 租稅는 사인에게 수입된다. 전국의 토지는 租(租稅)의 귀속에 따라서 公 田(國家收租地) 私田(私人收租地)으로 구분되는데 公田은 民田 國 有地 王室所有地 등으로 대표되며 私田은 주로 관료들에게 분급한 각종 收租地와 宮院田 寺院田같은 것이다. 사실 民田을 公田이라는 範畴안에 포함시키는 것은 다소 어색한 일이지만은 이것은 모든 토 지를 王土로 해석하는 王土思想에 분식된 관념의 소산이다. 公田 중에는 耕作者로부터 租를 수취하는 이른바 收租地 이외에 王室이 나 국가기관이 직접 경영하는 直營地도 있었다. 丁戶는 職役을 부담하는 대가로서 국가로부터 토지의 支給을 받았으나 職役의 부담이 없는 白丁은 국가로부터 토지의 支給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白丁은 토지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 었다. 국가로부터의 토지의 지급은 없었으나 그들은 그들대로 일 정한 토지를 所有하고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民田이었다.(田柴科 體制下의 土地制度 參照) 이 民田은 白丁 농민들이 祖先 대대로 물려받은 傳家의 재산이 었다. 白丁 농민은 그들의 가산인 民田을 경작하여 생계를 세웠 다. 白丁중에는 民田(公田)의 耕作만으로는 생계가 서지 않아 일부 私田인 관료들의 公給收租地를 小作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토지 재

288 2. 農民과 村落 산이 없어 전적으로 私田의 小作農民에 전락한 사람도 아마 있었 을 것이다. 경작하는 농민은 公田 私田을 막론하고 당연히 일정한 租稅를 물었다. 高麗의 건국 초기에 있어 租稅(田租)의 收取規定이 어떠하였는지 이에 관한 직접적인 확실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開國으로부터 약 5세기를 지난 高麗 말기에 趙浚이 王에게 올린 上疏文에 의하면 太 祖(高麗)는 즉위하자 곧 租稅의 收取率을 로 정하고 一負에 3升 즉 1結에 30斗(乙石)를 거두어 들였다 한다.1) 그러나 趙浚의 이 말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 갑자기 판정하기가 어렵다. 租稅의 收取率에 관한 확실한 明文이 보이는 것은 건국 후 70여년 을 지난 成宗 11년(992)의 일이다. 이해에 내려진 制에 의하면 公 田租의 收取率은 四分取一, 즉 25%로 정하고 每結當 收租量은 水 田 上等田이 3石 11斗 2升 5合(5勺?), 中等田이 2石 11斗 5 升 5合, 下 等 田이 1石 11斗 2升 5合, 旱田 上等田이 1石 12斗 1升 2合 5勺, 中等田이 1石 10斗 6升 2合 5勺, 下等田은 缺로 되어 있다.2) 公田 收租率이 25%였음에 대하여 私田 收租率은 二 分取一 즉 50%였다. 이것은 陳田의 開懇을 장려하기 위하여 光宗 및 睿宗年間에 내린 制3)의 내용에 의하여 무난히 확인할 수 있 다. 이와같이 高麗 前期의 公田과 私田은 租税의 收取率을 달리하 고 있었으며 私田의 收租率은 公田의 收租率 25%의 倍額에 해당 하는 50%였다는 것이 주목된다. 公田(25% 收租)과 私田(50% 收租)은 그 收租率에 있어 倍額의 1) 高麗史 卷 78 食货志 1 田制(祿科田) 辛禑 14年 7月 趙浚上書 太祖龍興 卽位 三十有四日 迎見群臣 慨然嘆曰 近世暴歛 一頃之租 收至六石 民不聊生豫予甚憫 之自今宜用什一 以田一負 出租三升 2) 高麗史 卷 78 食貨志 1 田制(租税) 成宗 11年判 3) 同上 光宗 24年 12月判 同上 睿宗 6年 8月

289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차이가 있었다. 즉, 私田의 경작자는 公田의 경작자에 비하여 배액 에 해당하는 租稅를 물었다. 公田과 私田이 다 같은 성격의 토지이 며 또 그 歷史的 배경이 같은 것이라면 이러한 막대한 收租率의 차 이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면 公田과 私田사이에 이렇게 收租率 이 대폭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租税 혹은 租 라는 같은 용 어로 포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公田租 와 私田租 는 분명히 그 성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公田租 는 地税의 槪 念에 해당하는 것이고, 收田租 는 地代의 槪念에 해당하는 것이었 다. 위에서 우리는 公田을 民田과 왕실소유지 국유지등으로 나누어 생각해 봤는데 본래 民田은 농민들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기 때문에 이들이 國庫에 바치는 民田租 公田租 는 地稅이지 地代일 수는 없다. 왕실소유지 중에서 가장 그 비중이 컸으리라고 짐작되는 莊 處 는 본래가 羅末 이래의 祿邑의 계통을 이은 것이라고 생각되며 본래 祿邑의 주민과 일반 촌락의 公民은 같은 차 원의 농민이었으므로 祿邑系列의 莊 處民은 그 租税부담이 일반 民 田을 경작하는 農民과 달라야할 이유가 없었다.4) 주로 公廨田 같 은 것으로 구성된 國有地는 주로 直營의 형태를 取한 것이 아닐까 한다. 왕실소유지 중에서도 租를 받는 것이 아니라 왕실이 直營하여 토지의 소출을 전부 取得하는 直營地 경영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흔히 있었다.5) 이 直營地는 주변 농민들의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 하여 국가나 왕실이 직접 경영하는 토지이므로 여기에서는 租의 4) 莊과 錄色의 關係에 관해서는 旗田 巍 高麗時代の 王室の 莊園 莊處 朝鮮 中世社會史の硏究 所收 5) 王室所有地 國有地의 直營에 관해서는 旗田 巍 高麗の 公田 朝鮮中世社會史 の硏究 所收 姜晋哲 高题 前期의 公田 私田과 그의 差率收祖에 대하여 歴史學報 29 참조

290 2. 農民과 村落 率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요컨대 국가 혹은 왕실이 收租하는 公 田은 國庫에 대하여 地稅을 부담하는 토지였었다. 이에 대하여 소출량 50%의 租稅를 무는 私田 주로 관료계 급에 授與된 分給收租地 은 지세를 무는 토지가 아니라 地代를 무는 토지였다.6) 이와 같이 같은 租 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으 나 私田租는 地代를 의미하며 公田租는 地税를 의미한다. 新羅말 기에는 귀족들에 의한 大土地兼併이 널리 진전되고 따라서 小作慣 例도 널리 보급되어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高麗 前期에 50%의 地代를 무는 私田은 아마 그 계보가 이 小作制土地와 연결이 되는 것이며 그 收租率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小作料(並作半收 혹은 折半 收益)에 해당하는 것이 주목된다. 2) 貢 賦 貢賦라는 용어는 본래 그 내용이 매우 복잡한 말이다. 어떤 경 우에는 貢物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어 제도상 田租(力役)와 더불어 두개의 큰 税項目으로 규정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貢赋라는 개념안에 田租와 貢物을 포함시켜 말하는 때도 있으며 또 高麗史 의 用例를 잘 분석해 보면 貢賦를 일정한 税項目의 하나로서가 아 니라 收取 전반에 관한 修辭的用語로서 쓰고 있음이 주목된다.7) 이러한 용어의 혼란이 있기는 하나 貢賦가 布나 기타 지방의 土產 物 즉 上貢을 政府에 上納하는 税項目이며 租税 徭役(力役)과 더 불어 收取體系의 根幹을 이루고 있었음은 再論할 여지가 없다. 朝 鮮時代에도 貢賦는 가장 주요한 收稅의 항목이었으며 太祖는 즉위 6) 私田租의 地代理論에 관해서는 旗田 巍 註 5) 論文 참조 7) 貢賦의 用語例에 관해서는 田川孝三 李朝貢物考 李朝貢納制の硏究 所收 今掘 誠二 高麗!賦役考覈 社會經濟史學 참조

291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하자 곧 貢賦詳定都監을 設置해서 貢賦의 等第를 세우고 납부할 貢赋의 액을 정하여 國家財政의 기초를 닦았는데, 이 貢赋의 제도 는 高麗時代의 税制를 繼承한 것이었다. 이 貢赋는 唐制의 調와 비 슷한 것이며 鄭道傳도 그의 著 朝鮮經國典에서 租稅 常徭 雜貢은 唐의 租 席 調에 遺意하였다. 高麗 前期의 貢賦에 관해서는 거의 연구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 내용 실태를 잘 알 수는 없으나 우선 주목되는 것은 貢賦가 農民 의 個別的 負擔이 아니라 集團的 負擔이며 每年 미리 定하여진 額 을 各 州 府 郡 縣에 할당하였다가 王室 宮院 政府의 各機關등에 獻 納케하는 것이었다. 貢賦는 전국의 貢物을 정부의 어떤 기관이 일 원적으로 收集하여 그것을 다시 각 기관에 分配하는 것이 아니라 王室 宮院 政府의 各機關에는 각기 貢物을 上納하는 郡縣이 미리 정 해져 있었던 모양이다. 忠烈王 때의 이야기지만 安東 京山府 營內 의 郡縣의 貢賦는 元成殿과 大府庫 迎送庫 少府庫등에 輸納토록 되 어 있었다.8) 이러한 관례는 初期 이래로 있었을 것이다. 州 府 郡 縣의 貢賦(歲貢)의 額數가 定해진 것은 光宗即位年의 일이다. 이때에 결정된 歲貢의 具體的 內容은 알 수 없으나 靖宗 7년 정월에 三司가 王에게 올린 奏文에 의하면 諸道의 外官員僚 로서 所官下의 州 府 税貢이 一歲에 米 300硕, 租 400斗, 黃金 10 兩, 白銀 2斤, 布 50匹, 白赤銅 50斤, 鐵 300斤 鹽 300硕, 絲縣 40斤, 油蜜 1硕을 未納한 자는 現任에서 罷免토록 되어있다.9) 貢物의 품목으로서 高麗史에 나타나 있는 물품을 대충 살펴보면 金 銀 白銅 赤銅 鐵 米 租 鹽 皮革 布 絲縣 苧布 油 蜜 瓷器 陶磁器 生薑 紙 墨 筆 炭 乾魚類 昆布 蕾 海苔 등속인데 이 貢物은 간혹 布로써 代納 8) 高麗史 卷 78 食貨志 1 田制(貢賦) 忠烈王 4年 2月 下旨 9) 高麗史 卷 78 食貨志 1 田制(租稅) 靖宗 7年 正月 三司奏

292 2. 農民과 村落 하는 일도 있었으니 예를 들면 文宗 20년에는 州縣은 每年의 常 貢 牛皮 筋 角을 平布로써 折價代納케 하였다 한다.10) 睿宗 9년의 判에 의하면 貢中 布一匹은 折貢平布 一匹十五尺하고 貢貯布 一 匹은 折貢 平布 二匹하고 貢縣油一匹은 折貢平布二匹하도록 되어 있다.11) 州 府 郡 縣은 할당된 貢物의 액수를 어떠한 기준에 입각해 서 주 민들에게 徵集하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結局은 有戶則有調( 貢) 와 비슷한 원칙에 의하여 村落에 살고 있는 농민들 家戶에 貢 擔시켰을 것이다. 郡 縣은 割當된 貢物을 採取 製造 搬送하기 위하여 주민들에게 役을 課하였는데 이것을 貢役이라하였다. 貢賦는 王宮 宮院 政府의 각 기관이 收取할 때에는 現物 이라는 형태를 취하 나 郡縣의 주민들이 이것을 부담할 때에는 대개 役(勞動力收取) 貢役 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貢役은 貢物의 採取 製造 搬送 등에 投下된 일종의 徭役이었다. 貢役은 당시의 白丁 농민이 부담한 役 중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의미에서 貢賦라는 稅目의 개념과 徭役(力役)이라는 稅目의 개념 은 서로 출입 중복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貢役은 白丁 농민의 부담 중에서 아마 가장 무거운 것이 아닐까 推察되는 바이거니와 村落의 농민, 所 의 匠人들이 이 貢役을 면 하기 위하여 逃避 流亡하는 사례가 흔히 있었다. 농민은 본래 다 貢役의 부담을 맡고 있었으나 농민중에서도 富強한 자는 地方의 官 員吏屬와 結托해서 미리 役價 를 바치고 貢役에서 면제되는 일 이 있었다. 役價 라는 것은 貢役을 면제해 주는 어떤 대가를 의 미하는 것이며 지방의 관속은 이를 수취하여 私腹을 채운듯 하다. 10) 高麗史 卷 78 食貨志 1 田制(貢賦) 文宗 20年 6月條 11) 同上 睿宗 9年 10月判

293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役價를 받고 役을 면제해 주는 것은 본래 불법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당시 널리 행하여지고 있었다. 이 결과 富戶들은 役價를 내어 貢役을 免하고 貢役은 빈곤한 농민들에게만 집중되 어 貢戶가 도피 유망하는 불온한 형세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부정 은 貢物의 收取過程에서도 있었을 것이 당연히 상정되며 지방관 원은 중앙의 할당 이상으로 貢物을 수취하여 사복을 채우는 예가 많았을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貢赋에는 常貢과 別貢의 두 종류가 있었다. 이 常貢과 別貢의 구별에 대해서는 貢은 즉 別貢이며 지방의 土產物이요, 賦는 즉 常貢이며 일반 農村의 물산이라는 설,12) 常貢은 즉 每歲에 各 州 縣으로부터 일정한 양의 現物税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米租 黃金 白 銀 布 白赤銅 鐵 鹽 絲縣 油蜜 牛皮 筋角 등이 이에 속하고 別貢은 특수 생산장소인 各所에서 貢出하는 것으로 銅鐵 瓷器 紙墨 등등이 그것 이었다는 설,13) 그리고 또 常貢은 米 布 絲縣 油蜜 등을 바치게 한 것으로 布가 그 중심을 이루었으며 別貢은 그 지방 토산물을 따로 바치게 한 것이라는 설 등이 있다.14) 이것은 주로 產物의 종류에 따라서 구별하려는 見解이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예년 常 定의 貢物을 常貢이라 하였고, 이에 대하여 王室이나 정부의 기관 이 수요에 따라서 임시로 불시에 특별히 差定하여 貢納케 한 것, 즉 상례 이외의 別例의 貢을 別貢이라 말한 것으로 짐작된다. 朝鮮 時代의 別貢(別例所貢)은 불시에 土產이 아닌 것이 差課되었으므 로 인민은 倍量의 가격으로 물품을 구매 獻納하는 등 막대한 폐해 를 입었다고 한다.15) 高麗時代의 常貢 別貢도 아마 朝鮮時代와 같 12) 中村榮孝 李氏朝鮮の税制 東洋史辭典 9 13) 李丙燾 韓國史 中世篇 p ) 韓佑肋 韓國通史 p ) 註 7) 田川論文

294 2. 農民과 村落 은 뜻이었다고 이해해 둔다. 시대가 훨씬 내려와 高麗 후기가 되면 輸納이 遲延된 郡 縣의 貢赋는 貨殖의 무리나 혹은 京主人이 우선 代納하여 뒤에 倍數徵 取하는 등의 폐단도 있었다. 이러한 代納의 폐단이 초기에까지 소 급하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는 확언하는 것을 보류 해 둔다. 金 銀 銅 鐵 陶磁器 紙 墨 등 鑛物品이나 특수한 手工業 品을 만드 는 所 가 獻納하는 製品도 일종의 貢賦이었다. 왕실 국가의 각 기관은 이러한 鑛物品이나 手工業品의 수요를 확보하기 위하여 전 국 郡縣에 所 를 설치하였다. 金鑛이나 銅鑛이 있는 곳에는 金 所 銅所가 설치되었고, 製紙나 窯業에 有利하고 적당한 곳에는 紙 所 陶磁器所 등이 설치되었다. 所 의 주민은 賦民이었으며 이들 은 貢物을 만들어 내는 貢役에 가혹하게 사역되었다. 所民이 부담 하는 貢役은 촌락에 사는 일반 良民에 비하여 훨씬 무거웠을 것이 라고 생각한다. 高麗는 國家的 財政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하여 전 국 郡縣에 광범하게 所를 설정하고 여기에 사는 주민을 奴隷制的 으로 把握 支配하였다. 高麗의 收取體系에 있어 이러한 古代 的성 격의 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주목되는 바이 다.16) 지방의 관원이 國王에 上納한 각지의 土產物을 膳 이라 하였는 데 이 역시 貢賦의 일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勝에도 常膳과 別膳이 있어 이것을 매월 바친 모양인데 그 구별은 확실치 않으나 정규적인 것과 임시적인 것의 차이가 아닐가 생각한다. 지방의 관 리 중에는 膳의 進供時에 농민을 괴롭혀 私腹을 채우는 자가 적지 16) 租税를 據額收租한 것은 圈體的 集團的 性格이 없는 것은 아니나 納税의 主體가 個人이었다는 점에서 여기에서는 農民의 個別的 負擔으로 보아둔다. 據額收租 에 관해서는 高麗史 卷 78 食貨志1 田制(租稅) 忠肅王 5年 5月 下敎 參照

295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않았으며 또 地方官이 百姓에게 侵漁한 것을 私膳 이라 하였다.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마는 租税는 農民이 每結當 얼마씩 부담한 개별적 부담이었는데16) 貢賦는 州 府 郡 縣을 단위로해서 그 부담 량이 책정된 집단적 단체적인 부담이었다. 결국이 集團的 負擔은 농민의 각 家戶에 분할 재배정되었거니와 이때 각 家戶는 戶制의 등급에 따라서 그 부담의 다과가 결정된 것으로 생각한다. 위에서 도 말한 바와 같이 貢賦는 일정한 어떤 하나의 기관이 일원적으로 수집하며 이를 다른 국가 왕실의 각 기관에 각기 다시 再分配하는 것이 아니라 각 郡縣에는 그 지방의 貢赋를 收取하는 기관이 미리 배정되어 있어 각 郡縣은 그가 속하고 있는 각 기관에게 직접 貢 赋를 獻納하는 조직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 매우 주목되는데 이 러한 관계로 인해서 高麗 후기에 이르러서는 정부의 각 기관이 貢 納의 지역 단위인 촌락을 서로 빼앗는 쟁탈전이 간혹 벌어지는 예 가 있었던 것이다. 高麗史에서는 租 調 役이라는 税의 項目이 자주 보이고 있는데 이중에서 調는 대체로 貢賦에 해당하는 것이다. 3) 徭 役 徭役은 인간의 노동력이 완전히 無償으로 국가권력에 의하여 收 取당하는 것을 말하는 税의 한 항목으로, 白丁 農民은 의무적으로 이것을 부담하였다. 高麗時代에 徭役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 것이 며 일년의 服役期限 혹은 收取基準같은 것이 어떠하였는지 현재 그 구체적인 상세한 양상은 전혀 알 수 없으나 하여튼 그 부담이 매우 가혹하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立役의 년한은 16세로부터 60세까지로 되어 있었다. 貢役이 일정한 貢納品의 採取 製作 搬送 등에 충당된 노동력 의 收取인 것에 대해서 여기서 말하는 일반 徭役은 宮院 寺刹 官衙의

296 2. 農民과 村落 營造와 城堡, 道路의 구축, 堤防의 改修 등 土木工事에 동원되었 다. 徭役은 또 王公 貴族의 遊興을 돕기 위해서도 동원된 일이 있 었는데 다음의 哀話는 徭役이 농민들에게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 스러운 부담이었는가를 잘 말하여 주고 있다. 太平 好文의 毅宗때 에 왕은 아름다운 亭子를 세우고 못을 파서 뱃놀이를 즐겼다. 처 음 이 공사를 시작할 때 많은 丁夫들이 동원되어 力役에 종사하였 는데 어떠한 役卒은 너무도 집이 가난해서 먹을 밥을 준비해 오지 못하고 같이 일하는 다른 役卒들에게 얻어 먹고만 있었다. 하루는 그 役卒의 아내가 밥을 차려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평소에 친히 지내는 분들과 나누어 자시라고 권했다. 役卒은 가세가 빈곤한데 어떻게 식사를 마련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 아내는 毛髮을 잘 라 판 것이라고 대답했다.17) 徭役은 강제적인 국가의 명령이었으 므로 농민은 服役 연령이면 이를 거역할 수가 없었다. 徭役이 노 동력의 무상수탈인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위에서 본바 와 같이 立役 중에는 食糧도 自辨하여야하는 것이었다. 농민들은 이 고역을 기피하기 위하여 중이 되어 절에 들어가기 도 하고 혹은 戶籍관계의 기재를 속이기도 하였다. 중이 되면 力 役의 면제를 받는 특권이 있었으나 나라에서는 이를 통제하였다. 戶籍관계의 기재를 속여 가구의 수를 누락하거나 연령을 증감하 여 免役을 꾀하는 일도 있었는데 이럴 때에는 家長에 대하여 국가 는 重罰로서 다스렸다.18) 위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鄭道傳은 税의 三大項目으로 租 常徭 雜貢을 들고 있으며 이것은 唐의 租 庸 調의 遺意라하여 常徭 17) 高麗史 卷 18 毅宗 世家(2) 21年 3月條 18) 高麗史 卷 84 刑法志1 戶婚 家長漏口及增減年壯免課役者 一口徒一年 九 口三年

297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를 庸에 비겼다. 唐의 庸은 周知되어 있는 바와 같이 徭役의 物納 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와 같이 徭役을 물품으로 代納하는 제도가 과연 高麗時代에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확실한 것을 알 수가 없다. 常徭라는 말이 高麗史에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高宗年間 이후의 일이며 그 이전에는 보이지 않는다.19) 설령 常徭가 役의 物納을 의미하는 庸과 같은 것이라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代納의 제도 를 高麗 전기에까지 遡及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다. 朝鮮 초기에는 물품을 代納하여 徭役을 면하는 규정은 없었다 한다.20) 그 이유는 국가에서 요구하는 民戶의 노동력은 너무 방대 하였음에 대하여 徭役에 服務하는 民戶의 노동력은 상대적으로 부 족하였기 때문에 徭役을 물품으로 代納할 여건이 이루어지지 않았 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高麗前期에도 徭役을 물품으로 代納하는 庸의 제도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당시 役民의 기한규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의문이지만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徭役에 대한 국가의 수요가 이처럼 방대한 것이었다면 그 규정이 잘 지켜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土木工事뿐 아니라 농경에도 농민들의 노동력이 무상으로 徵發 되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지방에 있는 왕실 왕족 정부의 토지는 直營의 형태를 취하여 주변 농민의 노동력을 동원시켜 경작하는 경영방식이 유행하였으며, 이러한 직접경영의 方式을 취하는 토지 를 경작하기 위하여 州縣官은 주변 농민의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 하였다.21) 이것도 역시 농민들에게 賦課된 徭役의 일종이었다. 이 19) 今掘誠二 註 7) 論文 20) 有井智德 李朝初期の徭役 朝鮮學報 ) 高麗史 卷 79 食貨志 2 農桑 睿宗 3年 2月 近來州縣官 祗以宮院 朝家田 令人耕種 其軍人田 雖膏膄之壤 不用心勸稼 여기서 宮院田은 王室關係의 土地 朝家田은 朝廷 즉 國家所有의 土地라고 생각한다

298 2. 農民과 村落 러한 종류의 徭役은 지금까지 얼마 주목되지 않고 내려 왔으나 당 시의 徭役 지배에 있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徭 役은 孝行 등 윤리적인 善行의 褒賞으로 면제된 일이 있으며 또 신체에 장애가 있는 廢疾 篤疾과 한 戶에 壯丁 하나 밖에 없는 單 丁일 경우에는 兔役되었을 가능성은 많으나 이 역시 확실한 것을 알 수가 없다. 高麗시대에는 一品軍이라는 軍隊組織의 특수한 노동부대가 지방 州縣에 존재하고 있었다. 一品軍은 촌락 농민으로 구성되었으며 服 務期間은 일년으로 二番 내지 三番의 交代制였는데 가을에 교대하 기 때문에 秋役軍이라고도 하였다. 이들은 중앙정부에 의하여 직접 파악되어 있었으나 전투병력이 아니라 工役을 담당하는 노동부대였 다. 이 一品軍이 각 처 지방 州縣에 배치되어 土木工事 및 기타에 사 역 되었다. 그리고 鄉吏는 一品軍의 將校職을 겸하고 있었다. 이것 은 군사적 체제 편성에 의한 농민의 노동력 수취인데 이 一品軍의 복무는 분명히 일종의 役 이었다. 단 촌락 농민이 전부가 다 一 品軍조직에 편성된 것은 아니므로 일반 白丁 農民에 대한 徭役과 일부 농민의 一品軍 服務가 서로 어떤 連關關係에 있었는지는 분명 치 않으며 이에 관해서는 후일의 연구를 기다려야 하겠다. 이상, 농민이 지는 税負擔을 租税 貢賦 力役의 三大項目에 걸쳐 대강 살펴보았다. 여기서 부담이 가장 무거운 것은 아마 貢賦였다 고 생각되며 高麗時代에 있어서도 朝鮮時代와 마찬가지로 貢 賦 는 税의 大宗이었다고 믿어진다. 공부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대개 貢役을 통하여 수집 製造 搬送되는 것이므로 결국 貢賦의 수취는 인간노동력의 수취인 徭役과 表裏一體의 관계를 이룬다. 貢賦 貢 役에 일반 徭役의 부담을 가하면 이 역의 부담은 租税를 능가 하 며 高麗의 收取體系에 있어서는 아마 노동력 수취가 현물 수취보

299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다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노동력 의 수취는 토지의 소유와는 관계가 없이 人丁의 다과 혹은 人丁의 다 과에 의하여 편성된 戶制에 기준을 두어 시행되었다. 이러한 收取 樣式은 다분히 古代的 성격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租税 貢賦 力役의 三税는 災損 혹은 恩賞으로 그 일부 혹은 전부 가 면제되는 災兔 恩兔의 제도가 있었다. 文宗때의 규정으로는 10 분중에서 災損이 4분에 이르면 粗(租税)를 면하고 6분에 이르면 租 布(調 貢賦)를 면하고 7분에 이르면 租 布 役(力役)을 俱免하도 록 되어 있었다.22) 또 국왕은 국가에 慶事가 있을 때나 기타 行幸 때에 經由한 지역에 대하여 恩免을 내려 税를 蠲減 혹은 放免해 주는 예가 있었다. (2) 村落의 構造 農民들이 생활을 영위하는 촌락은 州 府 郡 縣의 바로 밑에 있는 行政組織의 단위였다. 예를 들면 水州 廷谷村 密城 椿田村 혹은 入 居縣 土阹村23) 등으로 되어 있는 바와 같이 村은 바로 州縣의 밑에 있는 下部組織이었으며 몇 개의 村(村落)이 합쳐서 州 府 郡 縣을 형 성하였다. 이 촌락이 高麗前期 당시에 있어 어떠한 상태에 있었으 며 또 그 실태가 어떠하였는지 그 상세한 것은 전혀 알수가 없다. 高 麗史와 朝鮮 초기에 편찬된 여러 地誌, 즉 慶尙道地理志 世宗地理志 東國輿地勝覽 등에는 高麗시대의 村落에 관한 극히 零細한 단편적 인 기록이 실려 있으나 이것은 촌락의 실태를 傳하는 자료로서는 22) 高麗史 卷 78 食貨志1 田制(踏驗損實) 文宗 4年 11月 判 23) 水州 廷谷村은 高麗史 卷 20 明宗世家 25年 正月條, 密城 楮田村은 同 明宗 世家 24年 4月條, 八居縣 土阹村은 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에 각각 보인다

300 2. 農民과 村落 매우 불충분하다. 高麗時代의 촌락에 관한 연구는 이와 같이 史料 的으로 매우 큰 제약을 받고 있다. 高麗에 앞서는 新羅統一期의 촌 락에 관해서는 다행이도 우리는 日本 正倉院에서 발견된 帳籍文書 를 통하여 그 실태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景德王 14 年(755)에 작성된 것으로 믿어지는 이 帳籍文書는 8세기 후반기 의 우리나라 村落의 상황을 전하여주는 매우 귀중한 문서다. 高麗 의 建國은 이로부터 約 1세기반 이후의 일이다. 그간에 新羅의 멸 망 高麗의 興起 등 많은 격심한 정치적 사회적 변동이 있었으므로 新羅統一期의 촌락과 高麗 전기의 村落 사이에는 상당한 성격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 예상되지만 그러나 正倉院文書에 나타나 있는 新羅村落의 모습은 高麗村落의 輪郭을 잡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선 8세기 後半期의 新羅 村 落의 具體的 상황을 살펴보고 다음 高麗村落에 관하여 언급하기로 한다. 1) 先行的 形態 8세기의 構造 帳籍文書에 취급된 촌락은 모두 네개의 촌락인데 그 중의 西 原 京 管內에 있는 某村(D)은 民家가 10戶, 男 46명, 女 60명 계 106명이 이 촌락에서 생활하였고, 畓 29結 19負, 田 77結 19 負, 麻田 1結 8負의 耕作地가 있었으며, 馬 10匹 牛 8匹 桑 1,235樹, 楸子木 68楸, 板子木 48樹가 飼育 栽培되고 있었다. 매 호당 인구 10명, 경작지 10結 7負라는 매우 평범한 村落규모를 보이고 있다. 이 밖에 沙雲漸村(A)은 10戶 薩下知村(B)은 15戶 矢名村(C)은 8戶로 되어 있다. 이러한 各村의 戶수는 偶然的인 것이며 행정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唐에서는 500家를 鄕이라하고 100家를 里라하여 촌락이 행정적인 鄕里制度를 편성

301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하였으나 新羅에서는 鄕里制 같은 行政的 編成은 없고 자연촌락 이 그대로 國家的 파악의 대상이 되었다. 촌장의 戶는 9等戶制에 의하여 上上戶에서 下下戶까지 9等으로 편제되어 있었는데 戶等 編成의 基準은 아마 人丁의 多寡에 있었으리라고 믿어 진다. (D)村 10戶 중에서 1戶만이 下中戶며 남어지 9戶는 다 下下戶 로 되어 있다. 이것은 촌락의 빈약상을 말하여 주는 것이며 또 계 층화의 모습을 표시해 주고 있다. 이 촌락에는 奴婢 9명(奴 4명 婢 5명)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전촌락인구(106)의 8.4%에 해당한다. 奴婢는 A村이 9명, B村이 7명, C村이 명이며 D村의 9명을 합하면 25명이며 4村 전체의 인구수(A村 142, B村 125, C 村 69, D村 106) 442명에 대해서 5.6% 라는 비율을 보이 고 있 다. 각촌의 戶等構成을 보면 별표와 같이 下下戶의 비중이 매우 큰 빈약한 상태를 보이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內部에 5.6%에 해당하는 奴婢를 所有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村 A B 中 下 下 上 戶等 下 中 下 下 收 坐 ( 等外 ) 孔 烟 4 10 C 新羅王朝는 戶等制를 실시하 D 고 토지를 丈量하며 家畜 樹木 등에 이르기까지 조사해서 村 落을 파악하고 租税 貢賦 徭役을 收奪하였다. 여기에서는 戶나 口가 아니라 촌락 그 자체가 수탈의 단위로 된 듯하다. 특히 남녀의 연령을 6등급으로 세분하여 그 動態에 깊은 관심을 베풀 고 있는 것은 수취의 주목적이 노동력지배와 직접 관련되어 있음 을 암시해 준다. 촌락에는 농민들의 토지인 烟受有田畜 이외에 全 體耕地의 4.9%에 해당하는 官謨田, 內視令田, 麻田 등이 있었는 데 이것은 村民의 집단노동으로 경작된 것으로 推測된다

302 2. 農民과 村落 4개 촌락 중에서 가장 富裕한 촌락은 (A)村이었다. 이 마을은 戶數 10戶, 口數 142口, 畓 102結 2負 4束, 田 62結 10負?, 馬 25 匹, 牛 22匹, 桑 1,004樹, 柏子木 120樹, 楸子木 112樹라는 村勢를 보이고 있으며 戶當 토지소유량은 (D)村의 10結 7負에 비 하여 16結 41負로 되어 있다. (A)村의 토지중에는 村主 位田 19 結 70負가 포함되어 있는데 村主는 富裕한 村落의 有力者가 選任 된 듯하며 촌락의 지배는 이 村主를 매개로 하여 實現되었다. 촌 락에는 촌주가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었다. 위에서 살 핀 A, B, C, D의 4개 촌락 중에서 촌주가 있는 것은 A村 뿐이었 다. A村은 西原京 부근에 있는 어떤 縣의 촌장이었는데 이 촌의 촌주는 같은 縣下에 있는 다른 촌락에 관한 지배의 실무도 아울러 담당하였다. 이와 같이 村主는 촌락마다 있는 것이 아니라 촌주가 없는 촌락은 이웃 다른 촌락의 촌주를 매개로해서 郡縣支配에 隷 屬한 모양같다. 村主는 부유한 촌락의 부유한 자가 선임된 듯하며 이것은 관료로서가 아니라 村民으로서 파악되었는데 郡 縣은 제한 된 2 3명의 村主를 이용하여 촌락지배의 지방행정을 수행하였 다. 또 村主에 관해서는 郡縣 밑에 있는 村落에 본거를 두고 여기 서 생활하는 村長 的 존재가 아니라 郡縣의 在地勢力으로서 守令과 더불어 地方行政의 二重的 組織의 一翼을 담당하는 土豪 的 존재였으며 그 系譜는 옛날의 獨立的 主權者였던 族長 에 연결되는 것이며 또 여기서 말하는 村 은 郡 縣 밑에 있는 村 이 아니라 郡 縣 규모가 같은 옛날에 村 이며 三國史記 朴提上 傳에 보이는 水酒村干 伐寶靺 등 三人의 村干 이 그 先行形態 였다는 설도 있다.24) 24) 新羅의 村落에 관한 分析은 주로 旗田 巍 新羅の村落 朝鮮中世社會史の 硏究 에 依함. 村主에 관해서는 前揭 旗田 論文과 末松保和 村主について 新羅史の 諸問題 所收 佐伯有淸 新羅の村主と日本古代の村主 歷史評論 148號 등 참조

303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2) 村長 村正 羅末 麗初의 과도기는 사회의 양상이 크게 달라지는 격심한 변 동기였다. 新羅王朝의 集權的 統治力은 무너지고 高麗王朝에 의한 새로운 통일적 권력은 아직 형성되지 않고 있었다. 전국에는 各樣 各色의 地方豪族이 亂立하여 群雄割據의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大小 무수의 豪族들이 서로 對立 抗爭하는 사이에 豪族의 勢力圈 이 형성되고 이러는 過程에서 大豪族과 中小 豪族은 각자 그 본거 지에서 세력의 뿌리를 박았다. 豪族들 서로의 對立 抗爭의 과정에 있어 가장 중대한 문제는 어 떻게 하여 많은 촌락을 지배하느냐의 문제였다. 村落의 지배는 거 기서 살고 있는 인간의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 인간은 兵士 로서 전투의 武力을 제공하고 생산하는 농민으로서 경제력을 제 공 하였다. 많은 촌락의 지배는 많은 전투력과 經濟力의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당시의 豪族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더 많은 촌락을 지배하여 그 정치적 군사적 야심을 달성하려고 노력하였 다. 가장 많은 촌락을 장악한 호족은 가장 강력한 大豪族이었으며 그 밑에 촌락 지배의 정도에 따라서 中小豪族이 위치하고 있었다. 유력한 大豪族의 본거지에는 高麗의 郡縣制가 정비되면서 府 라 는 稱號를 부쳤다. 예를 들면 朴允雄의 고장인 蔚州가 興麗府로 鬱 되고 皇甫能文의 고장인 永州가 高 府로 된 것과 같다.25) 府 가 설치된 지역의 豪族과 郡縣이 설치된 지역의 豪族은 그 격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府의 豪族은 그 본거지인 府의 府城을 쌓아 군사적 거점으로 삼았다. 府의 주변에는 많은 촌락이 있었으며, 이 촌락에도 군사적 거점인 城이 있었다. 8세기의 新羅 25) 府와 豪族에 관해서는 旗田 巍 高麗王朝成立期の 府 と 豪族 朝鮮中街社會 史の硏究 所收 참조

304 2. 農民과 村落 의 경우와 같은 10戶 전후의 소규모의 자연 촌락에 전부 다 城砦 가 구축되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으나 아마 自然村落은 몇개인 가가 서로 결합하여 군사적 거점인 城을 축조하고 이 村城에 의거 하여 무력적 단결을 꾀하면서 불안한 亂世를 살아 나간 모양이다. 太祖 13년(930) 당시에 있어 부락의 촌성을 포함한 州郡의 城砦 는 溟洲(江陵)에서 興麗府(蔚山)에 이르는 慶州 以東 東海沿岸에 서만 110여개소에 달하였다고 한다.26) 村城의 우두머리가 村大監 村弟監이었다. 高麗의 村大監 村弟監 과 新羅의 村主 次村主(혹은 제二 村主 제三 村主)가 서로 系譜的 으로 어떻게 관련되는 것인지 여기서 깊히 언급할 겨를이 없다. 다 만 村主 次村主는 守令의 촌락지배를 補佐한 행정적 존재였음에 대하여 村大監 村弟監은 名稱 그 자체부터가 매우 군사적인 성격 색채가 강한 것이었다. 大監은 본래 新羅의 官職으로서 兵部 侍衛 府의 次官 혹은 軍團의 副司令官 정도의 높은 武官職이었으며 弟 監은 이에 다음가는 것이었다. 將軍 城主를 自稱한 羅末 麗初의 豪 族은 그의 부하인 촌락의 지배자에 대하여 大監 弟監이라는 칭호 를 주었다. 大監 弟監은 단순한 촌락의 지배자가 아니라 村民을 무 장시켜 村城을 지휘하는 군사적인 통솔자였다. 豪族은 大監 弟監을 통하여 촌락을 군사적으로 지배 장악하였다. 府城에 살며 將軍을 自稱하는 豪族은 주변의 여러 많은 촌락을 지배하고 촌락의 우두 머리인 大監 弟監을 이용하여 村民을 兵役 力役등에 동원하는 동시 에 촌락의 富를 수취하였다. 村大監 村弟監은 成宗 6년에 그 名稱이 村長 村正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村大監 村弟監의 군사적 성격이 가셔진 것을 의미한다. 成 26) 高麗史 卷 1 太祖世家 13年 2月條 是時 新羅以東沿海州郡部落皆來降 自溟 洲至興禮府惣百十餘城

305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宗 6년이라면 成宗 2년에 12牧이 설치되어 外官의 配置를 보게된 직후의 일이며 高麗의 郡縣制度는 새로운 發足의 段階에 오른 시 기였다. 郡縣制度가 실시되면서부터 豪族의 재래의 정치적 세력은 차차 거세되고 지방통치는 중앙으로부터 파견된 外官에 委任되었 다. 豪族支配의 시기는 이미 사라졌다. 豪族에 의한 촌락의 군사 적 장악은 郡縣制統治에 의하여 대치되었다. 촌락의 군사적 편성 은 벌써 필요가 없게되어 村大監 村弟監 등 武官職 名稱은 더 語 感이 적당한 村長 村正이라는 명칭으로 개칭되었다. 이것은 단순 한 명칭의 변경이 아니라 豪族의 촌락에 대한 군사적 지배가 종말 을 맺고 촌락이 郡縣制統治를 통하여 중앙정부의 集權的 支配에 흡수되어 가는 과정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재래의 豪族은 中央官 僚로 진출하기도 하고 혹은 鄉吏로서 在地的 勢力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村長 村正도 鄕吏와 더불어 守令의 지방통치에 매우 중요 한 구실을 하였다. 守令의 촌락지배는 村長 村正을 매개로 하여 實 現되었다. 村長 村正의 가장 중요한 직책은 촌락 내부에서 國家的 收取를 관철함에 있었다. 國家的 收取의 체계는 戶部 守令 村長 으로 계열화되어 있었으며 災害地區의 災免措置는 피해의 상황을 村典(村長)이 守令에게 보고하고 守令이 戶部에 보고하면 戶部는 다시 三司에 조사를 의뢰하여 사실의 여부를 확인한 연후에 최종 적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27) 村長 村正에 관한 구체적 기사는 高麗史 기타의 國內史書에는 전혀 보이지 않으나 高麗圖經에는 다음과 같은 民長에 관한 이야 기가 실려있다.28) 27) 高麗史 卷 78 食貨志 1 田制(踏驗損實) 文宗 4年 11月判 是月判 凡州縣 水旱虫霜 禾穀不實田疇 村典告守令 守令親驗申戶部 戶部送三司 三司移牒 撿覈 虛實後 又令其界按察使差別員審檢 果災傷 租稅蠲减 28) 高麗圖經 卷 19 民庶 民長條, 民長에 관해서는 李佑成 麗代百姓考 歷史學報 14 참조

306 2. 農民과 村落 民長의 稱은 鄕兵 保伍의 長과 같은 것이다. 인민들 중에서 富足한 자 를 뽑아 이를 삼았는데 聚落에서 大事는 관청으로 가고, 小事는 그에게 맡겼다. 그러므로 所在에따라 細民은 이를 높이 섬겼다 이 民長은 高麗史 등 우리나라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기사의 내용으로 살펴보아 아마 촌락의 지배자인 村長 村正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한다. 民長은 촌락 내부에서 일반 행정을 처리하고 간 단한 소송을 裁決하였다. 村長 村正에 의하여 지배되는 촌락은 郡 縣支配의 하부 말단의 조직이었는데 그 규모는 과연 어느 정도의 것이었을까. 高麗史 地理志(三) 北界條에 의하면 界內의 江東 縣 은 仍乙舍鄕 班石村 朴達串村 馬灘村이 서로 합쳐서 이루어졌으며 順和縣은 楸子島 櫻遷村 龍坤村 禾山村이 서로 합쳐서 이루어졌고 또 中和縣은 荒谷 唐岳 松串 등 9九개 村이 서로 합쳐서 이루어졌 다고 한다. 여기서 中和縣은 9개의 촌락으로 구성되었으나 江東縣 은 1개의 鄕과 3개의 村落, 順和縣은 1개의 島와 3개의 촌락으로 각기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국가가 행정적 파악의 대상으로 한 촌락은 과연 어떠한 촌락이었을까, 그것은 8 세기의 新羅의 경우와 같은 자연촌락이었을까 혹은 어떤 행정적 편성을 거친 촌락이었을까 그리고 또 만일 자연촌락이었을 경우 그 촌락에는 다 村長 村正이 배치되어 있었을 것인가 그렇지 않고 新羅의 경우와 같이 村長은 중점적으로 배치되어 한 사람의 村長 이 몇개의 촌락에 대한 행정실무를 아울러 관장하였을 것인가, 이 러한 문제들은 현재로서는 전혀 해명할 수가 없다. 高麗말기의 會津邑(羅州牧 會津縣 縣治의 所在地)은 10여戶의 자 연 촌락에 불과하였다.29) 이러한 자연촌락은 당시 흔히 있었을 것이 29) 鄭道傅의 消災洞記(三峰集 卷 4)에 環洞 皆山也 又其南 原野平衍 樹林 烟火 茅茨十餘戶 乃會津縣也 라고 있음. 또 이에 관해서는 李佑成 高麗末期 羅州牧 居平部曲에 대하여 震檀學報 合併號 참조

307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다. 이렇게 규모가 작은 촌락이 3 4개 모여 위에서 본 江東縣 順和 縣의 경우와 같이 한개의 縣을 형성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 해서 좀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견지에서 行政把握의 대상이 된 촌락은 자연 촌락이 아니라 몇개의 자연촌락을 합친 일종의 地 域村이며 朝鮮시대의 面과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30) 그러나 高麗史에 실린 公廨田柴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高麗의 州 縣은 千丁 이상의 것도 있었는가 하면 30丁 이하의 아주 규모가 적은 것도 있었다.31) 丁은 丁男의 뜻이며 16세 이상 60세까지의 연령층을 말한다. 이렇게 작은 縣이라면 10戶정도의 자연촌락 4개 로서도 충분히 형성될 수 있는 일이다. 심지어는 하나의 촌락이 縣 으로 된 예도 있었다 한다.32) 정부가 파악한 행정적 대상인 촌락 이 자연 촌락인지 아닌지는 縣을 구성한 村落의 수가 적었다는 것 만으로서는 판정할 수가 없다. 高麗의 촌락은 다 이렇게 규모가 작은 것은 아니었다. 高麗史 卷 20 明宗 世家 25년 정월조에는 다음과 같은 所傳이 있다. 時에 水州 廷谷村에 老嫗가 있었다. 나이는 104歲요, 子孫 丁 壯者가 다 95명인데 모두 徭役을 供하고 있었다. 왕은 이를 듣 고 嫗에 穀 30石을 賜하였다 이 廷谷村은 특별히 큰 대가족이 사는 예외적인 촌락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이 100명에 가까운 壯丁이 한 곳에 모여 사는 촌락도 있었다. 廷谷村에는 老嫗의 子孫이 아닌 村民도 아마 30) 李佑成 註 6) 論文 참조 31) 高麗史 卷 78 食貨志1 田制(公廨田柴) 公廨田柴 成宗二年六月 定州府郡縣舘 驛田 千丁以上州縣 公須田三百結 五百丁以上 公須田一百五十結 紙田十五結長 田五結 三十丁以上, 公須田二十結 二十丁以下 公須田十結 紙田七結 長田三結. 여기서 20丁以下라고 한것은 30丁以下의 잘못으로 생각한다. 32) 高麗史 卷 57 地理志 2 尙州牧에 諺傅 州北面林下村人姓太者 捕賊有功陞其 村 爲永順縣

308 2. 農民과 村落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廷谷村이 단순한 자연촌락인지 아 닌지는 여전히 분명치 않다. 단 여기서 화제가 된 老嫗의 子孫 만 은 서로 분산해서가 아니라 한 곳에 모여서 親族集團을 이루어 살 고 있었을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앞서 살핀 高麗圖經에서는 村長 村正에 해당하는 民長이 鄕兵 保伍의 長과 비슷한 것이 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鄕兵 保伍가 어떤 것인지 정확한 것은 알기 어려우나 이른바 村留 二三品軍이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한다.33) 村留 二三品軍은 一品軍과 비 슷한 것으로 짐작되거니와 一品軍은 戰闘를 담당하는 兵士가 아 니라 工役을 부담하는 役夫와 같은 존재였다. 村留 二三品軍도 촌 락에 머물러 있으면서 어떤 국가적 노역에 복무한 모양인데 그 구 체적인 것은 不明이다. 村留 二三品軍은 村民으로 구성되었으며 村長 村正은 二三品軍의 지휘책임자였기 때문에 高麗圖經의 저자 는 이를 鄕兵 保伍의 長으로 비긴 모양이다. 村長 村正이 二三品軍 의 지휘자가 된 것은 戶長 副戶長이 一品軍의 別將을 겸한 것과 서로 비슷한 것이다. 이리하여 高麗의 村落民은 村留 二三品軍이 라는 이름아래 村長 村正의 指揮를 받으며 집단적인 勞役에 종사 하였음을 짐작 할 수가 있다. 이들이 동원된 노역은 아마 주로 왕 실 국가 등에서 直營하는 토지를 경작하기 위한 노동인 것 같다. 왕실 국가에서 직영하는 토지에 주변 농민의 노동력이 동원되었음 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3) 村落姓과 姓氏集團 통일 후 26년을 경과한 峻豊 3년(光宗 13년 962)에 淸州에서는 33) 鄕兵 保伍와 村留 二三品軍과의 關係에 대해서는 註 6) 李佑成 論文 참조

309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堂大等 金芮宗 을 吊慰하기 위해서 從兄 堂大等正朝賜丹銀魚袋 金希一 이 龍頭寺에 鐵幢竿을 連立하였다.34) 淸州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新羅統一期에 西原京이 설치된 요지이며 羅末의 혼란 기에는 처음 北原의 豪族 梁吉에 投屬하였다가 그 후 弓裔에게 服 屬하였다. 王建의 건국 이후에는 많은 淸州사람들이 관료로서 高 麗王朝에 참가하였는데 이러한 동향의 배후에는 王建에 대항한 淸 州帥 波珍榮 陳瑄 과 또 이와는 반대로 그에 충성을 서약한 淸 州 領軍 將軍 堅金 副將 連翌 興鉉 등의 이름이 史上에 등장하고 있다.35) 이들은 淸州를 거점으로 하여 여기에 기반을 두고 있던 豪族들이었다. 위에서 말한 鐵幢竿의 건립과 관련된 淸州의 堂大等인 金氏 일 족은 州里豪家卿閭冠族 으로 표현된 이 지방의 대표적 門閥이었 는데 이 金氏는 鐵幢竿을 건립함에 있어 前侍郞 孫熙奈(大奈未) 前兵部卿 慶柱洪 奈(大奈未) 學院卿 韓明宴 奈未 時司倉 慶奇俊 大 舍 學院郞中 孫仁謙 前翰林學生 金遠 鐫者 孫錫 등의 협력을 얻고 있다(淸州 龍頭寺 幢竿記). 여기에 보이는 侍郞 兵部卿 學院卿 郞中 등은 모두 州司의 직명으로 보이나 그 이상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고 堂大等은 新羅의 上大等에 유래하는 州司의 최고장관이며 뒤에 戶長이라하였으며 司倉은 재무담당관이었다. 州司는 地方 豪 族의 小權力機構이며 수명의 堂大等을 정점으로 戶部 兵部 倉部 등 의 집행기관을 갖고 있었는데 이 獨自的 小權力機構는 뒤에 高麗 의 郡縣制度가 확립되자 鄕吏組織으로 개편되었다. 前記의 龍頭寺 幢竿記에 보이는 사람들은 淸州의 州司를 구성하 34) 淸州 龍頭寺幢竿記 朝鮮金石總覽 上 35) 陳王瑄에 관해서는 高麗史 卷1 太祖 世家 元年 10月條, 堅金 連燈에 관해서는 高麗史 卷 92 王順式列簿 참조

310 2. 農民과 村落 는 幹部級 인물들로서 이 지방을 지배하는 유력자였다. 幢竿記에 보이는 인물들을 姓氏別로 나열하면 金 孫 度 韓으로 정리된다. 그 런데 世宗地理志 新增東國興地勝覽등에 의거하면 淸州에는 전기한 4姓 이외에 李 郭 宋 高 俊 楊 東方 鄭씨등의 8姓氏가 살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들 12개의 姓氏는 淸州에 본관을 둔 淸州 토박이의 土姓들이며, 이러한 土姓은 淸州를 무대로 생활하는 傳統이 오랜 姓氏集團이었다. 이들 12개의 土姓은 아마 그 전부가 淸州의 州司 구성에 참여한 듯 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州司는 各 姓氏集團들의 정치적 結合體이기도 하였다. 各 姓氏 집단은 자기집단원의 일부 를 정치적 대표로 삼아 州司機構에 파견하고 그들을 통하여 州의 정치에 참여하였다.36) 姓氏集團의 有力者는 혹은 村落에서 村長 村正의 任에 當하고 혹은 州司에 파견되어 鄕吏가 되었을 것으로 推測되며 村長 村正과 鄕吏는 身分的으로 같은 次元에 있었던 것으 로 생각한다. 州司는 各 姓氏集團을 選出基盤으로 삼고 그 위에 존 립하였으며 州吏의 우두머리인 戶長은 이러한 의미에서 州司를 대 표하였다. 土姓을 州 府 部 縣의 豪族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으나37) 예를 들어 淸州와 같은 곳에 12개의 豪族이 서로 난립해 있었다면 豪族의 성격을 이해함에 있어 약간 어려운 문제가 수반되리라고 생각한다. 淸州에는 위에서 살핀 12개의 土城 姓氏集團 이외에 이들과는 다 른 또 몇개인가의 土着 姓氏集團이 존재하고 있었다. 世宗實錄 地理 志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적어도 某村의 朴 韓 申 葛의 四姓 氏와 周岸鄕의 河, 德平部曲의 申, 調豊部曲의 李, 椒子銀所의 畢, 背陰銀所의 畢등 5姓氏 합계 9姓氏가 淸州를 무대로 생활하고 있 36) 武田幸男 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の硏究 朝鮮學報 25 37) 註 3) 旗田 論文

311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었음이 확인된다.38) 이러한 姓氏가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高麗 前期에는 이미 그 대부분이 형성되어 있었 거나 설령 姓氏 그 자체로서는 형성되지 못했더라도 뒤에 그러한 姓氏 집단을 형성할 母體 혈연집단 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 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某村의 朴 韓 申 葛의 4姓은 앞서 말한 州 土姓의 12개 姓氏集團과는 그 성격이 상당히 다른 것으로 이해된 다. 上 記 4姓은 村落姓 내지는 村姓으로서 州에 소속된 일정한 촌락에 本貫을 두는 姓氏였다. 토성은 州(府 郡 縣)에 本貫을 두었으나 村 落姓은 촌락에 本貫을 두었다. 村落姓과 土姓의 차이는 어떠한 것 이었을까 단순히 그 本貫의 所在가 다르다는 정도의 차이 뿐이었 을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姓氏 本貫의 所在는 인간의 사 회적 신분을 표시하며 本贯의 소재에 따라 사람의 신분이 구별될 경우가 있다. 鄕 所 部曲에 本貫을 둔 姓氏는 賤民 내지는 準賤民 의 인간집단을 표시하는 것이며 이들은 신분적으로 州 府 郡 縣의 土姓을 가진 사람들과는 구별된다. 村落姓과 土姓의 사이에도 이 런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까. 村落姓 내지 村姓에 관한 자료는 高麗史 등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고 慶尚道地理志 世宗地理志 東國輿地勝覽 등 地誌類에 간혹 나 타나 있을 뿐인데 여기에서도 村落姓 내지는 村姓으로 기록되어 있는 姓氏는 극히 드물다. 慶尚道地理志가 편찬된 朝鮮初期라면 舊 來의 郡縣制度에 큰 변동이 일어난 시기이며 이때에는 인간의 移 動身分의 解放 混同으로 인하여 各地에서 姓氏의 雜混現象이 크게 나타나 특수한 신분층의 행정구역인 鄕 所 部曲이 바야흐로 소멸하 38) 村落姓 鄕姓 部曲姓 歸姓 등에 관해서는 武田幸男 新羅の滅亡と 高麗の展開 岩波 世界歷史 9 참조

312 2. 農民과 村落 고 재래의 다분히 신분적 요소를 띤 郡縣制度가 순수한 행정구역 으로 개편되어 가는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히 예외적이지 만은 村落姓은 土姓과 엄연히 區別되고 있다. 慶尙道地理志에 의하 면 安東大都護府는 土姓 7(權 金 張 姜 曹 高 李)에 대하여 村姓 1 (趙)이 기록되어 있고 義城縣에서는 土姓 2(金 沈)에 대하여 外村姓 5(丁 蔣 康 魯 金)가 기록되어 있다. 世宗實錄 地理志는 義城縣의 外 村姓을 그냥 村姓으로 기록하고 있다. 앞서 살핀 淸州의 村落姓 4姓 (朴 韓 申 葛) 중에서 3姓(朴 申 葛)이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이고 있 는데 여기에서는 本州姓과 서로 같이 병기되어 있으나 並村이라하 여 그 前身이 村落姓이었다는 유래를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村落姓 은 前代인 高麗時代의 遺制이며 차츰차츰 州 府 郡 縣의 姓氏와 평등 시 되어 그 안에 흡수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나 처음에는 촌락을 本 貫으로 하는 村落姓은 州 府 郡 縣의 土姓과 엄연히, 그리고 명백히 구별되어 전국적으로 광범히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 상정된다. 村落姓과 土姓이 무엇으로서 구별되었는지 지금 그 구체적인 자 세한 차이를 밝힐 수가 없다. 다만 여기에서는 앞서 말한 淸州의 12개 土姓과 4개 村落姓은 서로가 완전히 평등한 결합관계에 의하 여 淸州를 구성한 것 같지는 않다는 의문을 제시해 둔다. 村落姓과 土姓사이에는 사회적 지체 정치적 기능 등에 있어 다소 차이가 있 었을 것으로 믿어지나 그 實相의 해명은 후일의 연구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단 村姓은 鄕 所 部曲의 姓에 비해서는 그 신분 지위가 높았을 것으로 본다. 村落姓과 土姓(府姓)의 차이에 관해서는 다 음과 같은 견해도 있다. 府姓과 村姓의 區分의 起源은 高麗 初期에 있어서의 府의 豪族 과 村의 族團사이의 支配 服屬의 關係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府城 을 據點으로해서 勢力을 擴大한 豪族은 주위의 여러 村落을 그 支配

313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下에 넣어 그 首長을 族團部隊의 指揮者로 任命하여 首長을 통하여 族人을 動員하였다. 이러한 軍事的支配 服屬의 關係가 同時에 身分 的 上下關係로 되어 支配者인 府의 族과 被支配者인 族의 差를 만 들어 내었다. 즉 軍事的編成과 身分的 編成의 結合이었다.39) 그러나 이러한 土姓 豪族說에 대하여 약간의 의문이 있음은 이미 말해 둔 바와 같다. 土姓이라고 해서 治所인 邑에서만 몰려 산다는 법은 없었을 것이다. 淸州의 12개 土姓은 邑안에서만 몰려 산 것이 아니라 邑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많은 촌락에 분산해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단 土姓이 몰려 사는 촌락과 村落姓이 몰려 사는 촌락사이에 어떤 格의 차이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히 상 정된다. 土姓 村落姓 鄕 所 部曲姓 등으로 구성되는 州 府 郡 縣은 단 순한 지역적 편성이 아니라 다분히 신분적 의미를 포함한 累層的 構造를 가진 것이었으며 그 下部組織인 촌락도 동질시할 수 없는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高麗 前期의 村落에 관해서는 一姓一村을 원칙으로 같은 姓氏가 몰려 사는 血緣的 同族集團인 동시에 地緣的 村落集團이었으리라 는 견해가 매우 유력하다.40) 村落姓과 같이 어떤 일정한 촌락에 本貫을 둔 姓氏는 아마 그 촌락에서 同族끼리 어울려 살았으며 이 촌락에 다른 他姓이 雜居해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이런 의미에서 촌락의 血緣的 同族集團說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血緣的 同族集團으로서의 촌락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반면에는 그렇 지 않을 경우도 상정된다. 州 府 郡 縣의 治所가 있는 邑에는 各姓의 많은 鄉吏가 모여 살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만큼 이것을 同族의 集 團居住地로 보는 것은 어려울 것이며 여기에서는 異姓雜居의 현상 39) 註 3) 旗田 論文 40) 註 14) 武田 論文

314 2. 農民과 村落 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邑은 결국은 촌락과 비슷한 聚 居地인데 치소가 있다는 특수한 조건을 고려에 넣더라도 邑에서는 異姓의 雜居가 현상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촌락에서는 이것이 배 제되어 一村一姓의 同族集團居住原則이 固守되었으리라고도 믿어 지지 않는다. 아마 촌락은 개방되어 동족이 아닌 他姓이 서로 같이 사는 경우도 있고 또 일부에서는 동족끼리 몰려 사는 폐쇄적인 혈 연촌락일 경우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高麗末에 이르러서는 매우 규모가 적은 촌락에서도 異姓雜居의 現象이 뚜렷이 진전되어 있었음은 이미 논증된 바와 같다.41) 4) 淨兜寺 五層石塔造成形止記의 경우 이 形止記는 高麗 顯宗 당시 尙州界 京山府의 屬郡으로 있던 若 木郡에 소재한 淨兜寺에 세운 五層石塔의 造成 經緯를 기록한 일종 의 顚末記인데 작성 일자는 顯宗 22년(1031) 1월 4일로 되어 있 다. 이 문서는 日本의 正倉院에서 발견된 新羅의 帳籍文書 다음가 는 가장 오랜 古文書로서 그 史料的 價値는 매우 높이 평가되고 있 다. 이 문서에는 직접 촌락에 관계 된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간접 적으로는 당시의 若木郡을 형성한 각 촌락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이므로 이 文書에 나타나 있는 몇개의 사실을 촌락과 결부시켜 생 각해 보기로 한다. 이 기록에서 첫째로 주목되는 것은 石塔의 造成에는 많은 사람 이 관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름만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지 姓名이 連記되어 姓이 明示되어 있는 경우 는 매우 희소하다는 것이다. 당시 이미 高麗에서는 姓이 엄연히 존 재하고 있었으나 적어도 이 문서에서는 그것이 널리 보급되어 있 41) 註 7) 李佑成 論文

315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지는 않다. 形止記에는 합계 128명이라는 인명이 기재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僧侶로 생각되는 者, 若木郡民이 아닌 者, 重複되어 실 린 者 등을 정리하면 나머지는 71명이 된다. 이 중에서 姓이 있고 姓名이 連記되어 있는 것으로 추리되는 사람은 아마 20명 정도 뿐 이며 그 나머지 사람들은 이름만으로 기록되어 姓을 붙이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姓名이 連記된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으로는 戶長 李元敏 戶長 柳瓊 攝戶長 金甫 같은 것이 보이며 姓은 없고 이름만 기록된 것으로는 光賢 禀柔 知日 允孝 등이 보인다. 이 밖에 形止記 에는 姓으로 추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서 成 漢(韓?) 文 元 廉 洪 등이 보인다. 若木郡에는 당시 적어도 李 柳 金의 3개의 姓氏만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慶尙道地理志 및 世宗地理志에는 若木縣의 土姓으로 李 柳 韓, 村姓으로 金, 續姓 으로 白을 열거하고 있다. 土姓과 村姓은 아마 高麗 초기부터 존재 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郡民이 形止記의 문서에서는 이름만 기록되어 있고 姓은 붙이지 않고 있 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단순히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姓이 없는 사람은 일반 庶民이며 姓이 있는 사람은 上流의 名門이라는 추리를 내릴수 있겠다. 그러 나 姓이 없는 사람 중에는 위에 적은 禀柔(副戶長)를 비롯하여 戶 長 副戶長을 비롯한 많은 上流級(鄕吏)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와 는 반대로 아무런 職啣이 없는 庶民도 姓을 붙이고 있는 경우가 있 으니 간단히 상류 하류로써 姓의 유무를 판단할 수는 없다. 形止記 에서 붙인 郡民만 姓이 있었고 姓을 붙이지 아니한 郡民은 姓이 없 었는지 이 점도 반드시 확실치는 않다. 당시에 姓은 이미 널리 보 급하였으나 姓名을 連記하여 이름위에 姓을 반드시 기록하는 필요 풍습은 아직 일반적으로 형성되지 않고 있었을는지도 알 수 없다

316 2. 農民과 村落 이에 관해서는 앞으로 더 깊은 연구가 요청된다. 이상과 같은 사실 로 미루어 보아 촌락에 사는 주민들 사이에 姓의 사용이 널리 보편 화되지 아니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形止記에는 石塔의 造成에 협력하여 많은 사람이 물품을 喜捨한 것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물품을 희사한 사람들을 신분적으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鄕吏身分 戶長 攝戶長 副戶長 戶正 副戶正 兵正 正 副 兵正 副正 官 史 書者 外軍職身分 別將 散員 隊正 一品 軍人 武散階身分 仁勇校樹 工匠 樂工身分 漆匠 錄匠 樂人 鐵匠 一般庶民身分 職御 없는 者 奴婢身分: 奴 物品 喜捨者의 신분계층을 분석해 보면 鄕吏 外軍職階層이 중심 으로 되어 있으나 賤流에 속하는 工匠 奴婢階層도 이에 참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石塔의 造成事業은 郡內老小男女百姓等 의 發 願에 의하여 全郡民的 규모로 이루어졌으나 이에 물품을 喜捨한 사람은 信仰과 財力 등의 관계로 인하여 제한된 극소수의 人士에 불과 하였다. 物品 喜捨者의 신분적 계층에 있어 鄕吏外軍職이 매 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 다. 外軍職의 신분은 종래 별로 주목을 이끌지 아니하였으나 이들 은 鄕吏와 더불어 郡內의 유력자층이었다. 鄕吏, 外軍職의 활동무 대는 郡治가 있는 邑 중심이었겠지만은 그들의 주거지는 반드시 邑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주변의 촌락에도 분산해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邑 주변의 촌락에도 鄕吏 外軍職階層이 각기 생활의 본거 를 두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물품희사자의 명단에 보이는 사

317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회적 계층은 대체로 촌락안에서 分化된 촌락민들의 신분계층과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희사자 중에서 賤流에 속하는 工匠 樂 工이 奴와 더불어 작품을 내고 상당한 정도의 경비적 능력을 보이 고 있음은 매우 주목된다.42) 姜 晋 哲 3. 賤 民 (1) 奴 婢 우리 나라에 있어서 전통사회는 곧 신분사회 이기도 하였다. 각 기 다른 사회적 특권과 제약을 갖는 여러개의 신분계층이 상하로 연결되어 신분의 위계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高麗사회도 예외 는 아니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高麗사회의 신분구조는 크게 말해 귀족 양인 천민(천인)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천민만을 살 펴보게 될 것이다. 천민 혹은 천인은 經國大典의 용례에 의하면 朝鮮 초기에는 노비를 말하는 것이었다. 가령 良賤의 交嫁라고 할 때 賤 은 노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 법제적으로 천인이라 할 때에는 노비를 일컫는 것이 된다. 그러나 천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회적인 통념으로는 비단 노비뿐만이 아 니고 일련의 하위계층 사람들도 천민이나 천인으로 불리워 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身良役賤 의 사람들까지도 천민으로 취급 되었다. 이에 대해서 高麗시대의 경우는 약간 다른 점이 있었다. 물론 朝鮮시대의 身良役賤 의 계층에 비유될 수 있는 津尺 驛民 42) 淨兜寺 五層石塔 造成形止記의 內容分析은 주로 註 14) 武田 論文에 依함

318 3. 賤 民 등이나 朝鮮 시대에는 양인의 처지에 있던 鄕 所 部曲人이 모두 천 민으로 다루어 졌다. 그런데 이들 신분층은 사회적인 통념에서 뿐 만 아니라 법률적으로도 양인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계층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계층도 노비와 마찬가지로 법제상 천민으로서 많은 사회적 제약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똑같이 천민으로 묶여질 수 있 는 신분층이면서도 신분상의 위치가 모두 동일한 것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이 가운데 노비는 신분적으로 주종관계에 의해서 소유주 에게 예속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매매 상속 증여의 객체가 되었 다. 말하자면 천민 가운데 에서도 最下層 最下賤에 속하는 신분이 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보아 노비와 나머지 천민계층 사이에 는 상당한 거리가 놓여 있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특히 鄕 所 部曲人 은 천민으로서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비보다는 오히려 良人농민에 더 가까운 위치에 있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있 다. 이제 천민의 범위에 들어있는 신분층 하나 하나에 대해서 고찰해 나가기로 하되, 천민의 대표적인 존재였던 노비부터 살펴 보고자 한다. 1) 노비존재의 사회 경제적 조건 우리 나라에서 노비의 역사는 사료에서 그 자취를 더듬을 수 있 는 것만 가지고도 古朝鮮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후 新羅統一期를 거쳐 高麗시대에 이르기까지 노비는 꾸준히 존재하 여 왔다. 우리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바로 高麗의 노비이지만, 이것에 대하여는 이미 다소의 연구가 있다.1) 그러나 어느 것도 1) 대표적인 논문으로는 今西二三雄 高麗朝에 있어서의 奴婢에 대하여 桑原記念

319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노비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특히 간 과해 버릴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는 그들의 사회 경제적인 비중 이 과연 어느정도였는가 하는 것에 대한 고찰이라 하겠는데, 지금 까지의 연구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사회 경제적인 비중이란 결 국 노비에게서 기대되는 사회 경제적인 역할의 상대적인 비중을 뜻하는 것이지만, 이점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는 실로 중요한 문제 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노비의 사회 경제적인 처지로 부터 그 경제적인 효용성 나아가 노비가 존재하 지 않을 수 없었던 高麗 전기의 사회적인 여건을 밝혀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비들의 역할이 어떠한 형태로 이루 어 졌는가 하는 점부터 검토해 나가기로 하자. 노비 가운데에서도 공노비는 궁중을 비롯하여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아 학교 등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이곳에서 주로 잡다한 供 役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상당한 수의 공노비는 崔承老 의 상서에 太祖가 內屬의 노비를 减除하여 궁중에서 供役하는 이외에는 外郊에 나가 살게 하여 밭을 갈아 稅를 바치도록 하였다. (高麗 史 93 列傳 崔承老傳) 고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公田을 경작하였다. 관아에서 잡역 에 사역되든 外郊에서 농경에 종사하든 이들 공노비는 모두 독자 의 집과 경지를 갖고 있는 이를테면 外居奴婢였다. 그런데 후자의 노비는 농경에 종사 하면서 現物税를 바치고 나머지로 생계를 유 지하였다. 그들의 경작지가 占有 地일 뿐 所有 地가 아니었음 東洋史論叢(1930) 및 龜田敬二 高麗의 奴婢에 대하여 靑丘學叢 26 28( )가 있다. 그리고 특히 寺院奴婢에 대해서는 李載昌 寺院奴婢考 黄義敦古稀 記念史學論叢(1960)이 따로 있다

320 3. 賤 民 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良人농민인 佃戶에 비유 될 수 있는 것으로서 農奴에 가까운 존재였다. 반면에 전자의 노비는 土地所 有關係에서 제외되어 있었고, 소유주(국가)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이에 대한 일정한 보수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農奴的인 존 재라고 할 수 있는 후자의 外居奴婢와는 구분해서 생각해야 할 것 이다. 더우기 우리가 보통 外居奴婢라 할 때에는 후자의 노비형태 를 생각하고 있는 점에서도 전자의 노비는 달리 파악하는 것이 좋 을 것 같다. 그렇다면 奴隷的인 노비로 보아야 할 것인가. 그러나 그렇게도 말하기가 곤란하다. 원칙적으로 노예는 독자적인 경지를 갖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노예에 근사한 노비형태로써는 率居奴婢가 있었다. 그런고로 솔거노비와도 일단 구별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관아에서 供役에 종사하는 부류의 노비를 편의상 잠정적으로 供役奴婢 로 불러 두고자 한다. 公奴婢 가운데 외거노비는 왕궁의 私庫인 料物庫나 寶興庫의 所 屬田 또는 여러 관청에 딸려 있는 公廨田 등 국가 소유의 토지에 서 생산활동을 하였다. 공노비뿐만 아니고 寺院에 예속되어 있는 노비 가운데에도 自己家計를 갖고 寺院田의 경작에 참여하여 현물 지대를 무는 외거노비가 있었다. 그러나 당대에 있어서 외거노비 로써 보편적인 형태는 양반이나 양인농민으로서 비교적 부유한 사 람에게 딸려 있는 私奴婢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武臣亂 이후의 것이지만 다음 기록을 검토해 보자. 少監 王元之의 婢婿인 私奴 平亮이 元之의 가족을 멸하였다. (中 略) 平亮은 平章事 金永寬의 家奴로 見州에 살며 농사에 힘써 富를 이루었다 (高麗史 20 世家 明宗 18년 5월 癸丑) 사노비 출신인 平亮이 見州에 거주하여 경작한 토지는 주인인 金永寬의 소유였을 것이다. 그리그 租税를 납부한 나머지 몫으로

321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생계를 이어 나갔으리라는 점에 의문이 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平亮은 소유주인 金永寬과는 별개의 가옥과 所帶를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사노비 가운데 외거노비의 형태로 살아가는 전형적인 예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太祖가 禮山鎭에 행차하여 내린 다음과 같은 詔書 내용을 살피는 것도 다 소는 유익할 것이다. 마땅히 너희들 公卿將相으로 國祿을 먹는 사람들은 (中略) 너희들 祿邑의 編戶之氓을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다. 만약에 家 臣의 無知한 무리를 祿邑에 보내면 오직 聚飲만을 힘쓰고 마음 대로 빼앗아간들 너희들이 또 어찌 능히 이를 알 수 있겠는가 (高麗史 2 世家 太祖 17년 5월 乙巳) 祿邑을 갖고 있는 公卿將相이란 주로 王의 親族이거나 權勢家인 귀족출신이고 보면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임 에 틀림없다.2) 이들은 누구보다도 많은 토지와 사노비를 소유하 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토지는 그들과 관련을 맺고 있는 祿邑 안에도 있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다면 良人농민 뿐만 아니 라 많은 수의 사노비가 그 토지의 경작에 참여 했으리라고 짐작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마도 編戶之旗 에는 公卿將相의 사노 비로서 외거노비의 형태로 농경에 종사하는 자가 전혀 없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한다. 만일 이러한 추측에 크게 무리가 없다면 독자적인 가옥과 所帶를 갖는, 그리하여 독립된 戶 를 형성하고 있는 외거노비 형태의 사노비를 고려 초기부터 살필 수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外居奴婢를 제외한 나머지 사노비는 모두가 率居奴婢였다. 솔거 노비는 소유주의 家族의 一員으로 따로 자기의 경리를 갖고 있지 2) 姜晋哲 韓國土地制度史 上, 韓國文化史大系 Ⅱ (1965) pp

322 3. 賤 民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들의 의식주는 가족원으로서 소유주 가 해결해 주었고, 반면에 소유주에게 노동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토지소유관계에서 보더라도 이들은 토지를 占有(借耕)할 수도 所有할 수도 없는 노비였다. 이들을 奴隷的인 존재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원노비 가운데서 외거노비를 제외 한 나머지 노비도 노예에 가까운 것으로서 솔거노비의 범주에 넣 을 수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高麗 전기의 노비를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 대체로 外居奴婢 率居奴婢 供役奴婢 등 세개의 형태로 분 류하여 보았다. 이것을 도표로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形態 條件 土地所有關係 獨自經理의所有 社會 經濟的 身分的練屬關係 地 位 外居奴婢 占有(偕耕) 有 農 奴 率居奴婢 無 奴 隷 供役奴婢 有 私奴婢 公奴 婢 寺院奴婢 私奴婢 公奴 婢 寺院奴婢 公 奴 婢 이들 노비의 사회 경제적인 역할과 아울러서 경제적인 처지가 실질적으로 어떠하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考察 해 볼 필요가 있다. 供役奴婢는 외거노비나 솔거노비의 전제가 되는 중요한 조건 가 운데 일부만율 충족시켜 주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면 외거노비 와 솔거노비의 中間形態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 회 경제적으로 농노와 노예의 중간적인 처지에 있었으리라는 가정 이 성립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근거로 뒷받침되지 않 는 한 소박한 추리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소유주에 예속되어 의식 주를 의지하는 대신 무상으로 勞力을 제공하는 노예와 같은 솔거 노비 보다는 家計를 유지하고 살 수 있었던 供役奴婢의 처지가 대 체로는 나았을 것이라는 데에 큰 의심은 가지 않는다. 따라서 솔거

323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노비 보다는 다소나마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 보편적이었으리 라 짚어 보지만. 농노적인 외거노비와 비교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일차적으로 공역노비가 받는 급료와 외거노비가 現物 税 를 지불한 나머지 액수와의 크기에 있어서 어느만큼이나 틀림이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 고려되어야 하겠으나, 후자의 경우에 있어 서 이것을 일률적으로 산출해 내기가 힘들다. 이것은 현물세의 실 질적인 비율이 어느정도였겠는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으로, 가령 그것이 이었다해도 점유경작지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데서 오는 문제가 더욱 크다. 그러나 점유경작지가 작다 하더라도 농업생산에 있어서 노동력의 수요가 컸던 농촌에서 독립된 戶를 이루고 있는 외거노비는 노동력을 팔아 돈을 모을 수 있는 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공역노비는 원칙적으로 직접 생산활동에 참여하기 보다는 관료기구의 最下端에서 잡일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그들이 때로는 궁중이나 관청에 딸린 公 田의 경작에 동원되기도 했었으리라는 가능성은 배제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다. 여하튼 그들의 일에 대한 댓가는 법으로 일정한 액 수가 정해져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노동력을 팔아 보려고 한다 해 도 법정급료 이상으로 예컨데 상여금과 같은 것이 있었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지극히 힘든 노릇이다. 다음 사료의 검토와 함께 공역 노비에게 돌아가는 급여액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8石 御殿侍女 左右番件班中禁 7石 左右件都知 (中略) 4石 御殿侍婢 老奴 2石 進房燈燭小奴 小親侍 (高麗史 80 食貨 3 祿俸 雜別賜 文宗 30년) 御前侍婢 老奴 및 進房燈燭小奴 小親侍는 모두가 奴婢출신이었다. 小親侍는 궁궐에서 심부름하는 10여세 정도의 小奴였다.3) 이렇게

324 3. 賤 民 보면 이들은 모두 여자 노인 소년인 노비였다. 아마 장년의 奴일 경 우에는 급여액이 다소 많았을 것이다. 어쨌든 위에서 볼 수 있는 노비들의 수령급료액은 최하수준의 것이었다. 그리고 御前侍 女 는 良人출신이었을 터이지만 御前侍婢 와 하는 일에 있어 서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御前侍女 는 8石인데 반하여 御前侍婢는 4石을 받는데 지나지 않았다. 이러 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전반적으로 공역노비에 대한 경제적인 대 우는 절대적인 量에 있어서나 상대적인 量에 있어서 지극히 낮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것은 소유주(國家)의 입 장에서 볼 때 노비의 경제적인 효용성이 큰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공노비 가운데에서 供役奴婢와 外居奴婢가 차지하는 각각의 비 중을 알아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써는 자세 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단지 위에서 인용한 바 있는 崔承老의 상 서를 읽어보아도 느껴지지만 공노비에게 있어서 일차적으로 중요 한 일은 궁중이나 관아에 있어서의 공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공노비 가운데 에서 공역노비의 수는 상당한 수에 달했을 것이다. 朝鮮시대가 되면서는 選上이나 納貢을 막론하고 공노비의 대부분이 농민이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된 다. 결국 朝鮮시대의 공노비 가운데에서 외거노비가 차지하는 비 중은 거의 압도적이었다고 하겠다. 이 사실은 高麗시대에 공노비 로써 공역노비였던 수가 많았다고 하는 점과는 크게 대조를 이룬 다. 공노비 안에서 공역노비가 아직도 상당히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직접생산활동에 있어서 노비의 비중이 朝鮮시대에 비 하여 작은 것이었음을 시사해주는 것은 아닐까. 아울러 노비의 신 3) 高麗圖經 21조 皁隷 小親侍

325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분적 지위나 경제적 처지가 朝鮮시대와 비교하여 어느 만큼은 불 리했던 일면을 반영해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솔거노비는 소유주의 가족원으로서 가내에서의 갖가지 잡일을 비롯해서 소작으로 맡긴 토지를 제외한 소유주의 직영전답의 경 작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 솔거노비가 유일하게 관여 한 것은 아니었다. 소유주의 가족 및 기타 寄宿者 그리고 의거노 비가 때때로 참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傭人의 역할 을 들지 않을 수 없다. 傭人은 元이 吃折思八 八哈思를 보내어 沙門을 보호하라는 詔書를 갖 고 왔는데 (中略) 師는 본래 珍島郡人으로서 (中略)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매 부모의 存残을 몰랐다가 이에 이르러 西林縣에서 찾았 으나 가난하여 능히 自存치 못하고 점 집 雇傭이 되었는지라 王이 米와 田을 주어 喬桐縣에 집을 두게 하고 그 族屬을 모아 살게 하 였다 (高麗史 31 世家 忠烈王 20년 7월 乙亥) 라고 있고, 또 監察司가 말하기를 (中略) 宮室을 修築한지 이미 3년이나 되 었는데 兩班으로서 奴僕이 없는 자는 다만 祿牌를 팔아 雇傭하 여 赴役케 하고 혹은 몸소 執役하는 者도 있으니 또한 청컨대 이를 체거하여 농한기를 기다리게 하소서 (下略) 하였다 (高 麗史 29 世家 忠烈王 6년 3월 壬子) 고 한 것으로도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주로 양인신분으로서 대개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양반이나 부유한 양인농민에게 고용되어 있는 사람이다. 이들 傭人은 솔거노비와 함께 고용주의 직영경작 지에서의 생산활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그 일은 솔거노비의 그것 과 동질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고용주의 가족원으로서의 존재형태

326 3. 賤 民 도 솔거노비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傭人과 솔거노비가 받는 경 제적인 처우는 동일하지 않았다. 傭人은 고용주의 가족원으로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이외에 일정한 액수의 댓가를 지불받았다. 恭 愍王의 敎에 빈민으로 혹시 자녀를 판 자가 있으면 傭役한 것을 계산하여 그 값을 치르고 부모에게 돌리도록 하라 (高麗史 79 食貨 2借 贷 恭愍王 20년 12월) 고 한 것으로도 그 대가는 일정한 액수였음에 틀림없지만, 공정가 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비록 공정가가 있었다 하더라도 傭 人의 노동가는 근본적으로 노동력에 대한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대와 지역에 따른 차이가 있었을 것이 다. 傭人에 대한 솔거노비의 사회 경제적인 지위의 열세는 그들이 모두 소유주나 고용주에 게 지고 있는 노동력 제공에 대한 의무가 그 성격에 있어서 각기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는 점에서도 짐작 할 수 있다. 즉 傭人의 의무는 일종의 계약관계에서 생겨난 것인 반면에 솔거노비의 경우는 순전히 신분적인 예속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傭人은 그의 의무를 이행하는 대신 일정한 기간내 의 일정한 보수를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졌는가 어떤가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에 속하는 것이기 는 하다. 한편 솔거노비는 노동력의 댓가에 대한 쌍무적인 약속 혹은 契約이란 애당초 있지 않았고, 그것을 기대하거나 요구할 권 리는 더욱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분적인 주종관계를 전제로 하 였기 때문이다. 사실 경제외적인 구속 주로 도덕적 법률적 제 약 이 우선적으로, 또 철저하게 적용된 것은 솔거 노비였다. 예컨대 매매의 대상이 되었던 것도 대부분이 솔거노비였다. 이와 같이 가혹한 경제외적 강압이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솔거노비에

327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게 돌아가는 노동력에 대한 대가에는 대체로 보아 소유주의 일방 적이 고도 恣意的인 배려가 베풀어지기 쉽다. 솔거노비는 보다 낮 은 수준의 경제생활을 영위했었을 것임에 거의 틀림이 없다 하겠 다. 직영농업생산에 있어서 무상으로 무상이 아니라 하더라도 극히 저렴한 값으로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솔거노비에 대한 사회적인 수요는 커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外居奴婢는 소유주의 토지를 借耕하여 조세를 바치고 남은 부 분으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이 점에서 佃戶에 가까운 노비였다함 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佃戶가 田主에게 바쳐야 하는 조 세율에 대해서는 다음 사료를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陳田을 개간한 사람은 私田이면 첫해의 수확은 모두 지급하 고, 2년에 비로소 田主와 半分하고, 公田이면 3년까지 전부 지 급하고, 4년에 비로소 법에 의해서 租를 거두게 하였다 (高麗 史 78 食貨 1 田制 租稅 光宗 24년 12월 判) 3년 이상의 陳田을 개간하여 수확한 바는 2년동안 佃戶에게 全給하고 제3년에는 田主에게 半씩을 나누며, 2년의 陳田을 四 分率로 하여 이 一分은 田主에게 주고 三分을 佃戶에게 주며, 1년 의 陳田을 三分率로 하여 一分은 田主에게 주고 二分은 仙戶에게 주었다 (高麗史 78 食貨 1 田制 租税 睿宗 6년 8월 判) 위의 두 기록은 陳田을 개간하여 경작하게된 佃戶가 田主에게 내 야하는 조세의 비율을 연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만, 두개의 내 용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田主에게 돌아가야 하는 생산물의 몫이 이었다는 점이다. 단 私田의 佃作에 있어 서 그러하였다. 公田에 있어서의 경우는 후에 설명될 것이기 때문 에 여기서 언급하지 않는다. 여하튼 私田에 있어서 이라는 조 세율이 법률로서 정해져 있었으며, 이것은 佃戶쪽에서 볼 때에는

328 3. 賤 民 생산량의 이상을 물지 않을 권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陳田의 個作일 때에는 아무리 그 토지의 소유자라 하더라 도 일정한 기간은 법정조세액 보다 적게 받거나 전혀 받지 못하거 나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佃戶의 경제적인 일정한 지위가 법률의 보호를 받고 있었음을 살필 수가 있다. 이와같은 사정은 다음 기록을 보아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러 州縣의 公 私田이 河川에 漂損되거나 樹木이 叢生하여 耕種을 할 수 없는데 만약 관리가 그 佃戶 및 諸族類와 이웃사 람에게 税粮을 徵敛하여 侵害하여 弊를 짓는 者가 있으면 內外 의 所司가 察訪하여 禁除하게 하였다 (高麗史 78 食貨 1 田制 租稅 睿宗 3년 2월 制) 즉 佃戶가 부당하게 경제적인 이익이 침해되는 것을 禁除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佃戶의 경제적인 권익이 때로는 침탈 되기도 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신분적인 예속관계가 없다고는 해도 소유자로부터 토지를 借耕 하는 불리한 입장이고 보면 부당한 침탈이 없기는 힘들었을 것이 다. 外居奴婢의 경우는 과연 어떠하였을까. 外居奴婢가 소유주의 토지를 借耕했을 때 얼마 만큼의 부담을 져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규정이 없다. 기록에 보이는 佃戶 에는 외거노비 다시 말 해 奴婢油戶까지를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일까. 일반적으로 사회적 인 통념에 있어서나 법제적인 신분상 제약에 있어서 最下層 最下 賤의 처우를 받았던 것이 노비였음을 상기할 때 선뜻 긍정적일 수 가 없게 된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기록을 검토하면서 좀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少監 王元之의 婢婿 私奴 平亮이 元之의 가족을 멸하였다. 丙辰 에 平亮을 먼 섬에 귀양보냈다. 平亮은 平章事 金永寬의 家奴로 見

329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州에 살며 농사에 힘써 富를 이루었는데 權門 要路에 뇌물을 바쳐 賤人을 면하고 良人이 되어 散員同正 벼슬을 얻었다. 그 妻는 곧 元 之의 家婢인 바 元之는 집이 가난하여 가족을 이끌고 가서 依托하 고 있었다 (高鹿史 20 世家 明宗 18년 5월 癸丑) 平亮과 그의 妻는 見州에 外居하여 농사짓고 사는 外居奴婢였음이 분명하다. 平亮은 뇌물로서 良人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散 員同正이라는 벼슬까지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적지않은 돈을 쓰 지 않고는 힘들었을 것이다. 사실 그는 王元之가 집안식구를 거느리 고 와서 의탁할 정도로 부유하였다. 부유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농사에 힘쓰므로 해서였다. 平亮이 王元之의 가족을 멸하 고 遠島로 유배되어 가는 重罪人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농사에 힘 써 서 라고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부정이나 불법에 의해서 蓄 財한 것이 아님은 거의 분명하다. 순전히 농사에 힘써서 부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의문이 가지 않는다면 토지의 소유자에게 지나친 부담을 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영해 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 할 수는 없을까. 조세율에 국한시켜 볼 때 기록에 보이는 仙戶가 바쳐야 하는 을 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짚어 보는 것이다. 그렇 다면 佃戶 에는 노비신분의 仙戶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볼수 있 을까. 여기에는 아직도 상당한 주저가 따른다. 왜냐하면 平亮의 사 례는 어디까지나 高麗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전기의 모습을 사실 에 어긋나지 않게 반영해 주고 있다고 보기 힘들고, 平亮의 借耕地 가 仙戶의 평균적인 借耕地보다 훨씬 컸다고도 볼 수 있겠기 때문 이다. 따라서 平亮의 사례를 가지고 외거노비가 곧 佃戶 로서, 일정한 경제적인 지위가 법률로 까지 보호되고 있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나. 다만 외거노비도 佃戶 와 비슷한 크기의 조세율 즉 정도를 무는 것이 대체적인 현상이 아니었겠는가 추측해 볼 수

330 3. 賤 民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전반적인 경제적 처지는 佃戶 보 다 불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외거노비라 해도 신분적인 예 속관계에서 오는 소유주의 恣意的인 착취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 았을 터이기 때문이다. 솔거노비로 만드는가, 외거노비로 두는가 하는 것 부터가 근본적으로 소유주의 임의에 달려있는 문제이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사료를 검토해 보자. (前略) 光宗이 佛事를 많이 일으켜 役事가 날로 번거러워지 매 이에 在外奴婢를 徵發하여 役事에 充當하고 內宮의 分으로 支給하기에 不足하여 倉米도 같이 소비하였읍니다. (中略) 바 라건데 聖上은 하나같이 太祖의 制를 의거하여 宮中의 노비와 廐馬의 수를 酌定하시고 나머지는 모두 밖으로 나누어 보내소 서 (高麗史 93 列傳 崔承老傳 成宗 元年) 在外노비는 곧 외거노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경우의 외거노비 는 공노비로서 公田을 借耕하고 일정한 액의 조세를 국가에 바쳤 다. 公田에 있어서 조세율은 私田과는 달리 이었다. 사실 公 私田을 佃作할 때 납부해야하는 租稅額에 과 의 차이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佃戶의 입 장에서 볼 때 佃作이 公田이냐 私田이냐에 따라서 사회 경제적인 처지가 마땅히 다를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으로서는 확실한 언급을 할 수가 없다. 여하튼 위의 기록이 보여 주는 한, 외거노비는 하등의 제약이 없이 供役奴婢로 還徵되 었고, 다시 외거노비로 보낼 것이 촉구되고 있다. 요컨데 供 役奴 婢에서 외거노비로나 혹은 그 반대로나 소유주(國家)의 임의대로 쉽사리 바뀔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신분적인 예속관계가 외거노 비의 경제적인 지위를 어느정도 결정할 수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 다. 供役奴婢를 다시 외거노비로 내어 보내자는 표면적인 이유에

331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대해서는 內宮의 分으로 지급하기에 부족하여 倉米도 같이 소비 하였다 고 하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유주(國家)의 경제적 인 상태만을 고려한 일방적이고도 恣意的인 것이었다. 또한 光宗 때의 외거노비를 공역노비로 환징했던 것도 계기가 된 것은 마찬 가지였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공노비 뿐만이 아니고 사노비나 사 원노비에 있어서도 별다른 차이는 없을 것이다. 光宗朝에 궁중의 役事에 동원된 외거노비의 예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지만 대체 로 당대의 외거노비는 소유주 개인이건 국가이건 간에 의 편의를 좇아서 수시로 조세를 바치는 것 외에 노동력을 상당히 제 공했다고 믿어진다. 이에 못지 않게 貢物의 부담도 컸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력이라든가 貢物에 대한 부담은 외거노비가 佃 戶에 비해서 훨씬 컸을 것으로 생각한다. 신분적인 예속관계에서 오는 恣意的인 착취가 소유주로서는 거의 언제나 가능했으리라는 것에 의심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조세는 佃戶와 거의 같은 수준에서 받아드린다해도 조세의 收取 이외의 경제적인 착취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佃戶보다는 외거노비 즉 노비佃戶에 게 토지를 佃作케 하는 것이 소유주로서는 훨씬 경제성이 컸을 것 이다. 毅宗朝의 인물인 文克謙 傳에 (文克謙은) (前略) 僕從을 나누어 보내 田園을 넓게 잡으니 時議가 애석하게 여겼다 (高麗史 99 列傅) 고 한 것에서 田園을 넓게 잡은 것은 부당한 방법에 의한 것이었 음을 쉽게 알 수 있지만, 이곳의 농업생산에 良人佃戶를 세우지 않고 僕從(奴婢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됨)으로 하여금 그 역할을 맡게 하였다는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노비가 갖고 있 는 경제적인 효용성이 양인佃戶의 그것보다 컸기 때문이었을 것 이다. 이와같은 사실은 당대의 사회에서 노비가 존재하지 않을 수

332 3. 賤 民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 사회 경제적인 를 어느정도 설명 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직접 생산활동을 위해서건 잡다한 勞役을 위해서건 노동력에 대 한 수요가 상당히 컸던 官人層이나 국가 혹은 寺院에서는 노비를 확보함으로써 비교적 저렴한 노동력을 얻고자 하였다. 이같은 노력 은 전쟁포로나 중죄인을 노비화 함으로써, 이루어 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해서 생겨나는 노비는 어디까지나 전쟁이라던가 범 죄 행위에 따른 副次的인 產物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의 내면적인 발전의 각도에서 보아서는 예외적인 현상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 면 이렇게 예외적인 계기를 제외하고 어떻게 高麗전기의 사회가 노 비를 얻을 수 있었고, 또 이에 따라 값싼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 을까. 이 문제는 사회 경제사적 측면,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계급 분화 내지 계층분화의 관점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법제적인 면에서 볼 때 高麗시대에 있어서의 노비는 계 층분화를 일으키기는 상당히 어렵게 되어 있었다. 그들의 혈연의 隨母法4)에 입각하여 母系 즉 婢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母의 良 賤 에 따라서 그 자식의 신분이 결정되었다. 말하자면 良男과 婢의 交嫁所生은 母의 신분을 쫓아 노비가 되는 것이다. 奴와 婢 사이 의 자식이 노비가 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한편 奴 와 良女와의 交嫁所生은 자연히 양인이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奴 와 良女와의 相婚을 법률로 엄금시키고 있었기5) 때문에 이것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비의 피가 섞여 있는 한 그들은 거의 틀림없이 노비여야 했다. 그리고 그들의 신분은 대를 이어 상속되 게 마련이었다. 물론 법률적인 제약 때문에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 4) 高麗史 85 刑法 2 奴婢 靖宗 5년 5) 高麗史 85 刑法 2 奴婢

333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나기가 힘들기는 했지만 양인으로 해방되는 노비도 적었던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언급될 것이다. 여하튼 계층 분화의 결과 양인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나머지 대부분의 노비 들은 사회에서 값싼 노동력으로 혹사되었다. 이들과 같이 본래 부 터의 노비와 함께 양인농민으로 부터 전락되어온 노비가 있었다. 농민계급 가운데에서 상위층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바로 양인농민 이었지만, 이들 중에서도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정도로 빈곤한 농민은 양인농민으로서는 낮은 신분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체로 남의 집 傭人 이 되는 수가 많았을 터이지만, 傭人 은 신분상 여전히 양인으로 남아 있기는 해도 경제적 지위는 솔거노비보다 크게 나을 것은 없는 것이다. 낮은 경제적 지위가 그 들로 하여금 양인으로서의 신분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끔 만들 었을 것임에 거의 틀림이 없다. 다시말해 都僉議使司의 啓奏에 흉년으로 餓死者가 심히 많은데 賑恤하여 살릴 수가 없으니 良人으로서 스스로 능히 먹지 못하는 자는 부유한 사람으로 하 여금 먹이게 하고 사역은 그 一身에만 그치게 할 것이다. 하 거늘 王이 인민을 노예로 인증하는 것을 싫어하여 그 啓를 불태 웠다 (高麗史 39 世家 恭愍王 10년 5월 甲戌) 고 한 것으로도 짐작이 가지만 대개는 노비 즉 천인신분으로 전락 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傭人이 되는 것은 결국 노동 력의 賣渡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러고서도 돌이킬 수 없는 생존 권이었다면 신분의 賣渡까지도 불가피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傭人 의 형태를 반드시 거치지 않고서도 거의 경제적인 무능력 상태에 있던 일부 양인농민은 노비로 전락하는 예가 많았다. 다음의 기록 은 이 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詔하기를, 전 임금이 백성 보기를 草芥와 같이하고 斧壤에

334 3. 賤 民 還居하여 궁실을 營立하니 백성은 農功에 피곤하고 三時는 농 업에 때를 놓쳤으며 더우기 기근이 연달아 이르고 疾疫이 뒤이 어 일어남으로 집을 버리고 離散하여 路上에서 굶어 죽는 자가 서로 잇닿았으며 한 匹의 細布가 쌀 5升값이라 이리하여 백성 들로 하여금 몸을 팔고 자식을 팔아 남의 노비가 되게 하였으니 朕이 매우 민망하게 여기는 터이다. 그 所在官員으로 하여금 자 세하게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라 고 하니, 이에 일천여구를 얻으 매 內庫의 布帛으로써 보상하여 돌려 보냈다 (高麗史 1 世家 太祖 元年 8월 辛亥) 失政 기근 疾疫 등이 원인이 되어 백성들이 굶어 죽기도 하고, 또는 자기 몸과 자식을 팔아 남의 노비가 되기도 하였음을 알아 볼 수 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대단히 낮은 지위에 있던 양인농민이 천 인의 신분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행히도 太祖 가 즉위한 해에는 詔命에 의해 일천여명이 구제되었지만, 양인농 민에서 천인으로 전락된 자가 언제나 양인신분을 되찾을 수 있도 록 국가나 국왕의 배려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太祖의 詔命 은 인심을 수습하기 위한 일시적이고도 예외적인 조치로 돌려야 할 것이다. 비록 국가적인 조치가 간혹 있었다 해도 당시 사회의 현실로서는 양인농민의 계급분화에서 비롯되는 양인의 천인화를 근본적으로 막기는 힘든 노릇이었다. 삶의 영위를 위해서 신분의 매도는 피하기 어려웠고, 또 그렇기 때문에 양인농민의 自意에 따 른 것인 바에는 어쩔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생존의 위협을 받 는 양인농민 가운데에는 崔承老의 상서에도 群臣들이 본래 노비를 가졌던 자 이외에 기타 본래 없던자는 혹 재화 로 사사 노비로 하였다 (高麗史 93 列傅 崔承老傳) 고 있지만 재화를 대가로 신분을 파는 사람들이 적지는 않았을 것

335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당대를 통하여 꾸준한 추세로 나타나 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일단 천인신분으로 전락하여 노비가 된 이 상, 이들은 소유주를 위해서 무한한 노동력의 착취를 감수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주로 계급의 분화에 따른 양인의 노비화에 대해서 언급해왔다. 그러나 그 밖에도 전쟁포로라든가 중범죄인으로 부터 도 노비가 발생하였다는 점은 미리 지적해 두었다. 그런데 양인농 민 가운데에는 그 자신의 내부적인 조건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외 부적인 강압에 따라 노비가 되는 경우도 상당히 있었다. 이른바 壓良 이라고 하는 현상이 그러한 것인데 불법적인 것이었음은 말 할 필요도 없다. 대체로 권력을 배경으로한 권세가에 의해서 자행 되곤 하였다. 이러한 경우에 양인농민은 신분의 약탈로 해서 노비 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신분의 약탈에 의한 것이든 또는 신분의 매도에 따른 것이든 양인농민으로서 노비가 되는 것은 高麗 후기가 되면서 증대되어 갔다. 이것은 정치적인 혼란 田政의 문란과 양인농민에 대한 국가적인 부담이 증가되었던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 노비의 신분 노비는 최하층의 신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당시 사회로 부터 소외되어 천대를 받고 있던 존재였다. 노비에 대한 당대의 일반적인 이해가 어떠하였는가 하는 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려보 자. 노비법의 개혁을 위한 元나라의 기도에 대하여 忠烈王은 다음 과 같은 이유를 들어 이에 반대하였다. 옛적에 우리 始祖는 後嗣 子孫에게 垂誡하여 이르기를, 무릇 이 賤類들은 그 종자가 별다르니 삼가 이 천류로 하여금 양인으

336 3. 賤 民 로 삼지 말라. 만약에 良으로 삼기를 허락하면 뒷날 반드시 관 직에 나아가게 될 것이고, 차차로 要職을 구하여 국가를 謀亂할 것이니, 만약에 이 訓誡를 어기면 社稷이 위태할 것이라 하였 다 (高麗史 85 刑法 2 奴婢 忠烈王 26년 10월) 즉 노비를 양인으로 만들면 이들이 마침내는 국가의 存立을 위태 롭게 하고 말 것이라는 太祖 王建의 경고를 저버릴 수 없다는 것 이다. 노비는 일반 양인이 되어서도 안되고, 관리는 더우기나 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통치질서를 파괴하는 신분층으로 위 험시되었고, 따라서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신분적으로도 다른 신분층과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능에 대한 사회적인 기대도 유달리 다른 것이었다. 이것 과 관련하여 다음 기록을 살펴보자. 무릇 東國에 노비가 있는 것은 크게 風敎에 도움이 됨이니 內外 를 엄하게 하고 貴賤을 나누며 예의가 행해지는 까닭은 이에 말미 암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高麗史 85 刑法 2 奴婢) 이를 통하여 전통적인 신분질서를 유지하고 예의를 행하는 데에서 노비의 필요성이 거론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말하자면 노비는 최하의 신분계층으로 만족해야 하며, 주인에 대한 供役과 복종만 이 기대되는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당시의 이와같은 바램에 어긋 나지 않는 한에서 노비는 비로소 사회적으로 존재할 이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규범은 지극히 엄격한 것이었다. 예컨데 노비와 주인과의 관계는 부자의 사이와 같은 정도로 생각 되었다. 그리하여 노비가 주인을 배반할 경우는 자식이 아버지에 대한 그것과 마찬가지로6) 사회적인 지탄을 피할 수가 없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은 노비에 대한 사회적인 통념은 법제적인면 6) 崔承老가 成宗 元年에 올린 상서에 다음과 같은 句節이 있다. 當是時 子背父母 奴婢背主 諸犯罪者 變形爲僧 (高職史 93 列傳 崔承老傳)

337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에서 비교적 엄격한 제약으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우선 노비 는 결혼에 있어서 다른 신분층에서 배우자를 선택할 자유가 인정 되지 않았다. 노비사이에서의 혼인만이 원칙적으로 허용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知的인 수련이라든가 官職에 나아가는 것은 그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항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科擧에 응 시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교육을 받을 권리 또한 인정되지 않았다. 사회적인 제약은 교통수단의 이용에서 조차 뒤따랐다. 노 비는 서울 안에서는 乘馬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혹시 국가로 부 터 恩給이 내려질 때에도 가령 모든 流移하는 죄수중 도중에서 부인이 解產하는 자가 있으면 家口를 아울러 暇를 20일 주고 家女 및 婢는 暇를 7일 준다 (高麗史 85 刑法 2 恤刑) 고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차별대우를 받았다. 천인신분으로써의 노비를 가장 두드러지게 특징지워 주는 것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탈취의 객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노비 매매 는 高麗 초기부터 있어왔고, 成宗 5년에는 매매의 公定價格이 吿 示되었다.7) 이것은 노비매매가 법제화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노비가 재물로 간주되어 매매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 점에서 본 다면 다른 신분층과의 신분적 격차는 도저히 메꾸어 질 수 없는 것이다. 노비의 증여는 대개 賄賂의 수단으로 권세가에게 주어지 는 것으로, 일찌기 穆宗朝에 融大가 權貴에게 壓良노비 500口를 증여한 적이 있다.8) 또 李資謙에게 노비 20口를 贈賄하여 給事中 의 職을 얻은 崔惟迪의 경우9)도 찾아 볼 수 있다. 매매 혹은 증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노비가 財物로도 7) 高麗史 85 刑法 2 奴婢 成宗 5년 7월 敎 8) 高麗史 88 列傳 后妃 1 宮人金氏 9) 高麗史 97 列傅 韓安人傳

338 3. 賤 民 취급되었음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노비의 良人化가 거의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는 점은 극히 자연스러운 추 측이다. 그러나 당시 사회가 노비의 신분해방을 전혀 허락치 않았 던 것은 아니다. 成宗 때에는 주인을 대신해서 3년간 出征 또는 盧墓한 노비가 放良된 바 있다.10) 그리고 肅宗朝에서는 도적을 체포한 노비가 양인으로 해방되기도11) 하였다. 관직에까지 나아 가는 노비들도 더러는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毅宗은 捕賊에 대 한 보상으로 노비에게도 參職의 除授를 약속한 바 있고,12) 천인 출신인 李義旼은 手搏에 능하여 毅宗에 의해 隊正이 되었던13) 것 이다. 요컨대 노비는 所任에의 力行이나 立功 또는 特技의 소유 등과 같은 조건을 구비하고 良人이 되는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 러한 것이 노비해방의 계기가 되는 유일한 길은 결코 아니었다. 경제적인 지위의 상승을 배경으로 하여 천인 신분을 벗어나는 노 비의 경우를 무시해 버릴 수가 없다. 오히려 이 대목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해서 계급분화가 일어나고 그것이 다시 어떻게 계층분화를 가져오게 되는가 하는 것을 보는 일은 결국 社會史의 본질을 動態的으로 파악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보 아 노비는 경제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들이 재화를 저축하는 일은 대단히 힘든 노릇이었다. 그러나 똑같은 노비신분 이라 하여도 供役奴婢와 외거노비는 獨自의 家計와 財產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솔거노비 보다는 경제적인 처지가 나은 것이었다. 특히 외거노비는 제공하는 노동력의 크기에 어느정도 비례하여 재 화를 확보할 수 있는 입장에 있어서 다른 노비 보다는 훨씬 유리 10) 高麗史 85 刑法 2 奴婢 11) 高麗史 85 刑法 2 盜賊 12) 高麗史 18 世家 毅宗 21년 1월 癸丑 夜 13) 高麗史 128 列傳 李義旼傳

339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들 가운데에는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明宗朝의 平亮의 예에서 처럼 생계비유지 이외에도 재 화를 저축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들의 대부분은 平亮도 그러하였지만 경제력을 바탕으로 양인이 되고자 하였을 것으로 믿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해서 천인신분을 벗어나는 노비의 수가 정확하게 어느정도나 되 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러한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노비가 아 마도 상당 한 수에 이르지는 못하였을 것이라는 추측만을 해볼 수 있을 뿐 이다. (2) 鄕 所 部曲人 1) 鄕 所 部曲의 起源 鄕 所 部曲은 地方行政區劃의 하나로써, 이곳에 각기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동등한 신분적 위치에 있었다. 물론 행 정 단위로써의 鄕 所 部曲은 郡 縣의 하부조직으로 그 관할 아래에 있 었다.14) 그리하여 鄕 部曲 村이 합쳐서 郡 縣이 되기도 하였고, 반 대로 郡 縣이 降格하여 鄕 所 部曲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 鄕 所 部曲은 삼국시대로 부터 朝鮮 초기에 이르기까지 존재해 왔고, 그 지역적인 분포는 거의 전국적이었다. 그런데 東國輿地勝覽에 나타 나는 전국의 鄕 所 部曲의 총수는 785이고, 이 가운데 296이 新羅 의 발상지였던 慶尚道 지방에 있었다. 더우기 部曲은 전체수 406 가운데 그 절반이 넘는 217이 이곳에 집중적으로 산재되어 있었 다. 이점으로 미루어 보아 部曲의 전성기는 高麗 이전의 新羅시대 14) 旗田巍 高麗時代의 賤民制度 部曲에 대하여 和田淸博士還曆記念東洋史論叢 (1951) pp

340 3. 賤 民 였던 것으로 추측된다.15) 그러나 新羅를 포함한 삼국시대에는 部 曲등에 관한 기록을 남겨주지 않고 있다. 아마도 高麗시대와 마찬 가지로 州 郡 縣의 관할 일에 지방행정 체계 속에 포함되어 있었을 터이지만, 그밖에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여러 의문 가운데에 서도 이제 우리가 해명해야 하는 것 은 행정단위로써의 鄕 所 部曲 이 어떻게해서 생겨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高麗시대의 다음 기록의 검토로 부터 시작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시대를 거슬 러 올라가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본시 永州의 梨旨銀所는 옛날에 縣이었는데 중간에 邑民이 國命을 어기어서 廢하고 백성을 籍沒하여 白金을 税 물게 하였 는데 銀所라고 칭하게 된지가 오래 되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27 河陽縣 古蹟) 毅宗 15년에 縣人 子和 등이 鄭叙의 妻를 誣告하고 縣吏 仁梁으 로부터로 더불어 임금과 大臣을 저주하매 子和를 강에 던지고 縣 을 내려 部曲으로 삼았다 (高麗史 57 地理 2 陕州 感陰縣) 전자는 縣民이 國命을 어겨 縣이 所로 降格되었음을 말해주고 있 고, 후자는 縣民이 王과 大臣을 저주하였기 때문에 部曲이 되고 있음을 전한다. 이를테면 王에 대한 拒逆罪 또는 不敬罪 따위와 같은 犯罪행위가 縣民에 의해 이루어졌을 때 連帶責任으로 鄉 所 部曲등의 하급행정단위로 격하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거의 비 슷한 犯法행위에 의해서 주민들이 연좌되어 연대책임을 져야하는 경우는 統一新羅시대에도 있었다. 文聖王때에 張保皐의 謀叛이 실 패로 돌아가자 그 일당을 碧骨郡에 徒民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安勝의 族子인 將京 大文이 金馬渚에서 謀叛했을 때에 15) 金龍德 鄕 所 部曲攷 白樂濬博士還甲記念國學論叢 (1955) pp

341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도 徒其人於國南州郡 16)이라 하여 叛逆罪에 연좌된 일당을 나 라 남쪽의 州 郡에 옮긴 적이 있다. 謀叛에 연좌된 사람 뿐만 아니 고 전쟁포로들도 군사를 일으켜 百濟를 치니 品日 文忠 등이 공격하여 취한 城이 63이었는데, 그곳의 사람들을 內地로 옮겼다 (三國史記 6 新羅本紀 6 文武王 10년 7월) 고 한 것으로 알 수 있듯이 內地의 郡縣으로 옮겨지는 수가 있었 다. 그것이 謀逆에 의한 것이든 戰爭에 따른 것이든 犯罪의 연대 책임을 지고 다른 州 郡 縣으로 옮겨질 때에는 그곳의 감독과 統轄 을 받았으리라는 점에 의문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일반 郡縣의 管轄아래 있는 보통의 村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동일하게 취급되 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경제적인 착취가 행하여지고 사회적인 활 동에 있어서도 어느정도의 차별을 두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 스러울 것이다. 이들의 聚居地가 鄕 所 部曲의 하위행정단위로 편 성될 수도 있었을 가능성을 찾아보는 소이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만일 전쟁포로 따위의 聚居地에서 鄕 所 部曲이 생겨날 수도 있는 것이라면, 정복국가로써의 성격이 두드러진 삼국이 被征服民을 처 리하는 과정속에서 部曲 등이 발생하였으리라는 추측은 결코 무 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피정복민의 처리가 항상 일률적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 었다. 그리고 새로 얻게된 지역의 주민을 언제나 차별을 두어서 鄕 所 部曲 등으로 편성했던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순순히 來服해 왔는가 저항을 했는가 또는 그 저항의 정도는 어떠하였는가 하는 따위가 고려되었음에 틀림없다. 이것과 관련하여 아래의 사료를 살펴보자. 16) 三國史記 8 新羅本紀 8 神文王 4년 11월

342 3. 賤 民 尙州, 沾解王 때에 沙伐國을 取하여 州로 하였다 (三國史記 34 地理 1) 古寧郡, 본래 古寧加耶인데 新羅가 이를 취하여 古冬攬郡으로 하였다 (三國史記 34 地理 1) 松讓이 그 나라로써 來降하니 그 땅으로써 多勿郡을 삼았 다 (三國史記 13 高句麗本紀 1 東明聖王 2년) 이 일련의 기록은 인근지역의 병합과정에서 순순히 또는 별 저 항없이 來降해온 사람들이 일반 郡縣體制에 편입되고 있음을 보 여주고 있다. 그리고 金官國의 主 金仇亥가 妃 및 세 아들과 더불어 國努의 寶 物로써 來降하니 王이 禮로 맞이하여 上等의 位를 除授하고 본 국으로 食邑을 삼게 하였다. 아들 武力은 벼슬하여 角干에 이르 렀다 (三國史記 4 新羅本紀 4 法興王 19년) 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저항없이 흡수된 피정복사회의 신분구조 가 병합에 따라 거의 변화하지 않을 수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 다. 즉 피정복사회의 지배계층은 대체로 정복사회의 지배계층으로 재편성되었고, 나머지 사회 계층도 양인이든 천인이든 그들 의 법제적인 지위나 경제적인 처지가 어느정도는 그대로 유지되 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저항이 심하였거나 더우기 먼저 공 격해왔을 때에는 피정복민에 대한 처우가 가혹한 것이었으리라는 사실은 다음 사료를 검토하여도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肅愼이 침략해 오니 王은 이에 達賈를 파견하여 가서 이를 정 벌하도록 하였다. 達賈는 기묘한 계략을 내어 불의에 습격하였다. 檀盧城을 빼어 酋長을 죽이고 600餘家를 扶餘남쪽 烏川으로 옮기었 다. 그리고 항복한 부락 60所는 附庸으로 삼으니 王이 크게 기뻐하 였다 (三國史記 17 高句麗本紀 5 西川王 11년 10월)

343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肅愼이 來侵하자 高句麗의 西川王은 그의 아우 達賈로 하여금 복 수전을 감행케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檀盧城의 600餘家는 포로 로 하였고 60所의 부락은 高句麗의 附庸으로 삼았다. 후자의 경우는 순순히 항복했던 부락이었던 반면, 전자는 아마도 대항하여 싸웠 던 城이었다고 믿어진다. 報復戰인 이상 피정복민을 가혹하게 대 우했으리라는 짐작이 응당 가지만, 모두가 일률적으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특히 전자에서는 檀盧城의 酋長이 살해되기까지 하는 데, 이것은 來服해온 金官國의 主 金仇亥가 新羅의 귀족으로 편입 되 는 厚待와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항복해온 부락 60所는 본래 의 위치에 그대로 두고 附庸 으로 하였는데, 그 실질적인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高句麗에 臣屬한 東沃沮처럼 高句麗에 대한 예속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 잘못이 없을 것이다. 그렇 다면 이들은 사회적인 활동에 있어서 高句麗 사람과는 차별이 있 었을 것이고, 경제적으로도 보다 큰 착취의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檀盧城 의 주민들은 部落 民과는 달리 거 주지 자체가 달라졌는데, 이것은 저항에 대한 응징이 보다 가혹했 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들이 끌려온 포로인 이상 노예보다 나 은 대접을 받기란 어려웠을 터이지만, 이들의 家 즉 戶 를 그대로 유지케 한 것을 보면 率居奴婢는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外 居奴婢였거나 아니더라도 이에 준하는 정도의 신분이나 계급의 소 유자였을 것이다. 정복국가가 점차 성장하고 이에 상응해서 지방 행정조직이 정비되어감에 따라 예속관계에 있는 部落六十所 와 檀盧城 출신의 사람들이 聚居하는 지역과 같은 따위가 아마도 鄕 所 部曲의 하급행정단위로 나타났을 것이다. 요컨대 三國은 被征服地域을 州 郡 縣으로도 또는 鄕 所 部曲으로 도 만들었지만, 전자는 피정복민을 총체적으로 良人에 준하는 지

344 3. 賤 民 위에 둔 것이고, 部曲 등의 특수한 행정단위로 한 것은 피정복민 을 전체적으로 賤民으로 한 것이었다. 이들의 국가에 대한 부담이 나 신분적인 지위에 있어서 일반 양인 보다는 차이가 비교적 컸을 것으로 생각이 가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2) 鄕 所 部曲人의 신분 지방행정단위로서의 鄕 所 部曲과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신분적인 지위 가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部曲人이 차지하고 있던 신분상의 상대적인 위치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郡縣人과 津 驛 部曲人이 交嫁하여 낳은 자는 모두 津 驛 部曲에 속하게 하고 津 驛 部曲과 雜尺人이 交嫁하여 낳은 자는 똑같이 나누고 남는 수 는 母에 따른다 (高麗史 84 刑法 1 戶婚) 部曲人은 그의 신분에 있어서 津 驛의 사람 그리고 雜尺人과 같은 것이었다. 郡縣人과는 동일한 수준에 있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郡 縣人과의 相婚 자체를 금한 것은 아니었다.17) 여하튼 部曲人이 郡縣人과 同列에서 취급될 수 없었던 이유를 해명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部曲人과 郡縣人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신분상 격차의 실 제를 규명함으로써 풀리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部曲人은 國學에의 입학이 허락되어 있지 않았다. 이점으로 보 아 部曲人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에 있어서 일반 郡縣人 보 다 불리한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교육을 전혀 받 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國學만이 유일한 교 17) 武田幸男 敎授가 이미 部曲人과 郡縣人 사이에 婚姻規制가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한 바 있다. 武田幸男 朝鮮의 律令制 岩波講座 世界歷史 6 (1971) p.78 참조

345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육기관은 아닌 것이다. 國學을 제외한 다른 교육기관에서는 郡縣 人과 마찬가지로 입학하여 수업할 수 있었다. 郡縣人이라 하여도 실제로 國學에 입학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部曲人의 신분문제와 관련하여 검토해 보아야 할 중요한 것 가 운데 하나는 그들에게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권리가 있었는가 나 아가서 科擧에 응시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五逆 五賊 不忠 不孝 鄕 部曲 樂工 雜類의 자손은 赴擧 함을 許하지 못하게 하 였다 (高麗史 73 選擧 1 科目 靖宗 11년 4월) 고 한 것을 보면 鄕 部曲人은 科擧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였음 을 살필 수 있다. 그런데 部曲人과 나란히 赴擧權이 거부되고 있 는 雜類의 경우는 高麗초기부터 科擧에 응시할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仁宗 때가 되어서는 文武 3品의 位階에 까지 오를 수가 있 었다. 이와같은 사실은 위의 기록만으로 鄕 部曲人이 高麗 전시대 를 통하여 科擧를 볼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데에 망서림을 가져다 준다. 다시 다음 사료에 주목해 보자. 鄭文의 字는 懿德으로 草溪縣사람이니 아버지는 倍傑이다. 魁 科에 拔擢되어 官職이 禮部尚書中福使에 이르렀으며 儒術로써 文 宗을 도왔다. (中略) 倍傑의 妻 崔氏는 어질되 자식이 없는지라 그 族親의 딸을 길러 장성함에 미쳐 倍傑에게 권하여 妾을 삼게 하였다. 얼마 아니되어 倍傑이 죽고 遺腹子로써 文을 낳았다. (中 略) 國子監試에 나아가 (中略) 登第함에 秘書郞에 除拜되었다. (中略) 右拾遺로 轉補됨에 臺諫이 駁奏하기를, 文의 外祖의 世系 가 處仁部曲으로부터 나왔으니 諫官이 됨은 마땅하지 않읍니다 라고 하였다. (中略) 肅宗 10년에 刑部尙書 政堂文學 兼太子賓客 에 除拜되었고 檢校司空 禮部尚書를 加하였다 (高麗史 95列傳

346 3. 賤 民 鄭文傳) 鄭文은 外祖가 部曲출신이었지만 國子監試를 통하여 秘書郞에 初拜되었다. 鄭文은 결국 어머니도 部曲人 신분이었고, 따라서 그 자신도 이 신분(적어도 法制上은)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렇기 때문에 그가 諫官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外祖의 家 系가 部曲吏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해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러나 鄭文의 어머니가 倍傑의 妻 崔氏에 의해서 키워졌던 점을 보 면 外祖가 경제적으로 거의 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이 든다. 部曲吏 출신이었다면 남에게 딸을 맡길 만큼 경제력이 약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鄭文 어머니의 집안은 아마도 대대로 吏職 을 세습하는 部曲吏 출신이기 보다는 일반 部曲人 출신이었을 것 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가지 않을 것이다. 鄭文은 部曲人 신분으 로 해서 비록 淸要職인 右拾遺에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마침내는 尙書(正3品)職 및 政堂文學(從2品)에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그렇 다면 靖宗 때의 赴擧禁止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 제가 제기된다. 그것은 雜類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시적인 금지조치 로 해석하여 좋을 듯하다. 요컨데 간헐적으로는 科擧에 응하는 권 리가 박탈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보아 部曲人은 과거를 볼 수 있 었던 것으로 살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거의 제 약이 따르지 않았던 郡縣人에 비하면 신분적인 지위가 열등했던 것은 감추어질 수 없는 것이다. 部曲人은 물론 官職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 사 료를 보아도 알 수 있다. 高麗 때에 猫部曲人이 仕朝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는 識言이 있었다. 柳庇에 미쳐서 部曲吏로써 顯身하게 되었다(下略) (東 國輿地勝覽 40 全羅道 興陽 古跡 高興廢縣)

347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柳庇는 곧 柳淸臣으로서 忠烈王의 寵愛를 받아 立身하기 시작한 사람이지만 柳淸臣의 이전의 시대에 이미 猫部曲人이 仕朝하면 나라가 망한다 고 하는 識言이 있었다는 것은 部曲人으로서 관직 을 갖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리고 이러한 識言의 유행은 猫部曲 출신으로 국가의 大事를 左右 할 만한 고위관직 내지 요직을 맡고 있던 사람이 實在했었음을 반 영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部曲人으로서는 원칙적으로 오를 수 있는 品階와 나아갈 수 있는 品職에 제약이 있었을 것임 에 거의 틀림이 없다. 鄭文이 部曲人 신분으로 해서 右拾遺에 취임 할 수 없었던 예로 보아서 대체로 淸要職에 나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官階에 있어서도 나라의 제도에 部曲吏는 비록 功이 있어도 5品을 넘지 못하 였다 (高麗史 125 列傳 柳淸臣傳) 고 한 것에서 部曲吏라도 5品에서 限職의 제약을 받았던 것을 보 면 보통 部曲人으로서는 그것보다도 낮은 品階에서 머물러 있어 야 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淸要職을 맡기가 어렵기는 郡縣人 출 신도 대개 마찬가지였지만 오를 수 있는 品階에 제한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역시 신분적으로 部曲人 보다 높았기 때문이었다. 정치적인 진출에 있어서 뿐만 아니고 刑事上의 처벌을 받는 데 에도 다음 기록에서 알아 볼 수 있듯이 部曲人은 郡縣人보다 불리 할 때가 있었다. 部曲人 및 奴가 주인 및 주인의 극히 가까운 친척의 尊長을 奸하면 和奸은 絞하고 強奸은 斬한다 (高麗史 84 刑法 1 奸非) 部曲人이 奴와 나란히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것 부터가 部曲人 의 낮은 신분을 어느정도는 반영 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만 기록 가운데 주인 이란 部曲人과 奴의 경우가 그 구체적인 내용에

348 3. 賤 民 있어서 같은 것일 수가 없다. 部曲人에게 있어서는 契約上 主從關 係로 이어지는 주인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郡縣人에게는 이와같은 刑罰 조항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신분적인 제약을 말해주는 여러 관계사 료를 검토하고, 아울러 郡縣人과 비교하면서 部曲人의 법제상 신 분의 실체가 어떠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을 살펴 보았다. 그 결과 部曲人의 신분적 지위가 郡縣人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법제적인 지위를 다시 中國의 部曲 客女制와 비교해 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唐나라에 있어서 의 部曲은 主家의 戶籍에 附載되어 公役으로 부터 제외되어 있었 다는 점에서 私奴婢와 같은 법률적인 규제 속에 있었다. 그러나 部曲은 같은 신분인 客女뿐만 아니고 良人의 여자와도 혼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같은 賤人이면서도 私奴婢와는 달랐다. 말하자 면 上級賤人이었다.18) 혼인 문제에 있어서는 高麗의 部曲人의 경 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高麗의 部曲人은 唐의 部曲처럼 主家 에 附載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령 鄕 部曲 津 驛 兩界州鎭의 編戶人은 중이 되는 것을 금한다 (高麗史 85 刑法 2 禁令) 고 한 것만 보아도 그들이 독립된 戶를 이루면서 갖가지 公役을 부담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高麗의 部曲人과 唐의 部 曲이 신분적인 면에서 동일하게 취급되기가 어렵다는 것을 示唆 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다음으로는 高麗의 사회적인 통념으로는 部曲人이 어떻게 생각 되었는가 하는 점을 밝혀 보기로 하자. 다음 기록 가운데에서 이 에 대한 어느정도의 示唆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18) 玉井是博 唐의 賤民制度와 그 由來 支那社會經濟史硏究 (1943) pp.l

349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모든 州 縣長吏의 칭호가 혼잡하오니 지금부터는 郡 縣 이상의 吏는 戶長이라 칭하고 鄕 部曲 津 亭 驛의 吏는 다만 長이라 칭하 게 하소서 (高麗史 94 列傳 崔士威傳) 이것은 顯宗에게 崔士威가 올린 奏의 내용이다. 鄕 部曲吏의 호 칭을 郡 縣吏등과 구별해서 이를 법제화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崔 士威로서는 鄕 部曲 등의 吏가 郡 縣吏와 同列에서 불리워지기도 하는 것이 못마땅하게 생각되었음에 틀림없다. 崔士威의 이러한 생각은 部曲人에 대한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관념을 반영한 것으 로 헤아려진다. 이러한 풍조는 그 용맹하고 사납게 항거한 자는 먹실로 西京逆賊 이란 넉자를 새겨 海島에 귀양보내고 그 다음은 西京 두 글자를 새겨 鄕 部曲에 분배하고 그 나머지는 여러 州 府 郡 縣에 分置 하였다 (高麗史 98 列傳 金富拭傳) 고 한 것으로 보아 仁宗 때가 되어도 가시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가 있다. 罪人의 처리과정에서 鄕 部曲이 郡 縣보다도 重犯인 죄인 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결국 鄕 部曲人을 賤視하는 사 회적인 통념을 상당히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이다. 3) 鄕 所 部曲人의 생활 이제 끝으로 鄕 所 部曲人의 생활의 면모 특히 그들의 사회 경제 적인 처지를 개관해 보아야겠다. 우선 다음 사료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三司가 말하기를, 지난 해에 密城 管內의 牢山部曲 등 3개소가 큰 물로 田禾가 漂損되었으니 청컨대 1년간의 租税를 면제하소서 하 니 이에 따랐다 (高麗史 80 食貨 3 腹恤 災免 靖宗 2년 6월) 三司가 奏하기를, 東京 管內의 州 郡 鄕 部曲 19개소가 지난 해

350 3. 賤 民 의 오랜 가뭄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많이 굶주리고 困乏하니, 빌건 데 令文에 의거하여 4分 이상이 손실된 것은 租를 면하고 6分 이 상은 租調를 면하며 7분 이상은 課役을 모두 면하되 이미 輸納한 것은 내년의 租税에서 折减토록 하소서 하니 制하여 可하다 하였 다 (高麗史 80 食貨 3 娠恤 災免 肅宗 7년 3월) 이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미루어 볼 수가 있다. 즉 첫째로 鄕 部曲人이 郡縣人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농경에 종사 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둘 째로 租稅를 면제 租를 면하고 租調를 면하며 課役을 모두 면하되 등의 표현이 있음으로 보아서 租 庸 租의 公役 公課를 부담 하였음에 틀림없다. 나아가서 셋째로 그들의 公役 公課의 부담에 대 한 감면 혜택에 있어서는 郡縣人과 달리 취급되지 않았음을 살필 수 있다. 이점에 대해서는 다음을 통해서도 알 수 가 있다. 肅宗 3년 10월에 大廟에 祫享하고 여러 州 府 郡 縣 部曲의 금 년 租税의 半을 감하였다. (肅宗) 5년 2월에 州 府 郡 縣 部曲 雜 所의 금년 税布의 半을 감하였다. (高麗史 80 食貨 3 娠恤 恩免 制) 국가로부터 租税 라든가 税布 의 징수에 대한 減免令에 있어 서도 部曲人은 郡縣人과 조금도 다름 없는 은전을 받고 있다. 所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음을 동시에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런 데 所에 대해서는 鄕 部曲과 달리 이해하여 두는 것이 옳을 것이다. 所의 거류민에 대해서는 租税 徭役 등의 부담에 관한 기록이 나타 나지 않고 있다. 이것은 각종 물품의 생산과 그 貢納을 주요기능으 로 하고 있었던 所의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다 시 말해서 특정 물품의 貢納이라고 하는 부담으로 해서 租税라든 가 徭役의 收取가 실제로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되는 것이

351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다. 그렇다고 그들이 토지의 경작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생계를 유지하였던 것은 역시 농경활동에 의한 것 이었다고 믿어진다. 왜냐하면 국가로부터 祿俸 따위와 같은 생활상 의 보장을 받은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 서면 이들도 근본적으로는 鄕 部曲人과 같이 농경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파 악될 수가 있다고 하겠다. 다만 국가에 대해서 지고 있는 부담의 형태에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所의 거주자에게 내린 국가 의 은전에서 部曲人과 동일한 혜택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국가에 대한 이 兩者의 전체적인 부담은 결국 차이가 없었으리라 는 느낌이 든다. 결론적으로 말해 鄕 所 部曲人 사이에서나 또는 이 들과 郡縣人과의 사이에 있어서 사회 경제적인 지위 는 원칙적으로 동일했던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단정적으로 말하기에는 주저되는 면이 없지 않다. 위에 서 인용한 일련의 기록들은 部曲人이 안고 있는 公役 또는 公課 의 부담을 일정한 비율로 덜어 주라는 또의 施恩을 내용으로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체로 보아서 이같은 王命이 내려진 데에는 部曲人과 郡縣人의 公課의 基本量이 동일한 것을 전제로 함이 있 었다고 보는 것이 아마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렇 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아울러 인정해 두어야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깊은 연구가 뒤따라야 할 줄 안다. 어쨌던 部曲人의 경제적인 지위가 일반 郡縣人의 그것과 원칙적 으로 같은 것이라 해도 현실적인 경제적 처지는 언제나 동일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鄕 部曲 津 驛 兩界州鎭의 編戶人은 중 이 되는 것을 금한다 고 한 禁令을 좀더 자세하게 검토해 보는 것 이 좋을 듯 하다. 이 禁令은 部曲人이 兩界의 州鎭人과 나란히 취 급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단순히 신분적인 규제를 뜻하는 것만은

352 3. 賤 民 아니었음이 뚜렷하다. 중이 되는 것은 일종의 兔役을 의미하는 것 이기도 해서 이 내용은 公役收取의 측면에서 파악될 수도 있는 것 이다. 兩界의 州鎭人은 이 지역이 국방상 要地이므로 人力의 확보 가 필요했기 때문에 중이 되는 것을 금지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鄕 部曲은 津 驛과 함께 北界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北界 이 남의 지역에 훨씬 많았다. 때문에 兩界의 경우와도 다른 점에서 살 펴져야 한다. 律 驛民은 站役이란 특정한 부담을 지고 있었던 것으 로 보아 이에 대한 일종의 力役收取를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鄕 部曲人은 기술한 바 있듯이 일반 郡縣人과 마찬가지로 租 庸 調 의 公課를 짊어지고 있었다. 실제에 있어서 그들에게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시킨 것은 이 公課의 收取量이 감소되는 것을 막기 위함 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部曲人들이 근본적인 부담의 크기가 비록 동일했다고 하더라도 간혹 郡縣人보다 불리하게 취급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점을 살피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그러할 가능성을 전혀 외면해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신분적인 열세가 그들의 경제 적인 처지를 어느정도 악화시키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위의 禁令 자체가 部曲人에 대한 신분적인 제약이기도 하였음 은 말할 나위가 없다. 4) 高麗後期의 鄉 所 部曲人 賤人신분이기는 했지만 部曲人은 良人과 그렇게 큰 거리를 유 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분적 위치를 두고 말한다면 部曲 人과 郡縣人 사이에는 細線으로 표시될 수 있는 정도의 간격이 있 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高麗 후기가 되어서는 이 兩者 사이의 구별이 거의 사라져 버리는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19) 이 19) 高麗 後期에 郡縣人과 部曲人 사이에 있어서 신분적 지위의 차이가 없었다고

353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러한 변화의 실제는 행정단위로써의 鄕 所 部曲이 郡 縣으로 승격 하는 모습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후기에 접어 들면서 鄕 所 部曲이 승격되는 예가 전에 비하여 많 아진다. 그렇게 되는 데에는 여러가지 계기가 있었다. 이러한 계 기는 그 곳 출신 사람으로서 軍功 따위와 같은 상당히 큰 공로를 세웠을 때 마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공로 가 있는 때라도 郡 縣 등으로 행정단위가 바뀌는 예는 적지 않았 다. 한 두개의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忠惠王은 宦者 姜金剛이 元에 들어가 負絏의 노고가 있었으 므로 그의 고향인 退串部曲을 올려 奈城縣으로 삼았다 (高麗 史 57 地理 2 安東府) 梨旨廢縣은 본시 永州의 梨旨銀所였는데 오늘날 그 지방 사람인 那壽也先不花가 어려서 宦者가되어 禁中에서 급사의 노 고를 쌓아 그 공으로 鄕貫을 올려 다시 縣으로 하였다 (新增 東國輿地勝覽 27 河陽縣 古跡) 退串部曲이나 梨旨銀所가 縣이 된 것은 그 곳에 鄕貫을 갖고 있 는 사람들의 노고에 대한 보상의 결과였다. 그들의 노고가 국가의 운명에 관계되는 것과 같은 큰 업적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宮中 에서의 잡다한 勞力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더우기 姜金剛이나 那 壽也先不花는 모두 당시 사회에서 멸시되고 있는 宦者 신분이었 다. 비교적 낮은 신분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대단치도 않은 업적으로 그들의 출신지인 所 部曲이 縣으로 승격되는 모습을 살 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또 다른 예를 들어서도 뒷 받침될 수가 있다. 즉 歸化部曲이 密城縣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하는 것은 李佑成 敎授의 다음 論文 속에서 벌써 소상하게 지적되었다. 李佑成 高麗末期 羅州牧 居平部曲에 대하여 震檀學報 합집호(1966)

354 3. 賤 民 곳 출신 朴義의 贈賂에 의한 것이었고,20) 宦者인 李大順의 요청 에 따라 食村部曲은 豊安縣으로 바뀌었다.21) 그리고 德山部曲이 才山縣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곳이 敬和翁主의 고향이었다고 하는 단 하나의 이유에서 말미암은 것이다.22) 이처럼 수월하게 鄕 所 部曲이 郡 縣으로 승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행정단위의 높 낮이에 따라 그 곳 거주민의 신분에 차이가 없었다는 점을 밝혀주 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시대에 들어와 鄕 所 部曲 人과 郡縣人과의 사이에 신분적인 격차가 사라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鄕 所 部曲人의 신분상 지위가 상 승되었기 때문에 나타났던 것으로 생각된다. 武臣亂 및 蒙古의 침 입이 가져온 기존 신분질서에 대한 충격이 이러한 변화의 어느만 큼은 설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이 새로운 변화는 高麗 초기 이래로 兩者 사이에 꾸준히 남아 있던 신분상의 細線 이 지워지기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23) 20) 高麗史 124 列傳 朴義傳 및 同上 57 地理 2 密城郡 21) 高麗史 57 地理 2 寶城郡 22) 高麗史 57 地理 2 安東府 23) 본고에서는 部曲人의 신분을 賤人으로 일단 살펴 두었다. 郡縣人과는 여전히 신분적으로 細線으로 표시될 수 있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細線의 격차가 인정된다고 해서 賤人이어야 하겠는가 하는 것에는 문제가 남는다. 郡縣. 人이 良 賤을 가늠하는 유일한 기준은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部曲人의 良人 說을 주장하고 나온 견해가 근래에 제시된 바 있었다. 그것은 李佑成 교수 에 의해 최초로 제기되었고, 武田幸男 교수가 뒤를 따랐다. 하지만 部曲人 良 人說 을 뒷받침 할 만한 전면적이고도 본격적인 작업을 거치지 않은 미흡함이 있었다. 우선 종래의 部曲人 賤人說의 근거가 되어온 여러 史料에 대한 검토가 다각적 으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있어서의 良 賤에 대한 명확한 개념의 규정이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다시말해 良人 혹은 賤人이어야 하는 명백한 조건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다음에 良人 또는 賤人에 포함되는 여러 신분계층과 部曲人을 비교 검토하는 순서를 밟을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와같은 일련의 기초적 내지 근본적인 작업을 전개시킬 수 없었던 筆者로서는 旣存學說을 크게 벗어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他稿를 빌려 다시 한번 자세히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355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3) 津尺 驛民 高麗는 일찌기 驛站制의 실시를 통하여 거의 전국적인 도로망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정치 군사 경제상 要路에 설치된 驛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는 驛路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교량이 없는 河川에는 津이 있어서 渡船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津에는 津尺으로 흔히 불 리워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전체적인 도로망의 연결을 위해서는 중요한 몫을 떠맡고 있었던 셈이다. 驛에 거주하면서 站役이라고 하는 특정한 부담을 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驛民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들은 법제적 으로 驛戶로서 파악되었다. 이 驛戶에는 또한 申靑은 一名 松이니 多仁縣 伐里驛吏였다. (中略) 靑은 본래 驛戶인데 이름을 고치고 役을 피하여 속여 큰 벼슬을 받았다. (下略) (高麗史 124 列傳 37 要幸 2 申靑傳) 고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驛吏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들은 일반 驛民과 마찬가지로 站役의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驛民 과 驛吏가 맡는 站役의 형태가 각기 달랐다. 驛吏는 勞役의 직접 담당자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郡 縣의 吏 와는 물론 구별되었지만 그래도 長 이라고 공식적으로 일컬어 졌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일반 驛民 의 실질적인 長 으로서 이들에 대한 勞役의 分配 收取 監督 따 위의 일을 주관하였을 것으로 보아 좋을 듯 하다. 한 驛에 배치된 驛吏의 수는 驛의 크기에 따라 2 3명 정도였다.24) 이들은 公 館 에서 업무를 처리했다고 믿어진다. 이와같이 해서 驛吏는 일반 驛民과 일단 구별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驛吏는 郡縣의 24) 高麗史 82 兵 2 站驛 成宗 2년 判

356 3. 賤 民 吏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兩者사이 에는 공식칭호 부터가 달 랐다. 그리고 드디어 驛의 이름을 고쳐 興義로 하고 驛吏에게 冠 帶를 내려 州 縣 의 吏와 같게 하였다 (高麗史 94 列傳 姜邯贊傳) 고 한 것으로 보아 의복의 착용에 있어서 조차도 차별을 두었다. 결국 驛吏와 일반 郡縣의 吏가 구별되었다고 하는 것은 驛民과 郡縣人과의 신분적인 격차를 어느정도 반영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驛民의 신분상의 劣勢는 다음 기록을 보면 보다 분명하게 나타난 다. 郡 縣人과 津 驛 部曲人이 交嫁하여 낳은 자는 모두 津 驛 部曲 에 속하게 하고 津 驛 部曲과 雜尺人이 交嫁하여 낳은 자는 똑같이 나누고 남는 수는 母에 따른다. (高麗史 84 刑法 1 戶婚) 즉 郡縣人과는 구별해서 그들의 신분이 낮은 것으로 취급되었 다. 그렇기는 하지만 郡縣人과의 결혼까지도 제한을 가한 것은 아 니었다. 驛民의 신분과 관련하여 그들이 관직에 나아갈 수가 있었 는지 하는 점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다음 기록에 주목해 보자. 지금 內堅 申靑이란 자는 微賤한 데서 일어나 속여서 官爵을 받 고 권세를 천단하여 스스로 방자하고 朝廷의 법제와 本國의 법령 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高麗史 124 列傳 申靑傳) 驛吏 출신인 申靑은 실제로 관직을 가졌지만, 그것이 법제상으 로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驛吏가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고 한다면, 일반 驛民은 더욱 그러했을 것 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驛民의 신분적인 한계는 훨씬 더 명 백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驛民은 우선 郡縣으로 編籍되는 것을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같은 소망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사실 成宗代의 인물로서 祗弗驛民이었던 車達은 州 部에 編籍되는 것이

357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허락되었지만, 이것은 老母를 잘 奉養한 포상으로 이루어졌던 것 에 지나지 많는다.25) 驛民이 지고 있는 站役이란 말하자면 徭役의 한 형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國命을 전달하거나 국가의 중대사 특히 군사적 긴급사항을 보고하는 따위의 일이었다. 이 밖 에도 생산물의 운반이 중요한 업무가 되었다. 站役이외에도 그들 은 租稅를 납부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韓丁翊의 奏에 管內의 龍泉驛이 지난번 水害를 입어 公館과 民家가 모두 漂沒 하여 이제 바야흐로 옮겨서 館宇를 새로 짓는데 民力을 다 소모하 고 있아오니 청컨데 올해와 내년 두 해의 租税를 감면하여 주소 서 (高麗史 80 食貨 3 娠恤 災免 文宗 15년 1월) 라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驛民에게 개인소 유의 토지가 있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지만 적어도 驛에 주어 지는 公須田 紙田, 驛吏에게 지급되는 外役田은 바로 이 일반 驛民 들에 의해 경작되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경작하는 대신 驛民은 粗 税를 바쳐야 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가령 여러 道의 館 驛의 公須田租는 大路가 l00石, 中路 50石, 小路 가 30石으로하여 儲積하여 두고 廣給으로 지급하고 나머지 租 는 각각 州倉에 輸送토록 하라 (高麗史 78 食貨 1 田制 租税 文宗 2년 12월 判 고 있는 것에서 보이는 公須田의 租 는 驛民들이 냈을 것이다. 租 税 납부 이외에 貢物을 바쳤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이제 끝 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국가에 대한 驛民의 부담량이 郡縣 人의 그것과 비교하여 어떠하였을까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검토 는 대단히 중요한 작업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驛民의 사회 경 25) 高麗史 3 世家 成宗 9년 9월 丙子 敎

358 3. 賤 民 제적인 처지를 규명해 주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만 사료의 미비로 구체적인 것은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高麗 후기의 기록을 통해서도 그 윤곽정도는 알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근래에 驛戶가 凋弊하여 무릇 鋪馬 傳遞 知路 指路의 役을 州 郡에서 대신해서 그 고통을 받아 流亡함에 이르렀읍니다 (恭 讓王 元年 12월 趙浚 上疏) 西海道 岊嶺에서 7站 및 會源 耽羅에 이르기까지 沿路의 站 戶에 지시하여 지난번 東征 때에 各道의 人戶와 아울러 流移한 인물을 연한을 정하여 入居케 하였는데 (中略) 怨咨가 특히 심 한지라 有司로 하여금 마땅히 보낼 자를 가려서 站役에 충당하 고 그 各邑의 人戶는 모두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許하라 (高 麗史 82 兵 2 站驛 忠宣王 즉위년 11월 下敎) 各道의 人戶가 怨咨함이 특히 심했던 것 은 본래 站戶가 아니 었는데도 이에 충당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불만 불평은 驛戶로서의 부담이 고통 스러웠다는 현실을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郡縣人보다도 驛民이 좀 더 고통 스럽게 收取 를 받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요컨대 이러한 사실 로 미루어 보아서 驛民의 경제적인 생활은 대체로 郡縣人보다 낮은 수준의 것이었다고 말하여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후기에 들어오면서 驛民의 부담 특히 站役은 훨씬 무거워졌다. 행정질서가 문란해져 鋪馬의 公券이 濫發되고 運送量이 증가되었 던 것이다. 고통을 피하여도 망하는 이른바 逃亡驛戶 가 속출하 는 국면을 빚기에 이르렀다. 驛民은 이 시대가 되어도 그들의 신 분적인 지위를 상승시킬 기회를 잡지 못한 것 같다. 連犯者26) 賊 26) 高麗史 27 世家 元宗 12년 4월 乙卯

359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臣27) 등이 驛戶에 편적되는 것으로 보아서는 여전히 賤人의 위치 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헤아려 진다. 洪 承 基 4. 家族制度 (1) 家系繼承 韓國고대사 혹은 중세사의 연구는 자료의 빈곤 때문에 많은 어 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러한 사정은 高麗시대의 가 족제도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가족 연구는 대체로 세가지 방향으로 연구될 수 있는데 그 하나 는 외적 형태(크기, 구성, 유형 등)의 연구이며 또 하나는 내적 구 조(기능, 권력구조, 역할구조 등)의 연구이다. 마지막 한가지는 외 적형태나 내적 구조를 결정하고 규제하는 데 기여하는 가족의식 내지 가족규범의 연구이다. 그러나 高麗시대의 가족을 연구하는데 있어서는 이러한 측면으 로 선명하게 분석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본 논고에서는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각 史書의 기록을 모 아 高麗시대의 가족생활이 어떠했는지를 가능한 범위 안에서 그 윤곽을 찾아 보고자 한다. 高麗시대의 가족제도는 다른 제 사회제도와 마찬가지로 독자적 으로 특수한 점을 지니고 있는 것은 거의 없고 대체로 약 300여 년간 지속되어온 統一新羅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에 27) 高麗史 82 兵 2 站驛 恭愍王 5년 6월

360 4. 家族制度 불과하다. 후반기로 내려오면서부터는 유학 특히 朝鮮시대의 가족제도가 형성될 기틀을 마련하는 움직임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高麗시대의 가족제도는 전반적으로 朝鮮시대 의 가족제도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들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新羅가 3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唐과의 접촉이 매우 빈번하여 졌고 문화의 교류 역시 현저하여 졌다. 이로 인하여 相續制도 대 체로 唐律에 준하게 되었다. 高麗시대의 가계계승은 원칙적으로 長子繼承에 의하였으나 경 우에 따라서는 高句麗에 있어서와 같이 次子繼承이나 兄弟繼承의 예도 있었다. 高麗의 왕위계승에 관한 원칙을 기록한 太祖訓要 제3조에 의하 면 傳國은 嫡으로써 함이 상례라 할지라도 丹朱 不肖하므로 堯 는 舜에게 禪하였나니 실로 公心이라 할지니라. 만약 元子 不肖하 면 그 次子에게 與하고, 또 不肖하면 그 형제의 家에 추천될 만한 者 與하여 大統를 잇게 한다 1)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왕위계승의 원칙을 규정한 기록 외에 실제에 있어서도 高麗의 왕위가 직계의 子에 계승되는 외에 왕자 형제 2一3인에게 왕위를 계승케 한 사례를 보면 高麗시대에도 長男優位의 사상이 있 었다 하더라도 그다지 강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왕위계승을 보고 가계계승 일반을 추정 할 수는 없으나 高 麗史節要 등에도 이와 같은 사정을 기록한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즉 무릇 백성 들은 嫡子로서 後嗣를 세우되 적자가 없으면 적손 으로, 적손이 없으면 同母弟로서, 동모제가 없으면 庶孫으로서, 男 孫이 없으면 女孫으로서 후사를 세우도록 허락한다. (凡人民依律 1) 高麗史 卷2 世家 卷第2 太祖26年 夏 4月號

361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文立嗣 以嫡 嫡子有故立嫡宅 無嫡孫立同母弟 無同母弟立庶孫 無男孫者亦 許 女孫)2) 는 구절이 있고, 역시 文宗 22년(1068)의 判에 자 손이 없고 형제의 아들도 없으면 타인의 3세전 棄兒를 양자로 삼 아 자기의 성을 따르게 하고 가계를 잇게 하되 자손이 있거나 형 제의 아들이 있을 경우에는 異姓者를 양자로 삼는 것을 금한다 (凡人無後者 無兄弟之子則 收他人三歲前棄兒 養而爲子 卽從其姓 繼後付 籍 己有成法 其有子孫及兄弟之子 而收養異姓者禁) 3)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들을 종합해 보면 嫡子, 嫡弟, 弟, 庶子孫, 女孫, 姪, 收養子(三 歲前棄兒)의 순으로 가계를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高麗朝의 가계계승에 있어서 한가지 특이한 현상으로서 女孫繼嗣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남자의 우선은 오랜 역사시대 를 거쳐 내려온 습속이라고 하겠으나 마지막 男孫이 없으면 女孫 을 허하여 여자의 계통을 繼嗣로 인정하고 있는 점은 朝鮮時代 이후에는 찾아볼 수 없는 高麗朝 특유의 습속이라 할 수 있는 것 이다. 여손계사는 外孫奉祀를 의미하는 것인데 日本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婿養子制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즉 여자가 出嫁 하여 그의 아들로 하여금 外家를 계승토록 한 것이다. 增補文獻備 考에 의하면 文宗 원년(1047) 同平章事 皇甫頴이 왕의 허락을 얻 어 외손 金祿崇을 立後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4) 앞서 인용한 바와 마찬가지로 여손계사 외에 高麗가족의 특징적 인 현상은 이 異姓養子로서 高麗에 있어서는 널리 행해졌다. 그러 나 여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르게 마련이었는데 전혀 자식이 없고 2) 高麗史節要 卷4 靖宗 12年 2月條 3) 高麗史 卷84 刑法志 戶婚條 4) 增補文獻備考 卷84 禮考 立後條

362 4. 家族制度 형제의 자(姪)도 없을 경우에 異姓收養을 허용하였던 것이다. 단 이때 異姓이라 하여도 타인의 3세전 棄兒를 收養하여 아들을 삼 고 자기의 姓을 따르도록 하였던 것이다. (2) 家產相續 가계계승에 수반되어야 할 중요한 사실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 은 재산을 유지, 확대시켜야 하는 것이므로 가계 또는 祭祀상의 상속원리는 재산상에 있어서도 적용된다. 가계의 존속을 중요시하 는 사회에서는 가산이야말로 조상제사와 자손의 번영을 위한 가 장 기본적이며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高麗시대의 재산상속도 원칙적으로는 嫡長을 先位로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後嗣者가 있 을 경우에 그가 동시에 가산상속의 선위자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 이지만 만약 후사자가 없고 가계가 단절될 경우에는 이들의 재산 (특히 노비)을 둘러싼 권력가들의 쟁탈을 막기 위하여 전부 官에 서 몰수한 적도 있다5) 그후 麗末 恭讓王 3년에는 官沒을 피하고 부부 중에서 어느 편 이든가 同宗者에게 전하도록 되었고 이어 4년에 제정된 奴婢決訟 法 중에는 동종자 및 3세전 기아로서 收養子는 자기의 子와 같이 전승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또 후사자가 없을 경우에는 官에 고하 여 使孫(姪, 姪孫, 叔父, 從兄弟)에게 똑같이 분배하도록 되었 다.6) 앞서도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高麗에는 여손계사라는 특이한 현상이 있는데 이것은 新羅시대부터 내려오는 관습이라 생각되나 5) 無後人奴婢屬官 高麗史 卷85 志 第39 刑法2 奴婢條 仁宗 10년의 判 6) 金斗憲 韓國家族制度硏究 再版 (1969) p

363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재산상속에도 적용되는 원칙이었다. 恭讓王 3년條에 후계자가 없으면 부부중 동종자를 취하여 상속하도록(雖無後者 養其夫婦中 同宗者相傳)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후계자가 없는 경우에 유산이 자손 이외의 타인에게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同宗의 者를 入養하여 그에게 유산을 전하는 것 인데 이 경우에 단지 남계혈족의 동종자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 니라 妻系 또는 처계혈족의 자손도 養嗣子로 될 수 있다는 것이 다. 이리하여 여말에 와서는 후계자가 없고 本族도 없는 경우에는 유산이 관에 의하여 몰수되는 일은 없게 되었다. 자녀 간의 가산의 分給比率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異論이 있 지만 원칙적으로 자녀 간에 均分制를 취한듯 하다. 恭讓王 4년 (1392) 都官의 상서에 지금부터 財主의 未分 노비를 합집하거 나 분집하되, 균등하게 하지 아니한 자는 고발하게 하라(願自今 財主未分奴婢合執者 或分執而不均者 許人陳吿)7)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는 노비를 합집함에 의하여 쟁송이 자주 일어났고 합집 독점자 또는 균등하게 분집하지 아니한 자는 관에 고하여 이를 시 정케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재산상속에 있어서의 자 녀균분제는 朝鮮朝에 들어와서도 지속되어 經國大典에 반영되었 을 뿐 아니라 朝鮮 중엽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7세기 중엽까 지 상속의 일반적 형태로 굳어졌던 것 같다.8) 그런데 高麗시대의 상속제도에 대해서 몇몇 학자들이 노비는 자녀간에 균분되었지만 토지는 적장자가 단독으로 상속했다는 설 을 주장하고 있으나9) 필자는 이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7) 高麗史 卷85 志 卷第 39 刑法2 訴訟條 8) 崔在錫 朝鮮時代의 相績制에 關한 硏究 歷史學報 53 54合輯(1972) pp ) 旗田 巍 高麗時代における土地の嫡長子相續と奴婢の子女均分相續 東洋文化 22(1957)

364 4. 家族制度 첫째, 이 당시의 가산의 대표물이 토지가 아니고 노비라 한다면 노비가 자녀균분이고 토지가 적장자단독상속이라 하더라도 재산 전체의 지배적인 상속형태는 균분상속이라 할 수 있다. 둘째, 5品 이상의 고급관리에 주어지는 토지인 功蔭田도 적장 자 우선의 관념(1127년 이후에는 좀 달라졌지만)은 없고 자손, 친척(女婿 포함)중 1명이 선정되며 蔭職의 수여도 적장자가 우선 하지 않으며 자손, 친척 중 1명이 선정되니 이 양자 모두 적장자 단독상속의 형태는 아니다. 그런데 高麗史의 凡父祖田 無文契者 嫡長 爲先決給 10)이란 구절이 종래 高麗시대에 적장자단독상속 이 행해졌다고 주장하는 유력한 근거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父 祖田에는 공음전 시(柴)도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되나 여기서 爲先決給 의 표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에 따라서 커다란 차이가 나타날 것이다. 이 嫡長爲先決給 이란 말은 적장자에게 전부 상속시켰다던가 또는 더 많이 상속시켰다는 것이 아니라 나 중에 자녀에게 분급한다는 전제 아래 적장자에게 일단 관리권을 위임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無文契者 즉 父祖가 상속에 관한 문서를 남겨두지 않고 사망한 경 우에 임시로 연령과 경험이 많은 長子에게 관리권을 위임하는 것 으로 해석하는 것이 전후 모순없는 자연스러운 해석일 것이다. 세째, 병역의 부담자인 農軍이나 하급관리인 향리의 役에 대한 대가로 지급되는 토지인 田丁에 있어서는 외면적으로는 적장자단 독상속인 것처럼 되어 있으나 이것은 高麗왕조가 병역이나 力役 을 담당하는 농민을 파악하는 유효한 방법으로 창안해 낸 하나의 정책에 불과하며 농민의 실제 가족생활에 있어서 적장자단독상속 10) 高麗史 卷 85 刑法2 訴訟條

365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을 반영한 것은 아니다.11) 농민의 현실 상속제도를 반영하였다면 노비나 공음전이나 음직 등도 적장자단독상속을 하였어야 할 것 이다. 朝鮮초기의 상속이 자녀균분상속이고 또 高麗시대에 있어서 도 노비, 공음전, 음직.등이 적장자단독상속이 아니라는 것을 분 명히 하고서도 高麗시대의 토지상속을 적장자단독상속이라고 고 집한다면 高麗와 朝鮮시대의 역사적 단절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없을 것이다. 토지사유화의 진전에 따라 적장자단독상속이 자녀균 분상속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설명만으로는 高麗와 朝鮮시대의 相 續制의 크나큰 차이를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반대로 자녀균분상속제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高 麗초의 적장자단독상속에서 高麗후기의 자녀균분상속에의 전환의 근거를 토지국유에서 사유화에의 진전에 두고 있는 데 그럴수록 토지국유시대의 적장자단독상속 은 상속이 아니라 적장자의 토지관리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여 高麗시대의 田丁相續은 국가로부터 인위적으로 규정되었던 것이지만 이 제도가 이완된 이후에는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 자녀 균분상속이 실시되고 朝鮮초기에 들어와서도 자 녀균분상속제도가 뚜렷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국가의 통제관리가 가해지지 않았던 노비 상속은 시종 자녀균분제를 취했던 것만 보 아도 이 사정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그 당시 토지의 소유형태 가 가족공동소유형태를 취했다하더라도 여기에는 장차 균분으로 상속될 자녀의 몫이 잠재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1) 旗田 巍 上揭論文

366 4. 家族制度 (3) 婚 姻 高麗시대의 혼인은 新羅의 階級內婚制를 답습하였으며 同姓婚 내지 近親婚이 성행하였다. 紀年兒覽에 나타난 高麗왕실의 世系에서 왕비 중 기록이 명백 한 51명의 출신성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王女 13명 ꀋ ꀉ22명 宗室 9명 ꀙ 元의 王室 6명 蒙古의 女 2명 近臣의 女 21명 위 표에서 우리는 왕녀와 종실을 합한 22명의 同姓者를 왕비로 맞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高麗의 왕실에 동성혼이 그만큼 보 편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바 그 중에서도 구체적인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12) ① 光宗과 光宗의 異腹兄弟 旭은 父 太祖의 女를 妃로 삼았다. ② 德宗과 文宗은 父 顯宗의 女를 비로 삼았다. ③ 景宗 成宗 順宗 睿宗은 從姉妹를 비로 삼았다. 顯宗은 從兄의 女를 비로 삼았다. ⑤ 高宗은 父의 從弟의 女를 비로 삼았다. ⑥ 景宗의 제3왕비는 숙부 旭의 女이지만 景宗의 사후에는 景 宗의 숙부이며 동시에 자기의 숙부인 旭과 통하여 그의 비 가 되었다. 이와같이 高麗왕실에서는 동성혼 뿐만 아니라 근친혼까지도 일 12) 都守泰 朝鮮人の婚姻と族姓 社會學雜誌 第26號 (1926) p.57 참조

367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반적으로 성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실의 이러한 경향과 병행하여 近臣 양반계급에도 동성혼과 근친혼이 널리 행해져서 초 기 이래로 再從姉妹, 姪女, 異姓從姉妹의 혼인까지 행하였던 것이 나 점차 儒敎禮俗의 영향으로 이 동성혼에 대한 논란이 생기게 되 어 이를 금하게 되었다. 高麗시대의 동성혼 및 근친혼에 대한 法令이나 禮論의 기록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13) 文宗 12년 (1058) 嫁大功親所產禁仕路 文宗 31년 (1077) 同姓婚是非論 文宗 35년 (1081) 違律婚論議 宣宗 2년 (1085) 異母兄弟婚所產仕路禁 肅宗 원년 (1096) 嫁小功親所產禁仕路 肅宗 원년 (1096) 禁功親婚嫁 睿宗 12년 (1117) 大小功親犯嫁者禁錮 仁宗 12년 (1134) 大小功親所產曾限士品今後仕路禁 毅宗 원년(1147) 堂姑從姉妹堂姪兄弟女相婚禁 忠宣王 원년 (1309) 王族及文武兩班禁同姓婚 忠宣王 원년 (1309) 外家四寸禁相婚 恭愍王 17년 (1368) 娶異姓從姉妹禁 이것을 보면 11대 왕인 文宗 12년(1058)부터 대공친(9개월服, 종 형제간)간의 혼인에 대해서 논의가 시작되어 그 자식에 대해서 관 리에의 길을 금한다는 결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어느 정도 시행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23년 후에 다시 違律婚論議가 있었던 것을 보면 철저하게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근친혼의 규제에 13) 李熙永 高麗朝歷代妃嬪の姓の繼承に關する一試論 民族學硏究 31 1 (1966) p

368 4. 家族制度 대한 法制가 있지 않았나 추측된다. 즉 文宗 35년 (1081)에 吏部 尙書 崔奭 등의 상주에 의하여 進士 魯準을 그의 父가 法禁을 무 릅쓰고 대공친을 취하여 낳은 아들이었다고 하여 종신금고에 처하 자는 논의가 있었다.14) 이러한 상황을 감안한다면 文宗代, 적어도 文宗 36년 이전에 벌써 대공친과의 근친혼을 금하는 법률이 제정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어서 15대 肅宗 원년(1096) 6월에는 小功 이상의 근친과 혼인하지 못하게 하여 이의 소생에게 는 관리등용의 금지령이 내리게 되었지만15) 이것도 민간에게는 충분히 실행되지 못하였고 그보다 50년 후인 18대 毅宗 원년 (1147)에 가서 재차 소공 이상의 근친, 즉 堂姑從姉妹, 堂叔兄弟 女와의 혼인금지령을 내렸던 것이다. 단 이러한 금지령이 내리기 전에 이미 출생한 자손에 대해서는 금고의 제재를 가하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다.16) 26대 忠宣王(1309년) 때에는 元의 世祖가 왕가의 동성혼은 聖 旨에 위반되므로 논죄한다는 경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忠宣 王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왕족 및 양반의 同姓禁婚을 국법으로 정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왕실과 양반간에 동성혼이 성행 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元의 영향이 컸다는 것을 충분히 말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忠宣王 때의 이 법령은 毅宗 때까지의 규정보다 그 범위가 훨씬 넓어졌는데 毅宗 때까지 여러차례 논의된 것은 대공 혹은 소공 이 상의 喪에 복을 입어야 하는 관계에 있는 자와의 혼인을 금하였고, 이를 어기고 혼인해서 낳은 자녀에 대해서는 금고령에 처하는 규 14) 高麗史節要 卷5 文宗 35年 6月條 15) 高醒史 卷84 刑法 奸非條 16) 東史綱目 卷9 上 참조

369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정이 있었지만 忠宣朝 때에는 동성간의 혼인을 일반적으로 금하 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성혼금지령은 그 후 高麗사회에서 철저하게 시행되지 못한 것 같다. 우선 왕가에서조차도 동성혼이 근절되지 못하였으니 恭愍王 15년(1336)에 동성인 王씨를 비로 취한 것만 보더라도 이를 알 수 있다. 종래 文宗 12년(1058)부터 끊임없이 논의되고 때로는 법령으 로 반포된 大小功親相婚禁止 同姓婚禁止 등을 보고 일반적으로 高 麗시대에 근친혼이나 동성혼이 금지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 자의 견해로는 이렇게 많이 논의되고 법령으로 거듭 반포되었다 는 사실은 高麗시대에 그만큼 근친혼이나 동성혼이 널리 시행되 었다는 반증이 아닌가 추측된다. 요컨데 高麗시대는 新羅 이래로 왕족 및 귀족계급 사이에 內의 유복친간의 근친혼이 성행하였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이에 대한 금령이 내렸으나 이들 계급에 있어서의 근친혼은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17) 高麗시대의 혼인에 있어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豫婿制度이다. 高麗史 권 27 元宗世家 12년 2월條에 연소자를 데려와서 그 집 에서 성년이 될때까지 기다리니 이를 豫婿라 한다(國俗納年幼者 養 子家待年謂之豫婿) 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어린 남자를 신부될 사람의 집에서 맞이하여 그 남자가 성장한 후에 자기 딸과 결혼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 제도는 豫婦(민며느리)제도와 반대의 제도이기는 하지만 이 것을 가지고 高麗시대의 전체에 일반화시킬 수는 없고 일부의 사 17) 朴秉濠 우리 나라 率婿婚俗에 由來하는 親族과 禁婚範圍 法學 4卷 1 2號 (1962)

370 4. 家族制度 람들 사이에 행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예부혼이 여자의 집이 빈곤한데서 생겨났는데 대해서 예서혼은 남자의 집이 빈곤 하여 생겨난 것으로 생각된다. 또 이 예서혼의 일부는 25대 忠烈 王이 巡馬에 명하여 양가집의 처녀를 골라 원나라 사신에 진상하 려는 정책에서 벗어나려는 의도에서 생겨났던 것이다. 여하튼 高 麗시대의 예서혼은 그 당시 일반화한 것이 아니라 극히 일부의 현 상이었던 것이다. 한편 高麗시대의 혼인은 원칙적으로는 一夫一妻制였지만 왕족 과 귀족은 물론 일반 부유층사이에도 多妻 내지 蓄妾의 습속이 성 행 하였다. 왕후나 왕비의 호칭에 있어서 嫡을 王后라 하고 妾을 夫人이라 고 칭하였으며, 그 외에는 貴妃, 淑妃, 德妃, 賢妃도 또한 부인이 라 하고,18) 그 외에는 尙宮, 尚寢, 尚食, 尙針 등이 있어서 이를 일률적으로 內職이라고 칭하였다고 하니19) 왕실의 다처제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恭讓王 3년에는 왕비, 귀족, 품관의 내실의 작위칭호를 새로 제정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文武品官의 正妻, 次妻가 공인되어 있고 또 高麗圖經의 기록중에 부유한 집 안에서는 3 4인에 이르는 처를 거느린다(富家姿妻至三四人 ) 20)고 한 것은 다처 혹은 축첩의 습속을 더욱 분명히 말해 주 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朝鮮時代에 있어서와 같이 첩에 대한 차등은 심하지 않 았고 첩에게도 正妻와 마찬가지로 擅去 또는 改嫁를 법으로 금하 였다고 하는데21) 이로 미루어 보면 상당히 영속적인 결합관계에 18) 高麗史 卷88 列傳 卷第1 后妃條 19) 高麗史 卷77 志 卷第31 百官2 內職條 20) 高麗圖經 卷22 雜俗條 21) 高麗史 卷84 志 卷第38 刑法1 戶婚條

371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있었던 것 같다. 이와같이 高麗에 있어서의 축첩의 습속은 귀족과 부유층 등에 서 상당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이러한 多妻, 蓄妾의 습속은 麗末에 이르러서는 국가에 서 장려하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 즉 忠烈王 때 大府卿 朴楡 는 상소를 통해서 원나라에 대한 貢女策으로 인한 여자의 감소를 방지하기 위한 사회정책상으로서 大小臣僚들로 하여금 多妻를 취 하게 하고 庶人에게도 一妻一妾을 허락하여 그 庶妻의 소생자라 하더라도 관리등용의 길을 개방하자고 주장하였다(我國本男少女 多令尊卑皆止二妻 無子者亦子敢蓄妾 興國之來者 則娶無定限 恐人 物皆將北流請大小臣僚 娶庶妻 隨品降殺 以至庶人得娶一妻一妾 其 庶妻所生者 亦得比嫡子從仕 如是則怨曠以消 所以增矣)22) 결국 이 건의는 부녀자의 반대도 심하고 하여 실행되지는 못하였지만 그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高麗시대에는 多妻制가 蓄妾制를 포함하는 一去一妻制와 병행하고 그 庶妻도 嫡妻와 다름없는 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려는 일면이 있었다고 하겠다.23) (4) 離婚과 男女의 지위 高麗시대에는 禮敎的 觀念에 의하여 이혼에 다소 제한이 있었 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법적제한이 그다지 엄중하지는 않았다. 실 제로 高麗초기에는 이혼에 대한 일정한 법제가 확립되지 않았고, 睿宗때(1108)에 와서 비로소 淫女, 棄妻, 改嫁 등의 문제를 다루 22) 高麗史 卷108 列傳 卷 第9 朴褕傳 23) 金斗憲 韓國家族制度硏究 再版 (1969) p

372 4. 家族制度 고 있는 것이다.24) 高麗 刑律 중에서 戶婚律 4개조에 나와있는 이 혼에 관한 세가 지 항목을 열거한다면 우리는 高麗의 이혼에 대한 습속을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25) 즉 첫째로 음행이 있는 유부녀는 음녀로 간주하여 강제적으로 이 혼을 당할 뿐만 아니라 針工으로 하천시키고(有夫女淫姿女案針工 定屬), 둘째로 棄妻 시에는 반드시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것으로 만약 승낙없이 기처했을 때는 관리의 경우에는 정직처분까 지 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無父母和論 無故棄妻者 停職付處). 그러나 이것은 그 제재의 목적이 棄妻를 하였다는 사실에 있는 것 이 아니라 부모의 승낙을 얻지 않았다는 점, 즉 불효의 제재에 중점 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세째로 확실한 이유없이 처첩이 함부로 擅去하거나 改嫁하는 것을 금하고 있으며 첩이 아니고 正妻 일 경우에는 더욱 엄중하게 다루고 있다(妻擅去從二年 改嫁流二千 里 妾擅去從一年半 改嫁二年半 娶者同罪 不知有夫不座). 이와같이 처의 간통은 당연히 이혼이 강제되었으나 夫의 棄妻에 대해서는 그것을 부모에 대한 효도의 문제와 관련시켜서 처벌여부 가 결정되는 것을 보면 기처에 대한 제한은 별로 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왕실에서도 쉽게 폐비하였으며 귀족 사이 에도 夫의 일방적 이혼이 왕왕 행해졌다는 예와 함께 서민에서는 남녀가 혼인함에 가볍게 결합하고 쉽게 갈라진다(男女婚娶 輕合 易離) 거나 부유한 집에서는 처를 3一4인이나 두고 조금이라도 서로 마음이 맞지 않으면 법을 어긴다(富家娶妻三四人 小不相合 輒離法) 라고 한 것을 보면 高麗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이혼에 대 24) 金斗憲 韓國家族制度硏究 再版 (1969) p ) 高麗史 (延大版) 第2卷 p

373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한 법적 제한이 그다지 엄중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한편 再婚에 대한 측면을 살펴보면 禮敎의 보급과 더불어 지배 적인 계급에서는 개가를 失行으로 간주하게 되고 그의 子까지 관 리 등용에 제한을 두고 있다. 즉 毅宗 6년(1152) 2월 判에 개가자 (실행자)가 개가 전에 출생한 子에 대해서는 6품에 한하고 개가 후에 출생한 자에 대해서는 관리에 등용하지 않는다(姿女失行前所 產限六品職 失行後所產禁錮).26)고 규정하고 있다. 또 6품 이상의 처첩으로서 스스로 수절을 자원하는 자에게 表旌賜赏27)된 사실은 그 당시 수절을 장려하려는 정책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며 동시 에 再嫁가 상당히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실이라고 볼수도 있다. 6품 이상의 지배층의 처첩이 이러한데 일반서민들에 게 있어서는 아무런 제약없이 개가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면 高麗시대의 남녀는 어떠한 관계에 있었으며 그들의 지 위는 어떠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한마디로 高麗시대에는 朝鮮시 대와 같이 남녀의 구별이 그렇게 심하지 않고 어느 정도 자유로운 교제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남녀가 함께 냇물에서 목욕을 해 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남녀의 내외사상이 심 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節婦만 表旌賜赏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 라 義夫에 대해서도 국가가 表旌賜賞의 대상으로 삼았다. 高麗史 에 의하면 成宗 文宗 肅宗 睿宗 仁宗 熙宗 高宗 때에 절부와 꼭같이 의부도 국가로부터 우대되어 旌門賜物이 下賜되었던 것이다. 朝鮮 시대에 들어와서는 여자의 지위가 매우 예속적이어서 여자에게만 정절이 요구되었고 열녀만이 포상되었지만 高麗에 있어서는 朝鮮 시대처럼 남편에 대한 여자의 의무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던 것 같 26) 高麗史 志 卷第29 選擧3 銓注限職條 27) 高麗史 卷第38 刑法1 戶婚條

374 4. 家族制度 다. 이것은 남편에 대하여 여자가 남편에게 대하듯이 남편도 부 인에게 대하라 는 그 당시의 남녀의 사회적 지위의 일면을 나타 내는 현상일 것이다. 出自律에 있어서도 父系制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男 系子孫없는 자의 功蔭田은 女婿, 親姪, 養子의 순서로 세습시킨 것이라든가, 죄를 범했을 경우 여서가 친자와 같이 연좌된 사실이 라든가, 또는 서자가 있으면서도 여서에게 가계를 계승시키거나, 영예를 받을 경우에도 여서가 實子와 같이 받은 예가 적지 않다는 여러 사실 들은 高麗시대의 가족은 朝鮮시대와는 달리 父系制이 면서도 雙系的인 면도 상당히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한편 국가는 家長에 대하여 공법적인 권리의무를 규정하는 동 시에 가장이 가족을, 尊長이 卑幼를 통솔하기 위하여 패륜행위에 대한 재판의 제법규를 제정한 것을 보면28) 高麗시대에도 가장의 권위는 상당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世代(行列)의 권위의식은 朝鮮시대와는 판이하였다. 叔 姪 사이의 혼인은 高麗末까지 계속되었으며29) 그 한 예로서 高麗 4대왕 光宗은 姪의 관계에 있는 慶和宮夫人과 결혼하였던 것이다. 行列法이 완전히 실행된 것은 朝鮮시대에 들어와서이고 高麗 때 는 명목만 행하거나 또는 행하지 않은 자도 있었던 것이다.30) 崔 在 錫 28) 金斗憲 韓國家族制度硏究 再版 (1969) pp ) 鮕具房之進 雜攷 (1937) p.88 30) 鮕具房之進 上揭書 pp

375 執筆者 槪要 邊太燮 Ⅰ. 貴族的統治機構의 整備 1. 貴族的政治機構의 成立 李基白 2. 地方勢力과 中央統制 河炫綱 3. 軍事組織 李基白 Ⅱ. 貴族社會의 經濟的基盤 1. 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 姜晋哲 2. 手工業 姜萬吉 3. 商業과 對外貿易 姜萬吉 Ⅲ. 身分體制의 再編成 1. 中間階層 金光洙 2. 農民과 村落 姜晋哲 3. 賤民 洪承基 4. 家族制度 崔在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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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Year History of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of Korea 제4절 조선시대의 감사제도 1. 조선시대의 관제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무신란에 의하여 붕괴되고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이 지배층으 로 되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새로이 신흥사대부가 대두하여 마침내 조선 건국에 성공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조선양반사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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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실직 ( 實職 ) 을지낸이에게수여하였다. 壁上三韓三重大匡 은고려시대정1품문관의품계이다. 壁上 은 벽에 라는뜻으로, 벽에화상등을그려놓은경우를말한다. 上 은명사 ( 名詞 ) 뒤에부쳐서표면 ( 表面 ) ㆍ처소 ( 處所 ) 등을나타내는말이다. 三韓 은상고시대에한반도 ( 韓半 청주이씨 ( 淸州李氏 ) 선조 ( 先祖 ) 관직 ( 官職 ) 해설 청주이씨 ( 淸州李氏 ) 는시조 ( 始祖 ) 태사공 ( 太師公 ) 휘 ( 諱 ) 능희 ( 能希 ) 께서고려 ( 高麗 ) 태조 ( 太祖 ) 를도와개국 ( 開國 ) 에참여하여성 ( 姓 ) 을하사받은이후현상양좌 ( 賢相良佐 ) 가배출되어특히조선 ( 朝鮮 ) 초기에매우빛나는문벌 ( 門閥 ) 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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