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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사刊行趣旨 오늘 우리의 韓國史 연구는 지난날 民族史 탐구에 몸 바쳐 온 先人의 精神과 業績을 바탕으로 하여 여러 分野에 걸쳐 큰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또한 韓國史에 관한 국내외의 관심은 한층 더 높아 가고 있읍니다. 이에 우리는 韓國史 硏究成果를 집대성하고 체계화할 단계에 이 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올바른 韓國의 歷史와 文化를 모든 사람에게 인식시켜야겠다는 사명감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硏究成 果를 현재의 수준에서 일단 총정리, 검토함으로써 앞으로의 硏究 方向을 제시하기 위하여 꼭 이루어져야 할 일이라 믿기 때문입니 다. 國史編纂委員會가 있읍니다. 한국사를 편찬 간행하는 취지가 여기에 한국사를 편찬함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목표를 세 웠습니다. 첫째, 民族의 歷史와 文化의 성장 발달을 바탕으로 한 韓國史를 편찬한다. 둘째, 民族主體性에 입각하여 내재적 발전을 부각시키는 韓國史 를 편찬한다. 세째, 모든 硏究成果를 종합하고 체계화하며, 새로운 韓國史를 편찬한다. 한국사가 간행됨으로써 앞으로의 硏究에 새로운 길잡이가 되 고 또 널리 韓國史를 올바로 인식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國史編纂委員會 委員長

6 槪 要 1 19世紀末에서 20世紀初에 걸치는 10여년간 나라 안에서는 民 族的 危機를 打開하기 위한 운동이 여러가지 形態로 展開되었다. 흔히 愛國啓蒙 운동이라고 부르는 이 운동은 廣範한 社會的 地盤 을 갖고, 全國的인 規模로 展開되었던 것이다. 이 운동에서는 어떠한 事業이 推進되었던가? 당시의 知識人 등 은 나라가 滅亡의 危機에 처하게 된 것은 自強之術을 講究하지 않 았기 때문이라고 하고, 바꾸어 말하면 나라의 힘이 없기 때문이라 고 지적하고, 힘을 갖기 위해서는 敎育과 產業을 일으켜야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言論機關과 學會를 設置하여 啓蒙活動에 힘 썼고, 全國各處에 私立學校를 세워 敎育의 振興을 꾀하였다. 近代 西洋文明과 政治 經濟制度에 대해서도 커다란 關心을 表明하였 고, 한편 民族的인 自主性과 文化遺產의 繼承 發展에 대 한 문제 도 심각히 論議하였다. 國史와 言語에 대한 硏究가 促進되었던 것 도 그 結果에서 온 것이었다. 물론 이 운동은 당시의 緊迫한 情勢下에서 強한 政治的 要求와 結附되어 進行되었던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乙巳 條約 체결 이후인 1906년에서 1908년 사이에 이 운동이 그 絕頂 에 달하였던 것으로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운동은 具體性을 띄고 있었고, 특히 近代的 意識을 가진 國 民大衆을 基盤으로하여 展開되었다는데 特色을 갖고 있었다. 이것 - 1 -

7 近代文化의 發生 은 前時代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日帝의 強占으로 이 운 동은 그뒤 挫折되었으나, 그 特色은 近代文化를 發展시키고 또 계 속적으로 獨立運動을 展開시킬 수 있는 韓國民의 強力한 힘이 되 었던 것이다. 2 이 운동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思想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獨 立(國權)思想과 民權思想이 강하게 作用하고 있었음을 손쉽게 알 수 있다. 이 두 思想은 獨立新聞을 비롯한 여러 新聞에 실린 論說 과 記事를 通해, 그리고 獨立協會의 活動 등으로 國民들에게 널리 鼓吹되어 있었다. 1906년 7월에 公布된 西友學會趣旨文을 보더라 도, 今日 吾人이 如此히 劇烈한 風潮를 撞着하여 大而國家와 小而 自家의 自保自全之策을 講究하면 我同胞靑年의 敎育을 勉勵하 여 人材를 養成하여 衆知를 啓發함이 即是 國權을 恢復하고 人 權을 伸張하는 基礎라 고 하여 學會를 設立하는 目的이 國權을 回復하고, 人權을 伸張함 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1890年代 後半期로부터 이 두 思想, 즉 獨立과 民權思想은 社會的으로 크게 어필(appeal)되어 있었고, 또 啓蒙 운동이 활발하였던 시기는 나라의 主權이 날로 喪失되어가 고 있기도 하여 쉽게 호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독립과 민권사상 外에 進化論이 또한 이 운동에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그것은 前記 西友學會趣旨文 첫머리에, 凡物이 孤하면 危하고 羣하면 強하며 合하면 成하고 離하면 敗함은固然之理라. 矧今世界에 生存競爭은 天演이오 優勝劣敗 는 公例라

8 槪 要 고 있는 것으로서도 알 수 있다. 이 내용은 진화론을 명확하게 이 해하고서 쓴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진화론이 한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00년을 전후하여 中國을 통해서였던 것 같다. 日本에서는 1880년대 초기에 다윈(Charles Darwin)의 친구요, 東京大學의 초빙교수였던 모오스(Edward Sylvester Morse)에 의해 이미 進化論이란 책자가 출간되었 던 것이므로, 日本을 통해서도 進化思想이 소개되었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러나 당시의 思想界는 中國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 고 있던 터이므로 中國을 통해서 소개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中國에 進化論이 소개되기는 淸日戰爭 뒤였다. 嚴復이란 관리가 학슬리(T.H. Huxley)의 책 other Essays)를 進化와 倫理(Evolution & Ethics and 天演論이란 이름으로 번역함으로써 소개되어(1896년 譯稿가 완성되고, 다음해 天津에서 발간되는 잡지 國聞報에 揭載되었다가 1898년 單行本으로 출간되었다.) 中國思想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天演論에서는 진화의 현상과 거기에 작용하는 생존경쟁의 사 실을 설명하였는데, 그 중에서 특히 자연계에 있어서는 생존경쟁 을 통해 優勝劣敗의 원칙이 엄격히 적용되고 있으나, 이와는 달리 인간계에서는 그것을 극복하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주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국지식인들은 天演論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진화 론을 흡수한 梁啓超의 글로서도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1902년 新聞叢報라는 잡지에 실린 梁啓超의 新民說이란 글의 영향은 매우 컸었다. 그의 주장인즉, 오늘날과 같이 열강이 각축하 고 弱肉強食 優勝劣敗하는 시대에 있어서는 時勢에 적응치 못하 는 민족은 自存할 수 없으니, 新民 즉 국민의 面目을 새롭게 하는 방도를 강구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국민의 자세를 바로잡 - 3 -

9 近代文化의 發生 고 새롭게 정신무장을 시켜야 된다는 것이었다. 韓半島에서 열강이 서로 각축하고 있고,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있던 한국 지식인들은 梁啓超의 주장에 쉽게 共鳴하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인들이 1907년 비밀정치단체를 창설하 였을 때 단체명을 新民會라고 붙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한편 改新敎信者(Protestant)에 限한 것이었지만, 淸敎徒精神 (Puritanism)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 1907년 한국에 있어서의 改新敎信者는 20만 정도였는데 이들은 애국 계몽 운동에 있어서 어느 누구보다 더 열렬히 참여하였던 것이다. 정치단체 新民會에 는 회장 梁起鐸을 비롯한 安昌浩 李東輝 李昇薰 등 다수의 基督 敎 信者가 幹部로 活躍하였던 事實은 그것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淸敎徒精神이란 본시 宗敎의 自由를 찾아 아메리카 新大陸에 移住했던 淸敎徒들이 지니고 있던 氣風을 일컫는 것이지만 改新 敎와 함께 한국에 受容된 것이었다. 한국 改新敎 信者들은 大體로 中小地主 自作農 商人 등 中產層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당시에 있어서는 新興社會階層이 었다. 이들은 淸敎徒精神을 자기 들이 지켜야할 도덕윤리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청교도정신은 개인 적인 回心, 聖書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 열렬한 傳道心 등을 특징 으로 하고 있었는데, 한국 改新敎信者들은 이것을 굳게 신봉하였 던 것이다. 결국 도덕윤리를 지키고 사업을 촉진함에 있어서 엄격 한 그리고 철저한 정신자세를 취하였던 것은 청교도정신에서 자 극을 받은 것이었다. 한편 애국계몽운동기에 있어서 改新敎가 燎 原의 불길처럼 禁酒 斷煙 迷信打破 男女同等 一夫一妻 생활 간소화 등의 사회운동이 함께 크게 일어났던 것은 청교도정신을 체득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10 槪 3 要 그러면 애국계몽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던가? 1898년 12월 獨 立協會가 해산됨으로써 정치운동은 일시 정돈상태에 빠졌으나, 언 론기관인 신문은 계속 국민들에게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을 고취시 켰던 것이다. 1896년 4월 徐載弼이 독립신문을 발간한 이후 몇개 의 본격적인 근대적 신문이 간행되었다. 獨立協會가 萬民共同會를 열어 국가의 자주독립과 民權의 신장을 위해 투쟁하였던 1898년 에 매일신문 皇城新聞 帝國新聞이 간행되었고, 노일전쟁 이후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정치운동이 활발해지자 또다시 大韓毎日申報 萬歲報 大韓民報 등의 신문이 간행되었다. 당시의 신문은 1880년대에 발간되었던 漢城旬報나 漢城周報와 는 달리 日刊인데다가 특히 純國文이나 國漢文混用으로 간행되었 던 것이므로 中流以下의 대중과 부녀자들까지도 쉽게 읽을 수 있 었다. 따라서 국민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는 皇城新聞 1904년 10월 17일자 記事에, 蓋帝國新聞은 以國文之故로 市井商賈와 閭巷婦女와 及人民不 識 漢之者 莫不愛讀하야 邇來 數年은 外方人民도 購讀頗多하고 市井之間에 尤多盛行하니 毎過街路市井之邊 則母論靑年白叟하 고 手持一張紙하고 高聲朗讀者난 皆帝國新聞也 라고 있는 것으로 당시의 실정을 엿볼 수 있다. 新聞人들은 정 녕 애국계몽운동의 旗手라 할만 하였고, 대단한 사명감 마저 갖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日帝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그들은 筆鋒을 휘두르며 日帝를 맹렬히 공격하여 싸웠던 것이다. 前述한 바와 같이 정치운동은 獨立協會가 해산되면서 잠시 정돈 상태 에 빠졌으나 露日戰爭이 일어난 뒤 특히 1904년 7월 前 中樞 院 議官 宋秀晚 沈相震 등이 서울에서 輔(保)安會라는 단체를 조직 - 5 -

11 近代文化의 發生 함으로써 재개되었다. 輔安會를 조직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전 달 9월에 일본인 長森藤吉郞이란 者가 荒撫地開拓權을 요구한데 대해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荒撫地開拓權이란 한국의 山林 川澤 등 의 개척권을 50년 기한으로 장기대부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山 林 川澤등은 한국 國土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長森藤吉 郞의 案은 국토를 강탈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따라서 會員 3 4,000명을 갖고 있던 輔安會에서는 이 문제를 거론하여 전국에 通 文을 發하고 완강히 반대운동을 벌였다. 마침내 日本側도 굴복하여 철회하였다. 輔安會는 이처럼 승리를 거두었으나, 日帝의 강압은 혹독하여 皇帝로 하여금 輔安會를 해산시키게 하였다. 그 뒤 다시 協同會 共進會 進明會 등의 단체들이 置廢를 거듭하다가 1905년 5월에 는 李儁을 會長으로 하는 憲政硏究會가 발족되어 당분간 정치운 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이 단체에서는 一進會와 같은 親日賣國的 團體의 주장을 공격하면서 국민의 정치의식을 북돋아 주었다. 그런데 이상에서 열거한 단체들은 한결같이 나라를 立憲政治體 制로 개혁함을 目的으로 하고 활동하였다. 專制君主體制로서는 이 와 같은 국가의 위기를 타개할 수 없다고 절감하였던 것이다. 이 처럼 입헌정치의 실시를 주장하였다는 것은 이 단체가 獨立協會 의 사업을 계승하였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단체들은 독립협회 때보다 더 광범한 사회적 지반위에서 활동을 전개하였 던 것이었다. 곧 이어 乙巳條約이 체결되었다. 한국은 새로운 정치정세하에 놓이게 되었다. 국민들은 국권회복에 총력을 기울여야만 하였다. 이런 시기에, 즉 1906년 4월 張志淵 등은 憲政硏究會를 개편하여 大韓自強會를 창립하였다. 創立趣旨書에, - 6 -

12 槪 要 夫邦國之獨立은 惟在自強之如何耳라 我韓이 從前不講於自強之 術하야 人民이 自錮於愚昧하고 國力이 自趣於衰敗하야 遂至於今 日之艱棘하야 竟被外人保護하니 此皆不致意於自強之道故也라 尚 此因循玩愒하야 不思奮勵自強之術이면 終至於滅亡而乃已니 奚但 然이나 今日而止哉아 如究其自強之術이면 無他라 在振作敎 育也오 在殖產興業也니 夫敎育이 衰興則民智未開하고 產業이 不 殖則國富莫增하나니 然則開民養國力之道는 不在敎育產業之發達 乎아! 라고 설립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결국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직 교육과 산업을 일으켜 국력을 배양해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趣旨書를 내놓게 된 것은 日本의 보호정치하에서 표면 적인 정치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단체에서는 연설회와 같은 집회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大韓 自強會月報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국민의 啓蒙에 힘썼다. 自強會의 활동이 강화되고 그 영향력이 커지자 일제는 방관하지 않았다. 마 침내 1907년 8월 이 단체를 강제 해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啓蒙 運動家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해 11월에 또다시 吳世昌 등 이 주동되어 大韓協會라는 이름의 단체를 발족하여, 앞에 있었던 단체들의 사업을 계승하여 나갔다. 新民會라는 비밀정치단체가 설립되었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 단체는 1910년말 105人事件이란 기독교 지도자에 대한 탄압으로 해산될 때까지 3년간 國權回復과 啓蒙 운동에서 적지않은 공헌을 하였다. 會員은 그 大部分이 西北地方人士들로 構成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愛國啓蒙運動에 있어서 後世에까지 영향을 끼쳤던 가장 두드러 졌던 成果는 國民들의 敎育熱을 북돋아 준 것이었다 아는 것이

13 近代文化의 發生 힘 이니, 敎育이 일어나지 않으면 生存할 수 없다는 등의 口 號를 내걸고 敎育熱을 갖게 한 것이다. 교육을 지도한 기관은 학회 였다. 우선 1904년 9월 國民敎育會가 조직된 뒤 雨後竹筍처럼 학 회가 조직되었다. 1906년 10월 朴殷植 등의 발기로 西友學會가 설 립되고, 곧 이어 李儁 李東輝 등의 발기로 漢北興學會가 설립되었 다. 이 두 학회는 1908년 1월에 통합이 되어 西北學會라 稱하였 다. 1907년 7월에는 湖南學會, 湖西學會, 1908년 3월에 關東學 會, 4월에 畿湖興學會 등이 세워졌고, 이어 수 많은 학회가 세워 졌다. 이와 같이 지방별로도 학회가 조직되었지만, 한편으로 海外 留學生들로서도 조직되었으니, 太極學會, 共修學會, 同寅學會 등 은 그들이 만든 것이었다. 각 學會는 支會를 두어 지방과 부단히 연락을 취하였고, 강연회 토론회 등을 개최하고 機關紙를 발간하 여 국민들의 계몽에 힘썼다. 그리고 학회에서는 각처에 私立學校를 설립하여 경영하였다. 당 시의 학교경영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財政難에다가 敎 員 敎科書 등의 부족이 중요한 문제였다. 學會에서는 義捐金을 거두어 援助를 해 주었고, 學會本部에 敎員養成所를 두어 유능한 젊은이들을 일정한 기간 교육을 시킨 뒤 교원으로 파견하였다. 敎 科書도 편찬하여 보냈다. 물론 私立學校는 학회에 의해서만 세워졌던 것은 아니었다. 국 민의 교육열에 호응하여 어떤 선각자나 有志들이 私財를 털어 세 운 것도 있었고, 종교단체, 商會에서 세운 것도 있었다. 심지어 旣 往의 書堂을 교사와 敎科內容을 바꾸어 사립학교로 고친 것도 있 었다. 그리하여 1908년에는 그 수가 무려 3,000校나 되었다고 한 다. 甲午更張 이후 政府에서 漢城師範學校를 비롯한 近代式 學校 를 서울과 地方行政中心地에 세우기 시작하였으나, 1905년까지 - 8 -

14 槪 要 10년간에 세워진 學校數는 보잘것 없었다. 그런데 1906년 학회가 조직되면서부터 1908년까지 불과 2년간에 私立學校 3,000校나 세워 졌었다는 것은 실로 놀랄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 시기의 私立學校는 근대적인 교육형식을 뚜렷이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敎授內容에 있어서도 근대적인 지식을 체계적으로 가르쳤던 것이었다. 따라서 數에 있어서나 質에 있어서 높이 평가 받을만 하였다. 더우기 사립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근대적인 지식과 아울러 애 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시는 국권회복 을 위해 애국사상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4년 9월에 制 定된 國民敎育會規則중 第3條를 보면 다음과 같이 敎育會의 사업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즉 一. 學校를 廣設할 事 二. 文明的 學問에 應用할 書籍을 編纂 或 繙譯하여 刊佈할 事 三. 本國史記와 地誌와 古今 名人傳蹟을 蒐集廣佈하여 國民 의 愛國心을 鼓動하고 元氣를 培養할 事 라 하여 위의 第3項에서 밝히고 있듯이 韓國의 역사와 지리, 그리 고 名人의 事蹟을 수집하고 傳記로 편찬하여 애국심을 불러 일으 키게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韓國의 역사, 지리, 名士의 傳記를 敎 授함으로써 애국사상을 고취한다는 것이다. 每日 每日의 訓示를 통해 서로 고취하였을 것이지만, 이처럼 敎科書를 통해서도 고취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申采浩는 大韓協會月報에 歷史와 愛國心과의 關係라는 논설을 썼던 것이다. 그리고 乙支 文德傳, 姜邯賛傳, 李舜臣傳, 崔勉庵傳등 外國의 침 략에 대항하여 싸운 애국자의 傳記도 학자들에 依해 간행되었다. 애국사상의 고취는 몇개의 학교에 限한 것이 아니고, 전체 학교 - 9 -

15 近代文化의 發生 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일제의 統監府에서는 학교의 설 립을 막고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1908년 9월에 私立學校令을 制定 公布함과 아울러 愛國思想을 鼓吹하는 私立學校用 敎科書 를 단속하기 위하여 敎科用圖書檢定規定이란 것을 制定公 布하였던 것이다. 한편으로 애국계몽운동 기간에는 學問에 대한 硏究熱도 일어났 다. 前揭 大韓自強會趣旨書 중에, 內養其祖國之精神하며 外吸文明之學術이 即今日時局之急務也 로서 此自強會之所以發起者也라. 고 있드시, 안으로 애국정신을 涵養하고 밖으로 외국의 先進文明 과 학술을 받아들이는 것이 오늘날의 急先務라 하였다. 先覺者 중 에는 민족의 興亡盛衰의 원인을 학문의 발달여부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애국사상의 고취와 관련하여 자연히 우리나라의 역사와 국어에 대한 연구에 힘을 기울이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申 采浩 張志淵 朴殷植 등은 당시의 대표적인 史學者였다. 이들은 韓國史의 주체는 한국민족임을 강조하고 민족적인 자주성과 文化 遺產의 계승 발전에 대한 문제도 논의하였다. 18세기 實學者들 이 이룩해 놓은 한국의 지리와 역사연구의 가치를 발견한 것도 이 들의 공적이었다. 國語硏究는 國文硏究所 등의 전문적인 연구기관을 통해서 여러 학자들이 체계화를 해 보려고 노력을 하였고 또 그 결과로 몇 개 의 文法書도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있어서 周時經은 누구 보다 더 큰 업적을 남긴 學者였다. 그는 國語文典音學과 國 語文法 을 著述하여 지금까지 통일이 못되고 混亂狀態에 빠져있 는 우리말과 글에 대해 體系를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弟子들을 양성하고 한글을 일반국민들에게 보급하는 데에도 남달리 힘을

16 槪 要 기울였던 것이다. 그 밖에 이 시기에는 言文一致의 新小說이 쓰여지고, 唱歌가 불 리워지는 등 다방면에 걸친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운동은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되고 또 근대 적 의식을 가진 국민대중을 기반으로 展開되었다는데 특색을 갖 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정녕 한국에 있어서 근대문화가 발생하고 동시에 確固하게 뿌리를 박은 시기라 할 수 있었다. 근 대문화가 확고하게 뿌리를 박지 않았다면 합방 이후 日帝의 民族 同化 抹殺政策의 가혹한 시련을 이겨내고, 또한 계속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李光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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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1. 言論機關의 活動 2. 學會의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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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 言論機關의 活動 1. 言論機關의 活動 (1) 近代新聞의 始祖 開化 初期 무지몽매하고 固陋하였던 현실에서 빠져나와 西歐의 근대 문화를 흡수 도입하여 국제적 隊伍에 끼여 보자고 총총걸음 을 걷기 시작할 무렵에 근대화에 앞장서서 근대화를 추진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것으로 新聞을 아니들 수 없다. 개화의 선구 자들은 新聞의 機能을 재빨리 認識하고 국민의 계몽과 지식의 계 발을 위한 新聞의 指導性을 중요시하였다. 국민계발을 위하여 민권사상의 고취를 위하여 자주독립과 국권 만회를 위하여 근대 韓國의 新聞과 新聞人들은 뚜렷한 사명감을 인식하고 온갖 탄압과 갖은 고난을 무릅쓰며 初志一貫 국가와 민 족을 위하여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존재의의를 誇示하였다. 新聞經營은 多難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零細한 新聞 資本과 제작 기술의 졸렬은 신문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아가는데 적지 않은 지장이 되었었다. 이러한 逆境에서도 영리를 돌보지 않고 오 로지 신문이 가지는 사명을 完遂하기 위한 줄기찬 노력은 민족 신 문들의 쓰라린 경험이었다. 舊韓末의 日帝의 신문탄압은 우심한 것이 있었고, 여기에 대한 民族紙들의 민족과 국가를 위한 분노와 항거도 그칠 줄을 몰랐다. 日人 經營 新聞과 일제에 아부하여 날뛰는 親日紙들에 대한 감 시와 경고는 民族紙들의 지면을 활발하게 하였고 海外에서도 여기 에 호응하여 자주독립과 국권 만회를 도모하는 신문들이 발간되고 이들은 國內에서 발간되는 신문들과 정신적인 紐帶를 함께하고 보

21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조를 맞추었다. 그러나 1910년에 이르러 韓日合併의 역사적 悲運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于餘曲折 起沒無常했던 근대신문은 幕을 내린다. 한국 근대 新聞史의 時期劃定은 論者에 따라서 견해를 달리 할 수도 있 겠지만 필자는 漢城旬報가 탄생한 1883년부터 1910년 韓日合併 까지의 時期를 韓國近代新聞史의 영역으로 보고 그 동안의 韓國 에서 발생된 신문의 성장과정을 制限된 지면이나마 간략히 검토 해 보기로 한다. 1) 漢城旬報 국민의 계몽과 지식의 계발을 위하여 開化의 선구자로 나선 것 이 漢城旬報이다. 1883년 7월 15일(음력) 창설된 博文局에서 같 은 해 10월 1일(음력) 漢城旬報를 창간하였다. 물론 이것은 우리 나라 최초의 定期的인 新聞이다. 歐州 諸國에서는 일반적으로 정 기적인 新聞의 발간을 보기 前에 不定期的인 印刷 新聞이 정기적 인 新聞으로 移行하는 과정에서 發刊되는 것이 通例이었는데 近 代 開化期의 朝鮮의 新聞은 부정기적인 인쇄신문의 과정을 거치 지 않고 대뜸 정기적인 新聞으로 출발하였고, 겸하여 신문 발행의 嚆矢가 官에서부터 이루어졌었다는 것은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당시 정치하는 무리 중에서 開化黨은 일본의 문명 개화를 본받 아 朝鮮의 개화를 계획하였다. 鎖國의 꿈속에 있었던 조선은 1882년에 韓美修好條約이 성립되고 이어서 韓英, 韓獨, 韓露, 韓 佛 조약이 차례차례로 성립되어 식견을 널리 국제적으로 세계에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이르러 당시의 지도층은 물론 일반 국민들도 고루한 천지에서 개국진취를 위한 분위기 속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때에 즈음하여 무지몽매하던 봉건사회

22 1. 言論機關의 活動 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사상을 日本으로부터 도입하고자 하는 開 化黨의 一群은 일본인 井上角五郞 등을 초빙하여 신문을 발간하 는데 관여 하게 하였다. 漢城旬報의 第1面을 보면 漢城旬報라는 題號 밑에 開國 492년 癸未 10월 1일이라고 發行日字와 統理衙 門博文局이라고 發行處를 밝히고 있다.1) 세로 22.3 )이고 用語는 純 신문 체재는 册字型(가로 16.4 漢文으로 인쇄되고 用紙는 조선종이를 사용하여 지금으로 보아서 는 古漢文誌와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內容이 정부의 施策이 라든지 계몽기사 등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뉴우스를 전달하 고 지식을 보급시키려는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인 井上角五 郞이 漢城周報에 관여하게 된 것은 朴泳孝와 金玉均의 의뢰를 받 아들여 당시 日本의 지도자 福澤諭吉의 알선이 있었던 것이다. 서구식 근대사상이나 과학기술의 도입을 목적으로 朴泳孝는 정 부의 시책으로서 먼저 西洋學問을 履修한 7名의 日本人을 고용 朝鮮으로 파견할 것을 요청하였다.2) 그러나 日本측에서는 慶應義 塾에서 西洋學問을 공부한 井上角五郞, 牛場卓造, 高橋正信 등 3 명만을 1882년 12월에 파견하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保守派의 잠 재세력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였었고, 淸의 간섭이 심하여 西 洋學問이 진흥될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 그래서 日本人 3인 중 牛場卓造, 高橋正信은 日本으로 歸國하고 井上角五郞만이 韓國에 남아 統理衙門博文局의 主事가 되었다. 어떻든 이 신문 발행에 있 어서 日本人井上角五郞이 관여하였다는 것은 中國과 日本의 최초 의 정기적인 新聞發行이 외국인의 협력 또는 主管에 의해서 발행 1) 漢城旬報 창간 제 1호 1883년 10월 1일 2) 彭澤周 明治初期日韓淸 關係의 硏究 p.350 巡啓者 本大臣 諸國人 牛場卓造 井上角五郞 高橋正信 松尾三代太郞 眞田謙藏 三輪廣藏 本多淸太郎 右七人顧立 以來望閣下 知炤於貴領事館可也 爲此不宣

23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되었다는 것과 상통하는 點이 있다 하겠다.3) 新聞의 편집진용으로는 金寅植이 主事로 임명되었고 張 博, 吳 容默, 金基俊 등이 司事로 임명되어 日本人 井上角五郞과 신문편 집제작의 實務를 담당하였다. 이리하여 日本으로부터 도입한 인쇄 시설도 갖추게 되어 신문 발간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국민 계발을 위하여 新聞을 발간하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다. 1882년 11월 29일(음력) 朴泳孝는 漢城府判尹에 임명되어 王의 命에 의하여 漢城府에서 新聞을 발간할 계획을 세우고 일체의 준 비를 兪吉濬에게 맡기었다. 이리하여 兪吉濬은 程 4)을 漢城府新聞局章 草案하기도 하고 新聞 創刊辭도 준비하느라고 온갖 정열 을 기울였으나 朴泳孝는 이듬해 3월 4일 廣州留守로 左遷을 당했 다. 이리하여 新聞 발간을 위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5) 漢城旬報의 創刊辭는 純漢文(295字)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 朝 鮮이 처해 있던 사정을 잘 표현하였고, 당면한 新聞의 사명이 무 엇인가를 적절하게 지적하였고, 時代精神을 잘 묘사하고 國民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名論說이었다. 3) 日本은 최초의 정기적인 신문으로 1865년에 美國領事館 통역 Joseph Hiko(日系 美國人)가 海外新聞이라는 題號로써 월 1회 日本文 신문을 발간하였다. 中國에 서는 英文新聞의 中國文版이 아니고 獨立한 中國文新聞으로서 최초에 발행된 定期的 新聞 申報 가 1872년에 英國人 茶商 F. Majar에 依해서 창간되었다. 4) 漢城府新聞局章程 一. 局號 以博文爲稱 一. 印章 自本國金鑄成 署于所刷書文 一. 置尹一員 專管大小事務 以本府三尹中 奉勅旨兼 一. 置校書二員 掌繙譯 較正 印刷 會計 以堂 下官及士 本判尹奏任 一. 本局一切入費 自本局措辦 一. 選聰慧童蒙 敎育開導 一. 新報及册文 每新印 先納件于承政院 以爲叡覽 其余捧價 分布于各衛內及四都八道各邑 又許民人買看 一. 正書朝報一件 每日自承院 送于本局 以爲撮要登印 一. 問後添變條規現時 禀定 開國紀元四百九十二年二月 日 5) 李光麟 韓國開化史硏究 pp

24 1. 言論機關의 活動 그 全文을 解義하면 다음과 같다. 旬報序 禹鼎示象周官辨土要荒之外槪不及焉盖以山川限隔書軌不同匪可德孚而力 致此先王所以不勤遠略也今風氣漸闢智巧日長輪舶馳駛環瀛電線聯絡四土至 於定公法修聘問築港浦通交易而窮髮燋齒羊胛椶面無殊聯壞事變物類幻詭百 出車服器用技巧萬端固留心世務者所不可不知也 是以我朝廷開局設官廣譯外 報並載內事頒示國中派分列國名曰旬報以之廣聞見辨衆惑稗商利中西之官報 申報郵便交詢其義一也宇內之方位鎭浸政令法度府庫器械貧富飢饟與夫人品 之藏否物値之低昂摭實俻載可以燭照鏡考而褒貶勤懲之義又未嘗不行乎其間 也雖然覽者騖遠好近則是市步而失故者也味新膠舊則是丼觀而自大者也其必 度時審勢勿流勿泥取捨可否必求諸道不失其正然後庶乎開局之本旨也歟 字句解義 禹鼎示象 夏나라 禹王이 나라의 地形을 보여 주었다는 意味이고 鼎이 라 하는 것은 愼重하다는 뜻으로 中國의 九州를 말할 것이다. 周官辨土 周나라의 官吏가 나라의 地形을 分間하도록 정리하였다는 뜻 要荒之外槪不及焉 要와 荒은 夏禹氏 五服의 第 4 5位를 가리킨 것으 로 要荒 即 重要한 것과 그 다음 것 以外의 것은 地形을 整備할 때 다 미치지 못하였다는 뜻. 書同文車同軌라는 그들이 믿던 견해 즉 中國 即 天下라고 하 盖以山川限隔 書軌不同 山川이 막혀 있고 書軌가 同一하지 않다는 것 은 던 思考方式을 一擲하고 스스로 自我를 世界文化의 大潮 속에 解放하 려던 念願과 意圖인 것. 匪可德孚而力致此先王所以不勤遠略也 可히 德으로 믿게 하고 힘으로 이루어지게 할 수 없어 先王이 멀리 내버려두고 계획하지 않았다는 뜻. 今風氣漸闢 時局은 開化風이 漸漸 열리어 進步의 氣象이 드높다는 意 味이다. 智巧日長 輪舶馳駛 環瀛電線 連絡四土 지식과 기술 문명이 나날이 자 라고 韓國의 東方 領域으로 (環瀛은 濟州島의 周圍) 侵入하여 四方으 로 電線이 연락되어 외국의 문명이 차츰 韓國에 스며드는 것을 말한 것이다. 至於定公法 修聘問 築港浦 通交易 여기서 公法을 定하고 외국과 교제하 여 學修해서 港浦를 만들고 交通과 交易을 한다는 뜻

25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事變物類 일이 차차 변하고 物件이 달라진다. 幻詭百出 괴상한 것이 百出한다. 즉 괴상한 것이 많이 나온다는 뜻. 車服器用 技巧萬端 車와 服裝의 쓰임이 여러가지 있다. 固留心世務者所不可不知也 세상에 힘쓰는 者는 이러한 것을 마음에 두 而窮髮燋齒 羊胛椶面 열심히 연구하고 애써서라는 뜻. 無殊聯壞 땅이 한데 붙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뜻. 고 可히 알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是以 我朝廷開局設官 廣譯外報 並載內事 頒示國中 政府가 博文局을 설 치하고 널리 外報를 번역하고 아울러 국내 기사를 게재하여 국내에 반 포하겠다고 한 것인데 이것은 報道機關의 必要性을 말한 것으로 간주 된다. 派分列國名曰旬報 列國에도 分派하여 그 이름을 旬報라고 일컫고. 以之廣聞見辨衆惑 이것을 가지고 견문을 넓히고 여러가지 疑惑된 점을 판단하게 한다. 裨商利 中西之官報 申報郵便 交詢其義一也 商利를 도웁고 中部와 西部 의 官報를 新聞으로 펴서 郵便과 交詢하니 그 의의가 같다. 宇內之方位鎭浸 政令法度 府庫器械 貧富飢饟 與夫人品之藏否 物値之低昂 摭實俻載 國內가 鎭靜하고 政令과 法度가 있고 器械가 있고 貧富가 있고 飢饟이 있고 또 人品의 善과 不善이 있고 물건값이 높고 낮은 것 을 실제로 따서 갖추어 게재한다. 可以燭照鏡考 而褒貶勤懲之意 又未嘗不行乎其間也 역시 이 新聞의 使命 觀을 明示한 것임. 사회의 灯燭이고 인민의 거울인 것을 褒貶과 勤雖懲 으로 大衆을 지도 계발하려는 의도인 것을 표시한 것이다. 雖然 覽者騖遠好近 則是市步而失故者也 味新膠舊 則是井觀而自大者也 그렇긴 하나 購買者가 저자마다 다니면서 먼 것을 싫어하고 가까운 것 을 좋아한즉 옛것을 잃느니라. 그리고 새것을 맛보고서도 옛것에만 固着한즉 우물만 보고 自己만 크다고 하는 井底蛙와 같은 것이다 라 는 뜻. 其必度時審勢 勿流勿泥 取捨可否 必求諸度 不失其正 然後庶乎開局之本旨 也歟 때를 헤아리고 形勢를 살피어 흐르지도 말고 빠지지도 말고 좋 고 나쁜 것을 取捨選擇해서 道에 맞게 구해서 정당한 것을 잃지 않은 연후에 博文局을 開局하고 新聞을 발간하는 취지에 近似하게 될 것이 라는 뜻

26 1. 言論機關의 活動 漢城旬報의 창간취지와 그 존재의의는 이상 解義한 旬報序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旬報 발행이 의미하는 것을 전반적으 로 고찰할 때 먼저 時局은 새로운 海外文明이 國內로 밀려 들어오 는 것을 깨우쳐 주면서 고루한 구습을 버리고 進取의 氣象을 드높 이자고 한 것을 알 수 있고, 한편에서는 報道機關으로서의 역할뿐 만 아니라 국민의 견문을 넓히고 사회의 목탁으로서 監視의 임무 도 다하겠다는 것에도 언급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이 旬報는 影印本으로 (제1호부터 제36호까지) 발간되고 있어 旬報硏究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데 신문보도 내용을 전반적 으로 보면 內國記事, 各國近事, 國內官報, 各道觀察使狀啓, 地方近 報, 中國을 비롯한 外國新聞記事(主로 中國 滬報申報 上海新報 中外 新聞)의 轉載物 등과 오늘날의 사회면 기사에 해당되는 市井雜事에 이르기까지 滿載하고(册字型 20面) 있음을 볼 수 있고 지식을 보급 하기 위한 기사로는 創刊號에 게재한 세계지도를 木板으로 作製하 여 국민의 視界를 국제적으로 인도하는 세계 지도의 삽입을 비롯하 여 指導的 기사가 連綿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旬報의 보도 기사 내용이 국제적으로 문제를 야기시키 고 博文局에 고용된 日本人 井上角五郞이 그 기사의 책임을 지고 귀국하기도 했다. 漢城旬報 제10호 國內私報欄에 華兵犯罪라는 標題下의 다음과 같은 기사가 물의를 일으키게 한 것이다.6) 昨夜中國兵丁 往鍾街廣通橋側藥舖 其素相識也 貿易藥料 多有虧欠 藥 舖主人 入內取藥之隙 主人之子 以前債未淸 又來纏 繞責之問答之際 至發 辱罵 兵丁忿愧不勝 遽發手銃 主人之子死 主人自內而出 兵丁倉皇之際 手 勢熟滑又發一銃 主人仆地 兵丁逃走 暄閙相傳 隣舍畢集 二人伏尸 而無處 6) 漢城旬報 1884년 10월 3일

27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究結 火急報知官所 天明 自中國大陣 飛騎絡繹 親審形止 又自各陣 當日 大加查覈 四發議探 翼日主人復甦 幸得生活 而該犯姑未懲辨 諸陣縣賞 購 捕行當得獲不日 將伸法矣 中國兵勇多半 是招募四處 編成軍伍殺威已久 紀律申明 而有此意外作變 幸賴諸陣駕馭 有法訪閑 素嚴城郊 晏若軍民 相矣. 解 義 어제밤 中國 병정이 鍾路廣通橋 옆 藥舖에 갔는데 서로간에 알고 있는 사이었다. 藥料를 무역하는데 없는 것이 많이 있어 藥舖 주인이 안으로 들어가 藥을 가져 오는 동안에 그 주인의 아들이 이전의 負債를 청산하 지 않고 다시 왔기에 그 부채의 책임에 대한 문답이 오가는 동안에 욕설 을 하기에 이르러 병정은 분하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갑자기 총을 쏘니 주인의 아들이 죽었다. 솜씨가 익어서 또 한 방 쏘니 주인이 땅에 쓰러졌다. 병정은 도주하고 왁자지껄한 것을 서로 전하니 이웃집 사람들 이 모두 모였다. 두 사람이 죽어 넘어지니 일을 맺을 길이 없었다. 시급 히 관청에 알리니 그 이튿날 中國軍 부대가 빨리 와서 대열을 지었다. 친 히 사태를 조사하고 다시 각 부대로부터 크게 조사해서 옳고 그론 것을 더 알아보고 여러모로 검토했다. 이튿날 主人은 다행히도 소생했다. 그러 나 그 범인을 증거해서 판단치 못했다. 모든 부대는 懸賞으로 잡으려 하 니 不日內로 잡을 것이다. 장차 法이 밝혀질 것이다. 中國 병정의 용기가 반이나 줄었다. 이로써 여러 곳에 불러서 모집하여 군대를 조직하니 위 엄이 이미 오래고 규율이 다 밝아졌다. 뜻밖에 일이 잘 되어 변해지며 다 행히 모든 부대가 엄숙해졌다. 법이 있어서 찾고 막아 城邑이 이전과 같 아서 평안하니 군사와 백성이 서로 평안하다. 이 華兵 범죄 기사에 대하여 淸國 당로자는 조선 당국에 이 보 도기사는 전혀 허위보도라고 책임을 묻는 反駁書를 보내 왔다.7) 그래서 日本人 井上角五郞은 이 보도기사에 책임을 지고 1884년 4월 5일 일시 귀국하게 되었다. 旬報는 華兵 범죄에 대한 계속적 보도기사로서 간주할 수 있는 것으로 華兵懲辨이라는 題下의 보도기사를 발표한 것으로 미 7) 彭澤周 明治初期 日韓淸關係의 硏究 pp

28 1. 言論機關의 活動 루어 보아8) 華兵 범죄라는 제하의 기사는 전연 날조기사가 아니 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華兵懲辨 日前自華陣譏捕殺人 犯罪之華兵得三名 斬首縣之 孝經橋頭 紀律肅然 軍伍知散矣 일전에 中國軍 部隊로부터 농락하여 사람을 잡아 죽인 범죄인 3명을 잡아서 머리를 베어 孝經橋頭에 다시 규율이 숙연하고 군대의 隊伍가 정 돈된 것을 안다. 앞서 漢城旬報 창간사의 旬報序는 名論文이라고 언급한 바도 있지만 開化 선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누가 이 논설을 집필하였 느냐 하는 考證은 아직도 物議의 대상이 되어지고 있다. 安在鴻은 그의 논문 朝鮮新聞小史에서 이 旬報序를 논하여, 雲養 金允植 같은 一代의 巨儒가 그 漢文의 蘊蓄을 기울여 쓴 創刊辭는 문득 兵書傳의 殷盤周誥를 읽음 같아서 9) 운운하고 집필자가 金允植이였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李光麟은 自己의 저서 韓國開化史硏究에서 漢城旬報에 대한 深奥한 연구의 勞作을 발표하고 있는데 安在鴻 의 持論에 대하여 考證이 없어 논의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고10) 兪吉濬自筆의 苧社輯譯이라는 語集錄에 新聞局章程과 長文의 (約 2700子) 新聞創刊辭와 신문에 대한 解譯文이 현존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兪吉濬이 漢城旬報의 창간을 위하여 情熱을 기울 인바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11) 兪吉濬의 新聞創刊辭는 2700字이고 國漢文 混用이다. 그리고 실제로 旬報序에 나타난 創刊辭는 295字이며 純漢文으로 되어 있 8) 漢城旬報 1884년 1월 11일 9) 安在鴻 朝鮮新聞小史, 新聞評論社, 新聞評論 創刊號 10) 李光隣 韓國開化史硏究 p.48 11) 前揭書 pp

29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다. 시기적으로 보아서도 1883년 10월 현재 兪吉濬은 博文局公職 에 있지 않았고 報聘使의 자격으로 滞美中이었던 터이므로 漢城 旬報 창간에는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면 누가 이 創刊辭를 집필하였는가? 李光麟은 자기의 저서에서 旬報序의 집 필에 언급하여, 同文學掌敎요 博文局의 直接 責任者인 金晚植이 썼으리라고 짐작되는 旬報序즉 創刊辭는 300字도 못되는 짧은 것이니 兪吉濬이 쓴 2700字에 달하는 글과는 對照가 되며 특히 兪吉濬 의 글이 國漢文 혼용으로 되어 설득력이 있는데 반해 旬報는 純 漢文이니 독자들에게 주는 영향을 따진다면 비교가 안 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그처럼 짧은 글이요, 또 漢文으로 되어 있다 해도 내용을 검토해 보면 그 당 시의 韓國開化에 대해서 兪吉濬의 創刊辭와 근본적으로 호흡을 같이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即, 旬報序는 金晚植이 썼을 것이라고 짐작이 가나 집필자를 명 확히 밝히지는 않고 있다. 개화기 정부의 지도층은 온건파나 적극 파를 불문하고 누구나 모두 개화의 근본이념에 있어서 동일한 사 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兪吉濬이 창간사에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 창간사는 國漢文 혼용이 아닌 純漢文으로 되어 있으므로 직접적으로 거기에 간여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와 같이 旬報序의 창간사 집필자에 대하여 고찰해 볼 때 전술 한 바 있는 民世 安在鴻의 주장을 아주 무시해 버릴 수 없을 것이 다. 安在鴻의 論文 朝鮮新聞小史는 1940년 7월 6일부터 朝鮮日報 紙上에 연재되었던 것을 1947년에 新聞評論誌上에 再錄한 것이 다. 신문에 발표된 논문이 되어서 고증을 위한 註解를 달지 못하

30 1. 言論機關의 活動 였던 사정을 감안하여 볼 때, 金允植이 집필하였다는 지론은 다시 한번 검토하여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진다. 여기서 旬報 序를 집필하였다고 볼 수 있는 집필자의 윤곽이 들어나게 된다. 당시의 掌敎 金晚植과 主事 金寅植 그리고 旬報 창간에 있어 음으 로 양으로 관련이 있었던 당시의 外務協辦이고 실력자인 雲養 金 允植을 들 수 있다. 어떻든 이에 대한 해답은 金晚植 金寅植 金允 植 3인의 문장이나 어휘를 旬報序의 그것과 비교하여 검토해 보 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旬報序의 집필자를 확실하게 밝히려는 論究를 후일로 미루고자 한다. 開化의 역군이 되었던 이 旬報의 발행부수는 확실치는 않으나 전국 지방관청에서 읽혀졌으나, 純漢文으로 발간되었기 때문에 깊 숙히 대중속으로 전파되지는 못했다. 1884년 12월의 甲申政變으로 이 新聞 발행도 중도에서 철폐 하게 되었고 純漢文으로서의 신문 체제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 다. 아마도 이 신문은 40호를 전후한 호수를 발행하였을 것으로 추 측된다. 2) 漢城周報 開化初期 유일한 보도기관이었던 漢城旬報는 甲申政變 이후 그 발간을 계속하지 못하게 되어 세상형편이나 국내소식을 전달하는 기관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그 당시 정부에서나 일반에서나 모두 불편함을 느 끼게 되어 신문발행이 요청되어지고 신문 발행의 기운이 政府關係者 들 사이에서 일어나 1886년 1월 25일(朝鮮開國 494년 12월 21일)

31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中部慶幸坊校洞博文局에서 漢城周報를 발행하였다.12)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週刊新聞이 되었고 國漢文 혼용문체를 최초로 사용한 신문이다. 이때 統理衙門의 督辦은 雲養 金允植이 었고 日本에서 國文 활자도 주선해 온 일본인 井上角五郞도 周報 창간 초기에는 편집에 관여하였다.13) 이 周報가 國文을 兼用하였다는 것은 購讀者의 양적범위를 확 대하고자 한 것이고, 창간 제1호부터 國文을 겸용하기도 하였는데 간혹 純國文으로 全紙面을 채우기도 하였다. 이 周報 편집에 종사 한 진용은 漢城旬報 편집에도 관여하였던 張 博, 吳容默, 金基駿 외에 李命福, 秦尙穆, 李赫儀, 權文燮, 鄭萬敎, 李鴻來, 朴世煥, 玄 時運, 金肯善, 吳弘默, 秋栢曄, 韓喆重 등으로 대폭 증원되었고14) 周報의 반포가격은 매1호 原價 銅錢 50文이었다. 그리고 創刊辭 는 純漢文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解義하면 다음과 같다. 周報序 洪惟我 聖上睿智天縱規模宏遠旣通和列國命統理衙門設博文局置官掌其事紀內政 譯外報 頒示國中遍布寰宇內可以化民敦俗外可以禦侮除衅每十日成一編 故名之曰漢城旬報故人所謂知我亦知敵者此也 上下官民甚便之洎甲申政變 12) 觀周報 1886부 1월 25일 많은 저술에서 漢城周報는 漢城旬報를 改題하여 周報로 제호만을 변경한 것처럼 論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아주 별개의 신문이다. 그 이유는 제호의 명칭이 달라졌다는 것보다는 본질적인 것으로 그 발행번호를 이어 받지 않았다 는 것이다. 周報는 旬報의 발행번호를 이어받지 않고 第1號로 발행되고 있다. (漢城周報 第1號 寫眞 참조) 신문발행의 연속성은 新聞을 규정짓는 중요한 특징 이 되는 것이다. 13) 井上角五郞이 첫 번째 日本으로 귀국하게 된 것은 漢城旬報 第10號 華兵 犯罪 報道記事 사건에 책임을 지고 귀국했지만 그 뒤 다시 日本의 時事新報 特派員의 자격으로 朝鮮에 왔다가 활자를 주선하기 위하여 日本으로 귀국하고 다시 돌아 와 漢城周報창간에 관여하였다. 그 뒤 家庭事情으로 귀국하였다가 돌아왔는데 博文局과 인연은 끊게 되었다. 14) 李光麟 韓國開化史硏究 p

32 1. 言論機關의 活動 作局撤而不行上下官民咸茹恨齊歎曰甚矣人之情隨見而遷也始旬報之未刱 行也固未甚知其爲不便旣行矣而中撤矣 如耳目之厪得聞廣者旋又裏如而矇 然 人於是知行之爲便而撤之爲不便 上察其情命統理衙門議復設博文局便 否僉曰復之便局於是復其官 其法視前而稍損益之 凡隣邦之交涉官工之陛 黜以至閭巷謠俗農桑事務商税市値之鉅纖長短無不晰載而該著如有無官職 之人恣爲不拘束之談鏝諸別本亦本局之所不問昔之十日成一編者 七日而畢 其工因改旬報爲周報局規於是乎粗備矣顧是舉也上以奉 聖意下以循與情則 爲局員者可不謹其事勤其職以少稗於忠君誠民之道歟 但才有所不逮職有所 不膽懼不克負荷玆役可愧也凡局務之所未及與所未止惟開塞牖迷之是須是 資窃有望於局外之君子云爾 解 義 聖上睿智天縱 規模宏遠 旣通和列國 命統理衙門 設博文局 置官掌其事 紀 內政譯外報 頒示國中 遍布寰宇 內可以化民敦俗 外可以禦侮除衅 每十日 成一編 故名之曰漢城旬報 故人所謂知我 亦知敵者此也.15) 생각컨대 우리 聖上께서는 밝고 智慧가 있어 하늘이 낸 聖人으로 그 規模가 크고 넓어서 이미 列國과 和親을 通해서 統理衙門에 명하여 博 文局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어서 그 일을 차지하여 내정을 기록하고 外 報를 번역하여 나라 안에 반시하고 전국에 두루폈으니 안으로는 백성 으로 풍속을 두텁게 할 것이오 밖으로는 업신여기는 것을 막고 배반함 을 제외하여 10일마다 발행한 고로 이吾지어 가로대 漢城旬報라 하니 옛사람이 이른바 나를 알고 또한 敵을 알 만한 것이 이것이다. 上下官民 甚便之 洎甲申政變作 局撤而不行 上下官民 咸茹恨齊歎曰 甚矣 人之情隨見而遷也 始旬報之 未刱行也. 上下 官民이 매우 편하게 여기도다. 甲申事變으로부터 博文局을 거 두고 발행하지 아니하니 상하관민이 모두 恨을 머금고 일제히 탄식해 서 가로대 甚하다 사람의 情이 보는 것을 따라 옮아간다. 旬報의 續 刊이 이루어지지 못함이여. 固未甚知 其爲不便 旣行矣 而中撤矣 如耳目之厪 得聞廣者 旋又裏如而矇然. 진실로 알지 못하니 그 불편함을 안다. 이미 발행하던 것을 중지하니 귀와 눈으로 얻어듣기 넓은 자가 도리어 어리둥절해서 어두운 것같다. 人於是 知行之爲便 而撤之爲不便. 15) 漢城周報 1888년 3월 12일자 사설 참조

33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사람은 여기서 그것을 행하는 것이 편하고 중지하는 것이 편치 않은 것을 안다. 上察其情 命統理衙門 議復設博文局便否 僉曰復之便 局於是復其官 其法 視前而稍損益之. 성상께서 중지된 정상을 살피어 統理衙門에 명하여 博文局을 다시 설치하는 것의 득실을 의논하게 하자, 모두 다시 설치하는 것이 낫다 고 하였다. 이에 다시 博文局올 회복하니 그 법이 전에 비하여 약간의 가감이 있었다. 凡隣邦之交涉 官工之陛黜 以至閭巷謠俗 農桑事務 商税市値之鉅纖長短 無不晰載而該著. 이웃나라에 交涉하는 것과 官吏의 任免과 閭巷의 風俗과 農商事務 와 市中의 물가시세의 크고 적고 길고 짧음을 자세히 게재하여 명백하 게 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如有無官職之人 恣爲不拘束之談 鏝諸別本亦 本局之所不問 昔之十日成一 編者 七日而畢其工 因改旬報爲周報 局規於是乎粗備矣. 만약에 官職이 없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不規則한 말을 해서 別報 를 낸다면 또한 本局에서 不問에 부친다. 전에는 10일에 1回씩 발행하 던 것을 그 工程을 7日에 畢하고 따라서 旬報를 고쳐 周報라 하니 局 의 規則이 여기에 대강 갖추어졌다. 顧是擧也 上以奉聖意 下以循輿情 則爲局員者 可不謹其事勤其職 以少稗 於忠君誠民之道歟. 돌아보건대 이렇게 한 것이 위로 聖意를 받들고 아래로 輿論을 따른 것인즉 局員된 자는 그 일을 신중히 하고, 그 직책에 부지런하여 작은 것으로써 임금께 忠誠하고 백성율 깨닫게 하는 일에 도움이 되게 할 것이 아닌가. 但才有所不逮 識有所不膽 懼不克負荷 玆役可愧也. 다만 재주가 미치지 못하는 바 있고, 아는 것이 넓지 못한 바 있어서 능히 책임을 다하지 못함은 부끄러운 일이다. 凡局務之所未及 與所未止惟開塞牖迷之是須是資 窃有望於局外之君子云爾. 博文局의 사무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바르지 못한 것은 오직 막힌 것을 밝히기를 기대하며, 모름지기 局外 모든 君子에게 도움하기를 바 라노라

34 1. 言論機關의 活動 周報의 편집은 旬報의 그것과 대동소이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 으며 旬報는 册子형으로 題號와 함께 一面 기사를 게재하고 있는 데 周報는 동일한 册子형으로 표지에 漢城周報라는 밑에 第一號 라고 發行番號를 밝혀서 본문 기사와는 별개의 표지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표지 이면에는 발행 年月日을 朝鮮 開國, 中國 光緒, 西歷으로 따로 記入하고 있다. 편 집내용은 國內記事, 外報, 指導記 事 등을 볼 수 있는데 最終面에는 博文局의 公告로서 廣告를 게재하 고 그 이면에는 全面에다가 中部 慶幸坊博文局 이라고 博文局의 所 在를 廣告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周報에서는 旬報에서 찾아 볼 수 없었던 商業廣告가 게재되고 있음 漢城周報의 商業廣告 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獨逸 상인이 경영하던 世昌洋行의 광고를 볼 수 있다. 이 광고는 (日字未詳) 아마도 韓國 최초의 新聞商業廣告가 되리라고 믿어진다. 이 광고는 德商世昌洋行告白이라는 標題에 收買各貨라는 項 目에다가 牛皮, 馬皮, 狗皮, 虎皮, 豹皮, 水獺皮, 灰鼠皮, 馬尾, 牛尾, 馬鬃, 牛角, 猪鬃, 人髮, 紙, 五棓子, 虎爪, 蛤螺, 烟, 古銅 錢 등을 收買하겠다고 광고하고 있으며, 新到各貨 라는 항목에 는 洋標布, 各色染料, 洋裕褳, 綠染料, 漂洋布, 各種洋扣, 漂裕 褳, 琥珀, 頂原洋布, 洋腰帶, 洋藍色, 鍾表, 本色二細布, 洋燈, 洋紗, 洋景, 羽紗, 玻璃, 洋線, 自來火, 洋針, 八音栞 등의 外製品을 광고하고 있는데, 당시 朝鮮과 德國과의 사이에 교역상황의 전모

35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漢城周報는 2년여를 발간하고 財政事情이 좋지 못하여 1888년 7월 7일 폐간하였는데 몇 호까지 발간하였는가는 未詳이다. 현존 하고 있는 것으로 106호가 1888년 3월 12일 발간된 것을 참작할 때 아마도 122호까지는 발간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 民主言論의 嚆矢 1) 新聞創刊의 背景과 그 課題 1894년에 벌어진 日本과 淸國의 전쟁은 日本의 勝戰으로 돌아가 淸國의 세력은 朝鮮에서 차츰 물러가고 러시아와 日本이 虎視 耽耽 한국에 대한 침략의 기회를 엿보면서 갖은 수단을 다하였다. 따라 서 당시 한국의 政界는 혼란과 불안한 상태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외국의 세력을 배격하고 자주 독립을 외치는 소리는 民衆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愛國心은 날로 高潮되어갔다. 이러한 시기에 親露, 親日 등의 思想을 배격하고 민족의 자주 독립과 知識의 普及 에 의한 民權思想의 鼓吹를 企圖하고 나선 것이 독립신문이다. 독립신문을 창간, 주재한 사람은 徐載弼(Philip Jaison)이다. 독립 신문은 1896년 4월 7일 창간 제1호를 발간하였다. 甲申政變 때 開化黨은 大逆不道로 불리던 터이라 徐載弼은 九死 一生 美國에 망명하여 美國 시민이 되고 그 곳에서 民主政治의 정 신을 체득하고 국제정세를 통찰하여 불원한 장래에 닥쳐올 禍厄을 막아내기 위하여 外務顧問의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와 정계 요인들 과 교유도 하고 尹致昊 등과 發起하여 獨立協會도 창립 하고 獨立 門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독립신문은 민간신문으로는 최초로 간행 된 신문이다.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하고 純國文으로 발행한데 특

36 1. 言論機關의 活動 색이 있고 처음에는 週3회 발행하다가 1898년 7월 1일부터(제3권 76호) 日刊으로 하였다. 처음에는 300부를 발행하였었는데 나중 에는 3000부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4면은 英文판으로 편집하여 在留 외국인들에게 올바른 韓國 사정을 인식시키기 위하 여 힘썼다. 독립신문의 主要한 임무의 하나는 民權思想을 고취하 기 위하여 國民啓蒙을 提唱한 것이다. 주로 漢文을 사용하였던 漢 城旬報나 漢城周報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難解한 漢文習得의 폐를 경고하고 평이한 國文 사용의 장려에 힘써 국민의 지식수준을 높 이고 내외의 사정을 알게하는데 힘썼으며, 全紙面을 民族的인 危 機를 突破하고자 하는 일관된 정신으로 擧族的인 覺醒을 촉구하는 데 힘썼으며 특히 女性에 대하여서도 國文 解讀의 필요성을 강조 하기도 하였다. 또 하나 괄목할 만한 사실은 民權思想의 기본이 될 수 있는 言論自由에 대하여서는 예민한 바 있었다 년 에 걸쳐 당시 정부에서 신문을 取締하는 新聞條例의 실시를 試圖 하였는데 이의 부당성을율 계속 社說에서 지적하여 言論自由의 사 상을 드높이기에 힘썼고,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온갖 정열을 경주하였다.16) 2) 新聞 創刊의 直接的 動機 독립신문 창간의 동기는 그 創刊辭에서 이해할 수 있다. 徐載弼 은 당면한 朝鮮의 사정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하여서는 완고한 관 리나 왕에게 진언하는 것보다 일반 서민에게 직접 호소하고 周知 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며 民智啓發과 國權挽回를 위한 첩경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徐載弼이 8 15 해방후 일시 귀국하였다가 美國 東部 自宅으로 돌아가는 도중 로스엔젤리스에서 가진 講演會 16) 독립신문 1899년 3년 1월

37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의 內容이 그곳에서 발행되는 韓國語新聞 신한민보에 게재 되 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가 신문을 창간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를 推察할 수 있다.17) 그 내용을 抄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이와같이 싸우는 틈에 언제나 외국인에 기회를 주었 고 외국인이 이틈을 타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를 지휘하기 를 시작하였다. 처음에 중국이 왔고 다음에 일본이 왔다. 50년 전 아라사가 조선을 도모할 때에 당시 내가 조선에 있어 그 일 을 알고 신문을 발행하여 일반민중에게 알렸다. 처음에 관원들 에게 말하니 관원들이 말을 듯지 아니한다. 임군에게 말슴을 들리니 임군이 또한 듯지 않고 평민은 몰은다. 그리하여 내가 생각하기를 임군과 량반은 내말을 듯지 아니하니 평민 상사람 과 가치 일할 수 박게 없다고 하야 드듸어 독립신문을 발간하야 민지 계발로부터 국권 만회를 창도하였다. 3) 新聞 製作活動 徐載弼의 독립신문 경영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新聞 발간을 위하여 徐載弼은 먼저 활자와 인쇄기계를 大阪으로부터 주문하여 구입하였다. 이 印刷機는 電力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手動式 印 刷機械였었다. 신문 발행 부수는 3000부에 달했으며, 당시 周時經 은 總務 겸 校補員으로 신문편집에도 관여하였다. 인쇄직공은 모 두 16명이었었는데 8명씩 교대하여 作業을 하였다고 한다. 記者도 그렇겠지만 직공들도 경험이 없는 자들이어서 徐載弼이 직접 가르 쳐 주며 훈련을 시켰다. 그래서 徐載弼은 하루에 15 6시간의 노 동을 하여야 하는 고된 일과를 치러야 했다. 이리하여 신문은 점차 로 世人의 인식을 높이었고 당시 한국을 지배하려던 외국세력은 17) 신한민보 1948년 10월 14일

38 1. 言論機關의 活動 독립신문을 두려워하기에 이르렀다. 民權思想의 고취를 위한 徐載弼의 꾸준한 鬪志는 끊일 줄을 몰랐으며 이를 위한 討論會와 講演會가 연일 계속되었다. 많은 민중이 徐載弼을 따랐다. 李承晚 金奎植, 尹致昊, 李商在, 申興雨 등 지식인들도 이 강연을 들으러 왔다. 그리하여 이들과도 國事를 논의하게 되었는데 이와같은 운 동은 정부에서도 좋게 보지 않아 차츰 정부의 압박이 가해지기 시 작하였다. 平服 관리가 新聞社에 와서 3000부 인쇄한 신문 중에서 2000부의 신문을 買占하여 燒却하기도 했다.18) 討論會를 방해하 기도 했다. 民權思想의 고취는 정부와 신문과의 대립을 조성하게 되어 결국 徐載弼은 외국의 奸策에 의하여 美國으로 歸還하게 되 었다. 4) 徐載弼의 美國 歸還 1899년 5월 17일 徐載弼은, 독립신문 社說에서 독립신문의 運 營權을 尹致昊에게 맡기고 美國으로 귀환하게 되었다는 內容의 글과 이 신문을 維持하기를 바라며 또 이 新聞도 나의 前日의 主義를 억이지 아니하야 공변되고 확신한 것을 主張하기를 밋노 라 라고 말하고 美國으로 돌아갔다. 徐載弼의 美國 귀환 日字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1898년 5월 17일을 전후하여 귀환하였을 것으로 推察이 된다. 徐載弼의 귀환 이유에 대하여서 는 異論이 있기도 하지만 徐載弼이 1948년 10월 2일 美國 로스엔젤리스에 서 가진 다음과 같은 연설문에서 엿볼 수 있다. 日俄公使가 죠션에서 나를 구출하려다가 안되닛가 各該國外 交部로 美國國務省에 交涉하야 徐載弼의 召還을 요구하였고 國 務省에서는 徐載弼 까닭에 美國과 列强과의 國際問題가 일어나 18) 新民日報 1948년 2월 10일 徐載弼談 나의 新聞回顧

39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기 쉬우니 도라오도록 하는 것이 죠켓다고 하야 國務省으로부 터 駐朝鮮公使 일른 씨에게 訓令한 書翰을 일른씨가 나를 보이며 도라가는 것이 죠켓다고 하기에 내가 그이에게 뭇기를 당 신이 나더러 가라고 할 권리가 있느냐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야 그 러치 만은 도라가는 것이 죠켓다는 것은 다만 권하는 말 이라 하였다. 그래도 떠나지 않고 있었더니 나죵에는 나의 丈母집에 서 내 안해에게 電報하기를 어머님이 病中에 계시니 速히 도라 오라고 하야 事勢가 도라오게 되엇고 혼자 보내기가 어려워서 갓치 떠나게 되엇고 돌아와서 알어보니 이것이 나를 꼭 떠나게 만든 게 이다. 떠날 때에 독립신문을 윤 치호씨에게 맛겨 繼刊 하라고 19) 이것은 徐載弼이 美國으로 귀환 (제1차)하게 되는 직접적인 동 기가 되는 것이다. 徐載弼이 귀국한 다음 尹致昊와 앰벌리(Emberley, 音法里)가 독립신문 社長이 되어 신문발행이 계속되었다. 1898년 7월 1일부 터는 週 3회 발행하던 종래의 定期性을 日刊 발행(일요일 제외) 으로 改刊하였으며, 創刊初의 題號 독닙신문을 제12호부터는 독립신문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英文版은 1897년 1월 5일부 터 독립해서 隔日刊으로 발행되었다. (3) 搖藍期의 諸新聞 民間新聞의 嚆矢인 독립신문이 創刊된 다음 新聞의 機能이 國民啓蒙의 지대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자 1898년에 19) 신한민보 1948년 10월 14일

40 1. 言論機關의 活動 들어 漢城에는 수많은 신문이 雨後竹筍처럼 쏟아져나왔다. 週刊 또 는 週 3회 發行되 던 신문이 일간신문으로 발전하여 성장의 시초를 형성하였고 舊韓末 시대의 5大新聞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皇城 帝國두 신문도 이 시기에 창간을 보게 되었다. 이 시기에 창 간을 보게 된 몇몇 신문을 빼놓고 대부분의 신문은 그 발행기간이 길지 않았으나 국민 계몽을 위하여 힘을 傾注하는 한편 당시 韓國 이 처한 사정을 올바르게 국민에게 호소하며 신문의 존재 의의를 과시하였다. 이리하여 官에서도 신문에 대한 關心을 갖게 되어 新聞條例의 法案을 마련할 준비도 하게 되었고, 민간의 지도 자들도 신문의 성장 발전을 위한 구상을 하기도 했다. 美國에서 歸國한 徐載弼은 독립신문을 經營하는 한편 培材 1) 협셩회회보 일신문 商務總報 學堂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고 학생들로 하여금 團體活動의 조직 체로서 協成會를 조직시키기도 하였다. 이 協成會에서는 1898년 1월 1일부터 협셩회회보(週干)를 발행하였다. 이 會報는 학생들의 학구심의 앙양과 애국심을 북돋 우기 위한 것이 第一義的인 것이었지만 紙面에는 時事性 있는 현 실적인 문제도 게재하여 신문다운 성격을 갖추었다. 회보의 발행허가는 1898년 1월 26일자이었는데 이보다 앞서 1 월 1일부터 회보를 발행하였다. 主筆에는 李承晚이 취임하였고 協 成會 會員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幹部들이 있었다. 會長 梁弘默, 副會長 盧炳善, 書記 李承晚 金淵根, 會計 尹昌 烈 金爀洙, 查察 李益釆 任寅鎬, 司籍 周相鎬. 창설 초기에는 10명의 회원이 가입하였었는데 1년 후에는 200 명으로 增加되었고, 회보의 발행 부수도 1000여부로 그 量的 範

41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圍를 넓히었다. 그런데 이 會報는 제14호를 마지막으로 일간신문 으로 발전하였다 1898년 4월 9일이 협성회회보는 韓國 최초의 일간 신문인 일신문으로 改題 제1호를 발간했다. 당시 나라 안에는 독립신문과 京城新聞이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서 발행되고 있을 뿐이었다. 일신문은 協成會 幹部級의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발기하 여 일간신문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일신보 創刊 제1호를 보면 협셩회회보와 동일한 판으로 4면 신문을 발행하였는데 제1면 에는 논설(創刊辭)을 게재하였고 제2면에는 官報와 雜報, 3면에 는 外國通信과 電報 會中雜報, 4면에는 광고를 게재하고 있다. 이 신문은 일간신문의 필요성을 그 창간사에서 대략 본회즁 무와 외국 시세형편이며 쇼문소견에 학문에 유조 만 거슬 긔 야 국가 문명진보에 만분지일이라도 도 움이 하 님이 도으심과 회원들에 극진 성의로 지금이 회보가 거의 천 여장이 나아가니 우리회보 보시 이들게 감 을 치하 는 즁 기다리기에 우 지리 지라 회원즁 유지각 신 몇몇분 이 특별히 분석 신고하고 열심으로 쥬션 엿거니와 병 여 회원 드리 일심으로 역을 모하 오 붓터 일신문을 외국 시셰형편과 국민에 유죠 말과 실 적 소문을 만히 긔 할터이 니 목적도 극히 중대 거니와 우리 회원이 일심 국 지극 츙성의 간담을 합 야 이 신문샹에 드러 노라 라고 말하고 일간신문으로서 처음 시작하는 것은 韓國에서 처음 볼 수 있는 慶事이고 신문으로 하여금 문명진보의 기초적인 역할 을 충실히 담당해서 애국지성을 다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신문 이 의도한 것은 조국의 근대화를 위하여 문명진보의 기초적 역할 을 自任하고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신문도 오래

42 1. 言論機關의 活動 지속하지는 못하였다. 1899년 4월 15일 이 신문의 인쇄 시설 일체를 진골로 옮겨 신 문 명칭을 改題하여 새로운 신문으로 商務總報를 발행하였는데 社長은 길영슈이고 總務員은 나유석이었었다.20) 그러나 이 신문 도 1899년 5월에 停刊되고 말았다. 이 商務總報는 韓國에서 商業 新聞으로는 최초의 신문인 것이다. 2) 京城新聞과 대한황셩신문 京城新聞은 尹致昭가 發行人이 되어 매주 2회(水 土) 발행하는 純國文을 사용한 태블로이드판 2면 신문으로 출발하였다. 1898년 3월 8일 당시 農商工部의 허가를 얻었는데 신문발행은 이보다 앞 서 같은 해 3월 2일에 제1호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제10호를 마지 막으로 발간하고 11호(1898년 4월 6일)부터는 題號를 대한 황 셩 신문 으로 改題하였다. 京城新聞(1898년 3월 30일부) 제9호 論說 파겁 유론이라는 題下에 우리나라도 독립기초를 세워 각종 학문을 발죵지시 긔회 를 얻엇스니 정신을 가다듬어 위선 대쇼인민에 본국법률장졍을 익슉 게 알면 관인의 압제도 면 고 문명진보도 쇽히 될터이 고 탐관오리도 엇지 길이 업서 부득불 법률장정을 쥰 할 터 이니 이러 고 보면 젼국 인민이 각 기업을 편안이 가져 날로 부강 터인고로 우리 신문에 호마다 법률 장졍을 긔 터이 니 명 인민이 되여보랴거던 이 거슬 유의 야 보시오 라고 論하고 있다. 이 신문은 지식 수준을 높이기 위한 계몽 기관 으로서의 사명을 띠고 출발하여, 법률지식을 보급하여 遵法精神을 키우고 탐관오리의 일소와 압제를 받지 않는 국민생활을 영위하 20) 독립신문 1899년 4월 15일

43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도록 하는 데 노력하였다. 대한황셩신문은 새로운 신문의 창간이 아니다. 京城新聞의 發行番號를 그대로 이어 받아 발간한 것이므로 대한황셩신문 의 11호는 創刊號에 해당되는 것이다. 신문 題號를 대한황셩신 문이라고 개제하고 첫출발을 한 이 신문의 11호는 그 제호 밑 에 커다랗게 경셩신문을 대한황셩신문으로 곳쳣스니 제군 그리 아시 이라고 밝힌 다음 大韓의 皇帝가 계신 곳에서 신문 을 출판하게 되는 것이므로 대한황셩신문이라고 제호를 변경 하였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으며 다시 같은 欄에서 신문의 公益 性에도 언급하였는데, 신문이라 거 샹리로만 론지 거시 아니라 됴희쟝에다 엇던 나라던지 엇던 사람이던지 조곰치도 두려 지 않코 그 고 올 거솔 정없이 공변되게 의론 야 국 에 찬조가 되 거시라 라고 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문은 다만 지식을 보급시키는 기관으로만 인정하지 않고 정 치를 감시하고 관리의 부패를 막는데 이용하고 褒貶과 勸懲의 정 신을 기울여 貪政과 民弊를 없애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이즈음의 신문은 한결같이 官民啓蒙과 지식의 보급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이었던 것이다. 3) 대한신보 光武協會에서는 光武 2년(1898) 4월 6일 農商工部의 인가를 얻어 같은 해 4월 10일 대한신보를 창간하였다. 純國文 신문으로 週刊 발행이었었다. 事務所는 明洞 경성학당 안에 두고 小型 4面 新聞으로 발행하였는데 創刊 第1號 제1면에는 社告와 論說을 게

44 1. 言論機關의 活動 재하였고, 제2면에는 內報, 제3면에는 外報, 제4면에는 회즁 일기 를 게재하였다. 이 신문은 光武協會 會員들의 발기로서 창간을 보 게 된 것인데 同協會 제10희 通常會에서 신문을 발간하기를 의결 하였던 것이다. 創刊辭에 해당하는 논설에서 대한신보의 指導 精神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먼저 국민된 자의 의무를 준수 하 여야 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權利에는 義務 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의무는 皇帝陛下 의 깊으신 恩德에 보답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같은 난에 1885년에 英國艦隊가 巨文島를 不法占據하였을 때 국민들의 피끓 는 힘으로 대항하여 드디어 1887년에 英國艦隊로 하여금 巨文島 에서 물러나게 하였고 러시아의 절령도에 대한 야욕도 萬民共同 會를 비롯하여 국민들의 항거로써 무찔러 버린 大韓國民의 애국 심의 발휘는 자기의 義務를 다한 것으로 이것은 국민된 자의 커다 란 영광이라고 크게 찬양하고 이러한 것은 모두 皇帝陛下의 넓으 신 恩德에 힘입은바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新聞 發行本部인 光武協會는 仁川 日語學校에 支部를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協會는 賛助金에 의해서 유지되었었다. 賛助者 중에서는 李承晚, 梁弘默 그리고 日本人 澁澤, 長島 등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4) 時事叢報 時事叢報는 1899년 1월 22일 農商工部와 內部의 認可를 얻어 發行人 洪仲燮, 編輯人 張志淵에 의해서 隔日刊 新聞으로 創刊 第 1號로 발간하였다. 이 신문은 당시 守舊派의 성격을 가졌었는데 제1면 3단 全面을 本報發刊之趣旨라는 創刊辭로서 滿載하고 있는데 창간 취지 를 널리 이해시키기 위하여 제1면에 게재한 國漢文 겸용의 論說

45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전부를 평이하게 國文으로 제3면에 게재하고 全文을 해설해 놓고 있다. 이 신문은 그 創刊辭에서 古者에 稗官野史가 有 야 作史 者 或取之러니 今에 變 爲 新聞 니 其法이 盖筆自英伊하야 近世에 盛行各邦 니 是亦 史之流 라 하여 신문을 歷史에 비유한데 특색이 있고 신문의 기능이 국가 政治에 有助할 수 있는 것으로서 規諷 勉警 補給 省察 鑑戒의 다 섯가지 효력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신문발행은 국가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고 인민에게도 敦勵 勸懲 發達 資濟 遊覽 등에 대하여 補益됨이 있다고 자세한 설명을 추가하고 있다. 이 신문도 이 시기에 발간되고 있던 다른 신문들과 마찬가지로 국민지식의 보급을 지상 목표로 삼고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넉넉치 못한 경영사정 때문에 몇차례에 걸쳐 休刊하지 않을 수 없 었고, 100호 발행을 한 다음 停刊된 것으로 추측된다. (4) 舊韓末의 五大紙 舊韓末 民族陣營의 신문으로서 活氣를 띠고 민족의 자주독립과 국권만회를 위하여 筆鋒을 휘두른 주요한 신문으로 帝國 皇 大韓每日 萬歲報 大韓民報의 다섯신문을 들 수 있 城 다. 이들 신문은 經營難에도 불구하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올 바른 主觀的 傾向을 견지하며 외세침입에 항거한 민족적인 新聞 이었다. 이들 신문은 落魄해 가는 민심에 경종을 울리며 다난한 시국을 筆鋒으로 剔抉匡正하자는 의도로 일관하였다. 徐載弼을 중심으로 이룩된 독립신문의 民權運動도 국내권

46 1. 言論機關의 活動 력과 국제정세에 여지없이 짓밟히고 말았다. 그러나 帝國, 皇城 등의 신문이 탄생되어 언론면에도 새로운 양상을 전개시켰다. 漢 城 旬報 漢城周報와 그리고 독립신문을 가리켜 발생초기의 신문 이라고 한다면21) 帝國, 皇城 이 두 신문은 韓國의 신문이 발전하 기 시작한 발흥기의 신문이었다고 하겠다. 이들 신문은 韓日合併 까지 국가의 운명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하며 각자 제 구실을 다 하였던 것이다. 露日戰爭에 득세한 日帝는 韓國으로 하여금 韓日議定書와 乙巳 條約 등 굴욕적 조약을 체결케 하였다. 여기에 대한 韓國民의 輿 論은 皇城, 帝國, 大韓每日 등의 지면을 활기 있게 하였다. 이 때 皇城의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名社說은 賣國奴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名文이었다는 것은 世人이 주지하는 터이다. 이들 신문은 그 후에 발간되는 萬歲報와 大韓民報와 함께 국권 만회를 위한 국 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데 온갖 정열을 기울였다. 다음에 五大紙를 하나하나 검토해 보기로 한다. 1) 뎨국신문(帝國新聞) 독립신문과 獨立協會의 움직임이 徐載弼, 尹致昊 등 美國流의 新人들이 중심이 되어 民權思想으로 國民을 指導하려는 意圖이었 던 것에 반하여 帝國新聞은 미국류의 신인들에 의하여 발행된 것 이 아니고 儒生 중의 先覺者에 의해서 발행되었다. 이 신문은 1898년 8월 10일 李鍾一, 李承晚에 의하여 창간되었 다. 李鍾一은 유생의 선각자였고 李承晚은 당시 培材學堂에서 英 語를 履修한 개화 학도이었다. 21) 독립신문을 舊韓末 五大紙 중의 하나로 보는 論者도 있으나 독립신문의 발생 초기는 建陽 원년이었고 舊韓國 초기에 終刊된 신문이기 때문에 독립신문을 舊 韓末 五大紙의 하나로 지적할수는 없을 것이다

47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그 뒤 鄭雲復도 이 신문에 관여하게 되었다. 이 신문은 독립신문 의 본을 따 純國文을 사용하였고, 일반 대중을 讀者 對象으로 삼 았다. 新聞題號는 처음에 뎨국신문이라고 國文을 사용하였는 데 1903년 7월 7일부터 帝國新聞이라는 漢文題號를 사용하기 시 작하였다. 그리고 이 신문은 신문의 창간취지를 일반에게 주지시 키기 위해서 연4일에 걸쳐 論說을 실었다. 전반적으로 창간취지를 검토해 보면 용어를 國文으로 한 데 특징이 있는 것이다. 독자 대 상을 일반 서민층에 두어 그들에게 國文을 해독시키고 동시에 自 我를 찾게 함으로써 민족적 자주정신을 배양하고자 한 것이다. 이 신문이 그 과제로 삼은 것은 知識의 啓發이다. 即 신문을 하나의 국민 교육 기관으로 간주한 것이다. 또 民弊를 없애기 위하여 정 치와 사회를 감시하고 문명개화에 이바지하며 剛直한 언론으로써 국민을 지도해야겠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창간 취지에 보도기관으로서의 역할에 대하여는 일언반구도 언급되어 있지 않 다. 신문은 보도기관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지도기관 即 지식계발 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 교육 기관으로 본 데 특색이 있다. 전반적 으로 볼 때 민권적 주관적 경향을 가지면서 애국애족하는 신문의 성격을 유지하기에 힘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98년 11월 獨立協會事件이 있을 때에 李承晚은 皇城新聞社長 南宮檍과 함께 체포되어 투옥된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지만 옥중에 서도 帝國新聞에 논설을 써서 보냈으며 또 옥중에서 쓴 독립정 신 은 유명한 것이다. 帝國新聞 후기의 主宰者는 鄭雲復이었는데 그의 政治的 轉向은 이 신문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1910년 6월 1일 휴간하고 말았다. 한 가지 특기할 사실 은 帝國新聞社에서 1906년 7월 31일 大韓自強會 月報를 발간하 였다는 것이다. 이 月報의 版權은 大韓自強會의 소유이었는데 同

48 1. 言論機關의 活動 會에서는 같은 해 5월 24일 臨時 評議會를 개최하고 판권을 帝國 新聞社內 雜誌社에 讓與하기로 결정하고 그 交涉委員으로 林炳恒 太明軾, 南宮薰을 선출하였다.22) 2) 皇城新聞 皇城新聞은 儒生과 漢學者들이 중심이 되어서 1898년 9월 5일 창간되었다. 창간에 관여한 사람은 南宮檍, 柳 理 등이었고 그 후 張志淵, 朴殷植, 南宮薰, 申釆浩, 崔昌植이 참여하게 되었다. 신문기사의 내용은 官報의 抄錄과 雜報 외국의 통신과 電報를 게재하였는데 매일 제1면에 논설을 실었다. 창간 제1호에는 創刊辭에 해당되는 社說欄에서 창간취지를 언 급하고 있다. 이 신문은 國漢文 兼用文體로서 발간되었으며, 먼저 국민교육의 필요성을 말하기도 하고, 國文을 보급활용하여 국민의 지식 계발을 꾀하여야 한다는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世宗大王 서 一種文字를 創造 샤 愚夫愚婦로 無不開明케 하 시니 曰國文이라 其文이 克簡克易하야 雖童穉女라도 時月의 工을 推 면 可히 平生의 用이 足할지라 是로 以 야 一世에 傳習 者 10에 5 6에 至 더니 欽惟大皇帝陛下 서 甲午中興之會를 適際 샤 自主獨立하시 基礎를 確定 시고 一新更張하시 政 令을 頒布 실 特히 箕聖의 遺傳 시 文字와 先王의 創造 신 文字를 並行코저 샤 公私文牒을 國漢文으로 混用하라신 勅 敎를 下하시니 위에서 지적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신문은 漢文을 이해하는 특 권층만을 독자대상으로 삼지 않고 世宗大王이 창조하신 평이한 22) 大韓自強會報 第1號

49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國文을 겸용하여 일반 대중층을 독자의 對象으로 삼은 것이다. 이 때에 官의 訓令과 各郡의 報告書 등 公用文書는 모두 國漢文을 혼 용하라는 皇帝陛下의 분부가 있었기 때문에 신문도 여기에 보조 를 맞추어 國漢文을 겸용하고 만천하 독자의 애독을 간청하였다. 이 新聞도 국민 지식의 계발로써 정치를 감시하고 외세 침입에 항 쟁하는 무기를 삼고자 했다. 따라서 신문의 기능을 국민 지식의 계발을 위한 敎育機關이라는 데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국가의 자주독립을 손상시키며, 韓國에 그 세력을 뻗치 려는 日帝에 秋波를 던지던 賣國貪政을 감시하기에 힘썼다. 이 시 기의 신문은 論說이 중요시되기도 하였다. 救國救民을 위한 社說 이 연이어 게재되어 賣國奴들의 정치를 罵倒하였다. 그중에서도 韓國新聞史上 大書特筆 할 만한 對政府抗爭의 名社說을 남겨 놓 은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皇城新聞社長 張志淵은 1905년 11월 20일자 社說에 是日也放 聲大哭 이라는 題下에 賣國徒輩의 惡政을 신랄하게 비평하였다. 是日也放聲大哭 曩日伊藤侯가 韓國에 來 愚我人民이 逐逐相謂曰侯 平日 東洋三 國의 鼎足安寧을 自擔周旋 던 人이라 今日來韓 이 必也 我韓獨立을 鞏 固히 扶植 方略을 勸告 리라 야 自港至京에 官民上下가 歡迎 을 不勝 얏더니 天下事가 難測者多 도다 千萬夢外에 五條件이 何로 自 야 提出 얏 고 此條件은 非但我韓이라 東洋三國의 分裂 兆漸을 釀 出 인즉 伊藤侯의 原初主意가 何에 在 고 雖然이나 我大皇帝陛下의 強 硬 신 聖意로 拒絕 을 不己 셨으니 該約의 不成立 은 想像컨대 伊藤 侯의 自知自破 바어 噫彼暾犬不若 所謂我政府大臣者가 榮利를 希 覬 고 假嚇를 恇却 야 逡巡然觳觫然賣國의 賊을 甘作 야 四千疆土와 五千年宗社를 他人에게 奉獻 고 二千萬生靈으로 他人의 奴隷를 歐作 니 彼等豚犬不若 外大 朴齊純及各大臣은 足히 深責 것이 無 거니와 名爲參政大臣者 政府의 首揆라 但以否字로 塞責 야 賣名의 資를 圖

50 1. 言論機關의 活動 얏던가 金淸陰의 裂書而哭도 不能 고 鄭桐溪의 以刃刺腹도 不能 고 偃 然生存 야 世上에 雯立 니 何面目으로 強硬 신 皇上陛下를 雯對 며 何面目으로 二千萬同胞를 雯對 리오 嗚乎痛矣며 嗚乎憤乎라 我二千萬 爲人奴隷之同胞여 生乎아 死乎아 檀紀以來四千年國民精神이 一夜之間에 猝然滅込而止乎아 痛哉 痛哉라 同胞아 同胞아 이 社說은 韓國新聞史上 영원히 자랑할 만한 것이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張志淵은 70여일을 警務廳에서 구류생활을 하게 되었 다. 따라서 신문도 80여일이나 발행을 정지하였다가 1906년 2월 22일 부로 다시 自由之筆하고 自由之言하겠다는 是日復刊此 紙 의 復刊辭를 가지고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皇城新聞 초기에는 漢城旬報나 周報처럼 中國新聞의 보도기사 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萬國公報의 보도기사 인용이 눈 에 된다. 그리고 大韓帝國에 대한 曲筆을 일삼는 기사에 대해서는 여기에 대한 반박으로 신랄한 비판을 加하기도 하였다.23) 新聞社의 經營部面은 羅壽淵이 總務員의 직책으로 있었는데 本 社告白이라는 新聞廣告로써 本紙定價와 廣告料金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본사 사무소를 당시 中署澄淸坊黃土峴 第23統 7戶에 두고 있었다. 柳 瑾이 法定發行人이던 이 신문은 韓日合併 전 1910년 6월 12일 成善慶으로 발행인이 변경되었고 합병후에는 題號도 漢城新 聞으로 바꾸어 발행하다가 얼마 안가서 폐간하였다. 3) 大韓毎日申報 舊韓末 5大紙중의 하나요 抗日鬪爭의 제일선에서 민족의 자주 23) 皇城新聞 1898년 9월 21일 사설 論說(辨萬國公報迂謬說) 陽秋古燈 偶閱萬國公報 第108卷, 至高麗稱帝之說 自不覺啞然一笑而廢書也 云云 하고 中國新聞의 蓴大的 曲筆을 反駁하고 있음

51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독립을 위하여 과감하게 붓대를 잡은 신문이 大韓每日申報이다. 1904년 7월 18일 英國人 베델 (E.T. Bethell, 裵說)은 당시 英 語에 능숙하였던 梁起鐸과 함께 大韓每日申報(Korea Daily News)를 創刊하였다. 처음에는 國文과 英文을 겸용하여 발간하 였다. 신문 경영에는 林蚩正, 安泰國 등이 일을 보았고 申釆浩, 安 昌浩, 李 甲 등이 編輯에 관여하여 論陣을 폈다. 이 시기의 국제정 세는 日本과 英國이 동맹을 맺었고 韓日 관계로는 韓國이 韓日議 定書(1904)라는 굴욕적 조약을 강요당하게 되어 日本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게 되고말았다. 이러한 위기에 帝國, 皇城 等의 民族 紙들과 함께 기울어져가는 國難을 타개하고, 排日思想을 북돋우며 자주독립을 위한 투쟁을 과감하게 전개시킨 것이다. 이 신문은 創 刊 당시 인쇄기계와 활자 등이 미비하여 漢文을 사용하지 못하고 國文과 英文만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창간후 200호를 발간하고 잠시 휴간하였다가 1905년 8월 11 일 제3권 제1호를 발간하였는데 이 날 社告는 그 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本新報의 剏刊月 月日이 于今一週歲이나 機械와 鑄字가 未 具 으로 200餘號를 發行하고 仍爲停刊中인바 旣張而中輟 게 實所槪然이기 本社에서 思를 勞 고 慮를 責 야 今에 確定 야 大韓有志人士의 文明知識을 啓發 고 暨環球有國의 見物 을 合同 기 위하여 重刊發行 바 英文與漢文을 無爲解讀이 味必人皆能之인즉 英漢文公刊이 徒煩無益키로 從前一變前規 야 英漢文 各紙分刊이되 內外國各報를 一層迅速케 며 이와 같이 신문이 의도하고 있는 것이 국민의 문명지식을 계발 하고 세계 각국의 진보된 풍물을 도입하기 위하여 續刊한다는 취 지를 밝힌 다음 英漢文合刊이 徒煩無益키로 從前一變前規 여

52 1. 言論機關의 活動 라고 종래의 國英文版으로 발행하던 것을 따로 英文版을 分刊하겠 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이날을 기하여 國漢文版 大韓毎日申報와 英文版(Korea Daily News)를 따로따로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점진적으로 독자의 양적 범위를 확대하여 가며 일반 의 관심을 집중시키던 이 신문은 다시 한글판 大韓毎日申報의 발 간을 企圖하고 1907년 5월 7일 한글판 신문 제1호를 발간하였다. 이 신문은 創刊辭序頭에서 본긔자 이 한국사람을 대하야 마 말노 질문코저 노니 대져 삼천리 강토와 이천만 인구로 쥬독립하지 못할 걱정이 업거늘 무 연고로 오 날에 나라 권세를 온젼히 일코 사 권 리가 전혀 없어서 무궁히 비참한 경우에 빠졋나뇨 라고 말하고 세계열국이 自國의 國文과 國語로써 自國民의 정신을 완전케 하는 기초를 세우는데 他國의 漢文만을 숭상하여 가지고 自 國의 정신을 어찌 보존할 수 있겠느냐고 개탄하고 국문 습득의 필 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리하여 大韓毎日申報는 國漢文版 英文版 한글版으로 주관적 경향을 뚜렷하게 내세우며 日本의 侵略政策에 항거하였던 것이다. 日帝의 走狗 統監府도 大韓毎日申報社長 베델 에 대하여서는 갖은 陰謀와 악독한 수단을 다하여 제거할 공작을 꾀하였으나 英國紳士의 國際 正義心에는 어찌하는 수 없었다. 당시 美國 샌프란시스코우에서 발행되고 있던 民族紙 共立新報는 베델 에 대한 日人들의 흉계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24) 셜씨를 암살하려는 흉게 한국안에서 일본의 불법을 공격하 고 일본의 정책을 세계에 광포 여 롭게 쟈 대한 일 신보라 그런고로 일본사람 중에서 셜씨를 암살하려는 자가 있는데 통감부에서 만류하되 이때에 영국사람을 살 하는 것은 24) 共立新報 1907년 8월 2일

53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국제상 문제가 될터이니 그만두라 으로서 아직 실 하지 아 니 얏시며 그래서 統監府에서는 大韓每日申報에 대항할 수 있는 신문을 창간하기로 決議하고 재래의 日本 外務省 機關紙이었던 漢城新報 와 大東新報를 買收合併하여 새로 統監府機關紙로서 京城日報를 발간하게 되었고, 또 英字新聞紙 Korea Daily News 에 대항하 기 위하여 서울프레스(Seoul Press)의 창간을 보게 된 것이다. 大韓每日申報의 論調는 시종일관 民族主義의 정신을 固守하는 性格을 유지하고 있었다. 乙巳條約 締結時에는 張志淵 皇城新聞 社長의 是日也放聲大哭을 크게 찬양하는 경향의 논설과 보도의 태도를 보여주었고25) 國權恢復에 대하여서는 本社의 斷尺一局은 大韓人民의 國權恢復을 위하여 目的 을 到達하도록 始終을 恒常 如一케 에 在 니라고 명백히 밝 히고 있으며,26) 義兵의 활동에 대하여서도 자세한 보도를 하고 있으며 國債報償運動에 대하여서도 국민의 절대적인 호응이 있기 를 바라는 글을 연일 紙上에 게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一進會에 대하여 反旗를 드는 논설과 독자의 투고가 揭載되고 있 는 것도 주목할 사실이다. 大韓每日申報의 이러한 주관적 경향은 統監府의 두통꺼리가 되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베델을 추방하고자 하는 日本의 획책은 결국 1907년 10월 12일 統監府의 提訴에 의하여 3000圓의 供託金 과 謹愼處分을 내리 게 되었다. 그러나 大韓毎日申報의 民族正氣에 대한 의욕은 굽힐 줄을 몰랐다. 베델은 그 이듬해 統監府의 控訴에 의하여 英國法律에 의한 재판을 받고 三週日間 上海에서 監禁生活 25) 大韓每日申報 1905년 11월 22일 26) 大韓每日申報 1907년 5월 24일

54 1. 言論機關의 活動 을 하게 되었으며 서울로 돌아온 후 大韓毎日申報의 경영을 英人秘 書 만함(Manharm, 萬咸)에게 인계한 다음, 1908년 5월 1일 별세 하고 말았다. 臨終때 베델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겨 놓았다.27) 我는 死하나 申報는 永生케 야 韓國同胞를 救하라. 이 정신은 大韓毎日申報의 정신이며 정의에 입각하여 韓國民族 의 진로를 指示해 주는 횃불이였다. 만함은 1910년 6월 9일까지 (1407호) 자기 명의로 신문을 운 영하다가 신문시설 일체를 李章薰에게 40,000元에 양도하였다. 이리하여 李章薰은 6월 14일(1408호)부터 編輯兼發行人이 되어 合併후 日帝의 機關紙 每日申報로 改題될 때까지 이 신문사를 경 영하였다. 결국 大韓毎日은 8월 28일까지(1461호) 발행되고 8월 30일(1462호)부터는 每日申報로 改題되었다. 4) 萬歲報 모질게 달려드는 日帝의 侵略政策은 1906년 2월 韓國에 統監 府를 設置하고 韓國政府에 적극적인 간섭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기에 萬歲報는 吳世昌이 社長이 되어 1906년 6월 17일 創刊 第1號를 발간하였다. 日本에서 돌아온 吳世昌은 당시 孫秉熙 의 지원을 얻어 新聞을 발간하게 되었는데 主筆에는 李人稙이 임 명되었다. 17일에 創刊號를 낸 이 신문은 6월 28일부터 日刊으로 계속적인 발간을 보게 된다. 당시 서울에는 帝國, 皇城, 大韓每日 을 비롯하여 카톨릭 계열의 京鄕新聞, 一進會의 國民新聞, 李完用 계의 大韓新聞 등 國文新聞과 日人經營의 韓國文 日本文 신문 10여 종이나 더 되는 신문들이 民族紙와 親日紙로 분열되어 정치 적 견해를 달리 하여가며 격정적인 論爭을 벌이던 때이었다. 萬歲 27) 大韓每日申報 1909년 5월 5일

55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報는 國漢文을 사용한 신문으로서 第293號를 마지막으로 創刊 후 1년 남짓 발행하다가 1907년 6월 29일 경영난으로 폐간하지 않 을 수 없었던 것이다. 吳世昌은 萬歲報의 創刊辭에서 已啓已發한 人民의 知識도 益益 進步키를 企圖 거든 況此未 啓未發 人民의 敎育이야 엇지 一刻一抄를遲緩 이 可 리오 라고 시급한 國民敎育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는데 漢文 지식이 없 는 일반대중 독자에게 漢文을 습득시키기 위하여 漢字 옆에 루 비 를 달게 한 것은 特記할 만한 것이다. 吳世昌은 韓國語 교사로서 또는 망명객으로서 두 차례나 日本 을 왕래한 일이 있어 日本在留時에 孫秉熙와도 친교를 맺을 수 있 었고, 당시 日本文化의 發展相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낀바 있어, 韓國에서의 신문발행의 제일 목적을 미개한 국민의 지식계발에 두게 되었다고 본다. 이미 이 신문에 앞서 23년전에 발간되었던 漢城旬報의 課題도 국민의 지식계몽에 있었던 것과 같이 이 신문도 지식계발을 제일 주의로 하고 세계만방에 유통하고 있는 신문화의 흡수 소화를 위 하여 신문을 하나의 국민교육기관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특색이 있다. 그리고 創刊辭는 계속해서 新聞의 効力으로 言할진대 個人의 知識만 啓蒙할 뿐만이 아 니라 一則 國際의 關係와 政治의 挽回와 甚至戰爭을 激成 며 平和를 恢復 機關이오 二則 善을 彰 여 惡을 懲하고 上化 가 下에 浹 며 下恫이 上에 達케 하며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신문의 기능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며 신문 의 사명을 지식을 계발하는 하나의 敎育機關으로 인정할 뿐만 아 니라 국제간의 평화를 유지할 수도 있고 전쟁을 도발할 수도 있고

56 1. 言論機關의 活動 정치를 지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 신문이 여론에 미치 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또한 善彰惡懲의 정신으 로 民意를 上達하고 上意를 下達하여 건전한 사회생활을 誘導하 는 母體가 되어서 세상 사람을 가르쳐 올바르게 이끌만한 기관이 되어 보겠다는 포부를 말하고 있다. 萬歲報는 창간취지를 지면에서 발휘하기 위하여 신문제작에 열 의를 보여주었다. 일반 교육은 물론 특히 여자 교육에도 유념하여 여자 교육 단체를 조직시키기 위한 협찬도 하고 여성 문화단체와 도 밀접한 연락을 취하였다. 1906년 11월 2일부 紙上에서는, 我韓女子가 男子壓制力을 受 고 深閨에 禁錮하여 人道上 缺 點을 包有 感情을 融解 고 一般社會에 同等權利를 克復코저 지면 第一敎育에 在 다 라고 보도하기도 하였다. 女權尊重과 女性解放運動은 萬歲報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독 립신문부터 女權擁護의 정신이 계승되어 내려온 것은 사실이다. 여성운동 뿐만이 아니라 親日集團인 一進會와의 대결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萬歲報의 경영초기는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워졌다. 이 신문은 天道敎의 원조뿐만이 아니고 高宗皇帝의 特賜도 있었던 터이라 처음부터 다른 신문보다 구독료도 염가로 해서 독자에게 서어비스 하였다. 신문을 염가 제공하는 萬歲報에 대한 비난이 一 進會의 機關紙 國民新聞으로부터 나왔다. 萬歲報 설립 자금에 대 한 시비를 벌이기도 하였다. 1906년 8월 30일부 萬歲報는 여기에 대하여 國民報寄書批評이라고 다음과 같이 반박하기도 하였다. 本報가 他報보다 代金이 歇 다 얏스니 萬一 代金이 他報보 다 高 엿더면 如何한 論이 有 얏을런지 不知 스며

57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이 뿐만이 아니고 國債報償運動도 帝國, 皇城, 大韓毎日과 함께 거국적으로 전개시키고 전국 13道에 걸쳐 많은 성과를 얻게 하였 다. 그러나 당시 統監府는 민족적인 이 國債報償運動을 排日運動 으로 간주하고 압력을 가하였기 때문에 所期의 目的을 달성하기 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萬歲報는 태블로이드 倍大版 4면 신문이었는데 1면을 7段으로 나누고 1段은 41行이며 인쇄기계는 당시 日本에서 들여온 蒸氣機 關에 의한 活版機械를 사용하였고 신문편집도 다양성을 띠었다. 특히 李人稙이 이 신문에 관여한 바도 있어 新聞小說이 連載되었 다. 血의 淚와 鬼의 聲은 중요한 연재소설이었는데, 李人 稙 作 血의 淚는 韓國新小說의 효시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韓國초기의 民間新聞이 모두 그러했거니와 구독료의 수입은 여 의치 않고 매일 사용하는 인쇄기계와 활자는 소모되어도 수리 또 는 개조할 여유는 없어 정간 또는 휴간의 사태가 빈번하였다. 萬 歲報도 예외는 아니었다. 民族運動의 한 表現機關으로 孫秉熙一派 의 天道敎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一進會에 대항한 짧은 시일의 과 정이었지만 민족의 지식계발을 위한 공은 큰 것이었다 하겠다. 5) 大韓民報 舊韓國 말기에 日帝의 강압적인 韓日合併을 목전에 두고 영락 해 가는 민심을 깨우쳐 주고 국민의 사상을 통합하고 민족적 위기 를 돌파하기 위하여 大韓民報가 발간되었다. 1909년 6월 2일 吳 世昌, 張孝根이 중심이 되어 創刊 第1號를 발간하였다. 뒤이어 李 鍾麟도 논설의 집필자로서 활약하였다. 大韓民報의 창간을 전후해서 日帝의 강압정치는 韓國의 武官學 校와 군대를 폐지시키고 司法權마저 統監府로 이양하게 되었고

58 1. 言論機關의 活動 一進會가 韓日合併의 意見書를 발표하기도 하였던 때이었다. 一進 會에 대립하는 정치단체인 大韓協會(大韓自強會)는 日帝에 항거 하는 단체이었다. 이 大韓協會의 機關紙 역할을 떠맡고 애국애족 의 활발한 필치를 보여준 것이 大韓民報이다. 초기에는 영세한 자본으로 漢城 中部 壽洞에 본사 편집국을 설 치하고 興士團系의 인쇄소 同文館에서 印刷를 하였다. 처음에는 張孝根이 편집 겸 발행인이었었는데 1909년 10월 26 일 崔榮穆으로 그 편집 겸 발행인을 변경하였다. 이 신문의 창간 취지는 먼저 시대는 민중의 소리를 요구한다고 전제한 다음 신문 발행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時代의 要求에 依 야 仳離零落 國民의 思想을 統一 야 內로 氣魄을 祖國에 注 며 外로 知識을 世界에 求하야 一方으 로 敎育事業을 獎勵하여 國家의 實力을 養成하며 一方으로 天 下大勢를 周察하여 自國의 地位와 國是가 列強에 대 여 如何 한 關係가 有 을 冷靜히 觀破 고 國民의 行動을 一致 야 國 運의 發展을 是圖 由來國民이 浮虛輕薄한 思想을 打破 고 穩建確實 精神을 鼓吹하여 不膠 며 急進에도 不偏 여 自強 不息 는 信念으로서 一步에 一步를 更進 여 最後의 目的地에 到達 을 期 에 在 니라. 위에 지적되고 있는 바와 같이 大韓民報의 사명은 요컨대 사상 을 통일하여 민족의 단결을 꾀하는 동시에 동포를 啓發하고 國權 挽回를 하기 위한 지식의 보급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創刊號 제1면에 신문의 사명관을 그대로 표현한 諷刺畫를 게재하 고 있다. 漫畫는 한 紳士가 연설을 하는 口調로 大局의 肝衡 韓魂의 團聚

59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民聲의 機關 報道의 異彩 라는 표어를 말하는 것을 풍자한 것인데, 大局의 肝衡이라는 것은 大局을 똑바로 보고 국가정세에 대한 이해를 조장시켜 보겠다는 것이고 韓魂의 團聚는 민심을 통합하여 난국을 타개하고 국권만 회를 기해보자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民聲의 機關은 처음에 언급한 바 있듯이 시대는 민성의 소리를 요구하니 참된 輿論을 환 기시키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報道의 異彩는 신문제작의 구태를 벗어나 현실적 사실의 보도로써 다채로운 편집태도로 임 하겠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 諷刺畫는 貫齊 李道榮畫伯이 중심이 되어 그린 漫畫인데 創 刊號에만 게재하지 않고 계속해서 시사를 풍자하는 만화를 발표하 였다. 이것은 또한 韓國新聞諷刺畫의 효시가 되는 것이라 하겠다. 올바른 輿論喚起를 위하여 國債報償運動에 관한 문제에 커다란 관심을 집중시키는 한편 安重根義士의 伊藤博文狙擊事件에 대한 보도는 그 全貌를 낱낱이 보도하고 그의 排日鬪志를 크게 찬양하 였다. 韓日合併에 대한 一進會의 韓日合併 聲明書의 발표에 대하 여서는 이를 반대하는 大韓協會의 國民大會 發起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合邦反對理由를 밝히기도 하였다.28) 大韓民報는 편집 제작면에 있어서도 多樣性을 가지고 이채로운 것을 보여 주었다. 먼저 新聞小說에 있어서 病人懇親錄 薄情花 禽獸裁判 等 의 短篇連載를 볼 수 있고, 그 중에도 가장 독자의 관심을 갖게 한 것으로는 諷刺畫가 있었다. 이 諷刺畫는 東洋畫式의 木版時事 漫畫인데 版刻은 李禹昇이 담당하였고 매일 게재하여 繪畫化한 28) 大韓民報 1910년 1월 13일

60 1. 言論機關의 活動 논설로써 그 구실을 다하였었는데 日帝 統監府는 당시 이 만화에 대하여서도 삭제를 명령하여 漫畫전면을 시커멓게 먹칠을 해서 일반의 閱讀을 불허하였던 것이다. 그 중 言論制約에 관한 만화로 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一日不讀 口生棘 一日不見 胸塞茅 至今更對 欣心足 若遇名花 雨後朝 하루를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생기고, 하루를 보지 않으면 가슴이 막히고, 지금 다시 신문을 대하니 비가 내린 아침에 명화를 보는 것 같도다. 이것은 다가 한 정간되었 다시 복간을 신문에 대하여 閱讀을 찬미하는 내 용이다. (사진참조) 이러한 諷刺畫를 볼 때 당시의 신문 大韓民報諷刺畵 탄압이 얼마나 酷 毒하였는가 알 수 있다. 大韓民報는 韓日合併후 제357호를 마지막으로 폐간을 하게 되 었다. 폐간에 앞서 合邦布告가 내린 이튿날 30일에는 從前에 使用 하던 大韓民報라는 題號의 大韓이라는 두글자를 삭제하고 民報라 는 題號로서 발간되고 마지막 날에는 民報라는 두 글자의 새 로운 컽을 사용하여 발행하고 폐간되었다

61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5) 舊韓國時代의 宗敎新聞 1) 基督敎新聞 우리 나라 近代初期에 基督敎의 宣敎事業은 傳道에 있어서 뿐 만 아니고 朝鮮의 近代化와 初期新聞發展에도 寄與한 바 多大한 것이 있다. 宣敎師에 의한 인쇄술의 부흥과 현대식 鑄造法 등은 韓國의 印刷文化 발전에 이바지한바 있으며 또 이것은 협성회 일신문등의 신문 발간을 촉진시키는데 힘이 되었다. 회보 그리고 基督敎 계열의 定期刊行物은 韓國에 있어서 국민의 知 識 啓發을 그 任務로 삼는 文化事業으로서 경영되었으며 이것은 宣敎事業 中에서도 가장 作用力이 있는 것으로서 중시되었다. 監 理敎의 선교사 아펜셜러(H.G. Appenzeller, 亞扁薛羅)는 敎育事 業에 뜻을 가지고 먼저 培材學堂을 설립하였다. 이학당을 중심으 로 해서 이루어진 교육사업 신문사업 등은 培材學堂으로 하여금 韓國 근대 문화의 發祥地가 되게 하였고, 따라서 韓國 初期 敎育 界에 남긴 공로는 현저한 것이었다. 1897년에 창간된 죠션그리스도인회보(Appenzeller 發行)와 그 리스도신문(H.G. underwood 發行) 등 몇몇 신문의 창간을 손꼽 을 수 있는데, 이들 신문이 그의 임무로서 내놓은 使命觀의 主旨 는 宣敎에 第一義的인 목적이 있는 것이라 보겠지만, 初期 基督敎 新聞의 공통적인 특색은 한결같이 韓國 국민에 대한 일반적인 계 몽과 근대적 과학지식의 보급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발행된 것 이다. 그래서 이들 신문은 교회에서의 說敎와 병행해서 印刷媒介 物에 의한 일반 지식의 보급을 위하여 주력하였다. 이 시기에 발행되었던 주요한 基督敎 계열의 신문으로는 죠션

62 1. 言論機關의 活動 크리스도인회보, 그리스도신문, 그리스도회보 그리고 카토릭 교계 의 신문으로 京鄕新聞과 救世軍 계열의 구세신문 등을 볼 수 있다. 이들 신문은 開化 초기 또는 1910년 韓日合併을 전후한 시기에 출 간을 보게된 것이다. 1915년에 발간된 것으로는 基督申報가 있다. 1897년이면 국내에 외인 경영 신문이 있었을뿐 민족의 신문으 로는 徐載弼이 경영하는 독립신문이 유일한 존재이었다. 이러 한 때 외인 선교사에 의해서 죠션크리스도인회보(1897년 2월 2 일 創刊)와 그리스도신문(1897년 4월 1일 剣刊)이 간행되었는데 이들 신문은 宣敎보다도 지식의 보급에 중점을 두고 제작되었다. 죠션그리스도인회보는 創刊辭 서두에서 옥석을 지 아니 면 빗치 업고 거울을 닥지 아니 면 지 못 니 사 을 교육하지 않고 문견의 고루 을 망 면 이것 비컨 지 아니 옥석을 여 빗치업 을 망 과 닥지 아니 거울을 대 여 지 못 을 망 과 무어시 리오 라고 말하고 있고, 또 그리스도신문은 創刊辭 서두에서 누가 와서 우리의게 뭇기를 죠선이 이 를 당 야 그즁 요긴 거시 무엇시뇨 였더면 우리들이 첫재로 말 거슨 지식이라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들 宜敎師가 그 당시 무지몽매하던 韓國 국 민에게 新知識을 보급함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이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宣敎보다도 일반교양을 위하여 專心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리스도신문은 그 창간사에서 신문을 報道機關으로 인정하지도 않고 宣敎宣傳紙의 임무에 대하여서도 일언반구 언급 하고 있지 않다. 선교를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할 基督敎新聞이 선 교보다도 大韓國民의 지식계발에 중점을 두고 출발한데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당시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있던 徐載弼은 이 그리스도신문

63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을 평하여, 그리스도신문은 우 학문있는 조흔 신문일 더러 대단히 농공상 세가지 업에 더욱 요긴 신문이다. 어느신문에던지 조 흔 말이 있으면 서로 기 야 넓히 젼 야 아모조록 인민의 의 그리스도신문을 본즉 우 유 익한 말이잇기에 좌에 기 노라 욕이 열니게 길 쥬장 29) 라고 전제한 다음 독립신문에 그리스도신문의 논설을 인용게재하 고 있다. 이러한 예만 보더라도 이 신문이 지식계발을 위하여 얼 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였었고 국민의 각성을 촉진시키기에 얼마 나 고심하였는가를 엿볼 수 있다. 죠션크리스도인회보는 長老敎의 宣敎紙로서 발간되었고 그리스도 신문은 監理敎의 宣敎紙로서 발행되었다. 죠션크리스도인회보 제1면 에 게재된 創刊辭에서는 韓國이 開國 이전에는 古代中國의 文物만을 숭상하여 夏나라와 殷나라 그리고 周나라의 문화를 愛執하였다. 이 렇게 東洋 고유의 사상을 愛之重之하지 말고 또 옛것에만 집착하지 말며 韓國民의 그 視野를 西洋으로 돌려 변천하는 새 시대에 따르도 록 하기 위하여 이 신문의 애독을 장려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사을노이스라엘 첫임금에 대한 註釋이 게재되어 있고, 4면에는 회중신문란과 고 란이 있으며, 3면에는 뭇 제2면에는 말 란이 있어 宣敎用 교재로서 활용하도록 되어 있다. 처음에 4면 발행이었었는데 1897년 12월 22일부터 聖誕記念號로서 8면을 두 번 발행한 다음 계속해서 6면으로 增面하였다. 그리고 1897년 12 월 8일(第45號)부터는 대한그리스도인회보라고 개칭하였다. 한편 그리스도 신문의 편집내용을 보면 論說란과 농민을 위한 농리편성란 工場編成란 관보란 外國敎會通信란 外方通信란 등에 29) 독립신문 1899년 4월 6일

64 1. 言論機關의 活動 걸쳐 풍부한 指導記事를 滿載하고 있다. 이 신문들은 모두 주간 발행이었는데 언제까지 발행되었는지 확실한 날자는 미상이다. 이 두 신문은 1907년 12월 10일 聯合해 서 새로운 신문으로 예수교신보(The Church Herald)로 新發 足을 보게 되었다. 이 신문을 주간한 선교사는 1901년 5월 2일 제5권 18호부터 그리스도신문의 편집책임을 맡아보던 게일(J.S. Gale)이었다. 長老敎와 監理敎의 연합신문으로 출발한 이 예수 1908년 12월 10일자를 보면 태블로이드 판의 신문으 교 신보 로서 제1면에 時事問題의 동향 報道記事를 중점적으로 취급하고 國際問題의 동향을 알리기에 주력하였고, 제2면에는 各地方의 敎 會通信을 기재하고 있는 隔週 발행의 신문이었다. 그러나 敎會가 연합해서 신문을 발간한 지 불과 2년 2개월만에 다시 敎派別로 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長老敎의 게일이 1910년 2월 18일 예슈교회보를 창간하였고 1911년 1월 31일에는 監理敎의 奇義男 선교사의 主宰로 그리스 도회보가 창간되었다. 예수교회보는 小型 6면 신문이고 純國文을 사용하고 있으며 순 수한 宣敎紙로서 매호 제1면 左側下段에 기도모범란을 설치하고 祈禱의 말씀을 지도하고 있으며, 2면과 3면에서는 전국지방의 敎 會 소식을 전달하고, 4면에서는 論說란, 5 6면은 성경 硏究란, 7 면은 긔담 명담 셩경 일과, 8면은 廣告란으로 충당하고 있는 데 모두 藥廣告들이다. 그리스도회보는 韓日合併 후 처음으로 등장한 小型敎界新聞으 로 隔週間(月 2回) 발행이었다. 각교파가 연합하여 성서를 번역한 지 25주년을 맞이하는 해에 이 신문이 창간된 것이다. 이 신문의 창간을 축하하는 사람들 중에는 李承晚, 河鯉泳 등 외에 日本人

65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渡邊暢木原 外 七人의 이름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신문의 편집 방침을 다음과 같이 내세우고 있다. ① 敬天神主 相愛相救 ② 敎會通信으로 敎友들의 結合 ③ 一般敎友의 信仰心 昂揚 ④ 各種 學術과 知識의 傳播 ⑤ 實業生活 家庭衛生 長老敎와 監理敎는 일시 연합하여 신문을 발행하다가는 분리되 었고, 분리되었다가는 다시 연합해서 발간하곤 했다. 1915년 12 월 8일 監理 長老의 공동적인 연합 기관지로 基督申報가 英國人 宣敎師 河鯉泳 美國人宣敎師 奇義男에 의해서 발간되었다. 종래의 敎會新聞이 자활적이고 일반적이었던 不條理를 없애고 일치 협력 하는 連合新聞으로서 출현된 것이다. 初期부터 韓日合併 전후까지 近代 基督敎新聞의 특징을 개관하면 기독교의 선교와 韓民族의 문화수준의 향상을 위한 지식의 보급이 중요한 임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또는 교회 사정에 따라서 敎會의 연합을 주요한 임무로 삼기도 하고 교우 들의 정신적인 매개기관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문의 법정 발행인도 모두 美國 英國 등 외국인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2) 카톨릭新聞 ㄱ. 京鄕新聞과 京鄕雜誌 宣敎의 임무를 띠고 1898년 10월에 내한한 天主敎神父 佛蘭西인 플로리앙 드망주(Florian Demenge, 安世華)는 1906년 10월 19일 京鄕新聞을 창간하였다. 창간 당시에는 태블로이드형 체재의 週刊신 문이었다. 創刊 1년 후 태블로이드 倍大版으로 改型, 계속 주간으로

66 1. 言論機關의 活動 제작발행되었는데 신문용어는 純國文을 사용하였고 편집내용은 국 내기사는 물론 국외의 보도기사를 비롯하여 小說에 이르기까지 다 양성을 가진 신문이었다. 신문 附錄으로 信者를 위하여 寶鑑을 발행 하였다. 이 신문은 그 창간 취지를 창간호 제1면에 다음과 같이 밝 히고 있다. 경향신문 낼 연고가 네가지 잇 니 대한과 타국소문을 들어 냄이 이오. 관계잇 소문의 대쇼를 판단 이 둘이오 요긴 지식을 나타냄이 세히오 모든 사 이 알아듯기 쉬운 신문을 듬이 네히라. 이와같은 창간취지는 이 신문의 傾向을 말해 주고 있다. 카톨릭교 의 神父가 발행하는 신문발행취지에 선교적인 문구를 발견할 수 없 고 보도 전달과 동시에 현실적 사실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일반대중 을 위한 지식의 보급에 힘을 기울이겠다고 언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신문은 처음 태블로이드 판으로 발간되다가 보도기사의 輻 輳로 인하여 1907년 10월 18일부터 倍大版으로 紙面을 확대하였 는데 이에 따라서 편집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신문편집 내용은 현실적문제에 관한 社說, 현행 법률에 관한 解 說記事, 官報의 要約, 國內外 보도기사, 小說 詩歌 좌담 등을 찾아 볼 수 있다. 社說 報道 외에 娱樂 기사를 게재한 것은 발행부수의 양적범위를 넓히고자 의도한 것으로 보여진다. 종교적 배경을 가 진 신문이었기 때문에 社說에서는 비교적 온건한 필치를 보여주 고 있으나, 시종일관 韓民族의 민족적 자각을 촉구하는 논설을 게 재하였다. 특히 1907년 7월 24일에 체결된 韓日協約에 대하여서 韓國政府는 統監이 推薦하는 日本人을 韓國 官吏에 任命할 事를 평하여 는 제5조

67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통감부가 대로 일본인을 우리나라에 관리로 세우겠 이라 일본 권세 커질수록 우리나라 독립은 점점 적어지 도다. 라고 하여 민족적 관점에서 비판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韓日合併 이후 日帝는 韓國語 신문을 모조리 없애고 每日申報 하나만을 朝鮮總督府의 機關紙로 남겨 두었다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지만 이 신문도 외인이 발행인이 되었기 때문에 合併 후 4 개월은 존속할 수 있었으나 결국 日帝의 탄압에는 어찌하는수 없 이 1910년 12월 30일(220號)로서 신문발행을 정지하고, 京鄕 雜誌 라는 宗敎雜訪로 편집체재를 변경하고 말았다. 그런데 특히 유의하여야 할 것은 이 京鄕雜誌는 京鄕新聞의 연 속 번호를 이어받아 제221호부터 발행된 것이다. 3) 救世軍新聞 零細民 救護와 基督精神의 보급을 목적삼고 救世軍에서는 1909년 7월 1일 구셰신문을 창간하였다. 제1호를 발간한 다 음 제2호는 8개월 후인 1910년 4월에 간행하였다. 救世軍正領 許 嘉斗에 의해서 발간을 보게 되 었다. 용어는 純國文을 사용하였고 小型 8면 신문이었다. 제1면에는 救世軍 병사가 되려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규칙을 준수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① 병사는 쥬일을 잘 직히여 상뎨 경 올리되 구셰군 회에 가서 모든 사람에게 예수를 밋도록 며 쥬일에는 아모 일도 아니 며 져 도 지 말며, ② 구셰군병 되기를 원 사 은 술먹기를 흐며, ③ 병사마다 기동리에 구셰군일 슈있 로 죠 며, 연

68 1. 言論機關의 活動 ④ 병사마다 슈있 로 쇽쇽히 복장을 준비하야 닙을 지며, ⑤ 아모던지 우리병사는 정치상 일에 간셥치 못하고 정부관 리가 졍 곤란을 니르키지 못하고 구셰군은 인민의 령 혼에게 죠흔일과 죄나 마귀가 속박을 버셔 유 을 젼파 을 항상 각 거시외다. 悔改人에게 대한 규칙이나 士官에게 말하는 규칙은 모두 正領 許嘉斗의 名儀로 발표되었다. 그리고 2면에는 救世軍 조직이나 弘 報 등이 게재되었고, 3면에는 英國士官이 도착한 보도와 區報 그 리고 4면에는 문답란이 있고, 5면에는 救世新聞의 발간취지를 논 하고 있다. 그리고 6면에는 救世軍 大將에 관한 이야기와 救世軍 에 관한 내외 소식을 게재하고, 7면에는 구세군대장 월렴 뿌우드 의 전기를 기재하고, 8면에는 광고 등으로 꾸며지고 있다. 제1호 의 판매 가격은 1부 3錢이었는데 제2호부터는 정가를 1부 一錢으 로 引下하였다. 이 신문이 으뜸가는 임무로 삼은 것은 韓國人을 구원하기 위한 救世軍의 활동상황을 소개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요 구하심을 명백히 하며 이를 널리 전파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6) 舊韓末의 海外民族紙 1) 美洲에서의 新聞創刊의 背景 韓美通商條約이 締結된 다음 韓國人 중에는 外交使節로서 또는 學究를 위하여 그리고 亡命客으로서 많은 人士가 美國으로 찾아 들었다. 1902년 11월 20일 韓國 정부에 綏民院이라는 官制가 신 설되고 외국 이주민들에 대한 사무를 떠맡게 된 후 하와이로 이주 하는 韓國人의 수는 1905년까지 6747명에 달하였다.30) 30) 盧載淵 在美韓人史略 上卷 美國 로스엔젤스 p

69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1903년에는 하와이에 新民會가 설립되었다. 이 단체가 목적하 는 것은 民族精神을 昂揚하며 救國精神을 고취하고 民族의 團結 을 꾀하여 抗日運動을 전개하는 데 있었다. 이 會 설립에 주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洪承夏, 安正洙, 尹炳求 등이었는데 會長에는 洪承夏가 被選되었다. 이들은 또 하와이 가파아 地方에 支會를 설 립하였는데 支會長에는 韓柱東, 副會長에는 張永煥, 鄭鎭相이 被 選되었고 회원 중에는 梁天泰, 高錫柱, 趙炳玉 등이 있었다. 같은 해 샌프란시스코(桑港)親睦會가 조직되었다. 당시 이곳에 는 20여 명의 韓國人이 在留하고 있었는데 在留 동포의 대부분은 학생 또는 蔘商들이 었다. 親睦會長에는 安昌浩가 피선되었고 처 음에 회합을 가진 사람은 安昌浩, 朴善謙, 李大昌, 金昌武, 韋永敏, 朴永淳, 洪銓述, 金炳模, 安東三 9명이었다. 이들은 처음에 대부분 생활이 고적하였기 때문에 상호 협조하 기 위하여 親睦會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하와이 등지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오는 韓國人의 수는 날로 늘어 1905년 4월 5일 에 親睦會의 명칭을 변경하여 共立協會라 칭하고 會長에는 安昌 浩가 再選되었는데 이 희가 목적하는 바는 愛國과 同族相扶와 患 難相救 등이었다. 그동안에 韓國으로부터 李承晚과 朴容萬 그리고 宋錫峻의 차례로 샌프란시스코우로 건너왔다. 2) 하와이 신죠신문발간 海外國文新聞의 발간은 하와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04년 3 월 27일 신죠신문이 창간되었다. 하와이 이주민을 독자대상 으로 삼고, 社長 최 윤백 主筆 김 익성 翻譯 崔英萬에 의해서 월 2회 발행되었다. 이 신문의 창간취지는 이주민들을 위한 지식의 보급과 문맹퇴

70 1. 言論機關의 活動 치에 主眼點을 두었었다. 신문 보도의 내용은 論說과 雜報 外報 廣告 등을 게재하였는데 오늘날과 같은 활자를 사용한 인쇄 신문 이 아니었고 손으로 써서 등사판으로 박아낸 신문이었다. 당시 국 내에서 발행되던 신문들도 신죠신문의 발행을 높이 평가하고 크게 이를 보도하였다. 帝國新聞은 국내의 地方都市에도 韓國人 경영의 신문이 하나도 없는 실정인데 모군으로 뽑혀간 하와이 이 주민들이 신문을 발행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찬양한 바 있다.31) 남의 나라 부강 문명과 본국의 쇄약 형세를 각하고 그 간 신 돈으로 이제 신문을 창설 야 일 발 근경을 생각 즉 일변으로 감 을 익의지 못 바오 일변으로 본주에 있는 이쳔만동포에 붓그러움을 마지 아니 로다. 그러나 이 신문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1년 남짓 발간하 다가 폐간하였다. 3) 한인시사 親睦書報 電興協會報 하와이에서는 이민초기에 발생된 최초의 신죠신문 이외에 한인시사라는 신문이 매월 2회 등사판으로 印行되었다. 이 신 문은 1905년 6월에 창간되었는데 그곳 監理敎會의 후원하에 경영 되었으며 문맹퇴치와 지식의 보급에 중점을 두었었는데 1년 남짓 발행하다가 폐간되었다. 主筆은 역시 최 윤백이었다. 신죠신문, 한 인시사 등을 비롯하여 많은 新聞이 발행되었지만 모두 오래 지속 되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敎會 계통에서 在留同胞들의 문맹퇴치와 친목을 목적 삼아 발간한 週報 또는 月報가 있었다. 1905년 親睦會에서 金聲 權, 김 규섭 등이 중심이 되어 親睦會報를 발행하여 團體統合 31) 帝國新聞 1905년 11월 4일

71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運動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고 1908년에는 그곳 電興協會에서 朴 相夏가 主幹이 되어 문맹퇴치를 목적하고 電興協會報라는 月報를 발행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등사판에 의해서 발행되었다. 活版印刷로 제작한 신문으로는 한인합성신보가 있었다. 그러 나, 이 신문도 1908년 3월 5일 인쇄시설을 준비하고 새로운 체재로 신문을 발행할 때까지는 등사판으로 간행하였던 것이다. 이 보다 앞 서 1907년에 발행된 자진보도 洪宗杓가 主幹이 되어 신문원고 를 本國으로 보내어 인쇄하여 그곳 하와이에서 발행하였다, 4) 美洲本土의 新聞 ㄱ. 共立新報 샌프란시스코우에 거주하는 韓國人의 교포는 나날이 늘어나 共 立協會는 날로 확장되어 1905년 11월 14일 그곳 패시픽街 938番 地에 共立協會 사무소를 설치하고 11월 22일부로 共立新報를 창 간 하였다. 社長에는 共立協會長 安昌浩가 취임하고 主筆은 宋錫峻이었는 데 신문 발행의 취지는 창간호에서 찾아볼 수 있다. 共立新聞 창간호의 1면 上段 中央에 共立新報라는 題號가 橫書로 표시되어 있고 발행일자가 기입되어 있다. 그리고 上段 左側에는 광고 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쥬에 류 동포를 위 야 본사에서 기관 신문을 출 판 야 우리동포로 하여금 세계형편을 다아르시게 하오니 다 사셔 보시기를 바라옴 신문갑슨 장에 오젼식이오 일년션금은 一원이오 우톄비 한 장에 一젼식 로 밧소. 그리고 또 一面上側 上段에 32) 본사고 이라는 표제로서 다음 32) 共立新聞 1905년 11월 22일

72 1. 言論機關의 活動 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본사에 경비가 넉넉치 못 으로 신문을 일 출판치 못하고 아즉 한달에 두 번식 출판 오나 유지 신 우리 동포의 찬성 심을 인 야 졈졈 확장이 되기를 지망. 33) 共立新報 창간호에는 창간취지를 설명하는 논설이 있고 雜報란 에는 敎師渡美, 韓氏美擧, 勞働好況, 旅者被囚 등의 기사를 볼 수 있다. 인쇄시설이 미비하였기 때문에 논설과 보도 기사를 모두 毛 筆로써서 寫眞을 찍어 石版으로 인쇄하였는데 창간당시의 이 신 문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당시의 신문 발행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를 알게 하며, 활자 인쇄를 할 때까지 1년 6개월 동안 이나 꾸준히 신문 全紙面을 모필로 써서 石版 인쇄를 한 그 정성 에는 그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毛筆로 全紙面을 제작한 邦化 重은 초창기신문 발행에 있어 숨은 功勞者라 아니 할 수 없다.共 ㄴ. 共立新聞活字를 使用 共立新報가 창간된 지 얼마 안되어 1906년 4월 18일 샌프란시 스코우에 地震이 일어나 共立會館이 연소되고 韓團人 40여명이 오크랜드(Okland, 玉蘭)으로 避難하게 되었다. 避難處에서도 이들 은 複寫版신문을 계속 간행하였다. 在美僑胞들의 정성으로 인쇄 활자의 준비가 완료되어 활자 인쇄를 하게 되었다. 모필로 써서 석판으로 인쇄하던 신문이 1907년 4월 26일부터 활자를 사용하 게 되어 그 면목을 일신하고 독자도 점점 증가하여 처음에 300부 발행하던 신문이 나중에는 5000부 이상을 발행하여 國內와 遠東 에까지 보내게 되었다. 처음에 主筆職에는 宋錫峻이 就任하였는데 1907년 5월 宋主筆 의 逝去後 鄭在寬이 취임하였고 그 후임으로 崔正益이 3대 주필 33) 共立新聞 1905년 11월 22일

73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샌프란시스코우도 점차 정돈됨에 따라 그 社屋을 다시 샌프란시스코우로 옮겼다. 5) 國民會의 設立 ㄱ. 韓人合成協會와 그 機關紙 1905년 乙巳條約의 勒約이 締結된 다음 하와이의 韓人 社會團 體 수는 가일층 증가되어 24단체로 늘어났다.34) 이와같은 수의 단체조직은 물론 조국의 비운을 통분히 여기는 在美同胞들의 愛 國至誠에서 나타난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다수의 단체는 도 리어 民族意識의 분열을 초래할 우려가 없지않아 統一團體로 뭉 치고자 하는 輿論은 날로 高潮되어 드디어 1907년 9월 24일 24 단체의 대표들이 호놀루루에 집합하여 合同決議를 하고 韓人合 成協會 를 조직하였다. 이 韓人合成協會의 목적은 조국의 國權恢復과 在留同胞의 安寧 保障과 敎育獎勵이며 그 主義主張하는 바는 民族主義의 고취였는 데 이 회의 구성으로 하와이 在留 동포의 정신적인 단결을 가져오 게 하였고, 한걸음 나아가 정치적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게 되었 던 것이다. 이 회의 初代會長에는 林正沫, 제2대 회장에는 鄭元明 이 취임하였다. 이 단체의 설립으로 동회에서는 韓人合成新報를 發刊하였 는 데 이 新聞은 1907년 10월 15일 창간하여 처음에는 등사판으 로 발행하다가 1908년 3월 15일부터 활자를 마련하고 인쇄하여 주간신문으로 발행하였다. 그런데 이 韓人合成新報는 1909년 2월 샌프란시스코우의 共立協會와 하와이의 合成協會가 통합할 때 그 제호를 新韓國報라고 改稱하였다. 韓人合成新報 창간당시의 主筆 34) 金원용 재미한인오십년사, 美國加州, p

74 1. 言論機關의 活動 은 金聲權이었다. 그리고 新韓國報의 주필은 洪宗杓였다. ㄴ. 合成協會와 共立協會의 合同 美洲에 있는 共立協會와 하와이에 있는 合成協會는 지역적으로 는 다를지언정 그들이 의도하는 목적은 한결같이 재류동포의 지 식 계발과 애국정신의 고취에 두었었다. 한국의 정세는 나날이 쇠 퇴하여만 가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서는 美洲의 동포나 하와 이의 동포가 일치하여 역량을 총 집중하여야 할 시기에 도달하였 고 이 두 協會의 취지나 책임이 또한 동일하였기 때문에 서로 합 동하여 國民會로 發足을 하였던 것이다. 共立協會와 合成協會의 합동은 그 당시 하와이측의 발기인과 美洲측의 발기인들이 집합 하여 다음과 같은 七項條例를 만들고 이를 통과시켜서 합동을 보 게 되었는데 양측 대표는 다음과 같다. 하와이측 대표 高錫柱, 金聲權, 閔燦鎬, 安元奎, 李光洙, 姜永 韶, 韓在明 美洲측 대표 崔正益, 李大爲, 姜永大, 安奭中, 黃思溶, 李景儀 七條項 ① 美洲 韓人共立協會와 하와이 韓人合成協會가 각기 자체를 해산하고 합동 후에 그 명칭을 國民會라 할 것. ② 합동의 일자는 1909년 2월 1일로 정할 것. ③ 두 단체에서 規則起草委員 3인씩 선출하여 合席討議로 國 民會規則을 제정할 것. ④ 規則起草委員의 집합처소는 두 단체가 협의하여 지정할 것. ⑤ 國民會規則은 民主主義의 원칙에 依準할 것. ⑥ 새 규칙을 실시하기 전에는 종전에 쓰던 규칙을 사용할 것. ⑦ 합동된 단체의 임원이 취임될 때까지는 前任當局이 會務 를 진행할 것

75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이렇게 合同한 후 샌프란시스코우에 있는 美洲國民會長에는 鄭 在寬이 취임하고 하와이 國民會長에는 鄭元明이 취임하였다. 6) 新韓民報 第一號 國民會가 설립되기 전에 하와이의 신문인 韓人合成新報가 新韓 國報로 그 題號를 改稱하였다함은 前述한 바이지만 오랜 전통을 가진 美洲의 共立新報도 國民會의 설립으로 말미암아 1909년 2월 10일 그 題號를 新韓民報라고 개칭하고 續刊 119호(第1號)를 발 간하였다. 그 제호를 개칭하였다 하더라도 이 신문은 共立新報와 동일한 신문인 것이다. 共立新報를 新韓民報라고 개제하였을 뿐이 고 발행 번호의 지속성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7) 大韓人國民會(大同保國會 國民會에 合流) 1905년 12월 9일 南加洲 패시디아地方에서 金愚濟, 張 景, 李 秉瑚 등이 모여 大同敎育會를 創設, 美洲 在留同胞의 敎育振興을 목표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이 會는 샌프란시스코우에 있는 共立 協會와 대립하여 조직되었다. 設立者의 한 사람인 張 景은 美洲 최초의 단체인 親睦會의 발기인이기도 하였는데 이 회에서 물러 나 새로 大同敎育會를 창설하였다. 이 회는 다시 1907년 3월 2일 大同保國會라고 명칭을 변경하고 그 사업을 확장하기로 하였다. 회장에는 金愚濟가 被選되었으며 中央會와 地方會를 분립시키도 록 하고 中央會는 샌프란시스코우에 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1907 년 10월 3일 大同公報를 창간하였다. 初代 회장은 文讓穆, 主筆은 崔英萬이었다. 大同保國會는 다시 1910년 2월 10일 美洲國民會 와 합동하여 大韓國民會로 새출발을 하였다. 그리고 大同保國會에 서 사용하던 인쇄기계 시설도 新韓民報에 흡수되었다

76 1. 言論機關의 活動 8) 海蔘威의 民族新聞 海朝新聞과 大東共報 1908년 2월 26일 俄領 海蔘威에 國立新聞이 탄생되었다. 崔鳳俊이 社長이 되어 日刊新聞을 창간하였다. 당시 滿洲와 俄 領에는 40만이나 되는 韓國居留民이 있었지만 민족을 계발 지도 하는 신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내 국외의 有志들은 거류 민들의 중심지가 되는 海蔘威에 民族紙의 출현이 하루 속히 이루 어지기를 갈망하였다. 이와 같은 大韓民族의 사정을 통탄히 여기 어 崔鳳俊은 張志淵을 주필로 초빙하여 海朝新聞을 창간 文明事 業의 제일보를 내딛었던 것이다. 社長 崔鳳俊은 咸鏡北道 慶興 출 신으로 어려서 빈곤한 생활을 하다가 농업에 종사하면서는 모범 적인 농업경영을 하였고 다시 商界에 발을 들여 놓은 후 大成한 사람으로서 新聞社를 설치하고 일간신문을 발행하였으므로 그 快 擧를 내외에서 크게 치하하였다. 편집 방침은 다음과 같은 5개항목이었다. ① 해삼위에 있는 한인의 신문인고로 이름을 해죠신문이라. ② 일반 국민의 보통지식을 계발 며 국권을 회복 야 독립을 완전케 기로 목뎍. ③ 본국과 열국의 소문을 널리 탐디 야 날마다 발간. ④ 정티와 법률과 학술과 상업과 공업의 긴요 학문을 날 마다 역. ⑤ 국문과 국어로 자미있 이야기를 알기쉽도록 발간. 당시 이 신문의 발간은 국내와 美洲 在留同胞들을 크게 감동케 하였으며 美洲에서 발간되는 新韓民報도 연거퍼 대서특필하여 海 朝新聞의 발간을 축하하였고, 日本 東京에 在留하는 留學生들도

77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그곳에서 발간되는 大韓學會月報에 아무쪼록 더욱 발전하여 소기 의 목적을 달성하기를 축하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신문은 2개월 여(62號)를 발간하고 같은 해 6월 26일에 폐간되었다. 이어서 같은 해 6월에 大東共報가 그 곳 國民會의 기관지로서 발간되었는데 사장에는 車錫甫, 編輯人 命鎭律, 主筆은 尹弼鳳이 각각 담당하였다. 이 신문은 週間이었고 1910년에 폐간하였다. (7) 舊韓國時代의 新聞制約 1) 初期의 新聞制約試圖 漢城旬報나 漢城周報는 官에서 주관하는 新聞이었기 때문에 任 意로 발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1895년경에는 국내에 日本人 경 영신문이 허다하였고 漢城에서도 日本人이 경영하는 國文版 신문 도 있었는데 이를 감독하고 규제하는 아무런 법 규정이 없었다. 다만 1895년 5월 26일 勅令 124호로서 國內郵遞規則을 發布하였 다. 이 규칙은 80조에 달하는 법규정인데 신문에 해당되는 제19 조는 官報 외의 郵遞物은 農商工部에 보내 인가를 받고 매호에 農 商工部의 인가라는 票記를 보기 용이하게 인쇄하도록 하라는 내 용의 조항인데 이것은 다시 1900년 1월 17일 공포된 勅令 제6호 에 의해서 요금규정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허가된 신문은 모두 農 商工部認可라는 글자를 제호 곁에 게재케 하였다. 그 후 국내에는 많은 民族紙들이 출현하였다. 곧 독립신문 帝國 新聞 皇城新聞 時事叢報 등의 창간을 보게 된 것이다. 이들 新聞 도 農商工部의 인가를 받았다. 日本人 경영의 漢城新報도 1896년 1월 22일 農商工部의 인가를 받았다. 1898년 이래 漢城에는 많은 신문이 簇出하였다

78 1. 言論機關의 活動 이리하여 新聞行政 事務가 번잡해짐에 따라 內部에서 이를 담 당하게 되었다. 언제부터 신문행정사무를 內部에서 관여하기 시작 하였는가 하는 상세한 날자는 미상이나 1899년 1월 22일 창간된 時事叢報의 창간호에 農商工部認可 외에 內部認可라고 제호 곁에 기재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1899년 1월을 전후해서 시작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韓國 신문의 발간을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1883년에 창간된 漢: 城旬報를 가리켜 초기의 신문이라고 한다면, 1898년에 들어 서 활기를 띠고 나타난 신문을 勃興期의 신문이라고 필자는 본다. 정부에서는 이 시기에 있어서 수많은 이들 신문을 그대로 放置해 두고 자유로운 신문 제작을 하게 하지는 않았다. 新聞條例의 실시 를 시도하여 1898년부터 1899년에 걸쳐서 처음으로 新聞紙法規 를 마련하려고 하는 機運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 法 草案을 둘러싼 물의는 당시 발행되고 있던 신문 지면을 바쁘게 하였는데 1899년 1월 27일 독립신문 社說 新聞規則에서 新聞規則을 만들려면 간략하고 경계있게 하여 언론의 남용을 막는 것은 무방 하다고 하였다. 또 애국애족하는 신문의 보호육성책이 시급히 요 청된다고 강조하면서 新聞規則 制定에 거듭 熟慮있기를 아래와 같이 요망하고 있다. 드른즉 대한정부에서 장차 신문규칙을 내린다하니 간략하고 분명하며 경계가 있어서 각 신문에 잘못하는 것은 금하나 언권은 십분 자유롭게 하야 몇 百년 이래에 겨오 싹나는 공론을 없이 하 지 말게 하기를 밋노라. 만일 새로 난다는 신문 규칙이 까다로아 정부에서는 무삼학정을 하던지 백성은 아무말도 못하고 백성은 무삼 억울한 일이 있던지 호소 무처하게 되면 그런 규칙은 나라를 해롭게 하며 욕보힐 터이오 또 이런 규칙은 다만 대한사람이 하는

79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신문에만 압제요 외국사람의 신문에는 무삼말이나던지 금하지 못 할터이니 그럿코 보면 대한천지에서는 신문도 외국사람이나 하여 먹고 대한사람은 못할터이니 그보다 더수치가 어대 있으리오 규 칙 마련하는 제공들은 대한 황국을 위하여 부듸 무익한 일을 지어 유익한 것을 해롭게 하지 말지어다. 2) 新聞條例法案 위의 社說에서 보는 바와 같이 新聞條例의 草案은 그 당시 언론 계의 맹렬한 反對攻勢에 부딪혀 결국 초안의 수정위원을 선출하 여 同法律案을 수정하기로 되었다. 그런데 이 안은 內部大臣 閔丙 漢이 고안한 것이고 정부는 이를 中樞院으로 송부하여 可否間의 결정을 보게 한 것인데 中樞院에서도 이 法條案은 束縛이 좀 과하 다고 하여 修正委員을 선출하였는데 南宮檍, 李時雨, 朴勝朝 등 三氏가 피선되었다. 그러나 결국 이 法案은 언론계의 맹렬한 반대 에 봉착하여 그 실시를 보지 못하였다. 3) 光武新聞紙法 以前의 新聞制約 우리나라에서는 光武新聞紙法이 發布될 때까지 신문에 관한 이 렇다할 만한 법령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1883년 이래 수많은 신문이 발행되었지만 신문을 取 締 또는 保護하기 위한 法令은 없었던 것이다. 이러던 것이 韓日 合併 3년전에 李完用內閣의 法令 第1號로서 光武新聞紙法의 公布 를 보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1905년 11월 20일 皇城新聞社說에서 張志淵은 是日也 放聲大哭이라는 題下에 매국 도배의 악정을 신란하게 비판한 사실이 있다

80 1. 言論機關의 活動 이 때문에 張志淵은 70여 일의 구류 생활을 하게 되었고 신문 발행은 정지되었다. 1905년이면 아직 韓國의 統監府도 설치되지 않았던 때이나, 日本 警察들이 자기네들의 권세를 恣行할 수 있었 던 시대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大韓毎日申報는 張志淵 사장이 日 警에 被捉된 事情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皇城新聞社長 張志淵氏는 昨日該報中에 韓日新條約의 顚末과 時局의 顚覆된 事에 대하여 痛歎한 論駁을 記載하였더니 昨日上 午五時에 日本巡査가 該社에 來到하여 該長을 促致하야 警務廳에 拘囚하였고 該報館은 日本巡査가 把守하야 來往人을 禁止하기로 該報가 不得已 停刊되엇다더라. 이 신문보도에서 엿볼 수 있듯이 1905년의 신문제약은 어떤 명 확한 新聞法規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日本 官憲의 위협 과 자유재량에 의존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韓國에 있어서 日 本憲兵制度는 1896년 1월 25일 임시 憲兵隊의 編制令에 의하여 창설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1903년에 韓國駐劄軍司令官 麾下에 들게 되었고 이때부터 韓國에 있는 日本憲兵隊가 비합법적으로 일반경찰 行使를 하게 된 것이다. 1905년 11월 에 韓日간에 乙巳 條約이 체결되고 1906년 2월 1일 統監府가 開設되고 헌병은 軍 事警察 이외에 統監의 지휘하에 司法行政警察의 일까지 맡아서 하고 있었다.35) 그 당시 日警은 張志淵을 구속하고 치안을 방해하는 신문을 제 작한다고 暴言하며 위협하였지만 張志淵은 태연자약하게 여기에 항변하였다고 大韓毎日申報 1905년 11월 20일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再昨日 日本巡査가 皇城新聞社長 張志淵氏를 捉去하야 警務 35) 山邊健太郎 日韓併合小史 岩波書店 1968, p

81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廳에 拘囚하였더니 警廳顧問이 質問曰 何故로 新聞을 不由檢査하 고 擅恣發行하여 治安을 妨害하느뇨 同社長이 抗辯曰 所謂治安妨 害는 吾所不知라 大抵國이 有한 然後에 治安與否가 有할 것이니 今旣無國矣라 治安을 何論가 吾가 秉筆 7 8年에 世上에 公論을 主張하다가 今日國家가 없어지게된 關係事實을 豈可不據事直書하 여 使我國民知之며 試觀하라 吾所記載가 寧有一言不實가 所謂治 安妨害는 日本治安의 妨害가 有하다 함이냐 한데 警務顧問이 默 默無言하고 仍爲更囚라 하였더라. 1905년이면 시기적으로 보아 日本이 露國과의 전쟁에서 승리 를 거둔 때이라 日本 憲兵隊가 득세하여 一般警察行使를 자행할 수 있던 터이라 신문보도의 검열과 기사게재금지 등 언론탄압도 우심하였다. 4) 光武新聞紙法 1907년 7월에 李完用內閣 法律 第1號로서 新聞紙法이 發布되 었다. 이것은 처음으로 볼 수 있는 成文法이다. 당시 統監府가 韓 日合併을 반대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절규하는 韓國의 정당한 언론을 탄압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으로 이 新聞紙法은 日帝 時代에는 물론 8 15解放 후에도 언론정책에 있어서 물의의 대상 이 되었다. 全文 41條로 되어 있는데 제34, 35, 36조의 3항목은 1908년 4 월 20일 法律 第8號로서 추가, 제정 공포하게 된 것이다. 이 법률 은 大韓民國이 수립된 후 1952년 3월 18일 法令 227號에 의해서 폐지되었다. 그리고 出版法은 1909년 2월 法律 第6號로서 제정 공포하였는데 이 법률은 8 15해방 후 1945년 10월 9일 美軍政 法令11號로서 폐지되었다

82 1. 言論機關의 活動 5) 光武新聞紙法에 대한 結論 光武新聞紙法은 韓日合併올 반대하고 자주독립을 위하여 싸우 는 민족의 언론을 봉쇄하기 위하여 제정한 것이라 함은 위에서 말 한 바이거니와 이 법이 舊韓國 李完用 內閣에 의하여 발포되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日帝가 만들어 놓은 것이다. 同法은 모두 41조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 당시 日本의 新聞紙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日本의 新聞紙法은 처음 1869년 歐羅巴의 신문지법을 본따 新 聞紙印刷條例를 규정지었는데 다시 1873년에 新聞紙條目 18條 를 발포하였고 이어서 1875년에는 新聞條例 16條와 附則을 개정 발포하였다. 그리고 人身保護를 위한 讒謗律 8條를 발포한 바 있 다. 新聞條例는 1883년에 개정된바 있고 1887년 12월 28일에는 新聞紙法을 전부 개정하여 신문발행을 허가제도에서 계출제도로 하였다. 이 법률은 1897년과 1899년 그리고 다시 1909년에 개정되었 는 데 光武新聞紙法은 시기적으로 보아 1897년과 1899년에 개정 한 新聞紙法과 舊韓國 당시의 특수사정을 참작하여 제정한 것이 라고 볼 수 있다. 본론에서는 光武新聞紙法 41조 전부를 분석하는 것을 생략하고 동법이 언론창달을 방해하는 악법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몇가지 조항을 들어 검토해 보기로 한다. 그 중에도 保證金制度와 罰金條項 그리고 納本의 의무와 時事問題 취급신문에 관한 조항 등은 舊韓國의 언론을 탄압하기 위하여 제정한 조항이었다. 同法 41조에는 發行人은 保證金으로 金300圓을 請願書에 添

83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內部에 納付하여야 한다. 保證金은 確實한 銀行의 任 置金 證書로서 代納할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조항은 附하여 당시 日本 新聞紙法에도 채용되어 있는 항목이다. 보증금제도는 두말할 것 없이 풍부하지도 못한 자본으로 영리 를 돌보지 않고 경영난에 허덕이는 韓國의 애국애족하는 신문들 에게 재정적으로 제압을 주는 것을 목적한 것이며 새로운 신문발 행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新聞紙는 毎日 發行되기에 앞서 內部及 其管 轄官廳에 各 2部를 納付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 법조항은 그리고 10조의 納本의 義務를 말한 것인데 그 당시 日本의 신문 탄압보다도 더 가혹한 것이었다. 日本의 법조항에는 발행과 동시에 납부하라고 되어 있는데, 光武新聞紙法에는 신문지는 매회 발행에 앞서 납부 하여야한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原稿檢閱과 마찬가지로 신문을 탄압하는 강압적 수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납부의 의무를 신문에 법으로써 강요하는 것은 신문 검열상의 편리를 도모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또 이것이 신문편집에 정신적인 제압을 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다음은 罰金條項이다. 이 조항은 제23조 제24조 제26조 제28 조 제29조 제30조 제31조 제32조 제35조 제36조 등 벌금을 규정 지은 것이다. 제4조에서 신문발행에 있어서 保證金을 납부하게 하 여 신문을 탄압하였는데 또다시 10여 조항에 걸쳐 많은 벌금을 규정짓고 있는 것은 이중 삼중으로 신문을 재정적으로 괴롭히는 처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學術技藝 或은 物價報告에 關한 事項만을 記載하는 新聞紙에 있어서는 保證金을 納付하지 않는다라고 되 그리고 제5조에는 어 있는데 이 조항은 일반신문의 발행을 제약하고 學術商業新聞

84 1. 言論機關의 活動 의 장려를 목적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學術 商業新聞에는 보 증금 납부를 규정짓지 않고 시사성을 가진 일반신문에 한하여 보 증금을 납부하게 한 이 조항은 그 당시 외세 침입을 배척하고 자 주독립을 외치는 일반 시사성을 가진 신문의 발간을 되도록이면 억제해 보자는 심산에서 나온 법조항이었다. 이상 언급한 바와 같 이 光武新聞紙法은 届出制度가 아니고 許可制度에 의해서 신문을 발행하게 하였고, 신문에 대한 법률적인 定義도 명시되어 있지 않 다. 물론 이 법은 불완전하고 不備하고 불필요한 악법이었다. 6) 舊韓末 政府의 新聞 彈壓과 大韓毎日申報의 論說 1908년 光武新聞紙法의 追加制定公布가 있은 다음 해외에서 들 어오는 民族紙와 국내에서 발행되는 民族紙의 押收削除가 빈번하 였다. 그 이유는 소위 治安防害라는 內規에 저촉된다는 것이었다. 韓日合併을 목전에 두고 친일 내각의 언론 탄압을 위한 추태가 드러났다. 여기에 대하여 大韓毎日申報는 그 내규를 지상에 발표 하고 1910년 5월 14일자 社說에서 所謂新聞押收處分이라는 題下에 먼저 1909년 內部에서 발행된 警察事務槪要에 게재된 압 수된 신문보도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하여 친일 내각 정부 당사자 를 공격하고 있다. 國權回復의 名을 藉 야 日本保護를 反對 야 反旗를 揭 을 鼓吹한 者 日本의 保護를 圖 야 韓國을 并吞 이라고 誣 야 一般 韓民의 反感을 起케 者 無根流說을 傳 야 人心을 惑亂 케 고 又는 事를 誇大히 布張 야 國民을 憤慨케 야 官의 施設을 防害 고 社會의 秩序를 攪亂한 者 國權回復은 國民의 共同一致를 要 다 야 團體의 組織을 獎勵한 者 國權回復은 國民의 文明을 要 다 야 新敎育의 普及을 唱導한 者 海蔘威

85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地方으로써 韓國人의 國權回復團體의 根據地 삼기를 鼓吹한 者 暗殺者를 義士라 야 此思想을 鼓吹함을 努力한 者 暴徒를 대 하야 國家에 忠한 者라 야 此의 聲援에 與한 者 等을 列擧하 고, 國權回復은 國民의 共同一致를 要 다 하야 團體組織을 獎 勵한 者를 押收의 內容으로 삼으며 國權回復은 國民의 文明開 化를 要 다 야 新敎育의 普及을 唱導한 者를 押收의 內容을 삼는 것은 도모지 理解가 안가는 不可思議의 一奇法이다. 이처럼 舊韓末政府는 光武新聞紙法을 적용하기도 하고 內規를 적용하기도 하면서 해외에서 발행되는 민족지의 국내수입을 전면 적으로 금지하고 압수 처분을 일삼았으며, 국내에서 발행되는 신 문도 押收, 削除, 發賣禁止, 停刊處分 등이 빈번하였다. 7) 外地發行의 新聞 輸入禁止 美洲에서 발행되던 新韓民報, 그리고 海蔘威에서 발행되던 海朝 新聞, 大東共報 등도 정부에 의해서 압수되었다고 大韓民報(328 號 335號)에 연이어 보도되었으며, 日本에서 발행되는 日本語 新 聞도 韓國으로 수입되는 신문은 압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日本 內務省에서 日本國 各府縣에 통고한 바 있다.(大韓民報 345號) 이것은 韓日合併을 눈 앞에 두고 그 진행 상황이 韓人에게 알려지 는 것을 막기 위한 처사였다. 그리고 국내에서 발행되던 日本語新 聞도 그 취체가 한층 더 준엄하게 되어, 朝鮮日出新聞의 폐간을 비롯하여 朝鮮日報(日文), 日韓通信(日文), 東洋日報(日文) 등의 停 廢刊 사태가 속출하였다. 8) 統監府의 新聞制約 1909년에 들어서 內部에서 관할하던 新聞檢閱 사무를 統監府로

86 1. 言論機關의 活動 옮기고 같은 해 7월 18일 統監府 警務總監 明石元二郞은 각 新聞社 의 社長과 發行人을 소집하여 다음과 같은 주의 사항을 시달하였다. ① 지방에서 무기를 가지고 인민을 침해하는 徒黨에게 대하 여 義兵이라 칭하고 은연중 동정하여 이를 선등해서는 안 된다. ② 韓日 관계를 疎隔케 하는 文字를 써서 인심을 선동치 말 것. ③ 단체 또는 개인간의 惡感情을 도발하여 사회의 질서를 문 란케 하지 말 것. ④ 臆測記事를 쓰지 말 것. 이것은 統監府가 韓日合併 전에 처음으로 新聞制約을 위하여 표면에 나선 事例이다. 종전에는 新聞紙法의 제정 등 統監府가 의 도한 것을 舊韓國政府에 대행시켜 왔지만, 韓日合併을 목전에 두 고, 신문탄압에 직접적으로 나선 것을 말해 주는 사례라 하겠다. 日本 당국의 韓日合併案은 비밀리에 추진되고 있었는데, 1909년 7월에 日本閣議에서 그 안이 결정되고 日本 天皇의 裁決을 보았 다고 日本의 史學者 山本健太郞은 그의 저서에서 언급하고 있다. 위의 사실은 이러한 움직임을 반영하는 것으로 統監府의 새로 운 신문제약이 태동하게 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 한 결정을 9개월 앞둔 1908년 4월에 統監府에서 日本人에게 적 용시키는 新聞紙規則이 제정 공포된 것이다. 9) 新聞紙規則과 出版規則 光武新聞紙法이 발포된 다음 統監府에서는 韓國人 이외의 外地 人에게 적용되는 新聞紙規則과 出版規則을 공포하였다. 新聞紙規 則은 1908년 4월 統監府令 12호로서 제정 공포된 것인데, 韓國에 在住하는 韓國人 아닌 者에게 적용되었다. 그리고 出版規則은 1910년 5월 統監府令 제 20호로 제정공포된 것인데 이것도 韓國

87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에 在住하는 韓國人아닌 자에게 적용되었다. 그 당시 日本出版現 行法 及 豫約出版法을 그 내용으로 한 것이다. Ⅰ (8) 其他 諸新聞( ) 日本이 韓國과 國交를 맺기 시작할 무렵에 日本人들에 의해서 釜山 在留 日本人들을 讀者對象으로 삼고 日本語新聞이 발행되었 다. 韓國에서의 日本人 경영 신문을 고찰할 때 무시할 수 없는 사 실은 日本人들의 신문 발행이 韓國 초기의 定期的인 신문 발행보 다 앞선 사실이다. 開化期에 博文局에서 발간한 韓國 최초의 정기적인 신문인 漢 城旬報도 日本人 井上角五郞을 主事로 고용하였었고 이보다 앞서 釜山에서도 日本人 경영의 日本語 신문이 발간되었다. 그 후 淸日 戰爭과 露日戰爭에서 얻은 日本의 勝戰은 日本人들이 韓國에서 新聞經營을 위한 지반을 더욱 견고히 하는데 힘이 되었고 전쟁 중 에 戰況報道를 한다는 구실아래 수많은 日 本人 기자들이 特派員 의 자격으로 來韓하였다. 그리고 이들 특파원 중에는 韓國에 머물면서 신문을 경영하던 者가 많았다. 초기에 있어서 日人들의 新聞은 대부분이 商況報道 를 하는 商業新聞으로 발족하였다. 時日이 경과함에 따라서 時事 性을 가진 신문으로서 變轉되고 日本政府의 大陸進出政策에 호응 하는 論調이었다. 당시의 日本政府는 政策上 韓國에서의 신문발행을 장려하였고 따라서 補助金의 지출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舊韓國時代에 韓國에 서 신문에 관여한 日人들은 在日本 新聞社의 通信員을 겸한 자가 아니면 新聞支局 또는 支社로서의 일을 보던 者들이 었다. 漢城旬

88 1. 言論機關의 活動 報에 관여한 바 있었던 井上角五郞은 日本時事新報의 통신원을 겸하였고 靑山好惠는 大阪朝日, 菊池謙讓은 國民新報 蟻生十郞은 二六新聞의 통신원을 겸무하였었다. 이들 중에는 韓國에서 일인 경영 신문의 대표적인 신문을 경영하던 자도 있었다. 이들의 신문 경영은 日人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日本정책의 宣 傳機關이었다. 韓國의 新聞史 연구분야에 있어서 舊韓國時代에 日 人들에 의해서 경영되었던 신문에 관한 연구는 너무나 등한한 판 이었고 따라서 언급할 만큼 가치 있는 文獻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므로 지난날의 이들 신문의 자료가 현존하고 있지 않아 이 연 구에 있어서 많은 지장을 주고 있으며 이에 대한 연구의 시도도 불충분한 성과를 가져오게 하고 있다. 1881년부터 1910년 韓日 合併까지의 사이에 발간된 日本人 경영 신문에 한정하여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釜山에 처음으로 日人新聞 朝鮮新報誕生 1876년 江華島에서 맺은 韓日修好條約이 있은 다음, 같은 해 釜山이 開港되고 뒤이어 1880년에 元山, 1883년에는 仁川이 각 각 개항을 보게 되어 官吏 商人들을 비롯한 많은 日人들이 來韓하 였다. 1880년에는 서울에 日本 公館이 설치되고 初代公使로 花房 義質이 부암하였다. 이보다 앞서 日本人의 내왕은 있었다. 釜山 草梁倭館에 日本幕府의 使臣이 체류하고 있었다고 山邊健太郞은 그의 저서36)에서 말하고 있고, 奧平武彥도 釜山 倭館에는 韓日條 約이 체결되기 전에도 상당수의 日人이 거주하고 있었던 사실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倭館에서는 明治元年 以來 彼我의 公使交涉이 斷續되고 있는 36) 山邊健太郞 日韓併合小史 p

89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동안에도 貿易은 僅少하나마 營爲되어지고 그 一年의 總額은 12 萬圓程度이었다. 여기에서 日本商人의 住家도 있고 明治 8年頃에 는 100餘名이 居住하고 一般의 居留地를 形成하고 있었다. 37) 그 후 韓日修好條約이 체결된 다음부터는 日人들의 진출이 현 저하게 나타난다. 釜山은 제일먼저 개항한 곳이며 日人들이 많이 모여들었던 곳이다. 이들은 주로 商業貿易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大部分이었다. 이러한 日本人들을 독자대상으로 한 신문이 발간된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 당시 釜山에 있었던 日本 상업단체인 在朝鮮國 釜山港商法 會議所에서는 1881년 12월 10일 朝鮮新報를 발간하였다. 이 신 문을 주관한 사람은 大石德夫이다. 발간당시에 日本서 발행되고 있던 東京日日新聞은 1882년 3월 3일자 신문에 다음과 같이 朝 鮮新報 창간에 대하여 보도하였다. 朝鮮國釜山本部 2丁目 20番地의 朝鮮新報社에서 發行한 新 報 第1號는 日本 明治14年 12月 10日附로서 朝鮮歷辛巳年 10 月 19日이라고 記入되어 있고, 그 第1號는 1枚 印刷이고 2號부 터는 朝鮮國用紙로서 半紙判의 綴本이다. 이것은 本年 2月 5日 의 發行으로 朝鮮國의 12月 17日이라고 되어 있다. 이 新聞은 韓國 최초의 정기적인 신문인 漢城旬報보다 1년 10 개월이나 앞서 발간된 것이다. 이 신문은 1매 인쇄로 된 창간호만 제외하고는 모두 半紙册子型 신문인데 표지 이면에는 매호마다 例言과 目次를 게재하고 있다. 例言란에는 다음과 같은 創刊趣旨 를 밝히고 있다. 例 言 本所新聞刊行之旨趣在專叙述經濟論說 37) 奧平武彥 朝鮮開國交涉始末 刀江書院 1969, p

90 1. 言論機關의 活動 以供日鮮兩國博雅之釆覽 而如其發露中外之奇事異聞 亦要收拾不遺也 因希四方諸君子能諒此意 高論新說必不吝投寄 而其文務用漢文則記者之幸 以何加之敢望々々. 新聞 趣旨에서 언급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이 신문은 經濟紙로서 창간되어진 것이고, 용어는 純漢文기사가 있는가 하면 日本語를 섞은 보도기사도 있고 雜報란, 奇書란이 있는가 하면 釜山商況, 輸出物價表 등도 게재하고 있다. 그리고 本局廣告라는 題下에 本紙 廣告料 4號 文字 1行 25字 結 1回 金 3錢 2回 同 4錢 3回 以上 5回까지 同 5錢이라고 광고게재 요금을 발표하고 광고를 모집하고 있다. 이리하여 1882년 4월 15일부 제9호 9면에 처음 게재된 광고는 賣藥광고이었다. 千金丹發賣並諸始國藥下取次販 賣廣告 라는 題下에 千金丹을 비롯한 34種의 약품을 광고 하고 있다. 廣告主는 釜山港 本町正眞大取扱所 回生堂 出店 福田이라고 되어 있다. 이 외의 광고로는 釜山浦 三好社 支店이 광고 主가 되 어 荷物取扱을 한다는 광고가 게재되어 있다. 이 朝鮮新報 이외에 釜山에서 발간된 일인 경영의 신문으로는 1896년에 창간된 것으로 商業經濟에 관한 보도를 專門으로 일삼는 釜山商況이라는 것이 간행되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 후 東亞貿 易新聞이라고 개제하였다.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38) 朝鮮時報는 1894년 2월 그 당시 日本의 釜山領事 室田義文과 釜山商業會議所 會頭 榊茂夫 등이 발의하여 창간을 보게 된 것이 다. 그리고, 露日戰爭 勃發 조금전에 22000圓의 合資組織으로 변 38) 釜山商業會議所편 釜山要覽 1912, p

91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경하였다. 당시 釜山在留日本人 인구는 15000여명이었다. 이 신 문은 이들 在留日本人을 위하여 신문 독자의 量的 범위를 확장하 고 馬山, 晋州, 鎭海, 大邱 등지에도 지국을 설치하였다. 朝鮮時報 는 日本 九州 態本縣人에 의하여 설립되었고 또 熊本縣人이 아니 면 주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新聞社에 서는 한때 日本態本縣에 있는 九州日日新聞의 支部의 일도 맡아 보았다고 한다. 1905년에는 高木未態가 주필이었고 若宮本未彥이 영업부장이었었는데 그 후 高木 주필은 사장이 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 1905년까지 釜山에서 발행되었던 신문으로는 朝鮮毎 日新聞과 朝鮮日報, 朝鮮時事新報, 釜山日報 등이 있었다. 2) 仁川의 日人新聞(仁川 京城隔週商報가 始祖) ㄱ. 朝鮮新報 1876년 釜山 개항과 元山 개항에 뒤이어 1883년에 仁川 개항 을 보게 되었다. 그 후 貿易商人들을 비롯하여 1천 3백여명의 日 本人이 仁川에 거주하였다. 그래서 仁川에서는 日本人들의 신문이 발간되기 시작하였다. 仁川서 발간된 최초의 신문은 1890년 1월 28일 발행된 仁川京城隔週商報인데 이것은 朝鮮新報의 前身 이 되는 신문이다. 佐野識之에 의해서 濟物浦商報社에서 창간되었 다. 물론 이 신문은 仁川港에 거주하고 있는 日本상인들을 위해서 창간된 것인데 그 창간사에서 商報發刊의 主旨는 暗黑한 朝鮮 貿易上에 一條의 新光線을 던져주는데 있고 仁川 京城의 商況과 貿易을 報道하고 云云하고 있는 바와 같이 商業新聞으로서 발행 되었고, 격주 (월2회)로 발행하였다. 또한 당시 日本에서 仁川으로 왕복하는 船便이 월2회 있었기 때문에 거기 맞추어서 신문을 발행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16세기에 있어 歐羅巴의 신문이 년2-86 -

92 1. 言論機關의 活動 회의 定期性에서 週刊으로 옮겨질 때의 사정과 흡사하다. 즉 신문 보도가 뉴우스 공급을 하는 데에 外的 制約을 받기 때문인 것이다. 이 신문은 창간 이래 2년 1개월 여(44號)를 발행하다가 1891년 9 월 1일 그 제호를 朝鮮旬報라고 改稱하고 제1호를 간행하였다. 종 래의 월2회 발행하던 것을 旬報로 改題한 다음부터는 월3회 발행 하였는데 다시 1892년 4월 15일부터는 朝鮮新報로 개제하고 새 출발을 하였다. 朝鮮新報는 처음 주간발행이었는데 발행한 지 얼마 안되어 일 어난 淸日戰爭 도중에 休刊하였다가 靑山好惠에 의하여 재건되었 다. 靑山好惠는 1889년에 仁川에서 活版 인쇄소를 설치할 때 株 主의 한 사람으로 일해 왔고 또 大阪朝日新聞의 통신원을 겸무하 였었다. 靑山好惠는 편집 인쇄 경영에 이르기까지 혼자서 힘쓰다가 1896년 病死하였다. 그 후 이 신문은 中村忠吉이 경영을 引受하 였다. 淸日戰爭 후에 仁川은 날이 갈수록 번창했는데 이틈을 타서 신문도 발전하였다. 당시 日本 정부에서도 신문을 조종하기 위하 여 신문에 보조금을 지급하였는데 이 신문도 日本政府外務省으로 부터 보조금을 받았다. 따라서 日帝의 침략정책에 보조를 맞추어 협찬한 것만은 不問可知이다. 이 朝鮮新報에 종사하였던 기자로는 靑山好惠, 菊池謙讓, 熊本直亮, 中村忠吉, 西川谷垣, 萩谷籌夫, 蟻 生十郞, 小野覽一郞, 今井忠雄 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 신문은 종 래의 주2회 발간하던 것을 고치어 1902년 일간 신문이 되었다. 이외의 신문으로 仁川에서 발행되었던 것으로는 谷垣嘉市가 경 영하던 新朝鮮紙와 今井忠雄이 경영하던 朝鮮타임즈紙가 있 었다. 그리고 1930년에 仁川商報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뒤 朝鮮日

93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日新聞이라고 개제되었다. ㄴ. 朝鮮新聞 1908년 12월 朝鮮新報는 今井忠雄이 경영하는 朝鮮타임즈와 합병하여 朝鮮新聞이라고 개제하고 사장에는 萩谷籌夫가 취임하 였다. 1920년에 牧山耕藏이 경영하게 되자 본사를 仁川으로부터 京城으로 옮기고 日帝 말기까지 社長이 몇번 更迭되면서 社를 운 영하여 오다가 1942년 2월에 朝鮮總督府 警務局의 신문통제로 말 미암아 폐간되었다. 朝鮮新聞의 創刊 年月日에 대하여서는 仁川 京城隔週商報 의 발간일을 창간일로 보는 논자도 있으나 이것은 아주 별개의 신문이다. 朝鮮新報의 전신인 朝鮮旬報의 發刊 年月 日이 朝鮮新聞의 창간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仁川 京城隔週商報 와 朝鮮旬報는 아무런 연결성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발행 번호의 연속성은 동일한 신문을 규정하는 데 있어 缺해서는 안 될 요소가 되는 것이다. 3) 大邱의 日人新聞 ㄱ. 朝鮮紙와 大邱實業과 大邱日日 釜山, 仁川, 서울 등지에 뒤이어 大邱에도 日人經營의 日語新聞 이 발간되었다. 초기의 정기적인 인쇄 신문으로는 朝鮮紙와 大邱 實業新報를 들 수 있다. 이들 신문 발행에 관여한 자는 下津三郞 과 牧野周, 釋尾春仍 등이었다. 지리적으로 大邱는 釜山과 근접해 있는 관계상 釜山에 거주하고 있던 상인들을 비롯한 많은 日本人 이 각지에서 大邱로 모여 들었다. 이리하여 1904년경에는 鐵道從 業員, 工事請負員, 物資供給商人, 旅館, 料亭業을 경영하는 자 모 두 100여명의 日本人이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이곳에 재류하고 있던 日本人들은 그들의 단체로서 日本人會를 조직하고 達成周報

94 1. 言論機關의 活動 라는 주간지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이 신문은 활자로 인쇄된 신문 이 아니고 등사판으로 박아낸 신문이었는데 오래 지속되지 못하 고 제4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였다.39) 大邱實業新報는 1905년 2월 18일 창간되었다. 창설자는 下津 三郞과 牧野周이었다. 소형신문으로 격일 발행하였다. 그리고 신문 朝鮮紙는 이보다 앞서 1905년 1월에 주간으 로 발행하여 34호까지 발간하였다. 태블로이드판 6면 신문인데 5 6면에는 大邱판을 두었으며 8면 발행을 할 때도 있었고 4면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이 신문의 실물이 日本 東京大學 明治 大正 新聞文庫에 보존되 어 있다. 同紙 34호 제1면에는 다음과 같은 社告를 게재하고 휴간 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讀者諸君 秋凉은 사람의 意氣를 壯하게 하고 戰塵은 이미 收 拾되고 戰後의 大經營을 向하여 분투할 시기가 되었다. 여기에 있어 本社에서도 크게 決心한 바 있어 時勢와 함께 一大開展을 劃策하였다. 本紙가 一新紀元을 열고 一新面目을 가지고 讀者를 맞이하게 됨도 近日에 있을 것을 予告하는 榮光을 가지는 바이 다. 따라서 或은 次號를 一回休刊할지도 모르니 미리 諒知하여 주시옵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 신문광고는 終刊을 의미하는 듯 그 후 발행된 흔적을 찾아 볼 길이 없다. 이 신문 발행인 釋尾春仍은 眞言宗의 僧籍을 가진 자이었고, 達城學校40)에서 교편을 잡은 일도 있으며 인쇄소도 경 영하는 政商輩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釋尾春仍은 1906년 12월 에 다시 일간신문으로 大邱日報의 창간을 企圖하였는데 이 신문 39) 櫻井義之 韓國時代의 邦字新聞, 書物同好會報 제14호 京城書物同好會 ) 達城學校는 韓人들에게 日語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膝付益吉 尹弼五에 의해서 1889년 7월 창설되었다

95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의 第2號 社說에서 半身不隨의 韓日協約이라는 제목으로 伊 藤博文의 정책을 비난하였기 때문에 즉시 그 발행이 정지되었다. 그 후 釋尾는 서울에 와서 당시 漢城新報와 大東新聞 사장을 지낸 朝鮮의 편집 책임자가 되 었다. 이 잡지는 후에 朝鮮及滿洲라고 개제된 잡지이다. ㄴ. 大邱實業 大邱日日新聞으로 改題 바 있는 菊池謙讓이 경영하던 잡지 大邱에서 韓日合併까지 발행되었던 日本語新聞은 達成周報, 大 邱實業新聞, 朝鮮, 大邱日日新聞, 大邱日報, 大邱新聞 등이 있었 다. 이들 신문의 발행 부수는 보잘것 없었다. 합동 후 大邱新聞의 발행부수는 300부, 인쇄 부수는 400부이었다. 大邱實業新報는 1806년 大邱新報라고 개제하고 沖田錦城이 경영하였고 沖田棄次 郞이 편집에 관여하였는데 2개월만에 퇴임하고 한 달 남짓에 휴 간하였다. 그리고 같은해 11월에 大邱日日新聞이라고 개제하였 다. 大邱에 큰 화재가 있은 다음 牧野周가 신문을 경영하게 되었 다. 大邱에 거주하는 日本人 인구수는 1906년에 1,644명이었는 데, 1907년에는 2,675명으로 급증하였다. 이렇게 日本人의 인구 수가 증가함에 따라서 신문도 차츰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년에 들어 大邱日日新報 경영진의 반대파 小倉, 岩瀬 등이 중심 이 되어 새로 大邱新報의 발간을 획책하였다. 1908년 9월 1일부 터 자본금 5000圓으로 새로 日本大阪에서 16面型의 인쇄기를 구 입하고 새출발을 하였는데, 그 당시의 출자자는 岩津, 小倉武之 助, 木村竹太郎, 加藤一郞, 靑木重信, 澁澤固藏, 杉原新吉, 黑川丹 治, 稻本新臣, 町田久吉, 佐藤固藏, 藤繩文順, 福地義作 등이었다. 이리하여 大邱의 日本語新聞은 大邱日日新聞과 大邱日報를 創刊 하려고 획책하는 진영으로 갈리어 대결이 시작되었는데 결국 이 두 신문은 1908년 10월 1일부터 합동하여 大邱新聞이라는 題號

96 1. 言論機關의 活動 로 새출발을 하였다. 당시 日人들의 신문 경영은 신문의 사명으로서 앞서야 할 社會 的 公益性을 무시하고 개인의 利權을 위하여 더구나 자기파벌의 이익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언론을 행사하였고 이지적이어야 할 신문이 理性을 잃고 감정적인 신문제작을 자행하였다. 후에 朝鮮 民報社長을 지낸 바 있고 大邱日日新聞에도 관여한 바 있는 河井 朝雄는 그 당시의 신문을 평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41) 當時의 新聞記事를 오늘날 펼쳐보면 어떻게 그러한 新聞報道 를 할 수 있었을까 라고 말할만큼 劣等한 것이었다. 오늘날 世 上에서 惡德新聞이라고 指彈을 받는 新聞이라도 記述하지 못할 만한 記事를 報道하고 있다. 이것은 다만 大邱日日新聞만이 아 니고 大部分의 新聞이 그렇다. 新聞의 論調에 꽃이 피어 大邱의 紛糾는 더욱더욱 助長된 感이 있다. 이때에는 무엇을 하든지 岩 瀬中心이고 民團도 岩瀬 中心이었기 때문에 冲田君은 自己新聞 岩瀬民長影山助役이라는 揭載하고 紙上攻擊을 하였다. 이 題目으로 社說을 3回에 걸쳐 이러한 新聞評만 보더라도 그 당시 大邱에서 日人 경영의 신문 들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즉 新聞 을 지나치게 私有化하고 私利를 위하여 人身攻擊과 紛糾助長을 일삼는 기관으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4) 漢城의 日人新聞 ㄱ. 漢城新報(日本外務省機關紙) 大韓帝國 시대의 首都 漢城에서의 日本人 경영 신문의 발간은 釜山 仁川보다도 뒤늦게 1895년 3월 6일 日本通信省의 認可(舊 41) 河井朝雄 大邱物語 朝鮮民報肚 1931, p

97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韓國政府農商工部認可는 建陽元年 1月 22日)를 얻어 日本 熊本縣人 安達謙讓과 佐佐友房은 朝鮮新報(日文과 國文 겸용)를 창간하였다.42) 초기에는 발행겸인쇄인 宮住勇喜와 편집인 島田繼雄에 의하여 격일간 소형신문으로 발행되었다. 朝鮮의 개항을 강요하다시피 한 日本은 대륙진출의 꿈을 실현 하고자 하는 침략 정책의 수행을 위한 선전기관으로 機關新聞을 창안한 것이다. 이 漢城新報는 당시 日本外務省으로부터 충분한 보조를 받던 기관지이었다. 이 漢城新報는 제101호까지는 소형신 문으로 제작하다가 1895년 9월 9일부 제102호부터는 倍大版으로 확대하였고, 지면도 1 2면은 韓國文을 사용하였고 3면은 日本文 을 그리고 4면은 광고란으로 충당하고 있는데 廣告도 日本文 광 고와 韓國文 광고로 並載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기사의 표제는 1 호 활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전지면을 6단으로 나누고 1단은 47행 1행을 15자로 배열해 놓고 있다. 新倍大版 1호에는 1면에 社說欄, 雜報欄 그밖에 蠶種과 製絲하는 방법 등을 설명하고 있고 寄書欄 朝鮮開國記事와 妖巫의 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2면에서는 眞靈 이라는 논설과 官報抄錄, 社告 등을 볼 수 있는데 2면은 全 文 日本語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朝鮮國開國始末, 朝鮮沿海各 港誌라는 連續物이 게재되고 있다. 3면 下段 끝에는 日文으로 社 告를 揭載하고 같은 내용의 社告를 2면에 韓國文으로 게재하고 있다. 社告全文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신문지판을 크게 하기를 금일 발 (發行) 第102號로 부터 하노니 지금 사시는 모든 군 갑설곳쳐 1個月의 分 하오면 代金이 25錢이오 달로 계고하여서 第106號로부터 맛당히 로 갑슬 뎡하야보히리니다. 42) 菊池謙讓 私と朝鮮の言論 朝鮮之事情 京城朝鮮之事情社 1926, p

98 1. 言論機關의 活動 1903년 9월 25일 1226호에 발표된 社告 漢城新報 확장 개량 광고에 의하면 그동안에 日文과 韓文의 兩新聞을 격일 발행하고 1903년 3월 1일부터 일간으로 쇄신하고 韓文담당 主幹에 古河松 之助가, 日文담당 主幹으로는 武田卓爾가 담당하게 되었다고 하였 다. 당시의 사장이던 菊池謙讓은 당시를 회상하여 다음과 같이 말 하고 있다.43) 漢城新報라는 新聞은 小型의 日刊紙로서 半은 日文이고 半은 朝鮮文이었었다. 1900년에 火災를 입어 내가 再興에 努力한 功 으로 내가 新聞社의 社長이 되었다. 그리고 日文과 朝鮮文의 2種 을 刊行하기로 하였다. 編輯이 2局이고 印刷가 2個處이어서 社 의 收入은 極히 小額이지만 政府는 新報의 記事와 論說에 多大 한 自費를 들이었다. 나는 每日 두차례 公使와 만나 기사에 대한 여러 가지 상황을 상의하여 보도하였다. 漢城新報附錄(日本外務省機關紙) 43) 前揭書 p

99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그런데 이 신문은 부록을 발행하고 교양자료를 제공하기도 하였 다. 1899년 1월 6일부 제761호 부록에는 李舜臣장군의 전기와 日 本의 加藤淸正의 전기를 並載하고 있는데 이것도 加藤淸正의 전기 는 상단에 게재하고 있으며 李舜臣장군의 것은 그 밑에 싣고 있 다.(사진 참조) 이 신문도 1905년 9월 13일부 1742호부터는 다시 지면을 확장하였다. 1900년 사장에 취임한 菊池謙讓은 1903년에 사장직을 해임당하였다. 이 신문은 1906년 7월말까지 발행되었고 大東新報와 함께 統監府에 買收되어 統監府의 기관지로서 京城日 報라는 명칭으로 1906년 9월 1일 창간 제1호를 발행하였다. ㄴ. 大東新報(韓國文日文 2種) 1900년 漢城新報의 사장이었던 菊池謙讓은 1903년 6월에 日 本外務省으로부터 사장직의 해임통고를 받고 일시 渡日하였다가 外務省과 교섭하고 다시 새로운 신문 발행을 위한 補助協定을 맺 고 돌아와 大東新報를 창간하였다. 이 신문은 1904년 4월에 창간하였는데 4월 9월에는 日本 通商 省의 인가를 얻어 大東新報라는 같은 제호로 韓國文 신문과 日文 신문을 따로따로 일간신문으로 발간하였다. 당시 韓國文 大東新報 의 발행소는 泥峴에 두었다. 물론 이 신문은 그 당시 발행되던 漢 城新報와 마찬가지로 대륙 진출을 위한 日本정책을 옹호하며 추 진시키는 기관지였다. 이 신문은 4면 小型신문이었는데 2면에는 論說과 雜報를 게재하고 1면에는 史傳官令, 危言, 格言 등으로 채 우고 3면에는 小說, 4면은 廣告로 충당하고 있는데 論說란에서는 매일같이 日本의 대륙진출정책을 반영 내지 옹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04년 6월 24일부 이 신문은 對韓滿政策이라는 題目의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韓國에 至하야 西北으로 敵軍이 侵入 이 有 禦지者

100 1. 言論機關의 活動 一無하고 沿路城邑이 荒凉케 되야도 不顧하는데 況且中央政府 는 日韓交際를 斷切하기를 陰謀하고 內閣大臣을 遞任이 相次하 야 國政의 依然히 舊態를 不變함은 戰局以來에 僅以文字로만 盟友를 約할뿐이니 日本政府는 將次政策을 變 이 盖亦當然하 다 하노라.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乙巳條約이 체결되기도 전에 日本政府 의 앞잡이가 되어 韓國政府를 비난하며 강압적 정책으로 韓國을 위협하는 내용의 論陣을 폈다. 菊池謙讓은 1926년 韓國에서의 자 기의 기자생활을 회고함에 있어 大東新報는 韓國文과 日文 2종의 일간 신문을 발행하였다고 말하고 2년간의 경비로서 77,000圓의 손실을 보았다고 말했다.44) 그리고 日本語版 신문을 京城 永樂 2丁目에 본사를 두고 4면 大型신문으로 발행했는데 1면 6단 48행으로 지면이 구성되어 있 고 1906년 9월 26일부(第532號) 신문을 보면 1면 上단에는 東 段)에는 小說 お天馬列傳을 게재하고 있다. 그리고 平壤과 仁 淸鐵道와 遼河 라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하였고, 下段(4段과 5 川에 支局을 두고 있었다. 蛯原八郞에 의하면 大東新報가 村崎重 太郞에 의해서 1904년 4월 京城에서 일간으로 창간되었다고 말하 고 있는데 村崎重太郞은 발행인이었다.45) ㄷ. 大韓日報(韓國語版日本語版 2種) 韓國語版 大韓日報는 蟻生十郞이 사장이 되고 발행겸 편집인으 로는 萩釜籌夫, 인쇄인은 坂本工作이었다. 1904년 3월 10일 仁川 에서 창간호를 발간하였다. 仁川에서는 같은 해 12월 1일부 217 호까지 발행하다가 12월 10일부 218호부터 본사를 京城 南署明 44) 前揭書 p.11 45) 蛯原八郎 海外邦字新聞誌史 學而書林 p

101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禮坊鍾峴 417號로 옮기고 계속 발행하였다. 처음에는 소형신문으 로 발행하다가 1905년 6월 13일부 354호부터 擴大版을 간행하고 발행 부수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1906년 2월 1일부 紙上에서는 統監府의 開廳이라는 제목의 톱기사를 커다랗게 취급하기도 한 統監政治의 御用機關이었다. 그리고 日本語版 大韓日報가 1904년 2월 京城에서 戶叶薰雄에 의해서 창간되었다. 1907년 8월 27일부 제966호 1면을 보면 恭祝即位大典이라고 純宗皇帝 陛下의 即位를 축하하는 논설 을 게재하였고 生產業一般이라는 連載記事에서 瓦製造業에 대한 것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下段에는 小說을 연재하였다. 朝鮮民報 사장을 지낸 바 있는 河井朝雄은 자기의 저서 大邱物語에서 이 大韓日報를 지적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大韓日報라는 新聞은 戶叶薰雄君이 社長이고 山道襄一君이 主筆이었다. 대단히 辛辣한 筆陣을 폇는대 特히 大邱通信은 毒 이 있었다. 大邱通信員은 稻本新臣君이었는데 釋尾春仍氏가 經 營하는 大邱日報에서도 일하였다. ㄹ. 京城日報(日帝機關紙) 日本外務省의 機關紙 漢城新報와 大東新報는 統監府에 매수되어 統監府의 기관지로서 日本語新聞 京城日報 창간 제1호를 1906년 9월 1일 발간하였다. 창간초에 취임한 사장은 東京 朝日新聞의 編 輯主幹이었던 伊東祐侃이었다. 1908년에는 大岡力이 사장이 되고 1910년 韓日合併 후에 韓鮮總督府가 設立되자 그 기관지가 되고 신문의 조직을 改新하여 德富猪一郞이 경영을 맡게 되었다. 이리하여 같은 해 10월에는 京城日報와 每日申報가 합동하여 合資 會社를 조직하고 京城日報 사장이 직접 경영하게 되었으며 사장도 吉野太左衛門, 阿部充家, 加藤房藏, 秋月左都夫, 副島道正, 松岡正

102 1. 言論機關의 活動 男, 時實秋穗, 高田知一郞, 御手洗辰雄, 橫滿光暉의 순으로 변경되 어 나갔다. 統監府 기관지로서의 英文新聞 서울프레스(Seoul Press)는 1907 년에 頭本元貞에 의해서 경영되었으며 이 밖에 서울에 소재하던 日 人經營 신문으로는 京城新報(日文, 經營主 菊池謙讓), 中央新報(韓 國文, 經營主 古賀松之助), 大韓日日新聞(韓國文, 田村莫之助)와 日 文新聞으로 龍山日出新聞, 朝鮮日報, 東洋日報 등이 있었다. ㅁ. 其 他 위에서 설명한 신문들 외에 지방에서 발행되던 신문을 열거하 면 아래와 같다. 新聞名(發行地) 木 浦 新 報 ( 木 浦 ) 大 田 新 聞 ( 大 田 ) 全北日日新聞(全州) 咸 南 新 報 ( 咸 興 ) 南 鮮 日 報 ( 馬 山 ) 群 山 日 報 ( 群 山 ) 光 明 日 報 ( 光 州 ) 新義州時報(新義州) 北 鮮 新 報 ( 淸 津 ) 北鮮日日新聞(羅南) 鴨江日報(新義州) 開 城 日 報 ( 開 城 ) 湖南日報 ( 忠南懷德郡 ) 發行形態 격 일 일 격 일 일 일 일 일 일 일 일 일 일 일 간 간 간 간 간 간 간 간 간 간 간 간 간 創 刊 度 1898년 창간 1909년 1905년 1906년 1907년 1908년 1909년 1907년 1907년 1907년 1907년 1908년 1909년 그리고 通信社로는 日人경영의 日本 電報通信社 朝鮮總支社가 1906년에 京城에 설치되었고 京城通信이 1908년 11월에 京城에 서 창간되었고 그후 日韓通信이 발간되었다. ㅂ. 日人新聞에 대한 日本當局의 援助

103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신문의 기능과 그것이 일반 대중에게 미치는 作用力을 잘 아는 日本當局은 어떤 방법으로라도 신문을 정치적 선전에 이용하고자 힘을 썼다. 그래서 日本政府는 韓國에서 外務省의 기관지를 발행하기도 하 고 日本人 개인이 경영하는 신문에도 新聞操縱機密費의 支辨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日本의 대륙진출 정책에 호응하는 신문에 대 해서는 新聞紙條例를 적용하지도 않고 外務省機關紙 漢城新報와 大東 新報 이외에 일반 日人 經營紙의 보호육성도 기도하였다. 그 래서 日人新聞들은 在韓 各地 日本領事의 上申이 있을 때에는 日 本外務省으로부터 매월 소정의 금액을 원조받았다. 1897년에는 仁川의 朝鮮新報가 매월 50圓의 보조를 받고 그 후 새로 발간되 는 신문도 균등한 보조를 받았다. 그런데 이 보조금의 支辨은 1905년경까지 日本 外務省에서 직접 담당하였다. 당시 일본의 外 務次官 小村壽太郞이 在仁川日本領事에게 보낸 保護金件에 대한 서신을 보면 그때의 사정을 알 수 있다. 朝鮮新報에 대한 保護金下附의 件 朝鮮新報에 대한 保護金下附의 件 本年 2月 10日附 機密 第10 號로서 問議한 趣旨를 諒承, 適切하다고 생각하여 來 4月부터 向後 1年間 毎月 50圓꼴로 該新報에 保護金을 下附하기로 되었 기에 十分成績을 나타내도록 該社에 主要幹部에게 示達하시옵 기를 바라옵고 回答들이는 바이다. 明治 36年 2月 27日 外務次官 小村壽太郞 在仁川等領事 石井菊次郞 殿 日本 당국은 日本人이 경영하는 신문을 조종하고 침략정책에 호응하게 하기 위하여 統監府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신문에

104 1. 言論機關의 活動 대한 원조도 日本外務省으로부터 統監府에 移管하여 취급하였다. 露日戰爭이 끝난 후 京城 仁川 등 주요도시에는 日本人 인구가 증 가하고 여기에 따라 신문의 수도 늘었다. 그래서 보호금의 지변도 어느 특정한 신문에만 지불할 수 없게 되었다. 또 보도의 양이 많 아짐에 따라 새로운 편집요원과 기자의 증원이 요청되었다. 그리 하여 종래에 신문 경영주에게만 지원해 주던 원조제도는 사원들 의 갈등과 물의를 자아내기도하여 機密費의 증액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日本정부는 그들의 韓國 침략 야욕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 를 실현했던 것이다.46) Ⅱ (9) 其他 諸新聞( ) 1) 舊韓末의 親日紙 舊韓末 신문을 논할 때 親日紙의 존재를 아주 무시해버릴 수는 없다. 애국애족하는 민족지와 의견을 달리하는 친일지들은 統監府 가 설치된 이후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년 親日派에서 경 영하는 反民族的인 代表紙 國民新報와 大韓新聞이 창간되기까지 는 주로 民族紙와 日人經營新聞과의 논쟁이 있었고, 반민족적인 國民新報와 大韓新聞이 발생된 후 이들의 非國家的이고 非國民的 인 論調와 태도에 대한 애국민족지들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어서 상호간에 논쟁이 빈번하였다. 韓國 신문발생초기에는 민족지와 日 人 경영신문과의 마찰이 없어 양자간의 불화가 지면에 별로 나타 나지 않았지만 1905년 乙巳條約의 체결을 전후해서 갈등이 생기 기 시작하였고 韓國人 경영의 親日紙가 발생된 다음에는 한층 더 치열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46) 李海暢 韓國新聞史硏究 成文閣 1971, p

105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國民新報는 一進會에서 經營하는 기관지로서 宋秉畯이 관여하 였고 大韓新聞은 李完用 계열의 신문으로서 李人稙이 직접 경영 하였다. 당시 韓國에서 日本人이 경영하는 신문이 日本의 이익을 위하여 논진을 펴는 것은 민족지로 하여금 하나의 고민이 아닐 수 없었는데 더구나 韓國人 賣國賊들이 日帝의 앞잡이가 되어 日本 의 정책을 옹호하고 아부하는 韓國文 신문의 논진을 그대로 묵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들 친일지와 민족의 자주독립을 강조하는 排日 민족지와의 논쟁은 그칠 줄을 몰랐다. 賣國的인 친일지의 논조와 태도를 감시하는 것은 민족지들의 중요한 임무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친일지의 괴수이었던 國民, 大韓 두 신문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2) 國民新報 國民新報는 一進會의 기관지로 李容九, 宋秉畯에 의해서 1906 년 1월 6일 창간되었다. 초기에는 인쇄용지 등이 부족하여 발간한 지 5일만에 정간되고 1주일 후에 다시 속간하였다. 一進會가 주제하는 이 신문은 당시의 統監府에 아부하는 친일 매국지이었으므로 애국민족지와의 대립이 격심하였다. 그러나 초 기에는 충분한 資力을 소유하지 못하여 1906년 6월 초순에 다시 정간하였는데 이때의 사정을 당시 日人 경영신문이던 大韓日報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國民報가 刱設 지 四朔에 強制力으로 各道各郡各面에 發達 야 葉數 7000餘에 達 는 其價에 收入은 烏有 고 該社에 錢財 를 主務 金世基氏가 毎朔經費로 萬圓式支撥 야 3 4朔月內 에 家產이 蕩盡 故로 不得已 停刊 기로 決意하였다 니 그리고 1907년 6월 2일 和蘭에서 개최된 제2차 萬國會議에 파

106 1. 言論機關의 活動 견한 皇帝의 特使사건은 커다란 정치적 파문을 가져왔다. 이로 인 하여 讓位에까지 이른 사태는 민심을 극도로 격동시켰던 것이다. 이 일련의 사건에 대하여 一進會의 기관지 國民新報는 방약무 인의 언론을 구사하였기 때문에 군중에 의해서 파괴되기까지에 이르렀다. 國民新報 사장직에 李容九, 宋秉畯에 이어 취임한 韓錫 振은 이 신문의 주관적 경향이 마옴에 들지 않아 결국 사퇴하고 말았다. 梅泉野錄에는 韓錫振의 사퇴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國民新報社長 韓錫振免, 國民報, 久爲一進會機關, 至是宋秉畯 在倭, 託錫振揭載閔忠正夫人 朴氏有惡行于雜報, 錫振憤其誣, 衊 不從, 秉畯疾之, 斥免. 韓錫振이 사장직을 물러난 뒤에는 崔永年이 사장에 취임하였다. 3) 大韓新聞 大韓新聞은 李完用 계열에서 경영하던 신문으로 萬歲報社의 시 설을 인수, 1907년 7월 18일 京城 會洞 85戶 4號에 발행소를 두 고 李人稙이 사장에 취임하여 창간 제1호를 발간하였다. 이 신문 은 國民新報와 함께 친일에 앞장선 신문인데 창간취지로서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을 표면에 내세웠다. (一) 本報 國民의 知識을 啓 며 國家의 公益을 討 야 創 設 인 (一) 國文만 知 者도 漢文의 意義까지 解得 도록 言文一 致의 文法을 專用 (一) 本報는 堂堂한 獨立新聞으로 一般社會上公論을 唱 야 平 等博愛不覇獨立의 精神을 唤發 (一) 本報는 人心世態를 活畫하 新小說을 毎日掲載 터인데

107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小說作者 血의 淚와 鬼의 聲을 習作 人稙氏. 그리고 이외에도 민활 精實 探訪記事를 독자에게 보도할 터 이오니 계속구독을 희망한다고 광고한 바 있다. 民族紙 大韓每日申報는 이 大韓新聞의 혼빠진 논설에 대하여 大韓新聞魔記者아 一覽 이라는 사설로써 경고문( )을 발표하고 있으며 또 1907년 12월 17일에는 爲國民 大 爾祖先도 韓人이며 獎來爾子孫 도 韓人이라 韓國이 興하는 날에는云云 하여 신랄한 비판을 가 韓, 兩新聞招魂 이라는 題下에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신문은 韓日合併 후 그 제호를 漢陽新聞으 로 변경하였다가 얼마 안가서 폐간하였다. 4) 慶南日報 大韓民報가 創刊된 후 지방에서 처음으로 韓國人 경영의 신문 이 발간되었다. 1909년 慶南 晋州郡의 유지들은 자금을 모아 신 문발간을 계획하고 당국의 허가를 얻어 같은 해 8월 12일 창간 第1號를 發刊하였다. 이 신문은 격일간으로 발행되었는데 당시 발행소는 慶南晋州郡城 内一洞에 두고 편집겸 발행인은 金弘祚이고 主筆은 張志淵, 인쇄인 은 李基弘이었다. 그리고 이 慶南日報는 1910년 6월 21일 紙齡 100 號를 기념하는 날이 되어서 기념식도 성대히 거행하고 지면을 확대 하였다. 이 신문이 1909년 6월 신문창간을 준비하고 있을 때 大韓民 報는 慶南日報請認이란 표제로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47) 慶南晋州郡人士諸氏가 資金을 募集하야 新聞을 創刊하고저 하여 目的은 實業이오 名稱은 慶南日報오 編輯兼發行人은 蔚山 郡 金弘祚氏로 該觀察府에 請願하였는데 日間 內部로 轉報 야 47) 大韓民報 1909년 6월 22일

108 1. 言論機關의 活動 承認 後에 即行發行 다 니 我國人地方에서 新聞業을 設 은 此報로서 嚆矢가 되겠더라. 이 신문은 韓日合併 후에도 계속 발행되어 1913년 경까지 발간 되었다. 梅泉野錄에는 慶南日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48) 晋州人刱慶南日報聘張志淵爲主筆. 張志淵은 초기에 주필의 직책에 있다가 추후 편집겸 발행인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5) 其 他 閔元植이 主幹한 時事新聞이 1909년 12월 24일 창간되었다. 이 보다 앞서 安翊善이 발행인이 되어 大同日報가 1909년 9월 3 일 창간되었는데 사장 安翊善 다음에는 李紹鍾이 취임하였다. 이 때 즈음하여 漢城新報라는 신문이 새로 창간되었고 趙重應이 관 여한 法政新聞이 발간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韓國의 근대화 작업은 이웃나라의 그 것보다 훨씬 뒤늦게 시작되었고 開化 초기부터 舊韓末에 이르기 까지 이어온 신문의 역사는 그야말로 파란 중첩이었다. 회고하면 근대신문의 성장과정은 신문 본래 임무의 하나인 啓蒙을 위하여 줄기차게 노력해온 흔적으로 점철되어 있다. 韓國의 신문이 고루 한 봉건사회에서 벗어나 시야를 널리 세계에 돌리고 開國進取하 기 위하여 국민을 계몽하고 民權思想을 배양하며 知識을 보급하 고 民族精神을 앙양하여 外勢侵入과의 항쟁으로 국가와 민족의 당면한 고난을 타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약했던 사실은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본다. 신문 제작 기술이나 편집 기술도 日本 48) 黃玹 梅泉野錄 p

109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의 기술을 직접 導入하게 된 것은 開化期의 필연적인 추세가 아닐 수 없었다. 인쇄기와 활자의 도입을 비롯하여 초기 신문 창간시에 日本人을 고용한 것과 망명 또는 使節의 자격으로 日本에 갔던 先 覺者들에 의한 신문 편집 양상의 실례만 보더라도 근대 韓國의 신 문이 日本類의 전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新聞學者들은 신문이 그 과제로서 가져야 할 목적으로 서 報道, 啓蒙, 影響, 娛樂 등 네 가지를 드는데 韓國 근대의 신문 이 국민 지식의 계발을 위하여 啓蒙에 주안점을 두었고 국민 의 지식을 계몽함으로써 조국이 처해 있는 딱한 사정을 주지시켜 서 국권 만회를 위한 일군이 되도록 影響을 미치게 하는 데 또한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물론 小說같은 오락물을 제공하면서 국내 국외의 소식을 전달하는 보도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 啓蒙과 影 響에 두고 있었음을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이 啓蒙과 影響 도 인색하지 않았지만 역시 그 第一義的인 과제를 의 목적을 지향해 나아가는 그 저변에는 외국 세력을 배척하고 민 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일관된 民族主義의 흐름이 있어 왔던 것은 뜻깊은 사실이라고 본다. 이것은 近代 韓國新聞의 특징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李海暢

110 2. 學會의 活動 2. 學會의 活動 (1) 學會 政治 社會團體의 生成1) 門戶開放後 근대 문물의 도입 시설에 따라 여러 분야에 開化自 強의 모습이 나타났으며, 民衆의 意識構造도 상당히 변모하였다. 近代文物 制度에 어두웠던 우리 나라도 開化政策에 따라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시행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開 化政策의 여파는 列強勢力의 침투를 초래하였으며, 특히 日帝侵略 은 우리 민족의 抗日鬪爭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주권 수호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加重하는 外勢 侵略에 대하여 獨立協會는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 한 채 國運은 날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근대 문물을 미 처 다 배우지도, 익히지도 못한 가운데 우리의 주권은 유린당하고 우리의 地下資源은 외국인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淸日戰爭을 일으켜 列強의 경쟁세력을 물리친 日帝는 한때 三 國 干涉으로 인하여 후퇴의 기미를 보였으나 거듭되는 變轉속에 서도 韓國 침략을 서둘렀다. 그 결과 일어난 露日戰爭에서도 승리 1) 本稿는 다음 論文을 중심으로 썼다. 李鉉淙 李鉉淙 李鉉淙 李鉉淙 李鉉淙 李鉉淙 舊韓末 政治 社會團體 一班 金斗鍾博士 稀壽 紀念論文集 pp 畿湖興學金 史學硏究, 21號 大韓自彊會에 대하여, 震檀學報 29號 湖南學會에 대하여, 震檀學報 33號 大韓協會에 관한연구, 亞細亞硏究 39號 舊韓末 政治 社會 學會 會社 言論團體 調査資料, 亞細亞學報 2輯 Lee Hyoun-jong, On political, Journalistic and Social Organizations in the Tae Han Empire( ) Journal of social sciences and humanities. The Korean Research Center. 1967, No

111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한 日帝는 상대적으로 韓國 침략을 가속화시켜 大韓帝國은 國權 마저 유지할 수 없는 절망상태에 빠지고 있었다. 1905년 乙巳條 約으로 우리의 外交權을 탈취한 日帝는 계속해서 韓國에다 統監 府를 설치하고 顧問政治를 실시하다가 次官政治로 바꾸었다. 1907년에는 韓國軍을 강제로 해산시켜 國家保衛의 근원적인 힘을 없앤 다음 이른바 光武新聞紙法과 保安法 등을 강제로 실시하여 言論 出版의 탄압으로 우리 민족의 활동을 금지시키니 사실상 大 韓帝國은 실력 없는 형식상의 국가로 남아 있었으며, 그것마저 보 장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처럼 우리 국가와 민족이 日帝 침략으로 멸망의 위기에 이르 자 이미 主權守護에 앞장서 오던 愛國志士들도 더욱 억세게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義兵의 抗日 武裝鬪爭과 개인들의 抗日運動이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전개되었고 또한 敎育啓蒙을 통하여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동시에 自強獨立을 부르짖는 활동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主權回復의 한 가지 방법으로서의 學會를 비롯하여 각종 정치 사회 단체를 조직하고, 敎育과 啓蒙을 통하여 自強獨立, 自 主精神 배양에 힘쓰면서 이에 대한 장기 계획도 세워 抗日運動으 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활동은 日帝統監府에 의해서 제재 당하였다. 그리하여 愛國志士들은 한결같이 표면상으로 근대적인 지식의 보급과 民衆敎化를 위한 교육 계몽을 내걸었으나 실질적 으로는 기울어진 國運을 회복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물론 당 장에 국권을 회복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獨立自強의 정신을 기르 고 또 產業을 이르키며 技術을 습득시켜, 장래를 기약하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學會活動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순수한 學會는 물 론, 정치 활동과 경제 부흥 및 애국정신 계몽을 위한 각종 사회 단

112 2. 學會의 活動 체가 生成되었으며, 그중에는 賣國 단체도 있었다. 이들 각종 단체 는 그 성격과 그 형세의 우열을 가름하기 조차 어려울 만큼 서울과 지방에서 탄생되어 民衆敎化에 앞장섰으나 한편 혼란을 조장시키 는 결과가 되기도 하였다. 日帝 침략 앞에 흔들리는 主權의 보전과 수호를 위하여 義兵은 武力으로 抗戰하였으며, 學會 政治 社會團體는 言論과 結社로써 民衆을 계도함으로써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日帝 彈壓이 심해지자 愛國志士들은 抗日鬪爭의 방법을 바꾸어 본래의 목적대로 學術團體로서 학회 등 啓蒙團體를 조직하여 조직적으로 民衆을 깨우치기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단체의 모두가 日帝侵略이나 위기를 정신적으로나마 구해낼 수 없었음은 사실이 다. 오히려 많은 단체의 출현으로 건전한 學會 政治 社會團體마저 그 활동이 混迷할 정도로 어려웠던 일면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당시 義兵들이 활동하면서 부르짖은 倡義歌에서 각종 단체 의 混迷狀態의 일단을 보면 아래와 같다.2) 이 會, 저 會, 무슨 會, 왜 그렇게 많은가, 靑年會도 생겨나고, 東洋會도 생겨나고, 自治會도 생겨나고, 皇國會도 생겨나고, 敎育 會도 생겨나고, 學會도 생겨나고, 一進會도 생겨났다. 獨立自主한 뒤 保國安民하고프나 保國安民 버려둔채 亂國離民만 되네, 그놈의 라고 한 데서도 유명무실하고 七條約은 자세히나 들어보라 쓸데 없는 각종 사회 단체들이 생겨나 목적달성은 고사하고, 오히 려 保國安民이라는 미명아래 진정한 政治社會團體의 活動과 目的 마저 혼미케 한 일면을 엿볼 수가 있다. 물론 여기에는 정치적인 반등 세력의 행동과 日帝侵略의 走狗 役割을 하던 무리들의 행동 2) 暴徒編册 韓國駐劄 憲兵隊報告 隆熙4年 1月 6月 憲機 第200號 南泰永軍案倡義 歌 1910年(明治 43年) 1月 21日 본래 한국말인 것이 日語譯된 것을 다시 번역함

113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이 게재되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든 1905년 乙巳 條約이 체결된 후에 生成한 愛國團體들은 본래의 목적인 啓蒙活動 과 아울러 抗日主體意識을 鼓吹시키는 데 전력을 다하였던 것이다. (2) 學會 社會團體의 類型과 性格 軍事力을 배경으로 한 日帝 침략을 축출할 수 없게 된 大韓帝國 은 乙巳條約 후 統監府가 설치된 뒤로는 主權國家로서의 주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많은 愛國志士들이 앞장 서서 國家主權의 수호에 나섰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각종 형 태의 政治社會團體와 敎育團體와 啓蒙團體였으며 愛國志士들은 이같은 團體活動을 통하여 정신적으로 救國을 도모한 것이다. 이 런 많은 단체 중에는 뒤로 내려오면서 모두가 主權守護만을 위하 는 것은 아니었다. 바꾸어 말하면 애국을 가장한 각종의 정치 사 회 단체가 애국지사들이 모인 단체에 挑戰하여 왔다. 한쪽은 기울 어지는 國家主權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요, 소수의 다른 한쪽은 침 략 세력에 앞장서서 호응하는 대조적인 양상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므로 大韓帝國 末期의 사회 단체의 성격은 한 마디로 표현하 기 어려우나 그 類型은 다음과 같이 대별해 볼 수가 있다. ① 國權守護와 自主獨立을 중심으로 A. 獨立 主權守護團體 例 獨立協會 憲政硏究會 大韓自強會 B. 賣國團體 例 一進會 ② 政治敎育啓蒙을 중심으로 A. 政治活動團體

114 2. 學會의 活動 例 大韓自強會 大韓協會 一進會 B. 敎育 啓蒙團體 例 畿湖興學會 湖南學會 西北學會 C. 日帝侵略을 규탄한 國際輿論 喚起團體 例 大韓人國民會 (在桑港 在美同胞團體) ③ 地域啓發 啓蒙을 중심으로 A. 全國的인 規模의 단체 例 憲政硏究會 大韓自強會 大韓協會 B. 道單位 규모의 단체 例 畿湖興學會 湖南學會 矯南敎育會 西北學會 C. 郡單位 규모의 단체 例 羅州郡民會 咸南敎育會 ④ 抗日實力行使를 중심으로 A. 實力行使團體 例 義兵鬪爭團體 賣國賊暗殺 刺殺團體 B. 非實力行使團體 例 政治 敎育 啓蒙團體 이와 같이 活動과 성격면에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이 시기는 침략과 저항, 主權守護와 日帝侵略의 走狗 등이 混迷를 거듭하던 때이므로 國家와 民族을 위하여 더욱 많은 각종 정치 교육 계몽을 표방한 사회 단체가 생겨나게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이를 가장하 여 행동하던 매국인 단체도 생겨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최초의 근대적인 의미의 정치 계몽 사회 단체 로는 獨立協會를 들 수가 있다. 독립협회가 1896년에 조직되었으 니 1910년까지 보면 불과 15년간에 불과하다. 이 사이는 外勢侵略 과 國內政治의 혼탁 때문에 정치적 혼란이 소용돌이치던 때인만큼

115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主權守護를 위한 사회 단체도 급격히, 그리고 많이 생겨났다. 대체 적으로 정치 사회 단체의 증가는 한 시대를 보면 變轉을 거듭할 때 로서 정치적 교육적 계몽적 그리고 국가 부강을 내세우며 救國的 愛國的인 활동을 부르짖으며 많이 나타났다. 1910년 日本의 강제 적인 韓國併合으로 인해서 韓國과 韓國人을 위하던 각종의 정치계 몽의 사회 단체는 日帝의 강압으로 해산되고 親日團體도 이미 이용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에 日帝는 그것도 社會團體 해산이라는 명목 으로 해산시키고 말았다. 이는 표면상으로는 親日團體를 해산시키 는 것 같았으나 이면에는 韓國人의 愛國團體를 해산시키는 구실을 삼는데 좋은 기회를 포착하여 대의 명분을 내세우는 동시에 일제침 략에 앞장섰던 親日團體도 이용가치가 없어졌으므로 이를 없애기 위하여 해체하는 인상을 주는 이중 효과마저 노렸던 것이다. 日帝 침략과 主權守護라는 어려움을 겪는 우리 민족은 국가의 힘으로는 日帝 침략을 막을 수 없음을 보고 직접나서서 主權守護 를 위하여 사회단체 활동을 개시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결 실을 본 단체도 생겨났으나 반면에 雨後竹筍格으로 부실한 단체 도 많이 생겼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당시의 大韓每日申報에는 近 日에 당파가 層生하여 政府黨이니, 民權黨이니, 守舊黨이니, 開化 黨이니 부르짖으며 서로 鼎立하고 있으니 가히 黨時代라 할만하 다고 당파의 亂立相을 지적하고 있다.3) 또한 이들 社會團體들은 새로이 물결쳐오는 文物을 받아들이자 고 경쟁적으로 주장하고 國力의 伸長도 주장하였으나, 그들이 말 하는 開化는 어느 의미에서는 참다운 뜻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 하는 점도 없지 않았다. 어떻든 統監府는 될 수 있는대로 우리 민족의 활등을 탄압하는 3) 大韓每日申報 1907년 12월 14일

116 2. 學會의 活動 데 중점을 두었지만 日帝의 外交文書를 보더라도 당시의 學會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4) 즉 學會라는 것도 요즈음에 와서 그 설립이 점차 많아져, 그 이름은 學會이나 사실은 政治上, 社會上 의 운동을 주로 하며 敎育事業을 從으로 하여 政治와 敎育과를 혼 동하는 폐단이 심하므로 學會令을 發布하여 각각 설립 인가를 學 部大臣에게 받도록 하며, 또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어서 결과적으로 學會活動이 主權回復 活動에 앞 장섰던 일면을 反證하고 있는 것이다. (3) 學會 言論 社會團體의 活動規制 日帝侵略을 노골적으로 규탄하는 學會 政治 言論 社會團體에 대하여 統監府는 직접 간접으로 위협을 가하여 韓國人의 言論 集 會 結社에 대한 활동의 자유를 규제하였다. 이러한 강경조치로서 내려진 것이 저 유명한 소위 光武新聞紙法으로서 1907년 7월 27 일 法律 제1호로 李完用 內閣에서 공포하였다. 이것은 1908년(광 무 2년) 4월 29일에 법률 제8호로 그 일부가 개정 실시되었는데 그 新聞紙法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신문 창간에 있어서 內部大臣의 허가를 받아야 된다는 것과 또 보증금을 바쳐야 된다는 것이다. 內部의 허가제는 이미 사실상 실 시되고 있었던 것을 법규화한 것에 지나지 않으나, 여기서 중요시 되는 것은 그 罰則에 있어서 發行停止權을 비롯하여 罰金刑과 동 시에 體刑을 제정한 것과 器機를 몰수한다는 가장 가혹한 刑罰權 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5) 4) 日本外交文書 卷42 1册 p.190 (1909년 8월 30일) 5) 崔埈 韓國新聞史 p

117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이같은 全文 40조목으로 된 가혹한 내용의 규제로서 韓國人의 言論을 彈壓하기 시작한 統監府는 같은 날자로 保安法도 제정하 여 법률 제2호로서 全文 10조의 규정을 발표하였다. 同法은 제2 조에서 內部大臣은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할 경우에 結社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제2조에서는 警察官은 안녕질서를 保持하기 위하여 필요할 경우에 集會 또은 多衆의 운동, 혹은 群集을 제한 금지 또는 해산시킬 수 있다고 규 정하였다. 이와 같이 統監府는 말마다 안녕질서에 방해가 되면 結社는 해 산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안녕질서를 근본적으로 파괴 한 張本人인 日帝가 도리어 안녕질서를 부르짖으며 침략 그 자체 가 안녕질서인 것처럼 사실을 혼돈시켜 놓고 우리의 주권과 자유 를 파괴하면서 탄압한 것이다. 이같은 일제침략과 한국인에 대한 통감부의 탄압은 더욱 노골 화되어 保安法에 의해서 大韓自強會가 일차적으로 강제 해산을 당하였으며, 우리의 정당한 의사 표시와 抗日運動이 제지를 당하 였다. 여기에 설상 가상격으로 추가된 가혹한 刑罰은 出版法의 공 포였다. 이것은 1909년 3월 26일 법률 제6호로 실시되었다. 이것 은 新聞紙法과 아울러 시시각각으로 변천하는 시대와 사회에 부 합되지 않을뿐더러 지나친 탄압과 억제를 위주로 한 것인바 두 법 규는 日本 本土에서도 이미 말썽이 생겨 폐지 또는 개정한 것인데 그 惡法을 한국에다 적용시켜 우리의 발전을 저해한 것으로서 言 論과 출판자유의 암이 되었다. 이 난폭한 惡法은 明治 初期 日本 에서 조차 많은 물의를 일으킨 新聞條例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조목만을 그대로 모방하여 소위 新聞紙法이라 命名하여 우리에게 적용한 것이다. 이 法은 日本에서 地方官이 발행 정지권

118 2. 學會의 活動 을 가진다는 것과 印刷機를 차압한다는 內務大臣 署名의 법규였다. 이것은 1887년에 이미 폐지되었고 日本 新聞條例中 發行 禁 停止 條項 역시 1897년에 新聞事業을 위축내지 농단하는 것이라 하여 삭제 개정하였는데,6) 그 惡法을 統監府가 우리나라에 되살려 言論 結社를 노골적으로 탄압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保安法으로 結社와 出版物만을 탄압한 듯하나 이 출판법보다도 먼저 1908년에는 學會令까지 제정 실시하였다. 이 는 융희 2년 勅令 제63호로 발표되었는데, 그 규정중에서 學會는 營利事業을 위하거나 또는 政事에 관계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 다.7) 이리하여 民族運動의 하나로 나타난 學會活動을 아주 위축 시키는 방향으로 탄압하였다. 日帝統監府는 大韓帝國의 主權奪取를 목전에 두고 韓國民의 주 권 회복운동을 縱橫으로 얽어서 자유로운 활동을 금지시키기에 血眼이 되어 갔다. 寺內 統監은 심지어 우리나라의 各道儒生과 정 당의 세력이 어떠한가를 조사하라고 電訓까지 하였으며8) 병합하 던 8월에는 統監府 警務總監部令으로서 集會團束에 관한 것이 공 포되었다. 그러나 韓國人의 主權守護運動은 거세게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 들은 政黨 社會團體의 활동을 통제하기 위하여 結社의 요건으로 일정한 수가 모여 일정한 保證金을 납부치 않으면 結社를 不許할 뿐만 아니라 일차 結社한 것이라도 그 회원수를 조사하여 定數 이 하로 줄어질 때는 해산시키기로 할 것을 연구중이라는 보도까지 도 있었던 것이다.9) 6) 崔埈 韓國新聞史 p.264 7) 隆熙 2년 9월 1일 勅令 63號 韓國法典 p ) 大韓毎日申報 1910년 6월 17일 9) 大韓毎日申報 1910년 7월 10일

119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이리하여 主權守護運動을 펴나가려는 韓國人에 대한 탄압의 한 가지 법으로 政治團體와 學會가 일정한 보증금을 납부해야 되며 이행치 않을 경우에는 신규 단체나 기존 단체를 막론하고 해산시 킬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처럼 빈틈없이 탄압 조치하고 난 후 병합을 위한 強占條約이 실시되었고. 다음해에는 一進會, 朝鮮協會 등 10개 단체에 대하여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제는 韓國의 주권 탈취가 끝났으니 비록 日帝의 走狗團體라 하더라도 利用의 필요성이 없게 된 韓國人 때 문에 취해진 조치였다. 그렇지만 韓國人의 활동에 대해서는 계속 해서 감시하였다. 日帝는 合併前에 이미 공포 실시한 屋外集會와 集團行動 금지에 해당하는 조치에서 당분간이라고 규정하였으나 併合 後의 형세로는 集會禁止令을 계속 실시할 필요가 있으므로 그후 2 3년간은 해제 조치를 하지 않는 방향을 취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는 日帝의 武斷統治와 연결하여 한국인 탄압의 수단 으로 확대시켰던 것이다. (4) 社會團體의 活動目標 大韓帝國의 末期에 學會 政治 社會團體가 추구한 목적은 궁극적 으로 主權守護에 있었다. 그러므로 각 단체는 그 강령이나 취지가 행동면에 뚜렷하게 나타났으므로 그들의 활동 목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賣國團體나 親日走狗團體의 경우는 그 활동 목표 와 행동을 表裏不同하게 하였으므로 표면상으로 나타나는 것만을 보고는 식별하기가 어렵다. 一進會 같은 賣國團體의 경우는 그래도 단체의 행동을 알 수 있지만 群小團體의 경우는 숨기면서, 親日走 狗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식별하기가 더욱 어렵다. 더우기 愛國團

120 2. 學會의 活動 體가 아닌 政治社會團體일수록 주권 수호를 해야 된다고 부르짖으 며 주권 수호에 앞장서는 것처럼 가식적인 행동을 하였으므로 식별 하기가 더욱 곤란한 것이다. 이렇게 가식적인 행동을 취했던 이유는 당시 울분에 찬 民衆들의 민족적인 감정에 호응하는 듯이 보이기 위 한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親日走狗들의 목적을 달성시켜 주고 그 대 신 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거나, 아니면 보다 高度化한 수단 을 이용하여 전위적인 행동을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들 단체가 표방한 목적을 본다면 어느 것이고 賣國的인 강령 이 아니라 표면상으로 日帝侵略에 대항하는 민족적 감정을 내세우 고 있다. 심지어는 一進會 같은 賣國團體까지도 표면상으로 皇室 의 안녕 등을 부르짖고 있어 그러한 면을 엿볼 수가 있으며, 당시 민중들의 요망이 무엇인가를 쉽게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들 정치단체와 학회가 내세운 취지와 강령은 어느 것이나 日帝侵略과 맞서 싸우는 국민의 감정에 영합하는 내용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 이다. 이와 같은 假飾的으로 愛國團體然하던 賣國團體를 제외하고 이 제 대표적인 애국단체의 취지문을 살펴본다면 그 본 뜻을 쉽게 이 해할 수가 있다. 大韓自強會를 보면 오직 우리의 主權守護는 自強 의 여하에 있으며 우리가 外國人 즉 日本人의 보호에 있다는 것도 필경은 自強의 道에 이르지 못한 때문이라, 우리 한국은 삼천리 강토가 결함이 없고 이천만 민족이 있으니 힘써 自強하여 단체가 共合하면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앞으로 國權도 회복할 것이라 전제한 다음, 계속해서 自強의 方法은 다름이 아니라 敎育을 진작 시키고 殖產興業에 힘쓰는 데 있는 것이라 했다. 교육이 일어나지 않으면 民知가 미개하고 산업이 不殖하면 國富에 강함이 없으니, 그런즉 民知를 개발하고 國力을 양성하는 방법은 교육과 산업의

121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발달에 있다고 역설하였다.10) 이미 정치적으로 활동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웠고 또 日帝침략 세력과 統監府의 지독한 法網 속에서 피할 수 없었던 당시의 志士 들은 직접적인 행동, 즉 실력 행사에 의한 주권 회복 운동보다는 간접적이고 또 점진적인 방법으로써 후일을 기하여 목적을 달성 하자는 잠재적인 방향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라 보겠다. 어떻든 大韓自強會는 취지문 총 634자 중에서 24자는 自强이 란 두 글자가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오로지 自強에 있 다고 거듭 강조하면서 그 목적과 의식을 뚜렷이 하고 있다. 이것 은 전국적인 규모의 단체이지만 이제 地域單位 단체의 목적을 다 음에서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고, 地域社會의 開發과 발전 을 표방하면서 조직된 학회를 보면 아래와 같다. 湖南學會 全羅南北道 矯南敎育會 慶尙南北道 西友西北學會 平安南北道黃海道 關東學會 江原道 漢北興學會 咸鏡南北道 畿湖興學會 京畿道 忠淸南北道 이처럼 대략 道單位를 중심으로 조직하고 있는데 忠淸道는 京 畿와 같이 그리고 黃海道는 西北學會와 같이 조직되어 있으며 지 역 명칭을 가진 별도의 단체가 없다. 이들 學會는 비록 地域名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본부는 어느 것이나 서울에 있었다. 各地方 출신의 志士들은 출신 지역의 민중계몽과 문화향상을 위하여 서울에서, 학술단체를 조직하여 지 방과 긴밀한 연락 협조하에 민족정신의 앙양과 주권 수호, 회복을 10) 李鉉淙 大韓自強會에 대하여, 震檀學報 29號

122 2. 學會의 活動 위한 계몽에 힘썼다. 이들 학회는 지역성을 띠고 出身地域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조 직된 것이어서 그 성격상으로 볼 때는 해당지역에 있는 경우와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당시 새로운 文物과 時代潮流 등을 알기 위해 서는 그럴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在京鄕友會 같은 느낌까지 주고 있으나, 역시 學術團體인 점에서 거센 抗日鬪 爭이나 실력행사는 없이 敎育啓蒙活動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학 교를 건립하고, 교육을 통하여 주권의식을 깨우치기에 힘쓰고 당 장에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먼 훗날 기필코 우리의 주권을 찾을 수 있도록 그 실력을 길러주고, 民族意識을 일깨워 주자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상은 地域社會의 개발과 文化向上과 民族意識의 고취 등 啓 蒙을 표방하였으나 본부가 서울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보다 도 더 작은 규모의 학회나 단체로서 해당 지역에 있었던 郡單位 정도의 단체도 있었다. 예컨대 咸南敎育會 咸南 永興郡 南川里所在 平北耶蘇敎育會 平北 宣川邑內 所在 羅川郡民會 全南 羅州郡 開城學會 京畿道 開城郡 西部所在 이같은 작은 규모의 것은 해당 지역에 본부를 두고서 民衆의 계 몽과 抗日鬪爭 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이들 學會의 목적을 낱낱이 다 열거할 수는 없으나 畿湖興學會 의 취지를 본다면11) 畿湖를 중심으로 해서 조직된 것이지만 그들 이 바라는 것은 畿湖 뿐 아니라 畿湖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범위를 넓혀서 교육에 헌신하는 것임을 밝히고, 아울러 利用厚生 11) 李鉉淙 畿湖興學會에 대하여, 史學硏究 21號

123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을 역설하며 그래야만 國利民福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교육을 통한 內的 충실을 기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畿湖興學會의 精神은 國家的이며 畿湖的이 아니고, 敎育的이며 政 治的이 아니라고 밝혔다. 다시 湖南學會의 경우를 보면12) 그 취지서에서 오늘의 우리나 라는 이미 망했다고도 말하고 또 망하지 않았다고도 말한다. 國權 이 이미 옮겨지고 民心이 이미 흩어졌으니 비록 망했다고 해도 可 한 일이요, 그러나 망한 國運을 만회하고 망하지 않는 基를 확립 함에는 오직 敎育의 길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교육의 강화 에 더욱 힘썼다. 그리고 學會의 활동이 당장에 큰 효과가 있는 것 이 아니며 상당한 시일을 필요로 한다고 학회활동의 성과에 대한 일단을 표시하고 있다. 또한 西友學會 뒤에 西北學會로 개칭된 경우를 보아도13) 凡 物이 孤하면 危하고 群하면 強하고 合하면 成하고 離하면 敗함은 固然之理라 하면서 大而國家와 小而身家의 自保 自全之策을 강구하려면, 我同胞 靑年의 교육을 開導勉勵하야 人材를 양성하며 衆智를 개발함이 即是國權을 회복하고 人權을 伸張하는 기초라 고 학회 조직의 목적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다시 郡單位 정도의 단체가 내세운 목표의 일례를 본다면 敎育 普及, 產業發達, 愚民勸誘視善, 外交上의 敦厚 등 네 가지였다. 이렇게 규모의 대소나 지역 차이없이 대체적으로 그 목적 목표 가 主權回復을 위한 선행 조건으로서 敎育과 實業 殖產을 진흥시켜 自強之道를 강구하여야 한다는 데 있음을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國民會같은 경우는 실행 목표 5개항 중에 排日思想, 地 12) 李鉉淙 湖南學會에 대하여, 震檀學報 33號 13) 西友學會月報 第1號 本會趣旨書

124 2. 學會의 活動 方騷擾者 剖破, 枝節勿生토록 하여야 된다는 것이 있으며, 또 同 友會 같은 경우는 韓日兩國의 國祖를 숭상하여 韓日國民의 정신 적 和衷協同의 實을 거두기로 한다는 등 愛國團體가 표방한 목적 과는 아주 다른 입장을 취하였다. 심지어는 韓日兩國의 근원을 살 펴본다면 兄弟國이라 하고, 大神 天照와 大聖 檀君이 다같이 桓雄 의 아들로 東方에서 창업하여 각각 한쪽을 다스린다고 해괴망측 한 이론을 펴는 賣國走狗의 성격을 띤 경우도 없지 않았다.14) 다음 海外同胞들이 내세운 경우의 일례를 본다면 물론 국내에 서의 경우와는 다르나 그래도 애국적인 행동을 살필 수가 있다. 먼저 美洲地域에서의 경우 北美韓人同盟新興會의 취지문을 보면 朝夕雜報에 조국에 관한 기사가 실려 울분을 금치 못했다면서 폴 란드와 인도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國事에 헌신할 것을 국내외의 忠愛烈士에게 포고한다고 선언하고 있다.15) 또한 일본 東京에 있는 우리 유학생들이 그동안 여러 갈래로 分 派作用하던 것을 하나로 통일하였는데, 그 大韓學會賛成會의 취지 서를 본다면 在外學生이 정신적 단합의 필요를 자각함에 있어서 國內人士는 공동단합을 영구히 굳게 하기를 自任하고 분발하라고 애국 동포들에게 호소하고 있다.16) 그러나 본 회는 있는 곳이 日 本의 수도이며 또 갑자기 하나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꼭 취지서대 로만 되었으리라 여길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의의는 큰 것이었지만 日帝의 방해공작 때문에 활동에 제약이 컸으리라 믿는다. 위에서 몇 개 단체의 목적과 취지를 살폈으나 이것으로써 당시 의 學會나 政治社會團體가 갖는 목표를 모두 살폈다고 생각되지 14) 趙恒來 韓末社會團體史論攷, 본서는 舊韓末 親日團體를 총체적으로 연구하여 親日走狗나 賣國團體를 소상히 밝힌 勞作이다. 15) 大韓每日申報 1908년 1월 15일 16) 大韓毎日申報 1908년 5월 14일

125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는 않는다. 그러나 그 같은 例示를 통해서 憂國志士들이 찾으려고 애쓰던 목적이 무엇이며 그들의 意識과 계획이 무엇인가는 짐작 했으리라 생각된다. 이제 이같은 목적을 찾아보기 위하여 1908년(융희 2년)에 조 사된 당시의 學會 政治 社會 言論 등의 社會 團體들이 내세운 취지와 목적을 간략하게 표시하여 종합적으로 통계를 내어보면 아래 표와 같다.17) 社會團體目的 一覽表 團 敎 實 商 體 目 團 的 體 數 育 業 業 國 國 宗 慈 敎 政 輸 殖 新 衛 舊 善 科 債 家 書 學 報 發 孤 發 硏 償 達 敎 兒 刊 治 送 産 究 生 文 貧 患 農 拓 殖 明 者 難 工 會 政 救 相 改 社 援 黨 護 救 良 助 단체수보다 目的數가 많은 것은 1個 團體가 여러 목적을 가진 때문임. 위의 表는 조사되던 당시를 기준삼았으므로 그 후에도 변화가 있으리라 믿으나 역시 교육에다 목적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당시의 學會 政治 社會團體가 武力 團體가 아니니만큼 급진적인 수단 방법을 취하고 있지는 않으나 장래를 기약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統監府의 위협하에서 이미 기울어진 國運을 당장에 회복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교육을 통 하여 後日을 기약하고 있음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또한 이런 방 법을 적용하여 정치단체, 사회단체, 교육단체, 계몽단체 등의 역할 을 총괄하고 있으며 앞으로의 주권회복 운동을 위하여 民族思想 의 고취 및 民族精神의 배양을 교육의 주요 목적으로 한 것이며 근 17) 李鉉淙 舊韓末 政治 社會 學會 會社 言論團體 調査資料, 亞細亞學報 2輯

126 2. 學會의 活動 대의 새로운 학문을 빨리 배워서 뒤떨어진 실력을 배양하여야 된 다고 주장함이 압도적임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따라서 大韓帝國 말기의 學會 政治 社會團體는 親日走狗團體를 제외하고는 비록 단체 이름은 다르다 할지라도 교육과 언론을 통 하여 후일을 기하고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의 고취, 그리고 殖產 등 으로 실력 양성에 힘썼던 것이다. (5) 社會團體에 대한 日人 弄奸 주권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던 愛國志士들의 행동과는 달리 親 日賣國의 행위나 日帝走狗의 단체들은 賣國行爲나 개인적인 利害 相反 등으로 離合集散이 잦았던 것이다. 舊韓末의 사회단체는 대 체로 乙巳條約 이후 설립되었으나, 統監府 설치 후에 뒤로 내려오 면서 활동면에까지 더욱 많은 규제를 받았다. 그런 속에서도 結社 의 활동을 할 수 있었음은 오직 주권회복을 위한 民族的인 염원 때문이었다. 민족의 강렬한 분노는 일제 침략 세력으로도 억제하 지 못하였던 것이다. 물론 言論自由나 結社의 자유를 허락하고 있 다는 인상을 주어 전시효과를 노린 점도 없는바 아니지만, 어떻든 민족적인 정치 운동을 총검으로 억제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 러나 그 허용이란 어디까지나 限界性을 가진것으로서 어느 정도 이상의 활동을 규제하면서 점진적인 방법으로 團體 구성원들의 분 열을 조장하고 상호간에 증오하도록 농간을 부려 韓國人 동족끼리 헐뜯게 만들면서 합병의 목적을 차츰차츰 수행하여 나갔던 것이 다. 따라서 一進會를 선두로 한 노골적인 賣國行動을 비호하면서 소기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진행시켜 나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賣國的인 정치 사회 단체의 경우이며 우리가 잘

127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알고 있는 애국적인 단체의 경우도 日本인들의 농간에 휘말려서 그들의 활동은 日帝가 계획한 한계를 잘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 우를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일차로는 법률에 의하여 통제된 限界 線이요, 이차로는 소위 日本人顧問 등에 의하여 통제 또는 제약받 은 과정인 것이다. 그런 예가 많다고는 보지 않으나 그래도 중추 적인 단체에 日本人이 끼여 있었음은 다른 群小團體에서 보는 것 보다도 크게 주목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애국단체요, 큰 단체가 제약을 받는다면 그 외의 단체의 활동이란 농간을 부리든지, 않든 지를 막론하고 어느 정도일 것인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日人顧問을, 그것도 無報酬로 채용한 것은, 大韓自強 會가 그랬고 대한자강회가 강제로 해산당한 후에는 그 顧問이던 大垣丈夫의 산파역에 의하여 재조직된 大韓協會에서 또한 그런 점을 찾아볼 수가 있다. 한두 가지의 예로써 전체를 추측함은 옳 은 일은 아니나 그래도 舊韓末에 있어서의 대표적인 정치 사회 단 체로서 顧問으로 채용하였던 大垣丈夫의 경우를 보면 확실해진다. 그가 취한 행동을 살펴서 일제 침략에 전위적인 역할을 담당한 일 면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 日本人 大垣丈夫는 韓國에 건너와서 무슨 일을 하였는가. 한일합병 후에 자신이 이야기한 몇 가지를 간추려 본다면18) 大韓 自強會의 창립에 관한 회고담 속에서 儒生이라 하는, 讀書하는 선비들은 혹은 정치를 논의하며 혹은 宮中에 上書하며 혹은 王侯 大官을 접견하는 등의 자유를 갖고 있어서 보호조약과 같은 미증 유의 일을 만나서는 전후의 생각없이 일시에 소요함은 본래부터 당연한 것으로 하등의 이상할 것은 없으니, 悲憤慷慨하는 韓國 유 생들의 활동을 당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고 말했다. 그리고 당 18) 藤村德一 居留民이 昔物語り p.111 大垣丈夫項

128 2. 學會의 活動 시 45세의 청년이었던 자기로서는 이같은 상황을 보게 되어 타오 르는 功名心과 억제하기 어려운 義狹心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마 음에 기하는 바 있어, 열광적인 민심을 통일할 필요를 인정하고 당시 韓國 굴지의 인물인 尹致昊 李源競 張志淵 尹孝定 南宮勳 李 沂沈宣性 洪弼周 柳瑾 太明軾 李鍾一 林珍洙 金相範 등 여러 사람 과 內議하여 京城에 國民指導의 大施를 세워 광무 10년 4월 1일 大韓自强會의 창립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 大垣丈夫가 顧問에 임명되었는가는 뚜렷하지 않지 만, 그가 韓國人 志士들과 만나서 회칙 작성에 관여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 회칙에는 外交와 法律에 밝은 日本人 한 사람을 顧問 으로 추대한다는 규정이 들어 있다. 이 규정에 따라 大垣丈夫는 法律에 밝은 日本人으로서 大韓自强會의 顧問으로 顧聘되었던 것 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하여 顧問이 된 大垣은 시국 수습과 아울러 會의 활동 방침을 결정하는 등 실권을 장악하여 會員을 지휘하며 檄文을 13 道에 보내어 排日派의 규합 통일에 노력하고, 그에 겸하여 大家論 集을 편찬하며, 청년 立志篇을 저작하여 이것을 번역 출판시켜서 오로지 人心의 收攬에 腐心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여기에 大垣 丈夫가 顧問으로서 행동한 본의가 드러난다. 당시 그의 眼目에 비친 社會政情을 그 자신의 말에 의해서 살펴 보면, 江原道에는 田愚 등 일류의 儒生이 서로 氣脉을 통하여 호 응하고 계속하여 排日의 기세를 고취할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英國人 베델이 韓國人 梁起鐸 金允植을 論說記者로 雇入하여 大 韓每日申報라 칭 하는 한글 日刊新聞을 발행하여 인심을 치열하 게 선동하므로 民心이 날로 악화하여 드디어는 義兵의 봉기를 보 게 되었다는 것이다

129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또한 大韓自强會의 창립에 대한 회고담 속에서 지방에는 강원 도의 柳麟錫과 경상북도의 儒生 郭鍾錫 등의 檄文이 가장 교묘해 서 人心을 크게 자극하여 保護政治 반대를 표방한 排日의 기세를 올려 방해가 빈번히 일어나며 京城에 있어서는 軍部大臣 權重顯 을 백주에 요격하는 등 사건이 자주 일어나므로 그들을 자수시킨 예가 있음도 아울러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大垣丈夫는 斬奸狀을 기초하던 李沂에 대해서도 자기의 知人이라 하여 만나서 自首를 권유하였으나 李沂는 自首 는 士人의 가장 부끄러운 바라, 차라리 강제로 포박됨을 원한다면 서 거절하자 警務局에 연락하여 강제로 동반시키는 등 표면상 돕 는 체하면서 실질적으로는 抗日運動을 좌절시키는 데 역점을 두 고 있었다.19) 이와같이 大垣丈夫는 韓國과 한국인을 위하는 척하면서 표리부 동한 이중적인 행동으로 日帝 침략의 전위적인 행동으로 우리나 라 지식층의 활동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大韓自強會의 月 報나 大韓協會 月報 등의 논설란을 통하여 민중은 국가에서 정한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행동하여야 됨을 말하고 또 五賊이라 하더 라도 그들은 前職大臣이니 前官의 禮遇도 하여야 된다고 말하고 있음을 볼 때에 더 이상 大垣의 행동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할 필요 조차 없을 것 같다.20) 그러나 그가 차지한 위치는 國運이 다해가는 최종 단계에서 펴 보려는 愛國志士들의 행동을 제약 방해하고 限界지우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일제 침략 정책과 아울러 주목되는 것이 다. 大垣丈夫의 행동은 마치 魚網 속에 잡혀든 고기가 잡힌 줄을 19) 三城景明 韓末を語る p.70 20) 大韓協會月報 號에 수록된 大垣丈夫의 論說 참조

130 2. 學會의 活動 모르고 뛰면서 아무리 발버둥쳐 보았자 쓸데없는 것처럼 이미 붙 잡혀 있는 상태를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韓國人의 사정을 간취하고 大韓自治會나 大韓自強會를 조직하여, 애국지사들이나 또는 당대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會員으로 묶어서 다시 말하면 排日運動者들을 모아서 排日의 기세를 올리게 하는 척하면서도 은 근히 전체를 약화시키는 高度의 수단을 펴나가는 행동이었다. 그는 抗日運動家들을 돕는 척 하였지만 실제로는 伊藤統監과의 관계도 이루어졌던 것 같다. 大垣丈夫가 술회한 내용 중에 하루는 伊藤統監이 자기를 官邸로 拘致하더니 한 生으로서 無援의 몸으 로 韓國人과 잘 교제하여 조직한 自強會의 취지, 목적, 그리고 평 생토록 이루어 놓은 한국인에 대한 설득 등의 그 내용에 대해서는 下僚들의 보고에 의하여 잘 알고 있다면서 노고를 치하하였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술회가 사실이라면 統監은 무단정치를 행하는 한 편 大垣丈夫의 행동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서 한국인의 排日氣勢 를 약화시키는 양면 작전을 폈던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본 大垣의 행동은 대부분 그 자신의 회고담에 의한 것이 므로 그 신빙도가 문제가 안 될 수 없다. 韓日合併이 이미 눈앞에 다가오고 이제 과정만이 남았던 때이므로 大垣은 자기의 功名心 과 노고를 자랑삼아 過大評價하여 말하지 않았나 하는 점을 유의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日本人으로서 自國의 國家基本政 策에 반대하면서 전연 무보수로, 자기의 돈을 써가면서 韓國의 독 립을 위하여 공헌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은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많은 것이다. 그럼 이토록 위험하던 日本人, 침략국으로서 적대 관계의 인물 을 왜 志士들이 모인 大韓自強會의 고문으로 채용하였는가, 그 내

131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막이 확실치 않으나 이미 그는 大韓自強會의 창립 당시부터 관여 하였고 또 그가 한국에와서 愛國志士들을 돕는 척하므로 그 표면 상의 행동을 보면서 그를 이용해 보려고 당시의 外交法律에 능통 한 사람이라 보기 때문에 그를 이용하여 보려는 의도와 또 날로 새로와지는 법률의 해석상 문제를 의뢰하여 보려는 계획이 大垣 丈夫는 그대로 韓國志士를 역이용하려는 相互間의 相乘作用으로 나타났다고 생각되나 사실은 애국지사들의 생각대로만 되지 못하 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侵略과 抵抗이라는 雙方의 다른 목적에 대하여 相乘作用을 의도한 행동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韓國으로 오기 전에 東京에서 大韓問題硏究會長을 지내다 가 온 자로서 한국 침략의 일익을 담당한, 보다 고도화한 수단을 가진 민간인으로서 침략의 전위적인 역할을 담당한 자로 여겨지 는 것이다.21) 李鉉淙 21) 李鉉淙 大韓協會에 관한 硏究 亞細亞硏究 39號

132 Ⅱ. 近代敎育의 普及 1. 各級敎育機關 2. 敎科書 編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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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1. 各級敎育機關 1. 各級敎育機關 (1) 舊敎育의 遺產과 近代敎育의 發端 1) 舊敎育의 遺產 우리가 19세기 후반에 근대 교육을 시작할 무렵의 朝鮮王朝의 교육제도는 成均館 四學 鄕校 書院 및 書堂으로 구성되어 있 었다. 즉 高等敎育 기관으로 서울에 성균관이 있어 최고 학부의 구실을 하였고, 中等敎育 기관으로는 서울에 四學과 지방에 향교 와 서원이, 그리고 初等敎育 기관으로는 각 지방의 부락마다에 서 당이 있다시피 하였다. 그런데 이들 교육 기관은 오늘의 국민학교, 중 고등학교, 대학 과 같이 계단식으로 연결 계통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각각 독립된 교육 기관이었다. 그래서 그 구별을 명확히 규정짓기가 곤란하다. 다만 그 程度를 미루어 보면, 성균관은 대학, 四學 향교 서원은 중등학교, 서당은 초등학교에 해당한다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교육의 최고 행정 기관인 禮曹가 있어 成均館 四學 등 직할 학교를 유지 운영하고, 지방에는 道 觀察使 밑에 六房의 하 나로 禮房을 두어 교육에 관한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정 부는 이러한 교육 기관을 감독하기 위하여 學令과 經國大典을 비 롯한 제법규를 적용시키는 한편, 국력으로 교육을 장려하기 위하 여 물질적인 원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균관과 四學은 중앙 정부의 직할 학교이었던 만큼 國王이 養

135 Ⅱ. 近代敎育의 普及 士費라는 이름으로 下賜하는 田土 米布 魚脯 柴場 金錢 및 書籍으로, 향교는 지방 관청의 관할 밑에서 중앙에서 보조한 基金 으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서원과 서당은 私學機關이었으나, 서원 에 대해서는 田土의 免税와 같은 특전을 내렸다. 서당은 순수한 私設 교육 기관으로 기본 자산이나 인가를 요하 는 것이 아니므로, 누구나 뜻있는 사람이면 訓長 한 사람과 방 한 칸으로써 마음대로 설치할 수 있었다. 그 설립의 종류는 다음 네 가지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이는 훈장 자신이 자기의 생계 혹은 교 첫째, 訓長自營 書堂 육 취미로 세운 서당이다. 이는 洞中에 家勢가 넉넉한 이가 자기 둘째, 有志獨營 書堂 집의 자제 및 그 친척의 자제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훈장의 給費를 단독으로 부담하고 세운 서당이다. 때로는 이웃집의 자제에게도 무료로 修業케 하였다. 이는 洞中의 有志 몇 사람이 組合하여 훈 세째, 有志組合 書堂 장을 초빙하고 교실을 마련하여 조합원의 자제에게만 교육시킨 서 네째, 村組合 書堂 이는 마을 전체가 조합하여 훈장을 두고, 당이다. 물론 훈장의 衣 食 住 및 給費는 조합원이 부담했었다. 마을 아이들을 가르친 서당이다. 서당은 순수한 민간의 힘에 의한 초등 교육 기관으로 국민 대중 의 文字敎育은 물론 그 마을의 道德的 禮讓的 鄕風을 수립하고 순화 하는 데도 큰 공헌을 한 교육 기관이었다. 이들 각급 학교의 교육 내용은 주로 儒敎的 經書와 中國의 역 사 문학 등이었다. 학교의 정도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그 내용이 中國的인 것이라는 점과 모든 서적이 漢文書라는 점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었다. 비록 이러한 교육 내용이 儒敎的이었다

136 1. 各級敎育機關 고 하더라도 국가가 文을 숭상하여 국력으로 교육을 장려한 것인 만큼 그것이 이 땅의 문화에 끼친 영향은 아주 컸던 것이다. 이로써 보면, 우리에게는 오랜 전통과 제나름의 체제를 갖춘 교 육 제도와 내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19 세기 말까지도 다른 文明國을 意識하지 못하고, 전근대적인 교육 기관에서 교육을 하였다. 교육 내용 역시 유교의 旣定敎科形式에 맞추어 性理學說에 관계된 經典만 읽히고, 그밖의 것은 다른 雜書 와 함께 읽지 못하게 했다. 물론 이러한 교육 제도와 내용은 현대적 의미로 체계를 갖춘 것 이라고 할 수 없다. 2) 近代敎育의 發端 여기서, 近代敎育이란 말은 우리들이 흔히 쓰는 開化敎育이라는 말이다. 즉 종래 漢學敎育에 대한 學校 중심의 교육, 또는 舊來의 전통적 儒敎敎育에 대하여, 이것을 拂拭하고 西歐의 新文化를 섭 취하려는 교육을 말한다. 19세기말까지 우리나라 교육은 여러가지 면에서 전통적 유교 교육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는 다른 文明國을 의식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그러던 중, 鎖國主義者인 大院君이 高宗 10년(1873)에 드디어 政權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敵對勢力인 閔妃 一派에 의하여 축출된 셈이다. 이러한 국내 사정을 안 日本은 이것을 그들의 침 략적 의도에 입각한 通商條約을 강요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그리하여 일본은 서구에서 사들인 군함 雲揚號를 江華島 水域에 불법으로 침입시켜, 韓國에 문호 개방을 강요해 왔던 것이다. 이때 별다른 대책을 갖지 못한 朝鮮 왕조는 부득이 우리 역사상

137 Ⅱ. 近代敎育의 普及 최초의 근대적 국제 조약을 日本과 맺게 되었으니, 이것이 1876 년의 江華島條約(丙子修好條約)이었다. 이 조약은 처음부터 欺瞞 的인 불평등 조약으로, 중요한 내용을 이루는 것은 開港 문제였 다. 그리하여 이 조약에 따라 1876년 10월에는 釜山을 개항하고, 1880년 4월에는 元山을, 1883년 1월에는 仁川을 개항하였다. 이를 계기로 외국 사정에 눈이 어두웠던 우리 정부도 당면한 형 세에 대비하기 위하여 新文化에 대한 지식을 시급히 요청하게 되 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1881년에 紳士遊覽團을 日本에 파견하였 다. 이 일행은 일본의 각종 시설을 시찰하기 위한 專門委員의 파 견으로 약 70여일간 일본의 각지를 다니면서 행정 기관을 비롯하 여 산업 군사 교육 등의 상황을 상세히 살폈다. 특히 교육 기관 校戶山學校海軍兵學校士官學校 등을 시찰했다. 으로는 農業學校 女學校 外國語學校 師範學校 大學 機關學 이때 신사유람단의 隨員으로 갔던 尹致昊는 이 해에 中村正直 의 同人社에, 兪吉濬은 그의 姉兄인 柳正秀와 같이 福澤諭吉의 慶 應義塾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는데, 이들은 우리나라 新敎育의 先導的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이 해(1881)에는 淸의 권고에 따라서 領選使 金允植이 인 솔하는 69명의 청년학도들도 天津에 파견되었다. 이들 유학생은 약1년간에 걸쳐 淸의 각 學堂과 工場에 가서 무기 화약 탄약의 제조법과 電氣 化學 製圖 製鍊 機械工學 등과, 그리고 外國 語를 배우고 돌아 왔다. 이때 이미 天津에서는 水師學堂과 水雷學 堂이 개설되어 航海와 機關 및 軍事實習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으 니, 우리 유학생도 여기에서 배운 것이 많았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벌써 국내에도 어느 정도 세계 정세에 눈을 뜬 젊 은 知識人들이 있었다. 이들은 하루 속히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받

138 1. 各級敎育機關 아들여 근대화를 달성해 보자는 이른바 開化運動을 전개했다. 사 실인즉, 위에 말한 集團的 遊覽도 이들 지식인에 의한 계속적인 上疏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시 1882년에는 朴泳孝 金玉均 徐光範 등이 일본에 가 서, 그 곳에 도입된 서구 문화를 살폈다. 반년 동안 일본 각지를 다니면서 본 明治維新 이후의 일본의 비약적인 發展相은 이들 청 년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이때 金玉均은 일본 朝野의 名士를 방문하여 그들의 國策을 탐 지하기도 하고, 일본의 선각자인 福澤諭吉 後藤家一郞 같은 인사 와도 친교를 맺었다. 또 그는 日本 駐在 歐美外交官과도 세계 정 세를 토론했고, 당시 在日本 監理敎宣敎會의 대표자인 매클레이 (R.S. Maclay) 목사에게 韓國에 대한 선교의 필요성도 역설하였 다. 그리고 그는 日本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인재를 양성할 계획도 세웠다. 그러던 차, 金玉均은 1883년 捕鯨使로 임명된 것을 기회로 삼 아 釜山에 와 있는 日本인에게 典執을 잡히고 현금 2만 5천圓을 빚으로 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돈을 가지고 徐載弼 등 61명의 유 학생을 선발해서 일본 유학을 주선하였다. 이러한 일은 여태까지 밖으로부터 오는 近代敎育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韓國이 능동적으로 외국에 나가 근대 교육을 배 워 오려고 한 획기적인 조처였다. 한편, 또 우리 정부는 일본과의 문호 개방을 계기로 1882년 美 國을 비롯하여 英國 獨逸 이탈리아 등 歐美 여러 나라와도 修 好條約을 맺어 나갔다. 이로써 韓國은 완전히 문호를 개방하여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고, 또한 西洋 新文明의 輸入은 必至의 사실로 되었다

139 Ⅱ. 近代敎育의 普及 그러나 新文明의 수입은 동시에 일본을 위시한 列強의 침략을 수 반하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日本을 비롯한 열강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하루 속히 自主的 近代化와 富國強兵을 실현하여야 하였다. 그 방 법은 먼저 교육을 振興시켜 新知識을 가진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었는데, 이 신지식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近代學校가 나 타났다. 이 시기에 新敎育을 가르치기 위하여 설립된 학교가 元山 學校 同文學 育英公院이다. 日本과 江華島條約에 의거하여 開港한 釜山 元山 仁川 세 開 港場에는 바로 日本人 居留地가 만들어지고 그들 商人들이 대거 진출하였기 때문에 민족의 권익을 수호하여야 할 對決場이 되었 다. 특히 德源邑民들은 元山開港場에서의 日本 상인들의 침투를 직접 체험하고서는 이에 대한 대응책을 세워야 할 것을 切感했다. 이에 德源府의 鄕中父老들은 穩健開化派 德源府使 鄭顯奭에게, 鄕中의 年少한 聽中子弟를 뽑아 신지식을 교육하여야 할 터이므 로 자기들이 學校設立基金을 모을 터이니 새로운 근대학교를 설 치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鄭顯奭은 당시 西北經略使이던 魚允 中과 元山港의 通商을 담당하던 統理機務衙門의 主事 鄭憲時의 지원을 받으면서, 1883년에 德源邑民들의 요청에 응하여 元山學 校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1) 이 학교의 초기 校名은 리다가 뒤에 元山學校또는 그냥 學舍라 불 元山學校로 명명되었다. 설립 초기에 班 편성은 文藝班 50명과 武藝班 200명으로 나누 고, 문예반은 經義를, 무예반은 兵書를 가르쳤다. 그리고 文武 공 1) 愼鏞廈 p.53 우리나라 最初의 近代學校 文學과 知性 제5권 제1호 1974,

140 1. 各級敎育機關 차차 外國語法律地理萬國公法(國際法) 등으로 늘렸다. 동 과목으로 算數 格致(物理) 農業 養蠶 採礦 등을 강의했고 2) 이 元山學校는 외국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韓國人이 자발적 으로 誠金을 모아 이루었다는 점과, 또 外國人 혹은 官의 主導에 앞서 民衆의 광범한 近代化 의욕으로 설립되었다는 점에 그 역사 적 의의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후, 元山學校는 甲午更張 무렵 小學校 中學校로 분리되고, 소학교는 日帝下에서 처음에 元山普通學校로, 그 뒤에는 元山第一 國民學校가 되어 해방 당시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이 무렵 정부도 근대적인 官學을 설립하게 되었는데, 이 것이 바로 同文學(一名 通辯學校, 1883)과 育英公院(Royal English school, 1886)이다. 同文學은 1882년 壬午軍亂 뒤 淸國 의 세력이 뻗치면서, 獨逸人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ӧ llendorff)가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協辦 兼 總税務司로 부임하여 1883년 8월(양력)에 通商衙門의 附屬機關으로 설립하였다. 여기 에서는 英國人 할리팩스(T.E. Halifax)가 主務 敎師로 있으면서 주로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니 당시 同文學은 학교라기 보다 일종 의 通譯官 養成所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育英公院의 설립은 韓美修好條約 체결 후, 報聘大使로 美國에 갔던 閔泳翊의 귀국으로 본격화되었다. 美國 視察로부터 돌아온 그는 美國 문물의 탁월함을 高宗에게 보고하는 동시에 현대식 학 교의 설립을 제의하였다. 이에 高宗은 美國 정부에 이러한 학교 를 세우고 가르칠 수 있는 교사 세 사람을 추천해 줄 것을 요청 하였다. 이 요청에 따라 뉴욕에 있는 유니온 神學校 학생인 길모어 2) 愼鏞廈 前揭論文 pp

141 Ⅱ. 近代敎育의 普及 (G.W. Gilmore) 벙커어(D.A. Bunker) 헐버트(H.B. Hulbert) 가 추천되어, 이들은 1886년 7월 4일 韓國에 와서 동년 9월부터 수업을 시작하였다. 길모어는 育英公院의 설립 경위를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3) 나는 이 임명을 받은 사람들 중의 하나이었는데, 우리는 1884 년이나 1885년초에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1884년 늦은 겨울에 개화파의 지나친 열성으로 말미암아 혁명이 폭발되고, 따라서 우리의 준비는 무효로 돌아가는 양 싶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우리의 출발이 1886년까지 연기되기에 이른 것 밖에 없었다. 우 이 리는 동년 봄에 소집되어 7월 4일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미 우리가 居住할 집은 마련되어 다소의 수리가 되어 있었고, 學校校舍와 학생 기숙사도 준비 중에 있어 장래가 유망한 듯이 보였다. 9월말에 이르러 우리는 수업을 시작하였다. 학생은 貴族家庭의 자제이었고 國王이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처음에 우 리 班에는 35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아무도 英語에 대한 지식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알파벳부터 시작하여야 했다. 통역 세 사람 이 있어 우리 선생 3인에게 한 사람씩 배정되어 있었다. 育英公院은 左院과 右院으로 나누어, 左院은 年少한 文武官吏 를 택했고, 右院은 일반 선비 중에서 재주 있는 자를 가려 그 才 質에 따라 입학케 하였다. 또 左院의 학생은 집에서 통학하되, 右 院의 학생은 寄宿舍에서 생활케 했다. 그러나 新敎育運動의 試圖로서 세워졌던 育英公院은 그 설립 자체가 舊來의 전통과 특권을 찾고, 새 사회에 적응성이 없는 兩 班高官의 子弟들만 입학시켰으므로, 이 기관을 통해 새 문화를 받 3) G.W. Gilmore, Korea from its Capital, Philadelphia: The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1892, pp

142 1. 各級敎育機關 아들이기란 매우 힘들었다.4) 그러다가 초빙해 온 교사들도 점차 학교와 관계를 끊게 됨에 따라 결국 育英公院은 1894년에 완전히 폐지되고 말았다. 이로써 보면, 이상 말한 近代學校는 우리가 현대적 방식을 빌어 근대 교육을 시도한 최초의 학교라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歐美 諸國으로부터 직접적으로 近代敎育을 受容하여, 본격적으로 일반 교육을 목적으로 한 근대 학교의 설립은 新敎 宣敎師들의 來駐로 부터 시작되었다. (2) 近代學校의 設立過程 1) 미션 學校의 設立 ㄱ. 新敎 宣敎師의 來駐 천주교가 韓國에서 전파되기 시작하고 저 유명한 殉敎의 역사 를 거듭한 후, 약 1세기가 지나 이 땅에 新敎가 들어왔다. 신교의 전래는 純祖 32년(1832)에 독일계 和蘭 선교사 구쯜라프(C.A. Gutzlaff)가 傳道할 목적으로 온 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신교가 본 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高宗 19년(1882) 5월에 미국을 비롯하여 諸外國과의 修好條約을 체결한 후부터이다. 韓 美修好條約이 체 결된 후, 정부는 1883년 여름에 報聘大使로 閔泳翊을 임명하고 美國을 방문케 했다. 그 일행이 미국에 도착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으로 향하 여 기차편으로 대륙을 횡단하는 중에 벌티모어(Baltimore)시에 있는 가우쳐女子大學長인 가우쳐(John F. Goucher)를 만났다. 그 4) 李光麟 韓國開化史硏究 一潮閣 1969, p

143 Ⅱ. 近代敎育의 普及 는 閔泳翊 일행으로부터 우리나라의 사정을 청취하고 선고의 필 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그는 한국이 훌륭한 宣敎地區가 될 수 있다고 믿고, 1883 년 11월 6일자로 監理敎 外地宣敎本部에 韓國 선교를 즉시 시작 하기를 권유하는 편지를 내었다. 그러나 선교 본부는 時期가 아직 이르다는 이유로 가우쳐의 권유를 거부하는 회답을 하였다. 다시 가우쳐는 자기의 뜻을 버리지 않고, 1884년 1월, 당시 日本에서 선교하고 있던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S. Maclay)에게 한국에 선교할 준비로서 우리나라를 시찰하고, 그 사정을 보고해 달라는 電文을 보냈다. 이 전문을 받은 매클레이는 1884년 6월 24일 仁川에 도착하여, 7월 3일에 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金玉均을 통하여 高宗으로부터 敎育과 醫療事業의 允許를 받았던 것이다. 그 후, 이 보고가 선교 본부에 전달됨에 따라 1884년 9월 22일 에 美國 北長老敎 醫療 선교사 알렌(H.N. Allen)이 서울에 도착 하였다. 그 다음날 알렌은 美國公使 푸우트(Luciuse H. Foote)를 방문하고 來韓의 이유를 말한즉, 푸우트 公使는 우리 정부에서 아 직도 斥邪政策을 시행하고 있으므로 공개 선교 사업은 시기상조 라 하니, 알렌은 美國 公使館 醫官이란 이름을 빌어 가지고 있으 면서 선교의 길을 찾고자 했다. 한편 1884년 말에는 美國 北長老敎 선교사 언더우드(H.G. Underwood), 美國 北監理敎 선교사 아펜셜러(H.G. Appenzeller), 스크 랜톤(M.F. Scranton) 부인 등도 韓國에 대한 선교의 命을 받고, 언더우드는 1885년 1월에, 아펜셜러와 스크랜톤 부인은 2월에 각 각 日本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매클레이 집에 머물면서 韓國에 입 국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이들은 1884년 12월에 일어난 甲

144 1. 各級敎育機關 申政變으로 인하여, 韓國의 情勢가 어느 정도 안정될 때까지 기다 릴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韓國人으 로 初代 敎人의 한 사람이 된 李樹廷을 만나 우리말을 배우는 한 편, 甲申政變으로 日本에 亡命 중이던 朴泳孝를 만나 韓國의 사정 을 묻기도 하였다. 이때 朴泳孝는 이들에게 아래와 같이 말했다.5) 선교사들이 韓國에서 할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 백성이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敎育과 基督敎化입니다. 선교사 들과 또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를 통해서 우리 백성을 교육하고 향상시켜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재래 종교는 지금 기운이 다 했읍니다. 그리하여 基督敎에로의 改定의 길이 환히 열려 있 읍니다. 기독교 敎師들과 事業人들의 一團은 우리나라 어느 모 퉁이에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합법적인 개혁을 하기에 앞서 먼 저 우리 백성은 교육을 받아야 하며 基督敎化되어야 합니다. 위의 朴泳孝의 말은 당시 우리나라 實情을 올바르게 표현한 말 이라 할 수 있다. 이 말에 힘입은 언더우드와 아펜셜러 부부는 1885년 3월 31일 日本을 떠나 4월 5일 復活節에 仁川에 도착하 였다. 그러나 이들이 韓國에 첫 발을 들여놓은 감격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서울 駐在 美國 代理公使 폴크(George C. Foulk)는 이들에 게 전년 12월 4일에 일어난 甲申政變으로 외국 여자가 들어와 살 기에는 아직 이르니, 韓國의 정치적 불안이 解消될 때까지 日本에 가서 대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를 하였다. 이로 인하여 獨身인 언더우드는 서울로 직행하게 되고, 아펜셜 5) F.A. McKenzie, The Tragedy of Korea, Reprinted by Yonsei University Press, 1969, pp

145 Ⅱ. 近代敎育의 普及 러는 夫人(胎中) 때문에 부득이 그 배로 다시 日本에 돌아가게 되 었다. 그 후, 아펜셜러 부부는 동년 6월에 스크랜톤 부인과 함께 목적지 韓國 땅에 다시 오게 되었다. 그러니 이들 선교사의 계보를 볼 때, 그 시초에서부터 新敎의 전파는 美國的 모델에 따라서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이렇게 여러 모로 韓國 선교에 대한 기운이 조성되자, 각 敎派에 서는 때를 놓치지 않고 선교사를 派送했다. 1889년에는 濠洲 장로 교회 데비스(J.H. Davies M.T. Davies) 男妹가 와서 慶尚道 지방 을 중심으로 교육 및 의료 사업을 하였다. 다시 1890년에 英國 聖 公會가 仁川과 서울에, 이 해 浸禮敎는 江原道에, 1892년 美國南長 老敎는 全羅道에, 1896년 美國南監理敎는 京畿道와 江原道에, 1898년 카나다長老敎는 咸鏡道에, 1904년 安息敎는 서울과 平安 道에, 1907년 聖潔敎도 서울과 平安道에, 1908년 救世軍은 서울에 각각 선교 구역을 정하고 傳道 교육 의료 사업 등을 하였다. 이들 선교사들은 이 땅에 來駐하자, 곧 마태福音 제9장 35절에 따라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고(Teaching), 복음을 전파하며(Preaching), 모든 병들고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Healing) 주는 것으로 布敎의 사업을 시작하였다. 즉 교육과 의료를 중요한 포교 수단으 로 삼아 의료에 의해서 韓國人의 불행을 구하고, 교육에 의해서 啓蒙의 방법을 강구하여 서양의 근대 문화를 이 땅에 소개하는 데 주도적 소임을 다했다. 그리고는 근대적 교육 기관인 미션 學校 (Mission School)를 설립했다. 이에 따라 많은 수의 韓國人이 基督敎徒가 되고, 또 이들 학교 를 통하여 서구 문화와 접촉을 갖게 됨으로써 근대 교육의 원리를 수용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언더우드(H.H. Underwood) 는 선교사의 입국과 그 활등이 韓國의 교육에 새로운 局面을 전개

146 1. 各級敎育機關 시켰다6)고 보았다. ㄴ. 미션 學校의 設立 의료 선교사 알렌은 1884년 9월에 來駐하여 미국 영국공사관 의 公醫로 있으면서 선교의 길을 찾았다. 그러던 차 1884년 12월 4일에 일어난 甲申政變으로 守舊派의 閔泳翊이 被刺되어 그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당시 이름 있는 漢醫를 14명이나 불러들여 그를 치료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 다. 이에 알렌 의사가 그를 맡아 치료한 결과, 그의 상처는 3개월 만에 완전히 낫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알렌은 朝廷의 두터운 信任을 얻게 됨과 동시에 또한 서양 의술의 우수성이 인정되었다. 한편 알렌의 日記에 의하 면, 1885년 1월 27일에 閔泳翊은 銅錢 1만 文을 보내어 謝意를 표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알렌은 이러한 물질적 보수보다 이 기 회를 이용하여 자기 사업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미국 공사관을 통 해 우리 정부에 청하여 國立病院 설립을 제의하였다. 이에 정부는 漢城 北部 齋洞에 있던 洪英植의 舊家를 알렌에게 맡기어 병원을 설립하게 하고, 겸하여 약품비도 부담하게 되었으 므로, 1885년 4월 10일에 廣惠院(濟衆院)이란 이름으로 國立病 院이 開設되었다. 이것이 바로 韓國 최초의 근대적인 병원의 시작이다. 여기서는 의료뿐만 아니라, 일종의 의학 실습 교육으로 1886년 3월에 학생 16명을 뽑아서 서양 의학도 학습케 하였으니, 이것이 세브란스醫 學專門學校의 모체이며, 이로부터 延世大學校의 역사가 시작된 것 이다. 6) H.H. Underwood, Modern Education in Korea, New York: International Press, 1926, p

147 Ⅱ. 近代敎育의 普及 아펜셜러는 1885년 6월 21일 인천에 두번째 상륙하여 7월 19 일 서울에 들어와 1개월 먼저 와서 있는 의사 스크랜톤의 집 한 채를 사서 들고 방 두 칸 벽을 헐어서 조그마한 교실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 해 8월 3일에 두 학생을 얻어 수업을 시작하였다. 이때 高宗은 아펜셜러가 열심으로 두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 고, 또 앞으로 여러 학생을 교육할 학교를 세울 뜻을 가지고 있다 는 말을 듣고 곧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高宗은 1886년 6월 8일 에 인재를 배양하는 培材學堂이라는 校名과 額(학교 간판)을 내리었다. 당시 개교의 사정을 아펜셜러는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7) 일종의 前哨戰 모양으로 우리의 宣敎學校는 1886년 6월 8일 에 시작되어 7월 2일까지 수업이 계속되었는데, 학생은 6명이 었다. 오래지 않아 한 학생은 시골에 일이 있다고 떠나버리고, 또 하나는 6월은 外國語를 배우기에는 부적당한 달이라는 이유 로 떠나버렷으며, 또 다른 학생은 가족에 喪事가 있다고 오지 않았다. 이들의 빈 자리는 自願하여 오겠다는 학생들로 그 일부 가 채워졌다. 10월 6일인 지금은 재학생이 20명이요, 실재 출 석하고 있는 학생 수는 18명이다. 이렇게 출발한 培材學堂은, 그 후 날로 늘어가는 학생을 수용하 기 위하여 큰 校舍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1887년에는 르네쌍스式 의 벽돌집이 美國民의 선물로 완성되었다. 한편 언더우드(H.G. Underwood)는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하 여 3일만에 廣惠院에서 化學과 物理學을 가르침으로써 韓國에 대 한 봉사의 사업을 시작하였다. 7) L.G.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Reprinted by Yonsei University Press, 1970, p

148 1. 各級敎育機關 그러다가 그는 1886년 서울 貞洞 자기 집에 붙어 있는 건물을 이용하여 孤兒院 형식의 학교를 창설하니, 이것이 곧 오늘의 儆新 中 高等學校의 前身이다. 이 기관을 설치하게 된 경위를 길모어(G.W. Gilmore)는 아래 와 같이 말하고 있다.8) 언더우드가 접촉하게 된 일부의 男兒들이 처하여 있는 실정 으로 보아, 그는 孤兒院 설치의 필요를 느끼게 되고, 이 계획을 韓國 사람을 통하여 알게 된 國王(高宗)은 이를 승락하였다. 처음에 들어온 것은 모두 男兒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기관에서 먹이고 재우고 가르치게 된 어린이의 수효가 40명 이상이 되었다. 그 후 이 孤兒院 형식의 언더우드學堂은 예수교學堂(1891) 민노아學堂(1893) 儆新學校(1905)로 교명을 바꾸어 가면서 培 材學堂과 더불어 新文化의 先導的 역할을 하였는데, 당시 金奎 植 安昌浩 등도 이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또 언더우드는 儆新學校를 세울 때부터 이를 擴張하여 大學의 증설을 꾀하려고 하였으나, 이때 서울의 대학 설립은 在韓 宣敎師 간에 그리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初志를 굴하 지 않고 노력한 결과, 드디어 1915년 3월에 이르러 미국 기독교 북장로교, 남북감리교, 카나다 장로교 선교부연합위원회의 管理로 서울 鍾路 中央基督敎 靑年會館(YMCA)을 빌어 儆新學校 大學 部 라는 이름으로 개학하게 되니, 이것이 延禧專門學校의 시작이 되었다. 1885년 6월에 이 땅을 밟은 감리교 女宣敎師 스크랜톤 부인은 1886년 5월경에 여학생 하나를 상대로 학교를 시작하니, 이것이 8) G.W. Gilmore 前揭書 p

149 Ⅱ. 近代敎育의 普及 우리나라 여학교의 濫觴이 된 梨花學堂이며, 또한 지금까지 우리 나라 여성 교육의 總本山이 되고 있다. 스크랜톤 부인이 梨花學堂을 창설한 것은 실로 韓國에서는 혁 신적인 일이었다. 당시 男尊女卑의 사상으로 남자는 교육을 받아 야 하지만, 여자는 교육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던 시대에 여학교를 시작한 것은 참으로 勇斷性 있는 일이었다(설립 과정은 女學校의 設立과 女性敎育의 普及 참조). 1894년에는 平壤에 監理敎系의 光成學校 崇德學校 正義女學 校 등이 설립되어 지방 미션學校의 嚆矢가 된 뒤에 1897년 宣敎 部의 地方學校 설치에 관한 정책이 결정되자, 선교부가 설치되어 있는 전국 주요 도시마다 남녀 중학교가 설립되어 나갔다. 그리하 여 이들 학교는 청소년 교육의 책임을 거의 專擔하였다. 그러다가 1906년에는 崇實學校에 大學部가, 또 1910년에는 梨花學堂에 大 學部가 각각 설립되어 고등 교육의 임무도 담당했다. 참고로 韓末에 설립된 주요 미션 學校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9) 韓末 미션 學校 年代 校名 廣惠院(延世大醫大前身) 培 材 學 堂 梨 花 學 堂 儆 新 學 校 光 成 學 校 崇 德 學 校 正 義 女 學 校 貞 信 女 學 校 一 新 女 學 校 正 進 學 校 攻 玉 學 校 敎派 감리회 감리회 장로회 감리회 감리회 감리회 장로회 장로회 감리회 감리회 9) 孫仁銖 韓國近代敎育史 延世大學校 出版部 1971, pp 設立場所 서 울 서 울 서 울 서 울 평 양 평 양 평 양 서 울 동 래 평 양 서 울

150 1. 各級敎育機關 崇 信 永 培 盲 明 平 崇 樓 貞 德 好 進 懿 永 啓 信 保 義 韓 美 藥 須 信 紀 新 昌 懿 實 學 軍 學 化 女 學 花 女 學 啞 學 信 學 壤 神 學 義 女 學 氏 女 學 明 女 學 明 學 壽 敦 女 學 誠 女 學 昌 學 明 學 聖 學 聖 學 聖 女 學 明 學 英 書 理 欽 學 峴 學 皮 亞 女 學 明 女 學 全 女 學 興 學 信 學 貞 學 校 校 校 校 校 校 校 校 校 校 校 校 校 校 校 校 校 校 校 院 校 校 校 校 校 校 校 校 장로회 감리회 감리회 감리회 감리회 장로회 장로회 장로회 감리회 장로회 감리회 감리회 장로회 감리회 감리회 장로회 장로회 장로회 안식교 감리회 감리회 천주교 장로회 장로회 장로회 장로회 장로회 감리회 평 서 인 서 평 재 평 평 원 목 원 개 원 해 공 대 선 선 순 개 개 서 광 대 전 전 마 해 양 울 천 울 양 령 양 양 산 포 산 성 산 주 주 구 천 천 안 성 성 울 주 구 주 주 산 주 이 밖에도 선교사들은 이름 있는 미션 學校로서 群山에 永明學 校, 順天에 聖恩學校, 開城에 松都學校, 木浦에 永興學校, 光州에 崇一學校, 平壤에 崇仁學校, 江界에 英實學校, 城津에 普信學校 등 을 세웠다. 1910년 2월까지 설립된 미션 學校의 宗派別 통계를 보면, 장로

151 Ⅱ. 近代敎育의 普及 파가 501校, 감리파가 158校, 聖公會가 4校, 安息敎가 2校, 宗派未 詳 84校, 각 敎派合同 1校, 天主敎가 46校로써 新舊敎派가 세운 학 교가 모두 796校이 었다.10) 이 중 新敎 敎派만이 666校를 세웠다. 1910년 8월 韓日合併 직후, 寺內正毅 총독도 그의 최초의 施政 사립중학교 중의 대부분은 선교사의 경영인데, 생도 수가 20만을 넘으니 普通學校의 생도수보다 훨씬 많다 고 하 演說에서 11) 여 미션 學校의 優位性을 인정하였다. 이로써 보면, 오늘날 韓國近代學校의 元祖라고 할 수 있는 廣惠 院(延世大學校 醫科大學 前身)과 培材學堂, 그리고 女學校의 濫觴 이 된 梨花學堂이 모두 선교사의 손에서 창설된 것이다. 그러니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개척자인 칼빈(J. Calvin)이나 녹스(J. 敎會 옆에 學校라고 한 말은 한국의 경우 學校 옆 에 敎會라는 말로 代置되었다. Knox)의 2) 官 公立學校의 設立 ㄱ. 甲午更張과 新學制의 制定 우리나라가 制度上으로 新學制를 실시하여 官學을 세운 것은 1894년 甲午更張으로부터이다. 갑오경장은 그 경위가 어찌 되었 던 간에 수천년간 이 나라를 지배해 온 舊秩序를 일단 비판 배척 하고, 새로운 世界潮流에 발맞추어 이 나라를 근대화시켜 보려는 노력의 발로였다. 교육 개혁만 보더라도, 종래 學事를 管掌하던 禮曹를 폐지하고 교육 문제를 전담하기 위하여 1894년 6월에 學務衙門(다음 해 學 部로 개칭)을 두는 동시에, 또한 동년 7월 3일에는 科擧制度의 폐 10) 俵孫一 韓國敎育の現狀 pp ) 大野謙一 朝鮮敎育問題管見 京城 朝鮮敎育會 1936, p

152 1. 各級敎育機關 지를 의결 공포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종래의 유교 교육을 拂拭하고, 근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新敎育의 전통 확립을 謀 索한 국가 정책이다. 이는 1894년 7월에 새로 출발한 學務衙門의 아래와 같은 告示를 봄으로써 알 수 있다.12) 돌이켜보건대 時局은 크게 바뀌었다. 모든 制度가 다 함께 새 로와야 하지만 英才의 교육은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다. 그러므 로 나라에서 小學校와 師範學校를 세워 먼저 서울에 행하려하 니, 위로 公卿大夫의 아들로부터 아래로 庶民의 자제에 이르기 까지 다 이 학교에 들어와 배워 아침에 외고 저녁에 익히라. 그 리하여 장차 힘을 길러 시대를 救하고 內修와 外交에 각각 크게 쓰고자 하나니 진실로 좋은 기회이다. 앞으로 大學校와 專門學 校도 차례로 세우려 한다. 무릇 뜻있는 자는 一心으로 가르침을 받들어 聖世를 이루려는 大志를 버리지 말라. 또 1895년 1월 7일에는 高宗이 韓國 최초의 헌법이라고 할 수 國中의 聰明한 子 弟를 널리 파견하여서 외국의 學術과 技藝를 傳習시킨다고 하 있는 洪範 14條를 선포했는데, 그 제11조에 여, 서양의 근대 교육을 받아들일 것을 示唆했다. 다시 1895년 2월에는 전국민에게 敎育詔書를 내리었다. 여기서 는 근대적 국가를 세움에 있어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 고 있다.13) 즉 세계의 形勢를 두루 살펴 보건대, 富하고 強하며 독립하 여 雄視하는 모든 나라는 다 국민의 지식이 開明하였다. 이 지 식의 개명은 교육의 善美로 되었으니, 교육은 실로 국가를 보존 하는 근본이다. 그러므로 院이 君師의 자리에 있어 교육의 책임 12) 增補文献備考 學校考 13) 增補文献備考 學校考

153 Ⅱ. 近代敎育의 普及 을 스스로 맡노라. 또 교육은 그 길이 있는 것이니, 헛된 이름 이제 朕이 교육의 綱 과 實用을 먼저 분별하여야 할 것이다 領을 보이니, 헛 이름을 물리치고 실용을 취하도록 하여라. 첫째는 德養이니, 五倫의 行實을 닦아 綱規를 문란케 하지 말고 풍습을 가르치며 퍼뜨려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의 행복을 증진시킬지어다. 둘째는 體養이니, 동작을 떳떳이 하여 부지런히 힘쓰기를 주로 하며 게으름과 편안함을 탐내지 말고, 괴롭고 어려운 것을 피하지 말며, 그대의 근육을 굳게 하고 뼈대를 튼튼히 하여서 康壯하고 병 없는 樂을 누려 받으라. 세째는 智養이니, 사물의 이치를 깨쳐 나의 知를 충실케 하되 타고난 재능껏 窮理하여서 좋고 미운 것과 옳고 그른 것과 길고 짧은 데 머물지 않으며, 내 것과 남의 것의 구역을 세우지 말아서 자세히 연구하여 널리 통하기를 힘쓰라. 그리고는 한 몸의 私를 꾀하지 말고 公衆의 益을 도모할지어다. 가로되, 이 세가지는 교육의 紀綱이니라. 朕은 정부에 명하여 學校를 널리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며 그대들 臣民의 學識으로써 國家中興의 大功을 賛成케 하련다. 그러니 그대들 臣民은 忠君하 고 愛國하는 心性으로 그대의 德과 몸과 智를 기를지어다. 王室의 안전은 그대들 臣民들의 교육에 있고, 國家의 富強도 그대들 臣民 의 교육에 있다. 이와 같이 정부가 新敎育을 통하여 국가를 中興하려는 熱意를 보이고 있을 때, 당시 언론기관들도 정부를 독려하여 교육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독립신문의 아래와 같은 논설에서도 살필 수 있다.14) 14) 독립신문 1896년 5월 12일자 논설

154 1. 各級敎育機關 정부에서 학교를 지어 인민을 교육하는 것이 정부의 제일 소 중한 직무요, 다른 일은 아직 못하더라도 정부에서 인민 교육은 하여야 할 것이다. 나라가 지금은 약하고 백성이 어두워, 만사 가 남의 나라만 못하고, 남의 나라에 업수히 여김을 받으나, 조 선도 인민을 교육만 하면 외국과 같이 될지라. 지금 자식을 교육하는 것이 곧 봄에 씨뿌리는 것이니, 추수하고 싶은 부모 는 자식을 교육시키기를 봄에 씨뿌리는 줄로 생각하기를 바라 노라. 이러한 敎育立國의 정신에 따라, 정부는 교육을 통한 국가 중 흥의 理想을 실현하기 위하여 1895년 4월에 먼저 敎師 양성을 목적으로 한 漢城師範學校官制를 공포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최 초의 現代式 學校法規라 하겠다. 그 뒤로 정부는 계속하여 諸學 校官制와 規則을 제정하였는데, 이를 年代順으로 표시하면 아래 와 같다. 諸 學 校 官 制 制 定 연 월 일 漢城師範學校官制 外國語學校官制 成均館官制 小學校令 漢城師範學校規則 成均館經學科規則 小學校規則大綱 補助公立小學校規則 醫學校官制 中學校官制 商工學校官制 外國語學校規則 農商工學校官制 1895년 4월 16일 1895년 5월 10일 1895년 7월 2일 1895년 7월 19일 1895년 7월 23일 1895년 8월 9일 1895년 8월 12일 1896년 2월 20일 1899년 3월 24일 1899년 4월 4일 1899년 6월 24일 1900년 6월 27일 1904년 6월 8일

155 Ⅱ. 近代敎育의 普及 이로써 정부는 甲午更張으로부터 1905년 乙巳條約이 체결되기 까지의 약 10년간에, 형식상으로나마 舊敎育制度를 폐기하고 近 代的 敎育制度를 수립하게 되었다. ㄴ. 新學制에 依한 官公立學校의 設立 정부는 이 새로운 학제에 의하여 官學을 설립하게 되었다. 갑오 경장 그 자체가 日本의 권유로 이루어졌던 것인만큼, 이때에 제정 된 新學制와, 이에 따른 官學도 대체로 日本의 것을 모방한 것이 었다. 그 제도와 목적이 그랬고, 또한 敎科目이 그러하였다. 특히 小學校 中學校 師範學校의 제도에서는 이것이 현저히 드러나고 있다. 당시 日本은 이 세 종류의 학교를 尋常과 高等 두 계단으로 나 누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小學校와 中學校를 이 두 단계로 나누었고, 그 수업 연한에 있어서도 대략 같다. 오직 우리나라의 경우는 師範學校를 尋常과 高等 두 계단 대신에 本科와 速成科로 나누었을 뿐이다.15) 이것은 교사가 시급히 요청되던 당시의 사정에 비추어 취하여 진 非常措置였을 것이다. 小學校 小學校令은 1895년 7월 19일 勅令 제145호로 제정 공 포되었다. 이는 모두 4장 29조로 되어 있는데, 同令에 의하여 비 로소 초등 교육의 官制가 정하여졌다. 同令에 의하면, 小學校는 兒童 신체의 발달에 鑑하여 국민교육 의 기초와 그 생활상에 필요한 보통 지식 및 기능을 줌을 목적으 로 하고(제1조), 소학교를 官立 公立 私立의 세 종류로 나누었 다. 그 財源에 있어서는, 官立은 國庫, 公立은 府 혹은 郡, 私立은 私人의 부담으로 했다(제2 3조). 그 編制는 尋常과 高等의 두 科 15) 吳天錫 韓國新敎育史 現代敎育叢書出版社 1964, p

156 1. 各級敎育機關 로 나누었으며(제6조), 수업 연한은 尋常科 3년, 高等科 2년 또는 3년으로 정하였다(제7조). 그리고 만 8세로부터 15세까지의 8년 간을 學齡으로 정하였으며, 각 府 郡은 그 管內의 학령 아동을 취학시킬 公立小學校를 세우도록 했다(제16 17조). 이 밖에도 제8조에서 제10조까지는 敎科目을 규정하고 있다. 심상과의 교과목은 修身 讀書 作文 習字 美術 및 體操로 하 되, 時宜에 따라 學部大臣의 허가를 얻어 체조를 除하고 韓國地 理 歷史 圖畵 外國語 一科 흑은 數科를 加할 수 있게 하고, 女 兒를 위하여 裁縫을 더할 수 있게 했다. 국역사한국지리外國地理理科圖畵體操로 하되, 女兒를 그리고 고등과의 교과목은 수신 독서 작문 습자 산술 한 위하여 재봉을 가했고, 時宜에 따라 학부대신의 허가를 얻어 外國 語 一科를 加하고 외국역사 외국지리 도화 一科 혹은 數科를 除할 수 있게 했다. 위의 小學校令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제16조와 제17조이다. 이는 國民敎育制度를 의미하는 것으로, 근대 서구 학제에 의한 초 등 교육의 義務化를 뜻한다. 이와 같은 小學校令에 의하여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될 때까 지 小學校가 서울에 10개교, 지방에 50개교가 설립되었다. 우선 서울에는 1895년 小學校令 공포 직후 尋常小學校로 水下 뒤이어 渼洞養賢洞鑄洞安洞, 그리고 고등 소학교로 校洞이 洞 莊洞(뒤에 梅洞) 貞洞 齋洞 養士洞 小學校가 설치되고, 서게 되었다. 당시 고등소학교는 심상소학교 졸업생에게 시험을 거쳐 입학시켰다. 光州全州晋州大邱 春川平壤寧邊海州 咸興鏡城 이 기간 중 지방에는 각 觀察府 소재지 즉 水原 公州 忠州

157 Ⅱ. 近代敎育의 普及 에 공립심상소학교가 1개교씩 설립되고, 1896년에는 學部의 指定地 淸州 洪川 林川 南原 順天 靈光 慶州 安東 安岳 義 州江界成川原州江陵北靑 等地에 소학교가 세워졌다. 로서 開城 江華 仁川 釜山 元山 慶興 濟州 楊州 坡州 中學校 1899년 4월 4일 칙령 제11호로 제정 공포된 中學校官 制는 全文 17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교과목을 밝히지 않 고 있다. 實業에 就코자 하는 사람에게 正 德利用厚生하는 중등 교육을 보통으로 교수하는 處로 정함이라 同 官制에 의하면, 중학교는 (제1조)하고, 편제는 尋常科와 高等科로 나누었으며(제2조), 수업 연한은 7년으로 정하여 처음 4년을 尋常科 뒤의 3년을 高等科라 고 했다(제3조). 그리고 지방에서 중학교를 세울 때는 그 장소를 해당 지방의 鄕校로 정했다(제13조). 同 官制에 의하여 설립된 학교는 오직 1900년에 세워진 漢城中 學校(京畿高等學校 前身) 밖에 없었는데, 이것마저 高等科는 설치 하지 않고 尋常科만을 두는 데 그쳤다. 師範學校 사범학교는 1895년 4월 16일 칙령 제79호로 공포된 漢城師範學校官制로 비롯되며, 이는 韓國 최초의 근대식 학교 관 제로서 全文 13조로 구성되어 있다. 同 官制를 먼저 공포한 것은 당시 小學校를 널리 보급시킬 뜻을 가지고 있던 정부로서는 어떤 학교보다도 사범학교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는 同 官制를 공포한 바로 그 달인 1895년 4월에 漢 城師範學校를 新學制에 의한 최초의 학교로 서울 校洞에 세웠다. 敎官을 養成하는 處로 함, 동년 7월에 공포된 漢城師範學校規則 제1조에는 敎員에 應用할 學員을 양성함이라 했다. 그 설립 목적은 同 官制 제1조에 의하면

158 1. 各級敎育機關 同 官制에 의하면, 학교 편제는 本科와 速成科를 두고(제2조), 수업 연한은 본과가 2년, 속성과가 6개월이었으나(제3조), 1899 년에 본과의 수업 연한을 4년으로 개정하였다. 1896년에 기포오드(D.L. Gifford)는 漢城師範學校에 대하여 아 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16) 이 학교는 日本人 교사 한 사람과 韓國人 교사 두 사람 밑에 서 지도되었고, 교과목은 한국역사萬國史初步數學지리 한문한국어 작문과 漢文古典 등이었으며, 입학 희망자는 漢文 을 읽고 써야 하였고, 학생의 연령은 18세부터 25세까지였으 며, 정원은 50명으로 國費로 宿食을 담당하였다 고 하고 있다. 外國語學校 정부가 1876년 日本과 江華島條約을, 또 1882년 부터는 美國을 비롯하여 諸外國과도 조약을 맺고 通商關係를 갖 게 되자, 그 나라의 말과 문화를 아는 외교관 혹은 통역관의 양성 기관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실정에 즈음하여 설치되었던 것이 前 述한 同文學과 育英公院이고, 다시 그 뒤로 日語學校(1891)와 英 語學校(1894)가 세워졌다. 그러다가 1895년 5월 10일 全文 11조로 된 外國語學校官制가 공포됨에 따라, 法文上 통일됨으로써 外國語學校는 新學制 밑에서 발족하였다. 同 官制에 의하면, 外國語學校는 諸外國의 語學을 교 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제1조), 외국어의 종류는 時宜에 따라 학부대신이 정하고(제2조), 그리고 학부대신은 필요에 따라 外國 語學校의 支校를 지방에 세울 수 있도록 규정했다(제3조). 同 官制에 따라 1895년 10월에 法語學校, 1896년 5월에 俄語 16) D.L. Gifford, Education in Capital of Korea, The Korean Repository, June 1896, p

159 Ⅱ. 近代敎育의 普及 (露語)學校, 1897년 5월에 漢語學校, 1898년 9월에 德語學校가 세워졌다.17) 그런데 同 官制 제3조에 外國語學校 支校(分校)를 지방에 세울 수 있게금 규정되어 있었으나, 다른 語學校의 支校는 세워지지 못하고 日語學校만이 仁川과 平壤에 설립되었다. 1900년 6월 27일에는 外國語學校規則이 同 官制를 보충하기 위하여 제정 공포되었는데, 학과목은 外國語를 敎授하는 외에 외 국어로 보통 學問도 교수하며, 漢文으로 讀書, 作文과 韓國史 및 地理도 교수한다고 했다. 그리고 종래 입학 연령 16세 이상 25세 이하를 15세 이상 20세까지로 고치고, 수업 연한을 日語學校 漢 語學校는 3년, 기타 학교는 5년으로 정하였다. 이 시기에 다른 학교들이 모두 微微하였음에 반하여 外國語學校 만은 비교적 활기를 띠고 있었다. 이는 門戶開放에 따라 외국어를 해득하려는 사람이 많은데다가, 또 취직이 용이하였던 까닭이다. 그 밖의 學校 1899년 3월 24일에 공포된 醫學校官制에 의하여, 同年에 京城醫學校가 설립되었다. 이는 內外 各種 醫術의 교 수를 목적으로 세워졌는데, 수업 연한은 3년이었다. 또 이해에는 商工學校가 설립되었는데, 1904년에 그 이름을 農商工學校로 고치 고 農科 工科 商科로 나누어 豫科를 1년, 本科를 3년으로 정하 였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實業學校가 당시 우리나라에 하나밖 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實業에 대한 賤視傾向 때문에 학생수가 많아야 一科에 30명, 적을 때는 10명 미만이었다. 1900년 8월에 정부가 鑛學實業을 가르치기 위하여 설립한 鑛務學校 역시 鑛工業 을 천시한 당시의 풍조에 의하여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이 밖에도 1895년에는 法院 안에 法官養成所를 설립하고, 短期 로 법률을 교수하였다. 이것은 官職과 직결되는 교육이었던 만큼 17) 李光麟 前揭書 p

160 1. 各級敎育機關 학생수가 상당히 많았으며, 1903년에 수업 연한이 1년 6개월이 되고, 다시 1905년에는 2년으로 延長되었다. 한편 1897년에는 郵 務學堂 電務學堂을 설립하여 체신 사무의 요원을 양성하였다. ㄷ. 統監府下의 學制改正과 植民地敎育의 基礎工事 甲午更張은 自力에 의한 것이 아니고 日本의 압력에 의한 것이 었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日本 帝國主義가 보다 적극성을 띠고 침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日本의 제국주의적 침략 정책은 1904년 露 日戰爭을 계기로 더욱 본격화되어, 이 해 韓日 議政書를 성립시키더니, 드디어 1905년 11월에 乙巳條約으로 韓 國을 그들의 保護國으로 만들었다. 日本은 이제 韓國에 대해서 복 종을 강요할 입장에 섰다. 이 땅에 새로 설치된 統監府는 식민지 교육의 기본 정책을 수립 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교육 법령을 제정 공포하였는데, 이들을 年代順으로 들면 아래와 같다. 법령 師範學校令 高等學校令 外國語學校令 普通學校令 高等女學校令 私立學校令 私立學校補助規定 公立私立學校認定規程 敎科用圖書檢定規程 實業學校令 實業學校令施行規則 高等女學校令施行規則 師範學校令施行規則 高等學校令施行規則 공포년 1906년 1906년 1906년 1906년 1908년 1908년 1908년 1908년 1908년 1909년 1909년 1909년 1909년 1909년 법령 구분 勅 令 勅 令 勅 令 勅 令 勅 令 勅 令 學部令 學部令 學部令 勅 令 學部令 學部令 學部令 學部令 41호 42호 43호 44호 22호 62호 14호 15호 16호 56호 1호 2호 3호 4호

161 Ⅱ. 近代敎育의 普及 外國語學校令施行規則 普通學校令施行規則 1909년 1909년 學部令 5호 學部令 6호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統監府는 學制改正에서 종래의 小學校 를 普通學校라 이름을 고치고, 수업 연합을 6년에서 4년으로 단축 하는 동시에 尋常科 高等科를 하나로 통일하였다. 교과목은 종전 의 것과 차이가 없으나, 초급 학년부터 日語가 賦課된 것이 주목 된다. 이때 統監府는 漸進的인 同化政策의 방법으로 官 公立普通學 校를 다소 확장하였다. 즉 1906년에는 서울에 官立 9校와 지방에 公立 13校 도합 22校를,18) 1907년에는 지방에 公立 28校를, 1908년에는 지방에 公立 9校를, 이렇게 점진적으로 확장하여 1909년까지 도합 60개 普通學校를 신설했다. 學制改正 후, 중등 교육에 나타난 특징은 종래의 中學校를 高等 學校로 개칭한 것이다. 舊學制에서는 중학교를 소학교의 상급학교 로 하여 뒤에 大學까지 설치할 것을 구상했으나, 새로 마련된 고 등학교는 그 자체로서 최종학교를 의미한 것이었다. 그러니 統監府는 고등학교로써 韓國人 최고의 교육 기관으로 삼으려 했으니, 이는 韓國人에 대한 愚民化가 그들의 식민지 교육 의 기본 방침이었음을 말해 준다. 한국인의 자각은 그들 식민지 기초 작업에 장애가 되므로, 통감부 관리 중에는 한국인은 전연 가르치지 말라 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와 같은 교육 정책하에 통감부는 3개 高等學校를 설립 및 改 編하였다. 종래의 官立中學校 즉 漢城中學校를 개칭하여 4년제의 官立 漢城高等學校(現 京畿高等學校)를 세우는 동시에, 종전의 官 18) 官報 1906년 9월 4일 및 동년 9월 18일

162 1. 各級敎育機關 立 平壤日語學校를 개편하여 3년제의 官立 平壤高等學校를 설립 했다. 그리고 1908년에는 최초의 官立 女子敎育機關으로 漢城高 等女學校(現 京畿女子高等學校)를 세웠다. 이 밖에도 1909년 實業學校令이 공포됨과 더불어 통감부는 官 立 仁川日語學校를 개편하여 官立 仁川實業學校를 만들고, 같은 해 釜山 開成學校를 인수하여 公立 釜山實業學校(現 釜山商業高 等學校)를, 또 平北에는 定州實業學校를 세웠다. 1910년에는 平 壤農學校 大邱農林學校 全州農林學校群山實業學校春川實 業學校가 새로이 설치되었다. 이렇게 통감부가 實業學校를 擴充한 것은 한국인의 노동력 착취를 위한 實利追求에서였다. 참고로 1910년 4월말 현재 각종 官 公立 高等 程度 學校의 상 황을 보면 아래와 같다.19) 1910年 現在 高等 程度 學校 一覽表 學校名 官立 官立 官立 官立 官立 官立 官立 官立 公立 公立 公立 公立 公立 公立 成均館 法學校 漢城師範學校 漢城高等學校 平壤高等學校 漢城外國語學校 仁川實業學校 漢城高等女學校 釜山實業學校 大邱農林學校 全州農林學校 晋州實業學校 光州農林學校 春川實業學校 修業年數 學生數 3 30 本科 3, 豫科 1 本科 3, 速成科 , 日語速成科 本科 3, 豫科 本科 2, 速成科 ? 本科 3, 速成科 1? ) 吳天錫 前揭書 p

163 Ⅱ. 近代敎育의 普及 公立 公立 公立 道立 道立 群山實業學校 定州實業學校 濟州農林學校 平壤農學校 咸興農業學校 ? 3? 本科 2, 速成科 ? 3) 民間人 私立學校의 設立 甲午更張은 근대화의 요소를 지니고 있기는 하였으나 너무 갑 작스런 他意에 의한 改革斷行이었기 때문에, 앞서 말한 新學制의 제정도 실제상의 개혁이라기 보다는 制度上의 개혁에 지나지 못 하였다. 그러므로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官 公立學校보다 더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民間人 私立學校였다. 민간인 私學은 기독교의 직접적인 영향의 학교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대체로 보아 기독교 宣敎에 의한 학교 설립이라는 大勢와 당시 사회의 요청인 開化熱에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開化熱은 日本에서 유행되고 있던 하고 있던 開化, 中國에서 유행 自強운동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당시 開 化와 自強은 先進外國技術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케 하고 文明 化한다는 점에서 同一한 개념으로 共用되고 있었던 것 같다.20)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서 초보적인 교육 기관이 생겼고, 이를 토 대로 해서 중등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는데, 당시 私學의 설립이 도 시에만 국한되지 아니하고 지방 농촌에까지 파고 들어갔음은 주 목할 일이다. 아마도 초기 민간인 私學으로서 처음 세워진 것은 앞서 말한 德 原邑民들이 1883년에 세운 元山學校일 것이다.21) 그 다음으로는 20) 李光麟 前揭書 p.23 21) 前記한 近代敎育의 發端 참조

164 1. 各級敎育機關 閔泳焕이 1895년에 興化學校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閔泳煥이 34 세에 特命全權公使로 미국 영국 화란 오스트리아 독일을 거 쳐 페테르그라드로 가서 러시아 皇帝 니콜라이 二世의 戴冠式에 참석했다가 돌아와 外國語와 先進技術을 가르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여기서는 주로 英語와 日語 이외에 測量術을 가르쳤고, 科로는 尋常科, 特別科 및 量地科를 두었다. 1900년 7월 13일자 皇城新聞 記事에 의하면 再昨日 2時에 興化學校에서 放學式을 집행할 새, 尋常 特別 量地 三科 學員數 130餘人이라 22)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乙未義塾(뒤에 樂英義塾)이, 1896년에는 閔泳綺가 中橋義塾을 시작하였다. 1899년에는 安昌浩가 그의 고 향 江西 지방으로 돌아가 漸進學校를 세웠다. 이는 西道에서 민간 인이 세운 최초의 사립학교인 동시에 또한 男女共學을 실시한 최 초의 小學校이기도 하다. 1901년에는 徐光世 외 수명이 洛淵義塾(뒤에 普光學校)을 創 設하여 日語를 가르치고, 잠시 師範科를 두어 교사 양성에 힘쓰다 가 1916년에 廢校하였다. 1902년에는 牛山學校(懿法學校)가 설 치되고, 1904년에는 尚洞敎會 목사 全德基가 靑年學院을 설치하 였다. 그 후 靑年學院은 新民會의 機關學校로서 獨立思想 고취에 노력하다가 1914년에 폐교되었다.23) 1905년 2월에는 嚴柱益이 養正義塾(오늘의 養正中 高等學校) 을 창설하였다. 설립자 嚴柱益은 1904년 軍部協辦으로 渡日하여 당시 日本의 新文物을 시찰한 후, 일본이 서양의 새로운 사조에 22) 皇城新聞 1900년 7월 13일 23) 孫仁銖 前揭書 p

165 Ⅱ. 近代敎育의 普及 접하고 있음에 크게 감명되어, 귀국하여서는 당시 사회의 急先務 가 무엇보다도 교육의 보급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여 위해서 蒙以養正이라는 기에 찬동하는 7 8인의 발기인과 더불어 나라를 구하는 인재를 배양하기 旗幟를 높이 들고 私財를 던져 몸소 塾長이 되어 헌신했다.24) 설립 이후 3년이 경과되었을 때, 嚴妃는 1907년 5월 慶善宮과 英親王宮에 소속된 全南의 咸 平 務安 光陽 및 경기도의 利川 豐德 각 郡 소재의 토지, 총계 약 200만 평을 하사하였다. 1905년 5월에는 李容翊이 敎育救國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普成學校(高麗大學校 전신)를 창설했다. 李容翊이 普成을 세운 것 은 그가 일본으로부터 귀국한 이듬해이며, 그가 일본으로 간 것은 그들에 의하여 강제 납치되었던 때문이다. 그가 서거한 후, 손자 李鍾浩가 잠시 학교 경영의 책임을 맡다가 1910년에 天道敎에서 학교 경영을 引受했다. 그러다가 1905년 11월 소위 乙巳條約 이후에는 私學의 설립이 곧 敎育救國運動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민족 운동을 하던 애국 지사들도 직접 교육 사업에 종사하거나 교육 단체를 조직하여 더욱 교육열을 북돋워 주었다. 이들은 학교를 설립하기 전에 우선 교육 기관으로 學會를 만들었으니, 西北學會(西友學會 漢北興學會) 湖南學會 畿湖興學會 嶠南敎育會 大東學會 女子敎育會 太極 學會 大韓興學會 大韓同寅會 大韓學會 關東學會 輔仁學會 國民敎育會 등이 그것이다. 이들 學會의 취지는 모두 청소년의 교 육을 開導, 勉勵하여 국권을 회복하는 데 두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학회들은 그들 학회의 부속 기관으로 私立學校를 세우는 한편 24) 韓基彦 韓國敎育史 博英社 1963, p

166 1. 各級敎育機關 國家의 存亡은 교육에 좌우된다는 것을 唱導하니, 이에 자극되 어 京鄕 각지에서 수많은 학교가 열리게 되었다. 梅泉野錄에 의하면 關西人은 學會를 京師에 세우고, 이어서 關北人은 漢北興學會를 모두 本會를 京中에 설치하고 그 支會를 外部에 許하니, 是時에 學校와 社會團體가 國中에 가득하였다. 學 校는 關西가 더욱 盛하여 龍川 一郡만 하여도 二十餘區에 달하였 다 25)고 하고 있다. 西北學會로 통합되기 전의 西友學會는 교육 구국에 있어서 교 사 양성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여, 1907년 1월 15일에 西友師範學 校라는 速成師範科 夜學校를 설립하였다. 초대 교장은 朴殷植, 교 감은 金達河였다.26) 이때 朴殷植은 에 師範 養成의 急務란 題下 今日 敎育方針에 대하여 最先急務는 師範 養成이 是라. 盖 學生은 國家의 基礎요 蒙學은 學生의 基礎라 蒙學이 無하면 完全 한 學生이 無할 것이요 完全한 學生이 無하면 어찌 完全한 國家가 有하리오. 惟是 完全한 蒙學을 建立코자 할진대 必先 完全한 師範 을 培養할지라 고 했다. 西友師範學校 졸업생들은 황해도와 평안도 각 사립학교에 교사 로 派送할 계획이었는데, 과연 몇회 몇 명까지 졸업생을 輩出시켰 는지 未詳이다. 또 西北學會(西友學會 漢北興學會)는 1907년 7월에 姜華錫을 대표로 하여 西北協成學校를 세웠다. 韓日合併 후 西北學會가 강 제 해산됨에 五星學校로 교명을 고쳐 부르다가 1914년에 일시 폐 교했다. 그러다가 1921년 4월에 崔時俊이 五星講習所를 설치하 25) 黃玹 梅泉野錄 卷5 光武 10년 9월조 26) 朱耀翰 鄭英助 保護條約時期의 學會 및 團體運動 大成文化社 1965, p

167 Ⅱ. 近代敎育의 普及 고, 1922년 3월에 崔時俊 吳熙源 許 憲 등이 설립자가 되어, 다 시 校名을 協成學校라 일컬었다. 오늘의 光新中 商業高等學校는 協成學校의 후신이다. 경기 충청도의 人士로 결성된 畿湖興學會는 1908년 6월에 畿 湖學校를 설립하였다. 그 설립의 趣旨는 지방의 교육이 교사의 빈 곤으로 인하여 발전이 미약하므로 유능한 교사를 양성함에 있었 다. 초대 교장은 朴勝鳳이었고, 1910년에 兪吉濬 吳世昌 등이 설 립한 隆熙學校(1909)와 합동하여 교명을 中央學校라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中央中 高等學校의 전신이다. 大東學會는 1908년에 법률 교육을 목적으로 大東專修學校를, 大韓同寅會에서는 1907년에 同寅學校를 창립하였고, 輔仁學會에 서는 1908년 6월에 輔仁學校를 세웠는데, 이것이 오늘의 輔仁 中 商業高等學校의 전신이다. 그리고 女子敎育會는 부속학교로 서 1906년에 養閨義塾과 1907년 4월에 新學院을 설립하였다. 乙巳條約 이후 개인이 세운 私立學校를 보면, 1906년 5월에는 閔泳徽가 私財를 던져 徽文義塾을 설립하였다. 처음 교명은 廣成 義塾이었는데, 徽文義塾이란 교명은 高宗皇帝에 의한 賜名이다. 同校에서는 附帶事業으로 徽文館을 두어 교과서 및 기타 서적까 지 출판했다. 1906년 7월에는 南宮檍이 江原道 襄陽에서 峴山學 校를 세웠는데, 이는 오늘의 襄陽高等學校의 전신이 되었다. 1906년 9월에는 普成館의 설립자인 李容翊이 다시 普成中學校 (오늘의 普成中 高等學校)를 설립했다. 초대 교장에 申海永이 취 임하여 신입생 240명을 모집하고서는 동년 9월 22일 서울 中部 礴洞(現 壽松洞)에서 개교하였다. 또 이 해 12월에는 中東學校가 세워졌다. 처음에는 申圭植에 의하여 漢語 夜學으로 출발했으나, 뒤에 崔奎東의 경영으로 넘어가 오늘의 中東中 高等學校가 되었

168 1. 各級敎育機關 다. 中東學校의 설립 경위는 아래와 같다.27) 官立 漢城漢語學校內에 설립한 漢語夜學은 去春에 學部의 인 가를 得하여 개막하였으나, 출석 생도가 零星할 뿐 不是와 諸般事 가 未備하여 開校式의 擧行 無하였더니, 去月에 漢語敎官 柳光烈 氏와 其時 班監 崔興模氏는 某某 學員의 同意에 依하여 日語學 一 科를 첨가하고 學員을 모집하니, 생도의 입학이 日增月加하여 출 석 생도가 60餘名에 達한지라, 敎務를 확장하기 위하여 夜學의 명 칭을 改하여 中東學校라 命名하고, 校長은 吳在昌氏로 漢語敎師는 柳光烈氏로 日語敎師는 朴在肅氏로 校監은 崔興模氏로 선정하고 去月 28日에 開校式을 去行하였다. 1907년에 日本은 丁未 7條約으로 皇帝를 폐하고, 大韓帝國 군대 를 해산하였다. 이 해 2월에 安昌浩는 美國에서 귀국하여 自我革新 과 自己改造를 통해서 民族革新과 民族改造를 이룩하려고 했다. 그 리하여 그는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平壤에 大成學校를 세웠다. 당 시 大成學校 학생이었던 金瀅植은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28) 1907년 大成學校 설립의 報가 세상에 전파되자, 이를 聲援支 持 하는 소리는 全朝鮮을 흔들었으며, 입학 지원자는 조수와 같이 밀리어 不時에 5 6백명의 청년이 모이었다. 그 당시 학교의 과정은 중등학교라 하지마는 지금의 중등학교보다는 훨씬 고등이 어서, 4학년 과정은 어떤 전문학교의 정도와 대등하였으며, 또 數 學은 월등하게 고등하였고, 학교의 설비도 중등학교로서는 類例가 없을이만큼 완비하였었다. 이때 李昇薰이 평양에서 安昌浩를 만난 것은 그의 생애의 일대 전환기가 되었다. 그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에 대하여 깊이 깨달은 27) 大韓毎日申報 1907년 1월 5일 28) 朱耀翰 安島山全書 三中堂 1963, p

169 Ⅱ. 近代敎育의 普及 바 있어 定州 鄕里로 돌아와, 1907년 8월에 초등 교육 기관으로 講明義塾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講明義塾만으로 도저히 만족한 민족 교육을 전개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여, 중학교 건립을 목표로 활동한 결과 동년 12월에 다시 五山學校를 설립하게 되었다. 李昇 薰이 五山學校를 세우는 데는 당시 平安道觀察使 朴勝鳳의 후원 이 컸었다. 사실인즉 五山學校와 大成學校는 같은 뿌리에서 내어뻗은 두 줄기 푸른 가지였다. 大成學校는 安昌浩의 망명과 함께 興士團으 로 모양을 바꾸었고, 五山學校는 줄곧 學園으로 남아 日帝의 사나 운 서리와 비바람을 맞으면서벋어나간 것이 다를 뿐이다. 이 밖에 1907년에 설립한 사립학교는 李鳳來의 鳳鳴學校, 柳一 宣의 精理舍, 李鍾浩의 鏡城中學校, 金九가 책임자로 있은 楊山小 學校 등이 이름을 떨친 학교들이다. 1908년 9월에는 張志映, 閔 橿 등에 의하여 昭義學校가 설립되었는데, 그 뒤에 이 학교는 東星 商業學校로 개칭되었다. 1909년에는 金鴻亮의 發議로 楊山小學校 자리에 中學校를 설치하고 교육 문화 운동의 振幅을 넓혀 놓으니, 황해도 일대의 뜻있는 청소년들이 모두 이 곳으로 모여들었다. 참고로 韓末에 설립된 중요 民間人 私立學校를 살펴보면 아래 와 같다.29) 韓末 民間人 私立學校 年代 學 元 興 樂英義 中 校 名 山 學 校 化 學 校 塾(뒤乙未義塾) 橋 義 塾 29) 孫仁銖 前揭書 pp 設 德 閔 社 閔 立 源 者 有 泳 會 有 泳 所在地 志 煥 志 綺 元山 서울 서울 서울

170 1. 各級敎育機關 貞 善 女 學 校 順 成 女 學 校 漸 進 學 校 樂淵義塾(뒤普光學校) 牛 山 學 校 靑 年 學 院 養 正 義 塾 光 成 實 業 學 校 漢 城 法 學 校 普成學校 ( 뒤普成專門學校 ) 徽 文 義 塾 進 明 女 學 校 淑 明 女 學 校 普 成 中 學 校 中 東 學 校 峴 山 學 校 養 閨 義 塾 華 野 義 塾 新 學 院 西 友 師 範 學 校 同 寅 學 校 大 成 學 校 講 明 義 塾 五 山 學 校 鳳 鳴 學 校 西 北 協 成 學 校 (뒤 五星學校 光新商業學校) 精 理 舍 鏡 城 中 學 校 養 實 學 院 楊 山 小 學 校 保 強 學 校 長 薰 學 校 畿湖學校(뒤에隆熙學校와合同 하여中央學校로발전) 東媛女子義塾(뒤東德女子義塾) 養 源 女 學 校 金 養 堂 讚 揚 會 安 昌 浩 徐 光 世 梁 在 賽 全 德 基 嚴 柱 益 前 少 論 派 社 會 有 志 李 容 翊 閔 泳 徽 嚴 貴 妃 嚴 貴 妃 李 容 翊 申圭植( 뒤崔奎東) 南 宮 檍 女 子 敎 育 會 李 哲 鎔 女 子 敎 育 會 西 友 學 會 大 韓 同 寅 會 安 昌 浩 李 昇 薰 李 昇 薰 李 鳳 來 西 北 學 會 서울 서울 江西 서울 서울 서울 서울 서울 서울 서울 서울 서울 서울 서울 서울 襄陽 서울 抱川 서울 서울 서울 平壤 定州 定州 서울 서울 柳 一 李 鍾 社 會 有 金鴻亮 金 金 社 會 有 畿 湖 興 學 宣 浩 志 九 九 志 會 서울 鏡城 義州 安岳 載寧 서울 서울 趙 尹 植 羅 서울 서울 東 高

171 Ⅱ. 近代敎育의 普及 普 明 女 學 校 養 貞 女 學 校 大 東 專 修 學 校 輔 仁 學 校 昭義學校 ( 뒤東星商業學校 ) 隆 熙 學 校 楊 山 中 學 校 普明女子敎育會 崔 誠 卿 大 東 學 會 輔 仁 學 會 張 志 暎 俞 吉 濬 金 鴻 亮 1909 華 閔 山 學 校 泳 祚 서울 서울 서울 서울 서울 서울 安岳 高山 (全北) 위의 도표에 나타난 학교는 비교적 당시에 이름 있는 私學들이 다. 1908년 私立學校令이 공포되기 전까지는 私立學校를 설치하 는 데 있어 정부의 인가가 필요 없었고, 또 報告의 의무도 없었으 므로 정확한 통계를 알 수가 없다. 合併 후 總督府의 통계에 의하 면, 1908년 전국의 학교 수는 서울 시내 100餘校를 비롯하여 총 수 5,000 餘校에 달했으며, 학생수 20만에 이르렀다.30) 또 黄玹 의 梅泉野錄에 의하면, 1910년 韓日合併 직전까지 불과 몇 해 사 이에 3,000餘에 달하는 私立學校가 세워졌다고 한다. 4) 女學校의 設立과 女性敎育의 普及 朝鮮王朝의 교육 기관은 남성 중심의 것이었다. 이는 朝鮮王朝 뿐 아니라 그 前代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의 교육 기관이 설립되지 못한 데는 內外法과 또 女子 十年이면 不出(小學 立敎篇)이 라 하여, 거의 外出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제도적인 면 에서 여성을 위한 교육 기관을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朝鮮王朝의 여성 교육은 가정 중심의 非形式 敎育 (Informal Education)에 의하여 家事技術과 儒敎精神에 입각한 德育만을 가르쳤다. 여기서 비형식 교육이라 함은 학교 교육 밖에 30) 朝鮮總督府 朝鮮の保護と倂合 1918, p

172 1. 各級敎育機關 서 이루어진 교육을 말한다. 이러한 사회적인 與件 속에서, 女學校를 맨 처음에 시작한 사람 은 스크랜톤(M.F. Scranton) 부인이다. 1885년 6월에 이 땅을 밟 은 監理敎 女宣敎師 스크랜톤 부인은 선교 사업의 중요한 분야로 韓國 여성을 위한 교육 기관을 세울 것을 결심하고, 그 준비에 착 수하여 1886년 5월경에 여학생 하나를 상대로 학교를 시작하였 다. 이것이 바로 韓國 女學校의 濫觴이 된 梨花學堂이다. 그런데 신교육의 受容과 동시에 근대 학교에서 교육을 시작할 때 男學校의 경우는 신학문에 눈이 뜨기 시작한 때이라 학생을 구 하기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女學校의 경우는 학생을 구 하기가 어려워 여러가지 난관을 겪어야 했다. 즉 스크랜톤 부인은 梨花學堂을 처음 시작할 때의 사정을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31) (1886년 5월 경에) 학생 하나를 상대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학생이라는 사람은 정부 관리의 첩으로서, 그 관리는 자기 첩이 영어를 배워 가지고 왕후의 통역이 되는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3개월쯤밖에는 우리와 같이 있지 않았다. 제일 처음 의 장기적 학생은 金부인보다 한 달 뒤인 1886년 6월에 왔다. 이 女兒가 우리에게 온 것은 틀림없이 가난 때문이었는데, 며칠 이 지나 그의 어머니는 차라리 가난을 참을지언정 자기 딸을 외 국인에게 맡겨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웃 사람들은 그를 나쁜 여인, 肉親의 애정이 없는 어머니라고 비난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스크랜톤 부인에게 자식을 맡길 수 있겠 느냐고 하였다. 그들은 얼마동안 음식도 넉넉히 먹고 좋은 의복 도 입을 수 있고 하여 나쁘지 않을 터이지만, 나중에는 미국으 로 데려갈 것이요, 그렇게 된다면 그 운명이 어떻게 될지 누가 31) L.G. Paik 前揭書 p

173 Ⅱ. 近代敎育의 普及 알 것이냐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女兒가 결코 이 나라를 떠나 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文書로서 보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것이 그 어머니의 염려를 다소 완화시키는 데 효과가 있었으며, 몇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여자는 안심하게 되었다. 두 번째 로 온 학생은 집도 없는 乞兒로서, 그 모친은 城門 밖에서 스크 랜톤(W.B. Scranton) 醫師가 주워 오다시피 하여 병을 치료한 여인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이 女兒들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 시하였다. 이들이 불행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안 다른 어머니들도 차차 서양 부인을 신임하게 되어, 언덕 위에 있는 새 집으로 옮겨갈 때에는 학생수가 4명으로 늘 고, 다음 해 정월에는 7명이 되었다. 이것은 스크랜톤 부인의 술회이다. 그것도 학생의 어머니에게 학생의 身邊을 보증한다는 誓約書까지를 手交하고 입학시킨 것이 다. 그 서약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32) 誓約書 스크랜톤夫人이 朴氏에게 미국인 야소교 선교사 스크랜톤은 조선인 朴氏와 다음 과 같이 계약하고 이 계약을 위반하는 때는 어떠한 罰이 든지 어떠한 요구이든지 받기로 함. 나는 당신의 딸 福順이를 맡아 기르며 공부시키되 당신 의 허락이 없이는 西方은 물론 조선안에서라도 단 十里 라도 데리고 나가지 않기를 서약함. 1886年 月 日 스크랜톤 32) 梨花女子大學校 梨花八十年史 1967, p

174 1. 各級敎育機關 사실 스크랜톤 부인 자신은 이미 1885년 8월 이전부터 학교의 문을 열고, 처음에 양반집의 자녀를 학생으로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결국에는 가난한 집 아이와 고아를 학생으로 얻었던 것이 다. 이것은 梨花에 한하지 않고, 이 당시 설립된 女學校史 혹은 女 學校誌를 읽어보면 공통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점이다. 1887년에 학생이 7명으로 늘어났을 때, 閔妃는 스크랜톤 부인 의 勞苦를 알고 친히 梨花學堂이라는 校名을 지어 주고 外務 督辦 金允植을 통해 扁額을 보내와 그 앞날을 격려했다. 당초에 스크랜톤 부인은 專信學校(Entire Trust School)라 命名하려 했 으나, 閔妃의 은총에 감사하여 梨花로 택하였다. 이는 당시에 皇室을 상징하는 꽃이 순결한 배꽃(梨花)이었는데, 여성의 순결성 과 명랑함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그 후, 梨花學堂은 1888년에 학생수가 18명으로, 다시 1893년 에는 30명으로 늘어났다. 1890年代에 朴泳孝의 딸이 學堂에 와서 스크랜톤 부인과 기거를 같이하며 공부했다는 것을 보면, 開化志 士의 자녀와 부인들이 와서 공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上流階 級 출신은 극히 소수이어서 당시 학생은 兩極의 층으로 구성되었 던 것이다.33) 이렇게 梨花學堂이 설립되어 女性敎育의 礎石을 놓을 무렵, 1893 년 제1회 宣敎師公議會에서 결정된 선교 정책도 부인들을 改宗시 키는 일과 그리스도敎 信者인 少女들을 교육하는데 특별히 힘쓸 것. 이는 가정의 주부가 후손들의 양육에 주요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 라 34)고 하여, 여성 교육의 시급함을 말했다. 이에 따라 1894년에 는 평양에 正義女學校가 설립되어 地方 미션 學校의 嚆矢가 되었다. 33) 梨花女子大學校 前揭書 p.46 34) 郭安全 韓國敎會史 大韓基督敎書會 1961, p

175 Ⅱ. 近代敎育의 普及 그러다가 1897년에는 宣敎部의 地方學校 설치에 관한 정책이 결정 되자, 전국 주요 도시마다 미션 女學校가 설립되어 나갔다. 1895년에는 서울에 貞信女學校와 釜山 東萊에 一新女學校(東萊 女子 中高等學校 전신), 1897년에는 仁川에 永化女學校, 1898년 에는 서울에 培花女學校, 1903년에는 平壤에 崇義女學校와 元山에 樓氏女學校 및 木浦에 貞明女學校, 1904년에는 開城에 好壽敦女學 校와 원산에 進誠女學校, 1906년에는 宣川에 保聖女學校, 1907년 에는 光州에 須皮亞女學校와 大邱에 信明女學校 및 全州에 紀全女 學校를 세웠다. 이 밖에도 그들은 咸興에 永生女學校, 載寧에 明信 女學校, 會寧에 普興女學校, 城津에 普信女學校등을 설립했다. 前述한 미션 學校의 一覽表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女學校를 많이 설립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보더 라도, 당시 선교사들이 얼마나 여성 교육에 주력하였는가를 짐작 할 수 있다. 이같이 선교사들은 여성의 교육 기관이 全無하였던 때에 여학 교를 설립하여 여성 교육에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는 그들의 여학교를 통해 남녀평등의 사상을 전파하여 안방(閨房)에 갇힌 여성을 바깥 사회로 인도하였다. 이에 독립신문에서는 여성교육을 더욱 권장하기 위하여 아 래와 같은 論說을 揭載하였다.35) 즉 세상에 불쌍한 인생은 조선 녀편네니, 우리가 오늘날 이 불쌍 한 녀편네들을 위하여 조선 인민에게 말하노라, 녀편네가 사나 이보다 조금도 낮은 인생이 아닌데 사나이들이 천대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나이들이 문명 개화가 못되어 이치와 인정은 생각지 않고, 다만 자기의 팔심만 믿고 압제하려는 것이니 어찌 35) 독립신문 1896년 4월 21일자 논설

176 1. 各級敎育機關 야만에서 다름이 있으리요. 조선 부인네들도 차차 학문이 높아지고 지식이 넓어지면 부인의 권리가 사나이 권리와 같은 줄을 알고, 무리한 사나이들을 제어하는 방법을 알리라, 그러기 에 우리는 부인네들께 전하오니, 아무쪼록 학문을 높이 배워 사 나이들보다 행실도 더 높고 지식도 더 넓혀 부인의 권리를 찾아 라. 고 하였다. 또 독립신문은 1896년 5월 12일자 논설에서, 여성도 남성 과 같이 교육의 기회를 갖도록 官立 女學校 설립을 종용하였다. 즉 정부에서 사나이 아이들을 위하여 학교 하나를 짓거드면 계집아 이들을 위하여 또 하나를 짓는 것이 마땅한 일이니라고 했다. 또한 1898년 10월에는 讚揚會라고 명칭하는 婦人會에서도 官 立 女學校 설치를 아래와 같이 上疏하였다.36) 대황제 폐하께옵서 중흥의 운을 응하옵시고 독립의 업을 세우사 백가지 법도를 새롭게 하시며 성택이 겉으로 흐르시와 관립학교(남자)를 설립하사 영재를 발원케 하옵시니 성지라 흠 송하읍고 발구르며 춤추나이다. 이제 신첩 등이 찬양회를 설시하와 충성 충(忠) 사랑 애(愛) 두 글자를 규중으로부터 온 나라가 흥왕케 하랴 하오나 학교가 아니면 총혜한 계집 아해들 을 가르칠 도리가 없압기로 감히 외월함을 피치 않고 실정을 아 뢰오니 성명은 깊이 통촉하옵시어 학부에 칙령을 나리오사 특 별히 여학교를 설시하야 어린 계집아해들로 하여금 학업을 닦 사와, 대한도 동양의 문명지국이 되옵고 각국과 평등의 대접을 받게 하옵시기를 엎드려 바라옵나이다. 이들은 그 후에도 수차 이러한 내용의 上疏를 하였다. 그러나 36) 독립신문 1898년 10월 13일

177 Ⅱ. 近代敎育의 普及 독립신문과 부인회가 정부에 대하여 교육사업을 독려함에도 불구하고, 官立 女學校보다 더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민간인 私立 女學校이었다. 1897년 경에 한 민간인 여성의 손으로 서울에 貞善女學校가 설 립되었는데, 이는 西京人으로 上京 居住하는 金(號 養堂)씨에 의 하여 세워진 것이다. 그는 1899년에 교장으로 취임하여 1903년 3월 19일(음력) 殞命할 때까지 家財를 털어 여성교육에 헌신했 다.37) 그의 교육열은 臨終時 유언에서 我以一個女子로 我韓女 子를 外國과 如히 文明敎育하기를 畫夜로 天地神明께 祝壽하였더 니, 不幸 殘命이 不長하여 九泉에 歸하니 지극 원통한 恨은 我死 後에 學校를 누가 敎育할고 38) 한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1898년 12월에는 前記 讚揚會 부인들이 順成女學校를 세웠는데, 承洞에 위치한 관계로 承洞學校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후, 1905년에는 서울에 太平洞女學校가 설립되고, 1906년 4월에는 進明女學校가 세워졌는데, 이는 慶善宮과 英親王宮에서 희사한 토지 200만 평을 기초로 하여 설립되었다. 교명을 明 이라 하였음은 進 進德啓明이라는 뜻이다. 동년 5월에 설립 된 淑明女學校(초기 교명은 明信女學校) 역시 英親王宮으로부터 의 토지 1천여 정보의 喜捨를 기초로 세워졌는데, 초대 교장으로 李貞淑 여사가 취임했다는 것은 특기할 일이다. 會가 조직되었다. 그 취지를 我韓이 文明에 漸就하는 風潮 또 1906년에는 秦學新 金雲谷 金松岩 등에 의하여 女子敎育 가 一時에 啓發함을 臻하여 女子에 敎育이 現今 時代에 第一主義 로 認定하여 39)라고 밝히고, 이 해에 여성의 文明을 開進할 37) 丁堯燮 韓國女性運動史 一潮閣 1971, p.30 38) 皇城新聞 1903년 3월 19일자 雜報 39) 皇城新聞 1906년 11월 1일

178 1. 各級敎育機關 목적으로 養閨義塾을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뒤에 京城女子學校로 변하고, 다시 德壽小學校로 개편되었다. 1907년에는 明進女學校와 女子普學院, 1908년에는 東媛女子義 塾 普明女學校 勝洞女學校 養貞女學校 養源女學校 등이 세워 졌다. 이 중에 趙東植이 1908년 4월 夜學으로 설립한 東媛女子義 塾은 오늘날의 同德女子中 高等學校로 발전했다. 그때 서울 苑南 洞에 金仁和의 同德女子義塾이 있었는데, 金여사 자신이 이를 경 영해 나갈 능력이 없어서 1909년 4월에 東媛女子義塾에 병합했 다. 그래서 교명을 東媛 同德을 놓고 어느 쪽을 택하느 냐 하다가, 同德이라는 이름이 그 뜻으로도 좋고 또 여성교육에 적합한 이름이라 하여 同德女子義塾으로 재출발했다. 이와 같이 私立女學校가 활기를 띄고 있을 때, 정부는 1908년 勅 令 제22호로 여성의 중등 교육을 위한 高等女學校令을 공포 여자에 게 必須한 고등 보통 교육 및 技藝를 授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同令 제1조에 의하면, 高等女學校 설립 목적을 천명했다. 男兒를 위한 學校法規가 모두 1900년 이전에 공포된 것에 비하면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同令은 新敎育이 수용된 이 래 처음으로 여성 교육을 위한 법령으로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물론 정부가 여성의 중등 교육 기관을 두기로 결정하고, 高等女學 校令을 공포하기까지에는 기독교 선교사들의 자극이 컸었다. 정부는 同令에 의하여 1908년 4월 1일 漢城高等女學校(現 京 畿女子高等學校)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魚允迪을 임명했다. 이 때 純宗妃는 동년 5월 20일 漢城高等女學校에 아래와 같은 徽旨 를 내려서 이를 격려하였다.40) 光武 維新 이래 國家文明이 뒤짐을 軫念하시어 新學을 興하 40) 官報 1908년 5월 26일

179 Ⅱ. 近代敎育의 普及 시고, 純宗 등극 후에도 이 뜻이 이어 학교가 蔚興하고 자제가 奮勵하나 이는 모두 남자에 止할 뿐이요 여자 교육에 있어서는 그렇치 못하다. 보통 교육은 男女의 別이 無한 것이니 여자는 嫁하여 夫를 翼하고 家를 理하며 자녀를 扶育하는 책임을 負하 여 일가의 행복을 증진하고 이를 推하여 國運을 裨補함도 큰 것 이니 국가가 어찌 여자교육을 중요히 여기지 아니하리요 이는 여성교육에 대한 국가의 태도라고 볼 수 있는데, 그 내용 을 보면 賢母良妻가 교육적 人間像으로 나타나 있다. 처음 학교 편제는 豫科와 本科로 나누어 각각 한 학급밖에 두지 않았다. 예과의 수업 연한은 2년으로 하고, 보통학교 교과과정 정 도를 가르쳤다. 예과를 둔 것은 당시의 私立女學校가 학년의 구분 없이 교육을 했고, 또 정부가 보통학교 출신의 여학생을 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조처로써 官 公立 보통학교에 여자 학급을 두도록 하는 한편 漢城高等女學校 에 예과를 설치한 것이다. 본과는 수업 연한이 3년이었는데, 입학 자격은 예과 수료생이 나 보통학교 졸업자로 규정했다. 입학 후 성적이 우수하면 越班 을, 불량하면 낙제도 시켰다. 처음에는 학생 모집이 어려워 無償敎育을 했다. 그러나 개교 1 년 후인 1909년에는 벌써 본과 90명, 예과 68명, 도합 158명의 재적생 수를, 1910년 4월말에는 예과와 본과를 합하여 224명의 재적생 수를 나타내었다. 이와 같이 개화기의 여성 교육 기관은 점진적으로 보급되어 나 갔다. 그 설립 과정은 私學이 官學보다 먼저 세워졌다. 그 중에서 도 미션 女學校가 민간인 女學校보다 먼저 설립되었다. 이들 학교 는 모두 가정의 개혁과 여성의 자유와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데서

180 1. 各級敎育機關 출발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儒家의 젊은 여성들은 이들 여학교를 통하여 新 式生活의 방식과 민주주의 사상을 배우게 됨으로써, 종래 男尊女 卑의 사상이 모두 中國과 이 나라 儒家 선비의 잔재주에서 조작되 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男女平等의 관계를 조장하는 경향은 미 션 女學校에서 뚜렷했고, 때로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촉진했었다. 그리하여 이들 여학교를 통하여,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여성들도 점차 전통적인 사회 체제의 拘束性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백년의 舊習이던 內外法과 蓄妾制度 가 폐지되어 나갔다. 이와 같이 근대 여학교가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步調를 같 이 했으므로, 그 뒤에 여성들의 지위 향상은 물론 근대 문화에 대 한 자각이 현저하게 높아졌고, 또 여성들에 의한 自律的인 近代女 性運動까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근대 여학교는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는 데까지 그 운동의 視野를 넓혔는데, 이것이 日帝下에서 는 愛國的 女性像의 浮刻場所로 승화되었다. 특히 사립 여학 교가 그러했다. 실로 韓國 近代女學校는 이 나라 여성 해방의 첫 횃불의 장소였 고, 또 한국 여성 교육의 코페르니쿠스的인 혁명을 가져 왔다. (3) 近代學校의 設立精神 1) 미션 學校의 設立目的과 敎育方針 前述한 바와 같이 韓國 近代學校의 성립 과정은 私學이 官學보 다 먼저 세워졌다. 그 중에서도 미션 學校가 民間人 私學보다 먼 저 설립되었다

181 Ⅱ. 近代敎育의 普及 미션 學校의 설립 정신은 기독교 교육과 女權伸張 및 신식 생활 방식을 보급시키는 데 두었다. 다시 말하면, 傳道와 開化, 그리고 남녀평등과 민주주의를 가르치기 위하여 세워졌다. 이 중에서 특 히 여학교는 가정의 개혁과 여성의 자유 및 평등을 주장하는 데서 출발되었다. 첫째, 선교의 방법, 信者들의 기독교적인 훈련, 유능한 敎役者 를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新敎의 선교사들이 미션學校를 설립한 것은 宣敎事業의 기초 및 그 附帶活動의 하나로 시작했던 만큼, 이들 학교의 설립목적이 기독교적인 인물과 선교활동의 助力者를 양성하는 데 두었음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는 아펜셜러(H. G. Appenzeller)가 培材學堂을 설립할 때, 그 목적을 기독교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데 두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 다. 처음부터 학생들에게 福音에 대하여 의무적으로 강요치는 아 니했지만, 학교 생활에서나 가르치는 모든 학과에서 의식 혹은 무 의식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또 學堂訓으로 欲爲大者 當爲人役 즉 크게 되려는 사람은 마 땅히 남에게 奉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내세운 것도 聖經 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 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 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하리라, 태복음 20장 26-28절)는 예수의 교훈에서 가져 온 것이다. 梨花學堂의 창설자 스크랜톤(M.F. Scranton) 부인도 梨花의 설 립 목적을 학생들로 하여금 저들의 친구와 同族 가운데서 十字架 의 증거자가 되는 데 있다고 했고, 길모어(G.W. Gilmore)는 여기

182 1. 各級敎育機關 에 附言하여 한국 女兒를 그들이 생활을 營爲하여야 하는 조건 그들의 친척과 친구들에게 기독교의 선교자가 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고 하였다. 밑에서 41) 이에 따라 선교 초기의 학생들은 不信者였지만, 이들 학교의 교 육을 통하여 聖書의 지식을 넓히고 신앙을 돈독히 가졌다. 그리고 는 차차 기독교의 진리를 바로 이해하여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고 결국에는 한국의 福音化를 위한 역군들이 되었다. 둘째, 서양의 문물과 사상을 전달 소개하여, 이 나라를 開化하 기 위하여 설립했다. 開化란 차원이 높은 단계의 文明化에 도달함을 말한다. 차원이 높은 단계의 문명화는 선진 외국 문화를 받아들여 재래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문화를 창조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화 사 상이라는 것은 선각자들이 무식한 대중을 敎導하여 문명의 단계 로 이끌어 보려는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은 서양의 啓蒙主義 혹은 계몽 사상과 서로 통한다. 그러니 開化思想이나 啓蒙思想은 전근 대적인 사회에서 근대적인 사회로 발전하기 위한 준비기의 사상 이라 할 수 있다.42) 미션 學校의 설립 정신은 이러한 개화사상에 근거하여 근대 교 육을 시작했다. 즉 儒敎的 舊習에 사로잡힌 한국인을 無知로부터 해방하여 近代文明의 지식을 주고 과학을 이해케 하여 사회와 국 가에 봉사할 수 있는 일군을 기르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그들의 학교를 통하여 성경과 영어를 비 롯하여 세계역사 지리 수학 생물 물리 화학 수공 음악 체조 등 근대 교육의 교과목과 그리고 체육 시간에는 서양식 운동 41) H.H. Underwood 前揭書 pp ) 李光麟 前揭書 p

183 Ⅱ. 近代敎育의 普及 인 야구 축구 농구 등도 소개하였다. 이때 학생들은 처음으로 世界地理를 배우게 되자 눈을 크게 뜨 게 되었고, 중국 밖의 더 큰 세계에 놀랐고, 또 大朝鮮의 大란 실제적으로 틀린 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特別活動 시간인 演說會 때에는 처음에 학생들은 사람들 앞 에서 연설을 하려고 서는 것을 아주 부끄럽게 여겼지만, 어느 정 도 이들의 지도도 받고 격려도 받은 뒤에는 아주 효과적인 연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이러한 新學問의 내용은 종래 유교 經典을 유일한 교육 내용으로 삼아 온 전통적인 교육에 비하여 전연 새로운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文化面에서 볼 때, 이와 같은 교육 내용은 傳統文 化에 대한 異質文化의 침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것을 文 化 變容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때 독립신문도 학생들에게 나라를 開化하려면, 앞서 말한 新 學問을 배워 선배들이 하지 못한 일들을 하여야 한다고 격려 권장 했다. 즉 1896년 4월 25일자 논설에서는, 청국(淸國)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잘 아는 사람이 조선보 다 많이 있고 토지와 인민이 조선보다 더 크되, 구라파 속의 청국 10분지 1밖에 못되는 나라이라도 세계에 대접 받기를 청국보다 10배나 더 받고 정부와 백성이 100배나 강하고 부유하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구라파 각국에서는 적든지 크든지 인민들이 남녀 없이 적어도 10여년을 학교에서 각색 새 학문을 배운 연고요, 청 국은 그저 오랜 사서삼경을 공부한 까닭이라 43) 고 하였다. 또 1898년 1월 20일자 논설에서는 歐美 각국의 物理 學도 배우며 朱禮와 明律을 숭상하는 것처럼 歐美의 法律學도 배울 43) 독립신문 1896년 4월 25일자 논설

184 1. 各級敎育機關 것을 권장하였고, 1899년 8월 5일자 논설에서는 구미의 歷史 地 誌 數學 化學 生物學 등을 한층 더 노력하여 배울 것을 말했다. 또 基督敎系에서 발행하는 신문도 이 나라 개화에 노력했다 년 2월 2일에 발간된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 는 그 창간호에서 옥석을 갈지 아니하면 빛이 없고 거울을 닦지 아니하면 밝지 못하나니, 사람을 교육하지 않고 문견의 고루함을 책망하면, 이 것은 비하건데 갈지 아니한 옥석을 대하여 빛이 없음을 책망하 고 닦지 아니한 거울을 대하여 밝히 못함을 책망함과 무엇이 다 르리오 라고 하여, 국민교육을 提唱했다. 또 계속해서 同 會報는 우리 동포 형제들아 동양사적(東洋史籍)만 좋다하지 말고 선 대의 하시던 일만 옳다하지 마오 지금 만국이 교제하는 때 를 당하여 우리 회보를 보시면 세계상에 유익한 소문과 각 국에 재미있는 사적(史籍)을 자연히 통달할 것이니 44) 라고 하여, 개화사상을 보급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또 동년 4 그리스도 신문도 창간호 사설에서 만물의 이치를 널리 펴는 데그 목 월 1일에 발간된 언더우드(H.G. Underwood) 편집의 표를 두었었다. 그러니 미션 學校와 선교사 발행의 신문 등은 모두 開化의 필요에 응하여서 나타났고, 또 이 나라를 개화하는 데 크게 공헌 했다. 그러므로 당시의 청소년들은 미션 學校에 들어가 新學問을 공부하는 것이 곧 開化勢力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 결과, 이 들 학교의 졸업생들은 한국의 새로운 지식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사실인즉 미션 學校는 1894년 정부에 의한 교육 개혁이 있을 때 까지 新文化의 先導者의 노력을 했고, 그 후에도 겨레의 知識 44) 조선그리스도인회보 1897년 2월 2일자 창간호

185 Ⅱ. 近代敎育의 普及 의 寶庫가 되었다. 세째, 男女平等과 民主主義를 가르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선교사들은 이 땅에 기독교와 함께 민주주의 사상도 가지고 왔 다. 사실인즉 서구 사회가 발전되어 온 경로를 볼 때, 기독교와 민 주주의 사상은 相互關係에 있어 왔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당시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儒敎的 身分的 價値觀과 社會體制에 대하여 하나의 프로테스탄트的 사명을 가지고 미션學校를 세운 것이다. 이들 학교 교육 역시 모든 사람은 신분과 재산과 직업을 불문하고 倫理的으로 동일한 價値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다. 이에 청소년들은 종교적인 진리를 찾아서 뿐만 아니라, 이들 학교가 민주주의를 대표한 것이기에, 여기로 모여들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여학교는 전통적인 유교 체제 밑에서의 男女 不平等觀에 대하여 一夫一妻, 男女平等觀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세워졌다. 이는 前述한 미션學校의 일람표가 남학교에 못지않게 여학교를 많이 세운 것을 가지고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전통 사회의 젊은 여성들은 이들 학교 교육을 통하여 男女平等이 라는 휴머니즘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실로 선교사들이 男女平等觀에 입각하여 처음으로 근대 여학교 를 세운 것은 여성 교육의 開拓者的 역할이었고, 또 女性解放의 큰 福音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점차 기독교 敎則으로 되어 있 는 蓄妾 폐지와 남녀 평등의 사상이 보급되어 나갔다. 이러한 사조는 유교적 윤리 관념에 따른 신분제 사회에 대한 挑 戰으로서, 이후 민주주의 교육의 근본적 이념을 형성하는 데 도움 이 되었다. 이 밖에도 미션學校는 근대 교육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自主性 을 확립하는 데도 그 설립 목적이 있었다. 이에 학교 교육에서는

186 1. 各級敎育機關 학생들에게 民族과 國家觀念을 이해시켰으며, 특히 우리 글에 의 한 여러 교과목의 교수는 민족의 矜持를 갖게 했다. 그리하여 초 기 미션 學校는 민족 주체성의 확립을 위한 民族主義 이념을 확립 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이로써 보면, 미션學校의 설립 정신은 기독교 정신을 널리 전함 으로써 이웃 사회를 위하며, 서양의 문물과 사상을 소개 전달하여 낡은 儒敎的 舊習을 개혁하고, 나아가 민주적인 새로운 사회를 만 드는 동시에 우리 민족에게 자주 자립하는 정신적 자세를 확립하 는 데 두었다. 다음으로 미션學校의 敎育方針을 보면, 자기들을 위주로 한 西 洋人의 생활 풍습보다 韓國의 실정과 생활 환경에 알맞은 교육을 하려고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韓國 재래의 전통과 고유 문화를 무시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를 개량하려는 漸進政策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선교 초기에 이 나라를 찾아온 미국 선교사는 국가적 범위로 확대된 西歐型의 기독교회와는 달 랐기 때문에, 그들은 한국에서 자기들 나라의 정책과 提携할 아무 런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션學校의 敎育理想은 보다 나은 한국인(Koreans better Korean s only)이라는 사상 위에 두고, 이를 향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이는 培材學堂과 梨花學堂 및 貞信女 學校 등의 교육 방침을 봄으로도 알 수 있다. 培材學堂에서는 우리나라의 純美한 固有文化를 바탕으로 한 사 상위에 근대 문화의 지식을 주고 과학 공부를 하게 하여 실력있는 한국인을 기르는 데 두었고, 梨花學堂 역시 스크랜톤 부인은 그 교육 방침을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45) 즉 45) L.G. Paik 前揭書 p

187 Ⅱ. 近代敎育의 普及 우리의 목표는 女兒들을 외국인의 생활, 의복 및 환경에 맞도 록 변하게 하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단지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만듦으로써 만족한다. 우리는 한국인이 한국적인 것 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 훈을 통하여 완전무결한 한국인을 만들고자 희망하는 바이다. 第2代堂長 로드와일러(L.C. Rothweiler)도 이 점을 강조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46) 참된 家庭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있어 助力者가 되고, 우리 학 교의 교사가 되며, 寄宿學校의 助手가 되고, 의료 사업에 있어 看 護婦나 조수가 되게 하려는 데 있다. 그들은 음식을 만들고 의복을 만들며, 자기 자신과 집을 깨끗이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보다 나은 한국 사람을 만들려는 것이요, 외국인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貞信女學校 역시 학교는 우리가 세웠지만, 배우는 너희들은 너 희 풍속대로 하라고 했고, 또 우리의 목적은 학생을 기독교적인 한국인으로 만드는 데 있고, 美國女性을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이것은 모두 韓國式으로 하여야 한다. 47) 고 했다. 그러니 초기 미션學校의 교육 방침은 어디까지나 우리나라의 역사 문화 전통 풍속의 토대 위에 기독교 교육을 실시하였음 을 알 수 있다. 2) 官公立學校의 設立目標 선교사들은 미션學校를 통하여 우리에게 서구적 교육제도와 新 46) L.C. Rothweiler, What Shall We Teach in Our Girls School, The Korean Repository, March 1892, pp ) L.G. Paik 前揭書 p

188 1. 各級敎育機關 學問을 소개하는 일에 開拓者的 所任을 다했을 뿐 아니라, 또 민 주주의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소개한 신학문과 민주주의의 영향은 차차 민간에서 높아져 開化思想의 요소가 되 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도 新敎育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 하여 정부는 1894년 甲午更張에 즈음하여 新敎育을 널리 보급할 것 을 계획하고 새로운 교육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때(1895) 高 宗은 전 국민에게 내린 敎育詔書 가운데 헛 이름을 물리치고 實用 을 취할지어다 라고 하였다. 다시 1899년에 교육을 독려하는 詔書 에서도 국가가 학교를 開設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장차 知見 을 넓히고 進益을 구함으로써 物을 열어 業을 이루고, 用을 利하게 하여 生을 厚하게 하는 기본을 삼으려는 것이로다 48)고 했다. 그러니 新學制는 日本의 것을 모방했지만, 그 정신적 기반을 實 學에 두었음은 매우 자극적인 것이었다. 高宗 자신은 특히 茶山 丁若鏞의 與猶堂全書를 全寫해서 宮中에 비치하고, 茶山精神 에 의해서 韓末의 사회를 교육을 통하여 개혁해 보려는 생각을 가 졌었다. 이는 비단 高宗 뿐 아니라, 光武改革期의 開化를 생각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 과거의 知的 遺產을 實學에서 찾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新學制에 따른 官學의 설립도 그 정신적 기반을 모두 實學思想에 두었다. 1899년에 설립한 商工學校는 상업과 공업에 관한 實學을 교육하는 處 라 표방하였고, 1900년에 설립된 鑛務學 校도 實學을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1899년에 공포된 中學校 官制 中學校는 實業에 就코져 하는 人民에게 正德 利用 厚生하는 中等敎育을 보통으로 敎授하는 處로 定함이라하고, 1900 도 제1조에서 년에 漢城中學校를 세웠다. 48) 增補文獻備考 學校考

189 Ⅱ. 近代敎育의 普及 그러니 이들 官學의 설립 정신은 實學思想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 傳統思想 가운데서 新來 혹은 開化思想에 가 장 類似한 요소들 實學思想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05년 乙巳條約 이후에 설립된 官學은 모두 日帝의 制度的 同化政策에 의하여 세워졌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統監府는 점진적인 同化政策의 방법으로 官 公立 普通學校를 다 소 확장했으나, 여기에는 일제의 침략적 야심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교육 방침 역시 한국의 아동들로 하여금 그들의 식민지 정 책에 복종하는 人間像을 형성하는 데 두었다. 중등 교육에 있어서도 實業學校를 다소 확충한 것은 얼른 보기 에 한국의 번영을 위한 것처럼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실질적으로 교육 程度의 底下를 꾀한 일이다. 또 그들이 唱導한 實用的 人間의 배양이라는 것도 한국인의 노동력 착취를 위 한 實利追求에서였다. 그러니 統監府下의 官學의 설립은 결국 식민지 同化敎育을 再 編하려는 준비 단계로서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 교육 방침 역시 한국을 완전히 同化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3) 民間人 私立學校의 設立目的 民間人 私立學校의 설립 정신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 다. 하나는 先進諸國의 文物을 받아들이려는 開化思想이었고, 다 른 하나는 民族主義 정신에서 세워졌다. 韓末의 西勢東漸과 日帝侵略 특히 일본에 의한 淸日戰爭 甲午 更張 露日戰爭 乙巳條約 등은 각각 다른 각도에서 한국인에게 심각한 반성과 커다란 각성을 일으켰다. 이때 뜻있는 사람들은 남 의 나라 군대들이 우리 땅에서 제 마음대로 싸워도 말 한 마디 못

190 1. 各級敎育機關 하는 자신의 無爲無能을 痛歎했다. 또 허울좋은 獨立과 甲午更張 은 우리의 뜻에서 된 것이 아니고 일제의 손에서 된 것임을 알았 고, 行政機構의 改編, 新敎育제도의 裏面에도 일제의 魔手가 강하 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다가 19세기말 植民地主義 및 帝國主義 시대를 당하여서 우리에게는 開化와 獨立, 이것은 같은 사실의 兩面에서 전개되었 다. 그 이유는 開化 없이 自主獨立은 이루어질 수 없고, 또 自主獨 立을 해야 참된 개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開化 自主獨立이란 결국 국민적 自立이며 국가의 自强이었고, 그 방법은 먼저 교육을 진흥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요청에 응하여 민간인 私立學校는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초 중등 교육 기관이 모두 近代敎育을 빨리 펴서 젊은 사람들을 교육시키 는 것만이 나라를 되찾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대체로 1905년 소위 乙巳條約 이전에 설립된 私學은 개화의 요 청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民間人 私立學校의 設立 참조). 다 시 말하면, 開化라는 이름의 近代化를 실천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그리하여 이들 학교에 서는 개화된 先進諸國의 文物과 技術을 습 득하고, 또 富國强兵의 實을 擧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러나 우리가 근대 교육을 통해 新學問을 흡수하고 있을 무렵, 뜻하지 않은 軍國日本의 침략이 다가왔다. 이에 1905년 이후부터 설립된 私學은 民族資本에 의하여, 敎育救國의 급선무로서 人材養 成이란 민족적 욕망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私學의 설립자들도 모 두 근대적인 民族意識을 지닌 지도층이었다. 이는 1905년 5월에 李容翊이 세운 普成學校(高麗大學校 전신) 와 1906년에 세운 普成中學校의 설립 정신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즉 請廣開校 敎育人材 以復國權에 두었으니, 普成의 建學精神

191 Ⅱ. 近代敎育의 普及 은 인재를 배양하여 국가의 기초를 완성하고 국민의 지식을 발달케 함으로써 기울어져 가는 國權을 바로잡으려는 데 있었다. 李容翊의 생애는 철두철미 王室에의 충성과 일본 세력에의 반항에 있었다. 이는 그가 1907년 1월 露領 海蔘威에서 我死後에 韓國主權을 회 복하기 전에는 運柩以歸치 말라 고 유언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 國權更生의 길은 오직 하나인 교육밖에 없 다. 南宮檍도 이때 다 49)는 민족주의 정신에서 峴山學校와 그 뒤에 牟谷學校를 설립 하였다. 安昌浩 역시 韓末의 침체된 國運 속에서 나라를 구제하려는 운 동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전개했다. 다시 말하면, 自我革新과 自 己改造를 통해서 民族革新과 民族改造를 이룩하려면 다른 무엇보 다 교육이 제일 급선무라고 보았다. 그의 말을 빌면, 한국 민족 전체를 개조하려면 그 부문의 각 개인을 개조하여야 하겠고, 각 개인을 다른 사람이 개조하여 줄 것이 아니라, 각각 자기가 자기 를 개조해야 한다 50)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1899년에 漸進學校 와 1907년에 大成學校를 세웠다. 漸進學校는 점진적 공부와 수양을 계속하여 民族의 힘을 길러 야 한다는 것이 그 설립 목적이었다. 그가 친히 지은 校歌 속에도, 그 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다.51)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마음과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노래로 학과를 전문하되 낙심말고 하겠다 하세 우리 직무를 다. 또 大成學校의 설립 정신은 그의 民族改造論에 따른 것으로 49) 金世漢 翰西 南宮檍先生의 生涯 翰西 南宮檍先生記念事業會 p ) 安秉煜 民族의 스승 島山 安昌浩 興士團本部 p.7 51) 朱耀翰 安島山全書, 三中堂 p

192 1. 各級敎育機關 漸進的으로 大成하는 인물을 양성하여 民族運動의 중심 세력 을 구축함에 있었다. 그는 민족 운동의 인재와 國民敎育의 師傅를 양성할 목적으로 平壤을 비롯한 서울 大邱 光州 등지에도 똑같 은 大成學校를 세울 계획이었으니, 평양의 大成學校는 그 第一校 요 標本校였다. 그리고 大成學校의 교육 방침은 아래 네 가지에 두었다.52) 즉 첫째, 健全한 人格의 涵養. 둘째, 愛國精神에 강한 민족 운동자 양성. 셋째, 국민으로서 實力이 구비한 인재의 육성. 네째, 強壯한 체력의 훈련. 등에 두었다. 安昌浩는 이 교육 방침을 실천하기 위하여 평소 그의 신념대로 務實力行과 主人精神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務實力行 은 空理空論을 하지 말고, 우선 나 한 사람부터 誠實한 사람이 됨 으로써 민족 중흥에 새로운 힘이 될 수 있음을 이름이다. 務實이 란 實을 힘쓰자는 뜻이니, 實이란 眞實 誠實 참 그리고 거짓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安昌浩는 大成學校 학생들에게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 라 하고, 참되기를 가르쳤다. 約束을 지키는 것, 집합 시간을 지 키는 것이 모두 誠實 공부요, 약속을 어기는 것, 시간을 아니 지키 는 것은 허위의 실천이라고 보았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거짓이 없고, 참된 것이 務實이기 때문에 참의 정신 참의 실천 참의 도덕으로 우리 민족을 교육시켜 更生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가 말한 力行은 行을 힘쓰자는 것이다. 力行은 힘써 행하라는 말이 아니라, 행하기를 힘쓰자는 말이다. 즉 공리공론의 52) 吳天錫 前揭書 p

193 Ⅱ. 近代敎育의 普及 허식적인 명분론을 버리고 實踐窮行하기에 노력하자는 것이다. 이 實踐主義는 재래 文弱을 비판하고 強壯한 氣風을 숭상하는 데까 지 연장되어, 大成學校에서는 德 體 知 三育을 중히 여겼다. 德 育과 體育을 知育보다 먼저 내세운 것은 바로 이 力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이 力行은 큰 목적이 눈 앞에 실현되지 못한다고 낙 심하지 말고, 오늘에 할 수 있는 일은 오늘에 하자는 것이다. 이를 테면, 자기 家庭을 고치는 일, 虛偽를 버리는 일, 민족 운동의 동 지를 구하는 일 등은 모두 오늘에 할 수 있는 일이라 하였다. 그의 務實力行의 정신은 1909년에 조직된 靑年學友會의 四大 그것이다. 그는 이 四大精神 이외에도 自強忠實勤勉의 세 德 을 더 加했다. 그래서 靑年學友會歌를 지은 崔南善은 그 歌詞 에서 務實力行 등불 밝고 깃발 날리는 곳에, 우리들의 나갈 길 이 숫돌 같도다고 하였다. 精神에도 잘 나타나 있다. 務實 力行 忠義 勇敢의 정신이 바로 安昌浩는 이 務實力行의 정신을 그가 1913년에 미국 샌프란시 스코에서 창설한 興士團에도 挿入했다. 團歌에 務實力行 깃발 務實力行 정신으로늠름하게 모여든다고 했고, 또 入團 밑에 問答 때에 위원은 團의 格式에 의하여 어깨에 노란 빛과 붉은 빛 의 두 쪽을 합하여서 된 團帶를 메었다. 노란 빛은 務實이니 참됨 을, 붉은 빛은 力行이니 힘을 상징하는 色이었다.53) 다음으로 그가 大成學校 校訓으로 내세운 主人精神은 責任 精神과 獨立精神 및 主體的 精神을 이름이다. 이 主人精神은 그 뒤 에 그의 主人인가 旅人인가라는 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54) 즉 묻노니 여러분이시여, 오늘 대한 사회에 주인되는 이가 얼마 53) 朴鍾鴻 韓國의 思想的 方向 博英社 1968, p.44 54) 朱耀翰 前揭書 pp

194 1. 各級敎育機關. 그러나 대한인이 된 자는 누구든지 명의상 주인 나 됩니까 은 다 될 것이되, 실상 주인다운 주인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 읍니다. 어느 집에든지 주인이 없으면 그 집이 무너지거나 그렇 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 집을 점령하고, 어느 민족 사회든지 그 사회에 주인이 없으면 그 사회는 망하고 그 민족이 누릴 권리 를 딴 사람이 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민족의 장래 를 위하여 생각할 때에 먼저 우리 민족 사회에 주인이 있는가 없 는가, 있다 하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지 아니할 수 없 고 살피지 않을 수 없읍니다. 지나가는 여객도 남의 집에 참 변이 있는 것을 볼 때에 눈물을 흘리거나 忿言을 吐하거나 그 집 의 위급한 것을 구제하기 위하여 투신하는 수도 있읍니다. 그러 나 그는 주인이 아니요 客인 때문에 한때 그리고 말뿐 그 집에 대한 영원한 책임심은 없읍니다. 내가 하고자 하고 또 요구하는 주인은 우리 민족 사회에 대하여 영원한 책임심을 진정으로 抱 한 주인입니다. 주인된 자는 자기 집안 일이 어려운 경우에 빠질수록 그 집에 대한 염려가 더욱 깊어져서 그 어려운 경우에 서 건져 낼 방침을 세우고야 맙니다. 이와 같이 자기 민족 사회 가 어떠한 위난과 비운에 처하였든지 자기의 동족이 어떻게 못 나고 잘못하든지 자기 민족을 위하여 하던 일이 몇 번 실패하든 지, 그 민족 사회의 일을 분초간에라도 버리지 아니하고, 또는 자기 자신의 능력이 족하든지 부족하든지 다만 자기의 至誠으로 자기 민족 사회의 처지와 경우를 의지하여 그 민족을 건져 낼 구체적 방법과 계획을 세우고, 그 방침과 계획대로 자기의 몸이 죽는 데까지 노력하는 자가 그 민족 사회의 책임을 중히 알고 일하는 주인이외다. 이와 같이 그는 主人精神을 책임정신 독립정신 및 주체적 정

195 Ⅱ. 近代敎育의 普及 신 등으로 표현했다. 그 중에서도 민족 사회에 대한 責任精神을 더 힘차게 강조했다. 國家觀의 관념이 主權者로서의 강한 責任感으로 나타날 때, 진 정한 국가의 융성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五山學校 역시 大成學校의 정신과 같이 民族運動의 人材, 國民敎 育의 師傅를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진 학교이다. 1907년 12월 24 일 개교식 때, 李昇薰은 五山學校의 설립 정신을 아래와 같이 말하 였다.55) 지금 나라가 기울어져 가는데 우리가 그저 앉아 있을 수는 없 다. 이 아름다운 강산, 선인들이 지켜온 강토를 원수인 日人들 에게 내어 맡긴다는 것이야 차마 있어서는 안된다. 총을 드 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 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도 더 귀중한 일은 백성들이 깨어 일어나는 일이다. 세상이 어 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고 있으니, 그들을 깨우치는 것이 제일 급무다. 우리는 우리를 누르는 자를 나무라기만 해서는 안된다. 내가 못 생겼으니 남의 업신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냐. 옛 聖人 의 말씀에도 人必自侮而後 人侮之라고 하였다. 내가 오늘 이 학 교를 세우는 것도 후진을 가르쳐 만분의 일이라도 나라에 도움 일심 협력하여 나라를 남에게 빼앗기지 않는 백성이 되기를 부탁한다. 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듣고 五山에 모여든 교사와 학생들은 새로 마련된 이 자리에서 신학문을 닦아 나라의 참된 棟梁이 되려고 마음에 다짐 했다. 그러니 民間人 私學은 처음에 新文化 또는 開化의 방법으로 설 립된 것이었으나, 1905년부터는 그 樣相을 달리하여 敎育救國의 理念下에 세워졌다. 즉 그 설립 정신의 공통된 점은 모두가 민족 55) 金基錫 南岡 李昇薰 現代敎育叢書出版社 p

196 1. 各級敎育機關 의식을 고취하고 새 지식을 계발하여 國權을 찾는 데 두었다. 私 學의 敎師 역시 독립 운동의 志士요 애국자로서의 긍지와 信念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이로써 우리나라 近代學校의 설립 정신을 보면, 일반적으로 官 公立은 일본의 官僚主義 및 同化政策에 의하여 세워졌고, 미 션學校는 기독교 정신과 민주주의 정신을 기초로 하였으며, 民間 人 私學은 民族主義 정신에 기반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4) 近代私學의 民族精神과 敎育救國運動 1) 미션 學校의 敎育救國運動 前述한 바와 같이, 日本은 우리보다 일보 앞서 歐美 列強 앞에 문호를 열고 通商을 하더니, 구미의 선진 문물을 재빨리 수입하면 서 군사와 정치면의 서구화를 서둘러서, 아시아에서의 優位를 차 지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04년에 露日戰爭을 도발했다.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으며, 그 댓가로 우리나라를 보호한다는 미명 하에 1905년 11월에 소위 乙巳條約을 맺고, 그들의 保護國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당시 美國의 정잭도 일본의 韓國植民地化를 승인하고 있었다. 즉 1905년 7월 29일에 일본 수상 桂太郞과 미국의 데오 드르 루우즈벨트(Theodore Roosevelt) 行政府의 국방장관이던 태프트(W.H. Taft)가 회담을 하였다. 여기서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어떠한 침략적인 의도도 갖고 있지 않다 는 것을 언명하였 다. 그 후 루우즈벨트 대통령은 그의 개인 公報官을 통하여 일본 에 의한 한국의 改造에 대하여 미국은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으리 라는 보증을 東京의 外務省에 주었던 것이다.56)

197 Ⅱ. 近代敎育의 普及 그리하여 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한국을 필리핀과 바터하고 말 았다. 즉 일본의 韓國植民地化를 승인하는 동시에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주권을 일본으로부터 승인받았다.57) 그럼에도 在韓 美國 宣敎師들은 미국의 공식적인 對韓政策과는 달리 日帝하에 신음하고 있는 한국 국민에 대하여 극히 友好的인 행동을 취했다. 그 이유는 前述한 바와 같이, 선교 초기에 이 나라 를 찾아온 미국 선교사는 국가 범위로 확대된 西歐型의 기독교 교 회와는 달랐기 때문에, 그들은 구태여 한국에서 미국의 對韓政策 과 제휴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인즉 당시 한국에는 미국인이 약 250여명 있었는데, 그 중 半이 선교사였다. 이들은 명목상이 아니라, 실질상의 한국 독립 을 위한 열렬한 참피언 58)들이었다. 본래 선교 사업이 복음을 전파하여 사랑으로써 정신적인 救濟 를 도모하는 일인 만큼 민족과 국가가 위기에 처했던 당시에 한국 인의 정신적인 부활을 돕는 방법을 자연 민족의식의 앙양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많은 민족 지도자들이 한국인 교사로 미션 學校에 모여들게 된 것도 이러한 교육이념에 호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본질적 으로 國家 民族 君主 등에 대하여 不變의 관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독교는 시대에 따라 서, 그 시대에 不義를 저지르려는 자에 대하여 조속한 멸망을 바 랐을 뿐이다. 韓末의 기독교도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민족에게 愛 國心을 가르친 것이다. 이는 물론 기독교 그 자체가 不義한 자에 대한 抵抗意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에 미션學校에서는 주의 군대여! 앞으로 나가자, 다 깨 56) A.J. 그라즈단제브(李基白 譯) 韓國現代史論 一潮閣 1973, p.27 57) L.G. Paik 前揭書 p ) 閔庚培 韓國의 基督敎會史 大韓基督敎書會 1968, p

198 1. 各級敎育機關 라, 주의 군대여, 십자가 군병들아 와 같은 好戰的인 찬송가를 공공연히 가르쳤다. 또 이들 학교에서는 쟌 다르크(Jeanne d Arc) 라든가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ton)과 같은 自由의 鬪士들에 관한 이야기를 했고, 세계에서 가장 煽動的인 서적이라고 할 수 있 는 聖書를 보급하고 또 가르쳤다. 특히 宣川 信聖學校 교장 맥큔(G.S. McCune)은 학생들에게 다 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訓話 제목으로 택하여 正義로 武裝된 弱 者가 강대한 敵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또 평양 등지의 미션學校에서는 성경 시간에 베드로 前書 3장 13절에서 16절까지 와 로마書 9장 3절을 엄숙히 낭독했다. 즉 너희가 열심으로 선 義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나는 내 동족인 형제를 위하여라는 이러 을 행하면 누가 너를 해하리오, 한 내용은 모두 당시 失望에 싸인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는 힘찬 呼訴가 되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미션學校를 통하여 일제 침략에 고민하는 한 국인에게 하나님의 도움으로 國權恢復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이며, 독립을 위한 敎徒들의 단결과 열망은 반드시 하느님의 은총을 입 을 것이라고 설교하였다. 또 때로는 모오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桎 梏에서 끌어내던 古史를 인용하여 설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설교가 얼마나 한국인에게 위안과 격려가 되었으며 감 격을 불러일으켰는가는 1907년 大復興運動 이후 信徒 수효의 激 增이 이를 잘 설명하여 주고 있다. 이 대부흥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당시 한국인들의 民族的 覺醒이 이와 연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이 시기에는 미션學校와 믿는 사람들의 집 에는 主日마다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또 이때 唱歌集 속에 있던 이색적인 노래는 그리스도 軍兵

199 Ⅱ. 近代敎育의 普及 歌 였다. 기독교인들의 抗日民族精神은 합병 이전부터 치열했다. 우리 大將 예수님은 全能하시니 怨讐寃鬼 무서워 말고 接戰해 보세 큰 勝戰할 때까지 앞에 나가서 앞으로 앞으로 달려나가서 앞으로 앞으로 달려나가서 魔鬼悌勢를 滅하세. 미션學校와 교회는 이 노래를 강조하여 가르쳤다. 이는 기독교 신자들이 군대가 되어 日帝를 공격하라고 격려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일찌기 스위트(William W. Sweet)는 미국의 新敎가 神學的으 로 약하면서도 그 行動에 있어서는 강하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新 敎도 美國的 모델에 따라 전개되어 나갔기 때문에 역시 그 행동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는 新敎가 민족 운동에 열렬히 참가했고, 또 그 조직의 中樞를 이룬 사실을 통해 보아도 알 수 있다. 당시 많 은 人材가 여기로 모여들게 된 것도 민족 운동을 전개하기 위함이 었고, 기독교인 역시도 교인으로 있으면서 동시에 나라와 同一化 했다. 이와 같은 同一化에 있어서 韓末의 민족 지도자들은 구태여 종 교를 따질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은 오직 기울어져 가는 國運에 대해서 염려하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自由와 平等思想은 민족의 자유와 평 등을 찾는 독립운동의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미션學校와 日本 침략자들은 相互 警戒態勢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일제는 미션學校에서 자주 부른 십자가 군병들아와 같은 찬송은 마치 싸움을 선동하는 것 같다고 했고, 채플 시간에

200 1. 各級敎育機關 선교사들이 설교할 때 죄에 대항하여 싸우라고 하는 말도 그 들에 항거하여 싸우라는 말로 둘러 꾸며서 하는 말이라고 해석하 였다. 또 救世軍들이 쓰는 말이 군대식인 것도 그들에게는 트집거 리가 되었었다. 이렇게 일제는 미션學校와 교회 지도자들을 괴롭 히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105人 事件을 조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2) 民間人 私立學校의 民族意識과 敎育救國運動 우리가 종래 유교적 전통의 제약 속에서 近代敎育運動을 전개 시켜 나갈 무렵, 뜻하지 않은 것이 軍國 日本의 침략이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19세기말의 新文化 導入 과정에 잠시 동안 主權을 留保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여기에, 우리 민족은 抵抗과 屈從의 擇一 속에서 日帝를 상대로 하여 보다 합리적인 救國運動을 모색하게 되었고, 近代學校 역시 民族精神의 앙양과 獨立思想의 고취에 그 선봉을 담당하고 나섰다. 민족주의는 국가나 시대에 따라서, 또 어떠한 사회적 입장으로 부터 주장되는가에 따라 그 發現形態가 다르다. 한국의 경우는 일 제 억압에 대한 반항의 結集과 관련되면서부터 高調된 것이니, 이 는 과거 서구의 민족주의와 결정적으로 다른 면을 하나 가지게 되 었다. 그것은 곧 抵抗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民間人 私立學校도 抵抗 民族主義 사상과 밀접한 관련 을 갖게 되어, 민족 투쟁사와 함께 국가 민족이 겪은 현실적인 試 鍊의 克服에 있어서 意識의 核心을 이루게 되었다. 당시 私學에서 씌어진 교과서를 보면. 모두 애국심을 고취하는 내용이었고. 또 젊은 학생들의 피를 끓게 하였다. 이 중 玄 采의 幼年必讀을 보면 我國我身이라는 제목 밑에 아래와 같은 글이 실려 있다.59) 59) 玄 采 幼年必讀 券

201 Ⅱ. 近代敎育의 普及 우리가 此國에 났으니 此國은 곧 我國이요, 우리가 此身이 있 으니 此身은 곧 我身이라. 然한즉 我國이라 함은 他國이 있는 然故요, 我身이라 함은 他人이 있는 연고며, 我의 自由하는 權 은 사람마다 上天이 주신 바라, 他人이 감히 빼앗지 못할배요. 我國도 또한 그러한지라, 他國의 간섭을 물리쳐, 自主權을 잃 지 아니하고, 獨立하는 실상 힘을 지킨 後에야 我國이라 하나이 다. 그렇지 아니하면, 我國을 保全치 못하고, 我國을 保全치 못 하면, 我身은 保全치 못하나이다. 이러한 獨立思想은 학생들이 즐겨 부르던 唱歌를 통하여도 나 타났다. 창가라는 말은 新文化가 들어오기 시작한 초기에 獨逸語 리이드(Lied), 英語의 송(Song)을 漢字로 번역한 데 서 유래한다. 오늘날 國歌 대신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愛國歌 가 이 시기에 愛唱되었음은 물론이요, 그 밖에도 少年男子歌 와 少年冒險猛進歌 그리고 幼年必讀에 실려 있는 獨立歌 의 가 널리 애창되었다. 이 노래들은 모두 애국심의 고취, 국권 회복 등의 사상을 담은 것이었다. 少年男子歌의 一節은 아래와 같다.60) 무쇠 骨骼 돌 筋肉 少年 男子야 愛國의 精神을 奮發하여라 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나라에 少年의 活動時代 다다랐네 萬人 敵對 연습하여 後日 戰功 세우세 絶世英雄 大事業이 우리 目的 아닌가. 이때, 自主精神과 청소년의 氣慨를 북돋우는 少年冒險猛進歌도 자주 불리었다. 그 내용에는 씩씩한 항일적 기개가 담겨져 있다.61) 60) 皇城新聞 1909년 3월 21일 61) 趙容萬 宋敏鎬 朴炳采 日帝下의 文化運動史 民衆書館 1970, p

202 1. 各級敎育機關 1. 二千萬 同胞 우리 少年아 國家의 수치 네가 아느냐 天賦의 自由權은 차가 없거늘 우리 民族 무삼 罪로 욕을 받는가. 2. 나라 사랑하는 자 적지 않건만 冒險猛進하는 자 몇이 되느냐 깰지라 少年들아 험한 마당에 조금도 사양 말고 달려 나가세. 이 少年冒險猛進歌는 제목부터 대단히 격렬하다. 그 내용도 자 유와 독립을 위해 주저 말고 나가 싸우라는 도전적 기개를 노래한 것이니, 싸움의 상대는 일제의 침략이었다. 또 이때 安昌浩는 大成學校 학생들에게 아래와 같은 노래를 지 어 부르게 했다. 사랑하는 우리 학생들 오늘날 서로 만나 보니 반가운 뜻이 많은 중에 나라 생각 더욱 많고나. 또 그가 지은 노래 중에 이런 귀절이 있다. 긴 날이 맞도록 생각하고 깊은 밤 들도록 생각함은 우리 나라로다. 우리 나라로다. 韓末의 私學이 敎育救國運動으로 또 한 가지 강조하여 실시한 것은 體力의 훈련이었다. 이때의 체육은 단순한 스포오츠를 장려 한 것이 아니고, 일보 전진하여 구국 운동의 一翼을 담당케 했다

203 Ⅱ. 近代敎育의 普及 運動會 때에는 으레 大韓獨立萬歲란 綴字 競技를 시켰으며, 獨立歌를 부르게 했다. 또 때로는 학생들의 士氣를 높여 주기 위하여 인접 여러 학교가 공동으로 聯合 大運動會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럴 때는 씩씩한 창 가에 발맞추어 行進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구경하기 위하여 인근 민중들이 2 30里 밖에서도 모여 들었다. 이렇게 학교 운동회가 애국 정신을 고취하여 갔으므로, 統監府 에서는 운동회를 빙자하여 학생들이 집단적 구국운동을 일으킬 것을 우려한 나머지 1909년 4월 學部 주최의 城內 官私立學校 聯 合運動會를 최후로 각 지방에 훈령하여 學部의 재정난을 핑계삼 아 연합운동회를 폐지시켜 버렸다. 그러나 서울 시내의 각 私立 中等學校에서는 이에 항의하여 경 비를 공동 부담할 것을 약속하고 五星學校 普成學校 培材學 堂 中央學校 등 8개 학교가 1910년 5월에 三仙坪에서 성대한 연합운동회를 개최했다.62) 또 학교 체육은 兵式敎練과 다름이 없이 강행되었다. 으례 학교 에는 軍隊 나팔과 북을 갖춘 樂隊가 조직되어 있어, 이 악대가 나 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는 가운데 학생들은 木銃을 메고 군대식 훈 련을 받았다. 특히 大成學校에서는 체육 시간을 제일 중히 여겨 아주 군대식으로 학생을 교련하였다.63) 즉 積雪冱寒에도 광야에서 체조를 시키며 쇠를 녹이는 폭양하에 서 戰術講話를 하였고, 이따금 야간에 비상 소집령을 내리어 험산 계곡에서 膽力을 기르게 하며, 月下의 氷江에서 壯하도다 우리 62) 趙容萬 宋敏鎬 朴炳采 前掲書 p.68 63) 朱耀翰 前揭書 p

204 1. 各級敎育機關 學徒 兵式行步歌 의 노래를 부르며 肅肅한 행진을 하여 활기를 길 러 주었다. 安昌浩가 이렇게 大成學校에서 체육을 강조한 것은 다름이 아 니다. 이는 외국이 마음대로 우리 강토에 들어와서 설레는 것은 우리나라에 힘이 없는 까닭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또 大成學校와 같은 뿌리에서 내뻗은 五山學校에서는 體力을 아래와 같이 연마했다.64) 겨울에 눈이 하얗게 오면 기숙사에서 학생들을 불러내어 10 분이나 20분 동안 驅步를 시켰다. 구보가 끝나고는 整列시키고 발을 벗으라고 하고 자기(註 체육선생 박우병을 말함)도 발을 벗었다. 그리고는 자기가 앞장을 서서 맨발의 학생들을 논과 산 으로 데리고 올라가 몰고 다니다가 다시 데리고 내려 왔다. 눈 이 바람에 날려 학생들의 뺨에는 눈이 묻어 있었고, 벗은 발에 서는 김이 올랐다. 운동장에 돌아와 서면 전신에서 더운 기운이 발산되어 하얀 숨기운과 함께 뽀얀 수증기가 공중에 피어 올라 갔다. 누구나 낙오되거나 불평하는 학생이 없었는데, 이 같은 단련이 몸과 정신에 크나큰 힘이 되었다. 私學이 이렇게 스파르타式 군사 훈련에 가까운 체육을 실시한 것은 민족 운동의 하나로 독립할 힘을 기르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韓末의 私學이 愛國敎科와 體育 및 唱歌로써 민족정 신을 고취하게 되자, 통감부는 1908년 8월에 私立學校令을 제정 공포하여 이를 통제하였다. 다음으로 교육 실천을 통한 敎育救國運動을 살펴보면, 이 운동 은 남쪽보다 북쪽에서 더 활발하게 일어났다. 64) 金基錫 前揭書 pp

205 Ⅱ. 近代敎育의 普及 그러므로 통감부 경무국 고등과에 걸려 있는 朝鮮地圖에는 平 北의 宣川 定州 지방과 평남의 平壤과 황해도의 安岳 등지는 소 위 三大 查察地區로 늘 손꼽히는 지방이 되었다. 사실인즉 이 세 지역에는 저마다 不穩의 씨를 잉태한 核이 있었 다. 宣川에는 미션系의 信聖學校가 있었고, 定州에는 五山學校가 있었다. 그리고 平壤에는 大成學校가 있었고, 安岳에는 楊山學校 가 불온한 핵의 原點이었다. 황해도 安岳에는 1906년에 당시 교육가로 이름이 높은 崔光玉 이 이 곳으로 와서 金庸濟, 崔明植, 林澤權 등과 함께 民智啓發 產業增進 敎育獎勵 등을 목적으로 하는 勉學會를 조직하여 사회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金九가 책임자로 있은 楊山小學校에서는 1907년에 夏 期 講習會를 개최하였는데, 勉學會의 간부 崔光玉을 비롯하여 당 시 겨우 17세의 약관 李光洙도 講師로 초대되었다. 강습회의 주제 는 무너져가는 조국을 일으키려면, 자녀를 교육시키라였는데, 제2회 강습회 때도 이와 비슷한 주제를 내세웠다. 제3회 강습회 때는 황해도 평안도에서 모여든 聽講生이 700여명이나 되었는 데, 이때 金九는 이들에게 韓國人이 排日하는 이유가 무엇인 가 라는 제목으로 講演을 했다. 한편, 前記 勉學會는 1909년에 海西敎育總會로 이름을 바꾸어 발전하여 金九가 總監이 되었다. 약 160명의 회원을 가진 同會는 道內에 있는 私立學校들을 傘下에 포섭하고 一面一校의 方針으로 敎育施設을 확충하며, 강습회를 열어 啓蒙運動에 힘썼다. 또 이 해 에는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金鴻亮의 발의로써 楊山小學 校 자리에 楊山中學校를 설치하여 교육 문화 운동의 진폭을 넓혀 놓으니, 황해도 일대의 뜻있는 청소년들이 여기로 모여들었다

206 1. 各級敎育機關 그리하여 安岳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排日思想이나 主權回復에 대한 투철한 自覺은 新民會를 중심한 평안도 지방과 함께 두드러 지게 발전했다. 이렇게 안악 지방에 교육 문화 운동의 指導級 인 사들이 모여들어 敎育救國運動을 전개하고 보니, 통감부는 이 민 족 운동의 萌芽를 刈取할 목적으로 端緒 포착에 부심하였다. 그러다가 1910년 12월 安重根 義士의 從弟 安明根의 獨立運動 資金 募金事件이 綻露되자, 警務總監府는 安明根이 安岳에 머무는 동안 揚山學校와 海西敎育總會 간부들을 만났다는 구실로 소위 安岳事件을 조작했다. 그리하여 두 기관의 간부인 金九 등 10여명 은 15년 징역을, 나머지 40여명은 濟州島와 鬱陵島로 유배되는 刑을 받았다. 평안도에서의 교육 구국 운동은 주로 평양 大成學校와 定州 五 山學校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兩校가 모두 민족 운동의 인재를 기르기 위하여 세워진 학교이었던만큼 민족사상의 고취가 이들 학교의 풍토에 젖어 있었을 것은 두 말할 것 없다. 大成과 五山學校에서는 敎育救國運動으로 主人精神을 철저하게 가르쳤다. 安昌浩에 의하면, 주인 정신은 책임 정신과 주체적 정신 및 독립 정신이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兩校의 校庭에는 언제 나 太極旗가 휘날리었고, 매일 열리는 朝會 시간에는 愛國歌가 힘 차게 불리어졌고, 그 訓辭가 愛國精神에 넘쳐 흘렀다. 또 國權回復 을 위한 독립 투사를 양성하고자 금지된 國史敎育을 실시했다. 당시 大成學校의 國史 敎師로는 文一平, 黃義敦이 있었는데, 언 國權回復이란 문제를 냈으며, 그 대답이 폭탄과 암살이 最善策이란 답안에 만점을 주었다. 또 때로 제나 시험 제목으로 65) 는 작문 시간에 조국애를 되새기며, 학생들의 사명을 반성시키기 65) 金龍德 韓國史의 探求 乙酉文化社 1971, p

207 Ⅱ. 近代敎育의 普及 도 했다. 이때 五山學校의 역사 교사로는 申采浩가 있었다.66) 그의 국사 民族의 活動 生活을 直視하도록 촉구했기 강의도 歷史의 主人 때문에, 자연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했다. 兩校가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主人精神과 國權回復을 가르쳤느냐 하는 것은 隆熙皇帝가 南西巡行할 때, 학생들이 취한 행동을 봄으로써도 알 수 있다. 1909년 1월 伊藤博文의 강제에 의하여 隆熙皇帝가 西巡할 때, 伊藤도 동반하게 되었다. 이때 統 監府는 일반 국민과 각급 학교에 太極旗와 日章旗를 가지고 나와 환영할 것을 시달하였다. 그때 환영 나간 사람은 누구나 태극기와 일장기를 들었다. 그런 데 많은 사람들 중에서 大成 五山을 비롯한 평안도 지방의 私立 學校 學徒들만은 태극기를 들고 일장기를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 들은 처음에 이상히 생각했다가 그것이 옳은 줄 알고, 손에 들고 있던 일장기를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오히려 日章旗를 가지고 나 온 官 公立學校 학생들을 야유까지 하였다. 당시의 大韓毎日申報를 보면, 日章旗 交掲反對는 京鄕 각지의 私學에서 일어났다. 開城 韓英書院에서도 일어났고, 新義州에서는 교원과 학생이 합세하여 日章旗를 찢기도 했다. 義州郡의 경우는 이러했다.67) 一般國民과 各學校에서 日章旗를 交揭치 아니 하기로 決死抗 拒하매 觀察使와 該府尹이 韓日巡査를 四方으로 派送하여 威脅 多端에 甚至於 勅 令이라 하고 日旗 數萬個를 製造하여 人民 學生에게 勒揭케 함에 極力抵抗하다가 威脅을 不勝하여 或 日 66) 金基錫 前揭書 p ) 大韓每日申報 1909년 2월 12일

208 1. 各級敎育機關 旗를 交揭한 者도 有하나 至於枇峴面 各學校 敎師 李鼎根, 朴亨 權 兩氏가 新義州警察署에 被捉되어 無數惡刑을 當하여 幾至死 境이오 其餘 各學校 任員도 方今 調查中이라더라. 이 때 日章旗 不交揭運動으로 각 곳의 私學이 수난을 당하게 되 었는데, 특히 통감부는 이 기회에 大成學校를 폐교하려고 했다. 그 이유는 大成學校가 私學의 중심 세력이었고, 또 敎育救國運動 의 本山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安昌浩는 大成學校 첫 졸업식도 보 지 못한 채, 1910년 4월에 去國歌를 남기고 망명했다. 이와 같이 民間人 私學은 民族意識의 고취는 물론 敎育救國運 動까지 전개했다. 그러나 통감부는 國權回復을 목적으로 일어난 私學을 탄압 말살하기 위하여 105人事件, 安岳事件, 日章旗不交揭 事件 등을 조작하여 敎育救國運動을 저지하려고 들었다. 이것은 일제가 國權回復의 原動力으로 치솟은 私學을 탄압함으로써, 排日 의 원동력이 된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를 없애려는 짓이 었다. 이로써 보면, 韓末의 抵抗 民族主義는 近代學校 특히 近代私學 을 통하여 生成, 發展되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 정신은 다시 日帝下의 私學徒들에게 救國의 主人公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미 제시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韓末 이래 교육을 통한 國權 回復이라는 한결 같은 民族的 念願이 한 世代를 지난 日帝治下 36년간에도 그냥 그대로 계속될 수 있었다 孫仁銖

209 Ⅱ. 近代敎育의 普及 2. 敎科書 編纂 (1) 新敎育의 勃興과 學校設立 1) 新敎育의 胎動 1894年에 단행된 甲午改革은, 이것이 비록 일본의 정치적 主導 밑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하지만 종래의 舊體制를 一新하고, 형식상으로나마 새로운 근대적 국가체제를 완성하고 政治, 社會 전반에 걸쳐 새로운 탈바꿈을 이룩해 놓았다는 점에 대하여 일단 은 하나의 역사적 의의를 붙여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甲午改革은 안으로부터의 自覺과 충분한 기초작업 밑에서 필연적으로 다져진, 즉 자기요구에 의한 改革이 아니라 밖 으로부터의 정치적 종용과 개입에 의하여 꼭두각씨마냥 이루어진 개혁인 까닭에 결국 형식적 완성이라는 다시 말해서 알맹이 없는 껍질 革新에 그친 점을 부인할 수는 없는 까닭인 것이다. 한편 日本측으로 본다면, 여하튼 자기들의 정치적 입김이 奏効 하여 단행을 하기까지에 이른 甲午改革이고 보니 그 성공은 그대 로 일본의 정치적 승리를 증명하기에 충분하였으며, 이와 같은 사 실은, 뒷날 韓國 침략의 노골적 발판이 되어 결국 主權의 박탈과 국토의 併呑이란 최악의 지경까지 몰고 들어간 원인이 되어진 사 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論究는 제쳐두고 이 改革을 계기 로 싫든 좋든 간에 近代 文明과 아울러 근대국가의 국제 정략이 무엇인가를 事實1)로서 분명히 의식하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1) 李瑄根 韓國史 現代篇 p

210 2. 敎科書 編纂 것이다. 甲午改革의 단행은 실로 近世 韓國史의 중요한 分水嶺을 이룩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500年이란 긴 세월 동안 事大의 굴레를 못 벗고 中國파의 主從 關係를 계속하던 절대적 倫理觀을 破棄하고 獨立自主의 새로운 民族觀 國家觀을 되찾게 되었을 뿐 아니라, 政治 社會 등 여러 면 으로 積弊된 舊習과 제도를 타파하여 새로운 근대적 文明體制로 의 전환을 이룩해 놓았다는 점으로 관찰할 때 이를 부정적 측면으 로만 볼 수 없다는 것도 중요한 문제로 제기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떻든 甲午改革은 근대 韓國 정치사에 하나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준 것만은 사실이다. 막연하였지만 西歐文明에 대한 인식 과 아울러 近代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불러일으켰고 自主 自由에 대한 主體 의식을 되찾게 되었던 것이다. 역사의 분수령을 이룬 一陣의 회오리 바람과 더불어 또하나의 새 로운 물결이 일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곧 新敎育에 대한 열망이었다. 近代的 국가체제를 갖추고 出帆은 했지만 우선 급한 문제가 새 로운 人材, 敎育 받은 人材의 부족이었으며, 이에 따라 새로운 敎 育의 실시가 무엇보다도 시급한 課題로 대두되었다. 따라서 종래 의 낡은 교육제도나 방법을 개혁하고 새로운 제도와 교육방식에 따른 새로운 學校設置를 서두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開化 初期에 敎育을 갈망하는 강렬한 기운은, 새것에 대한 호기심만이 아니라 당시의 소용돌이 치는 정치정세 속에서 확고한 民族主體性을 확립시키는 방도가 곧 敎育이며, 敎育이 곧 自主獨立의 길이라는 自覺的인 일련성을 띤 운동으로 발전해 갔 다. 훗날 日帝 침략으로 국가의 주권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을 때 敎育을 통한 救國運動이란 새로운 命題를 걸고 民族史에 하나

211 Ⅱ. 近代敎育의 普及 의 뚜렷한 정신적 좌표를 定立시킨 사실은 여기에 그 淵源을 發見 해볼 수 있는 것이다. 本稿에서는 韓末에 신교육이 발흥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교육 내용을 이루었던 敎科書의 편찬 경위 및 종류를 더듬어 봄으로써 韓國敎育의 특질과 거기 따르는 교과서의 性格을 구명해 보고, 또 이것이 한국 정신사에 어떠한 내용적 構造를 이루면서 작용했었 느냐 하는 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서 다루는 近代的 敎育의 時代區分 문제에 있어서는 異論이 있겠지만 1883년 묄렌도르프(P. G. V. Mollendorff, 穆麟德)와 하 리팍스(T. E. Halifax)에 의해 세워진 英語學校가 그 효시가 될 것 이며, 1885년에 培材學堂이 설립되고 1886년에 育英公院 등이 잇 달아 開校됨으로써 그 門이 열렸다고 본다. 그러나 본격적인 근대 교육체제를 갖추고 시작된 교육은 甲午改革을 始點으로 한다고 보 아 여기서부터 韓末까지를 범위로 삼아 論述하고자 한다. 2) 學校의 設立 500년간이나 積弊되었던 봉건적 정치사회체제를 개혁하고, 새로운 근대적 체제로 전환해 보려는 첫 改革의 조치는 1894년 6월 25일자 로 내린 詔勅 軍國機務處設置에 關한 件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軍國機務處는, 우선 中央官制의 개혁부터 서둘러 근대국가의 내각체제를 모방하여 總理大臣 산하에 內閣官房이나 事務處 같은 기구를 설치하고, 舊制의 소위 六曹를 개편하여, 內務, 外務, 度支, 軍務, 法務, 學務, 工務, 農商務 등의 八衙門을 설치하기에 이른 것이다.2) 이러한 새로운 체제개혁을 단행한 정부의 조치 가운데서 특히 2) 李瑄根 前揭書 p

212 2. 敎科書 編纂 주목해 볼 만한 문제는 지금까지의 禮曹기구에 대하여 그 명칭이나 성격을 근본부터 뜯어 고치고 새로운 기구로서 學務衙門을 설치하 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교육문제가 시대적 촛점으로 그만큼 크게 비추어진 것을 뜻하고 있으며, 이로부터 신교육이란 새로운 門戶가 개방되고 그 서광이 비쳐오기 시작한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 설치된 學務衙門의 내용을 우선 살펴보는 것이 開 化期 신교육을 이해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고 보아 여기에 소개해 본다. 一. 學務衙門은 國內敎育 學務 등의 行政을 管掌한다. 一. 大臣 一員 協辦 一員 參議 六員 主事 十八員 各局은 左와 같이 分設한다. 一. 總務局 아직 設置되지 못한 各局의 庶務를 管掌한다. 參議 二員 主事 二員 秘書官을 兼한다. 一. 成均館及 庠敎書院 事務局 先聖 先覽 祠廟 및 經籍事務를 管掌한다. 參議 一員 主事 二員 一. 專務學務局 中學校 大學校 技藝學校 外國語學校 및 專門學 校를 管掌한다. 參議 一員 主事 四員 一. 普通學務局 小學校 師範學校를 管掌한다. 參議 一員 主務 四員 一. 編輯局 國文綴字 各國文 飜譯 및 敎科書 編輯 등에 關한 일을 管掌한다. 參議 一員 主事 四員 一. 會計局 本 衙門의 出納 財簿를 管掌한다. 參議 一員 主事 四員3) 이상과 같은 조직체제를 갖추고 출발한 學務衙門 制度는 순전 히 西歐文明 制度를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으나 사실은 일찌기 西 3) 官報 1894년 6월 28일

213 Ⅱ. 近代敎育의 普及 歌의 교육제도를 수용하여 실효를 거두었던 日本의 敎育體制를 그대로 본따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체제야 어떻든간에 교육의 전문화를 위한 조치로서 行政, 學事, 敎科書編輯 등 三大 事務管掌으로 나누고 전문적인 기구의 분화 로서 組成되었다는 것은 오늘의 文敎部 행정기구와 대조해 보더 라도 큰 차이가 없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한편 정부는 신교육의 조속한 실시를 위해 旣存의 成均館을 제 외하고는 기타의 구교육기관이나 제도를 모두 폐지하고 새로운 제도에 의한 학교 설립을 서둘렀다. 이리하여 500년이나 실시되어 내려온 교육제도는 하루아침에 없어지고, 교육의 내용면으로 보아도 지금까지 中國의 經典과 詩 賦만을 외고 숭상하던 사대주의적 교육을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 적 사상과 내용을 담은 민족주의적 이념 구현을 위한 새로운 교육 이 그 첫 막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정부는 甲午改革과 더불어 敎育의 필요성을 온 국민에게 알리기 위하여 洪範十四條를 마련하고 이를 발표하였으니 그 11 條에 나라안의 총명한 자제를 널리 國外에 파견하여 학술과 기 예를 전습케 한다 고 밝혔다. 선진국의 발달된 신문화, 학문, 기 술의 습득, 도입이 국가의 당면과제로서 얼마나 시급한 것이며, 이것이 富國強兵을 위하고, 국가 보전의 첩경이 된다는 것을 스스 로 밝히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은 敎育에의 力點은 당시의 정치적 여건으로 보아 약소 민족이 당면해 온 시급한 현실 문제로서 대두된 현상이다. 富國과 自強의 길은 기술과 학문을 새로이 수용하는 敎育에 있 는 것이며, 따라서 교육의 成敗는 곧 국가의 存亡에 관계된다는 것 을 깨닫고 1895년에 드디어 敎育立國의 큰 이념을 달성시키기 위

214 2. 敎科書 編纂 한 敎育詔勅을 내림으로써 新敎育을 향한 진행은 구체화해 갔다. 嗚呼라 民을 救치 아니면 國家를 공고케 하기 甚難하니 宇內의 형세를 環顧하건대 克富하며 克強하야 獨立雄視하는 諸 國은 皆其 人民의 지식이 開明하고 지식의 개명홈은 교육의 善 美하므로 以홈인 則 교육이 實로 국가보존하는 根本이라 是以 로 朕이 君師의 位에 在하야 교육하는 責을 自擔하노니 교육도 其道가 有한지라 虛名과 實用의 分別을 先立함이 可하니 書를 讀하고 字를 習하야 古人의 糟粕만 掇拾하고 時勢의 大局에 矇 眛한 자는 文章이 古今을 능가하야도 一無用한 書生이라 朕이 교육하는 강령을 示하야 虛名을 是祛하고 實用을 是崇하노니 曰 德養은 五倫行實을 修하야 俗綱을 문란치 勿하며 風敎를 扶 植하야 써 人生의 秩序를 유지하고 사회의 행복을 증진하여 曰 體養은 동작에 常이 有하야 勤勵하므로 主하고 惰逸을 貪치 勿 하며 고난을 피치 勿하야 爾筋을 固케 하며 爾骨을 健케 하야 康壯無病한 樂을 享受하라. 曰 知養은 物을 格호매 知를 致하고 理를 窮함에 性을 盡하야 好惡 是非 長短에 自他의 區域을 不立 하고 詳究博通하야 一己의 私를 經營치 勿하며 公衆의 이익을 跂圖하라. 曰 此 三者는 교육하는 綱紀니 朕이 정부를 命하야 學校를 廣設하고 人材를 양성함은 爾臣民의 학식으로 국가의 中興大功을 찬성하기 위함이라. 爾臣民은 忠君 애국하는 心性으 로 爾德 爾體 爾智를 養하라. 王室의 安全홈도 爾臣民의 교육에 在하고 국가의 부강홈도 爾臣民의 교육에 在하니 爾臣民의 교 육이 善美한 境에 抵치 못하면 朕이 어찌 갈아되 朕의 治가 成 하다하며 朕의 정부가 어찌 감히 갈아되 그 責을 盡하다 하리 오. 爾臣民도 교육하는 道에 心을 盡하며 力을 協하야 父가 是 로써 其子에게 提誘하고 兄이 是로써 其 弟에게 勸勉하며 朋友

215 Ⅱ. 近代敎育의 普及 가 是로써 輔翼하는 道를 行하야 분발 不己할 지어다. 4) 여기에 담겨진 신교육에의 지향은 첫째가 교육은 국가보전의 근본됨이 밝혀져 있으며, 둘째는 신교육의 道를 밝혔으니, 즉 과 거의 교육은 중국의 儒學을 근본삼은 虛名 虛飾 교육에 불과했으 나 신교육은 實用과 과학적 學問을 추구하는 것임을 밝혔다. 셋째 는 교육의 三六綱紀를 밝혔으니 德育 體育 智育의 셋이 그것이다. 네째, 敎育立國의 정신을 들어 學校를 廣設하고 人材를 양성함이 곧 국가의 中興大功과 保全에 직결되는 사실임을 밝혔다. 이에 뒤이어 1895년 4월 16일에는 새로이 勅令 第79號로서 비 로소 漢城師範學校 官制가 公布되었다. 우선 신교육 실시에 있어 서 교육의 母體가 되는 교원 양성을 위한 첫 官制가 시행된 것이 다. 또한 그 해 5월 10일 勅令 第89號로서 外國語學校 官制가 公 布되고, 같은 해 7월 19일에는 勅令 第145條로 小學校令이 공포 실시되었다. 이리하여 국민 교육 실시를 위한 제반 法令이 公布시 행됨으로써 이제 신교육은 본격적인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이렇 듯 신교육을 위한 정부의 노력은 1896년에는 38개소5)의 公立小 學校가 전국 중요 도시에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2) 開化期 敎科書의 編纂 및 그 內容 開化期의 新敎科書 내용을 알아보기 위하여 우선 앞서 公布되 었던 小學校令을 참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小學校令을 중심으로 당시 소학교에서 실시해야 했던 敎科 目이나 敎科 내용이 소상하게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4) 官報 1895년 2월 2일자 敎育 詔勅 5) 親睦會 親睦會報 4號 p

216 2. 敎科書 編纂 小學校令은 全文이 4章 29條로 되어 있으니 이 중에서 敎科目 敎科編制에 관한 사항만을 가려서 여기 소개해 본다면, 第2章 8 條에, 小學校의 尋常科 敎科目은 修身 讀書 作文 習字 算術 體操로 함으로 되어 있다. 또 同章 9條에는, 小學校 高等學校의 敎科目은 修身 讀書 作文 習字 算術 本國 地理 本國歷史 外國地理 外國歷史 理科 圖畵 體操로 하고 女兒를 爲하여 재봉을 加함. 時宜에 의하여 外國語 一科를 加하며 또 外國 地理 外國歷史 圖畵一科 或 數科를 除함을 得함 이라고 밝혔다. 또 同 第15條를 보면, 小學校의 敎科書는 學部의 편집한 外에도 或 學部大臣의 檢 定을 經한 者를 用함이라 되어 있어 敎科目이나 사용 교과서의 종류 등이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小學校令에 이어서 그해 8월 15일에는 學部令 第3號로 小學校 校則大綱이 발표됨으로써 小學校敎育의 보다 구체적인 윤 곽과 아울러 교과내용과 敎授要目까지도 밝혔다. 뿐만 아니라 앞 으로 편찬될 교과서의 내용 성격까지도 살펴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소학교 교과목 중 가장 중심이 되는 修身 讀書와 作 文(現在의 國語에 해당됨) 本國歷史 등 3科目의 지도 내용과 교 수지침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으며, 또 당시 신교육을 실시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철학적 사상적 관점하에서 고과운용의 중심을 잡 았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敎則大綱 第2條에, 修身은 교육에 관한 詔勅의 旨趣에 基하고 아동의 양심을 啓導하 야 其 德性을 함양하며 人道를 실천하는 方法을 授함을 耍旨로 홈

217 Ⅱ. 近代敎育의 普及 尋常科에는 孝悌 友愛 禮敬 仁慈 信實 義勇 恭儉 등 실천하는 방법을 授하고 別로히 尊王愛國하는 사기를 養함을 務하고 또 臣 民으로써 국가에 대하는 責務의 大要를 指示하고 兼하야 염치의 重함을 知케 하고 아동을 誘掖하야 風俗과 品位의 純正에 趨함을 주의함이 可홈. 女學生은 別로히 貞淑한 美德을 養케 함이 可홈. 修身을 授하는 時에는 近易한 俚諺과 嘉言과 善行 등을 例證하 야 勸戒를 示하고 敎員이 몸소 아동의 모범이 되야 아동으로 하여 금 浸潤薰染케 함을 要홈. 第3條에는 독서와 작문은 近으로 由하야 遠에 급하며 簡으로 由하야 繁 에 就하는 방법에 依하고 먼져 보편의 言語와 日常須知의 文字 文句 文法의 讀法과 의의를 知케 하고 적당한 言語와 字句를 用 하여 正確히 思想을 표창하는 能을 養하고 兼하야 智德을 啓發 홈을 要旨로 홈. 尋常科에는 近易適切한 事物에 就하여 平易하게 談話하고 그 언어를 연습하야 國文의 讀法 書法 綴法을 知케 하고 次第로 國 文의 短文과 近易한 漢文 交하는 文을 授하고 점진하기를 從하 야 독서 작문의 교수시간을 분별하는데 독서는 國文과 近易한 漢文 交하는 日用 書類 등을 授함이 可홈. 高等科에는 독서는 漢字 交文을 授하고 作文은 漢字 交文과 日用 書類를 授함이 可홈. 독서와 작문을 授하는 時에는 단어 短句 短文 등을 習取케 하 고 或 改作하야 國文 사용법과 語句의 用法에 熟하게 함이 可홈. 讀本의 文法은 평이케 하야 보통 國文의 모범됨을 요하는 고 로 아동의 理解하기 易하야 그 심정을 快活 純正케 홈을 授함이

218 2. 敎科書 編纂 可하고 또 그 事項은 수신 지리 역사 理科 기타 日用生活에 필 요하고 敎授에 취미를 添함이 可홈. 작문 독서와 기타 교과목에 授한 事項과 아동의 일상 견문한 사항과 及 處世에 필요한 사항을 기술호되 行文이 평이하고 旨 趣가 명료함을 可홈. 言語는 他敎科目의 교수에도 항상 주의하야 연습케 함을 要홈. 第7條에는 本國歷史는 國體에 大要를 알게 하야 國民된 志操를 要旨로 홈. 敎科에 本國歷史를 加하는 時에는 鄕土에 관하는 史談으로부 터 始하야 점점 建國의 體制와 賢君의 盛原과 忠良賢哲의 事蹟 과 開國 由來의 梗槪를 授하야 國初로부터 現時에 至하기까지 事歷의 大要를 知케 홈이 可홈. 高等科에는 前項에 準하야 稍詳히 國初로부터 現時에 至하기 까지 事歷을 授홈이 可홈. 本國歷史를 授하매 아동으로 하여금 당시 실상을 상상하기 易할 방법을 授하고 人物의 言行 등에 就하여는 是를 修身에 授 한 格言 등에 照하야 正邪 是非를 分辦케 홈을 要홈. 이상에서 3敎科의 主眼點이 한결같이 日常生活에 필요한 기본 지식을 습득케 하고, 나아가서는 尊王愛國하는 정신과 國民으로서 國家에 대하여 責務를 다하는, 말하자면 올바른 民族精神, 올바른 愛國觀을 교육하는데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면 이러한 교육방침이 교과서를 통하여 어떻게 표현되었던 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하여 당시의 學部에서 발간했던 敎科書 一覽을 살펴본다

219 Ⅱ. 近代敎育의 普及 敎科書名 萬國地誌 萬國略史 朝鮮歷代史略 朝鮮歷史 國民小學讀本 朝鮮略史 朝鲜地誌 小學讀本 牖蒙彙編 夙惠記略 輿載撮要 地璆略論 東輿地圖 近易算術 上 下 簡易四則算術 新訂 尋常小學 册數 敎科書名 漢文 三册 三册 泰西新史攬要 公法會通 東輿地圖 朝鮮歷史 朝鮮略史 朝鲜地誌 輿載撮要 地璆略論 萬國地誌 萬國略史 上 下 士民必知 漢 文 夙惠記略 牖蒙彙編 尋常小學 國民小學讀本 册數 漢文 二册 國文 二册 三册 三册 小學讀本 西禮須知 近易算術 上 下 簡易四則算術 小地球圖 着色 國文 小地球圖 着色 三册 6) 7) 이상은 1896년과 1897년의 兩年에 걸쳐 學部에서 발간한 교과 서 일람표이다. 발행 총수는 20종을 헤아릴 수 있으나 종류별로 보면 그 수는 훨씬 적다. 이미 공포되었던 小學校令이나 小學校 敎則大綱에서 보여준 全 敎科의 교과서 발간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여기서는 겨우 一部의 發刊에 그친 感이 있다. 6) 學部編輯局 尋常小學 卷1 뒤에 소개된 敎科書 一覽 7) 泰西新史 뒤에 소개된 學部 편찬 敎科書 一覽

220 2. 敎科書 編纂 한편 學部의 교과서 편찬에 日人이 간여한 사실은 建陽 원년 2 월에 學部에서 간행한 國語讀本인 尋常小學의 序文 8)에서 찾 아볼 수 있다. 이 序文을 참고해 보면 初期 교과서 편집에 있어서 편집 및 편 찬 기술면에 있어서 全的으로 日人의 의견이 강하게 반영된 점을 들 수 있으나, 이러한 문제는 정책적 의도에까지 확대시키지 못하 였고, 다만 편집기술상의 문제로 그친 것이다. 그러므로 심상소학 의 내용은 당시 日本 교과서의 스타일을 그대로 본 뜬 형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가령, 삽화의 사용이라든가 이솝의 우화 등을 加味했다는 것은 이것을 증명해 주는 실례이다. 반면에 교과서 편집상의 기본정신에 있어서는 甲午改革 후에 있어서의 독립의식이나 국가 민족의식 등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 는 것과 時務的인 내용을 담은 새로운 시대적 지식보급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곧 甲午改革 후의 獨立에의 부푼 꿈이 그대로 교 과서를 통하여 반영되었다고 보아지는 것이다. 이러한 교과편재상의 특질을 당시에 발간된 교과서의 목차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國民小學讀本 1895년 學部 발간 木活字 國漢文混用 漢裝 全文 142面 第一課 大朝鮮國 第五課 世宗大王紀事 第二課 廣知識 第六課 商事 及 交易 第三課 漢陽 第七課 植物變化 第四課 我家 第八課 書籍 8) 建陽원년 學部刊 尋常小學 序文 중에서 玆에 日本人 補佐員 高見龜와 麻川 松次郞으로 더불어 小學의 敎科書를 편집할 새 天下萬國의 六法과 時務의 適用한 者를 依樣하야 或 物象으로 譬喩하며 或 圖畵로 形容하야 國文을 尙用함은

221 Ⅱ. 近代敎育의 普及 第九課 以德報怨 第二十六課 支那國 二 第十課 時計 第二十七課 까휠드 一 第十一課 駱駝 第二十八課 까휠드 二 第十二課 條約國 第二十九課 氣息 一 第十三課 知識一話 第三十課 第十四課 倫敦 一 第三十一課 亞米利加發見 一 第十五課 倫敦 二 第三十二課 亞米利加發見 二 第十六課 風 第三十三課 亞米利加獨立 一 第十七課 勤學 第三十四課 亞米利加獨立 二 第十八課 蜂房 第三十五課 亞米利加獨立 三 第十九課 支那國 一 第三十六課 鳄魚 第二十課 錢 第三十七課 動物天性 第二十一課 紐約 第三十八課 合衆國礦原 第二十二課 乙支文德 第三十九課 元素 第二十三課 鯨獵 第四十課 第二十四課 老農多話 第四十一課 成吉思汗 二 第二十五課 時間恪守 氣息 二 成吉思汗 一 新訂 尋常小學 卷一, 1896年 學部 발간, 木活字 國漢文混用 漢裝 全文 52面 第一課 學校 第二課 勉勵 第三課 㬢 第四課 東西南北이다 第五課 四大門과 및 四小門이라 第六課 時

222 2. 敎科書 編纂 第七課 馬와 牛라 第八課 農工商 第九課 曉 第十課 虹 第十一課 苦는 樂의 種이라 第十二課 雀 第十三課 입은 하나니라 第十四課 金志學 第十五課 부엉이가 비들기의게 웃음을 보았더라 第十六課 食物 第十七課 쥐의 이야기 第十八課 아들되는 者의 道理라 第十九課 正直한 兒孩 第二十課 貪心 있는 개라 第二十一課 和目한 家眷 一 第二十二課 和目한 家眷 二 第二十三課 貪慾은 그 몸을 亡함이라 第二十四課 손가락 끝이라 第二十五課 淸潔하게 하라 第二十六課 蟪과 飛蛾의 이야기 第二十七課 조고만한 羊이라 第二十八課 我國 第二十九課 가마귀와 여우의 이야기라 第三十課 葡萄田 一 第三十一課 葡萄田 二

223 Ⅱ. 近代敎育의 普及 이상 소개한 두 敎科書는 명칭이 모두 小學讀本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이것은 오늘날의 國語讀本에 해당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國民小學讀本이 심상소학독본보다 앞서 간행되었지만, 내용을 비교해 보면 두 책이 모두 國漢文 混用으로 되어 있는 점은 같다. 그러나 국민소학독본이 심상소학보다는 어려운 한자를 많이 사용 하였으며, 文章도 長文型을 이룬 데다 삽화가 하나도 없다는 점에 서 이것이 高學年用으로 편찬된 교과서임은 쉽게 알 수 있다. 반 면 심상소학은 삽화가 많이 들어 있으며 單元의 내용도 國民小學 讀本에 비하여 훨씬 쉽고 간단한 文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이것은 低學年用으로 편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初期의 國語 교과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국민소학독본의 第一課 에 大朝鮮國이라는 單元부터 시작되어 있다. 이와 같이 전체 의 編制上의 특질로서 민족주체성과 愛國忠魂의 사상을 체득하도 록 표현하고 있음은 바로 甲午改革 후 자주독립 의식을 그대로 교 과서에 반영시킨 것이라고 보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 中心主 題를 抽出해 보면, 첫째 독립정신의 앙양, 둘째 歷史的 主體 의식 의 확립, 세째 넓은 국민적 교양의 습득과 새로운 세계지식의 이 해, 네째 과학지식의 보급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單元 편성의 주요정신은 곧 정치적 혼란과 국제간의 세 력 角逐에서 헤엄쳐 나가기 위한 自衛와 自立의 정신을 기르기 위 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甲午改革과 더불어 독립정신의 확 립이 우선 교육의 선결되는 이슈로서 다루어졌다함을 능히 알 수 있는 것이다. 1) 學會의 活動과 敎科書編纂運動 1905년 日本의 정치적 침략은 더욱 노골화되어 드디어 乙巳條

224 2. 敎科書 編纂 約을 강제 체결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 조약이야말로 弱肉 強食의 무자비한 한 표본을 現出시킨 것이다. 이 조약은 처음부터 武力에 의하여 강제로 체결된 불평등조약이었다. 허울좋은 保護란 이름 밑에 한 국가의 主權을 무시하고 행정 외교 군사 등 全權力 을 統監府 밑에 예속시켜서 恣意로 한국을 지배 요리하자는 底意 였던 것이다. 이 天人共怒할 乙巳條約이 발표되자 천지는 경악과 울분을 금 치 못했으며, 이를 반대하는 민족의 소리는 터지기 시작했다. 張 志淵은 皇城新聞에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치 욕적인 조약의 파기를 주장했으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조약을 반 대하는 여론과 함께 日帝 침략에 항거하고 주권회복을 외치는 소 리가 높아 갔다. 閔泳煥의 殉國은 그의 遺書와 더불어 抗日의 불꽃에 기름을 부 었으며, 全國의 儒生 志士들은 잇단 乙巳條約 반대의 상소문을 올 렸고, 나라를 위한 義兵의 義擧가 곳곳에서 일어나 民族正氣를 외 치고 애국심을 호소하는 소리는 최고조에 다달았다. 이런한 때를 당하여 憂國志士들은, 日帝 침략에 저항하고 주권 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교육을 통한 人材와 힘의 양성이 시급함을 깨닫고 교육을 일으키기 위한 熱意가 하나의 行動으로 具體化하 기에 이른 것이다. 주권회복과 富國強兵은 오직 교육에 의하여 이 루어질 수 있고, 또 교육은 곧 민족운동의 성패를 가름하는 것으 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학교를 설치하고 교육진흥을 위한 學會를 만들었다. 이러한 학회활동은 국권회복에 제일목표를 두었으며, 그 方法으로 교육과 민족계몽이란 兩大事業을 펴나갔던 것이다. 전국적으로 만연된 학회의 활동개황을 살펴보면 1908년에는 都合

225 Ⅱ. 近代敎育의 普及 57개9)에 이르렀으니 그 규모나 활동의 양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關東學會 畿湖學會 湖南學會關北學會 嶠南敎育會 國民敎 여기에 그 대표적인 學會名을 들어보면 大韓自強會 西友學會 育 등이다. 서울을 비롯하여 각지방마다 다투어 학교를 설치하고 교육에 열을 올렸으니 이러한 學會와 敎育과의 關係를 살펴보면, 凡物이 孤하면 危하고 羣하면 強하며 合하면 成하고 離하면 敗함은 固然之理라. 矧今世界에 生存競爭은 天然이오 優勝劣敗 는 公例라 謂하는 故로 社會의 團體成否로써 文野를 別하며 存 亡을 期하느니 今日 吾人이 如此히 劇烈한 風潮를 撞著하야 大 而國家와 小而自家의 自保自全之策을 謂究하면 我同胞 靑年의 敎育을 開導勉勵하야 人材를 양성하며 衆智를 啓發함이 即是 國權을 회복하고 人權을 伸張하는 기초라. 10) 한데서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있다. 學會 중심의 이와 같은 新敎育運動은 日帝의 침략에 대한 자기 방위라는 필연적 수단과 성격을 지니고 시작되었으며 또한 발전 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뒤늦게나마 정치적 교육적 자각 을 일으키게 되어 민족사상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고 抗日의 정신 적 支柱가 되어 계속화되었다는 것은 轉禍爲福의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신교육의 발흥이 정신적 경제적 요인 밑에서 필연적으 로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본다면, 실제로 이러한 내용의 교 육이 실시되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당시에 어떠한 교과서를 9) 國史編纂委員會所藏 各會社調查 ) 西友 創刊號

226 2. 敎科書 編纂 편찬했으며 그 내용은 어떠한 것이었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學會 중심의 學校는 우선의 목적이 국권회복을 위한 사 상교육에 있었기 때문에 교과서의 내용도 애국적이고 항일적인 사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는 것이다. 그 좋은 예를 하나 들면, 대개 의 私立學校에서 사용한 교과서는 日帝의 눈을 속여 프린트로 된 교과서를 많이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당시의 인쇄 사정 등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그보다는 국권회복의 내용을 담은 교과서를 독자적으로 만들어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더 큰 이유가 있 었을 것이다. 당시의 이러한 애국적 교육을 위해서 편찬된 교과서의 원모습 을 지금에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애석하지만 서울을 중심으로 당 시의 學會에서 편찬 사용되었던 교과서를 단편적이나마 몇 개 예 를 들어 그 性格을 찾아보기로 한다. 國民敎育會에서 편찬 발행한 교과서로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① 新撰 小物理學 全 光武 10년 6월 刊 國漢文混用 新鉛活字 洋裝本 全 107면 ② 初等地理敎科書 全 光武 11년 7월 5일 刊 國漢文混用 新 鉛活字 洋裝本 全 185면 ③ 初等小學 全 8卷 光武 10년 10월刊 國漢文混用 新鉛活字 洋裝本 各卷 平均 36면 ④ 大東歷史略 全 光武 10년 6월 國漢文混用 新鉛活字 洋裝 本全 221면 ⑤ 新撰小博物學 全 光武 11년 7월 國漢文混用 新鉛活字 洋 裝本全 108면 興士團에서 편찬 발간한 교과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227 Ⅱ. 近代敎育의 普及 ① 初等本國略史 全 2册 隆熙 3년 9월 30일刊 國漢文混用 新鉛活字 洋裝本 1册 55면 2册 99면 ② 初等本國地理 全 2册 隆熙 3년 10월刊 國漢文混用 新鉛 活字 洋裝本 1册 50면 2册 50면 이상이 學會 및 정치단체에서 발간했던 檢認定敎科書와는 달리 독자적 편찬으로 된 교과서인데, 이 책들은 철저한 민족주의적 사 상과 배일사상으로 일관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學會 활동과 더불어 신교육에 자극된 일반 출판사 도 敎育圖書, 특히 애국적 사상을 담은 출판물과 교과서 출판에 착수하여, 많은 애국적 내용물과 역사적 傳記物을 간행함으로써 日帝에 대한 문화적 저항운동이란 새로운 양상으로 변모해갔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성행해가는 學會 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日帝는 1908년 드디어 學會令을 공포하여 이를 제압하기 시작했 다. 이로부터 무수한 탄압과 행정적 간섭을 받게 되었으니 전과 같은 자유롭고 왕성했던 학회 운동도 차차 열기가 가셔 갔고, 또 한 學會 중심의 신교육운동도 침체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2) 私立學校敎育의 勃興과 敎科書 編纂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근대적 신교육의 發芽는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선교사들에 의해 설치된 學校는 거의가 私立學校로서 全國에 걸쳐 그 수가 대단히 많았다. 이에 따라 신교육에 차차 눈 뜨고 교육 자체를 중요시하게 된 민중들은 이제 자체의 힘으로 學 校를 설립하고 신교육을 하겠다는 주체적 교육운동이 전국에 걸 쳐 일기시작했다. 이러한 신교육운동에 더욱 박차를 加하게 된 직 접적 요인이 된 것이 乙巳條約 체결이란 정치적 정세에 있었던 것

228 2. 敎科書 編纂 은 사실이다. 私立學校 敎育 勃興의 원인에 대하여 1905년 統監府 學部 담당 書記官으로 있다가 1907년 이후 한국정부 學部次官을 역임한 日 本人 俵孫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日露戰爭 후 1905년(光武 9년) 第一次 韓日協約 以來 國運 의 變遷에 遭遇한 韓人은 그 두뇌에 強한 印象을 받아 교육에 의하지 않으면 國權의 회복을 바랄 수 없다. 특히 1907년의 第 二次 韓日協約 체결 軍隊解散 후에는 교육의 필요를 절감하는 念이 激發鬱勃하여 解隊의 將士들이 各地에 흩어져 혹은 폭도 草賊(義兵을 가르킴)의 무리에 投身하였으나 다른 一部는 職을 學校 敎師에 求하여 敎育熱의 격증을 유발하고 그 풍조가 도도 히 국내에 미만하여 마침내는 오늘과 같은 다수 사립학교의 설 립을 보기에 이르렀다. 11) 이와 같이 신교육 발흥의 第一要因이 국권회복이란 命題에 있 다고 보았으며 사립학교의 설치목적이나 교육방침이 철두철미한 배일사상과 독립사상으로 응고된 민족교육에 터잡고 있어서 日帝 에 대한 커다란 위협으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衝天之勢와 같은 사립학교 교육운동의 양상을 살펴보면 1909년 전국 사립학교 수는 총 2,250校에 달하였고, 그 중에 순 수한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설치된 민족주의적 사립학교의 수가 1,402校에 달했다 하니 사립학교 설치운동의 기세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독립을 찾고 救國運動의 일환으로 시작된 사립학교 설치운동은 차차 그 방향이나 성격을 中堅人物 양성을 위한 중등학교 설치운 동으로 돌렸다. 11)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1 p

229 Ⅱ. 近代敎育의 普及 이 운동은 더욱 번져 고등교육기관 설치의 필요를 느끼게까지 되었다. 그리하여 중등학교는 말 할 것도 없고 전문학교가 설치 개교되는 등 이제 교육은 본격적 궤도에 올라 근대적 교육의 모습 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중등학교의 대표적인 학교는 養正義塾 徽文義塾 등 15個 학교이며, 또한 專門學校의 성격을 지니고 설치된 學校로는 1905 년에 설립된 普成學校(뒤에 普成專門學校로 개칭)와 漢城法學校, 1808년에 설립된 大東專修學校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학교의 설립 상황을 보면 다음 표와 같다. 設立年度 中 等 學 校 1905年 (光武 9年) 養正義塾 光成實業學校 1906年 (光武 10年) 徽文義塾 進明女學校 普成中學校 淑明學校 輔仁學校 1907年 (光武 11年) 大成學校 五山學校 五星學校 鳳鳴學校 精理舍 中東學校 1908年 (隆熙 2年) 1909年 (隆熙 3年) 畿湖學校 同德女子義塾 專 門 學 校 普城學校 漢城法學校 大東專修學校 隆熙學校 昭義學校 이와 같은 고등교육기관의 설치는 지식 정보를 넓히고 엘리트 양 성의 큰 구실을 하게 되어 민족주의적, 배일적 사상을 더욱 체계화 시켰고, 이것은 또한 日帝에 커다란 위협적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철저한 민족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설치된 사립학교의 교육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서 당시 사립학교에서 사용되었던 교 과서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1905년경까지만 해도 學部에서 편찬된 교과서의 종류나 범위 가 극히 좁았던 관계로 각 사립학교에서는 자연히 독립적인 교과 서 편찬을 해야만 했고 따라서 다소 자유로운 교과서 발간을 할

230 2. 敎科書 編纂 수 있었다. 당시의 사립학교에서 발간한 교과서는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독 립정신을 高揚하는 등 철저한 민족주의 사상을 내용으로 한 교과 서가 대부분인 것이 특질이다. 이러한 사립학교용 교과서의 대부 분은 國史敎科書 國語敎科書가 중심 敎科가 되었다. 또한 정치 時事에 관한 책자도 발간, 副讀本으로 사용하여 새로 美國獨立史 埃及近世史 波蘭末年戰史 普法戰記 越南亡國史 伊太利獨立史등 外 운 시대적 지식의 보급에 힘써 왔다. 에도 많은 책을 발간했다. 이와 같은 西洋의 戰史나 歷史를 통하 여 민족적 현실을 자각케 하고 나아가서는 독립자주의 정신을 교 육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乙支文德傳 李舜臣傳 東國名將傳 같은 우리 역사상의 偉人 傳을 발간, 民族主體性과 歷史意識을 바르게 함으로써 애국적 學生 伊太利建國三傑傳 凶 亞利 愛國者 葛蘇士傳 比斯麥傳 華盛頓傳 美國大統領 까퓌일트傳 世界殖民史 民族競爭史 二十世紀 朝鮮論 飮氷室의 自由論등은 正規 교과서는 아니었지만 각 사립학교 을 길러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에서 정규 교과서와 같이 사용했던 책이며 학생들은 이 책을 통하 여 민족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현실적 상황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하여 日帝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구제해야겠다는 救國 정신, 愛國 思想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항일적인 인재가 배출됨으로써 교육의 열은 더욱 만연되어 갔다. 이와 같은 私立學校의 抗日, 民族敎育을 日帝는 탄압하기 시작 했다. 私立學校令이란 해괴한 法令을 공포한 것은 바로 탄압의 구 실을 만든 것이었다

231 Ⅱ. 近代敎育의 普及 私立學校令이 公布되기 前의 사립학교 교육의 양상에 대하여 日帝는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05년(光武 9) 경부터 敎育熱이 勃興하여 各地는 다투어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더우기 平安北道는 가장 왕성하여 심지어 1郡 內에 100을 헤아리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들 사립 학교 중에는 이름뿐이지 其實 내용은 없고 或은 靑年子弟를 모 아서 日夕 유희훈련만을 日課로 하고 或은 不良의 교과서를 사 용하여 정치와 교육을 混同하고 排日思想을 注入하였다. 12) 당시의 사립학교 교육의 왕성한 양상과 기세를 알아볼 수 있다. 1908년 勅令 第62號로 공포된 私立學校令은 표면상으로는 사 립학교를 정비한다는 이유로서 제정되었지만 실은 날로 번창해 가는 사립학교를 해체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이 私立學校令13)의 중심이 되는 골자를 살펴보면, 第2條에 私立學校를 설립코자 하는 者는 左의 사항을 具하야 學部大臣의 인가를 受함이 可함. 一. 學校의 目的 名稱 及 位置 二. 校則 三. 校地 校舍의 平面圖 四. 一個年 收支豫算 五. 維持方法 단, 기본재산 또는 기부금에 대하여는 증빙서류를 첨가함이 可함. 六. 설립자 學校長及 敎員의 이력서 七. 교과용 圖書名 12)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pp ) 1908년 8월 26일자 勅令 第62號로 公布되었다

232 2. 敎科書 編纂 第6條 私立學校에서 用하는 敎科用圖書는 學部의 편찬한 者이 거나 又는 學部大臣의 검정을 經한 者 中心으로 擇함이 可함. 私立學校에서 前項 以外의 圖書를 敎科用圖書로 用코자 하는 時는 學部大臣의 인가를 受함이 可함. 第10條 左의 경우에는 學部大臣은 私立學校의 폐쇄를 命함을 得함. 一. 法令의 규정에 위배한 時 二. 安寧秩序를 문란하거나 又는 風俗을 壞亂할 者가 有한 時 三. 6個月 以上 規定의 授業을 爲치 아니하는 時 四. 第9條에 의하야 學部大臣이 與한 命令에 위배한 時 등으로 되어 있어서 日帝는 자기들의 통치방침을 반대하는 종 래의 反日的 교육에 대해 폐쇄한다는 위협을 주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육시설의 零細性을 이유로 學校를 정비한다고 못 박아 놓았으니 雪上加霜格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교과용 도서 검정 규정을 신설하여 교과서의 모든 정치적 군사적 내용을 제약 삭제케 하여 교육에서 民族性을 말살하려 했 던 것이다. 이와 같은 私立學校令에 의하여 우리의 신교육은 제약을 받게 되었으니 과거의 民族主義的 排日的인 사상에 철저했던 사립학교 교육도 차차 위축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빠졌다. 3) 學部의 敎科書編纂事業과 敎科書의 受難 앞서의 私立學校令을 공포하게 된 또 하나의 저의는 사립 학교 에서 檢認定을 거치지 않고 사용했던 소위 排日的 敎科書를 一掃 하고 學部 편찬의 교과서를 강제 사용케 함으로써 排日的 요소나

233 Ⅱ. 近代敎育의 普及 민족적 색채를 모두 排除하려는데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과서의 통제 문제는 일찍부터 腹案되었던 것으로 日 帝는 1905년 행정개혁을 빙자하여 1,300만원을 차관형식으로 강 제 貸與해서 이중 50만원을 學事刷新이란 이름 밑에 학교건립과 시설 확장을 내세워 교육의 근대화사업을 추진한다는 명분을 내 걸었지만 실은 反日的인 韓國敎育의 방향을 억압 통제하려는 데 그 근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와 병행하여 우선 말썽많은 교 과서를 통제하고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에 부응되는 親日的 御用 敎科書 편찬사업을 계획하는 일에 着手하기 시작하였다. 1905년 日本人 學部參與官 밑에 委員會를 조직하여 學部敎科 用 도서 편찬에 착수했으며, 1906년에는 普通學校用 교과서의 일 부가 발간되어 이를 그해 9월부터 일제히 보통학교에서 사용케 했던 것이다. 이러한 學部 편찬사업은 우선 보통학교용 교과서를 중심으로 발간되었는데 1909년 발간된 교과서는 다음과 같은 것 이 있었다. 修身書 4册. 國語讀本 8册, 日語讀本 8册, 漢文讀本 4册, 理科 書(日文) 2册, 圖畵監本 4册, 習字帖 4册, 算術書(敎師用) 4册.14) 여기서 주목해 볼 문제는 새로 발간된 日語敎科書나 日文으로 된 교과서 등과 아울러 교과서의 내용 또한 日本의 보호정책을 합리 화한 내용으로 편찬된 사실이다. 과거의 민족주의적이며 독자적인 교과서 편찬 내용과는 전연 다른 내용으로 바뀌어지면서 결국 우 리는 남(日本)의 사상과 言語를 공부하기에 이른 것이다 日帝는 또다시 統監府의 교육정책을 강화하기 위하여 1908년 敎科用 圖書檢定規定15)을 공포하여 더욱 민족교육을 탄압하고 교 14) 高揭濱吉 朝鮮敎育史考 1927, p ) 1908년 8월 28일자 學部令 第16號로 공포된 것으로 全文이 15條로 되어 敎科 書는 반드시 學部大臣의 검정을 받아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234 2. 敎科書 編纂 과서용 도서의 검열 제도를 강화하여 갔다. 이러한 검인정제도는 교과서 내용의 민족성이나 자율성을 더욱 저해한 결과가 되었을 뿐아니라 교과서 발간에 큰 장애가 되었다 는 것은 1910년 5월말 현재 學部 調査에 의한 검인정교과서의 請願事項을 알아봄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16) 部 數 種 類 修 國 漢 歷 地地 理 數 博生 體 農商 敎 日其 法經 辭 身 語 文 史 誌文 化 學 物理 操 工 育 語他 制濟 書 計 檢定出願部數 內 譯 同認可部數 同不認可部數 同調査中 이상은 著譯者가 檢認定 出願을 낸 사항의 예이지만, 이보다도 학교마다 반드시 검인정교과서를 사용케 했으며 또한 이 중 人文 科 교과서의 경우는 반 이상이 不許 또는 未解決의 상태에 있음을 보면, 그 탄압의 양상을 알 수 있다. 또 사립학교령에 의거, 검정 을 받지 않은 교과서를 사용할 경우 사용 학교는 반드시 學部大臣 의 인가를 받도록 되어 있어서 말하자면 하나의 檢認定法에 묶여 있는 상태이었다. 여기에 따라서 사용 인가 신청서를 제출한 상황을 살펴 보면 다 음과 같다.17) 種 類 修佛基國漢日英歷地理數博體唱農法敎簿圖習手家 督 語 物 工 計 其 生 身書敎 部數 書語文語他史理化學理操歌商經育記畵字工政 認可出願部數 內 認可部數 不認可部 譯 數 16) 前揭書 p ) 前揭書 p

235 Ⅱ. 近代敎育의 普及 이상 檢認定 교과서의 出願 및 인가상황을 보더라도 不許된 대 부분의 교과서가 修身, 國語, 歷史, 地理 등이어서 교과내용이, 정 치時事와 같은 현실적 문제에 연관되어 민족적 自主性을 주축으 로 하고 있는 것은 그 절반 이상이 認可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 다. 이러한 사실은 검인정 도서규정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그대로 말해 주고 있다. 日帝의 교육 탄압 정책은 더욱 극악하여져서 1909년에는 各學 校令施行規則이 개정 발표되어 日語敎育이 대폭 강화되는 현상으 로 나타났다. 學部令 第4號로 발표된 高等學校令施行規則 중 高等 學校學科課程表 每週 敎授時間表를 보면 國語 漢文이 6시간인데 비하여 日語 6시간이란 비율로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은 統監府의 교육정책은 민족교육을 말살하려는 정책이 었으며,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御用敎育의 강요이었 다. 그리하여 민족교육은 일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편 敎科用 圖書 檢定規定이 公布된 이래 1909년 12월 1일까 지 사이에 學部에서는 다음과 같은 圖書에 對하여 使用禁止 處分 을 내린 바 있다. 이것은 部分的인 것에 불과하지만 당시 敎科書 와 受難과 아울러 民族敎育의 受難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書 名 著 初等小學修身書 中等修身敎科書 倫理學敎科書 最新 初等小學 국문독본 高等小學修身書 初等 倫理學敎科書 初等小學 作 柳 徽文義塾編輯部 申 輯 鄭 寅 조 원 徽文義塾編輯部 安 鍾 國民敎育會 者 槿 永 琥 시 和

236 2. 敎科書 編纂 牖蒙千字 高等小學讀本 日語獨習 녀자독본 幼年必讀 小學漢文讀本 精選 日語大海 最新初等 大韓地誌 大東歷史 大韓地誌 新編 大韓地誌 萬國史記 新訂 東國歷史 商業汎論 普通敎科 東國歷史 歷史輯略 女子修身敎科書 實地應用 作文法 蒙學 漢文初階 獨習 日語正則 德慧入門 速成 漢文讀本 最新高等 大韓地誌 問答 大韓新地誌 大韓新地誌 初等 大韓歷史 經濟原論 中等敎科 東國史略 大東歷史略 東西洋歷史 奇 徽文義塾編輯部 孫 鵬 張 志 玄 元 泳 朴 重 鄭 寅 鄭 玄 金 建 玄 元 泳 義 柳 金 大 玄 金 澤 盧 炳 崔 在 元 泳 鄭 雲 楊 格 徽 文 鄭 寅 博文書館編輯部 張 志 鄭 寅 金 雨 玄 俞 星 玄 설상가상으로 東國史略 등의 교과서와 아울러 一 九 淵 采 義 華 琥 喬 采 中 采 瑾 熙 采 榮 善 學 義 復 非 館 琥 淵 琥 均 采 濬 采 18) 越南亡國史 二 禽獸會議錄 우슨 소리등의 일반 출판물이 出 十世紀 朝鮮論 版法에 의하여 發賣禁止 압수되는 사태에까지 이르매 언론과 더불어 18) 前揭書 p

237 Ⅱ. 近代敎育의 普及 교육도 암흑기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開化期 新敎育이 시작되면서 民族主體性에 입각한 敎科書가 처 음으로 편찬발간되기는 1895년 學部에서 발간한 敎科書類가 그 최초라고 할 수 있다. 乙巳條約 후에는 救國運動과 併行하여 新敎育運動이 크게 勃 興되면서 敎科書의 성격이나 의의가 한결같이 愛國獨立을 표방하 고 그런 내용일색으로 된 것이 당시 韓國敎科書의 특질이었던 것 이다. 말하자면 敎科書 편찬의 내용이 技術的 面의 追求보다도 獨立 思想과 排日的 思想으로 요약되는 精神的 內容面을 더 重視했던 것이다. 敎科書의 特質이 이렇게 뚜렷했던 탓으로 民族敎育도 實이 있 는 敎育으로 성공했던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그러나 잇단 日帝의 彈壓에서 그 自由奔放하고 旺盛했던 護國 排日의 思想은 차차 排除되고 알맹이 없는 敎科書로 변모되어가 는 우리는 뼈아픈 과정을 밟으면서 韓國敎育은 암흑의 구렁이로 빠져들어갔다. 白淳在

238 Ⅲ. 基督敎의 展開 1. 基督敎의 展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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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1. 基督敎의 展開 1. 基督敎의 展開 基督敎는 우리나라에 傳來된 天主敎, 希臘正敎와의 對稱名詞로 서 改新敎로 알려진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을 의미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은 歐洲에서 16세기 宗敎改革(The Reformation) 의 결과로 새로운 신앙이 되어, 歐洲의 여러 民族國家 성립기에 民族主義와 자유 평등사상과 생산 노력의 神聖性을 助長시켜 歐 洲의 근대화의 契機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18 19세기 西歐人, 특히 앵글로-색슨族이 세계를 지배할 때에 프로테스탄티즘은 세 계에 傳播되었다. 우리나라에는 開港後에 西歐人들이 來往하게 되 면서 歐美 基督敎國에서 전래되었다. (1) 開港 以前 基督敎와의 接觸 1) 國內에서의 接觸 朝鮮王朝 純祖때부터 開港할 때까지 西歐 基督敎國의 探險家, 商 人, 宣敎師들이 우리 領海에 출입하였으나 우리의 엄격한 鎖國政 策下에 접촉이 거부되었다.1) 純祖 32년 7월에 獨逸人 改新敎 宣敎 師 귀츨라프(Charles Gutzlaff, 郭實臘)2)가 英國 東印度商會의 委 囑을 받고 우리 西海岸을 來訪하고 地方官憲을 통하여 우리 朝廷 에 글을 올려서 通商을 요청하고 기다리는 동안 忠淸道 주민들에 1) 白樂濬 韓國改新敎史 , 延世大出版部. pp.24 ff. 李能和 朝鮮基督敎及 外交史 下篇 서울 1928 pp ) 白樂濬 op. cit., pp

241 Ⅲ. 基督敎의 展開 게 漢文基督敎聖經을 分布하였다. 그러나, 通商開始 申請書와 奉送 하였던 禮物이 반환되어 오니 來訪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中國에 歸航하였다. 郭氏의 기록에 의하면 來訪船이 정박하여 있던 해안에 甘藷를 심고 갔다고 하였다.3) 다음으로 通商과 宣敎를 위하여 來訪하였던 改新敎 宣敎師는 토마스(Robert J. Thomas)4)였다. 그의 殉敎와 그가 타고 왔던 셔맨將軍號 燒却事件은 우리 近代史에 崔蘭軒事件으로 알려져 있 다.5) 토마스는 中國에 住在하던 英國敎會宣敎師인데 우리나라 西 海岸을 두번 來訪하였다. 첫쨋번은 1865년 늦은 가을이었다. 그때 韓國에서 天主敎迫害를 피하여 芝罘에 온 韓人 天主敎人의6) 木船 에 승객이 되어 우리 西海岸에 3개월간 체류하면서 우리 말을 배 우기도 하고 우리 海岸住民들에게 漢文基督敎聖經을 分布하였 다.7) 그러나 入國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滿洲를 경유하여 1866년 初(양력)에 그의 新任地인 北京에 도착하였다. 그는 北京에서 그 해의 우리나라 冬至使 李豊翼 一行을 대면하기도 하였다.8) 토마 스는 그해(1866년) 여름에 무장한 美國籍 商船 셔맨將軍號가 韓 國으로 通商을 개시하기 위하여 天津에서 出港하여 來韓하는 기 3) Charles Gutzlaff, The Journal of Two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July 30, 1932, p ) 白樂濬 op. cit., pp ) 토마스牧師가 北支那 旅行을 위하여 提出하였던 旅券申請書에는 그 이름을 漢字로 托瑪涘(토마스)라 하였다. 崔蘭軒에 관하여는 異論이 많이 있었으나 아 직 해결되지 않았다. 토마스가 北京에서 우리의 1866年度 冬至使를 만난 기록이 나타났다. 使行錄에 의하면 그해에 韓國冬至使의 正使는 李豊翼, 副使에 李世器, 書將官 兼 掌令에 嚴世永이었다. 그 使節의 高位層에는 崔姓人이 없다. 그러나 次位層에는 토마스와 對話한 崔姓人이 있었고 蘭軒 은 崔姓人의 僞名이거나, 그의 別號이었다는 假說을 세워둔다. 토마스가 1866년 여름에 平壤에 와 問情官 과 對話初에 韓國高官(?)의 姓名(지금말로 명함)을 내놓아 便宜를 보려던 本意 와는 달리 그의 姓名으로 誤認되었다는 假說도 붙여 둔다. -Ibid., p.54의 脚註. 6) Annual Report of the 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 for 1865, pp ) 白樂濬 op. cit., p.47 8) Ibid., loc. cit

242 1. 基督敎의 展開 회에 그 商船의 通譯 겸 宣敎를 목적으로 두번째 來韓하였다. 이 商船이 그 해 8월 말(양력)에 대담하게 平壤市까지 溯上하였다가 則滅되었다.9) 그가 죽기 전에 大同江邊에 모여 있던 平壤 주민들 에게 나누어 주었던 漢文聖經을 받은 사람으로 후일에 기독교인 이 된 이도 있었다.10) 2) 國外에서의 接觸 ㄱ. 滿洲 移住民의 基督敎 歸依 開港 以前에 만주의 韓人 移住民중에 적지 않은 인원이 基督敎 에 歸依하였다. 1870년대부터 滿洲에 내왕하던 우리 상인들이 滿 洲 住在 스코틀랜드 基督敎宣敎師 죤 로쓰와 그의 同僚들과 접촉 하면서 신도가 되었다.11) 그리고 로쓰와 그 同僚 宣敎師들은 만 주 여러 盆地에 散居하는 우리 移住民에게도 宣敎事業을 전개하 여 적지 않은 수의 歸道者를 얻었다.12) 滿洲를 내왕한 청년들로 서 滿洲에서 入敎한 初代基督敎徒들은 거의 모두 義州靑年들이었 다. 李應賛, 白鴻俊, 李成夏, 金鎭基 등 6인이 1876년에, 徐相崙은 1879년에 滿洲에서 세례를 받았으니 韓人 改新敎徒의 선구자들이 었다.13) ㄴ. 開化派 人士들의 日本에서의 基督敎 接觸 우리나라는 大院君의 鎖國政策下에 丙寅(1866) 辛未(1871) 兩 9) Ibid., p.48. 李能和 op. cit., pp ) S. A. Moffett, Early Days in Pyong Yang, The Korea Mission Field, Vol. 21, No. 3(March, 1925), p ) 白樂濬 op. cit., pp 金良善 Ross Version과 韓國 Protestantism. 白山學 報 第3號(1967年 11月), pp ) J. Ross, The Christian Dawn in Korea,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N. S., Vol.3, No.4(April, 1890), p.244. The Missionary Review (Princeton) for Nov., 1885, p ) 白樂濬 op.cit., pp

243 Ⅲ. 基督敎의 展開 次의 洋擾를 치르고 1876년에는 日本과 修好條約을 締結하였다. 그때부터 朝廷 要人들과 진보사상을 가진 新進人士들의 日本 來往 이 자주 있었다. 日本에 가서 開化를 배우려는 인물중에는 서양인 선교사들을 접촉하여 서양의 文物制度를 알아보려 하면서 그들이 전하는 종교에도 관심을 두었다.14) 開化派의 지도자이던 金玉均, 朴泳孝, 徐光範 등이 美國人 선교사들과 내왕 내지 상호 협조하였 다.15) 1882년 8월(음력)에 農學과 司法制度를 견학하려고 日本에 갔던 李樹廷16)은 基督敎에 입교하고 日本人 牧使에게서 1883년에 洗禮를 받았다. 그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위촉을 받고 駐日 美國 聖 書公會의 후원을 얻어 漢文譯 馬可福音에 한글로 접속사를 붙여 諺 解馬可傳福音書를 완성하여 1884년에 日本에서 간행하였다. 그는 다른 복음서의 飜譯도 계속하는 동시에 미국 여러 宣敎會에 글을 보내어 韓國에 宣敎師를 派送하여 주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李樹 廷이 滞日中 日本人 신자간에 특수한 존재가 되었을 뿐 아니라 日 本의 識者들과 詩文의 交驩도 가졌고 東京大學에서 韓國語를 교수 하였고 美國에 韓國을 널리 소개하였다. 駐日 美國人 宣敎關係人들 은 李樹廷이 韓國 改新敎 宣敎事業의 개척자가 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귀국 전후하여 1885년경에 기독교인의 생활을 청산하 고17) 1885년에 귀국하자 처형되었다.18) 이상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開港 이전에 滿洲와 日本에 外游하 던 상인과 開化派 인사들이 기 독교에 귀의하기도 하고 또는 호기 심을 가지고 접촉도 가졌다. 滿洲에서 歸道한 자들중에는 독실한 14) 15) 16) 17) Ibid., Ibid., Ibid., Ellen pp.66-67, p.91. pp.78-79, C. Parson, Fifteen Years in the Korea Mission, New York p.7. 18) 李光麟 韓國開化史硏究 서울 一潮閣 pp

244 1. 基督敎의 展開 신자들이 있었으나 日本에서 접근하였던 인사중에는 기독교를 근 대화의 일면으로 고려하였을 뿐이요 徐載弼 이외의 歸道人은 없 었다. (2) 開港과 基督敎의 傳來 외래종교의 한국 傳來에는 옛부터 박해와 저항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佛敎가 그러하였거니와 天主敎의 역사도 그러하였다. 우리나라와 基督敎國家間의 처음 접촉은 전쟁으로 개시되었다. 1866년 프랑스 함대의 來侵과 1871년 미국 함대 來襲의 원인이 모두 종교적 사건에서 惹起되었으니 우리 측에서는 서양인의 종교 를 쉽사리 받아들이게 되어 있지 아니하였다. 더우기 1881년 6월 의 斥邪綸音(邪敎禁止令)이 아직도 發効중에 있었고 辛未洋擾에 뒤이어 大院君이 세운 斥和碑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국내인으로서 는 아직도 禁敎인 天主敎와 새로 들어오는 기독교의 差異에 이해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1882년에 西方國家를 상대로 맨 처음 체결한 韓美條約에는 宣敎自由의 條項이 들어 있지도 아니 하였다. 開港初에 있어 기독교는 이러한 역사적, 사회적, 법적 制約 을 받아 자유스런 弘布와 受容의 문이 열려 있지 아니하였다. 1) 宣敎師들의 入國 開港 이전에는 中國과 日本에 住在하는 美國人 선교사들은 본국 교회에 글과 말로 한국에 宣敎事業의 開始를 촉구하여 오더니19) 韓 美 兩國間에 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어 외국인의 입국이 가능하게 되자 美國人 선교사들이 來韓하게 되었다. 미국인 의사 알렌(H. N. 19) 白樂濬 op. cit., pp

245 Ⅲ. 基督敎의 展開 Allen. 安連)은 中國에 파송되어 있던 美國 北長老敎派의 선교사 로서 1884년 9월에 중국으로부터 入京 居住하였고20) 언더우드 (H. G. Underwood, 元杜尤)와 아펜셀러(H. G. Appenzeller, 亞扁薛羅) 는 1885년 4월에 동시 來韓하였으니21) 전자는 장로교파에 후자는 감리교파 소속이었다. 이 두 교파는 韓國 改新敎의 雙璧이 되었다. 이들 및 그들의 뒤를 이어 입국한 선교사들이 서울에 자리잡고 어학과 풍속과 문물제도를 배우면서 거주하는 동안 關西地方에는 滿洲에서 受道하였던 徐尙崙, 白鴻俊 등이22) 은밀하게 기독교를 친지들 사이에 전하고 있었다. 徐尙崙이 살고 있던 黃海道 長淵 郡 松川里에 1886년경에 벌써 신도 집단이 생겼고23) 1887년에는 그곳에 장로교회가 설립되었으니 韓人 信徒들이 自力으로 설립한 최초의 교회였다. 2) 甲申政變과 基督敎가 얻은 機會 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 저녁에 신축한 郵政局 落成紀念宴 會場에서 金玉均 등 開化派 政客들이 朝廷의 守舊派 거두들을 살 해하고 開化黨政府를 수립하려고 일으켰던 政變이었다. 이 거사에 서 閔妃의 族姪되는 閔泳翊이 刺客의 칼에 맞아 동맥이 끊어지고, 頭部와 신체의 7개소에 刺傷을 입고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당 시 우리 조정에 외교 고문으로 와 있던 獨逸人 묄렌도르프(P. G. von Möllendorff, 穆麟德)가 그 연회에 참석하였다가 중태에 빠진 환자를 근처에 있던 자기 집으로 옮기고 서울에 來住하던 미국인 의사 알렌을 불러서 응급치료하게 하였다. 이로써 서양의술이 시 20) Ibid., p ) Ibid., p ) Ibid., p.162. 車載明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pp.8 23) 白樂濬 op. cit., p

246 1. 基督敎의 展開 험대에 오르게 되고 겸하여 그 洋醫가 來傳하려는 종교도 진퇴의 岐路에 봉착하게 되었다. 다행하게도 알렌이 施療한지 3개월만에 閔泳翊이 완쾌되니 서양의술의 신비성이 인정되는 동시에 알렌은 王廷의 신임을 얻게 되고 그가 그때까지 공개하지 못하고 있던 자 기 본래의 사명인 기독교의 선교사업도 차츰 그 進路가 열리게 되 었다. 3) 基督敎의 地盤構築 ㄱ. 西歐式 病院의 開設 기독교는 외래종교로서 한국의 새로운 문화환경 안에서 발붙일 만한 발판이 없었다. 그러나 서구의 물질 문명의 파도가 국내에 격동하기 전에 先着한 利點은 가지고 있었다. 알렌은 선교사요 의 사로서 世道家의 거물을 回生시켜준 유공자였다. 국내 인사들은 洋醫術의 혜택을 받기 원하였을 것이다. 알렌은 이 기회에 병원 설립을 계획하고 閔泳翊을 통하여 교섭한 결과로 정부의 재정적 뒷받침을 받고 자기의 의술을 제공하여 국립병원을 開設하였으니 때는 1885년 4월이었다. 在來로 있던 惠民署의 뜻을 따라 이 병 원을 廣惠院이라 命名하였다. 이 병원은 우리나라 근대 의학교육 과 國家 慈惠病院의 元祖요, 오늘 延世大學校 醫療院의 전신이다. 의술로 선교의 문을 열게 되니 來韓한 교파마다 병원과 施療所 를 서울에 개설하였다. 남녀 의사선교사들이 입국하였다. 감리교의 東大門婦人病院은 명실 공히 婦女子醫療機關이었다. 오늘 梨花女子 大學校 附屬病院의 前身이다. 이때에 古參 宣敎師인 알렌과 그의 후계자로 國立病院 의사이던 에비슨(O. R. Avison, 魚丕信)은 국 왕의 侍醫였고, 女醫師 호르톤(Lillias S. Horton, H. G. Underwood의 夫人) 은 오랫동안 왕비의 侍醫로 있었다

247 Ⅲ. 基督敎의 展開 의술이 신체적 고통을 고쳐주는 仁術로서 필요하였다면 몽매한 두뇌를 계발하는 교육의 필요성도 느끼고 있었다. 高宗初에 大院 君의 書院 撤廢와 甲午更張에서 科擧制 폐지에는 폐단의 제거도 있었겠지마는 朝鮮王朝 建國以來로 실시하여 오던 교육제도의 붕 괴이기도 하였다. 舊制度가 무력하여지는 동시에 해외로부터 새교 육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국내 새교육의 先驅者 들로서 美國監理敎宣敎部의 아펜셀러는 1886년에 培材學堂을 설립 하였고, 美國監理敎婦人宣敎會의 스크랜톤夫人(Mary F. Scranton) 은 그해 가을에 梨花學堂을 설립하였으니 우리나라 여자교육의 선봉이었다. 때를 같이하여 北長老敎의 언더우드는 救世學堂과 貞 信女學校를 설립하였다. 高宗은 서양식 새교육을 장려하는 뜻으로 아펜셀러의 학교를 培材學堂이라 명명하였고, 王妃는 스크랜톤夫 人의 학교를 梨花學堂이라 이름지어 주었다. 醫療事業과 교육활동은 기독교의 간접적 사업이요 기독교 그 자 체는 아니다. 선교사들은 入國 初에 직접 전도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아니하였고 또한 법적 근거도 없어 전도를 활발하게 전개하지 못 하였다. 단지 중국에서 간행한 기독교 문헌을 輸入 分布하기도 하 고 미숙한 우리 말로 側近者들과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 들에게 전도하였으나 1894년 이전에는 公開信奉者가 별로 없었다. ㄴ. 善行 篤志의 勵行 선교사들은 착한 일을 하고 독실한 마음으로 사람과 일을 대하 려 하였다. 불우한 사람과 불행한 일을 돌보려는 활동을 기회있을 때마다 전개하여 왔다. 1886년 여름에 콜레라 전염병이 서울 빈 민층에 퍼지게 될 때에도 防疫으로 불행한 환자들을 구조하고 避 病院의 設置도 계획하였다. 1895년에는 淸日戰爭이 끝나고 콜레 라가 國內에 만연하였을 때에 宣敎師 醫師陣은 정부 당국의 후원

248 1. 基督敎의 展開 하에 방역을 전담하고 전염병 退治에 공을 세웠다. 얼마 뒤에 된 일이지만 1895년 閔妃弑害의 참변이 있은 다음 국왕은 신변의 위 험을 느끼게 되었고 심지어 宮中進饌도 안심하고 받으실 수 없을 때에 선교사들의 가정에서 進饌하기도 하였고, 한때는 선교사들이 入闕하여 徹夜保衛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善行은 기독교에 대한 국민의 오해와 偏見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ㄷ. 韓美間의 友好政策 우리나라와 미국이 友好通商條約을 체결할 때부터 양국간의 관 계는 親善一路의 길을 걸어왔다. 미국은 條約締結後 서울에 공사 관을 개설하고 조약 준수에 충실하였다. 개항을 전후하여 서양 제 국이 한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同等國 대우를 하는 동시에 일 본세력이 韓半島에 침입함을 보고, 疎外되어짐을 意識한 淸國은 청년장교 袁世凱에게 總理 란 칭호를 주어 우리 서울에 주재하게 하면서 內政에 간섭할 뿐만 아니라 淸國의 對韓宗主權을 행사하 려 하였다. 그러나 美國은 淸國의 이러한 妄動에 개입하지 아니하 였을 뿐만 아니라 韓國을 자기 나라와 동등한 독립국가로 상대하 고, 또한 韓國의 主權을 국제사회에 강화하였고 한국에 주거하는 美國人으로 하여금 韓國의 법률을 준수하도록 지도하였다. 당시 信敎의 자유가 인정되지 아니하였고 國法에는 外國宗敎의 宣傳을 금하고 있었으므로 선교사들이 公開宣敎에 着手하기를 조급하여 함을 알면서도 駐韓美國使節은 선교사들로 하여금 國內法을 순종 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국내법이 풀리기를 기다린 끝 에 韓國民에게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한 의아심을 풀어주고 믿음 직하게 보여 주었다. 1884년부터 1894년까지의 만 10년 동안 우리 국민으로서 기 독교 신자가 된 사람의 수는 알 수 없다. 병원에서 施療를 받은

249 Ⅲ. 基督敎의 展開 환자와, 사무에 종사하는 사용인과, 간이한 의약처방 助役者들과, 학교의 교직원, 傭人, 助手, 基督敎文書 分布員 등 선교사들로부터 봉급이나 임금을 받는 선교사 側近人中에 歸道人이 얼마 있었다. (3) 新敎를 受容한 社會階層 1) 執權層의 態度 韓民族의 外來文化 受容은 지도계급이 먼저 받아들이고 서민층 이 따라간 것 같다. 高句麗, 百濟, 新羅 三國에서 불교를 受容한 형 태가 그러하였고, 高麗 太祖는 불교로써 국가의 안정을 이룩하려 하였으므로 불교가 국민의 종교가 되었고, 李氏朝鲜 初에도 집권 층이 먼저 排佛崇儒에 앞장섬으로써 儒敎의 융성을 보았다. 기독 교는 그 傳來初에 있어 국내 양반계급에 信敎人이 거의 없었다. 우 리 왕실은 私的으로 선교사들과 접근하였고 그들과 의견교환도 있 었다. 高宗皇帝는 서양의 나라들이 부강한 것은 기독교를 신봉하 는 혜택이란 말을 듣기도 하였다. 皇帝는 선교사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기독교를 신봉함이 국가를 부강하게 한다면 王室에서는 기독 교를 받아들이고 기독교를 國敎로 선포하겠다는 의사의 표시도 있 었다.24) 그러나 선교사들은 그러한 선교방식을 채택하지도 아니하 였고 皇室에서는 끝내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였거니와 또한 선교사들은 기독교적으로 인생이 新生함이 없이 형식적이며 都賣 式으로 改宗함을 원하지도 아니하였다. 乙巳條約 이후에는 皇室에 서 서울 皇城基督敎靑年會에 몇해동안 매년 一萬圓의 보조도 내리 었다. 李能和는 官紳社會에 信敎者가 없게 된 이유는 孔孟의 글을 외우고 程朱의 說을 주장하면서 서양인을 夷狄野蠻으로 보았기 때 24) L. H. Underwood, Underwood of Korea, New York, 1918, p

250 1. 基督敎의 展開 문이라 하였다. 士大夫와 상류층에서는 비록 기독교에 귀의하는 자가 적었다 하 더라도 도무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01년 獨立協會의 지도자로 서 收監되어 있으면서 基督敎信徒가 되었던 取堂 李源兢, 月南 李 商在, 兢齋 俞星濬 등은從二 三品의 嘉善大夫들이요, 三省 金貞植 은 警務官이요, 竹史 李承仁(月南의 次子)과 斗庭 洪在箕와 安國 善 등은 曾經郡守요, 李承晚은 李朝 第三代王 太宗의 一男 讓寧大 君의 후손이었다.25) 朴泳孝, 閔泳煥, 李 儁 등은 기독교 신자는 아 니었으나 이에 同情的이었다. 舊韓國 外部協辦이던 尹致昊는 監理 敎會 평신도의 영도자였고, 前觀察使이던 朴勝鳳과 俞星濬은 安洞 敎會의 長老들이었다. 이 저명인사들 이외에 소위 양반 계급으로 大院君의 外孫子인 趙南復, 趙南昇 兄弟와 南宮檍 등이 있었다. 2) 民族的 大覺醒과 基督敎 受容 淸日戰爭은 우리나라의 운명을 결정한 一大變局이었다. 정치적 문제는 고사하고 문화적 영향은 지대하였다. 민족적 大自覺의 자 극제이었다. 동양의 맹주로 군림하던 老大國은 新興日本에 戰敗하 였다. 韓國은 그 전쟁의 원인이요 또한 戰場이었다. 不在其位하여 不謀其政한다면서 國政은 임금과그 신하들이 맡은 일이요, 백성은 임금을 섬기고 복종하는 것만이 도리로 알아온 우리는 이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흥망에 匹夫有責을 깨닫게 되고 서민 백성은 국민이 라는 각오가 생기면서 日本이 승리를 차지한 이유를 省察하게 되 었다. 戰勝의 주요 원인이 日本이 서양의 新文化를 재빨리 섭취한 데 있음을 인정하게 되고 우리도 서양문화를 배워야만 富國强兵의 나라가 되겠다고 上下呼應하게 되었다. 이때에 서양문화를 受容하 25) 李能和 op. cit., 下編. p

251 Ⅲ. 基督敎의 展開 는 가까운 길은 日本을 모방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종은 1894년에 정치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하기 위하여 洪範 14條를 發布하였으 니 이로써 甲午更張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정세 아래 국민의 일부 에는 排洋斥倭하는 守舊派도 있었고, 日本의 소위 明治維新을 모 방 내지 移植하여 보려는 爲政者도 있었다. 그러나 일반대중은 서 양문화를 도입할 바에는 그것을 직접 수입하는 것이 옳은 방법임 을 믿었다. 특히 일본관계가 적은 먼 지방에서는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서양인들과 교제하게 되었다. 그런데 서양문화를 피부로 느 낄 수 있는 면은 그들이 전하는 종교와 그들이 경영하는 文化機關 들이었다. 더우기 한일관계가 1895년 閔妃弑害事件으로 인하여 악 화되니 서양인들에 대한 向心이 많아지고 그들의 학교와 병원과 교회로 나오는 사람들이 많게 되어 기독교 宣敎史上 거의 유례 없 는 전개를 보게 되었다. 3) 知識層의 基督敎 受容 甲午 이후로 1910년 韓日合併까지 16년간 기독교는 전국에 전 파되었다. 이 동안에 중앙의 선각자들과 지방의 지도자들이 기독 교회로 향하여 왔다. 특히 漢字書籍을 통하여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이 있었다. 이때에 선교사나 新入敎人들은 기독교를 他 人에게 이해시킬 만한 어학능력이나 교양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러한 실정하에 당시 韓國敎會는 漢字知識을 가진 有識者와 國文 書籍만을 읽을 수 있는 소위 무식층으로 갈리기도 하였다.26) 이 소위 有識者 중에서 초기의 교회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서울의 崔炳憲, 金弼秀(本籍은 全州), 金道熙, 金瑗根, 平壤의 吉善宙, 姜 奎燦, 義州의 韓錫晋, 金永勳, 宣川의 梁甸伯. 中和의 蔡廷敏, 定州 26) 白樂濬 op. cit., p

252 1. 基督敎의 展開 의 金秉祚 등은 儒家出身들로서 기독교 초기의 牧使와 지도자들 이었다. 嶺南, 湖南, 湖西에도 儒林出身으로 기독교에 귀의한 영도 자들이 있었다. 4) 新進人士들의 基督敎 受容 新進人士들중에도 基督敎 受容이 있었다. 기독교학교에서 修學 한 인사들과 歐美 各國을 유람한 경험자들과 외국에 유학한 識者 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감리교의 尹致昊, 梁柱三, 申興雨, 南宮檍, 全德基, 에스터 김, 河蘭史, 長老敎의 安昌浩, 金圭植, 李昇薰, 金 九, 崔光玉, 金瑪利亞 등이 있었다. 安重根義士와 安明根은 天主敎 人이요, 李在明과 張仁煥은 改新敎人들이었다. 5) 學生들의 基督敎 受容 學生들중에도 基督敎 受容이 있었다. 중앙에는 년 대부터 기독교학교가 설립되었고 교회는 그 뒤에 서게 되었다. 지 방에서는 그와 반대로 교회가 먼저 서고 학교가 그 옆에 서게 되 었다. 우리나라에 소위 新學問이 들어올 때에 그 선구적 구실은 기독교학교들이 하였다. 기독교학교에 입학하였던 학생들이 모두 기독교인이 되지 아니하였고 그렇게 되기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1910년 이전에 기독교학교 재학생으로 국가와 사회와 교 회에 공헌한 기독교 인사들이 있었다. 1911년의 百五人事件의 連 累者들과 1919년의 獨立運動 등 민족적 운동에 참가한 영도자중 에는 기독교학교에서 교육받은 인사들이 다수였다. 6) 農民階級의 基督敎 受容 기독교는 그 성격으로 보아 불우한 처지에 있고 불행한 사정을

253 Ⅲ. 基督敎의 展開 당한 사람에게 접근하게 되어 있다. 당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 로 또 문화면에서 낙오되어 있던 농민사회에서 기독교를 많이 받 아들이게 되었다. 근대공업이 발달하기 이전의 농민 특히 小作農 은 無產大衆이요 그 수는 국민의 9할에 달하였을 것이다. 농민은 위정자들의 가혹한 收奪과 地主의 착취를 당하고 살아왔다. 甲申 政變의 실패와 甲午更張의 좌절을 지낸 국민은 開化派에도 희망 을 둘수 없게 되었다. 국민은 淸日, 露日 두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생명과 재산의 安全保障이 없음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國運이 기 울어지는 현실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러한 여건에서 서양 문명의 빛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는 일반 대중, 특히 柔順 하고 소박한 농민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時局도 그러하였 지만 선교단체들은 意識的으로 선교의 主要對象을 農民層에 집중 하고 있었다. 농민들은 교회에 나가 새 지식을 얻게 되고 퇴폐적 인 생활에서 생기있는 혁신생활을 찾게 되고 불안한 사회환경에 서 신도들이 相扶相助할 수 있고, 不信社會에서도 신도들이 서로 믿고 살 수 있고, 종교적으로는 雜神의 정신적 속박을 벗고 제나 름대로의 安心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사회의 오해도 없지 아니하였고 近親間에 박해가 있었지만 非特權層인 농민들이 많이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이로써 한국의 전형적 기독교인은 농촌인이 요 대표적 기독교회는 농촌교회로 된 것이다. 7) 賤民階級의 基督敎 受容 농민은 四民 중에 第二類에 속하는 평민이었다. 평민의 類에도 속하지 못하는 천민이 또 있었다. 白丁은 가장 낮은 신분을 가진 천민이었다. 白丁은 戶籍도 없고 衣冠의 착용이 용납되지 아니하 였고, 천민 이외의 다른 평민과 通婚도 할 수 없었다. 선교사들은

254 1. 基督敎의 展開 白丁社會의 解放과 그들의 신분 향상에 유의한 결과 서울 貫鐵洞 白丁部落의 朴成春이27) 甲午更張期에 장로교에 入敎하였고 내부 (內務部)에 伸寃請願을 올려 평민으로 해방을 얻게 되었다. 그 결 과로 白丁社會에서 기독교에 귀의한 자들이 있었고 朴成春의 아 들 朴瑞陽은 세브란스醫科大學 第一回 卒業生 중의 한 사람이 되 었고 여러 新學問學校의 理科擔當 敎員도 되었다. 천민중에 白丁은 아니라도 갖신(皮靴)을 만드는 갖바치와 숯장 사, 광대. 무당 등도 이 종류에 속한다. 蓮洞敎會의 長老가 되었던 高燦益과 林公鎭은 갖바치와 광대 출신들이요, 후일 尙洞敎會의 목사요 애국지사이던 全德基는 숯장사였다. 양반사회에서 천대 받 아오던 상공업자들은 도시에서, 농민들은 시골에서 기독교에 人敎 함으로써 국민의 中樞階級이 새로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8) 不遇階級의 基督敎 受容 鰥寡孤獨이 없는 나라가 없지만, 그들을 돌보아주는 일은 많지 못하였다. 이때의 교회는 늙고 의지할 데 없는 늙은이를 돌보는 養老院이나 의지없는 어린이들을 길러주는 孤兒院 같은 기관들을 경영할 만한 힘이 생기지 못하였으나 개인적으로 돌보아주는 신 도들이 있었고 작은 규모의 養老, 孤兒院도 교회의 경영으로 싹트 기 시작하였다. 장차 교육면에서도 말하겠지만 교회 안에는 소경 과 벙어리를 교육시키고 젊은 寡婦와 버림받은 여인들을 모아 가 르치는 기관들이 설립되었다. 이렇게 불우하고 불행한 인생들이 기독교에 歸依, 再生하기도 하였다. 27) Ibid., p.214. 공단골敎會는 4年間 存續하다가 勝洞敎會와 統合하였다. 統合 前에 洗禮받은 敎人 108名 중에 30名은 白丁出身이었다. Roy E. Shearer, Wildfire: Church Growth in Korea, Grand Rapids, Mich., U.S.A., 1966, pp

255 Ⅲ. 基督敎의 展開 (4) 西北地方의 基督敎 우리나라의 人文地理學上 社會階層의 분포를 보면, 忠淸 全 羅 慶尙의 三南은 儒林의 중심지요 兩班들의 本據地였고, 西北에 는 儒學大家나 高官出身들이 많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있었다 할지라도 등용되지 못하고 秕政에 오래 시달렸다. 사상면으로는 三南은 국내 지배층의 古府로서 보수적이었으며 외래의 사상과 문물제도는 배척하고 있었다. 西北에는 侵軍과 潜商들이 北邊과 西海岸에 자주 출몰함으로서 域外接觸에는 개방적이었다. 더우기 西北地方은 淸日 露日戰役의 戰場이 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로 在來의 社會秩序는 동요되었을 뿐아니라 거의 붕괴상태에 빠져 있어 새 사상의 受容態勢가 비교적 준비되어 있었다. 이상과 같은 사회적 정세 이외에도 초기 선교사들의 西北開拓 에 대한 意識的 注力이 있었다.28) 1887년 즉 宣敎師들의 來韓 第 二年되던 때부터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는 서울 이북으로 義州까지 주요도시를 巡訪하고 국경과 滿洲에 散在한 基督敎信者들을 발견 하였고 그중에서 유망한 자들을 선발하여 西北宣敎開拓에 선봉이 되게 하였다. 徐相崙, 白鴻俊, 李成夏, 金灌根, 梁甸伯 등은 平安北 道에서 활동한 基督敎 傳道의 중진들이었다. 平壤은 전술한 토마 스의 殉敎地이거니와 언더우드, 아펜셀러, 모페트 등이 1887년 이 래 여러 차례 平壤을 탐방하더니 1893년에 長 監 兩宣敎會가 거 기에 宣敎支部를 설치하였다. 淸日戰爭으로 인하여 宣敎師들은 引 退하고 사업은 중단되었다가 戰後부터 宣敎活動이 活發하게 展開 되었다. 平南의 宋麟瑞, 金鍾燮, 李榮彥, 邦基昌, 韓錫晋, 吉善宙 28) 白樂濬 op. cit., p

256 1. 基督敎의 展開 등과 黃海道의 韓致淳, 徐景祚, 金 九, 崔光玉 등은 關西 基督敎界 의 先導者들이었다. 淸日戰爭 이후의 敎勢分布와 關西人들의 기독교 受容은 鼓舞的 이었다. 朝鮮예수敎長老敎總會의 집계에 의하면29) 년의 7년간 平安南北道와 黄海道의 敎會分布狀態는 광범위하였 다. 平南에는 平壤을 중심하여 隣近 各邑郡에 교회가 설립되어 있 었다. 鎭南浦, 平原, 龍岡, 江西, 中和, 肅川, 大同, 江東, 順安, 漢 川은 물론, 東部의 山邑 德川에도 기독교회가 있었다. 平北에는 宣川을 중심하여 義州, 龜城, 定州, 鐵山, 龍川, 博川, 郭山과 鴨綠 江邊 諸邑 江界, 碧潼, 楚山, 朔州, 渭原은 물론이요 南滿洲에까지 基督敎會가 散在하여 있었다. 黃海道에는 平壤을 중심으로 載寧, 安岳, 信川, 長淵, 殷栗, 松禾, 平山, 黃州, 遂安, 谷山, 鳳山, 文化 諸邑에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다. 이상 各邑郡內에는 여러 敎會가 산재하여 있었으니 平壤, 宣川, 載寧 등 중심지에는 大敎會들이 있었으나 시골에는 지리상 또는 교통관계로 한 郡邑內에만도 4 5내지 10여 支敎會들이 있었다. 平安北道의 寧邊, 泰川, 熙川, 价川과 平安南道의 陽德. 孟山 등 東北 山邑과 黃海道의 延安, 白川, 海州 등 東南 諸邑은 監理敎의 宣敎區域이었으니 이 여러 지방에도 長老敎區域에서와 같이 감리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다. 이상과 같은 교회당의 건립은 그 교회를 구성한 신도들이 있었 음을 의미한다. 기독교회가 이렇게 광대한 지역에 설립된 것은 傳 道人이 있었고 동시에 受道人이 있었던 사실을 밝히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 기독교의 弘通期에 西北에서 전도의 임무를 담당하였던 중견인물은 外人宣敎師들만이 아니었다. 새 신앙을 받아들인 열렬 29) 車載明 op. cit., pp

257 Ⅲ. 基督敎의 展開 한 韓人 信徒들이었다. 당시 西北地方에서 開敎의 임무를 맡았던 선교사는 兩宣敎部를 合하여 20 30명 내외였다. 언어와 인정과 지리와 풍속에 미숙한 외국인으로서만은 그렇게 巨刱한 과업을 수 행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더우기 基督敎聖經의 完譯도 없었고 기 독교에서 사용하는 術語조차도 고정되어 있지 못한 때에 기독교를 非基督敎人에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과업이었다. 이러한 실 정아래 기독교의 新興指導者들은 自進하여 佈道에 전심전력하였 다. 선교사들은 그 初期에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오는 방문객들에 게, 혹은 市井街頭에서 직접 전도하기도 하였고, 후방에서 敎勢확 장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전방에서의 對人接觸은 선교사들을 협조 하던 助事, 傳道師, 勸書人, 傳道婦人 들과 平信徒들이었다. 이 敎界의 新興指導者들은 물론 士大夫層 인사들이거나 基督敎 神學에 特殊訓練을 받은 신학자들이 아니었다. 기독교 학교에서 수학한 이들과 선교사들의 신앙 행동에서 배우고 漢字書籍을 통하 여 기독교의 교리를 해독한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기독교를 知的 으로 이해하는 데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종교적 신앙경험을 內充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기만이 가진 그 新生의 행복을 친지와 동 포들과 같이 나누어 가지려고 자진하여 傳道하였다. 그런데 新興 基督敎 指導者들은 거의가 다 유교나 불교나 雜神信奉의 배경에서 나온 이들이었다. 전통적 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교 리적, 종교적 내지 사상적 변천과정의 연구는 흥미있는 課題가 될 것이다. (5) 基督敎書籍의 刊行 우리나라는 東亞에서 가장 늦게 西方國家들과 국제관계를 맺게

258 1. 基督敎의 展開 되었고 또 저들의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도 비교적 늦은 편 이었다. 뒤진 이에게는 앞서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앞섰던 자들 의 경험을 이용할 수 있는 편의도 있다. 기독교가 중국에 소개된 것은 1809년이요, 日本에는 1859년이었으니 우리는 中國보다 75 년, 日本보다는 4반세기 뒤떨어졌다. 在中國 기독교 선교사들은 聖書를 번역하고 基督敎 宣敎文書와 서양의 과학문화를 소개하는 각종 문헌을 다량 번역 간행하였다. 來韓 初期의 선교사들은 中國 에서 간행된 서적들과 傳道文書들을 수입하여 포교용으로 사용하 기도 하고 漢文을 해독하지 못하는 대중을 위하여는 수입한 漢文 基督敎文書를 한글로 번역하여 포교에 사용하였다. 초기의 선교사 들은 아직 外書를 國譯할만한 어학능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漢學 者들을 고용하기도 하고 入敎人中에서 漢文을 通曉하는 이들의 조력을 얻어 漢文書籍을 重譯함으로써 基督敎書籍의 간행사업에 착수하였다. 底本의 선택에 있어서는 西歐文 原書가 표준되었고 漢文 창작이나 改作本의 선택에도 在中國 宣敎師들의 助言과 韓 國人 譯者들의 판단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國譯書의 底本選擇과 번역내용의 適否, 文體의 難易 등 여러 문제를 韓人 譯者들에게만 放置하지 아니하고 선교사 자신들이 명의상 譯者가 되는 동시에 譯本의 내용도 검토하였고 識者社會에서 사용하는 文語鍊習도 겸할 수 있었다. 外文書籍의 번역에는 原著者의 이론과 사상이 올바르게 전달되 도록 正譯함이 그 中心課題일 것이다. 한 나라의 宗敎經典을 다른 나라 말로 옮겨놓는 작업은 어려운 일 중에 어려운 일이다. 來韓 宣敎師들은 東亞에서는 後來한 자들이었던 만큼 先來者들의 혜택 을 입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기독교에서 信仰하는 唯一神의 호칭에 관하여는 아직도 異見의 餘韻이 없는 바 아니지만 福音,

259 Ⅲ. 基督敎의 展開 洗禮, 悔改, 救贖, 永生, 復活, 三位一體, 聖餐, 十字架, 新約, 舊約 등등 神學的 名詞와 敎會, 牧師, 長老, 監督, 安息日 등등 制度的 名詞와 예루살렘, 로마, 埃及 등의 地名은 모두 漢譯을 문자 그대 로 인용답습하는 편의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년간, 즉 선교사들의 入國 제2년부터 淸日戰役 종식때까지의 10년간에 간행된 서적의 종류와 간행물의 성격을 살피고자 한다. 간행물을 종류별로 보면 單篇 福音書들이 가장 많이 譯出되었 다. 이 사업의 선구자는 만주의 牛莊과 盛京(奉天)에 住在하던 스 코틀랜드의 新敎 牧師 존 로쓰(John Ross)와 그의 동료들이었다. 로쓰가 韓人 藥種商으로 滿洲에 내왕하던 李應賛, 徐尙崙 등의 조 력을 얻어 맨 처음으로 누가福音을 韓譯하여 1882년에 奉天에서 간행하였고 1884년에는 四福音書와 使徒行傳 合篇을 간행하였으 며 1887년에는 完譯한 예수성교젼서(新約全書)를 盛京 文光書院 의 활판으로 간행하였다. 新約全書가 순차적으로 滿洲에서 飜譯되 는 동안 福音書들이 單行本으로 여러차례 印行되어 국내 특히 西 北各地에 散布되었다. 日本 東京에서 李樹廷이 在日 美國聖書公會의 위촉으로 일시 譯 經에 종사하였음은 전술하였거니와 그는 제일차적으로 국내에서 사용하던 儒敎經典의 屬文法대로 懸吐漢韓新約聖書를 1883년에 작 성하였으니 純漢文 텍스트에 한글로 토(助詞)를 붙인 것이다. 이 懸吐本의 四福音과 使徒行傳 合篇이 1884년에 日本에서 간행되었 다. 그러나 이 懸吐本은 국내頒布에 부적당하다 하여 流布되지 못 하였다. 李樹廷은 제2차적으로 日本에서 사용하던 漢字 오른 쪽에 우리 말의 口語를 부치는 諺解法으로 馬可福音을 國譯하여 新約 馬可傳福音書諸解 라 表題하고 本文 書頭에는 馬可의 傳 福音

260 1. 基督敎의 展開 書諺解 라 하였다. 이 諺解本이 1884년에 日本에서 간행되었는데 1885년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아펜셀러(H. G. Appenzeller)가 이 諺解本을 얻어가지고 入國하였 다. 그들은 李樹廷譯本을 底本으로 改訂한 마가의젼 복음셔언 를 1887년에 출간하였다. 李樹廷은 日本에서 1885년에 누가 福音書도 國譯한 바 있으나 傳하여 있지 아니한다. 基督敎宣敎師들이 국내에 常住하게 되면서 韓人學者들의 조력을 얻어 旣存 譯本의 修正, 改譯, 新譯 등의 노력이 계속되었다. 모리 스 쿠란(Maurice Courant)의 韓國書誌에 의하면 년간에 譯出한 單篇 聖書譯本이 34種이나 있었다.30) 基督敎聖經의 번역 이외에 많이 流布된 간행물은 소위 問答 書이다. 基督敎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해석하려면 國語로 해석할 자와 해석을 들을 사람들이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아니하였으므로 新約問答 그리스도 問答, 예수敎問答, 聖經問答, 예수聖敎問答, 眞 敎入門問答, 天主예수不同問答, 靈魂問答, 洗禮問答등이 이 期間에 重譯 著作 譯出간행되었다. 이외에 聖敎撮理, 張袁 兩友相論, 引家歸道, 主日禮拜法등 說敎, 護敎, 信仰生活指針 문답식으로 신앙의 要諦를 설명하려는 노력이었다. 書 등이 譯出 刊行되었다. 基督敎書籍의 第三類는 讚頌歌의 編刊이었다. 讚頌歌를 齊唱하 는 것은 基督敎의 예배행위에 缺할 수 없는 부분이 되거니와 우 리나라에 洋樂의 소개도 이로써 출발하였다. 監理敎會의 죤스 (G. H. Jones)牧師와 로드웨일러(L. G. Rothweiler) 양이 1892년에 同敎會用 讚美歌를 譯出간행하였는데 39張의 小册子였다. 이 讚美歌 30) Maurice Courant, Supplément à la Bibliographie Coréenne, Paris, 1901, pp

261 Ⅲ. 基督敎의 展開 는 增補되어 46페이지에 81曲을 담은 曲附讚美歌로 1895년에 출 간되었다. 長老敎의 언더우드(H. G. Underwood)는 1894년에 128페이지의 曲附讚揚歌를 간행하였고 다시 그 이듬해에 일반용 으로 82張에 154曲을 편성하여 같은 題號로 간행하더니 1896년 에는 初版을 152페이지로 짜서 複刊하였다. 長老敎會의 그라함 리(Graham Lee)와 기포드夫人(M. H. Gifford)의 共編으로 54曲 의 讚聖詩가 1895년에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1896년경에 는 3종의 찬송가가 통용되고 있었다. 두 교파 사이에 공통용 讚頌 歌 編成의 의견이 높아가더니 1905년 9월에 在韓 福音主義 宣敎 團體들이 敎派聯合運動의 始點으로 福音主義公議會를 조직할 때 에 共用讚頌歌의 편성과 간행을 결의하였다. 敎會禮拜와 집회에서 讚頌歌의 사용이 초기부터 널리 유포되는 동시에 洋曲의 국내 소 개가 촉진되었다. 찬송가들 중에는 초기 篤信者들의 창작들도 편 입되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상에 열거한 간행물들은 起信을 위주로 한 小册子들이었다. 이때에 종교적 또는 문학적 성격을 具備한 世界 名著인 天路歷 程 의 譯刊을 특기하지 아니할 수 없다. 게일(J. S. Gale)은 1891년에 新娶한 아내에게서 기술적, 정신적 조력을 얻어 번역을 종료하고 1895년에 간행하여 해외문학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게일 天路歷程의 번역에 착안하게 된 유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東洋的인 心機는 학자나 無學者를 막론하고 모두 한 版에 은 찍어낸 듯하다. 누구나 다 物象과 象徵과 畵像으로 생각한다. 그러 기 때문에 寓意와 譬詞와 擬義文學이 東洋에서 特殊的 位置를 차 지하고 있다. 31)고 하였다. 天路歷程은 일찌기 1853년에 淸 國에서 中國文으로 번역되어 있었다. 게일은 그 題號와 登場人物 31) 白樂濬 op. cit., p

262 1. 基督敎의 展開 들의 譯名인 基督徒, 傳道, 錮執, 易遷, 恩助, 世智 등과 將亡城 등 地名을 漢文本대로 襲用하였고 文體는 우리 古代小說의 大河流 布式이었다. 아마도 게일의 文稿助役이던 李昌稙의 文體일지도 모 른다. 天路歷程 32)의 간행업무에도 문화적 의의가 있었다. 培材學 堂 構內에 설치되어 있던 三文出版社33)에서 木版에 刻字하여 韓 紙에 인쇄하고 黃色表衣에 紅線으로 綴裝한 豪華版이었다. 元山의 畵人 김춘근의 線畵 26幅도 삽입되어 있었다. 발행취지는 그 原著 者 죤 번연(John Bunyan)의 死後 200주년 기념이었다. 초판 발 행 이후에 活字版으로 횟수를 거듭하여 복간되어 왔다. 이 책의 출현은 우리나라 新文學 輸入의 한 路程標가 되어왔고 게일이 우 리 겨레에 남겨준 문화 유산의 하나가 된다. 게일이 남긴 문화적 유산중에 韓英辭典을 편찬한 공적은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초기 宣敎師들에 의하여 數種의 韓國語文法과 字 典類가 저작 편성되었으나 그 근본적 작업은 1880년에 日本에서 인쇄된 프랑스 神父들의 韓佛辭典이었다. 게일은 韓佛辭典을 底本 으로 하여 語彙를 증가하고 定義를 밝히어 日本 橫濱에서 1896년 에 그 초판을 발간하였다. 韓英部는 어휘가 35,000이었고 漢英部 에는 全韻玉篇 所載字數에 中國에서 쟈일스(Herbert A. Giles)가 1892년에 출간하였던 A Chinese-English Dictionary의 定義 를 다수 채용하였다. 게일의 韓英字典은 국내 辭書界에 多年間 최 고봉이 되었다. 출간이래 판을 거듭하면서 게일 자신과 그 후계자 들이 增補하였다. 증보판은 약 50,000 어휘로 1911년에 출간되었 32) Richard Rutt, A Biography of James Scarth Gale and His History of the Korean People, Seoul. 1972, pp 게일의 國文譯著書만도 29種이 있다. 宗敎書籍 以外에 文學書類도 數種 있으나 모두 1910年代 以後의 作品들이다. 33) 白樂濬 op. cit., pp.259,

263 Ⅲ. 基督敎의 展開 다. 제3판이 1931년 발행되었는데 總語彙數는 82,000으로 韓英 大字典 이라 改題 간행하였다. 1) 基督敎神의 稱號問題 34) 基督敎書籍의 번역에 있어 봉착한 문제 중의 하나는 基督敎神의 稱號였다. 우리나라에는 본래부터 上帝, 天神의 관념이 있지마는 畏懼나 恐怖의 대상으로 되어 있으므로 기독교의 神觀을 오해시킬 염려가 있다 하여 固有語의 채용을 반대하였다. 그 반면에 옛 칭호 에 새 개념의 注入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어 中國 天主敎會에서는 天神, 上 帝등 中國語源의 칭호가 있고 國語에는 하 님이 있다. 하 님이 轉音되어 하느님이라 하였다. 來韓한 舊敎와 英國敎 一大敎訟이 되었다. 우리 國語에는 最高神을 天, 會에서는 中國과 日本에 있는 同一系에서 사용하는 칭호를 引襲採 用하였다. 그러나 新敎 즉 기독교에서는 일시 혼란을 일으켰다. 초 기의 基督敎書籍에는 신(God)을 羅甸語의 原語를 그대로 채택하여 데우스(Dens)라고도 하였고, 같은 책에도 天主本과 上帝本 2 種이 있었다. 언더우드는 복잡한 문제를 피하기 위하여 그의 초판 여호와또는 主님으로 대치하기도 하였다. 新敎와 舊敎와의 차이를 밝히기 위하여 기독교에서는 하느님 을 하 님으로 轉音하였고 아래 字의 廢用에 따라 하나님으 讚揚歌에는 神을 로 표기하면서 기독교의 神은 獨一無二한 唯一神임을 밝히고 있다. 天主敎會에서는 往年 第二次 世界公會가 있은 다음 漢字의 天主를 하느님으로 개칭하였고, 新敎側에서도 新舊敎의 일치를 위하여 하느님으로 통일을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그러나 하 나님칭호를 고수하려 하고 있다. 國語의 34) Ibid., p

264 1. 基督敎의 展開 2) 한글 專用 기독교서적의 간행을 논하면서 우리는 기독교가 한글 專用用을 채택한 중요한 결단을 묵과할 수 없을 것이다. 基督敎宣敎師들은 프랑스 天主敎 敎士들의 한글 연구 결과와 자신들의 학습에서 한 글의 科學性과 意思表現의 풍부성에 驚異를 느끼게 되었다. 더우 기 大衆接觸에 절대적 필요성을 실감하였다. 오직 綴字法이 통일 되어 있지 아니하고 체계를 세운 문법이 없었을 뿐이었다. 基督敎 宣敎師들은 1893년에는 모든 基督敎文書에 한글 전용을 宣敎方針 의 주요 조목으로 책정하였다. 선교사들은 국내 학자들의 조력을 얻어 綴字法統一案을 세우고 성경의 번역과 인쇄에 사용함으로써 聖經綴字法이란 일종의 철자법이 생기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자기 들의 사용을 위하여 英文으로 國語文法을 저술하였으니 아마도 우 리말본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韓人 아닌 外人이었을 것이다. 한 글 전용이 우리의 문화 발전에 기여한 업적은 뒤에 논할 것이다. 기독교서적의 간행에 따른 附帶事業은 출판과 보급이었다. 인쇄 시설이 미비하던 때이므로 北監理敎宣敎部가 주동하여 1888년에 발의되고 1891년에 培材學堂 構內에 三文出版社란 인쇄소를 설치 하였다. 2년을 지나 1893년에 헐버트(H. B. Hulbert)가 그 책임 자가 되었는데 업무가 興盛하여 1896년에는 製本所를 附設하였 다. 이 출판사의 주목적은 基督敎書籍을 출판하는 데 있었다. 그 명칭을 三文이라고 한 것은 韓 漢 英 三文을 의미하였을 것이 다. 그러므로 敎界의 國漢文書籍의 출판은 물론이요 국내 유일 韓國留記(Korean Repository), 獨立新聞 (The Independent), 韓國評論(Korea Review)은 다 이 출판사의 한 英文出版社였다. 인쇄물이었다. 이 사업의 필요성이 강조되어 1906년에는 在韓 各

265 Ⅲ. 基督敎의 展開 宣敎團體의 聯合事業으로 발전을 企圖하였으나 流產되고 三文出版 社도 日本에서 들어오는 새 자본주의의 조류에 밀려나고 말았다. 선교사들은 基督敎書籍의 보급기관으로 1889년에 韓國聖敎書會 (The Korean Religious Tract Society, 現 大韓基督敎書會의 前身)를 조직 하여 성경의 번역과 발행 이외에 모든 基督敎書籍과 敎界의 정기간 행물의 발행 및 보급기관이 되어왔다. 성경번역 추진사업은 滿洲에 서 在滿韓人들에게 宣敎를 시작하였던 스코틀랜드 全國聖書公會와 日本에서 聖書韓譯에 착수하였던 美國聖書公會와 1887년에 로쓰 譯 新約全書 完譯本의 출간비를 보조한 英國 外地聖書公會의 責任 主管下에 진행되어왔고,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 등 3인과 그들 의 同役者이던 宋德祚, 李承斗, 金鼎三 등이 다년간 譯經事業에 종 사하였다. 新約全書는 1900년에 完譯 발행되었고 舊約全書는 1910년에 完譯 발행되니 宣敎開始 4반세기만에 비로소 기독교의 經典을 우리 國語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國譯聖書는 널리 보급되 어 1907년에 151,230권이 반포되었고 1910년에는 606,175권의 販賣高를 보았다. 基督敎文書의 간행사업에 있어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基督敎新 朝鮮그리 스도人會報를 1896년 2월에 창간하였고 1897년 8월에는 大韓 그리스도人會報라 改題하여 간행하였고 언더우드는 自力으로 1897년 4월 1일에 週刊 그리스도新聞을 창간하였다. 이 모두 徐載弼이 1896년 4월 7일에 창간한 독립신문의 뒤를 이어 출 聞의 발행이다. 三文出版社를 경영하던 監理敎會에서는 발하였던 정기간행물이었다. 이 基督敎新聞의 내용에는 新知識의 啓蒙, 敎會消息, 農事改良 등 科學 소개와 主日學校工課, 海外消息, 國內事情들이 기재되어 있어 西歐文化를 소개하는 기관지도 되었 다. 우리 정부에서는 그리스도新聞을 매호 467부를 구입하여

266 1. 基督敎의 展開 전국 367郡邑과35) 政府 10部處에 1부씩 배부하기도 하였다. 정부 가 이와 같이 敎會新聞을 보급시켜준 것은 기독교에 대한 善意的 태도라기보다 서양문명에 계몽되고자 하는 국민의 輿望에 응하려 함이었을 것이다. 기독교서적의 보급은 광범위하여 1900년에 어느 作家는 基督敎 勢力은 韓國文學界를 지배한다고 하였다. (6) 敎科書의 刊行 在韓 선교사들의 文書事業은 宗敎書籍의 간행에만 국한되지 아 니하였다. 선교사들은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에 종사하면서 교과서 의 생산을 필요로 하였다. 교과서의 편찬과 간행은 국내에 일찌기 없었던 事業分野였다. 당시 中國과 日本을 거쳐 들어오는 新學問 서적들이 약간 있었으나 번역에 종사할 譯書人도 거의 없었다. 교 육담당 선교사들은 교과서의 생산과 授業日課를 병행하였다. 서울 의 게일과 헐버트 그리고 平壤 崇實學校를 중심으로 베어드 夫人 (A. A. Baird) 등이 有數한 韓國人들의 조력을 얻어 각종 교과서를 번역, 저술, 편찬하였다.36) 게일의 牖蒙千字4권은 國漢文讀本 이었다. 語文一致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漢字가 主요 國文은 從 이었다. 그 자료는 東西故事에서 채취하고 讀本식으로 편찬되어 國 文學科 敎課目이 되었다. 제4권에는 李栗谷, 朴燕岩, 洪耳溪 등 大 家들의 名文이 다량 편입되어 있었다. 필드(Eva Field, 畢夏娃)의 算學新篇은 基督敎學校의 유일한 算數敎科書였고, 헐버트의 士民必知는 新異한 世界地理 地文學이요, 밀러(E. H. Miller) 의 初學地誌는 廣用한 內國地誌요, 베어드夫人의 主管으로 편 35) Annual Report of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Presbyterian Church U.S.A. for 1898, p ) 白樂濬 op. cit., p

267 Ⅲ. 基督敎의 展開 植物學, 動物學과 번하이셀(Charles Bernheisel, 片夏薛)의 天文學과 노블(W. A. Noble, 魯普乙)의 心理學 찬되었던 들은 비록 초보적이요, 簡易하였으나 純國文으로 새 지식을 우리에 게 보급시켜 주었다. 선교사들은 醫學敎育에도 종사하고 있었으니 의학용 교과서의 요청에도 응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科學用語와 醫學用語도 제정 되어 있지 아니하던 시기였다. 에비슨은 유명한 醫學標準敎科書이 던 그레이(Gray)의 解剖學을 번역하였다. 37) 그밖에 物理學, 化學, 藥物學, 細菌學, 衛生學 등 醫學敎科書들이 계속하여 번역되 었다. 이 의학용 譯書들은 騰寫版으로 油印되어 서울과 지방에 있 는 病院 助役者 양성에 사용하는 교과서로 宣敎支部 所在地 병원 에 분배 사용되었다. (7) 國民大衆의 基督敎 受容과 그 影響 開港 이래로 淸日戰爭期까지는 기독교선교의 地盤構築期였다. 이때에 기독교는 無君無父의 異端으로 저항도 받았고 外國侵略의 선봉으로 오해도 받았으며 天主學匠이의 同類로 지목되었고 害人 毀風의 공격과 荒唐無稽한 편견의 배척도 받았다. 그러나 선교사 들의 측근자들과 基督敎宣敎機關 在職者들과 새 문화에 감염된 자들과 새 신앙의 체험자들이 기독교에 歸依하여 물질적, 知的, 정신적, 靈的 혜택을 받았다. 그러므로 1894년 이전 韓人들의 基 督敎 受容은 蒙惠를 위한 수용이었다. 1894년 이후로 露日戰爭까지는 제2기로서 국민대중이 기독교 에 轉向하여온 大衆的 改宗이 있었다. 이러한 대중적 轉向에는 반 37) Ibid., p

268 1. 基督敎의 展開 드시 종교적 이유 이외에도 사회적 내지 정치적 事由가 없지 아니 하였을 것이다. 開港 이후의 국내정세는 多事多難하였다. 政變, 民擾, 東學亂, 甲午更張 등은 革舊就新을 要하는 民意의 표현이요, 전염병의 侵 入 反復과 흉년으로 인한 기근과 宮闕의 失火와 地震 등은 당시의 사고 방식에 의하면 爲政者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경고였다. 鐵道 의 개통, 電車의 운행, 전기와 개스의 사용, 석유의 수입과 電信電 報局의 설치 등 근대적 시설들은 국민의 일상생활에 空前의 變貌 를 가져오고 있었다. 사상면에는 文明開化, 自主獨立, 君主立憲, 自然科學의 위력이 날로 팽배하여 가고 있었으며, 국제적으로는 遠外國家들이 利權爭取를 위하여 온갖 음모와 협박과 침범을 가 하여 왔고 近邊大國들은 우리의 國權 그 자체를 탈취하기 위하여 半島江山에 전쟁의 포성을 두번이나 울리었다. 그러나 우리 爲政 者들은 세계정세에 몽매하고 舊習에 억매여 부패, 反動, 派別, 依 他의 姑息之計를 되풀이 하였고 국가의 장래에 대한 善謀遠慮가 없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을 둘러싼 국내 국제적 환경은 새 정신, 새 능력, 새 인간을 요하고 있었다. 기독교는 이러한 실정하에 신생명, 신생활의 福音을 가지고 등 장하였고 대중은 기독교의 호소에 호응하였다. 새 사람이 되고 새 정신으로 살고 새 힘을 얻으려 함이었다. 宣敎의 문이 크게 열리게 되어 授道하는 측에서는 그 대응책을 세우게 되었으니 소위 선교정책이었다. 선교의 근본정책은 受道者 들로 하여금 自進傳道, 自力運營, 自主治理하는 기독교회를 설립 하려 함에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은 단시일 내에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그 원대한 목적달성을 위하여 시대의 변천과 사업의 進陟에 符應하는 隨時應用政策이 채용되었다. 在韓 長老敎聯合公

269 Ⅲ. 基督敎의 展開 議會에서 1893년 1월 채택한 선교정책은 그 시대의 요청에 응하 려는 대표적 정책이 될 것이다. 이제 그 全文을 譯載하면 아래와 같다. ① 傳道의 목표를 상류층보다 근로계급의 歸道에 두는 것이 더 낫(勝)다. ② 母性은 養育에 중요한 영향력을 주는 관계상 부녀자의 歸 道와 청소년의 교육을 특수목적으로 한다. ③ 郡所在地에 初等學校를 설치함으로써 기독교 교육에 성과 가 많을 터이니 宣敎部 所管學校에 在學한 남학생들을 교사로 양성하여 각 지방으로 파송한다. ④ 교육받은 敎役者를 배출하는 희망도 우리 교육기관에서 실현되어야할 것이니 이 점에 항상 관심을 두어야 한다. ⑤ 사람의 힘이 다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회개시키 니 모든 힘을 다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정확한 말로 성경을 번 역하여 세상에 내어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⑥ 모든 文書사업에는 漢字의 구속을 벗어나고 순 한글을 사 용함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⑦ 진취적인 교회는 자립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 교인 중에 依存生活者들의 수를 감소시킴을 목표로 하고 자립하는 교회와 헌금하는 敎人數를 증가시킨다. ⑧ 韓國人 대중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은 韓人 자신 들이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이 대중에게 전도하는 것보다, 적은 수의 전도사를 철저하게 훈련시킨다. ⑨ 宣敎師 醫師들의 사업이 좋은 성과를 얻으려면 환자를 개 별적으로 병실이나 환자의 집에 오래 두고 施療하면서 전도도 하려니와 의사가 본보기가 되어 환자 마음속에 깊은 감명을 느

270 1. 基督敎의 展開 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할 것이다. 外來患者診療所 사업은 비교적 성과가 적다. ⑩ 지방에서 와서 장기간 입원하였다가 퇴원한 환자들을 그 들의 주소로 심방하여 事後狀況을 계속하여 돌보아야 한다. 그 들이 병원에서 받은 溫情的 대우는 傳道師가 접촉할 수 있는 기 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38) 長 監 兩敎派에서 처음 세운 교회당은 외국인들의 거주지대인 貞洞이었으나 1890년대부터 分散되기 시작하였다. 감리교는 애오 개, 東大門안과 尙洞에 支敎會들을 설립하였고 장로교에서는 貢緞 洞, 藥峴, 蓮池洞에 禮拜處所를 개설하였으니 이것은 入敎人들이 늘어남을 의미한다. 開港場인 釜山, 仁川, 元山과 義州에도 敎會가 생겼다. 平壤에 는 長 監 兩敎派가 1893년에 宣敎師 常住地가 되고 南長老敎派 에서는 湖南地方을 宣敎地域으로 정하고 1893년에 全州에 정착하 였다. 1895년에는 42個所의 교인집단이 있었다. 그중에 19個所에서 는 定期說敎會가 있었고 그밖에는 簡易 禮拜處所에 불과하였다. 監理敎會 아래에는 정식으로 조직된 교회가 넷이요 韓國長老敎會 에는 조직된 支敎會 8個所가 있었다. 전국의 敎人數는 528명의 洗禮敎人이 있었고 그 나머지 求道人은 567명이었다. 淸日戰爭 이후에 교인수는 격증하여 1897년에 監理敎會에는 1,074명의 準 敎人과 306명의 正敎人이 있었고 北長老敎會에는 530명의 正敎 人과 10個所에 조직된 교회가 있었다. 우리가 前述한 宣敎政策 제8항에서 본 바와 같이 대중 상대의 38) Ibid., pp.212, 213. C.C. Vinton, Presbyterian Mission Work in Korea,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N.S., Vol.6, No.9, p

271 Ⅲ. 基督敎의 展開 傳道는 韓人들이 추진시켰다. 1894년 이후에는 선교사들이 宣敎 一線에 적게 나서고 韓人信徒들이 自進하여 교세를 확장하였다. 敎勢擴張의 진행은 거의 자연발생적이었다. 基督敎 二千年史에 있어 교회의 興衰는 교회의 전도활동의 消長에 있었고 전도활동 의 소장은 신도들의 信仰虛實에 좌우되어 왔다. 처음으로 깊고 진지한 종교적 체험과 뜨겁고 담대한 신앙을 가진 신자들은 자기 가 얻은 신앙과 경험을 그러한 새 경험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 에게 알리어 나누어 가지려는 열성에서 생겨난 현상이다. 불교의 역사를 보아도 그 傳來初期에 受道人들의 신앙이 독실하고 傳道 熱이 왕성하여 國內布敎뿐만 아니라 日本에까지 불교를 전하여 주었다. 本國人의 교세확장활동은 선교사들의 사업을 全面 代行한 것이 었다. 열정에 찬 교인들이 개인전도에 직접 종사함은 물론이요, 교회당을 자력으로 건축하고 심지어 자기의 가옥을 교회당으로 사용하도록 제공하는가 하면 有給傳道師를 미개척지에 파송하여 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교회가 건립되면 자녀의 교육을 위하 여 학교를 附設하였고 불우한 자들을 돌보고 불행한 자들을 援護 하였으며 심지어 외국인이 불행을 원조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敎會의 초창기에 支敎會를 운영하던 지도자들은 有給職員들이 아 니요 모두 自費奉仕員들이었다. 지방의 邑村에서 新興 敎界指導者들이 敎勢를 자진 확장하는 이면에는 사회적 이유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촌락은 同姓集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동네의 중견인물 하나가 먼저 改宗하면 결국 그 동네사람들이 집단적으로 改宗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그와 반 대로 한 동네에서 身分이 없는 사람이 먼저 改宗하는 경우에는 그 洞里에서 소외되거나 심하면 추방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 洞

272 1. 基督敎의 展開 里에서 쫓겨나지 않고 살려면 동네 사람들을 자기와 같이 入敎하 도록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입교한 사람들 사이에는 두터 운 친교가 있었다. 교인들은 피차 어려운 사정을 돌보아 주고 苦 樂을 함께 나누었다. 신자된 사람은 입교하지 아니한 친구가 있으 면 그 친구를 교회로 인도하기에 힘썼다. 이렇게 自進傳道活動은 가족 중심과 친구와 동리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교회의 認定을 얻게 되는 이유도 있었다. 한 교인이 새 신자를 많이 교회로 인도하여 교회를 興旺하게 할 때에는 자연스레 그 교 회의 지도자로 인정을 받게 되고 그 교회의 직원도 되고 한 지방 의 책임자도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自進傳道의 동기로서 정치적 이유를 무시할 수 없다. 당시 우리 사회의 識者들은 민족생활을 해체의 경지에 빠지 게한 주요 원인의 하나로 派別에 의한 민족의 분열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나라일을 걱정하는 인사들은 어떤 종교적 힘이나 기타 의 방안을 채택하여 국민이 단결되어야만 國運을 打開할 수 있다 고 보았다. 야심적인 정치인들은 기독교인들과 손을 잡으면 數도 많고 質로도 개화된 교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내다 보았다. 교인의 수가 많을수록 지지력은 강하여지고 지지력이 강 해질수록 정치인에게 유리할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일부 정치인 들은 새 교인을 얻어 모으기에 노력하였고 열심으로 종교사업을 勵行하였다. 基督敎의 興起와 그 활동에 국민이 호응한 것은 민족 적 희망이 기독교를 통하여 成就될 것을 待望하였기 때문이다. 甲申政變 이래로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던 정치인 改革家들은 살 해되기도 하고 국외로 망명하기도 하였으니 대중은 새 지도자를 요구하게 되었다. 전민족적으로 보면 徐載弼, 李承晚, 尹致昊, 李 商在 등 進步思想의 지도자들은 기독교인들이었고 지방 각처에도

273 Ⅲ. 基督敎의 展開 지도층 인물중에는 기독교신자들이 있었다. 국민대중은 저들의 정 치적 사상뿐만 아니라 저들의 종교도 아울러 추종하려 하였다. 이 무렵 날로 기울어져가는 國運을 기독교의 새 힘으로 挽回하고 담 담한 국민의 앞날을 새 사람의 새 생활로 밝히려 하였다. 1) 基督敎人의 生活規範 위에서 1894년 이후에 대중이 기독교에 호응하였음을 略述하 였으나 기독교에 改宗한 자들의 실제생활을 살피지 못하였다. 당 시 기독교인들의 종교 또는 사회생활상태는 入敎者에게 賦課하였 던 敎則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이 規則은 敎會 밖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을 상대한 규칙이니 만큼, 누구든지 예수 를 믿고 교회에 나오고 세례를 받은 이는 이 규칙을 지키는 것 이 절대로 필요하다. ① 至尊者 하나님은 神靈들을 영화롭게 하고 또 敬拜함을 미 워하시므로 조상의 魂靈에 경배드리는 습관을 따르지 말고 오 직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하고 그를 따르라. ② 主日은 安息의 날이요, 하나님께서 지정한 聖日이니 이 날 에 사람이나 가축을 막론하고 일하지 말되 日用品의 購入도 하 지 말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 밖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여 야 한다. 엿새 동안에 부지런히 일하고 主日만은 엄숙하게 지켜 야 한다. ③ 부모를 효도로 받들라 하심은 하나님의 명령이니 부모 생 존시에 至誠으로 효도하고, 全力을 다하여 부모에게 효도하되,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행하여야 한다. ④ 하나님께서 한 남자에게 한 여자를 정하여 주셨으니 피차

274 1. 基督敎의 展開 에 버리지 못할 것이며, 여자는 아내만 되고 첩이 되지 아니할 것이요, 남자는 한 아내의 남편만 되고 蓄妾破倫者가 되어서는 아니된다. ⑤ 거룩한 도를 신봉함은 제1차적 임무이니 신자마다 식구들 로 하여금 찬송과 기도를 하게 하며 또한 一心하여 主를 의지하 고 순종하게 하여야 한다. ⑥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하라 명하셨으니 누구든지 일하지 아니하면서 먹고 입어서는 아니된다. 게으르지 말고, 거짓말하 지 말고, 탐내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힘을 다하여 올바르게 살고 힘써 일하여 너와 네 食口를 살려야 한다. ⑦ 성경은 飮酒와 賭博을 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말 다툼과 싸움과 살인과 傷害의 張本이 되니 그러한 행동은 絕禁 한다. 또한 술과 아편온 만들거나 먹거나 팔지도 말고, 집에 도 박장을 벌이지 말고, 남의 행위를 타락시키지 말아야한다. 39) 이상 7개항의 규범은 그때 뿐만 아니라 현대까지 준수하는 기 독교인의 생활준칙으로 되어 있다. 2) 基督敎會의 自力運營 전국에서 僚原의 불같이 일어나는 교회는 우리 국가생활에 처 음 생긴 종교 제도였다. 國敎가 아니니 국가에서 운영할 바도 아 니요 외국인의 원조로 유지할 것도 못된다. 한국교회는 한국인 교 회였다. 한국인의 교회는 한국인의 힘으로 운영되지 아니할 수 없 다. 교회의 自力運營에는 福音傳道와 교회설립도 포함된다. 기독 교가 국내에 소개될 때부터 自立運營策을 강조하여 왔다. 黃海道 長淵의 松川敎會가 1895년 7월 3일에 獻堂되었는데 그곳의 교인 39) 白樂濬 op. cit., p

275 Ⅲ. 基督敎의 展開 들이 自力으로 건립하였다. 서울의 貞洞監理敎會와 새문안 長老敎 會의 건축에도 건축비의 多額을 교인들이 부담하였다. 이렇게 自 力運營의 전통이 세워지고 基督敎 土着化의 근거가 잡히게 되었 다. 초기 韓國人 敎會堂은 교인들의 경제력에 적당하게 시설되었으 므로 그 규모가 교인들이 거주하는 住宅보다 크고 넓었을 따름이 요, 건축양식도 韓國 재래의 건축양식 그대로였다. 佛敎의 伽藍같 지도 않고 서양인의 화려한 聖堂도 못되었다. 그러나 이 교회당은 우리 교인들의 힘으로 이룩한 우리들의 교회였다. 다른 종류의 神 堂과 구별하기 위하여 東學軍이 창궐할 때부터 赤十字旗를 懸垂 하여 기독교회 당의 표지를 삼았다.40) 교회의 자력운영은 교회의 自主治理를 촉진시켜 주었다. 자력운 영하는 교회는 自主하는 교회가 되지 아니할 수 없다. 獨立敎會의 조직에 관하여 異論이 많았으나 長老敎會 계통의 4개 宣敎會에서 는 한국에 單一長老敎會의 조직을 목표하고 처음으로 피차 제휴 하여왔다. 監理敎派側에서도 1896년 美國 南監理敎會가 韓國에 대한 宣敎를 개시한 다음 두 교회가 여러 사업에 合作하였다. 그 리고 在韓 改新敎會의 6개 교파가 통합하여 단일한 韓國基督敎改 新敎會를 조직하려는 운동도 胎動하고 있었다. 1905년 6월 26일 韓國民族 창립할 시기가 來到하였음을 절감하고 韓國그리스 서울에서는 在京 各敎派宣敎師들이 회집하여 단일한 도敎會란 명칭하에 民族單一敎會의 창립을 추진하기로 결의하 敎會 를41) 였다. 그해 9월에 在韓 改新敎宣敎會 總會에서 在韓 福音主義宣敎 團 聯合公議會를 조직하고 여러가지 연합사업에 착수하였을 뿐이 40) Ibid., p ) Ibid., p.397. Official Minutes of the Korea Missions Conference for 1905, pp

276 1. 基督敎의 展開 요 단일한 민족교회의 創立推進案은 보류되고 말았다. 기독교가 국내에서 대중의 호응을 받고 있던 이때의 韓國敎會 는 법적으로 各宣敎部의 隷屬敎會들이었다. 만일 在韓 各派 宣敎 師들과 국내에 6개 宣敎部를 설치한 在北美洲 敎派敎會의 합의를 얻을 수 있었더면, 한국내에 單一한 民族敎會가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에 韓人 信徒들은 아직 이에 관한 정식 발언권이 없 었다. 그런데 在韓 各派 宣敎師들의 합의와 在外 6개 敎派敎會의 동의도 얻기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우기 이러한 중요사건에 한인 신도들이 법적 체제를 갖추지 못하였다 하여 그들의 의사를 무시할 수도 없었는데, 침범하여 들 어오는 日帝의 파괴공작도 있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단일한 韓國 民族敎會의 出帆을 보지 못하고 필경은 宣敎部 所屬敎會들은 敎 派敎會로 전개되고 말았다. 3) 獨立敎派敎音의 組織 4개의 長老敎 宣敎部에서는 본래부터 單一한 韓國 長老敎會의 조직을 목표하고 1901년부터 그 준비공작으로 각종의 훈련과 준 비작업을 추진하여왔다. 1905년에 4派의 연합으로 平壤에 長老 敎神學校를 개설하고 매년 3개월씩 수업하여 全課程을 5개년에 필하도록 하였고 감리교회에서도 유능한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있 었다. 神學校에 就學한 牧師 候補生들은 현대적 의미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神學校의 敎科內容도 기독교를 敎理的 입장에서 다루는 體系있는 神學敎育이 못되고 聖經解釋學이 그 주축이 되고 敎會史, 實踐神學, 교양과목으로서 敎會의 관리와 설 교와 敎會義式 規範을 敎授하고 있었다

277 Ⅲ. 基督敎의 展開 이 平壤神學校에서 수학하던 牧師候補生들이 1907년에 5個年 課程을 수료하게 되어갈 무렵, 在韓 宣敎師들은 자기들이 소속한 本國 敎會에 韓國敎會 獨立案을 제출하였다. 이에 대하여 많은 곡 절을 겪은 다음 允許를 얻어 全韓國長老會地區를 한 敎區로 하고 1907년 가을에 老會를 조직하는 동시에 그 老會에서 神學校 卒業 生들을 試取하여 牧師로 將立시킴으로써 大韓예수敎長老會 獨老 會가 출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1912년에 가서야 敎派敎會인 大韓 예수교 長老會 총회가 성립되었다. 한편 監理敎會는 일찌기 교회조직을 완수할 수 없었다. 1901년 5월 14일에 金昌植과 金基範을 執禮牧師로 임명하여 세례식과 혼 례식을 집행할 수 있었으니 이 두 사람은 한국에서 제일 먼저 按 手받은 改新敎 牧師들이었다. 監理敎會는 1903년에 서울, 仁川, 平壤의 3개 敎區가 합하여 在韓宣敎年會가 되었고 1904년에 美國 監理敎 4年總會의 허가를 얻어 宣敎部年會를 宣敎部總會로 승격 하고 日本에 駐在하던 監理敎 駐日監督 해리스(M.C. Harris)를 韓 日 兩國의 監督으로 임명하니 在韓 監理敎宣敎部는 한 監督 區의 宣敎部總會가 되었다가 1908년에 와서야 韓國監理敎總會가 成立되었다. 南監理敎會는 1918년에야 韓國總會를 조직하였다. 두 監理派교회는 1930년에 基督敎大韓監理會로 합동하고 독립한 韓國敎派敎會의 하나가 되었다. 兩大 韓國敎派敎會가 설립될 당시의 敎勢를 보면 大韓예수敎長 老會는 1907년에 單一老會를 조직할 때에 신도수가 72,968명이었 고 韓國監理敎總會는 1908년에 성립되었는데 所屬敎人은 45,000 명으로 보고되었다. 1905년 乙巳條約 이래 1912년까지의 8년간에 韓日合併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신도가 격증하였다. 長老敎會에서 집계한 전국과 西北地方의 敎勢는 다음의 圖表와 같다. 監理敎會에

278 1. 基督敎의 展開 서도 이와 대등한 증가가 있었을 터이나 통계를 入手할 수 없다. 年度 區分 敎會堂數 洗禮敎人數 敎人總數 小學校數 小學生數 用費總計 1905 全 國 ,061 37, , 全 國 ,353 56, , 平南北 黃海 全 國 ,383 18,061 43,190 72, ,271 8, 平南北 黃海 全 國 ,024 24,239 55,277 94, ,563 94,120 13, , 平南北 黃海 全 國 488 1,193 18,766 69,146 30, , , ,165 15, , 平南北 黃海 全 國 500 1,157 23,490 74,004 39, , , ,493 14, , 平南北 黃海 全 國 532 1,448 27,473 78,032 46, , ,389 75,295 13, , 平南北 黃海 全 國 527 1,438 30,391 68, , , ,903 80,037 12, ,764 用費 단위 원 4) 敎育事業을 通한 基督敎 受容 기독교교육사업은 宣敎의 일면이 된다. 기독교교육은 그 범위가 초등교육에서부터 고등교육과 특수교육에 이르기까지 敎育全般에 뻗쳤고 또한 1개 독립한 교육제도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이 상에서 선교사들이 來韓 초에 基督敎宣敎의 地盤을 構築하면서 남 녀학교를 중앙에 설립하였음을 서술한 바 있다. 선교사업이 지방으 로 분산됨에 따라 지방에도 교육사업이 전개되었다. 중앙에도 그러 하였지마는 지방에도 기독교 교육사업은 그 維持方式에 따라 두가 지로 대별되어 있었다. 하나는 선교사들이 直營하는 학교와 다른

279 Ⅲ. 基督敎의 展開 하나는 韓國敎會와 敎人들이 合力運營하는 학교들이었다. 1910년 이전에 선교사들이 直營한 학교는 거의 전부 宣敎支部의 소재지에 있었다. 중앙에 설치된 培材, 梨花, 儆新, 貞信, 세브란스醫學校, 培 花(1898) 이외에 平壤의 崇實(1897), 崇義女(1903), 光成, 正義, 宣川의 信聖(1906), 保聖女(1906), 大邱의 啓聖(1806), 信明 (1907), 東萊의 日新(1895), 咸興의 永生(男女), 仁川의 永化女 (1897), 載寧의 明信(1898), 元山의 樓氏女(1903), 木浦의 貞明 (1903), 開城의 好壽敦(1904), 韓英書院(1906), 公州의 永明 (1905), 寧邊의 崇德, 光州의 須皮亞(1907), 全州의 紀全(1907), 新興(1908), 馬山의 昌信(1908) 등은 宣敎部直營學校들이요, 그밖 에 韓國敎會가 경영한 학교로서는 平壤의 崇仁, 定州의 五山, 嘉明, 新安, 安岳의 揚山, 載寧의 養元, 義州의 養實 등이 있었다. 韓日合 併後 總督府의 통계에 의하면 1908년 전국에 林立한 私立學校數 는 서울 市內의 100個校를 비롯하여 全國 총수 5,000에 달하였고 학생 수는 20만이라 하였다. 朝鮮統監府는 1908년 8월 26일에 私立學校令을 발포하고 모든 학교로 하여금 인가를 받도록 하였다. 1910년 2월의 敎派別 學校 數를 보면 長老敎派에는 英美人이 설립자로 되어 있는 학교가 439 校요42) 韓人이 설립한 학교는 201校로 되어 있었다. 監理敎派에 는 美人이 설립한 학교가 156校에 韓人이 설립한 학교는 2個校로 나타나 있는데 道別로는 平南이 261校로 全部 美人의 설립이며, 黃海가 183校로 第2位요, 平北은 121校로 第3位인데 그중에서 韓 人이 설립한 學校가 53, 美人이 설립한 학교가 42校였다. 이처럼 韓末 長 監 兩敎派의 학교는 총 659校나 되었다. 그러나 認可願 을 제출하지 아니하였거나 인가원을 내었으나 인가를 얻지 못한 42) 孫仁銖의 引用文, 韓國近育史 , 서울, 1971, pp

280 1. 基督敎의 展開 敎會關係學校는 상당수가 될 것이다. 1910년 5월까지 學部에서 인가한 일반 및 宗敎學校의 수는 2,250校인데 그중 黃 平南北 3 道에만도 1,130校이었으니 이는 거의 전부가 敎會關係學校들이었 을 것이다. 1905년 乙巳條約이 勒結된 이후로 기독교의 당면문제는 교인 들이 요구하는 근대교육의 실시였다. 그때의 우리나라 新式敎育은 日本을 통하여 소개되는 일면이 있는 동시에 선교사들을 경유하 여 도입되는 다른 면이 있었다. 日帝의 교육시책은 식민지 확립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敎會關係學校의 교육은 宣敎事業의 一翼으로 새 지식의 보급과 신문화의 도입과 새 정신의 고취로 국 가와 교회에 봉사할 인재를 배양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日帝의 교육방침에 同調하지 아니하는 인사들은 비록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그 자제들을 기독교학교에 진학시켰고 우 리 애국자들은 기독교 교육에 종사함으로써 구국운동을 전개하였 다. 당시 기독교 교육자 중에는 서울의 全德基와 南宮檍, 開城의 尹致昊, 安岳의 崔光玉과 金九, 江華의 李東輝, 定州의 李昇薰 등 이 있었다. 기독교교육의 성격은 시국의 변천에 따라 변모되고 있었다. 算 術, 地理, 物理, 化學이 신기한 科目으로 학생들의 호기심을 끌어 왔지만 1905년 이후에는 唱歌와 體操가 주요과목이 되었다. 唱歌 는 본래 基督敎의 讚頌歌에서 起因, 보급되었거니와 이때는 전국 을 휩쓸던 愛國歌의 전성시대였다. 애국가를 부르고 그 가사에서 애국심과 적개심을 憤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슬프도다 우리 民族아 子子孫孫 福樂하더니 오늘날 이 지경

281 Ⅲ. 基督敎의 展開 웬일인가요 鐵絲蛛絲로 結縛한 줄을 우리의 손으로 끊어버리고 獨立萬歲 우리 소리에 바다가 끓고 山에 動켰네 擊劍歌의 第2節에 快하다 長劍을 비껴 들었네 오늘날 우리 손에 잡은 칼은 閑山島의 倭賊을 쳐 滅하던 忠武公의 칼이 오늘날 다시 번쩍번쩍 번개같이 번쩍 快한 칼이 우리 손에 빛나여 半島의 威權을 떨치는구나. 統監府는 소위 不穩唱歌의 放唱을 금지하였다. 기독교 학생들은 그들의 讚頌歌에서 믿는 사람들아 軍兵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갑시다. 또는, 그리스도 군사 앞서 나가세 十字깃발 들고 戰場에 가듯 또는, 十字架 軍兵들아 主 위해 일어나 들은 당시 學部(文敎部)의 唱歌敎科書에 있는, 少年은 易老하고 學難成하니 一分의 光陰인들 難可輕이라

282 1. 基督敎의 展開 든지 또는, 山谷間에 흐르는 맑은 물가에 저기 앉은 저 漂母 방망이 들고 이옷 저옷 빨적도 해도 바쁘다. 해는 어이 짧아서 西山을 넘네 로 代置될 수가 없었다. 體操科目은 보통 週當 한 시간 정도였다. 그러나 1905년 이후 로는 매일 있는 工課가 되기도 하였다. 學部로서는 徒手體操라 하 였으나 실은 木銃을 메고 행군하고 射擊과 전투를 연습하는 兵式 敎鍊이었다. 日帝는 海牙密使事件 이후에 韓國軍隊를 해산해버리 고 말았다. 이 해산당한 군인들이 義兵과 합세하여 抗日戰線에 참 가하거나 혹은 지방으로 분산하여 사립학교의 體操敎師들이 되었 다. 韓人經營의 기독교학교에서도 해산된 군인들을 체조교사로 채 용하여 정식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43) 그리고 때로는 지방적으로 대운동회가 있어 郡內의 학교들이 참가하여 군사훈련의 경기를 통하여 국민의 사기를 북돋우고 학생의 애국심을 앙양시켰다. 선 교사가 직영하는 학교에서는 이 민족적 운동에 참가하지 아니하 였기 때문에 非愛國的이라는 평도 없지 아니하였다. 이상에서 언급한 대중의 기독교 진입과 기독교인의 생활규범과 신식교육이 국민사회에 끼친 영향은 어떠하였던가? 宣敎師 자신 들의 평가도 있고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의 정평도 있었다. 이제 그 평가내용을 보면 前 延禧專門學校 敎授이던 피셔(J. E. Fisher, 皮時阿)는 기독교교육을 인간가치의 증진으로 보고, ① 병자와 환자에 대한 과학적 施療 ② 빈민, 버림받은 사람들과 고아들에 대한 의지적이요 조직 43) 白樂濬 op. cit., p

283 Ⅲ. 基督敎의 展開 적인 보호 ③ 惡靈信仰과 기타 미신의 減退 ④ 어린이 애호 ⑤ 早婚과 婚姻習俗의 개선 ⑥ 여성에 대한 태도와 處遇의 개선 ⑦ 민주주의 사상과 자존심의 앙양과 민족의 재평가 ⑧ 학문과 문학교육의 개선과 한글의 대중화 ⑨ 민주적인 인간관계의 발전과 계급차별의 타파 ⑩ 愛他主義와 사회복지에의 관심 ⑪ 알콜, 麻藥 등의 폐해에 대한 계몽 ⑫ 근대과학적 학교교육에 대한 의욕의 증가와 尊重의 대 중 44) 六堂 崔南善은, 첫째는 迷信의 타파니 기독교가 唯一神의 밖에 모든 偶像 을 痛斥함을 말미암아서 다른 아무 방법으로도 조처하기 어려 운 미신이 한번 敎門에 들면 뿌리째 뽑혀버림은 실로 정신적 해 방의 큰 은덕이었다 할 것이오. 둘째는 國語, 國文의 발달이니 기독교 선교사가 經典 번역과 册子作成을 위하여 朝鮮語法과 및 朝鮮文體를 연구하여 종래에 鄕言, 諺文이라고 경시되던 國語, 國文이 새로운 생명과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은 진실로 우리 문화에 대한 一大貢献이라 할지 新敎가 들어온 뒤에는 聖書全譯과 讚頌歌 번역 등을 위 니 하여 語文의 用이 더 커지는 동시에 朝鮮語의 文法硏究가 그네 의 손에 長足進步되는 등 朝鮮語文에 대한 基督敎師들의 공적 44) J. E. Fisher, Democracy and Mission Education in Korea, New York, p

284 1. 基督敎의 展開 은 진실로 영원한 감사를 받을 것이오. 세째는 근대문화의 洗禮이니 기독교사는 傳道의 기구 또 방 편으로서 학교를 설립하고 따라서 근대학술의 敎課用書를 만들 고 施療事業에 인하여 近代醫學을 傳하고 근대적 인쇄술을 수 입하고 新音樂을 보급하고 集會, 娛樂, 交際, 演說, 討論 등 공 동생활의 양식을 가르치고 또 그네의 사생활에서는 飮食, 衣服, 園藝, 工作에 관한 가르침을 받는 등 基督敎의 진행은 그대로 근대문화의 보급을 의미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오. 네째는 婦女의 해방이니 예배 기타의 집회에 있는 男女會同 은 우선 부녀의 錮閉生活을 타파한 것이오, 남녀평등의 사상과 蓄妾廢止의 敎則은 부녀의 사회적 지위향상이오, 여학교의 설립 과 및 그 보급은 부녀에게 교육상 기회균등을 준 것이오. 다섯째는 儀禮의 簡化이니 기독교의 신앙에서 비로소 繁文褥 禮로서 脫離하는 길을 얻고 기독교적 婚葬의 簡便莊重함은 드 디어 일반사회의 歡迎遵行을 보기에 이르렀읍니다. 이밖에 계급 적 痼習의 革除와 교회를 통해서의 세계호흡의 共感과 내지 國 權喪失 후에 민족운동의 依支를 이 속에 발견한 것 등도 다 이 길수 없는 혜택이라 할 것입니다. 또 一邊으로 朝鮮的 문화와 사정이 宣敎師들의 저술로써 遠西에 소개된 공적도 적지 않되 다만 支那, 日本에 왔었던 이만한 우수한 학구력을 가진 이가 적었다 할 밖에 없음은 좀 섭섭한 일이었습니다. 45) 春園 李光洙는 1917년에 기독교는 결점도 많이 갖고 있지만 그 은혜도 크다 하였다. ① 朝鮮人에게 서양 사정을 알림 朝鮮에 신문명의 서광을 준 자가 耶穌敎會라 함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45) 崔南善 朝鮮常識問答 續編 서울 1947, pp

285 Ⅲ. 基督敎의 展開 ② 도덕의 進興 混沌하고 淫惡한 사회에 一條의 생활의 이 상과 도덕의 권위를 준 것은 예수교회외다. ③ 교육의 보급 78년 전까지는 학교라 하면 대개 예수교 회학교였오. 지금 30 이상된 인사로 신교육을 받은 이는 태반 불완전하나마 朝鲜 신교육의 기초를 세운 자는 예수교회의다. 학교교육 이외에도 성경과 이나 예수교학교 출신이외다. 讚頌歌를 볼 필요상 무식한 교인들도 諺文을 배우며 또 성경을 읽기에 독서욕을 얻게 하였오 그러므로 남녀노유를 물론하 고 예수교인은 대개 문자를 解하고 독서력올 가지게 되었오. ④ 여자의 지위를 높임이외다 男子 와 같이 교회당에 출 석하여 같이 讚頌을 부르게 되매 하나님의 앞에 평등한 자녀라 는 사상을 얻게 됨은 예수교의 德이외다. 최초의 여학교도 예수 교회의 여학교이어니와 최초의 여학생도 예수교회의 여학생이 외다. 또 여자의 再婚을 승인한 것은 예수교회였오. ⑤ 早婚의 弊를 교정함이요 早婚을 엄금하고 또 실행한 것 은 예수교회뿐이었오. ⑥ 諺文(한글)의 보급이요 언문도 글이라는 생각을 조선인 에게 준 것은 실로 예수교회의다. 귀중한 신구약과 讚頌歌가 한 글로 번역되매 이에 비로소 한글의 권위가 생기고 또 보급된 것 이오. ⑦ 사상의 자극이외다 前代未聞한 예수교적 사상은 매우 유 력한 刺激을 주었오. 여명기의 특징인 신구사상의 충돌의 初幕 은 예수교인의 흉중에 처음 일어났오. 도덕의 표준이 全異 한 예수교적 사상이 더욱 큰 자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⑧ 개성의 자각 예수교는 각개인이 기도와 사색으로 하나님 을 보고 하나님을 찾음으로 각개인의 永生을 얻을 수 있다 하므

286 1. 基督敎의 展開 로 각개인의 표준은 각개인의 영혼이외다. 各人은 각각 개성을 구비한 영혼을 가진다 함이 실로 개인의식의 根底외다. 新 倫理의 중심인 개성이라는 사상과 新政治思想의 중심인 민주주 의라는 사상은 실로 예수교와 자연과학의 兩源에서 發한 一流 외다. 46) 이상에 인용한 諸大家의 의견은 서술의 방식에 차이는 있어도 대의는 동일한 것이다. 단 교회制度가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에 관하여 언급이 없다. 日帝下에 있어 제기할 자유가 없었음일 것이 다. 改新敎會의 組織原型은 代議政治制度이다. 교회가 조직단계에 들어가게 되면 代議政治의 細根이 되는 支敎會가 반드시 조직된 다. 모든 支敎會는 正規敎人이 선출하는 代議員(長老)들로 敎會堂 會를 조직하게 된다. 여러 支敎會가 있는 地區會(老會)는 堂會에 서 선출한 代議員들로 구성하여 그 지구의 자치기관이 되게 하고 地區會에서 선출한 代議員들로 교회의 최고 권좌인 총회를 조직 하게 되어 있다. 그 초기의 실시에 있어 미숙한 점이 없지 아니하 였으나 한국에 民主主義의 소개와 실천은 기독교회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 다른 한 면은 기독교가 대중의 경제생활에 끼친 영향이다. 6 일간 힘써 일하고 제7일에 안식하라는 誡命과 일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한 敎訓은 기독교의 勞動觀의 일면이라 할 수 있다. 改新敎 창시자의 하나인 루터는 사람마다 하나님께로부 터 받은 召命이 있고 사람이 종사하는 사업이나 직업의 種別 如何 를 막론하고 모두 자기의 召命에 응하는 것이라 가르쳤다. 칼빈도 역시 노동은 하나님의 召命에 대한 奉命이므로 노동은 神聖하고, 신성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근로하여 생산하고 46) 李光洙 耶蘇敎의 朝鮮에 준 恩惠 靑春 第9號 pp

287 Ⅲ. 基督敎의 展開 절약하여 저축할 것을 가르쳤고47) 나아가서는 利息取得도 正當視 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의 교리는 근대 歐洲의 자본주의의 발전을 조장시켜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교리의 가르침과 西歐의 부강을 부러워하고 신도들 사이에 相信力과 단결력이 생기면서, 勤勞力作 하는 신도들의 生產改善과 향상을 볼 수 있었다. 교회내의 신도들 사이에 合資經營하는 상점도 생기고 소규모의 股本(株式)會社가 생기게 되어 후일 韓人 信徒들의 자립경제에 기여하였다. (8) 1905년 이후 敎會의 當面問題와 課題 1905년 韓日條約의 勒結은 기독교 안에 일대충격이 아닐 수 없 었다. 淸日戰爭 이후로 전국에서 일어나던 기독교의 起信運動은 그 목표를 상실한 感이 없지 아니하였다. 국민대중이 기독교에 大 擧 歸依할 때에는 순수한 宗敎的 이유 이외에 민족의 소원성취를 그 목적으로 하기도 하였다. 지식층 기독교 인사들은 기독교가 우 리 민족에게 새 신앙, 새 도덕적 원동력을 주입시켜 주어 救國勢 力이 되기를 기대하기도 하였고, 기타 다수의 신도들은 기독교의 신봉으로 문명개화의 독립국가를 건립하려 하기도 하였고, 일부 교인들 중에는 점진적인 개혁을 要하는 장기간을 기다릴 수 없어 全能하신 하나님께서 그 권능을 행사하여 破格的으로 이 국가 민 족을 구출하도록 신의 直接 干與를 바라기 도 하였다. 그러나 1905년 日帝와의 條約이 勒結되고 이어서 日帝의 統監府가 설치 되니 昔日의 기대는 허무하게 되어진 것만 같았다. 이러한 실정 아래 韓國基督敎會는 異敎異族의 정치적 탄압 밑에서 생존하려면 47) 막스 웨버 原著, 權世元 姜命圭 共譯. 프로테스탄티즘의 倫理와 資本主義의 精神, 三版, 서울, 1966, p

288 1. 基督敎의 展開 內實과 단결이 요청되었다. 內實을 위하여 지금까지 외적 확장에 注力하던 방침을 內的 堅實에 치중하게 되었고, 단결을 위하여 인 간의 탐욕, 기만, 협잡, 부패의 추악을 씻어버리고 信義와 진실과 정직과 민족애로서의 민족적 통일이 요청되었다. 그러므로 한국교 회에 同調하는 在韓宣敎部는 피차 연합하여 공통한 목적을 추진 하기 위하여 협력할 것과, 각 宣敎部 專擔區域의 分界와, 韓國 獨 立敎派敎會의 조직과, 세계교회와의 聊通과 교육사업의 확대 쇄신 과, 全民族 信者化運動과, 時局對策 등을 時用 宣敎政策으로 실시 하게 하였다. 우리는 이상에서 在韓 6개 宣敎部가 1905년 9월에 在韓 福音主義 宣敎部公議會(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 를 조직하고 각종 선교사업에 제휴 내지 합작하였음을 알아 보았 다. 그리하여 在韓 6개 改新敎宣敎部間에는 宣敎地域의 쟁탈과 사 업의 중복을 서로 피하고 나아가서는 福音化의 早速한 실천을 위 하여 국내의 대도시는 重複하여 占據하되 전국을 6개 區域으로 分界하여 6개 宣敎部의 專擔區域으로 하였다. 이 합의에 따라 한 국 교회는 자동적으로 그 지역을 전담한 宣敎部에 소속한 교회가 되었고 이로 인하여 교세는 빨리 확장되었다. 이상에서 1907년과 1908년에 각각 韓國長老敎會와 韓國監理敎 會가 성립되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 한편으로는 韓國에서 獨立敎會 의 조직이 너무 늦었다는 評이 있는 동시에 민족교회의 조직을 유 산시켰음을 규탄하기도 한다. 各 敎派를 통합하여 韓國그리스도 교 회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敎派敎會가 조직되 었기 때문에 單一 民族敎會가 생기지 못하게 한 것은 그 단계에서 주도권을 가졌던 外人宣敎師들의 失策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는 민족교회가 출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敎派敎會가 생기

289 Ⅲ. 基督敎의 展開 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民族敎會 組織論이 대두 되었을 때에 韓人 牧師도 없었거니와 논의에 참가도 없었다. 우리 는 여기서 그때에 민족교회의 조직이 流產된 원인을 이해하여야 될 것이다. 그 내부적 원인은 교회의 급격한 성장이었다. 各 宣敎部는 각자의 사업확장에 열중하였고 자기들의 宣敎專擔地區內에 자체의 기관들을 설립하면서 각자가 다 자기들의 敎派가 민족교회가 되리 라는 기대도 없지 아니한 듯하다. 그리고 한국기독교에는 상류층 人士들이 入敎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민족교회를 영도할 만한 주 체세력이 없었다. 더우기 韓民族의 민족주의가 高調됨에 따라 敎派 中心主義가 육성되니 교회가 커 갈수록 敎派의 통일은 더욱 더 멀 어져갔다. 또 현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一大 外的 理由가 있었 으니 곧 날로 침투하여 들어오는 日帝의 對基督敎會政策이었다. 당 시 런던 日刊紙(The London Daily News)의 前 遠東駐在 特派員 이던 맥켄지(F. A. McKenzie)는 韓國敎會問題를 이렇게 관찰하였 다. 韓國敎會를 日本化하고 日本敎會의 支敎會로 만들어서 日本 의 韓人同化政策의 도구를 만들려고 강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 在韓 宣敎師들은 이러한 韓國敎會의 日本化를 극력 반항하였다. 48)고 하였으니 이 사정이 한인이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민족 교회의 성립을 뒤늦춘 것이었다. 또 어떤 비평가는 韓人信徒들이 心靈的으로는 다른 基督敎國의 신도들보다 앞섰으나 不偏不黨의 均衡心과 遠慮善謀하는 洞察力 등 自治의 요소가 缺如하다 고 하 였다. 以上의 여러 理由로서 한국교회의 자치가 늦어졌다고 할 수 있겠으나 실은 日本의 마수를 저항하려 함이었다. 이상에서 국내에 감리교 韓國年會가 조직되고 해리스가 韓國 48) F.A. McKenzie, Korea s Fight for Freedom, New York, 1920, p

290 1. 基督敎의 展開 감리교회의 監督에 임명되었음을 언급하였거니와 해리스는 日本 에 오래 거주한 자로서 親日宣敎師였다.49) 그러므로 宣敎師라기 보다 日帝의 대변자요 지지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日本組合 敎會는 1903년에 海外傳道를 결의하고 1907년에 在韓 日本人의 敎化를 표방하면서, 점차로 한국인 상대의 활동을 전개하여 日帝 의 침범에 협조하였다. 日本에서 소위 海外傳道 추진기에 사용하 였던 文書와 說敎에 나타난 그 동기와 목적에 대하여 검토하지 않 더라도 그들이 지향하던 바는 自明할 것이다. 그들은 1904년 7월 에는 서울에 京城敎會를, 1907년 10월에는 平壤에 平壤敎會를 설 립하였고 1899년 부터 1907년까지 日本人이 韓國의 청년교육을 爲한다는 名義 下에 세웠던 京城學堂의 長으로 있던 渡瀬常吉을 1910년에 派韓하여 저들의 소위 民間 融和活動에 注力하면서 우 리 교회를 교란시켰다.50) 1) 世界敎會의 聯通 大韓예수敎長老會老會는 1907년 9월 17일 平壤에서 개최되었다. 조직체제의 구성에 필요한 議案處理 이외에 중요한 결의는 世界汎 長老敎會聯盟(World s Pan Presbyterian Alliance)의 入會申請案이 었다. 이 入會申請案이 접수 통과되어 大韓예수敎長老會는 동 연맹 에 가입되고 그 世界的 聯通關係는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년에 조직된 韓國監理敎會는 世界監理敎會의 一員으로 등장하였다. 1910년 英國 에딘버러(Edinburgh)에서 회집하였던 世界宣敎大會 (World Missionary Conference)는 현대 世界基督敎一致運動의 礎 49) 鮮于燻 해리스頭上에 鐵槌 民族의 受難 서울 1959, p.137. 白樂濬 op. cit., pp ) 松尾尊兌 日本祖合敎會の朝鮮傳道 思想 1968年 7月號 通卷 529號 日本 東京 pp.949 ff

291 Ⅲ. 基督敎의 展開 石이 되었거니와 이 세계대회에 한국교회도 참가하였다. 다만 한 인 대표가 아니요 선교사들이 韓國敎派敎會들을 대표하였다. 한국 에도 교회가 존재하여 있다는 사실을 세계교회에 알리게된 동시 에 한국내에서의 基督敎 發展狀況이 보고되어 世人의 驚異를 자 아냈다. 2) 敎育界의 새 風潮 국가의 운명이 절박하여 갈수록 국민은 민족의 장래가 청소년 교육에 달려 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당시 어느 선교사의 보고서 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는 지금 교육혁명의 진행과정에 처하여 있다. 기독교기관 이거나 非基督敎機關이거나를 막론하고 학교들이 하룻밤 사이 에 생기곤 한다. 觀察使가 학교를 설립하고 郡守가 학교를 세우 고 面長이 학교를 시작하고 洞長이 학교를 세우고 있다. 7개 학 교가 선생 한 사람을 놓고 서로 빼앗아가려 한다. 봉급이 오르 교육관념이 크 게 달라지고 초빙받는 敎員型도 달라지니 漢文과 西洋科學 의 지식을 겸비한 교원만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고 平壤 崇實學校 졸업생들이 때를 만났다. 학교의 勃興은 고무적이지만 교육내용이 부실하면 소기의 목적 을 달성할 수 없다. 1906년에 韓英書院이 開城에서 開校되고 尹 致昊가 校長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외쳤다. 오늘날 한국인 학 생에게는 文科系統의 교육보다 실업교육이 더 유익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된다. 세익스피어의 戲曲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딸기밭을 가꿀 줄 아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언제 收用될 세익스피어는 기댈 수 있어도 이 나라의 토지는

292 1. 基督敎의 展開.우리 학생들이 졸업후에 비용과 시간을 가장 적게 쓰면서 生活에 응용할 수 있는 기술을 교육하자. 고 하였다. 지 모른다 51) 韓英書院보다 먼저 설립된 학교에서도 일찌기 校內에 工業部를 두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실업교육 그 자체가 아니요 학생들로 하여금 학비를 벌어 쓰게 하는 방편에 지나지 못하였다. 이때에 宣敎部 直營學校마다 工業部를 운영하고 있었다.52) 尹致昊는 기 독교 학교가 실업 교육에 중점을 둘 것을 主唱만 하지 아니하였고 의식적 노력을 가하여 딸기栽培를 처음으로 시도하였다. 韓英書院 (松都高等學校의 前身)에서는 후일 실업교육에 적지 아니한 발전 을 보았다. 일시 東亞各國 시장에 유명하던 松高織을 산출하기도 하였다. 이 비록 교육기관의 노력이요, 기업체의 산업은 못되었으 나 日本 자본주의의 침입에 저항하려는 노력이 되기도 하였다. 3) 信仰復興運動의 風靡 高宗皇帝의 讓位와 일제세력의 강화는 우리 민족에게 고독과 절망과 치욕을 가중시켜 주었다. 歷史的 制度의 기초는 흔들렸고 사회적 질서는 무너졌으니 한국민은 同情하는 친구와, 희망을 되 찾아 주는 격려와, 나아갈 방향을 지시하여 줄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었다. 國恥는 침통을 낳고 정복할 수 없는 강적에 대한 적개심 은 공포를 안겨주었다. 이리하여 국민이 당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 의 밑바닥에는 精神 문제가 깔려 있었다. 이러한 정신적 實態에서 신앙운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새 생명의 喚起와 新生이었 다. 새 생명을 취득하는 운동을 復興이라 한다. 한인 기독교인들 이 새 신앙을 수용하였으나 신앙을 직접 경험한 사람은 많지 못하 51) 白樂濬 op. cit., pp ) H. H. Underwood, Modern Education in Korea, New York, 1926, pp

293 Ⅲ. 基督敎의 展開 였다. 남의 신앙을 받아들이는 단계를 넘어서서 내 신앙으로 만드 는 경험을 소유하고 심화하려는 노력이 신앙부흥이다 년간에 이 운동은 전국에 風靡하였다.53) 신자된 사람이 성경 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설교를 들을 때마다 감동되는 바 있어 자기의 심경을 성찰하게 되고, 진지한 성찰을 통하여 心裏에 잠겨 있는 사기, 기만, 시기, 증오, 음란, 탐욕, 분노 등 추악이 있 음을 자각하게 되고, 심경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동으 로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자각과 발견은 그 생활 내 막을 털어내지 아니하면 안심을 얻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충격을 받은 신도들이 舊生活의 추악을 서로 털어내놓는 威勢가 기독교 인 사회에 휩쓸고 있었다. 舊態를 씻어버리고 新生命을 취득하려 는 진통이었다. 이러한 新生의 경험을 치를 때에 신앙은 실재적인 내 신앙이 되어 인생의 의의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이 全國敎界 를 휩쓸던 信仰復興運動은 신앙의 內實이요 민족적 醜惡面의 肅 淸이었다. 4) 百萬名 信者化運動 54) 이상에서 논급한 신앙부흥운동은 동포 百萬名 信者化運動으로 전개되었다. 물리적 힘으로 저항할 수 없는 외세의 강압하에 자신 력과 자존심을 잃고 나서 새 신앙으로 新生의 경험을 얻은 신도들 은 자기들의 신앙 경험을 전국민이 다 같이 가지게 되기를 懇望하 였다. 교회와 학교와 기독교집회에 참여한 신도들은 家家戶戶를 방문하고 기독교성경과 傳道文單과 說敎로써 기독교신앙에 귀의 하기를 역설 권고하였다. 이 사업을 위하여 誠金을 바치는 이와 53) 白樂濬 op. cit., pp ) Ibid., pp. 402 ff

294 1. 基督敎의 展開 전도사업에 전적으로 獻身하는 남녀신도들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 하는 막바지에 전심전력을 傾注하게 되니 기독교전도의 呼訴가 전국에 가득하였다. 日帝는 合邦節次의 終了를 서두르고 있는 이 때에 기독교도들의 百萬名 信者化運動은 무슨 擧事라도 일으키려 는 공작같이 보이기도 하였다. 百萬名 信者化運動은 그 목적을 소정기간 중에 달성하지 못하였 다. 또한 달성할 수도 없었다. 당시 改新敎會에 在籍한 正規敎人의 수는 8,000 내지 10,000명 程度요, 준교인과 來道者들을 합하여 모두 20만명을 下廻하였고, 改新敎 소속 宣敎師 진용은 200명 가 량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을 통하여 신도의 증가도 있었고 더우기 전국적으로 100만명 이상의 非基督敎人들을 접촉하고 기독교를 인식시켜 주었다. 민족적 일대 전환기에 있어 忠義烈士들의 殉國 自決도 있었고 捲土重來를 期하고 외국에 망명하는 지도자들도 있 었으나 드러난 민족적 의사 표시가 없었던 이때에 교회는 이 운동 을 일으켜 기독교인의 단합을 과시하고 민족운동 참여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주었고 나아가서는 우리와 표방하는 목적을 달리하던 一 進會와 侍天敎와 기타 親日勢力의 妄動은 民意가 아니었던 실정을 밝혀주었다. 우리는 이상에서 기독교 전래 25년간의 전개를 살펴보았다. 제 1기의 10년은 기독교의 宣敎地盤構築期였다. 이때에 있었던 소수 의 基督敎受容人들은 선교사들의 측근자와 使用人들이었다. 이들 은 물질적, 계몽적 혜택을 얻기 위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 이었다. 이 시기의 初代 入敎人들은 거의 蒙惠를 위한 基督敎受容 人들이었다

295 Ⅲ. 基督敎의 展開 淸日戰役으로부터 露日戰爭까지의 10년간은 대중의 基督敎呼 應期였다. 밖으로는 列強의 침범을 받고 안으로는 李朝文化의 退 潮에 臨하여 소생할 희망이 암담할 때였다. 대중은 西歐 선진국가 의 문화를 섭취하여 우리도 부강한 국가를 가지려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서구문화는 그들이 來傳하는 종교뿐이었 다. 더우기 隣邦 日本도 서구문화를 재빨리 섭취하여 근대국가의 대열에 들어갔음을 보았다. 우리 국민 대중은 서구인의 종교를 서 구 문화의 전체로 알고 접근하면서 그 종교는 우리 민족에게 새로 운 각성을 일으키고 새 힘을 길러주어 독립부강한 국가를 보존하 게 하여 주리라고 믿고 대거 호응하여왔다. 그러므로 제2기의 10 년간은 새 희망의 실현을 위한 基督敎受容期였다 년간의 5년은 日帝의 침략이 한 단계씩 성립되어 가던 과정이었고 필경은 국권 상실의 비극에 봉착하게 되던 때였 다. 義兵의 항쟁과 義人烈士의 義憤壯擧와 愛國志士들의 亡命去國 은 日帝와 더불어 天을 共戴하려하지 아니함이었다. 國權은 빼앗 아갈 수도 있고 국토는 점령할 수 있어도 민족은 영원히 남아 있 고 겨례의 정신은 빼앗지 못한다. 이 민족이 민족국가를 恢復再建 하려면 애국애족의 정신만은 살려야 했다. 애국애족의 정신은 바 로 침략자에 대한 저항정신이었다. 기독교의 자유 정의의 정신에 感應하는 기독교인들은 對敵抵抗을 위하여 基督敎를 受容하기도 하였다. 기독교를 수용하여 자유와 自律의 생활로 저항정신을 안으로 충만케 하는 적극적인 면이 있는 동시에 현세의 苦海를 탈출하여 來世의 福樂이나 기대하려는 소극적인 他界待望의 경향도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55) 55) Ibid., pp

296 1. 基督敎의 展開 改新敎가 歐洲에서 새 신앙체제를 성립하고 서구민족국가의 형 성기에 민족주의와 자유평등사상과 산업발전의 助長으로 근대화 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과 같이 우리나라에도 아직 초기적이 긴 했으나 그런 것의 활력소가 되기도 하였고 될 수도 있었다. 이 것이 민족국가의 확립과 병행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基督敎改新敎 는 16세기 歐洲에서 보여준 근대화의 영향력을 당시 한반도에서 는 다시 나타내지 못하였으나 민족은 살아있고 기독교는 반도 안 에 뿌리박았다. 白樂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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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Ⅳ. 國語國文學 硏究 1. 國語 硏究 2. 新小說과 唱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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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1. 國語 研究 1. 國語 研究 開化期라고 불리는 19세기와 20세기의 交替期는 우리나라의 새로운 학문이 시작된 시기였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18세기 이래 의 우리나라 학문의 전통을 계승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많건 적 건 서양 학문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는데, 강렬한 민족의식의 覺醒 에서 싹텄고, 그 무렵 우리나라가 겪고 있었던 近代化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에 대처하는 것을 그 당면의 목적으로 했었다. 이 개화기의 학문에서 국어에 대한 연구는 가장 중요한 분야의 하나였다. 국어에 대한 연구는 개화 즉 근대화와 더불어 우리 사 회에서 언어와 문자의 技能이 급격히 커짐에 따라 일어난 현실 문 제와 직결되어 있었던 만큼, 하나의 학문으로서뿐아니라 문화 운 동으로서도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오늘날 우리가 비교적 안정되 고 통일된 언어 문자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이 때 이래의 노력의 결과임을 생각할 때, 그 중요성이 새삼스럽게 인식된다. 開化期에 우리 사회가 당면한 언어 문자 문제는 각별히 심각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역사적으로 설명된다. 우리의 문자인 訓民正音이 창제되기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漢文이 문자 생활을 지배하여 왔다. 즉 입으로는 국어를 말하면서 글로는 한문을 쓰는 기형적인 문자 생 言文二致라고 불렀었다. 訓民正音의 창제는 이 言文二致를 극복하고 言文 一致를 실현하려는데 그 주된 목적이 있었던 것이나, 그 창제 이 활을 해 온 것이다. 이 상태를 개화기 사람들은 후에도 5세기에 가까운 기간을 문자 생활의 上層部는 여전히 학문

301 Ⅳ. 國語國文學 硏究 이 맡아 왔고 訓民正音은 그 下層部를 맡아 諺文이라고 통칭되어 왔다. 즉 한문은 士大夫의 글이었고 諺文은 庶民과 여자의 글이었 다. 이 중간에 吏讀(이두)와 諺漢文이 있었다. 吏讀는 한자로만 표기되는 점에서는 한문과 같지만 내용으로 보면 한문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胥吏 衙前에 의해서 公私文書에 사용되었다. 諺漢文은 언문과 한자를 섞어 쓴 것으로 龍飛御天歌 月印千江之曲 등과 상당히 많은 歌辭 時調 작품 그리고 諺解 등에 사용되었다. 요컨대 한자를 아는 사람들이 쓴 국어 작품에 사용되었다. 이렇듯 기형적인 문자 생활은 근대화 과정에서 혁신되지 않으 면 안 되었다. 개화와 더불어 급격히 커진 언어와 문자의 기능은 종래와 같은 言文二致의 상태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 이다. 이리하여 言文一致의 理想을 적극적으로 전면적으로 추구하 고 標準化를 달성하는 일이 긴급한 시대적 요청으로 등장한 것이 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가 우선 크게 제기되었다. 첫째 문제는 대표적인 문체의 결정에 관한 것이었다. 言文一 致 의 장본인 한문과 吏讀가 廢止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國 文(예전의 諺文)과 國漢文(예전의 諺漢文)의 어느 쪽을 택하느냐 하는 데는 문제가 있었다. 둘째 문제는 어느 문체를 택하거나 國文의 正書法을 確立하는 것이었다. 즉 문자 표기의 표준화를 달성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다만 이 때에는 아직 언어의 표준화 즉 표준어의 제정에 대해서 는 아작 관심이 미치지 못했었다.) 여기서 訓民正音에 대한 연구 를 바탕으로 한 문자 체계의 연구가 이뤄졌고 국어의 음운과 문법 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302 1. 國語 研究 (1) 言文一致의 첫걸음 1) 두 文體의 對立 개화기 이전의 우리나라에서 言文一致에 가장 가까운 문체를 지적하라면 아마도 대개는 諺文體라고 대답하기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주로 古典小說과 편지 등 일상 생활에 사용되어 일반 庶民 사이에 제법 광범한 地盤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言 文一致의 실현을 가장 강렬하게 추구한 개화기에 있어서 언문체 즉 國文體가 응당 대표적인 문체로 됨직한 일이었다. 그러나 실제 로는 종래 매우 미약한 존재였던 언한문체 즉 國漢文體가 크게 대 두하여 국문체와 대립되었고, 마침내 이것이 도리어 대표적인 문 체가 되었다. 국문체가 대표적인 문체로 채택되지 못한 원인은 이것이 종래 문자 생활의 하층부를 담당해 온 까닭에 갑자기 한문이 맡았던 상 층부까지를 감당하기 어려운 결점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국한문체는 한문에 가까웠으므로 이런 결점이 없었 다. 사실상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국한문체는 한문에 토를 단 정도의 것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言文一致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 으나, 점차 한문투가 적어져서 한자는 국어 속에 굳어진 漢字語의 표기에만 국한되기에 이르렀다. 개화기에 있어서의 문체의 대립에는 매우 심각한 일면이 있었 다. 가령 1883년에 나온 漢城旬報는 순전히 한문을 사용했음에 대하여 1886년에 나온 漢城周報가 한문 국한문 국문의 세 문체 를 아울러 사용했음은 그 초기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 뒤 이두 문체는 상당한 각축을 벌였다. 신문에서는 일시 국문체가

303 Ⅳ. 國語國文學 硏究 우세했으나 점차 국한문체가 일반화되어 갔다. 그러나 국문체도 점차 그 기반을 굳히고 넓혀갔다. 개화기에 있어서 문체의 單一化 작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국한문체와 국문체의 대립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2) 國漢文體 개화기에 있어서 국한문체의 수립과 普及을 위하여 각별한 노 력을 아끼지 않은 사람은 俞吉濬이었다. 그는 高宗 20년(1883) 봄에 漢城判尹 朴泳孝의 권유로 신문 간행을 준비하면서 그 創刊 辭와 解說文을 국한문으로 썼다고 한다. 이 신문이 發刊되지 못한 탓으로 그의 글은 발표되지 못하였으나 개화기에 意識的으로 국 한문을 쓴 최초의 試圖로서 기억될 만한 일이었다. 위에서 漢城周 報가 한문 국문과 함께 국한문체를 사용했음을 지적한 바 있는 데 이 역시 俞吉濬의 영향인 것으로 추측된다. 1886년에 鄭秉夏 의 農政撮要가 국한문의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는데, 著者는 漢 城周報를 낸 博文局에서 일하고 있었다. 따라서 초기의 국한문체 는 俞吉濬 및 博文局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그 뒤 俞吉濬의 西遊見聞이 高宗 26년(1889)에 완성되고 高宗 32년(1895) 에 간행되어 국한문체의 보급에 크게 貢獻하였다. 俞吉濬은 이 책의 序文에서 국한문체를 택한 이유로서 ① 말뜻 을 平順하게 하여 文字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도 쉽게 알게 하고, ② 스스로 글을 쓰기에 편하고, ③ 우리나라 七書諺解의 법을 따 라 詳明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특히 ③ 에 주목한다. 종래 그가 국한문체를 쓴 것은 1881년 日本에 갔을 때 접촉한 福澤諭吉의 영향이라고 하는 一說이 있었으나, 위의 ③

304 1. 國語 研究 은 그가 우리 나라 문자 생활의 전통 속에서 이 문체를 인식했음 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렇게 시작한 국한문체는 高宗 31년(1894) 甲午更張으로부터 官報를 비롯한 公私文書와 거의 모든 학교 교과서에 쓰이게 되고, 그 뒤 대부분의 신문 잡지에 채택되면서 그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이리하여 국한문체가 대표적인 문체로 확립되어 갔으나, 당시에 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過渡期的인 현상으로 생각되고 있었던 사 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당시의 몇몇 신문 論說도 이런 의견 을 表明하고 있지만, 李能和는 1905년 學部에 제출한 國文一定 意見書 에서 지금으로서는 국한문체를 사용하는 便法을 講究하 지 않을 수 없으며 국문체만을 사용하는 것은 백년 이후 시대에나 있을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의 말을 하였다. 이와 비슷한 견해는 李光洙에 의해서도 표명되었다. 1910년 皇 今日 我韓 用文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 는, 純國文인가 國漢文인가하면 純國文으로만 쓰고 싶으며 또 하면 될 줄을 알되 그 심히 困難할 줄을 알음으로, 무엇보다 도 新知識의 輸入에 沮害가 되겠으므로우선 국한문을 쓰지 않을 城新聞에 실린 수 없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이 글에서 주목되는 것은 李光洙가 당시의 국한문은 純漢文에 國文으로 懸吐한 것임을 지적하고 그 개혁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점이다. 즉 그는 固有名詞 나 漢文에서 온 名詞 形容詞 動詞 等 國文으로 쓰지 못할 것만 아 이 개혁은 실제로 1908년에 창간된 잡지 少年등에 의해서 직 漢文으로 쓰고 그밖은 모두 國文으로 하자 고 주장하고 있다. 이미 시작되어 있었고 그 뒤 李光洙를 비롯한 문필가들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이로써 비로소 국한문체가 진정한 言文一致에 접근하 게 되었고, 국한문체와 국문체의 차이는 다만 한자어를 한자로 쓰

305 Ⅳ. 國語國文學 硏究 느냐 한글로 쓰느냐의 차이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3) 國 文 體 國文體는 종래의 諺文體의 전통을 이은 것이었지만 단순한 繼 承에 그치지 않고 현저한 발전과 지위 향상이 있었음을 주목할 필 요가 있다. 국문체의 지위 향상에 가장 공이 큰 것으로 기독교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개화기 이전에 있어서 諺文이 佛敎에 의해서 많이 보급 되어 왔음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었는데, 기독교는 국문체로 성경 을 비롯한 많은 책들을 번역하여 적극적인 宣敎에 힘썼던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民間紙로 建陽원년(1896)에 創刊된 독립신 문 이 국문체를 채택한 것도 기독교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신문이 培材學堂을 本據로 간행된 사실이 이것을 증 명하고 있다. 그 창간호 論說에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남녀 상하 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요 또 귀절을 떼어 쓰기는 알아보기 쉽도록 함이라 고 밝히고 있는데, 특히 띄어쓰기를 한 것은 놀라운 先見 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띄어쓰기가 구체적으로 누구의 創案인 아직 培材學堂의 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우리는 周時經이 독립신문에 처음부터 관계했으며, 이 신문이 학생이었지만 창간된 다음 달에 그 신문사 안에 國文同友會를 조직한 사실을 주 목하고자 한다. 독립신문에 이어 일신문, 뎨국신문등이 국문체로 발간되어 한때는 신문의 문체가 국문체로 굳어지는 느낌조차 있었다. 그러나 본래 국문체로 발간된 대한황셩신문이 光武 2년(1898) 皇城新聞 으로 改題하고 국한문체를 택하게 되면서 신문에 국한문 체가 一般化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지식층의 요구였던 것으

306 1. 國語 研究 로 믿어진다. 이 뒤에도 가령 大韓每日申報가 국한문체로 내면서 따로 國文報를 낸 것은 일반 민중을 위한 것이었으나, 점차 국문체는 신문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문학에 있어서, 특히 小說에 있어서는 국문체가 확립되 어 있었다. 이것은 古典文學의 전통이 지켜진 것이다 개화기에 있어서 의식적으로 국문체의 확립을 위하여 힘을 기울 인 학자는 周時經이었다. 그는 光武 2년(1898)에 國語文法의 초 고를 국한문체로 썼었다고 하니(1910년에 이 책을 낼 때에는 국문체로 고쳤으나 미처 못 고친 곳이 더러 있었다.) 그의 국문체에 대한 신념 은 그 뒤에 생긴 것이라고 해야겠다. 그의 최초의 저서인 國文講 그 略例는 한문으로, 跋文은 국한문체로, 本文은 국문체로 되어 있다. 그리고 1907년에 그가 西友誌 2호에 기고한 국어와 국 문의 필요란 글은 국문체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내용도 이의 義 (속 제목은 대한국어문법 )는 光武 10년(1906)에 간행되었는데 확립을 강조한 것이다. 이로 보아 周時經이 국문체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게 된 것은 대체로 1907년 경이 아니었던가 한다. 1914년에 간행된 말의 소리는 그의 마지막 著述로서 그 자신이 써서 石版 으로 인쇄하였는데, 잘 다듬어진 순수한 국문체로 되어 있다. 그런 가로쓰기를 꿈꾸고 있었다. 이 책의 맨 끝 페이지에 가로쓰기를 한 것이 있으며 더구나 그 내용은 가로쓰기가 글의 理想임을 明言하고 있다. 가로쓰기에 대한 그의 試案은 이미 1909년에 國文硏究所 에 제출한 그의 최종 硏究案에도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周時 데 그는 국문체에 만족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經은 문자 문제에 있어서 매우 급진적인 理想主義者였음을 알 수 있다

307 Ⅳ. 國語國文學 硏究 (2) 國文의 研究 1) 周時經의 硏究 위에서 말한 국한문체와 국문체의 어느 쪽으로 표기하거나 거 기에 국문자(한글)가 사용되게 마련인 바, 그 통일이 절실하게 요 구되었다. 그 이유는 訓民正音 창제 당시의 문자와 맞춤법은 매우 정연한 것이었는데, 그뒤 5세기 동안 점차 문란해져서 19세기말 엽에는 극도로 혼란 상태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백 사람이면 백 사람이 다 다르게 쓰는 사태에 이르렀던 것이니, 이것을 시정하여 백 사람이면 백 사람이 다 같게 쓰도록 하는 일 이 시급했던 것이다. 우선 이루어져야 할 것이 문자 체계의 再樹立이었다. 여기서 훈 민정음 창제 당시의 체계를 연구하고 그 중의 어느 문자들을 현실 적인 文字體系로 인정해야 할까 하는 것이 문제로 등장하였다. ㆍ 자였다. 이것은 흔히 아래 아 무엇보다도 크게 문제된 것은 라고 하여 윗 아 와 구별되었지만, 실제 사용에 있어서는 완전히 ㆍ 자가 본래 나타내던 모음이 국어에서 없 혼동되었었다. 이것은 어지고 만 결과 빚어진 것이었다. 周時經이 국어 연구에서 맨 먼 저 관심을 쏟은 문제가 바로 이 문자의 音價 연구였다. (이 연구는 1892년이었는데 지난 50년대까지 60여년 동안 이것이 국어학에서 매우 중요 한 과제가 되어 왔음은 기억될 만한 일이다.) ㆍ ㅏ 이 연구에서 그는 의 音價가 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後述 참고) 이 문자는 새로운 문자체계에서 제외되어야 한 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周時經이 그의 짧은 生涯를 통하여 가장 강력히 주장한 것은,

308 1. 國語 研究 終聲(받침) 체계에 대하여 그가 깨친 새로운 원리였다. 그것을 간 ㄷ ㅌ, ㅈ, ㅊ, ㅍ, ㅎ, ㄲ, ㅄ, ㅶ, ㅀ 등을 단히 말하면 받침으로,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독립신문사 안에다가 國文同式會를 조직하여 이 원리를 주장했으나 同調하는 사람이 적어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었다. 그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그 뒤 학교와 강습 소에서 이 원리를 계속 주장하였다. 그러다가 隆熙 원년(1907) ㅈ ㅊ, ㅍ 등의 받침을 쓴 예를 보게 되어, 자기 龍飛御天歌에서, 의 원리가 역사적으로도 근거가 있는 것이라는 신념을 굳히게 되 었다.1) 이 周時經의 원리는 그 뒤 큰 영향을 미쳐 1909년 國文硏究所 의 議定案에 채택되고 다시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채택되었다. 2) 국문졍리 19세기 말엽에 국어 국문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데 공헌 한 책으로 李鳳雲의 국문졍리(國文正理)가 있었다. 이것은 독립신문이 창간된 이듬해인 光武 원년(1897)에 刊行된 팜프 렛으로 주로 국문의 체계에 대해서 논했으며 그 문체도 국문체로 되어 있다. 특히 오늘 과거와 같은 띄어쓰기를 한 점(띄어쓰는 대신 표를 하였다), 固有名詞에 대하여 人名에는 한 줄, 地名에는 두 줄을 오른쪽에 그어 표시한 점 등이 주목된다. 그는 서문에서 대저 각국 사람은 본국 글을 숭상하여 학교를 ㅈㅊㅍㅌ ㅈㅊㅍㅌ ㄱㆁㄷㄴㅂㅁㅅㄹ 龍飛御天歌 와 月印千江之曲 에서 가 받침으로 사용되기 는 했지만 이것은 15세기 맞춤법으로서는 예외적인 것이었다. 訓民正音解 例 에 분명히 과 같은 받침은 쓰지 않고 의 8자만을 쓴다는 규정이 있으며 이것이 당시의 문헌에 일반적으로 준수되었다. 따라서 周時經이 龍飛御天歌 만을 보고 내린 결론은 그릇된 것이었다. 1)

309 Ⅳ. 國語國文學 硏究 설립하고 학습하여 국정과 민사를 못할 일이 없이 하여 국부민강 하건마는 조선 사람은 남의 나라 글만 숭상하고 본국 글은 아주 이치를 알지 못하니 절통한지라 라 하여 국문을 존중할 것을 역 태서 각국 사람과 일청 사람들이 우리나 라에 와서 선생을 구하여 국문을 배우면서 反切의 이치를 무르 면 대답하지 못하니 나라의 수치라고 하였다. (李鳳雲에 대해서 설하였다. 그리고 는 어떤 일본인과 함께 일본어 교본을 지은 일이 있다는 것밖에 알려진 것이 없으나 이러한 말로 미루어 그는 아마도 외국인 특히 일본인의 국어 선생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책은 국어와 국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고취하고 언문옥 편 (국어사전) 편찬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문 에 대해서 여러가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 중 주목할 만한 것 ㄱ ㄴ 과, 된시옷을 배척 하고 ㄲ, ㄸ, ㅃ, ㅆ, ㅉ 로 써야 옳다고 한 점 이다. 이 밖에 ㆆ,, ㅿ 등에 대해서 말한 것으로 보아 저자는 으로는 한글 글자의 이름을 그윽 ( ) 느은 ( ) 등으로 고친 점 訓民正音에 대한 역사적 지식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던 듯한데 오늘날의 觀點에서 보면 들어 말할 만한 것이 못된다. ㅏ 해서도 는 長音이요 ㆍ 에 대 ㆍ 는 短音이라고 한 것은 아주 그릇된 주장이다. 3) 新訂國文 池錫永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牛痘를 실시한 醫學者로서 국 어 국문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光武 9년(1905) 大韓國文 說 을 지었으며 이것을 토대로 國文學 체계의 統一案을 작성하여 정부에 疏請한 것이 裁可되어 1905년 7월 19일에 公布를 보게 되 었던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新訂國文이었다. 이 新訂國文

310 1. 國語 研究 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ㄱ. 五音象形辨 국문 初聲字들의 制字 原理를 發音器官의 象形으로 설명한 것 이다. 이것은 물론 池錫永의 독창적인 학설이 아니요, 오래 전부 터 있어온 것이며 姜瑋의 擬定國文字母分解(1869)에도 이런 설명이 보인다. ㄴ. 初中終三聲辨 崔世珍의 訓蒙字會凡例의 체계에 의거한 것이다. 다만 中 聲獨用十一字 속에 그가 새로 만든 二 자가 포함되어 있는 반 면 ㆍ 자는 제외되었다. 한편 訓蒙字會의 初聲獨用八字 에서 ㅿㆁ 을 빼어 初聲獨用六字 (ㅈㅊㅋㅌㅍㅎ)로 하였다. ㄷ. 合字辨 이것도 訓蒙字會를 그대로 따른 것으로, 訓蒙字會에서 는 각자를 예로 들었는데. 여기서는 강을 예로 들어 설명 한 것이 다를 뿐이다. ㄹ. 高低辨 上聲과 去聲 및 長音에 대해서 글자 오른쪽에 점을 찍도록 규정 한 것이다. 小學諺解의 凡例에서 暗示를 받은 것인데, 이미 우리나라 사람들이 구별하지 못하는 東 과 動 의 聲調의 차이를 표시하려 한 것은 지나친 일이었으나, 눈 (雪)과 눈 (眼)의 차이 를 구별하려 한 것은 좋은 착안이었다. ㅁ. 疊音删正辨 ㆍ 를 없앰으로써 당연히 등 14자가 없어짐을 확 인한 것이다. ㅂ. 重聲釐正辨 된소리의 표기를 관습대로 ㅺ ㅼ ㅽ ㅾ 와 같이 된시옷으로 할

311 Ⅳ. 國語國文學 硏究 것을 규정한 것이다. 開化期에는 일반적으로 된소리는 ㄲㄸㅃ ㅆ ㅉ 로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유력했는데(姜瑋, 李鳳雲, 周時 經) 池錫永은 이것을 따르지 않았다. 이상의 간단한 요약에서 說明한 바와 같이 新訂國文 은 국문 체계의 改革案이라고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매우 保守的인 것이었 다. 받침으로 8자만을 사용할 것과 된소리 표기에 된시옷을 사용 ㆍ 할 것을 규정한 것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개혁이라고 한다면 ㆍ 는 ㅣㅡ 의 合音 이라는 周時經의 주장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ㆍ 를 없앤 것은 周 時經의 뜻과 같지만 ㅣㅡ 合音을 나타내는 二 를 새로 만든 것은 그의 뜻과 어긋난 것이었다. 말하자면 新訂國文은 정작 개혁 를 없애고 二 를 새로 만든 것뿐이다. 이것은 해야 할 것은 아니하고, 엉뚱하게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당시의 識者들 사이에 큰 물의를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이 新訂國文은 개화기에 있어서 국문 체계의 再確立을 위 한 최초의 公的 노력으로서 하나의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 리하여 그 시행을 위한 노력도 상당히 있었던 흔적이 엿보이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새로 만든 二 자가 큰 불씨가 되었을 뿐아니라 전체적으로 만족할 만한 체계가 提示 되어 있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의 힘을 합하여 새로운 국문 체계의 확립을 위한 노력을 하게 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한 新訂國文이 가져온 뜻밖의 소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學部에 國文硏究所가 설치된 것은 이 新訂國文이 직접적인 것은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4) 國文一定意見 이것은 당시 法語學校 敎官이었던 李能和가 光武 10년(1906)

312 1. 國語 研究 5월에 學部에 提呈한 하나의 建議書로서, 語文整理 事業의 필요성 을 역설한 것이다. 그 구체적 방안으로 편찬, 國文字典(국어사전)의 國語規範(주로 文字 체계의 통일안)의 저술 및 소학 교 과서의 漢字 옆에 국문을 달아 쓸 것 등을 말하고 있다. 學部가 國文硏究所를 설치한 것은 이 건의서가 제정된 바로 이듬해였음 은 이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李能和 자신이 後日 國文硏究所의 설치에 이 건의서의 작용이 있었음을 술회하 고 있다. (3) 國文研究所의 業績 1) 國文硏究所에 관한 資料 國文硏究所는 學部大臣 李載崐의 請議로 閣議를 거쳐 光武 11 년(1907) 7월 8일에 學部 안에 설치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의 正音廳(諺文廳)을 제외한다면, 이것은 국문을 연구하기 위한 최초의 국가적 機關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으로 우리나라 文化史 上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었다. 반드시 국가적 기관이라야 중대성을 띤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19세기와 20세기의 교체기에 국어 국문에 대한 自覺이 싹트고 이 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자들이 생겼는데, 이들이 국문의 연구를 위 해서 협동적인 노력을 이룩했던 최초의 기관이라는 데 일차적인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 뒤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 밑에서 朝鮮 語學會와 같은 민간 학회가 조직되어 국어 국문의 통일 사업을 완 수했는데 이것이 國文硏究所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것임을 생 각할 때, 國文硏究所의 역사적 의의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다

313 Ⅳ. 國語國文學 硏究 이리하여 國文硏究所는 일찍부터 국어학자들의 관심을 끌었으나 이에 관한 자료가 없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서 어떻게 結末을 지 었는지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없었다. 國文硏究所에 관해서는 日人 學者 小倉進平이 그의 朝鮮語學史(1920)에 간단하게 써놓은 것이 있을 뿐이어서 우리나라 학자들도 이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 다. 그리고, 國文硏究所의 직접적인 자료로는 金允經이 及語學史 (1938)에 실은 硏究案(油印)의 朝鮮文字 일부가 알려졌을 뿐이었다. 앞으로 이 글에서 밝혀지겠지만, 國文硏究所는 그 討議 과정에서 위 硏究案을 제출하면 그것을 등사하여 나누어 주었고 (처음 에는 위원들이 다시 參互硏究案을 내어 이것도 등사하여 나누어 주었다.) 마지막에는 國文硏究所의 사업을 마무리짓는 報告書를 원들이 제출했었다. 이 報告書는 各 問題에 대한 위원들의 표결의 결과를 종 합하여 議定案을 작성하고 여기에 각 위원의 최종적인 硏究 案 을 첨부한 것이었다. 불과 60여년 전의 일임에도 이런 자료들의 행방이 묘연했었는 데, 이 자료들이 최근에 모두 발견된 것은 불행중 다행한 일이다. 위에 말한 토의 과정의 등사 자료는 당시 國文硏究所 위원이었 던 周時經이 간수했던 것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발견되었고, (高麗大學校 亞細亞問題硏究所 六堂文庫) 報告書 一件 書類는 일 본에서 발견되었다(東京大學 小倉文庫). 이로써 國文硏究所에 관 한 모든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지게 된 것이다.2) 2) 開設의 動機와 目的 國文硏究所가 개설된 1907년은 매우 多事多難한 해였다. 이보 2) 國文硏究所에 대한 자세한 것은 李基文 開化期의 國文硏究(1970) 참조

314 1. 國語 研究 다 2년 전에 乙巳條約이 체결되었었고, 國文硏究所가 설치된 바로 그 달에 海牙密使事件이 있었고, 뒤이어 高宗 讓位의 詔書가 내리 고 純宗이 즉위하였다. 그 다음 달에는 軍隊 解散式이 있었다. 이 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온 나라 안이 술렁대고 있었던 때다. 이런 때에 國文硏究所가 설치된 것은 당시의 학계에 문자 문제에 관한 관심이 매우 컸으며, 정부 당국자들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國文硏究所야말로 우리나라 개화 기에 있어서 새로운 文化運動의 가장 빛나는 성과의 하나라고 하 지 않을 수 없다. 國文硏究所 개설의 동기는, 크게 보면 개화 과정에서 提起된 문 자 문제의 심각성과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개화의 初期부터 학자, 언론인 등이 기울여 온 노력의 集積으로, 공동연구에 의한 국가적 인 통일 체계를 확립할 필요성이 분명해진 데 있었다고 할 수 있 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 사건이 그렇듯이 國文硏究所의 개설도 직 접적인 동기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동기는 앞에서 이미 말 新訂國文과 國文一定意見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新 訂國文은 하나의 국문 체계의 개혁으로서는 여러가지 缺點을 지 한 니고 있었으니, 비록 池錫永이 당시에 상당히 유력한 인사였다고 하더라도 한 개인의 案을 정부가 그대로 공포했다는 것은 졸렬한 처사였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 밝히려고 하지만, 國文硏究所에서 행한 연구 제목들을 보면, 新訂國文의 내용을 再檢討하기 위하여 세워진 기관이라는 강한 인상을 준다. 당시 學部 編輯局長으로서 사실상 國文硏究所 개설 초기부터 주동적인 위원으로 활약한 魚允迪은 國文硏究所에 낸 그의 最終 硏究案에서 다음과 같이 國文硏究所의 開設을 설명하고 있는 데, 매우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國文은 오랫동안 漢文에 눌

315 Ⅳ. 國語國文學 硏究 려 왔으나 甲午維新으로 公私文書에 通用되게 되고 비로소 국문이 귀함을 알게 되어 이를 연구할 필요를 다투어 말하게 되 매, 李能和, 周時經, 池錫永 등이 나왔고, 이로 말미암아 국문의 빛이 다시 밝아지게 되었으나 여러 학자의 학설이 각기 달라 그 폐해가 크니 그것을 통일하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學部에서 國文硏究所를 설치한 이유라 하겠다. 國文硏究所를 세운 목적이 국문의 연구 및 정리에 있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國文이란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을 우리는 위에서도 자주 썼지만 이것은 우리나라의 문자 체 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말, 즉 國語는 國文硏 究所의 연구 대상에서 일단 제외되어 있었던 사실에 유의할 필요 가 있다. 國文硏究所規則제1조에 本所에서는 國 文의 原理와 沿革과 現在行用과 將來發展 등의 方法을 硏究함이라 國文硏究所의 목적은 고 구체적으로 표명되어 있다. 3) 직원과 운영 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國文硏究所는 개설(1907년 7일 8 월) 며칠 뒤(7월 12일)에 職員들을 임명하였다. 委員長에 尹致旿 (學部 學務局長), 委員에 張憲植(學部 編輯局長), 李能和(官立漢城 法語學校長), 玄櫽(正三品), 權輔相(內部 書記官), 周時經, 上村正己 (學部 事務官)의 6인, 幹事에 柳基泳(學部 視學官), 書記에 白萬奭 (學部 主事)이 각각 임명되었다. 그 뒤 8월 19일에 學部 編輯局長 이 갈리어 張憲植이 해임되고 魚允迪이 임명되었다. 위의 委員 중 周時經만은 민간인으로서 아무 관직도 없었으니 그가 위원에 임명 된 것은 순전히 그의 학자로서의 名望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

316 1. 國語 研究 다. 그리고 일본인(上村正己)이 끼어 있는데, 이 무렵에는 이미 우 리나라 정치를 감시하기 위하여 정부 각 기관에 일본인들이 배치되 어 있었으나(소위 韓日新協約 즉 丁未 7월 條約에 의함), 國文硏究 所와 같은 민족주의적인 文化機構에 감시의 눈을 게을리하지 않았 음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하겠다. 이 일본인들은 실제로 한 번도 硏 究案을 낸 일이 없다. 國文硏究所가 그 최초의 회의를 가진 것은 그해 9월 16일이었 다. 이 회의에서 연구소의 운영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들이 토의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중에서도 委員의 補選과 國文硏究所規則 의 작성이 논의된 것 같다. 그 결과 9월 23일자로 李鍾一(正三 品), 李億(正三品), 尹敦求(六品), 宋綺用(前敎官), 柳苾根(九品) 의 5인이 새로 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위원 속에 정작 池錫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池錫永 이 國文硏究所 위원으로 임명된 것은 1908년 1월이었다. 짐작컨 대 國文硏究所가 주로 그의 新訂國文을 검토하게 될 것이므 로 그를 참여시키지 않기로 했다가 뒤에 그를 참여시키는 것이 오 히려 좋다는 결론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뒤에도 직원의 移動이 있었는데, 1908년 5월에 幹事가 된 李敏應(學部 書記官)이 6월에 위원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같 은 해 8월에 李億이, 1909년 10월에 玄櫽, 李鍾一, 柳苾根 등이 해임되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별로 열의가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委員長 尹致旿 외에 委員은 魚 允迪, 李能和, 權輔相, 周時經, 尹敦求, 宋綺用, 池錫永, 李敏應의 8인이었다. 비록 큰 시대적 사명을 띤 기관이긴 했으나, 처음부터 그 규모 가 적었으며 그나마 운영이 순탄치 못했었다. 직원도 위원을 빼고

317 Ⅳ. 國語國文學 硏究 는 모두 學部 사람으로 兼職하게 했으며 비용도 學部에서 임시로 내기로 되어 있었다. 國文硏究所의 운영은 처음 두 번의 회의에서 정한 國文硏究 所 規貝則 에 의하여 행하여졌다. 이에 의하면 회의는 매달 3회 열기로 했으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위원장이 위원들의 의견을 참작하여 문제를 제출한다. 각 위원이 그 문제에 대해서 硏究案을 제출한다. 이것을 등사하여 위원들에게 배부하면 동료 위원들의 의견을 참작하여 다시 자기 의 硏究案(參互硏究案)을 제출한다. 이 參互硏究案에 위원장이 評 訂案을 첨부한다. 이것을 전체 회의에서 토론하여 출석 3분의 2 이상의 贊票로 議決한다. 이 방법은 실제로 제1회 문제에 대해서 적용되었으나 너무 번거 로와 다소 간소하게 개정되었다. 회의를 매달 2회만 열기로 하고 위원들의 硏究案에 대하여 위원장이 指名한 3인이 議案을 작성하 여 이것을 가지고 토론하여 多數票로 의결하기로 하였다. 요컨대 회의의 회수를 줄이고 進度를 빠르게 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4) 事業의 經過 國文硏究所는 1907년 9월 16일에 제1회 회의를 연 뒤로 그 해 에 5회, 이듬해에 12회, 다시 그 이듬해에 6회, 도합 23회의 회의 를 열었는데 최종 회의는 1909년 12월 27일이었다. 國文硏究 所規則 대로 규칙적인 회의가 열리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회의에서 위원장이 문제를 제출한 것은 모두 10회 14문제였 다. 이제 그 제목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1회 國文의 淵源 제2회 國文 字體 및 發音의 沿革

318 1. 國語 研究 제3회 제4회 제5회 제6회 제7회 제8회 ㆁㆆㅿ 四字의 復用 當否 ㆅ, ㅱ, ㅸ, ㆄ, ㅹ 五字의 復用 當否 ㄱ ㄷ ㅂ ㅅ ㅈ 重音(古稱 並書 俗稱 된시옷) 書法 一定 中聲에 二字 瓶製 ㆍ의 廢止 當否 ㄷ, ㅅ 二字 用法 初終聲 ㅈ, ㅊ, ㅋ, ㅌ, ㅍ, ㅎ 通用 當否 제9회 七音과 淸濁의 區別 如何 제10회 四聲票의 用否 國語音의 高低音 字母 音讀 一定 字順 行順의 次序 一定 綴字法 마지막 제10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1회에 1문제씩으로 되어 있다. 國文硏究所는 위의 14문제에 대한 토론과 의결을 사실상 1908년말 까지 끝냈었다. 그리하여 일단 學部大臣에게 그 결과를 보고한 것으 國文硏究議定案과 마 지막까지 남은 8위원의 최종적인 硏究案으로 이루어진 報告 書가 작성되었다. 이 때에는 과거에 토의된 문제들을 10題로 요약 로 보도된 바 있다. 그러나 1909년에 들어 한 점이 주목된다. (이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밝혀지겠기에 여기서 는 약한다.) 이것이 완성된 것이 1909년 12월 27일이요 그 이튿날 報告書를 學部大臣에게 제출하였다. 그런데 이 報告書에 대해서 정부는 그 뒤 아무런 조처도 취 즉 28일자로 하지 않았다. 그 결과 國文硏究所 위원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3 년 동안 애써 만든 國文硏究議定案이 이 세상에 공포되지 못 하고 學部의 미결 서류 속에 깊이 묻히고 말았다. 그 이유로서 우 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學部大臣의 更迭이다. 國文硏究所를 개설

319 Ⅳ. 國語國文學 硏究 하고 그 일을 계속해온 李載崐은 報告書가 제출되기 2개월 전 즉 1909년 10월 21일에 사임하고 李容植이 새로 취임하였는데, 李 容植은 親日派로서 李完用 內閣에 발탁된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가 國文硏究所의 報告書에 대한 처리를 일부러 천연시켰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學務局長 尹 致旿가 國文硏究議定案의 내용에 대해서 불만이 있었다는 설 도 있으나 이것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는 國文硏究所의 위원장이 었으나 그의 견해는 어느 자료에도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이다. 國文硏究所는 1909년 12월 28일자로 報告書를 제출함으로 써 그 사업을 완료하였다. 이로써 國文硏究所는 사실상 폐지된 것 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 報告書의 처리가 천 연되어 그 이름만은 그냥 남아 있다가 1910년 8월, 나라의 이름 과 함께 이 연구소의 이름도 없어지고 말았다. 5) 國文硏究 議定案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國文硏究所는 1909년에 들어 그 전에 10회에 걸쳐 14문제에 대해서 議決했던 것을 다시 최종적으로 정 리하여 學部大臣에게 보고하였다. 이것이 바로 國文硏究議定 案 으로 國文硏究所 위원들의 협동적 노력의 結晶일 뿐아니라 개화기의 국문 연구의 總決算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09년에 들어 國文究所에서는 그 전의 14題를 10題로 요약했었 議定案과 최종 硏究案은 모두 10題로 되었다. 이 議定案을 완성하는 것이 國文硏究所의 목표였으며 이것 다. 그리하여 은 정부에 의하여 공포될 것으로 예견되었던 것이나, 마침내 공포 되지 않고 말았을 뿐아니라, 그 내용조차도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것은 유감된 일이 아닐 수 없다

320 1. 國語 研究 여기에 國文硏究議定案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간단한 평을 붙이기로 한다. ㄱ. 國文의 淵源과 字體 及 發音의 沿革 淵源, 字體, 發音을 나누어 논하였다. 淵源에 대해서는 檀君 시 대로부터 우리나라의 문자를 개관한 것인데 그 서술이 간결하고 오늘날 보아도 거의 흠잡을 데가 없다. 檀君 시대에는 문자가 있 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 뒤 漢字가 들어와 한문으로 글을 쓰게 되어 言文二致의 상태가 되었다고 하고 新羅 시대에 한자를 이용하여 국어를 표기하는 방법이 생겼으나, 사용하기 어려운 흠 이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國文을 造作할 思想의 胚胎라고 본 것은 卓 見이었다. 訓民正音은 世宗大王이 즉위 25년(1443)에 창제하고 訓民正音이란 책을 짓게 하여 28년(1446)에 반포하였다고 했 다. 訓民正音보다 앞서 우리나라에 古代文字가 있었다 하나 문자 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부인한 것도 매우 타당한 見解라고 하겠다. 字體는 象形이니 古篆을 倣造한지라라 고 하여 鄭麟趾의 訓民正音序에 나오는 象形而字倣古篆을 그 字體에 대해서는 먼저 대로 인정하였다. 종래 훈민정음의 起源에 대해서는 많은 說이 있 었고 國文硏究所에서도 李能和는 梵字起源說을 주장했는데, 이런 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지극히 온당한 태도였다.3) 字體의 변 ㆁ ㆆ, ㅿ 이 없어진 사실, ㄲ ㄸ ㅃ ㅆ ㅉ 가 ㅲ ㅳ ㅄ ㅶ, ㅺ ㅼ ㅽ ㅾ 과 혼동된 사실, ㆅ 은 ㅎ 과 혼 천으로는 初聲字 중에, 동되어 없어진 사실, 唇輕音 4자는 우리나라 발음에는 없는 것이 3) 訓民正音의 制字 原理가 분명히 밝혀진 것은 1940년 訓民正音 原本이 발견 되어 그 解例 制字解 에 자세한 성명이 있음이 드러난 뒤의 일이다. 國文硏究 所 위원들이 原本을 보지 않고 鄭麟趾의 象形而字做古篆 을 인정한 것은 매우 온당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321 Ⅳ. 國語國文學 硏究 終聲復用初聲이라해서 初聲 17자를 다 終聲에 쓴 예가 있으나 뒤에 ㄱㄴㄷㄹㅁㅂㅅㆁ 어서 폐지된 사실, 終聲은 訓民正音에 의 8자만 終聲에 쓰게 된 사실 등을 지적하였다. ㆍ 그리고, 등의 새 글자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나 널리 사 용되지 않았음을 덧붙였다. 字體의 연혁이란 곧 문화체계의 역사 를 의미했는데, 이 부분의 서술이 충분치 못한 것은 개화기에 이 용할 수 있은 우리나라의 옛 문헌들이 매우 적었기 때문이었다. 發音의 沿革에 대해서 먼저 訓民正音에서는 각 글자의 발음을 漢字로 표시했으나 訓蒙字會에 와서 ㄱ 을 其役 (기역) ㅏ 를 阿 (아) 등으로 이름을 지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初聲 중 ㅇ ㆆ, ㅿ, ㆁ 은 당초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듯하지만 대체 로 비슷하여 ㆁ 만 남게 되었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개화기에 가 장 큰 문제가 된 中聲의 ㆍ 에 대해서는 그 발음이 ㅡ 자와 비슷 하되 국어의 音으로서는 발음되기 어려워 지금은 그릇되어 ㅏ 자 와 발음이 같게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ㆍ 에 관한 周時, 經의 학설이 채택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ㄴ. 初聲中 ㆁ, ㆆ, ㅿ,, ㅱ, ㅸ, ㆄ, ㅹ 八字의 復用의 當否 먼저 ㆁ 자는 지금에 사용되는 글자요 ㅇ 이 없어진 글자이 니, ㆁ 을 ㅇ 으로 고쳐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위의 제1제에 서도 엿볼 수 있었던 것으로, 魚允迪 위원의 주장을 따른 것으로 ㅇ ㆁ 글자가 있었다가 이들이 하나로 합하였는데 없어진 것은 ㆁ 이 추측되지만, 그릇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본래는 두 었던 것이다. 따라서 제2제는 본래대로 두는 것이 오히려 옳았을 것이다. 이들 여덟 글자는 다시 쓸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모든 위원의 ㆁ ㆆ, ㅿ 은 위의 제1제에서 말한 바요 의견이 일치하였다.,

322 1. 國語 研究 ㅱ ㅱ ㅸ, ㆄ, ㅹ 등 唇輕音字들은 國語音에는 자는 의 變體요, 없으니 쓸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ㄷ. 初聲의 ㄲ, ㄸ, ㅃ, ㅆ, ㅉ, ㆅ, ㅊ 字 並書의 書法 一定 이 것은 된소리의 표기에 관한 문제인데, 이 同字 並書가 多數 票로 결정되었다. 李能和, 周時經 등이 이것을 주장하고 池錫永은 그의 新訂國文대로 된시옷을 주장했으며, 魚允迪은 어느쪽이 나 다 같이 써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同字 並書가 타당한 이유로 서는 이것이 音理에도 맞을 뿐아니라 훈민정음 制字의 本義이기 ㆅ ㅎ 도 하다는 것이다. 다만 은 國語音에 만 써도 되므로 다시 쓸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ㄹ. 中聲 中 ㆍ 字 廢止 二 字 瓶製의 當否 이것은 池錫永의 新訂國文에서 가장 크게 말썽이 된 것이 다. 앞서도 설명했지만, ㆍ 의 本音이 ㅣ 와 ㅡ 의 合音이라는 周 時經의 학설에 의거하여 池錫永은 ㆍ 가 일반적으로 ㅏ 와 혼동 되어 사용되므로 이것은 폐하고 그대신 ㅣㅡ 合音字로 새로 二 를 만든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이 議定案에서는 ㆍ 의 本音 이 ㅣㅡ 라는 明證도 없고 ㅣㅡ 의 合音을 표기하려면 이 두 文字 를 합해서 쓰면 되므로(즉 ㅢ ) 二 자를 만드는 것은 부당하다고 결론하였다. 그리고 ㆍ 는 ㅏ 와 혼동되었으나 製字하신 本義 와 行用하던 慣例로도폐지함이 부당하다고 하였다. 이로써 新 訂國文의 규정은 國文硏究所에서 완전히 부정된 셈이다. 池錫永 의 주장에 찬동한 것은 李敏應뿐이었고 李能和, 宋綺用, 尹敦求는 반대하였고 魚允迪, 周時經, 權輔相은 二 를 만드는 것은 부당하 되 ㆍ 를 폐지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하였다. 이 마지막 주장이 더 욱 온당한 것인데, 아마도 委員長이 李能和 등의 의견을 택하여 그렇게 된 듯하다

323 Ⅳ. 國語國文學 硏究 ㅁ. 終聲의 ㄷ, ㅅ 二字 用法 及 ㅈ, ㅊ, ㅋ, ㅌ, ㅍ, ㅎ 六 字도 終聲에 通用 當否 이것은 周時經이 가장 강력히 주장하여 제기된 문제인 바, 그의 ㄷ ㅈ ㅊ, ㅋ, ㅌ, ㅍ, ㅎ,, 을 모두 받침에 주장대로 뿐 아니라, 사용하도록 결정되었다. 이 규정에 전적으로 찬성한 이는 魚允迪 周時經, 權輔相, 尹敦求였고 반대한 이는 李能和, 池錫永, 李敏應 이었다. 이들이 받침을 써야 하는 이유로 제시한 것은 저 위에서 말한 周時經의 이론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ㅂ. 字母의 七音과 清濁의 區別 如何 이것은 音聲學의 문제로서 子音의 새로운 分類를 결정한 것이 喉半舌半齒의 七音을 구별하였고, 發音의 輕重 淺深으로 全淸次淸全濁 등을 구별했으나 이것을 다음 표와 같이 分類 다. 예전에는 發音의 作用되는 部門 으로 牙 舌 唇 齒 하기로 정한 것이다. 七音을 五音으로 한 것은 동양 음운학의 전 통적인 체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으나, 淸濁의 구별에 있어 ㄴ ㅁ, ㆁ, ㄹ 등 不淸不濁을 全淸에 서는 激音을 새로 마련하고, 넣음으로써 전통적 체계를 깨뜨리고 말았다. 이 체계에서는 아직 서양 음성학의 영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牙音 淸 激 獨 音 音 音 ㆁㄱ ㅋ ㄲ 舌音 ㄴㄷㄹ ㅌ ㄸ 唇音 ㅁㅂ ㅍ ㅃ ㅅ. 四聲票의 用否 及 國語音의 高低法 齒音 ㅅㅈ ㅊ ㅆㅉ 喉音 ㅎ 四聲(平 上 去 入)은 國語音에 없으므로 四聲票는 쓸 필요가 없 고 高低長短音만 구별하여 長音은 글자의 左肩에 1점을 가

324 1. 國語 研究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문제 역시 池錫永의 新訂國文에서 제기된 것인데, 그의 주장 중에서 한자음에 관한 것은 채택되지 않고, 국어음에 관한 것만 채택된 것이다. 단 新訂國文에는 長音의 경우 1점을 右肩에 가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여기서는 左肩에 가하기 로 결정을 보았다. 오늘날 우리가 따르고 있는 철자법은 長音을 전혀 표시하지 않 고 있다. 이것은 문자 이외에 기호를 쓴다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長音을 표시하지 않는 데서 오는 불편도 적지 않다. 이 문제는 아직도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ㅇ. 字母의 音讀 一定 이것은 한글 자모의 名稱을 새로 결정한 것이다. 전통적인 명칭 은 기역, 디귿 시옷 등에서 제2음절의 불규칙성이 있었으나 이 들을 기윽, 디읃, 시읏 으로 고쳐 모두 으 로 規則化하였다. ㆁ 이응 ㄱ 기역 ㄴ 니은 ㄷ 디읃 ㄹ 리을 ㅁ 미음 ㅂ 비읍 ㅅ 시읏 ㅈ 지읒 ㅎ 히읗 ㅋ 키읔 ㅌ 티읕 ㅍ 피읖 ㅊ 치읓 ㅏ아 ㅑ야 ㅓ어 ㅕ여 ㅗ오 ㅛ요 ㅜ우 ㅠ유 ㅡ으 ㅣ이 ㆍ 이것은 魚允迪의 주장을 따른 것이다. ㆁ 을 모든 子音의 맨 앞 에 놓은 것도 그의 주장이었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뒤에 설명될 것이다.) ㅈ. 字順 行順의 一定 자모의 순서는 훈민정음 이후 여러 책에 서로 같지 않으나 初聲

325 Ⅳ. 國語國文學 硏究 은 牙舌唇齒喉의 순서로, 그리고 淸音을 먼저 놓고 激音을 나중에 놓으며, 中聲은 訓蒙字會의 것을 그대로 따르기로 결정을 보 았다. ㆁㄱㄴㄷㄹㅁㅂㅅㅇㅈㅎㅋㅌㅍㅊ 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ㆍ 行順이라고 함은 가가거겨 로 시작되는 文字表상의 순서를 말하는 것인데 中聲으로 벼리를 삼고 初聲의 순서대로 벌여 놓기 로 결정하였다.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 가가거겨고교구규그기? 以下 倣此 ㅊ. 綴字法 綴字法은 訓民正音 例義대로 仍舊 綴用함이 可하도다라고 간략하게 규정하였다. 당시의 학자들은 綴字法이란 말을 初聲中 聲終聲을 결합하는 방법이란 뜻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이상 國文硏究 議定案의 내용을 요약하여 보았다. 전체적으 로 볼 때 이것은 매우 훌륭한 문자 체계와 철자법의 統一案이라고 평해서 조금도 지나침이 없다고 믿는다. 을 제외한다면 國文硏究 ㆍ 를 그냥 쓰기로 한 것 議定案 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문자 체계와 철자법의 원리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 다. 현대의 문자 체계와 철자법은 1933년 朝鮮語學會의 한글맞 춤법 통일안 에 의해서 수립된 것인데 이미 이보다 4반세기 전 에 國文硏究所가 그와 같은 원리에 도달했던 것은 지극히 중요한 史實이 아닐 수 없다. 6) 各 委員의 硏究案 위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國文硏究所의 報告書는 國文硏

326 1. 國語 研究 究 議定案 과 마지막까지 남은 8위원의 최종 硏究案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硏究案은 議定案의 내용을 밑받침하는 기초 자료로서 議定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뿐아니라, 그 당시의 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연구 업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것이다. 이 硏究案은 國文硏究라는 표제 밑에 4책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개화기에 있어서 우리나라 학자들의 연구가 자못 높은 수준에 도달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4책을 검토해 보면, 처음 3책은 魚允迪, 李能和, 周時經 3인 의 案이요 나머지 1책이 權輔相을 비롯한 5인의 案이다. 처음 3인 의 硏究案은 분량도 많을 뿐아니라 그 내용도 훌륭하여 이 시대의 국문연구를 대표하고 있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침이 없다. 여기서 각 위원의 硏究案의 내용을 자세하게 소개하는 것은 너 무나 번거로운 일이어서 피하기로 하고 각 硏究案의 현저한 특징 만을 지적해 두기로 한다. ㄱ. 魚允迪 學部 學務局長으로 國文硏究所 위원을 겸하고 있었던 魚允迪의 학문에 대한 관심은 주로 역사에 있었으나4) 국문에 대해서도 당 시로서는 매우 높은 識見을 가지고 있었다. 위의 國文硏究 議定 案 에 대한 검토에서 우리는 그의 학설이 가장 많이 反映된 사실 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國文硏究所에 있어서의 그의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국문에 대한 자못 정 확한 지식을 가지고 實證的 태도로 그의 학설을 세웠으므로 당시 의 학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獨斷이 적었다는데 원인이 있는 것 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檀君 시대에 문자가 있었다고 하나 이것 4) 魚允迪은 東史年表(初版 1915, 再版 1935)의 편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327 Ⅳ. 國語國文學 硏究 은 推想的 空論에 불과하다고 배척한 점, 訓民正音의 기원에 대해서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訓民正音 序文에서 鄭麟趾가 말한 象形而字倣古篆이 가장 믿을 만하며 이 古篆은 곧 梵字라고 하기도 하나 古篆은 어디까지나 漢字를 말한 것이라고 주장한 점 등이 그의 堅實한 학문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訓民正音의 制字 원리에 대한 魚允迪의 견해는 訓民正音 原本 이 발견되기 이전에 있어서 가장 正鵠을 얻은 것으로 크게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는 무릇 문자 구조의 원리에는 象形 과 演義 가 ㅇ ㅁ 있는데 訓民正音에서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따, 등을 만든 ㄱ ㅋ ㅅ ㅆ 것은 象形이요 에 획을 더하여, 을 並書하여 을 만 든 것은 演義라고 하였다. 演義란 말은 그가 생각해 낸 것이지만, 訓民正音解例(制字解)의 설명에 부합되는 것이 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ㅇ 이 모든 初聲의 근본이요 ㆍ 가 모든 中聲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ㆍ 를 中聲의 근본이라고 한 것은 訓民正音 解例의 설명과 일치하는 것이며, 初聲에 대 해서까지 ㅇ 을 근본이라고 본 것은 지나친 것이었다. 그는 訓民 위의 설명은 正音의 制字를 太極과 陰陽의 이치로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制字上 ㆍ 를 中聲의 근본이라고 보는 그의 관점은 ㆍ 가 모든 모음 중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나는 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하 ㆍ 이리하여 그는 ㆍ 가 ㅣㅡ 의 合音이라는 周時經의 설을 부정하 였으나 ㆍ 자를 폐지하자는 점에 있어서는 周時經과 의견을 같이 였다. 이 때문에 는 다른 모음들과 혼돈되기 쉽다는 것이다. 하게 된 것이다. 한편 모든 初聲을 終聲으로도 써야 한다는 주장에 있어서도 魚 允迪은 周時經과 의견을 같이하였다. 그는 名詞, 形容詞, 動詞 등 에 承接詞(助詞 또는 語尾)가 붙는 경우 이들의 表記를 항상

328 1. 國語 研究 ㅈ ㅊ, ㅋ, ㅌ, ㅍ, ㅎ 과 같은 받침도 써야 한다 고정되게 하려면, 고 하였다. 이것은 周時經의 설명 방식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주목 된다. (周時經의 설명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될 것이다.) 그의 설명 방식이 오히려 그 뒤 우리나라에서 일반화된 설명 방식과 일치하 는 것이다. ㄴ. 李能和 法語學校長으로 다방면에 관심을 보여 많은 저서를 낸 李能和 는 세계의 언어와 문자에 대한 該博한 지식을 가졌으며 國文硏究 所의 일에 대단한 열성을 보였었다.5) 그는 訓民正音의 梵字 起源說을 강력히 주장하여 訓民正音 梵 字에서 모양이 비슷한 글자들을 예를 들기까지 하였다. 이 주장은 國文硏究所 委員들의 贊同을 얻지 못했었다. ㆍ 를 없애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강력히 내세웠다. 그는 ㆍ 는 본래 ㅏ 와 같은 발음으로 가볍고 짧은 소리였는데 뒤에 이것이 ㅏ 와 혼동되었으나 외국에도 글자는 다르지만 발음 은 같은 例가 있으므로 ㆍ 를 없앨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 밖 한편 그는 에도 몇 가지 이유를 들었으나 수긍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이 주장이 관철되어 國文硏究議定書에서 ㆍ 을 없애지 않기 로 한 것은 옥의 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① ㄱ ㄴㄹㅁㅂㅅㅇ 은 常用初終聲字 로② ㄷㅈㅊㅋㅌㅊㅎ 는 活 用初終聲字로, ③ ㆁㆆㅿㅱㆄㅹㆅ 등은 備考初終聲字로 나누었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①은 制限 없이 언제나 쓴다고 한 것을 보면 ②에는 어떤 제한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밖에 제5제에 대한 李能和의 주장은 매우 독특하였다. 그는 5) 李能和의 저서로는 朝鮮佛敎通史; 朝鮮基督敎及外交史; 朝鮮女俗考; 朝鮮巫俗 考; 朝鮮解語花史 등이 있다

329 Ⅳ. 國語國文學 硏究 도 그의 주장에는 쉽사리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 적지 않다. ㄷ. 周時經 國文硏究所의 일에 周時經이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활약했음 은 그의 硏究案이 量으로 가장 많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周時 經의 著書들이 전하기는 하지만, 그의 硏究案은 국문에 관한 그의 연구를 종합한 것으로 그의 학문을 이해하는데도 매우 중요한 자 료가 된다. 그의 硏究案에 먼저 주목되는 것은 그가 訓民正音의 制字原理 에 대해서 정면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은 사실이다. (그의 다른 저 서들에서도 이것을 볼 수 없다.) 아마도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확고한 결론을 얻지 못했던 것 같다. 이미 저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국문에 대한 周時經의 주장은 ㆍ 의 본래의 발음은 ㅣ 와 ㅡ 의 合音으로서 이것은 폐지해야 마땅하다는 것과, 된소리는 ㄲㄸㅃㅆㅉ 로 표기해야 한다는 것과 받침으로 ㄷㅈㅊㅋㅌㅍㅎ 등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에 중점을 두 고 있었다. 이 硏究案에서 우리는 周時經의 새로운 받침 이론에 관한 가장 세련된 敍術을 볼 수 있다. 모든 音은 달라지는 本音외에 환경에 따라 臨時의 音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나라 말이든지 그 本音으로 쓰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즉 ㅈ 臨時의 自然 한 音理에 의한 것이며 이 경우 本音은 엄연히 ㅈ 이라는 것이 다. 오늘날 우리가 ㅈㅊㅋㅌㅍㅎ 등의 받침을 쓰고 있는 것은 주 로 周時經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작 그의 本音 臨 時의 音에 관한 이론이 그 뒤 우리 학계에서 잊혀지고 만 것은 찾고 에서 이 제대로 발음되지 않으나 이것은 애석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국어의 음운체계에 대한 매우 깊

330 1. 國語 研究 은 통찰에서 우러난 것으로 이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더라면 현대 국어학의 빛나는 業績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ㄹ. 權輔相 國文硏究所 위원에 임명될 때 內部書記官이었다는 것 이외에 權輔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런데 그는 國文硏究所 개 설 이래 충실한 위원으로 일했으며 그의 硏究案은 23장의 짧은 것이기는 하지만 자세히 읽어 보면 매우 주목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국문의 기원에 대해서 그는 古篆의 뜻을 매우 넓게 해석하 였다. 즉 漢文 梵文 蒙文 등을 모방하고 이들을 일괄하여 古篆이 라고 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모방이란 것은 考察的 感念을 준 것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訓民正音은 전체 적으로는 하나의 독창적 문자체계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中聲 ㆍ 에 관한 權輔相의 이론은 주로 魚允迪과 李能和의 주 장을 반박한 것인데, 매우 날카로운 데가 있다. 이 이론에서 우리 는 그가 言語와 文字의 구별에 대한 명백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 을 발견한다. 국어가 있은 뒤에 이것을 표기하기 위하여 국문이 생겼는데, ㆍ 가 中聲의 처음이라고 해서 이것이 母音의 근본이라 하는 것은 잘못임을 그는 밝혔다. 받침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理論上으로는 모든 初聲을 終聲에 쓰는 것이 옳음을 분명히 하고, 그러나 이것을 일반화시킴 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그가 특히 文法敎育이 필 요함을 지적한 점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아도 타당한 것이다. 된소리 표기를 된시옷으로 하자는 것을 빼고는, 權輔相은 대체 로 周時經과 의견이 일치했으나, 그는 이론적, 실제적으로 독자적 인 근거를 가지고 있음이 주목된다. 특히 그가 위에서도 지적한

331 Ⅳ. 國語國文學 硏究 것처럼 言語와 文字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硏究案 의 다른 부분에서 드러나는 것이지만, 언어는 변화한다는 사실과 문자 표기는 保守性을 지닌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 음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인식은 당시의 다른 학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ㅁ. 宋綺用 宋綺用은 國文硏究所 창설 이래 한 번도 硏究案 제출을 게을리 한 일이 없는 충실한 위원이었으나 독창적인 학설은 별로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된소리 표기에 대해서는 周時經의 의견을 그대로 ㆍ 따랐고 을 없애는 것도 옳지 않고 二 를 만드는 것도 옳지 않 다고 한 것은 李能和의 학설을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받침 표기 에 대해서도 대체로 周時經의 의견을 따랐으나 隨機應用하자 고 한 점에서 차이를 보여 준다. ㅂ. 池錫永 新訂國文당시의 池錫永의 의견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의 의견은 전반적으로 보수적임을 특징으로 하여 魚允迪이나 周時經 과는 거의 모든 문제에서 대립을 보였다. 그의 주장은 議定案 에서 완전히 무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ㅅ 된소리 표기로 된시옷을 주장하면서, 池錫永이 서 의 은 본 ㅅ 래 이 아니라 한문에서 같은 글자를 생략할 때 쓰는 부호 〱 라고 한 것은 奇拔한 착상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새로 만든 二 자 에 대해서도 그의 설명은 너무나 빈약했다. 심지어 그는 그에 대 한 용법이나 용례를 하나도 들지 않고 있다. ㅅ. 李敏應 學部 書記官으로 나중에 國文硏究所 幹事와 委員을 겸했으며 國文硏究所 報告書도 李敏應의 글씨로 되어 있는데, 정작 그

332 1. 國語 研究 의 硏究案은 제4제와 제5제 두 문제에 관한 것밖에 보이지 않는 다. 그 내용을 보면 그는 池錫永의 의견을 추종하고 있다. ㅇ. 李敦求 특별히 독창적이라고 할 만한 의견이 없다. 그는 周時經의 영향 ㄲ ㄸ ㅃ ㅆ ㅉ 을 쓸 것과 모든 初聲을 終聲으로 쓰기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ㆍ 에 을 많이 받은 듯하다. 그리하여 된소리 표기에 대해서는 폐지하자는 설이 매우 타당하나 좀더 연구하여 本音을 밝힐 것을 주장하였다. (4) 文法의 研究 1) 西洋人의 硏究 국어에 대한 서양인들의 관심이 싹튼 것은 19세기 前半 또는 그 以前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들의 본격적인 연구는 19 세기 後半에 와서 주로 宣敎師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서양 선교 사들은 새로운 언어에 접했을 때 그 文法書와 辭典을 편찬하고 그 언어로 聖經을 번역하는 일을 무엇보다도 먼저 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傳道를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이러한 실제적 필요에 의한 연구 외에도 순수한 학문적인 연구도 있었다. 그 당시 유럽에서 성황을 이루고 있었던 比較言語學의 영향을 받 아 국어의 계통 문제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文字學의 관 점에서 한글의 기원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전문적인 언어학자가 아니어서 그들의 연구에는 한계 가 있었다. 오늘날 보면, 이들의 연구는 오직 역사적인 가치를 지 니고 있을 뿐이다. 문법(grammer)이란, 서양에서 발달한 학문이다. 그리하여 국어

333 Ⅳ. 國語國文學 硏究 문법이 처음 서양인들에 의해서 씌어졌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고도 할 수 있다. 처음으로 국어의 문법에 관한 저술을 한 사람은 영국 선교사 로 스(John Ross)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선교사의 입국을 금했으므로 그는 만주에 있으면서 국어를 공부하여 1877년에 朝鮮語初步 (Corean Primer)를 중국 上海에서 발행하였다. 이것은 국어 會話 책인데 그 첫머리에 국어의 音韻과 문법에 관한 설명이 보인다. 그 뒤 그는 이 책을 수정하여 朝鮮語法(Korean Speach, with Grammer and Vocabulary, 1882)를 내었다. 국어의 음운과 문법에 관한 설명이 훨씬 자세해졌음이 주목된다. 로스와 함께 만주에 있 었던 선교사 매긴타이어(John MacIntyre)도 朝鮮語論(Notes on the Corean Language, 1879)를 내었다. 이들의 책은 주로 平安 道方言을 기록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아마도 만주에서 주로 평안도 사람들로부터 국어를 배운 듯하다. 이 책들은 그 내용이 잘되고 못 되고는 고사하고,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평안도 방언을 전해주 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성경 을 국어로 번역하였는데 이 역시 평안도 방언으로 되어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 1881년에 빠리 外國傳道會 소속으로 우리나라에 파견된 불란서 선교사들이 편찬한 朝鮮語文典(Grammaire Corèenne par les Mis- sionaires de Corèe de la Sociètè des Missions Etrangeres de Paris) 이 日本 橫濱에서 출판되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문법연구의 시 초라고 할 수 있는 책으로 그 뒤의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러나 이 책은 서양 문법의 틀에 국어를 맞춘 것이어서 국어의 특 징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가령 이 책은 국어에 아홉 品詞를 設 定했는데 그 중에는 冠詞, 前置詞까지 들어 있다. 이것은 서양의

334 1. 國語 研究 문법 체계를 국어에 그대로 적용한 데서 온 것이다. 그리고 附錄 으로 계절, 十干, 十二支, 方位, 親族關係의 명칭 등을 들고 맨 끝에 각종 회화의 實例를 들고 자세한 설명을 한 것과 짧은 이야 기 10여편의 원문과 번역을 싣고 있다. 이것은 이 책이 순수한 학문적 필요보다는 실용적 목적을 위해서 씌어졌음을 말해 주고 있다. 영국 외교관으로 1884년에서 1892년까지 仁川 副領事를 지낸 스 코트(James Scott)는 1887년에 언문말책(En-moun mal Ch aik. A Corean Manual or Phrase Book with Introductory Grammar)를 저술하 였다. 제1편은 諺文의 발음, 품사의 설명이요 제2편은 회화 演習 으로 되어 있다. 스코트는 英韓辭典(English Corean Dictionary. 1891)의 編者로도 알려져 있다.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H. G. Uuderwood, 元杜尤)의 韓英文法(An Introduction to the Corean Spoken Language)이 1889년에 日本 橫濱 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은 제1편 문법, 제2편 영어와 국어의 對譯 으로 되어 있다. 이 역시 실용을 위주로 한 책임은 위에서 말한 책들과 다름이 없다. 내용에 있어서 품사 분류에 冠詞, 前置詞가 없어지고 그 대신 後置詞(postposition)가 등장한 것은 위에서 말 한 불란서 선교사들의 문법보다 한걸음 발전한 것이라고 하겠다. 後置詞란 體言에 붙는 토를 가리킨 것이다. 캐나다인 선교사로 국어로 성경을 번역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에 대해서도 몇 권의 저서를 남긴 게일(J. S. Gale, 奇一)이 1893년에 낸 辭課指南(Korean Grammatical Forms)은 국어 用言 의 活用語尾를 실례로 들어 설명한 책이다. 이것은 서양인이 국어 를 배울 때 가장 어려운 것이 용언 어미라는 점에 착안하여 집필 한 것으로, 국어의 용언 어미 264종의 경우를 들어서 설명한 것은

335 Ⅳ. 國語國文學 硏究 그 자료만으로도 훌륭한 업적이 되는 것이다. 이상 19세기에 있어서의 서양인들의 한국어 연구, 특히 문법에 관한 저서들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하였다. 뒤에 말할 바와 같이 우리나라 학자들의 문법 연구는 1880년대에 시작되었으나 문법책 이 간행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서의 일이었다. 여기서 우리나라 학자들의 연구가 이들 서양인들의 손에 간행된 문법책들의 영향 을 얼마만큼 받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된다. 앞으로 더욱 면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까지의 연구로는 이 영 향은 매우 적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서양 선교사들의 국 어문법에 관한 저술이 19세기에 매우 많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아주 적었다는 점이다. 위에 말한 책들의 改 訂版을 제외하면 1923년에 간행된 에카르트(P. A. Eckardt)의 朝鮮 語交際文典 (Koreanische Komversations Grammatik mit Lesestücken und Gesprächen)을 들 수 있을 뿐이다. 2) 大韓文典 우리나라 사람으로 최초로 문법에 관심을 가져 문법책을 저술 한 사람은 俞吉濬이었다. 그 자신의 말(1909년에 간행된 大韓 文典 의 緒言)에 의하면 그가 처음 국어문법의 草稿를 쓴 것은 1881년 日本에 유학갔을 무렵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뒤 여덟번이 나 원고를 고쳐 썼다고 한다. 이 초고 중에서 朝鮮文典이란 이름이 붙은 두 책이 지금 전하고 있다. 이 筆寫本 중의 하나에는 光武八年 六月(1904)이란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역시 朝 鮮文典이란 이름의 油印本이 있는데 그 끝에 1906년 5월에 이 책을 구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보다 앞서 되었음이 확실하다

336 1. 國語 研究 이것이 1907년에 少年韓半島란 잡지에 連載되었다. 6) 이 兪 吉濬의 문법이 단행본으로 간행된 것은 隆熙 3년(1909)이었다. 이것은 大韓文典이란 이름으로 되어 있다. 大韓文典이 간 행된 것이 있다. 이것은 兪吉濬의 大韓文典보다도 오히려 일 그런데 隆熙 2년(1908)에 崔光玉의 저서로 년이 앞서는 것으로, 종래 우리나라 사람이 쓴 최초의 문법책이라 고 일컬어져 온 것이다. 崔光玉은 당시에 널리 알려진 愛國志士요 기독교 신자로 황해도에 학교를 세워 민중 교육에 힘썼으며, 大成 學校 교장을 지낸 일도 있는데 그의 이 책의 내용은 위에 말한 俞 朝鮮文典과 전체적으로 비슷한 것이다. 그리고 兪吉濬 도 그의 大韓文典緒言에서 자기의 제4차 原稿本이 세상에 흘 러나가 간행되었다는 뜻의 말을 하여, 崔光玉의 大韓文典이 吉濬의 자기의 원고본에 의한 것임을 비친 바 있다. 위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俞吉濬이 高宗 18년(1881) 일본에 유 학했을 때 그의 국어문법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의 문법의 기 본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 간행된 일본어 문법을 그의 국어문법의 모델로 삼게 되었던 것이 다. 그는 그 뒤 미국에도 留學했으나 그의 문법에서 英語文法의 직접적 영향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국어의 구조가 일본어와 비슷하고 영어와는 다른 점이 많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俞吉濬은 建陽 원년(1896)으로부터 隆熙 원년(1907)에 이르 기까지 12년 동안 일본에서 亡命生活을 했는데 이 동안에 그의 문법책이 완성된 것으로 추측되므로, 사실상 그의 大韓文典은 전후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체류시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지나 6) 여기에는 저자의 이름이 없다. 저자 俞吉濬이 일본에 망명 중이어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37 Ⅳ. 國語國文學 硏究 친 말이 아니다. 俞吉濬의 국어문법 연구가 일본어 문법의 영향을 받은 것은 우 선 책 이름으로 文典이란 말을 쓴 것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 일본에서 나온 일본어 문법책들은 다 그 이름에 文典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俞吉濬이 처음 유학시에 참고한 것은 中根淑의 日本文典(1876)이었고 나중 망명시에 그의 원고를 고칠 때 주로 참고한 것은 그 무렵에 간행되 廣日本文典(1897)이었던 것으로 추 측되고 있다. 이밖에도 그의 大韓文典에는 당시 일본에서 간행 어 널리 읽힌 大槪文彥의 된 몇몇 문법책의 영향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당시의 일본 어 문법 연구에 대해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 유학에서 문법에 대한 관심이 싹텄던 俞吉 濬이 19세기 말엽 미국에 유학하면서 言語學과 영어 문법의 연구 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음을 아쉽게 생각한다. 그의 西遊 言語學이 포함되 見聞 에 보면 제13편 學業하는 條目 에 어 있다. 그런데 그는 이것을 주로 실용적인 외국어의 학습 내지 연구로 이해한 것 같다. 다만 各國의 言語를 比較하여 그 根本 의 異同을 考究함이라 고 한 끝 句節은 그가 比較言語學에 대해 서도 알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大韓文典은 우리나라 문법 연구의 初創期로서, 모방의 단계 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상 兪吉濬의 모델이 된 일본 어 문법들 자체도 모방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초 창기에 있어서는 모방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俞吉濬이 여덟 번이나 원고를 고쳐 썼다는 것은 그의 노력이 얼마나 컸던가를 말 해 주는 것이다. 俞吉濬은 우리나라 최초의 문법가라는 명예를 지니고 있다. 그러

338 1. 國語 研究 나 그의 大韓文典은 그 뒤의 문법가들에게 이렇다할 영향을 주 지는 못했다. 그의 문법은 周時經의 그것에 壓倒당하고 만 것이다. 3) 國語文法 周時經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國語文法을 쓰기 시작 한 것은 高宗 30년(1893)이요 이것을 일단 완성한 것은 그의 나 이 겨우 23세 되는 光武 2년(1898)이라고 한다. 이 기간은 대체 로 그의 培材學堂 학생 시절에 해당한다. 우리는 아직도 周時經이 어디서 언제 문법에 관한 지식을 얻었 으며 어떻게 그처럼 젊은 나이에 그의 문법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 는지 자세한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문법이란 학문이 새로 도입 된 초창기에 국어의 특수성을 살린 문법체계를 수립했다는 것은 확실히 하나의 奇蹟이요 신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의 저서의 여기저기에서 우리는 이 신비를 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자신이 쓴 기록에 의하면 그는 17세 때에 英文의 子母音 을 解하고 轉하여 國文字의 子母로 解할새 母音의 分合됨을 硏 究 (國語文典音學)하였다 한다. 이것은 그의 국어 연구가 영어의 지식에서 시작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그의 학문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영어, 중국어, 일본어의 문법 연구에 관 심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國語文法에서 品詞의 이 近日 日本과 支那에서 漢字로 文法에 用하는 名稱이 有하나 라고 한 것에 그 일단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國語文法의 방침을 밝힌 이온 글의 잡 이에서 그가 한 다음 말은 지극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 글은 今世界에 두루 쓰이는 文法으로 웃듬을 삼아 꿈임이 름에 대하여 註를 단 속에

339 Ⅳ. 國語國文學 硏究 라. 그러하나 우리 말에 맞게 하노라 함이라. 이것은 그의 문법 연구의 기본 태도를 천명한 것이다. 今世界 에 두루 쓰이는 文法 이란 말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쓰이고 있는 문법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周時經이 실제 로 알고 있었던 것은 영어, 일본어. 중국어의 문법 정도였을 것이 다.) 그러나, 그는 이런 외국어의 문법을 그대로 모방하려 하지 않 고 어디까지나 우리 말에 맞게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이것 이 周時經의 문법을 독창적으로 만든 가장 큰 要因이 된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俞吉濬은 줄곧 文典이란 말을 썼는데, 文法이란 말을 쓴 것이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 다. 역시 國語文法의 이온 글의 잡이에 이 글은 광무 이 周時經은 줄곧 년 무술에 다 만들었던 것을 이제 얼마큼 덜고 더함인데 이름을 漢 字로 國語文法이라 함은 그때의 이름대로 함이라 라고 되어 있다. 이로 보아 1898년에 이미 이 책의 이름은 알 수 있다. 그가 이 國語文法이었음을 文法이란 말을 보았을 가능성이 있는 책 들을 찾아 보면 우선 저 위에서 말한 언더우드(H. G. Underwood) 의 책의 內題인 韓英文法을 들 수 있고, 일본에서 20세기 벽두 부터 文法이란 말이 널리 사용된 사실을 들 수 있다. 연대로 미루 어보거나, 周時經이 언더우드를 잘 알고 있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언더우드의 책에서 직접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으리라고 생각 된다. 周時經의 문법에 관한 저서로서 최초로 출판된 것은 대한국어 문법 이다. (표지에는 國文講義 라 있다.) 이것은 그가 서울 尙 洞靑年會學院에서 가로친 교재로서 光武 10년(1906)에 간행되었 다. 그런데 이 책은, 그 跋文에도 있는 것처럼, 음운에 관한 부분뿐 이다. 그의 國語文法첫머리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점 1908년

340 1. 國語 研究 國語文典音學과 성격이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國語文法을 간행하기 전에 두 차례나 그 가 말하는 音學에 관한 저술을 낸 것이다. 그의 國語文法이 간행된 것은 1910년 4월이었다. 韓日合併 에 간행된 그의 條約이란 것이 체결되기 몇 달 전의 일이다. (이 책의 再版이 朝鮮語文法이란 이름으로 1911년에 간행되었다.) 國語文法의 특징으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그 文法 術語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순수한 국어 요소를 素材로 해서 임, 긋, 엇 과 같은 新語들을 만들어 썼던 것이다. 이에 대 하여 그는 學術用語란 漢字로 만들든 국어로 만들든 定義를 내려 야 하기는 일반인데, 국어문법에 국어를 쓰는 것이 옳은 일이며, 漢字로 지으면 오히려 그 뜻으로만 해석하려는 폐단이 있고 日本 이나 中國에서 쓰는 술어들은 국어에 적당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國語文法) 周時經의 識見이 얼마나 높은 데 있었는 가를 알 수 있다. 그는 맹목적인 國粹主義者가 아니었다. 國語文法전체의 가장 큰 특징은 그 獨創性이다. 그도 역시 외 국어 문법책 또는 외국인이 쓴 국어문법책을 참고했을 것임에는 틀 림이 없다. 위에서도 인용했지만 그 자신 이 글은 今世界에 두루 쓰이는 文法으로 웃듬을 삼아 꿈임이라 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이어 그러하나 우리나라 말에 맞게 하노라 함이라고 한 것이 周 時經의 문법 연구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그의 문법 체계에서 는 앞에 말한 俞吉濬이나 뒤에 말할 金熙祥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직접적인 외국 문법의 영향 관계는 찾아보기 어렵다. 周時經은 국어에 9품사를 두었는데 그 중에 주목되는 것이 언 겻, 잇, 끗 이다. 언 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관형사(매김씨)라고 하는 것으로 國語文法에서 처음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341 Ⅳ. 國語國文學 硏究 는 먹다, 먹고 희다, 희고 에서 먹, 희 만을 움(동사), 엇(형용 사)이라 하고 다 는 끗, 고 는 잇이라고 했던 것이다. 겻 이란 사람이 소를 의 이 를 등을 말한다. 말하자면 그의 문법의 특징은 체언과 토, 용언의 어간과 어미를 나누어 별개의 단어로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國語文法은 우리나라 문법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 다. 당시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았던 俞吉濬의 大韓文典보다도 그의 國語文法이 더 큰 영향을 미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國語文法의 내용이 매우 독창적이며, 그것을 가르치는 周時經 周時經의 의 至誠에 많은 젊은이들이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4) 魚允迪의 연구 國文硏究所 위원이었던 魚允迪은 문법가라고는 할 수 없으나 硏究案에 문법에 관련된 것이 보인다. 즉 제5제(終 聲의 ㄷㅅ 二字 用法 및 ㅈㅊㅋㅌㅍㅎ 六字도 終聲에 通用 當否) 그의 최종 에 관한 부분에서 그는 언어 구성에 있어서의 중요 재료는 명사, 형용사, 동사의 3종이지만 承接詞가 없으면 활용을 못하나니, 이 넷을 문자로 일정하게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은 제5제에서 제기된 문자들을 모두 받침으로 사용해야 이러 한 일정한 표기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즉 붓은 젖은 으로 써야 지 부슨, 저즌 으로 써서는 붓, 젖, 은 의 표기가 고정되지 않 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맞춤법의 가장 중요한 원리에 대한 설명으로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면 魚允迪은 동사, 형용사는 語幹만으로 보고 어미를 독립된 품사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周時經 의 견해와 일치한다. 承接詞란 魚允迪의 글에서만 볼 수 있는 독

342 1. 國語 研究 특한 이름이다. 初等國語語典 1909년에 金熙祥의 初等國語語典이란 책이 간행되었다. 그 뒤 그는 이것을 改訂하여 1911년에 朝鮮語典을 내었고 다시 1927년에는 울이글틀이란 책을 간행하였다. 이로 보아 그가 5) 매우 열성적인 문법 연구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金熙祥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울이 글 틀 의 서문에 의하면 그는 培材學堂 출신이요 나중에 開城 好壽 敦女學校에서 교편을 잡은 일이 있었다. 이 울이글틀의 序文은 그의 국어문법 연구의 내력과 태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는 光武 5년(1901)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전일 에 배운 영어 문법을 복습하기 위하여 그것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여 러 번 읽어 보다가 우리말에도 이런 것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떠 올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영어 문법 번역을 기초로 하여 국어문법 을 엮어 보려 했으나 어려움을 느끼다가 우리말에 관계되는 서적을 읽어서 좋은 참고를 얻어 初等國語語典을 지었다고 하였다. 위에서 본 것처럼 金熙祥은 영어 문법의 飜案에서 시작했기 때 문에 영어 문법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그 중에서도 關係 代名詞를 설정한 것과 높은, 붉은, 적은, 많은, 오는, 가는, 이, 그, 저, 무슨 등을 형용사라고 한 것은 현저한 예라고 하겠다. 활용되 는 단어와 되지 않는 단어를 구별하지 않고 명사 앞에서 명사를 수식하는 말을 모두 형용사라고 한 것은 영어 문법의 형용사를 본 뜬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문법에도 국어의 특수성을 드러내려고 한 노력의 흔적이 엿보인다. 가령 품사를 모두 7품사로 하고 그 하나로 吐를

343 Ⅳ. 國語國文學 硏究 설정했는데 이것은 周時經의 문법에서 겻, 잇, 끗이라고 세 품사 로 다루었던 것을 하나로 통합한 것이다. 그리고나서 오늘날의 문 법에서 말하는 助詞와 用言의 語尾 등으로 吐를 다시 분류하였다. 이상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처음 10년간에 있어서 우리나라 학자들이 거둔 국어문법 연구의 중요한 업적을 더듬어 보았다. 이 때는 문법이란 학문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초창기였으니 외국 문법의 모방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미 이 때에 국 어문법 체계의 특수성을 밝히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은 주목할 만 한 일이라고 하겠다. (5) 周時經의 國語研究 위의 서술에서 우리는 周時經의 국어 연구에 대해서 상당히 자 세하게 말해 왔다. 여기서 그것을 종합하여 볼 필요가 있음을 느 낀다. 周時經은 이른바 개화기를 대표하는 국어학자였고, 그 뒤의 국어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앞에 쓴 것과 다소 중복되더라도 그의 생애와 학문에 대해서 여기에 종합적으로 논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믿는다. 周時經(호 한힌샘)은 高宗 13년(1876)에 황해도에서 태어나서 亡國의 恨을 겪은 지 5년째 되던 1914년에 세상을 떠났다. 38년 7개월의 짧은 일생이었다. 그가 서울로 올라온 것은 12세 되던 해였다고 하지만, 그 당시 의 새로운 학문에 접하게 된 것은 18세 되던 高宗 30년(1893)이 었다. 그의 이력서에 의하면 이 해에 培材學堂의 講師인 朴世陽, 鄭寅德에게 算術과 萬國地誌 등을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기 록에 의하면(國語文典音學) 이보다 한해 앞서 17세 되던 해에 英

344 1. 國語 研究 文萬國地誌를 학습하면서 영문의 子音과 母音을 알게 되어 그 지 식으로 국문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 이듬해에 이미 ㆍ 가 ㅣㅡ'의 合音이라는 학설을 세웠다고 한다. 여기에는 1년의 錯誤가 있는 듯한데, 그의 이력서가 옳은 것으로 본다면, 이 학설을 세운 것은 그가 培材學堂에 입학하던 해요 또 甲午更張이 있었던 해였다. 그 뒤 光武 4년 (1900)까지 그의 교육은 주로 培材學堂에서 이루어 졌는데, 그는 학생이면서 이미 사회인이요 志土로 인정을 받아 建 陽 원년 (1896) 獨立新聞社의 일을 보게 되었고 光武 원년 (1897)에는 獨立協會 委員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그는 학생이면서 동시에 학자였다. 독립신문사의 일을 보게 되자 곧 그는 신문사 안에 國語同式會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국문 ㆍ 의 연구 단체로서는 최초의 것이었다. 그는 이 회에서 에 관한 ㆍ ㅣㅡ 의 合音이라는 것과 이것은 폐지해 야 한다는 것)과 받침에 관한 새로운 원리 ( ㄷㅌㅈㅊㅍㅎ 과 ㄲㄺ ㄿㄻㅀㄾㅄㄵㄳ 등을 써야 한다는 것)를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 자기의 결론( 는 본래 나 이런 주장은 너무나 시대에 앞선 것이어서 同調者가 없었다. 한 편 그는 이 무렵에 國語文法을 집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光 武 2년 (1898)에 이것을 일단 완성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나이 23세 되던 해의 일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국어 국문을 연구하는 학자요 교육자로서 의 그의 면모가 뚜렷해졌다. 그는 서울 안의 어느 학교에서나 거 의 자청하다시피 하여 가르쳤으니, 낮뿐 아니라 밤에는 야학, 일 요일에나 방학에는 강습소를 열어 국어 국문에 관한 새로운 지식 을 보급시켰다. 그는 이 방면의 연구 단체라면 빠진 일이 없었다. 그중 國文硏究所의 위원으로 활약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그는 저술에도 큰 힘을 기울였으니, 그중에서도 國語文法은

345 Ⅳ. 國語國文學 硏究 대한국어문법(1906)과 둘째 저작인 國語文典音學(1908), 그리고 마지막 저작인 말 의 소리(1914)는 모두 國語文法중의 音學(요즈음 술어로는 그의 필생의 저작이었다. 그의 첫 저작인 음운론)이 독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의 國文硏究所 최종 硏究案 도 국문에 관한 훌륭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朝鮮光文會 (1910년 창설)에서 국어사전을 편찬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사 전은 완성을 보지 못했으나 우리나라에서 맨처음 있은 국어사전 편 찬이었다. 周時經의 學問에 대해서 생각할 때 무엇보다도 큰 감명을 받는 것은 그 早熟性과 獨創性이다. 조숙성은 그 당시의 다른 학자들에 게서도 전혀 볼 수 없는 바 아니지만, 독창성은 견줄 만한 예를 찾기 어렵다. 培材學堂에서 배웠다고 하지만. 그의 국어 연구는 거의 독학이었는데, 그가 국어 연구에서 도달한 높은 수준의 독창 성은 하나의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 든 그의 저서들을 볼 때, 周時經은 국어 음운 연구에 시종 깊은 관심을 가졌었고 이에 큰 자부심을 가졌었음을 짐작할 수 있 다. 그의 말의 소리는 국어 음운론에 관한 하나의 기념비적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을 포함한 그의 여러 저술에 나타 ㅋㅌㅍㅊ 은 ㄱㄷㅂㅈ 과 ㅎ 의 섞임이라고 본 것을 비롯하여, 독창적인 견해로 가득차 있다. 그중에서는 本 音과 臨時의 音의 이론은 크게 주목된다. 저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여기서 다시 설명하면, 꽃이 할 때에는 ㅊ 이 제대로 발음되지만, 꽃만 할 때에는 ㄴ 으로 발음되는데 이것은 臨時의 音이요 本音 은 어디까지나 ㅊ 이니 우리가 글을 쓸 때에는 이 本音으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 이 이론은 그의 난 음운 이론은, 제자들에 의해서 계승되지 않았지만, 이것은 周時經 자신이 가장

346 1. 國語 研究 강력히 주장한 음운 이론이었으며 또 오늘날 새로이 평가되어야 할 중요한 이론이다. 이 本音j과 臨時의 音은 10여년간 미국 언어학에서 발달된 生成音韻論에서 말하는 基底表示(underlying representation)와 音聲表示(phonetic representation)에 각각 일 치되는 것이다. 이런 이론을 周時經이 발달시켰음은 그의 통찰력 이 얼마나 날카롭고 깊이 있는 것이었던가를 보여준다. 한편 그의 國語文法이 국어의 문법체계를 자못 독창적으로 파악했음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여기서 일일이 말하려 하지 않지만, 그의 마지막 저작인 말의 소리에 보이는 늣씨 에 대 해서 언급해 두고자 한다. 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는 것이 유 감이지만, 이것은 분명히 1930년대 이래 현대 언어학에서 발달해 온 形態素(morpheme)란 개념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着想에 그치고 이론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았음이 흠이라고 하겠다. 周時經의 정성어린 국어 연구와 그 보급을 위한 獻身的 노력의 믿받침이 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그의 학문과 교육은 애국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었다. 그의 애국 이 어떤 것이었던가를 말해주는 한 逸話가 있다. 그는 培材學堂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자가 되었었는데, 光武 10년 (1906) 崔益鉉 追悼會에서 돌아오는 길에 무력 침략보다 정신 침략이 더 무섭다 는 것을 깨닫고는 그날로 大倧敎로 개종하고 말았다 한다. 그러 나, 亡國의 悲運을 막을 수 없는 형세 속에서 그의 焦悶은 날로 커갔다. 특히 百五人事件으로 동지들이 많이 투옥된 뒤로는 더욱 그랬다. 그는 결국 이 焦悶 속에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7) 李基文 金允經 朝鮮文字語學史(1938); 崔鉉培 한글날 1941; 李熙昇 한글 맞춤법 통일 안 강의; 金敏洙 新國語學史(1964); 李基文 開化期의 國文硏究(1970); 姜馥 樹 國語文法史硏究(1972)

347 Ⅳ. 國語國文學 硏究 2. 新小說과 唱歌 (1) 新 小 說 1) 新小說의 名稱과 概念 오늘날 新小說은 20세기 초반 약 15여년간의 韓國小說을 총괄 하는 용어로 통칭되고 있으며, 또한 그 前代인 朝鮮의 소설과 그 이후의 現代小說과의 과도기적 문학형태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신소설에 대한 현재까지의 논의와 평가에는 대략 두 개 의 유형이 이루어져 있다. 그 하나는 신소설이 韓國 근대화 과정 의 한 반영이면서도, 기형적인 사회발전 속에서 이루어진 한국 문 학의 非正統的 변질양식으로 규정하는 견해요, 다른 하나는 이를 18세기 西歐의 中產層인 상업시민계층의 문학으로서의 이른바 노 블(Novel)과 同軌에 두려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들 兩論은 모두 開化期의 문학이란 데에 특별한 관심을 전제했기 때문에 변질이 든 변혁이든 무엇인가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假說을 토대로 평가 한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면서도 前者의 意識에는 결과적으로 小說史의 변칙을 가져다 준 기형성이 곧 신소설이라는 논리가 깔 려 있음으로써 변칙적인 斷絕論이 전제되어 있고, 後者의 경우는 서구의 소설사적 기준에 준함으로써 신소설의 가치를 實體 이상 으로 높이는 반면에 朝鮮소설의 가치는 자동적으로 格下시키는 단절론이 전제되었다는 점에서 다소의 異質性이 없지 않다. 이와 같은 견해들은 신소설이 지닌 얼마의 부분적인 특질들을 잘 지적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우선 수긍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반드시 타당한 것이라고할 수 만은 없다. 물론 외래적인 것에 대한 모방

348 2. 新小說과 唱歌 적인 요소를 배제해 버릴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끝내 西歐문 학의 亞類的인 기형형태로만 단정할 경우, 正常의 가치기준을 정 통의 고전에서 찾지 않고, 언제나 西歐문학이란 외부적 準據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 하겠다. 요컨대 신소설은 서 구것의 모방과 移植이기 때문에 곧 실패의 문학이란 판단을 가져 올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또한 新 자의 새로움이란 것에 지나 치게 固着할 때, 李朝소설의 계승이나 지속은 모두 부정해 버릴 뿐만 아니라 조선소설과의 銳角的인 대립만을 유발하고 조장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문학사 서술의 방법론적 필연성에 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편의상의 관습명칭으로서의 이른바 新小說이란 소설이 종으로는 전통적인 조선소설과 횡으로는 외부소설의 자극의 교차점에서 즉 이전과는 배경이 다른 상황에 서 얼마만큼 변화의 굴절을 겪고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內觀的인 解剖로서 그것에 접근함이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新小說이란 명칭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처음으로 쓰여졌는가? 현재까지의 考究는 李人稙에 의한 創案 가능 성, 또는 출판사의 案出이란 견해로서 기록상 명칭의 사용이 융희 원년(1907) 3월 17일, 또는 4월 4일이라고 해명되어 왔었다. 그러 나 광무 10년(1906) 2월 1일자에서 3일까지 게재된 일인 古河松之助 主宰의 大韓每日申報에 中央新報의 발간 광고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어서 그 시기를 더 소급할 수 있을 뿐만 아 니라, 명칭의 안출 또한 新聞社에 의한 것이었음을 推察케 한다. 明月奇緣은 漢雲先生의 著作인데 才子佳人이 相別 再會와 一 波一爛에 多情多恨의 態를 現하야 趣味津津하야 使讀者로 不知 이오. 1)(방점 필자) 厭케 하는 現代傑作의 新小說 中央新報발간 광고문 1) 大韓每日申報, 광무 10년(1960) 2월 1-3일자

349 Ⅳ. 國語國文學 硏究 이런 명칭이 1910년 무렵쯤에는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렇다 면 또 어떻게 해서 新小說이란 명칭이 대두되었을까. 이에 대한 糾 明으로는 두개의 근거가 가능하다. 즉 하나는 小說改革思想을 근거 한 혁신적인 소설이란 점에서다. 이는 申采浩의 한국에 전래하는 소설이 태반 桑園溥上의 淫談과 崇佛乞福의 怪話라 이 역시 인심 풍속을 敗壞케 하는 일단이니, 각종 신소설을 著出하여 이를 일소 함이 급급하다 말할지로다 라고 近今小說著者의 注意에서 밝 히고 있는 바 그대로 구소설인 이조소설의 음담류에 대한 새로운 사상의 함량이란 의미에서다. 곧 西歐的이란 말은 아니다. 또 하나 는 새로운 準據性이나 또는 新奇性에 기울어지는 일반 대중에의 사 회심리에 迎合하여 독자의 호기심을 끌어들이려는 상업적 신문사 나 출판사에 의해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누구나 새것을 좋아 하는 것이 대중의 심리이다. 현재까지의 기록으로 처음 나타 나고 있는 것이 中央新報의 발간 광고란이라는 것에 想到하면 이런 推論도 가능하다. 또 외부로 관심을 돌려 볼 경우, 당시 日本에서는 新小說이란 소설잡지가 발간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中國에 서도 梁啓超가 論小說與羣治之關係(1902)에서 欲新一國之民 不可不先新一國之小說 故欲新道德 必新小說 欲 新宗敎必新小說 이라하여 소설의 혁신을 주장할 뿐 아니라 그 스스로 新小說 2) (1902)이란 잡지를 발간한 점, 융희 2년(1908) 4월 李採雨에 의해 19世紀歐州文明進化論가운데서도 英國의 新 과 의 같은 동일용어가 영향을 주었을 公 體詩의 英法의 新小說 번역된 陳國鏞의 3) 2) 飮氷室文集 上海 廣智書局 上 通論 p.294: 飲氷室文集(新興書局) 下 卷3 學術類 pp ) 陣國鏞 十九世紀歐洲文明進化論, 1908 右文舘 인쇄(역자 李採雨) pp

350 2. 新小說과 唱歌 算도 있다. 따라서 신소설이란 용어의 개념 속에는 혁신성이란 개편적 일면 과 신기성이란 흥미의 일면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거니와 어디까지 나 문학사적인 방법론 위에서 규정된 것이 아닌 편의상의 관습적 술어이며, 年代的인 개념으로는 20세기 초반 약 15여년간에 발표 된 소설이므로 이를 달리는 開化期小說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2) 新小說의 勃興要因과 背景 신소설 발흥의 요인은 크게 간접적 요인과 직접적 요인으로 갈 라 볼 수가 있다. 전자가 周邊的인 背景論이라면 후자는 보다 작 품과 직결된 결과론인 것이다. ㄱ. 간접적 요인 국어운동의 대두에 의한 독서 대중의 확대 고종 31년(1894), 勅令으로 이루어진 국한문 혼용체의 채택 및 독립신문등의 국문 신문 발간, 각급 학교의 국어 교육에 資하는 각종 국어문법서와 작 문법1)의 간행으로 보아 甲午更張 이후 20세기초는 국어에 대한 自覺期다. 이와같은 국어에 대한 유례없는 자각은 동시에 국문을 널리 보급시키는 추진력이 되었으며, 이런 국문의 보급은 자동적 으로 독서대중의 확대를 가져왔다. 물론 조선소설도 국문으로 표 기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대의 국어의 사용은 주로 부녀자 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제도적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는 못했던 것이다. 사실 어느 나라든지 소설의 발흥은 넓게 擴散되는 독서대중의 성장과 깊은 함수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독자의 중대가 곧 읽을거리에 대한 需要를 확대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때만 해도 1) 당시에 나온 國語文法書로는 兪吉濬의 朝鮮文典; 崔光玉의 大韓文典; 주시경의 國語文典音學이 있으며, 作文書로는 崔在學의 實地應用作文法 등이 있다

351 Ⅳ. 國語國文學 硏究 대중들에게는 극장과 같은 완벽한 오락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소설이 곧 여가를 위한 가장 완벽한 오락형태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25錢 내지 35錢 내외의 소설책값을 고려해 보면, 여가를 위한 오락형태로서 소설 이상의 것이 없었던 것이다. 또 어느 나라없이 소설의 잠재적인 독자는 남성보다 여성이라 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경제적인 여유를 갖고 있는 중산층 이상의 부녀자들에게는 시간적인 여가가 있어 이 여가를 독서로 보낼 수가 있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으로 국문을 상용한 것은 부녀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교육기관의 簇出은 더더구나 여성의 독서인구를 확대시켜 주었던 것이다. 또 한편으 로는 근대적 도시에로의 전환에 의한 상품유통의 활발화로 인하 여 자급자족의 무거운 家事 부담에서 다소나마 풀릴 수 있는 생활 구조의 변혁과 미국 스탠다아드회사에 의한 松票석유 수입 판매는 이들의 독서여가를 확대시켜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가를 가진 독서대중의 확대는 어쨌든 새로운 읽을거 리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요인이 곧 새로운 소설의 발흥을 촉진 시켰던 것이다. 기업적인 출판사와 書籍商의 출현 이른바 交換回路上에 있어 서의 分配者의 현저한 출현현상이다. 종래의 刻本版 또는 坊刻本 기타 筆寫本은 양반이나 문학애호가들의 출자에 의한 소규모적인 출판기업이었지만, 활자와 인쇄기의 도입은 그러한 산업구조를 완 전히 바꾸어 놓았으며, 이들 새로운 출판기업인들은 개화기의 중 요한 基幹企業體로서 상품으로서의 책의 제작은 물론 판매까지도 장악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점은 현존 원본 신소설들에 찍힌 册 肆의 印章에서도 밝혀진다. 현대적인 인쇄시설의 도입은 고종 20년(1883)의 漢城旬報

352 2. 新小說과 唱歌 의 발간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이 시설은 아직도 정부기관인 博文 局에서만 이용한 것이었으며, 민간의 것은 고종 22년(1885) 培材 學堂의 宣敎사업과 고종 25년 明洞 天主敎堂의 聖書活版所 설치 등 布敎的인 사업에서 비롯하여, 각종 민간신문의 발간을 계기로 구체화되었으며, 융희 2년(1908) 무렵에 가서야 여러개소의 민간 인쇄시설이 갖추어지게 된 것이다. 이 인쇄소들은 廣學書舖 中央 書館 涯東書館 大東書市 徽文館 同文社 東洋書院 普成館 修文書館 등과 같은 출판사의 책들을 인쇄하였다. 또한 이들 출판 사나 인쇄소와는 별도로 紙塵商들이 있거니와 이들은 때로 서적판 매를 겸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이 무렵에 출판사 인쇄소 및 서적 상 그리고 지전상들은 각기 분업화되거나 協業化한 제반 시설을 구 비하고 있었다. 특히 새로운 기업적인 출판사의 등장에 의해서 생 산자로서의 작가와 분배자로서의 출판자의 대좌관계가 확립된 것 이다. 이러한 대좌 관계에서 신소설이 발흥할 수 있는 요건이 마련 된 것이다. 물론 이들 출판상들의 일차적인 사업이 곧 신소설의 출판은 아 니었다. 각종 교과서의 출판은 물론 坊刻本으로 이루어진 조선소 설의 활자화가 약간 선행되었던 것이며, 이어서 민간신문에 연재 되어 대중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신소설의 單行本化에도 착수한 것이다. 이런 출판상의 상업성은 직업적이고 전문적인 신소설 작 가를 배출하였다. 이와같은 점은 다음과 같은 大韓每日申報의 논 설이나 申采浩의 近今小說著者의 注意에서 일시적으로 시사 되어 있다. 起見으로 爲妾辨護의 鬼의 聲과 如한 小說 只是 牟利的 을 著하야 1) 1) 大韓每日申報 융희 2년(1908) 11월 8일자 논설

353 Ⅳ. 國語國文學 硏究 近今 신소설이라 云하는 者 刊出이 稀罕할 뿐더러 또 간출된 으로 艸撰出하여. 것을 觀한즉 도시 일시 모리적 이와같은 작가의 이른바 謀利的저작태도에는 몇개의 원인이 2) 개재되겠지만, 출판상과의 대좌관계의 간접적인 암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산자로서의 직업적 작가의 등장, 분배자로서의 출판사 및 수요자로서의 독서대중이란 교환회로적인 유통과정이 골고루 원만해질 때, 소설은 생산된다. 어느 한쪽의 缺格性이 있을 때에 는 유통관계에서 결함이 일어나기 때문에 서로가 相補的인 관계 다. 출판기업의 簇出은 직업적인 작가를 배출한다는 점에서 이 요 인도 신소설을 발흥시킨 중요한 文藝社會學的 배경이 될 것이다. 이들 출판사에 의해 등장한 직업적이고 전문적인 작가로서는 李海朝나 崔讚植을 들 수 있으며, 李人稙도 신소설제작에만 專心 한 것은 아니지만 거의 준직업적인 작가의 한 사람이다. 뿐만 아 니라 慶南日報의 소설기자로서 많은 작품을 발표한 朴永運은 출판사와의 대좌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신문의 소설기자였다 는 점에서는 역시 직업적인 작가다.3) 민간신문의 족출 개화기의 신문, 특히 민간신문의 발간은 문 화적 발전과 신소설의 발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사실의 보도는 물론 개화사상의 고취 및 敎化機能을 갖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상업주의까지 지니고 나타난 이들 민간신문이 실질적 으로 신소설의 유일한 발표 매개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사에 있어서 근대적인 민간신문의 출발은 建陽 원년 독립신문의 발간에서 비롯된다. 이를 起點으로 하여 皇城新聞(1897), 뎨국신문(帝國新聞)(1897), 大韓每日申報 (1905) 萬歲報(1906), 慶南日報(1909) 등 일련의 민간신문들이 (1896) 徐載弼의 2) 申采浩 近今小說著者의 意義 創造 1972년 6월 3) 李在銑 韓國開化期小說硏究 一潮閣 1972, p

354 2. 新小說과 唱歌 족출했다. 한편 日本人 萩谷壽夫에 의해서 大韓日報가 광무 8 년(1904)에 인천(仁川)에서 발간되었으며, 古河松之助에 의해서 도 漢城新報(1903) 및 中央新報(1906)가 각각 발간되었 던 것이다. 이들 민간신문들은 한글보급에 노력하는 동시에 1905 년 무렵부터 지면의 확대로 연재소설을 실어 신문소설의 길을 터 놓기 시작하였다1)는 것이 小說史에서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여기 그 대강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新 聞 皇 城 新 聞 大韓每日申報 帝 國 新 聞 大 韓 日 報 小 說 靑樓義女傳車夫誤解소경과 앉은뱅이 문답이태 리국 아마치전鄕老訪問醫生이라 小說正己及人報應昭照犬馬忠義血의 淚(下) (菊初)枯木花(東儂) 灌頂醒醐錄一捻紅(一鶴散人)斬魔劒龍含玉(金華 山人)女英雄(白雲山人)返魂香 神斷公案 夢潮 中 央 新 報 明月奇緣(漢雲) 萬 小說短篇 血의 淚(上) 鬼의 聲 歲 報 慶 南 日 報 王蓮堂(朴永運) 浮碧翫月 金山月 雲外雲 每 日 申 報 鳳仙花 菊의 香(趙一齋) 기타 많음 이와 같이 신소설 혹은 說話的인 이야기들이 거의 전적으로 이 들 민간신문을 근거로 하여 발표되고 있다. 초창기 신문이 새로운 소설의 발흥에 기여하는 경우는 비단 우리의 경우만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英國의 경우도 그렇고 가까운 中國이나2) 日本도 마 1) 崔埈 韓國新聞史 一潮閣 p.173 2) 阿英 晚淸小說史 대만 商務印書館 人人文庫 p.2 造成這空前的 繁榮局面 在事實上有些 怎樣的原因呢? 第一 當無是由於 印刷事業的 發達. 沒有前此那樣刻書的 困難 由於新聞事業的 發達 在應用上 需要多量的生產

355 Ⅳ. 國語國文學 硏究 찬가지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와같은 민간신문들이 이같은 신소설의 勃興 요건이 되며, 또 실제로 소설을 연재하였을까? 단순히 지면이 확 대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열거할 수 있다. 첫째, 거개의 평민으로 이루어진 독자3)를 상대로 개화기 언론 인들이 開化思想과 자주적 國權意識을 불러 일으키는 데 소설이란 형식이 적당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일찌기 우리 개화기의 지식 論小說與 不可不先新一國之小說 이라 인에게 깊은 영향력을 지녔던 淸末 학자인 梁啓超가 그의 犀羣治之關係 에서 欲新一國之民 4) 고 한 바와 같이 그들은 평이한 소설의 형식을 빌어 민중계몽의 수단으로 삼으려 하였다. 大韓每日申報가 靑樓義女傳 소경 과 앉은뱅이 문답 과 같은 문학적 慈善行爲를 한 것은 그 이유가 전적으로 여기에 있다. 당시의 언론인들은 소설의 敎化的 효용성 을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이로 인해 儒者社會에 만연해 있는 소설 輕視論에도 어느 정도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신소설이 심미적인 구조보다는 관념적인 이념전달의 結晶體로 굳어지게 하는 데에는 李朝소설에 대한 勸善懲惡的 효용 성과 더불어 이들 언론인들의 功利的 소설관에도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둘째로 신문사가 지닌 상업주의에도 그 원인이 있다. 신문이란 독자의 확보와 영리를 떠날 수는 없다. 독자가 많을 때 경영이 윤 택해질 것은 당연한 공식이다. 이러한 독자의 폭넓은 확보를 위해 3) 皇城新聞 1901년 1월 14일자 사설에 다음과 같은 논설이 실려 있다. 大抵 官報 보는 者는 官人이오, 新聞 보는 者는 擧皆 平民이니 方蒿菁洪翬校勘 卷 3 新興書局學術類 p.12 4) 梁啓超, 飮氷室文集

356 2. 新小說과 唱歌 서는 신문은 딱딱한 기사나 官報 및 논설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에 오락형태로서의 소설에 대하여 상업주의적 의식이 작용한 것 이다. 이와같은 상업주의의 요소는 다음과 같은 中央新報 발간 광 고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中央新報의 雜錄과 文苑과 其他 雜誌는 趣味饒多하야 讀而不 倦하고 日日新鮮을 撰하여 珍奇를 聚하야 독자로 하여금 中央 新報와 不堪離居케 함이라 中央新報는 天下公衆의 共樂公園地로 아시고 婦人新聞欄은 特히 姉妹諸氏를 爲하야 中央新聞의 一部를 割 하야 婦人諸氏의 共樂公園地로 供함이니 明月奇緣은 漢雲先生의 作인데 才子佳人의 相別相會와 一波 一爛에 多情多恨의 態를 現하야 趣味 津津하야 使讀者로 不知 이에서 모두 趣味饒多 珍奇 共樂公園地 趣味津津에서 厭케 하난 現代傑作의 新小說이오 5) 그 상업주의는 드러난다. 이 같은 상업주의는 일인들에 의해 발간 된 신문에서 더욱 두드러지거니와 또한 이들 일인이 만든 大韓日 報와 中央新報에서 최초로 신소설이 연재되고 또 삽화까지 곁들 여졌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칼한 일이다. 요컨대 상업주의는 어 느 신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며, 이런 상업주의의 필요기능에 적응한 문학형식으로서의 신소설은 필연적으로 대중소설 또는 멜로드라마의 屬性을 필연적으로 지니게 된 것이다. 일반대중의 사회 심리 변화 대중의 흥미는 언제나 고정적인 것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새로운 준거성과 신기성을 열망하는 것 이 변동기의 사회심리다. 따라서 수없이 되풀이해서 읽은 李朝소 설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소설의 등장을 바라기 마련이다. 이러한 심리에 영합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 신소설이기 때문에 이것도 5) 大韓每日申報 1906년 2월 1일자 광고

357 Ⅳ. 國語國文學 硏究 그 생성의 배경요인을 이루는 것이다. 小說 一捻紅 은 益益佳境에 入하니 一日一面式 揭載如何. 이것은 一捻紅이란 작품을 게재한 大韓日報의 讀者俱樂 部란에 투고한 好文生이란 사람의 글이다. 이 글에서도 이 1) 러한 사회심리의 일단이 암시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 一捻紅이란 작품은 血의 淚보다 먼저 발표된 것으로 漢文 위주의 문장이지만 日本 및 西歐유학생이 처음 등장하는 一鶴散人2)의 작품이다. ㄴ. 직접적 요인 李朝소설의 영향 흔히 신소설은 李朝소설에 대한 리얼리스 틱한 反動이라고 일컬어진다. 이런 논법은 자칫하면 李朝소설과 신소설은 흑백의 구별만큼 현저한 별개의 소설양식이라 誤謬를 조장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소설이란 점에 있어서 이 양자 사이 에는 그렇듯 격렬한 대립이란 있을 수 없다. 신소설은 이전의 李 朝소설에 대한 반역이기 보다는 반성의 결과로 이루어진 문학이 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는 신소설이 李朝소설의 解 體를 유발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서술방법이 놀랄만큼 이조 소설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신소설이 외국문학의 영향 못지않 게 李朝소설에서 실질적인 영향을 입고 있다는 것은 요즈음에 신 소설의 구조적 해명이나 양자의 대비에서 그 유사성들이 밝혀져 가고 있다.1) 가령 이같은 解明化가 없었다 하더라도 만약에 전적 으로 李朝소설과 같은 旣存小說형태가 없었다면 신소설의 생성이 정말 가능했을까를 생각해 본다면 이전 소설인 李朝소설의 영향 력이 어떠하리란 것은 자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1) 大韓日報 광무10년 2월 9일자 讀者俱樂部 欄 2) 최초의 작가 서명에 해당하는데, 본명이 누구인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1) 이 관계 논문 및 저서로는 다음과 같다. 全光鏞 新小說硏究-雉岳山-思想界 월호 申東旭 開化期小說에 反映된 新文化受容의 態度 韓國現代文學論 博英社 李在銑 韓國開化期小說硏究 一潮閣

358 2. 新小說과 唱歌 이런 점에서 李朝소설의 最底公分母로서 부정적인 천편일률성 이나 우연성 성격의 不在性과 같은 결점만을 道出해 낼 것이 아 니라, 그 나름의 리얼리즘 및 審美的 構造를 찾아나가는 것이 바 람직한 일이다. 사실 18세기 후반의 일련의 평민소설이나 燕巖 朴 趾源의 일련의 한문소설은 그 특유한 액자소설적 구조도 문제이 겠지만, 상당히 리얼리스틱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때 리얼 리스틱 하다는 말은 사회적인 탈을 쓴 현실적인 인간의 성격과 사회적 현실을 가차없이 관찰하고 이 양자를 결합하여 거기에서 하나의 世界像을 이루려는 요소, 즉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 도 덕적 향상이 전제되지 않는 생의 局面의 제시, 그들이 서 있는 현 실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설명하려는 요소를 일컬음이다. 이런 李朝후기의 소설들은 귀족 관료나 양반들을 비판하거나 그들의 몰락과정을 많이 그렸는데, 이런 태도는 불변의 안정을 원하는 귀 족들의 유쾌한 生哲學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배하에 있는 계층들에게 현실의 생에 대처케 하기보다는 치환된 삶 (substitute-living)의 속성을 지닌 귀족소설에 대한 拒否反應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광의의 리얼리즘은 李朝소설의 경우 주로 희 극적인 경향에서 비롯되어진 것 같다. 아뭏든 反官僚的인 李朝소 설의 요소는 신소설에서도 많이 계승되어 있고 또 귀족소설이든 평민소설이든 李朝소설의 행동 전개과정인 고난으로부터 행 복 이란 苦盡甘來의 요소도 상당히 많이 지속되고 있다. 요컨대, 李朝소설은 결과적으로 외국소설 못지않게 신소설의 형 성에 영향을 주고 있다. 외국문학의 영향 흔히 영향은 방은 무의식적인 모방이며 모 의식적인 영향이라고 하지만, 신소설이 발흥, 생성함에 는 외국문학의 영향이 묵과할 수 없을만큼 작용했던 것은 사실이

359 Ⅳ. 國語國文學 硏究 다.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타율적인 힘에 의해 反可 逆的인 固定으로부터 運動에로의 변화로 개항이 이루어진 이래, 문학에 있어서도 외국문학이 엄청나게 많이 수입, 移植되었다. 그 러나 그 수용태세는 반드시 가치선택의 확고한 어떤 기준 위에 서 있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自主 自保的 민족주의에 資하려는 의 도로 각종의 역사 傳記와 같은 일련의 역사 문학의 수용이 있으면 서도 또 한편으로는 일본의 통속적인 軟派小說까지 移植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나 문학자체의 순수성 같은 것은 그다지 고려 되지 않았던 것이며 또 그럴 수 있는 문학론적 배경도 없었다. 아무튼 開化期에 있어서 많은 문학작품과 역사 전기류가 번역 또는 飜案되었으며, 이들은 우리 신소설의 발흥에 큰 영향을 주었 다. 이를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역사전기류의 소개 개화기에 移入受容된 책으로 두드러진 것은 西歐제국의 戰史 및 위인의 救國抗爭記와 같은 傳記등속이다. 이와같은 책들은 일차적으 로는 서구의 역사적 지식을 확대시켜 주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이지 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적인 自保思想을 고취하려는 의도에 적합한 형태였다. 이들이 주로 국권이 탈취당한 1910년 이전에 그 前夜的 고비에서 많이 번역소개되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泰西新史(1897)를 비롯하여 波蘭末年戰史 (1897), 法國革新戰史(1899), 埃及近世史(1900), 美國獨立史 (1906), 萬國史(1906). 越南亡國史(1906), 意太利獨立史(1907), 比律賓戰史(1907), 拿破崙戰史, 伊太利建國三傑傳(1906), 比 斯麥傳(1907), 匈牙利愛國者 噶蘇士傳(1908), 華盛頓傳(1908), 彼得大帝(1908) 등이 있다. 이미 과거적 사실로 고정되어 버 이와같은 책으로는 1) 1) 河東鎬 開花期小說硏究 檀國大學校大學院 1972, pp

360 2. 新小說과 唱歌 린 역사를 산 현실에 적용하려는 의도의 결과라고 할 것이다. 번역 소설 개화기에 있어서는 번역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1) 새로운 외 국문화의 수용 수단이며 또 이를 통해 민중을 계몽할 수 있기 때 문이다. 前項의 역사 전기도 모두 이런 필요성에서 이루어진 번역 이다. 소설 작품도 적지 않게 번역이 이루어졌는데, 그 대강은 다 음과 같다. 고종 32년(1895) 게일(J. S. Gale) 목사에 의해 번역된 버년(John 天路歷程(The Pilgrimis Progress)을 위시하여 독일 희곡작가 쉴러(Friedrich von Schiller) 원작 빌헬름텔 Bunyan)의 의 (Wilhelm Tell)이란 희곡을 소설형식으로 번안, 번역한 朴殷植역의 瑞士建國誌(융희원년, 1907), 프랑스의 과학모험소설가인 쥴르 鐵世界(융희 2년, 1908), 영국작가 다니엘 데포우(Daniel Defoe) 원작의 번역인 羅賓孫漂流記(융희 2년, 1908), 일본 작가 矢野龍溪 원작의 經國美談을 번역한 정치 소설 經國美談(1908)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와같은 작품들 베르느(Jules Verne) 원작의 은 주로 모험사상의 고취 및 自保的 저항의 고취 또는 정치의식을 강 조하려는 사대의식에 부합되도록 받아들여졌으며 신소설의 주제 설정 에도 영향을 주었다. 번안 소설 번안 소설이란 번역의 변질적 유형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는 표절이 될 수도 있는 특수성을 가진 문학행위로서 장면 인물 풍속 등을 變異 調節하는 것이다. 이러한 외국소설의 번안이 이 1) 번역의 긴요성에 대한 논설이 많았거니와 그 대표적인 것으로 다음과 같은 논설이 있다. 今日 開民知之 第一着은 莫先於譯書라 上則 敎育主權者가 設譯書之局하며 養讀書之人하며 獎譯書之業하고 下則社會有志者가 創譯書之事하야 皇城新聞 광무 11년(1907) 6월 23일자 논설

361 Ⅳ. 國語國文學 硏究 시기에 많이 등장했거니와, 긍정적으로 보면 번역의식과 창작지향 적인 의식의 복합체다. 그런데 번안된 소설의 원작이 대부분 日本 소설들이다. 海王星과 같은 듀마(Dumas pére) 원작의 몽테크리스 長恨夢(원작 金色夜叉), 雪中梅(원작과 동명), 雙玉淚(원작 己之罪), 再逢春(想夫憐), 貞婦怨(捨小丹), 不如歸(동명), 杜鵑聲(不如歸), 榴花雨(不如歸) 등은 모두 日本 소설의 번안이 트 백작 (Le Comte de Monte-Cristo)도 있긴 하지만, 신소설에 포함된 다. 이외에도 정밀한 조사가 뒤따른다면 신소설에서는 번안작품으 로 판명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한 작품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 다. 이와같은 번안소설은 결코 우리 소설사에 편입될 수는 없다. 그 러나 이렇게 부정적인 측면으로 관찰할지라도 우리의 신소설의 형성과정에서 가장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시인하지 않 을 수 없다. 특히 번안된 이들 日本소설은 신소설의 문장 및 흥미 위주의 애정의 삼각관계 및 가정비극과 같은 체재에 많이 수용되 고 영향을 주었다. 이로 보면 신소설에 영향을 준 외국문학은 西歐문학 및 日本소 설 淸代 末期 소설 등이다. 첫째로 서구문학은 우리가 관념적으 로 생각하는 만큼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청소년 들에게 모험심을 고취한다든가 瑞士建國誌나 張志淵의 愛 國婦人傳 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쉴러의 희곡이 민족주의를 고 양시키는 매개가 되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의 하나다. 둘째 日本소설의 경우는 前述과 같고, 세째로 중국 淸代말기 소설의 영 향인데 이에 대해서는 별로 究明된 바가 없었다. 그러나 梁啓超의 越南亡國史, 匈加利愛國者 噶蘇士傳, 意太利建國三傑傳, 近 世第一女傑羅蘭夫人傳, 中國魂이 모두 開化 당시에 번역되었다는

362 2. 新小說과 唱歌 점과 또 壯者의 掃迷帚가 李海朝의 驅魔劍에 실질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으로 보면 그 영향도 도저히 배제해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소설 혁신론의 제기 비록 功利的 効用性과 결부된 것이긴 하 더라도 소설의 혁신론이 지식인 간에서 빈번히 논의 제기되었다 는 점은 신소설의 발흥을 더욱 촉진하였다. 이와같은 소설의 혁신 론 또는 소설관은 여러 곳에서 散見1)되거니와 실제로 소설에 정 치소설 교육소설 실업소설 토론소설 윤리소설 신소설 또는 가정 소설 등의 표제를 붙인 것도 이와같은 혁신 주장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출판사측의 신소설 발간 광고에서도 이런 敎化的 효용론을 반영시키고 있다. 따라서 신소설이라면 반드시 이런 요건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當代대로의 어떤 소설관이 설 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 사회적 변동 이런 요인은 간접적인 것으로 규정될 수도 있 겠지만, 요컨대 소설이 사회의 再現的인 반영이라는 점과 신소설 이 제기하고 있는 신교육 자보사상 자유연애 과학사상 및 풍 속과 제도의 개혁이란 일련의 문제가 바로 신소설에서 제기된 것 이 아니고, 시대정신의 추세였으며, 이를 신소설이 잘 반영했다는 점에서는 작품 자체의 발흥과 직접적인 관련을 지니기도 한다. 이러한 간접적 직접적인 요인 아래에서 직업적인 작가가 배출 됨으로써 신소설의 발흥은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ㄷ. 작가와 작품 작가가 서명된 新小說의 발표는 대략 1905년과 1906년경에 가 1) 소설관이 밝혀져 있는 문헌은 다음과 같다. 1) 瑞士建國誌 序文 2) 具然學의 雪中梅의 主人公 이태준의 말 3) 李海朝의 花의 血 序 4) 李相協의 再逢春 서문

363 Ⅳ. 國語國文學 硏究 서야 이루어졌거니와 李光洙의 無情(1917)이 발표되기까지 향후 십여년 남짓 한 신소설 기간에 배출된 작가와 작품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확실한 통계가 없다. 다만 개략적 인 數値만으로 40여 작가에 180여 편의 작품 정도였으리라는 算 定이 될 뿐이다. 그나마도 無署名으로 발표된 작품이라든가 창작 적 요소보다는 모방적인 되풀이에 불과한 작품을 발표한 작가들 을 제외한다면 그 수는 훨씬 적어지고 마는 것이다. 최초로 작가의 이름이나 號가 서명된 소설은 血의 淚라고 하 나, 그 이전에도 이미 署名作品은 상당수가 발표되었던 것이 사실이 大韓日報(광무 8년, 1904 발간)에 발표된 一鶴散人의 一捻紅, 金華散人의 龍 含玉, 白雲山人의 女英雄의 경우가 그것이다. 이들 소설의 소 다. 가령 日人 萩谷籌夫에 의해 간행된 설적인 성격이야 어떠하든 이같은 署名化는 바로 직업적인 작가의 등장 이 벌써 이 무렵에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충분히 이루어지게 한다. 아뭏 든 이러한 작가의 배출 이래로 대표적으로 신소설을 담당한 작자의 그 작품들은 대략 아래와 같다. 李人稙과 그의 작품 불과 10여년 남짓한 신소설 기간에 있 어서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는 아무래도 李人稙을 들지 않을 수 없 다. 이와같은 평가는 오늘의 기준에서 평가되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當代의 평가에서도 그러한 것으로 氏가 已往 日本 留學하던 時에 大端히 小說에 留意 야 遽然 히 韓國內 第壹等의 小說家로 自命 者이니 란 大韓每日申報의 논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 李人稙의 號는 菊初, 哲宗 12년 (1862) 음력 7원 27일에 출생 하여 1916년 11월 25일 55세로 세상을 떠났다.2) 光武 4년 舊韓 1) 大韓 每日申報 융희 2년(1908) 11월 8일자 1면 논설 演劇界之 李人稙 에서 2) 毎日申報 1916년 11월 28일

364 2. 新小說과 唱歌 國 정부의 官費留學生으로 日本 東京에 건너가 東京政治學校 청 강생으로 들어갔고, 光武 7년 (1903)에 졸업한 후 露日戰爭 때에 는 일본 陸軍省 韓語 통역관에 임명되어 제1군 사령부에 부속되 어 종군한 바도 있다.3) 그 뒤 李完用의 秘書로, 國民新報 大韓新 聞 등 친일적인 신문의 언론인으로, 新劇운동가로 활약하였으나 만년에는 經學院 司成이란 末職에 머물렀다. 그는 經學院 司成으 로 있을 무렵 三南地方을 돌아보고 삼남의 유림들을 경고한 警 告 三南 僉員 可畏論 이란 한문으로 된 글을 慶南日報에 寄稿하 血의 淚, 牧丹峰, 鬼의 聲, 雉岳山, 銀世界기타 貧鮮郞의 日美人등이 있다. 血의 淚 上下 血의 淚上은 萬歲報에 연재된 작품이다. 연재일자는 光 기도 하였다.4) 그의 작품으로는 武10년 (1906) 7월 22일자부터 등년 10월 10일자까지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오류가 있겠지만, 이 작품이 본격적인 신소설의 출 발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異論이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작품 一捻紅이란 신소설이 있기는 하나 그 문장은 전혀 血의 淚의 언문일치 문장에 견줄 바가 못되는 국 보다 먼저 발표되어진 한혼용체이면서도 한문 위주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洛陽城東에 有愛春園 고 園裡에 有一叢紫牧丹 니, 花大如 3) 毎日申報 1916년 11월 28일 이에 대해서는 이미 全光鏞 교수가 조사 한 바 小松綠, 朝鮮倂合の 裏面(1920 동경) 및 小松綠, 明治外交秘話 (1936 동경)에 기록되어 있음. 李人稙硏究, 서울大學校 논문집 인문사회편 6집 참조. 한편 이와는 달리 柳光烈씨는 스스로 이인직론을 쓰기에는 자신이 너무 부적당하다고 변명하고서 이와는 달리 기술하 였는데 그 전반은 신빙성이 희박하다. 氏도 일즉이 京城의 舊名門에 나서 어려서부터 政治에 뜻을 두고 東京에 亡命 하엿섯으니 氏도 亦是 開化黨 金玉均의 亞流를 따른 이이다. 그러나 奇異하게 도 氏는 晚年에 政治的으로 향긔롭지 못 하엿섯다. 三千里 4월호(1936) p.334 소재, 菊初 李人稙氏의 作品 4) 李在銑 韓國開化期小說硏究 一潮閣 p

365 Ⅳ. 國語國文學 硏究 椀 고 香聞十里라 人人謂洛陽一捻紅이라 야 5) 日本巡查 三人이 頭戴白絨帽子 고 腰帶三尺軍刀 고 軒軒昂 昂的 來到這場上 야 6) 한 것으로 그 이전의 李朝소설의 문장보다도 退行的이며 또한 이 一捻紅이란 소설의 표제는 중국 晚淸 소설에서도 나타나므로 그 번안일 가능성이 짙기도 하기 때문이다.7) 이러한 문학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는 血의 淚는 현재까지 만세보에 실린 부분을 上篇으로 보는 대신 에, 1913년 2월 5일부터 동년 6월 3일까지 65회에 걸쳐서 每日申 報에 연재된 牧丹峰을 그 續篇 또는 下卷으로 보는 오류를 범 많은 연구가에 의해, 해왔다. 사실 이같은 오류가 생길만한 충분한 이유는 있었다. 그러나 血의 淚의 하편은 예의 牧丹峰이 아니고, 光武 11년 (1907) 5월 17일자에서 동년 6월 1일까지 11회에 걸쳐 帝國新 聞에 발표된 표제 그대로의 血의 淚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점 실상, 은 菊初란 서명이 분명히 밝혀진 하편이 帝國新聞의 지면에 발표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에서 뿐만 아니라, 血의 淚상권을 단행본으로 血의 淚광고문에도 뚜렷하게 明示되어 있 따라서 금후의 血의 淚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이 上 발간한 金相萬書舖의 는 것이다.8) 下篇을 연결하여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상하 合篇의 이 작품은 淸日戰爭이 몰고온 제3국 국민의 엉뚱 한 희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牧丹峰에서의 가족의 遊離에서 시 작하여 日本 美國 등 현실적인 場面轉移와 더불어 겪는 옥련이 란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과 유리되어 몰락한 한 가족이 다시 美 國에서 再會를 하고 그 모친과 외조부는 일단 귀국하는 결말로 되 5) 大韓日報 광무 10년(1906) 1월 23일 6) 前揭 大韓日報 7) 阿英 晚淸小說史 臺灣 商務印書舘 人人文庫 8) 帝國新聞 1907년 5월 28일자에 실린 金相萬書舖 같은 기록이 있다. 下篇은 帝國新聞에 績載홈 血의 淚광고문에 다음과

366 2. 新小說과 唱歌 어 있는 소설이다. 신교육사상, 신결혼관 및 풍속의 개량을 표면 적인 주제로 내세우면서 상업주의적인 대중성도 상당히 가미하고 있거니와 어떻든 이 血의 淚의 등장으로 이 땅에서는 신소설 문학이 보다 본격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본격적인 신 소설의 출발이라는 문학사적 영예를 받으면서도 그 완결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光武 11년(隆熙 원년 1907) 6월 1일에야 이루어 졌다. 상편의 완성과는 근 6 7개월의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 이 하편은 필자의 조사가 있기 이전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 이기에 여기 그 梗槪를 옮겨 본다. 거대한 화륜선이 드나드는 부산, 무역상사의 주인 최주사(항 래 옥련의 외조부)는 그간 재물을 많이 모았으면서도 늘 근심 의 나날을 보낸다. 이미 회갑이 지난 그는 양자를 두었으나 평 양의 딸(옥련모)과 미국에 가 있는 사위(김관일)를 생전에 만 나고 싶은 일념뿐이다. 이럴 즈음에 평양의 딸이 뜻밖에도 진남 포에서 화륜선을 타고 찾아온다. 딸을 통해 옥련이 살아 미국에 있다는 소식을 들을 뿐만 아니라 나는 개화하였오란 딸의 말을 듣는다. 딸은 부친에게 미국에 갈 여비를 달라고 한다. 부 녀는 함께 동행하기로 작정하고 치행준비를 한다. 오랜 항해생 활이 계속된다. 배를 두 번이나 바꾸어 탄다. 한편 미국에 있는 옥련은 아버지(관일)가 묵고 있는 호텔에 찾아 갔다가 거기서 미국 도착을 알리는 외조부와 모친의 전보를 받는다. 함께 모인 가족과 구완서는 3주일간의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최주사와 옥련모가 귀국할 무렵, 다시 옥련의 혼인공론이 있어, 조선풍속 에 젖은 최주사가 둘을 조선에 데려가 결혼시키려 한다. 그러나 둘은 공부를 내세워 완곡히 거부한다. 떠나는 날 옥련모는 기쁜 마음이고 옥련은 정거장의 이별에서 눈물을 머금는다

367 Ⅳ. 國語國文學 硏究 이와같은 줄거리는 전편과의 사건 시간에 있어서 별다른 단층 이 없다. 그러나 상하편을 대비하면 상당한 변모가 눈에 띈다. 서 두부터가 판이하게 달라져 있는데, 淸日戰爭의 재난으로 시작했던 前篇과는 달리 속편은 근대적인 무역항으로 개항된 釜山 항구의 생생한 묘사로 시작된다. 부산 절영도 밖에 하늘 밑까지 툭 터진 듯한 망망대해에 시꺼 먼 연기를 무럭무럭 일으키며 부산항을 향하고 살같이 들어닿는 것은 화륜선이니, 오륙도 절영도 두틈 좁은 어구로 들어오는데 반 속력 배질을 하며 화통에는 소리가 하늘 당나귀 내려와 우는 지 웅장한 그 소래 한마디에 부산 초량이 들석들석한다. 물건을 들이고 내는 운수회사도 그 화통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사람을 보내고 맞아 들이는 여인숙에서도 그 화통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데 화륜선 닻이 뚝 떨어지며 쌍판 배가 벌메같이 들어간다. 또한 上편에서는 말을 몰고 하인을 앞세워 평양의 딸을 찾으러 갔던 최 항래 노인도 그 사이 무역상인이 되어 있고, 옥련모도 돌 연변이적인 개화여성으로 미국으로 딸을 찾아 나설 만큼 개화풍 경을 그려 이 후편은 개화찬양론으로 흐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오리까 어라 의 주종적인 대화의 어법도 읍니다 자네 알 아 할 일이지 와 같이 바뀌어져 있다. 자유연애론이나 관념적 애 국론은 상편과 다름 없다. 한편 비교적문학적 측면에 서 있는 논자들에 의해 이 작품은 다 분히 같은 시대 같은 표제의 日本소설의 번안이 아닐까 하는 점이 논의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는 필자의 對較 결과 그렇지 않다는 점 血の淚 (1896), 후네꼬의 血の淚 (1899), 山田美妙의 血의淚 등과 이 해명된 바 있다. 즉 同名의 일본소설 村井弦齋의 9) 9) 이 작품은 번역소설로서 원작자는 필립핀의 독립투사 호세 리잘 이며 원 표제는 Nori me Tangere (1887)다 José Rizal

368 2. 新小說과 唱歌 대비해 본 결과, 그렇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 소설의 서사적 위상이 나 행동계획의 접합성 및 배경의 설정이 번안의 조절요소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는 창작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牧丹峰은 속편의 속편으로 봄이 타당하다. 鬼의 聲 鬼의 聲은 李人稙의 대표작 일 뿐만 아니라 신소설 가운데 서도 白眉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상하 양편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 은 隆熙 2년에 단행본으로 발간된 것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당시 출판을 담당한 출판사 측의 광고와 또 당시 언론계의 비판은 처음부터 매우 대조를 이루고 있다. 本小說은 著者가 我韓家庭社會의 風化腐敗함을 痛戒하야 一部 諷刺的 小說로 主人公 金承知 夫人을 假托하야 其小室 姜娘이 其夫人의 妬忌惡行으로 凶婢의 手에 暗殺을 遭함과 其夫人 及 凶僕이 姜娘 生父에게 復讎의 慘殃을 反受하던 事實을 詳細著述 하야 有妻卜妾의 男子와 嫉妬惡習의 婦人과 賴德招婿의 愚夫와 貪財殺人의 奸婢를 一體 警戒함이요, 其悲憤狀快한 全篇 趣意가 可使讀者로 夢惋 悲淚를 自流케 해서 稱快의 叫聲을 不覺케 할 지니 讀者諸君은 必試一讀하시라 家庭裡面에 鄙風敗俗을 鑑戒할 지어다. 10) 只是牟利的 起見으로 爲妾辯護의 鬼의 聲과 如한 小 說을 著하야 社會上의 道德만 破壞하며 讀者諸君을 媚倒하고 其下 箸費만 充하얏도다. 11) 전자는 광고문이고 후자는 비평이다. 이렇듯 과도한 선전과 또 한 酷評 속에서 이루어진 작품이거니와, 요컨대 후자와 같은 혹평 은 다소 소설에 대한 偏見이 작용하고 있다하겠지만, 자주 국권이 10) 皇城新聞 2606호 4면에 실린 中央書舘의 李人稙의 11) 大韓毎日申報 융희 2년 11월 8일자 논설 鬼의 聲의 광고문

369 Ⅳ. 國語國文學 硏究 나 自保사상을 제일의 과제로 삼은 大韓每日新報의 논설이란 점에 유의하면 결코 무리는 아닌 것이다. 춘천에 사는 賤民 姜同知는 일시의 착오로 딸 길순을 양반 관료 인 金承旨의 小室로 보내지만 끝내 길순은 김승지 본부인의 시기 와 贖良을 염원하는 계집종 점순의 흉행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이에 강동지는 그대로 보복의 행동을 거침없이 해나간다. 이같은 내용을 지닌 이 작품은 주로 발표 당시 빌써 家庭小說이라 규 정되었던 바대로 봉건적인 가족제도의 결함에 대한 비판과 또한 官場生活, 즉 부패한 李朝정부의 관료계층에 대한 평민적 저항의 식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 결말에서의 강동지와 김승지의 모호 한 和解構造는 평민적 저항의 한계를 뚜렷이 보여 주기도 하지만, 금전에 대한 열망이라든가 속량에의 갈구, 또는 주인공의 비극적 인 죽음 등에 대한 객관적 처리, 유학생의 설교 배제 등으로 손색 없는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아뭏든 金東仁이 그의 說考 에서 이 韓國近代小 鬼의 聲을 신소설의 秀作으로 평가한 이래 변 함없이 이는 李人稙의 대표작으로 평가 되어지고 있다. 銀世界 新演劇 작품으로서의 銀世界는 隆照 2년에 同文社에서 발 간한 이 인직의 작품이다. 開化黨 金玉均의 감화를 받은 최 병도는 그 활동자금을 마련하 였으나 부패관료인 江原道 觀察使에게 잡혀 항거하다 죽고 그 부 인은 정신이상에 걸리고 자녀인 옥순 옥남은 미국 유학을 간다. 10년만에 귀국하여 다시 가족이 화합하지만 先親의 명복을 빌러 가는 길에 정부의 改革政策에 反旗를 든 의병에 잡히고 이들을 꾸 짖는 것이 그 梗槪다. 그런데 이런 작품의 경개가 이미 시사하는 바와 같이 이 작품의 갈등구조는 개혁적인 평민과 보수적이면서

370 2. 新小說과 唱歌 부패한 李朝정부의 관료의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다. 평민은 관료 의 收奪에 항거하나 결국 죽는다. 이같은 부패관료에의 비판은 18세기 후반의 李朝후기 소설과도 그 連帶性이 있으면서 동시에 晚淸 소설의 커다란 主調의 하나를 이루고 있는 이른바 중국의 譴責小說과도 그 맥락이 닿고 있는 것 이다. 이러한 기성적인 아버지대의 관료에의 이면적 積弊나 貪慾 無恥에 대한 고발의식은 그 다음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옥순 옥남 과 같은 혁신세대의 개화 혁신 의식으로 다시 발전한다. 그러나 이들 젊은 세대는 개화를 주장한 나머지 외세에 대한 민족주의적 집단본능에서 출발한 자보적인 무장 저항 세력인 義兵까지도 서 슴없이 꾸짖는다. 의병도 우리 나라 백성이요, 나도 우리나라 백성이다. 피차에 나라 위하고 싶은 마음은 일반이나, 지식이 다르면 하는 일이 다른 법이라. 여러분 동포가 의리를 잘못 잡고 생각이 그릇 들어서 堯舜같은 황제 폐하 칙령을 거스리고 흉기를 가지고 산 야로 출몰하며 인민의 재산을 강탈하다가 수비대 일병 사오십만 만나면 수백명의 의병이 더 당치 못하고 패하여 달아나거나 진실로 분한 마음이 있을진대 먼저 국권 잃은 근본을 살피고, 장차 국권이 회복될 일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우리나라 수십 년래 학정을 생각하면 이 백성이 이만치 남은 것도 뜻박이요 이 나라가 멸망의 화를 면한 것이 그런 다행이 없오. 이와 같이 의병투쟁을 오히려 개화정책에의 沮害的인 반역행위 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망국적인 현실의 원인이 부패한 학정에 있다는 논리적 변증은 온당한 주장이다. 그러나 침략적인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은 개화의식의 고조현상과는 반비례하는 논법이기 도 하기 때문에, 낡은 학정에 대한 준엄한 도전과 개화일변도의

371 Ⅳ. 國語國文學 硏究 양극은 있어도 이 반극의 境界人으로서 외세에 대항하는 인물이 없다. 이로 보아 신소설의 가장 대표적 작가인 李人稙은 신문학의 개척자라는 문학사적인 중요한 위치를 지닌다. 그러면서도 그의 행적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문학에 있어서도 부분적으로 는 결함이 없지도 않다. 李海朝와 그의 작품 李海朝는 高宗 6년 (1869) 京畿道 抱 川에서 나서 1927년 59세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거의 전문적으로 신소설 제작이나 李朝소설의 改作에만 전념했던 작가다. 그의 호 는 東濃 悅齋, 善飮子 遐觀生 惜春子, 神眼生 解觀子, 牛山居 自由鐘 鬢上雪 驅魔劍 紅桃花 鴛鴦圖 牧丹屏 花의 血 月 下佳人 巢鶴嶺 鳳仙花 기타가 있고, 그 이외에도 春香 傳을 개작한 獄中花를 비롯하여 沈淸傳興甫傳鼈主簿傳 등의 李朝소설을 개작한 江山蓮, 燕의 脚, 兎의 肝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新撰日鮮作文法을 남기고 있다. 士 등으로 다양하다. 그의 작품으로는 한편 그는 또한 당대로서는 매우 드물었던 소설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데, 이는 개화기에 있어서의 소설관의 면모를 더듬 어 보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 것이다. 무릇 소설은 체제가 여러 가지라 한가지 전례를 들어 말할 수 없으니, 혹 정치를 언론하는 자도 있고 혹 정탐을 기록한 자도 있고, 혹 사회를 비평한 자도 있고, 혹 가정을 경계한 자도 있 으며 기타 윤리 과학 교제 등 인성의 천사만사 중 관계 아니 되는 자 없나니, 상쾌하고 악착하고 슬프고 즐겁고 위태하고 우 스운 것이 모두 다 좋은 재료가 되어 기자의 붓끝을 따라 재미 가 진진한 소설이 되나 그러나 그 재료가 매양 옛사람의 지나간 수삼종 자취나 기탁이 험질없는 것이 열이면 팔구는 되되

372 2. 新小說과 唱歌 소설은 모두 현금에 있는 사람의 실지 사적이라 독자 제군의 신 문장의 광채는 기히 여기는 고평을 이미 많이 얻었거니와 황홀치 못할지언정, 사실을 적확하여 눈으로 그 사람을 보고 귀 로 그 사정을 듣는 듯하여 선악간 족히 많은 거울이 될 만할까 하노라. ( 花의 血 서문) 기자왈 소설이라 하는 것은 매양 빙공착영(馮空捉影)으로 인 정에 맞도록 편집하여 풍속을 교정하고 사회를 경성하는 것이 제일 목적 중 그와 방불한 사람과 방불한 사람이 있고 보면, 애 독하서는 열위 부인 신사의 진진한 재미가 일층 더 생길 것이 요, 그 사람이 회개하고 그 사실은 경계하는 좋은 영향도 없지 아니할지라 ( 花의 血 의 끝) 이는 瑞士建國誌서문의 소설론과 함께 개화기 小說論의 주 요 자료다. 즉 첫째 소설의 効用論의 피력이라 하겠는데, 여기에 는 소설의 교훈성과 오락성이 함께 언급되어 있다. 둘째로 빙공 운운이 해명하는 바와 같이 소설이 현실의 재현이란 규정 착영 인데, 이는 이전 소설에 대한 비판을 전제한 중대한 소설혁신의 辯이다. 이런 소설관은 그의 彈琴臺끝부분에서도 밝혀졌거니 와 李海朝는 자기나름의 이론을 지녔던 작가다. 自由鍾 隆熙 4년 (1910) 廣學書舖 발간으로 발행된 이 작품은 우선 그 머리에 토론소설이라 題한 것이 특징이다. 이매경이란 부인의 생일초대를 받은 몇몇 여인들의 토론으로 일관된 작품이다. 아무 런 서술적인 구조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소설로 보기에는 여러가지 결함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이른바 관념의 과다성이 소 설로서의 객관성을 지니지 못한 토론의 노출뿐이다. 이들 등장인 물들의 주장은 부녀자의 해방, 漢字폐지, 계급 嫡庶의 타파, 자주

373 Ⅳ. 國語國文學 硏究 정신과 자녀교육 지방색의 타파 등, 여러 영역에 미치고 있다. 아뭏든 일반적인 소설형태면에서 보면 완전히 파격적인 것이어서 적어도 이를 문학장르유형에서는 도저히 서사문학으로 볼 수는 없는 변칙적 형태나, 그만큼 교훈문학으로서의 부녀계몽이란 목적 의식을 두드러지게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형태는 소설의 자율성 이나 예술성보다는 이념전파를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소설을 생 각하는 시대 또는 계몽적인 敎化시대의 문학형태로서는 오히려 정상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驅魔劍 隆熙 2년 (1908) 大韓書林에서 간행된 이 작품은 그 표제가 시 사하는 바와같이 주로 새로운 과학사상에 입각한 迷信打破를 주 장하는 작품이다. 무당이나 卜術의 비과학성 내지는 비합리성이 예리하게 해부되어 있다. 함 진해의 삼취부인 최씨는 무녀의 말만 妄信한 나머지 아들 만득이 자주 병을 앓게 되는 것을 전처 귀신 과 잡신의 농간이라 믿는다. 또한 남편 함 진해도 무녀 금방울에 속아 전처들의 혼이 회오리바람이 되어 자기를 괴롭힌다고 믿는 다. 그리하여 약을 쓰는 대신에 굿을 한다. 끝내 만득이 죽자 선조 의 묘까지 면례를 하려든다. 이 때 함 일청이 나타나 그 아들 종 표로 종가를 잇고 판사가 된 종표는 사악을 응징 척결한다. 그런데, 이 작품 驅魔劍에 대해서는 특별히 지적해야 할 점 이 있다. 그것은 이 작품의 제작상에 미친 晚淸 소설의 영향이다. 물론 反迷信的 의식은 개화사상의 대두와 함께 포용적으로 나타 난 의식이기 때문에 이를 곧 어떤 외부적 요인과 연결시키기는 무 리가 있을 것이다. 또 반미신적인 신소설 작품으로 이미 大韓每日 소경과 앉은뱅이 문답, 大韓日報의 斬魔劍및 李人稙의 雉岳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申報의

374 2. 新小說과 唱歌 그러나 이 驅魔劍은 아무래도 淸末의 소설인 壯者의 掃 (1905)의 강한 영향을 받았던 것이라 단정할 수 있다. 그 迷帚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은 문맥에서 드러난다. 무릇 나라의 진보가 되지 못함은 풍속이 미혹함에 생기나니 슬프다. 우리 황인종의 지혜도 백인종에 못지 아니하거든, 어찌 타 오늘날 이같이 조잔 멸망지경에 이르렀나뇨. 반드시 연고가 있을지니라. 우리 동양으로 말하면 당우이래로 하늘을 공경하며 귀신에게 제 지냄은 일시에 백성의 뜻을 단속키 위함이려니, 요 괴한 선비들이 오행의 이론을 창설하야 길흉화복을 스스로 부 른다 함으로 재앙과 상서의 허탕한 말이 대치하여 점점 심할수 록 요악한 말을 수작한지라 일로 좇아 천지 귀신이 주고 빼앗으 며 죽고 사는 권리를 실상으로 조종하야 순히 하면 길하고 거스 르면 흉한 줄로 미혹하야 이에 밝음을 버리고 어둠을 구하며 사 람 을 내어놓고 귀신을 위하여 무녀와 판수가 능히 재앙을 사라 지게 하고 복을 맞아오는 줄 여겨 한 사람 두 사람으로부터 거 세가 본받아 적게 한 집만 멸망할 뿐 아니라 크게 나라까지 쇠 약케 하나니 이는 곧 억만명 황인종의 금일 참혹한 형상을 당한 소이연이라 엎드려 바라건대 형장은 무식한 자의 미혹하는 상 태를 거울하사 간악 요괴한 무리를 일절 물리치시고 서양사람 의 실지를 밟아 일절 귀신 등의 요괴한 말을 한 비에 쓰러바려 하늘도 가히 측량하며, 바다도 가히 건너며 산도 가히 뚫으며, 만물도 가히 알며, 백사도 가히 지을 마음을 두시면 비단 형장 의 한댁만 부지하실 뿐 아니라 나라도 가히 강케 하며 동포도 이 글은 驅魔劍의 우매한 형 함 진해에게 그의 사촌동생 함 가히 보존하리이다. 일청이 보낸 편지의 한 토막이다. 반미신적인 이 작품의 이념의 핵

375 Ⅳ. 國語國文學 硏究 심을 이루는 부분이다. 그런데 바로 이같은 문맥이 이보다 3년전 에 이루어진 壯者의 掃迷帚에 거의 그대로 적혀 있는 것이다. 看官須知阻礙中國進化的大害 莫若迷信 你們試想 黃種智慧不下 白種 何以到了今日 相形見 其間必定有個原故 乃因數千年人心風 俗習慣而成也 不是一朝一夕的事 大凡草昧初開之世 必藉神權 無 論中西 皆不能越此階級 中國唐虞以來 敬天祭鬼 祀神尊祖 不過借 崇德報功之意 檢束民智. 自西漢諸儒 創五行之倫 以爲禍福自召. 而災祥之說大熾 於是輾轉附會 捏造妄言 後世變本加厲 謂天地鬼 神 實操予奪生死之權 順之則吉 逆之則凶 由是棄明求幽 舍人 鬼 淫祀風靡 妊詞麻起 白宮廷以至外臣 自士夫以至民庶 一倡百和 擧 國若狂 日醉心於祈禳禱祝 遺傳之惡根性牢不可破 雖今日地球大通 科學發達 而億萬黃人 依然靈魂薄弱 羅網重重造魔自迷 作繭自縛 雖學士大夫 往往與愚夫愚婦同一見識 最不笑者 極狡䵟之人而信命 極奸惡之人而侫佛 不信鬼神之人而討論風水 極講鑽營之人而又信 前定 惝怳迷離 不可究詰 中國之民智閉塞 人心腐敗 一事不能做寸 步不能 荆天棘地 生氣索然 幾不能存立於天演物競之新世界 視西 人之脚踏實地 準實驗不憑虛境 擧一切鬼神狐妖之見 摧陷廓淸 天 可測 可航海 山可鑿 道可通 萬物可極 百年可好卒能強保國者 殆 判霄壤 故欲救中國 必自改革俗習入手 12) 이와같은 두 글의 對比를 통해서 전자는 틀림없이 후자를 토대 로하고 전개되었음을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또한 후반 결말의 판사의 응징도 중국의 公案類의 성격과 연관성을 지니고 있기 때 문이다. 아뭏든 이 작품을 통해서 근대문학에 있어서도 韓中文學 交涉史의 한 가능성이 열려진다 하겠거니와 미신타파를 역설하는 이 驅魔劍은 미신의 병폐를 또한 다음과 같은 풍자적인 노래 12) 阿英 晚淸小說史 人人文庫 pp

376 2. 新小說과 唱歌 로도 열거하고 있다. 세간놓는데 손보기 음식 보면 고수레하기 새그릇 사면 쑥으로 뜨기 쥐구멍을 막아도 토왕(土王)보기 닭을 잡아도 터주에 빌기 까마귀만 울어도 살풀이 하기 쪽제비만 나와도 고사지내기 이 밖에도 李海朝는 妻妾間의 갈등 및 혼인제도의 혁신과 신교 鬢上雪, 양반 귀족계층에 붙어살던 譯官, 胥吏의 몰락과정을 그린 牧丹屏, 자유연애와 재혼허용의 새로 운 결혼관을 그린 紅桃花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거니와 李人 육 사상을 강조한 稙과 더불어 신소설 작가로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崔瓚植과 그의 작품 崔瓚植의 호는 海東樵人 또는 東樵이며 高宗 18년 (1881) 음력 8월 16일 京畿道 廣州에서 나서 1951년 1월 10일 71세로 작고한 작가다. 그는 유년기에 廣州私塾에서 漢 學을 공부하였으며 甲午更張 이후 그의 아버지 梅下山人 崔永年이 광주에서 時興學校를 설립하자 그곳에서 신학문을 공부하였으며 후에 서울로 올라와 舊韓國 말엽의 漢城中學校에서 수학하였다.13) 그의 작품으로서는 秋月色 雁의 聲 金剛門 綾羅島 春 夢 등이 있다. 이 가운데서 그의 대표작인 秋月色은 1912년 滙東書館에서 발 간된 것이다. 파란만장의 우여곡절을 겪고 어릴 적에 청혼했던 두남녀가 다 시 再合하는 결말 등 그대로 李朝소설적인 구조다. 다만 朝鮮 日 13) 全光鏞 韓國小說發達史下 韓國文化史大系 V.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67, p

377 Ⅳ. 國語國文學 硏究 本 英國 등의 지리적인 인식공간의 확대 및 새로운 애정윤리 해외유학 등이 새로운 소재적 변천을 보여준다. 張志淵과 愛國婦人傳 張志淵의 호는 韋庵 또는 嵩陽山人, 韓 末의 志士的 언론인으로서 너무도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백 과사전적인 개화기 지식인으로 수많은 저서를 저작하였으며, 소설 로는 愛國婦人傳(隆熙 원년, 1907) 한 편을 제 작하였다. 전문 적인 소설가는 아니지만, 그의 이 작품은 여타의 많은 신소설과는 이념이나 주제에 있어서 판이하다는 점에서 우선 주목을 끄는 작품 일 것이다. 신소설이라고 明記되어 있는 이 작품은 隆熙 원년 (1907) 11월 3일 廣學書舖에서 발간한 총면 39페이지의 짧은 소설이다. 그리고 허구적인 것이 아니고 일종의 역사소설에 해당한다. 프랑스의 구 국 여걸 쟌느 다르크의 구국일대기를 서술한 것으로 여타의 신소설들의 보편적 주제가 되어 있는 개화 혁신론보다는 자보적인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외세의 침략에 항거하자는 목적 의식을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인 간격을 지닌 다른 準據를 끌어온 것으로 이는 역사의 현실적 再構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목적의식은 간간히 다음과 같이 삽입되고 있는 작자의 논평들에서 구체화하는 것이다. 슬프다. 이 때 아리안성은 도마 위의 살점이오, 가마 안의 고 기라 어찌 위태하지 않으리오. 옛적 우리나라 고구려 시대에 당 태 종의 백만 군병을 안시성 태수 양만춘이 능히 항거하여 백여 일을 굳게 지키다가 마침내 당병을 물리치고 평양성을 보전하 였으며 수양제의 백만병은 을지문덕의 한 계책으로 전군이 함 몰하였으며 고려 강 감찬은 수천병으로 걸안 소손녕의 삼십만 병을 물리치고 송경을 보전하였으니 아지 못게라 법국은 이 때

378 2. 新小說과 唱歌 에 양만춘 을지 문덕 강 감찬 같은 충의 영웅이 이 있느뇨.14) 슬프다 우리나라도 약안(쟌느다르크) 같은 영웅호걸과 애국 충의의 여자가 혹 있는가. 15) 따라서 이 책도 寺內의 무단정치와 언론탄압에서 압수 소각되 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것 같으면, 종래 단순히 역사 전기류 란 항목으로 묶어 비문학적 또는 비소설적인 것으로 흔히 다루어 버렸던 瑞士建國誌와 일련의 글은 단순한 역사가 아니고 제국주 의 침략하에서의 역사 문학 내지는 역사소설로 볼 수도 있는 것이 다. 쟌느 다르크의 항쟁일대기에 관한 지식의 원천은 필자의 짐작 으로는 아마도 쉴러의 오르레앙의 소녀에 있는 듯하다. 아뭏든 개화기의 신소설의 주조가 개화사상의 전파나 흥미로운 상업주의와 결부되었다는 통설과는 달리 이런 외국 역사적인 사 실에 준거하는 작품이나 자국 역사에 근거를 둔 申采浩의 乙支 文德 같은 역사물이 나왔다는 것은 민족주의적 저항문학을 규명 하는 좋은 자료인 것이다. 安國善과 그의 작품 安國善은 高宗 31년 (1894)에 渡日하 여 도오쿄오 와세다(早稻田) 대학에서 정치학을 수학했으며 귀국 해서는 일련의 정치운동으로 참형의 선고를 받고 전라남도 珍島 에 유배되었다가 放免된 바 있다.16) 1910년의 국권탈취 당한 이 후에는 잠시 官界와 관련되었던 적도 있으나 곧 다시 실업계로 전 환하여 개간, 금광, 미두, 株權 등 여러 방면에 손을 뻗쳤으나 모 두 실패했으며 한 때는 육영사업 및 기독교에도 관계했으나 만년 에는 낙향하여 은거생활을 보냈다.17) 14) 張志淵 愛國夫人傳, 廣學書舖 1907, p.8 15) 前揭書 p.39 16) 全光鏞 前揭書 p ) 全光鏞 前揭書 p

379 Ⅳ. 國語國文學 硏究 政治原論을 위시하여 演說法方 外交通義에 관한 저서를 내어 놓는 일방 신소설 禽獸會議錄 및 共進會를 발표하였다. 禽獸會議錄] 호는 天江 또는 弄球室主人, 융희 2년 (1908)에 발간된 이 작품은 신소설로서는 드문 寓意 的인 소설이다. 이른바 표면적 의미와 잠재적인 의미의 묘한 並列 性을 지닌 알레고리의 형태를 근거로 한 것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李朝소설의 假傳體 내지는 우의 소설들과 같이 모두 짐승 들이다. 그러면서도 이들 짐승들은 모두 인격성을 지니고 의인화 되어 있는데 회의형식으로, 이들 짐승들이 다 같이 예리한 풍자로 인간 세계를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금서 소동까지 일으킨 작품이 거니와 여기에 모인 각 동물들의 表象性은 각각 다음과 같다. 까마귀 반포지효(反哺之孝), 여우 요망간사(狐假虎威), 개구리 정와어해(井蛙語海) 벌 구밀복검(口蜜腹劍), 게 무장 공자(無腸公子), 파리 영영지극(營營之極). 호랑이 가정맹어 호(苛政猛於虎), 원앙 쌍거쌍래(부부애), 羊 온순, 사슴 은혜 와 순복(順服), 자생자락(自生自樂), 원숭의 공평흉내(모방) 까마귀 겉은 검으나 속은 희다, 제비 청렴신의, 올빼미 완 고수구(守舊), 고슴도치 호신지책(護身之策), 박쥐 기회주 의, 공작 호사와 외모 중시, 나비 교태(불의가 목적이 아님) 개미 근면, 자벌레 굴신에 의한 진보와 측량, 나귀 유익한 협 조, 캥거루우 새끼사랑(모성애), 호랑이 위엄탐욕. 이같은 표상성을 지닌 동물들이 인간과 인간의 사회를 두고 날 카롭게 비판하고 토론하는 것이 이 소설의 내용이다. 그러나 自 由鐘 보다는 대화적 성격에 있어 연설 일변도가 아니고 묘사적 서술이 상당히 많이 가미되고 있다. 이와같은 유형의 작품으로 김

380 2. 新小說과 唱歌 警世鐘이 있다. 共進會 共進會는 1915년 8월에 修文書館에서 발간한 개화기 소설 최초의 단편집이다. 이 단편집에는 기생 인력거군 시골노 인 이야기 등의 3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원래는 이외에도 탐정 순사(외국인의 話가 들어가기로 되었으나, 검열에 의해 게재가 필수의 불가능했다는 것이 작자의 後記에서 해명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이 책보는 사람에게 주는 글 및 이 책 본 사람에게 주는 글이란 글이 붙어 있는데다 다음과 같은 서문이 붙어 있다. 총독부에서 새로운 정치를 시행한지 다섯해된 기념으로 공진 작품집은 회를 개최하니 공진회는 여러가지 신기한 물건을 벌려 놓고 모 든 사람으로 하여금 구경하게 하는 것이거니와 이 책은 소설 공 진회라 여러가지 기기묘묘한 사실을 책속에 기록하야 모든 사람 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니 총독부에서는 물산 공진회를 광 화문 안 경복궁 속에 개설하였고 나는 소설 공진회를 언문으로 이 책 속에 진술하였다. 이와같은 삭제의 경위 해명 및 총독부의 새로운 정치 운운에서 검열하에 있어서의 작가활동의 제약성이 은연 중에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에 실려 있는 시골노인 이야기(地方老人談話)는 이른바 액자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런 형태는 이야기의 근 원상황에서 이미 비롯되는 것이지만 雲英傳이나 燕巖의 일련의 단 편 소설 및 村談解頤(姜希孟) 등 일련의 戯話가 지닌 형태를 계승 하고 있는 것이며, 이후의 근대적 액자소설을 가져오게 하는 출발 이기도 하다. 아뭏든 이런 점에서 이 共進會는 같은 시기의 話中話와 함께 개화기의 액자소설로서 중시될 수 있는 것이다. 朴永運과 작품 현재까지 이 작가나 작품에 대해서는 별반 알

381 Ⅳ. 國語國文學 硏究 慶南 日報(1909)에 의하면, 玉蓮堂(1912) 金山月, 浮碧翫 月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작가의 경력이란 더듬어 알 길 려진 적이 없었지만, 경남 진주(晋州)에서 발간된 지방신문 이 없으며, 慶南日報의 전속 소설가였다는 기록 정도가 고작이다. 金山月이란 신소설 광고에 본기자의 저술한 수십권 소설 중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도 상 당수의 작품을 발표했던 것 같다. 이 작품들 외에도 雲外雲, 巧奇冤 같은 작품을 동신문에 발표한 듯하나, 신문의 보존여부 慶南日報 1912년 11월 22일자의 에 따라서는 더 많은 작품이 조사될 수도 있다. 그의 작품은 대체적 으로 이전의 신소설들이 다룬 문제를 재정리 부연한 정도이며, 나라 의 失權 이후여서인지 자보사상이나 외세에의 저항적 요소는 희박 하며 주로 풍속개량을 다루었을 뿐이다. 松籟琴(隆熙 2년, 1908)을 쓴 陸定洙, 瑤地鏡(1910) 의 朴永鎭, 牧丹花(1911) 顯微鏡(1912) 地藏菩薩(1912)의 이 밖에도 金敬濟 등을 위시하여 李常春, 金榮漢, 趙重桓, 李相協, 金宇鎭 등 의 작가가 있다. ㄹ. 新小說의 특성 신소설의 특성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가려질 수 있다. 첫째는 신소성이 발흥되어 나온 시대적 배경과의 관련에서 밝혀 지는 것이며, 둘째는 소설사적인 관점에서 演繹되어 나온 결과론 에서이다. 따라서 전자는 주로 주제나 이념 또는 내용면이며, 후 자는 물론 전자의 요소도 검토할 수 있으나 형식이나 구조와 관계 된다. 이 특성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신소설은 근대 사상의 投影體 이와같은 근대 사상의 반영은 물론 소설로서의 미숙성이나 관념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교훈성에 편중되어 있다는 결점을 포함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신소

382 2. 新小說과 唱歌 설은 강한 주제를 지닌 문학이다. 그리고 근대적인 개화사상을 전 파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특징은 바로 당시의 效用主義的 소설관에서 이미 연유된 것이다 夫小說者는 感人이 最易하고 人人이 最探하여 風俗階級과 敎 化程度에 關係가 甚距한지라.1) (瑞士建國誌 序) 彼가 萬一 社會及 國家에 對하야 公益上의 思想이 有할진댄 羅賓孫 漂流記와 如한 奇文을 譯하야 國政의 모험심을 고발함 도 가하며 若安貞德救國傳과 如한 일 小史를 著하야 國民의 愛 (大每논설) 國性을 鑄造함도 可하거늘 此小說을 讀하면 國民의 精神을 感發하여 無論 男女하고 血淚를 可히 灑할 新思想이 有할지니 祖國의 精神을 培養하고 自由하고 自由 思想을 鼓動하는 惟 壹奇書 2) 3) 이런 소설관에서 보듯 당시에 있어서는 소설의 예술성은 보다 副次的인 것이었고, 일차적인 것은 개화이념의 전파에 있었다. 그 리하여 신소설의 네 개의 기본 주제는 개화와 자주 독립, 신교육 사상의 선전, 신도덕관과 인습의 비판 및 미신타파와 현실의 폭로 였다고 흔히 평가되고 있다.4) 이런 주제는 흔히 소설의 객관적 구조에 의해 形象化되어야 했을텐데, 그렇지 못하고 주인공의 연 설이나 변론으로 그대로 吐露되고 있다. 말하자면 관념과 구조가 융합하지를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離反되어 있어서 흔히 말하는 이들 주제도 모티프에서 발현되는 참된 주제라고 보기보다는 1) 白鐵 河東鎬 양교수에 의하면 瑞士建國誌 에 이같은 序文이 있다고 하나, 본인이 확인한 瑞士建國誌 에는 이런 서문이 없다. 2) 萬歲報 융희원년(1907) 4월 4일자 血의 淚 광고, 金相萬書舖 3) 大韓毎日申報 융희 2년 11월 17일자. 蕉雨堂主人 陸定沫의 松籟琴 광고 博文書館 4) 白鐵 朝鮮新文學思潮史(上) 首善社 1948, pp

383 Ⅳ. 國語國文學 硏究 일종의 메시지에 보다 근접하는 주제이다. 신소설의 주제는 그만 큼 구조의 주제가 아니라 이념토로의 주제다. 즉 연설의 주제와 상통하는 非文藝的 요소를 지니고 있다. 자주독립의 주제는 일종의 自保 사상이라고 할 것이다. 많은 정 치소설들은 비록 피상적이나마 자주사상을 피력하고 있다. 아울러 정치의 혁신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요소는 지극히 부분적인 데 서 노출될 뿐이며, 스토리의 전개는 엉뚱하게도 침략세력인 日本 을 긍정적인 근거로 그리거나 의병까지도 罵倒한다. 물론 이렇게 상반되는 모습은 작가에게 일단 책임이 돌려져야 하겠지만, 개화 인을 범죄인시한 李朝정부의 감시나 이른바 保護政治라는 미명 아래 委任統治權을 장악한 일본 침략세력인 統監府의 존재를 그 원인의 일단으로 규정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이런 가운데서도 신 소설의 등장과 거의 때를 같이하는 大韓每日申報의 車夫誤解 같은 작품은 비록 無署名의 소설이지만 統監府 정치에 대한 예리 統監을 通鑑으로 語戯化하면서 결말에는 李朝詩歌로서의 歌辭形態의 自歎歌로 한 공격을 시도한 일종의 劇文이다. 즉 자주 국권 사상을 고취하고 있다. 신교육 사상의 주제 역시 연설이나 담론 및 해외 유학생의 등장 으로 노출시키고 있다. 특히 유학생들이 유학가는 日本이나 西歐 제국은 兪吉濬의 이른바 開化의 等級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근대적 개화의 긍정적인 준거의 대상국이다. 이는 민중에게 경험 영역을 확대시키려는 교육적 의도이기도 했다. 또 교육을 받고, 해외 유학생이 됨으로써 주인공들은 처음의 불운을 극복하는 동 시에 이상적인 입신출세적 인간이 된다. 이런 스토리의 요소가 그 들의 대화로서는 부적절한 辯說과 합쳐지면서 신교육사상을 환기 시키고 있다

384 2. 新小說과 唱歌 한편 신도덕관념의 주입이라든가 인습의 비판은 주로 자녀관이나 결혼제도에 대한 것이다. 자녀의 부모에 대한 예속성을 비평하였고, 가족적인 친목이나 家父長的인 타의에 의한 결혼에 비판을 가하고 개성을 지닌 남녀의 일대일의 자유결혼을 강조했다. 그리고 미신타 파의 문제인데 과학사상의 대두와 이입이 많은 신소설에서 그대로 반영되었다. 李海朝의 稙의 驅魔劍이나 帝國新聞의 斬魔劍, 李人 鬼의 聲이 대표적이다. 현실의 비판도 강하였다. 주로 부 패한 귀족관료에 대한 것이었다. 이는 전대의 평민소설이나 중국의 견책소설과의 정신적 맥락이 있다. 商業主義 소설로서의 신소설 신소설은 현재까지 주로 교훈주 의적인 계몽성만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이에 못 지 않게 신소설은 市場指向的 상업소설 내지는 대중문학으로서의 면모를 두드러지게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열거되어질 수 있다. 첫째 이미 발흥론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신문사들이 최초로 신소설을 게재하였다는 것은 二重의 의미를 지닌다. 그 하나는 당 시의 신문들이 표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민중啓導의 수단으로서 소설이란 형태를 중시하거나 新文化運動의 일환으로 소설의 개혁 을 도모한 까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신 문의 보급 내지 독자의 확보를 위하여, 흥미로운 매개물로서의 소 설의 기능을 생각한 결과이다. 신문사의 경영을 위해서는 무엇보 다 중요한 것이 독자의 확보다. 독자 확보의 수단은 결국 지면이 지니는 오락성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또 이런 오락성의 형태로는 소설이 으뜸이다. 中央新報나 大韓日報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 는 자명해진다. 이들 신문은 신소설을 처음으로 게재한 신문들일 뿐만 아니라 삽화까지도 곁들여 독자를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다

385 Ⅳ. 國語國文學 硏究 前記 大韓日報의 소설 연재 광고의 文案만 하더라도 소설의 연재를 취미 진진이라고만 했을 뿐이며, 그것은 大韓每日申報나 皇城新聞의 경우와는 판이하다. 더구나 日人들이 우리의 자주의 식을 고취하려 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尾崎紅 金色夜叉(1897)가 거둔 讀賣新聞의 대중적 보급 및 德富蘆花의 不如歸(1898) 가 國民新聞의 보급에 준 막중 葉의 한 영향력을 더 의식했을 것이다. 아뭏든 이들 두 日人 간행의 신문들이 소설 게재를 비롯한 이래 로 거의 시기를 같이 해서 많은 신문들이 소설의 연재를 시작했다 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일종의 독자 유치를 위한 상업 주의적 수단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것이 확실하다. 韓國人에 의해 발행된 신문은 물론 이런 상업주의를 의식하면서도 이를 표면적 으로 노골화하지는 않았으며, 교화적 기능을 상당히 배려했던 것 같다. 그러나, 상업성이 없었던 바는 아니다. 이는 慶南日報의 소 설 기자였던 朴 永運의 그의 소설 金山月의 다음과 같은 記載 豫告에서도 암시되고 있다. 小說 玉蓮堂 은 凡全國上下家庭 其他 各般社會에서 本報를 愛 讀하시는 僉位의 知識을 增長하며 興味를 傍助하야 到處에 本報 를 환영하는 一助가 됨은 非但 愛讀者及 本社에 爲幸이라. 1) 물론 기자의 주관이 가미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에서 보면 소설 이 독자에게 신문을 보급 시키는데 一助가 되었다는 의미가 隱性的 으로 나타나 있으며 소설의 記者制란 것이 또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이렇게 상업성을 지닌 신문의 소설관은 결국 대중적인 사회심리에 영합하는 작품이 쓰여지도록 작가와의 묵계가 있었던 것 같다. 오 늘날 모든 일간 상업신문들이 신문의 보급을 위한 흥미거리로서 다 3단 광고 小說記者 朴永運豫告 1) 慶南日報 1912년 11월 22일자

386 2. 新小說과 唱歌 투어 소설을 게재하는 것도 이에서 연유하거니와 신문사의 경영을 위한 독자 확보의 수단으로 소설이 연재되기 시작하였다는데서 벌 써 신소설은 상업적 대중소설로서의 숙명을 지니게 된 것이다. 둘째, 신소설의 표제가 지닌 讀者誘引性이 또한 그러하다. 소설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책의 표제는 대개 內容公示的 기능과 독자 유인적 기능의 이중성을 갖는다. 그런데 신소설의 표제들은 물론 前者의 기능을 지니는 것도 있지만, 後者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 이 더 많다. 대중적인 센치멘탈리즘(感傷主義)에 적응 부합하려는 표제들이 그것이다. 李朝소설의 표제의 전형을 이루다시피 하는 傳이란 이른바 전기적인 전기소설(傳記小說)을 답습한 것은 張 志淵의 愛國婦人傳을 제외하고는 전무하다. 그 대신에 血의 淚 銀世界, 秋天明月, 花上雲, 榴花雨, 雪中梅, 秋月色, 杜鵑聲, 月下佳人, 花上雪, 雲外雲, 花의 血, 鳳仙花 등 花朝月夕의 浪漫的이고 夢幻的인 감상주의의 감미로운 표제들 이다. 물론 이런 표제들의 자연대상이 어떤 상징성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주제공시적인 적절한 표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거의 감상적인 허위에 불과할 뿐 그러한 표제를 붙일 아무 런 필연성을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 허다하다. 결국 이는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하려는 의식과 상업적인 구매력을 반영시킨 것이다. 물론 이런 지적은 전면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엄연한 일면적 특색 의 지적이다. 세째 작품의 내용에서 오는 상업주의다. 멜로드라마적인 작품의 구성, 주인공들의 현실의 고뇌로부터 置換된 生의 묘사와 이국으로 다니는 낭만적인 이상과 연애, 갈등의 공식성 등이 모두 독자가 지닌 신기성에의 관심 및 호기심을 유발하는 내용이다. 특히 현실의 문제보다는 낭만적인 이상을 지닌 외국 유학생 주

387 Ⅳ. 國語國文學 硏究 인공들의 해외여행이나 자유연애는 신교육 사상으로 음미되기 보 다는 현실에 대처케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보다는 낫고 이상적인 세계로 독자를 즐겁게 離項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가 더 쉬 웠던 것이다. 그런 주인공들의 소설적 배경이 日本으로 많이 설정 되었다는 점으로 본다면 신소설이 지니고 있는 친일의식도 쉽게 지적될 수 있다. 自保的 抵抗意識으로서의 신소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신소설 은 상당히 친일적인 경향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민족주의에 입각한 자보적 저항문 학으로서의 신소설과 역사 전기 문학도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유의 愛國婦人傳, 安國善의 禽獸會議錄, 劉元杓의 夢見諸葛亮(융희 2년, 1908), 申采浩의 乙支文德 등이 그것이다. 번역류로는 瑞士建國誌를 위시하여 약 50여편 하여야 한다. 張志淵의 이 있다. 우리법국의 동포 국민된 유지하신 제군들은 조금 생각하여 보시오. 우리 나라가 어떻게 위태하고 쇠약한 지경이며 오늘날 무슨 토지가 있어 법국의 땅이라 하겠오. 북방 모든 고을은 이 미 다 영국에 빼앗긴 바 아니오. 남방에 있는 고을은 다만 한낱 아리안성을 의지하지 아니하였오. 이 한 성도 불구에 함몰할 지 경에 이르렀으니 만일 이 성 곧 잃으면 법국의 종사가 전수히 멸망하는 날이 아니오. 또한 우리 국민이 모두 남의 노예와 우 마가 되는 날이 아니오. 다 알으시오 대저 천하 만고에 가장 천 하고 부끄럽고 욕되는 것이 남의 노예가 이 아니오. 국가가 한 번 망하면 인민이 다 노예가 될 것이오. 1) 이 글은 張志淵의 愛國婦人傳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1) 張志淵 愛國婦人傳 廣學書舖 융희원년, p 약안

388 2. 新小說과 唱歌 (쟌느 다르크)의 오르레앙성 중에서의 비장한 연설의 한 토막이 다. 이와 같은 역사의 한 사실을 再生시키고 있는 태도는 단순한 역사의 지식을 확보하려는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위기로 감지되 고 파악되는 현실의 타개와 자보적인 민족주의로의 결속과 저항 을 위한 준거로서 끌어온 것에 그 근본 의도가 있는 것이다. 따라 서 쟌느 다르크의 주장과 연설은 곧 이 작가의 절규 그것이며 저 항의 대상은 바로 日帝다. 또 나라로 말할지라도 대포와 총의 힘을 빌어서 남의 나라를 위협하여 속국도 만들고 보호국도 만드니 불한당이 칼이나 육 혈포를 가지고 남의 집에 들어가서 재물을 탈취하고 부녀를 겁 탈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 있오? 2) 이는 安國善의 풍자적인 우의소설인 禽獸會議錄에 등장하는 여 우의 연설이다. 이 작품의 등장 인물은 모두 의인화된 짐승들인데 이 부분은 더우기 인간을 비판한 대목이다. 제국주의의 무력적 식 민지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을 짐승을 假托하여 감행하고 있다. 이와같이 저항 문학으로서의 이들 신소설들은 주로 역사적 사 실이나 또는 동물세계를 끌어와서 이에 현실을 치환시켜 서술함 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역사는 자국의 역사일 수도 있고 또 他國 의 역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탁적인 간접화의 경우와는 달리 劉元杓의 夢見諸葛亮은 훨씬 대담하고 직접적이며 대상 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日本이 馬關條約 第一條에 淸國에 關係된 朝鮮을 獨立으로 確 定하더니 近日에 京釜鐵道와 京義鐵道를 建築하여 隱然히 勢力 을 擴張하였은즉 今日 旅順以東으로 陸地線路가 擴張하는 동시 에 朝鮮이 어찌 其範疇를 特脫한다 하리오. 嗚呼라 世間에 所謂 2) 安國善 禽獸會議錄 韓國新小說全集 卷8 乙酉文化社 p

389 Ⅳ. 國語國文學 硏究 萬國公法이란 것도 亦是 有名無實한 地上空文으로 淸國에 所宗 하는 詩書經傳과 洽似케되었으니 無論何國하고 自家를 自助하 야 自強力을 維持치 아니하면 保國치 못함은 現世에 公例가 된 者라, 足下도 亦朝鲜人인 則 今日 朝鮮이 日本에 羈絆됨을 어찌 痛恨치 아니리오. 3) 이런 면에서 역사소설의 주체사상과 저항성은 음미되어져야 한다. 表現과 叙述構造上의 특질 신소설의 표현 및 서술구조상의 특질을 상대적으로 李朝소설과의 대비에서 밝혀질 수 있다. 그러 나 대비는 결코 銳角的인 대립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언문일치의 문장과 근대적 문체 신소설의 문장은 이조소설의 그것에 비해서는 평이한 언문일치 의 國語體 문장이다. 또한 그 문체의 요건도 세밀성, 객관적 묘사 성, 근대적 사실성 및 개성적인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한편 語彙 驅使의 면에 있어서도 외국어 외래어 및 현대적 문명어가 많이 나타나며, 비유적 표현에 있어서의 類推的 轉移 대상도 李朝소설 의 그것과는 변모된 면이 허다하다. 일로 전쟁의 강화담판을 붙이던 미국 대통령처럼 철환같이 빠른 세월 서늘한 바람이 오동나무 그림자로 활동사진을 돌리더라. 철환보다 빨리 가는 속력으로 도루라미 돌아가듯 빙빙 도는 지구는 백여도 자전하는 동안에 전보줄처럼 빠른 소문 이러한 어휘와 표현은 당대 특유의 시대성을 반영하는데 부합 한 표현이며, 점차적으로 근대적 도시화의 과정을 겪어나가는 당 대 사회를 外延的으로 지시하는 어휘들이기도 하다. 87 3) 劉元杓 夢見諸葛亮 廣學書舖 융희 2년, pp

390 2. 新小說과 唱歌 발단적 서두의 동시대성 신소설의 발단 부위에 있어서의 시간공간 체계는 작가의 현실적 인 경험영역과 상당히 근접되어 있다. 따라서 서사문학으로서 이야 옛날 어느 곳에식의 막연한 時空意識에서 화설 대왕 직위 초나 화설 나라 년간에로 바뀌어진 것인 기(설화)의 創始語인 李朝 소설의 발단 부위보다도 현실적인 공간으로 접근되어 있다. 그 렇지 않으면 현실성을 지닌 배경묘사로 비롯되기도 한다. 일청전쟁의 총소리는 평양일경이 떠나가는 듯하더니 그 총소 리 그치자(血의 淚) 아산 둔포에서 총소리가 퉁탕퉁탕 나더니 장안 만호 상하 삼 판에 떼꺼지가 생겼는데 (牧丹屏) 찌는 듯한 삼복 더위에 사람마다 홍로중에 들어 비지같은 진 땀을 철철 흘리며(顯微鏡) 叙述的 逆轉 구조 역전이란 소설에 있어서의 순차적인 시간구조에 변화를 주는 방 법으로서 현재 속에 과거를 끌어들여 현재를 완성하고 도화하는 구조를 말한다. 신소설은 이런 서술구조를 많이 택하고 있거니와1) 라는 이를 解剖的 구성2)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특히 이를 본래 語辭가 역전적인 轉移語의 구실을 많이 하고 있다. 이런 역전은 과 거의 침투에 의해 현재 사건이 확대되는 현재 補強的인 것과 비교 적 긴 전이에 의해 현재의 方位가 포기되는 것 즉 액자 소설적 형 태가 있으나 여기서는 전자를 지적하는 것이다. 예컨대 鬼의 聲 에서 여주인공 길순과 김승지의 관계를 처음부터 順次대로 順 1) 李在銑 韓國開化期小說硏究 一潮閣 1972, pp ) 全光鏞 韓國小說發達史(下) 民族文化史大系 V.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pp

391 Ⅳ. 國語國文學 硏究 進的으로 서술하지 않고 임신하여 만삭이 된 길순이 홀로 고민하 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다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나, 순간 순간의 보충으로 과거가 등장하는 것이 그것이다. 서술된 事件 시간의 短縮化 서술된 사건시간이란 소설 속에서 일어난 사건의 시간을 말하 는 것으로, 李朝소설은 거의 사건시간의 폭이 주인공들의 일생과 일치한다. 탄생에서 비롯하여 고난을 겪고 입신 출세적인 復權을 하는 행복한 말년까지 시간 範域이 매우 넓다. 그래서 李朝소설은 대개 탄생 고난 행복이라는 三分節의 연속구조적 계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서 최초와 최후 부분은 축약적인 단축으 로서 시간의 跳躍的 持續 내지는 緩行的 축약으로 이루어진다. 뿐 만 아니라 최초부위와 중간부위 간에, 그리고 중간부위와 최후부 위와의 사이에는 상당한 공백 내지는 생략이 또한 포함되어 있으 며 이런 3분절적 단위가 순차적으로 연속되어 있다. 그런데 신소 설에서는 이런 삼분절적 行動連繫에서 첫번째 부분이 많이 탈락 되어 버리거나 역전의 방법에 의해 변형되어 버렸으며, 최종부위 도 많이 약화해 버린 것이다. 따라서 李朝소설에 비해서 전체적인 시간범위가 훨씬 단축되어 있다. 기타의 특성 그 밖에도 서술적인 時點 문제에 있어서 객관화 과정 즉 주관적 感情投影의 절제, 과장적 해학에의 반성 및 한 사람의 주인공의 전기적 구조로부터의 탈각으로 인간 공간소설로의 이행적 요소 및 天上的 세계 요소의 소멸화를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상의 지적은 李朝소설과 다른 점이거나 변화된 요소 를 든 것이며, 신소설은 실제적으로 李朝소설의 서술구조를 많이 계승하고 있다는 점도 그 특질로 고려되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392 2. 新小說과 唱歌 이런 흥미가 전항의 이념들과 병렬됨으로써 신소설은 많은 독자 를 확보할 수 있었다. 新小說의 文學史的 意義 신소설은 문학사의 측면에서 볼 때 李朝소설과 현대소설의 중 간 부위에 해당하는 과도기의 소설이다. 과도기적 성격이라고 표 현되는 내용 속에는, 李朝소설의 긍정적 전통요소의 지속성을 지 니면서도 또 다른 새로운 요소를 배태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적된 다. 아울러 단절이 아닌 한국 문학의 총체성속에서 이를 파악하려 는 의도도 잠재된다. 이런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으로 신소설의 의 의를 평가한다면 李朝문학과 근대문학이 상대적으로 閉塞되었다 고 생각하는 견해들과는 달리 문학사의 지속성을 해명할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된다는 점이다. 慣習史와 移植史로 날카롭게 대립된 한국문학사의 별개적 서술은 신소설에 대한 해명으로 해소될 가 능성이 많아질 수 있다. 放置的인 서술태도는 있을 수 없다. 둘째로, 한국의 20세기초의 근대화 과정을 잘 반영하는 문학이 란 점이다. 신소설은 소설문학으로서 결함이 많다. 객관화된 구조 적 형상화에 상당한 결함이 있다. 또 지나친 관념성의 투영체로서 소설로서의 미숙성이 현저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도 불구하고, 교훈적이고 계몽적인 입장에서 민중에게 근대 개화사상이나 자주 의식을 전파하는 매개로서의 기능을 잘 발휘했던 것이다. 여기에 서 유의할 것은 당대의 문학관 내지 소설관이다. 유교적 가치규범 에 근거한 李朝시가가 주로 윤리적 상상력과 결부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근대적 계몽문학으로서의 신소설이 주로 연설적인 토 론과 가르침의 話法을 택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예술성보다는 공 리적 효용성을 보다 중시한 시대정신의 발로다. 이런 시대적 요청 을 수용함으로써 자주자립 신교유 풍속개량의 이념을 주제로

393 Ⅳ. 國語國文學 硏究 잘 표방한 것은 신소설의 효용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세째로, 전대의 李朝소설에 비해서 근대적인 서술구조나 표현방 식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李朝소설에 대한 잠재적인 반성이 있었음 을 알 수 있고, 또 이를 극복하려는 의식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넷째로, 발흥론에서 밝힌 바처럼 신소설은 출판사의 상업주의와 강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근대 대중소설의 原形이다. 이는 곧 상업적 신문연재소설의 출발이었다는 지적으로, 근대 장편소설 이 예술성보다는 흥미있는 오락성으로 이끄는 길을 이에서 벌써 만들어 놓았다고 하겠다. 이 점과 친일의식 및 예술성의 결여는 다소 부정적 의의다. (2) 唱 李在銑 歌 1) 開化期歌辭의 分類 통칭 開化期라고 표현하지만 開化期 空間의 內容物이 과연 구 체적으로 무엇이며, 그것이 韓民族의 歷史展開과정에서 어떤 의미 를 띠는 가에 관해서는 아직도 實證的으로 點檢되어 있지 않은 상 태라 할 수 있다. 그 이유의 대부분은 이 기간이 歷史의 炎症에 해당되기 때문일 것이다. 소위 近代라는 이름의 西歐帝國主義의 충격이 닥쳐왔을 때 전개되는 韓國의 開化期 硏究方法은 다음 두 가지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 첫째는 韓 中 日 등 東洋三國의 儒敎克服方式이라는 일반 적인 視野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朱子學的인 질서 및 그 세계 관의 붕괴와 近代化 사이에 놓인 이 함수관계는 韓國 開化期에만 문제되는 것일 수 없다. 東洋三國에 있어서의 朱子學的 질서의 극

394 2. 新小說과 唱歌 복방식이라는 一般性을 고찰한다는 것은 西歐文物 유입과정의 汎 東洋的인 양상의 해명을 요청하는 것이며, 그것은 文化類型의 구 조를 밝히는 일에 해당된다. 文學에다 이 문제를 결부시킨다면 그 것은 比較文學的인 측면이 고려된다. 실상 韓國 개화기의 문학은 설사 文物에 얽혀 未分化 상태이기는 하나 日本의 재빠른 번역과 그것에 연해 있는 中國의 商務印書館의 再飜譯에 이어져 있는 것 이다. 韓國 개화기에 수백 종에 이르는 敎科用圖書 대부분이 日本 및 그것에 이어져 있는 中國의 것을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東洋 三國의 이러한 공통기반을 몰각한 자리에서의 韓國 개화기 연구 는 靜的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둘째로, 이러한 첫째의 바탕 위에서 韓國的 특징을 검토 해명 하는 方法이 놓인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으로 드러나는 점 은 1910년의 國家喪失이다. 梁啓超 嚴復(中國)의 유교극복방식, 福澤諭吉(日本)의 유교극복방식, 李光洙의 유교극복방식(子女中 心論) 등이 東洋的 공통기반의 일반형이라면, 韓國에서는 國家喪 失로 해서 中國이나 日本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조건이 형성되는 것이다. 한국적 개화기의 특질은 바로 이 사실에서 연유되는 것이 며, 또한 그 후의 韓民族의 意識 전부를 결정짓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비로소 우리는 開化期의 歌辭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흔히 唱歌로 일반화되어 있는 開化期歌辭는 그 內容 項目이 잡다하기 때문에 그 槪念定立부터 새롭게 해 둘 필요가 있 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엽, 西歐衝擊에 의해 나타난 文學上에 있어서의 律文樣式을 편의상 開化期歌辭로 규정할 수가 있다. 이 開化期歌辭를 우선 내용상으로 분류하면 다음 몇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가 있을 것이다

395 Ⅳ. 國語國文學 硏究 독립신문(1896)에서부터 나타나는 애국가 독립가類 를 들 수 있고, 둘째 大韓每日申報(1904)에 주로 나타나는 社會 첫째는 燈欄을 들 수 있으며, 세째는 申泰植 등 義兵들의 倡義歌. 네째는 경부텰도노래(京釜鐵道歌)(1908), 다섯째는 少年 (1908)誌 중심의 新詩, 가령 海에게서 少年에게등이 포함될 것 六堂 崔南善의 이다. 이렇게 다섯 항목으로 분류할 수 있는 근거는 다음 두 가지에서 연유된다. 그 하나는 建陽원년(1896) 무렵에서 泰西文藝新報 (1918) 사이의 시기적 구분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적 구분이란 통 칭 開化期에 해당되는 것이다. 독립신문의 가사類는 우선 그 以 前의 한국고전문학의 가사類와 내용상에 상당한 차이를 보여 주며, 또한 泰西文藝新報에 등장하는 서구 近代詩와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따라서 開化期歌辭라 했을 땐 그 시기적 범위는 1896년에서 1918년 사이 약 50여년을 포함시킬 수가 있다. 다른 하나는 앞에서 적은 다섯 가지 항목이 일단은 內容上의 분류라는 점 이다. 이 다섯 항목의 분류에 대한 타당성 여부는 그 內容에 대한 形態上의 고찰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文學史的인 意味綱이 드러날 수 있다. 2) 唱歌, 開化歌辭 開化期歌辭 用語에 대한 구별부터 일단 살펴 둘 필요가 있다. 開化라는 말 이 초기에 사용된 문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의 톄일 큰 긔쵸라. 나라의 대 대더 쥬독립 의리 화 쇼와 셩의 다과 물론 고 졍치를 히셔 학업을 힘써셔 남 의게 의뢰 각이 업고 기일을 긔가 면 비록 쟉은 나라 라 말은 풍쇽을 이라도 큰 나라이 압제치 못하고 화

396 2. 新小說과 唱歌 열고 셩을 화 이니 알기 어렵고 기 어려옴이 아니 오 를 좃차 편리 게 이라 1) 이러한 의미로 開化라는 말이 사용되었다면 開化歌辭는 이러한 開化의 內容을 담은 歌辭를 뜻할 것이다. 따라서 때를 쫓아 편 리하게 하는 내용을 담지 않은 歌辭는 開化歌辭라 할 수 없다. 가령 義兵의 倡義歌 같은 것은 물론 社會燈欄에 속하는 많은 작품 중의 대부분은 開化歌辭의 범주에 들지 않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와 開化期歌辭 라는 두 용어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되게 開化歌辭 된다. 開化期에 나타난 모든 歌辭를 開化期歌辭라고 규정한다면 이는 上位槪念으로서, 그 속엔 種概念으로서 즉 開化歌辭가 포함될 따름인 것이다. 開化를 노래한 歌 辭 그러면 唱歌란 무엇인가. 이 물음을 살피기 위해서는 당시에 사 용된 文脈을 일단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① 校歌團束 學部大臣 李載崑氏가 各觀察道府郡으로 訓 中 歌詞 >에 不穩當 令 기를 現今 私立學校에서 用 唱歌 及 同胞警醒歌 等은 最甚 者인데 是 者가 不少 바 就中 精神歌 等을 靑年學徒에게 唱케 은 敎育上 甚不當 니 轉飭各學校 야 此等 歌詞 一切 금지 라 하얏더니라.2) (傍點은 引用者) ② 唱歌編纂 近日 各私立學校의 敎科書 校令에 의 야 稍히 取締至 되 但 學童의 唱歌에 就하야 一定 印刷物이 無 으로 現今 當部에서 此를 調査 야 愛國歌 同胞警醒歌等을 編纂 計劃이라더라. ③ 調陽部議決 調陽俱樂部에셔 第一回 評議會에 議決 案件이 如左 니 詞藻를 首先 와 賢哲의 一本. 國 列聖朝의 御製 신 歌詞 1) 帝國新聞 1889년 3월 18일; 同 3월 27일字論說 2) 大韓民報 1903년 7월 2일

397 Ⅳ. 國語國文學 硏究 肄習 야 全國人民으로 야곰 求世 誦傳케 事 와 閭巷諷謠 適當 者를 採取 야 國民의 普 一. 學校의 愛國歌 을 普及케 事 通歌曲 를 編製 야 全國民 一. 家族間에 恩愛 道德心을 鼓發 가사 을 作 事 族 普通歌曲 一. 內外國 交際와 主與賓接待에 和樂한 禮調를 作 야 公私宴 에 應用케 事 一. 西洋樂器를 購入 事 一. 歌譜와 樂譜 修輯編纂 事이더라. (傍點引用者) 이상의 引用에서 唱歌 歌詞 精神歌 同胞警醒歌 愛國歌 間巷諷謠 歌曲 등의 용어를 목도할 수 있다. 이러한 여러 용어 중에서 그 上 位槪念이 唱歌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唱歌란 노래로 부르는 歌詞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노래로 부른다고 할 때 그 노래의 曲調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변을 얻 기 어렵다. 다시 말해 그 曲調가 과연 一定한 것이었던가 혹은 적 당한 노래투로 分節된 막연한 상태였던가의 判別이 문제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일정한 曲調를 想定할 수 있는 경우이며, 막연한 상태를 그 다른 하나로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唱歌란 학교에서 부르는 서양 곡조 를 말하는 것이다. 그 용어가 日本 文部省編 小學唱歌集 등에서 발단되었다는 사실에서 그것이 開化期에 수없이 성립된 학교교육 의 일환에 밀접히 관련된다. 교육에 있어 唱歌가 불리어지기 위해 서는 일정한 原則 즉 樂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樂譜는 서양 의 어떤 노래의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이 樂譜에다 愛國이라든가 새로운 文物을 노래한 詞(辭)를 여러 형태로 붙여 부를 수가 있었 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 학교교육과 관계없는 일반 사람들에

398 2. 新小說과 唱歌 있어서는 어느 特定한 樂譜와는 관계없이 막연히 어떤 리듬의 틀, 가령 4 4調같은 것에 의거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경우 문제되 는 것은 그 詞가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가에 있을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사실을 그 증거로 내세울 수가 있다. 鐵脚生이 일즉 德國 토른에라 地方에 遊 다가 農夫와 水 夫가 歌曲相如 聲을 聞 고 氣가 自奮흐며 肩이 自聳 야 德國國民歌 耳 順 고 (壹) 우뢰 소 귀에 마쳐 병장긔를 霹靂 치 부르지며 으라인(國權)으라인 德國 으라인 뉘가 너를 防備 고 으라인아 (後斂) 두려말아 父母國아 으라인 把守 여긔 잇스니 걱정말아 사랑 祖國아 으라인 把守 굿게 셨다.3) 이러한 紹介는 다만 그 詞의 內容이지 樂譜와는 무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많은 애국가類의 記名 혹은 無記名 작품들 도 樂譜와는 거의 무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例를 六堂의 그 것에서 들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실상 학교나 敎會 등 특수집단 쪽보다는 一般人을 대상으로 한 唱歌를 지속적으로 그리고 긴 作 品으로 쓴 것은 六堂 崔南善에 의해서이다. 唱歌라면 곧 六堂을 연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대표작 경부텰도노래 ( )는 그것이 唱歌에 값하는 樂譜를 구비하고 있다. 그 樂 譜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3) 大韓每日申報 1909년 5월 20일

399 Ⅳ. 國語國文學 硏究

400 2. 新小說과 唱歌 여기 보이는 樂譜는 스코틀랜드民謠( 밀발에서 )의 그것이다. 또 한 朝鮮遊覽歌(1928)에는 金永煥, 白禹鏞 등의 作曲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唱歌가 樂譜에 맞추어 불리어졌느냐의 여부에 대해서는 의문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이러한 西洋樂 譜는 짤막한 抒情詩에 통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六堂의 唱歌는 幾 百行을 넘는 장편인 것이다. 따라서 설사 이러한 唱歌를 소수의 학생층이 그 樂譜대로 불렀을지 모르나 대부분의 一般人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추측컨대 다만 一般人들은 7 5調리듬에 주 로 의거하여 그 字數에서 오는 律格에 의존했을 것이다. 律文樣式 으로 唱歌를 규정하는 것은 이때문이다. 이 리듬을 唱歌라고 명칭 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상과 같은 명칭의 문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새로이 開化 期歌辭라는 용어를 확인해 두어야 될 것이다. 즉 開化期歌辭라는 上位槪念을 설정하고 그 속에 種槪念으로서의 開化를 노래한 것, 唱歌로 된 것, 혹은 新詩 같은 것 등을 포함시킨다. 이러한 여러 要素를 함께 歌辭라는 명칭으로 부르고자 하는 것은 리듬을 基調 로 한 律文樣式의 傳統的 명칭에 연속시키기 위해서인 것이다. 歌 辭란 3 4 또는 4 4 調를 기반으로 하는 傳統的 律文樣式이며, 이 패턴은 다소 西歐的인 異質的 리듬의 침입을 입었다고 하나, 그러한 측면보다는 固有의 측면이 훨씬 강한 것으로 놓여있기 때 로 봄이 타당할 문이다. 따라서 唱歌는 樂譜를 同伴하지 않은 노래 것이다. 3) 開化期歌辭의 內容 ㄱ. 愛國歌類 에국가類라 함은 국가에 대한 애정과 自由獨立을 노래한 것으

401 Ⅳ. 國語國文學 硏究 독립신문에 발표된 21편의 가사는 전부 이 부류에 넣을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帝國新聞의 평양 국 녀학도의 학도가 혈죽 가 녀학교 국가, 皇城新聞의 閔忠正公殉國追悼歌 어하 大 韓同胞들아, 大韓每日申報의 춘절가 國債報償歌 檀君歌 獨立自由歌 등 初期에 발표된 대부분의 창가가 이 부류에 든다. 로 그 중 몇가지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셔울 슌청골 최돈셩의 글 대죠선건양원년 쥬독립깃버 세 텬디간에사 되야 진츙보국뎨일이니 님군 충셩 고 졍부를보호 세 인민들을 고 나라긔를 놉히달세 나라도을 각으로 시죵여일 동심 세 부녀경 식교육 사 마다 거시라 아모것도 몰은사 감히일언 옵내다4) 閔忠正公袍國追悼歌 天地至剛至正氣가 閔忠正의一刀로다 피가흘너 가되니 大韓帝國光榮이라 居諸光陰밧비오니 殉節 신今日이라 全國同胞二千萬이 一般追悼하려니와 數間基礎우리學校 遺澤尙新 시도다 奮 學徒더라 丁寧遺書어질손가 忠愛目的본을바다 獨立精神기를셰라 年年此日이노 를 紀念삼아 여보세5) 4) 독립신문 1896년 4월 11일 5) 皇城新聞 1906년 12월 1일

402 2. 新小說과 唱歌 ㄴ. 開化歌辭類 여기서 開化歌辭類란 앞에서 적었듯 開化라는 새로운 西洋 충격 을 막연하기는 하나 善 혹은 正의 方向性으로 보아, 그것을 드러내 어 宣傳 내지 啓蒙하려는 의도로 제작된 것을 뜻한다. 開化期의 歌 辭(노래체) 중 많은 분량이 이에 해당된다. 특히 이것은 당시 수 없이 設立된 新式學校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소위 學徒歌類 運 動歌類 등이 압도적인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사실이 이것을 증거하 는 것이다. 구체적인 各學校의 校歌類를 여기서는 일단 論外로 하 고, 당시 社會化된 各新聞에 발표된 것을 몇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勸學歌 (남셔져동 금계 리용션은 목격 일에 감동되야 우리 대한뎨국 소 학교 학도에게 두어말노 찬하 노 로 지여부치노라) 대한뎨국학도드라 이 말삼드르시오 광무십년삼월츈이 일기도화창 다 드르시오오날날이 삼월이십팔일이라 통감부의연회시오 외진신제회로다 군 량부영문압헤 록문을 놉히지여 한일량국넓은국긔 일광을희롱 고 한일량국기 들은 츠로단쟝 며 무동 와 불소리 흥을겨워 무궁무진 향풍은습의 고 환셩이진동 다 외국노소남녀 거리거리가득 다 괴로은이 병골 견딜수바이업셔 허허탄식 고 초려로도라올졔 아젼남학소학교를 홀연히지

403 Ⅳ. 國語國文學 硏究 그학교학도들이 비록어린동몽이나 구경 은불관 고 학이습지열심이라 얼시고됴흘시고 우리학도슈작이야 그마암을변치말고 진뎡말삼삼고지고 우리대한동포님네 오늘곤궁걱졍마오 아모죠록교육 셰 우리자뎨교육 세 밋노라 밋노라 학도말삼 밋노라 츅하 오츅하 오 졔학도 츅하 오6) 勸學歌 (김유 지음 챤셩시 칠구팔장곡죠와 갓치 지은 것) 1. 류수갖흔 셰월 졍업슴으로 한번 지나가면 다시 안오네 엇그져긔날의 쳥츈소녀들도 오날에 간 발이로셰 휴렴 힘들습시다 힘들습시다 공부를위 하여힘들습시다 나라위 여셔 힘들습시다7) 運動歌 天地秋色 가득 니 忠義精神 롭도다 우리學徒 團禮되야 自由運動 여보세 生存競爭此世界에 一步인덜辭讓 가 物品收取밧비 니 栗拾競走敏捷 다 兩人三脚一體되야 兼人之勇쟝 도다 6) 帝國新聞 1906년 3월 30일 7) 同上 1907년 6월 29일

404 2. 新小說과 唱歌 風雨갖치모 길에 先登旗取뉘당 가 어둔길을急히발케 提燈競走爽快 다 快勝千里一瞬間에 計算競走神奇 다 몸을솟쳐廣跳 니 飛將軍의勇猛이라 星矢갓치 른힘은 一二百歩競走로다 號令불너氣着 야 隊伍다시整齊 니 머리 신菊花가지 個個人의文明이라 太極旗를놉히드니 大韓獨立萬萬歲라8) ㄷ. 社會燈欄의 批判的 歌辭類 주로 大韓每日申報에서 1910년을 전후하여 대거 등장하는 이 社會燈欄은 歌辭로써 社會批判에 轉用한 한 典型性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의 基底는 朴殷植 張志淵 申采浩 등으로 대표되 는 志士型 知識人들의 新聞活用에 직결된다. 실상 朝鮮朝 知識人 의 現實批判機能은 上疏라는 형태에 있었다. 그 上疏로서의 批判 機能이 開化期에 수행된 곳이 바로 新聞의 社說欄이었다. 이 社說 이라는 硬文의 俗化에 해당되는 것이 소위 歌辭로서의 批判機能 인 것이다. 社會燈이라는 명칭이 이를 말해 주는 것이다. 이 부류 에 드는 歌辭로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특히 이러 한 것들은 無記名으로 되어 있으며, 高度의 政治性을 띤 것으로, 그 작자가 社說을 쓰는 사람 자신임을 확인케 한다. 花下總理 (一) 內部大臣宋秉畯은 趨走하던 小卒이라 聞見敎訓없섰으니 事君之道모를지라 犯分蔑紀하는것을 不足掛齒하려니와 總理大臣李完用은 그行爲를擧論컨대 8) 大韓日報 1906년 10월 30일

405 Ⅳ. 國語國文學 硏究 豚犬不若可痛일세 (二) 李完用氏들어보소 乙未政變말할진데 俄國公館播越時에 公의兄弟周旋이라 當當하신皇帝로서 外館播越웬일인가 皇室權威墮落함은 於此因하였으니 公의 罪가한가지오 (三) 李完用氏들어보소 俄日開戰한然後에 俄黨들을 鼠竄하고 日黨들이 得勢한즉 魂驚膽落公의心腸 日黨되기願하다가 五條約을締結할제 熱心賛助하였으니 公의罪가 두가지오 (七) 슲으도다 李總理여 韓魏公의子孫으로 반탁胃가 있었지만 陶菴같은 名賢으로 저른後孫意外로서 日得黃泉도라가서 列聖祖의靈魂이며 公의祖先公의아들 何顔對見하러는가 一進會야] (一) 韓國同胞許多中에 極悲極惡第一이라 此等人物누구런고 一進會가네로구나 私情없는이筆鋒이 無數論駁했거니와 近日情形드러본즉 凶燄之勢稍息하고 悔嘆者가많타하니 大慈大悲筆端으로 一次開導하리로다 (二) 一進會야一進會야 너도亦是人類로다

406 2. 新小說과 唱歌 人獸之判저區別이 義理有無이아닌가 父母國을背叛하고 掀天富貴할지라도 義理者의不取어던 他人奴隷되자고야 어찌참아背叛할까 義理上의關係로도 飜然退會할것이오 (七) 愚痴하다一進會야 可憐하다一進會야 百萬名의團體라고 네가恒常誇張하니 저럿타시大團體가 他人奴隷되지말고 祖國事에獻身하야 彈誠竭力하고보면 於公於私그利害가 오늘날의賣國賊과 何擇焉고何擇焉가 編餘漫筆 (一) 魔報記者韓석振은 宋秉畯의指囑받어 牛溲馬勃荒唐說로 人民耳目眩亂터니 陰險할사宋秉畯이 閔忠臣宅內庭事로 搆陷不測揭布코저 再三督促하는事에 絕對反對하다가서 社員遞免되였다니 그良心이可賀로다 (二) 大韓新聞저記者는 네아무리卑劣하야 無腦政府機關인들 觀光團의寄怪行動 極力賛成할뿐더러 一般輿論無視하고 正大報筆論駁하니 跖之狗의吠堯로다 不足掛齒하거니와 爾亦韓人이건마는 그心膓이可痛일세

407 Ⅳ. 國語國文學 硏究 (三) 觀光團의入叅者는 龍門에나올은 듯이 數百圓式虛費하야 朝鲜洋服떨처입고 활개치고가는모양 沐猴而冠彷彿하다 觀光生覺緊하거든 自由觀光못하고서 제돈드려觀光하며 他人拘束받고나니 그行動이可笑로다 (四) 窮凶極惡宋秉畯은 明月館主安淳煥의 各色料理얻어먹고 多少金錢貸用하야 그情誼가親密키로 典膳課長시키었고 日本까지同行터니 伊藤氏와交際할제 무삼感情있었는지 互相시忌한다하니 그情態가可憎일세 (五) 宮內大臣閔丙奭은 翡翏에게蟲惑하야 齒雜之聲浪藉하되 남의別室例事라고 한손접어容恕터니 妖惡할사저翡翠는 무삼不美또있든지 家庭風波大起란즉 齊家法이이렇고야 亡國大夫아니될가 그歷史가可觀일세 (六) 知覺없는 永宣君은 靑年敎育하겠다고 敦明義塾設立터니 一二年이못되여서 廢止함은무삼일가 쓸데없는花柳場엔 許多田庄典賣하야 累萬金을없애면서 文明機關學校에는 이럿트시無心한지 그思想이可惜일세9) 9) 이상은 靑丘大出版部 大韓毎日申報拔萃錄에 의거

408 2. 新小說과 唱歌 ㄹ. 義兵의 倡義歌 義兵歌辭는 엄격히 말해서 1910년 前後에 제작되고 불리었음 에 틀림없지만 그것이 活字化되어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후대 의 記錄에 의거할 수 밖에 없다. 이 義兵에 대한 開化期의 反應은 1910년 合邦 이전과 그 이후로 크게 구분된다. 그 이전은 아직도 朝鮮王朝라는 國家槪念이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義兵이 일종의 土匪 혹은 匪賊으로 간주된 듯하다. 화천 근처 비도에 보낸 격문 꾀심하다 너의 무리의 하는 바여 처음에 의병이라 닐카르니 사 람마다 이제 보니 한갓 나라에 근심을 끼치고 도로혀 민폐를 만들어 지내는 자에 남의 뫼를 파며 부녀들을 겁박하며 재산 을 뺏으며 점잖은 사람을 능욕하며 육축의 종자가 없어지고 그 행실은 강도라 일인을 보면 호랑이 만난 것 같고 10) 그러나 1910년 이후의 義兵에 대한 인식은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 으로 파악된다. 救國倡義歌로서 이른바 叙事的 長詩(1200여行)로는 신의관 창의가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의 중간단계로 우리는 1908 년에 씌어진 北嶽山人의 楚山吳水를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은 당 시 社會相의 制度的 變移過程을 가장 투철히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楚山吳水 北嶽山人 宇宙에 빗겨셔셔 南海風波 이러나고 古今事을 혜어보니 西山明月 러지니 日月도 薄蝕 고 黑洞洞漆 夜中에 山川도 變遷커든 嗟我同胞 二千萬은 하믈며 世上人事 杏花寒食 雨紛紛에 盛衰興亡 업슬손야 四面으로 悲歌로다 10) 독립신문 건양 1년 9월 12일

409 Ⅳ. 國語國文學 硏究 第一章解隊軍歌 隆熙以前軍人일세 於焉墓草 成宿 니 可憐 져 寃魄들 一盃酒나 慰勞 세 軍人업 져 獎忠壇 忠魂義魄 寂莫 다 拾余年從軍터니 一朝解散何罪런고 軍人의 生死命은 銃과 칼에 렷이니 歌曲號 어지니 軍致引節次 누가 랴 銃과 軍力 아사가니 重 목숨 러졌다 빈營門만 바라보니 不覺感淚 縱橫이라 恩賜盞이 다盡 니 第一章 八道農歌 五百餘年 堯舜世界 處處에 죽 소 日出耕田 入食에 含哺鼓腹 엿더니 巡檢主事 하나 日語不通 어이 며 年來에 貪虐官吏 侵漁百姓 魚肉이다 郡守稅監 들 政府에셔 退却이라 貪虐官吏 게오가니 義兵日兵 어이 고 副將至於 尉 지 門牌職啣 쓸슈업고 如干糧食 數間이라 沒 이 燒火 고 正校至於 兵卒 지 削髮冠宕 어이업다 玉石俱焚 中에 曖昧人命 다죽엇네 如干나문져 將校를 服裝行色 凄涼 다 이러한中 政府大臣 驛屯土의 荒蕪地 街兒邊人 唾笑 니 白晝人路 行치말소 外國人과協約 야 移民殖民 다 니 兵丁업 져軍部에 軍服出入 何面目고 可矜타 이百姓은 升天入地하올손가 延命生活 컨마 名譽를 도라보소 如干남은 져田土 義兵騷擾盜賊亂離 區區勸告 哀乞 야 무삼榮華 보랴시오 耕作 길 茫然 니 荒蕪地가 되리로다 當日死亡져 將校들

410 2. 新小說과 唱歌 荒蕪地가 되고보면 外國人의 開墾이라 片土업 人第生靈 大海岸에 나간다 나간다 나간다 一千萬이 나간다 ( 大韓每日申報 ) 신의관 창의가 申泰植 (前略) 장부의 울불지심 참을수가 전혀없다 노새를 잡아타고 만군중에 내려갈제 개같은 왜적들아 천시를 모르느냐 문경사는 신대장이 너를 잡으러 예 왔노라 일각이채못되어 적장머리베어들고 본진으로 돌아오니 날이 이미 황혼이라 앉아서 밤새우고 효두(曉頭)에 밥을 먹어 각처로 분송허여 적병을 퇴적허라. 巳時末 午時初에 현덕호 전망(戰亡)이라 각진이 혼합허여 사산분주 해산헐제 영솔을 수습허여 관각산들어가니 장곡도 심수헐뿐 인심도 순박허다. 춘천으로 얼양허여 수삭을 유숙허니 가평있는 수비대가 몰골로 올라온다.11) 4) 六堂의 唱歌와 新詩 開化期 空間에 놓인 六堂 崔南善( )의 律文樣式에 대한 偏向은 (1) 新詩 (2) 唱歌 (3) 時調 등으로 나타난다. 海에게서 少 경부텰도노래(京釜鐵道歌) 百八煩惱가 각각 대표적 年에게 筆寫本 文學思想5號 11) 1919년 이후 作品으로 추정

411 Ⅳ. 國語國文學 硏究 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ㄱ. 少年誌와 新詩 少年誌는 1908년 11월에서 1911년 5월까지 통권 23號로 된 綜 合誌이다. 이 잡지는 물론 당시에 간행된 500여 종의 敎科用圖書, 몇 少年誌 출현 전후의 開化를 살피려면 그 실질적 자료는 첫째 俞吉濬의 西遊見 聞(1895) 등의 단행본, 둘째 親睦會會報(1896) 太極學報(1906) 少年韓半島(1906) 漢陽報(1907) 夜雷(1907) 大韓自強會月 報(1908) 등의 綜合誌, 셋째 독립신문(1896) 大韓每日申報(1905), 네째 수백종의 敎科用圖書 등과 少年誌는 마땅히 비교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外面하고 마치 少年誌만이 전부인 것처럼 文學史에서 취급하는 것은 新體詩라는 用語의 허망만큼 오류에 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少年誌에 대한 關心이 있었다 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곧 少年誌가 여타의 刊行物과 다 개의 新聞 및 잡지 중의 한 點的인 존재에 불과하다. 른 特性을 지녔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 特性 중의 하나는 島山思想 과 中人階級性일 것이다. 趙容萬은 그의 저서 六堂崔南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安昌浩가 六堂을 사회에 열심히 추천한 것을 알 수 있거니와 六 堂도 安昌浩에 대한 사모와 존경이 대단하여 少年 제3년권의 책머리에다 삼가 이 詩集을 나의 가장 敬仰하는 島山선생 앞에 올려 海外에 있어 여러가지로 思慕하고 念慮하던 情을 表하옵나이 다 하고 그의 유명한 太白山詩集 을 安昌浩한테 올리고 있다. 六堂이 安昌浩의 지도 아래 靑年學友會의 설립위원이 되어 활동하 少年誌에 나타난 청년학우회의 사 업보고에서 볼 수 있다. 1910년 4월 15일에 발행한 少年제3 년 4권에 靑年學友會報라는 목차를 넣고 거기다가 六堂의 논 였다는 구체적 사실은

412 2. 新小說과 唱歌 靑年學友會의 主旨를 싣고 그 다음에 會報를 실었다. 李 光洙가 少年을 가리켜서 靑年學友會의 기관지라고 하였는 데 딴은 이 기사를 보면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인용에서 少年誌가 安昌浩( )가 창설한 靑年學友會(1909)의 機關紙에 準한다는 지적을 중시할 필요 설 12) 가 있다. 그것은 六堂의 초기 활동이 島山의 상당한 영향 밑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島山의 獨立方案의 核 心은 精神改造를 뜻하는 民族敎育에 있다. 독립운동 기간에 우리는 교육을 힘씀이 마땅할까요? 나는 단 언하오. 독립운동 기간일수록 더 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죽고 살고 노예되고 독립됨이 판정되는 것은 知力과 金力이오. 우리 靑年이 하룻동안 학업을 폐하면 그만큼 국가에 害가 되는 것이 또 국민에게 좋은 知識과 思想을 주고 애국의 정신을 격 오 발하기 위해 서적을 많이 간행하여 이 시기에 적합한 특수한 교 육도 하여야 하고 학교도 세우고 교과서도 편찬하여 해외에 있 는 이들에게도 가급적 교육을 실시하여야 하오. 島山의 이 13) 務實力行思想은 民族性의 改造라는 원칙론에 입 각한 일종의 準備論으로서, 朴殷植이나 申采浩의 투쟁론과는 현저 히 다르다. 六堂이 李光洙와 더불어 이 準備論에 찬동하고 있었다 는 사실은 그의 現實妥協主義와 계몽사상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 이며 동시에 그의 律文樣式의 本質을 밝히는데 기본요건이 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少年誌 창간호엔 海에게서 少年에 게 라는 詩가 권두에 실려 있다. 海에게서 少年에게 一. 텨 ㄹ썩, 텨 ㄹ썩, 텩, 쏴 아, 12) 趙容萬 六堂崔南善 三中堂 pp ) 주요한 安島山全集 三中堂 p

413 Ⅳ. 國語國文學 硏究 린다, 부슨다, 문허바린다. ㅅ 泰山갓흔 놉흔뫼, 딥턔갓흔 바위 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 디 하면서, 린다, 부슨다, 문허버린다, ㄹ썩, 텨 ㄹ썩, 텩, 튜르릉, 콱, 二. 텨 ㄹ썩, 텨 ㄹ썩, 텩, 쏴 아. 텨 내게는, 아모것, 두려움업서, 陸上에서 아모런, 힘과 權을 부리던 者라도 내압헤와서는 못하고, 아모리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디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압헤는, ㄹ썩, 텨 ㄹ썩, 텩, 쏴 아. 三. 텨 ㄹ썩, 텨 ㄹ썩, 텩, 쏴 아. 텨 나에게, 뎔하디, 아니한 者가, 只今 디, 업거든, 통긔하고 나서보아라. 秦皇室, 나팔륜, 너의들이냐, 누구누구누구냐 너의 亦是 내게는 굽히도다, 나허구 겨르리 잇건오나라. ㄹ썩, 텨 ㄹ썩, 턱. 튜르릉, 콱. 四. 텨 ㄹ썩, 텨 ㄹ썩. 텩, 쏴 아. 텨 됴고만 山모를 依支하거나, ㅅ ㅅ 도 쌀갓흔 뎍은섬, 손 벽만한 을 가디고, 고속에 잇어서, 영악한테를, 부리면서, 나혼댜 거룩하다 하난者, 이리둄 오나라, 나를 보아라

414 2. 新小說과 唱歌 ㄹ썩, 텨 ㄹ썩, 턱. 튜르릉, 콱. 五. 텨 ㄹ썩, 텨 ㄹ썩, 텩, 쏴 아. 텨 나의 될이는 하나잇도다, 크고길고, 널으게 뒤덥은바 뎌푸른 하날, 뎌것은 우리와 틀님이 업서, 뎍은是非 뎍은쌈 온갓모든 더러운것업도다. 됴 위 世上에 됴사람 텨렴 ㄹ썩, 텨 ㄹ썩, 턱. 튜르릉, 콱. 六. 텨 ㄹ썩, 텨 ㄹ썩, 텩, 쏴 아. 텨 뎌世上 뎌사람 모다미우나, 그中에서 한아 사랑하난 일이잇스니, 膽크고 純情한 少年辈들이, 才弄텨렴, 貴엽게 나의품에 와서안김이로다. 오나라 少年輩 입맛텨듀마. ㄹ썩, 텨 ㄹ썩, 턱. 튜르릉, 콱. 텨 이 작품은 卷頭詩로 씌어진 것이며, 발표 당시 詩라고만 표기 되었고 또한 자기 署名을 하지 않았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每 號마다 실리는 卷頭詩는 그 號의 특집을 드러내는 것이며 따라서 창간호는 바다 特輯號인 것이다. 이 卷頭詩는 처음에 대부분 外國 詩를 번역 내지 번안한 것에 속한다. 海에게서 少年에게는 바 이른의 Childe Harold s Pilgramage(1812)의 끝부분 소위 大洋(The Ocean)의 飜案에 가까운 것이며, 이는 少年三년 3號에 原詩 대 조가 나온다는 사실로써 증명된다.14) 海에게서 少年에게를 두고 李光洙는 서양시의 본을 받은 詩 로 인쇄가 되어서 세상에 발표된 것으로는 맨처음 15)이라 했다. 이 14) 金允植 近代韓國文學硏究 第一章 一志社 참조

415 Ⅳ. 國語國文學 硏究 경우 西洋詩란 日本의 新體詩와 비슷한 개념으로 파악된다. 日本의 新體詩는 時勢의 進步에 應해서 발생한 것으로 그 作法은 다음과 같다. 첫째 格法이 자유로울 것, 둘째 規模가 廣大할 것, 세째 言語 가 풍부할 것, 네째 語格이 現代語일 것, 다섯째 字句가 勁健할 것, 여섯째 旨意가 明晰할 것, 일곱째 新奇하고 淸新할 것 등이다.16) 이러한 作詩法이 海에게서 少年에게속에 작용되어 있음을 부 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作法은 다분히 新知識 輸入 및 普及의 次元 에 속하는 것으로 일종의 論說의 律文化로 규정된다. 六堂은 이러 한 詩法을 舊作三篇 꽃두고등에서 약간 시도하다가 스스로 포기하기에 이르는데 그 이유는 여러가지로 추측되나, 新知識 普及 方法으로 그 形式이 알맞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 다. 그가 계속 實驗 속에서 방황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가 詩를 위하야 만히 생각하고 만히 힘쓴 것은 그가 여러 가지 形式의 詩體를 시험해 본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우에 인용한 바와 같이 그는 서양시의 본을 바다서 글자수가 규칙적 으로 같은 시형식을 만들어보려고 하였으나 그 후에는 차차 그 것을 버리고 아직 글자수효에는 제한이 업는 산문시체와 또 그 와 반대로 글자수효에 분명한 제한이 있는 노래체 그 중에도 일 본의 이마요오(今樣)에서 나온 七 五조를 만히 사용하였고 융 희 삼년 끝에서부터 시조체로 만히 기울어졌다. ㄴ. 唱歌에의 偏向 17) 六堂의 散文詩體(新體詩)를 포기한 이유와 표리의 관계에 있는 것이 노래體 즉, 唱歌에의 집착이다. 이 唱歌에의 熱精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증명하기란 실로 용이한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그가 15) 李光洙 六堂 崔南善論 朝鲜文壇 6號 p.82 16) 井上哲次郎 新躰詩論 帝國文學 3卷 1號 pp ) 李光洙 前揭文 p

416 2. 新小說과 唱歌 유명한 7 5調 日本리듬의 日本鐵道歌를 모방하여 래 를 지은 것은 경부텰도노 海에게서 少年에게보다 9個월 먼저인 1908 년 3월이었다. 이 노래體에의 偏向은 그가 散文 개척까지를 중단한 점에서 단 少年창간호에 快少年世界周遊 적으로 드러난다. 가령 그는 나는 말노만 배호고 귀로만 듯난것보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 時報 를 썼다. 로 염량한 것을 낫게 아난 性味인 故로 前學校에 다닐 에도 漢 拏 白頭 두 山 우에 噴火口餘地가 잇단 것을 말노만 듯고는 마 음에 시원티 아니하야 暗夜에 남모르게 實地視察을 하랴하 十年의 宿願을 비로소 이루어 世界周遊의 길에 오르난 崔健一은 南大門停車場에서 이 부분은 李光洙가 일찌기 지적한 모자가 다 지그러지고 몬 지가 켜켜히 안진 갓을 뒤통수에 제쳐스고 라는 귀절과 함 다 18) 께 六堂이 시도한 言主從文體의 새로운 散文이다. 그러나 六堂은 靑春(1914) 창간호에 그것과 같은 내용을 世界一週歌라 하여 노래체(唱歌)로 쓰고 있다. 一 漢陽아 잘있거라 갓다오리라 압길이 질펀하다 水陸十萬里 四千年 녯도읍 平壤지나니 宏壯할사 鴨綠江 큰쇠다리여 雄大한 피레네의 山脈을 넘어 薔薇레몬橄欖의 香에 싸 18) 少年 창간호 p

417 Ⅳ. 國語國文學 硏究 葡萄輸出港으로 世界에 名난 보르도港繁華를 구경하고서 쓰카야灣에 배를 우고 造船業이 盛大한 난투를 거쳐 로와루江거슬녀올나가보고 사라켄人 敗績地투루지내매 안 륵색시의 奇蹟行하던 오를레안 저 城이 반가울시고 여긔서 몇 時間을 北으로 가면 오래두고 그리던 서울이라 파리야 얼골로는 첨이다마는 世界文明中心에 先鋒兼하야 이세상 樂園이란 다운 일홈 오래도다 들은지 우뢰퍼붓듯19) 왜 六堂이 散文詩體를 포기했으며, 또한 같은 內容을 7 5調唱 歌로 쓰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왜 開化期小說이 후기에 이를수록 開化思想을 고취하기는 커녕 古代小說보다 더 후퇴한 家父長制的 蓄妾關係 묘사로 시종하고 말았는가를 解明하 는 것과 對應關係에 놓인다. 여기에는 開化空間에 놓인 小說의 장 르性으로서의 堅固性의 法則, 唱歌의 리듬상의 한계 등등의 복잡 한 설명이 요청될 것이다. 여기에 강요되는 여러 설명 방법 중에 서 六堂에만 국한시켜 살핀다면 다음과 같아질 듯하다. 첫째 開化知識을 보급시키기 위한 文字行爲 중에서 노래體가 가장 합당하다고 판단된 것은 노래體가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反 19) 靑春 창간호 p

418 2. 新小說과 唱歌 復 때문이다. 리듬이란 生理的 측면을 그 固有의 법칙으로 한다. 記 憶함에 노래體보다 더 쉬운 것이 없다는 것은 이 리듬의 生理性이 며 따라서 이것은 功利的 측면이다. 둘째 六堂은 종래의 傳統리듬 의 패턴인 44調와는 달리 처음부터 7 5調라는 日本리듬에 의거하 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知識量의 확대와 관계되면서 동시에 新知 識을 지나치게 의식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추측된다. 4 4調가 유 교적 이념을 표현하는데 적합한 형식이었다면, 新知識을 표현함에 는 그와 다른 形式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내용이 새로운 形式을 강요한다는 것은 표현일반의 원칙이기 때문 이다. 그가 自由詩 散文詩體의 경지에까지 詩를 몰고가지 못한 것 은 그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文化的階層이 아직 형성되어 있지 못한 사실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 社會燈欄의 批判的 歌辭 및 초기의 勸學歌 類 愛國歌類가 傳統的 리듬인 44調에 바탕을 두고 있음은 그들 다. 각 新聞에 발표된 의 의식이 新知識을 向해 열려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확 신을 갖고 있지 않음과 對應關係에 놓인다. 즉 옛 理念과 새 이념 의 갈등 속에 놓여있었음을 증거하는 것이 된다. 이 사실을 보다 확실히 증명해 놓은 것이 六堂의 노래體 唱歌이다. 그의 世界一週 歌 를 분석해 보면 노래體가 어떻게 새 理念의 표현이라는 散文機 能을 대행할 수 있었는가를 확연히 알 수 있다. 앞에 인용된 世 界一週歌 에는 그 한 聯마다 解說文이 다음과 같이 붙어 있다. 피레네(Pyrenees) ; 프랑쓰와 이쓰파니아의 國境을 劃한 山脈. 레몬(Lemon) 東西아시아 地方 原山의 常綠樹. 果實은 楕圓形黃 色. 짜안누 륵(Jeanne D Arc, ) 프랑쓰 女傑. 프 랑쓰가 리텐으로 더불어 戰敗하야 오를레안城만 남앗을 적에 天命을 비닷다하야 二八少女로 率兵解圍하고 一絲로 扶鼎한 後 敵軍에 잡혀

419 Ⅳ. 國語國文學 硏究 焚殺을 입으니라 20) 이러한 解說文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장마다 그림이 삽입되어 있다. 이러한 方法은 경부텰도노래에서 비롯되는 六堂의 唱歌 전부에 해당된다. 실상 이러한 方法은 開化 空間에 놓인 많은 敎科 用圖書의 내용을 노래體로 軟文化시켜 심정적인 면에 침투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사실의 중요성은 開化期小說과 관련시 켜 바라볼 때 더욱 증대된다. 開化期小說은 그것이 새로운 開化知 識을 감당하지 못하고 새로운 思想擔當機能을 잃어버릴 때, 플롯 中心의 탐정소설로 轉落한다. 따라서 점점 知識層과는 유리되어 婦女子들 층으로 옮겨져 마침내 六錢小說類와 결합되고 만다. 이 와는 달리 開化知識의 전달 보급방법의 하나가 노래體 唱歌였던 셈이다. 즉 開化期에서 小說이 담당할 기능을 리듬化된 노래體가 담당한 것이라 해도 되리라. 따라서 六堂에 있어 노래體에의 偏向 은 新知識 보급의 욕구를 뜻하는 것이지 文學的인 집착을 뜻하지 않는다. 고쳐 말하면 六堂은 文學과는 무관하거나 거의 無關하다. 文學行爲는 六堂에게 아직도 道具로 비친 것이며, 이 사실은 그가 朝鮮社會의 마지막 文人이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며 동시에 계몽기 의 문학적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 노래體의 限界性이 뚜렷이 드러난다. 이미 7 5調 속에 가둘 수 없도록 知識量이 보급되었음에도 불구하 고, 그리고 그 新知識을 획득하더라도 그것이 總督 憲兵政治 밑에 서는 無意味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六堂은 朝鮮心으로 기울게 된다. 실상 그의 朝鮮主義는 光文會를 조직하고 韓國古典을 발간 하기 시작한 1910년대부터 그 싹을 보인다. 그가 時調를 창작하기 시작한 것도 少年誌에서부터이며, 靑春誌에서는 더 많은 時 20) 同上書 pp

420 2. 新小說과 唱歌 調가 님 내속 등의 제목으로 씌어지며 그 集成이 百八煩 惱 (1926)로 나타난다. 비록 근거가 빈약한 것이기는 하나 이 時 調에의 집착은 韓國人種이 유태인종처럼 音樂的 叫唱的, 그리고 樂 器 中心이 아니라 聲樂的人種에 속한다는 學問的 信念에 의거했던 것이다.21) 요컨대 六堂이 律文樣式에 현저히 偏向되었다는 점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5) 노래體와 리듬의 意味 開化期는 西歐의 近代라는 개념이 朱子學的 질서라는 單一世界 觀과의 충돌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넓게는 韓國, 中國, 日 本이라는 東洋三國의 공통사항에 속하는 일이다. 따라서 開化期의 意識構造와 儒敎克服方式의 과제는 엄밀히는 韓國開化期만의 것이 아니다. 여기에 이른바 文化型比較의 연구과제가 놓인다. 따라서 商務印書館의 日本譯 中國譯 西洋書册을 비교검토하는 일이 매우 긴요한 일에 속한다. 이러한 과제가 끝난 다음 차례에 韓國開化期 의 특성을 살펴야만 비로소 方法論的인 확립이 가능해질 것이다. 韓國開化期의 文化的 측면의 한 特性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 이 현저히 律文樣式에 偏向되어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러한 結論導 出은 開化期小說과 비교 검토한 후에 가능한 판정일 것이다. 이 경 우 律文樣式의 偏向性이란 노래體를 뜻한다. 唱歌라고 하기도 하 나, 校歌類나 기독교 찬송가류를 제하면 실제로는 樂譜를 가진 노 래라고 할 수 없다. 설사 경부텰도노래 朝鮮遊覽歌 등이 樂譜를 권두에 제시해 놓았지만 실제로 불렀는지는 매우 의심스럽 다. 그렇다면 이 노래體는 일종의 律文樣式에 불과한 것이다. 律文 21) 六堂 時調胎盤으로서의 朝鮮民性과 民俗 朝鮮文壇 17號 p

421 Ⅳ. 國語國文學 硏究 樣式의 핵심에 놓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리듬 概念이다. 이 리듬 意識은 주기적으로 되돌아오는 단조로움이다. 그것은 空間的 배열 에서 時間的으로 배열된다. 空間的 多樣性은 時間的運動에서 出 發한 形態의 統一에 따른다. 이 運動이 명랑함의 원천이다. 이 변화 의 快感은 제한된 유효성을 갖는다. 22) 더 美學的인 설명을 가한 異質的인 요소를 同質化하는 機能이라는 것, 副 次的인 것을 排除하고 主된 관심을 선명히 하는 기능 具體的 작품의 全體에 관한 統一的 美的 분위기를 창조하는 기능 등을 다면 리듬이 포함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헤겔的, 루카치的 리듬의 美 學思想을 믿는다면 開化期 律文樣式의 偏向을 보다 合理的으로 說 明할 수 있게 된다. 즉, 開化期가 新舊사상 및 가치관의 혼란의 극 한상태라는 사실을 일단 승인한다면 이 혼란속에 어떤 方向性으로 서의 文化的 統一 혹은 統合에 이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 다면 그 혼란에 統一的 美的 분위기를 生理的인 차원과 결부시 킬 수 있는 機能이 요청되지 않을 수 없다. 그 기능이 바로 리듬 意 識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리듬 意識의 開化期의 樣相은 4 4調와 7 5調임을 앞에서 이미 보였다. 4 4調는 물을 것도 없이 傳統的 인 것이다. 한편 7 5調는 六堂에 의해 日本 것을 도입한 것이다. 두개의 리듬 意識의 차이야말로 開化期律文樣式(노래體) 解明의 關鍵에 해당된다. 그것은 리듬과 그것을 대변하는 階層과의 對應關 係를 成立케 하기 때문이다. 4 4調階層과 7 5調階層의 대립구성 중 어느 쪽이 反文明主義냐하는 문제와 어느 쪽이 韓民族의 歷史 展開 과정에서 主體的이냐하는 문제의 究明은 바로 文藝社會學의 金允植 과제에 속한다. 22) F.G. Jünger, Rhythmus Und Sprache imdeutschen Gedicht, Stuttgart, 1952, S

422 執筆者 槪要 李光麟 Ⅰ. 言論機關과 學會의 活動 1. 言論機關의 活動 李海暢 2. 學會의 活動 李鉉淙 Ⅱ. 近代敎育의 普及 1. 各級敎育機關 孫仁銖 2. 敎科書編纂 白淳在 Ⅲ. 基督敎의 展開 1. 基督敎의 展開 白樂濬 Ⅳ. 國語 國文學硏究 1. 國語硏究 李基文 2. 新小說 李在銑 3. 唱歌 金允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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