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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1. 言論의 活動 2. 民族敎育 3. 民族史學 4. 現代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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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言論의 活動 1. 言論의 活動 3 1운동은 韓國民族의 드높은 예지와 누구도 억누를 수 없는 강 인한 독립정신의 소산이었다. 특히 그 투쟁 방식에 있어 순전한 자유 의사의 표시를 주축으로 한 무기없는 無抵抗主義를 택했다는 것, 그 리고 대중전달기관인 민간신문 없는 시대에 있어 면밀한 계획 아래 전국적으로 총권기하여 일제히 독립 만세를 부르짖고 나섰다는 것 등은 일찌기 그 유례가 없는 것으로 世界弱少民族의 독립 운동사상 주목할만한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러한 대규모의 3 1운동에 부닥쳐 당황한 日本은 군대를 동원하여 그 진압에 나섰고 잔혹한 살륙을 감 행한 후 겨우 6개월이 지나서 종식을 보았다. 이 사이에 上海에는 大 韓民國 臨時政府가 세워졌다. 이러한 韓國民族의 격렬한 독립정신은 日本 위정자들의 가슴을 서늘케 하였고 世界弱少民族을 크게 고무하 였다. 뿐만 아니라 日本政府는 세계여론의 비판과 식민통치의 무능 력을 날카롭게 비난하는 국내 여론에 부딪쳐 마침내 韓國民族에 대 한 식민정책의 급전환을 가져 올 밖엔 도리가 없었다. 졸렬하기 그지 없었던 武斷政策의 시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른바 文化政策이라 일컫는 회유정책으로 자주독립을 부르짖고 나선 韓國民族을 무마하 려 한 것이다. 즉 첫째, 꽁꽁 묶었던 言論 出版 集合 結社등의 자유를 어느 정 도 풀어 주므로써 韓國人의 환심을 살 수가 있다. 둘째, 공개적인 言論으로 말미암아 韓國人의 사상 동태를 파악 할 수가 있다. 따위의 실리적인 이점을 계상한 것이었다. 새로나 타난 海軍系의 總督齋藤 實은 韓日合併이 후 엄중하게 금지되었

4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던 言論 出版 集會 結社 등에 대한 제한된 자유를 다시 韓國 東亞日 報(發行兼編輯人 李相協), 朝鮮日報(同 芮宗錫), 時事新聞 人에게 허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920년 1월 6일자로 (同 李東雨)등 세 新聞의 발행이 허가되었다. 여러 新聞發行申請 者 중에서 위의 세 新聞만이 허가된 까닭은 각 방면의 세력균형을 취한 것으로 되었으나 그 실은 總督府당국의 다음과 같은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첫째, 發行兼編輯人들의 성분, 그 배후를 엄밀히 검토하였다는 것, 이들은 總督府 機關紙 每日申報의 전 편집주임을 역임했 거나 친일단체의 중견들이었다. 新聞紙法에서 발행 겸 편집인은 新聞의 발행권을 행사하는 가장 중요한 관건을 쥐고 있는 자이다. 둘째, 民族主義陣營과 親日派陣營의 비율을 1對 2로 정하여 韓 國人의 여론을 親日傾向으로 몰고 갈 것. 그러기 위해서는 社長에 朴泳孝, 株主代表로 金性洙를 내세운 東亞日報를 民族主義陣 營의 하나로 쳤고, 社長 趙鎭泰를 내세워 大正實業親睦會1)를 모 朝鮮日報와, 閔元植을 會長으로한 新日本主義를 표방 하고 나선 國民協會 를 모체로 한 時事新聞등을 親日派陣營 체로 한 2) 의 다른 하나로 쳤다. 셋째, 여기에 다시 總督府機關紙 每日申報를 합쳐 1對3의 1) 大正實業親睦會는 한국인을 위주로 한 會員들간의 相互意思의 疏通을 꾀하는 동시, 情誼를 敦篤히하며 精神修養하는 것을 目的으로 한다는 要旨로서 이미 武斷政治下인 1916년 12월 29일 創立된 親日단체이다. 會長에는 男爵 閔泳綺로 登錄되었고 副會長은 趙鎭泰였다. 會維持費로서 250名의 會員이 매월 1圓씩 據 出하고 그 밖에 必要에 따라 臨時 會費로서 經费을 支出하게 되어 있었다. 2) 國民協會는 1919년 1월 18일 閔元植의 主動으로 결성된 新日本主義를 들고 나온 急進的인 親日團 이 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融和-致를 目的으로 삼았고 B 本議會에 대해 選S法의 朝鲜旌行을 촉구하는 請願S를 내어 한국인의 參政權 을 主張하였다. 절성 당시 會員數는 198명으로 總留府당국에 보고하였다 년 2월 16일 閔元植이 東京에서 民族主義者 梁槿煥에게 被殺되자 後任會長으로 金明濬이 취임, 植民統治가 終熄를 告할때까지 이를 이끌고 왔다

5 1. 言論의 活動 비율로 民族主義陣營을 열세로 떨어뜨릴 것, 이는 韓國人의 민족 사상과 독립정신을 作爲的으로 억압배제하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韓國人발행의 한국말 民間 日刊新聞은 3종으로 못박았 다. 1920년 당시 韓國人의 총인구 16,697,017명에 대하여 總督府 機關紙까지 합쳐서 한국말 日刊紙는 겨우 4종에 지나지 않았음에 반하여 韓國에 移住한 日本人 326,8723)명에 대하여 日文日刊新 聞은 20種에 올라 있었다. 부당성과 부조리한 것이 植民統治이고 보면 허용된 세 民間新聞만이라도 제대로 확보해 나가는 것이 당 시 韓國言論界에 부과된 임무일밖엔 별 도리가 없었다. (1) 各紙의 背景과 性格 1) 東亞日報의 경우 韓國人에게 新聞發行을 허용한다는 정보를 재빨리 입수한 總督 府 機關紙 毎日申報편집주임 李相協은 그해 9월 전기 신문사 를 사임하고 새로히 新聞創刊운동에 나섰다. 먼저 유력한 협력자 로 金性洙를 손꼽아 이내 崔斗善을 통해 신문사업에 투자할 것을 요청하였다. 첫 회답은 비관적이었다. 당시 金性洙는 中央學校와 京城紡織을 인수하여 손을 뻗힌지 얼마 아니 되었던 때였다. 그러 나 그후 측근자들과 다시 숙고한 끝에 마침내 신문사업에도 적극 나설 것을 결심하였다. 이리하여 1920년 1월 14일 정식으로 株式會社 東亞日報社의 發 起人總會를 열고 株式모집은 전국적으로 변져 갔다. 이때 총자본금 을 100만원 (2萬株)으로 하고 우선 3,500株(1株當 50원)로 하되 제1회 불입금은 1株 12원 50전으로 하였다.4) 이때 株主發起人은 다음과 같이 전국의 有志 78명이었고 그 대표는 金性洙였다. 3) 朝鮮年鑑 p.278, 京城日報社刊 4) 東亞日報 1920년 4월 1일字

6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朴泳孝, 金棋中, 高允默, 李台健, 金弘祚, 金泳澤, 吳熙源, 李忠健, 高厦柱, 鄭海魯, 張斗鉉, 金舜善, 朴昌鎭, 殷成雨, 劉世冕, 李應魯, 金孝澤, 朴夏馹, 高光馹, 文尙宇, 金秉圭, 高光駿, 金永福, 許 杰, 金箕東, 張春梓, 任冕淳, 李承駿, 崔 浚, 安熙濟, 李象德, 崔浚晟, 朴容喜, 金雨英, 孫永暾, 李鍾淳, 李鳳和, 金時龜, 尹相殷, 李康賢, 羅弘錫, 尹炳浩, 康邦鉉, 尹顯泰, 邊光鎬, 李鐵煥, 朴琪圭, 李觀魯, 李鍾和, 洪鍾轍, 李孝健, 文永斌, 金衡圭, 李慶世, 金宗元, 李 雲, 成元慶, 金榮洙, 李相協, 張熙鳳, 鄭鳳洙, 李載爀, 張德俊, 徐孟洙, 鄭載源, 金 煜, 李鍾浩, 玄俊鎬, 鄭忠源, 孫秀文, 李炳穆, 金昇默, 崔演武, 李定烈, 朴正植, 池榮璡, 張德秀, 金性洙 한편 大正實業親睦會에서도 趙鎭泰 閔泳綺 芮宗錫 등이 주동 이 되어 朝鮮日報社組合을 1919년 10월부터 결성하여 신문창간에 도 時事新聞창간 준비를 서둘렀다. 위에서 보듯이 東亞日報 의 경우 株式會社體임에 반하여 朝鮮日報는 組合體이며, 時事 新聞역시 同類의 것이었다. 이리하여 1920년 3월5일 朝鮮日 報는 韓帝國이후 10년만에 韓國人 민간신문으로서의 첫 등장을 보 았고 그해 4월 1일에는 東亞日報 時事新聞이 동시에 창간호 발벗고 나섰으며 또 國民協會의 閔元植 金明濬 金九 李東雨등 를 내놓았다. 민간 세 신문은 제각기 창간 취지문을 통해 社是를 밝혀 독자 대 중의 획득을 노렸다. 朝鮮日報의 경우는 뒤떨어진 새 문명을 급속히 받아들여 이를 향상시키겠다는 新文明 진보의 주의를 들고 나왔음에 대해 東亞日報는 제1차 세계대전직후 널리 풍미한 民主主義的인 기풍에 발맞춰 人類의 共存을 위한 理想과 그 방향제

7 1. 言論의 活動 시를 다짐하는 동시, 民族의 表現機關과 理想의 指示機關을 자임하 고 나섰다. 한편 時事新聞은 韓國人의 新日本主義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 各紙의 성격과 주장은 그 윤곽이 뚜렷 해졌다. 이리하여 3紙는 言論機關으로서 韓國人民에게 그 첫 선을 보이게 되었으나 그 취지 내지 편집방침과 인원구성 등에서 부터 오는 차이는 자연 紙面製作에 그대로 반영되어 讀者大衆의 購讀支 持率에 현격한 차를 가져왔다. 日帝下 민간지 창간 초창기에 있어 東亞日報는 단연 다른 2個紙를 앞서고 달렸다. 그것은 창간사에서 밝혔듯이 朝鮮민중의 표현기관으로 自任, 民主主義를 지지한다, 文化主義를 제창한다는 3大 社是를 들고 나와서 박력있게 지면을 꾸였기 때문이다. 3 1 운동에서 완전독립을 쟁취못했다는 좌절감에 사로잡혔던 당시의 韓國民族에게 同報는 정신적인 매력있는 거점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同報는 다른 두 新聞을 제쳐놓고 韓國民族 가슴속 깊이 파 고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이제 그 例證으로 同報의 논설을 들수가 있다. 世界改造에 劈頭하여 朝鮮의 民族운동을 論하노라(제2호), 첵코스로바기아民族의 建國운동(제5호), 愛蘭문제의 由來(제 7호) 등으로 弱少民族의 동향과 방향을 밝히는 동시에 조선총독부 豫算을 論함(제 6호) 조선인의 교육용어를 日本語로 강제함을 廢止하라(제9호) 統治權의 根本義는 何在오(제16호)등으로 식민통치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조선父老에 게 告함(제3호) 假明人頭上에 一棒(제36호) 각지 靑年會에 寄하노라(제54호)등의 논설을 펴고 나서 젊은이 신문의 기백을 뚜 렷히 나타냈다. 그러나 同報의 이러한 논조는 일부 儒林들의 격노를 샀고 嶺南 및 湖南지방에서는 한때 不買同盟운동까지 벌어졌다

8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이에 대해 同報는 假明人頭上에 一棒과 儒敎의 眞髓(제45호 -제48호)란 논설을 전후 4회에 걸쳐 실어 전일 표현에 있어 일 부 과격했던 점을 사과하는 동시에 儒敎의 참된 목적을 설명 부연 하여 儒林을 포함한 전체 동포의 결속을 호소하였다. 여기서 다시 東亞日報의 창간 당시의 진영을 되새겨 볼 필요 가 있겠다. 그것은 아직 株式會社로서의 創立總會도 갖기 전에 大株 主 金性洙의 전폭적인 협찬으로써 신문사업의 첫 발을 내디딘 東 亞日報 를 씩씩한 논조와 편집모습으로 꾸며 낸 사람들이 누구일 까 하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다. 社長은 甲申政變때의 주동자 의 하나인 朴泳孝였고 編輯監督에는 大韓帝國時代의 皇城新聞 大韓每日申報의 總務이던 梁起譯이었고 主幹에는 당년 26세의 張德秀, 그리고 論說班에는 張德秀李相 協張德俊(30세)秦學文(27세)金明植朴一秉등이었다. 編輯 社長이던 柳瑾과 역시 陣營에는 編輯局長에 당년 28세의 李相協, 政治經濟部長겸 學藝 部長에 秦學文, 通信部長겸 調查部長에 張德俊, 社會部長겸 整理 部長에 李相協이었고 記者로서는 高羲東 金井鎭 金炯元 金泰 登 金東成 廉尚變 李昇圭 邊鳳現 徐承孝 申相雨 申佶求 崔榮穆 韓基岳 柳光烈 李瑞求등이었다. 그리고 大株主인 30歲 의 金性洙는 營業局의 한 社員으로서 그 이름을 남겨 두었을 뿐이 었다. 이렇듯 30未滿의 젊은 新進氣銳들로 구성된 同報는 靑年新 聞으로서의 기백이 흐르고 넘쳤다. 그러나 東亞日報는 1920년 9월 25일 總督府당국으로부터 마침내 無期停刊의 탄압을 받고 말았다. 그 직접 원인은 同日字 논 祭祀問題를 再論하노라(2)에서 日本의 3種 神器라 일컫는 劍鏡璽등을우상숭배의 표본이라고 비평했기 때문이다. 이때 설 總督府警務當局은 安寧秩序를 방해했다 하여 新聞紙法 第21條를

9 1. 言論의 活動 적용, 無期停刊의 行政處分을 했다. 그리고 이유로서 이렇게 주장 하였다. 표면상으로 獨立를 선동하는 것은 避하나 항상 引例를 他 國에서 취하여 교묘히 反語 隱語를 써서 獨立思想의 선전에 힘 쓰고 있는 형적이 현저하며 혹은 羅馬의 흥망을 말하여 朝鮮의 부흥을 說하고 혹은 埃及의 現情을 말하여 一波萬波로 마침내 朝鮮의 獨立을 說示하고 愛蘭문제를 說하여 朝鮮의 人心을 자 극하며 英國에 대한 반역자를 찬양하여 반역심을 자극하는 등 일일히 그 실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또 總督政治의 비판을 하는데 힘쓰지 아니하고 근본적으로 總督 政治를 부정하고 악의적인 추단를 내리어 總督政治에 대한 일반의 我帝國臣民의 신념의 中樞인 劒鏡璽에 대해 無理解한 妄說을 들고 (중략) 東亞紙의 言論은도저히 統治의 근본방침과 相容 되기 어려워 이에 부득이 發行을 금지하게 된 까닭이다. 위와 같이 東亞日報는 그후 1921년 1월 10일 停刊이 해제 오해를 깊게 함에 노력하고 있던 중 (중략) 우상숭배를 論할때 5) 될때까지 3개월 남짓한 정간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것도 창간한지 불과 9개월도 못 되었을 때 일이라 同社員들은 물론 韓國 국민들의 충격은 매우 컸다. 왜냐하면 암흑했던 우리 사회의 炬火 가 되며 지침이었으며 聾啞의 嘆을 免케 하였던 민족의 대변기관인 東亞日報가 강권에 의해 無期發行停止가 되었기 때문이다. 재정적으로 아직 확고한 지반을 세우기도 전에 言論機關의 생 명인 발행을 정지당했음으로 받은 同報의 타격이 어느 정도로 심 각했던가는 정간이 해제된지 41일만에야 겨우 복간되었다는 사실 로써 능히 알 수가 있다. 5) 京城日報 1920년 9월 26일字

10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뒤늦게나마 다시 속간하게 된 것은 洪增植의 주선으로 이룩된 閔泳達의 5,000원 투자에 힘입은 바 절대하였다. 그후 株式會社 東亞日報社 創立總會6)를 1921년 9월 14일(總株主 256명)에 갖 고 다음과 같이 取締役 및 監査役을 선출하였다. 李 雲張德秀金瓚永宋鎭禹李相協成元慶 張斗鉉鄭在瑗愼九範金性洙 監查役 玄俊鎬張熙鳳朴容喜李忠健許 憲 取締役 그리고 取締役會議에서는 다시 社長에 宋鎭禹, 副社長에 張德秀 (主筆兼務). 專務에 愼九範, 常務에 李相協(編輯局長兼務)등을 선 출하였다. 이리하여 東亞日報는 보강된 새로운 진용으로 씩씩 한 발디딤을 뻗혔다. 이때 宋鎭禹는 社長취임의 소감을 이렇게 피 력하였다. 元來 本報는 1黨 1派의 政略上施設이 아니다. 13道를 網 羅한 400여 株主의 共同經營이며 1人 1家의 私論偏見이 아니 라 2千萬 民衆의 公議 公論을 表現하는 機關이외다. (中略) 그러나 2千萬 民衆으로 같이 立하며 起하며, 같이 怒하며 같이 喜하며 같이 哀하며 같이 樂하려 하는 -片의 微誠만 가 지고 本社의 美良한 從僕이 되려 하오니 諒察하소서7) 그후 東亞日報는 宋鎭禹의 적극적인 新聞經營政策으로 말 미암아 日帝와의 투쟁속에서 성장 발전을 꾀할 수가 있었다. 2) 朝鮮日報의 境遇 한편 朝鮮日報가 국민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음은 그 조직 체가 大正實業親睦會라는 親日단체였다는 것과, 財政的 토대인 組 合株의 모집에 뒤졌다는 것, 그리고 編輯陣容이 열세하였다는 것 6) 古下 宋鎭禹先生傳 pp , 東亞日報社出版局刊 7) 前揭書 p

11 1. 言論의 活動 과, 처음 實業新聞을 指向했었다는 것 등에 기인된다. 그러나 朝鮮日報를 고찰할 때 먼저 생각할 것은 1924년 8월 말일을 한계로 一線을 그어야 되겠다는 점이다. 그것은 同報가 1924년 9 월 13일부터 民族主義者들 손에 넘어와서 오늘의 토대를 굳혔기 때문이다. 그러면 親日系列에서 경영하던 시절의 朝鮮日報의 朝鮮日報의 略史를 우선 들추어 보자. 이미 지적했듯이 同報는 大正實業親睦會가 경 영한 것이다. 그 陣容도 대체로 同系列에서 선출되었음이 특징이 다. 社長에 同會副會長인 趙鎭泰이며 副社長겸 發行人 芮宗錫, 編 輯局長 崔崗, 編輯部長에 崔援植, 政治部長에 金彰桓, 記者로는 方 漢旻 崔國鉉 金東澈 崔楠8)등이었다. 이때 同報는 4面, 10段制를 채용하여 먼저 紙面構成에 있어 4 東亞日報에 비해 손색이 있었고 겸하여 論說 및 記事내용에 있어서도 이른바 穩健한 編輯方針때문에 面 12段制를 채택한 생기가 없으므로 독자획득에 있어 뒤떨어졌다. 이리하여 社內에 자연 온건파와 과격파로 나눠질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하여 總督府당국은 전자를 여서는 親日派라 했고 후자에 대하 排日派라 평했으나 이 두파사이에 파쟁이 생겨 1920년 8월 14일 趙鎭泰, 芮宗錫 등이 퇴진하고 8월 15일에는 劉文焕이 새로 社長에 취임하였다. 發行人名義도 崔崗이 겸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同報의 論調는 硬化되기 시작하여 최초의 방침과는 정반대로 기적적으로 이른바 확실히 不穩記事를 실리게 되었다. 이는 東亞日報의 인기를 본받았음이 뻔하다. 그것은 첫째로 新聞經營상 민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어야만 되겠다는 것이 작용 되었고, 둘째로는 사실을 사실대로 대 담하게 보도하겠다는 新聞 8) 朝鮮日報五十年史(1970) pp 同社

12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記者정신이 크게 또한 작용되었다고 보겠다. 마침내 同報는 1920 년 8월 27일자 自然의 化란 論說로 말미암아 總督府당국으로 부터 1주일간의 發行停止의 行政處分을 받았다. 즉 同論說은 舞文 曲筆이라 규정하고 新聞紙法 第21條(安寧秩序를 妨害)를 적용한 것이다. 물론 同報는 그해 9월 5일자로 다시 續刊하는 동시 同紙上엔 愚劣한 總督府당국자는 何故로 우리日報를 停刊시컸나뇨라는 계속적인 論說로서 第1回分을 발표,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그러자 總督府당국은 즉각 同報에 대해 이번에는 無期發行停止의 行政處 分을 했다. 續刊되자마자 그날로 또 다시 停刊處分이란 매우 흥분 된 상태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재차 停刊 의 원인이 된 同報 論說 愚劣한 총독부당국자는 何故로 우리 日 報를 停刊시켰나뇨 의 要旨를 들어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前略) 總督政治의 攻擊, 이는 吾人이 가장 大膽하게 實 行한 것으로 當局者가 嫌忌하는 점이리라. 그러나 當局者여 誠心으로 생각해 보라. 吾人은 何故로 侃侃諤諤의 論을 提携 하고 壓迫 虐待를 받으면서도 去益政治의 批判攻擊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냐를, 이는 즉 吾人은 아직도 半島의 主權을 승인하면서 衷心으로부터 施政의 改善을 希望하는 誠意가 있 는 所以가 아니겠는가. 가장 聰明한 當局者는 스스로 回顧 反省하라. (中略) 當初 當局이 朝鮮人에게 新聞을 許可하여 言論을 容認한 本 義는 朝鮮人에게 自由를 附與하는 것이 아니라 壓迫을 加하 려 하며, 民意의 暢達을 구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阿부을 求 하려 하는 것이었는가. 果然 그렇다면 當局의 所謂 文化政治는 亦是 極히 奇怪한 것

13 1. 言論의 活動 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未完) 사실 9) 朝鮮日報는 창간이후 1920년 8월 27일까지 總督府당 국으로부터 紙面을 압수당하기 전후 23回이며 發行人이 戒責당하 기 10數回에 올랐다. 이러한 기록은 東亞日報가 창간된지 月餘 에 이미 5回의 압수를 당하였고 다시 第1次 無期發行停止된 1920 년 9월 25일까지에는 10數回에 걸쳐 發賣禁止를 당한 것을 앞지르 는 것이었다. 그후 朝鮮日報는 1920년 11월 5일 停刊이 해제되어 다시 續刊되었으나 發行人名義를 이번에는 權丙夏로 바꾸었다. 그러나 朝鮮日報는 여전히 답보상태를 지속하여 재정도 매우 어렵게 되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1921년 4월 18일 宋秉峻이 정식으로 社主 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왕년 韓日合併을 宣言한 一進會의 頭目 이며 또 親日新聞이었던 國民新報의 社長이기도 한 이름난 親日派頭目이다. 그가 이제 覆面을 벗어 던지고 직접 同報경영에 발벗고 나섰던 것이다. 그는 먼저 社屋을 三角洞 71에서 水標洞 43으로 옮겨 社勢擴張을 꾀하였다(창간은 貫鐵洞 249번지의 社 屋에서 냈다). 즉 1921년 11월 2일 輪轉機를 구입하여 이제까지 의 平版印刷에서 오는 애로를 타개했으며 새 活字의 채용(1922년 5월 16일부터)과 年中無休制의 실시(그해 9월 21일부터)하였고 1923년 여름에는 劉文煥을 물리치고 宋秉唆 자신이 社長자리에 앉는 동시에 副社長으로 南宮萬, 編輯局長에 鮮于日을 각각 맞이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강화책도 親日紙라는 본질적인 성격을 벗 어날 수는 없었고 재정난은 더욱 우심해만 갔다. 왜냐하면 論調의 빈약성으로 말미암아 독자가 늘지 않았기 때문 이었다. 그것은 東亞日報論說의 경우 總督府당국으로도 지적했 9) 諺文新聞差押記事輯紙 朝鮮日報편 朝鮮總督府警務局圖書課

14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듯이 隱語와 反語로서 韓國의 獨立思想을 고취하여 민족의 나갈 바 진로를 제시하였음에 반하여 朝鮮日報의 경우는 日本의 植民統治를 전제로 한 論陣을 폈기 때문이다. 또한 編輯方針에 있 어서도 전자의 경우, 이를테면 美國議員團의 來韓에 앞서 特派員 을 직접 北京 奉天등지로 파견하여 주체성있는 취재활동을 하는 데 반하여 후자의 경우 매우 미온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 한데서 오는 차이는 하나가 民族紙라는 인상이 짙었음에 비하여 또 다른 하나는 자연 親日紙라는 낙인을 독자대중으로부터 찍힐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저돌적인 성격의 宋秉畯도 드디어 그 版權을 申錫雨에게 8만5천원에 賣渡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것은 1924년 9월의 일이다. 이로부터 朝鮮日報의 성격은 民族紙로 급전환되어 그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즉 신문경영에 경험이 없는 申錫雨는 그해 4월 宋鎭禹와 경영 및 편집에 있어 의 견대립으로 말미암아 東亞日報를 사퇴한 신문제작의 전문가인 李相協을 비롯하여 開城의 崔善益등과 같은 강력한 理事陣을 구 성하였다. 이때 崔善益은 약관 21세의 젊은이로서 이미 孤兒事業 에도 손을 뻗치고 있었다. 安在鴻 曺偰鉉 白寬洙 李相協 崔善益 金東成 愼九範 그 리고 社長에는 民族指導者로서 민중의 추앙의 대상이었던 李商在 를 추대하고 申錫雨는 副社長으로 앉았다. 李相協 자신은 顧問으 로서 편집일체에 관한 총지휘를 했다. 이때 혁신된 朝鮮日報는 朝鮮民衆의 新聞이란 표어를 자 신 있게 내걸고 紙面刷新을 단행하였다. 그것은 첫째 女記者를 기용 하여 婦人欄의 충실을 기하는 동시에 女性문제를 많이 다루게 하였 고, 둘째 連載漫畵 멍텅구리를 창설하였으며, 셋째 短評欄인 八面鋒의 창설, 넷째 1924년 11월 23일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15 1. 言論의 活動 朝夕刊 6面制(夕刊 4面, 朝刊 2面)를 단행하는 등의 紙面制作에 새로운 기풍을 불러 일으켰다. 또 한편으로는 침체상태에 빠졌던 민중의 흥을 돋우기 위한 變裝美人찾기와 無線電話放送(지금의 라디오放送)을 시설, 優美館으로 독자대중을 무료로 초대한 후 연 예 프로를 전달하는 따위로 서울의 인기를 독차지 하였다. 이렇듯 맹렬한 기세로 朝鮮日報는 民族紙로서의 면목과 성가 를 높혀 가기만 하였다. 그것은 첫째 李相協과 의견을 같이 했던 閔 東亞日報의 優秀記者가 朝鮮日報로 자리를 옮겼고 그후 柳光烈韓基岳. 李瑞求등도 역시 혁신 朝鮮日報社로 뛰어 들어 편집진용이 사뭇 강화되었음에 반하여 東亞日報는 泰瑗 李炯元등 경험있는 유능한 記者를 일시에 대량으로 빼앗겨 자연 紙面制作에 朝鮮日報의 이러한 진출은 자 연 이제까지 독무대격이었던 東亞日報를 제압할 기세이었다. 커다란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혁신 朝鮮日報社의 초창기의 편집진용은 다음과 같다. 編輯局長 閔泰瑗, 論說委員 安在鴻 金俊淵 辛日鎔, 編輯部 金丹冶林元植崔恩喜, 地方部에 洪悳裕洪南杓朴憲永 金松殷 李相喆 孫永極, 社會部 金炯元 金達鎭 鄭寅翼 金在鳳 한편 년대부터 밀어 닥친 社會主義思潮는 혁신된 朝 鮮日報 紙面을 장식하게 되어 어느듯 同報는 社會主義新聞이란 평을 받게끔 되었다. 그러므로 종시 民族主義色彩로 일관하는 東亞日報에 비해 朝鮮日報는 새로운 맛을 풍겼다. 이러한 社會主義思想의 潮流는 己未년 31독립만세운동에 실 패한 韓國의 일부 지식층에게 하나의 매력으로 받아 들여졌다. 그 것은 弱少民族의 主權回復을 위해서는 민족자체의 힘만으로는 거 의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제1차세계대전후

16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나타난 蘇聯은 弱少民族의 해방을 돕겠다 하여 韓國의 민족운동 자에게도 그 손이 이미 뻗히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ML黨의 黨 首였던 金俊淵의 述懷談과 같이 된 것 10)에 獨立운동의 한 수단으로 채택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당시 知識分子들이 점 차로 社會主義思想에 기울어져 갔다는 것은 부인못할 사실이나 日本 植民統治에 항거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1925년 4월 서울 雅叙園에서 극비밀리에 朝鮮共產黨이 결성되어 이에 가담한 일부 意識分子를 빼어 놓고서는 거의가 위 에서 지적한 범주에 속했었다. 이에 대해 柳光烈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였다. 共產主義가 新聞社에 침투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년쯤에 共產主義가 들어 왔는데 처음에는 共產主義를 過激 派로만 알았읍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獨立이 되어야 된다 이렇게 主張해 왔기 때문에 民族主義者와의 區分이 分明치 않 았어요 11) 朝鮮日報는 1925년 9월 8일 자 朝刊에 朝鮮과 露國과의 政治的 關係란 제목의 사설에서 조 선의 해방은 오직 사회혁명에 있다 고 주장했다. 이것은 日本 이러한 새 思潮에 발맞추어 나간 과 蘇聯 두 나라가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서울에 蘇聯領事館이 설 치되어 샤드바놉領事의 착임을 계기로 다루어진 것이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서 당국으로부터 無期停刊의 行政處分을 당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筆者 辛日鎔의 구속과 輪轉機의 압수 등의 司法處 分까지 받았다. 이러한 總督府당국의 태도는 언론탄압의 가혹성을 나타낸 것으 로서 言論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약진도상에 있던 朝鮮日 10) 金俊淵 나의 人生回顧錄, 實話 1954년 11월호 11) 柳光烈 우리나라 新聞의 어제 오늘, 東亞日報 1961년 4월 2일字

17 1. 言論의 活動 報 로서는 더욱 큰 타격이었다. 出資者인 申錫雨 崔善益과 그리고 金東成 安在鴻 등은 停刊 解除운동에 나섰으며 이에 대하여 總督府당국은 社會主義的인 新 聞을 만들어서는 안될 것과 社會主義記者를 도태할 것을 요구하 였다. 이리하여 停刊중에 당국에서 지목한 辛日鎔 金丹冶 朴憲 永 林元植 등 이른바 赤派記者를 도태하는 동시에 李相協系의 白派記者를 포함한 다음의 13명을 대량 馘首하였다. 즉 그리고 營業局員인 姜禹烈洪鍾悅崔容均皮敎卨鞠採鎭, 金炯元 金松殷 柳光烈 徐範錫 孫永極 崔國鉉 李鍾鼎, 동시에 顧問制度를 폐지하여 李相協, 張斗鉉, 愼九範 등도 물러 나게 되었다. 1925년 10월 19일 停刊이 해제, 續刊되었으나 申錫 雨 金東成 安在鴻 등은 解雇된 白派記者側으로부터 맹렬한 공 격을 받았다. 解雇記者들이 집단적인 馘首反對의 결의와 태도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그후 朝鮮日報는 1927년 2월에 서거한 李商在의 뒤를 이 어 申錫雨가 社長이 되었으나 이미 재정적으로 곤경에 빠져 1928 년 9월 安在鴻에게 물려 주었다. 그후 그 자리에는 잠시 兪鎭泰가 앉았다가 다시 曺晚植社長시 대를 거쳐 1933년 3월 21일 方應謨가 이를 인수할 때까지 版權 을 에워싼 우여곡절은 격심하였다. 1933년 7월 10일 30만원의 全額拂込의 株式會社 수속을 완료 하는 동시 方應謨는 정식으로 社長에 취임하였다. 이어 그해 9월 그는 다시 20만원에 全額拂込의 증자를 단행하는 동시에 李光 洙 朱耀翰 徐椿 咸尚勳등 새 진용으로 紙面 강화에 힘썼다. 朝夕刊 12面制의 솔선단행을 비롯하여 취재용 飛行機및 自動車 購入 그리고 太平路에 새 社屋의 건립 出版部의 신설 한글통

18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朝鮮日報의 지반은 굳게 안 정되었다. 이로부터 경쟁지인 東亞日報와 정면으로 각축전을 일 철자법의 채용 등으로 비로소 벌리기 시작하였고 때로는 격렬한 경쟁의식의 과열로 말미암아 兩紙간에는 지면을 통한 공방전까지 빚어낸 바 있었다. 方應謨 財團의 등장이야말로 民族紙로서의 朝鮮日報의 성가 를 높이게 한 최대의 원동력이 되었음은 명기할 일이다. 朝鮮中央日報의 경우 여기서 먼저 밝혀 둘 것은 時事新聞을 비롯한 時代日報 中 外日報 中央日報그리고 朝鮮中央日報등을 한 항목으로 묶어 3) 기술하는 까닭을 말해야 되겠다. 첫째는 제한된 지면에 장황히 각 新聞別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편의상의 조치이고, 둘째는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總督府당국은 韓國人에게 日刊新 聞을 셋으로 제한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題號와 경영자는 달랐어도 總督府당국으로서는 행정적 으로 3종의 신문중의 하나로서 다루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서이다. 時事新聞은 이미 지적했듯이 新日本主義를 표방하는 國民協 會의 閔元植이 경영 주재한 것이었으나 1921년 2월 16일 東京 鐵 道호텔에서 民族主義者 梁槿煥에게 저격 피살되자 이내 휴간끝에 폐간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韓國人경영의 일간지는 둘로 줄어 들 었다. 己未년 독립만세운동으로 被囚되었다가 출옥하여 週刊紙 東明을 경영하던 崔南善은 同紙主幹인 秦學文과 더불어 새로 일간지인 時代日報창간운동에 적극 나섰다. 이것이 總督府당국 의 허가하는바 되어 1924년 3월 31일자로 마침내 창간 제1호를 내놓았다. 崔南善은 처음 드리는 말이라 하여 창간사를 이렇 게 썼다

19 1. 言論의 活動 낫자! 북돗자! 기르자! 그리고 길고 깁게 리를 박자! 이 것 밧게 우리의 살 길은 다시 업슴을 에 새겨 긔억하 자! 동포여! 부로여! 형뎨여! 자매여! 울자! 울자! 싸우자! 싸우자! 누가 인생은 웃음 그것만이라 하고만은 그것만이라 하드냐! 낫자면 괴로워야 한다. 북돗고 기르랴면 한층 더 괴 로울 것을 압서 짐작하여야 한다. 허물며 길고 깁게 리를 박으랴 함일소냐! 울어야 한다. 피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남을 것이 무엇이냐고는 뭇지 마라. 뭇는 그야말로 가장 어리석기 때문이다. 삼월 삼십일일! 이날을 우리는 긔억하자. 어느해 어느 세긔에 서든지 이날을 긔억하자. 이날이 낫는 목숨이 얼마나 만흐랴. 이날에 낫는 아들. 이날에 점지될 손자가 얼마나 만흐랴. 그 러면 이날을 긔렴하고 이날이 시대일보의 무궁할 그 목 숨에 비롯한 첫날임을 한 잇지 말자. 시대일보를 우리의 아들과 가티 기르고 우리 의 손자와 한가지 목숨을 니어 배달의 씨가 풍길 그 까지 이와같이 창간된 時代日報(發行人秦學文)는 署名社說制를 그리하야 이 실시하였으며 또 경제부를 두어 證券時勢등 경제기사를 다루는데 힘썼다. 이러한 편집태도와 당시 崔南善개인의 드높은 성망등이 원인되어 同報의 인기는 매우 컸으며 발행부수는 2만부에 올랐 다.12) 同報 창간 당시의 진용은 아래와 같았다. 社長兼 主幹 崔南善, 編輯局長 秦學文, 營業局長 李庭熙, 論說 班 朱鍾健 卞榮晚 安在鴻 李時穆, 社會部長 廉想涉, 同記者 12) 趙容萬 六堂 崔南善 p 三中堂

20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玄鎭建 羅彬 金達鎭 柳志永, 經濟部長 金喆壽, 同記者 魯秀 甲 李健赫 그러나 3개월후 극도의 재정난으로 말미암아 崔南善은 普天敎 의 車京錫으로부터 3만원을 받아13)들인것이 발단이 되어 판권소 동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것은 普天敎측으로부터 인사권을 주장하 였고 나아가서는 發行人名義까지 李成英으로 변경하고 말았기 때 문이다. 이에 놀란 사원들이 社友會를 결성 하여 사회의 공기인 신문을 개인이나 宗門의 전유물도 떨어뜨릴 수 없다고 일어났다. 이리하여 崔南善 秦學文등은 그해 9월 1일 각각 그 자리에서 물 러났다. 이때 社會主義者들은 崔南善聲討會까지 열고 社會公器를 일개 邪敎에 팔아 넘겼다고 맹공격을 하였다. 그후 社友會와 普天敎측 간의 절충과 同社發起人會의 노력으로 1925년 4월 새로 趙俊鎬가 發行人이 되어 續刊하였으나 역시 재정난으로 1926년 여름 마침 내 폐간하고 말았다. 이때 재빨리 새로 中外日報의 발행허가원을 總督府에 내놓은 朝鮮日報顧問을 사임한 李相協이었다. 1926년 9월 18일 발행허가가 되자 李相協은 安熙濟李佑植 등 嶺南人士의 투자를 얻어 그해 11월 15일 中外日報를 창간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것은 역시 재정난을 면치 못해 1930년 10월 13일부터 마침내 輪轉機가 쉬게 되었다. 이어 盧正一, 金賛成등이 당국의 허가를 얻어 1931 中央日報를 창간하였으나 이내 1932년 10월 31일 崔善益洪璔植尹希重등에게 版權을 이양하였다. 同 년 11월 27일 이번에는 報는 1933년 2월 출옥한 呂運亨을 새로 社長으로 맞이하고 동 3월 부터 題號도 朝鮮中央日報로 고쳤다. 13) 崔埈 韓國新聞史 p 一潮閣

21 1. 言論의 活動 朝鮮 東亞와 마찬가지로 朝夕刊 12面制를 단행하는 동시에 변 절자들에 대한 筆誅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獨立宣言에 署名한 33 인중의 한 사람인 崔麟과 朴熙道등이 그 대상인물로 된것은 이때 의 일이다. 그리고 역시 他紙와 같이 出版部를 두고 각종 잡지를 발간하였으나 1937년 11월 5일 마침내 당국으로부터 발행권취소 를 당하였다. 그것은 孫基禎선수의 사진중 그 유니폼에서 日章旗 를 말소하여 東亞日報가 발행정지되자 同報도 이미 日章旗를 말소한 바 있음이 밝혀져 자진 휴간의 형식을 취하여 정간중 역시 재정난으로 말미암아 재기불능으로 전기와 같이 版權이 취소되었 다. 그후 발행정지가 해제된 東亞 朝鮮 兩紙도 1940년 8월 10일 강제폐간되어 民間신문 없는 言論暗黑期로 돌입하였다. 이상 日帝下 민간 3紙의 歷程을 살펴 볼때 공통점으로 들 수 있는 것의 하나는 한결같이 민간 3紙가 언론탄압을 받았다는 점이다. 언 東亞日報 朝鮮日報는 각각 4회, 中外日報및 朝鮮中央日報가 또한 론기관의 사형선고에 해당되는 발행정지만 하여도 각 1회이었다. (2) 民族言論의 展開 1) 政府없는 民族에 形態없는 政府의 所任 植民통치 아래 韓國人의 민간신문의 움직임은 한 말로 해서 침략 세력에 대한 끈질긴 항쟁이었다. 억압과 탄압이 있으면 그때마다 그대로의 반발을 가져왔고 또 거꾸러져 가면서도 다시 재기의 길을 밟았다. 이렇듯 불굴의 투지는 韓國언론계의 전통적인 저항정신을 확립하였다. 물론 이는 韓帝國시대로부터 이어 받은 하나의 유산 으로 거기에는 당위성이 개재되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것은

22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첫째, 新聞 스스로의 사명감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 둘째, 韓國民族의 강력한 시대적인 요구가 가로 놓여져 있었다 는 것 등이다. 韓國 민간신문의 재등장은 앞에서 보았듯이 韓國 전체민족의 피의 댓가로 쟁취한 것이었던 만큼 韓國人의 전체문제에 충실할 밖에 없었다. 더구나 정치적인 무대를 갖지 못한 異民族의 植民統 治아래에서 민간신문은 고민하는 韓國民族의 정신적인 보루이며 투쟁적인 거점이 되었다. 이러한 韓國민간신문에 부과된 사명과 민족적인 요구는 자연 그 紙面제작에 있어 이를 반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민간신문은 기본적으로 韓國人의 주장과 요구를 올바로 내세우고 이를 관철하는데 그 주력을 기울려야 할 운명에 놓여져 있었다. 다만 그것이 植民통치라는 질곡속에서 제대로 충분히 발 휘할 수가 없었던 것 뿐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문제는 물론 완전 한 성취를 볼 수 없었으나 그러나 그 주장만은 민간신문의 존재로 말미암아 부르짖을 수 있었다. 특히 정신적인 문제, 이를테면 민족문화의 보존과 그 앙양에는 항상 민간신문들이 그 앞장을 서서 이를 끌어 올렸고 또 뒤밀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첫째, 전체 韓國人의 의사를 자기의 언어와 문장으로 공개표시 하는 길을 터놓았고 이를 토대로 韓國의 얼을 굳혀 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민간신문이 나타나자 재빨리 시도한 것의 하나로 檀 君影幀을 널리 현상을 부쳐 공모한 사실이다. 韓國民族의 宗祖로 우리 槿域에 나라를 세운 제 1인자로 널리 전해 알려진 사실을 다 시 한번 되새겨 오래 기리려는데 그 뜻을 두었던 것이다. 또 檀君 의 탄강한 聖地로 전승되어 온 白頭山에 登山隊를 조직하여 그 등 반체험을 기록하여 신문에 연재하여 민족정신의 진작을 꾀하는

23 1. 言論의 活動 등 정신문화의 앙양에 이바지하는 것 따위가 그것이다. 그런가하 면 1922년말, 당시 약관 23세로 一等飛行士의 면허를 따낸 安昌 南 飛行士의 故國訪問飛行을 서울에서 주최하여 韓國 민중의 사 기를 북돋았다. 이 바람에 크게 감격한 민중 사이에는 어느듯 떴다 봐라 安昌南. 굽어 봐라 嚴福童 이란 俗謠가 한동안 전 국적으로 유행하였다. 이처럼 민간신문이 막대한 경비를 들여 가 면서 일개 飛行士의 故國訪問飛行을 거족적으로 주최한 것은 韓 國人의 긍지와 자신을 불러 넣는데 그 뜻이 있었다고 하겠다. 노 력 분투만 하면 제2, 제3의 安昌南을 얼마든지 내 놓을 수가 있다 는 가능성을 실지로 보여 주는데 그 노림이 있었다. 그러므로 당 시 이것을 주최한 東亞日報는 그해 11월 22일자 社說에서 그러면 今回 本社主催의 一回飛行이 幾多의 飛行家를 產出 할것이며 積年 安君의 奮鬪的 精神이 無數한 科學者를 表現하 여 20世紀 科學世界에 萬丈의 氣焰을 吐한 者도 安君이며 半萬 年 沈默을 破하여 16億人의 生活舞臺에 一道 光明을 添한 者도 安君이라 하여 韓國 민중의 분투정신과 과학 개발을 위해 고무하는 바가 컸다. 한편 민간신문은 東京에 留學중인 학생들로 조직된 學友會주최 로 東京留學生夏期巡回講演會를 적극 뒤밀었다든가, 間島 東 京 쌘프랜시스코 하와이 블라디보스톡 등의 해외동포를 위안 하는 在外同胞慰問會를 발기하여 이를 전국적으로 전개하는 따위 도 크게 기록할 만한 일이다. 전기 學友會의 夏期巡回講演會는 1920년 7월 上旬부터 17일까지 大邱馬山咸安晋州統營公州禮山淸州鳥致院天安 에 걸쳐 東萊를 비롯한 釜山 釜山鎭 蔚山 金海 慶州 密陽

24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등지에서 學端講演을 강행하였다. 이를 신문이 후원하여 열렬히 뒷받침하였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다시 18일에는 서울 團成社에 서 張德秀司會로 개회되어 金度演(慶大生)이 朝鮮產業의 將來에 대하여 란 제목으로 강연이 진행중 돌연 임석경관의 中止令이 내 려 장내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강연 중지 이유는 保安法 제2條 不穩의 言辭을 用하여 治安을 素亂함이 頗多하였다는 것 이다. 이리하여 19일이후 沙里院平壤元山群山光州등지에 의 서 가질 강연회의 계획도 모두 중지되고 강연단은 강제해산되었 다. 이때 學友會강연단은 團長에 金俊淵(東京帝大)이고 단원은 전기한 金度演을 비롯하여 䄵洙朴錫胤朴定根徐 棒金松殷林世熙申東起韓在 謙李東濟 등이었다. 金鍾弼 崔元淳 尹昌錫 高志英 李琮根 朴勝喆 卞熙鎔 金 14) 한편 재외동포위문회는 국내 동포들로 하여금 해외에서 고생하 는 교포를 위한 교포애를 불러 일으키는 동시에 또한 해외교포들 도 국내동포를 생각하고 더욱 조국애를 굳히도록 하는데 그 뜻을 두고 기획된 것으로 이 역시 민간신문사가 전국의 주요도시를 찾 아 다니면서 幻燈과 講演會를 열어 賛助金을 모집하였다. 이 모임 에서는 萬國記者大會에 참석하여 副議長에 당선되었고 그후 다시 美國 워싱턴에서 열린 軍備縮小會議를 취재하고 귀국한 金東成記 者의 활동모습과 국제회의의 실황 및 해외교포들의 활동상황등이 幻燈映畵로 상영되었고 강연은 宋鎭禹, 張德秀, 金東成등이 담당 하였다. 제1차로부터 제5차에 이르는 전후 10개월에 걸친 이 재 외동포위문을 위한 全朝鮮 순회 환등영사 대강연회는 총청취자 6 만여명의 성황을 이루웠다. 여기서 얻어진 입장료 3만 5천여원은 14) 東亞日報 1920년 6월 26일字

25 1. 言論의 活動 경비를 공제한 나머지 3만1천여원을 해외의 각종 교육기관과 학 생단체에 분배하였다.15) 이처럼 민간신문은 사회 제반사에 대해 정부 없는 민중에 대해 형태 없는 정부와 같은 지도계몽적 역할을 도맡았었다. 2) 民族文化의 先鋒將 植民통치하란 특수성을 띤 민간신문의 존재에는 영리적이기보 다 먼저 민족적 公器性이 항상 앞섰다. 韓國의 일반민중들도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 들였다. 그러므로 각 민간신문사에서는 이러한 自矜과 포부를 가지고 민족을 대표하여 여러가지 문화사업에 손 을 뻗쳤다. 朝鮮日報 東亞日報등 兩紙가 경쟁적으로 전개 한 한글보급운동으로 나타난 문맹퇴치운동을 비롯한 각종의 體育 大會 文學 美術 音樂 演劇 映畵 出版 科學등 광범위하게 각 분야에 걸친 수많은 여러 사업을 일으켜서 사회에 이바지한 바 공적은 절대하였다. 특히 紙上을 통해 이러한 각종 사업을 소개 보도하여 민중계몽을 고취하는 등 뜻있고 다채로운 활동을 전 깨 한 점이 라든가 또 各紙가 상호간의 경쟁심을 북돋아 한층 더 열 을 가해간 것 같은 사실은 잊을 수 없는 일의 하나이다. 그러나 資本主義體制下에 있어서의 신문사자체의 각종 사업 중 에는 신문경영상 일종 이윤획득에 있었음도 사실이다. 이리하여 당 시로서는 민간신문들이 민중을 대표하여 각종의 사업을 기획하고 모임을 일으키는데 대해 일반 민중들은 조금도 의아심을 갖는 일 없이 당연한 것으로 지지하였다. 1925년 乙丑年 장마로 一大 水害 가 일어났을때 민간신문들은 솔선하여 罹災民구호에 손을 뻗혀 위 문금과 구호의류등의 모집에 열중하였고 이 에 따라 자연 민중들도 15) 東亞日報社史卷一, p 同社

26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열렬한 동포애를 불러 일으켰다. 또 이른바 滿洲事變으로 말미암아 在滿 1백만 동포의 생활이 근저로부터 뭉그러지려했을 때라든가 忠武公 李舜臣將軍의 墓地가 사소한 借金때문에 公賣될 위기에 부 딪쳤을 때, 이러한 때마다 민간신문들은 손수 나서서 민중에게 호 소하여 구제금 또는 의연금을 모집하여 전체민족의 이름으로 어려 운 일에 대처해간 공적 역시 컸다. 朝鮮體育會의 창설을 적극 뒷받침한 민간신문들은 제각기 각종 의 體育大會를 주최하였다. 이를테면 全朝鮮女子庭球大會를 비롯 한 中等學校野球리그戰 全朝鮮氷上大會 全朝鮮水泳競技大會 京城 平壤蹴球戰 全朝鮮女子籠球 및 排球大會 全朝鮮力技大會 등이 그 일례이다. 이처럼 민간신문들은 각종 체육을 극력 장려하 여 韓國의 남녀 젊은이들의 체력과 정신력의 함양을 꾀하였다. 특 히 모든 면에서 엄격한 차별을 둔 植民통치아래에서 유독 스포츠 만은 동등한 조건속에서 경쟁할 수 있는 분야이었던만큼 자연이 방면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어 갔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孫基 禎선수의 1936년 여름 베르린 올림픽大會에서 마라톤에 우승한 사실이다. 일개 고교생이었던 약관선수가 그것도 세계 신기록으로 제패했다는 사실이다. 韓國 젊은이들의 긍지와 자부심에 한층 빛 을 가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민간신문들이 이 사실을 크게 보도 하였음은 너무도 당연하였다. (3) 出版 雜誌의 發刊 1) 開闢社와 漢城圖書의 出現 1920년에 들어서자 新聞과 마찬가지로 出版, 雜誌의 발간도 허 용되었다. 물론 이러한 出版활동은 大韓帝國시대에 제정된 出版法

27 1. 言論의 活動 에 준거하여 허가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제 1920년 9월말 현재로 出版法에 의한 국문 잡지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開闢 京城 李敦化, 曙光 同 李秉祚, 槿花 同 金鳳杓, 學生界 同 吳天錫, 學生之友 同 朴永鎭, 廢墟 同 高 敬相, 共濟 同 趙誠焞, 修養 同 高敬相, 새벗 同 韓 錫源, 서울 同 張道斌, 新靑年 同 李鼎燮, 文友 同 李 秉祚, 至氣今至 同 李顯奎, 家庭新聞 同 任英宰, 新半 島 同 吳宗燮, 새소리 同 盧泳鎬, 開拓 仁川 吳天錫 16) 위와같이 政治, 時事문제를 다루지 않는 文藝, 修養, 어린이들 의 읽을거리 등 무난한 잡지만이 出版法에 따라 허용되었다. 그리 고 각종 종교관계의 잡지가 16개, 天一藥報와 같은 각종 商報 類가 10개였다. 한편 1919년 12월에 들어서자 工友俱樂部(崔宗焕 金大明), 維新 會(高義駿 金尙默), 朝鮮經濟會(朴泳孝 崔鎭)등의 새 단체가 출현 하였고 이어 1920년에는 다음과 같은 10개 단체가 허용되었다. 國民協會(閔元植 金丸), 大東斯文會(鄭萬朝 魚允迪), 勞動大會 (金光濟 李說鍾), 商務硏究會(金光熙 魏洪奭), 革新團(劉得信 盧 俊鐸), 儒道振興會(尹用求 鄭鳳時), 商務協會(鄭民和 李鍾赫), 朝鮮靑年聯合會(吳祥根 張德秀)17) 그러나 허용된 출판, 잡지, 단체 등은 그 성격과 구조상으로 보 아 대체로 2:3의 비율로서 親日系의 우세한 진출을 가져왔다. 이 는 齋藤總督의 言論政策의 일면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사회현상으로서는 오래간만에 손수 서적과 잡지 16) 開闢 1921년 1월호 17) 同上

28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를 만들 수 있다는 기쁨에서 투자 내지 기부금을 내는 인사가 많 았다는 점이다. 그 좋은 실례가 開闢社와 漢城圖書株式會社의 등 장이다. 開闢社는 天道敎人인 博川의 崔宗植이 1천원, 邊君恒이 5백원을 기부한 것을 그 기금으로 하여 李敦化 朴達成 李斗星 등이 1919년 12월 20일에 조직한 것으로 첫 사업으로 학술, 종교, 문 예등의 開闢을 발간하였다. 同社는 1922년 9월 出版部를 신설 하여 잡지와 일반서적의 출판에도 손을 뻗히기 시작하였다. 특히 開闢을 비롯하여 부녀층을 대 상으로 한 婦人( 창간), 소년소녀 잡지로 어린이( 창간), 학생을 대상으로 한 學生( 창간), 그리고 開闢이 강제폐간되자 1926년 11월 1일부터 대중잡지 別乾坤을 창간하 잡지발행에 있어서는 언론잡지로서 는 등 한때 잡지왕국을 이룩하였다. 이제 開闢社의 진용을 살펴 보면 거의가 天道敎人으로 구성되 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斌李在賢車相瓚金起氵塵崔宗植朴達成朴君實朴承喆 (在獨逸)方定焕(在日本)李宇明(在中國)張晦根(在美國) 吳世昌 權東鎭 崔麟 閔泳純 洪光鎬 李敦化 李斗星 金玉 18)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실례로서는 자본금 30만원의 株式體로 1920년 5월에 漢城圖書株式會社가 등장된 사실이다. 일시에 이처 럼 다액의 기금이 출판사업에 투자되었다는 것은 실로 日帝下 韓 國出版史上 처음되는 일이다. 이 획기적인 출판사업에 대한 뜨거 운 의욕은 西北出身의 인사들이 그 주류가 되어 이룩되었다. 이들 우리의 진보와 문화의 增長을 위하여 종시 노력하기로 自任 함이란 포부와 열의로서 同會社를 창립하였다. 이제 漢城圖書株 은 18) 開闢 1923년 1월호

29 1. 言論의 活動 式會社의 幹部陣容을 보면 社長에 李鳳夏, 專務에 李鍾駿, 取締役 에 韓奎相 張道斌 朴泰鍊, 監查役에 韓潤鎬 許憲, 顧問으로는 金允植 梁起鐸, 그리고 相談役에는 金相殷 金淋炳 金焕 劉壎 燮 李達元 李鍾麟 李忠健 李恒鎭 林祐敦, 出版部長에는 張 道斌이 각각 취임하였다. 서울主幹에 張道斌, 學生 界主幹에 吳天錫, 編輯員에 金焕田榮澤金成龍盧子泳, 雜 誌記者에 金億劉賢淑 外 6名과 囑託으로 金東仁崔八鏞 外 13 編輯陣容으로서는 月刊言論雜誌 名의 知名人士를 기용하였다. 이리하여 이듬해인 1921년부터는 理想村을 비롯하여 朝鮮大地圖그리고 데모스테네 스 짠따크 루쏘등의 傳記物등을 내놓기 시작하였다. 鄭然圭作 한편 동년 7월에는 또 하나의 株式體의 朝鮮圖書株式會社가 資 本金 25만원으로서 발족되었다. 이는 이제까지 각각 書廛을 가지 고 판매와 출판을 겸하여 온 기성 출판인들이 통합되어 이루어진 도서도매와 출판을 겸한 새로운 조직체이다. 同社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益亨, 監查役 金相冀南廷哲, 그리고 編輯顧問에는 金明植南 社長 池松旭, 專務 洪淳弼, 支配人 金元祐, 取締役 南宮濬 盧 廷哲 등이다. 한편 天一書館 翰南書林 廣益書館 德興書林 永昌書館등이 역시 출판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애국심에 불타오른 韓國의 젊은 이들은 출판에 뜻을 두고 이 방면에 투자하는 정열은 날로 가중해 갔다. 그러나 新聞紙法 出版法 制令第 6號 및 그후의 治安維持 法 朝鮮不穩文書臨時取締令등 韓國人의 언론 출판활동을 제한 통제하는 여러 법규로 말미암아 出版 雜誌界는 결코 평탄치는 않았다. 그것은 원고의 사전 검열이란 가혹한 애로를 돌파하지 않

30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으면 아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성한 출판의욕도 總督府 警務局圖書課의 까다로운 검열관계로 결국 일반적인 서적출판은 극도로 제한되어 그 수가 매우 적었다. ㄱ 년대의 出版傾向 이 무렵에 어떠한 종류와 내용의 책들이 출판되었는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당시의 總督府당국의 검열기준과 방향을 엿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1922년중에 출판된 것. 크롬웰傳, 世界名婦傳-이상은 漢城圖書, 宋淳蘷著 奇人 奇事錄-文昌社, 靑年의 獨立生活-廣韓書林, 成功立身法, 偉人成功의 徑路-이상은 廣韓書林, 朴氏溯源錄-太華書館, 金 祐民著 朝鮮正音文典-朝鮮圖書, 朝鮮之偉人-開闢社出版部, 李光洙作 無情-廣益書林, 朴容奐作 黑眞珠, 톨스토이著 나 의 懺悔, 입센作 人形의 집-이상은 漢城圖書, 方定焕編著 사 랑의 선물-開闢社出版部, 金泳俌作 戯曲集 사랑의 무덤-廣益書 館, 宋完植著 現代勞働問題-永昌書館, 現代思想各論, 靑年 讀本-太華書館, 짠발잔 이야기-博文書館, 朴哲魂作 疑問永昌書館, 金明植編 露西亞革命史와 레닌-新生活社 出版部. 1923년중의 출판된 것 鄭鑑錄(正本)-東洋書院, 批難鄭鑑錄眞本-槿花社, 鮮于全 著 朝鮮의 土地兼併과 그 對策-三光堂, 李章薰編 文獻便考新舊書林, 奇聞世界--啓文社, 玄哲譯 하므레트-博文書館, 閔牛步譯 무쇠탈-東亞日報出版部, 李光洙 開拓者-興文館, 玄鎭健作 墮落者-朝鮮圖書, 盧春城作 反抗-漢城圖書, 타고 아作 金億譯 기탄자리-平壤以文館, 靑春의 사랑 사랑의秘 密 最後의 사랑-이상 京城書館, 사랑의 꿈-永昌書館, 林圭

31 1. 言論의 活動 日本語學音語篇-朝鮮圖書, 朴玄寰著 提要東洋史-興文館, 칼맑스著 民衆社譯 賃金, 勞働及 資本-民衆社, 十大思想家 어이켄哲學 섹스피아와 그 生活-이상은 朝鮮圖書, 安廓著 朝 鮮文明史-滙雁東書館, 李敦化著 人乃天開闢社出版部 著 19) 이상과 같이 1922년 및 1923년에 출간된 서적이란 대개가 傳 記物을 비롯하여 識緯物, 文藝物, 飜案戀愛小說 및 戀愛書翰集, 古 典物과 칼 맑스의 著作物, 그리고 露西亞革命과 레닌 등 몇개의 이데올로기物 등으로 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는 곧 總督府 당국의 검열이 가혹함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다. 민족적인 思想物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은 당시의 출판사로 서는 기획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을 말해 주는 좋은 증좌이다. 왜 냐하면 설혹 그러한 것은 출판기획하여 원고집필이 완료되었어도 검열에 걸려 출판이 허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韓國人의 출판은 일체 전기한 바와 같이 出版法에 의해 總督府警務局圖書課의 사 전 검열을 받아야 되었고 이를 통과하였을 때만 출판을 허가했다. 이러한 관계로 韓國人의 출판물은 자연 그 내용이 저조할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韓國 人의 민족사상과 애국심을 북돋아 주는 저술은 엄중히 억제하면 서도 노동문제라든가 칼 맑스 및 레닌 등의 사상과 革命史의 저 술에는 비교적 관대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이었던가. 이를 구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日本의 정치동향을 참작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日本은 그때 共產革命을 이룩한 蘇聯과 정식으로 국교관계를 맺고 外交使節團을 서로 교환하고 있었으며 그후 서울에도 蘇聯 領事館의 설치를 인정하였었다. 그러므로 日本국내에서는 蘇聯에 제1호 19) 崔埈 韓國의 出版硏究, 서울大學校新聞硏究所學報

32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대한 관심이 점차로 높아 갔고 이데올로기적이라기 보다도 학구 적인면에서 칼 맑스와 레닌의 저서를 번역출판하는 것을 묵인하 는 경향이 질었다. 이러한 풍조는 곧 韓國에도 파급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總督 府의 검 열당국도 아직 이에 관한 체험이 없었던 까닭으로 초창기 에는 비교적 관대했을 뿐이다. ㄴ. 활발성을 되찾은 雜誌 그러면 잡지의 상황은 어떠하였던가. 일반서적과는 달리 韓國人 의 잡지는 매우 활발하였고 또한 투쟁적인 현상을 보여 주고 있었 다. 그것은 정기성을 띠고 있어 계속적으로 발행되었다는 것과 또 다루는 내용이 비교적 다양다색하여 일반서적에 비해 매우 동적 인 성격을 스스로 지니고 있었다는데 그 최대의 원인을 찾아 낼 수가 있겠다. 그리고 또 하나의 원인은 1922년 후반기부터 일부 韓國민간인 경영의 여러 잡지에 대해서도 新聞紙法에 의한 출판 을 허가하였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리하여 잡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에 걸친 시사문 제를 다각적으로 논급할 수가 있게 되어 자연 활발성을 띨 수 있 게 되었다. 더구나 오랫동안 억압당하여 오던 韓國人들의 의사, 주장 및 사상은 이러한 잡지를 통하여 비로소 발현하게 되었다는 事實이다. 그러나 소위 文化政策도 對韓國人의 언론조종면에 있 어서는 대체로 세단계를 두고 조작되었음을 간과할 수가 없다. 잡지는 종교, 학술, 문예 및 業界誌등으로 국한되었으며 더구나 이것이 出版法에 의해 허가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면 원고의 사전검열의 강행과 시사문제를 일체 못다루게 하는데 그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표면상으 로는 韓國人에게 의사표시의 기회를 준것 같은 효과를 거두는 반

33 1. 言論의 活動 면에 실제적으로는 언론자유의 길을 막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더 구나 出版法의 조문에도 없는 행정적인 제한조치를 취하여 잡지 창간을 허가하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總督府當局이 잡지창간을 허가할때 반듯이 계재내용와 항목을 지정한 일이다. 이 허가항목을 이탈하였을 때에는 곧 발매 금지 및 발행정지등의 처벌규정이 적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극도로 제한된 언론을 전개하기 위해 계 속 잡지발간허가를 신청하는 자가 그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이 목을 끌고 나타난 것은 旬刊誌인 新生活이었다. 이것은 朴熙道가 海州의 李承駿으로부터 1만5천원의 투자를 얻 고 西洋人宣敎師 白稚悳을 편집겸 발행인으로 하여 1922년 3월15 일 出版法에 따라 創刊號를 내었으나 발행당일로 總督府當局의 忌 諱에 저촉되어 발매금지 되었다. 開闢의 창간호가 밟은 전철 을 그대로 물려 받은 것이 되었다. 이것은 기백있는 잡지가 발족하 는데 있어서 마치 의무적인양 치러야 할 이른바 당국의 탄압 이란 첫 선물이기도 하였다. 新生活이 이처럼 창간호부터 탄압의 세례를 받은 것은 同 誌의 편집목표부터가 주목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同誌는 대중의 자유사상과 평등 문화를 외치고 나왔으며 파괴 로부터 건설, 개조와 혁신등의 신생활 신운동을 내세우고 나섰다. 新生活이 부르짖고 나온 구호는 확실히 韓國人 사회에 새 로운 파문을 던진 주목할만한 일이었다. 그것은 민족적인 전통과 인습에 도전하였고 日本統治에 반발하 여 社會主義 경향으로 돌진할 것을 암시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同誌는 당시 잡지계의 왕자인 가치를 높이 내세우고 나왔다 開闢과는 대조적인

34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新生活창간호는 어떠한 편집내용 그러면 발매금지를 당한 을 들고 나왔었던가. 이제 그 목차와 집필자를 알아 보기로 하자. 新生活 新紀元의 第1年 第 1日의 나의 所望 姜邁 自由思想과 賢母良妻主義 辛日鎔 重生하자 金元璧 生活의 不安 李星泰 民衆精神의 一考察 鄭佰 社會運動의 先驅者의 出來를 促함 申伯雨 金剛山遊記 春園 社會罪는 何 솔뫼 대개 이상과 같은 내용과 집필진으로서 新生活은 그 출발 을 보았다. 그러나 잡지 편집자들의 열렬한 의욕도 당국의 검열에 걸려 그때마다 원고의 삭제, 몰수, 혹은 발매금지등의 언론탄압을 받아 험란한 길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러므로 韓國人의 新聞 雜誌 記者의 조직체인 無名會에서 는 1922년 1월 26일 臨時總會를 열고 신문과 잡지에 대한 검열 및 허가제의 철폐를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이를 總督府당국에 요 구하였다. 한편 이무렵 韓國人 사회에서는 언론자유를 외치고 이를 요구 하는 여론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이에 대하여 總督府當局의 답변은 종시 치안을 방해한다는 것 으로 일관되었다. 이때 東亞日報는 1922년 1월 17일자 社說에서 치안방해의 정도의 한계를 밝힐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처럼 韓國人사회 에서는 언론 출판의 자유를 부르짖는 소리는 높아만 갔다. 그러 나 總督府當局은 이에 외면을 계속하였다. 따라서 韓國人의 언론,

35 1. 言論의 活動 출판의 자유는 국내에서는 계속하여 봉쇄당하였다. 그 반면 海外 여러나라로 이민 혹은 망명한 韓國人들의 언론활 동은 활발하였다. 신문 및 잡지들의 활약이 바로 그것이다 년 3월 1일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후 上海에서 수립된 大韓民 國 臨時政府에서는 獨立新聞을 창간하였고 한편 同臨時政 府公報 를 발행하여 국내동포를 위해 內地로 계속 발송하였다. 한편 美國에서도 각종 신문과 잡지등이 발행되었고 北京 天津 黑河 間島등 中國大陸의 각처에서도 간행물들이 발행되어 국내 동포들의 국민여론을 환기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日本에서도 이미 여러가지의 잡지가 나오고 있었으나 1922년 12월 15일에는 鄭昌先 崔承萬 金永鎭 崔元淳등의 집 필로 文化新聞-月 2회刊-이 창간되어 국내로 발송된 후 조 국의 질식상태에 빠져 있던 언론계를 위해 공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海外에서 발행된 출판물들은 總督府당국의 엄중 한 단속으로 말미암아 日本에서 발행된 것은 발매금지가 되었고 그밖에 다른 외국에서 출간된 것은 모조리 물수당하고마는 형편 이었다. ㄷ. 民族主義와 社會主義와의 分裂時代 韓國人사회에서 부르짖고 나온 언론자유의 외침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러던 중 總督府當局은 1922년 5월 親日團體인 國民協 時事評論을, 그리고 31독립선언문을 기초하 여 복역후 출옥한 崔南善과 秦學文에게 동년 9월 週刊誌 東明를 會에 대해 月 刊誌 각각 新聞紙法에 의해허가하였다. 國民協會長兼 社長인 閔元植을 時事新聞은 이어 경영난에 떨어지자 전기한 바와 같이 결국 月刊誌로 전환한 것이다. 이에 자극된 開闢을 비롯한 新天地 朝鮮之光그리고 新生活등이 일제히 新聞紙法에 잃은

36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의한 發行許可의 변경운동을 맹렬히 일으켰다. 開闢을 新聞紙 法에 의해 발행하도록 변경허가하였고 新天地 朝鮮之光 新 生活도 마찬가지로 이를 허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親日系인 平 壤의 大東同志會의 鮮于 (竹/洵)에게도 새로 月刊誌 共榮과 週刊紙 大東新報를 新聞紙法에 의한 발행권을 허용하였다. 이리하여 韓國人 경영의 전기한 잡지들은 비로소 정치시사 總督府當局은 마침내 1922년 9월 15일, 우선 평론을 할 수 있게 되어 아연 그 활기를 띠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정치 시사 학술 등의 평론이 허용되자 韓 國人 민간경영잡지계에는 새로 社會主義경향의 논문과 언론이 고개 를 들고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새 경향은 이미 1920년 1월 朴重華 朴珥圭등이 주동이 되어 조직 한 朝鮮勞動共濟會의 창립 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同會는 그해 4월 月刊誌 共濟를 창간하여 회원들간의 교양 계몽에 손을 뻗혔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노동단체가 처음으로 발 족했다는데 의의가 있을 정도밖에 아니 되어 별로 커다란 관심거리 는 못되었다. 이와 때를 전후하여 吳祥根 張德秀등이 주동이 된 朝鮮靑年聯合會가 1920년 3월에 결성되어 그 기관지로서 我 聲 를 발행하고 민주주의 문화운동의 실력양성를 목적하여 강력 히 전면에 나타났다. 共濟와 我聲은 비록 4호까지밖에 각 각 계속치는 못하였으나 벌써 民主主義對 社會主義의 대립상을 엿 보여 주어 앞으로 민족의 독립운동 내지 사상운동의 단조롭지 않음 을 예견케 하였다. 이리하여 1921년에 들어서자 韓國사회의 일부에서는 막연하나 마 점차로 社會主義가 번지기 시작하였고 이어 다음해에는 民族 主義와 분렬하기 시작했다. 민족주의 진영의 여러 단체들은 민족

37 1. 言論의 活動 전체의 취할바 길을 모색하는데 열중하였다. 이를테면 이미 1920 년 6월 26일 尹致昭댁에서 李商在외 91명의 발기로 조직되어 회 원 320명을 가졌던 朝鮮敎育協會에서는 청년들의 교육문제와 자 질향상운동에 나서고 있으며 1923년 1월 23일에는 朝鮮物產獎勵 會(理事長 兪星濬)를 조직하여 다음과 같은 3大口號를 내세우고 민족의 생활향상을 적극 꾀하였다. 즉 1. 입자! 朝鮮人의 짠 것을 2. 먹자! 朝鮮人의 만든 것을 3. 쓰자! 朝鮮人의 손으로 된 것을20) 이는 韓國人의 생활개선을 비롯하여 산업장려와 자작자급의 3 大指標를 제시한 것으로 크게 의의가 있었다. 왜냐하면 직접적으 로는 日帝下 韓國人의 살 길을 명시, 실천하는 것이오, 간접적으 로는 日本植民統治에 대한 저항운동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同會에서는 產業界를 기관지로 발행하여 산업장려에 힘썼다. 다시 同 4월에 들어가서는 李商在를 정점으로한 전국의 유수한 민족주의자들이 발기인이 되어 民立大學期成準備會를 조 직하고 民立大學의 설치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植民地敎育機關에 불만을 가졌던 당시 韓國指導者 들의 반항적인 표현이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總督府 經營의 官立學校에서는 입학자에 관해서 韓國人을 차별대우하였 으며 그 敎授科目 내용에도 민족교육을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民立大學設立運動은 總督府當局의 탄압으로 그 실현을 볼 수는 없었다. 위와같은 韓國人사회의 동향과 현상은 그대로 잡지편집면에 반 영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20) 東亞日報 1923년 1월 25일字

38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즉 各誌의 논조는 점차로 열을 더해 갔고 개중에는 社會主義경 新生活이었다. 新 聞紙法에 따라 편집된 週刊誌 新生活第11號는 露國革命 五 周年 紀念號로 특집 발행되었으나 1922년 11월 12일 總督府當 향이 짙은 편집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은 局에 의해 곧 압수되었고 이어 同第12號도 계속 압수되었다. 동시 에 同社社長 朴熙道와 印刷人 盧基禎 양인은 1922년 11월 22일 구속 검거되었다. 뿐만이 아니라 同社의 印刷機에 대해 封印押收하 는 한편 다시 執筆者인 金明植 金思民 辛日鎔 兪鎭熙등을 검거 기소하였다. 1923년 1월 8일의 공판에서는 전원에게 징역 2년 6개월 내지 1년 6개월의 有罪判決이 있었고 新生活은 무기발행금지의 행 정 처분을 당하였다. 이로서 韓國최초의 社會主義 硏究雜誌는 철 저한 탄압을 받았다. 新生活은 처음 旬刊으로 발행되었으나 검열관계로 정기성을 지키기 어려워 月刊으로 고쳤고 그후 新聞紙法으로 발행할수 있게 되자 이번에는 新聞紙型의 週刊誌가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부터 總督府당국은 社會主義경향의 잡지에 대해 가차없 는 탄압을 가하고 나섰다. 이는 民族主義경향의 잡지에도 적용되 었다. 그 예로서는 白大鎭집필의 논문을 실은 日本爲政者에게 與하노라란 新天地(1922년 11월호)에도 발매금지와 동시에 필자를 검거 기소한 것이 그것이다. 이 일연의 사실은 요컨데 總 督府당국이 언론정책을 일부분 수정 변경한 것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일부 잡지를 新聞紙法으로 허용하여 韓國人 사회의 언론을 물어 주는 대신에 植民統治에 반대 혹은 방해 되는 것은 단호히 처벌 탄압한다는 것이다

39 1. 言論의 活動 이러한 수법은 이제까지의 出版法으로써 사전 검열하여 그 수록 내용을 미리 억제하던 것에 비하면 적극성을 띤 유동적인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방법은 사실 전자에 비하여 후자가 훨씬 교 활한 것이었다. 그것은 전자의 경우 압수라는 행정처분이 고작이 었으나 후자의 경우에는 행정처분에 다시 사법처분까지 가하는 잔 혹한 처벌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社會主義 경 향은 朝鮮之光(發行人 金東爀)과 開闢에도 침투되어 그후 점차로 그 지면을 많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923년 이후 더욱 짙어만 갔다. 이점에 관하여 民主主義를 제창하고 民族代辯을 자임하고 나선 당 시의 東亞日報는 앞날의 韓國思想界를 전망하는 1922년 10월 3 일자 社說에서 吾人은 本來부터 民族主義와 社會主義 兩大思想에 對하여 더욱 硏究할 必要가 有하며 될 수 있는대로 協助가 有한 것을 覺悟하노라. 그 理由는 頑固한 民族主義는 往往히 排他思想을 挑發하며 (中略) 또한 過激한 社會主義는 往往히 階級僧惡와 同 族分裂의 憂慮가 不無하도다. 적어도 同族相愛와 人道的色彩를 띤 社會主義가 아니면 虛無慘擔한 黑幕을 연출할 것도 豫想하 라고 지적한 후 양대사상의 장단과 시대와의 적부 는 바이다 를 심각히 연구하여 그 美를 취하고 그 劣을 버릴것을 경고하였 다. 그러나 이미 社會主義경향으로 다듬질 한 각종의 단체와 구룹 간에는 치열한 헤게모니 다툼과 암투가 계속되었으며 더구나 기 성세력체인각종 民族主義團體에 대해서도 저돌적인 도전행위로 나와 부질없는 민족 분열을 조장하였다. 그러므로 민족분렬과 암투투쟁을 크게 걱정하는 층도 없지 않

40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아 왕년의 西 南 少論의 당파싸움과 같은 투쟁이 다시금 나타나서는 아니 되겠다는 경고와 또한 통탄하는 소리도 높았다. 이점에 관하여 新民公論(1922년 11월호)는 痛哭할 我社會의 分裂과 鬪爭이 란 제목의 논문으로 경종을 울린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이와같이 1923년 10월이후 1925년 사이는 韓國出版界의 성장 발전과정상 社會主義運動의 자연발생시기이며 구태어 말한다면 組合主義的인 經濟運動을 한 때라 하겠다. 그러나 이 시기에 社會主義로 기울어졌던 사람들 중에는 대개가 民族主義의 변형된 연장으로 삼고 나갔던 것이다. 朝鮮日報특파원으로서 모스크바에 다녀온 후 ML黨의 거두 로 검거되어 囹圄生活을 한 바 있는 金俊淵은 후일 당시의 사상 적인 경로를 이렇게 말하였다. 당시의 世界情勢로 보아서는 日本과 對遮的인 관계에 있는 소련과 握手하는 것이 우리의 目的을 達成하는 捷徑이라는 것 을 우리 朝鮮靑年들은 생각하게 되었고 더군다나 내 自身이 생 각하게 되었다 21) 이상과 같은 술회담은 그때 韓國 젊은이들의 사상적 움직임의 배경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1923년이후 새로 나타 난 社會主義경향의 文藝誌로는 李赤曉 李活 宋影등이 焰群의 창간을 들 수가 있다. 그러나 民族主義진영에서는 李光洙주재의 朝鮮文壇과 廉想涉의 靈臺가 나왔다. 1924년의 일이다. 이어 新文藝, 廢虛以後, 性愛, 數理界, 少年世界, 어린 벗, 半島少年등과 1925년에는 일부 北星會系員들로 된 一月會의 기 관지로 社會運動을, 李如星安光泉이 社會科學硏究誌로 思想 運動을 각각 창간하였다. 그리고 또 李晟焕의 朝鮮農民, 鄭國鉉 21) 金俊淵 前揭書

41 1. 言論의 活動 새벗, 李載禹의 相助, 金世映의 佛日, 權相老의 佛敎, 生長, 崔泰瑢의 天來之聲, 黎明, 普聲, 新民, 民生, 少年週報등이 나왔다. 특히 朝鮮文壇은 方仁根의 개인투자로 창간된 것으로서 1927 의 년 4월호(通卷 20卷)를 마지막으로 재정난 때문에 자진휴간하기까지 民族主義文學을 위해 공헌한 바가 실로 컸다. (4) 1) 開闢의 發行禁止 開闢과 現代評論 계급적인 색채를 노골적으로 나타내면서 등장한 것은 1926년 文藝運動이다. 이는 朝鮮프로레타리아藝術同盟(俗稱 카프)의 기관지로서 부르죠아이데올로기의 극복을 들고 나왔 다. 예를 들면 文學에 超越意識과 現代的인 意義(朴英熙), 文 學과 階級(朴衡秉)따위였다. 그러나 당국의 엄한 검열관계로 2월 창간된 1927년 1월 겨우 第3호를 내놓고 폐간할 밖에는 없었다. 카프는 그 후 1927년 12월 第三戰線과 합쳐서 藝術運動을 창간하였 으나 계속되지 못하였다. 時鍾, 4월에는 農民, 5월에는 東光, 8월에는 平凡, 그리고 11월에는 文 藝時代등이 각각 창간되었다. 특히 東光은 同友會(후일의 興士團)에서 발행한 것으로서 이에 앞서 民族主義진영에서는 1926년 1월에 民族主義진영의 유력한 언론기관으로 각광을 받고 등장하였다. 同 誌는 4.6倍版(그후 국판으로 변경)의 새 체제에 한글 철자법으로 용어를 통일하여 그 특징을 보였다. 이리하여 東光은 한글철 자법으로 통일된 최초의 잡지이었다. 그러나 出版法에 의거하여

42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허가된 까닭으로 정치, 시사의 평론을 할 수가 없었고 다만 수양 과 계몽을 위주로 한 기사로만 내용을 메꿀 수 밖에는 없었다. 民族的 肉體改造運動(金昌世), 合 同과 分離(安昌浩), 藝術評價의 標準(李光洙)의 편집내용을 同誌의 창간호를 보면 들고 나와 社會主義의 傾向文學 및 그 평론태도에 일침을 가하였고 특히 민족분리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었다. 집필진으로서도 安昌 奎趙炳玉鄭寅普白性郁金億李容卨金允經李允宰廉 相涉朱耀翰吳天錫朱耀燮金基鎭 등을 망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해 8월 1일 開闢은 總督府당국으로부터 발행금지 란 행정처분을 받아 1919년 31독립운동의 쟁취물인 同誌는 영 浩를 비롯하여 徐載弼 金麗値등의 海外亡命人士와 崔南善 權悳 영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것은 韓國雜誌界에 가장 큰 타격 을 준 불상사로서 韓國사회를 새삼 놀라게 하였다. 왜냐하면 開闢은 天道敎 敎人들이 경영한 가장 오랜 역사 를 가진 종합잡지로서 1923년이후부터 社會主義思想에 관한 논문 을 부분적으로 실려 오기는 했으나 民族主義진영 만이 아니라 전 체 韓國사회의 전통있는 잡지였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開闢8월호는 滌暑號로 특집되었으나 혁명사상을 선전했다 하여 總督府당국으로부터 新聞紙法 제21조를 적용, 드 디어 발행금지의 처분을 당하였다. 이리하여 7개년동안 민족문화 의 향상을 위해 공헌이 많았던 開闢은 사라지고야 말게 되었 다. 同誌는 창간된 이래 通卷 72호로서 사라질 때까지 전후 33회 에 걸쳐 압수와 동시에 발매금지를 당하였다. 그중에 1회는 50원의 罰金刑을 받았고 또 1회는 1925년 8월 第62號가 압수되자 다시 號外로 발행한 것이 문제가 되어 발행정 지를 받았다가 3개월후에 비로소 해제되어 속간하였다. 이제 開

43 1. 言論의 活動 關 의 언론투쟁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압수 및 발매금지를 당한 號數를 년대별로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1920년-창간호, 임시창간호, 제6호 1921년-제9호, 제12호, 제16호 1922년-제19호, 제26호, 제27호 1923년-제34호, 제39호, 제44호 1924년-제45호, 제46호, 제47호, 제49호, 제50호, 제53호 1925년-제54호, 제56호, 제57호, 제58호, 제59호, 제60호, 제62호, 同號外(이때 발행정지당함) 제63호, 제64호 1926년-제67호, 제69호, 同號外, 제70호, 제72호 위와같이 開闢은 7개년동안 通卷 72호를 내는중 33회에 걸쳐 압수와 발매금지를 당하므로 말미암아 입은 재정적인 타격 이 얼마나 컸던가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開闢社 는 불굴의 정신적인 투지로서 同誌를 계속 발행하여 왔었으나 드 디어 발행금지라는 결정적인 탄압을 받고야 말았다. 이는 新生活이 무기발행금지된 이후 두번째 일이었다. 그러 나 同誌의 發行人 李斗星, 編輯人 李敦化 그리고 編輯主幹인 金起 纏은 子息은 죽었으나 產母는 여전히 健在하다 22)고 지를 발행할 결의를 표시하였다. 이리하여 1926년 11월 대신에 계속 잡 開闢 別乾坤을 창간하였다. 이로서 開闢社는 이미 발행하고 있던 각종 잡지와 서적의 출판등으로 여전히 굴지의 언론출판의 기관으로 계속되었다. 開闢誌의 강제폐간으로 말미암아 1926년 8월 현재에 이르 러서는 新聞紙法에 의한 잡지는 朝鮮之光을 비롯한 時事評 論과 李覺鍾의 新民등 세가지로 줄어 들었다. 22) 李鍾洙 朝鮮雜誌發達史, 新東亞 1934년 5월호

44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그러나 朝鮮之光 도 재정난과 원고검열난으로 허덕여가면서 겨우 1931년까지 그 명백을 유지해 갔으나 그 대신 편집내용은 자연 활기가 없고 저조함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27년에 의한 現代評論을 1월에 창간하였다. 이는 開闢이 없어진 들어서자 河駿錫 趙俊鎬 李憲寧 李灌鎔등은 새로 新聞紙法에 공백을 메꾸는데 큰 소임을 지니고 나타났다 하겠다. 同誌의 집필 진도 매우 짜임새 있는 것으로 자연 사회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現代大勢의 大觀(李灌鎔), 中國革 命과 政治的 價値(安在鴻), 朝鮮人의 今日問題(金俊淵), 朝 鮮人經濟의 數字的 槪觀(李肯鍾), 朝鮮農村問題硏究(河駿錫), 個人主義와 社會主義(李順鐸), 맑스時代의 歐洲社會變遷(朴 衡來), 自治運動에 對한 社會學的 考察(白南雲), 新幹會의 任務(洪命憙) 등으로서 편집내용과 그 경향을 알 수가 있겠다. 그 후 1928년 3월 5일 現代評論은 마침내 廢刊屆를 내었다. 同誌 창간호의 차례를 보면 이제 1927년으로부터 1931년 5월까지 사이에 나타난 새 잡지의 이름을 대충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927년 : 朝鮮語學會의 한글, 洪鍾仁의 白雉, 아이생활 新興科學, 金敎臣의 聖書朝鮮, 開城의 思潮, 光活, 妓 生들의 長恨, 노동야학, 백합화, 勞動運動 1928년: 基督敎의 新生, 한빛, 文藝, 朝鮮運動, 理論鬪爭, 崔南善의 怪奇, 白熊 公州. 生의 聲 海 州. 朝鮮週報, 如是, 新聞硏究, 朝鮮詩壇 1929년: 梁柱東의 文藝公論, 京城帝大法文學部學友誌인 新 與, 金東煥의 三千里, 朝鮮文藝, 解放 新小說의 改題, 基督敎系의 農民生活, 槿友會의 槿友, 李鍾麟의 衆聲. 1930년; 藝術一般雜誌, 大衆公論, 全武吉의 大潮, 朴

45 1. 言論의 活動 詩文學, 音樂과 詩, 鐵筆, 白頭山, 新趣味, 朝鮮物產獎勵會會報, 一千동무 實生活, 카프의 大衆訪 群 旗 1931년 ; 產業勞動, 宋奉瑀의 批判, 我等開闢社의 慧星(그후 第一線으로 改題). 龍喆의 23) 1931년 3월 서울의 7個 雜誌社代表들은 언론출판의 권위신장, 경영상의 협조, 회원간의 친목을 목적으로 朝鮮雜誌協會를 결성 하고 다음과 같은 7개항목을 결의하였을때 總督府당국은 이를 또 한 묵인하고 더구나 出版法에 의한 잡지에 대해 어느정도의 정치 시사문제를 다루어도 무방하다는 태도로 나왔다. 결의사항이란 (1) 검열제도를 철폐할것 (2) 新聞紙法을 범위확장할 것 (3) 時間 制限의 규정을 철폐할 것 (4) 一部削除로서 全文削除로 된다든가 또는 出版의 불허가에 의한 징계적 수단을 철폐할 것 (5) 人物評을 허가할 것 (6) 검열시일을 단축케 할 것 (7) 편집기술에 속하는 기사취급방법에 간섭하는 것을 철폐할 것 등이었다. 2) 各新聞社의 雜誌刊行 1931년 6월 第6代總督으로 취임한 宇垣一成은 민심파악을 위 한 정책의 일환으로 自力更生과 心田開發이란 두 슬로건을 내세 웠다. 그러나 그는 韓國各地에서 族出한 젊은이들의 각종 단체를 탄압하였고 또 무수한 강습소등을 폐쇄시켰다. 더구나 그가 취임한지 불과 한달도 못되어 滿洲에서 韓國人과 中國人사이에 충돌된 萬寶山事件이 일어나 國內로 비화 확대되었 다. 이를 이용하여 韓國民族의 시선과 관심을 바깥으로의 전환을 꾀하였다. 이리하여 日本은 그해 9월 소위 滿洲事變을 일으켜 軍國主義一 23) 金根洙 韓國雜誌概觀및 號别目次 pp 韓國學硏究所

46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路로 다름질 쳤다. 이를 계기로 日本은 철저한 左翼탄압으로 나왔 음으로 共產主義者들은 완전히 지하로 잠입할 밖에 없었고 社會主 義경향의 논조도 또한 저조할 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배경 아래에서 東亞日報社는 1931년 11월 새로 종합지인 新東亞를 창간하였다. 원고난에 겹치는 검열난, 그리고 재정난에 허덕이던 것이 당시 民間雜誌들이 공통적으로 받은 3대 고통이었으나 新聞 新東亞는 비교적 이러한 고통을 제거해 가면서 편집을 할 수 있었다. 新東亞의 출현은 다른 민간인들의 잡지 社를 모체로한 를 압도하게 되었고 그후 各誌들은 자연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 다. 더구나 이에 더 박차를 가한 것은 朝鮮中央日報社가 1933년 11월 中央을, 다시 1935년 11월에는 朝鮮日報社에서 朝 光 등의 종합잡지를 각각 창간한 사실이다. 이리하여 韓國의 종합 잡자는 전기 세 新聞社가 경영한 3잡지가 패권을 장악하고 말았다. 다시 東亞日報社에서는 1934년에 女性雜誌인 新家庭을, 朝鮮 少年中央을, 그리고 朝鮮日報社에서는 1936 년 3월에 女 性등을 내어 新聞社經營의 잡지시대를 가져왔다. 中央日報社에서는 이 바람에 宗敎團體에서 경영하는 것이라든가 株式會社경영의 것, 기타 學術誌와 같은 것 이외에는 존속하기 힘들게 되어 갔다. 이러한 현상은 이제까지의 韓國雜誌가 뚜렷한 대량의 독자를 확보치 못한데 기인되는 것으로서 대중속 깊이 뿌리를 박지 못했 음에 있다 아니할 수 없다. 또 하나의 커다란 원인은 당시의 韓 國讀書界가 日本出版物에 의해 침식되었다는 점이다. 각종 日本 出版物의 침투도는 그 비중이 매우 컸었다는 사실이다. 여기다가 다시 시국의 급변에서 오는 중압감이 또한 커 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지가지의 악조건속에서도 여전히 간 할적이나마 각종의 잡지는 나왔다가는 살아지고 또 나오는 것

47 1. 言論의 活動 이었다. 이제 이를 년대별로 대충 들어 보면 아래와 같다. 한글, 新朝鮮, 文學建設, 新興 映畵, 第一線, 東方評論, 또 1933년에는 카톨릭靑年, 野 談, 金若水의 大衆, 朝鮮文學, 學燈, 哲學등을 들수 있 고, 1934년에 正音, 震檀學報, 劇藝術, 形象, 新人文學, 文藝創造, 다시 1935년에는 四海公論, 元世勳의 中央時報, 野談등이, 그리고 1936년에는 鑛業朝鮮, 朝鮮農民, 延禧詩 蘊, 普專學生등이 나왔다. 그러나 宇垣總督의 뒤를 이은 第7 代總督 南次郞은 1936년 8월에 취임하자마자 이른바 內鮮一體라 1932년에는 朝鮮語學會의 는 구호를 내걸고 나왔다. 이는 朝鮮軍司令官을 역임한 現役陸軍大 將인 總督으로서 韓半島와 韓國민족을 이른바 皇土化와 皇民化 를 시켜야 한다는 결의표명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1940년을 고 비로 하여 言論, 出版界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모든 분야와 더불어 軍國 日本의무모한 侵略戰時體制로 급변되어만 갔다. 1939년 2월에 文章은 總 25호를 마지막으로 살아져야만 했 다. 그것은 總督府당국의 강제명령으로 이른바 國語常用이라하 나타난 李台俊의 여 日本語로 편집을 해야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같은해 10월 人文評論은 總 16호를 낸 후 1941년 11월 日本語로 된 國民文學으로 改題하여 이른바 皇 에 창간된 역시 文藝誌인 崔載瑞의 道文學誌로 전환하였다. 이에 앞서 전일의 新生活誌사장이었던 朴熙道는 솔선 日本語 東洋之光을 창간하여 이목을 끌었고, 이어 1941년 2월에 는 梁在廈의 春秋를 비롯한 각종 잡지가 점차로 그 내용을 軍國 로된 調로 편집하였고 日本人 집필의 글은 원문 그대로 日本語로 수록하 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博文出版社의 新時代, 大東亞등도 그

48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뒤를 따랐다. 그러나 軍國 日本의 이러한 민족 고유의 언어와 문자 의 사용을 억압하고 금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韓國민족의 슬기와 끈질긴 노력은 계속 민족문화 확보에 집중되어만 갔다. 그 좋은 하 나의 본보기는 이러한 악조건아래에서도 韓國語辭典의 地下出版 이 성행되었다는 것과 창립이래 계속 적자운영이었던 漢城圖書 株式會社의 각종 출판물이 그 어느때 보다도 많이 팔려 크게 흑자 를 내었다는 사실등으로 이를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5) 文盲退治運動 민간 신문의 등장은 한글의 보급과 文盲退治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신문발행으로 韓國人대중의 읽기운동에 강력한 자극을 주 었고 이에 따라 문맹퇴치 역시 자연 병행하게 되었다. 이미 지적 되었듯이 신문이 여러 문화분야에 걸쳐 많은 공헌을 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이 文字普及 및 문맹퇴치운동에서 이룩한 공헌은 더욱 빛나는 대목의 하나이다. 1925년 9월 현재의 통계로 나타난 각종의 남녀 단체는 도합 4.470개로 되어 있다. 물론 이 통계는 당시의 朝鮮總督府 朝鮮史 料 제20집에 수록된 것으로 서울의 각단체의 본부 및 그 지회등 을 합친것이나 이중에서 靑年會는 447개이고 宗敎靑年會는 306 개, 그리고 종교類似단체가 1,474개로 되어 있다. 그후 1927년 2 월 민족단일결사인 新幹會와 역시 그해 5월에 결성된 槿友會등의 출현으로 그중의 많은 청년단체가 이에 통합 흡수되었다. 이들 청 년 단체가 또한 민간신문과 보조를 맞춰 문맹퇴치운동에 정력을 기울렸음도 기록할만 하다. 文字普及운동을 먼저 조직적으로 밀고 나온 것은 朝鮮日報社가

49 1. 言論의 活動 1929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실시한 제1회 歸鄕男女學生文字普 及運動 을 들어야 되며 뒤이어 나타난 또 하나는 1931년 여름부 學生夏期브나로드運動이다. 즉 전 자는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가르치자! 나 아는 대 로란 口號가 박힌 한글원본책을 대량으로 인쇄 배포하여 그 교 터 시작한 東亞日報社의 재로 삼았고 보급운동에 우수한 성적을 올린 남녀 학생들에게는 상금을 주기도 하였다. 후자의 경우 역시 여름 방학을 이용한 남 녀학생을 동원한다. 배우자 ㄱㄴ부터란 구호로 전국으로 전개 된 글장님없애기 운동으로 그 규모와 조직은 가장 짜임새가 있었 다. 그것은 글자를 가르키는 學生啓蒙隊로부터 學生講演隊, 學生 記者隊등으로 구성되었고 이밖에 지방유지들은 이에 참가를 희망 하는자를 위한 別動隊도 되어 한글공부 日用計算法등의 인쇄물을 배포하였다. 사실 글장님 없애기 운동의 선구는 東亞日 報社라 할수가 있다. 그것은 1928년 3월에 이미 同報창간 8주년 기념 사업으로 대대적으로 이 운동을 준비 추진중 總督府당국의 중지령때문에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두 新聞社의 문자보급운동의 연도별 통계를 보면 朝鮮의 文字 보급운동 참가학생 수강자 1929년 409명 2,849명 1930년 900명 10,567명 1931년 1,800명 20,800명 1934년 5,079명 不明 東亞의 브 나로드운동 참가학생 수강자 1931년 423명 9, 492명 1932년 2,724명 41,513명 1933년 1,506명 27,352명 1934년 1,094명 20,601명 이 지음 基督敎에서도 하기 아동성경학교란 모임을 각 교회마다 열어 한글 가르키기운동에 적극 참여한 업적 또한 적지 않았다. 1928년 당시 文盲者 80퍼센트를 가르치고 있을때 민간신문들이 한

50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결같이 그 타파운동을 크게 벌이게된 것을 너무나 당연한 노릇이 었다. 그것은 모든 단절로 정체, 그리고 곤욕과 부진을 일소하고 분연히 일어나서 자아를 회복하는데 그 기본이 되기때문이다. 그러나 總督府 당국은 1935년에 이르러 민간신문사들의 文字 普及운동을 또다시 중지시켰다. 그러나 한글은 그후 계속 교회와 주일학교를 통해 번져만갔다. 崔 埈 2. 民 族 敎 育 (1) 日帝의 敎育政策과 民族敎育 19세기 말 門戶開放이 이루어진 이래 韓國에 대한 열강의 세 력 다툼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또 이로 인하여 韓國의 內政이 갈 피를 잡기 힘들만치 어지러웠었다는 것은 오늘날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어려운 때에 韓國의 선각자들은 이미 저들 열강앞에서 韓國이 너무나도 무력하다는 사실과 함께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었던 것이니, 그것은 다름아닌 더 늦기전에 韓 國도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여 교육을 새로이 해야 하겠다는 것이 었다. 이것은 특히 신흥 日本이 淸日戰爭과 露日戰爭을 통하여 東西洋의 兩大國을 제압함에 이르러 더욱 더 확고한 신념이 되었 고, 따라서 우리 사회를 근대화하여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새로운 교육의 보급에서 찾고자 했던 것 이다. 그리하여 1910년 韓日合邦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국내 에서는 대대적인 교육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시기의 교육운

51 2. 民族敎育 동은 곧 韓國 新敎育史上 民族敎育의 방향을 그어준 획기적인 사 건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말해서 1905년 乙巳條約으로 부터 1910년 合邦까지 6년 동안에 일어난 국내에서의 교육운동은 韓國 現代史에 있어서 하나의 계몽기를 마련해 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日帝가 우리의 국권을 유린하고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명백해지자 우리 민족은 日帝에 대하여 한편으로 義兵을 중심으 로 한 무장항쟁을 벌이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교육을 통한 開 化文明운동을 일으켰는데, 무력항쟁이 日本 군부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면서 부터는 후자의 길, 즉 교육운동의 가치를 더욱 더 깊 이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 무렵에 韓國 전역에 걸쳐서 私學이 크 게 일어나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기울어 져가는 國運을 바로 잡고 사회적인 모든 병폐를 일소하는 수단 방 편으로서 우리 민족이 교육의 광범한 보급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學會畿湖學會嶠南學會關東學會와 같은 민중의 지도적인 단 따라서 安昌浩 李昇薰 李東輝와 같은 선각자와, 그리고 西北 체와 宗敎團體가 중심이 되어 大救國敎育運動이 전개되었다. 결 국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른 당시의 교육운동, 私學의 발흥은 사 실상 범국민적인 것이 되었다. 이 시기에 설립된 私立學校의 수 가 전부 얼마나 되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으나, 合邦直前인 1910년 7월 1일 현재 大韓帝國 學部에서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學部의 인가를 받은 私立學校의 수가 2,240校에 달하고 있다.1) 이 통계는 그보다 2년 전에 私立學校令이 내려져 다수의 學校가 1) 1910年 7月 1日現在 學部에서 調査한 全國學校數(官報 第4,756號 隆熙 4年 月 13日刊 彙報欄 所載)

52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폐쇄된 뒤의 것이다. 따라서 폐쇄된 學校까지 합친다면 상당수에 달하였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종전에 漢文을 가르치던 書堂이 學校나 義塾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新學問을 가르치고 都市마다 夜學校와 講習會가 생겨 新敎育의 보급을 촉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물론 교육기관으로서의 규모와 시설을 별로 갖추지 못했을지 몰라도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에 그처럼 맹렬한 교육 운동이 민간인들에 의하여 일으켜졌었다는 것은 문화적인 一大事 件으로서 특기할만한 일인 것이다. 서울의 養正義塾 普成學 校 徽文義塾 進明女學校 明新女學校 平安道의 五山學校 大成學 校 등이 다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이 같은 私學의 발흥이 外勢, 즉 이 시 기의 日帝의 침략에 의해서 자극되었을 뿐 아니라 하루속히 우리 사회를 近代化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해야 되겠다는 진지한 민족의 식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므로 私學의 교육정신이나 교육내용이 처 음부터 정치적 색채를 띄게 되었음은 어찌할 수 없었던 추세였 다. 한편 이렇게 무수한 私學이 애국심을 앙양하는 동시에 排日사 상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음을 본 統監府는 마침내 1908 년 8월에 私立學校令을 공포해서 私學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 를 가하게 되었는 바 이로써 당시 救國運動의 일환으로 전개되던 私立學校 敎育은 그 본래의 사명을 다 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合邦 이후엔 급기야 문을 닫지 않을 수 없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더욱 혹심한 억압과 본격적인 통제의 예고에 불 과했다. 1910년 合邦이 성립되자 日帝는 우리 민족에 대한 철저 한 植民政策에 의거하여 교육 방침을 수립 실천했던 것이니 이 시기의 民族敎育의 형세가 얼마나 곤경에 처했었던가는 여기서

53 2. 民族敎育 긴 설명을 따로이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日帝의 韓國 植民統 治 36년간의 행적으로 보건데 그들은 韓國人의 민족성을 말살하 고 또 문화를 파괴함으로써 日本人의 노예로 만들며 경제적으로 는 우리를 착취하여 自國의 부강을 도모하고 또 이 나라를 中 國 大陸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음이 명백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植民地政策에 맞춰 總督府의 교육방침도 수립되었고 또 실천에 옮겨졌던 것으로서, 그 내용은 日帝 지배하에서 전후 4차 에 걸쳐 공포된 소위 朝鮮敎育令에 의해 명시되고 있다. 이 朝鮮敎育令이란 것은 韓民族의 同化라는 日帝의 커다란 목표로 지향하는 과정에서 그때 그때 형편에 따라 韓國 民族敎育의 내용 을 세부적으로 변경한 데 지나지 않는 것이나 이로 말미암아 民族 敎育運動의 형태에도 변화를 가져 오게 하였던 만큼 그 내용을 여 기에 간단히 설명해 들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본다. 제1차 朝鮮敎育令은 初代 總督 寺內正毅에 의해 1911년 8월에 공포된 것으로서 이는 日帝統治 초기에 속하는 10년 동안에 행해 진 교육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이어 같은 해에 普通學校 高等普通學校 女子高等普通學校 實業學校 私立學校의 規則등 관계 법규가 공포되었고, 1915년에 가서 專門學校規則이 비로소 공포되었다. 全文 30條로 된 전기 朝鮮敎育令의 핵심은 韓國人을 모두 皇民化하고 時勢 民度에 맞는 교육을 한다는 취지하에 日 本語敎育과 實利敎育에 치중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로써 韓國 학 생들은 日本 臣民化의 토대가 되는 日本語와 근로교육 실과교육 의 전수에 힘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朝鮮敎育令은 私立學校 敎育의 근본적인 規制 조항을 條文 제1조와 제28조에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私立學校 에 대한 감독을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하여 1908년 統監府시대의

54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私立學校令을 개정, 私立學校規則을 공포하더니 다음엔 이것으로 서도 私學을 官 公立學校처럼 철저하게 통제할 수 없다고 보았 는지 1915년에는 改正私立學校規則을 또 다시 공포하는 등, 私學 통제의 농도를 최대한으로 짙게 하고자 했었다. 이 改正私立 學校 規則에 의거하여 당국은 여지껏 어느 정도는 治外法權에 속 해 있 던 外國 宜敎師 경영의 基督敎系 학교를 포함한 일체의 私 學에 대하여 적극적인 취체의 손을 면칠 수가 있게 되었다. 제2차 朝鮮敎育令은 3 1운동의 폭발에 자극되어 1922년 2월 에 공포된 일종의 융화적인 방법에 의한 植民地 교육 정책의 표현 이었다. 즉 우리 민족의 거족적인 봉기에 당면한 日本 당국자들은 결국 武力으로써 韓民族을 통치할 수 있다는 그들의 안일한 생각 에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종래의 武斷政策 을 완화, 소위 文化政治를 표방하고 나섰던 것이다. 齋藤 實 總督 이 새로이 부임하면서 나온 이 文化政治의 미명하에 여하튼 日帝 統治 초기에 공포 수단으로 채용되었던 憲兵警察制가 폐지되 고 韓國人 官吏의 등용문이 약간 열리게 되었으며, 또 어느 정도의 言論 集會의 자유가 허용되어 東亞 朝鮮 등 민간 신문 및 잡지 가 창간되기에 이르렀고, 몇몇 민간단체의 조직도 생기게 되었다. 특히 軍國主義的인 심볼로서 관리와 교원의 허리에도 칼을 차도 록 되어 있던 종래의 규칙을 폐지하여 자못 부드러운 정책을 시행 했던 바 전기 제2차 朝鮮敎育令만 해도 朝鮮統治 초기에 자기네 교육제도 보다도 훨씬 저급이었던 韓國의 敎育制度를 소위 자기 네 본토의 교육제도에 준거하여 뜯어 고쳤다고 하는 커다란 변화 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韓國人에 대한 차별대우를 없애겠다는 것 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들의 말로는 韓國의 民度가 이제 높아졌기 때문에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한다 하였으나 실은 3 1독립운동으

55 2. 民族敎育 로 팽배해진 韓國人희 反日感情 완화에 主眼을 둔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때의 文化政治는 외견상 온건하고 부드 러운듯 하면서도 실은 한층 더 음험하고 교활한 방법에 의한 同化 政策에 불과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나마 1927년 12월 齋藤 實의 후임으로 山梨半造가 韓國에 오자 寺內時代의 소위 民度에 맞는實科敎育 방침으로 환원되어 다시금 교육침체의 시기로 돌입하게 되었다. 이즈음 日本은 그 제국주의적 야망을 아시아 大陸에 펴기 위해 滿洲事變 中日戰爭 太平洋戰爭을 도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그들은 韓國을 兵站基地化하여 人的 物的 資源供給源으로 만들려는 정책을 쓰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韓國人에 대한 교육 도 大陸侵略戰爭을 지원하는 방편이 되게 하였으니, 國體明徵, 內鮮一體, 忍苦鍛鍊이라는 슬로우건을 내걸어 교육의 기본방침 으로 삼고 학생들을 전적으로 戰爭物資의 생산, 國防施設의 건 설, 日本軍에 대한 봉사사업에 동원하고 소위 志願兵제도를 만 들어 그들을 戰場으로 유도하였다. 이같은 사정에 응하여 당시 의 總督 南 次郞은 1937년 10월에 皇國臣民誓詞를 제정, 朝 鮮의 학교, 관공서, 회사 등에서 朝會때마다 이를 외우게 함으로 써 소위 皇國臣民化敎育을 극도로 강화하였다. 1938년 3월에 공 포된 제3차 朝鮮敎育令은 이같은 시정 방침의 토대 위에서 정해 진 것이었다. 이 敎育令에 의해 학교에서는 우리 글이 완전히 폐지되고 그 대신 日本語의 상용이 강요되었고 1940년에는 內鮮一體라는 미 명하에 우리의 성명을 日本式으로 創氏케 하기까지 하여 이에 응 하지 않은 사람의 입학, 진학을 허가하지 않기도 했다. 이 교육 제도의 수정으로 日本은 종래의 韓國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를 정

56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정하는 양 학교 명칭을 小學校, 中學校 등으로 통일시켰으나 이 것은 다만 형식상의 조치요 실질상의 차별은 여전히 남아 있었 다. 그들은 이처럼 韓國人에 대해서 강요한 희생의 댓가로 형식 적인 대우를 해주면서 민족말살정책을 지체없이 수행해 나간 것 이다. 민족교육의 자율성이 이토록 짓밟히고 日帝의 간악한 民族同化 政策에 더 없이 유린되던 국내의 각급 학교들은 그나마 1941년 太平洋戰爭의 발발로 최악의 수난을 겪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專門學校 이상은 1년 더 빨리 大東亞共榮圈 확립 및 臨戰奉公에 매진케 한다는 구실하에 수업년한을 4년에서 3년으로 단축하였는 데 이는 동년 5월에 日本閣議에서 결정한 韓民族에 대한 徵兵제 도의 실시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1943년 4월에는 종래 의 敎育令을 근본적으로 개정하여 제4차 朝鮮敎育令을 공표 시행 하게 되었는데 소위 皇國의 道에 따를 國民鍊成에 목적을 두 고 각급 학교의 學制改革을 단행, 국가 유용의 인물을 鍊成한다고 했다. 이어 1945년 5월엔 學徒의 決戰態勢 확립을 위해 이른 바 戰時敎育令이 내려져 학생과 교육기관은 일제히 太平洋戰 후 수행에 동원되었다. 이 동안에 民族敎育 내지 私學은 극도의 탄압 을 받게 되었다. 韓國語의 교수와 사용이 금지됨은 물론 日本語의 교수가 강화되고 韓人교원의 추방과 日本人 교원의 대량 진출로 私學은 사실상 日人의 손에 강점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民族敎育 내지 私學은 日帝統治下 36년간에 있어서 가장 혹심한 수난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날로 강화되어 온 그들의 탄압 속에 서도 수시로 民族敎育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니, 즉 統 監府時代에서부터 시작하여 日帝統治 초기에 해당하는 년대의 각종 民族敎育機關(밋숀系 學校를 포함한 私

57 2. 民族敎育 立學校, 專門學校 등)의 성장, 3 1독립운동이 있은 후 日帝의 소 위 유화정책을 이용하여 크게 일어난 1920년대의 勞動夜學會 職 業敎育 文盲退治의 브나르드운동 및 民立大學設立運動, 그리 고 역시 20년대 후반기에 싹터 1930년대의 전 기간과 194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크게 事業을 벌였던 朝鮮語學會의 활동은 日帝의 植民地 統治下에서 모진 탄압을 무릅쓰고 韓國民族이 자주적 주 체적으로 民族의 장래를 전망하면서 그 당시 벌였던 一大 民族運 動 文化運動이었음을 오늘날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准公 私立學校 立普 計 計 合計 府 通學 道別 專門 高等 實業 普通 校 高等 實業 普通 各種 宗敎 漢城府 4 2(女) (女) 京 畿 種別 官公立學校 忠 忠 全 慶 北 南 北 北 慶 黃 平 平 南 海 南 北 江 原 咸 南 咸 北 計 , ,152 2,238 이 統計에서 私立學校중 各種은 學會나 有志들이 세운 것이고, 宗敎는 宗敎團體에서 세운 것이다. 勿論 宗敎團體라고 하면 大體 로 基督敎 敎會가 이에 해당되었다. 地域的으로 關西地方에 많은 數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 地方에 敎會가 많이 세워져 있었기

58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때문이다. (2) 民族敎育機關의 成長 舊韓末 爲政者들도 근대적인 敎育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 렇기 때문에 1886년 헐버어트(Homer B. Hulbert) 등 美國敎師 3 인을 초빙하여 育英公院을 설치한 바 있고, 甲午更張 뒤에는 敎育 詔書를 내려(1895년과 1899년 兩次에 걸쳐 내림) 본격적으로 교육 사업의 추진을 다짐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895년 4월의 漢城 師範學校官制를 비롯해서, 外國語學校官制, 中學校官制 등 여러學 校官制와 規則이 제정되고, 실제로 小學校 中學校 師範學校 稱됨)小學校貞洞小學校齋洞小學校養士洞小學校校洞小學 外國語學校 등이 세워졌다. 水下洞小學校 壯洞(뒤에 梅洞으로 改 校 등 官立小學校가 서울에 설치된 것은 이 때였으며, 이 밖에도 지방 觀察府 소재지와 기타 府郡에 50여의 公立小學校가 설립되 었다. 이들 學校의 설립은 비록 당시의 정부가 충분한 財政的 지 원을 해주지 못하고 또 新敎育에 대한 一般國民의 이해가 부족하 여 별반 눈에 띌만한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역시 수 천 년래의 舊敎育을 국가에 의해서 탈퇴해 보려 한 노력이었다는 점 에서 기억할만한 일이다. 이렇게 새로운 교육을 위한 발돋움을 위해 정부가 힘을 기울이 고 있을 때 민간인들 가운데에서도 새 시대에 눈을 뜬 선각적인 人士들이 따로이 敎育機關을 설치하였으니 1895년의 興化學校를 비롯하여 1901년의 洛淵義塾, 1902년의 牛山學校, 1904年의 靑 山學院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학교들 또한 경제적 기초가 박약한 외에 너무 시세에 부응하여 정규적인 교육보다는

59 2. 民族敎育 外國語 위주의 교육을 시행했기 때문에 그 수명이 길지를 못했다. 한편, 이 무렵엔 韓國 민간인에 의해 私立學校가 세워진 것 이외 에도 宣敎師들에 의해 설립되는 학교의 수가 급증했으니 일찌기 1380년대에 시작된 培材, 梨花, 儆新 등의 男女學校에 이어 京鄕 各地에 적지 않은 수의 밋숀系 학교가 서게 되었다. 그 중요한 것만 들더라도 1894년의 平壤 光成學校(監理敎派)와 崇德學校(長老敎派), 1895년의 서울 貞信女學校(長老敎派)와 東 萊 一新學校(長老敎派), 1896년의 平壤 正進學技(監理敎派)와 서 울 攻玉學校(監理敎派), 1897년의 平壤 崇實學校(長老敎派), 1898 년의 서울 培花學校(南監理敎派)와 載寧의 明信學校(長老敎派) 및 平壤 盲啞學校(監理敎派), 1903년의 平壤 崇義學校(長老敎派)와 元山 樓氏學校(監理敎派) 및 木浦 貞明學校(長老敎派), 1904년의 開城 好壽敦學校(南監理敎派)와 元山 進誠女學校(長老敎派), 그 리고 1905년의 公州 永明學校(南監理敎派)등이 있다. 이들 밋숀 系 學校들은 당시 정부나 민간인에 의해서 설립된 학교들과 달리 女學校가 많다는 것이 이채로웠다. 이 학교들은 재정적인 기반이 비교적 튼튼하고 또 정통적인 교육을 목적으로 하였던 만큼 그 수 명이 길어 오늘날에까지 계속되면서 번창한 학교가 적지 않은 것 이다. 이처럼 舊韓末에 정부나 종교단체, 그리고 민간유지들이 새로운 교육을 통하여 이 나라를 국제사회의 一員이 되도록 늦게나마 심 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1905년 保護條約의 체결로 韓國에는 日人 의 統監府가 서게 되고, 따라서 우리 정부의 모든 정책 수립과 중 요 행정사무가 실제로 日人들의 지배를 받게 되자 民族敎育도 정 상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없게 되었다. 統監府가 설치되자 정부 각 분야에 걸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60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물론 敎育 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統監府에서는 學制의 정리와 普通敎育확장을 서둘렀다. 즉, 종래의 小學校는 普通學校로 개칭 했으며. 그 수업년한을 4년으로 단축시키는 동시에 재래의 中學 校는 高等學校로 고쳐 그 수업년한을 3년 내지 4년으로 하였고, 각급 학교를 學期制, 學級制를 조직화하여 학생, 학급의 定員制 를 실시한 것이다. 이 밖에도 새로 師範學校令 實業學校令 外 國語學校令 등을 제정, 기왕에 있던 學制를 대폭 개편하였다. 普通學校 擴張事業은 우선 임시 교육 확장비 50만원 가운데서 410,773원을 普通學校 확장 또는 신설에 충당하였다.2) 그리하 여 이 初等敎育機關 확장 제1기 계획사업으로 1906년에는 서울 에 官立學校 9개와 地方 道所在地와 기타 都市에 公立學校 13개 도합 22개소를 설치 (1910년에 官立普通學校는 漢城師範學校의 부속 학교가 된 安洞普通學校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漢城府에 移管되어 公立學校가 됨)하였고, 제2차 계획으로 1907년에는 開城 仁川 安城 淸州 등에 28교를 추가 개설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이 듬해인 1908년에는 제3차 계획에 의해 靈岩 古阜 宣川 江 華 驪州등에 9교를 증설하게 되었다. 더우기 다음 해에는 신설된 釜山實業學校에 釜山普通學校를 병설, 이로써 1906년에서 1909 년까지의 기간중에 官立 1, 公立 59, 도합 60개교가 설치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밖에 私立學校로서 學部가 인정하는 학교에 대 해서도 보조를 해준 補助指定普通學校라는 것이 1910년까지 전 국에 41교나 되었다. 그러나 이와같은 普通敎育의 확장, 정확히 말한다면 公立學校의 확충을 꾀한데에는 統監府에서의 목적이 있 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日本人의 주도하에 운영되고, 또 日本語를 주요 과목으로 가르치려는 학교를 갖기 위해서였다. 2) 學部編 韓國敎育, (1906) p

61 2. 民族敎育 결국 植民政策을 용이하게 실시하기 위하여 취해진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日帝의 속셈은 누구나가 다 뻔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韓國民들은 公立學校를 불신하게 되고 자제 들 을 취학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데 비하면 私立學校의 경우는 아주 달랐다. 앞서도 말했듯 이 이미 국운이 쇠하고 있음을 통감하여 하루속히 신학문을 보급, 국가와 민족을 近代化함으로써 구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선각자 들에 의해서 여러곳에 私立學校가 세워진 바 있거니와 일단 치욕 의 保護條約이 체결되자 더욱 더 민족적인 감정과 시대적 요청에 자극을 받아 그야말로 민간에 의한 一大 敎育救國運動이 전개하 게 되었다. 그리하여 韓國 歷史上 일찌기 보지못했던 私學의 전성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私立學校에서는 民族精神의 고취와 體力의 연마가 무엇보다도 강조되고 있었다. 학교에서 사용된 교과서가 그러하였으며, 교정 에서는 태극기가 날리웠고 모든 집회에선 애국가가 불리워졌을뿐 더러, 교내활동을 위시해서 토론회, 강연회 같은데서는 서슴치 않 고 親日政府를 통박하고는 했다. 이 에 統監府는 이 토록 排日 民族的인 색채가 질은 私學에 대하여 통제를 가하는 조치를 취했 던 것이니 이것이 1908년의 私立學校令이었다. 결국 모든 私立學校로 하여금 學部의 인가를 받도록 하고, 당국 의 비위에 거슬리는 교과서를 쓸 수 없도록 마련한 이 私立學校令 은 그 때까지 수에 있어서 범람하고, 질적으로 排日民族的인 私立 學校를 당국이 통제하게 된 최초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때의 통 제는 그래도 統監府에 대한 민간의 반발을 두려워하여 별반 엄격 한 것이 못되었다. 私學에 대한 가혹한 정도의 탄압은 1910년 合 邦이 이루어진 이후에 본격화하였다

62 Ⅰ. 抵抗期의 民族文化 日帝가 우리나라를 강압적으로 병합하여 植民政治를 시작하자 그들은 소위 一視同仁이라는 미명하에 영토적으로는 內地 延長主義 를 내걸고 韓國民族의 문화를 말살하여 日本人으로 만 드는 民族同化政策을 강력히 촉진하였다. 그들은 이 목적 달성을 위해 한 편으로는 武斷政治를 감행 했을 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 는 교육의 수단을 빌었던 것이다. 日帝植民地 統治의 제1단계에 해당하는 1910년대의 교육방침은 初代 總督 寺內가 1911년 8월 朝鮮敎育令을 공포하고 실시한 무렵에 행한 다음과 같은 담 화에 잘 나타나 있다. 帝國敎育의 大本은 일찍 敎育에 關한 勅語에 明示되어 있는 바로서, (中略) 朝鮮敎育의 본의도 여기에 있다. 생각컨데 朝鮮 은 아직 內地와 事情이 같지 않다. 그러므로 그 교육은 특별히 힘을 德性의 함양과 國語(日語)의 보급에 힘써서 帝國臣民으로 서의 자질과 품성을 갖추게 하여야 한다. 만일 空理를 論하고 實行을 멀리하며, 勤勞를 싫어하고 安逸에 흐르며, 質實敦厚의 美俗을 버리고 輕俳浮薄의 惡風에 빠지는 것과 같은 일이 있다 면 이것은 교육의 本旨를 배반할 뿐 아니라 마침내 자기 一身을 그르치고 累를 국가에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실시하 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時勢와 民度와에 맞게 함으로써 良美한 효과를 얻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3) 당시의 政務總監 山縣伊三郎도 역시 8월에 있은 普通學校 敎育 講習會 석상에서 이와같은 훈시를 하고 있다. 朝鮮人은 陛下가 愛撫하는 帝國臣民이다. 따라서 그 敎育이 內地人 敎育과 같이 忠良한 帝國臣民을 기르는 데 있음은 물론 이다. 4) 3) 朝鮮敎育會 朝鮮敎育法規則例規大全, (1927)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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