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치주의와 기록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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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빈 최씨의 생애와 궁원( 宮 園 ) 문화 이 영 춘 (한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1. 서설 2. 숙빈 최씨의 생애 1) 숙빈 최씨의 가문과 계보 2) 출생과 입궁 3) 왕자의 출산과 궁중 내 지위 3. 숙빈 최씨의 죽음과 추숭 1) 숙빈의 죽음과 상장례 2) 영조 즉위 후의 숙빈 추숭 사업 4. 국왕의 생모를 위한 궁원 문화 1) 육상궁과 소녕원의 조성과 제사 2) 7궁의 성립과 운영 5. 결어 1. 서설 영조(1694~1776, 재위 1725~1776)를 나은 생모 숙빈( 淑 嬪 ) 최씨( 崔 氏 : 1670~ 1718)는 가난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가, 7살에 대궐 에 무수리로 들어간 불우한 소녀였다. 그러다 23살의 늦은 나이에 국왕의 눈에 띄어 은총을 입은 후 왕자(훗날의 영조)를 출산하게 되었고, 마침내 후궁 중에서 최고 품 계인 정1품 빈( 嬪 )에 승격하여 숙빈( 淑 嬪 )이라는 봉작을 받아 영화를 누렸다. 숙빈의 영광은 사후에도 계속되어 영조가 국왕이 된 후 여러 차례 훌륭한 시호를 받고 묘궁 ( 廟 宮 )과 묘원( 墓 園 )이 조성되는 등 왕후에 준하는 추숭을 받게 되었다. 숙빈의 인생 역정에는 많은 개인적인 곡절과 국가적인 정변이 부수되었다. 그녀 의 일생을 추적해 나가면 조선 중기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숙빈은 늦은 나이에 승은 ( 承 恩 )을 입어 1693년(숙종 19)에 후궁에 봉작되었고, 연잉군( 延 礽 君 ) 등 3명의 왕자 를 나아 숙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왕비로 승격하였던 희빈 장씨의 시기 숙빈 최씨의 생애와 궁원( 宮 園 ) 문화 81

와 질투를 받게 되었다. 희빈이 남인들의 후원을 받은데 비해 숙빈은 노론 측의 후원 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1694년 남인들을 축출하고 폐출된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후 희빈의 저주 옥사( 獄 事 )를 일 으켜 사약을 받고 죽게 한 것도 숙빈이었다. 고립무원에 빠진 경종이 심신 위약 상태 에 빠져 즉위 4년 만에 죽자 마침내 숙빈의 아들 연잉군이 왕위에 올라 영조가 되었 다. 우리는 숙빈의 생애를 통하여 변화무상하게 전개되었던 숙종대의 정치와 궁중 음 모를 살펴볼 수 있다. 영조는 즉위한 후에 생모 숙빈의 사당을 육상궁( 毓 祥 宮 )으로, 숙빈의 묘소를 소녕 원( 昭 寧 園 )으로 격상시키고 화경( 和 敬 ) 이라는 시호를 올려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이러한 전례는 이후에 충실히 계승되어, 후궁 소생의 왕자가 세자가 되거나 왕위에 오른 경우에는 생모의 지위를 격상시켜 사당을 궁( 宮 )으로, 묘소를 원( 園 )으로 승격 하고 시호를 올리는 전례가 확립되었다. 이렇게 하여 조선후기에 궁원( 宮 園 )이라는 독특한 왕실 문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 결과 육상궁과 소녕원 외에도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 元 宗 )의 생모였던 인빈( 仁 嬪 ) 김씨의 저경궁( 儲 慶 宮 )과 순강원( 順 康 園 ), 영조의 후궁으로 추존왕 진종 ( 眞 宗 )의 생모였던 정빈( 靖 嬪 ) 이씨의 연호궁( 延 祜 宮 )과 수길원( 綏 吉 園 ), 장조( 莊 祖 )로 추존된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英 嬪 ) 이씨의 선희궁( 宣 禧 宮 )과 수경원( 綏 慶 園 ), 순조의 생모였던 수빈( 綏 嬪 ) 박씨의 경우궁( 景 祐 宮 )과 휘경원( 徽 慶 園 ), 영친왕의 생모 순비 ( 淳 妃 ) 엄씨( 嚴 氏 )의 덕안궁( 德 安 宮 )과 영휘원( 永 徽 園 ) 등이 설치되었다. 경종의 생모 희빈( 禧 嬪 ) 장씨는 끝내 추숭되지 못하고 대빈궁( 大 嬪 宮 )과 대빈묘( 大 嬪 墓 )로 불리었 으나 이들을 합쳐 7궁 7원이라고 한다. 이들 궁원에는 많은 농장과 노비가 하사되었 고 환관들이 관리인으로 파견하여 관리하였는데, 그 위세가 적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숙빈 최씨의 생애와 정치적 역할과 함께 그의 추숭으로부터 시작된 후궁들의 궁원( 宮 園 )을 통하여 조선후기의 화려한 궁중 문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숙빈 최씨의 생애 1) 숙빈 최씨의 가문과 계보 숙빈 최씨는 숙종의 후궁으로, 그녀의 신도비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그 가문 82 2014년도 장서각아카데미 왕실문화강좌

의 계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숙빈의 본관은 해주( 海 州 : 별칭 首 陽 )이며 아버지 최효원( 崔 孝 元 )은 선략장군( 宣 略 將 軍 : 종4품 무관 품계)이었다고 하나 자신의 품계보 다 아래 직위인 충무위( 忠 武 衛 ) 부사과( 副 司 果 : 종6품 무관직)를 지냈다. 어머니는 남 양홍씨( 南 陽 洪 氏 )로 통정대부( 通 政 大 夫 : 정3품 당상관 품계)를 받은 홍계남( 洪 繼 南 )의 딸이었다. 숙빈의 조부 최태일( 崔 泰 逸 )은 학생 신분이었고, 증조부 최말정( 崔 末 貞 )은 통정대부로 되어 있으며 고조 최억지( 崔 億 之 )는 관직이 없었다. 그들은 영조가 즉위 한 후에 각기 의정부 영의정, 좌찬성,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지만, 본래는 매우 미천한 가문 출신이었다. 고조부 최억지는 성명 외에는 일체 전해지는 것이 없고 그 이상은 가문의 세계( 世 系 )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본관이 해주라고는 하지만, 해주최씨의 족보에도 이들의 이름은 없다. 1936년 장봉선 등이 편찬한 정읍군지 에는 숙빈과 관련된 일화가 전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숙빈은 고향 전라북도 정읍현 태인에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로 자랐다고 한다. 그때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 閔 維 重, 1630~1687년)이 영광군 수에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에 태인의 대각교( 大 脚 橋 )에서 남루한 소녀를 발견하게 되 었다. 부인 송씨가 불쌍히 여겨 데려다 키웠고, 인현왕후가 왕비로 간택되어 입궁할 때 숙빈을 대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일화에는 숙빈의 고향이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 마을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일화는 사실적 근거가 없지만, 최효원 일가의 고향 이 전라도 지역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숙빈의 아버지 최효원의 직급이 충무위의 종6품 부사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러 한 직급은 조선후기에 모두 체아직( 遞 兒 職 )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므로 실제의 관직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이 주로 무과에 응시하여 무관직으로 나아간 것을 보면 최효원도 하급 무관직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들 최후( 崔 垕 )는 만호( 萬 戶 )를 지냈고, 손자 최수강( 崔 壽 崗 )도 무과에 급제한 후에 만호를 지냈 다. 증손 최진해( 崔 鎭 海 )는 무과에만 급제하였고, 외손 조경상( 趙 慶 祥 )은 무과 급제 후에 절충장군( 折 衝 將 軍 )에 올랐다. 최효원 집안의 혼맥을 보면 역시 무반 집안과 이루어지고 있는데, 손자 최수강의 부인은 무겸선전관( 武 兼 宣 傳 官 ) 김희윤( 金 熙 潤 )의 딸이었고, 사위 서전( 徐 專 )은 부사 ( 府 使 )를 지냈으나 무관 출신으로 보인다. 손녀 사위였던 조태항( 趙 泰 恒 )은 무과 급 제 후 만호를 지냈고 그의 아들 역시 무과 급제 후 절충장군에 올랐다. 따라서 숙빈 은 전형적인 중하급 무관 가문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아래 가계도 참조) 숙빈 최씨의 생애와 궁원( 宮 園 ) 문화 83

숙빈 최씨의 친정 가계도 億 之 子 末 貞 : 通 政 子 泰 逸 : 學 生 子 孝 元 : 宣 略 將 軍 行 忠 武 衛 副 司 果, 贈 領 議 政, 配 南 陽 洪 氏 ( 通 政 繼 南 女 ) 子 垕 : 萬 戶, 配 順 興 安 氏 ( 通 政 俊 榮 女 ) 子 壽 崗 : 武 科, 萬 戶. 配 武 兼 金 熙 潤 女 子 鎭 海 : 武 科, 配 金 斗 杓 女 子 鎭 衡 : 配 安 瑞 莢 女 女 趙 泰 恒 : 武 科, 萬 戶 子 慶 祥 : 武 科, 折 衝 將 軍 女 李 世 寬 女 權 繼 重 女 金 胤 宗 女 徐 專 ( 府 使 ) 女 李 馨 年 女 淑 嬪 : 肅 宗 後 宮 (1670~1718) 一 男 ( 妖, 1693.10.6~?) 二 男 : 延 礽 君 (1694.9.13~1776) 三 男 ( 妖, 1698.7.7~7.9) 2) 숙빈의 출생과 입궁 숙빈 최씨는 최효원의 막내딸로서 1670년 서울 여경방( 餘 慶 坊 : 현재의 세종로 일 대)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3살 때 아버지가 죽고, 4살 때 어머니가 작고하여 완전히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되었다. 그 때 오빠 최후는 겨우 10살 전후였고, 언니(서전의 부인)는 대여섯 살쯤 되었으니, 그 집안의 절박했던 형편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0 살도 넘지 않았던 어린 고아 3남매가 어떻게 살아갔는지 알 수 없다. 아버지 최효원 은 호남에서 상경해 하급 무관직에 있었던 가난한 사람이었으므로 친척도 많지 않았 고 재산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외조부 홍계남( 洪 繼 南 )이 서울 사람이었으므로 외가 쪽 친척들이 어느 정도 돌보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숙빈은 1676년(숙종 2) 7살 이 되던 해에 무수리로 입궐하였다. 아마도 생계나 양육 문제가 어려워 어린 나이에 친척들에 의해 궁중으로 보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 않으면 연줄이 있는 어떤 궁녀가 자신의 하녀로 삼기 위하여 데려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궁녀는 원래 왕실 소유의 내수사( 內 需 司 ) 노비들이나 관노비 가운데서 84 2014년도 장서각아카데미 왕실문화강좌

선발하여 조달하도록 되었다. 아무리 왕실이라고 하더라도 양반이나 양민의 딸들을 궁녀로 징발하여 사역하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수사 노비나 관노비도 수 가 제한되어 있었고 각기 소관 업무가 있었기 때문에 궁중에서 마음대로 징발하여 사역시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런 저런 방법으로 몰락한 양반이나 중인( 中 人 ) 또는 궁핍한 양민의 딸들이 입궁하는 길이 트이게 되었다. 궁중에만 들어가면 비록 생활이 고달프기는 하여도 의식주 생활이 보장되었고, 행여나 국왕이나 왕세자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게 되면 일약 후궁으로 승천하는 기회도 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세도가들 중에는 인물이 있는 여자 아이를 구하여 뒷문으로 대궐에 궁녀로 바쳐 국왕의 총애 를 꽤하거나 궁중의 여인들과 결탁하려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 는 대비나 왕비 혹은 고참 궁녀들이 자신들의 하녀로 부리기 위하여 친인척 아이들 이나 노비의 아이들을 데려 들어가기도 하였다. 희빈 장씨 같은 경우는 당시 대왕대 비였던 장렬왕후( 莊 烈 王 后 ) 조대비( 趙 大 妃 )가 자신의 하녀로 삼기 위해 데려갔던 여 자였다. 숙빈과 같이 어린 나이에 입궐하는 경우는 대개 집안이 궁핍하여 살기 어려운 사 람들이 딸아이를 궁녀들에게 부탁하여 무수리로 삼은 수가 많았다. 무수리는 궁중에 서 아무런 지위나 배경이 없이 그야말로 천한 궁중의 하녀들이었다. 그들은 대개 중 견 궁녀들에게 배당되어 심부름, 물긷기, 청소하기, 빨래하기, 바느질 등의 천역에 종 사하였다. 그러면서 조금씩 궁중의 일을 배우고 대궐 생활에 적응해 가는 것이었다. 무수리들은 워낙 천역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행여나 국왕의 눈에 띄는 일도 쉬운 일 은 아니었다. 이러한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대전( 大 殿 : 궁왕의 처소)이나 중전( 中 殿 : 왕비의 처소) 혹은 대비전( 大 妃 殿 : 대비의 처소) 등 국왕과 얼굴을 마주칠 수 있 는 곳에서 일하는 중 상급의 궁녀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나이 어린 숙빈도 어느 중견 궁녀에게 소속되어 막일을 하는 무수리가 되었을 것 이다. 어린 무수리들에게 궁중의 생활은 가혹하였다. 궁중에서 생활하였으므로 옷은 그런대로 입었고 밥도 굶주리지는 않았겠지만 잠은 냉골 판방( 板 房 : 마루로 된 방)에 서 자야했다. 궁중에는 온돌방이 드물어 왕과 왕비, 대비, 왕자, 공주 등의 왕족이 아 니면 모두 판방에서 자야했다. 조선후기에는 궁중의 법도가 조금 해이되어 늙거나 고 참 궁녀들에게도 온돌방이 배급되었지만 젊은 궁녀나 무수리들에게는 언감생심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수리와 같은 어린 궁녀들에게 고통스러웠던 것은 궁 밖을 출입할 수도 없고, 부모 형제나 친척들을 만나볼 수도 없으며, 심지어 도망 갈 수조차도 없는 엄격한 궁 숙빈 최씨의 생애와 궁원( 宮 園 ) 문화 85

중 법도였다. 그래서 그들은 감시와 속박 속에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무수리들의 일 과 생활은 가혹하였다. 그들은 고아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애정을 가지고 돌보아주는 사람도 없었고, 육체노동은 혹심하였다. 일을 하다가 또는 말과 행동에서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게 되면 엄하게 매질을 당하였다. 나이가 많거나 젊거나 궁녀들은 모두 애 정에 굶주리고 혼자 살아간 여성들이었으므로 성격들이 냉혹하고 신경질적이며 때로 는 괴팍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궁중에는 온갖 시기와 질투와 음모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용모가 있으면 중상모략을 받아 따돌림을 받거나 박해를 받기 일쑤였다. 궁녀들이 꿈에라도 바라는 것은 국왕이나 세자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고 승천하 는 것이었지만, 이는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하였다. 조금이라도 꼬리치는 낌새를 보 였다가는 왕비나 후궁들의 질시를 벗어날 수 없었고, 무슨 벼락을 맞을지도 알 수 없 었다. 어린 숙빈도 이러한 궁중의 음모와 암투 속에서 눈치를 보며 모질고 고된 궁중 생활을 해 나갔다. 이렇게 15년의 세월을 보내는 가운데 그녀도 점점 어린이 티를 벗고 꽃다운 처녀로, 어엿한 하나의 궁녀로 성숙해 갔다. 그러는 사이에 궁중의 법도 에도 익숙하게 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지혜도 생기게 되었다. 무수리로 입궁하였던 숙빈은 어느 때부터인가 장식 궁녀인 나인으로 승격된 것으 로 보인다. 바느질을 하는 침방( 針 房 )의 견습 나인을 거쳐 나인이 되었을 것이다. 조 선시대 궁중 풍속 전문가인 김용숙 교수가 구전된 자료들을 정리한 조선조 궁중풍 속연구 에는 아래와 같은 일화가 전한다. 이는 고종의 후궁인 광화당 이씨와 삼축 당 김씨가 고종에게 직접 들은 증언 이라 하였다. 어느 날 영조가 어머니께 침방에 계실 때 무슨 일이 제일 어렵더니까? 하니, 중 누비, 오목 누비, 납작 누비, 다 어렵지만 세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더이다 하고 최씨 가 대답했다. 그 이후부터 영조는 평생 동안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후대에 구전으로 전해 진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숙빈이 한 때 침방나인으로 일했음을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 침방에서 일했던 숙빈과 누비옷에 대한 영조의 한이 이러하였는데, 무수리 시절의 숙빈이 받았던 가혹한 대우와 비참한 사정을 영조가 알 았다면 과연 어떠했을까? 훗날 국왕이 된 연잉군( 延 礽 君 )에게는 무수리 출신 숙빈의 생애가 뿌리 깊은 한이 되었고, 그것이 자신의 근본에 대한 콤플렉스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86 2014년도 장서각아카데미 왕실문화강좌

3) 왕자의 출산과 궁중 내 지위 무수리였던 최씨는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己 巳 換 局 ) 이후에 숙종의 승은( 承 恩 )을 입었다고 하였으므로 대개 1690년 경 무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그녀 가 궁중에 들어온 지 15년여의 세월이 지난 20세 무렵으로 생각된다. 이 나이를 보 면 숙빈은 당시로서는 이미 꽃다운 시절이 지난 약간 늙은 처녀였다. 숙빈이 종4품 의 정식 후궁인 숙원이 된 것은 1693년이었으므로 그녀는 한동안 상궁의 신분으로 있었을 것이다. 상궁은 입궁한지 30여년 이상 된 정5품의 고참 궁녀들이었지만, 임 금의 승은을 입기만 하면 그 다음날로 바로 상궁이 되기도 하였다. 이들을 승은 상궁 이라고 불렀다. 한창 때를 넘긴 그녀가 어떤 계기로 숙종을 만나 사랑을 받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그녀는 폐위된 인현왕후의 수하에서 많은 은혜를 입었 고 그 때문에 왕후에게 깊은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숙빈이 승은을 입을 그 무렵에는 숙종이 희빈에게 싫증을 느끼고 점차 인현왕후를 그리워하고 있을 때였다. 숙빈은 당시 축출된 인현왕후를 위해 정성을 들이고 있었으므로 숙종이 침방나인이 었던 숙빈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1693년(24세, 숙종 19년) 초에 숙빈이 임신을 하게 되자 그녀는 몇 달 후 종4품 숙원( 淑 媛 )에 봉작되어 정식 후궁이 되었고, 곧 정2품 소의( 昭 儀 )로 승격하여 국왕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희빈 장씨의 심한 질투와 견제를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숙빈은 그 해 10월에 왕자 아기를 낳아 영수( 永 壽 )라는 이름까지 지었으나 2달만인 12월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숙종의 총 애 때문에 곧 다시 임신하게 된다. 다음 해 1694년 4월에 갑술옥사( 甲 戌 獄 事 )가 일어나 남인 정권이 무너지고 노론 과 소론 등의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폐서인 되었던 인현왕후가 왕 비의 자리에 복위하였고, 희빈은 다시 후궁의 지위로 강등되었다. 이 때문에 숙빈에 게는 노론이라는 정치적 후원 세력이 생기게 되었고 궁중 내 입지도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바로 그해에 그녀는 또 임신하여 정2품 숙의( 淑 儀 )로 진봉되었고, 9월에 출 산하였다. 그가 곧 훗날에 국왕(영조)이 된 연잉군( 延 礽 君 )이다. 숙빈은 다음 해 종1 품 귀인( 貴 人 )에 올랐고, 1698년에 또 남자 아기를 낳았으나 3일째 바로 요절하였다. 다음 해인 1699년(30세, 숙종 25년)에 그녀는 마침내 내명부 최고 직위인 정1품 숙 빈( 淑 嬪 )에 봉작되었다. 이때의 승진은 그 해 10월에 단종의 복위 의례가 완성된 데 숙빈 최씨의 생애와 궁원( 宮 園 ) 문화 87

따른 경축의 일환이었다. 이때 숙원 유씨( 劉 氏 )와 박씨( 朴 氏 : 명빈)도 숙의로 승격되 었다. 1) 조선후기에는 후궁이 봉작을 받으면 그를 위한 궁방( 宮 房 )이 설치되고 질병 치료 나 노후 생활을 위하여 가옥을 지급 받게 되며 많은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았다. 숙빈 은 생전에 전답 160여결(약 48만평)과 노비 100여명을 지급받았다. 또 숙빈( 淑 嬪 )은 당시 최고의 호화저택으로 이름난 이현궁( 梨 峴 宮 )을 받았다. 이현궁은 원래 광해군 ( 光 海 君 )의 왕자시절 저택이었는데, 1623년에 인조반정( 仁 祖 反 正 )이 일어난 후 계운 궁( 啓 運 宮 )으로 개칭하여 인조의 어머니였던 연주부부인( 連 珠 府 夫 人 ) 능성구씨( 綾 城 具 氏 )가 거주하도록 한 곳이었다. 후에 그 집은 인조의 아우였던 능원대군( 綾 原 大 君 ) 에게 하사되었다가 다시 왕실에 귀속되었다. 이렇게 크고 호화로운 저택을 숙빈에게 준 것으로 보면 당시 그녀의 위치와 숙종의 총애 정도를 알 수 있다. 숙빈의 궁중 내 거처는 왕과 왕비의 침실인 대조전( 大 造 殿 ) 서편의 보경당( 寶 慶 堂 )이었다. 이곳은 대조전과 지척에 있는 궁전으로 1694년(숙종 20) 숙빈이 영조를 출산한 곳이기도 하였다. 정조 때 수빈( 綏 嬪 ) 박씨가 순조를 낳은 후에 처소를 이곳 으로 옮긴 것을 보면 보경당은 곧 왕자를 출산한 제1후궁의 처소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희빈 장씨와 영빈 김씨 등 서열이 높은 후궁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거처는 대조전과 멀리 떨어진 모두 창경궁에 있었다. 숙빈이 보경당을 차지하게 된 것을 보 면 역시 숙종의 총애와 그녀의 지위를 알 수 있다. 영조도 어렸을 때는 숙빈과 함께 보경당에서 살다가 조금 성장한 후에는 창경궁의 건극당( 建 極 堂 )으로 옮겼다. 숙종은 결혼 후 오래 동안 아들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다가 희빈이 경종을 낳아 한숨을 돌리게 되었지만, 그래도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숙빈이 아들을 셋이나 낳았으므로 총애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두 아들은 출생 후에 바로 죽었지만, 둘째였 던 연잉군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으므로 숙종이 매우 든든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때문에 궁중에서 숙빈의 지위는 확고하게 되었다. 더구나 그녀는 왕비의 자리에 복위 한 인현왕후와 가까웠고, 집권세력이었던 노론과 밀착해 있었으므로 정치적으로도 흔 들릴 염려가 없었다. 숙빈은 이러한 배경과 숙종의 총애를 업고 당시의 당쟁 정국에 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제 무수리라는 출신 성분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숙빈은 궁중의 암투와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생존의 지혜와 경험을 얻었던 것으로 1) 숙종실록 권33, 25년(1699) 10월 23일 정해( 丁 亥 ). 88 2014년도 장서각아카데미 왕실문화강좌

생각된다. 이 때문에 그녀는 지극히 조심하면서 영리하게 처신하였고, 타인의 비난을 받을 일을 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숙빈의 처신과 관련된 물의는 한 번도 제기 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중한 처신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당쟁에 연루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후일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던 민진원( 閔 鎭 遠 )의 단암만록( 丹 巖 漫 錄 ) 에 의하면 숙 빈은 광성부원군 김만기( 金 萬 基 ) 집안과 일정한 교류가 있었고, 인현왕후와도 친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암만록 에는 1694년(숙종 20) 4월 갑술환국 때 광성부원군의 손자였던 김춘택( 金 春 澤 )이 숙종의 유모였던 봉보부인( 奉 保 夫 人 )을 통해 숙빈에게 비밀 스러운 계책을 전했다고 한다. 그것은 남인들의 독단적인 정치 행태와 희빈의 비위를 숙종에게 알리는 일이었다. 숙빈은 이 역할을 잘 수행하였고 그 결과 갑술환국이 일어 나 남인들은 숙청되었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어 희빈은 왕비의 자리에서 축출되었다. 이러한 숙빈의 정치적 활동은 노론의 정국 변환을 위한 정략 때문이기도 하였지 만, 또한 당시 희빈의 핍박을 받고 있었던 숙빈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도 필요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의 아들이었던 연잉군(후일의 영조)의 앞날을 위해서도 유리한 일이었다. 남인과 연결되어 있었던 희빈과 노론과 결부되어 있었던 숙빈은 정 치적으로 초연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각기 세자와 왕자가 있었으므로 궁중에서의 암투 도 적지 않았다. 1701년(숙종 27)에 인현왕후가 병으로 죽자 장희빈의 저주 사건 이 폭로되었다. 결국 희빈은 여기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여기에도 숙빈 의 작용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이보다 앞서 인현왕후가 병들어 누워 있을 때에 민진후( 閔 鎭 厚 ) 형제가 입시하니, 왕비가 하교하기를, 갑술년에 복위( 復 位 )한 뒤 조정의 의논이 세자( 世 子 )의 사친( 私 親 )을 봉공( 俸 供 ) 하는 등의 절목( 節 目 )을 운위하면서, 마땅히 여러 후궁들과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 고 하였는 데, 이때부터 궁중의 사람들이 모두 다 다 희빈에게로 기울어졌다. 궁중의 오랜 법도에 의하 면 빈어에 속한 시녀들은 감히 왕과 왕비의 처소에 드나들 수 없는데, 희빈에 속한 궁녀들이 항상 나의 침전에 왕래하였으며, 심지어 창에 구멍을 뚫고 안을 엿보는 짓을 하기까지 하였 다. 그러나 침전의 시녀들이 감히 꾸짖어 금하지 못하였으니, 일이 너무나도 한심했지만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빌 미가 있다. 고 한다. 궁인 시영( 時 英 )이란 자에게 의심스러운 자취가 많이 있고, 또한 겉으로 드러난 사건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어떤 사람이 주상께 감히 고하여 주상으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하겠는가? 다만 나는 갖은 고초를 받았으나, 지금 병이 난 두해 사이에 소원은 오직 빨 리 죽는 데 있으나, 여전히 다시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하여 이처럼 병이 낫지 아니하니, 숙빈 최씨의 생애와 궁원( 宮 園 ) 문화 89

괴롭다. 하고, 이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때에 이르러 과연 저주의 사건이 발각되니, 외간 에서는 혹 전하기를, 숙빈 최씨가 평상시에 왕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하여, 통곡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임금에게 몰래 고( 告 )하였다. 하였다. 단암만록 이나 숙종실록 은 모두 노론 측에서 기록한 것이므로 이러한 정황들 은 사실과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갑술환국이나 희빈 장씨의 옥사와 같은 커다 란 정변에 숙빈 최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숙빈은 연적이 었던 희빈과 정적이었던 남인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는 결국 자신의 아들 연잉군에 게 왕위를 계승시킬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 표면에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명민하고 신중한 숙빈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704년(숙종 30년) 2월에 연잉군이 결혼하면서 제택( 第 宅 )을 따로 마련하게 되자 조정에서 비난 여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연잉군이 이현궁( 梨 峴 宮 )에 숙빈과 함께 살 면 될 것인데 많은 경비를 들여 저택을 짓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여기에 개의 치 않고 순화방( 順 化 坊 : 지금의 종로구 통의동 일대)에 있던 숙휘공주( 淑 徽 公 主 : 효종 의 4녀)의 부군 인평위( 寅 平 尉 ) 정제현( 鄭 齊 賢 )의 옛 집터를 사 들여 연잉군의 제택 을 신축하였다. 이 집이 후일의 창의궁( 彰 義 宮 )이다. 그러나 1711년(숙종 37) 6월에 연잉군의 출합( 出 閤 : 왕자가 장성하여 결혼한 후 대궐을 나가 독립적인 가정을 만드 는 일)을 앞두고 숙종은 숙빈의 이현궁을 환수하고 연잉군의 집에 함께 살도록 하였 다. 연잉군은 어릴 때 숙종의 명으로 안동김씨가 출신의 영빈( 寧 嬪 ) 김씨( 金 氏 )에게 수양자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숙빈과의 모자 관계를 끊은 것은 아니 었다. 연잉군은 다음해 2월에 출합하였는데, 이 창의궁은 사실상 그와 숙빈의 공동 저택이 되었다. 숙빈은 만년에 이 집에서 살다가 여기서 죽었다. 숙빈은 매우 신중 겸손하며 화목 근검하고 성신이 독실하여 비난하는 사람이 없 었다고 한다. 그녀의 신도비에 칭송된 성품과 처신을 보면 아래와 같다. 숙빈은 천품이 신중하고 단정하여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고, 왕(숙종)과 왕 비(인현왕후)를 모실 때 주야로 힘써서 항상 공경하고 조심하였다. 여러 후궁과 궁인들을 접할 때는 겸손하고 화목하여 모두 환심을 얻었으므로 임금께서 매우 중히 여겼다. (중략) 숙빈은 성품이 온유하고 거동이 정숙 신중하였으며 돈독하고 화목하며 온순하고 공손하였다. 숙종을 보필하여 은총을 입은지 30여 년에 이르도록 근검하고 조심하였으며, 스스로 낮추어서 귀하고 영예로운 지위에 올랐으나 조금도 자만하지 않았다. 생각건대 궁중생활에서 덕의가 넘치고 정 성과 신의가 독실하여 비난하는 말이 없었다. 90 2014년도 장서각아카데미 왕실문화강좌

이러한 표현은 대체로 미화되고 상투적인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녀의 성품 과 처신을 대략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녀의 성격이 대단히 신중하고 감정 표현을 절제하였으며, 근면하고 검소하며 자만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 다. 이는 그녀가 어린 나이에 미천한 무수리로 궁중에 들어와 엄격하게 훈련받았을 뿐만 아니라, 승은을 입기까지 15년 가까이 하급 궁녀로 지냈기 때문이다. 3. 숙빈 최씨의 죽음과 추숭 1) 숙빈의 죽음과 장례 숙빈은 45세 때인 1714년(숙종 40)에 병을 얻어 대궐에서 나와 그녀와 연잉군의 사저인 창의궁에서 요양 생활을 하였다. 대궐에서는 대비ㆍ왕비ㆍ국왕ㆍ왕세자ㆍ왕세 자빈 등 국왕 직계 왕족 외에 후궁이나 궁녀들이 병이 나면 궁궐에서 나가야 했다. 지존에게 병이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숙빈이 무슨 병으로 신음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만 4년이나 병석에 있었던 것 을 보면 만성적인 지병이 있었던 것 같다. 그 간에 병이 좀 나으면 대궐에 들어가 숙 종을 알현하기도 하였다. 그때는 숙종도 지병으로 앓아누워 있었으므로 안팎으로 걱 정이 많을 때였다. 궁중에서는 그녀의 생활을 돌보기 위하여 환관들을 파견하였고 내 의원 의관들을 보내 최상의 치료를 제공했다. 무엇보다도 숙빈을 행복하게 했던 것은 그녀가 아들인 연잉군과 한 집에서 살면서 성심껏 봉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숙빈은 1718년(숙종 44) 3월 9일에 창의궁에서 병사하였다. 향년 47세였고 연잉 군이 25세 되던 해였다. 숙종은 왕족에게 규정된 예장( 禮 葬 : 국장 다음 등급의 장례 의전)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지시하고, 관재( 棺 材 )와 제수를 넉넉히 보내 주도록 하였 다. 대전( 大 殿 )과 중궁전 및 동궁의 3전에서 환관과 상궁ㆍ나인들이 파견되어 장례를 주관하였다. 내수사, 예조, 사옹원을 비롯한 여러 관서에서는 예장에 필요한 모든 의 장( 儀 仗 ), 의물( 儀 物 ), 비품, 음식물 및 제반 경비와 인력을 지원하였고, 종친과 외척, 의빈가( 儀 賓 家 ) 등에서도 아낌없이 조력하여 숙빈의 상은 신분에 걸맞게 호사스럽게 진행되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녀가 숙종이 총애하던 후궁이었고 또 연잉군이라는 든든한 왕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연잉군은 애모와 정성을 다하 여 생모의 상을 집행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것이 바로 영조 자신이 쓴 무 숙빈 최씨의 생애와 궁원( 宮 園 ) 문화 91

술점차일기( 戊 戌 苫 次 日 記 ) 이다. 본서에 기록된 숙빈의 상ㆍ장례 과정은 대략 아래와 같다. 숙빈은 3월 초9일 유시( 酉 時 : 오후 5~7시 사이)에 자택인 창의궁의 서별실( 西 別 室 )에서 별세하였다. 보고를 받은 숙종은 숙빈의 상을 예장으로 시행하는 등의 일을 전례에 따라 거행하고, 제수를 넉넉히 마련하여 보내라 고 전교하였다. 또 내수사로 하여금 관재( 棺 材 ) 숙빈의 궁방으로 보내도록 하였다. 다음 날인 3월 초10일에는 목욕( 沐 浴 )과 습렴( 襲 殮 )의 예를 행하였고, 호조와 내 수사 등 여러 관아에서 상ㆍ장례에 소용되는 제반 물자를 수송해 왔다. 이날에도 많 은 종친과 외척들이 문상하였고, 종친들은 집사를 맡아 상례를 도왔다. 제4일째인 3 월 12일에 대렴( 大 斂 )ㆍ입관( 入 棺 ) 후 빈소( 殯 所 )를 조성하고 성복( 成 服 )하였다. 성복 때는 연잉군이 예조에서 보내온 최복( 衰 服 : 상복)을 착용하였으나, 훗날 잘못된 예법 이라고 지적되었다. 묘지( 墓 地 )를 정하는 일은 여러 번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5월 2일에 가서야 양주 고령동( 高 嶺 洞 ) 옹장리( 瓮 場 里 )로 결정되었다. 이 상례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4월 8일 초저녁에 연잉군의 어린 딸이 죽었다. 연잉군은 딸의 죽음에 슬픔을 슬퍼하지도 못하 고 당일 중으로 염습하여 익일 새벽에 양주의 외가[최효원 가] 산소에 매장하였다. 장례는 5월 11일 새벽 4경 1점에 발인하여 100여리를 가서 오후 늦게 고령동의 산소에 도착하였다. 5월 12일 장례를 거행하고 13일 오후 늦게 창의궁에 도착하여 상청에 신주를 봉안하였다. 5월 14일에 삼우제( 三 虞 祭 )를 지내고, 16일에 졸곡제( 卒 哭 祭 )를 지낸 후 묘소에 석물( 石 物 )들을 설치하였다. 졸곡제를 지낸 바로 그 날 숙종 은 숙빈의 상이 이미 끝났으므로 연잉군이 대궐에 출근하여 사무를 보도록 지시하였 다. 그래서 연잉군은 숙빈의 장례를 치른 지 10일 만에 탈상하고 정상적으로 출근하 였다. 정상적으로 상을 마치지 못한 연잉군의 가슴에는 큰 상처가 남게 되었다. 그는 생모의 상중에 어린 딸까지 죽은데다가 이러한 일이 겹쳐 상심과 좌절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상중에 있었던 이러한 일들은 연잉군과 부왕인 숙종 사이에 갈등을 유발하였고, 그가 괴심 죄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연잉군은 다음해 2월 15일에 애첩이었던 정빈( 靖 嬪 ) 이씨( 李 氏 )와의 사이에서 아 들 경의군( 敬 義 君 : 훗날의 孝 章 世 子 로서 眞 宗 에 추존됨)을 낳았는데, 이는 실상 숙빈 의 상중에 임신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아버지 숙종으로부터 더욱 책망을 받고 미움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세자(경종)를 교체하려는 숙종과 노론의 암묵적인 합의에서 그는 이복동생인 연령군( 延 齡 君 )에게 밀리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92 2014년도 장서각아카데미 왕실문화강좌

외척이며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던 민진원은 단암만록 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연령군( 延 齡 君 )은 사람됨이 온유하고 영민하여 임금의 사랑을 받은 것이 연잉군보다 지나 쳤다. 연잉군은 자주 임금의 질책을 받았고 또 생모의 상중에 있으면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행검이 없다고 책망하여 임금을 알현하지 못하게 한 것이 몇 개월이나 되었다. 정유년(1617) 이이명( 李 頤 命 )이 독대( 獨 對 )했을 때 임금의 뜻은 대개 연령군에게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당시 숙종의 후계 구도는 이미 연령군에게로 기울었던 것으로 보였지 만, 다음 해 10월에 그가 병사함으로서 없던 일이 되었다. 이로써 노론의 촉망은 다 시 연잉군에게로 돌아오게 되었다. 어떻든 숙빈 사후의 복상 기간은 연잉군의 생애에 서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매우 괴로운 시련의 시기였다고 하겠다. 2) 영조 즉위 후의 숙빈 추숭 사업 숙빈의 묘에는 장례 직후에 묘표( 墓 表 ), 상석( 床 石 ), 향로석( 香 爐 石 ) 등의 석물을 배설하고 곡장( 曲 墻 )을 설치하였으며, 후에 제청( 祭 廳 )을 건축하여 묘역이 대략 정비 되었다. 그때에는 물론 정자각( 丁 字 閣 )이나 홍살문 등은 세워지지 않아 조촐한 후궁 의 묘로 조성되었다. 1724년 8월 25일에 경종( 景 宗 )이 승하하고 30일에 영조가 즉위하자 곧 숙빈에 대한 추숭 사업이 시작되었다. 경종 국상에 문무백관이 상복을 입는 27일간의 공제 ( 公 除 )가 지난 9월 21일에 바로 예조판서 이진검( 李 眞 儉 ) 등이 사친( 私 親 : 숙빈)에 대한 존숭의 예를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영조는 경종 때 희빈을 옥산부대빈( 玉 山 府 大 嬪 )으로 높인 것과 달리 숙빈의 작호를 고치지 말고, 사당을 세워 관가에서 제 사를 지내되 묘역을 넓히고 수호인( 守 護 人 )을 두는 것은 인빈( 仁 嬪 : 선조의 후궁이며 인조의 할머니)의 전례에 따르도록 하되, 사당은 경종의 인산( 因 山 : 장례)이 끝난 후 에 세우도록 하였다. 처음에 영조는 숙빈의 사당을 생전에 거처하였던 창의궁을 개조하여 세우도록 하 였으나 신하들은 국왕의 잠저( 潛 邸 )를 후궁의 사당으로 삼을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경복궁 뒤편에 터를 매입하여 사당을 세우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현재의 육상궁( 毓 祥 宮 )이다. 사당은 다음 해(1725) 12월에 완성되었고, 처음에는 그냥 숙빈 묘( 淑 嬪 廟 )라고 하였다. 그 해 9월에는 묘소에 신도비( 神 道 碑 )를 세웠는데, 비문은 금 숙빈 최씨의 생애와 궁원( 宮 園 ) 문화 93

평위( 錦 平 尉 ) 박필성( 朴 弼 成 )이 지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1734년(영조 10) 2월에 는 숙빈의 친정 부모에게 의정부 영의정과 정경부인( 貞 敬 夫 人 )을 추증하였다. 숙빈에 대한 본격적인 추숭은 1744년(영조 20)에 이루어졌다. 이 해 1월에 숙빈 의 조부모와 증조부모에게 각기 의정부 좌찬성과 정경부인, 이조판서와 정부인( 貞 夫 人 )을 추증하였다. 3월에는 숙빈의 묘호( 廟 號 : 사당 이름)와 묘호( 墓 號 : 묘소의 이름) 를 정하고, 묘소에는 전감( 典 監 )을 두어 수호하게 하였다. 묘호( 廟 號 )는 처음에 육경 묘( 毓 慶 廟 ) 라 하였다가 육상( 毓 祥 廟 ) 으로 고쳤고, 묘소의 이름은 소녕묘( 昭 寧 墓 ) 라 하였다. 그리고 숙빈의 제사를 받드는 봉사자( 奉 祀 者 )에게는 돈녕부 부정( 敦 寧 府 副 正 : 종3품)의 관직을 세습케 하였다. 8월에는 영조 자신이 묘비문을 지어 세웠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1753년(영조 29) 6월에 영조는 숙빈에게 화경( 和 敬 ) 이라 는 시호( 諡 號 )를 올리고, 소녕묘( 昭 寧 墓 ) 를 소녕원( 昭 寧 園 ) 으로, 육상묘( 毓 祥 廟 ) 를 육상궁( 毓 祥 宮 ) 으로 격상시켰다. 이를 위해 소녕원에 도감( 都 監 )을 설치하여 비와 비각, 금천교( 禁 川 橋 ), 제정( 祭 井 ), 홍살문( 紅 箭 門 ), 기임각( 祈 稔 閣 ) 등을 세워 면모를 일신하였다. 8월 6일에 영조는 육상궁에 나아가 친제를 행하고 시책( 諡 冊 )과 은인( 銀 印 )을 올렸다. 또 이를 기념하여 가벼운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시호를 올리는 의식을 마치고 영조는 내가 이제는 한이 없다 고 말한 것을 보면 이것이 그의 오랜 숙원이 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9월에는 이러한 사실을 종묘에 고하고 죄수들에 대한 대사면을 시행하였다. 이때는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특별 과거[ 庭 試 ]를 설행하였 으며, 파면되거나 직위 해제된 관리들의 죄과도 씻어 주도록 하였다. 숙빈에 대한 추숭 사업은 1753년에 대략 완성되었지만, 이 후에도 영조는 추숭 전례를 계속하였다. 1756년 1월 1일에는 숙빈에게 휘덕( 徽 德 ) 이라는 존호를 더 올 리고 축문의 선자친( 先 慈 親 ) 을 선비( 先 妣 ) 로 고치도록 하였다. 선비 라는 호칭은 선고( 先 考 ) 라는 호칭과 함께 작고한 부모를 부르는 말인데, 영조가 후궁이었던 생모 에게 정식으로 선비 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1772년(영조 48) 8월에는 안순( 安 順 ) 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고, 1776년(영조 52) 1월에는 수복 ( 綏 福 ) 이라는 시호를 더 올렸다. 이리하여 숙빈의 시호는 화경휘덕안순수복( 和 敬 徽 德 安 順 綏 福 ) 의 8자가 되었다. 이와 함께 숙빈의 아버지 최효원( 崔 孝 元 )의 사당에 여 러 차례 제사를 내리고 그 후손들에게도 벼슬을 주거나 증직( 贈 職 )을 베풀었다. 94 2014년도 장서각아카데미 왕실문화강좌

4. 국왕의 생모를 위한 궁원 문화 조선후기에는 후궁 소생의 왕자가 세자가 되거나 왕위에 오른 경우가 많았다. 이 러한 후궁들은 아들이 왕위에 오른 뒤에 지위가 격상되어 사당을 궁( 宮 )으로, 묘소를 원( 園 )으로 승격하고 시호를 추상( 追 上 )하는 전례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전례는 바로 영조가 생모 숙빈의 궁원과 시호를 추상하면서 비로소 확립되었고, 이후에 충실히 계 승되었다. 이리하여 이른바 7궁과 7원이 조선된 것이다. 이는 조선후기 궁중 문화의 독특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1) 육상궁과 소녕원의 조성과 제사 육상궁은 숙빈 최씨를 제사하기 위해 건설한 사당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 동 1-1 경복궁 뒤편에 있다. 1725년(영조 1) 처음 숙빈묘( 淑 嬪 廟 )를 세운 그 자리에 서 300여 년간 향화( 香 火 )가 이어져 왔다. 육상궁은 이른바 7궁이라고 부르는 조선 후기 국왕들의 사친( 私 親 : 생모) 묘궁( 廟 宮 ) 중에서 가장 먼저 창설되었고, 가장 중요 하게 인식되었던 궁이었다. 육상궁은 이후에 건립된 7궁의 제사 의례와 관리에 하나 의 표준이 되기도 하였다. 숙빈 최씨의 사당은 원래 그녀와 아들 연잉군의 저택이었던 서울 통의동의 창의 궁( 彰 義 宮 )에 있었다. 1724년 영조가 왕위에 오른 다음 해에 이곳에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옮겨 봉안하였다. 영조는 1744년(영조 20)에 생모인 숙빈을 본격적으로 추숭 하면서 묘호( 廟 號 : 사당 이름)와 묘호( 墓 號 : 묘소의 이름)를 정하였는데, 사당의 이름 을 처음에는 육경묘( 毓 慶 廟 ) 라 하였다가 후에 육상묘( 毓 祥 廟 ) 로 고쳤다. 그리고 10 여년이 지난 1753년(영조 29) 6월에 숙빈에게 화경( 和 敬 ) 이라는 시호( 諡 號 )를 올리 면서 육상묘( 毓 祥 廟 ) 를 육상궁( 毓 祥 宮 ) 으로 격상시켰다. 그러나 사당의 현판은 아 직도 육상묘( 毓 祥 廟 ) 로 되어 있다. 육상궁은 1882년(고종 19) 8월에 화재로 소실되 었으나 이듬해 다시 중건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육상궁에는 그 관리를 위하여 수봉관( 守 奉 官 ) 2명, 수복( 守 僕 ) 4명, 수직군사( 守 直 軍 士 ) 20명이 배정되어 있었다. 육상궁에는 그 관리와 제사를 위하여 많은 토지와 노비가 주어졌다. 숙빈은 생전에 궁방이 설치되면서 이미 160여결의 전답과 100여 명의 노비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160여결이면 약 48만평 정도에 이른다. 그 토 지는 후에 더욱 늘어나 순조 때 이후에는 470여결(140만평)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 숙빈 최씨의 생애와 궁원( 宮 園 ) 문화 95

한 규모는 대체로 1895년 갑오경장 때까지 유지되었다. 속오례의( 續 五 禮 儀 ) 에는 국왕의 육상궁 참배 의식 절차가 자세히 규정되어 있 다. 이는 1727년(영조 3년)에 영조가 직접 행하였던 예법이다. 그에 따르면 왕의 어 가가 출궁할 때 왕세자도 예를 갖추어 어가를 따른다. 국왕이 익선관( 翼 善 冠 )과 곤룡 포를 입고 판위( 版 位 )에 나아가 재배하면, 왕세자도 재배한다. 국왕이 궁내에 들어가 서 봉심( 奉 審 )할 때는 왕세자도 따라 올라간다. 육상궁소녕원궁원식례( 毓 祥 宮 昭 寧 園 宮 園 式 例 ) 에 의하면 육상궁의 신주는 북쪽 에서 남향하여 있다. 정규 제사인 사계절 제향은 춘분ㆍ추분ㆍ하지ㆍ동지에 거행하였 고 설날ㆍ한식ㆍ단오ㆍ추석 명절에도 약식 제사가 있었다. 사계절 제향의 날짜를 다 른 제사와 같이 택일하지 않고 춘분ㆍ추분ㆍ하지ㆍ동지로 고정한 것은 사마온공( 司 馬 溫 公 )의 서의( 書 儀 ) 를 기초로 한 이식( 李 植 )의 예설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소녕원은 숙빈의 묘소로 양주 고령동 옹장리(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 다. 이곳은 1716년(숙종 42) 5월 장례 직후에 보통 후궁의 묘로 조성되었던 곳이다. 장례 다음날 묘지( 墓 誌 )를 매설하였고 후에 묘표( 墓 表 ), 상석( 床 石 ), 향로석( 香 爐 石 ) 등의 석물을 배설하고 곡장( 曲 墻 )을 설치하였다. 당시에는 정자각( 丁 字 閣 )이나 홍살 문 등이 없는 조촐한 후궁의 묘로 조성되었다. 1724년 8월에 영조가 즉위하자 그 다음해에 숙빈의 사당을 새로 조성하고 묘역 도 확장 정비한 후 수호군을 두었다. 이때 묘소 진입로에 거대한 신도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금평위( 錦 平 尉 ) 박필성( 朴 弼 成 )이 지었고 글씨는 여산군(( 礪 山 君 ) 이요( 李 橈 ) 가 썼다. 그러나 묘호는 그대로 숙빈묘 라고 하였다. 이때 수호인은 인빈 묘소의 전 례에 따르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1744년(영조 20)에 숙빈에 대한 추숭이 이루어지면서 묘호도 소녕묘 ( 昭 寧 墓 ) 라 하였다. 영조는 직접 비문을 지어 세웠는데, 숙빈해주최씨소녕묘비( 淑 嬪 海 州 崔 氏 昭 寧 墓 碑 ) 라 하였다. 이때 지석도 이요( 李 橈 )의 글씨로 다시 제작하여 매설 하였다. 그리고 소녕묘의 제사를 받드는 봉사자는 대원군 봉사손의 예에 따라 4대 후에 돈녕부( 敦 寧 府 ) 부정( 不 正 )의 관직을 세습토록 하였다. 그리고 전감( 典 監 )이라는 수호관 2명을 두고, 수복 4명과 수호군 30명을 배정하였다. 그 후 10여년이 지난 1753년(영조 29) 6월에는 소녕묘를 소녕원( 昭 寧 園 ) 으로 격상하였다. 이때 비와 비 각, 금천교( 禁 川 橋 ), 제정( 祭 井 ), 홍살문( 紅 箭 門 ), 기임각( 祈 稔 閣 ) 등을 세웠다. 소녕원에는 묘소를 관리하기 위하여 종9품 수원관( 守 園 官 ) 2명, 수복 4명, 수호군 30명을 두었다. 원의 제사를 위한 위전( 位 田 )은 원래의 창의궁( 彰 義 宮 ) 소유 전답을 96 2014년도 장서각아카데미 왕실문화강좌

떼어 주도록 하였다. 소녕원에는 곡장, 혼유석( 魂 遊 石 ), 문인석, 석마( 石 馬 ), 석양( 石 羊 ), 묘표( 墓 表 ) 등의 석물과 사초지( 莎 草 地 ) 등이 있고, 사초지 앞에 정자각( 丁 字 閣 ) 과 비각이 있다. 정자각 앞에는 금천교, 제정, 홍살문, 기임각 등이 있었으나, 기임각 은 현재 소실되었다. 정자각 동쪽 비의 전면에는 조선국화경숙빈소녕원( 朝 鮮 國 和 敬 淑 嬪 昭 寧 園 ) 이라는 묘비의 비각이 있고, 그 위에는 영조가 직접 지은 묘비의 비각이 있다. 비각 맞은편에는 원래 제청( 祭 廳 )으로 지은 육오당( 六 五 堂 )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소실되고 주춧돌만 남아 있다. 2) 7궁의 성립과 운영 인빈 김씨는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 元 宗 )의 생모로 숙빈보다 100여년이나 앞선 사람이었지만, 그녀의 궁원(저경궁과 순강원)이 승격된 것은 숙빈보다 2년 뒤인 1755년(영조 31) 6월이었다. 영조는 숙빈을 추숭하는 과정에서 인빈도 함께 추숭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경종의 생모였던 희빈( 禧 嬪 )은 추숭하지 않았다. 이후 희빈은 끝내 시호를 받지 못하였고 사당과 묘도 궁원으로 격상되지 못하였다. 다만 정조 때 희빈의 사당과 묘에 대한 제사도 궁원에 준하여 시행하도록 조치되었을 뿐이었다. 그 리하여 대빈궁( 大 嬪 宮 )과 대빈묘( 大 嬪 墓 )로 불리웠다. 1776년(정조 즉위년)에 즉위한 정조는 곧 법적인 아버지 효장세자를 진종( 眞 宗 ) 으로 추숭하였고, 2년 후에는 그의 생모인 정빈 이씨( 靖 嬪 李 氏, 1693~1721년)의 궁원을 전례에 따라 승격하고 시호를 추상하였다. 그것이 연호궁( 延 祜 宮 )과 수길원 ( 綏 吉 園 )이다. 이렇게 국왕의 생모인 후궁을 추상하는 전례가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1822년 (순조 22) 12월에 순조의 생모였던 가순궁( 嘉 順 宮 ) 수빈( 綏 嬪 ) 박씨가 죽었을 때는 바로 원호를 휘경( 徽 慶 )으로, 시호를 현목( 顯 穆 )으로 정하였고, 2년 후 상을 마치자 사당을 경우궁( 景 祐 宮 )으로 정하여 제사하게 되었다. 영빈( 英 嬪 ) 이씨는 영조의 후궁으로 사도세자( 思 悼 世 子 )의 생모였는데, 영조는 1764년(영조 40) 7월 그녀가 죽자 의열( 義 烈 )이라는 시호를 주고 후에 묘소를 원 ( 園 )으로 봉하도록 유교를 남겼다. 그러나 그녀의 사당과 묘소는 한 동안 의열궁( 義 烈 宮 )과 의열묘( 義 烈 墓 )로 칭하였다. 1788년(정조 12) 12월에 시호를 궁호로 쓰는 것은 맞지 않는다 하여 궁호를 선희궁( 宣 禧 宮 )으로 고쳤고, 1899년(고종 36, 광무 3 년) 9월에 사도세자를 장조( 莊 祖 )로 추존하면서 선희묘( 宣 禧 墓 ) 수경원( 綏 慶 園 )으로 숙빈 최씨의 생애와 궁원( 宮 園 ) 문화 97

승격하였다. 1897년(광무 1)에 영친왕을 낳은 고종의 후궁 순비( 淳 妃 ) 엄씨( 嚴 氏 )는 1902년 황귀비( 皇 貴 妃 )로 책봉되었고, 1911년 7월에 사망하자 당시 이왕직( 李 王 職 )에서 시호 를 순헌( 純 獻 ), 궁호를 덕안궁( 德 安 宮 ), 원호를 영휘원( 永 徽 園 )으로 정하였다. 덕안궁 은 원래 그녀가 살던 경운궁( 慶 運 宮 : 덕수궁) 안 경선궁( 慶 善 宮 )에 설치되었다가 1913년 태평로 1가에 새로 궁(사당)을 지어 옮겼고, 1929년 7월에 육상궁으로 옮겼 다. 조선왕조의 궁원제도는 이렇게 왕조가 종언을 고한 뒤에도 지속되고 있었다. 육상궁과 이상의 6궁을 합쳐 7궁이라고 부른다. 7궁은 원래 각기 따로 지어져 있 었으나, 1908년(융희 2) 7월에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경우궁, 선희궁의 사당을 육 상궁 경내로 이설하여 6궁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조치는 예법의 실질에 충실히 한다 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대한제국 말기의 왕실 재정 궁핍에 따른 것이었다. 폐지된 여 러 궁원의 건물과 토지는 모두 국유지로 돌려 처분되었다. 1929년에 영친왕의 어머 니인 순빈 엄씨( 淳 嬪 嚴 氏 )의 덕안궁을 6궁의 경내에 합설한 후에는 칠궁( 七 宮 )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의 칠궁은 크게 3구역으로 되어 있는데 남쪽의 재실 구역, 그 동북쪽의 육상 궁 구역, 서북쪽의 저경궁 구역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재실 구역에 영조의 화상을 봉 안하였던 송죽재( 松 竹 齋 )와 풍월헌( 風 月 軒 ) 그리고 삼락당( 三 樂 堂 ) 건물이 연결되어 있다. 육상궁에는 연호궁이 합설되어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사당이다. 그 앞에는 동서각( 東 西 閣 )과 배각( 拜 閣 )이 있다. 육상궁 서편에는 냉천( 冷 泉 )이라는 우물과 냉천정( 冷 泉 亭 )이라는 정자가 있다. 그 서편의 저경궁 구역에는 서쪽에서부터 저경궁, 대빈궁, 및 합설된 경우궁ㆍ선희궁이 일자로 배열되어 있고, 그 앞에 덕안궁 이 배치되어 있다. 5. 결어 영조는 반세기에 이르는 오랜 통치 기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환국정치 시기라고 불리던 숙종~경종대의 치열했던 당쟁을 완화시켜 어느 정도의 정치적 안정 이 이루어졌던 탕평기( 蕩 平 期 )를 열었고, 17세기 이래 오래 논의되었던 균역법( 均 役 法 )을 시행함으로써 양민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는 1744년(영조 20)에 국조속 오례의 (이하 속오례의 로 약칭함)를 편찬 간행하고, 1746년(영조 22)에 속대전 98 2014년도 장서각아카데미 왕실문화강좌

을 편찬함으로써 예제와 법전을 재정비하였다. 또한 1765년(영조 41)의 여지도서 (55책), 1770년의 동국문헌비고 (109권 40책) 등 총서 류의 방대한 통치 자료들을 집대성하여 간행함으로써 국가의 전장 문물을 정리하였다. 이러한 사업들은 급격한 변화와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조선후기 사회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었지만, 영조 대의 정치적 안정과 국왕의 의지에 의해 가능하였던 것이며, 이는 새로운 시대를 여 는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영조가 세제( 世 弟 )에 책봉되고 국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정치적 배경에는 노론 ( 老 論 )이라는 정치 세력과 숙빈이라는 어머니가 있었다. 숙빈은 영리한 자질에다 오 랜 궁중 생활의 지혜로 인해 희빈 장씨의 질시와 음모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마침내 희빈과 남인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아들 연잉군을 탄탄대로에 올려 놓을 수 있었다. 숙빈은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7살에 대궐의 무수리로 들어갔으나, 국왕의 은 총을 입은 후 왕자들을 출산하게 되었고, 마침내 정1품 빈( 嬪 )에 승격하여 숙빈( 淑 嬪 )이라는 봉작을 받아 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녀의 사후에 아들 연잉군이 국왕이 되자 여러 차례 시호를 받고 묘궁( 廟 宮 )과 묘원( 墓 園 )이 조성되는 등 왕후에 준하는 추숭을 받았다. 숙빈의 추숭을 위해 시작된 묘궁( 廟 宮 ), 묘원( 墓 園 )의 조성과 제사는 육상궁( 毓 祥 宮 )과 소녕원( 昭 寧 園 ), 저경궁( 儲 慶 宮 )과 순강원( 順 康 園 ) 등 7궁 7원에 이르게 되었 다. 이들 궁원에는 많은 농장과 노비가 하사되었고 환관들이 관리인으로 파견하여 관 리하였는데, 그 위세가 적지 않았다. 이는 조선후기에 궁원( 宮 園 )이라는 독특한 왕실 문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숙빈 최씨의 생애와 궁원( 宮 園 ) 문화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