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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인류역사를 연대별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통 념을 깨뜨리고 연대별로 정리한 글 인류는 언제 탄생했으며 농사는 언제부터 시작됐고 문 자는 언제부터 생겼으며 법이란 언제 어떻게 왜 만들어 졌는가? 종교가 생긴 원인과 기계는 누구에 의해 언제 발명됐 으며 불평등한 삶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분석한 글. 대학에서도 못 배우고 밥은 굶어도 반드시 알아야 할 진실 <밥,알,진> 인간은 자신이 습득한 지식만큼 세상을 볼 수 있고 자 신이 습득한 지식만큼 세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권력욕이나 명예욕을 가진 사람들은 80Km로 달리는 차로 120Km를 달리는 차량을 선도( 先 導 )하겠 다고 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싶고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려하며 진실은 외면합니다. 역사와 정치 ㆍ 경제란 무엇인가?

서 문 필자는 1956년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에서 태어나 철암국민학교를 다니다 1968년 부친을 여의고 이용소 머리감는 꼬마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70년부터는 강원도 인제에서 이용소 머리감 는 꼬마로 생활했고 그 후 요리 집의 보이(웨이터)생활도 하고 요리사노릇도 하다 1978년 이용사면허증을 취득했으나 이용업에 종사하지 않고 1979 년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으로 내려가 결혼하면서 먹고 살기위해 석탄광부생 활을 시작합니다. 탄광에서 몇 차례 해고되고 해고투쟁을 전개해 복직되므로 이름이 알려져 1990년 탄광지역 총파업 때 한보탄광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됐다 구속됐 으며 이후 건설현장에서 비계공으로 철골도비로 서울에 올라와 지하철건설 현장에서 노동을 하다 1992년 김영삼 정권에서 사면복권이 됐습니다. 그 후 석탄합리화 사업으로 탄광들이 폐광됐기 때문에 1994년에 강원도 동해로 내려가 1996년에 시내버스 운전사가 됩니다. 시내버스운전사로 취업하고 노동조합대의원으로 선출 돼 활동했으나 관리 자(배차)에게 폭행당하고 오히려 해고되므로 해고무효투쟁을 전개하던 중 부 인이 당신은 노동운동에 미쳐 처ㆍ자식을 부양할 자격이 없으니 나가라. 면서 쫓아내므로 혼자가 돼 2000년 서울에 올라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2004년 서울에서 시내버스운전사로 취직했으나 2006년 한건의 사고가 발생했다는 핑계로 해고하므로 또다시 직장을 잃고 해고투쟁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며 방황하던 중 2007년 탄광에서 구속됐던 사건이 민주화운 동으로 인정되고 2008년 촛불집회가 벌어집니다. 촛불집회에서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직을 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주의 활동을 한다는 사람들과 대화하며 충격을 받았습 니다. 사회주의 활동을 한다는 사람들과 대화 중 화폐도 노동자들이 만들어 낸 생산물이므로 존치시켜야 한다, 고 주장하는 말을 듣고 모든 결과에는 원 인이 있는데 불평등의 근원을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가 평등한 사회 를 건설한다면서 오히려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라며 고심했습니다.

인류가 평생 생산노동을 하고도 빈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원인은 노력 한 만큼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고 착취와 갈취가 합법인 체제와 제도 때문으 로 착취와 갈취가 형성되고 유지되는 근원을 분석하려고 노력해야 모든 착 취와 갈취를 해체시킬 수 있게 되므로 필연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길을 가다 돌에 맞았다면 맞은 사람이 건설 현장이나 낙석위험 밑으로 지 나가거나 아니면 누군가 돌을 던져 맞은 것이지 원인 없는 결과란 없습니 다. 그런데도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고 결과만 놓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기 득권을 차지하고 근원을 은폐하려는 무리들이 하는 주장이고 과학적으로 생 각하는 사람들은 원인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 사람을 만나도 주거지(거주지)나 직장이 같은 동네에 있거나 왠 지 걷고 싶어 그쪽으로 갔는데 상대방의 직장이나 거주지가 거기 있다거나 아니면 회사일로 또는 무료해서 그 장소를 갔다거나 원인이 있어 결과가 나 타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먹을거리는 농민ㆍ어민이 수확ㆍ채취 한 물질이지만 농민과 어민이 수확ㆍ채취하기 위해 사용하는 농기구과 어 선ㆍ어구 등 모든 물질은 노동자들이 땀 흘려 생산한 물질이지 시장이나 화 폐가 아닙니다. 인류역사는 실패를 경험하며 발전한다면서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냉철 하게 분석하지 않고 실패한 경험만 강조하는 것은 역사를 거스르려는 무리 들이 피 착취자들에게 분노만 표출하다 억압당하고 포기하라는 의미가 됩니 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왜 평등한데 무엇 때문 에 어떻게 통제당하고 억압받으며 불평등한 삶을 살게 됐는가를 분석해야 하며 지도와 지시가 함유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설명돼야 합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되려면 자유와 평등을 부정 하는 통제의 기틀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고민해야 하고 억압과 착취의 근 원을 깨트리려 노력해야 모두가 평등하며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습 니다. 불평등은 자유를 부정하고 통제하고 지시하는 행위가 일어나는 곳에서 만 들어지는 것이고 통제하고 지시하는 행위들을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 아드리도록 강요하는 것이 집단이나 조직이라는 명분들이 정해놓은 규칙(법)

입니다. 그러므로 왜곡된 평등과 자유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모두가 실질적으로 평 등하고 풍족하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해법 을 찾기 위해 이글의 집필을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지 못하다 2010년 봄 집필을 시작했으나 얼마 쓰지 못하 고 생활고 때문에 김치공장에 들어가 노동을 시작했는데 공장에서 관리자 (반장)라는 사람의 비인격적인 행위에 공장을 그만두고 집필에 열중했습니 다.

목 록 1. 인류의 탄생 1 ~ 5 2. 초기의 생활상 6 ~ 7 3. 집단생활의 시작 8 ~ 11 4. 원시종교의 출현 12 ~ 12 5. 농경의 시작 13 ~ 17 6. 문명의 발달 18 ~ 23 7. 노예시대의 시작 23 ~ 26 8. 법(규칙)의 출현 26 ~ 32 9. 모세의 탄생 32 ~ 35 10. 석가의 탄생 35 ~ 38 11. 로마제국의 출현 38 ~ 43 12. 로마공화정으로 발전 43 ~ 49 13. 스파르타쿠스 저항 49 ~ 53 14.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53 ~ 55 15. 예수의 탄생 55 ~ 59 16. 로마제정의 출발 60 ~ 64 17. 자유사상의 종교화 65 ~ 68 18. 로마제국의 분리 68 ~ 69 19. 무함마드(영어 명: 마호메트)의 탄생 69 ~ 75 20. 서로마제국소멸과 비잔티움 76 ~ 77 21. 봉건시대(중세) 77 ~ 82 22. 백년전쟁과 농민혁명 83 ~ 86 23. 소작농의 출현 86 ~ 93 24.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93 ~ 97 25. 농민혁명과 수공업발전 98 ~ 107 26. 종교전쟁과 청교도 혁명 107 ~ 112 27. 식량생산의 대량화 112 ~ 117 28. 평등사상의 발전 117 ~ 122 29. 왕권계승과 학살전쟁 122 ~ 125 30. 자유를 위한 저항 125 ~ 133

31. 군부독재 출현 133 ~ 141 32. 노동자저항과 혁명 142 ~ 149 33. 유산자ㆍ위선자 민주주의 149 ~ 154 34. 다수결 선거선출주의 155 ~ 162 35. 전기의 발전 162 ~ 165 36. 모터의 발견 165 ~ 166 37. 자동차의 출현 166 ~ 168 38. 생산의 자동화 168 ~ 175 39. 광산노동자들의 저항 175 ~ 179 40. 공황과 학살전쟁 179 ~ 184 41. 전쟁을 혁명으로 184 ~ 189 42. 공황으로 독재정권 발호 189 ~ 197 43. 스페인 내전 197 ~ 201 44. 엄청난 인명살상 2차 대전 202 ~ 207 45. 가톨릭과 개신교의 조선장악 207 ~ 211 46. 시장자유주의 확산 212 ~ 216 47. 신용카드와 대형마트 출현 216 ~ 218 48. 생산로봇의 출현 218 ~ 221 49. 체코혁명과 금융대공황 222 ~ 225 50. 평등한 사회 225 ~ 227 51. 생산과 분배 228 ~ 231 52. 남녀의 평등 231 ~ 235

인류의 탄생 현재까지 지구에서 발견된 화석으로 보면 약 500~ 100만 년 전 지금의 아프리카 지역에서 인류의 최초조상이라 할 수 있는 원인( 猿 人 )류가 탄생(오 스트랄로피테쿠스/호모하빌리스)해 거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원인에 속하는 화석표본에는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지만 모두 직립자세 (두발로 걸음)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과, 또 그것은 골반의 형태나 두 개저 ( 頭 蓋 底 )에 있는 대후두공( 大 後 頭 孔 )의 위치와 크기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약 500만 년 전 아프리카는 동서로 왕래가 불가능하도록 남북을 관통하 는 산맥이 형성돼 동, 서 양쪽에 서로 다른 진화를 일으키는 환경적 요인으 로 작용했는데 산맥의 서쪽은 풍부한 강수량으로 열대우림이 있었기 때문에 나무열매 등 먹이가 풍부해 두 다리로 걸어야만 하는 진화가 필요 없으므로 계속 나무위에서 사는 동물로 남았다고 합니다. 반면 산맥의 동쪽은 구름으로 막혀서 수량이 줄면서 숲이 차츰 사라지고 초원이 나타났기 때문에, 원 인류는 먹이를 구하기 위해 숲과 숲 사이의 초 원을 걷게 된 것이며, 이때 존재했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같은 원 인류가 진화하면서 현재의 인간이 됐다는 것입니다. 현생인류와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침팬지의 경우 아과( 亞 科 )인 호미니 데(Hominidae)까지 현재의 인간과 흡사하며 고생물학적 연구결과 인간과 침팬지는 6백 5십만 년에서 7백 4십만 년 전 사이에 갈라졌을 것으로 분 석되고 있으며, 분자생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5백 4십만 년에서 6백 3 십만 년 전에 갈라졌을 것이라고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 두 그룹은 97에서 99.4%까지 같은 DNA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 져 일부 학자들은 침팬지를 호모(Homo)속( 屬 )에 넣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 고 있는 것입니다. 현생 영장류를 분류하면 우선 반 원류( 半 猿 類 )와 원류( 猿 類 )로 나뉘고 원류 는 유미원류( 有 尾 猿 類 )와 유인원으로, 유미원류는 다시 구세계원( 舊 世 界 猿 ) 과 신세계원( 新 世 界 猿 )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반 원류는 얼핏 보면 원숭이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가장 원시적인 종류로 안경원숭이 여우원숭이 등이 여기에 속하며 유미원류는 원숭이나 비비( 狒 狒 )에 해당하고 신구 양 대륙에 갈라져 있으며, 서식하는 방식에 뚜렷한 차 이를 보인다고 합니다. 느낌 1

꼬리가 있는 원숭이와 대비해 꼬리가 없는 것이 곧 유인원으로 오늘날 적 도아프리카에 서식하는 고릴라와 침팬지, 동남아시아에 서식하는 오랑우탄 과 긴팔원숭이 등이 이에 포함된다고 할 것이며, 이들 각군( 各 群 )은 지금부 터 약 6,000만 년 전인 신생대초기에 존재한 조상에게서 점차 갈라져 나 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신생대는 제3기와 제4기로 나뉘고 제3기는 다시 팔레오세( 世 ) 에오세 올리고세 마이오세 플라이오세로 나눠지며 제4기는 이른바 인류의 시대 로 지금부터 약 200만년(약 100만년으로 추정하고 있었으나 최근의 새로 운 연대측정법에 따라 늘어났음)전에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발견된 화석을 자료로 보면 신생대초기에 현생의 반 원류와 비슷한 종류가 살았고 에오세에 이르러 신세계원이 유미원류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 정하며 구세계원 계통에서 유인원의 첫 조상은 올리고세에 서식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무렵에는 긴팔원숭이 계통에서 이미 갈라져 나왔고, 마이오세에서 플라 이오세 초기에 걸쳐 다른 세 종류로 변화(진화)된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생물학에서는 이른바 계통수에서 인류로 진화 하는 과정이 언제 갈라지게 됐는가 하는 점에 대해 여러 주장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인류와 유인원의 근연( 近 緣 )관계를 강조하는 설의 경우에는 마이오세말기 또는 플라이오세에 고릴라나 침팬지계통에서 갈라졌다는 설과 그 반대로 마 이오세초기 또는 올리고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이 서로 대립하는 것 입니다. 두 발로 걷고 도구를 사용하는 인류는 제4기가 돼 나타나는데 제4기는 홍 적세와 충적세로 나뉘고 있으며, 홍적세는 다시 네 차례의 빙하기와 그 사 이의 간빙기로 분류하고 약 l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 기후와 동식물 상( 動 植 物 相 )이 오늘날과 거의 비슷해진 시대를 충적세로 분류합니다. 화석을 통해 판단되는 홍적세에 나타난 인류로는 원인( 猿 人 ) 원인( 原 人 ) 구인( 舊 人 ) 신인( 新 人 )으로 분류하며 원인( 猿 人 )으로는 남아프리카의 오스트 랄로피테쿠스와 파란트로푸스, 동아프리카의 진잔트로푸스가 대표적이고 적 어도 진잔트로푸스는 제1빙기 이전인 200만 년 또는 100만 년 전에 살았 던 가장 원시적인 인류라고 간주되고 있습니다. 초기 원 인류는 직립보행을 하면서 골반이 발달해 넓어졌으며 팔은 도구를 느낌 2

사용할 수 있도록 충분히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에 보행에 지장을 주지 않도 록 발달(진화) 했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짐승을 물어죽이기 위해 있었던 송곳니는 발달하면서 음식을 씹기 편 리한 치아로 진화 했고 하악관이 발달되면서 머리도 커지고 뇌 용량도 커졌 다고 합니다. 약 170~30만 년 전에는 원인( 原 人 )(호모에렉투스)류가 거주했으며, 이들 은 추운빙하기가 닥치자 아프리카에서 벗어나 아시아, 유럽 등으로 이주하 므로 삶의 영역이 넓어졌는데 자바원인, 북경원인, 하이델베르크인 등이 이 에 속한다고 보고 있으며 공식 학명으로 호모에렉투스라고 명명되고 있습니 다. 지금까지 발견된 석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약 240만 년 전 것으로 인류 가 처음 사용한 석기를 일반적으로 올두바이공작(OldowanIndustry) 이라 하며, 이때 사용한 석기는 그때그때 임시적으로 만든 것으로 판단되고, 이보다 정제된 석기는 발달한 올두바이공작(Developed OldowanIndus try) 이라 하며 이후 매우 정제된 형태로 발견된 석기를 아리안공작 이 라고 합니다. 아리안공작은 아프리카와 유럽 및 인도에 걸쳐 발견됐는데 모든 곳에 분 포된 것은 아니며 대표적인 석기는 주먹도끼를 비롯한 각종 양면가공석기 (biface)로 이런 석기는 약 150만 년 가까이 호모에렉투스와 초기 호모사 피엔스집단이 사용한도구로 보이며, 석기제작에는 돌보다 강도가 약한 나 무 사슴뿔 등을 사용해서 원석을 때리는 방법과 간접타법을 응용해 보다 정제된 형태의 석기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호모에렉투스란(똑바로 선사람)뜻으로 원인에게 직립인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500~200만 년 전 직립보행 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화석이 먼 저 발견됐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때부터 불을 사용해 원인들은 추운 혹한기가 발생되는 온대지방까지 분포할 수 있게 됐다고 추정하는 것이며 오랜 기간 생각하는 생활을 하므로 두개골용량은 850~1200ml로 커지고 주먹도끼(손도끼)라고 불리는 돌망치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석기시대 중기인 약 20만~35,000년 전에는 구인( 舊 人 )(호모사피엔스) 이 나타나 생활한 흔적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되는데 이들은 몸에 동물의 가 죽을 걸치거나 지붕과 옆면을 막고 움집을 지어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할 줄 알았고 불을 자유롭게 사용하므로 추운지역까지 삶의 범위를 넓힐 수 있었 으며 머리도 커져 뇌의 용량이 1200~1600CC까지 발달해 현생인류(신 느낌 3

인)와 비슷했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생활상은 시체를 매장하거나 시체에 채색을 하기도 하고 동굴에 거 주했으며 석기제작 등의 기술이 발달되면서 박편석기(원석을 보다 정교하게 만든 석기)인 돌칼, 돌송곳, 돌창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1859년 독일의 네안데르탈에서 발견된 화석은 지명의 이름을 따 네안데르 탈인이라고 부르는데 이때의 인류를 호모사피엔스의 일종(혹은 아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3만 년 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인류를 신인( 新 人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이라 칭하며 상동인, 그리말디인(Grimaldiman), 크로마뇽 인(Cro~Magnon man)등 화석인류와 현대인을 통 털어 부르는 명칭 으로 공식학명은 현대인의 학명과 똑같이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라고 부릅니다. 1868년 프랑스남부 크로마뇽지방에서 화석으로 발견된(크로마뇽 인)은 오늘날 북부유럽인과 외모, 두뇌의 크기가 비슷해 뇌 크기는 1500~1600CC 정도며 타제석기를 사용했고 골각기(작살), 활과 창 등을 사용했던 기록들이 라스코동굴에 벽화로 남아 있어 이때의 생활상 그리고 주술적의식과 예술적 감각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인류의 조상이라며 아래에 적시한 종들이 600~700만 년 전부 터 있었다는 학설이 계속 나오고 있으나 그만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Sahelanthropus tchadensis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 700만 ~600만년 전) Orrorin tugenensis (오로린 튜게넨시스, 600만~580만년 전) Ardipithecus ramidus (아르디피데쿠스 라미두스, 440만년 전) Australopithecus anamensis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나멘시스, 420 만~390만년 전) Australopithecus afarensis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380 만~300만년 전) Kenyanthropus platyops (케냔트로푸스 플라티옵스, 400만년 전) Australopithecus africanus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300만~250만년 전) Australopithecus garhi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가르히, 250만년 전) (파란트로푸스 속으로 분류되는 3종이 있다고 함. 270만~120만년 전) 느낌 4

Homo habilis (호모 하빌리스, 240만~170만년 전) Homo georgicus (190만~180만년 전) Homo erectus (호모 에렉투스, 180만~10만년 전) Homo ergaster (호모 에르가스터) Homo antecessor (호모 안테세소르) Homo heidelbergensis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하이델베르크인), 60 만~20만 년 전) Homo neanderthalensis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네안데르탈인), 20~3만 년 전) Homo floresiensis (호모 플로레시엔시스, 2만~1만 년 전) Homo sapiens (호모 사피엔스, 20만~현재) 느낌 5

초기의 생활상 문명사학자들은 대체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 시대까지를 모계중심사회로 분류하고 인류가 무리지어 생활하면서 초기농경사회를 이루었고 청동기시 대가 되면서 부계중심사회로 바뀌고 그 후 고대부족국가로 발전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초기 원 인류는 야생에서 생활하면서 눈ㆍ비를 피 하고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동굴에서 거주했고 먹을 것을 찾아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며 사냥도 하고 열매를 채집해야 했기 때문 에 따뜻한 기후로 변화되는 곳을 따라 이동하며 살았다고 봅니다. 누구에게 통제당하거나 간섭받지 않고 자연에서 자유롭게 동물들을 사냥 하고 열매를 채집하며 살던 원 인류들은 나무막대기를 창처럼 찌르거나 몽 둥이처럼 휘두르고 주먹돌을 가지고 사냥하면서 손의 쓰임새가 늘어나 손이 점점 더 자연스럽고 정교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화산폭발과 번개, 그리고 나무들이 바람에 부대끼면서 수백만 년 동안 수많은 화재가 발생했다는 사실들은 유추할 수 있고 불에 타죽은 동물 들의 시체를 먹고 맛있다는 사실을 안 원 인류는 불을 사용하면서 음식을 익혀 먹기 시작했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초기에는 자연발화로 발생된 불을 사용했을 것이나 돌을 무기나 칼로 사용 하기 위해 깨다 불통이 튀어 마른풀잎에 불이 붙기도 했을 것이며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부대끼는 소리를 관찰하다 나무는 마찰에 의해 불이 붙는 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싯돌과 나무를 비벼 불을 붙이면서 불을 다루게 됐다 고 보는 것입니다. 원 인류가 불을 사용하면서 부터 사나운 맹수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어두운 밤에도 생활할 수 있어 활동하는 시간이 늘어났을 것이며 빙하기와 혹한기의 추운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리라 봅 니다. 불은 사용해 음식물을 익혀 먹게 된 원 인류들은 음식을 담아 익히는 그릇 이 필요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단순하게 흙으로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을 것이며 지금도 아프리카 일부 부족들이 사용하듯 돌을 불에 집어넣고 뜨겁게 달궈서 달궈진 돌과 음식을 땅에 묻어 익히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생활을 반복하면서 흙에 특정 물질을 섞어 불에 오래 두면 단단해 진 느낌 6

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흙으로 빚어 불에 구운 그릇(도기)을 사용하기 시작했 을 것이며 돌을 불에 올리거나 받쳤다 달궈진 돌이 녹으며 흘려내려 반짝이 는 현상을 발견하고 반짝이는 물질인 금과 은을 추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 정을 통해 청동기와 철기도 발견하게 됐다고 추정합니다. 금이나 은은 녹는 온도가 약해 빨리 발견됐지만 청동과 철기는 녹는 온도 가 높을 뿐 아니라 연금술이 발달돼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흘러 발견됐을 것이고 비교적 낮은 온도에 녹는 은과 금이 먼저 발견됐을 것입니다. 구석기시대에는 날카로운 돌을 주워 사냥한 동물들의 껍질을 벗기며 생활 했을 것이고 날카로운 돌이 없으면 돌을 부딪쳐 깨트려 날카로운 면을 만들 어 사용했는데 큰 몸돌에 충격을 가해 날카롭게 떼어내 사용한 시기를 뗀 석기시대라 부릅니다. 당시를 모계사회라고 하는데 욕정이 발동한 수컷들은 암컷을 보면 교접(섹 스)을 가졌을 것이며 교접 후 수컷은 떠나고 또 다른 수컷들을 만나면 또 교 접을 가질 수밖에 없는 암컷들의 생활이 반복되면서 잉태를 한 암컷들은 홀 로 아이를 낳고 키워야했을 것입니다. 자연에서 먹을거리를 사냥하거나 채취하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수백 만 년 동안 하며 살았기 때문에 난교( 亂 攪 )로 태어난 아이들은 부계가 누군 지 알 수 없고 단지 자신을 낳고 키워준 모계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자 연스럽게 모계사회를 형성했다고 판단합니다. 동물 세계를 보면 하이에나는 암컷의 몸집이 더 크고 강해 무리를 이끌고 있으며 수컷들은 홀로 사냥할 수 있도록 성장하면 무리에서 추방하거나 암 컷에게 복종하며 살아가기도 하고 사자의 생활을 보면 암컷들이 사냥을 하 고 새끼수컷들이 사냥할 수 있게 성장하면 무리에서 추방당해 자유롭게 떠 돌이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들소나 사슴 등 여타 동물들의 생활도 힘센 수컷이 우두머리로 무리속의 모든 암컷들과 번식할 수 있는 교접권한을 가지며 생활은 평 동물이나 귀족 동물이라는 구분 없이 우두머리를 이긴 수컷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고 우 두머리가 되면 자기 유전자를 퍼트리는 교접을 위해 암컷들이 양육하는 새 끼들을 물어죽이기도 합니다. 느낌 7

집단생활의 시작 백 만년 이상 이어졌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과 같은 생활은 신분이나 계급이 있어 엄격히 통제하고 지시하는 복종적 형태는 없었고 사나운 맹수 에 대항해 집단을 지키고 먹을거리를 채취하거나 사냥하기 위해 공동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상호도모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자유롭게 생활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신분이나 계급제도가 없으니 우두머리만 힘을 과시했을 것이고 후손이란 종족보전과 동시에 사냥하는 힘의 원천이므로 집단이나 무리가 모두 협심하 여 함께 공동으로 양육했을 것이라는 것은 추론 가능하며 이렇게 수백만 년 동안 종족번식과 보전을 위해 살았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모계사회의 흔적들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히말 라야산맥 끝자락 중국 사천 성 서부지방의 대소금천지역의 강 하류에 위치 한 여왕 곡으로 이곳은 빙하가 밀려오면서 만든 협곡이 워낙 험준해 외부와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다부일처( 多 夫 一 妻 )제의 모계사회를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부일처 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남성들이 여성들 보다 월등하게 많이 태어나는 현상이 있어 성비( 性 比 )가 맞지 않고 남성의 수효가 많기 때문에 일부일처제를 하면 결혼하지 못하는 남성이 많이 생겨 분쟁이 끊임없을 것이라는 명분도 한몫 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는 남자가 결혼하려면 여성의 부모에게 지참금을 지급하고 얼마든 지 부인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남자는 결혼지참금을 지급한 이후부터는 일 을 하지 않고 놀아야 하며 남자가 돈을 벌면 돈을 벌어 후처를 얻으려고 한 다며 부인에게 폭행당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집단이 생계를 책임지지 않는 무리에서 생활해온 여성이나 남성이 여성을 폭행할 수 있고 죽임까지 행사할 수 있는 가부장적 집단 또는 무리에서 살 아 온 여성일수록 정조( 貞 操 )관념이 강해져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을 스스로 제한하며 억압된 생활을 합니다. 무리나 집단이 생계를 책임지며 많은 지식을 습득한 지역여성들은 가족주의 에 갇히지 않고 처녀( 處 女 )를 버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자유롭고 개 방적인 생활을 하지만 많은 지식을 습득하지 못했거나 억압된 틀에서 성장한 여성들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정과 욕망을 억누르며 가족을 중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느낌 8

이런 현상은 집단이나 무리가 생계를 책임지지 않고 남성이 물질을 가져와 야 살아갈 수 있는 가부장적 환경에 길들려졌으며 결혼은 운명이라는 거짓 에 세뇌됐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폭력도 참아야 하고 아이는 늙었을 때 생 계를 보장해주는 보험이라고 판단해 제도와 체제에 순응하며 스스로를 억압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와 이스라엘도 모계중심사회를 구성하고 있는데 유럽의 많은 국가들 중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농경을 중심으로 구성됐던 부족들은 사냥을 하며 살았던 부족보다 농사를 짓거나 열매를 채취하는 등 노동을 하는 일손(노동 력)을 많이 생산하는 여성을 우대할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ㆍ식물은 영양분을 섭취해야 살 수 있는데 인류 는 영양분을 먹을거리로 충당하고 먹을거리는 동물을 사냥하거나 물고기를 잡고 아니면 자연에서 채취 또는 수확한 곡물로 유지됩니다. 힘센 남성들은 주로 사냥을 했겠지만 실패할 확률도 높아 안정적이지 못한 데 비해 수태기간 때문에 육체적 활동이 부자유스러운 여성들이 덜 위험스 러운 자연에서 과실과 곡식을 채집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거나 열매를 거둬들이려면 일손이 많이 필요할 수밖에 없고 따라 서 일손을 생산할 수 있는 여성이 당연히 우선되는 것이며 특히 아이를 많 이 생산하는 여성을 우대하며 자연스럽게 모계사회를 구성했다고 보고 있습 니다. 초기 원 인류는 모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무리가 공동으로 사냥 하기 위해 사냥을 가자거나 어디에 사냥감이 있다거나 어느 방향으로 달아 나고 있으니 포위하라거나 하는 무리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의 표현 은 필수적으로 필요했을 것으로 봅니다. 먹을거리인 동물을 사냥하기 위한 신호를 주고받는 생활을 수 백 만년 동 안하며 서로 알아들을 수 있으며 의사가 소통되고 표현할 수 있는 공동의 언어가 발달하게 됐다고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아주 오랜 선사시대 때 원 인류들이 살아가던 동굴에서 벽화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런 동굴벽화들은 의사와 발성을 통일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육목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었을까를 판단해 봐야 할 것입니다. 원 인류들이 후손에게 삶의 기록을 남기려 벽화를 그리지는 안았을 것이고 벽화를 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같은 의미로 표현하고 같은 소리를 내기 느낌 9

위해 동물과 물고기그림을 그리고 사냥하는 모습을 그리며 어려서 부터 같 은 의미와 표현으로 이해하도록 훈련했을 것이라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래밭이나 땅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겠지만 땅이나 모래위에 그 린 그림들은 바람이나 비등 자연현상에 의해 지워져 버리므로 지워지지 않 게 하기위해 암벽이나 동굴에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는 사실은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원 인류들은 열매가 많이 열리는 곳을 찾아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채취했 던 열매가 넘쳐 버리고 가는 일을 반복하다 이듬해 가니 새로운 나무나 풀 에서 열매가 맺혀있는 것도 발견하고 생포했던 동물들이 새끼를 낳아 번식 한 것을 보면서 부터 정착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생활을 시작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농사와 목축으로 안전하게 먹을거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된 원 인류들은 정 착해 생활하면서 집단을 이루기 시작했을 것이며 처음에는 모계로부터 내려 오는 모계혈통의 사람들끼리 모여 집단을 이뤘을 것이라고 합니다. 집단이 무리를 이루며 공동생활을 시작했지만 아이들 중 장성한 수컷들은 사냥을 할 수 있게 성장하면 무리에서 벗어나 다른 수컷들처럼 자연에서 자 유롭게 사냥하며 살아가는 환경을 유지했다고 판단됩니다. 사냥이란 항상 성공할 수 없어 무리를 짓는 것이 사냥을 하거나 생존하는 데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원 인류의 수컷들도 무리를 짓기 시작했을 것이며 영역다툼과 사냥감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도 수없이 많이 했을 것입 니다. 무리를 짓고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진 원 인류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 아 닌 다른 무리들의 집단을 발견하기도 했을 것이며 발정 난 수컷들은 암컷들 과 교접하기 위해 어린 수컷들을 살해하고 먹을 것을 강탈하기도 했으리라 보고 있습니다. 또한 암컷이 없는 수컷 무리들끼리 싸우면 포로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힘 이 약한 무리의 수컷들은 모두 살해했을 것이며 더러는 식육으로 먹기도 하 는 식인생활도 했을 것으로 봅니다. 바다와 강가에 위치한 원 인류들은 조개나 물고기종류를 채취하며 살았을 것이고, 밀림이나 산악지역에서는 사냥이나 열매와 식물을 채취하고, 초원 지역은 사냥과 야생 조나 수수 같은 것을 채취하는 것이 생존방식이었기 때 느낌 10

문에 거주하던 지역적 환경에 따라 사냥과 채취, 수렵하는 방법들이 다양하 고 서로 다르게 발달한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원시시대 때 생활했던 유적이 발굴된 장소에는 옷이나 움집을 꿰매기 위해 고기의 뼈에 나무껍질을 가늘게 찢어 묶어 사용했던 흔적들이 있으며 물고 기를 잡기 위해 사용했던 그물추와 조개껍질이 쌓여 있는 것도 발견되는 것 을 보면 원 인류는 아주 오랜 세월동안 물고기를 수렵했던 것으로 보입니 다.(오이도 패총( 貝 塚 ):경기도 시흥 오이도에 있으며 선사시대 때 채취해 먹 은 조개껍데기가 쌓여 이루어진 퇴적층 유적.) 원시시대는 바닷가나 강가에서 오랫동안 생활했으며 석기시대의 조개더미 [ 貝 塚 ]에서 돌 동물의 뼈, 뿔 조개껍데기 등으로 만든 낚시 창 작살 등 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면 어업은 인류역사와 더불어 발전해 왔고 기원전 3,500년(5,500년 전)경 이집트에서는 칡덩굴ㆍ짚 등에 무거운 돌을 묶 어 그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당시 생활했던 유적들은 현재까지 발굴된 사실로 확인하고 있음) 원 인류는 손놀림이 상당히 발달하고 미세한 물건도 잡을 수 있게 발전하 면서 근대에 와서 삼ㆍ무명실로 그물을 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 로 작은 그물추에 가는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발견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알라스카에서 발굴된 배 조각을 방사선으로 탄소 측정한 결과 약 25,000 년 전 배의 조각으로 판명되므로 인류는 오랜 기간 동안 물고기를 잡아 생 활했다고 유추하는 것이며 초기의 배는 뗏목을 이용한 통나무배와 카누모양 의 배들이 인류가 최초로 사용했던 배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돌자구나 돌 낫등 유물의 발견) 한반도나 외국에서 발굴되는 유적을 보면 6,000년 전부터 인류는 흙으로 빗은 토기를 사용한 흔적이 있으며 토기를 사용해 음식을 담기도 하고 끓이 기도 하는 생활을 하면서 오래 동안 불에 구워진 토기는 단단한 옹기가 된 다는 사실도 발견했을 것입니다.(부산 동삼동 유적 6,000년 전 빗살무늬 토기를 제작해 사용한 흔적) 느낌 11

원시종교의 출현 자연현상을 이해할 수 없는 원 인류들은 잦은 화산폭발과 지진, 비바람과 천둥번개 그리고 겨울에 내리는 눈에 의해 수많은 희생을 당하면서 분석을 못해 자연현상을 일으키는 무엇인가 힘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생존할 수 있 는 것이 자연덕분이라고 판단해 숭배하는 마음으로 신을 만들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계절을 이해하지 못하는 원 인류들은 사냥을 떠났다 갑자기 하늘에서 앞을 분간할 수 없도록 폭우가 쏟아지거나 번개가 치면서 수십억 년 동안 성장한 숲속이 불타는 현상들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으니 두려움을 가졌을 것이며 겨울이 닥쳐 엄동설한의 추위와 눈보라가 내리는 현상도 이해할 수 없었다 고 봅니다. 그래서 하늘과 태양, 달, 별 등을 보고 빌었을 것이며 바다를 보고도 빌고 동물사냥으로 먹고 사는 종족은 힘센 동물들에게도 빌었을 것이고 채집으로 먹고 사는 종족들은 꽃과 나무에도 빌며 신을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주술사들은 사냥 중 부상을 당하거나 자연재해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치 료하기 위해 야생동물들 같이 온천에 몸을 담그게 하거나 항생제 성분이 있 는 오미자 같은 것을 돌로 찌어 바르거나 삶아서 사용했을 것이며 이런 경 험들이 지금까지 전해져 민간요법과 한의학이 됐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자연을 신으로 받들어 우상화하던 현상들은 세계 곳곳에 남아있는데 태양 신을 섬기고 바다용왕을 섬긴다거나 하는 행위들은 원시시대 종교에서 부터 비롯된 신앙들이 현재(현재도 무당이나 목사들이 안수기도로 치료한다며 몽 둥이로 환자를 때리거나 굶겨죽이는 곳도 있음)까지 이어지는 원시종교였다 고 봅니다. 사냥을 나가지 않아 자연을 살필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한 주술사들은 획득 한 사냥감을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먼저 제를 지내야 한다며 안정적으 로 먹을 것을 획득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 는 제사장이라는 위치도 만들었다고 판단됩니다. 느낌 12

농경의 시작 인류는 약 1만 년 전 신석기시대 말기에 이르러(지역적으로 차이가 있음) 비로소 식량을 인간의 손으로 직접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구석기시대에 보리를 재배했던 흔적으로는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나오 는 유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1만~1만 2천 년 전 원시민족인 호서인( 湖 棲 人 )의 유적에도 인류가 작물을 주식으로 섭취한 증거들이 나타나는 사실로 추정합니다. 신석기시대인 6,000~7,000(기원전 5,000~4,000년전)년경에 는 밀 보리 조 아마 등의 작물을 재배했으며 중국에는 4,700 (기원전 2,700년경)년전인 신농시대( 神 農 時 代 )에 이미 5곡을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원시농업의 발상지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8,000년(기원전 6,000년경)전 티그리스 및 유프라테스 강 연안에서 최초로 시작된 농업이 전 세계로 전파됐다는 것이 하나 있으며, 동남아시아와 중국의 웨이허평원 [ 渭 河 平 原 ], 티그리스 및 유프라테스 강 연안, 인더스 강 연안, 나일 강 연 안, 남부멕시코, 남아메리카 등 7개 지역이 고대부터 발달된 농업을 이루었 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처음엔 팔레스티나 시리아 북메소포타미아에서 이란고원 일부까지 걸친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 를 중심으로 하는 서 남아시아 가 급격히 건조하자 사막의 오아시스에 인간과 동물이 모여들어 공존하면서 야생식물인 보리와 밀을 재배하고 야생하던 산양 염소 소 등 유제류( 有 蹄 類 ) 동물을 가축화했다고 생각했지만 농경문화의 시작은 사막지방이 아니라 산록지대였음이 밝혀지면서 농경 목축이 산악지대에서 발전했다고 보는 것 입니다. 근동지방에서 시작된 코카서 로이드(Cocasuloid)계 인종의 맥류재배를 주체로 한 농경문화와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된 몽골로이드(Mongoloid)계가 맥류( 薯 類 ) 중심 농업을 이룬 농경문화, 서 아프리카의 니제르(Niger)강 상 류에서 시작된 니그로이드(Negroid)계 인종의 농경문화, 인디언계 인종의 서류와 잡곡을 중심으로 하는 신대륙에 기원한 농경문화 등 4개 지역이 제 시되기도 합니다. 4개 농경문화 발상지에 대해 살펴보면, 첫째, 지중해 농경문화로 8,000 년(기원전 6,000년경)전 티그리스 및 유프라테스 강 연안에서 시작해 지 느낌 13

중해 연안으로부터 파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은 맥류 유채 완두 잠두 순 무 등을 주로 재배했으며 소 면양 산양 말 등을 가축화해 농사와 목축을 겸한 혼합농업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발견된 유적을 연구한 발표에 의하면 중근동( 中 近 東 )의 티그리스 및 유프라테스 강 유역으로부터 이란 고원과 서 아시아 및 아프리카 북부 를 포함하는 이란 이라크 시리아의 경계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 9,000년(기원전 7,000년경)전부터 비슷한 시기에 농경과 목축을 시작했 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둘째는 동남아시아 기원의 근재농경문화( 根 栽 農 耕 文 化 )로 바나나 얌 (yarm) 타로(Taro) 사탕수수 등 영양번식작물이 초기재배의 주종이었고 돼지나 닭 등의 가축도 사육했으며 바나나는 5,000년(기원전 3,000년 경)전 말레이시아에서 재배했다고 합니다. 셋째는 아프리카에서 아시아에 걸쳐 사바나(Savannah)를 잇는 지대에서 발생한 사바나 농경문화로 7,000~5,000년(기원전 5,000~3,000년 경)전부터 피 기장 조 수수 등 잡곡류와 두류 참깨 등을 재배했다는 주 장입니다. 넷째는 신대륙 중남미로 카리브 해 연안에서 는 카사바(cassava)를 멕시 코에서는 고구마, 그리고 안데스산맥의 높은 지대에서는 감자를 재배하기 시작했으며 옥수수 두류 호박 등도 재배했다는 것입니다. 근동지방에서 농사를 짓게 되면서부터 부족으로 발전했으며 도시가 들어 서게 된 것은 10,000년(기원전 8,000년경)전에서 4,000년(기원전 2,000년경)전까지의 사이에 이루어 진 것으로 유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근동(아나톨리아와 레반트, 메소포타미아 등 유럽과 가까운 서 아 시아)지방이 발달하면서 서구문명이 시작하게 됐다고 보므로 근동지방이 현 재 문명발전의 최초지역이라고 보는 것이며 초기문명의 1차 지역(pristine region)은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 중남미, 중앙안데스지역이라고 합니 다. 농경의 시작은 버리고 간 곡식들이 자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 식물을 재배 하게 된 근원으로 보고 있으며 계획적으로 씨앗을 뿌려 재배하기 시작한 초 기농경은 피를 비롯한 몇 가지 밭곡식을 재배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초기농경 단계에서도 남자는 여전히 농사보다는 위험하고 힘든 사냥으로 느낌 14

살았을 것으로 판단되며 여자(출산ㆍ양육 때문에 사냥을 할 수 없으며 어린 자식을 데리고 식물을 채집, 재배하는 생활의 시작)들이 사냥보다 쉽고 안전 하게 먹을거리를 확보할 수 있어 농경생활을 시작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냥으로 획득할 수 있는 먹을거리는 위험하고 불규칙적이라 불안정하지만 씨앗을 뿌리고 수확기가 되면 몇 배의 먹을거리를 확보하면서 농업이 점점 발전하고 밭을 갈아 씨를 뿌리는 갈이농사로 발전하자 힘센 남자가 필요하 므로 남자와 여자가 함께 농업에 종사하는 부계사회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 가 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원시시대에는 나무와 짐승의 뼈 또는 돌도끼로 나무를 베어야 하고 뿌리를 뽑고 잡초와 돌을 없애 땅을 고르고 흙을 부드럽게 해야 하는 힘든 노동을 통해 밭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무리가 집단으로 정착하며 공동으로 생활하므로 사냥을 한 짐승이나 농경 으로 채취한 수확물은 개인이나 모계가족 소유가 아닌 공동체 무리를 위한 공동의 수확물로 인식했으며 사냥은 먼저 공격해 위험하고 힘들게 사냥을 성공하거나 농사에서 힘든 일을 맡은 사람이 조금 더 분배받도록 했을 것이 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산짐승을 울타리에 가뒀는데 울타리에 가둔 짐승들이 해가 바뀌면서 새끼를 낳고 먹이에 길들여져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을 보며 가축을 사육하기 시작해 가축만 전문으로 키우는 유목집단이 나타났고 유목 집단생활이 최초로 공동체와 공동체사이에 분업을 발생시켰다는 것입니다. 사냥과 채취ㆍ수렵은 공동체 생활에서 힘센 수컷과 임신으로 사냥할 수 없 는 암컷간의 성별 분업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으며, 집단으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생활이 정착되면서 힘들게 농사짓지 않고 가축을 키우며 살 아가는 유목생활을 하던 유목민들은 농경을 이룬 공동체를 만나면 필요한 곡식과 고기를 교환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유목생활을 하는 무리들은 초지가 풍부한 지역을 떠돌며 가축을 길렀기 때 문에 고기는 풍부했으나 곡식과 양념들이 부족하므로 농사를 짓고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는 무리가 있는 곳에 도착하면 가축과 곡식을 바꾸는 방식으 로 먹을거리를 획득할 수밖에 없는 생활을 했으므로 물물교환을 발생시켰다 는 것입니다. 농경사회 초기에는 삼림을 불태워 경작하는 화전 농업부터 시작했다가 점 차적으로 동물의 사육(목축)과 식물재배(농경)로 발전했다는 것이며 이로 인 느낌 15

해 수렵채취시대에는 부족했던 식량을 대량으로 수확하게 되면서 안전한 먹 을거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된 원 인류는 인구를 증가시키며 노동력도 확보했 다고 봅니다. 삼림을 불태워 경작하는 농경방법은 지력을 감퇴시켜 매년 수확이 감소되 고 수년 후에는 같은 식물이 자라지 않으므로 이동하게 됐으며, 그래서 화 전( 火 田 )농업을 일명 shiftingcul tivation(이동경작)이라 부르고 약탈농 업이라 부르는 것은 토지의 영양분을 약탈한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서양은 소규모 무리가 집단을 이룬 초기에 양을 사육하며 생활했다고 보 며 가축을 먹이기 위해 좋은 목초를 찾아다니는 유랑농업( 流 浪 農 業 )을 하면 서 토지가 있으면 농작물의 종자를 파종하고 길을 떠났다 파종한 농작물을 수확할 무렵 돌아와 작물을 획득하는 생활을 하고 지력이 소모되면 경작 장 소를 옮기는 농사를 지었다는 주장입니다.(양이 인류최초로 사육한 가축이라 함) 인구가 늘면서 유랑농업을 할 수 있는 토지가 불충분해지자 정착의 필요성 이 생겨 정착하는 약탈농업이 시작됐고 한곳에서 여러 해 같은 작물을 심 으면 수확이 안 되기 때문에 지력의 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토지의 일부분을 돌려가며 농사를 짓는 삼포식( 三 圃 式 ) 농법이 발달하자 생산량이 증가해 개 인이 먹는 것 이상의 먹을거리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밭농사는 자연으로부터 오는 빗물로도 재배가 가능하나 벼농사 같이 물이 많이 소요되는 농사들은 수량이 풍부하고 넓은 평야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인류는 강가에서 살기 시작했으며 많은 집단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무리의 단위를 형성하게 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무리끼리 부락을 형성해 공동으로 노동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면서 집단공동 체를 이루어 모두가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먹을 것이 풍부해 수 천 년 동안 계급과 빈부 격차가 없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평화롭게 살았을 것입니다. 모계사회에서 함께 수 백 만년 동안 생활하던 습관대로 모든 일은 무리끼 리 모여 공동으로 논의하고 홍수로 피해를 입거나 사냥으로 부상을 입어 먹 을 것이 부족한 무리와는 서로 나눠 먹으며 홍수에 대처하기 위해 물길을 막는 제방을 쌓는 등 집단이 함께 노동하는 공동체생활을 수천 년 동안 유 지했다고 봅니다. 세계의 4대 문명(중국황하 강,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인더스 강, 나일 강)은 큰 강 유역에서 발달했고 당시 자연환경은 오늘날보다는 습윤( 濕 潤 ) 느낌 16

했으며, 매년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는 일들이 많이 발생하므로 강의 범람시 기를 알기 위해 하늘을 살피다 천문학에 의한 태양력이 발달하고 이때 강이 범람했던 기록을 성경에서 노아의 방주로 표현했다고 판단됩니다. 당시에 농사를 지었던 지역은 크게 3곳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중동중심 (neareast center 이란ㆍ이락ㆍ시리아ㆍ터키)지방은 1만 년전 밀을 재 배한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며, 중남미 중심지역에는(central/south America center 옥수수, 고추, squah, bean, guards)흔적이 있고, 멕시코 고원지대와 페루의 고원지대에는 옥수수, 고추, 감자 등을 재배했으 며, 극동중심(fareast center 벼, peas, bean)지역에는 주로 벼 같은 논(습지)에서 자라는 작물을 재배한 흔적들이 발견된 유적으로 확인되고 있 으나 습지는 유기물분해로 인해 고고학적으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 니다. 근동지방은 북쪽으로는 구릉과 산맥 그리고 남쪽으로는 반 건조지역과 사 막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어 지리적으로 매우 다양하며 식물군(식생, 植 生 ) 이 분포돼 있는 것을 분석하면 환경지대를 8개소로 나눌 수 있는데 해안평 야(coastalplains),충적평야(alluvial plains),산록지대(piedmont), 반 건조고원지대(semiarid highland),구릉과 계곡(foothills and intermont anevalleys),산악지대(mountain ranges),저지대 (depressions), 그리고 사막(deserts)으로 나눈다고 합니다. 느낌 17

문명의 발달 집단농경사회를 이룬 초기에도 모계사회를 유지했을 것이며 자연에서 자유 롭게 사냥으로 생활하던 수컷 무리들은 모계로 형성된 부락에 가면 항상 식 량이 풍부하고 암컷들과 교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침략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인명을 살상하는 총 같은 것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힘이 센 자가 폭력을 행사해 먹을 것을 빼앗고 여자를 겁간하는 생활이 수 없이 많 은 세월동안 되풀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없는 침략과 약탈로 피해를 입은 무리는 자신들이 고생해서 생산한 물질 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집단을 이루어 함께 대항하려고 힘을 길러 무력으로 자신들이 생산한 먹을거리와 생활터전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부락을 침략해 타인을 학살하고 약탈을 일삼으며 집단을 정복한 무리들은 지배자가 돼 정착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이렇게 무력으로 학살과 약탈을 일 삼던 침략무리들이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 권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수컷들의 침략에 식량을 빼앗기던 암컷들은 힘이 필요하다 고 느끼고 정복자가 된 수컷들 중에 힘이 센 수컷의 씨를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고 이런 과정들이 부계사회를 만드는 동기가 됐을 것으로 추 정됩니다.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힘이 센 아이도 태어났을 것이고 힘이 센 아이 들이 성장해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부족을 장악하고 힘을 과시하므로 폭력이 횡횡하는 부족사회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성이나 양심은 없고 오직 힘이 센 자가 무리를 억압하고 복종시키는 환 경이 오랜 기간 반복되면서 서열이라는 것이 만들어졌을 것이고 서열이 높 은 자의 아이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비호를 받으며 안하무인으로 성장했다고 봅니다. 노동을 하지 않고 무력으로 무리를 복종시키고 군림하는 힘과 싸움기술만 배우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부모보다 더 억압적이고 폭력적 인 잔인한 성격을 갖게 됐을 것이고 힘만이 절대 권력이었다고 보는 것입니 다.(지금은 돈이 힘이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의 성장환경과 비교가 능) 타인의 간섭이나 지시ㆍ통제를 받지 않고 자연에서 자신이 노력한 만큼 수 느낌 18

확하며 자유롭게 생활하던 사람들을 침략자들이 학살하고 포획해 강제노동 을 시키며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면서 노예로 만들고 저항정신을 말살시 켜 순종하도록 길들이기 위해 제도와 법률을 만들었습니다. 처음 제도와 법률을 만들었을 때는 피지배계급들이 반발하며 저항했을 것 이나 세월이 흐르면서 지배계급이 지속적으로 강조해 세뇌되고 체제에서 법 률을 집행하며 먹고살도록 길들여진 무리(관료)들이 권위를 내세우며 자신들 의 생존을 이어가는 수단으로 삼아 대중을 강제로 억압하면서 제도로 정착 되는 것입니다. 많은 무리를 침략해 집단생활이 시작되면서 사냥을 하던 때 언어보다는 뜻 이 전달되고 의미를 이해하는 공통 언어가 필요했으며 무리가 같은 의미와 뜻으로 해석하는 언어가 발달하면서 인류의 실생활에 엄청난 발전을 가져오 는 동기가 됐습니다. 남겨진 기록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문자는 5,000년(기원전 3,000년경) 전을 전후해 사용했다고 전해지는데 고대인들은 음성언어를 사용하고 있어 서 소리가 들릴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만 소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권력을 쥔 무리들이 명령을 하달하기 위해 멀리 있는 사람에게도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은 없을까 궁리하면서 그림이나 매듭을 이용해 어떤 사물이나 의사를 전달하던 것이 사람들 사이에 일정한 약속이 되면서 문자로 발전했 다는 것입니다. 문자나 공식적인 기호는 집단의 생각이나 느낌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상징적인 체계가 있어야 하고 여러 사람들 사이에 서로 합의돼야 하므로 수 백 만년 동안 기호나 그림 또는 선화 등을 통해 간단히 소통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기록하고 보전할 수 있는 문자가 생기므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 오 게 됩니다. 문자의 기원으로는 이집트의 상형문자(Hieroglyph)와 중국의 갑골문자 ( 甲 骨 文 字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Cuneiform script)를 들 수 있는데 초기 형태 문자들은 모두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며 7,000 년(기원전 5000년경)전 구석기 중기의 유적에 돌이나 뼈에 규칙적인 간격 을 두고 새긴 조각에서 문자의 기원을 찾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자들이 점차 발전해 3,000년(기원전 1,000년경)전에는 선사인 류문명이 사용하던 그림문자 흔적이 발견된 것이며 초기의 그림문자는 단지 기억을 보조해 주는 수단에 불과했지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사용된 것 은 인류문명이 크게 발달한 중국,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마야 등의 문자라 느낌 19

고 합니다. 약 3,500년 전 무렵에 그림문자를 더 간결하게 생략해서 만든 상형문자 가 이집트유적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시기별로 히에로글리프문자, 히에 라티크문자, 데모티크문자, 멜로에문자로 나누고 있습니다. 히에로글리프문자의 명칭은 성스럽게 조각한 문자라는 뜻에서 성각문자( 聖 刻 文 字 )라고도 하며 히에로글리프문자는 처음에 표의문자로 탄생해 표음문 자로 발전하면서 오늘날 이집트알파벳 24자가 됐다는 것입니다. 현대문자의 시작은 표의문자와 표음문자가 모여 단어와 단문이 됐다 발전 하며 문장을 나타내게 됐으며 히에라티크문자는 이집트성각문자의 약자라고 할 수 있는 히에로글리프문자로 보고 있으며 4,650년(기원전 2,650년경) 전부터 시작해 3,000년(기원전 1,000년경)전까지 사용했다고 봅니다. 2,700년(기원전 700년경)전부터 1,600년(기원후 400년경)전 까지 사 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히에라티크문자를 흘려 쓴 초서체라 할 수 있는 데모 티크문자는 사물( 事 物 )을 그려 그것과 관련 있는 의미를 나타낸 문자라 할 수 있는 상형문자로 중국의 초기한자( 漢 字 )와 고대이집트문자인데 고대 4대 문명을 이룩한 무리들은 모두 독자적인 상형문자를 발전시켰으며 비교적 오 래된 것은 메소포타미아지방의 수메르 또는 엘람인의 문자로 알려져 있습니 다. 처음 발견된 상형문자는 750개정도의 표현을 기본적인 체계로 만들었으 며 오랜 기간 동안 어떤 변형도 겪지 않고 사용됐다는 사실은 마지막 신전 이었던 필레 사원이 폐쇄될 때까지 똑같은 상형문자를 사용한 것에서 확인 되고 있으며 이 문자들의 독창성과 복잡성은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기호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대상이나 사물을 나타내는 그림문자 로 이 문자들을 겹쳐 사용 하면 추상적인 개념도 표현할 수 있는데 풍뎅이나 말똥풍이 또는 태양 같은 상형문자가 그런 것이며, 표의문자나 그림문자의 다른 단어에서 자음근이 생길지라도 표음문자를 변형시켜 간단히 음으로 나타낼 수 있도록 했으며, 둘째는 표음문자 로 같거나 다른 형태의 소리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했으 며 어떤 물체를 묘사하지 않고 하나의 자음이나 보다 더 많은 자음을 나타 낸다는 것으로 표음문자는 표의문자보다 늦게 생겨난 것으로 보며 글자마다 일정한 음가를 가지고 있어 발음을 규칙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고, 셋째는 한정부호 로 문맥 속에 한 기호가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이나 사 느낌 20

물을 지적하는 것인지 알려주는 부호로 많은 고대이집트 단어들은 같은 기 호를 가지고 있었으나 완전히 다른 의미를 표현할 수 있었는데 단어의 의미 를 이해하기 위해 단어의 마지막에 한정사 라고 부르는 것을 사용하면서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중기이집트 또는 고전기 이집트어 는 중 왕국시대의 언어를 가리키는 말로 문법학자들이 주로 연구하는 언어와 이집트 학의 계기가 된 상형문자 도 이 시기에 속해 있으며 유명한[시누혜 이야기]도 중 왕국시대에 쓰여 졌 다고 합니다. 1799년 나폴레옹 군의 한 장교에 의해 나일 강 서쪽델타지역 리시드라는 마을에서 2,200년(기원전 196년)전 열두 살인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즉 위를 축하하기 위해 멤피스에 모인 사제들이 그리스어로 왕을 기리는 칙령 을 만들어 돌에다 새긴 높이 약 117 Cm, 너비 약 74Cm인 로제타석이 발견돼 고대에 사용하던 상용 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그리 스어로 썼지만 민중문자와 상형문자로 된 번역이 함께 새겨져 있다함.) 문자의 발달은 단순한 그림문자인 상형문자에서 설형문자( 楔 形 文 字 쐐기문 자cuneiform script)로 발전하고 설형문자는 그이전의 그림문자와 달리 구체적 사물뿐 아니라 동작이나 추상적인 개념까지 표현할 수 있도록 예를 들면 발( 脚 )이란 단어는 발뿐 아니라 서다와 간다. 또는 온다는 뜻을 갖고 있으며 화살이란 말은 산다( 生 )와 생명 을 함께 표현했다고 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대상이나 목적격개념이 없기 때문에 완벽한 문장이 되지는 못했지만 마귀를 쫓는 주문( 呪 文 )과 집권자들이 권력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 을 신격화하면서 신과 신전을 찬양하는 글, 도시와 도시사이에 벌어진 전쟁 을 서술하기도 하고 사회질서를 위한 칙령이나 법전 등을 만들었으며 대홍 수 이야기 와 길가메시 서사시 우르남무법전 등의 기록을 남길 수 있 었습니다. 수메르의 설형문자는 아카드인으로 이어지고 다시 바빌로니아인, 아시리아 인들에게 전해져 고대오리엔트전역에 퍼지게 됐으며 인도유럽어계통인 히타 이트어와 페르시아어에도 전해져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약 3천 년간 서 아시아 지역의 공용어로 사용했고 알렉산드로스대 왕이 동방을 원정할 때 크게 위축됐다가 약 1,900년(서기 74년)전 완전히 사라졌으나 19세기 중엽 유럽언어학자들에 의해 해독되면서 인류의 과거역 사를 알 수 있게 됐다고 합니다. 기록과 유적을 살펴보면 설형문자는 바빌로니아나 아시리아 등 셈계의 여 느낌 21

러 민족들과 비( 非 )셈계인 후르리 히타이트 페르시아에서도 사용한 기록 이 있으며(마리문서 아마르나문서) 페르시아의 설형문자부터 자획( 字 畵 )이 줄어들고 자수도 37자로 정리됐다가 시리아의 라스 샤므라에서 발견된 우 가리트왕국의 설형문자시대에는 글자가 30자로 줄어 현재의 완전한 알파벳 으로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고대이집트 글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3,300년(기원전 13세 기)전 19왕조 시대에 상형문자로 쓴 (사자( 死 者 )의 서( 書 ) Book of the Dead)라는 글이 있으며 예언이나 마법 또는 의술이나 약전( 藥 典 ) 그리고 요리, 천문, 시간의 측정 등을 다룬 지리에 대한 글들도 기록으로 남아있고 달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만든 달력으로 1년은 365일과 1/4일으로 변화 한다는 사실들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현재 서양에서 사용하고 있는 알파벳의 체계를 이룰 수 있는 표현 중 가 장 오래된 것은 자음만 표기할 수 있게 만들어 사용하던 페니키아인들 문자 로 이것이 그리스로 전해져 자음문자의 몇 가지 글자와 모음문자(α, ε, η, ι, ο)를 만들고 여기에 ν(입실론)과 ω(오메가)를 추가해 24자를 사용하 다 후에 로마인들이 라틴계의 여러 언어로 표기하면서 문자의 기초가 됐으 며 로마시대 라틴문자는 23자였으나 중세에 I에서 J가 분리되고 Y에서 U 와 W가 분화하여 현재의 26자가 됐다고 합니다. 라틴어계통 여러 언어의 대부분은 라틴문자알파벳을 다소 수정하고 보충한 것(이탈리아어는 21자, 에스파냐어는 28자)을 사용하고 있으며, 자형( 字 形 ) 은 중세에 이르러 그전에 사용하던 글자의 대문자에 소문자를 추가했고 16 세기에 인쇄술의 발명과 함께 현재 사용되고 있는 알파벳의 안정된 원형을 갖췄다는 것입니다.(인류역사는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시기를 역사시대라 하 고 기록을 남길 수 없는 시대는 선사시대로 나누고 있으며 선사시대는 다시 구석기시대, 중석기시대, 신석기시대로 나누고 구석기시대는 다시 전기와 중기, 후기로 구분합니다.) 모두가 공동으로 알아듣고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탄생되도록 오랜 세월동 안 인류는 점차적으로 발전했으며 무력으로 부족을 침략하고 권력을 형성한 무리들은 무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자기를 나타낼 방법이 없기 때문에 자신 을 나타내고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전쟁을 일으키므로 타인을 강제로 굴복시 키려고 합니다.(이런 현상은 야생동물의 세계에서 잘 나타나고 있음) 침략자인 부족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힘자랑 하는 자들끼리 싸우는 일 이 비일비재했을 것이기에 무리가 살아가는 공동체는 평화를 잃어버리고 폭 력이 난무하는 혼란을 겪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누구나 부족장의 자리를 지 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모두가 평등하게 논의하는 공동체 구조로 발전했 느낌 22

다고 봅니다. 강요된 전쟁 때문에 죽기도 하고 부상을 당하는 등 피해를 입은 부족민들 이 거부하는 현상도 있었을 것이고 혼자서 무리를 무력으로 강제 복종시키 려다 무리를 지어 반발하는 세력들에 의해 쫓겨나기도 하는 과정을 반복적 으로 겪으면서 서로 논의하는 공동체로 발전했을 것입니다. 당시는 전쟁에 동원된 병사들이 현대의 군인이나 경찰처럼 혈세로 지배자 에게 월급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농사를 짓고 살았기 때문에 침략자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할 의무도 없었고 폭력을 거부하며 반항하는 자들도 있었다고 봐야 하므로 직접적으로 죽이고 죽는 전쟁에서도 명령체계와 복종 이란 있을 수 없었다고 봅니다. 공동체라도 힘이 있는 자들은 전쟁을 하면서 패배한부족의 남자들을 포로 로 삼아 농사일과 침략에 대비한 성을 짓거나 향락과 안락한 생활을 위한 궁전을 짓고 지배자에게 복종하는 사상으로 길들이기 위해 신전을 짓는 노 동에 강제동원하며 혹사했을 것이고 여자들은 전쟁에 참가했던 병사들의 교 접대상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노예시대의 시작 문자가 발달하고 지배권을 가진 자들은 권력을 뺏기지 않기 위해 힘을 과 시하면서 수천 년 동안 이웃부락을 침략해 곡식을 강탈하고 부녀를 강간하 며 남자들을 노예로 삼아 물질을 대신 생산하도록 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부 족 중 지배자들은 노동을 하지 않고 노예의 노동을 착취하며 살기 시작했습 니다. 이때 까지도 가족이란 개념 없이 남자가 여자를 보면 무력으로 제압하고 강제로 성관계를 하며 지냈을 것이나 수천 년 동안 반복되면서 여성들의 저 항 없이 마음대로 성관계를 가지며 여성의 섬세한 노동을 이용할 수 있다고 판단해 가족이라는 제도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힘 있는 자의 필요에 의해 가족제도를 만들었을 것이며 귀족이나 힘이 있 는 남성들은 혼인관계를 따지지 않고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으면 언제든지 느낌 23

마음에 드는 여성과 관계를 맺고 피지배자들만 일부일처제를 지켰다고 보며 이런 일들은 한반도 왕들의 역사에도 확인되고 오늘날 생활 형태로도 나타 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무리나 또는 집단이 종족 번식과 보존을 위해 공동으로 아이들을 양육하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소그룹인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먹는 것을 책임지고 생산하는 씨족 공동체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봅니다. 힘이 약한 부족을 공격하면 언제든지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노예가 생기 기 때문에 도망가지 못하게 울타리에 가둬놓고 강제노동을 시켰으며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모든 먹을 것을 생산하고 주인이 호화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성과 저택을 지었지만 노예는 가축우리에 갇혀 먹는 것까지 제한 당했다고 합니다. 무력으로 침략해 점령한 부족민들을 노예로 부리고 감시ㆍ통제하면서 노예 들이 생산하는 물질로 편안하게 호의호식하고 향락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 자 힘이 생긴 사람들은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힘이 없는 부족 을 침략하게 됐고 이런 침략전쟁은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약탈하거나 방어하려면 집단의 힘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훈련된 병사들을 필요로 했을 것이며 노예들을 잡아 올 수 있는 병사들이 훈련받을 시설은 노예들의 강제노동으로 만들고 지배자가 노예 전부를 관리할 수 없 자 통제하는 사람이 필요해 귀족과 평민이라는 사회적 계급을 형성하게 됐 다고 봅니다. 전쟁을 통해 힘을 과시하고 권력을 만들어 군림하며 편안하게 누릴 수 있 으니 수많은 부족을 침략했을 것이며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많은 노예를 확 보했지만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아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들의 반발이 심해지 자 강제로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규칙이라며 법을 만들기 시작 했을 것입니다. 자유롭게 살던 부족민들이 하루아침에 침략 받아 살해되기도 하고 붙잡혀 와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혹독한 노예노동을 시키니 몰래 도망가기도 했을 것이고 힘이 있는 사람들은 저항하며 내부에서 싸움을 일으키기도 하는 일 들이 수도 없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침략자들은 자연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던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면서 자신들 은 신의 자손인양 우월성을 강조했고 먼저 잡힌 노예와 숙련된 노예는 태어 나면서부터 특별한 능력이 있는 듯이 차별대우하면서 먼저 온 노예가 늦게 느낌 24

온 노예를 멸시하도록 하므로 노예끼리 뭉치지 못하도록 분열시키기 위해 우월성을 조장합니다. 6천 년 전 충적평야 주변에서 노예들을 동원해 소규모 관개농업(인공적으 로 물 관리시설을 만들어 물을 공급 이용하는 농업방식)을 시작했으며 이 때부터 농사를 짓는데 쟁기를 사용했고 또 바퀴가 달린 짐수레가 만들어지 자 노예들을 가혹하게 혹사시키면서 무거운 돌을 날라 자신들의 안전을 도 모하기 위한 성을 쌓았습니다.(수메르와 마야,황허문명,아즈택,잉카,인더스, 메소포타니아,이집트문명 등) 바퀴의 발달은 집을 짓기 위해 나무를 다듬다 밟아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과정을 되풀이 하면서 둥근 것은 굴러가는 속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 이며, 이런 경험을 통해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때 물건 아래 둥근 나무들을 받치면 쉽게 이동할 수 있다는 원리를 발견해 수레바퀴를 만들게 됐다고 봅 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바퀴는 청동기 시대인 5,200년(기원전 3,200년경) 전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족이 처음으로 발명해 마차의 바퀴로 이용했다고 합 니다. A depiction of onager-drawn cartson the Sumerian battlestandard of Ur (circa 3200BC) 농사를 짓기 위해 수리시설을 고안하고 노예를 동원해 물을 끌어오는 수로 공사로 수세식 화장실을 만들고 목욕탕을 지었으며, 노예노동으로 먹을 것 이 풍부하니 귀족들은 호화생활을 누리지만 침략전쟁에서 부상이나 피해를 입은 병사들은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없어 반발하다 불만이 쌓여 폭발해 내 란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초기에 침략한 부족들은 전리품을 공동소유로 공정하게 나눠 불만이 없었 을 것이나 훈련된 병사조직이 생기면서 병사들을 관리하며 명령하는 사람과 명령받는 사람으로 계급이 형성되고 귀족과 평민으로 나누면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약탈한 전리품을 독식하므로 이에 불만은 표현하는 병사들이 늘어 났을 것은 자명합니다. 신분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전리품을 독식하는 귀족들의 행위에 반발해 병 사들은 자신이 잡은 포로는 자신의 것이라며 몰래 잡아가기도 하고 자신이 강탈한 물건을 왜 귀족이 차지 하냐며 반환을 요구해 내부분란이 끊임없이 일어나자 저항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기 위해 규칙(법률)을 만들었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느낌 25

자연에서 자유롭게 살던 부족민들을 학살하고 살아남은 사람을 붙잡아 감 시와 통제 속에 채찍질로 명령하며 물질을 생산하는 노예로 부림당하는 사 람들은 저항하거나 도망갔을 것이고, 신분상승이 되지 못한 평민들은 자신 들이 땀 흘려 생산한 물질을 귀족이라는 명분으로 세금이라며 수탈해가는 행위에 저항했을 것입니다. 침략자라고 엄청난 괴력과 흉악한 성격으로 무력을 행사하는 후손만 태어 나지 않고 힘이 약한 후손과 무력을 거부하고 이성과 양심을 찾으려는 후손 도 있어 침략으로 왕족이나 귀족을 칭하던 무리들은 착취질서를 정당화하며 신변을 보장받고 대를 이어 혈통을 보전하며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통제하 려고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법(규칙)의 출현 지금까지 발견된 사실로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만들어진 법전은 4,000여 년(기원전 2100년~기원전 2050년 사이)전 점토판에 새겨진 우르남무법 전( 法 典, Code of Ur-Nammu)으로 최초에 니푸르에서 두 조각이 발견 돼 1952년 샤무엘 크레이머에 의해 번역됐으며 추가로 우르에서 점토판이 발견돼 1965년에 번역했다고 합니다. 내용은 고아는 부유한 이에게 보내지 않으며 과부는 힘센 이에게 보내지 않고 재산이 1쉐켈의 사람은 1미나의 사람에게 보내지 않았다. 는 등의 내 용과 살인을 저지른 사람과 절도한 사람은 사형돼야 한다. 고 규정하고 있지만 노예와 주인간의 차별을 두고 있으며 귀족들이 신분이 높다는 이유 로 병사들로부터 강탈한 재산을 지킬 수 있는 조항들이 있을 뿐 평등을 위 한 규칙들이 아닙니다. 법률적 강제규칙들은 프랑스 모르강( De Morgan) 과 함께 1901 년 수사(Susa)에서 페르시아탐험대가 발견하기도 했는데 300년 후 인 3,700년(기원전 1,690년경)전 바빌로니아 왕국 함무라비 왕(기원전 1724~1682년 재위)이 즉위 38년에 높이 2.5m, 둘레 1.8m의 상부에 태양신으로부터 법전을 받는 장면을 부조한 탑이 발견된 것에도 기록돼 있 습니다. 최초의 성문법이라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은 총 3,000행으로 282조의 느낌 26

설형문자로 기록됐는데 특징은 사람의 권리를 3계급(귀족 평민 노예)으로 나누어 신분에 따라 형벌을 결정하도록 규정했습니다. 단순한 사고에 의한 살인도 사형에 처하고 아들이 아버지의 뺨을 때리면 손을 잘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이 알려졌지만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 는 규칙을 정한 것이 아니라 자유인과 천민 그리고 노예의 차이를 분명하게 규정해 귀족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갈취할 권리를 확보하고 권력을 행사하 는 내용으로 구성됐습니다. 내용은 자유인의 눈을 뺀 자는 그 눈을 빼고 자유인의 뼈를 부러뜨린 자 는 그 뼈를 부러뜨리며 천민의 눈을 빼거나 뼈를 부러뜨린 자는 은1마누의 형에 처하고 노예가 자유민의 뺨을 치면 그 귀를 자른다. 고 하는 규정들 이 있습니다. 영주가 자유인이나 노예에게 땅의 경작을 명했는데 농사를 짓지 않아 땅 이 못쓰게 되면 은으로 보상해야 한다. 는 내용이 있어 노예나 자유인은 귀족이 마음대로 노동시킬 수 있고 이를 거부하면 은으로 배상해야 한다고 강제하는 등 무력으로 침략해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의 수탈행위를 정당화하 는 규정들입니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4,500(기원전 2,500년)년전 역사시대에 밀 재배면 적의 6배나 많은 보리를 재배했으나 역사시대 후기로 오면서 남부 메소포 타미아의 토양 비옥도가 낮아져 밀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으며, 대추야자(메 소포타미아), 무화과(고원지대), 올리브(레반트 지역)등 과수재배를 시작했고 대추야자는 넓은 경작면적이 필요하지 않고 염류농도에 상당한 내성이 있어 전 지역으로 급속하게 퍼졌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기원전 3,000년경) 나일 강 유역에서는 메소 포타미아 문명과 긴밀히 상호작용하는 수메르와 아카드에 도시부족과 도시 연맹체가 존재했으며 이때부터 강력한 힘을 가진 군사통치자가 지배하는 왕 국이 탄생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초기 농경에서 도시로 발전하는데 4천년이 걸렸지만 이집 트문명은 약 2,50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집트는 메소포타미 아문명이 걸었던 길과는 다소 다른 방법으로 발전했는데 농경촌락들을 부락 단위로 편성시키고 농업생산을 기반으로 통제질서를 마련하므로 신속하게 안정을 찾았으며 교역과 관개공사를 한 것들이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 기록돼 있다고 합니다. 왕국을 건설한 무리들은 다수의 사람들을 복종시키고 다스리기 위해 가뭄 느낌 27

과 폭풍우 그리고 지진이나 화산폭발 같은 것에 의해 많은 피해가 발생하면 신의 노여움을 사서 그렇다는 거짓말로 엄청나게 많은 신들을 탄생시켰으며 스스로를 무소불위의 신이나 신의 아들로 자처하므로 수많은 우상(신화) 들 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누구나 타인의 통제나 지시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던 사람들을 학살하며 부족을 점령하고 귀족이 된 무리들은 부족민들이 자신들에게 복종해야 쉽게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은 신의 아들이라 자처하며 신을 만들어 냈고 다중을 복종시키기 위해 노예노동으로 신전을 짓고 권력을 행사하는 궁전과 안전을 지키는 성을 지었습니다. 포로로 잡힌 노예들은 병사들의 감시와 통제 속에 지배자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길렀고 무거운 바위 돌을 날랐으며 제대로 먹 지 못하고 힘든 노동을 하다 쓰러지면 가차 없이 채찍질을 당했고 조금이라 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반항하면 맞아 죽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했습 니다. 먹지 못하고 밤낮으로 강제노역을 하다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노예들이 속 출하자 노예들의 원기를 북돋운다며 마늘과 고추를 먹이기도 했다는 것입니 다.(고추와 마늘을 먹인 기록은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건설 때 기록돼 있음) 이렇게 건설돼 발달한 제국이 이집트와 마야문명으로 마야인들은 5,000 년전(기원전 3,000년경) 멕시코남부 치아빠스주 고원지방에 살았고 3,500년(기원전 1500년경)전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으며 2,800년(기 원전8세기경)전에는 멕시코의 남부지방과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하는 중미의 여러 지역에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2,500년전(기원전 5세기)에 띠깔과 와학뚠을 중심으로 번성하기 시작해 1,700년 전(기원후 300년경)까지 엄청난 문화발전을 이루었고 중심도시 는 과테말라북부에 있는 엘뻬뗀으로 과테말라고원지방족인 끼체 족과 더불 어 살았다는 것입니다. 5,200년(기원전 3,200년)전 이집트 보다 통일국가 발전이 약 60년 늦 은 메소포타미아문명이 출현했는데 수메르인들은 각지에 신전을 중심으로 한 도시부족을 세우기 시작해 정치나 생활은 신전을 중심으로 했는데 도시 부족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던 초기인 4,350년(기원전 2350년경)전에 셈 족의 사르곤 1세가 통일하면서 아카드왕조를 탄생시켰다고 합니다. 사르곤 1세는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병사들의 무력으로 도시부족 들을 침략하며 정복을 시작했고 정복한 도시부족들에 관료들을 임명하므로 느낌 28

집권의 틀을 갖추고 자신을 스스로 키시(Kish)의 왕, 사계( 四 界 )의 왕, 수 메르 아카드의 왕 이라 칭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칭호가 후일 메소포타미아지배자의 명칭이 됐으며, 아카드인은 수메 르도시부족이 습득하고 있던 문자를 비롯해 신화( 神 話 ) 문학 기술 예술 등 수메르적 요소를 폭넓게 흡수하고 오랜 기간 동안 함께 생활하므로 인종 적으로 양자가 점점 융합하여 바빌로니아세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고 합 니다. 수메르인은 4,050년(기원전 2050년경)전 막강해 우르 제3왕조를 세웠 으나 5왕조 107년 만에 엘람인에 의해 멸망했고 그 후 이신 라르사 마 리 바빌론 등 여러 부족들이 패권을 다투다 아무루계( 系 ) 바빌론 제1왕조 의 6대왕 함무라비가 3,700년(기원전 1700년경)전 이집트에 맞설 강력 한 병사로 힘을 갖게 되므로 제국을 건설하고 함무라비법전을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함무라비는 각 부족들이 우상화하던 신들의 계보를 통합해 바빌로니아문명 을 부흥시켰지만 이 무렵 이란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산악지대에서 목축으로 살던 히타이트 후르리 카시트 등의 부족들이 말이나 전차( 戰 車 )를 이용해 농경지대를 침략하며 약탈하고 도발을 일삼아 강력했던 바빌론 제1왕조는 3,600년(기원전 16세기 후반)전 히타이트인에 의해 멸망했다고 합니다. 4,000년(기원전 2000년경)전 이집트는 제12대 왕조를 세우고 병사 들의 무력을 바탕으로 통치하며 노예들을 이용해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으 나 3,700년(기원전 1700년경)전부터 셈계( 系 )의 유목민인 힉소스인이 서 ( 西 )아시아로부터 침입하므로 오리엔트는 혼란스러웠다는 것입니다. 3,500~3,400년(기원전 15~14세기)전 이집트 왕인 아멘호테프3세, 아나크톤4세는 아시아 각국 왕들과 군사동맹을 맺고 히타이트 후르리(미탄 니) 아시리아 카시트(카시)와 함께 힉소스 족을 추방하므로 권력을 유지했 다고 합니다.(나일 강 중류의 텔 엘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360통의 아카드 어로 기록된 설형문자 점토판문서(아마르나 문서) 는 이집트 왕인 아멘호테 프 3세, 아나크톤 4세와 아시아 각국 왕 사이에 교환된 공식서 간( 公 式 書 簡 )으로 확인) 평화롭던 부족들을 침략해 정복자가 된 무리들은 제국을 건설하고 왕이라 칭했으며 왕은 태양신의 아들로 자처했으므로 달의 공전과 지구의 자전에 의해 별자리가 이동하고 변화하는 시기를 알아야 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별자리의 이동을 기록하고 분석하다 나일 강이 범람할 느낌 29

때는 일정한 위치에 시리우스(큰개자리 α별)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태양력(태양 공전주기인 365. 2422일을 12달로 나눈 것)을 만들게 되는 등 천문지리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태양력과는 달리 태음력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태음력은 달의 운행만을 기준으로 삼아 달이 29.53059일 만에 보름달이 됐다 그믐달이 되는 것을 기준으로 1개월로 잡아 사용하고 있으며 현재의 음력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수메르인들이 번성했던 3,700년(기원전 1,700전경)전 나일강변에 큰비 가 내리는 대홍수가 발생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비옥했던 농토들이 침수 됐으며 농사를 지어 수확한 많은 곡식들이 떠내려가자 왕들은 신이 노해 저 주가 내렸으니 신에게 제물을 받치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며 사람의 심장을 제물로 받치는 죽음의 제로 대중에게 공포심을 주며 내란을 일으키지 못하 도록 복종시켰습니다. 많은 부족을 정복해 왕국을 건설한 침략자들은 점령당한 부족에게 자신들 이 믿는 신을 모시는 신전(페르시아전쟁의 승리를 기념해 2,447년(기원전 447~432년)전 익티노스의 설계로 세워진 그리스의 파르테논신전(아테네 라는 여신을 위한신전)도 노예노동으로 만든 것임)을 짓도록 하고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제를 지내게 함으로 복종하는 사상으로 길들이고 통치한 것입 니다.(이런 현상들은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부족을 침략으로 정복한 무리들은 패배한 종족의 기득권들에게 공 물을 바치는 식민지로 예속될 것을 강요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학살하고 남 은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으며 자신들이 저지른 흉악한 악행에 저항하지 못 하도록 순종시키기 위해 신을 자처하며 자신들은 죽어도 다시 부활한다고 세뇌하며 통제했습니다. 평화롭게 살던 부족들을 점령한 무리들이 점령부족민을 복종시키기 위해 신을 만든 것이며 자신들의 악독한 수탈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억압하며 통 제 지배하기 위한 방법으로 부활을 주장하고 부활할 장소라며 노예들을 혹 독하게 억압하고 수천 년간 신전과 자신들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만들어 권 력을 유지한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문명을 이루었다는 이집트는 구석기시대 신석기시 대 금석병용시대를 경유해 역사시대(왕조시대)로 이행됐다는 것이며 구석 기시대에는 자연경관( 自 然 景 觀 )이 왕조시대와 달랐는데 유럽 빙하기( 氷 河 期 ) 의 영향으로 우기( 雨 期 )와 건기( 乾 期 )현상이 주기적으로 나타났으며 당시 인 류가 거주했던 지역은 하곡지대가 아니라 서쪽방면의 대지( 臺 地 )였다고 합니 느낌 30

다. 아슈르기( 期 ) 무스티에기 솔뤼트레기 등에 속하는 구석기시대의 유물은 나일 강에 형성된 단구( 段 丘 )위나 파이윰호수( 湖 ) 하르가 등의 오아시스주변 높은 지점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중기까지의 문화는 이집트 전토( 全 土 )에 걸 쳐 동일한데 비해 후기에는 지방마다 다르게 특색을 띄고 있다는 것입니다. 파이윰 지방은 에피르발루아 문화, 하르가 오아시스의 아테리안 문화 등이 발굴됐기 때문에 당시 북아프리카는 다우습윤( 多 雨 濕 潤 )에서 건조( 乾 燥 )로의 이행기( 移 行 期 )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약 7,000(기원전 5000년경)전 건조화가 진전되면서 나일 강 수위( 水 位 ) 가 내려가 자연환경이 현재와 비슷하게 됐을 때부터 사람들은 나일 강 하곡 에 정착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사람들은 점차 농사를 짓 고 가축을 기르며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던 시기에서 이웃부족을 침략해 노 예로 삼고 공물을 강탈하는 왕조시대가 형성됐다고 합니다. 신석기 후기 유적으론 카이로 서남 80km에 있는 파이윰문화와 중부 이 집트동안( 東 岸 )의 델 타사유적이 많이 발굴됐는데 이때까지도 사람들은 떠 돌아다니는 수렵생활을 한 흔적들이 나타나지만 한편으로는 농사를 짓고 가 축을 기른 흔적들도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집트 상 하는 각각 다르 게 발전된 것으로 보이며 발굴된 유물로는 토기와 석기 그리고 골각아기( 骨 角 牙 器 ) 바구니세공[ 籠 細 工 ] 직물과 피혁제품 팔레트(화장접시) 꾸미개 [ 裝 身 具 ] 등이 있습니다. 유물로 보면 인류는 아주 오랜 세월동안 자신들에게 필요한 생활필수품인 옷이나 신발 같은 물질들을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침략자들이 왕조 를 만들고 각 지역에서 수공업 작업에 익숙한 사람들을 포획해 노예로 삼고 야금( 冶 金 )이나 무기제조 또는 피혁이나 도기( 陶 器 ) 그리고 약기와 약품 등 을 생산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남자노예들은 자신들을 혹독하게 감시ㆍ통제하는 감독관과 지배자들이 먹 고 살 수 있도록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고기를 잡고 생필품인 주택과 신발 그리고 가구 또는 귀족들이 타고 다닐 마차와 귀족들의 허영심을 채우 기 위해 금광에서 목숨 걸고 생산노동을 했다고 합니다. 노예들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받고 게으름을 피우면 채찍을 맞으며 생 활에 필요한 모든 물질을 만들어 낸 것이고 여자노예들은 음식을 만들고 귀 족들이 입고 생활할 옷을 만들었으며 집안을 청소하고 식물을 채취하기도 했지만 성욕과 유흥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느낌 31

금석병용기( 金 石 倂 用 期 ) 시대에 상( 上 )이집트엔 바다리유적, 하( 下 )이집트 엔 메림데유적이 발굴되는데, 바다리유적은 고타( 敲 打 )에 의한 것으로 주조 한 방법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최초의 구리제품과 현저히 발달 된 토기가 발굴됐으며 시나이 누비아산( 産 )공작석( 孔 雀 石 )이나 홍해산( 紅 海 産 )조개, 시리아산의 삼목재 등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는 엄청나게 넓 은 지역을 침략해 정복하고 공물을 받거나 강탈해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의 탄생 3,300년(기원전 1,200년경)전 이집트왕국은 많은 종족들을 정복 해 살았는데 특정종족들의 자손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자 왕족(기원전 1290~1223년경)들은 숫자가 많은 종족은 전쟁이 나면 내란으로 권력을 찬탈할 수 있다고 우려하며 태어나는 남자 어린아이들을 살해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유아들을 살해하므로 종족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막으면서 권력을 유 지했는데 특정종족의 아이로 태어나 학살을 피해 강가에 숨겨졌던 모세(본 명 요김 야훼께서 세우신 자 라는 의미였으나 모세 라는 이름은 이집트 공주가 지었다 함)라는 사람이 이집트공주에 의해 구출됐다는 것입니다. 그가 40세 되던 해 같은 종족이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분개해 이집트인 감 독관을 살해한 후 동족들에게 함께 저항하자고 호소했으나 동조하는 사람들 이 없자 혼자 외롭게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게 됐고 도망간 곳에서 유목민으 로 생활하던 미디안족( 族 )사제( 司 祭 ) 이드로(르의엘)의 딸 시뽀라와 결혼해 살았다고 합니다. 사제의 딸과 결혼하고 자연에서 누구에게 간섭받거나 통제되지 않고 자유 롭게 생활하며 장인이 신께 제사지내는 행위로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것을 보고 깨달은 모세는 80세 되던 해 이집트로 돌아와 동족들이 침략자들에 의해 자유를 박탈당하고 억압과 통제 속에 착취당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 했을 것입니다. 인류는 침략에 성공한 무리가 토지와 생산물을 강탈했으므로 토지의 사유 나 계급이란 구분 없이 집단에서 누구나 평등하게 공동으로 사냥하고, 농사 느낌 32

지으며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종족을 유지했으므로 동족에 대한 애착이 강했 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동족들이 법이라는 강제규정에 묶여 억압ㆍ통제 속에 착취당하는 것과 태양신과 헤라 신을 내세워 칭송하는 이데올로기(행동을 제약하기 위 한 관념이나 믿음)에 속아 살아가는 것을 보고 자신은 하느님(야훼)을 섬긴 다고 설파했다고 봅니다. 그는 하느님의 율법엔 모든 사람은 자연에서 자유롭게 살아야 하는데 침 략자(권력자)들에 의해 법률과 규칙에 얽매여 숫자를 받고 지시와 통제 속에 살아가는 것은 노예의 삶을 사는 것이므로 모든 관습과 법률의 굴레에서 벗 어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 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감시와 통제 속에 혹독한 채찍질을 당하며 지배자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질을 생산하던 노예들과 전쟁에 참여하고도 강탈한 물질을 차지 하지 못해 불만이 생긴 병사들, 그리고 평민이라는 이유로 귀족들의 권위에 억눌려 굽실거리며 착취당하던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됐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모세는 이들과 함께 세력을 규합하여 힘을 기르고 형 아론의 협조를 얻어 파라오에 대항해 싸워 이기므로 자신의 종족을 노예 에서 해방시켰다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종족을 해방시킨 모세는 여러 종족이 모여 살며 권력쟁 탈과 지배ㆍ통제의 틀에 갇힌 이집트를 벗어나 자신의 종족끼리 평화롭고 자유롭게 거주할 비옥한 땅을 찾아 유랑생활을 시작했으며 평소 자신이 주 장했던 평등사상과 철학에 따라 힘(권력)을 가졌지만 권위를 내세우거나 무 력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신망을 받은 모세는 거짓을 섬기는 제단을 만들어 사람 이나 산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제를 지내지 말 것이며, 모든 사람은 자유롭 게 살아갈 권리가 있고 평등한데 신앙을 핑계로 착취ㆍ갈취하거나 지배ㆍ통 제하기 위해 법률과 관습을 강요하지 말라 는 언약들을 구약과 율법으로 남겼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부족들을 침략해 힘으로 왕국을 건설한 제국의 왕들은 힘(권력)을 믿고 독선적 독재만 행사했지 조직을 관리할 두뇌나 융화( 融 和 )력이 부족하 기 때문에 내부에서 폭정에 저항하는 사람들과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권 력을 잡으려는 무리들도 있어 수많은 분열을 일으키면서 호시탐탐 권력을 찬탈할 기회를 노렸습니다. 느낌 33

또 한편 왕국을 건설하고 귀족생활에 젖어 안락하게 살아온 무리들은 다른 부족을 침략하고 물질을 약탈하려고 노력할 때는 강성한 힘이 있었지만 편 안한 귀족생활로 향락에 젖은 생활을 즐기면서 힘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힘 은 점점 약해지고 무기력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이 있거나 덩치가 큰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부터 약자를 괴롭히거나 물건 을 강탈할 수 있기 때문에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단순하고 미련한 경우(남의 물건을 강탈하기 위한 머리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가 많지 만 힘이 약하거나 덩치가 작아 항상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며 살아가므로 두뇌회전이 빠른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당시엔 거친 들판과 산야에서 목축을 하며 유랑생활을 하던 종족들은 사나 운 맹수들을 사냥하기도 하고 가축들을 지키기 위해 맹수들과 싸우면서 단 련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단련된 종족들은 무기와 기마병으로 무장하고 왕족들이 지배하지만 군사력은 없고 양식은 풍부한 변방을 수시로 침략해 약탈과 부녀를 납치하 는 수탈전쟁을 수없이 되풀이 하며 왕국을 점령하기도 했기 때문에 힘으로 건설된 왕국들은 소멸했다 탄생되기를 반복하며 발전해 왔습니다. 마야제국은 1,700년전~1,200년(기원후 300-800)까지를 구 마야제 국이라 하고 1,200년 전부터 500년 전(800-1500년)까지를 신 마야제 국으로 부르고 있으며 신 마야제국의 중심지는 유까딴 반도로 멕시코북부지 역의 똘떼까 문화권과 교류하며 번성했습니다. 기원후 5세기를 전후해 번성했던 구 마야제국은 9세기 후기 북부지방에서 내려온 이짜족과 도시연맹을 결성했지만 560년(1450년경)전 마야족과 이 짜족 간에 전쟁이 발생해 마야빤은 파괴되고 1563년에 스페인이 이 지역 을 정복했을 때 마야제국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야인은 농경에 의지하는 도시였음에도 엄격한 사회신분제도를 두고 통치 했는데 사제의 신전이나 귀족의 궁전은 높은 구릉 위에 요새같이 견고하게 짓고 이 구릉주위를 이엉으로 지붕을 얹은 다닥다닥 붙은 오두막으로 뺑 둘 러싸고 평민들이 살았으며 중간계층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극히 소수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자들로 나누고 귀족들은 권위적이며 폐쇄 적인 생활을 했고 제사장을 맡아 스스로를 알메헤노브라불렀는데 그 의미 는 아비와 어미를 가진 자 즉 혈통을 지니고 있는 자라는 뜻이라고 합니 느낌 34

다.(이런 기록으로 보아 이때까지도 난교생활을 했고 가족은 침략으로 지배 자가 돼 권력을 행사한 무리들만 형성 했을 것으로 추측됨) 마야나 잉카제국은 병사들의 힘(무력)으로 통치했으며 태양을 신으로 섬겼 고 왕은 스스로 태양의 아들이라 칭하며 노예에게 신전과 제단을 짓도록 했 으며 귀족, 평민, 노예로 철저하게 신분을 나누고 태양신에게는 사람의 심장 을 제물로 받치는 의식을 치렀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왕이 지명하는 사람을 제단위에 눕히고 마야는 살 아있는 남자가슴에 잉카는 여자가슴에 칼을 꽂아 살해하고 심장을 꺼내는 의식을 치르므로 대중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며 무력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고 합니다.(이러한 사실들은 당시 새긴 그림문자와 조각의 유물들로 확인되 고 있음) 무력으로 왕국을 건설한 무리들의 통치수단인 종교의식 때문에 제물로 받 쳐질 사람들이 필요했으므로 제물을 마련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노예를 확보했으며 확보된 노예들의 노동으로 먹을 것을 생산하고 신전들과 귀족들 이 누리고 살아갈 건물들을 지었으며 신전의 제물로 받쳐졌다는 것입니다. 석가의 탄생 2,500년(기원전 563~483년경)전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 국경부근 인 히말라야산( 山 )기슭에 카필라성(Kapilavastu: 迦 毘 羅 城 )을 중심으로 샤 키야족( 釋 迦 族 )이라는 작은 부족국가의 왕 슈도다나(suddhodana: 淨 飯 王 )와 부인 마야(Maya: 摩 耶 )사이에 싯다르타(Siddhartha: 悉 達 多 )고타마 (Gautama: 瞿 曇 )라는 왕자가 태어났으나 생후 7일 만에 어머니와 사별하 고 이모에 의해 양육되면서 왕족의 교양에 필요한 학문과 기예를 배우며 성 장했다고 합니다. 당시 풍속이 결혼한 여성은 친정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남편에게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마야부인이 고향으로 가던 중 룸비니 동산에서 싯다르타 고타 마를 낳았다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은 아소카( 阿 育 王 )라는 왕이 석가모니의 느낌 35

성지를 순례하면서 석가모니가 탄생한 자리를 기억할 수 있도록 석주( 石 柱 ) 를 세웠는데 이것을 1896년에 발견해 해독하므로 확인됐다는 것입니다. 인도역사는 50만 년 전 호모에렉투스가 생활하던 시기부터의 유적이 발 견됐으며 인류라 할 수 있는 호모사피엔스는 7만5천 년 전 타밀나두지방에 서 생활한 흔적들이 발굴됐고 5,300년(기원전 약 3300년경)전 무렵부터 3,300년(기원전 1,300년경)전까지 고대 인더스문명이 있었던 것으로 확 인되고 있습니다. 인더스문명은 3,900년(기원전 1900년경)전 까지 이어진 청동기시대 하 라파시기와 이후 철기 시대인 베다시대로 구분하고 있는데 베다시대에 들어 힌두스탄평원에는 십육대국으로 불리는 고대도시국가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십육대국의 하나인 마가다에는 2,600년(기원전 6~5세기)전 베다종교(다 양한 신)와 브라만교(힌두교의 원조)만 있던 인도에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마 하비라와 불교의 창시자인 싯다르타 고타마와 같은 사람들이 새로운 사문 ((samana, 沙 門 )이란 노력하는 사람 이라는 정도의 뜻)을 구성하고 후 일 무함마드에 의해 이슬람(순종이란 뜻)교가 생겼습니다. 아리안 족들은 강력한 군사력과 재빠른 기마병을 갖추고 있었으며 글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힘이 약한 부족을 침략해 식민지를 넓혔으며 이들이 정복 한 부족에게 베다종교를 믿게 하면서 4개로 구성되는 계급의 신분제도를 만들어 통치했습니다. 인도의 신분제도를 카스트(혈통을 뜻하는 포르투칼어 카스타(casta)에서 유래한말)제도라고 하는데 힌두교의 윤회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사람 은 죽어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혈육을 물려받아 태어나면 부모 의 계급과 신분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카스트제도는 아리안 족이 원주민을 억압하고 통치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던 4계급제도를 신앙의 기원으로 하여 변화시킨 사상으로 현재까지도 통치수 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카스트는 1.신분과 직업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으며 2.태어나면서부터 지 위를 세습하고(태어날 때 부모가 가지고 있던 신분의 세습) 3.타고난 능력 에 따라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수 없도록 할 뿐 아니라 4.다른 신분과는 결혼을 금지하며 같은 계급끼리 결혼하도록 강제하고 일상생활도 같은 신분 끼리 어울리도록 규정됐습니다. 카스트의 계급구성과 특징을 살펴보면 최고신분은 성직자인 브라만이라는 느낌 36

신분으로 제사의식을 독점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것이며, 둘째계급은 귀족 과 무사들로 정치와 병사를 지휘해 백성들을 통치하고 다스린다는 크샤트리 아라 불리는 신분이며, 셋째는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생산에 종사하는 농민과 상인계급으로 바이샤라는 신분이고, 마지막인 넷째 수드라계급은 노 예로 위의 세 신분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의무를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는다 고 합니다. 왕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의 지휘를 받아 통 치해야 하는 정치체제를 갖춘 환경 속에서 성장한 싯다르타 고타마는 왕자 의 신분으로 태어나 당시 풍습에 따라 16세에 부인인 야쇼다라( 耶 輸 陀 羅 )와 결혼했으며 아들라훌라( 羅 睺 羅 )를 낳고 행복한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생후 7일 만에 모친이 죽은 사실과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 것 등 인 생의 철학에 직면해 고뇌하다 29세 때 처자와 왕자의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생로병사와 고뇌가 생기는 근원을 파악하고자 고행의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처음엔 출가자의 풍습에 따라 육체를 학대하는 고행( 苦 行 )에 전념해 신체가 해골처럼 됐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남쪽으로 내려가 갠지스 강( 江 )을 건 너 마가다국( 國 )왕사성( 王 舍 城 : Rajagha)에서 알라라칼라마와 우다카 라마 푸타라는 스승들을 차례로 찾아 무소유처정( 無 所 有 處 定 ) 비상비비상처정( 非 想 非 非 想 處 定 )이라는 선정( 禪 定 )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방법으로는 생사의 괴로움을 해탈할 수 없다고 생각해 부다 가야 부근의 산림으로 들어가 6년간 고행했으며 다시 보리수( 菩 提 樹 :Bodhi-tree) 아래에 자리 잡고 깊은 사색에 빠졌다가 정각( 正 覺 :abhisambodhi)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깨달음의 내용<아함경( 阿 含 經 )>은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으나 사제( 四 諦 : 苦 集 滅 道 의 4가지 진리, 즉 현상계의 괴로움과 그 원인 및 열반과 그 에 이르는 길) 십이인연( 十 二 因 緣 ) 사선삼명( 四 禪 三 明 )등을 나타내는 것 으로 기본적으로는 선정에 의해 자연의 이치 즉 법( 法 :dharma)칙을 깨달 고 집필했는데 선정은 강렬한 마음의 집중이며 공포도 고통도 나아가 애욕 도 산란이 발생되지 않는 부동( 不 動 )의 마음(내공)을 이루는 것을 깨달으면 번뇌와 속박에서 해방되고 여기에서 생긴 지혜는 신비적 직관( 直 觀 )이 아니 라 자유로운 여실지견( 如 實 知 見 :사물을 있는 그대로 옳게 봄)이라고 설파하 여 성인으로 추앙받게 됐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하며 사람을 신 분이나 계급으로 구분 짓고 타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거 느낌 37

스르는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니자 하급신분으로 태어나 억압받고 노 예로 생활하던 많은 사람들이 설법을 듣기 위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고 합 니다. 군중들이 열망하므로 불교로 된 것이며 불교에 많은 신도가 모여 강성해지 자 카스트제도가 부정되면서 성직자들의 권위가 약화되니 권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 성직자들이 최고 권력인 성직을 회복하기 위해 종교전쟁을 일으켰 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불교가 패하고 설법을 펼치던 승려들이 카스트를 신봉하는 성 직자들의 무력에 학살당하므로 불교는 인도에서 사멸되고 힌두교와 이슬람 교의 성직자들이 권력을 잡아 신분제도를 부활시켰다고 합니다. 석가모니( 釋 迦 牟 尼 )(석가는 샤카(샤키야,Sakya)라는 민족의 명칭을 한자 로 발음한 것이고 모니(muni)는 성인이라는 의미라 함)는 석가문( 釋 迦 文 ) 등으로도 음사하며 능인적묵( 能 仁 寂 默 )또는 보통 석존( 釋 尊 )부처님이라고도 하기도 하며 석가모니란 본래는 석가족( 族 ) 또는 샤카족 출신의 성자 라는 뜻으로 불교를 창시한 인도의 성자( 聖 者 )로 부처님, 부처, 석가모니, 석가세 존, 석존, 세존, 석가, 능인적묵, 여래, 불타, 붓다, 불( 佛 ) 등 다양한 명칭으 로 불리고 있습니다. 초기불교는 예배대상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굽타왕조 이후부터 권력을 잡 은 기득권들이 불탑과 불상을 만들고 민간신앙인 힌두교(잡교와 밀교)와 같 은 형태로 변질시켜 석가 정신이 훼손되면서 지금의 종교형태가 됐다고 합 니다. 이슬람병사는 8세기 이후 북서인도까지 진출했다 11세기에 다시 몇 왕조 가 북부인도에 들어와 아프가니스칸, 간다라, 캐시미르 등지에서 불교사상 을 억압하고 12세기 말엽-13세기에 걸쳐 불교사원을 침공해 불태우며 파 괴하고 승려들을 살해하거나 추방해 불교는 인도에서 사멸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출현 고대 로마(라틴어: Roma antiqua)역사가들은 2,800년(기원전 8세기 경)전 이탈리아의 대다수가 상대적으로 미개한 상태일 때 에트루리아인들이 느낌 38

라티움에서 테베레 강을 건너와 정착해 살았으며 이탈리아남부와 시칠리아 (마그나 그라이키아)지방에도 그리스인들이 넘어와 정착하고 살면서 집단문 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이들이 정착해 살던 팔라티누스 언덕을 비롯한 로마의 여러 언덕에 농촌 촌락들이 형성됐는데 이들 산지 촌락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언과 관습이 있 었다는 것입니다. 2,700년(기원전 7세기 무렵)전 비옥한 땅에서 농경사회를 이루고 자유로 우며 풍족하게 살던 티베리스 강(현재의 테베레 강)하류 라티움이라는 지역 을 인도 유럽계 고대 이탈리아인에 속하는 라틴인과 사비누스인 일부가 무 력을 행사하며 침략해 사람들을 학살하고 점령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라티움을 점령하고 비옥한 땅에서 생산한 곡물을 강탈하므로 먹을 것과 재 물이 풍족해진 침략자들은 사람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병사를 훈련시키고 무 력을 바탕으로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시작했는데 침략무리를 이끌던 로물루 스(버려져 늑대에 의해 자랐다는 전설을 가진 Romulus와 Remus쌍둥이 형제)라는 사람이 2,700년(기원전 753년 즉위)전 왕이라 칭하면서 로마 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학살과 약탈로 재물이 풍부해지자 더 많은 병사를 끌어 모아 이탈리아를 통일한 무리들은 정복한 지역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법(규칙)을 만들고 (라틴어: IusRomanum) 로마의 고대법( 古 代 法 )은 민족적 색채가 짙은 형 식주의이며 관습위주( 主 )로 하다가 2,400년(기원전 449년)전 12표법( 表 法 )을 축( 軸 )으로 하였다.)계급으로 나누는 신분제도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병사를 보유했으며 초기부터 침략에 참여해 지휘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은 자칭 신의 자손이라는 3개의 귀족(파트리키)계급들로 나누고 최 고위직인 집정관(콘술), 침략지역을 통치하는 총독(사트라프), 고급관리인인 감찰관(켄 소르)이라는 직책으로 나누어 권력을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침략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은 귀족에 소속됐으며 침략 중 저항할 수 없도록 잔인하게 학살한 병사들을 칭송하며 진급시키고 전리품으로 침략한부족의 여자들을 마음대로 겁간하고 재물을 강탈하며 포로를 노예로 소유할 수 있 게 하므로 평민들은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신분상승의 기 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병사를 많이 보유한 무리들은 수많은 부족을 침략해 사람을 학살하거나 포 로로 포획했으며 붙잡힌 부족민은 침략자와 그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느낌 39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먹을거리(농사와 목축, 어로)와 생필품(관제수공 업) 그리고 신전이나 귀족들이 거주할 궁전 또는 저택을 짓는 노예노동을 하면서 갇혀서 감시받는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먹을 것과 생필품 등 모든 물질을 만들어내면서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도구(말을 알아듣고 할 줄 아는 도구)로 분류해 혹독한 감시와 통제 속에 가축처럼 취급됐으며, 노예주는 노예의 생 명을 뺏거나 양도 매매할 수 있어 노예는 주인이 소유한 재산이었다는 것 입니다. 고대 로마 노예는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부분적으로 재산을 모으면 자유를 살 수 있었다는 일부주장이 있는데, 노예가 벌면 주인 소유가 돼 노예재산 이란 없고 미국 남북전쟁까지도 흑인노예가 자유를 매수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에 억압에서 벗어나려면 뭉쳐서 통제에 저항해 싸우든가 도망 치거나 죽는 것뿐이었습니다. 자유롭게 살다 침략당해 땅과 가족을 잃어버린 노예도 아니고 정주민도 아 닌 도시가 형성돼 있으므로 살기 위해 스스로 도시로 찾아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외국인이라고 불렀으며 생활은 노예보다 자유로웠지만 소 속이 명확하지 않아 언제든지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포획될 수 있었다고 합 니다. 이들은 사람이 살지 않은 땅에 화전을 일구며 살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추 측 가능하며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귀족들이 차지하고 자기 땅이라며 유흥을 즐기기 위해 사냥을 나오면 쫓겨 다니며 살았을 것이고 생산하는 물 질 품목이 한정됐기 때문에 물물교환을 할 수 있는 시장을 형성하기도 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당시 재산을 많이 보유했다는 표현이 있다고 해서 화폐를 사용했다는 주장 이 있는데 화폐가 유통되는 시장이 존재하려면 생산되는 물질이 풍족해야 하고, 힘든 노동으로 생산한 물질을 화폐로 언제든지 교환할 수 있게 보장 되는 시장이 존재해야하며 대중이 보편적으로 믿을 수 있도록 합의한 화폐 를 제작하고 관리할 수 있는 기관이 있어야 합니다. 한참 뒤까지 그리스에서 병사와 관리(관료)들에게 소금을 봉급으로 지불하 고 소금으로 노예를 사고 물질을 교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화폐 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물물교환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병사들의 무력으로 평화롭게 살던 부족을 침략해 정복하고 질서유지라며 느낌 40

모든 사람들을 통제하는 법과 제도를 만들고 지배직책을 모두 장악한 무리 들은 자신들이 거느린 병사를 동원해 더 많은 부족들을 침략하고 물질을 약 탈하며 포로를 붙잡아 노예로 부리면서 더욱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거듭되는 전쟁으로 사망자가 늘어 병사가 부족해지자 전공을 세우 면 노예에서 해방시키고 일정한 직책을 준다며 노예를 병사로 동원했는데 도망가는 노예들과 명령에 따르지 않는 병사들이 늘어나 재산을 불리거나 다중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무력이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침략에 성공한 귀족의 재산(붙잡혀온 노예와 강탈한 재물)은 풍족한 반면 전쟁에 참여하지 못해 상대적으로 빈곤해진 귀족들은 전쟁에 참여할 권리를 갖거나 재물을 분배받는 제도를 만들려고 해 이권다툼이 치열했으며 병사들 이 침략전쟁으로 도시를 비운사이 주변 부족들의 침략까지 받으면서 로마는 점점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몰락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왕만이 붉은색 옷과 신발을 사용할 수 있었고 색깔옷감을 만드는 곳에 노예노동을 사용했으며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호화 스럽고 웅장하게 꾸민 거대한 마차를 타고 수많은 신하들과 생산노동은 하 지 않고 왕의 시중만 드는 노예를 거느리고 거리를 행차하는 것을 즐겨 생 산노예가 줄었습니다. 또한 권위를 내세우며 과시하기를 좋아했고 주지육림에 빠져 향락과 쾌락 을 즐겼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고도 갖은 세금(곡물과 생필품 등)이라는 명 분으로 수탈당해 비참하게 살아가던 병사들이 불평등과 빈곤에 불만을 가지 고 귀족에 대항해 암살하기도 하는 등 끝없이 내란을 일으켜 쇠퇴하게 됩니 다. 귀족을 자처한 사람들은 수많은 신을 만들고 자신들의 신을 믿을 것을 강 요하며 대중들을 통제했으나 석가모니(불교 창시자)와 모세(성경속 인물)가 주장했던 평등사상과 2,500년(기원전 469~470년경)전 소크라테스(Σω κράτης)와 그 이전 철학자들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하며 자유롭게 살 권 리가 있다고 주장한 사실을 깨우쳐 억압과 수탈을 목적으로 한 그들의 신을 부정하며 복종을 거부했다고 봅니다. 철학자들이 과거로부터 전해온 것들을 부정하며 새로운 지식을 축적하고 만물은 어디서 유래하며 무엇으로 탄생되는지에 대한 의구심, 자연에서 발 견되는 사물들의 다수성과 자연은 수학적으로 어떻게 기술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봉착해 끝없이 고뇌하면서 발전시켜온 역할로 평민들은 침략자들의 느낌 41

지배논리인 거짓신화에 현혹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족으로 뭉친 평민들이 수없이 반란을 일으키며 저항하자 귀족들은 로마 에 살고 있는 종족들 중 숫자가 많아 뭉치면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30개 의 부족대표에게 권리를 줄 수밖에 없게 됐으며 이들에게 투표에 참여해 표 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쿠리아회(Comitia Curiata)를 만들었다고 합니 다. 선출된 부족대표들은 평민들을 위해 귀족들의 폭정과 횡포를 막아내는 역 할을 목적으로 선출됐으나 대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자 귀족 들처럼 누리고 살려고 공물을 늘려 징수해 가로채므로 평민들의 생활이 나 아지거나 권리가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놀고먹는 착취자들만 늘어나 더욱 빈곤하게 됐습니다. 지배자들은 평민들이 귀족들의 향락과 부유한 생활에 불만을 갖는 저항정 신을 희석시키기 위해 경기장을 만들어 흥미위주의 공연과 맹수사냥을 보여 주는 한편 스포츠와 도박을 만들고 병사들의 체력과 전투기술(사람을 죽이 는 일)을 발전시키는 격투를 벌이는 검투사경기를 만들어 대중의 관심을 돌 리려 했습니다. 그런다고 평민들의 삶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경기장을 만든다며 수탈해 더욱 궁핍해진 평민들의 내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권력을 탐하는 귀족들이 호시탐탐 권좌를 노리므로 왕권은 상실되고 귀족들의 의견을 수렵할 수밖에 없어 30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을 만들고 2대(누마)왕(기원전 715~673 년)부터는 투표로 선출했다고 합니다. 투표로 왕을 선출해도 귀족들끼리의 권력다툼이고, 선출된 왕(Rex)은 군 사지휘권과 공동체문제를 전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재판관의 권한을 가졌 으며 종교의식을 집행하고 전시에는 귀족이라도 왕권(imperium)으로 신하 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단할 수 있는 권력을 행사했다는 것입니다.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 귀족 사이에 권력쟁탈을 위한 음모가 끊이 지 않았는데 평민들이 저항하므로 귀족들에게만 인정하던 시민권을 재물을 가진 평민들까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시민회(Populus Romanus)를 만들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시민회는 행정관의 임명이나 전쟁과 평화에 대해 추인하거나 거부할 권 한이 있었지만 시민회 결정사항은 300명의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 (Senatus)에 의해 거부됐기 때문에 명분뿐이었다고 합니다. 느낌 42

다수의 불만을 저지하고 안정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만든 이런 정책은 놀고 먹으며 누리고 사는 무리가 확장되면서 세금이 늘어 평민들의 삶만 더욱 궁 핍해 졌고 권력이 여러 종족으로 분산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빈부격차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타 부족을 침략해 재물을 약탈하고 토지를 점령해 귀족들에게 나눠 주므로 만족을 주고 평민들을 억압하며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더욱 수많은 부족을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키며 영토를 확장하고 노예를 포획했습니다. 로마공화정으로 발전 이후 왕권은 3대왕 툴루스-호스틸리우스(기원전 673~641년), 4대왕 안쿠스-마르티우스(기원전 641~616년), 양자로 왕이 됐으나 선왕의 친 아들에게 살해당한 5대왕 타르퀴니우스-프리스쿠스(기원전 615~579년), 선거 없이 원로원승인으로 왕이 됐다 딸과 사위에게 살해당한 6대왕 세르비 우스-툴리우스(기원전 579~534년), 장인을 살해하고 민회선거나 원로원 승인 없이 왕이 된 7대왕 타르퀴니우스(기원전 534~509년)까지 왕정이 었으며 침략전쟁을 거듭하며 무한하게 지역을 넓혔습니다. 침략으로 토지가 무한이 늘어나고 강탈한 물질이 넘쳐 귀족들 생활은 호화 스러웠지만 전쟁에 참여하느라 농사를 짓지 못해 궁핍해진 평민들이 내란을 일으켜 200년이 넘도록 권좌를 누리던 로마 왕권정치는 2,500년(기원전 5세기경)전 권력을 차지하려는 귀족들이 평민들과 합세해 전쟁에서 돌아오 는 에트루리아계왕을 축출하므로 왕정은 사라지고 과두공화정(Res Public Roman)으로 넘어오게 됐다는 것입니다. 공화정을 수립하자 원로원이 실권을 행사하는 정치기구로 귀족들의 권 한은 증대됐지만 평민들의 권한은 없었으며 귀족계급에서 선출한 집정관 (consul) 2명이 1년의 임기동안 최고권인 군사 사법 종교 등의 국가권 력을 1개월씩 돌아가며 집행할 수 있게 분산시키고 중임할 수 없게 했습니 다. 선출된 집정관 두 사람에게 동등한 권한을 주고 상호 견제하도록 했으며 느낌 43

국가전쟁 시에는 한사람의 독재관(dictator)에게 6개월간 절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위임하는 제도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귀족들의 영토 확장과 이탈리아 내 다른 종족과 전쟁으로 평민들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침략전쟁에 동원돼 노동을 하지 못하거나 농사를 짓고 도 납세로 빈곤해진 평민들은 정치적 사회적 불평등에 불만을 품고 무력봉 기를 일으키므로 평민에게도 점차적으로 평등한 권한을 줄 수밖에 없게 됐 다는 것입니다. 공화제를 수립하면서 공포한 발레리우스(Valerius) 法 으로 평민이 사형 언도를 받으면 백인회에 상소할 수 있도록 보장했으나 2,500년(기원전 494년경)전 대외전쟁을 위해 출정한 병사들이 전쟁을 거부하고 성산에 모 여 권리를 주장하며 내전을 준비하고 농성을 벌이므로 귀족들은 평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평민회(ConciliumPlebis)를 창립하게 됐다고 합니다. 평민회에서 선출한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 없이 사 형에 처할 수 있고 행정관들의 어떤 행위든 금지시키는 거부권(veto)을 행 사할 수 있도록 신분을 절대 보장하는 2명의 호민관(tribunus)을 평민에 서 평민들에 의해 선출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하므로 평민들이 정치에 참여하 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든 것입니다. 그 후 호민관수는 4명으로 증가하고 10명까지 늘었지만 호민관은 행정적 기능이나 군사적 권한 없이 매우 소극적으로 제한된 민권(potestas)만 행 사할 수 있었고 평민회는 호민관을 선출하고 입법권을 가졌지만 평민회에서 선출된 호민관이 뇌물을 받고 귀족의 권리를 대변하는 법을 표결(plebiscit a)해 평민의 권리를 오히려 제약했다고 합니다. 2,400년(5세기 후반(기원전 417년))전 평민의 권리를 확대하고 보장한 다면서 푸블리우스(Publilius) 法 으로 호민관이나 집정관에 의해 소집하고 관리할 수 있는 부족회(Comitia Tributa)를 만들었고 후일 법무관직이 부활하면서 집정관의 직무 중 일부를 부족회에서 행사할 수 있게 했다는 것 입니다. 부족회의 권한은 입법권은 없으나 백인회 및 원로원에서 인준한 법안의 가 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권한이확대됐다가 후일 쿠리아회는 종교적 기능으로 축소되고 백인회의 권한도 점차 부족회로 이관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했 습니다. 무력을 행사할 힘을 가진 병사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민들로 구성 느낌 44

됐고 병사들이 내란을 일으키면서 권리를 주장하므로 귀족들의 권익을 위주 로 만들었던 관습법은 점차 사라지고 5세기 중기에 이른 2,400년(기원전 449년)전 최초의 성문법인 12표 법을 만들게 됐지만 귀족들의 계급적 배 타성과 우월감은 12표 법에도 그대로 방영됐다고 합니다. 제10표 및 11표에 귀족 평민간의 통혼이 금지되는 조항들을 존치시키고 있어 평민들이 계속 저항하자 2,300년(기원전367년)전 리키니우스-섹티 우스 法 을 공포하면서 법적으로 권리를 보장하고 평민에도 권력직인 집정관 1명을 선출할 수 있게 바뀌었으며 귀족들의 토지독점을 금지하고 평민도 토 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만들어진 법률에도 각 시민의 토지소유는 500유게라 (jugera)로 한정한다고 규정했기 때문에 평민들이 계속 불만을 나타내며 저항하므로 2,300년(기원전 300년)전 마침내 오굴니아 법이 만들어지면 서 평민에게도 신관직(제사장)과 동시에 공직취임권도 개방할 수밖에 없었다 는 것입니다. 2,300년(기원전 287년)전 호르텐시우스법(LexHortensia)에 의해 부 족회의에서 결의한 법안들이 원로원의 인준 없이도 발효할 수 있게 되므로 평민들의 국정참여는 법적으로 최대한 인정됐지만 평민의 참여는 법적 관 념상에 불과했고 사실상 귀족들과 재산을 많이 가진 무리들의 공직점유 현 상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원로원은 재산이 없는 평민들은 관직에 오를 수 없도록 방해하려고 관직을 무보수 명예직으로 만들어 재산을 보유한자들이 매점매석하며 권력을 강화 했고 관직에 당선된 평민들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동경의 대상인 귀 족들처럼 생활하기 위해 재산을 모으는 곳에 권력을 사용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해 졌다고 합니다. 기득권이 된 무리들은 열주( 列 柱 )정원과 식당 침실 도서실 휴게실 주 방이 붙은 대저택을 짓고 수 많은 은기( 銀 器 )를 사용하면서 매일 호화로운 연회를 열고 동방에서 들여온 조상( 彫 象 ) 회화( 繪 畵 )등 많은 미술품들로 장식해서 뽐내며 노예들에게 문지기를 시키고 전차경기나 노예끼리 서로 죽 이는 검투사(gladiator) 경기를 즐기며 쾌락한 생활을 했답니다. 한편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속주나 총독 그 밖의 관직에 당선되려면 평 민들의 환심을 사야 했기 때문에 표를 얻기 위해 평민에게 무료배급을 하기 도 했다고 기록돼있습니다. 귀족들은 소수 노예관리자만 부려도 엄청난 재화가 불어나 여가와 시간을 느낌 45

즐겁게 보낼 수 있는 방법만 연구했고 옷을 갈아입거나 밥을 먹는 것도 노 예에게 수발들게 했으며 매 끼니마다 온갖 산해진미를 차리고 자신들이 먹 다 남긴 음식을 미천한 것들이 먹으면 안 된다며 버리게 했다고 합니다. 사인교와 팔인교라는 가마를 만들어 노예들이 매고 다니도록 했고 자신의 발로 땅을 밟는 것조차 수치로 알며 누렸지만 병사로 전쟁에 참여하고도 빈 곤해진 평민들은 작은 1 室 家 (atriun)저택에서 생활을 했으므로 자연스럽게 불만이 쌓이고 불만을 표출할 방법이란 단체로 무력을 형성하고 저항하는 내란밖에 없었습니다. 귀족들은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강탈해도 나누면 부자가 될 수 없고 모두가 풍족하면 특권을 내세울 수 없기 때문에 자신들만 재산을 불리고 권력을 행 사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며 철저하게 권력을 지키고 재산을 불릴 수 있는 방안들을 연구했고 평민들이 권리를 요구하면 병사들의 무력을 동원해 잔인 하게 진압했다고 합니다. 귀족들은 재물과 권력을 지키려고 평민들의 요구를 잔혹하게 억압하다 살 해되기도 했고 평민들 중 소수가 권리를 요구하면 귀족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사들의 무력으로 억압하고 학살하므로 부족끼리 집단으로 뭉쳐 권리를 주 장하게 되면서 집단저항을 시작한 것입니다. 관직단계는 집정관직을 거쳐야 원로원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고 총독은 공물을 바치는 점령국의 속주들을 수탈해 부유해졌지만 소농출신 병사들은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있어서 오래 동안 자신의 땅을 지키지 못해 포에니전 쟁(기원전3세기-2세기 중엽)(로마와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차지하려고 침 탈)을 치르며 빈부격차는 극에 달했다고 합니다. 귀족들은 잡혀온 노예와 점령한 부족의 땅을 차지해 재산이 늘자 대농장을 만들어 누렸고 병사를 지휘하는 계급은 강탈한 재물로 재산은 늘렸지만 원 로원이 병사계급의 정치발언권 확대를 방해하고 정쟁을 일삼으며 토지개혁 을 거부하므로 개정된 클라우디우스 법(lex Claudia)에 의해서도 원로원으 로 진출해 신분이 상승될 수는 없었습니다. 약탈로 점령국이 늘어난 로마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분배불균등으로 빈부 격차가 극심해진 것인데 포에니전쟁을 치르며 논밭을 짓밟아 농지가 황폐해 진 중소농이 몰락하자 귀족들이 토지를 차지했고 시실리 섬 병합 후 속주들 에게 공납으로 곡물을 바치게 하면서 반도 내 농민들에게는 곡물보다 과수 재배를 권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량된 농경법을 만들었으며 많은 포로의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게 느낌 46

된 귀족들은 1,800년(200년전)까지 대농장(Latifundia)을 만들면서 로 마 초기사회의 핵심을 이루던 자유 신분의 중ㆍ소농은 사라지고 토지도 없 으며 부채에 허덕이는 빈민층이 생겨나고 평민들은 소작인(colonus)이나 노예로 몰락했다는 것입니다. 침략을 성공하면서 계속 노예가 늘어나 노동력이 풍부해지고 침략한 부족 들의 비옥한 토지를 점령한 귀족들은 대농장을 만들어 노예가 노예를 감시 하고 통제ㆍ관리하도록 노예관리자를 두기 시작했으며 노예관리자들이 수확 량을 기록할 수 있게 글을 가르치고 노예를 혹독하게 부리도록 강요했다고 합니다. 글을 알게 된 노예관리자들은 자신이 동족을 억압하며 무자비하게 탄압하 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유를 찾아 달아나기도 했으며 혹독한 착취노동 행위에 저항하는 노예들에 의해 귀족대신 살해당하기도 하면서 무력으로 참 혹하게 노예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노예관리자들이 탄생했습니다. 빈부격차가 극심해 불만을 품은 병사들이 끝없이 내란을 일으키자 2,100 년(기원전133~121년)전 재무관(기원전133)과 호민관(기원전137)을 역임 한 티베리우스그라쿠스(Tiberius Gracchus,기원전163~133년)가 개혁 을 추진했으며 반대하는 동료호민관 옥타비우스(Marcus Octavius)를 물 러나게 하고 부족회를 통해 강경하게 개혁안을 통과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라쿠스가 만든 개혁법은 페르가몬 왕 아탈로스 3세의 유토( 遺 土 )와 귀족 이 점유한 일정량 이상의 공지( 公 地 )를 로마에 반환하도록 하고 토지 없는 농민과 시민들에게 분배하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개혁을 거부하는 원로원이 반대하면서 원로원결의의 권한으로 시민 들의 권리를 일시 정지시키고 동조하는 평민 3,250명 이상을 학살했으며 기득권들은 자신들의 권한을 넘보거나 침해하면 병사들을 동원해 평민들의 권리를 무력으로 억압한다는 본보기를 보였다고 합니다. 저항의 내란으로 평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는 늘었지만 여전히 선출될 수 있는 평민은 소수에 불과했고 소수는 관직에 올라 귀족들이 나 누어 갖던 재물 중 일부를 나누는 위치에 올랐으나 기왕에 물려받은 토지와 재산을 보유한 귀족들에 비하면 보잘것없었습니다. 선출된 사람들은 귀족들이 누리는 호화롭고 쾌락적인 생활을 동경해 재물 을 긁어모으려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평민들 위에 군림하며 수탈하고 폭력을 휘둘러도 임기가 보장돼 임기동안은 관직에서 쫓아 낼 수 없었고, 느낌 47

평민들은 투표하고 선출할 수 있는 권리만 있을 뿐 관직에 선출된 사람들을 제재하거나 횡포를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내란이 끝없이 반복됐습니다. 초기 원로원은 임금에게 정책적 조언을 권고 하는 직책이었으나 한니발 이 침공한 제2차 포에니전쟁(기원전 218년~202년)때 공화정의 의사결정 구조로는 긴급히 발생된 전쟁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어 원로원에게 임시 적으로 원로원 비상결의를 사용할 수 있게 했는데 각종 조치들을 재빠르게 취해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내므로 원로원이 최고 권력이 됐다는 것입니다. 원로원 비상결의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지만 가이우스그라쿠 스(Gaius Gracchus,기원전153~121)는 원로원을 배제하고 형보다 더 과격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티베리우스 토지 법안을 다시 부활시키고 토지분 할위원회에 사법권까지 행사하도록 했다가 두 형제 모두 원로원에 의해 살 해당했다고 합니다. 원로원은 정적들끼리 도시 룸펜출신 폭력배를 동원해 평민들을 협박하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온갖 거짓으로 모함하며 음모를 꾸미고 폭력을 행사 하면서 권력을 부유층과 귀족계급들이 장악했습니다. 2100년(기원전 110~105년)전 동맹국들에게 로마시민권을 부여하라 는 요구가 거부되자 아프리카의 누미디아, 프랑스의 갈리아, 그리고 소아 시아에서 계속 내란이 발생하던 중 2100년(기원전 91~88년)전 폰투스 (Pontus)왕이 로마총독의 악정과 징세청부업자들의 횡포로 감정이 악화된 민심을 이용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평민들은 반발하고 접경 부족들이 침략하므로 내란을 잠재우고 침략을 막 기 위해 시민권한을 확대할 수밖에 없게 되므로 국가권력 대부분을 원로원 에서 부족회로 이양하고 라틴족과 이탈리아 족에게까지 시민권을 인정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러자 귀족들은 내란과 침략을 재빠르게 제압하려면 1인이 강력하게 권력 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하며 공화정을 해체시키고 일인지배 의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 관을 선출할 수 있는 제도로 바꿉니다. 마리우스(Gaius Marius, 기원전157~86)는 집정관으로 선출된(기원전 107)후 토지 없는 시민을 의용병으로 정규군에 편입하고 제대하면 군 지휘 관이 토지를 분배해주면서 소유할 수 있도록 군제개혁을 실시했습니다. 병사들은 군 지휘관에게 재물이나 토지의 분배를 기대하고 복종하므로 군 느낌 48

지휘관의 권한이 막강해지자 훈련된 병사들의 무력을 바탕으로 북아프리카 및 게르마니아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것입니다.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마리우스가 권력을 잡자 원로원은 귀족 편에서 병 사를 지휘하던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기원전138~78)에게 동 방원정을 명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는데 부족회가 마리우스를 지휘관으로 추천하며 제지하자 두 기관이 서로 최고 권력을 주장하며 충돌해 로마가 동 사로 갈라지는 시발점이 됐다고 합니다. 이 결과 첫 번째 내란은 술라가 거느린 귀족 편 병사가 승리하므로 술라는 원로원에 의해 무기한의 독재관으로 임명됐고(기원전82) 귀족들은 원로원 수를 600명으로 증가시켜 권한을 증대하는 반면 호민관과 부족회의 권한 을 크게 삭감했습니다. 이렇게 조치를 취한 술라는 자신의 업적이 항구적으로 수립됐다면서 정계 에서 은퇴(기원전79)하자 권력을 차지하려는 귀족들이 파벌싸움을 일으켜 反 술라 폭동이 전 이탈리아 반도로 확산되며 정국이 다시 혼란에 빠졌습니 다. 이때 폼페이우스(Gaeus Pompeius, Magnus,기원전 106~48)는 노 예들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를 주장하며 평민에게 접근해 크라수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기원전70년)됐는데 선출되자 평민을 기망하고 귀족입장을 옹호했다고 합니다. 스파르타쿠스 저항 폼페이우스가 진압했다는 반란은 유명한 노예반란으로 트라키아에서 출생 한 스파르타쿠스는 모든 사람은 자유로운데 법률과 관습으로 통제되거나 억압당하며 얽매여 사는 것은 노예의 삶을 사는 것이다 라고 주장했던 모 세의 평등사상이 담긴 율법서를 읽고 율법학자나 철학자들의 설법을 들으며 자유롭게 살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자유롭게 살던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가 카르타고를 정복하기 위해 벌인 포 에니전쟁에 참여하라고 명령하자 침략을 거부하고 자기부족 병사들과 반대 느낌 49

편으로 갔는데 전쟁에 패한 로마군병사들이 스파르타쿠스 탓에 패했다며 트 라키아를 침공해 부족민들을 학살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노예로 삼을 때 잡힌 사람입니다. 노예는(Statius)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그 의미는 서서 기다리는 자 로 서 하루 종일 주인의 명령을 기다린다 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살아있는 도 구 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비참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노예는 광산에서 노동을 하다 목숨을 잃거나 농장에서 채찍질을 당하며 농 사와 가축을 기르고 각종 신발과 옷 등 생활용품을 만드는 노예와 저택에서 정원사, 가정부, 유모로 또는 평민들의 오락과 도박을 위한 검투노예로 주인 들의 부를 축적시켜주고 안락한 생활을 위한 심부름을 하며 성욕을 채워주 는 대상이었습니다. 인류는 침략으로 힘없는 사람을 살해하며 물질을 강탈한 무리들은 점령지 에서 기득권이 되고 피해자들은 정복자들에게 억압받고 수탈당하며 지배받 기 때문에 용맹하고 강력한 사람을 추앙하는데 적들에게 가족과 부족민을 살해당하고 잡혀온 스파르타쿠스는 분노가 넘쳐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젊고 병사들을 지휘한 경험이 있는 스파르타쿠스는 미항 나폴리 북쪽 2마 일 지점 카푸아에 살던 렌툴루스 바티아테스라는 사람의 검투노예가 돼 혹 독한 훈련을 받으며 경기에서 동료를 살해하거나 맹수들과 싸웠다고 합니 다. 저녁이면 안주인들의 성적노리개로 주인이 던져주는 더러운 음식을 먹으며 생활하는 비참한 생활을 견디지 못해 동료노예 70명과 탈출(기원전 73년) 해 베수비우스 화산근처에 거점을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검투사노예들이 탈출해 거점을 마련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도망노예들과 빈 민들이 모여들었고 마리우스가 포로로 잡아왔던 킴브리아 족과 튜톤족, 쓰 라키아인 등 고도의 검투사훈련을 받은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출신병사들도 합류했다고 합니다. 많은 숫자가 모이니 로마군대를 물리치고 남부이탈리아의 대부분을 점령하 면서 갈리아에 인접한 포강 근처까지 장악했다는 것입니다. 스파르타쿠스의 목적은 노예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침략자들처럼 신분에 차별을 두거나 억압과 착취를 위한 특권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생활했다고 합니다. 느낌 50

로마병사들이 계속 침입하므로 로마군을 피해 시칠리아 섬으로 건너가려고 항구까지 갔으나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출신병사들은 친족들이 모두 학살당한 고향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흩어지지 말고 로마에서 살자고 했다는 것입 니다. 고도로 훈련받은 검투사들로 뭉친 이들은 추격자 정무관 클로디우스, 바리 누스와 후일 집정관이 된 렌툴루스가 이끄는 로마병사들을 세 차례나 연패 시키며 다시 남부이탈리아로 돌아가기로 했다고 합니다. 남부이탈리라도 돌아가다 레기움에서 추적대와 부딪쳐 크라수스와 폼페이 우스가 지휘한 병사들에 의해 루카니아에서 스파르타쿠스는 전사(기원전 71 년)하고 6,000여명이 체포돼 아피아가도에서 십자가형으로 공개처형 됐다 는 것입니다.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가 누구냐 고 묻자 6,000명이 모두 내가 스 파르타쿠스다 라고 주장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존경하는 경외의 대상 이었으며 이 사건 후 기득권들은 노예 한명이 주인을 살해하면 그 가정에 있는 노예가 수백 명일지라도 전원 사형에 처한다는 법을 선포했습니다. 법이란 모두가 필요해 만드는 규칙이 아니라 침략과 학살로 기득권을 차지 한 무리들이 자신들의 지배ㆍ통제ㆍ착취와 권위적인 명령 등 폭정에 저항하 지 못하게 길들이며 억압하는 질서를 유지하고 부와 신변을 보장받으려 기 득권끼리 만들어 기득권이 판결하고 혈세로 사는 병사들을 동원해 집행시키 는 것입니다. 술라시대의 제도를 개정해 민권을 확대하고 지중해의 해적을 학살하며 소 아시아를 정복해서 파르타아를 통치한 크라수스가 전사하고(기원전53) 마 리우스의 조카인 카이사르(Julius Caesar,기원전 102~44)가 평민들 과 합세해 서방 및 갈리아지방을 장악하고 라인 강 근처와 브리타니아(켈트 족이 사는 영국)까지 로마세력으로 확장한 경험을 갈리아 戰 記 (De Bello Gallico)라는 책에 기록했다고 합니다.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를 점령하기 위해 기원전 55년과 54 년 거대한 전함을 타고 노예들 발목에 쇠사슬을 채워 노를 젓게 하는 잔인 한 방법으로 막강한 해상력을 행사하며 로마병사들을 이끌고 브리타니아를 정복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세력을 확장하고 원로원권력을 축소하자 동방 및 이집트를 세 력으로 둔 폼페이우스는 원로원과 결탁하고 카이사르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느낌 51

시기해 암살하려다가 실패해 로마가 양분되는 이유가 됐으며 카이사르는 평 민들로 구성된 민의회지지 아래 제1차 삼두정치 시대를 열었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는 전쟁에 참여한 장군들이 승리하고 돌아와 무력으로 권력을 찬 탈하는 일이 많아 귀족들은 언제 누가 자신들의 재산과 권력을 뺏을지 몰라 불안하므로 전쟁이 끝나면 병사들을 로마밖에 주둔시키거나 해체하고 장군 혼자 로마로 입성하도록 했습니다. 병사를 지휘하는 전쟁밖에 몰랐던 카이사르는 혼자 입성하면 귀족들의 시 기와 음모로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 졌다. 라며 병사들과 진군해 권력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자 수탈로 평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으면서 자신을 죽이려한 원로 원을 배척하고 동방과 서방에 있는 2명의 장군들과 로마에서 병사를 지휘하 며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신 이렇게 3명이 권력을 행사하는 삼두 정치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정복은 로마문화가 유럽화가 되는 계기가 됐고 갈리아를 통치한 기간이 종결(기원전50)되자 귀족의 권력을 위해 무력을 행사하는 폼 페이우스에 맞서 2,150년(기원전 49년) 루비콘(Rubincon)강을 건너 로 마로 진격하며 로마 공화정 말기 두 번째 내란을 일으키니 폼페이우스는 에 피루스(Epirus)로 도망했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에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자 왕실 피가 다른 피와 섞이는 것 을 막기 위해 만든 라지드법에 의해 남동생과 혼인하고 함께 권력을 잡은 클레오파트라가 있었으며 폼페이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정치적 후견인이라 서 이집트로 도망갔는데 카이사르의 군대가 쫓아온다는 사실을 안 프톨레마 이오스왕가는 폼페이우스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암살했다고 합니다. 폼페이우스를 잡으러간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5 세와 클레오파트라를 여왕으로 옹립해서 이집트를 로마세력아래 굴복시키고 클레오파트라와 사이에서 낳은 카이사리온(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뜻)과 개 선하여 10년 임기의 독재관(dictator)에 취임(기원전45)됐습니다. 그 후 최고제사장(pontifex maximus)을 겸하는 종신집정관이 되므로 전 로마군의 지휘권 국고처리권을 장악하며 임페라토르(imperator)란 칭 호를 얻고 금화에 얼굴을 새겼다는 것입니다. 독재관은 투표로 선출하는 직책이고 임기는 6개월로 규정됐으나 병사들의 느낌 52

무력으로 권력은 잡은 자들은 종신독재관의 지위를 가질 수 있었으며 금화 가 발행되고 얼굴이 새겨졌다고 해서 현재처럼 물질을 교환하는 시장이 존 재하고 유통됐을 것이라 곡해하기도 하는데 당시 귀족들은 번쩍이는 귀금속 을 즐겨 착용했습니다. 금화의 용도는 시장에서 물질을 교환하는 화폐가 아니라 권력과 가까운 귀 족이라는 신분을 표시하는 징표였으며 귀족들 사이에 누가 더 많은 재화를 차지하고 있느냐는 부의 척도를 과시하며 노예와 토지를 사고팔 수 있었을 뿐 화폐로 물질을 사고팔거나 교환할 수 있는 시장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 고 봅니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는 어려서부터 방대한 양의 책을 읽어 상당한 지식을 갖췄고 수많은 나라언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천부적인 말솜씨가 있었는데 카이사르 가 로마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지배자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지혜와 미모 를 이용해 유혹하려고 양탄자에 자신의 나신을 돌돌 말아 방에 들어가 바닥 에 펼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어려서 결혼한 남편이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성장하자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어 도망했던 클레오파트라(당시 21세) 는 폼페이우스를 암살한 프톨레마이오스왕가를 카이사르(당시 52세)가 옹 호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집트독립을 보장받는 한편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남동생을 무찌를 병사도 지원받으려고 유혹해 왕좌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로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소국이던 이집트여왕(기원전 51-30) 클레오파 트라는 연인인 카이사르가 닦아 놓은 발판을 딛고 아들 카이사리온을 로마 의 황제로 만들고 이집트와 로마 전체를 통치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의해 암살당한 후 자신과 아들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고 로마권력은 안토니우스파와 옥타비아누스파로 양분돼 싸움이 벌어지자 카이사르를 따라다니며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던 안토니우스를 이집트로 불러들여 유혹했다고 합니다. 느낌 53

카이사르를 경험으로 영웅의 정부는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정식결혼을 요구하고 태어날 아이들 의 후계권을 보장받자 로마에 선전포고(기원전 32년)를 해 전쟁이 벌어집니 다. 악티움(Actium)해전(기원전 31년)에서 이집트 군이 아그리파에게 패하 자 안토니우스는 배안에서 자살하고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름 다운 옷과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후 꽃 속에 누워 독뱀을 풀고 가슴을 물려 자살(기원전 30년 8월10일)했다고 기록됐습니다. 카이사르는 귀족들의 수탈과 억압을 금지하기 위해 원로원으로 집중된 권 력에 대항해 막강한 독재체제를 구축했는데 공화제의 전통을 수호하려 맹렬 히 반대하는 공화론 자들에 맞서다 2,050년(기원전 44년 3월15일) 폼 페이우스극장 안에서 브루투스(Brutus)와 카시우스(Cassius)가 지휘하는 암살범들에게 살해(이것이 시저의 브루투스 너마져도 라는 유명한 연극 임)됐다는 것입니다. 카이사르의 암살로 로마공화제의 전통이 유지되는 듯 했지만 포에니전쟁 (기원전 264년~146년, 118년간의 전쟁)이후 만연된 로마사회의 부정부 패와 빈부격차는 해소되지 못했고 대외적으로도 영토팽창은 정지됐으며 귀 족들 간 정치권력투쟁과 평민들의 내란이 끊이지 않아 공화정이 붕괴되고 제정( 帝 政 )으로 전환하게 됐다고 합니다. 카이사르 암살 후 평민들이 내란을 일으켜 공화주의자들 세력이 약화되자 귀족들이 질서유지라는 핑계로 제2차 삼두정치 기틀이 되는 국가질서 재건 위원회(기원전 43년)를 구성하고 5년 임기로 3인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 도록 개정한 후 카이사르의 조카이자 양자인 안토니우스와 장군 옥타비아누 스, 그리고 레피두스 간을 선출하지만 평민들의 권리와 재산은 늘어나지 않 았습니다. 제2차 3두 정치로 전환해도 내란은 끊이지 않았으며 7차례의 내전을 무력 으로 진압한 옥타비아누스는 2,030년(기원전29년)전 원로원의 제1인자가 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제정으로 회귀(기원전27년)시켰습니다. 그러자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존칭을 부여하며 호민관직 권, 프로콘술명령권 등 관직에 부수하는 여러 권한 권능을 한 몸에 집중시 키고 종신토록 행사하도록 했으며 총독의 권한이던 속주( 屬 州 )의 통치권까지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로 불리며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일리리아 전투에서 승리 느낌 54

를 거두나 바루스의 게르만원정(8년)때 라인 강에서 엘베 강으로 진격도중 역습을 당해 2만의 정예군단을 잃고 패퇴하므로 로마북국경이 확정됐으며 이시기 로마는 고대에서 고전시대로 변화하게 됐다고 합니다. 이때를 원수정치( 元 首 政 治 )라하며 아우구스투스가 종신토록 독재 권력을 행 사하면서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자 수탈로 빈곤해진 평민들이 정치참여권과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며 내란을 일으켜 어쩔 수 없이 노예와 아녀자를 제외 한 각 부족민들에게 투표권을 보장하고 투표인수를 확인하기 위해 호구조사 를 실시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탄생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부터 인구조사가 실시됐는데 이때 베들레헴에서인지 나사렛에서인지 호적을 등록하러 갔다 마구간에서 마리아와 약혼자인 목수 요셉 사이에 예수라는 사람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당시 시리아지방총독은 퀴리누스(퀴리뇨,Quirinus)였다고 성경(루카2장 1~7절)에 기록됐는데 퀴리누스는 서기 6년에서 서기 9년까지 총독이었고 인구조사는 그의 부임 초기(서기6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예수의 탄생시기 와 장소는 기독교내에서도 정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4명의 동방박사가 찾아왔다는 설이나 천사가 목자들 앞에 나타나 예수의 탄생을 고하며 하늘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 는 사람들에게 평화 라고 하나님을 찬양(누가 2:4)했다는 복음서의 내용은 성경비평 학이 등장하면서 종교를 필요로 하는 무리들의 주장과 해석이라고 평가합니다. (예수가 태어난 곳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복음서로 누가 복음 서와 마태 복음서에 베들레헴이라고 돼있고, 마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에서 는 나자렛 출신이라고 돼있음.) 가톨릭이나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복음서는 예수와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이 당시 행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몇 세대가 흘러 구전을 통해 전해오는 내 용이라는 것이며 표현도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마태오 복음서(2장1~16절)에는 예수가 태어난 해에 하늘에 동방의 별 느낌 55

이 나타나고 헤롯왕이 2세미만의 갓난 아이들을 살해하도록 명을 내려 그 가족이 이집트로 피신했다 고 기록돼 있으나 루카복음서(2장1~2절)에는 아우구스투스가 호적을 명해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을 찾았다 고 다르게 기록됐다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에는 예수가 너희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에 주 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네 믿음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라며 크게 칭찬했다고 썼는데 예수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는 메시아 비밀사상을 갖고 있 던 복음사가 마르코는 주님은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아무에게도 이를 말하지 말라 로 기록돼 있다고 합니다. 신학자인 존 도미니크 로산은 역사적 예수 에서 예수의 친구들에 의한 예수의 매장부터 완전한 허구이자 비역사적 이라며 자연기적과 예수의 부 활을 다루는 신약성서의 주된 내용은 부활 그 자체가 아닌 매우 정치적인 것으로 초기 기독교공동체들의 권력과 권위에 대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이야기일 뿐 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영국 BBC 방송국 기자 세 사람은 1982년 성혈과 성배 (The Holy Blood And The Holy Grail/ 미카엘 베이전트, 리처드 레이, 헨리 링 컨 공저)라는 책을 통해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자녀까지 뒀으며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와 짜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 같이 부활연극을 한 다음 로마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프랑스로 망 명해 살았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랑스 골(gaul)지방에 정착한 예수는 아내 막달라마리아와 사이에 자녀를 두고 은둔 생활을 하며 80세 넘게 살다 프랑스남부 마을 렌느르샤토에서 수 킬로 떨어진 야산 몽 카르두에 묻혔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렌느르샤토에 교회를 세워 교구장으로 지내다 프랑스의 액생 프로방스 생봄에서 죽었고, 예수의 제자 나사로는 마르세이유에서 주교관구 겔트교회를 세워 주교로 있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친척 징표를 가진 예수후손들이 현재도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유 럽에 살고 있으며 이런 사실은 예수가의 비밀을 지키는 성당기사단( 聖 堂 騎 士 團, 1118년 예루살렘 순례자 보호를 위해 조직된 교회군대)과 시온의 小 수도원이라는 비밀조직이 은폐하며 보호해왔다는 사실들이 영국재판정에 판 결로 남아있게 됐다고 합니다. 판결내용은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프랑스로 망명해 84살 까지 살다 죽었으며, 예수는 로마병사 판델라의 아들이었다. 고 판결한 것 느낌 56

이며 예수의 후손들은 4세기 후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 왕조에 협조하며 카 롤링거 왕조의 비지코트가등 8개의 가문을 이루다가 기독교가 번성하자 겉 으로 예수의 혈통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은 예수의 27대 후손이라는 피에르 플랭타르씨와 그의 아들이 법정에서 진술했고 이 진술과 판결을 지켜보던 신부, 수녀, 목사들은 방청석 에서 옷을 찢으며 통곡하고 기독교인이 목매 자살했으며 교회가 문을 닫는 일이 영국전역에서 발생하자 영국정부는 전 세계로 혼란이 확대된다며 판결 문의 공개 및 해외유출을 금지시키고 언론보도를 통제했다고 합니다. 예수는 부모에 순종하며 살았고(누가 2:51) 12살에 아버지를 따라 예루살 렘 성전에 갔다 학자들과 성서(구약)에 관한 토론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굉장히 뛰어난 두뇌와 재능을 겸비하고 논쟁을 즐겼으며 모든 인간을 자유롭기 때문에 법과 규칙 또는 관습에 얽매여 억압받고 사는 사람 들은 노예 라며 평등하게 살 것을 설파한 모세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지키 려 노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귀족들이 지배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산 재물을 바치며 공포심을 유발하고 강제로 우상을 떠받들던 수많은 신전과 신앙을 부정하면서 모든 사람들은 자유롭게 살아야한다고 설파하기 위해 자신은 야훼(하나님)를 믿는다고 주장 했다고 보면 종족을 해방시킨 모세의 사상을 따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먹을거리와 주택, 의류, 신발 등 모든 물질을 생 산하면서 법과 관습에 갇혀 억눌려 사는 노예와 불평등한 계급으로 억압 받 아 헐벗고 굶주린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했다는 내용들이 성경 속에 많은 것을 보면 고난을 겪으며 평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생활한 것 으로 보입니다. 공생활에서 최초의 유월절(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성전 안의 장사꾼들을 몰아냈다(27년 4월)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자신이 생산노동 을 하지 않고 타인의 노동을 갈취하는 사람들은 배척한 것으로 보이며 사람 들을 설득해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설파하려고 야훼(여호와)만이 유일한 신이라고 강조했다고 봅니다. 기득권인 귀족들의 신앙을 근거로 생활하거나 평등을 부정하고 평민계급 중 조금 여유 있게 살며 자신도 침략전쟁에 참여하면 부를 축적하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환상을 쫓던 사람들을 예수를 음해했을 것입니다. 노예노동과 평민들을 갈취해 쾌락적이고 호화롭게 누리던 기득권들은 대중 들이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할 믿음(종교)이 있어야 하는데 자신들의 느낌 57

신과 권위를 부정하고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기 때문에 평 등하다고 주장하는 예수를 좋게 보지 않았을 것은 자명합니다. 귀족들은 예수의 활동을 모함했겠지만 예수는 왕(권력)에는 복종하고 세금 을 내야 한다는 헤게모니(집단을 지배하는 정신ㆍ문화)를 깨기위해 사람들에 게 세금을 내면 병사들을 고용해 당신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수단 으로 사용되니 세금을 내지 말아야 평등하게 사는 세상이 된다. 고 강조하 기 위해 자신은 야훼(여호와)의 메시지를 전달하려온 유대 왕(요한19:19)이 라고 칭했으리라 봅니다. 30세경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는(마태 4:1) 자신의 고향 갈릴리나사 렛에서 예배드리며 이사야예언서를 인용해 자신은 고난 받는 민중들과 함 께하는 메시아로 살아갈 것을 설파하자 고향사람들이 지혜에는 감탄했지만 저 사람은 목수(요셉)아들 아닌가. 라며 예수가 변변치 않은 직업을 가진 사람임을 지적한(누가복음서 4:16-22)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누가는 유년시절을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을 받았 다 고 (누가복음서 2,52)기록하고 있으며 유월절 후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유대교회로 나갔으나 사람들이 평등만 주장하는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을 알 고 세례요한처럼 회개의 필요성을 깨달아 회개를 강조하기 시작했다고 기록 됐습니다. 예수가 회개를 강조하자 설교를 들으려는 사람이 요한보다 많아졌는데 모 든 사람은 물질적 가치보다 평등한 사상으로 각성하고 죄지은 사람들이 잘 못을 회개하고 되풀이되는 죄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전파해야 하는데 갈릴리 땅에는 전도사가 없어 유대전도를 그만두고 갈릴리로 갔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구속돼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데 길 목에 예수를 맞으려는 사람들이 나와 겉옷을 벗어 길에 펴는가하면 유대종 교권력의 횡포로 자신의 경작지를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이들이 통제 속에 재배하던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길에 깔고 환대하며 갈릴리바다 동북쪽 연안 광야지방까지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예수가 출생한 년도와 활동을 그친 정확한 년도는 알 수 없고 단지 성경에 과월절 전날인 목요일 밤 최후의 만찬을 들고 이튿날 아침 2명의 강도들과 함께 신을 모독한 죄명으로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보는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부활했다고 기록된 내용과 죽은 기록이 없는 성경만 있다는 것 입니다. 당시 황제를 지낸 사람으론 14-37년은(Tiberius)티베리우스였으며 느낌 58

37-41년까지(Gaius/Caligula)가이우스-칼리귤라 인데 110년경에 역 사가 타키투스가 쓴[연대기](Annalia)15권 44장 2절에는 64년 7월 19 일 네로 황제(54-68년)가 로마 시내에 화재가 나자 그리스도 (유대종족 을 칭하는 것으로 추정)인들을 방화범으로 지목하고 박해했다고 기록됐습니 다. 타키투스 연대기에 그리스도인 (타키투스는 라틴어:ChrestIani라 기 록하여 예수를 칭하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음)이 티베리우스황제 치세 때 행정관 폰티우스 필라투스(본티오 빌라도를 총독이라고 하는데 팔레스타인 은 총독이 아닌 행정관이 다스린 속령)에 의해 처형된 자가 외치던 이 사 악한 미신 은 계속 번져나가고 있다 고 기술되어 있다는데 이는 후일에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로마제국 속주 비티니아에서 총독으로 지낸 소 플리니우스는 112년경 트 라야누스황제(98-117년)에게 보낸 편지에 비티니아 지방 그리스도인들이 성가를 부르며 그리스도를 신처럼 여긴다. 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억압받는 민중들은 모세와 요한 그리고 예수의 영향으로 자유를 깨우쳐 평 등한 권리를 흠모하고 갈망하며 은밀히 회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기 작가 수에토니우스는 120년경[황제들의 생애](De vita caesarum )를 저술했는데<클라우디우스의 생애>편에 클라우디우스황제(41-54년)가 49년에 크레스투스의 사주로 분란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 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크레스투스가 예수를 뜻하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고 합니다. 수에토니우스가 서술한 이야기는 사도행전에도 있는데 루가에서 클라우디 우스황제의 유대인추방령으로 고린토로 이주한 유대인부부 아굴라와 브리스 길라가 자신들처럼 천막제작을 한 바울과 같이 일했다는 기록이 있고, 갈릴 리지방 유대인 독립군사령관으로 있다 패전을 앞두고 로마군에 투항한 요세 푸스는[유대전쟁사](Debello Judaico)에서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돌로 치 는 형벌을 가했다고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느낌 59

로마제정의 출발 로마공화정시절엔 노예나 여자 그리고 빈곤층에겐 투표권이 없었지만 권력 의 독주를 제재하기 위해 평민들이 선출했는데 제정초기에는 공화정형태라 고 속이기 위해 로마황제를 제1시민(princeps,프린켑스)이라 칭했고 원로 원이 과거 민회가 보유하던 입법권과 모든 법적권한을 가진 듯이 가장하고 황제가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원로원의원을 임명했음으로 허수아비였다고 합니다. 원로원이 국정을 운영하던 공화정을 해제하고 대내외에 상징적으로는 원로 원이 국가를 통치한다는 명목을 유지하면서 옥타비아누스의 뒤를 이은 율리 우스-클라우디우스(Julio-Claudian)왕조는 스스로를 프린켑스 세나투스 (Princeps Senatus, 원로원의 제1의원)라 표현했으며 이는 4현제 시대 까지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프린켑스(Princeps)가 가진 권한은 1개 선출직 원로원의원들은 감히 범 접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막강했으며 권력이 대부분 친족에게 물려졌지만 혈연관계가 없어도 프린켑스가 생전에 지명한 후계자에게 이어지면서 국가 최고 권력자로 아욱토리타스(Auctoritas권위)를 확대하고 통치한 시기를 원수정(Principate)이라 칭하며 제정 전기로마로 분류한다고 합니다. 칼리굴라(37~41년)는 광적인 성격의 인물로 대형목욕탕을 만들어 귀족들 이 나신으로 참석하는 연회를 즐겼고 노예와 평민 중 빼어난 미모의 여성들 을 선발해 마음에 들면 누구든 특정 없이 농락하도록 하는 등 쾌락적인 생 활을 하다 국고가 바닥나자 시민의 재산을 몰수했고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 해 황제예배( 皇 帝 禮 拜 )를 집도하는 등 폭정을 하다 근위군 장교에게 암살당 했다고 기록됐습니다. 클라우디우스(41-54년)아내 메살리나는 검투사출신으로 노예를 위시한 많은 남자들과 성관계를 갖는 생활을 하다 처형당했다고 하며 메살리나가 죽어 황비 자리가 비자 아들(네로)을 데리고 홀로 살던 황제의 질녀 아그리 피나는 황비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황제의 노예이자 심사위원인 팔라스를 자 신의 침실로 끌어들여 아름다운 육체를 제공하며 유혹해 황비가 됐다고 합 니다. 당시 귀족들은 대형목욕탕에서 수많은 여자들을 농락하며 유흥을 즐겼지만 저택에 있는 부인들은 남편과 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해 힘센 노예나 건장한 병사들을 대상으로 욕정을 해소했는데 아이가 생기면 귀족부인에게서 나면 귀족신분을 갖고 노예여자에게서 태어나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노예가 된 것 느낌 60

입니다. 아그리피나는 14살에 오빠 칼리큘라 황제(37-41년)와 첫 관계를 맺었 고, 15살에 결혼했다 사별했으며, 명문귀족과 재혼해 아들(네로)을 출산하 고 이혼했으며, 칼리큘라의 동성애상대자와 관계를 맺으며 황제를 암살하려 다 발각돼 추방당했으나 칼리큘라가 암살되니 로마로 돌아왔으며 메살리나 가 처형되자 심사위원인 팔라스에게 육체를 제공하므로 황비가 된 탕녀였다 는 설도 있습니다. 요염하고 농후한 아그리피나의 육체적 매력에 빠진 클라우디우스(57세)가 근친상간이라는 비난을 무시하고 아그리피나(32세)를 정식 황후자리에 앉 히자 아그리피나는 전 남편아들 네로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클라우디우스의 장남 브리타니쿠스를 제치고 친딸인 옥타비아와 네로를 결혼시켜 네로가 로 마황제의 후계자로 인정받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황제후계자 자리를 굳힌 아그리피나는 네로의 성인식을 거대하게 열고 클 라우디우스가 좋아하는 버섯요리에 독을 타 식사를 마친 클라우디우스(54 년 10월 23일)가 복통을 호소하며 쓰러지자 크게 놀라는 척하며 매수해 놓 은 의사를 불렀고 의사는 황제가 먹은 것을 토하게 하고 목 속 깊이 독을 집어넣어 숨지게 했다고 합니다. 클라우디우스가 숨을 거두자 재물로 매수한 근위대 도움으로 네로를 로마 황제자리에 오르게 했으나 황제가 된 네로는 어머니 말을 듣지 않고 황제의 친딸인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새로운 연인과 결혼하려 했는데 아그리피나는 네로의 행위를 반대하면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전 황제아들인 브리타 니쿠스를 옹립하겠다고 협박했다는 것입니다. 네로가 황제가 된 후 아그리피나는 사사건건 정책에 간섭하며 섭정을 폈고 자신의 초상이 든 금화를 발행해 위대한 어머니 라는 칭호를 쓰며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했고 그녀의 애인 팔라스도 각종 이권에 개입해 청탁 을 받는 등 권력을 남발하므로 팔라스를 멀리 추방했는데 이런 처분에 화가 난 아그리피나는 네로를 굴복시키려했다고 합니다. 네로는 아그리피나가 자신을 죽이고 브리타니쿠스를 황제자리에 앉히지 않 을까 불안해하다 자신의 어머니가 황제를 독살한 것처럼 브리타니쿠스의 식 사에 독을 넣어 살해했고 네로의 이런 행동을 본 아그리피나는 생명에 위협 을 느껴 네로를 회유하기 위해 아름답고 농후하며 능숙한 자신의 육체를 이 용했다는 것입니다. 아그리피나는 권력의 속성을 잘 알아 자신이 네로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 느낌 61

고 권력을 행사하려면 아들이라도 육체로 유혹하면 된다고 판단해 연회자리 에서 네로에게 음란한 애무를 퍼부었으며 술에 취해 혼미해진 네로는 친어 머니라는 사실도 망각하고 본능적인 음욕에 빠져 육체관계를 맺었다고 합니 다. 육체관계를 맺었어도 네로는 아그리피나가 권력에 간섭하는 것을 배척했는 데 권력을 유지하려면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야 하므로 재산을 불려주고 즐 기려 세금을 과징해 호화스럽고 방탕한 연회를 여니 수탈당해 굶주린 민중 들의 원성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원성이 높아지자 네로는 수탈과 폭정이 아니라 근친상간 때문에 여론이 나 빠 자신을 거부한다며 아그리피나를 바다에 수장시키려고 배에 태웠다 실패 하자 병사들에게 끝까지 쫓아가 살해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황제가 되고 자신은 선 황후로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려던 욕심이 아들을 후대에 길이 남을 폭군으로 만들었으며 병사들이 가슴에 칼을 들이 대자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잠옷을 걷어 아랫배를 내밀고 여기를 찔러라! 네로는 여기서 태어났으니까! 하며 소리치다 병사들의 칼날에 처참하게 난 자당해 죽었다고 합니다. 64년 로마시내에 7일간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하자 네로는 불난 자리에 황금궁전을 짓는다며 대규모 건설ㆍ건축을 시작해 재정이 바닥나니 항상 재 물이 풍족한 신전을 털어 충당했는데 그래도 모자라자 기득권인 지주들과 부유한 사람들에게 죽으면 재산을 왕국(황제의 정치자금)에 헌납한다는 유언 을 쓰라고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독선에 불만을 가진 원로원과 군인 등 재물을 강탈해 귀족행세를 하 던 사람들이 황제를 새로 옹립하자며 반발하자 정보를 입수한 네로는 자신 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체포해 자살하도록 명령하거나 추방하고 예술이라며 음악과 연극배우역할을 즐겼으며 나체로 돌아다니는 광적인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왕족으로 태어나 권력에 집착했던 아그리피나는 신분을 위력으로 타인을 복종시키기 위해 고압적으로 도도하게 명령하는 모습만 보며 성장한 네로는 권위주의와 우월주의 속에 성장했다고 보면 아그리피나의 양육환경이 오히 려 네로를 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성격으로 만들었다고 봅니다. 귀족들의 호화방탕하고 쾌락적인 삶을 위해 세금을 높여 징세하므로 극심 한 수탈에 헐벗고 굶주린 평민들이 빈곤을 견디지 못하고 평등을 요구하며 느낌 62

저항하는 일들이 반복되던 중 로마 시가 갑자기 7주야 동안 불에 타는 화재 가 발생하자 로마를 싫어하는 네로가 불을 냈다는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네로가 황금궁전을 짓기 위해 불을 냈다고 소문나면서 민심이 흉흉해 황제 를 폐위하자는 원성이 높아지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병사들을 동원해 불 만을 표출하는 평민들을 체포하거나 폭행하고 살해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이 불을 질렀다 는 거짓 소문을 퍼트려 자유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학살하고 추방했다는 것입니다. 가혹한 징세로 평민들을 수탈해 헐벗고 굶주린 민중들이 저항하던 중 68 년 갈리아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네로는 원로원을 소집해 진압하려 했지만 원로원과 근위대까지 네로의 재물수탈과 폭정에 반대하며 평민들과 합세하 므로 도망자 신세가 됐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네로가 쫓겨난 후 4명의 왕이 권력을 행사하던 69년을 지나 귀족들의 권 력암투와 굶주린 평민들의 저항이 높을 때 대중들이 정치에 불만을 갖는 정 신적 여유가 있으면 안 된다면서 베스파시아누스황제(72년)가 네로가 지은 황금궁전(도무스아우레스)인 인공호수를 메우고 거기에 대형경기장을 짓도 록 명령했다는 것입니다. 콜로세움의 정식명칭은 플라비우스이며 콜로세움이란 거대하다 라는 뜻 을 가진 Colossale(콜로사레) 또는 경기장 옆에 네로가 높이 30미터의 거 대한 금도금상 콜로소를 세웠기 때문에 콜로세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됐 다는 설이 있는데 8년 동안 공사해 베스파시아누스황제 아들 티투스황제 때 인 80년에 완공됐다고 합니다.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로 높이 57m, 둘레 500m 경기장 내부는 길이 는 최대 188m, 최소 16m로 1층은 높이 10.5m의 도리아식 반원주, 2 층은 높이 11.85m의 이오니아식 기둥, 3층은 11.6m의 코린트식 기둥으 로 돼 있으며 4층은 관중들이 작렬하는 햇빛을 가리는 벨라리움이라는 천 막을 고정시키는 벽이 있고 이외에도 계단과 독립 공간이 있으며 내부는 약 5만 명을 수용하는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상( 放 射 狀 )으로 설치돼 있었습니 다. 티투스는 등극하기 전인 70년에 수탈을 견디지 못한 유대지역 사람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내란을 일으키자 병사들의 무력으로 이들을 살육하고 10 만 명을 잡아 노예로 부렸는데 그 중 4만 명을 동원해 콜로세움을 건축했다 는 전설이 있습니다. 노예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농사짓는 노예는 목에 건물을 짓는 노예들과 배 느낌 63

를 젓는 노예들은 발목에 쇠사슬을 채워 노동을 시켰는데 건물을 짓다 높은 곳에서 수많은 노예들이 떨어져 죽거나 무거운 돌을 나르다 바위에 깔려 압 사하기도 했으며 힘이 빠져 지치면 가차 없이 채찍을 맞는 등 노예들의 피 와 땀으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건설된 경기장을 바닥은 모래로 덮고 사냥터분위기를 위해 나무와 구릉을 설치했으며 바닥 밑에는 노예들과 맹수들을 가둘 수 있는 우리 시설 을 만들고 글라디아토르( 劍 鬪 士 )시합과 맹수연기( 猛 獸 演 技 )등 평민들에게 볼 거리를 제공하면서 정권의 수탈행위에 저항을 생각할 시간을 뺏었으며 승자 를 예측하고 재물을 거는 도박을 조장했다고 합니다. 수만 명이 들어가는 대형경기장을 기득권들은 자신들의 재산과 신변을 지 키려 만든 법을 어기거나 모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 들, 혹사노동에 저항하는 노예들을 처형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에 반기를 들 지 못하게 억누르고 통제했으며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고 화합을 강조하는 정치의 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처참하고 참혹한 억압과 살육이 자행되던 콜로세움은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가 검투경기를 금지시킨 후 지진으로 무너지기도 했고 중세에 군사적 요새로 이용하다가 성당이나 궁전 등 건축에 사용될 자제로 제공되면서 황 폐하게 무너진 것을 18세기경 교황의 명에 따라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수난당한 현장으로 복구됐다고 합니다. 로마는 평민들의 끝없는 저항과 권력을 탈취한 무리들이 더 많은 재물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권력투쟁으로 내분이 끊이지 않아 네로(54-68년까 지 집권 Nero)와 콘스탄티누스 1세( 306-337 Constantine I)까지를 기득권을 지키려는 귀족들과 평민의 권리를 대변한다는 선거선출 귀족 그리 고 평민들과 대립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대중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만든 귀족의 신을 부정하고 자유를 주장하는 사 상이 번지며 내란이 끊이지 않자 284년 디오클레티안황제는 로마제국을 4 등분하고 권력을 각각 부황들에게 분산시켜 안정을 도모해 로마는 다시 평 화를 찾는 듯 했는데 부황들이 황제가 되려고 전쟁을 시작해 통제가 불가능 해졌습니다. 느낌 64

자유사상의 종교화 자신의 힘으로 농사지으며 자유롭게 사는 민중들이 가혹한 세금징수(수탈) 를 거부하고 귀족계급의 강압적인 통제를 부정하며 자유를 주장해 착취질서 를 유지할 수 없자 서방의 콘스탄티누스1세와 동방의 리키니우스가 313년 2월 밀라노에서 협의하고 그리스도를 종교로 인정한다는 칙령을 발표하며 조직을 확장하도록 후원했다는 것입니다. 혼란스러운 로마를 통일시킨 콘스탄티누스가 330년 5월 11일 대제로 등 극해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하며 로마제국의 새 수도를 건설했 지만 모두가 자유를 주장하며 통제를 거부하자 모든 침략자들이 신을 빙자 해 복종을 강요한 것처럼 기록이라며 성경을 만들고 평등사상을 신격화해서 통치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억압과 탄압을 받으며 숨어서 모세와 석가모니 그리고 요한과 예수가 모든 사람은 지배자들에게 통제ㆍ지시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고 주 장했던 평등사상을 실천했으나 종교로 변질시켜 공개적으로 논할 수 있게 만들고 사제들에게 권한을 주므로 사제들이 자유와 평등사상을 신의 행위로 변질시켜 통제합니다. 그 후 이글니스황제(392-394년 Eugenius)를 마지막으로 395년 로 마제국은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각각 두 공동 황제와 부제( 副 帝 )가 지배하는 사두체제를 도입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황제가 325년 니케아공의회를 주최하며 수도사들을 소집하 자 이때 참석한 에우세비우스 주교는 황제가 공의회개막식에 입장하는 모 습이 마치 하늘에서 하느님의 천사가 내려오는 것 같았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3권10장) 고 아부하며 권력에 복종하므로 사제가 제사장까지 오를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 사후 아들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재위337~361) 가 제위를 이어 종교를 이용해 안정을 도모했고 게르만족이 갈리아를 침공 해 거듭 패한 콘스탄티우스는 권력다툼 중에 죽인 사촌의 아들로 전투경험 은 전혀 없고 철학공부만 한 율리아누스를 사령관에 임명하자 율리아누스가 능력을 발휘해 쉽게 게르만족을 격퇴했다고 합니다. 게르만족을 격퇴한 율리아누스는 승전한 병사들과 수도로 진군해 황제가 됐으며 자신은 제우스신을 종교로 가졌지만 그리스도교를 이용해 통치하기 위해 자신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인정한다는 믿음을 주려고 궁중의 미 느낌 65

용사, 요리사, 환관 등을 추방하는 정책을 펼쳤으나 363년 페르시아를 정 복하기 위한 전쟁에 원정 갔다 전사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발렌티아누스 1세(Valentianus, 364~375)와 발렌스(Valens, 364~378) 두 형제가 지배했으며 이때 로마병사들은 게르만족이 주축이 었는데 375년 훈(Hun)족이 볼가 강을 건너 동고트(Ostrogoth)족을 침 략하자 6만의 서고트(Vishgoth)족이 로마영내로 피난했는데 지나친 수탈 에 시달린 서고트족들이 식량문제로 권력과 갈등이 발생해 폭동을 일으킵니 다. 구습의 통제만으론 지배질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 테오도시우스1세는 칙 령(391년)으로 달이나 꽃, 그리고 곡물과 태양 등에 신성한 혼(genius)이 있다며 자연을 두려워하고 섬기던 풍속신앙들을 금지하고 그리스도교만이 종교라며 국교로 선포하므로 사제들이 원로원까지 진출하면서 최고 권력이 됩니다.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은 제례의 제문을 보관하고 의식을 감 독하는 직책이었지만 국교로 인정되면서 가장 높은 수도사는 최고제사장 (pontifex maximus)으로 황제가 주관하던 신전에서 여러 신의 의식을 치르고 예배를 집도할 수 있자 다중을 통제하며 최고 권력을 행사했고 복점 관(augur)은 미래를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예언인양 점을 쳐주며 권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수도사라는 신분이 제사장이 되고 최고 권력을 행사하는 기득권이 되자 예 배를 관장하던 수도사들은 자유와 평등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만사를 신에 게 감사하라며 참을 것과 복종을 강요하므로 특정 능력 때문에 인간이 존재 하는 것처럼 조장하여 진실과 정의는 은폐되고 온갖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 게 됐습니다. 사람이 존재하기 위해 먹거나 사용하는 모든 물질은 사람들의 땀 흘린 노 동으로 창출되는 것임에도 풍년이 된 것은 하느님이 햇살을 주신 덕이니 감 사하라거나 화산폭발이나 자연재해가 발생되면 하느님이 실험하는 것이니 참으라고 강요하는 등 본능에 따라 양심껏 행동해야하는 저항을 잠재우고 신에게 의지하는 의타심과 복종심을 세뇌하며 통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종교에 세뇌된 신자들은 옆에 있는 물건은 자신이 손으로 잡고 사용해야 함에도 기도하면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듯이 착각하는 의타심을 갖게 됐으며 과학적 사고는 상실되고 복종하며 참고 사랑으로 살아야 된다고 세뇌되어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해도 온정을 바라고 신에게 기도만하면서 불의에 순종 느낌 66

하게 됐습니다. 권력을 잡은 수도사들은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신의 대리자 임을 주장하고 부활로 보복을 암시하며 다중을 착취해 누리는 사실을 은폐 하기 위해 운명론이나 창조론 또는 천국과 지옥을 강조하고 사후를 대비하 라며 죄를 지어도 회계로 사함 받는다는 거짓말로 많은 재물을 헌납할 것을 요구하며 본질을 드러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간섭(지배ㆍ통제)을 받지 않고 자신의 지식과 육체적 노력만큼 수확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음에도 거짓 운명론을 퍼트려 평생을 노동하고도 착취와 갈취ㆍ수탈로 빈곤해지고 부부라는 명분으로 일 생을 고통 속에 사는 것이 운명이라고 세뇌하므로 사람들이 지배질서의 틀 에 갇혀 억눌려 삽니다. 과학이 부족해 수도사들의 거짓말에 담긴 의미를 모르는 신자들은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가 있고 교리나 경전들은 창조주의 절대명령이기 때문에 성실 하게 수행하면 천국에 간다는 거짓에 속아 수도사들이 힘든 생산노동을 하 지 않고 통제하면서 헌금과 십일조로 호의호식하며 누리고 사는 본질을 깨 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378년 8월 9일 발렌스 황제는 8만 로마군을 지휘하며 수도 콘스탄티노 플에서 가까운 아드리아노플에서 고트족과 전쟁하다가 중장보병으로 이루어 진 로마군보다는 기병으로 무장한 고트족의 기동력에 밀려 로마병사들이 패 하고 발렌스 황제도 전사하므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379~395) 가 황제를 승계합니다. 원시시대는 돌칼이나 나무칼 동물의 뼈 등을 무기로 사용하는 종족보다는 철을 발견하고 강력한 철로 먼저 무기를 만들어 사용하는 종족이 승리했고 고대 전쟁은 누가 더 신속하고 용맹하며 폭력을 능숙하게 행사할 수 있느냐 에 따라 승패가 갈리고 전쟁에 승리한 종족이 권력을 차지했습니다. 황제가 됐으나 고트족의 침략이 끊이지 않아 전 평민을 병사로 동원했는데 병사가 된 평민들이 노동을 못해 생산되는 물질이 부족해도 귀족들의 호화 로운 생활과 전쟁 물자를 위해 가혹하게 징세하니 굶주린 병사들이 명령을 거부하므로 침략자들을 격퇴할 수 없게 된 테오도시우스는 어쩔 수없이 고 트족에게 굴복하고 제국 내 정주를 허락합니다. 힘으로 로마를 굴복시킨 고트족들 대부분이 다뉴브 강 이남을 장악하고 반 달(Vandal)족은 판도니아 지방을 프랑크족은 라인 강 이남에 정착하게 됐 느낌 67

으며 이들은 독자적인 법과 왕을 두고 로마의 징세를 거부하므로 사실상 로 마제국 안에 새로운 부족국가들이 건설된 것과 같은 형태로 세력을 형성한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분리 테오도시우스는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누고 두 명의 아들을 부황제로 임 명해 통제했는데 395년 그가 사망하자 장남인 아르카디우스(Arcadius) 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황제가 되고 차남인 호노리우스 (Honorius)는 서로마황제가 되면서 로마는 동과 서로 완전히 분리됐습니 다. 호노리우스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됐지만 권력은 게르만족 무장( 武 將 )인 스틸리코가 장악하고 무력을 행사해 한때 평화로운 듯이 보였는데 스틸리코 를 처형하자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황제를 호칭하는 자들이 늘어나 혼란스 러워졌을 때 많은 병사를 보유한 서고트족 알라리크 왕이 410년에 로마시 를 점령했다는 것입니다. 그 뒤 서고트족은 에스파냐로 이동했고 게르만인인 반달족은 아프리카로 진출했으며 부르군트족과 프랑크족도 갈리아로 진출하고, 색슨족은 브리튼 섬으로 건너가 각각 왕국을 세우자 로마 장군 아이티우스가 서고트족과 프 랑크의 힘을 빌려 아틸라가 이끄는 흉노족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격퇴하므 로(451년) 권력을 차지했다가 455년 반달족에게 로마시가 또 다시 점령당 했다고 합니다. 서로마 황제는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 강력한 병사를 보유한 게르만인 용 병대장 오도아케르장군이 권력을 행사했는데 가혹한 징세와 억압에 굶주린 평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모든 책임을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탓 으로 돌리고 황제를 폐위(476)시키므로 서로마제국은 막을 내렸다는 것입 니다. 서로마제국이 사라지고 그 지역은 프랑크 족이 무리(영주의 재 등장)를 이 루고 살았으나 샤를마뉴대제(종교 황제)때 통일해 서로마제국영토와 비슷할 느낌 68

정도로 점령하고 국가를 구성하므로 동로마와 서로마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완전히 분리됐으며, 샤를마뉴대제가 죽고 왕국이 다시 3개로 분열 돼(동/ 중/서 프랑크) 후일 지금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됐습니다. 지금 독일이 된 동 프랑크를 마자르족이 침략했을 때 오토1세가 막아내므 로 교황이 오토1세를 황제로 임명했지만 이름만 황제일 뿐 아무런 권한이 없어 중앙집권체제를 만들려고 했는데 대농장제로 물질이 풍족하고 많은 병 사를 소유한 영주들이 왕권을 부정하면서 반대해 이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 아가 됐다는 것입니다. 무함마드(영어 명: 마호메트)의 탄생 아버지 압둘라(압달라 Abdallah)가 죽고 어머니 아미나(Amina bint Wahb)에 의해 570년 4월 22일 태어났으나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사 망해 고아가 된 무함마드는 할아버지 압둘 무탈리브(압둘 무딸립 Abdul Muttalib)에게 맡겨졌다가 8살 때 할아버지가 사망하므로 하심 가문의 새 로운 가장이 된 숙부 아브 탈리브(아부 딸립 Abu Talib)의 보호아래 성장 했다고 합니다. 삼촌 아브 탈리브는 딸린 식구가 많은데 가난해 어려서부터 삼촌직업인 무 역을 따라다니다 12세에 삼촌과 시리아로 갔는데 그곳에서 유대인들과 생 활하면서 바히라라는 그리스도교수도사를 만나 모세와 예수의 이야기를 들 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무함마드는 알라 하나님께서는 양치기 목동이 아닌 자를 예언자로 보내신 적이 없다. 모세도 목동이었고, 다윗도 그랬으니 나 또한 야즈야드에 서 내 가축들에게 풀을 먹이며 예언자 직을 맡게 됐다. 고 목동시절을 하 칼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영민한 무함마드는 목동시절 자연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낮에는 광활한 하늘과 밤에는 반짝이는 별을 보며 깊이 사색하고 수도자들의 덕목인 청빈 느낌 69

과 고뇌생활을 깨달아 배고프지 않으면 먹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을 때는 배 불리 먹지 않았고 부와 명예보다는 진리와 진실을 찾으려 노력했을 것입니 다. 어린 시절 양치기로 평범하게 성장한 무함마드는 청년이 된 뒤 시리아를 왕래하는 무역상(한쪽지역에서는 많이 생산돼 흔한 곡물이나 물질(원료), 그 리고 문화를 습득하여 생산되지 않는 지역을 찾아 많이 생산되는 물질을 교 환하여 이익을 남기고 문화를 전파하는)으로 생활하다 삼촌의 소개로 부자 며 과부였던 카디자(Khadijah)의 대상( 大 商 )에 고용(취직)됐다고 합니다. 당시 대상이던 카디자는 젊지만 정직하고 성실한 무함마드의 성품과 두 뇌회전이 빨라 많은 이익을 남기는 상술에 감동해 구혼하므로 무함마드는 595년 25세의 나이로 40세의 미망인에게 새끼낙타 20마리를 선물로 결 혼했다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 2남 4녀가 태어났는데 무함마드의 두 아들은 유년기에 사망했 고 딸들 중 파티마(파띠마 Fatima)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함마드보다 먼저 사망했다는데 당시 사회는 건장한 남자가 대상무역을 하는 것이 영웅시 되 던 시절이라 아들들이 어려서 사망한 무함마드는 많이 고민했다고 합니다. 모든 가문이 건장한 사내아이를 선호했는데 아들이 없는 무함마드는 사회 적으로나 종족번식에 큰 결함이 됐을 뿐 아니라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 당시 큰 수치라 고민이 깊었으리라 봅 니다. 무함마드가 얼마나 영민한가하면 낡은 카바 신전을 헐고 새로 지으려면 당 시 신성하다고 믿은 흑석을 옮겨야 했는데 공사에 참여한 부족간에 그 흑석 을 누가 옮겨 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분쟁이 생겨 자칫하면 부족간 전쟁 이 촉발되려고 할 때 그들은 신전 문을 제일 먼저 지나가는 사람을 중재자 로 삼기로 했다고 합니다. 당시 믿음이 가는 자로 소문난 무함마드가 그 문을 처음 지나가자 인부들 이 중재를 부탁하므로 무함마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긴 옷을 가져와 땅 에 펼치게 하고 자신이 흑석을 들어 그 옷에 올려놓고 부족 대표들이 옷의 귀퉁이를 잡고 같이 옮기게 하므로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지혜로 해결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부자인 카디자와 결혼하고 대상으로 활동하며 생활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아들이 없어 고민하던 무함마드는 넓은 사막과 산을 찾아 사색을 즐겼고 히 느낌 70

라산 동굴에서 금식하며 진리를 찾으려 명상에 잠겼다 40세(610년)때 깨 달음을 얻어 자신은 알라(하느님)신의 말을 전하려온 메시아(예언자)라고 주 장했다고 합니다. 4년 동안 깊은 사색에 잠겨 고민하던 무함마드는 614년부터 자신의 깨달 음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알라(하느님)만이 유인한 신이며 하느님 앞에서 는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다 는 사상을 가지고 철학과 행동이 일치 할 수 있도록 사람이 지켜야 할 의무와 믿음과 행동이라는 내용으로 설교하 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무함마드가 하루는 사파라는 작은 언덕에 혈연관계 사람들을 모아놓고 나 는 한 명의 경고하는 사람으로 우리가 무서운 벌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경 고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알라께서 내게 명하길 나의 가장 가까운 친지인 여러분들에게 경고하되 나 자신은 현세와 내세에서 여러분들에게 아 무런 이로움도 가져다 줄 수 없음을 알리라 하셨습니다. 라고 말하자 이 말을 듣고 삼촌인 아부라합이 너는 없어져야 해 라고 소리 지르고 군중들 은 미치광이라 놀리며 등을 돌렸다고 합니다. 당시 카바 안팎에는 360여 가지의 우상들이 세워져 있었고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과 인간사이의 중재자라 주장하며 절대 권력을 행사하 고 모세와 예수의 추종자들까지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잊어버리 고 서로 자신의 이익을 쫓아 여러 종파와 파벌로 나눠져 있어 상당히 혼란 스러웠다는 것입니다. 악습과 관습에 젖어 우상을 섬기는 종교를 가진 메카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 이로 취급했으나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는 그의 말을 귀 기울려 듣고 점점 이해하게 되면서 따르기 시작했는데 619년 하심가의 가장이자 숙부인 아부 딸림이 사망하자 하심가는 더 이상 무함마드를 보호해 주지 못했으며 사랑하는 아내도 죽자 같은 피를 나눈 부족으로부터 버림받았 다고 합니다. 메카에서는 사람들이 거짓말 장이며 미치광이라고 놀려 생활할 수 없게 된 무함마드는 동쪽에 있는 다이프로가 자신은 알라신의 메시아로 하느님의 말 씀을 전하려고 왔다고 하자 다른 종교를 믿던 다이프 시민들은 무함마드에 게 돌을 던지며 쫓아내므로 돌팔매질을 피해 포도밭에 엎드린 무함마드는 깊은 밤에 자신에게 힘이 없음을 한탄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시하고 놀리며 폭행했지만 굴하지 않고 신의 말씀을 들으라며 신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기 때문에 법이나 규칙 또는 관습에 매달 느낌 71

려 누구에게 구속되거나 착취당하지 않고 평등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라고 설교하자 노동하고도 세금으로 수탈당해 가난한 사람들과 노예로 모든 물질을 생산하고도 감시 속에 억압받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으려 모 였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예수처럼 여러분이 세금을 내면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 그 세금으 로 먹고 살면서 여러분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병사들만 더 많이 만들어 내기 때문에 세금을 내지 말라야 합니다. 라고 강조하기도 하고 지식을 추구하 는 길을 따르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가는 길을 쉽게 인도 해 주실 것입니다. 라면서 진실을 추구하고 믿을 것을 호소하며 다녔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함마드의 말을 믿고 따르자 신의 아들을 자처하며 부족민 들을 통제하면서 누리고 살던 무리들이 모함하기 시작했으며 이슬람교도가 된 아비시니아인 흑인노예 빌랄은 주인이 뜨거운 모래 위에 눕혀놓고 가슴 에 크고 무거운 바위로 짓누르는 고문을 하며 이제 너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라면서 무함마드를 따르지 못하게 괴롭혔다는 것입니다. 고문을 하고 괴롭혀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 는 사상을 신앙으로 선택한 사람들의 정신을 바꿀 수 없자 족장들은 무함마 드와 추종자들을 제한된 구역 내에서만 살도록 강제하고 식량공급을 중단했 는데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몰래 식량을 전해 더 이상 억압수단이 될 수 없 자 식량금지령을 폐지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은 언제나 지혜가 넘쳐 아라비아 부족사회의 관습과 인습을 바꿨으 며 당신의 형제가 나쁜 일을 저지르고 있던지 나쁜 일을 당하고 있던지 그 를 도우십시오. 라고 말하자 어떤 사람이 저는 그가 나쁜 일을 당할 때는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일을 저지르고 있다면 어떻게 그를 도울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그가 나쁜 일을 하지 못 하도록 막는 것이 그를 돕 는 길입니다 라고 대답했답니다. 또한 하나님과 최후의 심판을 믿는 사람은 손님을 정성스럽게 접대해야하 며 이웃을 영예롭게 하고 진실하고 선한 것만 말하며 만일 사악한 것이라면 말하지 말고 침묵을 지켜야합니다. 라고하기도 하고 가장 완성된 사람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좋건 나쁘건 가리는 일없이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라며 설파하고 다녔다는 것입니 다. 한번은 어떤 남자가 무함마드를 찾아와 양 몇 마리를 달라고 구걸하자 두 느낌 72

언덕 사이를 오가며 풀을 뜯는 많은 양들을 전부 가지라며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을 도우며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고 불운하며 버 림받은 사람들을 도우라 했습니다. 라고 말하자 그 남자가 마을로 내려와 사람들에게 이슬람을 받아들이시오. 무함마드는 가난을 두려워하지도 않습 니다. 라며 소문을 냈다고 합니다. 재물과 명예에 집착하지 않고 억압받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자 620년 6명의 순례자가 제자 되기를 자청했고 다음 해에는 6명 중에 5명이 7명의 제자를 데려와 12명의 제자가 돼 무함마드의 사상을 전파하니 많은 사람들 이 따르게 됐고 권력을 가진 무리들은 자신들의 논리로는 대중을 지배할 수 없음을 깨닫고 무함마드를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 고문하고 살해했다는 것입 니다. 권력자들에 의해 무함마드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극심한 시기에 부족 간 전쟁과 약탈로 혼란스러운 메디나에서 집을 제공한다며 와서 질서 를 유지해 달라고 초청하므로 622년 7월 16일 250마일 거리에 있는 야 스랍이라는 도시로 이주하게 됐는데 이것을 헤즈라 라고하며 야스랍은 예언 자의 도시 메디나-툰-나비라고 불리게 됐으며 이때부터 이슬람력을 시작했 다고 합니다. 무력으로 타인을 노예로 부리며 노동력을 착취해서 부를 축적하고 누리던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정의를 선택하는 것이 자비요, 짐을 진자의 보따 리를 들어주는 것이 자비요, 질문하는 이에게 다정하게 대답하는 것이 자비 요, 통행에 불편한 것을 제거해 주는 것이 자비요, 형제에게 미소를 지어 보 이는 것이 자비입니다. 라고 설교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 앞에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므로 어떤 차별이나 특 권이 있을 수 없으므로 여러분이 가졌다고 착각한 기득권을 버리고 서로가 존중해야 할 사람임을 인정하고 자유를 보장하십시오, 이것만이 진실이고 정의요 지식이므로 인간이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덕목입니다. 이렇게 설교 하기도 했을 것이라 봅니다. 무함마드는 자신의 철학과 신념인 평등사상을 전파하기 위해선 강력한 힘 이 있어야 한다며 공동체인 움마(Ummah) 의 모체를 만들어 병사들을 육성했으며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병사가 되자 624년, 해마다 메디나 를 공격해 침략과 약탈을 일삼는 메카 군을 메디나 남서에서 격파함으로 메 디나의 최고 수장이 됐습니다. 무함마드는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 을 들고 전투했다는 설도 있 느낌 73

는데 624년 바르트전투에서 이슬람군의 두 배가 넘는 쿠라이시부족의 대 군을 격파해 대승을 거두자 많은 아랍인들이 알라신을 믿게 됐으며 메카의 대상( 隊 商 )을 습격하고 신의 계시라며 예배방향을 예루살렘에서 메카로 향하 게 하므로 메카 정복 의지를 나타냈다고 합니다. 무함마드는 병사들의 무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법과 규칙 또는 관습이라는 핑계로 권위주의를 내세우며 무력으로 억압하는 행위에 굴종하면 할수록 폭 력이 습관화 된 자들에 의해 이웃까지 혹독하게 박해당하니 평등을 부정하 고 권위를 내세우며 억압하는 행위에 저항하는 것이 신의 뜻입니다. 라고 도 했을 것입니다. 우흐드 족과 전투에서 승리했고 다음 해에 꾸레이쉬 족들이 메디나를 총공 격해 왔으나 막아 냈으며 베두인들과 유태인 그리고 메디나 안에서 권력을 잡으려는 무리들이 음모를 꾸미고 627년 만 명도 넘는 병사들로 진격해온 다는 정보를 준 페르시아인 살만의 충고로 무함마드는 병사들과 함께 도시 주변에 큰 도랑(한다크)을 파서 막았다고 합니다. 한 달이 넘도록 메디나를 공격했지만 방어막을 뚫지 못한 침략자들은 원조 를 받지 못해 식량이 부족했고 연합 족 병사들 사이에 서로 힘자랑으로 싸 움이 벌어져 불만이 고조됐는데 기상상태까지 악화되면서 견디지 못하게 된 침략자들은 스스로 병사들을 철수하고 난 이후부터 메디나는 침략당하지 않 았다는 것입니다. 무함마드는 5주 6신( 五 柱 六 信 ) 1.믿음의 선언(샤하다)(알라 외에 신은 없 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임을 증언합니다. 고 외치는 일) 2.예배(솰라)(코 란 1장을 외우며 하루 다섯번 절할 의무.) 3.구빈세(쟈카트)(수입 중 생활을 영위하는 최소 금액(최저생계비)을 제외한 금액 2.5%를 가난한 사람에게 희사할 의무, 가난한 사람은 내지 않아도 됨) 4.단식(쏴움)(매년 9월(라마단 달)에 매일 새벽 예배부터 저녁 예배까지 단식하고 절약된 곡식이나 비용은 단식이 끝난 다음 날 이둘피트르 축제일에 자카아툴피트리 라 해서 주 변 가난한자 또는 성원에 나눠주는 일) 5.성지순례(핫즈)(평생에 한번은 12 월 둘-힛자에 정해진 순례 기간에 메카를 순례해야하며 만인이 평등하게 이 흐람이라는 바느질이 없는 두개의 무명천으로 몸을 감싸 입고 정해진 코스 를 돌며 그 비용은 본인이 순수하게 노동한 대가로 벌어들인 돈으로 해야 됨.)와 1.하나님(알라) 2.천사들 3.경전(코란과 이전 경전) 4.사도와 예언자 들 5.정명 6.최후 심판을 믿고 실천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628년에 메카인들과 메디나인들 사이에 후다베야 라는 휴전협정을 맺었 는데 2년 동안 꾸레이쉬족이 공격하므로 630년 만 명의 병사와 진군해 피 느낌 74

한방울 흘리지 않고 메카를 정복한 무함마드는 진리가 와서 허위는 망해 없어졌다 라고 말하며 카바 신전의 모든 우상을 파괴하고 시민에게 자유를 보장하고 평등하게 대하므로 알라신을 믿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메카를 점령한 무함마드는 정복을 계속해 아라비아반도 대부분을 통일했을 뿐 아니라 당시 두 강대국인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을 포함한 많은 황제와 군주들에게 이슬람으로 초대한다는 서신을 보내 화해와 정복을 꿈꾸고 알라 신의 메시아라며 평등사상을 세계로 전파하는 원정 계획을 세우던 중 병사 했다는 것입니다. 아라파트 평원에서 무함마드는 이곳에서 해가 바뀌면 여러분들을 다시 만 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백성들이여, 신전을 짓거나 우상을 섬기지 말고 예 배라는 핑계로 통제하며 평등을 부정하고 권위주의를 내세워 타인의 노력을 갈취해 누리고 사는 허상을 타파하십시오. 모세와 다윗 그리고 예수는 신이 아니라 나와 같은 인간으로 여러분에게 신의 메시지를 전하려 왔을 뿐입니 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무함마드는 과부들과 여러 번 결혼(11번)했으나 50세 때 당시 9살인 아 부바크르의 딸 아이샤와 결혼한 것이 마지막으로 지금도 중동사회의 모델이 돼 어린여아가 40~50살 남성들과 결혼하는 것이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으 며 632년 6월 8일(이슬람력 11년 3월 13일) 63세 나이로 애처 아이샤 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메디나시대 이슬람을 지배한 무장( 武 將 ) 무함마드는 메카정복 이후 아라비 아와 주변국을 점령했으니 신의 사도라는 핑계로 대중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존재나 절대군주가 될 수도 있었지만 왕관을 쓰지 않았으며 옥좌 없이 마룻 바닥에 앉아 논의했고 인간은 평등하므로 누가 누구를 대신해 노동하는 것 은 자유를 억압당하는 노예라며 스스로 옷과 신발을 고쳐(수선) 입으며 겸손 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무함마드는 아라비아와 주변국까지 점령했음에도 사후 약간의 소지품만 남 았을 뿐 재산이 없고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을 뿐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으 며, 성전을 짓거나 자신을 위한 예배를 드리지 말라고 했다는데 그가 썼다 는 코란의 원본은 없으며 그의 삶을 칭송하고 갈망하는 후세들이 700년대 에 이븐 히샴의 채록( 採 錄 )과 그 외의 많은 구술(하디스)에 의해 코란으로 정리해 지금의 이슬람교가 됐다는 것입니다. 느낌 75

서로마제국소멸과 비잔티움 서로마 제국은 자취를 감췄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에 수도 를 건설한 동로마제국은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귀족행세 하던 게르만족 을 추방하고 로마를 지배했던 왕과 귀족가문이 다시 권력을 차지했는데 이 때를 16-19세기 역사가들은 비잔티움(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ων Ρωμαίων)제 국이라 명명하고 있습니다. 561년은 유스티니안이 집권해 강력한 무력으로 귀족과 평민들을 통제하고 복지정책과 유화정책을 펼치며 번성했고 7세기경 동방문화의 영향을 받은 헤라클레이오스 황제가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삼았으며 8세기경 이슬람이 침략해 시리아와 이집트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위협했다고 합니 다. 비잔티움은 페르시아와 이슬람의 침략을 막아내므로 유럽과 그리스도교를 보호하는 방파제역할을 했으며 9세기 초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자 무슬림에 정복당한 땅의 반환을 요구하며 다시 전쟁을 벌려 1000년에는 바실레이오 스 2세가 불가리아와 아르메니아를 재정복하고 제국의 면모를 갖췄다는 것 입니다. 동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이어져온 그리스도교는 동방정교(그 리스, 러시아정교)로 칭하면서 서로마에 남아있던 그리스도교와 분리됐으며 서로마는 일찍 소멸했기 때문에 로마교황이 그리스도교의 수장이 됐지만 동 로마는 황제가 있어 황제가 동방정교의 수장이었다고 합니다. 침략전쟁을 계속하던 비잔티움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했으며 귀족들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위한 혹독한 수탈 때문에 굶주린 평민들이 저 항하고 귀족들이 권력을 차지하려는 암투로 혼란스러워 질서를 유지할 수 없을 때 터키와 베네치아가 침입하자 1095년 콤네노스 왕조는 서방에 도 움을 요청했다고 기록됐습니다. 비잔티움제국이 도움을 요청하자 서유럽은 종교병사인 십자군을 파병해 지 원하므로 질서와 권력을 유지했는데 제4차 십자군이 들어와서는 약탈을 시 작해 혼란스러워 지면서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완전히 정복되자 몇 몇 후계 국가들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다가 마지막에 니카이아 제국이 점령했다는 것입니다. 니카이아 제국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했지만 동로마를 전체적으로 지배할 수 없어 서로마와 같은 절차를 거쳐 부락단위에 영주가 권력을 행사 느낌 76

하는 지역으로 분화하기 시작하면서 에게해 해안에 국한된 그리스국가만 남 았다가 이것마저 1453년 5월 29일 메메드 2세에게 함락 당하므로 로마 제국은 완전히 소멸됐다고 합니다. 봉건시대(중세) 로마제국이 사라지고 각 지역에서 많은 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 넓은 토지 를 장악해 권력을 행사하던 무리들이 스스로를 영주라 칭하면서 같은 지역 에서 같은 혈통을 타고난 부족민들끼리 모여 사는 부족국가가 됐는데 이때 부터 로마시대 귀족과 종교가 권력을 행사하는 사회로 변모하게 된 것입니 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이후부터 귀족이 되고 권력을 행사하게 된 그리스도수도 사들이 스스로 주교나 교황이 됐고 십자군병사를 만들고 침략전쟁을 시작하 므로 권력을 유지할 수 없는 영주들이 그리스도를 종교로 받아들이면서 종 교권력이 강화됐습니다. 종교가 권력을 행사하자 그리스도를 우상이라며 믿지 않거나 복종을 거부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단이나 마녀 또는 악마로 몰아 악랄하게 살해하기 시작했고 무함마드를 추앙하는 알라신을 믿는 이슬람교도들은 700년경부 터 우상(예수ㆍ성모상)을 파괴해야 한다며 침략전쟁을 시작해 1600년대 까 지 종교전쟁이 벌어집니다. 751년 피핀이 교황의 지원으로 프랑크황제(카롤링거 왕조의 시작)가 되며 기증한 중부이탈리아가 훗날 교황령(1929년 2월 11일 바티칸 시국)이 되 고 피핀의 아들 카롤루스(프랑스어 샤를마뉴)대제가 도나우 강변까지 점령해 오스트마르크(Ostmrak) 를 설치하고 오스트리아의 변방지대에 점령영 역인 마르크(Mark) 를 설치한 후 로마교황(교황 레오3세)으로부터 로 마인의 황제 란 칭호를 받습니다. 이것은 로마교황이 비잔티움제국의 동방 그리스도교와의 갈등 속에 든든한 후원자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카롤루스가 이때 정복한 작센 은 뒤에 독일 국가 초기형성에 기여했고 카롤루스 사후 프랑크왕국이 3등분 느낌 77

되면서 서 프랑크는 지금의 프랑스, 중 프랑크는 이탈리아, 동 프랑크는 독 일이 됩니다. 726년 레옹3세는 그리스도교를 믿고 있었으나 황제가 된 후 굶주린 평 민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수도사들이 하는 일없이 기도할때마다 재물을 걷고 헌납 받으며 많은 부를 축적해 대중들의 삶이 황폐해 졌다면서 돌로 우상을 만들어 대중을 속이고 갈취하는 성상제작을 금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843년 베르뎅조약으로 프랑크왕국이 삼분되고 919년에 작센의 하인 리히공작이 독일국왕으로 선출되면서 헝가리를 침략해 영토를 확장했으며 928~929년에 슬라브(폴란드)를 정복하고 헝가리에게 곡물을 받치지 말 고 수공예품(신발ㆍ의류ㆍ직물류 등 필요한 생필품)을 받치라 했는데 그 아 들이 962년 등극한 오토대제입니다. 오토대제는 자신의 영토를 되찾겠다며 침입한 헝가리 군을 물리치고 권력 을 강화하기 위해 국가종교제도를 도입해 주교와 수도원에 토지를 기증하고 수도사들에게 봉건영주의 작위를 수여하면서 주교 령으로 왕을 보호한다고 발표하도록 하므로 영주들의 명분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강화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오토는 북 이탈리아를 침략해 정복하므로(이후 북이탈리아)교황으로부터 황 제(신성로마제국)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황제의 병사들을 사용해 로마교회의 권력을 강화시키고 보호해주는 대신 교황은 황제가 점령한 이탈리아 내의 영토를 인정한다는 약속을 받고 신성로마제국이라고 칭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이 슬라브족(오스트리아도 Ostmark라는 변방의 한 주였음) 의 땅을 정복하면 점령지역(Mark라 칭함)에 공작들을 파견해 다스리게 했 는데 슬라브족은 영토를 점령당하면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고 다시 프랑크가 이들을 점령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다 브란덴부르크는 훗날 프로이센이 되 고 뮌헨주변은 오스트리아가 됐다는 것입니다. 교황은 스스로 신의 대리자라 칭하고 주교임명권한과 황제를 인정할 권한 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고 황제는 국가를 통치하고 교황도 황제가 다스 리는 국가에 부속된 국민의 한사람이므로 주교도 황제가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해 프랑크제국내의 주교들에 대한 서임권 행사를 놓고 권력다툼이 치열 했다고 합니다. 종교가 수탈하는 행위가 혹독해 민중들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황제 하인 리히4세를 지지했으나 황제권력을 노리던 귀족들이 교황(그레고리7세)과 결 느낌 78

탁해 서임권을 주지 않으면 황제에서 퇴위시키겠다고 협박하므로 1077년 카사노 성에서 황제가 굴복했고 이때부터 프랑크는 교황이 서임권을 행사하 게 됐습니다. 서임권은 실질적으로 종교권력을 행사하는 주교들을 임명하는 권한으로 대 중의 여론을 조장해 황제지위를 보장받는 권력의 밑받침이기 때문에 당연히 황제가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황제를 종교아래 굴복시키려는 교황은 주 교는 종교관할이기 때문에 교황이 행사해야 한다면서 서로 권력다툼을 한 것입니다. 종교와 정권 간에 권력암투가 격화되면서 종교전쟁이 벌어지고 종교가 권 력을 장악했을 때를 중세라 하며 이때까지도 노예제도가 사라진 것은 아니 고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먹을거리와 생활필수품들은 노예나 평민들 이 생산합니다. 종교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가장 악랄하게 사람들을 학살했는데 자연재해 가 발생하면 신이 노했다거나 부정이타서 그렇다며 종교와 자신들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을 이단이라며 화형 했고 주로 혼자 사는 여성들은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애완동물을 많이 길렀는데 반려동물을 기르는 행위를 마녀라며 처형하기도 했습니다. 중세에 대한 기록 중에 반려동물을 기르는 유럽귀족들과 성직자에 대한 말 이 있는데 그리스도교는 애완동물소유를 못마땅해 했으며 동물에게 먹일 음 식이 있으면 차라리 가난한자들에게 주라며 비판하고 동물과 친밀한 관계는 우상숭배와 관계있다며 모함했는데 애완동물에 대한 편견은 종교재판 때 극 에 달했다고 합니다.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은 이교도라는 증거라고 했으며 애완동물을 키운다는 이유만으로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고 동물과 친한 것을 간악한 마녀의 행위 로 몰아갔는데 마녀로 고소됐던 여자 중 많은 사람이 나이가 많고 사회적으 로 동떨어진 생활을 하거나 혼자 사는 힘없는 여인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신이 있다고 속이는 무리들이 얼마나 비과학적이고 어리석으며 비양심적이 고 편협하냐면 하느님이 땅을 창조했으며 지구는 평편하고 끝에 가면 끝없 는 낭떠러지가 있다고 강조했는데 우주를 관찰했던 코페르니쿠스와 브루너 가 지구는 평평하지 않고 둥글고 태양주의를 자전하며 돈다는 지동설을 주 장하자 화형 했다는 것입니다. 종교에서 달 위는 천상계고 신의 영역이기 때문에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된 느낌 79

다며 연구를 금지했는데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주장했 다 이단으로 몰려 종교재판(1633년)을 받았으며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지동 설을 철회하고 설파하지 말도록 강요받고 화형당할 뻔했다가 마지막 생애를 가택에 갇혀 지냈습니다. 이런 행위를 하는 무리들은 무력으로 선량한사람을 학살하고 재물을 강탈 했던 침략자들이 신의 아들이라며 타인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면서 수탈했던 것처럼 자신들이 신의 대리자라고 세뇌하므로 노동을 하지 않고 타인의 노 동생산물을 착취하면서 누리고 살기위한 수단으로 삼은 것과 같이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저주하고 학살하는 행위가 비양심적인 행위임에도 신 이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해 사후 세계와 악마와 귀신 그리고 뱀파이어와 흡 혈귀를 주장하며 사람들을 현혹하므로 공포를 느낀 대중들이 맹목적으로 자 신들의 종교에 매달리게 정신을 조종해서 재물을 갈취합니다. 종교가 권력을 잡고 성직자들이 황제처럼 누리고 살기위해 십일조와 헌금 을 강요해 서민들의 삶은 궁핍하기 짝이 없는데 황제까지 굴복해 종교에 대 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고 불신이 팽배해지자 교황 우르바노2세는 1095년 그리스도인이 순례 갔다 피살됐다 는 거짓을 퍼트리며 무력으로 억압하 려고 십자군전쟁을 일으킵니다. 이슬람은 성지순례를 용인했음에도 동로마제국의 힘이 약화되자 프랑크족 들은 내부의 불평등 때문에 발생되는 불만을 억압하고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1074년 약탈전쟁을 시작했다가 패하자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고 교황 은 동방정교를 로마가톨릭 교황권 아래 두려는 목적으로 성지회복이란 명분 으로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교황은 신께서 그들을 이끄시고 그들의 일을 도우신다. 신을 위해 일을 행하다 죽는 자는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받을 것이다. 가난한자 구원받지 못할 죄를 지은 자들은 그곳(예루살렘)에 가면 행복해지고 부유해질 것이다. 주저하지 말라 내년여름에 진군하라. 신께서 원하신다! 라며 대중과 신도 들을 선동했다고 합니다. 십자군을 모으기 위해 성직자들은 아무리 악독한 범행을 저지른 죄인도 전쟁에 참여하면 죄를 사함 받는다. 는 거짓말을 퍼트려 온갖 흉악범죄를 저지른 비양심적이고 심성이 악독한 범죄자들을 병사로 동원했습니다. 교황은 은자 피에르라는 광신도를 이용해 전쟁을 선동했고 피에르는 교황 느낌 80

의 말을 듣고 기사들을 동원해 노략질을 시작했는데 처음엔 유대인을 학살 하며 약탈하고 베오그라드에서도 약탈하다 헝가리왕국 기병대반격으로 군사 를 잃었으며 베오그라드의 중장보병대에 대패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 티노폴리스로 도망갔습니다. 동로마제국황제 알렉시오스1세는 그들을 배에 태워 이슬람영토에 데려다 주었으나 피에르는 거기서도 약탈을 일삼다 셀주크 투르크군을 만나 제리고 르돈 요새와 키보토스 요새에서 전멸하고 기사 레이날도는 항복했으며 은자 피에르는 알렉시오스1세에 의해 목숨을 구해 달아난 것이 군중십자군이었습 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차지한 무리들이 재물을 축적하려고 가혹 하게 수탈해 빈곤해진 민중들이 불만을 표출하며 분배를 요구하고 정책에 반대하거나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통제와 억압을 부정하면 갈취 하지 못하고 수탈질서를 유지할 수 없으니 대중들을 참혹하게 살육하는 전 쟁도 벌이는 것입니다. 전쟁을 벌이더라도 자신들은 전장에 참여하지 않아 죽지 않을 뿐 아니라 자유를 요구하는 대중들을 전시라는 핑계로 강압적으로 명령에 복종하도록 길들이거나 학살하고 평민들이 병사로 출정해 농사를 짓지 못하거나 전쟁 으로 짓밟아 황폐해진 토지를 헐값에 강탈해 재물까지 늘릴 수 있기 때문에 전쟁을 조장합니다. 대부분 유럽 왕들은 동쪽왕국의 힘을 알고 있어 전쟁을 달갑지 않게 생각 했으며 주변왕국과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십자군에게 자신들의 병사와 기 사들을 내주면 권력을 찬탈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거느리는 지방 영주들에게 그들의 기사와 병사들을 십자군전쟁에 동원하라고 했다는 것입 니다. 침략전쟁을 거부하면 이교도로 몰아 공격받았는데 제1차 십자군원정에 승 리한 영주들이 자신을 왕이라 칭하며 예루살렘주변을 자신의 영지로 삼고 통치하기 위해 노예나 죄인신분으로 참가한 병사들에게도 기사작위를 봉했 다는 소문이 퍼지자 2차 십자군전쟁부터는 수많은 영주나 기사 또는 병사들 이 예루살렘을 침공했습니다. 왕보다는 재물이 부족해 병사들의 절대적 충성과 복종을 강요하지 못하던 귀족들과 지방영주들은 물질이 풍족한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영토를 새롭게 확장할 야심에 병사들을 동원했지만 십자군이 계속 이슬람 군에 패하므로 기사와 병사를 잃어버린 영주들의 힘이 쇠약해져 왕들에게 종속되는 계기가 느낌 81

됩니다. 십자군전쟁은 제1차 십자군원정(1096년~1099년)을 시작으로 제2차 십 자군원정(1147년~1148년)등 총 10차례의 전쟁을 치렀으나 대패하고 종 국에는 청소년십자군이라고 해서 소년ㆍ소녀 3만 여명이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일부 상인들의 농간으로 노예로 팔려갔다고 합니 다. 초창기십자군은 이슬람세계가 정치적으로 분열돼 있어 승리를 거뒀으나 이 슬람이 단결하고 아마드 앗딘 장기(장기라 불림)나 살라흐 엣 딘(살라딘으 로 불림)같은 무장이 등장해 세력을 결집하고 반격하므로 십자군은 계속 대 패해 그리스도교가 실제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은 총 전쟁 중 일부 기간밖에 없습니다. 무지와 광신적인 믿음으로 편협성을 버리지 못한 십자군은 강간과 약탈을 일삼았으며 당시 성지백성들과 같은 그리스도교였던 동방정교회신자들에 대 한 학살과 약탈, 하기아 소피아성당에서의 무례로 비잔티움제국국교인 동방 정교회와 로마가톨릭 간의 대립이 더 심해져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의 분 열을 고착화 시켰습니다. 전쟁말기에 화승총이 사용되므로 육체적인 힘과 칼과 창 등 무기로 수많은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재물을 강탈해 입신출세 했던 기사계급들의 힘 이 소멸되므로 직업군(상비군)에 들어가거나 거리의 부랑자 또는 상인이 됐 으며 장교들은 대토지를 차지하고 귀족이 되거나 장교단을 형성해 융커라 불리게 됩니다. 대토지를 차지하고 장원을 만들어 영주라는 귀족이 되거나 장교단을 형성 해 정치적 입지를 굳히지 못한 기사들은 상인과 공업 인으로 변신해 노동자 와 농민들을 잔혹하게 억압하고 재물을 강탈하거나 착취해 부를 축적하므로 대장원이나 정치적 입지를 차지한 기사들과 같은 귀족위치로 상승하려 했습 니다. 십자군전쟁의 패배로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병사를 동원했던 교황권이 크 게 실추되면서 그리스도적 중세적 통합성이 허물어졌으며 전쟁 물자를 공 급하던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는 무역확장을 통해 동방과의 무역을 독점하 게 되고 유럽시장들에 철, 모피 등 동방의 물품들을 공급하므로 부를 축적 하는 기반이 됐습니다. 서유럽은 십자군전쟁 중 이슬람과 비잔티움에서 약탈한 물질로 경제가 발 느낌 82

전했으며 특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가장 이득을 봤지만 십자군은 가톨릭이 아닌 종교에 대한 증오를 불러 유대인대학살의 동기가 됐으며 우호적이던 가톨릭과 이슬람이 적대적으로 원수가 되는 계기 를 만든 것입니다. 백년전쟁과 농민혁명 중세는 결혼하면 여자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남자에게 지참금으로 받쳤는데 병사의 무력으로 침략해 부족의 영토를 빼앗고 대중위에 군림하던 프랑스 왕과 봉신인 영국 왕들은 영토를 차지하려고 전략적으로 결혼했으며 카페왕조(프랑스왕조)의 샤를4세가 아들 없이 죽어 4촌 형제 필리프6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샤를4세 누이의 아들인 영국 왕 에드워드3세는 자신의 엄마는 왕위를 계 승하지 못해도 자신은 남자기 때문에 프랑스왕위 계승자라면서 땅을 달라고 주장하자 필리프6세는 봉신이 자신을 능가하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것도 못마땅한데 땅까지 내 놓으라니 봉토를 몰수하고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늘 리려고 1340년 6월 영국과 프랑스 간에 전쟁을 벌입니다. 필리프 6세는 1337년에 영국 왕의 봉토였던 아키텐 령에 병사들을 파병 해 무력으로 점령하고 몰수를 선언했으며 노르망디 해안에 함대를 보내 영 국을 위협하자 에드워드3세는 공식적인 도전장을 띄우고 자체 군사력을 준 비하면서 혈족으로 형성된 왕가인 신성로마제국황제와 라인 강 및 네덜란드 제후 등과<황제대관>으로 절충하여 공수동맹을 성립시키고 전쟁을 시작합 니다. 전쟁의 핵심은 유럽 최대 모직물이 생산되고 있는 공업지대로 원료인 양모 공급국인 플랑드르공국과 포도주 최대 생산지인 아키텐 령에 속한 가스코뉴 공국으로 프랑스왕의 종주권 아래에 속했는데 영국이 관리하고 있어 이 두 지방을 차지하기 위해 왕위 계승이라는 명분으로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왕족으로 살아가는 무리들이 부와 권력을 위해 116년간 동안 벌인 전쟁으 로 수많은 병사와 양민들이 학살됐으며 농지는 황폐해지고 병사로 동원된 농민과 노예들이 노동을 못해 먹을거리가 없어 굶주릴 때 영국군이 들어와 약탈과 강간이 극심한데 귀족의 병사들까지 약탈에 앞장서자 1358년 농민 느낌 83

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귀족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수많은 양민들은 학살과 약탈 그리고 강간에 노 출될 뿐 아니라 병사들이 적군의 포로가 되면 병사를 석방하는 대속 금까지 부담해야 했으므로 분노한 농민들은 참을 수 없어 북프랑스의 보베이지 지 방에서 자크리(당시 농민 호칭이었던 자크의 집합명사)의 난이 일어난 것입 니다. 권력을 유지하고 부를 늘리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던 왕족들은 전쟁에 참여 한 병사들을 회군시켜 농민들을 잔혹하게 학살하므로 농민들의 자크리 난은 진압했지만 전장에서 병사들을 철수시키므로 포로가 된 장2세의 석방보상 금으로 300만 크라운을 지불하고 아키텐지방과 칼레시( 市 )라는 영토는 영 국에게 빼앗깁니다. 1364년 프랑스에서 장2세가 죽고 샤를5세가 즉위하자 전쟁을 하기 위한 재정( 財 政 )을 비축하고 늘렸으며 아키텐귀족들을 선동해 영국식민지에서 벗 어나 자유공국이 되라고 선동해서 아키텐귀족들이 영국에 반항하며 영국이 내란으로 어수선해지자 다시 전쟁을 재개했습니다. 1369년 흑태자의 동생 존 오브고트가 이끈 영국군이 프랑스를 침입했다 패배하고 영국해군은 카스티야해군과 동맹을 맺은 프랑스해군에게 잇달아 패배하므로 브레티니-칼레조약으로 영국에 빼앗겼던 아키텐지방과 칼레시 영토의 대부분을 프랑스가 점령하고 1375년 부르지에서 휴전협정을 맺게 됩니다. 오랜 전쟁으로 평민들은 헐벗고 굶어죽는데 귀족과 성직자들은 호의호식 하며 호화롭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한 영국의 성직자 존 볼은 성속귀족 ( 聖 俗 貴 族 )을 비판하고 아담이 경작하고 이브가 길쌈할 때 귀족은 어디 있 고 평민이 어디 있었습니까? 라면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니 신분으로 구분 해서 억압받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고 설교하며 다녔습니다. 교황과 황제는 귀족을 인정하지 않고 평등사상을 주장하는 존 볼을 몇 번 이나 투옥시켰으나 자신의 양심과 진리를 속일 수 없어 귀족도 먹어야 사 는데 모든 먹을 것과 생활하는데 필요한 물질들은 노동으로 만들어지는 것 이므로 모두가 균등하게 노동하고 공정하게 분배 받아 평등하게 살아야 한 다. 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존 볼은 1366년 교회로부터 파문당하고도 사람들에게 진리를 외치자 귀 족들은 그를 켄트의 미치광이 성직자라고 폄하하고 모함하며 놀렸으나 그래 느낌 84

도 꺾이지 않고 방랑설교를 계속하다 1381년 옥중에 갇혔을 때 타일러의 난이 일어나므로 각지의 농민에게 은유( 隱 喩 )로 된 회장( 回 章 )을 보내 농민 봉기군을 조직했습니다. 전쟁 때문에 농토는 황폐화되고 노동을 하지 못해 생산되는 물질이 부족해 굶주리며 삶이 피폐해진 민중들에게 전쟁비용을 모은다며 15세 이상의 사 람들에게 인두세( 人 頭 稅 )를 징수하고 왕명으로 노동자규제법(1.건강한 남녀 는 신분을 막론하고 1346년 이전의 품삯으로 일해야 한다. 2.노동자, 농 민의 도망을 금지한다. 3.물가는 1346년 이전의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4.위반자는 엄벌에 처한다.)을 발표합니다. 그러자 1381년 5월 영국 에섹스 지방에서 와트 타일러의 지휘아래 농민 군을 결성하고 반발하기 시작했으며 켄트 에식스 이스트 앵글리아 지방까 지 확대돼 잉글랜드왕국의 절반이상 지역에서 농민봉기가 발생되면서 런던 으로 진군해 하느님을 핑계로 민중을 가혹하게 수탈하던 수녀원과 수도원을 불태우며 전진했습니다. 런던에 도착한 농민군은 감옥을 파괴해 존 볼을 구출했으며 런던시민들이 합류하자 도시를 점령하고 혹독하게 이윤을 남기던 플랑드르상인들을 징벌 했고 왕의 삼촌이자 원성의 대상이던 랭커스터공작 곤트 존의 저택을 파괴 하고 대법관 서드베리와 재무장관 로버트 헤일스 경을 처형한 후 국왕에게 요구사항을 전달합니다. 농민군의 요구는 하느님을 핑계로 십일조와 헌금을 혹독하게 갈취해 자신 의 배를 채우는 (1.켄터베리 대주교를 처형할 것. 2.인두세의 부활 및 금지. 3.농민의 사냥 권을 보장할 것. 4.농노제를 폐지할 것. 5.농지세금을 1에 이커당 4펜스로 고정할 것. 6.곤트의 존과 간신배들의 처형할 것. 7.매매 의 자유를 보장할 것)등을 요구했습니다. 전쟁의 폐해로 국고가 바닥나 용병을 고용할 수 없는 국왕 리처드2세 (1377~1399년)는 어쩔 수 없이 농민군에 굴복해 농노제를 폐지하고 상 거래의 자유를 보장하며 토지세는 4펜스로 고정한다는 해방 장에 서명하자 대부분의 농민들은 만족하고 귀향했지만 와트 타일러의 지휘아래 켄트, 웨 섹스, 런던 시민들은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니 농노제를 완전히 폐기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거부합니다. 농민과 도시민이 결합한 민병대들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령을 폐지 할 것과 하느님을 핑계로 종교가 수탈한 토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분배 해 줄 것. 농민들의 노예화를 금지하고 자유화 를 요구하며 저항했으나 6월 느낌 85

15일 국왕과 협상 장소에 참석했던 런던시장 월리엄 월워스가 휘두른 칼날 에 타일러가 목을 다쳐 병원으로 실려 갑니다. 와트 타일러가 암살로 부상을 입고 세인트 바솔로뮤 병원으로 옮겨지자 민 병대는 왕을 향해 화살을 발사하려 했지만 국왕의 신변을 보호하던 용병인 기사들이 막아서면서 국왕은 도피하고 지휘관을 잃어버린 민병대가 우왕좌 왕하며 엉거주춤할 때 피신한 국왕은 나는 그대들의 지도자요 그대들의 왕 이니라!! 가만히 있지 못할까!! 라는 말 한마디에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흩 어지고 말았습니다. 민병대가 해산하자 런던시장은 병원을 찾아가 와트 타일러를 살해하고 나 중에 월리엄 경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국왕은 민병대가 자진해산하고 흩어 지자 용병들을 동원해 농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7월에 존 볼을 체포해 교수 척 장분지형으로 살해하므로 농민들의 봉기는 끝났지만 국왕이 서명한 해방 장에 의해 농노제와 인두세는 사라지게 됩니다. 십자군전쟁으로 부을 축적한 이탈리아에서는 재물은 많이 가졌으나 사회적 신분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어 귀족들의 착취에 시달리던 상공인들이 피 렌체에서 억압받는 노동자들을 선동해 치옴피의 폭동(1378~1382)을 일 으키며 신분상승을 꾀합니다. 성직자들의 수탈과 전쟁비용을 노동자와 농민의 세금을 징수해 치르면서도 승리하면 전리품으로 귀족들만 배불리는데 민중들에게 전쟁비용을 부담시켜 죽도록 노동을 하고 헐벗고 굶주리며 고통 받는다고 민중들을 선동해 2년 이상의 세월동안 피렌체를 점령하므로 통치할 수 없게 된 귀족들의 항복을 받아내 신분이 상승하게 됩니다. 소작농의 출현 무력으로 넓은 땅과 그 땅에서 거주하는 무리들을 통제하는 영주들은 노예 노동으로 농사와 가축을 기르며 바다의 생선을 포획시켜 호의호식했지만 노 예들은 오랜 세월 대를 이어 노동해도 자신들의 재물은 늘지 않을 뿐 아니 라 자유마저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고 농사짓는 일을 기피하기 시 작했습니다. 느낌 86

영주들은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무력을 사용해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으며 노예노동으로 큰 성을 짓거나 대저택을 짓고 그곳에서 병 사들과 함께 살며 자신의 영토에 있는 산짐승들도 전부 자기 것이라 주장하 고 농민이 배가고파 산짐승을 잡아먹으면 그 사람을 참혹하게 처형하기도 했답니다. 악랄하게 사람을 학살하도록 강요하는 영주만 처형하면 많은 사람들이 억 압당하지 않겠지만 영주의 병사로 있는 무리들은 영주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누리고 살려는 무리들이기 때문에 영주를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주를 위해 목숨까지 받치며 노예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며 갈취하는 것입니다. 노예들이 노동을 기피하자 일을 시키기 위해 노예관리자를 뒀으나 노예관 리자들이 노예들에게 살해당하는 일들이 발생해 소수의 노예관리자로는 관 리할 수 없게 되니 10명당 1명의 노예관리자를 뒀는데 이것이 훗날 산업사 회로 발전하면서 생산 공장이나 건설현장 관리자(반장) 시조가 됐을 것으로 봅니다. 노예관리자들이 혹독하게 감시ㆍ감독하며 노예들을 무력으로 억압하므로 초기에는 농사를 지어 많이 생산할 수 있었지만 노예관리자와 노예들이 결 탁해 영주를 살해하고 토지를 점령하거나 도망가기도 했으며 노예관리자들 에게 많은 물질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영주들이 호화롭게 살며 재산을 늘 릴 수 없었습니다. 영주들은 어쩔 수 없이 노예들이 생산노동에 전념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약 간의 토지를 나눠주며 일정 시간은 영주의 영지에서 의무적으로 농사를 짓 고 남은 시간에 노예에게 나누어준 토지에서 자신을 위한 농사를 짓도록 허 락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땅을 갖게 된 노예들은 처음엔 영주의 영지에서 열심히 농사를 짓 고 남은 시간에 자신의 땅에 농사를 지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노예의 후손들이 태어나자 가난과 굶주림에 지친 노예들은 영주의 영지에서는 대충 대충 농사를 짓고 자신의 땅에 정성을 쏟으면서 생산을 늘렸습니다. 넓은 토지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생산물이 없어 부가 축적되지 않자 영주들 은 토지를 회수하고 종교를 이용해 억압하며 노동을 강요했지만 자신에게 아무런 대가가 생기지 않고 희망도 없는 노동을 거부하자 일정범위의 농지 를 사용하는 대신 그 땅에서 생산되는 소출에서 일정량을 영주에게 받치라 며 소작을 시작한 것입니다. 느낌 87

소작을 하게 된 농노들 중 극소수는 넓은 토지를 소작 받아 다시 소작을 주면서 재물을 축적할 수 있자 노예를 사드리며 땅을 소유하려 하므로 영주 들은 농노들이 더 이상 재물을 축적할 수 없게 하기 위해 추수된 곡물에서 많은 양의 소작료를 징수하므로 노예들의 삶은 더욱 황폐해 졌습니다. 농지가 없는 도시 숙련노예들은 관제수공업으로 신발과 의류 그리고 식기 와 가구 등 사람이 살아가면서 실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질과 귀족 행 세하는 무리가 권위를 내세우며 재물을 뽐내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각종 보 석들의 세공과 장신구들을 만들고 귀족의 재산을 관리해주기도 했습니다. 노예에서 탈출하거나 해방된 숙련노예들은 신발과 옷을 만들거나 또는 사 람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만 갖고 있을 뿐 땅이 없 어 먹을 것을 생산할 수 없으므로 자신이 만들어낸 물건들과 먹을 것을 교 환해 생존했을 것이며 그들이 물건을 생산하고 기술을 교환하기 위해 같이 모여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사람 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있어 그곳에 가면 언제든지 먹을 것을 가져가면 필요한 물질을 교환할 수 있다고 소문이 나면서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드나 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장을 생성하게 됐다고 봅니다. 노예들의 땀 흘린 노동을 갈취해서 누리고 살던 무리들은 숙련노예들에게 는 곡물이 없어 빼앗아 갈 수 없으므로 농작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땅에 살 고 있기 때문에 세금을 내야 한다며 생산하는 물질의 량에 따라 곡물을 징 수하거나 만들어낸 물질을 강제 징수해서 부를 축적했을 것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이런 생활이 되풀이 되면서 재물을 많이 차지한 사람도 생 겨났을 것이며 재물을 많이 축적하고 창고에 쌓아 놨는데 과학이 발달되지 않아 보관시설이 미흡하니 썩어 못쓰게 되기도 했을 것이고 빈곤한 사람들 은 재물이 풍족한 사람에게 재물을 빌리기도 했다고 봅니다. 처음엔 재물을 빌려주고 차용증 같은 것을 교환했을 것이나 차용증은 재물 을 빌려간 사람이 죽거나 도망가면 다시 회수할 수 없고 재물은 쌓아두면 썩기 때문에 안전하게 재물을 늘리고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 차용증대신 언 제든지 물질교환이 가능한 화폐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을 것으로 판단됩니 다. 화폐로 물질을 교환할 수 있고 재산축적수단이 되도 노예는 자유가 없어 생필품이나 농사를 짓는 노동을 해야 했고 노동은 노예들이나 하는 것이라 느낌 88

며 기피하던 도시룸펜과 부랑자들이 화폐를 취득하기 위해 노예들이 만들어 낸 물건을 가져다 부락을 돌며 판매해 이윤을 남기며 화폐를 유통하는 상업 이 시작됐을 것입니다. 화폐가 생기기 전에는 무력이나 종교라는 거짓을 행사하는 무리가 권력을 행사하며 노동력을 착취하려고 타인의 자유를 부정하고 감시ㆍ통제하며 억 압했으나 화폐가 만들어지자 화폐가 권력이 되면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며 땀 흘려 가꾼 토지를 강탈(경매ㆍ징수 또는 매매)하거나 노동력을 착취(임금 노예)하며 감시ㆍ통제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게으름을 피울 권리와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 고 싶을 때 깨어날 권리가 있음에도 화폐가 권력이 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기득권을 행사하는 자들의 명령에 따라 주어진 시 간 안에 업무를 마쳐야 하는 돈의 노예로 자유를 박탈당하게 됐습니다. 화폐가 권력이 되자 수단 방법가리지 않고 온갖 비양심적 악행으로 타인의 자유를 부정하고 노동을 착취하고 억압하려는 자들이 넘치고 노동은 하기 싫고 화폐는 쓰고픈 남ㆍ여들이 유흥업체(노래방ㆍ술집ㆍ집장촌)를 떠돌면 서 온갖 도적질로 부를 차지한 자들을 추앙하고 화폐가 경제인양 왜곡하며 체제를 옹호합니다. 유럽에서 인쇄술의 창시자로 불리는 요하네스구텐베르크는 1397년이나 1398년 독일마인츠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의 아버지가 금화를 찍어내 는 일을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금화를 찍는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금형을 이해했으며 그것을 응용해 1434년 인쇄연구를 시작하고 1448년에 인쇄 소를 열었습니다. 이런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면 이 당시 사람들이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긴 것이 금이었으므로 금의 무게를 단위로 한 금화가 만들어 졌을 것으로 보이 며 당시는 많은 사람들이 금화를 제조했기 때문에 후일 기득권들이 통제하 고 통합하기 위해 은행을 만듭니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는 영국중앙은행은 1694년 W.페터슨의 제안에 따라 설립된 최초의 주식회사 형태 은행으로 당시에는 다른 사적 금 융업자들이 화폐를 발행하고 있었으므로 독점적인 발권은행( 發 券 銀 行 )은 아 니고 잉글랜드가 프랑스와 전쟁을 하면서 재정난 해소를 목적으로 설립했다 고 합니다. 1833년 잉글랜드 은행권이 법화( 法 貨 )로 지정됐고 1844년 잉글랜드 은 느낌 89

행조례(필 은행조례)에 의해 새로운 발권은행설립이 금지됐으며 1854년 많 은 은행에서 보유하고 있는 예금계정을 대체해 상호간 결제를 실시하게 됐 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인류역사에서 화폐와 상인의 생성은 오래되지 않았다 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화폐를 만들지만 화폐가 유통되지 않으면 가치가 없으므로 화폐에 가치를 두기위해 땀 흘려 생산한 물질과 교환되는 시장을 형성했을 것이며 화폐만 노리는 도적과 강도 그리고 사기꾼ㆍ도박ㆍ매춘 등 힘들이지 않고 화폐를 편안하게 갈취하려는 각종 범죄가 나타났다고 봅니다. 화폐만으론 어떤 물질도 생산되지 않으므로 화폐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유 통되는 시장이 있어야 하는데 시장은 필요한 상품이 많이 있어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물질이 대량생산된 후 현재의 시장이 형성됐을 것입니다. 시장에서 화폐로 생활에 필요한 물질을 교환하게 되자 노동생산물이 아니 라 화폐만 발행하거나 판매(취급)하는 금융업이 생겨났고 이자라는 핑계로 땀 흘려 생산한 물질을 합법적으로 강탈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자 화폐만능주의에 빠져 화폐를 차지하려는 도박이 판을 치고 도박행 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노동은 천한 노예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업신여기는 사상을 전파하며 사기와 도박을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무리들은 도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람을 살해하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화폐를 빌리면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죽도록 노동을 해야 하고 노동임금으 로 빚을 갚지 못하면 사기나 도박 등 범죄를 저지게 되며 범죄를 저지르다 구속되면 교도행정에 세뇌되어 체제옹호자가 됩니다. 바둑이나 장기 또는 그림이나 음악, 연예인이나 스포츠선수 그리고 글쓰기 나 도박, 방송과 행정, 감시ㆍ통제 등의 행위는 인류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그 어떤 물질도 생산되지 않음에도 풍족하게 생활하는 것은 임금노예들이 노동생산만이 경제라는 진실을 깨달을 시간을 갖지 못하도록 정신을 빼앗은 대가로 누립니다. 예술이나 문화라는 직업이 지성을 갖춘 양심인양 행동하지만 억압과 갈취 속에 빈곤하게 생활하는 민중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저항하는 정신을 갖 지 못하게 시간을 빼앗고 감성을 자극하므로 저항정신을 감소시키는 것입니 다. 처음 상인들은 부락과 도시를 돌며 물건을 판매하려갔다 주인 없는 한적한 느낌 90

주택에서 귀중품들을 가져오기도 했을 것이며 부녀자들이 혼자 있는 것을 보면 패악 질을 저지르기도 하므로 부락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 이웃을 믿지 못하는 불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것으로 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재물을 모은 사람들이 생기니 노동은 하기 싫고 돈은 갖 고 싶어 너도 나도 장사를 시작했고 재물을 모은 상인과 장인은 안전하게 재물을 지키려 토지를 구입하고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모여 커다란 부 락을 이루니 귀족들은 이들이 세력을 넓히지 못하도록 특정지역에서만 거주 하도록 강제했을 것입니다. 많은 재물을 모았지만 특정지역에 갇혀 살아야하는 사람들은 그 지역을 벗 어나려 했지만 권력의 감시와 통제로 벗어날 수 없자 힘을 합쳐 저항했으며 이런 과정을 거쳐 재물을 차지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둬놓은 지역을 벗어 날 수 있게 되고 대표를 뽑아 자신들을 가둬놓는 권력자들과 협상도 할 수 있게 됐다고 봅니다. 이들이 처음에는 자신들이 갇혀 지내는 지역 안에 사는 사람들끼리 뭉치 기 시작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며 점점 분화되고 같은 물질을 생산하는 사 람들끼리 뭉치기 시작하니 상인들도 자신들의 연합체를 만들어 이들과 함께 권리를 요구하며 저항하므로 영주들은 물론이고 황제도 위협할 수 있을 정 도였다고 합니다. 뭉치므로 힘이 생기자 이들은 자신들이 소속된 연합체를 상징하며 자신들 을 억압하는 병사들과 전투가 벌어지면 함께 보고 모일 수 있게 깃발을 만 들어 사용했는데 1430년 지기스문트 황제가 도시의 깃발을 벗어난 개별 적인 깃발을 가져서는 안 된다 고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위력적으로 저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연합체는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모세와 예수 그리고 석가와 무함마드가 주장했던 것처럼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참여하고 동등하게 발언하며 대 표를 선출해도 독선적 전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안 문제를 구성원들 과 함께 논의하고 결정되면 스스로 결의하고 대항했기 때문에 강했을 것입 니다. 생산노동 없이 상술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물건을 판매하려 다니면서 대 중들이 특정물질을 많이 필요로 한다는 것을 파악했을 것이며 처음에는 숙 련노예들에게 필요한 물질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해 가지고 다니며 팔고 물 건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불량품을 속여 팔아 이윤을 남겼다고 봅니다. 상인들은 숙련된 노예나 농민들이 땀 흘려 생산한 물질을 판매해 이익을 느낌 91

남기고 사는 사람들로 물건을 살 사람인지 구경만 할 사람인지를 판단해야 했고 눈치를 살펴 반드시 물건이 필요한 사람이면 감언이설로 꼬드겨 비싸 게 팔아 부를 축적합니다. 상품을 가져오면 단계별로 나눠 상품과 중품 그리고 하품으로 분리하고 상 품을 비싼 가격에 판매하므로 많은 이익을 남기는 것이며 눈속임해서 라도 판매해 이윤만 남기면 되기 때문에 겉으로는 똑같은 양으로 보이게 하거나 싱싱하게 보이도록 속임수를 써서 이익을 취하는 것입니다. 상인들은 물질을 판매만 하고 숙련노예들이 물건을 생산하는 양식이었지 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직접 만들어 판매해야 이익이 많다는 사실을 알 게 된 상인들이 노동자를 고용해 생산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당시까지만 해 도 물건을 만들어내는 도구나 기계들은 숙련노예들이 소지하고 있었다고 봅 니다. 욕심이 생긴 상인들은 노예들이 상품을 만들던 도구나 기계들을 구입하고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고용해 임금을 지불하며 물건을 만들어 내기도 했 을 것이고 물건을 만들어 내는 과정도 처음에는 한곳에서 한 개의 물건을 만들었겠지만 물건을 만들어내는 속도가 느려 더 빨리 생산하기 위해 분업 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한사람이 한자리에서 냄비의 손잡이와 냄비를 만들고 뚜껑을 만들며 뚜껑 손잡이를 만들어 조립해 완성시키던 것을 한 사람은 냄비만 만들고 다른 곳 에서 손잡이를 만들며 또 다른 곳에서 뚜껑을 만들고 다시 뚜껑손잡이를 만 드는 분업을 통해 한곳에서 집중적으로 조립해 빨리 생산하는 방법을 사용 하게 됐습니다. 상인들은 물건에 가격을 늘려 판매해 부를 축적하는 것도 모자라 물건을 구입하기위해 화폐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힘이 있는 사람 에게는 이자를 받지 못하거나 저리이자를 받고 힘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고 리이자를 적용해서 많이 갚을 것을 요구하고 돈을 갚지 못하면 가족까지 빼 앗으며 부를 늘립니다. 노예의 노동력을 영주가 보유한 병사의 무력으로 억압하다 수많은 저항에 부딪쳤던 무리들과 달리 화폐가 권력이 되자 먹을 것과 필요한 물질을 교환 할 수 있는 화폐를 통제무기로 삼아 임금노예들에게 잠자는 시간외에는 쉴 시간도 없이 노동하도록 강제했습니다. 임금노예노동은 어른이나 어린아이를 가리지 않았으며 탄광이나 금광 그 느낌 92

리고 철광과 금속 광을 가리지 않고 곡물을 생산하는 농촌과 가축을 기르는 목축업, 직물을 직조하는 가내수공업과 공장에서 부려먹어 먹을 것과 잠이 부족한 상태로 노동을 하니 노예들의 수명이 짧아져 일찍 죽었다고 합니다. 종교가 다중을 통제하며 통치할 때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는데 요한12세는 10 代 에 교황으로 선출돼 유부녀 침실에서 죽었으며, 교황은 아들과 사냥을 다니는 것을 자랑했고 교황의 사생아 아들이 교회정책을 좌지우지했으며 자 신들의 종교를 믿지 않으면 이단으로 몰아 처단하는 공포정치로 권력을 유 지했습니다.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자유와 평등사상을 종교로 변질시켜 기득권이 된 무리들이 우월성을 과시 하고 위화감을 조성하며 다중을 복종시키기 위해 거대한 성전을 짓고 더 많 은 부를 축적해 권위를 내세우려고 아무리 많은 죄를 지은 사람도 면죄부를 사면 죄를 사함 받는다는 거짓말을 퍼트리며 면죄부를 판매해 부를 축적하 기 시작했습니다. 비양심적이고 악독한 행위로 부를 축적한 무리들에게 면죄부는 신에게 미 리 들어놓는 보험처럼 받아들여져 엄청 많이 팔렸는데 1402년 체코의 종 교개혁가 얀 후스는 교회가 인덜전스(면죄부)를 판매하는 행위는 성경에 근 거한 것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이단으로 몰려 1415년 처형됐다고 합니다. 루터는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 을 통해 독일교회 안에서 개혁 해야 할 폐단 27종류를 열거했는데 이것은 모두 로마 교황청의 수탈과 관 련된 것으로 대표적으로 폐해가 큰 첫 수입세, 팔리움, 보류권, 사라센세 등 각종 공물 제도에 관한 것들이며 조달비, 공석금, 기부금, 십자군자금 등도 비판했습니다. 교황청은 십일조와 헌금을 강요하면서 미켈란젤로에게 엄청나게 큰 시스 티나 성당 천장그림을 그리게 하고 로마 교황청의 베드로 대성전 같은 것을 짓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했는데 이러한 행위는 신이라는 핑 느낌 93

계로 개인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흡입행위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배교, 우상숭배, 살인, 간통 등의 죄를 지으면 성만찬에 참 여할 수 없도록 추방했는데 쫓겨난 신자들이 배교하는 일이 늘어나자 교회 에서는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부과하는 형벌을 받으면 다시 교회로 받 아준다고 하므로 이때부터 고해성사가 실시됐다고 합니다. 중세교회에서는 개인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면 사제가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기도, 금식, 자선, 교회에 대한 기부 등 일정 한 벌을 주는 보속(Satisfacio )을 하도록 하며 개인고해를 받았는데 이후 보속을 덜해주는 대사를 두고 나중에는 돈으로 거래하기도 했습니다. 중세 일부교회는 대사의 효력은 보속의 경감뿐 아니라 모든 죄를 용서받고 심지어 연옥에 있던 영혼도 하늘나라에 간다고 선전했으며 도미니코 수도 회 출신 요한 테첼(Johann Tetzel)이라는 부흥사는 성서를 인용해 대사 를 사면 부모의 영혼도 하늘나라에 간다. 라는 설교로 신자들에게 면죄부 를 사라고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성직자들이 교회에 돈을 기부하면 죄를 사함 받는다는 거짓말을 퍼트리자 온갖 비양심적인 악행으로 재산을 축적한 무리들이 갈취한 재산 중 약간을 희사(적선)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덜고 또 다시 악행을 저지르며 인민들을 갈 취(착취ㆍ수탈)하므로 빈부격차가 극심해져 선량한 대중들은 굶주리고 사회 는 혼란스러워집니다. 1517년 가을 마르틴 루터는 교회를 짓는다는 핑계로 자유와 평등을 주장 했던 모세와 예수의 사상을 부정하고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며 혹독하게 갈취하기 위해 면죄부란 거짓을 파는 행위와 주교와 교황이 금지시키고 있 는 결혼문제 등에 대해 95개 조항으로 반박했습니다. 당시 마인츠에는 1455년 구텐베르크에 의해 발명된 인쇄기가 가동되고 있었기 때문에 루터가 작성한 95개 반박문은 인쇄해 빠르게 배포됐으며 그 내용이 대중들에게 널리 확산되고 알려지자 종교개혁 문제의 논쟁을 불러일 으키면서 마르틴 루터는 순식간에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됩니다. 신부며 신학자인 루터는 1525년 카타리나 폰 보라라는 수녀와 결혼해 6 자녀를 뒀는데 종교를 불신하고 불만을 나타내는 사람이 늘어 종교가 대중 장악력을 잃자 신부가 신으로부터 사명을 받고 살아가는 엄청난 사도인양 포장하기위해 결혼을 금지시키고 성직자라 부르는 것은 비양심적으로 만드 는 위선이라며 비판했습니다. 느낌 94

교황 레오10세가 루터에게 95개 조항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는 교서를 보내 협박하자 루터는 교황의 편지를 공개적으로 불태웠으며 교황이 1521년 루터를 파문하자 루터는 공정한 청문회도 없이 파문됐다고 이의를 제기하므로 로마 황제인 카를 5세가 보름스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 출두하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교황의 편지를 태우면서 예수는 걸어 다녔는데 교황은 가마를 타 고, 예수는 제자의 발을 씻어줬는데 교황은 자신의 발에 입 맞추라 하며, 예 수는 원수를 사랑하라 했는데 교황은 예수의 종들을 이단이라고 화형에 처 했기 때문에 그는 가증스러운 적그리스도며 교황이 나를 이단자라 파문하면 나는 교황을 그리스도의 진리로 파문하리라. 교황은 그리스도의 목자가 아 니라 악마의 사도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1521년 4월 루터가 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까 지 15일에 걸친 대장정의 길을 가는데 종교의 억압과 수탈에 지친 대중들 이 따라다녀 어디를 가나 사람이 넘쳤으며 교회와 제국의 관심이 집중되자 제국의회는 보름스칙령으로 루터의 법익( 法 益 )을 박탈하고 모든 저술의 출판 을 금지한다고 판결했습니다. 교회에서 교황에게 신부라는 직분을 잃고 황제가 법익을 박탈해 죽임을 눈 앞에 둔 위험에 처한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오는 길에 작센의 프리드리 히가 납치를 위장해서 구출하고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옮겨 융커 게오르크라 고 불리는 기사로 신분을 위장해줘 그곳에서 성경번역작업을 했다고 합니 다. 작센 프리드리히는 영주로 왕권에 저항하는 권력을 목적으로 루터를 구출 했는데 루터는 10개월 동안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황제와 교황을 피한 도망 자신분으로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성경(구약)을 독일어로 번역했지만 자신 의 이름을 쓸 수 없어 9월 성경 이라 명명하고 1522년 9월에 출판했다 는 것입니다. 번역한 성경가격은 1권이 가정부 1년 급료에 해당하는 비싼 가격이었음에 도 9월 성경 의 내용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넘쳐 12개월 동안 2쇄 에 걸쳐 6000부가 인쇄됐으며 1534년 무렵 루터는 히브리어 성경을 번 역해 출판하므로 일반인들도 모세와 예수가 주장했던 평등과 자유에 대한사 상을 깨달았다고 봅니다. 루터는 번역방법에 대해 집 안에 있는 어머니와 거리에 있는 아이들 시장 에 있는 보통남자와 이야기해 봐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잘 관찰하고 그들이 말하는 방식과 요구에 맞춰 번역해야 한다. 라고 말하 느낌 95

므로 성경을 원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현실에 맞게 번역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의 수탈 때문에 헐벗고 굶주리는 대중들의 원성이 극에 달해 종교개 혁바람이 불고 있는 와중에 콜럼버스라는 사람이 13세기 이탈리아탐험가 인 마르코 폴로의<동방견문록>을 읽고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1484년부 터 후원자를 찾았으나 아무도 없자 아들 디에고와 함께 포르투갈을 떠났다 고 합니다. 포르투갈과 프랑스 등 여러 나라를 오가며 후원자를 찾다 에스파냐의 이사 벨여왕을 만나 지원을 받고 의사, 목수, 은 세공사, 에스파냐 황실사절, 아 랍어 통역사 등 모두 90명의 인원과 항해를 했는데 1492년10월12일 핀 타호의 선원 로드리고 데 트리아나 가 육지가 보인다. 라고 외치므로 아 메리카대륙에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콜럼버스가 도착한 곳은 신대륙이 아니라 원주민들이 사는 땅이었는데 그 들은 작은 창 말고는 무기도 없고 태도도 호의적이다. 내가 칼을 보여주자 한 남자가 칼날을 잡는 바람에 손을 베였다. 나는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호 감을 갖도록 하고 싶다. 무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개종시키고 싶다. 라고 회 상했을 정도로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칼도 모르고 평화롭게 사는 사람들에게 평등과 자유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 라 창조론과 유일신을 세뇌해 대중을 굴복시켜 통제하며 갈취하는 사상을 전파하려고 39명의 선원에게 통치하라며 남겨두고 에스파냐왕실에는 신대 륙에 향료와 금광이 많다는 거짓 보고를 하고 돌아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 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에 현혹된 에스파냐왕국의 지원을 받아 17척의 선박과 1200여명 의 선원을 모아 두 번째 도착한 아메리카에는 남겨두고 떠났던 39명의 선 원들이 황제인양 군림하며 약탈과 강간을 저지르는 등 악행을 저지르다 원 주민들에게 몰살당한 후라서 콜럼버스는 보복하기 위해 원주민을 학살하고 노예로 팔려고 사냥했습니다. 콜럼버스는 1495년 초 타이노족 5백 명을 4척의 선박에 실어 유럽에 노 예로 팔았으며 이렇게 팔려온 원주민들은 머나먼 바다를 건너 갈 수도 없어 이국에서 엄청난 박해를 받으며 노예생활(킨타쿤테ㆍ만딩고)을 해야 했고 아 메리카에서는 14세 이상의 원주민남자들에게 석 달에 한 번씩 금을 바치라 며 갈취했다는 것입니다. 원주민들이 평화롭게 살던 곳에 이방인들이 들어오면서 유럽 질병인 천연 느낌 96

두와 같은 바이러스가 퍼져 50년 동안 수십만 명에 달하는 원주민들이 사 망했음에도 자신의 야망을 위해 4번째로 페르난도와 이사벨이 지원한 작은 배 4척을 타고 1502년 5월 항해를 갔다 돌아와 1506년 5월 21일 54 세로 숨졌다고 합니다. 교회가 타락해 우상을 섬기고 대중들을 착취해 재물을 모아 부를 축적하 고 흥청거리며 산다고 반발하던 종교개혁가 츠빙글리(Ulrich Zwingli)는 1522년 세 자녀를 둔 과부와 동거생활을 했는데 아내를 가진 10명의 사제 들과 함께 주교에게 성직자의 결혼을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들을 제출했다는 것입니다. 7월에 시 당국이 기획한 토론회에서 67제안( 提 案 )을 발표하고 설득하므로 종교개혁에 호응하도록 했으며 제2회 토론에서는 성화상( 聖 畵 像 )폐지에서 부터 십자가와 제단 그리고 오르간으로 예배하는 것과 성직자의 결혼은 금 지시키는 것은 성경에 어긋나고 오히려 성직자들을 비양심적으로 타락시키 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회가 십자군이라는 용병으로 사람을 학살하는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잘 못된 행위라고 비판했으며 성직자의 결혼금지는 믿음지상주의를 조장하기 위해 인간의 자연적 본능인 성적욕구를 통제하고 의무화하는 것으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자유를 허락한 신의 뜻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끄러운 얘기지만 우리는 불타는 정욕 때문에 그 동안 많은 흉측 한 짓들을 해왔다. 고 실토하며 마음을 상하게 할 정도로 자주 그리고 결 렬하게 타오르는 욕망의 불길만으로도 결혼의 명백하고 충분한 이유가 된 다. 했으며 음탕하고 뻔뻔스런 개 로 여겨지는 자신들이 일반인에게 복 음을 가르치는 모순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 다고 요구했습니다. 카를슈타트는 성직자에게 강요된 독신생활은 은밀한 동거뿐 아니라 간음, 동성연애, 자위행위를 조장해 음란의 나락에 빠뜨리고 억압된 성적욕구는 성직수행을 해친다고 했으며 츠빙글리는 67제안 49에서 교회가 결혼을 금지시키면서 내연의 처를 거느리라고 돈을 지급하는 것은 스캔들이다. 라 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독단적인 횡포로부터 모세와 예수가 살아갔던 사상들로 되돌리기 위해 개혁가들이 활동한 것을 프로테스탄트라고 칭하는 것이며 1525년 취 리히에서 최초로 교회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하는 법이 만들어지자 신성로마 제국과 영국에서도 성직자의 결혼을 법적으로 승인하게 됐습니다. 느낌 97

농민혁명과 수공업 발전 성직자가 혹독하게 수탈하고 착취하는 행위와 황제가 세금을 징수해 부리 는 병사를 동원해 무력으로 억압하며 복종을 강조하는 행위에 짓눌렸던 소 영주 후텐과 지킹겐은 루터가 교황과 황제에게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독립적인 권력을 잡기하기 위해 1522년 제국기사들과 반란을 일으켰다 연 방 군주들에 의해 진압됩니다. 1524년 6월 슈바르츠발트지방 스튈링겐 백작이 농번기에 백작부인이 실 을 감는데 사용할 달팽이껍질을 모아오라고 명령하고 자신의 초야권(노예나 소작농들은 결혼하면 반드시 첫날밤을 신부가 영주와 동침해야 됨)을 반납 하는 대신 현금을 내 놓으라고 요구했으며 농사를 짓는 농기구를 빌려주고 엄청난 사용권을 요구하는 고리대금업 횡포에 반발해 농민들이 저항하기 시 작했습니다. 당시는 많은 자유농민들이 미개간지 공유지 등 공동이용이 가능한 토지 에 양을 길러 양모를 생산했는데 권력의 지원을 받으며 영주와 일부 요먼 (Yeoman)들이 농민들이 농사짓고 양을 기르던 토지를 자신들의 영토라며 울타리를 둘러치고 농민들이 사용할 수 없도록 쫓아냈습니다.((Enclosure Movem ent)엔클로져) 요먼(Yeoman)이란 영국에서 장원제가 해체되면서 지주소작제가 시작되자 농민들은 서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암투가 벌어지면서 분열했는데 40 실링 이상의 자유보유지( 自 由 保 有 地 )를 사면 독립된 자영농민이 될 수 있을 때 토지를 사드려 농민 중 상층부를 이룬 사람들을 칭합니다. 당시는 공업이 발달하던 시기라 도시공장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는데 공장에서 휴식시간도 없이 감시ㆍ통제받으며 노동하는 것보다 농촌에서 농 사를 지으며 자유롭게 사는 것이 낫다며 농민들은 농사짓기를 원했지만 노 동자가 필요한 상공인들과 귀족의 결탁으로 울타리를 장려해 횡포가 극에 달했습니다. 영주들과 요먼들이 농민들 땅에 울타리를 치는 행위로 자신들의 토지를 늘 렸고 자신의 노동으로 먹을 것을 생산하며 자유롭게 살던 농촌에서 생산수 단인 토지를 빼앗겨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된 많은 농민들은 쫓겨나 도시로 나가 노동자가 되거나 예비노동자인 도시영세민으로 전락해 빈곤해집니다. 공장들이 있었지만 토지(자연)로부터 내쫓긴 농민들을 다 고용하지 못했고 생계수단을 상실한 자유농민들은 먹고 살길이 없으므로 도시를 떠돌며 거지 느낌 98

가 되거나 도적떼, 혹은 화전민, 부랑자들이 되어 떠돌았습니다. 그러자 농민들을 말잘 듣는 생산노동자로 길들이기 위해 1530년 경 부 랑아 처벌법 이라는 법률을 만들어 나이가 많아 노동을 할 수 없는 거지는 거지면허증을 발급해주고 건강한 자가 노동을 하지 않으면 결박(구속)하고 피가 나도록 때리며 두 번째 걸리면 한쪽 귀를 자르고 세 번째 걸리면 사형 했습니다. 상공인의 명령과 감독ㆍ지휘를 받는 노동을 거부한다고 고발하면 고발자의 노예가 되게 했고 이 노예가 달아났다 잡히면 이마와 등에 S 자 불도장을 찍고, 다시 달아나면 사형하므로(1547년 경, 에드워드 6세 치하) 생산수단 을 빼앗기고 어쩔 수 없이 도적이 됐다 유랑죄 로 처형당한 사람이 무려 7만 2천여 명이나 됐습니다. 농사를 지을 때는 남자는 논에서 여자는 밭에서 일하면 먹고 살 수 있어 여자가 남자를 크게 단속하지 않았지만 도시에서 월급 받는 노동자가 되자 남자가 버는 수입을 노리는 부류(집장촌, 술집 등)가 생기고 남자의 수입으 로 여자와 가족들의 생계를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남자를 단속하고 묶 어두는 일부일처제가 강화됩니다. 여성들 스스로가 먹고 살길이 없어 선택한 일부일처제 강화는 여성들이 육 아와 가사노동에 속박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먹을 것을 벌어온다는 이유만으 로 가정에서 폭력행위도 참아야 하고 한 사람과 한번 결혼이라는 굴레를 쓰 면서 성생활이 만족하지 못해도 참고 살면서 인간본능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남성의 지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남성우월주의나 칠거지악 또는 모성본능이라는 거짓에 세뇌돼 한번 성관계를 가지면 평생 그 남성만 기다 리며 살아야 하고 남성이 사회적 능력이 부족하거나 노동을 회피하면 여성 이 자기 몸을 희생해서라도 그 남성의 씨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강제착취를 낳았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존재가치는 부정되고 며느리 또 는 누구 엄마로 칭하게 됐으며 같은 여성이 시어머니라는 명분으로 며느리 인 같은 여성을 억압하며 탄압하고 자신이 낳았지만 자신의 성씨와는 무관 한 결혼한 남편집안 성씨를 따르는 종족을 유지하고 번창시키기 위해 억압 당하게 된 것입니다. 남성노동자에게는 가족을 먹여 살리고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의무가 느낌 99

주어져 노동현장에서 인간이하의 비인간적인 욕설과 기계취급을 받아도 저 항하지 못하고 참아야 하는 족쇄가 됐으며 자녀에게 들어가는 학비와 양육 비용을 벌기 위해 평생을 감시와 통제 속에 생산하는 노예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게 됐습니다. 산업의 발달은 계층 간 삶의 질도 변화시키는데 농사를 짓고 살 때는 누구 나 논밭에 나가 자신이 노동한 만큼 농작물을 수확해서 큰 차이가 없었으나 도시로 쫓겨나 공장노동을 하면서 모두에게 균등하게 노동할 기회가 주어지 는 것이 아니라 상공인들에 의해 노동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수입이 없 어 더 빈곤해 집니다.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해 물질을 생산하며 이윤을 남기는 상공인들은 모 든 사람의 일자리를 보장할 수 없으니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채 용하지 않고 자신의 권리와 노동력만큼의 임금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해고하 며 절대복종을 강요해 저임금으로 채용하기 위해 예비노동자인 실업자를 양 산합니다. 물질문명의 발달은 생산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숙련공과 비숙련공, 제조업 과 비제조업 철강업과 화학업종, 관리직과 비 관리직, 사무직과 생산직 등등 으로 나뉘어 계층 간에 반목대립하게 하므로 단결할 수 없도록 분열을 조장 하고 착취계층인 상공인들의 이윤을 위해 헌신하도록 강요하는 것입니다. 대 농장제인 장원제도가 무너졌음에도 영주계급이 부역을 요구하며 농민의 생산을 제한하고 착취하자 통제ㆍ억압당하던 농민들이 봉기하게 됐으며 당 시에 농민 단에는 용병출신 한스뮬러가 있었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병사들 은 이탈리아를 침공 중이었기 때문에 영주를 지원해 주지 못하자 굴복했습 니다. 농민 단들은 부근 소도시에서 종교적 압박을 받던 시민들과 손잡고 신앙의 자유와 봉건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며 저항했고 영주는 황제병사들의 지원을 받지 못하니 농민들을 진압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교섭 에 응하자 농민들은 승리했다며 10월에 자진해산합니다. 자신들이 땀 흘려 노동해도 항상 굶주리며 사는데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정치 관료들은 노동한번 하지 않고도 자신들보다 호화롭게 살아가는 불평등 한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판단한 농민들은 한스뮬러와 함께 겨울 동안 조직을 더 강화했고 1525년 봄에는 남독일 전역에 독자적인 농민 단을 결 성했습니다. 농민 단은 주교와 교황이 마음대로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을 금지하고 지역 느낌 100

주민들이 성직자를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요구했으며 농노제와 세금 을 폐지할 것, 그리고 부역지대조세를 경감하고 공유지를 해방시키라고 요 구하며 생산노동 없이 농민을 억압해서 착취와 갈취로 누리고 사는 수도원 과 성채를 불태웠습니다. 농민들이 갈취와 착취를 금지하라는 저항이 벌어지자 마르틴루터는 영주와 황제를 찾아가 하느님의 종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고 주장하며 권력에 저항하는 농민들은 미친개를 때려잡듯이 누구 든 할 수 있는 사람은 찌르고, 치고, 죽이게 하라 라고 아첨해 법익을 회복 합니다. 루터는 평등사상을 외면하고 성직자들이 대중을 통제하고 다스리며 기득 권으로 누리기 위해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은 성전 안에서만 있는 것 이지 성전을 벗어난 사회생활에서는 평등하지 않다. 고 강변하면서 억압과 착취에 견디지 못해 폭발한 농민들의 분노를 무력으로 억압할 것을 요구했 습니다.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권력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권 한 이라는 수장령(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면서 평등을 부정했고 양민을 학살 하며 억압으로 권력을 누리는 무리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므로 종교를 권력에 종속시키고 모든 사람들이 권력의 억압을 자연스럽게 받아드리도록 강요한 것입니다. 루터의 선동으로 학살당하던 농민들이 성직자를 불신할 때 종교개혁가 이 자 신부인 토마스 뮌처는 루터가 농부와 수공업자의 현실을 배반하고 있다 면서 거짓말 박사 혹은 비텐베르크의 정신 나간 나약한 인물 이라 고 비하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곤궁에서 구제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 이야말로 이 땅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일이다. 라면서 통제당하며 굶주리는 모든 사람들은 저항하라고 외칩니다. 뮌처는 모든 고리대금업자, 도둑, 강도 중 국왕과 지배자들은 최악이다. 그들은 가난한 농부들과 수공업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해 누리고 산다. 가난 한 사람들은 사소한 법률을 하나만 어겨도 그 대가를 치르지만 영주나 성직 자들은 법을 어겨도 처벌받지 않는다. 면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자유롭 게 살 권리가 있으므로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뮌처는 빈부격차 없는 사회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 라며 사람들을 설득하자 1524년 만스펠트와 그 근처 광부ㆍ농민이 저항을 시작해 튀링겐 과 하르쯔를 지나 14일 만에 40여 개의 수도원과 수녀원을 점령하고 파괴 느낌 101

하면서 점점 들불처럼 빠르게 번지기 시작해 1525년 초봄에는 남쪽 바이 에른과 중부독일의 헤센지방을 뺀 신성로마제국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났 다고 합니다. 루터는 농민혁명의 책임이 통치권을 행사하는 제후에게 있다며 혁명적 개 혁자 등장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면서도 독일의 제후들에겐 옛 자치단체 규범 과 관습으로 돌아가라 하고 저항하는 농민들을 병사의 무력으로 때려잡으라 고 선동하면서 농민들의 무장봉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며 저항을 폄하 하고 굶주림으로 생기는 혼란은 기독교인이 고난 받는 것이라며 교인들의 합류를 막았습니다. 농민과 광부 그리고 도시민들은 1성직자를 교구민이 뽑을 권리 2성직자 가 누리고 살기위해 십일조와 헌금을 강요하는 행위금지 3농노제의 폐지 4사냥과 고기잡이는 필요한 사람이 자유롭게 하도록 보장 5연료와 목재로 사용하는 벌목의 자유보장 6가혹하게 세금을 늘리는 증세금지 7부역증대 거부 8농사도 짓지 않는 자들이 징수하는 토지세반대 9영주가 농민이나 서민을 처벌하는 행위금지 10목초지를 영주가 통제하는 행위를 금하고 공동 으로 사용 11사람이 죽으면 돈을 받는 사망세폐지 12위 조항에 대해 자유롭 게 토론할 수 있도록 보장 하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뮌처는 그리스도께서 말하길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그대들 은 이 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거스르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해야 한다. 모세의 다섯 번째 경전 7장에 말하길 너희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동정치 말고 그들의 제단을 부수고 그들의 우상을 파 괴하고 불 질러 나의 분노가 너희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다. 라면 서 무장저항은 주장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농민군은 5월 2일 쉬톨베르크로 진격해 공작 보도 3세에게 농민군의 요구에 따르겠다는 서명을 받아냈으나 5월 14일 프랑켄하우젠에 서 화승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에 의해 학살당하며 패배하자 보도 3세는 농민 군을 무자비하게 도륙했으며 뮐하우젠에서 사로잡힌 뮌처는 온갖 고문을 당 하다 5월 27일 36살의 나이로 법이라는 명분으로 살해당했습니다. 뮌처가 구상한 천년왕국은 고문당하며 진술한 기록밖에 없는데 농민군에 함께한 목표는 모든 기독교인을 평등하게 하는 것과 복음을 거부하는 군주 및 지주들을 죽여 없애는 것이며 모든 물질은 공유하고 쓸 일이 생긴 사람 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며(분배) 이를 거부하는 군주, 공작, 지주들은 처음에 는 경고를 받고 그 다음에는 참수한다. 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농민전쟁으로 절대적 권한으로 대중을 지배했던 교황청과 주교들이 억압 느낌 102

하고 착취하던 통치행위가 막을 내렸으며 노동을 하지 않고 창조론이라는 거 짓과 유일신이라는 허위를 팔아 편하게 먹고 살려는 자들이 교황청의 지배를 받지 않는 교회를 만들어 내므로 그리스도교는 개신교와 가톨릭으로 나눠진 것입니다. 힘들게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 헌금과 십일조만 걷어도 평생 편안하게 먹고 살 수 있다고 판단한 신학대학 졸업생들이 교회를 짓고 목회자라면서 우후 죽순처럼 여기저기서 준동하고 하느님의 말씀이라며 자유를 설파하자 설교 내용을 통일하고 통제하기 위해 장로회와 영국국교회(성공회), 예수회 등 교 회중앙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종교가 신교와 구교로 나눠지자 서로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끝없이 전쟁 이 벌어졌는데 신교는 사람에겐 자유가 있기 때문에 성경을 쫓아 올바로 해 석하고 따른다며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요구했고 구교는 지금까지 이어 왔던 구 지배질서를 유지하면서 교황을 섬기는 것이 성경에 충실한 것이라 며 신교를 배척했습니다. 로마가톨릭 성직자들의 착취와 갈취를 부정하고 새로운 신교를 만든 목회 자들로 구성된 신교에 로마가톨릭구교의 강제헌금과 수탈을 거부하는 자유 직업인인 의사, 상공인 그리고 몰락한 귀족들이 모이므로 많은 신자를 확보 하며 빠르게 성장해 종교적 영역을 넘어 정치권력까지 행사할 수 있게 되니 기득권이 됩니다. 구교를 고수하고 있는 성직자들 중 일부는 영주라는 칭호를 받고 봉토를 받아 노동자와 노예노동을 착취하며 누리고 살지만 교회만 가지고 십일조와 헌금만으로 생활하던 성직자들은 신자 수가 줄어들수록 정치적 권한도 약화 됐을 뿐 아니라 수입이 줄어 생활이 어려워졌습니다. 성직자들이 누리고 살기 위해 수효가 줄어든 신자들에게 더 많은 헌금과 수입보다 넘치는 십일조를 징수하므로 신자들이 빈곤해지자 그 모든 어려움 이 성직자가 누리고 살기위한 수탈로 빈곤해진 것이 아니라 이단이고 악마 교인 신교에 있다고 설교하며 세뇌시켜 적대감을 품고 신교를 억압하며 탄 압한 것입니다. 종교가 갈라져 싸움을 벌이자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불구가 됐으며 권력을 행사하던 귀족들은 종교가 내란에 휩싸여 통치 질서를 유지할 수 없 자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종교의 자유를 평민이 아닌 영주들에게 맡 긴다며 화의를 종용하므로 일단락 됐습니다.(아우구스부르크의 화의) 농민들의 저항이 병사들의 무력으로 진압 당하자 농민군이 준동하지 않았 느낌 103

던 남쪽 바이에른과 중부독일의 헤센 지역 영주들은 현재의 회사사장들이 마음대로 사규( 社 規 )를 만들듯 자기 영토 안에서 자신이 멋대로 법을 만들어 농민을 억압하는 규칙을 정하고 과중한 벌금을 징수하며 착취한 행위를 재 판농노제라 합니다. 법이란 모든 사람이 공정하게 지키기 위해 존재하거나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 있는 자(선출직 국회의원도 당선되면 귀 족이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법을 만들지 일반국민이 법을 만들지 못함)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해관계 있는 대중들을 굴복시키고 착취와 통제를 합 리화하기위해 만듭니다. 도로교통법 같은 것도 모두가 지켜야 할 질서규범 같지만 국민의 혈세로 먹고 살며 법을 집행할 권한 있는 무리들은 법을 지키지 않을 뿐 아니라 법 이라는 핑계로 대중들의 자유를 부정하고 통제하면서 자연스럽게 억압에 순 종하도록 길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고 범칙금이라며 수탈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성경을 번역하므로 평등사상을 깨우친 사람들이 모든 사람 은 평등하며 누구나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고 외치다 토마스 뮌처까지 처 형당하고 장 칼뱅이 루터와 츠빙글리의 사상을 요약했다며 그리스도교 강 요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라는 책을 발행하고 두각 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칼뱅이 예정설과 근면ㆍ금욕 그리고 자기직업에 대한 충실을 강조하며 모 든 사람들이 소유한 사유재산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몰락하던 봉건귀 족과 노동착취와 양민갈취로 부를 축적한 상공인들은 세금으로부터의 해방 과 자유매매와 이자획득의 자유라며 지지하므로 이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출 발했습니다. 칼뱅이 구교로부터 상공인 신도를 빼앗고 귀족들로부터 억압받는 상공인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소유한 재산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임 금지급이란 명분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시장자유가 인정되면서 착취와 갈 취가 합법화됩니다. 칼뱅은 국교회에서 행하는 로마가톨릭의 제도 의식( 儀 式 )을 배척하면서도 도덕과 주일( 主 日 :일요일)의 신성화 그리고 향락제한을 주창하므로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고 철저하게 종교를 앞세워 교회가 공중도덕과 위생 및 화재 예방 같은 모든 문제에 관해 통제하도록 종교법을 강화하고 신권통치를 주 장한 것입니다. 느낌 104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학살하고 억압하며 대중들이 종교를 믿도록 강 요하므로 자연스럽게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고 억압해도 순종하도록 길들이 는 제도를 만들고 개인의 재산을 인정하므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동 자를 착취하고 양민들을 갈취하는 행위, 고리대금을 합리화해 빈부격차를 당연시 하도록 했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든 규칙과 규정을 인정하는 계층 에게는 착취를 보장하고 범죄를 비호하며 존중했지만 반공법(국가보안법)처 럼 억압과 착취를 거부하고 양심을 쫓는 사람들은 고문하고 학살하므로 진 실을 은폐하는 기구로 종교를 사용한 것입니다. 종교가 말하듯 기도로 모든 것이 이뤄지고 성직이 신의 종이라면 성직자는 농민이나 어민들이 재배ㆍ수확하거나 채취 또는 포획한 음식을 먹지 말고 살아야 하며 노동자들이 감시와 통제 속에 시간 맞춰 출ㆍ퇴근하며 새벽잠 밤잠못자고 지옥 같은 노동으로 생산한 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존재해야 합 니다. 성직자들이 평등을 주장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물질을 생산하는 노동은 하 지 않고 권위를 내세우며 자녀들을 해외여행을 보내 호화롭게 살도록 보장 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신자들은 결속해야한다며 신자들끼리 상인들의 물건도 사고팔도록 하고 조직을 폐쇄적으로 통제ㆍ관리하면서 누 리고 사는 것입니다. 신을 팔아 누리는 무리들은 신자들이 과학이 부족해 착취당한다는 사실을 판단할 수 없도록 하느님은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양심 에 어긋난 범죄를 저질러도 용서를 구하고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용서받는다. 고 거짓말하는 것이며 신자들은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양심에 위안이 돼 종교에 의지합니다. 칼뱅이 제네바에 도입한 교회법으로 4년도 안돼서 58명이 처형되고 76 명이 추방됐으며 16세기말까지 대략 150명이 화형 당했는데 춤추는 것이 나 카드놀이도 집정관에 의해 처벌 하므로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거 나 또는 신학적으로 칼뱅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가혹하게 억압했습니 다. 기록에는 예를 들어 한 미용사가 신부의 머리를 단정치 못한 모양으로 만 들었다는 이유로 이틀간의 구류 처분을 받았고 머리를 만지는데 함께 한 그 어머니는 여자 친구 두 명과 함께 그 일을 도왔다는 이유로 같은 벌을 받았 다 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을 통제하며 복종시키려고 어떻게 억 느낌 105

압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농민들이 저항할 때 상공인들이 물질을 판매할 권한의 자유(갈취의 자유)를 요구하고 칼뱅이 주장한 재산소유(생산수단(착취도구)의 개인소유)의 권리를 위해 또 자신들이 몰락한 귀족(침략학살자의 후손들)보다 재물이 풍요로움에 도 사회적 지휘와 권한이 낮은 것에 반발하니 사회가 혼란스러워집니다. 네덜란드는 중세 이후 모직물공업이 발달해 중계무역을 하고 광범한 자치 권을 행사하며 한창 번창했는데 종교개혁 이후 북부 여러 주에 칼뱅파( 派 ) 의 신교도가 급증하며 착취와 갈취의 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1556년에 에스파냐 왕이 된 펠리페2세는 가톨릭교회 수호자라 칭하며 신 교도들을 탄압했습니다. 도시에 대해 중세( 重 稅 )를 부과하고 상업을 제한했으며 자치권을 박탈하고 본국으로 보내는 공물을 늘려 자신의 입지를 굳히면서 재산을 늘리기 위해 수탈하자 1566년부터 북부는 물론 남부 여러 주에서 가톨릭교를 믿는 시 민까지 봉건 귀족이었던 에그몬트백작과 호른백작의 지도 아래 저항하기 시 작합니다. 1567년 네덜란드총독으로 부임한 알바공은 정예병 1만 명을 동원해 일명 혈( 血 )의 평의회( 評 議 會 ) 라는 심문소( 審 問 所 )를 개설하고 지도자인 에그 몬트와 호른 등을 비롯한 8,000명 이상을 종교재판( 宗 敎 裁 判 )으로 처단하 면서 독재공포정치로 저항하는 프로테스탄트(신교도)들을 잔악하게 학살했 습니다. 학살에 그친 것이 아니라 알바공은 상류귀족과 부유한 시민계급의 재산을 몰수하고 무역에 중세를 부과함으로 상업 활동이 마비되고 매뉴팩처 기능이 정지되므로 실업자가 증가하자 먹고 살기 위한 일자리와 갈취의 자유를 찾 아 시민들은 영국, 독일 등으로 10만 명 이상이 망명하게 됩니다. 공포정치로 통제가 극심할 때 1572년부터 에스파냐의 지배층에게 고이 젠(거지들)이라 불린 신교도(칼뱅파)를 중심으로 해상에서 에스파냐 은선단 ( 銀 船 團 )을 습격했으며 오라내공 빌렘을 지도자로 선출하고 다수의 귀족과 상ㆍ공업자 그리고 농민들이 합세해 독립전쟁으로 발전했습니다. 1576년에는 남북 여러 주가 브뤼셀에 모여 동맹을 맺음으로 독립전쟁이 본격화되지만 종교적으로 분열되고 경제적으로도 이해관계가 다른 남ㆍ북의 불일치( 不 一 致 )가 해소되지 않아 대립할 때 새로 부임해 온 총독 파르마공 ( 公 )의 종교 이간책에 넘어가 1578년 남부는 에스파냐에 굴복하게 됩니다. 느낌 106

홀란드 등 북부 7주는 1579년 위트레흐트동맹을 결성하고 항전하면서 1581년 7월 독립을 선언했으며 윌리엄을 초대총독으로 네덜란드 연방공화 국임을 선포하고 자체적으로 제도와 체제를 만들어 공물의 상납을 거부하며 스스로 자치국 권한을 행사하던 중 1584년 윌리엄이 로마가톨릭교도에게 암살당합니다. 1588년 에스파냐 무적함대가 격파되고 오랜 전쟁과 내전으로 재정적으로 궁핍했는데 펠리페2세가 사망하자(1598) 펠리페 3세가 즉위하면서 1609 년에 에스파냐와 12년간의 휴전조약( 休 戰 條 約 )을 체결했는데 휴전이 만료되 자 계속 전쟁을 벌이다가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에스파냐속령( 屬 領 ) 이던 네덜란드는 독립국이 됐습니다. 종교전쟁과 청교도 혁명 종교가 기득권이 되기 위해 분열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땀을 착취하거나 양 민갈취가 합법화되면서 부를 축적한 상공인들은 늘어났지만 귀족들의 권위 는 무너져 재물을 늘릴 수 없으니 구교와 신교 간에 3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전쟁[ 三 十 年 戰 爭, Thirty Years War]을 일으킵니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구교(로마가톨릭)를 믿었으며 30년 전쟁의 발단은 남부를 중심으로 구교를 부정하며 루터와 칼뱅의 사상을 받아들여 개신교를 만들고 노동자와 양민을 갈취해서 부를 축적하며 누리고 사는 사람들을 위 그노(Huguenot)라 불렀는데 이들을 구교가 학살해 벌어진 것이 위그노전 쟁입니다. 1562년 구교를 믿는 기즈 공작이 예배 올리던 신교도들을 기습 공격해 시작된 전쟁은 3차전 후 합의를 이뤘지만 귀족들과 구교는 신교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1572년 8월 24일 성바르톨로메오(St. Bar tholomew)의 축 제일(카트린의 딸과 나바르 왕의 결혼식)에 참석한 신교신자들을 기즈 공작 이 대량학살(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하자 격분한 신교도들이 전국에 서 일어났습니다. 느낌 107

신교도들을 학살해서 벌어진 위그노 전쟁은 36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종교 간 기득권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고 내전으로 번져 통치 가 불가능 해지자 국왕으로 등극한 앙리4세가 화해시키기 위해 1592년 가 톨릭으로 개종하고 1598년 낭트칙령(The Edict of Nantes)을 발표함 으로 일단락됐습니다. 낭트칙령의 주된 내용은 1.로마가톨릭 이외의 믿음을 탄압한다는 조항 삭 제, 2.개신교의 예배는 기정사실로 인정된 지역에서 허용하고 파리시에서는 금한다. 3.개신교신자의 재산상속, 대학교입학, 관리취임을 허용, 4.개신교 신자가 장악한 요새를 종교의 자유를 위한 안전지대로 인정. 5.파리 고등법 원 내에 개신교와 로마가톨릭간의 분쟁기구 설치(개신교 6명, 로마 가톨릭 10명) 지방고등법원에서의 분쟁기구는 개신교와 로마가톨릭의 수를 같게 함. 등으로 구교에 유리한 내용입니다. 성직자들의 기득권과 신자간의 이권 때문에 발생한 종교분쟁은 화의나 칙 령을 발표한다고 근본적인 원인인 구교 성직자들과 신도들의 생활이 나아지 지 않으므로 항상 불씨를 안고 있었고 권력을 차지한 왕들이 신교를 믿느냐 구교를 믿느냐에 따라 또한 재물을 축적할 욕망에 따라 재현될 수밖에 없었 습니다. 1617년 가톨릭교도인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왕위에 올라 구교의 절대 신 앙을 강요하자 1618~1620년 독일의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 제후( 諸 侯 )들이 각기 신교연합과 로마가톨릭교연맹을 결성해 대립할 때 보헤 미아와 오스트리아 개신교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또다시 30년 종교전쟁 이 시작됩니다. 1619년 페르디난트2세가 황제가 되자 보헤미아 인들은 팔츠선제후( 選 帝 侯 ) 프리드리히5세를 국왕으로 추대하고 대항하므로 전쟁이 발생했는데 1620년 바이서 베르크 싸움에서 패배한 프리드리히5세가 네덜란드로 망명 하자 보헤미아 인들로 구성된 신교도들을 극심하게 탄압했습니다. 권력과 구교들의 탄압에 견디지 못한 청교도들은 아메리카 버지니아( 처 녀 라는 뜻) 에 가면 농토가 풍부하고 자신이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표 시한 만큼 엄청나게 넓은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꼬드기는 말에 1620년 102명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도착하면서 미국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 땅은 버지니아도 아니고 엘리자베스1세 때 영국이 식민지로 삼아 1585년에 남자 89명과 여자 17명을 버지니아지방에 데려가 살게 하면서 점령했던 것인데 1589년에 영국배가 다시 찾아가니 왕실에서 보냈던 사람 느낌 108

들은 무슨 영문인지 단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원주민만 있었습니다. 영국왕실로는 엄청나게 넓은 영지가 있음에도 아무도 머나먼 땅에는 가려 하지 않아 공물을 받지 못했는데 구교가 신교를 억압하고 왕실도 구교방식 으로 통치하며 대중들을 억압해야 쉽게 수탈하고 부를 축적할 수 있으므로 신교도들을 추방도 하며 식민지로 삼을 욕심에 퍼트린 말에 신교도들이 현 혹된 것입니다. 처음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 도착했을 때는 엄청나게 넓은 대지에 원주민들 은 사냥과 유랑생활을 하며 평화롭게 살았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곳 인줄 알고 자신이 경작하지 못할 정도로 넓은 땅들을 차지했지만 돌아온 원주민 들은 자신의 영토에 이방인들이 침입한 것을 보고 쫓아내려 했습니다. 자기영토라지만 나무창과 나무활로 무장한 원주민부족이 언어도 통하지 않 고 화력(총)으로 무장한 이주민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부족이 멸종하게 되면 서 초기 청교도들이 정착하자 이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농사지을 농장과 목장을 만들기 위해 많은 땅을 차지하며 원주민 여러 부족과 전쟁을 벌입니 다. 자신이나 가족의 힘으로 경작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땅을 차지한 청교도 들은 원주민을 사냥해 노예로 삼기 시작했으며 자유롭게 살다 붙잡혀온 원 주민들이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다 도망가자 이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발목과 목에 쇠사슬을 묶어 목화밭과 옥수수 또는 밀밭에서 강제노동을 시키며 부 를 축적했습니다. 당시는 직물산업이 발달하던 시기라 많은 사람들이 옷감을 만들 수 있는 목화를 재배했으며 다른 농사도 마찬가지지만 기계가 발달되지 못했던 시절 엔 목화와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것은 사람의 손이 절대적으로 많이 필요한 작업이고 식물의 표면이 거칠어 잘못 스치기만 해도 상처가 생기는 매우 험 한 작업입니다.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4세는 독일영토를 노리다 신교와 구교간의 전쟁을 빌미로 영국과 네덜란드로부터 군자금을 얻어 1625년 독일을 침공했다 황 제 군에게 패배하고 1629년 뤼베크조약으로 화해했으며 황제가 배상령( 賠 償 令 )으로 종교제후( 宗 敎 諸 侯 )의 영지( 領 地 )를 회복시키자 신교를 인정한다 고 선포하게 됩니다. 구교를 옹호한다는 명분으로 스웨덴 왕 구스타브2세가 프랑스의 후원으로 독일을 침공해 라이프치히전투에서 황제 군을 격파했으나 1632년 뤼첸전 느낌 109

투에서 패배했으며 계속 패배를 거듭하던 스웨덴군은 1634년 황제군 사령 관 발렌슈타인이 암살된 것을 기회로 1635년 황제에게 화의를 제안하므로 그리스도교군의 작센선제후는 프라하에서 화의를 맺습니다. 독일영토를 탐낸 프랑스가 1635년 스웨덴과 연합하고 독일과 에스파냐에 선전포고하며 전쟁에 참여하자 황제 페르디난트3세는 제후들과의 오랜 내 전으로 전세가 불리해 1641년 종전을 제의했고 1644년부터 시작된 강화 회의는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이 성립되면서 독일인구 1/3을 죽음으로 몰고 간 30년간의 종교전쟁이 끝납니다.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스위스와 네덜란드는 독립국이 됐으며 프랑스는 알자 스-로렌을 차지했고 확장된 영토를 배경으로 제후국이 된 프로이센은 18세 기 초에 왕국이 됐으며 브레멘과 베르뎅은 스웨덴이 점령했고 프랑스와 스웨 덴은 독일제국의회에 선거권을 가지므로 독일의 내정을 간섭할 수 있는 권한 을 가집니다. 연방군주와 성직자들이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해 3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 을 학살한 종교전쟁이 막을 내리므로 독일 제후국 내의 루터파와 칼뱅파는 구교와 같은 동등한 지위를 획득했지만 전비를 부담하느라 농민들과 노동자 들의 삶은 비참했으며 특히 노동자들의 노동착취는 극에 달했습니다. 임금을 지급한다지만 전시라는 핑계로 상공인들은 노동현장에 명령체계를 갖추고 식사 값도 되지 않는 저임금을 지불하면서 강압적으로 하루 종일 생 산노동을 강요했으며 노동자들은 힘든 노동을 하면서 휴식과 수면도 취할 수 없는 환경에서 생산하다 죽어갔습니다. 반항할 힘과 판단력이 없다는 이유로 어린아이들을 노동현장에 선호했는데 넓은 굴을 팔 수 없는 광산에선 체구가 작은 어린아이들을 광부로 채용해 혹독하고 위험한 생산을 강요했으며 여성들의 세심한 노동을 요구하는 방직 공장은 어린소녀들을 고용해 하루 15시간 이상씩 노동시킨 것입니다. 러시아에서는 1662년 억압과 착취를 거부하고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며 모스크바 민중반란이 발생했다 진압됐으며 1770년대의 스텐카 라진 대반 란을 일으키며 절대왕정 폐지를 주장하다 실패하므로 차리즘(Tsarism)이 강화되고 전국회의( 全 國 會 議, Zemc kii Sobor, 젬스키 소보르)가 소멸하 면서 중앙 행정기구가 재편성됩니다. 독일과 유럽이 종교전쟁으로 분열될 때 영국에서도 신구교간의 분쟁이 일 어났는데 찰스1세가 왕권을 강화하기위해 의회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세금을 느낌 110

징수하면서 폭정을 정당화하고 반발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구교로 복귀하며 신교도인 청교도들을 탄압하자 결국 청교도혁명(1642년-1653년)이 일어 났습니다. 찰스1세는 황태자시절에 에스파냐공주에게 청혼했다 퇴자를 맞자 앙심을 품고 에스파냐를 정복하려 했으며 전쟁을 벌이기 위한 군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걷으려고 의회를 소집했지만 의회가 찰스1세의 제의를 거부하 자 의회를 해산했다 1628년에 3차로 회의를 소집합니다. 3차로 의회가 열리자 하원의원 에드워드코크는 권리청원(의회 동의 없이는 세금을 걷지 못하며, 법에 의하지 않고는 누구도 구속할 수 없다. 는 것으로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내용)을 제출했고 돈이 급했던 찰스1세는 권리청원에 서명을 하고 돈만 챙긴 다음 의회를 또 해산 시켜버리는 폭정을 저질러 왕 당파와 의회파가 대립했는데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가 승리하게 됩니다. 왕당파들은 왕권을 강화하고 왕이 절대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케임 브리지를 중심으로 하는 국왕파고 의회 파는 런던과 옥스퍼드를 중심으로 권력은 선출자의 뜻에 따라 의회를 중심으로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의회파가 권리청원을 제출하자 찰스1세는 병사들의 무력으로 의회 파를 없 애려고 군대를 모았습니다. 의회 파는 5만 명에 달하는 철기 군을 조직하고 대항하므로 왕당파가 패했 으며 승리한 의회파가 찰스1세를 처형하고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려고 했지만 젠트리 출신 신교도 크롬웰은 스스로 호국경이라고 칭하고 종교적으로 국민 을 통제하기위해 풍기단속법을 만들어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고 도박을 금 했습니다. 또한 일요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며 극장을 없애버리는 등 금욕적으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독재정치를 실시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다가 죽자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시민들이 그의 목을 치고 1688년 다시 권리장전(인 권선언)을 제출해 의회가 승인하고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니 이를 명예혁명이 라 합니다. 1689년에 의회를 통과한 인권선언의 내용은 [1.의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법률의 적용, 면제, 집행, 정지를 금지한다. 2.의회의 동의 없는 과세, 평시 의 상비군을 금지한다. 3.선거의 자유, 의회 발언의 자유, 국민청원권을 보장 한다. 4.의회를 소집한다. 5.국민의 청원권, 의회의원의 면책특권, 신체의 자 유에 관한 제반규정, 6.왕위계승자에 로마가톨릭 교도를 배제한다.] 라고 명 시됐습니다. 느낌 111

크롬웰이 죽고 찰스2세가 즉위하자 영국국민들은 입헌군주제의 실현을 갈 망했으나 왕당파가 다시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하고 새로운 선거에서 당선된 의원들은 거의 왕당파가 독차지하므로 기사당의회가 됐고 찰스2세는 이를 배경으로 철저한 전제 정치를 펼쳐 구교와 절대군주제에 위협이 되는 청교 도들을 억압합니다. 1670년 프랑스의 루이14세에게서 20만 파운드의 연금을 받고 반란이 일어나면 영국과 군사적으로 원조한다는 밀약을 맺으며 가톨릭으로 개종했 고 에스파냐 및 네덜란드에 대한 전쟁에 협력할 것을 약속하며 로마가톨릭 세력을 복귀시키자 신흥지주들의 힘이 약화됐고 기사당의회도 불안해하며 반발세력이 생깁니다. 젠트리(Gentry)는 영국에서 귀족의 지위는 없으나 가문의 휘장을 사용할 수 있고 요먼 이상 귀족이하의 토지소유자를 뜻하는 말로 부유한 지주와 법 률가 성직자 등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 및 부유한 상인 등을 핵심으로 이루었던 계급으로 후일 신사를 뜻하는 영단어인 젠틀맨(Gentleman)은 여기서 유래됩니다. 식량생산의 대량화 청교도들이 바다를 건너가 원주민들을 붙잡아 노예로 부리며 부를 축적할 때 영국에서는 런던 대흑사병(1665년~1666년)이 발생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으며 흑사병으로 농노와 노동자들이 죽어 생산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없자 노동자와 농민들의 지위가 상승하게 됩니다. 성직자와 상인 그리고 귀족과 예술인들은 생산노동은 감시와 통제ㆍ지시를 받는 노예들이나 하는 비천한 행위라고 거부해서 흑사병으로 많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사망하니 먹을 것과 사용할 수 있는 물질이 부족해 농민과 노동자 들에게 가하던 혹독한 억압과 차별을 금지하고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켜야 했습니다. 흑사병의 원인균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는 토양 속에 서식하며 간혹 설치 류와 인간의 체내에 들어와 병을 일으키는데 미셀 드란코르가 정립한 바에 의하면 야생화 된 개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개들은 벼룩에 의해 감염되거 느낌 112

나 썩은 시체를 먹은 개의 피를 벼룩이 빨고 설치류나 인간에게 전파하면 흑사병이 발병된다고 합니다. 농민의 감소는 농사방법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오는데 지력( 地 力 )의 쇠퇴 와 토지노화를 방지한다며 권력이 경지이용을 제약해 생산성은 낮추고 농업 발전을 방해하면서 강제로 시행하던 휴한제( 休 閑 制 )를 폐지해서 경작면적이 늘어났고 순무와 클로버 같은 사료작물을 윤작하므로 가축들의 겨울사료가 확보됩니다. 목초를 재배하며 가축사료가 늘어나 가축의 증대를 가져왔고 토양의 지력 을 위해 비료가 사용되면서 곡물생산이 늘어났으며 곡물생산을 늘리기 위해 우마( 牛 馬 )가 끄는 목재쟁기로 10Cm 정도깊이로 논밭을 뒤엎던 것을 철재 쟁기가 개발되면서 더 깊게 갈 수 있고 뒤집게 되므로 식량생산이 늘었습니 다. 후일 손으로 파종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1730년대 J.털(Jethro Tull)에 의해 조잡한 파종기가 출현함( 直 線 條 播 法 )으로 경작용(쟁기,가래),곡물수확 용(낫,기계),곡물처리용(탈곡기)등 용도별로 농기계를 만드는 기계공업이 시 작됐으며 1785년 쿡이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파종기를 발명했습니다. 식량생산이 늘어나면 사람들의 생활이 풍족해야 하는데 귀족인 영주들과 상공인들의 수탈과 착취로 빈부격차가 극심해 굶주린 대중들의 원성이 높으 니 영국국왕 월리엄 3세는 절대군주제로 회귀해 왕권을 강화하고 국민을 무 력으로 짓밟으며 억압할 수 있는 전쟁을 벌이기 위한 비용을 만들려 혈안이 됩니다. 독재를 강화하고 땅을 뺏어 부를 축적하며 국민을 억압할 핑계로 벌이는 전쟁비용을 비축하고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1694년 잉글랜드은행을 설 립했으며,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에 의해 인쇄술이 발전했기 때문에 화폐를 찍어내는 노동자가 생겨났습니다. 인간은 혼자의 노동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 질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힘든 노동으로 생산한 물질을 필요한 물건과 물물교환을 하며 어울려 살았으나 화폐를 사용하면서 시장이 형성되 고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 화폐만 취급하며 살아가는 부류가 나타납니다. 아무린 물질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화폐만 관리하며 빌려주고 이자란 핑계 로 착취하는 은행원들이 생겨났고 화폐가 경제인양 왜곡되면서 생산노동자 들의 노동력과 물질을 합법적으로 착취ㆍ수탈하는 각종 고리대금업이 기승 느낌 113

을 부립니다. 화폐를 유통시키는 시장이 형성되자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 노동자ㆍ농 민ㆍ어민이 땀 흘려 생산한 물질에 가격을 올려 판매해 먹고사는 상인계층 이 늘어나 이들까지 먹여 살리려니 생산에 종사하는 인민들은 삶은 더욱 황 폐하고 혹독해집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해 누구나 자신이 자유롭게 판단하고 선택 할 권리가 있음에도 부모가 어떤 위치에서 얼마만큼의 부를 가지고 있느냐 에 따라 태어날 때부터 교육받을 권리도 박탈당하고 선택할 직업도 한정됩 니다. 성직자와 귀족 그리고 정치인과 관료들의 먹을 것과 사용할 물질까지 생산 하던 노동자ㆍ농민ㆍ어민들이 화폐만 취급하는 금융업 종사자들과 물질을 판매하면서 먹고사는 상인들까지 먹고 사용할 물질을 생산해야 하기 때문에 죽도록 노동하지만 생활은 궁핍해지는 것입니다. 착취와 갈취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다중들을 갈취해 풍족해지지만 생산노동을 하면서도 안정적인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 아 수입이 없는 다수가 늘어나 소비가 되지 않는 현상을 공황이라 합니다. 공황의 근본 원인은 모두에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하고 노동한 만큼 분배 가 이루어지지 않아 빈부격차가 발생하면서 대다수인 인민들이 수입이 없어 물질을 구입하지 못하므로 상인들은 상품을 팔지 못해 폐업하고 남은 상인 들은 조금 팔아서 라도 생존해야 하기 때문에 물가가 폭등하는 현상이 나타 납니다. 기득권들은 시장이 멈추면 마음대로 화폐를 찍어 공사판을 늘리고 복지라 며 나눠주고 소비를 부추기지만 고정적인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 다수는 앞 으로 굶주릴 것이 두려워 저축하기 때문에 경제(소비)는 살아나지 못하고 가 치 없는 화폐가 넘쳐 인플레이션만 강화됩니다. 분배불균등 때문에 발생되는 공황을 해소하려면 일한 만큼 분배받을 수 있 는 공정한 분배체제를 만들어야 하는데 온갖 비양심적인 악행으로 부를 축 적하고 기득권이 된 무리들은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며 언제든지 저희들끼리 뭉쳐 권력을 찬탈하기 때문에 권력은 기득권을 지키고 부를 보장해주기 위 해 전쟁도 불사합니다. 선량한 다수 인민들은 억압ㆍ착취ㆍ학살당해도 권력을 노리지 않지만 추악 느낌 114

한 기득권들은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기 때문에 수많은 인민들이야 죽건 말 건 전쟁으로 인민을 통제하며 생산된 물질과 공장을 때려 부수고 건설하는 재건과정으로 기득권을 보장하고 다중의 불만을 억압하는 방법으로 사용합 니다.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War of the League of Augsburg )혹은 팔 츠 계승전쟁(War of the Palatine Succession)은 1688-97년까지 있었던 전쟁으로 잉글랜드 계승전쟁(War of the EnglishS uccession) 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프랑스의 루이14세가 1685년 낭트칙령(Edict of Nantes)을 폐기하면서 주변국과 공국들이 연합했습니다. 낭트칙령을 폐기하자 남 서 프랑스에 살던 신교도 약 100만이 동요를 일으키며 반발했고 생산노동은 하지 않고 재산을 모아 중산층으로 살던 약 40만 명의 상인 기사 공예인 군인 등이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등 으로 망명하므로 프랑스로서는 그 만큼의 부가 빠져나가는 손실이 발생합니 다. 노동자와 농ㆍ어민이 땀 흘린 노동으로 생산한 물질로 형성된 재화들이 프 랑스를 빠져나간다고 귀족들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며 전쟁을 일 으켜 전장에 참여한 수많은 병사들이 죽는다고 귀족들의 삶에 어떤 손해도 없고 오히려 전쟁을 핑계로 강제적으로 국민들을 억압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에 서로가 존중해야 평화로운 세상이 되는데 타인을 학살하고 재물을 강탈했으며 타인의 재능을 훔치고 지시하고 통제하 며 착취해 부를 축적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권력을 차지하고 인류를 학살 하는 전쟁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권력을 누리고 있습니다.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며 저항하면 할수록 착취하고 억압하는 무리들이 소멸되지만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저 항하지 않고 복종하면 할수록 복종하는 사람들 때문에 함께 살아가면서 저 항하는 사람들까지 통제와 감시 속에 고통 받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루이14세는 알사스 북부 팔츠지방 공가( 公 家 )가 권력을 이을 남계( 男 系 )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동생 오를레앙공( 公 )의 부인( 妃 )이 팔츠가( 家 ) 출신임을 이유로 영토를 요구했고 독일황제와 바이에른 작센선제후 그리고 에스파 냐 네덜란드 스웨덴 왕들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독 주를 견제할 준비를 합니다. 전쟁은 프랑스의 팔츠침공으로 개시되는데 전투는 유럽에서 뿐 아니라 아메 느낌 115

리카 식민지로도 확대됐으며 루이(태양왕)의 야망을 막기 위한 동맹은 잉글 랜드-네덜란드 총독-왕 윌리엄3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1세, 스페 인의 카를로스2세, 사보이 공국의 빅토르 아마데우스 등 전 유럽이 연합하도 록 했습니다. 프랑스의 루이는 전쟁을 치르는 병사들은 돈으로 움직이는 용병을 사용하 기 때문에 지나친 군사비 지출로 1696년 프랑스 국민들을 경제적 위기로 빠트렸으며 전쟁에 참여한 모든 국가들이 생산 장비가 파괴되고 농지가 황 폐화되면서 국가들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1696년 사보이가 동맹에서 이탈 합니다. 사보이공국이 동맹에서 이탈하면서 동맹군이 약화되자 모든 동맹국들은 재 빨리 협상을 맺어 안정을 취하고자 1697년 9월 레이스웨이크에서 조약을 맺고 서명하므로 전쟁참가 국들은 어떤 성과도 없이 수많은 병사들을 동원 해 민간인과 병사들을 학살하던 9년 전쟁은 끝났지만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삶은 피폐해 졌습니다. 병사들은 침략한 지역의 사람들을 학살하고 재물은 강탈할 수 있었지만 자 신들이 사용하는 총과 총알, 군복과 전쟁 중 먹는 모든 물질들은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어민들이 땀 흘린 노동으로 수확하거나 채취 또는 생산한 것으 로 과학적인 생산력이 발전하지 못한 시기 수공업노동은 말로 할 수 없이 혹독했습니다. 노동자ㆍ농민ㆍ어민들은 병사들뿐 아니라 상인ㆍ성직자ㆍ귀족ㆍ정치인ㆍ법 관ㆍ공무원ㆍ교육자ㆍ의사ㆍ음악ㆍ미술가ㆍ예술가와 도박사ㆍ강ㆍ절도범 거 리의 룸펜과 거지 등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먹을 것과 사용할 물 질을 생산해야 하기 때문에 가혹했지만 상공인들은 노동자들이 생산한 전쟁 물자를 판매해 더욱 많은 부를 축적합니다. 노동을 업신여기며 기피하는 계층 때문에 노동자들은 더욱 혹독하게 노동 력을 착취당했는데 어민들이 사용하는 어망과 그물 그리고 어선 등 모든 어 구들을 노동자들이 만들어야 했고 농민들이 사용하는 쟁기와 낫 파종기 등 모든 농기구를 생산하면서도 노동자는 겨우 끼니를 이어갈 뿐 부를 축적할 수 없습니다. 귀족들이 권력을 늘리려 인류를 학살하는 전쟁이 한창일 때 프랑스에서 영 국으로 망명했던 물리학자 드니 파펭은 1695년에 증기압축으로 실린더가 작동되는 엔진을 만드는 실험에는 성공했지만 세상을 떠나고 토머스 세이버 리가 1698년 세이버리기관을 발명하고 국왕 앞에서 실험에 성공하며 특허 느낌 116

를 받았습니다. 그 후 영국의 발명가이자 기업가인 토머스 뉴커먼은 파펭이나 세이버리보 다 개선된 방식인 증기에 냉수를 부어 식히면서 증기가 액화돼 생기는 진공 감압으로 피스톤을 움직이게 하는 배수용 증기기관을 제작해 1712년부터 콘월의 구리광산에서 분출되는 지하수를 배출하는 펌프로 사용했습니다. 영국에서는 방적기계 직물기계 등이 급속히 발달하며 공업이 활성화됐으 며 1764년 글래스고 대학수리소에서 일하던 와트는 뉴커먼기관의 수리요 청을 받고 개량에 착수해 1769년 1월 5일 화력기관에서 증기와 연료의 소모를 줄이는 새롭게 고안한 방법 이란 특허를 취득하고 비약적인 산업기 계발전을 가져옵니다. 평등사상의 발전 1737년 독일지방에 괴팅겐대학이 설립되면서 종교가 일방적으로 복종과 순종만 강요하며 창조론이라는 허상만 가르치던 관념적 종교교육에서 벗어 나 과학이 연구되고 임마누엘, 칸트와 헤르더 등이 활약하면서 질풍노도 의 시대(Sturmund Drang) 라는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작품들이 쏟 아지며 대중의식이 발전하게 됩니다. 과학이 발달하며 대중들의 의식을 깨우는 철학도 함께 발전하는데 1754 년 장자크 루소는 디종 학술원 학술연구공모전에 무엇이 인간 불평등의 근 원인가 라는 서문제출로 소유권제도와 사회조직의 발전으로 생긴 불평등과 비참함 그리고 자연 상태의 행복과 평등을 분석한 글을 발표합니다. 1755년 계몽기에 주장한 내용은 학문적 가치보다 혁명원리[ 인간 불평등 기원론]로 자연 상태나 사회계약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면서 1762년 저 술한[사회계약론]에 자유와 평등은 자연권으로 국가가 제약하면 사회계약에 느낌 117

의해 국가행위는 금지돼야 하며 권력행사는 주권을 보장하는 속에 집행(인 정)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권력행사가 정당화되기 위한 조건으로 국민의 전체 의사와 상위한 항상 정당한 일반 의사에 따라 집행하되 그것은 집행 후라도 다수결( 多 數 決 )에 의해 반드시 확인돼야 한다는 다수결 민주주의 원리를 주장하므로 권력집행 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면서 인간평등과 자유를 강조한 것입니다. 인간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자연종교이론과 그 폐해가 발생되는 원인을 분석해 발표하자 가톨릭교회가 성직자를 공격한다는 이유로 체포 장을 발부 하므로 1762년 스위스로 도피했다 1770년 파리로 돌아와 1772년부터 1776년까지[루소가 장 자크를 판단한다.]외의 글을 발표하면서 대중의 자 유주의정신을 일깨웁니다. 루소는 모든 사회악과 사회갈등의 근원이 경제 불평등 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문명이 발달하고 지배와 피지배가 강화될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 고 사회문제가 만연해지는 것을 보고 이를 일반의지론 으로 풀었으며 사 상 최초로 인간평등문제를 실천적으로 파고들어 해석하면서 철저하게 자유 와 평등을 주장했습니다. 모든 종교, 이슬람교는 카스트, 그리스도교는 부활과 가족, 불교는 윤회를 주장하며 설파하는 것은 왕권과 기득권이 혈통으로 세습되고 대물림되는 것 을 당연하게 받아드리도록 강요하며 무력을 사용해 다중을 억압하고 갈취해 권력을 행사하는 무리들을 보호하기 위해 부활과 상속을 강조하며 보복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가족과 혈육(혈통)의 강조는 상속(세습)을 뜻하므로 신분세습을 세뇌하는 것이며 부활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약자의 재물을 강탈해 누리고 사는 무리들이 다중을 억압하고 갈취하는 행위를 자신이 죽임을 당해도 부활해 보복한다거나 자손이 보복한다고 강조하므로 저항하지 못하게 억압하는 수 단입니다. 혈통주의는 제3신분 사람들이 관직이나 기사계급으로 진입할 수 없게 족 쇄로 작용했으며 혈통을 중시하는 상속제도는 같은 혈육끼리도 적자( 赤 子 ) 와 서자( 庶 子 ) 라는 신분상 차별을 둬 조선시대에 유명한 홍길동전에 아비 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다. 라고 표현했듯 평등 을 부정합니다. 루소는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평등하므로 자손이 생존방식을 자연 느낌 118

에서 성장하며 집단에서 습득하고 배워야 함에도 부모가 양육하며 자손의 행동과 사상을 강요하는 것은 부모라는 핑계로 혈육의 삶을 통제하는 것으 로 평등과 존중을 부정하는 행위라며 자연으로 돌아가라 는 명언을 남깁 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사회 속에서 쇠사슬 에 묶여 있다 고 주장하므로 문명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밝혔으며 자연 은 인간을 선량 자유 행복하게 만들었는데 사회가 인간을 사악 노예 불 행으로 몰아넣었다 라며 억압을 벗어난 인간 평등과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 건설을 강조했습니다. 자연(natura)은 서구어로 본성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인간의 천부적 자연권인 자유와 평등의 보장을 주장했으며 루소는 문명을 거부한 것이 아 니라 자연을 강조하므로 자연의 낭만성과 야성이 아닌 원시공산사회의 평화 롭고 자유로우며 평등한 사회의 원형으로 돌아갈 것을 다중에게 설명했다고 봅니다. 9년 전쟁이 종전되고 3년만인 1700년 러시아는 표트르대제가 즉위하면 서 이전에 상실한 영토를 회복하고 발트 해 지방을 탈환하겠다면서 덴마크 와 작센을 연합국으로 북방동맹을 맺고 스웨덴을 침공했으나 덴마크와 작센 군이 각개 격파당하고 각각 패배하여 대북방전쟁의 1차전이 끝납니다. 스웨덴은 1560년부터 1658년까지 핀란드만( 灣 )을 중심으로 카렐리아 (Karelia), 잉그리아(Ingria), 에스토니아(EstonIa), 리보니아를 통일했 으며 30년 전쟁 중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해 외레순 해협(1645년과 1658년 점령)의 북부와 독일의 포메라니아 서부 비스마르(Wismar), 브 레멘공국과 베르덴(Verd en)을 점령하고 국가가 됐습니다. 외레순 해협은 덴마크의 셸란섬과 스웨덴의 스코네반도 사이에 있는 해협 으로 현재 덴마크와 스웨덴을 오갈 수 있는 철로와 다리가 놓여 가장 붐비 는 뱃길로 1859년까지 덴마크가 양쪽 해안을 장악하고 해협을 지나는 모 든 선박들로부터 해협세( 海 峽 稅 :통행료)를 징수했으며 바이킹시대에는 북유 럽 국가들 사이의 해전무대였습니다. 연속적으로 패하던 러시아는 1709년에 잉글랜드(1707년에 영국), 하노 버, 네덜란드, 프로이센, 폴란드-리투아니아(1701년-1706년, 1709년까 지)와 동맹을 맺었으며 스웨덴은 폴란드-리투아니아(1704년-1709년)와 오스만제국 그리고 우크라이나가 동맹을 맺고 전쟁을 한 것입니다.(전쟁이 길어져 동맹국가가 바뀌기도 함.) 느낌 119

인력과 물자가 부족해 21년이라는 장기간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병사(용 병ㆍ외인부대)들의 봉급과 전쟁물자를 국가재정으로 지불할 수 없게 된 스 웨덴이 결국 패배하므로 뉘스타드조약과 스톡홀름조약으로 1721년 종결되 면서 러시아는 발트 해의 지배자가 되고 유럽에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전쟁으로 약 10만 명에 달하는 각국의 무고한 양민들이 기아와 질병 그리고 전쟁의 포화로 사망했으며 스웨덴병사 약 25,000명과 시민 등 175,000명이 전쟁으로 전사하고, 러시아군은 약 75,000명, 폴란드군은 14,000-20,000명, 작센군은 약 8,000명 덴마크군 약 60,000명이 학살당한 것입니다. 러시아와 스웨덴이 발트 해를 놓고 전쟁을 하는 사이 어릴 적부터 정신적 으로나 육체적으로 약해 후계자가 없을 것이라 우려했던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1700년 사망하자 그의 모든 영토와 권한이 루이14세 손자 앙주공 작에게 승계되면서 필리프는 스페인의 펠리페5세(Philip V of Spain)왕 이 됩니다. 그러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1세(Leopold I of Habsburg)는 스 페인왕위는 합스부르크가문의 권리라며 계승권을 주장해서 전쟁이 벌어졌는 데 루이14세가 공세를 강화하자 다른 유럽국가(영국 주도로, 포르투갈과 네 덜란드공화국)들이 프랑스의 영토 확장을 제어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 측에 가담했습니다. 혈육으로 보면 루이14세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앤(Anne of Austria)이 카를로스2세의 선왕 펠리페4세 딸이며 루이14세의 아내 마리아 테레사와 카를로스2세는 사촌이므로 카를로스2세의 이복누나인 스페인공주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의 유일한 아들인 프랑스왕세자 루이(Louis, le Grand Dauphin)가 됩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조의 레오폴트1세는 스 페인왕의 사촌으로 그의 어머니는 펠리페4세의 다른 여자형제이며 카를로 스2세의 아버지 펠리페4세는 왕명으로 자신에게 오스트리아계승권을 물려 줬던 적이 있어서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앙주가 죽으면 스페인영토를 프랑스왕세자가 계승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주변 유럽국들은 프랑스가 강대국이 돼 자신들을 침략하면 영토를 지킬 수 없다는 위기감과 전쟁에 참여하면 새로운 영토를 확보할 수도 있다는 기대 로 프랑스와 스페인에 대항하는 연합군을 결성하고 전쟁에 참여한 것이 스 페인왕위계승전쟁입니다. 느낌 120

같은 시기에 앤여왕전쟁과 동시에 벌어져 유럽뿐 아니라 영국식민지주민, 프랑스식민지주민(corsairs)과 스페인령인 남미북안(Spanish Main)에 거점을 둔 사략선, 해적선과 싸웠으며 북아메리카까지 번져 약 400,000 명에 달하는 사람들과 병사들이 사망하고 1713년 위트레흐트조약체결로 끝났습니다. 처음 조약은 프랑스와 스페인왕위가 한 사람(가문)에게 물려지지 않도록 보 장하자는 내용이 있어 1712년 7월 10일까지 체결되지 않다가 펠리페5세 가 스페인과 프랑스의 왕위가 한 사람에게 양위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합의 하므로 영국과 프랑스가 휴전에 동의하면서 1713년 4월 11일 체결됩니다. 이 전쟁 결과로 루이14세의 손자 앙주가 펠리페5세로 스페인왕으로 인정 받았고 필립과 그 후손인 베리공작(루이14세의 가장 어린손자)과 오를레앙 공작(루이14세 조카)은 같은 프랑스공작들에게까지 프랑스의 왕위계승권을 포기하도록 강요받고 스페인의 왕권에 대한 주장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스페인영토인 시칠리아 섬과 밀라노공국일부는 사보이아에 양도하며 신성 로마제국황제이자 오스트리아대공인 카를6세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나폴 리왕국, 사르데냐 그리고 밀라노공국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포르투갈은 브 라질에 있는 아마존과 오야포크(Oyapock)강 사이에 있는 영토의 영유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스페인은 지브롤터와 미노르카 그리고 세인트키츠 섬의 거의 대부분 지역 과 이익이 많이 낫던 노예무역계약독점권인 아시엔토를 그레이트브리튼에 빼앗겼으며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 있던 루퍼츠랜드와 아카디아, 뉴펀들랜 드에 대한 권한을 영국에 양도하게 된 것입니다. 프랑스는 이때 이로쿼이족에 대한 그레이트브리튼 종주권과 먼 지역 인디 언에게 그 어떤 나라와도 무역할 수 있도록 인정하므로 일레생장(현재 프린 스에드워드 섬)과 후일 루이스버그 요새가 세워지게 되는 일레 로얄레(현재 카페브레톤 섬)를 포함한 북아메리카 식민지영토들을 유지하게 됩니다. 위트레흐트조약이 체결된 후에도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과 1714년까지 도 전쟁을 계속했으며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사이에 1720년까지 평화조약은 체결되지 않아 1750년 마드리드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서로 공식적으로는 전쟁상태로 있었습니다. 침략전쟁으로 사람을 학살하며 재물을 강탈해 부를 축적하거나 노동자를 착취하고 다중을 속여 기득권이 된 무리들은 자신의 부만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아도 될 것 같지만 권력은 힘의 약화되는 순간 상대방에게 복속되 느낌 121

기 때문에 힘을 키우려고 혈안이 돼 전쟁이 끝이지 않는 것입니다. 힘든 일을 마치고 가족에게 돌아가 함께 따뜻한 밥이나 먹는 것을 행복으 로 느끼며 살고 싶은 민초들의 바람은 꿈일 뿐 사람위에 군림하려고 권력을 장악하는 무리들을 없애지 못하면 억압자들은 피억압자들을 분열시키고 피 억압자들끼리 갈등을 조장해서 싸우도록 조장하기 때문에 평화나 행복은 존 재할 수 없습니다. 스페인왕위계승전쟁이 끝나자 영토의 일부를 상실한 제국들은 1740년부 터 신성로마제국 카를6세가 여성에게는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도록 한 살리 카 법(Saliclaw)을 고쳐 딸(마리아 테레지아)에게로 오스트리아왕위를 계승 한 것을 이유로 또다시 전쟁을 시작해 1748년 엑스라샤펠조약에 의해 종 결됩니다. 권력을 계승하기 위한 전쟁으로 또다시 수많은 병사와 양민들을 학살하며 조약에 따라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왕위가 인정됐는데 오스트리아는 영토의 일부인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게 양도하는 대가로 전쟁이전의 상태로 왕권 은 유지됐지만 양민들의 피해와 죽음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전쟁은 종료됐지만 지하광물이 풍부하고 비옥해 생산의 근거지였던 슐레지 엔을 빼앗긴 오스트리아국민들은 왕위를 이어가기 위해 곡식과 석탄이 생산 되는 요지를 빼앗겨 생활이 어려워졌다며 원성이 높아지자 영토를 되찾으려 프로이센과 대립하다 다시 7년 전쟁(1756~1763)을 벌입니다. 이때 프랑스의 모렐리는 1755년 자연법전 (Code dela nature, oude veritable espritdeses lois, detout temps neglige oum econnu)을 통해 인류는 최초 단계가 자연적질서의 평화인데 침략자들이 사유재산과 권력을 주장하므로 신분에 의한 사회 불평등이 발생했다며 착취 하는 질서를 위해 통제하고 억압하는 계급제도와 사유재산을 폐지해야 평등 한 세상이 된다고 발표합니다. 왕권계승과 학살전쟁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쟁이 발생된 원인은 카를이 법을 바꿔 자신을 왕위에 앉힌 사실과 자신은 헝가리와 보헤미아여왕이자 오스트리아 여 공비 그리고 느낌 122

파르마 여 공작이 돼 합스부르크왕가영토를 계승하고 남편 로트링겐공작 프 란츠1세(FrancisI, Duke of Lorraine)를 신성로마제국황제로 만들려한 탐욕에 있었음을 숨겼습니다. 30년 전쟁이 끝난 후 독일북부지역에 위치해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부를 축적한 브란덴부르크를 중심으로 1701년 1월 18일 프리드리히1세가 프로 이센공국에 등극하면서 중앙집권화와 관료제로 정비하고 군을 강화하며 프 로이센 형( 型 ) 절대주의체제를 확립하므로 프로이센국이 형성됐습니다. 프로이센은 전쟁에 용병을 사용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들이는 것은 생산하 는 노동자와 농민 등 국민들에게 피해가 될 뿐 이므로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국력을 갖춰야 한다며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젊은이들을 징병하여 정규군으 로 만들어 훈련시키므로 강대해집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세금을 늘려 군비를 증강하고 적대관계에 있던 프랑스 왕과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를 혼인시켜 제휴했고 러시아 스웨덴 작센 기타 독일의 제국들과도 동맹을 맺으며 프로이센을 포위하자 영국과 동맹한 프로이센 프리드리히2세는 1756년 8월 기선을 제압하려고 작센을 침략하 므로 전쟁으로 발전합니다. 기습작전으로 프로이센이 초기에는 승리했으나 1759년 8월 오스트리아 러시아연합군이 반격하므로 대패해서 베를린까지 점령당하고 영국의 대( 大 ) 피트마저 실각해 원조가 끊기므로 고전하다 1762년 러시아 엘리자베타 여 제( 女 帝 )가 죽고 표트르3세가 즉위해 자신을 지지하므로 다시 승기를 잡았 습니다. 1763년 2월 15일, 라이프치히에서 약 30km 떨어진 후베르투스부르크 성( 城 )에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작센 3국이 슐레지엔은 프로이센의 영 토로 한다는 조약을 맺고 유럽에서 강국이 됐으며 해외식민지를 둘러싼 영 국 프랑스양국의 오랜 싸움도 영국이 승리해 대 식민제국이 됩니다. 엘리자베타 여제는 33세에 쿠데타로 아버지를 몰아낸 후 왕권을 찬탈했 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수많은 남자와 염문을 뿌렸지만 결혼을 하지 않아 후사가 없기 때문에 사망 후 혈육인 조카 카를 울리히가 러시아황제와 스웨덴국왕양쪽을 계승했는데 카를은 어릴 때 자신이 자란 프로이센을 동경 했습니다. 카를 울리히(표트르3세)는 안할트체르프스트라는 작은 공국 공주인 예카테 리나와 결혼했는데 신경질적이고 반항적인데다 완고한 카를은 전략결혼을 느낌 123

좋게 생각하지 않아 예카테리나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술로 세월을 보 내면서 폐인이 돼 부부관계도 원만하지 않았으며 불행한 결혼기간을 보냈습 니다. 명목상 황태자와 황태자비인 두 사람은 18년간 각자 정부를 두고 살았는 데 예카테리나는 세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가 각각 아버지가 다른 정부 소생이며 카를은 황제에 올랐지만 정치에는 관심 없고 러시아를 증오하면서 황실에 자신의 고향인 프로이센세력을 끌어들이자 예카테리나는 모반을 준 비합니다. 그녀는 러시아정교로 개종하고 유럽의 계몽 사상가들과 교류하며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정책을 발표하므로 러시아군대와 인민들의 지지를 받게 됐 으며 정부 중 한명인 오를로프는 그녀가 지시를 내리면 바로 동원할 수 있 는 여러 연대병사들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둔시키고 있었습니다. 궁정인물들과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식인 그리고 일반대중의 지 지를 얻은 예카테리나는 1762년 7월 군대를 이끌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쿠데타를 일으키자 놀란 표트르3세가 예카테리나에 맞설 군대를 모았지만 병사가 적어 표트르3세는 6개월 만에 아내에게 왕권을 강탈당했습니다. 8일 후 카를은 예카테리나의 정부 손에 암살됐으며 예카테리나는 1762년 9월 모스크바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치르고 예카테리나2세로 러시아 차르가 되자 약속을 지킨다며 모든 인민은 자유롭고 평등하므로 지배층의 피지배층 에 대한 착취를 금지한다는 대민정책을 발표하지만 실행하진 않습니다. 예카테리나2세 명령으로 만들어진 러시아헌법은 유럽의 계몽주의사상가들 도 놀랄만한 내용이지만 공표만 했을 뿐 실현하지 않았으며 귀족들의 지지 로 차르에 오른 그녀는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귀족들에게 이전보다 더 많이 착취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므로 러시아농노들을 더욱 혹독하고 가혹하게 착취당합니다. 1773년 돈카자흐 출신으로 프로이센과 7년 전쟁, 폴란드전쟁, 러시아 터키전쟁 등 유럽의 전장을 돌아다니며 평등과 자유에 대한 사상을 습득한 푸가초프는 러시아 각지를 방랑하다 농노들의 참혹한 삶과 비참한 현실을 보고 스스로 죽은 표트르3세라 칭하며 농노제를 반대하는 세력을 규합했습 니다.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푸가초프에 의해 발생된 반란은 우랄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카잔 펜자 사라토프 등 도시를 점령하고 러시아전역으로 퍼졌으 느낌 124

며 각지에서 지주를 붙잡아 재판하고 재산이나 토지를 몰수해 농민에게 나 눠줬지만 혈세로 살면서 학살만 배운 병사들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고 실 패로 끝났습니다. 자유를 위한 저항 1760년 조지3세가 국왕이 되기 전까지 1세기 이상 아메리카는 각각 식 민지의회를 개최하며 자치적으로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아메리카영국인은 본 국의 영국인과 거의 동등한 권리를 행사했는데 조지3세가 등극하고 가혹하 게 세금을 징세하므로 식민지인들은 권리 자유 특권을 쟁취하기 위해 저 항합니다. 영국은 북아메리카동부해안에 13개의 식민지를 건설하고 북부에는 상공업 과 자영농업, 남부에는 노예를 사용하는 농장을 경영했으며 해외식민지경쟁 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제국체제를 새롭게 개편하려던 영국은 조지3 세 즉위(1760년)후 인지세와 차세부과 등 중상주의적인 식민정책을 채택했 습니다. 1763년 7년 전쟁의 책임으로 프랑스 미국식민지가 파리강화회담으로 소 멸하자 영국은 식민지들을 장악하고 설탕 법, 당밀법을 만들어 당밀, 설탕, 철, 소금 등 수입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할 뿐 아니라 신문, 일간지, 트럼프 카드 등 미국식민지에서 출판되는 모든 출판물에도 세금을 부과한다고 발표 합니다. 영국의 이런 결정은 큰 반발을 불러 식민지인들은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대표 없이는 과세 없다) 는 구호를 내걸고 영 국의회에 대표를 보낸 적이 없으니 본국이 일방적으로 만든 법을 인정할 수 없다며 조세법에 반발하자 인지세법이 간접세라는 조세원칙에 맞지 않다며 인지세법을 철폐하게 됩니다. 1766년 인지조례는 철폐됐으나 타운센드제법( 諸 法 )을 제정하니 식민지인 들은 영국의 모든 과세를 거부하자는 움직임이 커지므로 1765년 식민지인 들을 길들이고 통제한다며 군대숙영법( 軍 隊 宿 營 法 )을 제정하고 군을 파견하 므로 반감이 누적됐는데 70년 식민지인들이 보스턴에서 항의 시가행진을 느낌 125

하다 영국군과 충돌해 시민 5명이 사망합니다. 미국식민지에는 자유를 누리려면 억압을 거부하고 저항해야 한다며 독립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왕권을 인정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왕당파들이 왕에게 청원하자고 해서 청원을 시작했지만 1772년 청원으로는 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은 식민지인들은 통신위원회를 만들어 연락하며 비합법저항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미국독립전쟁의 또 다른 원인은 프랑스-인디언전쟁에서 미국은 프랑스와 전쟁하는 영국을 지원해 승리했다면서 비옥한 중서부지역으로 진출하려는데 영국정부가 식민지를 보호한다며 인디언보호구역 을 설정하고 이동을 금 지시켰으며 병참 법을 제정하고 영국군대주둔비용 일부를 식민지민에 부과 한 것입니다. 이때 영국본토에서는 이발사이자 가발공인 리처드아크라이트(Richard Arkwright)라는 사람이 1767년 하그리브스가 발명한 다축방적기를 개 량하고 와트의 증기기관과 연결해 수력을 동력으로 소수 노동자가 대량의 실을 뽑아 낼 수 있는 수력방적기(water frame)를 1771년에 발명해 대 량으로 직물을 생산하게 됩니다. 1773년 영국은 미국식민지 상인들의 차에 대한 밀무역을 금지시키고 동 인도회사가 독점권을 행사하는 관세법을 통과시키자 식민지자치를 무시한다 며 분노한 보스턴시민들이 인디언으로 분장하고 항구에 정박 중인 동인도회 사 선박2척을 급습해 342개의 차 상자를 깨뜨리고 차를 모조리 바다로 던 져버립니다. 영국정부는 1774년 보스턴 항( 港 )을 봉쇄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통제하며 배상을 요구했고 매사추세츠식민지의 자치권을 정지시키는 등 징벌적인 여 러 법을 제정하며 징세를 늘리자 미국 식민지인들은 그것을 참을 수 없는 법( 法 ) 으로 규정하고 버지니아식민지 제의로 제1회 대륙회의가 소집됐습 니다. 1774년 제1차 대륙회의 폐회연설에서 패트릭 헨리가 자유가 아니면 죽 음을 달라 고 말 했다는데 헨리는 개개인의 권리보다 왕당파에 가까운 사 람이라 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는 설도 있으며 결과는 평화의 청원 문 작성과 자치적으로 민병대를 조직해 훈련시키고 군수물자를 비축하자는데 합의합니다. 1775년 제2차 대륙회의에서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로저 셔먼, 로 느낌 126

버트 리빙스턴, 토머스제퍼슨 등 다섯 사람이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 로 하고 대륙 군을 창설했으며, 조지워싱턴장군을 대륙 군총사령관으로 임 명하고 각 주에 군사와 물자지원을 요청하므로 사실상의 연방의회가 됐고 미국독립전쟁이 준비됩니다. 1775년 영국군과 대륙군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해 전쟁이 벌어지 자 T.페인이 공화제독립( 共 和 制 獨 立 )을 호소하는 정치 팜플렛[커먼센스 common sense]을 발행하고 버지니아 대표 R.H.리의 독립결의( 決 議 ) 제 안으로 T.제퍼슨이 기초하고 B.프랭클린과 J.애덤스가 가필한 독립선언문 이 76년 7월 4일 대륙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됐습니다. 이 선언문에는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천부의 권리가 있음과 권리를 위해 정부를 조직하므로 정부의 정당성은 피치자( 被 治 者 )의 동의( 同 意 ) 라 며 정부가 기본인권을 침범하면 국민은 그 정부를 전복할 권리가 있다 는 혁명권( 革 命 權 )을 명시하고 국왕의 폭정을 열거하므로 독립전쟁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등 외국의 군사적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졌습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무력으로 약한 부족을 침략해 사람들을 학살하고 기 득권을 차지한 무리가 왕국을 만들고 왕이 병사의 무력으로 다중을 억압하 며 통치하던 왕조가 아니라 다중이 선거로 대표를 선출하고 선출직이 권력 을 행사하는 국가가 생기는 기초가 된 것입니다. 아메리카와 영국이 식민지를 둘러싼 독립전쟁이 한창일 때 유럽의 프로이 센에서는 노동자와 시민들을 갈취해 부를 축적한 상공인들과 귀족 사이에 권력을 차지하려는 암투가 계속 일어났으며 1770년대 말부터 군국주의 전 통아래 국가의 검열에도 불구하고 계몽주의 책 생산이 증가하므로 신흥독서 층이 형성됐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천부(생존권,평등권,자유권 등 불가침의권리)의 권 리를 칼뱅의 영향을 받은 상공인들은 노동자의 노동력착취와 다중을 갈취하 는 물질 판매의 자유라고 왜곡했으며 성직의 혹독한 착취가 허상이라고 깨 달은 대중들이 종교를 배척하자 성직자들은 초기종교로 돌아가자는 목소리 를 높입니다. 유럽은 자유에 대한 사상이 퍼지면서 억압받는 민중들이 깨달을 때 미국식 민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식민지제국( 帝 國 )부활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다 미국에게 영국에 맞서 독립하라며 부추기고 있을 때 영국의회는 퀘벡조례를 제정하고 캐나다 서쪽지역까지 로마가톨릭교를 승인합니다. 1778년 사라토가전투(Battle of Saratoga)에서 대륙군이 승리하자 벤 느낌 127

저민 프랭클린은 이것을 명분으로 프랑스에 참전을 요청하고 프랑스가 참여 하자 1781년 요크타운전투에서 프랑스군과 대륙군 연합부대가 영국군 주 력부대를 격파하므로 1783년 파리조약으로 영국정부는 미국의 독립을 공 식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대륙회의는 1777년 11월 미합중국 초기헌법이라 할 수 있는 연합규약( 聯 合 規 約 )을 기초로 81년 연합의회( 聯 合 議 會 )로 개칭해 독립전쟁을 지휘하며 독립을 쟁취했고 1787년 서북( 西 北 )토지법 등을 제정했으며 89년 조지워 싱턴을 초대대통령으로 선출하는 연방헌법을 제정하고 신정부를 수립한 후 해체합니다. 1780년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망하고 권좌에 오른 요제프2세는 계몽주의 에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로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며 농노해방, 사형과 고문폐지, 교육권의 확대 등 많은 개혁을 구상하지 만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해 누리고 사는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 쳐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요제프는 전인구의 1/4에 불과한 독일인을 중심으로 중앙집권화를 시행하 는 정책을 펼치려했지만 기득권과 타민족들의 방해로 실패하고 스스로 자신 의 묘비명에 가장 훌륭한 의도를 가졌으나 하려고 한 모든 일에 성공하지 못한 요제프2세가 잠들다. 라고 새겨 넣었는데 오늘날 계몽전제군주( 啓 蒙 專 制 君 主 )라 불립니다. 유럽열강의 경쟁관계를 이용해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의 지지를 받으며 독립에 성공한 미국혁명을 지원을 하기 위해 해군과 육군을 파병하며 너무 많은 물질을 제공해 프랑스는 심각한 재정위기가 닥쳤으며 전쟁비용을 부담 하느라 헐벗게 된 인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혁명이 발발합니다. 영국에서는 1779년 방사( 紡 絲 ) 방적공( 紡 績 工 )이던 제임스하그리브스 [James Hargreave]가 한명의 노동자가 여러 개 방추( 紡 錘 )를 동시에 작 동시켜 생산할 수 있게 발명한 복식수동( 複 式 手 動 )방적기를 개량해 1825년 R.로버츠가 완전자동화 된 뮬(mule:잡종)방적기를 발명하므로 엄청난 생산 발전을 가져옵니다. 노동자들이 좀 더 쉬운 방법으로 물질을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 낸 기계발 달로 숙련노동자가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할 수 있게 되자 노동자들의 노동 력을 착취해 부를 축적한 상공인들은 노동자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고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높은 숙련노동자를 해고하며 더 많은 이윤 을 남깁니다. 느낌 128

경력이 많고 숙련된 노동자들은 임금이 높다고 해고하며 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도록 글 읽는 교육을 받고 가족이 딸리지 않은 젊은 노동자들을 싼 임 금으로 고용해 더 많은 이윤을 남기고 상대기업보다 싼 가격에 판매하므로 재산이 부족한 소기업들을 도태시키며 부를 축적합니다. 프랑스혁명의 근본원인은 봉건적신분제인 성직자(제1신분), 귀족(제2신분), 재산 있는 평민(제3신분)에 입각한 앙시앵레짐(구제도)을 타파하고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해 재산을 축적한 행위를 철폐하며 자유, 평등, 우 애의 이념으로 구체제와 왕정을 타도하고 봉건적 억압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를 발전시키게 됩니다. 제3신분에 속하는 상인, 제조업자와 법률가, 의사, 문필가 등 생산노동을 하지 않는 자유 직업인으로 이루어진 신흥계급은 칼뱅의 종교개혁 후 재력 이 성장했음에도 귀족과 정권으로부터 멸시받았으며, 길드와 같은 봉건적제 도로 불이익을 당했고 농민과 노동자는 봉건적 의무와 세금이라는 명분의 수탈로 피폐해졌습니다. 구제도 아래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은 면세특권과 봉건특권 을 누리고 제3신분인 평민만이 모든 재정부담을 안았는데 부르봉왕조의 사 치스러운 궁정생활과 루소 같은 계몽 사상가들의 혁명사상이 시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칠 때 미국의 독립혁명 소식은 큰 동요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1733년 J.케이가 기계적인 위입장치인 플라잉셔틀 수직기를 발명해 제직능률이 향상되고 1785년 영국의 E.카트라이트가 증기의 원동력 을 이용한 역직기를 발명해 자동방적기 및 역직기의 대대적인 보급으로 근대 적공업의 기초가 확립되자 맨체스터를 중심으로 면방직공업이 비약적으로 발 달합니다. 프랑스에선 다중은 빈곤하므로 특권계급에게 과세하고 왕실경비를 삭감해 재정위기를 극복하려던 루이16세가 귀족과 왕실의 반발로 실패하자 1789 년 5월 그 동안 소집되지 않았던 신분제의회인 3부회를 소집했는데 표결방 식을 둘러싸고 신분 간 충돌이 벌어져 제3신분 대표들은 별도로 국민의회를 열었습니다. 왕이 제3신분 회의실을 폐쇄하라고 명령해 쫓겨난 제3신분 대표들은 6월 21일 테니스코트에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말자고 결의 하고(테니스코트의 서약)뭉치자 왕이 부분적인 양보안과 회의를 신분별로 할 것을 명했는데 제3신분이 거부하니 어쩔 수 없이 귀족대표에게 국민의회에 합류하라고 지시합니다. 느낌 129

국민의회는 7월 7일 헌법위원회를 창설하고 9일에는 헌법제정국민의회로 명칭을 개칭하며 조직적으로 저항하자 성직자 및 귀족 등 동조자들이 합세 했으며 이들은 국민주권을 내세워 입법의회가 권력을 행사하는 헌법을 재정 하라고 요구하므로 왕은 병력이 동원될 때 까지 참다 무력탄압을 시도했습 니다.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 다중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국민의회는 봉건 제(무상)폐지선언 및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발표로 모든 인간은 평등 하며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고 명시한 자연권주권재민의 원리와 억압에 대한 저항권을 함께 포함하여 혁명이 지향하는 기본적인 방향을 제시합니 다. 선언의 내용을 간추리면 [제1조 인간의 권리는 자유롭고 평등하다. 제2조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자유, 재산, 안전, 그리고 압제에 저항권. 제3조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어떤 단체나 개인도 국민이 명시하지 않은 권 리를 행사할 수 없다. 제4조 자유는 타인에게 해롭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제5조 법은 사회에 유해한 행위가 아니면 금지할 권리가 없다. 제 6조 법은 일반시민의 의사표명이다. 제7조 누구도 법의 규정과 정하는 형 식에 의하지 않고는 소추, 체포 또는 구금될 수 없다. 제8조 범죄 이전에 제정 공포되고 합법적으로 적용된 법률 아니면 처벌될 수 없다. 제9조 모 든 사람은 범죄자로 선고되기까지 무죄로 추정되므로 체포하더라도 신병을 확보하는데 불가결하지 않은 모든 강제조치는 법에 의해 준엄하게 제압된 다. 제10조 누구도 그 의사에 있어 종교상의 것일지라도 그 표명이 법에 의 해 설정된 공공질서를 교란하지 않는 한 방해될 수 없다. 제11조 모든 시민 은 자유로이 발언하고 기술하고 인쇄ㆍ출판하며 평등하게 교육받고 사상과 의견을 자유롭게 소통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귀중한 권리의 하나이다. 자유 의 남용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한다. 제12조 인간과 시민의 제 권리보장 은 공공무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는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설치되 는 것으로 그것이 위탁되는 사람들의 특수이익을 위해 설치되지 아니한다. 제13조 공공무력과 행정비용을 위한 조세는 능력에 따라 평등하게 배분돼 야 한다. 제14조 모든 시민은 스스로 또는 대표자를 통해 공공조세의 필요 성을 검토하며 용도를 추급하고 액수, 기준, 징수, 그리고 존속기간을 설정 할 권리를 가진다. 제15조 사회는 모든 공직자로부터 그 행정에 관한보고를 요구할 권리를 가진다. 제16조 권리의 보장이 확보되지 않고 권력의 분립이 확정되지 아니한 사회는 헌법을 갖고 있지 아니한다. 제17조 불가침 적이고 신성한 권리인 소유권은 합법적으로 확인된 공공필요성이 명백하고 또 정당 하며 사전의 보상조건하가 아니면 침탈될 수 없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왕이 군대를 국경에서 베르사유주변으로 이동시키며 파리 시민에게 극도의 느낌 130

불안과 분노, 공포를 조장하면서 7월 11일 국민이 신망하던 삼부회 최고책 임자 네케르를 파면하자 분노한 시민들이 7월 13일 들고 일어나 무장하고 다음날 바스티유감옥을 포위하니 관료인 교도소지휘자 베르나르-레네 드 뢰 네는 80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총을 쏘며 저항하다 사살 당했습니다. 바스티유감옥을 파옥하고 점령한 1000명의 무장시민군은 파리시내로 들 어가 시장관사와 주교 청을 점령하고 시장을 사살했으며 사살한 시장 플레 제이유의 머리를 창에 꽂아 파리 시내를 누비며 무력을 과시하고 헌법과 입법의회를 구성해 봉건제억압을 금지하고 징세를 철회하라 고 외치며 다 녔다고 합니다. 시민군의 무력에 힘입은 국민의회는 8월 4일 의회에 봉건제 영주제 폐지 의 안건을 결의하고 9월 26일 인권선언을 채택해 행정 사법개혁에 착수 하므로 정치적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정교( 政 敎 )분리와 교회재산의 국유화로 전쟁으로 부족해진 재정을 충당하고 다음해 성직자세속 법까지 제정하게 됩 니다. 파리민중의 지지를 확보한 국민의회는 길드와 동업조합 그리고 내국관세와 통행세를 폐기해 생산ㆍ판매자의 권리를 확장했으며 신분제구분으로 복잡했 던 사법구역과 행정구역을 정리하고 귀족계급이 권력을 행사하며 법이란 핑 계로 다중을 억압하고 수탈하던 기구인 고등법원을 폐지합니다. 최초의 헌법기초( 起 草 )에 착수해 1791년 9월 프랑스사회를 권력분립에 입 각한 단원제 입헌군주제와 유산계급이 지배ㆍ통제할 수 있는 헌법을 완성하 고 9월 30일 해체했으며 새로 들어선 입법의회는 왕당파 지롱드당의 미라 보, 라파예트 등이 장악하고 입헌왕정 정체를 수립하므로 착취가 만연한 사 회로 정착됩니다. 1791년 소집된 입법의회의가 미적거리는 사이 왕권으로 회귀하려고 반혁 명움직임을 보이던 루이16세가 도망가다 잡히는 바렌느 사건이 발생하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프랑스혁명의 자국전파를 우려해 왕을 해치면 전 쟁을 하겠다며 협박하므로 분노한 파리 시민들이 1792년 4월 왕궁을 습격 해 국왕과 왕비를 가둬 전쟁이 벌어집니다. 시민들이 왕권을 정지시키고 유산자입법의회를 부정하자 1792년 9월 국 민공회가 소집됐으며, 국민공회는 개회와 함께 공화정이 수립됐음을 선포하 고 기득질서를 유지하려고 시민을 억압하며 통제하는 관료(사법,행정,징세) 집단을 해산하고 저항하는 무리들을 처형하자며 열기를 높이니 대중들이 민 병대를 자원해 혁명이 준비됩니다. 느낌 131

인간이 자유로울 권리와 평등을 부정하고 침략전쟁으로 학살하며 재산을 강탈하고 비양심적인 갈취와 착취행위로 권력을 차지한 무리들이 자신들과 같은 부류 일개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무고한 수십만의 국민들을 희생 시키는 전쟁도 불사한다는데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국민공회에는 성직과 귀족을 대표하는 지롱드당과 신흥중산층과 상공인을 대표하는 자코뱅(산악당)당이 대립했는데 혁명전쟁승리와 민중세력을 배경으 로 자코뱅 당이 주도권을 잡자 1793년 6월 보통선거권, 노동권과 생존권, 공공지원을 보장하는 헌법과 봉건제를 무상폐지하고 유산자민주주의 기틀을 만듭니다. 국민공회는 총 749명 의원 중 지롱드 당( 黨 )이 약160명, 자코뱅을 중심 으로 산악파( 山 嶽 ) 약200명, 평원파( 平 原 派 )라는 중간파가 약400명이었는 데 루이가 무죄라며 비호하는 지롱드당과 처형을 주장하는 산악파가 대립하 다 혁명을 거부하는 지롱드당은 상퀼로트(파리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해 산 악파가 권력을 장악합니다. 산악파내부의 당쟁과 자코뱅의 에베르파와 왕당파의 당통파, 로베스피에르 파 등 3파로 분열한 상태에서 에베르파가 식량사정악화를 빌미로 1794년 3월 시민을 충동해 봉기를 일으켰다 체포돼 기요틴에서 처형됩니다. 혁명을 주장하는 자코뱅 당이 방토즈법을 공표하며 국민공회를 장악하자 국왕 루이16세를 단두대에서 공개처형하고 1793년 10월부터 의용군의 무력을 바탕으로 공안위원회강화, 국민총동원령, 최고가격제(물건 값 상승 제한)등으로 국민을 통제하던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자 정권을 지롱드세력 들이 차지합니다. 방토즈법은 프랑스혁명 중 1793년 2월 26일, 3월 5일 국민공회( 國 民 公 會 )가 선포한 법령으로 공화국 적(왕당파)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 재산 을 분배받을 애국자의 리스트(명단)를 작성하기로 한 것으로 로베스피에르파 ( 派 )가 정권을 장악할 미끼로 공표했으나 이듬해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자 7월 27일 완전히 폐기됐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공안ㆍ보안위원회를 강화하고 전 국민에게 군사봉사의 의 무를 강조하며 전쟁수행기간 동안은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뜻에서 혁명정 부 성립을 선언했고 반혁명분자라며 지방에 은신했던 지롱드파와 왕비 마 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롤랑부인 등 1년 동안 약 1만 명 이상을 기요틴(단두 대)으로 처형합니다. 공안위원회의 총력전체제는 1793년 말까지 국민을 무력으로 억압하기 위 느낌 132

해 대외전쟁으로 여론을 돌리고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폭력을 남용하면서 통제정치를 펼치다 국민들의 불신을 받게 됩니다. 혁명정부는 4월에 당통파를 숙청해 로베스피에르파가 권력을 독점하고 대 ( 對 )유럽전쟁수행으로 불가피하다며 최고가격제와 물자통제를 강화하고 무 료배급을 실시하며 반대자를 처형하던 혁명정부는 상퀼로트의 지지를 받지 못하다 독재자 로베스피에르가 1794년 7월 처형됨으로 테르미도르의 반 동 은 종료됩니다. 1794년 봄 이후 도시와 농촌의 독립적인 소생산자가 자유롭고 평등한 덕의 공화국 을 이상으로 외치던 로베스피에르는 당내에서 분파적 움직 임을 보인 왕당파의 당통 등과 과격파 에베르 등을 처단하며 권력을 강화하 다 파리민중(상퀼로트)의 지지를 잃자 1794년 7월 테르미도르가 로베스피 에르를 단두대로 보냈습니다. 테르미도르는 산악파가 내분과 독선으로 약화되자 귀족 지롱드당의 중간층 과 산악파 보수층이 연합해서 만든 중도주의 정치집단으로 국민들이 혁명에 대한 방향을 결정하지 못하는 사이 권력을 장악한 집단입니다. 1795년 입헌공화정과 유산자까지 투표할 수 있는 헌법을 만들고 5인의 총재가 협의해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연립총재정부를 출범시켰지만 5인의 연 방 총재정부는 선출된 자들끼리 이권을 위해 분열되고 권력을 잡은 무리들 이 자신의 이익 챙기기에만 혈안이 돼 부정ㆍ부패로 프랑스국민들을 실망하 게 만듭니다. 군부독재 출현 5인의 연방총재 정부대표들이 왕당파와 공화파로 분열돼 재산 늘리기에 급 급한 모습에 실망한 국민들이 불평등한 제도와 체제 때문에 굶주리니 평등 한세상을 만들자고 요구하며 혼란스러울 때 병사를 지휘하던 나폴레옹이 병 사들의 무력으로 총재정부를 무너트리고 정권을 찬탈합니다. 프랑수아 바뵈프는 인권선언만으론 굶주림을 달랠 수 없다. 며 봉건제도 를 폐지하고 공화정치를 하려면 생활혁명을 해야 한다며 호민관( 護 民 官 ) 느낌 133

지( 誌 )를 발행하고 법( 法 )과 신분의 평등, 교육과 취직기회균등, 사유토지금 지, 생산물의 배당과 분배는 국가가 공정하게 배급해야 평등한 사회가 된다 고 주장했습니다. 바뵈프는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비밀리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결사 조직을 만들고 착취가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변화시킬 계획으로 구( 舊 )자코뱅당원 에베르파( 派 ) 혁명군장병 소시민 노동자들과 연결시켜 무장봉기를 준비하다 발각돼 1796년 5월 체포됐으며 1년 만에 처형됩니다. 나폴레옹은 1784년 파리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졸업 후 지방연대 포병소 위로 임명됐으며 1789년 프랑스혁명 때 코르시카로 귀향해 파올리 장군휘 하에서 코르시카국민군 부사령에 취임한 이력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육군 으로부터 군대이탈 3회와 2중 군적이 문제돼 휴직 당했습니다. 1793년 가을 툴롱항구 왕당파반란을 토벌하는 여단부관으로 복귀해 처음 무훈을 세우고 F.로베스피에르의 동생과 우정을 맺어 이탈리아국경 군 지휘 를 맡았으나 왕당파 테르미도르(Ther midor)반동쿠데타 때 독재자 로베스 피에르파( 派 )로 몰려 체포됐다 석방됩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고 1795년 10월 5일 왕당파들이 혁명정부가 실시 했던 모든 정책을 백지화하자 상류층과 상인들이 방데미에르 달(10월을 말 함)13일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므로 수세에 몰린 국민 공회( 國 民 公 會 )가 나폴레옹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나폴레옹이 무차별적인 포 격으로 반란을 진압합니다. 반란을 재빠르게 진압한 공로로 재기의 기회를 잡은 나폴레옹은 1796년 3월 신분이 높은 바라스의 정부( 情 婦 )이자 사교계에서 이름 높은 조세핀과 재혼하므로 총재정부로부터 이탈리아 원정군사령관으로 임명됐으며, 이탈리 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1797년 2월 만토바를 점령하므로 신망을 얻게 됩니다. 알프스를 넘어 사르데냐를 정복하고 북이탈리아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권력 의 야심을 드러내고 점령지역 국민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자신은 점령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왔다며 프랑스혁명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인민공화국들을 건설하므로 인민의 지 지를 받습니다. 이런 소식이 프랑스로 전해져 생산노동을 하면서 불평등한 신분차별과 착 느낌 134

취로 굶주리고 고통 받는 인민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나폴레옹이 니스와 사 보이를 침략하고 빈으로 진격하자 오스트리아가 화의를 요청해와 10월에 캄포포르미오에서 네덜란드(현재 벨기에)와 이오니아제도를 점령하는 조약 을 체결하면서 지지를 굳힙니다. 1798년 5월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를 침략해 카이로에 입성 했지만 나폴레옹이 지휘하던 해군이 7월 아부키르만( 灣 )전투에서 영국함대 에 패하고 본국과 연락이 두절되자 홀로된 나폴레옹은 5만여 명의 병사들을 버리고 혼자 이집트를 탈출해 10월에 프랑스로 귀국했습니다. 영국은 증기기관 발명으로 생산기계가 발전해 생산되는 물질은 넘쳤지만 오랜 전쟁으로 인민들의 삶은 빈곤했으며 노동자들은 하루 15시간 이상씩 노동했고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던 여성과 연소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죽는 것을 견디지 못해 뭉쳐서 계속 파업을 일으키자 1799년 단결금지법을 발표합니다. 프랑스로 귀국한 나폴레옹은 5명의 총재가 논의해 정책을 집행하는 총재정 부를 무너트리고 왕권으로 회귀를 갈망하던 셰이에스 탈레랑 등과 손잡고 1799년 11월 9일(브뤼메르 쿠데타)군을 동원해 요인들을 감금해서 총재정 부를 무력화시키고 자신을 통령으로 추대하도록 강요하며 권력을 장악합니 다. 국민들을 무력으로 통제하지 못하면 권력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나폴레옹은 국민들이 정권찬탈행위에 반발하지 못하도록 억압하기 위해 혁 명초기 원성이 높아 해체시키고 국립민간방위대가 담당했던 치안유지 권을 박탈하고 파리경찰청을 복원ㆍ창설해 다시 경찰무력으로 국민을 억압ㆍ통제 했습니다.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1800년 경제안정을 위한다며 민간이 마음대로 은행을 만들어 찍고 잉글랜드은행이 찍어 유통하던 화폐발행을 금지시키고 자신의 사적주식회사로 프랑스은행을 설립해 1803년부터 정부가 임명하는 총재가 프랑스은행을 통제ㆍ관리하도록 하는 발권은행을 만들었습니다. 경찰무력으로 국민을 억압한 나폴레옹은 1802년 대중들의 불만을 달래고 질서를 유지한다며 제1편 시민의 권리, 인격보호, 주거, 후견인, 보호자, 부 모와 자식, 결혼, 혼인의 취소(이혼)등 제2편 소유권 사용권 재산권의 존 중 등, 제3편 상속 기부 부부재산계약 채무 등을 명시한 민법전을 만든 것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인간존중이 아니라 착취하고 갈취한 사유재산을 인정한다는 법률을 발표하 느낌 135

자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해 부를 축적하는 공업인들과 노동자ㆍ농민ㆍ어 민들이 땀 흘려 생산한 물질을 갈취해 부를 축적한 상인들, 그리고 생산은 하지 않고 갈취로 누리고 사는 성직자와 자유직업인 등이 지지해 권력이 안 정됩니다. 사람은 노동자ㆍ농민ㆍ어민이 땀 흘려 생산한 물질로 존재함에도 노동력 착취수단인 화폐를 발행하고 다중논의 구조인 지방자치를 폐지해 중앙집권 체제를 만들었으며 사법권과 행정직을 만들어 소수관료가 국민집단을 통 제ㆍ관리하며 수탈하는 틀을 만들고 절대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로마가톨릭 교회를 부활시킵니다. 공직이란 직책을 많이 만들면 만들수록 공직자들이 받는 봉급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많이 부과하므로 인민들은 굶주리며 피폐해지게 되는 것이고 생산직들은 그만큼의 노동력을 착취당해야 하며 공직자들이 자신의 직책에 충실할수록 국민들은 가혹하게 억압당하고 수탈당하게 됩니다. 관료무리들은 착취체제를 보위하기 위해 국민을 억압ㆍ통제하고 세금이나 벌금이란 명분으로 수탈하는 것이며 상명하복의 명령체계 때문에 상사가 자 신의 위법을 은폐하기 위해 지시해도 이성과 양심도 없이 그 명령을 완수해 야 합니다. 관료들이 자신의 임무라면서 국민의 자유를 부정하고 억압하며 통제하고 수탈 할수록 자신의 이성이나 양심도 박탈당하고 자율성과 천부의 권리도 통제당하며 상사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체제의 틀에 갇힌 로봇이 됩니다. 혈세로 먹고 사는 관료란 승진이나 좋은 보직을 배정할 권한이 상사에게 있고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면 무능력자로 분류돼 도태되기 때문에 반드시 상사의 명령을 완수해야하며 상사에게 아부하기 위해 상납하므로 부정부패 를 조장하는 체제를 보위하는 조직입니다. 또한 상급관료들은 하급관료가 자신의 명령에 고분고분 복종하도록 길들이 기 위해 고의적으로 실수를 조장하거나 불법행위를 하도록 유도하고 하급관 료가 실수를 하거나 불법행위를 하면 그것을 약점으로 복종시킵니다. 공공업무를 집행하는 무리들은 스스로 다수 인민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규칙(법률)을 만들거나 임금노예면서 노예관리자가 돼 각종 징수란 명 분으로 수탈하며 인민들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통제ㆍ관리에 충실 할수록 인민들의 반발은 강화되고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면 유혈충돌로 발전 합니다. 느낌 136

선출직관료는 임기가 있고 다시 선출되려면 인민들의 환심을 사야 하므로 다중의 눈치를 보지만 임명직관료는 큰 비리나 실수가 없으면 정년퇴직까지 임기가 보장되니 선출직관료보다 더 체제를 지키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선봉대가 됩니다. 1800년 사법관과 관리를 지방민의 추천으로 선출하던 선거제를 폐지했으 며 각 지방 도지사도 통령이 지명하고 유산자는 정권이 지명한 사람에게 투 표만하도록 했으며 양원제입법부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대의제와 입법권한을 정부가 행사하면서 법률발의권마저 행정부만 행사하도록 했습니다. 중앙집권체제로 정비한 나폴레옹은 1802년 인민투표로 선출직통령이 되 자 1804년 봄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며 절대 권력을 장악했지만 상공인들 의 착취와 임명직공직자들의 수탈이 극심해 노동자들이 생산한 물질은 넘치 지만 농업은 피폐해지고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일자리 없는 다수인민들은 굶 주림에 허덕입니다. 굶주린 인민대중들이 저항하자 무력으로 통제하기 위해 혁명정신인 평등과 자유 그리고 박애를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켜 오스트리아를 침략하고 유럽대 륙을 점령했는데 영국을 굴복시키지 못하자 1808년 베를린칙령으로 대륙 과 섬나라인 영국의 통상을 금지시키는 대륙봉쇄령으로 경제압박을 꾀합니 다. 대륙봉쇄령은 지하자원과 물자를 자급자족할 수 없는 유럽지역 각 국가들 의 반 나폴레옹 감정을 일으켰으며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러시아를 본 보기로 응징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강화하려면 기득권층의 지지를 확보해야 하므로 1809년 조세핀과 이혼하고 이듬해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재혼했습니다. 프랑스가 대륙봉쇄령을 내리자 영국도 프랑스를 압박하기 위해 해상봉쇄정 책으로 맞섰는데 1812년 프랑스로 향하던 미국상선을 영국이 나포하자 미 국은 상업상의 자유가 있는데 통상활동을 방해받았다며 전쟁을 선포해 제2 의 독립전쟁이라고 부르는 미ㆍ영 전쟁이 발생합니다. 영국 육ㆍ해군은 체서피크 만( 灣 )해안을 초토화시켰고 블레이던즈버그 전투 에서 승리한 영국은 미국의 워싱턴D.C 공공건물들을 불태워 지금의 대통령 궁도 그때 불탄 것을 하얀 페인트로 칠해 화이트하우스로 불리게 됐으며 미 국은 총 23,765명의 사상자를 영국은 총 8,618명의 사상자를 내고 성과 없이 끝납니다. 1812년 모스크바만 점령하면 러시아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나 느낌 137

폴레옹은 혹독한 추위와 기상변화를 파악하지 못해 의욕을 상실한 병사들과 함께 침략전쟁에 패했으며 1814년 3월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 아군에 의해 파리를 점령당하고 전쟁의 책임을 물어 엘바 섬으로 유배됩니 다. 1811년 영국에서는 중부 북부의 직물공업지대에서 노동자들을 하루 15 시간 이상씩 노동시키며 가족부양은 고사하고 빵 한개도 못 사 본인조차 생 활할 수 없도록 임금을 지급하면서 엄청난 이윤을 챙긴 상공인들이 자동수 직기와 뮬 방적기로 생산시스템을 바꾸고 노동자를 해고하는 일들이 발생합 니다. 영국정부의 단결금지법으로 파업이나 공장점거 등 집단저항을 할 수 없게 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해고된 원인이 상대보다 싸게 생산하고 싸게 판매 해야 유지되는 경쟁으로 모두에게 일자리를 보장할 수 없는 체제모순 때문 에 발생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기계 탓이라며 기계파괴 운동을 벌입 니다. 노팅엄셔 요크셔 랭커셔를 중심으로 정체불명의 N.러드라는 인물의 지 도아래 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됐다고 해서 러다이트라 불렀는데 비밀결사 ( 秘 密 結 社 )형식을 취하고 야간에 복면을 쓰고 기계를 파괴했기 때문에 치안 당국도 실태를 파악하지 못했고 일반인들에겐 신비집단으로 알려졌습니다. 나폴레옹이 유배되자 국외로 망명해 독일코블렌츠에서 반( 反 )혁명 해방군의 수령이 되어 이탈리아 영국 등지를 유랑하던 루이16세 동생 프로방스백작 이 프랑스로 돌아와 입헌군주제를 약속하고 노동자나 농민 등 억압받는 민 중들의 권리와 혁명의 자유도 인정한다는 헌법을 공포하고 루이18세로 등 극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엘바 섬에 유배됐다 탈출한 나폴레옹이 이듬해 1815년 3월 파리로 돌아 오자 루이18세는 벨기에의 젠트(Jent)로 도망가고 나폴레옹이 다시 황제 (백일천하)에 올랐으나 영국과 전쟁에 나선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하고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자 루이 18세는 파리로 돌아와 7월 8일 다시 왕 위를 차지합니다. 루이18세는 입법권과 사법권의 독립, 법 앞에 만인 평등, 개인 재산권의 불가침, 기본적국민의 인권을 규정한 헌법을 공표하고 1815년 8월 초 입 헌군주제의 약속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 왕당파가 압승을 하자 로마가톨릭 추기경인 리셜리외공을 총리로 등용해 혁명사상인 자유와 평등주의정신을 억압했습니다. 느낌 138

억압에 반발한 인민이 늘어나자 1816년 의회를 해산시키고 다시 실시한 선거에서 입헌군주파가 다수가 되자 구( 舊 )귀족과 재산을 축적한 상공인들의 비호로 연명하다 1821년 왕당파의 J.B.빌렐 백작이 수상이 되니 다시 자 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며 혁명정신을 말살하고 절대왕정복귀로 회 귀하려다 1824년 사망합니다. 1790년 새뮤얼 크럼프턴이 뮬 방적기를 발명해 면사를 대량생산할 수 있 게 됐고 증기기관을 발전시킨 볼턴 앤드 와트가 설계도를 제공하고 업자들 이 부품을 만들어 1814년 석탄을 실어 나르는 기관차가 더럼광산에서 항 구까지 운행됐으며 1825년 세계 최초의 철도용기관차 로코모션호가 만들 어졌습니다. 1819년 영국에서는 전쟁으로 생활고에 고통 받던 랭커셔 주 직물공업지 대에서 부터 대중들이 분배를 요구하는 시위가 시작돼 8월 16일 맨체스터 의 세인트피터광장에서 직조공을 중심으로 약 6만 명이 의회개혁과 선거권 확대까지 요구하자 기병대가 습격해 11명이 사망하고 400명이 부상당하는 피털루학살이 벌어집니다. 정권은 1819년 빈부격차가 발생된 것은 상인들과 영주들이 은행을 설립 하고 마음대로 화폐를 찍어 땀 흘려 생산한 물질과 교환되지 않는 불환화폐 가 넘쳐난 탓이라며 화폐를 찍을 때는 찍는 양만큼의 금을 예치하고 금의 양에 맞춰 화폐를 발행하라며 금본위제화폐를 실시합니다. 1821년 그리스는 1814년 해방을 목표로 조직된 친우회(Φιλική Εταιρεί α)를 중심으로 자유가 보장되는 헌법을 채택하고 3월 6일 혁명주의자들이 오스만제국에 대항하며 도나우공국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혁명전쟁을 일 으켜 유럽열강들의 지원을 받으며 1829년 독립되고 그리스왕국도 독립했 습니다. 한편 스페인왕실은 1812년 선포한 평등을 보장하는 자유주의헌법을 시행 하지 않고 왕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폭압적인정치로 통제하고 수탈하므로 빈곤에 견디지 못한 인민들의 분노가 폭발해 혁명이 발생했으며 카디스에서 일어서 군사반란으로 왕실은 전복되고 페르디난도 7세는 반란군의 포로가 됩니다. 러시아는 스페인의 자유주의운동을 진압해야 한다며 5국 공동개입을 주장 했는데 영국은 자유주의 운동이 국경을 넘어 유럽공동체에 현실적인 위협 을 주는 경우에만 간섭이 정당화된다. 라는 명분을 들어 러시아가 스페인 반란에 개입하는 것을 빌미로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려 한다고 우려하 느낌 139

며 반대합니다. 스페인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이 1822년 10월 베로나에서 회 의를 열었으나 러시아는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영국은 개입할 수 없다 고 주장해 합의점을 찾지 못했는데 12월 오스트리아제국의 나폴리왕국이 단독으로 개입하려고 하니 프랑스가 스페인으로 진군해 진압됩니다. 1824년 루이18세가 죽자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동생 샤를10세는 부활 한 가톨릭교회의 옹호를 받고 왕권신수설원칙으로 돌아가자며 선거의 평등 권이 헌법에 보장됐음에도 세금을 많이 낸 사람에 대해서만 선거권을 허용 한다며 1830년 의회를 해산하고 7월에 새로운 선거를 실시했습니다. 이렇게 치러진 선거결과에도 의회군주파가 승리하자 샤를은 7월 26일 칙 령으로 선거권을 제한하고 출판의 자유까지 금지시키면서 선출된 의회를 해 산한다고 공포하므로 파리 시민들이 27일부터 29일까지(영광의 3일) 시가 전을 벌이며 반발했고 당황한 샤를은 총리 폴리냐크 공을 파면하면서 무마 하려다 쫓겨납니다. 26일 자유주의저널리즘이 독재 권력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자 27일 소( 小 ) 상공인 기능공 노동자 학생 등 파리 시민들이 바리케이드를 치면서 군과 충돌했는데 병사들이 알제리에 파견돼 있었기 때문에 병력과 탄약이 부족하 고 자유를 갈망하는 병사들이 무력진압을 거부하므로 정부 측이 밀립니다. 28일엔 참여하는 시민들과 바리케이드수가 늘었고 금지했던 삼색기( 三 色 旗 )가 나부꼈으며 시가전에서 군이 패하고 29일 시민들이 왕궁을 장악하자 샤를은 7월 칙령의 철회 및 내각교체를 협상카드로 내고 타협을 시도하다 거절당하니 8월 2일 손자 보르도공( 公 )에게 양위하고 영국으로 도망갔습니 다. 의회군주를 요구하는 시민들은 왕권을 부정하는데 양위한다고 보르도공의 권력이 인정되는 것도 아니고 국민이 추천하기로 했지만 함께 싸웠던 시민 들 중 입헌왕정파와 재산을 축적한 상공인들은 개혁을 거부하며 오를레앙가 ( 家 )의 아들 루이필리프를 추대해 다시 왕가가 권력을 잡습니다. 침략전쟁으로 인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강탈하며 권력을 만든 무리들은 자 신들의 혈육이 대를 이어 권력을 누리기 위해 혈통과 가족주의를 강조하는 것이며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할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노동자는 대를 이어 노동하고 정치가는 대를 이어 정치를 한다는 이데올로 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느낌 140

유럽은 나폴레옹의 침략전쟁이 끝나고 평등과 자유를 요구하는 인민들 의 요구가 거세져 1830년 벨기에에서 독립혁명이 일어나고 미국에서 는 1831년 8월 21일 흑인노예 냇 터너(Nat Turner/Nathaniel Turner)가 중심이 돼 사우스햄턴에서 노예들을 억압ㆍ갈취하는 백인농장 주들을 살해합니다. 저항은 이틀 만에 진압되고 몇 개월 동안 숨어 다니던 냇 터너는 10월 30일 체포돼 11월 5일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11월 11일에 교수형으로 살 해되자 공포에 떨었던 남부백인사회는 이 사건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노예의 교육과 이동 그리고 집회를 금지하는 억압적인 법률을 제정합니다. 러시아에서는 알렉산드르1세가 죽자 3주 동안 후계계승논쟁으로 혼란스러 웠는데 1825년 12월 14일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일부 청년장교들이 차르(군주에 대한 호칭)왕조를 잇는 니콜라이1세에게 충성을 거부하고 입헌 군주제와 농노제폐지 등 서부유럽 같이 평등과 자유주의사회를 건설하자며 봉기를 계획했습니다. 봉기는 준비결의와 조직이 충분하지 못한데다 실행직전 북부결사의 지도자 인 파벨페스텔이 체포돼 니콜라이1세에게 계획이 알려지면서 사전에 진압됐 으며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새로운 사회를 통치하기로 한 세르게이 트루베츠 코이 공작이 도망치고 봉기를 일으켰던 체르니고프연대까지 진압되며 실패 합니다. 니콜라이1세가 이 사건에 직접 참여하여 광범위하게 조사한 결과 121명의 데카브리스트가 재판을 받았고 그 가운데 파벨 페스텔, 릴리예프, 카홉스키,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페스트체프 류민 등 5명은 1826년 7월 25일에 처 형당했으며 31명이 감옥에 갇히고 나머지 푸시킨을 포함한 사람들은 시베 리아로 유배됐습니다. 데카브리스트(러시아 말로 12월이라는 말)의 난, 혹은 12월 혁명당원이란 나폴레옹침략전쟁 당시 유럽의 자유와 평등사상에 영향을 받은 젊은 청년장 교들이 1825년12월 충성을 거부하고 입헌군주제의 실현을 목표로 일으킨 사건을 말하는 것이며 이를 진압한 니콜라이1세는 자유에 위협을 느껴 전제 정치를 더욱 강화합니다. 느낌 141

노동자저항과 혁명 프랑스는 샤를을 몰아내고 하원이 공위( 空 位 )를 선언하자 입헌왕정파와 재 산을 축적한 상공인들이 오를레앙공의 아들 루이필리프를 추대하고 새로운 헌장을 지킬 것을 맹세하면서 다시 왕가가 권력을 잡았는데도 이를 선거로 선출했다고 국민의 왕 또는 바리케이드 왕이라고 칭했습니다. 1830년 7월 혁명은 선거로 루이필리프1세를 선출하며 보수적인 입헌왕 정( 立 憲 王 政 )을 시장자유주의로 바꿨을 뿐 귀족과 왕족, 부를 축적한 소수가 다중인민을 억압하는 지배체제를 만들어 분배나 신분과 빈부격차가 해소될 수 없었는데도 벨기에 독립과 빈체제 국제자유주의운동에 기폭제가 됩니다. 1789년 프랑스에서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념이 전파돼 있던 유럽에 1830년 7월 프랑스혁명은 들불처럼 번졌으며 남부네덜란드에서 7월 혁명 이후 한 달 만에 브뤼셀에서 혁명이 발생되고 같은 해 10월 벨기에는 독립 을 선언했으며 런던조약을 통해 폴란드는 국제적으로 독립국가로 승인받게 됩니다. 왕족이 권좌에 앉았지만 절대 권력을 행사할 권한은 상실했으며 온갖 착취 와 갈취로 재산을 축적한 상공인과 그들의 후원과 사주를 받는 하수인들이 의회에 진출하면서 언제라도 능력이 없다는 핑계로 의회를 통해 왕족을 몰 아내고 권력을 찬탈할 수 있기 때문에 부자들이 권력을 행사합니다. 국민공회는 겨우 입법부에 법률을 제출할 권리를 인정받았고 재산을 축적 한 사람에게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지면서 유산자권력이 강화됐을 뿐 노동자와 재산 없는 농민들은 자신이 땀 흘린 노동 결과물을 자신이 취급하 거나 처분할 권리 또는 선거권이나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확보 하지 못했습니다. 혁명이후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부자들은 귀족들의 지원을 받으며 영국에 서 들여온 자동생산기계로 공장을 바꾸고 노동자들에게 생계에도 부족한 최 저임금을 주며 엄청난 이윤을 남겨 부를 축적했고, 상인들은 노동자와 농민 들이 생산한 물질을 대량구매라며 헐값에 거둬 비싼 가격에 파는 폭리로 부 를 축적합니다. 모두에게 균등하게 일자리와 재물을 분배할 수 없어 발생한 1830년 공황 은 빈부격차가 점점 더 벌어져 실업으로 굶주린 인민들 불만이 높아지자 일 자리를 위해 철도공사를 시작한 프랑스는 1837년 파리에서 생제르맹앙레 간에 철도를 개통했으며 도시재건축과 철도연장 공사를 시작합니다. 느낌 142

정권의 이런 조치는 공정한 분배가 되지 않는 임시방편으로 노동자들은 죽 도록 노동해도 정해진 저임금을 받으며 산업재해로 불구가 되고 혈세는 건 설업자들 주머니에 들어가면서 빈부격차만 점점 더 벌어져 공황만 깊어집니 다. 폴란드에서는 1832년 폴란드생산자동맹을 만들어 강령으로[공유재산, 사 회적집산주의, 무계급사회, 민중-민족의 지배]를 주장했으며 1836년 폴 란드인민 회로 발전해 강령으로[폴란드인민과 연대, 평등한 민주주의, 국제 연대, 농민대중과 함께 사유재산의 폐지와 사회적 소유]를 주장하다 1863 년 1월 봉기합니다. 바르샤바 젊은이들이 Poland, Lithuania, Rusia인들에게 아시아의 봉 건제와 유럽의 착취제도를 깨트리려면 목숨 건 투쟁을 해야 한다며 무기를 들것을 호소했고 모든 시민은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등해야 한다며 경작농지는 농민이 소유해야 하니 토지가 없는 농민에게 왕령지의 땅을 분 배하자고 했습니다. 대신 왕족이 아닌 지주들에겐 배상하고 루테니아인(오늘날 우크라이나인과, 벨로루시인)과 유대인에 대해선 어떠한 차별도 폐지해야 한다며 형제적 동 참을 호소하자 초기에는 노동자, 대학생만 참여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농민과 빈민들이 호응하므로 재산을 몰수당할까 두려워한 지주들이 봉기에 앞장섭니다. 봉기는 성공했지만 명망 있는 자들이 임시정부 권력을 차지하고 무산자에 대한 토지분배를 거부하며 열강개입을 호소하자 프랑스가 군을 파병해 월등 한 화력으로 혁명군을 학살하므로 평등을 주장한 사람들이 수세에 몰려 산 속에 숨어 저항했고 러시아에서는 1864년 3월 2일 차르가 농노해방령을 내리게 됩니다. 영국에서는 노동력을 착취해 부를 축적한 상공인들이 생산기계 자동화로 10명의 노동자가 만들던 물질을 1명이 생산해도 더 많은 물질이 만들어지 자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했으며 해고된 노동자들이 수입이 없어 소비를 못 하니 소상인들이 폐업하는 공황이 발생돼 노동자들과 서민의 빈곤은 극에 달했습니다. 실직한 노동자와 도시서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 자신들의 노동력과 재물을 갈취해 부자가 된 무리들이 먹다버린 쓰레기통을 뒤져 썩은 음식을 먹고 병 을 앓기도 했으며 병들어 신음하는 도시빈민을 부자들이 더럽고 재수 없다 며 폭행하고 쫓아내니 이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 저항하게 됩니다. 느낌 143

노동가치가 감소하고 공장 법으로 힘이 약한 여성과 나이어린 노동자를 고 용하면서 저항력이 축소되자 저임금을 지급하며 장시간으로 노동력을 착취 하므로 노동환경이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상태로 방치돼 노동자들의 생명이 짧아졌습니다. 이렇게 공장법이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 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쥐어짤 수 있도록 상공인들의 이익을 보장 하기 위해 1802년 처음 만들어 진 것입니다. 공장 법이 만들어 지면서 기업은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상인들은 대 중을 합법적으로 갈취할 수 있게 됐으며 여성과 연소노동자들에게 장시간노 동을 시키는 법률적 근거가 마련되자 저임금으로 장시간노동자의 노동력을 갈취하므로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참혹해졌습니다. 상공인을 위한 공장 법임에도 상공인들은 지키지 않았으며 노동자들은 공 장 법에 의해 잠도 못자고 먹을 것도 부족한 상태에서 죽도록 생산하면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는데 이 모든 원인이 권력을 귀족과 유산자들만 행사 하는 선거에 있다며 파업을 일으키니 1837년 임시방편으로 다시 개정한 것입니다. 1840년 프랑스의 프루동은 대학의 현상논문에서 소유란 무엇인가 라 는 저서를 내고 생산노동 없이 축적한 재산이란 도둑질한 물건이다. 라고 정의하면서 농부가 자신이 일할 토지와 장인이 생산도구나 작업장을 소유할 권리를 갖는 것이 본질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1842년 소유자에 대한경고 (Averti ssementau xpropri etaires) 라는 저서를 발행한 후 권력의 미움을 받아 체포됐으나 그의 깊은 학문적 이해가 부족한 판사들이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고 양심적으로 판결함으로 석방됐으며 1843년 자신의 인쇄소를 팔고 수상운수회사에 사무책임자로 취업했습니다. 거기서 직조공으로 조직된 비밀결사회원과 접촉하다 프로이센의 마르크스 와 러시아의 바쿠닌을 만났으며 이들이 노동자가 공장의 주인이 되는 사회 를 건설해야 한다. 고 하자 프루동은 권력은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되므 로 노동자집단독재는 국가권력의 비대화를 가져와 다중인민에게 더 가혹한 착취와 억압을 안겨주므로 누구에게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 다. 고 주장합니다. 프루동은 소유는 권력=착취=지배로 통하는 수단으로 국가권력기구가 생기 느낌 144

고 통제라는 틀을 갖추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되기 때문에 평등을 부정하는 결과가 발생되므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집단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평등과 자유를 부정하고 집단지배질서를 만들 뿐 이라는 것입니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난 해 국회의원에 선출됐으나[민중 Lepe uple]지 에 나폴레옹3세를 비판하는 글과 경제적 모순 또는 빈곤의 철학 이라는 저서를 발행하자 3년의 징역과 3,000프랑의 벌금형을 선고받아 벨기에 로 피신했다 파리로 돌아와 체포됐으며 생트펠라지 감옥에서 옥고를 치루다 1852년 석방됩니다. 저서 내용은 화폐와 이자를 사회악의 근원으로 보고 노동으로 취득한 재산 만 인정하려면 생산노동에 기여한 노동량을 표기하는 증권을 발행하고 교환 할 수 있는 증권은행설립을 주장했는데, 노동력을 교환하는 증권은행을 만 들면 화폐처럼 노동생산물을 착취하는 계층이 존치하게 된다는 사실은 간과 됐습니다. 1852년 에프라지 피에가르드(Euphrasie Piegard)와 결혼하고 혁 명가의 고백 민중의 목소리 를 발행했다 기소돼 또다시 감옥생활을 했 으며 1858년 혁명과 교회의 정의론 을 발행하고 다시 3년의 징역형과 4,000프랑의 벌금을 선고받고 브뤼셀로 피신해 레프톨스토이를 만납니다. 1862년 파리로 돌아와 노동계급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 를 쓰는 등 재산소유의 근거를 법적, 심리적, 경제적으로 나누어 조목조목 분석하고 그 어떤 이유로도 생산수단의 개인소유는 정당화될 수 없어 철폐해야 한다며 대안으로 직접생산자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라던 프루동은 1865년 갑작 스럽게 사망했습니다. 영국의 차티스트운동은 1840년 오코너가 맨체스터에서 전국헌장협회를 설립해 1842년에 325만 명이 서명한 청원서를 제출했고 같은 해 버밍엄 에서 정치동맹 대신 완전한 선거권동맹을 조직하며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했 다 거부되자 동맹이 깨져 러벗이 물러났으며 북부에 번졌던 파업운동은 무 력으로 진압됩니다. 오코너는 노던 스타 및 전국헌장협회를 통해 계속 저항했으나 성과 없이 물러나고 G.J.하니가 대표로 선출돼 마르크스 엥겔스와 협력하며 1845년 설립한 우애( 友 愛 )민주주의협회를 기반으로 노동자조직에 호소하면서 570 만 명의 청원서명을 모아 4월 런던에서 대 청원시위운동을 시도합니다. 시위는 지배질서를 보위하는 경찰과 군의 무력에 대항하지 못하면서 진 느낌 145

압됐으며 청원서를 하원의원에 전달했지만 이것 역시 부결됐을 뿐 아니라 1847년 기득권들이 노동자를 보호한다며 10시간 노동법 등 보호입법을 만들고 노동자들의 저항을 달래므로 노동자투쟁이 다소 약화됩니다. 노동자저항이 약화되자 기득권들은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을 법질서라는 명 분으로 체포하고 투옥시키는 등 탄압이 극심해져 전국헌장협회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차티스트운동은 1858년 대회 후 소멸됐습니다. 마르크스는1844년 경제학 철학초고( 草 稿 ) 와 법철학비판서설( 法 哲 學 批 判 序 說 ) 을 발표했으며 1842년 처음 만났던 F.엥겔스와 1845년 파리 에서 재회해 공동으로 신성가족 과 독일이데올로기 라는 책을 집필했 으며 1859년 경제학이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경제학비판>의 서언( 序 言 )에 유명한 유물사관에 대한 공식을 발표하므로 새로운 철학의 장을 정립 설명 합니다. 1835년 졸업논문<직업 선택에 관한 한 젊은이의 성찰>에서 사람은 노예 같은 도구로 일하기보다 자기 영역에서 독립하고 인류에 봉사할 수 있는 분 야를 가져야 한다.(중략) 우리는 소명이라 믿는 직업을 마음먹은 대로 차지 할 수 없다. 미처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사회적관계가 어느 정도 결정 되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1847년에 P.J.프루동(1809~1865)이 발표한 빈곤의 철학 을 관념 적이라 비판하고 과학적으로 분석했다면서 철학의 빈곤 을 썼으며, 그해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되자 엥겔스와 함께 런던으로 건너가 공산 주의자동맹 강령인 공산당선언 을 공동명의로 집필하고 2월에 발표합니 다. 이 선언은 (전략..)지금까지 이어진 인류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자유 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장인과 직인, 한 마디로 억압자 와 피억압자는 항상 서로 대립하면서 때로는 숨겨진 때로는 공공연한 싸움 을 벌였다. (중략..)모든 지배계급을 공산주의혁명 앞에 떨게 하라, 프롤레타 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 전 세계노동 자여 단결하라! 란 내용입니다. 마르크스가 전반적으로 주장한 내용은 인류는 원시시대와 노예제시대를 거 쳐 산업사회로 발전했으며 산업사회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때문에 생산하 는 노동자와 농민들이 노동할수록 노동으로 이익을 남기는 공장주나 토지소 유주는 많은 부를 축적하지만 물질을 직접 생산하는 노동자는 더욱 빈곤해 진다는 것입니다. 느낌 146

모든 사물은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 발전하는 것이며, 물질생산단 계로 첫 번째는 노동대상이 있어야 하고, 두 번째는 노동할 도구가 있어야 하며, 세 번째는 생산할 노동력이 있으면 생산이 이루어진다는 생산의 3요 소를 설명하므로 인류가 생존하는데 필요한 모든 물질은 노동으로 창출된다 는 것을 밝혔습니다. 산업사회는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없고 생산수단을 소유한 유산자중심의 분배와 생산경쟁 때문에 분배불균등이 발생되면서 빈 부격차가 커지면 수입 없는 다수가 소비를 못하는 공황이 발생되므로 모두 에게 일자리를 보장하고 공정하게 분배하는 사회로 발전하지 못하면 해소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산업사회는 재산을 소유하고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유산자와 가진 것 이 없어 몸으로 노동하며 착취당하는 무산자로 나뉘고, 착취는 잉여노동에 서 발생하므로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생산을 멈추면 착취할 수 없으니 프롤 레타리아가 노동을 중단하고 단결로 저항해야 사회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모든 노동자가 생산을 멈추고 단결하고 저항해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철 폐하면 억압과 착취가 없는 평등한사회가 될 수 있으며 과학이 발달해 모든 사람이 풍족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물질이 생산되는 단계가 되면 능력껏 일하 고 필요한 만큼 물질을 분배받는 공산주의사회가 된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공정하게 노동하고 분배받는 공산주의사회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 이 아니라 무산자들이 단결하고 뭉쳐서 혈세로 살며 착취체제를 보위하는 관료집단을 무찌르고 억압과 통제로 유지되는 모든 구질서와 제도를 깨뜨려 야 평등한 사회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사망(1883년)한 때는 전기와 모터가 발전되던 시기로 사후 TV와 생산로봇까지 출현해 산업사회가 아니라 물건을 파는 상업사회가 되 고 기득권이 생산노동계층을 무력으로 통제하려고 관리직, 경비직, 관료들 을 늘리며 저항을 왜곡하고 분열 시키려고 서비스, 예술, 연예, 잡기, 스포 츠, 판매 등 생산노동보다 비생산노동(임금노예)계층을 더 많이 만든다는 사 실을 발견치 못했습니다. 종교는 사랑과 평화, 가족관계 등 기득권을 위한 관념적 사고를 설교하며 다중을 세뇌시켜 무산자들이 과학적 분석을 할 수 없도록 방해하고, 은혜와 온정주의를 강조해 억압과 착취를 당해도 순종해야 평화가 유지된다고 설교 하면서 저항력을 억제하는 마약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평화란 힘이라거나 권한 또는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고 동등한 입 느낌 147

장에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할 때 이루어 질 수 있음에도 어느 한쪽이 억압 받거나 착취당하면서 불평등에 저항하지 않고 계속평화가 이루어졌다면 그 것은 굴종과 복종이 오래 동안 유지됐다는 것을 뜻합니다. 1846년 2월 22일 폴란드에서는 공화국 농민들이 민족정부를 선언하고 봉기를 일으켜 크라쿠프(폴란드의 전통 민속)정신을 바탕으로 농민들이 토 지의 소유자가 되며 소작과 부역이 사라지는 사회체제를 건설할 것 이라면 서 봉기지도부를 포함한 모든 슐라흐타의 장원을 습격하고 영주와 그 가족 들을 살해했습니다. 농민들은 기득권의 착취와 수탈을 거부하며 저항했는데 지도부는 농민들의 분노를 애국으로 몰기위해 슐라흐타에게 향하도록 하자 다른 지역은 폴란드 왕령 경작지였지만 산악지대농민들은 오스트리아가 경작지를 매각하므로 생 계터전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지도를 부정하고 오스트리아제국주의 타도를 주장합니다. 1832년부터 시작한 폴란드의 크라쿠프봉기는 런던의 폴란드생산자동맹 강령으로 인민의 연대, 공유재산, 사회적 집산주의, 무계급사회, 민중-민 족의 지배 를 강조했으나 1836년 폴란드 인민의 강령 으로 폴란드 인 민과의 적극적 연대, 혁명적민주주의, 국제연대, 사유재산의 폐지와 사회적 소유 를 내세웁니다.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폴란드크라쿠프봉기는 지도를 자청하는 귀족들과 독 립을 주장하는 왕족간의 권력다툼이 되면서 의견이 합쳐지지 못했으며 오스 트리아군대가 부다페스트로 진입해 저항하던 농민들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학살하며 강제 진압하므로 수천 명의 망명자를 낳고 실패합니다. 프랑스는 루소를 존경하는 프루동, 바쿠닌 등의 자유주의사상에 영향을 받 아 1847년 초부터 개혁운동이 전개됐는데 루이필리프와 권력을 행사하는 무리들이 공개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를 금지하자 연회 라는 편법을 사용해 유산자들과 억압받는 세력이 모여 집회를 했습니다. 1848년 프랑스는 1830년 혁명으로 왕조통치를 종식했음에도 유산자 민 주주의를 만들고 옹립한 루이필리프정권이 중도주의군주제 형태로 시장자유 주의를 고수하면서 노동자와 농민들을 수탈해 생산하는 사람들이 노력할수 록 빈부격차가 커지므로 굶주린 인민들이 다시 저항한 것입니다. 1789년에 제정된 헌법(제1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가 자유롭 고 권리도 평등하다. 제2조 모든 정치적 결합목적은 인간의 자연권과 양도 느낌 148

할 수 없는 권리에 있다. 제3조 모든 주권(권력)의 원리는 인민 속에 있다. 제4조 모든 사람의 자유는 존중돼야 하며 타인에게 피해가 되지 않으면 무 엇이든 할 수 있다.)을 준수하라고 요구했습니다. 1848년 2월 22일 파리에서 열린 공개토론회가 정치적시위로 발전하자 혈세로 먹고살며 지배질서를 보위하는 경찰이 시위를 강제진압하다 2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므로 이에 분노한 민중들이 더욱 거세게 저항하며 24 일 왕궁까지 점령하자 루이필리프가 퇴위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망명해서 임 시정부를 구성합니다. 시청에 설치한 임시정부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성년남자(여성제외)의 보통 선거제를 선언하고 실업자를 구제한다며 국립작업장을 설립했는데 4월 23 일의 선거에서 유산자와 기회주의자들이 압승하자 새로 선출된 의회가 이익 이 없다며 국립작업장을 폐쇄하므로 노동자들이 6월에 저항(6.23~26)했 지만 혈세로 사는 군에 의해 진압됩니다.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노동자와 농민 모두가 참여해 투표로 대표를 선출하 는 선거를 실시하게 되자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농민이나 다수대중 을 수탈 또는 갈취해 부를 축적한 은행가 대지주 산업자본가들이 질서당 ( 秩 序 黨 )을 결성하고 공화주의파와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주장하는 루이블랑 등과 대립합니다. 다수결에 의한 선거선출 대의제는 선거자금을 사용할 만큼 부를 축적한 유 산자와 다수의 위력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는 기회주의자, 억압에 저 항하다 명망을 얻은 사람에게 신분상승의 기회를 제공하며 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변질돼 소수가 다수를 지배ㆍ통제하는 착취체제지 만인이 공정하 게 의견을 관철할 수 있는 민주제도가 아닙니다. 유산자ㆍ위선자 민주주의 다중이 투표로 선출하는 대의제는 당선되면 세비로 생활이 보장되고 각종 법률이나 정책을 입안할 권한이 생겨 이익 관련자들이 뇌물을 제공하므로 자연스럽게 재산이 축적되니 선출되면 특권을 누리는 기득권으로 변신하고 투표자는 선출하는 거수기역할만 하는 것입니다. 대의제는 다수에겐 선출할 권리만 있을 뿐 선출된 소수가 권력을 행사할 느낌 149

수 있고, 임기가 보장되기 때문에 선출자가 다중이 갈취ㆍ통제당하고 피해 를 입는 법률이나 정책을 합의해도 다중은 참여할 수 없고 권리만 박탈당합 니다. 다수결이 민주주의라는 왜곡으로 특정인이나 특정사상을 지지 하는 다수를 확보하면 권력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전체를 위한 정책은 없고, 온갖 권모 술수와 조작, 음모와 모함이 횡횡하고 집단이나 조직을 편 가르며 분열시키 는 수단이 됐고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는 폭력이 정당화되면서 다중을 통제 하는 수단이 됩니다. 모든 집단이나 조직은 다수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며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 는 다수폭력이 합법칙인양 강제되고 아무리 정당하고 합리적이라도 불합리 를 찬동하는 다수에 의해 소수의 정의롭고 진솔한 사상이 배척당해도 불의 에 저항할 수 없도록 족쇄를 채우는 것입니다. 권력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다중논의 구조가 다수에 의한 선거선출 대의제가 되면서 기회주의자들이 신분을 상승할 도구가 되니 소수 가 다중을 착취하고 갈취하는 체제를 유지하며 선출된 소수가 다중의 의사 를 묵살하고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력으로 변질됩니다. 1848년 4월 말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선거를 실시하자 재산을 축적 한 무리들과 기회주의로 명망을 얻은 무리들 그리고 나폴레옹의 영광을 조 카인 루이 나폴레옹보나파르트가 재현해 줄 것이라고 믿은 사람들에 의해 12월 루이 나폴레옹보나파르트가 당선돼 제2공화정이 출범합니다. 급진파와 왕권으로 회귀하려는 왕당파, 자유를 주장하는 공화주의파가 대 립했으나 정치의식이 낮고 종교의 인정주의에 세뇌된 농민층은 급진파가 기 득권들을 척살하고 재산을 몰수한다는 의미를 몰라 부정적으로 봤으며 중산 층은 자신들의 재산을 뺏기는데 반대해 보나파르트가 당선됐습니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투표권을 행사했을 뿐 그 어떤 경제적ㆍ정치적 권리도 얻지 못했으며 보나파르트는 헌법을 개정해 연임하려다가 의회가 거부할 것 을 알고 1851년 12월 2일 명망있는 정치가들을 체포해 구금하고 국민투 표로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켜 연임하면서 1852년 12월 황제라 칭하고 나 폴레옹3세가 됩니다. 프랑스혁명은 주변국으로 번지기 시작해 1848년의 봄이라 명명했는데 헝 가리는 혁명을 일으켜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자치와 자율권을 인정받았고, 체코는 시민적 권리와 언어의 권리를 보장하는 교서를 받았으며, 슬로베니 아는 민족적/정치적 요구보다 사회적불만을 해소하는 근간이 됐습니다. 느낌 150

크로아티아는 1848년 3월 25일 자그레브의 집회를 통해 코슈트의 제안 과 오스만터키제국 승인으로 일시적으로 마쟈르 족에 통합됐으며, 우크라이 나, 루마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는 농민들이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 하면서 정치의식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고 많은 국가들에 민족주의가 자리 잡게 됩니다. 지금의 독일지역에서는 오스트리아를 포함해 독일의 모든 공국 내 자 유주의지도자들 제창으로 1848년 3월부터 통일독일을 건설하기 위 해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지역에서 국민의회(Frankfurter National versammlung)를 개최해 예비의회(Vor-parl ament)를 만들고 국민의 회선거를 준비하기 위해 50인으로 임시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선거는 예정대로 진행돼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장크트파울 교회 에서 국민의회가 개최됐으며 선거에서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 다수 가 의원에 당선되자 4월 서남부에서 자유를 부정하는 무리들이 봉기했다가 무력으로 진압됐기 때문에 통일독일을 위한 헌법이 탄생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국민의회는 통일된 독일에서 보장돼야 할 기본원칙과 기본인권에 관해 상 당히 오랜 기간 동안 토론했으며 그밖에도 행정부의 성격, 독일의 영토범위 등과 같은 문제도 결정해야 했기 때문에 빅토리아여왕 이복동생이며 라이닝 겐대공인 카를의 주재로 임시정부를 구성합니다. 국민의회가 임명한 행정부는 슐레스비히공국과 홀슈타인공국 문제로 덴마 크와 전쟁을 시도했으나 의회를 무시하던 프로이센이 갑자기 8월에 전쟁을 중단하므로 라이닝겐대공은 1848년 9월 5일 사임했으며 후임으로 오스 트리아출신 자유주의자인 안톤 폰 슈메를링이 12월까지 이어가다 하인리히 폰 가게른으로 교체됩니다. 프로이센의 빌헬름4세는 평등을 요구하는 자유주의를 혐오하며 대중을 무 력으로 억압하고 통제해야 질서가 유지되며 갈취해야 기득권을 누리는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보수파 조언자들과 지내며 무력을 행사했고, 오스트리아 에는 페르디난트황제가 조카인 프란츠요제프에게 권좌를 물려줬는데 프란츠 요제프도 보수주의 장관들에 의존합니다. 독일의 두 강대공국에 자유와 평등을 기피하는 보수정권이 들어서자 독일 주권의 성격과 영토범위에 대해 다시 열띤 논쟁을 불러 1848년 말 국민의 회는 중앙정부인물이나 성격은 결정내리지 못한 채 독일헌법에 포함될 기본 권에 관한 토론을 종결하고 1849년 1월 헌법초안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 해 각국에 전달했습니다. 느낌 151

독일의 영토범위는 3월 4일 오스트리아헌법에 제국은 하나의 단일체로 간주되고 제국전체가 새로운 독일에 가입하지 않으면 소국이 개별로 가입 할 수 없다고 선포하므로 오스트리아의 독일계영토를 포함시켜 대독일 (Grossdeutsch)을 꿈꾸던 남부독일과 오스트리아 자유주의에 타격을 주 며 프로이센이 통일의 중심이 되는 소독일 (Kleindeutsch)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갑니다. 3월27일자로 중앙 행정권은 세습 황제 손에 있다는 내용의 헌법이 채택됐 지만 왕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무마하기 위해 보통선거의 시행을 약속하고 3월28일 국민의회에서 신임황제에 대한 투표를 실시한 결과 290표는 프 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4세에게 찬성하고 248표는 기권합니다. 4월 3일 의회의장 두아르트짐손이 프리드리히 빌헬름4세에게 황제 위를 제의하러갔으나 보수적이고 우월주의자인 그는 독일제후들 이외 다른 사람 들에게 독일황제 위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헌법초안도 거부하므로 프로이센 이나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지 못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더 이상 존 속할 수 없게 됩니다. 5월경 가게른 내각이 붕괴됐으며 대다수의 대의원들은 자국정부의 소환명 령을 받아 돌아갈 수밖에 없자 잔류의원들은 슈투트가르트로 옮겨갔지만 6 월 18일 뷔르템베르크군대와 경찰의 무력에 의해 해산되면서 통일독일을 만들려던 프랑크푸르트의회와 그 의회를 성립시켰던 활동들은 끝났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억압과 통제를 거부하는 자유주의통일운동이 활발해지며 마치니 등의 청년이탈리아당이 1848년 11월 로마공화국을 건설했고, 북이 탈리아에서는 사르디니아의 통일운동으로 베네치아공화국이 성립됐으며, 폴 란드 헝가리 뵈멘 덴마크에서도 독립운동이 광범하게 전개되면서 다수결 선출 대의제가 정착됩니다. 힘으로 다중을 학살하고 침략해서 재물을 강탈하며 권력을 누리던 왕조시 대는 대부분 막을 내리고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해 부를 축적한 유산자와 다중을 속이는 사기로 명망을 얻은 기회주의자들이 사회구성원의 선거를 통해 권력자를 선출하는 계약에 의한 국가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됐 습니다. 1803년부터 1848년까지는 미국의 서부개척시대 라고 하는데 개척민 들이 담배농사에 필요한 농토를 찾아 서부로 이동하면서 세 차례에 걸쳐 어 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인디언원주민 약 300만 명을 학살하고 점령했으며 미국정부는 인디언을 보호구역에 강제수용(1830년)하고 1850년 도망노 느낌 152

예단속법을 만듭니다. 1823년 12월 2일 군사력이 발전하지 못한 시기 미국대통령 제임스먼로 는 임기 7년째 되는 해 의회일반교서 연설에서 미국은 전쟁에(유럽전쟁이든 식민지전쟁이든 간) 참여하지 않는 대신 유럽 강국들이 미국이나 멕시코 등 미 대륙에 있는 주권국가들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침략하는 전쟁도 거부한다 며 중립을 선언합니다. 드레드스콧(Dred Scott)은 세인트루이스출신의 미 육군군의관으로 복무 하던 존 에머슨(John Emerson)이 소유한 미주리 주 노예였는데 에머슨 이 근무하는 군적에 따라 일리노이로, 위스콘신준주로 옮겨 다녔으며 새로 운 부임지로 옮겨갈 때마다 스콧을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부인소유가 아니 었습니다. 1846년에 에머슨이 죽고 스콧은 세인트루이스로 돌아왔는데 자청해 노예 에서 해방시켜 주겠다고 유혹하는 노예제폐지론을 주장하는 변호사들 요청 으로 에머슨의 미망인을 당사자로 자신은 연방법에 의해 노예제가 금지된 일리노이와 불법인 위스콘신준주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노예가 아니라 고 주장했습니다. 1857년 미국연방대법원은 드레드스콧이 자신은 에머슨부인소유의 노예가 아니라고 주장했음에도 북부출신판사들은 미국의회가 미국영토내의 노예제 도를 금지할 권리가 없으며 노예는 미국시민이 아니므로 미국헌법 아래 보 호되지 않고 소송권도 없다 고 판결하므로 남북전쟁의 기초가 마련됩니다. 미국은 북부와 남부의 생활이 달라 북부는 산업ㆍ공업ㆍ어업을 유지했고 토지가 비옥한 남부는 농업, 플랜테이션 등으로 살았기 때문에 북부는 노동 자가 필요했고 남부는 자신들을 대신해 농사지을 노예를 필요로 했는데 노 동자가 필요한 북부는 인간에겐 자유가 있다는 원칙을 주장하며 노예제폐지 를 요구해 전쟁을 벌입니다. 60년에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돼 시작한 남북전쟁은 1861년 4월 남부동 맹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항의 샘터요새를 포격하는 것으로 시작 해 1865년까지 4년 동안 수많은 인민들이 전사하거나 질병으로 사망하고 북부 군이 승리하므로 해방흑인 국을 설치했으며 헌법 13조를 수정해 노예 제를 폐지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공업을 지향한 북부가 승리해 산업이 발전하게 됐으며 전쟁과 정에 병사들을 나르거나 노동자가 생산한 물질을 운반하려고 1869년 최초 느낌 153

로 대륙횡단 철도를 건설했고 열차가 운행되자 노동자들은 노동기사단을 결 성했으며 선거권이 없던 여성들은 권리를 찾자며 전국여성참정권협회를 만 듭니다. 전쟁에 승리하고 노예금지 법이 만들어졌지만 태어나면서 부터 억압받고 예속된 노예로 길들여진 흑인들 중 일부는 내가 밖에 나가도 생산하는 임 금노예로 살아야 하는데 거주할 주택도 없고 직업도 보장되지 않으니 예전 대로 노예로 살면서 월급을 받겠다. 며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신이 태어나 생활하며 자란환경에 영향을 받는데 어려서 부터 통제당하고 지시받는 생활에 익숙하게 길들여진 아이들은 아무리 자유 를 보장해도 자유를 이해할 수 없어 누군가의 명령을 받으려 기다리는 노예 가 됩니다. 인간이 모두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려면 어려서부터 존중은 망각하 고 부모형제의 지시를 받거나 유아시절부터 학교라는 조직에 갇혀 지시받고 군대라거나 직장에서 통제와 감시 속에 살면서 사회에서 까지 법률(규칙)에 통제되고 지시받는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훈련돼야 합니다. 자신의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부모라는 핑계로 자녀를 마음대로 억압하고 통제하다 생활이 어렵다고 자녀를 살해하고 자살하는 행위는 폐륜을 넘어 악행을 저지르는 망종이며 형제나 부부 또는 상사라고 해서 상대방의 자유 와 행동을 통제하고 감시하며 간섭하는 것은 보호나 존중이 아니라 부당한 통제와 억압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서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위하는 마음이 있을 때 생성되고 지켜질 수 있는 것이지 누가누구를 착취하거나 법이나 규칙 또는 관습이나 조직 그리고 혈육이나 가족이란 핑계로 상대방의 자유와 사상을 부정하고 생각이나 행동을 통제하거나 억압하는 사람은 절대 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 없습니다. 상호존중이란 서로 신뢰가 있어야 하며 신뢰란 상호간에 숨김과 가식이 없 이 진솔하고 솔직하게 대화하고 행동해야 생길 수 있으며 자신은 좋다고 표 현해도 상대방이 귀찮게 느끼거나 치근댄다고 거절해도 부담을 주며 불편하 게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은 존중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느낌 154

다수결 선거선출주의 프랑스 보나파르트정권은 착취와 갈취의 권리를 보장하는 시장자유주의 정 책을 고수하니 모두에게 공정하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해 노동자와 농민들 은 힘들게 노동해도 수입이 적어 생계도 잇지 못하며 다수가 빈곤해 소비를 못하므로 공장에서 아무리 좋은 물질을 생산해도 팔리지 않는 공황이 계속 됩니다.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수입을 보장해야 소비를 늘리며 체제를 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좁은 도시를 허물어 도로를 확장하고 철도건설과 재건축 사업을 실시하므로 수입이 생긴 다중이 소비하자 산업생산이 배로 늘고 대 외무역은 3배로 증가했지만 빈부격차는 더욱 커집니다. 1854년 3월 28일 러시아제국과 오스만제국 간에 전쟁이 발생하자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왕국, 오스만제국이 연합전선을 형성했는데 사르데냐왕국 은 이탈리아를 통일시키고 싶은 욕망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으려고 참전했으며, 전쟁이 대부분 흑해에 위치한 크림반도에서 벌어져 크림전쟁이 라 합니다. 이 전쟁은 4번의 전투가 러시아의 완패로 끝나 1856년 파리조약으로 러 시아제국은 헌법을 수정해야 했으며, 다뉴브하구 및 흑해인근의 영향력을 잃고 흑해는 모든 국가의 군함통과를 보장해야 하므로 무장이 제한되는 중 립지역이 됐으며, 오스만제국은 탄지마트라는 개혁을 추진해야 했습니다. 1856년 3월 30일 체결된 조약으로 러시아출신 핀란드공작 소유인 발트 해의 올란드제도는 모든 군 관련 함선의 항해를 보장하기 위해 무장이 해제 되므로 인근의 투르크영토는 중립국지위를 얻었고, 오스만에 복속됐던 몰다 비아와 왈라키아지방은 통합돼 독립헌법을 제정하고 남쪽 베사라비아영토를 양도받습니다. 1854년에 인도에서 발생된 세포이항쟁 또는 세포이반란(영어: Indian Rebellion of 1857)은 세포이용병들을 중심으로 영국의 식민지정책 을 반대하며 일으킨 저항이 인도전역으로 확산된 사건으로 영국은 세 포이의 반란 이라 부르고 인도에선 제1차 독립전쟁 (First War of Independence)이라고 칭합니다. 당시 인도를 점령하고 있던 동인도주식회사는 인도대중들을 통제하기 위 해 군을 사용했으나 본국군인들이 부족해 대부분 용병을 채용했는데 영국군 의 90%이상이 세포이용병들이었기에 가능했으며 이들은 무굴제국의 복권 느낌 155

을 선언하고 식민지를 거부하며 옛 지배층과 규합해 여러 지역에 거점을 만 들어 저항했습니다. 영국은 19세기 중엽까지 다종교사회인 인도에 시크교국, 마라타동맹, 마이 소르왕국의 내분을 조장하는 방법으로 치밀하게 계획하고 인도전역을 점령 하며 지배를 시작해 인도의 정치, 경제, 조세제도를 무너뜨린 후 자국의 면 제품을 인도에 값싸게 공급하자 인도 최대산업이던 면직물산업이 몰락합니 다. 카스트제도와 많은 악습이 존재하는 인도는 시급히 유럽의 문물을 전파하 며 개혁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영국은 날이 갈수록 더욱 많은 양의 자원을 인도로부터 수탈해갔는데 영국동인도회사 용병인 세포이용병들이 영국군장 교들의 차별, 빈곤, 민족주의적 행위에 자존심까지 폭발해 항쟁으로 번집니 다. 용병들은 영국의 수탈 때문에 자신의 민족이 빈곤해진다며 감정이 좋지 않 았는데 인도용병들에게 지급하는 신식무기인 엔-필드 소총탄약통에 힌두교 도가 신성시하는 소의 기름과 이슬람교가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기름이 발라 져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탄약통수령을 거부하므로 대대적인 항쟁의 근원이 됐습니다. 1854년 5월 인도델리근교 소도시메루트에서 처음 봉기한 세포이들에게 항명죄로 10년의 중노동형이 선고되자 동료세포이들이 분노해 대규모 무력 봉기를 일으켰으며 영국의 식민지정책으로 착취와 수탈을 당해 빈곤에 허덕 이던 민중들의 분노도 함께 폭발해 델리를 장악하고 영국군이 통제할 수 없 도록 1859년까지 지속됩니다. 영국군은 본국의 증원 군과 네팔용병인 구르카, 시크교도들을 투입하고 월 등한 화력을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하는데 저항군의 지도자역할을 했던 옛 봉건세력들은 이권다툼과 이해타산만 따지면서 저항의 정당성을 확립하지 못해 봉기군들은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다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실패합니다. 영국군의 진압과 보복은 무자비했는데 붙잡힌 세포이들을 대포에 묶어 인 간탄환으로 처형하거나 도륙했으며 항쟁이 실패하자 무굴제국 황제가 폐위 되므로 무굴제국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영국동인도회사의 인도지 배는 끝나고 대영제국이 직접통치하면서 인도제국으로 불렸습니다. 영국은 세포이항쟁으로 인도의 구제도와 관습을 존중한다며 문화를 허용하 느낌 156

고 지배층의 착취와 갈취, 억압과 통제를 인정하는 대신 식민 질서를 유지 한다고 합의하므로 인종, 종교, 카스트의 구별 없이 광범위한 계층이 규합해 영국의 식민정책을 반대했던 항쟁은 무산되고 인도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 로 남았습니다. 1856년에 종전한 크림전쟁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협력체제는 부활했지만 빈부격차 때문에 발생된 경제침체는 계속 이어졌으며 빈곤에 허덕이는 대중 들이 분노하고 이윤을 남기지 못한 상공인들이 반발해 체제를 유지할 수 없 게되자 1859년 나폴레옹3세는 시장자유주의를 폐지하려고 했으나 실패했 습니다. 1861년 서 유럽이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며 저항하는 것에 동화된 러시아 에서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 人 民 主 義 者 )라는 뜻의 러시아어)라는 조직이 모 두가 평등한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며 후진성으로 유지되는 농촌을 바꿔내고 농노를 해방하기 위해 토지와 자유파 를 만들어 활약하기 시작합니다. 농노소유자로부터의 인신해방( 人 身 解 放 )과 차르제의 봉건성( 封 建 性 ) 타도 를 외치며 A.I.게르첸과 N.G.체르니솁스키는 비밀결사를 결성하고 농민에 대한 계몽운동을 벌였으나 1874년 경찰의 탄압이 극심해지면서 대립이 생 겨 1879년 인민의 의지파(Narodnayavolya) 와 흑토( 黑 土 )재분할파 (Chyornyipere del) 로 분열됩니다. 1867년 스웨덴의 물리학자 알프레드노벨은 넘어지면서 실수로 니트로글 리세린을 규토에 쏟았는데 굳어지는 것을 보고 규토와 니트로글리세린을 혼 합하면 뭉쳐진다는 사실을 깨닮고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특허를 따므로 1313년 슈바르츠가 질산칼륨과 황을 혼합해 그리스의 불(황 로진 생석 회 석유의 혼합물)로 불리던 흑색화약의 수십 배의 폭발력을 갖는 다이나 마이트로 발전했습니다. 1868년 스페인에서 혁명이 발생해 폭정을 일삼던 부르봉왕가가 쫓겨나자 혁명지도자들은 프로이센 빌헬름1세 국왕의 사촌 레오폴드 공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제안했으나 레오폴드 공은 이를 거절했는데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에 특사를 파견하고 1870년 6월 21일 수 락을 발표합니다. 통일독일을 꿈꾸던 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덴마크(1864)와 오 스트리아(1866)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여전히 프랑스의 영향력이 더 강한 남 부독일을 합병하지 못해 무력으로 통일하려 했다가 러시아와 영국이 반대하 므로 어쩔 수 없이 단 4개의 연방만을 독일로 편입시킨 후 영토를 늘리려했 습니다. 느낌 157

프랑스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합병을 꾀하자 비스마르크는 런던회의에 서 룩셈부르크를 중립국가로 만들어 프랑스의 룩셈부르크합병을 좌절시키므 로 프랑스는 이에 항의해 프로이센 인이 스페인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잘못 된 것이라며 철회하라는 문서를 보냈고 스페인에서 혁명이 발생하므로 어쩔 수 없이 1871년 혁명가 아마데오1세를 왕으로 선출합니다. 영국은 프랑스를 견제하기위해 프로이센의 협력이 필요한데 오스트리아-헝 가리가 이중왕국을 선포하므로 진압할 힘이 없으니 헝가리의 자치를 인정해 야 하는 등 어수선했으며 러시아는 비스마르크로부터 흑해조약을 풀겠다는 약속을 받고 친 프로이센 정책을 펴고 있는데 보나파르트는 엠스전보사건으 로 7월 19일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엠스전보사건이란 1870년 7월 7일 프랑스 베네딕트대사가 빌헬름1세의 휴양지 엠스를 찾아가 스페인왕위 계승 같은 건의 재발방지를 보장하라고 요구하지만 빌헬름1세는 관심 없다며 거절했으며 나폴레옹3세는 프로이센 이 항복할 것을 바라면서 사실상의 철회 보장 을 요구합니다. 그라 몽은 서면보장을 요구하면서 협상기한을 7월 12일로 최후통첩하고 빌헬름1세는 레오폴드의 스페인왕위 수락을 동시에 취소했는데 다음 날인 7월 13일 베네딕트와 빌헬름1세가 회동한 내용이 비스마르크에 의해 변경 돼 영국신문에 발표되자 이를 본 나폴레옹3세가 분노하며 프로이센에 전쟁 을 선포한 것입니다. 인민들이야 전쟁으로 죽거나 말거나 자신의 명예와 통일독일을 저지하려는 권력욕 때문에 벌어진 이 전쟁은 9월 2일 스당전투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프로이센군의 포격으로 전사하면서도 포위망을 뚫지 못한 나폴레옹보나파르 트가 항복하고 포로가 되며 끝납니다. 보나파르트를 포로로 잡은 프로이센군이 파리를 포위하자 기득권들은 국가 방위를 위한 임시공화제 정부를 수립하고 프랑스국민에게 민족주의를 호소 하며 완강하게 저항해줄 것은 요구했지만 9월 말에 스트라스부르, 10월 말 에는 메츠요새가 함락됐으며 1871년 1월 28일 마침내 파리까지 점령됩니 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파리개성( 開 城 ) 직전인 1월 18일 베르사유궁전 거울 방에서 독일제국(도이칠란드(Deutschland))을 선포하고 빌헬름1세 를 황제로 추대하자 이에 굴욕을 느낀 프랑스국민들의 반감을 초래했고 러 시아는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크림전쟁의 패배로 흑해해협에 관해 맺었던 협정의 파기를 선언했습니다. 느낌 158

1871년 1월 28일 독일이 휴전조약을 제안했지만 보나파르트가 황제로 왕권정치를 했기 때문에 정식강화조약을 체결할 권한 있는 대표가 없어 2 월13일 보르도에서 새로운 의회를 개최하고 나폴레옹 외교정책의 비판자인 오를레앙파의 아돌프 티에르를 공화국행정수반으로 지목하고 협정을 시작합 니다. 1인이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는 지휘하는 1인이 제거되면 내용을 모르는 다 중은 결정권이 없어 결과를 도출할 수 없으니 우왕좌왕하게 되므로 다중이 논의하고 계획이 수립되면 자신이 결의한 것을 스스로 집행하며 행위에 책 임지는 다중 직접논의구조가 최상이라고 봅니다. 3월 1일 프랑크푸르트 강화조약에 프랑스는 동부프랑스 지역 프로이센군 주둔비와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물고 알자스와 로렌의 절반을 양도한다는 조건으로 체결되자 국민들은 황제가 전쟁을 일으키다 패했고 유산자들이 일 방적으로 정한 조약을 이행해야 할 의무가 없다며 프로이센군에게 적의를 나타냅니다. 3월 1일 프로이센군이 파리에 입성하자 시민들은 침묵하면서도 적의를 비 치며 저항하고 소극적인 반발도 계속 일어나 상황이 악화되자 현지상황을 보고받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통일독일이 목적이었으므로 민심을 동요해 선 안 된다며 철수를 명령해 3월 4일 프로이센군이 파리에서 철수하게 됩 니다. 파리 시민들은 3월 3일 프로이센군과 왕조 그리고 기득권을 행사하는 의 회를 거부했고 착취질서를 유지하려고 폭력을 행사하는 관료(사법,행정,징 세)조직의 해체를 선언하고 통제하려는 무리들을 처단했으며 스스로를 방어 하기 위해 자발적인 국민민병대를 조직하고 새로운 질서를 위한 중앙위원회 를 결성하자고 제안합니다. 구체제의 연장선에 있는 유산자의회 티에르정부는 파리 시민이 존재감을 지키려는 결의에는 무관심하면서 저항을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해 3월 18일 국민민병대가 준비한 대포 227문을 압수하라고 명령하자 정규군 군인들이 명령에 불복종하며 명령을 내리는 르콩트와 토마장군을 사살했습니다. 그러자 유산자들로 구성된 의회는 베르사유로 도망했고 시민들 사이에 숨 어든 프락치와 생명을 중시한다는 종교주의자들이 반발해 논쟁이 벌어졌는 데 시민들은 국가는 국민이 안전하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도록 권리를 보장 해야 하는데 정권과 의회는 기득권이 착취ㆍ갈취하는 행위를 보호하 려고 국민을 수탈하며 억압만 했으므로 국가가 아니다 고 결론 냅니다. 느낌 159

타인의 자유를 부정하고 감시ㆍ통제하며 노동력을 착취 또는 갈취해 부를 축적한 무리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종교의 온정주의에 세뇌돼 억압과 착취ㆍ갈취에 복종하도록 길들여진 사람 들은 수탈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을 통제ㆍ지배한 무리와 체제를 옹호 하는 것입니다. 정규군과 국민민병대가 협의로 19일 양자대표가 시청을 점거하고 중앙위 원회 를 결성했으며 중앙위원회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코뮌(인민의회)은 남 녀차별 없이 모두 투표할 권리가 있고 선출된 의원들은 임기 없이 언제든지 소수인민이라도 자격을 박탈할 수 있으며 중앙위원회는 그 때까지 잠정기관 이라고 선언합니다. 26일 선거를 실시하자 절반정도가 참여해 85명의 의원이 선출되니 1871년 3월 28일 코뮌성립을 선포하고 노동자는 10시간 노동, 제빵공의 야근철폐, 종교와 정치의 분리 등을 선언했으며 야간에는 권리를 학습하고 여성권익을 위한 탁아소를 설치해 여성을 육아와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시 키며 자치구를 건설했습니다. 파리코뮌은 프랑스를 인민들에 의한 자유로운 지방정부로 만들기 위해 풍 성에 호소문을 매달아 날리자 마르세이유, 리옹, 생테티엔, 툴루즈, 나르본, 그레노블, 리모쥬 등의 지방에서도 파리와 같은 코뮌결성을 선언했지만 자 치민병대를 결성하지 못해 혈세로 살며 학살교육만 받은 정규군의 무력에 진압됩니다. 코뮌은 짧은 기간에 징병제와 상비군을 폐지하고 인민에 의한 자치민병대 설치, 주거보장, 관리봉급의 최고액결정, 종교와 사유재산국유화, 공장은 노 동자가 관리하고 부채를 탕감하며 이자를 폐기하고 노동자의 노동시간과 최 저생활을 보장하며 아동의 야간노동을 금지시키고 여성참정권과 탁아소를 설치하는 등 여러 가지 정책과 법령을 발표 했습니다. 파리코뮌이 널리 알려지자 기득권을 누리던 각국 정권들은 자신들의 영토 로 파리코뮌사상이 전파될 것을 두려워해 티에르정권에 조속한 진압을 주문 했으며 프랑스정부군을 지원하기 위해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벨기에, 대영제국이 진압군을 파병합니다. 1871년 5월 21일 시민들이 튈르리 궁전정원에서 코뮈나르(코뮌 지지자) 전사자가족을 지원하기 위한 대규모 음악회를 개최하는 사이 미리 숨어있던 간첩으로부터 생클루 문 근처에 국민민병대가 없다는 하얀 손수건신호를 받 은 연합군이 베르사유군 맥마흔(Mac-Mahon)장군의 지휘 하에 파리로 진 입했습니다. 느낌 160

긴박한소식이 코뮌의회에 알려지자 의원들은 방위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코 뮌군사위원회 대표 샤를 들레클뤼즈는 금술의 군복과 금빛으로 장식한 군 장교는 싫다, 민중에게 자리를 양보하라, 혁명의 종소리는 울렸다.<중략..> 시민여러분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싸우고 함께 죽을 것입니다. 라는 호소 문을 발표합니다. 밤이 되자 시내로 들어온 정부군본대 2만 명과 연합군은 시민들이 비무장 임에도 눈에 띄면 무차별적으로 발포하며 사살했고 파리시내교차로마다 바 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지면서 파리코뮌의 마지막 피의 일주일 이라는 학살만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혈세로 살며 체제를 지키기 위해 살인만 훈련한 군의 만행으로 죽은 사람 의 수는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지만 적게는 3만 명부터 많게는 5만 명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코뮌이 점령되자 기득권들 은 코뮌사상이 알려질 것이 두려워 시민 10만여 명을 체포하고 4만여 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습니다. 코뮌에 참여했던 7,500명의 인사들은 프랑스식민지인 누벨칼레도니로 종 신 유배되기도 했고 파리코뮌의 평등과 자유주의사상에 놀란 미국보수언론 들과 개신교목사들은 파리코뮌 같은 운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평등과 자 유를 주장하는 것은 빨갱이 사상이라며 탄압해야 한다고 선동합니다. 파리코뮌이 무너지자 유산자의회는 티에르를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제 3공 화국을 출범시켰는데 1873년 빈부격차로 발생된 공황으로 민중들이 반발 하자 티에르는 자신을 지지한 왕당파를 버리고 공화주의에 동조하므로 왕당 파가 그를 해임하고 5월 군사령관 맥마흔으로 교체했습니다. 미하일 바쿠닌은 1848년 프라하의 봉기와 1849년 드레스덴봉기에 참가 했다 체포돼 1857년 러시아정부로부터 시베리아에 유형 됐지만 1861년 탈출하고 1863년 폴란드의 무장봉기와 1864~1868년 이탈리아혁명에 참석했던 자신의 경험들을 정리한 사상을 1871년 신과 국가 에 발표합 니다. 1868년 스위스로 이주해 비밀혁명전위대인 사회민주주의동맹 을 설립 하고, 착취주의사회를 범세계적인 자유주의연방으로 통합시키는 목적으로 설립한 유럽노동자당 연합체인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했으 나 1872년 마르크스가 헤이그대회에서 다수란 명분으로 바쿠닌과 동료들 을 축출해 쫓겨납니다. 이때부터 사상논쟁은 조직주의로 분열하고 숫자를 내세운 힘겨루기 다툼으 느낌 161

로 변질되는데 바쿠닌이 저술한 압제의 제국독일과 사회혁명 L Empire Knouto -germaniqueetlarevolution sociale (1871) 및 무정부 주의 사회 Staatenanarchie (1873)는 마르크스와의 사상논쟁을 다룬 것이라고 합니다. 바쿠닌은 완전한 자유주의혁명은 폭력을 통한 기존질서의 파괴라며 무장투 쟁을 역설하므로 에스파냐 이탈리아 러시아에 영향을 미치지만 권력을 부 정했으며 인민들을 정치적 통제, 집단독재, 권위적으로 복종시키려고 새로 운 통제조직을 만들면 평등한 사회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바쿠닌은 공산주의정당을 만들고 프롤레타리아 집단독재를 통해 혁명을 일 으켜야 공산주의가 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집단의 무력을 만들어 인민들 이 더욱 억압받게 되므로 모두가 함께 참여해 생산하고 물질은 공동으로 나 눠도 개인에게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는 주장으로 러시아의 니힐리즘에 영향을 줬다고 평합니다. 혁명적 독재와 평등주의의 차이점은 겉모습일 뿐이고 그 둘은 소수의 지 성 과 다수의 어리석음 을 가정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지배라는 동일 한 원리로 그 둘은 머지않아 통제ㆍ지배하는 소수의 정치적, 경제적 특권으 로 대다수민중의 정치적ㆍ경제적 종속을 유지하는 점에서 지배논리란 겁니 다. 1875년 독일고타에서는 F.라살이 이끌던 전 독일노동자동맹과 A.베벨 및 W.리프크네히트가 당수로 있던 정당들이 통합되면서 독일사회 민주노동 당이라고 했는데 1878년 독일의 비스마르크정부에 의해 불법정당으로 제 재 받으며 유명세를 타고 번창해져 1889년 제2인터내셔널의 창설을 돕습 니다. 1882년 6월 일본에서 은행조례가 공포되고 10월에 일본은행이 만들어지 면서 초대총재로 요시하라 시게토시[ 吉 原 重 俊 ]가 업무를 시작했고 1885년 에 일본은행권을 은 본위 태환은화를 발행하며 발권을 시작해 1899년 12 월에 기존 국립은행 및 정부지폐통용(유통)을 금지하고 일본은행권으로 일원 화시킵니다. 전기의 발전 기원전 550년경 고대그리스 철학자탈레스는 보석인 호박(고대는 귀한 보 석)을 깨끗하게 닦기 위해 베 조각으로 문지르다 호박주위에 있던 먼지와 느낌 162

실ㆍ새털ㆍ천조각 등 가벼운 물질들이 호박에 붙는 것을 보고 연구를 거듭 해 마찰전기의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전기에 대해 몰랐던 고대그리스 사람들은 마찰전기에 의해 호박이 물질 을 끓어 당기는 것을 보고 호박 속에 신( 神 )이 있다고 믿으며 호박을 호신 용부적으로 달고 다녔으며 철학자들 사이에는 마법의 돌로 불렸고 탈레스는 흡인력이 우주를 지배하는 새로운 요소로 알았으며 이때부터 호박을 전자 (electron)로 불렀다고 합니다. 1600년 영국의 의학자길버트는 양의 전기와 음의 전기가 끌어당기 는 마찰전기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하고 저서 DeMag nete (전자 기론)에서 Electrica 로 명명했는데 1646년 영국의 브라운이 저서 Pseu dodoxia Epidemica (유행하는 외견상의 도수관)에서 전기 (Electricity)라는 단어를 사용하므로 전기로 불리게 됐다는 것입니다. 길버트가 발표한 가설에 자극을 받은 당시 학자들은 여러 가지 물질에 대 해 같은 실험을 반복하다 마찰전기에 의해 불꽃방전이 생기는 것도 발견했 으며 불꽃방전 때 생기는 발광을 모을 수 없을까 궁리하다 1746년 네덜란 드 라이덴대학의 뮈센브뢰크가 유리용기에 물을 넣고 전기를 모으는데 성공 했다고 합니다. 1747년 미국의 프랭클린은 일류체설 ( 一 流 體 說 )을 발표하면서 전기유 체( 電 氣 流 體 )는 그것에 여분으로 있으면 (+)전기가 되고 부족하면 (-)전기가 되는데 유리전기 쪽을 (+)전기, 수지전기 쪽을 (-)전기 라고 칭 하므로 오늘날 전기를 사용하는데 플러스극과 마이너스 극이라고 이름 붙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1752년 미국의 프랭클린은 당시 많은 사람들과 같이 자연에서 발생하는 번개현상을 실험실에서 생기는 불꽃방전과 같은 전기로 보고 연을 날리는 실험을 통해 번개는 불꽃방전과 같은 전기라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전기를 모으는 장치인 축전지의 이름을 대학이름을 따 라이덴병이라고 불렀다는 것 입니다. 전기를 모아놓은 라이덴병이라 부르던 축전지를 사람이 손으로 만지면 전 기에 의해 강력한 충격을 받자 이 현상을 충격놀이라 하며 전 세계로 퍼져 나갔는데 1776년 일본의 에도( 江 戶 )시대 후기 히라가( 平 賀 源 內 )가 충격놀 이를 즐기다 마찰전기를 발생시키는 기전기를 발명했다고 합니다. 1777년 독일의 리히텐베르크는 절연물의 표면상에서 불꽃방전을 일으키 느낌 163

는 실험을 하다 황의 착색분물이 절연물의 표면상에서 방전을 진전하는 과 정이 색도형으로 기록됐는데 음의 전하를 띤 황백색의 황 분말이 한쪽에만 부착돼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불꽃방전을 일으키면 양극성의 전하가 남는 현상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1785년 프랑스 쿨롱이라는 사람이 양전기와 음전기가 끌어당기는 현상을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은 현상으로 보고 여러 가지 실험을 통 해 발견한 것이 쿨롱의 법칙이며, 마찰전기를 이론적으로 통일했는데 모든 전기현상은 전하가 시간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조건으로 한 것을 정전기( 靜 電 氣 )현상이라 정의됐습니다. 1791년 이탈리아의 의학자갈바니는 개구리를 해부하던 중 주변에서 불꽃 방전이 발생하면 그 불꽃발생과 동시에 죽은 개구리다리가 움직이는 현상을 발견하고 개구리체내의 신경에 전류가 닫으면 신경이 반응하게 되므로 전류 가 흐른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이때부터 전류가 흐르는 현상을 갈바니전기 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1799년 이탈리아물리학자인 볼타는 현재 전지와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전기발생장치를 발견해 전류를 연속으로 발생시킬 수 있게 되므로 동전기 시대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으며 1873년 영국맥스웰의 가설로 흡인작용과 반발작용으로 동작되는 정전기현상과 전류에 동작하는 동전기현상을 통칭해 서 전기라고 합니다. 1868년 에디슨은 전기투표기록기( 投 票 記 錄 機 )를 발명해 최초로 특허를 받 았으며 1869년에는 주식상장표시기( 株 式 上 場 表 示 機 )를 발명해 생긴 돈으로 뉴저지 주의 뉴어크에 공장을 세우고 1871년에 인자전신기( 印 字 電 信 機 ), 1872년에 이중전신기, 1876년에 탄소전화기를 발명했습니다. 1876년 연구소를 멘로파크로 옮기고 1877년에 축음기, 1879년에 백열 전등을 발명하고 1887년에 다시 연구소를 웨스트오렌지로 옮겨 1891년 에 영화촬영기 영사기 1891~1900년에 자기선광법( 磁 氣 選 鑛 法 )과 에디 슨축전기 등을 발명하므로 오늘날 까지 사용되고 있는 전기와 영상기록장치 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1879년 영국의 물리학자 J.J.톰슨은 여러 가지 연구를 하면서 전기는 아 주 미세한 입자로 구성돼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이 작은 입자의 호칭을 전자라 불렀고 전기는 이 전자들의 이동에 의해 발생되는 현상임을 처음으 로 밝혀내면서 전기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됩니다. 에디슨은 모든 사람들이 전기를 안전하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소 느낌 164

켓 스위치 안전퓨즈 적산전력계( 積 算 電 力 計 ) 배전방식 등을 고안하고 효율이 높은 발전기와 배전반( 配 電 盤 )의 설계와 배전 충전 발전에 이르기 까지의 전기기체계( 機 器 體 系 )를 만들고 1882년에 세계 최초로 중앙발전소 와 에디슨 전등회사를 건설합니다. 에디슨은 대학 강의를 경멸하고 보통교육에 대해서 도 현재의 시스템은 두뇌를 하나의 틀에 맞추기 때문에 독창적인 사고를 길러내지 못한다. 중요 한 것은 무엇이 만들어지고 있는가의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다. 라고 비판 하면서 천재란 99%가 땀이며 나머지 1%가 영감이다 라는 유명한 명언 을 남겼습니다. 학자라는 직업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연구하고 발전시키기 위 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를 인정하는 틀 속에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 인정받아야 학자로 임명 될 수 있으며, 교육내용은 자신이 습득한 내용을 체제와 제도 안에서 살아남거나 성공하라며 기득권이 되는 방법을 가르칠 뿐 평등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모터의 발견 모터를 전동기( 電 動 機 )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회전력( 回 轉 力 )을 발생시키는 기계로 전기적 에너지를 역학적 에너지로 바꾸는 장치로 공장이나 가정에서 널리 쓰이며 자동차, 냉장고, 드라이어, 배수펌프, 에어컨, 보일러, 컴퓨터 등 부착되지 않은 곳이 없어 가전제품의 90% 이상이 모터의 힘을 사용합 니다. 1873년 빈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렸을 때 전시했던 여러 대의 발전기는 증 기기관을 구동시켜 발생되는 동력으로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생산했는데 조 수 한사람이 발전중인 발전기와 정지중인 발전기를 실수로 접속시키자 증기 기관이 연결되지 않아 돌지 않으리라 판단했던 발전기가 갑자기 돌기 시작 했습니다. 깜짝 놀란 담당자들이 여기서 생각하게 된 것이 증기기관이 구동시키는 축 을 연결하지 않고 발전기에서 생산되는 전기만으로도 회전하는 기관(모터)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며 모터나 전동기의 구조는 발전기와 같은 원리로 만들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후 플레밍은 전기연구에서 왼손의 가운데손가락, 집게손가락, 엄지손가 락을 서로 직각이 되게 벌리고, 가운데손가락을 전류의 방향으로, 집게손가 느낌 165

락을 자계의 방향으로 하면 힘의 방향은 엄지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아주 편리한 법칙을 발견해 모터의 회전방향을 정할 때 사용하게 됐습니다. 오늘날 사용하는 모터를 발명한사람 이라고 하면 영국의 물리학자 마이 켈 패러데이(Michael Fara day:1791~1867)와 미국의 전기 물리학자 조셉 헨리(Joseph Henry:1798~ 1878)로 알려졌으며 패러데이의 위 대한 발견[전자기유도]이란 논문에서 출발해 변압기와 발전기를 만들었고 그 후 모터원형이 만들어 졌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조셉 헨리(Joseph Henry)는 패러데이와 거의 같은 무렵에 전자 기모터의 원형을 만들었는데 단지 연구발표가 늦었을 뿐 헨리가 패러데이보 다 빨리 전자기유도를 발견했고 모터발명도 헨리가 최초라고 주장하기도 하 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장일 뿐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패러데이가 발견한 이론입니다. 자동차의 출현 르네상스시대의 대예술가이며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82년 봄 어느 날 성당에 걸린 벽시계의 태엽을 감다 실수해 태엽 감는 키가 튕겨 져 나오며 이마를 맞아 크게 다쳤는데 그 태엽이 풀리는 힘을 이용하면 바 퀴를 굴러가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안해 태엽자동차를 구상했다고 합니 다. 이렇게 만든 자동차는 멀리 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실용성이 없었고 그 후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다 1600년경 네덜란드의 시몬 스테빈이 돛단배에 바퀴를 달아 풍력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를 고안했으나 이 역시 바람이 불어 야 움직일 수 있고 조향타(요즈음 말로 핸들)가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 용할 수 없었습니다. 1765년 제임스와트가 증기엔진을 완성하자 1769년 프랑스군인 니콜라 죠셉 퀴노(Nichoolas Joseph Cugnot)는 증기엔진의 힘으로 대포를 옮 길 수도 있다고 생각해 1771년 포차 견인용 증기삼륜차를 만들었는데 퀴노 가 발명한 증기차는 무거운 보일러와 2개의 실린더가 앞바퀴에 얹혀 방향이 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후 움직이는 운반체를 연구하다 1780년에 알레산드로 볼타라는 사람 느낌 166

이 전기방전에 의해 수소를 연소하며 움직이는 장난감을 만들었고 1806년 스위스의 프랑수아 이삭 리바츠가 수소와 산소를 이용하는 내연기관을 개발 했으며 1823년엔 사무엘 브라운이 레오나르도 행정 이라 부르는 압축행 정 없는 내연기관을 특허로 등록합니다. 1824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니콜라스 레오나드 사디 카르노가 온도 차를 가져오는 압축행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1826년 사무엘모레이 가 압축공정이 없는 기체 및 증기기관 의 특허를 받았고 1838년 영국의 윌리엄 바르넷이 최초로 실린더가 작동하는 방식의 내연기관을 개발해 특허 를 냈습니다. 1839년 영국의 앤더슨(Anderson)이 전기자동차를 제작했고 1873년 프랑스의 가스통플랑테가 축전지를 발명해 전기자동차를 만들었으나 충전 할 수 없어 사라졌으며 1899년 프랑스의 제나찌(Camille Jenatgy )가 100km/h가 넘게 달릴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들었지만 1회 충전으로 주행 거리가 길지 않고 멀리 갔다 전기가 없으면 돌아 올 수 없기 때문에 발전하 지 못했습니다. 1854년 이탈리아의 에우게니오 바르상티와 펠리스 마테우치가 런던에서 내연기관 특허를 획득하고 1856년에 폰드리아데 피그노네 가 바르상티- 마테우치가 특허 낸 엔진을 개량해 5마력의 가벼운 엔진으로 제작한 것이 더욱 개량돼 두개의 실린더를 이용하는 엔진으로 발전했습니다. 1860년 벨기에의 에티에네 르느와르는 실린더와 피스톤 그리고 주 연봉 으로 구성해 내연기관에 휘발유를 발화시켜 사용할 수 있는 내연기관을 만 들었으며 1862년 독일의 니콜라우스오토가 라겐의 도움을 받아 합작으로 등유를 이용한 내연기관을 발명하면서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기초를 만들 었습니다. 1876년 니콜라스 어거스트 오토(Nikolaus August Otto)가 4행정 사 이클 내연기관을 완성했지만 엔진의 부피가 크고 무거워 실용되지 못하다가 1870년 오스트리아 빈의 지크프리트 마르쿠스가 가솔린엔진을 손수레에 장착하고 움직이게 하므로 최초로 움직이는 운송기구가 탄생하게 됩니다. 내연기관이 발전해 오면서 1884년 독일의 다임러벤츠사의 엔지니어가 길 이는 길지만 오토보다 높은 출력을 내는 가벼운 엔진을 개발하고 보조바퀴 가 장착된 모터사이클을 만들어 움직이게 하므로 세계 최초로 가솔린기관엔 진을 부착한 자동차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내연기관[ 內 燃 機 關, internal combustion engine]은 연료가 기관의 느낌 167

내부에서 에너지를 연소시키면서 생긴 열에너지인 연소가스로 피스톤 또는 실린더 내에서 터빈블레이드(깃) 등이 움직이게 하는 열에너지를 기계적인 힘으로 바꾸는 기관을 말하며 가스터빈 제트기관 로켓 등도 내연기관이라 고 부릅니다. 내연기관은 사용되는 연료에 따라 가스기관 가솔린기관 석유기관 디젤 기관 등으로 분류하는데 석유 가스 가솔린기관은 점화플러그(점화전)에 의해 전기불꽃으로 발열 할 수 있지만 디젤기관은 연료를 고온 고압의 공 기 속에 압축했다가 분사하면서 자연발화 시키는 것입니다. 내연기관은 1.흡입 2.압축 3.폭발 4.배기 과정을 반복하는 것을 4행정이 라 하는데 1.흡입은 연료와 산화제(공기)를 기관 안으로 빨아들이고 2.압축 은 기관안의 연료가 타면서 열을 발산해 기관 안이 팽창되는 것이며 3.폭발 은 압축된 공기가 피스톤을 밀어내고 4.배기는 산화된 기체를 밖으로 내보 내며 움직이는 힘을 만들어냅니다. 1894년 독일의 엔지니어 루돌프디젤은 불꽃이 있어야 시동을 걸 수 있는 휘발유엔진은 언제든지 불꽃에 의해 위험해 질 수 있다고 판단해 보다 안전 한 엔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 엔진기관 안에서 공기를 매우 압축시켜 얻 은 높은 열로 기름을 태워 폭발시키는 압축착화 기관인 디젤엔진을 발명했 습니다. 디젤엔진은 에너지비용이 저렴하며 효율이 높고 안전해서 경제적이라고 알 려지면서 유럽과 미국사업가들이 몰려 광산, 공장, 선박, 기차, 건설장비, 트랙터, 경운기 등에 사용되는데 엔진과 전기, 모터가 발명되자 이를 접목 해서 자동생산기계로 발전시키므로 인류는 비약적인 생산력발전을 가져옵니 다. 생산의 자동화 유럽이 분배불균등으로 발생된 빈부격차를 해소할 수 없어 평등과 분배를 주장하며 요동칠 때 엔진과 모터, 전기의 발전은 생산기계를 자동화시켜 소 느낌 168

수의 노동만으로도 엄청나게 많은 물질을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물질을 생 산하는 산업사회가 아니라 물질을 판매하는 상업사회로 발전합니다. 상업사회가 되자 생산노동 없이 화폐로 이자놀이만 하며 타인을 갈취해 부 를 축적하는 금융업자들과 타인의 노동생산물에 이윤을 남기고 판매해 부를 축적하는 계층들은 늘지만 남보다 싸게 만들고 싸게 팔아야 살아남는 경쟁 때문에 모두에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하니 생산하는 노동자들은 빈곤해지 고 굶주립니다. 소수의 생산노동만으로 물질이 풍부하게 생산되자 기득권들은 수입 없는 다수 인민들이 저항하지 못하게 통제하기 위해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도 생 산자보다 풍족하게 생활하는 각종 관료(임금노예며 노예관리자)들을 만들어 안정적인 급료를 지급하며 위계질서를 형성하고 충성을 강요합니다. 상명하복의 계급체계는 말잘 듣는 철 밥통들을 만들어 인민들을 각종 세금 과 범칙금, 과태료 등의 명분으로 수탈할 수 있는 각종 법률을 입안하고 모 든 인민들이 착취와 갈취당하는 체제와 제도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조 장하며 자연스럽게 복종하도록 통제하는 도구가 됩니다. 관료들을 체제를 보위하는 직분에 복무하며 충실히 수행하는 기계로 세뇌 시키기 위해 국가를 강조하고 충성은 대단히 위대한 사람만 할 수 있는 행 위인양 부추기며 충성경쟁을 강요하는데 훈련이 잘됐다는 것은 인간성을 상 실하고 명령에 복종하는 로봇이 됐다는 의미입니다. 관료를 늘리는 것은 다중 인민들을 수탈하며 억압하고 관리하며 통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산노동도 하지 않고 수입 없이 무위도식하던 사람 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므로 소비를 유도해 공장에서 물질을 생산하는 기업주 와 판매하는 상인들에게 이윤을 보장하므로 기득권들의 부를 늘리고 체제를 유지하는데 이용합니다. 한편으론 거짓학술과 문화ㆍ예술ㆍ광대놀음과 도박ㆍ잡기ㆍ스포츠 등을 퍼 트려 다중이 진실은 파악할 수 없도록 시간을 빼앗고 모든 인민들에게 일자 리를 보장하지 못하며 일한 만큼 분배받지 못하고 착취하는 체제와 제도 때 문에 분배불균등이 생기고 빈부격차가 발생되면 소비를 못해 공황이 온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입니다. 임금노예들이 새벽잠 저녁잠 못자고 감시ㆍ통제 속에 죽도록 노동해도 생 활이 어려운 것은 아무리 부지런히 일해도 생산수단을 개인이 소유하고 노 동자를 임금노예로 부리며 착취하고 해고하는 제도 때문에 빈곤해지는 사실 느낌 169

을 은폐하기 위해 개인이 게으르거나 무능해서 가난해 진다는 거짓을 퍼트 립니다. 생산수단은 유산자나 후일 빼앗길 사기꾼만 소유할 수 있고 부가 축적되는 것은 생산자가 땀 흘려 창출한 물질에 이윤을 포함해서 넘기는 공장(기업)주 들과 물질에 가격을 올려 판매라는 갈취로 부를 축적하는 상인들이고 임금 노예들은 소비자일 뿐 부를 축적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은폐합니다. 공장주의 지나친 부의 축적을 저지하려 가격을 낮추면 생산노예를 해고해 임금을 줄이고 더 강한 노동을 강요하는 노동력착취로 자신의 이윤을 남기 기 때문에 절대로 공장주나 상인들은 가난해지지 않으며 죽도록 노동하는 생산자들만 지옥 같은 노동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빈곤에 허덕이며 가난해 집니다. 노동가치가 정상적으로 지급되려면 8시간 노동으로 생산한 물질을 8시간 분의 임금으로 취득해야 하지만 관료들을 위해 생산제품에 세금을 부과하 며, 노동자를 혹독하게 관리하고 감시하는 관리자, 물질을 판매하는 상인들 과 운송업종사자, 기업주들이 먹고 살기 위해 12시간 혹은 15시간의 노동 력의 임금을 지불해야 취득할 수 있으므로 그만큼 착취당하는 것입니다. 생산노동으로 거지ㆍ사기꾼ㆍ종교인ㆍ도둑ㆍ대통령 등 전체 모든 인류가 살아감에도 물질을 생산하는 생산노동종사자들은 저임금과 실업으로 빈곤해 지고 건설노동자들은 새벽잠과 저녁잠을 못자며 생명에 위협을 받고 무거운 물질을 취급하며 고공노동으로 주택을 건설해도 정작 자신이 살아갈 수 있 는 주택은 소유하지 못합니다. 관료들은 다중이 채용하거나 선출하지 않았어도 혈세로 월급 받고 혈세로 교육과 훈련을 받으며 혈세로 마련한 장비로 국민을 폭행하고 통제하는 것 이며 수단방법가리지 않고 법과 세금이란 명분으로 다중들을 수탈하며 뇌물 과 향연요구로 체제유지를 위해 소비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공황이 심화될수록 혈세로 살며 다중을 억압ㆍ통제하고 소비를 유도하도록 조장하는 관료들을 많이 고용해 다수가 굶주림에 참지 못하고 저항하면 이 성과 양심도 없이 폭력 로봇이 돼 굶주린 다중의 저항을 무력으로 억압합니 다. 1873년 발생된 공황은 생산기계가 자동화되면서 주기가 빨라져 소비하는 관료를 만들어도 소비할 수 없을 만큼 생산되자 서비스직과 예술ㆍ문학ㆍ스 포츠ㆍ광대 등 소비하는 계층을 만들고 수입을 보장하면서 억압받는 생산자 느낌 170

들과 동조하지 못하게 분열시켜 생산노예들은 통제와 억압 속에 노동력 착 취만 극심해졌습니다. 1886년 미국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부를 축적한 기업주들과 상 인들은 백 달러짜리 종이돈으로 담배를 말아 피울 때 1주일 내내 노동하고 도 1달러 75센트 밖에 받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리다 참지 못한 노동자들이 시카고를 중심으로 자신들도 인간이라고 인간으로 살 권리가 있다며 단결하 고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감시와 통제 속에 굶주림과 저임금으로 생활하던 노동자들의 저항소식이 전국으로 퍼지자 1886년 5월 1일을 기해 8시간 노동 을 요구하며 총파 업에 돌입했는데 경찰이 파업농성을 하던 노동자들을 향해 경고도 없이 무 자별적으로 총을 발포하므로 어린소녀를 포함한 노동자 6명이 사망하는 사 건이 발생했습니다. 분노한 노동자 시민들이 5월4일 노동기사단 주도로 헤이마켓광장 에 모여 경찰의 살인 만행을 규탄하는 평화집회 를 여는데 경찰이 강제로 해 산할 것을 명령한 직후 폭발물이 터지며 경찰 66명이 부상하고 7명이 사망 하는 사고가 일어나자 경찰은 즉각 시위대에 총기를 발사해 수많은 시민과 노동자가 사살당하고 해산됩니다. 경찰과 기득권들은 노동자와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던 무정부주의자 등 앞 에 나섰던 사람 8명을 폭탄테러범으로 체포하고 판사들은 8명중 5명은 사 형, 3명에게는 금고형을 선고했는데 이 폭탄테러사건은 훗날 노동자들의 저 항을 진압하기 위해 기업주와 경찰이 짜고 조작한 사건이었음이 밝혀졌습니 다. 이성과 양심도 없이 상명하복의 명령이라며 법이란 핑계로 국민의 자유를 억압ㆍ통제하고 국민을 수탈하도록 길들여진 관료들은 착취와 갈취로 굶주 린 인민들이 저항하면 사건을 만들고 폭력으로 진압할 구실을 조작합니다. 실상을 알 수 없었던 상황에서 파업지도자인 엘버트 파슨즈가 형장에서 숨 을 거두며 민중의 소리를 들으라 는 말을 남기고 산화했으며 1889년 파 리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이날을 기념해 5월 1일을 만국 노동자들의 날(메이데이)로 정하고 8시간 노동을 목표로 투쟁한 것입니다. 과잉생산공황으로 평생 죽도록 노동을 하고도 굶주리던 영국 노동자들이 1887년 11월 13일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모여 평화롭게 시위를 하는데 노동자들의 시위가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 군경이 폭력을 사용해 2명이 사 느낌 171

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것을 피의 일요일사건(Bloody Sunday)이라 합니다. 1872년 미국최대 규모인 홈스테드 철강소를 세우고 미국의 거부가 된 카 네기는 1892년 4,000여명의 비숙련 노동자를 고용해 하루 12시간씩 노 동을 강요하며 주당 9달러의 임금을 지급했다가 자동생산기계를 도입하고 임금을 더 삭감하겠다고 하자 800여명의 조합원과 3,000여명의 비숙련 공노동자들이 파업했습니다. 기업주들은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우면서 노동자에게는 생계 도 잊지 못할 임금을 지급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더욱 삭감하겠다고 하 자 분노한 노동자들은 임금삭감을 반대하고 1일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노 동조합을 인정하고 협상하지 않으면 파업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카네기를 대신해 공장을 관리하던 헨리클레이 프릭은 기능공이 없어도 자 동화시스템으로 상품을 생산할 수 있고 실업자가 넘쳐 노동자들은 쉽게 고 용할 수 있으니 노동자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오히려 공장주변 3마일에 탐조 등 설치와 가시철조망을 치고 핑커튼 흥신소에서 무장한 사설경비대 300 명을 고용했습니다. 회사의 조치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더욱 많이 집결해 공장과 경비원들까지 포위하며 협상을 요구했는데 카네기는 오히려 주지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주지사는 주정부연방군을 파견해 무력으로 진압하며 총을 발사해 4개월 만 에 무장하지 않은 노동자들 10명이 죽고 60명이 부상당하며 진압됐습니 다. 당시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던 알렉산더버크만과 엠마 골드만 등은 무력학 살과 진압에 분노해 자신의 동료들과 홈스테드 제강사건의 핵심에 있던 프 릭을 암살하려다 부상만 입히고 체포됐으며 파업을 진압한 카네기는 노동 자에게 저임금과 12시간 맞교대로 근무시키며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거부가 됩니다. 러시아에서는 나로드니키[ 人 民 主 義 ]의 전통을 이어받은 농민들이 1881년 알렉산드르2세를 암살하는 등의 성과를 올렸으나 전제주의 정치는 바뀌지 않았으며 새로 등극한 알렉산드르 3세는 경찰통제를 강화하고 1882년 모 든 출판물을 사전 검열하는 언론 법을 제정하면서 신문사는 언제든지 폐간 할 수 있게 됩니다. 1889년에 대지주의 추천으로 귀족계급에서 농촌공동체 지도부를 선출할 느낌 172

수 있는 법을 만들면서 농민의 노동착취가 합법화되자 1901년 말 V.M.체 르노프, A.F.케렌스키, B.V.사빈코프 등을 지도자로 정부요인들을 암살하 자며 무장투쟁하는 러시아 사회혁명당[ 社 會 革 命 黨, 농민정당]을 창당합니다. 1892년 러시아 크로폿킨은[빵의 정복 LaConquete dupain] 1899년 엔[어느 혁명가의 추억 Memoirs of arevolutionist] 1902년엔[상호 부조론 MutualAid, afactor of Evolution]등 저서를 발표하는데 실 업자는 증가하고 임금은 삭감됐으며 지가가 폭등하자 굶주리고 억압받던 노 동자들은 반정부운동을 유산자들은 입헌운동을 벌입니다. 1894년 조선에선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신분차별로 죽도록 일하고도 굶주 린 소작농들과 노비들이 가혹하게 노동력만 착취하는 양반들을 살해하는 살 상( 殺 傷 契 )계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던 것이 동학농민전쟁으로 확대됩니 다. 사람취급을 못 받고 억압당하던 노비와 머슴, 소작농들의 저항이 전국적으 로 확산되자 조선 군병만으로 민중들을 통제할 수 없는 조선기득권(양반과 왕조)들은 타국의 무력으로 농민군을 억압하려고 병사를 요청해 조선통치권 을 놓고 청ㆍ일간 전쟁이 벌어졌는데 1904년 일본이 승리해 조선에 병사 를 주둔시킵니다. 1903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니 1904년 러시아가 일본과 전쟁을 시작했다 패했으며, 1905년 1월 9일 러시아에서 14만의 굶주린 노동자들이 차르 니콜라이2세 초상화와 기독교 성 화상(icon) 그리 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적은 청원서를 들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위했습 니다. 사회개혁론자이자 러시아정교회사제인 가폰(Georgy Gapon)신부의 인솔 아래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를 요구하며 왕궁을 향해 평화 적으로 행진하는데 군경의 발포로 500~600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이 부 상하는 대형유혈사태가 발생하자 차르를 하느님처럼 떠받들던 러시아민중들 이 반발합니다. 일요일에 벌어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시작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수도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들어가면서 전국으로 확산됐고 5월에는 각지에서 군과 무력충돌이 발생했으며 6월 말에는 포테톰킨호( 號 )의 반란이 일어나고 10 월에는 모스크바철도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벌이면서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발전해 혁명전선이 됩니다. 니콜라이 2세는 10월 국민에게 신교( 信 敎 )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와 느낌 173

입법권을 갖는 제헌의회를 실시한다고 선언했지만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불 평등과 억압에 시달리는 병사들은 계속 저항했으며 12월 하순에 10일간 모스크바노동자들이 무장봉기를 일으킵니다. 1905년에 소비에트가 만들어지는데 소비에트(soviet)는 영어로 (council 평의회)로 당시 러시아 노동자들은 법으로 금지돼 노동조합도 없 고 선거권도 없었으므로 의회제도나 대의제에 길들여지지 않아 타인에게 대 리권을 준다거나 타인의 지시나 통제를 받는일 없이 지하서클 활동을 했었 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평의회는 기본적으로 조직이라는 명분으로 분열되지 않았 으며 노동자들이 거수에 의해 공개적으로 대표를 선출하고 선출된 대표들은 소수라도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어 선출된 자들이 관료적행위를 할 수 없었 으므로 누구나 타인의 지시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신의 결의에 의해 책임있 게 권한을 행사했기 때문에 힘차게 변혁에 앞장선 것입니다. 노동자들은 전체를 종파 또는 계파로 서로 분열시키는 특정정당을 찬성하 지 않았으며 소비에트의 결의문, 구호 등은 자신들이 주체적으로 정하고 스 스로 중심이 돼 투쟁기금을 확보하고 실업자를 지원했으며 무장봉기를 강조 하는 선언문과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그런데 입헌정부를 요구하던 유산자와 기회주의자들은 평의회 체제에서는 자신들이 획득한 기득권(명성)이 사라지므로 차르의 10월 선언(국민의 기본 권과 시민적 자유 및 선거에 의한 제헌의회 창설약속)을 신분상승의 기회로 삼아 더 이상 저항은 의미 없다. 며 멈추자고 선동해 찬반을 둘러싸고 봉 기했던 주체가 분열되면서 1906년 5월 간접선거에 의한 민선의회인 두마 (Duma)만 구성하고 러시아혁명은 실패로 끝납니다. 1904년 8월 22일 조선에 병사들을 파병하고 무력으로 조선을 장악 한 일본은 강압적으로 재정( 財 政 )과 외교( 外 交 ) 부문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 문( 顧 問 )을 둔다는 내용의 외국인용빙협정( 外 國 人 傭 聘 協 定, 제1차 한일협 약) 을 체결하고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大 韓 帝 國, 이하 한국)과 한 일협상조약( 韓 日 協 商 條 約 )을 체결합니다. 을사( 乙 巳 )라는 명칭은 1905년이 육십갑자의 간지( 干 支 )에 해당돼 칭하는 것으로 명목상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 保 護 國 )이 돼 을사보호조약( 乙 巳 保 護 條 約 ) 이라고 칭했었으나 보호국이라는 명칭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植 民 地 )한 것을 미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발하므로 을사조약 이라 는 명칭으로 바뀝니다. 느낌 174

을사오조약( 乙 巳 五 條 約 ) 혹은 을사늑약( 乙 巳 勒 約 )이라 하는데 5개 항목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금지하고 통감부( 統 監 府 )와 이사청( 理 事 廳 )을 둔다는 내용 으로 개항장과 13개 주요도시에 이사청을 두고 11개 도시에 지청( 支 廳 )을 설치하며 통감부는 병력동원 권과 시정감독권을 장악하므로 최고 권력으로 식민통치가 시작됩니다. 미국에선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부를 축적한 계층들이 권력을 장악하면 서 자신들이 마음대로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를 발행하던 것을 중단시키고 국가가 관리하기 위해 1913년 발효된 연방 준비은행법에 의해 12개 산하 연방 준비은행과 연방공개시장위원회, 연방자문회의 등을 구성하고 연방 준 비은행을 설립합니다. 연방 준비제도이사회는 법정 한도 내에서 12개 산하연방 준비은행 회원은 행들의 준비금 요구사항과 할인율을 검토ㆍ결정하고 이사회 회원은행의 예 산을 심의하며 12개 연방 준비은행은 공익을 위해 설립된 민간 기업으로 9 명의 이사회가 운영하며 이사 중 6명은 회원은행들이 3명은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에 의해 임명됩니다. 광산노동자들의 저항 미국의 콜로라도 주 트리니다드 북서쪽 19Km에 위치한 루드로 광산에서 석탄을 생산하던 광부들은 다른 탄광보다 20%나 적은임금(1일 1달러68센 트)을 지급하며 채굴한 석탄 톤수를 속이고 무임금노동을 강요하며 회사가 제공한 집과 상점에서 비싼 가격으로 물건을 구입해야하는 억압ㆍ통제 속에 빈곤하게 생활합니다. 당시 광산은 록펠러가문소유의 콜로라도 퓨얼 & 아이언 컴퍼니(Colorado Fuel & Iron Company, CF&I)와 로키마운틴 퓨얼 컴퍼니(Rocky Mountain Fuel Company, RMF), 그리고 빅터-아메리카 퓨얼 컴퍼 니(Victor-American Fuel Company, VAF)라는 세 개가 가장 큰 탄 광으로 서로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각 광산들은 광부들이 뭉치지 않아야 쉽게 통제하고 사망재해가 발생해도 큰 보상 없이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기 때문에 주로 동유럽, 남유럽, 멕시 코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을 광부로 고용했는데 여러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을 느낌 175

섞어 의사소통을 힘들게 하므로 노동자들이 뭉쳐 저항하지 못하도록 관리한 것입니다. 이렇게 노무관리시스템을 구성한 광산주들은 광부들의 안전을 위한다는 핑 계로 회사 내에 광부들이 채굴한 석탄 이익금으로 급여를 지급받는 안전 관 리자들과 자체보안대를 설치하고 통제ㆍ착취하면서 광부들에게 생명을 건 위험한 노동과 무 임금노동을 강요하며 부를 축적해 거부가 됩니다. 먹을 것도 못 먹고 잠잘 시간도 없어 깡마른 광부들은 하루 12시간 이상씩 노동하며 1달러 68센트의 임금을 받고 회사가 지정한 사택에 비싼 주거비 를 지불하고 회사가 설립한 상점에서 강제로 비싼 가격의 물건을 구입하며 회사가 지정한 의사에게만 진료를 받아야 하는 규정에 묶여 통제당하고 착 취당한 것입니다. 광산주들은 광부도 사람이라는 생각을 깨우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매일 매 일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노동력을 착취했고 복종하는 비조합원들은 배려하 지만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조합원들은 일상에서 실수가 발생되도록 조장 하고 사소한 실수가 발생하면 사고로 몰아 정신적 복종까지 강요하며 통제 합니다. 광부들은 채굴한 석탄 톤수만 임금을 받고 석탄운반을 위해 부설하는 철로 와 갱을 지지하는 지주작업은 무보수로 작업해야 했으며 안전을 무시해 갱 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면 안전대책 없이 짧게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 전부였으므로 1884년과 1912년 사이 1,700명 이상의 광부들 이 탄광에서 사망했습니다. 1913년 9월 매일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위험을 무릅쓰고 똑같은 노동 을 하며 착취당하는 생산기계로 살던 광부들은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생산기계에서 벗어나고자 1.노조인정, 2.채탄가격인상(임금 10% 인상효과) 3.일 8시간 노동법준수, 4. 무임금노동 (철로 부설, 갱지주 작업, 불순물 제거 등)에 임금지급, 5.채탄무게 측정 때 노조선출인원입회,(사측의 속임을 방지) 6.회사가 지정하지 않은 상점과 주택, 의사를 이용하고 선택할 권리, 7.콜로라도 주 법의 엄격한 준수(광산안전법규, 전표의 폐지 등)와 강압적이 고 위협적인 회사보안대 폐지를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합니다. 극악한 생존환경 속에 광부들은 콜로라도 주 석탄 채굴회사연합에 걸 맞는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스스로 미국광부노조(United Mine Workers of America, UMWA)를 결성하고 노동조합주도로 파업을 시작하자 곧바로 탄광에서 해고되고 사택에서도 쫓겨나 탄광부근에 천막을 짓고 생활하므로 거대한 천막촌을 이뤘습니다. 느낌 176

광부들은 회사와 협상을 빨리 끝내고 자신이 거주하던 사택으로 돌아가 생 활한다고 생각했으나 광부들의 채탄수입금으로 생계와 부를 축적하는 관리 자와 광산주들은 고분고분해야 할 광부들이 저항하는 정신을 뿌리 뽑는다며 볼드윈-펠츠 탐정사무소를 고용해 광부들을 무참히 짓밟습니다. 석탄생산은 숙련도는 떨어지고 언어가 통하지 않지만 죽어도 큰 부담이 나 말썽 없이 굽실거리며 생산하는 이주노동자들이 많아 파업노동자와 딱지 (Scab, 파업 비참가노동자를 경멸하는 호칭) 로 분류해 딱지들은 광산 보안대와 탐정사무소 무장경비들이 보호하면서 파업노동자에겐 조소를 보내 고 위협하며 도발합니다. 파업을 조속히 마무리해야 명성을 날리며 많은 이익을 내는 탐정사무소에 서는 끝없이 파업노동자들을 자극하며 갖은 방법으로 위협하고 도발을 시도 했으며 차량을 개조해 장갑차를 만들고 주변을 정찰한다며 한밤중에 천막촌 에 탐조등을 환히 비추거나 무작위로 사격을 가해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광산주들은 파업을 빨리 마무리해야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광부들의 동요 도 막을 수 있고 자신들의 욕심대로 착취하며 부를 축적할 수 있기 때문에 탐정사무소를 압박하고 푸에블로 CF&I 공장에서 커다란 투어링 세단에 강 철방호재와 기관총을 장착한 장갑차를 만들어 지원하면서 파업노동자를 탄 압한 것입니다. 파업노동자들은 밤낮없이 천막촌에 굉음을 일으키며 돌아다니다가 한밤중 에는 무차별적인 사격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부상 입히는 이 차량을 데스 스페셜 이라 불렀는데 장갑차량의 빈번한 사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 치자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천막아래 땅굴을 파고 두더지처럼 생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장갑차와 회사보안대, 탐정사무소용역깡패들의 무작위적인 총기난사와 폭 력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광부아내들은 파업이 끝날 때 까지 자신들이 먹고 생활해야 할 곡식들과 사용하던 일용품들을 자루에 담고 시 장으로 가져가 자신들의 목숨을 지킬 유일한 무기인 총기와 바꿔야 했습니 다. 10월 28일, 파업과 관계된 폭력행의가 도마에 오르자 주지사 일라이어스 M. 아몬스가 콜로라도 주 방위군을 출동시켰는데 주방위군 지휘관 존 체이 스는 크리플 크릭에서 노동자들이 파업할 때 노동자들을 폭행해 사람을 학 살하는 로봇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광산촌 루드로에 노동자들을 제압하기 위 해 파견한 것입니다. 느낌 177

1914년 3월 10일, 천막촌 포브스거주자들이 몇 일전 용역깡패들의 총격 으로 죽은 아이장례식에 간 사이 주방위군 지휘관 체이스는 대체 노동자시 신이 포브스근처 철로위에서 발견됐다는 핑계로 포브스천막촌을 철거하라며 공격해 광부들과 어린아이 그리고 아녀자 등 수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습 니다. 콜로라도 주지사는 혈세로 유지되는 방위군을 지원할 자금이 바닥나 주 방 위군을 소환하게 되자 방위군 두 부대를 콜로라도남부에 남겨두는 대신 탄 광회사들에게 무력으로 파업광부들을 억압할 수 있도록 주방위군 제복을 입 힌 민병대를 조직하도록 하므로 용역깡패와 보안대가 합법이란 명분으로 무 장합니다. 4월 20일 아침, 그리스이민자가 부활절을 지낸 다음날 세 명의 보안요원 이 한 남자가 파업노동자 측에 붙잡혔다고 억지를 쓰며 석방을 요구해 천 막촌 지도자인 루이스 티카스에게 알려지자 티카스는 천막촌에서 반마일 (0.8km)정도 떨어진 루드로 마을 열차 역에서 민병대지휘관과 만나기로 했습니다. 만남이 진행되는 동안 민병대2개 중대가 천막촌근처 루드로 남쪽반마일 철 도를 따라 능선에 기관총을 설치하는 것을 본 티카스는 급히 천막촌으로 돌 아와 알려 광부들은 민병대 측면에 자리를 잡자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지나 가던 화물열차가 보안대가 기관총을 놓은 곳에 멈춰 막아 주므로 광부와 그 가족들은 블랙 힐 이라 부르는 동쪽언덕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오후 7:00 민병대는 천막촌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기 시작하면서 천막촌을 사수하던 루이스 티카스와 다른 두 사람이 민병대에 잡혔는데 민병대지휘관 중 하나인 칼 린더펠트 중위가 티카스와 다른 두 남자를 죽이고 시신은 지 나다니는 열차가 보이게 전시해 놓고 지역철도노조에게 시신을 가져가 매장 하라고 강 요합니다. 싸움이 벌어질 동안 4명의 여자와 11명의 어린이가 천막 밑에 파놓은 대 피호 속에 숨어있었는데 민병대가 천막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불길에 갇혀 2명의 여자와 어린이 모두가 질식사하므로 광산노조측은 무장봉기를 촉구 하고 콜로라도 주 노동조합지도자들도 모든 조합원의 무장봉기를 촉구하면 서 열흘간 게릴라전이 벌어집니다. 콜로라도 주 트리니다드에서는 광산노조가 조합본부에서 파업노동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무기와 탄약을 나눠줬으며, 여자와 아이들이 민병대에 의해 무 자비하게 학살 됐다는 사실에 분노한 700 ~1000명의 노동자들이 잇따 느낌 178

라 광산들을 습격해서 보안대를 쫓아내거나 죽이고 건물에 불을 질렀습니 다. 광부들이 보안대에 맞서 싸운 10일 동안 루드로 천막촌 희생자를 포함해 119명이 사망하자 대통령 우드로윌슨이 연방군을 보내 양측을 무장해제 시 킨 후 400명이 넘는 노동자를 구속하고 332명을 살인혐의로 기소했으나 파업을 주도한 존 로슨만은 살인죄가 선고됐다 콜로라도 주대법원에서 파기 됩니다. 루드로에서 천막촌에 불을 지르고 약탈과 학살을 일삼던 민병대와 주 방위 군의 장교 10명을 포함해 22명의 군인들이 군사법원에 회부됐지만 학살만 행을 저지른 자들을 기소한 것은 형식적인 행위였을 뿐 루이스 티카스를 폭 행한 혐의로 린더펠트 중위만 가벼운 징계를 받고 모두 무죄가 됐습니다. 록펠러재단은 권력의 비호를 받고 총기로 무장한 후 폭력으로 노동자들을 학살하고 억압하면서 노동력을 착취해 미국의 거부가 됐는데 후일 록펠러후 손들이 진상을 알고 가문이 수치스럽다며 부를 챙겨 떠나기도 했으며 록펠 러는 이때의 살상만행을 회계한다며 그 유명한 록펠러자선재단을 설립하게 된 것입니다. 체제 때문에 분배불균등에 의한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면서 다중의 수입이 줄고 굶주리는 인민들이 늘어 공장에서 생산한 물건을 팔지 못하는 공황을 타개할 수 없는 기득권은 타국을 침략해 시장식민지로 삼으려고 전쟁을 벌 입니다. 공황과 학살전쟁 1914년 독일은 영국을 앞질러 세계경제를 주도했으며 해운업 역시 다른 나라들을 주도하는데 프랑스는 독일과 함께 경제를 이끄는 경쟁자로 모로코 에서 광산자원과 무역시장을 두고 대립하다가 프랑스는 풍부한 철광산지인 로렌이 망하므로 독일 산업만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오스트리아는 이스탄불과 오스만제국을 침략할 야욕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 은 굶주리는 인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침략전쟁이 불가피 했지만 보 느낌 179

스포러스(Bosporus)에서 바그다드까지 철로를 놓으면 바그다드에서 페르 시아 만으로 이어져 인도까지 연결되는 철도노선공사로 실업을 해소하려 했 습니다. 이 철도를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 은행가들과 공동으로 투자하려했으나 양 국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거절당하고 풍부한 경제를 바탕으로 노동자들 의 수입을 보장하며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375마일(약 604킬 로미터)에 달하는 철도선건설을 강행하면서 국제적으로 반목과 질시를 받게 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190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자 대 세르비아 계는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하고 오스트리아내의 슬라브족이 같은 민족이라며 단결을 강조하자 세르비아인들도 상대를 적대시하며 뭉치려는 활동으로 대( 大 )세르비아계와 범 게르만계로 나눠지며 민족(지역)으로 대립 합니다.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전 11시경 사라예보를 친선 방문했던 오스 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대공과 그의 아내 호엔베르 크 소피아황태자비가 샛길로 차를 잘못 몰고 들어갔다 세르비아왕국 출신청 년 가브릴로 프린치프(1894년~1918년)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 사라예보 사건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모총장 프란츠콘라트 폰 회첸 도르프는 이것은 광 신자 1인 범죄가 아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우리제국은 남부슬라브인, 체코 인, 러시아인, 루마니아인, 이탈리아인들의 야망폭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전쟁을 해야만 한다. 면서 전쟁을 강조합니다. 도르프는 세르비아왕국에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을 왜 저질렀나? 라며 1.반 오스트리아 교육금지, 2.반 오스트리아 단체해산, 3.반 오스트리아 관리파면, 4.반 오스트리아 관련 출판물몰수, 소각, 5.사라예보사건재판에 오스트리아관리참여, 6.무기의 국외반출금지, 7.48시간 이내 회답 등 10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대립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인 독일과 마찰을 바라지 않으므로 세르비아에 상기 조항을 받아들일 것을 권 고하고 세르비아는 모든 조항을 무조건 수용하며 재판참여 역시 협상이후에 받아들일 생각이 있다고 했지만 오스트리아는 즉각 세르비아와의 외교단절 을 선언합니다. 느낌 180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베 오그라드를 향해 포격명령을 내리자 7월 29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군의 포탄이 세르비아수도 베오그라드에 떨어지므로 빈과 페테르부르크정부는 즉 각 총동원령을 내려 인류역사상 엄청난 인명을 살상하는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은 대영제국, 프랑스 제3공화정, 러시아 등이 주요 연합국으로 참 천했고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요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돼 싸웠으며, 약 900만 명이 전사하고 1918년 독일제국에서 혁명이 발생해 빌헬름2세가 퇴위하므로 공화국정부가 수립되면서 11월 11일 독일의 항복 으로 끝나게 됩니다. 1918년 9월 말 참모본부가 패전을 인정하며 조속한 휴전의 필요를 주장 해 10월 3일 독일에서 처음으로 막스 폰 바덴이라는 의원제 내각이 탄생했 고 내각에 의해 휴전교섭을 진행했지만 초대 의원제 내각이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자유를 주장하는 저항이 확산되며 황제퇴위를 요구합니다. 1918년 11월 3일 킬 군항에서 해군수뇌부의 독선적이고 독자적인 전투 계획에 반대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노동자들이 합류하면서 노동자-병 사평의회가 구성됐으며 노동자-병사평의회가 군과 경찰을 무찌르고 킬 시의 실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독일북부에서 서부 및 남부로 급속하게 혁명이 확대됩니다. 11월 9일 베를린에서도 혁명이 발생해 독일황제 빌헬름2세를 강제 폐위시 켰으며, 사회민주당 당수인 에베르트가 임시대통령으로 지명돼 임시정권을 세우고 11월 10일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민주당과 자유를 주장하는 사 람들 단체인 독립사회민주당의 연합으로 연립정권을 구성합니다. 12월 말부터 이듬해 1월 중순에 평등과 자유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유산 자끼리 선출되고 권력을 행사하는 의회제를 반대한다며 저항을 시작했으나, 군부를 중심으로 한 체제보위파의 지원병부대에 의해 진압되고 1919년 1 월 19일 실시한 총선거에서 민주공화파는 사회민주당 163석, 민주당 75 석, 중앙당 91석을 차지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자유를 주장한 독일인민당은 19석, 독일국가인민당은 44석, 독립사회민주당은 22석을 얻으므로 민주공화파가 승리했고 2월 6일 에베 르트가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며 샤이데만을 총리로 하는 민주공화파 3당의 연립정부가 만들어지며 바이마르공화국이 탄생합니다. 새로운 정권은 6월 28일 베르사유조약에 서명하고 8월 14일에는 민주공 느낌 181

화헌법이라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바이마르공화국헌법이 발효됐지만 바이마 르체제는 주요 정치세력들 사이의 타협이라 군대-관료-사법제도 등 억압과 착취세력을 발본색원해 정리하지 못하므로 역사발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선출 자들에 대한 불신은 직접선거로 광범한 권한을 지닌 대통령제를 채택 하며 권력을 집중시키므로 장래에 불안을 남겼고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세 력 및 국민들 사이에 여전히 제정( 帝 政 )에 대한 충성을 지닌 사람들도 있어 혁명이후 가장 큰 현실적 과제였던 경제 분배와 자유보장에 대한 실효성 있 는 정책을 만들지 못합니다. 1919년 8월 11일 제정된 독일 바이마르공화국헌법(독일어:Die VerfassungdesDeutschen Reiches)은 국민주권주의로 보통 평등 직접 비밀 비례대표의 원리에 의한 선거로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국가대 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하며 국가하원은 3분의 2 찬성으로 대통령 탄핵을 국민투표에 부의할 수 있습니다. 국가내각은 총리가 추천하는 장관들로 구성하고 총리와 장관들은 대통령이 임명하며 내각은 수평적 조직형태의 권한으로 각 장관은 자기 임무를 총리 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집행하고 장관들은 법안이나 중요한 안 건을 내각끼리 사전 조정해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내각 내에서 다수결로 결 정하도록 했습니다. 내각은 하원에 법안제출권과 상원에 발안권이 있으며 국가하원과 국가 대 통령은 국민들이 직접선출하고 국민의 권리는 국민발의와 국민투표로 입법 에 참여할 수 있으며 제국을 구성하는 모든 주는 독자적인 자유헌법을 가져 야 하고 모든 권력은 21세 이상 성인남녀의 선거에 의한 비례대표로 이루 어진다고 규정됐습니다. 하원은 입법권과 정부감사 권을 가지며 불신임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고 하 원이 신임을 철회할 경우 총리와 장관들은 즉각 사임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바이마르헌법으로 경제 분배에 대한 내용과 국민의 권리에 대한 내용 그리 고 국가라는 집단이 국민에게 보장해야 할 복지방향과 내용까지 자세히 언 급하고 있습니다. 제142조에 교육과 병자의 치료는 무료로 규정하고 제145조에 8년 동안 의 교육은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며 교육과 학습에 필요한 모든 자원은 무료 로 제공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교육비용이 없어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 이는 교육받을 수 있도록 정부가 식생활과 주거, 교통ㆍ교육비를 지원합니 다. 느낌 182

제150조는 풍치법이라고 해서 예술, 역사, 자연이나 풍경, 기념물은 보호 및 치료해야 한다고 규정하므로 정치권력이나 기업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마음대로 자연을 훼손하는 것을 금지하고 국토는 개인 것이 아니라 그 국토 에 살아가는 모든 국민의 공동소유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국가가 관리하도 록 했습니다. 제114조는 국민 개개인의 자유는 신성불가침으로 모든 국민의 동의와 합 의로 만든 법률에 규정된 범죄행위가 없는 한 어떤 이유로도 억압할 수 없 으며 개인적인 자유의 박탈은 법률에 근거해 허용하되 법률이 정한 순서로 진행하며 반대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 습니다. 제119조부터는 생활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데 남녀의 결혼은 평등에 근거 하고 가족생활의 보전은 헌법으로 특별히 보호하도록 했으며, 제121조에는 어린이들에게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 개발을 위한 동일한 기회를 갖도록 규 정하고, 제122조에는 청년은 정신적ㆍ도덕적 착취에 맞서 저항할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제155조에는 생산(기업)의 독점이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토지를 사용하 고 남는 이윤을 정부가 통제하며 주거 및 농가의 농토사용도 법률에 근거해 사용해야 하고 직장이나 개인재산의 지출 없이 활용할 수 있지만 경제적 가 치를 가지는 모든 광물 자원 및 자연의 이용은 국가가 감독하고 감시하도록 규정한 것입니다. 제159조는 노동과 경제조건의 결사로 모든 사람과 모든 직종에 대한 계약 을 보장하지만 노동자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불법으로 취급하므로 노동자 의 해고를 금지했으며, 제161조는 국가가 노동권을 보장하지 못해 수입이 없으면 건강과 업무능력 그리고 나이를 고려해 국가가 실업수당을 지급하도 록 했습니다. 제165조는 노동자의 임금 및 노동조건과 규제는 고용주와 노동조합이 동 등하게 참여하고 동등하게 합의하도록 했으며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지구노 동자평의회가 자유롭게 참여해 결정하도록 하므로 사회적 약자인 동시에 경 제주체인 노동자들의 권리를 국가가 철저하게 보장한 것입니다. 바이마르공화국은 상인이란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 노동자ㆍ농민ㆍ어민의 땀 흘린 노동생산물을 가져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윤을 포함시켜 판매하 므로 가격을 상승시키고 기업주도 생산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노동자의 노동 생산물로 부를 축적해 누린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착취와 갈취권한 느낌 183

을 제한했습니다. 경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관리ㆍ감독하는 공무원이 권한을 박탈당하지 않고 양심껏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신분을 보장하기 위해 제104조는 법 원판사들의 신분을, 제129조는 일반 공무원의 신분을 보장하고 곳곳에 양 심을 강조하므로 정권이 마음대로 자격을 박탈할 수 없도록 보장한 것입니 다. 이 헌법은 히틀러에 의해 폐기됐으며 현재 독일은 국민건강과 관련된 의료 는 국가가 책임지며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찾을 수 없는 사람은 택시비 를 지급하고 환자의 집으로 왕진을 가며 아이들의 교육은 무상으로 실시하 고 학비가 없는 학생들은 학업 할 수 있도록 주거비와 교통비 그리고 식비 를 정부가 지급합니다. 복지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모든 기업은 이윤의 70%를 세금으로 징수하며 모두가 공정하게 지켜야 할 법률의 범칙금을 일률고정으로 책정하면 재산정 도에 따라 불이익이 되기 때문에 소유한 재산에 비례해 %(프로테지)로 범칙 금을 부과하므로 모든 사람들이 공정하게 부담을 느껴 지키도록 하고 있습 니다. 전쟁을 혁명으로 독일이 전쟁을 치르며 구제도를 무너트리고 공화국을 만드는 사이 러시아 에선 분배불균등으로 굶주린 인민들이 저항하자 니콜라이 2세는 불만을 잠 재우려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강조하며 병사들을 동원해 제1차 세계대전에 무려 1,500만 명이 참전합니다. 러시아는 공업이 도입됐지만 농업 국가였는데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수많 은 젊은이들이 병사로 전장에 참여했기 때문에 노동력이 줄어 생산되는 물 질도 부족한데 인민의 생계에 사용돼야 할 국가예산 마저 전쟁에 쓰므로 민 중들의 생활은 당장 먹을 빵과 우유가 없을 정도로 어려워집니다.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대패해 사기가 저하되자 니콜라이 2세는 국정을 황 느낌 184

후에게 맡기고 1915년부터 직접전투에 지휘자로 참전했으나 페트로그라드 민중들이 먹을 밀가루가 절반으로 줄면서 어린이들에게 먹일 우유도 모자라 빵과 우유를 구입하기 위해 시민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줄을 서야 했습니다. 3월 7일(러시아력 2월) 국제 여성의 날 페트로그라드여성들은 빵과 우유 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같은 처지에 놓인 노동자 8만 명이 시위에 가담 하며 파업으로 이어지자 황후는 군을 동원해 군중들을 제압하라고 명령하니 기병대가 군중들을 거칠게 해산시키다 물러서면서 2열 횡대의 근위병들이 일제히 총을 발사합니다. 노동자들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혁명가를 부르며 자유를, 시민의 행복 을, 조국 러시아의 부흥을 이라고 외치며 저항하자 니콜라이는 수도방위사 령관 하발로프에게 병사로 진압하라고 명령했는데 2월 27일(러시아력) 진 압을 거부한 일부사병들이 페트로그라드노동자ㆍ병사소비에트 를 구성하 면서 혁명으로 발전했습니다. 러시아력으로 3월 2일 니콜라이 2세가 동생 미하일에게 정권을 넘겼으나 폐위됐으며 루소와 프루동사상에 기초한 자유주의자, 마르크스사상에 기초 한 노동자집단주의자, 종교의 프로테스탄트를 기초로 억압과 착취의 시장자 유주의자 그룹들이 연합해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탄생시킵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임시정부는 인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진 원인이 생산노 동을 해야 할 젊은이들이 전쟁에 동원돼 생산되는 물질이 부족한데도 기득 권만 누리고 살 수 있는 분배가 불균등한 체제 때문에 다수가 굶주리는 현 실을 외면하고 권력 안정에만 집중하므로 민중들의 지지를 잃습니다. 9월로 들어서 노동자집단주의를 주장하는 볼셰비키가 전국적인 지지를 받 으며 1917년 11월 7일(러시아 구력 10월 25일)오전 10시 볼셰비키 군 사혁명위원회(위원장 트로츠키)는 1,000명의 적위대를 동원하고 러시아수 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급습해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를 몰아내고 소비에트정 권이 수립됐음을 선언합니다. 소비에트대회 명으로 평화에 관한 포고 와 토지에 관한 포고 를 선포 하며 인민위원회를 구성해 레닌을 의장으로 추대하자 레닌은 구시대 지배질 서인 제헌의회 를 약속했으며, 1918년 1월 23일 개최된 제3차 러시아 소비에트대회에서 노ㆍ농 소비에트대회를 공동위원회로 채택하고 근로피착 취인민의 권리선언 을 선포하면서 안정을 꾀합니다. 소비에트부의장으로 지주와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 미적거리다 11월 혁명 느낌 185

(구력 10월)이 발생하자 여자로 변장하고 동궁을 탈출한 케렌스키는 지주와 기득권들의 돈을 지원받아 백군을 소집하고 전선에 배치해 있던 카자흐부대 와 수도탈환을 꾀하는 내전을 일으켰다 실패하자 프랑스로 망명합니다. 1당 정치체제를 구축한 레닌은 다중이 권력자를 직접 선출하는 선거가 아 니라 인민들은 대표권을 행사하는 대의원만 선출하고 대의원들이 전당(전국 대회)대회에서 의장을 선출하는 권력체계를 구축하므로 선거선출제도의 폐 해를 이중으로 사용하면서 다중의 의사를 봉쇄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시스템 을 만듭니다. 1당 독재 권력이 완성되자 모든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몰수하는 것이 아 니라 농민들이 토지를 국가에 양도하면 영구사용권을 인정하여 집단농장이 라 칭하면서 농민들이 사용했으며 대지주들은 쿨락이라 불리며 소작농들을 노예로 부렸고 짜르의 영토는 국영협동농장을 만들어 공동생산에 의한 공동 분배를 실시합니다. 러시아인민들은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생산하고 받은 임금으로 시장에서 비 싼 비용으로 물질을 구입하며 갈취 당하던 체제에서 모두에게 일자리가 보장 되는 집단농장과 협동농장에서 공동으로 노동하고 화폐대신 물품표를 받으니 착취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해 열심히 노동한 결과 공업이 급 발전하고 농촌지 역에서 생산이 증가됩니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투표권과 정치참여를 보장하며 여성을 남성의 억압 과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탁아소를 설치하고 남녀평등을 선포하자 외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90%가 넘었고 봉건제에서 남성에게 억압받으며 순종만 강요당했던 여성들이 이혼을 요구해 알코올중독자가 급 증합니다. 소비에트의 조치는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국가 기득권들에 게 충격이 돼 생산수단의 개인소유금지와 공동생산에 의한 공동분배사상이 자국에 전파되는 것을 두려워한 미국개신교목사들이 공산주의는 1당 독재정 권이고 빨갱이사상이니 타도해야 한다며 반공법이 기승을 부립니다. 전 세계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무리들은 자유를 주장하며 공정한 분배와 평 등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빨갱이라며 탄압하기 시작했 고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누리고 살던 러시아기득권들은 백군을 만들어 저항합니다. 기득권을 누리던 무리들은 축적한 화폐로 반혁명군인 백군을 고용하므로 느낌 186

초기 소비에트는 화폐를 폐지하고 물품표를 지급헤 물건을 분배받도록했는 데 모든 혁명이 그러듯 특정 조직을 광범위하게 준비하고 혁명하려면 기득 권이 탄압하고 억압해 조직이 유지될 수 없으며 혁명조직소수로는 전국적 행정력을 장악하지 못합니다. 인류역사에서 혁명이란 무장된 병사의 무력을 앞세운 쿠데타로 권력을 장 악한 행위가 아니라면 소수특정 조직이나 단체의 선전선동으로 촉발되는 것 이 아니라 죽도록 노동하고도 기득권의 착취와 지배ㆍ통제에 억눌리고 굶주 린 다수 대중들이 자유를 요구하며 분노하면 폭발되는 것입니다. 레닌은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중ㆍ소농의 토지를 국가에 헌납하면 영구 히 사용하도록 하므로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생산수단의 개인소유금지는 실 현되지 않았고 혁명에 앞장섰던 무리들이 소비에트인민위원회 고위관료나 생산하는 노동자와 농민을 지휘ㆍ통제하는 관료가 돼 호화로운 별장을 두 채 이상씩 보유하므로 불평등해졌습니다. 모든 인민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가 되려면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살아 갈 권리가 있다는 사상과 경제는 땀 흘린 노동생산물일 뿐이라는 사실들을 알려내고 다수결로 선출하는 선거제도는 다중에겐 선출할 권리만 있을 뿐 선출된 소수가 권력을 행사하므로 다수는 권리를 박탈당하는 제도라는 사실 을 알려야 했습니다. 생산노동에 기생해 살아가는 관료란 법이나 규칙이란 명분으로 다중의 자 유를 부정하고 억압ㆍ수탈ㆍ통제하며 체제를 보위하는 집단이란 사실을 밝 히고 권한의 집행자는 대중이 추천하고 소수라도 언제든지 자격을 박탈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를 실시하므로 다중을 지배ㆍ통제ㆍ수탈하는 관료가 탄생될 수 없게 했어야합니다. 구소련은 관료가 되는 당원이 되려면 출신성분과 사상을 따지며 제한하고 선출직들이 임명했기 때문에 당원이 된 사람들이 특정 출신성분이라는 이유 로 신분이 보장되며 특권을 지니고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러시아혁명으로 기득권을 차지한 무리들은 농민들이 글자를 모르는 문맹이 라는 핑계로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사상을 전파하지 않았고, 지 도라는 명분으로 인민들을 통제하는 권력을 행사했으며 내전과 전쟁이 발생 했다는 핑계로 도시노동자를 위한다며 농민들의 생산물을 강제 공출한 것입 니다. 레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했던 연속혁명론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느낌 187

성장전화( 成 長 轉 化 )라는 산업이 고도로 발달하고 나서 혁명해야 모두가 평등 한 공산주의사회가 된다는 2단계 혁명론을 주장하며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 는 수병들을 병사로 진압했으며, 노동자무장파견대를 동원해 농민들의 생산 물을 강제로 공출하므로 농민들이 생산을 거부하자 먹거리가 부족해집니다. 그러자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며 농민들의 개인 소유의 텃밭은 인정했으 며 루불화라는 화폐를 만들고 시장을 부활시킵니다. 트로츠키는 연속혁명론<우리의 이익과 임무는 다소라도 재산을 소유한 계 급의 지배적 지위를 폐기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며 전 세 계에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진행됨으로 경쟁이 그치고 생산력이 프롤레타리 아의 손에 집중될 때까지 혁명을 영속시키는 일이다>는 마르크스이론을 주 장하며 레닌과 대립하기도 합니다. 경제를 발전시킨다며 네프경제를 실시하므로 러시아에서 화폐와 시장이 부 활하니 노동자ㆍ농민ㆍ어민의 노동생산물을 판매해 이익을 남기는 상인들은 부유해졌지만 임금을 지급받아 필요한 생필품을 시장에서 구입해서 사용하 는 노동자들은 소비자가 되어 노력할 수 록 빈곤해지므로 모두가 평등한 사 회가 아니라고 자각한 노동자들이 생산노동을 기피하기 시작하면서 러시아 의 생산력은 급격히 저하됩니다. 기업을 운영하면서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무리도 있었고 노동자를 지시ㆍ통제하는 관료들이 존재했으며 화폐를 발행하고 시장을 인정하므로 타인의 노동생산물을 판매하고 이윤을 남겨 화폐를 축적하는 상인들이 늘어 나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며 권력을 행사하기에 이릅 니다. 관료들은 기득질서를 지키려면 집단은 관리돼야 한다며 정기적으로 보수교 육을 받고 특권의식에 세뇌돼 자신들이 행사하는 권력이 잘못됐다고 따지는 사람에게 과학적ㆍ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니 말이 많으면 빨갱이라고 억 압하며 공권력이라는 우월적 지위를 남용해 무력을 행사합니다. 새로운 사회란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가 돼야 함에도 구소련이 집 단은 관리돼야 한다며 자유와 평등을 부정한 행위 때문에 현실의 피착취계 급들이 억압 속에 착취당하는 줄 알지만 피 흘리며 저항해봐야 새로운 지배 계급을 만들어 줄 뿐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전파되면서 저항을 억제하고 있습 니다. 공황은 세계 1차 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인류역사 느낌 188

에 많은 발전을 가져왔는데 바이마르공화국과 구소련의 영향으로 남성들은 전쟁터에 동원되고 생산을 담당한 여성들이 자신들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 자 미국은 1920년 영국은 1928년부터 여성들에게도 참정권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전쟁동안 일하는 여성의 권리를 위해 생리대가 만들어지고 인명을 살상하 는 무기와 함께 과학이 발달했는데, 영국은 탄환을 연속으로 발사하는 기관 총과 탱크를 만들었으며, 독일은 독가스와 잠수함을, 프랑스는 전투기를 오 스트리아는 곡사포를 이탈리아는 기관단총을 개발합니다. 세계 1차 대전에 연합국이 승리하자 패전국을 차지하려고 오스만제국에 진 입했는데 1919년 5월 19일부터 민족주의자들이 아나톨리아에서 무장하고 저항하며 터키대국민의회를 발족해 그리스-터키전쟁, 터키-아르메니아전 쟁, 프랑스-터키전쟁을 거쳐 반발하다가 1923년 7월 연합국과 로잔조약 을 맺음으로 스미르나, 콘스탄티노플, 동부 트라키아지방을 회복하고 터키 공화국으로 독립됩니다. 1919년 일본제국의 침략으로 식민지로 전략한 조선에서 독립을 요구하 며 3.1만세운동이 발생하자 조선인민들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황국식민으 로 세뇌시키기 위해 1920년 5월 27일 지진제( 地 鎭 祭 )라는 기공식행사를 하고 남산 한양공원에 조선신사를 건립해 참배를 강요하며 천황제 신화를 주입하기 시작합니다. 1925년 6월 27일 일본제국은 내각고시를 공표하면서 신사의 격을 높이 고 신사의 명칭을 조선신사에서 조선신궁으로 개칭했으며 신사에 둘 3종신 기( 三 種 神 器 )라는 상징물들을 일본에서 가져오는 형식을 취하고 10월 15일 진좌제( 鎭 座 祭 )라는 행사를 진행하며 조선인민들에게도 참배할 것을 강요하 고 식민정신으로 세뇌했던 것입니다. 무력으로 타인의 평화로운 터전을 점령한 무리들은 로마제국이 건립되기 이전부터 자신은 태양신의 아들이라거나 신의 대리자라며 신에게 인간은 절 대복종해야 한다는 허구를 주입해 인민들이 순종하며 복종하도록 세뇌시키 고 피억압자들이 착취와 갈취에 저항하지 못하게 통제했습니다. 공황으로 독재정권 발호 이탈리아에서는 1908년 2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통치하던 트렌토 사회주의당 당원이며 노동당서기로 지역 정치신문 라보니레 델 라보라토 느낌 189

레 (이탈리아어: L Avve niredellavo ratore, 노동자의 미래)의 편 집진으로 활동하며 사회주의자로 명망을 얻은 베니토 무솔리니가 부각하기 시작합니다. 무솔리니는 급진잡지 라 보체 (이탈리아어: La Voce, 목소리)에 사회 주의자의 시각으로 본 트렌토 (이탈리아어: Il Tren tino veduto daun Soci alista)을 기고하고 반기독교운동을 내세운 소설 추기경의 애인 을 상티 코르바야와 함께 집필해 1910년 일 트렌토 발표하며 사회주의자임 을 강조해 명망을 얻습니다. 1919년 3월 23일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200여명으로 구성된 최 초의 파쇼<일 파르시 이탈리아니 디 콤바티멘토>(이탈리아어: Il Fasci Italianidi Combattimento, 파쇼 이탈리아 전투분대)를 설립하고 1922년 10월 27일부터 29일까지 로마진군이라 명명한 쿠데타로 루이기 파크타 총리를 실각시키고 총리가 됩니다. 총리가 된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국가주의자, 우익뿐 아니라 가톨릭신자며 이탈리아 인민당소속 장관 두 명을 포함시킨 연정내각을 구성했으며 국민 들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여론을 조성하고 우익으로 세뇌하기 위해 동생 아 말도를 파시스트당기관지<일 포폴로>편집장에 앉혀 언론을 장악하고 자신을 선전하도록 하므로 이탈리아헌법에 규정한 독재자지위를 합법적으로 획득합 니다. 최고의 권력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다중의 굶주림을 해소하고 소비를 촉진 해야 기득권과 착취당하는 다수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으므로 기득권의 이 익을 보장하기 위해 국유지불하, 임대법의 완화, 노동조합해산과 같은 일련 의 법안들을 통과시켜 부유한 상공업자와 지주들로부터 지지를 받습니다. 피착취계층들의 지지를 위해 대규모공공토목사업과 국가주도공업화를 진행 해 고용을 높이며 실업률을 낮췄고 곡물전투 라며 5천여 농장을 건립하고 토지전투 라며 폰티네 습지를 개간해 다섯 곳에 새마을 을 건립하면서 건설노동자들의 수입을 보장해 소비를 촉진하므로 대중에게도 신임을 얻습 니다. 다중의 지지를 획득한 무솔리니는 1923년 6월 전국을 단일선거구로 하고 총선에서 25% 이상 지지를 획득한 정당에게 의회의석의 3분의 2를 배분 하는 아체르보 법을 통과시키고 1924년 4월 6일 검은셔츠단을 동원, 폭 력을 행사하며 첫 총선을 실시해 파시스트당을 중심인 국가동맹 이 64% 를 획득합니다. 느낌 190

1925년 크리스마스이브에 통과시킨 법에 따라 무솔리니는 공식적으로 행정수반 이자 국가원수 가 되면서 의회동의 없이 국왕을 끌어내릴 수 있는 권력을 장악하고 지방자치를 폐지했으며 상원을 해산시켰고 자신이 권 력을 휘두르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헌법조항들을 폐기하며 경찰독재통제국 가로 만듭니다. 1928년 파시스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 활동을 금지시키고 이탈리아의회 를 해산했으며 의회를 대신해 5년 전 자신이 조직한 파시즘대의회가 그 자 리를 대신하도록 해 파시즘대의회가 무솔리니의 업무를 정지시키고 탄핵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속였는데 파시즘대의회를 소집할 권한은 무솔리니에게 만 있었습니다. 절대 권력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범죄와 전쟁한다며 체사레 모리를 팔레르 모의 지사로 임명해 모리가 마을들을 포위하고 여성과 아이들을 잡아 고문 하며 자백을 강요하는 잔인함으로 강철지사 란 별명을 얻었으나 1927년 마피아와 결탁한 것이 드러나 1929년 해임됐는데 무솔리니는 마피아를 근 절시켰다며 의원으로 임명합니다. 무한 권력을 차지한 무솔리니는 총선은 불법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하는 기 아코모 마테오티를 검은셔츠단(파쇼 이탈리아 전투분대)소속 아메리고 두미 니를 사주해 살해하고 마테오티의 시신을 집 밖에 세워둔 마테오티의 자동 차로 옮기며 사건을 은폐하려다 실패합니다. 마테오티를 살해한 두미니는 잡혀 이틀간 구류만 됐을 뿐 처벌을 받지 않 았으며 15년간 파시스트로부터 금전지원을 받으며 호화롭고 편안하게 살았 고 초기에 연정내각에 동참했다 야당이 된 무리들은 국왕 빅토리오 에마누 엘레 3세가 무솔리니의 독재행위를 불신임하기 바라며 의회등원을 거부했 습니다. 여기에 동참한 야권연대는 공산당의 안토니오 그람시, 사회당의 피에트로 네니, 자유당의 피에로 고베티와 지오바니 아멘돌라 등이 주도하면서 대중 적인 반파쇼 운동으로 발전했지만 국왕은 검은셔츠단의 폭력공포에 떨었고 내란으로 발생될까 불안해하면서 무솔리니가 집무실을 떠나지 못하게 붙들 어 두는 역할만 합니다. 농민들에게 과다한 보조금을 지급해 국가부채가 증가하는데 생산기계발달 로 공장과 건설현장에 장비와 기계가 도입되면서 소수가 생산해도 팔지 못 한 물질이 쌓이고 다수인민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하지 못해 발생되는 빈부격차로 굶주리는 다수대중이 늘어나면서 불만을 표출하기 시 느낌 191

작했습니다. 언론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폰티네 습지의 개간과 간척사업으로 새마을을 건 설한 것과 새마을로 실업률을 개선한 것을 성과로 선전하며 이를 위해 최소 1만 명 이상 농민들이 강제이주 당한 것은 은폐했는데 1940년 곡물전투 와 토지전투 정책은 폐기됐고 폰티네 습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다시 늪이 됐습니다. 공황으로 경기가 후퇴하자 무솔리니는 조국의 금 운동을 하면서 목걸이 나 반지 등에 사용된 금과 보석을 국가에 헌납하면 조국의 금 이라는 글 귀가 새겨진 철제 팔찌를 나눠주면서 다중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모인 금으 로 금괴로 만들어 국가경쟁력을 상승시킨다며 국립은행에 비축합니다. 1935년 무솔리니는 분배불균등으로 발생된 빈부격차를 해소할 방법은 다 중에게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해야 하므로 기업을 국유화한다며 자신이 보유 한 외국기업 주식을 국가에 납부하는 것으로 시작해 모든 은행을 포함한 이 탈리아 내 기업 4분의 3을 국유화시키고 1938년부터는 정부가 가격통제 를 실시했습니다. 파시스트 1인 독재체제를 유지하며 독일을 제외한 모든 외국과 무역을 단 절하고 이탈리아를 자급자족 경제체계로 만들지만 분배불균등으로 빈부격차 가 생겨 발생된 공황을 해소할 방법이 없는 무솔리니는 약소국들을 침략해 약탈하고 식민지시장을 넓히기 위해 전쟁을 준비합니다. 이탈리아가 파시즘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사이 독일도 나치독재가 발호되 는데 1차 대전의 책임으로 연합국이 1,32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요구하고 배상금지불이 늦다는 이유로 1923년 1월 프랑스가 루르지방을 점령하자 독일이 빚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화폐를 무한정 찍어내 물가가 폭등하고 가 치 없는 불환화폐가 넘칩니다. 외국화폐를 인정하는 것은 화폐를 제시하고 그 국가의 노동생산물을 가져 와 비축되면서 자국에 이익이 돼야 하는데 독일이 지불한 배상금으론 독일 에서 생산된 물질을 가져 올 수 없기 때문에 배상금지불이 늦다는 구실로 독일을 점령한 것이 화폐가 경제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킨 것입니다. 화폐가 가치를 가지지 못하자 물가는 걷잡을 수 없이 폭등하고 혈세로 살 다 경찰생활을 마치고 연금으로 생활하던 연금생활자들과 도시서민들 그리 고 노동으로 물질을 생산하면서 지불받은 임금으로 자신이 생산한 물질을 다시 시장에서 구입해 사용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생활은 빈곤해져 큰 타격 느낌 192

을 받습니다. 슈트레제만 총리는 1923년 독일의 공업과 농업자원을 담보로 렌텐마르크 화를 발행해 불환지폐를 회수하고 이듬해 이를 다시 마르크화로 교환함으로 다소 경기를 부양시키고 경제안정을 위해 연합국에 배상지불을 연장하는 도 스안( 案 )을 제시했지만 거절당하자 로카르노조약을 맺으며 알자스로렌을 포 기합니다. 독일이 서부국경을 침공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는 로카르노조약을 맺음으로 연합군이 라인란트에서 철군하고 독일의 국제연맹가입이 성사되자 연합군은 군사관리위원회를 해체하고 미국대표 영을 의장으로 하는 배상조정위원회를 구성하므로 국내의 노동생산인력들이 노력하면서 경제가 회생되기 시작했습 니다. 1929년 초 독일의 복지시스템과는 달리 미국은 개신교정신에 입각한 시 장자유주의체제로 극소수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분배불균등으로 일자리 가 없어 수입 없는 다중이 물건을 구입할 수 없으니 팔지 못해 넘쳐나는 자 동차와 공업용품이 증시를 폭락시키는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정체됩니다. 세계경제는 생산기계의 자동화로 생산된 물질이 넘쳐 팔지 못하고 쌓아둔 물질과 공장을 전쟁으로 파괴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생산노동자를 고용하면 서 소비를 유발해 발전하기 시작했고 전후 피해를 복구하며 생산되는 물질 이 넘쳐났지만 수입이 생긴 노동자들이 소비하면서 급속도로 발전했습니다. 미국은 1차 대전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신흥공업과 생산기술발달, 산업 전반에 걸친 기계화, 기업조직의 거대화, 새로운 노무관리방식을 도입하고 자동차, 화학, 전기, 토목, 석유 등 산업에서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며 비약적으로 발전해 라디오와 영화가 보급되고 집집마다 라디오와 자동차를 보유합니다. 모두에게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하지 못하는 시장자유주의는 과실이 기업가 와 일부부유층에게만 돌아가 빈부격차가 커지고 노동자들은 단순작업을 되 풀이하는 기계에서 자동화기계에 밀려 실업자가 되면서 수입이 없어 구매력 이 감소해 대량생산으로 물건은 넘치지만 소비할 사람은 줄었습니다. 전쟁 전에는 유럽 각국들에 물질을 판매했지만 유럽의 소수 부유층 말고는 상품을 구매해야 할 대중들은 자국의 상품을 소비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외국과의 무역거래가 침체되면서 생산된 물질과 실업자가 넘치고 쌓 이는데 상인들은 조금 팔아도 먹고살아야 하니 가격이 폭등하는 현상이 발 느낌 193

생됩니다. 경제가 정체되자 투자(갈취)할 곳을 찾지 못한 화폐가 대출을 종용하고 증 권 등 투기시장으로 몰리며 과도한 여유화폐로 주가가 기업체의 실질가치 이 상으로 높아지는 주식시장 거품현상을 유발해 1929년 10월 24일 주식가 격이 폭락하는 이른바 암흑의 목요일 이 발생하자 기업들이 연쇄파산하며 붕괴합니다. 인류가 발전시킨 과학은 농작물을 생산하는 농기구가 발전하고 생산기계가 자동화되면서 전세계인구가 먹고 넘칠 만큼 농산물과 물질이 풍족하게 생산 되지만 다수는 굶주리고 타인을 억압ㆍ통제하며 착취하고 갈취하는 극소수 만 풍요를 누립니다. 미국에서 부터 시작된 공황은 공업으로 물질을 생산하던 유럽 승전국들과 일본에서도 나타나며 대 공황으로 발전해 세계 곳곳에서 굶주린 인민들이 착취와 갈취가 합법인 체제와 제도 때문에 분배불균등과 경쟁으로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해 다수가 굶주린다며 체제를 폐지하자는 요구가 높아집니다. 1930년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댐과 사회간접자 본인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토목공사를 실시해 실업률을 줄이고 수입을 보장 하므로 소비를 유도하며 회생하려 노력했지만 국민세금이 건설업자들 호주 머니로 들어가며 빈부격차만 더욱 커졌습니다. 1930년 3월 세계 공황의 여파는 독일에 가장 큰 타격을 줘 거듭되는 혼 란이 가중되자 복지예산안 처리를 놓고 진통을 앓던 브뤼닝 내각이 헌법에 규정된 긴급권을 발동해 난국을 수습하려다 실패하면서 공화국의회는 해산 되고 새로 실시한 총선은 폭력과 선동이 난무하는 속에 공산당과 독일노동 당이 부상합니다. 기회주의자들은 자신이 집권하면 모두가 잘살 수 있는 사회가 건설된다며 다중들을 속이고 선거를 실시해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장악하자 출범한 브뤼 닝 내각은 공황을 해소하지 못하고 큰 은행들이 연속도산하며 1931년 초 실업자 수가 600만 명이 됩니다. 실업자가 넘치는 혼란 중에 대통령임기가 만료돼 선거를 실시하자 86세의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1,935만 표를 얻어 히틀러(1,341만표)를 누르고 당 선되어 출범한 파펜내각은 로잔회담에서 유럽 부흥기금으로 30억 마르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세계 1차 대전에 패배한 전범국으로 배상해야 했던 의무 를 완전히 해소합니다. 느낌 194

1932년 선거에서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NSD AP, 일명 나치)이 230석을 차지하자 히틀러가 9월 내각 불신임의결을 주장하며 정권을 엎 으려해 파펜내각은 의회를 해산하고 긴급권을 발동하며 비상정국을 선언했 지만 파펜과 함께 통치책임을 분담했던 슐라이허가 중도파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해 정국이 혼란스러워집니다. 파펜내각은 11명의 장관 중 독일노동당 소속 장관은 3명뿐이기 때문에 히 틀러와 정권을 나눠도 큰 문제가 발생되지 않고 오히려 히틀러의 행동을 제 한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독일노동당에 접근해 연립내각을 제안하자 히틀러 가 흔쾌히 승낙하므로 총리가 됩니다. 1933년 의사당에 화재가 발생하자 히틀러는 공산당이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 방화했다고 여론을 조장하면서 헌법에 보장된 긴급권을 부여받고 돌격 대와 게슈타포 그리고 경찰이 통제하고 감시하는 폭력 속에 공포선거를 진 행했음에도 나치당이 과반수 의석을 얻지 못하자 긴급권을 남용해 수권 법 ( 授 權 法 )을 발동시킵니다. 히틀러는 시장경제를 살리려고 사회간접자산인 아우토반을 건설하며 건설 노동으로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하고 소비를 촉진시키려 노력했으며 그래도 넘치는 실업자들은 자신을 옹호하는 경찰이나 자신이 만든 나치부대친위대 로 고용하고 돌격대를 구성하며 군비확충으로 실업을 해소합니다. 무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국가재건 법을 비롯한 일련의 법규제정에 착수, 주 의회를 폐지하고 지방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켰으며 노동조합을 폐지하고 나 치당 이외의 정당을 탄압하다 불인정하는 국방군과 나치돌격대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돌격대장 에른스트 룀을 처형하며 국방군을 달래며 독재 권력을 강 화시킵니다. 대통령인 힌덴부르크가 서거하자 히틀러는 선거 없이 대통령직과 총리 직 을 겸하면서 최고사령관직까지 차지하여 총통에 오르고 게슈타포 친위대 돌격대 등의 테러조직을 동원, 독일(제3제국)을 전체주의 경찰독재국가로 통치하기 시작했으며 교육 예술 언론매체 등과 주요 국가기관들을 나치당 이 엄격히 통제했습니다. 히틀러는 무너진 경제를 되살리며 1차 세계대전 패배로 잃어버린 조국 땅을 되찾고 유럽을 포함한 러시아까지 강력한 군대의 무력으로 합병시킨 다. 는 유겐트이념을 강조하면서 경찰과 게슈타포를 동원하고 언론을 통해 선전하자 이 사상이 젊은이들에게 교조적으로 주입되며 지지가 높아지니 시 장자유주가 빈부격차를 만든다며 가격을 통제합니다. 느낌 195

타인보다 조금 뛰어난 분석력이 있을지 몰라도 자신이 특출하다는 우월주 의에 정신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이 기득권이 되고 권력을 잡으면 다중의 권리를 무시하면서 독선적인 독재정치를 하고 기업을 차리면 노동자를 인간 이하로 취급하면서 인간평등을 부정하고 생명을 경시하며 노동력을 착취해 부를 축적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자유를 부정하고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억압ㆍ통제하며 유지되는 시장자유주의는 필연적으로 공황이 발생하고 빈부격차를 해소할 수 없는 체 제는 말잘 듣는 로봇으로 훈련시킨 병사들의 무력으로 학살전쟁을 일으켜 과잉 생산된 물질을 파괴하고 재건하며 기득권을 유지합니다. 러시아는 1당 독재, 유럽은 파시스트와 나치 1인 독재로 권력을 장악해 인민들을 억압ㆍ통제할 때 영국의 발명가이자 전기공학자인 베어드(John Logie Baird)가 1922년부터 연구해 1926년에 공개실험을 마친 텔레비 전을 생산하므로 1929년 비비씨(BBC)방송국이 처음 방송을 시작했습니 다. 텔레비전은 1939년 최초로 뉴욕세계박람회에 공개적으로 선보이고 1940년 영국 CBS가 처음 컬러TV 시험방송을 했으며 1946년에 상용방 송국이 방송을 개시하면서 미국 내에 2000-3000대의 TV가 보급됐고 1950년대 초 FCC의 검토를 거쳐 1953년 NTSC표준으로 채택되면서 지금의 칼라 TV로 발전합니다. 1934년 미국의 대공황과 독일의 무한정 화폐발행으로 금본위제화폐제도 는 정지되고 안방에서도 영상으로 정치나 사법권을 행사하는 권력들의 비리 를 알 수 있게 되며 여론을 형성하자 언론이 힘을 갖게 되므로 권력이 되고 언론이 기득권이 되자 온갖 거짓을 유포하며 다중들을 속이고 세뇌시키는 바보상자 첨병이 됩니다. 언론이 기득권들의 부정부패와 불평등한 원인을 보도하므로 다중들의 저항 사상에 영향을 미치자 기득권들은 진실을 알리는 양심 있는 언론인을 탄압 하고 광고수수료로 압박해 언론계 종사자들이 고액의 임금을 받으며 생활하 도록 하면서 굴복시켜 체제의 나팔수로 만듭니다. 기득권을 누리며 체제를 옹호하게 된 언론은 진실을 알리거나 권력을 감시 하지 않고 경제원칙이나 인간의 본질적인 평등과 자유에 대한 내용을 은폐 하고 착취와 갈취로 유지되는 기득질서를 지키려고 3S(스포츠ㆍ스크린ㆍ섹 스)정치와 시장과 화폐를 선전하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다중을 세뇌합니 다. 느낌 196

아무런 물질도 생산되지 않는 화폐가 경제인양 왜곡하고 돈을 빌리면 이자 라는 명분으로 땀 흘린 노동결실을 착취당함에도 상품과 대출만 선전하고 어떤 물질도 생산할 수 없는 스포츠나 드라마에 많은 개런티를 지급하면서 허영의식을 불어넣어 국민들이 진실을 볼 수 없게 시간과 정신을 빼앗습니 다. 텔레비전이 방송되기 전엔 연극이나 예능은 노동을 기피하거나 토지가 없 는 사람끼리 광대나 사당패라는 무리를 만들고 전국을 떠돌며 연극과 소리 를 공연하고 양반과 잠자리해서 수입을 얻어 생활하며 민중들에게 양반들의 횡포를 연극으로 알려 저항심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누구나 즐기는 연극이나 예능, 음악과 영화, 드라마 또는 쇼에 출연하는 연 예인에게 거액의 출연료를 지급하며 착취와 갈취로 억압받는 대중들이 현실 을 판단할 수 없도록 시간을 빼앗고 연예인들의 호화생활을 공개하며 허영 심을 부추겨 국민을 우민으로 세뇌하는 것이 목적이 됩니다. TV에 방영하는 드라마, 스포츠, 예능, 노래나 춤, 그 무엇이든 단 한 가지 도 인류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어떤 물질도 생산되지 않는데도 생산 노동하 는 사람들보다 몇 배 호화롭게 살도록 수입을 보장하고 허영심으로 살아가 는 생활을 공개하며 선전ㆍ선동하므로 국민이 자유로울 권리를 은폐하는 용 병으로 활용합니다. TV가 발명되기 이전 피지배계급들이 착취와 갈취 그리고 억압과 통제에 견디지 못해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며 저항했던 역사와 지배계급들이 자신들 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고 수많은 인류를 학살하는 전쟁을 벌인 잔혹한 진실들은 은폐하거나 단편적인 흥밋거리로 전락시켜 왜곡하는 것입니다. 스페인 내전 1930년 1월 스페인은 군주제에서 억압ㆍ통제당하며 착취ㆍ갈취로 곤궁해 진 인민들이 공황으로 발생된 빈곤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불만이 폭발 느낌 197

하면서 학생과 노동자들이 적기와 공화국 기를 들고 시위를 벌이는데 5월 마드리드에서 경찰들이 무자비하게 진압하자 시위대도 무장하고 전투를 벌 입니다. 12월 군 장교들이 군주제에 반대하며 내란을 준비하다 주동자들이 처형되 고 1931년 자치선거에서 자유주의(FAI)와 통합사회당(PSUC),스페인공산 당(PCE)이 도시지역을 휩쓸며 당선되니 임금 알폰소13세가 도주하므로 사 회주의노동자당(PSOE)과 결합하여 연합정권을 결성하고 스페인이 공화국 이 됐음을 선포합니다. 제2공화국은 헌법에 지방자치와 평화, 교회와 정치 분리,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토지를 몰수하는 내용으로 제정됐으나, 초대대통령 알칼라 사모라 는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가톨릭신도로 스페인의 소수 지배계급이었던 지주 와 로마가톨릭교회입장을 옹호했는데도 부자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대지주들과 가톨릭교회의 저항을 진압하지 못하는 사이 미국의 대공황 여 파로 양극화가 가중되면서 굶주린 노동자와 농민들은 바쿠닌의 평등과 자유 를 주장하는 집단,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노동자집단주의, 독일과 이태리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노동자당이란 파시즘나치 극단집단으로 나뉘며 극도로 불안정해집니다. 교회가 자유와 평등 그리고 분배를 주장하는 것은 빨갱이 사상이라는 선전 에 세뇌된 군부가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로의 발전을 거부하고 정권을 지지 하자 제2공화국 총리 아나샤는 토지개혁을 미루므로 노동자들에게 비난받 고 공황의 위기로 기득권에게도 비난받습니다. 1933년 1월 스페인 카사스 비에자스(Casas Viejas)에서 농민들이 노동 도 하지 않는 무리가 생산물을 갈취하는 토지의 개인소유를 몰수하고 농민 이 토지를 소유하는 사회로 바꾸자며 시위하자 연립정권이 군을 동원해 잔 혹하게 진압하므로 사회당내부에서 비난하는 여론이 높아져 분열되면서 재 선거를 실시합니다. 새로운 선거를 실시하자 공화사회주의정권이 농민을 무력으로 진압한 것은 보복해야 한다며 전국노동연맹(CNT)이 조직원들에게 기권을 촉구했고 대중 들도 여론에 동참하면서 압도적으로 투표하지 않았음에도 선거는 성립되고 기득권을 누리고 사는 성직자와 군주제주의자들만 당선됩니다. 당선된 성직자와 왕당파, 군부독재 지지자들이 내각에 합류하도록 초청받 자 1934년 10월 스페인전역에서 총파업이 발생하고 사회주의노동자당원 느낌 198

이 많은 광산노동자노동조합이 중심인 아수트리아스 노동자들이 경찰막사들 을 공격하면서 봉기로 발전해 군수공장까지 장악하고 무기를 획득합니다. 무기를 획득한 노동자들은 파업을 선언하고 동참하는 노동자들에게 기관총 과 소총을 분배했으며, 무장한 노동자들은 수도세비야와 스페인의 거의 모 든 지역을 장악하고 우리는 독일노동자들이 실패한 경험을 반복하지 말 자 면서 착취와 억압 없이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자고 결 의합니다. 기회주의자들은 서로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다수결선출제가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며 사회주의노동자당(PSOE), 통합 마르크스주의 노동자당(POUM), 스페인공산당(PCE), 통합사회당(P SUC), 전국노동연맹(CNT), 이베리 안 무정부주의자 연맹(FAI), 중도주의 노동자와 농민연합 [Workers and Peasants Bloc](BOC)을 만들어 근원을 은폐시킵니다. 그러자 노동자ㆍ농민은 제1공화국시기 바쿠닌의 영향을 받아 모든 억압과 착취를 부정하고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집단, 서로자기 세력이 많다며 양 분돼 노동자권력을 강조하는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집단, 독일 과 이태리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노동자당이란 파시즘집단으로 갈라져 분 열 됩니다. 1936년 2월 총선에서 스페인사회주의노동자당, 사회주의공화당, 스페인 공산당 등이 연합한 인민전선이 승리해 473석 중 289석으로 의회를 장 악하면서 토지개혁을 포함한 정책들을 실시하자 지주 상공인 교회성직자 들이 불만을 품고 1936년 7월 17일 모로코에 머물고 있던 군을 매수하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군부는 혈세로 기생하면서 상공인들이 축적한 재산도 보호받아야 하며 평 등과 분배보다 인민들을 자유보다는 통제받아야 하고 시장이 자유로운 사회 가 돼야 한다며 온갖 비양심적인 행위로 기득권을 차지하고 부를 축적한 집 단들이 지원하는 폭력자금(화폐)을 지원받습니다. 선거로 정권을 획득한 공화파정부는 쿠데타의 징후를 사전에 포착하고도 초동진압을 하지 않아 반란군이 무력으로 인민을 살상하며 통제해도 군이 역할을 못하자 시민들이 자체방위군을 결성하고 반란군에 맞서 싸웠으며 많 은 희생을 치르면서 몬타나 요새를 빼앗기고 마드리드를 지켜냅니다. 바르셀로나는 자치방위군이 조직돼 반란군과 결전에서 승리하고 발레아레 스제도에서 진군한 요피스를 체포해 처형했으나,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느낌 199

받는 프랑코군이 아라곤과 카탈리나 전역을 점령하므로 마드리드와 바르셀 로나가 고립당해 2년 동안 코뮌을 구성하고 자치로 운영하게 됩니다. 반란이 일어나자 스페인공화국정권은 반란군을 저지할 생각은 없었고 노동 자와 시민들이 무장하고 반란군에 맞서자 반란군보다 시민군을 더 두려워하 며 항구에 정부군함이 있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무장한 노동 자군대가 반란군에게 밀리자 정권을 반란군에게 넘깁니다. 공화파는 소련, 멕시코, 국제사회주의 운동가들로 구성된 국제여단으로부 터 무기와 병력을 지원받았으며 중심세력은 노동자, 소작농, 도시서민, 인 텔리겐치아 등이었으나, 공산주의나 아나키즘혁명을 지지하는 일부 기업인 들도 있었으며 정부군은 스스로 충성파, 인민전선, 공화파, 정부 파 등으로 불렀습니다. 반란군에 찬동한 세력은 카를리즘 정통주의와 왕당파, 로마가톨릭 및 보수 주의자와 착취를 갈망하는 가톨릭성직자, 지주, 기업가, 유산자, 파시스트군 대에 병력을 제공한 바스크지방 외곽지역의 가톨릭신자들 등 인간존중을 부 정하는 반공주의를 공통분모로 재산을 축적한 집단들입니다. 1인 독재체제를 갖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 그리고 포르투 갈은 반란군을 지원했으며 소련과 국제코민테른은 공화파를 지원하고 미국 은 정부군과 반란군에 비행기와 가솔린연료 등을 팔며 양쪽에서 이익을 챙 겼고 프랑스와 영국은 불간섭 조약을 지킨다며 스페인정부를 지원하지 않았 습니다. 미국은 평등과 정의 또는 진리와 양심은 없고 노동자와 농민들을 착취해 재물을 모았으나 봉건영주들과 가톨릭사제들로부터 갈취 당하던 무리들로 온갖 비양심적 행위로 부만 모으면 개인의 재산은 보호하고 인정해야 한다 는 개신교정신으로 무장된 착취와 갈취의 자유를 주장하는 집단입니다. 스페인내전은 50만 명이상의 반란군과 시민군이 사상당하고 1939년 4 월1일 공화파정권이 마드리드에서 반란군에게 항복해 끝났으며 반란에 앞장 섰던 프랑코는 성직자와 상공인, 지주의 지원으로 1975년까지 독재자로서 권력을 행사하며 인민전선을 색출 학살했습니다. 분배불균등 때문에 생기는 공황은 유럽의 전쟁승전국들에도 발생해 프랑스 에서도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며 실업자가 늘어나고 상품들이 길거리에 쌓이 는 현상이 발생됩니다. 공황이 발생하면 기득권은 소비를 유도하기 위해 재건축ㆍ재개발이라며 멀 느낌 200

쩡한 도시를 부수고 자연을 훼손하는 각종 토목공사, 혈세로 월급 받는 공 직으로 일자리를 만들어 통제를 강화하며 소비를 조장하지만 공사에 참여한 극소수만 먹고 살지 혈세가 소수 건설업자 호주머니에 들어가며 빈부격차만 커집니다. 기업들은 상품을 생산해도 팔리지 않아 이윤이 남지 않으면 쌓인 물건만 팔아도 살 수 있으니 생산을 중단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하는데 노동으로 먹 고살아야 하는 노동자들은 살길이 없어 저항(파업)하면 폭동으로 몰고 자신 들의 나팔수인 언론을 동원해 경제어려움이 노동자 탓 인양 여론을 조장합 니다. 성장기에 기득권들은 갈취대상이 많아 다중의 노동력과 재산을 착취했지만 공황이 닥치면 갈취와 착취대상이 줄어 기득권끼리 서로 뜯어 먹으며 분열 되고 뺐긴 자나 뺐어도 이익을 남기지 못하는 기득권들은 부가 축적되지 않 으니 기득권이 유지되는 체제를 지키려 전쟁을 벌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전쟁에 원흉인 기득권들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고 잔혹하게 피 흘리는 전쟁을 치루는 것은 갈취와 착 취로 억압받으며 헐벗고 굶주린 다중 인민들이 서로 죽이는 전쟁을 치릅니 다. 관료무리들은 타인의 자유를 억압ㆍ통제하며 착취와 갈취가 합법이고 소 수가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이 먹고 살도록 혈세 내는 민중들을 학살하고 통제하며 억압하는 행위가 국가를 위한 충성인양 강조하 며 자유를 갈망하는 사상을 탄압하고 역사발전을 가로막습니다. 공황기 기득권들은 주체성과 자주성은 없고 소액의 생활비를 지원받으며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이기적인 관제( 官 制 )보수를 이용해 굶주림에 반발하는 노동자와 민중들의 저항을 혈세로 먹고사는 경찰무력으로 억압해도 동조하 지 않게 여론을 조작하고 전쟁분위기로 공포심을 조장합니다. 자칭보수라 칭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해 이성적으로 활동할 능력이 없고 타인의 명령에 따라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고도 명령에 따랐다 며 책임을 상사 탓으로 돌리고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비겁한 사람들입 니다. 유럽은 1936년 일자리를 나눈다며 주 40시간 노동제를 실시했지만 빈부 격차가 해소될 수 없어 전쟁을 일으킵니다. 느낌 201

엄청난 인명살상 2차 대전 1933년 10월 히틀러는 제네바 군축회의 결과를 빌미로 불만을 표현하면 서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1935년 3월 재군비를 선언하며 군력을 증강하고 1936년 3월 로카르노조약을 파기하고 라인란트 비무장지대를 점령했으며 병사를 늘려 실업률을 해소하며 군부를 확장했습니다. 1937년 11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합병을 결의한 히틀러는 1938년 2월 측근을 요직에 앉혀 나치체제를 강화했으며 3월에는 오스트 리아를 합병하고 군사력을 바탕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이 자치를 요구하자 무솔리니와 연합해 체코슬로바키아를 포위하면 서 영국과 프랑스로 하여금 승인하도록 압박합니다. 히틀러와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뮌헨회담 후 체코슬로 바키아 주데텐란트 거주 독일인의 민족자결허용을 권고했고 프랑스도 이에 동의하므로 독일은 동부 중부 유럽진출을 위한 전략적 지위를 확보했으며 국제연맹을 탈퇴해버리므로 다른 국가들이 더 이상 독일을 제재할 수 없게 됩니다. 1937년 7월 7일 일본제국이 중화민국을 침략하고 1939년 6월 이탈리 아가 그리스를 침공한 것을 빌미로 1939년 8월말 독일은 소련과 독소불가 침조약을 맺고 9월 1일 폴란드의 서쪽국경을 침공하자 이에 동조한 소비에 트연방군이 1939년 9월 17일 폴란드의 동쪽국경을 침공하면서 세계 2차 대전으로 발전합니다.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침공에 항의하며 독일 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돌입하지만 폴란드는 동서 양쪽에서 준비하고 쳐들어온 독일과 소련에 쉽게 점령당했으며 히틀러는 곧 덴마크, 노르웨이 등 군이 약한 국가들을 공격해 쉽게 점령하고 영국, 프랑스와 대치하며 대 학살극을 벌입니다. 독일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를 침공하고 대서양 연안까지 진출해 영 국군과 프랑스군을 차단하자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잇달아 항복한 것에 힘입 은 이탈리아가 전쟁을 선포하고 참전했으며 히틀러는 자신이 주장했던 유겐 트사상에 따라 1941년 6월 22일 약 300만의 병력과 기갑사단을 앞세워 소련을 침공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중화민국의 장개석을 지지하던 미국은 일본이 인도차 이나 반도를 점령하자 ABCD 포위망을 구축하고 일본에 대한 석유금수조치 느낌 202

와 철광의 수출을 제한하며 고립시키기 시작하므로 일본은 항공모함을 동원 해 미국 태평양함대 본거지인 하와이진주만을 기습폭격하고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합니다. 세계 2차 대전은 독일 유태인수용소와 일본 731군부대에서 사람에게 온 갖 고문과 사지를 절단해 약품을 실험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참혹한 살상을 거치며 의학을 발전시키고, 과잉생산으로 넘쳐나던 물질과 공장을 때려 부 수고 약소국을 식민지시장으로 확장하며 끝났습니다. 인류가 발전하며 수많은 침략과 약탈전쟁을 거쳐도 여성들은 크게 동요하 지 않았으나, 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하며 게르만민족 우월주의를 주장해 민족주의가 자리하면서 독일여성들은 소련군이 들어와 강간당하면 순수혈통 을 낳지 못한다는 웃지 못 할 거짓에 세뇌되어 도망 다니기도 하고 자살도 많이 했습니다. 인류가 발전하는 과정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침략과 약탈전쟁을 거 치며 각종 인종들이 강간을 자행해 순수혈통을 가진 민족이란 존재할 수 없 고 현실에서도 여행이나 이민으로 서로 교류하기 때문에 순수민족이란 기득 권자들이 애국심과 충성을 요구하는 수단일 뿐 있을 수 없습니다. 1943년이 되자 이탈리아는 바티칸과 런던의 라디오를 들으며 무솔리니가 주장하는 선전술은 거짓이라는 것을 간파했으며 3월이 되자 이탈리아 북부 공업도시에서 최대파업이 시작됐으며 밀라노와 토리노는 공습을 피해 노동 자들이 생산을 멈추며 독일을 묵인하는 무솔리니를 반대했습니다. 7월 24일 전쟁을 시작한 후 최초로 파시스트대회에서 두체 를 소환하 고 그란디가 무솔리니의 불신임을 요청해 대의회가 19대 7로 가결하자 무 솔리니는 파시스트 대 의회는 자문 기관일 뿐 어떤 결정도 무효라며 다음날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했는데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무솔리니의 해임을 통고합니다. 무솔리니를 해임한 국왕은 후임자로 피에트로 바돌리오원수를 내정하고 왕 궁을 나오는 무솔리니를 근위대가 체포했지만 대중의 불신을 받아 반발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이탈리아는 독일이 무솔리니의 행방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아브루초 주의 산악지대인 캄포 임페라토레에 구금했습니다. 새로 출범한 바돌리오총리는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을 의식해 이탈리아는 여전히 독일의 우방 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속이려 했지만 출범 이틀 만에 국가 파시스트당을 해산시키며 1943년 9월 3일 연합국과 휴전조약을 체결하자 이탈리아 전역이 분노하며 들끓어 총리와 국왕은 로마 느낌 203

를 떠나 피신합니다. 총리와 국왕이 없는 이탈리아는 무정부 상태로 자체적인 질서유지를 준비 하는데 10월 13일 바돌리오총리가 몰타에서 나치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발표하면서 권력은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했지만 상당수 이탈리아군은 여 전히 파시스트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대중이 인정하지 않는 총리명령은 이행 되지 않았습니다. 수 천 명의 병사들만 지지하는 바돌리오정부는 독일에 맞섰지만 캄포 그란 사소 호텔에 연금됐던 무솔리니를 나치독일공수부대와 무장친위대가 구출하 고 이탈리아로 진군한 독일군은 왕가와 내각인사를 체포하며 무솔리니의 권 력을 회복시키려고 했으나 다중이 인정하지 않아 실패합니다. 무솔리니는 1943년 9월 23일 살로에서 이탈리아 사회주의공화국 수립 을 선포하고 정부수반이 되지만 이 망명정부는 실재적인 정부로서의 권한은 없었고 나치독일이 이탈리아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명분으로 세운 괴뢰정부 였음에도 정권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자신을 배반했다며 파시스트대의회의 요인들을 처형했습니다. 1945년 4월 전쟁의 패색이 짙자 무솔리니는 연인인 클라라 페타치와 독 일장교로 변장하고 독일군으로 위장한 병사들과 함께 탈출, 스위스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던 길에 4월 27일 공산주의계열 파르티잔에게 발각돼 코모 호 인근 동고마을에서 체포됩니다. 무솔리니와 페타치는 메체그라로 이송돼 처형됐으며 1945년 4월 29일 무솔리니와 페타치, 그리고 함께 처형된 파시스트들의 시체가 일전에 파시 스트당에 의해 반파쇼 운동을 한 사람들을 처형하던 밀라노의 피아차 로레 토에 위치한 주유소에 버려지자 분노한 민중들이 시체를 짓밟다가 지붕에 거꾸로 매달았습니다. 같은 날 한때 무솔리니가 신이다 라고 칭송하며 1인 독재를 찬동하고 아 첨해 자신의 이익만 챙기던 파시스트 왕당파 아실레 스타라체가 붙잡혀 피 아차 로레토로 이송됐고 파르티잔들은 곳곳에서 저항하거나 숨어있는 파시 스트들을 붙잡아 처형하고 그 시체들은 주유소지붕에 거꾸로 매달았다고 합 니다. 1945년 8월 8일 패전한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자살하자 독인은 항복했 으며, 1945년 9월 2일 일본은 전권대사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와 미국 측 맥아더원수가 요코하마 근해에 정박한 미 해군 미주리호 선상에서 무조건 항복문서에 조인하므로 참혹했던 세계 2차 대전은 막을 내립니다. 느낌 204

소수 기득권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인류를 학살하는 전쟁을 벌 려놓고 학살행위를 은폐하려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을 구국영웅인양 애도하 며 다중을 세뇌하고 절대복종과 충성을 강요하기 위해 반공을 주장하며 공 포분위기를 조성해 국민을 분열시키고 통치도구로 삼습니다. 세계 2차 대전은 2천만 명의 병사들과 3천 5백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 으며 전쟁이 끝나고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것은 1차 대전과 2차 대전에 크게 참전하지 않고 무기와 물자만 팔면서 부를 축적한 미국과 독일과 연합 하고 전쟁을 시작한 소련에게로 돌아갔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히틀러의 직속부관이었던 히믈러가 체포돼 세계전범재 판에 회부됐을 때 세계전범재판관들이 히믈러에게 너는 육백만이라는 유태 인을 학살하였으므로 사형이다. 라고 선고하자 히믈러는 나는 독일제국이 건설한 법을 집행했을 뿐 죄인이 아니다. 라며 자기변론을 했습니다. 그러자 당시 독일에서 가장 유명했던 법 철학자이자 형법 학자였던 라드브 르흐는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천부권(생존권, 자유권, 평 등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너는 법이라는 핑계로 육백만을 학살했으므로 사형이다. 라고 선고했습니다.(서울대법대 최종고교수님의 법학통고에서 발 췌) 이렇게 법이란 모두가 공정하게 지켜져야 할 규범이 아니라 온갖 비양심적 이고 파렴치한 행위로 기득권을 차지한 무리들이 피억압자들이 저항하지 못 하게 통제하고 억압하면서 다중들로부터 착취하거나 갈취한 재물을 지키고 이익을 보장받는 질서를 위해 기득권끼리 만드는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세계 2차 대전 종전 후 국민들이 광부나 간호사 등 위험하거 나 힘들고 더러운 작업들을 기피해 외국노동력을 수입할 수밖에 없게 됐으 며 여성들이 가사노동과 육아양육노동에서 해방돼 몸매를 유지한다며 출산 을 거부하므로 인구가 줄자 국가를 존치시키려 이민을 받습니다. 타 민족이라도 자국 내에서 자녀를 출산하면 자국민으로 인정하고 양육비 와 교육비까지 지불하니 세 명의 자녀만 출산하면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기 업주만큼 생활이 보장되므로 자녀만 낳는 사람도 있으나 이런 행위는 자녀 를 인간으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자신의 삶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 입니다. 2차 대전에 패한 일본은 1945년 8월 16일 오후 조선에 설치한 조선신 궁에서 승신식( 昇 神 式 )이라는 폐쇄행사를 갖고 9월 7일부터 해체작업에 들 어가 10월 6일 철거를 마치자 이튿날 나머지를 소각하고 철수했으며 미국 느낌 205

태평양지역총사령관 맥아더는 9월 9일 미군은 조선의 점령군임을 선포하는 포고령1호를 발표합니다. 조선 인민에게 포고함 태평양 미군 육군부대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포고한다. 일본국 정부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은 우리 편 여러 나라 군대의 오 래 계속되어 온 무력투쟁을 끝마쳤다. 일본 천황의 명령에 따라서 그를 대표하여 정부와 대본영이 서명한 항복 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이 지휘하는 전승군은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지역을 점령했다. 본관은 조선 인민이 오랫동안 노예처럼 지내온 사실과 적당한 시기에 조선 을 해방 독립시키려는 연합국의 결정을 명심하고 있다. 조선인은 우리가 조선인을 점령하는 목적이 항복 문서를 이행하고 조선인 의 인권 및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에 나는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하여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조선 주민에 대하여 군사적 관리를 하고 자 다음과 같은 점령조건을 발표한다. (제1조)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한다. (제2조) 정부 등 모든 공공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유급ㆍ무급직원과 고용 인, 그리고 기타 중요한 제반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 까지 종래의 정상 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 보존하여야 한다. (제3조)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으로 발포한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군에 대하여 반항행동을 하거나 질서보안을 교란하는 행위를 하 는 자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 (제4조) 주민의 재산권은 이를 존중한다. 주민은 본관의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일상적인 직무에 종사하라. 느낌 206

(제5조) 군정 기간 동안 영어를 모든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공용어로 한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또는 일본어 원문 사이에 해석 또는 정의에 관하야 어 떤 애매한 점이 있거나 부동( 不 同 )한 점이 있을 때에는 영어 원문이 적용된 다. (제6조) 새로운 포고, 포고규정 공고, 지령 및 법령은 나 또는 나의 권한 아래 나올 것으로, 제군에 대하여 요구하는 바를 지정할 것이다. 출처 : 시사연구소, <광복 30년사> 일본이 자신들의 사상으로 세뇌하기 위해 설치했던 조선신궁이 사라지고 정의나 양심 또는 진리는 없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착취와 갈 취로 재물만 축적하면 된다는 시장자유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가톨릭과 개신교가 물밀듯이 들어와 산골짝까지 점령하기 시작합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조선장악 조선에 미리 들어와 있었으며 미군과 영어로 소통되는 선교사와 목사, 신 부들이 친일파가 조선을 영구식민지로 삼기 위해 일본이 36년간 연구한 통 제방식에 길들여졌다고 추천하자 맥아더는 매국행위자들을 보호하며 요직에 앉히고 지배질서를 강화했습니다. 매국행위자들이 권력을 잡자 매국행위를 알거나 일본인이 소유했던 토지와 공장을 노동자와 농민이 관리하며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정하게 분배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혈세로 사는 집단(경찰ㆍ군ㆍ서북청년단) 을 동원해(대구10ㆍ1, 제주4.3, 여수ㆍ순천, 보도연맹 등)학살하며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사상을 말살시켰습니다. 이런 학살과 억압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통제되거나 지시받지 않 고 자고 싶으면 자고 깨고 싶을 때 깨며, 배고프면 먹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느낌 207

있는 게으를 수 있는 자유로울 천부(평등권, 자유권, 생존권)의 사상은 말살 되고 기득권이 만드는 질서유지라는 통제의 틀에 길들여집니다. 혈세로 사는 무리들은 착취와 갈취가 합법인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인 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로울 사상과 평등한 권리를 박탈하고 불법으로 감금 하고 고문하며 간첩으로 조작해 학살(사형)하며 국민을 우민으로 길들이는 이데올로기를 조성한 행위가 애국이라고 합니다. 통제질서에 길들여진 우민들은 사회생활에 불평등을 느끼지만 현상을 분석 할 수 있는 학문을 차단당해 진실을 알 수 없고 인간의 천부권리를 모르니 분배불균등 때문에 다중이 저항하며 혼란스러워지면 일부기득권을 징치하며 다중을 억압하는 독재 권력을 찬동하는 것입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조선을 장악하자 공동체를 위한 협동정신과 저항사상 은 말살되고 노동착취와 갈취가 합법인 시장자유주의와 소수가 다수를 지 배ㆍ통제하는 선거선출제도, 관료주의계급사회로 정착되면서 수단ㆍ방법가 리지 않고 돈만 차지하면 된다는 개인이기주의로 세뇌되며 철저하게 우민이 됩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전국으로 전파되자 진실과 진리, 의리와 정의는 사라지 고 거짓과 허구가 활개 치며 재물을 차지하기 위해 사기와 절도ㆍ도박ㆍ강 도ㆍ살인 등 온갖 범죄가 늘어나고 협동심이 사라졌으며 의심과 권모술수가 자리하게 됐습니다. 과학이 모자라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신이라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속일 수 없다 고 강조해 양심의 정곡을 찌르며 어떤 죄든 회계하고 기도하면 용서 받는다는 거짓말로 헌금을 강요하는데 선량한 사람들은 단지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양심에 위안을 얻는 듯해 종교에 빠집니다. 사람들은 양심을 속이는 위선과 착취ㆍ갈취로 유지되는 사회에 살면서 자 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할 수밖에 없고 이런 사실을 간파하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은 양심을 이용해 종교를 믿게 하고 헌금을 강요합니다. 사기와 위선, 거짓으로 유지되는 체제에서 직장을 놓치지 않거나 살아남으 려면 타인을 속이고 경쟁에서 이겨야하므로 항상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 람들의 마음을 감언이설로 꾀어 편안한 듯 착각하도록 현혹해서 갈취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노동생산물을 상ㆍ중ㆍ하로 분리해 이윤을 남기고 손님의 분실물까 느낌 208

지 주워 부를 축적하는 상인들과 직장에서 상사라며 아랫사람의 재능이나 노력을 가로채 자신의 성과인양 내세우며 관리자직책을 유지하는 무리들은 매일같이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임금을 지급한다는 명분으로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누리고 사는 기업인 이나 혈세로 살며 혈세 내는 국민을 억압하는 무리들과 다중을 속이며 지지 를 획득해 기득권을 누리는 정치꾼들은 인민들에게 진실을 볼 수 없도록 하 기 위해 종교를 동원해 신비주의까지 만들어 냅니다. 집단이나 무리에 살아가는 사람은 집단이나 무리가 책임져야 함에도 가톨 릭이나 개신교는 전 세계에서 거둬들이는 십일조와 헌금, 기득권들의 후원 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극 소액을 불우한 이웃을 위한 자선기금이라며 내 놓는 행위로 집단이나 무리의 책임을 개인 탓으로 변질시킵니다. 종교의 자선행위로 열심히 일하고도 빈곤하거나 장애를 가지고 고통 속에 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개인문제로 치부하고 마치 종교만이 구원자인양 자 신의 노동력과 시간을 희생하면서 자원 봉사활동으로 자신도 모르게 집단의 책임에 면죄부를 줍니다. 봉사나 자선사업이 선전되면서 노숙자나 거지를 돕는 것이 선행인 양 착각 해 동전 몇 푼 동냥하며 마음의 위안을 삼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집단이 나 무리가 책임져야 할 복지를 개인 탓으로 왜곡하며 모두에게 일자리를 보 장하지 못하고 착취와 갈취가 합법이어서 빈부격차가 발생되는 원인은 은폐 되는 것입니다.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쪽 뺨을 내밀라면서 온갖 착취와 갈취 그리고 부당 한 폭력행위에 저항하거나 대항하지 말고 참아야 한다고 강요하므로 착취하 기 위해 통제하고 억압하는 기득권에 순종하라며 질서를 지키려 세뇌합니 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판단부족 때문에 종교에 매달린다는 사실을 파악한 종교인들은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어야 더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 고 매달린다고 판단해 전쟁을 조장하거나 있지도 않는 악마나 사탄 또는 종 말론 같은 괴 소문으로 대중의 정신을 잠식하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며 신자들을 갈취합니다. 온갖 악행을 저질러도 교회 가서 회계하고 기도하면 사함 받는다는 거짓말 에 속은 신자들은 오히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비양심적이고 비 이성적인 행동으로 착취와 갈취를 일삼고 타인을 속여 사회혼란을 가중시키 느낌 209

며 인간을 존중해야 하는 가장기본적인 진리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강조해 자녀는 부모가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착각한 사람들은 자녀 의 장래를 위한다며 자녀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녀의 재능이나 기호와 동떨 어진 특정 교육을 강조하면서 자주성을 박탈하고 재산을 축적하지 못한 가 정의 자녀들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어도 교육받을 기회마저 박탈당하 게 됩니다. 종교와 기득권을 차지한 무리들이 주장하는 가족주의ㆍ혈육(혈통)주의 때문 에 자신이 축적한 재물이나 획득한 지식을 자신의 자녀에게 물려주려고 하 므로 발전이 방해되고 가난한 사람의 자녀들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이 있어 도 양심을 속이는 범죄 말고는 재산을 축적하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의 자녀들은 부모의 고혈을 짜내며 기를 쓰고 공부해 대학까지 나와도 모두에게 균등하게 일자리를 보장할 수 없는 체제에서 고학력실업 자가 되거나 대출한 학자금을 갚을 길 없어 졸업과 동시에 신용불량자가 될 뿐 절대로 기득권이 될 수 없습니다. 명령에 복종하며 통제받고 지배에 익숙하게 길들여지는 것은 자유의 권한 이 없는 노예나 생산기계 또는 로봇이나 애완용으로 기르는 짐승들에게 강 요하는 것이지 자신의 의사를 가지고 판단력과 결정권을 행사하며 평등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는 인간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가 이웃과 가족을 사랑하라고 강조하면서 정의와 진실은 사라지고 잘 못이 있어도 무조건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인 양 왜곡되면서 진리는 은폐되고 가족단위로 분열을 조장하는 편 가르기가 시작돼 사람을 많이 모은 사람이 권력자가 됩니다. 사람들은 종교를 믿던 안 믿던 선량하고 순박하게 살면 복을 받을 수 있다 고 판단하여 온갖 위선자들에게 속아 착취당하고 갈취당하면서도 착하게 살 아야 한다고 세뇌돼 위선자들과 갈취자ㆍ착취자들에게 저항해야 할 권리를 억누르며 기득권을 유지시킵니다. 종교에 세뇌된 사람들은 신의 뜻이라면 전쟁에 참여해 타인을 학살하고 타 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에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며 전쟁에서 기도나 부적만 붙이면 보호받는다는 거짓에 속아 목숨을 잃기도 하고 평생노동으로 마련한 주택도 사후에 천국 가는데 방해가 된다며 교회에 헌납하라면 헌금 으로 내 놓습니다. 교회를 지은 장로들은 교회재산은 교회에 귀속되고 장로들이 관리해야 한 느낌 210

다고 주장하고 목사들은 자신이 설교로 신도들이 교회에 재산을 헌납했으므 로 목회자 공로라며 재물강탈의 권리를 주장해 교회목사와 장로들 간 재산 분쟁이 끊이지 않고 발생되는 것입니다.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을 존중하기 때문에 평화를 사랑하 는 사람들임에도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누리고 사는 신부나 목사들은 진 실을 깨달고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며 정당한 분배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빨 갱이로 매도하고 타인을 학살하며 재물을 강탈한다고 거짓을 세뇌시키며 악 선전하고 있습니다. 우월의식에 젖은 자들이 기득권이 되면 타인을 통제하고 군림하기 위해 상 명하복의 명령계통 계급을 만들어 인간평등을 부정하고 타인의 자유를 억압 하므로 지배질서를 만들어 피 착취자들이 단결해서 저항하지 못하도록 분열 시키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진실과 진리를 은폐하는 것입니다. 평등과 자유에 대한 혁명이 많았던 프랑스는 공항천정에 대형흡입기를 만 들어 공항에서 담배를 피워도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흡연자의 자유 를 보장하지만 인간평등을 부정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통제하는 국가들은 타 인들의 제재와 통제를 당연하게 받아드리도록 길들이기 위해 단속규정을 만 듭니다. 인간은 먹고 마시면 자연스럽게 배설현상이 발생하므로 배설할 수 있도록 시설을 만들어야 하지만 평등과 자유를 부정하고 통제와 억압하는 틀을 유 지하는 무리들은 배설할 권리를 박탈하고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기도 하고 노상방뇨라는 단속법을 만들어 통제를 길들이고 범칙금이라며 수탈까지 하 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성을 가진 환경의 동물이라는 점을 이용해 어려서부터 부모로부 터 통제당하는 환경으로 길들이고 교육이라며 학교에서 통제당하고 학교를 졸업하면 국방의 의무라며 군에서 통제당하고 기초적인 통제를 벗어나면 수 입을 위해 회사에서 통제당하고 사회에서 혈세로 사는 경찰에게 법이라는 핑계로 통제당합니다. 철저하게 평등과 자율을 부정하고 통제하는 행위를 받아들이도록 길들이기 위해 가정을 강조하므로 인간존중을 상실한 사람들은 재산을 차지하려고 부 모를 살해하거나 제대로 양육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부모를 살해하기도 하고 분배불균등이라는 체제모순 때문에 빈곤해지면 자녀를 살해하고 자살하기도 합니다. 느낌 211

시장자유주의 확산 세계 1~2차 대전에서 전쟁 물자를 팔아 이익만 챙긴 미국은 1929년 전 세계를 빈곤으로 내몰아 전쟁을 유발한 사실을 은폐하고 노동자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하며 노동력을 착취하는 시장자유를 고수하다 농산물과 전쟁 물자가 넘치게 생산돼 경제가 정지됩니다. 1947년 생산물이 넘쳐 팔리지 않자 농민들의 수입을 보장하기 위해 농 산물을 정부가 수매해 태평양바다에 버리다 유럽부흥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이라며 시장자유주의를 채택한 국가들에 한 해 식량이 부족하면 농산물과 공업생산물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마셜플랜이라고 불리는 이 선언은 노동력착취로 생산한 물질을 굶주리는 국민에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며 노동자를 착취ㆍ통 제하는 국가들을 지원하므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며 이념갈등의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기득권들은 인간은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갖기 위해 집중하고 노력한다는 점을 악용해 노동자가 배부르면 생산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데올로기로 다 중을 세뇌해 노동자들이 빈곤에 견디지 못하고 분배를 요구하면 공권력이 노동자를 무자비하게 짓밟아도 분노하지 않고 외면합니다. 1947년 3월 미국대통령트루먼은 의회에서 미국외교정책에 관한 원칙이라 며 트루먼 독트린(영어: Tru man Doctrine)을 선언하는데 그 내용은 자 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사상을 억압하고 착취와 갈취가 합법인 나라에만 군 사적 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며 그리스와 터키 등 반공을 강조하는 정부들 을 원조했습니다. 1950년 2월 9일 유산자의회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는 공화당 여성들과 간담모임에서 연설도중 종이를 흔들며 내손에는 국무부의 정책을 입안하는 국가공무원 205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이 있다 며 공정한 일자리보장과 평 등이나 자유 그리고 평화와 분배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억압 한 것입니다. 이렇게 발생된 매카시즘은 수많은 국가에서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며 분배 불균등에 저항하는 양심 있는 사람들과 평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마녀처럼 사냥해 감옥에 가두거나 직장에서 해고했으며 벌금이란 핑계로 재산을 빼앗 기도 하는 등 경제적ㆍ사회적 활동을 제약했습니다. 이런 억압으로 평등과 자유를 깨달은 사람들의 사회적 활동을 차단하자 생 느낌 212

활과 시간에 다소 여유 있는 체제옹호자들이 기존질서 속의 경제적 우월성 을 내세우며 억압으로 빈곤해지고 고통 받는 경험 많은 사람들의 활동을 폄 하하고 방해하며 마치 자신들이 지도자인양 모든 조직들을 장악하고 체제를 지키려 소비를 유도하며 역사발전을 방해합니다. 관료들이 훈련이 잘됐다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원숭이나 개 등 애완동물처 럼 명령에 복종하도록 잘 길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교육을 많이 받았다 는 것은 인간성을 상실하는 체제에서 양심도 없이 자신이 생존할 수 있게 길들여지는 세뇌를 많이 당한 것이지 학문이나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은 아 닙니다. 혈세로 살며 불평등한 착취질서를 유지하는 관료들은 지배자인양 국민을 통제하며 기득권을 차지한 무리들이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해도 제재할 방법 이 없다며 비호하지만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 노예로 길들이기 위해 업무방해라며 벌금과 구속(억압ㆍ통제)을 남발합니다. 관료들은 눈이오나 비가 오나 시간 맞춰 출근해야 하고 상사가 내리는 명 령이 아무리 부당해도 지시에 복종하며 자신의 자유와 이성ㆍ양심도 없이 근무시간 안에 맡은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임금노예이면서 노예관리자로 기 득권이 만드는 착취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다중을 억압ㆍ통제하며 충성하는 로봇입니다. 미국은 군사력증강에 노력하기 때문에 군수산업이 발달했으나 모든 생산은 과잉 생산되면 쌓이고 쌓이면 생산계층이 실업자가 되니 수입이 없어 소비 를 못하게 되므로 기업이 아무리 물질을 생산해도 팔지 못해 주변 기업까지 망칩니다. 무기의 과잉생산을 가져온 미국은 소비하기 위해 약소국들을 침략하거나 내분을 일으켜 전쟁을 하도록 부추기고 무기소비시장을 만들어 자국의 과잉 생산을 해소할 뿐 아니라 전쟁으로 폐허된 국가를 돕는다며 건설이나 의료 또는 공산품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침투해 자연스럽게 산업을 장악합니다. 종교를 전파하는 선교사나 성직자들은 사랑의 실천이라며 타국에 침투해 의료라거나 자국에서 버려야 할 정도로 넘치는 공산품, 곡물 등을 지원하면 서 시장자유주의 사상을 세뇌하는 것입니다. 1950년 혈육을 학살하는 동족상쟁이 발생되자 신을 빙자하며 종교를 내 세워 특권을 누리는 목회자와 성직자들은 착취와 갈취로 유지되는 질서를 만들기 위해 개인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노동한 만큼의 분배와 평등을 주장 느낌 213

하는 것은 빨갱이사상이라고 세뇌해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정신 세계를 가지게 됩니다. 교육이란 나타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의구심이나 탐구심을 가진 객체가 창의성을 발휘하며 주체적으로 연구(탐구)하고 경험한 결과를 논의하며 발전 시켜 생활(생존)속에 실천(적용)하는 것으로 누구나 평등한 관계 속에 자유 롭게 활동할 수 있게 보장해야 가능하므로 서로가 존중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입법, 행정, 사법인 권력과 교육, 학술, 금융, 언론, 세무 등 모 든 분야를 일본의 장기식민지 통제훈련을 받은 매국노들이 장악하고 개인 의 자율적 주체성과 창의성, 그리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사상을 말살하는 목 적을 가진 내용의 교과서를 강압적으로 주입하며 누가 잘 외우냐 로 점수를 매기며 경쟁시켜 공동체정신을 말살하고 우민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사라는 우월적지위로 강제규율을 정해놓고 규칙이라며 통제하는 것은 학 생이라는 이유로 자율성을 말살하고 정해놓은 사상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으 로 거부감을 나타내며 반항하거나 순종하는 로봇을 강요해 어려서부터 반골 인가 아닌가를 파악하고 분류해 도태시키려는 목적으로 봐야합니다. 진리 없는 교육을 받고 학벌이 높다는 것은 주체성을 상실하고 체제에서 살아남거나 출세하기 위해 타인을 속이고 지배ㆍ통제하며 복종시키는 능력 을 얼마나 배우고 비양심적이 됐는가의 척도를 나타내는 것이지 진리와 학 문을 많이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기득권은 자신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나 체제의 모순을 파 악하는 학문이 탄생하면 자신들이 기득권을 누릴 수 없기 때문에 기존질서 에 복종하도록 강요하고 창의성과 창조성 그리고 자율성을 말살시키는 것입 니다. 체제를 지키는 전쟁을 치르면서 타인을 학살한 사람들 중 일부는 폭력에 중독돼 무력으로 타인을 억압하는 행위가 국가를 위한 충성인양 왜곡하며 자칭 우익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일부는 타인을 학살했다는 죄의식에서 벗 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고뇌하며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착취와 갈취를 위한 통제와 구소련의 집단독재를 경험했음에도 다수를 위 해 소수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다수결주의가 자리하면서 모든 인간은 자유 롭고 평등해야 하는 사상은 은폐되고 자신이나 무리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억압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행위가 정당화되는 억압에 길들여졌습니다. 혼자 잘살면 된다며 친일행각으로 민족을 수탈했던 무리들이 미 제국주의 느낌 214

비호아래 권력을 장악하고 혈세로 유지되는 공권력을 사용하며 자신들의 반 민족행위와 체제모순을 알고 있는 깨어난 지식인들을 빨갱이라고 누명 씌워 법이란 핑계로 학살(인혁당, 아랍회, 유학생간첩사건, 보도연맹 등등)하고 반공을 강조하며 권력을 유지합니다. 사법권을 행사하며 혈세로 사는 무리들은 자유를 요구하거나 체제모순을 아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구금하고 고문으로 간첩을 만들거나 불응하면 살해하고 암매장하는 것이 구국인양 왜곡하며 권한을 악용해 선량한 국민을 영원히 감옥에 가둘 수 있다며 면회까지 금지하는 억압으로 권력과 체제를 보위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반공과 개인이기주의로 세뇌시키며 대중들을 분열시키자 국가가 국 민의 전체노동(세금)으로 운영하며 필수적으로 보장해야 할 전기, 가스, 수 도, 의료, 교육 등에 시장자유주의논리를 적용해 적자란 명분으로 사유화를 강요하며 대중의 저항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장악합니다. 필수공익사업을 장악하면 기관 산업인 철도와 공항, 고속도로 등을 적자라 는 명분으로 사유화하도록 강제 하면서 인민들이 수탈당하는 식민지라는 사 실을 깨달을 수 없도록 은폐하기 위해 반공을 강조하고 평등한 공동체나 자 유와 분배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나 간첩으로 몰아 학살했습니다. 기득권은 모두에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하고 노동한 만큼 분배할 수 없는 체제 때문에 빈부격차가 발생하자 저항을 억압하고 기득권을 옹호하는 세력 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해 먹고 살도록 알선소와 소개소를 만들어 수입을 보장하고 노동자를 관리ㆍ통제하며 불만과 여론을 짓누르는 선봉대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세계전쟁으로 강대국이 됐지만 공황이 발생하자 닉슨대통령이 군사 력과 생산력을 바탕으로 1971년 금본위제를 폐기하고 달러본위로 바꾸며 약소국에게 시장개방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전 세계를 모두에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하 며 착취와 갈취로 유지되는 시장자유주의국가들로 만들고 노동생산물이 경 제가 아니라 화폐와 시장이 경제인양 왜곡하기 위해 화폐를 취득하는 관광 이 인류가 생존하는데 필요한 물질이 생산되는 산업인양 선전했습니다. 환율이 1달러 1000원이라면 1000달러짜리 물질을 수입할 때 100만원 이지만 환율을 조작해 수입할 때 1달러를 1100원으로 하면 110만원을 지 불해야 하고 반대로 수출할 때 1달러에 900원이 된다면 100만원 받던 것 느낌 215

을 90만원에 팔아야 하기 때문에 많은 물량을 거래할수록 엄청난 노동력을 갈취당하는 것입니다. 신용카드와 대형마트 출현 미국의 시카고사업가 프랭크 맥나마라(Frank McNamara) 는 1949 년 저녁식사를 위해 만들었던 신용카드를 최초로 발행하고 실업자들을 카 드회사직원으로 채용해 직업을 주고 수입 없는 다수는 신용이라는 외상으로 물건을 소비하며 먹고 살게 합니다. 신용카드는 처음에 다이너스카드(Diners card) 라 불렀는데 프랭크 맥 나마라가 뉴욕에 출장 갔다 호텔방에 지갑을 두고 나와 저녁을 먹고 식대를 지불하지 못하는 곤경에 처했는데 자신과 같은 경험이 많을 거라는 사실에 착안해 친구인 변호사 랄프 슈나이더(Ralph Schneider) 와 함께 카드 를 만듭니다.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다이너스신용카드 회원은 자신들의 친구들로 구성 해 2백 명이었으며 의미는 Diners club card 라는 글자 그대로 디 너(Dinner)에서 유래된 Diner 와 친구 또는 멤버십을 의미해 클럽 (Club) 이라 칭했으며 초기에 다이너스카드를 받아준 식당은 14개에 불과 했던 것이 신용카드의 원조입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모든 국가들은 파괴된 주택과 공장을 건설하고 수많은 노동자와 노동자를 관리하는 노동자들을 만들어 임금을 지불하므로 소비가 활성화 되고 과학발달로 가전제품을 만드는 중소기업들이 생겨나면서 창출 되는 재화가 넘쳐 분배되므로 다중은 주택도 구입하며 행복한 생활을 만끽 했습니다. 그것도 잠시 분배불균등으로 발생하는 빈부격차가 해소될 수 없어 다시 심 화되자 1962년 미국 로저스에서 샘월튼이 월마트라는 대형매장을 만들면 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물건을 파는 상인이 아니라, 임금 받고 물건을 판매 하는 노동자가 생겨 고용은 늘렸지만 대형마트출현으로 소형 상점들은 몰락 하게 됩니다. 느낌 216

대형마트가 출현하여 소형 상점들만 몰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품을 생산 하는 사람들만 노동자가 아니라 타인(상사)의 지시에 의해 임금을 받으며 생 활하면 노동자라는 의식이 확산되면서 억압에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1천명이 사는 마을에 10개의 소형 상점이 100명씩에게 물건을 판매하며 생계를 이어가는데 대형슈퍼마켓(대기업)이 납품업체에 상품의 대량구입을 이유로 납품단가를 낮추라고 요구하며 여러 가지를 구색 갖춰 진열하고 소 형 상점보다 싸게 판매하면 주변의 소형 상점은 망하게 돼있습니다. 작은 점포들을 삼키며 성장하고 존치되는 경쟁 때문에 유통 분야 대기업이 많은 물질을 구입한다는 구실로 가격을 낮추면 원재료를 공급하기 위해 생 산하는 공장이나 농촌노동자들의 생산노동은 더욱 혹독해지면서 임금은 낮 아지고 중간기득권(중산층)도 축소됩니다. 지구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 것이고 국토란 그 국가에 살아가는 모든 국민 것으로 유럽은 국가가 토지를 관리하지만 시장자유주의를 강조하 는 체제는 개인소유를 인정하므로 주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주거를 위 해 자신의 노동력으로 획득한 재물을 집세라며 강탈당하는 부동산투기가 넘 칩니다. 기업들은 한 번에 튼튼한 제품을 만들면 다시는 팔수 없고 팔지 못하면 노 동자를 고용할 수 없어 기업의 이윤을 확대할 수 없어 고장이 잦은 상품들 을 만들며 아까운 지구자원을 고갈시키고 부동산의 개인소유를 인정해 착취 와 갈취로 재물을 차지한 소수가 개발이라며 지구를 파괴하고 환경을 망치 는 것입니다. 건설사들의 이익과 부동산투기를 위해 재개발이나 재건축이라는 명분으로 주택을 부수면 자연에서 채취한 물자가 허비되고 재건축 폐자재들이 지구환 경을 오염시키면서 환경을 파괴해 지구에 존재하는 전체 생명체 공동소유인 지구를 망치며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건설사들이 존재해야 하고 생산계통에 종사하는 다중에게 소득을 보장하며 소비를 유도해야 체제가 유지되기 때문에 주택비율이 거주민의 120%가 넘 어도 건물은 계속 지어야 하고 분배불균등으로 극소수는 몇 백 채, 천 채가 넘는 주택을 보유하지만 정작 건설한 노동자들은 소유하지 못합니다. 상품가격이란 공장건설비용과 원재료 그리고 상품을 만들어낸 노동자의 인 건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업주와 노동자를 관리하는 관리자, 상품을 디자인한 디자이너, 상품을 운송한 운수노동자와 상품을 선전하는 모델, 그 느낌 217

리고 물품을 진열하고 보관하는 가계소유주와 판매자들이 먹고 살 수 있도 록 결정되는 것입니다. 기업이 넓은 토지에 공장을 짓고 원재료를 쌓아놔도 원재료를 가지고 상품 으로 만들어내는 노동자가 없으면 기계는 녹슬고 원재료는 썩어 악취를 풍 길 뿐 아무런 이윤이 창출되지 않지만 원재료를 가지고 기계를 가동시키며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노동자가 있으면 상품이 생산되고 이윤이 생깁니다. 운수업이란 회사를 만들어 넓은 부지를 확보하고 많은 차량을 보유해도 운 전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차량들은 녹슬어 고철이 되고 아무런 이윤이 창출 되지 않음에도 기업관리 자들은 자신들이 회사를 설립하고 운전자를 고용해 일자리가 창출됐으므로 자신들에게 고마워하라고 왜곡합니다. 상품을 판매하는 유통업이란 점포주혼자 물품을 판매ㆍ관리할 수 없어 종 업원을 채용하는 것으로 고용원이 이윤을 남기는 노동을 제공하므로 유지되 는 것이지 이윤을 남기지 못한다면 점포를 유지할 수 없어 노동자를 해고하 고 자신이 먹고살지 적자를 보며 고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 체제에서는 임금 받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에 충실할수록 갈 취ㆍ착취자들은 부유해지고 노동한 만큼 분배를 받지 못하는 노동계층은 빈 곤해지며 빈부격차가 커지고 노동생산에 기생해 혈세로 사는 임금노예이자 노예관리자들이 충실할수록 갈취당하거나 생산노동을 하는 민중은 억압ㆍ통 제당합니다. 생산노예나, 임금노예이자 노예관리자인 관료나, 생산을 감독하는 관리자 들이 충실하지 않으면 해고되기 때문에 열심히 노동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일에 충실할수록 빈부격차와 억압ㆍ갈취는 강화되는 모순 속에 살고 있습니 다. 생산로봇의 출현 1934년 샌프란시스코 뉴욕에서 개최된 국제박람회에 웨스팅하우스사가 걷고, 말하고, 윙크하며 색깔을 식별하는[윌리]라는 로봇을 출품하고 세계 느낌 218

2차 대전을 치르며 곡사포의 명중률을 위해 연구한 컴퓨터와 1960년대에 기계를 제어할 수 있는 집적회로(IC)가 개발되면서 인류는 로봇을 만들어 냅니다. 생산기계의 자동화로 노동자를 대신해 생산하는 로봇(팔이 상하 전후 좌우로 곧게 움직이는 직교좌표형 로봇, 팔 전체가 기둥을 중심으로 회전하 는 원통좌표형 로봇, 받침점으로 하여 치켜 올리거나 내리며 용접하는 극좌 표형 로봇 등)이 도입되면서 공장에서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줄어 수입 없는 다수가 늘어납니다. 중소기업이 자신이 개발한 물질을 생산하며 이익을 내면 대기업이 대량구 매라며 원가를 낮추고 생산 공정의 자동기계화와 비인격적인 노무관리로 노 동자를 생산기계취급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며 대량으로 생산해 싸게 판매하 면 중소기업은 상품을 개발하고 생산했어도 팔지 못해 망합니다. 경쟁에서 이기고 재물을 많이 축적해야 기득권이 유지되기 때문에 끝없이 소기업을 삼키며 대기업으로 성장하니 분배가 이루어지지 못해 자연히 재물 은 한쪽으로 쌓여 다중이 빈곤해지자 대중의 저항을 희석시키기 위해 복권 과 경마ㆍ카지노 등 도박을 조장하여 일확천금에 정신을 빼앗기도록 합니 다. 타인을 학살하고 재물을 강탈해 기득권을 차지한 무리나 그들에게 아부하 며 타인위에 군림하려는 기회주의자들이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상사 또는 관 리자로 통제받는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마치 자신이 창의적으로 개발한 것처 럼 가로채고 부하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한 것이 능력인양 강조하며 기득 권이 유지됩니다. IC가 개발되면서 시장자유주의에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컴퓨터를 생산 하고 컴퓨터가 개인에게 보급되며 인터넷이 발전하여 개인들은 종이나 구전 으로 전달되는 정보를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빛처럼 빠른 전파로 고급정보 들을 취득할 수 있게 되자 정신과 시간을 뺏기 위해 흥미위주의 각종 게임 을 만듭니다. 기득권을 차지한 소수가 정보를 독점하고 특권을 행사했지만 정보가 공유 되면서 특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므로 다중들이 접속해도 정보에 신경 쓰지 않고 흥미위주의 게임에 몰두시키기 위해 개발자의 수입을 보장하며 체제를 유지하는 소비를 촉진하는 1석 2조를 위해 각종 도박 사이트와 게임을 개 발시킵니다. 기득권들은 인류가 생존하는데 필요한 의ㆍ식ㆍ주를 해소할 수 있는 그 어 느낌 219

떤 물질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컴퓨터게임이 인류가 생존하는데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물질을 만들어 내는 양 일확천금을 제공하고 IT산업이라며 컴퓨 터게임 개발에 정신을 빼앗기도록 하므로 불평등의 본질을 은폐하는 것입니 다. 숙련노동 없이 소수 노동으로도 물질을 생산할 수 있게 되자 기득권은 노 동자가 공정한 분배를 요구하거나 저항하면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공장을 옮 기고 굶주린 실업자와 노점상(노동예비군)들을 고용해 물질을 생산하므로 소 수 노동자만의 저항으로는 변혁이 요원합니다. 인류는 노동자ㆍ농민ㆍ어민의 땀 흘린 노동생산물로 살아갈 수 있음에 도 생산노동자를 감시하고 통제하며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 관료들과 스포 츠ㆍ잡기ㆍ연예ㆍ서비스업 등 비생산 계층을 만들지만 만들면 만들수록 이 들이 생존하며 사용해야할 물질을 생산하는 노동계층의 삶은 더욱 혹독하고 가혹해집니다. 현 체제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어 저항해도 기득권을 차지한 무리들이 인민 을 관리하면서 노동조합은 빨갱이라고 악선전해 조직 률이 저조할 뿐 아니 라 소수만으로도 생산이 가능하므로 조합원 모두가 무장하고 저항하면 피 착취자들끼리 피 흘리고 싸우며 분열될 뿐 모두가 평등한 사회는 건설되지 않습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분배불균등으로 발생되는 빈부격차가 극심해지고 모두에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해 수입 없는 다수가 늘어나면서 소비를 못 하자 화폐가 유통되지 않는 공황이 발생됩니다. 일본은 화폐가 극소수에게 집중돼 유통되지 않자 다수에게 화폐를 나눠주 며 소비를 유도하며 내수를 살리려했는데 수입 없는 다수는 미래가 불안하 니 쓰지 않고 은행에 예치해 소비가 살아나지 않자 패전국임에도 미제국과 손잡고 해외시장을 개척하며 군국주의를 복원하려 자위대를 강화한 것입니 다. 모두에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해 수입 없는 다수가 소비를 못하게 빈곤해 져 화폐가 유통되지 않는 공황은 상품을 팔지 못해 상인이 존재할 수 없고 기업이 물질을 생산해도 팔 수 없어 결국 모든 인류가 굶주리면 저항이 극 심해지기 때문에 기득권을 유지하는 시장을 살리려고 대출을 시작합니다. 시장을 살리기 위해 주택을 보유하거나 구입할 사람들에게 서브프라임 모 기지론이라는 명분으로 장기 저리로 화폐를 대출하자 부동산투기가 기승을 느낌 220

부리니 토지소유주가 가격을 올려 공장건설을 방해하고 화폐가 통용되면서 소비가 살아났지만 변제기를 맞아 대공황이 발생합니다. 일자리도 없고 이윤을 낼 수 없는 다수가 대출받은 모기지변제기가 도래했 는데 변제할 수 없으니 대출해준 은행들이 도산했으며 은행들의 도산을 저 지하기 위해 담보 잡은 주택을 공매하고 건설사가 살기위해 주택을 지으니 주택가격이 하락하며 부동산버블이라는 주택가격 폭락사태까지 옵니다. 신용카드남발로 자신의 수입보다 많이 소비해 카드회사 직원들을 먹여 살리 며 외상으로 먹고살던 카드생활자들이 여러 장의 카드를 사용하며 돌려막기 로 간신히 유지했지만 돌려막는 카드는 일확천금이 생기지 않으면 유지할 수 없어 증권투기나 각종 도박이 흥행하면서 신용불량자가 늘어 은행도산을 가 중시킵니다. 신자본주의라면서 약소국을 침략해 전 세계를 시장으로 만들고 소비회생을 위해 각종 특혜와 감세정책을 펴며 화폐를 발행할수록 생산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혹독해지고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극소수는 지구를 덮을 만큼 화폐를 보유하지만 수입 없는 다수가 빈곤에 허덕이는 공황은 더욱 깊어집니다. 극소수는 화폐를 무한정 보유해 1개월에 1억씩 소비해도 1년이면 12억, 10년이면 120억, 100년이면 1,200억, 1,000년이면 1조2,000억, 10,000년이면 12조로 몇 백대를 누리고 살아도 착취할 생산수단과 부동 산을 소유하고 있어 재산이 줄지 않지만 수입 없는 다수는 노동력만 착취당 하며 빈곤에 허덕이다 굶어 죽습니다. 그러자 기계문명이 인류를 파멸로 이끈다며 컴퓨터 텔레비전 전자제품 등 현대생활에 필수적인 전자제품들을 사용하지 않고 문명을 거부한 채 외 진 곳으로 은둔하거나 출퇴근 때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고 자전거를 이용하며 산업화의 산물인 패스트푸드를 먹지 않고 슬로푸드를 먹는 사람들 도 늘어납니다. 첨단 기계문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소극적 레오 러다이트족( 族 )이라 하는 데 미국의 카진스키(T.J. Kaczynski)는 1978년부터 18년 동안 유나보 머(Una Bomber)라는 가명으로 모든 공장은 파괴돼야 하고, 모든 기술서 적은 불태워져야 한다. 고 선동했으며 실제로 우편물 폭탄테러를 시도하다 체포됐습니다. 느낌 221

체코혁명과 금융대공황 1989년 11월 17일 금요일 혈세로 먹고사는 경찰무력으로 통제하며 1당 독재로 인민들의 자유를 억압하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권 한을 행사하고 착취 없이 노력한 만큼 분배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라며 학생 들이 평화롭게 시위하는데 경찰이 폭력을 행사하며 강제해산시킵니다. 이래서 시작된 체코의 벨벳혁명(체코어: sametová revoluce) 또는 신사혁명 (체코어: nežná revolúcia)은 11월 19일 20만이 참석하는 대중시위로 발전 했고, 11월 20일에는 50만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11월 27일에는 체코슬 로바키아의 모든 시민이 참여하고 노동자들이 2시간 총파업을 결행했습니 다. 시위에 참석하는 국민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11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1당제도의 권력을 포기하고 다당제를 선언했으며 12월초 오스트 리아, 서독과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에 설치했던 철조망과 여타 장애물을 철 거하고 12월 10일 구스타프 후사크 대통령이 사임하고 다당제에서 새로운 선거를 실시합니다.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하면서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다중을 학살하는 무력행사도 서슴지 않지만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권력을 고집하지 않고 다중이 거부하면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인류역사는 이렇게 학살과 착취 등 온갖 비양심적인 행위로 기득권을 차지 한 무리들이 만든 규칙인 법과 관습에 억압ㆍ통제당하며 짓눌려 헐벗고 굶 주리게 된 다중들의 분노가 폭발해 기존규칙과 제도들을 깨트리며 평등한사 회로 발전했습니다. 불평등한 규칙과 제도들은 청원으로 소멸되지 않고 기득권을 지키고 유지 하려는 무리들의 폭력을 다중이 더 큰 무력이나 위력으로 굴복시켜야 규율 과 규제라는 억압과 통제의 틀을 깨트리고 평등한 사회로 발전합니다. 우월주의를 내세우며 타인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무리들은 체코는 타인을 지배하는 능력이 부족해 통제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권력을 뺏겼다고 해석 하겠지만 조직을 구성하면 종파를 형성하고 새로운 권력을 만들게 되므로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회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타인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을 카리스마라며 찬동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느낌 222

평등하게 논의하는 공동체를 부정하고 소수만이 특출한 능력을 타고나는 양 허구를 강조하며 극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선전ㆍ세뇌하는 것입니다. 빈부격차는 개개인의 능력부족이 아니라 모두에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하 고 타인을 통제ㆍ지배하며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해 재물을 축적해야 기 득권이 되는 시장자유주의라는 체제와 제도 때문에 발생된다는 것을 깨달지 못한 인민들은 굶주리거나 부채를 견디지 못하면 죄 없는 자녀까지 살해하 고 자살합니다. 일자리와 수입이 없어 굶주린 남성과 여성들은 자신의 성( 性 )을 매개로 생 존하기 위해 매춘을 선전하기도 하고 허황된 환상에 사로잡힌 여성들이 가 세해 부를 축적한 무리들이 자신들을 찾아준다고 환영하며 온갖 비양심적 행위로 부가 축적되는 체제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서민의 아들ㆍ딸들은 해외로 부인들은 노래방이나 유흥가를 맴돌며 먹고 살기위해 발버둥 칠수록 가정은 파탄나면서 가족을 지킬 수 없게 됩니 다. 기득권들은 국가와 민족은 상관없이 자신의 재산(기업)을 해외로 확장하며 국적 없이 재산을 늘리고 소비하며 결혼이란 굴레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운 데 피 착취자들은 국가와 민족을 강조하고 정조와 가족(혈육)주의를 고집하 므로 자신도 모르게 착취체제를 옹호합니다. 기득권들은 공황의 원인이 노동자의 임금 탓이라며 구조조정이나 정리해고 로 쫓아내고 다수 굶주린 인민들의 여론을 무기로 노동자들의 저항을 짓밟 으며 무력을 강화하지만 해고로 수입이 없어진 노동자들이 자영업이나 노점 상을 해서라도 먹고살려고 하기 때문에 시장질서 붕괴를 가속화 시킵니다. 저항하는 노동자를 해고해 노동자의 철학(착취와 억압ㆍ통제에 저항)을 상 인의 사상(시장자유주의)으로 변질시키며 저항력을 해체하지만 이런 행위는 수입 없는 다수를 가중시키고 상인수를 늘려 시장기능이 마비되므로 물건을 못 파는 상인들의 폐업만 급증합니다. 실업자 양산은 상인의 폐업뿐 아니라 물건을 팔지 못하는 상인들은 100% 팔던 걸 60% 팔고도 똑같이 살려고 하니 상품가격이 폭등하고 기업이 아 무리 좋은 물질을 생산해 저렴한 가격에 내놔도 수입 없는 다수가 소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기업도 망하는 산업사회 인류의 종말을 가져옵니 다. 느낌 223

처음엔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인 직업 없는 빈곤층부터 굶어 죽고 실업자가 된 노동자들이 굶어죽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확대돼 기득권을 누리던 중ㆍ소 기업인 그리고 전문지식으로 누리고 살던 지식인들이 굶어죽고 끝내는 모든 상공업분야로 살아가는 인류가 멸망하는 것입니다. 공황은 유럽에서 의료와 교육 그리고 주택을 무상으로 공급하며 실업수당 까지 지급하는 복지국가나 모든 인민들에게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하지 못 하고 착취와 갈취로 재물을 축적하면 기득권이 되는 시장자유주의를 선택한 국가나 가리지 않고 화폐와 시장이 존재해서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하므로 빈부격차가 발생하는 모든 나라에 해당됩니다. 기득정권은 공황이 되면 복지를 축소하고 기득권에게 특혜를 주기위해 감 세정책과 무한정 화폐를 찍고 국채를 발행하며 토목공사란 명분으로 기업주 소수의 부를 축적시키고 국민전체의 빚을 늘려 혈세로 사는 공무원을 감원 해도 부채를 갚을 수 없게 만들어 국가를 파산시키고 전쟁을 일으키려 독재 를 강화합니다. 금융공황은 인류가 공정한 노동보장과 분배체제를 가지고 평화롭게 공존하 며 생존할 것이냐 착취와 갈취 속에 억압ㆍ통제당하는 시장자유주의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인류를 학살하는 끔찍한 전쟁을 되풀이 하면서 조금 더 유지 시켜 줄 것이냐는 기로에 서있습니다. 과학문명발달로 엄청난 생산력을 보유한 인류는 파시즘과 나치독재로 인 류를 학살하는 전쟁을 치러도 기계가 발달해 세계 2차 대전 당시처럼 복구 기간이 오래 걸리지 않고 화폐를 유통시킬 수 있는 시장을 확보할 약소국도 없습니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국민과 소통을 거부하는 정권에 맞서 촛불집회가 발생하고 2009년 유럽과 캐나다에서 그리고 2010년에는 구소련의 키르 기스스탄에서 민중혁명이 발생해 의회와 행정부를 장악하니 정권이 물러났 으며, 2011년 독재자 튀니지 대통령은 성난 민중들이 의회와 행정부를 장 악하자 야반도주했습니다. 2011년 리비아에서 발생된 혁명은 장기집권 독재자 카다피가 혈세로 보 안군을 고용하고 저항하는 인민들에게 총격을 가하자 민중들도 무장하는 내 전으로 발전했으며, 터키 그리고 아랍을 넘어 유럽까지 공황으로 발생된 민 중들의 저항은 전 세계에서 끝없이 일어나고 7월엔 독일에서 자본주의철폐 를 외칩니다. 2008년에 발생된 촛불집회는 빈부격차와 빈곤의 발생원인 그리고 불평등 느낌 224

을 깨트린 새로운 질서는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에 대해 논의한적 없는 사람 들이 시청광장에서 자치적으로 해방구를 만들고 논의하며 자리를 잡아갈 때 기회주의적으로 명망을 얻으려는 무리들이 대책위라며 나타나 광우병으로 협소화 시키고 통제하므로 분열됐습니다. 거기에 혈세로 먹고 살며 지배자인양 기득권의 주구( 走 狗 )면서 법질서란 명 분으로 국민위에 군림하며 통제하는 무리들이 폭력을 행사하며 구속하고 벌 금을 남발하며 억압했고 명망 있는 정치꾼들이 나타났다 쫓겨났는데 언론이 광우병으로 축소ㆍ왜곡 보도하므로 확산되지 못했습니다. 인류는 온갖 착취와 갈취로 재물을 축적한 사람들이 선거자금으로 기득권 이 되는 유산자민주주의, 명망 얻은 사람들이 기득권이 되는 위선자민주주 의, 다수결에 의해 선출된 소수가 다수를 지배ㆍ통제하거나 구소련이 왕조 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지배질서를 만들어 관료독재가 다중을 지배했던 거짓 평등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혈세로 살아가는 무리들이 사법권(질서) 행사라며 국민의 자유를 억압ㆍ통제해 육신과 정신을 속박당하며 살아왔던 사회가 아 니라 모두가 평등하게 권한을 행사하고 해고걱정 없이 능력껏 노동하고 노 력한 만큼 물질을 분배받아 빈곤걱정 없이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 는 사회를 원합니다. 타인을 학살하며 온갖 비양심적행위인 갈취ㆍ착취ㆍ사기로 재물을 축적하 고 통제와 억압으로 기득권이 유지되는 모든 압제에서 벗어나 모두에게 일 자리가 보장되고 평등하게 권한을 행사하며 어떤 이유로도 억압ㆍ통제당하 거나 착취 또는 갈취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야 평 화로운 세상이 됩니다. 평등한 사회 인류는 원시시대를 넘어 침략자들에 의해 짐승처럼 취급받던 노예제에서 거짓이 권력을 행사하던 봉건제를 거쳤으며, 봉건제에서 타인의 노동력을 느낌 225

착취하거나 갈취해 소수가 누리고 사는 산업사회, 화폐가 권력인 시장자유 주의와 노동자전체주의를 경험하고 이제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사회로 발전 할 것이냐 멸망할 것이냐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새로운 사회는 온갖 거짓이 난무하며 진실과 진리, 정의와 인간존중은 은 폐되고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며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하기 위해 비인 간적, 비양심적으로 소수에게 명령받고 통제당하며 유지되는 사회가 아니라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로 발전시켜야 합 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누구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려면 거짓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솔직하고 진솔해지며 진실과 진리가 통하는 사회 를 만드는 것입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으며, 화폐나 시장으 로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 땀 흘린 노동생산물로 살아가고, 관료란 다중 을 통제ㆍ억압하며 노동생산물을 갈취ㆍ수탈하는 집단이며, 선거선출제도란 소수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다수는 참여권한만 박탈당하는 거짓 민주주의 라는 사실을 각성해야합니다. 새로운 사회는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하기 위해 유통했던 화폐 와 시장 그리고 부동산과 생산수단의 개인소유제, 평등과 자유를 부정하고 통제하며 억압하기 위해 만든 모든 법률과 기구들을 폐기하고 모든 사람들 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도록 갈취ㆍ통제금지법을 만들면 됩니다. 타인을 억압하거나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규칙(법)을 만들면 만들수록 법 을 만든 사람도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족쇄가 되므로 최대한 단 순하면서도 명쾌하게 만들어 모두가 공정하게 지킬 수 있도록 가장 엄밀한 사항만 명시하는 것입니다. 규칙들이 만들어지면 집행은 평소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 중 집행력이나 행 정력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추천하고 다중이 인정하면 생산노동을 하지 않는 대신 자신의 적성에 맞는 행정역할을 맡아 즐거운 마음으로 능력을 발 휘하면서 업무를 집행하도록 하면 됩니다. 기간을 보장하고 권한을 부여하면 권한을 이용해 관료가 되므로 선출이나 시험 없이 평소 생활하는 모습을 아는 사람들이 적성에 맞도록 추천해 임무 를 맡기므로 특권이 주어질 수 없게 하며 기간 있는 선출과 달리 추천을 취 소하면 자격을 박탈할 수 있도록 해 특권이 형성될 수 없어야 합니다. 느낌 226

다수 인민들의 직접추천으로 행정이나 사법, 전체를 위한 의회업무를 집행 하도록 하고 집행내역을 다중에게 보고(공개)하도록 하며 업무의 규칙은 계 급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논의하고 스스로 결의하며 결의한 것을 책임지고 집행하도록 하면 보다 생산적이 될 수 있습니다. 생산적으로 집행한다고 타인의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며 억압하는 것이 아 니라 본인이 스스로 결정했으므로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 있게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말하며 신분보장 없이 언제든지 자격을 박탈할 수 있기 때문 에 권한을 남용하는 특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추천이나 자격을 박탈하는 특정기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을회관이나 공장휴게실에 인터넷을 연결한 대형멀티스크린을 설치하고 원터치형식으로 누구나 쉽게 어느 지역에서 어떤 직에 대해 충원을 요구했고 무엇 때문에 자격이 박탈됐는가를 알 수 있도록 공개하므로 모든 정보를 공유하면 됩니 다. 또한 생산노동에 소요되는 인력과 수량파악, 노동을 보조하는 행정요원이 몇 명씩 배치되는 가도 확인가능하며, 누가 얼마의 노동을 하고 있다는 사 실도 확인되기 때문에 특정인들이 특정하게 많이 노동을 강요당하는지 모두 가 평등하게 노동권한을 행사하고 있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 평등한 사 회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중앙 집중 시스템은 모든 정보만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에서 자신이 생산하는 물질을 요구하는 량이 얼마고 자신들과 동종의 생산지에서 생산 되는 물질의 량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사전주문식 생산이 이루어 질수 있어 아까운 지구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과잉 생산되는 물질도 없어집니다. 노동생산물의 유통은 물질을 공급하는 노동을 만들어 양심 있는 분배노동 으로 공급하도록 하면 됩니다. 느낌 227

생산과 분배 인간이 누구나 평등하다면 누구도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할 권 한이 없으므로 모두가 노동을 해야 하며, 인류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땀 흘 린 노동 생산물이라는 것이 확인된 이상 필수노동의 범위를 명확하게 규정 해야 합니다. 인류가 생존하면서 섭취해야 할 음식물을 생산ㆍ포획ㆍ채집하는 농어업, 신발ㆍ의류 등 필요물품을 생산하는 산ㆍ공업, 건설노동, 생산된 물질을 운 반하는 운수노동, 물품을 나눠주는 공급노동,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 식을 습득하는 교육노동과 건강과 질병을 책임지는 의료노동은 당연히 필수 노동입니다. 모두가 노동에 종사하면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며 무위도식으로 누리고 살 던 무리가 없어지고 소수노동으로 생산하던 물질을 다수가 생산하므로 노동 강도와 노동시간도 줄어들며 모두에게 일자리가 보장되므로 분배불균등이 발생하지 않고 노력한 만큼 분배받아 일하는 사람 모두가 주인 되는 세상이 됩니다. 노동한 만큼의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려면 모든 물질의 가치단위를 시간으로 바꾸고 물질을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은 출ㆍ퇴근카드와 신용카드를 사용하듯이 자신이 노동한 시간을 노동카드에 기록하여 시간을 축적하고 필 요한 물질을 취득하면 취득한 물질만큼 시간을 공제하는 것입니다. 물질의 시간단위는 공장에서 몇 명이 몇 시간을 노동했는데 얼마만큼 의 물질이 생산됐는가를 기준으로 가령 1명이 기계를 가동시켜 5시간 동안 10만개의 종이컵을 만들어 냈다면 10만개 5시간(18,000초)=5.55초가 되는데 여기에 운반노동 시간과 분배노동 시간을 포함시켜 물질의 가치시간 을 산출하면 됩니다. 노동시간은 똑같은 시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위험하거나 고도 의 숙련이 필요한 노동은 많은 노동시간을 인정하고 손쉽게 가정에서 분배 노동을 하는 구멍가계 같은 곳은 시간을 가감하므로 실제로 힘든 노동을 하 는 사람들이 노력한 만큼 물질을 소유할 권한을 더 갖도록 해야 합니다. 노동시간과 노동 강도 측정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논의해 결정하고 게으 름피우며 노동을 기피하거나 잡담으로 시간만 보내는 사람들의 노동시간을 삭감하고 힘들게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의 노동시간은 늘리므로 지시하거나 통제함이 없이 모두가 평등하며 자유의사로 즐겁게 노동할 수 있게 하는 것 느낌 228

입니다. 물질의 단위를 시간으로 분류해 노동에 복무한 시간으로 취득할 수 있게 되면 도시에선 노동을 할 수 없으므로 노동할 수 있는 지역을 찾아 자연스 럽게 전국토가 골고루 아름답게 발전하고 향락도시는 사라지며 공업지대, 농업지대, 산업지대 등으로 바뀌게 됩니다. 지구는 지구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의 것이 듯 국토란 그 국토에 살아가 는 모든 사람의 것이지 개인소유가 될 수 없으므로 부동산의 개인소유를 폐 지하고 모두가 공동으로 노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논과 밭, 하우스단지 등 농지는 다중이 공동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정리하 고 다중이 생산에 필요한 모든 기계ㆍ기구와 필요품들은 필요품의 생산지대 로부터 필요량을 공급받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므로 농업지대와 공업지대간 의 격차를 없애야 합니다. 구소련은 모두가 함께 노동하고 공동으로 분배한다며 공동농장을 만들었지 만 농민들의 생산물을 도시 노동자를 위한다며 강제공출하고 생산량을 늘리 기 위해 농가들에게 텃밭을 허용하자 공동농장의 농작물은 피폐해지고 개인 의 부를 축적할 수 있는 텃밭의 농작물만 풍성해지는 오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체제처럼 개인이 부를 축적하는 사상이나 욕심이 발생되 지 않도록 철저히 각성하고 대신 공동으로 경작해도 자신이 노력한 노동 시 간만큼 물질이 분배될 수 있도록 하므로 누구든 착취당한다는 피해의식에 젖어 노동을 기피하지 않고 일하는 만큼 풍족하며 자유롭고 평등하게 생활 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합니다. 모든 인민은 자신의 취향과 성격에 맞는 생산노동을 찾아 노동할 권리가 있고 노동의 권리는 그 어떤 이유로도 박탈할 수 없으며, 생산노동에 종사 할 공장이 없으면 자신들이 하고 싶고 원하는 노동과 생산방식을 원터치 스 크린에 입력하고 많은 경험자들의 조언을 구하며 함께하려는 사람들을 모아 공장을 지으면 됩니다. 기존에는 화폐가 공장을 짓는다고 속였지만 자연에 맺힌 열매하나도 노동 으로 채취하듯 화폐로 구입할 수 있는 모든 물질이 노동으로 창출된 것이므 로 원터치 스크린에 입력하고 생산 공장에서 필요한 물질들을 만들면 만들 어진 물질을 운수노동으로 옮겨 공장을 짓고 필요한 원료도 가져와 생산하 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가 되면 현 체제에서 먹고 살기위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아도 느낌 229

한번 선택한 직종에서 평생 위험을 무릎쓴 비 효율적이고 비 생산적인 노동 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종을 찾아 즐거운 마음으로 효 율적이고 생산적인 노동을 하게 됩니다. 공동으로 생산하는 사회가 되면 모든 물질을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받기 때문에 개인의 기호가 통제되고 사라지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는데 모든 물질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호하는 카메라 나 자동차 등의 물질은 개인소유지 공유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물질을 생산하면 상품을 팔아 이익을 챙기고 다시 판매하기 위해 지구자원을 낭비하며 견고하지 못한 상품을 만들던 시기에서 고장 없이 자 신이 계속 사용할 튼튼한 물건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지구자원도 아낄 수 있으며 자신의 취향에 맞고 선호하는 물건을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게 됩니 다. 사회시스템이 바뀌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온갖 범법행위와 불량식품을 만 들어 타인에게 피해를 주던 돌로 만든 고추 가루나 사람들이 섭취하면 해로 운 항생제를 사료로 사용해 닭이나 계란을 생산하는 행위, 또는 광우병 위 험이 있는 소를 키우는 행위도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서로 믿으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필수노동인 물질운송과 대중을 수송하는 차량을 정비하는 정비사와 생산 활동이 아니고 위험성과 육체적인 무리가 없지만 기술을 필요로 하는 필수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ㆍ미용사들과 과학자들이 연구한 발명품에 대한 노동 시간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책정할 것인가는 다중이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 다. 음악ㆍ소설ㆍ연극ㆍ촬영 등 여가활동에 필요한 예술분야는 먹고살아야 하 는 경제적 사정 때문에 재능이 있어도 표현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 에 노동시간이 짧고 여가시간이 늘어나면 우후죽순처럼 늘어날 수 있으므로 노동시간으로 인정할 것인지 한다면 언제까지 얼마나 인정해야 할지도 논의 돼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적성에 맞고 생산에 적합한 장소가 정해지면 자신이 거주할 주택을 공급받으면 되고 마땅한 주거지가 없으면 건설노동을 통해 새롭게 주택을 건설해 거주하고 실생활에 필요한 전기와 가스, 수도와 인터넷 그리고 의료 와 대중교통(버스와 기차)은 숨 쉬는 공기처럼 집단이 책임지고 무료로 공급 해야 합니다. 무상의료가 되면 지금처럼 수입을 위해 사고가 발생된 후에 돈을 벌기 위 느낌 230

해 치료하던 의료 활동이 아니라 의료종사자들이 업무량을 줄이기 위해서라 도 사고나 질병이 발생되지 않도록 예방의학을 연구하므로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됩니다. 남녀의 평등 여성이나 남성이 동등하려면 여성도 남성과 똑 같이 노동할 권리를 가지며 부부가 된다면 가사노동은 당연히 남성과 공동으로 분담하고 가사노동에서 벗어나기를 원 할 경우 공동급식소(밥 공장)를 설치해 일자리를 늘리면 됩니 다. 인간은 모두가 존중받아야 하므로 가정에서도 부부가 공동으로 취사하며 같이 즐거움을 향유할 수도 있도록 보장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양육노동에서 벗어나고 자녀도 인간으로서의 자유로운 권리를 보장 하려면 공동탁아소를 설치하고 어려서부터 공동탁아소에서 집단으로 생활하 며 자신의 재능과 소질을 발견하고 개발시켜 인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교육은 자신이 원할 때 까지 무리가 의무적으로 보장해야 합니 다. 남성(부계)우월주의를 강조하며 혈육으로 계승되는 상속제를 폐지하고 일부 일처제라거나 결혼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누구나 자유롭게 결혼하고 자 유롭게 이혼할 수 있도록 하므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으로 불이익 을 받던 모든 규정과 족쇄를 없애야 됩니다. 잘못 세뇌되고 길들여진 가족제와 정조관념 때문에 여성은 남성과 혹은 남 성이 여성과 한 번 육체관계를 했다고 상대방이 자신의 소유물인양 족쇄로 삼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평생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고에서 벗어나 서 로 마음이 맞으면 성욕을 억제당하지 않고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사랑도 나 느낌 231

눌 수 있어야 합니다. 여성이 출산으로 노동할 수 없는 기간은 종족번식과 사회노동력의 생산이 기 때문에 여성이 노동력을 회복할 시간만큼 영아의 육아노동으로 인정해야 하며, 일정기간 시간이 지나면 탁아소에 양육할 것인지 여성이 양육할 것인 지는 자신이 판단하는 것입니다. 여성이나 남성이 자녀를 위해 또는 남성이 여성을 위해 타인과 다르게 많 은 시간을 노동하면서 상대를 보호하는 것이 현 체제에선 정상일지 몰라도 새로운 사회에서는 우월주의에 빠져 상대방도 평등하게 노동할 권리가 있는 것을 제한하고 자율성을 박탈하므로 예속시키려는 행위가 됩니다. 모든 인류가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면 현 체제처럼 자신의 이 익을 위해 서두르다 타인을 살해하는 교통사고도 사라지고 멀리 있는 지인 을 만나 여흥을 즐기다 늦어지면 악착같이 주거지로 귀가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준비된 휴게시설(모텔)에서 쉬어가면 되므로 시간에 쫓기지 않을 것 입니다. 아직도 인류를 학살하고 재물과 토지를 강탈해 권력을 차지하고 군주 행세 하는 국가가 유럽엔 영국 네덜란드 등 10개국 아프리카엔 모로코 등 3개 국 중동엔 사우디아라비아 등 6개국 아시아엔 일본 타이 등 5개국 있는데 이들 국가의 군주들이 기득권을 지키려 전쟁을 도발한다면 국방의무를 규정 하면 됩니다. 국방의무라고 현재처럼 상명하복의 명령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치 를 위해 결성됐던 시민군처럼 장교와 졸병이라는 계급 없이 모두가 평등하 게 토론하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자신이 맡아야 할 부분들을 스스로 결정 하고 결의해 타인의 자유를 억압ㆍ통제하거나 갈취하며 살아가려는 무리들 을 징치하도록 해야 합니다. 특정 기간(나이)은 국방을 위한 의무를 할 것인가 아니면 직업군인 식으로 국방을 담당하도록 할 것인가는 추후논의의 대상일 것이며 군이라고 무한적 으로 살상을 위한 훈련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먹고 살아야 하는 생산 노동 분야를 공동으로 수행하기 위해 농업군대, 산업군대, 공업 군대 등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민이 생산노동을 하면 극소수가 1일 8시간 혹은 12시간씩 산업재 해로 불구가 되거나 사망하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생산기계처럼 노동하는 사회가 아니라 1주일에 1일 혹은 1주일에 4시간이나 2시간만 노동해도 누 구나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는 물질이 만들어집니다. 느낌 232

지금까지 타인의 노동력과 재물을 착취하고 갈취하는 기득질서를 위해 만 든 노동조합이나 시의회, 국회, 사법, 행정 등 모든 조직과 특권을 폐기하고 나이가 어리다거나 여성 또는 남성이라는 이유로 억압받고 생활고 때문에 통제 당했던 제도와 기구들을 깨트려야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 는 사회가 건설됩니다. 흔히 혁명가의 교리니 뭐니 외치면 진보인줄 아는데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고 인식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인류의 진보를 인정하는 합리적인 사람이고 착취와 갈취로 유지되는 틀 속에 기득권이 있다며 자신의 권리만 고집하는 사람은 자유와 평등을 훼손하는 반역자입니다. 직장 혹은 지역에서 친밀한 사람끼리 단풍계모임 같은 것을 하면서 계주를 지명하는 것은 계주가 모든 계원들의 의견을 제대로 파악하고 수렴해서 올 바른 모임으로 만들어 가자는 것이지 계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계주가 마 음대로 전횡을 저지르며 특권과 독선을 행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현 체제는 모임을 만들고 회원이 많으면 큰 이권이 생기기 때문에 자신의 이권(권력이나 재물 등)을 지키거나 아니면 자신이 저지른 비리를 은폐할 수 있는 권한있는 대표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다중을 억압하는 폭력을 행사하 면서 모임의 조직원들을 분열시키고 권력을 행사하려 합니다. 가장 소단위라는 가정에서 남성이나 여성이 상대보다 힘이 세다며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억압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며 지배하고 통제하려 한다면 그런 행위는 복종하는 노예를 원하는 것이지 서로 위하고 아껴주는 가족을 원하 는 것이 아니므로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평등한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은 자신의 조직을 만들어 편으로 끼리끼리 분 열하고 정의와 진실은 간곳없이 무조건 자기편이면 지지하고 자기편이 아 니면 아무리 바른 말을 해도 반대하고 비방하는 거짓 활동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서로 타인을 존중하며 진리가 인정되는 기본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필자가 2000년 지하철공사장에서 일하던 시기 한 동료가 한국사람은 인 간성이 틀렸다 라 하기에 왜 그러느냐 물으니 자신이 해외에서 오래살 았는데 외국사람은 어린애들도 질서를 잘지킨다, 그런데 한국사람은 어른 도 질서를 않지키니 인간성이 틀렸다 고 하기에 필자가 그것은 어려서부 터 습관문제지 한국사람의 인간성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 라고 한 적 있습 니다. 모든 인간이 존중받을 권리가 있으니 자신의 아이에게도 자유를 보장한다 느낌 233

며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도록 방치하는 것은 자유라 할 수 없을 것이고, 어 려서부터 타인에게 피해가 되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도록 끝없이 대화 하면서 이해시키는 생활을 습관화 하므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해야지 자유롭게 키운다며 방종을 용인해서는 않된다고 봅니다. 자신이 존중받으려면 타인을 존중해야 자신도 존중받게 되는데 타인을 존 중하지 않고 지시하며 통제하려고 한다거나 아니면 방종스러운 행동으로 무 례하면서 자신만 존중받겠다는 사람 만큼 독선적이고 비양심적인 사람은 없 을 것입니다. 과학이 점점 더 발달해 인간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모든 물질을 로봇이 생 산한다면 노동자와 수많은 인민들은 생존수단을 잃어버리게 되고 극소수 기 득권자들이 로봇의 무력으로 사람까지 통제할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고민해 봐야 합니다. 기득권을 누리는 무리는 착취와 갈취가 합법인 체제를 유지하려고 타인을 학살하는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을 국가를 구한 영웅인양 칭송하며 폭력을 조장하고 단결하지 못하도록 분열시키는데 그나마 이성이 있는 제복 입은 임금노예가 아니라 기득권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로봇을 조 종한다고 생각하면 끔찍스러운 결과가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자유를 누리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회는 저절로 이 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억압과 통제 속에 착취당하고 핍박받는 모든 피 착취 자들이 프랑스나 독일ㆍ러시아처럼 억눌린 분노를 화산처럼 일시에 폭발시 키는 저항으로 건설됩니다. 인류가 평등과 자유를 요구하며 저항하는데 혈세로 살며 무력으로 통제하 고 억압하려는 무리들은 인간의 권리를 상실한자들이므로 소멸시켜야 하며, 자신의 권리인 저항을 하지 않고 기피하는 사람들은 평등과 자유를 누릴 자 격이 없으므로 처벌받아야 합니다. 긍정이란 무엇일까요? 긍정이란 수긍한다는 것으로 수긍하기 위해서는 참 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만이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자신이 하는 말이 뻔히 거짓으로 규명되는데도 무조건 긍정적으로 받아드 려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은 나는 거짓말로 당신을 속이고 이익을 취하 기 위해 사기 칠 테니 당신은 무조건 믿고 따르라는 것이지 올바른 판단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정리자가 이 책을 준비하자 지인들 중에 과거에 언제 그런 나라나 정치체 느낌 234

계가 있었느냐고 반문하기도 하고 더러는 꿈을 꾸는 것이냐고 비아냥거리기 도 했습니다. 정리자는 인류가 경험칙만 놓고 따지면 지금의 문명사회로 발전하지 못하 고 아직도 원시시대를 살고 있어야 하며 인류가 꿈을 꾸지 않았다면 현재같 이 문명이 발전한 사회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고 답변했습니다. 어제의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오늘에 내가 있고, 오늘의 내가 어떻 게 사는가에 따라 내일의 내가 되듯이 인류의 역사도 어제를 알아야 오늘을 알 수 있고 오늘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내일이 만들어 진다고 봅니다. 우리 모두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살 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모두가 존중받으며 자유롭고 평등하며 평화롭 게 살아가는 사회를 건설하는 방법을 고민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 치겠습니다. 끝으로 이글을 완성하기 까지 오랜 시간 항상 토론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해준 두 분과 주변에서 생활에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느낌 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