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역사를 연대별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통 념을 깨뜨리고 연대별로 정리한 글 인류는 언제 탄생했으며 농사는 언제부터 시작됐고 문 자는 언제부터 생겼으며 법이란 언제 어떻게 왜 만들어 졌는가? 종교가 생긴 원인과 기계는 누구에 의해 언제 발명됐 으며 불평등한 삶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분석한 글. 대학에서도 못 배우고 밥은 굶어도 반드시 알아야 할 진실 <밥,알,진> 인간은 자신이 습득한 지식만큼 세상을 볼 수 있고 자 신이 습득한 지식만큼 세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권력욕이나 명예욕을 가진 사람들은 80Km로 달리는 차로 120Km를 달리는 차량을 선도( 先 導 )하겠 다고 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싶고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려하며 진실은 외면합니다. 역사와 정치 ㆍ 경제란 무엇인가?
서 문 필자는 1956년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에서 태어나 철암국민학교를 다니다 1968년 부친을 여의고 이용소 머리감는 꼬마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70년부터는 강원도 인제에서 이용소 머리감 는 꼬마로 생활했고 그 후 요리 집의 보이(웨이터)생활도 하고 요리사노릇도 하다 1978년 이용사면허증을 취득했으나 이용업에 종사하지 않고 1979 년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으로 내려가 결혼하면서 먹고 살기위해 석탄광부생 활을 시작합니다. 탄광에서 몇 차례 해고되고 해고투쟁을 전개해 복직되므로 이름이 알려져 1990년 탄광지역 총파업 때 한보탄광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됐다 구속됐 으며 이후 건설현장에서 비계공으로 철골도비로 서울에 올라와 지하철건설 현장에서 노동을 하다 1992년 김영삼 정권에서 사면복권이 됐습니다. 그 후 석탄합리화 사업으로 탄광들이 폐광됐기 때문에 1994년에 강원도 동해로 내려가 1996년에 시내버스 운전사가 됩니다. 시내버스운전사로 취업하고 노동조합대의원으로 선출 돼 활동했으나 관리 자(배차)에게 폭행당하고 오히려 해고되므로 해고무효투쟁을 전개하던 중 부 인이 당신은 노동운동에 미쳐 처ㆍ자식을 부양할 자격이 없으니 나가라. 면서 쫓아내므로 혼자가 돼 2000년 서울에 올라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2004년 서울에서 시내버스운전사로 취직했으나 2006년 한건의 사고가 발생했다는 핑계로 해고하므로 또다시 직장을 잃고 해고투쟁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며 방황하던 중 2007년 탄광에서 구속됐던 사건이 민주화운 동으로 인정되고 2008년 촛불집회가 벌어집니다. 촛불집회에서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직을 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주의 활동을 한다는 사람들과 대화하며 충격을 받았습 니다. 사회주의 활동을 한다는 사람들과 대화 중 화폐도 노동자들이 만들어 낸 생산물이므로 존치시켜야 한다, 고 주장하는 말을 듣고 모든 결과에는 원 인이 있는데 불평등의 근원을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가 평등한 사회 를 건설한다면서 오히려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라며 고심했습니다.
인류가 평생 생산노동을 하고도 빈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원인은 노력 한 만큼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고 착취와 갈취가 합법인 체제와 제도 때문으 로 착취와 갈취가 형성되고 유지되는 근원을 분석하려고 노력해야 모든 착 취와 갈취를 해체시킬 수 있게 되므로 필연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길을 가다 돌에 맞았다면 맞은 사람이 건설 현장이나 낙석위험 밑으로 지 나가거나 아니면 누군가 돌을 던져 맞은 것이지 원인 없는 결과란 없습니 다. 그런데도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고 결과만 놓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기 득권을 차지하고 근원을 은폐하려는 무리들이 하는 주장이고 과학적으로 생 각하는 사람들은 원인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 사람을 만나도 주거지(거주지)나 직장이 같은 동네에 있거나 왠 지 걷고 싶어 그쪽으로 갔는데 상대방의 직장이나 거주지가 거기 있다거나 아니면 회사일로 또는 무료해서 그 장소를 갔다거나 원인이 있어 결과가 나 타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먹을거리는 농민ㆍ어민이 수확ㆍ채취 한 물질이지만 농민과 어민이 수확ㆍ채취하기 위해 사용하는 농기구과 어 선ㆍ어구 등 모든 물질은 노동자들이 땀 흘려 생산한 물질이지 시장이나 화 폐가 아닙니다. 인류역사는 실패를 경험하며 발전한다면서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냉철 하게 분석하지 않고 실패한 경험만 강조하는 것은 역사를 거스르려는 무리 들이 피 착취자들에게 분노만 표출하다 억압당하고 포기하라는 의미가 됩니 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왜 평등한데 무엇 때문 에 어떻게 통제당하고 억압받으며 불평등한 삶을 살게 됐는가를 분석해야 하며 지도와 지시가 함유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설명돼야 합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되려면 자유와 평등을 부정 하는 통제의 기틀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고민해야 하고 억압과 착취의 근 원을 깨트리려 노력해야 모두가 평등하며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습 니다. 불평등은 자유를 부정하고 통제하고 지시하는 행위가 일어나는 곳에서 만 들어지는 것이고 통제하고 지시하는 행위들을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 아드리도록 강요하는 것이 집단이나 조직이라는 명분들이 정해놓은 규칙(법)
입니다. 그러므로 왜곡된 평등과 자유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모두가 실질적으로 평 등하고 풍족하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해법 을 찾기 위해 이글의 집필을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지 못하다 2010년 봄 집필을 시작했으나 얼마 쓰지 못하 고 생활고 때문에 김치공장에 들어가 노동을 시작했는데 공장에서 관리자 (반장)라는 사람의 비인격적인 행위에 공장을 그만두고 집필에 열중했습니 다.
목 록 1. 인류의 탄생 1 ~ 5 2. 초기의 생활상 6 ~ 7 3. 집단생활의 시작 8 ~ 11 4. 원시종교의 출현 12 ~ 12 5. 농경의 시작 13 ~ 17 6. 문명의 발달 18 ~ 23 7. 노예시대의 시작 23 ~ 26 8. 법(규칙)의 출현 26 ~ 32 9. 모세의 탄생 32 ~ 35 10. 석가의 탄생 35 ~ 38 11. 로마제국의 출현 38 ~ 43 12. 로마공화정으로 발전 43 ~ 49 13. 스파르타쿠스 저항 49 ~ 53 14.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53 ~ 55 15. 예수의 탄생 55 ~ 59 16. 로마제정의 출발 60 ~ 64 17. 자유사상의 종교화 65 ~ 68 18. 로마제국의 분리 68 ~ 69 19. 무함마드(영어 명: 마호메트)의 탄생 69 ~ 75 20. 서로마제국소멸과 비잔티움 76 ~ 77 21. 봉건시대(중세) 77 ~ 82 22. 백년전쟁과 농민혁명 83 ~ 86 23. 소작농의 출현 86 ~ 93 24.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93 ~ 97 25. 농민혁명과 수공업발전 98 ~ 107 26. 종교전쟁과 청교도 혁명 107 ~ 112 27. 식량생산의 대량화 112 ~ 117 28. 평등사상의 발전 117 ~ 122 29. 왕권계승과 학살전쟁 122 ~ 125 30. 자유를 위한 저항 125 ~ 133
31. 군부독재 출현 133 ~ 141 32. 노동자저항과 혁명 142 ~ 149 33. 유산자ㆍ위선자 민주주의 149 ~ 154 34. 다수결 선거선출주의 155 ~ 162 35. 전기의 발전 162 ~ 165 36. 모터의 발견 165 ~ 166 37. 자동차의 출현 166 ~ 168 38. 생산의 자동화 168 ~ 175 39. 광산노동자들의 저항 175 ~ 179 40. 공황과 학살전쟁 179 ~ 184 41. 전쟁을 혁명으로 184 ~ 189 42. 공황으로 독재정권 발호 189 ~ 197 43. 스페인 내전 197 ~ 201 44. 엄청난 인명살상 2차 대전 202 ~ 207 45. 가톨릭과 개신교의 조선장악 207 ~ 211 46. 시장자유주의 확산 212 ~ 216 47. 신용카드와 대형마트 출현 216 ~ 218 48. 생산로봇의 출현 218 ~ 221 49. 체코혁명과 금융대공황 222 ~ 225 50. 평등한 사회 225 ~ 227 51. 생산과 분배 228 ~ 231 52. 남녀의 평등 231 ~ 235
인류의 탄생 현재까지 지구에서 발견된 화석으로 보면 약 500~ 100만 년 전 지금의 아프리카 지역에서 인류의 최초조상이라 할 수 있는 원인( 猿 人 )류가 탄생(오 스트랄로피테쿠스/호모하빌리스)해 거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원인에 속하는 화석표본에는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지만 모두 직립자세 (두발로 걸음)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과, 또 그것은 골반의 형태나 두 개저 ( 頭 蓋 底 )에 있는 대후두공( 大 後 頭 孔 )의 위치와 크기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약 500만 년 전 아프리카는 동서로 왕래가 불가능하도록 남북을 관통하 는 산맥이 형성돼 동, 서 양쪽에 서로 다른 진화를 일으키는 환경적 요인으 로 작용했는데 산맥의 서쪽은 풍부한 강수량으로 열대우림이 있었기 때문에 나무열매 등 먹이가 풍부해 두 다리로 걸어야만 하는 진화가 필요 없으므로 계속 나무위에서 사는 동물로 남았다고 합니다. 반면 산맥의 동쪽은 구름으로 막혀서 수량이 줄면서 숲이 차츰 사라지고 초원이 나타났기 때문에, 원 인류는 먹이를 구하기 위해 숲과 숲 사이의 초 원을 걷게 된 것이며, 이때 존재했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같은 원 인류가 진화하면서 현재의 인간이 됐다는 것입니다. 현생인류와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침팬지의 경우 아과( 亞 科 )인 호미니 데(Hominidae)까지 현재의 인간과 흡사하며 고생물학적 연구결과 인간과 침팬지는 6백 5십만 년에서 7백 4십만 년 전 사이에 갈라졌을 것으로 분 석되고 있으며, 분자생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5백 4십만 년에서 6백 3 십만 년 전에 갈라졌을 것이라고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 두 그룹은 97에서 99.4%까지 같은 DNA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 져 일부 학자들은 침팬지를 호모(Homo)속( 屬 )에 넣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 고 있는 것입니다. 현생 영장류를 분류하면 우선 반 원류( 半 猿 類 )와 원류( 猿 類 )로 나뉘고 원류 는 유미원류( 有 尾 猿 類 )와 유인원으로, 유미원류는 다시 구세계원( 舊 世 界 猿 ) 과 신세계원( 新 世 界 猿 )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반 원류는 얼핏 보면 원숭이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가장 원시적인 종류로 안경원숭이 여우원숭이 등이 여기에 속하며 유미원류는 원숭이나 비비( 狒 狒 )에 해당하고 신구 양 대륙에 갈라져 있으며, 서식하는 방식에 뚜렷한 차 이를 보인다고 합니다. 느낌 1
꼬리가 있는 원숭이와 대비해 꼬리가 없는 것이 곧 유인원으로 오늘날 적 도아프리카에 서식하는 고릴라와 침팬지, 동남아시아에 서식하는 오랑우탄 과 긴팔원숭이 등이 이에 포함된다고 할 것이며, 이들 각군( 各 群 )은 지금부 터 약 6,000만 년 전인 신생대초기에 존재한 조상에게서 점차 갈라져 나 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신생대는 제3기와 제4기로 나뉘고 제3기는 다시 팔레오세( 世 ) 에오세 올리고세 마이오세 플라이오세로 나눠지며 제4기는 이른바 인류의 시대 로 지금부터 약 200만년(약 100만년으로 추정하고 있었으나 최근의 새로 운 연대측정법에 따라 늘어났음)전에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발견된 화석을 자료로 보면 신생대초기에 현생의 반 원류와 비슷한 종류가 살았고 에오세에 이르러 신세계원이 유미원류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 정하며 구세계원 계통에서 유인원의 첫 조상은 올리고세에 서식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무렵에는 긴팔원숭이 계통에서 이미 갈라져 나왔고, 마이오세에서 플라 이오세 초기에 걸쳐 다른 세 종류로 변화(진화)된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생물학에서는 이른바 계통수에서 인류로 진화 하는 과정이 언제 갈라지게 됐는가 하는 점에 대해 여러 주장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인류와 유인원의 근연( 近 緣 )관계를 강조하는 설의 경우에는 마이오세말기 또는 플라이오세에 고릴라나 침팬지계통에서 갈라졌다는 설과 그 반대로 마 이오세초기 또는 올리고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이 서로 대립하는 것 입니다. 두 발로 걷고 도구를 사용하는 인류는 제4기가 돼 나타나는데 제4기는 홍 적세와 충적세로 나뉘고 있으며, 홍적세는 다시 네 차례의 빙하기와 그 사 이의 간빙기로 분류하고 약 l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 기후와 동식물 상( 動 植 物 相 )이 오늘날과 거의 비슷해진 시대를 충적세로 분류합니다. 화석을 통해 판단되는 홍적세에 나타난 인류로는 원인( 猿 人 ) 원인( 原 人 ) 구인( 舊 人 ) 신인( 新 人 )으로 분류하며 원인( 猿 人 )으로는 남아프리카의 오스트 랄로피테쿠스와 파란트로푸스, 동아프리카의 진잔트로푸스가 대표적이고 적 어도 진잔트로푸스는 제1빙기 이전인 200만 년 또는 100만 년 전에 살았 던 가장 원시적인 인류라고 간주되고 있습니다. 초기 원 인류는 직립보행을 하면서 골반이 발달해 넓어졌으며 팔은 도구를 느낌 2
사용할 수 있도록 충분히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에 보행에 지장을 주지 않도 록 발달(진화) 했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짐승을 물어죽이기 위해 있었던 송곳니는 발달하면서 음식을 씹기 편 리한 치아로 진화 했고 하악관이 발달되면서 머리도 커지고 뇌 용량도 커졌 다고 합니다. 약 170~30만 년 전에는 원인( 原 人 )(호모에렉투스)류가 거주했으며, 이들 은 추운빙하기가 닥치자 아프리카에서 벗어나 아시아, 유럽 등으로 이주하 므로 삶의 영역이 넓어졌는데 자바원인, 북경원인, 하이델베르크인 등이 이 에 속한다고 보고 있으며 공식 학명으로 호모에렉투스라고 명명되고 있습니 다. 지금까지 발견된 석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약 240만 년 전 것으로 인류 가 처음 사용한 석기를 일반적으로 올두바이공작(OldowanIndustry) 이라 하며, 이때 사용한 석기는 그때그때 임시적으로 만든 것으로 판단되고, 이보다 정제된 석기는 발달한 올두바이공작(Developed OldowanIndus try) 이라 하며 이후 매우 정제된 형태로 발견된 석기를 아리안공작 이 라고 합니다. 아리안공작은 아프리카와 유럽 및 인도에 걸쳐 발견됐는데 모든 곳에 분 포된 것은 아니며 대표적인 석기는 주먹도끼를 비롯한 각종 양면가공석기 (biface)로 이런 석기는 약 150만 년 가까이 호모에렉투스와 초기 호모사 피엔스집단이 사용한도구로 보이며, 석기제작에는 돌보다 강도가 약한 나 무 사슴뿔 등을 사용해서 원석을 때리는 방법과 간접타법을 응용해 보다 정제된 형태의 석기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호모에렉투스란(똑바로 선사람)뜻으로 원인에게 직립인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500~200만 년 전 직립보행 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화석이 먼 저 발견됐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때부터 불을 사용해 원인들은 추운 혹한기가 발생되는 온대지방까지 분포할 수 있게 됐다고 추정하는 것이며 오랜 기간 생각하는 생활을 하므로 두개골용량은 850~1200ml로 커지고 주먹도끼(손도끼)라고 불리는 돌망치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석기시대 중기인 약 20만~35,000년 전에는 구인( 舊 人 )(호모사피엔스) 이 나타나 생활한 흔적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되는데 이들은 몸에 동물의 가 죽을 걸치거나 지붕과 옆면을 막고 움집을 지어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할 줄 알았고 불을 자유롭게 사용하므로 추운지역까지 삶의 범위를 넓힐 수 있었 으며 머리도 커져 뇌의 용량이 1200~1600CC까지 발달해 현생인류(신 느낌 3
인)와 비슷했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생활상은 시체를 매장하거나 시체에 채색을 하기도 하고 동굴에 거 주했으며 석기제작 등의 기술이 발달되면서 박편석기(원석을 보다 정교하게 만든 석기)인 돌칼, 돌송곳, 돌창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1859년 독일의 네안데르탈에서 발견된 화석은 지명의 이름을 따 네안데르 탈인이라고 부르는데 이때의 인류를 호모사피엔스의 일종(혹은 아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3만 년 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인류를 신인( 新 人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이라 칭하며 상동인, 그리말디인(Grimaldiman), 크로마뇽 인(Cro~Magnon man)등 화석인류와 현대인을 통 털어 부르는 명칭 으로 공식학명은 현대인의 학명과 똑같이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라고 부릅니다. 1868년 프랑스남부 크로마뇽지방에서 화석으로 발견된(크로마뇽 인)은 오늘날 북부유럽인과 외모, 두뇌의 크기가 비슷해 뇌 크기는 1500~1600CC 정도며 타제석기를 사용했고 골각기(작살), 활과 창 등을 사용했던 기록들이 라스코동굴에 벽화로 남아 있어 이때의 생활상 그리고 주술적의식과 예술적 감각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인류의 조상이라며 아래에 적시한 종들이 600~700만 년 전부 터 있었다는 학설이 계속 나오고 있으나 그만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Sahelanthropus tchadensis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 700만 ~600만년 전) Orrorin tugenensis (오로린 튜게넨시스, 600만~580만년 전) Ardipithecus ramidus (아르디피데쿠스 라미두스, 440만년 전) Australopithecus anamensis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나멘시스, 420 만~390만년 전) Australopithecus afarensis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380 만~300만년 전) Kenyanthropus platyops (케냔트로푸스 플라티옵스, 400만년 전) Australopithecus africanus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300만~250만년 전) Australopithecus garhi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가르히, 250만년 전) (파란트로푸스 속으로 분류되는 3종이 있다고 함. 270만~120만년 전) 느낌 4
Homo habilis (호모 하빌리스, 240만~170만년 전) Homo georgicus (190만~180만년 전) Homo erectus (호모 에렉투스, 180만~10만년 전) Homo ergaster (호모 에르가스터) Homo antecessor (호모 안테세소르) Homo heidelbergensis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하이델베르크인), 60 만~20만 년 전) Homo neanderthalensis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네안데르탈인), 20~3만 년 전) Homo floresiensis (호모 플로레시엔시스, 2만~1만 년 전) Homo sapiens (호모 사피엔스, 20만~현재) 느낌 5
초기의 생활상 문명사학자들은 대체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 시대까지를 모계중심사회로 분류하고 인류가 무리지어 생활하면서 초기농경사회를 이루었고 청동기시 대가 되면서 부계중심사회로 바뀌고 그 후 고대부족국가로 발전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초기 원 인류는 야생에서 생활하면서 눈ㆍ비를 피 하고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동굴에서 거주했고 먹을 것을 찾아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며 사냥도 하고 열매를 채집해야 했기 때문 에 따뜻한 기후로 변화되는 곳을 따라 이동하며 살았다고 봅니다. 누구에게 통제당하거나 간섭받지 않고 자연에서 자유롭게 동물들을 사냥 하고 열매를 채집하며 살던 원 인류들은 나무막대기를 창처럼 찌르거나 몽 둥이처럼 휘두르고 주먹돌을 가지고 사냥하면서 손의 쓰임새가 늘어나 손이 점점 더 자연스럽고 정교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화산폭발과 번개, 그리고 나무들이 바람에 부대끼면서 수백만 년 동안 수많은 화재가 발생했다는 사실들은 유추할 수 있고 불에 타죽은 동물 들의 시체를 먹고 맛있다는 사실을 안 원 인류는 불을 사용하면서 음식을 익혀 먹기 시작했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초기에는 자연발화로 발생된 불을 사용했을 것이나 돌을 무기나 칼로 사용 하기 위해 깨다 불통이 튀어 마른풀잎에 불이 붙기도 했을 것이며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부대끼는 소리를 관찰하다 나무는 마찰에 의해 불이 붙는 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싯돌과 나무를 비벼 불을 붙이면서 불을 다루게 됐다 고 보는 것입니다. 원 인류가 불을 사용하면서 부터 사나운 맹수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어두운 밤에도 생활할 수 있어 활동하는 시간이 늘어났을 것이며 빙하기와 혹한기의 추운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리라 봅 니다. 불은 사용해 음식물을 익혀 먹게 된 원 인류들은 음식을 담아 익히는 그릇 이 필요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단순하게 흙으로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을 것이며 지금도 아프리카 일부 부족들이 사용하듯 돌을 불에 집어넣고 뜨겁게 달궈서 달궈진 돌과 음식을 땅에 묻어 익히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생활을 반복하면서 흙에 특정 물질을 섞어 불에 오래 두면 단단해 진 느낌 6
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흙으로 빚어 불에 구운 그릇(도기)을 사용하기 시작했 을 것이며 돌을 불에 올리거나 받쳤다 달궈진 돌이 녹으며 흘려내려 반짝이 는 현상을 발견하고 반짝이는 물질인 금과 은을 추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 정을 통해 청동기와 철기도 발견하게 됐다고 추정합니다. 금이나 은은 녹는 온도가 약해 빨리 발견됐지만 청동과 철기는 녹는 온도 가 높을 뿐 아니라 연금술이 발달돼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흘러 발견됐을 것이고 비교적 낮은 온도에 녹는 은과 금이 먼저 발견됐을 것입니다. 구석기시대에는 날카로운 돌을 주워 사냥한 동물들의 껍질을 벗기며 생활 했을 것이고 날카로운 돌이 없으면 돌을 부딪쳐 깨트려 날카로운 면을 만들 어 사용했는데 큰 몸돌에 충격을 가해 날카롭게 떼어내 사용한 시기를 뗀 석기시대라 부릅니다. 당시를 모계사회라고 하는데 욕정이 발동한 수컷들은 암컷을 보면 교접(섹 스)을 가졌을 것이며 교접 후 수컷은 떠나고 또 다른 수컷들을 만나면 또 교 접을 가질 수밖에 없는 암컷들의 생활이 반복되면서 잉태를 한 암컷들은 홀 로 아이를 낳고 키워야했을 것입니다. 자연에서 먹을거리를 사냥하거나 채취하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수백 만 년 동안 하며 살았기 때문에 난교( 亂 攪 )로 태어난 아이들은 부계가 누군 지 알 수 없고 단지 자신을 낳고 키워준 모계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자 연스럽게 모계사회를 형성했다고 판단합니다. 동물 세계를 보면 하이에나는 암컷의 몸집이 더 크고 강해 무리를 이끌고 있으며 수컷들은 홀로 사냥할 수 있도록 성장하면 무리에서 추방하거나 암 컷에게 복종하며 살아가기도 하고 사자의 생활을 보면 암컷들이 사냥을 하 고 새끼수컷들이 사냥할 수 있게 성장하면 무리에서 추방당해 자유롭게 떠 돌이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들소나 사슴 등 여타 동물들의 생활도 힘센 수컷이 우두머리로 무리속의 모든 암컷들과 번식할 수 있는 교접권한을 가지며 생활은 평 동물이나 귀족 동물이라는 구분 없이 우두머리를 이긴 수컷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고 우 두머리가 되면 자기 유전자를 퍼트리는 교접을 위해 암컷들이 양육하는 새 끼들을 물어죽이기도 합니다. 느낌 7
집단생활의 시작 백 만년 이상 이어졌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과 같은 생활은 신분이나 계급이 있어 엄격히 통제하고 지시하는 복종적 형태는 없었고 사나운 맹수 에 대항해 집단을 지키고 먹을거리를 채취하거나 사냥하기 위해 공동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상호도모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자유롭게 생활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신분이나 계급제도가 없으니 우두머리만 힘을 과시했을 것이고 후손이란 종족보전과 동시에 사냥하는 힘의 원천이므로 집단이나 무리가 모두 협심하 여 함께 공동으로 양육했을 것이라는 것은 추론 가능하며 이렇게 수백만 년 동안 종족번식과 보전을 위해 살았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모계사회의 흔적들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히말 라야산맥 끝자락 중국 사천 성 서부지방의 대소금천지역의 강 하류에 위치 한 여왕 곡으로 이곳은 빙하가 밀려오면서 만든 협곡이 워낙 험준해 외부와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다부일처( 多 夫 一 妻 )제의 모계사회를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부일처 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남성들이 여성들 보다 월등하게 많이 태어나는 현상이 있어 성비( 性 比 )가 맞지 않고 남성의 수효가 많기 때문에 일부일처제를 하면 결혼하지 못하는 남성이 많이 생겨 분쟁이 끊임없을 것이라는 명분도 한몫 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는 남자가 결혼하려면 여성의 부모에게 지참금을 지급하고 얼마든 지 부인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남자는 결혼지참금을 지급한 이후부터는 일 을 하지 않고 놀아야 하며 남자가 돈을 벌면 돈을 벌어 후처를 얻으려고 한 다며 부인에게 폭행당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집단이 생계를 책임지지 않는 무리에서 생활해온 여성이나 남성이 여성을 폭행할 수 있고 죽임까지 행사할 수 있는 가부장적 집단 또는 무리에서 살 아 온 여성일수록 정조( 貞 操 )관념이 강해져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을 스스로 제한하며 억압된 생활을 합니다. 무리나 집단이 생계를 책임지며 많은 지식을 습득한 지역여성들은 가족주의 에 갇히지 않고 처녀( 處 女 )를 버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자유롭고 개 방적인 생활을 하지만 많은 지식을 습득하지 못했거나 억압된 틀에서 성장한 여성들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정과 욕망을 억누르며 가족을 중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느낌 8
이런 현상은 집단이나 무리가 생계를 책임지지 않고 남성이 물질을 가져와 야 살아갈 수 있는 가부장적 환경에 길들려졌으며 결혼은 운명이라는 거짓 에 세뇌됐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폭력도 참아야 하고 아이는 늙었을 때 생 계를 보장해주는 보험이라고 판단해 제도와 체제에 순응하며 스스로를 억압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와 이스라엘도 모계중심사회를 구성하고 있는데 유럽의 많은 국가들 중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농경을 중심으로 구성됐던 부족들은 사냥을 하며 살았던 부족보다 농사를 짓거나 열매를 채취하는 등 노동을 하는 일손(노동 력)을 많이 생산하는 여성을 우대할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ㆍ식물은 영양분을 섭취해야 살 수 있는데 인류 는 영양분을 먹을거리로 충당하고 먹을거리는 동물을 사냥하거나 물고기를 잡고 아니면 자연에서 채취 또는 수확한 곡물로 유지됩니다. 힘센 남성들은 주로 사냥을 했겠지만 실패할 확률도 높아 안정적이지 못한 데 비해 수태기간 때문에 육체적 활동이 부자유스러운 여성들이 덜 위험스 러운 자연에서 과실과 곡식을 채집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거나 열매를 거둬들이려면 일손이 많이 필요할 수밖에 없고 따라 서 일손을 생산할 수 있는 여성이 당연히 우선되는 것이며 특히 아이를 많 이 생산하는 여성을 우대하며 자연스럽게 모계사회를 구성했다고 보고 있습 니다. 초기 원 인류는 모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무리가 공동으로 사냥 하기 위해 사냥을 가자거나 어디에 사냥감이 있다거나 어느 방향으로 달아 나고 있으니 포위하라거나 하는 무리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의 표현 은 필수적으로 필요했을 것으로 봅니다. 먹을거리인 동물을 사냥하기 위한 신호를 주고받는 생활을 수 백 만년 동 안하며 서로 알아들을 수 있으며 의사가 소통되고 표현할 수 있는 공동의 언어가 발달하게 됐다고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아주 오랜 선사시대 때 원 인류들이 살아가던 동굴에서 벽화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런 동굴벽화들은 의사와 발성을 통일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육목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었을까를 판단해 봐야 할 것입니다. 원 인류들이 후손에게 삶의 기록을 남기려 벽화를 그리지는 안았을 것이고 벽화를 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같은 의미로 표현하고 같은 소리를 내기 느낌 9
위해 동물과 물고기그림을 그리고 사냥하는 모습을 그리며 어려서 부터 같 은 의미와 표현으로 이해하도록 훈련했을 것이라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래밭이나 땅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겠지만 땅이나 모래위에 그 린 그림들은 바람이나 비등 자연현상에 의해 지워져 버리므로 지워지지 않 게 하기위해 암벽이나 동굴에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는 사실은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원 인류들은 열매가 많이 열리는 곳을 찾아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채취했 던 열매가 넘쳐 버리고 가는 일을 반복하다 이듬해 가니 새로운 나무나 풀 에서 열매가 맺혀있는 것도 발견하고 생포했던 동물들이 새끼를 낳아 번식 한 것을 보면서 부터 정착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생활을 시작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농사와 목축으로 안전하게 먹을거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된 원 인류들은 정 착해 생활하면서 집단을 이루기 시작했을 것이며 처음에는 모계로부터 내려 오는 모계혈통의 사람들끼리 모여 집단을 이뤘을 것이라고 합니다. 집단이 무리를 이루며 공동생활을 시작했지만 아이들 중 장성한 수컷들은 사냥을 할 수 있게 성장하면 무리에서 벗어나 다른 수컷들처럼 자연에서 자 유롭게 사냥하며 살아가는 환경을 유지했다고 판단됩니다. 사냥이란 항상 성공할 수 없어 무리를 짓는 것이 사냥을 하거나 생존하는 데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원 인류의 수컷들도 무리를 짓기 시작했을 것이며 영역다툼과 사냥감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도 수없이 많이 했을 것입 니다. 무리를 짓고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진 원 인류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 아 닌 다른 무리들의 집단을 발견하기도 했을 것이며 발정 난 수컷들은 암컷들 과 교접하기 위해 어린 수컷들을 살해하고 먹을 것을 강탈하기도 했으리라 보고 있습니다. 또한 암컷이 없는 수컷 무리들끼리 싸우면 포로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힘 이 약한 무리의 수컷들은 모두 살해했을 것이며 더러는 식육으로 먹기도 하 는 식인생활도 했을 것으로 봅니다. 바다와 강가에 위치한 원 인류들은 조개나 물고기종류를 채취하며 살았을 것이고, 밀림이나 산악지역에서는 사냥이나 열매와 식물을 채취하고, 초원 지역은 사냥과 야생 조나 수수 같은 것을 채취하는 것이 생존방식이었기 때 느낌 10
문에 거주하던 지역적 환경에 따라 사냥과 채취, 수렵하는 방법들이 다양하 고 서로 다르게 발달한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원시시대 때 생활했던 유적이 발굴된 장소에는 옷이나 움집을 꿰매기 위해 고기의 뼈에 나무껍질을 가늘게 찢어 묶어 사용했던 흔적들이 있으며 물고 기를 잡기 위해 사용했던 그물추와 조개껍질이 쌓여 있는 것도 발견되는 것 을 보면 원 인류는 아주 오랜 세월동안 물고기를 수렵했던 것으로 보입니 다.(오이도 패총( 貝 塚 ):경기도 시흥 오이도에 있으며 선사시대 때 채취해 먹 은 조개껍데기가 쌓여 이루어진 퇴적층 유적.) 원시시대는 바닷가나 강가에서 오랫동안 생활했으며 석기시대의 조개더미 [ 貝 塚 ]에서 돌 동물의 뼈, 뿔 조개껍데기 등으로 만든 낚시 창 작살 등 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면 어업은 인류역사와 더불어 발전해 왔고 기원전 3,500년(5,500년 전)경 이집트에서는 칡덩굴ㆍ짚 등에 무거운 돌을 묶 어 그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당시 생활했던 유적들은 현재까지 발굴된 사실로 확인하고 있음) 원 인류는 손놀림이 상당히 발달하고 미세한 물건도 잡을 수 있게 발전하 면서 근대에 와서 삼ㆍ무명실로 그물을 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 로 작은 그물추에 가는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발견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알라스카에서 발굴된 배 조각을 방사선으로 탄소 측정한 결과 약 25,000 년 전 배의 조각으로 판명되므로 인류는 오랜 기간 동안 물고기를 잡아 생 활했다고 유추하는 것이며 초기의 배는 뗏목을 이용한 통나무배와 카누모양 의 배들이 인류가 최초로 사용했던 배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돌자구나 돌 낫등 유물의 발견) 한반도나 외국에서 발굴되는 유적을 보면 6,000년 전부터 인류는 흙으로 빗은 토기를 사용한 흔적이 있으며 토기를 사용해 음식을 담기도 하고 끓이 기도 하는 생활을 하면서 오래 동안 불에 구워진 토기는 단단한 옹기가 된 다는 사실도 발견했을 것입니다.(부산 동삼동 유적 6,000년 전 빗살무늬 토기를 제작해 사용한 흔적) 느낌 11
원시종교의 출현 자연현상을 이해할 수 없는 원 인류들은 잦은 화산폭발과 지진, 비바람과 천둥번개 그리고 겨울에 내리는 눈에 의해 수많은 희생을 당하면서 분석을 못해 자연현상을 일으키는 무엇인가 힘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생존할 수 있 는 것이 자연덕분이라고 판단해 숭배하는 마음으로 신을 만들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계절을 이해하지 못하는 원 인류들은 사냥을 떠났다 갑자기 하늘에서 앞을 분간할 수 없도록 폭우가 쏟아지거나 번개가 치면서 수십억 년 동안 성장한 숲속이 불타는 현상들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으니 두려움을 가졌을 것이며 겨울이 닥쳐 엄동설한의 추위와 눈보라가 내리는 현상도 이해할 수 없었다 고 봅니다. 그래서 하늘과 태양, 달, 별 등을 보고 빌었을 것이며 바다를 보고도 빌고 동물사냥으로 먹고 사는 종족은 힘센 동물들에게도 빌었을 것이고 채집으로 먹고 사는 종족들은 꽃과 나무에도 빌며 신을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주술사들은 사냥 중 부상을 당하거나 자연재해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치 료하기 위해 야생동물들 같이 온천에 몸을 담그게 하거나 항생제 성분이 있 는 오미자 같은 것을 돌로 찌어 바르거나 삶아서 사용했을 것이며 이런 경 험들이 지금까지 전해져 민간요법과 한의학이 됐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자연을 신으로 받들어 우상화하던 현상들은 세계 곳곳에 남아있는데 태양 신을 섬기고 바다용왕을 섬긴다거나 하는 행위들은 원시시대 종교에서 부터 비롯된 신앙들이 현재(현재도 무당이나 목사들이 안수기도로 치료한다며 몽 둥이로 환자를 때리거나 굶겨죽이는 곳도 있음)까지 이어지는 원시종교였다 고 봅니다. 사냥을 나가지 않아 자연을 살필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한 주술사들은 획득 한 사냥감을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먼저 제를 지내야 한다며 안정적으 로 먹을 것을 획득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 는 제사장이라는 위치도 만들었다고 판단됩니다. 느낌 12
농경의 시작 인류는 약 1만 년 전 신석기시대 말기에 이르러(지역적으로 차이가 있음) 비로소 식량을 인간의 손으로 직접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구석기시대에 보리를 재배했던 흔적으로는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나오 는 유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1만~1만 2천 년 전 원시민족인 호서인( 湖 棲 人 )의 유적에도 인류가 작물을 주식으로 섭취한 증거들이 나타나는 사실로 추정합니다. 신석기시대인 6,000~7,000(기원전 5,000~4,000년전)년경에 는 밀 보리 조 아마 등의 작물을 재배했으며 중국에는 4,700 (기원전 2,700년경)년전인 신농시대( 神 農 時 代 )에 이미 5곡을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원시농업의 발상지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8,000년(기원전 6,000년경)전 티그리스 및 유프라테스 강 연안에서 최초로 시작된 농업이 전 세계로 전파됐다는 것이 하나 있으며, 동남아시아와 중국의 웨이허평원 [ 渭 河 平 原 ], 티그리스 및 유프라테스 강 연안, 인더스 강 연안, 나일 강 연 안, 남부멕시코, 남아메리카 등 7개 지역이 고대부터 발달된 농업을 이루었 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처음엔 팔레스티나 시리아 북메소포타미아에서 이란고원 일부까지 걸친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 를 중심으로 하는 서 남아시아 가 급격히 건조하자 사막의 오아시스에 인간과 동물이 모여들어 공존하면서 야생식물인 보리와 밀을 재배하고 야생하던 산양 염소 소 등 유제류( 有 蹄 類 ) 동물을 가축화했다고 생각했지만 농경문화의 시작은 사막지방이 아니라 산록지대였음이 밝혀지면서 농경 목축이 산악지대에서 발전했다고 보는 것 입니다. 근동지방에서 시작된 코카서 로이드(Cocasuloid)계 인종의 맥류재배를 주체로 한 농경문화와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된 몽골로이드(Mongoloid)계가 맥류( 薯 類 ) 중심 농업을 이룬 농경문화, 서 아프리카의 니제르(Niger)강 상 류에서 시작된 니그로이드(Negroid)계 인종의 농경문화, 인디언계 인종의 서류와 잡곡을 중심으로 하는 신대륙에 기원한 농경문화 등 4개 지역이 제 시되기도 합니다. 4개 농경문화 발상지에 대해 살펴보면, 첫째, 지중해 농경문화로 8,000 년(기원전 6,000년경)전 티그리스 및 유프라테스 강 연안에서 시작해 지 느낌 13
중해 연안으로부터 파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은 맥류 유채 완두 잠두 순 무 등을 주로 재배했으며 소 면양 산양 말 등을 가축화해 농사와 목축을 겸한 혼합농업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발견된 유적을 연구한 발표에 의하면 중근동( 中 近 東 )의 티그리스 및 유프라테스 강 유역으로부터 이란 고원과 서 아시아 및 아프리카 북부 를 포함하는 이란 이라크 시리아의 경계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 9,000년(기원전 7,000년경)전부터 비슷한 시기에 농경과 목축을 시작했 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둘째는 동남아시아 기원의 근재농경문화( 根 栽 農 耕 文 化 )로 바나나 얌 (yarm) 타로(Taro) 사탕수수 등 영양번식작물이 초기재배의 주종이었고 돼지나 닭 등의 가축도 사육했으며 바나나는 5,000년(기원전 3,000년 경)전 말레이시아에서 재배했다고 합니다. 셋째는 아프리카에서 아시아에 걸쳐 사바나(Savannah)를 잇는 지대에서 발생한 사바나 농경문화로 7,000~5,000년(기원전 5,000~3,000년 경)전부터 피 기장 조 수수 등 잡곡류와 두류 참깨 등을 재배했다는 주 장입니다. 넷째는 신대륙 중남미로 카리브 해 연안에서 는 카사바(cassava)를 멕시 코에서는 고구마, 그리고 안데스산맥의 높은 지대에서는 감자를 재배하기 시작했으며 옥수수 두류 호박 등도 재배했다는 것입니다. 근동지방에서 농사를 짓게 되면서부터 부족으로 발전했으며 도시가 들어 서게 된 것은 10,000년(기원전 8,000년경)전에서 4,000년(기원전 2,000년경)전까지의 사이에 이루어 진 것으로 유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근동(아나톨리아와 레반트, 메소포타미아 등 유럽과 가까운 서 아 시아)지방이 발달하면서 서구문명이 시작하게 됐다고 보므로 근동지방이 현 재 문명발전의 최초지역이라고 보는 것이며 초기문명의 1차 지역(pristine region)은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 중남미, 중앙안데스지역이라고 합니 다. 농경의 시작은 버리고 간 곡식들이 자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 식물을 재배 하게 된 근원으로 보고 있으며 계획적으로 씨앗을 뿌려 재배하기 시작한 초 기농경은 피를 비롯한 몇 가지 밭곡식을 재배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초기농경 단계에서도 남자는 여전히 농사보다는 위험하고 힘든 사냥으로 느낌 14
살았을 것으로 판단되며 여자(출산ㆍ양육 때문에 사냥을 할 수 없으며 어린 자식을 데리고 식물을 채집, 재배하는 생활의 시작)들이 사냥보다 쉽고 안전 하게 먹을거리를 확보할 수 있어 농경생활을 시작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냥으로 획득할 수 있는 먹을거리는 위험하고 불규칙적이라 불안정하지만 씨앗을 뿌리고 수확기가 되면 몇 배의 먹을거리를 확보하면서 농업이 점점 발전하고 밭을 갈아 씨를 뿌리는 갈이농사로 발전하자 힘센 남자가 필요하 므로 남자와 여자가 함께 농업에 종사하는 부계사회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 가 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원시시대에는 나무와 짐승의 뼈 또는 돌도끼로 나무를 베어야 하고 뿌리를 뽑고 잡초와 돌을 없애 땅을 고르고 흙을 부드럽게 해야 하는 힘든 노동을 통해 밭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무리가 집단으로 정착하며 공동으로 생활하므로 사냥을 한 짐승이나 농경 으로 채취한 수확물은 개인이나 모계가족 소유가 아닌 공동체 무리를 위한 공동의 수확물로 인식했으며 사냥은 먼저 공격해 위험하고 힘들게 사냥을 성공하거나 농사에서 힘든 일을 맡은 사람이 조금 더 분배받도록 했을 것이 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산짐승을 울타리에 가뒀는데 울타리에 가둔 짐승들이 해가 바뀌면서 새끼를 낳고 먹이에 길들여져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을 보며 가축을 사육하기 시작해 가축만 전문으로 키우는 유목집단이 나타났고 유목 집단생활이 최초로 공동체와 공동체사이에 분업을 발생시켰다는 것입니다. 사냥과 채취ㆍ수렵은 공동체 생활에서 힘센 수컷과 임신으로 사냥할 수 없 는 암컷간의 성별 분업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으며, 집단으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생활이 정착되면서 힘들게 농사짓지 않고 가축을 키우며 살 아가는 유목생활을 하던 유목민들은 농경을 이룬 공동체를 만나면 필요한 곡식과 고기를 교환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유목생활을 하는 무리들은 초지가 풍부한 지역을 떠돌며 가축을 길렀기 때 문에 고기는 풍부했으나 곡식과 양념들이 부족하므로 농사를 짓고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는 무리가 있는 곳에 도착하면 가축과 곡식을 바꾸는 방식으 로 먹을거리를 획득할 수밖에 없는 생활을 했으므로 물물교환을 발생시켰다 는 것입니다. 농경사회 초기에는 삼림을 불태워 경작하는 화전 농업부터 시작했다가 점 차적으로 동물의 사육(목축)과 식물재배(농경)로 발전했다는 것이며 이로 인 느낌 15
해 수렵채취시대에는 부족했던 식량을 대량으로 수확하게 되면서 안전한 먹 을거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된 원 인류는 인구를 증가시키며 노동력도 확보했 다고 봅니다. 삼림을 불태워 경작하는 농경방법은 지력을 감퇴시켜 매년 수확이 감소되 고 수년 후에는 같은 식물이 자라지 않으므로 이동하게 됐으며, 그래서 화 전( 火 田 )농업을 일명 shiftingcul tivation(이동경작)이라 부르고 약탈농 업이라 부르는 것은 토지의 영양분을 약탈한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서양은 소규모 무리가 집단을 이룬 초기에 양을 사육하며 생활했다고 보 며 가축을 먹이기 위해 좋은 목초를 찾아다니는 유랑농업( 流 浪 農 業 )을 하면 서 토지가 있으면 농작물의 종자를 파종하고 길을 떠났다 파종한 농작물을 수확할 무렵 돌아와 작물을 획득하는 생활을 하고 지력이 소모되면 경작 장 소를 옮기는 농사를 지었다는 주장입니다.(양이 인류최초로 사육한 가축이라 함) 인구가 늘면서 유랑농업을 할 수 있는 토지가 불충분해지자 정착의 필요성 이 생겨 정착하는 약탈농업이 시작됐고 한곳에서 여러 해 같은 작물을 심 으면 수확이 안 되기 때문에 지력의 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토지의 일부분을 돌려가며 농사를 짓는 삼포식( 三 圃 式 ) 농법이 발달하자 생산량이 증가해 개 인이 먹는 것 이상의 먹을거리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밭농사는 자연으로부터 오는 빗물로도 재배가 가능하나 벼농사 같이 물이 많이 소요되는 농사들은 수량이 풍부하고 넓은 평야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인류는 강가에서 살기 시작했으며 많은 집단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무리의 단위를 형성하게 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무리끼리 부락을 형성해 공동으로 노동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면서 집단공동 체를 이루어 모두가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먹을 것이 풍부해 수 천 년 동안 계급과 빈부 격차가 없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평화롭게 살았을 것입니다. 모계사회에서 함께 수 백 만년 동안 생활하던 습관대로 모든 일은 무리끼 리 모여 공동으로 논의하고 홍수로 피해를 입거나 사냥으로 부상을 입어 먹 을 것이 부족한 무리와는 서로 나눠 먹으며 홍수에 대처하기 위해 물길을 막는 제방을 쌓는 등 집단이 함께 노동하는 공동체생활을 수천 년 동안 유 지했다고 봅니다. 세계의 4대 문명(중국황하 강,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인더스 강, 나일 강)은 큰 강 유역에서 발달했고 당시 자연환경은 오늘날보다는 습윤( 濕 潤 ) 느낌 16
했으며, 매년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는 일들이 많이 발생하므로 강의 범람시 기를 알기 위해 하늘을 살피다 천문학에 의한 태양력이 발달하고 이때 강이 범람했던 기록을 성경에서 노아의 방주로 표현했다고 판단됩니다. 당시에 농사를 지었던 지역은 크게 3곳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중동중심 (neareast center 이란ㆍ이락ㆍ시리아ㆍ터키)지방은 1만 년전 밀을 재 배한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며, 중남미 중심지역에는(central/south America center 옥수수, 고추, squah, bean, guards)흔적이 있고, 멕시코 고원지대와 페루의 고원지대에는 옥수수, 고추, 감자 등을 재배했으 며, 극동중심(fareast center 벼, peas, bean)지역에는 주로 벼 같은 논(습지)에서 자라는 작물을 재배한 흔적들이 발견된 유적으로 확인되고 있 으나 습지는 유기물분해로 인해 고고학적으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 니다. 근동지방은 북쪽으로는 구릉과 산맥 그리고 남쪽으로는 반 건조지역과 사 막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어 지리적으로 매우 다양하며 식물군(식생, 植 生 ) 이 분포돼 있는 것을 분석하면 환경지대를 8개소로 나눌 수 있는데 해안평 야(coastalplains),충적평야(alluvial plains),산록지대(piedmont), 반 건조고원지대(semiarid highland),구릉과 계곡(foothills and intermont anevalleys),산악지대(mountain ranges),저지대 (depressions), 그리고 사막(deserts)으로 나눈다고 합니다. 느낌 17
문명의 발달 집단농경사회를 이룬 초기에도 모계사회를 유지했을 것이며 자연에서 자유 롭게 사냥으로 생활하던 수컷 무리들은 모계로 형성된 부락에 가면 항상 식 량이 풍부하고 암컷들과 교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침략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인명을 살상하는 총 같은 것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힘이 센 자가 폭력을 행사해 먹을 것을 빼앗고 여자를 겁간하는 생활이 수 없이 많 은 세월동안 되풀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없는 침략과 약탈로 피해를 입은 무리는 자신들이 고생해서 생산한 물질 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집단을 이루어 함께 대항하려고 힘을 길러 무력으로 자신들이 생산한 먹을거리와 생활터전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부락을 침략해 타인을 학살하고 약탈을 일삼으며 집단을 정복한 무리들은 지배자가 돼 정착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이렇게 무력으로 학살과 약탈을 일 삼던 침략무리들이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 권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수컷들의 침략에 식량을 빼앗기던 암컷들은 힘이 필요하다 고 느끼고 정복자가 된 수컷들 중에 힘이 센 수컷의 씨를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고 이런 과정들이 부계사회를 만드는 동기가 됐을 것으로 추 정됩니다.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힘이 센 아이도 태어났을 것이고 힘이 센 아이 들이 성장해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부족을 장악하고 힘을 과시하므로 폭력이 횡횡하는 부족사회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성이나 양심은 없고 오직 힘이 센 자가 무리를 억압하고 복종시키는 환 경이 오랜 기간 반복되면서 서열이라는 것이 만들어졌을 것이고 서열이 높 은 자의 아이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비호를 받으며 안하무인으로 성장했다고 봅니다. 노동을 하지 않고 무력으로 무리를 복종시키고 군림하는 힘과 싸움기술만 배우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부모보다 더 억압적이고 폭력적 인 잔인한 성격을 갖게 됐을 것이고 힘만이 절대 권력이었다고 보는 것입니 다.(지금은 돈이 힘이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의 성장환경과 비교가 능) 타인의 간섭이나 지시ㆍ통제를 받지 않고 자연에서 자신이 노력한 만큼 수 느낌 18
확하며 자유롭게 생활하던 사람들을 침략자들이 학살하고 포획해 강제노동 을 시키며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면서 노예로 만들고 저항정신을 말살시 켜 순종하도록 길들이기 위해 제도와 법률을 만들었습니다. 처음 제도와 법률을 만들었을 때는 피지배계급들이 반발하며 저항했을 것 이나 세월이 흐르면서 지배계급이 지속적으로 강조해 세뇌되고 체제에서 법 률을 집행하며 먹고살도록 길들여진 무리(관료)들이 권위를 내세우며 자신들 의 생존을 이어가는 수단으로 삼아 대중을 강제로 억압하면서 제도로 정착 되는 것입니다. 많은 무리를 침략해 집단생활이 시작되면서 사냥을 하던 때 언어보다는 뜻 이 전달되고 의미를 이해하는 공통 언어가 필요했으며 무리가 같은 의미와 뜻으로 해석하는 언어가 발달하면서 인류의 실생활에 엄청난 발전을 가져오 는 동기가 됐습니다. 남겨진 기록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문자는 5,000년(기원전 3,000년경) 전을 전후해 사용했다고 전해지는데 고대인들은 음성언어를 사용하고 있어 서 소리가 들릴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만 소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권력을 쥔 무리들이 명령을 하달하기 위해 멀리 있는 사람에게도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은 없을까 궁리하면서 그림이나 매듭을 이용해 어떤 사물이나 의사를 전달하던 것이 사람들 사이에 일정한 약속이 되면서 문자로 발전했 다는 것입니다. 문자나 공식적인 기호는 집단의 생각이나 느낌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상징적인 체계가 있어야 하고 여러 사람들 사이에 서로 합의돼야 하므로 수 백 만년 동안 기호나 그림 또는 선화 등을 통해 간단히 소통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기록하고 보전할 수 있는 문자가 생기므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 오 게 됩니다. 문자의 기원으로는 이집트의 상형문자(Hieroglyph)와 중국의 갑골문자 ( 甲 骨 文 字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Cuneiform script)를 들 수 있는데 초기 형태 문자들은 모두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며 7,000 년(기원전 5000년경)전 구석기 중기의 유적에 돌이나 뼈에 규칙적인 간격 을 두고 새긴 조각에서 문자의 기원을 찾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자들이 점차 발전해 3,000년(기원전 1,000년경)전에는 선사인 류문명이 사용하던 그림문자 흔적이 발견된 것이며 초기의 그림문자는 단지 기억을 보조해 주는 수단에 불과했지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사용된 것 은 인류문명이 크게 발달한 중국,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마야 등의 문자라 느낌 19
고 합니다. 약 3,500년 전 무렵에 그림문자를 더 간결하게 생략해서 만든 상형문자 가 이집트유적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시기별로 히에로글리프문자, 히에 라티크문자, 데모티크문자, 멜로에문자로 나누고 있습니다. 히에로글리프문자의 명칭은 성스럽게 조각한 문자라는 뜻에서 성각문자( 聖 刻 文 字 )라고도 하며 히에로글리프문자는 처음에 표의문자로 탄생해 표음문 자로 발전하면서 오늘날 이집트알파벳 24자가 됐다는 것입니다. 현대문자의 시작은 표의문자와 표음문자가 모여 단어와 단문이 됐다 발전 하며 문장을 나타내게 됐으며 히에라티크문자는 이집트성각문자의 약자라고 할 수 있는 히에로글리프문자로 보고 있으며 4,650년(기원전 2,650년경) 전부터 시작해 3,000년(기원전 1,000년경)전까지 사용했다고 봅니다. 2,700년(기원전 700년경)전부터 1,600년(기원후 400년경)전 까지 사 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히에라티크문자를 흘려 쓴 초서체라 할 수 있는 데모 티크문자는 사물( 事 物 )을 그려 그것과 관련 있는 의미를 나타낸 문자라 할 수 있는 상형문자로 중국의 초기한자( 漢 字 )와 고대이집트문자인데 고대 4대 문명을 이룩한 무리들은 모두 독자적인 상형문자를 발전시켰으며 비교적 오 래된 것은 메소포타미아지방의 수메르 또는 엘람인의 문자로 알려져 있습니 다. 처음 발견된 상형문자는 750개정도의 표현을 기본적인 체계로 만들었으 며 오랜 기간 동안 어떤 변형도 겪지 않고 사용됐다는 사실은 마지막 신전 이었던 필레 사원이 폐쇄될 때까지 똑같은 상형문자를 사용한 것에서 확인 되고 있으며 이 문자들의 독창성과 복잡성은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기호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대상이나 사물을 나타내는 그림문자 로 이 문자들을 겹쳐 사용 하면 추상적인 개념도 표현할 수 있는데 풍뎅이나 말똥풍이 또는 태양 같은 상형문자가 그런 것이며, 표의문자나 그림문자의 다른 단어에서 자음근이 생길지라도 표음문자를 변형시켜 간단히 음으로 나타낼 수 있도록 했으며, 둘째는 표음문자 로 같거나 다른 형태의 소리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했으 며 어떤 물체를 묘사하지 않고 하나의 자음이나 보다 더 많은 자음을 나타 낸다는 것으로 표음문자는 표의문자보다 늦게 생겨난 것으로 보며 글자마다 일정한 음가를 가지고 있어 발음을 규칙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고, 셋째는 한정부호 로 문맥 속에 한 기호가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이나 사 느낌 20
물을 지적하는 것인지 알려주는 부호로 많은 고대이집트 단어들은 같은 기 호를 가지고 있었으나 완전히 다른 의미를 표현할 수 있었는데 단어의 의미 를 이해하기 위해 단어의 마지막에 한정사 라고 부르는 것을 사용하면서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중기이집트 또는 고전기 이집트어 는 중 왕국시대의 언어를 가리키는 말로 문법학자들이 주로 연구하는 언어와 이집트 학의 계기가 된 상형문자 도 이 시기에 속해 있으며 유명한[시누혜 이야기]도 중 왕국시대에 쓰여 졌 다고 합니다. 1799년 나폴레옹 군의 한 장교에 의해 나일 강 서쪽델타지역 리시드라는 마을에서 2,200년(기원전 196년)전 열두 살인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즉 위를 축하하기 위해 멤피스에 모인 사제들이 그리스어로 왕을 기리는 칙령 을 만들어 돌에다 새긴 높이 약 117 Cm, 너비 약 74Cm인 로제타석이 발견돼 고대에 사용하던 상용 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그리 스어로 썼지만 민중문자와 상형문자로 된 번역이 함께 새겨져 있다함.) 문자의 발달은 단순한 그림문자인 상형문자에서 설형문자( 楔 形 文 字 쐐기문 자cuneiform script)로 발전하고 설형문자는 그이전의 그림문자와 달리 구체적 사물뿐 아니라 동작이나 추상적인 개념까지 표현할 수 있도록 예를 들면 발( 脚 )이란 단어는 발뿐 아니라 서다와 간다. 또는 온다는 뜻을 갖고 있으며 화살이란 말은 산다( 生 )와 생명 을 함께 표현했다고 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대상이나 목적격개념이 없기 때문에 완벽한 문장이 되지는 못했지만 마귀를 쫓는 주문( 呪 文 )과 집권자들이 권력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 을 신격화하면서 신과 신전을 찬양하는 글, 도시와 도시사이에 벌어진 전쟁 을 서술하기도 하고 사회질서를 위한 칙령이나 법전 등을 만들었으며 대홍 수 이야기 와 길가메시 서사시 우르남무법전 등의 기록을 남길 수 있 었습니다. 수메르의 설형문자는 아카드인으로 이어지고 다시 바빌로니아인, 아시리아 인들에게 전해져 고대오리엔트전역에 퍼지게 됐으며 인도유럽어계통인 히타 이트어와 페르시아어에도 전해져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약 3천 년간 서 아시아 지역의 공용어로 사용했고 알렉산드로스대 왕이 동방을 원정할 때 크게 위축됐다가 약 1,900년(서기 74년)전 완전히 사라졌으나 19세기 중엽 유럽언어학자들에 의해 해독되면서 인류의 과거역 사를 알 수 있게 됐다고 합니다. 기록과 유적을 살펴보면 설형문자는 바빌로니아나 아시리아 등 셈계의 여 느낌 21
러 민족들과 비( 非 )셈계인 후르리 히타이트 페르시아에서도 사용한 기록 이 있으며(마리문서 아마르나문서) 페르시아의 설형문자부터 자획( 字 畵 )이 줄어들고 자수도 37자로 정리됐다가 시리아의 라스 샤므라에서 발견된 우 가리트왕국의 설형문자시대에는 글자가 30자로 줄어 현재의 완전한 알파벳 으로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고대이집트 글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3,300년(기원전 13세 기)전 19왕조 시대에 상형문자로 쓴 (사자( 死 者 )의 서( 書 ) Book of the Dead)라는 글이 있으며 예언이나 마법 또는 의술이나 약전( 藥 典 ) 그리고 요리, 천문, 시간의 측정 등을 다룬 지리에 대한 글들도 기록으로 남아있고 달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만든 달력으로 1년은 365일과 1/4일으로 변화 한다는 사실들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현재 서양에서 사용하고 있는 알파벳의 체계를 이룰 수 있는 표현 중 가 장 오래된 것은 자음만 표기할 수 있게 만들어 사용하던 페니키아인들 문자 로 이것이 그리스로 전해져 자음문자의 몇 가지 글자와 모음문자(α, ε, η, ι, ο)를 만들고 여기에 ν(입실론)과 ω(오메가)를 추가해 24자를 사용하 다 후에 로마인들이 라틴계의 여러 언어로 표기하면서 문자의 기초가 됐으 며 로마시대 라틴문자는 23자였으나 중세에 I에서 J가 분리되고 Y에서 U 와 W가 분화하여 현재의 26자가 됐다고 합니다. 라틴어계통 여러 언어의 대부분은 라틴문자알파벳을 다소 수정하고 보충한 것(이탈리아어는 21자, 에스파냐어는 28자)을 사용하고 있으며, 자형( 字 形 ) 은 중세에 이르러 그전에 사용하던 글자의 대문자에 소문자를 추가했고 16 세기에 인쇄술의 발명과 함께 현재 사용되고 있는 알파벳의 안정된 원형을 갖췄다는 것입니다.(인류역사는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시기를 역사시대라 하 고 기록을 남길 수 없는 시대는 선사시대로 나누고 있으며 선사시대는 다시 구석기시대, 중석기시대, 신석기시대로 나누고 구석기시대는 다시 전기와 중기, 후기로 구분합니다.) 모두가 공동으로 알아듣고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탄생되도록 오랜 세월동 안 인류는 점차적으로 발전했으며 무력으로 부족을 침략하고 권력을 형성한 무리들은 무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자기를 나타낼 방법이 없기 때문에 자신 을 나타내고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전쟁을 일으키므로 타인을 강제로 굴복시 키려고 합니다.(이런 현상은 야생동물의 세계에서 잘 나타나고 있음) 침략자인 부족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힘자랑 하는 자들끼리 싸우는 일 이 비일비재했을 것이기에 무리가 살아가는 공동체는 평화를 잃어버리고 폭 력이 난무하는 혼란을 겪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누구나 부족장의 자리를 지 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모두가 평등하게 논의하는 공동체 구조로 발전했 느낌 22
다고 봅니다. 강요된 전쟁 때문에 죽기도 하고 부상을 당하는 등 피해를 입은 부족민들 이 거부하는 현상도 있었을 것이고 혼자서 무리를 무력으로 강제 복종시키 려다 무리를 지어 반발하는 세력들에 의해 쫓겨나기도 하는 과정을 반복적 으로 겪으면서 서로 논의하는 공동체로 발전했을 것입니다. 당시는 전쟁에 동원된 병사들이 현대의 군인이나 경찰처럼 혈세로 지배자 에게 월급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농사를 짓고 살았기 때문에 침략자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할 의무도 없었고 폭력을 거부하며 반항하는 자들도 있었다고 봐야 하므로 직접적으로 죽이고 죽는 전쟁에서도 명령체계와 복종 이란 있을 수 없었다고 봅니다. 공동체라도 힘이 있는 자들은 전쟁을 하면서 패배한부족의 남자들을 포로 로 삼아 농사일과 침략에 대비한 성을 짓거나 향락과 안락한 생활을 위한 궁전을 짓고 지배자에게 복종하는 사상으로 길들이기 위해 신전을 짓는 노 동에 강제동원하며 혹사했을 것이고 여자들은 전쟁에 참가했던 병사들의 교 접대상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노예시대의 시작 문자가 발달하고 지배권을 가진 자들은 권력을 뺏기지 않기 위해 힘을 과 시하면서 수천 년 동안 이웃부락을 침략해 곡식을 강탈하고 부녀를 강간하 며 남자들을 노예로 삼아 물질을 대신 생산하도록 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부 족 중 지배자들은 노동을 하지 않고 노예의 노동을 착취하며 살기 시작했습 니다. 이때 까지도 가족이란 개념 없이 남자가 여자를 보면 무력으로 제압하고 강제로 성관계를 하며 지냈을 것이나 수천 년 동안 반복되면서 여성들의 저 항 없이 마음대로 성관계를 가지며 여성의 섬세한 노동을 이용할 수 있다고 판단해 가족이라는 제도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힘 있는 자의 필요에 의해 가족제도를 만들었을 것이며 귀족이나 힘이 있 는 남성들은 혼인관계를 따지지 않고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으면 언제든지 느낌 23
마음에 드는 여성과 관계를 맺고 피지배자들만 일부일처제를 지켰다고 보며 이런 일들은 한반도 왕들의 역사에도 확인되고 오늘날 생활 형태로도 나타 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무리나 또는 집단이 종족 번식과 보존을 위해 공동으로 아이들을 양육하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소그룹인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먹는 것을 책임지고 생산하는 씨족 공동체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봅니다. 힘이 약한 부족을 공격하면 언제든지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노예가 생기 기 때문에 도망가지 못하게 울타리에 가둬놓고 강제노동을 시켰으며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모든 먹을 것을 생산하고 주인이 호화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성과 저택을 지었지만 노예는 가축우리에 갇혀 먹는 것까지 제한 당했다고 합니다. 무력으로 침략해 점령한 부족민들을 노예로 부리고 감시ㆍ통제하면서 노예 들이 생산하는 물질로 편안하게 호의호식하고 향락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 자 힘이 생긴 사람들은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힘이 없는 부족 을 침략하게 됐고 이런 침략전쟁은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약탈하거나 방어하려면 집단의 힘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훈련된 병사들을 필요로 했을 것이며 노예들을 잡아 올 수 있는 병사들이 훈련받을 시설은 노예들의 강제노동으로 만들고 지배자가 노예 전부를 관리할 수 없 자 통제하는 사람이 필요해 귀족과 평민이라는 사회적 계급을 형성하게 됐 다고 봅니다. 전쟁을 통해 힘을 과시하고 권력을 만들어 군림하며 편안하게 누릴 수 있 으니 수많은 부족을 침략했을 것이며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많은 노예를 확 보했지만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아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들의 반발이 심해지 자 강제로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규칙이라며 법을 만들기 시작 했을 것입니다. 자유롭게 살던 부족민들이 하루아침에 침략 받아 살해되기도 하고 붙잡혀 와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혹독한 노예노동을 시키니 몰래 도망가기도 했을 것이고 힘이 있는 사람들은 저항하며 내부에서 싸움을 일으키기도 하는 일 들이 수도 없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침략자들은 자연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던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면서 자신들 은 신의 자손인양 우월성을 강조했고 먼저 잡힌 노예와 숙련된 노예는 태어 나면서부터 특별한 능력이 있는 듯이 차별대우하면서 먼저 온 노예가 늦게 느낌 24
온 노예를 멸시하도록 하므로 노예끼리 뭉치지 못하도록 분열시키기 위해 우월성을 조장합니다. 6천 년 전 충적평야 주변에서 노예들을 동원해 소규모 관개농업(인공적으 로 물 관리시설을 만들어 물을 공급 이용하는 농업방식)을 시작했으며 이 때부터 농사를 짓는데 쟁기를 사용했고 또 바퀴가 달린 짐수레가 만들어지 자 노예들을 가혹하게 혹사시키면서 무거운 돌을 날라 자신들의 안전을 도 모하기 위한 성을 쌓았습니다.(수메르와 마야,황허문명,아즈택,잉카,인더스, 메소포타니아,이집트문명 등) 바퀴의 발달은 집을 짓기 위해 나무를 다듬다 밟아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과정을 되풀이 하면서 둥근 것은 굴러가는 속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 이며, 이런 경험을 통해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때 물건 아래 둥근 나무들을 받치면 쉽게 이동할 수 있다는 원리를 발견해 수레바퀴를 만들게 됐다고 봅 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바퀴는 청동기 시대인 5,200년(기원전 3,200년경) 전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족이 처음으로 발명해 마차의 바퀴로 이용했다고 합 니다. A depiction of onager-drawn cartson the Sumerian battlestandard of Ur (circa 3200BC) 농사를 짓기 위해 수리시설을 고안하고 노예를 동원해 물을 끌어오는 수로 공사로 수세식 화장실을 만들고 목욕탕을 지었으며, 노예노동으로 먹을 것 이 풍부하니 귀족들은 호화생활을 누리지만 침략전쟁에서 부상이나 피해를 입은 병사들은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없어 반발하다 불만이 쌓여 폭발해 내 란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초기에 침략한 부족들은 전리품을 공동소유로 공정하게 나눠 불만이 없었 을 것이나 훈련된 병사조직이 생기면서 병사들을 관리하며 명령하는 사람과 명령받는 사람으로 계급이 형성되고 귀족과 평민으로 나누면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약탈한 전리품을 독식하므로 이에 불만은 표현하는 병사들이 늘어 났을 것은 자명합니다. 신분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전리품을 독식하는 귀족들의 행위에 반발해 병 사들은 자신이 잡은 포로는 자신의 것이라며 몰래 잡아가기도 하고 자신이 강탈한 물건을 왜 귀족이 차지 하냐며 반환을 요구해 내부분란이 끊임없이 일어나자 저항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기 위해 규칙(법률)을 만들었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느낌 25
자연에서 자유롭게 살던 부족민들을 학살하고 살아남은 사람을 붙잡아 감 시와 통제 속에 채찍질로 명령하며 물질을 생산하는 노예로 부림당하는 사 람들은 저항하거나 도망갔을 것이고, 신분상승이 되지 못한 평민들은 자신 들이 땀 흘려 생산한 물질을 귀족이라는 명분으로 세금이라며 수탈해가는 행위에 저항했을 것입니다. 침략자라고 엄청난 괴력과 흉악한 성격으로 무력을 행사하는 후손만 태어 나지 않고 힘이 약한 후손과 무력을 거부하고 이성과 양심을 찾으려는 후손 도 있어 침략으로 왕족이나 귀족을 칭하던 무리들은 착취질서를 정당화하며 신변을 보장받고 대를 이어 혈통을 보전하며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통제하 려고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법(규칙)의 출현 지금까지 발견된 사실로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만들어진 법전은 4,000여 년(기원전 2100년~기원전 2050년 사이)전 점토판에 새겨진 우르남무법 전( 法 典, Code of Ur-Nammu)으로 최초에 니푸르에서 두 조각이 발견 돼 1952년 샤무엘 크레이머에 의해 번역됐으며 추가로 우르에서 점토판이 발견돼 1965년에 번역했다고 합니다. 내용은 고아는 부유한 이에게 보내지 않으며 과부는 힘센 이에게 보내지 않고 재산이 1쉐켈의 사람은 1미나의 사람에게 보내지 않았다. 는 등의 내 용과 살인을 저지른 사람과 절도한 사람은 사형돼야 한다. 고 규정하고 있지만 노예와 주인간의 차별을 두고 있으며 귀족들이 신분이 높다는 이유 로 병사들로부터 강탈한 재산을 지킬 수 있는 조항들이 있을 뿐 평등을 위 한 규칙들이 아닙니다. 법률적 강제규칙들은 프랑스 모르강( De Morgan) 과 함께 1901 년 수사(Susa)에서 페르시아탐험대가 발견하기도 했는데 300년 후 인 3,700년(기원전 1,690년경)전 바빌로니아 왕국 함무라비 왕(기원전 1724~1682년 재위)이 즉위 38년에 높이 2.5m, 둘레 1.8m의 상부에 태양신으로부터 법전을 받는 장면을 부조한 탑이 발견된 것에도 기록돼 있 습니다. 최초의 성문법이라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은 총 3,000행으로 282조의 느낌 26
설형문자로 기록됐는데 특징은 사람의 권리를 3계급(귀족 평민 노예)으로 나누어 신분에 따라 형벌을 결정하도록 규정했습니다. 단순한 사고에 의한 살인도 사형에 처하고 아들이 아버지의 뺨을 때리면 손을 잘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이 알려졌지만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 는 규칙을 정한 것이 아니라 자유인과 천민 그리고 노예의 차이를 분명하게 규정해 귀족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갈취할 권리를 확보하고 권력을 행사하 는 내용으로 구성됐습니다. 내용은 자유인의 눈을 뺀 자는 그 눈을 빼고 자유인의 뼈를 부러뜨린 자 는 그 뼈를 부러뜨리며 천민의 눈을 빼거나 뼈를 부러뜨린 자는 은1마누의 형에 처하고 노예가 자유민의 뺨을 치면 그 귀를 자른다. 고 하는 규정들 이 있습니다. 영주가 자유인이나 노예에게 땅의 경작을 명했는데 농사를 짓지 않아 땅 이 못쓰게 되면 은으로 보상해야 한다. 는 내용이 있어 노예나 자유인은 귀족이 마음대로 노동시킬 수 있고 이를 거부하면 은으로 배상해야 한다고 강제하는 등 무력으로 침략해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의 수탈행위를 정당화하 는 규정들입니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4,500(기원전 2,500년)년전 역사시대에 밀 재배면 적의 6배나 많은 보리를 재배했으나 역사시대 후기로 오면서 남부 메소포 타미아의 토양 비옥도가 낮아져 밀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으며, 대추야자(메 소포타미아), 무화과(고원지대), 올리브(레반트 지역)등 과수재배를 시작했고 대추야자는 넓은 경작면적이 필요하지 않고 염류농도에 상당한 내성이 있어 전 지역으로 급속하게 퍼졌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기원전 3,000년경) 나일 강 유역에서는 메소 포타미아 문명과 긴밀히 상호작용하는 수메르와 아카드에 도시부족과 도시 연맹체가 존재했으며 이때부터 강력한 힘을 가진 군사통치자가 지배하는 왕 국이 탄생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초기 농경에서 도시로 발전하는데 4천년이 걸렸지만 이집 트문명은 약 2,50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집트는 메소포타미 아문명이 걸었던 길과는 다소 다른 방법으로 발전했는데 농경촌락들을 부락 단위로 편성시키고 농업생산을 기반으로 통제질서를 마련하므로 신속하게 안정을 찾았으며 교역과 관개공사를 한 것들이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 기록돼 있다고 합니다. 왕국을 건설한 무리들은 다수의 사람들을 복종시키고 다스리기 위해 가뭄 느낌 27
과 폭풍우 그리고 지진이나 화산폭발 같은 것에 의해 많은 피해가 발생하면 신의 노여움을 사서 그렇다는 거짓말로 엄청나게 많은 신들을 탄생시켰으며 스스로를 무소불위의 신이나 신의 아들로 자처하므로 수많은 우상(신화) 들 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누구나 타인의 통제나 지시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던 사람들을 학살하며 부족을 점령하고 귀족이 된 무리들은 부족민들이 자신들에게 복종해야 쉽게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은 신의 아들이라 자처하며 신을 만들어 냈고 다중을 복종시키기 위해 노예노동으로 신전을 짓고 권력을 행사하는 궁전과 안전을 지키는 성을 지었습니다. 포로로 잡힌 노예들은 병사들의 감시와 통제 속에 지배자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길렀고 무거운 바위 돌을 날랐으며 제대로 먹 지 못하고 힘든 노동을 하다 쓰러지면 가차 없이 채찍질을 당했고 조금이라 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반항하면 맞아 죽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했습 니다. 먹지 못하고 밤낮으로 강제노역을 하다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노예들이 속 출하자 노예들의 원기를 북돋운다며 마늘과 고추를 먹이기도 했다는 것입니 다.(고추와 마늘을 먹인 기록은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건설 때 기록돼 있음) 이렇게 건설돼 발달한 제국이 이집트와 마야문명으로 마야인들은 5,000 년전(기원전 3,000년경) 멕시코남부 치아빠스주 고원지방에 살았고 3,500년(기원전 1500년경)전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으며 2,800년(기 원전8세기경)전에는 멕시코의 남부지방과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하는 중미의 여러 지역에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2,500년전(기원전 5세기)에 띠깔과 와학뚠을 중심으로 번성하기 시작해 1,700년 전(기원후 300년경)까지 엄청난 문화발전을 이루었고 중심도시 는 과테말라북부에 있는 엘뻬뗀으로 과테말라고원지방족인 끼체 족과 더불 어 살았다는 것입니다. 5,200년(기원전 3,200년)전 이집트 보다 통일국가 발전이 약 60년 늦 은 메소포타미아문명이 출현했는데 수메르인들은 각지에 신전을 중심으로 한 도시부족을 세우기 시작해 정치나 생활은 신전을 중심으로 했는데 도시 부족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던 초기인 4,350년(기원전 2350년경)전에 셈 족의 사르곤 1세가 통일하면서 아카드왕조를 탄생시켰다고 합니다. 사르곤 1세는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병사들의 무력으로 도시부족 들을 침략하며 정복을 시작했고 정복한 도시부족들에 관료들을 임명하므로 느낌 28
집권의 틀을 갖추고 자신을 스스로 키시(Kish)의 왕, 사계( 四 界 )의 왕, 수 메르 아카드의 왕 이라 칭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칭호가 후일 메소포타미아지배자의 명칭이 됐으며, 아카드인은 수메 르도시부족이 습득하고 있던 문자를 비롯해 신화( 神 話 ) 문학 기술 예술 등 수메르적 요소를 폭넓게 흡수하고 오랜 기간 동안 함께 생활하므로 인종 적으로 양자가 점점 융합하여 바빌로니아세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고 합 니다. 수메르인은 4,050년(기원전 2050년경)전 막강해 우르 제3왕조를 세웠 으나 5왕조 107년 만에 엘람인에 의해 멸망했고 그 후 이신 라르사 마 리 바빌론 등 여러 부족들이 패권을 다투다 아무루계( 系 ) 바빌론 제1왕조 의 6대왕 함무라비가 3,700년(기원전 1700년경)전 이집트에 맞설 강력 한 병사로 힘을 갖게 되므로 제국을 건설하고 함무라비법전을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함무라비는 각 부족들이 우상화하던 신들의 계보를 통합해 바빌로니아문명 을 부흥시켰지만 이 무렵 이란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산악지대에서 목축으로 살던 히타이트 후르리 카시트 등의 부족들이 말이나 전차( 戰 車 )를 이용해 농경지대를 침략하며 약탈하고 도발을 일삼아 강력했던 바빌론 제1왕조는 3,600년(기원전 16세기 후반)전 히타이트인에 의해 멸망했다고 합니다. 4,000년(기원전 2000년경)전 이집트는 제12대 왕조를 세우고 병사 들의 무력을 바탕으로 통치하며 노예들을 이용해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으 나 3,700년(기원전 1700년경)전부터 셈계( 系 )의 유목민인 힉소스인이 서 ( 西 )아시아로부터 침입하므로 오리엔트는 혼란스러웠다는 것입니다. 3,500~3,400년(기원전 15~14세기)전 이집트 왕인 아멘호테프3세, 아나크톤4세는 아시아 각국 왕들과 군사동맹을 맺고 히타이트 후르리(미탄 니) 아시리아 카시트(카시)와 함께 힉소스 족을 추방하므로 권력을 유지했 다고 합니다.(나일 강 중류의 텔 엘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360통의 아카드 어로 기록된 설형문자 점토판문서(아마르나 문서) 는 이집트 왕인 아멘호테 프 3세, 아나크톤 4세와 아시아 각국 왕 사이에 교환된 공식서 간( 公 式 書 簡 )으로 확인) 평화롭던 부족들을 침략해 정복자가 된 무리들은 제국을 건설하고 왕이라 칭했으며 왕은 태양신의 아들로 자처했으므로 달의 공전과 지구의 자전에 의해 별자리가 이동하고 변화하는 시기를 알아야 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별자리의 이동을 기록하고 분석하다 나일 강이 범람할 느낌 29
때는 일정한 위치에 시리우스(큰개자리 α별)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태양력(태양 공전주기인 365. 2422일을 12달로 나눈 것)을 만들게 되는 등 천문지리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태양력과는 달리 태음력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태음력은 달의 운행만을 기준으로 삼아 달이 29.53059일 만에 보름달이 됐다 그믐달이 되는 것을 기준으로 1개월로 잡아 사용하고 있으며 현재의 음력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수메르인들이 번성했던 3,700년(기원전 1,700전경)전 나일강변에 큰비 가 내리는 대홍수가 발생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비옥했던 농토들이 침수 됐으며 농사를 지어 수확한 많은 곡식들이 떠내려가자 왕들은 신이 노해 저 주가 내렸으니 신에게 제물을 받치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며 사람의 심장을 제물로 받치는 죽음의 제로 대중에게 공포심을 주며 내란을 일으키지 못하 도록 복종시켰습니다. 많은 부족을 정복해 왕국을 건설한 침략자들은 점령당한 부족에게 자신들 이 믿는 신을 모시는 신전(페르시아전쟁의 승리를 기념해 2,447년(기원전 447~432년)전 익티노스의 설계로 세워진 그리스의 파르테논신전(아테네 라는 여신을 위한신전)도 노예노동으로 만든 것임)을 짓도록 하고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제를 지내게 함으로 복종하는 사상으로 길들이고 통치한 것입 니다.(이런 현상들은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부족을 침략으로 정복한 무리들은 패배한 종족의 기득권들에게 공 물을 바치는 식민지로 예속될 것을 강요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학살하고 남 은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으며 자신들이 저지른 흉악한 악행에 저항하지 못 하도록 순종시키기 위해 신을 자처하며 자신들은 죽어도 다시 부활한다고 세뇌하며 통제했습니다. 평화롭게 살던 부족들을 점령한 무리들이 점령부족민을 복종시키기 위해 신을 만든 것이며 자신들의 악독한 수탈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억압하며 통 제 지배하기 위한 방법으로 부활을 주장하고 부활할 장소라며 노예들을 혹 독하게 억압하고 수천 년간 신전과 자신들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만들어 권 력을 유지한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문명을 이루었다는 이집트는 구석기시대 신석기시 대 금석병용시대를 경유해 역사시대(왕조시대)로 이행됐다는 것이며 구석 기시대에는 자연경관( 自 然 景 觀 )이 왕조시대와 달랐는데 유럽 빙하기( 氷 河 期 ) 의 영향으로 우기( 雨 期 )와 건기( 乾 期 )현상이 주기적으로 나타났으며 당시 인 류가 거주했던 지역은 하곡지대가 아니라 서쪽방면의 대지( 臺 地 )였다고 합니 느낌 30
다. 아슈르기( 期 ) 무스티에기 솔뤼트레기 등에 속하는 구석기시대의 유물은 나일 강에 형성된 단구( 段 丘 )위나 파이윰호수( 湖 ) 하르가 등의 오아시스주변 높은 지점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중기까지의 문화는 이집트 전토( 全 土 )에 걸 쳐 동일한데 비해 후기에는 지방마다 다르게 특색을 띄고 있다는 것입니다. 파이윰 지방은 에피르발루아 문화, 하르가 오아시스의 아테리안 문화 등이 발굴됐기 때문에 당시 북아프리카는 다우습윤( 多 雨 濕 潤 )에서 건조( 乾 燥 )로의 이행기( 移 行 期 )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약 7,000(기원전 5000년경)전 건조화가 진전되면서 나일 강 수위( 水 位 ) 가 내려가 자연환경이 현재와 비슷하게 됐을 때부터 사람들은 나일 강 하곡 에 정착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사람들은 점차 농사를 짓 고 가축을 기르며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던 시기에서 이웃부족을 침략해 노 예로 삼고 공물을 강탈하는 왕조시대가 형성됐다고 합니다. 신석기 후기 유적으론 카이로 서남 80km에 있는 파이윰문화와 중부 이 집트동안( 東 岸 )의 델 타사유적이 많이 발굴됐는데 이때까지도 사람들은 떠 돌아다니는 수렵생활을 한 흔적들이 나타나지만 한편으로는 농사를 짓고 가 축을 기른 흔적들도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집트 상 하는 각각 다르 게 발전된 것으로 보이며 발굴된 유물로는 토기와 석기 그리고 골각아기( 骨 角 牙 器 ) 바구니세공[ 籠 細 工 ] 직물과 피혁제품 팔레트(화장접시) 꾸미개 [ 裝 身 具 ] 등이 있습니다. 유물로 보면 인류는 아주 오랜 세월동안 자신들에게 필요한 생활필수품인 옷이나 신발 같은 물질들을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침략자들이 왕조 를 만들고 각 지역에서 수공업 작업에 익숙한 사람들을 포획해 노예로 삼고 야금( 冶 金 )이나 무기제조 또는 피혁이나 도기( 陶 器 ) 그리고 약기와 약품 등 을 생산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남자노예들은 자신들을 혹독하게 감시ㆍ통제하는 감독관과 지배자들이 먹 고 살 수 있도록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고기를 잡고 생필품인 주택과 신발 그리고 가구 또는 귀족들이 타고 다닐 마차와 귀족들의 허영심을 채우 기 위해 금광에서 목숨 걸고 생산노동을 했다고 합니다. 노예들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받고 게으름을 피우면 채찍을 맞으며 생 활에 필요한 모든 물질을 만들어 낸 것이고 여자노예들은 음식을 만들고 귀 족들이 입고 생활할 옷을 만들었으며 집안을 청소하고 식물을 채취하기도 했지만 성욕과 유흥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느낌 31
금석병용기( 金 石 倂 用 期 ) 시대에 상( 上 )이집트엔 바다리유적, 하( 下 )이집트 엔 메림데유적이 발굴되는데, 바다리유적은 고타( 敲 打 )에 의한 것으로 주조 한 방법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최초의 구리제품과 현저히 발달 된 토기가 발굴됐으며 시나이 누비아산( 産 )공작석( 孔 雀 石 )이나 홍해산( 紅 海 産 )조개, 시리아산의 삼목재 등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는 엄청나게 넓 은 지역을 침략해 정복하고 공물을 받거나 강탈해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의 탄생 3,300년(기원전 1,200년경)전 이집트왕국은 많은 종족들을 정복 해 살았는데 특정종족들의 자손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자 왕족(기원전 1290~1223년경)들은 숫자가 많은 종족은 전쟁이 나면 내란으로 권력을 찬탈할 수 있다고 우려하며 태어나는 남자 어린아이들을 살해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유아들을 살해하므로 종족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막으면서 권력을 유 지했는데 특정종족의 아이로 태어나 학살을 피해 강가에 숨겨졌던 모세(본 명 요김 야훼께서 세우신 자 라는 의미였으나 모세 라는 이름은 이집트 공주가 지었다 함)라는 사람이 이집트공주에 의해 구출됐다는 것입니다. 그가 40세 되던 해 같은 종족이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분개해 이집트인 감 독관을 살해한 후 동족들에게 함께 저항하자고 호소했으나 동조하는 사람들 이 없자 혼자 외롭게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게 됐고 도망간 곳에서 유목민으 로 생활하던 미디안족( 族 )사제( 司 祭 ) 이드로(르의엘)의 딸 시뽀라와 결혼해 살았다고 합니다. 사제의 딸과 결혼하고 자연에서 누구에게 간섭받거나 통제되지 않고 자유 롭게 생활하며 장인이 신께 제사지내는 행위로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것을 보고 깨달은 모세는 80세 되던 해 이집트로 돌아와 동족들이 침략자들에 의해 자유를 박탈당하고 억압과 통제 속에 착취당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 했을 것입니다. 인류는 침략에 성공한 무리가 토지와 생산물을 강탈했으므로 토지의 사유 나 계급이란 구분 없이 집단에서 누구나 평등하게 공동으로 사냥하고, 농사 느낌 32
지으며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종족을 유지했으므로 동족에 대한 애착이 강했 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동족들이 법이라는 강제규정에 묶여 억압ㆍ통제 속에 착취당하는 것과 태양신과 헤라 신을 내세워 칭송하는 이데올로기(행동을 제약하기 위 한 관념이나 믿음)에 속아 살아가는 것을 보고 자신은 하느님(야훼)을 섬긴 다고 설파했다고 봅니다. 그는 하느님의 율법엔 모든 사람은 자연에서 자유롭게 살아야 하는데 침 략자(권력자)들에 의해 법률과 규칙에 얽매여 숫자를 받고 지시와 통제 속에 살아가는 것은 노예의 삶을 사는 것이므로 모든 관습과 법률의 굴레에서 벗 어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 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감시와 통제 속에 혹독한 채찍질을 당하며 지배자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질을 생산하던 노예들과 전쟁에 참여하고도 강탈한 물질을 차지 하지 못해 불만이 생긴 병사들, 그리고 평민이라는 이유로 귀족들의 권위에 억눌려 굽실거리며 착취당하던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됐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모세는 이들과 함께 세력을 규합하여 힘을 기르고 형 아론의 협조를 얻어 파라오에 대항해 싸워 이기므로 자신의 종족을 노예 에서 해방시켰다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종족을 해방시킨 모세는 여러 종족이 모여 살며 권력쟁 탈과 지배ㆍ통제의 틀에 갇힌 이집트를 벗어나 자신의 종족끼리 평화롭고 자유롭게 거주할 비옥한 땅을 찾아 유랑생활을 시작했으며 평소 자신이 주 장했던 평등사상과 철학에 따라 힘(권력)을 가졌지만 권위를 내세우거나 무 력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신망을 받은 모세는 거짓을 섬기는 제단을 만들어 사람 이나 산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제를 지내지 말 것이며, 모든 사람은 자유롭 게 살아갈 권리가 있고 평등한데 신앙을 핑계로 착취ㆍ갈취하거나 지배ㆍ통 제하기 위해 법률과 관습을 강요하지 말라 는 언약들을 구약과 율법으로 남겼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부족들을 침략해 힘으로 왕국을 건설한 제국의 왕들은 힘(권력)을 믿고 독선적 독재만 행사했지 조직을 관리할 두뇌나 융화( 融 和 )력이 부족하 기 때문에 내부에서 폭정에 저항하는 사람들과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권 력을 잡으려는 무리들도 있어 수많은 분열을 일으키면서 호시탐탐 권력을 찬탈할 기회를 노렸습니다. 느낌 33
또 한편 왕국을 건설하고 귀족생활에 젖어 안락하게 살아온 무리들은 다른 부족을 침략하고 물질을 약탈하려고 노력할 때는 강성한 힘이 있었지만 편 안한 귀족생활로 향락에 젖은 생활을 즐기면서 힘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힘 은 점점 약해지고 무기력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이 있거나 덩치가 큰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부터 약자를 괴롭히거나 물건 을 강탈할 수 있기 때문에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단순하고 미련한 경우(남의 물건을 강탈하기 위한 머리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가 많지 만 힘이 약하거나 덩치가 작아 항상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며 살아가므로 두뇌회전이 빠른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당시엔 거친 들판과 산야에서 목축을 하며 유랑생활을 하던 종족들은 사나 운 맹수들을 사냥하기도 하고 가축들을 지키기 위해 맹수들과 싸우면서 단 련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단련된 종족들은 무기와 기마병으로 무장하고 왕족들이 지배하지만 군사력은 없고 양식은 풍부한 변방을 수시로 침략해 약탈과 부녀를 납치하 는 수탈전쟁을 수없이 되풀이 하며 왕국을 점령하기도 했기 때문에 힘으로 건설된 왕국들은 소멸했다 탄생되기를 반복하며 발전해 왔습니다. 마야제국은 1,700년전~1,200년(기원후 300-800)까지를 구 마야제 국이라 하고 1,200년 전부터 500년 전(800-1500년)까지를 신 마야제 국으로 부르고 있으며 신 마야제국의 중심지는 유까딴 반도로 멕시코북부지 역의 똘떼까 문화권과 교류하며 번성했습니다. 기원후 5세기를 전후해 번성했던 구 마야제국은 9세기 후기 북부지방에서 내려온 이짜족과 도시연맹을 결성했지만 560년(1450년경)전 마야족과 이 짜족 간에 전쟁이 발생해 마야빤은 파괴되고 1563년에 스페인이 이 지역 을 정복했을 때 마야제국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야인은 농경에 의지하는 도시였음에도 엄격한 사회신분제도를 두고 통치 했는데 사제의 신전이나 귀족의 궁전은 높은 구릉 위에 요새같이 견고하게 짓고 이 구릉주위를 이엉으로 지붕을 얹은 다닥다닥 붙은 오두막으로 뺑 둘 러싸고 평민들이 살았으며 중간계층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극히 소수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자들로 나누고 귀족들은 권위적이며 폐쇄 적인 생활을 했고 제사장을 맡아 스스로를 알메헤노브라불렀는데 그 의미 는 아비와 어미를 가진 자 즉 혈통을 지니고 있는 자라는 뜻이라고 합니 느낌 34
다.(이런 기록으로 보아 이때까지도 난교생활을 했고 가족은 침략으로 지배 자가 돼 권력을 행사한 무리들만 형성 했을 것으로 추측됨) 마야나 잉카제국은 병사들의 힘(무력)으로 통치했으며 태양을 신으로 섬겼 고 왕은 스스로 태양의 아들이라 칭하며 노예에게 신전과 제단을 짓도록 했 으며 귀족, 평민, 노예로 철저하게 신분을 나누고 태양신에게는 사람의 심장 을 제물로 받치는 의식을 치렀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왕이 지명하는 사람을 제단위에 눕히고 마야는 살 아있는 남자가슴에 잉카는 여자가슴에 칼을 꽂아 살해하고 심장을 꺼내는 의식을 치르므로 대중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며 무력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고 합니다.(이러한 사실들은 당시 새긴 그림문자와 조각의 유물들로 확인되 고 있음) 무력으로 왕국을 건설한 무리들의 통치수단인 종교의식 때문에 제물로 받 쳐질 사람들이 필요했으므로 제물을 마련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노예를 확보했으며 확보된 노예들의 노동으로 먹을 것을 생산하고 신전들과 귀족들 이 누리고 살아갈 건물들을 지었으며 신전의 제물로 받쳐졌다는 것입니다. 석가의 탄생 2,500년(기원전 563~483년경)전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 국경부근 인 히말라야산( 山 )기슭에 카필라성(Kapilavastu: 迦 毘 羅 城 )을 중심으로 샤 키야족( 釋 迦 族 )이라는 작은 부족국가의 왕 슈도다나(suddhodana: 淨 飯 王 )와 부인 마야(Maya: 摩 耶 )사이에 싯다르타(Siddhartha: 悉 達 多 )고타마 (Gautama: 瞿 曇 )라는 왕자가 태어났으나 생후 7일 만에 어머니와 사별하 고 이모에 의해 양육되면서 왕족의 교양에 필요한 학문과 기예를 배우며 성 장했다고 합니다. 당시 풍속이 결혼한 여성은 친정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남편에게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마야부인이 고향으로 가던 중 룸비니 동산에서 싯다르타 고타 마를 낳았다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은 아소카( 阿 育 王 )라는 왕이 석가모니의 느낌 35
성지를 순례하면서 석가모니가 탄생한 자리를 기억할 수 있도록 석주( 石 柱 ) 를 세웠는데 이것을 1896년에 발견해 해독하므로 확인됐다는 것입니다. 인도역사는 50만 년 전 호모에렉투스가 생활하던 시기부터의 유적이 발 견됐으며 인류라 할 수 있는 호모사피엔스는 7만5천 년 전 타밀나두지방에 서 생활한 흔적들이 발굴됐고 5,300년(기원전 약 3300년경)전 무렵부터 3,300년(기원전 1,300년경)전까지 고대 인더스문명이 있었던 것으로 확 인되고 있습니다. 인더스문명은 3,900년(기원전 1900년경)전 까지 이어진 청동기시대 하 라파시기와 이후 철기 시대인 베다시대로 구분하고 있는데 베다시대에 들어 힌두스탄평원에는 십육대국으로 불리는 고대도시국가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십육대국의 하나인 마가다에는 2,600년(기원전 6~5세기)전 베다종교(다 양한 신)와 브라만교(힌두교의 원조)만 있던 인도에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마 하비라와 불교의 창시자인 싯다르타 고타마와 같은 사람들이 새로운 사문 ((samana, 沙 門 )이란 노력하는 사람 이라는 정도의 뜻)을 구성하고 후 일 무함마드에 의해 이슬람(순종이란 뜻)교가 생겼습니다. 아리안 족들은 강력한 군사력과 재빠른 기마병을 갖추고 있었으며 글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힘이 약한 부족을 침략해 식민지를 넓혔으며 이들이 정복 한 부족에게 베다종교를 믿게 하면서 4개로 구성되는 계급의 신분제도를 만들어 통치했습니다. 인도의 신분제도를 카스트(혈통을 뜻하는 포르투칼어 카스타(casta)에서 유래한말)제도라고 하는데 힌두교의 윤회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사람 은 죽어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혈육을 물려받아 태어나면 부모 의 계급과 신분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카스트제도는 아리안 족이 원주민을 억압하고 통치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던 4계급제도를 신앙의 기원으로 하여 변화시킨 사상으로 현재까지도 통치수 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카스트는 1.신분과 직업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으며 2.태어나면서부터 지 위를 세습하고(태어날 때 부모가 가지고 있던 신분의 세습) 3.타고난 능력 에 따라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수 없도록 할 뿐 아니라 4.다른 신분과는 결혼을 금지하며 같은 계급끼리 결혼하도록 강제하고 일상생활도 같은 신분 끼리 어울리도록 규정됐습니다. 카스트의 계급구성과 특징을 살펴보면 최고신분은 성직자인 브라만이라는 느낌 36
신분으로 제사의식을 독점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것이며, 둘째계급은 귀족 과 무사들로 정치와 병사를 지휘해 백성들을 통치하고 다스린다는 크샤트리 아라 불리는 신분이며, 셋째는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생산에 종사하는 농민과 상인계급으로 바이샤라는 신분이고, 마지막인 넷째 수드라계급은 노 예로 위의 세 신분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의무를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는다 고 합니다. 왕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의 지휘를 받아 통 치해야 하는 정치체제를 갖춘 환경 속에서 성장한 싯다르타 고타마는 왕자 의 신분으로 태어나 당시 풍습에 따라 16세에 부인인 야쇼다라( 耶 輸 陀 羅 )와 결혼했으며 아들라훌라( 羅 睺 羅 )를 낳고 행복한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생후 7일 만에 모친이 죽은 사실과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 것 등 인 생의 철학에 직면해 고뇌하다 29세 때 처자와 왕자의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생로병사와 고뇌가 생기는 근원을 파악하고자 고행의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처음엔 출가자의 풍습에 따라 육체를 학대하는 고행( 苦 行 )에 전념해 신체가 해골처럼 됐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남쪽으로 내려가 갠지스 강( 江 )을 건 너 마가다국( 國 )왕사성( 王 舍 城 : Rajagha)에서 알라라칼라마와 우다카 라마 푸타라는 스승들을 차례로 찾아 무소유처정( 無 所 有 處 定 ) 비상비비상처정( 非 想 非 非 想 處 定 )이라는 선정( 禪 定 )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방법으로는 생사의 괴로움을 해탈할 수 없다고 생각해 부다 가야 부근의 산림으로 들어가 6년간 고행했으며 다시 보리수( 菩 提 樹 :Bodhi-tree) 아래에 자리 잡고 깊은 사색에 빠졌다가 정각( 正 覺 :abhisambodhi)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깨달음의 내용<아함경( 阿 含 經 )>은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으나 사제( 四 諦 : 苦 集 滅 道 의 4가지 진리, 즉 현상계의 괴로움과 그 원인 및 열반과 그 에 이르는 길) 십이인연( 十 二 因 緣 ) 사선삼명( 四 禪 三 明 )등을 나타내는 것 으로 기본적으로는 선정에 의해 자연의 이치 즉 법( 法 :dharma)칙을 깨달 고 집필했는데 선정은 강렬한 마음의 집중이며 공포도 고통도 나아가 애욕 도 산란이 발생되지 않는 부동( 不 動 )의 마음(내공)을 이루는 것을 깨달으면 번뇌와 속박에서 해방되고 여기에서 생긴 지혜는 신비적 직관( 直 觀 )이 아니 라 자유로운 여실지견( 如 實 知 見 :사물을 있는 그대로 옳게 봄)이라고 설파하 여 성인으로 추앙받게 됐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하며 사람을 신 분이나 계급으로 구분 짓고 타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거 느낌 37
스르는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니자 하급신분으로 태어나 억압받고 노 예로 생활하던 많은 사람들이 설법을 듣기 위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고 합 니다. 군중들이 열망하므로 불교로 된 것이며 불교에 많은 신도가 모여 강성해지 자 카스트제도가 부정되면서 성직자들의 권위가 약화되니 권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 성직자들이 최고 권력인 성직을 회복하기 위해 종교전쟁을 일으켰 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불교가 패하고 설법을 펼치던 승려들이 카스트를 신봉하는 성 직자들의 무력에 학살당하므로 불교는 인도에서 사멸되고 힌두교와 이슬람 교의 성직자들이 권력을 잡아 신분제도를 부활시켰다고 합니다. 석가모니( 釋 迦 牟 尼 )(석가는 샤카(샤키야,Sakya)라는 민족의 명칭을 한자 로 발음한 것이고 모니(muni)는 성인이라는 의미라 함)는 석가문( 釋 迦 文 ) 등으로도 음사하며 능인적묵( 能 仁 寂 默 )또는 보통 석존( 釋 尊 )부처님이라고도 하기도 하며 석가모니란 본래는 석가족( 族 ) 또는 샤카족 출신의 성자 라는 뜻으로 불교를 창시한 인도의 성자( 聖 者 )로 부처님, 부처, 석가모니, 석가세 존, 석존, 세존, 석가, 능인적묵, 여래, 불타, 붓다, 불( 佛 ) 등 다양한 명칭으 로 불리고 있습니다. 초기불교는 예배대상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굽타왕조 이후부터 권력을 잡 은 기득권들이 불탑과 불상을 만들고 민간신앙인 힌두교(잡교와 밀교)와 같 은 형태로 변질시켜 석가 정신이 훼손되면서 지금의 종교형태가 됐다고 합 니다. 이슬람병사는 8세기 이후 북서인도까지 진출했다 11세기에 다시 몇 왕조 가 북부인도에 들어와 아프가니스칸, 간다라, 캐시미르 등지에서 불교사상 을 억압하고 12세기 말엽-13세기에 걸쳐 불교사원을 침공해 불태우며 파 괴하고 승려들을 살해하거나 추방해 불교는 인도에서 사멸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출현 고대 로마(라틴어: Roma antiqua)역사가들은 2,800년(기원전 8세기 경)전 이탈리아의 대다수가 상대적으로 미개한 상태일 때 에트루리아인들이 느낌 38
라티움에서 테베레 강을 건너와 정착해 살았으며 이탈리아남부와 시칠리아 (마그나 그라이키아)지방에도 그리스인들이 넘어와 정착하고 살면서 집단문 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이들이 정착해 살던 팔라티누스 언덕을 비롯한 로마의 여러 언덕에 농촌 촌락들이 형성됐는데 이들 산지 촌락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언과 관습이 있 었다는 것입니다. 2,700년(기원전 7세기 무렵)전 비옥한 땅에서 농경사회를 이루고 자유로 우며 풍족하게 살던 티베리스 강(현재의 테베레 강)하류 라티움이라는 지역 을 인도 유럽계 고대 이탈리아인에 속하는 라틴인과 사비누스인 일부가 무 력을 행사하며 침략해 사람들을 학살하고 점령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라티움을 점령하고 비옥한 땅에서 생산한 곡물을 강탈하므로 먹을 것과 재 물이 풍족해진 침략자들은 사람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병사를 훈련시키고 무 력을 바탕으로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시작했는데 침략무리를 이끌던 로물루 스(버려져 늑대에 의해 자랐다는 전설을 가진 Romulus와 Remus쌍둥이 형제)라는 사람이 2,700년(기원전 753년 즉위)전 왕이라 칭하면서 로마 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학살과 약탈로 재물이 풍부해지자 더 많은 병사를 끌어 모아 이탈리아를 통일한 무리들은 정복한 지역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법(규칙)을 만들고 (라틴어: IusRomanum) 로마의 고대법( 古 代 法 )은 민족적 색채가 짙은 형 식주의이며 관습위주( 主 )로 하다가 2,400년(기원전 449년)전 12표법( 表 法 )을 축( 軸 )으로 하였다.)계급으로 나누는 신분제도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병사를 보유했으며 초기부터 침략에 참여해 지휘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은 자칭 신의 자손이라는 3개의 귀족(파트리키)계급들로 나누고 최 고위직인 집정관(콘술), 침략지역을 통치하는 총독(사트라프), 고급관리인인 감찰관(켄 소르)이라는 직책으로 나누어 권력을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침략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은 귀족에 소속됐으며 침략 중 저항할 수 없도록 잔인하게 학살한 병사들을 칭송하며 진급시키고 전리품으로 침략한부족의 여자들을 마음대로 겁간하고 재물을 강탈하며 포로를 노예로 소유할 수 있 게 하므로 평민들은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신분상승의 기 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병사를 많이 보유한 무리들은 수많은 부족을 침략해 사람을 학살하거나 포 로로 포획했으며 붙잡힌 부족민은 침략자와 그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느낌 39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먹을거리(농사와 목축, 어로)와 생필품(관제수공 업) 그리고 신전이나 귀족들이 거주할 궁전 또는 저택을 짓는 노예노동을 하면서 갇혀서 감시받는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먹을 것과 생필품 등 모든 물질을 만들어내면서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도구(말을 알아듣고 할 줄 아는 도구)로 분류해 혹독한 감시와 통제 속에 가축처럼 취급됐으며, 노예주는 노예의 생 명을 뺏거나 양도 매매할 수 있어 노예는 주인이 소유한 재산이었다는 것 입니다. 고대 로마 노예는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부분적으로 재산을 모으면 자유를 살 수 있었다는 일부주장이 있는데, 노예가 벌면 주인 소유가 돼 노예재산 이란 없고 미국 남북전쟁까지도 흑인노예가 자유를 매수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에 억압에서 벗어나려면 뭉쳐서 통제에 저항해 싸우든가 도망 치거나 죽는 것뿐이었습니다. 자유롭게 살다 침략당해 땅과 가족을 잃어버린 노예도 아니고 정주민도 아 닌 도시가 형성돼 있으므로 살기 위해 스스로 도시로 찾아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외국인이라고 불렀으며 생활은 노예보다 자유로웠지만 소 속이 명확하지 않아 언제든지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포획될 수 있었다고 합 니다. 이들은 사람이 살지 않은 땅에 화전을 일구며 살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추 측 가능하며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귀족들이 차지하고 자기 땅이라며 유흥을 즐기기 위해 사냥을 나오면 쫓겨 다니며 살았을 것이고 생산하는 물 질 품목이 한정됐기 때문에 물물교환을 할 수 있는 시장을 형성하기도 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당시 재산을 많이 보유했다는 표현이 있다고 해서 화폐를 사용했다는 주장 이 있는데 화폐가 유통되는 시장이 존재하려면 생산되는 물질이 풍족해야 하고, 힘든 노동으로 생산한 물질을 화폐로 언제든지 교환할 수 있게 보장 되는 시장이 존재해야하며 대중이 보편적으로 믿을 수 있도록 합의한 화폐 를 제작하고 관리할 수 있는 기관이 있어야 합니다. 한참 뒤까지 그리스에서 병사와 관리(관료)들에게 소금을 봉급으로 지불하 고 소금으로 노예를 사고 물질을 교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화폐 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물물교환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병사들의 무력으로 평화롭게 살던 부족을 침략해 정복하고 질서유지라며 느낌 40
모든 사람들을 통제하는 법과 제도를 만들고 지배직책을 모두 장악한 무리 들은 자신들이 거느린 병사를 동원해 더 많은 부족들을 침략하고 물질을 약 탈하며 포로를 붙잡아 노예로 부리면서 더욱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거듭되는 전쟁으로 사망자가 늘어 병사가 부족해지자 전공을 세우 면 노예에서 해방시키고 일정한 직책을 준다며 노예를 병사로 동원했는데 도망가는 노예들과 명령에 따르지 않는 병사들이 늘어나 재산을 불리거나 다중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무력이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침략에 성공한 귀족의 재산(붙잡혀온 노예와 강탈한 재물)은 풍족한 반면 전쟁에 참여하지 못해 상대적으로 빈곤해진 귀족들은 전쟁에 참여할 권리를 갖거나 재물을 분배받는 제도를 만들려고 해 이권다툼이 치열했으며 병사들 이 침략전쟁으로 도시를 비운사이 주변 부족들의 침략까지 받으면서 로마는 점점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몰락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왕만이 붉은색 옷과 신발을 사용할 수 있었고 색깔옷감을 만드는 곳에 노예노동을 사용했으며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호화 스럽고 웅장하게 꾸민 거대한 마차를 타고 수많은 신하들과 생산노동은 하 지 않고 왕의 시중만 드는 노예를 거느리고 거리를 행차하는 것을 즐겨 생 산노예가 줄었습니다. 또한 권위를 내세우며 과시하기를 좋아했고 주지육림에 빠져 향락과 쾌락 을 즐겼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고도 갖은 세금(곡물과 생필품 등)이라는 명 분으로 수탈당해 비참하게 살아가던 병사들이 불평등과 빈곤에 불만을 가지 고 귀족에 대항해 암살하기도 하는 등 끝없이 내란을 일으켜 쇠퇴하게 됩니 다. 귀족을 자처한 사람들은 수많은 신을 만들고 자신들의 신을 믿을 것을 강 요하며 대중들을 통제했으나 석가모니(불교 창시자)와 모세(성경속 인물)가 주장했던 평등사상과 2,500년(기원전 469~470년경)전 소크라테스(Σω κράτης)와 그 이전 철학자들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하며 자유롭게 살 권 리가 있다고 주장한 사실을 깨우쳐 억압과 수탈을 목적으로 한 그들의 신을 부정하며 복종을 거부했다고 봅니다. 철학자들이 과거로부터 전해온 것들을 부정하며 새로운 지식을 축적하고 만물은 어디서 유래하며 무엇으로 탄생되는지에 대한 의구심, 자연에서 발 견되는 사물들의 다수성과 자연은 수학적으로 어떻게 기술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봉착해 끝없이 고뇌하면서 발전시켜온 역할로 평민들은 침략자들의 느낌 41
지배논리인 거짓신화에 현혹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족으로 뭉친 평민들이 수없이 반란을 일으키며 저항하자 귀족들은 로마 에 살고 있는 종족들 중 숫자가 많아 뭉치면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30개 의 부족대표에게 권리를 줄 수밖에 없게 됐으며 이들에게 투표에 참여해 표 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쿠리아회(Comitia Curiata)를 만들었다고 합니 다. 선출된 부족대표들은 평민들을 위해 귀족들의 폭정과 횡포를 막아내는 역 할을 목적으로 선출됐으나 대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자 귀족 들처럼 누리고 살려고 공물을 늘려 징수해 가로채므로 평민들의 생활이 나 아지거나 권리가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놀고먹는 착취자들만 늘어나 더욱 빈곤하게 됐습니다. 지배자들은 평민들이 귀족들의 향락과 부유한 생활에 불만을 갖는 저항정 신을 희석시키기 위해 경기장을 만들어 흥미위주의 공연과 맹수사냥을 보여 주는 한편 스포츠와 도박을 만들고 병사들의 체력과 전투기술(사람을 죽이 는 일)을 발전시키는 격투를 벌이는 검투사경기를 만들어 대중의 관심을 돌 리려 했습니다. 그런다고 평민들의 삶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경기장을 만든다며 수탈해 더욱 궁핍해진 평민들의 내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권력을 탐하는 귀족들이 호시탐탐 권좌를 노리므로 왕권은 상실되고 귀족들의 의견을 수렵할 수밖에 없어 30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을 만들고 2대(누마)왕(기원전 715~673 년)부터는 투표로 선출했다고 합니다. 투표로 왕을 선출해도 귀족들끼리의 권력다툼이고, 선출된 왕(Rex)은 군 사지휘권과 공동체문제를 전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재판관의 권한을 가졌 으며 종교의식을 집행하고 전시에는 귀족이라도 왕권(imperium)으로 신하 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단할 수 있는 권력을 행사했다는 것입니다.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 귀족 사이에 권력쟁탈을 위한 음모가 끊이 지 않았는데 평민들이 저항하므로 귀족들에게만 인정하던 시민권을 재물을 가진 평민들까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시민회(Populus Romanus)를 만들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시민회는 행정관의 임명이나 전쟁과 평화에 대해 추인하거나 거부할 권 한이 있었지만 시민회 결정사항은 300명의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 (Senatus)에 의해 거부됐기 때문에 명분뿐이었다고 합니다. 느낌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