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키의 테마 독서논술 역사인물 (6) 세상을 바꾸는 힘 변화와 충돌이 일어나는 이유 (교사용 지도서) (주) 클 애 들 교 육 부설 한국독서교육개발원
지도하시는 선생님에게 안녕하세요? 남미영입니다.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북키의 테마 독서논술 이 탄생되었습니다. 중학생을 위한 독서논술 전문 프로그램의 모습으로 여러분 앞에 내놓은 이 프로그램에는 저의 오랜 연구의 경험이 담겨 있습입니다. 저는 지난 20여년 동안 국책연구소인 한국교육개발원 국어교육연구실의 책임자로 일하면서 세계적인 독서논술 교육의 중심지인 프랑스, 영국,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뉴질랜드, 미국, 호주, 캐나다 등의 중등학교 교실, 도서관 학교, 연구기관에서 협력연구를 하면서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도 교과별 사고력을 길러주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가 물고기를 잡아서 먹여주는 지식 위주 교과 교육을 하고 있는 동안, 선진국들은 물고기 잡는 방식의 교과별 사고력을 길러주는 교육을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차이로 수십조원의 학원비를 지불하면서도 학생들에게는 기쁨이 없는 교육을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학교가 싫고, 학원이 두려운 것은 끝없이 밀려드는 방대한 지식을 다 기억해야 하는 교육 컨셉 때문입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그 지식들을 선별하고, 처리하고, 응용하고, 창조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우리 교육의 컨셉을 바꾼다면 학생들은 얼마든지 즐겁고도 여유만만하게 지식의 억만장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북키의 테마 독서논술 바로 우리 학생들에게 그러한 교육을 선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이 프로그램을 보내면서 약간의 두려움도 느끼고 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도 저자가 직접 학생들은 교육할 수는 없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성공과 실패는 현장에서 직접 학생들을 지도하시는 선생님 여러분의 역량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독서교육의 동지로 서로를 선택하고, 수년간 서로를 길들여온 사이이기 때문에 두려움보다는 믿음이 더 큽니다. 가르치시는 여러분에게 작은 도움을 드리고자 프로그램 구성과 집필 배경, 문제의 핵심, 참고자료 등을 알려드리는 교사용 지도서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 지도서는 선생님 여러분의 열정과 노력이 가미 될 때에만 교육 효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앞으로 호를 거듭해갈수록 더욱 알차게 성장할
것입니다. 그동안 여러분의 뜨거운 열정과 정성을 곁들여 완성시켜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2005년에 여러분의 직장과 가정에 큰 행운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05년 2월 (주) 클 애 들 교 육 부설 한국독서교육개발원장 문학박사 남 미 영
<1차시를 위한 교사용 지도서> 1. 필독도서명 :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서양편> 2. 학습테마 :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정복전쟁> 3. 학습목표 1) 프랑스 혁명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다. 2) 프랑스 혁명의 진행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3)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을 통해 프랑스 혁명이 퍼져나가는 과정을 말할 수 있다. 4)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이 주변 여러 나라에 끼친 영향을 말할 수 있다. 4. 지도상의 유의점 1) 프랑스 혁명이 가장 보편적이고 대표적인 시민혁명이라는 세계 역사에서 갖 는 역사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2) 낡은 제도(앙시앵 레짐)의 모순점들이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되었음을 설명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3)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면서 혁명을 막으려는 주변 국가들의 간섭이 생기고 민 중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혁명이 과격화되는 과정 등을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4) 단순한 사실들을 나열하기보다는 원인과 결과로 사건들을 연결시켜 학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5)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이 프랑스 혁명을 주변에 전파시킨 공도 있지만, 주변국 국민들에게는 또 다른 압제가 될 수 있음을 설명한다. 6)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으로 인해 유럽의 여러 나라에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발전하였음을 설명하고, 프랑스 혁명이 오늘날 우리의 삶에 끼친 영향을 설명 한다. 5. 1차시 학습지도안 8쪽~9쪽
단원과 관련된 사진을 보면서 가볍게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으로 공부를 시작한다. 10자-20자 정도의 간단한 느낌을 쓰면서 단원의 창을 열어보는 과정이다. 이어 주 요 용어 해설이 있다. 이 주제를 다루면서 꼭 익혀야 할 사건, 인물, 용어를 짚어보 며 핵심적인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목적이 있다. 주제에 관련된 내용을 간추리는 부분도 있다. 그 시기 역사의 주요한 흐름을 스스로 정리하는 방식이다. 열쇠 말을 징검다리 삼아 당시 역사의 줄기를 나름대로 파악하고, 설명하면서 내용의 얼개를 잡는 것이다. 프랑스의 낡은 질서(앙시앵 레짐) - 구제도 아래서 프랑스에는 성직자와 귀족 및 평 민이라는 세 가지 신분이 있었다. 당시의 프랑스 인구는 대략 2653만 5000명으로 추정되는데, 제1신분인 성직자는 13만 5000명, 제2신분인 귀족은 40만 명으로서, 이들 특권 계층은 모두 53만 5000명이었다. 그 나머지 2600만 명이 제3신분으로 서, 2300만 명이 농민이었고, 그 외에 부르주아지가 100만 명, 농업 이외의 노동을 하는 사람이 2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제1신분인 성직자는 교회 땅과 수도원 땅을 소유하고, 농민으로부터 10분의 1세를 거두고 있었으며, 더구나 자신들은 면세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제2신분인 귀족은 국가의 요직을 차지하고 백성 위에 서 있 었으며, 영지를 소유하고 이들 역시 면세 등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제3신분인 평민은 국민의 98%를 차지하고 있었고, 산업에 종사하며 세금을 부담하고 있었다. 즉, 이 당시 프랑스는 전체 인구의 2%밖에 안 되는 제1신분과 제2신분이 98%의 제3신분을 지배하고 있던 사회였다. 게다가 지배층은 토지의 35%를 소유하면서도 세금 부담은 10%뿐이었으며, 제3신분은 50%의 토지를 소유하고서도 80%의 세금 을 부담했다. 제3신분은 많은 세금을 부담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정치적 권리가 없었으며, 대다수 농민은 영주에 대한 공납과 국가에 대한 무거운 세금부담으로 허 리가 휘고 있었다. 첫 번째 그림에서 농민 차림의 노인은 제3신분을 의미하며 농민 의 앞쪽 등에 올라 탄 사람은 십자가 목걸이를 통해 성직자 즉 제1신분임을 알 수 있으며, 뒤쪽에 올라 탄 사람은 칼을 찬 모습이라든지 화려한 복장에서 귀족 즉 제 2신분임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프랑스 혁명 이전에 제3신분의 고통과 노동 위에 온갖 특권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 프랑스의 1, 2신분을 묘사한 것이다. 더군다나, 3 신분이 늙은 노인으로, 1신분과 2신분이 살이 통통하게 찐 비교적 젊은 사람들로 그려짐으로써 프랑스 혁명 이전, 즉 구제도의 잘못된 점을 풍자하고 있는 그림이다. 두 번째 그림은 프랑스 혁명 이후의 상황을 묘사한 그림이다. 첫 번째 그림과 달리,
가슴에 십자가를 탄 성직자가 앞서고 농민을 등에 업은 귀족이 걸어가는 모습은 분 명히 첫 번째 그림이 그려질 때와는 다른 사회 상황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프랑 스 혁명이 프랑스 사회에 가져온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의 상황은 실제 일반적인 사회의 모습은 아니었고, 이런 사회를 이상으로 하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었다. 1) 구제도의 모순 - 구제도란, 오래된 제도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앙시앵 레짐 이 라 하는데, 이 말은 프랑스어로 옛날의 제도, 구제도 등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일 반적으로는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구제도 를 말할 때 사용된다. 프랑스 혁명 당시 프 랑스 국민은 절대주의 통치 아래 놓여 있었고, 일부 특권 신분만 백성들 위에 군림 하고 있었다. 절대주의라고 하는 낡은 정치체제와 신분제에 바탕을 둔 오래되고 낡 은 사회 경제 체제 전체를 앙시앵 레짐, 즉 구제도라 한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사 회를 유지하고 있는 정치체제와 신분제로 대표되는 낡은 사회체제는 근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상공업의 발달 등으로 인한 사회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였다. 즉, 상공 업활동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시민 계층은 국가에 막대한 세금을 부담하고 있음에 도 불구하고 아무런 정치적 권한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성직자와 귀족계층은 막대한 부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권계층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단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으면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호화스런 생활은 대다수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딛고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처럼 많이 가 진 사람은 단 한 푼도 세금을 내지 않으면서 막대한 부를 누리고, 반대로 적게 가 진 사람들은 교회에 대한 10분의 1세, 국가에 대한 각종 세금, 영주에 대한 공납 등 오히려 엄청난 부담을 진 채로 살아가야 하는 낡은 신분제에 바탕을 둔 잘못된 사회의 모습, 이것이 바로 구제도의 모순이었다. 이 구제도의 모순에 대한 반발에서 프랑스 혁명은 출발하였다. 2) 면세특권 - 말 그대로 세금을 면제받는 특별한 권리 를 뜻한다. 프랑스 혁명이 이루어질 당시 제1신분과 제2신분은 각종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제1신분인 성직자 들은 영주로서 봉건지대를 받고 십일조를 징수하는 특권과 면세의 혜택을 누렸다. 제2신분인 귀족은 전 국토 1/5 정도의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농민 으로부터 지대를 받았고, 교회 군대 행정의 고위직에 앉아 연금을 받았으며, 지세인 타이유(taille)와 도로 부역에서 면제되는 등의 실질적인 특권을 누렸다. 그리고 칼 을 찬다든지 하는 형식적인 명예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귀족은 막대한 토지 소유, 교회 군대 정부의 요직 차지, 면세 특혜 등을 향유하였다. 이처럼 많은 것을 갖고
있던 이들이 세금부과의 대상에서 제외된 반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3신분 은 무거운 부담을 짊어지고 생활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의 재정상태가 점점 악화되었다. 영국으로부터 값싼 상 품이 수입되면서 프랑스 산업은 위기에 빠졌으며, 실업자의 숫자는 크게 증가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왕실의 재정 위기도 심해졌다. 화려한 궁정 생활과 끊임없는 전쟁 등으로 인해 루이 14세때부터 왕실의 재정은 크게 악화되기 시작했으며, 루이 15세를 거쳐 루이 16세때에 이르러서는 적자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었다. 그것도 모자라 미국이 독립전쟁을 벌이자 엄청난 돈을 들여가면서 미국을 지원하여 프랑스 의 재정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런 위기를 해결하고자 튀르고라는 당시 프 랑스의 재무장관은 특권계급에게 주어졌던 면세 특권을 폐지하고 모든 토지 소유자 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국가의 수입을 늘리고자 하였다. 이러한 왕실의 재정 위기 를 이용하여 프랑스의 귀족들은 과거 절대왕정시대의 강력한 왕권 아래서 왕실에 빼앗겼던 각종 정치권력을 회복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신분제 의회인 삼부회를 소집하였던 것이다. 이 삼부회가 귀족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 면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3) 삼부회 - 정식 명칭은 전국삼부회이다. 삼부회는 프랑스의 신분제 의회를 말하 는 것으로, 성직자인 제1신분, 귀족을 제2신분, 그리고 평민을 제3신분으로 하여 3 개의 신분으로 구성된 의회라는 의미이다. 이는 14세기초 1301년에 당시 프랑스의 왕이었던 필립 4세가 소수 특권층인 사제 귀족 도시의 대표를 모아놓고 노트르담 성당에서 개최한 것이 기원이다. 그 뒤 제1부 성직자, 제2부 귀족, 제3부 평민의 대 표들로 구성된 일종의 의회였다. 당시 이미 의회가 성립되어 있었던 영국 의회가 주로 왕권을 제약하기 위해 귀족 등의 주도로 성립되어 발전한 반면에, 프랑스에서 는 오히려 국왕의 필요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즉 왕권을 제약하기 위 해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왕권이 국민대표에 협력을 요청하는 자문기관이라는 점 이다. 그러나 때로는 왕권을 제약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절대왕정 확립기인 1614년 이후 170년간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었다. 국가의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프랑스의 국왕 루이 16세는 특권 신분 사람들로만 구성된 명사회를 개최하였다. 거기에서 국왕은 각 신분의 평등한 과세 를 위한 새로운 제안을 하였으나, 명사회는 이를 거부하였다. 특권 신분의 사람들은 국왕의 재정 위기를 이용하여 과거 절대왕정시대에 국왕에게 빼앗겼던 각종 정치적 특권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1788년에 정부는 3부회의 소집 을 공포하게 되었다. 삼부회는 각 선거구에서 선출된 제1신분 대표 290명, 제2신분 대표 약 270명, 제3신분 대표 약 290명으로 구성되었고, 신분별로 3부로 나뉘어 의결하는 것이 관례였다. 제3신분 대표들은 특권계층에게 유리한 신분별 투표 방법 대신, 개인별 투표를 요구했으나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특권계층과의 마찰로 인해 신분간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결국 삼부회의 활동은 중지되고 말았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국민의회가 성립되면서 신분제 의회인 삼부회는 사라지게 되었다. 4) 테니스 코트의 서약 - 프랑스 혁명의 발단이 된 사건 중 하나이다. 왕실의 요구 에 의해 재정 위기의 해결을 위해 열린 3부회는 3부회 개최를 강력히 희망했던 특 권계층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신분별 투표를 주장하는 특권계층과, 개인별 투표를 주장하는 제3신분 대표들간에 투표 방식을 둘러싼 갈등 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분별 투표가 이루어질 경우 투표의 결과는 2대 1로 특권계 층의 의도대로 결론이 날 확률이 높았으나, 개인별 투표가 이루어질 경우, 1신분 내의 하위 성직자들이 제3신분과 뜻을 같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제3신분에 게 유리한 결정이 날 수 있었던 것이다. 삼부회에서의 표결방식이 정해지지 않자, 제3신분의 대표들은 다른 2부와는 독립하여 신분제 의회가 아닌 근대적인 국민의 회 를 구성하였다. 제3신분 대표들은 다른 두 신분 대표에게 국민의회로 합류할 것 을 권하였으나, 귀족 대표는 이를 거부하였고, 성직자들 중에서는 하위성직자들이 이에 응하였다. 이렇게 구성된 국민의회에 대하여 루이 16세는 국민의회의 회의장 을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폐쇄시켜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제3신분 대표들은 왕실의 실내 테니스코트에 모여 새로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였다. 이를 테니스 코트의 서약 이라 하며, 이후 국왕도 하는 수 없이 귀족과 국민의회에 참여하지 않은 성직자 대표들도 국민의회에 참가할 것을 지시함으로써 프랑스의 신분제 의회인 3부회는 사라지고 새로운 헌법 제정을 맹세한 제3신분 대 표들을 중심으로 한 국민의회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이는 바로 앙시앵 레짐, 즉 구 제도와 구체제가 몰락하는 첫 걸음이었던 것이다. 5) 인권 선언 - 프랑스 혁명 중에 국민의회가 발표한 것으로 원래의 이름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이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프랑스 혁명은 파리에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처럼 혁명이 진행되면서 혁명을 이끌던 국민의회로서는 혁명이 지향 하는 바를 분명히 밝혀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진보적 귀족인 라파예트가 중심 이 되어 기초한 것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이다. 이 선언은 프랑스 혁명이 일 어난 1789년 8월 26일에 국민의회에서 가결된 것으로 당시까지의 프랑스 혁명의 성과를 확인하고 새롭게 만들어질 사회의 이념과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서, 프랑스 혁명의 상징이다. 이런 역사적 의미 덕택에 사람들은 이 선언을 구제도에 대한 사 망 진단서 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몇 년 후에 제정되는 1791년 헌법의 전문으로 서 그 첫머리에 실리기도 하였다. 미국 독립 선언문의 영향을 받은 이 문서는 사상 적으로는 당시 프랑스에 널리 퍼졌던 계몽사상을 통해 자라난 인간 해방의 이념이 깔려 있으며, 국민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권리를 밝힌 것으로서 전문 17조로 되어 있다. 이 선언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천부인권 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주권재민, 언론의 자유, 사유재산의 불가침성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이 문서는 새로운 시민 사회의 여러 원칙을 선언한 것으로서, 당시의 유럽 제국의
군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그 후의 역사에서 인간 해방을 크게 일으켰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 문서이다. 영국 혁명 당시의 권리 장전, 미국 독립 혁명 당시의 미국 독립 선언문 과 함께 세계의 시민 혁명을 대표하는 문서 중의 하 나이다. 6) 입헌 군주제 - 왕이 나라를 통치하는 정치 형태의 하나로, 왕이 무제한적인 권한 을 행사하는 절대 군주제와 달리 법에 의해 왕의 권한이 제한되는 정치형태이다. 입헌 군주제는 절대왕정이라는 정치 형태가 시민 혁명을 거치면서 생겨났다. 영국 은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 는 입헌 군주제의 원칙을 세웠으며, 프랑스 혁명 중에는 1791년 처음으로 입헌 군주제가 성립되었다. 절대왕권을 휘두르던 프랑스의 왕 루이16세는 이러한 정치 형태에 만 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변 군주국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왕권을 회복하려 하였고, 이러한 국왕의 움직임과 주변 국가들이 프랑스 혁명을 무너뜨리려는 움직임은 혁명 을 점차 과격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입헌 군주제는 오늘날에도 여러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는 정치 형태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영국, 일본, 태국, 네팔, 브루나이, 요르단, 쿠웨이트, 모로코, 벨기에, 스페인,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모나코, 리히텐슈타인,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통가 등 생각보다 훨씬 많은 나라들이 입 헌 군주제를 실시하고 있다. 7) 공화정 - 여러 명의 주권자가 통치하는 정치체제로 군주제에 상대되는 개념이 다. 이 제도에서는 정치에 참여하는 대표자는 국민의 투표로 선출되며, 일반적으로 대통령제나 의원 내각제의 정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대표민주제 의회민주제 등도 같은 뜻으로 사용될 때가 있다. 영국이나 일본은 세습군주가 존재하고 있는 점에서 보면 형식적으로는 군주제이지만,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점에서 보면 실 질적으로는 공화제이다. 군주제에서 국가의 원수는 혈통적으로 세습되는 개인이지 만, 공화제의 특징은 출생에 따른 봉건적인 차별을 부정하고, 국민주권 자유 평등 민 주주의를 원리로 삼는다. 영국의 청교도혁명, 미국의 독립전쟁, 프랑스혁명, 러시아 혁명 등은 모두 공화제 확립의 길을 터놓은 역사적 사건들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대 그리스 스위스 미국 프랑스 등은 민주제적 공화국, 고대 로 마는 군인과 귀족에 의한 귀족제적 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제적 공화국에서 도 고대그리스나 스위스는 직접민주제적 공화국이며, 미국과 프랑스는 간접민주제 적 공화국이다. 8) 부르주아 - 원래는 시민을 의미하는 말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성벽 속에 거주하 는 사람들 이라고 한다. 이는 중세 도시에 거주하던 사람들에서 유래되었다. 이들은 주로 중세 도시의 발전과 더불어 성장한 상공업자들을 가리키며, 농업 사회에 바탕 을 둔 중세 봉건제 사회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였다. 부르주아는 자본주의가 발달
하면서 그 내용도 한층 복잡하게 되었는데, 절대주의 시대엔 봉건 계급에 대항하는 세력을 가리켰으나, 그들이 실제로 사회의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것은 시민 혁명을 거친 후의 일이었다. 프랑스 혁명 때에는 농민과 결합하여 봉건적 특권 계급인 제1 신분, 제2신분에 대항하며 자유 평등을 주장하였다. 영국의 명예혁명과 프랑스 혁명 후에는 제3신분인 부르주아, 즉 시민계층의 원리에 입각한 사회를 확립시켜 자본주 의, 의회제도, 민주주의, 자유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더욱 발전하면 서 제4신분인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층)를 성립시켜 부르주아란 자본가를 의미하 는 말로 주로 사용되게 되었다. 9) 제정 - 황제가 국가를 다스리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황제는 왕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왕이 국가를 다스리는 형태는 군주제 또는 왕정 이라 하는데, 왕 이 다스리는 여러 국가를 통치하는 사람이 황제이고, 황제가 다스리는 정치 형태가 제정이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 루이 14세나 등 프랑스의 왕들은 강력한 왕권을 휘 둘러 절대왕정이란 표현을 쓰지만 이들은 왕에 불과하였고, 그래서 이들이 다스렸 던 정치 형태는 왕정이고 그들이 다스린 나라는 왕국에 불과하였다. 반면, 정복 전 쟁을 통해 여러 나라를 점령하였던 나폴레옹은 자신의 동생을 에스파냐의 왕에 임 명할 정도의 막대한 힘을 휘둘렀으며, 이처럼 여러 왕국을 다스리는 자신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나폴레옹 황제 등장 이후의 정치 형태를 프랑스 제1 제정이라 하며, 나폴레옹 몰락 이후 나폴레옹 3세에 의해 1852년에서 1870년까지 실시된 제정을 프랑스 제2제정이라 한다. 10) 대륙봉쇄령 - 나폴레옹의 활발한 정복 전쟁의 결과, 유럽 대륙의 나라들 가운 데 반 이상이 나폴레옹에게 무릎을 꿇은 가운데 대륙에서 떨어진 섬나라 영국은 끝 까지 나폴레옹에게 저항하고 있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유일하게 남은 적 영국에게 경제적인 타격을 주는 동시에 프랑스의 상품시장을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유럽 대 륙과 영국의 통상을 금지한다는 이른바 대륙봉쇄령 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륙봉쇄령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 었기 때문에, 유럽 시장을 대신해서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 방면의 시장을 개척했 다. 또한 영국은 유럽 대륙의 국가들(포르투갈, 에스파냐, 독일, 네덜란드 등)과의 밀무역을 통해 계속 거래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즉, 영국에게 타격을 주려한 대륙 봉쇄령이 실제적으로 영국에게는 별다른 경제적 위협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반 면에 영국과의 교역을 통해 대부분의 일상생활 필수품을 값싸게 공급받고 있던 프 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의 국민들은 대륙봉쇄령으로 영국 상품 수입이 제 한되자 오히려 더욱 큰 고통을 받게 되었다. 대륙봉쇄령 초기에 프랑스는 대륙 시 장을 독점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번영을 누릴 수 있었지만, 영국의 강력한 해군력 등으로 인해 시간이 갈수록 원료와 사탕 등 식민지에서 들여오는 물품이 부족해지 자 물가가 높아지게 되었다. 또한 영국을 대상으로 하던 곡물 수출이 막히게 되자
경제적인 피해가 심해졌다. 그리고 영국을 대신해 유럽 여러 나라들에게 삼품을 충 분히 공급할 수 있을 정도로 프랑스의 산업이 발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프랑스 이외의 나라들은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영국과 유럽 대륙의 국가들 사이에 밀무역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대륙봉쇄령에 의해 곡물 수출의 길이 막혔던 러시아가 맨 먼저 나서서 영 국과의 통상을 재개하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배반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나폴 레옹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연합군을 이끌고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 이 러시아 원 정이야말로 나폴레옹이 몰락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0쪽~12쪽 주제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나 인물에 관한 사료, 그림 자료 등을 살피면서 텍스트 를 다시 한 번 참고하도록 하고, 간단한 문제를 풀면서 의미를 더듬어 보게 한다. 당시 인물의 설명이나 역사기록을 직접 읽어보면서 깊이 있게 공부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살펴보는 과정이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을 한두 가지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가장 큰 원인으로 들 수 있는 것 이 구제도(앙시앵 레짐)의 모순이다. 사회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낡은 정치 경 제 사회 체제가 갖고 있는 모순을 극명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신분별 인구 구성 및 토지 소유 비율을 나타낸 텍스트의 표이다. 표를 통해 당시 프랑스의 경제체제가 얼마나 불평등한 사회였는가를 설명하고, 더불어 그들의 세금부담 형태도 같이 언 급하여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지도한다. 한편 프랑스의 재정 위기는 프랑스 혁명
이 발생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의 재정 위기가 어떻게 프랑스 혁명으로 연결되었는가를 왕권과 귀족권의 다툼이라는 측면에서 설 명하여 단순한 암기가 아닌, 원인과 결과라는 역사의 흐름을 짚을 수 있도록 지도 한다. 1) ᄀ : 성직자(사제 또는 승려), ᄂ : 귀족 성직자 - 에스파냐, 포르투갈,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오늘날에도 유럽에서 카톨 릭 신도가 가장 많은 국가들이다. 빈칸 ᄀ에 들어갈 성직자들 역시 카톨릭의 성직 자들을 뜻한다. 이 성직자들은 제1신분으로 분류되었으며 넓은 교회의 땅과 수도원 땅을 소유하고, 농민들로부터는 10분의 1세를 거둬들이고 있었으며, 가끔 왕에 대 한 기부금을 내는 것 이외에는 거의 모든 세금이 면제되고 있었다. 교회 고위직은 종교 문제에 거의 관심이 없는 귀족들에 의해 차지되었으며, 막대한 수입을 가진 고위 성직자들은 교회 일을 하급자들에게 맡기고 베르사유에 와서 궁중의 들뜬 생 활을 즐겼다. 귀족 - 귀족들은 제2신분으로 분류되었고, 이들은 국가의 중요한 직책을 대부분 독차지하고, 넓은 영지를 소유하였으며, 성직자들과 마찬가지로 토지세인 타이유를 비롯한 대부분의 중요한 세금을 내지 않았으며, 대부분 파리에서 생활하는 부재지 주로서 토지를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역시 궁정 생활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성직자 중에서도 계급 차별이 심했는데, 상급 성직자인 대주교나 주교로 승진할 수 있는 것은 거의가 귀족출신의 승려였다. 제3신분 출신의 성직자들은 성 직자임에도 중하급 성직자인 부주교나 사제에 한정되었고, 이들의 수입은 극히 낮 았다. 한편 귀족들은 중세 이래로 귀족의 가문을 유지해 온 전통적인 귀족이 있었던 반 면에 신흥귀족층도 있었다. 신흥귀족이란 상업자본가 내지 고리대금업자로서, 귀족 의 토지와 신분을 사들인 자, 또는 정부에서 일하는 동안에 귀족의 자리를 차지한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 귀족 사이에서도 궁정귀족과 지방귀족의 격차가 두드러지게 있었다. 이처럼 고위 성직자나 고위 귀족들을 제외한 지방의 신부들을 비롯한 하급 성직자 와 농촌의 가난한 귀족들은 비특권층인 제3신분과 비슷한 생활 또는 그 이하의 어 려운 생활에 허덕이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제1신분과 제2신분의 일 부는 프랑스 혁명 당시 쉽게 제3신분 사람들과 같은 느낌을 갖고 열정적으로 혁명 에 참여할 수 있었다. 2) 프랑스 혁명의 원인 구제도의 모순 -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기 직전의 상황을 요약한다면, 프랑스 국 민은 절대왕정의 압제 아래 놓여있었고, 일부 특권신분들만이 백성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중세시대를 극복하면서 형성된 절대주의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성립된 정치체제였지만, 점차 발전하고 있는 근대 사회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한 낡은 정치 체제가 되어 있었다. 한편 중세 농업사회의 바탕이 되었던 봉건제도를 기반으로 하 였던 경제체제 역시 활발한 교역과 더불어 시작되고 있던 새로운 사회의 경제적 변 화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사회적으로도 중세의 낡은 사회 질서였던 전통 적인 신분제에서는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는 계층은 세금을 면제받고 각종 특권을 누리는 반면, 어렵고 힘들게 노동을 하는 대부분의 제3신분 사람들은 무거운 세금과 봉건적인 의무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그렇게 세금을 부담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정치적 권리도 갖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런 상황 때문에 농민을 비롯한 제3신분의 사람들은 전제정치에 대한 증오감이 커져 가고 있었으며, 이들 가운데서 상공업을 하는 시민들이 점차 힘을 갖게 되었다. 한편 사상적으로는 이 시기에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을 중요시하는 계몽사상이 널 리 퍼졌으며, 계몽 사상가들은 절대왕정으로 대표되는 권위와 전통을 비판하는 목 소리를 높이면서 프랑스 혁명의 이론적인 근거를 제시하였다. 미국의 독립혁명 : 1776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신대륙의 13개의 주가 중심이 되 어, 당시 세계 최강인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의 독립전쟁이 승리 를 거둘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의 강력한 원조 를 들 수 있는데, 미국 식민지가 로크의 사회계약사상과 계몽사상 등의 영향을 받 아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인간의 자유 평등과 국민주권의 원칙을 세계에 밝히고, 영 국의 압제에 저항하여 식민지의 독립을 달성한 것은, 당시 전제정치와 구제도의 모 순 속에서 고통받고 있던 프랑스인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재정 위기 : 프랑스 왕실의 재정 위기는 프랑스 절대왕정 최고의 전성 기를 누렸던 루이 14세 말년부터 시작되었다. 루이 14세 이래 프랑스는 활발한 대 외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국가재정의 적자를 보고 있었으며, 특히 미국의 독립전쟁 수행을 돕기 위하여 막대한 돈을 지출함으로써 프랑스의 국가 재정은 더욱 큰 어려 움에 빠지게 되었다. 루이 16세는 즉위 초에 튀르고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하여 개혁 을 시도하였다. 튀르고의 개혁안은 귀족들의 면세 특권을 제한하고 궁정 경비를 축 소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과 왕비의 반대에 부딪쳐 실패하였다. 뒤 를 이어 스위스 출신의 은행가인 네케르가 재무장관이 되어 계속 돈을 빌려가면서 재정 위기를 넘기고 있었지만 미국 독립전쟁에의 참전은 국가재정을 결정적인 위기 에 몰아넣었다. 네케르의 뒤를 이어 장관에 오른 칼론느는 모든 토지 소유자들에게 신분의 차별이나 면세 특권 없이 일률적으로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는 개혁안을 추 진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재정 위기 해결을 위한 노력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세력을 강화하려 했던 귀족들의 반발로 인해 삼부회가 소집되면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즉, 프랑스의 재정 위기는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는 가장 직접적
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1) 혁명기간 의회의 변천 삼부회 - 삼부회는 절대 왕정 성립 초기에 성립한 신분제 의회이다. 영국의 의회 가 주로 왕권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한 것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오히려 국왕이 세금을 걷을 때, 형식적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는 형식을 취하기 위해 개최 되고는 하여, 오히려 왕권이 강화되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때때로 신분제 의회가 왕권을 견제하려 하였기 때문에 무려 175년 동안 한 번도 열리지 않았으나, 프랑스 혁명 직전, 왕실의 재정 위기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높이려는 일부 특권계층의 의도에 의해 1788년 정부는 삼부회의 소집을 공포하게 되었다. 삼부회 소집의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은 국민들은 희망과 기대에 부풀었다. 18세기 를 통하여 물가가 65%, 지대가 98% 오른 데 반하여, 임금은 22%밖에 오르지 않 아 서민의 생활, 특히 도시민들의 생활은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값싼 영국산 제품 이 프랑스 시장에 침투하여 많은 실업자가 생기고, 흉년이 이어지면서 대부분의 제 3신분 사람들은 사회의 변화를 원하고 있었다. 삼부회의 제3신분 대표의 선출은 2단계 내지 3단계의 간접선거였고, 한 단계마다 선거구 구민의 요구사항을 적은 진정서가 작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구제도의 모순 이 낱낱이 들어났으며, 최종 단계에서의 대표 선출이 공개적이었기 때문에 말주변 이 좋은 법률가가 평민 대표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2신분에서는 소수이지 만 자유주의적인 귀족들이 일부 있었으며, 제1신분에서는 하위 성직자가 대표의 3 분의 2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제3신분 대표들은 귀족과 성직자 대표 중에서 매우 많은 동조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과거의 관례에 따르면 각 신분은 약 300명의 대표로써 구성되며, 신분별로 투표를 하게 되어있어, 제3신분에게 불리한 것이다. 이에 제3신분은 그들의 대표 수를 배 로 증가할 것과, 신분별 투표가 아닌 개인별 투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 여 귀족들이 강하게 반대하자, 절대왕정은 제3신분 대표의 수를 600명으로 늘리기 는 하였지만, 표결 방식에 대해서는 결정을 하지 못한 채로 회의를 열게 되었다. 국민의회 - 국민의회는 삼부회가 표결 방식을 둘러싸고 특권신분의 대표들과 대립
하자, 제3신분의 대표들이 따로 모여 신분별 의회를 지양하고 근대적 의회로서 국 민의회 를 선포하면서 성립되었다. 제3신분의 대표들은 다른 두 신분의 대표들에게 국민의회에 합류할 것을 권고하였고, 이에 대하여 귀족 대표는 거부하였으나, 성직 자 대표의 다수를 차지하는 하위 성직자들이 호응하고, 일부 자유주의적인 귀족 대 표들이 참여하였다. 한편 국왕은 국민의회를 인정하지 않고 이들을 탄압하려 회의 장을 폐쇄하였다. 이에 국민의회는 회의장을 궁정 테니스 코트로 옮겨 새로운 헌법 이 제정될 때까지 절대로 해산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 테니스 코트의 서약 을 발 표하였다. 그러자 국왕 루이 16세는 남아있던 다른 신분의 대표들에게 국민의회에 참여할 것을 지시함으로써 삼부회가 사라지고 국민의회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국왕이 할 수 없이 국민의회를 인정하자, 의회는 헌법제정 국민의회 라는 이름으로 헌법을 제정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루이 16세가 군대를 움직여 의회를 위협 하려 하자 파시 시민이 동요하기 시작하였으며, 재무장관 네케르를 해임하자 파리 의 시민들을 전제정치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함으로써 파 리에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이 프랑스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국민의회에 소속되어 있던 귀족과 성직자 의원들이 모든 봉건적 특권을 버린다는 성명을 발표하여 모든 특권신분의 면세 특권과 사냥할 수 있는 권리 및 영주의 재 판권 등이 폐지되었다. 이러한 개혁조치 속에서 국민의회는 1789년 8월 26일, 인 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일명 인권선언>을 결의하여 인간의 자유와 평등 및 국민주 권, 그리고 개인재산의 불가침성 등을 확인하였다. 인권선언 은 미국 독립혁명과 루 소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문 17조로 되어 있으며, 진보적 귀족이었던 라파 예트가 기초하였다고 한다. 영국의 권리장전, 미국의 독립 선언서 와 함께 시민 혁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선언서이다. 국민의회는 입헌군주제를 바탕으로 하는 1791년의 헌법 이 제정되자 새로운 의회의 구성을 위해 해산되었다. 입법의회 - 1791년 9월, 입헌 군주제에 바탕을 툰 새 헌법이 제정되고, 그 헌법 에 의해 구성된 의회가 입법의회였다. 입법의회 내부에는 여러 세력들이 분포하였 는데, 온건한 입헌 군주제의 입장을 지지하는 세력에서부터 공화주의를 주장하는 지롱드파와 자코뱅파 등이 의회를 구성하였다. 초기에는 입헌 군주파가 다수로서 의회를 주도하였으나, 곧 외국과의 전쟁이 진행되면서 혁명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 지자, 보다 급진적이었던 자코뱅파가 정권을 쥐게 되었다. 전쟁에 대한 준비가 없던 혁명정부가 초기에 패전을 거듭하고 혁명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프랑스 각지에서 의용군이 일어나 파리로 모여들었으며, 파리의 민중들은 왕국을 습격하여 국왕을 체포하여 탑에 가두었다. 사태가 이렇게 진행되자 입법의회는 왕권을 정지시키고
왕족을 가두는 한편, 국왕이 없는 정치체제에 걸맞는 새로운 헌법 제정을 위한 국 민공회의 소집을 결정하였다. 국민공회 - 1792년 9월 보통선거에 의해 국민공회가 탄생하였다. 국민공회는 왕 정을 정식으로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하였다. 국민공회는 치열한 논쟁의 결과 국 왕의 처형을 결정하고 1793년 1월 루이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하였다. 이처럼 혁 명이 진행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주변의 여러 나라들은 대불동맹을 맺어 프랑스 혁 명이 전파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이로 인하여 프랑스는 위기에 몰리게 되었고, 국민공회는 대외적 방위와 대내적 치안유지의 강화를 위하여 혁명재판소와 공안위 원회를 두고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공포정치를 진행하였다. 국민공회는 1793년 의 헌법을 제정하고 미터법을 채택하고, 혁명력을 정하는 등 혁명 수행을 위해 노 력하였으나, 로베스피에르의 실각과 더불어 사회 경제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결국 1795년의 헌법을 제정하고 총재정부가 수립되면서 국민공회는 해산되었다. 2) ᄀ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정치형태 : 입헌 군주제 프랑스 혁명이 처음 발생할 당시에는 절대 왕정이라는 정치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 다. 루이 14세때 절정을 이루었던 프랑스의 절대왕정은 왕의 권한은 신으로부터 받 은 것이라는 왕권신수설 을 바탕으로 하여 상비군제도와 관료제도 및 중상주의 정 책이라는 경제정책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혁명이 진행되면서 국민의회가 제정한 1791년의 헌법이 시행되면서 프랑스의 정치 체제는 입헌 군주제로 바뀌게 되었다. 군주제라는 점에서는 앞에서 말한 절대왕정과 같으나 군주의 권한이 헌법 에 의해 제한된다는 큰 차이가 있다. 이런 입헌 군주제는 프랑스보다 100년 앞서서 명예혁명 을 겪었던 영국에서 시행되고 있던 제도로, 국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다. 는 말에 입헌 군주제의 형태가 잘 설명되어 있다. 3) ᄂ과 같은 사건 후에 성립된 정치 제제 : 공화정 프랑스 혁명이 주변 국가들에 의해 위기에 처하게 되자, 프랑스 혁명을 지키기 위 해서는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항상 복위시키려는 국왕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고, 결국 국왕 루이 16세는 단두대로 처형이 된다. 국왕 가문에 의해 세습되어 오던 왕정을 폐지하고, 국민의 투표에 의해 통치자가 선출되는 공화 정이 실시되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몇 차례 공화정과 제정 그리고 왕정을 오가 는 정치체제의 변화를 겪게 된다. 그래서 이때 성립된 공화정을 제1공화정이라 한 다.
나폴레옹은 아직까지도 그 평가를 두고 여러 의견이 맞서고 있다. 프랑스 혁명을 유럽 전체에 전파한 혁명의 영웅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프랑스 혁명을 오히려 퇴보 시킨 사람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프랑스 혁명을 전파한다는 명분으로 주변의 여러 유럽인들을 고통에 떨게 한 사람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프랑스인들이 보는 나폴레옹 - 나폴레옹은 젊은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 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먼저 그의 뛰어난 전투 능력을 들 수 있다. 전투에 서 나폴레옹의 승리는 첫째로 병사들의 사기 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보잘 것 없는 군대를 이끌고 있으면서도 항상 무리의 앞에 서고 부하들과 동고동락을 같이 하였다. 때문에 병사들은 그를 꼬마 하사 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내 사전에 불 가능이란 없다. 는 그의 말처럼 불굴의 신념으로 프랑스 군을 지도함으로써 전투에 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집트에서 영국 해군에 패배했을 때, 자신의 부 하들을 모두 버리고 혼자 탈출하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 이중인격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또 한편, 그는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하였다. 그가 후에 황제에 올라 제1제 정을 실시하기는 하였지만, 그 전의 절대왕정을 부활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만든 나폴레옹 법전 은 세계 3대 법전의 하나로서 법 앞에서 국민의 평등을 보장함으로 써 프랑스의 혁명정신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더구나 그는 국민투표에 의해 압도적 지지를 얻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프랑스 국민들은 오랜 혁명과 전쟁으로 인해 많이 지쳐 있었고, 안정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 프랑스인들에게 나폴레옹은 프랑스 인의 자존심을 드높여준 위대한 영웅이었으며 유일한 희망으로 여겨졌다. 나폴레옹 은 이같은 바람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듯,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고, 또 승리를 거 두었다. 왕정을 폐지하며 혁명을 일으켰던 프랑스인들은 나폴레옹을 황제로 선택하 였던 것이다. 나폴레옹의 통치는, 한편에서 혁명의 정신을 계승한 법전 편찬, 농민 생활 안정 등 의 정책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끊임없는 권력욕으로 인한 대 외 정복 전쟁은 안정을 바라며 나폴레옹을 선택했던 프랑스 사람들의 기대를 무너 뜨리는 것이었다. 억압자로서의 나폴레옹과 프랑스 - 처음에 프랑스인들은 프랑스 혁명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시작된 지 6개월이 지나자 프랑 스는 주변국가들에게도 혁명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프랑스의 혁명을 지키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경우, 그 출발점은 주 변국가들을 병합해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지만, 혁명이 진행되자 병합과 자매 공화국이라는 형태로 프랑스의 확대 정책이 취해지게 되었다. 그 결과
프랑스에 병합되거나 자매 공화국이 된 지역에서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민족적인 저 항이 일어나게 되었다. 개인의 자유와 시민적인 권리의 존중을 내용으로 하는 나폴 레옹 법전 이 주변의 여러 나라에 전해졌기 때문에, 비록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나 라의 국민이지만, 그들이 시민으로서 자각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 지역 사람들의 이러한 자각은 나폴레옹 아니 프랑스의 지배에 대한 민족적인 저항 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자유를 위해 출발했다는 프랑스 혁명이 이젠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다. 황제에 즉위한 나폴레옹 은 전 유럽을 정치적으로 통일해 그 지배자가 될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자매 공화 국이 된 국가들의 대부분은 또다시 왕정으로 복고되어 나폴레옹 혹은 그의 친척이 왕이 되었다. 나폴레옹과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 -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음악 가 베토벤은 이렇게 말했다. 너 역시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가! 너 역시 모든 인간의 권리를 짓밟을 테지. 그리고 너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 모든 인간 위에 군림 하며 폭군이 되겠지!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기 전에 나폴레옹을 위한 교향곡을 쓰고 있었다. 그도 프랑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을 존경하고 지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말을 듣자 위와 같은 말을 하면서 그 제목을 영웅 교향곡 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프랑스 주변국가들의 지식인들은 대체 로 봉건적인 제도의 중앙에서 벗어난 해방군으로 나폴레옹 군을 받아들였으나, 그 들의 생각은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고, 자신의 친척들을 주변국의 왕위에 올리 는 행태를 보면서 서서히 변화되어 갔다. 13쪽~16쪽 논쟁점을 두 가지 뽑아 서로 다른 생각을 제시하여 사건의 여러 측면을 보게 하고, 다양한 해석을 느껴보게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어떤 판단을 할지도 생각해보게 한다.
프랑스 혁명이 역사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었는가를 생각해보는 차례다. 역사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갖는 프랑스 혁명이지만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프랑스인들이 겪었던 전쟁과 사회적 혼란, 뿐만 아니라 혁명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주변의 여러 나라 국민들이 겪은 일 등을 떠올릴 때 그것이 꼭 필요한 역사의 한 과정이었는가 를 생각해보는 자리이다. 혁명 당시의 사회적 혼란이나 희생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 정치 체제의 상당한 부분이 그들의 희생 위에 성립된 것임 을 설명하여 프랑스 혁명의 긍정적인 가치를 학생들이 느낄 수 있도록 지도한다. 1) 명예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차이 - 일반적으로 세계의 3대 시민 혁명이라 하면,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 혁명 등을 말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전 형적인 시민혁명으로 손꼽는 것은 프랑스 혁명이다. 그런데, 같은 시민혁명이라 하 더라도 영국의 명예혁명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국왕을 교체하였다고 하여 혁명 의 이름조차 명예 혁명이라 하는데 비하여 프랑스 혁명은 수많은 사람을 쉽게 처형 하기 위해 단두대(기요틴) 라는 처형 기구가 고안될 정도로 많은 피를 흘린 사건이 었다. 왜 프랑스에서는 영국과 같은 명예로운 혁명 이 진행될 수 없었을까? 영국의 명예혁명은 1688년에 이루어졌다. 명예혁명은 프랑스 혁명과 달리 신흥 상공업자들이 주축이 된 의회에서 주도하였다. 이들 신흥 상공업자들은 이미 경제 적으로는 지배층의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왕정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단지 그들의 이해와 직결되는 부분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자 했다. 그 절충으로 만들어진 정치 체제가 입헌 군주제였다. 반면 프랑스 혁명은 혁명이 진행되어가면서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들과 혁명이 자 기 나라로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주변국들의 간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프랑 스 혁명을 이끌던 세력들은 이러한 반혁명 세력들에 대항하여 혁명을 지키고자 하 였고, 그런 과정에서 반혁명 세력이 돌아가려고 하는 왕정의 핵심에 있는 루이 16 세를 처형하는 상황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다시 주변국가의 간섭을 불렀고, 이것이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면서 수많은 피를 흘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같은 시민혁명이라도 그것이 전개된 역사적 상황과 주변 조건의 차이로 인 해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절대왕정을 추구하는 국왕과 지배 층의 대립이 명예혁명으로 발전된 반면, 프랑스는 국왕을 비롯한 상층의 지배계층 과 피지배계층의 대립이었다는 점에서도 두 혁명이 다르게 전개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국의 명예혁명은 이미 경제적으로 지배층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완전한 시민혁명으로 보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으며, 미국의 독립혁명 역시 미국의 독립전쟁 이후,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 문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백인들만의 민주주의라는 한계를 갖는다.
이에 비하면, 계몽사상의 중심지였던 프랑스에서 발생한 프랑스 혁명과 인권 선언 은 국경을 넘어 널리 세계에 영향을 주었고, 이후 19세기는 프랑스 혁명이 퍼뜨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라는 큰 흐름이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유주 의 운동과 민족국가의 성립을 자극하였다. 즉, 프랑스 형명에 있어서의 인권이란 나 라나 인종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지닌 것으로서, 근대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점에서 프랑스 혁명은 다른 시민혁명과 큰 차이가 있다. 2) 대불동맹군 - 프랑스혁명의 파급을 막고 나폴레옹 1세의 대륙 지배에 대항하기 위해 1793~1815년 5차례에 걸쳐 유럽 제국이 체결한 군사동맹. 이 동맹은 유럽 각국이 군사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체결되었다. 1793년 프랑스에서 는 과격파인 자코뱅파가 정권을 잡고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뒤이어 벨기에를 점령 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유럽 제국은 영국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나라가 동맹을 맺 고 프랑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뒤 나폴레옹의 대륙 정복 때에도 영국을 주축 으로 프로이센, 러시아 등이 대프랑스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침공을 막 아내지는 못하고 말았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프랑스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제1차 대불동맹 : 1792년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시작으로 혁 명전쟁을 일으켰고, 이어 1793년 1월에는 루이 16세가 처형되었다. 그 뒤를 이어 프랑스는 벨기에를 점령했다. 이를 계기로 유럽 각국 정부의 반혁명 태도가 경직되 어 영국 총리 W.피트의 제창으로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네덜란드 에스파 냐 등 여러 나라가 제1회 대프랑스동맹(1793 1797)을 체결하고 프랑스를 포위 공 격하였다. 그러나 폴란드 분할문제를 둘러싸고 열강의 이해가 대립하고, 프랑스군의 선전으로 인한 동맹군의 열세로 프로이센이 탈락(1795년 바젤 화의)하였다. 이어서 에스파냐의 이탈(제2의 바젤 화의), 네덜란드의 프랑스 속국화, 1797년 나폴레옹 원정에 굴복한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캄포포르미오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제1회 대 프랑스동맹은 와해되었다. 제2차 대불동맹 :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영국 피트 총리의 노력으로 영국을 중심으로 러시아 오스트리아 터키 포르투갈 시칠리아 등이 참가하는 제2회 대프랑스동맹(1799 1802)이 결성되었다.(프로이센은 중립 고수) 그러나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어 북부 이탈리아로 침입하 여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1801년 뤼네빌 화약을 체결(캄포포르미오 조약의 재 확인)하자 영국 이외의 동맹국이 모두 탈락하였으며, 1802년 영국도 아미앵 화약을 체결함으로써 동맹이 해산되었다.
제3차 대불동맹 :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로 취임하고 대륙 지배를 확고히 하면 서 아미앵 화약의 평화도 2년으로 종식되었다. 영국에서 일시 실각했던 주전파의 피트 수상이 재집권하면서(1805)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주축으로 하는 제3회 대프랑스동맹(1805 1807)이 결성되었다. (중립을 고수해 온 프로이센도 후에 동 맹군에 가담) 이에 나폴레옹은 영국을 일격에 격파하고자 프랑스 에스파냐 연합함 대를 출동시켰으나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격파당하였다. 그러나 육전에서는 대승을 거두어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연합군을 아우스터리츠에서 대파하 고 라인 동맹을 결성함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을 해체시켰으며(1806), 영국을 고립시 키려는 대륙봉쇄령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러시아 프로이센의 연합군을 예나 등에서 격파하고 틸지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1807) 동맹을 해체시켰다. 제4차 대불동맹 : 대륙봉쇄령에 대한 각국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을 때 영국의 외 무장관 G.캐닝의 노력으로 영국 나폴리 스웨덴 오스트리아 등이 제4회 대프랑스동맹 (1808 1809)을 결성하였으나, 오스트리아가 바그람 전투에서 대패하고 쇤브룬 화 약을 체결함으로써 동맹은 단기간에 해체되었다. 제5차 대불동맹 : 1812년 나폴레옹의 운명을 건 러시아원정에서 프랑스군이 대 패하자 이에 용기를 얻어 1813년 프로이센 러시아가 동맹을 맺은 데 이어 영국 오 스트리아 등이 이에 가담함으로써 제5회 대프랑스동맹이 결성되어 유럽의 해방전쟁 이 감행되었다. 라이프치히전투에서 대승하고, 이듬해 나폴레옹 타도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정국의 혼미함을 틈타서 재집권한 나폴레옹의 역습을 워털루전투에 서 격파하여 완전히 몰락시켰다.(1815) 3) 로베스피에르 -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1758년에 프랑스 북부의 아라스시 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다닐 때 그는 깊은 흥미를 가지고 루소의 저서를 읽었으 며, 저서의 무신론 및 민주주의와 자유에 관한 학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프랑스의 유명한 사상가인 루소를 찾아가 방문한 적도 있었다. 후에 로베스피에르는 변호사와 법관을 지냈다. 그러나 프랑스 왕국의 법률이 툭하면 사 람을 사형에 처하곤 하는 데 대해 커다란 불만을 가진 그는 단연히 법관의 직무를 그만두었다. 1789년 봄 31세에 로베스피에르는 삼부회의 대표로 당선되었다. 이때 부터 그는 프랑스의 정치무대에 올랐다. 그는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용감한 전사로 서 투쟁에서 강인하고 생활이 검소하기로 이름났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부패 할 수 없는 사람 이라고 하였다. 중간키에 정갈한 옷차림을 하였으며 수척하고 영준 한 젊은이가 자코뱅 아지트에 나타날 적마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에게 열렬한 박수 갈채를 보내주었다. 당통 및 마라와 더불어 자코뱅파의 거두로 일컬어졌다. 1793년 6월 2일 산악파가 독재체제를 완성한 후로는 농촌의 봉건제도 불식, 소농민과 소 생산자층에 바탕을 둔 국가체제의 실현을 서둘러, 공안위원회에 가입하여 공포정치
를 추진하였다. 자코뱅파는 당시 프랑스 시민혁명에서 좌익의 핵심이었다. 국왕을 폐지하는 투쟁에서, 우파와의 투쟁에서, 국내외의 적과 반혁명 무력을 분쇄하는 투 쟁에서 자코뱅파 내부는 한결같이 뭉쳤다. 그러나 그들이 승리하여 집권당이 된 뒤 내부에는 분열이 생겼다. 1794년 3월 자코뱅 좌파인 에베르파를 반란죄의 명목으 로 숙청하였다. 이어 4월 우파인 당통파를 일소하여 독재체제를 완성하였으나, 7월 27일 부르주아 공화파를 중심으로 하는 의원들의 반격을 받고, 28일 생쥐스트 등 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는 청렴결백하였으나 그 반면 남에게는 냉담한 인상을 주었 다. 일생동안 독신으로 정치에만 열중하여, 루소를 숭배하고, 소부르주아적 혁신을 수행하려다 중도에서 쓰러졌다. 공포정치 : 1793년에서 1794년까지 프랑스 혁명 중에 실시된 자코뱅당의 독재 정 치를 말한다. 1793년 1월 루이 16세 처형 후, 프랑스는 밖으로는 영국 수상 피트 를 지도자로 하는 대프랑스 동맹의 위협을 받고, 안으로는 왕당파의 반란이 일어났 으며, 또 국민공회내에서까지 자코뱅당과 지롱드당은 매사에 대립하였다. 같은 해 6월 민중의 지지를 받던 자코뱅당은 국민공회에서 지롱드당 의원을 추방하고, 권력 을 독점한 후 공안위원회, 보안위원회, 혁명재판소 등을 장악하고 정적이나 용의자 를 철저하게 탄압하였다. 이 때문에 공포정치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자코뱅당은 그동안 징병제 채택, 봉건적 특권의 무상 폐지, 보통 직접 선거제 채택 등 주목할 만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자코뱅당 내부의 알력으로 지도자가 자주 바뀌었 고 로베스피에르의 독재가 무너지면서 공포정치는 끝을 맺었다. 훌륭한 장군, 혁명가, 해방자라는 평가를 받는가 하면, 그와는 정반대로 전제군주, 독재자, 침략자, 악마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기도 하는 사람이 나폴레옹이다. 나폴레 옹은 프랑스 혁명을 지키고 발전시킨 사람인가? 아니면 단지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 기 위해 프랑스 혁명의 성과를 이용한 사람인가? 단지 위인전에서 본 대로 나폴레 옹을 영웅으로만 생각하는 학생들이 다른 각도에서도 나폴레옹을 살펴볼 수 있도록 지도하며, 더불어 나폴레옹이 일으킨 정복전쟁이 프랑스 혁명과 이후의 역사에 어 떤 역할을 하였는지도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한다. 1) 나폴레옹은 - 나폴레옹은 1769년 코르시카섬의 한 하급 귀족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폴레옹의 아버지는 이탈리아계 중류층 지주로 제노바에서 코르시카 독 립운동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운동이 실패로 끝나 코르시카섬이 프랑스로 양도되었을 때는 프랑스 총독 편으로 넘어가 귀족 대우를 받았다. 나폴레옹은 10세때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건너가 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로 진학 하였다. 사관학교 졸업 당시 그의 성적은 58명 중 42등으로 그다지 우수한 편은 아
니었지만 수학과 역사 성적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를 가르쳤던 선생님은 그를 이렇 게 평가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과 마음을 터놓지 않았으나, 근면하고 친구들과 대화하기보다는 독서를 즐겼다. 말수가 적고 고독을 사랑하며 성미가 까다롭고 거만하며 자 존심이 강했다. 좀처럼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투는 단호하며 논리적이었 다. 자존심이 아주 센 거만한 야심가였다. 프랑스 혁명이 한창이던 1791년, 나폴레옹은 자코뱅 클럽에 가입해 있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 단순히 왕조를 교체하는 변화가 아니라, 봉건제의 타도와 근대적 생 산력의 해방을 가져오는 변화라는 점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1796년 27세의 나이로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어 다음해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고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붕괴시키는 공적을 세웠다. 이어서 나폴레옹은 인도와 영국의 통상을 끊어버리기 위해 이집트로 원정을 갔는데, 넬슨이 이끄는 영 국 함대에 패해 이집트에 갇혀버렸다. 그 사이에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자 나폴레옹은 병사들을 내버려두고 서둘 러 귀국하여 1799년 무력한 총재 정부를 무너뜨리고 3명의 통령으로 구성된 통령 정부를 수립하고 스스로 제1통령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1800년에 재차 오스트리아를 격파했으며 1802년에는 영국과 화해를 하여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해체시켰다. 나폴레옹은 같은 해에 종신통령이 되었 다. 그는 프랑스 은행을 창립하고 국민교육 제도를 확립했다. 1804년에는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하여 시민사회 질서확립에 노력했고 드디어 국민투표를 거쳐 폭넓은 계 층의 지지를 받아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나폴레옹 1세라 칭하였다. 나폴레옹은 제1통령에서 종신통령으로, 다시 황제로 변하는 과정에서 모두 국민투 표라는 방법을 통해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찬성을 얻었는데, 제1통령이 될 때는 300만의 찬성표에 반대표는 불과 천오백 표에 불과했으며, 종신통령이 되고자 했을 때는 3백 50만의 찬성에 8천 여 표의 반대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황제가 되고자 국민투표를 실시했을 때는 역시 3백 50만의 찬성에 2천 5백 정도의 반대라는 압도 적인 표차이로 황제가 되었다. 절대왕정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프랑스인들이 이처 럼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까닭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안정과 평화를 원하고 있었 기 때문이다. 총재정부 시대의 대외전쟁은 프랑스를 지키기 위한 방위전쟁이었지만, 나폴레옹 시대의 전쟁은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한 대제국 건설이 목표인데다가 나폴레옹의 야심이 겹쳐져 침략전쟁의 성격이 강했다. 영국을 점령하려던 계획은 트라팔가 해 전의 패배로 실패하였지만 나폴레옹은 승승장구를 거듭하여 신성로마제국을 무너뜨 리고 프랑스에 우호적인 라인동맹을 결성하게 하였다. 프로이센을 이긴 후에는 영 국경제에 타격을 주기 위해 대륙봉쇄령을 내렸고, 1808년에는 이베리아 반도에 세
력을 확장하여 형제와 가까운 친척들을 7개 왕국과 30개 공국에 배치하였으며, 1810년에는 오스트리아 황제의 장녀와 결혼까지 하였다. 나폴레옹은 문자 그대로 대륙에 군림하는 황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대륙 지배는 스페인에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무기 지 원을 받은 스페인의 민중들의 게릴라전에 나폴레옹군의 불패 신화는 무너졌다. 뒤 이어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을 무시하고 영국과의 통상을 공공연하게 전개하자 나폴 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떠났고, 이 원정에서 나폴레옹이 실패하자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마침내는 엘바섬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나폴레 옹은 다시 프랑스 국민의 추대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100일 천하 후에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다. 이후, 대서양상의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6년 후 52세에 위암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2) 나폴레옹의 변화 혁명을 전파하는 사람 : 오랫동안 절대왕정 아래서 봉건적 속박과 전제정치로 고 통받던 유럽 민중들에게 나폴레옹이 얼마나 환영을 받았는가는 쉽게 상상할 수 있 다. 독일의 시인 하이네게 있어서 어렸을 적 나폴레옹과 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 존재였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야만적이고 몽매한 독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그 정신을 알 필요가 있 습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북을 치면서 배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나는 프랑스 고적병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었는지 모릅니다. 어린 시인은 자유 라는 말의 의미를 무엇보다도 르 그랑이라는 프랑스 고적병이 두드리는 북의 라 마르세예즈 (프랑스의 국가)를 통해 분명하게 배웠다. 독재자 억압자로서의 나폴레옹 : 시간이 흐르면서 나폴레옹군은 유럽대륙을 제패 하고 각지에서 약탈을 일삼아 오히려 여러 민족의 억압자라는 성격이 강해져갔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를 정복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프랑스 국가에 헌납하기 위하여 적어도 50만 이상의 금을 보냈다. 군대 가 조국의 부담이 되지 않고 조국의 필요에 부응한 것은 근대사상에 최초로 있 는 일이다. 현재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는 이탈리아 원정 때 이탈리아에서 약탈해 온 미술품 이 상당량 소장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걸작 중의 하나인 최후의 만찬 에
는 그 그림을 약탈하려다 실패하자, 화가 난 프랑스 병사가 발로 찬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 과 관련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나 폴레옹의 도움을 받아 조국 폴란드를 독립시키려 했던 코슈추슈코는 나폴레옹을 아 래처럼 말했다. 나폴레옹은 오로지 자기 자신 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어떠한 대국의 국 민도 경멸하며 그 이상으로 독립 정신을 경멸하였다. 이야말로 폭군이 아니겠는 가? 이처럼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봉건제도의 중압에서 벗어난 해 방이라는 나폴레옹군이 지녔던 성격은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를 계기로 변질해갔다 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폴레옹은 형 조셉을 스페인의 왕으로 앉혔으나 스페인 민중은 각지에서 봉기하 여 격렬한 게릴라전을 벌였다. 나폴레옹은 이를 거지들의 저항 이라 표현하였으나, 이들 게릴라는 민중의 지지를 얻어 많은 프랑스군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훗날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원한이 나를 파멸시켰다. 고 술회하였다. 나폴레옹을 굴복시킨 스페인
근대 회화의 거장 가운데 스페인의 고야가 있다. 그의 수많은 걸작 가운데 1808년 5월 3일 이라는 제목의 회화가 있다. (위 그림 참조) 가로 3.5미터, 세로 1.7미터인 거대한 그림이다. 그림 오른쪽에는 칼이 부착된 총을 들고 일렬로 나란히 서서 이 제 막 방아쇠를 당기려는 병사들이 있다. 그 총부리 오른쪽에는 곧 처형될 남자 5,6 명이 움츠러들어 꼼짝 못하고 있다. 그들의 발밑에는 이미 처형된 남자들이 엎 어져 있다. 회화 가운데에는 처형될 순간을 기다리는 몇 명이 줄서있다. 그들 가운 데 어떤 사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어떤 사람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떨구 었고, 어떤 사람은 두려운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이 스페인에 보낸 프랑스 군이 점령군으로 다가오자 마드리드의 시민들은 1808년 5월 2일, 이에 맞서 프랑스군과 곳곳에서 유혈 충돌을 일으켰다. 그러나 시민들의 봉기는 다음날 새벽에 진압되었고, 이에 대한 프랑스의 보복이 다음 날인 1808년 5월 3일 새벽까지 마드리드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이 그림은 바로 이런 상황을 그 린 것이다. 17쪽~20쪽 본격적인 토론의 자리로서 주제에 관련된 쟁점을 서로 이야기하는 과정이다. 주제 자체를 명확히 따져보는 꼭지도 있고, 주제에서 현실로 눈을 돌려 현재적 문제를 살피는 꼭지도 있다. 현실사회의 쟁점을 일부러 제시한 것은 역사를 과거의 사실로 만 여기지 않고, 역사가 현재와의 깊은 연관 속에 있음을, 미래에 대한 판단도 역사 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루이 16세의 처형 -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면서 1791년의 헌법을 통해 프랑스의 정 치체제는 입헌 군주제로 결정되었다. 즉 국왕의 지위는 인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 나 절대왕정에 익숙했던 루이 16세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외 국의 도움을 받으려 하였고,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 황실은 이 러한 루이 16세의 요청에 응하려 하였다. 대중들 앞에서는 혁명을 인정하는 듯한 자세를 보였던 루이 16세는 몰래 파리를 탈출하여 오스트리아로 가려 하였다. 그러
나 1792년 변장을 한 채 가족을 데리고 파리를 빠져나간 루이 16세는 국외로의 탈 출에 실패하고 파리로 붙잡혀 돌아오게 된다. (바렌느 탈주사건) 국왕의 배신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하지만 국왕이 문 제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간섭 전쟁이 코앞에 닥쳐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준비가 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여러 이유에 의해서 초기에 잇따라 패전을 하 게 된다. 이에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 는 입법의회의 선언에 따라 전국에서 의용군 이 속속 파리로 몰려들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탈출한 망명귀족들도 벨기에 와 라인강 건너편에서 반혁명의 뜻을 밝히고 있었다. 이런 불리한 상황 속에서 프 랑스의 민중들은 반혁명군의 계속되는 승리 뒤에는 내부의 적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국왕을 체포하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마침내 1792년 8월 10일, 파리의 군중과 의용군들이 왕궁으로 쳐들어가 루이 16세와 왕비를 붙잡았고, 의회는 왕권 의 정지를 선언했다. 이 사이 프로이센의 군대가 국경을 넘었으나 의용군들의 분전 에 의해 발미 전투에서 혁명군이 프로이센군을 격퇴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날 국민 공회라는 새로운 의회가 소집되었고, 국민공회는 왕권의 폐지와 공화정을 선포하였 다. 국민공회에서는 국왕의 처리를 둘러싸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였다. 국왕의 처형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의 과정에서 로베스피에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란이 발발했을 때 폭군을 처리하는 데 일반 법률은 도움이 안 된다. 국민의 안전을 위한 법률만이 진정한 법률이다. 조국을 멸망시키고 싶지 않으면 루이는 처단되어야 한다. 국민을 배반한 죄인, 즉 인류의 죄인이라는 판결로 처단되어 야 한다. 모든 의원들이 루이 16세의 유죄를 인정했지만, 사형에 처하는 문제를 둘러싸고는 의견이 팽팽히 엇갈렸다. 이틀 낮과 사흘 저녁 동안 진행되었던 투표의 결과는 387 대 334로 사형이 결정되었다.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는 파리 중심에 있는 콩코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39살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그 얼마 후 왕비 마리 앙트 와네트 역시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혁명군의 승리와 대외진격에 이어 국왕의 처형 소식은 주변 여러 나라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영국의 수상 피트의 주창 아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네 덜란드가 중심이 되어 제1차 대불동맹이 결성되어 프랑스는 다시금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이라크 해방 전쟁? - 미국은 이라크 내부에 이라크는 물론 주변 지역을 커다란 곤 경에 빠뜨릴 수 있는 대량 살상 무기가 존재한다는 정보를 바탕으로 이라크 침략을 개시하였다. 9 11 테러 사건 이후 높아진 알카에다를 비롯한 테러 단체에 대한 반
감을 이용하여 이라크 정부가 알카에다와 연결되었다는 말도 곁들였다. 미국이 이 라크를 공격한 것을 따지기 이전에, 이라크의 대통령이었던 후세인이 중동 지역의 대표적인 독재자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1979년 이라크의 대통령에 취임한 이 후 미국에 의해 쫓겨날 때까지 20여 년 이상 독재를 실시했다. 재임 중에 이란을 침공한다든지, 쿠웨이트를 침공하기도 하여 많은 전쟁을 일으켰고, 또한 전쟁 중에 상대국에 대하여, 자치를 요구하는 쿠르드족에게도 무차별적으로 화학무기를 사용 하는 등, 반인류적인 범죄행위를 저지른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독 재자를 제거하여 이라크의 민주화를 앞당긴다는 명분을 앞세워 미국은 이라크를 공 격하였고, 후세인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전제가 되었던 이라크 내에 대량 살상 무기는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미국 대통령은 이를 알면서도 이 라크 공격을 감행하였다고 한다. 미국이 세계의 독재 정권과 윤리적이지 못한 정권 을 제거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 그런데 미국이 해방시켰다는 이라크에서는 왜 아직 도 미군들의 철수를 요구하며 계속해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하는 것일까? 생각키우기 2번의 해설 참조 4 19 혁명 - 혁명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국체( 國 體 ) 또 는 정체( 政 體 )를 변혁하는 일. 을 말하는데, 4 19 혁명은 이승만 대통령과 그를 추 종하는 정치세력이었던 자유당 정권이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선거에서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 정권을 연장하려 하자 이에 대한 저항 운동에서 비롯되어 결국 이승 만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시민혁명을 말한다. 3 15 부정선거 - 1960년 봄이 오고 있었다. 국민들의 눈과 귀는 5월로 예정된 제4 대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 모아져 있었다.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는 여전히 현직 대통령인 이승만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중적 거부 운동은 점차 확산되고 있었 다. 그러나 거부 운동의 크기 이상으로 선거 부정을 위한 공작이 강화되고 있었다. 이 승만은 선거를 앞두고 5부 장관을 경질했고, 도지사와 일선 경찰서장을 선거팀으로 교체했다. 내무 장관은 취임사를 통해 공무원과 공무원 가족은 대통령과 정부의 업적을 국민에게 선전해야 하며 이같은 일이 싫은 공무원은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 라고 공무원을 공공연하게 선거에 동원했다. 선거일 한 달 전 미국에서 병 치료를 받던 야당 후보 조병옥이 사망했다. 그리하
여 이기붕의 당선 여부에 관심이 집중된 상태에서 3 15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는 온갖 부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개표를 하니 무더기 투표, 사전 투표 등으로 자유당 표가 전체 유권자 수보다 더 많이 나왔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선관위는 당황하여 개표를 중단했고, 이승만과 이기붕에 대한 지지율을 낮춰서 발 표하는 소동까지 빚었다. ( 92% 88.7%, 95% 79%) 3.15선거가 부정과 폭력으로 자행되는 것을 지켜보고 많은 국민이 분노에 떨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용기 있게 떨치고 일어선 것은 마산의 시민 학생들이었다. 마산 의 시민 학생들은 3월 15일 오후 평화적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이를 강제해산시키려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인 끝에 경찰의 무차별 발포와 체포 구금으로 다수의 희생자를 내게 되자 격분하여 남성파출소를 비롯한 경찰관서 와 변절한 국회의원 및 경찰서장 자택을 습격, 이 과정에서 7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시민들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고 있는 4월 11일 행방불명되었던 16살의 마산상고생 김주열의 시체가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신포동 앞 바다에 떠오 르자 마침내 온 시민이 궐기하여 경찰의 만행과 부정선거를 규탄함으로써 4월 혁명 의 불길을 당겼다. - 4 19 혁명의 전개 : 김주열의 시체 인양으로 마산의 2차 시위가 4월 11일에 격렬 하게 전개되면서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갔다. 특히 4월 18일 고려대생 3천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 데모를 한 후 귀교길에 이정재를 두목으로 하는 반공청년 단 등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 기폭제 가 되었다. 4월 19일 화요일 오전이었다. 국회의사당 앞에 10만에 달하는 학생들이 경찰의 저 지선을 뚫고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정오 무렵 완전 무장을 한 경찰이 저지선을 펴 고 있는 중앙청으로 돌진하였다. 그러자 경찰이 학생시위대에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상황은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확대되어 갔다.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총을 맞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분노한 학생들은 서울 시내 곳곳에서 총을 쏘는 경찰 에 맞서 싸웠으며, 이날 하루 동안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6,026명이 부상당 했다. 정부는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서울 등 주요 도시에 계엄령을 선 포하고 육군참모총장이던 송요찬 중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군대는 유 혈사태를 방지하고 파괴방지에 전념하면서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시위는 교수단 시위를 계기로 다시 불붙었다. 4월 25일 전국 27개 대학의 4백여 명의 교수들은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는 깃발과 태극기를 앞세우고 가두 행진을 하였다. 이날부터 시민 학생들이 다시 일어났으며, 26일에 또다시 대대적인 시위가 전개되었다. 4월 26일 이른 아침부터 3만여 명의 시위대가 이승만 하야 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 시위에는 서울 수송국민학교 학생들이 언니 오 빠에게 총을 쏘지 마세요 라고 씌여진 플랭카드를 들고 시위에 참가하기도 하였 다. 오전 9시 무렵 학생과 시민들은 이기붕의 집을 부수고 가구와 장식품들을 불태
웠다. 비슷한 시각 다른 시민들은 이승만의 동상을 끌어내려 목에다 줄을 걸고 끌 고 다녔다.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 사임을 선언하고, 경무대를 떠났으며, 이기붕은 같은 날 (4월 28일) 권총으로 자살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승만은 그 해 5월 29일 하 와이로 떠났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으로 자주 이야기되는 것이 구제도의 모순이고, 구제도의 모순 중 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것이 인구의 2 %밖에 되지 않는 소수의 특권계층에게 많은 국가 의 부가 편중되었던 상황이다. 이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다고 말을 한다. 그런데 단순한 숫자상으로만 보면 현재 우리나라의 부의 편중 역시 프랑스 혁명 당시의 프랑스에 못지 않은 듯하다. 아래는 이런 내용을 보도하고 있는 보도 기사 의 내용이다. 우리나라 상위 1%의 사람들이 개인소유의 땅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 타났습니다. 부의 편중 현상이 토지 소유에서도 여실히 입증되고 있습니다. 지난해말 현재 총인구의 상위 1%가 전체 사유지의 51.5%의 땅을 소유하고 있 고 상위 5%는 82.7%의 땅을 갖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특히 전국의 땅부자들 상위 100명은 평균적으로 여의도 면적의 절반 수준인 115만평씩을 보유하고 있고 평균가액도 51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 다. 개인토지소유 편중비율은 지난 86년 65.2%보다 17.5%포인트나 급등한 것입니 다. 이처럼 현상이 심화된 것은 토지공개념정책이 토지초과이득세법에 대해 위헌 결정이 내려지는 등 토지공개념이 오히려 후퇴한데다 최근 개발정책 등의 영향 으로 전국이 땅투기장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됐습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토지가 일부 극소수사람들에 의해 소유되는 현상에 대해 많은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우선 땅값이 왜곡되거나 비정상적으로 치솟을 가능성이 크고 소득 뿐 아니라 자산가치의 양극화도 심화된다는 것입니다. 또 토지는 `부의 대물림`으로 빈부격차를 증폭시키고 땅값이 오르면 아파트 하 나를 짓더라도 생산가가 높아져 서민 부담이 늘어난다는 것, 그리고 개발비용 급증에 따른 국제경쟁력 저하도 문제라는 것입니다.
한편 정부는 이번 조사에서 나온 토지 소유의 편중현상을 8월 부동산 종합대 책에 반영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지금처럼 개발이익이 토지소유자에게 거의 돌 아가는 제도적인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이같은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으 로 보입니다. 따라서 강력한 누진적 보유세제를 확립하고 기반시설부담금제 도입 등 철저한 개발 이익 환수를 통해 토지편중 현상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 입니다. 이러한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요즘 신문지상에서 자주 언 급되는 것이 양극화 해소이다. 프랑스 혁명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부익부와 빈익빈 현상의 심화는 결국 파국을 가져올 것이고, 이를 막기 위해서는 사회 양극화를 해 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극화 현상을 분석한 칼럼의 일부이다. 양극화 해소를 놓고 세금 논쟁이 분분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신년 연설에서 양 극화 해소를 위한 세금 인상의 가능성을 내비쳤다. 이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세 금 인상을 하지 않되, 재정구조와 조세 개혁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밝혔 다. 즉 정부가 예산을 아껴 쓰고 조세감면 축소와 세원 확대 등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어떻든 정부는 양극화 해소를 위해 재정 확대 정책을 펴 겠다는 입장이다. 이에 한나라당은 정반대이다. 박근혜 대표는 신년 기자회견에서 양극화의 주범 은 참여정부가 만들어놓은 경제불황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감세와 규제혁파를 통해 작은 정부를 실현하여 정부가 아니라 기업이 일자리를 만들도록 하여 양극 화를 해소해야 한다고 밝혔다. 즉 재정을 반대로 축소하고 시장을 살리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극화 해소를 위해 어떤 정책이 바람직한 것인가? 현재 우리 경제에 나타나고 있는 양극화 현상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 적인 현상이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하여 부도 위 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 구조조정은 경제가 스스로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악 순환을 낳았다. 구조조정이 실업자를 양산하고 실업자 양산은 내수를 침체시키 며, 내수 침체는 기업 경영을 악화시켜 다시 구조조정을 반복해야 하는 덫에 걸 린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 경제의 양극화 현상이 재정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안일한 상황이 아니다. 구조적으로 양극화가 스스로 심화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 는 한 임기응변식 대책은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 현재 우리 경제는 소 비와 투자가 함께 부진하여 동력을 잃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세 부 담이 늘어날 경우 경제의 동력인 투자와 소비가 더 위축될 수 있다. 그리하여 성장률이 떨어지고 일자리도 더 줄어들 수 있다. 그러면 실업자와 빈곤층이 확 대되고 양극화는 더욱 심화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재정구조개혁에 앞서 전제조건으로 필요한 것이 일자리 창출이 다. 정부는 투자 여건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고용효과가 큰 서비스 산업을 대 대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기업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무수한 일 자리를 만들고 근로자 모두가 떳떳하게 일하고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렇게 투자와 고용의 선순환 체제를 구축하면 양극화의 악순환 고리는 자연히 끊어진 다. 그렇다고 해서 양극화 해소를 위해 재정정책 기능을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현재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생계 불안을 느끼는 빈곤층이 800만명에 달한다. 인 구 6명당 1명꼴이다. 이 사람들의 최저생계 유지와 일자리 만들기를 위해 정부 는 재정지출을 가능한 한 늘려야 하는 입장이다. 이렇게 볼 때 정부의 예산 낭 비를 줄이고 불합리한 조세제도를 개선하는 것은 당연히 추진해야 할 과제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수준에 비해 사회안전망이 지나치게 미흡하 다는 점이다. 따라서 소득이 높은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더 거두어 어려움을 겪 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것은 국가적 과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예산 절감과 소외계층 지원 확대가 함께 필요한 상황임을 감안할 때 여 야가 뒤엉켜 싸움만 벌인다면 이는 양극화 해소 대신 경제난을 더 심화시키는 것밖에 안 된다. 더욱이 증세는 분배론자들의 주장, 감세는 성장론자들의 주장이 라는 이념적 색깔 씌우기 현상이 나타날 경우 자칫 양극화 해소를 위한 세금 논 쟁이 경제발전 기반을 흔드는 독이 될 수 있다. 결국 정부, 기업, 국민 모두가 일자리 만들기에 나서 경제가 새로운 성장의 궤 도에 들어서게 한 후 재정과 조세구조를 선진화하여 분배 문제를 개선하고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 양극화 해소의 수순이다. 경제가 성장동력을 회복하여 모두가 다시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 희망을 찾는다면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양 극화 해소이며, 여기에 재정정책이 보완책으로 필요한 것이다. - 이필상 고려대교수 / 세계일보 2006년 2월 2일자 - 21쪽~23쪽 지금까지 학습한 내용과 부각된 쟁점, 토론을 바탕으로 테마에 맞게 자신의 생각
을 조리있게 쓰는 순서이다. 논점을 잡기 쉽게 3가지 유의사항을 앞에 제시하였으 므로 이를 참고하여 논리적인 글을 쓰되, 문장력, 창의력, 표현력이 돋보일 수 있도 록 안내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말미에 자기 평가표를 붙여 스스로 평가해 볼 수 있게 하였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를 모두 종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도교사는 먼저 학생들이 프랑스 혁명과 4 19 혁명에 대하여 정리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각 사건 을 정리할 때는 원인과 전개 및 그 결과를 일목요연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프랑스 혁명과 4 19혁명 모두 혁명 직후 반혁명 세력들에 의해 혁명 자체가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를 설명하면서 학생들이 이런 역사적 경험 속에서 어떤 것이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인가를 정리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24쪽~27쪽 주제와 관련된 문화재, 주요 인물, 답사할 만한 곳, 간단한 상식 등을 읽어보면서 학생들의 풍부한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대체로 주제와 관련한 다양한 소재를 제시 하여 주제를 보다 입체적, 다면적으로 파악하게끔 하였다. 더불어 더 읽어볼만한 책 자와 인터넷 사이트를 소개하여 참고하도록 하였다. <24쪽> 바스티유 감옥 - 바스티유 감옥은 프랑스 혁명 이전, 절대왕정에 반발하는 정치범들 을 주로 수용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때문에 혁명이 발생하였을 때, 사람들은 절대왕 정에 저항했던 수많은 정치범들을 해방시킬 생각으로 바스티유 감옥의 문을 열었지 만, 실제로 정치범은 없었다고 한다. 한편 이곳에는 무기고가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 이 무기를 확보하고자 습격했다고도 하는데, 어쨌든, 전제정치의 상징이었던 바스티
유 감옥이 함락됨으로써 파리에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급속하게 전국으로 확대되 었다. <25쪽> 좌파와 우파 -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좌파 정부, 보수 우파 등의 표현이 심심치 않게 언론을 타고 있다. 좌와 우 는 단순히 왼쪽과 오른쪽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의 정치적 성향을 나타내는 표현인데, 그 기원이 프랑스 혁명 중에 만들어졌다. 국 민공회에서 좀 더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자코뱅파는 왼쪽에, 반면에 상대적으로 보 수적이고 온건한 세력인 지롱드파는 오른쪽에 앉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진보적인 것은 좌, 보수적인 것은 우 로 표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얘기할 때, 정 치 경제적인 면에서 본다면 좌익 쪽에 가까운 것이 공산주의, 사회주의 이고, 극우 쪽에 가까운 것은 역사에 등장했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 등 을 들 수 있다. 좌와 우를 놓고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나쁘다는 관점을 갖기 보다는 사회 발전을 위해서는 두 가지 관점의 조화가 필요함을 학생들에게 지도한 다. <26쪽> 나폴레옹은 영웅인가 악마인가? -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 대륙은 물론이고 세계 역 사에 큰 영향을 끼쳤던 나폴레옹. 막상 그의 학교에서의 성적은 그 다지 뛰어난 편 이 아니었다고 한다. 학생들의 모든 것이 성적에 의해 결정되는 요즘, 이런 성적에 이런 위인이 나왔음을 얘기하면서 학생들에게 행복이 성적순이 아님 을 얘기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해 프랑스에 다가올 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신문 머리기사의 제목을 통해 어떤 것이 올바른 언론인가를 생각해보게 한 다. 일제시대와 군사독재시절의 신문 머리기사를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설명하는 것도 재미있는 방법일 듯하다. <27쪽> 에티켓 - 에티켓이란 당시 정원에 세워놓았던 작은 팻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 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파티에 참가했을 만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궁정 생활 속에 프랑스 혁명이 잉태되었음을 에티켓 일화와 연결시켜가면서 설명한다. 또한 이처럼 자주 열리는 파티 등으로 인해 프랑스는 당시에도 유럽의 유행을 선도 하는 곳이었는데,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설명할 수 있다.
28쪽 간단한 질문이나 선다형 문제를 풀면서 독서활동의 주요 내용을 점검하도록 한다. 다양하고 심층적인 독서활동에도 불구하고, 논쟁 자체에만 관심을 기울이다보면, 정 작 익혀야 할 내용지식에 소홀하기 쉽다. 비교적 난이도가 낮은 단답형 문제와 약 간 생각해야 풀 수 있는 문제를 함께 제시하여 주제에 따른 학습활동을 마무리하도 록 하였다. 답) 1) 제1신분 - 성직자, 2) 제2신분 - 귀족, 3) 제3신분 - 평민 답) 공화정, 2번 1번은 입헌 군주제가 실시되기 전의 국민의회에서 결정된 것이고, 3번은 나폴레옹 이 황제가 된 후의 일이다. 4번과 5번은 프랑스 혁명 초기에 일어났다. 답) 5번 전쟁을 통해 정복할 수 없었던 영국에 경제적 타격을 주기 위해 실행했던 것이 대 륙봉쇄령이었지만, 결국 이것은 나폴레옹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2차시를 위한 교사용 지도서> 1. 필독도서명 :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권> 2. 학습테마 : <산업혁명 - 공장의 불빛, 도시를 밝히다.> 3. 학습목표 1)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2) 산업혁명이 가져온 사회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3) 산업혁명 이후 발생한 사회 문제를 파악하고 현재의 문제와 연계해서 생각할 수 있다. 4) 산업혁명 이후 여성의 사회 진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4. 지도상의 유의점 1) 산업혁명 이후 획기적으로 변화한 삶의 모습 속에서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찾아볼 수 있도록 지도한다. 2) 다양한 책, 영화 등을 통해서 산업혁명 이후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실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5. 2차시 학습지도안 30쪽~31쪽 산업혁명이란 좁게는 집에서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생산 방식이 도시 지역의 공장 에서 기계에 의한 생산 방식으로 변화한 것을 뜻한다. 보다 넓고 진정한 의미의 산 업혁명을 알기 위해서 좁은 의미의 산업혁명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따 라서 다양한 그림 자료를 통해 그 변화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 예시 답안 > 1. (가)는 가정에서 손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반면, (나)는 공장에서 기계를 이용 하여 작업을 하고 있는 그림이다. 2. (가)에서 한 대의 물레에서 한 가닥의 실을 뽑아낼 수 있었는데 (나)의 기계는 여러 가닥의 실을 뽑아낼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3. (가)의 작업을 통해서 한 사람이 생산할 수 있는 양은 작지만 (나)의 작업을 통 해서는 한 사람이 더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다. 4. 물레를 돌리는 힘은 사람의 손에서 나오지만, 기계를 돌리는 힘은 수력, 혹은 증기기관에서 나온다.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 영국에서 일어났던 경제적 대변혁을 산업혁명이라 한다. 산업혁명은 (가)의 그림처럼 가내 수공업에서 공장제 기계공업으로의 전환을 바탕 으로 이루어졌다. (가) 그림은 산업혁명 이전에 면실을 뽑기 위해 물레를 이용하는 모습이다. 목화솜을 평행으로 가지런히 하여 이를 꼬아서 말면 실이 되는데 이런 작업에 물레가 이용되었다. 물레로 뽑은 실은 베틀을 이용하여 면직물을 짰는데 가 정에서 손으로 작업을 하였기 때문에 생산량이 한정되어 있었다. (나) 그림은 공장 에서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기계를 사용하여 대량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모 습이다. 1) 면직물 공업 - 산업혁명은 면직물 공업에서의 대량 생산에서 시작되었다. 영국 은 처음에는 인도에서 면직물을 들여왔으나 차츰 국내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도 면직물의 수요가 급증하자 대량생산을 모색하게 되었다. 2) 교통 수단 - 산업혁명의 진행은 원료와 상품을 보다 더 빨리, 그리고 석탄과 철 과 같은 무거운 화물을 대량으로 수송할 수 있는 육상 교통수단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1830년 영국의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차를 발명함으로써 해결되었다.
그 증기기관차는 로켓호 로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를 시속 12마일(24km)로 달리 는데 성공하였다. 3) 도시 노동자 - 산업혁명은 인클로저를 통해 농촌에서 쫓겨난 농민들의 도시 이 주를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농촌과 도시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예비노동자들은 고 용된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게다 가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여성과 어린이의 노동이 가능해지자 여성과 어린이에게 극 단적인 노동조건을 강요하는 사례가 빈발해졌다. 1) 기계를 돌려 상품을 대량생산하는 산업혁명기 공장의 모습이다. 위 사진은 공업 용 기계 장치이고, 아래는 농업용 기계 제조 공장이다. 2) 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 - 나는 북 의 발명으로 베를 짜는 속도는 두 배가 되 었으나 실 생산량은 부족하였다. 물레는 한번에 실 한 가닥 밖에 뽑아내지 못하였 기 때문이다. 이에 많은 방추를 돌릴 수 있다면 한번에 많은 실을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한 하그리브스는 여덟 가닥의 실을 동시에 뽑아내는 방적기를 발명하였다. 이 는 차츰 개량되어 후에는 80가닥의 실을 동시에 뽑아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여기 에 아내의 이름을 붙여 제니 방적기라고 명명하였다. 3)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 - 제니 방적기는 사람의 손으로 돌리는 것으로 한계 가 있었다. 인간의 힘 대신 동력을 전달하는 장치를 연결하여 수력을 동력으로 이 용한 것이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이다. 아크라이트는 이발사였지만 기계에 흥미 를 갖고 여러 발명품을 만들었다. 수력 방적기의 등장으로 인해 2~3백 명의 노동 자가 모인 공장이 생겨났다. 32쪽~36쪽
제시된 읽기 자료, 도표 등을 통해 사건의 배경, 숨겨져 있는 이유, 그 당시 사람 들의 생각 등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답> 가. (명예혁명)의 성공 나. 광대한 (식민지) 보유 다. 인클로저 운동 라. (석탄)과 (철광석) * 정치적 안정 - 17~18세기 서유럽은 절대주의 왕정이 나타난 시기이다. 절대주의 왕정은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왕권의 절대화를 꾀하였으며, 관료제와 상비군을 갖 추고 중상주의 정책을 전개했다. 당시 산업생산력을 갖추지 못한 서유럽의 각국은 식민지 수탈과 무역 독점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서로 무력충돌 을 일으켰고 네덜란드가 독립하였다. 서유럽 절대왕정의 대표되는 국왕에는 에스파 냐의 필리페 2세, 프랑스의 루이 14세,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등이 있다. 영국에 서는 엘리자베스 1세 이후 왕위를 계승한 스튜어트 왕조가 왕권신수설을 내세워, 의회의 동의를 얻어 국정을 수행해오던 오랜 영국 의회 전통을 거부하면서, 왕당파 와 의회파간의 대립이 극에 달하였다. 마침내 의회파는 내란을 일으켜 국왕 찰스 1 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수립하였다(청교도 혁명). 독재정치를 행한 크롬웰이 죽자, 영국은 다시 왕정으로 복귀한다.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가 전제정치를 펴자, 이에 의회는 왕을 추방하고 영국 왕녀 메리와 그의 남편 윌리엄 3세를 공동왕으로 추대 하여 권리장전을 승인받아 입헌 군주제의 토대를 마련한다(명예혁명). * 자본의 축적, 광대한 시장 - 해상 활동과 무역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던 영국은, 16세기 중엽부터 에스파냐의 주도권에 도전했으며, 무적함대를 격파한 이후 네덜란 드와 함께 해외 진출을 주도하였다. 17세기 내내 여전히 네덜란드의 우위가 유지되 었지만, 영국은 1600년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로 진출을 시도하였으며, 1607년에는 버지니아를 중심으로 북아메리카 진출을 서둘렀다. 영국은 앞선 해상 제국인 에스파냐와 네덜란드가 중계 무역을 통해 번성했던 것과는 달리 모직물 공 업을 꾸준히 발전시켜 다른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점차 우월한 지위를 확보했다. 영 국 배는 유럽의 공산품을 갖고 아프리카로 가서 흑인 노예와 교환한 다음, 신대륙 으로 건너간다. 신대륙은 흑인 노예를 공급받아 설탕과 면화, 커피를 생산하여 유럽 으로 공급한다. 이 과정에서 유럽은 막대한 자본을 축적하였으나, 아프리카는 노동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고, 부족간의 갈등이 심화됨으로써 정상적인 발전이 불가능해
졌다. 한편 신대륙에서도 단작 경영을 중심으로 경제의 해외 의존이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된다. * 풍부한 노동력 - 18세기 후반 자본주의에 깊이 공감하고 있던 영국 의회가 농경 지의 울타리치기(인클로저, enclosure)를 위한 일련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경작지, 목초지, 황무지 등은 울타리가 쳐진 거대한 토지로 통합되었고, 이 땅들은 사적 소 유나 자본주의적 지주의 개인적 관리 하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지방의 농업노동자들로부터 과거에 향유하던 공유지 사용권을 박탈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 지만 이는 또한 나날이 증가하는 도시 인구를 먹이기 위한 식량 공급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 풍부한 원료 - 영국의 풍부한 석탄 공급은 향상된 수송망과 결합해 18세기 중엽 부터, 금속을 용해시키는 데 나무 대신 석탄 사용을 가능케 했다. 이와 더불어 일련 의 발견은 고품질의 철 및 다양한 철제품의 제조와 연료의 절약을 가능케 해주었 다. 18세기말에 치러진 전쟁 기간에, 철에 대한 수요는 급속하게 증가했다. 또한 공 장 기계, 농업 용구, 철물 등에 대한 요구가 증대됨에 따라 철에 대한 수요는 계속 높아만 갔다. 철도의 도래는 그 수요를 더욱 더 증가시켰다. 영국은 1814년에 57만 1천 톤의 철을 수출했으며, 1852년에는 전 세계 총생산량인 200만 톤의 절반을 넘 는 1백 3만 6천 톤을 수출했다. 이는 세계의 나머지 국가들의 생산량보다도 더 많 은 양이었다. < 예시 답안 > 1. * 교통수단 : 증기기관차 * 생활상의 변화 : 원료와 상품이 철도를 따라 대규모로 이동하기 시작하였고, 철도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2. 1810년대를 분기점으로 농업인구가 빠르게 줄어드는 대신 공업 인구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도시 인구의 비중은 더욱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 철도(증기 기관차)의 발명 - 철도는 두 가지 필요성에 부응하기 위해 출현했다. 첫째, 원거리를 가로지르며 가능한 한 빠르고 값싸게 상품을 수성하려는 기업가들 의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욕구를 충족시켰다. 이미 언급한 대로 1830년 이전에 수송 체계의 향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재료, 특히 석탄의 운반은 문제거리로 남아 있었다. 1825년 최초의 근대적 철도는 영국 스톡턴의 더럼 탄전에서 해안 근
처의 달링턴까지 건설되었다. 1830년 리버풀에서 맨체스터까지 승객과 상품을 함 께 운송하는 철도 서비스가 최초로 개설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유럽, 미국 대 륙 및 그 밖의 지역에 철도를 확대하기 위한 계획이 수립되고 막대한 자본이 투여 되었다. 철도 건설의 호황은 산업화를 전반적으로 가속시켰다. 철도는 석탄 및 다양 한 중공업 제품들, 예를 들면 레일, 기관차, 객차, 신호기, 전철기 등의 수요를 엄청 나게 증대시켰을 뿐 아니라, 생산 공장에서 판매처까지 상품을 한층 빠르게 이동시 켜 상품 판매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시켰다. 또한 철도로 인해 결코 있어 본 적이 없었던 세계 시장이 개설되었다. * 도시 공업 인구의 증가 - 이 시기 사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도시의 성장이었다. 증기 기관의 발달로 인해 성인 남녀와 아동들이 엄청난 규모로 집중되어 공장에서 일할 수 있게 되자, 도시는 규모와 그 수에서 증가 현상을 보였 다. 이전에는 작업장들이 기계의 주된 동력원인 수력을 가까운 거리에서 확보할 수 있는 농촌에 산재해 있었다. 그런데 증기 기관은 기업가들로 하여금 수력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했으며, 또한 생산 체제를 대도시에서 확립할 수 있도록 했다. 도시에서의 운송은 농촌에서보다 좀 더 용이했다. 따라서 원료 수입 및 완제품 반출에 드는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을 더 쉽게 구 할 수 있었는데, 노동자들 자신도 대다수가 농촌 노동자보다 좀 더 많은 임금을 받 는 안정된 일자리를 찾으려는 희망에서 도시로 끌리게 되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19 세기초 도시 성장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다. 전반적인 인구 증가는 산업화와 함께 결부되어 도시가 경이로운 비율로 팽창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었다. 1. 기술 혁신이 가져온 변화 - 발명들은 생산량의 비약을 가져왔다. 면사의 총량은 보통의 방적기에 비해 제니 방적기가 6배에서 24배로 방적을 해낼 수 있었으며, 19세기말경에는 뮬 방적기가 200배에서 300배로 방적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중 요한 것은 면사의 질이 강도에서뿐 아니라 적합성면에서도 향상되었다. 영국의 면 직물은 1780년대부터 세계 시장을 휩쓸었다. 아프리카, 인도, 북아메리카의 온화한 지역에서는 면직물이 기후에 적합한 가벼운 제품으로 등장했다. 다음과 같은 수치 는 면직 공업의 확대가 초래한 혁명적 변화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1760년 영국 의 면제품 수출액은 25만 파운드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1800년경에 그 수출 액은 500만 파운드가 넘었다. 영국의 원면 수입은 1760년에는 1천 1백 톤, 1787 년에는 9천 9백 톤, 1837년에는 16만 4천 7백 톤에 달했다. 1800년경 면화는 연 간 국민소득의 약 5%를 차지했고, 1812년경에는 7~8%를 점했다. 2. 부르주아 - 부르주아층에는 영국 면직공업 부문의 필 가문, 그리고 좀 뒤에 등
장한 독일 철강 공업 부문의 크루프 가문 같은 산업가 집안들이 포함된다. 또한 여 기에는 국제적 명성을 지닌 로스차일드 가문 같은 금융가들과, 재력과 영향력이란 면에서 이보다 규모가 떨어지지만 유럽의 주요 금융 시장인 런던 및 브뤼셀, 파리, 베를린 등지에서 활동하는 은행가들과 자본가들이 포함된다. 그리고 영국 철도 산 업의 실세인 토마스 브레시, 죽어서도 철제관 속에 들어간 철강왕 존 월킨슨 같은 기업가들과 증기선 그레이트웨스턴 호 를 설계한 이삼바드 킹덤 브루넬 같은 전문 기술자들도 해당된다. 또한 정부가 산업화의 속도와 방향을 규정하고, 그로 인한 가 혹한 사회 경제적 결과를 개선하는 일에 착수했을 때 점점 그 필요성이 증대된 관료 도 여기에 포함된다. 여기에는 이미 사회적으로 지위가 확립된 직종에 종사하는 사 람들도 포함된다. 특히 자신들의 전문 지식으로 산업가들에게 봉사하게 된 법조인 들의 경우가 그렇다. 또한 산업과 금융의 팽창 과정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경영 인 및 사무원의 집단과, 이에 필적하는 대집단으로서, 날로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는 도시 중간계급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공급하는 상인과 상점주들이 이에 해당된다. 끝으로 이상과 같이 열거한 다양한 범주 속에 살던 모든 사람들의 가족이 여기에 포함된다. 1. 도시 문제 - 산업혁명이 가져다 준 가장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바로 도시화였 다. 도시로의 인구 집중은 여러 가지 도시 문제를 낳았다. 도시에서는 실업과 각종 범죄가 일상적인 것이었고, 주택과 화장실 등 기본적인 생활 기반이 턱없이 부족했 으며 상하수도 시설조차 갖추지 못해 콜레라나 이질과 같은 각종 전염병이 유행하 였다. 유럽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 극빈 노동자들은 햇볕도 들지 않고 하수도도 전 혀 없는 초라한 지하실 방에서 살았다. 그나마 한방에 6명, 8명, 심지어 10명이 사 는 것이 보통이었다. 맨체스터의 어느 지구에서는 200명의 주민이 옥외 화장실 하 나를 공동으로 사용할 정도로 화장실이 부족하였고, 분뇨 수거가 제대로 되지 않아 분뇨가 길에 넘치고 주변의 지하실로 스며들었다. 수백만 명의 영국인 남녀와 아이 들이 똥 속에 살고 있다 는 1840년대의 보고서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질병은 다발하고 전염병이 순식간에 번져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콜레라, 장티푸스, 결핵 등은 충분한 하수시설과 깨끗한 물이 없는데다가 공장, 철도, 일반 주택의 굴 뚝에서 뿜어 나오는 매연이 짙게 들이운 곳에서 맹위를 떨쳤다. 2. 사회 문제 - 이 시대 노동 계급의 삶을 가장 침울하게 만든 것은 생활의 불안정 이었다. 경제 불황은 다반사였다. 불황이 일어나면 노동자들은 실업보험제도 같은 생계 보장책이 전혀 없었던 상황에서 동시에 수 주일씩이나 잠정적인 실업 상태에 빠졌다. 1840년대초 영국의 공업 도시에서는 노동 인구의 절반이 실직 상태에 있
었다. 1840년 파리에서는 8만 5천 명이 정부 구호금으로 연명해 나갔다. 1844년 슐레지엔의 한 극빈 지역에서는 주민 4만여 명 가운데 3만 명이 구호 대상으로 보 고된 바 있다. 기계에 의해 그 역할이 대체된 숙련 노동자가 당한 곤경도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베틀 직조공의 경우가 가장 두드러진 사례가 된다. 1842년 영국 보울튼의 공장 지대에서 베틀 직조공의 수입은 주당 3실링에 미치지 못했다. 이 시 기에 숙련 노동자가 5인 가족을 굶기지 않고 부양하려면 최소한 주당 20실링의 수 입이 필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당 3실링 정도의 임금을 받고도 굶어 죽지 않는 다면 다행한 일이었다. 3. 경제적 침략 - 산업혁명을 가장 먼저 이룩한 영국은 산업과 금융에서 세계 경제 를 압도하였을 뿐 아니라 무역과 군사적 진출을 통해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화를 이룩하였다. 인도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를 식민지로 확보하였을 뿐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들과의 교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그리하여 인도 는 우리를 위해 면화를 만들고 오스트레일리아는 우리를 위해 양모를 만들고, 브라 질은 우리를 위해 향 좋은 커피를 만든다. 세계는 우리의 농장, 영국은 세계의 공 장 이란 표현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영국은 19세기말에 인도를 비롯하여 지구 전체 육지의 20%를 지배하였다. 영국은 인도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식민지배에 필요한 군인들과 관리들의 임금을 주었으며, 엄청난 돈을 가져갔고, 영국의 면직물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인도의 가내 수공업을 궤멸시켰다. 4. 노예무역 - 대서양 노예무역이 그 절정에 달했던 18세기에는 매년 7만 5천명에 서 9만 명에 달하는 흑인들이 대서양을 건너갔다. 노예무역의 역사 전체에 걸쳐 거 래된 노예의 총수는 9백만 명이었는데, 그 중 6백만 명이 18세기에 거래되었다. 상 인들은 값싼 인도산 천이나 금속 제품, 럼주, 소총 등을 아프리카 노예 상인들에게 주고 대신 인간 짐짝을 건네받았다. 경쟁 부족들에게 잡힐 때부터 만신창이가 된 흑인 남녀 및 어린애들은 수백 명 단위로 노예선에 옮겨져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무 시무시한 중앙 항로 를 항해했던 것이다. 위생 시설도 없이 갑판에 결박되어 있던 이들 시커먼 인간 짐짝 은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유럽인들이 이 소름끼치는 무역 에 항의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말에 이르러서였다. 1780년대에 프랑스의 최대 플 랜테이션 식민지인 생 도미니크에만도 50만 명의 노예가 있었으며, 영국의 식민지 자메이카에는 20만 명 이상의 노예가 있었다. 이러한 수치는 노예가 경작하는 작물 에 대한 세계 시장이 확대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노예가 재배하는 작물에 대 한 수요가 증가하는 한, 그리고 경제가 노예 노동력에 대한 의존도에 좌우되는 한 여러 나라의 정부들은, 이 나라에 고갈되지 않는 부 를 제공했던 노예무역을 그만 둘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인도주의적 열망을 지닌 사람들이 가한 대중적 압력에 의해 1807년 영국에서 노예무역이 사라지고 1833년 영국 식민지에서 노예제가 폐 지되었다. 프랑스 식민지에서 노예제는 생 도미니크에서 대규모 노예 반란이 발생
한 뒤인 1793년에 폐지되었다. 그 밖의 지역, 즉 라틴 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와 같 은 곳에서 노예제는 19세기까지 존속했으며, 미국은 1861~1865년에 걸쳐 일어난 남북전쟁때까지 노예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1. 사회주의 사상의 등장 -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노동문제가 심각한 양상을 빚게 되고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으로 사회 불안이 크게 일어났다. 이런 가운데 재산권의 자유와 시장 경제를 바탕으로 한 자유주의적인 사회 모델에 대한 반성도 확산되면서 다양한 시스템이 등장하였다. 사회주의 역시 이 과정에서 등장하였다. 2. 공상적 단계의 사회주의 - 사유재산제를 수정하여 사회적 소유 제도를 만들어감 으로써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자는 주장을 담은 이론과 실천 * 장점 - 오웬은 그 자신이 스코틀랜드 뉴라나르크의 대규모 면방직 공장 소유주 였다. 오웬은 이윤 동기가 사회 경제적 조직을 형성하도록 허용돼야 한다는 중간 계 급의 믿음에 반대했다. 그는 자신의 고용 노동자들에게 사회 보장제와 무료 교육을 제공하도록 자신의 공장을 재조직했다. 그는 나아가 노동자들에게 오로지 그들의 실제 노동의 결과에 대해 보답하는 공동체와 아울러 협동에 근거한 사회의 전반적 인 재조직을 주창하기에 이르렀다. 건설된 이상주의적 공동체들 속에서 당대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제시되고 있었다. * 단점 - 새로운 산업 사회의 경쟁적 성격, 특히 노동 계급에 대한 착취 등에 대 한 근본적인 개혁이 아니었다. 또한 이들이 만든 공동체들은 장기간 지속되지 못했 으므로 사회 개혁에 대한 장기간의 검토를 할 기회를 갖지도 못하였다. 37쪽~41쪽 논쟁점을 두 가지 뽑아 서로 다른 생각을 제시하여 사건의 여러 측면을 보게 하 고, 다양한 해석을 느껴보게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어떤 판단을 할지도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