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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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목회칼럼(2008. 6. 1.) 설교자와 청중 저는 목회자로서 설교를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설교를 잘 한 다고 할 때 잘하는 기준에 대하여서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에 설교를 잘 하는 것이 말을 잘 하거나 웅변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교훈적으 로 담아내는 것이라면 그 일을 집중적으로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 를 잘 한다고 할 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의 의미를 바 르게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설교를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 (The ministry of the Word of God)라고 하고, 설교자를 하 나님의 말씀을 봉사하는 자 또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날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지의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 도 어떤 사람들은 제가 하는 설교를 듣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 다. 또 어떤 사람은 설교가 너무 길어서 지루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 론 제가 생각할 때는 설교자인 제가 쉽게 이해하기 쉽도록 재미있게 하지 못하 는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청중들이 말씀을 원래 이해하는 방식대로 문법적이고, 역사적이며, 문맥과 관련하여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 게 느껴지고 마치 강의를 듣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어떤 사 람은 자칭 신자라고 생각했지만 우리 교회에 앉아서 설교를 들으면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지금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1988년에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부터 우리 교단의 신학교인 고신 대학교와 신학대학원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문제를 가르쳐 왔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알지 못하고 있고, 지극히 주관적이며 인위적으로 이해하거나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하고 있고 실제적으로 성경을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 신학대학원에는 성경을 수십 번 읽은 사람들이 많 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성도도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는데 무려 칠 팔십 번에서 백 번 이상 읽은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만 실제로 그 의미를 잘 알 지 못하고 구원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설교 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을 만나고 능력과 치료와 위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교회가 외형적으로 아무리 크고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 되지 않는다면 그곳은 교회라고 할 수 없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에 출입 은 하고 있으나 영적으로 절대로 자라지 않습니다. 물론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을

경험하고 있는지의 문제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됨의 결정적 인 표지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입 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실 때 구약시대부터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히1:1)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은 결국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기록된 문자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그 문자는 설명문 과 논리적 진술, 역사와 시와 비유와 상징 등의 다양한 건강 사용하여 기록되었 습니다. 그리고 그 문자는 기록된 역사적 상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법적이며 역사적인 해석은 성경을 이해하는 기본 가운데 기본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데 이해를 못 하겠다면 그가 신자가 아니든지, 스스로 신자 됨을 포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설교를 듣지 아니하면 영적으로 절대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 다. 물론 설교자도 이러한 방식을 포기하고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재미있게 한다 는 미명 아래에 재미있는 예화나 도덕적인 훈화나 교훈적으로만 설교하거나 사 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의 말씀을 왜곡시킨 무서운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설교자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일에 있어서 오늘날 설교하는 설 교자에게도 문제가 있고, 설교를 듣는 청중들도 문제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를 지적하면 그때부터 얼굴색이 변하여 아예 설교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원수를 대하듯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마다 설교자는 갈등하면서 그 사람을 의식하고 성경과 관계 없는 이야기를 하거나 듣기 쉽고 편한 말만 하게 되면 결국 성도를 망하게 합니 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올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가르쳐야 하고, 청중 은 목회자의 설교를 인간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 다(살전2:13). 만약에 청중이 예배에 참석하여 설교가 귀에 들리지 않거나 들으려 고 하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를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설교자이며 목회자인 저는 끊임없이 우리 성도 들을 생각하며 기도하면서 마음의 문을 열고 듣도록 설교를 준비합니다. 진지한 자세로 설교를 들으려고 한다면 그 말씀 자체가 얼마나 신비하고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고,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칼럼(2008. 6. 1.)

목회칼럼(2008. 6. 15.) 목회 리더십의 어려움 리더십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학자들마다, 또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 습니다만 요즘 함께 만들어가는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백과사전에 보면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리더십은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 성과를 창출하는 능력을 말한다. 지도력은 조직의 문제점을 개 선하고, 조직이 환경 변화에 적응하도록 하며, 구성원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등의 기능을 가진다. (wikipedia.org) 사실 리더십의 핵심은 조직이나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목적을 달성해 가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 정의는 영어로 Leadership이라는 단어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리더(leader)와 배(ship)를 결합한 말로서 공동체인 배 를 이끌고 목적지에 도달해 가는 능력입니다. 항해를 할 때는 폭풍도 지나야 하 고 암초도 지나야 하고 바람이 없는 잔잔한 바다도 지나야 합니다. 하지만 리더십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성 속에는 온갖 죄악된 요소들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 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7:21-23)라고 하였습니다. 이 러한 더러운 것들이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다루어야 하는 리더십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리더십에 관한 책을 보더라도 리더십의 중요한 요소를 인격 과 신뢰성, 능력, 균형감감, 친화력 등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한국적인 상황에 서는 이것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조건, 곧 돈과 사회적 지위, 그리고 교 회의 경우 교회교인의 수가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외적인 조건 은 그의 인격과 능력과 친화력과 관계없이 기능하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좋은 리더(leader)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 들은 좋은 리더의 지도를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주로 교회에 서 리더로 섬겼습니다. 담임목사로서 리더가 되는 것 말고 중고등부를 하던 시 절부터 학생회장과 대학청년부 회장으로 봉사하였습니다. 일반사회에는 초등학 교 5학년 때의 일로 기억이 되는데 반장선거에 한번 떨어지고 난 뒤에 리더가 되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와서는 학과의 대표도 해 보았고, 극예 술연구회라는 동아리를 이끌어가면서 연기와 연출도 해보고, 기획도 하면서 부 산의 시민회관 대강당을 대관하여 공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대학원에서는 편 집장으로 봉사하며 대학원의 학회지와 신문을 발간하는 일을 책임을 맡아 수행

해 본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경험들은 저로 하여금 한 공동체와 그룹을 이끌어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여러 가지 로 부족했지만 리더로서 훈련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목회 리더십은 이러한 성격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대전극동방송국에서 매주일 5분 칼럼 을 만 8년을 대개 수요일 아침에 방송하 였습니다. 그런데 간혹 몇 달에 한 번씩 수요일에 후원회 비슷한 모임이 있으면 그 날에는 넓은 주차장에 검은색 중대형 승용차가 꽉 들어차 있습니다. 이분들 은 대개 돈이 많거나 사회적 지명도 있는 사람이나 큰 교회의 목사들로 구성되 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방송녹음을 하고 나오는 날에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제가 오랫동안 한 방송칼럼을 듣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만나보기를 원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우리 교회의 교인수 가 몇 명인지 물어보고 난 뒤부터는 말투부터 달라져 거만하게 말하였습니다. 이건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요. 그런데 이러한 질의 사람하고는 아예 상대를 하지 않거나 책망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직접 제가 항해하는 배에 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제가 무 시하거나 책망할 수 있지만 우리 교회의 교인들의 경우는 무시할 수가 없습니 다. 사실 대부분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담임목사인 저를 믿고 존경하고 따릅니 다. 하지만 어느 교회든지 겉으로는 믿고 존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렇지 않은 사람도 있고, 아예 무례하고 막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다 알지요. 심지어 어떤 경우는 자신이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설 교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퉁명스럽게 앉아서 설교를 잘 듣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하기도 합니다. 특히 작은 교회에서는 원칙을 깨면 그가 의도했던 하지 않았던 간에 목회자의 리더십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여 생명을 얻게 해야 하고, 이 들을 가르치고 세워서 제자로 삼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궁극적으로 사람과 세 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어떤 사람이 인간 이하의 말과 행동을 해도 다른 사람들의 영혼과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참고 기다립니다만 얼마나 마음이 쓰린지 모릅니다. 그래 서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호소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목회 리더십의 어려움 입니다. 결국 교회의 리더십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 님이 높여주셔야 합니다. 그럴 때 백성이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같 이 (수3:7; 4:14) 두려워하고 복종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칼럼(2008. 6. 15.)

목회칼럼(2008. 08. 31.) 교리공부의 중요성 우리 개혁주의 교회는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라는 생활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교회 중심의 원리는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의 원리를 구현하는 방법적인 면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이 뿐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뜻 과 이상을 이 땅에 구현해 가는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이요 에이전트(Agent)로 서 기능해야 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 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가 일반 세상의 공동체와는 다른 윤 리적인 독특성이 있습니다. 그 독특성은 우리 교회가 믿는 교리에 근거해 있습 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교리가 필요없고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합 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기만 하면 거기에 나타난 핵심적인 내용을 알 수 있을까 요? 물론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 신비스러운 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교리적인 기초가 없이 성경을 읽으면 인간의 주관이나 사색에 지배되어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믿는 자들을 실족하게 만드는 대부분의 경향들은 개인의 주관이나 경 험에 근거한 성경해석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는 신천지(무료성경신학원), 박옥수의 구원파, 안상홍 증인 회 등이 있습니다. 안상홍 증인회는 대전 KBS방송국 앞에 하나님의 교회 세계 복음선교협회 라는 이름으로 큰 교회당을 지어서 포교활동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의외로 이러한 이단들이 교회 안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 고, 우리 믿음체계를 붕괴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이들 이단들 모두 하 나같이 공통점이 있다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 천지는 성경이 상징과 비유로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인위적이며 자의적으로 해석합니다. 교주 안상홍은 죽었으나 그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그의 재림을 기다 리고 있습니다. 안식교의 영향을 받아 구약의 안식일을 지키고 유월절을 지키며, 십자가를 상징물로 사용하는 것은 우상이라고 하고 십자가를 사용하지 않습니 다. 사실 이러한 이단의 세력이 교회 안에 기생하고 양산시킨 데는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고 영적해석이란 미명 하에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가장 큰 요인이 있습니다. CBS나 CTS에 나오는 설교자나 극동 방송에서 나오는 설교자들은 그들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여 설교하고 한국교회 에 유익하기 때문에 방송국에서 심의하여 나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은

그 시간을 마치 기업이 광고시간을 구입하듯이 헌금이나 선교비 명목으로 많은 돈을 지불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설교를 분석해 보면 성경이 원래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너무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은 진위를 식별하지 못하 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은혜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경우에 과연 성경이 말하 는 은혜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가 바른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성경이 어떤 책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나아가 설교가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인지, 종말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이며, 지금 현재 그리스도 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야 하는지 등의 문제를 비평할 수 있는 시각을 주 는데 이 교리를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교리가 성경 말씀 위에 있다는 말은 더욱 아닙니다.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항상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근거한 교리는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에 대하여 전체적인 그림을 보여주고, 그 그림에 묘사된 내용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시각을 줍니다. 물론 교리는 성경을 이해하는 일에 중요한 나침반 역할을 하고 해석하는 일에 중요한 원리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약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 리라는 울타리 안에 제한시킴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하고 왜곡시킬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성은 제한되 어 있기 때문에 바른 교리와 신학은 성경의 원리에 따라 나아갈 수 있는 방향성 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여전히 중요합니다. 이 교리의 중요성에 대하여 유명한 교회 역사가 필립 샤프(Philip Schaffer)는 성경의 교훈들을 요약해 주고, 성경의 올바른 이해에 도움을 주며, 성경을 가르 치는 자들이 하나가 되게 하여 믿음의 일치를 이루게 하며, 거짓된 교훈과 생활 을 막아내는 일에 공적인 표준이 된다고 하였습니다(필립 샤프, 신조학, 12). 교회역사를 보거나 실제로 목회를 해보면 교리는 이러한 역할을 하였고, 또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올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 교회가 받아들이고 있는 웨스트민 스터 표준문서 (신앙고백, 대 교리, 소 교리 문답, 교회정치, 예배 모범)를 공부하 는 일은 정말로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가족들이 이 교리공부에 관심 을 가지고 교리공부에 참여하여 믿음이 자라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되 기를 기대합니다. 목회칼럼(2008. 08. 31.)

목회칼럼(2008. 09. 07.) 교훈의 논리적 근거와 신뢰도 얼마 전에 조류독감이 전북과 충남지역에 발생하여 국민의 건강만이 아니라 양계업이나 치킨집을 경영하시는 분들에게 치명적인 손실을 안겨준 일이 있었습 니다. 그때 신문이나 언론에 몇 년 전에는 한글로 조류독감 이라는 표현을 사용 하다가 올해는 AI(Avian Influenza)라는 영문 이니셜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하여 국회에서 논의한 내용을 모 방송국의 돌발영상 에서 방영되었 습니다. 이때에 모 당의 정책위의장이 조류독감을 에이아이 (AI)라고 발음하지 않고, 에이원 이라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다른 국회의원도 역시 에 이원 이라고 읽었습니다. 그때 참석했던 기자가 질문하기를 에이아이 가 맞는 지, 에이원 이 맞는지 질문하였을 때 그 분은 에이원 이라고 재차 강조하며 말 하는 것이 영상으로 방영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조류독감으로 인하여 피해에 대 하여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그 사용하는 전문용어도 모르고, 보좌관이 써준 원고를 검증없이 읽어가는 사람들의 정책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 은 단순히 에이아이 를 에이원 으로 읽었다는 실수가 아니라 그 용어의 의미 와 출처도 모르고 사용한 사람이 그 대책을 제대로 세울 수 있겠는지에 대한 신 뢰도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얼마 전에 들은 설교와 신년메시지에 우리 인생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 솔개 를 예를 들어 교훈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솔개의 매체로 한 이야기의 내용은 한 경제신문사에 발간한 책에 기원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 내 용은 이러한 것입니다. 솔개는 가장 장수하는 조류로 알려져 있습니다. 솔개는 최고 약 70살의 수명 을 누릴 수 있는데 이렇게 장수하려면 약 40살이 되었을 때 매우 고통스럽고 중 요한 결심을 해야만 합니다. 솔개는 약 40살이 되면 발톱이 노화하여 사냥감을 그다지 효과적으로 잡아챌 수 없게 됩니다. 부리도 길게 자라고 구부러져 가슴 에 닿을 정도가 되고, 깃털이 짙고 두껍게 자라 날개가 매우 무겁게 되어 하늘 로 날아오르기가 나날이 힘들게 됩니다. 이때가 되면 솔개에게는 두 가지 선택 이 있을 뿐입니다.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약 반년에 걸친 매우 고통스런 갱생 과정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갱생의 길을 선택한 솔개는 먼저 산 정상부근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곳에 둥지를 짓고 머물며 고통스런 수행을 시작 합니다.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부리가 깨지고 빠지게 만듭니다. 그러면 서서 히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는 것입니다. 그런 후 새로 돋은 부리로 발톱을 하나하 나 뽑아냅니다. 그리고 새로 발톱이 돋아나면 이번에는 날개의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냅니다. 이리하여 약 반년이 지나 새 깃털이 돋아난 솔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30년의 수명을 더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정광호, 우화경영, 2005년 4월 매일경제신문사) 이 이야기는 인터넷에서 많이 회자( 膾 炙 )되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을 것입니 다. 그러나 교훈의 근거와 토대로 삼고 있는 솔개라는 새가 과연 생태학적으로 그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30년을 더 사느냐 하는 것입 니다. 제가 처음 설교와 신년메시지를 들었을 때 아 솔개가 그러한 특성을 가지 고 있구나! 솔개가 참 영물이구나 라고 생각하다가 집에 와서 사전을 찾아보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훈의 근거로 삼은 솔개가 그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동물생태학자 경희대 구태회 교수는 새에 서 부리가 다시 만들어져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hani.co.kr 2006/05/09). 그런데 제가 처음 솔개 이야기를 듣고 사전을 찾고 인터넷으로 검색하다가 하 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설교자들만이 아니라 검찰총장도, 국내 정상급 대형은 행장도, 대형신문사의 주필도, 솔개의 특성 을 화두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황영기 우리은행장은 솔개처럼 돌에 부리를 쪼아 새 부 리 나게 하자 라고 하였고, 정상명 검찰총장도 취임사에서 솔개 70년 장수론 을 펼치며 솔개는 40년을 살고 몸이 무거워지면 돌에 부리를 쪼아 새 부리가 나게 하고, 그 부리로 발톱과 깃털을 뽑아내어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한 뒤, 창공을 차 고 올라가 30년을 더 산다 라고 하며 검찰 간부들에게 변화와 혁신의 주체가 되라 고 요구했다고 합니다(hani.co.kr 2006/05/09). 논리학과 수학에서 전제가 잘못되면, 그 전제로부터 유추해낸 모든 주장과 논 리가 와르르 무너지는 법입니다. 자기 갱신과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는 것 자체 는 문제 삼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교훈의 논리적 근거가 잘못되어 있으 면 거기에 근거한 교훈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지금 설교자들만이 아니라 사회의 저명인사들이 솔개의 생태학적 특성을 근거로 이야기하지만 솔개 는 그러한 생태학적인 특성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강단에서 더욱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 님의 말씀을 읽지만 그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수단적으로 해석하여 교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논리적 근거가 잘못되면 거기에 근거한 모 든 교훈은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교훈의 신뢰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전파되는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자세 히 공부하고 검토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행17:11). 여기에 진정한 영적인 성 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전극동방송국 5분 칼럼 (2007. 1. 3.)

목회칼럼(2008. 09. 21.) 새벽기도회는 중요하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교회의 성도라면 우리나라의 교회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이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여 주었으며, 당시의 역사적 상 황에서 복음의 영향력이 무엇이며, 기독교가 우리나라의 역사에 미친 영향들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샘교회의 성도라면 역시 한샘교회의 역사와 우리가 추구하는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어떤 분들이 어떤 봉사를 하였고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 는 우리 교회의 역사에서 있었던 중요한 순간들을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기록하 고, 그때에 있었던 일과 설교를 담은 주보를 한 해가 지나면 책으로 만들어 보 관합니다. 유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 Carr)는 그의 유명한 책 역사란 무 엇인가? 라는 책에서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과거와 현재가 대화하는 것은 현재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교회가 지금의 역사적 상황에서 복음적인 책임을 다하며 더 발전된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는 우리 한국교회의 역사를 공부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러한 역사 가운데 특히 1907년 평양에서 있 었던 대부흥운동에 대하여 자세하게 공부해 보기를 바랍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의 의의와 역사적 평가에 대하여 여러 교회 사가들이 기록 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일어난 대부흥운동은 부흥사경회를 통하여 전해진 하나 님의 말씀에 기초한 철저한 회개운동이었습니다. 이러한 회개운동은 단순히 개 인의 영적인 갱신에 그치지 않고 교육열과 금연, 금주, 우상숭배에서 해방, 여성 의 지위향상, 세계관의 변화 등으로 인하여 사회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한 국사회의 악습으로 평가받고 있었던 일부다처제의 관습과 노름, 조상숭배 등이 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양 대부흥운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은 아닙니다. 민경 배 교수가 쓴 한국기독교회사 에 보면 길선주 목사가 평양에서 한국 최초로 시작했던 새벽기도회의 뜨거운 열정이 대부흥 운동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연세대학교출판부, 1996., 267). 사실 새벽기도회는 우리나라 교회역사 를 보면 우리나라 교회의 성장의 기초였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에 큰 영향을 미 친 유명한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박윤선 박사는 한국교회의 부흥은 새벽기도회에 있다고 그가 쓴 논문 가운데도 있습니다. 세계적인 영성신학자인 리차드 포스터 도 그의 책 기도 에서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가 교회의 성장과 영적인 변화

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서울의 명성교회의 새벽기도회 를 다루고 있습니다(두란노, 1996., 267). 새벽기도회는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 게 된 직접적인 동기일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부흥의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가르치고 있는 신학대학원의 목사후보생들은 말할 것도 우 리 교회의 성도들에게 제일 많이 강조한 부분도 새벽기도회입니다. 교회를 개척 하여 섬기면서부터 과거 훌륭한 목회자들이었던 리처드 백스터의 참 목자 상,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설교와 설교자, 찰스 스펄전의 목회자 후보생들 에게,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 등의 책을 비교적 자세하게 읽었습니다. 그런 데 이 책들 가운데 어떤 책도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는 책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교회를 개척하여 섬겨보니 교회 역사 속에서 보여주었던 믿음의 선배들의 경험들이 참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기도의 중요성을 교육하고 훈련하기 위하 여 새벽기도회를 강조하였고, 특별새벽기도회 를 분기별로 가져 훈련하기도 하 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시간을 정하여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누구도 자기 스스로 하루에 몇 시간씩 규칙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세계 교회의 역사에서 마틴 루터는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한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동 체 속에서 함께 공동생활을 하거나 정해진 시스템 아래에서 규칙적으로 기도함 으로 기도의 능력과 신비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기도와 명상에 관한 중요한 책을 쓴 분들이 대부분이 수도원이나 교회에서 정해진 시스 템 아래에 있으면서 경험했거나 특별한 환경인 선교적 상황에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기록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 까요?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의 부흥도 교회공동체 안에서 정해진 시스템이 중 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저의 목회방침 가운데 새벽기도회를 가장 중요한 위치에 둘 수밖에 없 고, 새벽기도회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생명을 다루는 일을 맡길 수밖 에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가 영적인 생명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영적인 생명은 성령의 역사와 기도로 이식되고 성 장하도록 디자인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도생활을 해보면 존 번연이 아침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은 그날의 나머지 시간에도 하나님을 발견하기 힘들다 라고 한 말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칼럼(2008. 09. 21.)

목회칼럼(2008. 10. 19.) 복음에 대한 믿음을 가져라 제가 결혼할 때 기도해 주셨던 목사님께서 한 부부가 회심하게 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이 분들이 회심하게 된 데는 이 분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 딸과 교회의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은 가정에 특별히 신주단지를 모시면 서까지 우상숭배하며 교회를 다니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모시던 신주단지들이 밤마다 공격하고 고통스럽고 힘들게 하였고, 각종 질병 으로 시달리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딸이 믿는 예수를 믿자 모든 귀신들이 물러 가고 몸이 치료가 되기 시작하고 평안해지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 일 이후 로 모든 신주단지들과 그와 관련된 모든 기물들을 버리고 옷들과 태웠습니다. 이 사건은 작은 사건처럼 보이지만 복음을 전할 때 사탄의 세력이 믿지 못하도 록 강력하게 역사하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하시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항상 이러한 능력이 나타나는 것 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 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교회역사에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 1회 졸업 생인 이기풍 목사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원래 평양의 유명한 깡패였 습니다. 그는 사무엘 모페트(Samuel Moffett) 선교사님이 복음을 전할 때 돌을 던 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목사가 되고 우리나라 최초 의 제주도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그를 가리켜 사무엘 모페트 선교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6년 전에 평양거리에서 나에게 돌을 던졌던 그가 한국 장 로교회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H. G. Underwood, The Call of Korea, 173) 우리 가 주변에서 복음을 전할 때 때로 남편이 가장 걸림돌이 될 수 있고, 때로는 아 내가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직장의 동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하고 나갈 때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들을 믿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직접 전도지를 집집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부터 접촉점을 찾아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제하고 지역사회에 봉사함으로도 전도할 수 있습니다. 우 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한 사람이 변하는 것은 돈이나 물질 적인 생활을 도우는 문제로 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빈민선교에 힘썼던 김진홍 목사님의 신앙간증집인 새벽을 깨우리로다 의 맨 마지막 부분 에 보면 흥미로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김 목사님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 람들에게 1차적으로 먹을 것을 주고 자활하여 생활이 안정되어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돈에 눈이 멀어 돈 때문에 싸우게 되고, 술에 빠져 가정에 큰 고통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때까지 의 선교방향을 바꾸고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 죄사함을 얻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돈과 물질적인 풍요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그 것 때문에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점은 오늘 여전히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은 1차적으로는 복음입니다. 교회가 도덕을 전파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도덕은 복음을 받아들인 후 변화된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각 사람들이 각자 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랑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이 다수가 되어 기 독교적인 이상이 실현되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래 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입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일 에는 많은 테크닉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전도의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 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사도 바울보다 뛰어난 기술을 가진 사람 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탁월한 전도 기술을 가지고 전해도 믿는 사람도 있었지만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 은 전도의 기술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특 히 사도행전 13:48에 보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라고 하였습 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복음을 전파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믿음의 문을 열어주시기도 하고, 또한 특이 한 방법으로 섭리하셔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는 것입니다(행14:27). 이것이 복음 을 전파하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의지하여 기도함으로 주님의 지상명령인 복음을 전하여 제자삼는 일에 열심을 내어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주일 확 인하는 구호인 복음은 사람과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능력입니다 라는 구호가 단순한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옮김으로 사실로 입증되기를 바랍니 다. 목회칼럼(2008. 10. 19.)

목회칼럼(2008. 10. 26.) 기도와 성경공부 글 : A. J. 폴 / 번역 : 박우택 목사 1. 언약 성경은 언약의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도 당신을 죄인들에게 계시하 시고, 우리에게 믿음으로 응답하도록 명하시고 있습니다. 믿음은 선포된 말씀으 로부터 오는 것입니다(롬10:17). 성령님께서는 성례(세례와 성찬)를 통하여 우리 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에 예배드리러 가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주간은 깁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더 깊은 교제 는 신자의 건강한 영적인 생활을 위하여 필수적입니다. 식사시간에 가족들이 둘 러앉아서 성경을 읽는 것은 좋은 습관입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읽은 것의 의 미에 초점을 맞추고, 그 말씀을 여러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시간을 항상 가지 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기도와 성경공부를 하기 위하여 시간을 계속하 여 가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매일의 삶을 헌신 하게 하는 한 권의 책이 유익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2. 기도 교리문답 주의 날 45-52번째 주일 1) 은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근본적인 교훈 과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무엇 에 관하여 기도해야 할는지에 대하여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주기도문에 나타 난 각각의 기도에 관하여 교리문답이 설명하고 있는 것을 읽으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의 기도에 넓이와 깊이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성경 을 공부하기 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성경을 연구하는 일을 마칠 때 다시 기도함으로 하 나님의 말씀에 응답하십시오. 3. 묵상 성경공부를 계속하는 한 우리는 성경을 단지 읽을 뿐만 아니라 그 성경의 의 미를 묵상해야 한다는 중요성도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 1) 역자 주 : 여기서 주의 날(Lord's Day) 45-52번째 라고 하는 말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16-129문에 나타나는 내용을 말합니다.

과 사역에 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기 위하여 주님이 우 리에게 계시하신 것에 관하여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위하여 그 의미에 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어떻게 계시하시는지에 관하여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 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고 (시145:5). 그리고 시 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시119:148). 또한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시11:5)라고 하였습니다. 4. 실제적 지침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에 약간의 도움의 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지침들입니다.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다른 면에 관심을 기울일 수도 있습니다. 1.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 자신의 말로 요약하십시오. 여러분은 그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주석성경이나, 성경에 대한 믿을 만한 주석을 사용하는 일은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본문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본문이 나타나는 문맥, 장, 그 본문이 속해 있는 성경, 그리고 전체 성경의 조명을 받아 이해하십시오. 이 문제에 대답 하기 위하여 다음의 질문들을 유의해야 합니다. (1) 하나님에 관하여 계시된 것은 무엇입니까? (2)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이 무엇입니까? 2) (3) 본문과 우리 삶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a. 어떤 약속이 있습니까? b. 어떤 의무나 책임이 있습니까(명령이나 금지, 격려나 권고, 긍정적인 모범이나 부정적인 모범)? c. 우리가 유의해야 할 어떤 경고나 위협이 있는가? 3. 본문에 관하여 생각함으로 여러분이 주님 앞에 무엇을 기도로 아뢸 수 있 습니까? (A. J. Pol, "Prayer and Bible Study", Clarion 제45권, 1호) 2) 역자 주 : 이것은 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또는 구속사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의미이기 도 합니다. 구약이나 신약의 핵심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본문을 읽을 때 그 본문 에서, 특히 구약의 본문일 경우 오실 그리스도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책이기 때문입니 다(눅24:27, 44; 요6:39-40).

목회칼럼(2008. 11. 02.) 기도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글 : J. 패커 / 번역 : 박우택 목사 입원 중에 치유를 위해 기도했던 나의 믿지 않는 친구는 지금 건강하게 잘 지 내고 있습니다. 역시 입원 중에 치유를 위해 기도했던 내 그리스도인 친구는 건 강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것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할까요? 통 계자료들은 어떤 사람이 어떤 형태의 기도를 할지라도,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든 아니든간에 환자들이 회복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 미가 있을까요? 일반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곤경에 빠졌을 때 탄원의 기도를 드리려는 본능 역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모든 시대, 모든 곳 에서 위기가 닥쳐올 때면 신앙을 가진 자이건 아니든 간에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립니다. 이런 일은 일어나게 하시고 저런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곤경 에 빠진 무신론자는 없다는 격언은 이런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곤란 중 에 기도하는 일은 삶의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환자들이 기도할 때 그들을 돌봐 주고 치료해 주는 하나님에게 무엇이든지 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때 내적으로 평안을 얻어 실제로 치유함을 얻는 일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참되 신 하나님은 진실로 자비로우시며 관대하시기 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들이, 그들 의 신앙과 삶이 모든 면에서 불경건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기도대로 건강함을 얻게 되는 일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이러한 것에 대한 통계자료를 하나 님의 대한 증거로 이해하는 일도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이보다 더 견고한 기초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 스도인들은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을 그들의 언약의 주요 구원하시는 은혜의 하 나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렇게 믿고 기도드립니다. 그리스도인들 의 기도는 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하고, 성령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에게 말 한다는 점에서 삼위일체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들의 대속적인 죽음과 아버 지의 자녀와 후사가 됨으로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는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리라는 아버지의 약속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론은 언제나 (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 고 기도합니다. 또한 그들은 만약 그들이 무지와 지혜의 부족으로 인하여 자신 들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을 구하지 아니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의 하나님은 그들 에게 참으로 더 좋은 것을 주심으로 그들에게 응답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 다. 예를 들어 바울이 자신의 몸의 가시를 제거해 주시를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 서는 그 가시를 그대로 남겨두신 채 그가 자신의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치유를 위한 간구나 그 밖의 어떤 것도 마술적 주문이 아닙니다. 또 한 기도는 부흥사들이나 일부 목사들이 건강과 부, 부흥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께 간절하게 구한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 다. 어떤 경우는 치유를 위한 비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치유됨으로 우리를 놀라 게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치유를 비는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음으 로서 우리를 당황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때로 우리를 놀라게 할 수도 있고, 당황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구하 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라는 말씀은 항상 진리입니다. 또한 그들이 구할 때 하나 님으로부터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길게 본다면 그들에게는 항상 가장 좋은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당시에는 실망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렇 습니다. James Packer, "When Our Prayer Is Not Answered", Christianity Today

목회칼럼(2009. 02. 08.) 목회자로서 비중을 두는 일 1 대개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목회에서 가장 비중을 두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설교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 의 말씀을 전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믿고 구원(생명)을 얻게 하는 일입 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실 때 이 일을 또한 우리에게 위임해 주셨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이 그러 하셨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일의 대부분은 설교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그의 사역 가운데 제일 중요한 일을 설교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의 커리큘럼 가운데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 설교를 잘 할 수 있도록 교리와 성 경주석 방법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 르치는 일이며 이 말씀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 믿기에 제일 비중을 둡니다. 그래서 저는 가장 많은 시간을 설교를 연구하고 준비하는 일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는 뛰어난 언변을 가지고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말을 잘한다고 해 서 설교를 잘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 부흥의 역사에 보면 설교를 잘 한다 고 할 때 설교를 전달하는 테크닉, 소위 언변이나 제스처(gesture)를 잘 사용한다 고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세계적인 복음전도자 빌리 그래함(William Franklin Graham)은 뛰어난 언변도 가지고 있고, 신학적 지식도 함께 갖춘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변에 뛰어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학적 지식이 얕고 천박하 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신학대학원에서 두 분의 잊지 못할 스승을 만나는 복을 누렸습니다. 그 분들은 화란 개혁교회 목사님으로 닉 호체 스(Nick Gootjes) 교수님이시고, 또 한 분은 존 배토우(John Batteau) 교수님이십니 다. 이 분들은 예화를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성경적인 원리에 입각한 깊이 있는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위대함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이 두 분을 절대로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전형적인 원고 설교 자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원고를 작성하여 감정을 섞지 않고 그대로 읽어 내려가는 방식으로 설교하였습니다. 거의 두 시간 동안 원고를 읽어 내려 갔습니다. 제가 지금의 설교방식에 영향을 받은 주신 분은 호체스 교수님과 존 배토우 교수님, 로이드 존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입니다. 특히 저는 설교 원고를 다음 주일에 성도들이 읽을 수 있도록 주보에 싣고 있 습니다. 이 일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하는

것은 두 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성도들이 성경을 읽고 해 석하는 안목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올바른 성경해석원리 에 따라 의미를 드러내고, 그 의미를 개인과 교회와 사회에 적용하는 일이기 때 문입니다. 또 하나의 목적은 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고 말에 대하 여 책임을 지기 위함입니다. 오랫동안 강의와 설교를 해 보신 분은 알겠지만 준 비된 원고가 없이 말로 한 두 시간을 얼마든지 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설교 를 기록하는 일은 설교의 표현을 다양하게 하고, 너절한 언어사용이나 판에 박 힌 말들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바른 설교를 들을 때 믿음이 자라고 구원을 이루어갈 뿐만 아니라 제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이 일에 제일 큰 비중을 둡니다. 설교가 귀에 들리려면 성경의 핵심개념과 교리를 알아야 합니다. 가끔 TV를 볼 때 아이들이 배를 잡고 웃습니다. 그때 저는 쟤들이 왜 웃어? 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가 웃음을 유발하는 말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일종의 신호체계인데, 이 신호체계를 모르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학문적인 용어로 바꾸면 선 이해, 선험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언어라는 신호체계로 기록되었기 때 문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려면 언어를 알아야 하 고, 성경의 기본개념을 확인하고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러한 이유에서 우리 교회에서는 누구든지 생명의 삶 과정을 반드시 이수하고 통과해야 합니다. 기본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귀와 마음이 열리도록 이 생명의 삶 을 가르치는 일에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지식과 논리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 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이 일을 위하여 몇 시간씩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 다. 이 기도하는 일을 담금질 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담금질(quenching) 은 고온에서 만들어진 금속을 물이나 기름에 담가 빨리 식혀서 결정구조가 변형 되지 않게 만들뿐만 아니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작업과정을 말합니다. 기도는 이와 같은 원리로 설교를 더 단단하고 예리하게 만드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 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일에 많이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우 리 교회 성도들이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생명을 얻기도 하고, 죄를 깨 닫고 회개하기도 하고, 우리의 존재와 사명을 깨달아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 설하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칼럼(2008. 02. 08.)

목회칼럼(2009. 02. 22.) 교회는 일꾼 세우기를 갱신하라 우리나라 목회자들이 많이 애독하는 목회와 신학 (두란노, 2004, 11월호) 특 집에 교회는 일꾼 세우기를 갱신하라 라는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아마도 각 교 회들마다 11월이 되면 내년에 교회에 봉사할 일꾼 세우는 일에 기도하면서 준비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교회에 일꾼으로 세우느냐 하는 문제는 그 교회공동 체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 서 직분자를 세우는 목적은 교회가 복음전파를 통하여 생명을 얻게 하고, 하나 님 나라의 이상에 이 땅에 구현하여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려는 것 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오늘날 교회는 직분자를 세워 교회의 본래적 기능을 잘 감당하 려고 세우지만 직분자들이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거나, 또한 교리적인 기초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본질과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유교적 전통과 잘못된 이데올로기 안에서 교회의 직 분을 수직적인 관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성경은 교회의 직분을 섬김과 봉사의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 때문에 교회의 직분이 왜곡되고 있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어떤 교회는 성경적 인 기준과 거기에 따른 합리적인 검증이 무시된 채 일단 직분을 주면 싫던 좋던 그 교회를 떠나지 않게 되고, 일정한 헌금도 하게 되리라는 생각 때문에 직분자 로 세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 크고 작은 거 침돌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을 세우는 목적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존재가치와 의의를 알고 그 사람을 세운 공동체나 조직이 추구하는 목적을 함께 이루어가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때 로는 교회가 사람을 잘못 세워 조직이나 공동체의 기능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 거나 큰 걸림돌이 되어 교회와 목회자에게 큰 시험거리가 되는 사례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잘 세워야 조직이 건강해 지고, 그 조직을 통하여 인간 의 연약한 본성도 극복하며 그 조직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도 합니 다. 이것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교회의 조직이 건강해야 하고, 탄력적이어야 합니 다. 조직이 건강하다는 것은 그 일을 하기에 인격적으로나 은사적으로 적절한 사람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직이 탄력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조직에 적 절한 사람을 더 세울 수도 있고, 또한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면 그만두게 하여

다른 사람으로 그 일을 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건강 하지도 못하고 비탄력적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교회가 직분자들을 세우는 현 상을 보면 교리적인 기초가 없고, 공적인 예배에 제대로 출석을 하지 않아도 직 분을 주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한번 집사직을 받으면 그때에는 대개 평생 그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교회 다 니는 사람의 호칭이 집사님 으로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예배 에 제대로 출석을 하지도 않고 봉사생활과 사회생활에 덕을 세우지 못해도 직분 을 그만두게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한 부서를 맡아서 봉사할 때 그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조직이 전혀 탄력성이 없습니다. 어떤 공동체나 조직이든지 사람을 세우는 일도 어렵지만 어렵게 세운 사람을 그만두게 하는 일 처럼 곤혹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특히 교회는 더욱 어려운데 교회는 그 직분을 통하여 그 사람을 세워가는 한 과정으로도 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 일은 규모가 작은 교회일수록 더욱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제가 섬기는 교회같은 경우에는 여기에 대한 대안으로 일정한 자격을 갖춘 자들을 집사와 장로로 세우되, 서리집사는 3년 사이클로 세우려고 개척당 시부터 규정을 정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규정조차 제대로 지 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규정을 지키려고 하면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하기 때문 입니다. 특히 장로는 더 엄격한 규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로교회의 경우 장로 는 교회의 인사권과 재정권과 정책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당회의 회원이 되기 때 문에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예배생활과 교회생활 그리고 사회생활에 모범이 되 지 못하면 교회의 가르침에 심각한 영향을 받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 의 말씀대로 살 것을 권면하는 일이나 기도하는 일을 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 서 직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성경적인 시스템을 마련하고 적용하는 일이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J. Calvin)은 기독교강요 라는 책에서 교회의 직분자들 을 가리켜 모든 믿는 자들을 한 몸에 연결시키는 신경조직이라고 하였고, 그리 스도를 대신하여 이 땅에서 모든 것을 성취할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건강한 신경조직을 가지고 교회에 위임된 본연의 직무를 잘 감당하기 위 하여 좋은 직분자를 세워야 하고, 그 직분자들이 제대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시스템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계속 건강해져서 하 나님께서 교회의 정체성을 구현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이 땅에 실현시켜 나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 일꾼 세우기는 갱신되어야 합니다. 대전극동방송국 5분 칼럼 (2004. 11. 3.)

목회칼럼(2009. 03. 15.) 목회자로서 비중을 두는 일 2 저는 목회자에게 있어서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배우지는 못했습니 다. 제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에도 목회자가 왜 기도해야 하며, 기도가 목회사 역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큰 교회에 부교 역자로 있을 때에나 한 기관의 지도교역자로 있으면서도 기도에 대한 부담을 가 져 본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없이도 잘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간 혹 신학대학원 채플에 설교하러 오시는 목사님들 가운데 기도를 많이 하신다고 알려진 목사님들이 오셔서 설교하면 본문과 관계가 없이 설교하시는 것이 대부 분이었습니다. 이것이 신학의 한계 때문이라면 기도는 이것을 변화시키는 무엇 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기도가 목회자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아주 피상적으로 이해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면서 저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이와 함께 여러 가지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연구하고 사랑으로 가르쳤음 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삶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근본적으로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우리 믿음의 선진들 은 어떻게 해결하였는지를 여러 경건서적들을 읽으면 기도에 눈을 뜨기 시작하 였습니다. 특별히 경건생활과 기도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해준 책이 칼빈이 쓴 기독교 강요 의 제3권인 20장 기도 편에 기록된 글입니다. 처음 이 책을 영 어판으로 읽었을 때 줄을 그으면서 읽었는데 그 느낌은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 지만 저로 하여금 읽는 순간부터 오랫동안 가슴이 떨리는 감동과 함께 이상한 은혜가 저를 휘감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또한 이 책이 4권으로 된 구성 가운데 1권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하여, 2권이 구속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 으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기록하고 있고, 3권이 그리스도 안에 이 루신 구속의 은혜를 받는 방법에 대한 부분으로 성령사역과 믿음과 말씀순종과 함께 기도를 기록하고 있고, 4권이 구속의 은혜를 전달하는 외적인 방편인 교회 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 다. 칼빈은 이 책에서 기도는 믿음을 실행시켜 현재화하는 주된 방법이며 날마 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법이다 (III. xx. 1.)라고 설명한 말이 오랫동안 나의 기억에 사라지지 않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웨슬리 듀엘(Wesley L. Duewel)이 쓴 기도로 세계를 움직이라 라는 책과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의 기도 라는 책이 기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의 폭을 넓혀 주었습니 다. 그리고 오래 전에 역시 저에게 감동을 주었던 책이 E. M. 바운즈(E. M.

Bounds)의 기도 라는 책이었습니다. 물론 이 책들 외에도 기도에 대한 많은 책들이 기도에 대하여 저의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책들과 더불어 기도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하였 던 것은 저의 목회와 강의경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제자로 삼는 일 은 단순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 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영적인 생 명은 성령의 역사와 기도로 이식되고 성장하도록 디자인해 놓으셨기 때문입니 다. 특별히 목회자라는 직업 자체가 일반 사람들이 다 이해할 수 없는 특수하고 어려운 일입니다만 특별한 은혜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야고보서 5:13-14 에 보면 장로들 을 청하여 기도하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한 말씀을 믿고 성도들이 겪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가지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대부분의 문 제들이 해결되는 것을 경험한 바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예배시간에 목회기도 를 할 때 불치병이 치료되기도 하고, 고통이 그 순간 떠나게 된다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되어 사람이 변하는 특별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 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특별새벽기도회 를 통하여 예배당 이전과 구입의 문제, 교회 성도들의 질병과 특별한 이슈들이 해결된 것 입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성도들의 믿음을 자라게 만들었고 제 자신도 기도할 수밖에 없도록 자극을 주었고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의 목회사역에서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의 말씀을 설교하는 설교자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가운 데 부어주시는 은혜의 중요한 방편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여 사람을 변화 시키는 일입니다. 이 설교는 일반 강의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가리켜 E. M. 바운즈는 기름부으 심 (unction)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끊임없는 기도없이 기름부으심은 설교자에 게 임하지 않는다 (E. M. Bounds, Power Through Prayer, Zondervan, 1979., 70)라 고 하였습니다. 지금 보편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 기름부으심은 설교 시에 나타나는 성령의 신비로운 현상으로서 설교와 다른 의사소통 사이를 구별해 주 며 열심이나 열정이나 수사학적인 기술 이상의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Richard Foster, Prayer, Harper Collins, 1992., 115). 이러한 이유에서 저의 목회사 역에 기도에 큰 비중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의 동역자들에게 바울이 나로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엡6:19)라고 기도를 부탁한 것처 럼 기도해 주도록 부탁하고 있습니다. 목회칼럼(2009. 03. 15.)

목회칼럼(2009. 03. 22.) 성화교리의 특성 성경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켜 성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 도 라는 말은 문자적인 의미로 거룩한 무리들 이라는 뜻입니다. 이 성도라는 용 어 자체가 우리 믿는 신자들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자들이고, 또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독특성을 설명하면서 거룩함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거룩한 자들이 고, 또한 거룩해야 한다는 사상은 구약과 신약에 거듭 강조되고 있는 사상입니 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 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19:2)고 하셨습니다. 신약시대에 사도 베드로 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이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오직 너희를 부르 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 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1:15-16)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께서는 그 자신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 이 거룩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거룩 이라는 의미가 많이 오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책을 옆에 끼고 특별한 제스처를 사용하면서 목소리까지 이상하게 하는 행동을 하거나, 때 와 장소도 구별하지 않고 아멘 이나 할렐루야 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이러한 사람을 만나면 혐오스럽고 구역질이 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외형적인 폼은 거룩한 체하고, 신자들이 즐겨 쓰는 용어는 사용하고 있지만 그가 쓰는 용어가 그의 삶 과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러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 대개 머리속에 쉽게 연상될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행동이 아 니라 혐오스러운 행동입니다. 성경적으로 거룩하다 는 말은 구약성경에는 주로 세속적인 사람이나 사물로 부터 구별하여 주로 제사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만 시편이나 선지서 등에는 의롭게 살고, 진리를 말하며, 정직하게 행동하며, 자비를 베풀고, 하나님과 동행 하는 행위가 포함된 윤리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시15:1-2; 미6:8). 신약성 경에 나오는 거룩하다 (hagios)라는 용어도 구원받은 성도에게 적용될 때는 그 리스도와 연합하여 윤리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으면 이미 거룩하게 되었고, 그 신분에 합당한 거룩한 특성들이 드 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화교리의 특성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프린스턴 대학의 존 머레이 교수는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얻어 이미 거

룩한 자가 된 것을 가리켜 즉각적인 성화 (Definitive Sanctification)라고 하였고, 계속적으로 완전한 나라에 이르기까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하여 힘써야 하는 것 을 가리켜 점진적인 성화 (Progressive Sanctification)이라고 구분하였습니다. 이 구분은 참 중요한데 성화에 대하여 두 가지 중요한 특성을 보여주고 있습 니다. 하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즉각적으로 거룩한 자가 되어 성화를 이루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생애 전체에 걸쳐서 점 진적이며 계속적으로 성화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즉각적 인 성화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며 은혜의 선물이지만 점진적인 성화는 인 간의 책임적인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사도 바울 당시 고린 도 교회 성도들을 가리켜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성도 (고전 1:2)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 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 이 하자 (고전7:1)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서 이미 이루어진 일이고 하나님의 역사이지만 한편으로 우리가 수동적인 자세 로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인간의 책임적인 요소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일이 가능하도록 모든 믿는 자 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심지어 중요한 직분을 맡아 봉사한다고 할지라도 그 삶에 변화가 없다면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 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신분적으로 성화가 되었고, 또한 성화 를 이루어가야 할 책임적인 요소가 함께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데 오늘날 구원을 받는 것과 성격을 구분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본래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여전히 옛사람의 성품을 버젓이 행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도대체 어 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만약에 그 말대로 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사역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성령을 주신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면 이 미 신분적으로 거룩한 자가 되었고, 동시에 일상생활 속에서 거룩함을 나타내어 야 할 책임이 있고, 실제로 그 생활에 거룩의 특성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만약에 이러한 점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질문해 보아 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이미 성화된 사람이고, 또 한편으로는 계속적 으로 성화를 이루어가야 할 특성을 가진 새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대전극동방송국 5분 칼럼 (2007. 02. 28.)

목회칼럼(2009. 03. 29.) 고통과 하나님의 섭리 우리 신자가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문제가 고통의 문제입니다. 신자가 세상에 서 살아갈 때 고통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부터는 어려운 문 제들이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신자가 되면 고통을 받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참된 신자는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 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고통을 당할 때도 많이 있습니 다. 우리 인간이 가진 이해력으로 그 고통의 문제를 풀기에는 상당히 어렵습니 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신화인 에뉴마 엘리쉬 (Enuma Elish)에 보면 인간은 악한 신의 피로 만들어진 더럽고 천한 존재이기 때문에 신들의 안식을 위해 평생 고통하며 노동해야 합니다(Ancient Near Eastern Texts, 68). 만약에 우 리 인간이 이 신화에 나타난 존재라면 고통을 체념하며 받아들일 수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존재적 특성 자체가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 경의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복과 안식을 누릴 수 있도 록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온 세상을 선으로 통치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믿음과 현실이 마치 괴리 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욥과 같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인이 고통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이 과연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죄 없 는 사람에게 그렇게 혹독하고 고통스러운 고통이 임할 수 있는가? 라고 질문하 기도 합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중요한 원리는 사람이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리와 실제로 우리 가 경험하고 있는 것 사이에는 모순이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러한 문제를 이론적으로 풀어보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중 에 한 분이 유명한 C. S. 루이스입니다. 그 분은 고통의 문제 라는 책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믿는 교리와 현실을 비 교하면서 하나님이 선하다면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완벽한 행복을 주고 싶어 할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그 소원대로 할 수 있을 것인데 현실적으로 인간은 행복하지 않고 고통이 많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선하지 않은 존재이거나 능력이 없는 존재이든지, 아니면 선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존재일 것이다. (39) 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고통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 지 않다는 것이고, 고통에서 자유케 할 능력이 없는 분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 다. C. S. 루이스는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제한된 이

성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고통 과 하나님의 섭리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입니 다. 때로는 인생이 고통과 갈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목사인 저도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많이 고민하며 갈등하며 때로는 밤을 하얗게 새면서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다룬 논문과 책을 수없이 읽었습니다. 고통의 문제에 대하여 완전한 답은 얻을 수 없 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에는 우리 인생이 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요 소들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고통을 조사해보면 인간의 죄 때문에 고통이 오기도하고, 욥 처럼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고통을 주시기도 하고, 우리 인간 개인의 의지작용과 전혀 관계없이 세계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로 인하여 고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악인이 잘 되고 의인이 오히려 고통을 받을 때 우리는 당황해 하고 고통합니다. 이때에 해결책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모든 것 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에 있어서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서도 우리가 붙잡아야 할 확실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의 문제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방식을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유익과 선함과 완전한 나라를 이루시 기 위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에 비추어볼 때 불합리하게 보여도 우리에게 유익하게 하 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지혜입니다. 이 경우에 우리 믿음 의 조상들은 우선적으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생각 하고 자세하게 살폈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더 많이 읽고 기도도 더 많이 하였습 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고통이 그들의 죄 때문에 주신 징계라면 회개하는 기회로 삼았고, 하나님이 믿음을 연단하시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들의 믿음과 삶의 지위를 몇 단계 업그레이드(upgrade) 시켜주시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통치방식의 목표를 믿고 믿음으로 산다면 여러 가지 고통으 로 힘들어 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대전극동방송국 5분 칼럼 (2006. 09. 20.)

목회칼럼(2009. 04. 05.) 신앙의 기본을 훈련하라 저는 개인적으로 테니스 경기를 하는 것도 좋아하고, 보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테니스 선수인 존 매캔로, 보리스 베커, 마이클 창, 피터 샘프라 스, 안드레 아가시, 로저 페더러, 라파엘 나달 등의 선수와 여자 선수로는 슈테 피 그라프, 마르티나 힝기스, 마리아 샤라포바 등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테니스 선수들의 이름을 외우고 있는 것은 테니스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수년간 테니스를 쉬었다가 지난해부터 몇 몇 목사님들 과 함께 만나다 보니 다시 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테니스를 하자 공 이 잘 맞지 않았고 기본기가 많이 흐트러졌습니다. 치는 공도 회전이 걸리지 않 아 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코트 밖으로 나가거나 네트에 걸리기가 일쑤였습니 다. 그래서 약 2달 정도 과거 테니스 선수 경험이 있는 테니스 코치에게 레슨을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예전의 구위를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되었고, 가장 기본이 되는 스트로크와 서브와 발리가 자리잡혀 갔습니다. 이제 경기가 다시 재미있어 졌고, 테니스를 즐기고 있습니다. 운동도 훈련해야 합니다.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인 로저 페더러 선수가 그의 연습 파트너로 한국인 유 다니엘을 선택하였습니다. 그가 돈을 내어서라도 배워 야 할 판이었지만 2009년 2월 20일부터 3월 6일까지 2주일간 UAE(아랍에미리트 연합) 두바이에서 페더러의 훈련 파트너를 해 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고, 항공 비는 물론, 숙식과 체재비까지 전액 페더러가 부담하는 조건이었습니다. 유 다니 엘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1998년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적 테니스 명문 닉 볼레 티에리 아카데미에서 엘리트 훈련을 받은 선수였습니다. 그가 선택된 데는 오른 손잡이인 페더러가 왼손잡이인 나달의 끈질긴 포핸드 공격과 강한 스트로크를 훈련하기 위하여 나달과 같은 유형의 선수이면서도 왼손잡이였기 때문입니다. 유 다니엘 선수는 그의 공을 받으면 라켓이 휙 돌아가고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 더군요. 이런 일은 처음이었어요. 2주일째 되니까 약간 적응이 됐어요. 라고 말했 습니다. 그리고 유 다니엘은 페더러로부터 테니스가 하루아침에 느는 것은 아니 다. 나도 이렇게 열심히 훈련한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라. 라는 위로의 말도 들었 답니다(chosun.com. 2009/03/18). 제가 지금까지 제가 테니스를 다시 시작한 이야기와 페더러가 훈련한 부분을 말한 것은 비단 테니스만이 아니라 신앙생활도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 함입니다. 기본기는 가능한 한 전문가에게 배우는 것이 좋듯이 좋은 신앙의 지 도자에게 기본을 배우고, 또한 옆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보고 배 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생명의 삶 과정에서 기본적인 신앙의 내

용을 배우고, 목장에서 기본기가 어느 정도 훈련된 목자, 목녀를 통하여 보고 배 우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지적으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적으로 이해된 하나 님의 말씀이 생활 속에 나타나도록 철저하게 훈련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적 용하는 훈련, 기도하는 훈련, 금식하는 훈련, 다른 사람을 섬기는 훈련, 이웃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을 가리켜 경건훈련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리 브릿지스는 이 일을 가리켜 그의 경건에 이르는 연습 이 라는 책에서 경건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으로 나타난 하나님을 향 한 헌신 이라고 정의한 바가 있습니다(18). 이 일은 시간이 들고 돈이 드는 일입 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함을 배우게 되고 자신을 희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 고 할지라도 교회와 사회에 봉사하고 책임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 인생의 선택적인 요소가 아니라 생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본질 을 회복하지 않으면 교회에는 다니고 있지만 구원의 은혜를 절대로 경험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 안에는 교회생활은 오랫동안 하였지만 신앙의 내용도 모르고 그냥 교회 안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 자신은 하나님을 믿 는 신앙이라고 말은 하지만 전문가의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의 잘못된 관념이나 경험이 신앙이 되어 버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교 리적인 지식을 알고 있다고 하지만 실상은 교리내용을 제대로 모르고 있고, 그 교리내용을 경험조차 해 본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할 때 말씀의 맛을 알고, 감동을 느끼며, 그 말씀을 생활에 실천할 수 있는데 이 말씀을 경험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예수님의 비유에 돌밭에 뿌려진 씨나 가시덤불에 떨어 진 씨처럼 결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적으로 알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알고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어떤 직분을 맡겨 봉사하며 은혜를 누리게 하고 싶어도 맡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 틀에 박힌 듯이 신앙 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거리가 멀고 추상적이고 막연한 개념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다시 신앙의 기본인 언약과 십자가의 교리를 확 인하는 것은 참 좋습니다. 과거 교회의 역사 가운데 진정한 영적 부흥이 일어난 때는 십자가의 복음을 들었을 때이고, 또한 신앙이 나태해졌을 때에도 회복할 수 있는 힘 역시 십자가의 복음이었습니다. 이번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고난주간을 통하여 십자가의 복음을 깊이 묵상하고 신앙의 기본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회칼럼(2009. 04. 05.)

목회칼럼(2009. 04. 12.) 금식기도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대제사장의 심문과 빌라도의 재판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마지막 일주일간의 사건을 기념하면서 고난주간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 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33년간의 지상생애를 사신 것 그 자체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역사 가운데 예 수님이 지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일 가운데 클라이맥스가 예 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이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금식하는 아름다운 전통 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전통 가운데 우리 믿는 자들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 면서 금식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금식기도는 영적으로 많 은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응답도 분명히 있습니다. 특히 금식하는 기도는 더 분 명한 응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금식 문제를 이야기할 때 항상 기도와 별개의 문제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금식과 기도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도와 금식은 거의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미스바에서 사무엘이 온 백성을 위하여 기도할 것이라고 하였고, 거 기에 모인 백성들은 금식하면서 여호와께 범죄한 것을 회개하였습니다(삼상 7:5-6; 참고. 삼하12:16, 21-23; 대하20:3-5; 스8:21-23; 눅2:37; 행13:2,3 등). 이 후에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시고 나라가 새롭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존 칼빈(John Calvin)이 쓴 유명한 책 기독교강요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에서도 금식을 기도와 연관시켜서 말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중대한 문제 에 대하여 기도할 경우 금식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면서 금식은 기도를 더욱 정성스럽게 하며 기도에 방해되는 것을 제거하려는 것 이라고 하였 습니다. 그래서 금식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경험하려고 하는 자에게는 아 주 중요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은 금식하며 기도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을 기 울이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금식이 신자의 생활에서 거의 잊혀져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있는 경향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원인 이 어디에 있을까요? 첫 번째로는 금식하는 일이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 금식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어떤 종류의 음식도 먹지 않는 것을 의미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하기 싫어하는 경향들이 금식을

멀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절박하게 사 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정말로 중요하고 하나님께서 문 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 성을 절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리차드 포스터가 지적한 것으로 건강에 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Celebration of Discipline, 47-48). 그러나 우리는 금식하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금 식기도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진리입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의 성 도들은 금식하는 일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깊숙하게 체험하고 있지 못하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한가지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웨슬리 듀엘(Wesley Deuwel)이 기도로 세계를 움직이라 라는 책에서 아주 적절하게 말하였습니다. 금식은 우리 기도의 깊이를 더하게 하고 능력을 더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다. 만일 우리가 금식의 특권을 이용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만큼 영적으로 더 빈약해 질 것이며 우리의 기도 생활 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104) 금식은 하나님의 은혜 를 깊숙하게 체험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은혜의 방편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고난주간을 맞아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우리 성도들 이 금식기도를 많이 활용해 보기를 원합니다. 구약과 신약성경에 금식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세는 40일간 두 번이나 금식하였고(신9:9, 18), 다윗은 그의 아들이 병들었을 때에 금식하며 기도하였고(시35:13), 백성들의 죄악 으로 인하여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시69:9-10).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들이 전 쟁터에 나가기 전에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대하20:17). 엘리야, 에스라, 느헤미 야, 에스더가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성경 안에 기록된 사람들만이 아니라 교 회 역사를 보면 많은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이 금식을 하였고 그 가치를 증언하였 습니다. 마틴 루터,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존 웨슬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등 이 그러하였습니다. 이는 금식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방식이었을 뿐만 아 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 영혼을 새롭게 하며 주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입는 방법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해 고난주간에는 하나님 앞에서 자 신을 돌아보면서 자기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교 회가족이나 우리 이웃과 민족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금식해 보기를 권합니 다. 이 금식을 통하여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맛보고 구원을 경험하였던 것처럼 이 시대에도 구원의 하나님을 더 풍성하게 경험해보기를 바랍니다. 대전극동방송국 5분 칼럼 (2006. 04. 12.)

목회칼럼(2009. 06. 14.) 영적인 슬럼프 사람들에게 누구나 소위 슬럼프 (slump)라는 것이 있습니다. 슬럼프 라는 말 은 원래 지질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지층의 암설( 岩 屑 )이 간헐적으로 아래로 미 끄러져 내리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용어가 심신의 상태 또는 작 업이나 사업 따위가 일시적으로 부진한 상태에 빠지는 경우에 더 많이 사용합니 다. 예를 들어 지금 일본의 요리우리 자이언츠에서 4번 타자로 맹활약을 하는 이승엽 선수가 일본에 진출한 후에 첫해에 성적이 상당히 부진하였습니다. 이때 에 슬럼프에 빠졌다 라고 하고, 또한 경제적인 불황이나 불경기에 빠진 경우도 슬럼프에 빠졌다 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슬럼프는 영적인 생활에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기독교 에서 이러한 상태에 빠지는 것을 영적 침체 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영국 이 낳은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C. H. Spurgeon)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자신 의 경험을 이렇게 말한 대목이 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지독한 영적 슬럼프로 인하여 많은 고통과 두려움을 겪고 있기에 여러분들 중에는 제가 처한 그러한 극도의 처절함을 겪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를 소원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당대 에 가장 뛰어난 설교자요 교육자였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하나님과 늘 가까이 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을 볼 때 그에게도 영적인 슬럼프가 찾아와 고통스럽고 힘든 싸움을 해야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슬럼프는 사람을 차별하여 찾아오지 않습니다. 인간 누구에게나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하 여 낙심할 때도 있고, 고통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슬럼프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어떤 경우는 외부적 인 환경이 어렵고 힘들 때 생겨나기도 합니다. 이 경우에 대개 신자들이라면 신 실하신 하나님의 인격과 약속을 바라보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기도해도 계획된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거나 경제적인 문제가 풀려지지 않거나 나아가야 할 진로문제가 불투명하고 그 끝이 보이지 아니할 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회 의를 느끼게 되고, 예배생활과 봉사생활과 기도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질문하게 됩니다. 또 어떤 경우는 외부적인 환경과 전혀 관계없이 자기 스스로 싫증을 느껴 침 체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금붕어를 키우는 일을 너무 재미있어 하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금붕어의 종류와 특성까지 다 외우면서 관심을 기울였 습니다. 지나가다가 수족관이 있으면 들어가서 새로운 종류의 금붕어가 나왔는 지 보고 자기 집의 금붕어를 보며 어항을 관리하고, 금붕어가 자랄 수 있는 어

항 안을 예쁘게 장식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어항에 이끼가 끼고 금붕어 에 이상이 생겨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런 이유가 없습 니다. 그냥 싫증이 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같이 자기 내부에서 자기도 모 르는 사이에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흥미가 떨어지고 의미를 잃어버려 타성에 빠지게 되고 기쁨을 잃어버려 침체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가지 원인으로 영적 인 슬럼프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 침체의 늪이 끝없이 이어져 어 디까지 갈까 염려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 슬럼프 현상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 납니다. 감사보다는 불평과 불만을 많이 합니다. 예배시간이 즐겁지 않고 그 결 과 예배에 빠지는 일을 예사롭게 하며, 매일 성경을 읽지 아니하며, 기도생활을 등한히 하게 되고 매사에 부정적인 사고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경우에 대개 하 나님을 섬기는 일은 의미가 있는가? 교회를 섬기는 일이 어떤 유익이 있는 가? 기도하는 일은 의미가 있는가? 등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형태가 길 어지면 어느새 신자로서 품위와 삶을 잃어버리게 되고 삶의 기쁨과 풍요도 잃어 버리게 됩니다. 사실 저도 이러한 영적인 슬럼프에 빠질 때가 있었습니다. 누구 나 슬럼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영적인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슬럼프를 만날 때 믿음이 표현이 되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이때에 믿음생활에서 이탈하 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유명한 골프 선수 타이거 우즈에게 슬럼프를 당할 때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슬럼프에 빠지면 더 많은 연습을 통해 정상을 되찾곤 합니다. (조영탁, 행복한 경영이야기, 562호)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생활의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법도 이와 동일합니다. 성경을 연 구해 보면 영적인 슬럼프를 극복하는 데는 특별한 묘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슬 럼프를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님과 관계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신앙생활에 기본기 에 해당하는 예배생활에 충실하고 있는가? 매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생활에 적용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고 있는가? 기도생활은 제대로 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있는가? 교회에서 맡은 직분을 성실하게 최 선을 다하여 섬기고 있는가? 등을 확인하고, 이 일을 계속하여 하는 길 외에 다 른 방법은 없습니다. 성경은 이 외의 다른 방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 로는 갈등을 일으키고 힘들게 한다고 할지라도 인내하며 계속하여 믿음의 기본 기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덧 영적인 슬럼프를 극복하고 더 나은 단계 로 믿음이 업그레이드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전극동방송국 5분 칼럼 (2006. 06. 28.)

목회칼럼(2009. 07. 26.) 믿음과 현실 사이의 갭(gap) 제가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치열하게 갈등하며 부르짖은 것 은 내 자신이 하나님과 교회에 대하여 믿는 믿음과 나타난 현실 사이의 갭으로 인하여 오는 갈등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신 대로 의로우신 분이시고 또한 공의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다는 사실도 믿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불의하고 거짓을 말하며 진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형통하고 심지어 하 나님의 교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안겨준 사람들이 형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강남의 한 유명한 교회의 장로와 집사들이 건강 한 상식을 가진 자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삶을 살았는데도 형통하여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를 각 분야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온 세 상의 주가 머리로 계시는 교회, 하나님이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들의 인격과 삶을 유린하고 모해하며 고통스럽게 한 사람이 형통하고 있습 니다. 심지어 직접 흉기로 죽이거나 목을 매달지는 않았지만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도록 심리적으로 압박하여 죽게 한 살인자들(?)이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고 살고 있고,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 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의로우시며 교회 안에 임재해 계신다는 믿음과 나타난 현실 사이의 갭으로 인하여 갈등이 있습니다. 믿음과 현실의 갭(gap)에서 오는 갈등은 목회자인 저에게 더 많이 있습니다. 특히 목회자인 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함과 은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말씀의 능력과 기도의 능력, 기쁨과 희망과 승리에 대한 내용을 설교하므로 위로하고 권면합니다. 하지 만 저의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무한한 능력, 말씀의 능력과 기도의 능력을 설교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와 기쁨 과 은혜를 설교하지만 수시로 찾아오는 공허함과 무력감과 분노와 좌절감, 의심 과 갈등이 있습니다. 때로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 사람들, 특히 유명 목사들의 농담거리로 사용되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발판 정도로 사용되는 현실에 분노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에 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분명 아름다운 결과와 미래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데 이상하게도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고, 교회에도 역시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 아 결과적으로는 목회자인 저를 믿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 분노하고 가슴치며 통곡하곤 합니다. 그리고 악한 자들이 형통하는 것처럼 보일 때 더욱 그러한 감정이 밀려오곤 합니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들을 가리켜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 고 단정을 짓고 정죄하곤 합니다. 심지어 제 주변의 목사님들도 제가 이러한 문 제에 분노하고 갈등하는 것을 듣고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훈계(?)하기도 합니 다. 그러나 참된 성도들이라면 이러한 갈등이 없는 것이 비정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로 인하여 타락한 순간부터 인간과 사회에 나타나는 여러 부조리( 不 條 理 )한 현상으로 인하여 갈등하고 고통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감추어진 질서세계인 영적인 세계에서 사탄이 집요하고도 교묘하게 활동하기도 하고, 신비로운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 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들이 자신 안에는 없는 것처럼 스스로 은폐하고 위장하여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말하 지만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삶일까요? 마음 깊은 곳에는 이러한 감정과 고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도할 때는 언제나 거룩하고 신령하게 보이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과연 바른 경건의 행동일까요? 성경 가운데 언약백성으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기술한 시편은 성도의 기쁨과 감사와 정서만이 아니라 탄식과 괴로움과 고통과 분노와 불평, 의심, 두려움, 저 주 등을 여과없이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삽은 시편 73:12에 볼지어다 이 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라고 불평하였고, 다윗은 악인들 을 향하여 시편 58:8에 소멸해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기되지 못하여 출생 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라고 저주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갈등하며 불평하고 저주하며 기도한다고 해서 믿음없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 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믿음과 현실의 갭(gap)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갈등과 고통이 있다면 이것은 불신앙이나 믿음 없음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시편 저자들의 대부분은 믿음이 없는 행동으로 정죄되어야 합니다. 믿음과 현실에 대 한 갭으로 인한 갈등과 고통은 오히려 참된 믿음의 발로라고 보아야 합니다. 왜 냐하면 그러한 갈등이나 고통은 믿음대로 되기를 바라는 열망으로 인하여 생긴 현상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의 아픔과 느끼는 감정을 시편기자들처럼 진솔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믿음과 현실의 갭으로 인한 갈등과 아픔과 좌절감과 고통, 분 노, 의심 등을 쏟아놓지만 동시에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 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시73:25-26)라는 성도의 고백처럼 믿음의 줄을 놓지 말고 더 굳게 붙들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은 단순히 갈등이나 불평이 나 분노로 머물지 않고 믿음을 현재화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칼럼(2009. 07. 26.)

목회칼럼(2009. 08. 16.) 교회와 교리 1 요즘 우리 한국교회는 교리를 무시하고 인간의 기호를 좇아가는 반 교리적인 경향들이 어느 시대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지금의 시대적 사조와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지금의 시대사조는 절대적인 진리를 무시 하고 모든 진리를 상대화시키는 포스터모더니즘 사상과 여기에 영향을 받은 종 교다원주의, 그리고 통일된 교리가 없이 모든 교파를 두루 만족시켜야 하는 복 음주의가 기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사조로 인하여 교리는 교회를 분열하는 것처럼 조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리는 교회를 분열한다 라 고 겁없이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아주 교묘 한 사탄의 전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리를 무시하는 것은 성경의 진리 를 인간의 주관이나 직관에 의존하는 잘못된 경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결과 기독교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며,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적인 교리가 가르쳐지지 않고 체험이 강조되는 것이 얼마나 위험 한 일인지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 담임목사가 건강상의 이 유 때문에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후임 목사를 청빙하는 문제에 있어서 교인의 대표라고 하는 사람이 기도하는 가운데 꿈에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고 주장하여 공적인 절차를 통하여 소개된 목사님을 청빙하는 일에 많은 어려움 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교인의 대표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분들도 하나님의 계 시를 들었는데 나름대로의 후임 목사에 대한 관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가 귀신이 들렸거나 거짓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하나님은 이러한 방식으로 말씀하시거나 계시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 교회에 성경적인 교리를 가르쳤다고 한 다면 성경적인 원리와 분명한 정치조례에 의해 결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래서 교회에서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는 일은 참 중요합니다. 교리가 이처럼 중요한 일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교리가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 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교리보다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기만 하면 거기에 나타난 핵심적인 내용을 알 수 있을까요? 물론 성령 께서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 신비스러운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리적인 기초가 없이 성경을 읽으면 인간의 주관이나 사색에 지배되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 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에 제한이 있기 때문에 각자의 신학적 전통과 교리에 따 라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교리가 성경 말

씀 위에 있다는 말은 더욱 아닙니다.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항상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근거한 교리는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에 대하여 밑그림을 보여주고, 그 그림에 묘사된 내용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시각을 줍니다. 그래서 교리는 참 중요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올바르게 사는 윤리가 필요한 것이지 교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상도 잘못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윤리 적인 행위도 교리적인 기초 위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교리 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올바 른 삶은 항상 바른 교리와 함께 시작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에서 증명해 주 고 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윤리적인 명령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교리적인 부분을 먼저 말하였습니다. 이 교리가 없이 윤리 적인 부분만 강조하다보면 윤리적인 삶이란 마지못해 행하는 종교적인 행위로 나타날 수도 있고, 동시에 본성과 반대되는 이중적인 삶을 노출할 수도 있습니 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구원의 사역, 즉 교리를 알고 난 뒤에 모든 윤리적인 명령들은 그 은혜에 대한 감사로 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리는 우리를 차갑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용광로 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랜 목회경험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 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들을 때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지 기독 교가 한 종교요 삶의 여러 방편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조금 선하게 산다는 것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열정적이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그가 뜨겁게 달구어 진 경험이 없거나, 달구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우리 삶의 기초요 우 리의 기본적인 마인드를 바꾸는 원동력입니다. 그래서 이 교리는 항상 실천적으 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 교회는 교리를 배우고, 가 르치는 일에 더욱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대전 극동방송국 5분 칼럼 (2000. 02. 11.)

목회칼럼(2009. 08. 23.) 하나님의 주권과 기도응답 우리 신자들의 생활에서 기도만큼 중요하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것은 없다 고 말할 정도로 기도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도라면 마땅히 기도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의 변두리에 덧붙은 작은 습관 가운데 하나가 절대로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 삶의 가장 중심부분을 차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우리 신자의 삶 자체이며 본질에 해당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하나 님과의 만남을 경험하고 말씀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지 식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전지하심, 신실하심, 전능하심, 인도하심 등이 이론적 인 지식이 아니라 실제 우리 생활 가운데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 서 우리는 기도를 훈련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생활을 변화시키며 창조적인 삶으로 바꾸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은혜로운 기도가 많이 오용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분과 기도의 상관관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 리는 쉽게 어떤 능력있는 목사님이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목 사님 가운데 신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특별한 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 런데도 요즘 교회에 나타난 이상한 현상 가운데 한 가지는 소위 능력있는 목사 님을 초빙하여 기도해 주고 헌금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교 회에 목사님이 기도해 주면 불치병이 낳는다고 하여 모든 퇴직금을 바치게 하였 는데 병이 낫지 않자 헌금반환을 요구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또 요즘 필요한 자금을 얻기 위하여 소위 능력있는 목사님(실상은 삯군 목사)을 초 청하여 질병을 위해 기도해 주고 헌금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기도의 상관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육신의 질병으로 곤경 가운데 빠져 있을 때 절대자를 찾고 구하 는 것은 그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인간 모두에게 있는 본능적인 것이고 자연 스러운 일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할 때 내적으로 평안을 얻어 실제로 치유함을 얻는 일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들의 신앙과 삶이 모든 면에서 불경건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기도대로 건강함을 얻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치유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 은 참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치유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 하고 구원에 이르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방편도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가 응답되는 문제에 대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의 믿음이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 실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 가운데 어떤 분들을 위해 우리 교회 가족들과 합심하여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분은 나아 서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분은 지금까지 열심히 기도하고 있 지만 낫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우리의 능력이 없어서거나 믿음이 없어서 치료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러한 일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부분은 분명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 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치유하시는 능력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고 통을 그대로 지고 가야할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아무리 능력있는 사람 (?)이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치유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분 에 해당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도 바울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있는 질병을 떠나게 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세 번씩이나 주님께 간절히 간구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고후12:8-9)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질병도 주님이 주시는 은혜요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볼 때 때로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그것이 곧 믿음이 없거 나, 능력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 도를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분과 관련하여 균형있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당하게 되는 여러 가지 질병과 고통에 서 건져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하나님 께서는 우리의 문제들과 질병들을 주님께 다 가져오고, 또한 기도하라고 말씀하 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문제는 해결해 주시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 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경우는 신학적으로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가운데 있다는 배우는 일입니다. 이 사실 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된다면 오늘날 교회 안에 기도를 빙자하여 성도를 우롱하 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는 더 크고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00. 02. 18. 대전 극동방송국 5분 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