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듯 말듯 동지 팥죽 쑤는 뜻 학습주제 1. 동짓날 팥죽을 먹는 이유 (1) 동지 팥죽은 미신일까? 과학일까? (2) 동지팥죽은 한중일 삼국의 공동 풍속 2. 공공씨( 共 工 氏 )가 팥죽을 끓였다? (1) 동지팥죽은 왜 생겼을까? 참고자료 : 형초세시기란? (2) 왜 하필 팥죽이었을까? (3) 왜 하필 동짓날 팥죽을 먹게 됐을까? 3..동지에 팥죽을 먹는 진짜 이유 1. 동짓날 팥죽을 먹는 이유 동짓날 팥죽을 먹는 것이 우리 민속이다. 이유는 귀신이 팥의 붉은색을 싫어하기 때문에 팥 죽을 먹으면 액땜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조선 순조 때의 풍속을 적은 동국세시기에 설명이 나온다. 동짓날을 작은 설( 亞 歲 )라고 한 다. 이날 팥죽을 쑤어 먹는데, 찹쌀가루를 쪄서 새알 모양으로 만든 떡을 죽 속에 넣는다. 이렇게 심( 心 )을 삼은 떡을 새알심이라고 한다. 이것에 꿀을 타서 시절음식으로 먹으며 제사 에도 쓴다. 팥죽을 문에 뿌려 액을 막기도 한다. 형초세시기에 공공씨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 역귀가 되었다. 그 아들이 생전에 팥을 무서워했기에 동짓날 팥죽 을 쑤어 물리치는 것이다 팥죽으로 귀신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동지 팥죽에 얽힌 상식과 관련해 몇 가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먼저, 왜 하필 동짓날 팥죽을 먹는 풍속이 생겼을까? 밑도 끝도 없이 공공씨의 아들이 동짓날 죽어 귀신이 됐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과연 어떤 의 미가 있는 것일까? 왜 하필 팥죽을 먹을까? 귀신이 된 아들이 생전에 팥을 무서워했다고 했는데 왜 팥을 무서워했을까? 우리는 귀신이 팥의 붉은 색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는데, 동국세시기에서는 팥을 무서워했다고 나온다. 귀신이 무서워한 것은 팥의 붉은 색일까? 아니면 팥일까? 별 것 다 따진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 동지팥죽의 비밀이 숨어 있다. - 1 -
(1) 동지 팥죽은 미신일까? 과학일까? 미신에서 비롯된 이야기...? (해동죽지, 조선왕조실록) 동짓날 죽은 귀신이 팥 내지는 팥의 붉은 색을 무서워했기 때문에 팥죽을 먹어 귀신의 해 코지를 미연에 막는다 얼핏 들으면 100% 미신이다. 옛날 조상님들은 무지몽매했기 때문에 귀신의 해코지를 액땜 하려고 팥죽을 먹고, 팥죽을 문에다 뿌린 것일까? 그리고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 역시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전통적으로 내려온 미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팥죽 먹고 팥죽을 뿌렸을까? 그렇다면 과학이 발달한 지금은 왜 동짓날 팥죽을 먹을까? 미신은 사라졌지만 전해져 내려 온 풍속이기 때문에 먹는 것일까? 요즘은 대도시에서는 사라졌지만 집집마다 팥죽을 뿌리는 풍속은 20세기 중후반까지도 남 아 있었다. 근대 초기, 일제 강점기 때 언론인이며 문인이었던 최영년이 쓴 해동죽지( 海 東 竹 枝 )를 보면 동짓날이면 팥죽을 쑤어 먹을 뿐만 아니라 집안의 방은 물론이고 장독대, 헛간 등 집 구석 구석에 팥죽을 놓아두었으며 문에는 팥죽을 바르거나 사방에다 팥죽을 뿌려 귀신이 들어는 것을 막는 것이 풍속이라고 했다. 조선 후기, 영조 때에도 팥죽을 뿌리는 것이 문제가 됐다. 영조실록에 그 기록이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영조 임금이 동짓날의 팥죽은 비록 양기가 되 살아 나는 것을 기원하는 뜻이라고는 하지만 귀신을 쫓으려고 문에다 팥죽을 뿌리는 공공씨 의 이야기는 정도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그만 두라고 명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도 팥죽 뿌 리는 행위가 계속 된다고 하니 이후로는 문에다 팥죽 뿌리는 행동을 그만 두어 잘못된 풍속 을 바로 잡으라 고 명령한다. 동짓날 팥죽 뿌리는 풍습이 도에 넘칠 정도로 지나쳤던 모양인데 영조가 왕명으로 금지시 켰지만 후에도 계속된 것을 보면 왕명이 먹혀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허황된 미신이 그만큼 널리 퍼졌기 때문일까? (2) 동지팥죽은 한중일 삼국의 공동 풍속 중국에서는 고대에 동지 때 팥죽을 먹었다. 동짓날 팥죽을 먹는 기원을 형초세시기에서 찾 고 있으니 당연히 옛날에는 동지 팥죽을 먹었다. 지금도 중국 시골에서는 동짓날 만두를 빚 고 팥죽을 먹는다. 일본에서는 小 正 月 이라고 하는 정월 1월 15일에 나쁜 기운( 邪 氣 )을 물리친다며 한 해의 건 - 2 -
강을 위해 팥죽을 먹는 풍습이 있다. 이 15일은 정월 대보름달의 날이라 望 粥 (もちがゆ)이라 고도 부른다. 팥이 가진 빨간 색과 벼농사 민족의 주술이 결합해 일찍부터 제사의 장에서 팥이 이용되어 왔다. 일본의 남북조 시대에 쓰여진 拾 芥 抄 에는 중국의 전설에서 비롯됐다고 했는데, 형초 세시기를 의미한다. 일본에서는 동지 팥죽 대신 대보름 팥죽으로 발달했다. 2. 공공씨( 共 工 氏 )가 팥죽을 끓였다? (1) 동지팥죽은 왜 생겼을까? 우리 동국세시기에는 형초세시기에 공공씨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 역귀가 되었다. 그 아들이 생전에 팥을 무서워했기에 동짓날 팥죽을 쑤어 물리치는 것이다 라고 나와 있다. 동지팥죽의 기원을 형초세시기에서 찾는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에서도 동지팥죽 의 기원으로 모두 형초세시기를 꼽고 있다. 형초세시기에는 다음과 같이 팥죽에 대한 설명이 되어있다. 동짓날이면, 해의 그림자를 재고 팥죽을 끓인다. 역질을 물리치기 위함이다. 공공씨( 共 工 氏 ) 에게 재주가 부족한 아들이 있었는데 동짓날 죽어 역귀가 됐다. 팥을 무서워했기에 동짓날 팥죽을 끓여 역귀를 물리치는 것이다 冬 至 日 量 日 影 作 赤 豆 粥 以 禳 疫 按 共 工 氏 有 不 才 之 子 以 冬 至 死 為 疫 鬼 畏 赤 豆 故 冬 至 日 作 赤 豆 粥 以 禳 之 참고자료 : 형초세시기란? 여전히 미신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데, 동지팥죽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려면 형초세시기에 나오는 시대적 의미와 상징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형초세시기는 어떤 책이기에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적어 놓았을까? 형초세시기는 서기 6세기 남북조시대 양( 梁 )나라의 종름( 宗 懍 )이 쓴 책을 7세기 초 두공섬( 杜 公 贍 ) 이 주를 달아 완성한 책이다. 현존하는 중국의 세시기 중에서 가장 오래 됐으며 이후 각종 세시풍 속을 적어 소개하는 책이 유행했다. 조선 후기 우리나라의 동국세시기, 일본의 일본세시기 등이 모 두 비슷한 유행의 세시기다. 형초세시기는 중국의 형초 지방에서 행해지는 설날인 元 旦 에서부터 除 夜 에 이르기까지, 24절기의 풍속과 활동, 기원 등을 기록했다. 형초 지방은 춘추전국 시대 때의 초나라 지방, 지금의 화중( 華 中 ) 지방으로 지금 중국의 후베이성 과 후난성, 양자강 중류 지역이며 중국 문화가 발달한 곳이고 중국의 평원지역으로 대표적인 곡창 지대이지만 강의 범람으로 수시로 홍수 피해를 입었던 지역이다. - 3 -
(2) 왜 하필 팥죽이었을까? 공공씨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신화집인 산해경( 山 海 經 )에 나오는 신으로 중국 신화에서 다양한 성격의 인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간단하게 정리하 면 요순시대에 등장하는 신으로 사람의 얼굴에 뱀의 몸을 하고 있으며 성질이 난폭했으며 강을 다스리는 신이다. 양자강에 홍수를 일으킬 수도 있고 물을 다스리는, 치수 능력을 갖고 있는 전설 속의 인물 이다. 공공씨가 낳은 재주가 없는 아들은 누구이며 왜 죽어서 역귀가 됐을까? 공공씨와 역귀가 된 아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중국의 요순시대 때, 순 임금이 홍수를 막은 우임금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준 것처럼 고대 중 국에서 물을 다스리는 것, 治 水 는 정치의 기본이다. 농업국가인 중국에서 물은 곧 풍년과 흉 년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공공씨는 강을 다스리는 신이다. 생명줄인 강의 신이고 홍수의 신이기 때문에 존경의 대상 이며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다. 반면에 공공씨의 재주 없는 아들( 不 才 之 子 )는 재주가 없으니 말썽만 피운다는 뜻이다. 어떤 말썽을 피웠을까? 죽어서 역귀( 疫 鬼 )가 됐다고 했는데 역귀는 바로 전염병을 옮기는 귀신이 다. 공공씨의 재주 없는 아들이란 현대 과학으로 해석하면 전염병을 옮기는 세균, 바이러스 다. 정리하자면 강의 신, 공공씨가 홍수를 일으키자, 그 결과로 전염병이 돌았다는 이야기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리고 역귀가 된 아들이 팥을 무서워했기 때문에 팥죽을 끓였다는 이야기 는 팥죽으로 전염병을 물리쳤다는 뜻이다. 팥죽이 전염병, 그것도 홍수로 인한 수인성 전염병의 예방약 내지는 치료약으로 쓰였다는 의미다. 역귀가 된 공공씨의 아들이 팥을 무서워했다는 기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왜 하필이면 팥 을 무서워했을까? 동지팥죽의 기원을 적은 형초세시기는 서기 6세기 무렵에 나온 책이다. 그러니까 기록된 내 용은 적어도 5 세기 이전의 풍속들이다. 쌀이나 밀가루는 높은 상류층의 왕족이나 귀족들이 먹는 음식이고 고기는 더더욱 구경하기 도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 평범한 일반 백성들이 구하기에는 팥이 가장 흔하고 영양가 높은 곡식이었을 것이다. 팥은 동아시아가 원산지라 한중일 세 나라에서 먹는 곡식이다. 동짓날 팥죽이 퍼진 이유일 것이다. 팥은 또 따뜻한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추운 겨울에 먹으면 좋은 음식이다. 동의보감에도 팥 은 성질이 따뜻하고 설사와 이질을 멎게 한다고 나온다. - 4 -
홍수로 강물이 범람한 이후에 도는 전염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데 좋은 음식이다. 동짓날은 겨울 중에서도 가장 추울 때다. 그렇기 때문에 팥죽을 뜨겁게 끓여 먹음으로써 한 기를 쫓아서 추위를 이겨내고 동시에 겨울철에 부족했던 영양을 보충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 었다. 당나라 때 서견( 徐 堅 )이 쓴 초학기( 初 學 記 )에는 양생요집( 養 生 要 集 )이라는 책에 동짓날에는 양( 陽 )의 기운이 배 속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뜨거운 음식물이 위장으로 들어가도 쉽게 소화 를 시킬 수 있다 고 적어 놓았다. 그러니까 양의 기운이 들어오는 동짓날에 뜨거운 팥죽을 먹으면 소화가 잘 되고 양의 기운을 보충할 수 있어 몸에 이롭다는 약식동원( 藥 食 同 源 )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추운 겨울에 먹는 뜨거운 팥죽 한 그릇이면 얼었던 속이 녹아 추위를 물리칠 수 있으니 건 강에 좋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조선시대 때는 한 겨울이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굶주림과 한기를 물리치라고 팥죽을 쑤어 나누어 주었다. 전염병을 옮기는 귀신, 역귀의 입장에서 보면 팥이 가장 두려웠던 이유다. (3) 왜 하필 동짓날 팥죽을 먹게 됐을까? 동국세시기에서 동지를 아세( 亞 歲 )라고 했다. 작은 새해, 내지는 새해에 버금가는 날이라는 뜻인데 왜 동지가 작은 새해일까? 동지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태양이 부활하는 날이다. 동지를 한자로 쓰면 겨울 동( 冬 ), 이 를 지( 至 )자를 쓴다. 겨울이 끝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동지는 양력으로 보통 12월 21일에서 23일 사이니까 추워도 한참 추울 때이고 어떻게 보면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이다. 그런데도 겨울이 끝났다니까 심정적으로 공감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태양의 움직임으로 보면 이날 겨울이 끝났다는 개념이 틀리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풀이하자면 태양이 움직이는 고도는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 여름의 하지는 태양 이 움직이는 궤적의 고도가 가장 높은 날이고 반면 겨울의 동지는 고도가 가장 낮은 날이 다. 때문에 동짓날이 밤의 길이가 가장 길고 낮이 길이는 제일 짧은 날이 되는 것이다. 태양이 움직이는 궤적이 가장 낮은 곳에까지 갔다가 다시 높은 곳으로 돌아오기 시작하는 날이 바로 동지다. 그렇기 때문에 태양이 가장 낮은 지점까지 갔으니 동지는 겨울이 끝나는 날이고 동지가 지나면 태양의 고도가 높아지고 그러면 태양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니 태양이 부활하는 날이다. 그러니까 태양의 움직임으로 한 해가 새롭게 시작되는 날이다. 때문에 고대에는 동지가 바로 새해가 시작되는 설날이었다. 지금처럼 음력 정월 초하루가 설날이 된 역사는 따지고 보면 깊지 않다. 한무제 때인 기원전 104년부터다. 중국의 역법에서 새해는 시대에 다라 달랐는데 하( 夏 )나라는 음력 1월, 은( 殷 )나라는 음력 12월, 주( 周 )나라는 음력 11월, 진( 秦 )나라는 음력 10월, 그리고 한나라 때 다시 음력 정월이 새해가 됐다. 동지 팥죽은 그러니까 우리가 새해 설날에 떡국을 먹고, 만두를 먹는 것처럼 옛날에는 새해 내지는 새해에 버금가는 아세에 먹는 준 설날 음식이었다. - 5 -
참고자료 : 동국세시기란? 조선 후기에 홍석모( 洪 錫 謨 )가 연중행사와 풍속들을 정리하고 설명한 세시풍속집으로 필 사본이다. 책 맨 앞의 이자유( 李 子 有 )의 서문이 1849년(헌종 15) 9월 13일에 쓰여진 점으 로 보아서 이 책의 완성은 1849년으로 보인다.편찬/발간 경위 뒤에 이 필사본을 홍승경( 洪 承 敬 )이 광문회( 光 文 會 )에 기증하여, 광문회에서는 1911년에 김매순( 金 邁 淳 )의 열양세시기 洌 陽 歲 時 記, 유득공( 柳 得 恭 )의 경도잡지 京 都 雜 志 와 더불어 합본하여 1책의 활자본으로 발행하게 되었다. 그 뒤 이 3책은 합본으로 여러 곳 에서 간행되었으며, 우리 나라 세시풍속연구의 중요한 기본문헌으로서 활용되고 있다. 이상 3책 중에서 동국세시기 는 제일 나중에 쓰여진 책이면서, 내용이 제일 세밀하고 분량도 많다. 그리고 1530년(중종 25)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 에서 기록을 옮겨 적어 놓고, 그 경우에 여지승람을 보라( 見 輿 地 勝 覽 ). 고 한 것이 많다. 그러므로 단정은 할 수 없으나, 동국여지승람 이 작성된 이후 근 300년이 지나 동 국세시기 기술 당시에는 이미 변질되었거나 혹은 단절된 풍속도 있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1월부터 12월까지 1년간의 세시풍속들을 월별로 정연하게 기록하고 있다. 단오 추석 등과 같이 날짜가 분명한 것들은 모두 항목을 별도로 설정하여 설명하였고, 날짜가 분명하지 않은 풍속들은 매월마다 월내( 月 內 )라는 항목 안에 몰아서 기술하고 있 다. 이러한 체재는 열양세시기 와 같다. 다만, 열양세시기 는 서울의 풍속을 중심 으로 하고 있다. 경도잡지 도 이와 체재가 비슷한데 기술이 매우 간략하다. 동국세시기 는 동국여지승람 에서도 많이 옮겨 싣고 있으나, 특히 경도잡지 를 모태로 삼은 느낌이 있다. 잘못된 기록이 두 책에 같이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따 라서, 동국세시기 는 당시의 세시풍속을 문헌자료들도 아울러서 총 정리한 느낌이 든 다. 그러면서 각 지방의 차이가 있는 풍속들도 많이 기술하고 있어서 다른 책들보다 훨 씬 더 참고가 되는 귀중한 자료집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동국세시기 [ 東 國 歲 時 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 원) 3..동지에 팥죽을 먹는 진짜 이유 정리하자면, 동짓날 귀신을 쫓는 의미에서 먹는다는 동지팥죽은 미신이 아니라 옛 사람들이 만들어 낸 나름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강을 다스리는 신인 공공씨가 심술을 부려서 홍수가 일어났다. 강물이 범람했으니 집과 논 밭이 떠내려간 것은 물론이고 추운데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으니 전염병이 나돌았다. 옛날 - 6 -
사람들이니 만큼 전염병은 공공씨의 죽은 아들이 옮기는 것이라고 믿었다. 전염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길은 영양이 풍부한 따뜻한 음식을 먹어 체력을 기르고 면역력 을 높이는 것이다. 서기 500년 이전의 평민들이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곡식은 팥이었을 것이고, 팥죽을 끓여 먹으면서 전염병을 물리쳤을 것이다. 전염병을 옮기는 역귀가 팥을 무 서워한다고 한 이유다. 굳이 동짓날 팥죽을 먹는 이유는 동지가 바로 새해에 버금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세계 어 느 나라나 새해 음식에 담긴 공통적인 소망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는 것과 부 자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동지팥죽도 새해에 한 해 동안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는 의미가 있다. 다만 우리가 얼핏 알고 있는 것처럼 귀신이 팥의 붉은 색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라는 미신적 이 이유가 아니라 옛날 조상들 나름의 과학적인 이유를 담고 있다. 잠깐만요 : 팥죽의 효능 팥죽 효능 알고 갑시다! 변비 팥 껍질에는 사포닌과 안토시아닌이라는 성분이 풍부한데요. 팥죽을 먹으면 이 성분들이 장을 자극시키고 장운동을 활발하게 만들어 쾌변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며, 배변의 양을 증가 및 부드럽게 만들어 변비가 있는 분들이 효능을 볼 수 있습니다. 혈액순환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각종 질병들을 유발할 수 있는데요. 팥은 혈액 및 지질 의 질을 좋게만들어 혈액순환을 촉진시키는데요. 특히, 팥에 함유된 사포닌은 혈전을 용 해시켜주고, 폴리페놀 성분은 체내의 활성산소를 제거해 주기때문에 혈액이 맑아지면서 몸 구석구석 혈액이 순환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탈모 탈모가 발생하는 원인으로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못하면 탈모증세가 유발될 수도 있는데요. 혈액순환에 좋은 팥죽을 꾸준히 섭 취해주면 두피에 영양분의 공급이 제대로 이뤄져서 탈모를 예방 및 개선하는데 팥죽효 능을 볼 수 있습니다. 성인병 팥에 들어 있는 사포닌 성분이 혈전을 효유적으로 녹이고 과산화지질의 생성을 억제시 - 7 -
키는 효능을 가지고 있으며, 폴리페놀 성분이 혈관에 쌓인 콜레스테롤을 제거하여 그 수 치를 낮춰주기 때문에 혈액을 맑게 만들면서 혈액순환이 좋아지는데요. 이로인해 팥죽을 꾸준히 섭취하면 고혈압이나 고지혈증, 동맥경화 등의 성인병 예방에 팥죽 효능을 볼 수 있습니다. 당뇨 췌장은 인슐린을 분비시키는 기관으로 췌장이 나빠지면 당뇨병에 걸릴 수 있는데요. 팥 죽을 꾸준히 섭취하거나 팥죽을 싫어하시는 분이라면 밥을 지으실때 팥을 넣어 먹으면 약해져버린 췌장에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인슐린의 분비를 촉진시켜서 당뇨병을 예방 및 개선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부종제거 신장이 제기능을 하지 못하면 소변이나 노폐물들을 배출하지 못해 부종증세를 유발할 수 있는데요. 팥죽을 먹으면 이뇨작용이 활발해져서 체내의 노폐물들을 배출시켜서 신장 의 기능을 회복 및 부종을 제거하는데 팥죽 효능을 볼 수 있습니다. 숙취해소 연말연시에 술자리가 많아지면서 숙취로 고생하시는 분들이 많으신데요. 팥은 해독작용 이 뛰어나기 때문에 체내의 알코올을 빠른시간에 배출시켜 숙취해소에 좋은데요. 팥죽을 부드럽게 만들어 먹으면 알코올로 인하여 약해진 위장에 좋습니다. 팥죽의 칼로리는 얼마인가요? 팥죽 칼로리는 1인분 기준으로 약 484kcal 인데요. 물론, 팥죽을 만드는 방법이나 재료에 따라서 칼로리가 차이가 날 수 있는데요. 맛을 내기위해서 소금이나 설탕 등을 첨가한다면 칼로리가 좀더 높아질 수 있다는점 참 고하시길 바랍니다. - 8 -
거꾸로 불러도 토마토 학습주제 1. 채소지만 과일로 먹는 토마토 (1) 채소와 과일의 기준 (2) 미국의 토마토논쟁이야기 2. 토마토, 굴곡의 역사 (1) 왜 토마토가 논쟁거리가 되었을까? (2)토마토 전파의 역사 (3)독이 든 열매, 토마토 3. 우리나리에 전해진 토마토 (1) 언제 우리나라에 전해졌을까? (2) 달갑지 않은 열매, 일년감 (3) 토마토를 보는 우리의 시각 0. 왜 그럴까요? 보통 토마토를 어떻게 먹을까?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과일로 먹을 뿐, 반찬이나 음식에 넣어 먹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토마토가 채소일까, 과일일까? 일단 정답은 채소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이유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토마토는 채소 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토마토가 왜 채소여야만 할까? 1. 채소지만 과일로 먹는 토마토 요즘은 서양 요리가 많이 전파됐으니까 토마토를 음식재료로도 많이 활용하지만 예전에는 토마토를 요리에 넣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하물며 우리나라 전통 음식 중에서는 토마토를 재료로 만든 음식은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토마토를 채소라고 하는 것일까? 하지만 서양에서는 토마토를 과일로도 먹지만 요리 재료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서양뿐만 이 아니라 중국 음식에도 토마토가 요리 재료로 들어간다. 많은 나라에서 토마토를 요리로 - 1 -
먹기 때문에 채소라고 하는 것일까? 토마토가 과일이 됐건 혹은 채소가 됐건 과일과 채소를 구분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1) 채소와 과일의 기준 #1-1 일반적으로 과일과 채소의 분류는 과일은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 즉 목본성( 木 本 性 ) 열매를 말하고 채소는 풀에서 열리는 열매, 다시 말해 초본성( 草 本 性 ) 열매로 분류한다. 원예학적으로 토마토는 과채류에 속하는 채소라고 한다. 채소의 종류 중에서 과실과 씨를 식용으로 하는 것이 과채류로 잎사귀를 먹는 엽채류, 뿌리를 먹는 근채류와 대응하는 용어 다. 오이 참외, 수박 등 박과의 채소, 토마토 가지 등 가지과의 채소, 잠두 완두 등 콩과의 채 소, 그 밖에 딸기 등이 이에 속한다. 이런 분류를 보면 토마토는 채소에 속하지만 상식적인 관념상 딸기와 수박, 참외가 과일이 아닌 채소라는 분류에는 거부감이 느껴진다. 식물학적 정의에 따르면 또 다르다고 한다. 과일은 씨방이 자라서 씨를 감싸면서 조직이 성 장된 것을 말한다. 이 기준으로 보면 토마토는 과일이며, 가지, 오이, 호박도 그런 의미에서 과일이라는 주장도 있다. 역시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토마토를 과일로 먹는지, 음식으로 먹는지에 따라 구분할 수도 있다. 보통 과일인지 채소인 지를 구분 짓는 방법으로 식사를 할 때 요리의 재료로 사용할 경우는 채소, 식사를 끝낸 후 후식으로 먹을 경우 과일로 나누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토마토를 주로 과일로 먹지만 서양 요리에서는 토마토를 요리 재료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 기준으로 보면 토마토는 채소일 수도 있고, 과일일 수도 있다. 토마토는 과연 채소일까? 과일일까? (2) 미국의 토마토논쟁이야기 #1-1 토마토가 과일인지, 채소인지를 놓고 미국에서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막대한 이익이 걸린 문제였기에 법정 소송으로 비화됐다. 미국은 1887년 관세법을 개정하면서 수입 과일과 채소에 대해 관세를 달리 매겼다. 과일에 대해서는 수입 관세를 부과하지 않았지만 채소에 대해서는 세금을 물도록 했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역시 토마토가 과일인지 채소인지를 놓고 꽤나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예를 들어 뉴저지 주에서는 토마토를 과일로 분류했고, 알칸사 주에서는 동일한 법률을 적 용하면서도 경우에 따라 과일, 또는 채소로 분류하는 모순이 생겼다. 그러다 수입 채소에 대해서는 관세를 매기겠다는 법이 발효되면서 토마토 수입업자들이 토마토는 채소 라는데 반발했다. 뉴욕의 과일 수입업자였던 존 닉스 형제가 뉴욕의 세관원이었던 에드워드 헤든을 상대로 - 2 -
토마토에 10%의 관세를 매긴 것은 잘못됐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끝내는 연방 대법원까지 올 라가게 됐다. 이른바 닉스 대 헤든(Nix vs Hedden)사건이다. 1893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최종 판결을 통해 토마토가 채소인지 과일인지를 결정하는 판 결을 내려, 지루한 논쟁을 잠재웠다. 9명의 대법관들이 논란을 벌인 끝에 만장일치로 내린 최종 판결은 토마토는 채소다 였다. 이유는 식물학적으로는 토마토가 과일이지만 식사할 때 채소와 과일의 구분은 요리로 사용 되느냐 혹은 디저트로 사용되느냐 인데 토마토는 주로 요리로 사용되기 때문에 채소 라고 판시했다. 대법원이 최종 판결을 내린 토마토가 과일이냐, 채소냐 라는 사건의 본질은 토마토를 어떻 게 먹느냐에 따라 관세 부과가 달라지는 만큼 토마토의 기준을 식물학적 분류, 다시 말해 교과서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이 토마토를 어떻게 먹느냐를 기준으로 해석 했다는 것이다. 맹목적인 원리원칙을 추종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맞춰 법을 해석한 판결이 라는 것이다. 참고로 토마토를 주로 과일로 먹는 우리나라였다면 어떤 판결이 내려졌을 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2. 토마토, 굴곡의 역사 #2-1 (1) 왜 토마토가 논쟁거리가 되었을까? 사람들은 왜 토마토를 놓고 과일인지, 토마토인지를 헷갈려했을까? 서양에서처럼 먹기는 주로 채소로 먹으면서 식물학적 분류로는 과일로 분류되고도 하고, 반대로 우리처럼 주로 과일로 먹으면서 원예학적 분류로는 채소로 분류되기 때문일 수도 있 는데, 비슷한 딜레마를 갖고 있는 수박이나 딸기와는 달리 왜 굳이 토마토는 채소인지, 과일 인지를 놓고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됐을까? 관세부과라는 이권이 걸려있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토마토가 뒤늦게 유럽에 전해졌기 때 문에 토마토의 정체성이 애매모호했기 때문은 아닐까? 사실, 토마토를 놓고 사람들이 벌인 논쟁은 토마토가 채소냐 과일이냐가 처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토마토를 놓고 벌인 최초의 논쟁은 토마토가 먹어도 문제가 없는, 식용 가능한 열 매인지 아니면 독이 있는 열매인지를 놓고 헷갈려 했다. 다음에는 토마토가 열매를 먹는 작 물인지 아니면 열매를 감상하는 화초인지를 놓고 또 한 번 논쟁에 휩싸였다. (2)토마토 전파의 역사 #2-1 토마토를 놓고 다양한 논쟁이 벌어진 이유는 토마토가 낯선 열매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감 때문이었다. - 3 -
토마토의 원산지는 안데스 산맥의 고원지대로 옥수수 밭에서 자라는 잡초의 일종이었다고 한다. 안데스 산맥에서 자라던 야생 토마토가 멕시코 등지에 전해지면서 아즈텍 문화권의 고대 멕시코 사람들이 기원전 500년 무렵부터 토마토를 재배해 먹기 시작했다. 토마토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다녀 온 이 후다. 정확하게 누가, 언제 토마토를 유럽에 전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493년 콜럼버스 가 귀국하면서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 (Hernan Cortez)가 1521년, 현재의 멕시코 수도인 멕시코시티를 점령한 후 토마토를 발견하 고 유럽에 전파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유럽의 각국으로 퍼졌고, 또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을 통해 아시아로 전파됐다. 처음 전해진 토마토를 유럽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토마토는 사실, 누구에게도 환영 받지 못하는 쓸데없는 작물이었다. 콜럼버스가 처음 향신료인 후추를 찾아 떠났던 것처럼 유럽의 상류층은 음식 맛을 더하는 향신료가 필요했다. 반면 민중은 굶주린 배를 채워줄 곡식이 필요했는데 토마토는 어느 쪽 의 욕구도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게다가 처음에 전해진 토마토는 유럽 풍토에 적응하지 못 해 질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먹으면 해로운 식물 취급을 받았다. 토마토가 식용 가능한 열매라는 기록은 1544년, 이탈리아 출신의 의사이자 식물학자인 피 에트로 마티올리(Pietro Andrea Mattioli 1501-1577년)가 남긴 논문에 보인다. 가지처럼 생 긴 열매로 익으면 붉거나 노랗게 변하는데 가지처럼 먹을 수 있다고 적었다. 논문의 핵심은 먹을 수는 있지만 좋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마티올리는 토마토를 가지과 식물로 분류했는데 당시 가지과에 속하는 식물은 모두 독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마티올리는 이때 토마토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고, 포모도로(Pomodoro), 즉 노란색 사 과(Golden Apple)라고 표기했는데 당시 유럽에서는 낯선 열매는 모두 사과라고 말했다. 그 러니까 애플을 사과가 아닌 열매라는 의미 정도로 사용했다. 실제 요리에 토마토가 등장한 것은 17세기 후반이다. 1692년 나폴리에서 발행된, 라티니 (Antonio Latini)라는 사람이 쓴 요리책에 토마토 레시피가 보인다. 스페인식 토마토 소스라 는 이름으로 토마토를 소개했으니 이 무렵만 스페인에서는 토마토가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 다. 이전까지만 해도 토마토는 먹는 대신에 주로 화초와 같은 관상용으로 쓰였는데 이탈리아 피렌치 등지에서는 토마토가 17, 18세기 요리에 쓰이기 전까지 주로 관상용 화초로 길렀고 토마토 열매는 테이블 장식용으로 쓰였다. 토마토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은 18세기 나폴리를 통해서다. 토마토 소스를 이용한 요리책이 나온 것도 나폴리로 당시 스페인이 통치하던 나폴리는 스페인에서 재배하는 작물을 빨리 받 아들였고, 나폴리 인근 베수비오 산기슭의 토양이 토마토 재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3)독이 든 열매, 토마토 #2-1 - 4 -
미국에서 토마토에 관한 기록은 18세기 초반에 보인다. 지금은 미국이 토마토 케첩을 대표 하는 나라가 됐지만 18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인들은 토마토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 었다. 스페인, 이탈리아 등 남부 유럽과 달리 늦게까지 토마토에 독성이 있다고 믿었던 영국 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미국의 독립전쟁 당시, 독립군 지도자로 미 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조지 워싱턴 장군(1732-1799년)을 독이 든 열매인 토마토로 암살하 려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 조지 워싱턴의 요리사는 영국의 통치를 지지하는 왕당파였기 때문에 조지 워싱턴이 감기로 미각을 잃어 맛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이용해 토마토를 음식에 넣어 워싱턴을 암 살하려고 했지만, 요리사가 음식으로 사람을 죽이려했다는 사실에 가책을 느끼고 결과도 보 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물론 근거 없는 뜬소문에 불과하고 이런 이야기가 실린 것도 1959년에 발행된 잡지가 처 음이라고 하는데 미국인들이 초창기, 토마토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재미있게 보여주 는 사례다. 3. 우리나리에 전해진 토마토 (1) 언제 우리나라에 전해졌을까? #3-1 토마토는 스페인을 통해 필리핀에 전해졌고, 필리핀에서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전역 으로 퍼졌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언제 토마토가 전해졌을까? 토마토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광해군 때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 芝 峯 類 說 )에 처음 보인다. 지봉유설에는 토마토를 남쪽 오랑캐 땅에서 전해진 감이라서 남만시( 南 蠻 柿 )f라고 했고, 일 년 생 풀에서 열리기 때문에 풀에서 열리는 감( 草 柿 )라고 했다. 봄에 자라서 가을에 열매를 맺는데 맛은 감하고 비슷하고 본래 남만의 과일로 근래에 중국에 다녀 온 사신이 종자를 구 해 온 외국 과일이라고 적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1614년에 쓰여 진 책이니 임진왜란이 끝난 후 18년이 지났을 때다. 그러니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편찬하기 직전에 토마토가 조선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 고추에 이어 전해진 토마토에 대해 당시 조선 선비들은 무척 낯선 인상을 받았다. 먹지도 못하고 기껏해야 관상용으로나 키울 수 있는 작물 내지는 아예 잡초 취급을 하고 있다. 때문에 토마토가 전해졌지만 조선에서는 이 낯선 과일에 대해 전혀 주목을 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문헌에 토마토에 관한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지봉유설 이외에는 조선 말기 인 순조 때의 실학자인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 五 洲 衍 文 長 箋 散 稿 )에 토마토에 관한 글이 보인다. 토마토인 남만의 감이 이 땅에 전해진지 200여 년이 지났는데 과일과 화초를 재배하는 - 5 -
사람에게 물어봐도 어떤 종류의 과일인지 잘 모르고 남겨진 기록도 없다. 지봉유설 이후에 도 성호 이익( 李 瀷 )과 다산 정약용( 丁 若 鏞 )이 토마토에 관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고 하지만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소문만 들었을 뿐 정작 기록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얼마나 자료가 없었으면 토마토 에 대해 아는 것이 풀벌레만도 못하다며 답답해했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종자가 들어 온 지 200년 동안 재배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달갑지 않은 열매, 일년감 #3-1 이규경은 토마토에 대한 묘사에서는 꽃, 잎사귀, 가지와 줄기 등 생김새로 보면 도저히 나무 종류라고는 할 수 없다며 사람들은 잡초에 불과할 뿐이라며 의심하고 있다고 적었다. 당나 라 감( 唐 枾 )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는데 당감은 바로 땡감 이다. 토마토가 고추의 한 종류가 아닐까 궁금해 하기도 한다. 줄기와 가지, 잎사귀 등을 살펴보면 남만초( 南 蠻 椒 ), 그러니까 고추와 비슷하고 여름에 작 은 꽃이 피는데 꽃 역시 고추의 꽃과 닮았다. 꽃이 떨어지면 열매가 달리는데 커다란 엄지 와 같다. 열매가 익으면 빨갛게 선홍색으로 변하는데 보기에 아름답다. 얼핏 보면 고추의 한 종류인 당초( 唐 椒 )로 착각할 수도 있으며 과실의 속을 열어 보면 과육 속에 하얀 씨가 있는 것이 마치 꽈리와 비슷하다. 혀로 핥으면 맛이 떫고 매운 맛도 나기 때문에 먹기가 힘들다. 서리가 내리면 곧 바로 시드는데 씨앗을 받아서 봄에 뿌리니 일년생 풀이라고 할 수 있다. 열매가 감을 닮았기 때문에 풀에서 열리는 감인 초시( 草 枾 )라고도 하는데 사람들이 종자를 천하게 생각해 전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토마토는 이렇게 이규경이 글을 남긴 19세기 중반만 해도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낯선 열 매였을 뿐이다. 하지만 19세기 말부터는 토마토를 재배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고종 20년 (1884년) 서양 원예작물 재배를 장려하기 위해 서양 채소 종자를 도입하는데 여기에 토마토 종자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재배가 이뤄진 것은 20세기, 그것도 1930년대 전후인 것으로 보인다. 일 년감(토마토)은 누구나 재배할 수 있고 또 영양소도 풍부한 과일이라며 재배를 장려하는 신 문기사가 자주 보이는 것이 이 무렵이다. 이때만 해도 토마토라는 이름 대신에 주로 일년감 이라고 불렀다. 그러다 1950년이 지나면서 일년감이라는 명칭이 사라지는 대신 토마토라는 이름이 자리 잡는다. (3) 토마토를 보는 우리의 시각 #4-1 토마토는 지금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채소이자, 과일이다. 세계 토마토 생산량이 2009년 현재, 무려 1억5,000만 톤에 이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 채소로 요리 - 6 -
를 해서 먹거나, 아니면 과일로 먹거나 혹은 주스에서부터 토마토를 가공한 케찹으로 먹거 나 우리의 일상 먹거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토마토다. 지금은 모두의 사랑을 듬뿍 받는 토마토지만 원산지인 남미에서 구대륙으로 토마토가 전해 진 지 500년 동안 토마토가 그렇게 환영받지 못하는 열매였다는 사실이 놀랍다. 토마토는 독이 있는 열매일까, 아니면 식용 가능한 작물일까? 에서부터 관상용 화초인 지, 아니면 먹는 음식인지? 나아가 채소인지, 과일인지? 에 이르기까지 토마토를 놓고 인간 이 벌여온 다각적인 논쟁이 흥미롭다. 우리나라에 토마토가 전해진 것이 1614년 이전, 토마 토를 바라보는 조선 선비들의 시각이 특이하고 우리가 토마토를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것 이 불과 70-80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의외다. 토마토라는 작은 열매를 통해 본 인간 들의 갖가지 이해관계와 다양한 역사가 흥미롭다. 참고자료 : 중국과 일본 전래 우리 기록에는 중국에서 종자를 가져왔다고 했지만 중국 기록은 우리보다도 늦다. 명나 라 말기에 조함( 趙 函 )이 쓴 식품( 植 品 )에 번가( 蕃 茄 )는 서양의 선교사가 만력( 萬 曆 ) 연간에 해바라기와 함께 중국으로 가지고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고 전해진다. 번가 는 외국에서 들어 온 가지라는 뜻으로 토마토를 말하고 만력은 명나라 신종 때의 연호로 1573년부터 1619년까지다. 1621년 왕상진( 王 象 晋 )이 쓴 군방보( 群 芳 譜 )라는 책에 도 같은 내용이 수록돼 있다. 일본 역시 토마토가 전해진 시기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라 고 하니까 한국과 중국, 일본 모두 비슷한 시기에 토마토가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http://en.wikipedia.org/wiki/antonio_latini http://www.snopes.com/food/tainted/tomato.asp 오주연문장전산고( 五 洲 衍 文 長 箋 散 稿 ) 南 蠻 柹 似 今 唐 柿 辨 證 說 芝 峯 類 說 卷 19 果 南 蠻 柿 農 務 牧 畜 試 驗 場 所 存 穀 菜 種 (1884) 동아일보 1934년 3월 31일, 1934년 8월 30일자 - 7 -
콩밥 싫어하는 아이들아! 1. 콩밥 먹는다는 말의 역사 (1) 콩밥 먹는다는 말의 역사 (2) 왜 하필 콩밥이었을까? 2. 부정적인 역사속의 콩밥 (1) 콩에는 死 者 의 영혼이 들어있다 (2) 콩에 얽힌 이야기 1. 콩밥 먹는다는 말의 역사 (1) 콩밥 먹는다는 말의 역사 왜 콩밥이 교도소를 상징하게 됐을까? 예전에는 재소자들에게 콩밥을 먹였기 때문이다. 하 지만 지금은 교도소에서 콩밥을 주지 않는다. 콩밥이 중단된 지 한참이 지났다. 콩밥 먹는다 는 말과 지금 교도소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도 콩밥=교도소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는 것을 보면 재소자에게 콩밥이 상당히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재소자 급식에서 콩밥이 사라진 것은 1986년부터다. 당시 재소자 급식기준을 쌀 50%, 보 리 50%로 바꾸면서 콩밥이 사라졌다. 콩밥 대신에 꽁보리밥으로 바뀌었다. 콩 대신에 쌀의 비중을 늘렸는데 이유는 콩 값이 비싸졌기 때문이다. 2014년 상반기 이전까지는 쌀의 비중이 90%, 보리 10%의 잡곡밥이 지급됐다. 앞으로는 보리가 사라지고 완전히 쌀밥이 제공된다. 보리 값이 비싸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감옥 간다 는 말을 콩밥 먹는다 는 말 대신에 쌀밥 먹는다 표현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1986년 이전에는 어떻게 콩밥을 제공했기에 콩밥 먹는다 는 말이 생겨났을까? 1957년의 교도소 재소자 식사규정에는 쌀 30%, 보리 50%, 콩 20%를 섞은 잡곡밥이 정량이 었다. 그런데 콩의 비중이 20%면 밥의 절반이 콩으로 채워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훨씬 이전, 일제 강점기 때인 1936년 형무소 식단표에는 쌀 10%, 콩 40%, 좁쌀 50%로 적 혀있다. 이 정도면 콩 덩어리에 좁쌀 몇 알 붙은 수준이다. 하루 세끼 이런 콩 덩어리를 몇 개월, 몇 년씩 먹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고역이었을 것이다. - 1 -
(2) 왜 하필 콩밥이었을까? 그런데 옛날 감옥에서는 왜 죄수들에게 콩밥을 먹였을까? 음식 종류가 제한된 교도소에서 재소자의 영양도 고려하고 값도 싸며 영양분도 풍부해 콩 밥을 식사로 제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상당히 인간적인 이야기지만 일제 강점기 때 감옥에 그렇게 휴머니즘이 넘쳐났을 리 없다. 콩밥이 얼마나 형편없는 식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글이 1936년 4월25일자 조선중앙일 보에 실려있다. 콩밥이라는 제목의 동시( 童 詩 )다. 콩밥을 보면 넌더리가 나요. 밤낮 우리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콩밥만 짓지요. 엄마, 나 콩 밥 먹기 싫어, 쌀밥 지어, 응 하고 졸랐더니 엄마는 없는 집 자식이 쌀밥이 뭐냐. 어서 못 먹겠니 하고 부지깽이를 들고 나오셨다. 나는 꿈쩍도 못하고 안 넘어가는 콩밥을 억지로 넘 겼지요. 해마다 쌀농사는 짓는데 밤낮 왜 우리는 콩밥만 먹을까? 표현 방법은 상당히 낯설지만 어쨌든 콩밥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아이들의 심정, 콩밥에 대 한 일반인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1924년 5월11일자 시대일보라는 신문의 기사에도 콩밥 이야기가 실려 있다. 평양 형무소 에서 식사량을 줄이는 바람에 일하던 죄수들이 배가 고파 졸도했다는 기사다. 콩( 大 豆 )을 섞 은 콩밥 대신에 조( 粟 )를 넣은 조밥을 제공했더니 졸도를 할 정도로 식사량이 줄었다는 것 이다. 감옥에서 왜 콩밥을 제공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기사다. 바꿔 말하자면 밥의 양을 늘리 는데 값싸고 양 많기로 콩을 대신할 작물이 없었던 것이다. 2. 부정적인 역사속의 콩밥 콩밥을 영양만점에 맛있는 밥으로 여기는 것은 콩 값이 비싸진 현대 이후의 일이다. 콩밥 은 옛날부터 가난한 사람들이 먹었던 거친 음식이었다. 두반곽갱( 豆 飯 藿 羹 ) 이라는 말이 있다. 콩밥과 콩잎으로 끓인 국이라는 뜻이다. 아주 변변치 못한 음식을 뜻하는 사자성어로 청빈한 생활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한 소쿠리의 밥과 표주박의 물이라는 뜻의 단사표음( 簞 食 瓢 飮 ) 과 같은 뜻이다. 타이완의 고 등학교 국어시험에 단사표음 과 비슷한 뜻을 고르라는 식으로 자주 나오는 사자성어다. 기원전에도 사람들이 콩밥이라면 치를 떨었는데 중국 후한의 역사가 반고( 班 固 )가 쓴 한나 라의 역사책인 한서( 漢 書 ) 열전에도 콩밥 이야기가 나온다. 진시황이 죽고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유방( 劉 邦 )과 천하를 놓고 다투던 항우( 項 羽 )가 군사 를 이끌고 중원으로 쳐들어간다. 도중 행군을 멈추고 진을 쳤는데 마침 날씨는 춥고 큰 비 가 내려 병사들이 얼어 죽고 또 배고픔에 시달렸다. 그러자 항우가 장차 진( 秦 )을 공격하려 - 2 -
면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없다. 흉년으로 백성은 궁핍하고 군대에는 양식이 떨어져 곡식의 반은 콩( 菽 )을 섞어 먹는다 며 서둘러 군사를 움직였다. 군량미가 떨어져 병사들에게 콩밥을 먹였다는 것인데 콩밥을 먹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군 대의 사기가 떨어질 정도였다. 역시 한서 화식전( 貨 殖 傳 )을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콩밥을 먹 고 물을 마신다고 했으니 콩밥을 먹어야 했던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만 하다. 춘추시대 사람인 공자도 예기( 禮 記 )에서 콩을 씹고 물을 마시더라도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 게 하면 그것이 효도 라고 했는데 여기서 콩은 가난한 살림을 뜻하니 콩밥을 거친 음식으로 여긴 역사는 의외로 깊다. 왜 이렇게 콩밥을 싫어했을까? 옛날에는 콩이 너무 흔했기 때문이다. 대두 콩의 원산지는 만주, 옛 고구려 땅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콩은 특별히 비료를 주지 않아도 척박한 땅에 서 잘 자란다. 과유불급( 過 猶 不 及 ), 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하다고 하는 말이 바로 영양가 높은 콩에 해당 됐다. (1) 콩에는 死 者 의 영혼이 들어있다 고대 서양인들은 악마, 혹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콩을 통해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온다고 믿었다. 때문에 함부로 콩을 먹으면 악마가 들어올 수 있기에 고대 서양 철학자들은 콩을 먹지 말라 고 외쳤다. 왜 콩을 먹으면 악마가 몸속으로 들어올까? 고대 서양에서는 생명체가 죽어서 땅에 묻히면 영혼이 바람으로 변해 땅을 뚫고 위로 솟아 오르다 콩 속으로 빨려 들어가 콩 안에 갇히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콩을 먹으면 그 속 에 갇혀있던 죽은 자의 영혼을 먹는 것인데 이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방귀다. 콩이 입 속으로 들어가 장에서 분해돼 가스로 분출되어 나오는 것을 영혼이 다시 풀려서 몸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황당한 소리 같지만 이름 높은 철학자들도 그렇게 믿었다. 유럽에서 콩을 구박한 역사는 뿌리가 무척 깊은데 대표적인 인물이 직삼각형의 빗변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의 넓이 는 다른 두 변을 각각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의 넓이의 합과 같다 는 수학공식을 증명한 피타고라스다. 피타고라스라고 하면 보통 기원전 6세기에 활동한 그리스의 수학자로만 알고 있지만 피타 고라스는 인류 최초의 채식주의자였고 당시에 벌써 남녀평등을 주장했던 선각자였다. 또 음계의 기틀을 만들었던 음악가였으며 생명체가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설을 주장했고 또 비밀스런 종교단체를 이끌었던 밀교의 교주이기도 했다. 이런 피타고라스가 콩을 먹지 말라는 주장을 했는데 그가 직접 콩을 먹지 말라고 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후세의 많은 기록에 피타고라스가 콩을 먹지 말라고 말했다고 적은 문헌이 많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는 콩을 기피하는 현상이 보편적이었던 모양이다. 서기 1세기 무렵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가 쓴 박물지(The Natural History)에 로마인 - 3 -
들은 콩을 먹으면 감각이 둔해지고 잠을 잘 때 꿈에 시달려서 잠을 충분히 이루지 못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고 적었다. 그리스의 수학자 피타고라스도 콩을 멀리하라고 했는데 피타고라스는 죽의 자의 영혼이 콩 (bean) 속에 갇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로마의 사제들은 콩을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며 꽃피는 계절에 콩에 꽃이 핀 것 을 보면 재빨리 주문을 외워 죽은 자의 영혼이 침입하는 것을 막는다는 기록이 박물지(제18 권, 제30장)에 보인다. (The Natural History, bookⅩⅧ, chapter 30)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콩을 기피했다는 기록은 피타고라스나 박물지의 기록 이외에도 많 은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류학자인 윌리엄 파울러는 로마의 축제라는 그의 저서에서 로마시대에 주피터 신전의 제사장은 콩을 만지지도 않고 콩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도 않 는다고 했다. 그리스의 유명한 역사가인 헤르도투스 역시 고대 이집트에서는 제사장들이 콩 을 부정한 식물로 여겼다고 적어 놓았으니까 서양 문명의 기원이 되는 고대 이집트에서도 콩을 달갑지 않은 식품으로 여겼다. (2) 콩에 얽힌 이야기 너무나 흔한 콩에 대한 미움이 동서양이 모두 같다. 외국에서도 콩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가 전해온다. 콩을 싫어하는 대표적인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결국 콩 때문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피타고 라스는 콩을 보면 도망쳤을 만큼 병적으로 콩을 싫어하고 두려워했다. 어느 날 자객이 피타 고라스의 집에 불을 질렀다. 피타고라스가 불난 집에서 빠져나와 도망치는데 그만 콩밭을 가로지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콩밭을 가로질러 살아남느니 차라리 죽임을 당하는 편이 낫다며 도주를 체념했고, 결국 자객에게 잡혀 칼을 맞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 해진다. 숙맥은 콩과 보리 세상물정 제대로 모르는 사람을 보고 숙맥 이라고 한다. 어수룩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숙맥 은 원래 콩과 보리라는 뜻이다. 한자로 콩 숙( 菽 )과 보리 맥( 麥 )자를 쓴다. 글자 뜻만 놓고 보면 어리석다는 의미와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데 무슨 까닭으로 콩과 보리가 어수룩한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을까? 숙맥은 사실 겉보기에도 확연하게 달라 보이는 콩하고 보리조차도 구분하지 못한다는 숙 맥불변( 菽 麥 不 辨 ) 에서 비롯된 단어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 는 무식한 것과는 다르게 근본적으로 어수룩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옛날 중국 고사에서 - 4 -
나왔다. 기원전 6세기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에 제후국이었던 진( 晉 )나라의 여공( 厲 公 )이 정사는 돌 보지 않고 주색만 밝히며 백성을 함부로 대하다 대신인 란서( 欒 書 )가 주동이 되어 임금을 폐하고 새 임금을 세웠으니 진 도공( 悼 公 )이다. 진 도공은 쫓겨난 여공의 조카로, 영특한 군 주였지만 차남이었기 때문에 옹립 과정에서 논란이 있었다. 숙맥은 이때 불만세력에게 대신 인 란서가 설명하며 쓴 말이다. 공자에게는 형이 한 명 있지만 지혜롭지가 못해 콩과 보리( 菽 麥 ) 조차도 구분을 하지 못한 다. 고로 왕으로 세우는 것이 불가하다( 周 子 有 兄 而 無 慧 不 能 辨 菽 麥 故 不 可 立 ) 주 공자의 형이 콩과 보리 조차도 구분하지 못하는 어수룩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조금은 모 자란 사람이기 때문에 왕으로 추대할 수 없다며 대신 14살에 불과하지만 똑똑하고 영특한 주( 周 ) 공자를 왕으로 세워 천하통일의 꿈을 키우자는 것이었다. 춘추시대 말기를 살았던 역사가 좌구명( 左 丘 明 )이 당시 제후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해설해 놓은 춘추좌씨전( 春 秋 左 氏 傳 )에 나오는 이야기다. 성공( 成 公 ) 18년에 숙맥( 菽 麥 )에 대한 내용 이 수록되어 있다. 비누 대신 콩으로 세수하다 예전에는 세수할 때 비누 대신 사용했던 것이 콩이다. 콩을 갈아서 만든 것이 씻는데 쓰는 콩이라고 해서 조두( 澡 豆 )라고 했는데 일종의 콩 가루 비누다. 콩가루에 각종 약재와 향료를 혼합해 만들었는데 세정효과는 물론이고 보습효과도 있어 얼굴 피부를 촉촉하고 유지해 주 었다고 한다. 옛날에 사용했던 콩가루 비누가 오죽하겠냐고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들어가는 재료를 보면 요즘 비누는 오히려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중국 당나라 숙종( 肅 宗 )의 딸인 영화공주( 永 和 公 主 )가 사용했던 콩 비누는 호사스럽게 짝이 없다. 영화공주는 8세기 때의 인물로 황제의 딸이었지만 평생 동안 미용과 피부관리법을 연 구해 후세에 피부관리비법을 전수했다고 신당서( 新 唐 書 ) 제제공주( 諸 帝 公 主 )편에 나온다. 영화공주가 전한 비법 중에 하나가 세수하는 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목욕하는 법인데 내용 중의 일부가 송나라 때 의학서인 태평경혜방( 太 平 經 惠 方 )에 전해진다. 영화공주가 세면을 할 때 사용했다는 비누 역시 콩가루를 주원료로 만든 조두인데 닭의 뼈 를 갈아서 약초인 백지( 白 芷 ), 천궁( 川 芎 )과 섞고 또 콩과 팥을 갈아 오이, 쑥 그리고 각종 향료와 혼합해 약으로 만들어 얼굴을 씻을 때 사용했다고 한다. 목욕을 할 때는 또 다른 비누를 사용했는데 이때는 쌀뜨물을 끓여 사슴 뿔인 녹각( 鹿 角 )으 로 만든 아교를 풀어 넣고 다시 찹쌀을 넣고 끓여 죽을 만든다. 여기에 복숭아, 살구, 검정 콩 및 백지( 白 芷 ), 천궁( 川 芎 ) 등의 약재를 넣은 후 굳혀 반투명의 고체를 만들면 비누가 되 는데 목욕을 할 때 온 몸에 바르면 피부가 어린아이의 피부처럼 하얗고 부드러워지며 몸에 서 향기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당나라 때 의사인 손사막( 孫 思 邈 )은 천금방( 千 金 方 )이라는 의학서에서 콩으로 만든 비누인 - 5 -
조두 는 사대부 집안의 남녀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미용제품이라고 했으니 요즘 비누를 사 용하는 것처럼 당나라 때에는 세수를 할 때 콩가루로 만든 비누를 사용했던 것이다.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 때는 절에서 콩가루로 만든 비누를 만들어 보급했다. 조선 왕조실록에 절에서 비누를 만드는 장인인 조두장( 澡 豆 匠 )이 콩으로 비누를 만들어 공급한다 는 기록이 있는데 승려들이 국가에 제때 콩 비누를 공급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연산군이 화 를 내며 중들이 세수하는 것이 국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며 사찰에 조두장을 배치한 것 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장면이 보인다. - 6 -
수험생에게 엿 먹이는 까닭 1. 수능 응원 선물이 다양해진 이유... (1) 다양한 현대판 수능 응원 선물 (2) 합격선물 우리만의 풍속일까? 2. 언제부터 합격기원 음식을 먹었을까? (1) 왜 하필 엿을 먹으며 합격을 빌었을까? (2) 엿은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 (3) 찹쌀떡은 왜 합격선물이 됐을까? (4) 왜 우리가 찹쌀떡을 먹었을까 1. 수능 응원 선물이 다양해진 이유 시험을 앞둔 수험생에게 가장 많이 건네는 선물은 전통적으로 엿이다. 혹은 찹쌀떡을 선물 하며 합격을 응원하기도 합니다. 왜 엿이나 찹쌀떡을 합격을 소원하는 선물로 주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끈끈하기 때문에 엿과 찹쌀떡이 합격 소원 선물이 된 것으로 알고 있을텐데요 엿이 달라붙는 것처럼 시험에 철썩 붙으라는 의미입니다. 찹쌀떡도 찹쌀이 멥쌀보다 더 찰 기가 있고 끈적끈적하니까 시험에 잘 붙으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수능을 앞두고 엿이 불티나게 팔리지만 예전 대학 본고사가 있던 시절에는 입학시험 보는 날이면 대학교 교문이 엿으로 덕지덕지 도배를 했다고 합니다. 엿처럼 철썩 붙으라는 의미에서 합격을 기원하며 엿을 선물한 것인데요 시험에 합격하거나 불합격했다는 말 자체도 엿하고 관계가 있다고도 합니다. 합격, 불합격을 우리말로는 시험에 붙었다 혹은 떨어졌다 라고 표현하는데 국립국어연구 원에서 펴낸 한국문화기초용어사전에는 붙었다 떨어졌다는 표현이 엿의 성질을 합격에 비유 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어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엿과 찹쌀떡이 끈끈하기 때문에 시험에 붙으라는 의미에서 합격을 소원하는 선물이 된 것도 틀린 말은 아니겠죠. 하지만 오직 끈끈한 성질 때문에 엿과 찹쌀떡이 합격 응원 선물이 된 것일까요? 그런 단세포적이고 일차원적인 이유 말고 또 다른 이유, 더 깊은 의미는 없는 것일까요? - 1 -
(1) 다양한 현대판 수능 응원 선물 (합격사과, 엿 도끼, 포크, 화장지...) 엿과 찹쌀떡의 끈적끈적한 물성만을 놓고 합격을 빌다 보니 예전과 달리 요즘은 다양한 수 능 응원 선물이 생겼다고 하는데요. 이왕 시험에 붙으라고 주는 선물이면 엿보다 더 끈끈 하고 접착력이 강한 것이 좋다. 때문에 한때 접착제를 선물하는 경우도 있었죠. 문제를 잘 풀어야 하니까 문제가 술술 풀리라고 화장지를 선물하기도 하고 시험문제가 객관식 문제 중 심이니까 정답만 골라서 잘 찍으라고 도끼와 포크까지 선물하죠. 장난과 위트가 섞인 선물 이라고 볼수 있겠네요. 요즘 인기 있는 선물은 합격사과라고 한다. 민속신앙에서 무당이 만들어주는 부적처럼 재 배할 때부터 햇빛을 이용해 합격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사과라고 하네요. 사실 합격 사과 가 등장한 것은 유래가 있습니다. 1991년 일본에 사과 수확기를 앞두고 태풍이 불었다고 합니다. 사과재배 지역인 아오모리 현이 큰 피해를 봤는데 수확을 앞둔 사과의 90%가 태풍에 떨어졌고요. 고민하던 사과재배 농민들이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고 달려 있는 사과를 마케팅에 이용한 것이죠. 아무리 어려 운 시험문제가 나와도 시험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에서 합격사과라는 이름으로 몇 배 비싸 게 팔았다고 하는데요. 시험을 앞두고 불안한 수험생과 학부모의 심리를 파고들었던 것인데 예상했던 대로 태풍 피해를 만회하고도 남을만한 대박이 났다고 하죠. 이후 합격사과가 유행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2) 합격선물 우리만의 풍속일까? (장원쫑, 돈가스, 일본 합격응원선물) # 1-1 이렇게 시험을 앞둔 수험생에게 합격을 기원하며 음식으로 응원하는 것은 우리만의 풍속이 아니다. 일본과 중국에도 비슷한 풍속이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와 좀 비슷한데요. 일본은 대학입학시험이 매년 1월에 있기때문에 대입시험을 앞둔 풍경은 매우 비슷합니다. 전통적으로 합격하라는 뜻에서 엿을 선물하기도 하고 수험생 에게 모치라고 하는 찹쌀떡을 선물하는 것도 똑같죠. 우리와 다른 풍속도 있습니다. 시험 전날 일본 수험생이 돈가스를 먹는 풍속인데요. 이유는 돈가스의 이름 때문이라고 합니다. 승리하다 고 할 때의 이길 승( 勝 )자를 일본말로는 가스 (かつ)라고 읽는데. 돈가스의 가스 와 이긴다고 할 때의 가스 가 발음이 같아서 그러니 돈가 스를 먹고 시험을 보면 시험지와 싸워 이길 수 있으니까 시험에 합격할 것이라고 믿으며 돈 가스에 합격의 소원을 담은 것이라고 합니다. - 2 -
가오카오( 高 考 ) 라고 하는 중국은 대학입학시험이 6월 초에 이틀에 걸쳐서 실시하는데요. 한 국이나 일본의 대입시험 못지않게 입학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역시 다양한 합격 기원 음식 이 발달해 있습니다. 가장 흔한 것이 입학시험을 앞두고 먹는 장원떡( 狀 元 餠 )입니다. 징원떡은 나뭇잎으로 찰밥을 싼 쫑즈라는 음식인데 장원종( 壯 元 粽 )이라는 이름으로 팔린다고 합니다. 쫑즈라는 찹쌀떡은 원래 중국에서도 전통 명절인 단오에 먹는 음식입니다. 춘추전국 시대 때의 충신이며 시인이었던 굴원( 屈 原 )을 기리며 먹는 음식인데, 굴원에게 자녀의 합격을 기 도하며 먹는다고 하네요 또 찹쌀떡을 뜻하는 쫑( 粽 )의 발음이 명중하다, 합격하다는 뜻의 가운데 중( 中 )자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쫑즈라는 나뭇잎으로 싼 찹쌀떡을 먹으며 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하는 꿈을 품기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방에 따라 옛날 국수를 먹고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했기 때문에 쌀국수를 먹기도 하고, 합 격 죽을 먹기도 하는데 중국에도 다양한 합격 기원 음식이 발달해 있습니다. 음식에 관심이 많은 중국의 경우, 명문 베이징 대학교와 칭화대학 합격생이 무엇을 먹었는 지가 관심 대상이 된다고 합니다. 2. 언제부터 합격기원 음식을 먹었을까? (김홍도 씨름도) 어느 나라나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은 긴장하기 마련이다. 사소한 것에도 커다란 의미를 부 여하면서 시험에 합격하기를 소원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죠.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도움이 된 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기 때문일텐데요 언제부터 시험을 앞두고 합격을 기원하는 음식을 먹는 풍속이 생겼을까요? 역사를 따지고 올라가면 시험으로 관리를 뽑는 과거시험 제도가 생긴 이후부터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거 제도는 중국 수나라 때(서기 607년)부터 시작됐다. 과거 시험에서 합격기원 음식을 먹 은 것도 수나라 이후부터일 것인데, 가장 빠른 합격 기원 음식은 수나라 다음에 들어선 중 국 당나라 때로 확인됩니다. 최초의 합격 기원 음식은 엉뚱하게 돼지족발 이었다고 합니다.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면 붉은 글씨로 이름과 과거 시험문제를 적는 것이 전통이었는 데요. 시험을 볼때 붉은 글씨로 시제를 적어 붉을 주( 朱 )자와 제목 제( 題 )를 써서 주제라고 하는데 돼지의 발굽이라는 뜻의 한자 저제( 猪 蹄 )가 중국말로 발음이 같기 때문에 과거시험 을 앞둔 유생들에게 친구들이 돼지족발을 사주며 장원급제를 축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럼 우리나라는 언제 엿을 먹는 풍속이 생겼을까요? #2-1 언제부터 시험을 앞두고 엿을 먹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1960년대 이전부 - 3 -
터 이미 고등학교, 대학교 입학시험을 볼 때는 학부모들이 교문에 엿을 붙이며 합격을 비는 모습은 참 익숙하죠.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땠을까요? 조선시대에도 엿을 먹으며 장원급 제를 빌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떠나는 유생들은 괴나리봇짐 속에 엿을 넣어 가지고 갔다고 하 니까 길을 가다 배고플 때 먹으려는 의미도 있겠지만 장원급제에 대한 간절한 소망도 담겨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 조선 후기의 과거 시험장에서 엿을 팔았다는 기록이 보이니까 이 무렵에도 엿을 먹 으며 장원급제를 빌었겠죠. 정조 때의 화가인 김홍도가 그린 씨름도를 보면 목판을 목에 걸고 엿을 파는 아이가 보이 는데요. 과거 시험장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 49년(1773년)에 과거를 보는 시험장에 엿장수가 함부로 들어와 엿을 팔아 문제가 됐다고 합니다.. 사헌부 소속 이한일이라는 감찰관이 과거시험을 보는 과장( 科 場 )이 엄숙하지 못하여 떡과 엿, 따위를 현장에서 터놓고 팔았으니 시험장 관리를 맡았던 금란관( 禁 亂 官 )을 파면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영조실록에 실려 있습니다.*(그림)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하루 종일 걸렸으니 간식으로 엿을 먹으며 배고픔을 달래기도 했겠지 만 동시에 엿을 먹으며 급제를 빌면서 심리적 안정을 취했을 가능성도 높았을 것입니다. (1) 왜 하필 엿을 먹으며 합격을 빌었을까? (엿에 관한 한자) #3-1 수험생들이 엿을 먹으며 합격을 비는 것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엿이 끈적끈적하 니까 엿처럼 시험에 철썩 붙으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미신이라면 미신일 수도 있고, 시 험을 앞두고 불안한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사소한 것에라도 기대고 싶은 심리를 반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과학적으로 엿을 먹으면 혈액 속의 혈당이 높아져 두뇌회전이 빨라지기 때문이라는 설 명이 맞을 수도 있겠는데 엿을 먹음으로써 수험생의 심리적 안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보다 깊은 이유가 있을 수도 있는데요.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풍 속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이유, 내지는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 조상들이 믿었던 미신 때문이 아니라 당시의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던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엿을 먹으며 소원을 비는 것은 엿 자체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엿이 기쁨을 부르는 음식이 기 때문입니다. 엿을 뜻하는 한자에서 그 의미를 읽을 수 있는데요. 엿을 한자로는 이( 飴 )라고 씁니다. 글자 - 4 -
를 풀어보면 먹을 식( 食 )변에 기쁠 태( 台 )자로 이뤄져 있습니다. 태( 台 )라는 글자는 세모처럼 생긴 글자인 사( 厶 )자 아래에 입 구( 口 )로 구성된 글자다. 그러니까 입( 口 )을 방실거리며( 厶 )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한나라 때 한자 사전인 설문해자( 說 文 解 字 )에서는 태( 台 )를 기쁘다는 뜻의 이( 怡 )자와 열( 悅 ) 자로 해석을 했으니 보통 즐거운 것이 아니라 희열( 喜 悅 )을 느낄 정도로 좋다는 뜻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먹어서( 食 ) 입을 방긋거리며 웃으며 희열을 느낄 정도로 좋은 ( 台 ) 음식이 바로 엿( 飴 )이라는 음식인 것입니다. 이제 수험생에게 왜 엿을 먹이는지 이유를 좀 알것도 같죠? 엿이 끈끈하니까 엿처럼 붙으라는 뜻이 아니라 엿을 먹으며 합격의 기쁨을 미리 맛보라는 심오한 뜻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에게 엿을 주는 의 미는 엿을 먹고 합격의 희열을 만끽하라는 속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설날, 세배를 하면 어른들이 덕담을 하는 것처럼 합격해서 기쁨을 누리라는 덕담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수 있는 것이죠 꿈은 이뤄진다고 믿는 것처럼 엿을 먹으면서 합격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긍정 마인드,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었으니 엿의 끈끈한 성질을 이용한 말장난 때문에 엿이 합격의 부적 이 된 것이 아니라 조상들이 기쁨의 음식인 엿을 이용한 만든 고도의 심리전이 아니었을까 요?. #4-1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기는데요. 엿이 왜 기쁨을 부르는 음식이었을까하는 것이죠. 지금은 특별할 것도 없는, 어찌 보면 싸구려 간식이지만 옛날에는 엿이 꿀에 버금갈 정도로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귀중한 곡물을 졸이고 졸여서 곡물의 에센스만 뽑아서 만든 식품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아무 때나 먹는 음식도 아니었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엿은 특별한 날에 만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럼 주로 어떤 날 엿을 먹었을까요? (2) 엿은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 (설날 엿, 이바지 엿, 중국 喜 糖 ) #5-1 옛날 어른들은 엿에다 다양한 소망을 담았습니다. 전통적으로 엿은 명절이나 잔칫날, 혹은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이었다는 것을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펴낸 한국세시풍속사전에는 우리 조상들은 정초나 정월 대보름 아침이 면 엿을 먹는 풍속이 있는데 그냥 엿을 먹는 것이 아니라 소원을 빌면서 엿을 먹었다고 나 옵니다. 정월 초하루나 대보름에 먹는 엿을 복( 福 )이라고 하는데 복 엿을 먹으면 살림이 엿가락처 - 5 -
럼 늘어나 부자가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정초에 엿을 먹으며 재물이 엿가락처럼 늘어나 기를 소원했던 것으로 이 경우에는 주로 흰엿을 먹었다고 합니다. 정월 대보름에 엿을 먹으면 일 년 내내 음식을 달게 먹을 수 있다고 했고 또 얼굴에 버짐 이 피지 않는다고 해서 건강을 기원하며 엿을 먹기도 했는데 음식이 귀했던 시절이니 곡물 로 만든 엿을 보양식품으로 여긴 것에서 비롯된 풍습입니다. 동국세시기( 東 國 歲 時 記 )에는 정월 대보름날 어린 남녀가 새벽에 엿을 깨물어 먹는 풍습이 있으니 이를 이빨내기( 齒 較 )라고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새해를 맞아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또 이를 튼튼하게 하려는 일종의 부럼 깨는 풍속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엿을 깨 먹으면서 새해 건강해지기를 비는 소원을 담은 풍속입니다. 지금은 설날 엿 먹는 집이 그다지 많지 않지만 결혼식에는 아직 엿 먹는 풍속이 남아 있습 니다. 딸을 시집으로 보낼 때 친정어머니가 정성껏 준비하는 것이 바로 이바지 음식입니다. 좀 놀랍지 않으신가요? 요즘 이바지 음식의 구성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이바지 음식으로 보통 엿이 들어갑니다. 이바지 엿은 신혼부부가 엿처럼 달라붙어 사랑하며, 백년해로하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요즘 해석으로는 시집 식구들 입막음용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엿 먹고 입이 달라 붙어 우리 딸 흉 못 보게 해 달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사실 이렇게 알려진 이유는 본래 엿을 넣는 의 미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엿은 복을 부르고 기쁨을 나누는 음식이니까 이바지 음식에 넣는 엿은 사돈의 인연을 맺었 으니, 혼사의 기쁨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죠다. 우리는 이바지 음식으로만 남아 있을 뿐, 결혼식 엿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중국에는 아직 이런 풍속이 남아 있습니다. 중국의 신랑 신부들은 결혼식이 끝나면 쟁반에 엿을 담아 하객들에게 돌리며 인사를 하는데요. 이 엿을 기쁠 喜 사탕 糖 자를 써서 喜 糖 이라고 하는데 하객들과 결혼의 기쁨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지금은 편하게 엿 대신 사탕을 담 아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동양에서 엿은 바로 기쁨을 나누는 음식, 기쁨을 맛보라는 음식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수험 생에게 엿을 선물하는 풍속은 단순히 엿이 끈끈해서 엿처럼 붙으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합격 의 기쁨을 맛보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3) 찹쌀떡은 왜 합격선물이 됐을까? (모치, 大 福 餠 ) #6-1 엿은 그렇다고 치고, 수험생들에게 찹쌀떡을 선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찹쌀떡 역시 멥쌀보다 찰기가 강하니까 시험에 찰싹 붙으라고 먹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당 연히 그렇게 단순한 이유 때문만이 아닙니다. 찹쌀떡에 담긴 의미를 찾으려면 먼저 찹쌀떡 - 6 -
의 유래를 알아볼 필요가 있겠죠? 우리가 수험생에게 선물하는 찹쌀떡은 우리나라 전통 떡인 인절미 종류가 아닙니다. 속에 단팥을 넣고 겉에 밀가루를 뿌린 찹쌀떡은 한때 우리가 흔히 모치(もち)라고 불렀던 일본에 서 전해진 떡입니다. 모치는 일본말로 떡이라는 보통 명사이고 우리가 말하는 모치, 다시 말해 찹쌀떡은 일본에 서 배가 볼록나온 떡이라고 해서 다이후꾸 모치라고 부르는 떡이죠. 원래는 클 大 배 腹 떡 餠 자를 써서 대복병, 즉 다이후쿠 모치라고 불렀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배 腹 자 대신에 복 福 자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일본에서 찹쌀떡이 상징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찹쌀떡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큰 복을 먹는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수험생에게 엿을 선물하며 합격의 기쁨을 맛보라고 하는 것처럼, 일본에서는 다이후 쿠 모치를 선물하면서 합격의 큰 복을 미리 맛보라고 축원하는 것이다. 일본의 이런 풍속이 우리나라에 전해져 합격 엿과 함께 합격 찹쌀떡을 선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4) 왜 우리가 찹쌀떡을 먹었을까? 찹쌀떡의 유래를 알고 나니 풀리는 궁금증이 몇 가지 더 있지 않으세요?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결혼식에 가면 답례품으로 찹쌀떡을 나누어 주었던 적이 있었 죠. 어렸을 때 그저 좋다고 먹었지만 사실 여기에도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결혼이라는 경사를 맞아 하객들과 복을 나눈다는 뜻이 있었던 것이죠. 초등학교나 유치원 운동회 날이면 줄에다 과자를 매달아 놓고 입으로 따먹거나 밀가루 위에 놓인 찹쌀떡을 손을 대지 않고 입으로 집어먹는 게임을 많이 하죠? 이 게임도 사실은 과자 를 매달아 놓지만 원래는 찹쌀떡을 달아 놓는 것이 원칙입니다. 왜 하필이면 찹쌀떡을 줄에다 매달아 놓고 입으로 따먹거나 밀가루 위의 찹쌀떡을 뒷짐을 지고 입으로 집어먹는 게임을 하는 것일까요?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해가며 망가지는 모습이 재미있어 웃었지만 사실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미와 함께 큰 복을 받으라는 뜻이 담아 했던 게임인 것이죠. 아 그게임을 왜 했는지 이제야 이유를 아셨다구요? 무심코 먹는 음식이지만 표면적으로만 알려져 있는 지식, 상식의 껍질을 깨고 그 속에 담 긴 참뜻, 핵심을 들여다보면 미처 몰랐던 새로운 사실이 보이고,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 7 -
설날 떡국에 담은 꿈 1. 한국인에게 떡국이란...? (1) 설에는 반드시 떡국을 먹어야... (2) 떡국을 먹어야 나이를 먹는다? (3) 새해 떡국의 의미 2. 장수와 재복의 상징, 떡국 (1) 가래떡은 왜 길어졌을까? (2) 떡국 떡은 돈 모양... 3. 부자 꿈을 담은 동서양 새해 음식 (1) 중국, 일본, 미국, 유럽의 새해 음식 1. 한국인에게 떡국이란...? (1) 설에는 반드시 떡국을 먹어야... #1-1 새해 명절음식으로 송편을 먹을 수도 있고 인절미나 시루떡도 있으며, 아니면 하얀 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설날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굳이 떡국을 먹는 까닭은 무엇일까? 먼 옛날부터 내려 온 풍속이니 정확한 설명은 불가능하겠지만 떡국에 담긴 의미는 과연 무 엇일까? 설날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반드시 떡국을 먹는다. 현대에는 전통 민속이 많이 사라지고, 전통 민속의 의미가 퇴색했기 때문에 굳이 떡국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데 불과 1세기 전까 지만 해도 달랐다. 혹시 설날 떡국을 먹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줄 알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27년의 신문기사를 보면 아이들에게 설날 떡국 한 그릇이라도 먹이려 면 가난한 어머니의 처절한 몸부림이 기록돼 있다. 설날은 다가오고 어린 것에게 떡국 한 그릇 먹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아이에게 떡국 한 숟가락이라도 먹이고 싶어 전당포 문이 닫히기 전에 떡 사고 간장 사서 설 아침 준비를 하 겠다는 생각으로 빨아 다듬은 옥양목 치마 한 벌을 전당포에 맡겼다. 이십 전이라도 주시 - 1 -
오 이 말을 들은 전당포 주인이 치마를 어따 쓰느냐 면서도 치마를 놓고 가라며 삼십 전을 내주었다 -동아일보 1927년 2월 3일자- 입던 치마를 저당 잡히고라도 떡 살 돈을 마련해 아이들에게 떡국을 먹이고 싶은 어머니의 모정이 절절하게 그려져 있다. 어머니는 왜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떡국을 먹이고 싶어 한 것 일까? 단순히 명절이기 때문에 명절 음식을 먹이고 싶은 가난한 어머니의 모정 때문일까? 아니면 떡국에 특별한 의미, 그것도 어머니도 모르는 특별한 의미,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와 한국 인의 DNA에 각인된 한국적 정서의 원형이 떡국에 담겨있기 때문일까? (2) 떡국을 먹어야 나이를 먹는다? #1-1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설날에 떡국을 먹어야 비로소 한 살을 더 먹었다고 여겼다. 뒤 집어 말해서 떡국을 먹지 않으면 나이를 먹지 못한다는 말이다. 요즘은 사라진 말이지만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떡국을 먹어야 한 살을 더 먹는다고 했다. 나이가 몇 살이냐? 고 물을 때 떡국 몇 그릇 먹었냐? 고 묻는 겨우도 있었다. 나이를 물을 때 떡국 몇 그릇 먹었냐? 고 묻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꽤 오래 된 풍습이었던 모양이다. 조선 순조 때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 東 國 歲 時 記 )에도 나온다. 설날이면 떡국을 끓여 손님을 대접하고 또 시장에서 떡국을 시절음식으로 팔기도 하는데 우리말로 나이가 몇이냐고 물을 때( 添 齒 ) 떡국을 몇 그릇 먹었냐( 吃 餠 湯 第 幾 椀 )고 묻는 것과 같다 때문에 떡국을 나이를 더하는 떡이라는 의미에서 첨세병( 添 歲 餠 )이라고 한다고 했다. 더할 첨( 添 )자에 나이 세( 歲 )이니까 나이를 더하는 떡이고 국이라는 의미다. 설날이면 반드시 떡국을 먹었기에 최소한 조선 후기인 순조 때 이전부터 지금까지도 떡국 먹은 그릇 수로 나이를 따진 것이다. 물론 현대 같으면 젊어지겠다며 떡국먹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옛날 기준으로는 떡국을 먹지 않으면 어른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설날 반드시 떡국을 먹어야 하는 이유다. (3) 새해 떡국의 의미 설날 떡국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있다. 그중 하나가 떡국은 하늘에 복을 비는 음복( 飮 福 ) 음 식이라는 것이다. 요즘은 설날이 그저 명절일 뿐이고 음력으로 새해가 시작된 날이라고 알고 있을 뿐이지만 농사가 중심이었던 옛날, 정월 초하루는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날이었다. 설날을 원단( 元 旦 )이라고도 하는데 6세기 무렵 쓰여 진 형초세시기( 荊 楚 歲 時 記 )에 정월 초 하루는 세가지가 시작되는 삼원( 三 元 )의 날이라고 했다. 일 년이 시작되는 날( 歲 之 元 )이며, - 2 -
하루가 시작되는 날( 時 之 元 )이고, 한 달이 시작되는 날( 月 之 元 )이다. 근대 한국의 사학자이자 문학가였던 최남선은 조선상식( 朝 鮮 常 識 )에서 설날 떡국을 먹는 풍속은 상고( 上 古 )시대 이래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먹었던 음복 음식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새해 첫날은 천지만물이 새롭게 태어나는 날로 태양이 부활하는 날이기 때문에 하늘에 제 사를 올리고 음복으로 음식으로 먹었는데 정결한 흰떡과 밋밋한 국으로 절식을 삼은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양의 기운이 돋아나 만물이 되살아나고 농사가 시작되는 날, 질병을 예방 해 장수를 빌며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먹었던 음식이 바로 떡국이다. 4세기 무렵 진( 晉 )나라 때 속석( 束 晳 )이 쓴 떡에 관한 글인 병부( 餠 賦 )에 정월 초하루는 음 양이 교차하는 날로 음의 기운이 점점 쇠퇴하고 양의 기운이 살아나는 날이라고 했다. 그러 면서 봄이 시작되는 이 날, 일 년의 평안을 기원하면서 만두국( 餠 湯 )을 먹는다는 것이다. 떡국이나 만둣국은 만물이 새롭게 살아나는 날, 일 년 동안의 풍요와 건강을 기원하며 먹 는 음식인 것이다. 2. 장수와 재복의 상징, 떡국 (1) 가래떡은 왜 길어졌을까? 설날 가래떡으로 떡국을 끓여 차례를 지낸 후 가족들이 떡국을 먹으며 새해 소원을 빌고 또 덕담을 나누는 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설 풍경이다. 떡국은 조상님께 올리는 차례와 가족 간 화합의 핵심 매개체로 여기에 넣는 것이 가래떡인데 설날 왜 가래떡을 먹으며 가래떡에 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전에서 가래 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떡이나 엿 따위를 둥글고 길게 늘여 만든 토막이라는 풀이가 나온다. 가래떡은 그러니까 길게 늘여 만든 떡으로 끊어지지 않고 길게 늘였다는 것 이 특징이다. 지금은 기계로 가래떡을 뽑지만 옛날에는 떡메로 내리치며 일일이 손으로 길게 늘여 가래 떡을 만들었다. 조선 순조 때의 동국세시기( 東 國 歲 時 記 )에 가래떡을 만들 때의 특징이 잘 나 와 있다. 설날이면 멥쌀가루를 쪄서 목판 위에 놓고 절구로 무수히 내리쳐( 無 數 擣 打 ) 길게 늘여 가 래떡을 만든다( 引 作 長 股 餠 )고 했다. 가래떡을 한자로 장고병( 長 股 餠 )이라고 표현했는데 길 장 ( 長 ), 가래 고( 股 )이니 기다란 가래란 뜻이다. 가래떡을 둥글고 길게 만드는 이유는 가래떡이 설날에 먹는 특별한 음식이기에 건강과 장 - 3 -
수( 長 壽 )의 소원과 부자 되기를 꿈꾸는 재복( 財 福 )의 염원을 담았기 때문이다. 가래떡에 장수의 소망을 담은 것은 국수를 장수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과 마찬가지다. 기다 란 국수 가락처럼 길고 둥근 가래떡을 만들며 오래 살기를 빌었던 것이다. 떡메로 떡살을 무수히 내리쳐 떡의 쫄깃쫄깃한 성질을 높이는 동시에 국수 면발처럼 떡을 길게 늘이며 장 수의 소망을 담았던 것이다. 설날은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날이어서 원단( 元 旦 )이고 음양이 교차되는 날로 양의 기 운이 살아나 만물이 소생하는 날이다. 설날에는 시작과 부활의 의미가 담겨 있어 하늘과 조 상께 차례를 올리며 풍년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인데 가래떡에다 건강과 장수( 長 壽 )의 소원 과 재복( 財 福 )의 기원을 담았던 것이다. 가래떡에 장수의 소망을 담은 것은 국수를 장수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과 비슷하다. 긴 국 수 면발처럼 기다란 가래떡을 먹으며 오래 살기를 소원했던 것인데 우리나라는 예전 밀가루 음식을 드물게 먹었으니 쌀가루로 만든 떡에다 장수의 소망을 새겼던 것이다. 국수가 장수 의 상징이 된 것은 7-8세기 중국 당나라 무렵이다. 당시 조악한 음식을 먹던 사람들이 밀을 곱게 빻은 밀가루로 국수라는 새로운 고급음식을 먹으며 수명이 늘어났기 때문에 국수의 기 다란 면발을 장수의 상징으로 삼았다. 우리가 언제부터 가래떡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가래떡이 길어진 것은 떡메로 떡살을 무수히 내리쳐 떡의 쫄깃쫄깃한 성질을 높이는 동시에 국수 면발처럼 떡을 길게 늘 여 장수의 소망을 담았던 것이다. (2) 떡국 떡은 돈 모양... 가래떡의 특징은 국수보다는 굵기가 두껍지만 길이는 국수처럼 길다는 점이다. 때문에 가 래떡으로 떡국을 끓이려면 떡을 썰어야 하는데 옛날 문헌을 보면 하나 같이 가래떡 썰어놓 은 모양을 엽전과 같다고 했다. 동국세시기( 東 國 歲 時 記 ) 떡국을 끓일 때는 가래떡을 동전처럼 얇고 가늘게 썰어(( 細 切 薄 如 錢 ) 간장을 푼 끓는 물에 소고기나 꿩고기를 넣고 후춧가루를 넣어 조미를 한 후에 먹는데 이를 떡국( 湯 餠 )이라고 부 른다고 했다. 열양세시기( 洌 陽 歲 時 記 ) 동국세시기와 같은 시대인 조선 순조 때 한양의 세시풍속을 적은 열양세시기( 洌 陽 歲 時 記 ) 에서도 가래떡을 동전 모양으로 썰어 넣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섣달 그믐날이면 가래떡을 엽전 모양으로 가늘게 잘라놓은 후 설날에 떡국을 끓여 식구 숫자대로 한 그릇씩을 먹는다 고 했다. - 4 -
좋은 쌀로 가루를 내어 체를 쳐서 고르고 맑은 물에 반죽해 찐 것을 안반에 놓고 떡메로 오래 친 다음 조금씩 떼어 손으로 비벼 문어발처럼 둥글고 길게 늘인 모양의 떡을 만드는데 이것을 권모( 拳 模 )라고 하며 가래떡을 말한다. 미리 준비해 둔 장국에 끓일 때 가래떡을 동 전 모양으로 얇게 썰어 넣으면( 沸 將 餠 細 切 如 錢 形 ) 끈적거리지도 않고 부서지지도 않아 좋다 경도잡지( 京 都 雜 志 ) 18세기 말, 정조 때 유득공이 지은 세시풍속지인 경도잡지에도 가래떡은 엽전 모양으로 썬 다고 적혀 있다. 멥쌀로 떡을 쪄서 치고 비벼 긴 가닥을 만들고 굳기를 기다려 엽전 굵기 로 자른다.( 粳 米 餠 按 摩 成 條 候 硬 橫 截 薄 如 錢 ) 이것을 끓이다가 꿩고기와 후cnt가루를 넣어 맛 을 내면 세찬으로서 없어서는 안 될 떡국이 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왜 하나 같이 가래떡을 동전 모양으로 썬다고 했을까? 둥글게 생긴 것 이 굳이 엽전뿐만이 아닌데 학식이 높았던 유득공이나 홍석모, 김매순이 이재( 理 財 )에 밝아 서 떡 썰어놓은 모양을 보고 돈처럼 생겼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썰어 놓은 떡국 떡의 모양에는 역시 인간들의 원초적 소망이 투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부자 되기를 소원하고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기원한다. 권력은 십년을 가 지 못한다는 권불십년( 權 不 十 年 )이라는 말처럼 권력욕은 다음 차원의 문제다. 때문에 새해 엽전 모양으로 생긴 떡국을 먹으며 돈을 먹는 것처럼 부자 되기를 빌었던 것 이고, 가래떡을 국수 가락처럼 기다랗게 뽑으며 오래 살기를 소원했을 것이다. 3. 부자 꿈을 담은 동서양 새해 음식 (1) 중국, 일본, 미국, 유럽의 새해 음식 흥미로운 점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새해 첫날 먹는 음식은 대부분 부 자가 되는 소원이 담겨 있다는 것이고, 때문에 돈의 모습을 닮았다는 사실이다. 중국 우리도 그렇지만 중국에서는 설날 만두를 먹는다. 그런데 우리나 중국 모두 설날 먹는 만 두는 평소 먹는 교자만두 혹은 찐 만두와 달리 만두의 양끝을 말아서 동그랗게 붙여 놓은 말발굽 모양이다. 말발굽처럼 생겼다고 했지만 사실은 말발굽 모양으로 만든 중국의 옛날 은화인 원보( 元 寶 ) 라는 화폐다. 돈 모양으로 만두를 빚어 먹으며 재물이 집안에 넘치기를 빌었던 것이다. 이것도 모자라 부잣집에서는 만두에 금은을 넣어 빚기도 했는데 이 만두를 먹은 사람은 일 년 동안 운수가 대통한다고 믿었다는 내용이 청나라 때 북경의 풍속을 적어놓은 연경세시기 ( 燕 京 歲 時 記 )에 나온다. 일본 일본은 '오세치(おせち)' 요리를 먹으며 새해를 맞이한다. 설은 오곡( 五 穀 )을 지키는 신을 맞 이하는 의미가 있어 이때는 불을 사용해 조리하지 않고, 설 전에 미리 요리를 만들어두고 연휴 동안 먹는다. 오세치는 찐 새우와 검은콩, 멸치, 연근, 밤, 다시마, 청어알 조림 등의 조 - 5 -
림 음식을 3~5단의 찬합에 보기 좋게 담아놓은 것이다. 검은콩은 '복', 멸치는 '풍작', 새우는 '장수', 연근은 '지혜', 밤은 '재운( 財 運 )', 청어 알은 자손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의미다. 동양은 물론이고 서양에도 비슷한 풍속이 있다. 프랑스, 그리스 등지에서는 신년에 동전을 숨겨놓은 케이크를 나누어 먹는데 케이크를 먹다 동전을 씹은 사람은 한해 운세가 트인다고 여겼으니 동서양 풍속이 서로 닮은꼴이다. 미국 미국 남부에서는 새해에 콩과 채소를 넣은 음식을 먹는 전통이 있다. 주로 쌀에다 콩, 무청 을 넣어 볶아 먹는 음식인데 일종의 미국식 볶음밥이다. 미국인들은 콩은 동전인 코인을 상 징하고 채소의 녹색은 달러를 의미한다. 달러 뒤쪽이 녹색이기 때문에 달러를 그린 백 (greenback)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미국 남부에서도 역시 새해 음식을 먹으며 부자 되기 를 소원했던 것이다. 이탈리아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는 전통적으로는 돼지고기, 특히 이탈리아 같은 나라에서는 돼지 족 발을 먹는다. 그것도 콩과 함께 먹는데 새해에 돼지를 먹어야 복이 온다고 믿는데 역시 재 운과 관련이 있다. - 6 -
신화 속 트랜스포머, 마늘과 쑥 학습주제 1. 왜 마늘과 쑥을 먹어야 사람이 될까? (1) 단군신화, 마늘과 쑥 (2)곰이 마늘을 선택한 이유는...? 2. 역사 속 마늘의 효능 (1) 마늘은 자양 강장제 (2) 드라큐라는 왜 마늘을 싫어할까? 3. 웅녀로 변하는 필요조건이 쑥 (1) 쑥은 여자에게 좋은 약초 (2) 쑥이 모기와 뱀을 쫓는 까달 1. 왜 마늘과 쑥을 먹어야 사람이 될까? (1) 단군신화, 마늘과 쑥 #1-1 단군신화는 일반적으로 고대에 토템(Totem)신앙으로 곰을 숭상했던 토착부족이 외래부족과 융합하는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한다. 하늘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외래 부족이 곰을 숭상하는 토착부족과 결합해서 호랑이를 숭배하는 또 다른 토착부족을 몰아내고 새 나라를 세운 것으로 보는 것이다. 또 다른 궁금증은 곰이 사람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왜 마늘과 쑥을 먹었느냐는 점이다. 많고 많은 식품 중에서 굳이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이 된 까닭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신화는 집단 무의식의 표현이다. 그러니 단군신화에 나오는 마늘과 쑥에도 집단 무의식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마늘과 쑥에는 옛날 사람들의 식습관과 인식이 그대로 투 영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마늘과 쑥을 무척 좋아했을 것이다. 쑥도 그렇지만 마늘은 지금도 고추장에 생마늘을 찍어 먹을 정도로 좋아한다. 먼 옛날부터 마늘을 즐겨 먹었기에 단군신 화에다 마늘을 등장시킨 것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현재 우리가 먹는 마늘(garlic)은 중국을 통해 한반도로 전해졌다. 지중해가 원산지인 데 3세기 무렵 진( 晉 )나라 사람인 장화가 쓴 박물지에는 기원전 2세기 한나라의 장건( 張 騫 ) 이 서역에서 들여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단군신화가 기원전 2세기 이후의 이야기거나 혹은 신화에 나오는 마늘 이야기가 엉터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서역에서 들 여 온 마늘은 한자로 대산( 大 蒜 )이라는 종자이고 아시아에서는 이전부터 산 마늘( 山 蒜 ) 혹은 들 마늘( 野 蒜 )을 먹었다. 그러니까 단군신화에 나오는 마늘은 지금 우리가 먹는 것과는 약간 - 1 -
다른 종자였을 것이다. (2)곰이 마늘을 선택한 이유는...? #1-1 곰이 사람으로 변하는데 먹어야 할 식품으로 마늘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마늘이 신비 한 식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물인 곰이 영물이 인간으로 변하려면 보통 방법 으로는 안되고 신성한 힘이 필요하다. 곰이 평소처럼 도토리를 주워 먹었더니 웅녀가 되었 다고 하면 신화로서의 신비함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은 마늘을 식품이 아 닌 신비한 약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마늘은 생명력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힘의 원천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늘을 정력제로 생각했고 생김새도 남성의 고환을 닮았다고 해서 다산의 상 징으로 받아들였다. 마늘에는 또 신비한 힘이 들어 있어 귀신을 쫓아내고 역병을 막아준다고 믿었다. 마늘이 식품인 동시에 약초였고 신비의 영약이었던 것이다. 단군신화에서 사람이 되려는 곰에게 굳이 마늘을 먹인 이유는 그만큼 친숙한 음식이면서 동시에 마늘에는 생명력, 생식력과 약초로서의 신비함이 모두 담겨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2. 역사 속 마늘의 효능 (1) 마늘은 자양 강장제 고대인들은 마늘을 먹으면 힘이 솟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동서양 구분 없이 모두 마늘 을 강장제, 정력제, 의약품으로 사용한 것으로 나온다. 마늘에 대한 가장 오래 전 기록은 성경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막을 떠돌며 이집트에 서 공짜로 먹던 마늘, 오이, 수박, 부추, 양파를 그리워하며 모세를 원망하는 장면이다. 민수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마늘을 먹지 않으니 힘이 쇠약해졌다며 한탄하는 모습이 나온 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마늘을 먹어야 기운이 솟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모세를 따른 이스 라엘 사람들은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건설하던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니 마늘은 먹고 힘을 내서 피라미드를 지으라고 제공되었던 특별 강장식품이었던 것이다. #2-1 고대 서양 문헌을 보면 마늘이 주로 육체노동자들에게 제공된 식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 대 그리스의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작품 평화(Peace) 에서 마늘을 먹는 노동자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 역시 로마에서 병정과 선원, 노동자들이 마늘을 먹는다고 했다.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여성의 자궁 종양 치료에 마늘을 처방한 것을 비롯 해 마늘의 다양한 치료효과에 대하여 여러 편의 논문을 남겼다. - 2 -
동양에서도 일찍부터 마늘을 의약품으로 이용했다. 명나라 때 의학서인 본초강목에는 마늘 을 먹으면 토사곽란을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여행을 갈 때면 마늘 을 상비약으로 휴대했다고 한다. 중국 원나라 때 왕정이 쓴 농서( 農 書 )라는 책에도 여행을 떠나며 마늘을 가져가면 뜨거운 바람과 비도 견딜 수 있고 마늘을 먹으면 독을 먹어도 해를 입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나라 동의보감에도 마늘은 헛것에 들린 것은 낫게 하고 아픈 것을 먹게 하는데 오랫동 안 먹으면 피를 맑게 한다고 했으니 기록했다. 옛날 사람들은 마늘을 먹으면 힘이 솟는다고 생각했다. (2) 드라큐라는 왜 마늘을 싫어할까? 마늘에 나쁜 기운을 쫓는 신비한 약초 성분이 들었다고 믿었던 옛 사람들의 생각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 드라큘라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드라큘라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십자가와 마늘이다. 드라 큘라는 뿌리 깊은 기독교 문명권에 사는 흡혈귀이니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지만 마늘은 왜 그토록 무서워하는 것일까? 드라큘라는 영국의 브람 스토커(Bram Stoker)가 쓴 소설에 나오는 흡혈귀, 즉 뱀파이어 (vampire)다. 루마니아를 무대로 한 소설 속의 가상인물이지만 동유럽에 널리 퍼져있는 사람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뱀파이어 전설은 11세기 무렵부터 동유럽의 슬라브 민족국가를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뱀 파이어는 흡혈귀로 흡혈귀에게 피를 빨리면 그 사람도 흡혈귀로 변한다. 일종의 전염병과 같은 현상이다. 이 밖에도 마법사와 마녀, 늑대인간(werewolf), 이교도, 부랑자, 사생아가 낳은 사생아 아이, 자살한 사람, 복수를 못한 사람, 살인자 등이 죽으면 뱀파이어가 된다고 믿었다. 당시 사회 에서 환영 받지 못했던 존재들이다. 동양식으로 말하자면 불행과 전염병을 몰고 다니는 역 귀( 疫 鬼 )와 같은 존재들이다. 동유럽에서는 전통적으로 뱀파이어를 쫓아내는데 마늘을 사용했다. 드라큘라의 무대로 알 려진 루마니아 북부의 트란실바니아 지방에서는 부활절이 되면 새벽에 마늘로 십자가를 만 들어 창문에 달아 장식을 하거나 집안 곳곳에 마늘을 놓아두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또 소 를 키우는 축사에도 마늘을 걸어놓고 소에게 마늘을 문질러 주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마늘이 흡혈귀의 접근을 막아 전염병을 예방한다고 믿었던 것인데 소설에서 뱀 파이어인 드라큘라가 싫어하는 기피식품으로 이용된 것이다. 루마니아를 포함한 동유럽 국가의 전설과, 드라큘라가 기본적으로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라 는 사실을 감안하면 마늘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마늘에는 나쁜 기운의 접근을 차단하고 쫓아내는 기능이 있었던 것이 - 3 -
다. 곰이 사람이 되려면, 다시 말해 동물의 성질인 야성( 野 性 )을 버리고 사람의 성질인 인성 ( 人 性 )을 찾으려면 마늘을 먹어야 했을 것이다. 3. 웅녀로 변하는 필요조건이 쑥 (1) 쑥은 여자에게 좋은 약초 #3-1 단군신화에서 웅녀로 환생한 곰이 먹었던 음식은 마늘과 쑥인데 특히 남자가 아닌 여자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쑥을 먹어야 했다. 한국 설화는 물론이고 세계 다른 나라의 민속에서도 쑥은 여성을 위한 식품이기 때문이다. 민속이라는 관점에서 쑥의 특징을 꼽자면 첫째 쑥은 정화작용을 한다는 것이고 둘째 쑥은 여성에게 필요한 식품이라는 점이다. 곰이 동물에서 인간으로 변신하려면 야성을 버리고 인 성을 갖추는 정화과정이 필요하다. 또 사람 중에서도 여자가 되려면 여성화라는 의례를 거 쳐야 하는데 두 가지 특성을 모두 갖춘 식물이 쑥이다. 곰이 웅녀가 되기 위해 쑥을 먹었던 이유다. 우리 속담에 애쑥 국에 산촌 처자 속살 찐다 는 말이 있다. 갓 돋아난 쑥으로 국을 끓여먹 은 산골 아가씨가 새봄을 맞아 한층 성숙해진다는 뜻이다. 쑥이 여자들에게 생기와 윤기를 더해 준다는 말인데 이 속담에는 생식과 다산의 의미가 담겨있다. 명나라 때 의학서인 본초강목에도 쑥이 여성들의 생식에 이롭다는 내용이 있는데 쑥은 음 기를 도와서 새살이 돋아 아이를 갖게 한다고 했다. 또 속에 있는 차가운 기운과 나쁜 기운 을 몰아낸다고 했으니 쑥을 여성의 출산능력을 높이는 비약( 秘 藥 )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예전 할머니들은 아이를 임신한 부인이 아랫배에 통증이 있거나 하혈을 하는 등 유산의 기 미가 보이면 쑥을 뜯어다 먹였는데 쑥이 유산을 막아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쑥을 먹으면 불규칙한 생리주기를 고르게 해주며 얼음장처럼 찬 손발을 따뜻하게 해 준다고 했다. 사실 요즘에도 갓 아이를 낳은 산모에게는 쑥으로 찜질을 해 주는데 다 이런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쑥은 옛날부터 생명력과 다산을 상징한다고 믿어왔다. 실제로 쑥은 생명력이 강해서 어느 곳에서도 잘 자라고 번식력이 왕성한 식물이다. 예전에는 여자들이 물에 쑥을 풀어 목욕을 하거나 베개 속에 쑥을 넣고 잠을 자기도 했는데 쑥을 통해 왕성한 생식능력을 전수 받으려 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 쑥이 여성에게 좋다는 생각은 우리뿐만 아니라 서양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쑥은 영 어로 아르테미지아(artemisia)라고 한다. 어원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 (Artemis)다. 아르테미스는 달의 여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냥의 여신이며 어린아이와 여성의 보호자 - 4 -
이고 수호신이다. 아이를 낳는 것에서부터 아이가 성장하기까지의 일체를 돌봐주는 여신이 다. 쑥의 영어 이름인 아르테미지아 를 보면 쑥 역시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바쳐진 식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달의 여신으로 여성의 수태에 영향을 주고 월경( 月 經 )주기를 조절해 주며 여성을 보호하는 여신에게 바치는 성스러운 풀인 것이다. (2) 쑥이 모기와 뱀을 쫓는 까달 #4-1 민속적으로 쑥에는 나쁜 기운을 쫓아내는 정화의 기능이 있다고 믿었다. 쑥을 가리키는 영 어 이름을 봐도 알 수 있다. 쑥을 영어로 아르테미지아 했지만 그 이외에 머그워트(mugwort) 라고도 한다. 어원사전을 보면 고대 독일어(Muggiwurti)에서 기원한 단어인데 파리, 모기, 나방을 쫓는 식물이라는 뜻 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시골에서는 모깃불로 쑥을 태우는데 유럽에서도 1세기 무렵부터 쑥을 태 워 모기와 파리를 쫓아낸 것에서 유래한 단어다. 또 다른 영어 단어로는 웜우드(wormwood) 라고도 하는데 벌레를 없앤다는 뜻이겠지만 모 기나 나방을 쫓는 머그워트 와는 달리 기생충을 없애는 식물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한 다. 중세 유럽에서 약쑥으로 회충을 치료한 것에서 비롯된 단어다. 쑥에는 곤충이나 해충을 쫓는 구체적인 성분은 물론이고 귀신이나 악령을 쫓아내어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기능이 있다고 여겼다. 동서양에 모두 널리 퍼져있는 민속인데 동양에서 도 예전에는 단오절이 되면 쑥으로 인형을 만들어 문에 걸어놓는 풍속이 있었다. 나쁜 기운 을 쫓는다는 뜻이며 형( 荊 ), 초( 楚 )나라 때부터 이어진 풍습이라고 한다. 유럽에서도 전염병이 돌면 대문에 쑥을 걸어 놓았는데 번개가 심하게 치는 날에도 쑥을 걸 면 벼락이 떨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다. 쑥의 신령한 효과에 대해 서양에서는 잠 잘 때 베개 밑에 쑥을 넣으면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는 꿈을 꾼다고 했다. 성경에서도 세 례 요한이 황야에서 지낼 때 쑥을 허리에 감고 지냈다고 적혀 있는데 사탄을 물리친다는 고 대의 주술적 믿음이 성경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북미 인디언들에도 쑥을 신성시하는 풍속이 있는데 쑥으로 손과 얼굴을 문지르면 몸이 정 화된다고 하고 또 어떤 부족은 쑥으로 여성의 성인식을 치르기도 하며 초경을 한 소녀에게 쑥을 문질러 몸을 정화시키는 부족도 있다고 한다. 한편 우리나라 사람들은 쑥을 즐겨 먹는데 여기에는 독특한 향기에서 풍기는 맛은 물론이 고 쑥의 약효와 신령한 기운의 덕을 보려는 주술적 믿음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 다. 예전에는 음력 5월 5일 단오에는 쑥을 뜯어서 쑥떡을 만들어 먹었는데 쑥 중에서도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인 단오절 오시에 뜯은 쑥은 약쑥이라고 해서 약효가 특히 좋다고 믿었다. 단오에 뜯은 쑥으로 나쁜 기운을 쫓아 액땜을 하려는 소망을 담았을 것이다. 중국 송나라 때의 역사를 적은 책인 송사( 宋 史 ) 고려전에는 정월 첫 뱀의 날인 상사일( 上 巳 - 5 -
日 )이면 파란 쑥으로 물들인 떡을 해 먹는데 고려에서는 식품 중에서 으뜸으로 여긴다고 했 다. 상사일은 집안에 뱀이 들어와 화를 입는 것을 막으려는 날인데 이날 쑥떡을 해 먹는 것 도 쑥의 신령한 기운을 이용해 화를 면하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 그것도 여자인 웅녀로 변했다는 단군신화의 이야기 속에서는 몸에 좋은 약초, 그리고 해충을 쫓는 채소인 마늘과 쑥에 대한 고대인들의 인식이 반영돼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아플 때, 전염병을 예방하고 치료할 때, 노동을 하기 위해 기 운을 차려야 할 때 먹었던 마늘과 쑥에 대한 무의식의 원형이 단군신화에, 또 드라큘라 이 야기에 녹아 있다. *구약성서 민수기 제11장 5-6절 - 6 -
날씬해져랏! 국수 변천사 1.장수를 기원하는 국수? 2. 국수에 대한 동양 3국의 시각... (1) 국수에 대한 동양 3국의 시각... (2) 언제부터 국수 먹으면 오래 산다고 믿었을까? (3) 국수는 언제 먹었나...? 3. 오래살기 위해 먹었던 국수 (1) 잔치국수의 유래 (2) 밀가루 麥 에 담긴 비밀 4. 왜 국수를 먹으면 오래 산다고 믿게 됐을까? 1.장수를 기원하는 국수? 요즘은 주로 어떤 경우에 국수를 먹을까? 배는 고프고, 시간도 없고, 번거롭게 밥 차려 먹기 귀찮을 때... 대충 한 끼 식사를 때워야 할 때 가장 흔하게 먹는 국수가 라면, 아니면 장국에 국수 말아서 김치 송송 썰어 넣고 먹는 잔치 국수, 끼니를 때우는 차원을 넘어 조금 더 맛있게 먹으려면... 칼국수 다양한 국수가 있습니다. 집에서 먹을 때는 그렇고, 밖에서 외식을 해도 보통의 경우 국수는 그저 편하게 먹는 음식 일 뿐. 게다가 밀가루 음식은 건강을 해치고, 비만을 유발한다고 기피하는 경우도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수는 인기가 많고 편히 접할 수 있는 음식 중 하나입니다. 왜일까요? #1-1 예전에는 어느 때 국수를 먹었을까? 국수는 잔칫날 먹는 음식... 아이 돌 잔치 때, 어르신 환갑잔치, 결혼잔치 때 먹는 음식 그래서 이름도 잔치 국수... 왜 잔칫날 국수를 먹었을까? 국수는 장수를 기원하는 음식... 기다란 국수 면발처럼 길게, 오래 살라는 소망이 담겨 있기 - 1 -
때문 예전에는 환갑잔치나 생일잔치 때 빠져서는 안 되는 음식이었는데 국수가 장수( 長 壽 )를 상 징했기 때문 지금이야 나이 예순에 오래 살았다는 말을 하면 화를 낼 일이지만 예전에는 환갑잔치 때 장 수를 축하하면서 국수를 장만 아이 돌잔치 때 돌잡이로 부자 되라며 돈을 잡거나, 공부 잘하라며 연필을 잡아야 좋아하지 만 옛날에는 실이나 국수를 집어야 무병장수한다며 즐거워했다. 환갑잔치 때, 六 十 甲 子 가 한 번 돌아 올 만큼 오래 산 것을 축하하는 의미 결혼 잔치 때는 부부의 연이 국수처럼 길어지라고... 아무 때나 먹는 음식이 아니었는데, 잔칫날 국수를 준비한 이유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옛날에는 밀가루 음식이 귀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하지만 잔칫날 국수를 대접하는 전통은 70-80년대까지도 지속... 국수가 귀하지도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 국수는 준비하기가 편하기 때문... 값도 싸고 잔칫날 많은 손님 접대에 편리해서... 분명히 그런 측면도 있었겠지만 싸고 편해서 국수를 준비했다면 잔칫날 축하하러 온 손님들 모독 잔칫날 국수를 먹는 이유는 기다란 국수면발처럼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 때문... 면발이 길기 때문에 국수가 장수를 상징하고, 국수를 먹으면 오래 살 수 있다는 믿음은 철 저한 미신이 아니었을까? 과학적 근거도 하나 없이 생긴 모습만 보고 잔칫날 국수를 준비해 먹고 대접했을까? 먼 옛날부터 한국과 중국, 일본 모두 국수를 먹으면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었는데... 단순히 국수의 생김새 때문에 국수를 먹으며 장수를 빌었을 만큼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모 두가 그토록 단순했을 것 같지는 않다. 더욱이 오랜 세월에 걸쳐 한중일 동양 삼국에서 국 수가 장수를 상징하는 식품이 된 데에는 그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국수 사진, 잔치국수 2. 국수에 대한 동양 3국의 시각... (1) 국수에 대한 동양 3국의 시각... #2-1 국수를 먹으면 오래 살 수 있다는 믿음은 한국과 중국, 일본의 공통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 습니다. 국수는 장수식품, 행운을 부르는 식품이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중국인 - 우리가 미역국을 먹는 것처럼 중국인은 생일날 국수를 먹는다. 생일날 먹는 국수를 장수면이라고... 오래 살라는 의미 - 2 -
일본인 - 일본도 국수를 먹으면 오래 산다는 의미가 있다. 옛날부터 결혼 축하연에서 소면 을 먹었다. 절에서는 축면( 祝 麵 ) 이라고 해서 경 사스러운 날 소면을 먹는 습관 이 있고, 아이의 무병 장수를 빌며 국수를 먹는 풍속. 뿐만 아니라 국수, 특히 메밀국수인 소바는 전통적으로 행운을 빌 때 먹는 음식... 새해가 오기 직전인 섣달 그믐날 소원을 빌면서 먹는다. 이사를 가면 메밀국수를 돌린다. 옛날 우리가 떡을 돌렸던 것처럼... 소바( 蕎 麥 ) 와 옆 혹은, 근처를 표시하는 소바( 側 ) 의 발음이 같기 때문에 생긴 풍 습 오래 동안 옆에 머물게 해 달라는 의미. (2) 언제부터 국수 먹으면 오래 산다고 믿었을까? 국수가 장수를 상징하는 음식이 된 시기와 이유를 풀어 줄 자료는 많지 않다. 그나마 많지 않은 문헌을 찾아보면 당( 唐 )나라 때부터 사람들은 국수를 먹으며 오래 살기를 소망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12세기 남송( 南 宋 ) 때 학자인 주익( 朱 翌 )이 저술한 의각료잡기( 猗 覺 寮 雜 記 )라는 책에 국수 먹 으면 오래 산다는 이야기 등장. 잡기( 雜 記 )는 이름 그대로 당시의 세상사를 잡다하게 모아 기록한 책이다. 여기에 당나라 사람들은 생일날 다양한 종류의 탕병( 湯 餠 )을 먹는데 세간에서는 소위 장수를 소원하는 국 수( 長 命 麵 )이라고 부른다고 적혀 있다 당송( 唐 宋 )시대에 탕병( 湯 餠 )은 단지 떡국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밀가루로 반죽한 음식, 지금의 국수( 麵 )까지를 포함하는 낱말이다. 중국 남방은 입식, 쌀 문화권이지만 북방은 분식, 밀가루 문화권 = 탕병이 떡국이 아닌 수 제비, 국수인 까닭 남송보다 앞선 북송( 北 宋 ) 때 사람인 마영경( 馬 永 卿 ) 역시 잡기류인 라진자( 懶 眞 子 )라는 책을 남겼는데 당나라 때 시인인 유우석( 劉 禹 錫 )이 쓴 시를 인용해 놓았다. 벼슬을 떠나는 진사, 장관( 張 盥 )이라는 사람의 송별회 자리에 초대를 받아 국수를 먹으며 바친 시다. 장관을 보내며 ( 送 張 盥 赴 擧 詩 ) 尔 生 始 悬 弧, 我 作 座 上 宾 引 箸 举 汤 饼, 祝 词 天 麒 麟 네가 막 태어났을 때 축하 잔치에 초대 받아 갔었지, 그때 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먹으며 하늘에 사는 기린만큼 오래 살기를 축원했었지. 今 成 一 丈 夫, 坎 坷 愁 风 尘 长 裾 来 谒 我, 自 号 庐 山 人 어느덧 벌써 성인이 되어 험난한 세상에 나오더니 의관을 차려 입고 점잖게 인사하는구나 (생략) 내용을 풀어 보면 생일 잔치에 초대 받아 귀한 손님으로 앉아 젓가락을 들어 국수( 湯 餠 )을 먹으며 하늘에 사는 기린만큼 오래 살기를 기원한다 고 소원을 빌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송나라 때의 시인인 소동파( 蘇 東 坡 )는 이 시에 대해 초대받아 국수를 - 3 -
먹는 사람을 탕병객( 湯 餠 客 ) 이라고 하면서 국수를 먹는 것은 장수를 소원하기 때문 이라고 해설을 했다. 참고자료 : 유우석( 劉 禹 錫 772-842)은 중국 당나라 때의 문학가이며 철학가이지 시인 생전에 白 居 易 와 이름을 나란히 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劉 白 이라고 불렀고, 백거이는 유우석을 詩 豪 라고 부르며 추앙했다고 한다. 이태백 詩 仙, 두보를 詩 聖 이라고 한 것처 럼... 참고자료 : 麒 麟 사슴의 몸에 소의 꼬리, 말과 비슷한 발굽과 갈기를 갖고 있고 오색찬란한 빛깔의 털과 이마에 외뿔이 달렸다고 알려진 상상 속의 동물. 용, 거북, 봉황과 함께 사영수( 四 靈 獸 )를 이루는 신성한 동물. 장수의 대명사로서 자손 번창을 의미 기록을 보면, 국수를 먹으며 오래 살기를 비는 풍속은 중국 당나라 때부터 비롯됐다. 당나라는 서기 618년부터 907년까지 지속된 나라 앞서의 기록, 의각료잡기와 라진자를 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모두 송나라 때 문헌이면서 국수를 먹으며 장수를 비는 풍속은 당나라 때부터 비롯됐다고 적었다. = 어떤 의미가 있을 까? (3) 국수는 언제 먹었나...? #3-1 옛날 사람들은 국수를 언제 먹었을까?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중기 이전에 국수를 먹었다. 우리와 관련된 문헌에서 국수에 관한 최 초의 기록은 12세기 초반,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간 서긍( 徐 兢 )이 쓴 고려도경( 高 麗 圖 經 )에 나온다. 고려도경에는 서긍을 비롯한 사신 일행이 고려 국경을 넘어서자 고려 관리들이 영접을 하면 서 음식을 내왔는데 10여 종류의 음식이 나왔는데 그중 국수가 으뜸이다. 해산물은 진기했다 나라 안에는 밀이 적어 다 상인들이 경동도( 京 東 道 - 송나라)로부터 사오므로 면( 麵 )값이 대 단히 비싸서 큰 잔치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 國 中 少 麥 皆 賈 人 販 自 京 東 道 來 故 麵 價 頗 貴 非 盛 禮 不 用 ) 고려 때 국수는 중국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거나 큰 잔치에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고려도경을 통해 고려 때 국수는 아주 귀한 음식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은 국수를 어느 때 먹었을까? 쌀과 같은 입식( 粒 飾 ) 문화권인 우리나라와 달리 밀가루 음식, 분식( 粉 飾 ) 문화권인 중국은 우리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국수를 먹었다. 하지만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그리고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 - 4 -
니었다. 9세기 초반, 사람인 당나라 시인 유우석이 장관이 태어났을 무렵, 생일잔치에서 국수를 먹으 며 하늘의 기린만큼이나 오래 살기를 축원한다고 한 것처럼 중국 역시 송나라 이전에는 생 일과 같은 특별한 날에는 먹는 음식이었다. 생일을 비롯해 잔칫날 먹는 잔치국수의 기원은 최소한 6세기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남북조 시대 때 북제( 北 齊 ) 때 황제인 문선황제( 文 宣 皇 帝 ), 고양( 高 洋 )이 잔치국수를 먹 었다는 기록이 가장 빠른 것으로 보인다. 북제는 서기 550년부터 577년까지 27년 동안 존속했던 나라인데 북조( 北 朝 )시대 242년 동 안의 역사를 기록한 북사( 北 史 )라는 역사서가 있는데 여기에 문선황제, 고양이 아들을 얻었 는데 아들이 태어난 지 사흘 째 되던 날 친척과 친구들을 불러 잔치를 열고 국수를 먹었다 는 기록이 나온다. 북사( 北 史 )에는 이 날 잔치의 이름을 탕병연( 湯 餠 宴 ) 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탕병( 湯 餠 )이란 국수를 뜻하는 말이고 연( 宴 ) 은 한자 뜻 그대로 잔치를 말하니까 국수 잔치가 되는 셈이 다. 기록상으로는 이날 먹었다는 국수를 최초의 잔치국수라고 할 수 있다. 3. 오래 살기 위해 먹었던 국수 (1) 잔치국수의 유래 #4-1 국수를 먹으면 오래 살 수 있다는 長 壽, 長 命 이라는 말은 당나라 때부터 보이기 시작하지만 6세기 무렵의 남북조 시대에 이미 국수를 먹으면 오래 산다는 믿음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 으로 추정된다. 중국 사람들은 지금도 생일날 우리가 미역국을 먹는 것처럼 국수를 먹는다. 생일 국수에는 특히 국수를 먹고 오래 살라는 뜻이 담겨 있어서 특별히 장수면( 長 壽 麵 )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왜 잔치국수가 됐을까? 고려도경에서 표현한 것처럼 밀가루가 귀했기 때문. 대장금이라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 럼 밀가루는 진짜 가루라는 뜻에서 진( 眞 )가루라고 불렀을 정도. 그럼 옛날 우리는 보통 어떤 국수를 먹었을까? = 메밀로 만든 메밀국수를 먹었다. 우리나라 에서 냉면이 발달하고 막국수가 발달한 이유.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결혼식이나 환갑잔치, 돌잔치와 같은 큰 행사가 아니면 준비할 수 있 는 음식이 아니었기 때문. 또 한 가지는 굳이 생일날, 중국처럼 장수를 기원하는 국수를 먹을 이유가 없었다. 이미 옛 날부터 미역국이라는 훌륭한 생일 음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국수를 먹으며 무병장수를 기원할 필요가 없었다. (2) 밀가루 麥 에 담긴 비밀 - 5 -
#5-1 국수의 역사를 보면 8세기 말 당나라 이전에는 국수의 면발을 지금처럼 가늘고 길게 늘여 서 뽑지도 못할 때였다. 그러니 기다란 국수 가락을 보고 면발처럼 오래 살기를 소원했다는 말도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국수를 먹으면서 오래 살기를 빌었던 것은 실제 국수를 먹어 본 결과 많은 사람들 의 수명이 늘어났거나 아니면 국수를 먹으면 당시의 평균 수명보다 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동양에서 어떻게 밀가루 음식을 먹게 됐는지는 상형 문자인 한자를 보면 알 수 있다. 한자로 밀은 맥( 麥 )이라고 쓴다. 우리는 보통 보리 맥이라고 풀이하지만 옛날에는 밀과 보리 를 구분하지 않았고 때문에 지금도 밀은 한자로 입자가 작다는 뜻에서 소맥, 보리는 입자가 크다는 의미에서 대맥으로 표기한다. 밀은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지방이 원산지라고 하는데, 기원전 10세기 무렵, 서역이라고 하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밀을 뜻하는 麥 자를 풀이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麥 은 오다는 뜻 의 올 來 자 아래에 천천히 걸을 쇠( 夊 )자로 이뤄진 글자다. 그런데 설문해자( 說 文 解 字 )라는 옛날 한자 사전을 보면 본래의 來 는 오다는 뜻이 아닌 밀을 뜻하는 글자였다. 이삭이 팬 밀을 형상화한 상형문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麥 이라는 글자는 이삭이 팬 밀( 來 )이 먼 곳에서 천천히 전해졌다( 夊 )라는 뜻으로 고대인들이 서역에서 중국으 로 밀이 전해지는 과정을 반영한 글자다. 옛날 사람들은 처음 밀을 갈아서 밀가루로 만든 것이 아니라 지금의 보리처럼 쪄서 먹었다. 밀을 밀가루로 갈아 만든 것은 나중에 제분기술이 발달하면서부터인데 이 과정 역시 한자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밀가루는 한자로 면( 麵 )이라고 쓴다. 면이라는 글자 역시 밀을 뜻하는 麥 자와 얼굴 면( 面 )자 로 이뤄져 있지만 옛날 한자로는 얼굴 면 대신에 가릴 면( 丏 )자를 써서 면( 麪 )이라고 했다. 풀이 하자면 밀을 갈아서 낱알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뜻인데 낱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루가 되었으니 밀가루인 것이다. 국수를 먹으면 오래 산다는 믿음이 생긴 것도 바로 밀을 곱게 간 면 때문이다. 4. 왜 국수를 먹으면 오래 산다고 믿게 됐을까? #6-1 당나라 때 사람들이 국수를 먹으며 장수를 빌기 시작한 까닭은 식품의 발달역사를 보면 보 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밀은 오래 전에 중국에 전해졌지만 밀가루 음식이 본격적으로 등 장한 시기는 한나라 초기다. 기원전 2세기 무렵으로 이때부터 밀가루를 반죽해 음식을 만들 어 먹는다. 그러다 당나라 때 밀가루 음식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 6 -
서역에서 수차( 水 車 )를 이용한 제분기술이 도입되면서 대량으로 밀을 빻을 수 있게 되면서 귀족이 아닌 일반인도 분식을 먹게 됐다. 제분기술의 발달로 밀가루를 곱게 빻을 수 있게 돼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서 소를 넣는 만두와 밀가루 반죽을 길게 늘이는 면발 형태의 국수가 분리되는 것이 바로 당나라 무렵이다. 그러니까 중국에서 국수가 지금처럼 틀을 갖추기 시작한 때는 당나라 무렵이며 이후 송나라 때 다양한 국수가 등장하면서 국수가 일상적인 음식으로 정착을 하고 발전을 하게 된다. 국수의 면발이 길어지는 시기가 당나라 무렵인데 국수와 장수의 관계는 기다란 국수 가락이 갖는 상징성 보다는 국수 가락이 길어지면서 생기는 식품의 영양학적 가치에서 과학적 근거 를 찾아야 한다. 밀을 재배해서 국수로 만들어 먹기까지는 역사적으로 긴 세월이 걸렸다. 밀을 재배해서 수 확하는 기술, 수확한 밀을 도정하고 제분하는 기술, 빻은 밀가루를 반죽해서 각종 첨가물을 넣어 길게 뽑아 국수로 만들어 먹는 기술이 나오기까지 5,000년이 걸렸다는 뜻이다. 공자님도 사실 쌀밥을 먹지는 못했다. 논어에 보면 공자님도 기장으로 밥을 먹었다고 나온 다. 하물며 수수나 기장, 지금은 잡초라고 뽑아 버리는 피를 먹던 사람들이 곱게 간 밀가루 로 뽑은 국수를 보면서 저런 음식을 먹으면 하늘의 기린처럼 오래 살 수 있겠다고 믿었을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거칠고 험한 음식을 먹던 사람들이 고운 밀가루로 소화도 잘되고 영양도 풍 부한 국수를 만들어 먹기 시작하면서 수명도 그만큼 늘어났을 것이다. 최소한 당나라 때 사 람들은 고운 밀가루로 뽑은 국수를 보면서 국수를 먹으면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당나라 때 국수가 장수식품이 된 이유입니다. 그러니 국수를 먹으면 국수 가락처럼 장수한다 는 말은 당시에는 과학적 근거가 있는 말이 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없었던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수명이 연장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7 -
선악과가 과연 사과였을까? 1. 사과에 대한 진실 - 서양 사과 이야기 (1) 사과가 선악과가 된 이유 (2) 서양에서는 모든 과일이 사과 2. 사과에 대한 진실 - 한국 사과 이야기 (1) 전래동화에는 왜 사과가 없을까? (2) 한국 토종사과는 능금이다 1. 사과에 대한 진실 - 서양 사과 이야기 (1) 사과가 선악과가 된 이유 아담과 이브는 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다.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알고 있는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선악과는 어떤 과일일 까? 일반적으로 이브가 따 먹은 선악과는 당연히 사과라고 생각한다. 창세기와 관련된 그 림에도 선악과는 주로 사과로 그려져 있다. 그렇지만 이브의 사과(Eve s Apple)는 성경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영어 성경에는 선악과 를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로 표현해 놓았다. 우리말 성경에는 선과 악을 구 별하는 나무, 중국어 성경에도 선악수( 善 惡 樹 )라고 표현하는 등 다른 언어로 적힌 성경도 마 찬가지다.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의 나무라고만 되어있을 뿐 선악과가 사과라고 명확하게 지 적한 대목은 성경 어느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다른 거부반응 없이 선악과가 사과라고 생각한다. 또 르네 상스 시대의 수많은 유명 화가들도 사과를 선악과라며 그려 놓았다. 남자의 목에 튀어 나온 목젖을 보고 아담의 사과(Adam s Apple)이라고 하는 이유도 선악과를 삼키다 목에 걸렸는 데 선악과가 바로 사과라는 무의식적 인식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선악과가 사과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분석이 있지만 서양의 신화에서 사과가 갖는 이미지와 함께 언어적인 해석 때문 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기독교는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가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서 양의 중심 종교로 자리를 잡는다. 바꿔 말해 로마시대 이후 유럽 사람은 주로 라틴어로 적 힌 성경을 읽었다. 선악과=사과 라는 사람들의 잠재의식은 라틴어 해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서기 405년 에 라틴어로 완역이 된 성경에서 선악과를 표현할 때 말루스(malus)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 1 -
이 말이 갖는 이중적 의미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루스(malus)라는 라틴어 단어에는 악(Evil)이라는 뜻, 사과(Apple)이라는 뜻, 그리고 돛 (Mast)라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우리말에서 배 라고 하면 먹는 배와 타는 배, 사람의 배를 동시에 연상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라틴어로 Tree of Malus 라고 하면 악의 나무(Tree of Evil)라는 의미이지만 사과나 무(Tree of Apple)라는 의미도 된다. 때문에 선악을 구분하는 나무에서 추상적인 악의 나무 라는 이미지보다 구체적인 사과나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는 해석이다. (2) 서양에서는 모든 과일이 사과 또 다른 언어학적 이유는 유럽 언어에서 사과가 갖는 보편성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대 영어에서는 사과(apple)라는 단어가 과일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외부에서 전해진 낯선 과일은 과일이라는 의미에서 애플(apple)이라는 단어를 붙여 과일임을 표시했다. 그 흔적이 파인애플이다. 큰 솔방울처럼 생긴 열매라는 뜻에서 솔방울 사과인 파인 애플(Pine apple)이라고 했다. 오이(cucumber)라는 단어가 생기기 이전, 고대 영어에서는 오이를 땅에서 나는 사과(earth apple)이라고 불렀다. 또 멜론(melon)은 조롱박 처럼 생긴 과일이라고 해서 조롱박 사과(gourd apple)이라고 했다. 이런 흔적은 영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남미에서 전해진 토마토는 처음에 무어인의 사과(Pomme de Moors), 감자는 땅속에서 나는 사과(Pomme de Terre)라 고 불렀다. 고대의 유럽 언어권에서는 대부분 모든 종류의 낯선 과일, 표현하기 애매한 과일은 모두 사과라고 불렀기 때문에 선악과 역시 자연스럽게 사과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는 해석이 다. 이런 언어학적인 이유에 더해 유럽의 다양한 신화 속에서 사과가 갖는 이미지가 결합되면 서 선악과를 사과로 생각한데다 르네상스 시대 때 화가들이 사과를 선악과로 그려 넣으면서 시각적으로도 선악과=사과의 이미지가 굳어졌다. 서양의 신화에서 사과는 금지된 과일(forbidden fruit)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리스 신 화의 황금사과도 그 중의 한 예다. 신들의 잔칫상에 초대받지 못한 불협화음의 여신 에리스 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주라고 던져 놓은 사과 한 알을 판정을 맡았던 양치기 소년 패리스(Paris)가 아프로디테에게 주면서 벌어진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에서도 사과는 금지된 과일 로 묘사된다. 중세 유럽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설화를 토대로 쓴 동화 백설 공주에서도 사과는 먹어서는 안 되는 금기의 과일 이었다. 성경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은 선악과의 실체를 사람들이 당연하게 사과라고 받아들이게 된 이유는 언어학적인 이유와 서양 신화에서 사과의 이미지가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 이다. - 2 -
2. 사과에 대한 진실 - 한국 사과 이야기 (1) 전래동화에는 왜 사과가 없을까? 서양 동화에 나오는 과일은 대부분 사과다. 하지만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우리 전래동 화에는 사과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에 감이 등장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제사상에 놓는 대표적인 과일은 조율이시( 棗 栗 梨 柿 ), 대추, 밤, 배, 감이다. 사과를 빼놓을 수 없는데 홍동백서( 紅 東 白 西 )라고 두루뭉실하게 표현했을 뿐, 사과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하 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일까? 사과는 배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과일 중의 하나다. 당연히 먼 옛날부터 사과를 먹었을 것 같다. 천지창조 때 에덴동산에 있던 선악과가 사과나무라고 믿는 것처럼 우리 역 시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신시를 열었을 때부터 사과를 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사과를 먹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조상이 지금과 같은 사과를 먹은 것은 생각보다 짧다. 조선 후기 가 시작되는 병자호란 이후다. 기록을 보면 효종의 사위인 정재륜( 鄭 載 崙 )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것이 효시라고 나온다. 박 지원( 朴 趾 源 )은 열하일기( 熱 河 日 記 )에서 사과는 우리나라에는 원래 없었는데 정재륜이 청나 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가지에 접을 붙여 가져 온 후 우리나라에 비로소 많이 퍼졌다고 했 다. 정재륜은 1648년에 태어나 1723년에 사망했는데 효종의 부마였다. 1656년 효종의 넷째 딸 숙정공주( 淑 靜 公 主 )와 결혼했는데 공주가 일찍 죽었다. 그리고 1681년(숙종 7년) 외아들 효 선( 孝 先 )마자 일찍 죽자 다시 장가를 들 것을 상소해 임금의 허락을 받았지만 대신들의 반 대로 재혼에 실패했다. 이때부터 부마들은 부인이 죽어도 다시 결혼을 할 수 없다는 법규가 생겼다. 정재륜은 1670년(현종 11년), 1705년(숙종 31년), 그리고 1711년(숙종 37년) 사신으로 청나 라에 다녀왔다. 이 때 사과를 들여왔다는 것이다. 순조 때의 실학자 이규경도 오주연문장전산고( 五 洲 衍 文 長 箋 散 稿 )에서 정재륜이 사과를 전 파했다는 설을 재확인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사실을 추가해 적었는데 인조의 셋째 아 들인 인평대군이 연경에 가서 종자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 이후에 번식했다는 이야기도 있 다는 기록을 남겼다. 인평대군은 1650년 이후 네 차례 사신으로 연경을 다녀왔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사과를 전파한 사람이 효종의 사위 정재륜이됐건 혹은 그에 앞서 인조 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이 됐건 현재와 같은 종류의 사과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병자호 란 이후인 17세기 후반이다. (2)한국 토종사과는 능금이다 - 3 -
사과는 효종 이후에 전해졌으니 그 이전의 우리 조상들은 사과라는 과일은 먹지 못했을 것 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과 같은 품종의 사과가 없었을 뿐 토종 사과를 먹었다. 사과는 품종이 다양하다. 조선 효종 이후에 우리나라에 전해진 사과는 일반적으로 지금 사 과라고 부르는 품종인 재배종(학명 malus domestica)이다. 지금은 사과라고 부르지만 옛날 에는 빈과( 蘋 果 )라고 했다. 사과라는 과일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에서 새로운 품종의 과일인 빈과(지금의 사과)가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 조상들이 먹 었던 사과는 능금과 옛날 사과다. 능금(학명 malus asiatica nakai)은 한자로 임금( 林 檎 )이다. 옛날 사과(학명 malus pumila mill)는 한자로는 사과( 沙 果 ) 또는 내( 柰 )라고도 표기했다. 보통 능금을 사과의 옛날 이름 또는 사과의 사투리 정도로 알고 있는데 능금과 지금의 사 과는 종자가 완전히 다르고 지금의 사과와 옛날 사과도 모양은 비슷하지만 학명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종자가 역시 다르다. 우리가 능금이라고 부르는 과일은 우리나라 토종 과일이다. 옛날에는 우리나라에 능금이 많았던 모양이다. 고려 숙종 때인 1103년 사신으로 우리나라를 다녀간 송나라 사람 손목이 쓴 계림유사( 鷄 林 類 事 )에도 능금이 보이는데 능금의 발음을 민자부( 悶 子 訃 )라고 적었다. 참고 로 중종 때의 훈몽자회에는 님금, 광해군 때 동의보감에도 님금, 그리고 조선후기 작자미상 의 문헌인 광물재보( 廣 才 物 譜 )에는 능금이라고 나온다. 능금의 한자표기인 임금( 林 檎 )은 맛이 좋아 새들이 능금나무가 있는 숲으로 몰려온다는 뜻 이다. 이수광은 지봉유설( 芝 峰 類 說 )에서 능금의 한자어인 임금( 林 檎 )을 래금( 來 禽 )에서 비롯 된 말이라고 풀이했는데 날짐승인 금( 禽 )이 오는( 來 ) 나무이기 때문에 능금으로 불렀다고 적 었다. 하지만 먼 옛날, 고대에는 능금이 새들이 몰려 들 정도로 맛있는 과일이었는지 모르지만 고려시대에만해도 그렇게까지 매혹적인 과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려 중기의 시인 이규 보는 동국이상국집( 東 國 李 相 國 集 )에 시를 썼는데 능금이 구슬같이 주렁주렁 달렸는데( 林 檎 綴 珠 琲 )/그 맛이 시고도 떫구나( 頗 覺 味 醃 苦 ) 라고 읊었다. 지금 품종의 사과가 전해진 이후 우리 토종과일인 능금이 사라진 이유일 것이다. 능금 이외의 옛날 사과는 사과( 沙 果 )라고도 했고 내자( 柰 子 )라고도 했으며 화홍( 花 紅 )이라 고도 불렀고 불가에서는 산스크리트어를 한자로 번역해 빈파( 頻 婆 )라고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재배종 사과가 들어오면서 이름마저 내주고 사라졌지만 6세기 무렵 북위 때의 농업서인 제민요술( 齊 民 要 術 )에 옛날 사과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온다. 재배종 사과 가 아시아에 전해지기 전까지 아시아에서 보편적으로 자랐던 사과 종자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옛날 사과는 능금과 종류는 같지만 종자가 다르고 열매는 능금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조금 더 크다고 설명했다. 효종 이후 재배종 사과가 들어오면서 토종의 옛날 사과인 내자와 능금은 바로 경쟁력을 잃 는다. 추사 김정희가 완당집( 阮 堂 集 )에다 지금의 사과를 얻고 기뻐하는 심정을 적었다. - 4 -
빈과(현재의 사과)는 부처님께 바치는 제물 중에서 그 이상 좋은 것이 없을뿐더러 자연에 서 자라는 신선들의 과일이요, 군자의 담담한 향기와 같으니 모든 과일 중에서 이만한 과일 이 없다고 했다. 지금 귀양을 와 있는 처지에 이런 과일을 얻었으니 하늘이 맛보라고 내려 준 복이라고 감탄한다. 능금과 옛날 사과에 비해 재배종 사과 맛이 월등히 좋았던 모양이다. 참고로 사과의 원형이 되는 야생종 사과(학명 malus sieversii)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 터키 동부로 추정되며 현재 알려진 사과품종은 모두 700 종류가 넘는다. 역사에 등장하는 유명한 사과 사과일 것이라고 착각하는 선악과를 제외하고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사과는 아마 뉴튼의 사과일 것이다. 왜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질 때는 수직으로 곧장 떨어질까? 옆으로 떨어지거나 위로 올라가 지 않을까? 지구가 당기기 때문이다. 당기는 힘이 있기 때문이며 지구의 측면이 아닌 중심 에서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뉴튼은 이런 중력의 법칙을 정립하는데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말하곤 했다. 뉴튼이 만유인력을 설명하는데 기여했던 사과나무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 1814년에 죽었지만 몇 그루가 접목되어 퍼졌고 우리나라에도 그 묘목이 전해져 대덕연구단 지 표준연구소 뜰에서 자라고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또 다른 사과는 인상파 화가 세잔느의 사과다. 서양 미술이 인상파에서 큐비즘으로 넘어가는 계기를 만든 사과이기 때문이다. 화가 폴 세잔느는 평생을 통해 사과 정물화를 그렸다. 세잔느의 친구 중에는 프랑스 자연 주의 문학의 대가인 에밀 졸라가 있는데 허약하고 근시였던 에밀 졸라가 같은 반 아이들한 테 괴롭힘을 당하면 힘세고 덩치가 큰 세잔느가 도와주곤 했다. 어느 날, 졸라가 고마움의 표시로 사과를 선물했는데 세잔느가 훗날 정물화의 소재로 사과를 자주 선택해 그림으로 표 현한 것도 어린 시절의 사과와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쨌든 세잔느는 모두 110점에 이르는 사과 그림을 그려 사과의 화가라고도 부른다. 한 숟가락 더 조율이시와 제사상 사과 사과가 비교적 늦게 전해진 과일이라는 사실은 차례상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수요가 많은 과일이기 때문에 차례상을 차릴 때는 반드시 사과를 놓는다. 그렇지만 중요한 과일이면서도 사과를 놓는 위치는 직접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조율이시( 棗 栗 梨 柹 ), 그러니까 대추, 밤, 배, 감이라고만 할 뿐 사과는 빠져있다. 나머지 과일은 정해진 순서 없이 홍동백서( 紅 東 白 西 ), 그러니까 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에 차리면 된다. 우리나라에서 사과가 가장 흔하고 많이 먹는 과일임에도 차례상의 격식에서 비중이 떨어지는 것은 대추, 밤, 배, 감은 모두 우리나라 토종과일인 반면에 사과는 효종 이후 늦게 전해진 외래종 과일이기 때문이 다.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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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도 족보가 있다 1. 붕어빵의 조상을 찾아서... (1)붕어빵은 언제 생겼을까? (2) 세월 따라 생김새와 모양도 변화 2. 붕어빵의 뿌리는 일본 도미빵? (1) 붕어빵의 원조가 도미빵일까? (2) 일본 도미빵 논쟁 3. 시조는 서양의 와플과 동양의 만두? 4. 붕어빵의 먼 친척들 1. 붕어빵의 조상을 찾아서... (1)붕어빵은 언제 생겼을까? 한국인이 겨울철에 가장 즐겨 먹는 간식 중에 하나가 붕어빵이다. 굳이 순서를 꼽자면 일 반적으로 붕어빵, 어묵, 그리고 호떡의 순이라고 한다. 붕어빵은 언제 생겼을까? 누가 물고기 모양으로 빵을 만들고 여기에다 붕어빵이라는 이름 을 지었을까? 흔히 먹는 서양 빵이나 단팥빵과는 또 다른 이 특별한 빵은 어떻게 생긴 것일 까? 음식은 살아있는 생물과 같다고 한다. 갑자기 누가 만들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에 걸친 진화의 결과라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어느 요리사가 개발한 특정 음식이라고 하 더라도 가만히 따져보면 돌연변이처럼 갑자기 생겨나는 음식은 없고 오랜 세월에 걸쳐 꾸준 히 진화하고 발전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진화론으로 풀어보면 붕어빵도 마찬가지다. 붕어빵 역시 갑자기 돌연변이처럼 생겨난 음식 이 아니라는 것이다. 붕어빵의 기원을 찾아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우리가 언제부터 붕어빵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이들이 주로 군것질로 먹었던 간식, 그것도 푼돈으로 사먹는 거리의 음식이니 붕어빵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붕어빵을 1960-70년대에 사먹었던 것을 기억한다. - 1 -
그렇다고 그 이전에는 붕어빵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붕어빵하고 생김새가 다른 국화빵, 그 리고 풀빵이라고 불렸던 빵이 있었다. (2) 세월 따라 생김새와 모양도 변화 붕어빵이나 국화빵은 생김새만 다를 뿐 같은 빵이다. 빵틀을 물고기로 만드는지, 혹은 꽃 모양으로 만드는지의 차이인데 보통 무쇠 틀에다 묽은 밀가루 반죽을 부은 후 그 속에다 단 팥으로 소를 넣어 굽는다. 지금은 붕어빵이 대세지만 예전에는 주로 국화빵이었다. 한때는 모양과 관계없이 풀빵이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생김새와 명칭도 시대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명확한 구분을 하기는 어렵지만 예전 신문기 사 등을 보면 50년대에는 국화빵이 대세였다. 6.25전쟁 무렵 기록 사진에도 빵의 생김새는 국화빵 모양이다. 1960년대 이후 신문기사에는 주로 풀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고, 붕어빵이라는 이름은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부터 주로 보인다. 지금도 붕어빵이 대세지만 잉어빵, 도미빵이라 는 이름도 보이기 시작한다. 특별한 차이점은 발견할 수 없지만 고급화된 붕어빵을 잉어빵, 도미빵이라는 이름으로 차 별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붕어빵 장수의 증언으로는 잉어빵은 붕어빵보다 밀가루 반죽에 계 란 등의 재료가 더 들어간다는 것이라고 하지만 분명한 차이점은 발견하기 어렵다. 붕어빵, 국화빵 모두 풀빵 계열이고 예전에는 풀빵이라고도 불렀다. 풀빵이라는 이름에 붕 어빵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 붕어빵이나 국화빵이 풀빵인 이유는 보통의 다른 빵과 달리 밀가루 반죽조차 넉넉하게 쓸 수 없었던 시절에 만든 빵이기 때문이다. 예전 도배를 할 때 접착제 대신 사용했던 밀가루 풀처럼 밀가루를 묽게 풀어 빵을 구웠기 때문에 생긴 이름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붕어빵, 국화빵 같은 풀빵이 겨울에 먹는 맛있는 간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사실 풀빵은 우리 민족이 겪었던 고난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눈물 젖은 빵이며 추억 의 식품이다. 풀빵에는 기본적으로 추운 겨울, 거리에서 산 풀빵 봉투의 따듯함과 갓 구운 빵을 한 잎 베어 물었을 때 입 속으로 들어오는 단팥의 달콤한 추억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60-70년대 산업개발 시대에 공돌이 공순이로 불리던 우리의 부모형제 들이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풀빵으로 끼니를 때웠던 배고픔의 추억도 들어있다. 동시에 50 년대 한국전쟁을 겪었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들이 구호물자로 나눠준 밀가루로 풀 반죽을 해서 풀빵을 구워 팔며 생계를 이어갔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기억한다. 모든 물자가 부족 했던 시절에 아이들에게 풀빵은 환상의 군것질 거리였지만 어른들한테는 그나마 동전 한 닢 으로 따듯하게 허기진 속을 달래며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던 구원의 식품이었다. 한국인에 게 붕어빵이 단순히 값싼 군것질 이상의 추억이고 소울푸드(Soul Food)가 되는 이유다. 2. 붕어빵의 뿌리는 일본 도미빵? - 2 -
(1) 붕어빵의 원조가 도미빵일까? 붕어빵으로 대표되는 국화빵, 풀빵을 언제 처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록에는 6.25전 쟁 무렵의 사진에 국화빵이 보이니 풀빵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1950년대 이전일 것 이다. 음식도 진화한다는 관점에서 붕어빵 역시 특정인이 창조한 것이라기보다는 변형과 발전을 통해 진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모델을 보통 일본에서 찾는다. 일본에 우리의 붕어빵과 모 양과 만드는 법이 비슷한 도미빵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 혹은 그 이후에 일 본에서 도미빵 모델을 들여와 국화빵, 붕어빵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추정한다. 붕어빵의 원조로 추정되는 일본 도미빵의 기원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일본에서는 1909년 도쿄 아사부( 麻 布 ) 지역에 있던 나니와가( 浪 花 家 ) 제과점에서 만들어 판 것이 시초라 고 보고 있다. 이곳에서 물고기 모양의 빵틀에 계란, 설탕을 넣은 밀가루 반죽에 단팥으로 소를 넣어 구 워 팔면서 다이야끼(たい 燒 き)라고 불렀다. 이 빵이 인기를 얻으면서 지금의 도미빵으로 발 전했다는 것이다. 일본말로 다이(たい)는 도미(돔)라는 생선을 뜻하고, 야끼( 燒 き)는 굽는다는 뜻이니 도미빵 인 다이야끼는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도미구이라는 뜻이 된다. 일본 사람들은 왜 빵을 생선 모양으로 만들어 굽고, 또 수많은 생선이름 중에서 특별히 도 미빵이라고 이름 지은 것일까? 일본에서는 도미가 생선의 제왕으로 대접받기 때문이다. 예전 일본의 서민들은 평소에 도 미는 값이 비싸서 감히 먹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고급생선이었다. 때문에 물고기 모양 의 빵을 구우면서 이왕이면 최고급 생선인 도미의 이름을 붙인 것인데 도미빵이라는 이름 때문에 대박이 났다고 한다. 평소 도미를 먹지 못하던 일본 서민들은 물고기처럼 생긴 빵을 먹으면서 실제로 고급 생선 인 도미를 먹는 것처럼 행복해 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붕어빵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일본에서 도미가 최고급 생선 이었기 때문에 도미빵으로 이름 지었다고 추정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붕어를 제일 많이 먹 었기 때문에 붕어빵이라는 이름이 생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가 왜 붕어를 많이 먹었냐고 반문하겠지만 사실 1960년대 이전, 서울에서는 바다생선 은 많이 먹지 않았다. 지금은 한 시간 거리지만 바닷가인 인천에서 서울까지는 가까운 거리 가 아니었기 때문에 살아있는 바다 생선은 흔하지 않았다. 때문에 바다생선 보다는 주로 민 물고기를 많이 먹었는데 조선시대 이래로 서울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생선은 붕어였다. 때문에 익숙한 생선 이름을 따서 붕어빵이라는 이름이 생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일본의 도미처럼 고급 생선의 이름이 아닌 가장 흔하고 익숙한 붕어라는 이름을 지었을까? - 3 -
일본의 도미빵과 우리 붕어빵의 재료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붕어빵은 기본적으로 풀빵 이다. 밀가루반죽을 묽게 풀어 만든다. 물자가 부족한 일제 강점기 때 만든 빵이고 이후 전 쟁과 가난한 시절을 겪으며 발전한 빵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붕어빵은 그만큼 서민적이며 대중적인 빵이다. 반면에 일본의 도미빵은 값싼 길거리의 간식이 아니다. 처음 나왔을 때도 밀가루 반죽에 계란과 설탕 등 갖가지 재료를 넣어 만들었다. 옛날 시각으로 보자면 고급 재료를 풀어 넣 고 반죽한 빵이다. 실제, 지금도 도쿄에서 도미빵을 사먹으려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가격에 놀라게 된다. 고 급빵의 전통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비슷한 물고기 모양이지만 붕어빵과 도미빵이라는 이름의 차이는 예전 한국과 일본이 좋아 하는 생선이 서로 달랐던데다, 만드는 재료가 대중적이고 서민적이었는지 혹은 상대적으로 값비싼 재료였는지의 차이에 따라 달라졌다. (2) 일본 도미빵 논쟁 일본에서는 도미빵 논쟁이라는 것도 있었다. 1953년 일본 요미우리 신문에서 주최한 지상 ( 紙 上 )논쟁인데 도미빵, 그러니까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붕어빵의 꼬리에도 팥을 넣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꼬리에는 팥을 넣지 않는 것이 좋은지를 놓고 벌였던 논쟁이다. 안도 쓰루오( 安 藤 鶴 夫 )라는 일본 유명작가가 시작했다고 하는데 나름 치열한 논쟁이 전개 됐지만 최종적으로 꼬리에는 팥을 넣지 않는 것이 좋다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유는 도미빵을 손가락으로 집어 먹으려면 꼬리에는 팥을 넣지 않는 것이 팥이 샐 염려가 없어서 좋다는 것이고, 또 몸통에 있는 팥을 먹고 마지막으로 팥이 없는 꼬리를 먹어 입가심을 하 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다수였기 때문이다. 붕어빵에는 꼬리에 팥을 넣는 것이 좋을 까? 안 넣는 것이 좋을까? 3. 시조는 서양의 와플과 동양의 만두? 붕어빵이 일본 도미빵을 모델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렇다면 도미빵은 어떻게 발전 했을까? 도미빵의 기원을 찾아가면 18세기 후반의 일본 에도시대 식품과 만나게 된다. 밀가루에 계 란과 설탕을 넣어 반죽한 후 단팥을 소로 넣고 빵 모양의 틀에다 굽는 이마가와 야끼( 今 川 燒 き)라는 일본 과자(빵)가 도미빵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이마가와 야끼는 18세기 후반 처음 이 빵을 만든 상점이 당시 에도에 있던 이마가와 다리( 今 川 橋 )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이마가와 야끼라는 일본말이 낯설어서 그렇지 예전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했던 오 방떡과 비슷하다. 오방떡은 둥근 동전 모양의 빵틀에 반죽을 넣고 동그랗게 구운 빵인데 일 - 4 -
본에서는 오방야끼라고 한다. 오방( 大 番 )은 에도시대 때 쓰던 금화이니 우리말로 하면 금화 빵 내지는 동전 빵이다. 그러니까 붕어빵의 족보를 따져보면 18세기 후반, 오방떡인 일본의 이마가와 야끼까지 거 슬러 올라가지만 이마가와 야끼나 도미빵 같은 식품은 모두 일본의 전통식품이 아니다. 서 양 식품을 일본인 입맛에 맞게 변형한 것이다. 붕어빵, 국화빵, 도미빵, 오방떡 종류인 이마가와 야끼의 공통적인 특징을 꼽자면 특정한 생김새의 틀에다 밀가루 반죽을 넣고 구워서 똑 같은 모양의 빵을 대량으로 찍어낸다는 것 이다. 공학적으로 보자면 금형( 金 型 )에다 재료를 넣고 대량으로 찍어내는 사출성형 제품과 다를 것이 없다. 서양 음식의 전통에서 기계로 찍어내는 것처럼 틀에다 찍어내는 유일한 빵이 와플(Waffles) 이다. 와플은 특정의 무늬가 새겨진 두 개의 금속판을 경첩으로 연결해 여닫을 수 있도록 만든 후 그 사이에 밀가루 반죽을 넣고 양면으로 굽도록 고안된 도구에서 찍어낸다. 붕어빵, 도미빵과 비교하면 기본적으로 붕어빵 틀은 물고기 모양이라는 것, 그리고 와플은 벌집 (Honeycomb) 모양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붕어빵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에는 서양의 와플에까지 뿌리가 닿는다. 겉모습을 보면 그렇지만 붕어빵에 들어있는 단팥은 뿌리를 동양에 두고 있다. 만두에 들어있는 소처 럼 일본 만쥬( 饅 頭 )의 단팥이 뿌리라는 것이다. 일본의 음식문화사학자인 오카다 데쓰는 국수와 빵의 문화사 에서는 일본에서 개발한 빵들 은 동서양의 퓨전으로 밀반죽을 굽는 서양의 빵 속에 속을 채워 넣는 동양의 만두가 결합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니까 단팥빵이나, 도미빵, 이마가와 야끼 등이 모두 서양의 빵에다 만두에 소를 넣는 것처럼 단팥을 소로 넣어 개발한 퓨전음식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붕어빵의 족보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한편에는 틀에다 빵을 찍어 내는 서양 의 와플이, 또 다른 한편에는 밀가루에 소를 넣어 찌는 동양의 만두가 있다. 시기적으로 따져보면 와플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 만두의 기원은 중국 한나라 무렵이니 붕 어빵 시조의 역사는 인류의 기원이 궁극적으로 아프리카에서 비롯된 것만큼이나 뿌리가 깊 다고 할 수 있다. 무심코 먹는 붕어빵이지만 그 속에는 동서양의 음식문화사가 모두 모여 있다. 4. 붕어빵의 먼 친척들 와플에는 벌집처럼 네모 칸이 촘촘히 들어차 있다. 와플을 왜 벌집(honeycomb) 모양으로 만들었을까? 와플이 벌집모양이 된 것은 유럽의 중세인 13세기 무렵이다. 와플 만드는 틀이 지금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의 결집체였다. 빵을 골고루 익히려면 금속판을 균일하게 벌집처럼 올록볼록하게 만들어야 했는데 여기에는 합금기술, 주물기술 등이 뒷받침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 덕분에 벌집 모양의 와플이 만들어졌는데 사실 와플이라는 말 자체가 중세 네 덜란드어로 벌집이라는 뜻의 바펠(Wafel)에서 비롯됐다. 와플은 그러니까 벌집처럼 생겼다는 - 5 -
뜻이다. 와플 만드는 틀이 유럽 각국으로 퍼지면서 와플 이외에도 다양한 서양과자가 발달하는데 지 금 우리가 먹는 과자들 중 상당수가 와플과 관련이 있다. 중세 네덜란드어 바펠이 영국으로 건너가면서 두 종류로 발달한다. 하나는 와플(Waffle), 또 다른 하나는 바펠의 알파벳 L 이 R로 살짝 바뀌면서 웨이퍼(Wafer)가 된다. 영어 웨이퍼라 는 단어가 한국으로 건너와 과자를 가리키는 콩글리시 웨하스가 된다. 웨하스라는 과자의 표면이 벌집모양인 이유다. 프랑스에서는 벌집이라는 뜻의 바펠이 고프레(gaufrer)가 된다. 고프레는 크림이 들어 있는 얇은 프랑스 과자인데 어원이 역시 고대 프랑스어로 벌집이라는 뜻이다. 아이스크림콘을 자세히 보면 아이스크림을 담는 과자 역시 네모 칸이 있는 벌집 모양이다. 아이스크림 콘은 20세기 초, 미국 세인트루이스 박람회 때 처음 등장했는데 아이스크림 담 는 접시가 떨어져서 와플을 말아서 담은 것이 콘 아이스크림의 시초라고 한다. - 6 -
생일 미역국을 언제까지 먹어야 해? 학습주제 1. 왜 미역국일까? (1) 왜 생일에는 미역국을 먹었을까 (2) 다른 나라의 생일 축하 음식은...? 2. 아이를 낳은 후 미역국을 먹는 까닭은...? (1) 왜 미역국으로 산후조리를 할까? (2) 언제부터 미역국이 산후조리 음식이 됐을까? 3. 한국인은 왜 미역국을 좋아할까? (1) 우리는 왜 미역과 미역국을 먹을까? (2) 산모와 어린아이의 구호품이 미역 (3) 산후조리 미역국에 담긴 의미는...? 4. 생일상의 미역국에 담긴 의미 0. 왜 그럴까요? 일반적으로 우리의 생일 밥상에는 항상 미역국이 오릅니다. 고깃국도 축하의미의 국수도 아 닌 미역국이 오르는 것이 생일에는 당연하게 여겨지죠 생일날 왜 굳이 미역국을 먹는지 생 각해 본적 있나요? 왜 미역국을 먹을까? 생일 케이크는 서양에서 들어 온 음식이니까 현대에 들어서 먹을 수 밖에 없었다고 치더라도 영양분을 따지자면 고깃국을 먹을 수도 있고, 아니면 설날처럼 떡 국을 먹어도 좋고 그도 아니면 잔칫날 국수를 먹는 것처럼 국수를 먹을 수도 있었을 것인 데 왜 굳이 미역국을 먹었을까요? 1. 생일에 먹는 미역국 (1) 왜 생일에는 미역국을 먹었을까 #1-1 한국 사람들은 생일날이면 미역국을 끓여 먹는다. 생일 케이크로 축하 파티를 하더라도 밥 상에서 미역국을 빼놓지는 않는데 생일날 왜 굳이 미역국을 먹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대부분 옛날부터 내려 온 전통이기 때문에 생일날이면 당연히 먹는 음식으로 알고 있을 - 1 -
뿐, 왜 생일날 하필이면 미역국을 먹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왜 미역국을 먹을까? 생일 케이크는 서양에서 들어 온 음식이니까 현대에 들어서 먹을 수 밖에 없었다고 치더라도 영양분을 따지자면 고깃국을 먹을 수도 있고, 아니면 설날처럼 떡 국을 먹어도 좋고 그도 아니면 잔칫날 국수를 먹는 것처럼 국수를 먹을 수도 있었을 것인 데 왜 굳이 미역국을 먹었을까?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온 우리 고유의 풍속이고 음식이라고 하지만 옛날이 언제일까? 도대 체 언제부터 생일날 미역국을 먹었으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인터넷 등에서는 산모가 아이를 낳은 후에 미역국을 먹기 때문에 낳아주신 어머니의 은혜 에 감사하며 생일날 미역국을 먹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데 과연 사실일까? (2)다른 나라의 생일 축하 음식은...? 생일에 미역국을 먹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풍속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생일에 어떤 음식을 먹으며 생일을 축하할까? 그리고 이유와 의미는 무엇일까? 중국에서는 생일에 국수를 먹는다. 생일에 먹는 국수를 장수면( 長 壽 麵 )이라고 하는데 국수 가락처럼 길게 오래 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당나라 때부터 생일잔치에 국수를 먹기 시작 했으니 약 1,500년이 넘는 풍습이다. 국수가 장수의 상징이 되고, 또 생일음식이 된 이유는 당나라 이전의 옛날에는 국수가 최고의 영양식이었기 때문이다. 영양 만점인 식품에 상징성 이 곁들여지면서 국수가 생일음식이 된 것이다. #2-1 서양에서 먹는 생일 케이크는 고대 그리스에서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Artemis)에게 바치는 음식에서 비롯됐다. 아르테미스는 출산을 돌보며 다산( 多 産 )과 번영을 주관하는 여신인 동시 에 아이들의 수호신이다. 생일 케이크가 둥근 이유도 달을 본 따 만들었기 때문인데 생일 케이크를 먹으며 아르테미스에게 건강과 소원을 빌었던 것이다. 신에게 바치는 음식이었던 만큼 고대 케이크는 밀과 꿀, 과일 등의 좋은 재료로 만들어 어쩌다 특별한 날에 먹는 고급 음식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일에 먹는 미역국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단순히 영양학적인 이유뿐 만이 아니라 중국의 생일국수, 장수면이나 서양의 생일 케이크처럼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 는 것은 아닐까? 생일에 먹는 미역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산모는 왜 아이를 낳은 후 미역국을 먹을까? 역 시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2. 아이를 낳은 후 미역국을 먹는 까닭은...? (1) 왜 미역국으로 산후조리를 할까? #3-1 - 2 -
생일에 미역국을 먹는 이유를 알아보기 전에 우리나라 산모들은 왜 아이를 낳은 후에는 반 드시 미역국을 먹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이 하나는 미역이 산모한테 좋기 때문일 것이 다. 보통 어머니가 아기를 낳고 난 후 미역국을 먹는 이유는 영양을 보충하고 아이에게 젖 을 먹이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과학적으로도 미역에는 요오드, 인, 칼슘, 철분, 알긴산, 비타 민 등이 풍부하다. 특히 알긴산에는 혈액을 맑게 하는 성분이 있고, 철분은 혈액에 포함되어 있는 성분이니 때문에 출산으로 출혈이 많은 산모에게 좋다고 한다. 산모에게 좋다는 미역국이지만 출산 후 미역국을 먹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 한국에 서는 아이의 피부가 닭살이 된다고 질겁할 일이지만 중국에서는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전통 적으로 닭고기 혹은 돼지고기를 먹고, 베트남에서는 주로 돼지고기를 먹는다. 중국 명나라 때의 의학서인 본초강목( 本 草 綱 目 )에는 황계, 노란 닭은 노인을 위한 것이고 오골계, 즉 검은 닭은 임산부를 위한 것이라고 기록했다. 닭국을 먹으면 피가 따듯해지는데 임산부는 수탉을 먹어야 하며 이는 수탉의 양기를 얻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임산부가 수탉 을 오랫동안 곤 국물을 먹으며 쌀을 넣고 닭죽을 먹으면 좋다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임산 부가 닭을 먹는 것을 금기시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서양의 경우는 특별한 산후조리 음식은 없다고 한다. 각 나라별로 산후조리에 도움이 될 만한 영양이 풍부한 음식을 먹을 뿐이다. 한국으로 시집 온 다문화 가정의 며느리들이 가장 싫어하는 산후조리 음식이 미역국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유는 다문화 가정 며느리가 출산 후, 시어머니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미역 국을 끓여 먹이기 때문이라는데 음식 문화가 다른 외국인 며느리에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익 숙하지 않은 미역국이 견디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니 미역국이 산모에게 좋다는 것은 우 리나라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2) 언제부터 미역국이 산후조리 음식이 됐을까? #4-1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들이 아이를 낳은 후 산후 조리음식으로 미역국을 끓여 먹은 역사는 무척이나 오래됐다. 기록으로 살펴보면 조선 후기인 18세기 때의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 ( 星 湖 僿 說 )에 미역국은 임산부한테는 신선들의 약 만큼이나 좋은 음식으로 동방의 풍속에서 는 아주 중요한 처방인데 중국 의학서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그러면서 중국 쪽에 서는 빠지고 우리나라 의학서에만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16세기 말기의 명나라 의학서인 본초강목에도 미역국이 나온다. 미역은 고려에서 나는 것 으로 쌀뜨물에 담가 짠 맛을 빼고 국을 끓이면 기( 氣 )가 잘 내린다고 했지만 고려에서 나오 는 것이라고 했다. 미역국이 중국의 산후조리 음식이 아닌 조선의 산후조리 음식임을 분명 하게 밝히고 있다. 고려사( 高 麗 史 )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인 고려 제8대 임금인 현종 7년(1015년), - 3 -
왕자가 태어난 것을 축하해 왕이 미역밭을 하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아이를 낳은 후 산후 조리를 위해 미역국을 끓여 먹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아니지만 고려 초기에도 출산 및 생 일과 관련해 미역국을 먹었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다. 우리 조상들은 왜 출산 후 미역국을 먹었을까? 조선 후기인 순조 무렵의 실학자, 이규경이 남긴 오주연문장전산고( 五 洲 衍 文 長 箋 散 稿 )에 관련 기록이 있다. 이규경은 우리 동쪽의 임산부들은 해산 후 하얀 밥과 함께 미역국을 먹는데 이는 악( 惡 )을 물리치고 혈기를 보충해 원기를 되찾기 위한 것이라고 했으니 영양학적인 이유와 주술적 이 유가 모두 담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 때의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미역을 한자로 해대채( 海 帶 菜 )라고 적어 놓은 한편으로 일명 최생( 催 生 )이라고도 한다고 적었는데 최생은 한자로 출산을 촉진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임산부들이 왜 미역국을 먹는지에 대해 이규경은 전설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전해지기를 옛날에 어부가 물가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는데 새끼를 갓 낳은 고 래가 물을 들이 삼키면서 어부도 함께 삼켰다. 어부가 고래 뱃속에 들어가 보니 배에 미역 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고래의 오장육부에 나쁜 피가 가득 있었지만 미역 덕분에 모두 소화가 되어 물로 변해 빠져 나왔다. 그래서 미역이 산후의 보약임을 알게 되었고 이후부터 산후에 미역을 먹는 것이 우리나라의 풍속이 되었다는 말이 세상에 전해진다 과학적으로 미역국의 효능을 증명할 수 없었던 옛날, 산모가 미역국 먹는 이유를 전설에 빗대어 풀이한 것이 아닌가 싶다. 3. 한국인은 왜 미역국을 좋아할까? (1) 우리는 왜 미역과 미역국을 먹을까? 미역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기 힘든 우리 고유 음식이다. 아이를 낳은 어머니가 먹는 첫 음 식이 미역국이고 생일날 어김없이 먹는 미역국인데 우리는 왜, 어떻게 미역과 이런 인연을 맺게 된 것일까? 미역은 옛날부터 한반도 해역에 풍부했고 품질도 좋았던 모양이다. 기원 전 4세기 무렵의 중국 사전인 이아( 爾 雅 )에 푸른 실로 땋은 끈 같은 것이 동해 바다에 있다고 적혀있다. 바다 에서 자라는 해초를 풀이한 것 같은데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 미역이 라고 풀이했다. 한반도에서 나는 미역은 옛날부터 유명했던 것 같다.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당나라에서는 함경도지방의 미역을 최고로 여긴다고 했다. 청나라 때의 성경통지( 盛 京 通 志 )에도 발해에서 당나라로 미역을 보냈다고 나와 있다. 현재 중국 길림성의 풍속을 적은 청나라 때 길림외기 ( 吉 林 外 記 )에도 발해 남쪽에 미역이 많다고 했는데 함경도 지방으로 추정된다. 미역 중에서 도 특히 함경도 미역이 유명했는지 정약용은 당서( 唐 書 )에 미역은 발해의 함흥 앞바다에서 생산되는데 맛이 뛰어나다고 적혀있다고 설명했다. 먼 옛날부터 미역을 먹었으니 미역을 채취하고 생산하는 기술도 상당히 앞섰던 것 같다. 고 려사에는 현종 7년(1016)과 문종 12년(1058) 때 미역 밭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밭 - 4 -
( 田 )이라는 표현을 한 것을 보면 이미 미역을 양식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송나라 사신으로 1123년 고려를 다녀간 서긍은 고려도경( 高 麗 圖 經 )에서 고려 사람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모두 미역을 잘 먹는다고 했으니 미역이 일상적인 식품이었음을 알 수 있 다. 조선시대에도 중국 사신들이 무역품목으로 미역을 요구하고 사신들에게 미역을 선물했다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보인다. 발해 때 즉 통일신라 이후부터 조선 때까지 줄곧 우리 의 미역이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쳤던 것이다. 미역이 풍부하고 질도 좋았던 만큼 요리 방법도 일찌감치 다양하게 발전했다. 고려 말 목 은 이색이 미역을 놓고 시를 썼는데 지금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 미역을 동해에서 나는 색 깔이 검고 살갗은 얄팍한 특이한 나물이라고 하면서 초를 치면 회를 대신해 먹을 수 있고 국을 끓여 먹어도 좋다고 했다. 지금도 미역 요리는 다양하다. 여름에 주로 먹는 미역냉국, 미역무침, 미역볶음, 생미역에 초고추장을 얹은 미역쌈, 미역자반에 미역 지짐, 미역김치 등등, 미역을 이용한 음식이 헤아 릴 수 없이 많은데 미역이 풍부하고 품질이 좋으니 미역을 먹을 수밖에 없다. 산모가 아이를 낳은 후 미역국 을 먹고 생일날에도 미역국을 먹는 배경에는 고대로부터 우리나라에 미역이 풍부하고 또 품 질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옛날에는 아무나 먹을 수 없었던 고깃국이나 국수와 달 리 비교적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 산모와 어린아이의 구호품이 미역 #5-1 미역은 조선시대에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빈민구제와 사회봉사 활동에서 빼놓아 서는 안 되는 필수 품목이었다. 조선시대 때도 부모 잃은 아이를 돌봐주는 보육시설이 있었다. 정조는 진휼청( 賑 恤 廳 )을 설 치하면서 흉년에 다니면서 빌어먹는 아이의 구제 대상은 열 살까지, 길가에 버려진 아이는 세 살로 한정해 보이는 대로 보고해 진휼청에서 돌보라고 명한다. 그러면서 빌어먹는 아이 는 흉년에만 보리가 나기까지 거두어 기르고 버려진 아이는 유모를 두어 기르되 나라에서 쌀과 미역을 지급하라고 했다. 세종도 제생원( 濟 生 院 )을 설치했는데 어린아이들이 겨울철 덮을 것과 소금 젓갈 미역 등의 물건을 모두 넉넉히 주라고 했으니 미역은 어린아이의 구호물품 중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품목이었다. 구한말 의병 활동을 한 이남규( 李 南 珪 )가 수당집( 修 堂 集 )이라는 문집을 남겼는데 여기에 미 역 이야기가 실려있다. 부친 이충구에대한이야기다. 날씨가 몹시 추운 겨울날 밤이 되어 성균관에서 돌아왔는데 이웃집에서 아이를 해산했다. 덮을 이불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이들에게 신혼 때 이불을 가져다주었고 또 옷을 전당 잡혀 쌀과 미역을 마련해 이들을 도왔다며 이렇게 위급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이 많았다고 했 - 5 -
다.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외면하지 않았던 훈훈한 인정이 감동적 이며 조선 양반들이 어떻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노 블리스 오블리제의 중심에 미역이 있었다. (3) 산후조리 미역국에 담긴 의미는...? #6-1 미역이 아이를 낳은 산모의 산후조리에 좋은 음식이라는 사실을, 우리 조상들은 과학적으로 또 경험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먼 옛날부터 미역이 풍부하고 미역의 품 질이 좋았다는 사실이 각종 기록에 남아있다. 하지만 미역국이 산후 조리 음식, 생일날 먹는 음식이 된 배경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 생일날 면발이 긴 국수를 먹으며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서양에서 케이크를 먹으며 생명의 여신에게 건강을 빈 것처럼 우리 역시 산모가 미역국을 먹으며 새롭게 태어 난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무병을 빌었고, 생일날 미역국을 먹으며 장수를 빌었다. 지금은 사라진 풍속이지만 옛날 아이를 낳은 후 미역국을 먹는 과정, 그리고 아이의 돌잔 치와 어렸을 때 생일잔치가 치러지는 과정, 곳곳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예전에는 아이를 낳으면 산모가 바로 미역국을 떠먹는 것이 아니라 산모 머리맡에 삼신상 을 차렸다. 하얀 쌀밥과 미역국 그리고 냉수 한 그릇을 떠서 삼신할머니에게 올린 후 산모 가 먹었는데 이를 첫 국밥이라고 했다. 삼신할머니에게 무사히 출산한 것을 감사하고 앞으 로 아이와 산모의 건강을 빈 후에야 산모가 미역국밥을 먹었던 것이다. 최남선은 조선상식( 朝 鮮 常 識 )에서 생후 삼 일이 지나면 또 미역국과 쌀밥을 차려 놓고 삼 신할머니에게 비는 것이 풍속이라고 했는데 이 때면 영아가 사망할 위기를 한 고비 넘겼을 때다. 조선여속고( 朝 鮮 女 俗 考 )라는 책에서도 출산 후 삼칠일, 그러니까 21일째 되는 날에도 삼신상을 차려 놓고 아기의 무병장수를 빈다고 했다. 1925년에 발행된 최영년의 해동죽지( 海 東 竹 枝 )에도 정약용의 풍속고를 인용해 아이가 열 살이 되기 전에 베주머니로 삼신주머니( 三 神 囊 )을 만들어 쌀을 채워 놓고 벽에 걸어 두는 풍속이 있다고 했다. 삼신할머니가 아이를 점지해 줄 뿐만 아니라 아이를 보호해 주는 신이 기 때문에 삼신 주머니를 만들어 놓고 빌었던 것이다. 조선후기 왕실의 출산 지침서인 임산예지법( 臨 産 豫 知 法 )이라는 책에도 왕실에서 출산을 할 때면 반드시 미역국을 끓인다고 했다. 사실 좋은 음식은 모두 있었을 왕실에서도 아이를 낳 는 사람이 있으면 미역국을 끓여 먹였다. 미역국에 있는 영양학적인 가치를 넘어서 왕실에 서도 삼신할머니에게 산모와 아이의 건강과 장수를 비는 소원을 담았던 것이다. - 6 -
참고 : 삼신할머니는 도대체 누구...? 삼신할머니라고 하면 보통 아이를 점지해 준다는 전설 속의 할머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무속 신앙과 연결해 쪽진 하얀 머리의 무당 할머니를 연상하는 것이 보통이다. 아이를 준다 는 미신 속의 별 볼일 없는 신 으로 치부해 버리기 때문에 주로 삼신할미 라고 낮춰서 부른다. 하지만 우리나라 전통 신앙에서 삼신할머니는 아이를 점지해 줄 뿐만 아니라 출산과 육아를 돕는 수호신이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 朝 鮮 常 識 )에서 삼신할머니는 우리나라 고대신앙에서 삶과 죽 음을 주관하는 여신이라고 했다. 옛날 사람들은 우리가 하늘의 아들인 단군의 자손임을 믿었던 것 처럼 삼신할머니가 한국인의 탄생과 생명을 주관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삼신할머니를 생명의 신으로 섬긴 것은 한민족의 역사만큼 오래된 풍속이었다. 다산 정약용은풍 속고( 風 俗 考 )에서 삼신제석( 三 神 帝 釋 )은 생명을 주관하는 신이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면 하얀 쌀 밥과 곽탕( 藿 湯 ) 세 그릇을 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우리 민족의 4,000년 전통이라고 했다. 여기 서 곽탕은 미역국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4. 생일상의 미역국에 담긴 의미 #7-1 어머니가 아이를 낳은 후 미역국을 먹는 이유는 물론 미역국이 산후조리에 좋은 식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옛날부터 각종 고기를 비롯해 다른 식품과 달리 한반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또 영양학적으로 품질이 뛰어난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옛날 어머니들은 아이를 낳은 후 산후 조리로 먹는 음식, 미역국을 먼저 아이를 점지해 주 고 또 앞으로 아이의 건강과 수명을 좌우할 생명의 신인 삼신할머니에게 바친 후 감사한 마 음으로 먹었다. 의술이 발달하지 못해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옛날,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들은 아이가 자라 면서 생명의 고비를 맞을 때마다 미역국을 끓여 놓고 생명의 신인 삼신할머니에게 병들지 않고 무사하게 자리기를 빌었다. 우리가 생일날 먹는 미역국은 전통 신앙 속에서 한민족에게 생명을 주고 일생을 주관하는 삼신할머니에게 바치는 제물이었다. 때문에 생명이 태어난 날일 생일날마다 미역국을 먹으 며 삼신할머니에게 무병장수를 빌었던 것이다. 미역국은 한민족의 생명의 신에게 바치는 감 사와 소원의 음식인 것이다. 참고문헌 星 湖 僿 說, 李 瀷 五 洲 衍 文 長 箋 散 稿, 李 圭 景 - 7 -
귀한 귤이 못난 탱자 되지 않으려면 1. 귤의 역사와 전파경로 2. 강남 귤이 강북서는 왜 탱자가 될까? 3. 한양에 귤이 올라온 것을 기념한 과거시험 4. 귤은 대학나무, 시름나무, 원수나무 1. 귤의 역사와 전파경로 귤은 역사가 깊은 과일이다. 원산지는 아시아 남부 열대 및 아열대 지방으로 추정되는데 기원전 16세기 이전에도 귤을 먹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이미 제 주도인 탐라에서 귤을 재배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사에는 백제 문주왕 2년(476년)과 고려 태조 때(925년) 탐라에서 토산물을 바쳤다고 했는데 아마 귤도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다만 고려사에 문종 6년(1052년), 탐라에 서 진상하는 귤의 숫자를 일백포로 결정한도 한 것을 보면 훨씬 이전부터 제주도에서 올리 는 진상품목 중에 귤이 포함되었을 것을 추정된다. 귤은 영어로 탄저린(Tangerine), 또는 만다린 오렌지(Mandarin Orange)라고도 하는데 정확 하게 말하자면 탄저린은 만다린 오렌지의 한 품종이다. 그런데 탄저린, 혹은 만다린 오렌지라는 영어 단어에 귤이 서양에 전해진 전파 경로가 담 겨있다. 탄저린의 어원은 탄지르 지방에서 전해진 오렌지(Orange from Tangier) 라는 뜻이 다. 1842년부터 쓰인 단어인데 탄지르(Tangier) 지방은 북부 아프리카에 있는 모로코의 항구 도시 이름이다. 영국에 처음 수입된 귤의 선적지가 바로 모로코 탄지르 항구였다고 한다. 아 시아의 귤이 아랍을 거쳐 영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한편 만다린 오렌지에서 만다린은 중국 이라는 의미이니까 아시아에서 건너 온 오렌지라는 뜻이다. 2. 강남 귤이 강북서는 왜 탱자가 될까? 속담에 강남 귤이 강북에 가면 탱자가 된다 는 말이 있다.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사람이 달라진다는 뜻으로 많이 쓰이는 말이다. 왜 이런 속담이 생겼을까? 단순하게 상징적 의미로 쓰는 말일까? 아니면 그럴듯한 이유가 있기에 생긴 속담일까? 먼저 이런 속담이 생겨난 고사가 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중국 춘추시대 때 제나라의 외 교관이었던 안영( 晏 嬰 )이 한 말에서 비롯됐다. 안자춘추( 晏 子 春 秋 )라는 책에 관련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제( 齊 )는 지금의 중국 산동성 일대에 있었던 나라로 재상이었던 안영은 키가 작고 생김새 - 1 -
가 볼품이 없어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다. 안영이 초( 楚 )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됐다. 초나라는 현재 중국의 호남성과 호북성에 위치했던 나라다. 초나라 영왕( 靈 王 )이 사신으로 온 안영의 기를 꺾어 놓으려고 제나라에는 그렇게도 사람이 없는가? 어찌 당신처럼 못난 사람을 사신으로 보냈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안영이 제나라에서는 상대국 사정에 맞춰 사신을 보내는 전통이 있는데 저는 키가 작고 못생겼기 때문에 초나라에 갈 사신으로 뽑혀서 오게 된 것 이라고 대답했다. 때마침 죄인이 포승에 묶여 옆을 지나갔다. 초왕이 어느 나라 사람이며 무슨 죄를 지었냐 고 물었는데 제나라 사람이며 도둑질을 하다 잡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초왕이 안영에게 제나라 사람은 모두 도둑질을 잘하냐? 고 물었다. 그러자 안영이 강남의 귤을 강북에도 옮 겨 놓으면 탱자가 되는데 그것은 토질과 물이 다르기 때문 이라며 제나라에서는 도둑질을 모르는데 초나라에 와서 도둑질을 하는 것을 보면 초나라 풍토가 나쁜 것 같다 고 대답했 다. 강남 귤이 강북으로 가면 탱자가 된다는 말은 여기서 나온 이야기로 한자로는 남귤북지( 南 橘 北 枳 ) 또는 회남의 귤이 북으로 가면 탱자로 변한다는 뜻에서 회귤위지( 淮 橘 爲 枳 )라고 한 다. 남귤북지의 고사에서 강남과 강북은 정확하게 중국의 회하( 淮 河 )를 기준으로 남과 북인 회 남( 淮 南 )과 회북( 淮 北 )을 말하는 것이며 중국에서는 통상 회하의 남쪽인 회남을 화남( 華 南 ), 북쪽인 회북을 화북( 華 北 )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회하( 淮 河 )는 황하와 장강 사이에 있는 중국 에서 세 번째 큰 강으로 중국의 중앙인 하남성을 지나 안휘성과 강소성을 거쳐 양자강( 長 江 )과 합쳐진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왜 강남, 즉 회남에서 자라는 귤이 강을 건너서 북쪽으로 가면 탱자 가 된다고 한 것일까? 지금 수천 년에 걸쳐서 종자가 개량된 귤과 탱자는 생김새가 확연하게 다르지만 예전 귤과 탱자는 생김새가 비슷하다. 물론 맛은 완전하게 다르다. 귤은 린네의 식물분류법상 운향과 감귤속에 속하는 작물이고, 탱자는 운향과 탱자속에 속하는 작물이다. 종자가 아예 다르다. 하지만 종자가 개량되기 전, 옛날에는 모습이 비슷해서 같은 종류의 작물로 오해를 했을 수 있다. 서기 1세기 무렵, 한나라 때 한자사전인 설문해자( 說 文 解 字 )에 탱자( 枳 )는 귤( 橘 )과 비 슷하게 생긴 나무라고 해석을 해 놓았다. 그런데 회하 이남에서 자라는 귤이 강을 건너 회하 이북으로 가면 자라지 못한다. 귤 재배 의 북방 한계선이 중국의 화북과 화남지방을 가르는 회하이기 때문이다. 회하 이북에서는 귤보다 추운 날씨에 잘 견디는 탱자나무가 자란다. 강남 귤이 강북에 가면 탱자가 된다고 한 이유다. 이런 사실은 우리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 經 世 遺 表 )에서 위도 상으로 영암 월출산의 북쪽 끝 지역이 중국의 회하와 서로 직선이 되므로 중국에서는 귤나 무가 강을 건너면 탱자가 되고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의 귤이 월출산을 넘으면 탱자가 된 - 2 -
다고 했다. 3. 한양에 귤이 올라온 것을 기념한 과거시험 11월은 시험의 계절이다. 전통적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양력 11월에 실시된다. 조선시대 에도 11월은 시험 보는 달이었다. 해마다 음력 11월이면 제주도에서 귤을 올려 보냈는데 귤 이 도착한 것을 기념해 과거가 열렸으니 바로 황감제( 黃 柑 製 )다. 귤이 시장에 나온 것을 기 념하는 시험이다. 왜 귤이 시장에 나왔다고 과거시험을 봤을까?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귤이 귀한 과일이었 는데 조선시대에 귤은 아무나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아니었다. 왕실이나 벼슬이 높은 고관대 작이 아니면 맛보기 힘들었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귤을 재배하는 유일한 곳이었던 제주도에서 보낸 귤이 한양에 도착할 무렵이면 사대부들은 임금님이 하사하는 귤을 받아 맛볼 수 있다는 생각에 도성이 거의 축 제 분위기였다. 동국세시기 에는 11월이면 제주도에서 귤과 유자 등을 진상하는데 임금은 이것을 종묘에 바쳐 제사를 지낸 후에 가까운 신하들에게 하사한다고 적혀 있다. 또 옛날부터 탐라 성주가 귤을 바치면 이를 기념하는 과거시험을 본다고 했다. 제주도에서 귤이 도착한 것을 기념해 과거시험을 치뤘다는 것인데 이때 보는 과거시험을 귤 감( 柑 )자를 써서 감제( 柑 製 ) 또는 황감제( 黃 柑 製 )라고 불렀다. 여기서 급제한 사람은 이차 시험인 복시나 임금님 앞에서 보는 전시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그리고 시험에 참여한 수험생인 선비들에게는 당시 귀한 과일이었던 귤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황감제에서 급제한 선비는 여럿이 있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로는 다산 정약용을 꼽 을 수 있다. 1785년(정조 9년) 11월 3일, 제주도에서 공물로 보낸 귤이 도착한 것을 기념해 과거를 실시했는데 다산이 일등으로 급제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제주도에서 귤이 도착하면 성균관 유생은 과거를 볼 수 있는데다 귀중한 과일인 귤까지 맛 볼 수 있었으니 손꼽아 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지만 조정의 대소 신하들도 들뜨기는 모두 마찬가지였다. 귤도 귤이지만 임금님의 총애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귤은 조선 초기부터 임금이 신하들에게 특별히 베푸는 은총의 수단으로 활용됐다. 국조보 감( 國 朝 寶 鑑 ) 에 태종이 이명덕과 목진공이라는 신하에게 경들에게는 모두 늙으신 어머님이 계신 줄 알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하사하는 것 이라며 각각 귤 한 그릇씩을 하사하는 대목 이 나온다. 이렇게 소중한 귤이었으니 잘못 취급해 상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담당 관리의 문책은 피할 수 없었다. 숙종 17년(1691년) 제주도에서 보내 온 귤이 썩어서 도착했다. 왕실 조달청인 사 옹원에서 진상한 귤이 썩었으니 운반 책임자를 문책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숙종 임금이 바닷 길에서 순풍을 기다리다가 썩은 것이지 운반한 사람들의 잘못은 아니라며 사면하는 장면이 보인다. 귤 때문에 벼슬이 왔다 갔다 했으니 시장에 귤이 널려 있는 요즘과 너무 비교된다. - 3 -
참고자료 : 황감제( 黃 柑 製 ) 조선에서는 오순절제( 五 巡 節 製 )라고 계절에 따라 다섯 차례의 과거시험을 실시했다. 음 력 1월 7일에 보는 시험인 인일제( 人 日 製 ), 3월 삼짇날의 화제( 花 製 ), 7월 칠석의 오제( 梧 製 ), 9월 중양절의 국제( 菊 製 )와 11월 제주도에서 귤이 도착한 것을 기념하는 황감제( 黃 柑 製 )다. 과거는 1차 시험인 초시( 初 試 ), 2차 시험인 복시( 覆 試 ), 최종 시험으로 임금 앞에서 치르 는 전시( 殿 試 )가 있다. 오순절제는 주로 초시에 해당되며 합격하면 문과 복시와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4. 귤은 대학나무, 시름나무, 원수나무 한때 귤을 대학나무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제주도에서는 귤나무 몇 그루만 있으면 자식을 대학까지 졸업시킬 수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얼마 전까지는 귤을 시름나무라고 부른 다고 했다. 해마다 생산과잉으로 귤이 넘쳐, 제 값을 받지 못해 재배 농가를 울렸기 때문이 다. 감귤 값이 폭락해 귤나무를 베어 버리는 현상까지 생겼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귤은 후손을 위해 심는 나무였다.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귤이 고수익 과일이었기 때문이다. 자손의 장래를 위해 귤을 심은 것은 비단 현대의 제주도 주민들만은 아니었다. 먼 옛날인 3세기 무렵의 중국에서도 후손을 위해 귤나무를 심었다. 천 그루의 귤나무라는 뜻의 감귤천 수( 柑 橘 千 樹 )라는 사자성어는 자손을 위해 나무를 심어 재산을 늘린다는 뜻인데 소설이 아 닌 역사책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다. 삼국시대 때 오나라에 이형( 李 衡 )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강릉에 천 그루의 귤나무만 있으 면 식읍을 갖고 있는 제후가 부럽지 않다 고 한 사마천의 말을 기억하고는 가족 몰래 7-8년 에 걸쳐 귤나무를 심었다. 덕분에 전쟁통에도 재산을 빼앗기지 않았고, 전쟁이 끝난 후 귤나 무에 귤이 열리게 되어 자손들이 부자로 살게 되었다는 고사다. 사기( 史 記 )를 쓴 사마천이 귤나무 천 그루면 제후가 부럽지 않다고 한 것을 보면 기원전 1세기 무렵에도 귤나무는 고 소득 작물로 명성이 높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귤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도 때를 잘 만나야 한다. 시절을 잘못 만나면 후손을 키우 기는커녕 이래 뺏기고 저리 빼앗겨 신세만 고달파지는 원수나무가 된다. 조선시대는 귤이 귀했던 만큼 수탈의 대상이었다. 제주도 농민들이 귤나무를 심는 것은 고 사하고 잘 자라고 있는 귤나무조차 몰래 뽑아 죽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나 온다. 어진 임금이라는 성종 때에도 수탈이 자행됐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성종 20년, 제주도 백성 - 4 -
중에 감귤나무를 가진 자가 있으면 수령이 열매가 달렸건 달리지 않았던 귤을 거두려고 괴 롭히기 때문에 백성들이 살 수가 없어 나무를 베고 뿌리까지 없애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귤나무를 심으면 피해만 생기고 이익은 없어 그런 것인데 귤나무를 심는 자에게 상을 주면 나무심기를 기뻐할 것이니 상 주는 방안을 의논해서 보고하라고 성종이 지시를 내린다. 명종 20년에도 현지 수령이 지나치게 귤을 거두어 문제가 되고 있다. 신임 목사인 이선원 이 탐욕스럽고 포악해서 민간의 감귤나무를 관에서 빼앗고 열매도 함부로 거두어들이니 백 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고 했다. 또 이렇게 거둔 귤을 한양으로 보내 승진운동을 하고 있으니 파직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는데 명종은 파직할 필요까지는 없으니 교체 인사를 하라고 명령한다. 제주도에서 귤을 수탈하는 것은 현지 수령 탓만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임금이 무리한 요구를 하니 현지에서는 그 몇 배로 수탈을 했던 측면도 있다. 연산군 8년 3월 11일, 임금이 현지의 제주목사에게 귤 철이 아닌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귤을 보내라고 독촉을 한다. 비록 귤이 열리는 철은 지났지만 따서 저장해 놓은 것이 있으면 봉 하여 올리고 나무에 달린 것이 있으면 가지에 붙어 있는 채로 올려 보내라는 것이다. 현지에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지는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2년이 지난 연 산군 10년에는 또 제주에 명령을 내려 금귤 1,000개를 급하게 올려서 보내는데 상하지 않 도록 주의하라고 했으니 시도 때도 없이 귤을 보내라는 명령에 시달렸던 것이다. 이러니 제 주도 주민들이 귤나무를 원수나무라며 베거나 뿌리 채 뽑아서 없애 버렸던 것이다. 참고자료 : 감귤 우리가 먹는 귤을 흔히 감귤( 柑 橘 )이라고 한다. 감귤은 오랜 세월, 혼동해서 쓰였지만 감( 柑 )과 귤( 橘 )은 엄밀하게 따지면 품종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감( 柑 )은 꽃이 크며 지금 의 오렌지에 보다 가깝고, 귤( 橘 )은 기본적으로 꽃이 작고 껍질이 잘 벗겨지는 지금의 귤 종류다. - 5 -
보약보다 좋은 봄나물 나눔 예찬 1. 봄나물이 왜 몸에 좋을까? 2. 냉이는 백세( 百 歲 ) 국이다 3. 입에 쓴 것은 몸에 좋다, 씀바귀 1. 봄나물이 왜 몸에 좋을까? 봄맞이 가자라는 동요가 있다.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너도 나도 바구니 옆에 끼고 서/달래 냉이 씀바귀 나물 캐오자/종다리도 높이 떠 노래 부르네 달래, 냉이, 씀바귀는 대표적인 우리나라 봄나물이다. 새콤달콤한 달래무침, 달래간장으로 밥 한 그릇 뚝딱 비울 때, 겨우내 텁텁하고 무기력했던 입안이 쌉싸래한 씀바귀 나물 한 접 시로 활력을 되찾고 상큼한 기운마저 느껴질 때, 된장 풀어 끓인 냉잇국을 한 수저 떠먹으 며 입 안 가득 냉이 향이 퍼질 때, 봄이 왔음을 실감한다. 봄의 전령사들은 추위에 길들여진 입맛만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기분까지도 봄날 겨울잠을 깨고 나온 개 구리만큼이나 싱그럽게 만든다. 사람들은 그래서 옛날부터 봄나물을 보약이라고 불렀다. 산채는 일렀으니 봄나물 캐어 먹세/고들빼기 씀바귀며 소루쟁이 물쑥이라/달래 김치, 냉 이국은 비위를 깨치나니/본초를 상고하여 약재를 캐오리라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의 아들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 2월령에 나오는 노래다. 음력 2 월이니 보통은 양력 3월에 해당된다. 달래, 냉이, 씀바귀, 고들빼기, 소루쟁이 등등의 봄나물이 얼마나 몸에 좋으면 갖가지 약초 의 종류를 적어 놓은 한약서인 본초( 本 草 )를 참고하여 나물이 아닌 약재( 藥 材 )를 캐오겠다고 했을까? 굳이 옛 문헌을 뒤적거리지 않아도, 또 음식과 약은 뿌리가 같다는 약식동원( 藥 食 同 源 )이라 는 거창한 사자성어를 들먹거리지 않아도 봄나물이 몸에 좋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경험적 으로 알고 잇다. 예전 할머니들은 겨울을 넘긴 나물뿌리는 인삼보다도 명약이라고 했다. 한 겨울 내내 꽁꽁 얼어붙었던 땅을 헤집고 나와 움을 틔운 것이 봄나물이니 그 끈질긴 생명력이 우리 몸에 자 연이 생기를 불어넣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의 힘이 비싸고 좋다는 보약의 약효 정도는 훌 쩍 뛰어 넘는다. 모든 봄나물이 몸에 이롭겠지만 옛날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냉이를 으뜸으 - 1 -
로 꼽았는데 아마 그만큼 우리한테 친숙한 봄나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 냉이는 백세( 百 歲 ) 국이다 냉이는 예전 우리 밥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봄철 반찬이었다. 냉이를 먹는 방법도 다양해 서 살짝 데친 후 오이, 양파를 비롯한 다른 야채와 초고추장 양념으로 버무린 초무침도 맛 있고 된장 풀어 끓인 냉잇국, 냉이를 듬뿍 넣은 된장찌개와 냉이로 담근 냉이 김치, 냉이 장 아찌에 냉이 부침개 또한 별미다. 양념 맛이 아닌 순수한 냉이 향기를 즐기기에는 그중에서 도 냉잇국이 으뜸이 아닐까 싶은데, 그 때문인지 옛날 사람들도 냉잇국을 특별하게 여겼다. 냉잇국은 별명이 백세국( 百 歲 羹 )이다. 중국 송나라 초기인 10세기 무렵 도곡( 陶 穀 )이 쓴 청 이록( 淸 異 錄 ) 에 사람들은 냉이를 백세국이라고 불렀는데,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냉이를 먹 을 수 있고, 나이가 100세를 넘은 노인들도 능히 먹고 장수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풀 이했다. 냉이는 순한 식물이기 때문에 노인이 먹어도 아무 부담이 없다는 것인데 뒤집어 보면 먹으 면 부담이 되지 않아 몸에 좋다는 이야기와도 통한다. 조선 숙종 때의 실학자 홍만선은 산림경제 에서 냉이는 성질이 따뜻해서 오장을 조화롭게 만든다면서, 송나라 때 채원정이 냉이를 먹고 학문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며 냉이의 효능 을 평가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채원정은 공자와 맹자의 뒤를 잇는 유교의 성현 주자( 朱 子 )도 존경했다는 인물로 주자학의 대가다. 어렸을 때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채원정은 서산( 西 山 )이라는 곳에 들어가 글을 읽었 는데 먹을 것이 없어 냉이를 캐어먹고 지내면서도 글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학문을 연마한 채원정은 주자의 소문을 듣고는 그를 찾아가 제자로 받아주기를 간청한다. 채원정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어 본 주자는 학문의 깊이에 놀라며 이런 사람을 제자의 반 열에 두는 것은 옳지 않다 며 채원정을 학문적 동지로 대했다고 한다.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은 백이숙제는 굶어죽었지만 서산에서 냉이를 먹으며 공부한 채 원정은 학문의 경지를 이뤘으니 냉이가 보약에 버금간다는 소리를 들을 만했다. 동의보감에 는 냉이가 눈을 밝게 한다고 나오는데 혹시 채원정이 학문을 성취한 배경도 냉이를 먹고 밤 늦게까지 책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냉이는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즐겨 찾았던 봄나물이다. 기원전 7세기 이전부터 냉이를 먹 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동양에서 가장 오래 된 시집인 시경에도 냉이를 노래한 곡풍( 谷 風 ) 이라는 시가 실려 있다. 누가 씀바귀를 쓰다고 하였던가? 내게는 달기가 냉이와 같네 라고 읊었으니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도 냉이를 달고, 순하다며 환영했음을 알 수 있다. 냉이는 우리는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에서도 즐겨먹는 봄나물인데 예전부터 봄을 축하하는 나물로 즐겨 먹었다. 지금 우리가 먹는 만두와 춘권은 본래 새해를 축하하고 봄을 맞이할 때 먹는 음식이었다. 만두와 춘권을 빚을 때 예전 당나라 때는 소로 냉이를 넣었으니 성질 - 2 -
이 따뜻한 봄나물 냉이를 넣어 양기를 보충한다는 뜻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중국 북방에 서는 봄이면 냉이를 캐어다 만두와 춘권을 빚는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로 냉이는 예전 일본 인들이 봄을 맞으며 먹었던 일곱 가지 채소, 즉 칠종채( 七 種 菜 ) 중의 하나였으니 봄을 축하 하는 음식에 냉이는 빠져서는 안 되는 나물이었다. 한중일 삼국에서 모두 봄이 되면 제일 먼저 냉이를 먹으면 몸보신을 하고 봄맞이를 했던 것이다. 3. 입에 쓴 것은 몸에 좋다, 씀바귀 쓴 것이 입에는 쓰나 비위에 역한 법은 없다. 사람이 오미( 五 味 ) 중에 쓴 것을 덜 먹으나 속에는 대단히 좋으므로 약재로 쓰면 유익하니 소태나 익모초가 다 몸에 좋은 이유가 여기 있다. 쓴 것을 약간 먹는 것이 좋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이라는 요리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옛날부터 입에 쓴 것은 몸에도 좋 다고 했는데 씀바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씀바귀는 쓴맛이 강해 붙여진 이름이다. 냉이와 비 슷해 가장자리에 톱니 같은 잎이 길게 나와 있고 잎줄기가 흰색으로 보송보송한 털이 나 있 으며 뿌리를 꺾으면 하얀 진이 나온다.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말에 이른 봄에 씀바귀를 먹으면 그 해 여름은 더위를 타지 않 는다 고 했도 춘곤증을 막아주어 봄철 정신을 맑게 해 준다 는 소리도 없다. 옛날 그른 것 하나도 없다는 말처럼 모두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허준이 쓴 동의보감 에 씀바귀는 성질 이 차면서 맛이 쓰다고 했으니 다시 말해 여름철 더위를 물리칠 수 있다는 말이고, 마음과 정신을 안정시키며 잠을 덜 자도록 도와준다고 했으니 곧 씀바귀를 먹으면 춘곤증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씀바귀는 고들빼기와 함께 봄철 춘곤증을 예방하는 대표적인 나 물로 꼽혀왔다. 씀바귀는 실연의 아픔도 이겨낼 수 있는 나물이다. 씀바귀는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식용했 던 나물이다. 기원전 7세기 이전의 중국 주나라 때 유행했던 시와 노래를 엮은 시경( 詩 經 )에 누가 씀바귀를 쓰다고 하였던가? 내게는 달기가 냉이와 같네 라는 노래가 실려 있다고 했 는데 사연이 있는 노래다. 쓰디 쓴 씀바귀가 오히려 냉이처럼 달다는 말은 반어법으로 표현한 글이다. 낭군한테 버림 받은 여자가 부르는 노래였으니 씀바귀의 쓴 맛 쯤이야 버림받은 아픔에 비하면 오히려 달 콤한 맛이라는 비유다. 쫓겨난 조강지처의 슬픔과 아픔이 노래에 구구절절이 배어있다. 따뜻한 동쪽 바람 불더니 어느새 날 흐리고 비가 내리네. 애써 마음 모아 함께 하다가 이 리도 화를 내니 너무 하네요/순무를 뽑고 무 뽑을 땐 뿌리만 필요한 것이 아니랍니다 회한과 원망에 이어 쫓겨나니 터벅터벅 걷는 걸음은 마음속에 가고 싶지 않아서라오 라고 비통한 심정을 읊은 연후에 나오는 것이 씀바귀의 비유다. 씀바귀의 쓴 맛도 실연의 아픔을 치유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 3 -
씀바귀가 달다고 노래한 인물이 또 있다. 주나라 태왕( 周 太 王 )으로 주나라를 건국한 무왕의 시조이니 기원전 11세기 이전의 인물이다. 역시 씀바귀가 달다는 표현을 반어법으로 사용했 다. 태왕이 처음 식구들을 이끌고 주나라 땅 들판으로 집을 옮기어 움집을 짓고 살면서 가문을 일으켰다. 주 태왕은 이때 기름진 음식은 찾지도 않았고, 밭에서 캔 씀바귀도 그저 맛이 엿 처럼 달다고 느끼며 검소한 생활을 했다. 씀바귀가 엿처럼 달다는 뜻인 근도여이( 菫 荼 如 飴 ) 라는 사자성어가 여기서 비롯된 이야기로 근검절약을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도 씀바귀는 원래 무지하게 쓴 나물인데 고생을 하면서 검소하게 살다보니 그 쓴 씀 바귀마저 엿처럼 달다고 한 것이니 뒤집어보면 고대인들에게 씀바귀는 그다지 환영받지는 못했던 나물이었다. 사실 달콤한 음식도 많은데 쓰디쓴 씀바귀를 사람들이 굳이 좋아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씀바귀를 가리키는 한자에도 옛날 사람들의 이런 인식이 반영돼 있다. 씀바귀를 한자로는 도( 荼 )라고 쓴다. 풀어 보면 풀 초( 艹 )자 아래에 나머지 여( 余 )자로 이 뤄진 글자다. 나물로 캐어 낸 여러 풀 중에서 다른 풀을 다 고르고 난 후에 남은 식용이 가 능한 풀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쓴 맛이 나는 것이 먹을 수 있는 나물 중에서 가장 맛이 없다는 뜻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옛말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 4 -
씨암탉은 사위를 싫어해! 학습주제 1. 장모님은 왜 씨암탉을 잡아주실까 (1)왜 전통적으로 씨암탉을 잡았을까? (2)결혼 잔칫상의 필수품 "닭" 2. 닭에 담긴 여러가지 상징적 의미 3. 장모님이 씨암탉을 잡아 준다는 것은? 4. 사위가 미우면 어쩌나? (1) 미운 사위에게는 매생이국 (2) 남도 특산물로 임금에게 진상하던 매생이 1. 장모님은 왜 씨암탉을 잡아주실까 (1) 왜 전통적으로 씨암탉을 잡았을까? #1-1 흔히 알려진 것처럼 옛날 시골에서 사위가 왔다고 소를 잡거나 돼지를 잡을 수는 없기 때 문에 집에서 놓아기르던 닭을 잡아서 백년손님인 사위에게 먹였다고 한다. 아마 씨암탉에는 사위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싶은 장모님의 사랑이 담긴 것도 사실일 것이고, 또 우리가 지금 짐작하는 것처럼 사위가 왔다고 소나 돼지를 잡을 수는 없으니까 그나마 가장 귀한 씨암탉을 잡았다는 것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장모님이 씨암탉 을 잡은 가장 큰 이유일 수 있겠지만 굳이 따져본다면 굳이 씨암탉이어야 할 이유도 없다. 먼저, 소나 돼지를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씨암탉을 잡았다고 하지만 소고기나 돼지고기는 시장에서 사오면 된다. 심심산골 시골 깡촌이 아니라면 근대는 물론이고 조선시대, 고려시대 에도 곳곳에 시장이 있었다. 19세기 초인 1808년에 발행된 만기요람( 萬 機 要 覽 )이라는 책의 재용편에는 전국의 시장 숫 자가 기재되어 있는데 경기도 102곳, 충청도 157곳, 강원도 68곳, 황해도 82곳, 전라도 214 곳, 경상도 276곳, 평안도 134곳, 함경도 28곳 등 모두 1,061개의 시장이 기록돼 있다. 조선 곳곳에 오일장 체계가 이미 수립되어 있었다. 돈만 있으면 굳이 소나 돼지를 통째로 잡지 않아도 고기를 사먹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살 돈이 없어서 씨암탉을 잡았을까? 사위에게 씨암탉 먹이 - 1 -
는 풍속이 가난한 사람들의 풍속이 아니다. 언제부터 생긴 풍속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나 라에 보편적으로 퍼졌던 풍속이다. 그러니 돈 때문에 소고기나 돼지고기 대신 씨암탉을 먹 인 것만도 아닐 것이다. 농촌에서는 제일 귀한 동물이 씨암탉이었기 때문에 씨암탉을 잡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농 촌에 해당되는 말이고, 또 조선시대 후기에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조선시대 전기만 해도 상황이 달랐을 것이다. 닭보다는 꿩이 더 흔했을 것인데 오죽하면 꿩 대신 닭 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씨암탉이니까 먹고 알 낳는 것처럼 순풍, 순풍 손자, 손녀 많이 낳으라는 의미였을까? 논리 적으로 맞지 않는다. 사위가 아이를 낳는 것은 아니니까, 제대로 먹이려면 딸이나 며느리한 테 먹여야한다. 또 하나, 같은 닭고기라도 맛으로만 따지자면 알을 한참 많이 낳는 씨암탉보다는 이제 갓 어미 닭이 되어 알을 낳기 시작한 연계(영계)가 훨씬 더 맛있다. 그럼에도 장모님이 굳이 사위에게 씨암탉을 잡아 주셨는데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왜 장모님이 씨암탉을 잡아주셨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옛날부터 내려온 풍속이니까, 그리고 예전에는 어쨌든 씨암탉이 귀했으니까 좋은 음식 먹인다는 차원에서 씨암탉을 준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전통을 보면 닭에 관한한, 특이한 풍속이 있다. 예전 풍습을 살펴보면 옛날 부터 즐겁고 중요한 날에는 닭을 많이 잡았는데 특히 결혼과 관련된 행사, 또는 나쁜 귀신 을 몰아내고 복을 기원하는 제사 때 닭이 많이 등장한다. (2)결혼 잔칫상의 필수품 "닭" #2-1 새신랑, 새색시, 결혼, 폐백 등 혼인과 관련된 행사 이외에도 각종 제례의식에 닭이 등장한 다. 지금도 남아있는 풍습으로 결혼식이 끝난 후 폐백을 드릴 때면 반드시 통닭 한 마리가 상 위에 올라가 있고 전통혼례를 올릴 때면 한편에서 닭을 안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장모가 사위를 맞을 때도 씨암탉을 잡았지만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면 닭을 잡아 대접을 했 고 새색시가 친정으로 근친을 갈 때도 닭이나 달걀을 싸 갖고 가는 것이 우리의 예전 풍습 이었다. 지금도 삼복이면 삼계탕을 먹지만 옛날에도 복날이면 영계백숙이나 닭찜을 먹었다. 복날은 음기( 陰 氣 )가 엎드려 있는 날로 나쁜 귀신들이 몰려 있기 때문에 귀신을 쫓는 기능을 지난 개나 닭으로 보신탕과 삼계탕을 먹어 재난을 예방한다는 의미가 있다. 고려 때부터 이어져 내려 온 행사로 연말이면 궁중이나 양반집에서 집안의 악귀를 몰아내 는 나례의( 儺 禮 儀 )라는 의식을 지냈는데 여기에 반드시 올라가는 제물이 닭 다섯 마리다. 뿐 만 아니라 조선시대 궁중의 각종 제사물품을 기록한 의궤( 儀 軌 ) 목록에는 닭찜인 연계증( 軟 鷄 蒸 )이 반드시 들어있다. 19세기 한양의 풍속을 기록한 열양세시기에는 추석이 되면 아무리 가난한 벽촌의 집에서 - 2 -
도 닭을 잡는다고 했으니 닭은 좋은 일을 축하하고 나쁜 일을 예방하는데 빠져서는 안 되는 제물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닭은 단순한 고기 이상의 특별한 동물이었다. 때문에 장모님이 씨암 탉을 잡았던 것도 맛있는 음식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을 수 있다. 닭은 우리에게 도대체 어 떤 동물이었을까? 2. 닭에 담긴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 #3-1 양기의 동물 장모가 사위에게 씨암탉을 잡아주는 이유는 백년손님에게 단순히 좋은 음식을 대접한다는 것 이상의 뜻이 담겨있다. 딸과 평생을 동고동락할 사위이기 때문에 나쁜 기운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또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의미를 씨암탉에 담았던 것인데 이유는 닭이 상서로 운 동물이기 때문이다. 닭은 옛날부터 길조( 吉 鳥 )로 여겼고 때를 아는 영물( 靈 物 )이라고 믿었 다. 주역에 보면 닭은 양기가 넘치는 동물이라고 한다.( 鷄, 陽 鳥 也 ) 고려사절요에도 고려 말의 요승, 신돈은 닭을 먹고 양기를 보충했다고 나온다. (고려사절요 제29권 공민왕 4년) 신돈은 성품이 사냥개를 두려워하고 사냥을 싫어하면서도 방자하고 음란하여, 항상 오계( 烏 鷄 )ㆍ백마( 白 馬 )를 잡아먹어 양기( 陽 氣 )를 보충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을 늙은 여우의 정기 라고 하였다. 명나라 의학서 본초강목에도 노인은 황계, 산모는 오골계를 먹으면 피가 따뜻해진다 = 산 후조리 음식으로 오골계를 먹는 이유는 출산하느라고 빠져나간 양기를 보충하기 위해서다. (한국인은 팔짝 뛸 소리!!!!! 아이가 닭 닮은 피부가 나온다고...) 닭은 양기가 넘치는 동물이니 갓 결혼한 사위에게 양기를 넣어 주기에 딱 좋은 가축이었다. 조선의 닭은 영물 닭은 옛날부터 나쁜 기운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또 부귀영화를 가져다주는 영물이었는 데 특히 닭 중에서도 으뜸은 우리나라 토종닭으로 중국의 옛 문헌에는 조선 닭이 영물이라 고 했다.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 위지( 魏 志 )에는 마한( 馬 韓 )에 꼬리가 가는 닭( 細 尾 鷄 )이 있는데 길 이가 5척이나 된다 고 했고 후한 때의 설문해자( 說 文 解 字 )에는 봉( 鳳 )은 동방의 군자지국에 서 나온다 고 했다. 동방의 군자지국은 옛날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고 봉( 鳳 )은 전설 속 에 나오는 새인데 옛날 중국에서 봉황의 원형을 우리나라 토종닭인 긴 꼬리 닭( 細 尾 鷄 )에서 찾았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중국 명나라 때 의학서인 본초강목( 本 草 綱 目 )에도 조선에는 꼬리가 긴 장미계( 長 尾 鷄 )가 있 는데 꼬리가 3-4척이며 시간을 알고, 날씨의 맑고 흐림도 안다.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닭은 - 3 -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 僻 邪 )고 했으니 영물이다 라고 기록해 놓았다. 우리의 토종닭이 얼마나 유명했는지 조선시대 때는 중국의 세도가들이 사신에게 부탁해 조 선에서 닭을 구해갔다고 한다. 길조로서의 닭 동양에서 닭은 길조라고 여겼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 닭을 숭상했던 역사는 뿌리가 깊다. 신라의 건국신화에서 시조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고, 태어난 장소도 닭의 우물이라는 뜻 의 계정( 鷄 井 )이며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도 태어날 때 숲 속의 닭( 鷄 林 )이 울음으로 그 탄생을 알렸다. 신라의 옛 이름이 계림( 鷄 林 )인 이유다. 신라 때부터 조상들은 닭을 상서롭 게 여겼던 것이다. 닭은 옛날부터 길조로 여겼고 때를 아는 영물이라고 했다. 중국 한나라 때 사전인 설문해 자에는 닭이 때를 아는 가축이라고 했으며 암흑과 광명을 바꾸는 상서로운 영물이라고 풀이 해 놓았다. 귀신들이 닭 울음소리를 듣고 새벽이 오는 것을 알아 자취를 감추니 닭에는 귀 신을 쫓는 축귀( 逐 鬼 )와 나쁜 기운을 방지하는 벽사( 僻 邪 )의 능력이 있다고 했다. 군자의 덕을 갖춘 닭 닭이 왜 군자의 덕목을 갖췄을까? 중국 한나라 때 한시외전( 韓 詩 外 傳 )이라는 책이 있다. 춘 추시대 때 시경을 해석한 책이다. 여기에 닭은 군자가 갖춰야 할 다섯 가지 덕목을 모두 갖 춘 새라고 했다. 머리의 벼슬은 선비의 모자를 의미하니 글을 읽은 文 을 상징하고, 다리를 들고 싸우는 것은 힘을 뜻하는 武 를 상징한다고 했다. 적을 보면 치열하게 싸우는데 이것은 용( 勇 )을 상징하는 것이요, 먹을 것을 보고도 서로 다투지 않는 것은 인( 仁 )이며 때가 되면 시간을 알려주는 것 은 신( 信 )이라고 했다. 3. 장모님이 씨암탉을 잡아 준다는 것은? #4-1 그러고 보면 씨암탉에는 장모님 입장에서 사위가 갖췄으면 싶은 조건이 모두 포함돼 있다. 먼저 닭은 양조라고 했으니 양기가 넘친다. 몸에 좋고 특히 옛날 남자는 양( 陽 ), 여자는 음 ( 陰 )으로 봤으니 남자에게 좋은 동물이다. 거기에다 한참 알을 낳는 씨암탉이니 몸에 좋은 씨암탉을 먹고 자손을 많이 낳으라는 뜻이 다며 있다. 닭은 귀신을 쫓는 축귀( 逐 鬼 ), 그리고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주는 벽사( 辟 邪 )의 능력 을 갖춘 동물이다. 사위에게 귀신이 달라붙지 않고 나쁜 일이 생기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닭은 군자에게 필요한 다섯 가지 덕목을 갖추고 있는 동물이다. 다섯 가지 덕목을 갖춘 사 람은 사회에서 인정받고 출세를 하기 마련이다. 사위 잘 되라는 소원을 담은 것이다. 그렇다면 사위에게 씨암탉을 잡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 4 -
가장 큰 이유는 맛있는 음식인 닭고기, 옛날에는 귀했던 씨암탉을 잡아 백년손님이라는 사 위를 잘 대접하고 싶었던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 속내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딸을 시집보내며 장모님이 사위에게 바 라는 당부가 담겨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장모가 사위에게 씨암탉을 잡아주는 이유는 그러니까 단순한 몸보신의 차원이 아니었던 것 이다. 문장과 무예와 용기, 인덕과 지혜를 고루 갖춘 닭을 먹고 사위가 다섯 가지 덕( 五 德 ) 을 갖추기를 기원했던 것이며 양의 기운이 넘치는 닭을 먹고 사위에게 양기가 충만하기를 바랐던 것이고 씨암탉을 잡아서 나쁜 기운이 사위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아 딸이 평생토록 평안하기를 기도했던 친정 엄마의 소원이 담겨 있는 것이다. 또 부부금슬이 좋아서 아이 많이 낳고, 사위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군자의 덕목을 갖춰 출세해서 오래오래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면서 우리 딸 호강시켜 달라는 친정어머니의 애틋한 소망이 장모님의 씨암탉에 담긴 속마음이 아닐까 싶다. 씨암탉이 맛있을까? vs 영계가 맛있을까? 일반적으로 닭고기는 어린 닭이 맛있다고 한다. 특히 병아리에서는 예전에 벗어났지만 아 직 알은 낳지 않은 한참 피어오르는 젊은 닭, 씨암탉이 되기 직전의 갓 성숙한 닭고기 제일 맛있다. 고기도 가장 연하고 부드러울 때다. 때문에 영계백숙은 고기 맛이 가장 좋을 때의 젊은 닭을 잡아 통째로 삶는다. 조선 후기문집인 담인집( 澹 人 集 )에는 백숙( 白 熟 )을 만들 때는 어린 닭( 鷄 兒 )으로 요리한다 고 했으니 병아리 상태에서 갓 벗어난 젊은 닭이 바로 약이 된다고 보았던 모양이다. 어린 닭을 표현할 때는 주로 연계( 軟 鷄 ) 혹은 영계( 英 鷄 )라고 표현하는데 표준말은 연계( 軟 鷄 )라고 하지만 실제 영계( 英 鷄 )라는 단어도 있다. 영계는 꽃부리 영( 英 )자를 써서 영계라고 하는데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인 기원전 2세기 무렵의 이아( 爾 雅 )에는 화려하게 꽃을 피웠지만 아직 열매는 맺지 않은 상태를 영( 英 )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니까 영계( 英 鷄 )를 글자 뜻 그대로 풀이하면 어린 닭이 아니라 꽃으로 비유하자면 이 제 막 화려하게 꽃을 피운 성숙한 젊은 닭이라는 뜻이다. 너무 어리지도 않고 너무 늙지도 않은 먹기에 딱 좋은 닭인 것이다. 4. 사위가 미우면 어쩌나? (1) 미운 사위에게는 매생이국 #5-1 사위 사랑은 장모이니 씨암탉을 잡아 사위대접을 하는 것이 보통의 관습이다. 그런데 도대 체 사위가 마음이 들지 않으면 어찌해야 할까?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도 있으니 그래도 사위니까 떡이라도 하나 더 챙겨 먹여야 하는 걸까 아니면 어떻게든 골탕을 먹여 분 풀이를 해야 할까? 전라도 해안 마을 출신 장모라면 이럴 때 굳이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 처갓집에 들린 사위 - 5 -
에게 매생이 국을 끓여 먹이면 된다. 전남의 해안 마을에서는 예전부터 매생이 국을 미운 사위 국 이라고 불렀다. 곱게 키워 시집 보낸 딸을 소홀히 대하는 미운 사위 골탕 먹이기에 안성맞춤이었던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혹시 장모님이 매생이 국을 끓여 주 거나 사주면 처갓집에 미운 털이 박힌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펄펄 끓여 먹는 매생이 국에서 매생이를 잘못 건져 먹으면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겉으로 는 전혀 뜨거워 보이지 않는다고 덥석 물었다가 가느다랗고 촘촘한 매생이 올마다 숨어있는 열기 때문에 여지없이 입천장이나 목구멍을 데기 때문이다. 그러니 장모님에게 미운 털이 박힌 사위는 처갓집에 들렸다가 장모님이 잡아주신 씨암탉 대신에 매생이 국을 먹고 입천정이 훌렁 벗겨지는 수모를 당했던 것이다. (2) 남도 특산물로 임금에게 진상하던 매생이 #5-1 매생이가 서울에 알려진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했지만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그렇지 만도 않았던 것 같다. 적어도 600년 전부터 임금님께 진상했던 전남의 특산물이었고 아는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했던 지역의 명물이었다.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 地 理 誌 )를 보면 전라남도 해안지방의 토산품으로 매생이를 빼놓지 않고 기록해 놓았다. 예를 들어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전라도 토산품으로 매생이( 莓 山 伊 ) 가 있다고 적어 놓았고 동국여지승람을 보완해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매생이의 생산 지역이 자세히 나와있는데 전라도 중에서도 장흥, 나주, 진도, 강진, 해남, 흥양 등의 특산물 이라고 적었다. 매생이는 한번 맛을 보고 그 맛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잊기 힘든 별미였던 모양이다. 선 조 때 학자로 호남의 사림을 대표했던 유희춘이자신의문집인미암일기( 眉 巖 日 記 )에서 해남의 수령이 매생이를 보내주었다며 좋아하는 내용이 실려있다. 조선 성종 때의 학자이며 문인인 성현이 쓴 용재총화( 慵 齋 叢 話 )에도 매생이 이야기가 나온 다. 매생이를 보고 임금님께 바치는 진상 품목으로 궁궐 바깥 사람들이 함부로 먹는 식품이 아니라고 했고 천하의 진미라고 했으니 한양에서는 매생이가 무척 귀했음을 짐작할 수 있 다. 용재총화의 내용으로 보면 매생이는 전라남도 일부 지방에서만 나오는 특산물이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한양에서는 매생이가 무척 귀한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 숟가락 더 영계( 英 鷄 ) 특별히 키운 약 병아리를 가리킬 때도 영계라고 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이 오주연 문장전산고에서 닭에 관한 각종 옛날 기록을 모아서 닭( 鷄 ) 변증설을 써 놓았는데 여기에 명나라 때 의학서인 본초강목( 本 草 綱 目 )을 인용해 영계에 대해 설명했다. 본초강목에 영계법( 英 鷄 法 )이라는 것이 있는데 석영( 石 英 )가루를 닭에게 사료로 먹여서 닭 - 6 -
을 키우는 방법이다. 석영가루를 먹여 키운 닭이 낳은 달걀을 먹으면 양기가 되살아나고 허 해진 기운을 보충할 수 있는데 몸에 살이 올라서 건강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신체에 탄력이 생긴다. 또 겨울에 먹으면 아무리 추워도 추운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영계( 英 鷄 )가 낳은 계란을 먹어도 이 정도이니 영계를 통째로 삶아 먹으면 회춘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몸에 좋은 닭이 영계인 것이다. 본초강목에 나오는 영계는 그러니까 병아리 상 태를 갓 벗어난 어린 닭도 아니고 계란을 낳는 씨암탉이 되기 직전의 갓 성숙한 닭도 아니 고 석영가루를 먹여 특별히 키운 약이 되는 닭( 藥 鷄 )이다. 잠깐만요 조선 닭을 언급한 중국 고문헌 마한에는 꼬리가 긴 장미계( 長 尾 鷄 )가 있는데, 꼬리의 길이가 5척( 尺 )이다. 후한서 장미계는 꼬리가 가늘면서도 길어 길이가 3척이나 되며, 조선국에서 난다. 교광지( 交 廣 志 ) 조선에는 장미계가 있는데 꼬리 길이가 3-4척으로 맛이 살지고 다른 닭보다 좋다. 본초 강목 백제에는 닭이 있다. 수서( 隋 書 ) 닭 가운데 백두( 白 蠹 )란 닭은 살지고 기름졌는데, 조선의 평택( 平 澤 )에서 난다. 본초경 ( 本 草 經 ) 닭은, 약( 藥 )에 넣을 때에는 대개 조선에서 나는 것을 쓰는 것이 좋다. 개보본초( 開 寶 本 草 ) - 7 -
주먹밥 싸서 갈 길 재촉하던 어머니 마음 1. 조선 양반들이 화려한 주먹밥 2. 주먹밥에 관한 옛날 기록들... 3. 한중일 주먹밥 문화의 차이 1. 조선 양반들이 화려한 주먹밥 주먹밥은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다. 주먹밥은 기본적으로 비상 상 황에서 먹는 밥이다. 먼 길을 떠날 때 휴대했던 밥이 주먹밥이고 전쟁터에서 밥을 지어 먹 을 여유가 없을 때 먹었던 밥이고, 피난길에 허기를 면하려고 먹었던 밥이 주먹밥이다. 요즘은 주먹밥도 온갖 재료를 넣고 모양을 내어 예쁘게 만든다. 간단하게는 김치주먹밥에 서부터 볶음주먹밥, 과일을 넣은 과일주먹밥, 달걀말이주먹밥, 야채쌈주먹밥, 멸치주먹밥 등등, 쇠고기와 야채 등 갖가지 재료를 곁들이고, 갖은 양념까지 해서 보기 좋게 여러 가지 로 모양을 낸 주먹밥이 집에서는 물론 식당의 정식 메뉴로까지 등장한다. 그렇다면 옛날에는 지금과 같은 주먹밥이 없었을까? 우리 조상들은 전쟁 중에 혹은 피난길 에, 혹은 먼 길을 떠날 때만 주먹밥을 먹었을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물론 난리가 났을 때 먹는 주먹밥을 온갖 정성을 들여 만들었을 수는 없겠지만 평상시에는 양반들도 먹었던 만큼 요즘 엄마들이 아이들 간식으로 만들어 줄 때처럼 정성을 들여 갖가 지 재료를 넣고 온갖 모양으로 만들어냈던 것 같다. 조선 후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제함반법( 製 餡 飯 法 )이 나오는데 바로 주먹밥 뭉치 는 법이다. 작단( 作 團 )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작은 경단 모양으로 빚었을 수도 있고 주먹 밥이 단반( 團 飯 )이니 보통 주먹밥 크기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규경이 소개한 주먹밥을 보면 멥쌀로 밥을 지어 고명을 넣고 뭉치는데 고명의 특 성에 따라 각각 다른 맛을 낸다고 하면서 채소를 익혀서 현란하게 찧어 둥글게 빚는 주먹밥 이 있다고 했다. 또 콩과 녹두, 팥의 껍질을 벗긴 후 꿀이나 사탕과 함께 끓여 둥글게 만들 기도 하고 대추나 잣가루 꿀과 계피가루 석이버섯 가루를 섞어 둥글게 만들기도 하고 생선 살을 빻아 즙에다 담근 후 기름에 부쳐서 둥글게 빚는다고도 했으니 이것은 어묵과 비슷하 - 1 -
다. 또 고추장에 담그거나 고추를 볶아서 둥글게 빚으며 게장으로도 빚고 새우 알, 전복이나 볶은 홍합, 대하가루로 빚고 기름소금에 김을 구워 가루로도 빚으며. 회와 겨자 장을 섞어서 주먹밥을 만들기도 하는데 접시에 담아 먹는다고 했으니 이렇게 먹으면 주먹밥이 피난길에 먹는 밥이 아니라 훌륭한 요리가 된다. 찹쌀로 주먹밥을 만들기도 했는데 아마 약식을 주먹밥처럼 만들었던 것 같다. 고려 말 목 은 이색의 시에 찹쌀로 주먹밥을 만들었다는 대목이 있는데 끈끈한 찹쌀밥을 둥글게 똘똘 뭉쳐서 꿀로 버무리면 빛깔이 알록달록하고 여기에 다시 대추와 밤, 잣을 곁들이면 입에 달 고 맛이 한층 더 좋다 고 노래했다. 그러면서 이것은 동방의 풍속을 읊은 것이어서 중국 친 구들이 읽어도 알 수가 없을 것이라고 했으니 정월 대보름에 먹는 약식을 주먹밥처럼 뭉쳐 서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콩을 삶아 주먹밥을 만들어 먹는 경우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선조 26년 정무경이라는 사 람이 콩을 삶아서 주먹밥을 만들어 길거리의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구제를 했다며 난리 를 당했음에도 남을 구제할 마음을 가졌으니 마땅히 포상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권장을 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주먹밥은 전쟁이 났을 때 피난길에 먹었던 음식이고 재난이 발생하면 먹었던 구 호품이었으며 다양한 재료와 모양으로 빚으면 양반들이 좋아하는 고급 요리가 되었던 것이 다. 2. 주먹밥에 관한 옛날 기록들... 주먹밥의 기원은 알려진 것이 없다. 뿐만 아니라 특별한 기원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어떤 이유에서건 조상들이 곡식을 이용해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먹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저가 없어서 주먹으로 밥을 뭉쳐 먹었을 수도 있고, 먼 길 떠나면서 혹은 전쟁터에서 밥 을 간편하게 휴대하기 위해 주먹밥을 먹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밥을 손으로 움켜쥐어 주먹처럼 뭉쳐놓은 것이 주먹밥이니 특별히 기원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주먹밥에 관한 가장 빠른 기록은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 제5권 효 선( 孝 善 )편에 보인다. 진정법사( 眞 定 法 師 )에 관한 일화다. 진정법사는 신라 사람으로 젊었을 때 집이 가난해 장가도 들지 못했는데 군에 있을 때에도 품을 팔아서 홀어머니를 봉양할 정도로 효자였다. 불심도 지극해서 어느 날 스님이 절을 지 을 때 필요한 쇠붙이를 구하러 다니니 어머니가 하나 밖에 없는 솥을 시주했다. 아들이 이 를 보고 부처님과 관련된 일에 시주하는 것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냐며 기뻐했다. 그러면서 어머니께 효도를 마치면 머리를 깎고 의상법사에게 가서 도를 닦겠다고 하자 어 머니가 기다릴 것 없이 당장 떠나라고 독촉을 한다. 그러면서 집에 있는 쌀을 모두 털어 보 니 일곱 되가 나왔는데 모두 밥을 해놓고 하는 말이 뜨거운 밥을 먹으면 더디게 갈 것이니 한 그릇은 내가 보는 여기서 먹고 나머지 여섯 그릇은 전대에 넣어 갖고 빨리 가서 승려가 - 2 -
되라고 독촉을 했다. 삼국유사에서 전대에 넣어 갖고 갔다는 밥이 한자로 전대 탁( 橐 )자에 밥 반( 飯 )자를 쓴 탁 반( 橐 飯 )이다. 탁반이 정확하게 어떤 모양으로 생긴 밥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옛날 전대에 넣 어 가지고 다니는 밥이라면 주먹밥이었을 확률이 높다. 신라 때에는 구도의 길을 걷겠다며 먼 길을 떠날 때 먹는 밥이었지만 전쟁이 나면 임금과 왕비도 별 수 없이 주먹밥을 먹으며 피난길을 떠났다. 선조 때 사람인 이식의 택당집( 澤 堂 集 )에 임진왜란으로 피난길을 떠난 중전의 고난이 기록 되어 있다. 어느 마을에 이르렀는데 고을이 모조리 파괴되었으므로 중전이 점심마저 거르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 신하들이 상의하여 보따리에서 주먹밥을 꺼내어 올렸다고 하니 피난길 에 반드시 챙겨야 할 음식이 주먹밥이었고 배가 고프면 임금이나 중전 아니라 누구라도 달 게 먹었던 것이 주먹밥이었다. 일본에 점령 당하고 또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주먹밥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 먹었던 음식이 아니었다. 당장 6,25 전쟁 때 군인들이 참호 속에서 뜯어 먹었던 밥 이 주먹밥이었는데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은 남자는 물론 여자도 행주치마 졸라 매고 하루에 세 끼 먹던 밥을 두 끼로 줄여 주먹밥을 날라야 할 것 이라는 담화를 발표한 다. 동부 이촌동이 지금은 부자들이 사는 동네지만 옛날에는 여름이면 한강이 넘쳐 이재민이 생겼는데 1925년 7월에 큰 물난리가 났는지 주먹밥 600인 분을 만들어 동서부 이촌동 수재 민에게 보냈다는 신문기사도 보이고 사진 설명에는 피난민들이 간신히 주먹밥을 얻어 먹고 있다는 내용도 있으니 우리에게 주먹밥은 눈물 젖은 밥에 다름 아니었다. 3. 한중일 주먹밥 문화의 차이 주먹밥은 한국과 일본에서 주로 발달했던 음식이다. 반면 중국은 우리가 먹는 것과 같은 주먹밥과 관련된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간혹 주먹밥 관련 이야기가 있지만 일부 지방 에 국한되어 나온다. 현대에 들어 일본은 자칭 주먹밥을 요리로 승화시켰다고 자찬하는데 그 중심이 되는 것이 오니기리(おにぎり) 혹은 오무스비(おむすび)다. 오니기리는 주먹으로 움켜쥔다는 뜻에서 생 긴 이름이고, 오무스비는 주먹밥 중에서도 삼각형 형태로 마무리한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삼각 김밥이 형태다. 일본이 주먹밥을 삼각형으로 만드는 것은 일본 고사기( 古 事 記 )에 나오는 세 명의 신을 형 상화해서 삼각형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옛날 일본인들은 산( 山 )을 신격화해서 밥을 산과 같은 삼각형으로 만들어 신령을 내려 받으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먹으로 밥을 잡는 방법에 따라 각이 생겨 삼각형이 될 수 있는데 주로 도쿄 지방 의 주먹밥 만드는 형태라고 한다. 일본의 오니기리는 13-14세기 때인 가마쿠라 시대 후기에 멥쌀로 지은 주먹밥이 발달하는 - 3 -
데 이 주먹밥이 삼각 김밥으로 발전하는 것은 김으로 싸면 주먹밥의 밥알이 손에 달라붙지 도 않고 먹을 때 맛도 더 좋아지기 때문에 김으로 싼 것이 삼각 김밥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 라고 해석한다. 그러니까 일본 삼각 김밥의 기원도 주먹밥을 김으로 싼 것으로 보는데 우리나라 김밥 역시 주먹밥을 김으로 싸 먹게 되면서 현재와 같은 김밥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조선 후기, 순조 때의 동국세시기에는 정월 대보름이면 채소 잎이나 김으로 밥 을 싸서 먹는데 이것을 복쌈( 福 裏 )라고 한다고 적혀 있다.( 以 菜 葉 海 衣 裏 飯 含 之 謂 之 福 裏 ) 특히 전쟁이 잦았던 일본에서 주먹밥은 병사들의 전투식량으로 널리 이용됐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비롯해 각종 전쟁을 일으킨 제국주의 시대 일본 육군은 쌀과 보리밥 1홉으로 끼니 당 2개의 둥그런 주먹밥을 휴대하는 것이 기본 전투식량이었다. 하지만 주먹밥은 전투 중에 만들기도 쉽지 않았지만 밥에 물기가 있어 습기가 많은 일본에서는 금세 쉬어 버리고 겨울 이면 꽁꽁 얼어 먹기가 힘들다. 그래서 주먹밥 대신에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전투식량으로 개발한 것이 건빵이다. 반면 중국에서는 주먹밥에 관한 기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국수록( 國 壽 錄 )이라는 서적에 삼국유사에 나오는 것과 같은 주먹밥인 탁반( 橐 飯 )이 나오는데 산동 사람으로 명나라 때 농 민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서홍유( 徐 鴻 儒 )의 민병들이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두르고 자루에 다 주먹밥을 싸서 넣고 반란에 참여했다고 나온다. 서홍유가 일으킨 반란은 명나라 말기에 일어난 최초의 민란으로 꼽힌다. 또 청나라 때 황숙경이 쓴 대해사차록( 臺 海 使 槎 錄 )에는 중국 남방의 소수민족이 죽통( 竹 筒 ) 에 찹쌀을 넣어 솥에 쪄서 익히고 매일 주먹밥을 만들어 먹으며 따듯하게 데우지 않은 주먹 밥은 외출할 때 허리의 죽통에 넣어 갖고 다닌다고 적어 놓았다. 아마 찹쌀 문화권에 사는 소수민족의 전통으로 주먹밥과 나뭇잎에 밥을 싼 쫑즈와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중국에서 주먹밥이 발달하지 않은 이유는 중국의 음식문화와 관련이 있다. 중국 북방은 밥 이 아닌 밀가루를 중심으로 한 분식문화다. 휴대에 편리한 만두 등이 있기 때문에 옛날 기 준으로 잘 먹지도 않는 밥으로 만든 주먹밥을 만들 이유가 없다. 또 중국의 쌀은 한국이나 일본처럼 찰기가 많지 않아 잘 뭉쳐지지도 않는다. 밥을 주로 먹는 입식 문화권인 화동과 화남 지방에서는 기온이 높기 때문에 주먹밥을 만들 어 장기간 휴대하며 보관하기가 불편하다. 게다가 이들 지역은 찹쌀이 발달한 지역이다. 때 문에 주먹밥 대신 찹쌀을 나뭇잎으로 싼 쫑즈와 같은 음식이 발달했다. 별 것 아닌 주먹밥 하나가 발달하는 과정에도 기후와 풍토, 그리고 음식의 종류 등 다양한 문화가 작용한다. - 4 -
도깨비를 유혹한 메밀묵 학습주제 1. 설화 속에 나오는 메밀묵 (1)한국인에게 도깨비란...? (2)도깨비는 왜 메밀묵을 좋아할까? 2. 한민족이 좋아하는 메밀음식 (1) 메밀은 완벽한 작물 (2) 우리 국수의 뿌리는 메밀국수 3. 언제부터 메밀국수를 먹었을까? 1. 설화 속에 나오는 메밀묵 #1-1 한국인에게 도깨비는 어떤 존재일까? 중국의 귀신이나 서양의 뱀파이어, 흡혈귀와 달리 한 국의 도깨비는 한편으로는 무서운 존재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친근한 존재다. 어떤 면 에서는 재앙을 부르는 무서운 귀신의 이미지보다는 복을 가져다주는 수호신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설화나 동화를 보면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러 금은보화가 쏟아지도록 해서 부자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 어수룩한 장난꾸러기로 오히려 사람들한테 이용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 우리나 라 도깨비다. 그만큼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에게 익숙한 존재다. 그런데 설화에는 도깨비를 유인할 때 반드시 나오는 음식이 있다. 바로 메밀묵과 수수떡, 호박범벅 등인데 도깨비는 왜 이런 음식을 좋아할까? 특히 도깨비들은 메밀묵을 좋아하는데 이유가 무엇일까? 전라도 지방에 전해져 내려오는 옛날이야기 하나. 나무꾼이 그믐날 나무를 하다 어두워진 후에 산에서 내려오는데 도깨비들이 자기네한테 메 밀묵을 쑤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부자로 만들어 주자고 이야기하는 것을 엿들었다. 나무꾼 은 밤새도록 도깨비들이 좋아하는 메밀묵을 만들어 도깨비들이 있는 곳에 가져다 놓았는데 도깨비들이 메밀묵을 먹고 산에다 논밭을 개간해 주어 나무꾼이 큰 부자가 되었다. - 1 -
충청도 지방의 설화 둘 메밀묵을 좋아하는 장난꾸러기 도깨비 이야기가 있다. 농부가 모내기를 하는데 장난이 심 한 도깨비가 와서 논의 모를 싹 뽑아 버렸다. 그리고는 농부가 중얼거리며 하는 말마다 논 에 덜 뽑힌 모가 남아 있으니 싹 뽑아가 주세요 라고 했더니 다음날 예상대로 논에 모가 잔 뜩 심어져 있었다. 이튿날에는 메밀묵을 갖다 놓으며 논이 너무 더러우니 깨끗하게 치워야지 라고 중얼거렸 다. 다음날 가보니 여기 논에 거름이 잔뜩 옮겨져 있았다. 농부는 도깨비들에게 메밀묵을 쑤 어다 주며 항상 거꾸로 빌어서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2-1 우리 조상들은 전통적으로 섣달 그믐날이면 도깨비를 불러 이듬해에 재수가 좋고 부자가 되 기를 빌었다. 이때 도깨비를 꼬시는 음식으로 반드시 메밀묵을 준비했는데 도깨비들이 가 장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설화는 전국적으로 퍼져 있다. 부산과 경남에서는 그믐날 저녁에 메밀을 마당에 뿌려 놓으면 도깨비가 메밀을 보고 찾아 와 복을 주고 간다고 믿었다. 충청도를 비롯해 전 남과 경남 지방에서는 정월 초부터 대보름 사이에 동네 제사인 동제( 洞 祭 )를 지내는데 마을 전체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에서 잡신에게 바치는 음식으로 메밀묵을 준비한다. 도 깨비에게 먹이는 음식이다. 전남 보성의 바닷가 마을에서는 메밀묵이나 메밀떡을 바다에 뿌 리며 도깨비에게 풍어를 기원하는 등 도깨비에게 메밀묵을 먹이는 것이 오랜 전통이고 전국 적인 풍습이다. (1)한국인에게 도깨비란...? #3-1 한국의 도깨비가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하기도 하고 복을 가져다주기도 하는 이중적 존재이 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받들어 모셔야 하는 절대적인 존재도 아니고 복종해야 하는 무서운 귀신도 아니다. 도깨비는 성격도 그렇지만 출신 성분 역시 사람들이 떠받들어 모셔야할 만큼 대단한 존재 가 아니다. 도깨비는 자연물이나 사람이 쓰던 물건이 변하여 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밤길을 가다가 도깨비가 나타나 심술을 부리기에 칡덩굴로 묶어놓고 다음날 가보았더니 헌 빗자루 하나가 묶여 있었다는 이야기나, 나그네가 밤길을 가다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하룻밤을 보내고 아 침에 깨어보니 부지깽이 하나를 안고 누워 있었다는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조선 초기, 정도전은 문집인 삼봉집( 三 峰 集 )에서 도깨비는 산과 바다의 쓸쓸하고 공허한 기 운으로 풀과 나무, 흙과 돌의 정기가 변해서 된 것으로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라고 했 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 역시 성호사설( 星 湖 僿 說 )에서 도깨비는 숲에서 나온다고 했다. - 2 -
그러니까 나무가 도깨비의 출생지이자 서식처다. 이익은 또 오래된 것의 힘이 바람과 합쳐 지면 도깨비가 된다고 했는데 집에서 쓰던 오래된 빗자루나 멍석이 도깨비로 변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깨비는 그러니까 태생 자체가 민중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에 깃든 정령이니까 도 깨비를 크게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우리나라 설화에서 사람들이 오히려 도깨비에게 친밀감 을 느끼는 경우가 이 때문이다. 설화를 보면 도깨비는 서민 편이다. 도깨비에게 혼이 나는 대상은 대부분 못된 양반이나 욕심쟁이 부자이지 서민이 아니다. 오히려 도깨비의 덕분에 부자가 되니 그만큼 서민 친화 적이다. 도깨비가 지닌 초자연적인 신통력은 민중들에게 유익하게 이용된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소원, 예를 들어 돈을 벌고 싶고, 권력을 얻고 싶고, 맛있는 음식 을 먹고 싶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꿈을 도깨비가 이뤄주는 것도 도깨비가 일상생활에서 익숙한 물건이 변한 것이기 때문이다. 잘못 쓰면 해코지를 할 수도 있지만 평소에는 또 도 움이 되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2)도깨비는 왜 메밀묵을 좋아할까? #4-1 도깨비는 출신 성분부터 서민 친화적이니 도깨비가 즐겨 먹는 음식도 서민들이 많이 먹고 좋아하는 음식이 될 수밖에 없다. 메밀묵을 좋아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메밀은 조선시대에 서민들이 보편적으로 먹었던 양식이다. 양반이 아닌 상민들은 명절 때 가 아니면 감히 쌀밥은 구경하기도 힘들었고, 보릿고개 넘기기도 쉽지 않았을 만큼 보리도 귀했다. 반면 메밀은 구황작물로 벼농사를 끝낸 후 짧은 기간에 심어 부족한 양식을 보탤 수 있으니 서민들에게 친숙한 곡물이었다. 따지고 보면 곡식으로 만든 전통음식 중에서 쌀로 만드는 밥이나 떡을 제외하면 다른 대부 분의 음식, 즉 국수나 떡 등이 모두 주로 메밀로 만들었을 만큼 메밀은 우리에게 낯익은 곡 식이다. 메밀묵은 그 중에서도 농민들이 농사를 끝낸 후 갓 수확한 메밀로 묵을 만들어 겨 울나기를 준비하며 먹었던 별미 음식이다. 메밀묵을 쑤면 자신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영물인 도깨비에게 먼저 메밀묵을 대접했으니 설화에서 도깨비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 역시 메밀묵으로 설정했을 것이다. 더욱이 메밀은 오방의 영물이라고 해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작물이라며 도깨비에게 묵을 주고는 때로는 해 코지를 하지 말라고 빌고, 때로는 복을 가져다 달라고 소원을 말했던 것이다. 2. 한민족이 좋아하는 메밀음식 (1) 메밀은 완벽한 작물 우리나라 사람은 메밀과 심정적으로 친숙하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의 서정과 한밤중 메밀 묵 사려 라는 외침 소리에 한국인은 향수를 느낀다. 메밀이 오랜 세월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 - 3 -
았던 음식이기 때문이다. 밀가루가 드물었던 시절, 우리 조상들은 지금은 밀가루로 만드는 음식의 대부분을 메밀가루로 만들었다. 냉면, 막국수에서부터 메밀나물, 메밀누룩, 메밀떡, 메밀만두, 메밀묵, 메밀밥, 메밀부침, 메밀산자, 메밀소주, 메밀수제비, 메밀쌀 등에 이르기까 지 메밀은 한국 음식문화의 한 축을 맡아왔다. 심지어 메밀은 음식뿐만 아니라 여자들이 화장할 때도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비누 가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얼굴을 치장할 때 분 대신에 분꽃 씨를 갈아서 쓰거나, 메밀가루로 대신했고 부잣집 규수들이나 진주를 꼽게 빻아서 사용했다. #5-1 지금은 메밀이 건강에 좋은 웰빙식품, 참살이 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불과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밀가루, 분식에 밀려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메밀은 옛날 흉년이 들었을 때 먹었던 구황작물로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메밀은 예전부터 오방지영물( 五 方 之 靈 物 ) 다시 말해, 하늘이 인간을 위해 땅에 내 려 보내준 완벽한 작물이라고 불렀다. 세상을 동서남북으로 구분하면 사방( 四 方 )이 되지만 여기에 가운데( 中 )를 더하면 오방( 五 方 ) 이 된다. 오방은 천지의 조화를 상징하고 우주의 이치가 담겨있다. 메밀을 오방지영물 이라 고 한 것은 소중한 곡물인 동시에 영양의 균형을 이뤄 건강에 좋은 작물이기 때문인데 음양 오행을 기본으로 하는 동양철학과 약식동원의 동양의학에서 메밀은 완벽한 작물이라는 뜻이 다. 메밀은 잎은 파랗고( 靑 ), 꽃은 흰색( 白 )이며, 줄기는 붉고( 赤 ), 열매는 까맣고( 黑 ), 뿌리는 황 ( 黃 )색으로 오방의 색( 五 方 之 色 )을 모두 갖춘 작물이라고 했다. 오방의 색 은 세상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방위, 즉 동서남북과 가운데를 대표하는 색이다. 파란 색은 동( 東 ), 흰 색은 서( 西 ), 붉은 색은 남( 南 ), 검은 색은 북( 北 ), 황색은 가운데( 中 )를 상징한다. 그러니까 다섯 가지 색깔을 모두 갖추고 있는 메밀은 음양오행설에서 자연을 구 성하는 모든 요소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는 식물이 되는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의학서인 황제내경( 黃 帝 內 經 )에는 다섯 가지의 색( 五 色 )의 음식이 조화를 이루면 건강에 이롭고 장수( 養 生 )할 수 있다고 했다. 약식동원( 藥 食 同 源 ) 의 개념에서 우주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의 색깔이 있는 음식을 균형 있게 섭취하면 병에 걸리지 않고 건 강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장은 폐장( 肺 臟 ) 심장( 心 臟 ) 비장( 脾 臟 ) 간장( 肝 臟 ) 신장( 腎 臟 )의 오장( 五 臟 )을 갖추었 다. 그런데 작물 중에서도 검은 색 작물은 콩팥인 신장( 腎 ), 붉은 색( 赤 )은 심장( 心 ), 파란 색 ( 靑 )은 간장( 肝 ), 하얀 색은 폐( 肺 ), 노란 색( 黃 )은 지라인 비장( 脾 )에 이롭다는 것인데 메밀은 이런 다섯 가지의 색깔을 모두 갖춘 작물이기 때문에 식물 중에서도 완벽한 작물에 속한다 는 것이다. - 4 -
(2) 우리 국수의 뿌리는 메밀국수 #5-1 우리나라의 전통국수는 메밀국수다. 메밀로 국수를 뽑아 냉면, 온면, 막국수 등 다양 한 국수를 만들었다. 요즘 국수는 밀가루로 만들지만 옛날에는 밀가루 국수는 결혼식이나 환갑날 같은 특별한 날에나 맛볼 수 있었다. 때문에 잔치국수라는 이름이 생겼다. 우리가 흔하게 밀가루 국수를 먹게 된 것은 해방 이후 특히 한국전쟁 때 미국에서 구호물 자로 밀가루가 쏟아져 들어오면서부터다. 20세기 초반, 최남선도 조선상식문답( 朝 鮮 常 識 問 答 )에서 요즘은 국수라고 하면 밀가루 국수를 떠올리지만 옛날에는 메밀국수를 일컫는 말이 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밀은 18세기 이후부터 생산이 늘어난다. 그렇지만 밀가루 음식이 널리 퍼지 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19세기 순조 때 조재삼이 쓴 송남잡지( 松 南 雜 識 )라는 책에 여전히 국 수는 밀가루로 만드는데 우리나라는 주로 메밀가루로 만든다고 적혀있다. 메밀국수를 거칠게 만들면 막국수가 되고 고급스럽게 만들면 냉면과 온면이 된다. 특히 메 밀은 차갑게 먹어야 제 맛이 나는데 메밀국수가 일반적이었던 우리나라에서 냉면이 발달한 이유다. 3. 언제부터 메밀국수를 먹었을까? #6-1 메밀국수는 한국과 일본에서 발달했다. 일본에도 메밀국수인 소바가 발전했지만 중국은 메 밀국수가 드물다. 하루면( 河 漏 麵 )이라는 메밀국수가 있지만 즐겨 먹지는 않는다. 왜 이런 차 이가 생겼을까? 한국과 일본은 메밀 농사가 많았던 반면 중국은 밀농사 위주였다. 또 밀가루 국수와 달리 메밀국수는 늦게 만들어졌다. 메밀은 국수로 뽑기가 힘들다. 메밀 자체가 끈기가 적은데다 열을 가하면 쉽게 끊어져 면발을 기다랗게 늘리기 힘들다. 때문에 길게 늘려 뽑는 밀가루 국수와 달리 메밀은 틀에다 넣고 눌러서 국수를 뽑는다. 메밀국수는 밀국수보다 약 500년 정도 늦은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는 원나라 때 왕정이 쓴 농서( 農 書 )에 처음 보인다. 메밀( 蕎 麥 ) 조항에서 북방에서는 메밀의 껍질을 벗겨 맷돌로 갈아 국수를 만드는데 이것이 하루면( 河 漏 麵 )이라고 한다 고 나온다. 하루면 제조에는 반드시 국수틀인 하루상( 河 漏 床 )이 필요한데 중간에 원통이 있고 그 아래 구멍이 있어 반죽을 아래로 눌러 만든다고 했으니 우리나라의 메밀국수 만드는 법과 같다. 우리는 언제부터 메밀로 국수를 뽑았을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중국과 비 슷한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2세기인 1123년 송나라 사신 일행으로 고려를 다녀간 서긍이 쓴 고려도경( 高 麗 圖 經 )에는 고려 안에는 밀이 적어 상인들이 중국에서 사오기 때문에 국수는 값이 대단히 비싸서 큰 잔치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 는 기록이 보인다. 밀가루로 만든 국수이야기이지만 당시에는 메밀국수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14세기, 고려 말의 충신 목은 이색은 메밀국수( 白 麪 )을 배불리 먹었다는 시를 남겼다. - 5 -
밀이 부족했던 고려에서는 상대적으로 풍부한 메밀을 이용해 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당시 로서는 상당히 고급음식이었던 국수를 발전시켰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은 치킨 등을 대표 야식으로 꼽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전에 가장 즐겨 먹었던 야참 중의 하나가 메밀묵이다. 농사가 끝난 시골에서 마을에서 겨울밤이면 남자들은 사랑방에 모 여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짜면서, 여자들도 길쌈을 하고 수다를 떨면서 겨울을 보냈다. 이 때 추렴해 먹었던 음식이 메밀묵이고 메밀국수다. 굳이 시골출신이 아니더라도 메밀묵에는 어려운 시절을 살았던 부모 세대의 서정과 향수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60년대, 그리고7080세대들은 통행금지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고학생들이 외치고 다녔던 메밀묵이나 찹쌀떡 소리를 기억한다. 국민보 라는 지금은 폐간된 신문의 1959년 2월 29일자 기사에 메밀묵을 먹고, 팔면서 어려 운 시절을 견뎠던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 세대의 애환이 그려져 있다. 찬바람이 부는 거리를 헤매며 찹쌀떡, 메밀묵 사려 라는 소년들의 외침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정심을 유발시킨다. 찹쌀떡과 메밀묵은 낮에 시장에서 팔지 않는 것은 아니나, 밤 이면 더구나 겨울의 기나긴 밤에 할 일 없이 앉아 있는 사람들의 구미를 돋우어 준다 우리나라 전래 동화나 설화에 도깨비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왜 메밀묵을 비롯한 메밀로 만 든 음식이 자주 등장하는지, 그리고 우리나라 도깨비는 왜 귀신과 달리 무서우면서 동시에 친근한 이미지인지 짐작할 수 있다. 무심코 먹는 음식이고, 당연하게 여겼던 사실이지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처 생각 하지 못했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고, 미처 몰랐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참고문헌 삼봉집( 三 峰 集 ), 도깨비에게 사과하는 글( 謝 魑 魅 文 ), 정도전( 鄭 道 傳 ) 성호사설( 星 湖 僿 說 ), 이익( 李 瀷 ) 국민보, 1959년 2월 29일자 곡유구문( 曲 洧 舊 聞 ), 주변( 朱 弁 1085-1144) - 6 -
웃어라 돼지머리! 학습주제 1. 고사와 돼지머리 (1)왜 하필 돼지머리일까? (2) 돼지머리는 미신일까? 2. 돼지와 우리 민족 (1)신과 인간을 잇는 소통의 매개체 (2)돼지는 그 자체가 신이다 (3) 돼지는 북두칠성의 화신 3. 왜 돼지를 숭배했을까? 1. 고사와 돼지머리 (1)왜 하필 돼지머리일까? #1-1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비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풍습인데 그렇기 때 문에 한국에 오래 살았던 외국인들도 한국에 살면서 가장 재밌는 진풍경으로 고사상의 돼지 머리를 꼽는다. 큼지막한 돼지머리에 너도 나도 절을 하면서 코와 입에 지폐를 꽂고 사업이 번창하기를 빌 고, 공사가 아무 탈 없이 마무리되기를 비는 것이 외국인뿐만 아니라 이제는 우리에게도 낯 설고 진기한 풍경으로 비춰진다. 고사상에 돼지머리를 놓고 비는 풍속은 옛날부터 전해진 풍속이다. 풍년을 기원하거나 임 금이 하늘에 제사를 올릴 때도 돼지머리를 제물로 바쳤는데 예전부터 이어진 전통이니까 고 사상의 돼지머리를 당연한 풍습으로 여기지만 왜 하필 돼지머리였을까? #1-1 (2) 돼지머리는 미신일까? 고사상에 돼지머리를 올려놓는 이유는 돼지가 재물과 복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물이기 때 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꿈에 돼지를 보면 복이 온다, 음식을 얻는다. 돼지를 잡으면 대길하 다며 길몽으로 생각한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예전 새해 첫 돼지날인 정월( 正 月 ) 상해일 ( 上 亥 日 )에 장사를 하면 좋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왜 돼지가 재물과 복을 가져다주는 동물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다. 먼저 돼지는 집에서 기르는 가축으로 소중한 재산이 된다. - 1 -
때문에 돼지를 재물과 동일시했다. 또 돼지의 한자인 돈( 豚 )과 화폐인 돈( 金 )의 발음이 같기 때문에 돼지를 재물로 여겼다. 돼 지는 한 배에 여러 마리씩 새끼를 낳는데다 잘 먹고 잘 자라서 번식력이 뛰어나다. 때문에 돼지가 재물과 복을 상징하게 됐다는 것이다. 무속에서는 고사상에 돼지머리를 올리는 이유를 돼지는 집안에서 키우는데 돼지를 양육할 때 집안의 음식 잔여물 및 오물을 먹고 성장하여 우리에게 양식이 되어주기 때문에 집안의 안 좋은 기운을 소멸하고 운을 달라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돼지의 생김새, 돼지의 속성을 들어 돼지가 재물과 복을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해석하는데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일차원적인 단순한 해석인데다 돼지의 생김새, 돼지의 속성 때문에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돼지한테 소원을 빈다면 미신 중에서도 그런 미신이 없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근거 없는 단순한 미신을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믿었기 때문에 고 사상에 돼지머리를 올리는 것이 전통으로, 민속으로, 풍속으로 굳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사상에 돼지머리를 올리는 것이 미신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이유로 돼지머리를 올렸던 것일까? 돼지는 한민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2. 돼지와 우리 민족 (1)신과 인간을 잇는 소통의 매개체 우리나라 고대 신화나 설화 등에는 돼지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통로, 신과 인간을 잇 는 소통의 매개체로 자주 등장한다. 때문에 고대로부터 돼지를 제물로 쓴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고사상에 돼지머리를 올리는 이유도 돼지가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통로이자 매개 체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2-1 먼저, 삼국사기에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은 하늘의 계시를 받은 돼지를 통해 발견한 장소 였다. 돼지 덕분에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길 수 있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유리왕( 琉 璃 王 ) 19년 8월, 그러니까 서기 1년에 제사에 쓸 돼지( 郊 豕 ) 가 달아났다고 적혀있다. 교( 郊 )는 제사를 지내는 장소이고 시( 豕 )는 돼지를 말한다. 왕이 두 사람을 시켜 달아난 돼지를 잡아오도록 했는데 이들이 늪에서 돼지를 발견하고 칼 로 돼지 다리의 힘줄을 끊었다. 왕이 이를 듣고 노해 어찌 하늘에 제사를 지낼 희생에 상 처를 낼 수 있는가? 라며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던져 죽였다. 제물용 돼지가 사람 목숨보 다 소중했던 것 같다. - 2 -
유리왕 21년에도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났다는 기록이 나온다. 돼지를 쫓던 신하가 돌아와 보고하기를 국내성( 國 內 城 )에서 도망간 돼지를 잡았는데 그곳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지형이 깊고 험하며 땅에 곡식을 키우기 알맞고 짐승과 물고기도 많아 수도를 옮긴다면 백성에게 이롭고 전쟁이 일어나도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유리왕은 이 말을 듣고 고구려의 수도를 졸본( 卒 本 )에서 옮겨 천도를 하는데 국내성은 중 국의 길림성 집안( 輯 安 )현으로 보고 있다. 하늘이 돼지를 통해 수도를 옮기라는 계시를 내려 준 것이다. 삼국사기에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돼지 덕분에 임금이 후궁을 얻고 후계자인 아들까지 얻을 수 있었다. 고구려 제10대 왕인 산상왕( 山 上 王 ) 때에도 제사에 쓰려던 돼지가 도망을 갔다. 산상왕은 아들이 없어 하늘에 기도를 하고는 했다. 즉위 12년 겨울인 11월에 제사 때 쓸 돼지가 주통 촌이라는 곳으로 도망을 갔는데 그곳에 절세미인의 여자가 있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밤에 여인의 집을 찾아가니 여인의 집에서 거절을 하지 못하고 합방을 했다. 13년 3월 왕비가 주통촌 여자를 질투해 몰래 군사를 보내 죽이려 하니 여자가 아기를 가 졌다고 하자 왕이 무척 기뻐했다. 때문에 왕비가 그 여자를 죽이지 못했다. 그리고 9월에 아 들을 낳았는데 산상왕이 기뻐하며 제사에 쓸 돼지를 부르는 말인 교시( 郊 豕 ) 로 말미암아 아들을 얻었기 때문에 왕자의 이름을 같은 뜻의 교체( 郊 彘 ) 라고 지었다. 시와 체 모두 한자 로 돼지라는 뜻이다. 고구려에서는 돼지가 신과 통하는, 신의 계시를 전달하는 영물로 여겼던 것이다. 고려가 수도를 송도, 지금의 개성으로 정한 것도 돼지의 도움 때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조상들의 내력을 적은 고려사( 高 麗 史 ) 고려세계( 高 麗 世 系 )에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작제건( 作 帝 建 )은 고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다. 고려가 세워진 후 의조( 懿 祖 )로 추존됐다. 작제건이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서해의 용왕에게 칠보와 돼지를 얻었다. 돼지를 싣고 돌아 온 작제건이 예성강 강가에 이르러 그곳에 영안성( 永 安 城 )을 쌓고 저택을 지었다. 그런데 용왕에게 얻어 온 돼지가 1년이 지나도록 우리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 러자 작제건이 돼지에게 말하기를 "만약 이 땅이 살만한 곳이 못된다면 나는 장차 네가 가 는 곳을 따라 가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돼지가 길을 떠나 지금의 개성인 송악 남쪽 기슭에 이르러서 그곳에 드러누 우니, 그곳은 공교롭게도 그의 할아버지인 강충이 예전에 살던 집터였고, 그로 인하여 마침 내 이곳에 새 집을 지었다. 고려가 도읍지를 개성에 정하게 된 내력인데 고구려처럼 돼지가 신의 계시를 받아 수도를 정했다는 것이다. (2)돼지는 그 자체가 신이다 #3-1 - 3 -
고사상에 돼지머리를 놓는 이유, 돼지를 통해 소원을 비는 이유가 단지 돼지가 역사적으로 또 신화에서 신과 인간을 잇는 소통의 매개체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따지고 보면 돼지 는 그 자체가 신이었다. 돼지 자체가 재물과 복을 내려주는 신이었을 수 있고, 또 하늘과 인간을 잇는 소통의 역할 을 했기 때문에 돼지머리를 놓고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동양,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먼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고대의 돼지를 숭배하는 돼지 토템신앙과 도교신앙, 불교신화, 그리고 무속신앙이 복합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돼지를 숭배하는 신앙에는 북두칠성이 하늘과 인간 세상을 다스린다는 고대의 동 양 천문사상과 도교사상이 가장 큰 배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과 기상을 하늘의 뜻으로 여겼던 옛날에는 밤하늘에 떠있는 북두칠성에 살고 있는 신 들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믿었다. 도교의 북두칠성 숭배 신앙이 그것이다. 불교 사찰에 모셔 진 칠성당 역시 북두칠성 숭배신앙의 결과다. 북두칠성 신앙은 이렇게 불교가 들어오면서 수용되고 도교가 들어오면서 더욱 두드러져 민 중 신앙으로 발전했다. 특히 도교에서 두칠성은 인간의 수명과 복을 담당했든데 칠성 신앙 은 조선시대에 두드러졌지만 고구려 시대부터 존재했다. (3) 돼지는 북두칠성의 화신 #4-1 예전 할머니들은 비나이다, 비나이다, 칠성님께 비나이다 라며 칠성당에서 치성을 들였는데 소원을 비는 대상이 바로 옥황상제가 사는 곳이며 신들이 있는 북두칠성이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북두칠성을 동물에 비유했는데 오잡조( 五 雜 俎 )*에서는 북두칠성의 형태가 마치 돼지의 형태( 豕 狀 )을 닮았다고 해서 북두칠성 자체를 돼지로 보고 있다. 오잡조( 五 雜 俎 )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당나라 때 일행( 一 行 )이라는 승려가 혼천사( 渾 天 寺 )라는 곳에서 돼지 무리를 포박해 잡았더니 즉각 북두칠성이 하늘에서 사라졌다 돼지 와 북두칠성을 동일시했다는 증거다. 또 서무공( 徐 武 功 )이라는 사람이 북두칠성 신봉자여서 평생 돼지고기( 豕 肉 )을 먹지 않았다. 어느 날 시비에 걸려서 어려움에 처했는데 하늘에서 북두칠성이 변한 일곱 명의 사자가 내 려와 구해줬다. 신화이니까 지금 기준으로 황당하게 들릴 수밖에 없지만 옛날 사람들이 북두칠성이 변신한 것이 돼지의 모습이고, 또 북두칠성을 신앙으로 믿었다는 증거가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북두칠성 자체가 돼지가 아니라 돼지가 북두칠성에 사는 신중의 한 명으 로 그려지기도 한다. 돼지가 하늘에서 쫓겨 온 신이라는 믿음의 원형은 소설 서유기에서 볼 수 있다. 저팔계는 죄를 짓고 하늘나라에서 쫓겨난 돼지 신으로 천상에서는 천봉원수( 天 蓬 元 帥 )였다. 술에 취해 선녀인 항아를 희롱했다가 천상세계에서 인간세계로 쫓겨났다. 땅으로 내던져질 때 착오로 사람이 아닌 돼지 탯줄을 던져서 인간의 몸에 돼지 머리를 하고 나온 것이다. - 4 -
저팔계로 상징되는 돼지는 바로 북두칠성에 사는 신( 豕 神 )이었다. 그것도 서열상으로 첫 번 째 신인 천봉( 天 蓬 )으로 사람의 수명과 부귀와 영화 그리고 자손의 번창을 주관하며 종과 자를 갖고 다니면서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인간의 수명을 관장했을 뿐만 아니라 도량형의 기준인 자를 가지고 다니면서 곡식과 재물 을 관할했다. 돼지가 재물과 연결되는 이유다. 3. 왜 돼지를 숭배했을까? #5-1 고대에 돼지를 숭상한 이유는 다각적으로 찾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옛날 사람들의 돼지 토템 신앙이 그 뿌리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서양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대 동양에서 돼지 토템은 상당히 넓게 퍼져있었다. 예를 들어 중 국에서 가장 오래 된 신화책인 산해경( 山 海 經 )**에는 중국인의 시조라고 하는 황제( 黃 帝 )의 자손이 돼지에서 비롯됐다고 나온다. 황제의 아내 뇌조가 창의를 낳았는데 창의는 약수에 내려와 살며 한류를 낳았다. 한류( 韓 流 )는 길쭉한 머리에 작은 귀, 사람의 얼굴에 돼지주둥이( 猪 喙 ), 비늘 돋힌 몸에 통뼈로 된 다리, 돼지발( 猪 止 )를 하고 있었는데 촉산씨의 자손인 아녀를 맞아 전욱 임금을 낳았다 전욱( 颛 頊 )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삼황오제( 三 皇 五 帝 ) 중 한 명으로 천하를 잘 다스려 태평 성대를 이룬 인물이다. 고대 중국에 퍼졌던 돼지토템의 한 예다. 우리나라에도 단군신화의 곰 토템 신앙처럼 돼지 토템이 있다. 신라 때의 학자 최치원의 출생 신화가 돼지 토템의 한 예다. 어느 고을에 갑자가 금돼지가 나타나 마을 사람과 고을원님의 부인을 잡아갔다. 원님이 돼 지가 사슴 가죽을 무서워한다는 말을 듣고 사슴가죽으로 부인을 구했다. 그런데 돌아 온 부 인이 아이를 가져 아이를 낳았는데 바로 최치원이다. 이로 인해 후세 사람들은 최치원의 후 손을 금돼지의 자손이라고 했다. 옛날 사람들이 돼지를 숭상했던 이유다. 고사상에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사업의 번창과 집안의 안녕, 그리고 재물이 풍성하기를 비 는 이유는 단순히 무지몽매한, 옛날 사람들의 미신 때문만은 아니었다. 돼지머리에 돈을 꽂아 놓고 비는 이유는 먼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돼지 토템신앙에다, 돼지가 북두칠성의 화신이라는 도교적 신앙과 우리 민족 고유의 칠성 신앙, 그리고 삼국사 기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돼지를 하늘과 인간을 연결짓는 매개체라는 믿음 등이 복합적 으로 얽히면서 만들어진 풍속일 것이다. 고사상의 돼지머리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맹목적으로 미신으로 몰아세울 것도 아니 고, 진기하고 우스운 풍경으로 삼을 것도 아니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우리 민족의 신화와 신 앙, 그리고 풍속의 의미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 - 5 -
*오잡조( 五 雜 俎 ), 사조제( 謝 肇 制 )가 쓴 중국 명나라 때의 백과사전 형태의 수필집 **산해경( 山 海 經 ),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지리서이며 신화책 - 6 -
한국인의 보신탕 갑론을박 학습주제 1. 보신탕, 혐오식품인가 vs 전통문화인가 (1) 보신탕 혐오 논쟁 (2) 보신탕이 싫어 발달한 육개장 2. 복날이란... 보신탕과의 관계 (1) 복날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2)복날은 귀신이 엎드려 있는 날? 3. 복날 왜 보신탕을 먹을까? (1) 복날 왜 보신탕을 먹을까? (2) 왜 굳이 보신탕이었을까? 4. 왜 굳이 한국만 보신탕이 있을까? (1) 한국인만 보신탕을 먹는 까닭은...? 1. 보신탕, 혐오식품인가 vs 전통문화인가 (1) 보신탕 혐오 논쟁 #1-1 보신탕 논쟁에 대해서도 왜 우리는 보신탕을 먹었는지, 다른 나라에 비해 보신탕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적었는지 그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보신탕만큼 극단적으로 좋고 싫음이 분명하게 엇갈리는 식품 도 드물다. 개고기 먹는 것 자체를 혐오하는 사람도 많지만 보신탕 예찬론을 펼치는 사람도 드물지만은 않다. 보신탕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조상들이 먹었던 음식 이니, 한국 고유의 음식문화이고 그만 큼 맛있고 영양이 풍부한 보신 음식 도 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보신탕 찬반 논쟁은 형태만 달리할 뿐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보신탕은 주로 복날 먹었다. 동국세시기( 東 國 歲 時 記 )에도 삼복에는 개장국을 먹는다고 했다. 개고기를 파와 함께 푹 삶은 것을 개장국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산초가루(고춧가루)를 치고 흰밥을 먹으면 삼복의 시절음 식이라고 했다. 닭고기와 죽순을 넣으면 더욱 좋은데 보신탕을 먹고 땀을 흘리면 더위도 물 리치고 몸에도 좋으니 저잣거리에서도 판다고 기록돼 있다. - 1 -
(2) 보신탕이 싫어 발달한 육개장 #1-1 조선시대도 어떤 이유에서건 보신탕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 朝 鮮 常 識 )에서 육개장은 전통적으로 삼복더위 때 보신탕을 대체했던 음식이라고 했다. 삼복이 면 개를 삶아서 자극성 있는 조미료를 얹은 개장 을 계절음식으로 먹었는데 개고기가 몸에 맞지 않는 사람은 쇠고기로 대체를 한 육개장을 먹었다는 것이다. 육개장이라는 이름도 개 장은 원래 개고기로 끓인 장국이라는 뜻에서 개 구( 狗 )자, 구장( 狗 醬 )이지만 개고기 대신에 쇠고기를 넣었기 때문에 고기 육( 肉 )자를 써서 육개장이다. 육개장이 발달했다는 것은 그만 큼 개고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반대로 보신탕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임금께 맛있는 요리를 만들 어 바쳐 출세한 사람이 여럿 있다. 더덕 요리로 정승자리에 올라 사삼각로( 沙 蔘 閣 老 )라는 소 리를 들었던 한효순( 韓 孝 純 ), 잡채를 잘 만들어 잡채상서( 雜 菜 尙 書 )라는 별명을 얻은 호조판 서 이충( 李 忠 )도 있다. 둘 다 광해군에게 맛있는 요리로 아부해 출세했다고 세간의 눈총을 받았던 인물이다. 조선에는 개고기를 잘 구워 벼슬을 한 사람도 있다. 가장주서( 家 獐 注 書 )라는 벼슬을 한 이 팽수( 李 彭 壽 )라는 인물이다. 가장주서 는 이팽수를 비꼬는 말인데 주서 는 승정원의 정7품 벼슬로 역사 기록물인 사초( 史 草 )를 담당하는 벼슬이다. 가장 은 집에서 기르는 노루( 獐 )라는 뜻이니 개를 뜻한다. 그러니까 가장주서( 家 獐 注 書 )는 개고기로 주서 벼슬을 얻은 작자라고 비꼬는 말이다. 중종 때 세도가였던 김안로( 金 安 老 )가 평소 개고기를 무척 즐겨 먹었는데 이팽수가 살찐 개를 구해다 바치며 구미를 맞추고 벼슬을 얻었기에 생긴 별명이다.* 2. 복날이란... 보신탕과의 관계 (1) 복날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보신탕은 주로 복날에 먹는다. 복날은 언제부터 시작됐고, 복날이 개와 어떤 관계가 있기에 복날 보신탕을 먹었던 것일까? 사마천의 사기( 史 記 ) 에는 진나라 덕공( 德 公 ) 2년, 복날에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짓고 개를 죽여 벌레 로 인한 피해를 막았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진( 秦 )은 진시황 무렵이 아닌 훨씬 이 전 춘추시대의 제후국을 말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덕공 2년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 훨씬 전인 기원전 676년이다. 복날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실린 사기 에는 복날 개를 잡았다는 기록이 두 군데에 나온 다. 하나는 진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진본기( 秦 本 記 ) 로 덕공 2년, 초복에 개고기를 잡아서 - 2 -
벌레를 막았다고 했다. 한자 원문으로는 어고( 禦 蠱 ) 라고 썼다. 조선후기의 동국세시기 에는 사기 를 인용해 진나라 때 복날 사당을 짓고 개를 죽여 벌 레로 인한 피해인 충재( 蟲 災 ) 를 막았다고 나온다. 여기서 한자 고( 蠱 )와 충( 蟲 )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둘 다 벌레라는 뜻인데 고 라는 한자 는 해석하기에 따라 보통 해충일 수도 있지만, 옛날에는 눈에 보이는 벌레가 아니라 뱃속에 있는 벌레를 뜻했다. 사기의 주석에는 뜨겁고 나쁜 기운( 熱 毒 氣 )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니까 벌레 고는 농작물을 해치는 해충이나 파리, 모기와 같은 벌레를 의미한다기 보다 는 전염병을 옮기는 기생충이나 바이러스성 세균을 말하는 것으로 벌레에 의한 피해를 막았 다는 뜻의 어고 는 전염병을 예방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복날 개와 관련된 또 다른 기록은 사기 십이제후연표( 十 二 諸 侯 年 表 ) 에 나오는데 여기에 는 덕공 2년에 처음으로 복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짓고 개고기를 찢어서 성문 네 곳에 걸었다고 적혀있다. 사기에 나오는 한자와 연결해 해석하면 무더운 여름철에 퍼지는 전염병인 역질( 疫 疾 )을 막 으려고 개고기를 걸어 두어 나쁜 기운이 성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2)복날은 귀신이 엎드려 있는 날? #2-1 복날은 귀신이 엎드려 숨는 날이다. 중국 한나라 역사를 기록한 한서( 漢 書 ) 중에서도 제례 관련 기록을 모은 교사지( 郊 祀 志 ) 에 복은 음기가 장차 일어나려다 아직 남아있는 양기의 기세에 눌려 엎드려 숨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래서 복날( 伏 日 )이라는 것인데 복( 伏 )은 엎드 리다, 숨어있다 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음기를 나쁜 기운이라고 믿었다. 때문에 속된 말로 복날은 귀신이 판치는 날이라 고 생각했다. 후한서( 後 漢 書 ) 에는 이날 모든 귀신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하루 종일 문을 닫 고 다른 사람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는 복날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특별한 음식 을 먹기도 했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모두 귀신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다. 당나라 학자 구양순( 歐 陽 詢 )이 쓴 예문유취( 藝 文 類 聚 )에 당시의 복날 풍습을 그린 시가 실 려 있다. 시의 내용을 풀어보면 삼복 무렵이면 도로에 지나다니는 행인이나 수레가 끊기며 문을 닫고 더위를 피해 누워 지내며 서로 내왕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혹시 손님이 왔다는 소리를 들은 주인은 눈살을 찌푸리고 입술을 삐죽이 내민다고 했고 부채를 너무 휘둘러 어 깨가 다 아픈데 땀은 쏟아지듯 흐르고 전하는 이야기가 아무리 고상하더라도 이렇게 더운 날 찾아와서 보자는 것은 꾸짖어 마땅한 일이라고 적었다. 복날의 유래, 복날 음식 등을 감안해서 해석하면 복날은 여름 더위를 피하는 날, 여름철 건 강에 주의하고 전염병을 막자는 날이었을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3. 복날 왜 보신탕을 먹을까? - 3 -
(1) 복날 왜 보신탕을 먹을까? #3-1 사마천의 사기에 남긴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복날 보신탕을 먹는 이유는 나쁜 기 운을 피하기 위한 것,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고 전염병을 예방하자는 의미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6세기 형초세시기( 荊 楚 歲 時 記 )에는 복날 뜨거운 국을 먹는 것은 나쁜 기운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으니 뜨거운 국과 고기로 영양도 보충하고 전염병도 예방했던 것이다. 고대에는 영양 때문에 보신탕을 먹었지만 문화가 발전하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철학적, 종 교적 해석이 덧붙여진다. 먼저 복날 뜨거운 보신탕을 먹는 이유를 이열치열로 뜨거운 국을 먹음으로써 더위를 물리 치고 영양을 보충하는 실용적 이유와 개고기로 잡귀를 쫓아낸다는 주술적 이유로 설명한다. 보신탕 대신 육개장을 빨갛게 끓이는 이유도 육개장은 이열치열의 효과는 있지만 쇠고기로 끓였기 때문에 개고기처럼 귀신을 쫓는 주술적 기능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개 장에는 고춧가루를 듬뿍 풀어 빨갛게 끓이는데 귀신은 빨간색을 싫어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국물의 색깔로 쇠고기에는 없는 주술적 기능을 보충했다는 것이다. 동양의 오행설로 복날 보신탕을 설명하기도 한다. 동의보감이나 본초강목을 비롯한 옛날 의학서에는 개고기가 몸에 좋다고 나온다. 하지만 몸에 좋은 것을 그것은 다른 고기도 마찬 가지다. 그렇다고 개고기가 특별히 전염병을 일으키는 역귀( 疫 鬼 )을 쫓는 기운이 강했던 것 도 아니다. 옛날 기준으로 보면 나쁜 귀신을 쫓을 때는 개고기보다 닭고기가 더 좋다. 그럼에도 복날 보신탕을 먹게 된 이유를 몇 가지 추정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오행설에 따 른 것으로 개는 불의 기운( 火 )을 갖고 있다. 반면 복날의 음기는 쇠의 기운( 金 )이라고 한다. 불은 쇠를 녹이기 때문( 火 克 金 )에 보신탕으로 복날의 음기를 물리친다는 것이다. 보신탕을 먹기 시작한 한참 후에 만들어진 논리다. (2) 왜 굳이 보신탕이었을까? #4-1 고기의 영양가 때문이건, 혹은 철학적이나 주술적 이유 때문이건 왜 복날 굳이 다른 고기를 놔두고 개고기로 보신탕을 삼았을까? 고대로부터 이어진 풍속인데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혔으니 간단하게 설명할 수는 없 겠지만 무엇보다 고대에는 개고기가 좋은 고기였고, 또 다른 고기는 구하기 쉽지 않았기 때 문일 것이다. 농업국가에서 소는 함부로 잡을 수 없었고, 게다가 옛날 동양에서 개고기는 기피식품도 아 니었고 오히려 제왕의 음식으로 대접받을 정도의 고급 음식이었다. 귀한 음식이었고 어쨌든 나쁜 기운도 쫓아낼 수 있으며 오행에도 맞았기 때문에 복날 시절음식이 됐을 것이다. 조선 후기, 정조 때만 해도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칫상에 개고기 찜( 狗 蒸 )을 올렸다는 기록 이 있다. 그러니까 보신탕은 궁중에서 대비도 즐겼던 음식이다. - 4 -
고대에는 개고기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음식이었다. 복날 시절음식으로 삼기 전부터 고 대 동양에서는 개고기로 국을 끓인 후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돈을 기부한다는 뜻의 헌금( 獻 金 ), 혈액을 제공할 때의 헌혈( 獻 血 ) 등에 쓰이는 한자 바칠 헌( 獻 )자에 그 의미가 담겨있다. 헌( 獻 ) 이라는 글자를 풀어서 보면 솥이라는 뜻의 권( 鬳 )자 옆에 개라는 뜻의 견( 犬 )자가 자 리잡고 있다. 그러니 글자 뜻 그대로 풀이하면 개를 잡아서 그 고기를 솥에다 담았다는 뜻 이다. 그런데 헌 이라는 글자가 헌금, 헌혈, 헌신 등과 같이 바치다, 드리다 는 의미가 된 이유는 솥에서 끓인 개고기, 즉 보신탕을 종묘에 제사 지낼 때 바쳤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이전, 주나라 때의 예법을 적은 주례( 周 禮 )에도 개고기는 말, 소, 양, 돼지, 닭 과 함께 제왕이 먹는 여섯 가지 고기에 포함돼 있다. 고대 중국에서 개고기는 여섯 가지 식 용가축에 포함돼 있었다. 개고기는 줄곧 귀한 식품 대접을 받았는데 춘추전국시대 왕과 귀족의 어록을 모아놓은 좌구 명( 左 丘 明 )의 국어( 國 語 )라는 책에도 사례가 있다. 와신상담이라는 고사성어의 주인공인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에게 복수하기 위해 군사력을 키우면서 병력을 늘리려고 백성들에게 출산 을 장려한다. 그리고 출산장려책을 내놓았는데 여자가 17살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고, 남 자가 20세가 되도록 장가를 들지 않으면 부모에게 죄를 물었다. 반면 결혼한 부부가 아이를 낳을 때 군인이 될 수 있는 남자 아이를 출산하면 술 두 병에 개고기를 지급했고 여자 아이 를 낳으면 술 두 병에 돼지고기를 지급했다. 남아를 선호했던 옛날, 더군다나 군사력 증강을 위한 출산장려금에게 남아를 출산했을 때 개고기를 지급했으니 월나라에서는 개고기를 돼지 고기보다 귀하게 여겼던 것이다. 4. 왜 굳이 한국만 보신탕이 있을까? #5-1 (1) 한국인만 보신탕을 먹는 까닭은...? 최초의 의문, 왜 이 세상 수많은 나라 중에서 한국에서만 굳이 보신탕을 먹을까? 고대 중국에서 그토록 귀한 음식이었던 보신탕, 즉 개고기를 지금 대부분의 중국 사람들은 먹지 않는다. 일본에서도 보신탕을 먹지 않고 다른 동남국 국가에서도 대부분 보신탕을 먹 지 않으니 아시아에서 보신탕을 먹는 나라는 한국과 베트남 정도다. 일본 사람들은 왜 보신탕을 먹지 않을까? 일본의 경우 서기 675년, 덴무( 天 武 ) 일왕이 처음 으로 육식금지령을 선포한 7세기 무렵부터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 때까지 아예 육식을 금 지했다. 소와 말, 개, 원숭이 닭을 먹지 못하게 했으니까 개고기는 물론이고 쇠고기나 돼지 고기도 먹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다시 가축의 고기를 먹기 시작한 것은 근대화가 이뤄진 19세기 말부터였으니 이때 굳이 개고기를 먹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 5 -
중국은 왜 보신탕을 먹지 않을까? 고대에 귀한 고기로 대접받던 보신탕이 중국 고문헌에서 사라지는 시기는 6세기 무렵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농업서인 제민요술( 齊 民 要 術 )에도 개고기가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고기를 얻는 주요 가축으로 취급 받았던 소, 말, 돼지, 양, 닭, 개였지만 제민요술에서는 개 대신에 낙타와 오리 등이 들어간다. 6세기 이후 중국은 남북조( 南 北 朝 ) 시대로 중국에서 북방의 유목민족이 세력을 떨칠 무렵 이다.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가 일어난 시기로 중국의 송나라가 남쪽으로 크게 위축된 때였다. 이후에는 원나라가 중국을 지배한다. 이 무렵 중국은 북방 유목민족 음식문 화의 영향을 받는다. 유목민족이나 수렵민족의 경우 개는 목축과 수렵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물이기 때문에 농 경민족과 달리 개를 먹는 전통이 없다. 중국에서 개를 먹는 풍속이 사라진 것도 6세기 이후 계속된 유목민족 지배의 영향이 컸다는 것이다. 반면, 지금 보신탕을 먹는 전통이 남아 있는 한국과 베트남은 농업이 중심이었다. 게다가 두 나라 모두 전통적으로 개고기를 제물로까지 사용했던 유교를 숭상했던 나라다. 굳이 역 사적으로 보신탕을 기피할 이유가 없었다. 한국에 보신탕이 남아 있는 까닭은 그만한 문화 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29년(1534년) 9월 3일 **원행을묘정리의궤( 園 幸 乙 卯 整 理 儀 軌 ) *** 說 文 解 字, 禮 記 - 6 -
말짱 도루묵 수난사 1. 도루묵과 선조 이야기 2. 진짜 도루묵을 먹은 임금은 누구일까? 3. 특산물이었던 도루묵 도루묵은 맛없는 생선이 아니다 1. 도루묵과 선조 이야기 도루묵은 맛없는 생선의 대명사 쯤 된다. 오죽했으면 도루묵이라는 이름까지 얻었을까? 맛 이 없으니 도로 묵이라고 하라 며 까탈을 부린 주인공은 임진왜란 때의 선조로 알려져 있 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북쪽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배가 고팠던 선조가 수랏상에 올라온 생선 을 맛있게 먹은 후 그 이름을 물었다. 묵 이라는 생선이라고 하자 맛있는 생선에 어울리는 이름이 아 니라며 즉석에서 은어( 銀 魚 )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전쟁이 끝난 후 환궁한 선조가 피난지에서 맛보았 던 은어가 생각나 다시 먹어보니 옛날 그 맛이 아니었다. 형편없는 맛에 실망한 임금이 역정을 내면 서 도로 묵이라고 불러라 고 해서 도루묵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도루묵에 얽힌 전설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도루묵이 그렇게까지 형편없는 생선은 아니 다. 입맛이야 사람 따라 다르겠지만 말짱 도루묵 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맛없는 물고기가 아니다. 나름 특별한 맛과 멋이 있다. 통통하게 살찐 도루묵 구이는 별미다. 얼큰한 도루묵 조림과 찌개는 밥 한 공기를 뚝딱 비 우게 만드는 밥도둑이고 막걸리에 소주를 부르는 술 도둑이다. 강원도 바닷가라면 좀처럼 맛보기 힘든 도루묵회에 도루묵깍두기, 도루묵 식해가 별미다. 도루묵이 맛없다는 오명은 이름 때문에 생긴 선입견이다. 누명 때문에 온 천하에 형편없는 생선이라는 오명을 쓴 채 몇 백 년을 보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도루묵의 어원은 과연 진 실일까? 도루묵은 주로 강원도와 함경도, 그리고 지금이 경상북도 바닷가에서 잡히는 생선이다. 그 런데 선조는 도루묵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피난을 간 적이 없다. 임진강을 건너 평양을 거 쳐 의주로 갔으니 실제 피난길에서 도루묵을 먹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실제로 도루묵의 유래가 적힌 조선시대 문헌에도 선조가 도루묵을 먹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도루묵의 유래는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이 광해군 시절에 귀양을 갔을 때 쓴 전국팔도 음 식평론서인 도문대작 에 실려 있다. 은어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동해에서 나는 생선으로 처음에는 이름이 목어( 木 魚 )였는데 전 왕조에 이 생선을 좋아하는 임금이 있어 이름을 은어라고 고쳤다가 너무 많이 먹서 싫증이 - 1 -
나자 다시 목어라고 고쳐 환목어( 還 木 魚 )라고 했다( 銀 魚 產 東 海 初 名 木 魚 前 朝 有 王 好 之 改 曰 銀 魚 多 食 而 厭 之 又 改 曰 還 木 ) 고 했다. 한자어 환목어를 우리말로 풀이한 것이 바로 도루묵이다. 허균이 전 왕조라고 했으니 도루 묵이라는 이름을 만든 주인공은 실제 선조가 아니라 바로 고려 때의 어느 임금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역시 광해군 때 벼슬을 살았던 택당 이식의 환목어라는 시에 나오는데 도 루묵의 주인공이 선조 임금이라는 말은 없다. 그저 임금님이 왕년에 난리를 피해 황량한 (동해안) 해변에서 고난을 겪다가 도루묵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적었다. 시의 내용은 이 렇다. 목어( 目 魚 )라는 이름 가진 물고기가 있었나니/바닷고기 중에서도 품질이 형편없어 / 원래 번지르르하게 기름지지도 못하였고/ 타고난 생김새도 볼 만한 게 없었으나 / 그래도 씹어 보면 담박한 맛이 있어 / 겨울철 술안주로 즐길 만하였어라 / 왕년에 임금님이 난리를 피해 / 황량한 이곳 해변 고초를 겪을 적에 / 마침 목어가 수라상에 올라와서 / 출출한 배 든든하게 채워 드리자 / 은어라는 명호( 名 號 )를 특별히 하사하시고 /영원히 공물로 바치도록 하명( 下 命 )을 하셨더라 / 그 뒤 대가( 大 駕 )가 도성으로 귀환하여/ 수라상 각종 진미( 珍 味 ) 서로들 뽐낼 적에 / 가엾게도 목어 역시 그 사이에 끼였는데/ 한번이라도 맛보시는 은총을 어찌 받았으리/ 금세 명호가 깎여 도로 목어로 떨어지며 / 순식간에 버린 자식 취급받게 되었어라 / 잘나고 못난 것이 자기와 상관있으리요 / 귀하고 천한 신분 때가 결정하나니 / 명칭이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한 것 / 버림받았다 해도 그대 탓이 아니로세 / 푸른 바다 깊숙이 가슴 펴고 헤엄치며 / 유유자적( 悠 悠 自 適 )하는 것이 그대의 본령( 本 領 )일 지로다 / ( 有 魚 名 曰 目 海 族 題 品 卑 膏 腴 不 自 潤 形 質 本 非 奇 終 然 風 味 淡 亦 足 佐 冬 釃 國 君 昔 播 越 艱 荒 此 海 陲 目 也 適 登 盤 頓 頓 療 晚 飢 勅 賜 銀 魚 號 永 充 壤 奠 儀 金 輿 旣 旋 反 玉 饌 競 珍 脂 嗟 汝 廁 其 間 詎 敢 當 一 匙 削 號 還 爲 目 斯 須 忽 如 遺 賢 愚 不 在 己 貴 賤 各 乘 時 名 稱 是 外 飾 委 棄 非 汝 疵 洋 洋 碧 海 底 自 適 乃 其 宜 ) 2. 진짜 도루묵을 먹은 임금은 누구일까? 선조가 아니라면 동해안 쪽으로 피난을 가서 도루묵을 먹었다는 임금은 과연 누구였을까? 도루묵을 먹으며 역정을 냈다는 임금이 누군지는 여러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임진왜란 때의 선조로 알려져 있지만 1904년 4월 9일자 황성신문에는 인조라고 나온다. 또 정조 때 이의봉이 쓴 고금석림( 古 今 釋 林 )에는 고려의 어느 임금이라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광해군 때의 허균과 이식과 비슷하다. - 2 -
고려와 조선 시대에 서울인 개성이나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떠났던 임금은 모두 다섯 명이 었다. 11세기 때는 고려 현종이 거란족의 침입을 피해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을 간 적이 있다. 그 리고 13세기에 고려 고종이 피난은 아니지만 몽고군의 침입에 대비해 수도를 개성에서 강 화도로 옮겼다. 14세기에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경상도 안동으로 피신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16세기 말,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는데 함흥으로 갈까 의주로 갈까 망설이다 결국 의주로 떠났다. 그리고 17세기 인조가 세 차례에 걸쳐서 한양을 비웠는데 정 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 그리고 이괄의 난 때는 충청도 공주로 몸을 숨겼다. 그러니 도루묵이 잡히는 고장인 동해안으로 피난을 떠났던 임금은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면 왜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것처럼 전쟁의 와중에서도 쓸데없이 음식투정 이나 부렸던 임금으로 선조를 지목했던 것일까? 선조나 도루묵이 왜 모두 누명을 썼는지 정확한 까닭은 알 수 없지만 굳이 짐작하자면 전 란에 시달렸던 백성들이 마땅치 않았던 임금에 대한 원망을 도루묵 이야기와 연결 지었던 것일 수 있다. 지도자의 의무는 부하를 제대로 이끄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나자 임금이 백성 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갔으니 도루묵에 빗대어 역사의 조롱거리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굳이 도루묵의 주인공을 선조와 연결 지은 또 다른 이유를 찾자면 도루묵 이야기를 기록에 남긴 허균이나 이식의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허균이나 이식은 모두 선조 다음 임금인 광 해군 때의 인물이다.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전 왕조( 前 朝 )라고 표현했고 이식은 왕년( 昔 )의 임 금이라고 표기했다. 그러니 전 왕조를 전 임금으로, 왕년의 임금을 직전의 임금으로 연결지 은 것이 도루묵의 주인공이 선조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역시 나라를 지키지 못했던 임금 에 대한 원망이 컸기 때문에 생긴 이야기일 것이다. 도루묵의 또 다른 이름인 은어도 그렇다. 배고픈 임금이 너무나 맛이 좋아 은빛이 도는 물 고기라는 뜻에서 은어( 銀 魚 )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하지만 조선 후기 정조 때의 실학자 서 유구가 쓴 난호어목지 에는 이름의 유래가 다르게 적혀 있다. 물고기의 배가 하얀 것이 마치 운모가루와 같아 현지 사람들이 은어라고 부른다. 고 했으니 은어는 임금이 하사한 명 칭이 아니라 현지인들이 부르는 이름이었다. 3. 특산물이었던 도루묵, 도루묵은 맛없는 생선이 아니다 도루묵의 유래로 인해 도루묵은 으레 맛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옛날 문헌을 보면 도루 묵은 동해안의 특산물이었다. 지금은 경상북도인 울진 이북의 강원도와 함경도에서 두루 잡 히는 생선이었는데 조선왕조실록 에는 조정에 공물로 바치는 지역 특산물이었다고 나온다. 특히 강원도와 함경도의 어부들은 겨울이 되면 한양으로 올려 보내야하는 도루묵 때문에 적지 않은 고초를 겪었던 모양이다. 정조실록 에는 양양과 간성에서 은어를 공물로 바치느 라고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데 양양은 그나마 큰 고을이니까 이해를 할 수 있지만 간성에서 까지 토산물로 공물을 바치는 것은 부당하니 은어, 즉 도루묵을 잡아 바치는 폐단을 시정하 - 3 -
라는 기록이 보인다. 조정에 공물로 바쳤던 토산물이라고 모두 고급 생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아무 리 좋게 봐도 도루묵이 귀한 물고기일 수는 없다. 하지만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을 들을 만 큼 형편없는 생선은 아니었다. 특히 도루묵이 동해안에서 많이 잡히기는 했지만 교통이 불 편했던 당시 한양에서 도루묵을 맛보기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수요가 공급에 크게 미치 지 못하니 도루묵에 대한 당시 양반들의 인식이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았다. 광해군 때 활약 한 문인 이응희가 남긴 은어, 도루묵에 관한 시다. 서남쪽 지방에서는 나지 않으니/동북쪽 지방에서 가져왔구나/쟁반에 수북이 은빛 회가 쌓 여있고/ 도마에는 백설 같은 빛이 날린다/말려서 화로에 구우면 별미이고/진하게 간장에 졸이면 향기롭지/ 가난한 사람이 먹기에도 좋지만/고량진미 먹는 이도 실컷 먹기는 어렵다/ 부자도 마음껏 먹기는 어렵다는 뜻이니 도루묵이 옛날에도 이름처럼 그렇게 구박만 받던 생선은 아니었다. 도루묵은 선비 집안의 제사상에도 올랐던 생선이다. 정조 때 문인인 박영원( 朴 永 元 )이 남긴 문집인 오서집( 梧 墅 集 )의 시곤록( 示 昆 錄 )에 도루묵인 환목어로 제사를 지낸다는 이야기가 적 혀 있다. 시곤록은 자손들에게 당부하는 교훈을 담은 글이다. 여기에 제사는 성의가 첫째로 성의가 없는 제사는 지내지 못하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제수는 정갈한 것이 중요하니 풍족 하게 차리지 않아도 괜찮다. 제수를 풍부하게 차리다 보면 정결하기를 소홀히 할 수 있으니 정성을 다하기 힘들다고 했다. 우리 집은 그런 제수를 피하는데 환목어는 계절에 따라 천신 을 하는 것이니 제사상에 놓아도 좋다는 것이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도루묵을 하타하타(はた-はた)라고 한다. 천둥 치는 소리를 표현한 의성 어로 일본 고어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도 도루묵은 음력 11월에 주로 잡히 는데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 천둥과 번개가 많이 치는 계절에 도루묵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일본식 한자로는 도루묵을 물고기 어( 魚 )변에 귀신 신( 神 )자를 써서 표기하는데 신과 같은 물고기라는 뜻이 아니라 옛날 일본에서는 천둥을 신이 내는 북소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역시 천둥이 많이 칠 때 몰려오는 물고기라는 뜻이다. 하타하타 는 또 겨울철 동 해의 파도가 거세질 때 잡히기 때문에 파도가 많이 친다는 뜻의 파다파다( 波 多 波 多 )에서 유 래했다고도 한다. - 4 -
도루묵이 고급 생선은 아니지만 예전 서민들은 지금보다 더 다양하게 조리했다. 구이와 조 림, 찌개는 물론이고 도루묵으로 회도 치고 식해도 담갔다. 또 도루묵 깍두기는 별미였으니 토막 친 생선을 무와 버무려 깍두기를 담고 김치를 담을 때 대구나 동태 대신 도루묵을 넣 어도 훌륭한 맛이 난다고 했다. 말짱 도루묵이 아니라 서민의 사랑을 받는 생선이었다. - 5 -
마음에 점을 찍다, 점심( 點 心 ) 학습주제 1. 점심이란 무엇인가? (1)점심이란 무엇인가 (2) 누가 하루 세끼를 먹었을까? (3) 조선시대의 점심식사 (4) 임금은 하루에 몇 번 식사를 했을까? 2. 점심... 왜 마음에 점을 찍을까? (1) 점심의 기원 (2)점심, 딤섬, 디앤신 (3) 딤섬의 종류 1. 점심이란 무엇인가? (1)점심이란 무엇인가 사전에서는 점심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있을까? 새 우리말 큰 사전(삼성출판사)에 서는 점심을 낮에 먹는 끼니 로 정의했다. 일반 상식과 크게 다를 것 없다. 하지만 점심에는 또 다른 뜻도 있다. 불교의 선종( 禪 宗 )에서 시장기가 돌 때 조금씩 먹는 음식, 중국 요리에 곁들여 나오는 과자, 무당이 삼신( 三 神 )에게 떡과 과일 따위의 간단한 음 식을 차려 놓고 비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점심에는 낮에 먹는 식사라는 뜻 이외에도 다양한 의미가 있다. 알고 있는 상식보다 점심에 관한 정의가 훨씬 폭이 넓다. 왜 이렇게 의미가 광 범위할까? #1-1 점심은 한자로 점찍을 점( 點 )에 마음 심( 心 )을 써서 점심이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마음 에 점을 찍는다는 뜻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아침밥과 저녁밥 사이, 낮에 먹는 밥이라 면 예컨대 낮밥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점심이라고 표현했을 까? 낮에 먹는 밥이 마음에 점을 찍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 1 -
그러고 보면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점심이라는 단어, 점심식사에 대해 여러 가지 궁금증이 생길 수 있다. 사람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점심을 먹었을까? 간단하게 먹는 중국요리를 딤섬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점심( 點 心 )이라고 쓰는데 낮에 먹는 점심과 중국음식 딤섬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2) 누가 하루 세끼를 먹었을까? #2-1 사람들은 보통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루에 세끼를 먹는다. 하루가 24시간이니까 잠자는 시간을 빼면 하루에 세 번 밥을 먹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 같기는 하다. 그러니 자연발생 적으로 생겨난 습관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옛날 사람들은 하루 두 끼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먹을 것이 그만큼 귀했기 때문으로 신 분이 높은 사람들이나 부자들이 아니면 대부분 하루 두 끼를 먹었다. 힘들게 일하는 농부들 도 하루 2-3세끼가 일반적이었다. 농사일을 해야 했기에 아침을 든든히 먹고 점심은 주로 새참을 먹은 후 저녁을 먹었는데 농사일에 바쁜 여름에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농한기인 겨 울철에는 농부들도 아침과 저녁 두 끼를 먹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100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식사 횟수를 정한 규정도 있었다. 사회적 신분에 따라 식사회사를 정했다. 말도 안 될 것 같은 이런 규정이 정해지고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은 서기 79년 무렵이다. 황제는 이른 아침에 한번, 또 아침에 한번 그리고 낮에 한번, 저녁에 한번 네 차례 식사를 하고 제후는 세 번 식사를 하며 공경대부는 하루 두 번 식사를 한다 한나라 때 학자인 반고( 班 固 )가 편찬한 서적인 백호통의( 白 虎 通 義 )에 수록돼 있는 내용으로 백호통의는 일개 학자가 자기의 생각을 적어놓은 책이 아니다. 백호관회의라는 회의의 결정 사항을 기록한 책으로 밥 먹는 횟수를 정한 백호관회의는 터무니없는 모임 같지만 사실 이 회의에서 한나라는 유교를 국가 통치이념으로 정했다. 그리고 임금을 가장 우선순위로 두는 삼강오륜을 비롯한 유교사회의 도덕체계를 세웠다. 그리고 신분에 따른 하루의 식사횟수도 이때 정했다. 백호관회의에서 하루에 몇 번 식사를 할 것인지도 확정을 했는데 황제는 중앙에 머물며 사 방을 통치하는 것처럼 하루에 네 번 식사를 한다고 했다. 또 논어를 인용하면서 제후는 하 루에 세 번 식사를 하고 공경 대부는 하루에 두 번 식사를 하는데 귀하고 천한 것의 차이 때문이라고 했다. 공경대부는 경과 대부로 정치를 직접 담당하는 고위직 벼슬아치이니 왕과 제후가 아니니 하루에 두 번만 식사를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하루 세끼 밥을 먹는 것은 제후에게 적용되는 식사 예절이다. 물론 백호관회의에서 결정한 신분에 따른 식사 횟수 때문에 하루에 2번, 혹은 3번을 먹지 는 않았을 것이다. 강제성 여부도 불투명한데다 약 2,000년 전인 1세기 때의 일이다. 식사 횟수가 정해진 것은 신분에 따른 차이라기보다도 경제력에 따른 차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 2 -
어쨌든 동양에서 평민들은 근대초기까지도 신분과 경제력에 따라 하루 2번 식사가 일반적 이었다. (3) 조선시대의 점심식사 #3-1 지금은 모두 옛날 제후처럼 하루 세끼를 먹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보통의 경우는 하루 두 끼를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하루 세끼를 먹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 지만 그 이전에는 보통 두 번의 식사를 했다. 공경대부는 하루에 두 번 식사를 한다고 한나라 때의 백호통회의에서 규정한 것처럼 조선 의 관공서에서는 아침과 저녁으로 하루 두 끼 밥을 먹었다. 조선의 관리들은 도시락을 싸 갖고 출퇴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 식사가 제공됐는 데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燃 藜 室 記 述 )에는 관에서 아침과 저녁으로 밥을 준다고 기록해 놓았 다. 정조 때 실학자인 이덕무도 청장관전서에서 사람들은 하루에 아침과 저녁으로 다섯 홉 의 곡식을 먹는다고 했으니 역시 하루 두 끼 식사가 일반적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조선 말기로 가면서는 하루 세끼로 식사 횟수가 늘어난 것으로 보이는데 순조와 헌 종 때 활동했던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쓴 점심변증설에서 점심은 원래 조금 먹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지금은 오후에 먹는 식사가 양이 많으니 점심이라고 할 수 없다고 적어 놓았다. 그러니까 오후에 새참으로 간식처럼 먹는 것이 점심인데 그 양이 적지 않으니 새참이 아니 라 제대로 된 식사라는 뜻이니 이렇게 되면 아침, 점심, 저녁으로 세끼의 식사를 했다는 뜻 이 된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일반인이나 관리들은 하루에 두 번 식사를 하는 것이 원칙이었 다. (4) 임금은 하루에 몇 번 식사를 했을까? #4-1 왕의 식사 횟수에 대해서는 여러 말이 있다. 하루 다섯 번 식사를 했다고도 하고 하루 여 섯 끼를 먹었다고도 말한다. 그렇지만 조선 임금의 식사 횟수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왕의 식사를 보면 여섯 시에 이른 아침인 초조반( 初 早 飯 )을 들고 열 시 무렵에 제대로 된 아침 식사인 아침 수라를 먹는다. 그리고 정오 무렵에 점심( 點 心 )을 들고 오후 세 시 무렵인 신( 申 )에 참을 먹는다. 이후 여섯 시 무렵이 되면 저녁 식사인 저녁 수라를 들고 잠자리에 들기 전인 아홉 시 무렵에 야참을 들었던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이렇게 계산하면 하루 여섯 끼의 식사를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점심과 야참 그리고 오후 세시 무렵에 먹는 음식은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니다. 출출해진 속을 채우려는 간식의 의미로 봐야 한다. 실제 현대를 사는 우리는 조선의 왕이 하루 다섯, 여섯 번의 식사를 했다고 말하지만 정작 - 3 -
조선의 왕들은 스스로 하루 세끼를 먹고 절약을 할 때는 두 끼를 먹는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선조 26년(1593년)의 기록에서 선조는 흉년이 들자 내가 평일에도 늘 삼시 세끼를 먹지 않고 있으니 내가 먹을 쌀의 반을 덜어 죽을 쑤어 먹는 사람에게 먹이 도록 하라 는 교지를 내린다. 정조실록에도 15년(1791년)의 기록에 민간에서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자는 하루에 세끼 밥을 먹지만 나는 하루에 두 끼만 먹는다 고 했다. 조선의 임금들은 정작 본인 스스로는 하 루에 세 번 내지는 두 번 밥을 먹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음식 먹는 회수를 놓고 현대인들은 하루 다섯, 여섯 번을 먹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조 선의 왕들은 간식이 아닌 진짜로 밥을 먹는 회수를 놓고 하루 두세 번 식사를 한다고 말하 는 것이다. 2. 점심... 왜 마음에 점을 찍을까? (1) 점심의 기원 황제와 제후를 제외한 사람들은 하루 두 끼만을 먹었던 시절, 아침식사와 저녁식사 중간, 혹은 전후에 시장기를 달래 줄 가벼운 요깃거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간식으로 먹은 것이 점 심이다. 점심은 그래서 간단하게 먹는 것, 즉 소식( 小 食 )이 점심이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점심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오 찬을 점심이라고 하는데 많이 먹으면 점심이 아니다. 점심이라는 것은 소식( 小 食 )의 명칭인 데 오찬이라도 적게 먹으면 점심이라고 일러도 되는 것이다 간식으로 간단하게 먹는 것이 바로 점심인데 그렇다면 점심( 點 心 ) 이라느 단어는 언제부처 쓰기 시작했을까? 당나라 정참( 鄭 傪 )이 강회 유후( 江 淮 留 後 )로 있을 때 집안사람이 부인의 새벽밥을 준비하 니, 부인은 그의 아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는 치장을 아직 마치지 못했고 나는 밥 먹을 시간이 아직 못 되었으니, 너는 점심을 하도록 하라. 하였다. -출전 칠수유고( 七 修 類 稿 ), 15세기 명나라 낭영( 郎 瑛 ) 지금과 달리 아침 식사 전 공복을 채우는 음식을 보고 점심이라고 했던 것이다. 옛날 사람 들은 칠수유고의 이 글을 인용해 당나라 때에 이미 점심이란 말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뜻의 점심은 과연 무슨 말일까? 성호사설에서 이익은 점심 은 허기지어 출출한 것을 조절하는 것이다. 허허기지어 출출한 것은 마음에서 나온다. 그러 니 소위 점심이라는 것은 음식을 먹어 허기에 점을 찍으니 마음에 점을 찍는 것이다. 그리 하여 배고픔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점심은 살피고 성찰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 다. - 4 -
허기진 마음에 점을 찍듯이 적은 양의 음식을 먹어 배고픔을 생각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점심이라는 것이다. (2)점심, 딤섬, 디앤신 허기진 마음을 채우며 간단하게 먹는 것이 점심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한자문화권에서 지역에 따라 읽는 방법이 달라졌고 의미까지도 차이가 생겼다. 우리말 점심은 낮에 제대로 먹는 식사라는 뜻이 됐고, 중국어 표준말 디엔신은 문자 그대로 간식(Snack), 즉 조금 먹는 다는 뜻의 샤오츠( 小 吃 )다. 원래의 의미가 그대로 남아 있다. 반면 광동어인 딤섬(DimSum)은 때와 관계없이 가볍게 먹는 식사라는 뜻이 됐다. 딤섬은 널리 알려진 홍콩말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홍콩에서 발달해 세계로 퍼졌 다.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경제가 발전하기 전, 아시아 금융의 중심지였던 홍콩에서 유행해 서양으로까지 전해졌고 또 거리의 분식집은 물론이고 호텔에서도 먹는 고급 요리로 유명해 졌다. 흔히 중국식 작은 만두요리를 보고 딤섬이라고 하는데, 간단하게 식사처럼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모두 딤섬이 될 수 있다. 홍콩에서 주로 먹을 수 있는 딤섬 종류만 해도 200가지가 넘는다고 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만두 종류이기 때문에 만두 종류가 딤섬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3) 딤섬의 종류 딤섬 전문점의 만두를 간단하게 구분하자면 찐만두인 쩡쟈오( 蒸 餃 )와 같은 교자만두, 샤오 롱바오( 小 籠 包 )와 같은 포자만두, 사오마이( 燒 賣 )라는 만두, 그리고 소가 없는 찐빵 종류인 만터우( 饅 頭 ), 스프링롤인 춘권( 春 捲 ) 종류로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작고 투명한 것은 쟈오( 餃 ), 껍질이 두터운 것은 바오( 包 ), 만두의 윗부분이 봉 해져 있지 않고 열려 있는 것을 마이( 賣 )라고 하는데 교자만두인 쟈오와 포자만두인 바오를 보다 정확하게 구분하자면 밀가루를 발효시킨 것은 포자인 바오, 생반죽으로 빚은 것이 교 자인 쟈오다. 딤섬 중에서 대표적인 교자만두가 하가우( 蝦 餃 )인데 광동어로 된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광동 음식으로 새우를 넣어 찐 만두다. 만두피로 얇고 반투명한 전분을 쓰는 하가우 는 만두를 빚을 때 12개 이상으로 주름을 잡아 머리빗 모양으로 빚는 것이 관건이다. 맛과 함께 시각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것이 요리사의 능력이다. 널리 알려진 딤섬으로 만두 속에 육즙이 가득 들어있는 샤오롱바오는 작은 찜통에 찐 만두 라는 뜻이다. 19세기 중반 상하이의 한 만두집에서 개발했는데, 딤섬의 유행에 기여한 음식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만두 속의 즙을 마시는 샤오롱바오의 뿌리는 멀리 송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딤섬의 대표격인 사오마이는 끝 부분을 밀봉하지 않고 꽃모양으로 꾸민 만두다. 초기의 사 - 5 -
오마이는 원나라 때 찻집에서 발달한 만두로 알려져 있는데 만두를 찔 때 꼭대기를 밀봉하 지 않은 이유는 손님에게 직접 만두소의 내용물을 눈으로 확인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만두소의 종류가 너무 많아 소고기가 들었는지 혹은 양고기가 들었는지, 파와 함께 넣었는 지 무와 두부를 넣었는지 구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홍콩과 타이완에서 발달한 가볍게 먹는 식사 딤섬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황제나 제후, 고관대작의 간식에서 출발한 음식이다. 역사적 의미를 따지고 보면 외식을 하면서 딤섬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아니면 점심을 포함 해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옛날 기준으로 보면 복 받은 것일 수도 있다. 적 어도 제후 수준의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점심과 딤섬의 역사를 보면 행복도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다. 참고자료 : 백호관회의( 白 虎 觀 會 議 )란 무엇?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한나라였지만 당시의 유교는 여러 학파가 난립을 하면서 공자 말씀을 중구난방 제멋대로 해석을 했고 거기에 각종 신비주의 사상까지 곁들여지 면서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통치사상으로서 유교 이념을 확실하게 세우고 또 제멋대로 떠드는 유교 각파의 이론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높아지면서 후한의 장제( 章 帝 )가 서기 79년 학자들의 건의를 받아들 여 전국의 유명한 유교 이론가들에게 낙양에 있는 궁궐인 백호관( 白 虎 觀 )으로 모여 난립 해 있는 유교 이론을 정리하도록 명령했다. 이 때 열린 회의가 백호관 회의다. 당시 중 국 전역에서 이름이 알려져 있는 유명한 유교학자들을 모두 백호관에다 소집해 유교 종 합학술회의를 열었던 것이다. 범엽( 范 曄 )이 쓴 역사책인 후한서( 後 漢 書 )에서는 장제가 주최한 백호관 회의에 대해 장 제의 연호인 건초 4년 11월에 공경대부와 박사를 비롯한 모든 유생들이 백호관에 모여 서 다섯 가지 경전인 오경( 五 經 )의 서로 다른 부분을 토론하고 바로 잡았다고 적혀있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 시대 이후 중구난방으로 난립한 유교이론을 바로 잡고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재정립하는 학술회의를 연 것인데 여기서 정리된 내용을 수록해서 위로는 천자에서부터 아래로는 일개 유생에 이르기까지 알아야 할 유교의 모범 사례를 정립해 놓은 책이 백호통의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인 1세기 때의 일이고 더군다나 우리나라도 아닌 중국에서 있 었던 일이니 우리와 아무 관련이 없을 것 같지만 백호관 회의는 동양의 사상 전체에 커 다란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동양의 기본적인 사회윤리는 삼강오륜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런 도덕적 체 계가 확립된 것이 바로 백호관회의다.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는 군위 신강을( 君 爲 臣 綱 ) 제일 앞에서 강조함으로써 유교의 통치이념을 정립한 것이다. -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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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엔 시루떡을 먹자 학습주제 1. 설날 가래떡, 추석 송편, 시루떡은...? (1)시루떡은 언제 먹을까? (2) 고사상에 왜 시루떡을... 시루떡은 한민족의 떡 2. 10월 상달은 어떤 의미...? (1) 왜 10월이 상달일까? (2)새해의 변천사 3. 상달 고사와 시루떡의 관계는...? (1) 개천( 開 天 )의 의미.. (2) 상달 고사의 의미 (3) 민요 성주풀이의 의미는...? 1. 설날 가래떡, 추석 송편, 시루떡은...? (1)시루떡은 언제 먹을까? 전통적으로 우리 조상들은 명절 때마다, 또 계절마다 그리고 각종 경조사 때에 빠짐없이 떡을 해서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여러 떡 중에서도 가장 많이 해 먹은 떡이 시루떡이고, 지 금도 고사를 지내거나 특별한 날, 혹은 이웃에 인사할 때 시루떡을 돌리는 풍습이 있다. 시루떡은 멥쌀가루에 삶은 팥을 켜켜로 얹어 찌는 떡이다. 그런데 시루떡은 주로 언제 먹 었던 떡이었을까? 옛날부터 우리 조상님들은 특별한 날에는 특별한 떡을 먹었다. 예를 들어 설날에는 가래떡, 단오에는 수리 떡인 쑥떡, 추석에는 송편을 먹었다. 시루떡은 주로 고사 상에 놓는 떡이었다. 그것도 10월 상달 고사에는 반드시 시루떡을 해 놓고 고사를 지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풍속이지만 40-50년 전만 해도 음력으로 10월이 되면 집집마다 시루 팥떡을 해 놓고 고사를 지냈다. 집안의 평안과 복이 두루 내리는 발복( 發 福 )을 기원하면서 조상님과 치성을 드렸고 부뚜막과 장독대, 헛간, 대문 앞에 시루팥떡을 차려 놓고 성주님을 비롯해 집안을 지키는 수호신에게 안녕을 빌었다. 예전 풍속을 보면 몇 가지 특징점이 있다. - 1 -
(2) 고사상에 왜 시루떡을... 시루떡은 한민족의 떡 고사떡의 기본이 되는 떡은 시루떡이다. 시루떡에도 종류가 여럿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시 루팥떡이 단군 숭배를 포함한 우리 민속신앙과 관련된 제사에 쓰인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떡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떡이 시루떡이기 때문이다. 최남선은 조선상식( 朝 鮮 常 識 )에서 우리의 시루떡은 다른 나라의 떡과는 확연하게 구분 된 다고 했다. 곡식가루를 쪄서 만드는 떡은 한국과 중국, 일본에 모두 있지만 나라마다 각각 속성이 달라서 중국은 밀가루가 주재료이고, 일본은 찹쌀가루를 주로 쓰는 반면에 한국은 멥쌀가루로 떡을 만든다. 그리고 한민족의 떡은 시루떡이 정통으로 다른 떡은 시루떡의 보 조이거나 사치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는 시루떡이 유독 발달했는데 규합총서 ( 閨 閤 叢 書 )에는 시루떡 종류만 11가지가 있다. 우리나라 떡은 크게 시루떡, 인절미, 절편으로 나눌 수 있는데 시루떡이 기본이고 그 다음 으로 흔히 만들어 먹는 떡이 인절미이며, 다음으로 절편을 많이 먹는다. 이 밖에도 떡 속에 다 소를 넣어 만드는 것, 기름에 지지는 것 등이 있지만 크게는 앞서의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시루떡이 기본일까? 쌀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불에다 벼를 볶아 먹는 방법으로 가장 원시적이다. 다음은 벼를 돌에 갈아서 거친 껍질을 제거하고 쌀가루만 모아 쪄 먹는 방법이다. 이렇게 만들면 시루떡이 된다. 반면 밥을 하려면 벼의 껍질을 적당 하게 벗겨야 하고 껍질을 벗긴 쌀을 알맞게 익힐 수 있는 솥이 필요하다. 고대에는 벼에서 껍질만을 벗기는 도정( 搗 精 ) 자체가 고도의 기술이었고 쌀을 태우지 않고 적절하게 익힐 수 있는 밥솥 역시 첨단기술의 산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조상들은 상식과는 달리 밥보다 떡을 먼저 먹었고 떡을 찌는 시루 역시 솥이 개발되어 밥을 먹기 전까지 주식인 떡을 조리하는 기구였다. 게다가 인절미나 절편과 달리 떡메로 내리치는 추가 공정이 생략된다. 단순히 떡메로 치는 과정뿐만 아니라 곡식을 가루로 빻는 것에서부터 찌는 과정까지가 훨씬 단순해진다. 어찌 보면 떡을 만드는 방법이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이다. 시루떡은 고대에 고사를 지낼 때 쌀을 이용해 만들 수 있는 최상의 음식이 시루떡이었던 것이다. 시루떡이야 말로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먹었던 전통 음식이고 주식이었기 때문에 고삿상에 올랐을 것이다. 2. 10월 상달은 어떤 의미...? (1) 왜 10월이 상달일까? 고사란 무엇일까? 왜 하필 10월 상달에 고사를 지내는 것일까? 예전에는10월에 다양한 제 - 2 -
사를 지냈다. 문중에서는 조상님께 시제( 時 祭 )을 지냈고 마을에서 부락을 지켜주는 신에게 대동제( 大 同 祭 )를 지냈다. 뿐만 아니라 각 가정에서도 성주받이라는 고사를 지냈다. 왜 10월 에 고사와 제사가 이어진 것이며 상달이란 무엇일까? 상달( 上 月 )은 정월이라는 뜻이다. 한해의 맨 앞에 있는 달이니 으뜸이 되는 달, 첫 번째 달 이라는 뜻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달이 곧 상달이다. 새해는 1월부터 시작되는 것이 상식인데 왜 10월을 새해의 시작인 상달이라고 했을까? 새해가 1월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태양력을 바탕으로 하는, 지금의 그레고리력이 기준이다. 새해는 정하기 나름이다. 지금은 양력인 그레고리력을 사용하니까 양력 1월 1일이 새해 첫 날이지만 음력을 쓰는 경우에는 음력 정월 초하루가 새해 시작이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보 통 1월 말, 2월 초순인 설날이 새해의 시작이다. 반면에 고대 우리 민족이 사용했던 달력으로 계산하면 10월이 새해 시작이다. 때문에 10월 이 상달인 것이다. 10월을 새해 첫 달로 정한 것은 비단 우리뿐만이 아니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다는 시황제의 진나라도 새해는 10월부터 시작됐다. 이른바 전욱력( 颛 頊 曆 )이라는 달 력이다. 고대 북방 민족은 10월을 새해의 시작으로 여겼다. (2)새해의 변천사 새해는 정하기 나름이다. 동양의 새해도 시대에 따라 여러 차례 변했는데 중국을 기준으로 보면 기원전 16세기 이전, 전설 시대라는 하( 夏 )나라는 지금 음력처럼 정월 초하루가 새해 첫날이었다. 하나라의 역법인 하력( 夏 曆 )이 지금의 음력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의 뒤를 이은 은( 殷 )나라는 정월이 음력 12월이었다. 이때는 큰 달이 30일, 작은 달은 29 일이었으며 나머지는 연말에 윤달로 모아 한 해를 13개월로 나누었다. 일 년이 열두 달이 아니라 열세 달인 것이다. 은을 이은 주( 周 )나라에서는 음력 11월부터 새해가 시작됐다. 그러니까 동지가 정초가 된 다. 동지를 새해에 버금가는 날이라는 뜻의 아세( 亞 歲 )라고 부르게 된 이유다. 주나라에 이어 진시황이 세운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진( 秦 )나라는 전욱력( 颛 顼 曆 )이라는 달 력을 사용했다. 이때는 음력 10월이 새해가 시작되는 정월이었다. 참고로 우리의 단군신화 에서도 음력 10월을 새해의 시작으로 본다. 진의 뒤를 이은 한나라는 처음 진나라 달력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했기 때문에 음력 10 월이 새해였지만 그러다 보니 달력으로는 그믐인데 실제 하늘에는 보름달이 뜨는 등 달력과 천문현상이 일치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기원전 104년, 한무제가 사기( 史 記 ) 의 저자인 사마천 등을 시켜 달력을 고친 것 이 지금 쓰는 음력의 기초가 됐다. 참고로 그레고리력인 현재의 양력을 공식 도입한 것은 우리가 1896년, 일본은 1872년, 중국은 1912년이다. 3. 상달 고사와 시루떡의 관계는...? - 3 -
(1) 개천( 開 天 )의 의미... 고대에는 10월을 새해의 시작으로 여겼다. 지금의 개천절이 10월 3일인 이유도 여기에 있 다. 단군신화의 개천의 의미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신시( 神 市 )를 열면서 시작된다. 단군세기( 檀 君 世 紀 ) 에 의하면 환웅은 웅녀와의 사이에서 단군왕검을 낳 는데 기원전 2333년 10월에 아사달을 도읍으로 정하고 나라를 세운 후 국호를 조선이라고 정해 삼신( 三 神 )에게 제사를 지내고 건국을 알렸다.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비로소 하늘이 열렸다는 린 것이니 바로 개천( 開 天 )이다. 천신( 天 神 ) 의 자손인 한민족은 이때부터 세상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고대 한민족에게는 10월이 세상의 시작이며 새해의 시작이다. 개천절이 10월 3일로 고정된 것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 때부터로 처음에는 음력이었다가 1949년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양력 10월 3일로 정해졌다. 보통은 10월 상달을 일 년 농사가 마무리되고 햇곡식과 햇과일을 수확해 하늘과 조상님께 감사를 드리는 기간이어서 일 년 열두 달 중에 으뜸가는 달이어서 상달이라고 부른다고 풀 이하는데 정반대의 해석이다. 고대 책력과 단군신화를 기준으로 상달은 세상이 열린 날이니 새해가 시작되는 날이고 그 렇기 때문에 곡식과 과일을 준비해 하늘과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는 것이다. 마무리가 아닌 시작의 개념이니 결과는 같지만 의미는 반대다. (2) 상달 고사의 의미 최남선은 조선상식( 朝 鮮 常 識 )에서 10월 상달을 하늘과 조상에 제사를 올리고 고사를 지내 는 것은 수확이 끝난 후 일 년 농사에 대한 감사의 뜻도 있지만 아득히 먼 옛날 마한( 馬 韓 ), 예( 濊 ), 고구려 때부터 하늘의 씨족 신에 대한 제사를 모두 10월에 잡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고 했다. 역사적으로 조상께 감사를 드리는 축제였던 고구려의 동맹( 東 盟 ), 예의 무천( 舞 天 ), 부여의 영고( 迎 鼓 ), 고려의 팔관회( 八 關 會 ) 등이 모두 10월에 열린 것도 이때를 하늘이 열린 날로 여겨 상달로 삼은 우리 민족의 단군신앙과 관계가 있다. 가문과 일족의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인 시제, 부락 공동의 제사인 대동제, 각 가정의 수호 신에게 평안을 비는 성주받이, 토지의 신께 올리는 대감놀이 등도 모두 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10월 상달에 고사를 지내는 것은 단순한 무속 때문이 아니라 단군신화에 바탕을 둔 민속 신앙의 뿌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3) 민요 성주풀이의 의미는...? 10월 상달에 지내는 고사와 제물인 시루떡은 누구에게 소원을 비는 것일까? 10월 상달 고 - 4 -
사는 고대의 책력과 하늘이 열렸다는 단군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긴 세월이 흐르며 토 속신앙으로, 그리고 무속으로 발전했다. 각 가정에서 지내는 10월 상달 고사는 무속에서 말하는 성주님께 바치는 것이다. 무속에서 는 집안 구석구석에 수호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데 성주는 대들보를 지키는 신이고, 터줏 대감은 집터와 장독대를 보호하는 수호신이며, 조왕신은 부엌을 관장하는 신이다. 성주풀이라는 민요도 있는데 무속에서 성주를 부르는 주문이 민요화한 것인데 성주가 도대 체 누구일까? 조선무속고( 朝 鮮 巫 俗 考 )에 성주( 城 造 氏 )는 집을 짓고 지키는 신이라고 했는데, 보다 구체적 으로 성주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으로 인간에게 집짓는 법을 가르쳐준 신이다. 천신의 아 들인 환웅이 세상에 내려오기 전에 성주에게 미리 명하여 궁궐과 가옥을 지으라고 선발대로 내려 보낸 신이다. 집은 다 짓고 난 후에는 집안을 지키는 수호신이 됐다. ( 海 東 竹 枝, 최영 년, 1925년) 우리 민족 신앙인 대종교 교리인 신단실기( 神 檀 實 記 )에는 10월 농사가 끝나면 햇곡식으로 큰 시루에 떡을 해서 술과 과일을 차리고 신을 모시는데 이를 성조( 成 造 )라고 하며 집안과 나라를 이룬다는 뜻으로 단군이 백성에게 집을 짓고 거처하는 법을 가르친 것에서 비롯되었 다고 설명하고 있다. 시루떡은 그러니까 좁게는 10월 상달에 집 짓는 법을 가르쳐주고 또 집안을 지켜주는 수 호신인 성주(성조씨)에게 바치는 제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넓게는 하늘을 열고 고조선을 건국한 우리 조상님께 바치는 떡이었고, 고대 역법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10월 상달에 하늘 에 바쳤던 차례 음식이었으니 바로 하늘이 열린 것, 개천( 開 天 )을 기념하는 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상달 고사에 굳이 시루떡을 제물로 준비하는 것 역시, 시루떡이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우리 민족의 기본 떡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동양의 달력 달력(나라) 정월 시대 비고 하력( 夏 ) 1월 BC 16세기 이전 은력( 殷 ) 12월 BC 16세기 주력( 周 ) 11월 BC 11세기 동지 아세( 亞 歲 ) 전욱력( 秦 ) 10월 BC 3세기 10월 상달( 上 月 ) 태초력( 漢 ) 1월 BC 104년 음력 설날 그레고리력 양력 1월 한국 1896년, 일본 1872년, 중국 1912년 도입 - 5 -
독해져라 고춧가루 학습주제 1. 고춧가루 탄 소주가 감기에 특효?! (1) 고춧가루 탄 소주가 정말 효과가 있을까? (2)소주에 고춧가루 타서 마신 조상님 (3) 조선시대 고추 탄 소주를 마신 결과는...? 2. 조선에 전해진 고추의 정체 (1) 동북아에 고추는 누가 퍼트렸을까? (2) 최초의 고추는 식품이 아니었다. (3) 언제부터 고추를 먹었을까? 3. 소주에 고춧가루 타는 또 다른 이유 (1)소주에 탄 것은 산초와 후추? (2)고춧가루 탄 소주는 서민용 도소주 1. 고춧가루 탄 소주가 감기에 특효?! (1) 고춧가루 탄 소주가 정말 효과가 있을까? 어르신들 말씀이 옛말 그른 것 하나도 없다고 하는데 혹시 감기에는 소주에 고춧가루 타마 시면 특효라는 말에도 이유가 있고,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닐까? 별 생각 없이 무심코 쓰는 말이지만 지금부터 그 속에 담겨 있는 비밀을 풀어보자. 먼저 의사한테 질문했다. 진짜 소주에 고춧가루 타서 마시면 감기가 떨어집니까? 당연히 아니라고 그럴 줄 알았는데 의사 선생님 이야기가 무조건 아니라고 부정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땀을 쭉 흘려서 낫는 감기라면 혹시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소주나 고춧가루가 모두 열을 내는 발열작용을 하기 때문에 혹시 땀을 내서 감기가 나 을 가능성을 완전 무시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감기에 걸린 상태에서 술을 마시면 발열에 의한 효과보다는 부작용 때문에 증상이 더 욱 악화될 것이고, 게다가 고춧가루까지 타서 마시면 틀림없이 속 버릴 것이니 절대로 감기 - 1 -
치료하겠다고 소주에 고춧가루 타서 마시는 무식한 짓 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2)소주에 고춧가루 타서 마신 조상님 #1-1 그렇다면 왜 소주에 고춧가루 타서 마시면 감기에 특효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분명히 이유 가 있을 것이다. 크게 두 가지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첫째는 옛날 우리 조상님들이 실제로 소주에 고춧가루를 타서 마셨기 때문이다. 고추가 우 리나라에 전래된 과정과 관련 있다. 고추에 관한 이야기가 처음 실린 조선시대 문헌은 광해군 때(1614년), 이수광이 쓴 지봉유 설( 芝 峯 類 說 )이라는 책이다. 여기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추는 남쪽 오랑캐들이 먹는 식물이어서 남만초( 南 蠻 椒 )라고 했고, 또 일본인 왜를 통해 전해져서 왜개자( 倭 芥 子 )라고 부른다고 했다. 일본에서 남만은 주로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을 말하므로 남미를 통해 유럽에 들어온 고추가 일본을 통해 전해졌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고추에는 강렬한 독이 들어 있고, 주막에서 종종 고추를 심는데 고추의 매운 성질을 이용해 소주에 고추를 타서 팔기도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고춧가루 탄 소주를 마시고 죽은 사람이 적지 않다고 기록했다. 주막집에서 술을 더 독하게 만들기 위해 소주에 고추를 섞었 다는 뜻이다. 그러니 우리 조상님들이 정말 소주에 고춧가루를 타서 마셨던 것이다. (3) 조선시대 고추 탄 소주를 마신 결과는...? #1-1 그런데 지봉유설에 적혀 있는 것처럼 소주에 고춧가루 타서 마신다고 사람이 죽을 수 있는 것일까? 아마 옛날에는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소주는 지금과 같은 희석식 소주가 아니다. 순수 증류주였기 때문에 알코올 도 수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았다. 소주가 독했다는 증거가 있다. 숙종 때 청나라 에 사신으로 갔다 온 이의현이라는 분이 쓴 경자연행잡지( 庚 子 燕 行 잡지)라는 기행문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북경 사람들은 조선의 소주가 독하다며 잘 마시지도 않고, 마셔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보통 중국술을 독주라고 말한다. 베이징에서 파는 빼갈의 경우 일반적 으로 알코올 도수가 38도, 52도이고 심지어 70도가 넘는 술도 있다. 알코올 도수가 70도짜 리인 술을 마시면 뱃속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독하다. 이렇게 독한 술을 마시는 중국 사람들이 조선의 소주가 독하다며 싫어했다는 것이니 소주가 얼마나 독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독한 소주에도 독처럼 강렬한 고추를 섞었으니 고춧가루 탄 소주를 마시고 죽은 사 람이 적지 않았다는 지봉유설의 기록이 과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감기에 걸렸을 때, 소주에 고춧가루 타서 먹으면 감기가 바로 떨어진다는 말을 - 2 -
이해할 수 있다. 고춧가루 탄 소주를 마시고 사람이 죽을 정도이니 그까짓 고춧가루 탄 소 주로 감기 바이러스 쫓아내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감기에 걸린 환 자가 소주에 고춧가루 타서 마시고 살아남았다면 감기는 즉석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혹시 감기에는 고춧가루 탄 소주가 특효 라는 말은 지봉유설에 실린 기록처럼 고추의 독 한 성질을 강조한 것에서 비롯된 표현은 아니었을까? 2. 조선에 전해진 고추의 정체 (1) 동북아에 고추는 누가 퍼트렸을까? 소주에 고추를 타서 마셨다는 지봉유설의 기록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고추는 한국인과 떼려고 해야 뗄 수 없는 채소다. 고춧가루로 버무린 김치 없이는 밥 을 먹지 못하고, 밥상에서 고추장 양념 반찬이 빠지는 적이 거의 없다. 심지어 매운 고추를 또 매운 고추장에다 찍어 먹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한국인이다. 하지만 고추가 처음 전해진 임진왜란 직후만 하더라도 고추가 식용으로 널리 쓰이지는 않 았다. 사실, 고추가 어디에서 어떤 경로를 통해서 전해졌는지, 처음에는 용도가 무엇이었는 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과 중국, 일본 사람들이 웬만하면 다 자기네가 원조라고 주장을 하지만, 고추의 전래만큼은 반대로 자기가 원조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조선시대 문헌을 보면 우리는 임진왜란 때 일본을 통해서 고추가 전해졌다고 주장한다. 반 대로 일본 문헌에서는 조선을 통해 전해졌다고 나온다. 중국은 또 만주지역을 비롯해 북방 에 고추가 전해진 것은 조선, 혹은 일본에서 전해졌다고 한다. 물론 남방을 통해서 들어왔다 는 기록도 있다. 어쨌든 고추를 퍼뜨린 것이 자기네 나라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겨났을 까? 초창기 고추의 용도가 아마 바람직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2) 최초의 고추는 식품이 아니었다. #2-1 광해군 때 고추는 소주에 넣는 첨가제였다. 그것도 맛을 내는 조미료가 아니라 독한 소주를 더 독하게 만드는 불법 첨가물이었다. 양심불량의 주막집 주모들이 고추 탄 소주를 마시고 사람이 죽든가, 아니면 감기가 떨어지든가, 사람이 절단 날 정도로 강력한 독약 수준이었다. 고추는 또 화생방 무기로도 쓰였다. 고추가 전해진 초기에 고춧가루를 적진 앞에서 뿌리 면 코에서는 재치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 적들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간다 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최루탄과 맞먹을 정도로 효과가 강력했다. 이규경의 할아버지인 이덕무가 쓴 청정관전서( 靑 莊 館 全 書 )라는 문헌에도 고추의 살벌한 효 - 3 -
과가 기록돼 있다. 고추는 매운 작물이라서 먹으면 입술이 마비되고 목이 막힐 정도이고 특 히 성질이 뜨거워 많이 먹으면 불기운을 일으켜 몸에서 종기가 나기도 하고, 임신부가 잘 못 먹으면 아이가 떨어질 수 있다고 했다. 성질이 강렬했기 때문에 의약품으로도 사용한다고도 기록했다. 동상 예방에 효과가 있어 추운 날 먼 길을 떠날 때 버선 속에도 고추를 넣으면 발이 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고추는 한국인의 밥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식품이 됐지만 처음 고추가 전해졌을 때는 음식이 아니라, 화생방 무기이거나 독약 수준으로 쓰였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러니 소주에 고춧가루를 타면 감기쯤은 가볍게 떨어뜨릴 수도 있었을 것 같다. (3) 언제부터 고추를 먹었을까? #2-1 우리는 고추를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을까? 고추가 전해 진 것은 임진왜란 무렵이니까 16세 기 말, 또는 17세기 초반이다. 하지만 고추가 전래되자마자 식용으로 쓰였던 것은 아니다. 각종 기록을 보면 고추는 식용보다는 의약품이나 화생방 무기, 혹은 첨가물 등 주로 특수용 도로 쓰였다. 김치에 고춧가루를 넣거나 고춧가루로 고추장을 담가 먹기 시작한 것은 고추가 이땅에 전 해진 지 약 100년이 지난 18세기 초반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춧가루를 넣은 김치에 관한 기록은 18세기 중반인, 증보산림경제( 增 補 山 林 經 濟 1766년) 에 나오는 기록이 처음이다. 고추장에 관한 기록도 이 무렵에 등장한다. 18세기 영조 임금 이 고추장을 즐겨 먹었다는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자주 보인다. 물론 고추를 먹은 기록은 18세기 초반에도 보인다. 김창업은 고추( 蕃 椒 )를 주제로 이렇게 글을 썼다. 오랑캐가 가져와 작고 왜소하지만, 맛은 생강 계피와 비슷하다. 촌가에서도 먹 을 수 있어 다행이다 생강 계피와 같은 고급 향신료와 맛은 비슷한데 시골 농촌에서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쉽 게 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리하자면 고추는 전해지지 100년 정도 후에야 식용으로 널리 퍼졌는데 후추나 계피처럼 고급향신료처럼 부자들이 음식이 일반 서민층으로 퍼진 것이 아니라 평민들이 먹던 고추가 후추나 산초와 같은 고급 향신료를 대체하면서 한국인 모두가 먹는 식품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고추가 전해지기 전까지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매운 음식을 먹었을까? 고추가 전 해지기 저네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즐겨 먹었다. 광해군 때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황해도 황주의 초장( 椒 醬 )이 유명하다 고 기록했다. 물론 고추가 전해진 이후의 기록이지만 여기서 초장은 고추장( 苦 椒 醬 )이 아니 라 산초장( 山 椒 醬 )이다. 요즘 추어탕에 넣어 먹는 산초가루로 장을 담갔던 것이다.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의 충신으로 유명한 목은 이색은 시에서 임금님이 하사한 생선 매운 - 4 -
탕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얼얼하고 매운 맛이 일품( 香 辣 雜 羹 魚 君 賜 頻 充 腹 )이라고 했는데 고 려 말에는 고추가 없었으니 산초로 매운 맛을 냈다. 3. 소주에 고춧가루 타는 또 다른 이유 #3-1 (1)소주에 탄 것은 산초와 후추? 소주에 고춧가루 타서 마시면 감기에 특효라는 말이 생겨난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 이고 첫 번째로는 지봉유설에 나오는 기록처럼 고추의 독한 성질을 강조한 것에서 비롯된 표현이었을 수 있다고 짐작했다. 두 번째로는 고추가 이 땅에 전해지기 전에 향신료로 쓰였던 산초를 소주에 타서 먹었던 풍속에서 감기에는 소주에 고춧가루 타서 마신다는 말이 생겼을 수도 있다. 지금은 사라진 풍속이지만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는 정월 초하루가 되면 온 가족이 모여 도소주( 屠 蘇 酒 )라는 술을 마셨다. 도소주는 주로 산초나 후추로 담근 초주 ( 椒 酒 )라는 약술로 삼국지에서 관우을 수술했다는 명의, 화타가 빚었다는 이 술은 한 잔만 마셔도 추위를 물리치고, 병을 치료하며 몸이 튼튼해진다는 술이다. 문제는 산초술 혹은 후추술인 초주는 아무나 마실 수 없는 술이라는데 있다. 술 담그는 재 료가 바로 후추와 산초였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후추나 산초가 별 것 아니지만 사실 후추는 서양에서 같은 무게의 금과 가격이 같았을 정도로 비쌌던 향신료였다. 결국 후추 때문에 마 젤란이 세계 일주를 했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는 대항해 시대가 열렸을 정 도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동양도 마찬가지였다. 후추는 명절이 되었을 때에야 임금이 특 별히 대신들에게 하사한 선물이었는데 조선 후기 영조는 음력 5월 5일, 단오에 원로대신들 에게 후추 한 되와 종이를 바른 부채, 옻칠을 한 부채 각 한 자루씩을 신하들에게 하사했 다.** 추어탕에 넣는 산초( 山 椒 ) 역시 예전에는 무척이나 귀한 향신료였다. 톡 쏘는 매운 맛으로 상쾌하면서 시원하게 입맛을 돋우며 음식 맛을 살릴 뿐만 아니라 산초는 민물고기와 육류의 비린내를 없애고, 또 채소의 풋내를 제거하면서 소화를 돕기 때문에 예전부터 향신료로 널 리 쓰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중기까지만 해도 고추 대신 산초를 사용했다. 산초는 새해를 맞아 손님을 대접할 때도 쓰는 귀한 향신료였다.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 중 기의 위대한 성리학자인 기대승( 奇 大 升 )의 고봉집에는 옛날부터 정월 초하루에 손님을 대접 할 때 소반에다 산초를 담아 내와 술에다 산초를 넣어 마셨다고 했다.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두보의 시에도 아융( 阿 戎 )의 집에 와서 새해를 맞으니 소반에 산초를 담아 그 꽃을 노래하 네 라는 구절이 있으니 옛날 선비들이 새해에 산초를 먹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렇게 새해에 마시는 산초나 후추로 담근 술을 도소주라고 하는데 도소주는 왜 마시는 것 일까? - 5 -
(2)고춧가루 탄 소주는 서민용 도소주 #3-1 도소주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술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옛날 풍속에는 정월 초하루에 장수를 기원하고 새해를 축하하는 의미로 집안의 어른에게 이 술을 바쳤다. 도소 주를 마시는 가장 큰 목적은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 한 해를 건강하게 보내게 해달라는 의미 였다. 그러나 서민들한테 후추나 산초로 담근 초주는 그림의 떡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후추나 산초는 너무나 값비싸고 귀한 향신료였기 때문이다. 평민들은 그렇기 때문에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후추나 산초 대신 고추를 탄 소주인 고초주( 苦 椒 酒 )를 마시며 감기라도 떨어지기 를 기원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고춧가루 탄 소주가 감기에 특효 라는 옛말은 술 좋아하는 주당들이 그저 하 는 허튼 소리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세도를 누리는 권력자들이나 돈 많은 부자들처럼 호사 를 누리지는 못하더라도 없는 처지에서라도 건강한 삶을 꿈꾸는 서민들의 소망이 담겨 있는 말에서 비롯된 표현일 수 있다. 술꾼들의 빈말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옛날 사람들의 삶의 의지를 엿 볼 수 있는 말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 五 洲 衍 文 長 箋 散 稿 ) 번초남과변증설( 蕃 椒 南 瓜 辨 證 說 ), 이규경( 李 圭 景 ) ** 희암집( 希 菴 集 ), 채평윤( 蔡 彭 胤 ) - 6 -
대보름 부럼을 깨는 진짜 이유 1. 부럼을 깨는 의미는...? (1)견과류를 깨무는 이유 2. 옛날 부럼은 땅콩 대신 무 (1) 예전에는 땅콩 부럼이 없었다 (2) 땅콩은 19세기 말에 전래... (3) 땅콩보다 아몬드가 먼저 전해졌다 (4)호두를 굴리는 이유는...? 1. 부럼을 깨는 의미는...? (1)견과류를 깨무는 이유 부럼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과일과 견과를 깨물면서 피부병을 방지하고, 건 강한 치아를 갖게 해달라고 소망한 것은 동양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전통풍속이다. 우리 문헌에 부럼 풍속은 18세기 영, 정조 이후에 집중적으로 보인다. 동국세시기 에 대 보름날 아침 호두와 밤, 잣, 은행, 무를 깨물며 일 년 열두 달 무사태평과 부스럼이 나지 않 도록 기원하는데 이것을 부럼 깬다고 했다. 한자로 작절( 嚼 癤 )이라고 썼는데 씹을 작( 嚼 ), 부 스럼 절( 癤 )이니 부스럼을 깨물어 터뜨린다는 뜻이다. 같은 시기 서울의 풍속을 적은 열양세시기( 洌 陽 歲 時 記 )에는 부럼 깨는 견과류를 한자로 교 창과( 咬 瘡 果 )라고 했으니 깨문다는 교( 咬 )자에 부스럼 창( 瘡 )자로 역시 부스럼을 깨물어 터뜨 리는데 쓰는 열매라는 뜻이다. 이밖에 소종과( 消 腫 果 )라고도 하는데 종기를 없앤다는 뜻이니 모두 비슷한 뜻이다. 19세기 정조 때 문인 김려가 쓴 담정유고( 藫 庭 遺 藁 ) 에 왜 부럼을 깬다는 것이 어떤 의미 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정월 대보름 풍속을 읊은 시에 호두와 밤을 깨 무는 것은 바가지를 깨는 것처럼 종기의 약한 부분을 깨물어 부숴버리는 것이다. 신령의 소 리를 흉내 내 솜씨 좋은 의사가 침을 놓는 것 이라는 주문을 외우며 깨문다 고 했다. 부스럼은 피부병이지만 옛날에는 역귀( 疫 鬼 )가 퍼트리는 돌림병이라고 믿었다. 때문에 역귀 - 1 -
를 물리칠 수 있는 하늘의 신령 목소리를 빌어 부스럼이 생기기 전에 미리 종기를 터뜨린다 는 뜻에서 견과를 깨물었던 것이라고 짐작된다. 한겨울인 대보름날 내 더위 사가라 고 외치 는 것과 같은 이유다. 부럼을 깨는 까닭은 또 있다. 종기를 미리 터뜨려 부스럼을 없앤다는 유감 효과도 있지만 부럼 깨는 소리에 돌림병 귀신이 놀라 도망가라는 주문이다. 순조 때의 학자 윤기는 무명자집( 無 名 子 集 ) 에서 부럼으로 밤을 깰 때는 소리가 크게 울 리도록( 生 響 ) 깨물어야 한다고 했다. 조수삼의 추재집( 秋 齋 集 )에도 어린 아이들이 호두, 밤, 잣을 깨는 소리( 作 聲 )를 부럼 깨는 것이라고 했으니 소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 예전에는 왜 이렇게 부스럼 예방에 신경을 썼을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들다. 화학물질로 인한 아토피는 문제가 되도 불결한 위생 때문에 생기는부스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상황이 달랐다. 부스럼 앓는 아이가 적지 않았다. 하물며 위생이 좋지 않았던 조선시대 이전에는 피부병이 큰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때문에 고종 때 이유원은 가오고략( 嘉 梧 藁 略 ) 에서 부럼 깨는 풍속 은 신라, 고려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고 했다. 동양의 다른 곳도 비슷하다. 이수광은 지봉유설( 芝 峯 類 說 ) 에서 본초에 이르기를 빈랑( 檳 榔 ) 은 영남에서 나는 과일로 남방은 땅이 따뜻하기 때문에 이것을 먹지 않으면 부스럼, 종기를 막지 못한다고 적었다. 이어 조선 선조 때 학자인 조완벽( 趙 完 璧 )의 말을 빌어 안남국 사람 은 언제나 빈랑을 먹는다. 고로 더운 지방의 땅에서 나는 기운으로 인한 부스럼을 막고 치 아를 튼튼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참고로 빈랑은 대추와 비슷한 열대지방의 열매이며 영남( 嶺 南 )은 우리의 경상도가 아닌 중 국 광동, 복건 지역, 그리고 안남국은 지금의 베트남을 말한다. 2. 옛날 부럼은 땅콩 대신 무 (1) 예전에는 땅콩 부럼이 없었다 요즘 대보름 부럼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견과류는 땅콩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약 160년 전인 1849년에 발행된 풍속서인 동국세시기 에는 부럼으로 밤과 호두, 은행, 잣, 무 종류를 깨문다고 나온다. 땅콩이 없는 대신 엉뚱하게 무가 들어 있다. 1925년에 나온 최영년의 해동죽지 에도 부럼으로 호두와 잣( 海 松 子 )만 보인다. 부럼으로 예를 든 견과가 너무 적어서 당시 땅콩을 깨물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예로 들지 않은 것을 보면 땅콩이 없었거나 적어도 주요 부럼으로 꼽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신문 연재물을 모아서 1946년에 책으로 발간한 최남선의 조선상식 에는 대보름 새벽에 밤, 호두, 은행, 잣, 무 등을 깨문다고 했다. 그리고 괄호 속에다 요즘에는 무가 빠지고 대신 낙화생( 落 花 生 )을 깨문다고 적었다. 낙화생은 땅콩의 한자말이니 드디어 대보름날 부럼으로 땅콩이 등장한 것이다. - 2 -
지금은 가장 대표적인 부럼이 땅콩이지만 20세기 중반까지만 땅콩은 보이지 않고 무를 깨 물었다. 예전에는 땅콩이 왜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예전에는 땅콩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땅콩이 우리나라 에 전해진 역사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땅콩은 19세기 말에 전래... 땅콩의 원산지는 남미다. 우리 조상들은 중국을 통해 처음으로 땅콩을 구경했는데, 조선 후 기인 정조 무렵이다. 땅콩은 독특하게 열매가 땅속에서 여문다.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땅콩 을 신기해했다. 꽃이 지면 열매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꽃이 땅에 떨어져 묻히면 그 속에서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하며 진기하고 괴상한 과일이라며 했다. 땅콩이 한자로는 낙화생( 落 花 生 )인데 꽃이 땅에 떨어지면 스스로 열매가 된다는 뜻이다. 정조 때의 실학자 이덕무가 1778년 사신으로 청나라를 다녀와서는 외국에는 죽은 사람의 간을 땅에 묻으면 사람이 다시 살아 나오고 먼 사막에는 양의 뼈를 묻으면 양이 다시 살아 나오는 곳이 있다더니 땅콩도 꽃이 떨어져 땅에 묻히면 그 속에서 과일이 열리니 마찬가지 이치인 것 같다 고 적었다. 1799년 중국을 다녀와 무오연행록( 戊 午 燕 行 錄 ) 을 쓴 서유문도 무화과라는 것은 꽃이 피 지 않고 열매만 열리는 신기한 과일이고 땅콩은 꽃이 모래 속에 떨어지면 스스로 열매를 맺 는데 맛은 호두와 같다며 기이한 열매라고 했다. 조선의 선비들이 땅콩을 보면 낯설어하는 모습이다. 정조 때 중국에 간 사신들이 현지에서 땅콩을 구경하고 맛보았지만 정작 조선에서 땅콩을 재배한 것은 훨씬 후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 五 洲 衍 文 長 箋 散 稿 ) 에 할아버지 이덕무 가 땅콩 종자를 가져다 심었는데 싹이 나지 않았다고 했으니 재배에 실패했던 모양이다. 그 리고 1836년에 남 모씨가 집에 땅콩을 심었다고 했으니 우리나라에서 땅콩 재배가 시작된 것은 빨라야 19세기 중반 이후였을 것이다. 하지만 땅콩이 널리 퍼진 것은 더욱 늦어 20세 기에 접어든 이후부터다. 그러니 예전 대보름날에는 땅콩 대신 부럼으로 무를 깨물며 부스 럼이 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3) 땅콩보다 아몬드가 먼저 전해졌다 일반적으로 땅콩은 우리나라에 옛날부터 있었지만 아몬드는 현대에 전해진 견과류라고 생 각한다. 하지만 땅콩보다는 아몬드가 먼저 전해졌다. 아몬드 역시 땅콩에 관해 기록한 정조 때의 실학자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보인다. 다만 땅콩은 이덕무가 중국에 갔을 때 처음 본 반면 아몬드는 한양에서 이미 재배하고 있다고 청 장관전서에 기록했다. 편도( 匾 桃 )라는 글에 지금 교서관( 校 書 館 ) 동쪽 담장 아래에 복숭아나 - 3 -
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다. 납작한 열매가 맺었는데 세속에서 말하는 또애감 이다. 사람들이 감복숭아( 枾 桃 ) 라고만 알고 있는데 다른 나라에서 진품으로 여기는 줄을 알지 못한다 고 적 었다. 보충 설명을 하자면 교서관은 경서와 사적 등을 인쇄하고, 도장 등을 보관 관장하던 관청 으로 지금의 서울시 중구 예관동, 남산 입구 숭의 여자 대학교 별관 터라고 한다. 여기서 교서관에 있는 감 복숭아나무의 열매편도가 바로 아몬드다. 땅콩은 우리 고유의 견 과류이고 아몬드는 현대에 들어 서양에서 전해진 견과류일 것이라는 일반적인 짐작과는 달 리 아몬드의 재배가 땅콩보다 훨씬 빨랐던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서역인 페르시아가 원 산지인 아몬드와 남미가 원산지인 땅콩의 전래 시기는 지역적으로 아몬드가 더 빨랐을 수밖 에 없다. 참고로 아몬드는 복숭아 비슷한 열매의 씨앗이다. (4)호두를 굴리는 이유는...? 대보름이면 부럼 중에서 예쁘고 잘 생긴 호두를 골ㄹ라 손에 넣고 굴리고 다닌다. 호두를 굴리면 손바닥에 지압도 되고 건강에 좋다고 믿었기 때문인데 왜 호두를 굴렸을까? 호두를 손바닥에 굴리며 노는 것은 기혈을 자극해 건강에 좋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호두가 귀신을 쫓는 나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호두는 한자로 오랑캐 호( 胡 ), 복숭아 도( 桃 )를 써서 호도( 胡 桃 )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오랑캐 땅에서 자라는 복숭아라는 뜻이다. 3세기 무렵, 진나라의 장화( 張 華 )가 쓴 박물지 ( 博 物 誌 ) 에 호두는 강호( 羌 胡 )의 과일로 한나라의 장건( 張 騫 )이 서역에서 석류, 포도와 함께 종자를 얻어와 동쪽으로 퍼졌다 고 적었다. 강호( 羌 胡 )는 지금 중국 신강성, 감숙성, 영하성 일대를 말한다. 예전에는 복숭아나무에는 신비한 기운이 있어 귀신을 쫓는다고 믿었다. 오랑캐 땅에서 자 라는 복숭아라고 믿은 호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때문에 호두나무를 신선의 나무라는 뜻 으로 선목( 仙 木 )이라고도 했다. 호두 역시 귀신을 쫓고 상서로운 기운을 불러와 재난을 면하 게 해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호두는 또 장수를 돕는 견과류라는 뜻에서 장수과( 長 壽 果 ), 만년을 사는 열매라는 뜻에서 만세자( 萬 世 子 )라고도 한다. 이런 별명이 생긴 것은 아마 호두의 원산지와 관련이 있지 않을 까 싶다. 호두의 원산지는 고대 안식국( 安 息 國 )으로 아프가니스탄 부근이다. 지금은 분쟁지역으로 널 리 알려져 있지만 예전에는 장수촌이 많은 것으로 유명했다. 장수과라는 별명이 생긴 것도 호두가 장수에 이로운 음식이기도 하지만 안식국에 장수하는 노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정월 대보름에 호두로 부럼을 깨어 부스럼을 옮기는 역귀를 물리치고 손바닥 에 굴리며 건강을 축원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 4 -
양갱의 변신은 무죄! 1. 양고기 국물로 만든 과자? 양갱 (1)양갱( 羊 羹 )은 어떤 과자일까? (2) 양갱의 유래에 대하여... 2.양갱에 얽힌 옛날이야기 (1)양갱을 나누어 먹지 않아 나라가 망했다? 3, 양갱의 종류... 만드는 법 (1) 연양갱, 수양갱, 증양갱 (2)양갱의 원료 한천에 대하여... 1. 양고기 국물로 만든 과자? 양갱 (1)양갱( 羊 羹 )은 어떤 과자일까? 양갱은 팥으로 만든 과자다. 팔을 삶아 체에 걸러 나온 앙금에다 설탕과 한천을 섞어 굳혀 서 만든다. 우리나라 전통과자, 즉 한과( 韓 菓 )로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사실은 일본 에서 발달한 일본 과자( 和 菓 )다. 일본말로는 요우깡(ようかん)이라고 한다. 양갱은 지금까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과자 상표 중에서는 역사가 가장 오래 된 제품이 다.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1945년부터 판매되어 지금까지 같은 제품이 팔리고 있기 때문 이다. 해방 후 국내 제과업체(해태제과)에서 일본계 제과회사를 인수하면서 대표 제품을 그대로 이어받아 우리 입맛에 맞도록 변형해 만든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당시 양갱 한 개의 가격이 50환, 100환 짜리 두 종류가 있었다고 하고 당시의 막걸리 한 되 가격이 150환이었다고 하니까 당시의 물가 시세, 그리고 경제 규모 등을 고려했을 때 아이 들이 군것질 거리로 마구 사먹을 수 있는 가격은 아니었다. 양갱은 이렇게 역사가 깊은 과자인 만큼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에 가서 양갱을 사 들고 포장 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작은 글씨로 한자로 羊 羹 (양갱)이라고 적혀 있다. 대부분의 양 - 1 -
갱 브랜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양갱에서 양( 羊 )은 글자 그대로 양이라는 동물을 나타내는 글자이고, 갱( 羹 )이라는 글자는 고깃국이라는 뜻이다. 양갱은 분명 팥 앙금을 원료로 만든 과자인데 왜 엉뚱하게 양갱, 즉 양고기 국이라는 뜻의 이름을 얻게 됐을까? (2) 양갱의 유래에 대하여.. 과자에 양고기 국이라는 뜻의 기상천외한 이름이 생긴 까닭은 양갱이 만들어진 유래 때문 이다. 양갱은 일본의 승려들이 중국에서 전해와 발전시킨 과자다. 전래시기에 대해서는 12-13세 기 가마쿠라 시대라는 설도 있고 14-16세기 무로마치 시대라는 설도 있지만 명확하지 않다. 문헌상으로는 무로마치 시대에 서당의 초급용 교과서인 정훈왕래( 庭 訓 往 來 )에 간단하게 먹 는 간식( 點 心 )으로 양갱이 소개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양갱의 기원은 일본 불교인 선 종에서 육식을 계율로 금지했기 때문에 정진요리로써 육식 대신에 팥을 쓴 것이 일본 양갱 의 원형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본에서 양갱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에도 시대 때로 처음에는 팥을 쪄서 떡처럼 만들었다가 나중에 팥 앙금을 가라앉혀 과자로 만들어 차와 함께 먹는 간 식으로 유행했다. 양갱의 일본 전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옛날 중국에 양간병( 羊 肝 餠 ) 이라는 떡이 있었다. 한자로 보면 양( 羊 )의 간( 肝 )으로 만든 떡( 餠 )인데 실제 양의 간으로 만 든 순대의 한 종류였는지 아니면 양의 간처럼 만든 떡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중 국에 유학 온 일본 승려가 귀국할 때 이 떡을 일본에 전했는데 불교에서는 육식을 금하기 때문에 양고기 대신 팥을 넣어 발전시킨 것이 지금의 양갱이 되었다는 것이다. 양의 간으로 만들었지만 이름은 양고기 국이라는 뜻의 양갱( 羊 羹 )이 된 이유는 간( 肝 )의 일본어 발음과 국이라는 뜻의 갱( 羹 ) 발음이 모두 깡(かん) 이기 때문에 양간( 羊 肝 )이라고 불러야 할 것을 양갱( 羊 羹 )으로 혼동해 일본어로 요깡(ようかん)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양갱이 실제 양고기 국물인 양갱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양고기로 국을 끓인 후 국물이 식으며 고기의 젤라틴 성분이 굳어져 말랑말랑한 식품이 된다. 옛날 중국에서는 양고기 국이 식어 말랑말랑하게 된 것을 간식으로 먹었는데 일본 승려들 이 이것을 보고 일본으로 가져와 발전시킨 것이 현재 먹는 양갱의 기원이라고 한다. 모두 문헌의 근거를 토대로 한 이야기가 아니라 민간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는 민간어원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일본은 양갱의 원형이 중국에서 전해졌다고 하지만 실제 중국 문헌에서는 현재의 양갱과 비슷한 과자로서의 양갱에 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현재 중국에서도 양갱을 판매한다. 베이징의 중심부인 왕푸징( 王 府 井 )거리, 텐진 등지 에 중국 전통과자를 파는 상점에서 다양한 종류의 양갱을 판매한다. 팥 양갱에서부터 밤 양 갱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볼 수 있는 양갱은 물론 복숭아, 사과, 산사나무 열매 맛 - 2 -
등 중국 특유의 맛을 내는 양갱도 있다. 다만 이것이 중국에서 옛날부터 전통적으로 만들었던 과자인지, 혹은 일본의 영향, 특히 일 본군이 베이징과 톈진을 점령해 지배했을 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다. 2.양갱에 얽힌 옛날이야기 (1)양갱을 나누어 먹지 않아 나라가 망했다? 양갱의 유래를 추적해 보기 위해 중국 문헌을 찾아보면 양갱이라는 글자가 자주 보인다. 물론 진짜 양고기 국이라는 뜻으로 쓰였을 뿐, 일본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국물을 식혀 말랑 말랑한 젤리 상태로 먹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기원전 한나라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양고기 국을 즐겨 먹는 것을 보면 과자 상태로 만든 양갱을 다른 용어로 표현했을 수도 있고 혹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 진 식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록에 빠진 것일 수도 있다. 때문에 우리가 먹는 과자 양갱이 양고기 국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엉터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지금 먹는 양갱과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중국 역사에서 양고기 국, 그러니까 양갱( 羊 羹 )은 역사의 교훈으로 역사책에 자주 인용된다. 부하에게 양고기 국을 나누어 주지 않았다가 부하의 원한을 사서 나라가 멸망했기 때문이 다. 아랫사람을 무시하거나 사소한 이유로 부하를 섭섭하게 하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고 인 간관계를 해칠 수도 있다는 교훈이다. 춘추전국시대 때 활동한 전략가들의 정치 군사 외교 경제 전략을 모은 전국책( 戰 國 策 )이라 는 서적이 있다. 전한( 前 漢 ) 때 사람인 유향( 劉 向 )이 쓴 책인데 여기에 양고기 국, 양갱의 이 야기가 나온다. 중산이라는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장수들을 모아 잔치를 열면서 양고기 국( 羊 羹 )을 대접했 다. 그런데 준비했던 양고기가 모자랐다. 마침 대부 벼슬에 있던 사마자기( 司 馬 子 期 ) 앞에서 양고기 국이 떨어졌다. 여러 사람 앞에서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사마자기는 이웃 초나라 로 건너가 초왕에게 중산국의 약점을 알려주며 정벌을 하라고 꼬드긴다. 초왕이 군사를 일 으켜 중산국은 결국 망하고 말았다. 전국책에서는 양고기 국 한 그릇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 며 사소한 것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뒷이야기가 한 가지 더 있다. 중산국은 망하고 임금을 비롯해 모든 신하들이 뿔뿔이 흩어 져 도망갔다. 그런데 단 두 사람만이 창을 꼬나들고 도망가는 임금을 보호하며 쫓아왔다. 중 산국 왕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왜 다른 사람처럼 도망가지 않고 나를 따라와 고 생을 하는가? 그러자 두 신하가 대답했다. 예전 저희 아버지가 굶어 죽을 뻔 했는데, 왕께 서 그릇에 담긴 밥을 나누어 주어 목숨을 건진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만약 에 중산국에 일이 생기면 너희들이 목숨을 다해서 그 은혜를 갚아라 라는 유언을 남기셨습 - 3 -
니다. 그래서 지금 왕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중산국 왕이 고개를 들어 탄식하며 말했다. 양고기 국 한 그릇 때문에 나라를 잃었는데, 밥 한 그릇 때문에 두 용사를 얻었구나 들은 귀는 천 년이고 말한 입은 사흘이다 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 좋은 말, 따뜻한 말, 고운 한 마디가 누군가의 가슴에 씨앗처럼 떨어져 뜻밖의 용기와 위로를 줄 수 있다. 반면 무심코 생각 없이 던진 한 마디에 상처 받아 피눈물을 흘리며 복수의 칼을 갈 수도 있다. 3, 양갱의 종류... 만드는 법 (1) 연양갱, 수양갱, 증양갱 이왕 양갱 이야기가 나왔으니 양갱을 어떻게 만드는지, 양갱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 알아 보자. 시중에서 사 먹는 양갱의 포장지에는 연( 鍊 )양갱, 혹은 연( 煉 )양갱이라고 적혀 있다. 한자로 쇠 금( 金 ) 변이냐, 불 화( 火 ) 변이냐의 차이일 뿐, 모두 불리다, 반죽하다는 뜻으로 같은 의미 로 쓰인다. 어쨌든 우리가 먹는 양갱은 대부분 연양갱인데 양갱에는 연양갱, 물 양갱인 수( 水 )양갱, 그 리고 찐 양갱인 증( 蒸 )양갱이 있다. 양갱은 팔을 삶아 체에 걸러 나온 앙금에다 설탕과 한천을 섞어 조린 후 굳혀서 만드는데 연양갱은 한천을 많이 넣어 굳힌 것으로 수분이 적고 설탕이 많이 들어가 저장성이 높은 것 이 특징이다. 반면 물양갱은 한천을 적게 넣어 수분이 많아 액체 상태이며 부드러운 것이 특징으로 가장 나중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예전 일본에서는 명절 음식으로 특별히 겨울철에 만들어 먹었다 고 한다. 반면 찐 양갱은 한천 대신에 밀가루 혹은 칡 가루를 팥 앙금과 섞어서 찐 것으로 초창기 양갱의 형태다. (2)양갱의 원료 한천에 대하여... 한천은 우무를 동결 건조시켜 만드는 식품이다. 바닷가에서 자라는 해초인 우뭇가사리를 끓여서 굳혀 묵으로 만든 것이 우무인데 이것을 동결 건조시킨 한천은 아이스크림, 양갱 등 각종 식품의 원료로 쓰인다. 한천( 寒 天 )은 차가운 하늘이라는 뜻으로 단어의 유래가 일본어 유래사전에 보인다. 추운 겨 울, 한 승려가 햇볕에 우무를 말리다 한천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설도 있고 17세기 교토에서 추운 날 우무를 집 밖에 놓았다가 우연히 동결 건조된 우무를 얻게 되어 한천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영어로는 agar 로 이 단어는 말레이에서 유래한 말로 현지어로 젤리(jelly)라는 뜻이라고 한 다. - 4 -
우무를 잘 모르는 사람도 많은데 여름에 콩국수 먹을 때 콩국에 들어있는 맑고 투명한 젤 리(jelly)같은 것이 바로 우무다. 또 재래시장에서는 투명한 우무를 갖가지 양념으로 무쳐서 간식으로도 판다. 우무는 우모( 牛 毛 ) 또는 우모초( 牛 毛 草 )라고 하는데 생김새가 마치 소 털처럼 생겼다고 붙 은 이름으로 옛날에는 여름철 궁중의 임금님에게 바쳤던 남해안의 특산물이었다. 최영년의 해동죽지( 海 東 竹 枝 )에서는 남해 연안에서 생산되는 우뭇가사리( 牛 毛 草 )로 해마다 여름이면 투명한 우무묵( 淸 泡 )을 만들어 궁궐에 진상하는데 사람들이 묵을 가늘게 썰어 초장을 쳐서 냉탕으로 만들어 마시면 상쾌해서 더위를 씻을 수 있고 갈증도 덜어낼 수 있다고 적었다. 참고로 우무(한천)와 곤약을 헷갈리는 사람도 많은데 우무는 해초인 우뭇가사리로 만드는 반면 곤약은 구약식물의 뿌리로 만든다. - 5 -
닮지 말고 예뻐져라 단팥빵 1. 단팥빵에 왜 참깨를 뿌렸을까? (1) 단팥빵 가운데는 왜 움푹 들어갔을까? 2. 빵의 본고장 서양에는 왜 단팥빵이 없을까? 3. 크림빵, 소보로 빵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1) 소보로 빵, 과자와 빵을 동시에... (2)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크림빵 1. 단팥빵에 왜 참깨를 뿌렸을까? 또 하나의 특징은 단팥빵은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여러 빵 중에서 왜 유독 단팥빵만 가운데를 배꼽처럼 가운데를 파놓았을까? 길가에 마음대로 나뒹구는 돌멩이 하나에도 돌멩이가 거기까지 굴러 온 데는 그럴만한 사 연과 이유가 있다고 한다. 단팥빵에 참깨를 뿌린 이유, 단팥빵의 가운데를 움푹 파놓은 데는 어떤 사연과 이유가 있 을까? 지금 단팥빵에 뿌린 참깨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단지 옛날부터 단팥빵에 참깨 를 뿌렸으니까 만드는 사람도 습관적으로 참깨를 뿌릴 뿐이고, 먹는 사람도 빵 위에 뿌려진 참깨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단팥빵에 뿌린 참깨는 원래 빵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표시하는 상징이었다. 단팥 빵에 들어있는 단팥은 두 종류다. 하나는 팥 알갱이가 그대로 씹히도록 체로 거르지 않은 통 단팥을 넣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팥을 곱게 갈아서 체로 걸러 넣는 고운 단팥이다. 하지만 빵을 자르지 않고는 어느 빵에 통 단팥이 들어있는지 또는 고운 단팥이 들어있는지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고운 단팥을 넣은 빵에는 참깨를 뿌려 놓았고 통 단팥 을 넣은 단팥빵에는 아무 것도 뿌리지 않거나 혹은 겨자씨를 뿌려서 소비자들이 기호에 맞 게 고를 수 있도록 표시를 한 것이다. 단팥빵에 뿌려진 참깨는 소비자가 원하는 단팥을 골라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한 소비자 중심 마케팅의 결과였다. 단팥빵을 최초로 개발한 일본 기무라 제과에서 처음 이렇게 표시를 했 는데 다른 제과점에서도 그대로 따라 했고, 그 전통이 우리나라에까지 전해진 것이다. (1) 단팥빵 가운데는 왜 움푹 들어갔을까? 단팥빵이 일본에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단팥빵이 처음 나왔을 무렵의 메이지 일왕 - 1 -
과 당시 일본 총리였던 야마오카 뎃슈( 山 岡 鐵 舟 )의 영향이 적지 않다. 단팥빵의 창시자인 기무라와 야마오카 총리는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기 전부터 서 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기무라 야스베에가 1874년 긴자 거리에 서양식 제과점을 창업한 이듬해 수상인 야마오카 뎃슈가 기무라를 찾아온다. 왕이 벚꽃놀이 행차를 하는데 폐하에게 당신이 만들었다는 단팥빵을 맛보게 하자 는 제안 을 한다. 기무라는 사업도 사업이지만 일왕에게 자신이 만든 빵을 바친다 는 사실이 너무 영광스럽고 놀라웠기 때문에 온 몸을 떨었다. 기무라 제과점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내용이 다. 이후 기무라는 일왕을 위해서 정성을 들여 특별한 단팥빵을 만들겠다며 연구에 연구를 거 듭한다. 일본사람들은 빵은 일본 음식이 아니라 서양음식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으니 일왕을 위해 가장 일본적인 빵을 만들어야겠다고 방향을 잡는다. 연구 결과 일왕이 벚꽃 행사에 참석할 때 먹는 빵이고, 벚꽃은 봄을 대표하는 꽃이니까 일 본 전통음식인 소금에 절인 벚꽃 열매를 빵 한가운데 넣어 보자며 독특한 빵을 만든다. 그 러니까 단팥빵의 한가운데인 배꼽 부분에다 소금에 절인 벚꽃 열매를 집어넣은 것이다. 1875년 메이지 일왕의 식탁에 드디어 기무라가 만든 단팥빵이 선을 보였다. 새롭고 독특한 음식인 단팥빵을 처음 맛본 메이지 일왕이 맛있게 먹었는데 특히 왕비가 맛있다며 계속해서 왕실에 단팥빵을 공급해 줄 것을 요구했다. 기무라는 이후 궁내성에 납품하는 단팥빵은 시중에서 파는 단팥빵과 구분하기 위해 한가운 데를 오목하게 만들고, 소금에 절인 벚꽃 열매를 얹어 납품했다. 지금 우리가 먹는 단팥빵의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간 이유도 그때 만들어진 흔적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기무라 제과점에서 왕실에 단팥빵을 공급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단팥빵은 일본 전국에 유명해졌다. 또 단팥빵 하나 사려고 3시간 넘게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한다. 2. 빵의 본고장 서양에는 왜 단팥빵이 없을까? 단팥빵은 제과점에서 파는 빵이지만 정작 빵의 본고장인 유럽, 혹은 미국에서는 단팥빵을 사먹을 수 없다. 단팥빵은 고사하고 비슷한 빵조차도 구경하기 힘들다. 단팥빵은 서양에서 만든 빵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팥빵은 일본에서 처음 만들었다. 그러니까 서양 빵이 아니라 일본 빵이다. 단팥빵과 찐빵 은 똑같이 밀가루 반죽에 단팥을 넣고 만든다. 그런데 단팥빵과 찐빵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찐빵은 동양식으로 찐 것이 단팥빵은 서양식으로 구운 것(Baked)이 차이다. 그러니까 서양 빵과 동양 찐빵이 퓨전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음식이 만들어졌을 까? 근대 초기, 일본에는 유일한 개항지였던 나가사키 항구를 통해 서양 문물이 전해지는데 이 때 서양의 빵도 함께 들어왔다. 일본인은 낯선 서양 빵에 관심을 보였지만 처음 맛 본 서양 빵이 바로 일본인의 입맛을 만 - 2 -
족시키지는 못했다. 특히 빵을 발효시키는데 사용되는 효모에 대해 거부감이 심했다고 한다. 메이지( 明 治 ) 시절, 왕실 주방 일을 하던 기무라 야스베에가 우연히 네덜란드인의 요리사로 일하던 우메키치라는 사람을 만나 낯선 서양 빵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다. 기무라가 전해들은 서양 빵은 일본 찐빵이나 중국 만두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쌀밥이 주식인 일본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찐빵이나 만두에 익숙한 일본인에게 무엇인가 끌리는 면이 있다고 느꼈다. 이후 기무라는 일본인 입맛에 맞도록 서양 빵을 개량하는 연구 를 시작한다. 약 6년의 연구 끝에 효모(yeast) 맛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을 위해 밀가루를 발효는 시키 지만 효모 맛은 느껴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동양의 전통에 따라 알코올을 이용해 발효시키 는 것이다. 그리고 서양과 달리 밥이 주식인 일본인의 식습관에 어울리도록 간식으로 빵을 먹도록 개량했다. 그래서 일본인이 좋아하는 단팥을 넣었는데 전통적인 일본 찐빵과도 다르고 중국 만두와는 더더욱 다르며 네덜란드에서 전해진 서양 빵과도 또 다른 독특한 퓨전식품인 단팥빵을 만들 어 낸 것이다. 기무라는 단팥이 들어있는 빵이라는 뜻에서 이름을 안빵(アンパン)으로 짓고 1869년 도쿄 에 작은 서양식 잡화점 겸 제과점을 창업한다. 단팥빵의 역사다. 서양의 빵이 일본에, 동양 에 맞게 변화하고 적응하는 과정이 단팥빵에 담겨 있다. 3. 크림빵, 소보로 빵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1) 소보로 빵, 과자와 빵을 동시에... 단팥빵과 함께 제과점에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빵이 곰보빵이라고도 하는 소보로 빵, 그리고 크림빵이다. 역시 유럽과 미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데 단팥빵처럼 일본에서 처 음 만들어 동양으로 퍼진 빵이기 때문이다. 소보로 빵은 기원이 확실치 않다. 누가 만들었는지, 어떻게 개발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만든 시기는 20세기 초반으로 보고 있는데 소보루 빵의 기원을 연구한 일본책 메론 빵의 진실( 講 談 社, 2004년) 에는 1932년 일본 특허청에 메론빵 만드는 법이 실용신안으로 등 록되어 있다( 등록번호 154057). 메론빵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메 이지 시대(1868년-1912년) 후반 혹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9년) 무렵에 나온 것으로 보 고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소보로 빵이라고 하지만 일본에서는 소보로 빵 대신에 메론빵이라고 부 른다. 소보로(そぼろ)'는 일본어로 생선 고기 등을 으깨어 양념한 후 밥이나 초밥에 뿌려 먹 는 식품이다. 빵 위에 과자가루가 뿌려져 있어서 생긴 이름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빵 표면이 메론 껍질처럼 갈라진 것이 메론을 닮았다고 해서 메론 빵, 혹은 서양 과자인 머랭에서 와전되어 메론빵이라고 부른다. 또 일본을 통해 소보로 빵이 전해진 타이완에서는 파인애플을 닮았다고 파인애플빵( 菠 蘿 面 包 )이라고 한다. 소보로 빵은 어떻게 생긴 빵일까? 보통 기원을 두 가지로 추측한다. 하나는 머랭 - 3 -
(Meringue)이라는 쿠키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소보로빵의 일본이름인 메론빵이 머랭이 와 전되어 생긴 이름이라는 것이다. 머랭은 계란 흰자에 설탕과 코코넛, 바닐라 등의 향료를 넣고 거품을 낸 후에 낮은 온도의 오븐에서 구워 바삭거리도록 만든 쿠키다. 종류가 여럿 있지만 기본적으로 쿠키와 같은 느 낌으로 크림 등에 질감을 주어 디저트에 얹어 먹는다. 또 다른 기원으로 추정하는 것은 독일의 스트로이젤(Streusel)이라는 빵이다. 스트로이젤은 밀가루를 하얀 설탕과 버터에 섞어서 만드는 비스킷 반죽 같은 것으로 부스러기처럼 만들어 머핀이나 빵, 케이크 등에 토핑으로 얹어 굽는다. 스트로이젤이라는 단어 자체가 뿌리다 반짝거리다 라는 뜻의 독일어 동사인 스트로이엔(Streuen)에서 비롯된 단어라고 하는데 독 일에는 스트로이젤 쿠키라는 케이크가 있다. 여기에 소보로 빵의 특징이 있다. 쌀밥이 주식인 일본에서 서양의 주식인 단팥빵을 간식화 한 것처럼 소보로 빵 역시 빵에 비스킷 반죽을 올려놓고 함께 구운 것으로 빵도 먹으면서 동시에 과자를 먹는 느낌이 들도록 만든 것이다. 서양에서 식사로 먹는 빵이 일본에서 간식으로 먹는 빵으로 정착하는데 일조를 한 것이 바 로 소보로 빵이다. (2)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크림빵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 음식의 발달도 비슷하다. 우리가 좋아하는 크림빵도 그 중 하나 다. 크림빵이 세상에 나온 지는 약 110년이 됐다. 크림빵 역시 일본에서 만든 빵인데 1904년 처음 만들어 팔았다. 그런데 크림빵의 뿌리는 단팥빵이라고 한다. 1874년에 단팥빵이 선을 보였으니 정확하게 30년 후에 나온 빵이다. 크림빵을 개발한 사람은 일본 나카무라 제과( 中 村 屋 )의 창업자인 소마 아이조라는 사람이 다. 부부가 함께 1901년 동경대학교 앞에서 나카무라 제과점을 열었는데 어느 날 슈크림을 처음 먹어보고는 그 맛에 깜짝 놀란다. 지금이야 슈크림이 별 맛 아닐 수도 있겠지만 100년 전에 부드럽고 촉촉한 패스트리(Pastry)에 달콤한 카스터드 크림이 들어있는 슈크림을 처음 으로 맛보았다면 천상의 맛 이라고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빵집을 하는 소마씨 부부는 환상적인 맛의 슈크림을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빵에다 적용시켜 판매하면 인기를 끌 수 있겠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당시 경쟁사인 기무라 제과( 木 村 屋 )에서 개발해 일본인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단팥빵에 크림을 넣어 보기로 한다. 빵 속에 들어가는 내용물로 단팥 대신에 크림으로 넣으면 신선한 풍미가 더해지면서 훨씬 고급화된 맛을 느낄 수 있고 게다가 아이들도 팥과 설탕만 넣은 팥빵보다는 유제품을 사용 한 크림빵을 먹으면 영양적인 측면에서 훨씬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구를 거듭한 끝에 1904년 처음 크림빵을 선보였는데 예상했던 대로 크게 히트를 했다. 단팥빵이 나온 지 꼭 한 세대가 지난 30년 만의 일로 그 사이에 일본사람들의 입맛이 단팥 빵 덕분에 빵에 길들여진 부분도 있었고 또 오랜 기간 동안 단팥빵을 먹었으니 새로운 빵이 - 4 -
나오기를 기대하는 욕구도 있었는데 빵과 크림을 결합한 크림빵이 시기에 맞게 적절하게 개 발된 것 역시 크림빵이 히트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한다. 현재 우리가 먹는 크림빵의 유래다. - 5 -
송편 품은 추석 1. 명절 때 마다 장만한 민족의 떡 (1) 추석 송편은 오려 송편 2. 추석의 기원에 대하여... 3. 언제부터 송편을 먹었을까? (1) 왜 솔잎으로 떡을 쪘을까? (2) 송편은 반달을 닮은 떡이다? 1. 명절 때 마다 장만한 민족의 떡 우리는 보통 추석에 송편을 먹는다. 하지만 다른 명절에도 송편을 먹었다. 옛날로 거슬러 올 라갈수록 추석보다는 다른 명절에 더 송편을 준비했다. 상식과는 달리 옛날에는 송편이 특 별히 추석에만 만들었던 음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명절 때마다 장만한 민족의 떡이라고 할 수 있다. 고문헌 곳곳에 기록이 보인다. 광해군 때 팔도의 맛있는 음식을 기록한 허균의 도문대작 에 송편은 봄에 먹는 떡이라고 했다. 봄에 쑥떡, 송편, 느티떡, 진달래 화전, 이화전 등을 먹는다며 가을에 송편 먹는다는 이야기는 없다. 다산 정약용도 봄날 지은 시 에서 뾰족한 송편, 생선으로 소를 만드니/한낮이 될 때까지 산가의 아내가 바쁘네 라고 읊었다. 추석이 아닌 봄철에 송편을 빚었는데 생선으로 소를 넣 었다는 것이다. 19세기 초 조수삼은 추재집( 秋 齋 集 ) 에서 정월 15일 대보름날 솔잎으로 찐 송편으로 차례 를 지낸다고 했으니 대보름날 송편을 먹었다. 열양세시기 와 동국세시기 는 모두 2월 초하룻날에는 벼 이삭을 털어서 흰 떡을 만들어 콩으로 떡 소를 넣고 떡과 떡 사이에 솔잎을 겹겹이 쌓아 시루에 찌는데 이것을 송편이라고 했다. 농사일이 이때부터 시작되므로 송편을 노비에게 나이 숫자대로 먹이는데 이것을 노비 송편이라고 불렀다. 정월과 2월에 이어 늦봄인 3월에도 송편을 먹었다. 영조 때 활동한 이의현은 도곡집( 陶 谷 集 ) 에 세시음식을 기록해 놓았는데 설날에는 떡국, - 1 -
대보름에는 약식, 3월 삼짇날에는 송편, 6월 유두일에는 수단, 7월 칠석에는 찐 만두인 상 화, 9월 중양절에는 국화전, 그리고 동지에는 팥죽을 먹는다고 적었다. 4월 초파일의 송편 기록도 보인다. 인조 때 문신 이식은 택당집( 澤 堂 集 ) 에 역시 명절음식 을 적으며 대보름 약식, 삼짇날 쑥떡, 초파일인 등석( 燈 夕 )에 송편이라고 했다. 5월 단오에도 송편을 빚었다. 조선시대 가정에서 지켜야 할 관혼상제의 의식을 적은 책인 사례의( 四 禮 儀 ) 에는 단오에 시루떡 또는 송편을 먹는다고 했는데 숙종 때의 문신 송징은 역시 약헌집( 約 軒 集 ) 에서 송편을 단오 음식으로 꼽고 있다. 6월의 유두절에도 송편은 빠지지 않았다. 선조 때 활동한 신흠은 유두절 좋은 명절에/거 친 마을로 쫓겨난 신하/수단 먹는 것은 토속을 따르고/송편 빚어 이웃집 선사하네 라고 읊 었다. 지금은 송편을 추석 때 먹지만 옛날에는 추석 이외에도 정월부터 6월까지 명절 때마다 특 별한 날에는 송편을 빚었다. (1) 추석 송편은 오려 송편 추석에 송편을 먹는다는 기록은 조선 후기, 근대에 이르러서야 집중적으로 보인다. 2월 초하 룻날 송편을 빚는다고 적었던 조선 후기, 순조 때의 동국세시기에는 추석 때 세시풍속으로 도 떡집에서는 햅쌀 송편과 무, 호박을 넣은 시루떡을 만들고, 찹쌀가루를 찐 다음에 떡메로 친 인절미를 판다고 했다. 원문에는 특별히 햇벼( 早 稻 )로 송편을 만든다고 했는데 송편이 추석 때의 특별한 떡이 아 니라 여러 떡 중 하나로 묘사돼 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25년 최영년의 해동죽지 에도 추석이면 송편을 먹는다고 했다. 8월 15 일은 중추로 신라 때의 가배일이며 집집마다 쌀로 떡을 만들어 솔잎을 깔고 찐 후 조상님께 성묘를 하니 추석 송편이라고 했다. 여기서도 새로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해 신송편( 新 松 餠 ) 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송편은 종류가 많아서 계절에 따라, 다양한 재료로 송편을 빚었다. 1931년 동아일보(9월 22일자)에는 송편은 아무 곡식이든지 가루로 만들 수 있으면 되는데 조, 수수, 귀리, 옥수수, 감자, 도토리 등으로도 만든다고 했고, 재료에 따라 오려 송편(햅쌀), 무리송편(묵은 쌀), 보 리송편(보리쌀)이 있다는 기사가 보인다. 동국세시기, 해동죽지를 비롯한 각종 고문헌을 보면 송편은 계절에 관계없이 다양한 재료 로 명절이면 어김없이 장만하던 민족의 떡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특별히 추석에 빚는 송편을 보고는 오려 송편 이라고 했다. 올벼( 早 稻 )를 수확한 후 빻은 햅쌀로 빚은 송편 이라는 뜻이다. 현대에 들어 송편이 특별히 추석 명절 음식으로 자리를 잡은 이유는 설날과 추석을 제외하 고 다른 날들은 모두 명절의 기능을 잃으면서 송편이 추석 떡으로 정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 2 -
2. 추석의 기원에 대하여... 추석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보름달이 둥글게 뜨는 음력 8월 15일을 명절로 정하고 먼 옛날부터 성대하게 보냈다. 추석은 왜 명절이 됐을까? 추수 감사의 성격이 강하다지만 음력 8월 15일은 아직 제대로 수확하기 전이다. 조상님께 성묘하는 날이라지만 왜 하필 추 석에 하는지도 설명이 충분치 않다. 추석의 기원은 무엇일까? 추석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 고문헌으로는 우리 역사책인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 중국 역사서 인 수서( 隋 書 ) 동이열전( 東 夷 列 傳 ). 구당서( 舊 唐 書 ) 동이열전, 그리고 일본 승려인 엔 닌의 기행문 입당구법순례행기( 入 唐 求 法 巡 禮 行 記 ) 가 있다. 책이 나온 연도는 수서가 636년, 입당구법순례행기가 839년, 구당서가 945년, 삼국사기 1145년의 순이다. 기록된 내용으로는 삼국사기에 서기 32년, 신라 제3대 임금인 유리 이사금 때의 일이라고 적혀 있으니 삼국사기에 실린 내용이 가장 빠르다. 유리이사금 9년, 왕이 여섯 부서를 정하고 이를 둘로 갈라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 각 부내의 여자를 거느리게 했다. 가을이 되면 음력 7월 16일부터 매일 아침 큰 부서의 뜰 에 모여 베를 짠 후 밤중에 돌아갔는데 8월 15일에 이르러 공의 많고 적음에 따라 패한 쪽 에서 술과 음식을 내어 이긴 편에 사례하며 노래하고 춤추며 온갖 놀이를 즐겼으니 이를 가 배( 嘉 俳 )라고 했다. 패한 쪽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며 회소( 會 蘇 ), 회소 읊으니 그 소리가 애처롭고도 우아했다. 후세 사람들이 그 소리로 노래를 만들어 회소곡( 會 蘇 曲 )이라 고 이름 지었다. - 三 國 史 記 新 羅 本 紀 儒 理 尼 師 今 - 우리는 보통 추석의 기원을 여기서 찾는다. 특이한 사실을 두 가지 발견할 수 있다. 신라 초기부터 음력 8월 15일을 특별한 날로 정해 기념했다는 사실, 그리고 추석의 기원이라지만 달맞이, 성묘, 혹은 추수감사와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중국 문헌도 비슷하다. 수서 동이열전 에는 신라에서는 해마다 8월 15일에는 잔치를 열고, 관인들에게 활을 쏘게 하여 말과 베를 상으로 준다고 적혀있다. 구당서 동이열전 도 거의 같은 내용이다. 정월 초하루와 함께 8월 15일을 중히 여겨 풍 악을 울리고 연회를 베풀어 군신이 궁정에서 활쏘기를 한다. 부인들은 머리를 틀어 올려 비 단과 구슬로 치장을 하는데 머리털이 길고 아름답다고 적혀 있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법화원 노승의 말을 인용해 8월 15일, 명절의 기원을 엉뚱하 게 신라가 발해와 싸워 이겼다는 전승 기념일이라고 했다. 또 다른 나라에는 없고 오직 신 라에만 있는 명절이라고 했다. 중추절( 仲 秋 節 )을 명절로 여기는 중국에서 신라에만 있는 명 절이라고 한 것도 주목해 볼 부분이다. 정리해 보면 고대 추석의 기원은 해와 달에게 소원을 빌며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이라기보 다는 단합 대회의 성격이 강했다. 추수 감사의 의미는 나중에 더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그 - 3 -
러니 굳이 달에게 소원을 빌려고 달처럼 생긴 떡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참고자료 : 중국의 중추절 중국에서 중추절을 명절로 지낸 것은 송나라 이후다. 북송 때인 1147년, 맹원로의 동경몽화록 ( 東 京 夢 華 錄 ) 에 중추절을 명절로 여기는 분위기가 묘사돼 있다. 귀족과 부자는 정자에 올라 달 을 감상하고 백성도 달구경을 한다고 했는데 가을을 맞아 수확을 축하하고 보름달 구경을 하는 분 위기다. 이후 남성 때인 1274년 오자목의 몽양록( 夢 梁 錄 ) 에도 수도인 항저우( 杭 州 )에서의 중추절 풍 속을 묘사한 글이 보인다. 음력 8월 15일의 달은 평소보다 배나 밝아 월석( 月 夕 )이라고 한다고 했 다. 이날 달을 감상하며 술 마시고 노래하며 잔치를 연다고 했는데 중국에서 중추절은 명나라와 청나 라에 접어들면서 확실하게 전통명절로 자리를 잡는다. 중국의 중추절은 달맞이를 하는 날이니 달 모양의 월병을 먹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추석과 중국의 중추절은 날짜는 같은 8월 15일이지만 기원도 다르고 명절이 된 시기도 다르다. 선조들이 추석을 우리 고유의 명절이라고 부른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3. 언제부터 송편을 먹었을까? 추석이 됐건 혹은 다른 명절이 됐건 우리는 언제부터 송편을 빚어 먹었을까? 먼저 추석에 관한 기록을 보면 통일 신라에서도 추석 때에는 떡을 먹으며 명절을 보낸 것으로 나온다. 서기 839년, 일본 승려 엔닌( 圓 仁 )이 당나라에서 유학을 하던 중 장보고가 산동성에 세운 절인 법화원에서 신라 명절인 추석을 보냈다. 이곳에서 추석에 떡을 먹었다는 것이다. 엔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 入 唐 求 法 巡 禮 行 記 ) 에 절에서 박탁( 䭦 飥 )이라는 떡으로 만든 음 식을 마련해 8월 15일의 명절을 보냈다 는 기록을 남겼다. 박탁 은 떡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음식이다. 쌀가루나 밀가루와 같은 곡식 가루를 반죽해 만드는 음식이니 떡의 원형 정도로 지금의 수제비와 비슷한 음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쌀가루를 반죽한 박탁을 찐 것이 발전해 떡이 됐고, 밀가루를 반죽한 박탁이 발달해 국수 와 수제비 등 다양한 밀가루 음식이 나왔으며 박탁에다 소를 넣어 싼 음식이 만두라고 할 수 있다. 쌀가루 반죽에다 지금처럼 콩이나 참께, 팥 등을 소로 넣고 솔잎에 찌면 바로 송편이 되는 것인데 엔닌이 먹었다는 박탁 이 송편과 비슷한 음식이었는지 아닌지는 설명이 없으니 알 수 없다. 다만 9세기 중반, 신라 사람들이 추석 때 떡을 먹으며 명절을 보낸 것은 분명하다. 송편이라는 떡 이름은 조선 초기에 등장한다. 성종 때 활동한 김수온의 식우집( 拭 疣 集 ) 에 송편을 푹 찌고 두부를 구웠다( 爛 蒸 松 餠 豆 泡 炙 ) 는 구절이 있다. 솔잎으로 찐 떡이라는 뜻의 송병( 松 餠 )이라는 한자를 썼는데 송편이라는 이름이 보이는 초기 문헌이다. 때문에 송편이 등장한 것은 늦어도 조선 초기 이전으로 추정 - 4 -
할 수 있다. 선조 때인 1601년 오희문의 쇄미록( 鎖 尾 錄 ) 에도 송편이 보인다. 음력 5월5일 단오에 송 편을 준비했다는 기록과 12월22일 모친의 생신 때 식구들이 송편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 다. 송편 만드는 방법은 1680년 요록( 要 錄 ) 에 백미가루로 떡을 만들어 솔잎에 찐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 에 송편 만드는 법을 자세히 풀이해 놓았 는데 떡 속에다 콩가루로 소를 넣고 솔잎으로 쪄서 만드는데 이것이 소나무 떡인 송병( 松 餠 ), 즉 송편이라고 설명했다. 성호사설에는 혹은 솔잎으로 찌지 않고 무늬가 있게 얇게 만 들어 익히기도 하는데 이것은 산병( 散 餠 )이라고 했다. 송편과 만드는 법은 비슷하지만 안에 다 소를 넣어 찐 다음에 겉에는 콩가루를 입히기도 하는데 이것은 단자( 團 子 )라는 것으로 푸른 쑥을 섞어 만들기도 한다고 했다. 송편은 솔잎으로 찌기 때문에 송편인 것이니 솔잎으 로 찌지 않으면 송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익은 성호사설에 문헌통고( 文 獻 通 考 )를 인용해 이런 떡들은 모두 한 시대의 풍속이었다 고 했는데 시대에 따라 유행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송편이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1) 왜 솔잎으로 떡을 쪘을까? 송편을 찔 때 왜 굳이 솔잎을 넣는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한 까닭을 알 수 없다. 현대에 나 온 한국세시풍속사전에서는 송편은 흰떡 속에 솔잎에서 발산되는 소나무 정기를 침투시킨 떡으로 솔잎의 정기가 몸 안으로 들어와 건강해진다고 여겼기 때문 이라고 풀이했다. 솔잎에 떡을 찌면 향이 배어 맛도 좋고 떡도 오래 보존할 수 있으며 소나무와 솔잎은 건강 에 좋다고 여겼을 뿐만 아니라 소나무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었으니 떡을 먹으며 그 기상 을 본받고자 했을 것이다.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소나무가 건강에 좋다고 믿었다. 동국이상국집 에 실린 고려 학자 이규보의 송이버섯이라는 시에서 소나무에 대한 인식을 엿 볼 수 있는데 송이버섯은 항상 솔잎에 덮여 소나무 향기를 머금어 향기도 맑다 고 하면서 듣건대 소나무 기름( 松 腴 )을 먹 으면 바로 신선이 될 수 있다고 했는데 버섯도 솔잎 향기를 머금었으니 어찌 약이 아니랴 라고 노래했다. 솔잎 향기 머금은 송이버섯을 약이라고 했으니 솔잎으로 쪄서 향기가 배어든 송편 역시 건 강에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려사 에는 원나라 승상 안동( 安 童 )이 사람을 보내 소나무 껍질을 넣고 만든 송고떡( 松 膏 餠 )과 금강산에서 나오는 솔잎( 眠 松 葉 )을 요구했다는데 우리나 라 소나무와 솔잎의 품질이 이렇게 유명했으니 떡을 찌는 재료로 활용할 만 했다. 송나라의 학자 왕안석은 자설( 字 說 ) 에서 나무 목( 木 ) 옆에 벼슬 공( 公 )으로 구성된 글자인 소나무는 나무의 으뜸( 百 木 之 長 )이어서 나무 중에서는 높은 벼슬인 공( 公 )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송( 松 )이라는 글자가 만들어졌다고 했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소나무를 절개와 장수의 상징으로 여겼다. - 5 -
추상적이면서 나중에 만들어 해설을 붙인 이야기 이외에 솔잎으로 떡을 찐 것은 실용적인 이유가 컸을 것으로 보인다. 정조 임금이 쓴 홍재전서( 弘 齋 全 書 ) 에는 제물 중에서도 여름철 콩떡( 豆 餠 )은 상할 염려가 있으니 송편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숙종 때 실학자 홍만선은 산림 경제 에서 집 주변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으면 생기가 돌고 속기를 물리칠 수 있다고 소개 했으니 떡이 상하는 것도 방지하고 나쁜 기운도 물리치기 위해 솔잎으로 떡을 찌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예전 선비들은 늙지 않는 약으로 솔잎과 국화를 복용한다고 했으니 솔잎을 신선이 먹는 약으로 여겼다. 그러니 신선이 먹는 솔잎에다 솔잎 향기까지 스며들고 맛과 풍류에도 어울리고 떡도 쉽게 상하지 않으니 송편에는 이렇게 다양한 장점이 있다. (2) 송편은 반달을 닮은 떡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추석 때 송편( 松 餠 )을 먹는다. 하지만 예전에는 명절 때마다 송편을 먹었다. 추석에는 특별히 오려 송편을 먹었다. 중국은 우리의 추석인 중추절( 仲 秋 節 )에 월병( 月 餠 )을 먹고 일본은 중추의 명월( 中 秋 の 明 月 ) 에 쓰키미당코( 月 見 團 子 )라는 떡을 먹는다. 추석은 음력으로 8월 15일, 보름달이 뜨는 달이니 달과 관련이 깊다. 따라서 우리의 송편 이나 중국의 월병, 일본의 쓰키미당코가 모두 추석 보름달과 관련이 있고 달을 형상화해서 만든 음식이라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중국의 월병은 문자 그대로 달떡 이라는 뜻이고 일본의 쓰키미당코 역시 달을 보며( 月 見 ) 먹는 떡( 團 子 )라는 뜻이다. 중국이나 일본 모두 떡 이름에 달( 月 )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고 생긴 모양도 둥근 보름달을 닮았다. 모두 특별히 음력 8월 15일 보름달이 뜨는 날을 기념해 먹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의 송편은 추석 떡이지만 달과는 큰 관련이 없다. 송편이라는 떡 이름도 솔잎으 로 찐 떡( 松 餠 )이라는 뜻으로 달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보름날인 추석에 먹는 떡이면서 생 긴 모양도 보름달이 아니다. 혹자는 송편은 반달을 닮은 떡으로 삼국사기 에 보름달은 곧 지는 만월이고 반달은 앞으 로 차오르는 달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에 송편을 반달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억지로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삼국사기 권 28, 백제본기 의자왕 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백제 멸망의 여러 징후가 보였다 는 내용 중 하나일 뿐, 추석과는 어떤 연결 고리도 보이지 않는다. 송편이 반달 모양이 아닐뿐더러 월병이나 쓰키미당코와 달리 아예 달 모양을 닮지 않은 이 - 6 -
유는 두 가지로 나누어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송편이 특별히 추석을 기념해 먹는 음식이 아 니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명절 때마다 먹는 떡으로 추석 때는 올벼로 빚은 오려 송편을 먹었을 뿐이다. 둘째는 우리 명절인 추석은 보름달이 뜬 것을 기념하는 것에서 비롯된 명절이 아니라는 사 실이다. 날짜가 같고 중추절로 한자로 이름도 같지만 중국의 중추절과는 성격이 다르기 때 문에 굳이 달을 기념하는 떡을 만들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7 -
조선, 비빔밥을 탐하다 1. 비빔밥을 사랑한 한민족 (1)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2) 조선은 비빔밥 천국 2. 팔도명물 비빔밥 이야기 3. 비빔밥은 고급요리였다 4. 비빔밥의 기원에 대하여... 1. 비빔밥을 사랑한 한민족 (1)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여러 종류의 음식재료를 한 곳에 모아 넣고 비벼서 새로운 맛을 창조하는 비빔밥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한국 고유의 음식이다. 한국인은 옛날부터 여러 음식을 섞어서 비벼 먹는 것을 특별히 좋아했던 모양이다. 조선의 선비 중에는 비빔밥 예찬론을 편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고 그 때문인지 조선시대에 이미 다양한 종류의 비빔밥이 발달했다. 조선 영조 때 활동한 실학자로 성호사설( 星 湖 僿 說 )을 쓴 이익( 李 瀷 )은 음식을 노래한 시에 서 비벼 먹는 것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骨 董 吾 無 厭 ) 라고 읊었다. 성호 이익 개인의 입맛이라고 간단하게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 민족은 대체적으 로 비벼 먹는 것을 좋아한다. 굳이 밥이 아니더라도 국수도 비벼 먹기 때문에 비빔국수가 발달했고 국에다가도 이것저것을 한꺼번에 넣은 후 밥을 말아 국밥을 만드는데 여기에 김 치, 깍두기 국물을 붓고 또 김치 깍두기까지 얹어서 먹는다. (2)조선은 비빔밥 천국 비벼 먹는 것을 이렇게 좋아했으니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다양한 비빔밥이 발달했다. 재료 에 따라 특색 있는 비빔밥이 발달한 것은 물론, 지역에 따라서도 다양한 비빔밥이 있었으니 옛 문헌에 나오는 비빔밥을 보면 요즘 비빔밥과 비교해도 다양성에서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다. - 1 -
조선 말기인 순조와 헌종 때 활약했던 실학자 이규경 역시 비빔밥을 많이 좋아했는지, 저 서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비빔밥 이야기를 여럿 남겼다. 이규경은 조선 말기의 다양한 비빔 밥을 소개하면서 평양비빔밥이 명물이라고 했다. 평양의 특산물로 감홍로와 냉면, 그리고 골동반(비빔밥)을 꼽았으니 조선 말기에는 지금의 전주비빔밥 대신 평양 비빔밥이 서울인 한양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이규경은 또 비빔밥은 종류가 여러 가지여서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진미( 珍 味 )로 여기는 비빔밥 종류가 서로 다르다면서 다양한 비빔밥을 소개해 놓았다. 그중에는 지금은 찾을 수 없어 낯설게 보이는 비빔밥도 적지 않다. 먼저 별미인 평양비빔밥은 채소비빔밥이라고 했으니 지금의 야채 비빔밥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숭어회, 갈치회, 준치회를 고추장이 아닌 겨자장으로 비빈 겨자장( 芥 醬 ) 비빔밥이 있는데 지금의 회덮밥 종류로 짐작된다. 다만 초고추장이 아닌 겨자장으로 비볐다고 했으니 회덮밥과 맛은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또 막 구운 전어로 비빈 전어비빔밥, 말린 새우와 새우가루를 넣고 비빈 새우비빔밥, 황주 의 특산물인 새우젓 비빔밥도 있다. 또 새우알 비빔밥도 있으니 일종의 알밥으로 보이고 게 장 비빔밥은 지금도 먹지만 마늘 비빔밥, 생오이 비빔밥, 기름에 재서 구운 김가루 비빔밥, 산초로 비빈 거으로 보이는 미초장( 美 椒 醬 ) 비빔밥, 볶은 콩으로 비볐다는 콩비빔밥까지 있 었으니 조선은 비빔밥 천국이었다. 2. 팔도명물 비빔밥 이야기 이규경이 다양한 비빔밥을 소개하면서 평양비빔밥을 별미로 꼽은 것처럼 조선 말기에 이미 지역에 따라 유명한 특산 비빔밥이 명성을 떨쳤다. 지금은 전주비빔밥이 유명하지만 조선 말기에는 평양비빔밥, 근대 초기에는 진주비빔밥, 해주비빔밥이 이름을 날렸고, 비빔밥의 한 종류인 제삿밥도 보인다. 이런 뿌리가 있었기에 지금의 통영 멍게비빔밥, 정선 곤드레비빔 밥, 마산 미더덕비빔밥 등 다양한 비빔밥의 전통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예전 지역 특산 비빔 밥의 특징을 알아본다. 전주비빔밥 현재 비빔밥의 대명사는 전주비빔밥이다. 하지만 언제부터 전주비빔밥이 유명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과 근대 문헌에 전주비빔밥에 대한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전주비빔밥은 현대에 고급화가 이뤄지면서 유명해진 음식이라고 보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전주비빔밥의 뿌리는 17세기부터 발달한 전주 남문 밖 시장의 콩나물 비빔밥에서 찾기도 한다. 밥 지을 때 콩나물을 넣는 콩나물밥은 전주 고유의 향토음식이었는데 현대에 전주 한 정식에 편승해 관광 상품화되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비빔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보 는 것이다. (출처 전주음식, 민속원, 2009년) 전주는 옛날부터 콩나물로 유명했던 지역이다. 전주시사( 全 州 市 史 )에는 콩나물이 전주부( 全 州 府 ) 일대에서 많이 생산돼 하루 세끼 식사 때 반찬으로 올랐다고 했다. 전주를 대표하는 음식으로도 각종 콩나물 무침이 나오는 한정식과 함께 비빔밥, 콩나물국밥, 콩나물밥을 꼽는 다. 그런데 1929년 발행된 별건곤이라는 잡지에서도 팔도명물음식 중 전주 음식으로 비빔밥 - 2 -
이 아닌 콩나물 국밥을 꼽은 것을 보면 전주비빔밥이 유명세를 탄 것은 현대에 들어서일 가 능성이 높다. 진주비빔밥 전주비빔밥에 밀려서 명성을 잃었지만 근대까지만 해도 진주비빔밥이 더 널리 알려져 있었 다. 별건곤 잡지의 팔도명물음식 예찬 특집에도 전주비빔밥 대신에 진주비빔밥을 비빔밥 명 물로 꼽았다. 특별히 팔도명물음식의 선정 기준이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잡지사 임의로 선정한 것 같으 니 진주비빔밥이 전주비빔밥보다 더 유명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기사를 쓴 필 자는 서울 비빔밥과 같이 큰 고기 점을 그대로 올려놓은 것과 콩나물 발이 세치나 되도록 넝쿨지게 놓은 것과 진주비빔밥은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다 며 진주비빔밥을 찬양하고 있 다. 진주비빔밥은 하얀 쌀밥 위에다 숙주나물, 고사리, 도라지, 산채 나물 등 갖가지 야채로 색 을 조화시키고 그 위에다 볶은 쇠고기와 육회를 올려놓아서 화려하기가 그지없다. 이성우의 한국요리문화사에는 진주비빔밥을 화반( 花 飯 )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비빔밥의 모양이 꽃처 럼 화려하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진주비빔밥, 진주냉면은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진주의 특징으로 땅이 기름지고 풍속은 부유하며 화려함을 숭상한다고 했다. 화려하다는 진주비빔밥에는 지역의 이런 역사적, 문화적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 한편 진주비빔밥의 유래에 대해 임진왜란 진주대첩 때 결사항전을 결심한 백성과 군인들이 있는 재료를 모두 모아 비빔밥을 만들고 남아있던 소를 잡아서 육회로 얹어 비벼 먹으며 전 의를 다진 것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문헌상으로는 전혀 검증이 되지 않은 이야기 다. 평양비빔밥 지금 평양냉면은 유명해도 평양비빔밥은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조선시대와 근세 문헌을 보면 평양 비빔밥이 꽤 유명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은 평양의 명물로 감홍 로( 甘 紅 露 )라는 술과 냉면, 그리고 비빔밥을 꼽았다. 이규경은 평양 비빔밥을 채소 비빔밥이 라고 소개했는데 비빔밥 중에서도 평양의 것이 진품( 珍 品 )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맛이 독 특한 것 같다. 관련 자료를 보면 평양비빔밥은 볶은 쇠고기에다 갖은 야채를 밥 위에 얹어 서 나오는 비빔밥이라고 했으니 요즘 음식점에서 대중적으로 먹는 비빔밥과 별 차이가 없 다. 해주비빔밥 1925년 출간된 해동죽지( 海 東 竹 枝 )에는 전국 유명 음식으로 해주 비빔밥을 꼽았다. 조선 말기를 무대로 한 김주영의 소설 객주에도 해주 명물음식으로 도미국수와 비빔밥을 꼽았다. 해주 비빔밥은 해주교반( 海 州 交 飯 )이라고도 하는데 특징은 밥을 볶아서 비비는 것이다. 볶 은 밥에다 버섯, 도라지, 고사리, 해삼, 전복, 조개, 닭고기, 계란 등을 얹어 먹는 음식으로 밥 속에 산해진미가 다 담겨있다고 했다. 그런데 옛날 우리나라에는 볶음밥이 없었다. 1930년대 신문기사에 볶음밥은 중국음식이라 고 했다. 해동죽지에도 해주의 명물 음식으로 소위 일반에서 말하는 골동반(비빔밥)과 비슷 하다 고 했으니 딱 떨어지게 비빔밥이라고 말하기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또 맛에 대 한 평가도 맛이 기이하다( 奇 品 ) 고 해놓았다. 그러니 어쩌면 전통적인 비빔밥이라기보다는 - 3 -
오히려 현재의 볶음밥에 더 가까운 음식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3. 비빔밥은 고급요리였다 부자들이 먹었던 비빔밥 비빔밥도 재료와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요즘 비빔밥 엄청나게 값비싼 요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음식점에서도 대중적으로 사먹을 수 있고 집에서도 찬밥에 남은 반찬을 넣어 쉽고도 맛있게 만들 수 있는 평범한 음식이다. 그런데 옛날에도 이렇게 비빔밥을 쉽게 먹을 수 있었을까? 음식문화사를 비빔밥은 그렇게 만만한 음식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영조 때 선비인 이학규의 문집, 낙하생집( 落 下 生 集 )에는 허리띠 값이 부자가 여름에 먹는 골동반(비비밥) 한 그릇과 같은 가격으로 값이 600전에 이른다 는 기록이 있다. 허리띠 값과 비빔밥을 비교하면서 비싸다고 표현한 것인데 도대체 얼마나 비쌌기에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 600전이 당시 어느 정도의 화폐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인지, 그리고 어떤 재료를 넣어 만 든 비빔밥인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학규보다 한 세대 뒷사람인 정약용은 경세 유표( 經 世 遺 表 )에서 1만전은 100냥으로 쌀 20섬 값이라고 했다. 이 기준으로 보면 600전은 6냥으로 쌀 3섬 값이다. 화폐가치가 그때그때 달랐던 조선 후기니 정확한 비교는 아니지만 어쨌든 기록에 나오는 비빔밥이 상식을 넘는 비싼 가격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비빔밥이 요즘처럼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는 것은 세조 때의 공신, 홍윤성( 洪 允 成 )의 일화에 서도 엿볼 수 있다. 인조 때 문신인 박동량의 기재잡기( 寄 齋 雜 記 )에 홍윤성과 비빔밥 이야기 가 나온다. 홍윤성은 세조가 왕위에 오를 때 공을 세워 정난공신에 봉해졌고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도가 엄청났다. 주인집 세도를 믿고 방자하게 구는 하인을 잡아 온 포도대장 전림( 田 霖 )을 보고는 좋은 인재를 만났다며 술과 밥을 대접했는데 이때 차림 음식 이 비빔밥이었다. 전림을 좋게 본 홍윤성은 세조에게 건의해 전림을 선전관으로 발탁한다. 인재에게 대접한 음식이 비빔밥이었으니 아무렇게나 만들어 먹었던 음식은 아니었을 것이 다. 고종 때 경상도 함안( 咸 安 )부사를 지냈던 오횡묵( 吳 宖 默 )이 쓴 일기로 함안군 총쇄록( 叢 鎖 錄 )이라는 책이 있다. 여기에서 오횡묵은 계곡으로 나들이를 갔는데 하인을 시켜서 꽃을 꺾 어 화전을 지지고 준비해간 골동반으로 식사를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골동반은 곧 비빔밥 이다. 동국세시기에 나오는 나들이 음식인 반유반처럼 조선의 양반들도 나들이 음식으로 골 동반(비빔밥)을 준비했던 것이다. - 4 -
4. 비빔밥의 기원에 대하여...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특별할 것도 없고, 또 평소에 먹는 반찬을 밥에다 넣고 고추장 이나 간장으로 비비면 되는 간단한 음식이니까 먼 옛날부터 조상 대대로 먹었을 것 같지만 상식과 달리 비빔밥은 누구나 아무 때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을 수 있다. 더욱이 지 금 우리가 먹는 비빔밥처럼 갖가지 양념을 넣고 제대로 비빈 비빔밥은 그 역사가 생각보다 훨씬 짧을 수 있다. 비빔밥의 기원에 대해서는 궁중음식에서부터 농번기음식, 임금의 피난음식, 제사를 지내고 먹는 음복 음식, 심지어 연말에 묵은 음식을 처리하면서 먹는 음식에다 동학혁명군의 음식 까지 다양한 기원설이 보인다. 비빔밥이 어느 한 가지 음식에서 진화해 현재와 같은 비빔밥으로 발전했다고 보기는 어렵 다. 각각 다른 종류의 비빔밥이 발달하고 또 융합하면서 지금의 비빔밥이 만들어졌을 것이 다. 우리나라 옛 문헌에서 비빔밥이라는 단어가 처음 보이는 시기는 많이 알려진 것처럼 19세 기 말, 20세기 초반이다. 시의전서( 是 議 全 書 )라는 요리책에 한글로 부븸밥 이 나온다. 한자 로는 골동반( 汨 董 飯 )이라고 표기했는데 이후부터 다른 요리책에도 비빔밥이라는 한글 명칭 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비빔밥의 역사가 100년 남짓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한글 비빔밥 이 이 무렵에 보일 뿐이다. 시의전서에 나오는 골동반은 음식으로는 조선 초기, 용어로는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골동반 중에서 골동은 골동품이라고 할 때의 골동이다. 사전적으로 골동( 骨 董 )은 오래 된 것이나 희구한 옛날의 도자기, 예술품으로 알고 있는 정의하지만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것 이 한데 섞인 것 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골동반( 骨 董 飯 )은 다양한 재료를 한데 섞어 놓 은 밥이라는 뜻이 된다. 골동반 이라는 음식은 조선시대 문헌에 여러 번 보인다. 홍윤성이 비빔밥 이야기가 실린 기재잡기( 寄 齋 雜 記 )를 쓴 박동량은 인조 때 학자로 17세기 사람이지만 홍윤성은 15세기 사 람이니 조선 초기에해당된다. 정조 때 이덕무도 청장관전서( 靑 莊 館 全 書 )에서 골동반을 먹었다고 했으며 헌종 때 이규경 ( 李 圭 景 1788-1856)은 오주연문장전산고( 五 洲 衍 文 長 箋 散 稿 )에서 골동반의 종류를 상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문헌 기록으로 볼 때 비빔밥인 골동반 은 음식은 조선 초기에도 보이지만 문헌에 등장하는 빈도로 봤을 때 비빔밥이 제삿날이나 손님접대, 호화요리가 아닌 일반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조선후기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 5 -
골동반이란 무엇일까? 보통 비빔밥을 한자로 골동반( 骨 董 飯 )으로 표기한다. 그렇다면 골동반이란 무엇일까? 골동반은 지금의 돌솥 밥처럼 쌀과 재료를 함께 조리해 비비는 밥이다. 동국세시기에는 여 러 가지 음식을 섞어 끓이는 것을 골동갱( 骨 董 羹 )이라고 하는데 골동은 섞는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강남 사람들은 반유반( 盤 遊 飯 )이라는 음식을 잘 만드는데 밥 속에다 젓, 포, 회, 구이 등을 넣은 것으로 골동반이라고 부르며 옛날부터 이런 음식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참고로 동국세시기에서 강남 사람은 중국의 양자강이남 사람이고 반유반은 나들이 음식을 말하는 것으로 중국 송나라 때 시인 소동파가 쓴 구지필기( 仇 池 筆 記 )에 나오는 말을 인용했 다. 소동파는 밥 속을 파헤쳐 가며 먹는다고 했으니 밥 속 깊숙한 곳에 젓이나 회, 구이 등 의 각종 재료를 묻어 꺼내어 먹거나 비벼 먹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우리 비빔밥이 중국의 골동반에서 진화한 음식일까? 사실 옛날 중국의 골동반과 우리나라의 비빔밥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현재 중국에 는 우리와 같은 비빔밥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비빔밥인 골동반과 중국에서 말하는 골동반이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한 나라의 음식문화가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 럼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경우는 없으니까 1,000년 전에는 서로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다. 비빔밥의 기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사실, 비빔밥을 비롯해 음식의 기원을 따지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먹는 음식과 옛날 음식은 재료에서부터 조리법, 맛까지 모두 다르니 같은 음식이라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비빔밥을 먹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다만 상식적으로 비빔밥은 고급음 식에서 비롯돼 발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헌상 기록으로 보아 최소 조선시대 전반부터라고 가정했을 때 비빔밥은 함부로 먹을 수 없는 귀중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각종 나물과 김치, 고기, 생선 등을 넣고 아주 쉽게 비벼 먹을 수 있지만 조선시대 전반만 해도 고기와 생선을 말할 것도 없고 김치라고 해 봐야 무를 절인 짠지 종류에 불과 했을 것이고, 나물도 양념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며 더욱이 고추장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대였다. 밥을 비빌 수 있는 재료가 소중했던 시절이니 비빔밥이 지금처럼 아무렇 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다. - 6 -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비스킷과 건빵 1. 두 번 구운 과자 비스킷 (1) 비스킷은 두 번 구운 과자 (2) 왜 두 번 구웠을까? 2. 비스킷이 세상을 바꿨다 (1) 비스킷 덕분에 장거리 항해가 가능 (2) 비스킷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3. 동양의 비스킷은 건빵이다 - 1. 두 번 구운 과자 비스킷 (1) 비스킷은 두 번 구운 과자 비스킷은 바삭바삭한 과자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영어권에서는 조금 다르다. 과자와 함께 빵이라는 의미도 있다.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 집에서 주문하면 확인할 수 있다. 비스킷 달라고 하면 과자가 아닌 빵 종류를 준다. 이유가 무엇일까? 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 다. 비스킷이라는 이름에는 비스킷이 발전해 온 역사가 유전자 코드처럼 고스란히 들어있다. 비스킷은 영어로 Biscuit 라고 쓴다. 중세 프랑스어에서 비롯된 단어로 어원은 로마시대 라 틴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두 번 구웠다 는 뜻이다. 라틴어 비스콕투스(Biscoctus)가 어원으로 비스(Bis-)는 두 번(Twice), 콕투스(-Coctus)는 요리 하다(cook)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과자가 됐건, 빵이 됐건 밀가루 반죽을 두 번 구웠다는 의 미에서 생긴 이름이다. 두 번 구웠다 는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기에 이렇게 이름까지 두 번 구웠다는 뜻의 비스킷이라고 부르며 강조를 한 것일까? 지금 기준으로 보면 밀가루 반죽을 두 번 구웠다는 것이 별 것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기술 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 기준으로 두 번 구웠다는 것은 획기적인 조리 기술의 진보였다. 한 번 구운 밀가루 반죽을 다시 구우면 새까맣게 타버리고 만다. 그런데 태우지 않고 두 - 1 -
번 구워 예전에는 없었던 또 다른 종류의 빵과 과자를 만들어 낸 것이다. 제분기술의 발달, 화덕의 진보, 조리기술의 발전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만들어낸 결과다. (2) 왜 두 번 구웠을까? 밀가루 반죽을 두 번 구우면 어떻게 될까?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밀가루 반죽 속에 포함되어 있는 수분이 완전히 빠진다. 물기가 하나도 없는 빵과 과자가 된다. 물기가 없기 때문에 돌처럼 딱딱해지고 곰팡이가 피지 않아 장기간 보관이 가능해진다. 얼 마나 장기간 보관이 가능할까? 1861년부터 1865년에 사이에 벌어진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남군과 북군 병사들은 주로 비 스킷을 먹고 전쟁을 했다. 당시 북군에 비스킷을 납품했던 군납업체 중에 밀튼(Milton)이라 는 식품회사가 있었다. 이 회사에서 군대에 납품한 비스킷 중에 1846년, 미국과 멕시코 전 쟁 때 납품했던 비스킷도 있었다고 한다. 15년 전의 전쟁 때 만든 비스킷을 군대에 납품하고 납품받았던 식품회사와 군 당국자의 몰상식과 배짱도 놀랍지만 15년 전에 만든 빵(과자)이 썩지 않고 보존됐다는 사실 역시 놀 랍다. 더군다나 방부제를 사용하지도 않고, 또 냉동 냉장시설이 발달하지도 않았던 19세기 중반의 일이다. 밀가루 반죽을 두 번 구우면 얼마나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때의 비스킷은 지금처럼 바삭바삭하고 맛있는 과자가 아니었다. 전쟁 중인 군인이나 먼 곳을 항해하는 선원들이 먹는 식량이었는데 총알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비스킷이었다고 한 다. 남북전쟁 닷이 미국 육군의 보급품을 묘사한 책으로 1881년에 발행된 비스킷과 커피, 알 려지지 않은 군 생활 이야기(Hardtack and Coffee: The Unwritten Story of Army Life) 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빌링스(Billings)라는 사람인데 하드태크는 밀가루에 물을 섞어 구운 비스킷인데 너 무 딱딱해서 깨물어 먹을 수가 없다. 먹으려면 주먹으로 세게 내리쳐야 한다. 구더기와 바구 미가 들끓는 경우도 많다 고 묘사했다. 비스킷의 전신은 부드럽고 바삭바삭한 과자가 아니 라 악명을 떨쳤던 과자(빵)였다. 2. 비스킷이 세상을 바꿨다 (1) 비스킷 덕분에 장거리 항해가 가능 밀가루 반죽을 두 번 구우면 수분이 제거되어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다. 심지어 수십 년씩 저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먹기는 정말 힘들다. 주먹으로 내리쳐 부수는 것은 기본이고 망치 로 두들겨 깨기도 했다. 이런 음식을 왜 만들었을까? - 2 -
예를 들어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을 때인 1492년 무렵만 해도 선원들은 빵과 고기 등을 싣고 갔지만 습기로 가득 찬 바다에서 빵과 고기는 금세 썩고 부 패했다. 육지를 떠난 후 조금만 지나면 선원들은 썩고 부패한 빵과 고기를 먹고 살아야 했는데 이 럴 때 비스킷은 썩은 식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양식이었다. 망치로 두들겨 깨 먹더라도 부패한 음식보다는 좋았기 때문인데다 오랜 기간 동안 보관해도 곰팡이는 피더 라도 썩지는 않았다. 때문에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탐험과 마젤란의 세계 일주 등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선박의 장거리 항해가 가능해진 배경에 비스킷을 빼놓을 수 없다. 먼 바다를 중간에 보급품 지원없이 몇 달씩 항해할 때 보통의 빵은 썩어서 먹을 수 없지만 비스킷을 싣고 가면 먼 바 닷길을 떠날 수도 있었다. 만약에 비스킷이 없었다면 대항해 시대가 덜 활발해졌을 수도 있다. 부패한 빵과 썩은 고 기를 먹고 몇 달씩 태평양과 대서양을 항해해야 했다면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선상 반 란이 일어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비스킷이 없었다면 역사가 지금 과는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다. 비스킷이 대항해 시대를 여는데 일조를 했다는 사실은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서 찾아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16세기 후반, 17세기 초반(1564~1616년)을 살았던 사람 으로 이 시기는 유럽이 대항해를 통해 아메리카와 아시아로 세력을 넓혔던 때다. 비스킷에 관한 기록은 이 무렵에 주로 등장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비스킷이 자주 등장 하는데 비스킷이 이때 많이 보급됐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좋으실 대 로 라는 작품에 항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남겨 온 말라빠진 비스킷처럼... 이라는 대사가 있다. 원양으로 항해를 떠나는 선박들이 비스킷을 가져갔다는 증거다. 비스킷이 어떤 형태의 음식이었는지는 셰익스피어의 또 다른 작품(Troilus and Cressida)에 서 짐작할 수 있는데 선원이 비스킷을 깨트려 먹었다 고 했다. 깨물어 먹는 것이 아니라 망 치 등으로 깨야 할 정도로 단단한 음식이었다. 당시 영국의 해군 수병들과 선원들은 비스킷을 하드태크(Hard Tack)라고 했는데 딱딱한 항 해용 장비라는 뜻이다. 음식을 보고 장비라고 했으니 비스킷이 어떤 형태의 음식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2) 비스킷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16세기에 비스킷이 널리 퍼진 것으로 짐작되는데 밀가루 반죽을 두 번 구운 과자(빵), 비스 킷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일부에서는 로마시대에 군인들이 전쟁터에 나갈 때 비스킷을 가지고 갔다고 하지만 정확하 지는 않다. 밀가루 반죽을 두 번 구운 비스킷은 아니기 때문이다. - 3 -
영어권 문헌에서 비스킷이라는 단어는 주로 두 시기에 보인다. 하나는 로마시대의 작품이 고 또 하나는 현대 영어가 시작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다. 영어로 번역된 로마 문헌에 나오는 비스킷이라는 단어는 두 번 구웠다는 뜻이 아닌, 단순 하게 빵을 뜻하는 라틴어 파니스(Panis)를 비스킷이라고 번역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기원전 1세기 로마의 극작가 막시우스 플라우투스의 희곡에 딱딱하게 구운 비 스킷 이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이 음식이 두 번 구워 장기간 저장이 가능한 비스킷이었는지, 아니면 보통의 빵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영어로는 비스킷으로 번역했지만 라틴어 원문에는 붉은(Rubidus) 빵(Panis)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오래돼서 딱딱해 진 빵일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로마시대의 비스킷이 그 저 단순한 빵인지 혹은 두 번 구운 비스킷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두 번 굽는 기술이 쉽지는 않기에 로마시대에 비스킷이 등장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반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비스킷은 두 번 구운 빵(과자)인 것이 확실해 보인다. 장 기 항해를 위해 만든 선원들의 음식이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 비스킷에 구멍은 왜 뚫려 있을까? 비스킷의 기원은 항해용 식품, 또는 전투식량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언제부터 비 스킷이 발달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지금의 비스킷에도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다. 비스킷에는 작은 구멍이 송송 뚫려있다. 비스킷을 구울 때 구멍을 뚫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시초는 장기 항해를 할 때 구멍을 뚫으면 통풍이 잘돼 장기보관이 쉬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도 장기 항해 중 바구미가 비스킷을 갉아 구멍 이 뚫렸는데 덕분에 공기가 잘 통해 보관기간을 늘릴 수 있게 된 것에서 비롯됐다고 한 다. 물론 권위 있는 문헌에 의해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다. 3. 동양의 비스킷은 건빵이다 군인들이 먹는 전투식량이며 아이들도 즐겨하는 과자인 건빵 역시 뿌리는 서양의 비스킷이 다. 건빵은 우리나라에서 발달한 과자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일본에서 비스킷을 변형해 만든 과자이고, 또 일제가 침략전쟁에 활용하기 위해 개발한 식품이다. 비스킷이 일본에 처음 전해진 시기는 16세기 임진왜란 이전이다. 일본에 온 포르투갈 선박 의 선원들이 먹는 비스킷을 보고 일본서는 남쪽 오랑캐가 먹는 식품이라는 뜻에서 남만( 南 蠻 )과자라고 불렀다. 일본에 전해진 비스킷 역시 장기간 항해를 떠나는 선원들에게 지급할 딱딱한 빵, 하드태크 였다. 당시 일본의 봉건 영주들은 비스킷을 보고 전투식량으로 대체할 궁리를 한다. 전쟁이 잦았던 일본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병사들은 주로 주먹밥이나 말린 밥( 乾 飯 )을 먹었고 상황 이 다급해지면 굶은 채로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남만에서 온 딱딱한 빵인 비 스킷을 전투식량으로 응용하는 연구를 거듭한다. 급기야 메이지( 明 治 ) 시대에는 일본 제국 - 4 -
육군 군인들에게 식사 때 밥 대신 빵을 제공하기도 한다. 서양을 동경해 유럽 군대를 모방 해 식사까지 빵으로 대체하려는 의도도 있었고 쌀이 부족했던 이유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 만 병사들의 반발이 심해 식사 때 밥 대신 빵을 제공하는 것은 곧 중단됐지만 일본 육군에 서는 1877년 휴대용 전투식량으로 중소면포( 重 燒 麵 包 )라는 빵을 개발한다. 중소( 重 燒 )는 중 복해서 구웠다는 뜻이고 면포( 麵 包 )는 빵의 한자 표기이니 중복해서 구운 빵이라는 뜻이고 비스킷(Biscuit)의 어원 역시 두 번(Bi-) 구웠다(-cuit)라는 뜻이니 중소면포란 비스킷을 한자 로 그대로 옮겨놓은 단어인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 군대는 건빵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다. 청일전쟁 이전에 중소면포라는 건빵과 같은 휴대용 전투식량을 개발하기는 했지만 널리 보급 되지는 않았다. 크기도 수첩만 했고 잘 부스러지는 단점이 있어 먹기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일본 육군에서는 야전에서 중소면포를 갖고 다니는 대신에 주로 주먹밥을 먹으며 전투 를 했다. 그런데 수분이 많은 주먹밥은 따듯한 지방에서는 바로 부패하고 반면에 추운 지방 에서는 곧바로 얼어버리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으며 또 많이 갖고 다닐 수도 없다. 청일전쟁 때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식량을 제때 보급할 수 없었던 일본군대는 가볍고 휴대 가 편리할 뿐만 아니라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비상식량의 개발이 절실해진다. 그래서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등으로 기술자를 파견해 각국의 군용식량을 연구하고 응용해 건빵 의 전신인 일본군 고유의 중소면포를 발전시킨다. 그러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작고 휴대가 편리한 건빵을 만들게 된 것은 태평양 전쟁 직전이다. 카와시마라는 육군 소장이 수첩만한 크기였던 중소면포를 개량해 지금의 건빵과 같은 소형으로 만들었는데 먹기도 편하고 휴대 도 간편하기 때문에 군용 비상식량으로 정착됐다. 지금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군도 건빵을 비상 전투식량으로 채택했다. - 5 -
빈부격차 잊고 수제비 한 그릇 1. 한국인에게 수제비란...? 2. 조선시대 최고급 요리 수제비 3. 수제비는 밀가루 음식의 화석 4. 왜 여름철 수제비가 맛있을까? 1. 한국인에게 수제비란...? 수제비는 장국을 끓인 후 부드럽게 반죽한 밀가루를 손으로 떼어 넣어 익혀 먹는 음식이 다. 전형적인 서민음식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배고팠던 시절, 가난한 사람들이 먹었던 음식만도 아니다. 예전 농촌에서, 또 살림이 넉넉한 집에서도 여름철 별미로 수제비를 만들 어 먹었다. 한국인에게 수제비는 무엇일까? 연령대에 따라 수제비에 대해 애증이 교차한다. 20-30대 의 연령층에게 수제비는 저렴한 가격에, 특별히 입맛도 없을 때 먹을 수 있는 별미로 다가 온다. 40-50대에게 수제비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끓여 준 추억의 음식이었다. 먹을 양식이 부족 해 수제비를 먹었지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속사정은 제대로 모르고 그저 맛있게 먹었던 기억만 추억으로 남아 있다. 60대 이상 70-80대에게 수제비는 끼니를 잇기 위해 먹어야 했던 음식이다. 특히 6.25 전쟁 을 전후해 식량사정이 극도로 나빴을 무렵, 미국의 원조물자로 들어온 밀가루로 만든 수제 비는 한국인의 배고픔을 해결해 준 구황식품이었다. 따지고 보면 수제비가 지금처럼 일반인 들이 모두 즐겨먹는 음식이 된 배경도 당시 미국의 구호물자인 밀가루 덕분이다. 이 시기를 겪은 세대는 수제비로 하루 세끼 끼니를 이어야 했기에 지금도 죽이나 보리밥, 수제비를 먹지 않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적지 않다. 조선시대에도 수제비는 주린 배를 채워주는 구황식품인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맛깔스 럽게 만들어 양반들이 즐겨 찾는 별식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불탁( 不 托 )이라는 음식이 구 황식품으로 자주 등장한다. 바로 수제비를 가리키는 단어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문헌에는 무면불탁( 無 麪 不 托 )이라는 말이 자주 보인다. 수제비 를 만들 곡식가루조차 없다는 의미다.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면( 麵 )은 지금처럼 밀가루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곡식가루를 의미한다. - 1 -
메밀에서부터 귀리까지 온갖 잡곡의 가루는 모두 면( 麵 )이다. 그러니까 조선시대에 구황식품 으로 먹었던 수제비는 밀가루 반죽으로 끓인 지금의 수제비가 아니라 잡곡가루를 반죽해 끓 인 음식, 내지는 지금의 풀떼기에 가까웠을 것이다. 우리는 수제비에 대해 약간의 오해를 하고 있다. 6.25전쟁이 끝난 후 원조 밀가루를 배급 받아 가난한 시절에 먹었던 음식이었기 때문에, 또 밀가루 반죽을 아무렇게나 손으로 뚝뚝 떼어내 끓여 먹었던 음식이었기에 수제비에 대한 인식이 곱지만은 않다. 형편이 어려운 사 람들이 먹는 음식, 밥이 부족해 대신 먹어야 했던 허드레 음식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없 지 않다. 물론 수제비가 한 시절, 우리 민족과 고난을 함께 겪었던 음식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수 제비는 사실 역사가 무척 오래 된 전통 음식이다. 17세기에 이미 수제비란 한글 단어가 보 일 정도였고 기원을 따지자면 국수보다 뿌리가 훨씬 더 깊다. 끼니를 때우려고 대충 만들어 먹었던 음식만이 아니라 양반들의 잔칫상에도 올랐던 고급요리이기도 했다. 2. 조선시대 최고급 요리 수제비 근대 초기까지만 해도 양반집에서는 삼복에 별식으로 수제비를 끓여 먹었다.* 밀이 흔치 않았던 시절에는 밀가루 대신 쌀가루로도 수제비를 끓였는데, 쌀 수제비라고 하면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가을철 추수가 끝나 쌀은 넉넉한데 밀가루는 없고, 그렇다고 밀가루를 살만한 현금도 없으니 굳이 쌀을 팔아 밀가루 수제비를 만드는 대신 쌀가루를 반죽해 쌀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쌀 수제비는 농촌에서 추수 무렵, 한철에만 먹을 수 있었던 별미 중의 별미 였던 것이다. 쌀도 없고 밀이 귀한 곳에서는 그 지역에서 가장 흔한 재료로 수제비를 만들었다. 감자, 강 냉이, 메밀, 도토리 등이 수제비의 재료가 됐다. 조선시대에는 고급 수제비도 많았다. 발어( 撥 魚 ) 라는 전통음식이 있는데, 고급 수제비 요리 다. 발어라는 이름은 물고기가 뒤섞여 노니는 모습을 표현한 단어다. 밀가루 반죽을 숟가락 으로 떼어 내 끓는 물에 넣으면 수제비가 끓으며 들썩거리는 모습이 마치 물고기들이 어우 러져 헤엄치는 것과 같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수제비라는 이름 역시 17세기 중국어 사전인 역어유해에 물속에서 밀가루가 날아 다닌다 는 의미에서 수저비( 水 底 飛 )라고 표기했으니 발어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조선시대 산림경제를 비롯해 각종 요리책에 영롱발어( 玲 瓏 撥 魚 )라는 음식이 있다. 영롱발어 는 메밀가루를 반죽해 잘게 썬 쇠고기나 양고기와 함께 수저로 펄펄 끓는 물에 떼어 넣으면 메밀반죽은 물에 뜨고 고기는 가라앉는데 그 모습이 화려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산약발어( 山 藥 撥 魚 )도 있는데 산약발어는 메밀가루에 콩가루와 산약인 마를 섞어 수저로 떠 넣어 끓인 후 익혀서 먹는 음식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참살이 식품으로 각광받는 마로 만든 수제비였으니 역사 속에 보이는 수제비는 양반과 부잣집에서 별미로 먹었던 음식이었 다. ** - 2 -
3. 수제비는 밀가루 음식의 화석 수 만년 동안 변치 않은 모습으로 살아남은 생물이 살아있는 화석이다. 동물 중에서는 악어나 상어가 여기에 해당되고 식물로는 은행이나 고사리가 있다. 음식도 살아있는 생물처 럼 진화한다. 음식 중에서는 어떤 식품이 살아있는 화석이 될 수 있을까? 수제비가 살아있 는 화석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싶다. 수제비에는 인류가 곡식을 빻아서 음식으로 만들어 먹었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국 수와 떡, 만두와 빵의 원형이 수제비에 남아있다. 때문에 수제비야 말로 살아있는 음식 화석 이라고 할 수 있다. 수제비는 반죽한 밀가루를 손으로 뜯어내 끓는 장국에 넣어 만드는 비교적 간단한 음식이 다. 우리 수제비는 반죽을 손으로 뜯어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숟가락이나 젓가락으로 뜯어 내기도 한다. 또 밀가루 반죽 대신 메밀가루와 같은 다른 곡물가루 반죽으로 만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수제비를 먹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수제비라는 한글 음식 이 름이 문헌에 보이는 것은 조선시대 중엽인 1690년의 역어유해( 譯 語 類 解 )라는 중국어 통역서 이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에서 수제비를 조선 중엽 이후에 먹었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현 존하는 문헌 중에 수제비라는 한글 단어가 실린 문헌이 이때의 역어유해라는 의미일 뿐이 다. 역어유해에서는 수제비를 박탁( 餺 飥 )이라고 했다. 박탁이라는 음식은 중국에서 6세기 무렵 북위 때 가사협이 쓴 농업서인 제민요술( 齊 民 要 術 )에 요리법이 나온다. 밀가루 음식 만드는 법( 餠 法 )이라는 항목에 박탁은 밀가루 반죽을 손가락 크기로 주물러 끓는 물에다 젓가락으 로 끊어서 넣어 만든다는 설명이 있다. 밀가루 반죽을 손가락으로 뜯는지 혹은 젓가락으로 끊는지의 차이가 있을 뿐 밀가루 반죽 을 일정 크기로 잘라 끓는 물에 넣고 음식을 만드는 것은 수제비와 박탁이 같다. 최소한 6 세기 이전에 이미 동양에서는 수제비를 끓여 먹었다는 이야기다. 수제비의 역사를 알면 국수의 발달사를 이해할 수 있다. 6세기 무렵에 박탁이라는 곡식가 루(밀가루) 반죽덩어리를 끓였다. 이어 국수가 등장한 것은 당나라 무렵이다. 7-9세기 때로 이 무렵부터 밀가루 반죽이 면발이 기다란 형태로 변한다. 밀가루를 가는 제분기술이 발달 하기 때문이다. 이후 11세기 송나라 때, 현재와 같은 다양한 국수가 만들어지면서 동양에서 국수문화가 자리를 잡게 된다. 수제비를 밀가루 음식, 즉 분식의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말하 는 이유다. 4. 왜 여름철 수제비가 맛있을까? 햇볕이 하얗게 내리쬐는 뜨거운 여름날이나, 장마철 비가 주룩주룩 내릴 때는 햇감자를 뭉 텅뭉텅 썰어 넣고 송송 썬 애호박을 얹은 엄마표 수제비나, 바지락조개를 듬뿍 넣어 끓인 칼국수가 입맛을 당긴다. 온몸이 흠뻑 젖도록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수제비 한 그릇 비우고 나면, 한여름 더위가, 땀과 함께 모두 씻겨 나간 것처럼 몸과 마음이 한껏 개운해지는데, 그 - 3 -
렇지 않아도 더운 날, 우리들은 왜 하필이면 뜨거운 수제비에 입맛을 다시는 것일까? 여름은 뜨거운 음식으로 이겨야 한다는 우리의 전통적인 여름나기 피서 법 때문일까? 물론 이열치열의 원리도 작용했을 것이지만 사실은 수제비가 밀가루 음식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여름철 별미로 자리 잡게 됐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여름이면 별식으로 밀가루 음식을 먹었다. 우리만 해도 여름철이면 수제비나 칼국수를 별식으로 먹었고, 특히 비오는 날이면 기름에 지진 밀가루 부침개를 찾 았다. 중국도 마찬가지인데, 중국 속담에 여름 국수, 겨울 만두 라는 말이 있다. 쌀밥인 입 식보다 밀가루인 분식을 주식으로 삼는 중국 북방에서도, 여름이면 특히 더 국수를 즐겨 먹 었던 것이다. 여름에는 왜 수제비가 더 맛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먼저 전통 의학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동의보감 을 비롯해 동양의 의학서들은 하나 같이 밀은 성질이 찬 곡식으로 번열( 煩 熱 ), 그러니까 가 슴이 답답하고 괴로운 신열, 무더위 때문에 생기는 열기를 없애 준다고 했다. 동시에 조갈 ( 燥 渴 ), 입안이 몹시 마르는 갈증을 해소해주고 또 소화를 돕는다고 했다. 더위를 식혀주고 갈증을 없애주는데다 소화에도 좋다니 더운 여름날 먹기에 딱 좋은 음식이다. 또 밀은 가을에 심고, 겨울에 자라서 봄에 이삭이 패고 여름에 추수를 하는 곡물이니까 밀 가루 음식은 갓 추수한 여름이 제일 맛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밀보다는 보리를 주로 심었 기 때문에 밀가루를 진( 眞 )가루 라고 부를 정도로 밀이 귀했다. 그러다 보니 오랜 세월이 흐 르는 동안 여름에 어쩌다 먹는 밀가루 수제비가 여름철 별미로 한국인의 유전자 속에 각인 되었을 것이다. * 朝 鮮 料 理 學 ** 山 林 經 濟 - 4 -
약과 해먹다간 곤장 80대 1. 약과가 무엇이기에...? (1) 약과는 약이 되는 과자. (2) 약과가 약과인 이유 2.제사상엔 왜 약과를 놓을까? (1)제철 과일 대신에 약과를... (2) 약과의 발전 1. 약과가 무엇이기에...? (1) 약과는 약이 되는 과자. 약과는 대표적인 전통 한과다. 어른아이 가릴 것 없이 대부분 평소에도 즐겨 먹지만 제사 상에도 빠지지 않고 오른다. 그만큼 우리 생활과 밀접한 식품인데 조선시대 법령을 보면 특 이한 조항이 있다. 민간인이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 약과 등의 유밀과를 사용하면 곤장 80대에 처한다 정조 때 경국대전을 재정비한 대전통편( 大 典 通 編 )에 보이는 항목이다. 지금의 상식과 달리 잔칫상이나 제사상에 약과를 놓지 말라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렇다고 위반할 경우 곤장 80 대는 너무한 것 같다. 도대체 왜 이렇게 터무니없는 조항을 만들었을까? 지금은 특별할 것 없는 전통 과자일 뿐이지만 예전 약과는 아주 특별했던 식품이었기 때문 이다. 약과( 藥 果 ), 한자 뜻 그대로 풀이하면 약이 되는 과자라는 뜻이다. 전통 약과는 밀가루에 참 기름, 꿀, 술과 생강즙 등을 넣고 반죽한 후 기름에 튀겨 꿀을 발라 만든다. 보통 밀가루에 꿀과 기름을 넣어 만드는 과자를 유밀과( 油 蜜 菓 )라고 하는데 약과, 다식( 茶 食 ), 만두과( 饅 頭 菓 ), 차수( 叉 手 菓 ) 등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약과다. (2) 약과가 약과인 이유 그런데 약과를 왜 약이 되는 과자라고 했을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약과를 먹는다고 특별히 약이 될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현대적인 관 점일 뿐 옛날 기준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약과를 만드는 재료가 보통이 아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밀가루가 귀했다. 때문에 밀가 루를 진짜 가루라는 뜻에서 진가루라고 불렀다. 참기름도 보통 기름이 아니다. 불과 몇 십 - 1 -
년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들은 참기름 한 방울조차도 아까워했다. 꿀은 지금과는 달리 아껴 두었다가 특별한 날이나, 몸이 아플 때 약으로나 먹었던 음식이다. 생강 역시 양념이 아니라 주로 약으로 쓰였다. 임금님이 인삼차 대신 생강차를 마셨을 정도로 인삼 못지않게 귀하게 여겼던 향신료였다. 이런 재료들로 만든 것이 약과였으니 먹으면 약이 된다고 생각해서 약과라고 했을 수도 있 지만 약과라고 부른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다. 다산 정약용이 우리말의 어원을 풀어 놓은 책이 아언각비( 雅 言 覺 非 )다. 여기에 왜 약과라고 부르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우리말에서는 꿀( 蜜 )을 약( 藥 )이라고 부른다. 때문에 꿀로 담근 술을 약주( 藥 酒 )라고 하고, 꿀로 지은 밥을 약밥( 藥 飯 )이라고 하며, 꿀로 만든 과자를 약과( 藥 果 )라고 하는 것이다 아언각비에 따르면 약과는 약이 되는 과자이기 때문에 약과가 아니고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꿀로 만든 식품을 약이라고 했기에 꿀로 버무렸다는 뜻에서 약과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약과는 과자인데 한자로 과일 과( 果, 菓 )자를 쓰는 것일까? 따지고 보면 과자( 菓 子 ), 역시 과일이라는 뜻의 한자를 사용하는데 왜 군것질로 먹는 과자에 과일이라는 뜻의 한자를 쓰는 것일까? 과일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무엇일까? 참고자료 : 아언각비( 雅 言 覺 非 )란? 다산 정약용이 순조 19년(1819년) 당시에 널리 쓰이고 있는 말과 글 중에서 잘못 쓰이 고 있는 것을 골라 옛 문헌을 참고하여 원뜻과 어원을 밝히고 용례를 들어 설명한 책이 다. 모두 200여 항목으로 이뤄져 있으며 내용은 자연, 풍속, 인사, 제도, 관직, 식물, 동물, 의복, 음식, 주거 등에 관계되는 것, 또 언어학적으로 뜻을 잘못 알고 쓰는 것, 동음어, 동의어, 방언 등을 다방면에 걸쳐 고증해 놓았다. 2. 제사상에 왜 약과를 놓을까? (1)제철 과일 대신에 약과를... 약과는 전통 제사상에 빼놓지 않고 차리는 제물이다. 제사 때뿐만 아니라 환갑과 전통 결 혼식 같은 잔칫상에도 약과를 빼놓지 않았다. 그런데 약과가 올려져 있는 상차림, 특히 제사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약과를 대추, 밤, 배, 감, 사과 등과 함께 진설한다는 것이다. 약과와 같은 유밀과는 과자 종 류인 한과인데 왜 과일과 같은 줄에 차리는 것일까? 약과는 지금처럼 군것질로 먹는 과자가 아니라 과일을 본 따 만든 인공 과일이었기 때문이 다. 약과뿐만 아니라 아이들 간식인 과자 자체가 뿌리는 과일에서 비롯됐다. 인공 과일이기 - 2 -
때문에 과자( 菓 子 )라고 하는 것인데 과자라는 단어에 한자로 과일 과( 菓 )자가 들어가는 까닭 이다. 그러니까 약과를 비롯한 전통 한과는 지금처럼 온실재배나 저장시설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 날, 제철이 아니면 과일을 구할 수 없었던 시절, 제철 과일 대신에 인공으로 만든 과일이 바 로 약과, 즉 과자였다. 자세한 설명이 역시 정약용의 아언각비에 풀이돼 있다. 약과는 유밀과의 한 종류로 과일의 한 종류다. 모양이 바뀌었지만 이름은 그대로 남았다. 성호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약과는 조과( 造 果 )라고 했다. 이를테면 가짜 과일이라는 뜻이다. 우리말에는 진짜가 아닌 것에는 만들었다는 뜻의 조( 造 )라는 글자를 붙인다. 옛날에는 꿀과 밀가루로 과일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혹은 대추나 밤처럼, 혹은 배나 감처럼 만들었다. 그리 고 조과라고 했다. 후에 모양이 둥글어서 굴러다니는데다 상에다 높이 쌓을 수 없어 사각형 으로 고쳐서 만들었다. 모양은 바뀌었지만 과일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남아 약과라고 부른 다 제사상에서 약과를 과일과 함께 진설하는 이유도 설명이 되어 있다. 지금은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진설하는데 과일을 진설하는 곳에 놓는다 고 했는데 약과가 인공 과일이니 과일 과 함께 놓는 것이 당연하다. (2) 약과의 발전 우리나라에서 약과가 발전한 과정을 살펴보면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 朝 鮮 常 識 )에서 약과 는 불교의 불공음식에서 발달한 것이라고 했다. 육식을 금지하는 불교에서는 제례를 올릴 때 고기나 생선을 쓸 수 없기 때문에 과일과 곡 식으로 대신했는데 그 중에서 약과는 중요한 제례음식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때 유학자들은 제사에 약과를 놓아야 하는지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 도 했다. 제사 때 약과를 놓은 것은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에서 고기와 생선을 쓰지 않으니 까 약과를 놓았을 뿐인데 유교에서는 고기와 생선을 사용하니까 약과 쓰는 것은 폐지해야 한다면 갑론을박을 펼쳤다. 약과는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 때 크게 발전하는데 불교 의식뿐만 아니라 궁중과 민간의 제 사와 각종 잔칫상에도 반드시 약과를 좋게 됐다. 고려사( 高 麗 史 )를 보면 의종 때 팔관회와 연등행사 때 약과가 놓여있지 않았다고 큰 일이 난 것처럼 기록해 놓았다. 큰 행사에 약과를 준비하지 않으면 예의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것으로 여기기도 했지만 약과를 영혼을 부르는 음식으로 생각한 측면도 있다. 그러니 각종 제례에서 약과가 빠지면 혼을 불러 오는 음식이 빠졌으니 문제를 삼았던 것이다. 엉뚱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약과는 영혼을 부르는 음식이었다. 옛날 문헌을 통해 약과의 기원을 따져 올라가면 하늘로 간 그리운 사람을 부를 때 사용한 식품으로 나온다. 약과에 대한 이런 인식은 중국 전국시대 때 노래를 엮어 놓은 초사( 楚 辭 )에 그 뿌리를 두 고 있다. 초사 중에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부르는 노래인 초혼부( 招 魂 賦 ) 가 실려 있는데 작자 - 3 -
가 자신의 임금이었던 초나라 회왕( 懷 王 )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다. 내용 중에 거여 와 밀 이 라는 음식을 차려 놓았으니 돌아오라는 구절이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거여 와 밀이 는 밀가루로 만든 떡을 기름에 지 진 후 엿과 꿀을 발라 말린 것으로 지금의 약과와 같다고 했다. 약과의 기원을 거여 와 밀 이 라는 음식에 두고 있는 것이다. 대문에 약과가 영혼을 부르는 초혼( 招 魂 ) 의 음식으로 인 식했던 이유다. 3. 사치음식 제조 금지령 (1) 약과가 초호화 사치음식...? 고려와 조선에서는 약과가 여러 차례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사치음식이었다. 옛날에는 귀 했던 밀가루와 꿀, 생강과 참기름 등을 버무려 만드는 한과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나라 에서는 국고가 빌 정도로, 또 돈 많은 사람들도 가산을 탕진할 정도로 제사와 잔치를 핑계 로 너무 자주, 또 너무 많은 약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정조의 글을 모은 홍재전서( 弘 齋 全 書 )에 약과로 인한 사치가 우려하는 대목이 보인다. 사가( 私 家 )의 연회에서 유밀과( 油 密 果 )를 쓰는 것은 원래 금지 조항에 저촉되는데, 요즈음의 세태를 보면 혼례( 婚 禮 )나 수연( 壽 宴 )에서 종종 유밀과를 몇 자[ 尺 ] 씩이나 높게 진설하는 경 우가 있다. 사치를 이처럼 부린다면 재물이 어찌 바닥나지 않겠는가 유밀과는 밀가루를 꿀로 버무려 만든 과자이니 약과가 가장 대표적이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3년(1472년) 1월 22일자 기록에도 약과로 인한 사치가 극심한 것을 지 적하고 있다. 요즘은 산소에 차려놓는 제물로 거의가 유밀과를 쓰니 엄히 더 금단할 것 시골의 부자들은 장례를 성대하게 준비하는데 유밀과를 큰 쟁반에 담는 것이 심해졌다 역시 조선왕조실록 정조 20년의 기록에 여염의 부자들이 경사스러운 모임으로 손님을 청 할 때면 비단과 금줄이 좌우에서 번쩍거리고 쌓아 놓은 유밀과의 높이가 한 길이 넘는 등 낭비가 날로 심해지고 저마다 사치를 숭상하고 있습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세조 원년 에는 외국 사신들을 위한 연회 때에만 유밀과를 사용하고 그 이외에는 모두 엄격히 금지하 였습니다. 우리 선조( 先 朝 )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혼례나 사대부의 혼례를 막론하고 모두 유 밀과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으며, 금종이나 은종이로 만든 꽃을 사용하는 자는 형장 80대로 처벌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훌륭한 덕을 갖춘 열성( 列 聖 )께서 몸소 근검절약을 실 천함으로써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정립시키고자 함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기록 곳곳에서 유밀과, 즉 약과로 인한 사치를 우려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 다. 약과 사치는 임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 4 -
약과를 중심으로 한 음식사치가 심해지면서 집집마다 관혼상제 때면 약과를 필요로 했고, 만들어 놓으면 이곳저곳에서 선물로 내놓으라고 요구를 하며 심지어 중국에서도 조공으로 약과를 바치라고 했으니 수요를 만족시킬 정도로 공급을 하려면 국가재정이나 개인 살림이 거덜이 날 판이었다. 그런데 약과로 인한 사치는 굳이 민간뿐만이 아니라 임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익은 성호 사설에서 고려 때 충선왕은 세자 시절에 원나라에 머물면서 황실이나 조정의 잔치에 초대를 받아서 가면 고국에서 가져 온 약과를 선물로 가져갔다고 했는데 맛이 좋아 인기가 그만이 었던 모양이다. 몽고 공주한테 장가를 간 충선왕은 고려로 돌아오지 않고 원나라에 계속 머물겠다며 원나 라 요소요소에 로비까지 한 인물이니 이때 약과를 뇌물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겠다. 원나 라 때 몽고에서 약과에 대한 인기가 무척 높았기 때문이다. 최남선의 조선상식을 보면 고려 충렬왕 이후부터 원과의 교류가 많아지면서 각종 잔치에 약과가 자주 쓰였는데 원나라에서 약과를 선물로 보내라는 요구가 많아지자 왕이 앞으로 약 과를 잔치에 내놓지 말라고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고려 의종 때도 빈번한 제사 때마다 약과를 올리느라고 약과 품절 현상이 빚어졌다는 기록 이 보이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심해졌는지 아예 법으로 약과 사용을 금지하기까 지 했다. 약과 만들면 곤장이 80대... 약과를 만들어 사용하지 못하게 한 기록은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나온다. 고려 말 공민왕 때는 원나라에서 해마다 사신이 와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극도로 사치를 다하여 물가가 등귀하니 공식적인 행사나 민간의 사사로운 행사를 막론하고 유밀과인 약과를 금지 하기도 했다. 최남선은 조선상식( 朝 鮮 常 識 )에서 대전통편( 大 典 通 編 )에는 민가의 혼례와 장례 때 유밀과, 즉 약과를 쓰는 자는 곤장 80대에 처한다는 조문이 있다고 소개했다. 약과를 만들었다가 곤장을 맞았다는 기록은 조선시대 문헌에 보이지 않으니 실제 집행된 경우는 없는 사문화된 조항으로 보이지만 역사적으로 약과만큼 자주 제조 및 식용금지 조치 가 내려졌던 식품도 드물다 국조보감에 의하면 조선 초기, 세조 때는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잔치 이외에는 약과 사 용을 금지하는 법령을 만들었다. 조선 후기 영조 때는 임금이나 왕자의 국혼은 물론이고 사 대부의 혼인에 이르기까지 결혼식에 약과를 비롯한 유밀과 사용을 금지토록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뒤집어서 해석하면, 약과로 인한 사치를 엄격히 금지한다는 명령이 수시로 내려졌다는 것 은 엄격하게 금지해도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만큼 약과가 귀한 재료로 만 드는 고급 음식이기도 했겠고, 제사나 혼례에 빼놓을 수 없는 의미를 지닌 식품, 과일 대용 - 5 -
품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참고자료 : 국조보감( 國 朝 寶 鑑 ) 조선시대 역대 왕의 업적 가운데 선정만을 모아서 펴낸 편년체의 역사책이다. 세종 때 처음으로 편찬을 구상하여 세조 4년에 태조, 태종, 세종, 문종의 보감을 완성했고 마지막 으로 순종 2년에 헌종 철종의 보감을 추가하여 90권을 완성했다. - 6 -
왜 호떡집에 불났다고 할까? 1. 호떡집에 불났다는 말의 함의( 含 意 ) (1) 쏼라쏼라의 의미 (2) 설렁탕보다 많은 호떡집 2. 실크로드 따라 온 서역의 빵, 호떡 (1) 호떡( 胡 餠 )의 胡 자가 갖는 의미 (2) 한나라 때 전해진 호떡 (3) 호떡은 왕과 귀족이 먹던 고급 음식 1. 호떡집에 불났다는 말의 함의( 含 意 ) (1) 쏼라쏼라의 의미 지금 호떡은 보통 거리의 포장마차, 혹은 상가 중에서도 도로에 접한 열린 공간에서 판다. 호떡집에 불이 났다고 특별히 시끄럽게 호들갑을 떨 상황이 아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달랐다. 호떡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찾는 간식이지만 이름에서도 짐 작할 수 있는 것처럼 중국에서 전해진 식품이다. 개화기 때 주로 중국에서 온 건너 온 화교 들이 호떡을 구워 팔았다. 그러니까 호떡집 주인인 중국 사람이 불이 났다며 소란을 피우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호떡집에 불났다 는 말에서 몇 가지 압축된 시대상황을 엿볼 수 있다. 단순하게 시 끄럽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지만 개화기, 그리고 식민지 시대의 아픔과 민족감정이 호떡집 에 불났다 는 말에 녹아 있다. 상점에 불이 나면 누구라도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필 호떡집 주인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 말이 생겨날 무렵, 호떡집 주인은 대부분 중국에서 온 화교 출신들이었고 우리나 라 사람들은 평소 중국인들이 시끄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시끄럽다는 인식 에는 중국인데 대한 곱지 않은 민족 감정까지 깔려 있다. 한국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말하는 모습을 흉내 낼 때 쏼라쏼라 거리며 떠든다고 표현한다. 쏼라쏼라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의미가 있는 말일까, 아니면 단순히 중국말이 우리 귀에는 쏼라쏼라로 들리는 것일까? 쏼라쏼라는 중국어로 솰라솰라( 算 了 算 了 )에서 비롯된 말로 추정된다. 솰라솰라라는 말은 어 감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지만 보통의 경우 됐다, 됐어 정도의 뜻으로 쓰인 다. 그러니까 장사를 할 때 흥정이 이루어졌을 때도 쓸 수 있는 말이고 흥정이 깨져 팔지 - 1 -
않겠다고 할 때도 쓰는 말이다. 반대로 중국 사람들에게도 한국말은 시끄럽게 들린다고 한다. 우리에게 중국인들의 쏼라쏼 라라고 떠들어 대는 것처럼 중국인들은 한국 사람이 후구리 뚜구리, 후구리 뚜구리 라며 떠든다고 표현한다. 역시 한국인을 다소 비하할 때 쓰는 말이다. 의미가 통하지 않으면 어느 나라 말이건 상대편의 귀에는 소음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더 욱이 좋은 감정이 아닐 때는 더욱 시끄럽게 들린다. (2) 설렁탕보다 많은 호떡집 그러지 않아도 시끄럽게 들렸던 중국말인데 호떡집에 불이 났으니 놀란 호떡집 주인이 얼 마나 크게 큰 소리로 떠들었을까? 호떡은 20세기 초반에 들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임오군란 이후 일제 강점기 때까지 점차 늘어난 중국 화교들은 생계를 위해 짜장면과 만두, 호떡 같은 음식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지금의 인천인 제물포에서 시작해 중국 대사관 주변인 서울의 명동과 종로 일대로 퍼지면서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인기를 끌게 되었다. 호떡은 원래 지금처럼 소로 설탕을 넣지 않고 밀가루로 만드는 것이 원칙이지만 설탕이 들 어간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맞도록 변형된 것이라고 한다. 1924년 6월 28일자 동아일보에는 지금의 서울시청인 경성부 재무당국조사 자료를 인용해 경성부에 설렁탕집이 대략 100 곳이 있는데 호떡집은 150 곳이라고 나온다. 호떡집이 번창 을 했던 것인데 다시 말해 일제강점기 하의 서울에서 중국인들이 한국인들 상대로 돈을 벌 어간 것이다. 1920-30년대 신문기사에는 호떡집에 관한 기사가 많이 보인다. 기사에 중국인이 경영하는 호떡집이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호떡집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호떡집 관련 기사는 대부분 부정적인데 호떡집에서 아편을 팔다 적발됐다는 내용, 중국인이 조선여자를 인신매 매하는데 호떡을 미끼로 조선 소녀를 꾀어 중국에 팔아넘겼다는 내용 등이다. 사회면에 실린 사건 기사인 만큼 내용이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고 조선 에 건너와 장사를 하는 중국 화교가 나쁜 짓을 많이 했던 측면도 없지 않다. 어쨌든 호떡 파는 중국인데 대한 조선인의 민족감정이 곱지는 않았다. 1920-30년대 신문기사에는 호떡집에 불났다는 기사도 자주 보인다. 화덕에 불을 피워 호떡 을 굽는 만큼 화재가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호떡집에 불났다 는 말에는 당시의 이런 시대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2. 실크로드 따라 온 서역의 빵, 호떡 (1) 호떡( 胡 餠 )의 胡 자가 갖는 의미 - 2 -
호떡은 붕어빵, 어묵, 떡볶이 순대 등과 함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는 간식 중의 하나다. 20세기 초반 중국 화교들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널리 퍼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호떡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떡 앞에 접두어로 오랑캐 호( 胡 )자가 있으니 오랑캐들이 먹는 떡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입장에서 중국을 비하할 때 되놈 또는 역사적으로 청나라를 오랑캐 라고 여겼기 때문에 중국의 떡을 우리 떡과 구분해 호떡이라고 불렀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중 국에서도 우리가 먹는 것과 비슷한 호떡을 호떡, 중국어로 후삥( 胡 餠 )이라고 부른다. 중국 입장에서도 오랑캐의 땅에서 온 음식, 즉 이국음식이기 때문이다. 호떡은 어디에서 온 음식 일까? 음식 중에서도 호( 胡 )가 접두어로 붙은 식품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호떡을 비롯해서 호두 ( 胡 桃 )가 있고, 후추( 胡 椒 )가 있으며, 참깨도 한자로는 호마( 胡 麻 )라고 하고 오이를 호과( 胡 瓜 ) 라고도 한다. 호( 胡 )자가 들어가는 식품은 대부분 서역, 그러니까 중앙아시아에서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 으로 들어 온 음식들이다. 호두는 서역에서 전해진 복숭아 씨앗처럼 생긴 견과류라는 듯이 고 후추는 서역에서 전해진 향신료라는 뜻이다. 무심코 먹는 호떡이지만 기원을 따져보면 뿌리가 깊다. 지리적으로는 멀리 서역에서 온 음식이고 역사적으로는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까지 전해진 음식이다. 호떡은 원래 옛날의 서역( 西 域 ), 그러니까 중앙아시아에서 먹는 빵이다. 지금의 우즈베키스 탄, 카자흐스탄, 파키스탄 등 나라 이름이 -스탄 으로 끝나는 지역의 음식이다. 옛날로 치면 흉노족, 돌궐족이 먹었던 빵이니 오랑캐들이 먹는 빵이라는 뜻에서 호떡이라고 불렀던 것이 다. 요즘 중앙아시아와 터키, 인도 등지에서 먹는 빵인 난 과 같은 음식이 바로 호떡의 원조 라고 할 수 있다. (2) 한나라 때 전해진 호떡 호떡이 우리나라에 퍼진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반으로 추정되지만 중국에서는 진작에 호떡을 먹었다. 우리는 밥을 중심으로 한 입식 문화이기 때문에 밀가루 음식이 많지 않지만 중국 북방은 밀가루 중심의 분식 문화이기에 호떡이 일찌감치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문헌 기록에 의하면 호떡( 胡 餠 )은 한나라 때 서역에서 중국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6세기 무 렵의 농업서인 제민요술( 齊 民 要 術 )에도 호떡은 서역에서 온 음식이라고 나온다. 명나라 때 장대( 張 岱 )라는 학자가 쓴 야항선( 夜 航 船 )이라는 책에서는 중국 떡의 계보를 밝 히면서 호떡은 한나라 때 김일( 金 日 )이 전했다고 적혀있다. 김일은 흉노족의 왕자였는데 한 무제 때 중국으로 귀화를 하면서 호떡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 3 -
중국이 흉노를 비롯한 서역 국가와 본격적으로 교류를 한 것이 기원전 1-2세기, 한 무제 때이니 호떡도 이 무렵에 중국에 소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 문헌에 호떡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유비와 조조, 손권이 싸웠던 삼국시대 무 렵이다. 삼국시대에 여포가 마을에 주둔을 하자 마을 유지가 소를 잡고 술을 준비하며 호떡 1만장을 구워 병사들에게 제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왕찬( 王 粲 )의 영웅기( 英 雄 記 ) 한나라의 삼국시대가 끝난 후 들어선 왕조인 진나라의 역사를 적은 진서( 晉 書 ) 열전에도 호떡을 먹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그까짓 호떡 하나를 놓고 왜 여러 역사책들이 기록을 남겼을까? 그것도 진나라의 정사인 진서와 같은 역사서와 저명한 학자인 장대의 야항선 같은 문헌에 호떡에 관한 기록 을 남긴 이유가 무엇일까? (3) 호떡은 왕과 귀족이 먹던 고급 음식 지금은 간식에 불과하지만 호떡은 역사적으로 옛날 황제나 귀족들이 먹던 귀한 음식이었 다. 그것도 멀리 서역에서 건너 온 이국 음식이었으니 아무나 먹을 수 있는 흔한 간식거리 가 아니었다. 중국에 호떡이 전해진 것은 기원전 1-2세기, 한나라 무렵이지만 널리 퍼지고 유행한 것은 당나라 때다. 서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 서역의 음식인 호떡이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서 크게 유행한다. 당나라는 세계화가 실현되었던 시기다. 당시 수도였던 장안에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실크로 드를 따라 쉬지 않고 들락거리는데 낙타 방울소리와 외국어가 끊이지 않았다. 기이한 모습 과 복장, 풍습을 한 외국인이 장안에 넘쳐 났는데 중앙아시아 여자들도 많이 들어왔고 바닷 길을 통해 한국과 일본, 동남아, 아프리카 여자들까지 장안에서 장사를 했다. 시내에는 서역 음식을 파는 식당도 많아, 여러 사연을 가슴에 안고 중국에 온 서역의 미인들이 고향 음식 인 호떡을 먹으며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그런데 양귀비도 호떡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역사책인 이십사사( 二 十 四 史 )에 실린 글 중에 서 흥미 있는 이야기만 골라 엮은 통속연의 通 俗 演 義 )에는 당 현종이 양귀비와 함께 여행을 하는데 미처 식사를 하지 못하자 양국충이 시장에 가서 호떡을 사다가 바쳐 끼니를 때웠다 고 나온다. 또 당나라 중엽 때 기록인 광이기( 廣 異 記 )에는 상점에서 호떡을 판다는 기록이 보이고 송 나라 때 수도인 카이펑의 풍경을 묘사한 동경몽화록( 東 京 夢 華 錄 )에도 상점에서 호떡을 판다 고 했으니 당나라와 송나라 때에는 요즘처럼 길거리 상점에서 호떡을 많이 팔았다. 지금은 길거리에서 간식으로 먹는 호떡이지만 그 역사의 뿌리와 얽혀있는 이야기가 적지 않다. -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