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듯 말듯 동지 팥죽 쑤는 뜻 학습주제 1. 동짓날 팥죽을 먹는 이유 (1) 동지 팥죽은 미신일까? 과학일까? (2) 동지팥죽은 한중일 삼국의 공동 풍속 2. 공공씨( 共 工 氏 )가 팥죽을 끓였다? (1) 동지팥죽은 왜 생겼을까? 참고자료 : 형초세시기란? (2) 왜 하필 팥죽이었을까? (3) 왜 하필 동짓날 팥죽을 먹게 됐을까? 3..동지에 팥죽을 먹는 진짜 이유 1. 동짓날 팥죽을 먹는 이유 동짓날 팥죽을 먹는 것이 우리 민속이다. 이유는 귀신이 팥의 붉은색을 싫어하기 때문에 팥 죽을 먹으면 액땜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조선 순조 때의 풍속을 적은 동국세시기에 설명이 나온다. 동짓날을 작은 설( 亞 歲 )라고 한 다. 이날 팥죽을 쑤어 먹는데, 찹쌀가루를 쪄서 새알 모양으로 만든 떡을 죽 속에 넣는다. 이렇게 심( 心 )을 삼은 떡을 새알심이라고 한다. 이것에 꿀을 타서 시절음식으로 먹으며 제사 에도 쓴다. 팥죽을 문에 뿌려 액을 막기도 한다. 형초세시기에 공공씨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 역귀가 되었다. 그 아들이 생전에 팥을 무서워했기에 동짓날 팥죽 을 쑤어 물리치는 것이다 팥죽으로 귀신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동지 팥죽에 얽힌 상식과 관련해 몇 가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먼저, 왜 하필 동짓날 팥죽을 먹는 풍속이 생겼을까? 밑도 끝도 없이 공공씨의 아들이 동짓날 죽어 귀신이 됐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과연 어떤 의 미가 있는 것일까? 왜 하필 팥죽을 먹을까? 귀신이 된 아들이 생전에 팥을 무서워했다고 했는데 왜 팥을 무서워했을까? 우리는 귀신이 팥의 붉은 색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는데, 동국세시기에서는 팥을 무서워했다고 나온다. 귀신이 무서워한 것은 팥의 붉은 색일까? 아니면 팥일까? 별 것 다 따진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 동지팥죽의 비밀이 숨어 있다. - 1 -
(1) 동지 팥죽은 미신일까? 과학일까? 미신에서 비롯된 이야기...? (해동죽지, 조선왕조실록) 동짓날 죽은 귀신이 팥 내지는 팥의 붉은 색을 무서워했기 때문에 팥죽을 먹어 귀신의 해 코지를 미연에 막는다 얼핏 들으면 100% 미신이다. 옛날 조상님들은 무지몽매했기 때문에 귀신의 해코지를 액땜 하려고 팥죽을 먹고, 팥죽을 문에다 뿌린 것일까? 그리고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 역시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전통적으로 내려온 미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팥죽 먹고 팥죽을 뿌렸을까? 그렇다면 과학이 발달한 지금은 왜 동짓날 팥죽을 먹을까? 미신은 사라졌지만 전해져 내려 온 풍속이기 때문에 먹는 것일까? 요즘은 대도시에서는 사라졌지만 집집마다 팥죽을 뿌리는 풍속은 20세기 중후반까지도 남 아 있었다. 근대 초기, 일제 강점기 때 언론인이며 문인이었던 최영년이 쓴 해동죽지( 海 東 竹 枝 )를 보면 동짓날이면 팥죽을 쑤어 먹을 뿐만 아니라 집안의 방은 물론이고 장독대, 헛간 등 집 구석 구석에 팥죽을 놓아두었으며 문에는 팥죽을 바르거나 사방에다 팥죽을 뿌려 귀신이 들어는 것을 막는 것이 풍속이라고 했다. 조선 후기, 영조 때에도 팥죽을 뿌리는 것이 문제가 됐다. 영조실록에 그 기록이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영조 임금이 동짓날의 팥죽은 비록 양기가 되 살아 나는 것을 기원하는 뜻이라고는 하지만 귀신을 쫓으려고 문에다 팥죽을 뿌리는 공공씨 의 이야기는 정도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그만 두라고 명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도 팥죽 뿌 리는 행위가 계속 된다고 하니 이후로는 문에다 팥죽 뿌리는 행동을 그만 두어 잘못된 풍속 을 바로 잡으라 고 명령한다. 동짓날 팥죽 뿌리는 풍습이 도에 넘칠 정도로 지나쳤던 모양인데 영조가 왕명으로 금지시 켰지만 후에도 계속된 것을 보면 왕명이 먹혀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허황된 미신이 그만큼 널리 퍼졌기 때문일까? (2) 동지팥죽은 한중일 삼국의 공동 풍속 중국에서는 고대에 동지 때 팥죽을 먹었다. 동짓날 팥죽을 먹는 기원을 형초세시기에서 찾 고 있으니 당연히 옛날에는 동지 팥죽을 먹었다. 지금도 중국 시골에서는 동짓날 만두를 빚 고 팥죽을 먹는다. 일본에서는 小 正 月 이라고 하는 정월 1월 15일에 나쁜 기운( 邪 氣 )을 물리친다며 한 해의 건 - 2 -
강을 위해 팥죽을 먹는 풍습이 있다. 이 15일은 정월 대보름달의 날이라 望 粥 (もちがゆ)이라 고도 부른다. 팥이 가진 빨간 색과 벼농사 민족의 주술이 결합해 일찍부터 제사의 장에서 팥이 이용되어 왔다. 일본의 남북조 시대에 쓰여진 拾 芥 抄 에는 중국의 전설에서 비롯됐다고 했는데, 형초 세시기를 의미한다. 일본에서는 동지 팥죽 대신 대보름 팥죽으로 발달했다. 2. 공공씨( 共 工 氏 )가 팥죽을 끓였다? (1) 동지팥죽은 왜 생겼을까? 우리 동국세시기에는 형초세시기에 공공씨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 역귀가 되었다. 그 아들이 생전에 팥을 무서워했기에 동짓날 팥죽을 쑤어 물리치는 것이다 라고 나와 있다. 동지팥죽의 기원을 형초세시기에서 찾는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에서도 동지팥죽 의 기원으로 모두 형초세시기를 꼽고 있다. 형초세시기에는 다음과 같이 팥죽에 대한 설명이 되어있다. 동짓날이면, 해의 그림자를 재고 팥죽을 끓인다. 역질을 물리치기 위함이다. 공공씨( 共 工 氏 ) 에게 재주가 부족한 아들이 있었는데 동짓날 죽어 역귀가 됐다. 팥을 무서워했기에 동짓날 팥죽을 끓여 역귀를 물리치는 것이다 冬 至 日 量 日 影 作 赤 豆 粥 以 禳 疫 按 共 工 氏 有 不 才 之 子 以 冬 至 死 為 疫 鬼 畏 赤 豆 故 冬 至 日 作 赤 豆 粥 以 禳 之 참고자료 : 형초세시기란? 여전히 미신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데, 동지팥죽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려면 형초세시기에 나오는 시대적 의미와 상징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형초세시기는 어떤 책이기에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적어 놓았을까? 형초세시기는 서기 6세기 남북조시대 양( 梁 )나라의 종름( 宗 懍 )이 쓴 책을 7세기 초 두공섬( 杜 公 贍 ) 이 주를 달아 완성한 책이다. 현존하는 중국의 세시기 중에서 가장 오래 됐으며 이후 각종 세시풍 속을 적어 소개하는 책이 유행했다. 조선 후기 우리나라의 동국세시기, 일본의 일본세시기 등이 모 두 비슷한 유행의 세시기다. 형초세시기는 중국의 형초 지방에서 행해지는 설날인 元 旦 에서부터 除 夜 에 이르기까지, 24절기의 풍속과 활동, 기원 등을 기록했다. 형초 지방은 춘추전국 시대 때의 초나라 지방, 지금의 화중( 華 中 ) 지방으로 지금 중국의 후베이성 과 후난성, 양자강 중류 지역이며 중국 문화가 발달한 곳이고 중국의 평원지역으로 대표적인 곡창 지대이지만 강의 범람으로 수시로 홍수 피해를 입었던 지역이다. - 3 -
(2) 왜 하필 팥죽이었을까? 공공씨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신화집인 산해경( 山 海 經 )에 나오는 신으로 중국 신화에서 다양한 성격의 인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간단하게 정리하 면 요순시대에 등장하는 신으로 사람의 얼굴에 뱀의 몸을 하고 있으며 성질이 난폭했으며 강을 다스리는 신이다. 양자강에 홍수를 일으킬 수도 있고 물을 다스리는, 치수 능력을 갖고 있는 전설 속의 인물 이다. 공공씨가 낳은 재주가 없는 아들은 누구이며 왜 죽어서 역귀가 됐을까? 공공씨와 역귀가 된 아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중국의 요순시대 때, 순 임금이 홍수를 막은 우임금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준 것처럼 고대 중 국에서 물을 다스리는 것, 治 水 는 정치의 기본이다. 농업국가인 중국에서 물은 곧 풍년과 흉 년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공공씨는 강을 다스리는 신이다. 생명줄인 강의 신이고 홍수의 신이기 때문에 존경의 대상 이며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다. 반면에 공공씨의 재주 없는 아들( 不 才 之 子 )는 재주가 없으니 말썽만 피운다는 뜻이다. 어떤 말썽을 피웠을까? 죽어서 역귀( 疫 鬼 )가 됐다고 했는데 역귀는 바로 전염병을 옮기는 귀신이 다. 공공씨의 재주 없는 아들이란 현대 과학으로 해석하면 전염병을 옮기는 세균, 바이러스 다. 정리하자면 강의 신, 공공씨가 홍수를 일으키자, 그 결과로 전염병이 돌았다는 이야기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리고 역귀가 된 아들이 팥을 무서워했기 때문에 팥죽을 끓였다는 이야기 는 팥죽으로 전염병을 물리쳤다는 뜻이다. 팥죽이 전염병, 그것도 홍수로 인한 수인성 전염병의 예방약 내지는 치료약으로 쓰였다는 의미다. 역귀가 된 공공씨의 아들이 팥을 무서워했다는 기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왜 하필이면 팥 을 무서워했을까? 동지팥죽의 기원을 적은 형초세시기는 서기 6세기 무렵에 나온 책이다. 그러니까 기록된 내 용은 적어도 5 세기 이전의 풍속들이다. 쌀이나 밀가루는 높은 상류층의 왕족이나 귀족들이 먹는 음식이고 고기는 더더욱 구경하기 도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 평범한 일반 백성들이 구하기에는 팥이 가장 흔하고 영양가 높은 곡식이었을 것이다. 팥은 동아시아가 원산지라 한중일 세 나라에서 먹는 곡식이다. 동짓날 팥죽이 퍼진 이유일 것이다. 팥은 또 따뜻한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추운 겨울에 먹으면 좋은 음식이다. 동의보감에도 팥 은 성질이 따뜻하고 설사와 이질을 멎게 한다고 나온다. - 4 -
홍수로 강물이 범람한 이후에 도는 전염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데 좋은 음식이다. 동짓날은 겨울 중에서도 가장 추울 때다. 그렇기 때문에 팥죽을 뜨겁게 끓여 먹음으로써 한 기를 쫓아서 추위를 이겨내고 동시에 겨울철에 부족했던 영양을 보충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 었다. 당나라 때 서견( 徐 堅 )이 쓴 초학기( 初 學 記 )에는 양생요집( 養 生 要 集 )이라는 책에 동짓날에는 양( 陽 )의 기운이 배 속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뜨거운 음식물이 위장으로 들어가도 쉽게 소화 를 시킬 수 있다 고 적어 놓았다. 그러니까 양의 기운이 들어오는 동짓날에 뜨거운 팥죽을 먹으면 소화가 잘 되고 양의 기운을 보충할 수 있어 몸에 이롭다는 약식동원( 藥 食 同 源 )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추운 겨울에 먹는 뜨거운 팥죽 한 그릇이면 얼었던 속이 녹아 추위를 물리칠 수 있으니 건 강에 좋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조선시대 때는 한 겨울이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굶주림과 한기를 물리치라고 팥죽을 쑤어 나누어 주었다. 전염병을 옮기는 귀신, 역귀의 입장에서 보면 팥이 가장 두려웠던 이유다. (3) 왜 하필 동짓날 팥죽을 먹게 됐을까? 동국세시기에서 동지를 아세( 亞 歲 )라고 했다. 작은 새해, 내지는 새해에 버금가는 날이라는 뜻인데 왜 동지가 작은 새해일까? 동지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태양이 부활하는 날이다. 동지를 한자로 쓰면 겨울 동( 冬 ), 이 를 지( 至 )자를 쓴다. 겨울이 끝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동지는 양력으로 보통 12월 21일에서 23일 사이니까 추워도 한참 추울 때이고 어떻게 보면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이다. 그런데도 겨울이 끝났다니까 심정적으로 공감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태양의 움직임으로 보면 이날 겨울이 끝났다는 개념이 틀리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풀이하자면 태양이 움직이는 고도는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 여름의 하지는 태양 이 움직이는 궤적의 고도가 가장 높은 날이고 반면 겨울의 동지는 고도가 가장 낮은 날이 다. 때문에 동짓날이 밤의 길이가 가장 길고 낮이 길이는 제일 짧은 날이 되는 것이다. 태양이 움직이는 궤적이 가장 낮은 곳에까지 갔다가 다시 높은 곳으로 돌아오기 시작하는 날이 바로 동지다. 그렇기 때문에 태양이 가장 낮은 지점까지 갔으니 동지는 겨울이 끝나는 날이고 동지가 지나면 태양의 고도가 높아지고 그러면 태양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니 태양이 부활하는 날이다. 그러니까 태양의 움직임으로 한 해가 새롭게 시작되는 날이다. 때문에 고대에는 동지가 바로 새해가 시작되는 설날이었다. 지금처럼 음력 정월 초하루가 설날이 된 역사는 따지고 보면 깊지 않다. 한무제 때인 기원전 104년부터다. 중국의 역법에서 새해는 시대에 다라 달랐는데 하( 夏 )나라는 음력 1월, 은( 殷 )나라는 음력 12월, 주( 周 )나라는 음력 11월, 진( 秦 )나라는 음력 10월, 그리고 한나라 때 다시 음력 정월이 새해가 됐다. 동지 팥죽은 그러니까 우리가 새해 설날에 떡국을 먹고, 만두를 먹는 것처럼 옛날에는 새해 내지는 새해에 버금가는 아세에 먹는 준 설날 음식이었다. - 5 -
참고자료 : 동국세시기란? 조선 후기에 홍석모( 洪 錫 謨 )가 연중행사와 풍속들을 정리하고 설명한 세시풍속집으로 필 사본이다. 책 맨 앞의 이자유( 李 子 有 )의 서문이 1849년(헌종 15) 9월 13일에 쓰여진 점으 로 보아서 이 책의 완성은 1849년으로 보인다.편찬/발간 경위 뒤에 이 필사본을 홍승경( 洪 承 敬 )이 광문회( 光 文 會 )에 기증하여, 광문회에서는 1911년에 김매순( 金 邁 淳 )의 열양세시기 洌 陽 歲 時 記, 유득공( 柳 得 恭 )의 경도잡지 京 都 雜 志 와 더불어 합본하여 1책의 활자본으로 발행하게 되었다. 그 뒤 이 3책은 합본으로 여러 곳 에서 간행되었으며, 우리 나라 세시풍속연구의 중요한 기본문헌으로서 활용되고 있다. 이상 3책 중에서 동국세시기 는 제일 나중에 쓰여진 책이면서, 내용이 제일 세밀하고 분량도 많다. 그리고 1530년(중종 25)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 에서 기록을 옮겨 적어 놓고, 그 경우에 여지승람을 보라( 見 輿 地 勝 覽 ). 고 한 것이 많다. 그러므로 단정은 할 수 없으나, 동국여지승람 이 작성된 이후 근 300년이 지나 동 국세시기 기술 당시에는 이미 변질되었거나 혹은 단절된 풍속도 있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1월부터 12월까지 1년간의 세시풍속들을 월별로 정연하게 기록하고 있다. 단오 추석 등과 같이 날짜가 분명한 것들은 모두 항목을 별도로 설정하여 설명하였고, 날짜가 분명하지 않은 풍속들은 매월마다 월내( 月 內 )라는 항목 안에 몰아서 기술하고 있 다. 이러한 체재는 열양세시기 와 같다. 다만, 열양세시기 는 서울의 풍속을 중심 으로 하고 있다. 경도잡지 도 이와 체재가 비슷한데 기술이 매우 간략하다. 동국세시기 는 동국여지승람 에서도 많이 옮겨 싣고 있으나, 특히 경도잡지 를 모태로 삼은 느낌이 있다. 잘못된 기록이 두 책에 같이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따 라서, 동국세시기 는 당시의 세시풍속을 문헌자료들도 아울러서 총 정리한 느낌이 든 다. 그러면서 각 지방의 차이가 있는 풍속들도 많이 기술하고 있어서 다른 책들보다 훨 씬 더 참고가 되는 귀중한 자료집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동국세시기 [ 東 國 歲 時 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 원) 3..동지에 팥죽을 먹는 진짜 이유 정리하자면, 동짓날 귀신을 쫓는 의미에서 먹는다는 동지팥죽은 미신이 아니라 옛 사람들이 만들어 낸 나름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강을 다스리는 신인 공공씨가 심술을 부려서 홍수가 일어났다. 강물이 범람했으니 집과 논 밭이 떠내려간 것은 물론이고 추운데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으니 전염병이 나돌았다. 옛날 - 6 -
사람들이니 만큼 전염병은 공공씨의 죽은 아들이 옮기는 것이라고 믿었다. 전염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길은 영양이 풍부한 따뜻한 음식을 먹어 체력을 기르고 면역력 을 높이는 것이다. 서기 500년 이전의 평민들이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곡식은 팥이었을 것이고, 팥죽을 끓여 먹으면서 전염병을 물리쳤을 것이다. 전염병을 옮기는 역귀가 팥을 무 서워한다고 한 이유다. 굳이 동짓날 팥죽을 먹는 이유는 동지가 바로 새해에 버금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세계 어 느 나라나 새해 음식에 담긴 공통적인 소망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는 것과 부 자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동지팥죽도 새해에 한 해 동안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는 의미가 있다. 다만 우리가 얼핏 알고 있는 것처럼 귀신이 팥의 붉은 색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라는 미신적 이 이유가 아니라 옛날 조상들 나름의 과학적인 이유를 담고 있다. 잠깐만요 : 팥죽의 효능 팥죽 효능 알고 갑시다! 변비 팥 껍질에는 사포닌과 안토시아닌이라는 성분이 풍부한데요. 팥죽을 먹으면 이 성분들이 장을 자극시키고 장운동을 활발하게 만들어 쾌변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며, 배변의 양을 증가 및 부드럽게 만들어 변비가 있는 분들이 효능을 볼 수 있습니다. 혈액순환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각종 질병들을 유발할 수 있는데요. 팥은 혈액 및 지질 의 질을 좋게만들어 혈액순환을 촉진시키는데요. 특히, 팥에 함유된 사포닌은 혈전을 용 해시켜주고, 폴리페놀 성분은 체내의 활성산소를 제거해 주기때문에 혈액이 맑아지면서 몸 구석구석 혈액이 순환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탈모 탈모가 발생하는 원인으로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못하면 탈모증세가 유발될 수도 있는데요. 혈액순환에 좋은 팥죽을 꾸준히 섭 취해주면 두피에 영양분의 공급이 제대로 이뤄져서 탈모를 예방 및 개선하는데 팥죽효 능을 볼 수 있습니다. 성인병 팥에 들어 있는 사포닌 성분이 혈전을 효유적으로 녹이고 과산화지질의 생성을 억제시 - 7 -
키는 효능을 가지고 있으며, 폴리페놀 성분이 혈관에 쌓인 콜레스테롤을 제거하여 그 수 치를 낮춰주기 때문에 혈액을 맑게 만들면서 혈액순환이 좋아지는데요. 이로인해 팥죽을 꾸준히 섭취하면 고혈압이나 고지혈증, 동맥경화 등의 성인병 예방에 팥죽 효능을 볼 수 있습니다. 당뇨 췌장은 인슐린을 분비시키는 기관으로 췌장이 나빠지면 당뇨병에 걸릴 수 있는데요. 팥 죽을 꾸준히 섭취하거나 팥죽을 싫어하시는 분이라면 밥을 지으실때 팥을 넣어 먹으면 약해져버린 췌장에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인슐린의 분비를 촉진시켜서 당뇨병을 예방 및 개선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부종제거 신장이 제기능을 하지 못하면 소변이나 노폐물들을 배출하지 못해 부종증세를 유발할 수 있는데요. 팥죽을 먹으면 이뇨작용이 활발해져서 체내의 노폐물들을 배출시켜서 신장 의 기능을 회복 및 부종을 제거하는데 팥죽 효능을 볼 수 있습니다. 숙취해소 연말연시에 술자리가 많아지면서 숙취로 고생하시는 분들이 많으신데요. 팥은 해독작용 이 뛰어나기 때문에 체내의 알코올을 빠른시간에 배출시켜 숙취해소에 좋은데요. 팥죽을 부드럽게 만들어 먹으면 알코올로 인하여 약해진 위장에 좋습니다. 팥죽의 칼로리는 얼마인가요? 팥죽 칼로리는 1인분 기준으로 약 484kcal 인데요. 물론, 팥죽을 만드는 방법이나 재료에 따라서 칼로리가 차이가 날 수 있는데요. 맛을 내기위해서 소금이나 설탕 등을 첨가한다면 칼로리가 좀더 높아질 수 있다는점 참 고하시길 바랍니다. - 8 -
거꾸로 불러도 토마토 학습주제 1. 채소지만 과일로 먹는 토마토 (1) 채소와 과일의 기준 (2) 미국의 토마토논쟁이야기 2. 토마토, 굴곡의 역사 (1) 왜 토마토가 논쟁거리가 되었을까? (2)토마토 전파의 역사 (3)독이 든 열매, 토마토 3. 우리나리에 전해진 토마토 (1) 언제 우리나라에 전해졌을까? (2) 달갑지 않은 열매, 일년감 (3) 토마토를 보는 우리의 시각 0. 왜 그럴까요? 보통 토마토를 어떻게 먹을까?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과일로 먹을 뿐, 반찬이나 음식에 넣어 먹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토마토가 채소일까, 과일일까? 일단 정답은 채소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이유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토마토는 채소 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토마토가 왜 채소여야만 할까? 1. 채소지만 과일로 먹는 토마토 요즘은 서양 요리가 많이 전파됐으니까 토마토를 음식재료로도 많이 활용하지만 예전에는 토마토를 요리에 넣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하물며 우리나라 전통 음식 중에서는 토마토를 재료로 만든 음식은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토마토를 채소라고 하는 것일까? 하지만 서양에서는 토마토를 과일로도 먹지만 요리 재료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서양뿐만 이 아니라 중국 음식에도 토마토가 요리 재료로 들어간다. 많은 나라에서 토마토를 요리로 - 1 -
먹기 때문에 채소라고 하는 것일까? 토마토가 과일이 됐건 혹은 채소가 됐건 과일과 채소를 구분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1) 채소와 과일의 기준 #1-1 일반적으로 과일과 채소의 분류는 과일은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 즉 목본성( 木 本 性 ) 열매를 말하고 채소는 풀에서 열리는 열매, 다시 말해 초본성( 草 本 性 ) 열매로 분류한다. 원예학적으로 토마토는 과채류에 속하는 채소라고 한다. 채소의 종류 중에서 과실과 씨를 식용으로 하는 것이 과채류로 잎사귀를 먹는 엽채류, 뿌리를 먹는 근채류와 대응하는 용어 다. 오이 참외, 수박 등 박과의 채소, 토마토 가지 등 가지과의 채소, 잠두 완두 등 콩과의 채 소, 그 밖에 딸기 등이 이에 속한다. 이런 분류를 보면 토마토는 채소에 속하지만 상식적인 관념상 딸기와 수박, 참외가 과일이 아닌 채소라는 분류에는 거부감이 느껴진다. 식물학적 정의에 따르면 또 다르다고 한다. 과일은 씨방이 자라서 씨를 감싸면서 조직이 성 장된 것을 말한다. 이 기준으로 보면 토마토는 과일이며, 가지, 오이, 호박도 그런 의미에서 과일이라는 주장도 있다. 역시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토마토를 과일로 먹는지, 음식으로 먹는지에 따라 구분할 수도 있다. 보통 과일인지 채소인 지를 구분 짓는 방법으로 식사를 할 때 요리의 재료로 사용할 경우는 채소, 식사를 끝낸 후 후식으로 먹을 경우 과일로 나누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토마토를 주로 과일로 먹지만 서양 요리에서는 토마토를 요리 재료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 기준으로 보면 토마토는 채소일 수도 있고, 과일일 수도 있다. 토마토는 과연 채소일까? 과일일까? (2) 미국의 토마토논쟁이야기 #1-1 토마토가 과일인지, 채소인지를 놓고 미국에서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막대한 이익이 걸린 문제였기에 법정 소송으로 비화됐다. 미국은 1887년 관세법을 개정하면서 수입 과일과 채소에 대해 관세를 달리 매겼다. 과일에 대해서는 수입 관세를 부과하지 않았지만 채소에 대해서는 세금을 물도록 했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역시 토마토가 과일인지 채소인지를 놓고 꽤나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예를 들어 뉴저지 주에서는 토마토를 과일로 분류했고, 알칸사 주에서는 동일한 법률을 적 용하면서도 경우에 따라 과일, 또는 채소로 분류하는 모순이 생겼다. 그러다 수입 채소에 대해서는 관세를 매기겠다는 법이 발효되면서 토마토 수입업자들이 토마토는 채소 라는데 반발했다. 뉴욕의 과일 수입업자였던 존 닉스 형제가 뉴욕의 세관원이었던 에드워드 헤든을 상대로 - 2 -
토마토에 10%의 관세를 매긴 것은 잘못됐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끝내는 연방 대법원까지 올 라가게 됐다. 이른바 닉스 대 헤든(Nix vs Hedden)사건이다. 1893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최종 판결을 통해 토마토가 채소인지 과일인지를 결정하는 판 결을 내려, 지루한 논쟁을 잠재웠다. 9명의 대법관들이 논란을 벌인 끝에 만장일치로 내린 최종 판결은 토마토는 채소다 였다. 이유는 식물학적으로는 토마토가 과일이지만 식사할 때 채소와 과일의 구분은 요리로 사용 되느냐 혹은 디저트로 사용되느냐 인데 토마토는 주로 요리로 사용되기 때문에 채소 라고 판시했다. 대법원이 최종 판결을 내린 토마토가 과일이냐, 채소냐 라는 사건의 본질은 토마토를 어떻 게 먹느냐에 따라 관세 부과가 달라지는 만큼 토마토의 기준을 식물학적 분류, 다시 말해 교과서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이 토마토를 어떻게 먹느냐를 기준으로 해석 했다는 것이다. 맹목적인 원리원칙을 추종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맞춰 법을 해석한 판결이 라는 것이다. 참고로 토마토를 주로 과일로 먹는 우리나라였다면 어떤 판결이 내려졌을 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2. 토마토, 굴곡의 역사 #2-1 (1) 왜 토마토가 논쟁거리가 되었을까? 사람들은 왜 토마토를 놓고 과일인지, 토마토인지를 헷갈려했을까? 서양에서처럼 먹기는 주로 채소로 먹으면서 식물학적 분류로는 과일로 분류되고도 하고, 반대로 우리처럼 주로 과일로 먹으면서 원예학적 분류로는 채소로 분류되기 때문일 수도 있 는데, 비슷한 딜레마를 갖고 있는 수박이나 딸기와는 달리 왜 굳이 토마토는 채소인지, 과일 인지를 놓고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됐을까? 관세부과라는 이권이 걸려있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토마토가 뒤늦게 유럽에 전해졌기 때 문에 토마토의 정체성이 애매모호했기 때문은 아닐까? 사실, 토마토를 놓고 사람들이 벌인 논쟁은 토마토가 채소냐 과일이냐가 처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토마토를 놓고 벌인 최초의 논쟁은 토마토가 먹어도 문제가 없는, 식용 가능한 열 매인지 아니면 독이 있는 열매인지를 놓고 헷갈려 했다. 다음에는 토마토가 열매를 먹는 작 물인지 아니면 열매를 감상하는 화초인지를 놓고 또 한 번 논쟁에 휩싸였다. (2)토마토 전파의 역사 #2-1 토마토를 놓고 다양한 논쟁이 벌어진 이유는 토마토가 낯선 열매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감 때문이었다. - 3 -
토마토의 원산지는 안데스 산맥의 고원지대로 옥수수 밭에서 자라는 잡초의 일종이었다고 한다. 안데스 산맥에서 자라던 야생 토마토가 멕시코 등지에 전해지면서 아즈텍 문화권의 고대 멕시코 사람들이 기원전 500년 무렵부터 토마토를 재배해 먹기 시작했다. 토마토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다녀 온 이 후다. 정확하게 누가, 언제 토마토를 유럽에 전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493년 콜럼버스 가 귀국하면서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 (Hernan Cortez)가 1521년, 현재의 멕시코 수도인 멕시코시티를 점령한 후 토마토를 발견하 고 유럽에 전파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유럽의 각국으로 퍼졌고, 또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을 통해 아시아로 전파됐다. 처음 전해진 토마토를 유럽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토마토는 사실, 누구에게도 환영 받지 못하는 쓸데없는 작물이었다. 콜럼버스가 처음 향신료인 후추를 찾아 떠났던 것처럼 유럽의 상류층은 음식 맛을 더하는 향신료가 필요했다. 반면 민중은 굶주린 배를 채워줄 곡식이 필요했는데 토마토는 어느 쪽 의 욕구도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게다가 처음에 전해진 토마토는 유럽 풍토에 적응하지 못 해 질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먹으면 해로운 식물 취급을 받았다. 토마토가 식용 가능한 열매라는 기록은 1544년, 이탈리아 출신의 의사이자 식물학자인 피 에트로 마티올리(Pietro Andrea Mattioli 1501-1577년)가 남긴 논문에 보인다. 가지처럼 생 긴 열매로 익으면 붉거나 노랗게 변하는데 가지처럼 먹을 수 있다고 적었다. 논문의 핵심은 먹을 수는 있지만 좋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마티올리는 토마토를 가지과 식물로 분류했는데 당시 가지과에 속하는 식물은 모두 독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마티올리는 이때 토마토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고, 포모도로(Pomodoro), 즉 노란색 사 과(Golden Apple)라고 표기했는데 당시 유럽에서는 낯선 열매는 모두 사과라고 말했다. 그 러니까 애플을 사과가 아닌 열매라는 의미 정도로 사용했다. 실제 요리에 토마토가 등장한 것은 17세기 후반이다. 1692년 나폴리에서 발행된, 라티니 (Antonio Latini)라는 사람이 쓴 요리책에 토마토 레시피가 보인다. 스페인식 토마토 소스라 는 이름으로 토마토를 소개했으니 이 무렵만 스페인에서는 토마토가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 다. 이전까지만 해도 토마토는 먹는 대신에 주로 화초와 같은 관상용으로 쓰였는데 이탈리아 피렌치 등지에서는 토마토가 17, 18세기 요리에 쓰이기 전까지 주로 관상용 화초로 길렀고 토마토 열매는 테이블 장식용으로 쓰였다. 토마토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은 18세기 나폴리를 통해서다. 토마토 소스를 이용한 요리책이 나온 것도 나폴리로 당시 스페인이 통치하던 나폴리는 스페인에서 재배하는 작물을 빨리 받 아들였고, 나폴리 인근 베수비오 산기슭의 토양이 토마토 재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3)독이 든 열매, 토마토 #2-1 - 4 -
미국에서 토마토에 관한 기록은 18세기 초반에 보인다. 지금은 미국이 토마토 케첩을 대표 하는 나라가 됐지만 18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인들은 토마토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 었다. 스페인, 이탈리아 등 남부 유럽과 달리 늦게까지 토마토에 독성이 있다고 믿었던 영국 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미국의 독립전쟁 당시, 독립군 지도자로 미 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조지 워싱턴 장군(1732-1799년)을 독이 든 열매인 토마토로 암살하 려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 조지 워싱턴의 요리사는 영국의 통치를 지지하는 왕당파였기 때문에 조지 워싱턴이 감기로 미각을 잃어 맛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이용해 토마토를 음식에 넣어 워싱턴을 암 살하려고 했지만, 요리사가 음식으로 사람을 죽이려했다는 사실에 가책을 느끼고 결과도 보 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물론 근거 없는 뜬소문에 불과하고 이런 이야기가 실린 것도 1959년에 발행된 잡지가 처 음이라고 하는데 미국인들이 초창기, 토마토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재미있게 보여주 는 사례다. 3. 우리나리에 전해진 토마토 (1) 언제 우리나라에 전해졌을까? #3-1 토마토는 스페인을 통해 필리핀에 전해졌고, 필리핀에서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전역 으로 퍼졌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언제 토마토가 전해졌을까? 토마토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광해군 때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 芝 峯 類 說 )에 처음 보인다. 지봉유설에는 토마토를 남쪽 오랑캐 땅에서 전해진 감이라서 남만시( 南 蠻 柿 )f라고 했고, 일 년 생 풀에서 열리기 때문에 풀에서 열리는 감( 草 柿 )라고 했다. 봄에 자라서 가을에 열매를 맺는데 맛은 감하고 비슷하고 본래 남만의 과일로 근래에 중국에 다녀 온 사신이 종자를 구 해 온 외국 과일이라고 적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1614년에 쓰여 진 책이니 임진왜란이 끝난 후 18년이 지났을 때다. 그러니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편찬하기 직전에 토마토가 조선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 고추에 이어 전해진 토마토에 대해 당시 조선 선비들은 무척 낯선 인상을 받았다. 먹지도 못하고 기껏해야 관상용으로나 키울 수 있는 작물 내지는 아예 잡초 취급을 하고 있다. 때문에 토마토가 전해졌지만 조선에서는 이 낯선 과일에 대해 전혀 주목을 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문헌에 토마토에 관한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지봉유설 이외에는 조선 말기 인 순조 때의 실학자인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 五 洲 衍 文 長 箋 散 稿 )에 토마토에 관한 글이 보인다. 토마토인 남만의 감이 이 땅에 전해진지 200여 년이 지났는데 과일과 화초를 재배하는 - 5 -
사람에게 물어봐도 어떤 종류의 과일인지 잘 모르고 남겨진 기록도 없다. 지봉유설 이후에 도 성호 이익( 李 瀷 )과 다산 정약용( 丁 若 鏞 )이 토마토에 관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고 하지만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소문만 들었을 뿐 정작 기록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얼마나 자료가 없었으면 토마토 에 대해 아는 것이 풀벌레만도 못하다며 답답해했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종자가 들어 온 지 200년 동안 재배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달갑지 않은 열매, 일년감 #3-1 이규경은 토마토에 대한 묘사에서는 꽃, 잎사귀, 가지와 줄기 등 생김새로 보면 도저히 나무 종류라고는 할 수 없다며 사람들은 잡초에 불과할 뿐이라며 의심하고 있다고 적었다. 당나 라 감( 唐 枾 )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는데 당감은 바로 땡감 이다. 토마토가 고추의 한 종류가 아닐까 궁금해 하기도 한다. 줄기와 가지, 잎사귀 등을 살펴보면 남만초( 南 蠻 椒 ), 그러니까 고추와 비슷하고 여름에 작 은 꽃이 피는데 꽃 역시 고추의 꽃과 닮았다. 꽃이 떨어지면 열매가 달리는데 커다란 엄지 와 같다. 열매가 익으면 빨갛게 선홍색으로 변하는데 보기에 아름답다. 얼핏 보면 고추의 한 종류인 당초( 唐 椒 )로 착각할 수도 있으며 과실의 속을 열어 보면 과육 속에 하얀 씨가 있는 것이 마치 꽈리와 비슷하다. 혀로 핥으면 맛이 떫고 매운 맛도 나기 때문에 먹기가 힘들다. 서리가 내리면 곧 바로 시드는데 씨앗을 받아서 봄에 뿌리니 일년생 풀이라고 할 수 있다. 열매가 감을 닮았기 때문에 풀에서 열리는 감인 초시( 草 枾 )라고도 하는데 사람들이 종자를 천하게 생각해 전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토마토는 이렇게 이규경이 글을 남긴 19세기 중반만 해도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낯선 열 매였을 뿐이다. 하지만 19세기 말부터는 토마토를 재배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고종 20년 (1884년) 서양 원예작물 재배를 장려하기 위해 서양 채소 종자를 도입하는데 여기에 토마토 종자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재배가 이뤄진 것은 20세기, 그것도 1930년대 전후인 것으로 보인다. 일 년감(토마토)은 누구나 재배할 수 있고 또 영양소도 풍부한 과일이라며 재배를 장려하는 신 문기사가 자주 보이는 것이 이 무렵이다. 이때만 해도 토마토라는 이름 대신에 주로 일년감 이라고 불렀다. 그러다 1950년이 지나면서 일년감이라는 명칭이 사라지는 대신 토마토라는 이름이 자리 잡는다. (3) 토마토를 보는 우리의 시각 #4-1 토마토는 지금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채소이자, 과일이다. 세계 토마토 생산량이 2009년 현재, 무려 1억5,000만 톤에 이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 채소로 요리 - 6 -
를 해서 먹거나, 아니면 과일로 먹거나 혹은 주스에서부터 토마토를 가공한 케찹으로 먹거 나 우리의 일상 먹거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토마토다. 지금은 모두의 사랑을 듬뿍 받는 토마토지만 원산지인 남미에서 구대륙으로 토마토가 전해 진 지 500년 동안 토마토가 그렇게 환영받지 못하는 열매였다는 사실이 놀랍다. 토마토는 독이 있는 열매일까, 아니면 식용 가능한 작물일까? 에서부터 관상용 화초인 지, 아니면 먹는 음식인지? 나아가 채소인지, 과일인지? 에 이르기까지 토마토를 놓고 인간 이 벌여온 다각적인 논쟁이 흥미롭다. 우리나라에 토마토가 전해진 것이 1614년 이전, 토마 토를 바라보는 조선 선비들의 시각이 특이하고 우리가 토마토를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것 이 불과 70-80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의외다. 토마토라는 작은 열매를 통해 본 인간 들의 갖가지 이해관계와 다양한 역사가 흥미롭다. 참고자료 : 중국과 일본 전래 우리 기록에는 중국에서 종자를 가져왔다고 했지만 중국 기록은 우리보다도 늦다. 명나 라 말기에 조함( 趙 函 )이 쓴 식품( 植 品 )에 번가( 蕃 茄 )는 서양의 선교사가 만력( 萬 曆 ) 연간에 해바라기와 함께 중국으로 가지고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고 전해진다. 번가 는 외국에서 들어 온 가지라는 뜻으로 토마토를 말하고 만력은 명나라 신종 때의 연호로 1573년부터 1619년까지다. 1621년 왕상진( 王 象 晋 )이 쓴 군방보( 群 芳 譜 )라는 책에 도 같은 내용이 수록돼 있다. 일본 역시 토마토가 전해진 시기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라 고 하니까 한국과 중국, 일본 모두 비슷한 시기에 토마토가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http://en.wikipedia.org/wiki/antonio_latini http://www.snopes.com/food/tainted/tomato.asp 오주연문장전산고( 五 洲 衍 文 長 箋 散 稿 ) 南 蠻 柹 似 今 唐 柿 辨 證 說 芝 峯 類 說 卷 19 果 南 蠻 柿 農 務 牧 畜 試 驗 場 所 存 穀 菜 種 (1884) 동아일보 1934년 3월 31일, 1934년 8월 30일자 - 7 -
콩밥 싫어하는 아이들아! 1. 콩밥 먹는다는 말의 역사 (1) 콩밥 먹는다는 말의 역사 (2) 왜 하필 콩밥이었을까? 2. 부정적인 역사속의 콩밥 (1) 콩에는 死 者 의 영혼이 들어있다 (2) 콩에 얽힌 이야기 1. 콩밥 먹는다는 말의 역사 (1) 콩밥 먹는다는 말의 역사 왜 콩밥이 교도소를 상징하게 됐을까? 예전에는 재소자들에게 콩밥을 먹였기 때문이다. 하 지만 지금은 교도소에서 콩밥을 주지 않는다. 콩밥이 중단된 지 한참이 지났다. 콩밥 먹는다 는 말과 지금 교도소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도 콩밥=교도소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는 것을 보면 재소자에게 콩밥이 상당히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재소자 급식에서 콩밥이 사라진 것은 1986년부터다. 당시 재소자 급식기준을 쌀 50%, 보 리 50%로 바꾸면서 콩밥이 사라졌다. 콩밥 대신에 꽁보리밥으로 바뀌었다. 콩 대신에 쌀의 비중을 늘렸는데 이유는 콩 값이 비싸졌기 때문이다. 2014년 상반기 이전까지는 쌀의 비중이 90%, 보리 10%의 잡곡밥이 지급됐다. 앞으로는 보리가 사라지고 완전히 쌀밥이 제공된다. 보리 값이 비싸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감옥 간다 는 말을 콩밥 먹는다 는 말 대신에 쌀밥 먹는다 표현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1986년 이전에는 어떻게 콩밥을 제공했기에 콩밥 먹는다 는 말이 생겨났을까? 1957년의 교도소 재소자 식사규정에는 쌀 30%, 보리 50%, 콩 20%를 섞은 잡곡밥이 정량이 었다. 그런데 콩의 비중이 20%면 밥의 절반이 콩으로 채워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훨씬 이전, 일제 강점기 때인 1936년 형무소 식단표에는 쌀 10%, 콩 40%, 좁쌀 50%로 적 혀있다. 이 정도면 콩 덩어리에 좁쌀 몇 알 붙은 수준이다. 하루 세끼 이런 콩 덩어리를 몇 개월, 몇 년씩 먹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고역이었을 것이다. - 1 -
(2) 왜 하필 콩밥이었을까? 그런데 옛날 감옥에서는 왜 죄수들에게 콩밥을 먹였을까? 음식 종류가 제한된 교도소에서 재소자의 영양도 고려하고 값도 싸며 영양분도 풍부해 콩 밥을 식사로 제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상당히 인간적인 이야기지만 일제 강점기 때 감옥에 그렇게 휴머니즘이 넘쳐났을 리 없다. 콩밥이 얼마나 형편없는 식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글이 1936년 4월25일자 조선중앙일 보에 실려있다. 콩밥이라는 제목의 동시( 童 詩 )다. 콩밥을 보면 넌더리가 나요. 밤낮 우리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콩밥만 짓지요. 엄마, 나 콩 밥 먹기 싫어, 쌀밥 지어, 응 하고 졸랐더니 엄마는 없는 집 자식이 쌀밥이 뭐냐. 어서 못 먹겠니 하고 부지깽이를 들고 나오셨다. 나는 꿈쩍도 못하고 안 넘어가는 콩밥을 억지로 넘 겼지요. 해마다 쌀농사는 짓는데 밤낮 왜 우리는 콩밥만 먹을까? 표현 방법은 상당히 낯설지만 어쨌든 콩밥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아이들의 심정, 콩밥에 대 한 일반인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1924년 5월11일자 시대일보라는 신문의 기사에도 콩밥 이야기가 실려 있다. 평양 형무소 에서 식사량을 줄이는 바람에 일하던 죄수들이 배가 고파 졸도했다는 기사다. 콩( 大 豆 )을 섞 은 콩밥 대신에 조( 粟 )를 넣은 조밥을 제공했더니 졸도를 할 정도로 식사량이 줄었다는 것 이다. 감옥에서 왜 콩밥을 제공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기사다. 바꿔 말하자면 밥의 양을 늘리 는데 값싸고 양 많기로 콩을 대신할 작물이 없었던 것이다. 2. 부정적인 역사속의 콩밥 콩밥을 영양만점에 맛있는 밥으로 여기는 것은 콩 값이 비싸진 현대 이후의 일이다. 콩밥 은 옛날부터 가난한 사람들이 먹었던 거친 음식이었다. 두반곽갱( 豆 飯 藿 羹 ) 이라는 말이 있다. 콩밥과 콩잎으로 끓인 국이라는 뜻이다. 아주 변변치 못한 음식을 뜻하는 사자성어로 청빈한 생활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한 소쿠리의 밥과 표주박의 물이라는 뜻의 단사표음( 簞 食 瓢 飮 ) 과 같은 뜻이다. 타이완의 고 등학교 국어시험에 단사표음 과 비슷한 뜻을 고르라는 식으로 자주 나오는 사자성어다. 기원전에도 사람들이 콩밥이라면 치를 떨었는데 중국 후한의 역사가 반고( 班 固 )가 쓴 한나 라의 역사책인 한서( 漢 書 ) 열전에도 콩밥 이야기가 나온다. 진시황이 죽고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유방( 劉 邦 )과 천하를 놓고 다투던 항우( 項 羽 )가 군사 를 이끌고 중원으로 쳐들어간다. 도중 행군을 멈추고 진을 쳤는데 마침 날씨는 춥고 큰 비 가 내려 병사들이 얼어 죽고 또 배고픔에 시달렸다. 그러자 항우가 장차 진( 秦 )을 공격하려 - 2 -
면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없다. 흉년으로 백성은 궁핍하고 군대에는 양식이 떨어져 곡식의 반은 콩( 菽 )을 섞어 먹는다 며 서둘러 군사를 움직였다. 군량미가 떨어져 병사들에게 콩밥을 먹였다는 것인데 콩밥을 먹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군 대의 사기가 떨어질 정도였다. 역시 한서 화식전( 貨 殖 傳 )을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콩밥을 먹 고 물을 마신다고 했으니 콩밥을 먹어야 했던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만 하다. 춘추시대 사람인 공자도 예기( 禮 記 )에서 콩을 씹고 물을 마시더라도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 게 하면 그것이 효도 라고 했는데 여기서 콩은 가난한 살림을 뜻하니 콩밥을 거친 음식으로 여긴 역사는 의외로 깊다. 왜 이렇게 콩밥을 싫어했을까? 옛날에는 콩이 너무 흔했기 때문이다. 대두 콩의 원산지는 만주, 옛 고구려 땅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콩은 특별히 비료를 주지 않아도 척박한 땅에 서 잘 자란다. 과유불급( 過 猶 不 及 ), 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하다고 하는 말이 바로 영양가 높은 콩에 해당 됐다. (1) 콩에는 死 者 의 영혼이 들어있다 고대 서양인들은 악마, 혹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콩을 통해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온다고 믿었다. 때문에 함부로 콩을 먹으면 악마가 들어올 수 있기에 고대 서양 철학자들은 콩을 먹지 말라 고 외쳤다. 왜 콩을 먹으면 악마가 몸속으로 들어올까? 고대 서양에서는 생명체가 죽어서 땅에 묻히면 영혼이 바람으로 변해 땅을 뚫고 위로 솟아 오르다 콩 속으로 빨려 들어가 콩 안에 갇히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콩을 먹으면 그 속 에 갇혀있던 죽은 자의 영혼을 먹는 것인데 이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방귀다. 콩이 입 속으로 들어가 장에서 분해돼 가스로 분출되어 나오는 것을 영혼이 다시 풀려서 몸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황당한 소리 같지만 이름 높은 철학자들도 그렇게 믿었다. 유럽에서 콩을 구박한 역사는 뿌리가 무척 깊은데 대표적인 인물이 직삼각형의 빗변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의 넓이 는 다른 두 변을 각각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의 넓이의 합과 같다 는 수학공식을 증명한 피타고라스다. 피타고라스라고 하면 보통 기원전 6세기에 활동한 그리스의 수학자로만 알고 있지만 피타 고라스는 인류 최초의 채식주의자였고 당시에 벌써 남녀평등을 주장했던 선각자였다. 또 음계의 기틀을 만들었던 음악가였으며 생명체가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설을 주장했고 또 비밀스런 종교단체를 이끌었던 밀교의 교주이기도 했다. 이런 피타고라스가 콩을 먹지 말라는 주장을 했는데 그가 직접 콩을 먹지 말라고 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후세의 많은 기록에 피타고라스가 콩을 먹지 말라고 말했다고 적은 문헌이 많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는 콩을 기피하는 현상이 보편적이었던 모양이다. 서기 1세기 무렵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가 쓴 박물지(The Natural History)에 로마인 - 3 -
들은 콩을 먹으면 감각이 둔해지고 잠을 잘 때 꿈에 시달려서 잠을 충분히 이루지 못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고 적었다. 그리스의 수학자 피타고라스도 콩을 멀리하라고 했는데 피타고라스는 죽의 자의 영혼이 콩 (bean) 속에 갇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로마의 사제들은 콩을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며 꽃피는 계절에 콩에 꽃이 핀 것 을 보면 재빨리 주문을 외워 죽은 자의 영혼이 침입하는 것을 막는다는 기록이 박물지(제18 권, 제30장)에 보인다. (The Natural History, bookⅩⅧ, chapter 30)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콩을 기피했다는 기록은 피타고라스나 박물지의 기록 이외에도 많 은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류학자인 윌리엄 파울러는 로마의 축제라는 그의 저서에서 로마시대에 주피터 신전의 제사장은 콩을 만지지도 않고 콩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도 않 는다고 했다. 그리스의 유명한 역사가인 헤르도투스 역시 고대 이집트에서는 제사장들이 콩 을 부정한 식물로 여겼다고 적어 놓았으니까 서양 문명의 기원이 되는 고대 이집트에서도 콩을 달갑지 않은 식품으로 여겼다. (2) 콩에 얽힌 이야기 너무나 흔한 콩에 대한 미움이 동서양이 모두 같다. 외국에서도 콩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가 전해온다. 콩을 싫어하는 대표적인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결국 콩 때문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피타고 라스는 콩을 보면 도망쳤을 만큼 병적으로 콩을 싫어하고 두려워했다. 어느 날 자객이 피타 고라스의 집에 불을 질렀다. 피타고라스가 불난 집에서 빠져나와 도망치는데 그만 콩밭을 가로지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콩밭을 가로질러 살아남느니 차라리 죽임을 당하는 편이 낫다며 도주를 체념했고, 결국 자객에게 잡혀 칼을 맞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 해진다. 숙맥은 콩과 보리 세상물정 제대로 모르는 사람을 보고 숙맥 이라고 한다. 어수룩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숙맥 은 원래 콩과 보리라는 뜻이다. 한자로 콩 숙( 菽 )과 보리 맥( 麥 )자를 쓴다. 글자 뜻만 놓고 보면 어리석다는 의미와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데 무슨 까닭으로 콩과 보리가 어수룩한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을까? 숙맥은 사실 겉보기에도 확연하게 달라 보이는 콩하고 보리조차도 구분하지 못한다는 숙 맥불변( 菽 麥 不 辨 ) 에서 비롯된 단어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 는 무식한 것과는 다르게 근본적으로 어수룩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옛날 중국 고사에서 - 4 -
나왔다. 기원전 6세기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에 제후국이었던 진( 晉 )나라의 여공( 厲 公 )이 정사는 돌 보지 않고 주색만 밝히며 백성을 함부로 대하다 대신인 란서( 欒 書 )가 주동이 되어 임금을 폐하고 새 임금을 세웠으니 진 도공( 悼 公 )이다. 진 도공은 쫓겨난 여공의 조카로, 영특한 군 주였지만 차남이었기 때문에 옹립 과정에서 논란이 있었다. 숙맥은 이때 불만세력에게 대신 인 란서가 설명하며 쓴 말이다. 공자에게는 형이 한 명 있지만 지혜롭지가 못해 콩과 보리( 菽 麥 ) 조차도 구분을 하지 못한 다. 고로 왕으로 세우는 것이 불가하다( 周 子 有 兄 而 無 慧 不 能 辨 菽 麥 故 不 可 立 ) 주 공자의 형이 콩과 보리 조차도 구분하지 못하는 어수룩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조금은 모 자란 사람이기 때문에 왕으로 추대할 수 없다며 대신 14살에 불과하지만 똑똑하고 영특한 주( 周 ) 공자를 왕으로 세워 천하통일의 꿈을 키우자는 것이었다. 춘추시대 말기를 살았던 역사가 좌구명( 左 丘 明 )이 당시 제후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해설해 놓은 춘추좌씨전( 春 秋 左 氏 傳 )에 나오는 이야기다. 성공( 成 公 ) 18년에 숙맥( 菽 麥 )에 대한 내용 이 수록되어 있다. 비누 대신 콩으로 세수하다 예전에는 세수할 때 비누 대신 사용했던 것이 콩이다. 콩을 갈아서 만든 것이 씻는데 쓰는 콩이라고 해서 조두( 澡 豆 )라고 했는데 일종의 콩 가루 비누다. 콩가루에 각종 약재와 향료를 혼합해 만들었는데 세정효과는 물론이고 보습효과도 있어 얼굴 피부를 촉촉하고 유지해 주 었다고 한다. 옛날에 사용했던 콩가루 비누가 오죽하겠냐고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들어가는 재료를 보면 요즘 비누는 오히려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중국 당나라 숙종( 肅 宗 )의 딸인 영화공주( 永 和 公 主 )가 사용했던 콩 비누는 호사스럽게 짝이 없다. 영화공주는 8세기 때의 인물로 황제의 딸이었지만 평생 동안 미용과 피부관리법을 연 구해 후세에 피부관리비법을 전수했다고 신당서( 新 唐 書 ) 제제공주( 諸 帝 公 主 )편에 나온다. 영화공주가 전한 비법 중에 하나가 세수하는 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목욕하는 법인데 내용 중의 일부가 송나라 때 의학서인 태평경혜방( 太 平 經 惠 方 )에 전해진다. 영화공주가 세면을 할 때 사용했다는 비누 역시 콩가루를 주원료로 만든 조두인데 닭의 뼈 를 갈아서 약초인 백지( 白 芷 ), 천궁( 川 芎 )과 섞고 또 콩과 팥을 갈아 오이, 쑥 그리고 각종 향료와 혼합해 약으로 만들어 얼굴을 씻을 때 사용했다고 한다. 목욕을 할 때는 또 다른 비누를 사용했는데 이때는 쌀뜨물을 끓여 사슴 뿔인 녹각( 鹿 角 )으 로 만든 아교를 풀어 넣고 다시 찹쌀을 넣고 끓여 죽을 만든다. 여기에 복숭아, 살구, 검정 콩 및 백지( 白 芷 ), 천궁( 川 芎 ) 등의 약재를 넣은 후 굳혀 반투명의 고체를 만들면 비누가 되 는데 목욕을 할 때 온 몸에 바르면 피부가 어린아이의 피부처럼 하얗고 부드러워지며 몸에 서 향기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당나라 때 의사인 손사막( 孫 思 邈 )은 천금방( 千 金 方 )이라는 의학서에서 콩으로 만든 비누인 - 5 -
조두 는 사대부 집안의 남녀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미용제품이라고 했으니 요즘 비누를 사 용하는 것처럼 당나라 때에는 세수를 할 때 콩가루로 만든 비누를 사용했던 것이다.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 때는 절에서 콩가루로 만든 비누를 만들어 보급했다. 조선 왕조실록에 절에서 비누를 만드는 장인인 조두장( 澡 豆 匠 )이 콩으로 비누를 만들어 공급한다 는 기록이 있는데 승려들이 국가에 제때 콩 비누를 공급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연산군이 화 를 내며 중들이 세수하는 것이 국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며 사찰에 조두장을 배치한 것 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장면이 보인다. - 6 -
수험생에게 엿 먹이는 까닭 1. 수능 응원 선물이 다양해진 이유... (1) 다양한 현대판 수능 응원 선물 (2) 합격선물 우리만의 풍속일까? 2. 언제부터 합격기원 음식을 먹었을까? (1) 왜 하필 엿을 먹으며 합격을 빌었을까? (2) 엿은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 (3) 찹쌀떡은 왜 합격선물이 됐을까? (4) 왜 우리가 찹쌀떡을 먹었을까 1. 수능 응원 선물이 다양해진 이유 시험을 앞둔 수험생에게 가장 많이 건네는 선물은 전통적으로 엿이다. 혹은 찹쌀떡을 선물 하며 합격을 응원하기도 합니다. 왜 엿이나 찹쌀떡을 합격을 소원하는 선물로 주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끈끈하기 때문에 엿과 찹쌀떡이 합격 소원 선물이 된 것으로 알고 있을텐데요 엿이 달라붙는 것처럼 시험에 철썩 붙으라는 의미입니다. 찹쌀떡도 찹쌀이 멥쌀보다 더 찰 기가 있고 끈적끈적하니까 시험에 잘 붙으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수능을 앞두고 엿이 불티나게 팔리지만 예전 대학 본고사가 있던 시절에는 입학시험 보는 날이면 대학교 교문이 엿으로 덕지덕지 도배를 했다고 합니다. 엿처럼 철썩 붙으라는 의미에서 합격을 기원하며 엿을 선물한 것인데요 시험에 합격하거나 불합격했다는 말 자체도 엿하고 관계가 있다고도 합니다. 합격, 불합격을 우리말로는 시험에 붙었다 혹은 떨어졌다 라고 표현하는데 국립국어연구 원에서 펴낸 한국문화기초용어사전에는 붙었다 떨어졌다는 표현이 엿의 성질을 합격에 비유 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어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엿과 찹쌀떡이 끈끈하기 때문에 시험에 붙으라는 의미에서 합격을 소원하는 선물이 된 것도 틀린 말은 아니겠죠. 하지만 오직 끈끈한 성질 때문에 엿과 찹쌀떡이 합격 응원 선물이 된 것일까요? 그런 단세포적이고 일차원적인 이유 말고 또 다른 이유, 더 깊은 의미는 없는 것일까요? - 1 -
(1) 다양한 현대판 수능 응원 선물 (합격사과, 엿 도끼, 포크, 화장지...) 엿과 찹쌀떡의 끈적끈적한 물성만을 놓고 합격을 빌다 보니 예전과 달리 요즘은 다양한 수 능 응원 선물이 생겼다고 하는데요. 이왕 시험에 붙으라고 주는 선물이면 엿보다 더 끈끈 하고 접착력이 강한 것이 좋다. 때문에 한때 접착제를 선물하는 경우도 있었죠. 문제를 잘 풀어야 하니까 문제가 술술 풀리라고 화장지를 선물하기도 하고 시험문제가 객관식 문제 중 심이니까 정답만 골라서 잘 찍으라고 도끼와 포크까지 선물하죠. 장난과 위트가 섞인 선물 이라고 볼수 있겠네요. 요즘 인기 있는 선물은 합격사과라고 한다. 민속신앙에서 무당이 만들어주는 부적처럼 재 배할 때부터 햇빛을 이용해 합격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사과라고 하네요. 사실 합격 사과 가 등장한 것은 유래가 있습니다. 1991년 일본에 사과 수확기를 앞두고 태풍이 불었다고 합니다. 사과재배 지역인 아오모리 현이 큰 피해를 봤는데 수확을 앞둔 사과의 90%가 태풍에 떨어졌고요. 고민하던 사과재배 농민들이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고 달려 있는 사과를 마케팅에 이용한 것이죠. 아무리 어려 운 시험문제가 나와도 시험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에서 합격사과라는 이름으로 몇 배 비싸 게 팔았다고 하는데요. 시험을 앞두고 불안한 수험생과 학부모의 심리를 파고들었던 것인데 예상했던 대로 태풍 피해를 만회하고도 남을만한 대박이 났다고 하죠. 이후 합격사과가 유행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2) 합격선물 우리만의 풍속일까? (장원쫑, 돈가스, 일본 합격응원선물) # 1-1 이렇게 시험을 앞둔 수험생에게 합격을 기원하며 음식으로 응원하는 것은 우리만의 풍속이 아니다. 일본과 중국에도 비슷한 풍속이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와 좀 비슷한데요. 일본은 대학입학시험이 매년 1월에 있기때문에 대입시험을 앞둔 풍경은 매우 비슷합니다. 전통적으로 합격하라는 뜻에서 엿을 선물하기도 하고 수험생 에게 모치라고 하는 찹쌀떡을 선물하는 것도 똑같죠. 우리와 다른 풍속도 있습니다. 시험 전날 일본 수험생이 돈가스를 먹는 풍속인데요. 이유는 돈가스의 이름 때문이라고 합니다. 승리하다 고 할 때의 이길 승( 勝 )자를 일본말로는 가스 (かつ)라고 읽는데. 돈가스의 가스 와 이긴다고 할 때의 가스 가 발음이 같아서 그러니 돈가 스를 먹고 시험을 보면 시험지와 싸워 이길 수 있으니까 시험에 합격할 것이라고 믿으며 돈 가스에 합격의 소원을 담은 것이라고 합니다. - 2 -
가오카오( 高 考 ) 라고 하는 중국은 대학입학시험이 6월 초에 이틀에 걸쳐서 실시하는데요. 한 국이나 일본의 대입시험 못지않게 입학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역시 다양한 합격 기원 음식 이 발달해 있습니다. 가장 흔한 것이 입학시험을 앞두고 먹는 장원떡( 狀 元 餠 )입니다. 징원떡은 나뭇잎으로 찰밥을 싼 쫑즈라는 음식인데 장원종( 壯 元 粽 )이라는 이름으로 팔린다고 합니다. 쫑즈라는 찹쌀떡은 원래 중국에서도 전통 명절인 단오에 먹는 음식입니다. 춘추전국 시대 때의 충신이며 시인이었던 굴원( 屈 原 )을 기리며 먹는 음식인데, 굴원에게 자녀의 합격을 기 도하며 먹는다고 하네요 또 찹쌀떡을 뜻하는 쫑( 粽 )의 발음이 명중하다, 합격하다는 뜻의 가운데 중( 中 )자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쫑즈라는 나뭇잎으로 싼 찹쌀떡을 먹으며 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하는 꿈을 품기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방에 따라 옛날 국수를 먹고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했기 때문에 쌀국수를 먹기도 하고, 합 격 죽을 먹기도 하는데 중국에도 다양한 합격 기원 음식이 발달해 있습니다. 음식에 관심이 많은 중국의 경우, 명문 베이징 대학교와 칭화대학 합격생이 무엇을 먹었는 지가 관심 대상이 된다고 합니다. 2. 언제부터 합격기원 음식을 먹었을까? (김홍도 씨름도) 어느 나라나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은 긴장하기 마련이다. 사소한 것에도 커다란 의미를 부 여하면서 시험에 합격하기를 소원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죠.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도움이 된 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기 때문일텐데요 언제부터 시험을 앞두고 합격을 기원하는 음식을 먹는 풍속이 생겼을까요? 역사를 따지고 올라가면 시험으로 관리를 뽑는 과거시험 제도가 생긴 이후부터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거 제도는 중국 수나라 때(서기 607년)부터 시작됐다. 과거 시험에서 합격기원 음식을 먹 은 것도 수나라 이후부터일 것인데, 가장 빠른 합격 기원 음식은 수나라 다음에 들어선 중 국 당나라 때로 확인됩니다. 최초의 합격 기원 음식은 엉뚱하게 돼지족발 이었다고 합니다.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면 붉은 글씨로 이름과 과거 시험문제를 적는 것이 전통이었는 데요. 시험을 볼때 붉은 글씨로 시제를 적어 붉을 주( 朱 )자와 제목 제( 題 )를 써서 주제라고 하는데 돼지의 발굽이라는 뜻의 한자 저제( 猪 蹄 )가 중국말로 발음이 같기 때문에 과거시험 을 앞둔 유생들에게 친구들이 돼지족발을 사주며 장원급제를 축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럼 우리나라는 언제 엿을 먹는 풍속이 생겼을까요? #2-1 언제부터 시험을 앞두고 엿을 먹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1960년대 이전부 - 3 -
터 이미 고등학교, 대학교 입학시험을 볼 때는 학부모들이 교문에 엿을 붙이며 합격을 비는 모습은 참 익숙하죠.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땠을까요? 조선시대에도 엿을 먹으며 장원급 제를 빌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떠나는 유생들은 괴나리봇짐 속에 엿을 넣어 가지고 갔다고 하 니까 길을 가다 배고플 때 먹으려는 의미도 있겠지만 장원급제에 대한 간절한 소망도 담겨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 조선 후기의 과거 시험장에서 엿을 팔았다는 기록이 보이니까 이 무렵에도 엿을 먹 으며 장원급제를 빌었겠죠. 정조 때의 화가인 김홍도가 그린 씨름도를 보면 목판을 목에 걸고 엿을 파는 아이가 보이 는데요. 과거 시험장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 49년(1773년)에 과거를 보는 시험장에 엿장수가 함부로 들어와 엿을 팔아 문제가 됐다고 합니다.. 사헌부 소속 이한일이라는 감찰관이 과거시험을 보는 과장( 科 場 )이 엄숙하지 못하여 떡과 엿, 따위를 현장에서 터놓고 팔았으니 시험장 관리를 맡았던 금란관( 禁 亂 官 )을 파면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영조실록에 실려 있습니다.*(그림)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하루 종일 걸렸으니 간식으로 엿을 먹으며 배고픔을 달래기도 했겠지 만 동시에 엿을 먹으며 급제를 빌면서 심리적 안정을 취했을 가능성도 높았을 것입니다. (1) 왜 하필 엿을 먹으며 합격을 빌었을까? (엿에 관한 한자) #3-1 수험생들이 엿을 먹으며 합격을 비는 것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엿이 끈적끈적하 니까 엿처럼 시험에 철썩 붙으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미신이라면 미신일 수도 있고, 시 험을 앞두고 불안한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사소한 것에라도 기대고 싶은 심리를 반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과학적으로 엿을 먹으면 혈액 속의 혈당이 높아져 두뇌회전이 빨라지기 때문이라는 설 명이 맞을 수도 있겠는데 엿을 먹음으로써 수험생의 심리적 안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보다 깊은 이유가 있을 수도 있는데요.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풍 속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이유, 내지는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 조상들이 믿었던 미신 때문이 아니라 당시의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던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엿을 먹으며 소원을 비는 것은 엿 자체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엿이 기쁨을 부르는 음식이 기 때문입니다. 엿을 뜻하는 한자에서 그 의미를 읽을 수 있는데요. 엿을 한자로는 이( 飴 )라고 씁니다. 글자 - 4 -
를 풀어보면 먹을 식( 食 )변에 기쁠 태( 台 )자로 이뤄져 있습니다. 태( 台 )라는 글자는 세모처럼 생긴 글자인 사( 厶 )자 아래에 입 구( 口 )로 구성된 글자다. 그러니까 입( 口 )을 방실거리며( 厶 )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한나라 때 한자 사전인 설문해자( 說 文 解 字 )에서는 태( 台 )를 기쁘다는 뜻의 이( 怡 )자와 열( 悅 ) 자로 해석을 했으니 보통 즐거운 것이 아니라 희열( 喜 悅 )을 느낄 정도로 좋다는 뜻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먹어서( 食 ) 입을 방긋거리며 웃으며 희열을 느낄 정도로 좋은 ( 台 ) 음식이 바로 엿( 飴 )이라는 음식인 것입니다. 이제 수험생에게 왜 엿을 먹이는지 이유를 좀 알것도 같죠? 엿이 끈끈하니까 엿처럼 붙으라는 뜻이 아니라 엿을 먹으며 합격의 기쁨을 미리 맛보라는 심오한 뜻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에게 엿을 주는 의 미는 엿을 먹고 합격의 희열을 만끽하라는 속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설날, 세배를 하면 어른들이 덕담을 하는 것처럼 합격해서 기쁨을 누리라는 덕담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수 있는 것이죠 꿈은 이뤄진다고 믿는 것처럼 엿을 먹으면서 합격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긍정 마인드,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었으니 엿의 끈끈한 성질을 이용한 말장난 때문에 엿이 합격의 부적 이 된 것이 아니라 조상들이 기쁨의 음식인 엿을 이용한 만든 고도의 심리전이 아니었을까 요?. #4-1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기는데요. 엿이 왜 기쁨을 부르는 음식이었을까하는 것이죠. 지금은 특별할 것도 없는, 어찌 보면 싸구려 간식이지만 옛날에는 엿이 꿀에 버금갈 정도로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귀중한 곡물을 졸이고 졸여서 곡물의 에센스만 뽑아서 만든 식품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아무 때나 먹는 음식도 아니었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엿은 특별한 날에 만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럼 주로 어떤 날 엿을 먹었을까요? (2) 엿은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 (설날 엿, 이바지 엿, 중국 喜 糖 ) #5-1 옛날 어른들은 엿에다 다양한 소망을 담았습니다. 전통적으로 엿은 명절이나 잔칫날, 혹은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이었다는 것을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펴낸 한국세시풍속사전에는 우리 조상들은 정초나 정월 대보름 아침이 면 엿을 먹는 풍속이 있는데 그냥 엿을 먹는 것이 아니라 소원을 빌면서 엿을 먹었다고 나 옵니다. 정월 초하루나 대보름에 먹는 엿을 복( 福 )이라고 하는데 복 엿을 먹으면 살림이 엿가락처 - 5 -
럼 늘어나 부자가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정초에 엿을 먹으며 재물이 엿가락처럼 늘어나 기를 소원했던 것으로 이 경우에는 주로 흰엿을 먹었다고 합니다. 정월 대보름에 엿을 먹으면 일 년 내내 음식을 달게 먹을 수 있다고 했고 또 얼굴에 버짐 이 피지 않는다고 해서 건강을 기원하며 엿을 먹기도 했는데 음식이 귀했던 시절이니 곡물 로 만든 엿을 보양식품으로 여긴 것에서 비롯된 풍습입니다. 동국세시기( 東 國 歲 時 記 )에는 정월 대보름날 어린 남녀가 새벽에 엿을 깨물어 먹는 풍습이 있으니 이를 이빨내기( 齒 較 )라고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새해를 맞아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또 이를 튼튼하게 하려는 일종의 부럼 깨는 풍속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엿을 깨 먹으면서 새해 건강해지기를 비는 소원을 담은 풍속입니다. 지금은 설날 엿 먹는 집이 그다지 많지 않지만 결혼식에는 아직 엿 먹는 풍속이 남아 있습 니다. 딸을 시집으로 보낼 때 친정어머니가 정성껏 준비하는 것이 바로 이바지 음식입니다. 좀 놀랍지 않으신가요? 요즘 이바지 음식의 구성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이바지 음식으로 보통 엿이 들어갑니다. 이바지 엿은 신혼부부가 엿처럼 달라붙어 사랑하며, 백년해로하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요즘 해석으로는 시집 식구들 입막음용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엿 먹고 입이 달라 붙어 우리 딸 흉 못 보게 해 달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사실 이렇게 알려진 이유는 본래 엿을 넣는 의 미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엿은 복을 부르고 기쁨을 나누는 음식이니까 이바지 음식에 넣는 엿은 사돈의 인연을 맺었 으니, 혼사의 기쁨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죠다. 우리는 이바지 음식으로만 남아 있을 뿐, 결혼식 엿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중국에는 아직 이런 풍속이 남아 있습니다. 중국의 신랑 신부들은 결혼식이 끝나면 쟁반에 엿을 담아 하객들에게 돌리며 인사를 하는데요. 이 엿을 기쁠 喜 사탕 糖 자를 써서 喜 糖 이라고 하는데 하객들과 결혼의 기쁨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지금은 편하게 엿 대신 사탕을 담 아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동양에서 엿은 바로 기쁨을 나누는 음식, 기쁨을 맛보라는 음식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수험 생에게 엿을 선물하는 풍속은 단순히 엿이 끈끈해서 엿처럼 붙으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합격 의 기쁨을 맛보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3) 찹쌀떡은 왜 합격선물이 됐을까? (모치, 大 福 餠 ) #6-1 엿은 그렇다고 치고, 수험생들에게 찹쌀떡을 선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찹쌀떡 역시 멥쌀보다 찰기가 강하니까 시험에 찰싹 붙으라고 먹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당 연히 그렇게 단순한 이유 때문만이 아닙니다. 찹쌀떡에 담긴 의미를 찾으려면 먼저 찹쌀떡 - 6 -
의 유래를 알아볼 필요가 있겠죠? 우리가 수험생에게 선물하는 찹쌀떡은 우리나라 전통 떡인 인절미 종류가 아닙니다. 속에 단팥을 넣고 겉에 밀가루를 뿌린 찹쌀떡은 한때 우리가 흔히 모치(もち)라고 불렀던 일본에 서 전해진 떡입니다. 모치는 일본말로 떡이라는 보통 명사이고 우리가 말하는 모치, 다시 말해 찹쌀떡은 일본에 서 배가 볼록나온 떡이라고 해서 다이후꾸 모치라고 부르는 떡이죠. 원래는 클 大 배 腹 떡 餠 자를 써서 대복병, 즉 다이후쿠 모치라고 불렀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배 腹 자 대신에 복 福 자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일본에서 찹쌀떡이 상징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찹쌀떡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큰 복을 먹는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수험생에게 엿을 선물하며 합격의 기쁨을 맛보라고 하는 것처럼, 일본에서는 다이후 쿠 모치를 선물하면서 합격의 큰 복을 미리 맛보라고 축원하는 것이다. 일본의 이런 풍속이 우리나라에 전해져 합격 엿과 함께 합격 찹쌀떡을 선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4) 왜 우리가 찹쌀떡을 먹었을까? 찹쌀떡의 유래를 알고 나니 풀리는 궁금증이 몇 가지 더 있지 않으세요?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결혼식에 가면 답례품으로 찹쌀떡을 나누어 주었던 적이 있었 죠. 어렸을 때 그저 좋다고 먹었지만 사실 여기에도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결혼이라는 경사를 맞아 하객들과 복을 나눈다는 뜻이 있었던 것이죠. 초등학교나 유치원 운동회 날이면 줄에다 과자를 매달아 놓고 입으로 따먹거나 밀가루 위에 놓인 찹쌀떡을 손을 대지 않고 입으로 집어먹는 게임을 많이 하죠? 이 게임도 사실은 과자 를 매달아 놓지만 원래는 찹쌀떡을 달아 놓는 것이 원칙입니다. 왜 하필이면 찹쌀떡을 줄에다 매달아 놓고 입으로 따먹거나 밀가루 위의 찹쌀떡을 뒷짐을 지고 입으로 집어먹는 게임을 하는 것일까요?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해가며 망가지는 모습이 재미있어 웃었지만 사실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미와 함께 큰 복을 받으라는 뜻이 담아 했던 게임인 것이죠. 아 그게임을 왜 했는지 이제야 이유를 아셨다구요? 무심코 먹는 음식이지만 표면적으로만 알려져 있는 지식, 상식의 껍질을 깨고 그 속에 담 긴 참뜻, 핵심을 들여다보면 미처 몰랐던 새로운 사실이 보이고,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 7 -
설날 떡국에 담은 꿈 1. 한국인에게 떡국이란...? (1) 설에는 반드시 떡국을 먹어야... (2) 떡국을 먹어야 나이를 먹는다? (3) 새해 떡국의 의미 2. 장수와 재복의 상징, 떡국 (1) 가래떡은 왜 길어졌을까? (2) 떡국 떡은 돈 모양... 3. 부자 꿈을 담은 동서양 새해 음식 (1) 중국, 일본, 미국, 유럽의 새해 음식 1. 한국인에게 떡국이란...? (1) 설에는 반드시 떡국을 먹어야... #1-1 새해 명절음식으로 송편을 먹을 수도 있고 인절미나 시루떡도 있으며, 아니면 하얀 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설날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굳이 떡국을 먹는 까닭은 무엇일까? 먼 옛날부터 내려 온 풍속이니 정확한 설명은 불가능하겠지만 떡국에 담긴 의미는 과연 무 엇일까? 설날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반드시 떡국을 먹는다. 현대에는 전통 민속이 많이 사라지고, 전통 민속의 의미가 퇴색했기 때문에 굳이 떡국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데 불과 1세기 전까 지만 해도 달랐다. 혹시 설날 떡국을 먹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줄 알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27년의 신문기사를 보면 아이들에게 설날 떡국 한 그릇이라도 먹이려 면 가난한 어머니의 처절한 몸부림이 기록돼 있다. 설날은 다가오고 어린 것에게 떡국 한 그릇 먹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아이에게 떡국 한 숟가락이라도 먹이고 싶어 전당포 문이 닫히기 전에 떡 사고 간장 사서 설 아침 준비를 하 겠다는 생각으로 빨아 다듬은 옥양목 치마 한 벌을 전당포에 맡겼다. 이십 전이라도 주시 - 1 -
오 이 말을 들은 전당포 주인이 치마를 어따 쓰느냐 면서도 치마를 놓고 가라며 삼십 전을 내주었다 -동아일보 1927년 2월 3일자- 입던 치마를 저당 잡히고라도 떡 살 돈을 마련해 아이들에게 떡국을 먹이고 싶은 어머니의 모정이 절절하게 그려져 있다. 어머니는 왜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떡국을 먹이고 싶어 한 것 일까? 단순히 명절이기 때문에 명절 음식을 먹이고 싶은 가난한 어머니의 모정 때문일까? 아니면 떡국에 특별한 의미, 그것도 어머니도 모르는 특별한 의미,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와 한국 인의 DNA에 각인된 한국적 정서의 원형이 떡국에 담겨있기 때문일까? (2) 떡국을 먹어야 나이를 먹는다? #1-1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설날에 떡국을 먹어야 비로소 한 살을 더 먹었다고 여겼다. 뒤 집어 말해서 떡국을 먹지 않으면 나이를 먹지 못한다는 말이다. 요즘은 사라진 말이지만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떡국을 먹어야 한 살을 더 먹는다고 했다. 나이가 몇 살이냐? 고 물을 때 떡국 몇 그릇 먹었냐? 고 묻는 겨우도 있었다. 나이를 물을 때 떡국 몇 그릇 먹었냐? 고 묻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꽤 오래 된 풍습이었던 모양이다. 조선 순조 때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 東 國 歲 時 記 )에도 나온다. 설날이면 떡국을 끓여 손님을 대접하고 또 시장에서 떡국을 시절음식으로 팔기도 하는데 우리말로 나이가 몇이냐고 물을 때( 添 齒 ) 떡국을 몇 그릇 먹었냐( 吃 餠 湯 第 幾 椀 )고 묻는 것과 같다 때문에 떡국을 나이를 더하는 떡이라는 의미에서 첨세병( 添 歲 餠 )이라고 한다고 했다. 더할 첨( 添 )자에 나이 세( 歲 )이니까 나이를 더하는 떡이고 국이라는 의미다. 설날이면 반드시 떡국을 먹었기에 최소한 조선 후기인 순조 때 이전부터 지금까지도 떡국 먹은 그릇 수로 나이를 따진 것이다. 물론 현대 같으면 젊어지겠다며 떡국먹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옛날 기준으로는 떡국을 먹지 않으면 어른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설날 반드시 떡국을 먹어야 하는 이유다. (3) 새해 떡국의 의미 설날 떡국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있다. 그중 하나가 떡국은 하늘에 복을 비는 음복( 飮 福 ) 음 식이라는 것이다. 요즘은 설날이 그저 명절일 뿐이고 음력으로 새해가 시작된 날이라고 알고 있을 뿐이지만 농사가 중심이었던 옛날, 정월 초하루는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날이었다. 설날을 원단( 元 旦 )이라고도 하는데 6세기 무렵 쓰여 진 형초세시기( 荊 楚 歲 時 記 )에 정월 초 하루는 세가지가 시작되는 삼원( 三 元 )의 날이라고 했다. 일 년이 시작되는 날( 歲 之 元 )이며, - 2 -
하루가 시작되는 날( 時 之 元 )이고, 한 달이 시작되는 날( 月 之 元 )이다. 근대 한국의 사학자이자 문학가였던 최남선은 조선상식( 朝 鮮 常 識 )에서 설날 떡국을 먹는 풍속은 상고( 上 古 )시대 이래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먹었던 음복 음식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새해 첫날은 천지만물이 새롭게 태어나는 날로 태양이 부활하는 날이기 때문에 하늘에 제 사를 올리고 음복으로 음식으로 먹었는데 정결한 흰떡과 밋밋한 국으로 절식을 삼은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양의 기운이 돋아나 만물이 되살아나고 농사가 시작되는 날, 질병을 예방 해 장수를 빌며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먹었던 음식이 바로 떡국이다. 4세기 무렵 진( 晉 )나라 때 속석( 束 晳 )이 쓴 떡에 관한 글인 병부( 餠 賦 )에 정월 초하루는 음 양이 교차하는 날로 음의 기운이 점점 쇠퇴하고 양의 기운이 살아나는 날이라고 했다. 그러 면서 봄이 시작되는 이 날, 일 년의 평안을 기원하면서 만두국( 餠 湯 )을 먹는다는 것이다. 떡국이나 만둣국은 만물이 새롭게 살아나는 날, 일 년 동안의 풍요와 건강을 기원하며 먹 는 음식인 것이다. 2. 장수와 재복의 상징, 떡국 (1) 가래떡은 왜 길어졌을까? 설날 가래떡으로 떡국을 끓여 차례를 지낸 후 가족들이 떡국을 먹으며 새해 소원을 빌고 또 덕담을 나누는 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설 풍경이다. 떡국은 조상님께 올리는 차례와 가족 간 화합의 핵심 매개체로 여기에 넣는 것이 가래떡인데 설날 왜 가래떡을 먹으며 가래떡에 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전에서 가래 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떡이나 엿 따위를 둥글고 길게 늘여 만든 토막이라는 풀이가 나온다. 가래떡은 그러니까 길게 늘여 만든 떡으로 끊어지지 않고 길게 늘였다는 것 이 특징이다. 지금은 기계로 가래떡을 뽑지만 옛날에는 떡메로 내리치며 일일이 손으로 길게 늘여 가래 떡을 만들었다. 조선 순조 때의 동국세시기( 東 國 歲 時 記 )에 가래떡을 만들 때의 특징이 잘 나 와 있다. 설날이면 멥쌀가루를 쪄서 목판 위에 놓고 절구로 무수히 내리쳐( 無 數 擣 打 ) 길게 늘여 가 래떡을 만든다( 引 作 長 股 餠 )고 했다. 가래떡을 한자로 장고병( 長 股 餠 )이라고 표현했는데 길 장 ( 長 ), 가래 고( 股 )이니 기다란 가래란 뜻이다. 가래떡을 둥글고 길게 만드는 이유는 가래떡이 설날에 먹는 특별한 음식이기에 건강과 장 - 3 -
수( 長 壽 )의 소원과 부자 되기를 꿈꾸는 재복( 財 福 )의 염원을 담았기 때문이다. 가래떡에 장수의 소망을 담은 것은 국수를 장수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과 마찬가지다. 기다 란 국수 가락처럼 길고 둥근 가래떡을 만들며 오래 살기를 빌었던 것이다. 떡메로 떡살을 무수히 내리쳐 떡의 쫄깃쫄깃한 성질을 높이는 동시에 국수 면발처럼 떡을 길게 늘이며 장 수의 소망을 담았던 것이다. 설날은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날이어서 원단( 元 旦 )이고 음양이 교차되는 날로 양의 기 운이 살아나 만물이 소생하는 날이다. 설날에는 시작과 부활의 의미가 담겨 있어 하늘과 조 상께 차례를 올리며 풍년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인데 가래떡에다 건강과 장수( 長 壽 )의 소원 과 재복( 財 福 )의 기원을 담았던 것이다. 가래떡에 장수의 소망을 담은 것은 국수를 장수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과 비슷하다. 긴 국 수 면발처럼 기다란 가래떡을 먹으며 오래 살기를 소원했던 것인데 우리나라는 예전 밀가루 음식을 드물게 먹었으니 쌀가루로 만든 떡에다 장수의 소망을 새겼던 것이다. 국수가 장수 의 상징이 된 것은 7-8세기 중국 당나라 무렵이다. 당시 조악한 음식을 먹던 사람들이 밀을 곱게 빻은 밀가루로 국수라는 새로운 고급음식을 먹으며 수명이 늘어났기 때문에 국수의 기 다란 면발을 장수의 상징으로 삼았다. 우리가 언제부터 가래떡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가래떡이 길어진 것은 떡메로 떡살을 무수히 내리쳐 떡의 쫄깃쫄깃한 성질을 높이는 동시에 국수 면발처럼 떡을 길게 늘 여 장수의 소망을 담았던 것이다. (2) 떡국 떡은 돈 모양... 가래떡의 특징은 국수보다는 굵기가 두껍지만 길이는 국수처럼 길다는 점이다. 때문에 가 래떡으로 떡국을 끓이려면 떡을 썰어야 하는데 옛날 문헌을 보면 하나 같이 가래떡 썰어놓 은 모양을 엽전과 같다고 했다. 동국세시기( 東 國 歲 時 記 ) 떡국을 끓일 때는 가래떡을 동전처럼 얇고 가늘게 썰어(( 細 切 薄 如 錢 ) 간장을 푼 끓는 물에 소고기나 꿩고기를 넣고 후춧가루를 넣어 조미를 한 후에 먹는데 이를 떡국( 湯 餠 )이라고 부 른다고 했다. 열양세시기( 洌 陽 歲 時 記 ) 동국세시기와 같은 시대인 조선 순조 때 한양의 세시풍속을 적은 열양세시기( 洌 陽 歲 時 記 ) 에서도 가래떡을 동전 모양으로 썰어 넣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섣달 그믐날이면 가래떡을 엽전 모양으로 가늘게 잘라놓은 후 설날에 떡국을 끓여 식구 숫자대로 한 그릇씩을 먹는다 고 했다. - 4 -
좋은 쌀로 가루를 내어 체를 쳐서 고르고 맑은 물에 반죽해 찐 것을 안반에 놓고 떡메로 오래 친 다음 조금씩 떼어 손으로 비벼 문어발처럼 둥글고 길게 늘인 모양의 떡을 만드는데 이것을 권모( 拳 模 )라고 하며 가래떡을 말한다. 미리 준비해 둔 장국에 끓일 때 가래떡을 동 전 모양으로 얇게 썰어 넣으면( 沸 將 餠 細 切 如 錢 形 ) 끈적거리지도 않고 부서지지도 않아 좋다 경도잡지( 京 都 雜 志 ) 18세기 말, 정조 때 유득공이 지은 세시풍속지인 경도잡지에도 가래떡은 엽전 모양으로 썬 다고 적혀 있다. 멥쌀로 떡을 쪄서 치고 비벼 긴 가닥을 만들고 굳기를 기다려 엽전 굵기 로 자른다.( 粳 米 餠 按 摩 成 條 候 硬 橫 截 薄 如 錢 ) 이것을 끓이다가 꿩고기와 후cnt가루를 넣어 맛 을 내면 세찬으로서 없어서는 안 될 떡국이 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왜 하나 같이 가래떡을 동전 모양으로 썬다고 했을까? 둥글게 생긴 것 이 굳이 엽전뿐만이 아닌데 학식이 높았던 유득공이나 홍석모, 김매순이 이재( 理 財 )에 밝아 서 떡 썰어놓은 모양을 보고 돈처럼 생겼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썰어 놓은 떡국 떡의 모양에는 역시 인간들의 원초적 소망이 투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부자 되기를 소원하고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기원한다. 권력은 십년을 가 지 못한다는 권불십년( 權 不 十 年 )이라는 말처럼 권력욕은 다음 차원의 문제다. 때문에 새해 엽전 모양으로 생긴 떡국을 먹으며 돈을 먹는 것처럼 부자 되기를 빌었던 것 이고, 가래떡을 국수 가락처럼 기다랗게 뽑으며 오래 살기를 소원했을 것이다. 3. 부자 꿈을 담은 동서양 새해 음식 (1) 중국, 일본, 미국, 유럽의 새해 음식 흥미로운 점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새해 첫날 먹는 음식은 대부분 부 자가 되는 소원이 담겨 있다는 것이고, 때문에 돈의 모습을 닮았다는 사실이다. 중국 우리도 그렇지만 중국에서는 설날 만두를 먹는다. 그런데 우리나 중국 모두 설날 먹는 만 두는 평소 먹는 교자만두 혹은 찐 만두와 달리 만두의 양끝을 말아서 동그랗게 붙여 놓은 말발굽 모양이다. 말발굽처럼 생겼다고 했지만 사실은 말발굽 모양으로 만든 중국의 옛날 은화인 원보( 元 寶 ) 라는 화폐다. 돈 모양으로 만두를 빚어 먹으며 재물이 집안에 넘치기를 빌었던 것이다. 이것도 모자라 부잣집에서는 만두에 금은을 넣어 빚기도 했는데 이 만두를 먹은 사람은 일 년 동안 운수가 대통한다고 믿었다는 내용이 청나라 때 북경의 풍속을 적어놓은 연경세시기 ( 燕 京 歲 時 記 )에 나온다. 일본 일본은 '오세치(おせち)' 요리를 먹으며 새해를 맞이한다. 설은 오곡( 五 穀 )을 지키는 신을 맞 이하는 의미가 있어 이때는 불을 사용해 조리하지 않고, 설 전에 미리 요리를 만들어두고 연휴 동안 먹는다. 오세치는 찐 새우와 검은콩, 멸치, 연근, 밤, 다시마, 청어알 조림 등의 조 - 5 -
림 음식을 3~5단의 찬합에 보기 좋게 담아놓은 것이다. 검은콩은 '복', 멸치는 '풍작', 새우는 '장수', 연근은 '지혜', 밤은 '재운( 財 運 )', 청어 알은 자손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의미다. 동양은 물론이고 서양에도 비슷한 풍속이 있다. 프랑스, 그리스 등지에서는 신년에 동전을 숨겨놓은 케이크를 나누어 먹는데 케이크를 먹다 동전을 씹은 사람은 한해 운세가 트인다고 여겼으니 동서양 풍속이 서로 닮은꼴이다. 미국 미국 남부에서는 새해에 콩과 채소를 넣은 음식을 먹는 전통이 있다. 주로 쌀에다 콩, 무청 을 넣어 볶아 먹는 음식인데 일종의 미국식 볶음밥이다. 미국인들은 콩은 동전인 코인을 상 징하고 채소의 녹색은 달러를 의미한다. 달러 뒤쪽이 녹색이기 때문에 달러를 그린 백 (greenback)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미국 남부에서도 역시 새해 음식을 먹으며 부자 되기 를 소원했던 것이다. 이탈리아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는 전통적으로는 돼지고기, 특히 이탈리아 같은 나라에서는 돼지 족 발을 먹는다. 그것도 콩과 함께 먹는데 새해에 돼지를 먹어야 복이 온다고 믿는데 역시 재 운과 관련이 있다. - 6 -
신화 속 트랜스포머, 마늘과 쑥 학습주제 1. 왜 마늘과 쑥을 먹어야 사람이 될까? (1) 단군신화, 마늘과 쑥 (2)곰이 마늘을 선택한 이유는...? 2. 역사 속 마늘의 효능 (1) 마늘은 자양 강장제 (2) 드라큐라는 왜 마늘을 싫어할까? 3. 웅녀로 변하는 필요조건이 쑥 (1) 쑥은 여자에게 좋은 약초 (2) 쑥이 모기와 뱀을 쫓는 까달 1. 왜 마늘과 쑥을 먹어야 사람이 될까? (1) 단군신화, 마늘과 쑥 #1-1 단군신화는 일반적으로 고대에 토템(Totem)신앙으로 곰을 숭상했던 토착부족이 외래부족과 융합하는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한다. 하늘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외래 부족이 곰을 숭상하는 토착부족과 결합해서 호랑이를 숭배하는 또 다른 토착부족을 몰아내고 새 나라를 세운 것으로 보는 것이다. 또 다른 궁금증은 곰이 사람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왜 마늘과 쑥을 먹었느냐는 점이다. 많고 많은 식품 중에서 굳이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이 된 까닭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신화는 집단 무의식의 표현이다. 그러니 단군신화에 나오는 마늘과 쑥에도 집단 무의식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마늘과 쑥에는 옛날 사람들의 식습관과 인식이 그대로 투 영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마늘과 쑥을 무척 좋아했을 것이다. 쑥도 그렇지만 마늘은 지금도 고추장에 생마늘을 찍어 먹을 정도로 좋아한다. 먼 옛날부터 마늘을 즐겨 먹었기에 단군신 화에다 마늘을 등장시킨 것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현재 우리가 먹는 마늘(garlic)은 중국을 통해 한반도로 전해졌다. 지중해가 원산지인 데 3세기 무렵 진( 晉 )나라 사람인 장화가 쓴 박물지에는 기원전 2세기 한나라의 장건( 張 騫 ) 이 서역에서 들여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단군신화가 기원전 2세기 이후의 이야기거나 혹은 신화에 나오는 마늘 이야기가 엉터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서역에서 들 여 온 마늘은 한자로 대산( 大 蒜 )이라는 종자이고 아시아에서는 이전부터 산 마늘( 山 蒜 ) 혹은 들 마늘( 野 蒜 )을 먹었다. 그러니까 단군신화에 나오는 마늘은 지금 우리가 먹는 것과는 약간 - 1 -
다른 종자였을 것이다. (2)곰이 마늘을 선택한 이유는...? #1-1 곰이 사람으로 변하는데 먹어야 할 식품으로 마늘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마늘이 신비 한 식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물인 곰이 영물이 인간으로 변하려면 보통 방법 으로는 안되고 신성한 힘이 필요하다. 곰이 평소처럼 도토리를 주워 먹었더니 웅녀가 되었 다고 하면 신화로서의 신비함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은 마늘을 식품이 아 닌 신비한 약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마늘은 생명력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힘의 원천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늘을 정력제로 생각했고 생김새도 남성의 고환을 닮았다고 해서 다산의 상 징으로 받아들였다. 마늘에는 또 신비한 힘이 들어 있어 귀신을 쫓아내고 역병을 막아준다고 믿었다. 마늘이 식품인 동시에 약초였고 신비의 영약이었던 것이다. 단군신화에서 사람이 되려는 곰에게 굳이 마늘을 먹인 이유는 그만큼 친숙한 음식이면서 동시에 마늘에는 생명력, 생식력과 약초로서의 신비함이 모두 담겨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2. 역사 속 마늘의 효능 (1) 마늘은 자양 강장제 고대인들은 마늘을 먹으면 힘이 솟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동서양 구분 없이 모두 마늘 을 강장제, 정력제, 의약품으로 사용한 것으로 나온다. 마늘에 대한 가장 오래 전 기록은 성경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막을 떠돌며 이집트에 서 공짜로 먹던 마늘, 오이, 수박, 부추, 양파를 그리워하며 모세를 원망하는 장면이다. 민수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마늘을 먹지 않으니 힘이 쇠약해졌다며 한탄하는 모습이 나온 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마늘을 먹어야 기운이 솟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모세를 따른 이스 라엘 사람들은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건설하던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니 마늘은 먹고 힘을 내서 피라미드를 지으라고 제공되었던 특별 강장식품이었던 것이다. #2-1 고대 서양 문헌을 보면 마늘이 주로 육체노동자들에게 제공된 식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 대 그리스의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작품 평화(Peace) 에서 마늘을 먹는 노동자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 역시 로마에서 병정과 선원, 노동자들이 마늘을 먹는다고 했다.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여성의 자궁 종양 치료에 마늘을 처방한 것을 비롯 해 마늘의 다양한 치료효과에 대하여 여러 편의 논문을 남겼다. - 2 -
동양에서도 일찍부터 마늘을 의약품으로 이용했다. 명나라 때 의학서인 본초강목에는 마늘 을 먹으면 토사곽란을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여행을 갈 때면 마늘 을 상비약으로 휴대했다고 한다. 중국 원나라 때 왕정이 쓴 농서( 農 書 )라는 책에도 여행을 떠나며 마늘을 가져가면 뜨거운 바람과 비도 견딜 수 있고 마늘을 먹으면 독을 먹어도 해를 입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나라 동의보감에도 마늘은 헛것에 들린 것은 낫게 하고 아픈 것을 먹게 하는데 오랫동 안 먹으면 피를 맑게 한다고 했으니 기록했다. 옛날 사람들은 마늘을 먹으면 힘이 솟는다고 생각했다. (2) 드라큐라는 왜 마늘을 싫어할까? 마늘에 나쁜 기운을 쫓는 신비한 약초 성분이 들었다고 믿었던 옛 사람들의 생각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 드라큘라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드라큘라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십자가와 마늘이다. 드라 큘라는 뿌리 깊은 기독교 문명권에 사는 흡혈귀이니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지만 마늘은 왜 그토록 무서워하는 것일까? 드라큘라는 영국의 브람 스토커(Bram Stoker)가 쓴 소설에 나오는 흡혈귀, 즉 뱀파이어 (vampire)다. 루마니아를 무대로 한 소설 속의 가상인물이지만 동유럽에 널리 퍼져있는 사람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뱀파이어 전설은 11세기 무렵부터 동유럽의 슬라브 민족국가를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뱀 파이어는 흡혈귀로 흡혈귀에게 피를 빨리면 그 사람도 흡혈귀로 변한다. 일종의 전염병과 같은 현상이다. 이 밖에도 마법사와 마녀, 늑대인간(werewolf), 이교도, 부랑자, 사생아가 낳은 사생아 아이, 자살한 사람, 복수를 못한 사람, 살인자 등이 죽으면 뱀파이어가 된다고 믿었다. 당시 사회 에서 환영 받지 못했던 존재들이다. 동양식으로 말하자면 불행과 전염병을 몰고 다니는 역 귀( 疫 鬼 )와 같은 존재들이다. 동유럽에서는 전통적으로 뱀파이어를 쫓아내는데 마늘을 사용했다. 드라큘라의 무대로 알 려진 루마니아 북부의 트란실바니아 지방에서는 부활절이 되면 새벽에 마늘로 십자가를 만 들어 창문에 달아 장식을 하거나 집안 곳곳에 마늘을 놓아두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또 소 를 키우는 축사에도 마늘을 걸어놓고 소에게 마늘을 문질러 주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마늘이 흡혈귀의 접근을 막아 전염병을 예방한다고 믿었던 것인데 소설에서 뱀 파이어인 드라큘라가 싫어하는 기피식품으로 이용된 것이다. 루마니아를 포함한 동유럽 국가의 전설과, 드라큘라가 기본적으로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라 는 사실을 감안하면 마늘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마늘에는 나쁜 기운의 접근을 차단하고 쫓아내는 기능이 있었던 것이 - 3 -
다. 곰이 사람이 되려면, 다시 말해 동물의 성질인 야성( 野 性 )을 버리고 사람의 성질인 인성 ( 人 性 )을 찾으려면 마늘을 먹어야 했을 것이다. 3. 웅녀로 변하는 필요조건이 쑥 (1) 쑥은 여자에게 좋은 약초 #3-1 단군신화에서 웅녀로 환생한 곰이 먹었던 음식은 마늘과 쑥인데 특히 남자가 아닌 여자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쑥을 먹어야 했다. 한국 설화는 물론이고 세계 다른 나라의 민속에서도 쑥은 여성을 위한 식품이기 때문이다. 민속이라는 관점에서 쑥의 특징을 꼽자면 첫째 쑥은 정화작용을 한다는 것이고 둘째 쑥은 여성에게 필요한 식품이라는 점이다. 곰이 동물에서 인간으로 변신하려면 야성을 버리고 인 성을 갖추는 정화과정이 필요하다. 또 사람 중에서도 여자가 되려면 여성화라는 의례를 거 쳐야 하는데 두 가지 특성을 모두 갖춘 식물이 쑥이다. 곰이 웅녀가 되기 위해 쑥을 먹었던 이유다. 우리 속담에 애쑥 국에 산촌 처자 속살 찐다 는 말이 있다. 갓 돋아난 쑥으로 국을 끓여먹 은 산골 아가씨가 새봄을 맞아 한층 성숙해진다는 뜻이다. 쑥이 여자들에게 생기와 윤기를 더해 준다는 말인데 이 속담에는 생식과 다산의 의미가 담겨있다. 명나라 때 의학서인 본초강목에도 쑥이 여성들의 생식에 이롭다는 내용이 있는데 쑥은 음 기를 도와서 새살이 돋아 아이를 갖게 한다고 했다. 또 속에 있는 차가운 기운과 나쁜 기운 을 몰아낸다고 했으니 쑥을 여성의 출산능력을 높이는 비약( 秘 藥 )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예전 할머니들은 아이를 임신한 부인이 아랫배에 통증이 있거나 하혈을 하는 등 유산의 기 미가 보이면 쑥을 뜯어다 먹였는데 쑥이 유산을 막아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쑥을 먹으면 불규칙한 생리주기를 고르게 해주며 얼음장처럼 찬 손발을 따뜻하게 해 준다고 했다. 사실 요즘에도 갓 아이를 낳은 산모에게는 쑥으로 찜질을 해 주는데 다 이런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쑥은 옛날부터 생명력과 다산을 상징한다고 믿어왔다. 실제로 쑥은 생명력이 강해서 어느 곳에서도 잘 자라고 번식력이 왕성한 식물이다. 예전에는 여자들이 물에 쑥을 풀어 목욕을 하거나 베개 속에 쑥을 넣고 잠을 자기도 했는데 쑥을 통해 왕성한 생식능력을 전수 받으려 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 쑥이 여성에게 좋다는 생각은 우리뿐만 아니라 서양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쑥은 영 어로 아르테미지아(artemisia)라고 한다. 어원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 (Artemis)다. 아르테미스는 달의 여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냥의 여신이며 어린아이와 여성의 보호자 - 4 -
이고 수호신이다. 아이를 낳는 것에서부터 아이가 성장하기까지의 일체를 돌봐주는 여신이 다. 쑥의 영어 이름인 아르테미지아 를 보면 쑥 역시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바쳐진 식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달의 여신으로 여성의 수태에 영향을 주고 월경( 月 經 )주기를 조절해 주며 여성을 보호하는 여신에게 바치는 성스러운 풀인 것이다. (2) 쑥이 모기와 뱀을 쫓는 까달 #4-1 민속적으로 쑥에는 나쁜 기운을 쫓아내는 정화의 기능이 있다고 믿었다. 쑥을 가리키는 영 어 이름을 봐도 알 수 있다. 쑥을 영어로 아르테미지아 했지만 그 이외에 머그워트(mugwort) 라고도 한다. 어원사전을 보면 고대 독일어(Muggiwurti)에서 기원한 단어인데 파리, 모기, 나방을 쫓는 식물이라는 뜻 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시골에서는 모깃불로 쑥을 태우는데 유럽에서도 1세기 무렵부터 쑥을 태 워 모기와 파리를 쫓아낸 것에서 유래한 단어다. 또 다른 영어 단어로는 웜우드(wormwood) 라고도 하는데 벌레를 없앤다는 뜻이겠지만 모 기나 나방을 쫓는 머그워트 와는 달리 기생충을 없애는 식물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한 다. 중세 유럽에서 약쑥으로 회충을 치료한 것에서 비롯된 단어다. 쑥에는 곤충이나 해충을 쫓는 구체적인 성분은 물론이고 귀신이나 악령을 쫓아내어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기능이 있다고 여겼다. 동서양에 모두 널리 퍼져있는 민속인데 동양에서 도 예전에는 단오절이 되면 쑥으로 인형을 만들어 문에 걸어놓는 풍속이 있었다. 나쁜 기운 을 쫓는다는 뜻이며 형( 荊 ), 초( 楚 )나라 때부터 이어진 풍습이라고 한다. 유럽에서도 전염병이 돌면 대문에 쑥을 걸어 놓았는데 번개가 심하게 치는 날에도 쑥을 걸 면 벼락이 떨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다. 쑥의 신령한 효과에 대해 서양에서는 잠 잘 때 베개 밑에 쑥을 넣으면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는 꿈을 꾼다고 했다. 성경에서도 세 례 요한이 황야에서 지낼 때 쑥을 허리에 감고 지냈다고 적혀 있는데 사탄을 물리친다는 고 대의 주술적 믿음이 성경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북미 인디언들에도 쑥을 신성시하는 풍속이 있는데 쑥으로 손과 얼굴을 문지르면 몸이 정 화된다고 하고 또 어떤 부족은 쑥으로 여성의 성인식을 치르기도 하며 초경을 한 소녀에게 쑥을 문질러 몸을 정화시키는 부족도 있다고 한다. 한편 우리나라 사람들은 쑥을 즐겨 먹는데 여기에는 독특한 향기에서 풍기는 맛은 물론이 고 쑥의 약효와 신령한 기운의 덕을 보려는 주술적 믿음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 다. 예전에는 음력 5월 5일 단오에는 쑥을 뜯어서 쑥떡을 만들어 먹었는데 쑥 중에서도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인 단오절 오시에 뜯은 쑥은 약쑥이라고 해서 약효가 특히 좋다고 믿었다. 단오에 뜯은 쑥으로 나쁜 기운을 쫓아 액땜을 하려는 소망을 담았을 것이다. 중국 송나라 때의 역사를 적은 책인 송사( 宋 史 ) 고려전에는 정월 첫 뱀의 날인 상사일( 上 巳 - 5 -
日 )이면 파란 쑥으로 물들인 떡을 해 먹는데 고려에서는 식품 중에서 으뜸으로 여긴다고 했 다. 상사일은 집안에 뱀이 들어와 화를 입는 것을 막으려는 날인데 이날 쑥떡을 해 먹는 것 도 쑥의 신령한 기운을 이용해 화를 면하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 그것도 여자인 웅녀로 변했다는 단군신화의 이야기 속에서는 몸에 좋은 약초, 그리고 해충을 쫓는 채소인 마늘과 쑥에 대한 고대인들의 인식이 반영돼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아플 때, 전염병을 예방하고 치료할 때, 노동을 하기 위해 기 운을 차려야 할 때 먹었던 마늘과 쑥에 대한 무의식의 원형이 단군신화에, 또 드라큘라 이 야기에 녹아 있다. *구약성서 민수기 제11장 5-6절 - 6 -
날씬해져랏! 국수 변천사 1.장수를 기원하는 국수? 2. 국수에 대한 동양 3국의 시각... (1) 국수에 대한 동양 3국의 시각... (2) 언제부터 국수 먹으면 오래 산다고 믿었을까? (3) 국수는 언제 먹었나...? 3. 오래살기 위해 먹었던 국수 (1) 잔치국수의 유래 (2) 밀가루 麥 에 담긴 비밀 4. 왜 국수를 먹으면 오래 산다고 믿게 됐을까? 1.장수를 기원하는 국수? 요즘은 주로 어떤 경우에 국수를 먹을까? 배는 고프고, 시간도 없고, 번거롭게 밥 차려 먹기 귀찮을 때... 대충 한 끼 식사를 때워야 할 때 가장 흔하게 먹는 국수가 라면, 아니면 장국에 국수 말아서 김치 송송 썰어 넣고 먹는 잔치 국수, 끼니를 때우는 차원을 넘어 조금 더 맛있게 먹으려면... 칼국수 다양한 국수가 있습니다. 집에서 먹을 때는 그렇고, 밖에서 외식을 해도 보통의 경우 국수는 그저 편하게 먹는 음식 일 뿐. 게다가 밀가루 음식은 건강을 해치고, 비만을 유발한다고 기피하는 경우도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수는 인기가 많고 편히 접할 수 있는 음식 중 하나입니다. 왜일까요? #1-1 예전에는 어느 때 국수를 먹었을까? 국수는 잔칫날 먹는 음식... 아이 돌 잔치 때, 어르신 환갑잔치, 결혼잔치 때 먹는 음식 그래서 이름도 잔치 국수... 왜 잔칫날 국수를 먹었을까? 국수는 장수를 기원하는 음식... 기다란 국수 면발처럼 길게, 오래 살라는 소망이 담겨 있기 - 1 -
때문 예전에는 환갑잔치나 생일잔치 때 빠져서는 안 되는 음식이었는데 국수가 장수( 長 壽 )를 상 징했기 때문 지금이야 나이 예순에 오래 살았다는 말을 하면 화를 낼 일이지만 예전에는 환갑잔치 때 장 수를 축하하면서 국수를 장만 아이 돌잔치 때 돌잡이로 부자 되라며 돈을 잡거나, 공부 잘하라며 연필을 잡아야 좋아하지 만 옛날에는 실이나 국수를 집어야 무병장수한다며 즐거워했다. 환갑잔치 때, 六 十 甲 子 가 한 번 돌아 올 만큼 오래 산 것을 축하하는 의미 결혼 잔치 때는 부부의 연이 국수처럼 길어지라고... 아무 때나 먹는 음식이 아니었는데, 잔칫날 국수를 준비한 이유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옛날에는 밀가루 음식이 귀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하지만 잔칫날 국수를 대접하는 전통은 70-80년대까지도 지속... 국수가 귀하지도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 국수는 준비하기가 편하기 때문... 값도 싸고 잔칫날 많은 손님 접대에 편리해서... 분명히 그런 측면도 있었겠지만 싸고 편해서 국수를 준비했다면 잔칫날 축하하러 온 손님들 모독 잔칫날 국수를 먹는 이유는 기다란 국수면발처럼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 때문... 면발이 길기 때문에 국수가 장수를 상징하고, 국수를 먹으면 오래 살 수 있다는 믿음은 철 저한 미신이 아니었을까? 과학적 근거도 하나 없이 생긴 모습만 보고 잔칫날 국수를 준비해 먹고 대접했을까? 먼 옛날부터 한국과 중국, 일본 모두 국수를 먹으면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었는데... 단순히 국수의 생김새 때문에 국수를 먹으며 장수를 빌었을 만큼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모 두가 그토록 단순했을 것 같지는 않다. 더욱이 오랜 세월에 걸쳐 한중일 동양 삼국에서 국 수가 장수를 상징하는 식품이 된 데에는 그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국수 사진, 잔치국수 2. 국수에 대한 동양 3국의 시각... (1) 국수에 대한 동양 3국의 시각... #2-1 국수를 먹으면 오래 살 수 있다는 믿음은 한국과 중국, 일본의 공통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 습니다. 국수는 장수식품, 행운을 부르는 식품이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중국인 - 우리가 미역국을 먹는 것처럼 중국인은 생일날 국수를 먹는다. 생일날 먹는 국수를 장수면이라고... 오래 살라는 의미 - 2 -
일본인 - 일본도 국수를 먹으면 오래 산다는 의미가 있다. 옛날부터 결혼 축하연에서 소면 을 먹었다. 절에서는 축면( 祝 麵 ) 이라고 해서 경 사스러운 날 소면을 먹는 습관 이 있고, 아이의 무병 장수를 빌며 국수를 먹는 풍속. 뿐만 아니라 국수, 특히 메밀국수인 소바는 전통적으로 행운을 빌 때 먹는 음식... 새해가 오기 직전인 섣달 그믐날 소원을 빌면서 먹는다. 이사를 가면 메밀국수를 돌린다. 옛날 우리가 떡을 돌렸던 것처럼... 소바( 蕎 麥 ) 와 옆 혹은, 근처를 표시하는 소바( 側 ) 의 발음이 같기 때문에 생긴 풍 습 오래 동안 옆에 머물게 해 달라는 의미. (2) 언제부터 국수 먹으면 오래 산다고 믿었을까? 국수가 장수를 상징하는 음식이 된 시기와 이유를 풀어 줄 자료는 많지 않다. 그나마 많지 않은 문헌을 찾아보면 당( 唐 )나라 때부터 사람들은 국수를 먹으며 오래 살기를 소망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12세기 남송( 南 宋 ) 때 학자인 주익( 朱 翌 )이 저술한 의각료잡기( 猗 覺 寮 雜 記 )라는 책에 국수 먹 으면 오래 산다는 이야기 등장. 잡기( 雜 記 )는 이름 그대로 당시의 세상사를 잡다하게 모아 기록한 책이다. 여기에 당나라 사람들은 생일날 다양한 종류의 탕병( 湯 餠 )을 먹는데 세간에서는 소위 장수를 소원하는 국 수( 長 命 麵 )이라고 부른다고 적혀 있다 당송( 唐 宋 )시대에 탕병( 湯 餠 )은 단지 떡국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밀가루로 반죽한 음식, 지금의 국수( 麵 )까지를 포함하는 낱말이다. 중국 남방은 입식, 쌀 문화권이지만 북방은 분식, 밀가루 문화권 = 탕병이 떡국이 아닌 수 제비, 국수인 까닭 남송보다 앞선 북송( 北 宋 ) 때 사람인 마영경( 馬 永 卿 ) 역시 잡기류인 라진자( 懶 眞 子 )라는 책을 남겼는데 당나라 때 시인인 유우석( 劉 禹 錫 )이 쓴 시를 인용해 놓았다. 벼슬을 떠나는 진사, 장관( 張 盥 )이라는 사람의 송별회 자리에 초대를 받아 국수를 먹으며 바친 시다. 장관을 보내며 ( 送 張 盥 赴 擧 詩 ) 尔 生 始 悬 弧, 我 作 座 上 宾 引 箸 举 汤 饼, 祝 词 天 麒 麟 네가 막 태어났을 때 축하 잔치에 초대 받아 갔었지, 그때 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먹으며 하늘에 사는 기린만큼 오래 살기를 축원했었지. 今 成 一 丈 夫, 坎 坷 愁 风 尘 长 裾 来 谒 我, 自 号 庐 山 人 어느덧 벌써 성인이 되어 험난한 세상에 나오더니 의관을 차려 입고 점잖게 인사하는구나 (생략) 내용을 풀어 보면 생일 잔치에 초대 받아 귀한 손님으로 앉아 젓가락을 들어 국수( 湯 餠 )을 먹으며 하늘에 사는 기린만큼 오래 살기를 기원한다 고 소원을 빌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송나라 때의 시인인 소동파( 蘇 東 坡 )는 이 시에 대해 초대받아 국수를 - 3 -
먹는 사람을 탕병객( 湯 餠 客 ) 이라고 하면서 국수를 먹는 것은 장수를 소원하기 때문 이라고 해설을 했다. 참고자료 : 유우석( 劉 禹 錫 772-842)은 중국 당나라 때의 문학가이며 철학가이지 시인 생전에 白 居 易 와 이름을 나란히 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劉 白 이라고 불렀고, 백거이는 유우석을 詩 豪 라고 부르며 추앙했다고 한다. 이태백 詩 仙, 두보를 詩 聖 이라고 한 것처 럼... 참고자료 : 麒 麟 사슴의 몸에 소의 꼬리, 말과 비슷한 발굽과 갈기를 갖고 있고 오색찬란한 빛깔의 털과 이마에 외뿔이 달렸다고 알려진 상상 속의 동물. 용, 거북, 봉황과 함께 사영수( 四 靈 獸 )를 이루는 신성한 동물. 장수의 대명사로서 자손 번창을 의미 기록을 보면, 국수를 먹으며 오래 살기를 비는 풍속은 중국 당나라 때부터 비롯됐다. 당나라는 서기 618년부터 907년까지 지속된 나라 앞서의 기록, 의각료잡기와 라진자를 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모두 송나라 때 문헌이면서 국수를 먹으며 장수를 비는 풍속은 당나라 때부터 비롯됐다고 적었다. = 어떤 의미가 있을 까? (3) 국수는 언제 먹었나...? #3-1 옛날 사람들은 국수를 언제 먹었을까?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중기 이전에 국수를 먹었다. 우리와 관련된 문헌에서 국수에 관한 최 초의 기록은 12세기 초반,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간 서긍( 徐 兢 )이 쓴 고려도경( 高 麗 圖 經 )에 나온다. 고려도경에는 서긍을 비롯한 사신 일행이 고려 국경을 넘어서자 고려 관리들이 영접을 하면 서 음식을 내왔는데 10여 종류의 음식이 나왔는데 그중 국수가 으뜸이다. 해산물은 진기했다 나라 안에는 밀이 적어 다 상인들이 경동도( 京 東 道 - 송나라)로부터 사오므로 면( 麵 )값이 대 단히 비싸서 큰 잔치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 國 中 少 麥 皆 賈 人 販 自 京 東 道 來 故 麵 價 頗 貴 非 盛 禮 不 用 ) 고려 때 국수는 중국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거나 큰 잔치에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고려도경을 통해 고려 때 국수는 아주 귀한 음식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은 국수를 어느 때 먹었을까? 쌀과 같은 입식( 粒 飾 ) 문화권인 우리나라와 달리 밀가루 음식, 분식( 粉 飾 ) 문화권인 중국은 우리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국수를 먹었다. 하지만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그리고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 -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