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열쇠가 된다. 본 연구는 러한 유산기의 자료적 특징에 착안하여, 금강산, 지리산, 청량산, 속리산, 북 한산 등 주요 산의 유산기를 통해 당시 사대부들의 자연 향유 양상을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 로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유산기 내용 분석을 통해, 사대부들의 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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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책방도서관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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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기로 본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자연향유 양상 치영 *1 1. 머리말 일견 문학과 지리학은 전혀 공통분모가 없는 분야로 보인다. 그러나 서구의 지리학에서는 오랫동안 문학작품을 연구에 활용해 왔으며, 1970년대 후에는 문학지리학 라는 새로운 연구 분야가 확립되기에 르렀다. 지리학에서의 문학작품의 활용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문학작품을 객관적으로 용하는 것으로, 문학작품에서 특시대 특 장소의 지리적 사실을 추출하여 지역지리를 구성하는 소재로 용하는 것다. 다른 하나는 문학작품을 주관적으로 용하는 것으로, 문학작품으로부터 인간집단 장소와 경관에 대해 가지는 감, 태도, 가치 등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다. 에 대해 서구의 문학지리학 을 주도해 온 Pocock(1979)은 문학은 장소미지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왜냐하면 작가는 성격묘사와 드라마를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풍경을 묘사하는 데도 훌륭한 관찰력과 통찰력을 발휘하기 때문다. 라고 하여, 지리학 연구에 있어서 문학작품의 주관적 용 가치를 높 평가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遊 山 記 라는 조선시대 문학작품을 용하여 당시 사람들의 장소와 경관에 대한 감과 태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주된 자료인 유산기는 조선시대 사대부들 주로 산 을 등산한 체험을 산문으로 써서 남긴 일종의 기행문학다. 유산기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지속적으로 창작되어 현재 약 600 편의 작품 남아있다고 알려져 있다. 유산기의 형식은 작가에 따라 약간의 차는 있으나, 대개 첫머리에 유람의 동기나 목적, 동행인을 기술한 다음 날짜 별로 유람을 하면서 견문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유산기를 분석하면, 작 가의 여행과과 함께 여행지역의 당시 상황을 복원할 수 있으며, 여행지에서 느낀 작가의 감흥을 파악할 수 있다. 나아가 유산기에는 당시 사대부들 유산의 대상었던 산과 강 등 자연을 어떻게 감상하고 해하였으며, 자연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였는지를 살펴볼 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부교수

있는 열쇠가 된다. 본 연구는 러한 유산기의 자료적 특징에 착안하여, 금강산, 지리산, 청량산, 속리산, 북 한산 등 주요 산의 유산기를 통해 당시 사대부들의 자연 향유 양상을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 로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유산기 내용 분석을 통해, 사대부들의 산수유람 방법을 파악하 고, 여행 경로, 주요 방문지 등을 분석하여 그들 선호한 자연경관에 대해 해하며, 나아 가 그들 자연을 어떤 방식으로 체험하였으며, 를 통해 얻으려 했던 것은 무엇인지 등을 고찰하고자 한다. 리하면, 조선시대 사대부들 어떤 자연경관나 장소를 중요하게 인식 하고 그 가치를 평가하였는지에 대한 해명과 함께 그 향유 방식을 해하고자 한다. 2.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산수유람 방법 조선시대에 사대부들 사에는 전국의 명산대천을 찾아나서는 유람여행 성행하였다. 렇게 유람여행 활발하였던 유는 讀 萬 卷 書 行 萬 里 路 라는 말 있듯 사대부들 산수 유람을 단순한 유흥 아닌 중요한 공부의 수단으로 생각하였기 때문다. 사대부들의 산수 유람은 아름다운 산수의 감상 주된 목적긴 했으나, 에 못지않게 산에서의 심신의 수 양과 공부, 그리고 역사문화유산의 답사 등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사대부들의 산수유람 방법은 개인에 따라, 그리고 유람하는 대상에 따라 차가 있었기 때문에 를 일반화하여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유산기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통해 당시 산수유람 방법을 복원해 보면, 오늘날의 여행과는 상당한 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과 비교해 조선시대의 산수유람은 대체로 많은 시간 소요되는 장기간의 여행었 다.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들 주로 찾았던 북한산 유람의 경우에도 2~3일 상 소요되 었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금강산의 경우에는 가고 오는 시간과 금강산을 구경하는 시간을 합하면 보통 한 달 상 걸리는 여었다. 때문에 오늘날의 여행 보다 훨씬 복잡한 준비과 필요하였다. 여행 준비는 먼저 여행보의 수집에서 시작되었다. 사대부들 필요로 하였던 보는 여 행경로, 경유지, 숙박지 등에 대한 내용었다. 어떤 경로로 여행하는 것 효율적며 많은 장소를 구경할 수 있을지, 또한 놓치지 않고 찾아보아야 하는 경유지로는 어떤 곳 있는 지, 어디에서 자는 것 편리한 지 등은 현대의 여행자들에게도 필수적인 보다. 조선시대에 러한 보의 획득원으로 가장 많 용하였던 것은 앞선 여행자들의 기록,

즉 유산기와 遊 山 詩 였다. 금강산, 지리산, 청량산 등 여행자가 많았던 산들은 많은 유산기가 있었기 때문에 러한 유산기를 구해 읽으며 여행의 꿈을 키우고 여행 준비를 하였던 것 다. 유산기가 여행안내서 역할을 하였던 것인데, 금강산의 경우, 조선전기의 南 孝 溫 등의 유 산기를 묶은 른바 臥 遊 錄 조선후기의 사대부들에게 여행안내서가 되었다. 지리산 여행 자들은 그들의 유산기에 1489년 金 馹 孫 저술한 頭 流 紀 行 錄 을 많 언급한 것으로 보 아, 글을 많 참고한 것으로 생각된다. 유산시는 대개 각 산의 대표적인 명소를 소재로 하였기 때문에 유산시의 무대가 된 장소는 꼭 구경해야 할 곳었다. 유산기 외에 지도와 路 程 記 등도 유람 준비에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程 里 表, 道 里 表 라고도 부르는 노기는 각 구간의 거리 등 적혀 있어 가야 할 길과 동할 거리 등을 하는데 참고하였다. 먼저 유람을 경험한 사람들의 경험담도 중요한 여행 보가 되었다. 금강산은 워낙 여행 자들 많았기 때문에 먼저 여행한 친척나 친구의 말을 듣고 여행을 결심하거나 여행계획 을 짜는 들 많았다. 1671년 가을에 금강산을 유람한 金 昌 協 은 같은 해 봄에 산을 다 녀온 동생 金 昌 翕 으로부터 금강산 유람 어렵지 않다는 야기를 듣고 유람을 결행하였 다. 2 명산의 사찰들을 순회하며 수행하는 승려로부터 보를 얻는 사대부들도 많았다. 17세 기 북한산을 유람한 鄭 佶 은 독서를 위해 道 成 菴 라는 암자에 머무는 동안 한 노승으로부터 북한산의 기함과 험준함, 그리고 고적에 대한 야기를 듣고 유람에 나섰다. 3 특히 승려들 은 현지의 기후상황 등에 르기까지 생생한 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대부들의 유람 준비에 큰 도움 되었다. 장기간에 걸친 장거리 여행에는 여러 가지 준비물 필요하였다. 돈과 식량은 물론고, 침구와 의류, 식기와 취사도구 등 준비되었고, 문방구와 책은 사대부들의 유람에 필수품 었다. 먼저 식량으로는 쌀과 반찬, 술, 과일 등을 준비하였다. 식량은 무거우므로 출발할 때에는 2~3일분을 준비하고 중간에서 돈을 주고 사거나 친지로부터 조달하는 것 일반적 었다. 술은 유흥을 위해서도 필요하였지만, 여행 중에 허기를 해소하고 높은 산에서는 추 위를 기는 데도 요긴하였다. 의류와 침구류로는 갈아입을 옷과 신발, 부자리, 바닥에 깔 자리를 준비하였다. 신발은 미투리나 짚신을 여러 켤레 준비하였으며, 비가 올 것에 대비하 여 油 衣 와 도롱도 챙겼다. 지리산과 같 높은 산에 오르는 사대부들은 방한용 의류도 준 비하였다. 1807년 봄에 지리산에 올랐다가 눈을 만난 河 益 範 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갖옷 2 3 金 昌 協, 農 巖 集 卷 23, 東 遊 記. 鄭 佶, 蘭 谷 遺 稿 卷 2, 遊 三 角 山 記.

을 준비하였다가 입었다. 4 오늘날과 달리 부자리를 들고 다녔던 것은 당시 사대부들 숙 박시설로 용하였던 역과 원, 사찰은 물론고, 酒 幕 의 경우에도 침구를 제공하지 않는 것 일반적었기 때문다. 5 식기와 취사도구로는 솥, 밥그릇과 접시, 바가지 등을 가지고 갔는데, 솥은 노구솥, 식기 도 대나무나 나무로 만든 것을 준비하여 무게를 줄였다. 사대부들은 편지나 시를 쓰거나 여 행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문방구를 반드시 휴대하였다. 붓, 벼루, 먹, 종 등을 준비하였는 데, 벼루도 작고 가벼운 것을 준비하고, 종는 두루마리나 책의 형태로 만들어 휴대와 쓰 기에 편리하도록 준비하였다. 사대부들의 필수품인 책은 유산기와 노기, 그리고 시집 등 을 준비하였고, 心 經 과 近 思 錄 과 같은 책을 준비하여 매일 독서를 하였다. 두 책은 마음공부에 관한 것으로, 유람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인 신 수양에 도움 될 수 있 는 책들었다. 밖에 만일에 대비한 상비약을 준비하고, 지팡, 칼과 같은 여행도구도 챙겼다. 사대부들은 여행준비가 끝나고, 여행을 떠나기 전에 신변 리를 하였는데, 부모님과 친 지를 찾아 인사를 드리고, 조상의 묘소와 사당을 참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여 상에 있 는 친구와 친지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여행을 미리 알렸다. 유람 길에 들을 방문하기 위한 것었지만, 들에게 숙식 등 편의를 제공받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현직관료들은 疏 를 올려 임금의 허락을 받거나 辭 狀 을 제출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유람에 나서는 것 상례 였다. 조선시대 사대부들 혼자서 유람에 나서는 예는 극히 드물었고, 가족과 친지와 함께 유 람 길에 오르는 것 보통었다. 대개는 5~10명 도의 사대부들 동반하였으며, 여기에 각자 한 명씩의 노복 동반하였으므로 전체 유람단 규모는 10~20명 도인 경우가 많았 다. 노복은 말을 끌거나 짐을 지고 취사를 하는 등 유람에 필요한 일을 도맡아 하였다. 들 외에도 유람자에 따라 악공과 화공 동반하는 사례가 있었다. 악공은 피리, 거문고 등 의 연주자들로 유람의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하였으며, 금강산의 경우에는 동반한 화공 명 승지의 경치를 그림으로 옮겼다. 또 다른 중요한 동반자로 승려들을 꼽을 수 있다. 들은 산에서 유람의 안내자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식사를 준비하고 가마를 메는 역할까지 수 행하였다. 전, 현직 고위관료가 유람에 나설 때에는 대규모의 여행단 꾸려지기도 하였다. 여행 경로에 위치한 군현의 지방관들 마중을 나와 같 여행하기도 하고, 들 보낸 악 4 河 益 範, 士 農 窩 集 卷 2, 遊 頭 流 錄. 5 연식, 2006, 조선시대의 여행조건-황윤석의 西 行 日 曆 과 赴 直 紀 行 을 중심으로, 인문논총 15, 서울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39.

공, 기생 등 수행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다. 1558년에 晋 州 牧 使 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전, 현직관료와 함께 지리산을 찾은 曺 植 의 여행단은 악공, 기생, 요리사, 노비, 짐꾼 등을 포함하여 100여 명에 르렀을 것으로 추된다. 6 사대부들 산수유람에 용한 교통수단은 산을 오가는 길에서와 산에서가 달랐다. 산을 오가는 길에는 대개 말을 용하였다. 여행에 말을 용하면, 도보에 비해 훨씬 힘 덜 들 고 따라서 장거리 동 가능하였기 때문다. 남효온, 권업, 박성원 등의 금강산 유산기에 는 하루 동거리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하루에 대개 평탄한 길에서는 90리 내외, 산길에서는 60리 도를 동하였다. 7 말을 타고 갔는데도 불구하고 하루 동거리가 길지 않은 것은 혼자 말을 달려가기 보다는 노복 고삐를 잡은 말을 타고 갔기 때문다. 당시 말은 가격 매우 비싸서 친지나 지방관아에서 대여하여 탄 사례도 많았으며, 역나 주막, 민가를 용하여 말에게 계속해서 꼴을 먹면서 유람을 하였다. 말 외에 나귀, 그 리고 드물지만 소나 가마를 탄 사람들도 있었다. 나귀는 체력 강하고 바위가 많은 곳에서 도 잘 걸으며, 말에 비해 적게 먹고 가격 저렴하여 사대부들의 유람에 많 용하였다. 산에서의 교통수단은 시간 흐름에 따라 변화가 있었다. 조선전기에는 험한 산길에서 말 을 탈 수 없었기 때문에 도보로 유람을 하였다. 16세기 후에는 산에서 가마의 일종인 藍 輿 를 용하기 시작하였다. 남여를 메는 일은 주로 승려들 담당하였으며, 조선후기 들어 산에서의 남여 사용 점차 일반화되자 사찰 마다 담당구역 해질 도였다. 금강산을 예로 들면, 내금강은 장안사나 표훈사의 승려들, 외금강은 유점사와 신계사의 승려들 남여를 메었으며, 내금강과 외금강의 경계인 안무재에서 서로 교대하는 것 관행화 되었 다. 속리산, 지리산, 청량산 등에서도 약간의 시간적 차는 있었지만 남여 사용 일반적 었다. 에 따라 유람객 많 찾는 유명한 산에 주재하는 승려들의 부담 갈수록 가중되 었다. 들은 길 안내는 물론고 남여를 메는 일, 식사 준비와 숙박 뒷바라지까지 감당하 여야 했다. 산수유람에 나선 사대부들은 대체로 가장 빠르고 편한 길을 용하였다. 서울에서 출발한 유람객 많았던 금강산 유람에는 대부분의 사대부들 조선시대 6 大 路 중 제2로인 慶 興 路 를 용하였다. 길은 서울에서 금강산 입구까지를 거의 직선으로 어주는 가장 빠른 길 었을 뿐 아니라, 국가가 관리하는 간선도로여서 길가 곳곳에 驛 과 院 등 편의시설 잘 갖추어져 있어 말을 타고 여행하는 사대부들 큰 불편함 없 여행할 수 있었다. 다른 6 曺 植, 南 冥 集 卷 2, 遊 頭 流 錄. 7 치영, 2003, 金 剛 山 遊 山 記 를 통해 본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여행 관행, 문화역사지리 15(3), 29.

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여나 여행기간의 차는 있으나, 산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편의시설 잘 갖추어진 길을 선택하여 여행을 하였다. 여기에는 선인들 용한 길을 그 대로 답습한 경향도 영향을 미쳤다. 것은 선인들의 유산기가 여행의 안내서 역할을 하였 기 때문으로 추된다. 조선시대 유람 여행은 교통수단 등의 여행 여건 때문에 짧으면 2~3일, 길면 한 달 상 걸렸으며, 오늘날과 같 당일로 루어지는 여행 거의 없었다. 따라서 유람여행에는 숙박 따르게 된다. 유산기에 기록된 숙박 장소들을 분석해 보면, 먼저 왕복로 상의 숙박 장소와 산 안에서의 숙박 장소가 차가 있었다. 사대부들 왕복로 상에서 숙박한 곳으로 는 민가, 관아, 역과 원, 주막, 사찰, 서원 등 있다. 민가는 여 상에 있는 친지의 집으로, 유람 전에 미리 연락을 하고 방문하였으며, 숙박 은 물론 식사까지 대접받는 것 일반적었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는 奉 祭 祀 接 賓 客 라 하여, 손님을 성껏 접대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개인적인 친분 있는 수령 근무하는 관아에 숙박하는 경우도 많았다. 때는 客 舍 에서 주로 숙박하였으며, 수령과의 친소관계에 따라 그 대접 달랐다. 대로를 따라 여행한 사대부들은 역을 용하기도 하였 다. 역 숙박장소로 많 용된 것은 대로변에 규칙적으로 입지해 있으며, 주된 교통수단 인 말을 관리하기에 용하다는 장점 있었기 때문다. 역에 비해 많지는 않으나, 원에 숙박한 들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원은 대로변나 성문 밖, 나루터, 고개 아래 등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조선후기 들어 그 기능을 주막 대신하게 되었다. 8 18세기 후에는 유람 중에 주막에 숙박하였다는 사대부들 적지 않다. 청량산을 유람한 사대부 가운데는 陶 山 書 院, 易 東 書 院 등 서원에서 숙박한 들 있었다. 서원에서의 숙박은 사대부라는 신분기 에 가능한 일었다. 서원에서 잔 들은 대개 인근 지역 거주자들로, 서원과 인적, 물적으 로 긴밀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었다. 9 한편 유람시기에 있어서는 가을 가장 많았다. 사대부들 가을을 택한 유는 유람하기 에 좋은 기후조건을 가지고 있고, 단풍도 즐길 수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가을 다음으로 는 봄 많았다. 봄 가운데는 특히 늦봄에 유람하는 들 많았는데, 시기가 숙식에 따 른 불편 다른 계절보다 적기 때문에 여행시기로 선호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8 최영준, 2004, 한국의 옛길 영남대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302-309. 9 치영, 2005, 유산기로 본 조선시대 사대부의 청량산 여행, 한국지역지리학회지 11(1), 66.

3. 조선시대 사대부들 선호한 자연경관 조선시대 사대부들 선호한 자연경관은 그들 산수유람 중에 방문한 장소를 통해 유 추할 수 있다. 표 1부터 5는 각 산의 유산기의 내용을 분석하여 여행자 별 유람경로 중 자연경관라 할 수 있는 장소의 방문기록을 리한 것다. 먼저 표 1의 금강산을 살펴보자. 금강산은 크게 內 金 剛, 外 金 剛, 海 金 剛 으로 삼분하여 살펴 볼 수 있다. 는 조선시대 금강산을 여러 지역으로 다시 세분할 때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으로, 때 내금강은 毘 盧 峰 - 日 出 峰 - 遮 日 峰 등으로 어지는 주능선을 경 계로 하여 서쪽에 해당하며, 조선시대에는 회양부와 금성현, 현재는 금강군에 속한 지역 다. 외금강은 주능선의 동쪽으로 고성군에 속한 지역며, 해금강은 동해안 지역으로 조선시대 고성, 통천, 간성군에 속한 지역었다. 표 1. 금강산의 주요 자연경관 및 방문자 자연경관 별 방문자 구분 자연경관 남 효 온 원 성 제 원 홍 인 우 유 운 룡 양 대 박 구 권 업 형 윤 엽 명 준 신 익 성 경 석 창 협 수 증 만 부 박 성 원 동 항 조 필 감 상 수 내금강 백천동 명연 망군대 백탑동 천일대 만폭동 비로봉 외금강 불대 만경대 은선대 발연 구룡연

옥류동 만물상 해금강 삼일포 사선 해산 총석 자료: 유산기를 분석해 필자가 작성. 조선시대 사대부들 가장 많 유람한 지역은 내금강었다. 내금강에서 사대부들 구경한 자연경관은 크게 계곡과 산봉우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萬 瀑 洞, 鳴 淵, 百 川 洞, 百 塔 洞 은 계곡의 자연경관다. 먼저 만폭동은 본 연구에서 분석한 20명의 사대부들 모 두 방문하였는데, 금강산에서 계곡미가 가장 뛰어난 약 1km의 계곡으로, 폭포가 아니면 못, 못 아니면 폭포라 할 수 있을 도로 계곡 온통 폭포와 못으로 가득 차 있는 자 연경관다. 10 1671년 창협은 만폭동의 경관을 다음과 같 묘사하였다. 만폭동은 전체가 커다란 반석으로 바닥을 루고 있고 돌의 색은 모두 하얀 옥같 희다. 계곡 물 비로봉부터 그 아래 모든 골짜기로 내려오는데 물줄기들 서로 뒤섞고 다투면서 흘러내려 곳에서 만난다. 험하거나 솟아나거나 울퉁불퉁한 바위들 여기저기 놓여서 물과 서로 다투는데, 물 돌을 만나면 튀어 올라 부서지면서 갖은 변화를 부린 다음 노기를 꺾고 서서히 흘러 평평한 시내가 되고 잔잔한 개울 된다. 간혹 높은 벼랑을 만나면 떨어지면서 폭포가 되고 폭포는 내려 와 돌면서 못 된다. 폭포의 높는 1-2길에서 6-7길까지, 못의 넓는 3-4랑에서 7-8랑에 른다. 11 만폭동 다음으로 16명의 사대부들 찾은 명연은 계곡에 있는 커다란 못으로, 못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사람 우는 소리를 닮았다고 하여 울소, 명연란 름을 가지게 되 었다. 12명 구경한 백천동도 석가봉과 십왕봉의 두 산줄기 사에 펼쳐져 있는 경치가 뛰어난 계곡다. 백천동은 골짜기가 좁고 깊숙하여 어딘지 알지 못하는 깊은 곳으로 자 10 유홍준 편, 1998, 금강산, 학고재, 102. 11 金 昌 協, 南 冥 集 卷 2, 遊 頭 流 錄.

꾸 들어서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12 5명 찾은 백탑동은 흰 바위로 루어진 많은 자연 돌탑과 폭포를 볼 수 있는 곳다. 13 봉우리 중 가장 많은 유람객 찾은 곳은 15명 방문한 千 一 臺 다. 眞 歇 臺 라고도 부 르는 천일대는 표훈동의 양사 인근에 있는 높 약 800m의 봉우리로, 내금강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한 곳다. 14 진헐대는 철 關 東 別 曲 에서 廬 山 의 진면목 여기야 다 뵈나다. 라고 표현한 곳기도 하다. 6명 오른 毘 盧 峰 은 높 1,638m의 금강산의 상며, 5명 오른 望 軍 臺 도 높가 1,331m로, 금강산에서 비로 봉 다음 가는 전망대다. 천일대에 비해 비로봉과 망군대의 전망 더 좋은 데도 불구 하고, 방문자가 적었던 것은 오르기가 어려웠기 때문다. 특히 사방 깎아지른 듯한 절 벽으로 루어져 있는 망군대는 17세기 후 사대부들의 발길 거의 끊어졌는데, 길 위험하다고 알려지면서 방문을 주저하였거나, 안내자 역할을 한 승려들 안내를 꺼렸기 때문으로 추된다. 1628년 금강산을 유람한 李 命 俊 의 遊 山 錄 에는 길은 위험하 기가 비로봉보다 더한데, 보는 것은 양사의 천일대보다 나을 것 없다. 라는 15 망군 대에 대한 평가가 실려 있다. 외금강에서도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봉우리와 계곡 사대부들에게 인기 있는 자연경 관었으며, 佛 頂 臺, 隱 仙 臺, 鉢 淵 특히 방문객 많았다. 1607년 금강산을 찾은 권업 외금강의 승경 중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한 불대와 17세기 후에 사대부들 찾기 시작한 은선대는 모두 十 二 瀑 布 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조망점다. 발연은 연신동계 곡의 동남쪽에 있는 못으로, 발연 자체도 모양 기묘하지만 주변 계곡의 경치가 절경 다. 16 동해를 끼고 있는 해금강에서는 三 日 浦, 四 仙 亭, 叢 石 亭, 海 山 亭 의 순으로 방문객 많 았다. 關 東 八 景 중 하나인 삼일포는 석호로, 주변의 봉우리와 호수 안의 섬들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사선과 해산은 삼일포 주변에 있는 자로, 삼일포와 동 해를 조망할 수 있는 곳들다. 12 문성렵 외, 2004, 금강산의 명승, 사회과학출판사, 191. 13 인갑, 1992, 금강산, 에스페로문고, 152. 14 리용준 외, 2004, 금강산지명유래, 사회과학출판사, 148. 15 李 命 俊, 潛 窩 遺 稿 卷 3, 遊 頭 流 錄. 16 문성렵 외, 앞의 책, 86-87.

표 2. 지리산의 주요 자연경관 및 방문자 자연경관 별 방문자 자연경관 종 직 남 효 온 일 손 조 식 변 사 양 대 박 박 여 량 유 몽 인 성 여 신 조 위 한 양 경 우 박 장 원 지 백 식 도 수 동 항 유 문 룡 하 익 범 박 치 복 송 병 선 회 석 천왕봉 중봉 소년대 일월대 완폭대 마암 벽소령 영원령 용유담 불일폭포 홍류동 삼신동 화개동 자료: 유산기를 분석하여 필자가 작성. 표 2는 지리산을 유람한 사대부들 찾은 주요 자연경관다. 금강산과 마찬가지로, 봉 우리와 계곡 주를 루고 있다. 금강산과 다른 점은 산의 규모에 비해 사대부들 주 로 방문한 곳 두 지역에 몰려 있다는 점다. 하나는 지리산 상인 天 王 峰 을 중심으 로 한 지역다. 21명의 지리산 유람객 중 15명 찾은 천왕봉을 비롯해, 6명 오른 日 月 臺, 3명 오른 中 峰 은 모두 천왕봉에 인접한 곳고, 역시 3명 찾은 少 年 臺 도 천왕 봉을 오르는 길목에 있는 봉우리다. 모두 조망 뛰어난 장소들며, 특히 천왕봉과 일 월대는 일출과 월출을 관람하는 곳다. 1489년 천왕봉에 오른 일손은 그 감회를 아래 와 같 서술하였다. 여명에 해가 동쪽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보니 맑은 하늘 잘 닦은 구리거울과 같다. 사방을 바 라보니 만 리에 끝 없고 대지의 여러 산들은 모두 개미나 지렁가 늘어선 것 같았다. 를 묘 사하려 한다면 韓 愈 의 南 山 詩 가 여기에 맞으며, 보고 느낀 바를 말하려 한다면 孔 子 가 東 山 에 올 라 느낀 심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러한 회포를 품고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니 감개가 무량하

다. 17 다른 한 지역은 하동의 화개골짜기 일대다. 翫 瀑 臺, 佛 日 瀑 布, 紅 流 洞, 三 神 洞, 花 開 洞 여기에 속하는데, 홍류동과 삼신동은 화개동의 상류에 있는 골짜기로, 물 흐르는 계곡과 산의 경치가 조화를 룬 곳다. 불일폭포 일대와 를 감상할 수 있는 완폭대 는 상향인 靑 鶴 洞 있다고 알려진 지역다. 또한 완폭대, 삼신동, 화개동 일대는 신 라시대 최치원과 관련된 여러 흔적과 전설 내려오는 지역기도 하다. 표 3. 청량산의 주요 자연경관 및 방문자 자연경관 별 방문자 경유지 주 세 붕 권 호 문 득 연 신 지 제 중 청 영 조 유 진 허 목 배 유 장 권 성 구 익 강 재 항 권 진 송 환 기 범 조 박 종 성 대 중 성 해 흥 도 명 송 병 선 선학봉 자란봉 연화봉 탁필봉 연적봉 치원대 풍혈대 총명수 어풍대 생굴 자료: 유산기를 분석하여 필자가 작성. 표 3은 청량산 유람객들 즐겨 찾은 자연경관들다. 금강산, 지리산과 달리 계곡 없으며, 대부분 봉우리다. 는 퇴적암류, 특히 역암으로 루어져 물 귀하고 깊은 계곡 없는 청량산의 지형적 특성 때문다. 사대부들은 기암절벽으로 루어진 봉우리 17 金 馹 孫, 濯 纓 集 卷 5, 頭 流 紀 行 錄.

들을 바라볼 수 있는 御 風 臺, 致 遠 臺 와 같은 조망점을 많 찾았다. 흥미로운 점은 청량 산에도 최치원과 관련된 장소들 많으며, 를 방문하는 사대부들 많았다는 것다. 치원대는 그의 름을 땄으며, 風 穴 臺 는 그가 독서하고 바둑을 두던 곳며, 聰 明 水 는 그 가 마시고 더욱 총명해졌다는 전설 내려온다. 18 가장 많은 사대부들 찾은 金 生 窟 은 신라시대 명필인 金 生 글씨를 연마했다고 하는 곳다. 속리산에서 사대부들 많 방문한 자연경관을 리한 것 표 4다. 속리산 역시 계곡 보다는 전망 좋은 조망점을 찾은 사대부들 많았다. 속리산을 유람한 모든 사대 부들 방문한 곳은 유람의 베스캠프 역할을 한 法 住 寺 인근의 水 晶 峰 다. 곳은 높 지는 않으나, 속리산의 주요 봉우리들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다. 수봉 옆에 있는 거북바위도 8명의 사대부가 찾았는데, 역시 전망 좋을 뿐 아니라, 풍수지리설과 관련된 전설 내려온다. 표 4. 속리산의 주요 자연경관 및 방문자 자연경관 별 방문자 방문지 행 석 남 몽 뢰 오 재 현 익 만 부 송 교 명 조 경 강 환 동 항 상 수 박 문 호 천왕봉 비로봉 문장대 중대 학소대 수봉 거북바위 은폭동 금강굴 석문 보현령 18 청량산박물관 편, 2007, 옛 선비들의 청량산 유람록, 민속원, 8.

속리산에서 세 번째로 사대부들 많 방문한 곳은 文 藏 臺 (1,054m)다. 속리산의 최 고봉은 天 王 峰 (1,058m)나, 문장대를 더 많 오른 것은 커다란 암석으로 루어져 있 어 멀리서도 눈에 잘 띄고 상부가 평평해 많은 사람들 앉을 수 있는 문장대를 속리 산의 상징으로 여겼기 때문다. 1787년 속리산을 찾은 李 東 沆 은 문장대에 오른 감흥을 다음과 같 기술하였다. 사방으로 가로막히는 것 아무것도 없어 전국을 다 바라볼 수 있다. 천 리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로 한껏 다 바라다보아서 속세의 먼지로 가득하였던 가슴을 씻어 내렸으니 것 내가 문장 대에 오른 유다. 19 표 5. 북한산의 주요 자연경관 및 방문자 자연경관 별 방문자 방문지 구 길 허 목 오 재 익 송 상 기 덕 무 엽 유 광 천 옥 신 명 현 양 의 영 영 조 계 서 박 문 호 백운대 노적봉 민지암 청하동 동장대 산영루 중흥동 표 5는 북한산을 유람한 사대부들 방문한 자연경관을 리한 것다. 북한산은 속리 산과 달리, 白 雲 臺, 露 積 峰 등 봉우리에 오른 사대부들보다 계곡인 重 興 洞, 靑 霞 洞 을 찾 은 들 많았다. 북한산 북서부에 위치한 중흥동은 산 내부에서 발원한 물줄기들 합 쳐져 흐르는 북한산에서 가장 길고 큰 계곡다. 또한 계곡에는 북한산 유람의 중심 역 19 李 東 沆, 遲 庵 文 集 卷 5, 遊 俗 離 山 記.

할을 했던 重 興 寺 와 山 映 樓 가 있어서 사대부들 많 찾았다. 1717년 북한산을 찾은 宋 相 琦 는 산영루의 경치를 다음과 같 표현하였다. 자리를 펴고 앉아 난간 아래를 보니 물빛 속에 산 그림자가 드리웠다. 산과 그림자가 아래위로 어진 모습을 보니 눈과 귀가 맑아지고 신 확 깨는 것 참으로 즐길만한 경치였다. 20 한편 北 漢 山 城 의 일부로 군사시설인 東 將 臺 도 빼어난 조망장소로 꼽혀 많은 유람객들 찾았다. 곳에서는 북쪽으로 백운대, 仁 壽 峰, 萬 景 臺 가 보고, 남쪽으로는 도성 한 눈에 내려다보였으며, 달구경의 명소로도 유명하였다. 지금까지 금강산, 지리산, 청량산, 속리산, 북한산 등 5개의 산을 유람한 사대부들 선호한 자연경관을 살펴보았다. 사대부들 선호한 자연경관은 물과 돌, 그리고 나무가 어울려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계곡과 아름다운 경치나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는 조 망장소, 렇게 두 가지 유형으로 리할 수 있다. 렇게 사대부들 자연경관 중에서도 특히 계곡과 조망장소를 선호한 것은 들 아 름다운 경치 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다. 그것은 러한 자연경관 유학자 들인 사대부들에게 중요한 유가적 텍스트였다는 점다. 먼저 물 흐르는 계곡은 자연 의 운행질서를 해하고 를 통하여 자신을 함양하는 觀 物 察 己 의 장소였다고 할 수 있 다. 孔 子 가 흐르는 물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라는 철학적 치를 해하고 물을 지속적 인 도덕성 연마의 표상으로 바라본 것과 같, 21 사대부들에게 계곡은 만물의 치를 파 악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텍스트였다. 또한 사대부들은 깊은 계곡을 神 仙 사는 그 윽한 장소로 인식하였다. 금강산의 백천동, 지리산의 화개동 등 그러한 예로, 속세와 단절된 상향라 생각하고 러한 장소를 찾아 신선의 경지를 경험하고 싶어 하였다. 한편 사방 탁 트인 조망장소는 공자가 말한 登 東 山 而 小 魯, 登 泰 山 而 小 天 下 라는 의 식을 체험하기 위한 장소였다. 높은 곳에 올라 그 아래 펼쳐져 있는 광대한 경관을 보고 浩 然 之 氣 를 기르려고 한 들에게 산 상나 높은 봉우리는 가장 좋은 장소였다. 또한 산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조망장소도 산을 玩 賞 의 대상에 그치지 않고 삶의 20 민경길 편역, 2004, 북한산 3-시문집, 집문당, 249. 21 최원석, 2009, 조선시대의 명산과 명산문화: 치사회지배계층의 명산 인식과 실천을 중심으로, 문화역사지 리 21(1), 218.

지표, 신적 고양을 표상하는 대상물로 본 사대부들에게 중요한 장소였다. 예를 들어, 1544년 청량산을 유람한 주세붕은 접근하기 어려운 층층 쌓인 봉우리와 깎아지른 절 벽을 바라보며 그가 지향한 상적 인간형으로 형상화하였다. 22 금강산을 유람한 사대부 들 중에도 산봉우리를 유교의 성인에 비유하거나, 유가적 관점에서 자연경관에 의미를 부여한 가 여러 명었다. 그렇지만 살펴본 바와 같 산들에 따라서 사대부들 선호한 자연경관에 약간의 차 가 있다. 러한 차는 산의 자연적, 특히 지형적 특징과 사대부들의 주된 여행 목적에 의해 생긴 것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경치가 빼어난 산으로 꼽혔으며 볼거리 도 많은 금강산은 사대부들 선호한 자연경관 다양한 데 비해, 사대부들 심신 수양 과 공부를 위해 많 찾았던 지리산과 청량산은 선호한 자연경관 몇 곳에 몰려 있었으 며, 조망장소를 더 선호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사대부들 선호한 자연경관은 단순한 자 연경관 아니라,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지닌 경우가 많았다. 특히 선현들의 자취와 신, 그리고 풍류가 녹아 있는 장소들을 주로 찾았다. 4.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자연향유 방식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산수유람은 계속 동하면서 루어지지 만, 특한 지점, 즉 그들 보고 즐기고자 한 자연경관에 르게 되면, 상당한 시간을 소요 하며 를 향유하게 된다. 그 향유방식은 사람과 산, 그리고 그 대상인 자연경관에 따라 다 양하지만, 관행화되어 일한 규칙성을 지니는 경우도 많다. 여기에서는 러한 관행화된 향유 방식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가장 일반적인 향유 방식은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그 감상을 글로 기록하거나 시로 남기 는 것다. 대개의 유산기에는 방문한 장소의 경치가 상세하고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고, 그 경치를 보고 느낀 감흥나 기분을 서술해 놓았다. 는 그 장소에서 바로, 또는 매일 빠뜨 리지 않고 꼼꼼하게 기록을 하였다는 증거다. 특히 시 쓰기는 사대부들의 중요한 자연향유 방식었다. 사대부들은 방문하는 곳마다 그 장소를 소재로 선인들 지은 시를 읊고, 다시 자신의 시를 지었다. 즉 특장소에 르러 선인들 지은 시를 먼저 회상한 다음, 와 비교해 자신 느낀 감흥을 시로 옮겼다. 그러 22 우응순, 2001, 산수유기의 전통과 주세붕의 遊 淸 凉 山 錄, 우리문학연구 14, 93.

므로 여행자들 시를 짓는 장소는 거의 해져 있었으며, 에 따라 소재가 서로 중복되었 다. 와 같은 사대부들의 시 쓰기와 관련된 관행 때문에 산마다 시의 주된 소재가 되는 장소 가 있었는데, 금강산에서는 유람객들 많 방문하였던 만폭동, 명연, 은선대, 삼일포 등 며, 지리산에서는 천왕봉, 불일폭포, 용유담 등을 소재로 한 시가 많 지어졌다. 청량산에 서는 치원대, 생굴 등에서 시가 많 만들어졌으며, 속리산을 방문한 사대부들은 수봉 을 보고 시를 많 썼다. 북한산은 산영루, 중흥동, 동장대가 詩 作 의 주요 무대였다. 한편 사대부들은 유람 중에 기록을 하고 시를 쓰기 위하여 미리 준비를 하여 여행에 나섰 다. 기록을 하는 데 필요한 붓, 벼루, 먹, 종 등 문방구와, 시를 지을 때 참고하기 위한 詩 筒 과 다른 사람들의 시집 등 그것었다. 종는 휴대가 용하고 시를 쓰기 좋도록 미리 잘라서 책으로 묶어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 많았으며, 시통은 한시의 韻 頭 를 얇은 대나무 조각에 써넣어 가지고 다니던 조그마한 통으로, 많은 여행자들 휴대하였다. 시집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집도 있었으나, 唐 詩, 杜 詩 補 遺, 南 嶽 唱 酬 集 등의 중국 시 집을 준비하는 사대부들 많았다. 23 가운데에서도 朱 熹 가 張 栻, 林 用 中 과 함께 南 嶽 을 일주일 동안 유람하면서 주고받은 시와 序 跋 文 을 합쳐 묶은 남악창수집 은 조선후기 사 대부들 유람 중의 시작에 많 참고한 책으로 보인다. 24 주자를 존경하던 조선의 사대부들 은 주자와 장식의 남악 유람을 산수 유람의 전범으로 생각하고, 들의 행태를 본받으려고 애썼는데, 그 하나가 시를 짓는 것었다. 사대부들의 또 다른 자연향유 방식으로, 장소에 대한 름 짓기를 꼽을 수 있다. 대개의 사대부들의 유람은 선인들 유람한 여을 따라 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기 때문에 미 름 붙여진 명소들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그렇지만 여 상에 지금까지 름 붙여 지지 않았던 새로운 자연경관을 만나면,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름 짓기를 하였 다. 그 좋은 예로, 1628년 금강산을 유람한 李 命 俊 은 안문재 근처에서 폭포를 조망할 수 있 는 경치가 빼어난 곳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 밝히며 李 許 臺 라고 명명하였다. 그는 또 망 군대 근처의 南 臺 가 경치가 뛰어나다며 五 仙 巖 라는 름을, 장안사 근처의 맑은 못에 玉 23 1570년 청량산을 유람한 권호문은 두시보유, 1671년 금강산을 유람한 창협은 당시 를 휴대하 였다. 24 책은 명나라 때인 1500년에 鄧 淮 라는 사람 주희와 장식의 문집에서 관련 시들을 골라 엮은 것인데, 우 리나라에서는 적어도 1585년 전에 복각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李 荇 은 1531년 주희와 장식의 7일 산행을 본 받아 7일을 기한으로 삼아 남악창수집 에 실린 50수의 시를 차운하였다(심경호, 2007, 산문기행, 조선의 선 비 산길을 가다, 가서, 684-685.).

潭, 만폭동의 폭포에 飛 流 瀑 란 명칭을 붙기도 하였다. 만약 대가 서울 부근에 있었다면 반드시 사람들마다 칭찬을 하였을 것나, 산에 있기 때문 에 시냇가의 버려진 땅 되었다. 한 물줄기의 빼어남 또한 사람들을 만났느냐 만나지 못했느냐에 달 려 있구나. 그러나 내가 명로와 함께 다행히도 대를 만나서 반나절 즐기게 되었으니 름을 짓지 않을 수 없다. 25 또한 명준은 금강산 곳곳에 붙여진 불교식 지명에 대해 그 말을 증명할 수 없다., 우 매한 풍습으로 참으로 개탄할 만하다., 불경스러운 말을 취하여 름을 지어 무지한 백성 을 미혹시킨다. 등으로 평가하면서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1544년 청량산을 유람한 周 世 鵬 도 아래와 같 언급하며 름 없는 봉우리에 름을 붙 고, 불교식 름을 가진 봉우리의 름을 바꾸었다. 丈 人 峰, 卓 筆 峰, 蓮 花 峰 등 주세붕 붙인 름은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내외의 여러 봉우리가 름 없었다. 주자가 廬 山 에서 기한 절경을 만나면 곧 름을 붙였으니 징험함 없다고 해서 름을 붙지 않은 것도 아니다. 산의 여러 봉우리들은 백세를 지나며 름 없었는데 참으로 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부끄러움 된다. 만약 반드시 주자의 현명함을 기다 려 름을 붙인다면 름 붙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우선 름을 붙고 뒤에 오는 총명한 사람 고치기를 기다리는 것 어찌 잘못겠는가? 내봉과 외봉을 합치면 열둘 되고 옛 름 그대로인 것은 두 개다. 26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자연경관에 름을 붙기도 하였지만, 자신의 름을 자연에 남기 기도 하였는데, 그것 바로 題 名 다. 제명란 경치 좋은 장소에 자신의 름나 시를 쓰는 행위를 말한다. 제명은 모든 산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특히 제명 성행했던 곳은 일 찍부터 많은 유람객들 찾았던 금강산다. 제명은 계곡나 산봉우리 등의 바위에 새기는 25 경수 외 편역, 2000, 17세기의 금강산 기행문, 강원대학교출판부, 118. 26 청량산박물관 편, 2007, 옛 선비들의 청량산 유람록 Ⅰ, 민속원, 19-20.

것 일반적었으나, 절나 자의 벽과 기둥 등을 가리지 않았다. 가장 제명 많았던 곳은 만폭동으로, 1700년대 전반에 금강산을 찾은 李 萬 敷 는 만폭동에 있는 楊 士 彦 의 글씨 주변에, 자신의 조상들과 아버지의 름을 비롯하여 글씨를 새길 만한 공간 없을 도로 셀 수 없 많은 름 새겨져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1865년 금강산을 찾은 李 象 秀 도 그 상황을 고발하며 다음과 같 제명을 비판하였다. 옛날 사람은 우연한 흥취로 인하여 더러 어떤 한 가지 일을 창출하기도 하였는데 깊은 뜻은 없었 다. 그런데 후세사람들은 그것을 마냥 본받고 있다. 韓 昌 黎 는 27 嵩 山 에서, 蘇 東 坡 는 28 仙 遊 에서 모두 제명을 남겼다. 그러나 두 사람 지나는 산천마다 모두 제명을 남긴 것은 아니었다. 금강산의 제 명은 장안사의 동문에서부터 시작되어 명경대에서 성황을 루고 만폭동에서 극치를 루었다. 주먹 만 한 돌도 온전한 것 적었다. 명나라 때 袁 宏 道 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율법 가운데 산을 도 둑질하고 돌을 떼어내면 형벌 주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속된 선비가 산을 오염시키는데 율법으 로 금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푸른 산과 흰 돌 무슨 죄가 있어 까닭 없 얼굴에 刺 字 를 하 고 그 살을 찢는가? 아, 인자하지 못함여. 29 금강산에 비해서는 덜 하였으나, 지리산, 속리산 등 다른 산에서도 제명은 성행하였다. 시 간 흐를수록 제명 자체가 구경거리가 되었다. 앞서 유람한 유명인나 자신의 조상, 친지 의 제명을 찾아 감회에 젖거나, 그 근처에 다시 제명하는 것 관행화되었다. 그 예로, 청량 산의 李 滉 의 제명을 들 수 있다. 황은 1561년에 제자들과 청량산을 유람하면서 致 遠 庵 의 서쪽 벽에 자신의 름을 썼는데, 후 청량산을 찾은 사대부들은 대부분 곳에 들러 황 의 제명을 감상하였다. 그러나 황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그 주변에는 제명을 하지 않았다 고 한다. 30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자연 향유 방식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 아름다운 자연경관 속에 서 음악과 연회를 즐기는 것다. 음악을 즐기는 방식은 사대부들 직접 연주하기 보다는 전문적인 악공들을 동반하여 유람 중간에 머무는 장소에서 연주하게 하는 것다. 특히 다 른 산에 비해 금강산 유람에 악공 동원되는 사례가 많았다. 1572년에 금강산을 유람한 양 27 중국 당나라 때 시인 韓 愈 를 말한다. 28 중국 북송 때의 시인 蘇 軾 을 말한다. 29 동주 편역, 1999, 금강산 유람기, 전통문화연구회, 368-369. 30 李 瀷, 星 湖 全 集 卷 53, 遊 淸 凉 山 記.

대박은 서울에서 출발할 때부터 胡 琴 을 연주하는 악공과 동행하였으며, 1603년에 산을 찾은 구도 피리를 부는 악공을 데리고 갔다. 구는 1603년 북한산 유람에도 피리 부는 노비를 동반하였다. 그는 산에 가면서 피리 소리가 없으면 재미가 없다고 일부러 친지의 집 에 있는 피리를 잘 부는 노비를 섭외하여 데리고 갔으며, 유람 도중에 거문고 악공을 합류 시켰다. 31 유람에 동원된 악기는 피리, 비파, 나발, 대금, 퉁소, 태평소, 북, 생황, 거문고 등 다양하였으나, 휴대가 편리한 관악기류가 주를 루었다. 한편 산에서의 연회는 경치 좋은 곳에서 동행한 일행들과 준비해간 술과 음식을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유흥의 흥취를 진작하기 위하여 악공을 동원하였다. 구와 조식 은 북한산과 지리산에서 자신 즐긴 연회의 모습을 각각 다음과 같 묘사하였다. 나와 일행들 맨발로 시냇물에 들어가서 옷깃을 풀어헤친 채 바위에 앉으니 음식 번갈아 나오 고 안주가 낭자하였다. 혹 물결에 잔을 띄우고서 다투어 술을 마시기도 하고, 혹은 그물을 던져서 물 고기를 잡기도 하였다. 자제는 단풍 가지를 꺾어 머리 위에 꽂았고 나는 국화꽃을 따서 술잔 위에 띄 웠다. 취기가 오르자 더욱 즐거워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춤을 추었으며, 거문고와 피리가 어우러져 맑고 미묘한 음악을 연주하니 모두 천고에 드문 소리였다. 32 다시 불일암에 모여 물을 마시고 밥을 먹었다. 절 문 밖 소나무 밑에 나와 앉아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한껏 술을 마셨다. 아울러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부니 그 소리가 사방에 울 려 퍼져서 산봉우리에도 메아리쳤다. 33 5. 맺음말 본 연구는 금강산, 지리산, 청량산, 속리산, 북한산 등 주요 산의 유산기를 용하여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산수유람 방법과 그들 선호한 자연경관에 대해 파악하고, 나아가 그들 어떤 방식으로 자연을 체험하였는지를 고찰하였다. 그 주요한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 31 李 廷 龜, 月 沙 集 卷 53, 遊 三 角 山 記. 32 귀(상하 역), 2003, 국역 월사집 5, 민족문화추진회, 266. 33 최석기 외, 2000,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돌베개, 113.

다. 조선시대 산수유람은 길게는 한 달 상 걸리는 장기간의 여행었고, 때문에 오늘날 의 여행보다 복잡하고 많은 준비과 필요하였다. 먼저 여, 숙박지 등을 결하는 데 필요한 여행 보는 앞서 여행한 사람들의 유산기와 경험담 등을 통해 얻었는데, 특히 유산 기는 유람여행의 안내서 역할을 하였다. 장기간의 여행을 위해 식량, 침구와 의류, 식기와 취사도구 등을 준비하였는데, 대부분의 여행용품은 무게가 가볍고 부피가 작아 휴대에 편리 한 것을 사용하였으며, 사대부의 여행었기 때문에 책과 문방구가 빠지지 않았다. 대개 유람여행은 가족과 친지와 함께 하였으며, 신분에 따라 대규모 여행단 꾸려지기도 하였다. 사대부들 산수유람에 용한 주된 교통수단은 산을 오가는 길과 산에서가 달랐 다. 산을 오가는 길에는 대개 말을 용하였고, 산에서는 16세기 후 藍 輿 를 사용하였다. 산수유람에 나선 사대부들은 가장 빠르고 편한 길을 용하여 산을 오고 갔는데, 국가가 관 리하는 역로를 많 용하였다. 사대부들은 여행 중에 민가, 관아, 역원, 주막, 사찰, 서원 등에서 숙박하였고, 산에서는 주로 사찰에서 잤다. 사대부들 선호한 자연경관은 산에 따라 조금씩 차가 있으나, 아름다운 계곡과 멀리까 지 조망할 수 있는 조망장소를 선호한 것은 공통적었다. 러한 자연경관은 사대부에게 빼어난 경치로서 뿐만 아니라 유가적 텍스트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사대부들에게 계 곡은 만물의 치를 파악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장소였고, 조망장소는 호연지 기를 기를 수 있는 장소였다. 또한 사대부들은 자연경관 자체보다는 거기에 담긴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중요시하였으며, 러한 점 관람할 자연경관을 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하 였다. 사대부들의 자연향유 방식은 관행화된 것들 적지 않았다. 먼저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그 내용을 기록하거나, 그 감회를 시로 옮겼다. 특히 시 쓰기는 조선시대 사대부들 유람 중 에 가장 많 하던 활동으로, 유람지마다 시를 쓰는 장소가 거의 해져 있었다. 사대부들 은 자연경관에 름을 붙는 일도 하였는데, 불교식 름을 유교식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 었다. 거꾸로 자신의 름을 자연에 남기는 제명도 성행하였다. 사대부의 제명은 시 쓰기와 함께 선인의 자연향유 방식을 본받는다는 의미가 강하였으나, 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 사대부들도 적지 않았다. 아름다운 자연경관 속에서 연회를 즐기는 일도 중요하였는 데, 여기에는 거의 음악 빠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