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 무 형 문 화 유 산 자 원 한국 무형문화유산 자원 5 5 나 전 장 나전장 한국 무형문화유산 자원 1 2 3 4 5 6 도독곡 창극 옹기장 불천위 제례 천일염 시조창 독서성 구들장논 나전장 풍어제 발간등록번호 11-1550246-000008-01 ISBN 978-89-299-0491-3 93600
한국 무형문화유산 자원 5 나전장
나전장
일러두기 1. 국립무형유산원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근거하여 우리나라 무형문화유산 자원파악을 위 한 조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2013년에 조사된 나전장 에 대한 현지조사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2. 보고서는 한국의 무형문화유산으로서 나전장 이 갖는 의미와 더불어 전국적으로 전승되고 있는 사례를 수록하여, 유산의 전승현황을 종합적으로 살피고 있습니다. 개별 사례는 지역별로 기술(경기, 강원, 충청, 전라, 경상 순)하고 해당 지역 내에서는 가나다순으로 정리하여 유산의 전국적 현황을 파악하도록 하였습니다. 3. 이 보고서의 원문(PDF)은 국립무형유산원 홈페이지(www.nihc.go.kr)에서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발간사 무형문화유산은 인류 문화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유네스코는 이를 보 호하고자 무형문화유산 보호 협약 을 제정하고, 협약에 가입한 각 나라들이 자국의 무형문 화유산 목록을 작성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이에 우리나라도 협약의 당사국으로서 목록 작 성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유네스코 보호 협약 체제는 무형문화유산의 보호에 대한 인식 체계에도 변화를 가져와 무 형문화유산이 그것이 전승되고 있는 지역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소중한 문화자산이 라는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문화가 곧 국가 경쟁력인 시대에서 무형문화유산은 자국의 전통문화이면서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문화 자원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습니다. 국립무형유산원은 무형문화유산 보호에 대한 환경 변화에 맞춰 국가 목록 작성에 필요한 무형문화유산 조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발간하는 보고서는 나전장 의 전승 현황 과 사회 문화적 기능, 그리고 전승을 위한 보호조치 등을 수록하여 유산의 현재적인 모습 과 함께 앞으로의 전승 가능성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가 우리나라 무형문화유산 국가 목록 작성 에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인류 문화 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데에 이바지하기를 기대합니다. 보고서가 나오기까지 유산의 전승 현 장을 직접 조사하고 기록하여 주신 조사자들과 조사에 응해주신 전승자 분들께 깊은 감사 를 드립니다. 2014년 12월 국립무형유산원 원장
목차 Contents
나전장 007 무형문화유산으로서 나전장의 전승과 지속 041 경기 042 강원 179 충청 186 전라 194 경상 225 Abstract 301
전통공예기술 나전장
한국 무형문화유산 자원 5 나전장 장경희 한서대학교 교수 1. 나전장의 정의 및 소개 나전칠기는 나무를 이용하여 백골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전복껍질 등을 가공한 자개를 아교 및 어교로 붙여 각종 문양을 나타낸 후 칠을 발라 완성하는 한국의 전통공예기술이다. 한국에서 나전칠 기는 오랜 역사 속에서 전승이 이루어져 왔다. 이중 옻나무에서 채취한 칠을 활용한 기술은 이미 청 동기시대까지 연원이 올라가고, 전복껍질의 자개를 이용한 기술은 통일신라시대에 발생하는 등 오 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목기나 목가구 등에 문양을 시문하는 나전일은 고려시대 이래 현재 까지 한 중 일 동아시아 삼국 중 유독 한국에서만 특별히 발전하여 우리의 민족 문화를 대표하는 무형문화유산이자 공예 기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일은 우리 민족 의 역사와 더불어 성장 발전해왔으며 그 재료에 해당되는 나무나 자개 및 칠을 다루는 자연지식도 함께 전승되어 왔다.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장인, 즉 나전장은 국가에서 동원하였고, 그들 이 제작하는 제품은 왕실이나 귀족들의 전유물로 사용되었다. 때문에 나전칠기는 그 시대의 미감을 표출하는 문양이 반영되어 당시대의 자연을 다루는 기술이나 우주에 대한 지식이 양식적으로 변천 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고려시대에는 불교적 미의식을 반영한 문양을 시문한 나전경함( 經 函 ) 등을 주로 제작하였는데, 이로 인해 자개를 잘게 끊어서 만드는 기법이 크게 성행하였다. 반면
나전장 8 9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유교적 미의식을 반영하여 관복함이나 여성용품의 제작이 많으며, 포도문양이 나 십장생과 같이 자손을 다산하고 장수하며 부귀하길 바라는 길상적 성격을 반영한다. 이러한 다종 다양한 문양은 주름질 기법으로 제작하였다. 이렇게 나전칠기에 반영된 문양은 시대에 따른 예술적 미감을 표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것을 제작하기 위한 기법의 발전도 도모하였는데, 특히 전복 자개를 어떻게 다루어 문양을 시문하는가에 따라 기술적인 발전 양상이 달라졌다. 곧 고려시대 이래 자잘하고 섬세한 문양은 잘게 끊는 기법으 로 제작하였으며, 칠기 면을 회화적 공간으로 보아 십장생 문양 등을 처리할 때에는 주름질 기법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그밖에 선적인 처리나 모서리의 강화를 위해 동선이나 은선을 감입하거나 전복 조개에서 찾을 수 없는 색상을 표현하기 위해 대모껍질을 갈아 복채기법을 사용하거나 부분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상어껍질을 펴 바르기도 하는 등 다종다양한 기법이 전승되었다. 고려에서 조선 및 한말 일제시대, 현대로 내려오면서 나전칠기의 사용자는 점차 확산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왕실이나 귀족 계층에 제한되었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사대부가 및 부유한 상인 등이 사 용하다가 한말 이후 현대에는 보다 더 수요가 늘었다. 어쨌든 좌식 생활을 영위하던 전통적인 우리 의 주거 공간에서는 나전칠기는 안방에 의복 등을 넣어둘 장롱이나 반닫이가, 사랑방에 책을 넣어두 던 함궤나 상자 등 각종 수납가구로 애용되어 왔다. 시기가 내려오면서 집의 규모가 커지면서 부피 가 큰 장롱 제작이 성행하는 변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오늘날에는 아파트와 같은 입식구조로 가옥형태가 변화 하면서 장롱 뿐 아니라 화장대와 콘솔 등 다종다양한 형태로 새롭게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도 나전칠기는 전통적인 공예품으로서 나름대로 독특한 한국적인 문양을 지니고 있음을 누구나 인 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관념이 현대에도 이어져 국내는 물론 외국인들에게까지 한국 을 대표하는 전통공예품이자 상징으로 여겨져, 관광상품이나 소형 소품의 문화상품이 대량으로 제 작되는 추세이다. 곧 거울, 명함 케이스, 핸드폰 케이스, 액세서리 등 다종다양한 실생활용품이나 선 물용품이 대량으로 제작되어 유통되고 있다. 이렇듯 나전칠기는 필요에 따라 실생활에 필요한 용품 으로 제작되었으며, 향후 또 다른 수요가 생기면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변화될 가능성도 무궁무 진하다.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자연 환경이나 생산 방식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 무형문화재로 지 정되는 동안 변화되었으며, 판매구조가 변화하면서 문화유산의 지속가능한 성장에 어려움을 겪는 추세이다. 무엇보다 먼저, 나전칠기를 만들고 생산하는 데 필요한 재료인 나무 자개 옻 등의 수집 과 구득의 문제이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 이후까지는 나전칠기가 조선미술전람회나 세계박람회 에 출품되거나 일부 계층이 선호할 뿐 그다지 수요가 많지 않아서 국내산으로 충당이 가능했다. 그
한국 무형문화유산 자원 5 러나 1960~1970년대 근대화 이후 1990년부터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나전칠기의 수요가 늘자 그 것을 생산하는 각종 재료를 해외의 수입품에 의존하게 되었다. 둘째, 나전칠기 작업의 공정마다 사 용하는 시설이나 도구의 현대화와 기계화되는 문제이다. 해방 이후 근대화 이전까지는 인건비가 저 렴하여 소규모 공방에서 수공작업으로 나전칠기 제작의 상당수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1990년대부터 수요가 증가되자 인건비가 올라가고 대규모 공방에서 시설이나 도구를 기계화 하여 자개 등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수반되어 무형문화재 보유자나 작가를 중심 으로 하는 1인 공방의 수공예품과 명인이나 명장 등이 운영하는 대형 공방에서 기계 생산으로 대량 제작하는 생산 방식으로 작업구조가 이원화되었다. 셋째, 나전칠기 제품의 생산과 판매의 문제이다. 전통적으로 지방과 서울, 소품과 작품, 가구와 문화상품 등 이분화 되면서 작업 단계가 다양하게 분 화하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의복을 담아 수납하기 좋은 가구로 규모가 작으면 함궤, 규모가 크면 가구 등을 생산하였는데, 각 시대마다 자연이나 우주에 대한 이해의 정도 및 사유체계를 표상 화한 문양을 시대 양식으로 발전시켰으며, 최고급 기술로 장식성이 강한 나전칠기의 제작 필요성을 느꼈다. 특히 나전칠기의 수요가 증가하는 조선시대 내내 이것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각종 재료들은 국가의 통제를 받은 국가 기간산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를 위해 국가에서는 백골에 해당되는 각 종 나무의 종별과 생산지 및 개수를 파악하거나, 전복 조개의 생산지를 확인하거나, 표면을 마감하 는 옻나무의 산지를 국가의 관리 하에 두었다. 그러면서 더 좋은 재료를 수급하려는 자연 지식이 다 양하게 발전하였고, 제작 기술을 발전시키려는 과학적 방안도 마련되었다. 따라서 나전칠기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무형문화유산임을 알 수 있다. 우선, 나전칠기는 우 리 민족의 고유한 수납가구이자 선물용품으로 기능한 것이다. 다음, 나전칠기는 시대의 미감을 반영 하는 심미적 대상으로서, 자개로 표현하는 문양은 그 시대 사람들의 자연관이나 우주에 대한 지식을 집약시켜 표현한 상징적 표상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개를 자르고 오리고 칠을 발라 완성하 는 제작기술은 나전 장인들의 삶과 체험 속에서 체득되고 응축된 전통적 경험지식으로서 전승되어 왔다고 여겨진다. 2. 유산의 전승지, 전승자와 공동체의 역할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어느 집이나 안방에는 장롱 하나쯤 갖춰져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장롱은 한국인이 의복을 수납하는 중요한 용품으로서 주생활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도 하다. 전통적으 로 사대부가에서는 여자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오동나무를 심고, 그 아이가 자라 시집 갈 나이가 되 면 집안의 경제력을 과시하고자 할 때 혼숫감으로 나전칠기 장롱을 장만해 주었던 기억이 전승되는
나전장 10 11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만큼 나전칠기 장롱은 우리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핵심적인 가구이다. 이러한 나전칠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나무와 자개와 옻칠이다. 이 재료들이 생산되는 지역에 서는 다른 지역보다 해당 제품을 만들기에 용이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발전하게 되었다. 더욱이 나전 칠기를 만드는 데 사용될 자개나 옻칠 자체를 국가에서 통제할 만큼 국가적으로 긴요한 원자재였을 뿐 아니라, 그것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이 수반되기 때문에 소비가 가능한 지역에서도 함께 발전한 것도 특징이다. 때문에 해방 후 국가에서는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일이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공예기술이라고 여 겨, 이 일에 종사하는 장인을 1966년 6월 29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으로 지정하였다. 이 것은 전통공예기술 중 갓을 만드는 총모자장 양태장 입자장을 합쳐서 1964년 12월 24일 중요무 형문화재 제4호 갓일을 처음으로 지정한 이후 두 번째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만큼 나전칠기를 제작 하는 기술과 그 일에 종사하는 장인에 대한 역사적 가치나 예술적 중요성을 국가나 학계가 인지하 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나전칠기와 관련된 일과 이에 종사하는 장인들에 관심 을 갖고 보호하고자 국가를 비롯하여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렇 게 나전칠기와 관련하여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종목과 기능 보유자 중 현존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다. 우선,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송방웅(통영, 끊음질)과 이형만(원주, 주름질), 중요무형문화재 제113호 칠장 정수화(서울, 옻칠정제) 등 3명이 지정되어 있다. 다음 지방 무형문화재로는 서울특별 시를 비롯하여 지방에 나전장과 칠장 15명이 지정되어 있다. 곧 서울특별시에는 무형문화재 제1호 칠장 신중현(생옻칠) 손대현(옻칠) 홍동화(황칠) 정병호(남태칠), 제14호 나전장 정명채가 있다. 경기도에는 무형문화재 제17호 생칠장 송복남, 제24호 나전칠기장 배금용(칠장) 김정렬(나전장)이 다. 강원도에는 무형문화재 제13호 나전칠기장 박귀래, 제12호 칠장 김상수, 제17호 생칠장 이돈호, 제11호 칠정제장 박원동이 있다. 전라북도에는 무형문화재 제13호 옻칠장 이의식 김영돌, 옻칠(정 제)장 박강용이 있다. 이렇듯 나전장은 나전일과 칠일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쓰이는 만큼 나전칠장 으로 부르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무형문화유산으로 나전칠기에 대한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본 조사에서는 위와 같은 문화재청의 중요무형문화재 및 지방자치단체의 무형문화재로 제도권에서 지정되어 보호를 받는 나전장은 제외 하고, 그밖에 제도권 밖에서 나전일을 하는 장인들의 전국적인 현황과 실태를 파악하고자 지역을 안 배하여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나전칠기의 생산지역은 크게 서울 지역, 경기도 지역, 충청도와 전라 도 지역, 강원도와 경상도 지역의 4개 권역으로 구분되었다. 이들 권역별로 개략적인 전승 양상과 공동체의 역할 및 특징에 차이를 보이고 있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울 지역은 전통적으로 나전칠기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재료의 구득부터 제품의 생산과 판
한국 무형문화유산 자원 5 매 등이 고루 갖춰져 있다. 이렇게 된 것은 나전일에 종사하는 인력의 수급도 용이하며, 일 년에 수 십 차례 열리는 각종 전시회를 통하여 전문가는 물론 일반 소비자와 애호가들이 나전공예를 향수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곧 서울은 교통과 소비의 중심지로서 전국에서 생산된 모든 재료가 모이며,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계층이 많이 분포하여 나전칠기의 중심지가 되어 크고 작은 공방이 산재해 있다. 게다가 서울에는 나전칠기의 중심 재료가 되는 자개를 판매하는 상가가 밀집되어 있어 나전일 을 하는 데 유리한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서울 지역에서 주목되는 전승지로서는 성동구 왕십리 일대가 있다. 한 때 이곳 왕십리와 화 양리에는 100여 곳에 이르는 자개가게가 있었고, 종사자수는 500여 명에 달했지만, 1990년대를 전 후하여 상가는 화양리에서 본래 자개의 메카였던 왕십리로 많이 옮겨왔다. 그 후에도 전업은 계속 해서 이어졌고 지금은 10여 곳에서만 자개를 취급하고 있다. 곧 평화자개상사를 비롯하여 서울자개, 상아자개 등 여러 곳이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 재료상가에서는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국내산 자개를 비롯하여 필리핀이나 멕시코 등지에서 수입된 다채로운 형태와 색상의 자 개를 공급하고 있다. 게다가 나전칠기를 마감하는 데 필수적인 정제칠 흑칠 채색칠 칠분 등의 재료도 원주 등지의 국내산 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하여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이곳에서 는 나전칠기 가구나 제품을 제작하기에 적당한 형태와 크기 및 색상의 다종다양한 자개와 칠을 원 활하게 공급해주고 있어 서울지역이 나전칠기를 전승하기에 적합하게 만드는 토대가 되고 있다. 서울지역 나전장의 전승현황 지역 전승지 유산명칭 성명 생년 종사기간 산업 주요품목 서울 광진구 중곡3동 30-35 크리스탈칠기 김규장 1955 37 업체 가구, 작품 중곡동 229-5호 경동칠기 최태문 1955 40 업체 가구 성동구 사근동 193-42 이빈공예 최상훈 1954 44 개인 소품, 작품 성북구 정릉4동 809 개인 공방 김선갑 1952 36 개인 가구 은평구 역촌동 70-45 남해공예사 최태화 1948 46 업체 가구 강북구 수유5동 516-72 고암나전칠기연구소 오왕택 1955 31 개인 작품 종로구 부암동 148-24 공방 목 장민석 1964 6 개인 목가구 강동구 암사동 460-15 디자인 넥서스 조훈상 1960 7 개인 각종 소품 성동구 도선동 274-3 평화자개사 김영배 1952 40 업체 자개재료상 다음으로 서울에서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전승지로는 강남보다는 강북지역에 편향되어 있다. 여러 지역 중 가장 주목되는 전승지는 광진구의 중곡동, 성북구 정릉동, 은평구 역촌동 등이다. 이 지역은 해방 이후 크고 작은 공방이 산재해 있었던 곳이며, 더욱 활성화된 시기는 1960년대 산업화와 근대
나전장 12 13 화를 거치면서 경제적 여유가 생겨 판매장이 형성된 이후부터이다. 곧 1960년대 말부터 강북지역에 는 나전칠기 공방이 집중적으로 세워졌음을 알 수 있으며, 지금도 이곳의 나전칠기 공방이나 공장은 같은 곳에서 30~40년 이상 전승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명장을 비롯하여 30~40여 명의 장 인이 나전일에 종사하고 있는데, 지역적 역사는 그리 길지는 않다. 왜냐하면 중곡동 일대가 1970년 부터 면목동에 이어 서울시가 외곽을 개발할 당시의 신도시적 성격이 강한 지역이므로, 이 지역 나 전일은 1980년 이후부터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어쨌든 이렇게 강북지역에 여전히 공방이 밀집 한 이유는 이곳의 땅값이나 집세가 강남보다 싸고, 무엇보다 공간을 넓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있 다. 특히 이곳에서는 서울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가구를 제작하는 경향이 있다. 가구는 문화상품이 나 관광 소품과 달리 부피가 크고 공간을 많이 차지하기 때문에 만들 때에도 그것을 판매할 때에도 자리를 넓게 차지하므로 강북이 강남보다 유리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가구 제작으로 명성이 자자한 곳은 광진구 중곡동에 있는 크리스탈칠기 나 경동칠기, 은평구 역촌동에는 남해공예사 등 대규모 공방이다. 이들 공방을 경영하는 대표들은 대개 60대에서 70대에 해당되는 고령의 장인들로서, 40년 이상 나전칠기 일에 종사하였다. 그들 중 1960대 말부터 활동한 김규일과 1977년에 설립한 크리스탈칠기의 김규장은 형제간이며, 1968년 말 에 남해공예사를 설립한 최태화와 1973년에 입문하여 1980년에 경동칠기를 설립한 최태문 또한 친 형제간이다. 이러한 나전칠기 가구공장에서 주로 생산되는 제품은 장롱과 함께 화장대나 문갑 등 혼 수용 가구 일습을 대량으로 제작하거나 부유층을 위한 맞춤형 가구를 제작하여 공급하는 것이 특징 이다. 이처럼 대형 나전칠기 공방의 활동을 조사한 결과,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현대 나전칠기의 흐 름을 주도했다고 여겨진다. 곧 현대 나전칠기는 1960~1970년의 성장기를 거쳐, 1980~1990년대의 발전기를 지나, 2000년대의 침체기에 이르고 있음을 알게 한다. 게다가 생산방식의 변화도 주도하 여 이들 공장들이 설립될 당시인 1960년 말에서 1970년대 초에는 전통적인 수공예 방식을 유지하 였는데, 산업화 이후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나전칠기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점차 기계화 방식의 대량 생산으로 전환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와 함께 규모가 큰 나전칠기 공장에서 가구를 생산할 때 에 백골은 다른 소목 공장에서 주문해 들여오고, 공방 내에 자개부와 칠부를 분업적으로 운영하며 해당 분야마다 여러 명의 전문 장인을 두는 제작체제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계화와 분업화 경향은 규모와 형태는 달라도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중곡동 지역이 국내 최대의 나전칠기 전승지로 기능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근처에 나전칠기 를 판매하는 수십여 곳의 대규모 가구 도매상이 밀집해 있기 때문이다. 나전칠기 가구는 부피가 크 고 무거워 제작이 완료된 이후 완제품으로 시장에 내려면 운송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 도매상이 위치하고 있어 중곡동이 판매에 적격이라는 것이다. 특히 가구 판매장은 장롱, 침대, 화장
한국 무형문화유산 자원 5 대, 문갑 등 안방이나 서재 등의 공간을 풀세트로 디스플레이 하고, 여러 회사나 공장의 제품을 비교 하고 구입하기 때문에 공간이 넓어야 한다. 가구를 판매하는 도소매상의 특성상 땅값이나 집세가 저 렴한 땅에 넓은 공간을 차지해야 하는데, 중곡동은 이러한 여러 조건을 가장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고 한다. 근래 광진구 중곡동 다음으로 규모가 있는 곳은 중곡동에서 밀려나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간 광진 구 구의동이나 강동구 천호동이다. 이들 지역 또한 중곡동만큼이나 땅값이 저렴하고 넓은 공간을 확 보할 수 있어 가구 공장이 위치하기에 적합하다. 때문에 가내 수공업이나 1인 기업으로 구석구석마 다 수십 군데에서 여전히 나전칠기 작업이 이뤄진다고 한다. 특히 강동구 천호동의 경우 고급 가구 를 소비하는 강남구가 가까이 위치하여 나전칠기를 제작하기에 좋은 환경을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강북지역에서도 규모가 작은 개인 공방이 여럿 있다. 최상훈의 이빈공예, 김선갑의 개인 공방, 오왕택의 고암나전칠기연구소 등이다. 이들 개인 공방의 전승자들은 무형문화재 제도권 내 보유자 들에게 나전칠기의 오랜 전통을 배웠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곧 김선갑과 오왕택은 중요무형 문화재 제10호 나전장 김태희 보유자에게, 최상훈은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4호 나전칠기장 민 종태 보유자와 관계를 맺고 있어 주목된다. 이들 개인 공방의 전승자들은 처음 나전칠기에 입문할 때부터 보유자와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대규모 공장과 또다른 형태의 전통 나 전칠기의 지식이 전승되고 있었다. 곧 그들의 작업실이나 개인 공방에서도 일부 수입산 재료나 현대 화된 기계식 도구를 사용하지만, 스승에게 배운 대로 전통적인 국산 재료와 수공 도구를 사용하여 전통적인 문양과 형태를 여전히 고수하는 작업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오랫동안 무 형문화재 보유자의 공방 작업에 익숙해 있어서인지 스승들의 사후 나전칠기 가구의 소비가 활발해 진 1980년대 이후 대규모 공방에서 자개작업만 전담하거나, 독립해서도 여전히 1인 통합형 수공방 식의 전승을 고수하고 있다. 이 또한 이 지역 나전칠기의 또 다른 지역적 특징이다. 한편, 경력 10년 미만의 젊은 장인들이 제도권의 무형문화재 장인들에게 전통 나전칠기 기술을 교육받고, 이것을 현대 가구나 공예와 접목시키는 경향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이번 조사 대상자 중 공방 목 의 장민석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경우이고, 디자인 넥서스 의 조훈상은 대학에서 디자 인을 전공하고 졸업 후 현대 리바트가구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었다. 그들은 둘다 대학에서 이 분야 를 전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산하 KOUS에서 개설한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박명배 보유자에게 소목일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호 칠장 손 대현 보유자에게 나전칠기일을 수강한 것이다. 게다가 조훈상은 그곳에서 전통공예가에게 칠보까지 배웠다. 이렇게 배운 전통적인 작업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교육을 하거나 현대적 작품 전시 등
나전장 14 15 과 접목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전자인 장민석은 소목일에 나전을 부가적으로 가미시켜 동호인들에 게 교육하는 일을 하고 있다. 후자인 조훈상은 나전과 칠보를 결합시켜 소수의 애호가를 위한 소품 을 전시하고 나만의 명품 으로 제작하여 공급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그들의 공방은 작지만 일반 인의 접근성이 좋은 곳에 위치하고, 먼지 나고 지저분한 일반 공방과 달리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깔 끔하고 깨끗한 작업환경에서 전승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둘째, 경기도 지역은 나전칠기의 최대 소비처인 서울과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규모가 비교적 작은 전승자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다. 경기도는 서울과 가까운데, 1970~1980년대 산업화 이후 도시 개발이 되고 아파트가 세워지면서 서울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자리잡게 된 곳이다. 때문에 이곳에는 현재 크고 작은 200여 공방이 밀집해 있는데, 이곳의 대표들은 원래 서울의 외곽에 위치해 있던 나 전칠기 공장에서 일을 배웠던 이들이 독립하면서 이 지역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들 업체에서 제작하는 품목들은 문화상품이나 관광용 소품 등을 제작하는 것이 특징이다. 경기지역 나전장의 전승현황 지역 전승지 유산명칭 성명 생년 종사기간 산업 주요품목 하도읍 월산리 290-10 설화칠기 김용관 1957 42 업체 가구 하도읍 녹촌리 488-74 동양칠기 김길수 1960 30 업체 소품 일패동 272 김종민 1960 30 업체 소품 남양주시 진건읍 진관리 329 최권혁 1959 31 업체 소품 와부읍 육성리 510-1 유창근 1958 32 업체 소품 지금동 391-84 청목공예 김동숙 1960 30 업체 소품 금곡동 234-2 나승덕 1957 33 업체 소품 경기 일패동 512-21 한국칠기 배명주 1955 42 업체 가구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194 김정열 1954 36 업체 소품 고읍동 한양수자인A 이봉구 1966 24 업체 소품 성남시 중원구 은행2동 82-1 장춘철 1960 30 업체 소품 중원구 은행2동 82-1 만정공방 배광우 1977 16 개인 소품, 작품 광주시 오포읍 고산리 38-2 가야옻칠공예사 성용 1958 28 업체 가구, 소품 안산시 상록구 비늘치길 41 박미란 1969 21 개인 소품 부천시 오정구 원종2동 208-16 박만순칠기 박만순 1958 35 업체 가구, 소품 인천 인천시 가좌동 178-65 진성옻칠공예 임충휴 1949 41 업체 소품 우선 경기도에서는 북부 지역에서 나전칠기업이 발달하였는데, 이곳은 광진구 중곡동이나 성동구 왕십리 등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점이 있다. 때문에 경기도의 나전칠기 전승지역 중에서도 가장
한국 무형문화유산 자원 5 주목되는 곳이 남양주이다. 이곳에서는 관광 상품과 같은 대중적인 나전공예품이 많이 제작되고 있 는데 관련업에 종사하는 장인이 200여 명 정도가 포진하여 있다. 경기도 남양주 공방에서 나전칠기 제작은 분업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곧 이곳에서는 백골을 제작하는 업체가 8곳, 자개를 문양에 따 라 절삭하는 업체가 4곳, 이것들을 가지고 나전칠기를 제작할 때에는 자개부와 칠부의 장인으로 세 분화 전문화되어 있다. 이러한 자개를 유산지에 붙이는 붙임질과 자개의 표면이나 칠을 닦아내는 사 포질 등에는 여성 장인들도 상당수가 참여하고 있다. 이렇게 남양주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나전제작 집단을 이루고 있으며, 공방 상호간에는 정기적으 로 친목 모임을 갖고 있다. 그들은 자체적으로 적게는 한 둘, 많게는 다섯 개 이상의 모임에 참여하 며 상호 정보교환 및 친목을 도모하고 상부상조하여 나전공예품이라는 결과물을 세상에 내어 놓고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재료나 제작 도구는 대량 생산에 편리하도록 개량되어 있었다. 전통적인 지 식을 유지하기에는 생계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현대적인 개량을 통해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선된 것이다. 이러한 개량 개선을 통해 재화 만능시대에 당당히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상 품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다. 나전일을 성격적으로 분류하면 크게 작품을 제작하는 집단과 상품을 제작하는 집단으로 나뉘는 데, 전국 나전칠기 상품의 80%가 남양주에서 제작될 정도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나전칠기 상품은 대부분 나무 대신 MDF 소재를 백골로 사용하며, 옻칠 대신 캐슈를 가공하여 부착하는 형식으로 제 작되는 것이 확인된다. 또 나전칠기 제품의 핵심 재료라 할 수 있는 자개 또한 자연에서 채취된 전복 껍질이나 조개껍데기를 가공한 알자개가 아니고, 일정한 크기의 판에 자개를 붙인 판자개를 사용한 다는 점이다. 더 값싼 제품의 경우에는 자개도 아닌 자개의 문양을 실사로 찍어낸 플라스틱 필름을 사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이곳에서 제작되는 나전칠기 제품은 나전칠기의 전통 적인 지식과 많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남양주에서 주목되는 것은 자개에 그린 문양을 절삭해주는 공장이다. 나전칠기 제품과 소목 제품 을 구분 짓는 가장 큰 차이는 자개로 시문한 문양인데, 전통적으로 나전칠기 공장에서 자개부의 장 인은 톱으로 문양에 따라 자개를 하나씩 주름질하는 일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이들 절삭 공장에서 는 주름질 장인이 하나씩 하던 자개 절삭 작업을 작품이건 상품이건 자개로 제작하여 양쪽 장인들 에게 골고루 넘겨준다. 특히 상품용 판자개 100장을 포개어 한번에 같은 문양을 절삭하는 기계와 방법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기계는 다이아몬드 톱날을 장착하고 있으며 가 늘고 얇은 톱날로 100장의 자개를 켜, 나전칠기 제품이 대량 생산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준 것이 다. 양산이 가능해지고 경제 논리가 반영되면서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전통 지식에 혁신을 가져온 것이다.
나전장 16 17 물론 이와 같은 생산 구조의 개혁은 장인들이 기술로 생업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필연적인 수순이라 여겨진다. 예컨대 나전칠기 작가들 중에는 낮과 밤의 작업 형태가 다른 경우가 있다. 곧 낮 에는 생계를 위해 공장에서 기계를 사용하여 대량 생산되는 상품을 제작하고, 밤에는 공모전이나 전 시회 등에 출품하기 위해 전통적인 수공예 방식으로 작품을 병행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이렇게 영 세하게 남양주 지역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공방의 장인들은 대부분 50대 후반 이상 60대로서, 서울 강북 지역의 대규모 공방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나전칠기를 제작하던 기능인 출신이 대부분을 차 지하고 있다. 비록 그들의 기능은 전통적인 지식에 기반을 두고 있고 나름대로 우수하지만,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가장들이어서 궁여지책으로 상품 제작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남양주의 나전칠기 상품 업계는 냉엄한 현실 경제의 도전에 직면해서, 나전칠기 작업의 전통적인 공정을 시각적으로 유지하고 있을 뿐, 재료나 도구나 공정이 모두 전통에서 멀어져 있다. 자개는 알자개 대신 판자개에서 비슷한 느낌으로 인쇄한 플라스틱 소재로 바뀌고, 옻칠은 비슷한 성 분을 지녔으나 냄새가 고약한 캐슈로 바뀐 것이다. 도구는 활비비나 톱과 같은 전통 도구 대신 천공 기[드릴]나 절삭기를 사용해서 100장을 순식간에 절삭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물론 이들 장인은 대부분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데 필수적인 전통적인 재료나 도구 및 기술과 같은 전통 지식을 고스 란히 간직하고 있으나, 그 중 최소한의 것만 남기고 상당수 변질된 모습의 나전칠기를 생산하고 있 는 것이 현실이다. 한편, 경기도 지역 중에서도 성남시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전승지라 할 수 있다. 이곳에는 1994년부터 2012년까지 활동한 진성옻칠공예사 (임충휴)가 있고, 현재는 만정공 방 (배광우)이 있다. 전자를 경영하는 임충휴와 후자의 대표인 배광우는 둘 다 무형문화재 보유자와 인연을 맺고 있다. 곧 임충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김태희 보유자의 제자였던 안승권이 운영하던 조안공예사 의 직원이자 제자로서 30여 년간 전통 옻칠기법을 사사받으며 그곳 공방에서 기능을 연마하였다. 이후 1994년 진성옻칠공예사를 세우면서 독립한 장인이다. 반면 배광우는 경기 도 무형문화재 제24호 나전칠기장 배금용의 아들이다. 때문에 중요무형문화재나 지방자치단체의 무형문화재의 아들을 비롯하여 제자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재료와 도구 및 작품의 제작기술 등에서 전통적인 지식을 전승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셋째, 충청도와 전라도는 나전칠기의 전승지로서 지역적인 특징이 일치하지 않는다. 특히 충청도 지역은 다른 지역과 달리 나전칠기를 전승하는 기반이 조금 미약한 편이다. 하지만 전라도 지역은 충청도 지방보다는 조금 형편이 나은 편이며, 그중에서 광주시와 전주시는 나전칠기에 대한 전승지 로서 주목할 만하다.
한국 무형문화유산 자원 5 충청 전라지역 나전장의 전승현황 지역 전승지 유산명칭 성명 생년 종사기간 산업 주요품목 충청 전라 논산시 은진면 살포재길 21 해송공예 문재필 1962 33 업체 가구, 소품 청주시 상당구 정북동 81-4 개인공방 김성호 1957 40 업체 소품 광주시 남구 양림동 99-7 최씨공방 최석현 1957 41 개인 소품 북구 오치2동 옻칠연구소 조규열 1959 35 개인 소품 영암군 군선면 동구림리 279-3 오칠로공방 양준형 1960 42 개인 가구, 소품 익산시 금강동 868-2 장산공예사 김창진 1958 38 개인 가구, 소품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864-5 흑단공예 최대규 1951 46 개인 소품 먼저, 전주와 익산은 나전칠기가 발달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 있다. 두 지역의 근처에 위치한 남원은 일찍부터 목기와 함께 제기 제작을 위해 칠의 제작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남원 일대에는 칠 을 생산하는 옻나무가 인근 산간에서 재배되므로, 칠의 수급이 용이하여 자연스럽게 자연 유산을 이 용하는 자연지식이 전승되어 번창하였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1970~1980년대 전주 익산 남원 과 그 인근에 나전칠기 종사자들이 500명이 넘었을 정도로 번성하였고, 경제적으로 번창하면서 나 전칠기 가구점이나 재료상들이 즐비하였다. 특히 전주에는 통영, 부산, 서울, 광주 등 전국에서 많은 장인들이 유입되어 나전칠기가 자연스럽게 발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99년, IMF 사태가 발생하 고 국가 경제 위기에 처하면서 대부분의 장인과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기술자들이 이직을 하고 판 매처가 사라지면서 재료상과 가구업체 또한 서서히 소멸되었다. 그 당시 활동했던 장인들 중 일부에 해당되는 박강용, 이의식, 김을생, 김영돌 등은 이후로도 계속 전승하여 현재 무형문화재로 지정되 었으며, 여전히 활발하게 우리나라 전통나전칠기의 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예컨대 전주 흑단공예 의 최대규가 통영 전습소 출신의 박희목이 전주 서학동에 옮겨와 활동할 때 나전칠기 일을 배운 것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전주나 익산에서 나전칠기가 전승되는 이유는 이곳 의 도시 규모가 크고 인구가 많으며 경제적 여유가 많아 나전칠기 제품을 소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1970~1980년대에 이곳 전주와 남원 및 익산 등지에는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장인이 500명 가까 이 되었던 것도 이것을 여실히 증명한다. 현재 익산 장산공예사 의 김창진 또한 나전칠기의 활황기 때에는 칠부에 7~8명이, 나전부에 5명을 두었다가 현재는 서너 명으로 축소되었지만 그만큼 수요가 많은 지역에서 나전칠기의 제작이나 전승이 이뤄지고 있다. 한편, 광주 지역의 공방들 또한 서울이나 통영 지역의 나전칠기 무형문화재 등과 연계되고 있는 전승지로서 주목된다. 예컨대 광주 옻칠연구소 의 조규열은 나전칠기에 입문한지 2년 뒤, 1986년 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김태희 보유자의 제자인 신봉곤의 문하에서 배웠다. 이후 2008년까지
나전장 18 19 경기도 남양주시를 왕래하면서 다양한 나전일과 칠일 기능을 배웠다. 이렇게 서울 지역과 경기 지역 의 나전칠기 작업 방식을 수용할 수 있었다. 반면 최씨공방 의 최대규는 입문하고 2년 뒤인 1974년 통영의 장인에게 나전칠기를 배웠으며, 이후 서울에 거주하는 198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 장 심부길 보유자나 113호 정수화 보유자에게 세부 기술을 익혔다. 이처럼 광주 지역의 장인들은 중 요무형문화재 보유자들에게 전통적인 도구를 사용해서 전통 기법으로 제작하는 일을 익힌 것을 알 수 있다. 넷째, 강원도와 경상도 지역은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전통 재료나 무형문화재 보유자들 이 존재하여 전통 기술에 대한 전통 지식을 고스란히 전승하는 지역적 특징이 있다. 무엇보다 먼저 재료적 측면에서 보면 강원도는 나전칠기를 마감할 때 필요한 옻칠의 특산지이며, 경상도는 나전칠 기에 문양을 시문하는 데 필요한 전복껍질이 생산되는 바닷가가 위치하고 자개의 특산지에 해당된 다. 다음으로 강원도와 경상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이형만(원주) 보유자와 송방웅(통 영) 보유자가 현존하고 있다. 그밖에 옻칠과 관련된 장인들이 여럿 존재하고 있다. 강원 경상지역 나전장의 전승현황 지역 전승지 유산명칭 성명 생년 종사기간 산업 주요품목 강원 원주시 봉산동 1124-2 중천공방 설명돌 1951 46 개인 소품 북신동 2-6 태평공예사 장철영 1961 36 업체 소품 경남 통영시 도남동 642 대복공예사 박재성 1953 40 개인 소품, 가구 광도면 용호리 마구촌길 68 통영섭패 이금동 1951 46 업체 자개 섭패 고성시 고성읍 죽계리 542-43 서울자개사 강상용 1948 47 업체 자개 섭패 진구 초읍동 249-35 세흥칠공방 김정중 1951 42 개인 소품 초읍동 336-1 송원칠공방 강정원 1949 49 개인 소품 부산 연제구 거제2동 1259-2 菱 花 紙 공방 문철호 1961 39 개인 하청 소품 연산2동 1582-1 창강칠화공방 김영필 1948 42 개인 소품 기장군 철마면 송정리 563 철마공방 이종철 1954 40 개인 작품 교육 수영구 강암1동 118-3 성문공방 김관중 1958 43 개인 소품 상품 대구 동구 괴전동 125 아름다운공예 이종윤 1959 38 개인 소품 상품 우선,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나전칠기의 본고장은 통영을 비롯한 경상도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통영 출신의 장인들이 서울, 부산, 광주 등지를 거점으로 대도시 지역으로 확산되어 어 느 곳에서나 활발하게 활동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해방 이후 통영에 설립한 나전칠기양성소 혹은 통 영나전학원의 기술력이 우수했음을 나타낸다. 현재 통영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송방웅 보유자가 있고, 그의 조교나 이수자 등이
한국 무형문화유산 자원 5 여럿 있는데 태평공예사의 장철영 또한 그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지역에는 나전칠기에 종사하는 장 인이 매우 많은데 그중 명장 박재성이 작업하고 있다. 그밖에 통영 출신의 나전칠기 제작 장인이 가 장 많은 곳은 단연 부산지역이다. 통영과 인접해 있고 인구가 많기 때문에 1970~1990년대에 나전 칠기가 가장 성행하였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전국적으로 통영 출신의 수많은 장인들이 종사하고 있 는데, 대부분 규모가 큰 작업장이나 업체, 유명한 장인은 대다수가 통영 출신이 많다. 다음, 통영 이외의 지역에서 통영 출신 장인이 가장 많은 곳은 부산 지역이다. 부산은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통영에서 이동을 해서 공방을 차려 나전칠기 제품을 제작했고, 인구가 많고 경제적으로 여 유가 있어 나전칠기의 소비가 많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지리적 여건, 사회문화적 여건, 환경적 여 건에 의해 특히 많이 분포하는 경우이다. 현재 부산지역에는 통영출신 나전칠기 작가들이 다섯 명 남짓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의 유산 활동은 통영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다년간 발전하여 부산만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그중 철마공방 이종철이나 송원칠공방 강정원 또한 통영에서 부산으로 거 처를 옮겨, 부산에서 나전칠기 유산의 맥을 지켜가고 있는 몇 안 되는 장인 중 하나이다. 성문공방 김관중은 통영 출신 주기태에게 나전칠기 기법을 배웠고, 이성운에게는 끊음질을 배웠다. 이들 장인들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1970~1990년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구류부터 소품까 지 나전칠기로 제작한 것들을 소장하길 원했고, 서양식 가구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때문에 이 들 통영 출신 장인들은 전통적인 장식 재료로 전복껍질을 비롯한 자연유산에 대한 지식을 전승해 왔다. 현재는 통영을 비롯한 앞바다에서 채취하는 전복껍질 이외에 뉴질랜드나 멕시코 및 필리핀 등 지에서 수입되는 얼룩이, 야광패, 색패, 진주패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있어 자연유산에 대한 전 통지식의 전승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또한 도구의 경우 기계화되거나 개량화되었으며, 기능 이나 기법 또한 현대화되면서 전통유산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데 근본을 두고 작업하는 장인은 그다 지 많지 않은 편이다. 이들 장인들은 가구류와 함께 관광상품, 기념품, 공예품, 액자류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고 많은 종류의 상품과 작품을 제작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한편, 강원도 원주에서 활동하는 중천공방 설명돌 또한 원래 통영 출신으로 1966년부터 입문했 는데,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김봉룡의 제자인 김경일의 공방에서 나 전일을 다시 시작하였다가, 이후 인천, 부천, 제주도, 통영 등지의 작업장을 전전하였다. 14년 전, 현 재의 원주로 이사하면서 작업실을 운영하고 있다. 초기에는 나전칠기가 활성화된 시기여서 안방가 구류를 주로 제작하였으나, 지금은 통영상이나 생활가구류 및 소품 등을 많이 제작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전국의 나전장을 조사한 결과, 현재 전국적으로 전통적인 방식으로 나전칠기를 제작 하는 공방들은 대략 20~30여 곳이다. 조사에 응하지 않은 장인이나 통계에 누락된 장인들을 감안 하더라도 대략 40여 곳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대개 한 명의 대표가 활동하는 전승공동체의
나전장 20 21 숫자라고 할 수 있으며, 공방에 소속되어 자개를 다루어 주름질을 하거나 끊음질에 종사하는 전승자 는 적어도 100여 명이 될 것이라 여겨진다. 실제로 나전칠기 공방은 개인 공방이 가장 많지만 그 밖 에 규모가 큰 공방 내에는 적으면 1~2명, 많으면 7~8명 안팎의 장인들이 피고용인으로 소속되어 끊 음질이나 주름질 및 색칠 작업 등의 부분적인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4호 끊음질장(후일 제10호 나전장으로 통합됨)으로 인정된 심부길 보유자의 경우, 뛰어난 끊음질 솜씨에도 불구하고 김봉용이나 정수화 등이 운영하는 대형 공방을 전전하였던 것에 서 알 수 있다. 현재 30여 곳의 나전칠기 공방이 존재하는 전승양상은 과거와 매우 다르다. 곧 나전칠기 일이 호 황을 누리던 1970~1980년대 서울지역에는 자개를 공급해주는 자개사가 성동구 왕십리 지역에는 100여 곳이 넘었고, 통영지역에서 자개를 가공하는 섭패장인만 300여 명이 넘었다. 통영지역에서 나전칠기를 제작하던 공방은 100여 곳, 전주 지역에만 300여 곳, 부산지역에도 100여 곳 등 엄청난 숫자의 크고 작은 공방이 존재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현재는 그 전승력이 매우 약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특히 1999년 IMF 경제사태 이후 경제적으로 위축되면서 나전칠기의 수요가 급격하게 축소되 었다. 당시 서울지역의 경우 신혼 부부의 혼수감으로 구입하던 나전칠기 장롱이나 화장대 및 문갑 등의 혼수가구 일습은 위축되었으나, 중년층의 나전칠기 수요는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이렇게 다른 지역의 나전칠기 수요가 줄어들던 때에도 서울의 수요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나, 2005년 이후 부 동산 경기가 침체되자 혼수가구는 물론 중장년층의 고급 나전칠기조차 구입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규모가 큰 가구류의 제작은 줄어들었으나, 문화상품이나 관광용품와 같은 소품의 수요는 늘어났다. 이러한 제작 품목의 변화는 나전칠기의 재료나 도구 및 제작기술이나 기법 등 전통 지식 이 엄청나게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나전칠기 재료의 경우 원래는 통영 앞바다 등지에서 자 연산으로 채취하던 전복껍질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양식을 통한 인공산 전복껍질로 바뀌거나 중 국 필리핀 뉴질랜드 멕시코 등지의 외국에서 수입한 야광패 얼룩패 진주패 색패 등 다종다 양한 외국산으로 변화하였다. 둘째, 나전칠기를 제작할 때 많은 시간과 노동력을 요구했던 분야에 사용된 도구들이 대부분 기계화되었다. 예컨대 나전칠기 표면에 문양을 만들고자 자개를 일일이 자 르는 데 사용하던 톱 대신 전동식 절삭기를 사용하고 있다. 톱이 자개를 한 장씩 자르던 데 비해 절 삭기는 다이아몬드 톱날로 만들어져 자개 100장을 순식간에 세밀하게 잘라 시간을 단축하고 노동 력을 줄였다. 이에 주름질에 종사하던 장인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자개를 잘라 백골 위에 붙이 고 칠을 할 때 전통적으로 귀얄이나 칠붓 및 칠주걱 등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을 전동화시켜 핸드피 스나 콤프레서 등으로 바뀌었다. 셋째, 제작과정에서 백골일은 소목장에게 주문해서 들여온 다음, 자개부와 칠부로 구분되어 작업하며, 그 뿐 아니라 도안 작업이나 유산지에 자개를 붙이거나 색분을
한국 무형문화유산 자원 5 칠하는 방법 등으로 세분화되어 여러 명의 장인을 동원하여 분업적으로 제작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규모가 큰 공장이나 업체에서 사용하는 것이고, 중요무형문화재를 비롯하여 그들에게 전승을 받은 장인들은 여전히 1인이 그 모든 작업을 수작업하는 점은 큰 차이이다. 다만 최근 전통 나전칠기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커지면서 전통적인 재료와 문양 및 제작방식 등 을 선호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결국 나전칠기의 제작방식은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는 데서부터 최 신의 기술을 도입한 방법까지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과거와 비교할 때 나전칠기의 사회적 수 요가 많이 축소되긴 했지만, 여전히 전통 가구로서 선물용품 등으로서 나전칠기의 필요성은 유지되 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유산의 관련 지식과 기술 전승 역사적으로 나전( 螺 鈿 )이라는 용어는 당대의 옥 보석 대모 상아 등을 병용 장식하는 보전( 寶 鈿 )에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표현법이 당시 삼국으로 도입되어 그 나라의 정서를 반영하면서 발전되 어 오다가 통일신라로 합병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나전이라는 개념과 자 재라는 용어를 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자개는 조개를 가공하여 얻 어지는 재료를 말하는 것이고 나전은 기물의 장식 및 회화적인 표현을 목적으로 자개 보석 대모 등을 활용하여 제작한 미술품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나전과 구분되는 한국 나전의 특징은 자개를 포함하여 대모와 보석 및 금속을 병행 하는 것에서 그 차별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지극히 중대한 사안으로 우리는 삼국시대부터 나전 이라는 본래의 개념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화각공예 역시 나전문화의 범주에 속 한다고 볼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서도 본래 나전 개념이 있었지만 그대로 전 승되어 오고 있는 곳은 현재 한반도뿐이다. 일본의 쇼소인[ 正 倉 院 ]에는 자개 보석 대모 등을 활 용하여 제작한 유물이 많은 수를 점유하고 있다. 모두 당( 唐 )의 유물로 간주하고 있지만 백제 의자 왕이 하사한 바둑판이 한국에서 보전( 寶 鈿 )기법으로 만든 것으로 밝혀졌고, 오늘날까지 나전의 원 의미대로 제작에 임하고 있는 한국 나전의 역사에서 그 제작의 진위를 다시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 다. 즉, 나전은 우리의 비빔밥문화와 상통하고, 한국은 지금도 나전의 나라지만 동아시아 3국 중 중 국과 일본 등은 현재 엄격히 말하면 나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 동남아지역에서 나전칠기 작업이 성행하는 베트남의 나전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의 경우 프랑스의 지배를 받 은 뒤부터 나전칠기기법 대신 칠화( 漆 畵 )기법에 그 자리를 내어 주고 말았다. 결국 한국은 지구상에 서 특이하게 천 년 이상의 세월을 초월하여, 나전칠기가 전통 공예기술로 여전히 지속되고 전승되어 문화유산으로 기능하는 유일한 나라라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전장 22 23 이렇게 천여 년 이상 전승되어온 한국 나전칠기는 목재[ 白 骨 ] 자개 옻칠이라는 핵심재료로 이 뤄지며, 이것을 다루는 장인의 기술에 내재한 전통지식은 크게 4가지 범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나전칠기의 재료인 나무와 자개 및 옻에 대한 지식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전칠기의 형태를 구성하는 백골은 소목장에게 주문을 해서 제작하기에 소목장의 영역이지만, 나전장인은 소목장이 짠 나무 기 물 위에 자개를 붙이고 칠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나무를 고르는 고유 지식과 경험 지식을 갖추고 있다. 이와 함께 나전장은 나전칠기 작업의 핵심 재료인 자개나 옻의 성질에 대한 고유한 지식을 가지고 좋은 재료를 고르고 나름대로의 판단기준과 경험지식을 갖추고 있다. 둘째, 나전장이 자개를 오리고 붙이는 과정에서 습득하고 있는 몸에 체득된 신체기술과 관련된 지식이다. 여기에는 자개나 옻을 다 룰 때 손의 연장으로서 몸의 일부처럼 사용되는 도구에 대한 지식도 포함된다. 셋째, 나전장이 자개 로 표현하는 문양은 당대인들의 사상이나 감정이 응집된 경험적 지식이다. 자개의 문양은 시기에 따 라 변천되었는데, 그것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문양내용이 달라진 때문이다. 아울러 이것은 민족에 따른 취향의 차이도 반영되고 있어 우주적 철학적 지식까지 포괄하고 있다. 넷째, 나전칠기 기물을 옻장에 넣어 완성시킬 때 활용되는 자연에 대한 지식이다. 이것은 기물을 형성하는 나무나 문양을 나타낸 자개를 붙이고자 칠한 칠은 일정한 온도와 습도 상태에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고 착된다. 이것은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한 지식으로서의 능력이다. 이처럼 나전장이 나전칠기를 제작 하는 데 필요한 지식들은 자연과 우주에 대한 지식이 포함되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첫째의 재료와 넷째의 온 습도는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자연에 대한 경험적 지식으로 나전칠기 장인만 의 고유한 영역이다. 반면, 둘째의 도구와 셋째의 문양은 몸과 마음으로 체득한 우주에 대한 경험적 지식들로서, 전통공예에 공통되는 영역이다. 천 년 이상 최고의 전통 기술로 자리매김한 나전칠기의 근간은 그것을 제작하는 데 간여한 다양 한 종별의 장인 집단의 경험지식에 의거한다. 이렇게 다양한 종별로 구성된 나전 장인의 작업은 다 음과 같은 8가지 과정으로 전문화되어 있다. 1 목재선별과 백골제작[소목장] : 나전칠기를 만들 기물 형태의 백골 제작 2 패류채취와 원패가공[섭패장] : 원패를 분류하여 자개의 두께 색상 크기별로 가공 3 옻칠의 정제[칠장] : 옻나무에서 채취한 생칠을 정제하거나 색을 넣는 과정 4 칠기 문양 도안[도안사] : 기물에 어울리는 적절한 문양의 선택과 도안을 그리는 과정 5 자개의 선별과 절삭[절삭공] : 문양에 어울리는 자개선별 및 자개의 절삭 6 자개 붙임과 문양 시문[붙임공] : 무늬에 따라 유산지에 자개를 붙이고 문양을 조정 7 칠 도장[칠일] : 칠기용 백골에 묽은 칠과 목재결 나타내기 및 하 중 상칠로 도장
한국 무형문화유산 자원 5 8 평탈 마감 : 밑칠 위에 자개를 시문하고 표면을 갈아서 평평한 표면으로 나전 완성 이러한 작업은 크게 백골 제작 작업, 자개 장식 작업, 옻칠 작업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때문에 본 조사에서는 백골을 다루는 소목일, 자개를 제작하고 오리는 자개일, 옻을 채취하고 정제하여 칠하는 옻일 등으로 구분하여 경험지식이 전승되는 것이다. 현재 활동하는 나전장인들의 전통 지식이 어떻 게 전승되는지를 살펴보기 위하여 중요무형문화재나 시도 무형문화재 및 명장 등 제도권에 속한 장 인 이외에, 나전칠기 일을 전승하는 장인들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다음의 표와 같이 세 분야로 크게 나뉘었다. 백골, 자개, 옻칠 관련 장인의 분야별 전승현황 백골-소품 자개, 절삭 옻 채취, 정제 석일공예 : 백골(함, 쟁반, 상 등) 제작 평화자개 : 자개 판매 평화자개 : 옻 판매 오영길 : 경기 남양주(소품 제작) 이금동 : 통영(통영섭패) 남기만 : 원주(옻칠) 김영성 : 경기 남양주(소품 제작) 강상용 : 고성(서울자개) 김정중 : 원주(칠) 윤경일 : 경기 남양주(장농백골, 소품) 박재홍 : 왕십리(중앙공예) 이현양 : 원주(칠) 임재만 : 경기 용인(소품 겸용) 김용환 : 왕십리(성도공예) 설명돌 : 칠 10kg 구입 하원기 : 경기 용인(소품 작업) 이근우 : 왕십리(현대조각) 이종철 : 중국생칠 20kg 임재만 : 경기 용인 박동순 : 경기 광주(장농백골, 일반가구) 이상배 : 경기 광주(원목작업) 김의용 : 경기 광주(소목장) 김영목 : 경기 광릉 임영율 : 경기 고양 장경춘 : 경기 구리(원목 및 가구 전문작업) 심기조 : 경기 포천(가구전문) 이종관 : 경기 덕소공방 : 갈이류 주문 김관중 : 부산, 소품류의 백골 직접 제작 강정원, 최규열, 이종철 : 건칠 백골 직접 제작 장영균 : 왕십리(형제공예) 김형동 : 왕십리 김영수 : 태릉 이두범 : 중랑구 김남용 : 중랑구 이상식 : 경기 양평 이동근 : 경기 남양주 김동숙 : 남양주(청목공방) 임경철 : 경기 성남 최석현 : 광주 섭패 확보 김창진 : 제주도 전복패 곧 나전칠기일은 목재[백골], 자개, 옻칠과 같은 재료에 대한 경험지식이 전승되는 것이어서, 이 것이 각각 세분화되고 분업적이며 전문적인 과정을 통해 나전칠기가 제작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나전장 혹은 나전칠기장의 나전일은 자개시문과 평탈 작업 등 최종 작업에 절대적인 비중을 두고 있는 상황이다. 그 밖에 제품을 구성하는 백골일, 원패 가공, 자개 절삭일 등은 외부에 의뢰하고 있
나전장 24 25 어서, 각각의 전승실태를 파악하여야 나전칠기일의 지속가능성이나 전승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사료된다. 나전장인이 사용하는 백골은 소목장이 애용하는 목재와 다르다. 때문에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장 인들은 칠기용 백골을 제작할 때 가구나 창호 및 목공소품 등을 제작하는 일반 소목장과는 달리 나 전 백골 소목장을 전문적으로 따로 두고 있다. 그와 더불어 나전칠기의 문양을 만드는 패류는 넓은 대양을 끼고 있는 국가에서 전세계에 공급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패류를 수거하는 현지인을 두고 그 패류를 전문적으로 수입하는 집단과 이 원패를 사용처에 적합하고 아름다운 광채를 발할 수 있도록 가공하는 섭패공이 따로 구분되어 있다. 이렇게 가공된 자개를 선별하여 문양에 따라서 자개를 종류 별로 주름질하는 절삭공, 최종 자개부착 후 공예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마감칠을 하는 칠공의 역할이 나 지식 또한 자못 크다. 때문에 일부 나전칠기 공장에서도 칠부와 자개부를 별도로 두고 그들의 경 험지식과 기술 전승을 도모하고 있다. 백골에 묽은 칠을 하고 목재결을 나타내거나 하중상( 下 中 上 ) 칠을 올려 밑칠을 완성하는 칠부는 개인보다는 집단으로 별도 존재시켜 그들의 경험지식을 전승하기도 한다. 문양에 어울리는 자개를 정하여 유산지 위에 문양대로 붙임질하거나 유산지의 자개 문양을 백골 위에 올리고 지짐질하는 자 개부 집단도 별도로 존재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무엇보다 먼저 나전장은 기물을 설계하고 의도에 맞는 적절한 문양을 도안한 후 백골제작을 의뢰하고 자개절삭과 제반 작업을 수행하여 설계 한 대로 나전작품을 제작한다. 때문에 현재 나전장의 전승 방식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분업화, 전문화되어 있다. 곧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일은 백골 위에 옻칠이 칠해진 기물 위에 계획된 문양대로 자개를 자르고 그것을 붙이고 옻칠을 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재료와 일이 분업적 작업 방식으로 이어져 있다. 이러한 재료를 백골, 자개, 옻칠로 나눌 때, 백골은 소목장, 자개는 섭패장, 옻칠은 칠장과 상호 관계를 맺으며 제작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나전일은 자개를 끊음질하거나 주름질하는 장인만 나전장으로 지정되 어 있어서 그나마 보존이 될 뿐, 그밖에 작업을 함께 해야 할 다른 분야는 장인의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아서 사라지게 될 위기에 처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것은 현재 나전일을 하는 산업체나 개인 공방 중에서도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 규모가 큰 크리스탈칠기, 경동칠기, 설화칠기 등에서는 백골을 주 문 제작하지만, 칠일을 하는 칠부와 자개를 붙이는 나전부는 이원화되어 있었으며 여러 장인을 소속 시켜 운영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물론 1970~1980년대 나전칠기가 활성화되어 제작 물량이 대량 이었을 때에는 도안사를 따로 두고 문양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이래 현재까지 나전칠기의 전과정은 나전장이 혼자서 소화한 것이 아니라 백골, 자개, 옻칠 등을 부분적으로 해당 분야 전문가 와 협업하여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국 무형문화유산 자원 5 1) 백골일 나전장이 작품이나 가구 및 소품에 사용하는 백골은 스스로 제작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백골업체 에 주문하여 제작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백골의 제작 방식은 주문자인 나전장에게서 도면을 넘 겨받아서 주문 제작 형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백골업체는 피동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양자는 상호 보완적이어서, 나전장이 밀집된 경기도 남양주, 서울의 중곡동과 정릉동, 은평구 역촌동, 강원 도 원주시, 경남 통영시 등의 지역을 보면, 나전일과 백골일을 하는 공방이 밀집되어 있다. 곧 백골 제작자는 나전장 근처에 작업장이 있으며, 이곳에서 나전장이 필요로 하는 작업의 종류에 따라 목재 수종을 적절하게 선택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변형되거나 터지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제작하는 노하우로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백골 제작자를 조사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나전일의 뼈대에 해당되는 백골은 완성된 제품에 따라 가구류를 제작하는 곳과 소품 위주로 제작하는 곳으로 나눌 수 있다. 둘째, 백골 제작업체에게 나전장이 주문하는 재료는 크게 원목이나 합성목으로 구분된다. 물론 백골을 주문한 나전장은 자신이 제작하고자 하는 작품의 성격에 따라 가 격대가 높거나 내구성을 요구하는 곳에는 원목과 합판을 요구하는 것이다. 아울러 저가로 책정된 문 화상품이나 관광용품을 제작할 경우는 저가의 합성목(MDF)을 요구하여 제작하게 되는 것이다. 혹 은 대량생산을 위해 물푸레나무로 제작한 갈이틀(로구로)이 백골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백골 공방이나 업체도 나전일을 하는 곳과 마찬가지로 1~2인이 종사하는 등 영세하다. 특히 수요 에 비해 백골로 제작할 국내산 원목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는 것도 이 분야의 발전에 저해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작업환경 면에서 보면 백골 작업을 하는 동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작업해야 한 다. 영세하여 집진 설비를 마련하기 어려운 작업환경이어서 깨끗하고 세련된 공간에서 근무하고 싶 어하는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요인이 된다. 때문에 젊은이들이 이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장인들 의 연령이 노후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나전일의 다른 분야와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백골업체는 작업환경 개선이 급선무이고, 주문받는 작업내용이 저가에서 고가까지 골고루 있어 기능이 발전되고 수입적인 면도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칠부의 역량이 강화되지 않으 면 기대할 수 없으므로 어느 한쪽의 보호와 지원으로 나전일의 상황이 개선되는 순기능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향후 나전일과 짝을 이루는 소목 작업을 포함한 실태조사가 종합적이고 입체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조사가 수행될 때에는 안압지 유물에서 발견되는 권태기법이나 얇은 전나무 판재를 활용한 고려 나전 경함과 같은 잊혀진 백골제작기법은 재료의 효율성이 높으므 로 원목의 모손이 많이 발생하는 갈이물 대용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나전일에 대한 규모와 위상을 밝히려면 백골인 목재를 다루는 공방이나 업체를 조사하고, 이에 대한 종사자까지 파악하여야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나전장 26 27 2) 자개일 한국은 나전칠기의 종주국으로서, 일찍부터 백골 위에 문양을 넣는 자개와 마감을 위한 칠에 대한 지식이 발전되어 왔다. 그럼에도 현재 한국의 자개의 공급이나 생산 능력은 열악하다. 국내산 자개 의 경우 수요에 비해 공급이 줄기 때문이며, 다양한 색상이나 형태를 제공하는 해외산 자개의 활용 방안을 강구하고, 자개를 제작하는 작업 여건을 개량하고 섭패 기능도 보존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조사에서 섭패일과 관련된 곳도 조사되어 그와 관련된 내용도 함께 수록하였 다. 섭패일과 관련된 곳은 평화자개, 서울자개사, 통영섭패, 청목공방이다. 자개일과 관련하여 조사 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무형유산으로서 나전 작업의 활성화는 국산 자개의 공급을 활성화시키는 방안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종래에는 통영 지역을 비롯한 남해안에서 자생하던 자연산 전복을 채취하여 크고 빛 깔이 영롱한 자개를 공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복이 생산되는 바다의 자연환경이 변화되고 생태 계가 파괴되면서 전복을 생산하고 공급하는 방식도 변화되었다. 곧 근래 바닷물의 온도가 상승하면 서 자연산 전복이 사라지는 추세이고, 전복의 양식이 가능해지면서 먹기 좋은 크기로 조절하여 시장 에 출하하게 되었다. 이렇게 자연에서 채취하던 전복에서 인공적으로 양산한 자개를 나전일의 재료 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자연산 전복과 양식 전복을 비교하면 크기나 형태, 무늬 및 빛깔 등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나게 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통영의 섭패장 이금동이 근처 바닷가나 횟집에서 자개를 채취하나 그 양이 많지 않다고 한다. 또 고성의 섭패장인 강상용의 경우 1달에 2주일 정도를 해안가 횟집을 순환적으로 방문하여 전복조개를 수집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내는데, 자연산처럼 크기가 크고 원하는 수량을 충당하기 매우 어렵다고 한다. 둘째, 근래 국내에 공급되는 전복조개는 90% 이상이 해외 수입품이다. 우리나라보다 바다가 넓고 전복이 많이 잡히는 필리핀과 멕시코 및 호주 등지에서 수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외 자개는 국내 의 자개 생산 및 유통 업체가 현장을 방문하고 선별하여 가져오며, 이것을 섭패 장인들에게 보급하 여 용도에 알맞도록 가공한 다음 판매상이나 나전장인들에게 넘기는 것이다. 물론 필리핀 등 몇몇 지역은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하고 현 장으로 가야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 깨지기 쉬운 전복의 속성상 파손 없이 원거리를 운반해야 상품성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전복을 수입할 때에는 전복을 잘 아는 전문가가 반드시 현장에서 전복의 빛과 상태를 확인한 다음, 안전하게 운반하는 등 전 과정을 동행해야 하므로 이 또한 몸으로 직접 체득한 노하우가 수반된다. 이것은 금전으로 살 수 없는 무형의 자산이므로 이에 대한 실태 조 사나 정책적 배려가 필요한 대목이다. 셋째, 전복을 갈고 자르고 가공하는 섭패 기능에 대한 관심이다. 나전일은 섭패일과 떼려야 뗄 수
한국 무형문화유산 자원 5 없는 관계에 있다. 나전 장인이 구사하는 디자인에 맞게 자개를 갈고 연마하고 자르는 데 오랜 시간 이 걸리게 된다. 예컨대 나전장과 섭패장은 양자 간에 정해진 약속과 룰이 있었다. 따라서 섭패장은 나전칠기 장인의 작업에 맞춰 전복패를 섭패할 때에 부위별로 용도에 맞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조리 사가 쇠고기의 부위별로 요리방법을 달리하는 것처럼, 섭패장은 전복패나 야광패 및 진주패 등을 섭 패할 때 색상이나 두께, 형태 등 작업의 성격에 따라 만드는 것이다. 아( 亞 )자 문양을 끊음질할 때에 는 특정한 부위의 자개를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개가 부스러지거나 너무 얇으면 도장 작 업 시 갈려 없어지거나 밑칠이 벗겨져 나와 영롱함이 사라지는 등 완성도가 높은 표현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나전장이 만드는 작품마다 섭패장과 서로 호흡을 맞춰 일정한 두께로 갈고, 특정한 부위를 잘라서 공급하게 마련인 것이다. 넷째, 자개를 다루는 또 하나의 영역은 자개를 절삭하고 문양의 성격에 맞도록 종류별, 색상별로 코디를 하는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방에서는 일반적으로 자개장식 작업자가 담당하고, 보유자나 명장 및 작가들은 세부 작업을 혼자 할 수 있다. 그러나 가구를 제작하거나 다량의 문화상 품을 제작하여 나전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장인이나 업체를 위해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사 항이다. 예컨대 누구나 알 수 있는 십장생 문양의 경우는 각각의 물상에 따른 조개패를 선별하고, 그 색상을 안배하는 것이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의 감성에 부합하는 틀이 있으므로 색상이나 형 태 및 두께의 안배가 부적절하면 안되므로 일정한 룰을 지키면서 제작한다. 직함이 없는 장인은 보 유자와 명장의 하청작업 및 자기 작업에서 색상을 고민하면서 앉아 있을 시간이 없으므로 이렇게 분업화 되어 있다. 그래서 독하게 작업하여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분업화가 아니면 불가능하 고 현대작가처럼 일 년에 한두 점 작업하여 생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섭패장은 오랜 기간 동안 나전장과 소통하면서 나전작품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기 능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자개의 영롱한 빛은 옻칠과 짝을 이룰 때 더욱 도드라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원패의 수입 및 가공업체에서 국내산과 해외산을 어느 정도 사용하는지, 한국식 원패 가공기 술은 어떤 수준인지, 그 노하우를 바탕으로 얼마나 제작하여 어디로 공급되고 활용되는지에 대한 실 태파악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3) 칠일 옻칠의 경우 옻나무의 재배와 칠의 채취 및 칠의 정제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옻나무는 조선시대 때에는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그 정도로 옻나무는 사회 경제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러한 옻나무는 전통 지식으로 인지되어 문화재청과 산림청이 협업하고, 원주시 등에서 옻나무의 재배를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추세이다.
나전장 28 29 둘째, 옻의 채취이다. 생옻의 채취는 계절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이것을 전업으로 하기에는 어려 움이 많다. 현재 원주에 이와 관련된 전승자가 1~2명 있고, 지리산 등지에서도 옻을 채취하는 사람 이 1~2명이 있을 뿐이다. 옻나무의 재배가 늘면서 옻을 채취하는 사람 또한 증가해야 수요에 맞춰 공급을 어느 정도 할 것으로 여겨진다. 셋째, 옻칠의 정제이다. 정제가 활성화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 전칠장 김태희 보유자가 옻칠을 정제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그 기능을 전수 받은 장인으로는 현 정수화 보유자와 김선갑 칠작가가 있다. 이렇듯 옻칠을 정제한 역사는 비교적 짧다. 하지만 짧은 역 사에도 불구하고 정수화 보유자가 중요무형문화재 칠장으로 인정되면서 정제칠에 종사하는 전수자 를 여럿 양성하였다. 때문에 이전보다 여러 곳에서 자력으로 정제칠을 만들어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한편, 일본은 옻칠 정제에 있어서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은 200년 동안 축적한 정 제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으며 핵심 기술은 철저한 기밀을 유지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정제칠과 색칠 을 세계 각국으로 수출하고 있다. 옻은 일반 화학도료와 달리 수분이 70~80%, 온도가 25~30 가 되어야 공기 중의 산소와 옻 속의 락카제가 결합되어 고분자 화학반응을 일으켜 고체로 변하므로 일반적인 건조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현재 한국에서 칠기 작업을 하는 옻칠 작가를 비롯한 많은 장인들이 일본의 정제칠이나 색칠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듯 나전 장인들의 전승지식이나 기술은 백골일, 자개일, 칠일의 세분화된 범주에서 크게 구분 되었다. 하지만 이들 지식들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상호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어느 한 지식이 잘못되어도 완전한 나전칠기의 생산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전칠기에 대 한 제작기술에 포함되어 있는 나전 장인들의 전승지식은 단순하게 자개에 문양을 그리고 절삭하고 붙이는 기술에 국한할 수 없으며 3가지 범주가 각각 개별적이지도 않다. 그들 3범주에 속하는 세분 화된 장인들이 보유하고 있는 전통지식들은 서로 유기적이며 상호 관련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나전 장인들이 체득하고 있는 경험적 전승지식들을 종합해보면, 목재나 전복껍질 및 옻칠 등 나전칠기를 제작하기 위한 재료에 대한 크기 색상 문양 재질 성질 온도 습도 등에 대한 자연과학적 지식 이나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제품의 형태 문양 내용 등에 대한 자연 및 우주에 대한 지식 들이다. 이러한 지식들을 어떻게 습득하고 또 전승하는가에 따라 지역공동체 중심의 전 승지식 이나 개인 차원의 경험적 지식 들로 구분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세부 요소나 대상에 대해 지식을 습득하기까지 축적된 시간의 깊이에 따라 역사가 긴 지식 과 최근에 만들어진 지식 이 서로 중층적으로 결합되기도 한다. 아울러 이렇게 축적된 지식이 적용되거나 활용되는 범위에 따라 나 전 장인들의 일반적 지식 과 특정 장인만이 갖춘 고유한 지식 등도 섞여 있다. 대체로 나전 장인들
한국 무형문화유산 자원 5 의 전승지식들은 그들 나름의 경험 속에서 체득된 고유한 생태학적 지식을 포함한 경험과학적 범주 에 포함되는 것이다. 비록 나전 장인들이 자개에 칠을 바르고 이것을 건조장에 넣어 마감할 때 온도 와 습도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측정한 보존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경험에 의하여 어느 정도의 온도와 습도에서 자개가 백골과 옻칠에 의해 견고하게 완성되는지를 알기 때문 이다. 아울러 전복껍질에 대한 생물학적 지식이나 재료공학적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 복껍질을 어느 정도의 두께나 크기로 자르고 오리고, 그것의 조건에 따라 옻칠의 정도가 달라진다는 것 등도 오랜 경험으로 체득하여 나름대로 지식을 축적하고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나전칠기 제작 관련 기술을 종합해보면, 전승지역별로 고유한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전통 적으로 목재 생산이 잘되던 지리산 인근의 전라도 지역, 앞바다에서 채취한 전복껍질의 생산과 공급 이 활성화되어 자개 제작에 강점을 보이던 통영을 비롯한 경상도 지역, 옻나무의 특산지로 옻의 공 급이 원활하던 강원도 지역, 인구가 많고 경제적 여유가 있어 나전칠기 제품의 소비가 활발하여 대 규모 공장이 즐비하고 판매가 촉진되었던 서울과 경기지역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전승지역의 특성 에 따라 나전칠기 유산에 대한 지식과 기술의 전승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전승 지역에 따른 유산 의 차이도 눈여겨 볼만하다. 4. 유산의 지속 가능성 나전칠기의 제작과 사용을 둘러싼 사회문화는 천여 년의 세월 동안 다양한 양상으로 변화되어 왔 다. 전통사회에서 나전칠기는 장롱을 비롯한 수납가구 중 공예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최고급 제품 이었다.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오동나무를 심고 그것으로 장롱을 짜서 시집을 보낼 때에도 혼수감으 로 작은 소품이라도 하나 갖고 싶은 미적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통사회에서 나전칠기는 가구 류 중 최고로 쳤을 뿐 아니라, 칠기문화권을 형성하는 한중일 삼국 중에서도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 만 독특하게 발전한 한국의 대표적인 공예기술이다. 누구나 하나쯤 갖고 싶은 대상이었기에 고려시 대 이후 시기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다종의 나전칠기가 제작되었고, 중국 등지에 조공품으로 보내거 나 부귀나 신분의 상징으로 널리 소비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 한말 일제시대를 거치면서도 나전칠기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르고, 해방 이 후 현재까지도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공예기술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더욱이 해방 이후 한국전쟁 을 거치고 나서 서구적 교육방식과 생활양식의 도입으로 우리의 전통문화가 급속히 사라지는 데 위 기를 느낀 국가에서 전통문화를 보호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정책을 실시 하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공예기술 분야는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이 지정되 고 나서, 다음해 196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로 나전장이 지정되었다. 그만큼 나전칠기가 지니고
나전장 30 31 있는 전통 지식으로서의 의미나 가치를 일찍부터 인정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나전장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1960년대 말부터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추진되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경제적으로 풍요하고 삶의 여유를 즐기면서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나 전칠기의 수요는 급증하였다. 이것은 산업화 이전까지 우리의 가옥구조는 대체로 작은 초가집이나 한옥이었는데, 경제성장과 더불어 다층 양옥집이나 아파트로 바뀌면서 가옥 규모가 커지고 내부 공 간도 넓어지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면서 집 안 내부를 채울 가구로 나전칠기의 수요가 폭발 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당시 나전칠기의 수요는 무형문화재 나전장으로 지정되어 보유자로 활동하 던 김봉룡이나 송주안 및 심부길 등 장인 개인이 만든 한두 점의 소품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숫자였다. 때문에 당시 나전칠기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통영의 나전칠기전습소에서 배출한 장인 들과 그들이 운영하는 공방에서 배출된 장인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엄청난 물량의 나전칠기를 제작 하기에 이른 것이다. 호황기였던 1970~1980년대 통영 시내에는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공방이 300 여 곳이 넘었다. 그러다가 통영에서 활동하던 장인들이 나전칠기의 소비가 활발한 서울이나 부산 등 지의 대도시로 이주를 하면서 크고 작은 200~300여 곳의 공방이 운영되었다. 특히 서울 지역의 왕 십리나 중곡동 등지에 위치한 대규모 나전칠기 공장에서는 많은 자본을 들여 백골을 주문하고 자체 공장 내에는 도안사를 따로 두고 자개부와 칠부를 나누어 70~100명 정도의 직인들을 고용하여 절 삭일, 붙임질, 지짐질, 칠일 등을 분업적이고 전문적으로 수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1970년대부터 1990년대 말까지 호황을 누리며 대규모로 확장되던 나전칠기계가 갑자기 위기를 맞은 것은 1999년 IMF 경제 조치에 기인한다. 그때까지 결혼을 앞둔 신부들이 혼수품으로 반드시 장롱과 화장대 및 문갑을 일습으로 갖춰 가는 것이 상례였으나, 급격한 경제적 어려움이 닥 치자 원목가구나 대형 공장에서 기계적으로 제작한 단품 가구 등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이때에 규모가 작은 나전칠기 공방이나 개인 작업자들이 몰락을 하게 되었다. 예컨대 고암나전칠기연구소의 오왕택 장인의 경우 1990년대부터 15년간 생계와 자녀들의 학비를 위해 나전칠기일을 떠나 택배일을 했던 것에서 어려웠던 상황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나전칠 기 공방이 문을 닫은 것은 아니었다. 대규모 공방의 경우 공장의 규모를 줄이고, 직원수를 10명 안팎 으로 줄여서 수요에 대처하였다. 곧 IMF의 경제 위기에서도 강남 등지의 대형 아파트에 거주하거나 부동산을 소유한 계층에서는 아파트 평수를 넓혀 가거나 이사를 하거나 할 때에 나전칠기 가구를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최태화와 최태문 형제가 경영하는 남해공예사나 경동칠기, 김규장 명장이 경 영하는 크리스탈칠기나 김용관 명장이 운영하는 설화칠기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들 대형 나전 칠기 공방은 2000년대 중반까지도 주문량이 줄어 규모를 줄였으나 그 수요는 여전하였는데, 2005 년 부동산 경기가 위축되면서 나전칠기의 수요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한국 무형문화유산 자원 5 산업화와 근대화로 인해 우리나라의 경제규모는 늘어나고 국민 소득도 1만불 내지 2만불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차 국민들이 삶의 질에 관심을 갖고 전일제 노동에서 점차 휴가를 즐 기려는 사회의식이 높아져 주5일제 근무가 정착되었다. 그리고 국민들이 국내외의 명소를 관광하는 일도 많아졌다. 아울러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그리고 2002년 월드컵 등을 거치 면서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의 숫자가 증가하였다. 관광산업이나 문화산업의 활성화는 곧 나전칠 기 업계에게는 외연을 넓혀 규모가 큰 가구뿐 아니라 문화상품이나 생활 속의 소품을 제작하는 계 기로 작용하였다. 그동안 대규모 나전칠기 공장에 피고용되었던 직인이나 개인적으로 작업하던 장 인들조차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땅값이 비싼 서울을 벗어나 서울 왕십 리나 중곡동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 300여 명의 장인 집단이 형성되어 새로운 전승력을 확대시켜 나가고 있다. 이곳 장인들은 소규모로 한두 명 혹은 두세 명의 장인이 문화상품 이나 관광소품을 제작하는데, 나전칠기의 전통적인 기술을 개량하여 원목 대신 합성목(MDF)을 사 용하고, 알자개 대신 판자개나 플라스틱 필름에 프린팅을 하고, 옻칠 대신 캐슈를 칠하고 있다. 아 울러 전통적으로 자개를 하나씩 자를 때 사용하던 톱 대신 다이아몬드 톱날을 활용한 전동절삭기를 개발하여 자개판 100개 묶음을 절삭하거나, 귀얄로 칠하는 대신 핸드피스나 콤프레서로 대체하기도 한다. 이렇게 나전칠기의 사회적 수요가 다양해지면서 점차 이전까지 전통 나전장인 혼자서 자개를 자르고 붙여서 옻칠을 하던 전 공정을 세분화, 분업화 및 전문화시키고, 수공 작업 대신 노동력을 기 계로 대체하는 방법으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변화가 진행된다고 해도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일에 종사하는 장인들의 작 업이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이번에 나전일에 종사하는 장인을 조사한 결과 세 가지 부류의 작품을 제작하고 있었다. 우선 전통적인 방식으로 원목과 자개와 옻칠로 소량의 나전칠기 소 품을 제작하는 1인 공방의 장인이 있고, 다음으로 원목과 자개와 옻칠을 재료로 하되 도구의 기계화 와 칠부와 나전부의 분업화를 통해 대규모 가구를 제작하는 나전산업체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합성 목의 백골 위에 필름이나 판자개 및 캐슈[에폭시] 등을 활용하여 소품종 다량 생산으로 문화상품이 나 관광상품을 제작하는 업체로 구분되었다. 조사한 결과 중 몇 사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통칠기의 수공예적 제작 방식을 전승하는 사례이다. 전통 나전칠기의 수공예식 제작방식 은 나전칠기를 전통적으로 제작하고 공급하는 방식으로, 제작자는 주로 무형문화재 보유자, 명장, 개 인 작업자들이다. 이들의 작업은 1인이 전과정을 종합하고, 다품종 소량 생산하는 제작체계라 할 수 있다. 전통 재료와 기법을 전승하고 전통적인 수공식 도구를 사용하여 전통적인 형태나 문양도 고수 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서울의 최성훈은 서울시 무형문화재 민종태 보유자에게 나전칠 기의 전통적 기능을 전수 받은 장인이었다. 그는 민종태 보유자가 남긴 수백 장의 도면을 아직도 정
나전장 32 33 리하지 못한 채 가지고 있으며, 민종태가 사용하던 톱과 거도를 사용하여 주름질 및 끊음질하는 전 통 기능을 오롯이 지니고 있었다. 약간의 디자인을 거친 문화상품도 가끔 제작하지만 대부분의 시간 을 전통 문양과 전통 형태로 제작하고 있어 옻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인 수공예식 제작 시스템은 그동안 문화재청에서 시행한 무형문화재의 체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고, 전통 기술을 전승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그러나 문화유산으로 서 나전일은 전통 기술의 전승에 더하여 형태나 문양까지 고답적으로 답습 반복하여 나전칠기를 현 대적 조형으로 승화할 때에는 제약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현지 조사결과 대부분의 1인 공방체제를 운영하는 장인들의 제작 유형은 첫째 유형인 공예화의 제작체계로 둘째 유형인 예술품 제작을 함께 작업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어쨌든 현재 전통 나전공예가 외형적으로 비칠 때 누구나 공감하는 보편적인 하나의 형식을 떠 올리게 되는데 그 양상은 조선시대에 형성된 목물의 구조와 용도가 그대로 활용되고 모란문 국화 문 보상화문 등의 정형화된 틀을 유지하면서 자개와 대모 금속선 색칠로 표현되는 스타일이 그 것이다. 고려시대 초기의 통일신라 풍이 계승되고, 조선 초기에 고려 풍이 일정기간 혼재하는 과도 기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고려와 조선 스타일을 극복하고 한국 스타일을 모색 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전통작가들에 의하여 시도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좀 더 경과를 지켜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보유자이거나 특징 있는 타이틀을 가진 작가 등 소수는 여유 있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대다수 작가는 생계유지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다. 양극화는 전통작가들 간에도 심화되어 있어, 검증된 디자인을 확보하여 정책적으로 일감을 주고 심사에 통과한 작품을 구매하여 전시 판매하는 등의 제도적인 장치를 만들어 보호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서울이나 경기도를 제외한 지방의 장인들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의 장인들은 모두 가내수공업 형 태에서 크게 벗어나서 작업하는 경우는 없었고, 현대식 기계나 문양을 활용하는 장인들도 없어 보였 다. 예컨대 원주 설명돌은 끊음질기법을 중심으로 국화문, 귀갑문, 만자문을 주로 사용하면서 매화 문이나 산수문양을 줄음질하여 작품의 성격이 강한 작업을 하면서 반면에 컵, 쟁반 등 생활용품은 간결한 산수문을 일부 도출하여 장식하고 약 10~20여 점 정도씩 작업하여 원주옻문화센터 상설전 시관에서 온, 오프라인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다만 광주 최석현은 옻칠 정제에 있어서는 정제설비를 갖추어 가고 있었고 이외 장인들은 재래식 장비와 도구로 작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조사자가 본 장인들은 1970년대나 현재나 크게 차이점을 느낄 수 없어 보였고, 다만 가구류에서 소품류, 나전액 자류, 문화상품류 등 소비성향에 맞추어 제작 용도만 변화되어 보였다.
한국 무형문화유산 자원 5 둘째, 전통 나전칠기를 현대적 예술품으로 제작하는 경향이다. 이것은 현대적 조형교육,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공예나 미술 및 디자인을 전공한 이들이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요소, 재료나 기법을 자신 의 작품에 응용하여 예술품화하는 경향이다. 자개의 영롱한 아름다움으로 색채미를 표현하거나 옻 칠의 견고함과 영구성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테크닉을 삼는 것이다. 이렇게 현대 공예가나 아티스트 및 디자이너들이 애호가를 위한 예술 작품을 제작하고, 이것을 현대적으로 응용하여 타 분야와 협업 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제작한 소품은 갤러리나 소장가와 직접 거래하거나 옥션 등에서 예술품을 판 매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에 해당되는 사례로 몇 예를 들 수 있다. 우선 서울의 김선갑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김태희 보유자에게 작업 전과정을 배운 전수자로서, 전통적인 칠 정제를 비롯한 나전일 전체를 전승받았다. 그러면서 전통 문양을 현대화시킨 김태희 보유자의 가르침을 따라 나전의 핵심을 문양이나 디자인 의 현대화에 두고, 홍익대를 찾아가 동양화와 서양화를 배워 나전으로 회화적 작품을 구사하게 되었 다. 아울러 전통 좌식가구 대신 입식 가구화하고 그 위에 나전으로 그린 회화작품을 제작하여 호텔 등을 통해 일본에 판매를 하고 있었다. 한편 그와 달리 서울의 조훈상은 원래 현대 리바트 가구의 디자이너로서 대학원 때 소목장(박명 배), 나전장(손대현), 칠보 등을 배웠다. 그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디자인그룹 넥서스라는 1인 사 업체를 운영하면서 화장대나 거울과 같은 현대적인 소품 가구에 칠보와 나전을 결합시키는 작품을 제작하여 애호가들의 성원을 얻고 있다. 한편 서울의 장민석은 소목 가구를 배우고 여기에 칠과 나 전을 더하는 작업을 더하여 자신만의 작품을 제작하거나 동호인을 교육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전공예 작가로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작업하거나 교육을 하더라도 회화나 조각과 같은 조형예술과 달리 작품만으로 생계를 꾸려가기에는 매우 어려운 현실이다. 곧 화가를 비롯한 조형예 술가들은 물감이나 붓과 같은 표현 재료를 활용하여 자신의 작품세계를 펼쳐나가듯이 나전예술가 도 옻칠 바탕에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는 프로세스를 밟아야 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화가와 달 리 나전작업은 작업의 속도 면에서 어려움이 내재해 있다. 옻칠은 건조시간이 길고 공정이 복잡하며 건칠 작품 한 점을 제작하는 데 보통 6개월 정도가 소요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예술성을 갖 춘 나전작품을 제작하더라도 작업기간을 단축하고 작업여건을 혁신하지 않으면 작가의 삶을 지속 하기 어렵다. 물론 대학에 적을 둔 교수 작가들은 꾸준한 작품활동을 할 여력이 되나, 현재까지 무수 히 많은 학생들이 대학에서 배출되었지만 전업작가 몇 명만이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나전공예의 장점을 살리고 현실적인 효용가치를 도출시키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안이 있다. 우선 산업디자인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나전칠기는 소품종 소량생산으로 고부가가치 산업과 친환경 사업과 융복합하는 방식으로 판로를 열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전통장인과 협업하
나전장 34 35 는 것이다. 장인의 기능적인 노하우와 현대작가의 첨단디자인을 하나로 묶으면 서로 간에 부족한 부 분을 보완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나전칠기에 산업적인 대규모 분업 제작 방식을 도입한 사례이다. 1970년대 산업화 추세에 발맞추어 나전칠기가 호황기를 맞이하였다. 이에 나전칠기 업계는 나전칠기의 생산을 활성화하고 전통 공예의 저변화를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현대화하고 개량하였다. 이러한 산업화에 종사한 이들 중에는 명장으로 활동하는 설화칠기의 김용관, 크리스탈칠기의 김규장 및 경동칠기의 최태문 등이 있다. 이들의 작업은 전통적인 문양과 기법으로 실생활 속에 필요한 제품을 만들어 공급하는 분야이 다. 전통시대에 나전칠기가 기능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의 삶에 필요한 가구를 비롯한 생활용품을 제 작하거나 관광 문화상품 등을 대량으로 제작하는 산업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전통적 인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기술적 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더 많은 수요를 창출할 수 있도록 다 량의 재료, 기계와 설비 및 도구와 같은 생산체계를 갖추고, 전통적인 형태나 문양의 개선을 추진하 는 방향으로 개선하고 있었다. 서울의 최태화나 김규장의 경우 1980~1990년대에 50명 이상의 직원 을 두고 연간 수백 점의 가구를 제작하였는데, 이때 전통적인 문양이나 기법에 더하여 현대적인 요 소까지 채택하였으며 외국인의 수요에 부합되도록 제작하여 해외 수출까지 했다. 한편, 이러한 산업화를 추구하면서 재료, 설비, 디자인의 세 부문에서 변화를 수용하였다. 첫째 전 통적인 나전칠기 재료의 다변화와 가격의 저렴화를 의도하여 값비싼 나무, 자개, 옻칠 등을 대신해 값싼 대체재료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값비싼 원목 대신 합성목을, 국내산 자개 대신 외국산 수입자 개를, 옻 대신 캐슈나 래커, 호마이카 및 에폭시 등을 사용한 것이다. 둘째 작업과정의 효율성 및 시 간 절약을 위해 수공 도구를 기계화 설비로 대체하였다. 전통적인 활비비나 톱 대신 공업용 다이아 몬드를 부착한 천공기나 절삭기 등을 개발하여 자개패를 1개씩 제작하던 것을 100개씩 절삭하여 작 업의 효율성과 능률성을 높였다. 귀얄로 칠하던 옻칠을 콤프레서 등을 사용하여 넓은 면적에 칠을 골고루 할 수 있는 방식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셋째, 전통적인 형태나 디자인을 개선하여 주문자나 수요자의 요구에 따라 현대적으로 디자인화시켰다. 전통 가옥에 어울리던 좌식 가구에서 아파트에 서 필요한 입식 가구를 생산하거나, 그에 따른 형태를 현대적으로 개선하거나, 전통 문양을 현대인 의 취향이나 서양인의 성향에 맞게 개선하는 것이 그것이다. 현대식 가구를 생산하는 최태문의 업체 에는 백골부는 외부에 두고, 디자인부, 칠부, 나전부 등 여러 분야로 분업화되어 문화상품이나 가구 등을 디자인하는 경향으로 전개되었다. 나전산업체에 종사하는 제작자를 조사한 결과, 그들은 전통적인 재료나 기술을 체득한 토대 위에 작업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작업도구나 제작방식을 개량하고 개선한 것이 확인되었다. 예컨 대 전주 최대규는 나전 액세서리 작업을 주로 하고 있었는데, 제작 재료는 후패 중 황진주, 흑진주,
한국 무형문화유산 자원 5 홍진주패 등 수입산 진주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재료를 가지고 물고기, 탈, 얼굴, 한 글 등 다양한 형태의 문화상품 액세서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부산 김관중은 부산시 상징 문양, 바다 속 풍경, 을숙도 풍경 등 부산 지역을 상징하는 문양을 토대로 가구류, 액세서리, 문화상품, 그림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때 사용하는 칠은 합성칠인 캐슈칠로 작업하고 있었 고 판매는 개인 전시장을 통하거나 지인을 통한 판매를 하고 있었다. 부산의 이종철은 개인 작품을 많이 하고 있었으나 판매는 많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대부분의 장인들은 소속되어 있는 협회나 그 룹에서 평균 연 2~3회의 전시를 하고 있었으나 판매는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 분야의 종사자 대부분이 나전칠기 기능올림픽에서 수상을 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기 능적으로 숙련되어 있었다. 다만 나전칠기 가구에 대한 인기가 1990년대 말부터 시들해지면서 이러 한 현대적 나전칠기가 대폭 줄어들고, 근래 기능올림픽에서 나전칠기가 제외되면서 이 분야의 쇠퇴 가 역력한 추세이다. 남양주에서는 나전일과 관련하여 수많은 중소 공방과 업체가 몰려있고 한국에 서 생산되는 나전 관광 상품의 80% 이상이 만들어져 국내의 관광단지와 박물관, 공항 등으로 납품 되고, 해외로도 수출되고 있다. 나전 제작과정의 난해한 기법과 공정을 최소화하고 제작시간을 단축 시켜 관광객이 가격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가격대로 상품을 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일 반 시민들이 다양한 장소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나전은 역시 정형화 되어 있는 나전관광소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면에서 나전칠기는 오늘날 전통적인 수공업 체제, 현대적 예술품 제작, 대규모 분업적 생산 등 다양한 양상으로 분화 발전하고 있으며, 나전칠기와 관련된 기술적인 측면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면 서 지속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전통적인 기술 지식을 나름대로 고수하고 있는 기능보유자나 조교 및 이수자 등 전승자들조차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상당한 변화가 유추된다. 특히 나전칠기 가구처럼 규모가 큰 작품을 제작하려면 자개를 자르고 오리고 끊어내는 육체적인 노동을 많이 필요로 하는데, 이러한 문양의 절삭 부분이 대개 기계화로 대체된 것이 두드러진 변화이다. 물론 가구 전면에 귀얄로 칠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전체적으로 호황기에 비해 나전칠기업에 종사하는 인구 자체가 많이 줄어들었는데, 이것은 기계화 작업으로 사람의 인력을 대신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전통적인 방식에 의해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기술이 전승되더라도, 교통과 통신 및 운송수 단의 발달 등으로 인해 그것을 만드는 자개와 옻칠 재료의 지역성은 거의 사라지고 있다. 곧 예전에 통영 앞바다에서 나온 전복껍질을 사용하여 섭패일을 했던 데 비해, 이제는 국내산 전복껍질도 자연 산이 아닌 양식산이어서 크기가 작고 색상도 볼품이 없어 전통 지식의 전승대로 제작하기 어려운 형 편이다. 때문에 통영이나 경상도 지역뿐 아니라 서울이나 경기지역 및 강원도나 전라도 지역 등 어 디서나 중국, 필리핀, 뉴질랜드, 멕시코 등 전 세계에서 나는 야광패, 진주패, 색패 등 다종다양한 조
나전장 36 37 개를 이용하여 문양에 따라 적절하게 선택하여 시문하는 것이다. 칠 또한 원주에서 재배하는 옻나 무 숫자가 제한적이어서 이곳에서 생산되는 한정된 양으로는 원주 지역의 장인들조차 만족할 수 없 을 지경이다. 이에 중국 등지에서 수입한 옻칠을 우리 기술로 정제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자개나 옻칠의 지역성은 거의 사라지고 전 세계의 자개를 수입하여 공급하는 판매망이 잘 갖춰져 있 다. 이러한 결과로 오늘날 나전칠기의 전승지역은 재료의 수급이나 판매의 문제 등 지역적 범주를 넘어서고 있다. 예전에는 자개의 생산지인 통영을 중심으로 판매와 소비처인 서울을 중심으로 권역을 형성하였 는데, 근래에는 여전히 통영과 부산권역이 강세이고, 서울권역 그리고 새로운 생산지로 떠오르는 경 기권역으로 묶이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막상 지역 나전공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개의 본고 장인 통영이 위축되고 대신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 중심으로 편제되면서, 인구가 많고 소품류의 생 산단지가 밀집된 경기도 권역으로 축소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나전칠기 문화의 전통성이나 지역성이 약화된 것이라고 평가되는 반면, 새로운 시대의 흐름과 방식에 적응하면서 전승력을 키워 가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현대사회의 변화에 발맞추어 지역성은 약화되는 반면, 나전칠기가 가진 고 유한 전통성을 현대사회의 요구에 맞게 새롭게 창조되고 계승되는 추세로 여겨진다. 5. 결론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의 정의에 의하면 나전장인은 두 가지 기준에 적합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첫째, 전통공예기술에 해당되고, 둘째, 자연과 우주에 대한 지식 및 관습의 하나이다. 그중 전통공예 기술의 기준으로 보면 네 가지 범주에서 무형문화유산으로서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전통공예기술은 어떤 사회 혹은 공동체에서 자연자원을 이용하여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 드는 지식, 기술, 솜씨를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면으로 볼 때, 나전칠기는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 중 한국에서만 1000년 이상 독특하게 발전된 전통 지식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한국의 남해안 앞바다 에서 채취되는 전복껍질이라는 자연자원을 이용하여 다양한 가구와 물품을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이것을 각각의 크기와 색깔과 두께에 맞춰 자르고 오리고 갈고 펴기 위해 다양한 범주의 지식과 기 술 혹은 솜씨들이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나전장인들은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것과 관련된 전통공예 기술의 무형문화유산을 전승하고 있는 집단이라고 할 만하다. 둘째, 전통공예기술은 어떤 사회나 공동체 구성원들의 일상적 생존활동에 필요한 단순한 실용적 물건을 만드는 지식, 방법, 기능, 솜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해당 공동체 혹은 해당 사회의 전 반적인 문화적 개성을 드러내는 문화현상과 긴밀하게 연결된 지식이나 방법 등을 가리킨다. 이와 관 련해서 한국인들에게 있어 나전칠기는 가구로서 주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자개로 표현
한국 무형문화유산 자원 5 된 문양에는 한국인 공동체가 소망하거나 희망하는 내용이나 우주에 대한 생각 등이 내재되어 있다. 때문에 한중일 동아시아 3국 중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나전칠기가 발전하였고, 그 문양에는 한국인 의 공동적 문화 양상이나 양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평가할 만하다. 따라서 나전칠기는 소품이든 가구이든 한국인의 의식을 가늠할 의미 있는 내용을 한국적 공예기술로 표출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전통공예기술은 어떤 사회 또는 공동체의 종교적, 의례적, 축제적, 예술적 표현물의 일부로 서 존재하는 것일 때,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나전칠기는 천 년간 한국 의 의례나 축제의 핵심 물품이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나전청동거울과 은평탈청동거울이 제 작된 이래 고려시대, 조선시대,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우리는 나전문화를 향유하여 왔 다. 전통적으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 나무를 심고, 그 어린아이가 결혼을 할 때 그것을 잘라서 장롱을 만들어 준다. 나전칠기는 바로 이런 한국인의 일생의례를 상징하는 기물이 며, 특히 혼수함이라는 나전칠기는 결혼식이라는 축제를 더욱 값어치 있게 만드는 상징품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나전칠기제품은 왕실의 결혼식 때 왕비의 부모에게 보내는 선물 이었고, 중국의 황제나 황후에게 보내는 최고의 예물이기도 했다. 이것은 나전칠기가 한국을 대표하 는 최고의 예술적 표현물이라는 증거에 다름 아니고, 이 때문에 세계적인 무형문화유산으로서의 가 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전통공예기술은 문화의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단순히 옛 문화의 가치를 전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지속가능성을 가질 때 더 높은 가치가 있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국에서 나전칠기는 한국인으로서 생활을 할 때 가구로서 가장 갖고 싶은 물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근래에는 새로운 여러 분야와 융복합되어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인의 삶 속에 나전칠기는 지금까지 천 년간 한국적 미의식을 대표하였듯이, 앞으로도 계속 젊은 예 술가들에게 정신적 영감을 불러 일으킬 주요한 예술대상인 것이다.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집이라는 공간에서 살듯이, 한국인에게 나전칠기 가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다. 다음으로 자연과 우주에 대한 지식 및 관습이라는 기준에서 살펴보자. 나전칠기와 그것을 제작하 는 장인의 무형문화유산은 자개나 옻과 같은 자연자원에 대한 채취, 준비, 변형 등에 관한 전통 관습 과 지식들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전복껍질을 바다에서 채취하여 그것을 갈고 깎고 다듬고 자르고 오려서 가구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전복이나 옻에 대한 전통적 경험지식들이 축 적되어온 결과이다. 나전칠기를 만들기 위해 자개와 옻이 일정한 온도와 습도에 대한 자연과학적 지 식이 경험적으로 인지되어야 하고, 이것을 자르기 위한 도구와 제작기술에는 산업 기술과 과학적 지 식이 결합되기도 한다. 또한 자개를 자르고 오린 문양은 그 시대의 종교와 사상 및 감정 등 사회구성 원의 민속지식과 관습이 내재된 결과인 것이다. 또 현재 나전문화의 근간은 목재선별과 백골제작을
나전장 38 39 담당하는 백골 소목장, 바다에서 패류를 수거하여 원패를 아름다운 광채가 나는 자개로 가공하는 섭 패공, 자개에 민족 공동체의 사상과 감정에 맞는 문양을 그리는 도안사, 자개를 선별하여 문양에 따 라 줄음질하거나 끊음질하는 절삭공, 이것을 유산지에 붙이는 붙임공, 옻칠 위에 자개를 붙이는 지 짐공, 위에 옻칠을 하는 칠공 등 공동체가 작업을 하면서 한국인의 고유한 자연과 우주에 대한 지식 및 관습을 새롭게 전승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나전칠기와 그것을 만드는 나전장들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협약에서 정의 하는 무형문화유산의 요건을 잘 갖추고 있는 세계적인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한중일 삼국 중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발전한 전통공예기술인데, 그것은 나전칠기가 한국인의 감정과 멋과 전통적 색채에 잘 부합되기 때문인 것이다. 게다가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자개나 옻과 같 은 자연을 이용하고 주생활의 가구로 애용하는 생활 문화 속에서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장인들은 그 들만의 고유한 자연과 우주에 대한 지식 및 관습을 풍부하게 전승하였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무형문화유산으로서 나전장의 전승과 지속
경기 가야옻칠공예사 43 경동칠기 49 고암나전칠기연구소 61 김선갑공방 72 남해공예사 83 동양칠기 96 만정공방 104 박만순옻칠공방 111 설화칠기 117 이빈공예 127 진성옻칠공예 138 청목공방 145 크리스탈칠기 151 평화자개 162 한국칠기 172
무형문화유산으로서 나전장의 전승과 지속 나전장 42 43 가야옻칠공예사 전해운 대구대학교 교수 유산조사일 2013년 8월 20일, 9월 5일, 10월 29일 유산소재지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고산리 38-2 조사대상자 성용(남, 1960년생, 가야옻칠공예사 대표) 1. 유산명칭 가야옻칠공예사 2. 유산의 영역 무형문화유산의 전달수단으로서의 언어를 포함한 구전 전통 및 표현 공연예술 사회적 관습, 의례, 축제행사 자연과 우주에 대한 지식 및 관습 전통공예기술 나전칠기는 목재 기물에 칠을 먹이고, 그 기물의 변형을 막기 위해 삼베나 모시를 바르고 칠을 여 러 번 올린 후 자개를 실톱으로 오려 붙이고 다시 칠로 마무리하는, 천년 이상을 전해져 내려온 한국 의 전통공예기술이다. 또한 나전칠기의 주요 재료인 옻칠과 자개를 다루는 데에는 자연에 대한 장인
한국 무형문화유산 자원 5 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 가야옻칠공예사는 나전칠기 유물의 복원을 통하여 입증되는 다양한 정보를 현대작품에 응용하는 복고적인 나전작품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3. 유산의 소재지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고산리 38-2 4. 전승자(종사자) 1) 직책(기능) : 대표(도안, 나전일, 칠일) 2) 성명 : 성용 3) 성별 : 남성 4) 나이 : 54세(1960년생) 5) 출신지 :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장전리 235 6) 입문시기 : 성용은 1985년 아버지가 경영하던 섭패공방을 물려받으면서 나전일에 입문하게 되었 는데, 그의 아버지는 1968년 홀로 상경하여 서울 풍납동에서 자개공장을 차렸다고 한다. 성용은 이 후 섭패일을 하면서 외국에서 원패를 선별하여 직접 수입하고, 칠기 종사자들에게 양질의 자개를 공 급하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 7) 공방 이동지역 : 1985년 자개가게와 섭패공장을 동시에 운영하였다. 공방은 경기도 남양주시 교 문리에 두고 가게는 왕십리에서 화양리로 이동하였다. 이후 1990년대 후반부터 나전칠기 경기가 어 려워지면서 1996년에 섭패공장을 정리하게 되었다. 자개를 이용한 나전칠기 공방은 2000년에 경기 도 광주시 목현동에서 6~8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시작하였다. 이후 작업하기 좋은 곳을 찾다가 지금 의 공방이 위치한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고산리로 옮겨 14년 간 작업하고 있다. 8) 대표와의 관계 : 본인 5. 유산의 내용 1) 재료 가야옻칠공예사는 무늬를 표현하는 자개 및 금속선, 대모 등의 재료를 골고루 활용하는 작품을 특 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주 재료인 자개로 주름질과 끊음질은 물론, 타찰법, 시패법, 조패법 등으로 무늬를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등 재료의 특성을 잘 구현하고 있다. 자개 중에서도 전복껍데기 를 가공해 만든 색패를 즐겨 사용하는데, 그래서 가야옻칠공예사의 작품은 화려하고 영롱한 색깔 작 품이 주류를 이룬다.
무형문화유산으로서 나전장의 전승과 지속 나전장 44 45 가야옻칠공예사 성용은 섭패장 출신답게 민물자개와 야광패 뿐만 아니라, 야광패, 수도리패, 고동 패, 색패, 민물패, 양식패, 호주패, 뉴질랜드패, 멕시코패, 레드패, 대만패, 청패, 흑진주패, 진주패, 신 발패 등의 다양한 종류의 자개를 이용하여 작품에 활용하고 있지만 일반인들은 구별조차 쉽지 않다. 이와 같이 다양한 자개를 나전문양에 따라 색상별로 분류하여 화려한 회화 작품처럼 나전칠기를 표 현하고 있다. 현재 가야옻칠공예사는 왕십리에 있는 몇 안 되는 자개가게와 포천에 있는 자개공장과 중국에서 가공해 오는 양질의 알자개를 구입해서 사용하고 있다. 2) 시설 및 도구 가야옻칠공예사는 경기도 광주시의 교외에 넓은 마당이 있는 지상 2층 반지하 1층의 큰 규모의 주택을 공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각 층별로 60평이므로 총 180평 넓이이며 반 지하 1층은 자개부실 과 옻칠정제실, 절삭기계를 이용한 자개절삭실로 구성되어 있다. 2층에는 옻칠작업장(칠장) 2곳과 건조실, 거실, 물일하는 작업실, 성용 대표의 연구실이 있다. 초 칠, 중칠, 상칠의 칠작업은 칠부가 행하며, 매번 칠할 때마다 사포질을 하는데 천사포, 종이사포, 가 루사포, 숫돌을 사용한다. 자개를 부착한 후의 연마공정에는 가루사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특 히 성용 대표는 정제기를 갖추고 있으며, 3층에는 작품을 진열하고 방 한 칸에 옻칠 장을 두고 옻칠 연구실로 쓰고 있다. 또한 옥상을 막아 먼지가 나는 기물의 마른사포질을 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아교 끓일 때 쓰는 곤로와 냄비 대신 밥통을 사용하고, 거두로 상사를 자르던 것을 상사기계로 정밀하게 자르고, 지짐질에서 인두를 불에 달구어 쓰던 것을 전기인두, 전기다리미와 겸용으로 사용 한다. 그 외의 자개일의 공정은 예나 지금이나 모두 수작업에 의존한다. 3) 제작과정 가야옻칠공예사는 4명의 직원과 성용 대표가 직접 모든 일에 관여하지만 서로 분업화하여 작업 을 하면서 효율성과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옻칠정제와 간단한 자개절삭은 성용 대표가 직접한다. 2 명의 자개부에서 붙임질, 끊음질, 지짐질을 하며 풀빼기 작업, 자개 땜 보기까지 해서 칠부에 넘기면 초칠이 들어가기 전 다시 한 번 칠면과 자개를 손질한다. 초칠, 중칠, 상칠 작업을 행하며, 매번 칠할 때마다 사포질을 한다. 칠 두께를 주기 위한 사포질로 가루사포를 많이 사용한다. 상칠이 끝나면 자 개에 묻은 칠을 제거하고 광내기 작업과 접칠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작품이 완성된다. 뿐만 아 니라 칠부는 백골이 제작되어 오면 자개를 붙이기 직전까지의 일반적인 밑칠 제작공정을 마무리한 후 자개부에서 자개의 시문이 이루어진다. 가야옻칠공예사 갈이물 작업은 작품의 성격에 따라 제작방법을 3가지로 구분하는데, 목기 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