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되어 있었다. 슬하에 5남매를 두셨으나 3남매가 근무력증을 앓고 있어서 가정생활도제대로하지못하는3남매를위해평생을바치시고자신의아픔을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호스피스 완화의료만이 우리가 할머니에게 해 드릴 수 있는 전부가 되어버렸다. 평생 동안 자녀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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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 동체 순례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 시흥 전진상복지관/의원 홍 순 택 새길기독사회문화원 간사 김 할머니를 찾아서 청담복지관의 사회복지사 소개로 찾아오신 분은 말기암을앓고 계신 김 할머니의 따님이었다. 환자의 상태와 가정환경을 물어보는 중 벌써 7년 전에 우리 의원에 다니셨던분이시고김할머니의손자는우리복지관의장학생으로고교를졸업하였으 며지금은어느작은회사에근무하고있음을알게되었다. 평소목요일에는환자방문을 나가기 때문에 새로운 환자등록을 받지 않았지만 환자의 상태가 위중하시다 하여 가정방문을 미루고 환자를 등록시켰다. 이날오후의료진과함께찾아간할머니의집은다가구주택의1층후미진방이었다. 불과몇년전까지만해도산동네판잣집들이많이눈에띄어누구나어려운동네임을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은 판자촌 자리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고, 밑에 동네에는 다가구 주택을 지어서 겉으로 보기에 영세민들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렇게 집안으로들어서면어둡고습기찬골방이나혹은반지하방에서고생하시는환자들이 많다. 할머니는 약 2개월 전 암 말기라고 진단을 받으실 때까지 혼자서 병을 숨기고 사셨기 때문에 가족들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치료가 불가능한 호스피스 58_

2 환자가 되어 있었다. 슬하에 5남매를 두셨으나 3남매가 근무력증을 앓고 있어서 가정생활도제대로하지못하는3남매를위해평생을바치시고자신의아픔을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호스피스 완화의료만이 우리가 할머니에게 해 드릴 수 있는 전부가 되어버렸다. 평생 동안 자녀들 때문에 너무나 큰 십자가를 지고 사셨는데 이제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또 이처럼 큰 아픔을 받으셔야 하는 김 할머니에게서 우리가 보아야 할 하느님의 영광은 무엇일까? 가까이사시면서또우리가하는일을알고계시면서도전진상의원가정호스피스를 더 일찍 찾아오지 못하신 할머니의 처지가 안타깝기만 하다 년 이른 봄에 쓰여진 글, 시흥 전진상복지관/의원 홈페이지에서 판자촌으로 널리 알려진, 그러나 이제는 판자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 는 곳 중 하나인 시흥에는 1975년부터 32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공동 체가 있다. 이 공동체는 32년 동안 변함없이 시흥 지역의 가난한 이웃을 대상 으로 의원과 약국, 그리고 복지관을 운영해 왔다. 그 이름이 시흥 전진상복지 관/의원이다. 앞에 인용한 글은 지난 32년 동안의 전진상복지관/의원의 노고 와 시대적 변천을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더불어 눈부신 세상의 변화와 는 달리 너무도 달라지기 힘든 우리네 가난한 이웃들의 삶이 대물림되는 아 픔 또한 보여주고 있다. 김 할머니 와 그 가족들 은 아직도 우리 곁에 많이 있다. 하지만 예전보다 더 눈에 띄질 않는다. 나 스스로도 김 할머니 같은 분을 매스컴을 통해서가 아니고는 직접 뵌 적이 별로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전진상복지관/의원 같은 나눔의 공동체가 32년째 여전히 바쁘게 운영되고 있 다는 것이 불편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임에 틀림없다.

3 시흥 전진상복지관/의원 전진상복지관/의원은 지난 1975년 김수환 추기경의 요청에 국제가톨릭 형제회 (A.F.I.: Associas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 이하 약자로 아피 )가 응 답하여 시작되었다. 아피 회원 중 간호사, 약사, 사회복지사인 회원 세 사람이 서울과 인근의 판자촌 10여 곳을 돌아본 후 현재의 장소를 선택하고 살러 들 어왔다. 현재는 의원과 사회복지를 통합해서 일하고 있어요. 아시다시피 사람은 전인적인 존재잖아요. 그래서 의료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복지사의 도움까지 함께 제공하고 있어요. 의료와 사회복지, 그리고 정서적인 환경까지 한꺼번에 돌보는 전인적인 접근이라 할까요. 그런 일을 1975년 시작할 때부터 함께 해오려 했어요. 처음부터의료문제는상당히중요시하고있었어요. 선택한지역이영세민지역이고 가난한지역이기때문에경제적인어려움이악순환되더라구요. 어디부터이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할까 고민했죠. 당시에는 건강하기만 하면 어디든지 날품팔이라도 해서 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병들고 나면 안 되잖아요. 게다가 그때만 해도 의료비가 너무 비쌌죠. 그러니 우리가 의료문제부터 이분들께 도움을 드려서 건강을 찾아드리자 한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이분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자는 생각이었죠. 사람들은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그건 아 마도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가정환경 을 어렵게 하고 육아환경을 어렵게 함은 물론 아이들의 교육환경까지 어렵게 한다. 현대가 자본주의 사회이니 피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가난한 가정의 아 이들은 방치되는 경우도 많을 뿐만 아니라 갈수록 높아져만 가는 사교육의 거대한 탑 아래에서 맴돌기 십상이다. 그러다보면 그 아이들은 흔히 말하는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가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다시금 자신들이 자랐던 것과 같은 어린 시절을 물려주길 원치 않음에 60_

4 도 불구하고 자식에게 어쩔 수 없이 가난을 물려주게 되는 불행한 경우가 적 지 않다. 이런 상황에 돈을 벌어오는 가족에게 사고나 병이 찾아온다면 그 가정의 가난의 굴레는 더욱 무거워지고 더욱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세계 일 류를 소리 높여 외치는 신자유주의의 경쟁이나 숨이 턱턱 막히도록 가파르게 치솟는 입시경쟁과 사교육의 아성은 탈출 을 더 어렵게, 그것도 제도적으로 어렵게 한다. 학력만능주의라 할 정도로 학력에 대한 차별이 심한 우리나라 에서 최근 사년제 대학의 입학과 가정의 경제적 형편과 상당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조사 자료들이 언론을 통해 자주 보도되는 것은 그 반증일 것이다. 어른들께 듣던 개천에서 용 난다 는 류의 이야기는 이제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처럼 가난한 이들의 어려움의 목록이 늘어나는 만큼 전진상복 지관/의원이 할 일도 다양해져 왔다. 그러고 나니 다음에 아동문제가 보이더군요. 이건물 지하에는지역아동센터라고 있는데요. 한동안 유치원을 했었어요. 예전에는 유치원 교육이 부족했기 때문에 여기 아이들은 학교 갈 때까지 유치원이 뭔지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태반이었죠. 어쩔수없이부모모두일을나가야하는형편이다보니아이들은그냥방치되더라구요. 그래서 골목에 뛰어노는 아이들 데려다가 무료로 골목유치원 을 시작했어요. 요즈 음은 출산율도 저하되어 아이들도 준데다가학교에서도 병설유치원을 하고 사설유치 원 또는 그에 준하는 학원들이 많이 생겨서 유치원 아이들이 많이 줄었긴 해요. 그래도여기도저기도못가는지체장애아이들이나부모님들이경제적으로나신체적 으로 어려워 돌보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그런 아이들이 우리 유치원에 다니고 있지요. 또 방과후 공부방도 시작했어요. 지역이 열악하다보니 부모들이 다 일해야 하고 부모가 집에 있다고 할지라도 요즈음은 공부가 어려워져서 수준에 맞추지 못하기 때문에 예전처럼 부모가 봐 주기 어려워요.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밖으로 돌게 되고 자연스럽게학력이 떨어지고 학교에서는학력이떨어지는그만큼 아이들에게소외당 하고 학교도 재미없게 되고 하니 더 밖으로 돌게 되고 성적은 더 떨어지게 되고 악순환이 반복되더군요. 전직 교사들이나 시간이나 생활에 조금 여유 있는 분들이 61

5 하루 이틀 오셔서 공부방의 아이들을 거의 개인지도 하다시피 공부도 가르쳐주고 생활도 살펴주고 해 주셨어요. 그러다보니 아이들 성적도 올라가게 되고 아이들도 학교생활에 흥미를 더 갖게 되고. 게다가엄마아빠가모두새벽부터밤늦게까지일을하는경우가많으니까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이 제법 있어요. 지난해 봄만 해도 얼굴에 마른버짐이 핀 아이들이 있었어요. 공부방에서 공부하고 오후에 이른 저녁 먹고 하니까 아이들도 영양보충 되면서 버짐도 없어지고 했죠. 그러고나니까 한부모가정이나 조부모가정 학생들의 중등과정, 고등과정 학비 문제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래서 장학금 지급하는 일도 하게 되었죠. 또 가족 형태가 점차 핵가족 형태로 변하다 보니 독거노인 문제가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독거노인 용돈 드리고 방문하는 일도 하게 되었고 그렇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들을 따라가면서 하다보니까 형태적으로는 종합적인 사회복지관에서 하는 일들을 하게 되었어요. 근래 들어 저소득층을 위한 영세민 제도나 각종 사회보장제도들이 점차 확대-보완되고 있다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영세민제도가 확충되어 최하층 에 대한 생계비와 의료복지 지원이 강화되고 있고 의료보험도 형식상으로는 전국민에게 확대되었으며 보장범위나 비율도 느리지만 꾸준히 상향되고 있 는 추세이다. 뒤늦었지만 이제는 국가가 나서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챙 기고 있는 것이다. 62_ 나라가 달라지니까 상대적으로 좋아지는 것 같긴 해요. 우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영세민제도가 없을 때였어요. 당시 영세민의 생활은 절대빈곤이었죠. 병이 생기면의원을갈 수도없었기에 민간요법이나대체의료 등을 많이쓰고있더라구요. 지금은 나라가 경제적으로 당시보다는 많이 나아졌고 사회보장제도, 영세민제도, 의료보험제도 등이 생겨서 최소한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런데요즈음은영세민들은생계비지원나오고의료의약무료로받을수있지만, 오히려차상위계층이나, 호적상에는자녀가있으나한번도찾아오지않는경우라든지, 호적상의 자녀가 전실부인의 자녀라든지 해서영세민 지정을 못받는 분들이 있어요.

6 또 나이가 젊어도 사업이 완전히 실패하고 갈 곳 없어 떠밀려 온 경우도 있죠. 이런 경우는 국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분들이 적지 않아요. 저희는 처음부터도 도움을 받을 곳이 없는 분들을 위해서 일을 했어요. 영세민 제도가 없을 때에는 제일 어려운 분들, 영세민 제도가 생긴 후에는 영세민카드가 없으면서 어려운 분들, 또는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는 분들, 차상위계층들을 돕고 있어요. 전체적으로 보면 많이 좋아졌지만 상대적인 빈곤은 여전히 있고 지금도 사실은 의식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숨겨진 분들이 많지요. 특히 최근에는 확대된 의료보험 제도에서도 별 도움을 받지 못하고 큰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바로 말기암 환자들이시더군요. 특히 가정 형편이 어려운 말기암 환자분들이요. 말기암 환자가 되면 환자 본인은 통증으로괴롭지만 병원에서 제대로 도움을 받기도 힘들고 가족들도 간병을 위해 가정을 돌보기 어려워요. 통증이 수반되지 않는다고 해도 거동이 불편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다 핵가족이고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집에서 돌보기 너무 힘든 거예요. 그런데다가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기까지 하니. 사회와 가정을 위해 공헌하셨음에도 맨 마지막에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가게 되시는 게 너무 안타까워서 요즈음은말기암환자를 돕는호스피스 일에도중점을두고 있어요. 이 건물의 3층에는 호스피스 환자분들을 낮 동안이라도 돌볼 수 있는 낮병실이 있어요. 가족들이 일을 나가야 하는 낮에라도 저희가 돌봐 드리는 거죠. 시흥 전진상복지관/의원의 아피 회원들 c전진상복지관/의원 63

7 1975년 처음 시흥에 온 아피(국제가톨릭형제회) 회원 세 명은 아직도 같 은 곳에서 일하고 있다. 변화가 있다면 그녀들의 머리가 많이 하얘졌다는 것. 그리고 처음 간호사로 이곳에 왔던 벨기에 출신의 회원은 의학 공부를 하여 이제 의사로 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세 명의 식구가 더 늘어 여섯 명이 되었다. 변화가 없는 것이 있다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비록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지만 여전히 많다는 것이다. 이제 전진상복지관/의원에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 6명의 아피 회원이 있고(의사 2, 약사 1, 간호사 1, 사회복지사 2) 15명의 직원이 있으며 15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있다. 아피 회원 6명은 짧게는 7년에서 길게는 이곳의 역사만큼 이곳 주민들과 함께 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업이 다양해지면서 직원도 늘어났고 자원 봉사자와 후원자들도 늘어났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 다. 환자를 진료하여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후원금으로 돈을 들여가며 형편 이 어려운 환자들을 진료하고 어려운 이웃들의 복지를 돕기 때문에 재정적인 문제는 늘 어려움으로 남는다. 보통 의원은 돈을 많이 버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저희는 어려운 분들을 진료하다 보니까 후원금을 받아서 진료를 하고 있는 형편이에요. 2차 진료는 자원봉사 하러 오시는 전문의 분들이 계셔서 진료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투약을 하게 되거나 2차, 3차 검사를 받게 되거나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게 될 경우 후원으로만 충당해야 하는 저희로써는 쉽지 않을 때가 많지요. 그렇지만 저희 일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고 알리고 싶지도 않았어요. 봉사자분들도 알음알음 알고 찾아와 도와주시는 분들이구요. 알려지기보다는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니까 그 가르침 따라서 우리도 삶에서 삶으로 그냥 살자고 결심한 사람들이거든요. 우리 회원 6명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서 그런지 직원들도 적은 급여에도 꾸준히 우리와 같이 일해 주시고, 봉사해 주시는 각과 전문의 선생님들도 바쁜 일정인데도 꾸준히 찾아와 봉사를 해 주고 계시지요. 30년 넘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매달 빠지지 않고 찾아와 주시는 의사 선생님도 계세요. 64_

8 아피 가톨릭의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아피는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37년 벨기에의 평 신도 여성인 이본 퐁 슬레(Yvonne Poncelet, 1906~1955)에 의해 설 립되었다. 퐁슬레는 중국식 수도복을 입은 레브 신부와 중국 어린이, 그리고 전진상 메모 c 전진상복지관/의원 당시 중국에서 활동 중이던 뱅상 레브(Vincent Lebbe, 중국명 雷 鳴 遠, 1877~1940) 신부의 선교관과 평신도 선교 운동에 깊은 감화를 받고 그의 뜻 을 받들어 아피를 창설하고 평신도 활동과 선교에 일생을 바쳤다. 레브 신부 는 토착화와 평신도 사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1926년 최초의 중 국인 주교단을 출범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핵심을 전( 全 ), 진( 眞 ), 상( 常 )의 세 단어로 표현했다. 레브 신부님이 중국에 선교사로 가서 한자와 사서삼경을 공부하면서 내가 그리스 도를 전하러 중국에 왔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나보다 먼저 와 계시구나! 이 문화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찾아야 한다 고 하셨어요. 그리고는 복음의 정신, 성경말씀을 한자로 표현한다면 전, 진, 상으로 표현하겠다, 하신 거죠. 온전 전( 全 ) 자는 바로 예수님께서 완전히 십자가에 자신을 바치신 것, 참 진( 眞 ) 자는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는데 그것은 인류를 참답게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늘 상( 常 ) 자는 끊임없는기쁨을 말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기쁨이 단순한 즐거움이라든지가벼운쾌락이 아니고 자기 생명을 완전히 바쳤을 때 오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바치신 후에 얻은 부활한 삶, 그 새로운 삶의 심연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에요. 65

9 전 은 전희생( 全 犧 牲 ), 즉 온전한 자아봉헌을 뜻한다. 자신을 위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하여 살기 위해 자신이 온전히 죽는 전적인 봉헌을 말하며 진 은 진애인( 眞 愛 人 ), 즉 참다운 사람 사 랑이다. 단순히 이웃을 좋아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 즉 온전한 자아봉헌을 통 해 자신을 철저히 비워버린 후 나오는 무욕( 無 慾 )의 사랑, 완전한 이웃에의 헌신을 의미한다. 이 같은 전과 진의 영성 위에서 평신도들의 모임에도 불구 하고 아피의 공동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즉 공동생활은 전적인 헌신을 위한 물적토대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 은 상희락( 常 喜 樂 )이다. 때때로 가 아니라 항상 기쁘게 생활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기쁘게 살자 고 마음 먹고 노력하여 기쁘게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자기봉헌과 참된 이웃사 랑의 삶을 사는 가운데 그 삶 깊숙한 곳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어느 신앙인인들 때때로 찾아오는 번뇌와 회의로부터 온전히, 게 다가 늘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같은 부침( 浮 沈 )은 인간의 숙명이 아닐까? 항 상 기뻐하라 는 복음의 말씀이 가장 큰 감동을 주는 것은 그만큼 우리 인생이 고통과 번뇌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지난 세월 이야기를 들어보니 전진상복지관/의원의 아피들의 지난 30여 년은 보통 사람들의 30년보다 더한 고통과 번뇌의 날들이었을 텐데 상희락 은 그들의 삶에서 어떻게 구현되었 을까? 게다가 그토록 만만치 않다는 공동생활 에서 말이다. 내게는 전, 진, 상 중에서 상이 가장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전, 진, 상 중에 어떤 것이 제일 힘드세요? 저는 상이 제일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사실 전, 진, 상을 하나씩 떼어서 생각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예수께서 온전히 자기를 바쳐 이웃을 사랑하며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부활하셨잖아요. 바로 그 부활과 같은것이기쁨이아닐까생각이들어요. 부활하지 않았다면예수님의죽음은 무의미할지도 모르죠. 부활하셨기에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더 큰 의미가 있듯이 온전히 자기를 바치고 정말 참답게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기쁘지 않다면 66_

10 그것은 의미 없는 것이잖아요. 전, 진, 상 중에서 어떤 것이 쉽다 어떤 것이 어렵다 말하긴 어려운 것 같아요. 하지만 분명한 건 항 상 기쁨 이라는 것은 전과 진이 우선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기쁨이라는 거죠. 나도 모르게 솟 아나는 기쁨.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 겠군요. 그렇지만 저희들 삶도 똑같은 삶이에요. 그야말로 지지고 볶고 싸 우고 화해하고 그렇게 사는 삶이에 요. 특별한삶이아니에요. 단지우리 가전, 진, 상의정신을가지고매일매 일 생활의 순간을 그리스도의 정신 에 따라서 살겠다는 마음으로 이곳 에 왔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기 전진상복지관/의원의 아피 회원들이 아침 저녁으로 공동기도를 드리는 경당 때문에 그런 의식이 있는 거지, 그런 의식이 있다고 해서 더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더 못 사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평범한 삶의 형태를 살고 있어요. 어항 속의 물고기를 보며 물속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아무리 머 리를 굴려본들 그리하여 나오는 답의 목록에 물고기가 얼마나 동의를 하려나. 나는 그런 전적인 헌신과 참다운 사랑을 하고 있는가? 그것 없이 기쁨만을 좇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값싼 은총을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난 30여 년 동안 이 곳에서 살아오시면서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이나 사람이 있으시다면 소개해 주시겠어요? 그런 질문 받을 때가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다 지나간 일이니 67

11 답을 못하겠어요. 다른 질문에 대한 답은 줄줄이 잘 할 수 있겠는데 그 냥 생활이다 보니. 어설픈 질문이었다. 그렇지만 현명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분들에 게는 전과 진이 있었기에 상도 자 연스럽게 함께 하고 있었다. 다 지 나간 일, 그냥 생활이다 보니 라 는 답은 이분들이 진지하게 전과 진을 살아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날 감싸 안았다. 지난 30여 년의 세월 동안 이분들께 어찌 고통이나 괴로 움, 그리고 관계의 틀어짐이 없었 겠는가. 하지만 이분들이 다른 이 경당 한편의 성모아기예수상과 전진상 글자 들과 다른 점은 아마도 고통과 괴 로움, 관계의 틀어짐을 딛고 늘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쁨의 원천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리스도라는 원천, 이웃이라는 원천, 공동생활을 하는 식구라 는 원천. 신앙, 인간의 해방을 위한 참여 전진상 영성의 토대 위에서 아피 회원들은 신앙, 인간의 해방을 위한 참여, 우주성 이라는 세 개의 실천지침을 갖고 행동하려 한다. 사도직을 실 천함에 있어서 이 세 가지를 늘 우선적인 선택의 기준으로 놓고 활동하는 것 이다. 68_

12 신앙 은 모든 사람을 사랑과 정의, 평화와 존엄성 안에 부르시는 그리 스도 에 대한 신앙이며 인간의 해방을 위한 참여 는 신앙에서 오는 근본적 인 요구 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아피는 인간의 존엄과 정의, 형제애를 갈구 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우선을 두고 활동해 왔다. 아피의 회칙도 아 피 회원은 억압받는 이들, 가장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기 위해서는 삶의 형태 와 직업을 선택할 때, 보다 정의롭고 인간다운 세상을 위한 투쟁에 동참하는 일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고 명시한다. 1956년에 한국에도 아피가 들어왔다. 아피들이 한국에서 주력한 활동은 여성과 가톨릭 평신도의 활동을 향상시키기 위한 일이었다. 또한 1970년대 이래 전진상 교육관의 활동을 통해 자유와 민권 의식을 고취하는 역할도 해 왔다. 더불어 의료, 사회복지, 노동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아피 회원들은 1970 년을 전후하여 안양, 시흥 등지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시흥의 전진상복지 관/의원의 활동도 이 같은 신앙 에 뿌리를 두고 인간 해방을 위한 참여 를 위해 선택하고 투신한 일인 것이다. 1969년 설립된 안양의 전진상복지관은 노동과 관련된 일을 중점으로 해 왔다. 또 다른 회원들은 생태운동에 투신하 고 있고 우리 사회의 낮은 여성인권을 보호하고 높이는 일, 가족의 화해와 안정을 위한 상담사역 등에 헌신하고 있다. 그리고 우주성 아피는 2차대전과 대전 후의 혼돈 속에서 동맹국과 연합국 국민을 가리 지 않고 누구에게나 의료 복지 등을 제공하는 활동을 했으며 민족, 국가, 이 념, 문화를 넘어 형제애를 고취하는 활동을 해왔다. 이는 아피의 세 번째 실천 지침인 우주성 과 깊이 연결된 것이었다. 전쟁 중, 그리고 전쟁 후에는 승전 국과 패전국, 또는 침략국과 침략을 받은 국가 국민들 사이의 극심한 반목이 필연적이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치뤘으니 오죽하겠는가.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아피는 화해와 협력을 위한 활동을 펼쳐 왔다. 69

13 그렇다면 단일민족이란 생각이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고 문화적으 로도 다분히 단일한 모습을 갖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이 우주성은 어떻게 꽃피울 수 있을 것인가? 70_ 처음에는 가시적인 우주성을 강조했어요. 1956년 한국에 아피가 들어왔을 때는 이태리, 독일, 벨기에, 캐나다, 프랑스 같은 다양한 국적의 아피들이 한국에 들어와 살았어요. 생긴 것도 다르지만 자라면서 익혀온 교육, 문화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오는 갈등을 크리스천 정신으로 어떻게 극복하며 사느냐, 이것을 보여주는 거였죠. 그런 삶이 우주성을 표현하는 것이었어요. 그때만해도외국에나가기가하늘에별따기처럼어려웠고외국사람볼수있어야 미국사람들 정도였죠. 그런데 이제는 세계가 한 지붕이 되는 세상이 되었잖아요. 그러면서 우주성이라는 것도 가시적인 것에서 각자 내면에 있는 무언가로 새롭게 받아들여졌어요. 자기를 벗어남, 자기를 초월해서 나와 다른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우주성의 실현이라는 것이죠. 한국에서 외국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을우주성의실현이라보고실천하기는어렵겠지요. 하지만지역적인차이, 정치적인 차이 등으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못 받아들이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하거든요. 그뿐만아니라내가추구하는것과다른나의모습도못받아들이는경우가많잖아요.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우주성은 내 안에서부터 이뤄져야 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나를있는그대로받아들이자, 하느님께서사랑하시는나인데내가왜나를미워하고 인정을 못하나, 그런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우주성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봐요. 그리고 사실은 그게 제일 어려운 우주성의 실현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지금은 가시적인 우주성 차원이 아니라 정말 나와 다른 모든 것에 열려진 마음, 받아들이는 마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실현하는 것을 우주성의 실현이라 할 수 있겠죠. 우리는 고유한 문화고 민족이고 하면서 너무도 우리 것만을 우월하게 생각해 왔거든요. 또 지조를 지켜야 된다 하면서 옛날에 생각했던 것을 고수해야만 지조를 지키고 주체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죠. 그런데 우주성을 실현하려다 보면 그게 아니잖아요. 내가 무너져야하고남의 문화를 내문화처럼 똑같이 귀중하게생각해야 하고 남의 가치를 내 가치처럼 똑같이 귀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우주성인데

14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우리에게는 힘든 것 같아요. 이 세상에서 가장 눈에 안 보이는 것은 아마도 내 마음이 아닐까. 그 마 음을 살피고 굳은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에서부터 우주성은 실현되는 것일 것 이다. 어느 종교치고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은 종교가 있을까. 그러나 수많은 종교와 종교인들이 넘쳐나고 있음에도 갈수록 보이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공 을 들이는 우리들은 정녕 성인들의 가르침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저 세상 탓만 하기에는 우리의 본성이 너무 악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일까? 레브 신부는 타격아 ( 打 擊 我 ), 타도아 ( 打 倒 我 )라는 표현을 영성수련의 지침 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공동생활 그래서 공동생활이 어려운 것일 것이다. 같은 가족이야 어찌되었든 서로 혈연이라는 강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고 한 가족문화 속에서 자라나 서로 비 슷한 면이 적지 않을 것이기에, 그리고 같이 사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 기에 함께 사는 것이 상대적으로 수월하리라.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남이라 면. 오랜 연예를 거친 부부도 혼인 초기에는 서로 많은 차이를 느끼며 그 차이를 좁히기 위해 무던히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가. 공동체에 관심 있는 사람들 중에는 공동체요? 좋죠. 그런데 같이 살지만 않 으면 되요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니. 그래서 공동체의 공동생활은 무엇보다도 힘든 것이며 힘든 만큼 자신을 쓰러트리고 역설적으로 자신의 본 모습을 받아들이며 나아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가장 적 절한, 그러나 가장 치열한 현장이 되기도 한다. 아피는 창설 당시 독신의 여성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수도 회가 아닌 평신도 사도직 단체로서 세상 속에서 살기 위해 애써왔다. 1966년 총회에서는 남성회원과 기혼회원의 가입도 허용되었으며 현재 한국에는 40 여 명의 아피 회원이 있고 기혼회원 한 쌍이 있다. 71

15 일반 수도회를 선택치 않고 아피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저는 큰언니가 수녀님이세요. 수녀님 생활을 보면 서 그렇게 가고 싶지는 않더라구요. 조금은 더 사회성 있는 곳에서 일을 하고 싶었어요. 지금은 수도회도 많이 달라졌지만 제가 이 단체를 선택할 때만 해도 수녀원의 생활이 상당부분 폐쇄적이고 공동체를 강조하고 있었 어요. 무엇보다 제가 그런 생활을 감당할 힘이 없었고 그 다음으로는 사회 속에서 함께 살고 싶었어요. 수도회는 아니지만 아피 회원들은 많은 경우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물론 가정을 가진 회원이나 홀로 다른 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회원의 경우는 별 도로 생활하기도 하지만. 시흥 전진상의 성모예수상: 시흥지역어린이를닮은예수가인상적이다. 72_ 저희들이 32년 동안 일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 공동체로 일하기 때문일 거예요.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 이 아무리 많아도 혼자 일하는 것과 여섯 명이 함께 일할 때 나오는 시너지의 차이는 엄청나요. 각자의 능력 을 단순히 합한 것 이상의 것이 나와요. 그뿐만 아니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많은 분들이 믿음을 갖고 후원해 주고 봉사해 주시죠. 그렇게 일이 발전해나 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공동체로 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절실히 느껴요. 초기에 3명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6명이 되었어요. 함께 공동체로 산다는 것, 하느님도 삼위일체 공동체라 니 우리도 혼자 살 때보다는 같이 살 때 그 가진 빛을 두 배 세 배 보여줄 수 있지 않겠어요?

16 평신도 생활을 하면서 굳이 혼인을 하지 않아야 할까? 물론 이제는 아피 들에게 혼인이나 독신은 회원 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로 변화했지만 여전히 독신을 지키는 회원들도 많이 있다. 소가족주의가 사회의 연대성을 저해한다 는 일각의 우려를 생각한다면 독신인 아피 회원들은 새로운 가족, 확대된 가 족을 실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도자가 아니면서도. 공동생활하는 이들이 새로운 가족이 되고, 함께 헌신하며 같이 살아내는 주변의 이웃들을 새로운 가족으로 만드는 실험.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기 때문에 형제다, 라는 생각을 공동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아직도 갖지 못했을 것 같아요. 크리스천이라면 모든 사람을 가슴에 형제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게 부끄럽기도 하죠. 이제 알게 된 것이 은총이고 감사해요. 어떤 생각으로 사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부부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아요. 독신으로 살아야만 이런 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부부로산다고구현할수없다는것도아니고. 많은부부들이이런정신으로 함께 살았으면 해요.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 아피에 대한 소개를 처음 부탁했을 때 아피 회원 한 분이 자신들은 다리 와 같은 존재이고 이곳 복지관/의원도 다리와 같은 곳이라고 말해 주었다.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어요. 이 자리에 온 이유도 있는데. 그 당시만 해도 나라가 전부 가난했잖아요. 여기 뒤에 보이는 산의 아파트 지역이 전부 판자촌 지역이었어요. 아마 서울에서 제일 큰 지역이었을 거예요. 인구가 4만 5천인가 했던. 그런 지역인데 의원이 단 2개, 약국이 하나 있었죠. 하지만 저희는 판자촌 지역 한가운데로 들어가 자리를 잡지는 않았어요. 항상 우리 단체의 영성이랄까

17 정신이랄까, 하늘과땅의다리를놓으시고옆사람과다리를놓으신예수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아 우리도 어려운 분들과 조금 나은 분들, 도움이 필요한 분들과 도움을 주고 싶으신 분들을 잇는 다리를 놓아서 우리 모두 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공동체를 이루는 데에 우리 삶을 투신하자 함께하자는 뜻으로 장소를 찾았어요. 그러다보니 판자촌 한가운데로 들어가기보다는 판자촌과 여전히 서민층이긴 하지만 약간 형편 나은 사람들 사는 그 경계, 중간지역에 자리를 잡았지요. 지금 이곳이 그런 자리였어요. 한쪽은 그럭저럭 괜찮게 사는 마을, 다른 한쪽은 논밭, 그리고 논밭 넘어 산 언덕에 판자촌. 처음에는 저희도 흙담집에 살았어요. 쌀가게로 쓰던 곳을 이용해서 진료소 하고 숙소 하고. 겨울에는 벽이 얼어서 물이끼도 차고 연탄가스 중독으로 힘들기도 했었고 이분들과 비슷하게 살았죠. 현재 건물은 15년 전에 서울의 32개 본당들과 다른 분들의 후원으로 짓게 되었어요. 하늘과 땅 사이의 다리를 잇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리가 되는 것. 그것은 바로 아피들이 추구하는 우주성의 실현일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의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경제적 격차는 마치 하늘과 땅 사이처럼 이어지기 힘든 것이 되어가고 있다. 그 사이에 다리를 놓는 어렵지만 고귀한 시도를 전진상복지관/의원의 아피들은 30여 년째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서로 말 한 마디 건넬 기회조차 없어진 사람들, 서로의 삶을 이해하기조차 힘들어진 사 람들 사이에서 말이다. 74_ 자원봉사자분들은이곳에오셔서같이사는것이아니라하루봉사하고떠나시는 거잖아요. 그래도 그분들 가슴속에 그 만남이 남아 있으리라 생각은 해요. 저희가 목적하는 바가 그거에요. 중간역할, 다리역할. 봉사자분들께서 오셨다가 변화된 마음을 갖고 가긴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까지 바꿀 정도로 눈에 보이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조그만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봐요. 봉사자들이 어렵게사는분들을도우러간다는생각으로갔다가어려운와중에도오히려봉사자들 을반겨주고웃고이야기해주고이것저것주는것을보면서너무뜻밖이란이야기들을 하거든요. 만나지 못하면 정말 서로 사이의 강이 한없이 넓어지고 차이가 더 벌어질

18 것 같아요. 만나고 느끼고 하는 만남의 장이 되는 거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마 서로에게 우주성의 실현으로 다가가질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봉사하러 오시는 분들 말고 봉사를 받으시는 어려운 분들의 마음을 여는 것도쉽진않아요. 봉사자들의방문을받아들일수있는분들을방문하도록안내하는데 사실은 참어려운일이거든요. 모르는 분들은 그냥 봉사하러왔다가가시는것이지만 그렇게까지 봉사할 수 있도록 할머니의 마음, 장애인의 마음, 호스피스 환자의 마음을 살피고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마음 여시도록 한다는 것, 그 마당까지 가는 것도 쉽지가 않은 것 같아요. 나야 내 마음만 열고 소개해주시는 어려운 분들에게 찾아가 맡겨진 일을 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든지 동정심이라든지를 버리 고 나와 같은 인간으로 그분들을 대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하지만 전진상복지관/의원의 아피 회원들은 찾아오는 봉사자들이 마음을 열 도록 도와야 할 뿐만 아니라 어려운 환경의 분들도 봉사자들을 격의 없이 맞 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야 하는 더 큰 어려움도 감당해야 한다. 같은 세상을 사는 우리들 사이에 참 벽이 많다. 열고 들어가야 할 문도 많다. 그 문을 두드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19 끝을 향하여 Ad Finem 힘든 육체노동 못지않게 사람을 힘들게 하고 소진시키는 일은 바로 주변 의 사람들을 끊임없이 살피는 일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돌보는 무한한 사랑 이야 혈육에 대한 본능적인 사랑이 개재되어 있으니 그나마 쉽다고 할 수 있 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과거에 어떠한 인연도 없던 이웃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아피 회원들이 고백하듯이 전 과 진 이 없다 면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것도 30여 년을 매일 같이 이어와야 한다면 말이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아피 회원들의 신앙일 것이다. 그분들 말대 로 날마다가 하느님의 기적이고 하느님의 은총이었기 에 가능했던 일일 것 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오랜 세월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기쁨이 그분 들을 이 자리까지 이끌었다는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아쉬움도 있고 순간적인 후회도 있었죠. 그런 것이 없을 수는 없죠. 하지만 그래요. 가끔 다시 태어나면 이런 삶을 선택할까. 그럴 것 같아요. 참 멋있는 삶인 것 같아요. 크리스천으로서 그래도 하느님을 더 잘 알 수 있는 삶이었고.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많이 나름대로 실천할 수 있는 그런 삶이었고, 하느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삶을 같이 느낄 수 있는 삶이었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도 이런 삶을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Ad Finem, 끝을 향하여. 종말과 관련된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 잘 모르는 나이지만 아피의 영성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말이라 한다. 아 니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말이리라. 끝은 먼 훗날에 올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지금 당장이 끝이 될 수도 있는 것이 불안한 우리 인간의 조건일 것이다. 나에게 묻는다. 다시 태어나도 다시 선택할 만큼 온 마음과 온몸 던져 진실하게 사랑할 사람이 있는가? 그것도 혈연을 넘어서. 그리고 그 헌신과 76_

20 사랑으로 인해 솟아나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생수의 강, 기쁨의 샘이 내게 있는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남들과 다르지 않게 바쁜 직장일과 가족사에 치이며 하루하루 살고 있는 흔한 인간으로서 신앙의 영역, 헌신의 영역은 내 일상의 영역에서 분리되어 별개의 것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신앙이 세속화 되고 사사화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어쩔 수 없는 형편이라고 치 부하며 좀 더 형편이 나아질 언제 올 지 알 수 없는 훗날로 미루어놓을 것인 가? 끝 날의 일은 끝 날로 미루어 놓을 것인가? 시흥 전진상복지관/의원 서울시 금천구 시흥5동 200-2번지 (복지관) (의원) (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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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9월도서관웹용 www.nl.go.kr 국립중앙도서관 후회의 문장들 사라져 버릴 마음의 잔해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이번 해에도 배추농사에서 큰돈을 남은 평생 머릿속에서 맴돌게 될 그 말을 다시 떠올려보 만졌다 하더라도 지난 여름 어느 날 갑자기 들기 시작한 았다. 맺지 못한 채 끝나버린 에이드리언의 문장도 함께. 그 생각만은 변함없을 것 같았다. 같은 나이의 다른 아이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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