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인재를 키워낸 서구의 격대교육 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 1. 세계적 인물은 할매 할배가 만든다? 2. 때로 부모교육보다 더 효과적인 격대교육 성공 사례 3. 이기적 육아 와 실존적 공허 를 넘어 1. 세계적 인물은 할매 할배가 만든다? 예전에는 명문가든 아니든 대가족을 이루고 살던 대부분의 가정에서 손자들의 교육은 자연스 럽게 할아버지, 할머니가 맡았다. 할아버지는 손자와, 할머니는 손녀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 면서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들려주곤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부모와 달리 한 세대를 건너뛰 기 때문에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혈연의 정을 나누면서 손자손녀를 지도할 수 있었다. 또한 할 아버지와 할머니는 부모가 직접 교육을 하는 경우보다 아이들 정서에 좋은 영향을 준다고 한다.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없지만 대개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있는 집안의 아이들은 예의도 바 르고 김치나 된장 등 음식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고 친구들과의 대인관계도 원만하다. 즉 조부모의 손자손녀 교육은 인성교육 측면에서 효과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어머니는 격대교육으로 손자손녀를 키워 세 명을 모두 교육대학교에 보냈다. 큰조 카는 공부에 뜻을 두고 중고등학교부터 열심히 공부했는데 동생들은 달랐다. 작은 조카는 중학생부터 문제아였고 가출을 몇 번이나 해 부모뿐만 아니라 할머니의 속을 무던히도 썩였 다. 이른바 일진 짱 이었다. 부모는 두 손을 들었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손녀가 가출했다 집 에 돌아오면 별말 하지 않고 밥을 챙겨주었다. 결국 고등학교 3학년 때 정신을 차렸고 삼수 끝에 언니가 다니는 교대에 들어갔다. 막내조카는 고2때 돌연 음악을 하겠다며 공부는 늘 뒷전이었다. 부모는 걱정이 컸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중 2학년까지 손자와 함께 잤던 할머 니는 손자가 마음을 다잡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결국 손자도 고 3때 공부에 정진했고 두 명의 누나가 다니고 있던 교대에 들어갔다. 성장기 아이들에게 할머니 할아버지만한 스승은 없다는 게 필자의 어머니에게서도 입증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할머니 할아버지, 특히 할머니의 존재는 이른바 긍정심리학에서 말하는 회복탄력성 의 개 념과 결부할 수 있다. 회복탄력성(resilience)란 원래 제자리로 돌아오는 힘을 일컫는 말로, 심리학에서는 주로 시련이나 고난을 이겨내는 긍정적인 힘을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즉 회복 탄력성이란 아이 스스로 일상 속에 부딪히는 크고 작은 시련과 문제를 이겨 내는 마음의 근 육이다. 회복탄력성은 또한 절망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랐지만 공부나 친구관계 등 매사에 적극적이
고 긍정적인 청소년에게서 발견된 개념이다. 연구를 주도한 사람은 미국 발달심리학자 에미 워너였다. 1954년 워너는 극단적으로 열악한 조건에 놓여있는 하와이 카우아이 섬의 1955년 생 신생아들이 18살 청소년으로 성장할 때까지 과정을 분석했다. 그 결과 3분의 2는 심한 학습장애와 범죄경험을 갖고 있거나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3분의 1 정 도 아이들은 모범적이고 학교 성적이 우수하며 자신 있게 진취적으로 성장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에미 워너는 이 학생들의 공통점은 회복탄력성이 높다 는 것으로 설명했다. 에미 워너는 특히 회복탄력성의 핵심적 요인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관계였다. 어 려운 환경에서도 제대로 성장한 아이들이 예외 없이 지니고 있는 공통점은 그 아이의 입장 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어른이 적어도 한 명은 아이 곁에 있었다 는 점이었 다. 이는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즉 (외)할머니나 할아버지, (외)삼 촌이나 (외)사촌, 이모나 고모 등 언제나 상담이나 조언 역할을 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있는 아이일수록 성적도 좋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외) 할머니나 (외)할아버지도 포함될 수 있다. 필자의 조카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손자손녀들에 게 가장 든든한 후원자의 역할을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가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에미 워너의 회복탄력성의 연구 결과에서도 격대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단서를 발견해낼 수 있다. 다음에 살펴볼 빌 게이츠나 버락 오바마의 경우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2. 때로 부모교육보다 더 효과적인 격대교육 성공 사례 1) 나서기 가풍의 중독과 외할머니의 독서교육, 빌 게이츠 가 우리나라에서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격대교육은 서양에서도 발견된다. 서구에서도 할아 버지나 할머니가 손자손녀의 교육에 열성적이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부자의 상징이 되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창업한 빌 게이츠 가는 외할머니가 키운 독서영재 였다. 빌 게이츠는 자선사업가로 바쁜 어머니 대신 외할머니가 키워내 MS사를 창업해 세계적인 회 사로 만든데 이어 세계적인 자선사업가로 우뚝 섰다. 빌 게이츠는 최근 기업들이 가난한 사 람들을 위한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데 초점을 둔 사업을 창출해야 한다면서 창조적 자본 주의(creative capitalism)를 주창하기도 했다. 빌 게이츠는 가난한 집 출신에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오해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것은 사실 이 아니다. 빌 게이츠는 대은행가인 미국 서부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H. 게 이츠 2세는 워싱턴주립대 법대를 나온 변호사로 시애들의 법률회사를 경영했는가 하면 주 변호인협회 회장이었다. 할아버지는 대은행가였고 증조부는 시애틀은행인 내셔널시티뱅크의 설립자로 시애틀시가 생겨날 때부터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 메리여사는 시애틀 은행가의 딸로 워싱턴대학교의 사무처장을 지냈다. 특히 그의 어 머니는 자선사업가로 시애틀의 사교계를 주름잡을 만큼 활발한 활동과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고 자선단체의 회장(미국 유나이티드웨이와 유나이티드 인터내셔널)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래서 빌은 어린 시절 외할머니가 키우다시피 했다. 빌 게이츠가 쓴 자서전 게이츠 에는 외할머니와 보낸 어린 시절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 다. 외할머니는 늘 과자를 만들어 놓고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곤 했다. 게임과 카드놀이를
좋아했던 외할머니는 어린 손자에게 다양한 게임을 가르쳤다. 게임은 할머니에게 단순히 시 간을 때우는 일이라기보다는 기술과 지능을 시험하는 시간이었다. 또한 빌 게이츠의 아버지 빌 게이츠 시니어(본명은 윌리엄 헨리 게이츠 2세, 빌 게이츠 의 본명은 윌리엄 헨리 게이츠 3세 이다)가 쓴 게이츠가 게이츠에게 에도 가미 외할머니의 역할이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내 메리가 자원봉사 일로 바빠지자 아이들의 학교시간에 맞춰 장모님이 우리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매일 우리 집으로 오셨다. 장인어른이 이미 돌아가셨던 터라 장모님은 혼자 살고 계셨지만 단 한 번도 우리 집에서 저 녁식사를 하셨던 적이 없다. 생각이 깊은 장모님은 우리 가족만의 식사시간이 필요하다며 언제나 집으로 돌아가셨다. 1) 이어 윌리엄 게이츠는 가미 장모님은 우리 아이들을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아 주었고 아이들 의 모든 것을 수용해주는 한없이 너그러운 분이었다 고 전하고 있다. 막내딸 리비는 가미 외할머니를 어떤 것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 어떤 비밀이라도 지켜줄 수 있는 영원한 친구로 기억한다. 외할머니는 늘 책을 읽어 주셨고, 덕분에 빌은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진 독서광이 되었 다. 청소년을 위한 자연과학소설의 고전으로 화이트와 디카밀로(E. B. White, Kate DiCamillo) 공저의 샤로테의 거미집, 동물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의사 돌리틀과 동물 환자들을 그린 휴 로프팅(Hugh Lofting)의 돌리틀 박사 와 기상천회한 발명품을 만들어내는 발명가를 그린 빅터 애플턴(Victor Appleton)의 톰 스위프트, 그 리고 예전에 우리나라에 영화로도 방영되었던 에드가 라이스 브로우스(Edgar Rice Burroughs) 타잔 시리즈, 그리고 수학과 과학 책도 빠짐없이 읽었다. 외할머니 덕분에 빌 게이츠는 어릴 적 별명이 책벌레였을 만큼 독서를 좋아했다. 그 자신도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것은 동네 도서관이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컴퓨터 황제인 그는 컴퓨터가 결코 책의 역할을 대체하지는 못할 것 이라고 말한다. 빌 게이츠는 어려서부터 이해할 수 없는 게 생기면 답을 알아내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 였고, 그 때문에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컴퓨터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라, 컴 퓨터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면 당장 도서관으로 달려가 밤을 새며 그 궁금증을 찾고 해결했다. 빌게이츠의 대저택인 게스트하우스에서 눈길을 끄는 건물이 하나 있는데 다름 아닌 돔 형태 로 지어진 도서관 건물이다. 돔으로 지은 이유는 빛이 잘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외할머니에게 배운 카드실력으로 나중에 하버드대학에서 포커놀이를 통해 돈을 모아 결국 창업자금을 만들었다. 빌은 천성적으로 경쟁심이 강해서 지는 걸 아주 싫어했기 때문에 외 할머니는 카드놀이를 통해 그의 개성을 잘 살려주었던 것이다. 빌 게이츠의 이러한 경쟁심 은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하면서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그 강점을 드러냈다. 피터 드러커는 프로페스널의 조건 이라는 책에서 단점을 줄이려고 하기보다 강점을 강화하라 고 조언한다. 외할머니는 빌의 이러한 경쟁심을 자극함으로써 그의 강점으로 만들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경쟁심은 자칫 잘못 이용하면 사행심을 부추길 수도 있어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이다. 이 렇게 보면 빌은 외할머니와 궁합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손자의 성격을 잘 파악 해 그에 맞게 재능을 키워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격대교육의 전통이 시공을 뛰어 넘어 미국에서도 세계적인 갑부인 빌 게이츠의 소년시절을 이끌어 주었던 것이다. 빌 게이츠의 아버지 윌리엄 게이츠는 나는 가미 장모님을 통해 할아버지, 할머니로서 아 이들을 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며 그 자신이 이제는 손자손녀 들을 위해 할아버지 역할을 나름대로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손자들을 맥도널 1) 빌 게이츠 시니어, 게이츠가 게이츠에게, 국일미디어, 2010, 137쪽.
드에 데려가거나, 아이들 학교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날 에 참석하는 일을 통해 나름대로 아 이들을 위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날 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학교에 방문해 손자, 손녀와 하루를 보내는 날이다. 빌 게이츠의 부모는 손자손녀들의 행사 에 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자신의 손자 아이들 개성을 고려해 그 아이가 흥미를 느낄 만한 책을 사주기도 한다고 전한다. 나아가 빌 게이츠의 부모는 자신의 손자 손녀들의 생일선물로 함께 휴가를 간다고 전한 다.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알고, 또 우리가 아이들을 더 잘 아는 기회를 갖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막내 손녀를 데리고 자주 놀러 가는데, 그곳에서 손녀가 이웃 아이들과 즐겁게 어울려 노는 것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본다고 한다. 이렇게 또래아이들끼 리 어울려 노는 것을 통해 인간관계 능력을 형성하는 것이다. 빌 게이츠의 부모는 할아버 지, 할머니가 손자손녀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이렇게 말한다. 너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무척 소중한 존재란다. 네가 어떻게 커 가는지, 앞으로 네가 무엇을 하는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곁에서 지켜볼 거란다. 2) 연말이 되면 생각나는 소설이 있다. 영국의 자수성가형 소설가인 찰스 디킨스가 쓴 크리스마 스 캐럴 이다. 구두쇠를 상징하는 스크루지는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에서 유래한다. 디킨스는 인색하던 스크루지가 돌연 자선을 베풀며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부유한 계층부터 자 선을 실천하면 그 효과가 동심원처럼 확신되어 따뜻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확산시켰다. 연말이 되면 누구나 한번쯤 지난 한해를 되돌아보며 자선냄비 나 불우한 이웃들을 떠올 리곤 한다. 그런데 자선이나 기부,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며 도움을 주기 위해 나서는 행위는 일종의 중독 이자 습관 이라고 한다. 세계적으로 나서기 의 대명사가 된 빌 게이츠는 부모로부터 나서기 중독을 이어받았고 습관이 되었다고 한다. 윌리엄 게이츠가 쓴 게이츠가 게이츠에게 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 아이들은 내가 나서기 에 일종의 중독 증상을 보인다며 짐짓 놀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랬던 아이들이 지금은 나의 나서기 습관을 꼭 빼닮은 것 같다. 청년 변호사로 일하던 1950년대 윌리엄 게이츠는 YMCA 위원회에 합류하면서 처음으로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를 위해 더 많이 나서기 로, 더 많은 도움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후 윌리엄 게이츠는 대형 로펌의 회 장으로 성공가도를 질주했는데 나서기 또한 멈추지 않았다. 윌리엄은 부시 대통령이 상속 세 폐지를 주창하자 이를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대변인을 지냈다. 그런데 윌리엄 게이츠의 나서기 또는 나누기 는 그 아버지, 즉 빌 게이츠 할아버지의 나서기 에서 중독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도움이 필요할 때 누구든 주저 없이 도움을 구 하는 분이었다. 좋은 일에 쓸 공적 자금이 필요할 때면 아버지는 기꺼이 가가호호 문을 두 드리며 몇 푼이라도 일조해주기를 청했던 것이다. 고향 마을에 새로 공원을 조성한 것도 아 버지가 나서서 이룬 일이었다. 이는 빌게이츠의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대해 회고한 말이다. 게이츠 가의 나서기 중독은 3대째 이어져오고 있는 가족 전통 인 것이다. 빌 게이츠의 어머니인 메리도 남편에 뒤지지 않을 만큼 나서기 를 좋아 했다. 처음에 시 작한 봉사활동은 학교에서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지도하거나, 자선단체인 유나이티드웨이 자원봉사자로서 부모 중 한 사람이 없는 한 부모 가정 을 방문해 돕는 일이었다. 메리는 오 랜 세월 유나이티드웨이 자원봉사를 한 공로로 워싱턴 지역 유나이티드웨이의 첫 여성 책임 자를 거쳐 미국 유나이티드웨이와 유나이티드 인터내셔널에서도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20 2) 빌 게이츠 시니어, 게이츠가 게이츠에게, 136쪽.
년 동안을 워싱턴대학의 운영위원회 위원으로 지냈다. 아들 빌 게이츠는 매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저녁식사 자리에서 엄마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으며 자랐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네 용 돈의 얼마를 구세군에 기부할 생각이니? 어머니는 1994년 아들의 결혼식 전날 며느리 멜 린다에게 너희 두 사람이 이웃에 대해 특별한 책임감을 느낀다면 세상을 좀 더 살기 좋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라는 편지를 썼다. 빌 게이츠가 2008년 7월에 자신이 설립한 마이크 로소프트의 회장직을 사임하고 자선사업가로 나선 것은 어머니의 편지도 영향을 주었을 것 이다. 빌 게이츠의 왕성한 자선활동은 단지 돈이 많아서 하는 행위라기보다도 부모가 물려 준 위대한 유산 인 셈이다. 2) 미국 첫 흑인 대통령을 키운 외할머니의 사랑, 오바마 가 두 살 때 이혼한 케냐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인도네시아에서의 어린 시절, 외가에서의 청소년시절. 미국에서 첫 흑인대통령시대를 연 버락 오바마에게는 아늑하고 행복한 가정환경은 애당초 없다. 그에게 과연 어떤 비밀이 있었기에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궁금증이 생긴다. 그의 성장배경에 그 비밀이 숨어있다. 오바마는 열 살에서 대학 입학 때까지 하와이에서 외조부모와 함께 살았다. 외가는 백인집안으로 피부색도 달랐지만 백인 노부부와 흑인 손 자 세 사람이 꾸려가는 가정은 화목했지만 주변에서 보기에는 평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여전한 미국에서 때로는 경멸과 모욕적 시선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외할머니 매들린 더넘 여사는 손자가 피부색 때문에 상처받을까봐 한없는 정성과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손자가 자라나 대통령에 도전하는 과정을 기적을 목도하는 것 같은 심정으로 지켜봤다. 그러나 기구하게도 대통령선거 하루 전인 2008년 12월 3일 더넘 여사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손자를 키웠던 호놀룰루의 임대 서민아파트에서다.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야간 유세 를 하던 중 오바마는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는 할머니는 조용한 영웅들 가운데 한 분이었다. 이름이 신문에 실리지는 않지만 매일의 일상 속에서 열심히 살아온 3) 이라고 말하다 눈물을 흘렸다. 오바마에게 외할머니는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바마 후보의 아버지는 1982년, 외할아버지는 1992년, 어머니는 1995년 타계했다. 더욱이 아버지와는 어린 시절 단 한번 만나 농구공을 선물하고 떠났다. 그 농구공을 바스켓에 던지며 설움을 달랬다. 그의 농구실 력이 수준급인 것은 이런 아픈 가족사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그동안 가족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할머니에 대해 한없이 나를 위해 희생해온, 새 차나, 옷을 사는 걸 미루고 손자에게 모든 걸 쏟아 부으신,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가르쳐주 신 분 이라며 그리워했다. 더넘 여사는 고교졸업 학력이 전부지만 성실성과 인내심으로 말 단 행원에서 하와이 지역은행 최초의 여성 부행장 자리까지 올라 사실상 가계를 꾸려갔다. 직장생활을 할 때에는 흑인 수위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등 인종적 편견 없이 대했다. 그런데 오바마의 피에는 뜻밖에도 체로키 인디언의 피가 흐르고 있다. 더넘 여사가 바로 영국계 이민자의 후손인데 외가 쪽에 체로키와 닿아 있다. 이런 출생배경이 인종적 편견을 가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또 그게 딸이 케냐 출신의 흑인 대학생을 데려왔을 때에도 흔쾌 히 결혼을 허락한 배경이 됐을 것이다. 오바마에게 그런 외할머니의 존재는 축복이 아닐까. 오바마를 을 키워낸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바마의 꿈을 이룬 것도 청소년시 절 외할머니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오바마는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하와이에서 명문학교인 3) 동아일보, [ 美 대선] 오바마 나의 조용한 영웅이 떠났다, 2008.11.5.일자.
푸나후에 다닐 수 있었다. 푸나후 시절 오바마는 마약에 손을 대며 방황한 적도 있지만 이 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조부모 덕분이었다. 그런데 오바마의 성공신화를 보면 역설적인 요인을 발견할 수 있다. 다름 아닌 프레드 L. 스트로트베크의 분석이다. 원칙상의 문제 등으로 인해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놓아버린 아버 지와 성취에 대한 강한 이상을 지닌 어머니야말로 자식의 재능을 발전시키는데 최적의 조합 이다. 4) 스트로트베크의 분석은 흥미롭게도 오바마에 그대로 대입해볼 수 있지 않을까. 조 국 케냐를 위해 이혼까지 불사한 오바마의 아버지와 학업을 위해 아들을 남겨둔 채 인도네 시아로 돌아간 어머니가 여기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경우 조국인 케냐 여행을 통해 가족까지 버린 아버지를 이해하면서 그를 영웅으로 삼았고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다. 오바마는 아버지가 비록 자신과 어머니를 버렸지만 조국에 대한 아버지의 헌신 과 열정에서 위대한 아버지의 모습을 읽고 존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바마는 아버지를 통 해 자신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되찾을 수 있었고 또한 그가 조국을 위해 할 일을 깨달을 수 있었다던 것이다. 어린 시절 오바마에게 아버지는 신화적인 존재였다. 2세 때 아버지와 헤어진 오바마는 어 머니와 살다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 함께 하와이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때 오바마 는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한 험담을 듣지 못했다.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 와 이혼한 어머니도 아버지에 대해 항상 좋은 이야기만 해 주었다. 그러면서 외할아버지는 항상 너는 네 아버지의 자신감을 배워야 해. 자신감은 남자의 성공을 위한 비밀의 열쇠거 든. 이라고 마무리하곤 했다. 외할아버지가 들려 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들은 오바마가 아버지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 각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오바마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어머니가 들려주는 짧은 이야 기를 재구성해 가면서 아버지를 자신이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렸다. 그러면서 소외감과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견뎌낼 수 있었고 조금씩 자신감을 가지고 생활할 수 있었 다. 오바마에게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아버지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힘이 되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헤더 레어 와그너가 쓴 오바마 이야기 에 따르면 오바마는 10세 때 하와이에서 아버 지를 만나게 된다. 한 달 동안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때 두 가지 기억을 간직하게 된다. 하나는 아버지가 일일교사가 된 일이다. 푸나후 학교에서 아버지가 교단에 서던 날 아버지 는 친구들로부터 큰 박수와 존경을 받았다. 그것은 오바마에게 일어난 뜻밖의 사건이었다. 아버지는 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 자유를 위해 싸웠던 조국 케냐의 역사에 대해 들려주었다. 케냐 사람들을 부당하게 억압했던 영국인들과 자유를 향한 꿈을 잃지 않고 끈기와 희생으로 시 련을 이겨내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케냐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강의를 끝내자 친구들은 박수를 쳤고 크게 환대했다. 친구들은 오바마에게 멋진 아버지를 두었다고 말했다. 너희 아빠 정말 끝내준다! 고 환호하는 친구도 있었다. 오바마 의 아버지를 만나 보기 전까지 그 아이는 아프리카에 식인종이 산다고 말했던 친구였다. 두 번째 기억은 아버지가 조국 케냐의 소리라며 레코드판 두 장을 선물해 준 덕분에 간직 할 수 있었다. 이거 너 주려고 가져왔는데 깜빡했네. 네 조국 케냐의 소리들이다. 그날 오 바마는 음악을 들으며 아버지와 함께 춤을 췄다. 오바마는 아버지와 재즈 연주회도 가고 함 께 책을 읽기도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떠나는 날 농구공을 선물로 받았다. 오바마가 농구 선수 수준의 농구 실력을 가질 수 있었던 까닭은 이때부터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농구 코 4) 빅터 고어츨 외, 세계적 인물은 어떻게 키워지는가, 뜨인돌, 2006. 146쪽.
트에서 땀을 흘린 덕분이었다. 그 후 아버지는 조국 케냐로 돌아가 불행하게 삶을 마감했지 만 오바마에게는 결코 실패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조국 케냐를 사랑한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오바마는 더 큰 사랑의 존재를 알 수 있었고 강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후 그가 흑인으로서 미국 대통령의 꿈을 키울 수 있었던 에너지로 작용하게 된다. 그가 대 통령이 된 것은 아버지가 남기고 간 추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바마에게서 이른바 아버지 요인 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성인이 된 자녀들 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는 문제들의 근원을 추적해보면 아버지의 영향이 아주 크다. 스테 판 폴터는 모든 인간관계의 핵심요소 아버지 라는 책에서 모든 인간관계의 핵심에는 아 버지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이를 아버지 요인(father factor)이라고 규정한다. 아버지 요인 이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아버지의 태도, 행동, 가치, 직업윤리, 그리 고 자신과의 관계 유형 등을 의미한다. 즉 성공한 사람은 성공한 사람대로, 실패하거나 조 직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또 그 나름대로 상당부분은 아버지의 문제에 기인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아들뿐만 아니라 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버지는 죽어서도 영향을 미치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생각하며 언젠가 눈물을 글썽이면 아버지는 그것으로 만족하는 존재다. 그 아버지가 실패했든 성공했든 상관 없다. 다만 오바마 아버지처럼 신념과 자기주장이 강하고 열정 있는 삶을 산다면 그 어떤 아버지도 자녀에게 존경받을 수 있고 또 그 자녀는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며 인생의 길을 살 아갈 것이다. 오바마의 경우 아버지의 존재를 알려준 사람은 외할아버지였고 결국 열 살 때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서 아버지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나아가 자기 정체성을 형 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오바마가 흑인 첫 미국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 도 아버지요인이 크게 작용했다고 하겠다. 3) 포스트모던 문학의 지평을 연 외할머니의 영국식 교육, 보르헤스 가 아르헨티나 출신의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단편소설집 픽션들 에 서 보여준 그 난해함으로 인해 일반 독자보다 사상가나 소설가들에게 인기 있는 작가다. 20 세기 서구 지성사를 대표하는 푸코를 비롯해 데리다, 우베르트 에코, 옥타비오 파스 등에 의해 작품이 해부됨으로써 더 유명해진 것이다. 텍스트를 쓴 작가의 의도 못지않게 그것을 읽는 독자의 해석이 중요하다는 독자수용미학이나 후기구조주의 등 사상의 골격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보르헤스는 모국어인 스페인어로 읽기 이전에 영어로 읽는 법을 먼저 배웠다. 그가 돈키 호테 를 스페인어 원본이 아니라 영어 번역판으로 읽었다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그가 독서의 기쁨을 느낀 것은 스페인어 책보다 영어 책이 더 많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영어 책 속에는 현실보다 훨씬 멋지고 신나는 신세계가 담겨있었다. 그런데 그는 영어권 작가가 되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배운 영어는 20세기 서구중심의 문학계에서 변방 으로 치부되던 아르헨티나 출신이 문학계를 주도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가 어릴 때부터 영어와 스페인어의 이중 언어를 쓰는데 아주 익숙했던 비결은 바로 영 국인 할머니에게 있었다. 집안에서 호르헤 대신 같은 이름의 영국식 발음인 조지라고 불렀 다. 영국인 할머니는 아들과 손자뿐 아니라 며느리에게까지 영어를 가르쳐 집 안에선 모두 영어를 쓰게 했다. 보르헤스의 집은 문화적 주관이 뚜렷했던 영국인 할머니에 의해 아르헨 티나에 있는 조그만 영국 식민지 같았던 것이다.
보르헤스는 어릴 때에 친할머니와는 영어로, 외할머니와는 스페인어로 말했다. 영어와 스 페인어가 서로 다른 언어라는 사실은 그가 철들고 나서야 알았다고 한다. 보르헤스가 처음 책을 접한 것은 할머니 무릎에 앉아 영어로 된 영국 동화집을 들으면서부터였다. 그의 부모 는 당시 귀족가문의 전통대로 보르헤스를 일반 학교에 보내는 대신에 가정교사인 영국인을 두어 교육시켰다. 후에 부모가 할머니 집에서 분가하자 보르헤스는 스페인어 읽는 법을 배우고 스페인어 책을 읽게 된다. 그러면서 서서히 영국식 이름의 조지 는 스페인어의 호르헤 로 바뀌어 가게 된다. 보르헤스는 나는 항상 작가로서보다는 독자로서 더 우수했다. 라는 말을 자주 했다. 보르 헤스의 아버지는 열렬한 독자였을 뿐만 아니라 작가 지망생이었다. 아버지는 어마어마한 영 어 책을 소장한 개인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 서재는 어린 그에게 우주보다 더 넓게 보였 다. 아버지가 영어책으로 가득한 개인도서관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보르헤스의 할머니 덕분이었다. 아버지의 유년시절에 할머니가 구입한 동화책과 모험소설책들로 가득했다. 나는 어릴 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교외에서 살았다. 그것은 구불구불한 골목길 위로 황 혼이 멋지게 깔리는 구역이었다. 확실한 것은 우리 집에 철책으로 둘러싸인 정원과 엄청난 영어 책이 있는 도서관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5) 보르헤스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만일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 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아버지의 도서관 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보르페스가 처음으로 다 읽어본 소설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 이다. 그는 어릴 적에 마크 트웨인, 브레트 하트, 호손, 잭 런던, 애드거 앨런 포 등을 읽었을 때부터 미국을 무척 좋아했고 지 금도 미국 작가들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는 모두 할머니가 영어책을 사들여 아버지의 도 서관을 만들어준 데서 시작한다. 나중에 원어로 돈키호테 를 읽었을 때 난 뭔가 잘못된 번역본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 다. 나는 아직도 빨간생 장정에 금박활자가 찍힌 가니어의 번역본을 기억한다. 스페인어 원 본 돈키호테 를 나중에 읽었는데 뭔가 어색해서 진짜 돈키호테 가 아닌 듯한 느낌마저 들 었다. 6) 보르헤스는 영아로 된 책을 많이 읽었지만 어린 시절 가장 영향은 받은 것은 돈키호테 였다. 그런데 스페인어로 읽기에 앞서 영어로 된 돈케호테 를 읽었던 것이다. 1939년 보르 헤스를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알려지게 한 첫 단편소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는 어린 시절 읽었던 영어판 돈키호테 의 기억에서 탄생한 것이다. 나는 여섯인가 일곱 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세르반테스 같은 스페인 고전 시대 작가들을 흉내 내려고 했다. 또한 조악한 영어로 그리스 신화를 요약한 글도 썼다. 나 의 첫 문학 모험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7) 그는 백과사전을 즐겨 읽었는데 그 또한 영국의 백과사전을 즐겨 보았던 할머니와 그 할 머니의 습관을 물려받은 아버지를 통해 세대를 이어 물려받은 유산이다. 보르헤스를 키운 것은 도서관이었고 그곳에서 백과사전을 읽기 시작했다. 보르헤스를 가장 잘 표현한 말 중의 하나는 도서관의 작가 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노 년에 이르기까지 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작가와 교수 외가 그가 가졌던 유일한 직업은 도서관 사서였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와 함께 도서관에 다니며 백과사전 5) 김홍근, 보르헤스 문학전기, 솔, 2005, 68쪽. 6) 김홍근, 73쪽. 7) 김홍근, 76-7쪽.
등 책을 읽었고 38살에 도서관 사서로 취직해 74살까지 국립도서관장으로 재임했다. 그가 장년에 실명하고 난 뒤에도 도서관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영어로 책을 읽게 하고 말을 배우게 한 영국인 할머니의 교육방식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4) 외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서 잉태된 노벨문학상, 가르시아 마르케스 가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 의 작가인 콜롬비아 출신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1927~2014)는 이른바 마술적 리얼리즘 의 영역을 개척해 소설의 죽음 을 말하던 20세기 중반에 소설의 소생 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로 인해 198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 다. 마술적 리얼리즘은 현실과 환상, 사실과 허구가 초현실주의적 수법으로 교묘하게 결합 되어 있는 형태를 말한다. 아마란타는 죽은 사람들에게 전해 줄 편지를 모아가지고 해질녘에 죽음의 나라로 가리라 는 소식이 마콘도 전체에 전해졌으며 오후 3시에는 응접실에 준비해둔 상자가 편지로 가득 찼다. 편지를 쓰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아마란타에게 전해 줄 말을 남겼고, 아마란타는 그 말과 그 얘기를 전해들을 사람의 이름과 사망한 날짜를 공책에 적었다. 8) 아마란타는 내가 그곳에 가면 우선 그분이 어디 계시는지 물어봐서 찾아가지고 당신의 얘기를 전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라고 말했다. 그녀는 이런 일을 떠맡게 되어서 오 히려 신이 나는 듯했다. 이 대목에서 보듯이 마치 죽음 너머에도 삶이 있는 것처럼 자연스 럽게 이야기되고 있다. 아마란타가 혼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마치 사후 세계가 있는 것처럼 죽은 사람에게 보낼 편지를 써 그녀에게 주는 것이다. 마치 사후세계의 우편배달부처럼 말이다. 여기서 보듯 때로는 마술적 현실이 사실주의적 현실보다 훨씬 사실적이라는 역설적 주장 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황당무계함은 이 소설의 주조를 이룬다. 그는 황당무계함 또는 우 리 현실의 일부분이다. 현실 자체가 황당무계하다. 고 말한다. 그런데 마르케스의 작품 세계는 그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의 삶이 소설적이 고 그는 삶 속에서 소설을 창조했던 것이다. 1927년 콜롬비아의 아라카타카 마을에서 아버 지 가브리엘 엘리히오 가르시아와 어머니 루이사 산티아가 마르케스 사이에 태어나다. 여기 서 보듯 마르케스는 어머니의 성이다. 송병선의 가르시아 마르케스 비평서인 가르시아 마 르케스 에 소개된 인용문에는 어린 시절 큰 영향을 미친 외가에 대한 나는 멋진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외조부모들에게는 환영으로 가득 찬 커다란 집이 있 었습니다. 그들은 풍부한 상상력과 미신을 신봉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 ) 한마디로 공포 로 가득 찬 멋진 세계였지요. 9)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외조부모 밑에서 성장했고 바로 그러한 성장환경이 마법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태어난 후 얼마 안 되어 그의 부모는 리오아차의 전신국으로 발령을 받아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외할아버지 집에 맡기고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초저녁이면 할아버지와 마르케스는 장터의 시끌벅적한 소음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온 세상의 신기한 것들에 감탄했다. 장터에서는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는 마법사들, 촛불을 삼키는 사람들, 동물들에게 말을 하게 만드는 복화술사들, 사건들을 노래로 만들어 목청껏 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 년 동안의 고독, 안정효 역, 문학사상사, 2005, 312-3쪽. 9) 송병선, 가르시아 마르케스, 문학과 지성사. 1997, 18쪽.
불러대는 아코디언 연주자들에 정신이 팔렸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산책을 나갈 때 꼭 나를 데려가라고 강요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새 애인을 사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마르케스는 외할아버지가 낯선 집에서 가 장처럼 앉아 있는 것을 목격하고선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마르케스에게 사전을 선물해주면서 이 책은 모든 걸 알고 있고, 또 절대 틀리는 법이 업는 유일한 책이란다. 라고 손자에게 말한다. 그러자 손자는 단어가 몇 개 들 어 있어요. 라고 묻자 모두 다 들어 있지 라고 할아버지는 대답한다. 할아버지가 사전을 선물하자 마르케스는 호기심이 발동한 나머지 내용은 이해하지 못한 채 알파벳순으로 소설처럼 사전을 읽어 나갔다. 그는 작가로서의 내 운명에 근본적인 역할 을 했을 그 책을 나는 그런 식으로 만났던 것이다 라고 회상한다. 마르케스는 외할아버지가 죽고 난 후에 옷을 태운 것을 기억한다. 대령이 전쟁에서 입던 하얀 리넨 제복들은 불에 타는 순간에도, 마치 대령이 살아서 그 옷들을 입고 있는 것처럼, 대령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 ) 유물을 불태우는 그런 의식을 통 해 나도 외할아버지의 죽음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몸이 벌벌 떨렸다. 그 장면 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의 어떤 것이 외할아버지와 함께 죽어 버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순간 나는 이미 글 쓰는 법을 배우기만 하면 되는 초등학생 작가였다는 사실이다. 10) 외할아버지는 참전 용사로 대령이었는데, 훗날 마르케스의 소설에서 수차례 부활한다. 외 할아버지는 하루 중 아무 시각에나 나를 데리고 바나나 회사의 풍성한 매점으로 물건을 사 러 갔다. 거기서 나는 도미를 생전 처음 보았고, 처음으로 만져 본 얼음이 차갑다는 사실을 알고는 몸을 벌벌 떨었었다. 이 장면은 소설의 첫 문장으로 나온다. 몇 년이 지나 총살을 당하게 된 순간,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오래전 어느 오후 에 아버지를 따라 얼음을 찾아 나섰던 일이 생각났다. 11) 얼음덩이를 보고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이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야 라고 외친다. 마치 성경에 손을 얹고 증거하듯이 그 얼음덩이를 만지면서 그는 이것은 우리 시대의 최고의 발명품이야 라고 단 언한다. 12) 미신을 믿고 신비적인 것을 아주 좋아하던 외할머니는 어린 가브리엘에게 환상적이고도 터무니없는 일들을 아주 자연스러운 말투로 이야기해 주곤 했다. 가브리엘은 환상과 경이로 가득 찬 옛날 얘기의 세계에 흠뻑 젖은 채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마르케스는 내 존재 방식과 사고방식의 근간은 유년기에 나를 보살펴 주던 외갓집 여자 들과 여러 하녀들로부터 영향 받은 것 같다 고 회상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이상야릇한 외가집은 그 어떤 가정환경보다 내 직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손 자에게 피비린내 나는 전투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하면, 새들의 비행 방법과 오후에 치는 천 둥소리들에 관해 설명해주면서 어른들의 세계에 관해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외가에서의 어린 시절 동안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마콘도란 상상의 마을로 형상화될 아라 카타카와 풍성하고 신비스런 외할아버지의 집을 통해 백 년 동안의 고독 에 등장하는 부엔 디아 가계를 소설화하는 소재를 발견한 것이다. 즉 그는 유년기부터 들어온 전설이나 신화 의 이야기가 잠재의식에 머물고 있다 드디어 백 년 동안의 고독 으로 표출한 셈이다. 외할 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옛날의 이야기를 독특한 관점과 문체, 이야기 구조로 현실과 비 10)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조구호 역, 민음사. 2007, 147쪽. 11)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 년 동안의 고독, 5쪽. 12) 송병선, 99쪽.
현실, 사실과 환상을 교묘하게 융합시켜 놓았음으로써 총체적 허구의 세계를 창조해 낸 것 이다. 이 소설 속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일상적인 것은 환상적으로, 또한 환상적인 것은 일상적으로 융합한다. 그는 항상 그렇듯, 향수는 나쁜 기억을 지우고 좋은 기억을 확장한다. 그 누구도 향수의 맹공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한다 13) 고 말한다. 마르케스의 소설은 어린 시절 외가에서의 경험 에서 잉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5) 노벨상의 명가를 만든 홈스쿨링과 격대교육, 퀴리 가 격대교육 의 참모습을 퀴리 가에서도 그대로 발견할 수 있다. 격대교육은 할아버지나 할 머니가 손자손녀를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가르치는 자녀교육의 한 방법이다. 노벨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퀴리 가는 할아버지 외젠느 퀴리 박사가 손녀들을 훌륭하게 키 워냈다. 할아버지는 아들 피에르에 이어 손녀 이렌느까지 노벨상을 타게 했는데, 그것은 과학 의 호기심과 열정을 일깨워준 외젠느 퀴리에서 시작됐다. 퀴리가문은 퀴리부부가 1903년 물 리학상을, 퀴리부인(본명 마냐 스클로도프스카)이 1911년 화학상을 받았고 이어 그의 딸 이 렌느부부가 노벨 화학상을 공동수상해 2대에 걸쳐 노벨상 부부공동 수상의 진기록을 냈다. 마리 퀴리는 1867년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마리의 아버지는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아버지가 교사에서 해직되고 가정형편이 어렵게 되자 어머니는 하숙을 쳐 생계를 보탰다. 아버지는 하숙생에게 과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리의 어머니는 마리를 임신했을 때 결핵을 앓았고, 마리가 10살 때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으며 전 세계 여성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된 마리 퀴리(본명 마냐 스클로도프스카)는 당시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에서는 여성의 대학진학을 금지하는 제도 때 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할 뻔 했다. 그래서 자신이 태어난 조국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 파리에 와서야 대학 문턱을 밟을 수 있었다. 지금과 같이 여성들이 자유롭게 대학에 다닐 수 있고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닌 상황이었기 때문에 마리 퀴리의 삶이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퀴리부인은 지금도 전 세계 여성들을 꿈과 희망의 세계로 이끄는 역할모델이 되어주고 있다. 프랑스의 퀴리집안은 아버지 외젠느 퀴리와 할아버지가 모두 의사였고 외젠느의 아들 자 크 퀴리와 피에르 퀴리 형제 또한 과학자였다. 여기서 피에르 퀴리와 마냐가 결혼하면서 훗 날 노벨상의 명가로 우뚝 선 퀴리 가문이 탄생한 것이다. 퀴리 가의 격대교육은 피에르 퀴리의 아버지이자 의사로 유명했던 외젠느 퀴리에서 시작 된다. 퀴리부부는 딸 이렌느를 낳자마자 퀴리부부는 요즘 맞벌이 부부가 겪는 것과 같은 고 민에 빠졌다. 경제사정이 좋지 못한 상황이어서 부부가 공동으로 실험을 계속하기가 힘들었 다. 그때 피에르의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숨을 거두자 홀로 남게 된 아버지 외젠느 퀴리가 아들과 함께 살게 됐다. 마리가 실험실에 있는 동안 자연스럽게 할아버지가 손녀를 돌보게 되었다. 할아버지 외젠느가 손녀 이렌느에게 끼친 영향은 컸다. 의사인 외젠느는 손녀가 정 신적으로 안정된 아이로 자라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빅토르 위고와 에밀 졸라 등 문학작 품을 읽어주면서 문학적 소양을 갖도록 이끌었다. 또 식물학과 박물학에도 자연스럽게 관심 을 가지도록 유도했다. 13)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30쪽.
외젠느 퀴리는 이미 자녀교육 전문가이기도 했다. 외젠느는 지적발달이 늦은 아들 피에르 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독학으로 키우면서 자연과학에 흥미를 갖게 해 결국 노벨상을 수상 하게 했다. 외젠느는 파리 근교에서 살면서 아이들에게 자연에 대한 탐구심을 자연스럽게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아버지는 자녀를 직접 가르칠 경우 자칫 감정을 상하게 돼 부모와 자녀관계를 해칠 수 있다고 했지만 외젠느는 자상하게 아들을 이끌었다. 외젠느는 의술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앞장선 의사였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허 준처럼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에는 의사가 없는 동네를 다니면서 환자를 돌봐주었다. 프랑스 가 혁명의 와중에 있을 때는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간이병원을 만들어 부상자를 데리고 와 치료해주기도 했다. 이때 총에 맞아 턱뼈가 부서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런 시민정 신으로 명예훈장을 받기도 했다. 외젠느는 파리 근교에서 살면서 아이들에게 자연에 대한 탐구심을 자연스럽게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외젠느는 두 아들의 교육을 직접 가르쳤다. 우리나라 부모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부모들 은 자녀가 다른 아이에 비해 지적 능력이 떨어지면 일찌감치 아이의 미래를 포기한다. 피에 르 퀴리의 경우를 보면 그것은 결코 현명한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훗날 노벨상을 탄 피에르 퀴리의 아버지 외젠느 퀴리도 성급하게 아이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외젠느는 아들 피에르가 지적 발달이 늦다는 것을 알고 직접 가르치기로 결심한다. 학교에 보내면 오히려 아인슈타인처럼 교사에게 구박을 받아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 다. 그래서 피에르는 고등학교까지 학교에 가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집에서 공부했다. 동생 인 외젠트보다 세 살 위인 형 자크 역시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아 들에게 어떤 선입관이나 편견을 가지지 않고 학교교육 대신 자신이 열정을 갖고 교육을 시 켰다. 피에르 퀴리는 다행히도 통찰력을 지닌 아버지가 있었기에 과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 던 것이다. 이들 형제 중에서 동생인 피에르 퀴리는 결국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가 된다. 피에르 퀴 리는 대학에서 실험준비 조교로 활동하면서 공부를 계속했고 여기서 마냐를 만나면서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게 되는 것이다. 가정 형편상 고액의 과외를 시킬 수 없는 가정의 경우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격대교육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 자체가 훌륭한 스승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6) 존경받는 부자를 만든 할아버지와 손자의 아침산책, 발렌베리 가 5대 150여년을 내려오면서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부자가문으로 꼽히는데 다름 아닌 스웨 덴의 발렌베리(Wallenberg) 가문이다. 발렌베리그룹은 우리나라 삼성, 현대그룹과 같이 스 웨덴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스웨덴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통한다. 현재 발렌베리 그룹 가운데 세계1위 기업만 5개에 이른다. 통신장비업체 에릭슨, 발전설비업체 ABB, 가전업체 일렉트로룩스, 제지업체 스토라엔소, 베어링업체 SKF 등 무려 5개 기업이 각각 해당 분야 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발렌베리 가는 처음부터 존경받는 부자가 아니었다. 이 가문은 은행을 만들고 큰돈 을 벌면서 스웨덴 사회를 위해 끊임없이 도움을 줌으로써 스웨덴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이 될 수 있었다. 발렌베리 가문은 자녀들이 가문으로부터 자긍심을 갖도록 교육을 해오고 있다. 발렌베리 가에서는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할아버지와 아이들이 함께 숲을 거닐면서 선조들의 위대한
업적을 들려준다고 한다. 또 사업적인 감각을 기를 수 있도록 할아버지가 손자를 직접 교육 시키고 있다. 또 집에 손님이 오면 아이들을 불러내 손님들과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게 한 다. 손님들과 주고받는 이야기를 통해 세상사는 지혜를 자연스럽게 익히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부자로 회자되는 경주최부잣집의 경우도 할아버지가 손자를 사랑 방에서 함께 자면서 사랑방을 찾는 과객들의 이야기를 듣게 했다. 경주최부잣집의 최염 옹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사랑방에서 생활했는데 할아버지는 손님이 찾아오면 언제나 옆에 앉아서 주고받는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었다 고 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 보컴퓨터를 창업한 이용태 박사의 경우도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가 손님들과 사랑방에서 대화 하는 자리에 앉게 했는데 그 자신 또한 자녀와 손자들에게 그런 교육을 해왔다고 전한다. 아 이들은 어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음으로써 그들의 지혜를 전수받는 자리가 되는 것이다. 집에 손님이 오면 아이들을 방으로 내쫓는 게 아니라 손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옆에서 지 켜보게 하는 것만으로 교육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보통 가정에서 어른들이 오면 아이들 은 얼씬도 못하게 하는데, 이제라도 아이를 동석시켜 어른들의 문화를 엿보고 익히도록 해 보는 것이다. 이게 바로 산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서는 상대방 을 배려하는 토론문화를 일찍이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발렌베리 가문은 이런 훈육과정을 통해 아이가 자신에 대한 정체성과 자긍심을 갖게 해줌 으로서 책임감 강한 아이로 거듭나게 해주었고 또한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사업 감각을 자연 스럽게 체득하게 해주었다. 발렌베리 가문이 존경받는 부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대대로 이어져오는 원칙을 전하고 함께 그 원칙을 공유한데 있다고 하겠다. 자녀가 아 버지나 할아버지의 철학을 따라주지 않으면 결코 5대에 걸쳐 존경받는 기업으로 거듭날 수 없을 것이다. 3. 이기적 육아 와 실존적 공허 를 넘어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격대교육은 서구에서도 자녀교육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즉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에도 공통적으로 격대교육으로 수많은 인물을 배출해 오고 있다. 특히 서구의 격대교육에서 외할머니가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버락 오바 마 대통령과 빌 게이츠,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공통적으로 외할머니의 존재가 큰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드러났다. 서구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자손녀들에게 지식보다 더 소중한 지혜와 경험을 들려줌으로써 부모와 교사가 채워주지 못하는 멘토의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서구에서는 이미 조부모의 날 을 제정해 사회적으로 조무모의 교육 참여 기회를 활 성화시키고 있다. 앞서 빌 게이츠의 아버지가 손자손녀가 다니는 학교에 할아버지 할머니 의 날 에 참여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에서는 이미 사회적으로 조부모가 손자손녀의 교 육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고 있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조부모의 날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는 나라는 14개국 정도로 파악되 고 있다. 미국은 9월 노동절 다음 첫 일요일을 조부모의 날 로 공식 지정해 시행하고 있는 것을 비롯해 독일(10월 둘째 일요일), 영국(10월 첫째 일요일), 프랑스(3월 첫째 일요일), 이탈리아(10.2일), 호주(11월 첫째 일요일), 캐나다(9월 둘째 일요일), 대만(8월 마지막 일 요일), 파키스탄(10월 둘째 일요일), 브라질(4.26일), 에스토니아(9월 둘째 일요일), 남수단
(11월 둘째 일요일) 등이 조부모의 날을 제정해 기리고 있다. 폴란드는 할머니의 날(1.21) 과 할아버지의 날(1.22)을 분리해 시행하고 있다. 조부모의 날 은 조부모와 손자손녀 세대 간의 장벽을 허물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 공한다는 차원에서 우리나라도 시급히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빌 게이츠 가에서 확 인할 수 있듯이 손자손녀들이 조부모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마음을 전해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멋진 세대 간의 사랑이 있을까 싶다. 이는 또한 세대 간의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통로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이기적 키워드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이른바 이기적 신 드롬 이 붐을 이루고 있다. 수명 연장과 베이비부머들의 퇴직과 맞물려 이기적 노후 가 여기에 가세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 신문은 외손자 양육에 사생활을 뺏긴 내 인생도 있는데... 장모님의 반란 14) 이란 기사를 다루었는데 이게 바로 이기적 노후 의 한 단면일 것이다. 이 신문은 손자를 안 맡는 노하우를 담은 이른바 장모 5계명 15) 까지 소개했다. 키우더라도 확실하게 양육비를 받자 여유가 있다면 양육 도우미를 붙여주자 등과 같은 5계명을 보면 육아를 떠안은 장모들의 사정에 공감가면서도 왠지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즉 이기적 노후는 이기적 자녀의 양산으로 이어지고 세대간의 간극은 더욱 넒어지는 등 사회적인 문제를 더 한층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 다. 때문에 만시지탄이지만 우리나라도 조부모의 날 을 제정하기를 제언해본다. 이기적 신드롬 은 그동안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부모의 윤리인 헌신 이 사라지고 있다는 신 호탄이 아닐까. 이는 이기적인 자녀 들이 부모를 그런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 다. 얼마 전 우리나라의 부모자녀 관계가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도구적 인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부모의 소득이 낮을수록 자녀들의 발길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기적 가족 의 시 대, 나아가 가족해체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징후라는 생각마저 든다. 장모들의 반란에서 보듯이 이제 더 이상 부모가 자녀에게 무조건적으로 헌신하는 시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를 부채질 하는 것이 어쩌면 이기적인 부모 에 의한 이기적 육아 라고 할 수 있다. 내 아이만 잘 키우면 된 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아이를 더욱 이기주의자로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해체 시대일수록 역설적으로 가족 의 울타리는 더없이 중요한 자산이다. 일부에서는 이 기적 부모와 자녀들로 가족해체의 몸살을 앓고 있지만 가족공동체의 끈을 잘 이어가는 경우도 있다. 이는 부모나 자녀가 이기적인 욕망을 한발씩 물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21세기에 전통시대 와 같은 가족공동체의 모습을 기대한다는 게 애초 불가능하지만 격대교육과 같은 가족애를 바 탕으로 한 양육방식이 가족의 끈을 매개로 부축한다면 그나마 행복한 웃음꽃이 피어나는 가족 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치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생환한 빅터 프랭클의 인간이란 무엇인가(원제 Man's Search for Meaning) 에 실존적 공허 라는 말이 나온다. 실존적 공허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권태에 시달리고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빅터 프랭클은 실존적 공허를 소개하며 두 여인을 비교한다. 즉 자식 없고 재산이 많아 사회적으로 이름이 난 노부인과 불구의 자식을 가진 어머니를 대비한다. 먼저 자식이 없고 재산이 많은 노부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저는 백만장자와 결혼했 고 재산이 넉넉해서 유족한 생활을 했습니다. 한껏 살았지요. 이젠 나이 80이 된 몸인데 슬 14) 중앙일보, 2008년 1월 30일자. 15) 1. 장모도 인생을 즐길 권리가 있다. 2. 애 키울 자신 없으면 딸 결혼 전부터 못을 박자. 3.여유가 있으면 양육 도우미를 붙여준다. 4. 손자. 손녀를 길러주면 확실하게 양육비를 받자. 5. 시어머니와 양육을 분담하자.
하에 자식 하나 없이 지금 늘그막에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어 요. 그러면서 이 노부인은 사실 저의 인생이 실패이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 고 말끝을 흐린다. 불구의 자식을 가진 어머니는 이렇게 고백한다. 저는 어린애를 갖고 싶어 했습니다. 결국 소망이 이루어진 셈. 그러나 한 아이는 죽었어요. 나머지 한 아이는 불구자여서 만약 그 애 의 뒷바라지를 내가 맡지 않았다면 그 애는 요양소에 보내졌을 것. 비록 불구이고 남의 도 움이 없이는 못 사는 아이지만 그래도 내 자식입니다. 이 순간 그 어머니는 와락 눈물을 쏟았다. 울면서 말을 이었다. 지나온 저의 인생을 담담하게 돌이켜 보면 저의 인생은 충분한 의의가 있습니다. 저는 그 의의를 실현하고자 온힘을 기울여 왔으니까요. 저는 자식을 위해서 힘껏 노력했습니다. 이 어머니는 저의 인생은 조금도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고 말을 맺고 있다. 빅터 프랭클이 말한 실존적 공허 에 대한 최고의 처방약이 어쩌면 격대교육 에 있지 않 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결국 유한한 존재자인 인간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의미 있는 일 을 할 때 행복해질 수 있는데 손자손녀라면 그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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