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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제1절 고구려와의 관계 31 그런데 고국원왕대에 남진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전연의 압박으로 서쪽 東臺子 遺蹟으로 보는 설22)로 나눠져 있다. 南進에 대한 고국원왕의 의지나 으로의 진출이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당시 전연은 중원 진출을 도모 지역관리 현황으로 보아 평양으로 보는 것이 옳다. 고국원왕대에 고구려에 하고 있을 정도로 강한 세력이었다. 전연으로서는 중원 진출 이전에 고구 서는 망명 온 정치가를 황해도 지역에 안치했다. 337년 1월에 고구려로 온 려를 제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고국원왕 12년(342)에 고구려로 쳐들어 冬壽에 대한 묵서가 安岳 3호분 무덤방 입구에 적힌 것도 이와 관련이 있 왔다. 이때 적의 침공로를 오판하여 고구려군은 크게 패했고, 전연의 군대 다. 이는 이 지역을 남진의 중심 기지로 삼고, 낙랑 대방 고지인들을 남진 는 곧장 수도로 들어와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파괴했다. 뿐만 아니라 계획에 적극 활용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고구려의 반격을 막기 위해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을 도굴해 수 한편 백제도 대방군 축출 이후 이 지역을 얻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백제 레에 싣고 가고, 王母를 납치해 갔다. 남녀 합쳐 5만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 는 고구려가 요동지역에 신경을 집중하느라 이 지역에 무관심한 틈을 타 16) 을 포로로 끌고 가기도 했다. 고국원왕으로서는 부왕의 시신과 왕모를 돌 세력을 뻗쳐왔다. 그 결과 4세기 중엽 경에는 황해도 배천에 비정되고 있 려받기 위해 저자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前秦이 부상함으로써 고 는 雉壤 선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방고지를 둘러싼 두 나라의 충 구려 서변 지역의 정세가 바뀌었다. 고구려는 370년 전진왕 符堅이 전연을 돌은 시간문제였다. 17) 멸망시키자, 도망 온 慕容評을 잡아 전진으로 압송했다. 이로 인해 전진 과 우호 관계를 맺게 되었고, 불교를 받아들이고 사신을 파견하는 등 교류 369년에 북상하려는 백제와 남진하려는 고구려가 최초로 직접 충돌했 다.23) 를 활발히 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서변 지역의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대신 요동으로의 진출은 한동안 유보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고국원왕은 南進으로 방향을 돌렸다. 고국원왕 4년(334) 평양 성을 증축한 것을 보면, 이미 전부터 낙랑 대방고지에 대한 지배를 본격 (근초고왕) 24년(369)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斯由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 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는데, 그 사로잡은 포로들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24) 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8) 전연의 침공으로 丸都城이 대파된 바로 다음 해인 343년에 平壤東黃城으로 임시 천도할 수 있었던 것 고국원왕이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치양으로 쳐들어 오자 근초고왕이 태자 은 이전부터 지역관리를 체계적으로 진행해왔기 때문이었다.19) 평양동황성 근구수를 보내 이를 치게 했는데, 전략과 전투능력이 탁월했던 근구수가 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의 平壤이나,20) 江界,21) 또는 中國 吉林省 集安市의 지름길로 치양으로 가 급습함으로써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 기 사에 따르면 당시 치양에는 백제군이 배치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만약 치양에 백제군이 있었다면 근구수가 수도에서 군사를 이끌고 오기 이전에 16) 三國史記 卷18 高句麗本紀 6 故國原王 12年(342) 11月. 17) 三國史記 卷18 高句麗本紀 6 故國原王 40年(370). 18) 三國史記 卷18 高句麗本紀 6 故國原王 4年(334) 8月. 19) 三國史記 卷18 高句麗本紀 6 故國原王 13年(343) 7月. 20) 채희국, 1965, 평양성의 축성과정에 대하여, 고고민속 1965-3 ; 정찬영, 1966, 평 양성에 대하여, 고고민속 1966-2 ; 閔德植, 1991, 故國原王代 平壤城의 位置에 關한 試考, 韓國史의 理解 古代考古 1, 신서원. 21) 李丙燾, 1976, 高句麗 平壤東黃城考,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370~373쪽. 이미 백제군과 고구려군의 1차 충돌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당시 국경선 22) 魏存成, 1985, 高句麗初 中期的都城, 北方文物 1985-2. 23) 三國史記 卷18 高句麗本紀 6 故國原王 39年(369) 9月. 24) 三國史記 卷24 百濟本紀 2 近肖古王 24年(369) 9月.
32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제1절 고구려와의 관계 33 이 명확히 성립되어 있지 않았고, 영토보존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갖추어 정치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해 나가면서 영토 확장에도 힘쓰는 등 국 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력을 기르는데도 열심이었다. 그 결과 강적 고구려의 첫 번째 대규모 침공 아마도 대방고지에 대한 두 나라의 생각이 서로 달랐던 것 같다. 고구려 을 맞아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승리로 인해 백제군의 사기는 로서는 대방군을 축출한 당사자였으므로 당연히 자국의 땅이라고 생각했 한껏 높아졌다. 그에 편승하여 왕권도 더욱 강화되었다. 고구려를 물리친 고, 백제는 이미 이전부터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백제 영토라고 두 달 뒤 한수 남쪽에서 사열을 했는데, 깃발을 모두 황색으로 했다는 것27) 생각했던 것 같다. 고구려로서는 남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보니 백제세력이 이 그 상황을 잘 보여준다. 치양까지 뻗쳐 있으므로, 이 땅이 고구려 소속임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 군 여하튼 근구수는 이 전쟁을 통해 백제인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그는 획 사를 모아 내려왔던 것이고, 백제로서는 자국영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 득한 고구려군 포로를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장졸들의 마음 구려군을 축출하려고 군사를 급파했던 것이다. 을 살 수 있었다. 능력있는 지도자이면서 부하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는 고구려로서는 별반 심각하게 생각지 않고 있다가 백제에게 크게 당한 형 근구수의 영웅적인 모습은 당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때문 국이었다. 고국원왕이 이끌고 온 군대가 정예부대가 아닌 疑兵 이었던 것 에 태자의 말발자국 이라는 그와 관련된 전승지가 생겼고, 그에 대한 이 은 그 때문이었다. 백제에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가 있던 斯紀가 근구 야기가 고려시기에 이르기까지도 이 지역에 전해지게 되었다.28) 수에게 저쪽의 군사가 비록 많기는 하나 모두 숫자만을 채운 허위의 군사 근구수가 수행했던 369년의 전투는 치양(현 황해도 배천)에서 발발하여 (疑兵)일 뿐입니다.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오직 붉은 깃발의 부대뿐입니다. 수곡성(현 신계) 서북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예성강 하류인 치양에서 백제 만일 먼저 이를 깨뜨리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 군이 고구려군을 기습공격하자, 당황한 고구려군이 예성강의 연안을 따라 25) 다. 라고 일러준 것도 고구려군의 이런 분위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 상류지역인 수곡성 쪽으로 쫓겨 갔다가 결국 평양 쪽으로 퇴각했던 것이 다. 자국 영토를 어느 틈에 잠식한 백제에게 고구려군의 위용을 보여줌으 다. 후퇴하는 고구려군을 추격하던 백제군이 수곡성 서북지역에 이른 후 로써 영토의 향방을 원래대로 돌려놓고자 했던 고구려로서는 백제라는 잘 더 나아가려 하자, 막고해가 너무 적진 깊이 들어가면 위험하므로 이것으 모르고 있던 대상, 그리고 약간 가볍게 생각했던 대상에게 예상치않게 강 로 만족하고 추격을 그만 멈추자고 건의했다. 근구수는 그 건의를 받아들 타를 맞은 것이다. 5천이나 되는 군사를 상실한 엄청난 패배였다. 이며, 훗날 누가 이곳까지 이르겠느냐며 자신이 이룩한 성과에 스스로 감 그러나 백제의 승리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한 군현 축출 이후 고구려 와 국경을 접하게 된 백제로서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예상하고 미리 대비책 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근초고왕 21년(366) 사신을 신라에 보내 우호의 손 탄하며 감회에 젖었다. 그러나 바로 2년 뒤인 371년에 근구수는 고구려 땅 안으로 더 깊숙이 쳐 들어가게 되었다. 평양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26) 짓을 보낸 것도 고구려의 남하에 대한 대비책 마련의 일환이었다. 내부의 가-1)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왔다. 왕이 이를 듣고 浿河 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그들 25) 三國史記 卷24 百濟本紀 2 近仇首王 卽位年(375). 26) 盧重國, 1981, 高句麗 百濟 新羅 사이의 力關係變化에 대한 一考察, 東方學志 28, 53~54쪽. 27) 三國史記 卷24 百濟本紀 2 近肖古王 24年(369) 11月. 28) 三國史記 卷24 百濟本紀 2 近仇首王 卽位年(375).
34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제1절 고구려와의 관계 이) 이르기를 기다려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하였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 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서 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 斯 由가 힘을 다해 싸워 막았으나 流矢에 맞아 죽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도 읍을 漢山으로 옮겼다.29) 가-2) 겨울 10월에 백제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은 군대를 30)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죽었다. 故國의 들에 장사지냈다. 35 이 전력을 다해 백제군과 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이 전투에서는 어느 나라가 승리했을까? 이 전쟁의 승패에 대해서 는 사료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사료에는 평양성 전투 직후 근초고왕이 군대를 이끌고 퇴각한 뒤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고 나온다. 그리고 평양 지역은 이후에도 계속 고구려 땅으로 남아 있었다.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전쟁이 끝난 후 이달 23일에 고국원왕이 서거했다고 한다. 이로 보아 평양 가-2)에는 백제가 먼저 고구려를 공격한 듯 평양성 침공 기사만 적어 놓 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유시에 맞고 쓰러지는 등 힘겹게 전투를 하긴 했 았다. 하지만 가-1)에 의하면 이 해에도 고구려가 먼저 백제로 쳐들어왔다 지만, 결국 고구려가 백제군을 물리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전쟁에서 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구려는 369년 치양전투에서 출정군의 4분의 1이 얻은 상처로 고국원왕이 죽게 되었으므로 고구려로서는 심대한 타격을 입 나 희생시키고 쫓겨 갔던 것을 설욕하기 위해 2년 뒤 다시 백제를 침공했 었고 혼란을 겪게 되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다. 백제는 전과 달리 미리 군사를 패하에 매복시켜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닐 정도였다. 그렇지만 근초고왕이 직접 출정하여 진두지휘한 평양성 공격 고구려군을 쳐 승리를 거두었다. 고구려군은 이번에도 백제군이 미리 와서 전에서 백제가 승리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31) 당시 백제의 분위기도 승리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현장에 도착했다가 급습을 당했다. 한 쪽의 그것이 아니었다. 수도를 급히 옮기는 것으로 보아 오히려 고구려 이 전투에서 백제군과 고구려군은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369 의 역공에 대한 두려움이 백제 전체에 퍼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년에 백제군은 고구려군이 민가 약탈을 자행한 후에야 전장에 도달했지만, 하지만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은 백제 이번에는 고구려군이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고구려군의 동향을 모 인들에게 꿈에도 잊지 못할 감개무량한 기억으로 남았다. 개로왕이 북위에 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군은 이번에도 역시 정보가 없 보낸 표에 이 일을 거론하며, 釗의 머리를 베어서 달아매었다. 고 자랑한 는 상태에서 매복군에게 급습당했다. 정보전에서 고구려가 백제에 뒤지고 것에서 그 분위기를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사실상 승리했다고 볼 수 없는 있는 것이다. 전쟁이 이렇듯 백제인들의 자부심으로 남게 된 것은 그만큼 백제가 고구려 그러나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371년 겨울 근초고왕이 태자와 함께 를 강국으로 알고 두려워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3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 남진의 중심 지휘부인 평양성으로 쳐들어갔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끊임없이 전쟁을 했다. 고구려에게는 백제가 자국 다. 이때는 고구려도 백제의 동향을 감지했다. 백제의 침공에 대한 대응태 의 왕을 죽인 원수였으므로 대백제전이 가지는 의미가 남달랐다. 영토 확 세를 갖추고 고국원왕이 직접 전장에서 지휘를 했다. 그런데 전장에서 고 장을 위한 정복활동이거나, 대외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 경제적 기 국원왕이 유시에 맞고 말았다. 적국의 왕이지만 고구려왕 사유가 힘써 싸 반이 될 평야지대 확보 전쟁 등의 의미를 넘어서는 부모의 원수를 갚아야 워 막다가 유시에 맞아 죽었다. 고 백제본기에 나오는 것을 보면, 고국원왕 한다는 필연적이고 당위적인 목적과 의무가 내포되어 있었다. 29) 三國史記 卷24 百濟本紀 2 近肖古王 26年(371). 30) 三國史記 卷18 高句麗本紀 6 故國原王 41年(371). 31) 梁起錫, 1997, 百濟 近仇首王의 對外活動과 政治的 地位-高句麗와의 關係를 중심으로-, 百濟論叢 제6집,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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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제1절 고구려와의 관계 63 를 고구려에 빼앗겼기 때문으로, 이는 곧 한수유역 상실과 밀접한 관련이 수습하고 안정을 도모하면서 남부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다져 나갔다. 탐라 있다. 551년에 한수유역 수복작전을 벌여 백제는 한성과 평양을 비롯한 한 에 대해 압력을 강화하고,150) 사비지역에 관심을 가진 것151) 등이 그 증거이 강 하류의 6군을 차지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유역의 10성을 차지한 것도 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동성왕대에 한강유역 일대는 고구려가 차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당시의 영역귀속을 판단할 때에는 이 사안들을 모두 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152) 움직일 수 없는 판단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외에 당시 백제 내부의 상황과 그로 인한 국가의 정책방향 등을 고려 해야 한다. 동성왕 이전까지는 국왕이 시해되고 수도가 함락된 위기상황에 2) 무령왕대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 서 벗어나 나라를 안정시키기에도 급급한 상태였다. 황급히 천도한 새 도 읍지에서 국정운영을 가다듬기에 여념이 없었다. 동성왕대까지 고구려에 대한 백제의 대응은 매우 수동적이었다. 직접 고구려를 공격한 적은 한 번 도 없었다. 고구려의 사주를 받은 말갈이 쳐들어오거나144) 고구려군이 쳐들 어왔을 때145) 격퇴하거나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할 때 지원군을 보내주기는146) 해도 고구려 침공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사실 당시 고구려는 백제가 아닌 신라를 집중 공격했다. 백제는 그 틈을 타 남조 신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써 보호막을 마련하면서 내부를 수습하고 안정을 도모하는 분위기 였다. 남조에 사신을 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147) 고구려가 항로를 148) 장악하고 있어 실패하기도 했다. 무령왕의 재위연간은 문자왕의 재위 후반기와 안장왕(519~530) 초반기 에 해당한다. 무령왕대에 들어오면 동성왕대와는 양상이 사뭇 달라진다. 무령왕은 즉위 직후부터 수곡성과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153) 503년 506년 507년에는 한수 이북 지역에 있는 고목성을 둘러싸고 말 갈과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다.154) 뿐만 아니라 다음 사료를 보면 이때 백제 가 한성을 회복하고 한수 이북지역까지 지배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나-1) 겨울 10월에 고구려 장수 高老가 말갈과 더불어 漢城을 공격하고자 꾀하여 橫岳 아래 에 진군하여 주둔하였다. 왕은 군사를 보내 싸워 이를 물리쳤다.155) 신라와의 공수동맹을 성실히 지켜나갔 나-2) 봄 2월에 왕이 漢城으로 행차하여 좌평 因友와 달솔 沙烏 등에게 명령을 내려 漢北 으며, 더 나아가 혼인을 통해 우호를 강화하기도 했다.149) 이런 노력의 결과 州郡의 백성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雙峴城을 쌓게 하였다. 3월에 漢城으로 동성왕 말년에는 국력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488년과 490년 고 부터 돌아왔다.156) 구려가 백제를 침공해왔을 때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이처럼 동성왕대 정책의 기본방향은 내실을 기하는 것이었다. 안정을 되 이 사료의 한성과 횡악 쌍현성 등이 지명 이동한 것이 아니라면, 사료 찾은 재위 후반기에도 동성왕은 한성 회복을 추진하는 대신 내부의 혼란을 144)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東城王 4年(482) 9月. 145)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東城王 10年(488) 17年(495) 8月條. 146) 三國史記 卷3 新羅本紀 3 照知麻立干 3年(481) 3月, 6年(484) 7月 ; 卷26 百濟本紀 4 東城王 16年(494) 7月. 147)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東城王 6年(484) 2月. 148)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東城王 6年(484) 7月. 149)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東城王 15年(493) 3月. 150)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東城王 20年(498) 8月. 151)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東城王 12年(490) 9月. 152) 金榮官은 성왕대에 한강유역을 안장왕에게 빼앗기기 이전에는 줄곧 백제가 영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金榮官, 2000, 앞의 글, 89쪽). 153)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武寧王 1年(501) 11年, 2年(502) 11月. 154)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武寧王 3年(503) 9月, 6年(506) 7月, 7年(507) 5月. 155)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武寧王 7年(507). 156)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武寧王 23年(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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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성 방어체계를 견고하게 구축해 놓은 요동지역과 비교해 볼때 현저히 차이 제1절 고구려와의 관계 69 는 백제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가 나는 점이다. 그런데 5세기 후반 6세기 초반에 들어와 한강유역에도 산 성방어체계가 수립 되었다. 이는 방어선의 개념이 담긴 것으로서 그만큼 절박한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무령왕대에 이 지역을 백제에 빼 앗겼던 경험, 그리고 6세기 중반 경 백제와 신라의 동태 등이 한강유역의 방어체계가 더욱 강화되어 가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요컨대 무령왕대에 백제는 신라와 거리를 두는 가운데 독자적으로 고구 려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그 결과 국력을 상당히 회복할 수 있었고, 한 강유역을 되찾기도 했다. 그러나 재위기간 내내 한강유역을 안정되게 확보 하고 있지는 못했다. 이 지역을 두고 고구려와 공방전을 계속했다. 한성을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도를 되돌리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던 것도 그 때 문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도 백제와 고구려는 모두 중국 왕조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상대국을 견제하려 했다. 무령왕대 백제는 한강유역을 회복 하면서 남조와의 교류도 보다 원활해졌다. 전축분인 무령왕릉과 그 안에서 나온 유물들은 당시 梁과의 문물교류의 정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다) 7년(529) 겨울 10월에 고구려 왕 興安(안장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와서 북 쪽 변경의 穴城을 함락하였다. (왕은) 좌평 燕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 느리고 五谷의 벌판에서 막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169) 위의 사료에 보이듯 529년에 안장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북방 변경에 있는 혈성을 둘러 뺐다. 백제에서는 佐平 燕謨에게 명하여 步騎 3 만을 거느리고 오곡지원에서 막게 했지만 2천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낼 정도로 참패했다. 백제에서 동원한 군사가 보기 3만인 것으로 보아 안장왕 도 이에 상응할 정도의 대군을 이끌고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안장왕 으로서는 오랫동안의 준비와 계획 끝에 치른 격전이었다. 그런데 안장왕이 둘러 뺀 혈성과 대승을 거둔 오곡지원은 어디였을까? 고양지역에는 안장왕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170) 그에 따르면 안장 왕은 이전에 이곳으로 와서 한씨미녀와 인연을 맺었고, 뒤에 다시 와서 두 사람의 해후가 이루어 졌다고 한다. 이 설화를 통해 고구려가 한때 이 지역 을 상실했다가 되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29년 10월에 있었던 오곡지 원에서의 전쟁에서 백제는 무령왕대에 일시적으로 회복했던 한강유역을 다시 빼앗긴 것이다.171) 3) 성왕 16년(538)까지의 百濟와 高句麗의 관계 안장왕과 한씨미녀의 설화에 의하면 529년 고구려의 공격이 있기 전에 이미 한강유역의 재지세력과 고구려 측의 접촉이 비밀리에 이루어 졌다는 그러나 성왕대에 이르러 상황은 다시 변화되었다. 이때에도 백제와 고구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공격하고 재지세력이 내응함으로써 전쟁을 승 려의 관계는 여전히 적대적이었다. 두 나라는 상호 공방을 계속했다. 이 시 리로 이끌 수 있었다. 무령왕대에 백제가 회복했던 한성 지역을 안장왕이 기에는 고구려가 공세를 강화했고, 백제는 수세로 돌아섰다. 직접 출정해 大戰을 치른 후 되찾았던 것이다. 523년 5월에 무령왕이 훙거하고 성왕이 즉위했다. 이 해 8월 고구려가 패수를 공격하자, 성왕이 左將 志忠에게 步騎 1만을 거느리고 나가 적군을 물리치게 했다.168) 아마도 왕이 교체되는 시점의 혼란을 틈타 공격을 감행 했던 것 같다. 이때 고구려왕은 안장왕(519~531)이었다. 이후 고구려에서 168)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聖王 1年(523) 8月. 169)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聖王 7年(529) 10月. 170) 三國史記 卷37 地理 4 漢山州條 ; 卷35 地理 2 漢州條. 171)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1999, 조선전사 3, 158~159쪽 ; 金榮官, 2000, 앞의 글, 81 쪽 ; 조희승, 2002, 앞의 책, 196~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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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제1절 고구려와의 관계 73 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왕은 가야의 제세력들을 잘 무마했고, 그로 인 고려를 정벌하여 한성의 땅을 얻었다. 또 진군하여 평양을 정토하였는데 무릇 6군의 해 한강유역 회복 전쟁에 가야권의 나라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땅이다. 드디어 고지를 수복하였다.187) 왜 병력을 동원하기 위한 노력도 많이 했다. 백제가 왜에 救援軍을 요청 했다고 하는 日本書紀 欽明紀 8년조(547)의 기사, 왜에서 고구려의 强暴 이 사료들은 성왕의 한강유역 수복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정작 삼국 함을 언급하면서 백제에 화살 30구를 보냈다고 하는 欽明紀 11년조(550) 사기 백제본기에는 이에 관한 사료가 실려 있지 않다. 고구려본기에도 신 의 기사,180) 백제가 고구려의 爾林을 공략하고서 획득한 포로를 왜에 보냈 라가 공격해 와 10성을 빼앗아 갔다고만 나올 뿐 백제의 침략은 서술하지 다고 하는 같은 해의 기사181)등은 그런 노력을 잘 보여준다. 도 않았다. 열전의 거칠부전과 일본서기 를 통해 비로소 백제가 이 전쟁 백제는 신라와의 공수동맹도 가동했다. 성왕 26년(548) 봄 정월에 고구 에 가담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려가 濊를 동원하여 漢北의 獨山城을 공격하자, 성왕이 사신을 신라에 보 일반적으로 한강유역 공격을 위해 연합군을 결성하고 신라와 백제군이 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장군 朱珍이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데리고 침공할 지역을 나누는 등 전술전략을 총괄 계획하고 지휘한 나라는 백제라 독산성으로 달려와 고구려 군사와 싸워 이를 크게 격파하였다.182) 이때 죽 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백제측 자료에 의거했다고 여겨지는 日本書紀 거나 사로잡힌 고구려병이 대단히 많았다고 한다.183) 欽明紀의 기사를 통해 비로소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한성 공략 시 성왕 성왕은 이전부터 개별적으로 이어져오던 왜 가야 신라와의 군사동맹 을 한데 묶어 연합군을 형성했다. 그리고 551년 마침내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 직접 출정하여 지휘를 했다고 한다. 사실 한강유역을 상실한 성왕이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를 했으며, 그 준비의 결과가 551년의 전쟁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가장 라-1) 신라가 공격해 와서 10성을 빼앗아 갔다.184) 순조롭다. 성왕이 계획하고 총지휘한 551년 연합작전의 결과 백제는 한강 라-2)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에 침입케 하였는데, 이긴 기세를 타고 10개 군을 이남의 한성과 이북의 평양(양주) 등 6군을 획득했고, 신라는 죽령 바깥 고 빼앗았다.185) 현 이내의 10개 성을 차지했다. 라-3) 12년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大角 仇珍, 각찬 比台, 잡찬 耽知, 잡찬 非西, 파진찬 奴夫, 파진찬 西力夫, 대아찬 比次夫, 아찬 未珍夫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平壤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리의 186) 기세를 타서 죽령 바깥, 高峴 이내의 10군을 취하였다. 라-4) 이 해 백제 聖明王이 친히 무리 및 二國兵(이국은 新羅와 任羅이다.)을 거느리고 가서 그러나 신라와의 연합은 백제에게 치명적인 반전을 가져왔다. 오랫동안 공수동맹의 관계에 있던 신라와 백제였지만, 신라는 이전에도 고구려와 백 제가 싸움을 하는 틈을 타 어부지리를 얻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고구려와 백제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두고 서로 뺏고 빼앗기는 싸움을 벌일 때 신라 가 끼어들어 두 성을 모두 차지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188) 국제관계에서 각 국이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국의 이익인 것이다. 180) 日本書紀 卷19 欽明紀 11年(550) 春2月. 181) 日本書紀 卷19 欽明紀 11年(550) 夏4月. 182)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聖王 26年(548) 1月. 183) 三國史記 卷4 新羅本紀 4 眞興王 9年(548) 2月. 184) 三國史記 卷19 高句麗本紀 7 陽原王 7年(551) 9月. 185) 三國史記 卷4 新羅本紀 4 眞興王 12年(551). 186) 三國史記 卷44 列傳 4 居柒夫傳.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침으로써 한강 상류의 10개 군을 획득한 신라는, 187) 日本書紀 卷19 欽明紀 12年. 188) 三國史記 卷4 新羅本紀 4 眞興王 11年(550) 正月 ; 三國史記 卷19 高句麗本紀 7 陽 原王 6年(550) 1月 ;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聖王 28年(550) 正月.
74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제1절 고구려와의 관계 다시 고구려와 밀약을 맺고는 백제가 회복한 한강하류지역으로 진출했다. 75 할 수 있다.195) 한강 이북은 고구려, 이남은 신라가 차지한다는 약속을 파기 하고 신라가 모두 차지해버려 고구려인들의 분노를 샀던 것이다. 189) 마-1) 신라가 동북쪽의 변경을 빼앗아 新州를 설치하였다. 마-2) 백제의 동북변경을 취하여 신흥(백제기에는 주라 되어 있다.)을 설치했다.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190) 마-3) 이에 앞서 백제는 신라와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고려를 정벌하려고 도모할 때 진흥이 고구려로서는 남 북 양쪽에서 적을 맞이했기 때문에 백제 연합군과 적 극적으로 전쟁을 진행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유목세력인 돌궐의 침입으로 인해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던 요동 지역의 안정이 깨지게 되었기 때문이 말하기를 나라의 흥망은 하늘에 달렸는데, 만약 하늘이 고려를 미워하지 않으면 내가 다.196) 고구려로서는 비록 한성은 신라로 넘어갔지만 양주 일대라도 회복할 감히 바라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이 말을 고려에 전하였다. 고려가 그 말에 감격 수 있게 되고, 또 백제와 신라 두 나라를 떼어놓게 됨으로써 후고의 환을 하여 신라와 통호함으로써 백제는 신라를 원망하여 침범해온 것이다.191) 덜고 서북 변경 지역에 군사력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 마-4) 이 해에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신라가 이로 인하여 한성에 입거했다.192) 위 사료 마-1)과 마-2)에 보이듯 삼국사기 에는 신라가 백제의 동북변 경을 취해 신주를 설치했다는 내용만 나올 뿐 고구려와의 밀약 사실은 나 와 있지 않다. 그러나 마-2)에 의하면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모종의 모의 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점이 정확치는 않지만, 고려와 신라가 화 통하고 세를 합해 백제와 임나를 멸하려고 모의하였다고 하는 내용이 일 193) 본서기 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551년 제라의 한강유역 탈취 이후 552년 5월 이전 사이 어느 시점에 고구려 신라 두 나라가 화호했음을 알 수 있 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와 신라는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유역의 영유를 두고 모의를 한 것 같다. 마-4)에 보이듯 백제는 한성과 평양을 버렸지만, 신라는 한성으로만 들어갔으므로 한강 이북의 평양은 고구려가, 이남의 한 성은 신라가 차지하는 것으로 약속을 했던 것 같다.194) 이것은 뒤에 온달이 신라가 우리 한강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심히 한 탄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라고 말한 데서도 확인 189)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聖王 31年(553) 秋7月. 190) 三國史記 卷4 新羅本紀 4 眞興王 14年(553) 7月. 191) 三國遺事 卷1 紀異 2 眞興王條. 192) 日本書紀 卷19 欽明紀 24年條. 193) 日本書紀 卷19 欽明紀 13年(552). 194) 노중국, 2006, 古代 東아시아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백제의 한강 유역 회복을 중 신라와의 화호와 밀약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 같다.197) 신라로서도 한강 하류 유역을 차지하게 되면 경제적 이득과 함께 무엇보다 대중국 항로를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고구려의 제의에 응했다. 이때 백제와 신라 사이에 전투는 없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사료 4)에 백 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고 표현해 놓은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바 로 이 해에 성왕이 신라에 왕녀를 시집보내는 것을 보면 실제 두 나라가 전 투를 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198) 성왕은 신라와 고구려의 밀약사실을 알게 되자, 한강 하류지역을 스스로 포기했던 것이다. 그리고 는 더 큰 일을 위해 원망을 감추고 신라와의 혼인을 추진했다. 이것은 당시 삼국간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고구려와 백제 신 라는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나라와 상호 동맹을 맺거나 그것을 폐 기하거나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고구려와 백제, 백제와 신라의 관 계가 좋지 않았다. 장수왕의 적극적인 남진 정책실시 후 백제와 신라가 공 수동맹을 맺기는 했지만, 그 이전에는 적대적인 관계였다. 그러나 고구려 심으로-, 古代 東아시아에서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 왜의 관계 2005년도 고구 려연구재단 학술연구과제 연구결과보고서, 37쪽 참조. 195) 三國史記 卷45 列傳 5 溫達傳. 196) 盧泰敦, 1984, 5~6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고구려의 대외관계, 동방학지 44. 197) 盧泰敦, 1976, 高句麗의 漢水流域의 喪失의 原因에 대하여, 韓國史硏究 제13집, 52~55쪽. 198)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聖王 31年(553) 10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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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제2절 신라와의 관계 89 너질 때 고구려에 구원군을 요청할 틈도 갖지 못했다. 그에 따라 백제와 고 경우, 백제의 입장에서는 한성 북 동 방면에 대한 방어에 확실한 태도를 구려는 결국 각개 격파되고 말았다. 취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남북 양방에서 동시에 가해질 군사적 김현숙(동북아역사재단) 압력을 예방하고자 한다면, 한성 남쪽에 세력 근거를 두고 있었을 마한과 의 관계는 일정한 타협과 양보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통해 볼 때, 건국 직후의 백제는 주변 정세를 십분 고려하 여, 능동적 대외정책을 수행함으로써 자국의 실익을 최대한 확보하고자 했 제2절 신라와의 관계 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삼국시대 대외정책의 기본 전제가 자기 나라의 존립 과 실익 추구 및 세력 균형이었다는262) 점과 직결된다. 즉 신라와의 접촉 이 전의 대외교섭에 있어 백제는 이미 실익과 세력 균형의 원칙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제 위에 출발하는 백제와 신라의 초기 교섭을 살 1. 1~4세기 신라 관계의 시작 펴보면 아래의 사료 가]와 같다. 건국 직후 백제는 낙랑 마한 등과 외교적 교섭을 가지며 말갈과 군사적 사료 가]-① (63) 겨울 10월에 국왕께서 영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에 이르렀다. 이에 신라에 접촉을 갖고 있었다.259) 이때 백제의 대외교섭은 영토 획정 등의 문제에 있 사신을 보내어 회견을 요청하였으나, 신라가 응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권23 백 어 낙랑이나 마한 등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이며, 말갈의 침공을 적극적으 로 방어하였다. 그러나 똑같은 국경 분쟁의 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제본기 1 다루왕 36년). ② (64) 국왕께서 군대를 보내어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그래서) 병력을 이동하여 구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가 기병 2,000명을 동원 낙랑의 경우 우호관계의 결렬과 일전 불사의 의지를 보인 반면, 마한과의 하여 맞아 싸우는 바람에 패하여 달아났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1 다루왕 관계에서는 명분론에 밀려 양보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37년).263) 이쯤 백제는 말갈과 공방전을 벌이며260) 낙랑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말갈의 거주지나 활동 근거를 남한강 중 상류 유역으로 파악할261) ③ (66)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아 200명의 병력을 잔류시켜 지키도록 하였으나, 얼마가지 않아 신라에게 (다시) 패배하였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1 다루왕 39년). ④ (70) 병력을 보내어 신라를 침공하였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1 다루왕 43 년). 259) 三國史記 卷23 百濟本紀 1 溫祖王 4年(B.C.15) 8年(B.C.11) 10年(B.C.9) 13年 (B.C.7) 18年(B.C.1) 24年(A.D.6) 참조. 260) 三國史記 卷23 百濟本紀 1 溫祖王 2年(B.C.17) 8年(B.C.11) 10年(B.C.9) 13年 (B.C.6) 등. 261) 李康來, 1985, 三國史記 에 보이는 靺鞨의 軍事活動, 領土問題硏究 2, 高麗大 領土 問題硏究所, 61쪽. 한편 문안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보이는 말갈은 영서지역에서 활동한 貊系靺鞨 파악하고 있다(文安植, 1998, 三國史記 羅 濟本紀의 靺鞨 史料에 대하여 -靺鞨勢力의 地域的 分布 및 種族 構成上의 차이와 변화를 중심으로-, 韓國古 代史硏究 13, 韓國古代史硏究會 ; 2003, 한국 고대사와 말갈, 혜안, 68~69쪽). ⑤ (74) 장수를 보내어 신라를 침공하였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1 다루왕 47 년). 262) 盧重國, 1981, 高句麗 百濟 新羅 사이의 力關係變化에 대한 一考察, 東方學志 28, 延世大 國學硏究院, 46쪽. 263)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 1 脫解尼師今 8年에는 와산성과 구양성 공격의 동일한 내용이 각각 8월과 10월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90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⑥ (75) 겨울 10월에 또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1 다루왕 48년). ⑦ (76) 가을 9월에 와산성을 신라가 수복하였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1 다루 왕 49년). 제2절 신라와의 관계 91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교전 장소가 언급 되지 않은 사료 가]-④ ⑤ ⑧ 또한 와산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의 전 투였다고 파악해도 별 무리가 없다. (76) 가을 9월에 군대를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여 와산성을 다시 수복하고, 백제 그렇다면 이 시기의 백제와 신라의 전쟁은 와산성 방면으로 영토를 확장 로부터 그곳으로 와서 머물던 사람들 200명을 모두 죽였다( 삼국사기 권1 신 하려는 백제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정착하려는 진한계와의265) 항쟁으로 이 라본기 1 탈해이사금 20년). 해된다. 다루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회견을 요청한 것은 평화적인 방 ⑧ (85) 봄 정월에 병력을 보내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삼국사기 권23 백제 본기 1 기루왕 9년). 사료 가]의 경우, 사료 가]-①을 제외하고는 7건의 내용이 모두 백제와 신라의 교전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때 백제는 일부 말갈과의 군사 관계도 있기는 하나, 주로 신라와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것은 아마도 삼국 중심으로 서술된 삼국사기 의 자료적 한계와 함께, 당시 상황에서 백제가 취할 수 있는 군사 활동의 역량 때문으로 파악된다. 사료 가]-①은 백제가 낭자곡성(청주)까지 영토를 개척하여 신라 세력과 조우하게 되자, 신라에 회합을 요청한 것이다. 즉 현재의 충북 일원에 세력 을 확보한 백제가, 자신의 교전 대상이 신라에게까지 확대되는 것은 바람 직하지 않다는 정세 판단 아래 신라와의 우호를 원했던 것이라 보인다. 아 울러 접경에 따른 분쟁의 예방 필요성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단순한 사신의 파견 수준을 넘어 직접적인 회합을 요청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라는 다루왕(28~77)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 이후 백제는 사 료 가]에서 볼 수 있듯이, 주로 낭자곡성 구양성(괴산 또는 옥천) 와산성 (보은) 등 지금의 충청북도 지역에서 신라 세력과 교전을 갖게 된다. 특히 백제는 사료 가]-② ③ ⑥ ⑦에서 볼 수 있듯이, 와산성을 두고 신라와 법으로 해당 지역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라 보인다. 그러나 신라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아울러 이들 진한 계는 사료 가]-②의 기병 2,000명을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에서 볼 수 있 듯이, 이미 고도로 발달된 철기문화를 경험하고 온 집단이라 보인다. 그렇 기 때문에 다루왕의 회견 요청도 마다한 채, 백제와의 일전도 불사할 수 있 었다고 파악된다. 이처럼 사료 가]에서 보이는 백제와 신라의 첫 접촉은 군사적 충돌에서 시작되었으나, 신라에 대한 백제의 공세는 아무 소득 없이 끝났다. 이후 삼국사기 에는 20년 동안 두 나라 사이에는 별다른 접촉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전후의 사정에 대한 언급도 없이 등장하는 것이 양국의 평화적 교섭을 보여주는 사료 나]-①이다. 사료 나]-① (105)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요청하였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1 기루왕 29년). ② (113)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빙례를 하였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1 기루 왕 37년). (113) 3월에 백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 빙례를 하였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 기 1 지마이사금 2년) ③ (125) 신라가 말갈의 침략을 받자 국서를 보내어 군사를 요청하였다. 국왕께서 5명 치열한 교전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이 보은 지역은 후대에 신라가 백제의 양해 아래 추풍령을 넘어 삼년산성을 쌓은 곳이다.264) 즉 전략적으로 매우 264) 鄭雲龍, 1989, 5世紀 高句麗 勢力圈의 南限, 史叢 35, 高大史學會, 12쪽. 265) 천관우는 이때 백제와 교전하는 신라 는 남하 중인 舊辰國(辰韓系) 세력으로서, 후일 신라사에 포함되는 집단으로 보고 있다(千寬宇, 1975, 三韓의 成立 過程 -三韓攷 第1 部, 史學硏究 26 ; 1989, 古朝鮮史 三韓史硏究, 一潮閣, 183~185쪽).
92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제2절 신라와의 관계 93 의 장군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였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1 기루왕 49년). 등 국내 정치의 안정과 국방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아울러 국방의 측면에서 (125) 봄 정월에 말갈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 는 마두성과 가소성을 거점으로 하여 가야와 군사적 긴장 상태에 돌입해 있 들을 살해하고 약탈하였다. 가을 7월에 또 대령책을 습격하고 니하를 건너 오 자, 국왕께서 백제에 편지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백제가 장군 5명을 보내 었다.270) 따라서 사료 나]-①에는 백제의 화친 요청에 대한 신라의 반응이 우리를 도와주자 적들은 그 소문을 듣고 퇴각하였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1 언급되지 않았으나, 아마도 이때 신라는 백제 방면의 안정을 위하여 기루왕 지마이사금 14년). 의 화친 요구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④ (155) 겨울 10월에 신라의 아찬 길선이 모반을 하다가 일이 탄로나 도망하여 이후에도 백제는 거듭해서 한발 기근 외침 지진 수해 등에 많은 어 왔다. 신라 왕이 편지를 보내어 (길선의 송환을) 요청하였으나 보내지 않았다. 려움을 겪었다.271) 그러나 사료 나]-②에서 백제의 빙사가 신라에 파견되는 신라 왕이 노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는데, 여러 성들이 굳게 지키고 나 가 싸우지 않았다. 신라 군사들은 양곡이 떨어져 돌아갔다( 삼국사기 권23 백 제본기 1 개루왕 28년).266) 것처럼, 기루왕 때 백제는 신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백 제와 신라 사이에 최초로 보이는 빙사의 교류는 아마도 112년 10월 파사왕 의 사망함에 따른 조문과, 지마왕(112~134)의 즉위를 축하하는 의미로 이 사료 나]-① ② ③에 해당하는 기간인 기루왕(77~128) 때의 백제는 루어진 것이라 보인다.272) 성변 일식 지진 한발 대풍 사태 서리 우박 등의 자연재해가 속출 이러한 양국의 우호 분위기로 인하여 사료 나]-③과 같은 상황이 전개될 하여267) 국정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처럼 자연재해에 시달 수 있었다. 사료 나]-③은 대령책과 니하 일원에서 말갈의 침공을 받은 신 리던 기루왕은 한산에서 그러한 난국의 해소를 의미하는 상서의 상징으로 라가 백제에 도움을 요청하자, 백제가 신라를 도와 말갈을 물리친 것이다. 신록을 잡았다.268) 그 직후 백제는 사료 나]-①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에 이때 신라본기에 의하면, 말갈의 신라 공격은 정월과 7월에 걸쳐 있었다. 다시 화친을 요청하였다. 따라서 신라로서는 정월에 말갈의 공격을 받은 후, 예상되는 말갈의 공격 아마도 백제는 자연재해로 인한 국내 민심의 동요와 정치적 불안이 증폭 에 대비하여 사전에 백제에 청병할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되던 상황에서, 모처럼 상서의 징조가 나타나자 그를 계기로 민심의 수습과 처럼 사료 나]-①에서 양국이 최초로 우호관계를 맺은 후, 백제와 신라의 정치적 안정 제고를 위해 신라와의 화해를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269) 이때 신 관계는 외적에 대한 공동 군사 활동이 가능할 정도로 긴밀하였다. 라는 파사왕(80~112)이 진휼과 사면 등으로 민심을 수습하고, 권농 축성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 듯 보인다. 이는 일성왕(134~154) 때 신라가 지속적으로 말갈의 침공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273) 백제의 구 원이나 공동 군사행동이 보이지 않은 것에서 유추가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266) 이 기사는 백제본기에는 155년에 편입되어 있으나, 신라본기에 의해 165년 사건으로 파 악하는 것이 옳다고 보인다(李康來, 1993, 三國史記 本紀間 共有記事의 검토, 宋甲 鎬敎授停年退任紀念論文集 ; 1995, 三國史記 典據論, 民族社, 103쪽). 267) 三國史記 卷23 百濟本紀 1 己婁王 9年(85) 11年(87) 13年(89) 14年(90) 16年 (92) 17年(93) 23年(99) 참조. 268) 三國史記 卷23 百濟本紀 1 己婁王 27年(103). 신록을 상서 동물로 파악하는 견해는 이희덕, 1994, 三國時代의 祥瑞說, 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 上 -古代篇 高麗時代篇-, 一潮閣 ; 1999, 韓國古代 自然觀과 王道政治, 혜안, 223쪽 참조. 269) 鄭雲龍, 1996, 羅濟同盟期 新羅와 百濟 關係, 白山學報 46, 白山學會, 93쪽. 270)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 1 婆娑尼師今 2年(81) 3年(82) 5年(84) 8年(87) 14年 (93) 15年(94) 17年(96) 18年(97) 참조. 271) 三國史記 卷23 百濟本紀 1 己婁王 31年(107) 32年(108) 35年(111) 40年(116). 272) 鄭雲龍, 2006, 三國史記 交聘 記事를 통해 본 羅濟同盟 時期의 再檢討, 百濟硏究 44, 忠南大 百濟硏究所, 193쪽. 273)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 1 逸聖尼師今 4年(137) 6年(13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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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사료 라]-① (266) 가을 8월에 군대를 보내어 신라 봉산성을 공격하였다. 성주인 직선이 건 장한 병사 200명을 인솔하여 (성에서) 나와 공격하여 우리를 패배시켰다( 삼국 사기 권24 백제본기 2 고이왕 33년). ② (272) 겨울 11월에 군대를 보내어 신라를 침공하였다(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고이왕 39년). ③ (278) 겨울 10월에 군대를 출동시켜 신라를 공격하여 괴곡성을 포위하였다( 삼 제2절 신라와의 관계 99 ② (337)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빙례를 갖추었다( 삼국사기 권24 백제 본기 2 비류왕 34년). ③ (366) 신라로 사신을 보내어 빙례를 갖추었다(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근 초고왕 21년). ④ (368) 봄 3월 신라로 사신을 파견하여 좋은 말 2필을 보냈다( 삼국사기 권 24 백제본기 2 근초고왕 23년). 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고이왕 45년). (368) 봄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좋은 말 2필을 진상했다( 삼국사기 권3 신 (278)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괴곡성을 포위하였다. 파진찬 정원에게 명을 내 라본기 3 나물이사금 13년). 려 병력을 이끌고 가서 방어하도록 하였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2 미추이사 금 33년). ④ (283) 가을 9월에 군대를 보내어 신라의 변경을 침공토록 하였다( 삼국사기 권 24 백제본기 2 고이왕 50년). ⑤ (373) 가을 7월에 독산성주가 300명을 이끌고 신라로 달아났다(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근초고왕 28년). (373) 백제 독산성주가 백성 300명을 이끌고 투항하여 왔다. 국왕께서 그를 받 아들여 6부에 나누어 거주토록 하였다. 백제 왕이 편지를 보내어 양국의 화호 가 마치 형제와 같이 지내자고 약속을 하였는데 이제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간 위 사료 라]-① ③에서 앞서 사료 다]에서 보았던 봉산성 괴곡성 등이 백제의 주요 공격지로 등장함을 볼 수 있다. 즉 봉산성과 괴곡성이 3세기 백성들을 받아들이시니 화친의 의미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며 대왕에게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바라건데 그들을 돌려보내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답서를 보내어 백성이란 자들은 항상된 마음이 없기 때문에 생각나면 오고 싫어지면 떠나는 말 백제와 신라의 주요 교전지로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이들 성이 양국 세 것이 그들의 바램입니다. 대왕께서 백성들의 불안은 걱정하지 않으시고 과인만 력권의 접점에 위치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사료 라]-② ④의 신 을 책망하시니 어찌 그리 심하십니까? 라고 하였다. 백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라 변경도 정황 상 봉산성 괴곡성 등지와 관련된 것이라 보인다. 다시는 (이 일에 대하여) 말을 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3 나물이 그러나 사료 라]의 전투 결과 봉산성과 괴곡성은 여전히 신라의 장악 아 래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이들 지역이 와산(보은)과 관련하여 등장 사금 18년). ⑥ (403) 가을 7월에 군대를 보내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아신왕 12년). 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봉산성과 괴곡성은 추풍령을 경계로 위치한 지역이 었을 것이라 보인다. 즉 3세기 말까지 백제의 영역 확장은 충북 지역에 있 어서는 추풍령이 남쪽 경계였던 것이라 파악이 가능하다. 3세기 후반 거듭되는 신라 침공에서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있던 백 제가 신라에 화친을 요청한 것이 사료 마]-①이다. 이쯤 신라는 사료 다]와 그런데 이처럼 지속적으로 신라를 공격하던 백제 고이왕이 그 재위 말년 사료 라]에서 볼 수 있듯이, 거의 120년 동안 단속적으로 백제와 전쟁을 치 에 신라에 화친을 요청하였다. 그 이후 삼국사기 에는 백제와 신라 사이 렀다. 따라서 신라 조정에서는 백제를 불신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여,280) 호 에 별다른 전쟁 기사가 보이지 않은 채, 거의 90년 동안 평화적인 관계가 의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이때 백제의 화친 요청에 대하여 신라의 반응이 유지된 것처럼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 사료 마]이다. 어떠하였는지는 확실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백 제의 화친 요청만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료 마]-① (286) 봄 정월에 신라로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요청하였다(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고이왕 53년). 280) 三國史記 卷2 新羅本紀 2 儒禮尼師今 12年(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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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제2절 신라와의 관계 103 다고 보인다. 이후 신라는 왜의 침입을 받을 때 고구려 광개토왕(391~413)의 이 백제를 향하게 됨으로써, 신라는 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피폐를 예방할 군사적 원조를 통해 극복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하여 신라는 고구려에 종속적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고구려에게 종속적인 위치에 놓여 있던 신라는 점차 인 외교 관계를 맺게 된다.290) 이러한 상황에서 사료 마]-⑥처럼 백제가 신라 고구려의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러한 신라의 움 의 변경을 공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백제와 신라는 두 나라 사이의 관계 직임에 짝하여 백제가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한 것이 사료 바]이다. 는 물론이며, 고구려라는 커다란 변수를 안고 양국 관계를 전개하게 되었던 사료 바]-① (433) 가을 7월에 사신을 신라로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였다( 삼국사기 권25 것이다. 백제본기 3 비유왕 7년). 이러한 전개 과정을 종합해 보면, 백제는 독산성주의 신라 귀부 사건으 ② (434) 봄 2월에 사신을 신라로 보내어 좋은 말 2필을 주었다. 가을 9월에 또 로 인한 양국 관계의 냉각을 제외하고, 대부분 주변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 흰매를 보냈다. 10월에 신라가 좋은 금과 명주로써 보답하였다( 삼국사기 권25 면서 능동적 외교 관계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가 성장 과정의 문 백제본기 3 비유왕 8년). 제나 고구려와의 대치 등으로 인하여, 4세기 후반 동진과의 교섭을 제외하 ③ (454) 8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3 눌 지마립간 38년). 면, 그 대부분의 교섭 대상 국가가 신라에 한정되고 있다는 제약은 있다. ④ (455)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자 왕께서 병력을 보내어 구원하였 그러나 이 시기 백제의 대외 관계는 주변 국가와 상호 대등한 교빙 관계를 다(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3 눌지마립간 39년). 맺고 자국의 필요에 의해 수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와의 관계 또한 이 러한 기조 위에서 백제의 입장이 반영된 관계를 맺고 있었다. 427년에 있었던 고구려의 평양 천도를 강력한 남진정책의 의지로 이해 할 경우, 사료 바]-① ②는 그에 대응하는 백제와 신라의 동맹 결성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고구려의 평양 천도는 중앙 귀족에 대한 견제책임과 2. 나제동맹기의 협력과 갈등 294) 동시에, 요하의 서쪽을 지향하는 과감한 서진정책의 전개 과정에서 배 후의 불안 요인으로 성장하는 신라와 백제에 대한 공세적 방어 조처를 취 399~400년에 왜의 침공을 받은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 하였다.291) 이때 왜의 신라 침공은 가야 방면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백제 292) 가 가야를 발판으로 왜를 동원하여 행한 군사행동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하튼 이 전쟁의 결과 신라의 입장에서는 5세기 전반 들어 고구려 293) 에 대한 외교적 예속도가 심화되었다. 한 것이다.295) 더욱이 5세기 후반까지 경상북도 내륙지방과 동해안 방면의 신라 영토에 까지 고구려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었으며,296) 449년의 상황을 전하고 있는 297) 중원고구려비에는 신라 영토 내에 자국의 당주를 주둔시키고 있던 고구 반면에 고구려의 주요 공격 방향 290) 鄭雲龍, 1994, 5~6世紀 新羅 高句麗 關係의 推移 -遺蹟 遺物의 解釋과 關聯하여-, 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 15, 慶州市, 43~45쪽. 291) 廣開土王陵碑 永樂 9年(399) 및 10年(400) 庚子. 292) 金鉉球, 1993, 任那日本府硏究 -韓半島南部經營論批判-, 一潮閣, 101쪽. 293) 鄭雲龍, 1994, 앞의 글, 44~49쪽 참조. 294) 徐永大, 1981, 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 -王權 및 中央集權的 支配體制의 强化과정과 관련하여-, 韓國文化 2, 서울大 韓國文化硏究所, 126~128쪽. 295) 朴京哲, 1989, 高句麗 軍事戰略 考察을 위한 一試論 -平壤遷都以後 高句麗軍事戰略의 志向點을 中心으로-, 史學硏究 40, 韓國史學會, 56쪽. 296) 鄭雲龍, 1989, 앞의 글, 27쪽 및 鄭雲龍, 2006, 中原高句麗碑의 建立 年代, 白山學 報 76, 白山學會, 156~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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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삼국사기 에 보이는 나제동맹기 삼국 사이 전쟁 기사를 살펴보면, 455 년부터 500년까지 신라 고구려 사이 7회의 전쟁 기사와 백제 고구려 사 이 4회의 전쟁 기사가 있다. 반면에 501년부터 550년 직전까지는 백제 고구려 사이에만 10회의 전쟁 기사가 보인다. 즉 5세기 후반은 고구려의 제2절 신라와의 관계 107 (468) 봄 2월에 국왕께서 말갈 병력 1만 명을 이용하여 신라 실직성을 공격하 여 빼앗았다(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6 장수왕 56년). ② (469) 가을 9월에 장수를 보내어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침범하였다. 겨울 10월 에 쌍현성을 수축하고 청목령에 큰 책을 설치하고 북한산성의 군졸들을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개로왕 15년). 선제 공격에 의한 신라와 고구려의 전투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6세기 ③ (475) 9월에 국왕께서 병력 3만 명을 이끌고 백제를 침범하여 왕의 도읍인 한 전반은 고구려와 백제의 상호 공방전으로 일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 성을 함락하고 백제왕 여경을 살해하였으며, 남녀 8,000명을 포로로 잡아 귀환 체로 보아 500년쯤을 경계로 하여 고구려의 주요 교전 대상국이 신라에서 하였다( 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6 장수왕 63년). 백제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475)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거련이 병력 3만 명을 이끌고 와서 왕도인 한성을 포위하였다. 국왕께서 성문을 잠근 채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또 500년 이전에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를 상대로 한 전쟁을 11회에 걸쳐 병력을 4방향으로 나누어 협공을 하였다. 또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성문을 불 수행하는 중 나제동맹군의 공동방어작전이 5회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 태웠다. 백성들이 두려움에 어떤 사람은 나가 항복을 하자고 하였다. 왕이 어찌 반면에 그 이후에는 10회에 걸친 백제 고구려 사이의 전쟁에서 동맹군으 할 바를 몰라 수 십 기를 이끌고 성문을 나서 서쪽으로 도망갔다. 고구려 사람 로서의 신라의 참전이 단 1회만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전쟁 양상을 기준으로 이 기간을 각기 나제동맹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이 경우 들이 추격하여 왕을 살해하였다(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3 개로왕 21년). (475) 개로왕의 재위 21년 때 고구려가 와서 한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였다. 개로 왕은 성을 굳게 닫고 스스로 지켰으며 문주를 시켜 신라에 구원을 요청토록 하 전기와 후기의 분기점은 501년 백제 동성왕(479~501)이 신라에 대비하여 였다. 문주가 1만 명의 병력을 얻어 돌아오자 고구려 병력은 비록 물러났으나 탄현(대전 부근)에 책을 쌓는 것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성이 파괴되고 개로왕이 죽었다. 겨울 10월에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삼국 결국 방어동맹으로서의 나제동맹의 성격을 6세기 전반에까지 일률적으 사기 권25 백제본기 3 문주왕 즉위년). 로 적용하기는 곤란하다.302) 이 경우 삼국 사이 교전 대상국의 현격한 교체 가 고구려의 정책 변화에 따른 것인지 전쟁을 회피하고자 하는 신라의 의 앞서 살펴본 것처럼 450년을 전후하여 신라 사회에서는 과도한 고구려 도에 의한 것인지도 의문의 대상이며, 그러한 현상이 초래된 이유나 백제 의 영향이나 압력에 대한 반발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따라서 그러한 신라 의 대응에 대한 구명이 필요하다. 이에 먼저 백제와 신라의 협력 관계가 돈 의 움직임에 대한 고구려의 위협 또한 점차 직접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 독했던 나제동맹 전기(455~500) 나제동맹군의 군사 활동을 통해 백제와 었다. 이에 대한 신라의 대응이 결국 사료 바]-④에서 처럼 백제와의 군사 신라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적 공동 보조 모색으로 나타났다. 결국 433년 이래 모색되어 온 백제와 신 라 사이의 동맹이 가시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백제와 신라의 공동 사료 사]-① (468) 봄에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경의 실직성을 습격하였다. 가을 9월에 하 군사 활동에 의해 고구려군을 물리치게 되자,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에 대 슬라 사람으로서 나이 15세 이상인 자들을 징발하여 니하니하는 일명 니천이라 한다 한 자신감으로 464년 경주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군을 몰살시켰다.303) 에 성을 쌓았다(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3 자비마립간 11년). 302) 梁起錫, 1994, 앞의 글, 76쪽. 303) 日本書紀 卷14 雄略 8年(464) 2月. 한편 김현숙 장창은 등은 이 기사가 454년 이전 의 사실을 종합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金賢淑, 2002, 4~6세기 경 小白山 脈 以東地域의 領域向方 - 三國史記 地理志의 慶北地域 高句麗郡縣 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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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제2절 신라와의 관계 111 있듯이 고구려가 재차 백제 한성을 공략하고자 하는 모습이 사서에 남아 구려는 한수 이북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이렇게 고구려의 한 있는 것이다. 성 공략은 결국 지금의 한강을 중심으로 하여 백제와 고구려가 각각 강남 그런데 현재 한강 북쪽 유역의 아차산 홍련봉 용마산 망우산 시루 과 강북을 차지하며 대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봉 등지에는 고구려의 보루성들이 남아 있다. 이들 보루성은 임진강 유역 의 고구려 관방 시설들과 연결되고 있다.312) 이 중 아차산 제4보루의 경우 대략 100명 정도의 병력이 주둔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출토된 유물 중 토기류는 모두 26개 기종에 538개체 분이다. 이들 토기류의 대부분은 6세 사료 아]-① (481)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경을 공격하여 호명성 등 7성을 빼앗았고, 계속 해서 미질부로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와 백제 가야의 원병이 길을 나누어 고구 려를 막아, 고구려군이 패퇴하였다. 그들을 추격하여 니하의 서쪽에서 격파하여 수 천 명의 목을 베었다(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3 소지마립간 3년). 기 이후의 토기로 편년되고 있다.313) 보고자들은 이 제4보루 유적의 편년을 ② (484) 가을 7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공격하였다. 우리 군사가 백제와 합동 5세기 중반~6세기 중반으로 편년하고 있으나, 출토 토기류를 통해 판단한 으로 모산성 아래에서 고구려를 공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삼국사기 권3 신라본 다면 해당 유적은 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기 3 소지마립간 6년). 한편 한강 이남 지역의 경우 몽촌토성에서는 고구려 유물이 확인된 바 ③ (489) 가을 9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공격하여 과현까지 이르렀다. 겨울 10 월에 호산성을 함락하였다(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3 소지마립간 11년). 있다. 즉 몽촌토성에서는 모두 15개 기종의 343개체 분의 고구려 토기가 ④ (494) 가을 9월에 장군 실죽 등이 고구려와 살수의 들판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확인되었다. 이것은 아차산 제4보루에 비해 많은 숫자의 군대가 주둔한 것 못하고 견아성으로 물러나 지켰다. 고구려 군사가 견아성을 포위하였으나 백제 314) 치고는 토기의 수량이 매우 적은 것이다. 또 백제의 왕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에서는 고구려 유물의 출토가 없다. 따라서 몽촌토성의 경우는 고 구려가 백제의 한성을 공략할 때 점령하여 일시 주둔하면서 유물을 남긴 왕 모대가 병력 3,000명을 보내어 포위를 풀어주었다(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3 소지마립간 16년). ⑤ (495) 가을 8월에 고구려가 백제 치양성을 포위하였다. 백제가 구원을 요청하 자 국왕께서 장군 덕지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가서 구하게 하였다. 고구려 군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에 풍납토성은 고구려에게 함락되었으나 곧 이은 신 사들이 궤멸하였다. 백제 왕이 사신을 보내어 감사하였다( 삼국사기 권3 신라 라 구원병의 도착으로 인하여 고구려군이 퇴각했기 때문에 고구려 유물이 본기 3 소지마립간 17년). 보이지 않는 것이라 판단된다. 따라서 웅진 천도 이후 백제의 주력은 공주로 옮겨갔으나,315) 삼국사기 를 통해 보면 475년 이후 백제는 한수(한강) 이남 지역을 여전히 장악하고 ⑥ (496) 가을 7월에 고구려가 우산성을 공격하였다. 장군 실죽이 나아가 니하 가 에서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3 소지마립간 18년). ⑦ (497) 8월에 고구려가 우산성을 함락하였다(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3 소지마 립간 19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한강 북안의 고구려 보루성을 통해, 당시 고 웅진 천도 직후 백제에서는 병관좌평 해구가 문주왕(475~477)을 시해 하였다.316) 문주왕 시해 이후 해구는 이어 삼근왕(477~479)을 즉위시키고 312) 白種伍, 2007, 南韓地域 高句麗 關防體系, 先史와 古代 26, 韓國古代學會, 301쪽. 313) 임효재 외, 2000, 아차산 제4보루 -발굴조사 종합보고서-, 서울대 박물관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214쪽 224쪽. 314) 최종택, 2002, 夢村土城 內 高句麗遺蹟 再考, 韓國史學報 12, 高麗史學會, 29~30쪽. 315) 강종원, 2005, 수촌리 백제고분군 조영세력 검토, 百濟硏究 42, 忠南大 百濟硏究 所, 52쪽. 군국정사를 천단하다가 대두성을 근거로 모반을 꾀하였으나 실패하였 316)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文周王 3年(477) 4年(478). 단 문주왕 4년 기사는 3년 기사로 파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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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제2절 신라와의 관계 115 로서의 나제동맹의 효과적 방어 활동은 백제와 신라 양국의 내정 안정에도 원하여 축성한 것인 듯하다. 따라서 우산성의 함락은 실직 하슬라가 고구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특히 백제의 경우 상서의 상징 가화인 합영화를 헌 려의 군사적 위협에 노출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때 백제의 구원이 보 상 받아 덕치를 과시하면서, 소지왕의 신궁 설치와 비견되는 의미를 갖는 이지 않는 것은 이 지역이 백제로부터 원격지일 뿐 아니라, 고구려 충주 거 천지제의 시행으로 사상적 일체감을 조성하고, 정청인 남당에서 군신들에 점으로 인하여 백제 구원군의 교통로가 확보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 연회를 베풀어 국왕으로서의 위의 과시와 함께 국내 통치의 안정을 확 324) 고히 할 수 있었다. 이후 6세기 들어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계속된 전쟁에도 불구하고 나제 동맹군의 일원인 신라의 군사 활동은 548년까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제 그 결과 491년에 기근으로 인하여 백제 백성들이 신라로 도망가는 사건 동맹군의 활동이 보이지 않는 이 기간에, 전후의 상황에 대한 언급은 없으 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나제동맹의 유지와 우호관계의 강화를 위하여 493 나, 신라와 백제의 외교적 교섭이 주목되는 바이다. 일단 전쟁 기사를 중심 325) 년 동성왕이 신라에 청혼하여 이찬 비지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나 으로 나제동맹 후기(501~554)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제동맹 전 기간을 통해 볼 때 동성왕과 소지왕의 시기에 동맹군의 활동이 가장 현저했다. 고구려에 대한 효과적 방어가 이 기간에 집중되고, 양국 사 이에 결혼까지 이루어지고 있음으로 보아 이때가 백제와 신라 사이 우호와 신뢰가 가장 돈독했던 시기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 신라 양국은 사료 아]-④ ⑤과 같이 고구려 세력 의 군사적 파상 공세에 대하여 공동 방어로 대응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고 구려의 군사행동은 백제 한성 공략 이외에는 백제와 신라 연합군의 방어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반도 중부 내륙의 경우 진천 - 청천 - 조령선에서 전 선이 정돈됨으로써 충주를 거점으로 한 백제 신라 전선의 확대에 실패하 326) 였다. 사료 자]-① (501) 겨울 11월에 달솔 우영을 보내어 병력 5,000명을 이끌고 고구려의 수곡 성을 습격토록 하였다(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4 무령왕 즉위년). ② (502) 겨울 11월에 병력을 보내어 고구려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삼국사기 권 26 백제본기 4 무령왕 2년). ③ (506) 겨울 11월에 장군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토록 하였다. 큰 눈이 와서 사졸 들이 얼어 죽자 돌아왔다( 삼국사기 권19 고구려본기 7 문자왕 15년). ④ (507) 여름 5월에 고목성 남쪽에 두 개의 책을 세웠다, 또 장령성을 축조하여 말갈에 대비하였다. 겨울 10월에 고구려 장군 고노와 말갈이 한성을 공격할 것 을 모의하여 횡악 아래에 와서 주둔하였는데, 왕이 병력을 내보내어 그들을 격 퇴하였다(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4 무령왕 7년). 그나마 고구려가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아]-⑥ ⑦에서 볼 ⑤ (512) 가을 9월에 고구려가 가불성을 습격하여 빼앗고, 병력을 이동하여 원산성 수 있듯이 신라 동해안 방면에 대한 군사적 진출을 기도하여 강릉 삼척 을 격파하고 많은 백성들을 살육했다. 국왕께서 뛰어난 병사 3,000명을 이끌고 인근의 우산성을 공략함으로써 신라의 북단 군사 거점을 위협할 수 있게 위천 북쪽에서 전투를 하였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국왕의 병력이 적은 것을 보 되었다는 점이다. 고 얕잡아 보아 군진을 설치하지도 않았다. 국왕께서 기습 작전으로 급히 공격 하여 고구려를 크게 격파하였다(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4 무령왕 12년). 신라의 우산성은 아]-⑥ 기사에 처음 등장하는 지명으로, 사료 사]-①에 ⑥ (523) 봄 2월에 국왕께서 한성을 순행하셨다. (이때) 좌평 인우와 달솔 사오 등 서 468년에 실직으로 진출하려는 고구려에 대비하고자 하슬라 백성을 동 에게 명을 내리어 한수 북쪽의 주 군 백성 중에서 나이 15세 이상인 사람을 징 발하여 쌍현성을 쌓았다. 3월에 한성에서 돌아오셨다(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4 무령왕 23년). 324)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東城王 11年(489). 325)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東城王 15年(493) 및 卷3 新羅本紀 3 炤知麻立干 15年 (493). 326) 鄭雲龍, 1989, 앞의 글, 15쪽. (523) 가을 8월에 고구려 병력이 패수에 이르렀다. 국왕께서 좌장 지충에게 명 령을 내려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나가 싸워 고구려를 물리쳤다( 삼국사 기 권26 백제본기 4 성왕 즉위년).
116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제2절 신라와의 관계 117 ⑦ (529) 겨울 10월에 고구려 왕 흥안이 직접 병력과 군마를 이끌고 침범하여 와 백가의 난을 평정한 이후 전쟁을 통해 귀족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북쪽 변경의 혈성을 빼앗았다. 이에 좌평 연모에게 명을 내리어 보병과 기병 3 자 하는329) 것이기도 하다. 한편 당시 신라는 소백산맥 이남 경북 내륙 지역 만 명을 이끌고 오곡의 들판에서 맞아 싸우도록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여 전사한 사람이 2,000여 명이었다(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4 성왕 7년). ⑧ (540) 가을 9월에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하였다. 국왕께서 정예 기병 5,000명 을 보내어 백제를 격파하였다( 삼국사기 권19 고구려본기 7 안원왕 10년). 과 동해안 방면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당주를 축출하고, 소지왕이 나이 군(영주)까지 순행하며 영역 확인 작업과 함께 신라 영내에 대한 통치력의 관철에 박차를 가하였다.330) ⑨ (548) 봄 정월에 고구려 왕 평성이 예와 함께 공모하여 한수 북쪽의 독산성을 결국 동성왕이 탄현에 책을 설치한 것은 이와 같은 신라의 움직임이 대 공격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국왕이 장군 외 팽창으로 이어질 것에 대한 대비였다. 아울러 동성왕 12년(490)에 이어 주진에게 명을 내려 갑졸 3,000명을 이끌고 출전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길을 달려 독산성 아래 도착하여 고구려 군사와 한 번 싸워 그들을 크게 격파하 였다(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4 성왕 26년). 거듭된 사비 전렵 또한 장차 사비 천도를 위한 예비 작업의 성격을 띠고 있 었다고 보인다. 이것은 사비 방면의 가림성 축조 자체가 신라로부터 사비 로 이어지는 교통로의 방비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사료 자]-① ②는 백제가 고구려의 수곡성을 선제 공격함으로써 백제 따라서 위사좌평 백가의 불만과 동성왕 시해는 사비 천도 움직임에 대한 와 고구려 사이의 군사 분쟁이 있게 된 것을 보여주는 동일한 사건이다. 즉 반발로 보인다. 만일 동성왕이 사비 천도를 염두에 두었다면, 이는 본격적 동성왕이 501년 12월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유월 인 신라 고구려 전선의 확대를 예상 또는 의도하고 수도를 안전한 곳으로 즉위년칭원법에 따라 무령왕의 즉위는 502년 정월이다. 따라서 사료 옮겨 놓고 대외 군사 활동을 본격화하려 한 것이라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자]-①은 사료 자]-②에 해당하는 내용이라 보인다. 아울러 삼국사기 에 이 시해됨으로써 백제의 이러한 의도는 무산되고, 오히려 자]-③ ④ 보이는 삼국 사이의 관계 기사가 고구려본기에만 기록된 예가 없고, 4세기 ⑤ ⑥ ⑦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의 집중적 공격을 받게 된다. 게다가 말~6세기 전반 백제와 관련된 내용은 백제본기의 자료 비중이 현저하다는 가야 방면에서는 신라의 진출로 인하여 기왕에 가야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점을327) 감안한다면, 이들 내용을 전하고 있는 문자왕 12년(503) 기사 또한 백제인들의 일부가 구축당하여 유식자가 되고, 백제는 그들의 귀환과 정착 1년의 오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을 위하여 귀농 조치를 취하여야만 되었다.331) 그런데 사료 자]-① ②에 앞서, 동성왕은 재위 23년(501) 7월에 탄현에 그런데 사료 자]-④의 경우 고구려가 한성을 공격하기 위해 횡악 아래에 책을 설치하여 신라에 대한 대비를 하였다. 또 8월에는 가림성(부여 임천 와서 주둔을 하였는데, 그것을 백제가 격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 백제 면)을 축조하고, 10월와 11월에는 2회에 걸쳐 사비(부여)에서 전렵을 하다 가, 12월에 가림성주로 부임 명령을 받은 백가의 반발로 인하여 백가에게 시해되었다.328) 이 경우 사료 자]-①에서 무령왕이 수곡성을 공격하는 것은 327) 李康來, 1993, 三國史記 本紀間 共有記事의 검토, 송갑호 교수 정년퇴임기념 논문 집, 591쪽. 328)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東城王 23年(501). 329) 梁起錫, 2005, 5~6세기 百濟의 北界 -475~551년 百濟의 漢江流域 領有問題를 중심 으로-, 博物館紀要 20, 檀國大 石宙善紀念博物館, 41쪽. 330) 鄭雲龍, 1994, 앞의 글, 60쪽. 331) 이강래는 昌寧과 全州에 比斯伐이라는 동일 古號가 남게 된 이유를 구명하는 과정에서 三國史記 卷44 列傳 4 異斯夫에 보이는 지증왕 때(512년 이전) 신라의 가야 진출과 日本書紀 卷17 繼體 3年(509) 2月의 任那 거주 백제인의 귀환 기사,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武寧王 10年(510)의 內外 游食者 歸農 조치를 묶어 이와 같이 이해하였다(李 康來, 1987, 百濟 比斯伐 考, 崔永禧先生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探求堂, 42쪽).
118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제2절 신라와의 관계 119 의 방어는 한수 이북 지역에서 전개된 것으로 판단된다. 즉 사료 자]-④를 료 자]-⑨를 제외하고는, 신라의 구원이 없었다는 점에 대하여 기왕의 연 통해 백제는 한수 이북 지역에 군사적 진출이 가능했었다고 보인다. 아울 구에서 많은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백제와 러 이 시기의 백제는 521년에 무령왕(501~523)이 양에 사신을 보내어, 한 신라 관계의 변화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 다음의 사료이다. 성을 공파당한 이후 잠시 국세가 위축되었으나 근래 고구려를 여러 차례 격파하면서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자신하였으며, 양으로부터 작호를 받기 도 하였다.332) 이때 다시 강국이 되었다. 는 것은 백제가 한성 지역 전체를 차지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보인다. 이러한 것은 사료 자]-⑥에서 봄에 무령왕이 한성을 순행하며 한 달을 머물다 돌아온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즉 당시의 한성은 현재의 강남 강북 지역 모두가 백제에게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령왕은 새로이 회복한 한수 이북 지역을 돌아보며 백성들을 위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의 한수 이북 지역 회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사료 차]-① (512 以前) 이사부혹은 태종이라 한다의 성은 김씨이며 나물왕의 4세손이다. 지도로 국왕 때에 바닷가를 다스리는 관원이었는데 임기응변으로 거도성을 습격하여, 말 오락으로 가야혹은 가라국이라 한다를 빼앗았다. 13세 되던 임진년에 하슬라 군주가 되어 우산국을 병탄할 계획을 세웠다. ( 삼국사기 권44 열전 4 이사부). ② (522) 봄 3월에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어 청혼을 하였다. 왕이 이찬 비조부의 딸을 보내어 결혼하였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4 법흥왕 9년). ③ (524) 가을 9월에 왕이 남쪽 변경으로 순행을 나아가 영토를 개척하였다. 가야 국 왕이 와서 국왕을 만났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4 법흥왕 11년). ④ (525) 봄 2월에 신라와 서로 빙례를 갖추었다(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4 성 왕 3년). 사료 자]-⑦을 보면 고구려 안장왕(519~531)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혈 ⑤ (532) 금관국 왕 김구해와 그의 비 및 세 아들인 장남 노종, 둘째 무덕, 셋째 무 성을 공략한 다음 오곡에서 백제의 대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 이 전투에 력이 나라의 폐백과 보물을 바치며 항복하여 왔다. 국왕이 그들을 예의로써 대 서 백제 성왕(523~554)은 패배하였다. 고구려 국왕이 직접 백제를 공격한 접하여 최고 높은 등급을 수여하고 본국을 식읍으로 주었다. 아들 무력은 벼슬 것은 475년의 한성 공략 이후 이 사례가 처음이다. 따라서 이 전투는 한성 공략을 염두에 둔 것이며, 백제가 패배하였다는 것은 한수 이북 지역이 다 시 고구려의 장악 아래 놓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333) 이어 고구려는 사료 자]-⑧에서 우산성을 공격해 온 백제를 물리치고, 을 하여 각간에까지 이르렀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4 법흥왕 19년). ⑥ (538) 봄 사비일명 소부리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했다( 삼국사기 권 26 백제본기 4 성왕 16년). ⑦ (541)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자 그것을 허락하였다( 삼국사기 권 4 신라본기 4 진흥왕 2년). 사료 자]-⑨에서는 한수 북쪽의 백제 독산성을 공격하였다. 이 독산성은 백제의 입장에서는 한수 이북의 거점성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사료 차]-④ ⑦의 경우 이들 내용은 각기 상대국 본기에는 보이지 백제는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신라는 한강 하류 지역에서의 군사 작 않는다. 그러나 이 두 기사를 한 데 묶어 생각해보면, 541년에 신라가 백제 전 경험을 살리려 적극 지원을 하였던 것이다. 의 화친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 이전에 양국 사이에 외교적 단절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5회에 걸쳐 고구려의 침공을 받는 백제에 대하여, 사 동맹의 파기에 버금가는 상황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상정할 수 있다. 특히 백제의 화친 요청을 신라가 허락 했다는 표현은 동맹의 결렬 위기가 백제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 경우 동맹 결렬 332)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 4 武寧王 21年(521). 333) 梁起錫, 2005, 앞의 글, 43쪽. 반면에 김수태는 오곡 전투의 패배가 백제에게 그리 큰 타격은 아니었다고 보고 있다(金壽泰, 2006, 백제 성왕대의 변경 ; 한강유역을 중심으 로, 百濟硏究 44, 忠南大 百濟硏究所, 133~134쪽). 위기의 계기 또는 시점은 사료 차]-④의 525년 교빙 이후가 될 것이다. 특 히 525년 기사는 교빙 임에도 불구하고 해당 내용이 백제본기에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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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제2절 신라와의 관계 135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당에 (사태의) 급박함을 알렸다. 국왕께서 이러한 말을 아막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전투 이후 오히려 신라가 소타성 듣고 (전투 준비를) 그만두었다 삼국사기 권27 ( 백제본기 5 무왕 28년). 등 4성을 축성하여 백제 영토를 위협하자, 백제가 4만 대군을 동원하여 신 ⑩ (632) 가을 7월에 병력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삼국 사기 권27 백제본기 5 무왕 33년). ⑪ (633)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어 신라 서곡성을 공격토록 하여 13일만에 빼앗 았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5 무왕 34년). ⑫ (636) 여름 5월에 국왕께서 장군 우소에게 명을 내려 갑옷 입은 군사 500명을 이끌고 가서 신라 독산성을 공격토록 하였다. 우소가 옥문곡에 이르러 해가 저 물자 안장을 풀고 군사들을 쉬도록 하였다. 우소가 큰 바위 위에 올라가 활 을 당기며 맞아 싸웠으나 화살이 떨어져 사로잡히고 말았다( 삼국사기 권27 백 제본기 5 무왕 37년). 라가 축성한 지역을 공격하였으나 귀산 추항 등의 활약에 힘입은 신라에 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때 귀산 추항 등은 화랑으로 생각되는데, 진흥왕 때부터 육성되기 시작한 신라의 화랑이 삼국의 항쟁에서 전면에 등장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어 신라는 사료 파]-②에서 백제의 동쪽 변경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쯤 백제나 신라는 오히려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하여 피해를 보고 있었 다. 즉 백제는 고구려에게 송산성과 석두성 등을 공격당하였으며,349) 신라 ⑬ (642) 가을 7월에 국왕께서 직접 병력을 이끌고 신라를 침범하여 미후성 등 40 또한 고구려에게 북쪽 변경의 백성들을 약탈당하거나 우명산성을 빼앗겼 여 성을 함락하셨다. 8월에 장군 윤충을 보내어 병력 1만 명을 이끌고 신라 대 다.350) 그런데 당시 고구려의 공격에 의한 피해는 백제보다 신라의 경우가 야성을 공격하였다. 성주인 김품석과 처자들이 나와 항복하였다. 윤충은 그들을 모두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왕도로 보냈다. 남녀 1,000여 명을 사로잡아 나라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신라가 608년에 원광의 걸사표를 수 나라에 보 의 서쪽 주 현에 나누어 거주하도록 하였다. 병력을 남겨 그 성을 지키도록 하 내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수 나라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음에서 잘 나 였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5 의자왕 2년). 타난다. ⑭ (643) 겨울 11월에 국왕께서 고구려와 화친을 하여 신라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 이렇게 신라가 고구려의 공격에 시달릴 때, 백제는 사료 파]-③처럼 신 가 당 나라에) 조공 들어가는 길을 막고자 계획을 세워 마침내 병력을 동원하여 라의 가잠성을 공격하였다. 이 가잠성은 7세기 들어 백제와 신라의 주요 당항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왕 만덕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 였다. 국왕께서 그 말을 듣고 병력을 되돌렸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5 의 자왕 3년). 교전지로 등장한 곳이다. 즉 사료 파]-③에서는 백제가 100일 동안 포위를 하여 함락시킬 정도로 가잠성의 중요도를 보여주는 반면, 사료 파]-⑤에서 는 신라가 혜론의 활약에 힘입어 가잠성을 탈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수 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백제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를 비방하였다. 이에 덧붙여 수 나라가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 가잠성과 함께 또 다른 주요 교전지로 보이는 곳이 사료 파]-④와 사료 파]-①에 등장하는 모산성이다. 할 때 백제는 수 나라에 연합 작전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가잠성과 모산성의 위치를 정확하게 비정하기 곤란하다. 다만 6세기 후 598년에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347) 아울러 고구려는 한수 이 반에 백제의 신라에 대한 주요 공격이 신라의 서쪽 변경이었으며, 사료 북의 땅을 다시 차지하고자 신라 북한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진평왕의 방어 파]-②에서는 신라가 백제의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에 막혀 군대를 되돌렸다.348) 이러한 와중에 백제는 사료 파]-①처럼 신라 가잠성과 모산성 또한 백제의 동쪽, 신라의 서쪽 변경 지역에 위치했을 것 347) 三國史記 卷20 高句麗本紀 8 陽王 9年(598). 348) 三國史記 卷4 新羅本紀 8 眞平王 25年(603). 349) 三國史記 卷27 百濟本紀 5 武王 8年(607). 350) 三國史記 卷4 新羅本紀 4 眞平王 30年(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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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제2절 신라와의 관계 의 땅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하며 신라의 지원 요청을 거부하였다.357) 결국 358) 점증하는 백제와 고구려의 압력에 처한 139 지 등이 우리를 맞아 싸웠다. (전세가) 불리하여 흩어진 병졸들을 모아 도살성 아래 주둔하고 다시 싸웠으나 우리 군대가 패배하였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 신라는 당 나라와의 관계를 긴밀 기 5 의자왕 9년). 하게 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울러 당 나라 또한 고구려의 (649) 이에 김유신 등이 진격하여 (백제를) 크게 패배시켰다. 장수 100명을 강력한 대응으로 군사적 좌절을 맛보면서 신라와의 연합 필요성을 절감했 살해하였으며 군졸 8,980명을 살해하였다. 전투 말 1만 필을 빼앗았다. (빼앗 던 것으로 보인다.359) 은) 무기류의 경우는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5 진덕왕 3년). 이러한 상황은 사료 하]-①에서처럼 신라 김유신이 백제와의 전쟁에 적 극 개입함으로써 극복되기 시작하였다. 사료 하]-① (644) 가을 9월에 신라 장군 김유신이 병력을 이끌고 와 공격하여 7성을 빼앗 ⑥ (655) 8월에 국왕께서 고구려와 말갈과 함께 신라 3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 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5 의자왕 15년). ⑦ (659) 장수를 보내어 신라의 독산성 동잠성 등 2성을 공격하였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5 의자왕 19년). 았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5 의자왕 4년). (659) 여름 4월에 백제가 여러 차례 국경을 침범하였다. 국왕께서 장차 백제를 ② (645) 여름 5월에 국왕께서 (당 나라)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공격하며 신라 병 공격하려 사신을 보내어 당 나라에 들어가 병력을 요청하였다( 삼국사기 권5 력을 동원한다는 말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의 7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신 라는 장군 김유신을 보내어 (우리를) 공격해왔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5 의자왕 5년). 신라본기 5 무열왕 6년). ⑧ (660) 또 당 나라와 신라의 군대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들 었다. 장군 계백을 보내어 결사대 5,000명을 이끌고 황산으로 나가게 하였다. (645) 여름 5월에 (당 나라)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정벌할 때 국왕께서 병력 3 신라 군사와 4번 싸워 모두 이겼으나 병력이 부족하고 힘이 다하여 마침내는 만 명을 징발하여 도왔다. 백제가 (신라의) 빈 틈을 타고 습격하여 나라 서쪽의 패배하고 계백이 죽었다 삼국사기 권27 ( 백제본기 5 의자왕 20년). 7성을 빼앗았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5 선덕왕 14년). ③ (647) 겨울 10월에 장군 의직이 보병과 기병 3,000명을 이끌고 신라 무산성 아래에 나아가 주둔하였다. 병력을 나누어 감물성과 동잠성 등 2성을 공격하였 사료 하]-①은 김유신이 백제를 공격하여 7성을 빼앗은 사실을 보여준 다. 신라 장군 김유신이 직접 날랜 병사를 이끌고 결사로 항전하여 우리를 크게 다. 이것은 사료 파]-⑬에서 보았던 대야성 패전에 대한 보복적 성격을 띤 격파하였다. (거의 전멸당하고) 의직은 단신으로 돌아왔다( 삼국사기 권27 백제 것으로 이해된다. 아울러 그 이듬해인 사료 하]-②에서 신라가 당 나라의 본기 5 의자왕 7년). ④ (648) 봄 3월에 의직이 신라 서쪽 요거성 등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여 고구려 정벌에 군대를 보내어 돕는 것을 기화로,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여 름 4월에 옥문곡까지 진군하였는데, 신라 장군 김유신이 (우리를) 맞아 다시 싸 7성을 빼앗았다. 이때의 7성은 아마 사료 하]-①에서 신라가 빼앗은 7성을 워 (우리가) 크게 패배하였다(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5 의자왕 8년). 되찾은 것이라 보인다. 당시 사료 하]-②의 백제본기에는 김유신이 7성을 ⑤ (649) 가을 9월에 국왕께서 좌장 은상을 보내어 정예 병력 7,000명을 이끌고 신라 석토성 등 7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신라 장군 (김)유신 진춘 천존 죽 되찾기 위해 백제를 공격해 왔다고 되어 있으나, 그 상세한 전과는 전하지 않고 있다. 그 이후 사료 하]-③에서 볼 수 있듯이, 백제는 거듭해서 신라를 공격하 357) 三國史記 卷21 高句麗本紀 9 寶藏王 2年(643). 358) 舊唐書 卷199(上) 列傳 149(上) 東夷 百濟. 359) 金瑛河, 2000, 高句麗 內紛의 국제적 배경 -唐의 단계적 戰略變化와 관련하여-, 韓 國史硏究 110, 韓國史硏究會, 44쪽. 였으나 김유신의 방어에 막혀 실패로 끝났다. 이러한 김유신의 활약은 사 료 하]-④ ⑤에서도 백제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다. 이처럼 이쯤 백제와 신라의 전투는 사료 하]-①을 제외하고는, 사료 하]-② ③ ④ ⑤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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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주시(옛 지명 發羅郡=巴老彌)로 비정한 견해402)가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삼국사기 지리 4의 당나라가 백제의 옛 땅에 설치하려던 도독부에 소속 제3절 가야와의 관계 같은 문헌 분석을 보완해 주고 있다. 지금까지 지명 비정한 결과를 지도로 표시하면 다음의 도면 1 과 같다. 된 일곱 州 중의 하나인 分嵯州의 옛 이름 波知城이 불미지 또는 포미지에 더 가깝다고 생각된다. 파지성은 삼국사기 지리 3의 백제 栗支縣의 다른 호칭으로서 波知 는 지명의 음을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한 것이고 율지 의 밤 율(栗) 자는 훈을 쓴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지명은 밤지 로서 불미지 나 포미지 와 거의 유사하며, 지금의 전남 담양군 금성면에 해당된다. 그 에 이어지는 반구국 즉 반고 는 전남 나주시 반남면(옛 지명 半奈夫里縣 =半那)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백제는 이 모든 곳을 직접 지배할 수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4 읍이 저절로 행복했다. 는 표현도 백제의 주관적 관점에 의한 과장이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신공기 49년조의 이어지는 기사에서 조공 맹약의 장소 가 支山(전북 김제시)과 古沙山(전북 정읍시 고부면)이었다고 나오기 때 문이다. 이로 보아 백제의 영향력은 맹약의 장소였다는 전북 서쪽 방면까 지만 미쳤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온조왕이 재위 26 27년에 사냥 나온 척하고 마한을 쳐서 멸하였다는 기사와 같은 것이고,403) 아울러 10년 뒤인 36년에 古沙夫里城(전북 정읍시 고부면)을 쌓 았다는 기사와 직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4세기 후반에 백제의 영역은 전 북 김제 및 고부까지, 즉 노령산맥 이북까지 확장되었으나,404) 전남까지는 미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신공기 49년조에서 백제에게 항복했다는 4읍 중 에 전남 지역의 布彌支(담양군 금성면)와 半古(나주시 반남면)는 공납 지배 까지 미치지 못하고 일시적 교류에 그친 것이라고 하겠다. 4세기 중엽부터 5세기 후반까지에 해당하는 몽촌 Ⅱ기의 백제 토기가 남쪽으로 금강 하구 건너 전북 익산 지역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고고학적 연구 결과는405) 이와 402) 이병도, 1976, 앞의 책, 265쪽. 403) 이기동, 1987, 馬韓領域에서의 百濟의 成長, 馬韓 百濟文化 10, 242쪽. 404) 이병도, 1976, 앞의 책, 513쪽. 이도학, 1995, 앞의 책, 140쪽. 155 x도면 1y4세기 후반 백제의 영역 및 교역 거점 확보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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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제3절 가야와의 관계 179 마차해와의 비교도 가능하다. 삼국사기 김유신전 상권 을사년(645)조에 이로 보아 자탄은 경남 진주시(옛 지명 菁州 居 ), 대사는 경남 하동군 백제군이 쳐들어왔다는 買利浦城도 같은 곳이다. 이렇게 볼 때, 대가야는 고전면(옛 지명 韓多沙郡), 만해는 전남 광양시 광양읍(옛 지명 馬老縣)에 부림 영산에 축성하여 신라에 대비하고, 그를 근거로 하여 밀양 삼랑진 비정되므로, 대가야가 진주와 하동 지방에 성을 쌓고 광양 일대까지 감시 까지 때때로 힘을 미치고 노리면서 신라와 대립하였던 것이다. 를 하면서 백제와 왜의 교역을 막으려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열 위와 같이 지명 비정한 결과를 지도로 표시하면 도면 2 와 같다. 비는 경남 의령군 부림면(옛 지명 辛爾縣 省熱縣), 마수비는 경남 창녕군 영산면(옛 지명 西火縣), 마차해는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옛 지명 推浦縣), 추봉은 경남 밀양시(옛 지명 推火郡)에 비정되므로, 부림에서 낙동강을 건 너 영산 일대까지 영역을 확보하고 밀양 방면까지 힘을 뻗치는 대가야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이듬해인 계체기 9년(515)조에 의하면, 왜의 物部連은 수군 500명을 이 낙 백 끌고 곧장 帶沙江에 이르렀으나, 대사강에 머물러 있은 지 6일 후에 伴跛 제 소 가 군대를 일으켜 와서 공격하므로, 무서워서 달아나 간신히 목숨을 건지 동 백 가야 산 강 신 고 汶慕羅에 정박했다고 나온다. 이는 왜의 사신단이 가야 연맹의 반발을 라 무릅쓰고 帶沙 즉 하동에 와서 백제와 교역하려고 기다리다가, 급기야 반 파 즉 대가야의 공격을 받아 물러나는 상황을 보이고 있다. 백제의 하동 지 맥 방 경략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섬 진 그러나 계체기 10년(516)조에 의하면, 物部連이 己汶(지금 남원 장수 강 남 임실)에 도착하여 백제 관리의 인도를 받아 백제 왕정에 들어가 후한 교역 강 을 이루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섬진강은 하구에서는 강줄기가 전남 광양과 경남 하동의 경계를 이루지만, 하구만 통과하면 곧바로 지리산 서쪽의 전 축성 주체 축성 지역 관할 경계 지역 남 구례 및 전북 남원 일대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왜 사신 일행은 대가야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하동 지방을 통과하여 기문에 도착할 수 있었던 듯하다. x도면 2y510년대 대가야의 축성 및 세력 영향권 상황 이로 보아, 백제와 육지로 접해 있던 기문에 이미 백제의 관리가 상주하 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대가야가 다툴 여력이 없었던 것 밀양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영산과는 인접해 있는 곳이라, 그 고증을 그대로 따를 수 없다. 밀양의 領縣이 될 만한 津處로는 密陽郡 三浪津邑(옛 지명 龍津)이나 下南邑(옛 지명 守山津)도 가능하다. 특히 龍 이 密 推 와 발음이 통하고, 玄驍縣(현풍)의 옛 지명인 推良火를 三良火라고도 하여 推 와 三 이 서로 통하는 것을 보면, 三浪津邑이 密津縣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을 알 수 있다. 즉 516년을 기점으로 하여 백제는 하구를 제외한 섬진강 유 역 세력들을 모두 복속시킴으로써, 현재의 전남 및 전북 동부 지역 일대를 장악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영토 확장의 성공은 훗날 백제가 泗 천
180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도를 하면서 五方制를 실시하는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제3절 가야와의 관계 181 에서 비교적 끝까지 독립 세력임을 주장했었다고 보인다. 麻連 은 앞에서 백제가 520년경에 중국 남조의 양나라에 조공하였을 때의 기록인 梁職 보았듯이 510년경에 백제가 병합한 전남 광양의 소국이고, 上己文 은 전북 貢圖 百濟國使圖經480)에서 옆에 있는 소국으로 叛波 卓 多羅 前羅 장수군 번암면 및 임실군 지방의 소국이다. 下枕羅 는 제주도를 가리키는 斯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 등이 있어서 그(백제)에게 부속되어 듯하다. 있다. 고 되어 있는 것은 당시 백제의 주변 인식을 보여준다. 그렇게 볼 때, 양직공도 백제국사 도경에 보이는 백제의 주변 인식은, 여기서 앞 부분에 나오는 叛波 는 경북 고령의 대가야국을 가리키고, 백제가 외교적인 수단을 통해 전남 동부의 섬진강 유역까지 이미 차지하고 卓 은 경남 창원시의 탁순국, 多羅 는 경남 합천의 다라국, 前羅 는경 나서, 소백산맥 동쪽으로 움츠러든 가야 연맹과 그 동쪽의 신라도 그와 같은 481) 남 함안의 안라국으로서 모두 가야 연맹의 일원들이다. 그에 이어 나오 는 斯羅 는 경북 경주의 신라국을 가리키는 다른 칭호이다. 이들은 모두 일개 소국으로 보고 앞으로 경영하겠다는 의도 그 자체였다. 이와 같은 지명 비정 결과를 지도로 표시하면 다음의 도면 3 과 같다. 당시에 백제에게 부속되어 있지 않은 독립적이거나 혹은 적대적인 세력들 인데, 백제는 이들을 자신에게 부속된 소국들이라고 중국 양나라에 소개한 것이다. 게다가 대가야를 가라 로 부르지 않고 그 옛 이름인 반파 로 칭한 것은 후기 가야 연맹의 맹주로서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백제의 의도를 보 이고 있다. 신라를 구태여 사라 라고 칭한 것도 앞 시대의 소국이었을 때 의 신라를 연상시키는 고의적인 호칭이라고 하겠다. 반면에 그에 이어지는 소국들은 가까운 시기인 5세기 말 내지 6세기 초에 백제가 병합한 지역들이다. 즉 止迷 는 신공기의 彌多禮 와 같은 것으 로 보아 전남 강진으로 보는 설이 있는데,482) 본글의 앞에서 이를 해남군 현 산면으로 추정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해남으로 비정한다. 해남군에는 현 산면 월송리 조산 고분, 북일면 방산리 신방리 고분, 삼산면 창리 고분 등 5세기 말 6세기 초의 전방후원분들이 곳곳에 분포해 있어서 전남 서부 지역 480) 이홍직, 1965, 梁職貢圖 論考 -특히 百濟國使臣圖經을 中心으로-, 高大60周年紀念論 文集 人文科學篇 (1971, 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388쪽 재수록). 양직공도는 양나라 元帝(재위 552~554) 蕭釋이 즉위하기 전에 만든 것으로 그 기록에 나오는 가장 늦 은 연호는 大通 2년(528)으로 그치고 있으므로, 묘사 시대는 520년경으로 볼 수 있다. 481) 김태식, 1985, 5세기 후반 大加耶의 발전에 대한 硏究, 韓國史論 12, 64쪽 87쪽 ; 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2권, 215쪽. 482) 김기섭, 2000, 백제와 근초고왕, 학연문화사, 173쪽. x도면 3y 양직공도 에 나타난 520년대 백제의 주변 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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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제1장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관계 제3절 가야와의 관계 야 제국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187 3) 가야 전역의 부용화 및 상실492) -신라와의 충돌- 그러나 창원의 卓淳國은 가야 남부 지역의 유일한 독립 지대였는데, 그 북 부의 구례산성을 점령하고 있던 백제로부터 지속적인 억압을 받다가, 스스 530년대 말 신라의 탁순국 및 구례산성 확보 이후, 백제가 함안의 안라 로 신라에 투항하여 편입되었다. 탁순국이 신라에게 멸망된 시기는, 백제 국에 설치했던 왜신관도 그 무력적 배경을 잃고 혼돈에 빠졌다. 이에 안라 가 泗 (지금 충남 부여) 천도 등으로 인하여 대외적인 문제에 적극적인 대 는 백제의 의사와 관계없이 왜신관의 인원을 的臣 吉備臣 河內直 移那 응을 하기 어려운 538년 직후의 어느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신 斯 麻都 등의 친 안라 왜인관료들로 재편성함으로써 그 기구를 장악하였 라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구례산성(칠원)에 주둔한 백제 군사를 물리쳐 쫓아 다. 그리하여 안라왕은 이를 가야 연맹 제국이 신라와 백제로부터의 외부 491) 냈다. 이로써 신라는 탁순국의 영유를 확고히 할 수 있었으며, 반면에 백 제는 가야 병합을 위한 전진 기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압력을 막아내는 방패막이로 활용하였고, 그런 과정 중에 가야 연맹 내에 서 안라의 지위를 높이려고 하였다. 안라는 그 후 세력을 주변의 가야 남부 지금까지의 사건 전개 결과를 지도로 표시하면 다음의 도면 4 와 같다. 지역으로 확대함으로써, 북부의 대가야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중심 세력으 로 대두할 수 있었다.493) 여기서 6세기 중엽 가야 지역의 유적 상황을 살펴보면, 이들은 전반적으 로 묘제 및 토기 유물 등의 면에서 전 시대 이래의 문화 기반을 거의 그대 로 유지하면서 성장했다. 다만 고령 합천 거창 진주 등 주로 대가야 문 백 화권에는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및 세발토기(三足器) 등 백제 문물 제 낙 소 대가야국 가야 백 동 산반하국 산 임례국 맥 자타국 진 강 라 강 탁기탄국 하동 화고분과 진주 수정봉 2 3호분, 합천 창리 A지구 e유구 출토 뚜껑세발토 항아리(二重口緣短頸壺), 진주 수정봉 2호분 출토 청동 주발(銅 ) 등이 그 것이다. 사이기국 걸손국 의 요소들이 약간 추가된다. 백제계통의 굴식 돌방무덤인 고령 고아리 벽 기(有蓋三足器), 거창 말흘리 2호분 출토 백제 양식의 입술에 덧띠 돌린 목 다라국 졸마국 섬 신 무릉산 금관국 작대산 안라국 구성리 천주산 산성 특히 섬진강 하구의 帶沙 로서 백제로부터 전략적 가치에서 주목을 받 던 하동 지방에서는 고리리 나15호분 출토의 납작밑 주발(平底 ), 귀때단 탁순국 고차국 신라 편입 지역 백제 편입 지역 (임나의 하한) 530년대 말 당시의 현존 가야 소국 530년대에 신라에게 멸망한 가야 소국 530년대 이전에 백제에 편입된 지역 x도면 4y530년대 말 가야 연맹의 지역 범위 491) 日本書紀 卷19 欽明天皇 5年 3月條의 聖王 회고담, 신라는 봄에 탁순을 취하고, 나아 가 우리 구례산성을 쫓아내고 나서, 마침내 그를 가졌다. 492) 이 節의 내용은 김태식, 1993, 앞의 책(제5장), 加耶聯盟의 崩壞 의 내용을 요약하되 백제를 주체로 하여 재편성한 것이므로, 일일이 주석을 달지 않는다. 다만 그 책의 내용 과 달리 지명 비정을 한 것은 새로이 주석을 달았다. 493) 김태식, 1991, 530년대 安羅의 日本府 經營에 대하여, 蔚山史學 4 ; 1993, 앞의 책,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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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제2장 중국과의 관계 제1절 남북조와의 관계 199 격동과 활력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으며, 중원과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 인하여 국가의 통합시기도 북방의 고구려보다 상대적으로 늦으며, 중국문헌 로 이어지는 국제교류의 중심축의 하나가 바로 백제였다. 의 모호한 표현으로 인해 對中通交의 구체적 실상도 분명히 알 수 없으나, 따라서 백제사의 전개와 그 국가적 성격을 이해하는 중요한 관건 중 하 나가 당대 중원의 남북조와의 관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대체로 3세기 말에 이르면 한군현의 기미책을 극복하고 국내지배체제를 확 립함으로써 대륙의 왕조와 직접 통교를 전개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연구에서도 이러한 점이 여러 각도에서 검토되었는데, 조공-책봉을 중심 으로 한 외교적 교섭의 성격, 遼西經略을 비롯한 백제의 대륙진출의 사실 (1) 백제의 국가형성과 한군현과의 교섭 1) 성문제, 남조와의 문물교류 등이 주요과제였다. 사료적 한계로 그 진실이 모두 밝혀진 것은 아니며, 요서경략 등 백제의 南韓社會에서도 이미 B.C.4~3세기경에는 海路를 통하여 중국과 교섭관 대륙진출 문제 등은 끊임없이 긍정론과 부정론이 교차되고 있으며, 외교적 계를 가진 집단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3) B.C.3~2세기경에는 史記 朝 교섭의 내용도 그 성격이 충분히 구명되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최근 백제 鮮傳의 欲上書見天子 라는 기술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衛滿王國과 對立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히 진행됨에 따라 중원제국과의 문화교 하여 중국과 직접통교를 주도하던 정치세력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2) 류의 양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들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細型銅劍文化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된 辰國이다.4) 백제가 정식으로 중원 제국과 외교적 교섭을 맺은 것은 일반적으로 근초 辰國은 準王의 南渡를 비롯하여 위만조선의 멸망을 전후하여 남하하기 고왕대 東晉과의 교섭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이러한 점을 시작한 조선계 유이민의 파상적인 이동으로 해체되고, 그 주류는 馬韓으로5) 고려하여 여기서는 삼국형성 시기 백제의 대 漢 魏 晉 등 중원 제국과의 일부세력은 북쪽에서 내려온 辰番 朝鮮系와 합류하여 마한의 동계에 머 교섭 과정을 일별해 본 뒤 중원의 南北朝 諸國과의 외교적 교섭을 시기별 무르다가 경상도 방면으로 계속 이동하여 辰(弁)韓社會를 구성하니,6) 여기 로 정리하고 동아교섭사의 거시적 시각 속에서 백제의 대남북조 교섭이 갖 에 이른바 삼한사회가 성립되었다. 는 역사적 성격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신라의 고대국가로의 성장은 이러한 辰韓사회의 성립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백제의 경우는 신라와 달리 삼한사회 속에서 성립 2) 국가형성기 백제의 대중교섭 하였다기 보다는 桂婁部의 移動에 의한 고구려사회의 통합과정 중에서 밀 려난 原(proper)高句麗社會를 구성하였던 夫餘系가7) 韓系를 정복 흡수하 辰國의 해체과정에서 성립한 삼한사회를 통합하는 가운데서 성장한 백제 는 주변사회의 후진성과 한군현의 경제적 수탈을 수반한 기미외교책으로 1) 백제 대외관계사의 주요 과제와 내용은 신형식, 2005, 백제의 대외관계, 주류성 참조. 2) 박순발, 1999, 한성백제의 대외관계, 백제연구 30 ; 2001, 한성 백제의 탄생, 서경 문화사 ; 성정용, 2003, 백제와중국의 무역도자, 백제연구 38 ; 권오영, 2003, 백제 의 대중교섭의 진전과 무역도자, 강좌 한국고대사 4 ; 2005, 百濟文化의 이해를 위한 中國 六朝文化 탐색, 韓國古代史硏究 37. 3) 全榮來, 1976, 完州 上林里出土 中國式銅劍에 關하여, 全北遺跡調査報告 5, 11~15쪽. 4) 李賢惠, 1984, 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 一潮閣, 9~10쪽. 5) 이현혜, 1984, 앞의 책, 마한지역 제소국의 형성 참조. 6) 千寬宇, 1975, 삼한의 성립과정, 사학연구 26 참조. 7) 李萬烈, 삼국시대사, 지식산업사, 61~65쪽 참조 ; 노중국, 1988, 백제정치사연구, 일 조각. 이도학은 부여계의 百濟가 한의 소국인 伯濟사회를 통합하였다는 신설을 제시하였는 데(이도학, 1995, 백제고대국가연구, 일지사), 건국시점은 다르지만 백제의 부여계 문화 요소에 착안한 견해로 보인다. 백제와 부여의 정치적 문화적 관련성에 대해 본격적인 검 토가 필요하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