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년중남미여행기 -4 - 페루 ( 쿠스코및마추픽추 ) 편 - 3 월 9 일 ( 일 ), 여섯째날파나마 --> 페루도착 오전과오후내내파나마시티유적지관광및파나마운하를견학한후, 공항으로이동하여출국수속을마치고게이트에서기다리다오후 6시 50분 CM 489편으로파나마공항을출발하여 3시간반지나밤 10시 30분에페루 ( 공식적으로는페루공화국 ) 의수도리마에있는호르헤차베스국제공항에도착하였다. 드디어북반구에서적도아래에위치한남반구로왔으며, 또한잉카문명으로대표되는페루의땅을밟는다는생각에다소흥분이되었다. 입국승객이많아 1시간정도입국수속을마치고나오니, 현지가이드 ( 지수일씨로남성 ) 가기다리고있었다. 버스로오늘숙박할 Sheraton Lima 호텔로향하면서문화재청장을지내셨고 [ 나의문화유산답사기 ] 로유명한유홍준씨를꼭빼어닮은지선생이페루전반에대해안내해주었다. 여행전공부하였던내용이대부분이었으나, 페루의수도인리마는자갈구르는소리라는뜻의리막강에서유래하였으며, 사막도물이적은沙漠과자갈로이루어리마서숙박한쉐라톤호텔진砂漠이있다며, 페루의사막은대부분자갈로이루어진사막이라는것을새롭게알게되었다. 또한이번여행중에만난다른현지가이드와달리우리일행에게중남미여행을하는연 3000명정도의한국인중한사람이라는특혜 (?) 를받았으니, 페루에대해많이느끼고알아가기바란다고하면서, [ 멀리서보면보석같은것이주워보면돌멩이다 ] 라는멋진글귀를알려주었다. 심야를넘긴시간에호텔에도착하였으나, 흥분때문인지피곤하지가않았다. 로비로나와카톡으로친구들과문자를나누다들어와서내일일찍해발 3천미터가넘는쿠스코로가야하므로다리의상처부위를다시한번소독하고, 짐을정리하여며칠간사용할짐만을배낭에따로챙겨넣은후, 잠을청하였다. [ 페루일반 ] 페루는한마디로사막, 고산, 밀림이라는 3대거대자연이모여있는나라이다. 북쪽에서내려오는안데스산맥이길게볼리비아와칠레를향해남쪽으로향하며, 해발 4000 m에서 6000 m에이르는고지대문화와태평양아따까마사막으로내려가며황색과푸른바다가경계선을펼친다. 그리고안데스산맥동편으로는브라질로이어지는거대한아마존밀림이숨쉬는곳이다. 남태평양에면한사막에는한류와난류가겹치며형성된천해의해양자원이무궁무진하다. 또한황금을비롯한수많은광물과원유, 그리고동부아마존으로내려가며밀림생태계자연이보존하는동식물약초등세계가주목하는친환경적인자원이넘친다. 안데스에는잉카문명을비롯한해발 3800m의티티카카호수를중심으로원주민의생활터전이자리잡고있어, 이곳에는알
파카, 면등고급섬유의원산지가되고또한독특한인디오문화가낳은다양한공예품과자연산물이존재하고있다. 오늘날의페루는남미대륙서해안중앙에위치하고적도바로밑에서부터남위 18도에걸쳐있는나라로, 한반도의 6배나되는 128만 km 2 의넓은국토를차지하고있는농업국가이나, 국토의 27% 나되는안데스산맥등은많은산악지대와자연계곡을흐르는급한물살로교통이원활하 호텔방에서내려다본리마시내풍경지못해이러한자연적영향으로국민의 45% 가순수한인디언혈통을지닌인디오일정도로다른남미국가들보다혼혈의정도가낮다. 따라서스페인어및케츄아어가공용어로사용되고있다. 그러나이나라역시 12% 의백인이주도권을잡고지배계층을이루고있으며, 40% 의혼혈, 그리고원주민들의이에대한반목과불만이심각한형편이다. [ 페루의역사 ] 페루의역사는원시수렵농경시대까지거슬러올라간다. BC 2만년에서 BC 10세기까지안데스산악지대를중심으로몽골계원주민이거주하였고, 이후이들이고대토착문화를형성하였다. 그러다 1세기까지정착농경문화를형성해이들이만든토기 피라미드등의신전이아직까지남아있는데이시기를차빈문화로부른다. 이어 BC 3세기 ~AD 8세기의제1기지역문화시기를거쳐, 8~12세기의통일국가형성기를티아우아나코문화로부르며, 이후 15세기까지를제2기지역문화시기로부른다. 13세기에망꼬카팍 (Manco Capac) 이쿠수코에나라를세움으로써케추아 (Quechua) 족의왕국이탄생하였으며, 15세기에이르러파차쿠텍 (Pachacuteq) 잉카 ( 태양의아들 ) 가페루전역을지배함으로써비로소거대한잉카제국이탄생하였는데, 전성기에는콜롬비아남부에서칠레중부에이르기까지 1200만명에달하는백성과광대한지역을다스렸다. 그들은정비된정치조직을바탕으로관개농업을발전시켜서유럽을능가하는문명을이룩하였고, 특히거석을이용한건축술, 도시계획 의술등에뛰어났다. 참고로우리에게잘알려진잉카는안데스산맥을중심으로아메리카대륙서안에퍼져살던인디언중케추아족등을일컫는말이었으며, 동시에태양의아들로숭배되던최고승려이자통치자를지칭하는 왕 이란뜻의원주민어로우리나라에서는잉카가다스린다는말이 잉카제국 이라는이름으로바뀌어세상에알려지게되었다. 1532년스페인의피사로에게정복된후 300년동안스페인의식민지로서그들의지배를받았다. 스페인은 1535년리마에부왕청을설치, 인디오를노예로삼아금과은을채굴함으로써남미에서가장큰부를누렸다. 그러나스페인귀족들의영화도 1781년콘도르캉기 ( 투팍아마르 ) 가이끄는인디오들의대규모반란을계기로서서히내리막길을걷기시작한다. 1814년각지에서반란이일어났으나인디오들의적극적인호응을얻지못하는등우여곡절을겪다가, 1821년 7월 ' 페루의보호자 ' 로불리는아르헨티나의산마르틴장군이리마로들어와페
호텔근처에있는대법원건물및멋진성루의독립을선포한뒤, 시몬볼리바르가다시리마에입성해 1824년아야쿠초전투에서스페인군을격파함으로써독립을달성하였다. 1845년부터 1862년까지는세차례나대통령을역임한카스틸랴의지도아래약간의진보정책이실시되고자유주의헌법이제정되는한편, 구아노 ( 새똥천연비료 ) 판매에따른호황으로근대국가의기초를확립하였다. 1879년영국과미국의이해대립을배경으로한대칠레전에휩쓸려크게패함으로써 1883년초석과구아노산지 ( 아리카 타크나 ) 를칠레에할양하였는데, 이지역은그후에도계속해서분쟁대상이되어오다가 1929년리마조약에따라칠레는아리카를차지하는대신타크나는페루에반환되었다. 그후레기아독재정권, 산체스세로와오스카르베나비데스군사정권 (1930~1939) 을거쳐 1939년마누엘프라도의민간정부가들어서면서제2차세계대전동안미국과공동보조를취하였으나, 1948년장군오드리아가군사혁명을일으켜 1956년까지다시독재정치가계속되었다. 1956년제2차프라도정권때도국민억압정책이실행되었고, 1962년쿠데타를거쳐이듬해 7월인민행동당의벨라운데가대통령으로선출되었으나종래의정권과다를바없어 1965년부터산악지대를중심으로게릴라전이일어나기시작해급속히확산되었다. 1968년 10월쿠데타를거쳐집권한벨라스코알바라도군사정권은미국계석유회사 (IPC) 를국유화하고, 농지개혁법을실시하는등민족주의정책을펼쳤으나지나친급진정책과석유파동으로경제적위기에직면하였다. 1975년베루무데스장군이이끄는군부온건파가쿠데타에성공한뒤, 1980년 5월벨라운데테리가대통령에당선됨으로써 12년간계속된군정에종지부를찍었고, 1985년에는알란가르시아페레즈가대통령에당선되었다. 가르시아대통령은취임연설에서총수출액의 10% 만을외채상환에충당하겠다고선언하여 IMF, IBRD 및채권국으로부터고립되었다. 한편비동맹외교를강화하였으며중동, 아프리카등의미수교국을비롯하여북한과도수교하였다. 그러다우리에게도잘알려진일본인교포인후지모리가 1990년 7월선거에서당선된후, 가르시아정부의비동맹외교에서탈피, 대선진국외교를중시하였다. 초인플레이션진정과재정적자해소에주력하는한편, 200억달러에달하는외채해결에역점을두고긴축경제개혁조치를발표하였다. 1995년재선에성공했으나, 이듬해일본대사관저인질사건이일어나전세계의이목을집중시킨뒤, 1997년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APEC) 가입을거쳐, 1998년에는에콰도르와평화협정을조인함으로써쿠스코공항에서본쿠스코시내모습
170여년간지속된적대관계를종식시키기도하였다. 또한 1999년에는 70년간지속되어온칠레와의국경문제를평화적으로해결하는성과를이루었다. 그러나 2000년 11월, 쿠리야당의원매수사건파문으로사임하게되었다. 후지모리정권이종식되고페루는경제성장을계속하며부패와싸우고있으며, 2006년 6월대통령선거에서아메리카인민혁명동맹당 (APRA) 의알란가르시아가페루를위한동맹 (UPP) 의오얀타우말라후보를제치고대통령이되었다. 3 월 10 일 ( 월 ), 일곱째날쿠스코및우루밤바관광 아침에일찍눈이떠져밖으로나와호텔주변을산책하였다. 주변에페루대법원건물및아름다운성 ( 이름은모름 ) 이눈에띄었으며, 호텔앞에지하철도있었다. 내려가페루지하철을구경하고싶었지만오늘은중요한일정이기다리고있으므로참았다. 아침식사를한후, 버스를타고공항으로향하였다. 오전 8시경호텔을출발해리마공항에도착하여수속을마친후, 게이트에서기다리다 9시 40분 LA 2075편으로리마출발하여쿠스코로향하였다. 비행기안에서다소흥분된기분으로잉카제국에대해조사하였던내용을머릿속으로정리해보았다. 남미최대의제국을건설한잉카제국은 1250년경부터 1533년까지수도쿠스코를중심으로번영을누렸다. 잉카제국의역사는제1대왕망꼬카팍에서 13대의아타우알파 (Ataualpa) 에이르는시기를크게전설기 (1~2대), 군주기 (3~8대) 및역사기 (9~13대) 로구분하고있다. 잉카는원래쿠스코에중심을둔케추아족의족장으로군주가된후, 최후에는강력한제국의왕으로변신하였다. 즉, 1438년잉카의 9대군주였던파차쿠텍잉카유팡키 (Pachacuteq Inca Yupanqui) 가창카족의공격에직면하여그의아버지가쿠스코로이동했을때군대를지휘하여그들을격파하고, 그의제위기간에치무왕국을합병해서북으로는에콰도르의키토부근에서부터남으로는칠레의티티카카호주변저지대에이르는광대한지역을장악한거대한잉카제국을건설하면서역사시대를열었다. 1471년그의아들토파잉카 (Topa Inca) 가, 1493년에는사파잉카 (Sapa Inca) 가, 그후 1520년우아이나카팍 (Huayna Capac) 이계승을이어갔으나 1524년쿠스코부인의아들 쿠스코공항광장풍경 아타우알파 (Atahualpa) 와키토부인의아들우아스카르 (Huascar) 사이의갈등으로내란이발생하여멸망의길로접어들때까지의 1세기동안, 남북으로는콜롬비아로부터칠레
의마울레 (Maule) 강까지, 그리고동서로는태평양연안으로부터안데스의동부계곡지대까지방대한지역을정복하여제국을건설하였다. 초기에잉카는신의화신이자태양의아들 (Hijo del Sol), 대지의지도자 (Señor de la Tierra), 그리고세계의질서수립자 (Ordenador del Mundo) 로인식되면서, 제정과군사분야의최고실권자로전제정치를펼쳤다. 따라서그의말은제국의법령이고, 불복은곧사형을의미하였다. 그의임무는제국의통치및야만족의문명화, 즉케추아문화권으로의통합이었다. 이것은잉카제국의정식국명이모든방향또는 4방향의세계라는의미의타완틴수유 (Tawantinsuyu) 라는사실로도알수있다. 즉, 잉카제국은쿠스코를수도로정하고안데스산맥의지세에따라 4개구역으로구성되어있었다. 사실잉카제국의주민들은쿠스코가지구의중심지이고성지라태양에의해빛나는도시라고믿었다. 타완틴수요의주된주민은쿠스코중심의케추아, 코야오지역에정착한라코야 (La Colla), 페루의연안지대에정착한라융가 (La Yunga) 족들로구성되고, 그밖에도창카족 (Chancas), 푸기나족 (Puguinas), 우앙카족 (Huancas), 우아누코족 (Huánucos), 콘추코족 (Conchucos), 카하마르카족 (Cajamarcas), 차차포야족 (Chachapoyas) 등수많은부족들이자체의언어를갖고잉카제국내에자리잡고있었다. 잉카사회에는혈족귀족 (nobleza de sangre) 과특권귀족 (nobleza de privilegio) 이있 안데스산맥고원분지속의쿠스코풍경었다. 혈족귀족은현직잉카왕의부인과자녀들을제외한모든친척과죽은잉카왕의후손들로구성되었으며, 그들은오레호네스 (Orejones) 라고호칭되고, 쿠스코에거주하면서호화스런복장을착용하고, 공물제공의의무를면제받았다. 특권귀족에는정복한부
족의왕과귀족및그의후예들로구성된정복특권귀족과전공과봉사에대한왕의은전으로이루어진포상특권귀족이있었다. 반면일반주민들은성년이되면모두유용한인간이되도록교육받았지만, 사실그들은노동을위해태어난것에불과하였다. 잉카제국은각지역지배계층의자녀들을쿠스코에서집단적으로교육시켰다. 잉카의교육은경직되어있었으나효율적이었다. 그들의도덕률개념은나태한자가되지말것 (Ama Kella), 도둑질하는자가되지말것 (Ama Sua), 그리고거짓말하는자가되지말것 (Ama Lulla) 등이었다. 잉카제국의정복은실용적이고효율적이며또한전체주의적이었다. 잉카제국은정복지의모든주민들에게케추아어를교육시켜방대한지역에서언어의통일을이룩하였다. 일찍이스페인정복대에참여한초기의연대기학자들은페루의고산지대에는특성이다른 44개의부족집단, 그리고연안오아시스지대에는 38개의다른부족집단이있었다고보고하였다. 이와같이잉카의지배계층은방대한제국에서정치, 사회, 종교, 관습및공용어까지통일을성취했으나지속적인재정적지원의결여로서서히여러곳에서새로운사회문화적다양성이표출되었다. 이것을해결하기위해잉카는미티마에스 (Mitimaes) 라는집단을새로운정복영토로보내잉카주민으로서의언어와농경술등을교육시켜생산증대와제국의통일에기여하게하였다. 또한, 잉카제국에는평민과는달리의식주를제공받으면서선대로부터계승되는일부의예속된직능전문가인야나코나스 (Yanaconas) 집단이있었다. 잉카제국의사회는목적에따라 10 단위 (10000, 5000, 1000, 500, 100, 50 및 10) 가정으로위계화되고, 행정조직은친척들로마을을형성한아이유 (Ayllu) 가있었다. 기본조직으로가정 (Familia) 은가족대표인푸릭 (Puric), 10가정은충카 (Chunca) 를구성하여충카카마욕 (Chuncacamayoc), 100 가정은파차카 (Pachaca) 를구성하여파차카카마욕, 1000 가정은우아랑가 (Huaranga) 를구성하여우아랑가카마욕, 그리고 10,000 가정은우노 (Huno) 를구성하여우노카마욕이지도하였다. 잉카제국은기본적으로아이유를중심으로연간그들가족의생계유지에필요한토지를가족대표들에게양도하였다. 이들단위는인구의증가로계속확대되어제국의최전성기인 1520년우아이나카팍의집권시에는제국내에 30만개단위에이르러중앙정부에서는주기적으로왕실감사관을지방에파견하여감사하였다. 당시 10,000 가정이상지역의최고지배자들은매년쿠스코에서회합을갖고세금을전달하고, 또왕으로부터는노예와선물을받으면서잉카왕실이교육시키는자녀들을방문하기도하였다. 잉카제국의주민들은확실히수학지식에서뛰어났다. 또한, 그들의위대함은방대한제국영토를연결한도로망구축의완벽성, 산악지대경사지의경작지에수분공급을위한관개수로의구축, 그리고왕궁과요새의건설에서시멘트의사용없이축조된건축술이었다. 또한, 그들은돌의조각과벽화, 금속장신구, 비쿠냐, 알파카및야마의털로직조하고, 그리고소식을전하기위해매듭을지어여러색깔로꼰결승문자 (El quipo) 를사용하였다 리마를출발한비행기는산악지방으로들어가더니 1시간 20분지난 11시에표고 3,457 미터에달하는페루남부의안데스산맥고원지대에위치한쿠스코에무사히도착하였다. 착륙하기전내려다본쿠스코시내는분지속에자리잡고있는거대도시였다. 어떻게이렇게커다란도시가안데스산맥한가운데에있는지믿어지지않을정도로. 공
항청사밖으로나올때까지는흥분된기분에의식하지못하였는데, 공항밖으로나와일행을잠시기다리는동안갑자기다리상처부위가부풀어올라터지는것만같고, 머리가빠개지듯이아파왔다. 머리가아픈것은고산증으로비행기타기전에가이드가고산증세가와도견딜만하면견디는쪽이회복도빠르다고하여견뎌보려고하였지만, 다리의상처부위는눈물이나올정도로아파견딜수없었다. 이곳이고산지대라기압이낮으니다리상처부위가부풀산또도밍고성당어오를것은며칠간비행기를타면서느꼈기때문에어느정도예상은하였지만이정도일지는몰랐다. 순간무리하게상처난다리를끌고이곳에온것이역시나의과욕이었는가? 하는생각이들었지만, 어떻게해서여기까지왔는데여기서그만둘수는없다는생각에이를악물고참아보기로하였다. 움직이지않고가만히 5분정도있자머리와다리상처부위도그런대로참을만하였다. 내가버스에늦게도착한것에이상한낌새를눈치챘는지친절하게도인솔자가괜꼬리칸차입장권찮으냐고물어보았지만, 일행에게걱정을끼치기싫어애써웃음을지우며괜찮다고하였다. 일행을태운버스는시내로향하였다. 쿠스코의첫인상은어릴적시골서보던하늘과같이하늘이너무나도맑다 ( 푸르다 ) 는사실과, 빌딩과같은현대식건물이전혀눈에띄지않는전형적인시골마을을연상시키는도시 ( 인구가 50만을넘는다고하니 ) 였다. 시내로들어가는길에잉카의정복왕으로불리는제 9대파차쿠텍기념비가도로한복판에위치하고있었다. 이기념비는잉카방식을흉내내 1402개의돌들을이어붙인 22.4m 의 9층구조물로, 꼭대기에는고대군주의위엄을보여주는높이 11m에무게 7톤이나되는동상이있다. 표고 3,457미터에달하는페루남부의고원지대에위치해있는쿠스코는황금도시의전설을품은잉카의심장으로잉카의성스러운수도이자태양신을숭배하는황금도시로서번영을자랑하였지만 1533년제국이붕괴될때까지그절정기는불과 100년에도미치지못했다. 이도시는잉카제국대대로황제의명에따라조금씩건설이이루어졌지만, 1438년에즉위한제9대황제인파차쿠텍에의해제국수도로서의위상이확립되었다. 파차쿠텍황제시대는잉카제국이급속히세력을확장한시대이며, 동시에창조신비라코차신앙이뿌리를내린시대이기도했다. 잉카의전승은쿠스코의기원을다음과같이이야기하고있다. 창조신인비라코차가현재의티티카카호에있던 ' 아톤코야오 ' 라는태양의섬에망꼬카팍과아오오쿠요라
꼬리칸차입구및타완틴수유 ( 잉카제국 ) 역사안내판 잉카의역사, 신격및문화안내판 는두남녀를창조해서그들을부부로만들었다. 그후비라코차는둘에게황금지팡이를주면서 " 이지팡이가가라앉는곳을거처로삼아라 " 는천명을내렸다. 신의명령을받은두사람은긴여행끝에쿠스코남쪽에있는파카리 산또도밍고성당에남아있는잉카태양신전의석벽
탐푸 ( 기원의땅 ) 에간신히도착했다. 그리고그곳에있는아우카우리언덕에서지팡이를던졌더니와카이바탄에가라앉았다. 그들은이곳을거처로정했다. 이이야기가바로잉카의기원에관한전설이다. 이전설에따르면결국쿠스코는잉카제국의발상지위에건설된것으로볼수있다. 쿠스코는케추아어로 ' 배꼽 ' 을뜻하는데, 이는잉카족이자신들의수도인쿠스코를세계의중심으로생각했다는단적인증거라할수있다. 이러한쿠스코는우아타나이강과톨마요강사이에끼어있는가늘고긴도시로, 위에서내려다보면그모습이마치퓨마처럼보이기도한다. 북서쪽의삭사이와망요새는퓨마의머리, 우아타나이강과톨마요강의합류점에인접해있는남동쪽의푸마츄판은꼬리, 와타나이강의굴곡은복부의형상을띠고있다. 그리고중앙광장에해당하는와카이바탄과, 인접해있는궁전은심장의위치에놓여있다. 쿠스코는퓨마의형상을띠고있을뿐만아니라제국전체의축소판으로그에걸맞게건물과시설이배치되었다. 실제로궁전을중심으로중요한건축물들은와카이바탄부근에배치되었고, 신분이낮을수록그주거지는 ' 도시변방 ' 으로밀려났다. 도시전체는잉카의행정구분에따라네개구로나누어졌으며, 주민들의출신지도거주지결정에큰영향을끼쳤다. 잉카제국의중추인쿠스코에는궁전을비롯한수많은건물들이존재했다. 하지만몇명안되는스페인군대에게제국의중심을허망하게빼앗긴후, 건물들대부분이파괴되었기때문에현재까지남아있는건물은거의없다. 그중에서도쿠스코에서가장유명했던비라코차 잉카의세계관을엿볼수있는황금판신전과 ' 태양의처녀궁전 ' 인아쿠야와시, 태양신전인꼬리칸차같은종교건축물은철저하게파괴되었고, 바로그위에가톨릭교회와수도원들이건설되었다. 현재까지남아있는대규모건물유적은삭사이와망요새와도시주변부에있는몇몇건물들에불과하다. 하지만과거꼬리칸차가서있던자리위에세워진산또도밍고교회서쪽에는반원형의석벽일부가남아있다. 쿠스코가번영을누릴당시이석벽에는황금으로두른장식이있었지만모두스페인정복자들의수중에들어가고말았다. 스페인인들이잉카제국을침략할당시제국은아타우알파와우아스카르라는두명의황제가내전을벌이고있는상태였다. 내전에서승리해쿠스코를장악한아타우알파는강력한힘을가진스페인인들을이용해제국을지배하려고했지만그의의도는실패로
돌아갈수밖에없었다. 결국스페인정복자들은황제아타우알파를처형한후쿠스코를잔인하게침탈했다. 궁전과신전에있던황금제품들은모두약탈당했고건물들은모조리파괴되었다. 특히종교적인건축물들은철저하게파괴를당했고, 바로그자리위에들어선가톨릭교회는주민들에게개종을강요했다. 하지만주민들은새로운지배자에게저항의깃발을들었다. 간헐적으로발생한반란도결국스페인정복자들의물리력앞에서는무력해질수밖에없었다. 1871년최후의잉카였던투팍아마르 2세가처형되자더이상의저항은일어나지않았다. 이렇게해서남미최대의제국이었던잉카제국의역사는완전히막을내리고말았다. 버스가잉카태양의신전인꼬리칸차광장에멈췄다. 광장언덕위에위치한꼬리칸차는철저하게파괴되어서인지주변의건물들과유사하게낮은단층건물로되어있었으며, 한편에위치한산또도밍고성당건물이위치를확인해줄정도였다. 낮은언덕을올라가려는데다소아픔이가라앉았던상처가다시아픔을호소하여천천히걸어산또도밍고성당에도착하였다. 산또도밍고성당 ( 꼬리칸차 ) 은 1538년쿠스코에들어선가톨릭신부들이잉카의가장중요한태양신전이었던꼬리칸차위에세운성당으로, 바로크스타일의종탑을가진르네상스양식의건축물이었다. 가이드가꼬리칸차입장권을사는동안성당주변을살펴보니, 성당은다른곳의성당에비해그다지특징적인면이없었다. 입장권을내고성당옆단층건물로되어있는꼬리칸차입구로들어서니, [ 타완틴수유-잉카제국 ] 이라는안내판이눈에띄어반가웠다. 곧바로중정과회랑이중심을이룬곳이나타났는데, 이것은꼬리칸차위에함께지은산타카탈리나수도원이었다. 꼬리칸차는황금의뜰, 또는황금궁전이라는뜻으로잉카의주신인태양신을모시는신전이었다. 스페인인들이쿠스코에관해남겨놓은기록에따르면꼬리칸차는초대황제였던망꼬카팍부터대대로황제가살았던궁전이지만, 애당초망꼬카팍이건설했던신전은인티칸차라불리는비교적작은건축물이었다고한다. 그러나시대가흐르면서신전과붙어있는궁전과새로운주거지를포함하는일군의건물전체를태양꼬리칸차석벽내부모습및산또도밍고교회벽에신전, 즉꼬리칸차라고부르게되걸려있는미신적분위기의십자가었다고한다. 그리고태양신전의본체는약 70 60미터규모의건물로북서쪽으로나있는유일한입구는인티판파라불리는태양광장으로통했다고기록은전하고있다. 광장주변에는태양신전외에도각기달, 별, 천둥, 뱀을모시는신전이있었다고전해진다. 또광장에는옥수수밭과다섯개의분수가있었는데, 황제와그일족들은옥수수밭에서직접농사를지었다고한다. 여기에서수확한옥수수는태양신에게공물로바쳤으며, 분수는잉카의왕비들이혼인의식을하기전에자신의몸을청결히하는장소였다고한다. 또한신전외부의벽에
는황금판이씌워지고신전안에는태양신이묘사된순금제릴리프 ( 부조 ) 등황금상들로가득하였지만스페인침략자에게모두약탈당해지금은흔적도남아있지않다. 이역사적인장소에서머릿속으로이모든것들을상상할수밖에없다는사실이안타깝지만, 그나마꼬리칸차가서있던자리위에세워진산또도밍고성당서쪽에반원형의잉카신전의석벽일부가남아교회상부를받치고있는모습과성당한쪽에남아있는잉카의세계관을엿볼수있는해와달, 별과무지개, 구름과천둥, 인간의모습이그려진황금판을내눈으로직접확인할수있어기뻤다. 1650년과 1950년의지진으로스페인이지은교회건물은크게파괴되었지만잉카신전은전혀손상을입지않았을정도로, 잉카인들 잉카시대의잉카의월별업무 (?) 를묘사한부조사진및꼬리칸차태양광장에서본꼬리칸차 ( 산또도밍고성당 ) 의튀어난석축기술과, 안내판에소개된사진이지만잉카시대의월별업무 (?) 를묘사한부조를직접눈으로확인할수있어나름대로이곳에온보람을느꼈다. 꼬리칸차내부한쪽편에있는종교박물관에는 16~18세기까지쿠스코화가들의작품이전시되어있었는데, 유럽에서그려진성화와달리뭔지꼭집어말하기는어렵지만원주민들의무의식세계가담긴흔적들을곳곳에서발견할수있었다. 특히스페인의잔혹한잉카제국침탈역사의계기가된사건인잉카의왕아타우알파가인질로잡히기전피사로와대면하는장면을담은그림이있는데매우사실적으로그려져있었다. 즉피사로는가톨릭사제를통해성경에담긴하나님의말씀을믿을것을설파하지만태양신을믿고있고문자자체를몰랐던아타우알파는성경에서아무런말도들리지않는다며성경을던지는순간매복해있던스페인군이달려나와아타우알파를인질로잡은역사적사실을잘나타내고있었다. 밖으로나와언덕을내려가며산또도밍고성당을다시한번올려다보다벽면에미신적분위기를물씬풍기는금박장식이된십자가가걸려있었다. 아하! 저것이이곳원주민들이믿는가톨릭신앙의본래모습이구나하는생각이들며, 조상제사문제로갈등을겪고있는우리나라기독교인들도본을받았으면좋겠다는생각이들었다. 꼬리칸차광장에서이번여행을함께하는일행들과단체기념사진을찍고, 전쟁광장을의미하는아르마스광장 (Plaza Armas) 으로향하였다. 쿠스코시내는여기저기공사를진행하고있어몇불록떨어지지않은광장으로버스로가는데도시간이다소지체되었다. 아르마스광장에대한첫인상은세계어떤광장에뒤지지않을정도로참아름답다! 였다. 광장은직사각형으로한가운데분수대가있으며분수대중앙에는아까공항에서
아름다운쿠스코아르마스광장오면서본파차쿠텍기념비에있던동상과똑같은모양의잉카제 9대군주인파차쿠텍동상이세워져있었다. 이분수대주위의광장과분수대를중심으로대각선방향으로넓은길이나있으며, 길과길사이와광장바깥도로로둘러싸인 4개의삼각형형태의터에는각종꽃나무들로예쁘게가꾸어진잔디밭이다. 또한광장주변으로대성당, 라꼼바나데헤수스교회와같은건축물과함께멋진회랑과테라스가길게이어진건물들이 쿠스코에서점심식사한전통음식점. 꼭먹고싶었던쿠이요리사진및실제먹은요리. 앙증맞은민예품인조미료통 광장을둘러싸고있으며, 이건물들에는카페, 레스토랑, 민예품점, 선물가게, 여행사등이입주해있었다. 또한광장주변건물너머로분지도시쿠스코의집들이다시둘러싼형태로천혜의조건을다가지고있는광장이라는생각이들었다. 그런데이곳이스페인침략이전잉카시대부터아우카이파타 (Haucaypata) 로불리던통치의중심지로현재의아름다운모습은잉카신전을모두파괴하고피로물든폐허위에세운것이라는현지가이드의말에다소놀랐다. 시간이상당히지나시장하였기에점심식사를한후관광을하기로하고, 아르마스광장근처에있는음식점으로갔다. 음식점은간판부터실내인테리어까지우리나라괜찮은음식점보다더우수하다는생각이들정도로멋졌다. 입구에는전통복장을한원주민여인이인사를하고, 식사중에는악사들이전통음악을연주해주었다. 손님에게서비스를제대로하고돈을번다는영업의기본철학을제대로가지고있는점이우리나라
음식점도본받을만하다는생각이들었다. 또한식탁에놓인앙증맞은민예품인조미료통이놓여있는것이특히눈길을끌며, 파는곳이있으면선물로사가고싶었다. 그런데우리가먹은음식도잉카후손인원주민의전통요리 ( 이름은잊어버렸지만 ) 로맛이있었지만, 중남미여행전부터먹고싶었던쿠이 (Cuy) 요리가음식점메뉴판에있는것을발견하고는이것을못먹어다소아쉬웠다. 참고로쿠이는우리나라에서는애완용쥐 기니피그 로알려진토끼크기만한동물로원주민들의단백질공급원으로쿠스코음식으로유명하다. 여행사측에서이러한사실을모르지않았을텐데다른전통음식이나온것은, 천만원이넘는이번여행가격을생각하면아마가격문제보다는통째로나오는쿠이요리를고객이징그러워먹지못할것이라고하나여행사가그동안의고객설문조사 쿠스코의대성당및라꼼바나데헤수스교회를반영한것이라고좋은쪽으로생각하기로하였다. 다시아르마스광장으로나와, 가이드가대성당및라꼼바나데헤수스교회에대해설명해주었다. 대성당은아르마스광장북동쪽계단에우뚝솟은붉은건물로잉카의비라코차신전 (Palacio de Viracocha) 위에지은것으로, 중남미에서도손꼽히는스페인식민시대건축물로 1550년에짓기시작해완공까지 100여년이넘게걸렸다고한다. 어제파나마비에호에있던대성당이파괴된후, 이곳으로옮겨져왔다는바로그성당이었는데, 외관상으로는바로크스타일의성당치고는화려함 ( 또는현람함 ) 보다는중후한멋이풍기는성당이라는느낌이들었다. 성당가운데지붕에남미에서가장큰종인 Campana Maria Angola가 1659년에설치되었다고하는데보이지않았다. 설마성당안쪽에있는것은아니겠지! 성당안에는유럽의화풍을자신의것으로소화한유명한메스티조화가마르코스시파타가그렸다는 [ 최후의만찬 ] 이있다는데만찬음식으로쿠스코의대표음식인쿠이가그려져있다고한다. 또한갈색피부를가진 지진의신 예수와같은성화가있다고하여보고싶은데, 물론패키지여행이라생략되었다. 라꼼바나데헤수스교회는잉카의 11대군주우아이나카팍의궁전이었던곳에세워진교회로벽화와제단이볼만하다고한다. 내개인적인취향으로는대성당보다이교회쪽건물이규모는작지만더마음에들었다. 일행들이페루원주민들이만든알파카의류등특산품을사기를원해, 가이드가 1시간의자유시간을주었다. 물론나는관광하는쪽이므로, 다리가아프지만일행과헤어져쿠스코의거리를발길닿는대로둘러보며그들의문화를피부로느껴보고싶었다. 라꼼바나데헤수스교회왼편골목으로관광객과제복을입은학생들을포함한쿠스코시
민들이많이들어가고있었다. 나도그들을따라들어서니갑자기양쪽으로높은석벽이이어져있는로레또골목으로, 마치다른시대로시간이동을한것같은착각을불러일으키는독특한분위기를연출하고있었다. 이곳석벽의돌들은아까꼬리칸차에서본석재보다는작았고특별히인상적인모형 로레또골목및산프란시스코광장입구 사법재판소뒷담의독수리조각상및앞정원의벽화은없었지만, 잉카후기에세워진것으로추정된다고하는이석벽은거의원형그대로보존되고있었으며소문대로면도날하나들어갈틈없이완벽하게맞물려있어잉카석벽의분위기를마음껏느낄수있는훌륭한장소였다. 쿠스코시민과여행자들과호흡을같이하며이골목을천천히거닐며문이열려있는건물내부를구경도하고, 그옛날이거리를거닐었을잉카시대잉카인들을떠올려보기도하였다. 발길닿는대로걷다보니담밑에두마리의독수리 ( 콘도르 ) 조각상이눈에띄었다. 아하! 잉카인들도마야인들과같이독수리를숭상하는구나하는생각을하며건물을돌아걷다보니민속공예박물관과건물앞에경찰이서있는사법재판소 (?) 도눈에띄었다. 그런데이건물정문안쪽정원벽면에멕시코대통령궁에서보았던그림과같은거대한벽화가눈에띄었는데, 자세히보니십자가의예수상, 스페인군의침략등쿠스코의역사를하나로표현한것같았으며, 눈을가린여성이들고있는사법부의상징인저울이특히내눈길을끌었다. 내가가이드라면이러한현지모습을열심히공부하여고객에게전하고싶은데아직우리나라여행현실이인증샵에머물러있는데어찌하랴! 다음에이곳을여행한다면스스로공부하고통역이필요한가이드와함께오리라생각할수밖에. 여행은증명사진이필요한것이아니라현지인의삶에대한공유의느낌이라는나의개똥여행철학 (?) 관점
에서는패키지여행은돈자랑 (?) 에불과하며그것을선택하고왔으니할말은없다지만. 아직일행과모이기로약속한시간이많이남아있지만, 다리의상처가나를가만두지않기에걷는속도를줄이고시계를보면서쿠스코시내를살펴보기로하였다. 쿠스코시내풍경은평온하고이곳에서살고싶은도시답게마음에들었지만고지대에살지않는나에게는역시고산증이내몸을괴롭히고있다. 거기에상처까지! 천천히걸으며주변을살펴보니현지인의삶이나와동행하는것같다. 특히성인이아닌학생또는어린이의표정에관심에관심을가지고이들의일상삶을관찰하고보니, 우리에게쿠스코는망한잉카제국의흔적으로관광지일지몰라도현지인들에게는지금까지내려온역사적현장이며일상의삶이라는느낌을받았다. 잉카제국이망해스페인속국이되었고지금은페루의국민이되었지만, 그들은언제나특권을누리기보다는지배를받는현실을받 쿠스코아라마스광장의잉카동상, 이름모를광장의이름모를동상, 레고시호광장에있는재미있는카페이름 아들이며자신의가족과자신을위해열심히살아가고있는나와동일한평범한삶을최선을다해살고있다는! 그들얼굴표정에서나는그들보다더좋은세상에살고있다는생각을접을수밖에없는사실도인정할수밖에없었다산프란시스코광장을둘러보고일행과의약속시간에맞춰발길을돌리면서, 쿠스코는과거의역사를유지하면서현재의각박한삶을열심히살아가려고몸부림치는잉카후손들의삶의터전이라는느낌이들며그들의삶에경의를표하며나자신의최근나태해진삶에대해서도반성하였다. 조만간다시이곳에오면관광객이아닌이들과의이웃으로이들과며칠간이나마함께호흡을하며생활해보고싶다고. 약속시간에맞춰서둘러아르마스광장에돌아왔는데일행의모습이보이지않았다. 상처난다리도아파잠시벤치에앉아광장에놀라나온쿠스코시민들을살펴보았다. 햇볕에타고일에쪼들려주름진얼굴을가진잉카의후손들인원주민들의표정은각박한삶을영위하는지배층인백인들의표정과달리무표정하지만어딘지모르게삶을달관한것같은평온한표정들이었다. 코를흘리며때가절은옷을입은원주민아기에게서내어릴적모습을보고, 귀여워가방에서초콜릿과과자를꺼내건네주자활짝웃으며진심으로감사해하는아기어머니모습에서내돌아가신어머니모습을보는것같았다. 삶이어렵지만힘내세요! 라고그들에게마음속으로나마격려를보냈다. 어느시대, 어느나라든국가는국민 ( 민중 ) 을위한다고하지만일반국민이느끼기에는너무나도먼현실을이곳에와서도
실감할수있었다. 잉카인의석조기술로띄어난 12각의돌을내눈으로직접보고싶었으나약속시간이이미지나다음기회로미루고, 광장주변을살펴보니일행중몇분이눈에띄어만나보니다른분들은아직쇼핑중이라고한다. 약속시간이조금더연장되었으면쿠스코시내를좀더둘러보았을텐데하는아쉬움이있었지만, 다리의아픈상처에는다행이다라고고쳐생각하고광장벤치에앉아아픈다리도쉬며주위를둘러보니분지도시인쿠스코를둘러싼산에 [ 페루 ] 라는글씨와산꼭대기의십자가가눈에띄었다. 이들에게십자가는어떤의미일까? 아까꼬리칸차 ( 산또도밍고성당 ) 에서본십자가와같이그들에게십자가는기독교또는가톨릭과는그다지관계없는마음속의신앙이라는생각이문뜩들었다. 신앙은인간의삶이어려워부모와같이누군가에게기대고싶어인간이만 아라마스광장풍경및소풍나온원주민가족의단란한모습든것이므로 ( 현재는인간이종교에속박되어있지만 ), 십자가가누구를의미하든그다지의미있는것은아니며그들이그것을보고마음의편안함을느낄수있다면그것으로됐다는생각이들었다. 약속시간보다약 30분정도늦어, 아라마스광장옆레고시오광장으로옮겨미술관같은오래된유적지건물을잠시둘렀으나너무짧은시간이라어디인지기억이나지않는다. 버스를기다리며광장벤치에앉아주변을살펴보다재미있는카페이름을발견하였다. [Kushka...fe] 즉쿠스코카페란의미일진데서울의어느가게이름보다도더욱산뜻한느낌이드는멋진아이디어를살린명칭이라는생각이들었다. 버스를타고쿠스코근교유적지관광에나섰다. 쿠스코북서쪽으로난산길을약 2km 올라가자산중턱에넓은평지가나타나더니잉카시대의거대한유적인삭사이와망 (Sacsayhuaman) 이나타났다. 이유적은잉카제국제 9대파차쿠텍황제가건설을시작해그의후계자투팍유팡키때완성됐다고하는성벽으로쿠스코시내가내려다보이는산중턱에건설되어있는데, 쿠스코를퓨마의형상으로볼때이곳은퓨마의머리에해당한다고하는학설대로커다란그릇안에도시를담은형태의쿠스코시내가한눈에내려다보였다. 원래는 20m 높이의성채와원탑을가지고있었는데스페인침략으로대부분파괴되고지금은성벽의밑동암남아있다. 또한이곳의석벽은쿠스코시내에서볼수있는잉카의석벽과동일한기술을사용하였지만, Z 모양의지그재그형식으로내밀고디밀어쌓기로되어있으며, 돌하나하나의크기가최고로큰것은높이 9m, 무게
삭사이와망전경및그곳에서내려다본쿠스코시내모습 350 톤에이를정도로비교도안될만큼컸다. 내게관심을끈것은지형지물을적절히이용하여석축을쌓아올린것과, 현명하게도물빠짐구멍을만들어놓았다는사실이었다. 스페인사람들이쿠스코에자신들의건물을지을때이곳의돌들을옮겨가사용하고도남은것이이정도라니그어마어마했던규모를짐작해볼수있었다. 주변을살펴보아도채석장이보이지않는데도대체이것들을어디서옮겨왔는가? 하는의문이들었지만, 중국의만리장성의돌들과같이제국을수호하고황제의권위 (?) 를위한수많은사람들의피로물든노역의대가일것이라는생각이들었다. 그런데자세히보니돌들이화강암이아닌연마하기비교적편한돌로, 화강암같은돌을사용하면석재를가공할수있을것이라는생각과함께이들의빈틈없이석벽을쌓는기술이어느정도이해가되었다. 또한이장소는잉카가마지막저항을하였던곳으로, 이곳에서쿠스코삭사이와망전경가스페인의지배하에들어간후꼭두각시황제로임명된망꼬잉카가쿠스코를탈출하여병사들을모아쿠스코탈환에나섰다고하는데, 태양이떠있는동안에만전쟁을하고, 농사철에는농사를지어야한다는신앙 (?) 에빠져있는잉카인들의미신 (?) 때문에잉카군의유리했던전세에도불구하고이곳에서몇차례접전끝에패해잉카제국의회복을결국은이루지못하였다는어처구니없는역사적사건이벌어진장소라고한다. 유적지를한가롭게거닐
삭사이와망전경 삭사이와망에서전통공예품을팔거나사진모델을하는원주민여성들며버스가기다리고있는장소로가다보니민예품과알파카를배경으로한사진모델 (?) 을하고있는순박한원주민여성들이눈에띄었다. 이들은농사도짓는한편틈틈이이곳에서관광객을상대로장사를하는일종의투잡 ( 이중직업 ) 을하고있는셈이라고생각하니미소가떠오르며, 억척같이살아가는그들의삶에마음속으로박수를보냈다. 다음으로간곳은지그재그혹은미로라는뜻을가진켄코 (Qenqo) 로, 쿠스코시내북쪽켄코전경
켄코모습으로 4km 떨어진곳에있는거대한자연석들사이에난길이마치미로처럼얽혀있는유적으로큰켄코와작은켄코로나뉜다. 거석무리앞쪽에커다란돌이기념비처럼세워져있는데, 가이드말로는춘추분때이돌의그림자가마치퓨마의형상을나타낸다고한다 ( 믿거나말거나인데가이드가보여준사진을보면그럴듯하였다!). 미로처럼얽혀있는유적안에들어가니조그만공터와함께안쪽에작은동굴이있었다. 제단처럼깎여진돌은희생의식용제단이라고하는데, 입구에지그재그모양으로홈이새겨진바위로흘러내리는액체의모양에따라길흉을점쳤다고하는데서이러한학설이생긴것같다. 신권정치에서이러한신탁의장소를만들어길흉을점치는것은무지몽매 (?) 한백성을다스리는데아주중요한일일것이다. 이곳에서도삭사이와망과마찬가지로쿠스코시내가한눈에내려다보였는데, 정말멋진전경으로바위에앉아잠시감상하고싶었지만시간이허락하지않았다. 다시버스를타고가다보니붉은요새라는뜻으로탐보마차이의길건너편에붉은벽돌로만들어진석재구조물인푸카푸카라 (Puca Pucara) 가나타났는데폐허로별로볼것이없다고하여버스차창으로보는것으로하고지나치고, 탐보마차이 (Tambomachay) 로갔다. 그런데입구에서가이드가유적지까지언덕길을약 20분정도올라가야하니힘든사람은올라가지않아도된다고한다. 일행중몇분이포기를하고버스에서기다린다고하였다. 아픈다리를참고지금까지견뎌왔는데언덕길이라니! 그러나포기할수는없지! 라고내스스로에게다짐하며천천히언덕길을올라갔다. 쿠스코보다도해발고도가더높아숨이가빠지고다리상처의통증이있었지만언덕길주변의풍경이마치늦은
오후에한가롭게시골계곡길을걷는것같이마음을평온하게만들어주었다. 탐보는 탐보마차이풍경숙소또는객사라는뜻으로, 탐보마차이는잉카의목욕탕이라불리기도하는데, 이유적은 1년내내일정한양의물이흘러내리게만든잉카의수로기술을엿볼수있는유적으로, 언덕의한쪽면에돌을쌓아올린계단형의구조물이있고, 돌틈사이로물이흘러내리도록수로와작은폭포를만들었다. 가이드말로는위쪽에있는사다리꼴의 4개의문안쪽에잉카의미라가안치되었던것으로처음에추정하였으나, 4개의문이의미하듯이 4방향의세계라는의미의타완틴수유라는잉카제국의 4명의제후대표가이곳에서목욕재계하고잉카황제를알현 (?) 하는의식을행한곳으로보는것이더적절하다고하는데그럴듯하다는생각이들었다. 갑자기일행중의공주 ( 닉네임 ) 가폭포물에손을씻는것같은자세를취하라고하여얼떨결에자세를취하였더니그럴듯한작품이만들어졌다. 버스에올라오늘의숙박지인우루밤바에있는호텔로향하였다. 버스가대관령고개를넘어내려가듯급경사로난산길을내려가자산허리에계단식옥수수밭이끝없이펼쳐져있었다. 말로만듣던잉카의성스러운계곡 (Valle Sagrado de los Incas) 으로들어서는것이었다. 이곳이잉카인들의식량공급처이므로이러한이름이붙었을것이다. 도중에 [ 코라오 ] 라는강원도산골마을같은작은마을이나타났는데, 가이드말로는코이카가이곳에도자기학교를만들어주었다고한다. 잉카인들은토기제조에대해우수한기술을가지고있었는데, 아마이것을계승발전시키려는것같다는생각과함께, 코이카가세계곳곳에대한민국을알리고있다는생각에뿌듯한기분이들었다. 마을의집들
은이제는우리나라에서거의사라져버린시골토담집과같이아도베 (adobe) 라는흙벽돌로지은집들로, 짚으로만든우리나라지붕과비슷하게바하 (baja) 라는풀을사용하여지붕을만든다고한다. 날이저물기시작하여어둠이찾아올무렵눈앞에우루밤바 (Urubamba) 강과함께내리막길이끝나는곳에위치한피삭 (Pisaq) 이라는마을이나타났다. 이곳은우리나라시골 5일장과같이 1주일에 3회전통의상을입은주변마을원주민들이중앙광장에모이는원주민시장이서는데, 감자나과일을파는활기찬옛시장풍경을볼수있어관광객에게유명해진마을이라고한다. 또한광장중앙의교회에서는일요일마다원주민전통언어인캐추아어로미사가열린다고한다. 우리가탄버스는피삭을거쳐어둠이깔린성스러운계곡의평지길을달려깔까 (Calca) 및우루밤바라는마을을통과하였다. 어둠속이라원주민마을을감상할수없는것이아쉬웠지만돌아올때볼수있기에잠시뒤로남기기로하였다. 그런데우루밤바삼거리안내판에우리가달려가는길이아닌쪽으로쿠스코라고쓰여있는것이눈에띄었다. 참고로우루밤바는 6천m 이상의높은산들아래로황토빛물이흐르는우루밤바강을끼고있는평화로운성스러운계곡마을들중의하나로, 피삭에서시작되는우루밤바강은오얀따이땀보 (Ollantaytambo) 를지나고마추픽추아래 옛장원이었던식당의내부모습및밖에서발견한앵무새한쌍 옛장원이었던식당에서의저녁성찬마을인아구아스칼리엔떼스 (Aguas Calientes) 를넘어아마존지역까지이른다. 우루밤바를조금지나쳐버스가도로에서벗어나산길을조금올라가자우리가저녁식사를할멋진집이나타났다. 예전이곳의영주 (?) 가살던집이라는데어둠속이라제대로볼수없었지만건물규모가대단하였다. 지금은고급음식점이라고하는데이곳토
산품인토기와그림으로장식된엄숙하고웅장한실내분위기는영화속에나오는영주의저택그대로였다. 시장도하였지만오랜만에분위기있는장소에서원주민청년이연주하는음악을들으며멋진저녁성찬을즐겼다. 물론쿠스코관광을무사히마친것을기념하여쿠수코의맑은물로만들었다는페루의대표맥주쿠스께냐 (Cusqena) 도마시고, 음악을연주하던청년과도기념촬영한컷하고. 식사후밖으로나와잠시산책을하는데앵무새한쌍이눈에띄었다. 처음에는조각물인줄알았는데자세히보니살아있었다. 이런장소에서실제앵무새를볼수있어기뻤다. 음식점에서그다지멀지않은곳에위치한호텔 (Casa Andina) 에도착하였다. 호텔은 2 층건물이몇동있는리조트풍의호텔이었다. 짐을풀고오늘하루종일별사고없이무사하게잘견뎌준다리의상처에게감사하며정성껏치료하였다. 고맙다! 내다리! 베란다로나와주위를살펴보니산들이그로테스크한분위기를풍기고있으며, 캄캄한밤하늘에별들이선명하게빛을발하고있었다. 누군가안데스의밤하늘에대해멋지게기술한것이떠올랐다. [ 안데스에서의밤하늘은별점박이무늬로도배해놓은거대한천장이다. 밤이되면안데스는산이아니라하늘이된다. 산은자신의모습을침묵으로숨기고대신밤하늘을내놓는다. 안데스의밤하늘을따져보면빈하늘면적보다별들에의해점유된면적이훨씬넓고크다. 서울밤하늘은별이있는둥마는둥하지만안데스에서는그야말로쏟아져내린다.] 그런데실제로내가본안데스의밤하늘은별들이쏟아져 내릴정도는아니었다. 우루밤바에서 2 박한호텔 Casa Andina 3 월 11 일 ( 화 ), 여덟째날마추픽추관광 아침에일어나밖을보니날씨가쾌청하였다. 드디어오늘은이번여행의하이라이트라고할수있는마추픽추를관광하는날로, 설렘으로약간기분도들떠있었다. 또한이곳이쿠스코보다약천미터정도해발이낮아서그런지다리상처의통증도거의없어다행이었다. 밖으로나와호텔주변을산책하였다. 호텔은원주민마을안에위치하고있었으며마을주변에는옥수수를키우는넓은들판도펼쳐져있었다. 마을길을따라걷다보니옛날과다름없는모습그대로살아가고있는원주민사람들의아도베 ( 흙벽돌 ) 로만든집들이눈에띄었다 ( 다만지붕은이곳도새마을사업을해서인지기와와슬레이트중간의것으로되어있었다 ). 비록낡고허물어질것같은집들이지만집둘레에는화
우루밤바원주민마을풍경 우루밤바원주민마을풍경초도심어져있고, 수세미, 호박, 오이등이심어져있는텃밭도만들어져있었으며, 놓아키우는돼지, 관광객상대로장사를하기위한노새등도눈에띄었고, 시궁창냄새도다소나는이곳마을분위기는어릴적내가자라던시골과너무나도흡사한평온함과아늑한느낌이물씬들었다. 그런데이곳원주민들의신앙을나타내듯각집지붕위에장식된십자가가조각된소와함께있었다. 예전우리나라시골에서농사를짓기위해소가귀중하였듯이이곳에서도역시소는농사를짓기위해절대적으로필요하였을
것이므로십자가와함께있을것이라는생각이들었다. 또한마을곳곳에산으로부터내려오는물이흘러가도록관계수로가잘만들어져있었고, 아침저녁출퇴근을위해마을버스 (?) 와같은시스템도있는것이눈에띄었다. 역시사람사는곳은똑같다는사실을 오얀따이땀보에서올려다본주변산풍경 다시한번확인할수있었다. 느긋하게아침식사를마친후, 가볍게배낭만지고마추픽추를관광하러나섰다. 호텔 오얀따이땀보의재래시장풍경에서그리멀지않은곳에위치한잉카시대와달라진것이있다면이층건물이올라섰다는것과관광객으로붐빈다는것정도라고할정도로돌로만든길과벽, 수로와구획등잉카시대에만들어진마을형상을그대로간직한성스러운계곡의중심마을인오얀따이땀보로갔다. 이곳은잉카의길을따라마추픽추로걸어가는 잉카트레일 의시작점이자좀더저렴하게마추픽추로가고자하는여행객들이열차를타는곳으로, 마을광장에서주위를둘러보니산중턱에잉카의신비라꼬차등다양한신들을모시기위한종
교적구조물이라는잉카시대의유적지가눈에띄었다. 피삭에서보지못한원주민전통시장을보기위해광장인근에있는원주민의재래시장에가보니, 시장이현대적창고건물안에있는등옛날모습은많이사라졌지만감자나과일을파는활기찬시장풍경이우리나라시골장터와분위기가비슷하여반가웠다. 마을안으로들어서니잉카시대에만들어졌다는돌로만든길과벽, 길한복판을흐르는수로, 구획이잘되어있는등옛모습을그대로간직하고있음을눈으로직접오얀따이땀보의수로가나있는잉카시대마을풍경확인할수있었는데, 잉카원주민의집내부모습 먼조상을쫓아가면같은종족이었으니그럴수도있겠지하는생각이들면서도어딘지
모르게우리나라의시골전통마을모습과너무나도흡사하여놀라웠다. 또한원주민이살고있는집을두곳들어가살펴보았는데, 참으로신기한것들이많이눈에띄었다. 내가어릴적시골마을에서본한칸짜리초가집과같이두세평남짓한원룸형집안에부엌, 침실, 주방도구, 탁자등모든생활용품과함께농사도구, 농사지을옥수수씨앗등이눈에띄었는데, 그보다놀라운것은여러가지형상의토기및조각상, 동물미이라, 조상의해골등각종신들을모셔놓고있으며, 또한집안에서쿠이나오리를기르고있는점이었다. 이마을의토착신앙은내가어릴적할머니가부뚜막 ( 귀 ) 신, 장독 ( 귀 ) 신,.. 등등집에는각종터주대감격가택신들이살고있다고말씀하신것과같이만신개념으로모든사물에신적존재가들어있다고믿는다. 기차시간이다가와기차역으로가면서보니마을중앙을흐르는파타칸차강 (Rio Patacancha) 주변에잉카인들이다양한방법으로물길을만들어농경과종교적목적을위해이용하였음을알수있는돌에홈을파서만든수로와목욕탕등관계시설이눈에들어왔다. 우리나라시골마을에아직도존재하고있는이런시설을발견하니반가웠다. 오얀따이땀보기차역입구전경및열차앞에서인솔자와함께그런데기차역입구에서기차표와함께여권을검사하는것이다소의아스러웠지만여행자및마추픽추유적지를보호하기위한것이라고애써이해하기로하였다. 티켓을자세히보니내이름과여권번호까지인쇄되어있었다. 우리일행이산티켓은 11시 15분출발하는여행객들을위한 Turista(Backpaker) 로편도요금이 48 미국달러이니결코싸다고할수없는가격이지만, 비행기요금으로마추픽추행열차표및원주민여승무원과함께기념사진
오얀따이땀보-마추픽추구간기찻길주변풍경따지면에코노미클래스에해당한다. 참고로이보다한단계높은레벨, 즉비즈니스클래스인 Vistadome( 약 71 미국달러 ) 와가장비싼일등석에해당하는마추픽추를처음발견한사람의이름을따하이람빙엄 (Hiram Bingham) 이있는데요금이무려 300 미국달러를넘는다. 이들세클래스는비행기와달리운행열차가서로다르다. 기차에탑승한후마추픽추입구에해당하는마을인아구아스깔리엔테스까지약 1시간반동안열차에서제공하는음료수한잔을마시며우루밤바강을끼고달리는기찻길주변험난한안데스산맥의멋진경관을감상할수있었다. 12시 45분드디어마추픽추 (Machu Picchu) 여행의관문인아구아스깔리엔테스역에도착하였다. 아구아스깔리엔테스는여행자만을위한식당과숙소가가득한산속작은마을이었다. 역에서가까운우루밤바강이내려다보이는근처 2층식당에서뷔페로점심식사를하고잠시휴식을취하며어느쪽에마추픽추가있을까예측해보았으나나중에본전혀다른위치에있었다. 마추픽추의관문인아구아스깔리엔테스마을주변풍경식당길건너에있는마추픽추행셔틀버스정거장에서버스를이용하여마추픽추로향하였다. 드디어잃어버린도시마추픽추관광이본격적으로시작되었다. 마추픽추로올라가는산길은꼭양의창자모양인데양이척박한초식을소화하기위해창자가아홉
번이나꺾어져길다는뜻의구절양장이란말이무색하게아홉번이아니라열세번이나접힌길로, 길도 1차선비포장도로로맞은편에서차가오면군데군데조금폭이넓은길에서교차를하는데보는내가식은땀이날정도로아슬아슬하였는데운전기사는익숙해서그런지태평스럽게운전을하고있었다. 버스가정상에도달할수록점차시야는높아지고우루밤바강이눈밑으로보이기시작하였다. 버스가마추픽추입구에정차하여내렸다. 아! 드디어그유명하다는마추픽추에왔구나! 하는생각과함께마추픽추에대해그동안조사한불확실성으로가득한내용이떠올랐다. 세계에서가장아름다운문화유산으로손꼽히며그존재만으로도세계인들의마음을사로잡는잉카유적인 [ 잃어버린공중도시 ] 마추픽추 (Machu Picchu) 는세계 7대불가사의중하나로, 쿠스코에서북서쪽으로 110km 떨어져있으며, 유유히흐르는우루밤바강을밑에두고 [ 늙은봉우리 ] 라는뜻을가진마추픽추산과 [ 젊은봉우리 ] 라는뜻을가진우와이나픽추산이병풍처럼둘러싸고있는정상사이의해발 2430 미터절벽위급경사면에계단을만들고, 능선위로펼쳐져있는쟁반처럼좁은평지에건설한산정도시로, 아래에서봐서는그존재가드러나지않는다. 도시의면적이 5 km 2 이라지만그절반은경사면을깎아억지로도시에끼워놓은형국으로, 여기에최대인구만명이살았다고하는데, 좁은공간을최대한활용하였기때문에건물들은답답해보일정도로빼곡히들어서있으며, 또한도시아래급경사마추픽추올라가는길풍경면에만들어진계단식밭이유적전체를둘러싸고있어서기묘한풍광을자아내기도한다. 이마추픽추유적은 1911 년미국예일대역사학과교수였던하이람빙엄이처음으로발견하였는데, 그는스페인정복자들도발견하지못했던마추픽추 ( 실은전설속의빌카밤바 ) 를찾기위해온갖어려움을마다하지않았다고한다. 즉, 그는급류가흐르는강과계곡을건너거의수직으로깎아지른듯한우와이나픽추의급경사면을기어오른다음두산의정상을이어주는좁은능선을지나마침내마추픽추에도달할수있었다고한다. 이러한마추픽추유적은잉카제국에서유일하게정복자의침탈을받지않은도시이며, 이유적을발견한빙엄이이곳을제국최후의잉카인아타우알파가스페인정복자에대한저항의거점으로삼은전설속의 빌카밤바 ' 였을것으로추정함으로써, 부당한지배에맞서싸운잉카문명의상징으로페루원주민들의각별한사랑을받고있다. 그러나그런사실을입증할수있는유물은결국발견되지않았으며, 아쉽게도나중에다른곳에서빌카밤바가발견되었다. 따라서마추픽추는언제쯤건설되었으며, 왜잉카인들이이마추픽추를만들었고, 또한어떻게버려졌는가에대해확실한것은무엇하나도지금껏밝혀지지않고있다. 빙엄의주장대로최후의잉카가세웠던전설의 빌카밤바 라고아직까지주장하는사람도있고, 잉카에굴복당하지않았던고지의민족들이수도쿠스코를방어하기위해건설한요
새라고주장하는전문가도있으나, 실제로하이람빙엄이마추픽추를처음발견했을때모든신전과황제들의묘는비어있었다. 때문에잉카의신비를풀수있는유물이나그실마리가될만한것도전혀발견할수없었다. 하지만도시아래쪽에있는동굴에서발견된유체를조사한결과, 매장되어있던 185구의유체중 109구가여성의유체라는사실이밝혀졌다. 이를통해적어도마추픽추말기에는주민의대부분이여성이었을것으로추정되고있다. 이때문에마추픽추는잉마추픽추입장권카제국초기부터신과잉카만을위해길러진 ' 태양의처녀 ' 들의수도원이었다는주장도있다. 연구자에따라서는잉카의남성은정복자에게계속저항하기위해재산과함께멀리떨어진다른곳에있었을것이라고주장하는사람도있다. 하지만그어떤주장이든분명하게뒷받침할만한증거는아직도발견되지않고있는상태다. 다만마추픽추는잉카의제 9대황제인파차쿠텍이 1450년경만들었으며, 그가하늘을관찰하고농경과관련된시기를파악하기위해머물렀다는설과신과잉카만을위해길러진 ' 태양의처녀 ' 들의수도원이라는주장이현재로는가장유력하다. 입장권을내고유적입구를통과해조그만산허리언덕을넘어서니언론매체를통해보았던마추픽추가모습을서서히드러냈다. 먼저눈에띈것은유적지저편으로 [ 젊은봉우리 ] 라는뜻을가진우와이나픽추산, 눈아래로계단처럼만들어진밭옆에지워진잉카의저장고인 [ 꼴까 ](Depositos Qolqas), 그리고머리위로 [ 감시인의집 ] 이었다. 꼴까는수확한식량을저장하는곳으로잉카시대에는잉카의길중간중간에이러한꼴까를세워곡물을저장하고필요시사람들에게재분배하기도하였다고한다. 유적전체를한눈에내려다보기위해왼쪽으로향하는좁은산길을따라정상에있는 [ 감시인의집 ] 으로올라가자, 우와이나픽추산을배경으로도시와계단식밭으로이루어진유적전체가한눈에펼쳐지는흔히우리가보는대표적인마추픽추사진의모습을내눈으로직접 제단, 도시입구성문, 세개의벽이남아있는주신전 확인하면서두봉우리사이에좁은도시의공간이있고거기에도시가길게드러누워있는너무나도멋진장관에잠시넋을잃을정도였다. 언론매체를통해본태양의신전,
마추픽추의환상적인풍광 3개창문의신전, 주신전, 천문관측소인인띠와따나가주광장남쪽으로위치하고, 감시인의집발아래로급격한산경사에축대를쌓아농경지를만든계단식밭이있음을확인하고는너무기뻐소리를지르고싶을정도였다. 증명사진을몇장찍고일행을기다리면서보니돌로만들어진제단이눈에들어왔다. 가이드에게물으니잉카가사망하였을때임시로시신을모시는영안실같은역할을하는제단이라며, 모든잉카의큰도시에는이러한제단이만들어져있다고한다. 이제숲을보았으니나무를보기로하고, 가파른길을내려가도시의좁은문을몸을구부리고빠져나가성벽의석벽에대해가이드의설명을듣고묘지를통과하는데갑자기비가내리기시작하였다. 마추픽추를여행한사람들의여행기를보면대체로환한햇빛아래서유적을보기보다는안개와비구름에가려진모습을보았다고할정도로날씨변화가심하다고하였는데, 우리도예외는아니었다. 가지고간우비를꺼내입고각자흩어져근처무덤바위들밑에비를피하며그
마추픽추의환상적인풍광치기를기다리며, 그래도우리일행은환한햇빛아래에서마추피추라는숲을제대로감상하였으니그나마다행이라는생각이들었다. 잠시비가잦아드는것같아신전들이모여있는신성의광장 (la Plaza Sagada) 을향해내려가고있을때, 건너편산에선명한무지개가생긴것을발견하였다. 마추픽추에서무지개를보다니! 너무나도큰행운이라는생각이들었다. 다시비가내리기시작해주교의집이있는귀족의거주지역을거쳐, 세개의창문이나있는 ' 삼창 ( 三窓 ) 의신전 (Temple de la Tres Ventanas)' 과 3개의벽이남아있는주신전을빠르게둘러보았다. 가이드말에따르면이장소가중요함은건축의규모가크고돌을다듬은솜씨가비교적정교하기때문에금방알아볼수있는데, 잉카시대건축의계급에따른구별은재료와기술구사정도에서선명하게나타난다고 귀족의거주지역, 삼창의신전창문으로본경치, 태양의신전모습한다. 먼저삼창의신전은반원형으로지어졌는데, 광장쪽으로는벽이없는개방된형태로, 나머지세면에만벽이있고, 건물뒤동쪽으로커다란창이셋있어서이러한이름을가졌다고한다. 3개의벽이남아있는주신전은황제의미라를넣어두었던것으로추정되는데, 햇빛을통한건조효과를노리기위해지붕을만들지않았다고하며, 바로옆에는축제나행사때황제의미라를공개했을것을보이는안치소건물 (?) 이있다. 또한신전옆에오로지커다란돌로만쌓았는데도면도칼조차들어가지않을만큼정교하며, 돌과돌사이의접합면도상당히매끄러워서 ' 남미에서가장아름다운벽 ' 으로불리며유적을발견한빙엄을감동시킨것으로유명한, 돌로쌓은대단히아름다운벽이있
폭우로인해올라가보지못한천문관측소 [ 인띠와타나 ] 전경, 대신본의식용돌다는데비때문에확인해보지못한것이다소아쉬웠다. 비가더욱세차게내려신성의광장에서그림자를이용해계절의변화를감지하였다고전해지는돌기둥인잉카의해시계로유명한언덕위로보이는천문관측소인띠와따나는생략하고비를피할수있는건물이있는장소로갔다. 참고로마추픽추가번영을누리던때인띠와따나장소에서동짓날밤을새면서태양을묶어두려는제사를지냈던것으로추콘도르신전정된다고도한다. 건물이있는장소에는 [ 의식용돌 ] 이라고부르는의식용으로쓰이던거대한돌이있었는데, 춘추분때건너편산등성이의그림자모습이이돌의모습과일치한다고한다. 비가그칠기미를보이지않아다시출발하여콘도르신전으로갔다. 콘도르의신전은하늘로뻗치는자연적인암석의전체적인형상이독수리가날개를펼친모습이기때문에붙여진이름으로, 암석날개에인공석축으로힘껏확장시키고있었다. 자연과인공물의조화를잘이용한잉카인의디자인감각에감탄을할수밖에. 건물뒤쪽에서미라가발견된동굴도있어, 콘도르의머리부분에해당되는바닥편평한돌부분에서희생의식이치러졌을것으로추정하고있다. 우물 (Fuentes) 은계단형수로시설로, 정교하게맞물린돌틈사이로물이흐르게만든기술에감탄사가나올정도였다. 참고로이수로가높은신분의사람들이살던지역에있어그들이의식전에몸을씻거나생활용으로사용하던것으로추정된다고한다. 우물옆에굉장히특이한모양의구조물이하나눈에띄었는데, 구조물아래부분에커다란자연석을지붕처럼삼각형모양으로받치고, 특이하게깍은돌로입구를만들었
다. 이곳은왕족의미라를안치했던장소로추정되며, 파차쿠텍왕의시신을모셨다고도전해지는능묘 ( l a Tumba Real) 였는데, 이렇게추정하는이유는이능 우물 ( 왼쪽 ), 능묘와태양의신전 ( 오른쪽 ) 농경지역에서올려다본감시인의집및유적지전체풍경묘가태양의신전하단부분을차지하고있기때문이다. 능묘위에위치하고아까삼창의신전창문으로내려다본태양의신전 (Templo del Sol) 은커다란암석과인공석축이중합되어만들어진복합건축물로이유적지의다른건축물과는달리직선이직경 10.5 m 정도로휘어져들어오면서 J자모양의공간을만들고있어훨씬정교한모습이었다. 건물상단에뚫린창문으로들어오는태양빛을관찰해서계절의벼화를읽었다고한다. 특히동지와하지의정확한시기를그림자를통해파악할수있었는데, 파종과수확시기를결정하는데아주중요한정보를왕이직접통제함으로써통치권한을확보했던것으로추정된다고한다. 내개인적로는아까비때문에지나쳤던태양을묶어두려는제사를지냈던것으로추정된다는천문관측소인띠와따나보다이쪽이더설득력이있다는생각이들었다. 비가계속내려가이드가유적지입구에서만날시간을정하고다소자유시간을주었다. 다리도아프고하여천천히유적지입구쪽으로걸어가며층층이계단식밭으로이루어진농경지역을살펴보니알파카가한가롭게풀을뜯고있는광경이눈에띄었다. 또한못내아쉬워발을멈추고되돌아서서오늘내발로걸으며확인한유적지풍경을다시한번감상하였다. 아까그냥지나쳤던주광장한가운데나무가한그루심어져있다는새로운사실과함께, 삼창의신전이이쪽에서는또다른느낌을주고있다는사실등... 유적지입구에서셔틀버스를타고다시아구아스깔리엔테스로내려오는데옆자리에
마추픽추주광장및안내판마침마추픽추트랙킹을마치고돌아가는호주젊은여성을만났는데, 트랙킹을위해 2 주일간휴가를내었다고한다. 여행은이런식으로해야되는것인데, 우리나라패키지여행은인증샷여행이니아직여행문화가선진화되기까지는멀었다는생각이들었다. 아구아스깔리엔테스에서잠시자유시간을가진후저녁식사를하고기차를타고오얀타이탐보역으로귀환하였다. 오늘관광으로피곤도하였지만밤기차에서다른한국인관광객가이드와이야기를나누며오느라지겨운줄몰랐다. 오얀타이탐보에서다시버스를타고호텔로돌아올때까지비가계속내리고있었다. 호텔에도착하자마자비에젖은다리의상처를치료하고, 오늘이번여행의하이라이트인마추픽추관광을무사히마쳤다는것을자축하며휴식을취하였다. 3 월 12 일 ( 수 ), 아홉째날리마관광 아침에일어나밖으로나가니어젯밤늦게까지내리던비가그치고호텔주변안데스산맥으로너무나도멋진운해가펼쳐지고있었다. 멋진풍경을내눈에담아두기위해한동안풍경에눈을떼지않고감상하였다. 오늘은리마로귀환하는날이므로, 서둘러아침식사를하고호텔체크아웃을한다음 7시조금지나쿠스코로출발하였다. 일행중어제비를맞고그동안의피로가누적되어서그런지감기걸린분들이많이생겼다. 아직여행의절반도마치지않았는데다소걱정이되었다. 어제비온덕에성스러운계곡의넓은평원에오순도순살고있는원주민마을들의풍경이너무나도평온하고아늑해보였다. 가이드가산맥한쪽을가리키며, 저쪽에황토색계곡사이를가득메운하얀색염전살리네라스 (Salineras) 가있다고하며, 땅으로부터소금을수확하는토판염 ( 전 ) 이라고하며, 한국강남에서도잉카소금이란이름으로팔리고있다고한다. 원래바다였던곳이갑작스러운융기로인해하늘과맞닿은고산지대가되어생겨난것으로, 산속에서미네랄이녹아계곡을따라내려오는것을막아서태양열을이용해물을증발시켜 3000미터산속에서소금을얻는구조라고한다. 염전의규모가매우크며, 소금생산에는이틀이소요되고, 주 3회생산이가능하다고한다. 또한소금은층별로색깔이며용도가다른데, 맨아래형성된소금은의약품으로위는순차적으로식용및다른용도로쓰인다고한다. 그러면서고산음식이짠이유가고산증으로인한 Na 부족분을보급하기때문으로, 이곳에서수확된소금이안데스산맥을생활터전
아침에호텔에서바라다본안데스산맥의멋진운해풍경으로삼은잉카인들에게귀중한국가자원으로이곳소금을 태양의선물 이라고지칭하기도했다고한다. 우루밤바마을삼거리에서버스가그저께밤쿠스코에서피삭을거쳐이곳으로왔을때이정표에쿠스코로되어있는방향으로돌아산길을오르기시작하였다. 아하! 이길이친체로와모라이로가는길이구나하고생각하고있는데산길을올라가면서차창밖으로뒤에설산을배경으로한우루밤바의멋진마을풍경이눈에들어왔다. 한동안멋진풍경을쫓느라정신이없는사이버스는넓은고원평야지대를달리고있었으며, 주변으로꽃의색깔이다른감자밭이넓게펼쳐져있었다. 이곳에서얼마멀지않은곳에잉카시대의농업실험장이있는모라이 (Moray) 라는마을이있겠다라는생각이들며이곳에대해조사하였던내용이떠올랐다. 쿠스코근방친체로와우루밤바사이에있는작은마을마라스에서갈수있는잉카시대의농업실험장인모라이 (Moray) 는잉카의농업기술이얼마나뛰어났는지를보여주는우주선착륙장을연상시키는계단식원형구조의밭이해발3400m에있는데, 가장낮은지대부터차차높은곳으로옮겨심는식으로곡물들을고산지대에적응시켰다고하며, 각계단의높이를달리하여바람과햇빛의달리함은물론계단높이에따른온도변화도이용했다고한다. 주요작물은옥수수와감자이며, 이곳실험장은비가많이와도물이차지않고스민다하니놀라운정도로관개및배수시설이층별로잘되어있으며, 우기에도최하부중앙원이수영장이되는일은없었다고한다. 잉카제국때많은개량으로인해당시 1500여종, 현재는 3000종의감자가존재한다고한다. 버스는운해에빠져있는드넓은안데스고원지대를계속달리고있는데아침의상쾌함과함께무릉도원에와있는것같은황홀감마저느껴졌다. 친체로조금못미처도로가에버스를세우고밖으로나와자연의상쾌한공기를마시며환상적인광경을연출하고있는안데스산맥의설산을감상하였다. 사진을찍었지만내눈으로느끼는멋진모습이잡히지않아다소아쉬웠지만평생기억에남을장관을눈속에담았다. 버스를타고쿠스코로가면서가이드가페루가원산지인감자가프로이스 ( 독일 ) 로갔다가아일랜드로퍼져갔고, 그후전세계로퍼져갔다고하며, 미국역대대통령 44명중 22명이아일랜드출신이라며감자의대단함을이야기해주었다. 버스가한적한안데스고원마을인친체로 (Chinchero) 를지나갈때보니어제지나온피삭과마찬가지로원주민들이모여살고있는평화로운마을로, 마을중앙광장에하얀회벽건물이있는데
친체로마을근처에서본안데스고원의멋진운해및설산이것은쿠스코와마찬가지로잉카의신전을허물고그석벽위에세운성당이며, 성당안은 지진의신 으로불리는검은피부를가진예수나일하는성모마리아의그림등이곳원주민들이독특한그들만의방식으로가톨릭을받아들였음을짐작할수있는이미지로가득하다고한다. 또한성당밖에는잉카인들이 대지의어머니신 으로섬긴빠차마마의상징인다층계단위에십자가가놓여있고, 십자가한가운데에는잉카의상징인태양이그려져있다고한다. 다음번다시페루에올수있다면이곳도발로걸으며직접확인해보기로하였다. 쿠스코에가까워져다소창밖으로볼거리가없어졌을때, 가이드가애주가인내게귀가솔깃해지는이야기를해주었다. 이곳에도술집이있는데, 장대끝에빨간봉지를걸어놓은집은옥수수로만든막걸리집이고, 파란봉지를걸어놓은집은여자가나오는니나노식막걸리집이라고알려주었다. 다음에오면이두곳을필히현장체험해보아야겠다는생각이들었다. 9시조금지나쿠스코공항에도착하였다. 이틀전이곳에도착하였을때는못견디게아팠던다리의상처도이제는면역이되었는지그다지아프지않았다. 체크인하고게이트앞으로가서기다리다 10시에 LA 2022편으로쿠스코를출발하여리마로향하였다. 만이틀간의잉카제국의상징도시인쿠스코와마추픽추관광으로보지못한곳과제대로못본것에대한아쉬움도있었지만왠지잉카제국에대해좀더알게되었다는뿌듯한기분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