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사건 조사단 습격에 관한 건(원문) 7 016 요정출입 단속 관리번호(건번호) : BA0774248(28-1 ~ 39-1) 쪽수 : 18쪽 생산일자 : 1951년 3월 ~ 1951년 6월 작성자(생산기관) : 국무총리비서실 각 부처 장관이 국무총리가 시달한 <공무원 요정출입 엄금 단속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을 수령하여 각 소속장에게 지시했음을 보고하는 내용이다. 교통부, 사회부, 관재청, 체신부, 법제처, 국방부, 내무부, 보건부, 상공부 등 각 부처 장관이 국무총리에게 보고 한 것이다. 각 부처 장관이 국무총리가 시달한 <공무원 요정출입 엄금 단속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 을 수령하여 각 소속장에게 지시했음을 보고한 문서이다. 1951년 6월 27일 교통부장관이 보 낸 문서, 6월 20일 법무부장관이 보낸 문서, 4월 15일 사회부장관이 보낸 문서, 4월 7일 관재 청장이 보낸 문서, 4월 5일 체신부장관이 보낸 문서, 4월 4일 법제처장이 보낸 문서, 4월 1일 국방부장관이 보낸 문서, 3월 31일 내무부장관이 보낸 문서, 3월 31일 보건부장관이 보낸 문 서, 3월 29일 상공부장관이 보낸 문서와 함께 3월 24일 국무총리가 각 부처 장관에게 보낸 문 서 등이 합철되어 있다. 재무부장관이 국무총리에게 보낸 문서는 탈락되어 없다. 다만 재부무 장관이 각 국장에게 4월 2일에 보낸 <공무원 요정출입단속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은 남아 있다. 공무원의 요정출입은 고질적인 병폐 중의 하나였다. 1949년 하반기부터 이승만 대통령은 공 무원들에게 관공리는 요정출입을 삼갈 것을 지시하기까지 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하 여 감찰위원회는 11월 9일과 10일 이틀간 경찰의 협력을 얻어 중부 종로 두 경찰서 관하의 요정 음식점을 조사하여 발표하였다. 발표에 의하면, 회식 참여자 중 40%가 공무원이었으 136 137
요정출입 단속(원문) Ⅰ - 국무총리실 공개재분류 중요 기록 해제집Ⅰ 1 며, 그들 중 권력을 가 졌거나 물자이권을 가 진 행정관청의 공무원 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 었다. 공무원들의 요정출입 이라는 병폐는 전쟁 과 정에서도 계속 이어져 결국 국무총리는 각 부 처 장관에게 통첩을 내 리게 되었다. 그것이 바 1951년 지방행정공무원들에게 연설하는 김성수 부통령의 모습 (CET0042767) 로 1951년 3월 24일자 國總秘 제64호이다. 장 면(張勉) 국무총리는 통첩에서 전시 하 솔선수범하여야 할 공무원들이 요정에 출입하여 일반 2 국민의 지탄을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므로 엄중이 단속할 것을 각 부처 장관에게 시달하였 다. 당시 국무총리는 전시하 국민의 지도자로서 진두에서 내핍생활을 해야 할 공무원들이 요 정에 탐닉하여 유흥으로 풍기를 문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하였다. 공무원은 솔선수범하 여 건전한 정신으로 공무원으로서 각자에게 부여된 직책에 충실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리하여 각 부처 장관에게 부하직원을 감독하여 그 직위의 고하와 직장 여하를 불문하고 요정 출입을 엄중 단속하도록 통첩을 보냈던 것이다. 다만, 외교상 필요에 의한 외빈 접대에 대해 서는 의례적 접대, 기타 공식연회가 있을 경우에 한하여 정중한 태도로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 문서는 전시하 공무원들의 요정출입이라는 병폐가 심각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 이다. 임송자(성균관대학교) 138 요정출입 단속 139
Ⅰ - 국무총리실 공개재분류 중요 기록 해제집Ⅰ 訓局 報道課長)으로 재직 중이었다. 김현수는 1950년 6월 26일 전파로 한국전쟁의 발발 소식 진급 제청의 건 상신 를 의정부(議政府)까지 파견, 활동을 지휘하였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로 입성하 관리번호(건번호) : BA0774248(44-1) 쪽수 : 1쪽 생산일자 : 1951년 8월 14일 작성자(생산기관) : 총무처장 을 알려 유엔군을 파견하게 하였고, 그리고 6월 26일 방송대 정훈공작대(放送隊 政訓工作隊) 자 당시 서울방송국을 사수하고 있었던 김현수 대령은 북한군 유격대원에게 피살당하였다. 017 전사장교(戰死將校) 전성호 대령은 일제시기 광복군(光겖軍)으로 활약 하였고, 해방 직후 대한국 군준비위원회(大韓國軍準 備委員會)를 조직하는 등 건군활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전투 중 사망한 대령의 준장 추서(追敍)를 총무처장이 상신한 문서 1949년 1월 육군 소령으로 이다. 대령 김현수(金賢洙), 권태순(權泰順)과 전성호(全盛鎬)는 한국전쟁 직후 전투를 특별 임관하였고, 한국전 지휘하던 중 사망하였고, 이들의 계급을 추서해줄 것을 건의하고 있다. 쟁 발발 당시 제1사단 12 연대장으로 제1사단의 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중에는 한국전쟁 발발 초기 전투 과정에서 많은 군인들의 사망하였다. 충 무처는 한국전쟁 당시 대령 계급으로 전 사한 대령 김현수(金賢洙)와 대령 권태 순(權泰順), 대령 전성호(全盛鎬)의 장 군 진급을 상신하였다. 수작전에서 많은 공적을 세웠다. 이후 유격대 총사 령부(遊擊隊 總司令部) 참 모장으로 근무하던 중 인 천상륙작전의 일환으로 북 1951년 육해공군 합동위령제 모습 (CET0022787) 한군 교란작전으로 기획된 경상북도 영덕상륙작전에 참가하여 전투를 치르던 중 1950년 9월 15일 전사하였다. 이 문서 김현수 대령은 일제시기 일본국학원대 학에 재학하다 학병으로 입대하였다. 해 에서 상신된 바와 같이 김현수와 전성호는 모두 1951년 8월 21일 준장으로 추서되었다. 이후 전성호는 1988년 10월 25일 국립묘지 장군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방과 함께 귀국한 뒤 군사영어학교(육군 사관학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국방경비 노영기(서울대학교 규장각) 대(國防警備隊 : 육군의 전신) 장교로 임 관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김현수는 한국전쟁 때 전투과정에서 파괴된 탱크 (CET0047877) 140 전사장교 진급 제청의 건 상신 육군본부 정훈국 보도과장(괱軍本部 政 141
전사장교 진급 제청의 건 상신(원문) 018 탄원서 1 - 공비출몰 관리번호(건번호) : BA0774248(51-1) 쪽수 : 1쪽 생산일자 : 1951년 8월 22일 작성자(생산기관) : 경상남도 합천군 각계 유지들 경상남도 합천군 각계 유지들이 보낸 탄원서를 국무총리비서실에서 1951년 8월 22일 접수하여 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한 문서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각계 유지들이 보낸 탄원서를 국무총리비서실에서 1951년 8월 22일 접 수하여 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탄원서는 이 문서에 첨부되어 있지 않아 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탄원서를 토대로 정리한 것으로 대략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데, 경 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은 공비출몰이 심한 곳으로 7월 19일 무장한 수십 명이 지서를 급습하여 입초병(굤哨兵)의 무장을 탈취하고 경찰관 여러 명을 난타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쌍백지서 에 연락하여 이들을 검거하여 취체 중이라고 하였다. 국무총리비서실에서는 9월 4일 국방부와 내무부 양 장관에게 조사조치방법에 대한 전명(傳 命)을 내릴 것이며, 이 건을 국방부에 이송하여 엄중 조사 후 그 조치를 보고 할 것을 자신의 의견을 비고란에 기입하여 보고하였다. 이에 대해 열인난(閱人갽)에 장면 국무총리가 서명한 것으로 보아 본 건은 국방부에 이송된 것으로 보인다. 임송자(성균관대학교) 142 143
탄원서 - 공비출몰(원문) 019 1 감찰위원회 징계파면 의결에 대한 호소 의 건 관리번호 : BA0774248(52-1) 쪽수 : 6쪽 생산일자 : 1951년 8월 21일 작성자 : 부산 해사국장(海事局長) 이 (굃 ) 1951년 7월11일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침몰하여 94명의 사망자를 낸 제5편리호(第5 궄利號) 침몰사건의 책임을 지고 8월 8일부로 파면된 부산 해사국장(海事局長) 이 (굃 )이 이에 불복하여 장면 국무총리에게 낸 진정서이다. 그는 진정서에서 연안 여객선의 관리감독권이 교통부 해사국에 없다는 근거를 들어 파면이라는 징계가 너무 과하다는 주장을 하고, 징계의 정도를 경감시켜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 문서는 부산 해사국장(海事局長) 이 (굃 )이 제5편리호(第5궄利號) 침몰사건 으로 파면된 후 장면(張勉) 국무총리에게 낸 진정서이다. 문서는 원문사본을 감찰위원장에게 송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1951년 7월 11일 일어난 부산과 다대포간을 운항하는 연안여객선 제5편리호(第5궄利號) 침몰사건은 94명의 사망자를 낸 1950년대 최대의 해상사고였다. 제5편리호는 선박이 건조 된 지 24년이 지난 노후선으로 정원이 54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70명이 승선한 것이 대형 참사의 근본원인으로 지적되었다.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던 전시 상황이었지만 대규모 인명 피해를 낸 사건의 규모로 인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이 사건은 교통부장관의 대국 민사과와 함께 국회가 진상조사에 착수할 정도로 큰 사회적 문제로 확대되었다. 국회가 진상조사에 나선 것은 엄청난 인명피해를 낸 대참사였다는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 로 이듬해로 예정된 대통령선거와 관련하여 직선제 개헌을 통해 재선을 노리는 이승만정권 144 145
Ⅰ - 국무총리실 공개재분류 중요 기록 해제집Ⅰ 다. 그러나 검찰이나 국회조사위는 동일하게 관리감독의 책임이 해사국에 있다고 보았다. 즉 으로 보인다. 수상경찰서는 선박 입출항과 관련된 서류의 접수, 범죄조사와 범죄 사전예방을 위한 사찰이 이승만정권 역시 재선에 걸 림돌이 될 수 있는 이 사건을 과 여기에 반대하는 국회가 정치적인 대립을 하고 있었던 시기라는 점도 일정하게 작용한 것 주요업무이고, 여객선 운항과 관련된 영업허가와 관리감독 권한은 해사국에 있다는 것이 검 찰과 국회조사위의 판단이었다. 조기에 무마하기 위해서 신 속하게 대처하였다. 부산지 여기에 대해 문서에서 이 검의 직접 지휘 아래 수상경 은 연안여객선의 운항에 대한 찰서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관리감독권이 해사국에는 없다 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16일 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그 만인 7월 27일에 여객선 선 는 해사 관련 법령이 전적으로 주 등 운항관계자와 부산 해 교통부 소관으로 규정되어 있 사국장을 포함한 해사국(海 다고 하여 선박침몰사건과 관 事局) 공무원 등 총 18명이 련한 책임이 당연히 해사국에 검찰에 송치되었다. 해사국 있다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 공무원들에게는 관리감독의 이라고 항변하였다. 그는 그 근 책임과 직권남용 외에 해당 거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 회사에게 부산 다대포간 해 째는 당시 연안여객선의 대부 운 독점권을 부여하였다는 점, 정원초과 운항을 묵인하는 대가로 수백만원의 뇌물을 받았다 분이 노후선으로 수리를 해가 는 혐의까지 추가되었다. 검찰 송치 후 감찰위원회가 열렸고 부산 해사국장을 포함한 관련 면서 운항하고 있는 것은 일반 공무원 6명이 8월 8일부로 파면조치 되었다. 적인 실정으로, 언제라도 이러 거창사건 및 제5편리호 침몰사건 진상보고 요청에 관한 건, 1951 (BA0135095) 노후선박의 문제는 1950년대 해운업의 구조적 문제였다. (CET0030717) 한 사고가 일어날 개연성이 있으며 단순히 관리감독 강화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을 본 문서는 이와 같은 결정에 의해 파면된 부산 해사국장 이 이 장면 국무총리 앞으로 지적하였다. 이것은 국내 조선소에서 선박을 건조하기보다는 중고 노후선을 외국에서 수입 자신에게 씌어진 혐의가 부당한 것임을 주장하는 진정서를 주 내용으로 한다. 이 은 수뢰 해서 이용하는 당시 해운업의 구조적 문제를 실무책임자가 지적한 것으로 주목되는 점이다. 혐의를 부정했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내려진 징계가 부당하다면서 그 근거로 연안해운에 대 둘째는 정원초과에 대한 것으로, 이것은 국영으로 운영하는 철도와 달리 연안해운업의 경우 한 관리감독권 책임을 해사국에 전부 전가시켰다는 점을 들었다. 민간이 주체가 되어 운영하면서 영리를 추구하는 업자의 과도한 욕심이 빚어낸 과실이 해사 국의 관리감독 소홀보다 훨씬 무거운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146 실제로 검찰에 의한 사건조사과정에서 책임소재를 놓고 해사국과 수상경찰서가 대립하고 이 은 국무총리에게 직접 진정서를 올린 이유에 대해서도, 먼저 감찰위원회의 결정에 있었다. 당시 언론은 이것을 각 부서간 책임 전가라는 비판적 시각으로 크게 보도하고 있었 불복하여 이의를 제기했으나 감찰위원회의 답변은 행정소송을 제기하라는 것이었지만 행정 감찰위원회 징계파면 의결에 대한 호소의 건 147
감찰위원회 징계파면 의결에 대한 호소의 건(원문) Ⅰ - 국무총리실 공개재분류 중요 기록 해제집Ⅰ 박 건조비를 국가보조와 저리융자 를 받도록 국가가 알선하여 사실 상 선주(船主)가 소액의 자기 자금 만으로도 선박을 건조할 수 있도 1 록 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 었다. 계획조선의 시행과 해무청의 설 립을 중심으로 한 1950년대 중반 의 해사정책과 행정기구의 변화과 정을 보면 이 의 지적은 자기 스스로를 구명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1950년대의 해사행정 전 반에 대해서 일정하게 문제점을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해무청 은 이승만정권기 동안 존속하였다. 2 배석만(부산대학교) 조선장려법 공포의 건, 1958 (BA0084217) 150 감찰위원회 징계파면 의결에 대한 호소의 건 151
감찰위원회 징계파면 의결에 대한 호소의 건(원문) 3 152 5 4 감찰위원회 징계파면 의결에 대한 호소의 건(원문) 6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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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 돌발사건 중간 보고의 건(원문) 중요 돌발사건 중간 보고의 건(원문) 2 5 1 6 3 156 4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