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milar documents
¹ßÇ¥¿äÁö


hwp

º´¹«Ã»Ã¥-»ç³ªÀÌ·Î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Drucker Innovation_CEO과정

차 례 1. 서시 1 2. 우리나라와일본의역사비교표 2 3. 일본속의한국문화답사 3 (1) 요시노가리유적 3 (2) 후나야마고분 4 (3) 아스카테라 5 (4) 시텐노지 6 (5) 이시부다이 7 (6) 고류지 8 (7) 호류지 9 (8) 다자이후 10 (9) 도다이지

152*220

0.筌≪럩??袁ⓓ?紐껋젾 筌

178È£pdf

01¸é¼öÁ¤

인되기시작하면서한반도에서발생, 전파된것으로보는견해도있다. 전방후원분은고분군내에서도가장높은곳이나전망좋은곳에위치하고, 규모나부장품도특별하여주로그지역의수장층의무덤으로알려져있다. 머릿속으로상상만하던전방후원분을만난다는것만으로설레는답사지였다. 직접와보니눈으로확인하기엔큰규모때문인지

10월추천dvd

#7단원 1(252~269)교

<B3EDB9AEC0DBBCBAB9FD2E687770>

2015년9월도서관웹용

~

_¸ñÂ÷(02¿ù)

제와오늘, 내일의한일관계에대해생각하고공부해야겠다는다짐을하게되었다. 부산과후쿠오카를同경제권으로묶어, 해저터널을건설하자는제안도신중하게접근해야될것같았다. 경제적협력관계도중요하지만역사인식을공유하고역사청산도함께이루어지면어떨까하는생각을하였다. 한 일간의공감대가형성된다면프랑스와독일


¿©¼ºÀαÇ24È£

통계내지-수정.indd

2015현엘 내지.indd

<B9AEC8ADC0E7C3A2766F6C2E31325FBDCCB1DB2E706466>

* pb61۲õðÀÚÀ̳ʸ

할렐루야10월호.ps, page Normalize ( 할 437호 )

¼øâÁö¿ª°úÇÐÀÚ¿ø

ÆÞ¹÷-Æîħ¸é.PDF

DocHdl2OnPREPRESStmpTarget

041~084 ¹®È�Çö»óÀбâ

77

문화재이야기part2

현장에서 만난 문화재 이야기 2

ITFGc03ÖÁ¾š

광주시향 최종22

(연합뉴스) 마이더스

더바이어102호 01~09

5 291

ÀÚ¿øºÀ»ç-2010°¡À»°Ü¿ï-3

나하나로 5호

º»ÀÛ¾÷-1

ÃѼŁ1-ÃÖÁ¾Ãâ·Â¿ë2

Ä¡¿ì_44p °¡À» 89È£


<C3E6B3B2B1B3C0B C8A32DC5BEC0E7BFEB28C0DBB0D4292D332E706466>

~11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Çѹ̿ìÈ£-197È£

untitled

2007중국답사기

ºñ»óÀå±â¾÷ ¿ì¸®»çÁÖÁ¦µµ °³¼±¹æ¾È.hwp

985-2.pdf

¹é¹üȸº¸ 24È£ Ãâ·Â

제 53 회서울특별시과학전람회 예선대회작품설명서 본선대회작품설명서 쓰나미의피해를최소화시키는건물과 건물배치에대한탐구 출품번호 S-504 출품분야학생부출품부문지구과학 학교명학년 ( 직위 ) 성명

.....hwp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_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21 여 ö Ç J ö Ç Ç ö úç úç ú Ç 사랑으로채우 - - 여? J J J J J #ú Ç úç 사랑으로채우 - 여 L? ú ä F ä A ä # _

82-대한신경학0201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일본탐방지주제강사답사키워드 현장강연우스키석불군정영호절 2 일 (9 월 30 일 ) 3 일 (10 월 1 일 ) 4 일 (10 월 2 일 ) 5 일 (10 월 3 일 ) 우사신궁신라범종신라범종 아카마신궁조선통신사의숙소조선통신사숙소 청일강화기념관일제침략의발판시모노세키조약

<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 평균 ( 만원 ) 자녀상태 < 유 자 녀 > 미 취 학 초 등 학 생 중 학 생 고 등 학 생 대 학 생 대 학 원 생 군 복 무 직 장 인 무 직 < 무 자 녀 >,,.,.,.,.,.,.,.,.

11+12¿ùÈ£-ÃÖÁ¾

<34BFF9C8A320B4DCB8E9B0EDC7D8BBF32E706466>

!

레이아웃 1

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고류지의목조미륵반가사유상 ( 왼쪽 ) 과우리국보 83 호인금동미륵반가사유상 반가사유정영호교수님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있는영보전에들어가면왼쪽에약사여래상을호위하는십이신장상 ( 十二神將像, 藤原時代 ) 이있다. 그런데아무리세어봐도십사신장이기에왔다갔다하다가안내하는분에게여쭤봤더니호위

5권심층-양화1리-1~172

4-Ç×°ø¿ìÁÖÀ̾߱â¨è(51-74)

기본소득문답2

내지(교사용) 4-6부

hwp

내지-교회에관한교리


( )탐스런해설OK

³»Áö_10-6

2ÀåÀÛ¾÷

레이아웃 1

병원이왜내지최종본1

750 1,500 35

아침 송(頌) 유자효 자작나무 잎은 푸른 숨을 내뿜으며 달리는 마차를 휘감는다 보라 젊음은 넘쳐나는 생명으로 용솟음치고 오솔길은 긴 미래를 향하여 굽어 있다 아무도 모른다 그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길의 끝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여행에서 돌아온 자는 아직

2002report hwp

•••••1301(•••).pdf

¹ßÇ¥¿äÁö1-60

- 2 -

금강인쇄-내지-세대주의재고찰

....pdf..

2014도서목록본문

4-Ç×°ø¿ìÁÖÀ̾߱â¨ç(30-39)

CD 2117(121130)

1960 년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09콘텐츠산업백서_1 2

CC hwp


닥터큐3.indd

<5BB0EDB3ADB5B55D B3E2B4EBBAF12DB0ED312D312DC1DFB0A32DC0B6C7D5B0FAC7D02D28312E BAF2B9F0B0FA20BFF8C0DAC0C720C7FCBCBA2D D3135B9AEC7D72E687770>

%±¹¹®AR

어린이 비만예방 동화 연극놀이 글 김은재 그림 이 석

Transcription:

본론 1 후쿠오카 다마나 시모노세키 가 출항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 승선 대기> <승선> <선실 내부 - 10인용> <선내 간편식 자판기> 시 부산항 국제 여객 터미널에서 집합하여 출국 수속 및 승선을 하기로 하였다 오늘따 라 부산으로 가는 기차가 고장이 났다 덕택에 모든 기차들이 다 조금씩 연착이다 이런 처 음 시작부터 결코 쉽지는 않네 오후 시 워낙 대규모다보니 인원 점검 및 입국 수속 등 사 소한 모든 것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긴 시간이 필요하다 모든 탐방단이 모여 각 호차별 인원 확인 작업을 하고 시간 분의 긴 대기 끝에 비로소 겨우 승선하였다 그리고 또다시 긴 기다림 끝에 시 분에야 비로소 부산항을 떠나 하카다항으로 출항을 시작한다 이번 탐방에서는 특이하게 지역별로 배차를 한 것이 아니라 이름과 성별을 이용하여 배차 및 숙소를 선정하였다 전국에서 오신 분들 중 열 명의 여선생님들이 인실에 모두 각자 한 칸씩 자리를 잡으셨다 뉴카멜리아호부터가 일본의 시작이다 선실에서부터 일본임을 알 게 해 주는 단적인 예는 볼트 전원을 사용하는 콘센트도 배에서 흘러나오는 일본어 안 내문도 아니었다 바로 자판기였다 흔히 보던 음료수 자판기를 필두로 과자 자판기 맥주 자판기 간편식 음식 자판기까지 각 층마다 죽 이어진 자판기들이야말로 자 여기가 일본입 니다 맘껏 느끼십시오 라고 외치는 것 같다 시가 되자 전체 소등이 되었다 17 5 3 10 32 35 10 110 12

나 다자이후 <다자이후> <흔적만 남은 정청 집무소 자리> 신라 공격에 대비한 방어 거점이자 삼국과 일본 교류의 시작점이었던 다자이후 에 서 우리의 탐방도 시작되었다 아침에 살짝 낀 안개로 고속도로가 전부 통제되었다 하카다 항에서 분이면 도착한다는 길은 한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 긴 여정으로 변해 새벽 시 모 든 선실을 환하게 밝힌 점등에 의해 시작되었던 우리 탐방단의 본격적 일정 시작인 다자이 후 에 도착한 건 시가 지난 이후였다 걸핏하면 앞도 잘 안 보이는 짙은 안개가 오전 내내 끼는 곳에서 생활을 하지만 한 번도 도로통제를 겪어보지 않던 나로선 안개가 끼 었다는 인지조차 되지 않는 옅은 안개에도 고속도로가 전면 통제되는 일본의 생활방식은 조 심성인지 소심함인지 판단이 잘 되지 않는다 다자이후 건설은 백제 멸망과 깊은 관련이 있다 년 백제가 나 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 하자 왜의 사이메이 천황은 백제를 구원하고자 한다 백제 부흥 운동을 이끌던 복신의 요청 을 받은 여제는 년 월 오사카 항을 출발 중간 중간 이곳 저곳을 들러 군사를 모아 츠 쿠스 현 북규슈 에 도착한다 백제로부터 구원 요청이 있은 지 두 달도 안 돼 출병을 전격 결정하고 예순이 넘은 나이에 몸소 규슈까지 출정했던 사실은 당시 백제와 왜가 얼마나 긴 밀한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사이메이 천황은 뜻을 이루지 못 하고 같은 해 월 현지에서 급사하고 만다 이에 황태자 나카노오오에 뒤의 텐지 천황 가 어 머니의 시신을 해로를 통해 아스카로 옮기고 상 을 치른 뒤 다시 군사를 일으킨다 이러 한 사실들은 일본의 천황가는 백제계의 후손 이라는 설의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카다 연안에 전진기지를 구축한 텐지 천황은 그 해 월 우선 천의 군사를 백제에 파견 현지 백 제 부흥 세력과 연합 전선을 편다 이후 이들과 나 당 연합군 간 공방은 계속된다 년 월 텐지 천황은 여 척의 배에 만 여 명의 군사를 태우고 백제 땅으로 건너온다 월 일과 일 이틀 간 백촌강 어귀에서 양군 사이에 대접전이 벌어지고 이 싸움에서 왜 의 수군을 궤멸하고 만다 이로써 백제부흥군은 재기의 힘을 완전히 잃게 된다 백마강 전설 속에 나타난 소손녕의 백제 왕실에 대한 철저한 제거 중국의 구당서 에 기록된 왜 국 수군의 배 척을 불태웠는데 그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바닷물이 핏빛이었다 는 사서 의 기록들 그리고 낙화암으로 떨어진 천 궁녀 전설들을 통해 나타난 백제 국민들의 위기 감은 백제 귀족들의 대규모 일본으로의 이주로 이어지게 된다 이 후 천여 명에 이르는 백제 지배층은 일본 수군과 함께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 었다 여 척의 군선을 모두 잃은 텐지 천황은 함께 온 이들 백제 유민들의 선진 기술을 30 5 9 1m 660 661 1 7 9 5 400 27 2 7000 400 400 3 3 8 28 663 9

이용해 백제식 토성과 산성을 만들었다 나 당 연합군의 다음 목표지는 일본 규슈일 것이라 믿고 하카다만 연안에 있던 전진기지를 철수하는 동시에 이곳에 방어 요새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성이 바로 다자이후로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수성 이다 다자이후는 주위가 모두 산으로 막혀 있다 수성은 적의 접근로가 될 수 있는 곳에 다져진 흙으로 제방을 쌓았다 수성만 지키면 하카다로 상륙한 어떤 군대도 이곳을 통하지 않고는 전진할 수 없게 된다 수성과 함께 축성된 방어 진지 중 하나가 다자이후 주변에 있는 오노 성 이다 백촌강 패전 이후 열도로 건너온 백제 귀족들의 지도에 따라 년 축성됐 다 산등성이에 토루를 쌓고 골짜기에는 석축을 쌓는 형식이다 몇 군대에 정문을 만들고 성 안에 건물을 세웠다 일본에서는 이와 같은 성을 조선식 산성 이라고 부른다 다자이후 터 에는 정청 인 거대한 집무소 자리가 남아 있다 지금도 그 규모를 알 수 있게 하는 초 석들이 산재해 있다 청정의 가장 중요한 건물인 정전 과 중문 은 회랑으로 연결 되었고 그 안에 부속 전각 개가 있었다 이후 다자이후는 규슈 지역을 다스리고 외교를 담 당하며 관문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 다자이후는 한때 나라와 교토처럼 북쪽 중앙의 정청을 중심으로 바둑판같이 계획된 도시로 융성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다자이후는 넓디 넓은 정청 초석만 남긴 채 우리 답사단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이 황량하기만 하다 665 4 다 후나야마 고분 <후나야마 고분> <석관>

< 충남수촌리출토백제금동관 > < 후나야마고분출토금동관 > < 충남수촌리출토금동신발 > < 후나야마고분출토금동신발 >

<일본학생들의 복장> <대나무숲> <지진대비건물>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잠시 산책을 하는 중에 중학생 쯤으로 보이는 학생들 무리를 만나게 되었다 이후로도 탐방지 곳곳에서 수학여행단으로 보이는 학생들 무리를 이후로 꽤 자주 만나게 되었다 직업은 못 속이는지 여기서도 학생들의 복장이며 태도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어라 우리 아이들이 말하는 일본 스타일의 짧은 치마 몸에 붙는 바지가 아니잖아 세상에 저 촌스러운 폭넓은 바지며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를 모두가 다 입 고 있네 우와 저 아이들 좀 봐 저렇게 집중해서 설명을 듣다니 멋지다 일본 학생들에 대한 의문은 결국 일본인의 튀지 말라 와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 는 교육 방식으로 인한 행동 방식임을 알게 되었다 한편 산책길에 만난 또 하나의 광경은 후나야마 고분 뒤로 넓게 펼쳐진 울창한 대나무숲 이었다 대나무는 그 뿌리가 땅을 힘껏 잡아주는 성격이 큰 식물이라고 한다 이는 지진이 많은 일본으로서는 매우 적절한 산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잦은 지진에 대비하여 층 이 하의 낮은 건물들이 주를 이루고 혹여 지진이 발생했을 때 피할 수 있는 지진대피처가 설 치된 건물과 완강기 위치를 표시한 건물들 흔들리는 땅을 조금이라도 지지하기 위한 울창 한 대나무 숲 폭설로 무게를 이기지 못해 지붕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급경 사로 이루어진 세모 지붕 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형성된 민둥산 회복을 위해 형성된 성장속도가 빠른 삼나무 숲들 아무리 극복하고자 애 써보아도 자연 앞에서 우리는 한낱 힘없는 피조물일 뿐 잠시 머물러 있는 시간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는 것이 보다 현명하다???!! 2 라 아카마 신궁 <조선통신사 상륙 기념비> <아카마 신궁> 2

를 수리하고 접대할 음식을 준비했다 여 척의 조선통신사 배가 간몬해협을 들어서면 시 모노세키에서 안내선 척이 마중을 나왔다 오랜 시간 긴 항해에 지친 조선통신사 일행이 항구에 도착하면 숙소에서는 곧바로 이들을 위한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졌다 술과 음식으로 긴 여행에 지친 피로를 풀면서 환대하는 일본인들에게 시와 연주로 조선의 문화를 전파하면 서 일본인의 호전성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키고자 했던 이들 조선통신사 일행이 머물렀던 아 미타지는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 채 아카마 신궁만이 남아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년 탐적사로 일본을 방문하여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피로인 포로 명을 쇄환한 사명대사가 아카마신궁에 들러 안토쿠 천황을 조문하는 시를 지었고 이후의 조선통신사들 은 그 운자를 따서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 정부의 도움 없이 홀로 포로 송환에 크 나큰 역할을 하였던 사명대사가 굳이 이 곳을 들른 이유는 말 그대로 통신 을 하기 위 해서였겠지 다시 한 번 더 양국의 신의를 교환하면서 더 이상의 아픔은 일어나지 않길 바 랐던 사명대사의 의지가 느껴지는 듯 하다 400 100 1604 1390? 마 청 일 강화 기념관 <청일강화기념관> <시모노세키조약 회담장> 동학농민운동을 평정한다는 명분으로 벌어진 청 일 전쟁은 양무운동을 통해 개혁을 실시 하면서 자신감에 차 있던 청의 어이없는 패배 이후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청과 일본이 모여 년 월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은 곳이 바로 야구마구치현 시모노 세키시 슌판로 안에 있다 아카마 신궁 바로 옆이다 시모노세키에서 중국 청나라의 이홍장 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는 청이 조선의 독립을 확인하고 군비 억 냥을 배상하며 랴오둥 반도 와 대만 펑후 도 의 일본 할양 등을 포함하는 시모 노세키 조약 을 맺었다 청 일 강화 기념관은 청 일 강화 회의와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기 위하여 년 월 강화회의의 무대가 된 슌판로 바로 옆에 개관되어 강화회의에서 사용된 비품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의 유묵 등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기념관 중앙에는 조약 회 담장을 그대로 재현해 당시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년 월 일 제 차 회의를 마친 이 홍장이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코야마 토요타로오라는 청년에게 저격당해 회의가 일시 중단 되기도 했으며 이후 이홍장은 큰길을 피하고 산길을 왕복했다고 전해지며 현재도 이홍장 길 이라 불리며 존재하고 있었다 청 일 전쟁의 패배를 계기로 청의 약체가 폭로되어 서양 세력들이 다투어 중국에서 이권을 획득하고자 진출하면서 외국에의 할양이 심화되고 한반 1895 4 1937 2 6 1895 3 24 3

< 한국인피폭자위령비 > < 평화공원내 원폭돔 > < 태평양전쟁설명문 >

< 일동제일형승 > < 호메이슈제조공장 > < 삼원신 >

< 고라쿠엔정원 > < 고라쿠엔정원 >

< 이시부타이 - 외부 > < 이시부타이 - 내부 > < 이시부타이 - 석관내부 >

북쪽 돌의 무게만도 남쪽 돌이 으로 총 중량은 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다 그러 나 권력 투쟁 승리 후에 건립되었던 이시부타이는 비록 이리도 거대할지도 소가씨가 누웠던 석관의 내부는 겨우 한 평도 채 되지 않는다 한 평 누울 자리를 위해 그리도 처절히 싸웠 을까 이제는 역사 속에 묻혀버린 소가씨의 이야기는 권력이 무엇인지 진정한 승리는 무엇 인지 참다운 삶이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는 역사의 교훈인 것 같다 64t 77t 2300t? 나 아스카테라 <아스카테라 금동불> <쇼토쿠 태자상> 아스카테라는 년 백제로부터 부처의 사리를 헌납받은 일본 조정의 실세 소가노우마코 가 발원해 년 창건한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찰이다 과거 호코지 혹은 강코지 로도 불렸다 창건 당시 아스카테라는 개의 금당이 탑을 둘러싸고 있는 대사찰이었 으나 가마쿠라 시대에 대부분 소실됐고 현재 본당은 에도 시대에 재건된 것이다 창건을 위 해 백제로부터 많은 기술자들을 초청해 불당과 탑을 축조했다 기와를 제작한 기술자들을 호류지 등의 축조에도 관여했고 이후 관련 기술을 익힌 기술자들과 제자들이 일본 전역에 퍼져 사찰 건설에 기여했다 아스카테라는 소가씨의 권력을 확립한 소가노우마코가 모노노베씨를 타도한 다음 백제에 요청해서 준공했다 일본서기 에 따르면 우마코의 요청으로 백제가 년 불사리와 승려 명 절 짓는 기술자 노반박사 와박사 화공 등을 보내자 아스카테라를 짓기 시작하여 년 완공했다고 한다 아스카테라는 국제 교류의 장이기도 했다 년 도일한 고구려 혜자 와 백제의 혜총 이 머물렀고 년 도일한 고구려 승려 승륭 과 혜총 백제의 관륵 그리고 년 건너간 고구려의 혜자 등이 전부 아스카테라에서 활 동했다 그 중에서도 혜자 는 여년 간 쇼토쿠 태자를 가르치면서 고구려와 일본의 가 교 역할을 했다 최근 아스카테라의 원형이 백제의 왕흥사라는 의견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왕흥사는 세기 백제 수도인 부여에 있던 절이다 이 절은 백제왕의 발원으로 년 월 백제왕 이 기술자를 일본에 보내 년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후 착공해 년 불탑을 완성했다 이로써 두 사찰간의 긴밀한 관계를 설득력을 얻게 됐다 아스카테라는 백제 왕흥사를 본 따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 본당의 금동불 석가여래상은 일본 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아스카 대불 이 588 596 3 588 596 595 602 624 6 20 6 7 577 588 11 596

라 불린다 아스카테라는 년과 년 두 차례 낙뢰로 화재가 일어나 본당이 소실되었으 나 에도 시대 재건되었다 아스카 대불도 보수됐지만 얼굴의 일부 왼쪽 귀 부분 오른손 가 운데 손가락 개만이 원래 것으로 남아 있다 근처 발굴에서 탑의 기단이 호류지의 기단과 거의 유사한 크기임이 밝혀졌다 금동 석가여래불 앞 제단에 놓인 음식 중에 우리네와 달리 배추가 한포기 그대로 놓여 있다 수없이 많은 절들을 보았지만 이렇게 배추가 통으로 한 포기 자리잡고 있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또다시 같은 듯 다른 느낌의 문화적 차이를 느낀 다 887 1196 3 다 도다이지 <청동대불> <도다이지東大寺> <가라쿠니辛國 신사> 년 일본 쇼무왕 일 발원으로 로벤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화엄종의 총본산인 도다이지는 단일 규모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 건축물이다 백제의 양식을 그대로 본 딴 호류지 와는 달리 지진이 많은 일본의 환경을 고려하여 도다이지에서는 한국의 무거 운 기와를 대신하여 일본에서 개발한 한번에 개짜리 기와를 찍어내는 일본식 기와를 얹은 직선형태의 지붕을 얹었다 현재의 투구모양 지붕 형태는 헤이안 시대 말기인 년과 전 국시대인 년 두 차례 화재 이후 변모된 모습이다 본당 안에는 무게가 높이가 인 거대 청동대불이 있다 얼마 전까지 청동대불이 세계최대라 하였으나 얼마전 태조산 각원사에 이보다 조금 더 큰 남북통일 기원 청동대불이 그 기록을 깼다 본당 뒤편 강당 터에서 다시 서쪽으로 가면 나라 시대 건축물로 일본 황실의 유물을 모은 보물창고인 쇼소인 정창원 이 있다 이 곳의 가장 대표적인 유물로는 신라의 사회 구조와 토 지 제도 연구의 방향을 제시해 주게 된 신라장적 부터 신라 바둑판 발해 목관 등이 모두 여기에서 출토된 것이다 신라장적을 통해 신라의 사회 경제상을 연구할 수 있는 기초 자 료를 마련함과 동시에 이런 자료가 이곳 일본 황실 보물창고에 보관되었다는 것은 결국 우 리 나라와 일본이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나 하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한편 이 도다이지 창건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절을 지 을 땅 기증부터 도다이지와 대불 주조의 발원 설계와 제작에 도움을 주었던 이들은 한반도 에서 건너간 사람들로 백제계 씨족의 후손이었다 이들을 위해 대불전 동쪽 회랑에서 니가 츠도로 통하는 오솔길에 이들을 기리기 위한 가라쿠니 신사 원래는 신사임 가 지어 져 있다 현재의 신사는 규모가 크게 위축된 것이라고는 하나 동대사의 크기와 규모에 비하 여 너무도 작고 버려진 듯한 느낌이 강한 가라쿠니신사의 모습은 우리의 문화를 기반으로 745 4 1567 1180 16m 425t

성장한 일본이 결국은 우리를 앞서고 이제는 우리를 우습게 여기고 있는 현 일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저절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라 호류지 <호류지 5층 목탑> <철제등> <옥충주자> 호류지는 아스카 문화의 중심지이다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 의 목조 건축물이 자 중국과 한반도의 불교 건축과 예술이 일본에 건너가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동아시 아 미술의 보고 로도 불린다 우리가 호류지를 이야기할 때 가장 금방 떠올리는 것은 사실 담징의 금당 벽화이다 그러나 아쉽게 이 벽화들은 년 수리 중에 발생한 화 재로 내지 위쪽에 그려진 비천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소실되어 지금은 사진을 기초로 재현 한 모사품을 통해 추측만 해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금당벽화가 타고 난 다음 문화재 소방 법을 재정하여 문화재 관리를 위해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은 현재의 모사 품 금당벽화조차 철창으로 가려놓고 촬영 및 접근을 금지하는 것을 통해 철저히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문득 년 우리나라 숭례문 화재 사건 이후 제기되었던 문 화재 소방특별법 이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정되지 못하고 있으며 목조 문화재에 화재가 발생하고 나면 기껏 보험에 가입을 했느니 말았느니 하는 말만 언급하고 있는 우리네 실정 과 비교가 되었다 왜 우리는 실수를 통해 교훈을 얻고 배움을 갖지 못하나 이 금당벽화는 현재로선 고구려 담징의 작품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호류지 가 조성될 즈음인 세기 초 다카마스 고분벽화의 예에서 보듯 고구려계 회화의 영향력이 백 제계 화풍을 누리고 일본을 지배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구려가 되었건 백제가 되었건 호류지가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시대 문화를 종합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일본이 한 반도의 직접적인 문화적 영향권 하에 있었음을 여러 건축물과 불상 그림 등이 웅변하고 있 음은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오류지에 있는 또다른 전시물로 백제관음상이 있다 가 넘는 크기의 목조 관음상은 우 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백제의 미소 를 오롯이 띠고 있다 머리에 드리우고 있는 투조보관과 양옆의 수식에서부터 두 발을 딛고 있는 연화대 부드러운 얼굴과 눈썹 선 배를 약간 앞으 로 내민 듯한 유연한 자세 등은 왜 이 관음상이 백제관음상 인지를 설명해 준다 또한 삼국시대 미술의 일본 전파와 관련한 보물 중 하나가 옥충주자 이다 옥충 이란 비단벌레를 말하는 것으로 주자의 상부인 궁전부 주변의 모서리를 감싸고 있는 투조의 금동 1949 2008 5? 7 2m

제 테 밑에 비단벌레 날개를 깔아 장식한 데서 나온 명칭이다 주자란 불상을 모셔두는 방 이나 집을 말하는 것으로 불감 이라고도 한다 옥충주자는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 장도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동시에 나온다 우선 백제설은 옥충주자의 건축양식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궁전부의 겹지붕이 백제 산수 문전에 보이는 사찰 건물의 양식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또 아랫부분 수미좌 각주를 장식한 금동 투조 장식이 백제 능산리 고분에서 출토된 왕관중심식과 유사하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 한다 한편 옥충주자의 수미좌 면과 궁전부 비에 그려진 불교적 내용의 그림들은 고구려 의 영향을 받았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예컨대 수미좌 옆면 공양도 에 그려진 비구와 비운 궁전부에 그려진 천왕상과 보살상 등이 고구려의 것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것이다 또한 수 미좌 한쪽 면에 그려진 사신사호도 또한 고구려 고분벽화의 회화 기법과 닮았 다 사신사호도 는 전생에 마가나타 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부처가 암호랑이 와 마리 새끼 호랑이가 굶어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를 먹이로 내 던져 짐승에게도 보시를 베푸는 사신공양 과 불석신명 을 표현한 그림이다 온전히 나를 버리고 베푸는 보시 행위는 일본에 온전히 우리의 문화를 전해주고 홀라당 먹혀버렸던 우리 네 모습같아서 씁쓸한 기분을 느낀 건 나의 피해의식일까 암튼 이 옥충주자에 관한 논문이 일본에서만 수십편이 된다고 하는데 예술적인 면이나 역사와 같은 학문으로만 접근하지 말 고 인도주의적 측면으로도 접근하여 부디 일본의 정치인들도 조금 각성을 했으면 하는 바램 을 잠시 가져본다 4 4 7? 4 니조성 고류지 가 니조성 <니조성> <니조성 입구 문> 교토 시내 중심에 위치한 니조성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 에도 막부를 연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천황이 있는 교토를 방문할 때 머물 숙소로 건축한 것이다 이 건 물은 내부가 매우 화려하다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화려한 금박을 입힌 출입문이며 화려한 색감의 그림들은 마치 내가 제일 잘 나가 를 외치는 듯하다 성의 안쪽에는 쇼군과 부인 하녀들이 살고 성의 중심인 니노마루고덴에는 복도로 연결된 홀이 있는데 각각의 홀은 다른 높이로 지어졌으며 계급에 따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 에 제한을 두었다 그 가운데 오오히로마는 쇼군이 지방 영주인 다이묘들의 방문을 받던 곳 이다 이곳 우구이수바리 라는 마룻바닥은 외부 침입자를 막기 위해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

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장치되어 있다 일명 자동 알림 장치다 여기에는 년 메이지유신 때 마지막 쇼군이 메이지 천황 앞에 무릎을 꿇고 통치권을 넘겨준 곳 대정봉환 임을 알리기 위해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고 있었다 임진왜란의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난 후 도요토미의 어린 아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더 이상의 적은 없 기에 해자도 좁고 성벽도 낮게 지을 정도로 자신을 표현하였지만 시대의 흐름은 그 누구에 게도 절대 권력을 대대손손 물려주진 않는다 1867 나 고류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일본> <고류지 - 정교수님 강의중> <미륵보살반가사유상-백제> 고류지 광륭사 는 스이코 천황 년 년 건립된 사찰로 호류지 시텐노지와 함께 쇼토 쿠 태자가 건립한 일본 대 사찰 중 하나이다 이 곳에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모셔져 있 다 칼 야스퍼스가 지구상의 모든 시간적 속박을 초월해 도달할 수 있는 인간 조재의 가장 정결하고 원만하여 영원한 모습의 상징 이라는 고류지 목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의 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쌍둥이라 하여도 어느 누구 하나 토 달지 않을 만큼 완벽한 싱 크로율을 자랑한다 일본의 한 학생이 불상에 반한 나머지 껴안으려다 손가락 하나가 부러 지는 사고가 발생한 후 불상의 재료에 대한 정밀 조사 끝에 일본에는 없고 한반도에 많이 자라는 임이 밝혀짐에 따라 신라 제작설에 대해 무게가 실리고 있다 심장이 벌렁벌렁 거릴 정도로 완벽한 미를 자랑하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모습은 그 대학생이 왜 그런 행동 을 했는지 충분히 이해를 하게 만들었다 문득 든 의문 하나 호류사 금당벽화는 모조품인데도 철창 속에 그렇고 꽁꽁 싸매고 있더니 이건 이렇게나 밝은 조명과 전혀 차단되지 않는 습기 및 기타 등등의 여러 악조건에 이렇게나 완벽하게 노 출시키다니 이들 일본인의 문화재 관리 기준은 도대체 뭐지 11 603 7?

5 오사카성 시텐노지 동양도자박물관 가 오사카성 <오사카 성 해자> <오사카 성> <천수각의 황금치미> 드디어 일정이 끝으로 다가왔다 처음으로 정시 출발에서 조금 늦어진다 아마도 다들 짐 을 싸서 오시느라 조금 늦어지는 듯 하다 여기저기서 이제 겨우 적응되려는데 간다는 안타 까움과 아쉬움의 한숨소리가 들린다 년 전쟁 임진왜란 을 일으켜 한반도를 유린하고 동아시아 전역에 피바람을 몰고 왔던 도 요토미 히데요시의 권력의 상징인 오사카성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 고 하면 빠지지 않고 꼽히는 인물이 바로 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하급 무사의 아들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최고 권력자까지 이른 전설적인 인물로 말이다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가 년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고 암살당한 뒤 권력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 요시는 자신의 승리를 자랑이라도 하듯 가는 곳마다 화려한 성을 짓게 되는데 오사카성 역 시 그러하다 일본에서는 최초로 성 안에 천수각을 짓고 층 누각 전체를 금과 은으로 도배 하다시피 하며 천수각 지붕의 봉황 모양 치미는 황금으로 되어 있다 심지어는 화장실조차 순금으로 장식했다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벼락부자들의 과시욕은 모두 똑같은 듯하다 그러 나 년간에 걸친 제작기간을 가진 화려한 오사카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난 후 도 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정치패권을 둘러싼 싸움에서 패배한 어린 아들 히데요리는 결국 이 성 에서 자결하는 비극을 낳았다 이후 오사카성은 세 번이나 벼락을 맞았고 년 두 번째로 떨어진 벼락은 복원했던 천수각마저 태워 버렸다 우리 속담에 남의 눈에서 눈물 흐르게 하면 제 눈에는 피눈물이 난다 라는 말이 있는데 역시 이 말은 시 공간을 넘어선 진리인 것 같다 현재 오사카성 천수각은 층 전망대를 빼고는 마치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사박물관처럼 꾸 며져 있다 특히 도요토미의 삶의 과정을 영상으로 볼 수 있도록 제작되어 관람객들이 그의 삶에 대해 소상히 알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쉽게 접하게 하고 즐기게 하고 그러면 서 자연스럽게 융화되도록 하는 것 우리가 배워야 할 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7 1582 5 5 1665 8 3D

나 시텐노지 <왓소 축제장> <시텐노지 금당> <탑 꼭대기-상륜부 내부> 시텐노지 는 지금부터 약 년 전 스이코 천황 원년 년 에 건립됐다 일본 서기 에 따르면 모노노베노모리야와 소가노우마코의 전쟁 다시 숭불파 소가씨의 세력인 쇼 토쿠 태자가 불리한 형세를 타개하기 위해 사천왕상을 만들며 만약 이 싸움에 승리한다면 사천왕상을 모신 사원을 건립하겠다 라고 서원한 것이 계기가 돼 승전 후 건립됐다 가람배 치는 시텐노지식 가람배치 라는 양식으로 남북으로 중문 오층탑 금당 강당을 일렬로 배치 하고 이를 회랑이 둘러싸는 형식으로 된 일본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축양식 중 하나이다 그 원류는 백제사찰이다 나라현에 있는 세계문화 유산 호류지 와 함께 세기 말에서 세기 전반에 세워진 아스카시대 사원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것들 중 하나로 꼽힌다 이곳의 지명은 텐노구 즉 천황구이다 이곳 시텐노지에서 매년 월 일 벌거벗은 젊은이 들이 두 편으로 갈라서 서로 우신 부적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하는 도야도야 축제 월 일 부카쿠 축제 월 왓소 축제가 열리고 매달 일과 일에는 골동품시장 등도 열린다 그 중 특히 왓소 축제는 백제에서부터 조선통신사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온 손 님들을 맞이하던 환영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매년 월 첫째 일요일을 택해 일본에 왔던 왕인 박사 등 손님을 맞이하는 가장행렬이 벌어진다 참가자들이 옛날 복식을 한 채 행렬을 이어가며 외치는 왓소 왓소 소리가 그대로 축제의 명칭이 된 것이다 특히 주변 회랑의 엔 타시스 양식 기둥과 수막새를 얹은 골기와 백제식 치미 등은 시텐노지가 한반도의 고대 절 건축 양식을 본땄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입구에 있는 아미타당에는 시신을 모시고 제를 올린 후 화장하는 일본의 풍습을 엿 볼 수 있다 특히 시텐노지 층탑의 경우 겨우 한 사람만 다닐 수 있는 좁고 경사진 계단을 오르 는 계단 내려가는 계단으로 나누어 실제로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다만 안타까운 건 꼭대기까지 올라가도 외부의 모습은 전혀 볼 수 없다는 것 1400 593 6 7 4 22 11 1 14 21 22 11!! 5! 다 동양도자박물관 중국과 일본 한국의 도자기들을 모아놓았다는 동양도자박물관은 실제로는 한국의 도자기 그 중에서도 고려 청자를 많이 보관하고 있다 쉽게 볼 수 없는 고려 청자 이조 백자 등을 한 자리에 이렇게 많이 모아놓기는 쉽지 않을 터 전쟁이 끝나고 마구 쏟아져 나오는 우리 나라 도자기들을 사 모을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도 그 도자기들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일본땅에 기증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모두 우리네 역사의 아픔인 듯 하여 애잔한 느낌을

결론 <이어지는 한류> <좌변기 사용 설명서> 너무도 친절한 레드캡 여행사 직원들과 노령에도 끝까지 우리와 일정을 함께 하시며 위트 와 재치로 모든 유적지를 살아 숨쉬게 하신 정용호 교수님을 위시한 강사진 그리고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데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쉴 틈없이 움직이던 조선일 보 문화부 팀원들 그리고 각 답사지마다 매번 이어졌던 멋진 토론을 함께 한 우리 탐방팀 의 힘들지만 보람있는 답사가 끝이 났다 백제인의 기술력을 이용하여 세워진 다자이후에서 출발한 고대 문화의 교류 현장부터 근대의 조선통신사의 여정까지 이어졌던 한국과 일본의 문화교류는 오사카 번화가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크게 보이는 지우히메 로 최지우의 광고 간판과 노래방에서 보이는 한국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들 그리고 답사지의 안내 간판에서 보이는 한글들을 통해 이제 또다시 한류라는 이름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 다 문화교류란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쌍방간의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 서로가 자극을 받으며 조금씩 닮아가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일 터 이렇게 일본이 잘 살게 된 건 다 우리의 문화를 쏙쏙 빼먹어서 압축효과를 봤기 때문이 야 그러니 이들은 우리에게 늘 고맙고 감사해 하거늘 참으로 고약한 나라일세 라는 고압적 자세도 그리도 잔인하게 우리를 지배하고 아직도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못하고 있느니 참 으로 후안무치로세 라는 자세도 이야 얘네들 기술력 좀 봐 우와 일본의 디자인 좀 봐 끝내준다 역시 일본이야 라는 생각도 이제는 스스로를 냉정하게 들여다봐야 할 시점이 아 닌가 한다 중학교 역사교육에서는 한국사와 세계사란 이름의 서양사를 고등학교 역사교육 에서는 한국사와 동아시아사란 이름의 중국사 위주의 교육을 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이 웃 나라 일본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 상대를 정확히 모르고 있기에 무조건적 적대심 또는 동경심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고 그렇기에 제대로 된 관계 설정이 어려운 것은 아닌가 하 는 생각을 이번 연수를 통해 하게 되었다 이제 감성이 아니라 이성을 기반으로 상대를 우 리와 일본의 과거와 현실을 인식하도록 하자 일본의 성장은 다 우리 덕이라는 우월의식도 끊임없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우리를 침략하고 반성하지 않는 나쁜 나라라는 피해 의식보 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들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나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한다 어느 휴게소에서 발견한 좌변기 사용 설명서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 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 같다 바로 당연한 것이라 간주하고 무심코 지나치고 있는 작은 것들이 결국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런 사소한 것이 일본과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