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境 界 人 의 역사: 화교의 어제와 오늘 강진아 마석은 어디에나 있다 이한숙
서평 로컬리티 인문학 12, 2014. 10, 275~285쪽 境 界 人 의 역사: 화교의 어제와 오늘 강 진 아 * 타인들 사이의 중국인 : 근대 중국인의 동남아 이민 필립 A. 큔 지음, 이영옥 옮김. 심산출판사, 2014 (Philip A. Kuhn, Chinese Among Ohters: Emigration in Modern Times(State & Scoiety in East Asia),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08) 1) 淸 史 연구에 큰 학문적 족적을 남긴 필립 큔 교수의 새 책이 국내에 번 역되었다. 타인들 사이의 중국인 이라는 다소 낮선 제목의 이 책은 16 세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중국인의 해외이주에 대한 개설서이다. 저 자가 감사의 말 에서 밝히고 있듯이, 원래 큔 교수가 이 주제로 책을 기 획하게 된 것은 2006년 10월에 한국학술협의회, 대우학술재단 후원의 석학 강좌 시리즈에 초빙되어 여섯 차례의 내한 강연을 했던 것과 관련 이 있다. 학술재단은 석학 강좌 시리즈의 강연 내용을 책으로 출판하도 록 하여, 해외 석학들과 국내 연구자들과의 연구 교류를 촉진하고, 그 성 과를 해외에 발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6년 평자 역시 그 중 한 차 례의 강연에 토론자로 참여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은 이 책의 제6장을 구 성하고 있다. 책이 어떻게 다듬어졌는지 궁금하기도 하여, Rowman & Littelfield Publishers에서 출판된 뒤, 다시 싱가포르 국립대학 출판부에 서 출간이 되었을 때 구입하여 대강 훑어 본 적이 있다. 그런 인연이 있어 *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canton@hanyang.ac.kr) 서평 境 界 人 의 역사: 화교의 어제와 오늘 275
서인지, 이 책의 한국어판 출판에 더욱 기대가 컸다. 서평을 쓰는 여러 방식이 있지만, 필립 큔 교수의 이번 저작은 논쟁적 인 학술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중국인의 해외 이주사에 대한 망라적인 서 술로서 입문서적인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구 성과 전체 내용을 제대로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에 서평의 역점을 두고 싶다. 책은 전체 8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장에서 중국인의 해외이 주에 대한 전반적인 스케치가 이뤄진 후에는, 대체로 시대순으로 전개된 다. 제1장 해상 팽창과 중국인 이주 에서는 16세기 안소니 리드가 교 역의 시대 라고 부른 서구의 동남아시아 진출과 그에 따른 무역의 폭발 적인 증가가 어떻게 중국인 이주를 유인했는가에서 서술이 시작된다. 17 세기 중엽 명말 청초의 혼란기에 海 禁 이 강화되었다가 해제된 이후 중국 의 대외무역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거기에 17세기 중반-18세기 중반의 100년 동안 인구가 3배 가까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중국 사회는 잉여 인구가 국내 이주, 해외 이주 양방향으로 대량 이동을 하는 시대를 맞게 된다. 같은 기간 경작지는 2배 정도밖에 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생존 전략으로서 이주를 선택하였다. 물론 해금이 해제된 이후에도 淸 정부는 해외 2년 이상 체류자에 대해 가혹한 처벌을 가하고 엄격한 통제 를 가했지만, 사실상 동남아시아와 연계되어 있는 福 建, 廣 東 남부 연안 지역은 지방 관리들의 융통성과 대내외의 이주 수요로 사실상 중국인들 의 동남아시아 이주는 끊이지 않았다. 비단 생계형 노동자뿐 아니라, 상 인들 역시 투자와 이윤을 찾아 이주를 선택했다. 저자는 이들 남부의 이 주자들을 방언그룹을 기준으로, 福 建 남부[ 閩 南 ], 珠 江 삼각주의 廣 東 人, 潮 州 人, 客 家, 海 南, 복건 북부의 福 州 人, 복건 중부 지역의 興 化 福 淸 人, 溫 州 人 으로 나누어 분석을 진행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들이 경제적인 틈새 를 찾아 통로 를 구축하여 해외로 진출했다고 보고, 이 두 개의 276 로컬리티 인문학 12
키워드를 통해 이주사의 양상을 그리고 있다. 제2장 초기 식민제국들과 중국인 이주공동체 는 16, 17세기 동남아 시아 유럽 식민지의 건설 과정과 중국인의 역할을 다루었다. 유럽인들은 소수의 군사력에 의지해서 식민지를 세웠으나 다수의 원주민을 통제할 인력과 시스템이 없었다. 이에 이주한 중국인들(대부분 복건인)은 이들 식민지 당국을 위해 항구관리자, 세관징수원으로 봉사하면서 이권을 챙 길 수 있었다. 16세기 포르투갈이 건설한 말라카(후에 영국이 탈취하여 싱가포르, 페낭을 포함한 해협식민지로 발전)에는 카피탄(Kapital) 이 란 지역공동체 사무를 관할하는 부유한 중국인 상인이 원주민을 비롯한 다민족 집단을 통솔하였다. 많은 복건 중국인들은 정주 과정에서 원주민 여성과 결혼하여, 혼혈 집단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들을 바바(Baba) 라 고 부른다. 스페인은 마닐라에서 중국인에 대해서도 카톨릭으로의 개종을 비롯해 강력한 동화정책을 구사하였다. 이곳에서도 중국인과 필리핀 인디오 사 이의 혼혈 집단인 메스티소(Mestizo) 가 식민당국을 보좌하면서 지주 로 성장하였는데, 스페인 문화를 수용함으로서 이들의 정체성은 스페인 화, 탈중국화되었다. 바타비아(자바, 후의 인도네시아로 발전)를 지배하던 네덜란드는 포르 투갈과 마찬가지로 카피탄 치나(Kapitan cina) 라는 중국인 관리자를 이용해 식민지를 통제했으나, 스페인과 달리 동화가 아닌 분리주의를 취 하여, 종교적 개종이나 문화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곳에서 중국인 들은 식민 통치의 중간계층으로 세금청부, 아편청부로 부를 구축하였다. 바타비아의 혼혈집단은 페라나칸(Peranakan) 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럽 식민주의자와 중국인 사이가 늘 상생 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수적으로 소수인 지배자 유럽인들은 다수이자 경제력까지 있는 중국인을 늘 견제하였다. 그 결과는 주기적으로 반복된 중국인 대량 학 서평 境 界 人 의 역사: 화교의 어제와 오늘 277
살이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중국과의 직접교역보다는 중국 상인들이 동남아시아의 식민 도시로 와서 교역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아편 및 징세의 청부업자로 선금을 치를 수 있을 정도의 재력 은 중국 상인들만이 보유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중국인과의 공생 관계는 곡절을 겪으면서도 유지되었던 것이다. 제3장 제국주의와 대량 이주 에서는 1800년 이후 시작된 대량 이주 시대를 다루었다. 19세기에 중국인의 대규모 이주가 조직되게 된 원인, 구조, 경로와 장소에 대해 분석한다.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의 개항장 에 외국인이 거주하게 되었고, 이주 노동자를 모집하고 징발하는 사업은 법적 보호를 받게 되었다. 더구나 태평천국운동과 같은 전란이 연이어 일어나, 남부 중국의 경제가 황폐해지면서, 이주 희망자 풀을 확대시켰 다. 이주자의 주요 송출항은 홍콩과 마카오였다. 홍콩은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북미, 남미,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로 대량의 중국인 노동자를 송 출했으며 포르투갈 관할의 마카오는 주로 쿠바와 페루로 출항하는 쿨리 수송선의 주요 정박지였다. 이른바 쿨리무역은 노예제 폐지 이후 대체 노동력 공급원으로 등장했는데, 남미까지 가기까지의 운임 및 수수료를 채무로 처리하고 수년간의 강제 노동을 계약하는 이른바 연기계약이나 사기나 납치로 이뤄지는 인신매매적 노동 송출은 사실상 노예적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영국령 남아프리카 트랜스발의 금광 개발과 기아나 설탕 플랜테이션의 쿨리 노동 이용 사례에서처럼, 노동조건이 가혹하고 비인 간적인 처우가 만연한 경우, 중국인 노동자의 탈출과 반란이 연잇고 정 착은 없어서 장기적으로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공급에 더욱 효율적이고 성공적이었던 것은 채무가 경미하고 어 느 정도 자발적인 이민이었다. 원래 중국 남부의 농촌지역에는 마카오에 서 범선을 타고 농한기에 해외로 계절적 일자리를 찾은 이동이 전통적으 로 존재했고, 신용 티켓 형태의 이주 시스템이 안정되게 작동했다. 이 278 로컬리티 인문학 12
른바 신용 티켓 은 남성 노동력 일인을 송출할 경우, 그 운임과 수수료 의 일부를 친족들이 공동으로 염출하여 일종의 투자 개념으로 제공하고, 부족분은 채무(때로는 고향에 남아있는 친족의 토지 보증을 더해서) 형 태로 처리하는 방식이다. 노동자는 운임 지불 여부가 기록된 티켓을 가 지고 배에 탈 수 있다. 이 티켓에는 출신지역이 적혀있는데 일종의 연대 보증이다. 이 신용 티켓 은 운송회사와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차후에 채무 변제를 증명하는 서류를 갖춘 이후에야 노동자는 귀향선에 오를 수 있다. 19세기 대량이주는 아메리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 동남아시아 등 지 구적 규모로 전개되었다. 1848년에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된 이후 廣 東 人 을 주력으로 대량 이주가 발생하여, 1852년에는 캘리포니아 인구 의 10%(2만 5천명)가 중국인이었다.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위해 1865-69 년 사이에 고용된 1만 4천여 명의 중국인 노동자도 그 대열에 숫자를 보탰 다. 금광 열기는 미국뿐 아니라, 캐나다(1858년), 오스트레일리아(1851 년)에도 발생하여 중국인 노동자의 유입을 가져왔다. 서인도제도와 페루 의 경우, 특히 연기계약형 이주가 대부분으로 노동조건과 처우가 대단히 열악하였다. 이에 반해 동남아시아의 대량 이주는 동향루트를 통해 상당 히 안정적이었고 숫자도 압도적으로 많았다. 영국의 말라카와 해협식민 지 접수는 중국인들의 이주에 새로운 계기를 제공했는데, 영국이 말레이 반도에서 이른바 전진 정책 으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주석 산업은 안정 적 기반 위에 크게 발전하게 되었고, 주석 생산의 급증에 따라 중국 노동 자 유입도 크게 늘어났다. 시암의 경우도 영국의 압력으로 1855년 바우 링조약을 맺어 자유무역을 실시하게 되면서, 경제성장과 더불어 노동 수 요의 증가로 중국인 이주가 늘어났다. 제4장과 제5장은 대량이주가 해외 중국인공동체의 사회에 미친 영향 과 현지사회의 대응을 지역별로 다루었다. 제4장 대량 이주 시기의 공 서평 境 界 人 의 역사: 화교의 어제와 오늘 279
동체들 1. 동남아시아 에서는 유럽 당국의 중국인 경제세력에 대한 견제 와 새로운 중국인 이주자들의 세력 확장을 다룬다. 인도네시아는 네덜란 드인들의 견제정책으로 1880년대 초 중국인의 특권적 지위가 약화되었 다. 중국인들의 부의 원천이었던 아편 세금 청부는 폐지되었고, 대신 정 부가 전매하였다. 1890년 이래 페라나칸의 특권적 지위가 약화되는 대신 에, 이 시기에 새롭게 중국에서 이민해 온 중국인 이주자, 즉 토톡 들이 중국어 학교와 신문을 발행하면서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필리핀에서도 새로 이주한 중국인들이 혼혈 메스티소를 누르고 경제 적 세력을 대체해나갔다. 새로 이주한 중국인들은 플랜테이션 노동자가 되기보다는 상업과 무역에 전력하여 유통을 장악하였고 대부분 도시에 거주하였다. 이들 신참자와의 경쟁에 진 메스티소는 도소매 등 유통에서 힘을 잃고 수출 작물의 생산자, 지주로서 색깔을 더욱 확실히 하게 된다. 말라야에서 영국은 포르투갈 시대 이래의 카피탄을 없애고 직접 통치 를 시행하였고, 중국인 공동체를 장악하고 있었던 三 合 會 와 같은 비밀결 사 조직을 법적으로 규제하였다. 해협식민지에서도 새로운 이민자 토 톡 의 수가 급증했는데, 이들은 중국 출생자들이었다. 1880년대부터 부 유한 바바들은 자녀들에게 영어교육을 시키고 영국식 교육을 받게 하여 전문직화한 반면, 중국 출생자들의 토톡들은 청 제국과의 관계를 더욱 밀접화하였다. 특히 싱가포르에 1877년에 최초로 청 영사관이 설치되면 서, 이러한 연대감은 커졌다. 청은 捐 納 을 통해 관직과 학위를 판매하고 토톡들은 재정적 기여와 교환하여 청이 제공하는 위신을 살 수 있었다. 이를 경계한 영국 당국 역시 유사하게 평화의 재판관 등 명예직을 토톡 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신참자들을 끌어들이려하였다. 전반적으로 전통적 인 아편 세입 청부나 세금 청부가 폐지되는 조류 속에서, 동남아시아의 중국인들은 주석, 쌀 등 생산 가공업에 투자하는 방향을 강화하였고, 그 결과 1930년 중국인들은 시암의 쌀 도정사업의 거의 전부, 인도차이나 280 로컬리티 인문학 12
쌀 도정업의 80%, 말라야 주석광산의 3분의 2, 고무가공업의 3분의 1을 장악하였다. 제5장 대량 이주 시기의 공동체들 2. 정착민 사회 내, 외부의 배척 은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의 상황을 다루었다. 이들 지역은 노예제적 수탈은 없었고 강제노동을 폐지하는 등, 이민자에 우호적인 시 스템을 갖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중 국인 이민자에 가장 적대적이었다. 법적 수단을 이용해, 중국인들에게 시민 지위를 부정하였고, 인간 존엄을 손상시켰으며, 일자리를 제한한 끝에 아예 차단시켜버렸다. 그 원인에 대해 저자는 동남아시아, 남미와 같은 지역은 식민통치의 중간계층 혹은 노예노동의 대체처럼 중국인만 이 스며들 수 있는 틈새가 있었지만, 위의 지역들은 같은 경제적 틈새 를 두고 유럽인 이민자들과 맹렬하게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음을 들 고 있다. 북미 이주 중국인들은 대부분 廣 州 府 의 三 邑, 四 邑 출신이었다. 중국 인 노동자의 수가 피크에 달하기도 전인 1854년에 이미 캘리포니아 법정 은 중국인이 백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것을 금지하여, 중국인은 심 지어 살인사건을 목격해도 증언조차 할 수 없었다. 1859년에 벌써 중국 산 제품 불매 운동이 일어났으며, 反 쿨리클럽 이 조직되어 중국인에 대 한 집단 공격과 중국인 점원을 고용한 상점에 대한 방화가 빈발했다. 1867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는 정치권의 반중국인 정서가 확고하게 굳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선거에서 반중국인 정서는 선거의 쟁점이 되었는데, 더욱 공격적이었던 민주당이 7년 만에 공화당을 물리치고 주 정부를 장악한 것이다. 이후 반중국인 정서는 정치권에서 더욱 공세화되 었다. 중국인에 반대하는 논리는, 중국인들은 번 것을 중국에 다 가져간 다, 중국인의 특성은 미국인의 사고방식과 동화될 수 없다, 사실상 노예 인 인 중국인의 엄청난 인구가 몰려와 백인 자유인 을 압도할 것이라는 서평 境 界 人 의 역사: 화교의 어제와 오늘 281
주장이었다. 반중국인 운동에 앞장을 선 것은 백인이주노동자층에서 최 하위층을 형성하던 아일랜드 이민자들이었는데, 이들은 반중국인 활동 을 통해 백인계급의 일원으로 심리적 격상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1882 년 중국인 육체노동자의 이민 금지법안이 통과되고, 1902년에 이 조항이 영구화됨에 따라 이후 1943년까지 60여 년간 특정 인종에 대한 이민금지 가 취해졌던 것이다. 1913년 캘리포니아 주는 중국인 및 아시아인들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미국보다는 반중 분위기가 덜했지만, 그래도 1901 년에 처음으로 연방국으로 출발한 후에, 연방 탄생 후 새 의회의 첫 사업 이 이민제한법 입안이었다. 게다가 이주 허가에 영어 받아쓰기 시험을 도입하여 사실상 중국인 노동자의 유입을 원천적으로 막았다. 기존에 진 출해 있었던 중국인 상인들은 과일 사업과 무역업에서 두각을 드러냈는 데, 이러한 반중 분위기를 의식해 이들은 백인과의 경쟁을 피해 과일의 판로를 해외시장, 중국 수출에서 찾음으로서 공존을 꾀하였다. 제6장 혁명과 민족 구제 는 위와 같이 반중국인 정서의 고조와 排 華 정책의 강화 속에서, 해외 중국인들이 어떻게 모국 중국의 개량운동 과 혁명운동에 관심을 가지며, 민족주의를 고취하게 되는가를 다룬다. 동남아시아 중국인들 사이에서 민족주의는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본국 으로부터 온 활동가들에 의해 나타난 교육된 민족주의 였다 (311쪽)고 저자는 단언한다. 중국에서 발신된 민족주의적 호소에 열렬히 반응한 것 은 오래된 혼혈 중국인 공동체가 아니라 새로 이주한 중국 출생의 신참 자 토톡 집단이었다. 해협식민지와 말레이는 숫적으로 토톡이 바바를 압도했고, 태국은 양자가 비슷했으며, 인도네시아 자바는 혼혈집단인 페 라나칸이 토톡보다 3대 2 정도로 많았다. 1854년 네덜란드 당국은 페라 나칸을 동양 외국인 으로 구분하여 인도네시아 원주민과 같은 법적 지 위로 격하시키고, 1899년 일본인에게는 유럽인과 같은 지위를 부여하였 282 로컬리티 인문학 12
다. 원주민에 대해 제2공민으로 우월의식을 가져왔던 페라나칸은 식민 지 당국의 푸대접 속에서 열패감을 느끼고, 점차 모국인 중국 문화를 통 해 문화적 정체성과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20세기 초 중국 민족주의의 조류는 동남아시아뿐 아니라 북아메리카에서도 타 올랐다. 미국에서 중국인 이주민들은 중국을 가난하고 후진적으로 보는 대중적 관념 때문에 고통을 당했고, 강력하고 진보적인 새로운 중국의 탄생이 바로 이러한 관념을 깨줄 것으로 기대하여, 중국의 개혁과 혁명 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康 有 爲, 梁 啓 超 의 개혁운동가들, 손문과 같은 혁명가들은 적극적으로 이러한 열기를 이용했다. 그러나 중국 본국과 관 련된 화교들의 이와 같은 정치적 행동주의는 결과적으로 원주민들의 중 국인에 대한 적대감을 강화시켰고, 각 지에서 반중국인 운동과 동남아시 아 민족주의에 불을 붙이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 동안 동남아시아를 침략하면서, 싱가포르의 陳 嘉 慶 과 같은 중국인 지도자들은 중국구제기금위원회를 조직하여, 항전 자금을 조달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국적을 서너 개씩 취득하여 그 증명서를 사업의 호신부로 쓰는 상황도 공존했다. 실제 많은 중국인 들은 사업은 사업 이라는 기풍을 유지했다. 20세기 전반기 해외 중국인 의 민족주의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 전략과 심리와 연관된 모자이크와 같이 복잡한 것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남아시아 각국의 독립 이후 중국인 사회를 다 룬 것이 제7장 식민지 시대 이후 동남아시아의 중국인 공동체 이다. 인 도네시아에서는 일본 점령기에 일본에 협력했던 중국 이민자들 중의 후 발 주자( 福 淸 人 )가 전후에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과도 협력하면서 정 경유착을 통해 새로운 경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자들은 초기에 대동아공영권에 호응하여 네덜란드에 반대하며 일본에 호의적이었는데, 그만큼 네덜란드의 식민통치에 일익을 담당했던 중국 서평 境 界 人 의 역사: 화교의 어제와 오늘 283
인에 적대적이었다. 전후 인도네시아 경제는 여전히 중국인이 장악했지 만 주력 집단은 교체되었다. 인도네시아 당국은 중국인들이 지방에서 소매업을 아예 못하게 하는 강력한 반중국 정책을 폈고, 10만 명이 넘는 화교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반면에 인도네시아 군부와 유착한 강력한 중국인 기업군은 후원자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더욱 발전 했다. 말레이 반도의 경우, 총리 마하티르의 정책에서 나타나듯이, 줄곧 親 말레이 정책와 말레이인에 대한 특혜를 강화했으나, 문화다원주의와 공 존을 강조하면서 인도네시아와 같은 극단적 대립은 피할 수 있었다. 그 렇게 하기에는 말레이시아에서 중국인의 수는 너무 많았고 경제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이다. 필리핀은 스페인의 통치 전통을 이어 계속해서 동화 주의를 강화했다. 1970년대에는 귀화와 출생을 통해 중국인들은 쉽게 시 민권을 가질 수 있었다. 마지막 장인 제8장 새로운 이주 는 개혁개방 이후 1980년대 이래의 新 移 民 을 다루는데, 앞에서는 크게 다루지 않았던 溫 州 商 人 에 대한 분석 이 많다. 저자는 1500년대 이후를 이해하는 데, 나는 이민이 빠진 중국사도 중 국사가 빠진 이민도 적절한 연구 방식이 아니라고 본다 (본서, 18쪽)고 지적했는데, 이 주장에 대해 평자 역시 전적으로 찬성한다. 특히 근대 중 국의 경제사나 재정, 무역을 연구하는 경우에 해외 화교의 영향은 직접 적이며, 근대 문물과 문화의 도입에 있어서도 빠뜨릴 수 없다. 그러한 면 에서 국내 사건의 전개로 기울어진 역사 서술을 보다 다채롭게 할 수 있 는 좋은 입문서를 이 책은 제공하고 있다고 하겠다. 다만 2006년의 강좌 를 처음 들었을 때에는 대단히 신선했던 것이, 최근 몇 년 사이에 화교사, 이주사에 대한 연구 성과가 밀물처럼 쏟아지면서 상식처럼 되어버린 지 284 로컬리티 인문학 12
식이 많아진 관계로, 지금 이 책을 일독하면 대체로 익히 알고 있는 내용 이 대부분이 되어버려, 다소 김빠진 맥주가 되어버린 감은 있다. 또 2006 년 여섯 강좌의 내용이 크게 수정되지 않고 담긴 관계로, 각 장별로 중복 서술이 많고 시대순의 전개가 이뤄질 뿐 유기적인 연계가 약한 것은 아 쉬운 점이다. 번역에 있어서도, 영어 번역이 쉽지 않고 이렇게 번역이 되 는 것만으로는 국내 독자에게 감사한 일이지만, 어렵지 않게 눈에 띠는 오타와 오역, 또 직역이 비문이 되어버린 문장들은 개정판을 낼 기회가 있다면 수정을 바란다. 또 타이, 태국이 혼용되고 있는 것처럼, 전체적으 로 원어표기와 한자표기가 섞여 있어서 혼란스러운 점 역시 조금 더 편 집의 공력이 아쉬웠던 부분이었다. 서평 境 界 人 의 역사: 화교의 어제와 오늘 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