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투고일 : 2009. 9.29 심사완료일 : 2009.12. 4 삶과 죽음의 경계, 상여 장식물의 이중적 구조 이 현 경 서울시립대학교 강사 Lee Hyun Kyung Lecturer of University of Seoul 1. 머리말 2. 상여 장식물의 사회적 출현과 그 의미 3. 삶의 영역 : 민화 양식의 수용과 시대성의 반영 4. 죽음의 영역 : 고대 미술에 나타난 계세적 세계관의 표상 5. 죽음을 보는 양가적 태도의 투사 6. 맺음말
민속학연구 제25호 197~226쪽 2009.12 삶과 죽음의 경계, 상여 장식물의 이중적 구조 이 현 경 서울시립대학교 강사 1. 머리말 상여( 喪 輿 ) 장식물은 목공예 뿐 아니라 미술사 전반에서 주로 조선후기에서 해방 후까지에 걸쳐 우리의 상례 문화 속에 잉태된 뛰어난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유분방한 형태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미술 사의 주변부에 자리 잡아 유지되어 왔다. 이는 동시대 성행했던 표현 형식이 유사한 민화( 民 畵 )가 한국회 화사의 영역에서 그 소재와 형태를 비롯한 상징 면에서 많은 연구와 노력이 집중된 것과 상반된 상황을 보여준다. 민화와 더불어 19세기 민화적 양식을 수용한 불화, 도자기, 가구, 자수, 건축 장식 등의 여러 분야처럼 상여 장식물이 조명되지 못했던 것은 그동안 죽음에 대해 금기시하는 선입견과 부정적 시각으로 인해 그 의미와 가치가 평가절하 되었기 때문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상여 장식물을 주목하여 상여 장식물이 민화의 2차원 평면 공간을 넘어 3차원의 공간을 다루는 목조각으로 불교미술의 석조각과 더불어 한국의 미의식을 살펴볼 수 있는 고유한 분야이 며, 인간의 죽음을 다루는 중요한 테제를 갖기에 삶과 연관한 풍성한 해석적 요소를 함의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또한 예와 질서를 중시하는 가부장적인 유교문화의 산물이지만 유교적 현세주의 속에서는 다룰 수 없는 죽음이기에 시대에 따라 축적된 불교, 도교의 영역이 혼재하며 그 중에서 특히 기층문화의 근간인 무속적 영역, 즉 샤머니즘적 세계관이 주된 예술적 원동력이었다는 점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본 연구를 통하여 상여 장식물의 상징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한국인의 생사관, 사자( 死 者 )에 대한 관념 을 비롯해 우리의 원형적( 原 型 的 )이며 집단적인 세계관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죽음은 어느 시대 에나 있었던 일이므로 상여의 도상 양식이 그 시대상을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반영하였음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99
삶과 죽음의 경계, 상여 장식물의 이중적 구조 2. 상여 장식물의 사회적 출현과 그 의미 주지하다시피, 상여 장식물은 조선시대의 유교적 상례문화와 함께 성행한 예술적 산물이다. 조선의 유교식 상례의 전통은 이미 조선 건국 때부터 성리학적 이데올로기 정립의 추진 과정에서 도입되었다. 충렬왕 16년(1290년) 성리학과 함께 들어온 주희( 朱 熹, 1130~1200)의 ꡔ가례( 家 禮 )ꡕ는 조선 예제( 禮 制 )의 기본이 되었고, 이를 토대로 ꡔ경국대전( 經 國 大 典 )ꡕ(1469)과 ꡔ국조오례의( 國 朝 五 禮 儀 )ꡕ(1474)가 편찬되어 시행되는 등 국가 주도의 유교식 의례의 보편화가 진행되었다. 1)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유교식 상례의 정책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 중기까지는 고려의 불교식 화장( 火 葬 )문화의 영향으로 유교식 매장 의례 는 완전히 정착되지는 못하였다. 유교식 상례문화가 정착된 계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전쟁으로 초토화된 조선 사회는 그 이전의 전통 문화의 단절 현상을 겪고 있었기에 국가의 유교식 사회 질서 확립의 의지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두 번의 양란을 겪은 후 성리학자들에게 있어 예( 禮 ) 는 논어에서 강조하고 있는 유학의 본질에 관련 된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들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실용적 학문이었다. 2) 사회 재건을 위해 조선의 실정에 맞는 실천적 학문의 필요성을 인식한 16~17세기의 학자들은 중국식 ꡔ가례ꡕ를 수용하 였지만, 있는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실정에 맞는 부분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과감히 버리는 형태로 취하였다. 3) 조선후기가 되면 실학자들의 학문적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복잡한 절차 를 가지는 고정적인 ꡔ가례ꡕ는 조선의 민속적 상황에 융합되면서 신분과 지역, 가정경제 등의 사회적 여건 에 따라 비고정적으로 흘러갔다. 4) 조선후기의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더불어 상례에서 가장 큰 의례 용구인 상여에서도 그 구조와 장식물 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다층화( 多 層 化 )와 건축물화 현상이, 장식적인 측면에서는 민화적 성격을 갖춘 그림과 더불어 각종 목( 木 )장식물이 부착되었다. 여백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식성이 부각된 상여는 더욱 화려해졌다. 5) 조선후기부터 화려한 장식물을 부착한 상여가 등장한 연유는 직접적으로 당시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농업, 상업의 발전에서 찾을 수 있다. 후기로 내려올수록 정치사회 적 지위를 누렸던 인물은 각종 예서와 관행을 바탕으로 한 절차를 중시하므로, 유교적 절제미를 실천하는 그들에게 상여 장식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적인 부를 획득한 인물은 당시 유교적 반상규범이 붕괴되면서 경제적 부의 소유가 곧 사회적 지위를 평가하는 가치척도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1) 김시덕, 2006, 한국 상례 문화의 이해, ꡔ목인박물관ꡕ 소장품 도록, 20쪽. 2) 이영춘, 1998, 다산의 예학과 복제예설, ꡔ조선시대사학보ꡕ 5, 조선시대사학회, 178쪽. 3) 김시덕, 앞의 글, 22쪽. 병자호란은 그때까지의 명 중심의 중화주의( 中 華 主 義 )적 세계관을 갖고 있던 조선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흔들어놓았다. 그동안 오랑 캐로 무시했던 만주족이 세운나라 청에 대해여 조선은 사대( 事 大 )를 강요받았지만 문화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방침으로 명의 멸망으로 오랑캐의 압제 속에 서도 중화문화는 유지하고 있는 것은 소중화( 小 中 華 ) 조선뿐이라는 의식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곧 명의 후계자로서 조선의 주체를 확인, 중화문화 의 유일한 계승자로서 조선문화의 자존의식( 自 尊 意 識 )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오랑캐에 종속된 조선지식인이 오랑캐 청에 대항하여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라는 실천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최완수, 1981, 겸제진경산수화고, ꡔ간송문화ꡕ 21 참조 ; 유봉학, 1995, ꡔ연암일파 북학사상 연구ꡕ, 일지사, 58쪽). 4) 김시덕, 위의 글, 23쪽. 5) 박종민, 2007, 상여 장식물의 표현양식과 상징적 의미, ꡔ민속학연구ꡕ 제20호, 국립민속박물관, 79쪽. 200
민속학연구 제25호 197~226쪽 2009.12 그들에게 상여 장식물은 유교적 의례 활동을 통해 양반 신분으로의 상승을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표상물 ( 表 象 物 )이었다. 6) 상여의 제작, 보관,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경제적 조건 외에 상여 장식물은 철저히 유교적 이데올로기 안에 포섭되고 예, 주로 효의 실천을 보여주는 존재에게만 부여되는 의미물들이었다. 조선 사회에서 아기, 처녀, 총각 등 미성년자의 죽음은 부정( 不 淨 ) 그 자체였으므로 철저하게 세상을 보지도 말고 나다니지도 말라는 뜻에서 억압당했다. 이들 죽음은 삶의 미완이었던 만큼 모자라는 죽음 으로 간주되었는데 그로 말미암은 여한 때문에 공포스러운 죽음의 범주의 맨 앞에 내세워졌다. 따라서 그들은 제대로 된 무덤의 영역에서 쫓겨나서 엎어 묻고 다시 큰 바위를 덮어놓는 사회와 의례 바깥의 존재들이었다. 7) 그러나 이들과 다르게 가부장제의 공동체 사회에서 가장( 家 長 )의 죽음은 엄청난 위기와 혼란을 가져오 는 사건이었으며, 가장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절차는 관례( 冠 禮 ), 혼례( 婚 禮 ), 제례( 祭 禮 )처럼 하나의 주체로서 순차적으로 진행될 수 없는 복잡한 성격을 가졌다. 김시덕에 의하면 상례는 망자( 亡 者 ), 망자의 혼, 조상신, 상주들이라는 4개의 의례주체를 가지며, 상례 절차는 이들 네 주체들을 위한 의례 행위에 의해 중층적으로 이루어졌다. 8) 김시덕이 분류한 표를 통해 상례 절차 속에서 상여가 등장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표1> 상례절차의 중층구조 9) 의례의 주체 대절차 망자( 亡 者 )[혼( 魄 )] 혼( 魂 )[혼백( 魂 帛 )] 조상신( 祖 上 神 )[신주( 神 主 )] 상주( 喪 主 )[공동체( 共 同 體 )] 주체 통과의례 영역 주체 통과의례 영역 주체 통과의례 영역 주체 통과의례 영역 1. 초종( 初 終 ) 분리단계 이승 분리, 전이단계 인간의 영역 분리단계 일상의 시간영역 2. 습( 襲 ) 3. 소렴( 小 殮 ) 전이단계 전이(중간) 혼과 전이단계 중간영역 통합단계 망자의 4. 대렴( 大 殮 ) 영역 영역 5. 성복( 成 服 ) 6) 박종민, 앞의 글, 92쪽. 상여는 각각의 구조물을 제작하는데 여러 사람이 수개월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일반 상장례에서 상 기간동안 제작할 수 없었다. 상여 제작은 조각장( 彫 刻 匠 )이 칠은 칠장( 漆 匠 )을 필요로 하는 기술적 전문가가 수반되어야 하므로 상여 구입과정에서 우선 큰 지출이 있게 된다. 또한 각종 절차 와 운구에 필요한 인력비는 만석꾼의 살림이라도 쉽게 감당할 수 없는 경제적 지출이 수반된다. 일례로 흥선대원군 부친 이구( 李 捄, 1788~1836)묘를 이장할 때 사용한 남은들 상여는 100여 년이 지난 1956년에 수리, 보수하였는데 이때 수리비용은 111,490환이였다. 이는 당시의 백미( 白 米 )가격으로 보면, 200여 가 마에 이른다(박종민, 위의 글, 79, 83쪽). 7) 김열규, 2001, ꡔ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ꡕ, 궁리, 156쪽 참조. 8) 김시덕, 2000, 상례, 누구를 위한 의례인가?-상례절차와 구조분석을 중심으로, ꡔ민속학연구ꡕ 제7호, 국립민속박물관, 86쪽. 주체라는 용어는 대상을 지칭 하기도 한다. 특히 제사나 혼례에서는 그 대상이 곧 주체가 된다. 즉 혼례의 대상은 혼인당사자이고, 제사의 대상은 제사를 받는 조상신이 되는데, 이것을 의례주체( 儀 禮 主 體 )라고 한다. (김시덕, 앞의 글, 같은 쪽.) 인류학자 헤르츠(Hertz)는 장례식을 분석하여 시체와 영혼과 상주라는 등장인물이 있고, 각 부분은 이 중의 하나로 구성된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Richard Huntington, Peter Metcalf, Celebration of Death,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9, p. 61.) 9) 이 표는 김시덕, 위의 글, 86, 90, 92, 95, 99쪽의 표들을 인용하여 종합한 것이다. 김시덕에 의하면 는 중심주체, 는 부속적이지만 비중이 있는 주체, 는 비교적 관계가 약한 주체이다. 201
삶과 죽음의 경계, 상여 장식물의 이중적 구조 6. 조상( 弔 喪 ) 7. 개상( 開 喪 ) 8. 치장( 治 葬 ) 9. 천구( 遷 柩 ) 황천, 10. 발인( 發 靷 ) 도솔천 통합단계 11. 급묘( 及 墓 ) 저승 분리단계 전이단계 혼과 조상신 분리단계 혼, 망자 전이 전이영역 통합단계 상중의 시간영역 12. 반곡( 反 哭 ) 통합단계 혼, 조상신의 의 영역 단계 13. 우제( 虞 祭 ) (조상신) 영역 14. 졸곡( 卒 哭 ) 분리단계 15. 부제( 祔 祭 ) 16. 소상( 小 祥 ) 17. 대상( 大 祥 ) 통합단계 (완전통합) 조상신의 영역 18. 담제( 禫 祭 ) 19. 길제( 吉 祭 ) 통합단계 (완전통합) 일상의 시간영역 <표 1>에서 9, 10, 11은 상여가 등장하는 절차로 관을 상여에 싣는 절차가 속한 천구( 遷 柩 ), 관을 상여에 싣고 장지로 운반하는 절차로 발인( 發 靷 ), 상여가 장지에 도착하여 하는 일인 급묘( 及 墓 )에 해당된 다. 상여가 등장하는 절차들은 대체적으로 통합단계로 나타나는데, 망자가 주체일 경우에는 이승과 저승 의 통합, 혼이 주체일 경우에는 인간의 영역과 혼과 망자의 영역의 통합, 조상신이 주체일 경우에는 혼과 망자에서 조상신의 영역으로 가는 전이(중간)단계, 상주가 주체일 경우에는 일상에서 상중 시간의 통합단 계이다. 10) 즉, 상여는 저승( 亡 者 )과 이승( 生 者 )영역, 그리고 신성( 祖 上 神 ) 영역과 일상 영역의 통합 또는 전이 단계에서 존재하며 그렇기에 상여와 그 장식물은 이 양자적 영역을 동시에 수반하는 속성을 갖는다. 상여장식물은 유교 사회의 주로 가장의 죽음을 애도하고 극복하기 위한 상징물로서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의례 행위로 나타나며, 그렇기에 삶과 죽음의 영역이 교차하는 이중적 특징을 지닌다는 것이다. 3. 삶의 영역 : 민화 양식의 수용과 시대성의 반영 상여의 구조는 크게 가마형과 누각건물형으로 나눌 수 있다. 가마형은 전체적인 형상이 가마처럼 생긴 10)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 魂 )과 백( 魄 )으로 분리되어 백은 땅에 묻히고, 혼은 조상신으로 승화되어 간다고 믿는다. 즉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이승이라 는 영역에서 시신인 백은 지하의 영역에 묻히고, 혼은 저승의 영역에 머물며, 조상신은 인간의 생활공간인 이승의 영역에 머물게 된다. 이것이 전통사회의 가옥 구조에 조상신( 神 主 )을 모신 사당( 祠 堂 )이 존재하는 이유이다(김시덕, 위의 글, 98쪽). 202
민속학연구 제25호 197~226쪽 2009.12 상여를 말하며 다시 상여 본체 지붕의 위치에 자리한 덮개의 형태로 보아 자라의 등처럼 둥근 형태로 생긴 별갑형( 鱉 甲 形 )과 지붕 양쪽에 박공 2개를 접속 고정한 박공형( 朴 工 形 )이 있다. 누각건물형은 다층 누각형태로 된 상여로서 상여의 상단을 기와집의 형태로 마감하여, 기와와 처마 등을 갖춘 와가( 瓦 家 )의 구조물을 그대로 재현한 것을 말한다. 11) 이처럼 상여는 집이라는 삶의 모티브를 구체적으로 재현하고 있어, 고구려 고분의 현실( 玄 室 ) 구조나 신라, 백제에서 조선시대의 릉( 陵 ) 아래의 구조와는 다르게 보다 직접적인 삶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 1> 청풍부원군 상여(가마형), 조선시대, 국립춘천박물관, 중요민속자료 제120호 <그림 2> 산청 전주최씨 고령댁 상여(누각건물형), 1856년, 국립민속박물관, 중요민속자료 제230호 그러나 상여의 집 형태는 무덤까지 이동 기간 동안 머무르기 때문에 혼이 거주하는 사당과 같은 공간이 라고는 볼 수 없고, 왕처럼 무덤아래 따로 공간을 둘 수 없는 신분이 낮은 사대부나 민간의 죽은 자가 현세에서 마지막으로 누릴 수 있는 호사( 豪 奢 )로운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12) 이것은 상여를 화려하게 치장한 이유와도 상통하는데, 임금이 타던 연( 輦 )이나 고관대작들이 타던 화려한 가교( 駕 轎 )처럼 비슷하 게 꾸며서 죽은 이가 평소에 탈 수 없었던 것을 죽을 때라도 타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전통혼 례 때 사모관대( 紗 帽 冠 帶 )나, 여성의 경우 활옷을 입는 것을 허용하던 조선시대의 의례복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3) 상여의 구조 외에 보다 삶의 모티브에 기원을 둔 상여장식물은 민화와의 연관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7~19세기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성행한 민간회화는 나라마다 그 형태적 차이를 갖지만 민간의 기층문화가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근대를 향해 사회적 발전에 박차를 11) 김시덕, 2003, 상여연구, ꡔ남은들상여실측보고서ꡕ, 예산군, 19~20쪽 ; 박종민, 위의 글, 79쪽. 집의 형상으로 제작하여 국장( 國 葬 )에 사용하였던 견여( 肩 輿 ) 에서 유래하는 박공형은 현재 청풍부원군 상여, 남은들 상여, 권상하 상여 등이 있으며, 누각건물형은 국립민속박물관, 안동민속박물관, 광주민속박물관, 목 아박물관 소장 상여가 이에 해당된다(박종민, 위의 글, 79쪽). 12) 김종대, 2006, 민중예술의 꽃, 상여장식에 나타난 의미와 상징성, ꡔ목인박물관ꡕ 소장품 도록, 117쪽. 13) 김종대, 앞의 글, 118쪽. 203
삶과 죽음의 경계, 상여 장식물의 이중적 구조 가하고 있던 이 시기는 앞서 설명했듯이 경제력이 신분 상승의 주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눈이 뜨이던 시대였으므로, 서민경제의 활성화는 곧 상층문화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더불어 한편으로 그들의 취향과 속성을 반영한 회화를 창출하게 하였다. 이 시기 조선은 주로 18세기에는 서민들의 생활상을 담은 풍속화가 그리고 19세기에는 서민의 취향을 담은 민화가 성행하게 되는데 당시 이들은 모두 속화( 俗 畵 )의 영역으로 분류되었다. 14) 정조의 민간 정책 과도 관련이 있어 자비대령화원의 출제 과목이었던 풍속화와는 다르게 민화는 양반과 서민들을 중심으로 그 수요가 늘어났으며 그림뿐아니라 불화, 도자기, 목가구, 자수, 건축장식 등 여러 분야로 확산되어 제작 되었다. 15) 주로 병풍의 형태로 의례적 행위에 실용적으로 쓰였던 민화는 그 내용이 행사나 장소에 맞게 제작되었 으며, 부귀다남( 富 貴 多 男 ), 부귀공명( 富 貴 功 名 ), 무병장수( 無 病 長 壽 ) 등의 의미와 같이 서민들의 삶에 대 한 애착과 소망을 담아 일상 기물과 같은 친숙한 소재에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예를 들면 사랑방에 걸려있던 책거리의 수많은 기물과 도상들은 19세기 청나라의 수입품이었던 값비싼 고서( 古 書 )와 고동기 물( 古 銅 器 物 )에 대한 동경의 대리물이었으며, 서적과 비싼 물건에 대한 수요는 증가하나 현실의 경제사정 으로는 감당할 수 없으므로 수요자의 소유욕이 그림을 통해 대리만족되는 것이었다. 16) 민화의 이러한 상층문화에 대한 동경과 삶을 보다 풍요롭게 지내고자 하는 바램은 그 화제를 통해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민화에 등장하는 소재가 상여에 선별적으로 장식되었다. <표 2> 민화의 화문과 화제 17) 화문( 畵 門 ) 화제( 畵 題 ) 화문( 畵 門 ) 화제( 畵 題 ) 산수( 山 水 )화 금강산도, 관동팔경도( 關 東 八 景 圖 ) 기용( 器 用 )화 책가도, 책거리, 호피장막( 虎 皮 帳 幕 ) 수석( 壽 石 )도 노송( 老 松 ), 괴석( 怪 石 ) 풍속( 風 俗 )화 경직( 耕 織 )도, 평생( 平 生 )도 화훼( 花 卉 )도 모란, 연꽃, 국화, 장미 도안( 圖 案 )화 문자( 文 字 )도 소과( 蔬 果 )도 석류, 복숭아, 포도 인물( 人 物 )화 백동자( 百 童 子 ), 신선과 동자, 초상화 화조( 花 鳥 )도 학, 봉황, 백로, 기러기, 원앙, 닭, 매, 부엉이, 오 리, 꿩, 참새 도석( 道 釋 )인물화 신선( 神 仙 ), 수성노인( 壽 星 老 人 ), 팔선( 八 仙 ), 하 마선인( 蝦 蟆 仙 人 ) 등 축수( 畜 獸 )도 호랑이, 까치호랑이 지도( 地 圖 )화 영수( 靈 獸 )화 기린, 신구( 神 龜 ), 현무( 玄 武 ), 해태( 獬 怠 ), 불가 사리, 사불상( 四 不 像 ), 운룡( 雲 龍 ), 청룡, 황룡 기록( 記 錄 )화 계회( 契 會 ), 의궤( 儀 軌 ), 반차( 班 次 ), 능행( 陵 行 ), 궁궐, 사신( 使 臣 ), 전쟁, 수군( 水 軍 ), 행렬도 등 어해( 魚 蟹 )도 삼어( 三 魚 ), 약리( 躍 鯉 ), 어변성룡( 魚 變 成 龍 ), 백 어( 百 魚 ), 하합( 蝦 蛤 ) 설화( 說 話 )화 효자, 춘향, 구운몽도 14) 정병모, 2006, 한국 민화와 중국 민간연화의 비교, ꡔ민속학연구ꡕ 제19호, 국립민속박물관, 192쪽. 속화라는 의미는 원래 문인화의 경지에 못 미치는 낮은 수준의 그림을 가리킨다(정병모, 앞의 글, 같은 쪽). 15) 전승창, 1987, 조선후기 백자장식의 민화요소 고찰, ꡔ고문화ꡕ 31, 256~278쪽 ; 정병모, 2003, 조선말기 불화와 민화의 관계, ꡔ강좌미술사ꡕ 20, 한국불교 미술사학회, 141~183쪽. 16) 이현경, 2007, 책가도와 책거리의 시점에 따른 공간 해석, ꡔ민속학연구ꡕ 20호, 163쪽. 17) 이 표는 윤열수, 1995, ꡔ민화이야기ꡕ, 디자인하우스, 7~9쪽의 목차를 재구성하여 표로 만든 것이다. 204
민속학연구 제25호 197~226쪽 2009.12 초충( 草 蟲 )도 나비, 박쥐 혼성( 混 成 )도 여려 소재를 혼합한 그림 옥우( 屋 宇 )화 동궐, 사당, 용궁 춘화( 春 畵 ), 세화( 歲 畵 ) 등 <표 3> 상여의 장식과 문양의 종류 18) 구분 국립민속박물관 안동민속박물관 온양민속박물관 정자용( 丁 字 龍 ) 청룡, 황룡, 용두 청룡, 황룡 청룡, 황룡, 구름 하층 해, 달, 청룡, 황룡, 구름 속 청룡 벽 휘장 매화, 새, 동자, 사람, 물고기, 모란, 학, 소나무, 여인 휘장 1층 난간 구름, 청룡, 황룡, 동녀상( 童 女 像 ) 바닥 동녀 모란, 연꽃, 학 청룡, 황룡 연꽃, 학, 청룡, 황룡, 소봉, 오리, 모란, 원앙, 염우 운각 새 술, 연꽃, 새, 학, 소나무, 선인( 仙 人 ) 소봉, 연꽃, 표범을 탄 동자, 소봉두, 학, 소나무, 선인 연꽃, 학을 탄 신선, 소봉 난간 청룡, 황룡, 용, 동녀, 동자 연꽃 2층 바닥 대봉( 大 鳳 ), 용, 쌍룡, 용두, 백련( 白 蓮 ), 홍련( 紅 蓮 ), 대봉, 선인, 정 자 용, 풍경( 風 磬 ), 유소( 流 蘇 ), 여인상, 남자상, 연꽃, 소봉두 염우 운각 새, 새 술, 물고기 연꽃, 학 소나 무, 매화 연꽃, 소나무, 소봉두 바닥 대봉, 12지신상, 승자( 乘 子 ), 용, 청룡 황룡, 동녀, 소봉, 여인상, 남자상 3층 벽 염우 운각 스님, 연꽃, 학, 잉어, 모란, 신선, 게, 새, 소나무, 동자, 불로초, 공작 소봉 연꽃, 학 소나무, 동자, 소봉 처마 인도자, 소봉두 술, 새 연꽃, 새 4층 바닥 벽체 연꽃 소봉( 小 鳳 ), 연꽃, 학 용마루 새 용, 새 처마 새, 귀면( 鬼 面 ), 소봉 새 운각 모란, 연꽃, 학 술 지붕 바닥 동자, 학, 해, 모란 연꽃, 모란, 청룡, 황룡, 공작, 대봉, 소 사슴, 해태를 탄 사람, 스님, 종교 지도자, 악사, 차 과일 공양인물 별갑 대봉 술, 학, 신선, 청 황룡, 소봉, 구름 앙장대 청룡, 황룡, 봉황, 구름, 새 18) 이 표는 박종민, 앞의 글, 88~89쪽의 표를 인용하여 재구성하였다. 205
삶과 죽음의 경계, 상여 장식물의 이중적 구조 민화와 상여장식물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것들 중에 모란은 부귀영화를, 매화와 소나무는 선비의 절개 를, 공작새는 최고의 관직과 지위를, 물고기는 장원급제와 부부화합, 자손번창을, 오리( 鴨 )는 갑옷 갑( 甲 ) 이 있어 장원급제, 원앙은 부부금실을 뜻하였다. 19) 이들 삶의 소망은 삶의 흔적으로 상여장식물에 남아 있으며, 또는 망자에게 죽은 이후의 삶이 있다면 그 때의 삶에 대한 염원으로 재탄생되는 것이다. 1 2 3 4 1 <그림 3> 연꽃과 물고기( 年 年 有 餘, 蓮 = 年 魚 = 餘 ) 2 <그림 4> 모란과 학, 20세기, 목인박물관 3 <그림 5> 봉황, 20세기, 목인박물관 4 <그림 6> 민화의 화조도 상여장식물만의 고유한 도상이 있다면 그것은 방상시와 귀면( 鬼 面 ) 혹은 용수판( 龍 首 板 )일 것이다. 방상시는 반드시 칼이나 창을 들고 몰려오는 잡귀잡신을 쫓는 역할을 하며, 도깨비나 용의 모습을 한 귀면( 鬼 面 ) 또는 용수판도 방상시와 마찬가지로 잡귀를 쫓는 벽사( 辟 邪 )의 역할을 하였다. 20) 이들 방상시 와 용수판은 벽사의 역할을 한다는 데서 죽음의 영역에 속하는 인물상인 저승사자와는 다르게 삶에서 나쁜 액을 없애고 싶은 주술적 필요에 의해 제작된 민화의 세화( 歲 畵 )적 속성을 띠고 있다. 1 2 3 4 1 <그림 7> 방상시 2 <그림 8> 상여에 장식된 방상시, 국립민속박물관 3 <그림 9> 용수판, 19세기, 목인박물관 4 <그림 10> 괘릉의 무인상 얼굴 19) 박종민, 앞의 글, 85쪽 참조. 20) 이두현, 1998, 나무꼭두의 역사와 쓰임새, 김옥랑 편, ꡔ한국의 나무꼭두ꡕ, 열화당, 17쪽. 206
민속학연구 제25호 197~226쪽 2009.12 세화는 그 연원을 새해 첫날에 잡귀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기 위해 그림을 대문에 붙이거나 선물로 나누어주는 풍속인 문배( 門 排 )에서 찾을 수 있는데, 통일신라시대부터 금강역사상과 같은 신장도( 神 將 圖 ) 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는 문배는 조선시대에 이르면 임금이 새해를 송축( 頌 祝 )하는 그림을 신하에게 주는 세화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궁중의 세화는 다시 민간에 확산되어 그 내용도 다양해지면서 민화로 발전하였다. 21) 민화의 연원인 문배 중에 조선시대에 가장 사랑받았던 도상은 처용도( 處 容 圖 )와 용호도( 龍 虎 圖 )였 다. 22) 집에 들어가기 위한 첫 시작인 문에 붙여진 처용도와 용호도처럼 상여의 맨처음을 장식하는 방상시 와 용수판은 그 도상에도 유사성이 보인다. 동해에 살고 있는 용의 아들인 처용의 모습이 주로 서역인의 모습을 띤 무사상이었다는 점 23) 은 방상시의 모습이 주로 무기를 든 도깨비의 형상이나 무사상으로 조각 된 것과 비슷하다. 이렇듯 삶을 안전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한 벽사적 도상이 상여장식물과 민화에 동시에 쓰인 것은 이 둘을 사용했던 수요층이 같음에서 비롯한 것일 것이다. 다만 민화는 종이라는 매체를, 상여 장식물은 나무라는 매체를 통해 표현되므로 평면과 입체라는 다른 조형요소를 갖고 있으며 민간 미술의 특성상 제작자의 개성이 상당히 자유스럽게 표출된다는 점에 있어 작품들은 모두 같은 도상의 다른 형상 을 갖는 모습으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여기서 민화적 기법이 조각적인 목공예에 적용된 계기를 동시대 중국의 민간연화( 民 間 年 畵 )가 대부분 목판화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24) 당시의 동아시아 내 중국문화의 파급력을 생각할 때, 중국이 민간회화를 대량으로 제작하기 위해 나무재료를 다루는 상황은 조선후기 이후의 상여 조각장들도 알고 있었으리라 판단된다. 그렇지만 이 점은 창작의 소재였을 뿐 창작 그 자체에 반영된 것은 아니고, 우리나라의 경우 민화가 판화로 제작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회화로 이어졌던 것처럼 상여장 식물도 그 고유의 영역에서 차별적으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21) 정병모, 1995, 민화와 민간연화, ꡔ강좌미술사ꡕ 7, 한국미술사연구소, 101~141쪽 참조. 정병모는 한국의 민화가 중국의 민간연화에 영향을 받아 세시풍속의 하나로서 전개되었으므로, 그 시원과 성행배경에서 유사점을 갖는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문배는 중국의 문신( 門 神 )에서 세화는 중국의 연화( 年 畵 )에서, 민 화는 중국의 민간년화( 民 間 年 畵 )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우리의 민화는 문배 세화 민화의 순으로 발전하였다(정병모, 한국 민화와 중국 민간연화의 비교, 184쪽). 22) 정병모, 앞의 글, 184쪽. 23) 임영애, 2006, 統 一 新 羅 の 美 術 に 現 れゐ 西 域 人 のイメージ, ꡔ불교미술ꡕ 287호, 27~44쪽 참조. 24) 보어쏭니엔( 薄 松 年 ), 2006, 중국의 민간 목판 연화, ꡔ민속학연구ꡕ 19호, 국립민속박물관, 147~151쪽 참조. 207
삶과 죽음의 경계, 상여 장식물의 이중적 구조 1 2 3 4 5 6 7 8 1 <그림 11> 나이든 여인, 조선초기 2 <그림 12> 젊은 여인, 조선후기 3 <그림 13> 처녀, 20세기 4 <그림 14> 젊은 선비, 조선초기 5 <그림 15> 나이든 선비, 조선중기 6 <그림 16> 중절모를 쓴 남자, 조선말기(개화기) 7 <그림 17> 동자1, 조선시대 8 <그림 18> 동자2, 조선후기 상여장식물이 삶을 담은 흔적은 인물상의 의복이나 머리 관식 등에서 더 구체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다수의 인물상들은 종교에 관련된 인물, 선인( 仙 人 ), 범인( 凡 人 ) 등 다양한 계층과 역할로 표현되었지만, 의복의 형태는 제작된 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조선전기의 인물상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대체로 긴 두루마기 형태의 중국식 포( 袍 )의 복식을 갖춘데 반해 조선 후기가 되면 남성은 양반의 평상복으로 여성은 치마와 저고리의 모습으로 변화가 보인다. 25) 또한 여성은 저고리의 길이가 조선중기를 거치면서 후기에 이르면 허리에서 가슴부분까지 짧아지는데 이러한 양상이 인물상에도 나타난다. 1 2 3 4 5 6 1 <그림 19> 해방 이후의 중년남자, 20세기 2 <그림 20> 순경, 조선말기(개화기) 3 <그림 21> 호적을 든 여인, 20세기 4 <그림 22> 성춘향과 이몽룡, 20세기 5 <그림 23> 효녀심청, 20세기 6 <그림 24> 해방이후의 거지, 20세기 25)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정착되던 6세기 북위( 北 魏 )시대의 불상 양식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옷주름이 펄럭이는 두꺼운 포복식( 袍 服 式 ) 의상이다. 이는 더운 인도에서 추운 중국 지방으로 동전( 東 轉 )되면서 나타난 특성인데, 이러한 포복식으로 정착된 불상 양식은 오랜 시간 동안 우리나라에 상호 영향을 미치며 발전하였다(강우방 외, 2005, ꡔ불교조각ꡕ 1, 솔, 74~81쪽 참조). 조선전기는 앞서 설명하였듯이 고려의 불교식 가치관이 남아있던 시기이므로 상여장 식물에도 이런 불상 모습이 차용된 것으로 보인다. 208
민속학연구 제25호 197~226쪽 2009.12 개화기로 시대가 내려갈수록 시대적 풍모는 더욱 다양하게 나타난다. 1896년 고종에 의해 새로 정비된 호적제( 戶 籍 制 )는 일제시대 민적법( 民 籍 法 ) 제정되면서 집 및 집안에서의 개인 신분관계 등기제도로 바뀌 는 등 호적제도의 목적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상여장식물에서 여성이 호적이라고 적힌 패( 牌 )를 들고 있는 것은 이러한 세태를 반영한 것이다. 또한 개화기 상여 인물상은 유교적인 전통 복장에서 신문물을 상징하는 중절모와 서양식 의복으로 나타나며 26), <성춘향>, <심청전>, <이수일과 심순애>와 같은 전( 傳 ) 소설의 인물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 말기에 민간에 성행했던 판소리계 국문소설, 한문 장ㆍ단편 소설, 야담( 野 談 ), 전( 傳 ) 등 27) 의 대중 소설이 미술로 수용된 양상을 보이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유교적 충( 忠 ), 효( 孝 ), 열( 烈 )을 강조하는 전 의 인물이 장식물에 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상례의 의례적 의미에 맞는 소설적 인물을 선택하여 수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4. 죽음의 영역 : 고대 미술에 나타난 계세적 세계관의 표상 상여장식물에 나타난 죽음의 영역은 삶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상징물에도 이 두 개의 영역이 중첩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장식물을 통해 죽음의 세계를 분리하여 본다기보다는 우리의 죽음에 대한 전통적 세계관을 살펴보는데 주목하고자 한다.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고대부터 축적된 고분( 古 墳 ) 미술을 통해 엿볼 수 있으며, 이들 고분유물을 통해 유교적 상여장식물과 공통된 의미군( 群 )을 발견할 수 있다. 상여장식물이 우선 역사적으로 죽음의 영역과 관련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은 명기( 明 器 )의 의미로 살펴볼 수 있다. 명기는 망자가 생전에 쓰던 물건을 모작( 模 作 )하여 분묘에 함께 부장하는 물건을 말하며, 분묘에 부장하기 위해 일부러 만든 동물이나 사람, 각종 그릇, 악기, 기구 등을 총망라하는 이름이다. 이는 일찍이 고대의 순장( 殉 葬 )의 풍습에 기원을 둔 다고 볼 수 있는데, 상여장식물은 명기 중에 토용( 土 俑 )의 역할이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토용은 망자에 대한 봉사자로서 산 사람을 순장하는 대신 무사( 武 士 ) 나 예인( 藝 人 )이나 동물, 생활용구를 부장하는 것으로, 장례나 무덤을 지키기 위한 인물용( 人 物 傭 )이 많았 다. 28) 나무로 만든 용( 俑 )은 그 재료의 특성 때문에 빨리 부식되어 남아있는 유물이 별로 없지만 국립민속 박물관에 소장된 변수( 邊 脩, 1447~1524)묘 출토 목우( 木 偶 ) 22점을 통해 명기로서 나무 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9) 26) 조선시대 양반의 상이 윤기 찰찰 흐르는 말총으로 짠 갓, 소매폭이 두 자는 됨직한 도포, 그리고 팔 길이만큼 뻗어나간 담뱃대로 생각되던 상황은 1895년 양복이 허용되고 이어 단발령이 시행되면서 급격한 변화를 거친다.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유행으로 각종 신문의 광고에서도 볼 수 있는 물품은 모자, 안경, 단장( 短 杖 ), 시계, 여송연( 呂 宋 煙 )이었다. 이들 신문물은 모두 일본의 조선에 대한 염료, 담배산업 등의 상권 장악 목적에서 제도와 의식개혁을 통해 확산되었 다(권보드래, 2002, ꡔ한국 근대소설의 기원ꡕ, 소명출판, 277~279, 289~291쪽). 27) 김찬기, 2004, ꡔ한국 근대소설의 형성과 전( 傳 )ꡕ, 소명출판, 11~46쪽 참조. 28) 이두현, 앞의 글, 13쪽. 29) 김영재, 2001, 변수묘 출토의 목우에 나타난 조선전기의 남녀복식 고찰, ꡔ생활문화연구ꡕ 제2호 참조. 209
삶과 죽음의 경계, 상여 장식물의 이중적 구조 명기처럼 상여장식물 또한 그 일차적 목적은 망자를 호위하고 저승으로 천도하여 극락세계로 모시기 위한 것이다. 화려하게 꾸민 상여는 장지에서 하관( 下 棺 ) 후 소각했으며, 망자는 상여 난간에 시립( 侍 立 ) 한 많은 종자( 從 者 )들과 함께 저승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후대에는 경제적 이유 때문에 상여를 해체하여 마을의 상여막에 간직했다가 다시 사용하였다. 30) 상여장식의 인물상 중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시자( 侍 者 )와 선인( 仙 人 )그리고 재인( 才 人 또는 藝 人 )이 다. 그런데 시자와 선인의 모습은 모두 갸름한 이목구비를 가진 조선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는데 재인의 모습은 크고 둥근 눈과 주먹코를 가진 이국적 인물로 표현되었다. 재인의 유래는 초기 고구려 고분벽화인 생활풍속계 도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생활풍속계 고분벽화에서는 힘겨루기를 하는 씨름( 角 抵, 相 搏, 手 搏 戱 )의 인물과 연회에서 놀이를 주관하는 재인의 모습이 상여의 재인상과 마찬가지로 이국적 인물로 표현되었다. 31)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주인부부와 시자 등 다른 인물은 눈이 작은 전형적인 고구려의 인물로 표현된 반면, 씨름하는 인물과 재인의 모습은 서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의 인물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의 대외 교섭이 서역과도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에서는 서역계 인물이 힘 의 상징으로 여겨졌기에 힘을 쓰는 활동적인 인물=서역계 인물로 정하고 여기 에 신성( 神 性 )을 부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32) 1 2 3 1 <그림 25> 각저총 널방 왼쪽 벽화:씨름, 고구려 2 <그림 26> 재인, 조선 3 <그림 27> 북치는 광대, 조선 재인의 경우처럼, 신성이 부여된 고구려 고분벽화의 여러 도상들과 앞서 <표 2>의 상여 장식물을 비교 해보면 상당수의 제재가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30) 이두현, 앞의 글, 15쪽. 31) 생활풍속계의 기본 제재는 무덤주인부부도, 행렬도( 行 列 圖 ), 가무도( 歌 舞 圖 ), 연회도( 宴 會 圖 ), 생활공간도( 生 活 空 間 圖 ) 및 일월성수도( 日 月 星 宿 圖 ) 등을 들 수 있다(전호태, 2004, ꡔ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ꡕ, 서울대학교출판부, 119쪽). 32) 전호태, 앞의 책, 156, 161~162쪽 참조. 씨름의 경우는 당시 내륙아시아의 제 민족에게 장례 때에 씨름을 행하는 풍습이 있다는 민족지적 자료에 의한 보고, <일본서기> 중의 씨름기사가 장의행사의 하나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고구려 고분벽화의 씨름도 장의행사 중 하나로 여겨진다( 寒 川 恒 夫, 1993. 6.20~21, 葬 禮 相 搏 の 系 譜, 제1회 아시아 민속놀이 국제학술대회 발표요지, 중앙대학교 한국민속학연구소; 齊 藤 忠, 1979, 高 句 麗 古 墳 壁 畵 にあらわれた 葬 送 儀 禮 について, ꡔ 朝 鮮 學 報 ꡕ 91 참조). 210
민속학연구 제25호 197~226쪽 2009.12 상여장식물의 시대까지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 4> 고구려 고분벽화의 분류체계 33) 우주론적 보편화 성현( 聖 顯, Hierphanies) 인류학적 상세화 비인격적 상징( 非 人 格 的 象 徵 ) 인격적 상징( 人 格 的 象 徵 ) 하늘과 천문( 天 文 ) 세계 상서( 祥 瑞 ) 서물( 瑞 物 ) 세계 장식 문양 신화 세계 수행( 修 行 ) 차원 풍류( 風 流 ) 세계 태양과 달, 별자리와 사신( 四 神 : 靑 龍, 朱 雀, 白 虎, 玄 武 ) 인두조수( 人 頭 鳥 獸 ), 기린, 학, 봉황, 용, 나 무 등 구름, 연꽃, 불꽃, 기 하학 무늬 등 문명과 관련된 신( 燧 神, 神 農, 製 輪 神, 磨 石 神 등), 견우와 직 녀 등 예불( 禮 佛 ), 칠보공의 ( 七 寶 供 儀 ) 비천( 飛 天 )과 선인( 仙 人, 주로 학, 용, 봉황 등을 타고 있음), 탈 춤, 씨름, 등 전호태는 고구려의 초기 생활풍속계 고분벽화는 고구려 재래의 계세적( 繼 世 的 ) 내세관( 來 世 觀 )을 기본 줄기로 하여 구성되고 표현된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생활풍속계 벽화에서 무덤의 내부는 현실세계의 질서와 가치, 관계와 관념을 다시 담아내는 장소이며, 재현된 현실 즉, 보다 개선된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 내세공간이다. 34) 이러한 계세적 내세관은 동시대 신라의 고분에서도 그 유사함을 찾아볼 수 있는데, 원삼국시대 신라 고분의 묘곽의 방향을 살펴보면 모두 동향으로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에 따라 조금씩 이동하는 해의 방향 과 정확하게 죽은 이의 머리 방향이 일치한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 삶의 방위는 동쪽이나 남쪽에 두고, 죽음의 방위는 그와 반대인 서쪽이나 북쪽에 두는 사례가 많다. 불교에서도 내세, 곧 죽음의 세계를 서방 에다 두고 있으며, 유교에서도 죽음의 방향을 북망산( 北 邙 山 )으로 두고 있다. 보편적인 생각에 의하면 밝음이나 양지가 삶의 영역이라면 그늘이나 음지는 죽음의 영역으로 잡혀질 것이다. 그런데 고대 신라인 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상적인 삶의 방향을 고분의 방향과 일치하게 함으로서 죽음을 삶의 연장선상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거듭남이나 되살아남과 같은 재생의 개념이 아니라 그냥 장소를 옮겨 이사를 가는 것과 같이 죽음을 또 다른 삶의 한 모습으로 본 것이다. 35) 이러한 가치관에서 본다면 죽음은 두려움이나 부정의 대상이 아니요, 삶의 또 다른 연장선이다. 이와 같은 고대인의 죽음관은 고분에서 공통적으로 출토되는 동물상에서 더 명확히 확인된다. 먼저 청동기부터 삼국시대까지 고분 유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새, 사슴, 말, 곰과 호랑이와 같은 동물들은 고대의 샤머니즘 사상과 연결하여 살펴볼 수 있는데, 특히 신라 관식( 冠 飾 )이 주목된다. 관식을 보면 우주 수목( 軸 )인 나무를 표상하고 있는 출( 出 )자 무늬가 한 가운데에 있으며, 이 좌우에 대칭으로 각기 33) 위의 표는 박종수, 2003, 고구려 고분벽화의 종교적 의미에 대한 연구-종교형태론적 접근을 중심으로, 한신대학교 대학원 종교문화학과, 26쪽의 표를 그 대로 인용하였다. 34) 전호태, 위의 책, 120쪽. 35) 김열규, 앞의 책, 106~113쪽. 신라 고분의 동남향 방향에 대해서는 황용훈, 1969. 9.26~11.27, 경주 인왕동 19, 20호 고분 발굴 조사보고서, 경희대학교 박물관 참조. 211
삶과 죽음의 경계, 상여 장식물의 이중적 구조 하나씩 배치된 사슴뿔과 새 깃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새가 나타내는 하늘 세계와 사슴이 나타낼 땅의 세계 중간에 나무가 위치함으로써 육체와 영혼, 이승과 저승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샤머니즘의 우주 상을 신라적인 삼계( 三 界 )의 구도로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36) 1 2 3 1 <그림28> 신라금관 2 <그림29> 신라 서봉총금관 새 부분 3 <그림30> 상여 지붕과 난간에 부착된 새들 신라 관( 冠 )의 출자형 수목, 사슴 뿔, 새의 깃과 같은 공통적 도안화( 圖 案 化 )는 남러시아나 시베리아의 샤먼 관과 상통하는 점이 있어 신라문화의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중 새의 관식은 조류를 영험( 靈 驗 ) 의 상징으로 숭상한 샤머니즘적 토착신앙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송사( 送 死 )에 대우( 大 羽 )를 넣는다 는 ꡔ삼국지( 三 國 志 )ꡕ 위지( 魏 志 ) 동이전( 東 夷 傳 ) 진한조( 辰 韓 條 ) 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37) 이렇게 신라 관식의 새를 통해 죽은 이가 주술적 비상을 할 수 있듯이, 샤머니즘에서는 그 특이한 애니미즘과 연계해서 유기체와 무기체, 또는 하늘과 땅, 또는 미시( 微 視 )와 거시( 巨 視 ), 존재하는 모든 것에 영혼을 부여하는 특성이 있다. 영혼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 모든 것이 생체( 生 體 )가 될 수 있는 궁극적인 근거가 되기에, 천령( 天 靈 )이 있을 수 있는가 하면, 지령( 地 靈 )도 있을 수 있으며, 물론 갖가지 물혼( 物 魂 )도 존립이 가능하다.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이 서로 영혼으로 상통하고 교류하는 이 범령( 凡 靈 ) 사상은 죽음에 대한 생각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38) 샤머니즘 영혼관에서는 죽은 이들의 영혼이 타계로 가고 나면 그것뿐으로 모든 것이 청산되거나 단절 되지는 않는다. 영혼은 천상에 편입되거나 극락에 가버림으로써 이승과 인연을 잘라버리지 않는 것이다. 죽은 이의 영혼이 산 자와의 직접적인 연관, 그것도 일상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연관을 생시나 마찬가 지로 지속해야만 비로소 샤머니즘다운 영혼의 자질을 갖추게 된다. 사령( 死 靈 )이라는 말이 사용되기는 36) 존 카터 코벨, 김유경 엮어옮김, 1999, 스키타이족과 신라금관의 무속연구, 신라금관의 무속기능, 시베리아 북방종족의 집단기억-사슴뿔과 자작나무, ꡔ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ꡕ, 학고재, 138~155쪽 참조. 새 상징의 형태는 학술적으로 보고된 가장 오래된 유물인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앙덕리의 고인돌무덤 을 비롯하여, 소위 농경문청동기들인 방패형동기, 조형간두식( 鳥 形 竿 頭 飾 )과 삼국시대에 이르면, 고구려의 지배층이 새 깃을 꽂고 있는 모습을 무용총( 舞 踊 塚 ), 감신총( 龕 神 冢 ), 쌍영총( 雙 楹 塚 ), 개마총( 鎧 馬 塚 ) 같은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가야나 신라에서 나오는 고분 유물 중 금관이나 금 동관에는 대부분 새 깃이나 새 날개 모양의 장식이 붙어 있다. 37) 한병삼, 1986, 삼국시대의 고분금속, ꡔ국보2-고분금속Ⅱꡕ, 예경산업사, 185쪽. 38) 김열규, 2003, ꡔ동북아시아 샤머니즘과 신화론ꡕ, 아카넷, 41~42쪽. 212
민속학연구 제25호 197~226쪽 2009.12 하지만, 그것은 결코 이미 죽은 이의 넋으로 이승에서의 실존과 권리를 포기하고 있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계속 살아 움직이고 있는 영혼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39) <그림 31> 샤머니즘의 세계관 40) 샤머니즘에서 죽음의 영역을 이동하는 범령사상이 시대를 거쳐 이어졌고, 또한 비단 샤먼에게만 국한 되지 않는다는 것은 18세기 이후 성행한 우리나라의 무신도( 巫 神 圖 )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김태곤에 의하면 무신도의 신들은 크게 하늘, 해, 달, 바람, 불, 동물 등의 자연신( 自 然 神 ) 계통과 왕, 왕비, 장군, 대감, 불교ㆍ도교계 인물, 영웅, 일반인 등의 인신( 人 神 )으로 크게 나뉘며, 41) 정병모에 의하면, 특히 이 인신들은 단군, 선덕여왕, 태조, 세조, 임경업장군, 최영장군, 무학대사 등의 역사적 인물뿐 아니라 이도령, 성춘향 등의 소설속의 인물, 심지어 맹인, 정주정씨 부인 등의 민간인까지 여러 신분의 사람들을 망라한 다. 42) 불교, 도교계 인물을 제외하고 순수 무교계의 신들은 대부분 역사상 실제 인물이며 그 중 민간인을 그려 인간적인 실상을 그대로 신의 세계 곧 영의 세계로 환원한 것은 지극히 무교적인 즉 샤머니즘적인 발상이다. 무신도의 인물은 대개 5등신의 몸매에 얼굴이 유난히 큰 공통점을 갖는다. 그런데 이 얼굴은 문배나 사천왕과 같은 도식적 얼굴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어, 죽은 후의 삶이 현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시사한다. 43) 39) 김열규, 앞의 책, 42쪽. 40) 위 그림은 김열규, 위의 책, 209~212쪽 내용을 참조하여 그린 것이다. 김열규에 의하면 샤머니즘에서 이승과 저승은 강, 물, 바다, 나무 등을 건너 샤먼이 여행을 통해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는 상호교류의 열려진 영역이다. 또한 주몽과 탈해왕 등 고구려, 신라의 신화를 통해 이러한 샤머니즘적 타계 여행의 구 체적 모습을 알 수 있다(김열규, 위의 책, 121쪽). 41) 김태곤, 1989, ꡔ한국 무신도ꡕ, 열화당, 19~20쪽. 김태곤이 분류한 신들은 모두 134분이었고, 후에 양종승이 발표한 신들은 292분 이었다(양종승, 1996, 한국 무속신 고찰:무신도를 중심으로, ꡔ몽골학ꡕ 제4호, 한국몽골학회, 1~61쪽 참고). 42) 정병모, 2004, 무신도의 휴머니즘, ꡔ논문집ꡕ 제17집, 경주대학교, 71쪽 ; 조좌용, 1995, ꡔ삼신민고ꡕ, 가나아트, 439~440쪽. 43) 정병모, 앞의 글, 74쪽. 213
삶과 죽음의 경계, 상여 장식물의 이중적 구조 1 2 3 4 1 <그림 32> 임씨 할머니, 1700년대, 지본당채, 69 47cm, 서울 2 <그림 33> 맹인부부, 1800년대, 견본석채, 106 60cm, 서울 3 <그림 34> 산신, 1800년대, 지본당채, 92 51cm, 서울 4 <그림 35> 넉바위서린장군, 1900년대 중반 이와 같은 샤머니즘적 세계관을 통해 본다면 상여장식물에서 봉황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새들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영혼의 안내자 또는 사자( 死 者 )=새의 도식으로 영혼의 주술적 비상을 보여주는 상징물이 될 것이다. 또한 상여장식물의 도상이 위의 <그림 34, 35>의 호랑이, 말 탄 인물처럼 무신도에서 보이는 도상과 소재가 일치하는 면이 많은 점 그중에서 특히 민간의 인물을 다수 등장시키는 것으로 보아 무속적 특성이 반영된 것을 알 수 있으며, 삶과 죽음은 우주적 질서 안에 영혼이 순환할 수 있는 각각의 세계일 뿐 분리와 단절의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은 앞서 고구려 생활풍속계 고분벽화에 나타난 계세적 내세관과도 상통한다. 상여는 상례 문화 안에서 가장 큰 의례구이며, 그 장식으로 인해 화려함과 더불어 가장 구체적인 형상 물이 제시되는 상징 공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도상은 어디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까? 불교 도입 이전과 이후의 도상을 다른 내세관으로 파악한 전호태의 글을 참고해 보자. (계세적 내세관처럼) 현세와 내세를 거주자의 삶의 상태와 터만 달라질 뿐 내용상 구별되지 않는 두 개의 세계로 인식할 경우, 두 세계는 중첩된 형태로 매우 생생하게 현실적이고 구상적인 형태로 그려질 것이다. 반면, (불교적 내세관처럼) 현세와 내세를 구별하고, 내세를 삶의 터를 포함한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는 곳으로 볼 경우, 두 세계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려지며, 특히 내세는 비현실적이며 기호화된 모습으로 묘사될 수 있다. 44) 불교 도입 이후 5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생활풍속적인 주제가 쇠퇴하고 연꽃 중심 의 장식무늬가 크게 유행하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수용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백제의 무령왕릉의 내벽 44) 전호태, 앞의 책, 385쪽. 214
민속학연구 제25호 197~226쪽 2009.12 면의 무늬가 모두 연꽃무늬로 찍혀있다는 것에도 알 수 있다. 상여장식물에 보이는 연꽃 형상은 이러한 불교적 세계관의 상징 도상임을 알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연꽃은 불교적 윤회( 輪 回 )의 의미에서 재생, 곧 부활을 뜻한다. 45) 현세와 내세를 동일시하는 계세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그려지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무덤주인은 말을 타고 시자들의 인도를 받으며 조상신의 세계로 삶의 터를 옮기지만, 불교적 내세관이 바탕에 깔린 무덤 주인은 생전에 쌓은 선한 공덕( 功 德 )에 의지하여 연꽃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 정토( 淨 土 )세계의 일원이 된다. 정토세계에서 무덤 주인은 단순히 하늘사람으로 화생( 化 生 )할 수도 있고, 보살이나 천왕( 天 王 )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 46) 불교적 내세관에서는 전생( 轉 生 )을 통한 육도윤회( 六 道 輪 回 )의 삶이 계속되거나, 불교도들은 정토왕생( 淨 土 往 生 )을 이루거나 천계전생( 天 界 轉 生 )을 소망하기 때문에 현세의 삶이 반복될 확률은 상대적으로 낮다. 47) 그러므로 죽음은 삶에서 한 번의 단절을 겪는 과정이며, 이전의 삶이란 동일 하게 돌아오지 않는 영역인 것이다. 상여장식물의 효녀 심청 도상 또한 이러한 불교적 내세관의 흔적이다. 인당수에 빠져 죽은 심청이 연꽃에 실려서 지상세계로 재생하는 부분은 이러한 불교적 부활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심청은 유교적 규범 체계인 효의 서사를 다루므로 더욱 선택적으로 수용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효녀 심청까지 포함하는 상여장식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구체적 현실성은 삶의 영역과 죽음의 영역을 분리해서 보지 않는 계세적 내세관, 즉 샤머니즘적 세계관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앞서 무신도의 인물 표정이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을 갖고 있음과도 상통하는 부분이다. 48) 또한 이러한 세계관의 표출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상여장식물이 조선후기 이후의 무속적 근간을 둔 기층 ( 基 層 )문화의 소산이라는 것에도 연관성을 가진다. 18세기 실학자 성호 이익( 李 瀷, 1681 1763)의 그 시대를 비판한 말을 참고해 보자. ꡔ 周 禮 ꡕ에도 巫 官 이란 것이 있다. 생각건대, 옛적에는 귀신의 道 를 신봉하여 災 禍 가있으면 반드시 기도했기 때문 이다. 지금은 국가 ꡔ 祀 典 ꡕ 에는 무당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의식이 극히 正 大 하니, 하루바삐 물리쳐 끊음이 합당한 데, 또 어찌해서 賦 稅 를 거두고 있는가. 이미 부세를 거두고는 또 그들의 귀신 섬기는 것을 벌해서 후한 贖 布 를 받아 官 에 이롭게 하니, 그 뜻은 布 를 收 入 하는데 있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가까이는 서울에, 멀리는 州 郡 까지 모두 주인 무당이 있어, 관청 출입을 제 마음대로 하니 백성의 풍습이 휩쓸리듯 한다. 49) 45) 이두현, 앞의 글, 17쪽. 46) 전호태, 앞의 책, 385~386쪽. 47) 전호태, 앞의 책, 385쪽, 전호태, 1989, 5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불교적 내세관, ꡔ한국사론ꡕ 21,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참조. 48) 한 가지 더 부연하면 김유정은 제주내왓당 무신도를 연구하면서 그 기원을 안악3호분과 덕흥리 고분 등 초기 생활풍속계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찾고 있다. 그 증거로 관을 쓰고 부채를 들고 지인( 指 印 )을 한 묘주( 墓 主 )부부의 초상들, 뱀을 휘감은 장사( 壯 士 )의 위엄이나 분위기, 벽화에 나오는 새, 까마귀( 三 足 烏 ), 신선, 천녀, 신수( 神 樹 ) 등이 내왓당 무신도와 유사하다고 설명하였다(김유정, 1997, 제주의 무신도-현존하는 내왓당 무신도 10신위 연구, ꡔ탐라문화ꡕ 8권,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203쪽). 49) 李 瀷, 巫 條, ꡔ 星 湖 僿 說 ꡕ(유성원 외 지음, 강만길 외 옮김, 1987, ꡔ한국의 실학사상ꡕ, 삼성출판사, 139쪽 재인용). 215
삶과 죽음의 경계, 상여 장식물의 이중적 구조 이익의 말을 토대로 본다면 18세기는 유교적 국가 체제 아래 무속을 배척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속적 근간은 여전히 존재하여 많은 사람들이 무속에 휩쓸렸으며 또한 무당의 관 출입이 쉽게 허용되는 정도였다. 이러한 배경은 근대까지 그려졌던 무신도의 제작시기로 보아 조선말, 그리고 일제강점기까지도 면면히 이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18세기는 조선후기 사회생산력의 발전에 힘입어 직접적인 생산력을 갖춘 부농이 출현하였고, 직접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으나 봉건적 특권이나 행정기구에 의한 수입을 갖춘 중간 계급이 다양하고도 두터운 층으로 성립되었던 시기였다. 이들은 주로 경아전( 京 衙 前 )과 기술직 중인이 속한 여항인( 閭 巷 人 ) 이었는데 여항인들은 기본적으로 권력에 가까이 있으면서 결정적으로 권력에 소외되었다는 동질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 일정한 범위 내에서 민중과 연대감을 갖고 있었다. 50) 19세기에 이르면 지방의 씨족 중심으 로 권력과 재력을 갖춘 문화층들이 민화를 소유하고자 서민 이하의 출신 작가들에게 주문을 제작, 의뢰하 는 것으로 보아 51) 상여장식물도 민간에 일정한 근간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 경제성을 갖춘 인물들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일부 공립박물관 소장 장식물과 그 외 사립박물관이나 개인 소장으로 구조 틀이 유실되어 분리된 상여장식물들은 19세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존의 봉건체제의 해체를 도모한 경제력을 갖춘 민간층들의 미적 양식과 세계관을 양식적으로 계승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상여장 식물은 유교적 상례 문화 안에서 제작되었지만 민화에서 유( 儒 ) 불( 彿 ) 도( 道 )의 습합( 濕 合 )된 상징물 이 나타나듯이 시대가 내려갈수록 유교적 봉건 질서가 붕괴되면서 여타의 다른 종교적 세계관이 들어올 여지가 많은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그리고 또다른 관점에서 상여장식물에서 샤머니즘적 시각이 용인된 계기는 유교 문화의 틀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교적 현세주의나 합리주의로 보아 죽음의 영역은 이치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지만, 52) 죽음은 비합리적일지라도 현실에서 지속적으로 되풀이 되는 외면할 수 없는 실제 사건이다. 그렇 기에 죽음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유교는 일찍부터 그 규범 체계에 위배되지 않도록 제례라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의례 속으로 죽음의 영역을 포섭했다. 유교적 가부장제에서 승인된 인물은 죽음 이후 영혼이 조상신으로 승격되며 후대에도 효를 보여줘야 하는 사람으로 여전히 삶의 영역에 머물게 된다. 제례를 받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가족이며 가족이 있는 곳, 집안이 있는 곳이면 때와 장소에 매임 없이 편재( 偏 在 )하는 것이다. 53) 이러한 유교의 조상신을 두는 문화는 영혼으로 삶과 죽음을 하나의 세계로 보는 샤머 니즘과 상통하는 측면이다. 50) 강명관, 1997, ꡔ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ꡕ, 창작과 비평사, 418쪽. 여항인으로 분류되는 직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인( 中 人 )으로는 편교( 騙 校 ) 계사( 計 士 ) 의원( 醫 員 ) 역관( 譯 官 ) 일관( 日 官 ) 율관( 律 官 ) 창재( 唱 才 ) 상기( 賞 技 ) 사자관( 寫 字 官 ) 화원( 畵 員 ) 녹사( 錄 寫 )의 칭호가 있고, 시정( 市 井 )에는 액속 ( 掖 屬 )ㆍ조리( 曹 吏 )ㆍ전민( 廛 民 )의 명칭이 있으니, 이것이 시정의 명분( 名 分 )이다. ( 명분( 名 分 ), ꡔ홍재전서( 弘 齋 全 書 )ꡕ) 더 크게 분류하면 경아전ㆍ서얼ㆍ하 급장교ㆍ기술관ㆍ향리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강명관, 앞의 책, 51쪽). 51) 이우환, 1977, ꡔ이조의 민화ꡕ, 열화당, 7쪽. 52) 죽음에 대한 유교적 생각은 공자가 제자 자로의 물음에 답한 ꡔ논어( 論 語 )ꡕ, 선진( 先 進 ) 편에 잘 나타나있다. 죽음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는가? 자로가 다시 물었다. 귀신 섬기는 법을 말씀해주십시오. 사람도 다 못 섬기는데 어찌 귀신을 말하겠느냐? 53) 김열규, ꡔ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ꡕ, 18쪽. 216
민속학연구 제25호 197~226쪽 2009.12 물론 제례를 통해 조상신을 모시는 문화는 고대부터 존재하였지만 상여장식물이 제작되는 시기가 되면 이러한 계세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샤머니즘적 시각이 죽음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유교적 시각에 풍부한 예술적 영감을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식물이 성행했던 시기의 사회 구조 안에서 유교와 샤머니즘을 이분법적으로 보자면, 유교는 사대부, 남성, 낮, 합리성과 같은 공적( 公 的 )이고 의식화된 영역 이며 샤머니즘( 巫 俗 )은 민간, 여성, 밤, 비합리성과 같은 사적( 私 的 )이고 무의식적인 영역이다. 조선 후기 이후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명백히 유지될 수 없었으며 샤머니즘적 근간은 유교적 틀 안에서, 죽음과 예술이라는 비합리적 영역으로 상여장식물을 통해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5. 죽음을 보는 양가적 태도의 투사 앞서 2장에서 김시덕에 의해 죽음에 대한 상례 절차에는 4개의 의례주체가 등장하고, 이들 망자, 망자 의 혼, 망자의 혼이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생활공간으로 안착되는 조상신, 그리고 상주라는 네 주체가 의례행위에 의해 중층적으로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관례의 관례 당사자, 혼례의 혼례 당사자, 제례의 조상신이라는 단일한 주체를 가진 다른 의례 행위와는 다르게 상례는 왜 이렇게 복잡한 관계망을 구축하고 있고 그것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죽음 이라는 속성으로 돌아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좀 길지만 프로이트가 인용한 인류학자 베스터마르크의 ꡔ도덕 관념의 기원과 발달ꡕ에서 의 글을 참고해 보자. 죽음은 일반적으로 모든 불행 중에서도 가장 엄숙한 불행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사자( 死 者 )는 자기가 처한 운명에 강한 불만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다. 원시인들의 관념에 따르면 사람이 죽는 것은 곧 죽음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주력( 呪 力 )에 의해서든, 힘에 의해서든 죽음을 당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죽음을 당한 이들의 영혼은 복수심에 불타고 있으며 따라서 심술궂은 경향이 있다. 사자의 영혼은 끊임없이 살아 있는 자들을 부러워하면서 옛 친구들과의 재회를 갈망한다. 하지만 육신을 떠난 영혼이 사악한 악령이라는 관념 은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두려움은 죽음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데서 유래하는 것이기도 하다. 54) 위의 베스터마르크의 언급에 따르면 살아있는 사람들이 보았을 때 사랑하는 사람(부모)에게 다가온 죽음은 손쓸 도리가 없는 어쩔 수 없는 사건이다. 이것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도 죽은 사람에게도 당하는 입장에 서게 하는 본능적인 공포의 대상인 것이다. 그동안 이러한 공포에 대해 잘 인식하지 못하고 살던 54)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윤기 옮김, 2008, ꡔ종교의 기원ꡕ, 열린책들, 111쪽. 217
삶과 죽음의 경계, 상여 장식물의 이중적 구조 사람들은 부모의 죽음을 통해 이 공포를 생생히 맞보게 된다. 죽음이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부모를 통해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염( 殮 )을 통하여 주검을 접한 상주는 시체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인간 육체에 대한 허무감과 죽음을 당한 망자의 한과 그 한을 품고 육체를 떠난 혼에 대해 접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고대로부터 조사한 인류학적 연구에 따르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죽음을 당한 사자는 산 사람들을 저승으로 데려가고 싶어 한다. 곧 죽은 자가 죽음을 부르는 것이다. 55) 그런데 이러한 부정적 감정의 한편에 살아남은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의 부주의나 태만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닐까 하는 고통스러운 의문을 품는 경우가 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이것은 강박성 자책 이 라고 불리는데, 이 강박성 자책에는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기울였던 어떤 정성의 기억도, 이런 자책이 근거없는 것임을 증명하는 어떤 객관적 증거도 남아있는 사람의 고통을 줄이는데 보탬이 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야 없어지는 이러한 현상은 애도( 哀 悼 )의 한 병리학적 형식인 것이다. 56) 우리의 상례 과정 안에는 이러한 강박성 자책이 과도한 죄업 의식의 과정으로 잘 드러나 있다. 주로 3년이라는 애도의 오랜 기간 동안 상주는 바깥 출입과 타인과의 접촉 금지, 의식주의 절제 등으로 부모를 여윈 자식은 곧 부모를 죽게 한 자식의 의미로 죄업 의식을 수행한다. 57) 즉 상례 의식 속에는 부모를 돌아가시게 한 것은 자식의 불효탓이라는 집단적 강박성 자책이 묻어나는 것이다. 이렇든 죽음을 접한 인간의 감정에는 공포에 대한 부정적 태도와 지극한 사랑을 통한 고통스러운 애도 라는 이중적 감정이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가지는 원초적 양가성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죽인 자와 산 사람과의 관계에 내재하는 이 양가성이 인류의 발전 단계를 거치면서 그 뿌리로부터 두 가지 서로 완벽하게 대응하는 심리적 구조를 만들어 낸다고 하였다. 그것은 망자의 령이 죽음을 불러온다는 것(악령)과 귀신에 대한 두려움이 그 하나이고 또 하나는 조상 숭배의 구조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만이 악령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은 죽음에 대한 애도가 악령 신앙 체계의 발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 준다. 죽음에 대한 애도 행위는 하나의 특수한 심적 임무를 수행하는데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기억과 희망을 고인으로부터 벗겨 내는 일이다. 이 임무가 수행되면 고통이 줄어드는 동시에, 후회와 자책, 그리고 여기에 수반되는 악령의 공포도 완화된다. 동시에 처음에는 악령으로서 공포의 대상 노릇을 하던 고인의 영혼과도 따뜻하게 만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이 영혼은 조상의 혼이 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 조상의 혼에 도움을 청하게 되는 것이다. 58) 그러므로 이러한 애도의 과정 속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의 대상인 망자의 혼이 조상신의 영역으로 되기 까지는 상당한 정성이 수반된 시간과 절차가 필요하다. 이 어느 정도의 시간과 절차가 의례 행위, 곧 55) Kleinpaul, R., 1898, Die Lebendigen und die Yoten in Volksglauben, Religion und Sage, in Leipzig(민간 신앙, 종교, 전설에서 나타나는 삶과 죽음). 오 늘날 우리가 죽음을 조명하는 도상인 해골은 죽은 자가 곧 산 사람을 죽인다라는 사실을 내포한다(지그문트 프로이트, 이윤기 옮김, 앞의 책, 110쪽 참조). 56) 지그문트 프로이트, 앞의 책, 111쪽. 57) 김열규, 앞의 책, 20쪽 참조. 58) 지그문트 프로이트, 앞의 책, 119쪽. 218
민속학연구 제25호 197~226쪽 2009.12 우리의 상례의 과정인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중적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상례를 통해 산 사람들은 죽은 이와 결별하는 한편으로 죽은 이와의 관계를 재조정하게 된다. 이 재조정 속에서 죽은 이는 조상신으 로 정립되고 그로 인해 살아 있는 가족들, 친지들, 이웃들 사이의 관계도 거듭 손질된다. 혈통의 단일성, 가문의 일관성이 새삼스레 다져지는 것에 수반되어 친족 간의 위계며 관계가 필요한 대로의 질서를 회복 하게 되는 것이다. 59) 이렇듯 상례의 과정 속에서 발생되는 복합적인 4개의 주체와 그들 간의 중층적 관계는 죽음에 대한 원초적 양가성, 즉 이중적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해소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 할 수밖에 없는 관계망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관계망이 구축됨으로써 인간의 얽히고설킨 감정이 그 중층 구조를 따라 전이되고 해소되는 것이다. 상례 과정에서 가장 화려하고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도상으로 등장하는 상여 장식물들은 이러한 이중 적 감정의 해소과정을 가장 표면적으로 잘 보여주는 애도 과정의 꽃이다. 우리의 상여에 장식된 인물, 동물, 식물의 도상은 개성적인 손맛과 더불어 그 표정과 형태에서 자연스러운 감정의 표출을 느낄 수 있다. 용과 봉황, 선인과 같은 권위적이고 위엄있는 도상을 표현하면서 선의 분방한 표현, 도식화되지 않은 생생하고도 익살적인 표정으로 죽음에 대한 이중적 감정을 드러낸다. 상여장식물에서 보이는 익살의 표정은 환희나 우울과는 달리 익살의 대상이 되어 있는 객체에 대해서 신남과 비통의 두 감정을 표출하는 혼요된 혹은 단일하지 않은 감정이다. 신남과 우울 그 중간에 자리잡은 익살은 두 감정의 대치 또는 겨룸으로 이룩되는 표정인 것이다. 60) 슬픔과 고통을 수반한 죽음의 과정에서 억눌린 감정은 상여장식물 을 통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보여주며 해소되고 그 복합적 양상의 이중성을 익살로 투사시켜 드러냈다. 상여장식물들은 삶의 소망을 담아 죽음의 부정적 측면보다는 죽음을 통해 삶이 연장될 것이라는 이어지는 삶에 대한 축복의 장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1 2 3 1 <그림 36> 용수판, 20세기, 목인박물관 2 <그림 37> 용수판, 20세기, 목인박물관 3 <그림 38> 젓대를 부는 여인, 조선시대 59) 김열규, 앞의 책, 181쪽. 60) 김열규, 앞의 책, 188쪽 참조. 219
삶과 죽음의 경계, 상여 장식물의 이중적 구조 이러한 측면에서 상여장식물에 다수를 차지하는 호랑이를 탄 인물 도상에서 이 호랑이는 삶의 영역으 로 되돌아오는 조상신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호랑이는 조선시대에 주로 불교의 산신각( 山 神 閣 )에 배치되어 산신과 함께 그려졌다. 산신신앙은 고대의 샤머니즘부터 민간의 무속( 巫 俗 )적 기반 하에 도교, 불교, 유교의 전래와 수용 과정 속에서 각 종교와 마찰을 겪기 보다는 적절히 융화되어 오늘날까지 민족의 심층 속에 살아있는데, ꡔ삼국유사ꡕ에서는 단군신화를 기록하면서 단군을 우리나라 산신의 시조( 始 祖 )로 설정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단군은 조선을 건국하고, 1908세까지 나라를 다스리다가 죽어 아사달 ( 阿 斯 達 )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61) 1 2 3 4 1 <그림 39> 산신도, 조선후기 2 <그림 40> 호랑이를 들고 있는 동자, 18세기 3 <그림 41> 해태를 탄 법사, 20세기 4 <그림 42> 호랑이를 탄 저승사자, 20세기 산신은 고대의 샤머니즘적 세계관에서는 주로 여성의 영역으로 존재하다가 유교적 합리주의와 가부장 적 사회구조 속에 남성적 존재로 변화하고 산신숭배도 왕조 보존을 위한 호국( 護 國 )신앙의 형태로 바뀌게 되었으며, 사찰 안의 산신도 수염을 길게 드리우고 호랑이를 대등한 노인의 모습으로 이미지화 되었다. 62) 이때의 호랑이는 주로 산신과 동일시하거나 호랑이 자체를 산신으로 믿는 것을 발전되었는데 민화에서 산신이 빠진 호작도( 虎 鵲 圖 )도 이러한 산신신앙의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고대의 부족들은 토템 을 갖고 있고, 이 토템들은 동물이 가장 많다는 인류학자들의 견해로 본다면 단군신화 속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우리의 토템이 될 것이다. 63) 프로이트는 그의 논문 토템과 터부 에서 고대 부족에게 토템은 61) ꡔ 三 國 遺 事 ꡕ, 紀 二 第 二, 第 四 脫 解 王. 손정희, 2000, 산신신앙연구-문헌 설화를 중심으로, ꡔ한국민족문화ꡕ Vol. 16, No. 1,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14~15쪽. 62) 손정희, 앞의 글, 2쪽. 63) 신용하는 고조선 국가가 처음에 한ㆍ맥ㆍ예이라는 3부족의 결합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좀 더 설명해주는 자료로 단국신화를 들고 있다. 그는 전 세계 거의 모든 원시부족들은 토템을 갖고 있고 이 토템들은 동물이 가장 많으며 부족의 이름들은 대체로 토템이름과 관련된다는 뒤르케임의 이론을 설명하면서, 태양은 동물토템은 아니나 태양숭배를 일종의 정신적 토템 이라고 해석하면, 단군설화에는 3개의 토템, 즉 태양(해)숭배 토템 부족과 곰( 熊 )토템 부족과 범 ( 虎 )토템부족이 나온다고 볼 수 있다고 하였다. 태양숭배 토템부족은 환인ㆍ환웅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한( 桓 ㆍ 韓 ㆍHanㆍHuan) 부족이다. 이들은 한울님 의 자손이라고 생각하며, 해, 밝음, 새 빛( 東 光 )을 숭배한다. 곰 토템부족은 맥( 貊 ) 부족을 가리킨다. ꡔ후한서ꡕ 에 맥이( 貊 夷 )는 웅이( 熊 夷 )이다 라고 명백하 게 기록되어 있다(ꡔ후한서( 後 漢 書 )ꡕ 동이열전( 東 夷 列 傳 )). 범 토템부족은 예( 濊 ) 부족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ꡔ후한서ꡕ 동이열전 예조( 濊 條 )에는 (예는) 해 마다 10월이면 제사를 지내는데 범( 虎 )을 신으로 여겨 제사 지낸다 고 기록하였다고 하였다(신용하, 2005, ꡔ한국 원민족 형성과 역사적 전통ꡕ, 나남, 27 220
민속학연구 제25호 197~226쪽 2009.12 자기들의 공동의 조상이며 원초적인 아버지라고 지적하였고, 64) 그의 논의를 통해 호랑이를 정리해 본다면 호랑이 산신 단군 조상신 원초적 아버지(토템)의 순으로 생각될 수 있다. 상여장식물의 호랑이 를 탄 인물 도상은 직접적으로는 호랑이를 타고 있는 산신(즉, 조상신)이지만 오랜 세월동안 불교의 사자 를 타고 있는 문수보살이나 도교의 해태를 타고 있는 선인 등의 도상과 합쳐지면서 그 양상이 보다 다양하 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들도 호랑이를 통해 망자가 조상신으로 되돌아올 것을 예견하면서 죽음에 대한 이중적 감정을 애도하고 승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앞서 3장에서 보았던 고분벽화의 계세적 내세관, 즉 샤머니즘적 내세관의 태도를 유교적 테두리 안에서 수용한 모습이며, 유교적 합리주의 안에서 다룰 수 없는 죽음의 복잡한 특성이 상여장식물을 통해 민간의 여러 무속적이고 민속적인 신앙체계를 포섭하면서 그 안에서 죽음을 삶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6. 맺음말 지금까지 조선후기에서 해방 후까지 유교적 상례문화 속에서 예술적 영역으로 꽃피웠던 상여장식물을 살펴보았다. 조선전기에 불교식 화장 문화를 지우고 새로운 유교적 이데올로기 안에 상례문화를 포섭하기 위해 등장한 상여는 조선후기가 되면 농업, 상업의 발전과 더불어 민간의 기층문화가 사회 전반에 대두되 면서 그들이 주도한 상여장식물도 규모가 커지고 다양한 도상들이 등장하면서 화려해졌다. 이렇게 다양한 도상이 담긴 장식물들은 미술에서 시대를 흐르며 축적된 유 불 도의 상징적 의미가 혼합되어 보이기도 하였지만, 도상들의 주된 흐름을 보아 그 기본적 세계관은 죽음을 단절로 보지 않는 샤머니즘적 세계관으 로 나타났다. 영혼의 여행을 도와주는 새나 우리의 원초적 아버지인 토템을 암시하는 호랑이 상징 등을 통해 상여장식물에서는 죽음이 여행과도 같아 죽은 이의 혼이 조상신으로 바뀌어 동일한 삶의 공간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있었다. 상여장식물이 이렇게 계세적인 샤머니즘적 세계관을 보여주게 된 배경은 조선후기 사회, 경제적 변화 에 의해 유교적 신분제가 와해되면서 기층민의 의식구조가 표면적으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며 기층문화의 의식 근간이 바로 무속적 배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동시대 성행했던, 상여장식물과 양식적 유사함을 보이는 민화의 도상들도 거의 기층민의 소망을 주술적으로 풀어내는 무속적 틀을 가지고 전개되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유교적 합리주의 안에서 불가해( 不 可 解 )한 영역으로 존재하던 죽음의 영역은 기층민의 의식 근간인 샤머니즘적 세계관 속에 삶의 연장으로 생각되었기에 보다 사실적이며 풍성하게 표현되었다. 또한 죽음은 결국 살아있는 이들에게는 절대로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이기에 상여장식물은 쪽). 64) 지그문트 프로이트, 앞의 책, 202쪽. 221
삶과 죽음의 경계, 상여 장식물의 이중적 구조 시대에 따른 삶의 흔적이 드러난 예술 구조가 되었다. 한편, 살아남은 사람에게 죽음은 허무와 공포를 수반하는 부정적 감정과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도의 감정이라는 양가적인 갈등 구조를 가지게 하므로 이러한 이중적 갈등 구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정성이 수반된 절차가 필요했다. 우리의 상례 문화는 죽음을 겪은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풀어가기 위해 의례 과정 속에서 공포스러운 부정적 감정을 씻고 고통스러운 애도의 감정도 자연스럽게 소멸시키는 애도의 장치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화려한 의례구인 상여 장식물은 애도의 꽃이었으며 예술 적 상상력으로 죽음에 희망을 던지는 메시지였다. 222
민속학연구 제25호 197~226쪽 2009.12 참고문헌 강명관, 1997, ꡔ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ꡕ, 창작과 비평사, 446쪽. 강우방 외, 2005, ꡔ불교조각ꡕ 1, 솔, 244쪽. 권보드래, 2002, ꡔ한국 근대소설의 기원ꡕ, 소명출판, 351쪽. 김시덕, 2000, 상례, 누구를 위한 의례인가?-상례절차와 구조분석을 중심으로, ꡔ민속학연구ꡕ 제7호, 국립민속박물관, 77~ 108쪽. 김시덕, 2006, 한국 상례 문화의 이해, ꡔ목인박물관ꡕ 소장품 도록, 18~33쪽. 김열규, 2001, ꡔ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ꡕ, 궁리, 308쪽. 김열규, 2003, ꡔ동북아시아 샤머니즘과 신화론ꡕ, 아카넷, 444쪽. 김유정, 1997, 제주의 무신도-현존하는 내왓당 무신도 10신위 연구, ꡔ탐라문화ꡕ 8권,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183~ 214쪽. 김종대, 2006, 민중예술의 꽃, 상여장식에 나타난 의미와 상징성, ꡔ목인박물관ꡕ 도록, 114~119쪽. 김찬기, 2004, ꡔ한국 근대소설의 형성과 전( 傳 )ꡕ, 소명출판, 310쪽. 김태곤, 1989, ꡔ한국 무신도ꡕ, 열화당, 198쪽. 박종민, 2007, 상여 장식물의 표현양식과 상징적 의미, ꡔ민속학연구ꡕ 제20호, 국립민속박물관, 77~99쪽. 박종수, 2003, 고구려 고분벽화의 종교적 의미에 대한 연구-종교형태론적 접근을 중심으로, 한신대학교 대학원 종교문화 학과, 75쪽. 손정희, 2000, 산신신앙연구-문헌 설화를 중심으로, ꡔ한국민족문화ꡕ Vol. 16, No. 1,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1~34쪽. 신용하, 2005, ꡔ한국 원민족 형성과 역사적 전통ꡕ, 나남, 474쪽. 유봉학, 1995, ꡔ연암일파 북학사상 연구ꡕ, 일지사, 247쪽. 윤열수, 1995, ꡔ민화이야기ꡕ, 디자인하우스, 336쪽. 이두현, 1998, 나무꼭두의 역사와 쓰임새, 김옥랑 편, ꡔ한국의 나무꼭두ꡕ, 열화당, 7~19쪽. 이우환, 1977, ꡔ이조의 민화ꡕ, 열화당, 48쪽. 이현경, 2007, 책가도와 책거리의 시점에 따른 공간 해석, ꡔ민속학연구ꡕ 20호, 145~167쪽. 임영애, 2006, 統 一 新 羅 の 美 術 に 現 れゐ 西 域 人 のイメージ, ꡔ불교미술ꡕ 287호. 전호태, 2004, ꡔ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ꡕ, 서울대학교출판부, 651쪽. 정병모, 1995, 민화와 민간연화, ꡔ강좌미술사ꡕ 7, 한국미술사연구소, 101~141쪽. 정병모, 2004, 무신도의 휴머니즘, ꡔ논문집ꡕ 제17집, 경주대학교, 65~90쪽. 정병모, 2006, 한국 민화와 중국 민간연화의 비교, ꡔ민속학연구ꡕ 제19호, 국립민속박물관, 183~217쪽. 조좌용, 1995, ꡔ삼신민고ꡕ, 가나아트, 554쪽. 최완수, 1981, 겸제진경산수화고, ꡔ간송문화ꡕ 21, 39-52. 한병삼, 1986, 삼국시대의 고분금속, ꡔ국보2-고분금속Ⅱꡕ, 예경산업사, 234쪽. 보어쏭니엔( 薄 松 年 ), 2006, 중국의 민간 목판 연화, ꡔ민속학연구ꡕ 19호, 국립민속박물관, 147~162쪽. 223
삶과 죽음의 경계, 상여 장식물의 이중적 구조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윤기 옮김, 2008, ꡔ종교의 기원ꡕ, 열린책들, 472쪽. 카터 코벨, 김유경 엮어 옮김, 1999, ꡔ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ꡕ, 학고재, 414쪽. 도판참고 김옥랑 편, 1998, ꡔ한국의 나무꼭두ꡕ, 열화당, 182쪽. 목인박물관, 2006, ꡔ목인박물관ꡕ 도록, 168쪽. 224
민속학연구 제25호 197~226쪽 2009.12 Abstract A Boundary of Life and Death, Dual Structure of Sang-yeo Jangsikmul Lee Hyun Kyung Lecturer of University of Seoul Early period time of the Joseon Dynasty, Korean Buddhist cremation( 火 葬 ) is reconstructed by the new Confucian culture ideology, which is include funeral culture, funeral bier Sang-yeo ( 丧 舆 ) appearances bonuses in the customary culture, late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the Korean became to develop agriculture, commerce and economic that general cultural society was emerged private sector with this led them to a bonus Sang-yeo ornament a growing variety of sizes, while slashing their appearance became brilliant. This variety decorations icon of ornaments followed the art ears that contained to accumulated Confucian, Buddhism, Taoism, showing a mix of symbolic meaning, but, looking at art Gye-Se-Jeok( 继 世 的 ) in the mural painting of the Goguryeo ancient tombs view, which was the shamanism attributed as a death did not disrupt way. The spiritual trip to help of the primitive bird, origin of father reminiscent, and a totem symbolizes of the tiger through, Sang-yeo ornaments are the death could be as a trip, also a dead spirit objection became decedent's ancestral spirit and the same life you wanted to come back into the space was filled with hope. The Sang-yeo ornaments showed Gye-Se-Jeok shamanism view, this world, the background was the late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Korean community, and the economic system, it meltdown to Confucian statue system changed to the populace consciousness structure had been the rise on the surface, also a populace culture awareness was emerged by shamanism culture background. It was prevalent contemporary, Sang-yeo ornaments, and structure form similar with the Korean folk tale( 民 畵 ) icons, mostly populace hope s affect to magical way; in fact it had been deployed by the Korean shamanism framework. Confucian rationalism in the incomprehensible( 不 可 解 ) were present in one area, the death rituals of the people of the area, the substrate backbone in the world view of life as an extension of shamanism thought was more realistic and enriched representation. We went through the funeral customary culture of death, which was human beings go to the 225
삶과 죽음의 경계, 상여 장식물의 이중적 구조 top of the complex psychological process for the ritual washed out from the fear, negative emotions and painful feelings condolences to the mourning of the device was destroyed naturally. In the process, the most spectacular flowers of mourning rituals Sang-yeo ornaments work, the artistic imagination work were messaged the death had begun to hope for. Keywords : Sang-yeo Jangsikmul, decorations icon of Sang-yeo, funeral bier Sang-yeo, funeral culture, life and death, Gye-Se-Jeok shamanism 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