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이야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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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목차 1 명십삼릉( 明 十 三 陵 )을 말한다 8 2 명청상방: 관상결탁으로 생겨난 소금전매업자 13 3 명나라시대의 통신방법은? 15 4 명나라의 정보기관: 동창, 서창, 대내행창, 금의위 18 5 명나라때의 대이민 20 6 명나라때의 의문의 북경대폭발 23 7 명십삼릉 : 명나라황제는 16명인데, 왜 13황제만 묻혔는지? 25 8 명나라의 임인궁변( 壬 寅 宮 變 ), 속칭 궁녀모반( 宮 女 謀 叛 ) 27 9 십자군의 동정( 東 征 )과 몽골군의 서정( 西 征 ) 몽골이 일본정복에 실패한 이유는? 아인 잘루트(Ayn Jalut) 전투: 몽고군의 서방정벌중 최대의 참패 몽고인들은 왜 일본을 점령하지 못했는가? 카미카제( 神 風 ) : 몽고의 제1차 일본침공 원( 元 )나라 멸망이후의 몽고제국 원나라의 황제들은 왜 능묘가 없는가? 천년간 잠든 서하( 西 夏 ) 문화를 누가 깨웠는가? 북송( 北 宋 )의 비참한 최후 북제문선제( 北 齊 文 宣 帝 ) 고양( 高 洋 ) : 술고래 황제 황당한 왕조 남한( 南 漢 ) : 관리는 모두 환관으로 조어성전투( 釣 魚 城 戰 鬪 ) : 송의 가장 성공적인 몽고군 방어전 대송제국은 어떻게 멸망하였는가? 수당시대 일본과 중국의 외교전 당나라의 환관취처( 宦 官 娶 妻 ) 고징( 高 澄 ): 황제에게 주먹질한 사상최초의 권신( 權 臣 ) 수당대운하( 隋 唐 大 運 河 ): 지하의 휘황 77

4 26 중국역사상 가장 화려한 여행 중국역사의 분수령 당나라때 환관과 대신간의 한판 승부 당나라는 인간지옥이었다 수( 隋 )나라 대운하( 大 運 河 ) 중국역사상 가장 싱거운 전쟁 당나라때는 왜 귀족들이 공주와 결혼하지 않으려 했는가? 당나라의 굴욕 삼국시대의 명검( 名 劍 ) 호태후( 胡 太 后 ) : 황태후에서 기녀로 남조( 南 朝 ) 송( 宋 )의 황당한 골육상잔 삼국시대 사대명마 흉노( 匈 奴 ) 명칭의 유래 칠국지란( 七 國 之 亂 ): 바둑 한 판에서 비롯된 내전 실크로드: 동서문명의 상호오해 한( 漢 )나라와 로마제국의 비교 한선제( 漢 宣 帝 )는 왜 황후의 구족을 멸하였는가? 왕망( 王 莽 )의 황위찬탈후 발생한 사건들 동한왕조내부의 피비린내나는 투쟁: 외척과 환관 중국의 의술명가 : 서씨가족 서복( 徐 福 )은 일본으로 건너갔는가? 진나라시대 백년간의 사천이민현상 병마용( 兵 馬 俑 )의 발견자는 누구인가? 아방궁( 阿 房 宮 )의 이름의 유래 전국옥새의 뒷이야기 148

5 51 화씨벽( 和 氏 壁 )과 전국옥새( 傳 國 玉 璽 ) 순식( 荀 息 )과 이극( 里 克 ): 진( 晋 )의 가장 참혹한 궁중정변 중국고대 스와핑으로 인한 멸족사건 현대중국인의 조상은 어디에서 왔는가? 진( 晋 )나라의 형제지쟁( 兄 弟 之 爭 ) 오월( 吳 越 ) 전쟁의 심리전술 갑골문( 甲 骨 文 )의 살인비밀 허창인( 許 昌 人 ); 화석과 중국인의 기원문제 중국 기녀( 妓 女 ) 역사상 중요한 3명의 남자 공주와 옹주 중국 최고의 여황제 측천무후~!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중국의 개국황제들은 왜 공신을 죽였는가? 왜 전세계에서 중국에만 환관이 있었는가? 신중국 개국대전의 비화 중국역사상 수도선택의 원칙 중국고대의 전쟁포로 처리방법 [중일전쟁] 군벌과 중국군대 위그르족 향비 중국 고대 참혹형벌 중국 황제의 여성 편력사 일본인들의 만행, 난징( 南 京 )학살 사건 중국역사를 출렁이게 했던 시안사변( 西 安 事 變 )의 진실 중국역사를 후퇴시킨 마오( 毛 )의 문화대혁명 역사를 거꾸로 쓴 약진운동의 진실 310

6 76 국공내전( 國 共 內 戰 )과 마오( 毛 )의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불가사의한 대장정,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운동과 중국공산당 탄생에 관하여 국공 내전 중국은 술과 음식의 나라 흉노의 황제 묵특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악녀, 피바람 가남풍 두 자매의 다른 길-송경령과 송미령 황금가족의 분열 한영제( 漢 靈 帝 ): 부자가 되고 싶었던 황제 병마용갱은 누가 불태웠는가? 청의 중국 지배(2) - 호복 변발과 팔기( 八 旗 ) 그리고 녹영( 綠 營 ) 청의 중국 지배(1) - 이한제한( 以 漢 制 漢 )과 한간( 漢 奸 ), 섭정 다이곤( 多 爾 袞 ) 명조의 흥망성쇠-명의 멸망 명조의 흥망성쇠- 양명학의 등장 시기 모택동이 탄복한 인물 `증국번`의 지혜 명나라가 멸망한 진정한 원인은? 중국고속철의 환상: 2조위안 시장을 주고 어떤 기술을 받았는가? 항우: 잔학해서 패망했는가 주산( 珠 算 )의 기원 황제사후 비불발상( 秘 不 發 喪 )의 비밀 주원장은 개국공신들을 어떻게 죽였는가? 남당( 南 唐 ): 독살의 역사 하일도( 夏 一 跳 ): 청나라 궁중의 무림고수 대명제국을 날린 가장 큰 심복지환 流 賊 ----이자성과 장헌충 427

7 명십삼릉( 明 十 三 陵 )을 말한다 :14 자금성( 紫 金 城 )에서 십삼릉( 十 三 陵 )까지. 이것은 명나라때 대부분의 황제들이 반드시 거쳐간 길이다. 단지 3명이 예외이다. 첫째는 명태조 주원장이다. 그는 남경 자금산의 아래('효릉")에 묻혀 있다. 둘째는 건문제이다. 그는 자신의 숙부인 연 왕 주체(즉 나중의 영락제)에게 패배당하여, 남경성이 함락될 때 행방불명이 되었다(전해지는 바로는 불바다 속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죽어서도 묻힐 장소를 얻지 못했다. 셋째는 제7대황제인 경태제( 景 泰 帝, 明 代 宗 )은 복벽한 영종( 英 宗, 토목지변으로 몽골 오 이라트에 포로로 잡혔다가 나중에 풀려나서 돌아옴)의 궁정정변으로 죽임을 당하였는데, '왕'의 예로 옥천산 북쪽 금산구에 묻힌다. 그가 생 전에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두었던 명십삼릉지구의 분묘는 폐기되는데, 미완공의 이 묘자리는 백여년후에 명광종 주상락의 경릉( 慶 陵 )으로 꾸 며지니, 어쨌든 쓸데없이 공사한 것은 아니었다. 건문제의 황제자리를 빼앗은 주체는 북경으로 천도하고, 자금성을 만든다. 위세를 드러내고, 영화부귀를 누리면서 죽음에도 대비했다. 서북쪽 의 창평 천수산 아래에 호화로운 능묘를 만드니, 바로 장릉( 長 陵 )이다. 그 규모와 기세는 명태조의 효릉에 비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다. 장릉의 보성( 寶 城 : 城 壁, 墳 山, 方 城 을 포함함) 및 지궁은 주체가 등극한 후 7년째 되는 해(1400년)부터 착공했고, 4년후에 완공한다. 지면의 주체시설인 은전(제사용)은 지금 북경지역에서 보존된 최대의 그리고 완벽하게 보존된 명나라 건축이다. 또한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의 목 조건축물중 하나이다. 동서의 길이와 기세는 자금성의 태화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영락제는 문치무공방면에서 큰 일을 벌이는 것을 좋 아했을 뿐아니라, 죽고나서의 사후에 대하여도 조금도 소홀히 처리하지 않았다. 허대령( 許 大 齡 ) 선생은 장릉이 십삼릉중 가장 긴 신도( 神 道 ), 가장 큰 비정( 碑 亭 )과 비( 碑 ), 최대의 향전( 享 殿 )과 최대의 보성을 지닌 것을 제 외하고 농담식으로 이렇게 말했다: "정화하서양의 목적을 보면, 그가 정화를 해외로 보낸 것이 건문제를 찾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이는 국위 를 선양하고 해외에서 보물을 찾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장래 장릉에서 영락대전은 발굴될 가능성이 크지는 않지만, 장릉 및 경릉, 헌릉에서 정화가 해외에서 가지고 온 주보, 향료가 있을 가능성은 아주 크다." 주체는 개국황제인 주원장에 다음가는 중요인물 이다. 창업형군주에 속한다. "정난지역", 천도, 변방수비, 원정(그는 타타르, 오이라트의 두 부족을 북벌하는 도중에 죽었다), 및 능묘건축에 이르기까지 '살아서는 위대함을 죽어서는 영광을' 추구했다. 장릉은 그에게 기념비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장릉의 주위에, 12개의 능이 있다. 모두 주체의 자손이다. 그들은 주체의 유산인 자금성과 금란전을 승계했다. 그리고 영락제의 삶과 영락제 의 죽음을 따라했다. 그리하여 일률적으로 토목공사를 크게 벌여서 능묘를 만들었다. 그리고 부장할 보물들도 긁어모았다. 인간세상의 황금미 옥, 능라주단을 모조리 가져가려고 했다. 장릉의 보물은 아직도 수수께끼이다. 만력황제의 정릉은 이미 1956년에 발굴되었다. 출토된 대량의 부장품을 보면, 광금단료가 160필에 달하 고, 황제의 왕관 및 용포는 모두 금사금선수직으로 만들었고, 황후의 봉관도 보통이 아니었다. 보석을 백여개, 진주를 오천여개나 상감했다. 구천지하에서 보석가게를 열어도 될 정도이다. 그와 비교하면 염라대왕이 오히려 가난뱅이로 보일 것이다. 정릉은 십삼릉 중에서는 중등규모에 속한다. 방산의 서남쪽 대석와( 大 石 窩 )에서 단계( 丹 階 )로 쓸 돌(길이 3장, 두께 5척)을 운반해오는데, 2만 의 운반공들이 꼬박 28일간(하성서의 <<양궁정건기>>) 운반했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재력을 들였는지 알만할 것이다. 그외에 유릉, 무릉, 태릉, 강릉, 영릉, 소릉, 경릉, 덕릉등등도 마찬가지이다. 명십삼릉( 明 十 三 陵 )을 말한다 7

8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규모가 비교적 작은 헌릉에 동원된 군부( 軍 夫 ), 공장( 工 匠 )이 23만명이다. 십이릉중 가장 작은 편인 경릉에도 10만명 이 동원되었다. 능 하나를 만들 때마다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피와 땀을 흘렸겠는가? 예를 들어 장릉을 만드는 과정에서, 주체는 일찌기 사람을 보내어 천수산 시공부지에서 제문을 지어서 죽은 일꾼들을 위로했다. 죽은 자를 위하여 묘를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인력 재력을 낭비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살아있는 사람을 죽였는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중 국역사상 어두운 밤과도 같은 우매함과 암흑이다. 사망은 생명보다 중요하다. 생활보다도 중요하다. 이런 고대 제왕들의 사고방식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그들은 자신의 위하여 능묘를 만 드는 동시에, 무형중에 국가의 군주제시대를 점차 거대한 분묘로 몰아넣었다. 봉건사회는 제왕들의 사치와 혼용 가운데 마지막을 맞이한다. 인류의 발전사는 바로 문명과 야만의 투쟁과정이다. 문명은 최종적으로 야만에 승리한다. 황제는 결국 죽는다. 또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황제가 모조리 죽은 후에, 문명은 비로소 탄생하고, 비로소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제왕의 무덤 속에서 몸 부림쳐서 빠져나온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어쩔 수 없이 그 시황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시황은 장성을 쌓으면서 수많은 백성을 죽였다. 원래 의도는 좋은 것이었을 것이다.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게 하도록 외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었다. 최소한 절대적인 이기심에서 벌인 일은 아니다. 하물며 민간전설에는 맹강녀가 한번 곡을 하자 장성이 무너졌다고 하지 않는가. 장성과 십삼릉을 비교하면, 명나라황제들의 황음과 이기심이 드러난다. 이는 혼자서 누리기 위한 '장성'이다. 백성의 선혈과 뼈를 가지고 자신 을 위하여 개선문을 만든 것이다. 하물며 당시에는 어느 과부가 이 무덤 위에 엎드려 통곡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통곡할 자유마저 빼앗긴 것 이다. 명나라때는 심지어, 금나라 원나라의 소수민족의 비빈순장제도를 그대로 썼다. 명영종이 죽기 전에 비로소 유조로 폐지시킨다. 이는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의 제왕들이 감히 하지 못했던 일들이다. 지금 십삼릉 덕릉의 동남쪽에 있는 동정( 東 井 )과 정릉 서북쪽에 있는 서정( 西 井 )(당시에는 동서낭낭궁이라고 불렀다)에는 지금도 분홍색의 담장과 녹색 유리기와로 된 건물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이곳은 영락제가 순장한 비빈들을 묻은 곳이다. 정말 악독하다. 이처럼 아름답고 살 아있는 희생물을 선택하다니. 황제는 죽으면서도, 여색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했다. 살아있는 사람을 금은주보와 마찬가지로 모조리 데려갔다(못먹는 것은 싸가지고 간다 는 말도 있다). 비빈들이 죽을 때 모두 정원에서 식사를 하고, 식사를 마치면 집안으로 끌려들어간다. 이때 곡소리가 전각을 진동한다. 집안 에는 소목상( 小 木 床 )을 두고, 그 위에 서게 하고는, 밧줄을 위에 매달아 둔다. 그리고 머리를 그 안에 집어넣게 하고, 아래 소목상을 걷어낸 다. 이렇게 하면 목이 졸려서 죽는 것이다. 이들 미인들이 황제를 위하여 우는 것일까? 자신을 위하여 우는 것일까? 울어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십삼릉은 통곡한다고 해도 무너지지 않는다. 제왕의 분묘는 백성들의 백골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들의 영광은 항상 짙은 음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 또 하나...나는 십삼릉을 다 돌아보았다. 느끼는 바가 있다: 다행히 명나라의 국운이 다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계속하 여 지어나갔다면, 교외의 좋은 논밭은 모두 다 차지하지 않았겠는가? 백성들은 고혈을 모조리 빨리지 않았겠는가? 거기의 대리석, 한백옥, 화 강암은 모두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만든 것이 아닌가? 명십삼릉( 明 十 三 陵 )을 말한다 8

9 겨우 십여명의 황제만으로도 수백년간 백성들을 고생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다: 고염무와 같은 지식인이 왜 황제의 무덤에 엎드려 곡을 했는가? 호소를 하지도 않고, 성토를 하지도 않고, 애 도를 했는가? 서생의 곡은 어떤 때에는 궁녀의 곡보다도 더욱 애매하다. 고염무는 명나라가 망한 후에 염무( 炎 武 )로 개명하고, 항청투쟁에 가담한다. 청나라 순치16년(1659년)에 그는 47세였다. 아마도 가능성이 없 다고 보았는지, 강소 곤산에서 북경으로 온다. 먼저 배알한 것은 자연히 한족통치를 상징하는 명릉이다. 분명히 몇번 절을 했을 것이다. 남은 19년의 기간동안 그는 시종 그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6번이나 십삼릉을 배알한다. 그리고 <<창평산수기>> <<경동고고록>>등 시문을 쓴다. 그 리하여 무형중에 가장 유명한 명십삼릉의 묘지기중 하나가 된다. 명십삼릉의 퇴폐한 모습은 고염무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제사를 지냈고, 과거의 좋은 시절을 그리워했다. 사실, 그 십여명의 황제는 그가 눈물을 흘려줄만큼 가치가 있는가? 이는 완전히 수갑과도 같은 충군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쫓겨난 황제들이 그의 충성을 받아줄 수도 없지 않는가. 그는 숭정의 사릉에서도 애도하는 시를 지었다. 사실 숭정은 목을 매어죽은 무능한 황제였다. 그의 유골은 현지 선비들에 의해 매산의 홰나 무에서 끌어내려져 몇몇이 돈을 모아서 싼 값의 버드나무관에 넣어 창평으로 운송한 후, 요절한 귀비 전씨의 묘에 같이 묻어준다. 일찌기 난 폭했던 주명왕조는 마지막에 가서 관을 살 돈도 없었다. 겨우겨우 마음씨 좋은 사람들의 연민과 기부로 관을 마련했다. 이것이 인과응보인가? 동곽선생들아. 이들 사람을 잡아먹은 가족들에 대하여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된다. 옛황제이든 신황제이든, 죽은 황제이든 살아있는 황제이든 어쨌든 모두 짐승같다. 그들에게 골수를 빨리던 때를 잊었는가? 피까지 모조리 빨 리던 때를 잊었는가? 왜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려주는가? 이자성이 거용관을 차지하고, 창평을 함락시켰다. 먼저 명릉을 점령했다. 그 후에 북경으로 밀고 들어간다. 궁중에 깊이 틀어박혀있던 숭정을 목매달아 죽게 만든다. 만일 장기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대명왕조의 장에 대하여 외통수로 장군을 부른 것이다. 황제도 죽을 지경에 처 하고, 조상의 묘도 보전하지 못했다. 황천의 주체들은 아마도 이런 것을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백성의 피고름을 짜내서 만든 능묘가 자신의 업적이 산서에서 온 잡이들 에게 짓밟히게 될 줄이야. 이를 보면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숭정말에 창평의 여러 능은 이자성에 의하여 훼손된다. 감 장( 龕 帳 )이 모두 사라지고, 신주( 神 主 )도 누가 훔쳐갔는지 모른다. 이자성은 말을 타고 황가의 조상묘를 짓밟았다. 이때는 복수의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는 역대왕조의 반란자들이 동경하는 일이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폭군만이 폭민을 만들어낸다. 폭정만이 폭동을 불러일으킨다. 이자성은 비록 일부 문화재를 손괴했지만, 나는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를 위하여 변호할 생각이 있다. 최소한 이는 독재의 왕권에 대한 필요한 경고이다. 황제들에게 일깨워주는 것이다: 자신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서라면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아라, 백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말아라. 명십삼릉( 明 十 三 陵 )을 말한다 9

10 그렇지 않으면, 모든 황제는 프랑스대혁명중에 단두대에서 죽어간 루이 몇세처럼 될 것이다. 매산(지금의 경산)은 숭정의 단두대이다. 그가 총명했다는 것은 일찌감치 목을 맸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관중을 피하고, 굴욕을 피했다. 숭 정이 절대로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명나라의 천추기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일 것이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묻힐 능묘도 만들지 못했다. 다행히 전비묘가 있어서 그의 몸을 묻힐 수가 있었다. 능앞의 신공성덕비는 청나라황제가 그를 위하여 세워준 것이다. 비문은 자연히 나중에 쓴 것이다. 사실 이 패가망신한 자에게 무슨 공덕이 있겠는가? 십삼릉중에서, 사릉( 思 陵 )은 모양이 특수하고, 확실히 간소하다. 지는해의 쓸쓸함과 같다. 사릉의 '사( 思 )'는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것 이외에 반성하는 생각이라는 뜻도 있다. 망국의 군주는 확실히 저승에서 잘 반성해봐야 할 것이다. 후세의 제왕은 더더욱 사릉을 경계로 삼아야 한다. 모든 일에 세번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 비참해질 것이다. 아쉽게 도 대청왕조는 사릉에 비를 세워주었지만, 진정으로 교훈을 받아들이지는 못한 것같다. 그들의 결말도 대명왕조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 영 국프랑스연합군이 원명원을 불태우고, 팔국연합군이 자금성을 함락시키고, 두 번이나 황제(함풍과 광서)를 황급히 도망가도록 만들었으니, 정 말 쓸모없는 자들이다. 멍청한 서태후(중국특색의 클레오파트라 혹은 에카테리나여왕)는 망국의 책임이 있을 뿐아니라, 매국까지 했다. 땅도 떼어주고, 돈도 물어주고, 국권을 잃는 많은 조약에도 서명했다. 조상이 물려준 장성을 모조리 팔아버린 것이다. 장성이라는 위엄과 존엄의 개념은 일찌감치 허명만 남았다. 장성은 청나라말기에 그저 소극적인 장식품이었다. 십삼릉은 열 세명의 황제의 저승에서의 집이다. 그들이 사후에 보유한 지하왕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자금성이다. 그들은 언젠가 이 집으로 이사가야 한다. 황제를 이사가게 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금관옥상, 보정향로, 예상우의, 동거석수, 심지어 덮개까지도 빠트려서는 안된다. 그리고 수량이 엄 청난 '잡비' 부장되는 화폐. 이 모든 것들은 죽는 것도 살아있는 것과 같게 보는 예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릉을 예로 들면, 건설비만도 백은800여만이 들었다. 여기에는 부장품의 가치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생활용품도 모조리 갖추어 놓는다. 황제의 유령이 만일 금벽휘황한 지하궁전에서 거닌다면, 분명히 편안하게 느낄 것이다. 다만 아쉽게도 우리는 그들이 죽은 후에 어떻게 느끼는지는 알지 못한다. 매번 기발굴된 정릉에 갈 때마다, 나는 자신이 황제의 음삼한 꿈속에 들어간 것처럼 느껴져서 냉기에 부르르 떨곤 한다. 십삼릉에서 소릉의 한켠에, 월아성( 月 牙 城 )이 있다. 속칭 아파원( 啞 巴 院 )이다. 현궁이 봉문된 후, 설계사 및 장식공들은 모두 이 곳에 갇힌다. 그리고 약을 먹인다. 모조리 벙어리( 啞 巴 )가 되는 것이다. 입은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한다. 이 방법은 도굴을 방지하는데 유효했다고 한다. 명십삼릉외에 북경근처에 있는 제왕릉으로는 금릉( 金 陵 ), 청동릉( 淸 東 陵 지금의 하북 준화)등등이 있다. 서남쪽 방산에 위치한 금릉은 금왕조( )이 황가능묘이다. 금나라시조부터 장종까지 17명의 황제와 후비 및 왕들이 잠들어 있다. 명 십삼릉보다 400여년전에 만들어진 북경 최초의 황릉구역이다. 지금 지면건축은 모조리 사라졌고, 지하궁전만 800년의 암흑과 신비속에 잠들 어 있다. 명십삼릉( 明 十 三 陵 )을 말한다 10

11 건륭이 천수산 십삼릉을 구경할 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나라가 개창할 초기에, 예친왕이 우리 군대를 이끌고 요동에서 승리할 때, 명 나라의 군신은 성상( 星 象 )의 설에 미혹되어, 금나라때 능침이 우리 왕조와 관련이 있다고 하여, 방산현의 금릉을 훼손시켰다...이후에 정릉의 향전을 철거하고 제사를 끊었다." 이는 풍수를 믿었던 만력황제가 후금이 굴기하자, 일찌기 조상묘에 대하여 토벌을 하였다는 것이다. 금나라 청나라는 모두 종족연원이 같다. 청나라병사들이 입관한 후, 이에 대한 보복으로, 명릉중 만력제의 정릉을 불태웠다. 이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이닌가? 봉건시대에 왕조가 바뀌면, '개싸움'의 투쟁이 벌어졌다. 전황조의 묘를 파헤치는 것은 정신적인 승리의 일종이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고, 복수의 창끝은 저승으 로 향한다. 피할 방법이 없다...황제는 죽은 후에도 편안하지 못하다. 청동릉은 민국시대에 탐욕스러운 군벌에게 도굴당한다. 공병과 폭약을 동원했다. 이는 최대규모의 도굴사건이다. 묘안의 보물은 모조리 가져 간다. 현재는 행방불명이다. 아마도 이미 조용히 팔려버리고, 군벌혼전때의 탄약비용으로 충당되지 않았을까? 그 운명은 명십삼릉보다도 못하 다. 서태후는 평생동안 돈을 배상하고 땅을 떼어주느라고 바빴는데, 죽어서는 자신의 묘조차도 지키지 못했다. 이 모든 것들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탓이다. 역사는 반드시 반복된다. 명사릉이 그러했고, 청동릉도 그러했다. 명십삼릉( 明 十 三 陵 )을 말한다 11

12 명청상방: 관상결탁으로 생겨난 소금전매업자 :13 중국인들은 뒤를 돌아보기 좋아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이익추구만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신용기갈증을 앓고 있다. 그리하여, 어 떤 사람은 명청상방을 떠올리고, 그들을 신용을 기본으로 하고, 신용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신용으로 사업을 발전시킨 일대 "유상( 儒 商 )"으로 이상화한다. 여기에서 최소한 두 가지 잘못을 범했다: 하나는, 신용은 원래 상인(물론 일반인도)이 당연히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도덕수칙이 다. 만일 이것을 대단한 미덕으로 찬양한다면, 이 민족의 집단인격은 확실히 불쌍하고 가련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다음으로, 신용이 부족하 다고 하여, 무한대로 신용을 끌어올릴 수는 없다. 신용은 도덕적 품격이거나 직업소양일 뿐이다. 그것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될 수 없다. 그 리고 상인이 재물을 취득하느냐의 여부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소가 될 수도 없다. 이외에, 상방이 흥성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명청의 두 왕조를 상업이 번영하고, 인민이 부유했던 태평성대로 묘사하려는 생각을 일방적으로 가지기도 한다. 명왕조에 대하여, 역사학자인 황인우는 이렇게 그 본질을 갈파한 적이 있다: "이 제국은 무력을 숭상하지 않는 경향을 보일 뿐아니라, 사회개조, 생활수준제고의 큰 뜻도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그저 대량의 인민이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사서'에서도 소위 '백성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는다'는 저표준하에서 사회의 장기적인 안정을 도모했다." 그리고 야만적인 청왕조에 대하여는 중 국에 문명의 대후퇴를 가져다 주었다. 사회경제에 여하한 혁신적인 발전도 가져다주지 못했고, 기껏해야 전왕조의 사례를 본받아서,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사회개조, 생활수준제고'를 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은 백성들이 부유해져서 재물의 세력을 믿고 관청을 무시하고, 정권을 위 태롭게 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인민을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게 한 것은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또 다른 측면에서 정권을 위태롭게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는 전제통치자들이 공동으로 취했던 방식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에서 출발하여, 일부러 절대다수의 백성들이 겨우겨우 먹고살 수 있는 수준을 유지하게 한 것이다. 천백년이래로, 중앙집권적 전제재도는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속에는 광명이 없다.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명청상방은 송나라때 관청과 결탁한 상인들과 마찬가지이다. 단지 규모가 더 커지고, 범위가 더 넓고, 더욱 집단적이 되었을 뿐이다. 역사의 진실을 복원하자면, 명청상방의 흥성은 실제로 통치자의 정치적수요에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최초의 이유는 명 태조 주원장이 실시한 "개중제( 開 中 制 )"에 있다. 주원장이 몽골원나라세력을 격파하고 명왕조를 건립한 후, 여전히 북방유목민족은 큰 위협이었다. 그리하여 장성을 잇는 선을 따라 9개의 방 어구를 둔다. 이를 구변( 九 邊 ) 혹은 구진( 九 鎭 )이라 부른다. 이것은 동쪽으로는 요동진 해변부터, 서쪽으로는 감숙진 가욕관까지, 5274킬로미 터에 이러는 거대한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관할했다. 긴급한 군사적 상황이 발생하여 내지에서 지원군을 보내는 경우를 제외하고 평소에 주둔 군만 80여만에 달했다. 그중 주둔군이 가장 밀집한 지역은 "내박경기, 외공이적( 內 迫 京 畿, 外 控 夷 狄 )"의 대동( 大 同 )일대였다. 대동진이 관할하 는 장성의 길이는 323킬로미터이다. 여기에는 마보영관병 13.5만명이 있고, 말, 나귀, 노새등이 5만여필 있었다. 속담에, 병마미동, 양초선행( 兵 馬 未 動, 糧 草 先 行, 병사와 말이 움직이기 전에 병사들이 먹을 양식과 말이 먹을 풀을 먼저 이동시켜야 한다)라 는 말이 있다. 이처럼 길다란 변방체계, 이처럼 방대한 주둔군규모는 명나라정부에 거대한 공급난을 가져다 주었다. <<대명회전>>의 기록에 따르면, 대동진에서만 주둔군의 양식이 51만석, 풀이 16.9만속 필요했다. 이외에 대량의 면화, 베등 소비품도 필요했다. 이들 물자를 운송하기 위하여, 명정부는 대량의 관군을 동원했을 뿐아니라, 많은 백성들도 징집했다. 결론적으로 매년 장성에 병력을 주둔시키는데 드는 돈이 천만 냥이상이었다. 이는 중앙재정에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명청상방: 관상결탁으로 생겨난 소금전매업자 12

13 변방의 군사소비와 공급간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하여, 명나라정부는 몇 가지 조치를 취한 바 있다. 그중 진상( 晋 商 )의 발전에 핵심역할을 한 것은 '개중제'이다. 개중제라 함은 역대 식염( 食 鹽, 소금)을 국가가 전매하는 기초위에서, 명정부가 변방의 군수물자조달을 해결하기 위하여 일거양득의 방식을 채택했다. 돈도 적게 들고, 시간도 적게 들며, 힘도 적게 드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의도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상인을 부유하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개중제는 상인들로 하여금 변진의 변방창고에 양식을 납품하고, 이를 통해서 관염( 官 鹽 )을 판매할 수 있는 허가증( 鹽 引, 引 目 )을 주는 것이다. 이를 "납량중염( 納 糧 中 鹽 )'이라고 부른다. 모든 국가에서 전매하는 상품은 폭리상품이다. 소금은 양식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생활필수품이다. 소금은 양식과는 달리 어디서나 생산되는 물품이 아니다. 그러므로, 소금은 관청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고, 이를 통하여 백성으로부터 폭리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은 소금자원이 부족한 나라는 아니다. 그 가치 폭은 폭리는 주로 관청의 독점때문에 나타난다. 개중제가 최초로 실행된 곳은 산서 대동진이다. <<명태조실록>> 권53의 기록에 따르면, 1370년(홍무3년), 산서행성의 관리가 조정에 건의한다: "대동의 양식저장은 능현(지금의 산동성 덕주)에서 태화령(산서성 삭주 마읍)까지 운송하는데, 길이 멀어 비용이 많이 듭니다. 상인으로 하여 금 대동의 창고에 쌀 1석을 제공하거나, 태원창고에 쌀 1석3두를 제공하면, 회염( 淮 鹽 ) 소인( 小 引, 2백근) 하나를 끊어주게 되면, 이렇게 하면 운송비가 적게 들고 변방의 창고는 충실해질 것이다." 명태조 주원장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다음해에 개중제를 실행한다. "납량중염"은 주로 구변에 집중되어 있었따. 대동진은 가장 먼저 이 제도를 실행한 곳이고 납량의 액수가 가장 큰 곳이다. 그리하여 산서상인 은 가까운데 있다보니 이득을 많이 보았다. 개중제가 다양화된다. '납량'외에 납면( 納 棉 ), 납포( 納 布 ), 납마( 納 馬 ), 납철( 納 鐵 )을 통해서 염인을 받는 방식이 나타난다. 산서상방은 여러가지 경영으로 북방의 군수무역을 독점하엿을 뿐아니라, 그 세력범위를 양회, 하동등 전국의 모든 소 금생산지로 확장시킨다. 이리하여 '무천사방( 貿 遷 四 方 )'의 전국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명나라중기에 들어서면서, 염업정책은 '개중제'에서 '절색제( 折 色 制 )'로 변화한다. 소위 "절색제"는 양식등 물자를 지정한 변방지구로 운송하고 염인을 받을 필요가 없고, 직접 은자를 주고 염인을 받아내는 방식이다. "개중제"가 산서상방을 만들었다면, "절색제"는 휘주상방( 徽 州 商 幇 )이 흥성하게 만들었다. 현대인들이 무한히 그리워하는 명청양왕조의 상방 은 사실 관상결탁으로 일어난 소금판매업자인 것이다. 개중제를 실핼할 때, 양식등 물자를 변방으로 운송해서 염인을 얻을 때는, 휘주는 멀리 떨어지고, 산속에 깊이 있으며, 교통이 불편한데다, 땅 은 좁고 사람도 적은 곳이어서, 양식을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가 없었다. 진상과 비교하면 '지리'적으로 아주 불리했다. 절색제가 실행되니, 휘 상은 내지에서 돈으로 염인을 사들일 수가 있었다. 홍치년간에서 만력년간까지, 휘주염상은 무리를 이루어 당시 전국최대의 소금생산지인 의 정( 儀 征 ), 양주( 揚 州 )와 회안( 淮 安 )등지를 장악했다. 휘주염상의 경영은 일시에 커다란 발전을 이룬다. 명청상방: 관상결탁으로 생겨난 소금전매업자 13

14 명나라시대의 통신방법은? :10 사람들이활동을 할 때면 서로간에 연락을 할 필요가 있다. 명나라이전의 기나긴 역사시간동안 중국은 서신( 書 信 )의 세계였다. 사람들은 서신 을 통하여 서로간에 안부를 묻고, 장사를 하며, 새로운 사상과 계속 변화하는 관념을 교류했다. 서신은 오늘날의 학술간행물과 같은 역할을 했다. 당시 사람들의 서신왕래는 아주 빈번했다. 명나라때 학자이자 지도전문가인 나홍선( 羅 洪 先, )은 그와 왕기( 王 畿, ) 간의 장기간의 통신왕래에 대하여, "구년간 서찰왕복이 대단했다"고 표현했다. 명나라후기에 발생한 두 가지 사건은 서신왕래의 내용과 형식 을 변화시킨다. 첫째는 명사들이 그들의 서신을 출판해서, 새로운 사상과 관념을 교류하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상업적인 우편 서비스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서신은 도대체 어떻게 전달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바는 아주 적다. 어떤 때는 집안노비가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거리의 사람들에게 사람을 일부러 보내어 서신을 전하기는 쉽지가 않을 것이다. 통상적으로 원거리의 서신은 모두 그 방향으로 가는 여행 자에게 부탁해서 보냈다. 당연히 가장 좋기는 친구이고, 전문적으로 서신을 운반하는 사람을 보내지는 않는다. 약간의 비용을 들여서 서신을 왕래하는 상인이나 공무를 집행하는 하급관리, 역졸 혹은 관청의 심부름꾼들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규정에 따르면, 관청의 심부름꾼이나 역졸 은 사인의 서신을 휴대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대운하에서 관청에서 사용하는 배에도 약간의 개인물품을 끼워넣어서 운송하는 것 과 마찬가지로, 관청의 역참제도도 마찬가지로 개인서신을 운반해주었다. 아래의 두 가지 예에서 보듯이, 우리는 당시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 로 서신이 목적지까지 도달하도록 확보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 예는 작자의 가족이 보존하고 있는 편지의 원본에서 찾았다. 장신원( 庄 臣 元 )은 절강 북부의 상업도시 남심진의 한 강남선비집안에서 태어났다. 1603년 그는 40일의 여정을 거쳐 북경으로 가 진사시험에 참가한다. 다음 해에 그는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을 얻는다. 오래지 않아 모친이 사망하여 고향으로 가서 시묘를 한다. 그의 내용이 잡다한 글들은 오늘날까지도 전해진다. 거기에는 1603년 여름에서 1605년 여름까지 북경에 있는 동안 아들에게 보낸 서신이 있다. 이들 서신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서신의 왕래는 장씨가 바라는 것처럼 시간에 맞추어 수신인에게 도착하지 않았다. 장원 신이 북경에서 보낸 첫번째 서신은 1603년 육월 십오일에 썼다. 서신에서 그는 숭문문밖에 있는 아미타불사에 머무른다고 썼고, 답신은 오충 건의 집에 있는 장집사에게 보내어 전해달라고 하라고 했다. 구월 십사일의 서신에서는 그가 이미 팔월 이십육일에 아들이 칠월 이십이일에 보낸 서신(서신이 북경에 도착하는데 36일이 걸렸다)을 받았다고 말한다. 곧이어 십월 십사일에 보낸 서신에서, 그는 아들에게 이미 장집사에 게 부탁하여 구월 십사일의 서신을 보냈는데, 받아봤는지를 물어본다. 그해 겨울, 서신의 왕래속도는 돌연 느려진다. 오랫동안 장원신은 집에 서 온 서신을 받아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나중에 세 통을 한꺼번에 받는다. 이 세통은 각각 구월 십구일, 십일월 십일과 십이월 이십칠일에 쓴 것이었다. 이후 속도는 다시 느려진다. 그가 1604년 육월 이일의 서신에서는 걱정스럽게 묻는다. 왜 십이월 이십칠일의 서신이후에 다시는 집안에서 오는 서신을 받아보지 못하느냐고. 11일후, 그는 다시 한번 집에 보내는 서신에서, 그의 네 명의 고향사람들은 모두 서신을 받아보 았는데, 그 혼자만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집안에 보낸 서신은 육월 이십사일에 북경으로 오는 친구가 가져다 준 것이었다. 이것 은 오월 이십구일(29일의 시간만에 북경에 도착했다). 이 장집사는 보기에 오충건의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이고, 그의 업무는 주인(혹은 주인과 같은 고향사람)을 위하여 서신왕래를 담당하는 것같 다. 아마도 서신은 장집사가 여행하는 상인들에게 부탁하여 보냈던 것같다. 비록 이 점을 장씨가 명확히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장원신은 장집사 이외에 다른 서신왕래경로를 알아본 적이 있고, 그중 최소 한번은 그의 동료의 노비를 통하여 고향에 보낸 적이 있다. 서신을 보내준 사람과는 북경에 돌아온 후 장원신이 3 내지 5전의 은자를 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이것은 적지 않은 금액이다. 그는 또한 여러번 당부 한다. 서신을 절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맡겨서 가져가게 하지는 말라고. 유감스러운 것은 장씨는 그러나 어떤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람 명나라시대의 통신방법은? 14

15 인지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 그저 우연히 만나는 사람을 말하는가? 여행하는 상인을 말하는가? 관청심부름꾼을 말하는가? 아니면 상 업적인 서신전달꾼을 말하는가? 더욱 유명한 서광계( 徐 光 啓, )는 북경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가 상해의 집에 있는 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우리는 명나라때 통신 업이 좀 더 발달했다는 상세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위에서 장원신은 매 서신의 날짜를 가지고 서신의 수발상황을 파악했다. 그와는 달리, 서광계와 아들은 모든 서신을 연도별로 일련번호를 매겨서 언제든지 어느 서신을 받았고, 어느 서신을 못받았는지 쉽게 알 수 있게 했다. 그 는 1607년 봄에 집에 보낸 서신에서, "이십삼호도 도착했다. 작년에는 이십칠호만 못받았다." 1615년(혹은 아마도 1616년) 여름에 그는 이렇 게 썼다: "작년의 서신과 금년 사호이전의 서신은 모두 북경에 도착했다. 다만 삼월이후는 받지 못했다." 1616년 십일월 이십일, 그는 서신에 서 이렇게 말한다: "부관인의 집안사람이 돌아가는데 십구호 서신을 보냈으니 반드시 도착할 것이다" 서신전달을 부탁받은 사람에 대하여 그 는 그저 친구의 노비라고만 적었다. 장원신처럼 전문적으로 서신수발을 처리해주는 집사가 없었으므로, 그는 운에 따라 누군가 마침 남방으 로 가면 대신 가지고 가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래서 서광계의 서신은 장원신의 것처럼 규칙적이지 않았고, 시간도 정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서광계는 1616년 육월 이십칠일의 서신에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시때때로 글을 써서 보내달라." 서신에서 서광계는 또한 물품을 같이 보낸다고 언급하고 있다. 서신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는 아들이 상해의 농장에서 부쳐주는 양식과 기타 물품으로 생활했다. 일찌기 1606년 가을에 아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내년봄에도 배로 쌀과 잡곡을 부쳐달라" 1617년봄에 그는 다시 재촉한다: "집안에서 물길로 보낸 것이 어떤 것이냐? 누구에게 맡겼느냐?" 그는 선박운송이 안전한지에 대하여 안심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어서 이렇게 쓴다: "어떻게 전부 써보내지 않느냐. 탄식할 만하다" 이러하기는 했지만, 선박운송으로 상해에서 북경으로 양식을 보내서 일 가족이 생활하는데는 충분했다. 그리고 북경시장에서 사는 것보다 쌌다. 비록 몇냥의은자로 운송을 부탁해야 했지만. 서씨는 여러번 상업채널을 통하여 돈을 부친 것을 언급했다. 이것은 그가 은가격파동에 민감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611년 그는 아들에게 이 렇게 털어놓는다: "회표( 會 票 )도 역시 도착했다. 은가격이 좋지 않아서 아직 가서 찾지 않았다." 이를 보면 1616에 화폐시장은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서신에서 이렇게도 적었다: "오늘 표를 되돌려보냈다. 찾아서 석교백의 집안에 써라" 명나라때 원거리 화폐송금비용은 거리의 원근에 따라 결정되었다. 몇전에서 몇냥까지 서로 달랐다. 명나라후기에 화폐송금서비스는 북경과 강남의 도 시간에 존재했다. 그리고 다른 곳도 포함될 것이다. 1660년대가 되어서, 북경에서 개인우편을 보내는 첫번째 상업기구가 전문적인 호칭을 얻게 된다. 그것이 바로 "보방( 報 坊 )"이다. 이는 신문발 행기구이다. 곧이어 분명히 상업적인 신문출판과 상업적인 서신전달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 보방은 신문을 편집할 뿐아니라, 이들 신문을 각 성으로 보내어 판매까지 했기 때문이다. 서신의 전달과 신문의 정기발행을 하나로 합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이후 전문적으로 우 편을 처리하는 "표호( 票 號 )"가 나타난다. 이전에도 상업적 우편서비스는 일찌감치 있었던 것같다. 그러나 모두 다른 상업서비스의 부속서비스 였다. 번화한 강남지역에, 상업적 우편서비스가 가장 먼저 출현한 것은 1660년대이다. 1663년 항주에서 출판된 우수서신집에는 출판상의 원고모집 공고가 들어 있다: "독자들이 서신집 속집을 출판하고자 하는 모 서방에 잘 쓴 서신들을 보내주기 바람"이라고 되어 있다. 나중에 이 서신속 집은 년간에 순조롭게 출판된다. 1668년의 속집에서는 한 여화가가 한 여성 시집편집인에게 보낸 서신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공동의 취미를 가지고 시작을 서로 부쳐주자고 한다. 1672년에 출판된 시가집의 서언에는 유사하게 우편으로 모은 원고들이다. 편집자는 두 번째 시가집을 출판할 계획임을 밝히고 있다. 독자들에게 그들의 시원고를 태주의 그의 집으로 보내주거나 혹은 양주, 북경, 남경의 4개 주소 중 한 곳으로 보내달라고 하였다. 6년후, 두번째 시가집이 출판된다. 또 다른 출판은 1689년 상업적인 여성시가집중에서 편집자들이 6곳의 먼 성지역의 작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있다. 그들이 먼 곳에서 시원고를 출판사로 보내준 것에 감사하는 것이다. 강남의 상업우편네트워크는 서신전달뿐아니라, 소포도 처리했다. 양주에 사는 한 1588년(만력16년)의 진사는 전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절강(아마도 항주일 것이다)의 한 친구가 한 상자의 가득한 글을 보내와서 대신 보관해달라고 했다. 그는 상자를 구석에 놓아두었다. 상자안 에 담겨있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다. 절강의 친구가 10년후에 세상을 떠난 후에 양주에 살던 그는 책상자를 선박운송을 통하 명나라시대의 통신방법은? 15

16 여 죽은 사람의 아들에게 부쳤다. 죽은 자의 아들이 상자를 열어보니, 상자 바닥에 500냥의 은자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기작가는 상자 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항주로 부쳤는지는 적지 않고 있다. 아마도 그와 그의 독자들은 그 문제에 대하여 흥미가 없었던 것같다. 그들은 분명히 상자를 어떻게 양주에서 항주로 선박을 통해 보낼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저 오늘날의 우리만 제대로 몰라서 궁금해할 뿐이다. 명나라시대의 통신방법은? 16

17 명나라의 정보기관: 동창, 서창, 대내행창, 금의위 :09 창위( 廠 衛 )는 명나라때 황제의 정보기관이다. 창( 廠 )은 동창( 東 廠 ), 서창( 西 廠 ), 대내행창( 大 內 行 廠 )을 말하고, 위( 衛 )는 금의위( 錦 衣 衛 )를 말한다. 합쳐서 창위라고 부른다. 동창은 명나라 영락18년(1420년)에 북경의 동안문 북쪽에 설립했다. 서창은 명나라 성화13년(1477 년)에 구회창에 설립했다. 대내행창은 명나라 정덕초년에 설립했다. 금의위는 원래 내정어림군( 內 廷 御 林 軍 )이었고, 황제의 호위부대로써 홍무15년(1382년)에 설립되었다. 창위는 명나라때 정보기관으로써, 황제의 이목과 손발이 되었다. 동, 서창 및 대내행창의 두목은 사 례감의 태감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금의위장관은 지휘사로 황제의 신임을 받는 심복이 맡았으며, 아래에 17개소와 남북진무사를 통할했다. 창과 위의 기본직책은 비슷했다. 다만 금의위는 외관이 맡 았으며 황제에게 아뢸 때는 주소( 奏 疎 )를 사용했다. 동창등의 환관처럼 가깝지는 못했다. 그래서 창 의 세력이 위보다 컸다. 금의위는 기본적으로 모든 관료를 정탐했고, 창은 관민과 금의위를 감시했 으며, 대내행창은 관민과 창위를 감시했다. 황제가 모든 정보기관을 직접 관장하였고, 완전한 체계 를 갖춘 정보기관체계를 가졌던 것이다. 창위는 사법기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황제의 영을 받아 사 건을 처리하고, 관리와 백성을 체포하였으며, 형이 지극히 잔혹하여 조야상하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 워 하였다. 동창은 관서( 官 署 ) 이름이다. 명성조 영락제시기에 건문제의 잔당을 색출하고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만든 조직이다. 한편으로는 금의위를 회복시키고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명영락18년(1420년) 에 동집사창( 東 緝 事 廠, 약칭 동창)을 설치하였다. 환관이 제독( 提 督 )을 맡았다. 권력은 금의위보다 컸고, 황제에 대하여만 책임졌다. 사법기관을 거치지 않고, 임의로 관리와 백성을 체포할 수 있어, 환관이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빌미가 되었다 서창도 관서 이름이다. 명헌종시기에 정보정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성화3년(1477년)에 서집사창( 西 緝 事 廠, 약칭 서창)을 설치하였다. 유명한 환관 왕직( 汪 直 )제독을 맡았다. 그의 권세는 동창을 넘어 섰다. 왕직은 서창을 거점으로 하여, 조정의 관리와 결탁하여 자기를 따르지 않는 관리를 내쫓고, 충신과 양신들을 내보냈다. 서창에 대하여 조야의 반대가 심해지자 결국 철폐하게 된다. 명나라 무 종때 유명한 환관인 유근( 劉 瑾 )이 전횡할 때 서창을 되살린 적이 있으나, 유근이 물러나고 능지처참 된 후 다시 철폐되었다. 대내행창도 관서이름이다. 명나라 무종때 환관 유근이 전횡을 하였고, 대내판사창( 大 內 辦 事 廠, 대내 행창 또는 內 廠 이라고 함)을 두고 스스로 통할했다. 동창, 서창보다도 훨씬 악독했다. 무종이전까지 는 창, 위를 분리시켜 서로 번갈아가면서 일을 시켰는데, 이때는 동창의 수령인 구취( 丘 聚 ), 서창의 수령인 곡대용( 谷 大 用 ), 금의위 지휘사인 석문의( 石 文 義 )가 모두 유근과 한패거리였다. 그래서, 창위 명나라의 정보기관: 동창, 서창, 대내행창, 금의위 17

18 가 합세하여 정보정치가 판을 쳤다. 명나라 정덕5년(1510년) 유근이 모반죄로 피살되면서, 서창, 대 내행창이 모두 철폐되었다. 금의위는 황제의 시위기구이다. 전신은 태조 주원장때 만든 어용공위사( 御 用 拱 衛 司 )이다. 명홍무2년 (1369년)에 대내친군도독부( 大 內 親 軍 都 督 府 )로 바꾸고 15년에 금의위를 설치한다. 주원장은 중앙집 권정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금의위로 하여금 형옥을 장악하도록 하고 체포권한을 부여하고, 아래에 진무사를 두어 정찰, 체포, 심문등의 활동을 하게 하며, 사법기관을 거치지 않도록 하였다. 명나라의 정보기관이 동창과 금의위는 북경이외의 각지에 분지기구를 두었다. 예를 들어, 천진시 하 북구의 금의위교대가와 이전의 금의위교는 바로 당시 이 금의위의 천진사무소가 있던 자리이다. 당 시 많은 대내의 고수들이 천진성에서 횡행하였던 것이다. 특무를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은 비밀업무에 종사하고 군사정보를 캐내는 인물로 생각하기 쉬운데, 명나라때는 공개된 인물이었다. 명나라때의 특무기관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 지방주 재하는 자, 둘째, 북경에 근무하는 자, 셋째, 임시로 외부에 파견나간 자. 금의위를 제외하고는 모두 환관들이 담당했다. 임면은 사례감에서 하고, 반드시 황제의 최종결정을 받아야 했다. 위의 세부류 중 지방에 나뉘어 있는 자들이 가장 많았다. 명나라 영락제때부터 두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전국 각 성과 각 중요한 도시에는 모두 설치하였다. 그들의 임무는 실제로 황제를 대신하여 현지관리, 백성 을 정찰하고 군민의 동태를 암암리에 살피는 것이었다. 명나라의 정보기관: 동창, 서창, 대내행창, 금의위 18

19 명나라때의 대이민 :08 명나라 홍무, 영락(명의 창립황제 주원장 및 영락제 시절)때의 대이민은 파란만장하며, 슬프고 길이 남을 역사적 대사건이다. 지금은 시간적으로 근 600여년이 흘렀음에도, 그들이 옮겨간 비장한 이야 기는 아직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각지의 후손들에게 남긴 다음과 같은 노래는 지 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묻노니 나의 조상은 어디에서 왔는가? 산서홍동( 山 西 洪 洞 )의 대괴수( 大 槐 樹, 큰 홰나무)에서.. 나의 고향은 어디인가? 산서홍동의 노관와( 老 鸛 窩, 오래된 황새의 집)이라네. 수백년동안 이 민요는 중국의 산동, 하남, 하북, 북경, 안휘, 강소, 절강 일대에서 연면히 전해져 내 려왔고, 남녀노소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가가호호 부르지 못하는 사람이 없다. 명나라때의 이민역 사는 그의 후손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살아서 남아 있는 것이었다. <<홍동현지( 洪 洞 縣 誌 )>>의 기록에 의하면 "대괴수는 성의 북쪽 광제사( 廣 濟 寺 )의 왼쪽에 있다. <<문 헌통고>>에 따르면, 명나라 홍무, 영락제때, 산서의 백성들을 북경, 산동, 하남 등의 곳으로 강제이 주시켰는데, 나무아래가 집합장소였다. 전해지는 바로는 광제사에 주재관서를 두고, 증빙을 보고 노 자돈을 나눠주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대괴수는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절도 병난에 훼멸 되었다..." 이 문헌의 기록을 보면, 바로 중국의 화동, 중원등지에서 불리우는 민요와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나라때 산서홍동의 대괴수에서 백성들의 강제이주가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 도 믿을 수가 있다. 그렇다면, 명왕조는 왜 이처럼 대규모의 백성을 이주시켰는가? 민간에는 여러가지 전설이 정해진다 "호대해복수기"등.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전쟁이 빈번했고, 홍수로 인한 재해와 역벽으로 인한 재해 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불구불 흐르는 황하는 중화민족의 요람이고, 염황자손의 어머니강이다. 동시에 황하 중하류에 사 는 백성들은 계속하여 재난을 당하고 있었다. 원나라 지순1년에서 명나라 홍무2년( )까지 40년의 기간동안, 황하중하류는 7번이나 제방이 무너져 범람하였다. 홍수가 마을을 삼키고, 논밭을 삼켜서 수많은 백성들이 유리걸식하게 만들었다. 홍수가 지난 후에는 시체가 썪고 역병이 유행하며 마을에는 사람들이 살지를 못하였다. 비옥한 하남, 산동의 땅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으로 뒤바뀌었 으며,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원나라 말기, 조정부패로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지고, 당시 황하양안에는 이런 민요가 전해지고 있 었다. "석두인, 일지안, 도동황하천하반(돌로 된 사람. 외눈. 황하를 움직이니 천하가 뒤집어진다)" 명나라때의 대이민 19

20 이 노래는 농민반란을 암시하는 전조이다. 원나라 지정11년(1351년), 황하의 제방이 무너졌다. 중원 과 화중일대의 백성들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원나라의 통치자들은 백성들의 사활은 도외시하고, 강 제로 변량, 대명등 14로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황하를 소통시키는 공사를 하게 하였다. 그해 4월, 백 성들은 난고황릉강 하오의 아래에서 눈하나를 가진 석인상을 파낸다. 석상의 등에는 이런 두 문구 가 쓰여 있었다. "석상이 눈이 하나밖에 없다고 말하지 말라. 이 물건이 한번 나오면 천하가 뒤집어 진다( 莫 道 石 人 一 只 眼, 此 物 一 出 天 下 反 )"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역사상 유명한 홍건적의 농민반란이 일어난다. 이어서, 서수위가 계주에서, 장사성이 태주에서 반란의 깃발을 들었다. 오래지 않아. 주원 장, 곽자흥도 호주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원나라 정권은 군대를 모아서 각지의 농민군과 중원일대에 서 결전을 벌였다. 전쟁으로 인하여 하남, 하북, 산동, 강소북쪽, 안휘북쪽 일대의 사람들 10에 8,9은 죽게 되었다. 원라나 군대는 농민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그 땅을 뽑아버리고, 그 성을 도륙내 는" 방식을 택하여서,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봄에 제비가 다시 돌아왔는데, 천리나 되는 빈땅에 사 람이 거의 없네( 春 燕 歸 來 物 棲 地, 赤 地 千 里 少 人 煙 )"의 경지였다. 주원장의 농민군이 원나라 조정을 멸망시킨 후에야 16년에 걸친 전란은 끝이 났다. 전란이 있으면, 재난이 따르기 마련이다. 원나라 말기에는 곳곳에서 전쟁이 있었고, 홍수와 메뚜기 떼의 해도 이어졌다. 1341년에서 1368년의 사이에, 황하, 회하는 자주 붕괴되었고, 거의 매년 홍수가 범람했다. 산동, 하남, 하북, 양회일대에는 백성의 집이 잠기고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마을과 도시가 대부분 폐허로 바뀌었다. 곡물을 땅에 심지 못하고,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었다. 집이 10개 있으면 9개는 빈집이었다. 천재에 인재가 겹치고 기근과 전염병이 돌아서 중원의 몇 개 성의 백성 들은 엄청난 재난을 당하였다. 이 곳은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바뀌었다. 주원장은 휘주의 이승이 제출한 "성벽을 높이 쌓고, 양식을 많이 준비하며, 황제에 오르는 것은 늦 춘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명나라 왕조를 개창하였다. 그런데 중원, 화중일대에는 토지가 황폐하고 사람이 살지 않아, 조세수입이 오르지 않았으며, 명나라 왕조의 통치에 부담을 주었다. 주원장은 소 기, 유구등 대신의 건의를 받아들여, 백성을 이주시키는 거대한 정책을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대규 모의 백성이주이벤트가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바로 주원장 집권초기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중원지역이 전쟁과 재난에 휩싸여 있을 때, 내지에 있던 산서성은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보냈다. 산 서는 지리환경이 독특하여, 동쪽에는 태행산이 병풍역할을 하고, 서쪽에는 여량산이 막아주고 있다. 가운데로는 분하가 흐르고 있는데, 그 중에서 진남평원은 아주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토지 도 비옥하고 날씨도 좋아서 물산도 풍부하고 사람도 많았다. 원나라 말기의 전쟁도 이 지역에는 영 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산서성에는 아직도 원나라때의 건축물이 남아있는 것만 300여개 되는데, 이 것은 바로 이 지역이 원말에 전쟁에 휩싸이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인구로 보아서, 홍무14년 의 기록에 의하면 하남과 하북의 인구는 모두 189만인데 반하여, 산서의 인구는 400여만에 달하였 다. 즉, 산서성의 인구가 하남, 하북 두개 성의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았던 것이다. 중국의 각 지방간 인구균형이 맞지 않은 것을 보고 주원장과 그의 후계자인 영락제는 산서를 주시 했다. 당시 홍동현은 진남(산서남부)에서 가장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었고, 남북왕래의 교통요지였다. 그래서 이민은 이 곳을 중심으로 발생하게 된 것이다. 관청에서는 백성이주를 책임지는 부서를 홍 동에 두고 거기에서도 성북쪽의 광제사에 두었다. 이 절은 분하의 옆에 있고, 길옆에 있어서 지리적 인 위치가 좋았다. 절앞에는 큰 홰나무가 있었고, 홰나무 위에는 황새들의 집이 있었으니, 이 곳을 상징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것들이었다. 명나라때의 대이민 20

21 대괴수, 노관와, 홍동현은 중국의 명나라때 대이민을 상징하는 말들이 되어 중국인들의 기억속에 남 아 있다. 명나라때의 대이민 21

22 명나라때의 의문의 북경대폭발 :07 380년전인 1626년 5월 30일(명나라 천계제 6년 5월 6일) 오전 9시경에 북경의 자금성바깥 서남쪽 약 3킬로미터지역에 위치한 곳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은 왕공창( 王 恭 廠, 현재의 선무문지역) 을 중심으로 하여 3평방킬로미터지역에 걸쳐서 일어났는데, 북경에서 십킬로미터이상 떵어진 곳에 서도 강렬한 진동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폭발의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 것뿐아니라, 폭발후에 발생한 재해의 형태도 매우 기괴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최초에 이 사건을 기재한 것은 관방의 기록문서인 저보( 邸 報 )이고, <<명계북략>>에서 <<병인오월초 육기이>>로 기재하고 있는데,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계병인오월초육 사시에 하늘은 희고 맑았다.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큰 진동이 들리 더니 하늘이 꺼지고 땅이 가라앉았다. 깜깜한 밤처럼 어두워졌고, 집들이 무너져 평지가 되었다. 왕 공창일대는 파괴가 더욱 심하였다. 시체가 겹겹이 쌓이고, 악취가 진동했다. 성안에 있는 집들도 성 한 곳이 없었다. 모두 놀라서 날뛰었고 멀리 구름기운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어지러운 실같은 것 도 있고, 오색인 것도 있고, 영지버섯처럼 검은 것도 있었는데 하늘로 솟아올랐다. 대전에서 일하는 자들이 진동으로 떨어진 자가 2000명이었는데, 모두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상처입은 남녀들은 모두 발가벗은 상태였고, 실오라기하나 하나도 걸치지 않았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부인들이 벗은 몸으로 지나가는데, 어떤 이들은 기와로 음호를 가리고, 어떤 이들은 반쪽다리로 가렸으며, 어떤 사 람은 반쯤남은 이불로 가린 자도 있었다. 장안가의 공중으로 사람의 머리, 논썹, 코, 이마가 우수수 떨어졌다. 이상의 기록에서도 폭발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알 수 있다. 여기서 영지버섯과 같은 구름 은 마치 원자폭탄이 폭발했을 때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의복이 모두 벗겨져서 모두 나체로 되었느냐는 점이다. 도대체 의복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저보>> 는 아래와 같이 기재하고 있다. 진동으로 무너진 후, 보고에 의하면, 옷들은 모두 서산에 날아가서 절반정도는 나무에 걸려있었다고 한다. 창평주의 교장에도 의복이 쌓여있고, 장신구 은, 식기등 없는 것이 없었다. 관방의 보고서외에 민간에서 쓴 글에서도 이 재난을 기록하고 있다. 유약우가 저술한 <<작중지>>에 의하면 천계6년 5월 초육일 진시에 갑자기 크게 진동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큰 나무 스무그루가 땅에서 모 두 뽑혔다. 뿌리가 위를 향하고 가지가 아래를 향하였다. 그리고, 구덩이는 수장깊이가 되었다. 구릅 이 올라갔는데 영지버섯 모양을 하고, 동북쪽으로 몰려갔다. 죽은 자들은 사지가 멀쩡하지 못하였 고,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나체였다. 아직 죽지 않은 자들도 역시 대부분은 옷과 모자가 벗겨졌다. 명나라때의 의문의 북경대폭발 22

23 정말 보지 못했던 해괴한 사건이었다. 이외에 어사 왕업호가 황제게게 바친 글에서도 스스로 겪은 바를 기재하고 있다. 신등이 진각에 관청에 들어가 일을 보려고 할 때, 갑자기 진동음이 들렸는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것같았습니다. 화염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사방에서 담장이 무너지고 집이 갈라지는 소리 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이상한 것은 정원의 나무가 모두 뽑혔는데, 불에 탄 흔적은 없다는 것 입니다. 약방건물이 날아가 버리고 수장깊이의 구덩이가 생겼습니다. 각종 기재를 보면, 북경대폭발은 절대 단순한 폭발사건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많은 의문점들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왕공창이 비록 당시에 군수용품을 보급하는 기관이기는 하였 으므로, 화약을 보관하고 있었겠지만, 폭발후에도 풀하나 나무하나 불에 타지 않은 것을 보면 도대 체 어떻게 폭발한 것인지를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폭발의 위력이 엄청난 것도, 그리고 사람들의 옷이 모두 벗겨져서 창평으로 날아간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머리카락 하나 손상이 없다는 것도 이상하다. 공왕창에서 동북쪽으로 약6킬로미터 떨어진 화신묘에서는 폭발 전에 어떤 사람이 기괴한 음악성을 들었고, 그리고 하나의 불구덩이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 다고 한다. 얼마지나지 않아 재난의 진동음이 들렸다는 것이다. 당시 공부상서 동가위는 두 팔이 절 단되었고, 어사 하정추, 반운익은 집에 있다 죽었으며, 두 집안의 가족들도 모두 흙속에 묻혔다고 한다. 또한 석부마대가의 50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돌사자는 날아서 순성문바깥에 떨어졌고, 상래가 의 황가상원의 상방은 모두 무너져서 코끼리가 놀라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승은사가의 8명이 메는 가마가 지나가다가 재난을 만났는데, 가마는 거리중심에 부서져 있는데, 가마탄 여자와 8명의 가마 꾼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었다. 채시구의 주씨 성을 가진 소흥에서 온 사람은 6명과 얘기하고 있다가 홀연히 머리가 날아가고 몸통은 땅바닥에 주저앉았는데, 옆에 있던 6명은 아무 일이 없었다. 더 이상한 것은 죽은 자이건, 상처를 입은 자이건, 아무런 상처가 없는 자이건 모두 사고이후에는 옷이 날아가서 나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원홍규가를 지나가던 가마속의 여인은 재난시에 가마두껑 이 날아가고 여인의 옷과 장신구는 다 날아갔지만 그녀의 몸은 아무런 상처도 없이 가마속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어느 관리의 시종도 재난을 당했을 때 그저 모자와 옷과 바지 그리고 신발등이 순 식간에 다 없어졌다고 한다. 어느 한 관리의 소첩은 기왓장더미에 깔렸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구해 주고 보니 몸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기록에 따르면 폭발의 힘은 주로 왕공창 중심구역내였다. 폭발후의 충격은 동, 서, 북의 세 개 방향이었고, 남쪽으로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 원인에 대하여는 수백년동안 각종 의견이 제시되었다. 지진으로 인한 것이라는 설, 화약폭발에 의한 것이라는 설, 운석에 의한 것이라는 설, 화산열에 의한 강폭풍이 있었다는 것, 등이다. 심지어 는 UFO가 나타났다든지 외계인이 침입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북경지질학회등 20여개의 단체는 1986년에 학술토론회를 열어 이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고자 하였는 데, "대기의 정전기가 재난을 불러일으켰다는 설", "지진이 화약폭발을 일으켜 사고가 났다는 설", "지구열핵의 강력한 폭발작용이라는 설"등이 제시되었다. 물론 이러한 이론은 신선하기는 하지만, 재난동안 저온이며 불이 붙지 않고, 의복이 날아가는 등의 드문 특징을 해석하기는 어려웠다. 명나라때의 의문의 북경대폭발 23

24 명십삼릉 : 명나라황제는 16명인데, 왜 13황제만 묻혔는지? :06 북경의 북쪽 팔달령장성을 가는 곳에 명나라 황제들의 무덤이 있다. 명나라의 황제는 모두 16명인데, 여기에 묻혀있는 황제는 13명이다. 그럼 어느 황제 3명이 북경 십삼릉에 묻히지 않은 것일까? 첫째, 명태조 주원장 명태조 주원장의 묘는 남경의 명효릉( 明 孝 陵 )이다. 주원장은 남경을 수도로 정했고, 거기서 죽었으 므로 남경에 묻혔다. 둘째, 건문제( 建 文 帝 ) 주윤문 건문제는 삼촌인 영락제( 永 樂 帝 )에게 황위를 빼앗기는 인물이다. 그는 영락제가 군대를 이끌고 북경 에서 남경으로 쳐들어갔을 때, 주윤문은 실종되고 만다. 끝까지 그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그의 무덤도 없다. 셋째, 경태제( 景 泰 帝 ) 경태제는 대종( 代 宗 )이며 이름은 주기옥( 朱 祁 鈺, )이다. 선종 주섬기의 둘째아들이며 현비 오씨의 소생이다. 영종( 英 宗 ) 주기진( 朱 祁 鎭 )과는 동부이모의 형제이다. 주기옥의 생모인 오씨는 원 래 한왕부의 시녀로서 신분이 미천하였다. 영종은 오이라트를 토벌하러 떠났다가 토목보에서 소위 토목보의 변으로 불리우는 사태로 오이라트 에 포로로 붙잡히는 신세가 된다. 그로 인하여 황실에 감국으로 있던 주기옥이 황위에 올라 황제에 오른다. 후에 우겸의 외교노력으로 영종은 포로의 신세에서 풀려나 1450년에 다시 귀국하게 된다. 귀국후 두 황제의 관계는 묘한 상태로 되고, 영종은 사실상 연금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이후 곡절을 겪어 경태제가 세운 황태자는 요절하고, 그마저도 건강이 악화되어 다시 영종이 복벽에 성공을 하 게 된다. 영종이 복위한 후 영종은 대종에 대하여 "불효, 부제, 불인, 불의"함을 들어 그를 황위에서 폐하고 왕으로 낮추게 된다. 이후 1457년 1월 19일 사망하는데, 영종은 생전에 만든 수릉을 철거하고, 경사 금산에 경태릉( 景 泰 陵 )을 별도로 만들어 황제의 예가 아니라 왕의 예로써 장사를 지내게 된다. 이로 인하여 황제였던 대종은 명십삼릉에 황제의 예로 묻히지 못한다. 명십삼릉 : 명나라황제는 16명인데, 왜 13황제만 묻혔는지? 24

25 참고로,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청나라의 배려하에 황제의 예로 명십삼릉에 묻힌다. 명십삼릉 : 명나라황제는 16명인데, 왜 13황제만 묻혔는지? 25

26 명나라의 임인궁변( 壬 寅 宮 變 ), 속칭 궁녀모반( 宮 女 謀 叛 ) :05 명나라의 역사상 궁중에서 일어난 해괴한 일들이 적지 않지만, 명나라 세종, 즉 가정제( 嘉 靖 帝 )때 궁녀에 의한 황제모살사건도 후세에 적지 않은 의문을 남겼다. 자고이래로 경비가 삼엄한 곳은 감옥이 아니라 황궁이었다. 황제는 다른 사람이 암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주변을 경계하고 순라를 돌았다. 명나라때도 마찬가지였다. 명나라 황제의 침궁은 자금성내의 건청궁( 乾 淸 宮 )이었다. 황제와 황후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이 곳에 거주할 수 없었다. 비빈들은 그저 순서 에 따라 들어올 뿐이었고, 황제의 별도 허락없이는 오래 머물 수도 없었고, 그날 밤으로 떠나야 했다. 가정연간의 건청궁은 난각( 暖 閣 )을 뒤에 두어 모두 9칸이었다. 매간은 상하양층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계단이 통해 있었다. 매칸에는 침상을 3장두었는데, 혹은 위층에 혹은 아래층에 두어, 모두 27개의 침상이 있었다. 황제는 그중 마음대로 한 곳을 정해서 거주했다. 그리하여, 황상 에 어느 곳에 자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런 방식으로 황제의 안전은 많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그의 신변에 있는 궁녀들까지 방 비할 수 있었을까? 바로 이들 궁녀들이 경천동지의 큰 일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상 "임인궁변"이라 불리우는 궁녀모반사건이다. "임인궁변"은 가정21년 (1542년) 임인년에 발생한다. 당시의 사료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가정21년 10월 21일 새벽, 십여명의 궁녀는 주후총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그를 목졸라 죽이기로 결정한다. 먼저 양옥향( 楊 玉 香 )이 굵은 밧줄 을 소천약( 蘇 天 藥 )에게 건냈다. 이 굵은 밧줄은 의장기에서 가져온 것으로 사화승( 絲 花 繩 )을 꼬아서 만든 것이었다. 소천약은 묶은 밧줄을 양 금영( 楊 金 英 )에게 건넨다. 형취련( 刑 翠 蓮 )은 황릉말포( 黃 綾 抹 布 )를 요숙고( 姚 淑 皐 )에게 건네고, 요숙고는 황릉말포로 주후총의 얼굴을 덮고, 그의 목을 꽉 조른다. 형취련은 그의 앞가슴을 눌렀고, 왕괴향( 王 槐 香 )은 그의 상반신을 눌렀으며, 소천약과 관매수( 關 梅 秀 )는 각각 그의 좌 우손을 붙잡았다. 유묘련( 劉 妙 蓮 ), 진국화( 陳 國 花 )는 각각 그의 두 다리를 눌렀다. 양금영이 밧줄을 묶기를 기다려, 요숙고와 관매수 두 사람 은 힘을 다해서 밧줄을 끌어당겼다. 그들이 목적을 달성하려는 순간에, 밧줄은 양금영이 잘못 묶어서 더 이상 졸라지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황제를 그 자리에서 완전히 죽여버리지 못했다. 궁녀인 장금련( 張 金 蓮 )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바로 도망쳐서 방황후( 方 皇 后 )에게 달려 가서 보고했다. 황제를 구하러 달려온 방황후는 요숙고에게 한주먹을 얻어맞았다. 왕수란( 王 秀 蘭 )은 진국화로 하여금 등을 끄도록 시켰다. 그 후에 다시 총패( 總 牌 )인 진부용( 陳 芙 蓉 )이 불을 붙였다. 그러자 서추화( 徐 秋 花 ), 정금향( 鄭 金 香 )이 다시 불을 껐다. 이때 관사( 管 事 )가 진부용 이 불러 달려왔고, 이들 궁녀들은 체포된다. 주후총은 이로써 목숨이 끊기지는 않았지만, 너무 놀라서 계속 혼미해 있었고, 오래 지나서야 비 로소 깨어나게 된다. 사건발생후, 사례감( 司 禮 監 )은 그녀들에 대하여 여러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하여 그들에게 진술을 얻어낸다. 그러나, 그녀들이 하는 말은 모두 양금영의 말과 일치했다. 결국 사례감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 "양금영등은 모반을 공모했다. 장금련, 서추화등은 등불을 꺼서 그에 가담하였 으므로, 함께 처벌한다" 사례감의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주후총은 성지를 내리는데, "이들 역비( 逆 婢 )들과 조씨( 曹 氏 ), 왕씨( 王 氏 )는 침소에서 시해하기로 공모하였으니, 흉악하고 패륜적이므로 죄는 죽어마땅하다. 너희가 이미 심문을 통하여 명확히 알아냈으니, 주범과 종범을 구분하 명나라의 임인궁변( 壬 寅 宮 變 ), 속칭 궁녀모반( 宮 女 謀 叛 ) 26

27 지 말고 모두 율에 따라 능치처참하라. 그의 친족들중 이에 참가한 자가 있으면 하나하나 찾아내서, 금의위가 압송해서 법에 따라 처결하고, 재산을 몰수하여 국고에 넣어라. 진부용은 비록 역비이나 막았으니 추궁하지 말라. 이렇게 명하니 이에 따라 처리하라." 형부등 아문은 황상 의 명을 받들어 바로 집행했다. 나중에 집행현황을 보고한 서류도 있다: "신등은 성지를 받들어, 즉시 금의위 장위사, 좌도독 진인등과 함께, 범죄자들을 붙잡아 묶어서 시정으로 끌고가서 하나하나 능지처참하였습니다. 시신은 효수하여 백성들에게 보이고, 황화승, 황릉말포는 물수하 여 관고에 넣어두었습니다. 이후 계속 각 범죄자들의 친족을 잡아서, 모두 법에 따라 처결하겠습니다" 성지에 나오는 조씨, 왕씨는 누구인가? 고증에 의하면 그녀들은 영빈왕씨( 寧 嬪 王 氏 )와 단비조씨( 端 妃 曹 氏 )라고 한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은 이 성지를 근거로 조씨, 왕씨가 지시해 서 이번 궁중변란이 일어났다고 보기도 한다. 사례감에 기록된 양금영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이번달 19일 동소간에 왕, 조시장( 侍 長, 아마도 영빈왕씨, 단비조씨를 가리키는 듯)이 있었 고, 점등시에 서로 상의하여 말하기를: '우리 빨리 손을 쓰자. 그러지 않으면 (그의) 손에 죽을 것이다(누구의 손인지에 대하여 글자가 빠져 있는데, 아마도 황제에 대한 피휘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기재를 근거로 주모자가 조씨, 왕씨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만일 주모자가 조씨와 왕씨라면, 사료에 당연히 영빈왕씨와 단비조씨의 상황이 있어야 하는데, 이상에서 언급된 행형과정에서도 조씨나 왕씨에 대한 조치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주모자가 누구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깊은 궁중안에서 일어난 일이고, 거리에 해가 비칠때도 그늘의 슬픔이 있는 법이다"이것이 명나라말기의 역사학자인 담천이 이 사건을 보는 입장이다. 사실이 어떠했는지는 더이상 알 수가 없다. 그리하여 이것도 하나의 궁중의 수수께끼사건이 되어 버렸다. 주후총이 아직 황제가 되기 전부터 그는 연단( 煉 丹 )과 선도( 仙 道 )를 익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온 신경을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데 두었다. 그가 황제가 된 후에 인간세상의 부귀영화는 모두 누리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장생불사를 추구했다. 그리하여 그는 널리 도사, 방사를 불러모으고, 궁중안에서 재초( 齋 醮 )등의 행사를 벌였다. 규모를 계속 확대했을 뿐아니라, 돈도 많이 쏟아부었다. 그는 호색한이었다. 예부로 하여금 경성, 남경, 산동, 하남등지에 사람을 보내어 민간여자 천여명을 궁중에 보내도록 시텼다. 이후 여러번 궁녀를 뽑았는데, 그 숫자가 수 천에 달하였다. 가정26년(1547년)에서 가정43년(1564년) 사이에만 4번의 선발이 있었고, 모두 1080명의 8살부터 14살까지의 소녀들이 입궁했 다. 이들을 뽑은 이유는 첫째, "원성순홍단( 元 性 純 紅 丹 )"을 연제하기 위한 것이었고, 두번째는 주후총의 음락에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 입궁한 여인들은 아주 적은 인원만이 봉호를 받았고, 대다수는 노역에 종사하고 몸을 망쳐갔다. 주후총이 이 사건을 당한 것은 그의 이런 호 색행위와 관련이 있다. 다만, 구체적인 발생이유에 대하여는 몇 가지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첫째는 가정제가 장생불사의 단약( 丹 藥 )을 제조하기 위하여, 궁녀들을 학대하여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당시 시례감에서 궁녀를 심문한 기록에 보면 "우리가 해치워 버리자. 그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으냐"라는 말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것으로 추단해보면, 궁녀들은 곧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어차피 죽음을 피하기 어렵다면 먼저 손을 쓰자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각종 자료들을 살펴보면, 사건 발생전에 이 궁녀들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러 죽을 죄를 진 것으로 나오지는 않는데, 이런 점에서 추단하는 것이 아마도 장생불로의 단약을 만드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가정제 주후총( 朱 厚 [ 火 + 悤 ])은 여색을 밝혀, 건강상태 가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럴수록 가정제는 도교의 선술에 빠져들어 장생불사를 기원했다. 유명한 방사( 方 士, 방술을 행하는 도사)들은 비약 ( 秘 藥 )이나 연단약( 煉 丹 藥 )을 바쳐 횡재를 하곤 했다. 도중문( 陶 仲 文 )은 가정제의 가장 총애받는 방사의 하나였는데, 한번 상을 내릴 때면 10 만냥의 은을 내리곤 했고, 관직도 일품에 달하게 하여, 그의 자손들까지 덕을 보게 되었다.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전국각지에서 비약과 연단약을 갖다 바치는 것이 줄을 이었다. 당시의 단약비방중 가장 유행하던 것은 "홍연( 紅 鉛 )"이었는데, 처녀의 월경과 약가루를 섞어서 만든 것이었는데 진사( 辰 砂 )와 비슷했다. 또 하나는 "함진병자( 含 眞 餠 子 )라는 것인데, 갓태어난 영아가 입에 물고 있는 핏덩어리를 얘기한다. 가정제 때는 1547년에서 1564년까지의 사이 에 4번에 걸쳐 궁녀를 뽑았는데, 1008명의 8세부터 14세까지의 어린 여자아이들을 궁녀로 뽑았다. 당시 항제는 궁녀들에게 하혈약을 강제로 복용시켜 궁녀들의 신체가 많이 상했을 뿐아니라, 피를 뽑은 궁녀들은 아마도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하에서, 궁녀들은 다른 궁녀들이 죽는 것을 보고는 자신들도 조만간 죽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죽음을 피하기 어렵다면 가정제와 동귀어진하자고 생각하였을 것이라는 명나라의 임인궁변( 壬 寅 宮 變 ), 속칭 궁녀모반( 宮 女 謀 叛 ) 27

28 것이다. 둘째는 가정제가 궁녀들의 원한을 산 것까지는 비슷한데, 다만 원인을 장생불로의 단약이 아니라 가정제의 포악함에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가정제는 성격이 잔폭하고 기뻐하고 화내는 것이 순간적으로 바뀌며, 사람을 대하는게 그때그때 달랐다는 것이다. 황 후부터 궁녀까지 모두 그랬는데, 황후만 보더라도 첫번째 황후인 진씨는 단지 가정제가 호색하는데 대하여 약간의 불만이 있다는 이유로 화 를 불같이 내며 진씨와 그 복중의 아들까지 다 죽여버린다. 진씨의 사망후에 가정제는 순비 장씨를 황후로 세우고 매우 아꼈는데, 역시 사소 한 일 하나로 화가 나서 장씨를 폐출시키고 덕비 방씨를 황후로 세운다. 황후 방씨는 바로 임인궁변에서 가정제의 목숨을 구해주는 그 여인 이다. 그런데, 방씨가 황제가 총애하던 조씨를 죽게 하였다는데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몇년후 황후의 후궁에서 불이나는데, 가정제는 그저 보 기만 하고 구해주지를 않아 방씨는 무섭고 놀라서 경황이 없는 중에 사망하게 된다. 황후들에게도 이렇게 대한 가정제가 나머지 궁녀들에게 어떻게 대했을지는 짐작이 간다. 조선의 사서에 의하면 가정제는 색을 탐하였으나, 궁인이 아주 조그마한 잘못을 저질러도 절대 용서하지 않고 매질을 심히 하였다. 이로 인하여 200여명에 달하는 궁녀들이 맞아죽었다. 이런 비인간적인 대우는 궁녀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동시에 너죽고 나죽자는 심정까지 생기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궁녀들 이 "우리가 먼저 손을 쓰자. 그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된 것이다. 셋째 의견은 영빈 왕씨가 주모자라는 것이다. 왜 왕씨가 궁녀들을 교사하여 가정제를 살해하도록 하였는가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가정제는 신체가 약하고, 항상 기침을 하였던 그녀는 가정 9년이 되도록 자식이 없었다. 가정 10년부터 가정제는 궁내에 흠안전에 제단을 설치하고 후 사를 잇도록 기도를 드렸는데, 예부상서가 감례사가 되어 문무대신들이 돌아가며 향을 올렸으나 전혀 효과가 없었다. 가정 15년에 도사 소원 절( 邵 元 節 )등이 주청하여 단을 세우고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교묘하게도 그 해부터 후궁비빈들이 사내아이를 낳았고 여러명의 아이를 낳게 되었다. 영빈 왕씨도 이 해에 가정제를 위하여 아들을 낳게 된다. 관례에 따르면, 빈에서 비로 승격시켜주어야 하는데, 왠 일인지 가정제는 영빈을 비로 승격시켜주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영빈 왕씨는 원한을 품고 있었다. 가정제가 총애하는 조씨의 궁중에서 잘 때, 양금영등 궁녀 를 시켜 황제를 목졸라 죽이게 하여 보복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며, 책임을 조씨에게 덮어씌우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설은 설득력이 좀 부족 하다. 이미 자식을 낳은 비빈이 이렇게 큰 모험을 한다는 것도 상리에 맞지 않을 뿐아니라 십여명의 궁녀가 영빈 왕씨를 위하여 생사를 돌보 지 않고 황제를 살해하는데 가담하였다는 것도 가능성이 적다. 넷째, 정치투쟁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즉, 직전 황제인 무종은 황음무도하여 자식을 남기지 않고 사망하였는데, 유언도 남기지 못하였다. 임종시에 태감에게 태후와 조정대신들이 상의하여 후사를 정하라고만 하였을 뿐이다. 자수황태후가 조정대신들과 상의한 후 흥헌왕( 興 獻 王 ) 의 아들인 주후총을 가정제로 세우기로 한다. 배분상으로는 세종과 무종은 당형제이므로, 황위계승의 원칙과 황가의 전통에서 보자면 자기의 생부인 흥헌왕은 숙부가 되고, 무종의 부친인 명효종을 부친으로 삼는 것이 맞다. 그런데, 가정제는 자신의 생부를 황제에 추증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황통을 이을 때 이 부분을 명확하게 하지 아니하는 바람에 가정제의 즉위후에 이를 둘러싼 조정의 논쟁은 끊이지를 않았다. 내각수보인 양정을 중심으로 한 일파에서는 명나라 황실의 전통을 중시하여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장총등의 사람들을 대표로 한 일 파에서는 가정제의 뜻에 따라 처리하자는 입장이었다. 명나라 조정은 이를 둘러싸고 역사에서 말하는 소위 "대예의( 大 禮 儀 )"논쟁을 근 20년간 벌인다. 표면적으로는 예의에 대한 다툼이었으나, 실제로는 조정신하와 황제, 그리고 조정신하들간의 격렬한 권력투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예의논쟁이 막 가정제의 의사대로 종결되자마자 임인궁변이 일어난다. 그리고, 단비 조씨와 영빈 왕씨가 관련된다. 이로써 추측해 보자면, 대예의논쟁에서 패배한 일파?에서 비빈을 이용하여 가정제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명나라의 임인궁변( 壬 寅 宮 變 ), 속칭 궁녀모반( 宮 女 謀 叛 ) 28

29 십자군의 동정( 東 征 )과 몽골군의 서정( 西 征 ) :04 11세기부터, 유럽의 기독교회는 십자군의 원정을 시작했다. 제1차 원정은 교회가 만족할 결과를 얻었다. 1099년,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다. 얼마전에 나온 영화 <<천국>>은 바로 이 시기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였다. 성전기사단의 출현으로 교회는 자신의 직업군대를 보유하게 되 었다. 십자군원정은 나중에 많은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불러일으키는데, 그중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정이 있다: 유럽과 머나먼 동방이 직접 적인 접촉을 개시하였다는 점이다. 제1차십자군원정후 약 반세기가 지나서, 1147년, 유럽은 제2차원정을 시작하나 실패로 끝난다. 15년후, 머나먼 몽골초원에는 한 남자아이가 출생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태어났을 때, 손안에는 핏덩이를 움켜쥐고 있었다고 한다. 유럽인들은 나중에 이것은 마귀의 상징이라고 하였 다. 이 남자아이는 나중에 역사에서 징기스칸으로 칭하는 인물이다. 현대의 의사들은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 손안에 핏덩이를 움켜쥐고 있는 것이 그다지 특별할 것은 없다고 한다. 모친의 출산과정에서 어린아이가 핏덩이에 뒤덮일 수 있고, 마침 어린아이가 손으로 잡았다면 징기스 칸처럼 마귀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징기스칸이 25세되던 해인 1187년, 아랍의 영웅 살라딘(쿠르드인)은 예루살렘을 회복한다. 유럽교회는 즉시 1189년 제3차원정을 개시한다. 결 과는 여전히 실패였다. 이때까지, 십자군원정은 근 100년간 지속되었다. 다만, 인류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동안 지속된 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역사는 13세기로 접어들었다. 1202년, 유럽교회는 제4차십자군원정을 시작한다. 이번 원정은 좀 특별했다. 공격대상이 유럽인 자신이 었다. 즉, 동로마제국이었다. 이번 원정에서 재물에 대한 욕심이 분명히 드러난다. 동로마제국이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 가 점령된 후, 유럽교회는 '성전'을 구호로 내걸었지만, 이미 더 이상 동방의 재물을 약탈하겠다는 실질을 감추지도 않았다. 1217년, 재물을 약탈하겠다는 꿈에 눈이 어두워진 십자군은 제5차원정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대상이 이집트였다. 그러나, 이번 원정이 끝나기 도 전에 유럽은 징기스칸의 소문을 듣게 된다. 1220년, 징기스칸은 북경을 떠나, 서쪽으로 진군한다. 우리는 지금으로서야 징기스칸이 서정 ( 西 征 )을 시작한 계기가 동서접경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헛점을 노리고 쳐들어간 것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현재, 우리는 한가지는 믿고 있다. 징기스칸의 곁에는 특수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어서 서방과 계속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민간관계는 오랫동안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1221년, 징기스칸이 파견한 사신이 코카서스지구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항복을 요 구한다. 같은 해 제5차 십자군전쟁은 끝이 난다. 이때의 유럽은 동방에서 밀려오는 몽골군대를 상대해야만 했다. 동유럽지역의 작은 나라들은 몽골의 철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전체 유럽 이 곧 몽골인의 수중에 들어갈 형국이었다. 그러나, 1227년, 몽골인들의 공격은 돌연 멈춘다. 금방 유럽교회도 알게 된다. 원태조 징기스칸이 죽은 것이다. 이후 한동안 징기스칸의 후예들은, 권력투쟁에 돌입한다. 그리하여 잠시 유럽에 대한 공격을 멈추게 된다. 그리하여 1228년, 즉 징기스칸이 죽은 다음 해에 유럽교회는 제6차 십자군원정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다시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1229년, 원태종 오코타이가 칸의 지위에 오른 후, 몽골의 최고지도자가 확정되었다. 유럽의 제6차 십자군원정도 이 해에 끝이 난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재미있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유럽인의 동정과 몽골군의 서정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같다. 몽골인들이 멈추 면, 유럽인들이 행동을 개시하고, 몽골인들이 행동을 개시하면, 유럽인들은 바로 멈춘다. 마치 어떤 방법이 있어, 몽골의 정보가 유럽에 적시 에 전파되었던 것같다. 사실은 아마도 이러했을 것이다. 멀리 당나라때에는 당나라이 수도에 기독교파가 하나 있었다. 중국역사에서 경교( 景 敎 )라고 부르는 일파이고, 유럽교회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라고 불리우는 일파이다. 5세기때, 동로마제국의 네스토리우스가 이 일파를 창건하 는데, 그는 예수는 사람이고 신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유럽교회에서는 이단으로 낙인찍혀 박해를 받게 된다. 할 수없이 동쪽으로 옮 십자군의 동정( 東 征 )과 몽골군의 서정( 西 征 ) 29

30 겨서 발전의 기회를 찾는다. 가장 멀리는 중국까지 갔다. 이 교파는 동쪽으로 전도하는 과정에서, 시리아, 이라크, 이란, 코카서스, 인도에 모 두 흔적을 남겼고,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리하여, 현재의 연구자들은 네스토리우스파 즉 중국의 경교가 어느 정도 동서문화교류에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본다. 다만 종교적인 원인으로 이들의 의사소통업무는 역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몽골인들이 언제든지 서정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는 상황하에서 유럽교회들은 동방의 형세를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1235년, 몽골인들은 모스크바를 점령한다, 1241년에는 징기스칸의 손자인 바투가 현재의 헝가리를 점령하고, 비엔나 부근까지 접근한다. 다만, 몽골군대는 다시 진격을 중단한다. 바투의 군대도 돌연 방향을 동쪽으로 되돌려 가버린다. 나중에서야 유럽인들은 알았다. 징기스칸의 후계자인 오고타이가 죽 은 것이다. 바투는 바로 돌아가서 권력쟁취를 위해 싸워야 했다. 이때, 유럽교회는 알게 된다. 멀리 동방에 몽골인들이 통치하는 제국의 내부 에 기독교가 통치하는 작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한 군주가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유럽교회는 1245년, 정식으로 몽골에 사신을 파견 한다. 이는 역사상 유럽과 중국간에 기록상 남아있는 첫번째의 직접적인 접촉이다. 유럽교회의 사신은 Joannes de Carpino(중문으로 柏 朗 嘉 賓 )와 프란시스파 전도사들은 교황의 서신을 가지고 몽골인을 만난다. 그들은 몽 골의 수도안 카라코룸(Qara-Qorum)까지 가서, 오고타이이후의 칸인 원정종 구육의 즉위식에 참가한다. 유럽교황은 몽골칸에게 보낸 서신 에서, 몽골인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함부로 죽인 것을 질책하고, 몽골인들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라고 요구하며, 동시에 몽골인들과 정치연맹을 결성할 것을 기도하였다. 원정종 구육은 교황에게 회신을 보내는데, 서신에서는 "너는 서신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세례를 받아야 만 하고, 기독교도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이에 대하여 간단하게 답변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왜 우리가 반드시 그래야 하는지....너희는 단지 서양인들만이 기독교도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멸시한다. 그런데, 너희는 어떻게 하느님이 도대체 누구에게 은혜를 베풀었는지를 알 수 있단 말인가?...하물며 너희는 평화를 갈망하고, 너희의 행복을 우리에게도 주고자 하는데, 너희 교황이 즉시 여 러 기독교 귀족들을 친히 데리고 찾아와서 배알하고, 평화를 체결하라. 그래야만 우리는 너희가 확실히 우리와의 평화를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단계의 전후에 유럽교회가 몽골에 파견한 사신은 하나뿐이 아니었다. 또다른 것은 도미니크회 전도사인 아스린이 이끈 사절단이 몽골에 도착했다. 몽골칸도 사신을 유럽에 보내어 교황에게 서신을 보낸다. 그 중의 하나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하늘의 법에는, 라틴파, 그리스파, 아르메니아파, 네스토리우스파, 야곱파 및 모든 십자가에 기도하는 사람들 간에는 차이가 없다. 그들은 우리 제국에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 다. 우리는 교황도 그들을 나누지 말고, 모든 기독교도들에게 보편적인 사랑을 베풀기를 바란다" 역사학자들은 이 서신이 위조되었다고 보기 도 하나, 증거는 부족하다. 이서신은 아마도 원정종 구육이 사망한 후의 섭정자에 의하여 초안되었을 것이다. 이 서신을 통하여 몽고에는 확 실히 기독교도들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역사학자는 몽골의 세번째 칸인 원정종 구육이 기독교도라고 한다. 그러나, 몽골의 기독교도는 모두 당초 유럽에서 이단으로 불리우던 네스토리우스파이다. 이 교파는 유럽교황에 대하여 비교적 모순적인 입장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유럽정통교회에 의하여 받아들여질 것을 바 라면서도 또한 다시 탄압을 받을까봐 두려워 했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전후하여, 중국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은 한편으로는 유럽교황 에게 '신앙고백서'를 보내기도 하고, 또 다른 측면으로, 몽골의 입을 빌어, '종교자유'를 요청했다. 당시 몽골칸의 신변에는 확실이 네스토리우 스파 기독교도인 고관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교화외 몽골칸의 정식 직접접촉은 한계가 있었다. 1248년, 몽골의 세번째 칸인 원정종 구육이 사망한다. 몽골칸의 다툼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1249년, 유럽은 즉시 제7차십자군원정을 시작한다. 이 교류과정에서, 우리는 교황이 몽골인들에게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였 다고 질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십자군도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 바로 이러했기 때문에, 몽골칸은 교황이 질책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황의 사신은 할 수 없이 요구조건을 낮추어 기독교도들은 죽이지 말아달라고 했다. 이 말에 숨은 뜻은 기독교도가 아니면 죽여도 좋다는 취지였다. 이후, 원헌종 몽케칸을 거쳐, 1260년, 원세조 쿠빌라이가 칸에 오른다. 그는 중국본토에 주력한다. 1270년, 유럽에서는 제8차 십자군원정을 일 으키는데, 마지막 십자군원정이 된다. 제1차원정으로부터 계산하자면 거이 200년에 걸친 원정이었다. 교황이 몽골에 사신을 보낸 30년후인 십자군의 동정( 東 征 )과 몽골군의 서정( 西 征 ) 30

31 1275년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도착해서, 동서교류에 큰 공헌을 한다. 역사학자에 따르면, 유럽교황이 몽골과 직접 접촉한 것은 정치적인 의도 가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몽골과 손을 잡고 공동으로 이슬람교에 대처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방의 제왕들은 유럽의 교황이나 국왕에 비하여 '종교자유'를 더욱 선호했다. 14세기에 들면서, 중앙아시아에 있던 몽골제후들이 속속 이슬람교를 받아들인다. 유럽교황이 몽골의 기독 교도와 손을 잡고 공동으로 이슬람교에 대응하려던 의도는 철저히 물거품이 된다. 사람들은 왕왕 이런 명제를 생각한다: 유럽교회의 통치하에서, 어떻게 하여 르네상스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유럽십자군원정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14세기에,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의 각 도시에서 나타난다. 양자간에는 필연적인 관련이 있다. 르네상스는 유럽내부의 자체적인 변 화의 결과가 아니라, 세계교류와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십자군원정은 처음에는 약간이나마 '성전'의 의미가 있었지만, 뒤로 갈수록 재물을 쟁 취하려는 전쟁으로 변질되었다. 동방의 재물은 가난한 유럽인들이 침흘리는 대상이었다. 이런 재물은 유럽인들의 기독교의 금욕적이고 청빈 을 중시하는 견해를 바뀌게 반들었다. 그리하여, 르네상스 초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이탈리아의 도시에서 시작된 것이다. 다음으로, 르 네상스의 내용도 고대그리스, 고대로마로부터 왔는데, 이들 역사문헌은 그리스어를 정종으로 하는 동로마제국에 장기간 보존되어 있었다. 셋 째로, 이슬람교는 중국의 제지기술을 배운 후, 대량의 고대그리스 문헌을 번역하고, 이는 거꾸로 유럽교회의 통치하에 있던 유럽인들을 자극 하였다. 그리하여, 십자군원정의 최종결과는 우매한 유럽교회의 통치는 자신의 적에 의하여 문화적으로 패배하게 된다. 이런 국면이 형성된 하나의 원인은 바로 문화교류이다. 그중, 몽골인들은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Joannes de Carpino등이 몽골에 도착했을 때는 겨우 북방의 초원지 대를 보았다. 당시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곳은 남송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중국이 진정 한 부와 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중에 마르코 폴로가 중국의 장강유역에 도착한 후, 그는 항주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 름다운 도시라고 감탄했다. 항주와 비교하자면, 유럽에서 가장 번화했던 베니스도 시골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1299년, 마르코 폴로의 중국에 관한 책이 출판되고, 유럽에서 중세기의 최대 베스트셀러가 된다. 르네상스운동중에도 널리 전파된다. 200년후, 컬럼부스는 마르코폴로여행기 를 읽으면서 300여곳에 메모를 해놓고, 그 후에 부유한 중국으로 가서 돈을 벌기 위해 항해를 떠나게 된다. 십자군의 동정( 東 征 )과 몽골군의 서정( 西 征 ) 31

32 몽골이 일본정복에 실패한 이유는? :03 일세를 풍미했던 몽골은 유라시아대륙을 휩쓸었고, 싸우는 전투마다 승리했고, 격파하지 못한 성이 없었다. 그런데, 일본은 두번이나 쳐들어 갔지만, 모두 참혹한 실패로 끝이 났다. 몽골인들이 일본으로 진격한 이유는 일본이 몽골제국에 신복( 臣 服, 굴복하여 신하로 자처)하지 않았 기 때문이다. 쿠빌라이는 여러번 사신을 일본에 보내어 일본으로 하여금 신하를 자처하고 공물을 바치도록 요구했다. 고려국왕도 일본에 서 신을 보내어 몽골인들에 굴복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매번 쿠빌라이의 요구를 가볍고 멸시적으로 거절했다. 이같은 무례한 나라 에 대하여 군림천하의 몽골대칸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두번에 걸친 대규모의 일본본토침략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제1차몽골의 일본침입은 1274년에 발생한다. 일본으로 진격하는 원정군은 조선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규슈로 향한다. 원정군은 모두 2만5 천명이었고, 그 중에는 몽골인과 고려인이 각각 절반씩이었다. 그리고 일부 여진족과 일부 한족이 끼어 있었다. 원정군의 총사령관은 몽골인 홀돈( 忽 敦 )이었고, 두명의 부사령관은 고려인 홍다구( 洪 茶 丘 )와 한인 유복형( 劉 復 亨 )이었다. 원나라군은 하카다( 博 多 )항까지 항행하여 갔고, 먼저 쓰시마섬( 對 馬 島 )와 일기도( 壹 岐 島 )를 점령했다. 그후에 세 곳으로 나누어 규슈에 상륙해서 내륙으로 공격해 들어간다. 삼로( 三 路 )의 군 대중에서 일로( 一 路 )는 주력군이었고, 양로( 兩 路 )는 보조군이었다. 주력부대의 상륙지점은 개략 나카사키( 長 崎 ) 부근이었다. 제1차 몽고침입을 맞이하여, 일본의 카마쿠라( 鎌 倉 ) 막부는 일부 정규군을 소집하여 응전했다. 규슈연해의 각 번( 藩 )들도 긴급히 사무라이와 민병을 조직하여 전투에 참가한다. 참혹한 전투는 20여일간 지속되었다. 유복형은 격전중에 전사하고, 원나라군은 절반을 잃고 바닷가로 물러나서, 대포에 의 지하여 방어하고 있었다. 원나라군의 사상자가 많아, 패전은 불가피했다. 화살과 식량도 바닥이 났으므로 더 이상 진지를 사수할 수도 없었 다. 그리하여 원나라군은 배에 올라타고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제2차몽골의 일본침입은 1281년에 발생한다. 쿠빌라이는 중국을 통일한 후, 제2차일본침입에 착수한다. 원나라제국의 방대한 원정군은 강소절 강과 조선에서 동시에 출발한다. 이번 출정의 군대진용은 이전보다 훨씬 장관이었다. 대소선박이 모두 5천척이고, 군대는 약 20만이었다. 그 중 몽골인이 4만5천명, 고려인이 5만여, 한인이 약 10여만이었다. 그중 한인의 절반이상은 신부군( 新 附 軍, 즉, 개편한 남송의 군대)이었다. 원 정군에서 몽고인들은 당연히 작전의 핵심역량이었다. 6월상순, 원나라군은 상륙작전을 시도한다. 상륙지점은 구룡산( 九 龍 山 )으로 제1차때 상 륙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이번 원정군은 더욱 완강한 저항에 부닥친다. 몇명의 몽골군 고급지휘관이 연이어 전사한다. 격전은 1개 월여간 지속되었고, 원정군의 손실이 이미 1/3을 넘어섰다. 일본연해의 바닷가에 견고한 석장( 石 墻 )을 쌓아두었으므로, 원나라군의 계속된 진 공도 돌파하지 못하여 무위로 돌아갔다. 7월하순, 원나라군의 양식과 화살이 기본적으로 바닥났다. 그리하여 원나라군은 철수하게 된다. 사료를 분석해보고, 필자는 몽골이 두번에 걸친 진격에서도 일본을 정복하지 못한 주요한 이유는 아래와 같은 여섯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 제1차일본진공때는 병력이 부족했다. 남송이 아직 멸망하지 않아서, 몽골은 중국의 북방만을 지배하고 있었고, 당시 몽골제국은 병사를 모아 남송을 치는 것을 준비하고 있어서, 일본에 진공하는 군대는 그저 5만여에 불과했다. 먼길을 가서 싸우는데다, 몽골인들은 바다를 건너 서 전투하는데는 익숙하지 못했다. 여기에 일본민족은 강인하였다. 그리하여 병력차이가 현격했다. 병력부족의 원인은 전선이 여러개였다는 것을 제외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쿠빌라이가 당시 군사력이 강했던 일본을 별 것이 아닌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둘째, 몽골은 전술상으로 전혀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일본인의 견해에 따르면, 몽골인들의 전투력은 상상한 것처럼 강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개시후, 일본인은 몽골인과 접근전방식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몽골인들의 궁술과 대포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몽골병사들은 힘든 것은 잘 견디고, 필요하면 말고기를 먹고 말피를 마시면서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작전에서는 기동력이 좋고, 적은 식량과 풀만 가지고 도 사병의 먹고 입는 문제는 현지에서 강탈하여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번의 전쟁에서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도저히 발휘하지 몽골이 일본정복에 실패한 이유는? 32

33 못했다. 내륙의 주민거주지까지 진입하지도 못했다. 그러다보니 약탈할 땅도 없었다. 이와 비교하여 일본인들의 전술은 훨씬 고명했다. 셋째, 몽골은 무기장비에서도 우세하지 못했다. 대일작전에서 몽골은 제1차침입때 무기장비의 면에서 자기들에 비하여 손색이 없는 적수를 처음 만난다. 일본인들의 우세는 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사의 철갑( 鐵 甲 )에서도 두드러졌다. 원나라군의 보통사병의 도검이 일본도와 부 닥치면 바로 부러졌다고 한다(당시 일본의 야금술과 도구제작기술은 세계일류였다. 일본도의 성능은 북인도와 서아시아에서 나는 다마스커스 검과 비견할 수 있을 정도였고, 일본강철은 중국강철보다 훨씬 강했다). 거리가 조금만 멀어지더라도 몽골군의 화살은 일본무사의 갑옷을 뚫 지 못했다. 넷째, 일본사무라이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아서, 전투기술의 측면에서 몽골인들보다 뛰어났다. 몽골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 인들은 단독격투에서 뛰어났다고 한다. 이는 일본인들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일본인들은 원나라군대에서 한인들에 대한 평가는 아주 낮았다. 그들이 보기에 한인군대는 죽기를 겁내는 겁장이였고, 사기도 낮았으며, 가장 표준적인 날나리부대였다. 다섯째, 바다를 건너는 전쟁임에도 비밀유지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두번의 침입은 모두 기습이 아니었다. 일본은 사전에 정보를 취득하고 있 었고, 충분한 전투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제2차침입에 대하여 일본인들은 엄밀하게 원나라제국의 동향을 파악했고, 몽골의 공격에 대한 충분한 준비를 갖추어 놓았다. 이때 일본정국은 안정되어 있었고, 북조시종( 北 條 時 宗 )은 카마쿠라막부와 일본 각번에 대하여 잘 통제하고 있 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몽골에 대항하기 위하여 인력과 물자를 많이 동원할 수 있었다. 막부는 규슈에서 백성들을 동원하여 하카다만일대에 몽골군이 상륙할만한 곳에 석방을 쌓았다. 이로써 몽골기병들의 활동을 제약하게 하였다. 사실상 몽골병사들은 이 방어선을 시종 뚫지 못하 였던 것이다. 여섯째,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 태풍이 일본을 도와주었다. 두번의 침입에서 모두 맹렬한 태풍의 습격을 받아, 손실히 참혹했다. 1281년 제2 차침입때인 8월 1일, 태평양상에 돌연 맹렬한 태풍이 발생한다. 퐁풍은 4일간 지속되었고, 원나라군의 남방함대의 함선은 기본적으로 모두 파 괴되었다. 북방함대의 함대도 절반이 부서졌다. 북방함대의 남은 함선에 지휘관과 일부 몽골군과 고려군을 싣고, 전장터를 떠나 고려로 돌아 간다. 남방군의 지휘관과 고위장수들은 희망이 없다고 보고, 대부대를 남겨놓고, 남방함대의 잔존한 몇 척의 배에 올라타고 도망치게 된다. 이때 구룡산의 바닷가에는 아직도 거의 10만에 이르는 원나라군대가 남아있었다. 이들은 보급선과 퇴로를 차단당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도 없게 된다. 그리하여, 절망적인 지경에 놓이는 것이다. 3일후, 일본인들이 반격을 시작하고, 잔존한 원나라군은 팔각도 ( 八 角 島 )라는 협소한 지역으로 몰아넣고, 공세를 취한다. 그리하여, 원나라군은 대부분 피살당하고, 남은 2만여명은 포로로 붙잡힌다. 몽골이 일본정복에 실패한 이유는? 33

34 아인 잘루트(Ayn Jalut) 전투: 몽고군의 서방정벌중 최대의 참패 : 년 8월의 어느 날, 이집트의 마메루크(Mameluke) 술탄인 쿠두스(Kudus)는 12만 대군을 이끌 고 카이로를 출발해서, 시리아로 향했다. 거기서 몽골군과 결전을 벌이고자 했다. 이전 몇년동안 몽골의 서방정벌군은 훌레구의 지휘하에, 추풍낙엽처럼 페르시아와 티그리스/유프라 테스강유역을 석권했다. 2년전에 바그다드가 함락되었고, 압바스왕조(Abbasid Caliphate)의 마지 막 군주이자, 이슬람세계의 정신적 지도자인 알 무스타심(al-Mustasim)은 몽골대군에 생포되어 죽 임을 당하였고, 이로써 압바스왕조는 멸망했다. 7개월전에는 아랍인의 아시아 최후의 중요도시인 다 마스커스가 함락되었다. 이제 이집트의 마메루크정권은 이슬람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군사력이 되 었다. 쿠두스는 전체 이슬람세계가 절벽에 몰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를 만회할 중책이 자신의 어깨에 달려 있다는 것도 알았고, 생사존망이 이번 결전에 달려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만일 실패한다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이슬람정권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쿠두스의 이번 결전시기는 아주 잘 선택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몇 개월전에 몽골의 칸인 몽케가 서 거했고, 훌레구의 형인 쿠빌라이와 아릭부케간에 칸의 지위를 놓고 내분이 벌어져 있었다. 훌레구는 십여만대군을 이끌고 이를 지원하러 갔다. 그저 부장인 체드부화가 이끄는 2만명의 병사가 다마스 커스에 주둔하고 있었다. 쿠두스는 처음에는 훌레구가 동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경거망동 하지 못했다. 그는 다마스커스에 얼마나 많은 몽골군이 남아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에 팔레스타인의 십자군 기사들이 군사행동을 벌여 체드부화의 군사력이 얼마인지를 알게 해주었다. 시돈(Sidon)의 루른백작과 베이루트의 성기사단의 존은 군대를 이끌고 몽골군 순찰대를 습격했다. 전투중에 체드부화의 조카가 피살되었다. 체드부화는 대노하여, 군대를 이끌고 반격했고, 존의 성기 사부대를 철저히 무너뜰ㅆ다. 그 후에 시돈을 함락시키고, 철저히 약탈했다. 몽골인들의 이러한 징 벌조치는 결과에 있어서 좋지 않았다. 십자군정권과 결렬하게 되었을 뿐아니라, 병력의 규모를 드러 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술탄 쿠두스는 다마스커스의 몽골군 병력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이는 하늘이 준 좋은 기회라 여겼다. 그러나, 그의 수하에는 겨우 5만의 마메루크병사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즉시 몽골 사신의 목을 잘라 군중들에게 보여주고, 전국에서 이슬람병사를 모았다. 그리하여 12만대 군을 이끌게 된 것이다. 이때 모여든 병사들은 이집트 내륙과 리비아 사막의 유목민족이었다. 그래 서 그들은 몽골군이 얼마나 무서운지 전혀 몰랐고, 사기가 높았다. 그리고는 시리아로 가서 체드부 화와 결전을 벌이고자 하였다. 출정하기 전에, 쿠두스는 사신을 파견하여 십자군의 팔레스타인 거점 과 연락했고, 이전의 악감정을 버리고, 힘을 합하여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자고 건의했다. 십자군의 기사들은 막 체드부화의 군대에 패배를 당해서 투지를 잃고 있었으므로 쿠두스의 건의를 거절했다. 다만 마메루크대군이 팔레스타인을 지나가는 것은 방해하지 않겠다고 보증했다. 마메루크는 아랍어로 "노예"라는 뜻이다. 9세기부터, 압바스왕조의 칼리프들은 소아시아에서 코카서 아인 잘루트(Ayn Jalut) 전투: 몽고군의 서방정벌중 최대의 참패 34

35 스까지 노예를 매입했다. 그리고 엄격히 훈련시킨 다음에 기병부대를 조직했고, 칼리프가 직접 지휘 했다. 이들을 가지고 군대를 가진 아랍 각 부락의 수령들과 힘의 균형을 맞추었다. 나중에 아랍 각 지의 술탄들은 칼리프를 모방해서, 자기의 마메루크부대를 결성했다. 마메루크병사는 비록 노예신분 이지만, 주인으로부터 중시를 받았으므로, 대우도 괜찮고 수입도 많았으며, 마메루크 장군은 왕왕 정계의 고위직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13세기의 이집트는 원레 아유브왕조(Ayyubid)의 통치하에 있었다. 아유브왕조는 1174년에 그 이름 도 유명한 살라딘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아유브왕조가 생존을 의지한 마메루크군대는 살라딘에 의 하여 조직되었다. 살라딘의 자손은 내려갈수록 엉망이었다. 13세기초에 이르러는 압바스왕조의 속국 이 되었다. 1250년, 아유브왕조의 술탄 아-살리흐(as-Salih)가 병으로 사망한다. 돌궐출신의 마메 루크 장군인 아이바크(Aybak)는 나이어린 후계자를 죽여버리고, 아-살리흐의 미망인을 처로 삼고, 이집트 마메루크왕조를 세운다.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이 왕조를 승인하지 않고, 아이바크와 여러차 례 무장충돌을 일으킨다. 1258년, 몽골정벌군이 압바스왕조를 멸망시키고, 바그다드는 참혹하게 유 린당하게 된다. 그러자, 카이로는 이슬람세계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집트의 마메루크왕조 는 이때부터 당당하게 이슬람세계의 기둥을 자처하게 된다. 마메루크군대의 전투력은 이슬람세계에서는 최고였다. 원인은 병력자원과 훈련에 있었다. 매년 아랍 인신매매상인은 코카서스지역과 중앙아시아초원에서 수만의 아이들을 유괴하거나 납치해서, 그들을 바그다드, 다마스커스, 카이로의 노예시장에 팔았다. 아랍의 술탄들은 자질이 가장 뛰어난 아이들을 골라서, 군사학교에 보내고, 미래의 마메루크병사로 양성했다. 가장 환영받는 마메루크의 인력자원 은 코카서스에서 온 그루지아와 투르크 부락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역사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그루지아에서 매년 유괴되어 매매되는 아동이 2만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코카서스 산주민과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은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고,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 여 병사로 삼기에는 가장 좋았다. 이집트 마메루크?오가 건립된 후 500년간, 마메루크 병사는 거의 모두 코카서스지역에서 왔다. 마메루크 군사학교는 아주 과학적인 훈련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아이들은 먼저 아랍어와 이슬람교 의를 배우고,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심어준다. 14살이 되면 시스템적으로 신체와 군사기술훈련을 받 는다. 여기에는 만도( 彎 刀 )를 사용하는 법, 긴창과 활을 사용하는 법, 기마술이 포함된다. 궁술은 특 히 중시되었다. 아이들은 먼저 땅 위에서 활쏘는 법을 배우고, 나중에는 말 위에서 활쏘는 법을 배 운다. 나중에는 말을 채찍으로 치고 달리면서 활쏘는 법을 익힌다. 기본적인 군사기능을 장악하게 되면, 아이들은 기마술훈련(Hippodrome)을 받게 된다. 즉, 기병전술단위의 기동훈련이다. 이곳의 아이들은 전진 후퇴 우회등의 각종 전술과 기동중의 진형유지등을 배운다. 마메루크기병은 모두 중기병( 重 騎 兵 )이다. 머리에는 강철로 만든 투구를 쓰고, 몸에는 강사로 짠 갑 옷을 입는다. 마메루크기병의 투구는 유럽기사의 것보다는 많이 가볍다. 그러나 방호효과는 크게 나 쁘지 않았다. 무기와 장비에는 강궁, 긴창, 날카로운 다마스커스칼과 방패이다. 마메루크강궁의 길이 는 몽골강궁보다 하나 더 길었고, 사정거리고 길었으며, 뚫고 들어가는 힘도 강했다. 다만 속도는 느렸다. 이들이 타는 말은 유명한 아랍의 써러브렛이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길었으며 달리는 속도가 빨랐고, 지구력도 괜찮은 편이었다. 몽골기병과 다른 점은, 마메루크기병은 기본적으로 1인1마였기 때문에, 기동성에서 몽골기병에는 미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아인 잘루트(Ayn Jalut) 전투: 몽고군의 서방정벌중 최대의 참패 35

36 마메루크군대의 전술과 몽골군대의 전술은 차이가 많았다. 마메루크군대는 전투시에 수비에 치중한 다. 기병들은 나란히 대형을 유지하고, 강궁으로 한 차례, 또 한차례 진격해오는 적군에 사격을 가 한다. 마메루크기병의 궁술은 뛰어나서, 상당히 먼 거리의 적군도 정확히 맞출 수 있었다. 적군이 화살이 바닥날 때쯤, 마메루크기병은 돌격한다. 이때의 마메루크기병은 진형을 엄격하게 유지한 채 진격한다. 적에게 접근할 때는 먼저 화살을 날린 후, 전진을 돌파한다. 긴창과 다마스커스칼로 적과 백병전을 벌인다. 마메루크기병의 칼솜씨는 아주 뛰어났다. 말을 채찍질하면서도 공중의 대추를 맞 힐 수 있는 수준이었다. 세계에 이름을 날린 다마스커스칼은 마메루크기병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었다. 근거리전투에서 이를 당할 것이 없었다. 마메루크군대는 장비와 전술에서 유럽의 기사와 중앙아시아 기병의 장점을 잘 결합했다. 여기에 엄 격한 훈련까지 받고, 규율이 엄격하여, 확실히 중세의 가장 강한 군대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집트 마메루크왕조는 이들 우수한 군대에 의지하여 5백년간 지속되었다. 1798년 마메루크기병은 프 랑스군대에 두번이나 패하면서 이집트의 마메루크왕조는 그 종말을 맞이한다. 1260년 9월 3일, 마메루크의 대군은 팔레스타인 북부의 아인 잘루트(Ayn Jalut)에서 체드부화가 이 끄는 몽골대군과 맞부닥쳤다. 체드부화에게는 2만의 몽골기병이 있었고, 일부 시리아의 지방군대를 보유했다. 아르메니아의 국왕 인 하이든은 이미 귀국했지만, 2천의 철갑기병을 남겨 두었다. 그리하여 아인 젤루트 전투에 참가한 몽골군대는 2만5천 정도였다. 아인 젤루트는 부근에 약 6킬로미터 넓이의 산골짜기가 있었다. 이곳 은 쿠두스가 고민끝에 선택한 전투장소였다. 쿠두스는 대부분의 마메루크기병을 산골짜기 깊숙한 곳에 배치했다. 북아프리카의 경기병들은 양측의 산 속에 배치해서 거대한 U자형을 이루었다. 그 후에 쿠두스는 믿음직한 부하장수 바이바르(Baibar)에게 1만의 군대를 이끌고 골짜기입구에 진을 펼치게 하였다. 비록 몽골군대의 인원수는 마메루크대군보다 몇배나 적었지만, 체드부화는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반 드시 이길 것이라는 자신감에 넘쳤다. 그리고, 그의 자신감은 모든 몽골전사에게 감염되었다. 몽골 군대는 수십년간 무적이어서 이미 '승리병'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 증상은 교만함으로 나타났다. 몽 골군대의 야전능력은 세계적으로 유명했고, 훌레구가 서방정벌을 할 때 파죽지세였고, 아랍인들은 몽골군대만 만나면 겁을 먹고, 그저 성을 지키기에 급급했고, 야전은 회피했다. 이리하여 몽골군대 는 아랍군대 특히 마메루크기병의 야전능력을 아주 형편없게 평가했다. 결전은 드디어 시작되었다. 체그부화는 훌레구의 밑에 있는 최고의 장수였다. 그는 이번 전투에도 맹목적으로 이길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군대를 이끌고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바이바르의 임무는 패배하여 퇴각하는 것처럼 하여, 몽골군대를 쿠두스가 설치해놓은 함정에 빠트 리는 것이었다. 이 1만의 마메루크기병은 약간 저항하다가 산골짜기로 도망갔다. 몽골군대는 바로 추격하며 산골짜기로 돌진했다. 만일 체드부화가 조금만 주의하였다면 그는 철수하는 마메루크군대 가 질서정연하고 전혀 패퇴하는 군대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체드부화와 그의 부하들은 이미 계속된 승리에 취해 있었고, 쿠두스의 포위망으로 뛰어드는데 대하여 전혀 걱 정하지 않았다. 바이바르부대는 신속히 본진으로 되돌아갔고, 마메루크군대의 전모가 체드부화의 눈 앞에 펼쳐지게 된다. 5만의 마메루크기병은 6킬로미터길이로 전선을 펼치고 있었고, 중간은 병력이 아인 잘루트(Ayn Jalut) 전투: 몽고군의 서방정벌중 최대의 참패 36

37 두텁고 양쪽은 얇았다. 요( 凹 )자의 초생달 모양이었다. 목적은 화살의 화력을 집중하기 위한 것이었 다. 쿠두스는 중앙에서 전국면을 지휘했고, 바이바르는 우익을 지휘했다. 양측 산속에 있는 7만명으 ㅣ북아프리카 기병이 이때 돌진해 들어갔다. 그리하여 몽골군대는 3면에 적을 맞이하게 된다. 자기들이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에, 몽골군대는 잠시 혼란이 있었고, 따르던 시리아의 군대 는 전장에서 도망쳐 버린다. 체드부화는 역시 오랫동안 전투를 해온 장수였다. 그는 신속히 전장의 형세를 파악하고, 즉시 몽골군대의 2만기병과 아르메니아의 철갑기병을 선봉에 서게 하고, 마메루크 진영의 약한 두 날개로 돌진했다. 체드불화는 친히 1만의 부대를 이끌고 마메루크진영의 좌익으로 부닥쳐 갔다. 몽골군대는 전방과 측면에서 하늘을 가리며 날아오는 화살을 마주하게 되고, 손실이 참혹했다. 몽골병사는 고도의 전술규율을 발휘하여, 죽거나 다친 자들을 내버려두고 앞으로 돌격했 다. 마메루크진영의 양측 날개에 있는 병사들은 몽골기병이 생사를 도외시 하고 쳐들어오고, 몸에 수많은 화살을 맞으면서도 돌진하자 간담이 서늘해 졌다. 삽시간에 몽골군대는 이들 앞에 도달했다. 중기병은 다마스커스칼을 꺼내어 휘둘렀다. 원래 자신감이 없던 마메루크기병은 점차 투지를 상실 한다. 바이바르가 이끄는 우익은 겨우 버텼다. 그러나 좌익은 체드부화가 직접 이끄는 몽골기병에게 큰 압력을 받고 있었고, 이미 궤멸되기 시작했다. 양익의 병사들의 전투의지가 동요되고 이는 전염 병처럼 중앙에 번졌다. 전체 마메루크진영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아주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쿠두스는 절망속에 자기의 대군이 이미 궤멸되는 것을 목격했다. 아랍측의 사료에 의하면, 쿠두스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투구를 벗어 땅바닥에 내던졌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는 "이슬람을 위하 여!"를 외치며 단기필마로 다마스커스칼을 휘두르며 전장터에 뛰어드니, 십여명의 몽골병사들이 그 의 칼아래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쿠두스의 이러한 영웅적인 행동은 마메루크기병의 용기를 불러일 으켰다. 그들은 잠시 주저한 후, 미친 듯이 돌진해 들어갔다. 만도로 몽골기병과 백병전을 벌였다. 마메루크기병이 잠시 주춤한 것은 심리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자신감을 회복하자 금방 놀랄만한 전 투력을 발휘했다. 몽골기병은 근거리전투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마메루크기병은 칼싸움에서 금방 우 세를 점하게 된다. 이번 혼전은 새벽부터 오후까지 계속되었다. 마메루크대군은 사람수에서 우세했고, 이것이 점차 힘 을 발휘했다. 몽골기병의 사망자는 점차 늘어나고, 패색이 짙어졌다. 체드부화의 부하들은 그에게 후퇴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그는 오만하게 거절했다. 체드부화는 친히 자기의 호위병을 이끌고 돌 격했다. 결국 그는 화살에 목숨을 잃는다. 지휘관을 잃은 몽골군대는 급격히 무너진다. 도망치는 자 가 생기게 된다. 마메루크기병은 12킬로미터를 추격했고, 베이산(Beisan)이라는 곳에서 몽골의 잔 여군을 겹겹이 포위한다. 몽골병사는 모두 말에서 내려, 방패로 둥글게 방어선을 치고, 강궁으로 정 확히 적군을 사격했다. 이리하여 마메루크군대는 상당히 많은 자가 죽게 된다. 몽골병사들이 화살을 다 쏘자, 마메루크기병은 방패로 된 방어선을 뚫었고, 몽골병사는 전원 전사한다. 체드부화의 대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이 다마스커스에 전해졌고, 다마스커스를 지키던 몽골병사들은 바로 도망친다. 며칠 지나지 않아 쿠두스는 대군을 이끌고 다마스커스에 진주한다. 성안의 무슬림들 은 즉시 반격을 가하여 기독교도와 유태인들을 죽여버린다. 이리하여 다마스커스는 다시 피바람이 몰아친다. 이슬람의 구원자 쿠두스는 아쉽게도 승리의 과실을 며칠도 누리지 못하고, 그의 부하인 바이바르에게 암살당한다. 이리하여 바이바르는 이집트 마메루크의 새로운 술탄에 오른다. 아인 잘루트(Ayn Jalut) 전투: 몽고군의 서방정벌중 최대의 참패 37

38 몽고인들은 왜 일본을 점령하지 못했는가? :01 13세기 원제국이 두번에 걸친 일본침공을 감행하나 참담하게 패전한데 대하여 동아시아에서 유럽까지의 많은 역사서적에 모두 기재가 남아 있다. 그러나, 가장 원시적인 기록은 세군데로부터 나온다. 하나는 원제국의 기록이고, 둘은 고려의 기록이며, 셋은 일본의 기록이다. 이 세가 지 기록은 모두 치우친 점이 있고, 서로 모순되는 곳이 많다. 다행히 모두 유일한 기록은 아니고, 고고학적으로 방증을 찾을 수 있어서 상호 비교하여 진상을 추리하는데 크게 어렵지는 않다. 그중 고려사람들의 위치는 국외인에 가까웠고, 전쟁과 큰 이해관계가 없어서, 이들의 기록이 가장 믿을만하다. 몽고인들이 일본을 공격한 것 은 일본이 몽고제국에 신하로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쿠빌라이는 여러차례 사신을 일본에 보내어 일본으로 하여금 신하를 칭하고 공물을 바치라고 하였고, 고려국왕도 일본에 글을 보내어 몽고인들에게 굴복하라고 요구하였지만, 매번 일본인들은 가볍게 쿠빌라이의 요청을 거절 했다. 이러한 무례함에 대하여 군림천하의 몽고황제는 당연히 그냥 두고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력으로 일본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설명해야할 것은 제1차일본진공때, 남송이 아직 멸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북방만을 지배하고 있었고, 당시 원나라제국은 병사를 모아서 남정을 준비하던 때였다. 일본으로 진공한 부대는 많지 않았다. 한인들은 이번 일본공격의 주력도 아니었다. 쿠빌라이가 일본을 지배하고자 한 것은 칸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외에 여러가지 실제적인 고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몽코황제의 재산은 세계최고였다. 그러나, 몽고귀족의 사치품에 대한 왕성한 수요에 몽고인들이 재산관리에 능숙하지 못했던 점으로 인하여 몽고제국의 재정은 자주 바닥을 드러냈다. 쿠빌라이 이전의 두 칸인 구유크와 몽케는 모두 돈을 펑펑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들은 사치품을 구매하면서 귀금 속으로 지급했고, 일부 미지급된 채무는 미래의 전리품을 담보로 하였다. 쿠빌라이는 아리부케와 칸의 지위를 놓고 4년간이나 격전을 벌였다. 이번 몽고족간의 내전에서는 아무런 전리품도 얻지를 못해서, 자연히 몽 고제국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일본은 과거 수백년간 세계에서 최대의 백은( 白 銀 ) 생산지 겸 수출국이었다. 이 부유한 섬나라는 통화가 필요했던 몽고귀족의 눈에는 아주 탐나는 것이었다. 1274년, 일본을 진공하는 원정군은 조선에서 배를 띄웠고, 큐슈로 향했다. 원정군은 모두 25000명이었는데, 그중 몽고인과 고려인이 각각 절 반씩 차지했고, 일부 여진인과 소량의 한인이 있었다. 원정군의 총사령관은 홀돈( 忽 敦 )이었고, 두명의 부사령관은 고려인 홍다구( 洪 茶 丘 )와 한인 유복형( 劉 復 亨 )이었다. 원나라군대는 하카다만까지 항행했고, 먼저 대마도와 일기도( 壹 岐 島 )를 점령하고 유린했다. 그후에 세 부대로 나 누어 큐슈에 상륙해서 내륙을 공격했다. 삼로로 나뉜 원정군은 1로가 주력이고 두개의 로가 지원했다. 주력부대의 상륙지점은 개략 나카사키 부근이다. 제1차 몽고침입을 맞이하여, 일본의 카마쿠라막부는 일부 정규군을 모집하여 전투하고, 큐슈연해의 각번들도 긴급히 사무라이와 민변을 조직 하여 전투에 참전하였다. 참혹한 전투가 20여일간 지속되었다. 일본인들의 전술은 비교적 낙후되어, 처음에는 전투에서 많은 사람이 사망했 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원나라의 진격은 막아냈다. 며칠간 서로 대치한 후, 일본인들은 점점 몽고인들의 전술에 익숙해지고, 반격을 시작 했다. 주로 사무라이로 구성된 일본의 중기병부대는 특히 용감했다. 그들은 궁수의 지원하에 화살의 비를 견디며 적진을 돌파하려했고, 상대 방과 접근전을 벌였다. 그리하여 몽고인들의 궁술에서의 장점을 잃어버리도록 만들었다. 유복형은 격전중에 전사한다. 원나라군대는 절반을 잃은 후 바닷가로 패퇴하여 대포에 의지하여 방어한다. 원나라군대의 사상자가 속출하고, 진격이 어려워지자, 그들은 패전이 불가피했다. 그 리고 화살과 물자도 곧 바닥을 보일 지경이었다. 원나라군대는 계속 진지를 지키고 있을 수가 없어 배에 올라 철수하게 된다. 조선으로 돌아 오는 길에, 원나라군대는 폭풍을 만나 손실을 입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배는 안전하게 귀국한다. 몽고인들은 왜 일본을 점령하지 못했는가? 38

39 이번 전투를 일본역사에서는 "문영지역( 文 永 之 役 )"이라고 부른다. 몽고인들은 동아시아에서 장비, 훈련 및 용기의 면에서 자신들에 못지 않은 적수를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 고려인들은 전투에서 접근전을 책임졌다. 이들은 일본인들의 정면공격을 받아 손실이 참중했다. 그래서 고려인 들은 일본인들의 전투력 특히 일본인들의 전도( 戰 刀 )에 대하여 인상이 깊었다. 원나라의 보통병사들이 가진 칼은 일본도와 부딛치면 바로 부 러졌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활과 화살에 있어서는 몽고인들의 손실이 적었다. 그들이 보기에 일본인의 화살은 비록 위력이 컸지만, 사정거리 가 짧아서 몽고인들의 각궁에 비교할 수 없었다. 여기서 다시 일본도를 간략히 소개하기로 하자. 당시 일본의 야금술과 칼제작술은 세계일류였다. 일본도의 성능은 북인도와 서아시아에서 나 는 다마스커스 강도( 鋼 刀 )만이 이에 비길 만할 정도였다. 고대의 가장 우수한 강( 鋼 )은 성능으로 나누면, 다마스커스강( 鑄 造 花 紋 鋼 ), 일본강 ( 暗 光 花 紋 鋼 ), 말레이시아강( 接 花 紋 鋼 )이었다. 중국에서 가장 좋은 강( 鐵 )은 사실 한접화문강이었다. 그러나, 성능은 말레이시아것처럼 뛰어나지 못했다. 중국에서 가장 좋은 도검은 일반적으로 말레이시아에서 수입한 강으로 만들었다. 다마스커스강은 고급합금강이다. 여금기술 이 복잡하고, 원가가 비쌌으며, 구체적인 제조기법은 이미 실전되었다. 고대에 다마스커스강도는 일반적으로 귀족들만 가질 수 있었다. 최고 급의 다마스커스강도는 오자강도( 烏 玆 鋼 刀 )로 인도에서 생산되었다. 그 다음이 스체르만도( 斯 切 爾 灣 刀 )로 페르시아에서 나왔다. 스체르만도는 제조기법과 장식이 아주 호화스러웠다. 몽고귀족들이 아끼는 것이었다. 이와 비교하면, 일본강은 사실 그리 큰 특색은 없다. 일본도의 우수한 성능은 주로 독특한 후기의 공법에 있었다. 다마스커스강도는 비록 성능이 탁월했지만, 일본도는 제조원가가 저렴했다. 일본의 보통병사들도 좋은 칼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당시 고생을 견디는 것으로 따지자면 몽고전사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필요하면 그들은 말고기를 생으로 먹을 수도 있고, 말의 피를 마시면서 생명을 유지할 수도 있다. 몽고인들은 작전때 기동성을 제일로 치고, 일반적으로 물자를 많이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사병들은 먹고 입는 문제를 주로 전쟁지구의 백성에게서 빼앗아 해결했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 몽고인들은 자신의 장점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내 지의 주민거주지역으로 깊게 들어갈 수가 없었고, 그래서 백성으로부터 약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전술은 아주 뛰어났었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이것은 일본군대의 전투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제1차일본공격이 끝난 후, 쿠빌라이는 일본인들이 몽고인의 위력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시 사신을 보내어 일본에 신하를 칭 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아예 사신의 목을 베어버린다. 쿠빌라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중국을 전부 통일한 후, 그는 제 2차 일본공격을 준비한다. 군대는 중국각지, 몽고와 고려에서 모으로 연해지구에서 상륙작전을 연습한다. 원장군의 양식보급은 전국각지에서 모아서 끊이지 않도록 조치했고, 동시에 고려와 중국동남연안의 조선소에서는 밤을 새워 크고 작은 전선과 보급선을 만들었다. 이같은 대규모의 원정준비는 비밀유지가 힘들었다. 일본인들은 정찰을 통하여 원제국의 동향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곧 있을 제2차 몽고침입 에 대한 충분한 전쟁준비를 해두었다. 이때, 일본의 정국은 안정되어 있었고, 복조시종( 北 條 時 宗 )의 카마쿠라막부와 일본 각번에 대한 지배력 이 그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 강력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더 많은 인적 물적자원을 모집하여 전쟁준비를 할 수 있었다. 막부는 큐슈에서 백 성을 징용하여 하카다만일대에 원나라군대가 상륙할만한 곳에 돌벽을 쌓아두었다. 이로써 몽고기병의 활동을 막으려 했다. 몽골군대가 일본 에 진격할 일시가 가까워오자, 복조종성( 北 條 宗 盛 )과 북조종정( 北 條 宗 政 )은 각각 정예 사무라이를 이끌고 혼슈와 큐슈의 연해지방에 병력을 배치했다. 복조종정의 진서군( 鎭 西 軍 )은 나중에 전투의 주력이 된다. 동시에 규슈의 각 번에서도 민병을 모집한다.일본의 다른 지역의 사무라 이들도 전투에 참전한다. 1281년, 원제국의 방대한 원정군이 강소절강과 고려의 두 곳에서 동시에 출발한다. 이번 출정의 면모는 장관이었다. 모두 크고작은 선박이 5 천척, 군대는 약 20만이었다. 그중 몽고인이 4만5천, 고려인이 5만여, 한인이 약 10만이었다. 그중 한인의 대다수는 새로 편제된 남송의 옛군 대였다. 원정군에서 몽고인이 당연히 주축이었다. 북방에서 출발한 함대는 5월말에 일본인들이 생각한 하카다만에 도착한다. 다시 남방함대를 기다리는 기간동안 몽고인들은 가볍게 하카다만의 몇개 도서를 점령한다. 섬안의 주민은 모두 죽이고, 섬위의 건축물도 모두 불태운다. 유월 상순 남방함대가 도착한다. 두개의 방대한 함대는 큐슈의 바깥 바다에서 회합하고, 이후 원나라군대는 상륙작전을 개시한다. 상륙지점인 구룡 산은 제1차때 주력부대가 상륙한 지점에서 멀지 않았다. 이번 원정군은 더욱 완강하고 효과적인 저항에 부딛친다. 일본군대는 돌벽으로 엄호 몽고인들은 왜 일본을 점령하지 못했는가? 39

40 하면서 계속 원나라군대의 진격을 물리친다. 기회를 틈타 돌파작전을 벌인다. 일본인의 가장 성공적인 반격으로 고려군의 주력은 궤멸한 다. 몇명의 몽고지휘관도 연이어 전사한다. 격렬한 전투가 1개월여간 계속된다. 원정군의 손실은 이미 1/3을 넘어섰다. 그런 여전히 돌벽을 돌파하지 못했다. 7월하순이 되어, 원나라군대는 양식과 화살이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이때 몽고인이건 일본인이건 모두 이번 전쟁의 결과도 저번과 같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원나라군대가 철수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8월 1일, 태평양에서 맹렬한 태풍이 몰려왔다. 태풍은 4일간 지속되었다. 원나라군대의 남방함대의 배는 기본적으로 모두 부서졌다. 북방함대 의 배는 절반가량 부서졌다. 북방함대의 남은 배는 지휘관과 일부 몽고군과 고려군을 태우고 고려로 돌아갔다. 남방군의 지휘관과 일부 고급 장교는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겨우 남은 몇 척의 배를 타고 멀리 도망친다. 이때 구룡산의 바닷가에는 여전히 10만의 원나라군대 가 남아 있었다. 이들은 보급선과 퇴로를 잃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방법도 없었다. 이제는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3일후, 일본인들이 반격을 시작했다. 남아있던 원나라군대는 팔각도라는 좁은 지역으로 몰려갔고, 공격을 개시했다. 원나라군대는 대 부분 피살되었고, 남은 2만여명은 포로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몽고인의 표준에 따라 포로를 4등급으로 나누었다. 전3등은 몽고인, 색목인, 여 진인, 고려인과 북방한인으로 모두 죽여버렸다. 4등인 당인( 唐 人, 남방한인)은 죽음을 면하게 한 후 부민( 部 民, 천민)으로 삼았다. 지금도 하 카다만에는 "원관총( 元 冠 塚 )"이라는 작은 산이 있는데, 이곳은 당시 원나라병사들을 집단으로 묻은 곳이라고 한다. 이번 참패에서, 남방군은 겨우 3명의 병사만이 도망쳐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겨우 작은 배 하나를 구해서 행운스럽게도 중국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쿠빌라이는 3명의 생존자들을 통해서 패전의 진상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전쟁의 부총사령관 범문호는 참수되었고, 다른 관리들도 서로 다르지만 처벌을 받았다. 일본역사에서는 제2차몽고침입을 "홍안지역( 弘 安 之 役 )"이라고 부른다. 이번 전쟁에 일본인들이 투입한 군대는 수준이나 수량면에서 모두 "문 영지역"을 넘어섰다. 몽고인들은 전술에서 조금도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일본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몽고인의 전투력은 상상했던 것처럼 강 대하지 않았다. 일본 사무라이는 여러 면에서 그들을 압도했다. 특히 장비와 전투기술의 측면에서 그렇다. 일본인의 장비우세는 일본도뿐이 아니었다. 사무라이의 철갑에서도 조금만 떨어져 있으면 몽고인들의 화살이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몽고인들의 화살은 사무라이의 갑 옷을 뚫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 사무라이들은 어려서부터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았고,그들의 전쟁기술이 몽고인보다 뛰어났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몽고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개별전투, 단독전투에 능하다다고 하였다. 이것은 일본인들의 주장과도 부합한다. 일본인 의 원나라군대에 대한 평가에서 한인들을 가장 낮게 평가했다. 그들이 보기에, 한인들은 죽기를 두려워하는 겁쟁이었고, 사기도 낮았고, 가장 형편없는 부대였다. 그러나, 한인은 싸우는 것은 잘 못해도, 노예로 삼기는 좋았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한인들을 사면해서 노예로 삼았던 것 이다. 몽고인들은 왜 일본을 점령하지 못했는가? 40

41 카미카제( 神 風 ) : 몽고의 제1차 일본침공 :59 지원3년(1266년), 쿠빌라이는 병부시랑 혁덕( 赫 德 ), 예부시랑 은홍( 殷 洪 )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쿠빌라이는 국서에서 이번 사신파견의 목적 을 명확히 밝히면서 일본이 고려를 본받아 원나라와 통호( 通 好 )하자고 하였고, 만일 통호하지 않으면, 장차 군대를 보내어 일본을 취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국서의 글내용이 무례하다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고, 돌려보냈다. 이후에도 몇번 사신이 갔으나 모두 일본에 의하여 거절당한다. 지원10년(1273년), 쿠빌라이는 일본정벌전쟁준비에 착수한다. 지원10년 4월에 이르러, 탐라도의 임연( 林 衍 )이 반란을 일으켰고, 고려왕의 정통 에 반기를 들었다. 쿠빌라이는 이 틈을 타서 원나라 군대를 고려에 보내어 주둔시킨다. 이후, 원나라군대는 탐라도에 초토사( 招 討 司 )를 설치 하고, 1700여명의 주둔군을 두면서, 일본과 남송간의 해상통로를 장악한다. 이로써 원나라군대는 직접 일본을 공격할 수 있는 루트를 확보한 다. 이후 쿠빌라이는 흔도(? 都 ), 김방경( 金 方 慶 )을 원나라의 대도로 불러 일본정벌에 관하여 협의한다. 지원11년(1274년) 정월, 쿠빌라이는 고 려왕에게 명하여 9백척의 배를 건조하게 한다. 그중 대함으로 천석 또는 사천석을 실을 수 있는 3백척은 김방경으로 하여금 책임지고 건조하 게 하고, 쾌속선 3백척과 급수소선 3백척은 홍차구( 洪 茶 丘 )로 하여금 책임지고 건조하게 한다. 그리고 정월 15일에 착수하여, 기한내에 완성 하도록 명한다. 6월, 9백척의 군함이 건조되었고, 원세조 쿠빌라이에게 보고하였다. 쿠빌라이는 몽고, 한족, 고려의 3족군대로 구성된 연합군을 구성하여 일본 을 정벌하도록 명한다. 연합군의 핵심은 몽고원나라부대의 몽고/한족부대 2만명이었다. 고려군은 5,600명이었다. 여기에 고려수군 6700명을 합하여 모두 32,300명이었다. 정동도원수는 흔도, 우부사는 홍차구, 좌부사는 유복형( 劉 復 亨 )이 지휘하였고, 8월에 출발한다. 당시의 몽고군대는 징기스칸의 훈련을 받아 군기가 삼엄하였다. 매 10인, 100인, 1000인, 10000인을 하나의 전투대로 하여 매 전투대에는 한 명의 대장이 통솔하였으며 조직이 아주 엄밀하였다. 그리하여, 용감하게 잘 싸웠고, 전투력이 매우 강했다. 이외에, 원나라는 당시 화기사용기 술이 세계최고수준이었고, 일찌기 유럽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래서 화포는 이번 일본정벌작전의 중요한 비밀무기가 되어 원나라군대에 배 치된다. 일본의 사무라이부대의 기초는 수( 守 ), 개지두제( 介 地 頭 制, 庄 頭 制 )였다. 이것은 원뢰조( 源 賴 朝 )가 건립한 막부시기에 형성된 병사제도였다. 임수, 개지두의 직을 가진 사무라이는 많은 사람들이 역대 쇼군이나 집권자의 가신이었다. 즉, 어가인( 御 家 人 )이었다. 수( 守 )는 한 지방의 병 마대권을 장악한 최고행정장관이다. 그러나 관직의 품계로 보면, 종오품에서 정육품까지의 중하급관리였다. 지두는 공사토지에 대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였다. 그리고 그가 관리하는 토지에 대하여 경찰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직위는 더 낮아서, 수에 예속되었다. 그들은 그가 관 리하는 토지면적의 대소에 따라 사병을 길렀다. 한 수가 군대를 데리고 출정하면, 그 일종의 가족이나 친척들은 바로 당해 수부대의 핵심이 되어 함께 출정했다. 수가 관할하는 지두도 역시 그의 가족등을 데리고 하나의 무리를 이루러 함께 전투에 나섰으며 수의 지휘를 받았다. 이 런 주종관계로 구성된 부대는 조직이 공고하고, 쉽게 궤멸되지 않았으며 흩어졌다가도 다시 뭉치곤 했다. 가신은 죽음으로써 군주의 말앞을 지키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으므로 전투력이 매우 강했다. 그러나, 이런 부대는 각자 따로 싸웠고, 지휘권이 통일되지 않았으므로, 전투시 일 기가 일기를 맞이하는 단독전투방식을 취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투시 혼란이 나타나고, 무조직, 무기율의 현상이 있어서 지휘가 쉽지 않았다. 전술이랄 것도 없었고, 근본적으로 원나라군대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전체 전투력으로 따지면 아주 약한 편이었다. 지원11년(1274년), 일본을 침입한 원나라군대는 흔도, 홍차구, 유복형의 세 장군의 지휘하에 10월 3일, 고려의 합포( 合 浦, 지금의 진해만 마산 포부근)를 출발하여, 대마도로 향한다. 10월 5일, 대마도에 접근한다. 현지의 지두( 地 頭 )인 종마윤조국( 宗 馬 允 助 國 )은 팔십여기를 조직하여 원 카미카제( 神 風 ) : 몽고의 제1차 일본침공 41

42 나라군대가 상륙하는 지점으로 갔고, 쌍방은 격전을 벌인다. 중과부적이어서 종마윤조국 및 그의 적자, 양자등 모두 12명이 전사하고, 대마도 를 사수하던 군대는 전부 섬멸된다. 6일 대마도를 점령한다. 어떤 사료에 의하면, 종마윤조국이 일기도( 壹 岐 島 )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14일저 녁, 원나라군대는 일기도를 공격한다. 원나라군대의 두척의 배에서 약 400명이 먼저 상륙하고, 부대는 상륙한 후 대오를 갖춘 후 붉은 기를 세우는 것을 신호로, 수호군좌위문 위평경고(평내좌위문경륭)가 이끄는 백여기와 격전을 벌인다. 경고는 숫적으로 불리하자 성내로 물러나 방 어한다. 15일에 성이 함락되고, 경고는 자살한다. 16일, 원나라군대는 비전의 연해도서와 서북연해일대를 압박한다. 비전( 肥 前 )은 일본 큐슈의 서남연해지구의 고지명이다. 현재의 나가사키( 長 岐 )와 사하( 佐 賀 )의 두 개 현을 포함한다. 당시 일본도 폐문쇄국정 책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큐슈의 태재부( 太 宰 府 )에는 총독부를 설립해서 큐슈의 군사방어와 국가외교를 책임졌다. 그리하여, 비전지역은 실제 로 일본의 대외교류의 창구역할을 했다. 여러번 외래문화의 침식을 받고 군사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사세보 군항은 지금까지도 여전 히 미국 태평양함대의 중요기지이며, 나카사키는 바로 원자탄이 떨어졌던 바로 그 도시이다. 태재부의 서수호소 소이( 少 貳 ) 겸 "삼전이도"의 수호인 등원경자( 藤 原 經 資 )는 원나라군대가 대마도를 공격하였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편으 로 막부에 보고하고, 다른 한편으로 방어진을 쳤다. 보고서는 10월 17일 겸창(카마쿠라)막부에 도달했다. 18일에는 교토에까지 도착한다. 10월 22일에서야 대마도가 원나라군대에 점령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이때는 원나라와 일본군의 제1차전쟁이 이미 끝난 뒤었다. 이 상황으로 보면, 일본조정과 막부는 원나라군대의 일본침입전쟁에 대하여 아무런 구체적인 조치나 지휘를 하지 못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투의 주 력은 태재부의 소이 등원경자의 지휘하에 진행되었다. 원나라군대는 비전에서 상륙한 후 종심으로 진격하지 않고, 주역부대를 하카다( 博 多 )항으로 이동시켰다. 10월 19일, 원나라군대의 함선은 하 카다항을 공격하였으며, 해변의 수비군대를 죽이고 금진( 今 津 )일대를 점령하였다. 금진일대의 지형은 대부대가 작전을 전개하기에 불편하였 고, 태재부에서 아직도 하루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원나라군대는 그날로 배에 돌아갔고, 다음 날 태재부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20일 아침, 원나라군대는 상륙전을 전개하였다. 일부 원나라군대는 하카다항의 서부 백도원빈해일대로 상륙하였다. 전날 저녁에 이미 이 곳에 포진한 제1선지휘관 등원경자가 이끄는 5백명의 기병은 원나라군대가 상륙할 때 그 중간을 자르지 못하고, 원나라군대가 상륙을 마치고 부대 진형을 정비한 후에야 일본당시의 회전관례에 따라 주공부대가 명적( 鳴 鏑 )을 울리며 진공을 개시했다. 이런 전술은 중국 춘추시대 송양공의 판박이였다. 일본군은 한 명의 무사가 단기로 전투에 들어가고, 전면을 뚫으려했다. 그후 대대의 기병이 이어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것이다. 당시 일본사무라이기병부대가 가까이 올 때, 원나라군대는 북소리를 크게 내며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고 활과 대포가 크게 울렸다. 일본사무 라이들은 원나라군대의 전술에 대하여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하였고, 그저 놀라고만 있으며, 말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두 군대가 막 만 나자, 일본사무라이군대는 사상자가 엄청났다. 백도원의 전장터에서는 일본군의 시신이 그득했고, 원나라군대는 금박 녹원까지 진격했다. 또 다른 원나라부대는 백도원서부의 적판( 赤 坂 )으로 진공했다. 비후( 肥 後 )의 무사인 국지이랑은 자기의 무사 130여기를 이끌고 원나라군대와 전투를 전개했다. 태재부의 소이인 등원경자가 이끄는 사무라이부대는 일족일문의 전투조직형식이었다. 돌아가면서 적판을 점령한 원나라군 대와 사수전을 벌였다. 마침내 이 원나라군대는 녹원방향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화포는 전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원나라군대가 철수할 때, 비후무사인 죽기계장은 자기의 친척 4기를 이끌고 원나라군대의 뒤를 추적하여는데, 화포에 부상당해 낙마하였으나, 다행히 죽지 는 않았다. 원나라와 일본의 전투이고, 죽기계장은 자기가 참전한 전투의 경험과 목도한 실황을 바탕으로 <<몽고습래회사>>를 그렸다. 이것은 원나라와 일본의 전쟁을 연구하는데 아주 생생한 사료가 된다. 그중의 한 폭의 왼쪽에는 막 불꽃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폭발하는 구형의 철화 포를 그려놓았으니, 이 전투에서의 화포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태평기>>에는 이런 기재가 있다. "북을 친 후에 병사들의 칼이 서로 맞 부딪치고, 구형의 철포를 쏘아대며, 산언덕을 따라 내려오니, 형세가 차량바퀴와 같았고, 소리는 벽력과 같으며, 빛은 번개와 같았다. 한번에 두,세개의 탄환을 발사할 수 있으니, 일본병의 피해자가 여럿이고, 성위의 창고에 불이붙으면 원래 불을 꺼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녹원 및 조사 일대의 원나라군대는 계속 상륙하였고, 점령면적을 확대하였다. 일본 키타큐슈각지의 사무라이들, 예를 들어 이토송포당, 원전 일족, 일전, 율미, 산전등이 이끄는 무사들이 전장터로 몰려왔다. 한 무리 한무리의 부대들이 돌아가면서 원나라군대와 싸웠다. 비록 사무라이군대의 인원수는 적지 않았지만, 한 부대로 놓고 보면 원나라군대에 카미카제( 神 風 ) : 몽고의 제1차 일본침공 42

43 비하여 수가 형편없이 적어서, 사상자가 아주 많이 발생하였다. 이때, 또 다른 원나라군대는 하카다항의 동쪽 상기( 箱 岐 ) 방향으로 상륙하였다. 해안의 송림을 점령하고, 배후에서 백도원의 원나라군대와 전 투하던 일본사무라이를 공격하였다. 이 지역의 수군인 대우뇌태의 사무라이부대는 원나라군대의 협공을 버티지 못하고, 동남쪽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대우뇌태부대가 철군하면서, 백도원의 원나라군대와 싸우던 일본군은 앞뒤에서 적을 맞이하게 되었고, 할 수없이 태재부 수정방 향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20일, 원나라군대는 일본군과 하루 종일 격렬한 전투를 치른 후에, 거의 늦은 밤이 되어서야 하카다만의 상기등지를 원나라군대의 수중에 넣 을 수 있었다. 일본군은 할 수 없이 전군이 물러났다. 그러나, 원나라군대는 그들을 쉽게 놔주지 않았다. 철수하는 일본군을 계속 핍박하였다. 원나라군대의 좌부원수, 작전지휘관인 유복형은 작전을 쉽게 지휘하기 위하여, 높은 언덕에서 아래쪽으로 말을 몰며 전진하였다. 이 상황은 일본군의 전선지휘관인 등원경자에게 발각된다. 그는 즉시 말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서 그를 활로 쏘아 낙마시킨다. 원나라군대는 지휘관이 부상을 당하자, 진공의 기세는 약간 꺽이게 된다. 여기에 날씨가 어두워지면서 진격을 중지하게 된다. 이 때, 일본군은 막 원나라군대의 추격 을 벗어나서, 급히 태재부의 수성으로 퇴각한다. 일본군이 퇴각한 후, 아직 도망치지 못한, 노인, 어린이, 부녀등 약 1500명은 포로로 잡힌다. 밤의 어둠이 내린 후, 전투는 기본적으로 중지되었다. 상처를 입은 좌부원수 유복형은 먼저 배에 올랐다. 원나라군대의 대원수 총사령관인 흔 도는 나머지 장수들을 불러모아 다음 날의 군사행동에 대하여 논의한다. 하루의 전투를 겪은 후, 원나라군대는 일본사무라이의 완강하고 용 감한 전투력에 대하여 어느 정도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한부대씩 참전하는 사무라이부대는 도대체 그 수가 얼마인지도 정확한 숫자 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원나라군대보다 몇 배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동시에 원나라군대는 비록 진지를 확보하였지만, 사상자가 적지 않 았고, 병사들이 피로해하고, 화살도 거의 떨어졌으며, 부지휘관도 상처를 입었다. 이것은 오랫동안 전쟁을 수행해온 원나라의 총사령관 흔도 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전쟁쌍방의 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고려장군 김방경은 비교적 냉정했다. 그는 당시의 전쟁형세가 원나라군대 에 유리한 것을 보고서, 결국 힘들지만 전투를 거쳐 태재부를 점령한 후, 진지를 지키면서 원군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김방 경은 "우리 군대는 비록 적지만, 이미 적의 땅으로 들어왔고, 스스로 싸워야 한다. 맹명이 배를 불태우고, 회음에서 배수의 진을 친 것과 같 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김방경의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피로한 군사를 이끌고 적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좋은 계 책이 아니다. 되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생각해서 흔도는 전군을 배로 퇴각하도록 하고, 그 다음 날 돌아가려고 한다. 만일 원나라군대가 이렇게 돌아갔다면,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었다. 최소한 비긴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풍운은 예측할 수 없어서, 바로 흔도가 물러나기로 결정한 날의 하루 전날 밤에, 하카다만에는 흔치 않은 태풍폭우가 몰아닥쳤다. 일본군도는 사면이 바다로 쌓 여 있어서, 동북부의 연안해안을 제외하고는 모두 열대태평양의 난류에 둘러쌓였고, 그래서 흑조의 영향을 받으며 기후는 비교적 온화하면서 습한 해양성 계절풍기후를 형성하고 있다. 매년 8, 9, 10월이면, 일본서부와 남부는 자주 태풍의 내습을 받는다. 하카다만은 바로 태풍이 오는 길목이고, 마침 원나라군대가 귀국하려고 준비하는 마지막 순간에, 태풍이 도착했다. 지형에 익숙하지 못한 바람에, 원나라군대가 하카다항구에 정박해두었던 함대는 일대 혼란에 빠진다. 그래서 서로 부딪쳐 뒤집어지고, 큰 풍 랑에 침몰되기도 한다. 태풍이 점차 멈추자 폭우가 또 내렸고, 하늘을 칠흑같이 어두었다. 바라도 떨어진 병졸들은 구할 방법도 없었다. 흔도 는 일본군이 이 기회를 틈타 내습할 것을 두려워하여 비를 무릅쓰고 철군하여 귀국하기로 결정한다. 이로 인하여 원나라군대는 병졸이 13,500명이 사망한다. 일본사서에서는 "문영지역( 文 永 之 役 )"이라고 부른다. 다음 날인 22일 아침, 일본군은 태재부수성에서 진용을 갖추었다. 그러나 원나라군대가 진공하지 않았다. 정찰대원을 파견하여 알아보니 하카 타바다에는 원나라 배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원나라군대가 철수한 것이다. 일본의 조야는 갑자기 들이닥친 태풍으로 원나라군대를 쫓 아낸 것이 아주 기뻐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활동을 벌이고 이것을 "카미카제( 神 風 )"이라고 불렀다. 이후 "카미 카제"라는 말은 일본인들과 670년간을 계속했고, 1945년에까지 이르게 된다. 원세조 쿠빌라이는 제1차군대를 파견할 때, 일본을 겁주어서 통호하려고만 생각한 것이지 일본을 점령하거나 멸말시킬 생각은 없었다. 흔도 카미카제( 神 風 ) : 몽고의 제1차 일본침공 43

44 등 원나라 사령관은 쿠빌라이의 이러한 생각을 고려하여, 교묘하게 태풍을 만나 패퇴한 사정을 숨기고, '일본으로 들어가 그들을 패배시켰 다"고 전적을 쿠빌라이에게 보고했다. 쿠빌라이는 이를 믿고, 일본군이 원나라군의 공격하에 징벌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즉시 원나라와 통호 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일본정벌에 나섰던 군사들에게 크게 상을 내리고, 동시에 예부시랑 두세충( 杜 世 忠 ), 병부시랑 하문저( 何 文 著 )등에 게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사신으로 가게 했다. 4월, 원나라의 사신 두세충 일행이 태재부를 돌아 장문실진( 長 門 室 津, 일본 혼슈의 야마쿠치 현)으로 향했다. 순조롭게 관문을 통과해서 교토나 카마쿠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장문의 수호는 원나라 사신인 두세충등을 태재부로 압 송한다. 그 후 막부에 보고하였다. 북조시종( 北 條 時 宗 )은 이 소식을 듣고, 원나라 사신을 카마쿠라로 압송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북조시종 은 국서를 받지도 않고, 다른 결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원나라 사신 두세충 일행 30여명을 카마쿠라의 용구에서 참수하도록 하며, 4명의 고려관원들만 풀어준다. 이것이 원나라의 제1차 일본침입에 관한 내용이다. 5년후에 쿠빌라이는 다시 일본을 원정하나, 역시 태풍으로 인하여 실패하고 만다. 카미카제( 神 風 ) : 몽고의 제1차 일본침공 44

45 원( 元 )나라 멸망이후의 몽고제국 :58 1. 북원( 北 元 )정권의 멸망 1368년, 국운이 100년을 넘지 못했던 원나라는 주원장이끈 반란군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요, 금, 서하등의 소수민족정권과는 달리, 마지막 황 제인 원순제( 元 順 帝 ) 토군테무르( 妥 歡 帖 睦 爾 )는 전사하지도 않았고, 자살하지도 않았으며, 왕족과 남은 부대를 이끌고 자기 조상이 일찌기 나 라릉 일으킨 옛땅인 몽골고원으로 물러났다. 그들은 중국에서 외래정권으로써 그대로 몸을 빼서 물러난 "기적"을 이룬 것이다. 이는 징기스칸 부터 거의 미친듯이 확장하여 몽고제국의 국경이 넓었고, 칸국, 부락이 수도 없이 들어섰는데, 원나라는 그 중 몽골제국의 일부분만을 차지하 고 있었고, 원나라의 황제는 몽골제국의 대칸이기도 했으며, 몽골의 각 칸국과 부락에 대하여 종주권을 행사하였었기 때문이다. 원나라의 멸 망은 몽고제국으로 하여금 중국의 영토만을 잃었을 뿐이고, 몽고제국 자체는 여전히 존재하였던 때문이다. 원순제는 원나라 황제중 드물게 한문화에 깊이 접촉했던 사람이다. 대도성이 함락된 후 황망하게 북으로 도망갔는데, 그 타격은 매우 컸을 것이다. 비록 여전히 몽고각부의 대칸이었으나, 그는 나라를 버리고 고향으로 되돌아간 우수를 달래기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명나라군대는 그에 대하여 계속 공격을 멈추지 않았으니, 더구나 편안히 세월을 보낼 수도 업었다. 마침내 1370년 5월 23일, 그는 비분과 우울함을 안고 사 라무룬강변의 응창( 應 昌 )에서 사망한다. 원순제의 아들인 애유식리달랍( 愛 猷 識 里 達 臘 )은 부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카라코룸( 哈 拉 和 林 )에서 즉위한다. 그는 북원정권을 다시 8년간 유지한고, 병사를 훈련시켜 언젠가 다시 중국의 황제위에 오를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는 이 희망을 실현할 수 없었을 뿐아니라, 몽 고지구로 깊이 진입해오는 명나라군대의 공격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했다. 1372년, 명나라의 대장군 서달( 徐 達 )은 카라코룸을 공격한다. 이 몽 고황금가족의 대본영은 권력과 영광의 상징이었는데, 명나라 군대에 짓밟힌다면, 몽고제국은 세계역사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리하여 몽고인들 의 저항은 아주 격렬했다. 그러나, '만리장성'으로 칭해지던 서달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왔다. 애유식리달랍은 거의 절망적인 지경에 이르렀 다. 다행히, 명나라 대군은 전선이 너무 길어지게 됨에 따라 뒤를 받쳐주지 못하여 투라강변에서 저지되고 만다. 1378년, 애유식리달랍은 여한을 안고 사망한다. 그의 아들 투구스테무르( 脫 古 思 帖 木 爾 )가 제위를 승계한다. 이 세번째 북원황제가 지배하는 영토는 이미 몽고제국이 처음 건국될 때의 수준으로 좁아졌고, 조상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어보이게 되었다. 1388년, 10만명의 명나라군대가 남옥( 藍 玉 ) 대장의 지휘하에 하러카강과 커르룬강의 사이, 베르호의 남안에서 투구스의 군대를 대파했다. 북 원의 여러 왕, 평장사이하 관리 3천여명 및 병사 7천여명은 포로가 되었고, 투구스테무르는 도주한 후 그의 부하장수에 의하여 목졸려 죽는 다. 이번의 실패는 황금가족-쿠빌라이가족의 북원정권으로 하여금 몽고인들의 심중에서 지고무상의 지위를 상실해버린다. 그리하여 대다수의 몽 고부락은 그로부터 분리하여 독립을 선언한다. 1399년, 예니세이강의 상류연안에 분포해있는 치르지스부의 수령인 구이리츠는 최후의 북원황 제인 얼러보커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1399년 그를 무찌르고 죽여버리며, 각부를 통치하는 패권을 차지한다. 이로써 29년간 남은 숨을 몰아쉬 던 북원정권은 멸망한다. 합법적인 몽고제국의 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몽고각부는 다시 몽고제국의 칸의 보좌를 차지하려는 투쟁에 접어들었다. 2. 군웅들이 칸의 지위를 노리다. 원( 元 )나라 멸망이후의 몽고제국 45

46 북원의 멸망은 명나라로 하여금 정치상의 적수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고, 몽고는 이미 '변경의 우환'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 상 전왕조의 잔여세력이 아니었다. 이로 인하여 영락제는 귀이리츠에 대하여 아주 우호적으로 대하고, 그의 몽고각부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 한다. 그러나, 구이리츠도 칸의 지위를 오래 보전하지 못하고 만다. 1400년 아수터부의 수령인 아루타이와 오이라트부의 수령인 마하무의 연 합군에 패배한다. 아수터부는 몽고화된 이란인이었고, 코카서스에서 기원했다. 몽고의 서정으로 중국에 들어왔고, 원나라군대에서 그들의 군 단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이라트부는 삼림몽고인중의 강력한 부락이었고, 징기스칸시대에 "임목중의 백성"이라고 불리웠으며, 바이칼호의 서 부에 거주하고 있었다. 아루타이와 마하무는 모두 몽고제국의 칸이 되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자기들 부족이 몽고인으로부터 독립하였다는 것 에 대한 승인을 받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구이리츠를 격하한 후 명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자기들은 몽고제국의 칸의 지위를 다투는 부족 과 다르다고 알린다. 이런 귀순은 명나라로서는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고, 그들에게 많은 지원과 지지를 보낸다. 이런 지원에 의거하여, 오이 라트부는 그 패권을 바이칼호의 서안에서 어얼치스강 상류의 전체 서몽고지역으로 확대한다. 그러나, 아수터부와 오이라트부의 몽고중부와 몽고동부에 대한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구이리츠의 아들인 어써쿠가 다시 일어나서, 아루타 이와 마하무와 칸의 보좌를 다투기 시작하였다. 쌍방은 십여년간의 전쟁을 벌였고, 어써쿠가 1425년 병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어써쿠는 계속적으로 아루타이 및 마하무와 최고종주권을 다투는 것과 동시에, 1403년, 북원의 마지막 황제인 어러보커의 아들인 본야시리로 하여금 칸의 지위에 오르게 한고, 자기가 몽고제국의 칸이라고 선언하게 한다. 황금가족의 후예로서, 본야시리는 아수터부나 오이라트부보다 는 호소력이 있었다. 오래지 않아, 아루타이를 포함한 몽고부락은 이 정통대표자의 주변에 결집되었다. 그러나, 쿠빌라이가족의 쇠망을 바라 던 명나라로서는 이 새 몽고 대칸에 대하여 적대시할 것은 명약관화했다. 그래서, 영락제는 본야시리에게 신하로 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의사표시를 요구했다. 그러나, 조상의 기업을 회복하려던 본야시리가 어찌 자기가족을 멸망시킨 중국의 황제인 주씨가족에게 신하로 자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영락제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몽고로 들어갔다. 징기스칸의 옛지역인 어넌강 상류의 평원에 이르고, 년에 본야시리와 아루타이의 군대를 물리친다. 이번 실패는 본야시리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그에게서 칸의 권위를 잃어버리게 만들 었기 때문이다. 1412년, 오이라트부의 수령인 마하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격파하고 칸의 지위를 빼앗아 버렸다. 이전에 마하무는 계속 명나라의 영락제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때, 그는 이미 몽고제국의 진정한 칸이 되었다. 그래서 아무런 망설 임없이 명나라와 단교했다. 이것은 영락제로 하여금 재차 몽고를 친히 정벌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비록 마하무의 저항으로 인하여 명나라 군대는 많은 손실을 입혔지만, 그러나 실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는 군대를 투라강의 서쪽으로 철군시켜 휴식하게 한다. 마하무의 위신은 이 번 전투로 약간 손상을 입었다. 왜냐하면 그는 명나라 군대가 몽고초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하무가 도망친 후, 칸의 지위는 다시 공석이 되었다. 이 때 흥안령 동쪽에 거주하던, 만주변경의 넌강 부근의 커얼친부의 수령인 아타이가 1425년, 무리를 이끌고 몽고중동부지구를 장악했다. 시류의 흐름을 따르던 아수터부의 아루타이는 이번에는 아타이를 지원하고 본야시리를 죽여버리며, 아타이를 몽고제국의 칸으로 받든다. 커얼친사람은 징기스칸의 동생인 하사르의 후예들이고, 역시 황금가족에 속한다. 비록 영락 황제가 웨이라터의 배반을 용인할 수 없었지만, 몽고인들중에 높은 위망을 가진 황금가족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다시 오이라트부를 지원한다. 자연히 이 지지에 대하여 오이라트부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3. 오이라트의 정권장악 영락제가 관철하려 했던 것은 황금가족타도를 위하여 오이라트부의 세력을 지원하는 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그의 사후에 효과를 발휘한다. 1434년에서 1438년까지, 오이라트의 수령이며, 마하무의 아들인 투환은 군대를 이끌고 몽고동부로 진공하여, 제국의 칸 아타이와 그의 중요한 신하인 아루타이를 죽이고, 칸의 보좌를 빼앗는다. 비록, 황금가족인 쿠빌라이가족의 한 왕자이며, 어러보커의 아들이고, 본야시리의 형제인 아잔이 이 때 정통을 수호하는 수령들에 의하여 칸으로 옹립되지만, 사실상 몽고제국은 이미 황금가족인 쿠빌라이가족에서 오이라트의 줘로 원( 元 )나라 멸망이후의 몽고제국 46

47 스가족의 수중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명나라 황제에게 있어서는 징기스칸의 황금가족은 이미 끝났다. 초원의 이러한 새 군주는 그다지 혁혁한 집안의 역사를 가지지 않은 민족이 다. 그들은 몽고제국의 역사상 혁혁하지 않았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황금가족처럼 지고무상의 위망과 호소력을 지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몽고인의 중원에 대한 위협은 이로써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이라트사람은 그들이 계승한 몽고제국의 칸의 지위를 잊지 않았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자신과 다른 몽고인들과 거리를 멀 게 유지하였지만, 그들은 한 시도 몽고제국의 원래 강역을 회복하려는 바람을 버리지 않았다. 당연히 명제국이 아직 강대할 때에는 오이라트 사람들은 호랑이수염을 함부로 만지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조상 마하무의 유훈을 기 억하고 있었다.그래서, 제국을 회복하려는 첫번째 칼은 그들이 동남지구의 차카타이 칸국으로 내려치게 된다. 두환의 아들 예센( 也 先 또는 額 森 )은 차카타이 칸국의 웨이스칸을 격파하고, 그의 누이인 하니무공주를 강제로 취한다. 웨이스칸은 황금가족이므로, 이번 혼인은 오이라트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몽고인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혈통을 가지게 한 것이다. 예센은 부친인 투환의 칸을 계승한 후, 몽고제국의 강역은바르카스호수에서 바이칼호까지 넓어지고, 다시 바이칼호에서 장성부근지구까지 확 대된다. 정통을 상징하는 도성인 카라코룸도 제국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1449년, 그는 중국의 공주를 취하려 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래서 예센 은 산서북부와 대동부근의 중국변경을 유린한다. 명나라의 영종황제는 태감 왕진과 전투에 나선다. 토목보에서 전투를 개시하지만, 예샌은 명 나라군대에 엄청난 타격을 가하며 명나라군대 10만을 섬멸하고, 영종황제를 포로로 잡는다. 그러나, 포위공격에는 익숙치 않아서, 예센은 그 지역의 도시인 대동( 大 同 )과 선화( 宣 化 )는 함락시키지 못한다. 그리하여 포로인 영종황제를 데리고 몽고제국으로 되돌아간다. 3개월후, 그는 권토중래한다. 군대를 북경 서북부까지 진격시킨다. 그러나, 명나라의 명장 우겸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다. 그리하여 여러번의 진격이 무위로 끝난다. 오래지 않아 명나라의 다른 지역의 군대가 보충되면서, 명나라의 군대가 수적으로 우세하게 되자, 예센은 거용관으로 철수한다. 1450년, 예센은 영종황제를 풀어주기로 결정한다. 1453년에는 중국과 평화협정을 맺어 자기는 중국의 신하라고 선포한다. 이 행동 으로 그는 몽고제국의 종주권을 포기하게 되고, 자신은 독립한 칸이라고 하게 된다. 이런 행동은 전혀 똑똑한 행동이 아니었다. 원래 그의 부 하가 되었던 황금가족의 부락과 칸국들은 다시 자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1455년, 예센이 암살된다. 예센의 아들인 아마상치 타이지는 부친의 칸위를 이어받는다. 1456년, 차카타이 칸국을 침범하는데, 이리강 부근에 서 재위중이던 위노스칸을 패배시킨다. 그러나 이 때 황후인 하니무(차카타이 웨이스칸의 여동생)은 후방에서 혼란을 일으키고, 그녀의 아들 인 이부라신과 예리야스 형제가 아마상치에 반란을 일으키나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번 내란으로 오이라트의 실력은 많이 약화되었다. 4. 황금가족의 복벽 오이라트의 실력이 약화될 때, 징기스칸의 후에들은 아직 제대로 반격을 조직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족내부의 다툼으로 서로 죽 고죽이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1467년, 징기스칸의 제27대 후게자인 만두구러 칸은 그의 조카손자와 후게자 보르후지농을 토볼하는 전쟁중에 사망했다. 보러후지농은 그가 칸을 칭하기 전인 1470년에 암살된다. 후손들이 많았던 황금가족은 이제 겨우 5살된 남자아이 보러후지농의 아들 다옌( 達 延 )만을 남기게 된 다. 다옌의 운명도 가혹했다. 가족의 어른들은 모두 내분중에 사망했고, 어린 아이는 아무에게도 의탁하지 못하며, 그의 모친도 이미 그를 버리고 개가했다. 이것은 징기스칸의 어릴 때의 처지보다 더 비참한 것이었다. 다행인 것은, 만두구러칸의 젊은 과부인 만두하이사이인커둔이 그를 자기의 모호하에 둔 것이다. 만두하이사이인커둔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옌을 길렀을 뿐아니라, 1470년에는 그를 칸으로 선포한다. 원( 元 )나라 멸망이후의 몽고제국 47

48 가장 힘든 것은 그녀가 여인의 몸으로 군대를 이끌고 오이라트를 쳐부쉈다는 것이며, 오이라트부는 몽고의 중동부에서 완전히 쫓겨나게 된 다. 다얜의 이후 통치에 튼튼한 기반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다얜칸은 몽고제국을 통치한 기간이 가장 긴 칸이다. 1470년부터 1543년까지 73년에 달한다. 1481년에 친정을 시작한 이래로, 다옌칸은 우익 투무터족, 우량하족의 반란을 진압한다. 그리고 1497년부터 1505년까지의 기간동안 그는 요동에서 감속에 이르는 명나라 변경지구에 아주 효 과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명나라가 오이라트와 연락할 수 없도록 한다. 1543년에 다얜 칸이 사망한 후, 그의 손자인 보디는 칸을 계승한다. 비록 넓은 영토는 다얜 칸의 여러 아들들에게 나누어 졌지만, 1544년부터 1634년까지 몽고제국의 칸의 지위는 계속 안정적으로 다얜 칸의 장손후예인 차하얼부에서 전승된다. 역대로 보디 칸( ), 쿠등 칸 ( ), 투먼자사크투 칸( ), 체첸 칸( ), 린단 칸( ) 5. 몽고제국의 멸망 비록 다얜 칸의 장기통치가 몽고제국의 칸위 계승을 원활하게 하였지만, 몽고민족의 최대약점인 "가족간에 유산을 나누어 갖는 전통"을 깨트 리지는 못했다. 제국의 창립자가 죽은 후, 제국은 연방식의 가족국가로 변모하는 것이고, 국내의 각급 수령은 모두 형제 또는 당형제이고, 그 들은 차하얼부의 최고권리는 인정하지만 상당히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하얼부의 칸위 계승자들은 점차 전체 몽고를 통치할 역량을 잃어버리게 된다. 서방의 오이라트와 동방에서 일어난 퉁 구스(만주)인들은 그들의 무서운 적이었다. 그러나, 이 때, 오이라트부는 마침 카자흐 칸국과 제정러시아의 짜르 및 내부의 줘로스가족과 허 슈터가족의 권력투쟁에 휘말린다. 이로 인하여 몽고제국역사를 끝장낸 것은 퉁구스인들이 건립한 후금제국이 된다. 1604년 린단이 칸의 지위를 계승한다. 황교의 사르바후투크투의 종교의식을 받고, 린단쿠투크투 칸이라고 부르게 된다. 린단 칸은 멍청한 칸 은 아니었다. 그는 일찌감치 후금제국의 몽고에 대한 야심을 눈치챘다. 그래서 제위를 계승한 때로부터 각부를 통일하기 시작하고, 스스로 "통령사십만중몽고바투루칭지스칸"이라고 칭한다. 1627년, 우익 어얼두스, 카라친, 투무터등의 부를 수습하고, 카르카부와는 연맹을 맺는다. 그리하여 그의 위세는 크게 떨치게 된다. 관할지역은 동으로 요동에서 서로는 감숙에 이른다. 그러나, 다음 해, 두앤우량하의 쑤부타이, 카라 친의 다라이 타이지, 투무터의 허부스투 칸, 어얼두스의 어런친지농 및 용세부, 아수티, 아바카, 카르카등의 부족이 대군10만의 연합군을 구성 하여 투무터의 소성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린단 칸은 4만여명의 정예를 잃게 된다. 이것은 린단 칸의 실력을 크게 감쇄시켰다. 그의 적은 몽 고인들의 용맹함과 한족의 지혜를 결합시킨 후금황제 누르하치와 홍타이시(청태종)이었다. 이것은 용맹하지만 지략은 없었던 그로 하여금 실 패하게 만드는 운명에 놓이게 한다. 누르하치때, 커얼친부, 자루트부는 혼인관계로 후금에 귀부한다. 투무터, 카라친, 우량하등은 린단 칸의 보복을 피하기 위하여 후금에 귀순한 다. 1625년, 린단 칸은 넌강으로 병사를 파병하여 커얼친부를 공격한다. 후금은 병사를 보내어 커얼친을 도와준다. 린단 칸은 패주한다. 홍타 이시는 직위후, 린간칸의 주요한 적이 된다. 1628년, 패륵 아지거를 보내어 노하강의 상류에서 린단한의 통치를 받던 카라친부와 결맹을 맺 고, 함께 린단 칸을 공격하기로 한다. 9월, 홍타이시는 대군을 이끌고 차하얼의 통치를 받던 아오한, 나이만, 카르카, 차루터와 카라친등의 부 의 두령들에게 연회를 베푼다. 이로써 린단 칸은 칸의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이미 고립되어 버리고, 시라무룬강유역으로 후퇴하고 귀화성(후 허하오터)만을 고수하게 된다. 1632년 4월, 홍타이시는 대군을 다시 이끌고 서진한다. 도르곤도 함께 출정한다. 시라무룬강변에 이르러, 몽고여러부의 병사를 모아 함께 린 단 칸을 공격한다. 세력이 자기보다 월등한 적군을 보고, 린단 칸은 어쩔 수 없이 귀화성을 버리고 인마 10만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서쪽으 로 도망친다. 그러나, 이미 기세가 기운 것을 본 사람들은 10명중 7, 8명이 흩어져 버리게 된다. 린단 칸이 청해로 도망갔다가, 2년후에 청해 에서 병사한다. 그는 죽기 전에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와 마찬가지로, "짐이 망국의 군주는 아니라"고 한탄했다. 그들은 모두 노력은 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재능은 모두 그들 조상의 영광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명제국과 몽고제국은 이백여년을 투쟁하였는데, 누구도 상대방을 원( 元 )나라 멸망이후의 몽고제국 48

49 소멸시키지 못했고, 마지막에는 10년의 기간을 두고 청나라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된다. 1635년, 도르곤과 웨투어등은 만명의 병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린단 칸의 처자와 아들의 투항을 받고, 칸의 도장을 내놓게 한다. 전체 막남 몽고는 완전히 후금제국의 판도에 들어간 것이다. 몽고제국의 칸의 지위는 이로써 단절되었고, 몽고제국은 영원히 사라졌다. 원( 元 )나라 멸망이후의 몽고제국 49

50 원나라의 황제들은 왜 능묘가 없는가? :57 봉건사회에서 황제는 지고무상의 지위를 누렸고, 살아서는 황금용을 새긴 의자에 앉았고, 죽어서는 황릉에 묻혔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원나 라의 황제들은 능묘를 만들지 않았고, 관도 준비하지 않았으며, 순장품도 남기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봉건황조는 황제가 죽은 후에 모두 능묘를 만들었다. 이러한 능묘중 많은 경우는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만들기 시작하며, 이후에 도 매년 수리하고 늘여갔다. 그래서 재위기간이 길면 길수록 능묘의 규모도 더욱 커졌다. 그러나, 북경을 관광하게 되면 명나라 황릉과 청나 라 황릉은 있는데, 왜 원나라 황릉은 없을까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게 된다. 원래, 원나라의 황제묘장제도는 역사상의 다른 나라와 많이 달랐다. 그들은 과거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었다. 천하의 모든 힘을 모아서 분묘를 만들고, 천하의 모든 재물을 모아서 관에 집어넣고, 후궁들을 모아서 순장을 시키더라도, 이후 몇번의 변란을 거치면 여러 경우에 파헤쳐지 고, 유해가 노출되며, 심지어 분묘의 흙도 마르기전에 분묘가 이미 비어버리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래서 비밀매장방식을 택하게 되어, 후인들 이 발견할 수 없게 만들었다. 원나라에서는 어떻게 황제를 묻었는가? 섭자기( 葉 子 奇 )의 초목자( 草 木 子 )라는 책에는 이렇게 기재하고 있다. 원나라의 황제가 죽으면, 관은 필요없었고, 순장기물도 필요없었다. 침목 2개를 준비해서, 가운데를 파내었고, 사람의 형태와 크기가 비슷하게 만들어서 합치면 관이 되었고, 그 가운데 유해를 두었다. 그 후에 묻을 장소로 옮겼다. 장소는 역사서에 의하면 "원나라의 여러 황제는 모두 막북 기련곡( 漠 北 起 輦 谷 )에 묻 었다"라고 되어 있다. 기련곡이 어디인지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커루룬하와 투라하의 사이에 있는 긍특산( 肯 特 山, 현재 몽고공화국경내)으로 보고 있다. 그곳에 깊은 구덩이를 판 후에 파낸 흙을 순서대로 쌓아두었다가 관을 넣고 파낸 흙을 순서대로 다시 넣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 면 표면은 원래의 흙과 동일한 흙이 되었다. 그리고는 부대를 파견하여 주위를 봉쇄한다. 다음 해에 풀이 나게 되면 묻은 장소가 어디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다음 해에 제사를 지낼 때는 어떻게 하는가? 원래 매장하기 직전에, 한마리의 어린 낙타를 같이 순장시킨다. 그리고 제사를 지낼 때는 그 어 린 낙타의 어미 낙타를 데려가는데, 어미 낙타가 슬피 울며 움직이지 않는 곳이 바로 어린 낙타가 순장된 곳으로 보고 그 곳에서 제사를 지 냈따. 그러나, 오래 지나서 제사도 중단되고 어미 낙타도 죽으면 더 이상 어디에 묻었는지를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몽고에 있는 징기스칸 묘는 어떻게 된 거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징기스칸묘에는 징기스칸의 유해가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관만 놓여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징기스칸의 유해는 도대체 어디에 묻혀 있을까?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다상 몽고사>>에 의하면 당시 징기스칸을 묻은 후에, 장지에 널리 나무를 심었고, 이후 나무가 자라면서 밀림이 되어, 어느 나무 밑에 묻었는지를 알 수 없게 되었따고 적고 있다. 원나라의 황제들은 왜 능묘가 없는가? 50

51 천년간 잠든 서하( 西 夏 ) 문화를 누가 깨웠는가? :56 글: 신공무기( 申 公 无 忌 ) 하왕릉(동방의 피라미드) 서 하란산( 賀 蘭 山 )의 아래, 천년간 잠들어있는 왕릉의 폐허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왕조" 서하 국( 西 夏 國 )의 왕릉이다. 제3호릉은 바로 서하의 개국황제인 이원호( 李 元 昊 )의 능이다. 송, 요, 금나라와 병존하며, 189년이나 존속했던 왕조는 돌연 역사의 강물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런 경우는 중국과 세계의 역사상으로도 드문 일이다. 필자의 귀에는 1134년 가을 한족의 민족영웅인 악비가 읊은 <<만강홍>>이 울린다. "노발충관..." 역 사의 소리는 그렇게 깊이 가라앉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 사는 서하왕조와는 관계가 없다. 그 때의 남송은 거의 서하와 마찬가지로, 역사무대에서 여진족의 금나라와 마주하고 있었다. 싸우기도 하고, 화평의 시대를 보내기도 하면서, 삼국정립의 국면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골철기의 출현은 이런 짧은 역사의 균형을 철저히 무너뜨렸다. 쇠발굽아래, 서하, 금, 남 송은 하나하나 멸망한다. 그런데, 여진인도 아직 남아있고, 한족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오로 지 서하문명을 창립한 당항족( 黨 項 族 )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렀다. 서하는 이런 역사의 수수께끼를 남긴 것이다. 원나라의 통치자들은 송요금사( 宋 遼 金 史 )는 써서 남겼다. 오직 서하에 대하여는 거의 아무 것도 남 기지 않았다. 서하는 중국역사상 당항족이 1038년에 설립하여 1227년까지 중국의 서부지역에 건립했던 정권이다. 역사상 "서하( 西 夏 )"로 불린다. 중원대지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송나라사람들은 이들을 '서하'라고 불렀다. 송요금사에는 모두 하국편( 夏 國 篇 )이 있다. 그러나 내용이 상세하지 못하 다. 서하라는 나라는 있었지만, 정사( 正 史 )는 남기지 못했고, 남겨진 사료도 너무나 적다. 우리는 그 저, 서하에 문자가 있었고, 불교를 숭상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저 그 뿐이다. 서하의 문명은 1804년에 이르러 장주( 張 澍 )라는 인물에 의하여 역사의 먼지를 털어낼 수 있었다. 장주는 청나라때 유명한 경학자, 사학자 겸 금석학자이다. 1776년에 태어나서 1847년에 죽었다. 자 는 백윤( 白 淪 )인데, 수곡( 壽 谷 ), 시림( 時 霖 )이라고도 썼다. 호는 개후( 介 侯 ), 구민( 鳩 民 ), 개백( 介 白 ) 천년간 잠든 서하( 西 夏 ) 문화를 누가 깨웠는가? 51

52 등이다. 양주부 무위현(지금의 감숙성 무위) 사람이다. 19살에 거인이 되고, 24살에 진사가 된다. 26 세에 귀주성 옥병현 지현이 되고, 나중에 준의지현, 광순지부, 사천 병산지현, 흥문, 대족, 동량, 남 계지현, 강서 영신지현, 강서임강부대리통판등의 직위를 지냈다. <<청사고>>에 전이 있다. 1804년, 장주는 오랫동안 떠나있던 고향으로 돌아와서 요양한다. 아마도 하늘의 조화인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의 일종의 호기심으로 인하여 서하학( 西 夏 學 )연구의 대문이 열리게 된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하루는 장주와 친구가 청응사( 淸 應 寺 )에 놀러갔다. 두 사람이 담소를 나누는 동안에 절의 깊은 안쪽 까지 들어가게 된다. 이때, 장주는 돌연 눈앞에 사면을 벽돌로 쌓아서 막아놓은 정자를 보게 된다. 이 정자는 왜 이렇게 벽돌로 봉쇄해놓았을까? 절안의 화상에 따르면, 이것은 저주받은 정자라는 것 이다. 봉쇄된지 이미 수백년이 되었다고 한다. 현지에는 이 봉쇄된 벽돌을 허무는 자는 무서운 보복 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그리하여, 수백년동안 아무도 감히 이 정자에 가까이 다 가가지 않았다. 정자의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을까? 장주는 원래 담량이 있었고, 민간에서 말하는 무슨 보복 에 대하여는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는 화상에게 사람을 불러 정자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자고 제 안했다. 그리고 그는 하늘에 맹서했다. 개봉한 후에 무슨 재앙이 있으면 모두 그 혼자 감당하겠으 며, 다른 사람이 연루되지 않게 하겠다고. 장주의 계속된 요청으로, 화상은 마침내 응락한다. 벽돌을 하나하나 들어내자, 커다란 검은색의 석비( 石 碑 )가 나타났다. 비신( 碑 身 )은 반원형이고, 사방에는 인 동꽃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비문의 정면에는 단정한 해서체의 글자가 가득 차 있었다. 장주가 석비 에 가까이 다가가서 위에 쓴 글자를 읽어보았는데, 깜짝 놀랐다: 이 비문의 글자는 멀리서 보기에는 모두 아는 글자같았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자 한 글자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것은 문자인가 부호인가? 장주는 즉시 정자 사방의 벽돌을 모두 제거하게 하였다. 그러자 석비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비문의 내용은 대체로 호국사( 護 國 寺 ) 감 응탑( 感 應 塔 ) 및 사원을 건설한 상황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비문의 작성연대를 보고는 장주가 깜짝 놀란다: '천우민안오년세차갑술십오일술자건( 天 佑 民 安 五 年 歲 次 甲 戌 十 五 日 戌 子 建 )". 장주는 '천 우민안'이 서하의 연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비석의 기괴한 문자가 바로 이미 '죽은' 지 수백년도 더된 서하문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석비는 바로 '천하절비( 天 下 絶 碑 )"라고 불리우는 <<중수양주호국사감응탑비( 重 修 凉 州 護 國 寺 感 應 塔 碑 )>>(즉 "서하비( 西 夏 碑 ))이다. 이 비석의 발견은 서하학 연구의 서막을 연 것이다. 그리고 '잃어 버린 왕조'를 되찾게 된 것이다. 일찌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하는 이로써 역사의 먼지를 털어내고 사람들에게 모습을 보였다. 서하비는 서하문자를 해석하는데 절판된 사전역할을 했다. 장주는 나중 에 <<서서하천우민안비후( 書 西 夏 天 佑 民 安 碑 後 )>>를 통하여 "이 비석은 내가 발견한 후부터...금석가 들에게는 또 하나의 기서가 추가되었다" 호국사의 석비가 왜 청응사로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누가 이 정자를 봉쇄했는지에 대하여도 여러가지 전설이 있는데, 여기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서하문명의 재발견에 두 사람의 외국인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오늘의 평가로는 그들이 중 국문화의 '약탈자'이지만. 그들은 바로 러시아인 코즈로프와 영국인 스타인이다. 1908년, 군인신분의 코즈로프는 러시아황가학회의 파견으로, 탐험대를 이끌고 중국으로 온다. 1908년에서 1909년까지 코 즈로프는 두번에 걸쳐 어지나강 하류의 바단지린사막의 가에 있는 흑수성( 黑 水 城 )에 대하여 발굴을 천년간 잠든 서하( 西 夏 ) 문화를 누가 깨웠는가? 52

53 진행한다. 그리고 잘 보존되어 있던 대량의 역사유물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그는 성의 서하불탑내 에서 묶음으로 되어 있는 서하경권( 西 夏 經 卷 )과 다른 왕조의 역사진보를 찾았다. 그 중에는 서적, 문서, 육필원고, 불상, 회화등의 진귀한 문물이 포함되어 있다. 그 자신이 쓴 <<여행기>>에 따르면, 서책, 화권 및 육필원고만도 합계 2만점이상이었다고 한다. 그중,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하문의 간본 과 사본이 8천여종에 달하였다. 여기에는 한문전적에서 번역한 <<논어>>, <<맹자>>, <<효경>>, <<손 자병법>>, <<유림( 類 林 )>>등이 있고, 서하문으로 쓴 <<문해( 文 海 )>>, <<음동( 音 同 )>>, <<잡자( 雜 字 )>>, <<성립의해( 聖 立 義 海 )>>등의 자전, 사전이 있다. 그중 서하문과 한문의 두 문자로 쓴 <<번한 합시장중주( 番 漢 合 時 掌 中 珠 )>>는 특히 진귀하다. 이 책은 두개의 언어를 서로 대역하고, 뜻을 서로 풀어쓴 도구서이다. 책에는 서하문과 한문의 두 언어의 단어를 썼는데 모두 대응하는 뜻과 발음을 적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서하문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한문을 배우기 쉽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한문 을 아는 사람이 서하문을 배우기 쉽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사전이 나타난 것은 오늘날 우리가 현 존하는 서하문헌을 해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 것이다. 영국인 스타인은 더욱 유명하다. 그는 돈황등 중국문화역사유적지의 발굴과 약탈에 참가했다. 이 자 는 일찌기 돈황 막고굴의 왕도사의 신임을 얻어 적은 돈을 주고, 대량의 막고굴내의 진귀한 역사유 뮬을 가져갔다. 1913년에서 1915년까지 그의 제3차 중국탐험에서 다시 호텐( 和 田 ), 니야( 尼 雅 ), 누란 ( 樓 蘭 )유적을 다시 방문하였고, 돈황이외에 흑성자( 黑 城 子 )와 투루판( 吐 魯 番 )등지의 유적지를 발굴 했다. 이에 따라 그는 고고보고서 <<아시아내지고고기>>(1928년) 전4권을 썼다. 그중 서하문명에 대 하여도 여러가지 기술을 하고 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현재 서하문명에 관련된 대량의 문물은 러시아와 영국에 보존되어 있다. 아마 도 이 두 사람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만, 어찌되었건, 그들은 서하문명의 연구에 중요한 공 헌을 한 것이다. 이 점을 회피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역사연구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서하문명의 재발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은 확실히 서하왕릉의 발견과 발굴정리업무이다. 하란산 아래에 있는 서하왕릉은 1970년이전에까지는 당나라의 능묘로 알고 있었다. 황야에 흩어져 있는 피 라미드형의 황토흙무더기는 일찌기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기도 했다. 역사의 수수께끼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1970년 초봄, 섬서의 고고학자는 영하를 거쳐 내몽고의 아라산으로 가는 도중에 은천시에서 멀지않 은 하란산의 아래에 높낮이가 서로 다른 황색의 흙언덕( 土 丘 )을 발견했다. 이들 기세당당한 능묘건 축군은 당나라묘라고 추측했다. 다만, 당시 영하 사학계와 고고학계는 이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 었다. 더더구나 이들 능묘가 누구의 것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 고고학자가 소위 '당묘'를 본 것 을 영하의 관련인들에게 얘기하자 이를 듣고는 망연해 했다고 한다. 1971년 겨울, 난주군구의 모부대는 하란산의 아래에 소형 군용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십여일후, 몇몇 전사는 기지굴토공사를 하면서, 의외로 십여개의 오래된 도기제품을 발견한다. 그들 주에는 부 서진 도자기항아리도 있었고, 흩어져 있는 비석조각도 있었다. 위에는 네모난 문자가 쓰여져 있는 데, 전사들은 봐도 무슨 글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부대장은 이를 본 후에, 전사들에게 즉시 굴토공 사를 중단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신속히 영하박물관에 보고한다. 당시 종간( 鍾 侃 )이라는 연구원이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와 동료는 은천시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공사현장으로 갔다. 현장 을 보호하고, 동시에 구조성 발굴을 개시한다. 10일후, 오래된 묘실( 墓 室 )이 드러났다. 묘실에서는 천년간 잠든 서하( 西 夏 ) 문화를 누가 깨웠는가? 53

54 무사상( 武 士 像 )등 잘 그린 벽화를 발견한다. 동시에 고대의 정교한 공예품과 네모난 벽돌등 도기제 품이 출토된다. 네모난 벽돌에는 네모난 글자와 꽃무늬가 가득 차 있었따. 종간등이 자세히 연구하 고 측정한 결과 이는 서하제왕릉(즉 6호묘)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출토된 네모난 글자는 바로 '천서 ( 天 書 )'와 같은 서하문( 西 夏 文 )이었다. 종간은 1960년에 서북대학 역사학과 고고학전공의 젊은이였 는데, 나중에 서하역사연구의 권위자가 된다. 나중에 영하박물관장, 영하문물고고연구소장을 역임하 고, <<영하사화>>, <<서하간사>>등의 저서를 남긴다. 1972년 8월, 중국고고학계는 이 세계를 놀라게 할만한 중대한 발견을 발표한다. 이후, 중국의 고고 학자는 6호왕릉(제4대서하황제 건순현종의 묘)과 7호릉(서하중흥왕 인종황제 인효의 묘)등의 묘를 집중적으로 발굴하고 정리한다. 여기서 대량의 서하왕조문물을 발견한다. 얼마전에 다시 3호릉(이원 호 묘)에 대한 보호적 발굴을 진행한다. 이들 묘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은천에 가면 반드시 들르는 관광성지가 되었다. 서하문자 인장( 大 白 高 國 ) 서하의 문명은 이러한 곡절을 겪은 후에 완전하게 후세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모 호한 것들은 점차 분명해졌다. 당항족은 원래 청해호의 이남, 황하, 대통하 및 황수 원류부근의 산 지 초원일대에서 생활했다. 일찌기 서한의 서강족( 西 羌 族 )의 한 갈래이다. 그리하여 당항강( 黨 項 羌 )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나중에 당항족은 대량으로 내지로 이주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북위 선 비족 척발씨의 후예라고도 하고, 당나라에서는 이씨성을 하사했다. 북송때에는 다시 조( 趙 )씨성을 하사받으며, 오늘 날 영하일대에 정착한다. 당나라말기에 이르러, 당항족의 세력은 점차 강성해 진 다. 그들의 조상인 척발사공( 拓 跋 思 恭 )은 하주( 夏 州 )를 점거하고, 서평왕( 西 平 王 )에 봉해지며, 하국 공( 夏 國 公 )을 세습한다. '비록 나라를 칭하지는 않았지만, 왕도 있고 영토도 있었다( 雖 未 稱 國 而 王 其 土 )". 1038년, 척발사공의 후손인 이원호가 송나라에서 벗어나 독립하여 나라의 이름을 대백고국( 大 白 高 國 )이라 한다. 중국역사에서는 '서하' 또는 '대하( 大 夏 )'라고 부르는 왕조이다. 영토는 영하성 전 부와 감숙성 대부분, 신강, 청해, 내몽고 및 섬서성의 일부지역을 포함한다. 동으로는 황하에 이르 고, 서로는 옥문관에 이르며 남으로는 소관( 蕭 關, 영하성 동심의 남쪽)에 이르고, 북으로는 대막을 장악했다. 폭이 아주 넓었다. 서하국은 10명의 황제가 있었다. 1227년에 몽골의 원나라에 멸망당한 다. 당항족도 재앙을 입어 이때부터 소실된다. 서하문자는 죽은 문자가 된다. 다행이라면, 오늘날, 서하문자는 영하에서 어디서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서하왕릉의 앞에서 하란 산 돌을 파는 잡상인도, 언제든지 관광객을 위하여 서하문자로 된 도장을 파줄 수 있다. 찬란한 역 사문명은 모침내 아무도 덮어둘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유라시아대륙을 제패한 징기스칸도 서하문화 를 완전히 덮어두지는 못했다. 천년간 잠든 서하( 西 夏 ) 문화를 누가 깨웠는가? 54

55 북송( 北 宋 )의 비참한 최후 :54 북송말기에 금( 金 )나라 군대의 제2차 남하때, 수도인 변경성을 포위했다. 목숨을 구차하게 연명하기 위하여, 송휘종, 송흠종은 "만명이 넘는 궁중, 종실과 경성의 부녀들"을 인질로 보냈다. 게다가 1인 당 가격까지 명확하게 설정했다. 금나라의 군영에서 그녀들은 온갖 유린을 당하게 된다. 북송정권의 멸망후, 금나라군대가 철군하면서 이들 여인들은 금나라군대에 압송되어 북으로 따라갔다. 그 도중 에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당했으며,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금나라이 도성인 상경에 도착한 이 후에 그녀들은 금나라의 군신들이 즐기는 세의원( 洗 衣 院 ), 금나라 황제의 각 어채로 보내어지거나, 금나라 장군들에게 상으로 내리기도 했다. 심지어 민간에까지 유락( 流 落 )하여 노예나 창기로 팔리기 도 했다. 정강원년(1126년) 11월에 금나라병사가 제2차남하로 변경성을 포위한 때로부터, 정강2년 4월 장방창 ( 張 邦 昌 )의 대초( 大 楚 )정권이라는 금나라의 허수아비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송휘종과 송흠종 그리고 북송의 관리들은 약간의 환상과 기대를 가지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정권을 지속시키고자 애썼다. 그리하여 정강2년 정월 22일 쌍방은 합의서를 작성하게 된다. 이 합의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 (금나라는) 도종( 道 宗, 송휘종)이 북행하지 않아도 되도록 허락하며, 태자 강왕, 재상등 6명을 인 질로 하고, 송나라궁중의 기물을 공물로 바친다; - (금나라는) 하( 河, 황하) 이남의 땅 및 변경성을 떼어내서 주는데, 제희( 帝 姬, 공주) 2명, 종희( 宗 姬 ), 족희( 族 姬 ) 각 4명, 궁녀 2500명, 여악사등 1500명, 각종 공예인 3000명을 인질로 하고, 매년 비 단500만필을 대금에 공물로 바친다. - 친왕, 재상 각 1인과 하외수신의 혈족은 속히 전부 (금나라에) 보내고, 영토할양이 완료된 후에 되돌려보내준다; - 호군금( 犒 軍 金 ) 금100만정( 錠 ), 은500만정( 錠 )은 10일내에 빠짐없이 보낸다. - 부가조건: 만일 액수를 채우지 못할 때에는 제희, 왕비는 1인당 금1천정으로 치고, 종희는 1인당 금500정으로 치며, 족희는 1인당 금200정으로 치고, 종부( 宗 婦 )는 1인당 은500정, 족부( 族 婦 )는 1인 당 은200정, 귀척녀( 貴 戚 女 )는 1인당 은100정으로 하며 수부( 帥 府 )에서 임의로 뽑아간다. 정월28일부터, 북송정부는 위 합의서를 ㅇ행하기 위하여, 금나라사람의 요구에 따라 금나라군대에 여인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최초로 보내진 것은 채경( 蔡 京 ), 동관( 童 貫 ), 왕보( 王 黼 )의 집안에 있던 가기( 歌 妓 ) 각24명이었다. 그 중에는 복금제희( 福 金 帝 姬, 공주)도 채경의 집안여인으로 되어 보내어 지게 된다. 그녀는 금나라의 황자인 알리불( 斡 離 不 )의 영채로 보내어진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북송( 北 宋 )의 비참한 최후 55

56 복금제희는 알리불을 만난 후 "전률하며 사람의 안색이 아니었다"라고 적고 있다. 알리불은 노비인 이씨에게 명을 내려 복금제희를 술에 취하게 한 후, 그녀를 유린한다. 복금제희는 "정강지난"에서 첫번째로 금나라 장군에게 유린된 송나라의 공주이다. 비록 개봉부의 관리들이 있는대로 다 긁어모았지만, 금나라인들이 요구한 수준을 맞출 수가 없었다. 구차하게라도 연명하기 위하여, 송휘종, 송흠종은 부녀를 보내어 채무금액을 까기 시작한다. 개봉부 의 관리는 옥첩을 대조하여 궁중과 종실의 부녀를 모두 금나라군영에 보내는 외에, 경성의 민녀들 이나 심지어 이미 시집간 궁녀들까지 뽑아서 수를 채운다. 이처럼 강제적으로 여인들을 붙잡아가자, 경성의 여인들은 봉두난발에 얼굴에 진흙을 묻히고 굶어서 병이 든 것처럼 해서 겨우 빠졌다고 한 다. 그런데, 개봉부윤인 서병철은 공을 세우기 위하여, "비녀, 옷, 악세사리등을 준비해놓고" 여인들 에게 입혔다. 위로는 황제의 후궁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백성인 부녀에 이르기까지 5000명의 부녀 에게 옷을 잘 입혀서 경성을 출발해서 금나라군영으로 보낸다. 승리자인 금나라군은 5000명중에서 "처녀3000을 뽑아서 거두고 나머지는 다시 성으로 돌려보냈다" 당연히 되돌려보내진 2000명은 금나 라병사에 유린된 후 신체가 허약하다든지 하는 원인으로 데려가기 불편해서 돌려보낸 것일 것이다. 북송정부로서는 어떻게 해도 금나라군이 요구하는 수치를 맞출 수가 없었다. 송휘종과 황실구성원 들은 액운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2월 초7일 정오에 금나라군대의 사령관인 점한( 粘 罕 ), 알리불( 斡 離 不 )과 만명이 넘는 기병의 삼엄한 감시하에, 송휘종은 처첩, 자식 며느리, 노비를 이끌고 황성에서 끌려나왔다. 내시의 점검을 받은 후, "태상후비, 제왕, 제희는 모두 가마를 타고 출발했다. 후궁이하 는 기병의 등에 업혀 갔다" 이후 민간에 숨어있던 궁중과 종실의 여인들도 금나라군대에 하나하나 수색당한다. 황실과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있는 나이 1살인 아동들까지도 모두 포로가 되었다. <<정 강비사>>의 3권 <<개봉부상>>에서 보존된 소량의 황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여성의 자료통계에 따 르면, 이들 여성들의 평균연령은 20세가량이었다. 최종적으로 금나라군은 다음과 같이 뽑았다 (1) 비빈83인, 왕비24인, 제희,공주 22인을 뽑았는데, 황 제의 비는 금액을 배로 쳐주어서, 함계금13만4천정이었다; (2) 빈어 98인, 왕첩 28인, 종희 52인, 어 녀 78인, 근지종희 195인은 합계금22만5천5백정이었다; (3) 족희 1241명은 합계금 24만8200정이었다; 궁녀479인, 채녀 604인, 종부 2091인은 합계 은 158만7천정이었다; (4) 족부 2007인, 가녀 1314인은 합계 은 66만4천200정이었다; 귀척, 관민녀 3319인은 백은 33만1900정이었다. 이상의 부녀들의 금액 합계는 금60만7700정, 은258만3100정이었다. 이렇게 해도, 이미 지급한 금은을 빼고, 북송정부는 아 직도 금나라에 "금34만2780정, 은 87만1300정을 빚지게 된 것이다" 이 11,635인의 팔려간 여인들은 각각 청성채(원래의 대량성 남쪽 5리, 지금의 개봉성 남쪽), 유가사(지금의 개봉성 동북)의 양대 금 나라군영에 붙잡혀 있게 되었다. "정강지난"에서 북송의 후궁비빈, 종실부녀는 모두 북방에 포로로 잡혀가 노예가 창기가 되었다. 이 역사는 남송인들이 이를 가는 치욕일 뿐아니라, 남송으로 하여금 금나라병사들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을 격려하는 동력이 되었다. 남송의 도학자들에 있어서, 이번 재난은 그들에게 경종을 울려주었 다: 민족갈등이 아주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남송시기에, 금나라군대의 빈번한 침입은 여성들이 정절 을 지키지 못하는 액운을 입게 되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경우에 부녀의 정절을 어떻게 보호할 것이 냐는 것도 도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문제였다. 그들은 북송시기의 생명을 중시하고 정절은 가볍게 보는 관념을 버렸다. 그리고는 부녀들에게 생명을 버리더라도 정절을 지키라고 제창하기 시작한다. 이런 관념은 점차 사대부들에게서부터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도학자들의 계속적인 설교와 통치자 북송( 北 宋 )의 비참한 최후 56

57 의 선전에 따라, 명청에 이르러서는 여상의 사회활동과 생존공간이 더욱 좁아졌다. 그녀들의 순절을 표방하는 정절패방은 갈수록 늘어났다. 그러나 생존과 정절의 사이에서 여성들은 순절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도록 되어 버렸다. 북송( 北 宋 )의 비참한 최후 57

58 북제문선제( 北 齊 文 宣 帝 ) 고양( 高 洋 ) : 술고래 황제 :54 북제의 문선제 고양은 아주 능력있는 황제였다. 동위( 東 魏 )의 효정제( 孝 靜 帝 ) 때, 그의 형인 대장군 고징( 高 澄 )이 정권을 장악해서 조정을 좌 지우지했고,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고징은 고양의 재주에 대하여 항상 거리낌을 가지고 있었다. 고양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멍청 한 것처럼 위장했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인양 행동했다. 고징이 원수에게 살해당하게 되었다. 그는 소식을 들은 후 이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되게, 아주 차분히 수하를 지휘하여 범인을 체포하였 다. 원래 그를 무시했던 사람들은 그가 문무대신을 만날 때 말이 분명하고 민첩하며, 풍모가 뛰어난 것을 보고는 모두 대경실색하였다고 한 다. 더욱 사람을 놀라게 만든 것은 그가 일을 처리하는 것이 신속할 뿐아니라 깔끔했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재상이 된 후, 고양은 즉시 이전에 조정에서 부적절하던 부분은 시정했다. 그가 동위의 효정제를 황제위에서 끌어내린 후 스스로 북제의 개국황제가 되었다. 그리고는 국사를 신중히 처리하고, 인재를 널리 등용했으며, 제도를 잘 활용하였다. 조정내외에서 다스리는 데 아주 조리가 있었다. 동시에 그는 군사에도 관 심을 기울여, 매번 싸울 때마다 선봉에 섰고, 그가 황제가 된 처음에는 정치적인 업적이 휘황했고, 명성도 많이 얻었다. 그래서, 만일 계속 이렇게 나갔다면, 아마도 역사는 달라지고, 북제의 역사, 심지어 중국의 역사도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 러나,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만일'이다. 그는 술을 너무 좋아했었다. 그는 술을 너무 좋아하였는데, 술잔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매번 마시면 대취하였다. 취한 후에는 발가벗고 머리카락을 흐트리며, 칼을 차고 길거리를 달렸다. 달리다가 피곤하면, 장소를 찾아서 쉬고, 달리다 힘들면, 아무데나 누워자곤 했다. 한번은, 그의 모친인 누태후가 그의 이 모습을 보고 화가나서 지팡이로 그를 때렸다. 그러자 그는 술김에 욕을 하면서 "이 노친네가. 오랑캐에게 시집보내버리겠다"라고 소리쳐서 누 태후가 거의 화가나서 반죽음에 이를 정도였다. 술이 깬 후에 그는 눈물을 흘리며 누태후에게 용서해달라고 빌었고, 스스로 채찍을 들어 자 기를 50대 내리쳤고, 10일간 술을 끊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전과 똑같았다. 한번은 그가 술에 취해서 길거리를 달리다가 한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는 물어보았다. "현재 천자가 어떠냐?" 그러자 그 여자는 그를 알아보 지 못하고, "미친 놈 같은데, 무슨 천자냐?"고 대답했다. 그는 듣기 거북했던지 칼을 뽑아 그 여자를 죽여버리고 말았다. 고양에게는 아끼는 후궁이 있었는데, 원래 기녀였다. 그런데, 그녀는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났고, 고양은 술을 마시고 나서 그 일을 생각하자 갈수록 화가나서 그 녀의 머리를 잘라버리고, 그녀의 머리를 가슴에 품고, 다른 술자리로 갔다. 한참을 마시다가 그 후궁의 목을 내놓았고, 칼로 자르면서, 뼈를 긇는 소리를 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전율을 금치 못했다. 술이 깬 후에 그는 후회하며 방성대곡을 했고, 사람을 시켜 그녀를 후히 묻어주게 하였다. 또 한번은 그의 수하중에 최지라는 대신이 죽었다. 그는 술이 취해서 몽롱한 가운데 조문을 갔다. 울고 울다가 최지의 처에게 물었다. "최지 가 그리우냐?" 최지의 처는 "그립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이어서, "그렇다면 왜 가서 보지 않는가?" 말을 마치자 최지의 처를 칼 로 내리쳐서 죽여버렸고, 머리를 담장밖으로 던져버렸다. 어쨌든 술만 취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취미로 되어 버렸다. 그는 이 취미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재상 양암에게 사형수들을 준비해두도록 시켰다. 그리하여 고양이 술을 마신후에 죽이도록 제공했다. 이 사형수들은 3개월내에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석방해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북제문선제( 北 齊 文 宣 帝 ) 고양( 高 洋 ) : 술고래 황제 58

59 양암이 이렇게 한 것은 사실 어쩔 수 없었던 것이었다. 왜냐하면 고양이 술에 취하면 대신도 죽여버렸다.예를 들어, 양암 자신도 비록 고양의 재상이고 심복이지만, 잘못하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번은 고양이 술에 취한 후 작은 칼로 양암의 아랫배를 그었다. 다행히 대 신 최계서가 나서서 말려서 살았다. 또 한번은 그가 술김에, 양암을 관에 집어넣고, 영구차에 실었다. 그의 동생인 고연은 이 모습을 보고 걱 정이 되어서, 땅바닥에 꿇어앉아 그에게 권하였는데, 우느라고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고양은 이에 감동을 받아 술잔을 땅에 집 어던지고, "이후 누구든 나에게 술마시라고 하면, 죽여버리겠다"라고 한다. 그리고 모든 술잔과 술마시는데 관계되는 것을 부숴버린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다시 옛병이 도져서 더 많이 마시게 되었다. 고양은 술마신 후에는 추태를 보였지만, 술만 깨면 아주 이성적이었다. 죽기 전에, 그는 아들 고은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는데, 동생 고연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네가 황제가 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해라. 그저 네 조카만 죽이지 말아라" 북제문선제( 北 齊 文 宣 帝 ) 고양( 高 洋 ) : 술고래 황제 59

60 황당한 왕조 남한( 南 漢 ) : 관리는 모두 환관으로 :53 글을 읽어 관리가 되는 것은 중국고대선비들의 이상이었으며, 각 시대의 통치자들은 지식인의 역할 을 중시했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일찌기 관리가 되려는 모든 자들은 거세를 하여 환관이 되도록 한 적이 있다. 이 기괴한 왕조는 바로 오대십국( 五 代 十 國 )중의 남한( 南 漢 )이었다. 남한은 중국의 남방에 위치하고 있다. 국왕 유성( 劉 晟 )이 단약( 丹 藥 )을 먹다가 목숨을 잃은 후, 새 국왕 유계흥( 劉 繼 興 )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환관인 공징추( 澄 樞 )를 매우 신임했고, 국가의 모 든 정책은 공징구에게 맡겨버렸다. 가장 이해하기 힘든 일은 재능이 있는 자나 글을 읽어 진사, 장 원에 합격한 자는 모두 거세하여 환관이 되도록 한 후에, 관리로 임용하였다는 것이다. 즉, 화상이 나 도사가 유계흥과 선이나 도에대하여 논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먼저 거세를 한 후에만 만날 수 있 었다. 유계흥이 보기에, 관리들이 집이 있고, 가족이 있고, 처자가 있으면, 황상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부 시류에 영합하는 자들이 거세를 한 후에 관직을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한은 거의 환관의 나라로 되어 버렸다. 당시 사람들은 아직 거세하지 않은 사람 은 문외인( 門 外 人 ), 이미 거세를 한 사람은 문내인( 門 內 人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유계흥이 환관을 중용하고, 모든 일에서 그들의 말을 따르게 되었다. 그 때 환관중에 진연수( 陳 延 壽 )라는 자가 있었는데, 아주 무뢰한이었고, 부녀를 간음하다가 거세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화 위복으로 궁중의 내시가 되었다. 그는 아부를 잘하고, 눈치가 빨랐으므로 서서히 유계흥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진연수는 유계흥의 총애를 얻기 위하여, 여자무당인 번호자( 樊 胡 子 )를 추천해서 궁내 로 들어오게 하였다. 번호자는 신선을 강림하게 하거나 부적을 만들어서 벌어먹고 사는 여자였다. 그녀는 스스로 옥황상제의 명을 받들어 특별히 유계흥을 보좌하여 사해를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 기 위하여 내려왔다고 말했다. 유계흥은 반신반의했다. 번호자는 머리에 원유관을 쓰고, 몸에는 자 하거를 입고, 허리에는 금군을 매구, 발에는 주홍리를 신고,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게 차려입고 옥황상제가 몸에 강림한 것처럼 하여 유계흥은 원래 옥황상제의 태자인데 인간세상에 내려온 것이라고 말했고, 여러 나라를 평정하여 천하를 통일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옥황상제가 반호자, 노경선( 盧 瓊 仙 ), 공징추, 진연수등을 인간세상에 강림하게 하 여 태자황제를 보필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 네 사람도 모두 천상의 신선이며, 우연히 죄를 범하여 인간세상에 내려왔다고 말하였다. 유계흥은 급히 땅바닥에 엎드려 하늘에 큰 절을 하였다. 이후에 궁중에서는 유계흥은 태자황제라고 부르게 된다. 유계흥도 스스로 옥황상제의 태자로 인간세상에 내려왔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더이상 두려움이 없 이 더욱 포악해졌다. 그는 소, 주, 검, 척, 검수, 도산등 각종 잔혹한 형벌을 만들었다. 신하나 백성 들에게 약간의 잘못이라도 있으면 독형으로 처리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심지어 잘 아는 사람들이 길가다가 만나도 서로 눈빛만 교환하고 말은 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황당한 왕조 남한( 南 漢 ) : 관리는 모두 환관으로 60

61 그는 후원에 호랑이 표범과 같은 맹수들을 길렀고, 범죄를 저지르면 옷을 벗겨서 맹수들의 틈으로 넣어서 맨몸으로 호랑이, 표범, 물소, 코끼리와 싸우도록 하였다. 유계흥은 후궁시첩들을 데리고 누 상에서 이를 보았으며, 참혹한 비명을 들을 때마가 박장대소를 하였고, 이를 즐겼다. 내시인 이탁( 李 托 )에게는 양녀가 둘이 있었는데, 모두 예뻤다. 궁중에 들어온 후, 큰 딸은 귀비( 貴 妃 )가 되고 작은 딸은 재인( 才 人 )이 되었다. 유계흥은 그 둘을 매우 총애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매 일 밤 이씨자매와 술을 마시고 노래부르고 춤을 추었다. 술을 마신후에는 죄를 범한 자를 맹수에 물어뜯기게 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유계흥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평소에 싫어하던 대신을 붙 잡아와서, 삷거나 피부를 벗기거나, 검수에 오르게 하거나 도산으로 가도록 했다. 문무대신들은 모 두 전정긍긍하고, 유계흥을 만나는 것을 무슨 염라대왕을 만나듯이 하였다. 유계흥은 자주 바깥으로 미행하였는데, 어떤 때에는 한 두명의 내시만 데리고 갔다. 어떤 때는 혼자 서 시장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주점, 식당, 화류계등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운나쁜 백성이 그와 맞 부닥쳐서 한두마디 말조심을 하지 않으면 바로 그에게 찍혀서 병사를 시켜 잡아오게 하였다. 그리 고는 혹형을 당하여 죽게 되었다. 당시 남한의 백성들은 우연히 낯선 사람을 만나면 황제가 온 것 이 아닌가 생각하여 바로 입을 닫고 말조차 많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계흥은 성격이 포악하였지만, 그의 손재주는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자주 진주를 엮어서 구 슬을 가지고 노는 용의 모습을 만들었는데,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을 시켜서 진주를 캐게 하였는데, 많을 때는 3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궁중에 일이 없으면, 물고기머리뼈로 탁자를 만들고, 누야자로 주전자를 만들었는데, 솜씨가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아주 뛰어난 장인들 도 유계흥이 만든 것을 보고는 모두 놀라마지 않았다고 한다. 유계흥은 진주로 궁전을 장식하고, 호 화롭기가 극에 달하였다. 합포에 미천도를 두어, 병사 8천으로 하여금 전문적으로 진주를 캐도록 하 였다. 진주를 캘 때는 돌맹이를 백성의 발에 묶어서 바라 칠백척의 깊이로 들어가게 하여 익사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남한은 땅이 좁고 척박하여, 유계흥이 사치를 하게 되자 국고가 금방 비어버렸다. 유계흥은 더욱 세 금을 늘였다. 시골에서 도시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돈을 납부하게 하였고, 쌀에도 세금을 붙였다. 매 년 수입은 모두 궁전을 짓거나 노는데 썼다. 환관 진연수는 각종 명목을 만들어 매일 수만금을 낭 비했다. 진연수는 유계흥으로 하여금 여러 왕족을 없애서 후환을 없게 하자고 건의하여 유씨종족을 모두 죽여버린다. 옛날의 신하나 장군들도 죽지 않으면 도망쳤다. 그리하여 조정에 신하들이 거의 없게 되었고, 그저 이탁, 공징추, 진연수와 환관들만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송나라의 군대가 토벌하 러 왔을때도 유계흥은 전혀 알지 못했었다. 송나라의 병사들이 하주에서 30여리 떨어진 곳까지 왔을 때야 유계흥이 소식을 들었다. 이 때 남한 의 병사를 쥐고 있던 것은 모두 환관이고, 여기에 궁전을 지으면서 아무런 방비조치를 해놓지 않아 서, 유계흥은 속수무책이었다. 당히 궁녀중에 양난진이 곽숭악을 부르면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 였다. 곽숭악은 원래 미신을 믿고 날로 귀신에게 기도하는 자였다. 그리하여 천병을 불러 송나라군 대를 물리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곽숭악이 매일 기도를 해도 아무런 효험이 보이지 않았다. 송나라 병사는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고, 유계흥은 급히 십여척의 배를 구해서 금은보화와 후궁을 싣고 도망치고자 한다. 그러나, 도망도 치기 전에 환관인 악범이 배를 훔쳐 달아나고 만다. 유계흥은 어 황당한 왕조 남한( 南 漢 ) : 관리는 모두 환관으로 61

62 쩔 수 없이 송나라에 항복하게 된다. 이로써 남한은 성립부터 멸망까지 65년간 존속하게 된다. 황당한 왕조 남한( 南 漢 ) : 관리는 모두 환관으로 62

63 조어성전투( 釣 魚 城 戰 鬪 ) : 송의 가장 성공적인 몽고군 방어전 :52 송나라와 몽고의 전쟁은 1235년에 전면적으로 발발하였다. 전쟁은 1279년 애산( 崖 山 )의 전투에서 송 황실이 멸망할 때까지, 근 반세기간 계속되었다. 이것은 몽고세력이 궐기한 이래 몽고군이 맞은 가 장 시간이 길게 걸리고, 가장 힘을 많이 쏟고, 가장 고달팠던 전쟁이었다. 1259년에 발생한 사천성 합주( 合 州 )의 조어성전투는 그 중에서도 영향이 가장 컸던 전투였다. 1234년, 송, 몽고연합군이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 남송은 병사를 동원하여 하남의 실지를 회복하고 자 했으나, 몽고군의 공격을 받아 무산된 바 있다. 1235년, 몽고군은 서쪽으로는 천섬( 川 陝, 사천성 과 섬서성), 동으로는 회하( 淮 河 )하류의 수천리 전선에서 동시에 남송에 대한 남진을 감행하였으며, 송과 몽고의 전면전이 폭발한 것이다. 1241년까지, 몽고군은 남송의 많은 토지를 유린했으며, 사천 성은 삼대전쟁터(나머지 두 개는 경호전쟁터 즉, 지금의 호북, 하남일대, 양회전쟁터 즉 지금의 회 하유역일대)중에서 몽고군에 의한 파괴약탈이 가장 극심했던 지역이다. 그러던 중에 몽고의 오고타이( 窩 闊 台 )가 사망하였고, 내부에서 정쟁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남송에 대한 공세가 약화되었다. 남송은 이를 틈타 숨을 쉴 수 있었고, 각 전쟁터의 방어진지를 조정하고 강화하였다. 1242년, 송이종은 양회항몽전쟁에서 현저한 공을 세웠던 여개( 余 개)를 사천으로 보내어 행정을 책임지게 하였으며, 이로써 사천의 국면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여 상류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여기는 사천성에 대하여 일련의 정치, 경제, 군사적인 조치를 취하였는데, 그 중 가장 중요 한 것은 산성방어체제를 구축한 것이었다. 이것은 사천의 주요한 강, 하의 연안과 교통요지에 험준한 곳을 택해서 성을 쌓는 것이며, 성들을 별처럼 연결시켜 서로 성원할 수 있는, 완벽한 전략방어체제를 갖추도록 한 것이었다. 조어성은 바 로 산성방어체계의 핵심이며 가장 견고한 보루였다. 조어성은 사천성 합주현성의 동쪽으로 5킬로미터 떨어진 조어산위에 있다. 산은 우뚝 솟아서 상대 고도가 약 300미터나 된다. 산의 아래로는 가릉강( 嘉 陵 江 ), 거강( 渠 江 ), 배강(배 江 )의 세 개의 강이 모여서 흐르며, 남, 북, 서의 삼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고, 지세가 아주 험준하다. 여기는 산수가 험 준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수로와 육로교통이 연결되어 사천의 각지로 연결되는 교통요지였다. 팽대 아( 彭 大 雅 )는 사천제지부사를 지내는 동안( ), 감윤초( 甘 閏 初 )에 명하여 조어성을 축성하게 하였다. 1243년, 여개는 파주( 播 州, 현재의 준의)의 현사 염진, 염박 형재의 건의를 받아들여, 염씨 형제로 하여금 조어성을 다시 쌓게 하였고, 합주의 관청과 흥원도통사를 그 곳으로 옮겼다. 조어성 은 내, 외성으로 나뉘는데, 외성은 험준한 절벽위에 쌓고, 성은 돌로 쌓았다. 성내에는 전답과 사철 끊이지 않는 풍부한 수원이 있었다. 주위의 산록에는 많은 경작지가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조어성 으로 하여금 장기간 방어전을 펼칠 수 있는 지리적인 조건을 갖추도록 하였다. 천험의 요새로 방어 는 쉬우나 공격은 어려운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1254년, 태주의 수비장수 왕견( 王 堅 )은 성을 좀 더 완벽하게 가다듬었다. 사천의 난민들은 병란을 피해 이 곳으로 몰려들었으며, 조어성은 병사와 양식 조어성전투( 釣 魚 城 戰 鬪 ) : 송의 가장 성공적인 몽고군 방어전 63

64 이 충분한 견고한 보루가 되었다. 1251년, 몽크( 蒙 哥 )는 칸( 大 汗 )의 지위에 올랐고, 몽고의 정국이 안정되자, 적극적으로 송을 멸망시 킬 전쟁을 기획하였다. 몽크는 징기스칸의 막내아들인 토레이의 큰 아들이다. 일찌가 발도( 拔 都 )등 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정복한 바 있었고, 용맹하고 전투에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1252년, 몽크칸은 동생인 쿠빌라이( 忽 必 烈 )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대리( 大 理 )를 평정하게 하였으며, 남송에 대하여 포위공격하는 형세를 취하였다. 1257년, 몽크칸은 대규모의 대송전쟁을 일으킨다. 몽크한은 쿠빌라이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악주 ( 鄂 州, 지금의 무한)를 치게 하고, 타차르( 塔 察 兒 ), 이단으로 하여금 양회를 공격하게 하여, 송나라 의 군사력을 분산시켰다. 그리고, 올량합태( 兀 良 合 台 )로 하여금 운남에서 병사를 이끌고 광서를 거 쳐 북상하게 하였으며, 몽크한은 스스로 몽고군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사천을 공격하였다. 몽크한은 사천에서 주공격방향을 몽고군이 장점이 있는 야전전투에서 찾기로 하고, 사천을 먼저 공격하여 확 보한뒤, 장강을 따라 남하하는 것을 계획하였으며, 남하하면서 각 지역의 군대와 합쳐서 직접 송나 라의 수도 임안(항주)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1258년 가을, 몽크는 4만의 군사를 이끌고 3부대로 나누어 사천을 들어갔다. 여기에 사천에 있던 몽 고군과 각지에서 동원한 부대를 합하여 몽고군의 수는 4만을 훨씬 넘었다. 몽고군은 검문고죽애, 장 녕산성, 봉주운산성, 낭주대획성, 광안대량성등을 차례로 점령하였고, 합주로 다가왔다. 몽크칸은 투 항한 송나라 사람 진국보( 晋 國 寶 )를 조어성으로 보내어 투항하라고 하였으나, 그는 합주수비장군 왕 견에 의하여 살해당한다. 송나라 개경원년(1259년) 2월 2일, 몽크한이 군대를 이끌고 계조탄( 鷄 爪 灘 )을 통하여 거강을 건넜 고, 석자산( 石 子 山 )에 군영을 차렸다. 2일, 몽크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조어성 아래로 왔다. 7일, 몽 고군은 1자성벽을 공격하였다. 1자성벽은 횡성벽이라고도 하는데, 그 작용은 성외의 적군의 움직임 에 장애를 주는 것이었고, 동시에 성내의 수비군으로 하여금 외성벽을 이용하여 1자성벽에서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조어성의 성남, 성북쪽에 1자성벽이 있었다. 9일, 몽고군은 진서문 을 맹렬히 공격했으나 무너뜨리지 못했다. 이 날, 몽고 동도군 사천택( 史 天 澤 )이 병사를 이끌고 조 어대에 와서 참전하였다. 3월, 몽고군은 동신문, 기승문과 진서문의 소보를 공격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따. 4월 3일부터, 큰 비가 20일간 연속으로 내렸다. 비가 그친 후, 몽고궁은 4월 22일, 호국문을 중점적으로 공격하였다. 24일밤, 몽고군은 외성에 올라갈 수 있었다. 수비하는 송나라 군사들과 격전을 펼쳤다. <<원사. 헌종 기>>에서는 "송나라 병사를 많이 죽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몽고군의 공세는 결국 송나라 군사 에 의하여 격퇴되었고, 물러났다. 5월, 몽고군은 계속 조어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몽 고칸은 병사를 이끌고 사천성에 들어온 이후 연도의 모든 산성채보는 남송의 장수들이 항복함에 따 라 쉽게 손에 넣었으며, 진정으로 격투를 한 것은 조어성이 처음이었다. 그러므로, 조어산에 도착한 후, 몽크는 기세를 이어서 이 성도 무너뜨리고자 하였고, 성을 버리고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몽고 군의 공성무기가 정교하기는 했지만, 조어성의 험준한 기세앞에서는 별달리 활약하지 못했다. 조어 성의 수비군사는 주장수인 왕견과 부장인 장각( 張 珏 )의 지휘하에, 몽고군의 진격을 계속 물리쳤다. 천호( 千 戶 ) 동문위( 董 文 尉 )는 몽크칸의 명을 받아 등주 한족병사를 이끌고 성을 공격했다. 동문위는 병사를 격려하고, 운제( 雲 梯, 구름사다리)를 끼고 날아오는 돌을 무릅쓰며 힘들게 성에 올랐고, 성을 조어성전투( 釣 魚 城 戰 鬪 ) : 송의 가장 성공적인 몽고군 방어전 64

65 방어하는 송나라 군사들과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병사들의 부상이 참중하여 결국 퇴각하고 말았 다. 그 조카인 동사원( 董 士 元 )은 숙부인 동문위를 대신하여 공성할 것을 청하였고, 병사를 이끌고 성에 올랐다. 송나라 군사들과 오랫동안 싸웠으나 결국 뒤를 받쳐주지 못하여 부득히 퇴각하고 말 았다. 조어성을 오랫동안 함락시키지 못하자. 몽크칸은 여러 장수들에게 계책을 내도록 하였다. 술속훌리 ( 術 束 忽 里 )는 병사들이 굳건하게 지키는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고 보고, 소량의 군대 를 남겨서 포위한 후, 주력은 장강의 물길을 따라 남하하여, 쿠빌라이의 군대와 만나서, 한꺼번에 남송을 멸망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교만했던 몽고의 여러 장수들은 모두 조어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몽크한 은 술속홀리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공성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조어성이 너무나 굳 건하여, 움직임이 민활하고 흉맹하고 용감한 몽고기병은 전혀 활약하지 못하였다. 6월, 몽고의 장수 왕덕신( 汪 德 臣, 원래 금나라의 장수)는 병사를 이끌고 방에 외성의 마군채( 馬 軍 寨 )를 공격했으며, 왕견도 군대를 이끌고 가서 방어하였다. 하늘이 밝아지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몽고군의 구름사다리는 부러졌으며, 할 수 없이 퇴각했다. 몽고군은 5개월간이나 공격하여 함락시키 지 못했다. 왕덕신은 단기로 조어성의 아래로 가서, 성의 수비군사를 불러내어 싸우고자 하였으나, 성에서 쏘는 화살을 맞고 그는 결국 진운산의 절에서 죽고 말았다. 몽크는 그의 죽음소식을 듣고는 탄식하며 한 팔을 잃은 것과 같다고 하였다. 왕덕신의 죽음은, 몽크에게 큰 정신적인 타격을 주었 고, 조어성을 오랫동안 함락시키지 못하자, 마음 속에 병이 되었다. 몽고군이 대거 사천성에 들어온 후, 남송은 사천성에 대하여 대규모의 지원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조어성을 도와주기 위해서 파견한 병사들은 몽고군에 의하여 저지되었고, 계속 조어성의 아래에 도 달하지 못했다. 비록 이러하기는 했지만, 포위공격이 수개월에 달하도록 조어성은 여전히 물자가 풍 족했고, 수비군의 투지는 높았다. 하루는 남송의 수비군들이 15킬로그램에 달하는 생선의 꼬리와 찐 밀가루떡 백여장을 성밖의 몽고군에게 던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몽고군에게 서신을 보내어 10년도 더 버틸 수 있다고 하였다. 몽고군은 조어성을 함락시킬 방법을 찾지 못했다. 둘을 비교하면 성밖의 몽고군의 상황은 아주 엉망이었다. 몽고군은 성밖에서 오랫동안 주둔하였는데, 이미 더운 여름철이 되었고, 몽고족들은 원래 여름날씨에 견디기 힘들었고, 물도 맞지 않았다. 이리하여 군중에 감기, 학 질, 곽란등의 질병이 유행하였고 상당히 심하였다. <<원사>>의 기록에 따르면, 몽크칸이 6월에 병을 앓았다고 한다. 라스터의 <<사집>>에서는 더욱 명확하게 이질이라고 적었다. 다른 <<마르코폴로여행 기>>와 명나라 만력때의 <<합주지>>에 의하면, 몽크칸이 부상을 입었다고 적고 있다. 어쨌든, 몽크 한은 더 이상 성을 공격할 수 없었다. 7월, 몽고군은 스스로 조어성에서 물러난다. 금검산 온탕협 (현재의 중경북온천)에 이르렀을 때, 몽크칸은 사망한다. <<원사>>의 기재, 원나라 사람들의 문집, 비전, 행장등의 기재에 따르면, 몽크한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조어성에서 죽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조어성의 전투가 무척 치열했다는 것과 몽고군에 상당한 손실을 안겼다는 것이다. 몽크칸이 조어성에서 패하여 사망한 것은 영향이 매우 컸다. 첫째, 이는 몽고군에 의한 송나라를 멸망시키는 전쟁이 전면적으로 와해된 것을 의미한다. 송나라는 이로써 20여년을 더 명맥유지하게 된다. 사천에 진출하였던 몽고군은 철군할 수밖에 없었고, 몽크칸 조어성전투( 釣 魚 城 戰 鬪 ) : 송의 가장 성공적인 몽고군 방어전 65

66 의 시신을 호송하여 북으로 돌아갔다. 동로군을 이끌고 장강의 천험을 돌파하여 악주를 포위하고 있던 쿠빌라이는 그의 동생 아리불가와 칸의 지위를 놓고 다투어야 했으므로, 부득이 철군하여 북 으로 돌아갔다. 운남에서 광서를 거쳐 북상한 올량합태의 군대는 계속 승리하고, 이미 담주( 潭 州, 지금의 장사)에까지 이르렀지만, 몽크가 죽자, 쿠빌라이가 파견한 부대와 함께 장강을 건너 북상하 게 된다. 몽고의 남북양군은 기본적으로 계획에 따라 진군하였으나, 서쪽의 주전장터에서의 패배로 인하여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둘째, 몽고군의 제3차 서정( 西 征 )이 정체되었고, 몽고세력의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대한 위협이 완화되었다. 1252년, 몽크칸은 동생인 욱렬올( 旭 烈 兀 )을 보내여 제3차 서정을 시도하고, 이란, 이라 크 및 시리아등 아라비아반도의 토지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바로 욱렬올이 이집트를 향하여 진공 하려고 할 때, 몽크의 죽음을 전해듣는다. 욱렬올은 소량의 부대를 남겨 계속 싸우도록 하고, 대군 을 이끌고 동으로 회군한다. 결과적으로 몽고군은 중과부적이 되어 이집트군에 패배하고, 몽고군은 아프리카로 진입하지 못했다. 몽고의 대규모 확장행동은 이후부터 기세가 꺽이게 된다. 이로 인하여 조어성의 전투의 영향은 중국의 범위를 훨씬 넘어섰고, 세계역사상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것이다. 셋째, 이는 쿠빌라이가 몽고정권을 장악하는데 계기를 제공한다. 이로써 중국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몽크한은 몽고보수주의자이다. 그가 시행한 것은 전통적인 정책이었다. 이런 몽고부족과 서 역색채가 농후한 정책은 이미 광대한 중원의 한족대지를 통치하는데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쿠빌 라이는 몽고통치집단내에서 드물게 보는 한문화를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몽크가 칸의 지위에 오른 이후, 쿠빌라이는 막남의 한족땅을 지배하였다. 그는 대량의 한족 선비를 받아들였고, 한화정책을 극력 추진하였으며, 많은 성과를 보았다. 그는 몽크칸과 그의 신료들의 의심을 사서, 쿠빌라이는 관 직에서 파면되었고, 그가 실행하던 한화정책은 폐지되었다. 쿠빌라이가 칸의 보좌에 오른 이후, 한 화정책을 계속 썼고, 점진적으로 몽고군의 남살정책은 완화되었고,남중국의 경제와 문화는 파괴를 벗어날 수 있었다. 몽크칸은 일찌기 유언을 남겼는데, 이후 조어성을 함락시키면 성의 사람을 다 죽 이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조어성이 몽고에 항복하자, 쿠빌라이는 그 군민을 사면해준다. 바로 쿠빌 라이가 정권을 잡았으므로, 몽코칸국은 변강정권에서 중국의 봉건대왕조인 원나라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어성은 산성방어체계의 전형적인 것이다. 과거에는 그 방어작용이 충분했다. 그는 몽고군마저도 쉽게 함락시키지 못한 보루였다. 몽크한이 사망한 후, 조어성은 계속 몽고군의 여러차례에 걸친 공 격을 막아낸다. 1279년 수비장수 왕립이 성문을 열고 투항하고나서야 비로소 몽고의 손에 들어간다. 중국인민혁병군사박물관의 고대전쟁관에는 특별히 조어성 고전장의 모형을 제작해 두고 잇는데, 이 것은 조어성전투가 중국고대전쟁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조어성전투( 釣 魚 城 戰 鬪 ) : 송의 가장 성공적인 몽고군 방어전 66

67 대송제국은 어떻게 멸망하였는가? :51 대송제국은 중국역사상 가장 번성하고 부유했던 왕조이다. 부유한 정도는 지금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미국학자인 스타프리아노 스는 그가 제은 "세계통사"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송나라 왕조에서 주의할 점은 명실상부한 상업혁명이 일어났다는 점이다...근원은 중국 경제의 생산효율이 확실히 제고된데 있다. 기술의 안정적인 발전은 전통공업의 생산량을 제고시켰고...경제활동의 신속한 발전은 무역량을 증 가시켰다. 중국에 처음으로 상업위주인 행정위주가 아닌 도시가 형성되었다. 특히, 송나라때는 대외무역량이 이전의 어느 시기보다 훨씬 많았 다." 이와 같이 고도로 발달한 상업이 송나라의 사회를 또 하나의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게 만들었다. 송왕조는 경제문화의 여러 방면에서 업적을 쌓았다. 현대인들에게 중국고대의 4대발명품이라고 불리는 것중에서 3가지가 송나라때 나타났다. 경제발달로 국고는 충족했고, 송나라는 중국역사상 유일하게 상비군을 가진 왕조였다. 이와 동시에 아이러니한 것은 송나라는 중국역사상 유 명한 '약소'왕조였다는 것이다. 원인은 간단하다. 송나라 태조 조광윤이 즉위하면서 생각한 것은 어떻게 하면 당나라때 변방의 장수들이 할거 하는 국면이 다시 나타나지 않게 하고, 어떻게 하면 오대이후의 여섯번째 단명왕조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냐는 점이었다. 여기에서 그가 얻 은 답안은 "강간약지( 强 幹 弱 枝 )"정책이었다. 줄기를 강하게 하고, 가지를 약하게 하는 것, 즉 중앙정부를 강하게, 지방정권을 약하게 하는 것 이었다. 역사상 유명한 "배주석병권"(술잔을 주고 병권을 빼앗은 것)의 이야기는 그의 이러한 정책을 반영하는 것이다. 지방정권이 쇠약했으므로, 중앙정부가 전체적으로 조절하는 것은 더욱 중요했다. 그러나 대송제국은 각급정부를 관리하는 것이 그다지 효율 적이거나 유효하지 못했다. 여기에 여러가지 객관적인 문제가 있어, 정부의 명령은 자주 지체되는 경향이 있었다. 고대에 교통이 발달하지 못 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것은 치명적이었다. 이로 인하여 군사적으로 송나라는 항상 열세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생존하기 위하여 송왕조는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고대로부터 "원교근공( 遠 交 近 攻, 멀리 있는 나라와는 사귀고, 가까이 있는 이웃나라는 공격한다)"의 정책이 있었다. 이 정책은 고대 춘추전국시대에 매우 성행하던 것이다. 대송제국은 이 정책을 가지고 생존전략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잘못된 정책이었다. 바로 송나라는 이러한 정책을 쓰는 바람에 사지로 몰리게 된다. 첫째. 거란의 요( 遼 ) 송나라의 건립초기에 바로 강력한 이웃나라가 있었다. '거란'이라고 불리우는 요나라였다. 요나라는 사회형태나 경제형태에서는 모두 낙후한 나라였지만, 그들은 침략적이었고, 강력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이라는 활동을 통하여 나라를 생존시키고 발전시킬 기회를 찾 았다. 그래서 부유한 송나라는 항상 그들의 공격목표였다. 전쟁이 여러해 동안 이어졌다. 송나라는 스스로 침공을 받지 않기 위한 유일한 수 단으로써 요나라에 공물을 바친다. 즉 요나라에 대하여 자금지원을 하는 것이다. 과거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송나라의 정책이 체면상하는 것 이라고 생각해서, 공물을 바쳤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예물을 하사하였다고 말하곤 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표현하던간에 스스로 원해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원한은 마음 속에서 자라고 있었고, 발아할 기회만 엿보게 되었다. 이 때 요나라의 동북쪽은 원래 황무지였는데, 나중에 강력한 유목민족이 나타나게 된다. 바로 여진족이고, 나중에 금나라를 세운다. 그들은 요나라의 핍박을 받고 있었으며, 요나라에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송나라는 암중에 여진족과 교류하며, 여진족에 자금을 지원해 준다. 송나라는 돈은 많았으니까. 일정한 기간동안 준비기간을 거쳐, 금나라사람들이 더 이상 요나라의 핍박을 참을 수 없게 되자, 송과 여진 은 연합하여 요나라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킨다. 송나라는 순망치한의 교훈을 잊고 있었고, 오로지 복수하고픈 마음 뿐이었다. 송나라와 여진 대송제국은 어떻게 멸망하였는가? 67

68 의 합공에 요나라는 무너지고 만다. 여진족은 금나라를 세웠을 뿐아니라 송나라에 대하여는 예전에 요나라가 누렸던 혜택을 똑같이 누리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즉, 공물을 바치라는 뜻이다. 그러나 송나라는 거절했고, 금나라는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전쟁이 눈앞에 다가왔 다. 둘째, 여진의 금( 金 ) 송나라는 금나라의 위협에 경계는 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열심히 준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전쟁이 한번 일어나자, 급히 대응하기는 하였지 만, 결과는 연이은 패배였다. 수도인 변경마저도 지키지 못하였고, 금나라는 대승을 거두었다. 대량의 전리품과 포로로 잡은 두 명의 황제를 데리고 그들은 수도인 북경으롣 돌아갔다. 실로 옛 원한도 아직 갚지 못했는데, 새로운 원한만 생긴 꼴이다. 남쪽으로 도망쳐 남송을 세운 송 나라사람들에게 금나라는 다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어제의 친구는 오늘의 원수인 것이다. 그러나, 남송도 어쩔 수 없이 금나라에 공물 을 바치면서 기회를 노리게 된다. 셋째, 몽고의 원( 元 ) 이 때, 금나라의 북쪽 초원에 또 하나의 유목민족이 등장한다. 바로 몽고족이다. 금나라는 몽고인들을 핍박하였고, 몽고족들의 반항심리를 자 극했다. 징기스칸이 몽고의 각부족을 통합하자, 금나라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남송은 예전의 잘못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눈앞의 원한만 생 각해서 다시 몽고족과 손을 잡는다. 여러번의 전쟁을 통해서 금나라는 많이 쇠약해졌다. 이 때는 남송과 금나라가 연합하여 몽고에 대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나라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다. 당시 징기스칸은 서쪽정벌에 나서 금나라와 남송은 잠시 그냥 두었다. 그러나, 서쪽정벌이 끝나고 후계자인 오고타이가 등장하자 다시 금나라에 대한 마지막 전투를 시작한다. 남송의 도움을 받아 두 나라의 군대는 금나 라의 수도를 무너뜨린다. 전리품의 분배시에 벌써 남송과 몽고간에는 마찰이 발생한다. 몽고의 몽크는 결국 남송에 대하여 대거 진공하게 된다. 여러번의 전투를 거쳐 남송은 결국 철저하게 멸망한다. 냉혹한 현실은 하나의 명제 를 증명한다. 그것은 바로 대송제국은 자기의 철천지원수와 적수에 의하여 멸망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가 도와주었던 "친구"에 의하여 멸 망하였다는 것이다. 대송제국은 어떻게 멸망하였는가? 68

69 수당시대 일본과 중국의 외교전 :41 글: 아동( 阿 東 ) 수나라, 당나라이전까지는 왜국사람들은 백성들중 맨발로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庶 多 跣 足 ). 아 직도 신발을 신을 줄 모르는 민족이었다. 그러니, 중국의 황제들은 자연히 이 이웃나랑에 대하여 무 시하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입장이었다. 왜국도 전혀 고분고분하게 중국의 말을 듣지는 않았 다. 수당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평정은 부지불식간에 깨어진다. 암류가 용솟음쳐서 왜인은 중국과 대등하게 상대하고자 했고, 모든 면에서 체면을 끝까지 고집했다. 그리하여, 화약연기없는 체면 전 이 벌어지게 된다. 중국과 일본과의 외교사상 이 체면전은 근 100여년간 지속된다. 수나라 개황2년(600년) 일본의 섭정 쇼토쿠태자( 聖 德 太 子, 廐 戶 太 子 )는 처음으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낸다. 수문제는 관리를 보내어 왜국사신에게 왜국의 풍속을 묻는다. 왜국의 사신은 이렇게 대답한 다. 왜왕은 하늘을 형으로 삼고, 해를 동생으로 삼는다. 하늘이 밝기 전에 정무를 살펴보고, 가부 좌를 하며, 해가 뜨면 일보는 것을 중지한다. 이 보고를 받고 마치 파리를 삼킨 것처럼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수문제는 생각한다: 중국의 황제는 스스로 하늘의 아들이라고 칭하는데, 왜왕은 하늘 을 형이라고 부르다니, 왜왕이 숙부뻘이 된다는 말이 아닌가? 그리하여 수문제는 대노하여, 훈령 을 내려 고치게 한다 수문제는 천진하게 생각했다. 이 이웃나라의 잘못에 대하여 말로 몇마디 혼 을 내면 고쳐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했다. 수나라때의 이 체 면싸움은 아직 전모가 드러난 것이 아니다. 그 이후는 훨씬 더 심해진다. 당시의 일본은 한편으로 순종하는 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기회만 있으면 야심을 드러냈다. 수나라 대업3년(기원607년), 왜국의 외교가 오노노 이모코( 小 野 妹 子 )가 수나라에 사신으로 간다. 국서에는 동천황( 東 天 皇 )이 서황제( 西 皇 帝 )에게 경백( 敬 白 )한다 는 말로 시작하다. 이것은 처음으로 외교 문서에 천황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수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해가 뜨는 곳의 천자가 해가 지는 곳의 천자에게 보낸다 수양제는 왜국국왕의 조공에 아주 기뻐했는 데, 국서에 해가 뜨는 곳의 천자가 해가 지는 곳의 천자에게 보낸다 는 내용이 나오자, 안색이 홱 변하고 만다. 이번에는 수문제때처럼 왜왕이 자신을 하늘을 형으로 삼는다는 식으로 숙부 뻘이라고까지는 하 지 않았지만, 왜왕은 국서에서 신하가 천자를 뵙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군왕의 예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수양제에게는 대불경이다. 그리하여 수양제는 홍로경에게 말한다. 오랑캐의 글에 무례한 점이 있으니 다시는 보이지 말라. 즉, 이후에 이런 불경한 국서는 자신에게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국서의 칭호에 대하여 수양제는 그저 우연한 사건으로 생각했고, 이를 통 하여 왜왕의 의도까지 간파하지는 못했다. 더더구나 이를 중시하지도 않는다. 홍로경으로 하여금 왜 국의 사신을 잘 접대하게 하였고, 배세청( 裴 世 淸 )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기까지 하다. 수당시대 일본과 중국의 외교전 69

70 수나라 대업4년(608년) 팔월 십이일, 왜왕은 배세청을 접견한다. 접견때, 배세청은 먼저 수나라의 선 물을 바친다. 그 후에 수나라의 국서를 올린다. 쇼토쿠태자는 수양제의 국서에서 첫번째 문구가, 황제가 왕에게 안부를 묻는다( 皇 帝 問 候 王 ) 라고 되어 있자, 그의 웃던 얼굴이 돌연 굳어진다. 수 나라가 다른 사람을 낮춰보면서 자신의 패주로서의 이미지를 나타내려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군 왕으로 동등하게 대접해주지 않은데 대하여 불만을 표시하고, 사신에게 선물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 나, 그는 꾹 참고 발작하지는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이웃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에 대하여 마음 속에 깊이 원한으로 품고 있었다. 그해 구월 십일일, 배세청 일행이 귀국한다. 오노노 이모코는 사절단을 동행하여 호송한다. 그는 수 나라에 왜왕의 국서를 바치는데, 홍로경이 펼쳐보니, 첫문구가 동황제경백서천제 였다. 그는 놀 라서 등에 식은 땀을 흘린다. 신하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황제는 이런 글자를 싫어한다고. 더구나 황제는 더 이상 이런 글은 내게 보이지 말라 고까지 하였지 않은가? 그래서 이를 감히 수양제에 게 올리지 못한다. 이 국서를 보면 일본은 대등한 예절을 유지하고자 하고, 체면을 유지하려고 하는 심정이 잘 드러난다. 수나라때는 중국과 일본간의 체면싸움이 그저 말과 문자로 나타났다. 그러나, 당나라때가 되어서는 중일간의 교류가 더욱 빈번해지고, 당태종 이세민은 중국이 이미 안정시키면, 사방의 오랑캐를 복 속시켜야 한다 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멀리서온 왜국의 사절과 유학생들을 아주 잘 돌봐주었다. 그리고 칙령을 내려 일본은 1년에 1번 조공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고, 신주자사 고표인( 高 表 仁 )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기도 한다. 이때, 중국과 일본의 교류는 밀월기였다. 일본인들은 대당의 인자함에 감동했고, 강성한 대당의 앞에서, 바다를 사이에 둔 왜국은 그대로 승복하지 않았다. 왜왕 은 문자로 더 이상 장난치지 않았고, 직접적으로 부닥치게 된다. 정관6년(622년) 십월, 고표인은 난파진( 難 波 津, 지금의 오사카)에 도착한다. 왜왕은 높은 격의 접대 를 한다. 그러나, 고표인등이 왕도로 가서 왜왕을 접견하려할 때 마중나온 왜왕의 아들과 예를 다투 는 사건이 벌어진다. <당서>에는 무수원재( 無 綏 遠 才 ) 라는 네 글자로 이번 충돌을 표현하고 있 고,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이슈는 아마도 같을 것이다. 이번 충돌은 아마도 왜왕의 아들 이 동등한 예로 상대할 것을 요구했고, 고표인이 화를 낸 것일 껏이다. 고표인은 대당의 조서를 읽 는 것을 거절하고, 즉시 귀국하겠다고 한다. 이때의 왜왕은 그래도 인내심이 있었다. 633년 정월에 야 사절단을 호송하여 고표인을 중국으로 돌려보낸다. 이번의 체면충돌에 대하여 당나라조정은 왜국에 죄를 묻지는 않았다. 그냥 대범하게 고표인이 무능 하여 쌍방이 서로 불쾌하게 헤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쌍방의 교류도 이를 이유로 영향을 받지 않는 다. 당고종시대가 되어, 왜국은 견당사를 계속 당나라로 보내어 학습하는 외에 문서와 보물을 많 이 가져 갔다. 그동안, 백제와 고려는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했고,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여 구원을 요청한다. 당고종은 조서를 왜왕에게 보내어 신라를 원조하도록 한다. 왜국은 백제와 관계가 밀접하여 당고종의 조서를 본체만체 하고 전혀 병력을 움직이지 않는다. 당고종은 그의 말이 통하 지 않자, 부득이 스스로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를 도와줄 수밖에 없게 된다. 당고종은 군사기밀을 누 설했다는 이유를 들어, 왜국의 제4차 견당사를 억류한다. 이때, 일본은 이미 자신의 발판이 튼튼해졌다고 생각하여, 무력으로 당나라를 시험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663년, 중일간의 첫번째 전투인 백강구전투가 일어난다. <신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당군 수당시대 일본과 중국의 외교전 70

71 과 왜군의 해전에서, 네번 싸워 모두 이겼고, 사백척의 배를 불태웠고, 바닷물이 빨갛게 물들었 다. 고 적었다. 나당연합군이 일본백제연합군에 철저히 승리를 거두고 끝난다. 왜국의 참패는 자신 감에 심대한 타격을 입힌다. 강대한 당나라의 앞에서 무력으로 싸우는 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고 느낀다. 그리하여 온유하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다른 최선의 길을 찾게 된다. 무측천, 당현종에서 당숙종시기까지, 당나라조정은 왜국의 아와타노마히토( 粟 田 眞 人, 朝 臣 眞 人 )을 사 선경( 司 膳 卿 ), 조형( 晁 衡, 阿 倍 仲 麻 呂 )을 좌산기상시 겸 진남도호로, 정진성( 井 眞 成 )은 상의봉어, 후 지와라노기요카와( 藤 原 淸 河 )는 비서감으로 삼는다. 이처럼 왜인들을 관리로 임명한 행위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런 관직을 주는 것은 조정의 관리에 대한 은혜이며 일종의 명 예직이다. 사실, 이는 대당과 왜국간에 종주국과 속국의 관계를 나타내려는 것이다. 결국 당나라정 부는 여러가지 방법을 써서 체면싸움에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애쓴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자 로 체면 을 바꾸는 행위는 연약함을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일찍이 당나라에서 관직을 받은 후지와라노키요카와 일행은 당초에 현종을 만났을 때, 현종이 이렇 게 말한다. 그대의 나라에는 현명한 임금이 있으니, 그 사신의 행동거지도 남다르다. 그리고 일 본에 유의예의군자지국( 有 義 禮 儀 君 子 之 國 ) 이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그리고 당현종은 아배중마려 로 하여금 후지와라노키요카와일행을 데리고 창고와 삼교전을 보여주게 하고, 키요카와와 길비진비 ( 吉 備 眞 備 )의 용묘를 그려서 번장에 넣어두게 했다. 이는 일본사신의 체면을 많이 봐준 것이다. 그러나, 네가 체면을 살려준다고 하여, 상대방도 너의 체면을 살려주는 것은 아니다. 얼마후, 당현종 이 연회를 베푸는데, 후지와라노키요카와는 체면쟁탈전을 벌인다. 천보12년(753년), 정월 초하루. 당 나라의 문무백관과 각국사신들이 장안 대명궁 함원전에 모였다. 성대한 새해첫날축하의식을 연 것 이다. 각국사신이 자리를 잡은 후에, 후지와라노키요카와는 일본의 자리가 원래는 서쪽의 토번( 吐 蕃 )의 바로 아랫자리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자리에 앉고 보니, 신라사절이 동쪽의 가장 윗자리에 앉 아 있었다. 그래서 항의를 제기한다. 신라보다 낮은 자리에 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대당은 일본과 신라의 자리를 조정해주어 일본의 체면을 살려주다. 이번 자리 다툼은 당나라 황제의 면 전에서 일어났고, 당현종은 일본사신이 공개적으로 떼를 쓰는 것을 용인하고 결국은 타협까지 해준 다. 이는 일본의 국제지위가 어느 정도 올라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당도 이미 이 속국을 무시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백여년의 중일간 체면전을 살펴보면, 일본인은 처음에는 말, 문자, 대항, 들이받기식으로 계속하여 요구하고, 수당정부는 훈계, 화, 관직부여, 양보, 용서, 무력등의 책략으로 피동적으로 응대한다. 일 본인들은 조금씩 자존심을 찾아가고, 수당정부는 이 과정에서 존엄을 점차 상실한다. 체면전부터 시 작하여 일본인들의 야심은 점점 더 팽창하다. 마지막으로 일본은 중국의 영토와 자원을 노린다. 나 중에 왜구가 오고, 왜군이 왔다. 그들은 유의예의군자지국 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총과 칼을 들 고, 대담하게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수당시대 일본과 중국의 외교전 71

72 당나라의 환관취처( 宦 官 娶 妻 ) :40 환관은 소위 "형여지인( 刑 餘 之 人, 형벌을 받은 사람)"이다. 신체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원래 혼인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다만, 환관취처(환 관이 처를 취하는 것)현상은 역사상 유래가 오래되었고, 계속하여 존재했다. 현존하는 사료로 보면, 환관이 대량으로 처를 취한 현상은 동한 때 나타났다. <<후한서. 유유전>>에는 "상시황문( 常 侍 黃 門 )도 널리 처를 취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한의 환관들이 처를 취하는 현상은 비교적 광범위했고, 당시 사회여론의 비판과 견책을 받았다. 예를 들어, <<후한서 주거전>>에는 "환관인 자들이 거짓으로 형태를 꾸미기 위하여, 양 가집 여자를 핍박하여 취한 후, 가두어 두고, 백발이 될 때까지 짝을 찾지 못하게 하니, 이는 하늘의 뜻에 어긋난 일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는 당시 사람들이 환관들이 여인을 취하는 것을 혼인관계로 인정해주지 않았을 뿐아니라, 여성을 박해하고 짓밟는 것이라고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당나라때가 되어서는 환관취처 현상이 이미 성행하게 된다. <<신당서>>, <<구당서>>, <<전당문보유>>, <<문원영화>> 및 당나라때 비각 등 관련기록을 보면, 당나라때 관직이 있는 환관은 일반적으로 모두 처를 취했다. 어떤 경우는 처가 하나만도 아니었다. 당나 라때 환관취처의 보편성은 동한, 명나라를 포함한 역대왕조중에서 전무후무할 정도이다. 필자가 통계를 내본 바에 의하면, 당나라때 환관으로 처를 취한 자는 5품이상의 고급환관중에서는 49.3%이고, 6품이하 하층환관중에서는 50.7%이다. 중하층환관들에서 이렇게 높은 비율을 차지하 는 것은 당나라때 환관들이 보편적으로 혼인관계를 수립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당나라때 관련 사료와 사적을 보면, 환관취 처문제에 대하여 비난하거나 질책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최소한 환관들이 건립한 혼인관계를 묵인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나라때 환관들이 처를 취할 때는 따지는 것이 많았다. 첫째, 여자측의 문벌을 중시했다. 비지( 碑 誌 )자료에 따르면, 환관은 처족의 문벌이 얼 마나 고귀하고 대단한지를 자랑하는 내용의 기록이 많다. 이것은 바로 이러한 배우자선택관념을 반영한 것일 것이다. 둘째, 여자의 품행을 중 시했다. 배우자가 '덕행온후( 德 行 溫 厚 )', '유순숙덕( 柔 順 淑 德 )", "영숙소착( 令 淑 昭 着 ), "온공윤색( 溫 恭 允 塞 )"할 것을 요구했다. 즉, '삼종사 덕'을 지킬 것을 요구한 것이다. 셋째, 여자의 용모를 중시했다. 예를 들어 고력사의 처인 여씨는 용모가 "국수( 國 姝, 나라에서 손꼽히게 예쁘 다)"였다고 한다. 환관 위모의 처인 송씨는 "자용완숙( 姿 容 婉 淑 )"했다고 되어 있고, 양현략의 처인 두씨는 "응자회수( 凝 姿 迴 秀 )"했다고 하며, 낙명순의 부인 초씨는 "온가유지자( 溫 嘉 柔 之 姿 )"를 가졌다고 한다. 이외에 환관취처에서 여자의 연령도 중시했다. 묘지명의 기술을 보면 여자 가 환관에게 시집올 때, 많은 경우가 "초계( 初 )" "계년( 年 )", "급계( 及 )"라고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즉 15살 가량을 말한다. 이런 여러가지 상황을 보면, 명나라때 환관들은 처를 취할 때, 아무렇게나 선택한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높은 기준의 요구조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나라때는 왜 환관이 처를 취하는 풍속이 성행했을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래의 다섯가지 이유가 있는 것같다: 첫째,당나라는 개방적인 시대였다. 사회환경도 비교적 느슨했고, 황제도 환관취처에 반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보국이 원씨를 처로 맞이할 때, 당숙종이 중매를 서준 것이었다. 둘째, 환관취처후 비록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는 못하지만, 처가 있고 집이 있다는 만족감은 누릴 수 있었다. 셋 째, 환관은 생육능력을 상실했지만, 그러나, '불효에 세 가지가 있는데, 후손을 두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크다"는 전통종법관념의 압력하에, 처 를 취하고 양자녀를 들이는 것을 통하여 형식적으로나마 '전종접대( 傳 宗 接 代 )'의 의무를 다할 수 있었다. 넷째, 당나라때 환관은 처를 취하고 자식을 시집장가보내는 것을 통하여, 다른 가족과의 인척관계를 맺고, 정치적으로 장수하고자 했다. 다섯째, 당나라때 환관은 대부분 강인했 다. 그들은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군권을 장악하고, 토지를 겸병하고, 저택을 지었다. 심지어 직접 황제를 올리고 폐위하기까지 하였다. 조정 관리들이 가진 특권은 그들이 모조리 가지고자 했다. 예를 들면 처를 취하고 집안을 이루는 것도 포함된다. 당나라의 환관취처( 宦 官 娶 妻 ) 72

73 환관취처는 많은 부녀의 고통 위에서 건립되었다. 많은 부녀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것을 기초로 건립된 혼인관계이다. 청춘기의 소녀가 내시 의 짝이 되어 인생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이들 불행한 여자들 중에 어떤 사람은 죽음으로 항거 하였다. 예를 들어, 내시 이모가 창주 요안현위 대모의 딸을 처로 삼았는데, '그해에 바로 죽었다' 이는 비정상적 사망이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불교에 귀의했다. 예를 들어 대환관 초희망의 처 이씨가 그러했다. 내시 뇌모의 부인 송씨는 호가 공덕산거장인데, 남편이 죽 은 후, '돈오공색, 요귀선정( 頓 悟 空 色, 了 歸 禪 定, 공과 색을 깨닫고 선정에 들었다)'즉 불문에 귀의했다. 어떤 환관은 배우자에게 남편인 환관 이 죽은 후에도 수절할 것을 요구했고, 개가하지 못하게 했다. 예를 들어 환관 낙보정이 죽었을 때 부인은 26살이었는데, '평생을 과부로 지 냈다" 이같은 고통의 눈물들은 당나라때 환관취처의 배후에 있는 잔혹과 기형을 드러내준다. 당나라의 환관취처( 宦 官 娶 妻 ) 73

74 고징( 高 澄 ): 황제에게 주먹질한 사상최초의 권신( 權 臣 ) :39 황제노릇하기는 어렵다. 좋은 황제노릇을 하기는 더욱 어렵다. 괴뢰황제노릇을 하기는 가장 어렵다. 괴뢰황제는 고대의 가장 위험한 직업이라 고 할 수 있다. 머리 위에 쓰고 있는 것은 황관이 아니라, 시한폭판이며, 언제라도 터지면 강산과 목숨이 날아가는 것이다. 운이 좋은 괴뢰황 제로는 한헌제( 漢 獻 帝 )가 있다. 강산은 빼앗겼지만, 그래도 천수는 다했고, 또한 천자의 예로 매장되었다. 운이 나쁜 괴뢰황제로는 후조( 後 趙 ) 의 황제 석대아( 石 大 雅 )이다. 그는 시신을 온전히 남기지 못했을 뿐아니라, 일가족이 모조리 참초제근 당했다. 어쨌든, 이것은 모두 그들을 통 제한 권신의 마음씀씀이와 자질이 어떠한가에 달렸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괴뢰황제는 물러나기 전까지는 그들의 체면은 살려주었고, 존중받 았다. 권신은 고개를 숙일 때는 숙여주었고, 만세를 부를 때는 만세를 불러주었다. 다만, 예외적인 경우도 물론 있다. 예를 들면, 동위( 東 魏 ) 의 유명한 권신인 고징( 高 澄 )은 당시의 괴뢰황제인 효정제( 孝 靜 帝 ) 원선견( 元 善 見 )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았다. 일찍이 황제에게 주먹을 세 대나 먹인 일로 역사상 처음 황제를 구타한 대단한 인물로 남아있다. 고징이 이처럼 조조도 하지 않은 나쁜 짓을 한 것은 그의 가족출신과 가정교육과 많은 관계가 있다. 그가 생활한 시대는 오호난중화( 五 胡 亂 中 華, 다섯 오랑캐가 중원을 어지럽힘)의 남북조시대였고, 그는 선비족에 속한다. 조상은 내몽고자치주의 빠오터우시 동북지방에 살았었다. 비록 고씨집안은 생활방식에서 점차 한화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뼛속에는 야만적인 유전인자가 퇴화되지는 않았었다. 그의 부친인 고환 ( 高 歡 )은 원래 시골의 가난뱅이였다. 나중에 운이 돌아와서 육진의거의 바람을 타고, 두락주( 杜 洛 周 )와 갈영( 葛 榮 )에 차례로 의탁한다. 나중에 반란군을 떠나 이주영( 爾 朱 榮 )에 투항하여 그의 총애를 받고 진주자사가 된다. 갈영이 실패한 후, 그는 갈영의 무리를 거두고, 산동의 기주, 정주, 상주의 여러 주(지금의 하북, 하남 북부)를 자기의 거점으로 삼는다. 같은 해 이주영은 북위의 효장제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우 이주씨 ( 爾 朱 氏 )들이 조정을 통제한다. 보태원년(531년) 고환은 병사를 일으켜 이주씨를 토벌한다. 신도(하북 기현)에서 원랑( 元 朗 )을 황제로 옹립한 다. 영희원년(532년) 업성을 빼앗고, 내부적으로 불화가 있던 이주씨 연합군을 격파하고 낙양에 진격한다. 이주씨와 자기가 옹립한 두 명의 황제를 페위시키고, 다시 효무제 원수( 元 修 )를 옹립한다. 고환은 대승상, 태사를 맡으면서 정주자사를 세습한다. 이어서 병주를 평정하고, 진 양에 대승상부를 세운다. 북위제국을 완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넣게 된다. 나중에 북제를 건립하는 기반을 다진다. 원래 그들 고씨집안은 중국북방을 모두 장악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534년, 허수아비역할을 하지 않기로 한 효무제 원수가 고환과 안 면몰수하고 장안으로 도망쳐서 또 다른 지방군벌인 우문태( 宇 文 泰 )에게 간다. 당시는 난세여서, 세발달린 하마는 찾기 어려워도, 두발달린 황 제는 찾기 쉬웠다. 오래지 않아, 고환은 11살된 원선견을 효정제로 세운다. 이때부터 북위는 두 개로 갈라져서 동위, 서위로 나뉜다. 통일을 향한 발걸음은 다시 수십년간의 혼전에 빠지게 된다. 호부불견자( 虎 父 不 犬 子, 호랑이애비에 개새끼는 없다)라고 부친이 풍운을 질타하던 때, 장남인 고징도 호랑이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는 어릴때부터 머리가 아주 잘 돌아갔다. 그의 스승조차도 상당히 감탄할 정도였다. 막 10살이 되었을 때, 중요한 정치임무 하나를 완성한다. 당 시 대신중에 고오조( 高 敖 曹 )라고 있었는데, 큰형인 고건( 高 乾 )이 고환에게 의탁한 데 불만을 가지고, 여자옷을 큰형에게 보내어, 자신은 고환 의 밑에 들어갈 수 없다고 태도를 표시한다. 중국고대에 여러가지 변화가 있었지만, 한가지 일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가장 심한 욕은 남자를 여자 라고 욕하는 것이다. 고오조는 여자옷을 보냄으로써 고환을 멸시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고환의 이전 성격대로라면 분명히 고오조를 절단내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기의 아들을 시험해보기로 한다. 그리하여 고징으로 하여금 고오조를 만나 게 했다. 고징은 어린 나이였으므로, 자손의 예로 고오조를 대하였고, 결국 감동한 고오조가 고징과 함께 고환을 배견한다. 이후 그는 충성을 다하여 고환을 모셨고 전장터에서 목숨을 마친다. 현재의 나이로 보자면, 고징은 그 때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의 어린학생이었다. 이런 어린학 생이 어른을 설복시켰다니, 이 어린아이가 얼마나 총명했던지는 전국말기의 신동 감로에 못지 않았을 것이다. 고징( 高 澄 ): 황제에게 주먹질한 사상최초의 권신( 權 臣 ) 74

75 고징은 비록 뼛속까지 야만적인 유전인자를 지니고 있지만, 어쨌든 어려서부터 문명사회에서 살았으므로, 원래는 행동거지가 그럭저럭 괜찮 은 어른이 될 수 있었다. 최소한 나중에 황제에게 주먹질을 세번이나 하는 야만적인 일은 벌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의 부친이 아주 망나니라는데 있다. 어떻게 망나니인가? 그는 주먹이 말보다 빠른 사람이었다. 고환은 자식들이 잘 크기를 바랐기 때문에 가 정교육이 아주 엄격했다. 가장 많이 쓴 수법은 주먹과 욕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자식들은 모두 폭력적인 성향을 지니게 된다. 사람죽이는 것 을 아무 것도 아니게 여기게 된다. 나중에 한 식구끼리 서로 죽이기에 이른다. 고징은 부친으로부터 맞고 욕먹으며 자랐다. 진원강이라는 대 신이 더 이상 보아넘길 수가 없어서 울면서 고징을 때리고 욕하지 말라고 청했다. 대왕께서는 더욱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아이를 교 육시키라고. 그래도 고환은 여전히 때리는 교육을 했다. 유일하게 합리적인 것이라면 이후 진원강이 모르게 했다는 것이다. 몽둥이아래서 효 자가 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고환은 몽둥이 아래서는 달랐다. 고징이 14살이 되었을 때, 사춘기가 막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남 달랐다. 일거에 부친의 애첩인 정대거와 가까워진 것이다. 고환은 화가나서 어쩔 줄을 몰랐고, 고징을 때려서 거의 목숨이 왔다갔다 할 정도 가 되었다. 동시에 고환의 처는 그의 다른 동생과 가까워졌다. 고환은 역시 때리는 것으로 해결했다. 그 동생은 고징처럼 뼈가 단단하지 못하 였는지, 맞다가 죽어버렸다. 포악한 성격은 고징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그후 고환은 약간 마음이 풀어졌는지, 그에게 조정에 들어와서 정치 를 돕게 했고, 경기대도독을 맡아 국가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때 고징은 겨우 16살이었고, 현재로 말하면 중학생이었다. 그러나 조정의 일 을 아주 기민하고 과감하며 적절하게 처결했다. 마치 닳고 닳은 관료와 같았다. 그리하여 문무백관들은 모두 그를 얕볼 수가 없었다. 무정4년(546년) 11월, 고환은 동위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중병을 얻고, 병사하게 된다. 고징은 이후 고환의 일체 직무와 권력을 물려받는다. 껍 대기만 남은 동위제국을 그가 대체하고자 한다. 괴뢰황제 효정제에 대하여 그는 예전에 부친이 자식에게 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욕하고 싶으면 욕했다. 효정제는 운이 나쁜 사람이었다. 그는 원래 아주 표준적인 미남이었고, 문무를 겸비했다. 두 팔로 돌사 자를 끼고 담장을 뛰어넘을 수도 있었고, 시를 읊고 부를 지을 수도 있었고, 고금의 일을 논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조정의 신하들이 그를 받들었다. 야심만만한 고징은 이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중서황문랑 최계서를 보내어 효정제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고,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자신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황제를 여러가지로 제약하였는데, 조조가 한헌제에 대하여 한 것보다 훨씬 심했다. 한번은, 효정제가 사냥할 때 말에게 채찍질하며 달려가는데, 감위도독 오나라가 권해서 한 말은 이런 것이었다: 폐하 말을 달리지 마십시 오. 그렇지 아니면 대장군 고징이 분노할 겁니다 또 한번은 고징이 식사를 할 때 억지로 효정제에게 술을 권했다 효정제는 원한을 품은 목 소리로 말했다: 짐( 朕 )은 천자가 되어서 모든 일에 제약을 받으니,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고징은 그 자리에서 분노하며 말했다: 무슨 짐( 朕 ), 짐이냐. 이 개다리 같은 짐아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그 자리에서 곁에 있던 최계서에게 효정제를 주먹으로 세번 때리라고 하였다. 아마 고징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이 명령은 중국역사에 하나의 기록을 세우는 것임을 그는 황제를 때린 첫번째 인 물이 된 것이다. 이전의 권신은 괴뢰황제에 대하여 말로 모욕을 가한 일은 있고, 직접 죽인 일은 있지만, 주먹질을 한 적은 없었다. 일반 사 람도 참기 힘든데, 하물며 황제가 참을 수 있겠는가? 효정제는 화가 나서, 예부랑중 원근, 장추경 유사일등과 몰래 고징을 죽일 것을 모의했 다. 그런데, 일이 누설되었다. 고징은 바로 병사를 이끌고 입궁하여 효정제의 면전에서 역사성 유명한 말을 한다: 황제, 네가 반란을 일으키 려는 것이냐? 신하가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킨다는 말은 있어도, 황제가 신하에게 반란을 일으킨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천고의 기이 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로써 그가 어느 정도 발호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황제 본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참여자는 모두 죽여버 린다. 무정7년(549년) 4월, 고징은 대장군의 신분으로 상국을 겸하고, 제왕( 齊 王 )에 봉해진다. 그의 권위는 신하로서는 최고에 이른다. 그러나 사람 은 절제를 알아야 한다. 만일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면 하늘이 막는다. 이해 8월, 고징은 심복 최계서, 진원강등을 불러모아 북성 동백당의 거 처에서 황위를 찬탈할 계획을 세운다. 이때 난경( 蘭 京 )이라는 요리사가 평소에 고징으로부터 온갖 모욕을 당해서 원한을 가지고 있어, 형제들 을 끌어모아 일거에 밀고 올라가서 칼을 휘둘러 고징을 육장으로 만들어버린다. 황제도 때린 이 권신은 결국 황제의 보좌에는 올라보지 못하 고 죽게 된다. 고징( 高 澄 ): 황제에게 주먹질한 사상최초의 권신( 權 臣 ) 75

76 수당대운하( 隋 唐 大 運 河 ): 지하의 휘황 :38 중국대운하를 자세히 나누면 두개의 계통으로 나뉜다: 하나는 경항대운하( 京 杭 大 運 河, 북경에서 항주까지의 대운하)이고, 다른 하나는 수당대운하( 隋 唐 大 運 河 )이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대운하이다. 시간도 다르 고, 지리적위치도 다르다. 비록 다같이 대운하라고 불리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개념과 계통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잘 모 르고 있다. 중국대운하라고 하면, 경항대운하로 이해를 하고 있고, 수당대운하가 있었다는 것조차도 잘 모르고 있다. 필자는 다행히 전국정협고찰단으로 두번에 걸쳐 시찰하며 조사한 바 있다. 2006년도에 경항대운하를 고찰하였는데, 10일동안 진행하였다. 2007년말에는 수당대운하를 고찰했고, 역시 10일동안 진행하였다. 수양제는 대단한 제왕이다. 대운하만 놓고 말하자면 수양제에 대한 평가는 바뀌어야 한다 과거에 역사상, 정설로 굳어진 견해는 수양제를 아주 나쁜 통치자로 보는 것이다. 그는 백성들을 동원해서 돈을 물쓰듯이 쓰고, 전쟁을 일으 키며, 낭비하다가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수나라가 단명황조가 된 죄는 수양제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대운하가 있어,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수양제가 즉위한 것은 605년이다. 그의 부친인 수문제 양견에게서 자리를 넘겨받았다. 617년까지 12년간 재위하였다. 그의 재위기간데 한 가 지 큰 일을 했데, 바로 전국의 힘을 모아 대운하를 판 것이다. 이는 그의 웅재대략을 보여주는 것이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경천동지의 대 업을 이룩한 것이며, 불멸의 업적을 남긴 것이다. 현재 보기에, 수양제의 대운하는 최소한 역사상 여섯가지 공헌을 하였다. 첫째, 중국대지의 동서남북을 소통시키고, 중국역사상 최초의 진정한 대일통을 이루어냈다. 고대에, 육로는 말이나 마차에 의지하거나 걸어다 녀야 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했으므로 아주 힘들고 느렸다. 그러나, 인류는 일찌기 물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를 타면 강을 건널 수 있고, 바다도 건널 수 있다. 빠르기도 하면서 짐도 많이 실을 수 있다. 이는 육지를 다니는 것보다 종종 훨씬 간편했다. 사람과 물건을 배 위에 싣고 사람이 젓거나 아니면 돛을 달면 하루에 수십리 내지 수백리를 갈 수 있다. 이는 인류이동의 비약적 발전이었다. 배가 크면 병사도 운송할 수 있고, 말도 운송할 수 있고, 양식도 운송할 수 있으며, 말먹이인 풀도 운송할 수 있고, 석탄도 운송할 수 있고, 목재도 운송할 수 있다. 이는 인류의 활동공간을 많이 넓혀주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강의 흐름은 기본적으로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남북으로는 흐르지 않는다. 수양제는 남북대운하를 파기로 결정한다. 아예 동서남북을 모두 물로 연결시키겠다는 것이 었다. 이리하여 수망( 水 網 )을 구성하여, 몇개의 대자연수계(장강, 회하, 황하, 해하, 전당강)을 하나의 수계로 만드는 것이다. 대운하가 있음으 로써, 전체 중국국토는 완전히 자신의 황권 범위내에 들어오게 된다. 마치 자기의 품에 들어온 것과 같은 것이다. 과거 역사상 어느 제왕도 이룩하지 못한 것이었다. 둘째, 한꺼번에 수십개의 번화한 도시를 형성시켰다. 먼저 강이 있고, 나중에 도시가 생긴다. 도시는 강때문에 생기고 강때문에 번성했다. 큰 수당대운하( 隋 唐 大 運 河 ): 지하의 휘황 76

77 도시는 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된 곳을 말하는데, 인재가 모인다는 것은 분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운수에 종사하는 사람, 운반하는 사람, 세금을 거두는 사람, 관리하는 사람, 배만드는 사람, 창고를 운영하는 사람, 화물을 모으는 사람, 매매를 하는 사람, 여관을 하는 사람, 식당을 하는 사람, 미인가를 운영하는 사람, 창극오락을 하는 사람, 학교와 같은 기관등도 필요하다. 결국 모이면 모일 수록 이름도 더 멀리 퍼져가 게 되고 큰 도시가 되는 것이다. 대운하는 바로 도시의 촉매제였다. 셋째, 수나라때의 대운하는 양주(항주 포함), 서안(낙양, 개봉 포함), 북경(천진 포함)의 삼대 세계도시를 만들어 냈다. 양주는 대운하의 기점 이고, 서안은 중간점이고, 북경은 종점이다. 대운하는 세 점을 만듦으로써 중국역사상 중요한 지위를 지닌 도시를 형성한 것이다. 수도가 되 기도 하고, 경제중심지가 되기도 하고, 전국정치중심, 경제중심, 문화중심이 되기도 하였으니, 영향이 매우 컸다. 넷째, 중원문화를 북방과 남방으로 퍼지게 하였다. 그리고 북방초원문화와 남방의 어미상차수향문화를 중원에 가져왔다. 이리하여 중화문화의 다양화, 상호보완 및 공동번영을 이루게 된다. 다섯째, 몇개의 수계를 연결시킴으로써 민족융합과 교류 및 중외국제교류를 촉진시켰다. 대운하는 비단길에 손발을 달아준 것같이, 한편으로 는 지중해주변과 중앙아시아의 문화와 중국내륙의 문화를 연결시키고, 퍼져나가게 하였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북방소수민족문화와 중원한족 문화를 연결시켜, 중화민족대가정의 형성, 공고 및 확장을 이루어냈다. 이 양자의 문화대교류는 수나라때의 대운하를 판 것으로 인하여 후대 에 빛을 발하게 되고, 큰 성과를 이루어낸다. 여섯째, 수양제 대운하는 당나라때의 정관지치를 가능하게 해주고, 당나라문화가 세계에 떨치게 만들어준다. 수나라는 짧았지만, 당나라의 장 기간통치와 극성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수나라대운하의 기초를 잘 닦았기 때문에, 당나라는 정책에서 약간의 조정만으로도 곧바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보기에 수양제에 대한 평가는 달라져야 한다. 대운하가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절반은 지상에 절반은 지하에 만일 경항대운하의 절반은 말랐고, 절반은 물이 차있다고 한다면, 수당대운하는 절반은 땅속에 절반은 땅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수나라의 수도는 서도 장안과 동도 낙양이었다. 대운하는 양주에서 출발하여, 먼저 서북쪽으로 간다. 그리하여 안휘성의 회하유역을 비스듬히 지나가며, 하남의 동북부를 거쳐, 황하유역으로 들어간다. 그 후 낙양에 도착한다. 이것이 하반부이다; 이후 동북으로 가서 하북동남부를 지 나, 해하유역으로 들어서고, 탁군(북경남쪽)에 이른다 이것이 상반부이다. 이를 합치면 전체적으로 갈 지자( 之 )의 걸음을 하게 된다. 수나라운하는 605년부터 건설되고, 360만민공을 동원하여 물길을 파서 황하와 회하를 연결시킨다. 같은 해에 10만민공을 동원하여 고간구를 소통시키고, 회하와 장강을 연결시킨다. 3년후, 하북민공 100만여를 동원하여 영제거를 판다. 이리하여 북경남쪽까지 연결시킨다. 다시 2년이 지난 후 다시 강남운하를 파고, 여항(항주)에 이른다. 이에 이르러 모두 500여만민공을 동원하여 6년에 걸쳐 대운하의 전체 노선이 개통되는 것이다. 전체 길이는 2700킬로미터에 이르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공정의 하나였다. 이 운하는 500여년간 운영한다. 당나라, 오대, 송나라에 이른다. 남송말년에 일부 물길이 흙이 퇴적되어 쇠락하기 시작한다. 이를 대체한 것이 경항대운하이다. 원나라가 금과 남송을 대체한 후, 북경에 수도를 정하면서, 대운하를 남북으로 직선연결하게 된다. 다시는 낙양, 서안으로 가 지 않고, 900여킬로미터를 단축시킨다. 그리고는 다시 700여년간 운영하여 오늘 날에 이른다. 수당대운하의 쇠퇴는 700년전인데, 그 유적은 지금의 어디일까? 수당대운하( 隋 唐 大 運 河 ): 지하의 휘황 77

78 현지고찰을 하게 되면 깜짝 놀라게 된다.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 다. 상황은 약간 복잡하다. 어떤 구간은 나중의 경항대운하에 흡수된다. 주로 양쪽 끝부분이다. 예를 들어 장강이남의 강남운하와 산동임청이북의 영제거의 중북단은 모두 땅 위에 존재한다. 볼 수도 있고, 만져볼 수도 있다. 그리고 고간구와 강남운하는 아직도 수량이 풍부하고, 운송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구간은 버려졌다. 주로 황하이북의 영제거의 상중단의 대부분이 그러하다. 이번 고찰의 수확중 하나는 폐기된 시기가 근대라는 것이다. 슬픈 일은 이 구간이 이미 14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수당대운하의 상반구간인데, 버려진 후에 보호를 받지 못하였고, 폐수가 지나는 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오염이 아주 심하여, 목불인견이다. 주요 오염원은 하남 초작, 신향일대의 공 업폐수와 하북성연안의 공업과 생활쓰레기이다. 현지 선원과 어민의 회고에 따르면, 1970년대에는 수량이 충분했고, 위하에서는 배가 다녔다 고 한다. 하남 학벽에서 천진에 이르는 구간에는 돌과 화물을 운반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육로와 철로가 만들어지고, 수량이 부족해지면서 수당대운하의 북쪽구간은 신속히 쇠퇴하여버린 것이다. 이는 매우 아쉬운 일이다. 세번째 상황은 지하에 묻혀버린 경우이다. 원인은 황하가 역사적으로 몇번의 큰 수재와 물길변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운하의 옛길은 황하의 진흙으로 지하에 묻혀버린다. 이부분은 아주 길다. 대체 적으로 수당대운하의 하반구간이다. 즉, 하남과 안휘경내이다. 이부분에도 예외인 구간은 있다. 예를 들면, 안휘성 숙주시 사현의 장구진에는 여전히 물이 있는 옛 운하물길이 남아있고, 25킬로미터에 이른다. 이외에 절대다수의 부분은 땅 속에 묻혀 있다. 지표면상에 수당대운하는 남 아있지 않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수당대운하는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지하의 황토흙속에 이 길고 넓은 대운하의 옛길 이 남아있을 뿐이다. 발굴만 하면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발견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약간만 신경을 쓰면 놀랄만한 큰 수확을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발굴해낸 부두, 침몰한 선박, 창고, 자기를 보게 되면 아마도 깜짝 놀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전에 그렇게 번성했던 대운하 인가? 옛창고, 옛부처상, 옛성, 옛부두, 옛다리, 옛자기 수당대운하의 유적지는 두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한가지는 지표면상에 있는 것으로, 연안의 옛성, 옛부처상이고, 다른 한가지는 지하에 있는 것으로 고고학적으로 발굴해낸 옛다리, 옛부두, 옛창고, 옛도자기이다. 전자중의 옛성벽 예를 들면, 하남 학벽시의 여양진이 있고, 옛부 처상은 학벽시 대비산의 북위대불이 있다. 이들처럼 드물게 볼 수 있는 지상유물이 아직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비교적 높은 곳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작은 산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유적은 모두 지하에 있다. 모든 중대한 발견은 모두 고고학적 인 성과이다.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이라면 고대 양식창고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양식창고는 낙양, 서안, 상구일대에서 이미 7,8곳이 발견되었다. 1970년대, 낙양시 동북의 철로회사의 마당에서 오래된 저장고를 발굴했다. 아주 컸는데, 구경이 12미터, 깊이가 10미터였다. 황토의 지하에 파 서 만든 갱이었고, 안에는 양식을 저장할 수 있었다. 출토될 때, 이 옛창고에는 대량의 양식이 발견되었는데, 이미 탄화되었다. 이 옛창고의 위치는 고고학적인 고증을 거쳐서 부두의 옆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너비 100미터, 깊이 12미터의 물길옆에 있었으므로, 이 옛 양식창고는 운하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양식창고는 여러개가 발견되었다. 지도에서 보면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고, 바둑판 과 같은 형태를 띄고 있어, 인공으로 설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창고부지는 아주 정치하게 400여갱이 있었다. 한 창고갱에는 양식 250톤 을 저장할 수 있었다. 전체 저장량은 10만톤이상이었다. 더욱 기쁜 일은 창고에서 석비를 발견했는데, 당시의 문서자료에 상당하고, 아주 자 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양식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기재하고 있다. 거기에는 양식이 하북, 산동, 하남, 강소에서 왔다고 되어 있다. 왜 이런 기록을 남겼을까? 민, 관, 군용이외에 재해구호용으로도 쓰였다. 석비에는 양식창고의 관리인원의 업무분담내용도 기재되어 있다. 누가 무게 를 재고, 누가 기록하고, 누가 창고를 막으며, 누가 관리감독하고, 누가 당직을 서며, 누가 총책임자인지 등등이다. 모두 성명이 잘 기록되어 있는데, 많은 곳은 10여개항이 있다. 이로써 볼 때, 이는 아주 정규적인 관청창고였다. 이 창고는 함가창( 含 嘉 倉 )이라고 불렀다. 이에 상당하는 것은 기존에 발견된 곳만, 낙구창 ( 洛 口 倉 ), 하양창( 河 陽 倉 ), 회락창( 回 洛 倉 ), 태창( 太 倉 ), 여양창( 黎 陽 倉 ), 산양창( 山 陽 倉 )등이 있다. 수당대운하( 隋 唐 大 運 河 ): 지하의 휘황 78

79 대운하의 공능이 우선 조운( 漕 運 )에 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대운하는 실로 국가의 대동맥이었다. 역사문헌에 기재된 이름난 낙양 천진교( 天 津 橋 ), 개봉 주교( 州 橋 )도 최근에 발견되었다. 그들은 모두 운하위의 다리들이었따. 모두 시중심에 있고, 공사가 거대하며, 설계가 아름다워, 당시 빈번한 선박과 사람의 왕래를 증명하는 증거이다. 전문가들은 개봉의 주교는 바로 하나의 공 교동( 孔 橋 洞 )을 실측한 후, 다시 흙속에 묻어버렸다. 이는 지하대유적박물관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 부두유?의 발견도 아주 중요하다. 1999년, 안휘 회북시 백선진 유자촌에서는 수당대운하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을 시도했는데, 돌로된 부 두유적지가 발굴되었다. 일부 운하의 하상( 河 床 )도 발굴되었다. 아래에는 8척의 당나라때 침몰된 배유적도 나왔다. 또한 수십톤의 자기도 나 왔는데, 그중에는 보기 드문 자기진품만 1200점이 나왔다. 이는 당송시기 전국의 유명한 자기생산지에서 나온 유물들이었다. 대운하는 이번 고고학적 발굴로 다시 새로운 명칭을 얻었다: 도자기의 길 이 고고학적발굴은 1999년 10대고고학적 발굴중 하나로 인정되었다. 유자마두는 전국중점문화재보호단위로 되고, 문화재중 상품들은 회북시 박물관에 들어가서, 전문진열장에 전시되고 있다. 유사한 고고학적 발굴은 2007년 안휘성 숙주시에서 두번에 걸쳐 있었다. 운하유적발굴은 이 미 주변도시 문화재부서가 주목하게 되었다. 더 좋은 발굴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더욱 오래된 운하 수당대운하는 가장 오래된 운하가 아니다. 이전에 동일한 지점에 일부 운하가 이미 존재하였다. 그들이 수당대운하의 전신인 것이다. 실제로 수양제의 대운하는 이전의 부분운하를 가지고, 황하와 회하의 일부 자연하도도 이용하면서, 연결시킨 것이다. 당연히 이는 중대한 발 전이고 질적인 변화였다. 수양제가 6년만에 대운하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배경과 기초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 사람들이 만든 운하중에는 홍구( 鴻 溝 )와 백구( 白 溝 )가 가장 유명하다. 홍구는 고대 황하와 회하를 연결하는 운하였다. 이는 중국중원 운하의 비조이다. 동주 전국시대에 시작했으니 지금부터 2300년전이다. 남방의 고간구보다 120년정도 늦은 것이다. 홍구의 시작점은 오늘 날의 낙양과 정주 사이이고, 공의시와 형양시의 북부이다. 황하의 물을 남으로 끌 어들여, 위지, 태강, 회양을 거쳐 회하로 들어간다. 그 하류에 동쪽으로 빠지는 갈래가 있는데, 이것이 나중에 유명하게 되는 변하이다. 홍구 가 유명했던 것은 바로 초한의 전투가 이 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경계로 하여 초와 한이 나뉘어졌다. 백구는 삼국시대 조조가 군사목적으로 판 고운하이다. 204년에 시작하였으니, 지금부터 1800년전의 일이다. 그 전신은 전국시대 황하북안의 운하였다. 먼저 고양제를 쌓고 태행산의 물을 막아 황하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가의 경내로 끌어들였다. 둑을 따라 동으로 흐르게 해서 위 휘시를 흘러 준현의 신진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산서에서 내려오는 기수와 만나서 황하로 들어갔다. 기수는 산수이고, 청수라고도 부른다. 조조은 오늘날의 하북 임장일대의 원상을 정벌했다. 물을 막아서 기수를 황하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동쪽으로 흐르게 해서, 양식을 운반하 는 통로로 삼았다. 나중에 백구는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파게 되는 영제거의 전신이 된다. 영제거는 송나라때 어하( 御 河 )라고 부른다. 명나라이후에는 위하( 衛 河 )라고 부른다. 홍구, 백구와 같은 고대의 운하가 존재하였으므로, 운하를 파는 기술과 운하관리에서 경험이 집적되어 있었다. 동시에 수양제는 대운하를 파 면서 자연하도도 잘 활용했다. 그런데, 홍구도 좋고, 백구도 좋고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유적지를 현지고찰하는 것이 핵심문제이다. 역사문헌만으로는 부족하기 때 문이고, 반드시 실증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당대운하( 隋 唐 大 運 河 ): 지하의 휘황 79

80 수당대운하( 隋 唐 大 運 河 ): 지하의 휘황 80

81 중국역사상 가장 화려한 여행 :36 중국역사상 몇개의 황조는 "일세휘황, 이세패망(창업자때는 번성하다가, 2대째 가서 멸망하다)"의 길을 걸었다. 진( 秦 )나라가 그러했고, 수 ( 隋 )나라가 그러했다. 이들은 요역과 세금을 과중하게 매기고, 백성들의 고혈을 뽑아서,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돈 것이다. <<수서>> <<자 치통감>>에서 쓴 내용을 보면, 수문제 양견은 만년에 약간의 과실이 있기는 했지만, 그의 가장 큰 잘못이라면 후계자를 잘못 선정한 데 있다. "천하제일의 놀이꾼"인 양광( 楊 廣, 수양제)은 양견이 평생 모은 집안의 재물을 탕진해버린 것이다. 이 수양제 양광은 중국역사상 가장 황음무도한 제왕일 뿐아니라, 좋은 산수를 찾아 여행다닌 "슈퍼 여행가"이기도 했다. 그는 14년간 재위하 면서, 세번이나 친히 고구려를 정벌하러 나섰던 것을 제외하고는 그 나머지 해에 거의 매년 "출순( 出 巡 )"했다. 중국역사상 아마도 세계역사상 가장 호사스러웠던 화려한 여행을 한 것이다. 양광의 최대공적이라면 아마도 나중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된 "대운하( 大 運 河 )"일 것이고, 이는 객관적으로 백성들에게 이후 오랫동안 이로 움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당시 그가 대운하를 파기 시작한 동기의 하나는 오히려 산수를 유람하는데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서. 양제기>>의 기록에 따르면, 대업원년 봄여름에 양광은 황하이남의 각군의 백여만의 남녀백성을 징집하여, 하( 河 ), 락( 洛 ), 강( 江 ), 회( 淮 ), 절 ( 浙 )의 다섯개 수계를 연결시키는 운하를 파게 하고, 연도에 이궁( 離 宮 ) 40여개를 만들게 하였다. 이뿐아니라, 강남에서 목재를 모으게 해서, 수만척에 이르는 선박을 건조하게 하였는데, 용주( 龍 舟 ), 봉가( 鳳 舸 ), 황룡( 黃 龍 ), 적함( 赤 艦 ), 누선( 樓 船 )등이 포함된다. 이해 가을, 황제위에 앉은지 1년이 된 양광은 첫번째 출순( 出 巡 )을 시작하는데, 목적지는 강도( 江 都 )였다. <<자치통감>> 권180에서 쓴 내용에 의하면, 양광이 탄 용주는 "4층루( 四 層 樓 )"였고, 높이가 45척, 길이가 200척이었으며, 윗층에는 정전( 正 殿 ), 내전( 內 殿 )과 동서조당( 東 西 朝 堂 ) 이 있었다; 중간층은 약 120개에 이르는 '초호화급' 방들이 있었는데, 모두 금옥으로 장식하여 휘황찬란했다; 아래층은 내시들이 거주하는 곳 이었다. 소황후가 탄 상리주( 翔 舟 ), 일명 봉가는 용주보다 약간 작았지만 인테리어수준은 용주와 같았다. 또다른 부경선( 浮 景 船 )이 9척이 있는데, 모두 3층루의 "수상궁전"이었다. 이들을 바로 뒤따르는 것은 수천척의 각종목적의 호송선이었다. 후궁, 제왕, 공주, 백관등이 탔다. 양 안은 이 호화유람선을 줄로 매어서 끄는 섬부( 纖 夫 )만 8만여명에 달하였다. 이외에 "몽동", "팔도" "정가"등 수천척의 배에는 12위의 사병들이 타고 있었다. 선단의 첫부분에서 끝부분까지는 길이가 200여리에 달하였을 정도로 방대했다. 방에는 불빛으로 인하여 강가의 육지까지 모두 환했고, 수만의 기병이 강안을 따라 호위했으며, 이들의 군기가 온 벌판을 수놓았다. 이처럼 호사스럽고 당당한 "출순" 장면은 양광의 선배들 인 진시황이나 한무제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연도의 5백리내에 있는 주현에서는 식품을 바쳤는데, 많은 주는 수레 100개분량을 바쳤다. 모두 산해진미였고, 먹고나면 버리거나 묻어버렸다. 다음 해 3월, 양광은 강도에서 되돌아오는 길은 육로를 택한다. 거여( 車 與 )를 만들게 하는데, 각주현에서 우모( 羽 毛, 새의 깃털)를 모아서 바 치라고 명령한다. 백성들은 새를 잡기 위하여 온데 그물을 쳤고, 깃털을 제공할 수 있는 새나 짐승은 거의 모두 죽임을 당했다. <<자치통감>> 에는 민간전설을 하나 싣고 있는데 아주 풍자적이다. 오정( 烏 程 )이라는 곳에 큰 나무는 백척이 넘는데, 나무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기어오르기 힘들게 되어 있었다. 나무위에는 새집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이 새집의 학을 잡으려고 하는데, 나무를 기어오를 수 없게 되자, 나무를 베어버 리려고 하였다. 학들은 나무가 베어지면 후대가 끊길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기의 깃털을 뽑아서 아래로 던져주었다고 한다. 당시 어떤 사람은 이것이 길조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천자제우의, 조수자헌우모( 天 子 制 羽 儀, 鳥 獸 自 獻 羽 毛, 천자께서 깃털로 만든 의장을 만들려고 하시니, 새와 짐승들이 스스로 깃털을 뽑아서 바치었다)" 당시 우의를 만드는데 참여했던 장인들이 10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들이 사용한 금은전백 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양광이 돌아올 때의 행렬도 20여리에 달하였고, 길거리를 꽉 채웠다. 동경에는 1천승 만기의 대의장대열 이 호송했다. 중국역사상 가장 화려한 여행 81

82 대업3년, 양광은 다시 기분이 일어, 내몽고의 유림군( 楡 林 郡 )까지 북순( 北 巡 )을 가서, 초원의 경치를 보고자 했다. 여행의 편의를 위하여 수십 만의 장정을 징집하여, 산에 길을 뚫고, 강에는 다리를 놓았다. 양광은 돌궐의 유목풍경에 흥취가 있어서, 십여만 장사로 하여금 태행산을 뚫 게 해서, 병주와 연결되는 도로를 닦는다. 그리고는 50만대군, 10만필의 전마를 이끌고 방진( 方 陣 )을 만들고, 자신은 후궁을 데리고 방진의 중 간에 몸을 숨기고, 돌궐의 유목풍경을 감상했다. 대업5년, 양광은 다시 장액( 張 掖 )까지 서순( 西 巡 )을 한다. 그는 대사막의 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발연산에서는 양광이 수렵을 하 며 놀았다. 수렵한 곳은 주위가 2천리에 달하였는데, 이때 동용한 군대와 백성, 그리고 마필의 수는 부지기수였다. 대업6년, 양광은 다시 강도로 유람간다. 대업11년, 고구려와의 전쟁이 끝나자마자, 양광은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장성으로 북순을 하고 새외의 풍경을 감상한다. 그런데, 생각지 도 못하게 돌궐의 시필가한( 始 畢 可 汗 )이 군대를 몰고와서 안문관( 雁 門 關 )을 겹겹이 포위해 버렸다. 양광은 급히 천하의 병마를 보내어 지원하 라고 명령한다. 그리하여 각군의 태수, 현령은 군대를 모아서 그를 구하러 달려왔고, 비로소 포위망을 풀 수 있었다. 이처럼 병사와 백성을 동원한 것은 모두 그가 유람하고 놀기 위한 것이었다니 상상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렇지만 양광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안문관에서 포 위를 벗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다시 호호탕당하게 강도로 출순한다. 결과적으로 대업14년에 강도에서 반군에게 피살되어, 진시황이후 두번째 출순길에서 사망한 황제가 된다. 양광의 황제로서의 생애는 기본적으로 산수를 유람하면서 보냈다. 그의 유람에서의 사치호화스러움과 낭비의 정도는 전무후무하였다. 단순히 유람의 각도에서만 보자면, 양광은 "천하제일의 유람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유람은 아주 창의적이었고, 유람하고 노는데 있어서는 천재적이었다. <<수서>>의 기재에 따르면 양광은 경화궁에서 시위들에게 대량의 반딧불을 붙잡게 하여 여러 개의 곡식담는 용기에 담아두었 다가, 밤에 후궁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놀 때, 반딧불을 한꺼번에 풀어놓아서, 졸지에 산과 골짜기가 빛으로 가득차게 하여, 수만개의 등이 밝혀진 것과 같았다고 한다. 양광이 놀았던 규모나 호화스러움은 후세인들이 본뜨고 싶어도 도저히 본뜰 수 없을 정도였다. 중국역사상 가장 화려한 여행 82

83 중국역사의 분수령 :35 당현종( 唐 玄 宗 ) 이융기( 李 隆 基 )는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에 의하여 휘황한 개원성세( 開 元 盛 世 )가 만들어졌고, 또한 그에 의하여 안사 의 난이 일어났다. 양귀비를 총애하고, 이임보, 양국충을 신임하며, 안록산을 놔두다가 결국 천하대란을 맞이한 것이다. 후세인들은 그를 동정 하면서도 질책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에게도 억울한 점은 있다. 양귀비, 양국충, 이임보등의 사람들보다 더 억울하다. 중국역사를 잘 살펴보면, 진한수다은 한족이 가장 휘황했었던 시기이다. 안사의 난이후 잔당오대이후, 송원명청은 한족의 우세가 남아 있지 않았고, 유목민족이 두 개의 강력한 통일정권을 건립했다. 중간이 낀 한족의 두 황조인 송명은 비교적 약소했다. 이렇게 본다면, 죄를 묻자고 치면 이융기가 한족에게는 천고죄인이 된다. 그러나, 그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안사의 난과 관련하여 그는 확실히 책임이 있다. (1) 양귀비를 총애하여 국정을 돌보지 않았고, (2) 이임보 양국충을 등용하여 현신을 물리쳤 으며, (3) 안록산을 신임하여 늑대를 조정에 끌어들였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모두 가장 주요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저 부차적인 이유일 뿐이다. 진정으로 심각한 역사적인 원인은 이융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인정하는 것처럼 안사의 난의 근본원인은 병권의 외중내경( 外 重 內 輕 )에 있고 지방절도사이 칼끝을 거꾸로 향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 다. 그러나 이것도 근본원인은 아니다. 진정한 근본원인은 농경민족의 약화와 유목민족의 강화에 있다. 진시황이 왕전( 王 剪 )에게 대군을 쥐어 주었지만, 칼자루를 거꾸로 쥘 것을 걱정하지 않았고, 한경제때도 칠국의 난때 한나라왕조의 근본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시 병민일 체로 중앙이 강대했고, 수도지역의 군사실력이 명명백백하게 우세했다. 당시 한민족은 전시에는 전민개병제로서 외부로는 강적을 맞설 수 있 고, 내부로는 국가기본체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수당이래로 이러한 상황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특히 당나라 중기를 분수령으로 하여, 한민족의 군사우위는 점차 상실되며, 유목민족 의 군사우위가 점차 명확해 진다. 생각해보라, 당나라에는 5천만인구가 있는데, 10명중의 1명만 뽑아도 500만대군을 갖춘다. 만일 이들이 싸 운다면, 안록산이 십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오더라도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록산이 과감하게 이렇게 한 것은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들여다 본 것이다. 이 500만은 그저 양에 불과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도의 농경화로 인민의 생활이 안정되고 야성이 사라졌다. 당나라의 철기농경기술은 이미 상당히 성숙도어, 경지면적이 확대되고, 단 위당 생산량도 높아졌다. 인구는 증가하고, 사람들의 생활범위도 좁아졌다. 생활은 더욱 안정되었다. 동시에 법률제도도 완비되어, 사람과 사 람간의 문제해결방식이 문명화되었고, 무력을 동원할 기회나 횟수도 줄어들었다. 쓰면 발달하고 안쓰면 퇴화하는 법이다. 백성들에게서 호전 적인 의식이 많이 약화되었다. 둘째, 강남개발로 경제중심이 남으로 이전했다. 북방의 변경은 주변화되었다. 대운하의 개통은 강남을 더욱 발전시켰고, 당나라때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미 강회지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장성이남과 장성지구는 반농경화된 유목민족이 남하하여 점거했고, 군사역량이 강대했다. 농업사회중에서도 반유목반농경의 사회였다. 셋째, 경작생활에서는 대량으로 소를 사용하고, 말의 수량이 점차 감소했다. 말을 이용하여 물건을 운송하는 필요도 점차 감소하였다. 동시에 밀집된 경작지에서는 말을 달리기도 힘들었다. 사람들은 점차 말을 기르지 않게 되고, 전투에 사용할 수 있는 말의 수량도 급격히 감소했다. 이리하여 기병의 힘이 쇠약해진다. 그러나, 당시의 원거리전투는 기동성이 중요하고 속전속결에는 말이 중요했다. 보병은 기병에 대하여 열세 중국역사의 분수령 83

84 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넷째, 문관정치로 관료기구가 비대해졌다. 효율도 낮아졌다. 당나라초에는 원래 군사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변방장수가 스스로 병사 를 거느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출장입상제도를 시행했다. 그러나 이임보에 의하여 이러한 제도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물론 이것도 역사 의 필연이다. 송나라가 건국하는 초기에도 문관정치체제를 확립하고, 군사역량은 정치적인 견제를 많이 받게 된다. 이는 스스로 자기의 힘을 약화시킨 것이다. 다섯째, 군대직업화는 전쟁의 비용을 증가시켰다. 당나라때부터, 전민개병의 부병제체제는 해체되기 시작한다. 이를 대체한 것은 직업병제도 였다. 즉, 모병제이다. 모병제에 의하여 정부는 병사를 기르는데 비용을 많이 쏟게 된다. 그러나, 군사력은 오히려 약화되었다. 그리고, 직업군 인의 존재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의 군사역량도 많이 약화된다. 여섯째, 부녀의 전족은 전군의 군사능력을 하강시켰다. 부녀 자신의 능력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이는 남자들에게 더 큰 부담을 주게 되었다. 한족은 부녀의 발만을 묶은 것이 아니라, 전민족의 발을 묶었던 것이다. 일곱째, 유가사상의 속박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무술을 사랑하고 전투를 좋아하는 기풍이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유목민족은 기술발달로 인하여 군사력이 오히려 강화되었다. 아래의 몇 가지 측면에서 그러한 점을 볼 수 있다. 첫째, 철기야금술과 단조기술이 제고되어, 무기는 더욱 가볍고 쓰기 편하게 바뀌었다. 기병들의 기동성과 빠른 돌격에 적합했다. 그러나, 보병 에게는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둘째, 말안장기술이 발전해서 기병과 전투마들이 더욱 잘 결합될 수 있었다. 이는 기병의 돌파력과 안정성을 강화시켰다. 그리하여 당송때 유 목민족의 기병은 한무제때의 흉노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원나라에 이르러서는 최전성기에 이른다. 징기스칸의 철기와 만도는 천하무적이 었다. 이는 징기스칸 본인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유목민족의 군사역량이 당시 최고조에 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군사적우세는 바로 당나 라중기부터 시작되었다. 셋째, 유목민족이 장성양측의 중간지대를 확보하게 된다. 그리하여 유목과 농경에서 이중의 군사적인 우세를 확보한다. 원정기동과 신속타격 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또한 물자조달이 보장되게 되었다. 당나라초기 중기까지는 이 지역을 당나라가 지배하였으나, 잔당과 오대송원명청때 는 한족이 계륵처럼 보이지만 핵심인 이 지역을 잃어버렸고, 자연히 연약하고 무력하게 된 것이다. 당현종은 역사의 분수령에 서 있었다. 국가대사를 잘못 처리한 점이 있어 안사의 난을 불러온 것은 그의 잘못이다. 그러나, 그가 제대로 처리 했다고 하더라도, 그저 연기시키는 정도의 의미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역사의 필연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보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국가번영, 백성 부유, 인구의 많음, 제도의 완비는 모두 군사력이 강대해지는 필연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약화되는 요인이 될 것이다. 호랑이나 늑대가 튼튼해지는 것은 강대해지는 것이지만, 돼지나 양이 살찌는 것은 오히려 연약해지는 것이다. 한 민족이 강대해지려 면, 반드시 자기의 모든 장점과 조건과 군사역량을 완벽하고 긴밀하게 결합시켜야 가능한 것이다. 중국역사의 분수령 84

85 당나라때 환관과 대신간의 한판 승부 :34 동한( 東 漢 ), 당( 唐 ), 명( 明 )의 세 황조는 중국에서 환관의 위해가 가장 극심했던 황조들이다. 그러나, 동한의 환관들은 자주 외척의 견제를 받 았었고, 명나라의 황제는 아주 발호했던 위충현과 같은 인물도 황제의 한마디 명령에 처형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 두개의 황조에서의 환관 은 어찌되었던 노비의 위치였다. 당나라의 환관들은 달랐다. 당숙종시기의 이보국( 李 輔 國 )부터, 조정대신의 승진과 강등, 황제의 옹립과 폐위, 심지어 황제의 생살대권까지 모두 그들이 한손아귀에 움켜쥐었다. "노비가 주인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는 당나라 중후기 이후의 황 제옹립표이다: 당대종( 唐 代 宗 ) : 환관 이보국( 李 輔 國 )이 옹립 당목종( 唐 穆 宗 ) : 환관 양수겸( 梁 守 謙 ), 왕수규( 王 守 圭 )등이 옹립 당문종( 唐 文 宗 ) : 환관 양수겸, 왕수징( 王 守 澄 ), 양승화( 楊 承 和 )등이 옹립 당무종( 唐 武 宗 ) : 환관 구사량( 仇 士 良 ), 어홍지( 魚 弘 志 )등이 옹립 당선종( 唐 宣 宗 ) : 여러 환관이 옹립 당의종( 唐 懿 宗 ) : 환관 왕종실( 王 宗 實 )이 옹립 당희종( 唐 僖 宗 ) : 환관 유행심( 劉 行 深 ), 한문약( 韓 文 約 )이 옹립 당소종( 唐 昭 宗 ) : 환관 양복공( 楊 復 恭 ), 유계술( 劉 季 述 )이 옹립 황제들이 환관에 의하여 옹립되었으므로, 생살대권을 환관들이 장악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당숙종은 이보국에 의하여 죽었 다. 당헌종은 환관 진홍지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당경종은 환관 유극명등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를 보면, 모두 황제가 어찌 이 정도로 핍박 을 받았단 말인가? 도대체 대신들은 무엇을 하였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당한 세계의 초강대국이었던 당나라가 한 무리의 환관들에게 완전히 장악되다니, 조금이라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그냥 참고넘길 수가 없을 일이다. 이렇게 된 하나의 중요한 이 유는 바로 환관들이 아주 중요한 하나의 패를 쥐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금군( 禁 軍 )이다. 이 무장세력이 있으면, 아주 손쉽게 조정을 장악할 수 있다. 그러나, 압박이 있는 곳에 반항이 있다는 좋은 말도 있다. 황제와 대신들은 일련의 자잘한 투쟁을 했었다. 예를 들면, 당대종, 당덕 종, 당헌종이 통치하던 시기에 환관들은 적절히 통제된?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짧았고, 후임자들의 수준이 따르지 못해서, 일시적인 일에 그치고 말았다. 이중 당문종때 발생한 감로지변( 甘 露 之 變 )은 환관과 대신들간의 한차례 큰승부였다. 이는 이후 대신들이 철저히 패배하 는 국면을 공고히 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결전을 부른 인물은 당문종 이앙이었다. 그는 당목종의 둘째아들고, 중당시기에 비교적 능력있던 황제였다. 그가 승계하였을 때의 당나라 제국은 문제투성이었고, 모순이 격화되고 있었다. 그중에서 환관인 양복공은 아주 광망자대하였다. 원대한 포부를 품은 당문종은 즉위후 일련 의 부국강병조치를 취한다. 대화원년(827년) 즉위시로부터, 궁중의 도사 기처현, 양충허 및 예인 이원집, 왕신등을 영남으로 유배보낸다. 대화 3년(829년)에는 다시 영을 내려 봉상(섬서성 서부 감숙성동부), 회남(안휘 수현) 두 도의 관리들을 황궁에 보낸 여악사 24명을 원적으로 되돌 려보냈다. 개성5년(840년)에는 다시 후궁에서 궁녀3000명을 방출하고, 교방악공, 내감 1270명을 원적으로 돌려보낸다. 황실의 사냥용으로 쓰이 던 매와 개도 모두 풀어주었고, 각지에서 조정으로 진귀한 보물과 비단들을 상납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당문종의 이러한 행위는 환관 구사 량과 같이 황제에게 주색잡기의 놀거리를 제공하면서 군주를 고혹시켰던 무리들에 대한 반격이었다. 당문종의 즉위후 두번째로 한 일은 과거 시험을 통하여 인재를 발탁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조정에서 환관이 주도하는 국면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대화2년, 당문종은 영을 내려 "직 언급간과"의 시험을 쳤는데, 유분의 <<직언간언책>> 5천자는 환관이 정치를 어지럽히는 것에 대하여 날카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환관이 조정 을 장악한 현상에 대하여 "환관 5,6명이 천하를 대권을 잡았고,..여러 신하들이 감히 그 현상을?하지 못하고, 천자도 그 마음을 제어하지 못 당나라때 환관과 대신간의 한판 승부 85

86 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아무 일도 안하는 무리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불필요한 비용을 줄여서, 사회의 빈곤한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고 적었다. 주시험관은 그의 글로 환관들의 미움을 살까 겁을 내서 그를 조정에 뽑지 않았다. 문종황제도 나서서 간여 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자기도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화말년에 문종은 환관세력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이는 유분이 내놓은 대 책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문종이 세번째 했던 일은 송신석을 재상으로 임명한 일이다. 이렇게 하여 환관세력을 분산시키고자 했다. 대화4년(830년)에 문종은 송신석을 재상으로 삼는데, 송신석은 내외에서 평가가 아주 좋은 편이었다. 감찰어사, 예부원외랑, 한람학사를 지냈 었다. 조정대신중 청렴하기로 이름있고, 붕당을 짓지도 않았다. 그러나, 문종의 이러한 과단성있는 조치들은 바로 환관들의 경각심을 불러일 으켰다. 게다가 송신석이 환관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기밀이 새어나가서, 환관들이 먼저 손을 쓰게 된다. 추밀사 겸 우군중 위 왕수징등은 송신석이 장왕 이주(목종의 여섯째아들)과 결탁하여 모반했다고 밀고한다. 다음 해 송신석이 쫓겨나며 계획은 실패한다. 환관두목 왕수징은 송신석사건을 통하여 결론을 얻는다. 반드시 당문종을 엄히 감시하고, 그의 말한마디 행동하나를 통제해야만 자기들이 안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대화8년(834년) 가을, 왕수징은 정주를 어의로 추천하여 문종의 병을 치료하게 한다. 그리고 심복인 이훈으로 하여금 당문종에게 <<역경>>을 강의하게 한다. 두 사람은 당문종의 신변호위가 되었다. 문종의 일거수 일투족은 이들 두 사람에게 감시당했 다. 문종은 그러나 역공을 취한다. 두 사람에게 높은 녹봉을 주어 자기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정주를 태복경으로 삼고, 이훈은 한림시강학사 로 삼는다. 다음 해 가을에 이훈은 재상으로 삼고, 정주를 봉상절도사로 삼는다. 두 사람은 안팎에서 호응하여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환관들 에게 타격을 가한다. 이들은 헌종의 환관인 양승화, 왕천언, 진홍지, 왕수징등을 죽인다. 이리하여 환관을 제거하는 첫번째 단계를 성공한다. 철저하게 환관세력을 제거하려면, 조정에서 더 많은 무장세력을 장악해야 했다. 그리하여 이훈은 다시 호부상서 왕반을 태원절도사로 추천하 고, 대리경 곽행여를 분녕절도사로 보낸다 두 사람이 부임하기 전에 경조윤 나립언, 금오대장군 한약, 어사중승 이효본등이 병사를 모아서 환 관을 모조리 제거하고자 한다. 대화9년(835년) 10월 21일 자신전에서 아침조회가 거행되었을 때, 금오대장군 한약은 좌금오장원안의 석류나무에 밤에 감로가 내렸다고 보고 한다. 재상 이훈은 즉시 제의하여 하늘이 상서로운 조짐을 황궁에 내린 것이니, 당나라가 크게 흥할 길조라고 보고한다. 황제는 바로 하늘에 제사지내어 국운을 흥성하게 하여야 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문종은 함원전에 잠시 머물면서 재상, 중서, 문하성의 관리들로 하여금 이를 보게 한다. 여러 관리들은 살펴본 후 주청드리기를, 진정한 감로가 아닌 것같다고 말한다. 문종은 다시 신책군의 좌우호군인 구사량 어홍지등에게 명하여 전체 환관을 데리고 와서 진짜인지 살펴보고 즉시 보고하라고 한다. 구사량등이 좌금오장원에 이르렀을 때, 한약이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원내에 병사들이 여럿 매복되어 있는 것을 본다. 그리하여 즉시 도망치게 된다. 환관을 금오원에 유인하여 몰 살시키려던 계획은 실패로 끝이 난다. 환관은 함원전으로 도망온 후, 문종을 협박하여 가마에 태우고 내궁으로 들어간다. 이훈, 한약등은 급 히 내궁으로 들어가 황제를 보호하고자 하여,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다. 금오위의 병사와 어사대의 병졸 약 500여명이 달려왔고, 환관 수십명 을 죽인다. 그러나, 환관은 이훈을 바닥에 쓰러뜨리고, 문종을 들고 선정문 안으로 도망쳐서 문을 잠그려고 한다. 조정신하들은 놀라서 흩어 진다. 이훈은 종남산의 절로 도망가서 피신한다. 이것이 역사상 환관을 몰살시키려던 "감로지변"사건이다. 환관은 문종을 협박하여 궁으로 들어가게 한 후 바로 신책군 500명을 파견하여 칼을 들고 황궁을 나서며, 만나는 자들마다 죽인다. 이때 죽 은 자가 명이다. 이어서 성문을 걸어잠그고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펼쳐 다시 1000여명을 죽인다. 이 일에 참여했던 관리인 이훈, 왕애, 서원여, 왕반, 곽행여,나립언,이효본,한약등은 모두 체포되어 살해당한다. 감로지변때, 정주는 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왔는데, 도중에 변을 만나 봉상으로 돌아갔고, 나중에 감군인 환관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 관리들은 모두 멸족의 화를 당했고, 연루된 자들이 아주 많았다. 감로지변이후에 관리들이 대량으로 피해를 입어, 조정의 빈자리가 아주 많았고, 아무도 일을 하지 않았다. 환관들은 더욱 전횡을 하게 되었으 며, 황제는 더욱 욕을 당하게 되었다. 문종은 곧 한을 품고 죽는다. 이리하여 당나라의 통치는 더욱 암울해진다. 마지막황제인 당소종때, 내정 과 외번이 합력하여 비로소 환관세력을 몰아낼 수 있었따. 그러나, 이때의 당나라는 이미 마지막 붕괴로부터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나라때 환관과 대신간의 한판 승부 86

87 당나라는 인간지옥이었다 :33 한 시기가 "태평성세( 太 平 盛 世 )"인지여부를 판단하려면, "민생( 民 生 )"을 기준으로 하여야 할 것이다. 중국전통문화는 반드시 탈태환골하여야 한다. 그래야, 중국문화가 살고, 중국민족이 살 수 있다. 전통적인 정치문화의 본질은 강탈이다. 중국전통문화는 "민주"에 맞지 않고, 그저 봉 건황제제도에나 맞을 뿐이다.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권력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황제 한 사람이 자유를 가지고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집안노비( 家 奴 )"인 것이다. 이연( 李 淵 ), 이세민( 李 世 民 )은 모두 중국인이 아니다. 그리고 돌궐에 의탁하여 매국노로 전락했던 인물들이다. 당나라는 정통성이 없고, 불법 적으로 권력을 획득한 위정권( 僞 政 權 )이다. 이세민은 지방깡패두목출신으로, 형을 죽이고, 부친을 핍박해서 황제위를 차지한 대역무도한 인물 이다. 소위 "정관지치( 貞 觀 之 治 )"는 허위이다. 이세민이 국가를 통치하면서 사용한 수단은 "내부투쟁" "구교구( 狗 咬 狗, 개가 개를 물어뜯다)", "모래섞어넣기"등이다. 이리하여 백성을 통치하는데 사발위의 모래알처럼 만들고 동아병부( 東 亞 病 夫 )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데 다음과 같은 10자의 비결을 사용한 것이다. 분권( 分 權 ) : 권한을 나눠준다. 내투( 內 鬪 ) : 내부에서 항상 투쟁하게 한다. 장징( 奬 懲 ) : 상과 벌을 사용한다. 환계( 換 屆 ) : 임기가 끝나면 사람을 바꾼다. 불측( 不 測 ) : 예측불허하게 조치한다. 당나라의 관리들은 부패가 극심하고 세금이 과중해서, 인간지옥이었다. 절반의 백성이 도망치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병신으로 만들었다. 당현종은 흡혈귀였다. 백성의 고혈을 잘 뽑아내는 자들을 중용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죽고싶어도 죽을 수 없고,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지 경에 처하게 하였다. 개원( 開 元 ) 연간에 양극화가 극심해서 가난한 자를 죽여서 부자를 배불리었다. 조직폭력배와 관청이 결탁하여 권력은 제 약을 받지 않고, 기득이익집단은 세금도 내지 않고, 가난한 자들만 국가의 모든 세금을 부담했다. 이세민은 돼지사육의 고수였다. 이세민의 능력은 비범했다. 20세에 반란을 일으키고, 29세에 형을 죽이고 부친을 협박하여 황제위를 차지했으며, 여러 신하를 잘 다루었고, 천하를 통치했다. 강토를 넓혔고, 국제적으로도 이름을 날렸으니, 고래에 드문 인재이다. 이연이 반란을 일으켜 수나라의 천하를 차지한 것은 유방이나 주원장이 천하를 얻은 방식과 완전히 달랐다. 이연은 그 자신이 귀족출신이고, 반란이전에도 이미 상당한 지위와 명망을 누리고 있었다. "창업"과정에서도 반란세력내에 다른 "핵심"이나 "거두"가 나타나지 않았고, 반란군 내에는 위계에 따라 상하간 질서가 유지되었다. 유방이나 주원장은 달랐다. 천하를 얻는 과정에 장수들은 거의 홀로 한 지역을 책임졌다. 이리하여 여러 "핵심"이 나타났다. 그들도 황제가 될 능력과 야심이 있었고, 언제든지 독자세력을 만들 수 있었다. 유방이나 주원장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신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것이었다. 당나라는 인간지옥이었다 87

88 이연이 천하를 얻은 후에 아들 이세민만이 야심을 지니고 있으므로, 공신들을 많이 죽일 필요는 없었다. "창업"과정에서 이연은 수나라의 관 작에 인색했던 풍기를 일신하여, 수시로 사람들에게 돈을 하사하고, 관작을 내렸다. 그리하여 천하의 주현( 州 縣 )의 수나 관료의 편제가 수나 라때보다 배는 늘어났다. 이연시절에 관리들의 대다수는 수나라때의 관리들이었다. 그들은 그저 "옷"만 바꿔입었다. 그리하여 이연이 재위할 때, 정치는 아주 부패했고, 집정자들은 백성들로부터 고혈을 짜내고, 무리를 지어 자신의 배를 불렸다. "일인득도, 계견승천( 一 人 得 道, 鷄 犬 昇 天, 한 사람이 득도 하면 닭이나 개까지 하늘로 올라간다. 한 집안에 고관직에 오르는 사람이 있으면 다 른 친척들도 모두 한자리씩 차지하는 경우를 가리킴)", "입류( 入 流, 옛날에 관직에 나가는 것을 말함)하는 자들은 모두 기득이익집단의 자손 들이었다. 예를 들어, 당나라때, 이부의 책임자의 아들이 병부에서 일하면서 밥을 먹고, 병부의 책임자의 아들은 호부에서 일하면서 밥을 먹 고, 호부의 책임자의 아들은 다시 이부에서 일하면서 밥을 먹는 식으로 서로 교차하여 자리를 마련해 주곤 했었다. 고대에는 "음습( 蔭 襲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이것은 부친이 죽으면 아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는 것을 말한다. 부친이 국장까지 지냈으면, 아들 은 과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당나라말기의 재상인 이봉길( 李 逢 吉 )의 아들인 이덕유( 李 德 裕 )는 과거제도를 싫어했다. 그래 도 부친의 후광으로 관직을 이어받아 관료의 길로 들어섰고, 나중에 재상에까지 올랐다. 그러므로, 이연의 정치유산을 우리가 계승하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당나라는 인간지옥이었다 88

89 수( 隋 )나라 대운하( 大 運 河 ) :32 중국의 큰 강들은 모두 서쪽에서 동쪽방향으로 횡단하며 흐르고 있다. 그리하여, 현대적인 육로교통 수단이 나타나기 전에는 남북을 종단하는 수로운송이 아주 필요했다. 특히, 남북조의 분열시대를 마 감하면서, 수나라가 전국통일을 이룬 이후에는 그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당시, 수나라의 정치,군사 중심은 북방이었다. 그러나 남방의 강회(강소,안휘)지구의 경제는 아주 큰 발전이 있었다. 북방도시 는 물자, 특히 양식이 필요했는데, 많은 부분을 강회일대에 의존했다. 이 양식들을 어떻게 남방에서 북방으로 운송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당히 통치자들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였다. 대량의 물자를 강회에서 장안으로 운송하고 심지어 북방변방의 군사도시에까지 운송하려면, 어떤 운송방식 을 채택해야 할까? 당시 육상운송은 겨우 말이나 당나귀가 끄는 마차나 혹은 사람들이 어깨로 지고 날라야 해서, 속도가 너무 느렸고, 운송량도 적었으며, 비용과 시간도 많이 들었다. 이것만으로는 당 시 통치계급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수로운송만이 이런 임무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운하를 건설하는 것은 시대의 요구였고, 역사의 필연이었다. 이것은 수양제라는 폭군이 한 폭 정의 결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운하를 건설하려면 험난한 공사로 인하여 백성들에게는 재난이었따. 수양제는 강제로 수백 만의 농민일 징용하여 운하를 파게 하였다. 이로써 생산활동은 큰 지장을 받게 되고, 수천수만의 농 민들이 운하공사장에서 죽어갔다. 당나라말기의 시인인 한옥이 쓴 <<개하기( 開 河 記 )>>에는 운하를 파는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잘 그리고 있다. 이 글에서, 수양제는 혹리 마권모를 파견하여 운하공 사를 책임지게 하고, 천하의 15세이상의 남자를 모두 끌어모아서 360만명을 모은다. 동시에 5집에서 1사람씩을 뽑은데, 노인이거나 어린아아이거나 여인이었다. 이들은 농민공들의 취사를 담당했다. 수 양제는 이외에 5만명의 험악한 남자들을 보내서 형벌을 담당하게 하였고,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노동부담이 너무 크고, 감독들이 심하게 다루었으므로 1년도 되지 않아 360만은 250만으로 줄었따. 중국역사상, 경항대운하( 京 杭 大 運 河, 북경에서 항주까지의 대운하)의 건설은 대체로 3개의 시기를 거치게 된다. 제1시기 : 동주( 東 周 ) 춘추시대. 동남의 오나라 국왕인 부차( 夫 差 )는 중원을 얻기 위하여 북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기원전 486년 장 강의 물을 과주( 瓜 洲, 지금의 강소성 한강현- 江 縣 - 남부)를 거처 북쪽의 회수( 淮 水 )로 끌어들였 다. 이것은 장강과 회수를 연결시키는 운하이며, 과주에서 말구( 末 口, 지금의 회안부근)까지 연결되 었고, 당시 한구( 溝 )라고 불렀다. 이 운하는 경항대운하의 기원이고, 대운하의 최초의 물길이다. 나중에 진, 한, 위, 진과 남북조까지 이 물길은 존속한다. 제2시기 : 수나라. 수( 隋 )나라 대운하( 大 運 河 ) 89

90 6세기말에서 7세기초까지 대체로 한구를 기초로 너비를 넓히고, 곧게 만든다. 이리하여 운하의 중간 구간이 되며 이름을 산양독( 山 陽 瀆 )이라고 부른다. 장강이남에는 강남운하를 완성하는데, 이것은 대 운하의 남부구간이 된다. 실제로, 강남운하의 원형은 이미 존재했고, 일찌감치 조운에 활용되었다. "조( 漕 )"는 수로운송을 이용하여 쌀을 어떤 지점까지 운송한다는 의미이다. "조운"은 중국역사상 아 주 중요한 경제제도이다. 지금의 용어로 말하자면, 수로를 이용하여 양식을 운송하는 일종의 전문운 송이었다. 중국의 봉건왕조는 농민들에게 지조( 地 租 )와 전부( 田 賦 )를 받았고, 오랫동안, 실물로 징수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런 왕조는 대부분 수도가 서북이나 북방에 있었으므로, 부근에서 생산되는 곡물만으로는 수도에서의 필요를 충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양식을 수도로 옮겨야 했고, 이거은 아주 중요한 정치적인 조치였으며, 봉건통치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되 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조운은 중국역사상 비교적 완비된 제도를 갖추게 되고, 상응하는 관리시스템 을 갖추게 된다. 조운에 사용하는 배는 조선( 漕 船 )이라고 한다. 조선에는 곡식, 쌀을 싣는데 이것은 조량( 漕 糧 ), 조미( 漕 米 )라고 한다. 조선을 모는 군대나 민공을 조군( 漕 軍 ), 조정( 漕 丁 ), 조부( 漕 夫 )라 고 불렀다. 많은 왕조에 조운을 전담하는 관리가 있었다. 진한시대에도 중국사서에는 이미 조운에 대한 기재가 있다. 수나라때에 이르러 조운은 더욱 발전하게 된다. 수양제 양광은 605년 남북을 관통하는 대운하의 건설을 지시하게 된다. 이는 주로 통제거( 通 濟 渠 )와 영제거( 永 濟 渠 )를 건설하는 것이다. 황하남안의 통제거공사는 낙약부근에서 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동남으로 흐르게 하고, 변수(하남성 개봉근처를 흐르던 강, 지금은 이미 말라서 존재하지 않음)로 들어가게 하였고, 황하와 회하의 두 강을 잇는 물길이 되었다. 광제거는 어하( 御 河 )라고도 부르는데, 황하, 변수와 회하의 3개의 강물을 연결시킨 시작이었다. 수나라의 수도는 장안이었으므로, 당시의 주요 조운노선은 강남운하에서 경구(지금의 鎭 江 )에 도착하여 장강을 건너고, 다시 산양독을 따라 북상하였다가, 다시 광제거로 들어가고, 황하, 위하( 渭 河 )를 거슬러 올라가서 최종적으로 장안까지 가는 것이다. 황하이북에 개설한 영제거는 심수( 沁 水 ), 기수( 淇 水 ), 위하( 衛 河 )등의 강물을 수원으로 하여 물을 끌어들여 항해를 할 수 있게 하였다. 천진서북에서는 노구( 蘆 溝, 지금의 영정하)를 이용 하여, 직접 탁군( 郡, 지금의 북경)에 도달하는 운하이다. 아래에서는 수나라때 대운하를 건설한 몇 가지 중요한 공사에 대하여 언급하기로 한다. 첫째, 황하와 통하는 광통거( 廣 通 渠 ). 수나라때 만든 중요한 운하는 장안에서 황하로 통하는 광통거 이다. 수나라초때는 장안이 수도였다. 장안에서 황하로 이르는 물길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자연강 물인 위수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한나라때 만든 인공강인 조거( 漕 渠 )였다. 위수는 깊이가 얕고, 모래 가 많으며, 강물이 구비져서, 항해하기에 불편했다. 동한때는 낙양으로 옮겼으므로, 조거는 수리를 하지 않아서, 일찌감치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수나라때는 할 수 없이 새로 물길을 파는 수밖에 없 었다. 개황원년(581년) 수문제는 대장군 곽연( 郭 衍 )을 조거대감으로 임명하고, 장안-황하간의 수운 을 만드는 것을 책임지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완성한 부민거( 富 民 渠 )는 여전히 동부의 양식을 서 부로 운송하는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3년후에 부득이 다시한번 개조공사를 하게 된다. 이번 개조공사는 물길을 더 깊고, 더 넓게 파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큰 배도 지나다닐 수 있게 하고자 하였다. 개조공사는 걸출한 공사전문가인 우문개( 宇 文 愷 )가 주재한다. 노동자들의 노력하에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그 해에 준공한다. 새로운 물길은 위수를 주요 수원으로 하여, 대흥성(서안시) 에서 동관( 潼 關 )에 이르는 300여리였고, 광통거라고 이름을 붙였다. 새로운 광통거는 운송량이 옛날 것보다 훨씬 많았고, 관중에 양식을 운송하는 것 외에도 많은 부유함을 가져다 주게 된다. 수( 隋 )나라 대운하( 大 運 河 ) 90

91 둘째, 강회와 통하는 어하의 개보수. 수양제가 즉위한 후, 정치중심은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겨진다. 그리하여 황하, 회하, 장강간의 수상교통을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이리하여 남부의 양식을 북으로 운송하고 동남지역을 통제하기 쉽도록 하고자 하였다. 대업원년(605년), 우문개로 하여금 동경낙양 의 건설을 책임지게 한다. 매원 200만명이 투입된다. 동시에 상서우승 황보의에게 명하여, "하남회 북 여러군의 남녀 100여만을 동웒여, 통제거를 파도록" 지시한다. 이외에, 회남의 농민 10만을 동원 하여, 산양독을 확장공사하도록 한다. 공사규모의 크기와 범위가 넓음은 모두 유래가 없는 것이었 다. 통제거는 동서 두 구간으로 나뉠 수 있는데, 서쪽구간은 동한때의 양구( 陽 溝 )를 기초로 하여 팠 다. 서로는 낙양서쪽에서 낙수( 洛 水 ) 및 그 지류인 곡수( 谷 水 )를 수원으로 하여 낙양성남쪽을 통과 하여 언사의 동남쪽에 이르고 다시 낙수를 따라 황하로 들어간다. 동쪽구간은 서로는 형양( 熒 陽 ) 서 북의 항하변상의 판저( 板 渚 )에서 시작하여, 황하를 수원으로 하여, 지금의 개봉시 밍 기현, 수현 ( 縣 ), 영릉, 상구, 하읍, 영성등의 현을 지나, 다시 동남으로 지금의 안휘 숙현, 영벽, 사현을 지나 고 다시 강소의 사홍현을 지나 우이( )현에 도달하여 회수로 들어간다. 두 구간의 길이는 거의 2000리에 이른다. 산양독은 북쪽은 회수남안의 산양(지금의 강소성 회안시)에서 시작하여, 곧바로 남쪽으로 향하여 강도(양주시)의 서쪽에서 장강과 만난다. 두 거( 渠 )는 모두 통일된 표준에 따라 건 설하고, 양쪽에 버드나무를 심고, 어도( 御 道 )를 건설한다. 연도에 이궁( 離 宮 )을 40여채나 건설한다. 용주선( 龍 舟 船 )은 크기가 엄청났으므로, 어하는 반드시 깊게 파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운행할 수 가 없었다. 통제거와 산양독의 건설과 정비는 함께 시작하여 동시에 진행되었다. 시공때 비록 기존 의 구거와 자연하도를 최대한 이용하였지만, 통일된 너비와 깊이를 요했으므로 주로 인공으로 파내 는데 의존했으므로, 공사량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시간은 아주 짧게 걸렸다. 3월에 착공하여, 8월 에 완공한다. 수양제는 즉시 낙양에서 용주선을 타고 후비, 왕공, 백관을 데리고 강도로 남순한다. 이것은 고대 공사역사상 기적이다. 당연히 대가는 컸다. 공사과정에서 죽은 자가 많았던 것이다. 셋째, 북쪽의 탁군에 이르는 영제거이다. 통제거, 산양독을 완공한 이후, 수양제는 황하이북에 다시 대운하를 파기로 결정한다. 즉 영제거이다. 대업4년(608년) "하북여러 군의 남녀 백여만을 소집해서 영제거를 파도록 했다. 심수를 끌어들어 남으로 황하에 이르게 하고 북으로 탁군에 이르게 하였다" 영제거는 두 구간으로 나뉜다. 남쪽구간은 심하입구에서 북으로 가서 지금의 신향, 급현, 활현, 내황 (이상 하남성), 위현, 대명, 관도, 임서, 청하(이상 하북성), 무성, 덕주(이상 산동), 오교, 동광, 남피, 창현, 청현(이상 하북성)을 거쳐 지금의 천진시에 이르는 길이다. 북쪽구간은 천진에서 서북으로 방 향을 바꾸어, 천진의 무청, 하북의 안차를 거쳐 탁군에 도착하는 길이다. 남북양구간은 그해에 완성 된다. 영제거는 통제거와 마찬가지로 넓고 깊은 운하였고, 기록에 의하면 길이가 1900리이다. 깊이 가 얼마였는지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보면 통제거와 비슷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시 용주가 다닐 수 있는 물길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대업7년(611년), 수양제는 강도에서 용주를 타고 운하를 따라 북상한다. 인마와 배를 데리고 수륙의 두 길을 모두 가서 탁군에 도달한다. 도합 4000 리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그럼에도 50여일을 썼으니 통항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만하다. 넷째, 태호평원을 종단하는 강남하를 준설한다. 태호평원에는 운하를 만든 역사가 깊다. 춘추시대 오나라는 도성인 오(소주시)를 중심으로 여러개의 운하를 팠다. 그 중의 하나가 북으로 장강에 이어 지는 것이고, 하나가 남으로 전당강에 이어지는 것이다. 이 두 개의 남북방향의 인공수로는 최초의 강남하이다. 이 강남하는 진한, 삼국, 양진, 남북조때 여러차례 정비를 거치고, 수양제때 다시 한번 준설하게 된다. 광통거, 통제거, 산양독(수양제는 후 양자를 합쳐서 어하라고 한다), 영제거와 강남하는 비록 서로 수( 隋 )나라 대운하( 大 運 河 ) 91

92 다른 시기에 건설되었고, 각자 독립한 운수수로였다. 그러나, 이 물길은 모두 정치중심 장안, 낙양을 핵심으로 하여, 동남, 동북으로 퍼져나가서, 완전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동시에 규격이 기본적 으로 일치하여, 용주와 방주가 운행할 수 있게 되었고, 서로 연결이 되었다. 그래서 또 하나의 대운 하를 이루는 것이다. 장안, 낙양에서 동남으로 항주까지, 동북으로 북경까지 이르는 대운하는 역사 상 가장 긴 운하이다. 이것은 전당강, 장강, 회하, 황하, 해하의 5대수역을 통과하여 국가의 통일에 기여하고 남북의 경제문화교류에도 공헌한다. 제3시기: 원명시기 원나라는 대도(북경)에 수도를 정한 후, 강소절강일대의 곡식을 대도까지 운송하게 된다. 그러나, 수 나라때의 대운하는 해하와 회하의 중간구간이 낙양을 중심으로 동북과 동남으로 펼처져 있었다. 낙 양을 돌아오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직선화공사를 하게 된다. 원나라는 그리하여, 제주, 회통, 통혜 등의 수로를 만든다. 명,청양대에는 다시 대운하의 많은 구간을 개조한다. 아래에서는 원나라때 개 설한 운하여 몇가지 중요한 공사를 설명하기로 한다. 첫째, 제주하( 濟 州 河 )와 회통하( 會 通 河 )의 건설 원나라의 수도 대도(북경시)에서 동남의 곡창지대까지 연결된다. 대부분의 지방은 수로로 통하고, 그저 대도와 통주의 사이, 임청과 제주의 사이에 편리한 수로가 없거나 기존 수로가 막혀 있었다. 그래서 남북수로관통의 관건은 이 두 곳에 인공수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임창과 제주사이의 운하 는 원나라때 두 단계로 나누어 진행된다. 먼저 제주하를 파고, 다시 회통하를 팠다. 제주하는 남으 로 제주(제녕) 남쪽의 노교진에서 북으로 수성(지금의 동평현)의 안산까지 150리이다. 사람들은 유 리한 자연조건을 잘 활용하였다. 문수와 사수를 수원으로 하고, 갑문을 만들고 물길을 팠다. 회통하 는 남으로 수성의 안산에서 제주하와 이어지고 북으로 파나간다. 요성을 거쳐 임청에서 위하와 만 난다. 길이는 250리이다. 이것은 제주하와 마찬가지로 강위에 많은 갑문을 만들었다. 이 두 구간을 판 후에 남쪽의 양식배는 위하, 백하를 거처 통주에 이를 수 있게 된다. 둘째, 패하와 통혜하( 通 惠 河 )의 건설 옛날의 하도는 통항늘역이 적어서, 원나라때 대도와 통주간에 운송능력이 큰 물길을 팔 필요가 있 었다. 이리하여 통주에 집중된 양식을 북경까지 옮겨야 했다. 그래서 패하와 통혜하를 이어서 파게 된다. 먼저 만든 것은 패하이다. 서로는 대도 광희문에서 동으로 통주성북쪽까지가서 온유하에 이러 진다. 이 수로는 20여킬로미터이다.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차이는 20미터 정도이다. 하도 의 높낮이가 컸다. 강물을 보준하기 위하여 하도에 7개의 갑문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 운하를 패하 라고 불렀다. 나중에 패하는 수원이 부족하여 원나라때 다시 통혜하를 판다. 이번 공사의 책임자는 곽수경( 郭 守 敬 )이었다. 먼저 수원을 개발하여 적수담에 모으고, 다시 적수담에서 동으로 물길을 건 설한다. 황성동쪽에서 남으로 흐르고 동남으로 문명문에 이르며 동으로는 통주에서 조백하에 이어 진다. 이 새로운 인공수로는 쿠빌라이에 의하여 통혜하라고 이름지어진다. 통혜하가 건설된 후 적수 담은 번화한 항구가 된다. 원나라때 몇 개의 중대한 공사가 완공된 후, 오늘날의 경항대운하는 그 모습을 갖추게 된다. 전체 길이 1700여리이다. 경항대운하는 수나라때의 남북대운하의 적지 않은 구간을 활용하였다. 만일 북 수( 隋 )나라 대운하( 大 運 河 ) 92

93 경세서 항주까지 운하로 운송한다면, 전자는 후자에 비하여 900여리를 단축하였다. 수( 隋 )나라 대운하( 大 運 河 ) 93

94 중국역사상 가장 싱거운 전쟁 :31 고창( 高 昌 )은 옛날의 지명이다. 구체적인 위치는 현재의 신강에 있는 투루판( 吐 魯 番 )이다. 이곳은 서역지역에 위치한 한족의 지방정권이었다. 그렇다면, 왜 고창국은 마지막에 당나라와 서로 싸웠는가? 왜 겨우 3만의 인구를 지닌 고창국을 치는데, 당나라는 그렇게 중시하여, 20만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치게 되었는가? 당태종시기의 고창국에 있던 국왕은 국문태( 麴 文 泰 )였다. 국문태는 처음에 중원의 당나라 중앙정부와 양호한 관계를 유지했다. 정관4년, 국문 태는 부인과 함께 장안을 갔다. 당태종은 높은 격으로 국문태를 접대했고, 그의 부인을 "공주"로 봉했다. 그이후, 쌍방의 관계는 급속히 가까 워진다. 서역의 모든 움직임에 대하여 국문태는 적극적으로 당나라에 보고한다. 그러나,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서역의 상공에 확산되고 있었고, 누구도 이 것이 향후 고창국과 당나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줄 몰랐다. 그 것은 무엇인가? 문제는 서돌궐( 西 突 厥 )에서 나타났다. 서돌궐의 두목인 통엽호( 統 葉 護 )가 병사한 후, 그의 후계자들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마침내 두 파로 나뉘어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수년을 끌게 되어, 정관2년부터 정관6년까지 하게 된다. 모든 서역의 나라들이 화를 면하지 못했다. 그들은 서돌궐의 양파투쟁에 반드시 선택 을 해야 했다. 당연히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느 일파가 자신들을 통제하게 되면 그 쪽을 따르는 것이다. 서돌궐의 양파는 동시에 당나라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정관12년에 이르러, 당나라에서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당태 종이 지지하던 서돌궐의 일파는 세력이 점점 약해졌고, 당태종이 지지하지 않던 일파는 반대로 세력이 갈수록 강해졌다. 그 두령인 욕곡설( 欲 谷 設 )은 상대방을 무너뜨렸을 뿐아니라, 서역을 대통일하려는 기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욕곡설의 일파가 세력을 증가시킴과 동시에 점차 당나 라와 마찰이 발생했다. 당나라가 예전에 자기의 상대방을 지지했다는 것으로 인하여, 욕곡설은 고창을 통제하였고, 고창국과 연합하여 함께 언기( 焉 耆 )를 쳤다. 언기는 천산남쪽에 있었고, 고창과는 천산 하나를 사이에 두었다. 이와 동시에 욕곡설은 서역과 당나라의 왕래를 막아버 렸다. 이것은 소위 공물을 바치는 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일부 중원인들이 서역으로 도망쳤다가 지금 다시 중원으로 돌아가고자 해도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언기를 공격한 일은 당나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언기와 고창은 모두 당나라의 부속국이었기 때문이다. 당태종은 사자를 보내서 조정하려고 있고, 고창에게 언기사람들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창은 말을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창은 이미 서돌궐 욕곡설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욕곡설은 부하를 보내서 고창을 감 독했는데, 아사나구( 阿 史 那 矩 )라는 자였다. 그는 명목적으로는 고창의 일개 장군이었지만, 실제로는 욕곡설을 대리하여 고창을 지배하고 있었 다. 당나라도 상황을 이해한 것같다. 당태종은 바로 아사나구를 지명하여 장안으로 오라고 했다. 고창은 당연히 그렇게 할 능력이 없었고, 그 저 사자를 장안에 파견하여 이런저런 변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쌍방 사자의 왕래는 사실상 쌍방의 입장을 의사소통하는 길이고, 피차의 배경을 이해하는 길이었다. 당나라의 사자가 고창에 도착하자, 국문 태의 입장은 아주 강경했다. 사자가 그에게 왜 언기를 쳤느냐고 묻자, 국문태의 회답은 "매는 하늘에 있고, 꿩은 갈대밭에 숨는다. 고양이는 집에서 놀고, 쥐는 구멍속에서 편히 쉰다. 각자 자기가 있을 곳을 얻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 뜻은 결국 서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어찌할 수 없다는 의미였고, 이는 명확히 당태종의 중앙정부를 무시하는 말이었다. 고창왕 국문태는 왜 이렇게 담량이 컸을까? 감히 당태종에 대항하려 한것일까? 중국역사상 가장 싱거운 전쟁 94

95 국문태는 일찌기 그의 심복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수나라에도 가보고, 당나라에도 가봤는데, 그는 이전에는 수나라가 당나라보다 강대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강대한 수나라도 서역에 병사를 보낼 여력이 없었는데, 당나라에서 출병하더라도 별로 규모가 크지 않을 것이 다. 왜냐하면, 병사를 많이 보내려면 군수물자측면의 준비가 아주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3만이하를 파병한다면 고창을 이기기 힘들 것이다. 당나라병은 하연적(고비사막)을 넘게 되면, 분명히 피로에 지칠 것이므로 고창은 그저 이일대로( 以 逸 待 勞 )하면 된다. 당연히 국문태 에게 있어서, 그는 또 하나의 믿는 바가 있었다. 서돌궐의 욕곡설은 가한부도성(지금의 신강 지무사르)에 주재하고 있었고, 고창과 가까웠다. 서돌궐은 고창의 가장 중요한 패였다. 바로 고창이 당나라의 중앙정부에 대항할 수 있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량이었다. 이때, 당나라 조정은 어떠했는가?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은 실패했고, 당태종에게는 전쟁이냐 아니냐의 선택만 남았다. 당나라 내부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견해가 있었다. 주전파는 당나라의 인내는 이미 한계에 다달았다. 서역문제는 마음대로 놔둘 수가 없다. 장기적인 전략에서 볼 때, 출병이 시급하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일파는 서역에 병사를 보내는 것에 반대했다. 그들의 견해는 먼길을 떠나려 면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서역에 대하여 너무 큰 댓가를 치르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후자의 주장을 한 사람들은 명확한 기 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관점을 볼 때, 위징의 일관된 사상과 부합한다. 그렇다면 원정을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 보내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결과는 심각하다. 보내려면, 국문태가 말한 문제가 확실히 있었다. 먼 길을 보내려면 곤란이 한 둘이 아니다. 자연환경도 열악하고, 군대의 군수물자공급도 곤란하다. 출병병사수를 적게 한다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출병병사수를 많이 한다면, 국가재정부담이 문제된다. 계속 참을 것인가, 도전을 맞이할 것인가? 당태종은 도전을 맞이하여 싸우기로 결정한다. 이 전쟁의 핵심은 당나라가 불손한 국가를 치는데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만일 고창뿐이라면, 문제는 간단하다. 관건은 고창의 배후에 있는 서돌궐이었다. 당나라는 서돌궐과 전쟁을 벌일 것인지 여부도 결정해야 했다. 만일 전투를 벌인다면, 반드시 서돌궐의 참전에 대한 준비까지 마쳐야 한다. 서돌궐의 욕곡설은 막 승리를 이끌어냈고, 서역의 많은 나라들이 그에게 정복되었다. 당나라가 고창을 평정한다면, 최대의 준비 는 바로 서돌궐과의 전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전체전략으로 보건, 국제정치로 보건 모두 이 점은 고려해야 한다. 안싸운다면 그만이지만, 싸우려면 반드시 완승해야 한다. 고창배후의 서돌궐에 대하여는 요행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대이다. 당나라가 출병했다. 당태종이 반포한 <<토국문태조>>의 전편에는 국문태의 죄행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다. 서돌궐은 그저 언급만 하고 있다. 결론은 국문태를 징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국문태를 토벌하는 것은 중국의 내정이고, 황제가 배신한 신하인 국문태를 토벌하는 것이며, 대외전쟁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숨은 뜻은 외인들은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외인들이 간섭하면, 당나라는 무서워할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당태종은 전쟁준비를 다 마쳐두었던 것이다. 이부상서 후군집은 행군대총관이고, 우진달, 설만균등이 부대총관이다. 그외에 총관이 여러명이다. 참전한 군대는 부병( 府 兵 ) 외에 많은 민족 으로 구성된 병사들이 참전하였다. 선봉의 설연타 군대, 그리고 아사나두르가 이끄는 돌궐군대, 계복하륵이 이끄는 철륵군대가 그것이다. 당 나라는 도대체 얼마의 군사를 동원했는가? <<구당서.고창전>>에 의하면 총수는 개략 20만이라는 것이다. 고창의 인구는 얼마인가? 3만7천7백3십8명이다. 고창은 당나라군대의 주력공격목표가 아니었다. 당나라군대의 방대한 인원은 서돌궐 욕곡설 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욕곡설은 당나라군대의 역량을 보고는 당태종의 결심을 눈치챘다. 결국 당나라군대가 도 착하기 전에, 욕곡설은 도망쳐버렸다. 한꺼번에 천리를 서쪽으로 도망친 것이다. 서돌궐의 가한부도성에 주재하던 장군은 항복해버린다. 국문 중국역사상 가장 싱거운 전쟁 95

96 태는 당나라군대가 이미 고비사막을 넘어서 이오( 伊 吾 )에 출현했다는 말을 듣고, 긴장하여 그냥 죽어버리고 만다. 국왕이 사망하자, 신국왕인 국지성( 麴 智 盛 )은 후군집에게 서신을 보낸다. 죄를 지은 선대국왕은 이미 벌을 받아 사망하였고, 자신은 신국왕으 로 아무 일도 모르니, 불쌍히 여겨달라고. 후군집은 회신을 보내어 '투항을 하면, 잘 보살펴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국지성은 그렇게 투항하려 고 하지는 않았고, 후군집은 진공한다. 후군집의 군대에는 기술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먼저 하미( 哈 密 )로 가서 천산의 나무를 재료로 하여 많은 공성무기를 만들어 놓는다. 이것을 사용하자, 국지성은 대항할 힘이 없어, 결국 항복한다. 역사는 어떤 때는 이렇게 황당하다. 당나라에서 만리를 넘어 온 원정병사들은 이처럼 별 힘들이지 않고, 우스운 결말을 보게 된 것이다. 중국역사상 가장 싱거운 전쟁 96

97 당나라때는 왜 귀족들이 공주와 결혼하지 않으려 했는가? :30 당나라의 역사서적을 보면 비교적 독특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귀족들이 공주를 처로 맞으려 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당나라때의 정사, 필기에 기록들이 있는데, 여기서 두가지만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구당서>>권147<<두우전>>부<<두종전>>을 보면, "(헌종의 장녀 기양공주가 부마를 뽑을 때) 재상을 시켜 사대부가문의 글을 알고 풍모가 있 는 선비를 뽑으려고 하였으나...모두 사절하고 응하지 않았다" <<동관주기>>권상에는 선종의 딸인 만수공주가 시집갈 때 황제가 백민중을 시켜 고르게 하였고, 백민중은 상문의 아들인 정호를 점찍었다. 공주와 결혼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은 정호는 백민중에게 깊은 원한을 가졌다고 되어 있다. 당나라때 선비들이 공주를 취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개략 다음의 세 가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복상( 服 喪 )의 예에 관한 규정이다. 당나라때의 규정으로는 처가 죽으면 남편은 1년간이 복상기간이다. 그런데, 공주를 취하면 그 남편은 3년간의 복상기간을 지내야 한다. 당문종때 두종이 일찌기 이런 문제에 맞닥뜨린 적이 있다. "부마는 공주를 위하여 3년의 상을 지내야 하니 선비들이 공주를 취하기를 꺼린다"는 내용이 나온다. 둘째, 문벌관념이 여전히 존재했다는 점이다. 당나라때 특히 초당과 중당때에는 문벌이 중시되었다. 당나라에서 가문이 좋다는 것은 권력이 크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고, 양호한 문화전통과 가법과 가풍이 있고,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인척관계를 가진 것을 말한다. 이런 기준으 로 보면 당나라의 이씨황실은 가장 높은 권세를 가졌던 것은 말할 것도 없으나, 문화전통이나 가풍의 측면에서는 많이 떨어졌다. 이런 점에 서 특히 산동의 문벌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이씨 황실은 원래 돌궐출신이고 한족이 아니다. 그러므로 가족문화에서도 이씨황실은 한족의 대성문벌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혼인관 계에서도 이씨황실은 돌궐의 풍습을 그대로 유지하여 지나치게 자유로웠고, 심지어 방종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당나라에 기록에 남아있는 것 만 26명의 공주가 개가하였다. 그 중 안정공주, 제국공주는 3번 시집간다. 당태종은 동생의 처인 양씨를 취했고, 당고종은 부친의 궁중재인인 무측천을 황후로 삼았으며, 당현종은 며느리인 양옥환(양귀비)를 취했다. 무측천은 공개적으로 면수(남총)를 모집했다는 것은 비밀도 아닌 사 실이다. 이런 점에서 당나라때의 전통적인 귀족가문에서는 황실의 이런 행위를 멸시하였다. 이씨황실의 산동문벌귀족에 대한 감정은 복잡했다 한편으로 억제하면서 한편으로 부러워 하였다. 당나라를 건립한 후 바로 최씨등 산동문벌 을 압박했다. 동시에, 이씨 황실은 양호한 문화전통과 가풍을 지닌 집안과 혼인을 원했으나, 자주 거절당했다. 그래서 문벌귀족들은 딸을 황 실로 시집보내기도 원하지 않았고, 공주를 며느리로 맞이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셋째, 적지 않은 공주들은 부도를 지키지 않았다. 당나라때 공주들은 사치, 교만, 방봉으로 유명했고, 전횡, 음탕으로 유명한 자도 적지 않았 으며, 질투가 심하고 잔혹했던 자도 있었다. 공주들이 부도를 지키지 않는 경우는 그리고 적지도 않았다. 이것은 역대황조에서 비교적 드문 일이었다. 당나라때는 왜 귀족들이 공주와 결혼하지 않으려 했는가? 97

98 당나라의 굴욕 :29 이씨의 당나라는 성립당초부터 치욕으로 충만했다. 이연( 李 淵 )은 정권을 빼앗기 위하여 나라의 이익을 팔아먹고, 후안무치하게 돌궐( 突 厥 )에 신하로 자칭했다. "...정벌로 얻은 자녀, 옥과 비단은 모두 가한( 可 汗, 칸)의 것입니다" 이연 시대의 당나라는 돌궐에 계속 조공을 바쳤고, 돌 궐인들은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와서 약탈해가곤 하면서 지냈다. "고조가 즉위하면서 전후로 상사( 賞 賜 )를 내린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시필( 始 畢 )칸은 스스로 공이 크다고 생각하여 더욱 오만해졌다. 매번 사자를 장안으로 보낼 때마다, 매우 무례하였다. 고조는 중원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매번 용인해주었다" "상사"라는 말은 참으로 절묘하게 썼다. 원래 아랫나라가 윗나라에 바치는 것은 "진공" "조공"이고, 윗나라가 아랫나라에 내리는 것은 "상사"이다. 이연은 스스로 신하로 칭하였으면, 돌궐의 시필칸은 군왕이다. 비록 당서에서는 흑 백을 뒤집어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연이 조공을 바치면서 신하를 자처한 내용 자체를 완전히 숨기지는 못하였다. 돌궐의 대군이 장안성에 다가오자, 이세민은 어쩔 수 없이 위수 변교에서 치욕적인 성하지맹( 城 下 之 盟 )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당나라 는 금은보화(수나라 조정에서 물려받은 것)를 돌궐에 진공으로 바쳤다. 이세민은 스스로 당나라가 돌궐에 진공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나는 너희 칸과 화친을 맺기로 하였고, 금과 비단을 보낸다" 이세민도 스스로 이를 "위수의 치욕"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당고종시기인 670년(함향원년)에는 토번이 병사를 일으켜 당나라 서역의 4개 진, 귀자, 우전, 언기, 소륵을 빼앗아 간 바 있다. 그 후에 당나 라는 두번에 걸쳐서 대군을 보내어 빼앗긴 땅을 되찾고자 하였다. 당나라는 대장군 설인귀로 하여금 10만대군을 이끌고 토번으로 진공하게 하였다. 그러나, 청해호의 남쪽에 있는 대비천에서 토번대군에게 대패하였다. 698년(의풍3년)에는 당나라의 중서령 이경현이 18만군대를 이끌 고 토번군대와 다시 청해에서 싸웠는데, 당나라는 다시 참패했다. 당나라 군대는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했다. 무측천시대에 돌궐은 다시 강대해졌다. 이 때의 당나라는 전혀 돌궐의 적수가 못되었다. "돌궐이 조, 정 지역에서 당나라의 남녀8,9만을 약탈 하여 모두 묻어버리고, 지나는 길의 사람과 가축, 금은화폐, 자녀를 모두 빼았았다. 당나라의 장수는 쳐다만 볼 뿐 감히 싸우려고 하지 못했 다" 당나라 중종때에도 "돌궐이 명사를 공격했다. 영무군의 대총관은 싸워서 이기지 못하였고, 죽은 자가 수만명이었다." 무측천시기에는 원시적인 단계에 불과한 거란족에게도 당했다. 696년, 조인사등 28장수는 거란을 공격했으나 전멸하였고, 대장군은 포로가 되 었다. 696년-697년에 거란수령인 이진충은 스스로 무상칸( 無 上 可 汗 )으로 칭하며, 만영을 대장으로 병사를 일으켜 하북에 대규모로 진격했다. 당나라국경을 넘어 여러 큰 도시를 점령하였고, 당나라군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697년 3월, 당나라는 상서 왕효걸, 우림위장군 소굉휘에게 17만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고, 동협석에서 전투를 벌였다. 거란은 왕효걸의 군사를 낭떠러지로 유인한 후 병사를 돌려 맹공을 가하였고, 왕효걸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고, 소굉휘는 도망쳤으며, 병사들은 거의 죽었다. 만영은 승리후 유주에 들어갔으며 유주성을 도살했다. 당나라는 다시 하내군왕 무의종을 신병도대총관으로 하고 우숙정태어사대부 누사덕을 청변도대총관으로 하고, 우위위장군 사탁충 의를 전군총관으로 하여 20만병사를 이끌고 거란을 쳤다. 무의종의 군대가 조주(하북성 조주)에 이른 후 감히 나가지 못하고 상주(하남성 안 양)로 후퇴했다. 만영이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니 그 기세가 날카로웠다. 거란인들이 하북의 요지를 침입하여 북경을 포함한 수개의 성을 약탈 하는데도 당나라군대는 그저 하남으로 도망쳐 갈 뿐이었다. 710년 당중종은 문성공주를 토번에 진공으로 바쳤을 뿐아니라, 당예종은 1년후에 황하의 하서구곡의 땅을 토번에 할양하였다. 이때부터 토번 은 전략적인 요충지를 장악하여 지리상의 우세를 점하게 된다. 이것은 당나라화친역사상의 가장 치욕적인 화친일 것이며, 할양의 시작이었다. "토번은 구곡을 얻었고, 그 땅이 비옥하여, 병사를 주둔시키고 목축을 하였다. 그리고 당나라의 국경과 가까워, 이 때부터 병사를 이끌고 자 주 침입하였다" 토번인들은 당나라 황실의 미녀를 가져갔을 뿐아니라 당나라의 좋은 전략요충지도 빼앗아 갔다. 그리고 여전히 당나라를 약 당나라의 굴욕 98

99 탈했다. 이런 좋은 일들만 있었던 토번인들은 정말 행운아들이다. 마침 가장 유약한 중원의 중앙정부가 있었으니까. 당현종은 거란인에게 화친공주를 보냈으나 모두 살해당하였다. 캠브리지의 중국요서하금원사에 의하면 "745년, 당나라 조정은 통혼연맹정책을 채택하여 거란과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하였다. 보내어진 황실의 신부는 모두 살해되었다" 당나라는 체면이 땅에 떨 어지게 되었다. 당현종은 두번이나 남조의 남만오랑캐에게 패하게 된다. 한번은 당나라군대가 6만명이 죽었고, 다른 한번은 7만명이 죽었다. 당나라는 남쪽의 작은 나라인 남조에 대하여도 이긴 경우보다 진 경우가 많았다. 여러번 남조에 참패를 당했다. 중국은 역대로 남방민족에게 대패한 경우는 드물고 북방민족에 패한 경우는 많은데, 이로써도 당나라군대의 무능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안사의 난이 일어나기 전의 일이다. 안사의 난이후에 성도는 남조에 의하여 함락된다. 831년, 남조는 사천을 침범하여 성도외성을 함락시키고, 자녀, 백공 수만명을 데리고 후퇴한다. 수 만명의 당나라 백성들이 남조의 노예가 된 것이다. 당나라의 굴욕은 남만 오랑캐에 그치지 않았고, 서원( 西 原 )의 오랑캐에게도 당한다. 서원오랑캐는 광서의 소수민족이다. 763년(광덕원년), 서 원오랑캐는 호남 도주성을 공격하여 도주성을 일개월가량 점령한다. "계묘년에 서원적이 도주에 들어와 불지르고 죽이고 약탈했으며 모두 가 지고 가버렸다" '서원오랑캐가 주민 만여명을 데려갔다" 다음해 7월에 서원 오랑캐는 다시 영주(호남 영릉)과 소주(호남 소양)을 격파하였다. 당나라군은 또한 연( 燕 )나라에도 연전연패하였다. 그래서 할 수없이 '이이제이'의 수법으로 회흘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당숙종은 회흘에 겨우 겨우 사정해서 회흘로부터 병사를 빌린다. 약정에 의하면 "성을 함락한 후, 토지와 선비평민은 당나라에 귀속되나, 금은보화와 비단, 자녀는 회흘에 귀속된다" 당나라는 회흘군대에 매일 양200두, 소20두, 쌀 40곡을 주기로 한다. 동경 낙양이 회흘사람들에 의하여 3일간 노략된 후, 많은 미녀와 재산보물이 회흘인들에게 약탈되었다. "회흘이 동경에 이르자 그들의 행동이 잔인하였다. 선비와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하였고, 모두 성선사와 백마사의 두개의 누각에 올라서 난을 피하였다. 회흘은 두 누각을 불질렀으니 다치고 죽은자가 만명이 넘는다. 15일간 불이 계속 탔다. 그리고 관리들을 크게 욕하였다" 나중에 당숙종은 매년 회흘에 진공으로 견2만필을 주기로 한다. 그리고 숙종의 친딸인 녕국공주 를 회흘의 60여세된 늙은 칸에게 첩으로 보낸다. 당나라는 자주 토번에게 대패하고, 토번에게 심지어 수도가 점령당하기도 하였다. 763년 10월, 토번대군이 봉천(섬서성 건현)을 점령하였다. 병사들이 장안성의 아래에 이르렀다. 놀란 대종은 황망하게 섬주로 피난갔다. 결과적으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토번에 함락당하고 토번에서 는 새 황제를 세웠다. 그들은 당나라 종실의 광무왕 이승굉을 황제로 앉혀서 자신들의 통치도구로 삼았다. 하서, 농우등 넓은 땅은 토번의 영 토가 되었다. 이로부터 수백만의 한인은 토번의 노예로 전락했고, 토번은 난을 틈타서 당나라의 하서와 황산등 50개군, 6개진, 14군을 차지했 다. "토번이 허를 틈타 하서, 농우를 취했고, 중국인 100만이 토번인의 노예가 되었다" 당나라는 심리적으로 토번을 무서워했고, 토번과 역사 상 첫번째의 영토할양조약을 체결하였다. 783년에 당정부는 토번에 핍박당하여 <<당번청수맹약>>을 체결하였다. 당나라 정부는 토번이 점령 한 지역을 토번의 영토로 인정하고, 맹약을 맺었다. 이후로, 농남의 문, 무, 성, 일, 민등의 각주군현은 모두 토번의 영토가 되었다. 중국의 역대왕조중 이민족에게 가장 많이 핍박받고, 핍박받은 범위가 가장 넓고 그 시간도 가장 긴 것이 바로 당나라이다. 당나라는 절반의 기간동안 이민족에게 능욕과 모욕을 당했다. 돌궐, 거란, 토번, 남조, 회흘은 무두 수만 수만씩 당나라 사람을 약탈해갔다. 심지어 서원오랑캐 같은 광서의 야만적인 작은 족속까지도 당나라에 와서 수만명을 약탈해갔다. 이런 일은 정말 더 이상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당나라의 백성들 은 기본적인 안전보장도 되지 않는 상태에서 생활했다. 당나라황조를 중국역사상 가장 강성한 황조라고 하는 것은 중국에 대한 모욕이다. 당나라의 굴욕 99

100 삼국시대의 명검( 名 劍 ) :28 첫째: 의천검( 倚 天 劍 ) 근거: 삼국연의 제41회를 보면, "원래 그 장수는 바로 조조의 곁에서 검을 메고 있던 하후은입니다. 조조에게는 보검이 2개 있는데, 하나가 의천이고 다른 하나가 청공( 靑 釭 )인데, 의천은 조조 자신이 차고, 천공은 하후은에게 주어서 차게 합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의천'이라는 명칭은 송옥( 宋 玉 )의 대언부( 大 言 賦 )에 나오는 구절인 "발장검혜의장천( 拔 長 劍 兮 倚 長 天, 긴 칼을 뽑아서 긴 하늘에 기대어 서 다)"는 것에서 따온 것으로 기백과 기개를 나타낸다. 둘째: 청공검( 靑 釭 劍 ) 근거: 의천검과 동일한 곳에 이름이 나옴. 조자룡은 하후은을 죽인 후 이 검을 취한다. 그리고는 "청강검을 뽑아서 어지럽게 휘두르니...갑옷 도 그냥 뚫고 지나고, 피가 샘처럼 솟았다. 여러 장수를 물리치고, 포위를 뚫었다." 청공검에 대하여는 "의천을 뽑지 않는다면, 누가 감히 상대할 수 있으리오"라는 말이 나온다. 셋째, 진산검( 鎭 山 劍 ) 근거: 양나라 도홍경의 <<고금도검록>>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후주 유선이 연희2년에 큰 검을 만드니, 길이가 1장2척이었다. 진검구산( 鎭 劍 口 山, 검구산을 진압하다). 왕왕 사람들은 그 빛을 보았는데, 후세인들은 이를 얻고자 해도 얻을 수가 없었다. 이 검은 1척이 33.3센티미터이고 1장은 10척이라고 계산하면, 1장2척은 399.6센티미터 즉, 4미터에 달하는 장검인 것이다. 아마도 천하제일의 장검일 것이다. 넷째, 비경검( 飛 景 劍 ), 조비삼검( 曹 丕 三 劍 )의 하나 근거: 조비의 <<전론( 典 論 )>>에 이런 기록이 있다: "나는 격검을 좋아하고, 짧은 것으로 긴 것을 이기는데 능하다. 좋은 금속을 모아, 국가의 장인에게 명하여 정련하게 하였다. 백번을 두드려 이루어졌다. 오색이 화로에 충만하고, 큰 가마가 스스로 울렸다. 영물과 같았고, 나르는 새 가 춤추는 것같았다. 보배로운 무기를 9개 만들었는데, 그 중에 검이 3개이다: 하나가 비경이오, 둘이 유채( 流 采 )이며, 셋이 화정( 華 鋌 )이다. 모두 길이는 4척2촌이며, 무게는 1근15량이다. <<조비집. 검명>>에도 이런 기록이 있다: "위나라 태자 조비가 백벽보검을 3개 만드니, 길이가 4척2촌, 무게가 1근15량이다. 빛이 유성과도 같 아서 하나는 비경이라고 부르고, 두번째는 유채인데, 색이 무지개와 같았다. 셋째는 화정이라고 하였다" 비경은 일명 비경( 蜚 景 )이라고도 부른다. 원창자는 "비경의 검은 위엄이 백일을 빼앗고 기운은 자하를 이룬다"고 하였다. 조비는 보도 3개, 비수 3개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보검 3개까지 만든 것이다. 다섯째, 유채검( 流 采 劍 ), 조비삼검( 曹 丕 三 劍 )의 하나 삼국시대의 명검( 名 劍 ) 100

101 근거: 비경검 참조 여섯째, 화정검( 華 鋌 劍 ), 조비삼검( 曹 丕 三 劍 )의 하나 근거: 비경검 참조 일곱째, 맹덕검( 孟 德 劍 ) 근거: 양나라 도홍경의 <<고금도검록>>에 따르면, "위무제 조조는 건안20년, 유곡( 幽 谷 )에서 검을 하나 얻었는데, 길이가 3척6촌이고 위에는 금으로 글자가 쓰여 있었는데, '맹덕( 孟 德 )'이라는 글이었다. 왕은 자주 이를 가지고 다녔다" 건안20년은 조조에게는 아주 수확이 많았던 해였다. 이 해에 장로가 투항해오고, 한중의 땅을 얻는다. 권위가 합비를 공격하나 장료가 격파한 다. 파국의 7성 이족왕이 모두 땅과 백성과 함께 귀의하니 파군의 땅을 얻는다. 이 검은 바로 이런 해에 얻었으니 금상첨화이고, 하늘의 뜻이 라고 생각해서 상징적인 의미가 큰 검이다. 여덟째, 양수검( 楊 修 劍 ) 근거: <<문사전>>에 따르면, "위문제는 양수의 재주를 아꼈다. 양수가 주살된 후, 양수를 그리워했다. 양수는 보검을 문제에게 바쳤었는데, 문 제는 이를 차고는 좌우에 '이것이 양수검이다'라고 하곤 했다" <<자검지남>>에 따르면, "검의 형식은 아주 옛날 식이었고, 은연중에 전서( 篆 書 )로 '양수'라는 글자가 드러났다. 검의 길이는 1척6촌8푼이고 자루( 柄 )의 길이는 8촌이며, 무게는 14량이다. 호수( 護 手 )와 검병, 검초( 劍 鞘 )는 모두 나무로 되었다. 탄구( 呑 口 )는 자동( 紫 銅 )으로 만들었다" 양수는 원래 재주는 뛰어났으나 정치적으로 줄을 잘못 섰다. 그는 조식의 편에 서서 계책을 냈는데, 적수인 조비와도 관계가 괜찮았다. 죽기 전에 그는 자기가 아끼는 검을 조비에게 선물한다. 조비도 이를 아주 좋아했다. 드나들 때 자주 이를 차고 다녔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것이 양수의 검이다'라고 자랑했다. 아마도 조비는 적수인 동생 조식의 편에 선 양수가 미웠을 것이다. 그가 주살되자, 아주 기뻤을 것이고, 그의 검을 가져와서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이것이 바로 양수의 검이다. 나의 반대편에 서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똑똑히 보라고 말하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아홉째, 유광검( 流 光 劍 ) 근거: 양나라 도홍경의 <<고금도검록>>에 따르면, "손량( 孫 亮 )은 건흥2년에 검을 하나 주조하니, 이름을 '유광'이라고 하고, 소전( 小 篆 )으로 새 겼다" 열째, 황제오왕검( 皇 帝 吳 王 劍 ) 근거: 양나라 도홍경의 <<고금도검록>>에 따르면, "손호( 孫 皓 )가 건형원년에 검을 하나 주조하니, 이름을 '황제오왕'이라고 하고, 소전으로 새 겼다" 기타 후보들 조조대봉리인( 曹 操 對 鋒 利 刃 ) 삼국시대의 명검( 名 劍 ) 101

102 이 검은 도식( 刀 式 )의 고검이다. 1918년 산동성 제녕 서관고묘에서 출도되었다. 검의 호수 부분에 "조조대봉리인"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서 이 이름을 얻는다. 길이는 3척2촌4푼이고 너비는 1촌2푼, 무게는 1근7량이다. 호수에는 세 송이의 꽃을 새겼다. 사서에는 이 검에 대하여 전 혀 기록이 없다. 손권육검( 孫 權 六 劍 ) 진나라 최표가 지은 <<고금주>>에 따르면, "삼국의 오나라 대제 손권은 6자루의 보검이 있었다. 하나는 백홍( 白 虹 )이고, 둘은 자전( 紫 電 )이며, 셋은 피사( 辟 邪 )이며, 넷은 유성( 流 星 ), 다섯은 청명( 靑 冥 ), 여섯은 백리( 百 里 )이다. 손권고검( 孫 權 古 劍 ) 양나라 도홍경의 <<고금도검록>>에 다르면, "오왕 손권은 황무5년에 무창의 동철을 채취하여, 천고검( 千 古 劍 ), 만고도( 萬 古 刀 )를 만드니, 각각 길이가 3척9촌이고 '대오( 大 吳 )'라고 소전으로 새겼다." 여기서 말하는 천고검, 만고도는 이름이 아니라, 고대의 검과 칼의 제작방식을 말한다. 촉팔검( 蜀 八 劍 ) 양나라 도홍경의 <<고금도검록>>에 따르면, "촉의 주인 유비는 장무원년에 신축일에 금우산의 철을 캐서, 8자루의 검을 만든다. 각각 3척6촌 인데, 1개는 유비가 스스로 쓰고, 1개는 태자 유선에게 주고, 1개는 양왕 유리에게 주고, 1개는 노왕 유영에게 주었으며, 1개는 제갈량에게, 1개는 관우에게, 1개는 장비에게, 1개는 조자룡에게 주었다." 그런데, 장무원년이면 관우는 이미 건안24년에 죽은지 2년이 지난 후였는데, 관우의 시신에게 주었다는 말일까? 위제왕패검( 魏 齊 王 佩 劍 ) 양나라 도홍경의 <<고금도검록>>에 따르면, "제왕 방은 정시6년, 검을 1개 만들어 자주 차고 다녔다. 그런데 아무 이유없이 잃어버리고, 빈 갑만 남았다. 나중에 황제위를 선양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그 조짐이 여기서 나타났고, 사마씨에 의하여 폐위된다" 쌍고검( 雙 股 劍 ) <<삼국연의>> 제1회를 보면, 유현덕이 좋은 장인을 시켜서 '쌍고검'을 만들게 한다. 이것은 자웅검이다. 유비는 이를 드물게 사용했다. 삼형제 가 여포를 상대할 때 한번 칼집에서 나온다. 칠성검( 七 星 劍 ) 제갈량이 동풍을 빌릴 때 썼던 검이다. 삼국시대의 명검( 名 劍 ) 102

103 호태후( 胡 太 后 ) : 황태후에서 기녀로 :27 천하가 넓다보니 별의 별 일이 다 있었다. 황태후에서 기녀가 된 것이 비록 나라가 망한 이후의 일 이라고는 하나, 스스로 '태후를 하는 것보다 기녀가 낫다'고 말하였다는데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역사상의 황후, 황태후는 매우 많다. 그러나, 남북조시기의 북제( 北 齊 )의 호태후처럼 황음무도하 고, 염치가 없으며 기녀가 되는 것을 오히려 좋아했던 황태후는 정말 드문 경우라 하지 않을 수 없 다. 호태후는 북제의 안정군( 安 定 郡, 현재의 영하성 고원) 사람이다. 그녀의 부친은 호연( 胡 延 )이며 모 친은 노( 蘆 )씨이다. 천보(북제, 문선제 고양의 연호, 기원 550년-559년)초기에 용모가 뛰어났던 호 씨는 조정에서 후궁을 뽑을 때 뽑혀서 장광왕비( 長 廣 王 妃 )가 된다. 기원 561년, 무성황제 고담( 高 湛 )이 북제의 황위를 승계한 후, 장광왕비이던 호씨는 황후( 皇 后 )가 된다. 호씨는 비록 황후이기는 했으나, 황제의 총애는 받지 못하였다. 무성황제가 총애했던 여인은 형수인 이조아( 李 祖 娥 )였다. 그리하여 무성황제는 자주 그녀의 소신궁( 昭 信 宮 )에 머물렀고, 호황후는 냉대 를 받았다. 천성이 음탕했던 호황후는 적막함을 견디지 못하고, 궁중의 내시들을 불러 놀았다. 당시, 무성황제의 가장 심복인 대신은 화사개( 和 士 開 )였다. 그리하여 무성황제의 곁을 자주 드나들 던 화 사개는 금방 호황후의 눈에 띄게 되었다. 그녀는 화사개에게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다. 화사개는 자 신의 궁중에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호황후와 기꺼이 가까이 지냈다. 두 사람은 금방 죽이 맞아서 깊은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야심이 컸던 화사개는 호황후라는 배경을 가진 후 "심복"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화 사개는 무성황제에게 호태후의 아들이며 태자인 고위( 高 緯 )에게 황제위를 넘겨주고, 자신은 태상황 으로 조용히 지내라고 권고한다. 이렇게 하면 아무런 거리낌없이 향락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한 다. 혼용무능했던 무성황제는 화사개의 건의를 받아들여, 564년 아들인 고위에게 황제위를 물려주 고, 스스로 태상황이 된다. 이때부터 궁궐 깊숙이 들어앉아 향락을 즐기다가 3년후에 무성황제 고담 은 주색을 과도하게 즐겨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 태자 고위는 황위를 계승한 후, 모친인 호황후를 황태후로 모신다. 호태후와 화사개는 더 이상 장애 가 없어지자, 이제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행동하며, 조정내외에서 그들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거 의 없었다. 많은 정직한 대신들은 이에 대하여 극도의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황제 고위에게 상소를 올려 화사개를 처단하도록 요청한다. 나이도 어리고 멍청했던 고위는 모친인 호태후가 화를 낼 것 을 두려워하여, 그저 아뭇 소리 않고 참고만 있었으며,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화사개는 이 틈을 타서 자기 심복들을 중용하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쫓아냈다. 일시에 그의 권세는 조야 를 장악하게 되고, 지위는 혁혁해진다. 황제 고위는 그를 회양왕( 淮 陽 王 )에 봉함에 따라, 그는 북제 에서 가장 권세있는 자로 된다. 호태후( 胡 太 后 ) : 황태후에서 기녀로 103

104 화사개는 호황후라는 카드만 있으면 천하를 횡행할 수 있고 아무런 장애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 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그를 모살하려는 그물망이 펼쳐지고 있었다. 원래, 황제 고위의 동생 인 낭야왕 고엄은 일찍부터 화사개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고엄은 호태후의 매부인 풍자종( 馮 子 琮 ) 이 화사개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풍자종과 함께 계책을 꾸몄다. 그리하여 화사개가 조회 에 참석하는 길에 심복을 보내어 화사개를 암살해버린다. 화사개가 죽은 후, 적막함을 견디지 못한 호태후는 부처에 예불한다는 명목으로 자주 사원을 드나 들었다. 그리고, 금방 사원내의 담헌화상( 曇 獻 和 尙 )과 눈이 맞았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사원내의 선 방에서 비밀리에 만남을 즐겼으나, 나중에는 호태후가 "강경( 講 經 )"을 명목으로 담헌화상을 무성황 제가 생전에 자주 거주하던 내전까지 불러들여, 밤낮으로 담헌과 함께 잤다. 호태후와 담헌의 관계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일이 되었다. 사원내의 화상들도 뒤로 숨어서 담헌을 태상황이라고 불렀다. 그저 황제 고위만 모르고 있었다. 하루는, 고위가 입궁하여 모친 호태후에게 문안인사를 하러 갔는데, 호태후의 곁에 처음 보는 여승이 두 명이 있는데 용모가 뛰어났고, 고위의 마음에 들었다. 모친의 방에서 나온 후, 그는 즉시 명을 내려 두 여승에게 궁에 들어와 '시침'하라고 하였다. 그날 저녁, 두 명의 여승은 고위의 침궁으로 불려왔다. 고위가 그녀들과 즐기고자 하였는데, 두 여승은 죽어라 반항하였다. 고위가 대노하여, 강제로 두 여승의 옷을 벗겼는데, 그제서야 이 "여 승"이 원래는 여장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 이 두 명의 "여승"은 담헌 수하의 어린 중들이었다. 예쁘게 생겨서 호태후의 눈에 들었다. 호 태후는 그들을 궁중으로 데려가고 싶었는데, 아들인 고위가 알까 두려워, 다른 사람의 눈을 속이기 위하여 어린 중들로 하여금 여승으로 분장하도록 한 후에 궁중에 데려온 것이었다. 고위는 그 사실 을 모르고, 그들을 자기의 침궁으로 데려갔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모친 호태후의 행적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고위는 모후의 음행을 알게 된 훙, 부끄러움이 분노로 바뀌었다. 다음 날, 그는 두 명의 어린 중들 의 내력을 조사하게 하여, 담헌에 대하여도 알게 되었다. 사실이 다 밝혀진 후, 고위는 담헌과 두 명의 어린 중은 모두 참수하게 하였고, 모친 호태후는 북궁으로 옮기게 하여 유폐시켜 버렸다. 그리 고, "내외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태후와 만나서는 안된다"고 명을 내린다. 이어지는 조사과정에서 고위는 또 원산왕등 지방관리들이 태후와 관계가 있었음을 알고는 모두 주살한다. 577년, 북주는 일거에 부패한 북제를 멸망시킨다. 호태후는 이로 인하여 다시 자유를 얻게 되었다. 당시, 호태후의 나이는 40이 안되었다. 비록 약간 나이는 들었지만, 기품은 여전했다. 황태후의 지위 를 잃은 후, 음탕했던 호태후는 그녀의 며느리인 북제의 후주 고위의 황후인 나이 겨우 20여세의 목사리와 함게 북주의 수도 장안에서 기녀가 된다. 이 소식이 전해진 후, 장안의 인사들이 앞다투어 찾아오고 영업은 성황을 이루게 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호태후는 흥분해서 며느리인 목황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황후노릇하는 것이 기녀노릇하는 것만큼 재미가 없다" 수문제 개황연간( )에 호태후는 장안에서 병사한다 호태후( 胡 太 后 ) : 황태후에서 기녀로 104

105 남조( 南 朝 ) 송( 宋 )의 황당한 골육상잔 :26 유유( 劉 裕 )는 동진( 東 晋 )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송( 宋 )을 건국한다. 이후 순제가 황제위를 제( 齊 )에 물려주기까지 모두 8명이 황제위에 오른다. 그런데, 유유가 죽은 다음부터 최고권력을 두고 골육간 의 상잔이 벌어지는데 심한 정도가 상궤를 벗어난다. 2대의 유유의 아들은 모두 7명이 있다. 장남 의부( 義 符 )는 태자의 신분으로 직위한다. 바로 소제( 少 帝 )이다. 그러나, 재위 1년만에 황당한 짓을 많이 저질러 고명대신 서선지( 徐 羨 之 ), 부량( 傅 亮 ), 사회( 謝 晦 )등에게 죽임을 당한다. 차남 의진( 義 眞 )은 역시 서선지등에게 살해당한다. 삼남 의륭( 義 隆 )이 황제에 옹립되니 바로 문제( 文 帝 )이다. 문제는 서선지등을 2왕을 살해한 죄명으 로 주살하고 처자들까지 죽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아들 태자 유소( 劉 劭 )에게 죽임을당한다. 원 가29년, 유소는 동부이모 형제인 유준과 결탁하여 부친을 빨리 죽도록 사설을 사용한다. 이것이 들 통나자 문제는 태자를 폐위하려고 한다. 그러자, 유소는 유탁과 합하여 궁정정변을 일으켜 문제와 총비 반숙비등 수십명을 죽이고, 등극한다. 사남 의강( 義 康 )은 문제의 동생으로 재주가 있었다. 원가13년 문제가 병이 든 후에는 매번 정사를 의강에게 위탁했다. 그러나, 의강은 참언을 들어 전공이 탁월했던 단도제( 檀 道 濟 )를 죽여버린다. 그 러자, 적국 북위에서는 매우 기뻐했다. 문제가 병이 많자, 의강의 심복 유담등은 의강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들통나자 유담은 죽이고 의강은 영남으로 유배보낸다. 원가22년에 공희, 범엽등이 다 시 의강을 옹립하려고 하자 그들을 모두 죽이고 의강을 서인으로 만든다. 원가28년, 위나라가 남침 해오자 문제는 의강이 다시 난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의강을 죽여버린다. 이번 형제간의 상잔은 "팽성지변"(의강이 팽성왕이었음)이라 부른다. 오남 의공( 義 恭 )은 나중에 효무제 유준을 옹립한 공으로 태재의 직을 맡고, 유준의 칼을 벗어난다. 유준의 아들 자업이 황제가 되었을 때에도 역시 죽음을 면한다. 그런데, 대신 유원경, 안사백등이 유자업을 폐위하고 의공을 옹립하려다가 발각되자 자업은 의공을 죽이고, 그의 네 아들도 죽여버린 다. 동시에 유원경 및 아들 8명, 동생 6명과 조카들을 죽이고, 안사백과 그 여섯 아들을 다 죽인다. 육남 의선( 義 宣 )은 형주에 오래 머물렀다. 효무제 유준이 음험하고 독랄하여, 의선은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웃 강주자사가 효무제를 토벌하고 의선을 옹립하여 하고 강북 이주자사 노상, 서 유보등과 이를 논의한다. 의선이 반란에 참여한 주요 이유는 유준이 음란하여 의선의 여러 딸을 범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란은 실패하고 의선과 아들 16명과 참여한 자사, 태수등이 피살당한다. 일 부 의선의 반란에 참가했던 병사들은 북위로 망명한다. 이로써 국력이 크게 손상되었다. 남조( 南 朝 ) 송( 宋 )의 황당한 골육상잔 105

106 칠남 의계( 義 季 )는 아들중 유일하게 비명에 죽지 않는다. 그는 재주도 없고, 그저 매일 술이나 마시 고 정사에 관여하지 않다가 원가 24년에 죽는다. 그는 일찍 죽어서 화를 당하지 않을 수 잇었다. 3대에 내려와서도 나아지지는 않았다. 문제의 19명의 아들의 운명을 보자. 15남, 16남, 17남은 요절했고, 5남, 7남은 병사했다. 9남 유창( 劉 昶 )은 원래 입조하여 황제가 된 조카 자업을 축하할 예정이었으나, 자업은 자기의 위엄 을 세우기 위해 유창을 토벌하겠다고 선포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유창은 어쩔 수 없이 반란을 일으 켰으나 패배한다. 이후 북위에 투항한다. 북위는 그를 매우 중시하여 공주를 시집보내고 왕의 작위 를 내리고, 정남장군에 봉한다. 이처럼 유창은 적국에 투항함으로써 목숨을 보전했다. 삼남 유준( 劉 駿 )과 십일남 유욱( 劉 彧 )은 전후로 황제에 안정되게 올랐으므로(유준은 효무제, 유욱은 명제), 살신지화를 면할 수 있었다. 오히려 그들은 형제와 조카들을 죽였다. 유준이 죽인 문제의 아들들은 장남 유소, 차남 유준, 사남 유락, 육남 유탄, 십사남 휴무가 있고, 유 욱이 죽인 아들들은 팔남 유위, 십이남 휴인, 십삼남 휴우, 십구남 휴약이 있다. 유소가 부친을 죽이고 즉위하자 밀령을 내려 강릉의 유준을 죽이라고 명한다. 유준은 어쩔 수 없이 병사를 일으켜 천하에 격문을 붙여 원흉(유소를 가리킴)을 토벌하자고 한다. 결과는 유소가 패해서 피살되고, 사남도 같이 죽는다. 이 때 같이 죽은 자들이 차남 유준과 유준의 세 아들, 소의 비 은씨 와 소, 준의 딸, 첩등이 모두 죽는다. 은씨는 죽으면서 옥승에게 "너희 집안이 골육상잔을 벌이는데, 왜 죄업는 자를 함부로 죽이는가?" 은비가 했다는 이 말은 아직도 전해진다. 옥승의 대답은 "황후가 되었는데, 죄가 없다면 무슨 말인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유락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었고, 원래 삼남 유준을 그다지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 유소 가 중용했었으므로 투항을 가장 늦게 하였다. 그래서 유준은 사람을 보내어 독살하고 사후에 사도 에 추증했다. 유탄은 459년 광릉에서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유준이 참언을 듣고 소인을 등용하며, 무고한 자들을 죽이고 음란한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유준은 유탄과 가까웠던 모든 자들을 죽이니 죽은자 가 천을 헤아렸다. 광릉을 함락시키고, 유탄은 죽이고, 모친, 처는 모두 자살하였다. 유탄의 성을 유 ( 留 )씨로 바꾸게 하고 황족에서 제명했다. 여기에 광릉의 사람을 모두 죽이라고 명한다. 다행히 전 선총지휘를 맡은 심경지 장군이 간하여 성년남자만 죽이고 미성년남자는 살려두며, 여자들은 모두 전리품으로 삼아 장졸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렇게 해도 3천여명이 죽었다. 유혼은 나이가 어려서 농담으로 스스로를 '초왕'이라고 하였고, 연호를 영광으로 정하고, 백관을 두 었다. 이것은 어린아이 장난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고발되어 유혼의 명은 끝나고 만다. 유휴무는 성격이 급했다. 옹주자사때 20세가 되지 않았는데, 조정에서 보내온 감독관원이 마음에 들 지 않아 양양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스스로 차기대장군이 되어 싸웠으나 금방 진압되고 죽는다. 남조( 南 朝 ) 송( 宋 )의 황당한 골육상잔 106

107 유위는 명제의 형이다. 하동의 유흔위가 모반하면서 노강왕 유위를 옹립하려 한다. 위는 유와 통모 하나, 고발되어 유흔위는 주살당하고, 유위는 자사로 강등된다. 유위는 그 후에도 억울하다는 말을 하다가 파면된다. 그리고 자살한다. 명제의 여러 동생들은 휴범이 재주가 모자라 명제가 걱정하지 아니하여 안죽인 것을 빼고는 나머지 휴인, 휴우, 휴악은 모두 주살당한다. 그가 가장 걱정한 것은 자기가 죽은 후 태자의 손에서 동생들 이 권력을 빼앗을 것이어서 모두 하나하나 죽여버린다. 휴인은 황제가 보자고 부른 다음에 약을 먹 여 죽여버린다. 그리고는 휴인이 모반했다고 선포한다. 그의 두 아들에 대하여는 관대하게 처리하여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고, 명제의 아들 유욱이 등극하자마자바로 두 사촌을 죽 여버린다. 휴우는 성격이 강렬하여, 나중에 어린 아들이 다루기 힘들 것으로 생각하고 명제는 같이 사냥하는 길에 죽여버린다. 그리고는 말에서 낙마했다고 한다. 휴약은 성격이 온후하고 인간관계가 좋았다. 명제는 강주자사로 보낸 후 건강에 도착했을 때 사약 을 내려 죽인다. 그리고 신하들 중에서도 인심을 얻고 있던 중신 오희, 황친이며 중신인 왕경문에 사약을 내리고, 예 주태수 유암을 죽인다. 유암을 죽인 이유는 정말 황당했다. 명제가 꿈을 꾸는데 누가 유암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고했다는 것이다. 잠이 깨자마자 바로사람을 보내어 죽여버렸다. 휴범은 명제의 손에 죽지는 않았지만, 그 아들이 황제에 오른후 역시 죽임을 당한다. 송문제의 19아들 중에서 요절하거나 병사한 경우를 빼고 화를 면한 사람은 세 사람뿐이다. 황제 두 명과 적국에 투항한 한 명이다. 나머지 11명은 전부 비명에 죽었다. 삼대의 사람들이 다 죽고, 다시 사대의 후손들에게 칼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순서는 삼대를 먼저 죽이고 사대를 죽인 것은 아니었고, 순서에 관계없이 죽였다. 사대의 주요한 사람들은 효무제 유준의 아들과 명제 유욱의 아들들이다. 효무제는 모두28명의 아들을 주었다. 요절한 10명을 제외하고 18명의 아들은 모두 죽었다. 태자 유 자업은 황위를 계승했으니 전폐제( 前 廢 帝 )이다. 자업이 등극할 때 겨우 16세였고 성격이 광포했고, 행위가 괴상했다. 보정대신 대법흥은 거슬린다는 이유로 죽이고, 태재 유의공을 죽이고, 동부이모동 생인 자란을 죽인다. 자란은 효무제의 팔남이다. 자란을 죽인 이유는 그의 모친 은귀비가 궁정을 장 악했고, 효무제의 사랑을 받았었기 때문에 그를 미워했던 것이다. 죽을 때 자란은 10살이었다. 자란 이 죽을 때 하였다는 말은 "내세에는 제왕가에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동모동생 인 사(이십이자)와 여동생도 살해했다. 유자업은 또 다른 동생 삼남 자훈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이유는 문제 의륭, 효무제 유준이 모두 셋 째이면서 태자를 대신하여 황제가 되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를 죽이는 계획을 시행하기 전에 스스로가 먼저 수하에게 피살된다. 남조( 南 朝 ) 송( 宋 )의 황당한 골육상잔 107

108 자업이 죽고 나서 유욱(명제)가 즉위한다. 유욱은 문제의 십일남이고, 폐제 유자업의 숙부이다. 그가 황제에 오르는 것은 원래 법도에 맞지 않았다. 강주자사 자훈은 10살에 불과했는데, 원래 폐제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나중에 주변에서 황제로 옹립하자 명제의 건강정권과 대항하기 시작했다. 자훈의 형제인 자수, 자욱, 자원, 자방이 그쪽에 가담했다. 사실 이들은 모두 어린아이들이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의 손에 놀아나는 것일 뿐이었다. 자훈이 패하고 피살되고 나머지 동생들도 모두 죽었다. 사 남 자수, 육남 자방, 칠남 자욱, 구남 자인, 십일남 자진, 십삼남 자원, 십육남 자맹, 십팔남 자산, 이십일남 자여, 이십오남 자기, 이십육남 자기, 이십칠남 자사, 이십팔남 자열이 모두 죽었다. 남은 것은 이남 자상이었는데, 그도 명자의 아들인 후폐제 유욱이 황제가 되면서 죽임을 당한다. 송명제는 철저하게 청소를 하였는데, 특히 효무제의 후손은 개미새끼 한마리 남겨놓지 않았다. 그러 나, 형제의 정을 생각해서 자기 아들 중 유찬을 효무제의 양자로 넣어주어 제사는 잇게 해주었다. 이런 코미디는 정말 중국특색의 것이 아닐 수 없다. 명제 유욱은 조카와 형제를 죽였고, 공신을 죽였으며, 국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유송왕조가 말일 을 향하고 있었다. 여기에 그의 11명의 아들들도 역시 서로 죽이기 시작하면서 결국 소씨의 제나라 에 정권을 넘겨주게 된다. 명제의 장자인 유욱은 황제가 되나 어린 나이에도 살인본성이 강했고, 부친보다 심했다. 짧은 4년의 기간동안 숙부 휴범과 두 아들을 죽이고, 유경소와 세아들 및 동당 수십인을 죽이고, 숙부 휴인의 두아들 백융과 백유를 죽이고, 공신 고도경을 사약을 내려 죽이고, 대신 두유문, 심발, 손초지를 모 반죄로 죽였다. 심발은 죽기 전에 소황제를 욕했다. "너는 걸주보다 심하다. 하루도 사람을 죽이지 않는 날이 없구나" 결국 유욱이 죽자 권신 소도성( 蕭 道 成 )이 명제의 셋째 아들 유준을 황제로 앉힌다. 당연히 괴뢰황제 였다. 그가 순제( 順 帝 )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도성이 정식으로 송나라를 대체하고 제나라를 설립 한다. 소도성은 황제에 오른 후, 유씨들끼리 완수하지 못한 유씨혈족말살작업을 끝마친다. 유씨의 송나라는 4대에 8명의 황제가 오르고, 짧은 59년의 기간동안 골육상잔의 참혹함은 공전절후였다. 개 국황제 유유의 일곱아들, 사십여손자, 육칠십증손자가 모두 죽었다. 남조( 南 朝 ) 송( 宋 )의 황당한 골육상잔 108

109 삼국시대 사대명마 :25 1. 적토( 赤 兎 ), 답설적토( 踏 雪 赤 兎 ) 삼국시대의 명마를 얘기하자면, 먼저 얘기해야하는 것은 적토마이다. 적토마는 원래 여포가 타던 말 이었다. 나중에는 관우를 따라 전장터를 누볐다. 관우가 전사하자, 이 말은 더 이상 먹지 않고 주인 을 따라 죽었다. 적토마는 "온몸이 아래 위로 불타는 탄처럼 붉었고, 네 발굽은 눈을 밟듯이 하얗다. 조금의 잡털도 없으며 머리부터 꼬리까지 1장이고, 발굽부터 머리까지 높이가 팔척이다. 포효하면 하늘을 오르고 바다에 뛰어드는 형상이었다" 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지. 여포전>>에 나오는데 일찌기 "인중여포, 마중적토'(사람중에는 여포요, 말중에는 적토라)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사서에까지 기재될 정도이니 말로서는 최대의 영예이고, 이 말이 삼국역사상 어떤 지위를 지녔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삼국의 역사를 통틀어 적토를 가졌던 이는 최고의 영웅호걸이었다. 2. 적로( 的 盧 ) 삼국시대에 유비가 타던 말이다. 이 말을 무척 빨랐다고 한다. 삼국의 역사에서 그가 보인 가장 뛰 어난 활약은 유비를 등에 태우고 수장 넓이의 단계( 檀 溪 )를 뛰어넘어 추격하는 병사를 따돌린 일이 며, 이로써 유비의 목숨을 구한다. 이 한번의 도약으로 적로는 삼국시대 명마의 반열에 오를 수 있 다. 비록 적토마에 비하면 명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역시 삼국시대에 상당한 명성을 누린 말이다. 나중에 송나라때의 신기질( 辛 棄 疾 )이 쓴 사에서 "마작적로비쾌, 궁여벽력현경( 馬 作 的 盧 飛 快, 弓 如 霹 靂 弦 驚, 말이라면 적로와 같이 날듯이 빠르고, 활이라면 벽력과 같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더 유 명해졌다. 3. 절영( 絶 影 ) 일대의 효융인 조조가 타고 다니던 말이다. <<위서>>에는 이렇게 기재되어 있다. "공이 타고 다니던 말의 이름은 절영이다." 조조가 장수( 張 繡 )를 정벌하러갔다가 아주 비참하게 패하는데, 이 전투에서 아들 한명(조앙), 조카 한명(조안민), 아끼던 장수 한명(전위) 그리고 아끼던 말 한 마리(절영)을 잃는다. 이 전투에서 조조 는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지만, 절영에 의지하여 목숨을 건진다. 삼국시대 사대명마 109

110 절영은 원래 한혈보마이며, 이 말은 몸에 화살을 세 개나 맞고도 날듯이 달렸다고 한다. 원래 절영 이라는 이름은 너무 빨라 그림자가 따라오지 못한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나중에 눈에 화살을 맞 고서야 쓰러진다. 그러나, 절영은 조조의 목숨을 구함으로써 자기의 사명은 다한다. 4. 조황비전( 爪 黃 飛 電 ) 조조의 애마. 크고 위풍이 당당했으며, 모양이 장엄했다고 한다. 오로지 조조와 같은 패웅만이 이러 한 말에 어울렸을 것이다. 이 말의 모습이 고귀하고 비범하였으므로 조조는 매번 개선할 때마다 이 말을 타서 다른 사람과는 다른 위풍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 말은 말굽이 황금과 같고, 달리는 것이 번개와 같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삼국시대 사대명마 110

111 흉노( 匈 奴 ) 명칭의 유래 :24 흉노 라는 단어는 외국어를 번역한 용어이다. 중국고대문헌에서 흉노 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아래의 몇 가지 서적에서이다: 첫째, <<전국책.연책>>을 보면, 진나라의 장군 반어기가 반란을 일으켜 연나라의 태자단에게 도망을 치는데, 연나라의 태부 부국무는 태자단 에게 반어기를 받아들이지 말고, 반어기에게 흉노로 도망치도록 하자고 한다. 그러나 태자단은 단은 강국인 진나라가 압력을 가한다고 하 여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버려서 흉노로 보낼 수는 없다 고 말한다. 이 사건은 진시황19년에 발생했다(기원전227년) 둘째, <<사기.진본기>>를 보면, 진혜왕후칠년, 한, 조, 위, 연, 제가 흉노와 함께 진나라를 공격하다 라는 내용이 있다. 이는 기원전318년에 발생했다. 셋째, 한나라초기의 정치평론가인 가의( 賈 誼 )의 <<신서>>에는 대량의 흉노 라는 단어가나타난다. 넷째, <<일주서.왕회해>>에는 흉노교견( 匈 奴 狡 犬 ) 이라는 네 글자가 있고, 책의 뒤에 첨부로 붙여놓은 <<성탕헌령>>에는 북방의 13개 이민 족을 열거하고 있는데, 바로 공동, 대하, 사차, 고타, 단략, 맥호, 융적, 흉노, 누번, 월지, 섬리, 기룡, 동호 이다. 아래에서 이를 분석해보자. <<일주서>>는 진( 晋 )나라 태강2년(281ss)에 발급군의 고묘를 도굴해서 얻은 것이다. 이 묘는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전국시대 위나라 안리왕 의 묘이다. 위나라 안리왕은 기원전243년에 사망했다. 18년후에, 위나라는 진나라에 멸망한다. 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전국시대 말기라는 것 이다. 일반적으로 이 책은 전국시대 말기의 인사가 쓰면서 상,주 시대의 일을 논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여기에 서역의 제국중 사차( 莎 車 )등이 나오는데 이는 장건이 서역에 사신으로 가고 나서야 중국인들이 알게 된 것인데, <<일주서>>의 작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이에 따라, 어떤 사람은 <<일주서.왕회해>>가 후세인의 위작인데, <<일주서>>에 붙어서 후세에 전해진 것일 뿐이라고 보기 도 한다. 어찌되었건, <<일주서>>가 전국시대 말기의 작품이라는 것은 비교적 믿을 만하다. 다만, 우리는 <<일주서>>이외에, 전국말기의 다른 저작에서는 흉노 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찾을 수 없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북방의 유목민족부락은 왕왕 호맥( 胡?) 혹은 호 ( 胡 ) 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이를 보면 전국시대 말기에 이미 흉노 라는 단어가 나오기는 했지만, 아직 널리 쓰이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흉노 라는 명칭은 한나라초기에 저명한 정치평론가이자 문학가인 가의가 저작에서 대량으로 사용하게 된다. <<사기>>의 작자인 사 마천, <<전국책>>의 작자인 유향은 모두 가의보다 후대의 사람이다. 그들의 저작에서 흉노라는 단어를 쓴 것은 모두 가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흉노 라는 두 글자는 글자 자체만 보더라도 좋은 뜻으로 쓰지는 않았다. 원래 부르는 이름이 있었을 것이고, 이것은 원래의 발음을 참고 하여 만든 것일 것이다. 우리가 현재 미국( 美 國 ) 가구가락( 可 口 可 樂 ) 이라고 한자로 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만, 이 둘은 좋은 뜻 의 글자를 골라서 한자로 만든 것이고, 흉노( 匈 奴 ) 라는 것은 좋지 않은 의미의 글자를 모아서 만든 것일 뿐이다. 유럽에서 흉노의 후예에 대한 칭호는 Huns 이다. 훈 족인 것이다. 고대 한어에서, 흉( 匈 ) 과 호( 胡 ) 는 발음이 비슷했다. 즉, Huns 의 앞부분 hun 과 비슷한 것이다. 아마도 호 가 흉노 의 정상적인 음역이었을 것이고, 흉 은 악의적인 음역이었을 것이다. 흉노 라는 것은 흉의 노예 라는 뜻이니 악의적인데다가 악의적인 것을 더한 음역이었을 것이다. 흉노( 匈 奴 ) 명칭의 유래 111

112 만일 이상의 추리가 정확하다면, 전국말기의 저작자의 글에서 나오는 호 또는 호맥 은 후세의 흉노 를 가리키는 것이다. 즉, 이 전 국시대에 굴기하기 시작한 유목국가의 2개의 한자표기는 한편으로는 호 또는 호맥 으로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흉노 라고 한 것이 다. 하나는 객관적 음역이고 하나는 악의적 음역이다. 진,한 시대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쓰였다. 다만, 이때 흉노가 중원을 자주 침략했기 때 문에 가의와 같은 사람이 그들을 흉노 라고 불러버린 것이다. 이렇게 부름으로써 그들에 대한 분노의 뜻을 표출했던 것이다. 후세에도 이 를 따라서, 흉노라는 명칭이 계속 전해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흉노족 들도 한족과 교류할 때는 스스로를 흉노 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이 있다. 서한말기에 왕망은 흉노를 강제로 항노( 降 奴 ) 라고 고쳐부르게 한 적이 있다. 선우( 單 于 )는 복우( 服 于 ) 로 고치게 했다. 흉 자조차도 쓰지 못하게 한 것이다. 원래 선우( 單 于 ) 는 탱리고도선우( 撑 梨 孤 塗 單 于 ) 의 줄임말이다. 탱 리 는 하늘( 天 )을 뜻하고, 고도 는 아들( 子 )을 뜻하며, 선우 는 넓고 크다( 廣 大 ) 는 뜻으로 수식어이다. 탱리고도선우 를 줄인다 면, 당연히 탱리고도 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런데, 한어의 규칙에 따라 전반부를 수식어로 보고 줄여버리고, 후반부의 형용사를 오히려 주 체로 인식하여 남겨버렸던 것이다. 호 라는 칭호는 진한시기에는 동시에 사용되었다. 예? 들어, 동호( 東 胡 ) 도 동호부족의 자칭은 절대 아니다. 한족들이 그들을 부른 칭 호일 뿐이다. 그 뜻은 동쪽의 호인(오랑캐) 혹은 호(흉노)의 동쪽에 사는 부족 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흉노의 동쪽에 살았고, 이는 흉노에 대한 상대적인 위치를 표시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나중에 호 의 의미는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 이민족 특히 북방의 이민족을 통칭하여 호 라고 부르는 것이다. 흉노( 匈 奴 ) 명칭의 유래 112

113 칠국지란( 七 國 之 亂 ): 바둑 한 판에서 비롯된 내전 :23 글: 월초( 越 楚 ) 한경제( 漢 景 帝 ) 3년(기원전154년), 오왕( 吳 王 ) 유비( 劉?)는 초왕( 楚 王 ), 조왕( 趙 王 ), 교서왕( 膠 西 王 ), 교동왕( 膠 東 王 ), 치천왕(? 川 王 ), 제남왕( 濟 南 王 )과 결탁하여 공동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역사에서 칠국지란 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이 대란의 도화선은 한경제 유계( 劉 啓 )의 사부인 조착( 晁 錯 )에게서 비롯된다. 조착은 <<삭번책( 削 藩 策 )>>을 내놓는데, 이는 오왕등 제후왕들의 봉지( 封 地 )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반군에서는 청주 조착, 이청군측( 請 誅 晁 錯, 以 淸 君 側, 조착을 주살하여 황제의 측근에서 간신을 제거해 달라고 청하다) 의 깃발을 내걸고, 병력을 일으켜 조정 을 압박했다. 유계는 어쩔 수 없이, 일찍이 조착과 원한이 있던 원앙( 袁?, 전 오나라 재상)의 계책을 받아들여, 시중을 순찰한다는 명목으로 은사 조착을 동시로 유인하여 요참( 腰 斬 ) 해 버린다. 가련한 조착은 이렇게 억울한 귀신이 된다. 유계는 원래 졸을 버려서 차를 지키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조착이 죽었는데도, 유비는 전혀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심하게 굴었다. 스스로 동제( 東 帝 ) 라 칭하며 황위를 빼앗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했다. 사실, 이 대란의 도화선은 바로 유계 본인이 매설한 것이다. 그 원인은 바로 육박( 六 博 ) 의 승부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이는 중국역사상 바둑 한판으로 인하여 일어난 가장 유명한 내란이라고 할 수 있다. 조착은 그저 그 도화선에 불을 붙 인 것일 뿐이다. <<사기. 오왕비열전>>을 보면, 이 유비는 한고조 유방의 형인 유중( 劉 仲 )의 아들이고, 한고조12년(기원전195년)에 오왕에 봉해진다. 당시 관상을 보는 사람이 유방에게 오십년후에 동남에서 반드시 난이 일어날 것이다 라고 얘기했는데, 그 의미는 오왕 유비에게 반 골 이 있다는 뜻라고 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는 분명히 후세인들이 가져다붙인 것일 것이다. 유계가 태자로 있을 때, 오나라의 세자가 경성으로 가서 한문제를 접견했다. 그 동안 태자 유계가 함께 놀아주면서 육박 이라는 놀이를 했다. 이 육박 은 육박( 陸 博 ) 혹은 박( 博 )이라고도 하는데, 가장 오래돤 바둑이라고 할 수 있다. 출토문물을 보면, 육박은 기국( 棋 局, 즉 棋 盤 ), 바둑돌, 저( 箸, 주사위) 및 박주( 博 籌 )로 구성된다. 놀이방법은 주로 대박( 大 博 )과 소박( 小 博 )의 칠국지란( 七 國 之 亂 ): 바둑 한 판에서 비롯된 내전 113

114 두 가지가 있다. 서한 및 그 이전에는 대박의 방법이었느? 효( 梟 ) 를 잡으면 이기는 것이다. 육박을 하는 쌍방이 각각 자신의 바둑판에 6 개의 돌을 놓아두는데, 그중의 하나가 효 이고 나머지 5개는 산( 散 ) 이라고 부른다. 저( 箸 ) 6개를 쓴다. 쌍방이 돌아가며 저 를 던져서, 저 의 수량에 따라 바둑돌을 옮기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상대방의 효 를 잡으면 승부가 난다. <<한비자>>에서 얘기한 박자귀 효, 승자필살효( 博 者 貴 梟, 勝 者 必 殺 梟 ) 이는 장기에서 왕을 잡아야 이기는 것과 비슷하다. 육박을 좋아하던 태자 유기와 오나라 세자는 바둑판 위에서 결투를 벌인다. 유비의 아들이 모신 스승은 모두 초나라 사람이었으므로, 성격이 광망하고 오만하며, 호승심이 강했다. 바둑놀이를 하면서 서로 이기겠다고 싸우다보니 태도가 좋지 못하고, 말도 불손했다. 황태자를 무시하는 것같았다. 유계는 화가나서 바둑판으로 오나라 세자를 내려친다. 급소를 맞았는지, 세자는 죽어버린다. 조정은 오나라 세자의 영구를 오나라로 돌려보내 장사지내게 한다. 유비는 분노하여 소리쳤다: 천하는 유씨일가의 천하이다. 장안에서 죽었 으면 장안에서 묻어라.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영구를 다시 장안으로 돌려보낸다. 이때부터, 유비와 유계간의 원한은 맺어지고, 유비에게는 모반을 일으키겠다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유비는 처음에는 병을 핑계로 가을에 장안으로 가서 황제를 배알하는 예를 행하지 않고, 그저 사신을 보내어 참가하게 했다. 한나라때 제후왕은 매년 황제를 만나서 업무보고를 하여야 했다. 이 제도는 주나라때부터 시작되었고, 이는 천자와 제후간의 일종의 약속인 셈이다. <<맹자>>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제후가 천자를 배알하는 것을 술직( 述 職 )이라고 한다. 한번 배알하지 않으면 작위를 강등시키고, 두번을 배알하지 않으면 그 땅을 빼앗고, 세번을 배알하지 않으면 군대를 끌고 가서 친다. 이를 보면 제후가 감히 황제를 배알하지 않는 것은 죽을 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유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했다. 이는 이미 죽기를 각오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조정은 오나라 사신을 구금하고 심문했다. 사신은 그저 사실대로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유비가 아들을 잃고나서 마음 속으로 두려움이 일어나서 병이 들었다고. 마음이 인자했던 한문제는 아마도 유비가 아들을 잃은 고통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유비를 회유하려는 생각에서, 그냥 용서하 고, 유비에게 궤안(? 案, 벽에 세워놓고 몸을 기대는 방석)과 괴장( 拐 杖, 지팡이)를 하사하며, 유비는 나이가 많으니 다음부터는 배알하러 오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이렇게 하여 평정되었고, 유비는 그후 이십년간 조정에 배알하러 가지 않는다. 그러나, 유비의 유계에 대한 원한은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복수하겠다는 마음과 모반을 일으키겠다는 마음은 그대로였다. 항상 유계의 자리 를 빼앗겠다고 생각을 했다: 유씨의 천하이니, 황제도 유씨들이 돌아가면서 해야 한다 오나라는 구리( 銅 )가 났고, 바닷가였다. 그리하여 유비는 전국각지의 유랑민들을 끌어모아 동전을 만들고, 소금을 만들었다. 오나라에서 만든 칠국지란( 七 國 之 亂 ): 바둑 한 판에서 비롯된 내전 114

115 동전이 전국으로 유통되어, 오나라의 국력은 중앙조정에 필적할 만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니, 오나라는 국내에서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일을 시키면 유비는 그들에게 대가를 주었고, 별도로 사람을 사 서 일을 시켰다. 명절때가 되면, 그는 돈을 풀어서 선비들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므로, 유비는 오나라에서 명망이 아주 높았다. 거병시에도 그가 명을 내리자 바로 이십여만명이 모여든다. 오나라로 도망와 있던 다른 나 라이 도망범들도 모두 유비가 길렀다. 다른 나라의 관리가 오나라로 들어와서 체포하려고 하면, 유비가 이를 막아주었다. 그러니 이들은 모두 유비의 은혜에 감격했고, 그를 위하여 기꺼이 견마지로를 다하려 했다. 유비는 그외에도 금은보물로 다른 제후왕, 대신들을 회유했다. 이를 보면 유비는 계속하여 모반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문제가 재위하고 있을 때에는, 유비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첫째는 한문제는 자신에게 잘 대해주었고, 둘째는 반란을 일으킬 적합한 이유 가 없었다. 당시 조착은 여러 번 상소를 올려 한문제에게 유비의 죄를 물으라고 요청하나, 한문제는 차마 유비를 징벌하지 못한다. 유계가 즉위한 후, 그는 일찌감치 유비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므로 하루빨리 삭번( 削 藩, 번국을 없애는 것)을 할 것을 주장했다. 조착은 유계 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비는 오늘 삭번해도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삭번하지 않아도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삭번하면 반란을 빨리 일으키 고, 그 화도 작지만, 삭번하지 않으면, 반란이 늦어지지만, 그 화는 더 클 것이다. 조착의 뜻은 황제인 유계 당신이 유비의 아들을 때려죽인 이후로, 유비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이미 마음을 굳혔다. 반란을 일으키는게 늦어지 면 질수록 그 화는 더욱 커진다. 그러니 아예 빨리 반란을 일으키도록 한 후에 진압하는게 낫다는 것이다. 이를 보더라도 칠국의 난 을 일으킨 진정한 도화선은 바로 그 육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착의 역할이라는 것은 그저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일 뿐이다. 서한에 발생한 칠국의 난 은 최종적으로 유계의 동생인 양왕( 梁 王 ) 유무( 劉 武 )가 전력을 다해서 막아내고, 태위 주아부( 周 亞 夫 ), 대장군 두영( 竇?)이 삼십육만의 군대를 이끌고 반군의 식량통로를 단절시키고, 3개월만에 평정한다. 칠국지란( 七 國 之 亂 ): 바둑 한 판에서 비롯된 내전 115

116 실크로드: 동서문명의 상호오해 :22 진한( 秦 漢 )과 로마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멀리 떨어진 곳의 상대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진한은 로마를 대 진( 大 秦 )이라고 불렀고, 로마는 진한을 세레스(Seres)라고 불렀다. 그들의 눈에, 상대방은 모두 '전설상의 국가'였다. 이 두 개의 전설상의 국가를 연결한 것은 후세인들이 실크로드(비단길)라고 부르는 상인의 길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실크로드를 통한 연결은 그저 간접적인 연결 이었을 뿐이다. 1. 소통 전성시대, "나라"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다. 기원전 3세기이래, 한나라와 로마는 둘 다 경제가 번영하고, 문화가 발달한 고대제국이었다. 높은 산과 넓은 사막으로 서로 떨어져 있었다. 비록 그러했찌만, 한족은 로마에 호감이 충만했고, 그들을 "대진"이라고 불렀다. <<후한서. 서역전>>에서는 그 인민은 모두 장대평정( 長 大 平 正 )하여, 중국과 유사하다. 그래서 "대진"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손기는 "로마와 중국을 어깨를 나란히 하는 파트너라고 묘사했다. 이것이 분 명한 증거이다" 기원전221년, 진시황은 육국을 통일한다. 그후, 한무젠느 강토를 적극 개척했고, 북으로 흉노를 격파하여, 천산남북을 장악한다. 동으로는 조 선반도에까지 이르고, 남으로는 월남, 버마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고대로마도 가장 전성기였다. 영토가 가장 넓었을 때는 기원116년이다. 그 해에 로마의 오현제( 五 賢 帝 )중의 하나인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을 정복했다. 두 제국의 전성시대에 그들간에는 단지 박트리아와 파르티아( 安 息 國 )이라는 양대제국과 일부 소국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양쪽으로는 유럽과 동아시아의 거의 절반을 양대제국이 나누어 점거하고 있었다. 장안성에서 출발하여, 초원, 고비사막을 지나서 교류하면서 한나라와 로마는 관계를 맺기 시작했따. 2. 중전( 中 轉 ) 비단길, 간접교류 다만, 기원전2세기중엽까지는 비단길을 거치는 동서무역이 아주 드물고 소규모였다. 중간중간 끊어지고 중간을 거치면서 진행되었다. 기원전138년, 흉노와 원수지간인 대월지( 大 月 氏 )와 연합하여 공동으로 흉노를 치기 위하여, 한무제는 장건을 서역에 사신으로 보내는 모험을 한다. 십여년후, 장건은 다시 사신으로 떠난다. 부사는 심지어 안식(이란)까지 도달한다. 이때부터, 중국과 서아시가간의 육상교통노선이 정식 으로 개통된다. 한나라와 로마제국은 동방과 서양의 경제, 문화교류의 막을 열었다. 은은히 들리는 낙타의 방울소리 속에서 그 막이 열린 것 이다. 그러나 진한과 로마의 교류는 많은 학자들이 보기에 그저 간접교류에 불과했따. 한 구간 한 구간, 한 나라 한 나라를 연결시킨 것이다.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중외관계사, 서역사를 연구하는 경승은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동한 한화제때 반초는 감영을 대진에 사신으로 보낸 적이 있고, 도중에 조지( 條 支 ), 안식등 여러나라를 지나 페르시아만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기가 어려워 돌아왔기 때문에 로마까 지는 가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에 두 나라간에는 아직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다. 최종적으로 아시아내륙을 관통하는 동서의 육상교통노선은 장안을 기점으로 하여, 하서주랑, 신강, 중앙아시아를 거쳐, 안식에 이르고, 안식에 서 서아시아를 거쳐 유럽에 이르렀다. 전체길이는 7000여킬로미터이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할 점은 "진한시기의 교류는 비록 간접교류이기는 하지만 동로마지역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경승은 당시의 동로마지역은 시리아, 이라크등지라고 말한다. 중국의 비단, 철기등의 물품이 계 실크로드: 동서문명의 상호오해 116

117 속하여 서방국가로 수출되었고, 서방의 물산도 이 문화전파의 길을 따라 중국에 들어왔다. 19세기하반기,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이 육상교통노선을 실크로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후 국내외사학자들은 이 설을 지지했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3. 지선( 支 線 ) 해상무역, 아마도 존재했었던 듯. 육로교류이외에, 해상항선도 점점 학자들의 집중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중국에서 유럽으로 가려면 남해에서 인도양으로 가서 서북으로 홍해 로 간다; 홍해와 지중해의 사이에는 좁은 수에즈해협이 가로막고 있다. 혹은 뱃머리를 돌려 서남으로 가서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대서양으로 가서 북으로 가면 유럽이다. 이 항해라인은 아주 길다. 현대학자도 <<한서.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해상비단길"의 역사적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일남 장색, 서문, 합포에서 배로 5개월을 가면 도원국이 나온다; 다시 배를 타고 4개월을 가면 읍로몰국이 나온다;...부감도로국에서 배로 2개월여를 가면 황지국이 나온다; 황지국은 민속 이 주애( 朱 崖 )와 유사하다...황지의 남에는 기정불국이 있다. 한나라의 사신이 여기서 돌아갔다." <<한서. 지리지>>에 기록된 해상항로는 대체로 남해로 인도양으로 가는 길이다. 황지국은 사학계에서 아마도 지금 인도 동남부의 Conjeeveram이라고 추정한다. 기정불국은 지금의 스리랑카로 추정한다. 중국의 해상운송화물은 인도를 거쳐 서쪽으로 운송되어 유럽까지 간다. 그러나, 이 해상노선이 정말 당시의 상업항로였는지는 학술계에서 지금까지 논쟁이 있다. 양홍은 조선술의 한계로, 진한시대에 해로무역이 있 었는지는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고고학자가 보기에, 역사의 환원은 사서기록외에 고고실물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육로무역은 우리 가 출토문물을 통하여 한 구간 한구간의 노선을 고증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출토문물을 보면, 진한시기의 해상비단길의 노선도는 환원시킬 수가 없다." 4. 오해 비단은 나무에서 열리는 것이다. 로마인들은 진한을 세레스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진한의 비단을 아주 좋아했기 때문이다. 세레스는 비단의 나라라는 뜻이다. 동한초 기에 누란국은 이미 한나라에서 직조한 "장수명광금( 長 壽 明 光 錦, 남색 바탕에 황색, 갈색, 녹색의 삼색의 실로 가로방향의 운뢰문을 나타내고, 가운데 호랑이, 용, 벽사등의 상서로운 동물을 채웠으며, 중간에 소전체로 '장수명광'이라는 길상어를 써놓았다)" 그리고 누란은 비단길의 중 요한 통과지점이다. 로마인들은 특히 중국의 비단제품을 좋아했다. 공화국말기의 케사르는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극을 보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이는 중국과 서양의 교류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야기이다. "이때 비단은 로마에서 잘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제국시기에 이르러, 로마성내의 두스크스지구에 이미 중국비단을 파는 시장이 나타난다. 2세기때, 비단옷을 입는 것이 유행했고, 이는 더욱 서쪽에 있는 브리튼까지 전파되었 다." 그러나, 피차간에 직접교류가 없으므로, 반복되는 중간상인을 거쳐, 로마제국에 도달한 한나라의 비단은 신비화되었따. "로마인은 심지어 비 단이 나무위에서 열리는 것으로 알았다" 경승은 그때는 로마와 직접 거래하는 서아시아 상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비단을 신비화하였다고 말한다. 사는 사람이 있으면, 자연히 파는 사람도 있다. 서방인과 인도양 연안의 상인들은, 주보( 珠 寶 )와 유럽의 상품을 가지고 광주로 왔다. <<사기. 화식열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번우( 番 禺 )도 큰 도시이다. 주기, 서각, 대모, 과일, 포( 布 )등이 많다" 당시 로마는 유리제품으로 유명했다. 실크로드: 동서문명의 상호오해 117

118 진한시대의 유적지에는 로마의 유리제품이 일부 출토되고 있다. 광주 소북로 횡지강 1호의 서한중기묘에는 3건의 유리그릇이 출토되었따. 동위원소 X선분석에 따르면, 인산칼슘 유리계통이고, 제작방식, 원 소성분으로 판단하면, 그것은 지중해 로마에서 기원전 1세기에 만든 유리제품이다. 세상은 평등해졌다. 사람들은 나무에서 비단을 수확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중국인도 유리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비단과 유리에 새겨진 동서문명의 차이는 시종 없애지 못했다. 실크로드: 동서문명의 상호오해 118

119 한( 漢 )나라와 로마제국의 비교 :21 기원전후의 수백년간, 고대세계에는 두 개의 '초강대국'인 한나라와 로마제국이 병존하고 있었다. 기원전2세기에서 기원후2세기까지는 고대세계사상의 중요시기이다. 이전 100년간 유라시아대륙에는 풍운이 일었다. 마케도니아 알렉산더대왕 의 제국,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인도통일, 중국 진나라의 짧은 흥성: 이 셋은 모두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 세 제국이 해체된 후, 서로는 지중해 에서 동으로는 중국동해에 이르는 광활한 유라시아대륙은 어떻게 세계질서를 새로 세울 것인지의 이슈에 직면하게 된다. 한나라(서한과 동한)는 기원전3세기말에 흥성하여, 기원후3세기초에 멸망한다. 중국을 약 400년간 통치한다. 거의 동시에 로마제국이 흥기하 고, 점차 지중해문명지역을 장악하며, 대제국을 건설한다. 기원3세기부터 쇠퇴하여 467년에 노르만의 침입으로 멸망한다. 한나라는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했다. 서한과 동시에 흥기한 흉노제국은 한나라를 위협했을 뿐아니라, 하서주랑의 서역각족을 위협 했다. 월지는 이들의 위협하에 서쪽으로 이주하고, 이는 중앙아시아 셈족의 이주를 유발시키며, 결국 쿠샨왕조를 만든다. 한나라는 흉노와의 장기적이고 험난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기원1세기말, 북흉노는 서쪽으로 이주하고, 남흉노는 한나라에 귀부하여, 점차 농경생활로 전환 한다. 북흉노는 동유럽까지 치고 들어가, 4세기말에 노르만의 대이동을 낳고, 결국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이끈다. 한나라와 로마제국의 비교 기원1세기 내지 2세기에 세계에는 로마, 파르티아( 安 息 ), 쿠샨, 한나라의 4대제국이 존재했다. 영토, 인구, 경제, 문화의 발전수준으로 보아, 로마제국과 한나라의 실력이 가장 컸고, 서로 비슷했다. 인구는 각각 5천만명이상이었다. 다른 두 제국은 이 둘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였다. 본문에서는 기원전후 수백년간 세계에 웅거했던 한나라와 로마제국이라는 두 초강대국을 비교해보자: 로마제국은 정복으로 만들어지고, 한나라는 통일로 만들어진다. 로마제국과 한나라는 모두 개척형이고 대외통상을 중시했다. 로마제국은 행성제( 行 省 制 )를 채택했고, 한나라는 군현제( 郡 縣 制 )를 채택했다 로마제국은 다민족다문화이고, 한나라는 한민족과 한문화가 절대우세를 점했다. 로마제국은 노르만등 이민족에 망했지만, 한나라는 흉노를 제압했다. 로마제국의 창건은 정복으로, 한나라의 창건은 통일로 한나라와 로마제국은 모두 전쟁과정에서 탄생한다. 다만 로마제국의 경우는 무력정복이라면, 한나라는 무력통일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로마제국의 광대한 판도는 로마공화국후기의 정복으로 확보한 영토를 기반으로 계속 확장하여 얻은 것이다. 일찌기 공화국전기에 로마는 하 나의 도시국가로 성과 주위의 사람을 '공민'으로 불렀다. 그리고 패전후에 로마와 동맹을 맺은 라틴인과 이탈리아인들이 동맹자였다. 기원전 227년에 시칠리아에 행성을 건립할 때 시칠리아인들을 신민( 臣 民 )으로 삼았다. 공화국말기, 라틴인과 이탈리아인은 모두 로마공민권을 취득한 다. 행성의 수도 대폭 증가한다. 로마제국이 정식 형성된 후에도, 공화국시기의 전통을 이어간다. 로마는 정복자이고, 법률상 로마공민이 국가 권력의?이다. 행성의 신민은 피정복자이고, 행성은 '로마공민의 재산'이다. 행성의 도시는 왕왕 서로 다른 대우를 받았는데, 통상적으로 지방 한( 漢 )나라와 로마제국의 비교 119

120 자치권을 누렸다. 행성 도시주민의 지위는 거의 동맹자에 상당하였다. 신민과 공민의 중간상태였다. 기원 1세기 내지 2세기에 로마공민권은 점차 행성의 더 많은 주민들에게 부여된다. 기원 3세기초, 로마제국의 경내의 모든 자유민은 공민권을 취득한다. 다만 이때 로마제국은 이미 군벌통치하에 있었고, 공민권은 이미 의미가 크지 않았고, 오히려 부담이 되었다(공민은 군에 입대하는 의무가 있었음). 한나라는 진나라의 계승자이다. 진시황이 6국을 멸망시킨 후, 진나라백성은 다른 6국의 백성들보다 높은 신분적인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진 나라의 백성은 모두 '검수( 黔 首 )'라고 불렀는데,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구분이 없었다. 한고조 유방은 원래 초( 楚 )나라 사람이고, 반란군을 이 끌고 관중으로 들어가서 진나라를 멸망시킨다. 그리고 관중의 지지를 받아 동방의 항우를 패퇴시키고, 마침내 관중의 장안에서 건국한다. 유 방은 초나라사람들을 '정복자'로 삼고, 진나라사람을 '피정복자'로 삼을 수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한나라의 경내에, 왕후귀족과 노예 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편호제민( 編 戶 齊 民 )'하였다. '편호'는 호적을 만들어 편입시키는 것이고, '제민'은 백성을 동등하게 대우한 다는 뜻이다. 편호제민은 로마공민처럼 참정특권을 갖지도 못했고, 로마행성신민들처럼 정치권리가 배제되지도 않았다. 한나라의 백성은 서로 다른 '작위( 爵 位 )'를 받았다. 작위가 낮은 자는 민( 民 )이고 작위가 높으면 관리가 되었다. 절대다수의 작위가 있는 '제민'은 그저 '민'이었다. 그러나, 원칙상 작위는 단계가 있었고, '제민'에게도 개방도어 있었다. 그러므로, 한나라의 건립으로 각지의 편호제민은 통일된 것이고 정복당 한 것이 아니었다. 로마제국과 한나라는 모두 개척형이고 대외통상을 중시했다 로마제국은 그리스화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의 기초위에서 계속하여 외부로 확장했다(특히 지중해서부 카르타고등의 지역). 한나라도 진나라의 영토기반위에서 계속 외부로 확장했다(특히 서역지역) 고대에 동서간에는 중요한 상업도로가 있었다. 즉 '비단길(silk road)'이다. 이는 한나라와 로마제국의 교통명맥이었다. 기원전2세기이전에는 파미르고원의 서쪽은 길이 열렸으나, 파미르고원의 동쪽인 중국경내는 아직 개척되지 않았었다. 기원전 138년, 한무제의 명을 받들어, 장건이 월지국에 사신으로 가다가, 중간에 흉노에 붙잡혔다 기원전 126년에 비로소 귀환한다. 기원전 121년, 119년에 곽거병, 위청은 한나라의 군대 를 이끌고 두 차례에 걸쳐 흉노를 대파하고, 하서주랑( 河 西 走 廊 )을 확보하며, 흉노를 멀리 막북으로 쫓아보낸다. 이때 장건은 다시 명을 받아 오손국(오늘날 Balkash호수 동남쪽의 이리강 유역)에 사신으로 떠난다. 사마천의 <<사기>>는 장건의 두 차례에 걸친 사신행을 "착공( 鑿 空, 구멍뚫기)"라고 표현했다. 이는 바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건이 개척한 "비단길"의 동쪽부분은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두 갈래로 나뉜다. "옥문, 양관(돈황서쪽)에서 서역으로 나가는 길이 두 갈 래이다. 선선(오늘날 신강 약강일대) 방남산(오늘날 아르긴산, 곤륜산), 북파(순착)강(두 산의 북쪽의 여러 강이라는 뜻임)으로 서쪽으로 가 서, 사차(지금의 신강 사차)로 가는 남쪽길: 남쪽길은 서쪽으로 파미르고원을 넘어 즉 대월지, 파르티아로 간다. 차사의 앞에서 왕정(지금의 신강 투루판서쪽), 수북산(지금의 천산), 파하(지금의 타림강)으로 서쪽으로 가면, 수륵(지금의 신강 카슈카르시)에 이르는 북로가 된다: 북로 는 서쪽으로 파미르고원을 넘어 대완(지금의 Farghana), 강거(지금의 Balkash호수와 아랄해의 사이), 엄채(지금의 아랄해와 카스피해의 중 간쯤) 언기로 나간다. 이 두 갈래의 길은 모두 천산이남이다. 북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이북으로 타림강을 따라 서행하는 것이고, 남로는 타클 라마칸사막의 남쪽으로 아르긴산, 곤륜산의 북록의 강물을 따라 서행하는 것이다. 장건이 처음 사신으로 갈 때는 흉노로부터 벗어나 대완, 강 거, 대월지를 지나 대하( 大 夏 )에 이르렀다. 그가 갔던 길은 <<한서. 지리지>>에서 말하는 북로이다. 돌아올 때는 '병남산'으로 왔다고 되어 있 으니, <<한서. 지리지>>에서 말하는 남로임에 틀림없다. 두 길은 모두 장건이 연 것이다. 사실 이 두 길 외에 천산이북에도 또 하나의 길이 있다. 장건이 두번째 사신으로 나갈 때에는 내지에서 직접 오손으로 갔고, 오손에서 각각 부사를 나누어 대완, 강거, 월지, 대하로 보낸다. 이 렇게 하여 그들은 다시 천산이북의 길을 하나 더 뚫었다. 다만, <<한서. 지리지>>에는 이 천산북로에 대하여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동한시 대에 반초가 서역을 경영했는데, 일찌기 기원97년에 감영을 대진(로마제국)에 보낸다. 감영은 파르티아서쪽까지 이르고, 강을 건너고자 하나 (비잔틴을 향하여), 안식의 서쪽에 있는 뱃사람들에게 저지당하여 실현되지 못한다. 이는 한나라의 사신이 '비단길'을 따라 가장 서쪽까지 간 기록이다. '비단길'이 개통된 후, 한나라의 비단은 대량으로 서방에 팔린다. 로마제국에서는 귀족들과 부호들이 옷과 장막용으로 많이 사용했다. 이외에 한( 漢 )나라와 로마제국의 비교 120

121 중국의 철기, 칠기등도 서방에 수출된다. 로마제국의 유리제품, 모직품, 인도의 보석, 향료등도 '비단길'을 통하여 한나라에 수입된다. 이외에 불교도 이 길을 따라 한나라때 중국에 유입된다. 동시에 유입된 것은 간다라미술이다. 육로이외에 <<한서. 지리지>>의 끝부분에는 한나라가 서방과 통한 '해상비단길'을 소개하고 있다. 이 해로는 아주 중요하다. 특히 육상 '비단 길'이 막혔을 때는 그렇다. 예를 들어, 인도(천축)는 한화제때 여러차례에 걸쳐 사신을 육로로 중국에 보내는데, 동한후기에는 서역길이 끊긴 다. 기원 159년, 161년에 인도사절은 해로로 바꾸어 중국으로 온다. 기원166년, 동로마제국의 사절이 동한제국을 방문한다. 역시 해상 '비단 길'로 왔다. 한나라가 파견한 장건, 반초가 서역으로 가고, 동로마제국의 사신이 중국을 왔다. 중국과 서양은 육로와 해로의 두 '비단길'을 열었던 것이다. 중화문명과 서방문명이 교류를 시작하였으니 시대를 긋는 의미가 있다. 아쉽게도, 한나라와 로마제국이 모두 멸망한 이후, 중서방의 교통은 장기간 막히게 된다. 한나라의 군현제, 로마제국의 행성제 한나라와 로마제국은 모두 광활한 영토를 가진 대국이었으므로, 행정구역을 나눌 필요가 있었다. 로마는 행성제를 실시했고, 한나라는 군현제 를 실시했다. 둘은 모두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지방을 통치하는 것이어서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구체적인 점에서는 양자간에 뚜렷한 차 이도 있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군현제를 계승하여, 중앙이 지방을 직접 통치하는 일련의 행정시스템을 갖춘다. 군에는 군수( 郡 守, 나중에는 太 守 라 함)와 군의 관리 약간명을 두었다. 군의 아래에는 현( 縣 )을 두고, 큰 현에는 현령( 縣 令 ), 작은 현에는 현장( 縣 長 )을 두었고, 각각의 현에도 관리를 약간명 두었다. 관리는 모두 국가가 임명한다. 그리고 제도에 따라 국고에서 봉급을 받는다(오수전과 양식). 현이하의 향( 鄕 )은 향의 삼로( 三 老 )가 다스리는데, '삼로'는 지방관리가 현지백성중에서 선발한다. 명을 받아 현을 관리하고, 국가로부터 봉록을 받는다. 한나라때의 중국에는 자치 혹은 반자치의 도시는 없었다. 한무제이후, 제후왕국도 이름뿐이었다. 그저 서역과 같은 변방지역에서만 군현제가 시행되지 않았을 뿐이 다. 로마제국에서는, 각 행성의 상황이 크게 차이가 있었다. 그들이 받는 대우도 서로 달랐다. 예를 들어, 시칠리아에 설치된 행성은 로마에서 총 독을 한 명 파견하여 그 곳의 로마군대를 통솔했고, 그곳의 최고재판권을 장악했다. 이외에 2명의 재무관을 파견해서 재정세수를 담당했다. 총독과 재무관은 모두 매년 임명되고, 그들의 아래에는 일련의 관료조직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현지의 일은, 여전히 로마총독에 종속하는 각각의 소국이 스스로 관리했다. 행성의 로마제국에 대한 최대의 의무는 로마에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었다. 시칠리아는 거둔 금액의 1/10이 었다. 또한 이집트는 황제의 개인재산으로 되어, 황제가 직접 총독을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총독과 재무관등 고급관리는 로마인이 맡았지만 사람수는 적었다. 그들은 그리스출신의 관리와 세금징수인을 두어 보조하게 하였다. 이집트인들의 원래 기구는 그대로 존속시켰다. 기원 1세 기 내지 2세기때, 적지 않은 행성은 모두 자치 혹은 반자치의 도시를 둔다. 각각 크고 작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로마의 행성 체계에서는 정도는 다르더라도, 지방자치가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이렇게 하여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보면, 로마제국은 한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로마제국의 다민족다문화, 한나라의 한민족한문화 절대우세 로마제국과 한나라는 모두 다민족국가이다. 각각 1 민족이 정치적으로 주도적인 지위에 있었다. 이것은 양자간에 비슷한 점이다. 그러나, 구 체적인 상황을 보면, 양대국은 민족구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 로마족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로마족은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이다. 이탈리아인은 언어, 경제와 문화적으로 로마 한( 漢 )나라와 로마제국의 비교 121

122 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공동으로 천하를 정복한 핵심역량이다. 그리스인은 로마문화의 선구자이다. 그리고 일정한 사회적인 지위가 있다. 로마인은 이탈리아인과 그리스인 이외의 신민을 '야만족'이라고 불렀다. 로마민족은 제국통치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점한다. 그러나, 열 세에 처한 부분도 있었다. 먼저, 그들은 로마제국에서의 인구비율이 소수였다. 한 추측에 의하면, 전체로마제국의 인구는 약 5400만이며, 그중 로마족은 600만이라는 것이다. 겨우 1/9을 점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로마제국에서, 유구한 문화전통을 지닌 동부각족이 있고, 걸출한 문화공 헌을 한 그리스족이 있다. 로마족 자체는 법학에서 공헌을 한 것을 제외하면, 문화적인 면에서는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 하물며, 제국의 '로 마화' 정도도 그다지 심화되지 못했다. 제국의 동부는 그리스어를 통용했으니, 그리스화한 지역이다. 서부는 라틴어를 통용했으니, 로마화지역 이다. 또한 동부, 서부를 불문하고, 라틴어 혹은 그리스어는 정부와 도시에서나 통용되었고, 농촌에서는 여전히 각지의 현지언어를 사용했다. 로마제국은 문화적으로 통일되어 있지 못했으며, 결국 서(라틴어지역)와 동(그리스어지역)의 큰 두 조각 및 그외 일부 작은 조각들로 갈라진 다. 한나라는 한족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족은 선진시기의 화하족( 華 夏 族 )과 이적( 夷 狄 )각족이 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원래 중원지구는 화족과 이족이 섞여서 하는 현상이 보편적이었고, 춘추시대까지는 화족과 이족간의 풍속이 서로 달랐고, 언어도 서로 통하지 않 는 곤란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들어, 화족과 이족의 구별이 중원지구에서 기본적으로 사라졌다. 예를 들어, 중산국( 中 山 國 )은 원 래 이족의 하나인 선우인( 鮮 虞 人 )이 건립한 ㄳ인데, 하북 평산에서 발견된 전국시대 중산왕묘의 명문을 보면, 그들은 화하족과 이미 차이가 없게 되었다. 화이의 교류와 융합으로 형성된 민족공동체가 한나라에 이르러 합쳐서 "한인( 漢 人 )"으로 불리게 된다. 한나라에서 한족은 총인 구의 대다수를 점유한다. <<한서. 지리지>>에 다르면 기원2년(평제 원시2년)의 전국인구총수는 59,594,978명이고, 여기에는 각군,국의 인구수 가 나와 있다. 중원한족거주인 각군의 인구총합계는 한족과 소수민족이 혼거하는 변방지역의 인구총수보다 훨씬 많다. 게다가 서한초기에 일 찌기 북방을 위협했던 흉노를 보더라도 그들의 총인구는 한나라의 군( 郡 ) 하나만도 못했다고 하고 있다. 나중에 남흉노가 한나라에 귀부하여 한나라의 중요한 소수민족의 하나로 되었는데, 총인구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아주 적었다. 한족인구는 한나라의 절대다수를 점했고, 이러한 점에서 로마제국과는 차이가 있다. 한족은 인구적으로 국가의 주체일 뿐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국가의 주류였다. 선진의 찬란한 문화와 한나라의 문화는 일맥으로 전승되어 온 것이다. 한무제는 유가학설을 정통으로 확립하고, 사상 통일로 국가를 통일시켰다. 이는 로마제국의 통치자들이 하지 못한 일이다. 서로마제국은 노르만족에 멸망당하나, 한나라는 흉노를 제압했다. 한( 漢 )나라와 로마제국의 비교 122

123 한선제( 漢 宣 帝 )는 왜 황후의 구족을 멸하였는가? :20 성명: 곽씨( 霍 夫 人 ) 연령: 불상 연대: 서한( 西 漢 ) 신분: 가정주부 곽부인은 이 여인의 실제 성명이 아니다. 알려진 것은 이 여인의 이름이 "현( 顯 )"이라는 것뿐이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기록에 남아 있지 않 다. 그녀가 한선제때의 권신( 權 臣 ) 곽광( 霍 光 )의 부인이었으므로 "곽부인"이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곽부인은 원래 신분이 미천했고, 곽광의 정실부인이 시집올 때 따라온 시녀였다. 곽광을 모시면서 같이 잠자리를 하게 되고, 정실부인이 죽게 되자, 곽광은 그녀를 정실로 삼아서 곽 부인이 된 것이다. 곽부인은 야심이 컸다. 항상 그녀와 곽광의 사이에 낳은 딸인 곽성군( 霍 成 君 )을 황후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황후 허평군( 許 平 君 )은 한 선제의 조강지처였고, 한선제와 허평군은 아주 사랑이 깊었으며, 한선제가 황후를 폐위시킬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한선제와 허평군의 혼인에 대하여 얘기하자면, 한무제 말년의 "무고안( 巫 蠱 案, 무고사건)"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무고안"은 아주 유명하면서도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한무제때의 정치국면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사건이다. "무고안"의 발단은 경성의 대협인 주안세( 朱 安 世 )가 실명으로 승상인 공손하( 公 孫 河 )의 아들이자 관직이 태복( 太 僕 )에 이르렀던 공손경성( 公 孫 敬 聲 )이 양석공주( 陽 石 公 主 )와 사통하였고, 사람을 시켜 무술( 巫 術 )로 한무제를 저주하였으며, 한무제가 자주 지나다니는 감천궁의 길아래 허수아비를 묻어놓았으며, 저주하는 말이 아주 악독했다고 고발한데서부터 시작한다. 양석공주는 한무제의 황후인 위자부( 衛 子 夫 )이 딸이다. 사건 발생후, 공손하 부자는 멸족되었고, 양석공주와 동모자매간인 제읍공주( 諸 邑 公 主 )는 모두 처형되었다. 한무제는 간사한 소인 강충( 江 充 ) 을 보내어 이 사건을 처리하게 하였다. 강충은 원래 태자인 유거( 劉 據 )와 알력이 있었으며, 이 기회를 틈타 태자를 모함하고자 했다 강충은 궁중에 고( 蠱 )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말하면서 오랑캐무당을 시켜 땅을 파보게 했고, 태자의 동궁까지 파보게 되었다. 강충과 오랑캐무당은 태 자궁에 우인( 偶 人 )을 묻어놓은 다음, 오랑캐무당은 술을 땅에 뿌려 범죄현장을 날조했다. 태자궁에서 우인을 파내게 되자, 태자는 무척 두려 워하였다. 그리하여 선발제인( 先 發 制 人, 먼저 손을 써서 상대방을 제압한다)하여, 가짜조서를 만들어 강충이 모반했다고 하면서 강충을 죽여 버리고, 오랑캐무당은 상림원에서 불태워죽여버린다. 승상인 유굴모는 병사를 이끌고 태자의 군대와 장안성에서 전투를 벌인다. 번화한 도성 은 피로 물들었다. 태자 유거는 패배하고, 도망하던 도중에 피살된다. 황후인 위자부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태자비, 유거의 아들, 며느리도 모두 피살된다. 이 때, 미래의 한선제인 유거의 손자 유병기( 劉 病 己 )는 아직 강보에 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보에 쌓인 유병기도 감옥에 들어간다. 감 옥관리를 맡았던 정위감 병길( 吉 )은 그를 가련하게 여겨서 아이를 낳은 여자죄수들로 하여금 그에게 돌아가며 젖을 먹여주게 하여, 목숨을 겨우 건질 수 있었다. 4년후, 한무제의 병이 깊어졌다. 한무제는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하여 신선을 찾아다녔는데, 한 자칭 신선은 장안성의 감옥에 천자의 기 운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하여 한무제는 장안성의 감옥에 있는 사람을 죄의 경중을 불문하고 모두 죽여버리라고 명령한다. 소위 천자의 한선제( 漢 宣 帝 )는 왜 황후의 구족을 멸하였는가? 123

124 기운이라는 것은 유병기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명령에 대하여 병길은 명령에 따르지 않아, 막 5살이 된 유병기는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된 다. 한무제가 임종시에, 강충이 태자를 모함한 음모가 드러났다. 한무제는 후화막급이었고, 태자 유거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었으며, 태자가 피 살된 곳에 "사자궁( 思 子 宮, 아들을 그리워하는 궁)"과 "귀래망사지대( 歸 來 望 思 之 臺, 돌아오기를 바라보며 기다리는 대)"를 만들어, 억울하게 죽은 태자를 기렸고, 생전에 태자의 각종 행적을 높이 평가했으며, 죄기조( 罪 己 詔, 황제가 스스로에게 죄가 있음을 밝히는 조서)를 남겨, 자신 이 늙어서 멍청했으며, 간사한 자에 속았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유병기는 이때 비로소 감옥에서 나오게 된다. 출옥한 후, 병길은 어린 유병기를 자신의 외할머니 집에 보내어 기르게 한다. 오래지 않아, 조정에서는 조서가 내려왔고, 유병기의 황실신분 이 회복시켜주고, 후궁비빈들이 거주하는 액정( 掖 庭 )에서 거두어 기르도록 하였다. 마침 액정령인 장하( 張 賀 )는 원래 태자 유거의 부하였다. 옛날의 은혜를 생각하고, 유거의 유일하게 남겨진 손자인 유병기를 잘 보살펴 주었다. 심지어 자신의 주머닛돈을 털어서 그에게 책을 사주어 읽게 하였다. 유병기가 18세가 되었을 때, 강하는 그의 혼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장하의 원래 뜻은 자신의 손녀를 유병기에게 시집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하의 동생인 장안세( 張 安 世 )가 극력 반대했다. 장안세는 당시 우장군으로 곽광과 함께 보정대신을 맡고 있었는데, 불길한 황가후손을 자기의 가족으로 맞이하였다가 쓸데없는 일에 연루될까봐 걱정한 것이다. 장하는 어쩔 수 없이 손녀를 시집보내려는 생각을 포기 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시의 부하인 허광한( 許 廣 漢 )에게 딸이 있는데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허광한을 불러 술을 먹으면서, 허광 한의 딸을 유병기에게 시집보내달라고 청하게 된다. 허광한은 아주 고생운을 타고난 사람이다. 젊었을 때는 창읍왕 유하( 劉 賀 )의 낭관( 郎 官 )을 지냈는데, 한번은 한무제를 모시고 사냥을 나갔을 때, 다른 낭관의 안장을 잘못 집어서 자기의 말에 얹은 적이 있었다.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어 도둑으로 체포되었다. 황제를 따라나간 길에서 도둑질을 하는 것은 적은 죄가 아니고 아주 중대한 범죄였다. 그리하여 사형을 받게 된다. 다행히 한무제의 마음이 너그러워 사형을 궁형( 宮 刑 )으로 감해주었다. 궁형을 받고는 환관이 되었다. 한무제가 죽은 후에, 한소제( 漢 昭 帝 ) 유불릉( 劉 弗 陵 )이 즉위하였는데, 보정대신 상 관걸( 上 官 傑 )이 황제를 폐위시키려는 음모가 발각되었고, 그는 피살된다. 허광한은 이때도 재수가 없었다. 상관걸이 모반할때, 허광한은 범인 을 포박하는 밧줄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그 밧줄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다른 사람이 찾아내 게 된다. 상사는 허광한이 그런 업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의 관직을 파면시키고, 그를 액정의 하급관리로 보내게 된다. 마침 그는 유병기와 같은 관사에 거주하게 된다. 허광한의 딸은 허평군이었는데, 당시 14,5살이었다. 원래 이미 내자령( 內 者 令, 환관)인 구후( 歐 侯 )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그 런데, 마침 혼인을 하려는데, 구후의 아들이 급사를 하고 만 것이다. 허평군의 모친은 그녀의 명이 질겨 남편을 죽인 것으로 생각하고, 관상 을 보는 사람에게 딸의 관상을 보게 했다. 관상쟁이는 그녀를 차근차근 살펴보더니, 허평군이 나중에 아주 귀하게 될 것이라고 축하를 해주 었다. 구후의 아들은 자신이 죽음으로써 허광평에게 무궁한 앞날이 열리게 해준 것이다. 장하는 허광한의 직접 상사였고, 그가 혼인 얘기를 꺼내자, 허광한으로서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유병기는 어째되었던 황실후손이 아 닌가. 속담에 말라죽은 낙타도 말보다 크다는 말이 있는데...허광한은 그 자리에서 응락한다. 집에 돌아온 후, 부인은 딸을 몰락한 황손에게 시집보내겠다는 말을 듣고는 매우 화를 낸다. 그녀는 딸이 부귀를 누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허광한과 한바탕 싸우게 된다. 장하가 다시 집을 찾아와서 혼인을 요청하자, 어쩔 수 없이, 딸을 유병기에게 시집보내게 된다. 한소제 유불릉이 죽은 후에 자식을 두지 못했다. 곽광의 주재하에, 창읍왕 유하를 황제로 올렸다. 그런데, 유하는 황음무도하여, 즉위한지 27 일만에 곽광은 상관태후에게 그를 폐위시키고, 한무제의 적증손인 유병기를 황제로 올리자고 건의한다. 상관태후는 곽광의 외손녀인데, 어찌 외할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겠는가? 유병기는 이렇게 하여 하늘에서 떨어진 떡을 받아먹게 된다. 이름도 유순( 劉 詢 )으로 개명하고, 등극하니 그 가 바로 한선제( 漢 宣 帝 )이다. 바로 이런 배경하에서, 곽부인은 딸인 곽성군을 황후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이다. 한선제가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아, 황후를 책봉하고자 준비했다. 여러 신하들은 곽광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곽성군을 황후로 추천했다. 곽광 한선제( 漢 宣 帝 )는 왜 황후의 구족을 멸하였는가? 124

125 은 한선제를 등극시키는데 최대공신이며, 권력이 조야에 따를 자가 없었다. 한선제는 그 자리에서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그리하여 한선제는 조서를 내려, 옛날에 썼던 검을 찾아오게 한다. 여러 신하들은 이 조서를 보고는 즉시 한선제의 뜻을 알아차린다. 옛물건을 아끼는 마음을 드 러낸 것이다. 그리하여 말을 바꾸어 허평군을 황후로 삼아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그리하여, 허평군은 황후가 된 것이다. 허평군의 모친은 옛날 자신이 눈은 있어도 눈알이 없어 귀인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탓했을 것이다. 한선제와 허평군은 이전에 이미 아들 하나를 낳았었고, 이름은 유석( 劉 奭 )이라고 했다. 이 아들이 나중의 한원제( 漢 元 帝 )이다. "석"은 그 의미 가 무성하다는 의미이다. 황후로 책봉된 다음 해에 허평군은 다시 회임을 하였다. 회임기간중에 부인병을 얻었는데, 여태의( 女 太 醫 )인 순우연 ( 淳 于 衍 )이 명을 받아 입궁하여 병을 치료했다. 순우연은 곽부인과 교분이 깊었고, 순우연의 남편은 이때 액정호위였으며, 매일 야근을 섰고, 하루빨리 승진하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부인을 곽부인에게 보내어 관직을 부탁하도록 하였었다. 순우연으로부터 이런 소식을 들은 곽부인은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녀는 주위사람을 모두 물리친 후에 순우연에게, "네가 한 가지만 나를 도와주면, 네 남편에게 반드시 보답해주겠다"고 한다. 순우연: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곽부인: "나의 남편이 가장 예뻐하는 딸이 있는데, 그녀를 고귀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이 일은 네 도움이 필요하다" 순우연: "저는 겨우 태의에 불과한데,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겠습니까?" 곽부인: "여자들이 자식을 낳다보면, 죽는 경우가 많다. 만일 허황후에게 독약을 먹여서 죽여준다면, 황후는 내 딸이 될 것이다. 내 남편이 있 는 한 아무도 너를 귀찮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순우연: "매번 약을 올릴 때마다 미리 맛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독약을 넣기는 어렵습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곽부인: "독을 넣을지 말지는 모두 네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니냐.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네가 독을 넣기를 원한다면, 언제든지 기회 는 있을 것이다. 내 남편이 지위가 높고 권세가 있으니, 일을 이루게 되면, 누가 그의 칼날을 피할 수 있겠는가? 경중과 완급이 있느니, 잘 생각해보아라." 순우연은 곽부인의 위협에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오래 생각한 후에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어, 순우연이 허황후에게 약을 내릴 때, 부자( 附 子 )를 갈아넣었따. 부자는 독이 있다. 고대에 중증을 치료할 때 쓰는 구명약이었다. 허황후 는 이 약을 마신 후, 바로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온몸이 마비되고, 호흡곤란이 왔으며, 손발이 쪼그라들었으며, 얼마못가 죽 고 말았다. 황후가 기이하게 죽자, 대신들이 상소를 올려 탄핵했다. 황후를 치료하던 모든 태의는 수감되었다. 곽부인인 조급해 졌다. 순우연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실토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곽광에게 털어놓게 된다. 곽광은 그녀의 말을 듣고 대노했고, 곽부인의 간큰 행동을 질 책했으며, 곽부인을 고발해서 수감시킬까도 생각했지만, 어쨌든 자기의 처리므로 할 수 없이 순우연이 풀려나게 해준다. 곽성군은 순조롭게 황후가 되었다. 3년후, 곽광이 사망한다. 황제보다 권력이 컸던 권신을 한선제는 아주 두려워했었다. 곽광과 함께 나들이를 나갈 때면, 한선제는 항상 등에 칼날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곽광이 죽었으므로, 한선제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 것이다. 이어 그는 허황후의 아들인 유석을 태 자로 올린다. 이 소식을 듣자, 곽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밥도 먹을 수 없고, 피를 토할 정도였다. 그녀는 딸인 곽황후에게 "유석은 유 순이 아직 황제가 되지도 않았을 때 낳은 아들이지 않느냐. 민간의 자식이고, 신분이 천한데, 어찌 태자가 될 수 있겠는가? 네가 아들을 낳더 라도 겨우 일개 왕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아니냐?" 딸에게 순우연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서, 기회를 보아 태자에게 독을 쓰라고 얘기한다. 곽 성군은 원래 자기주장이 없던 여인이다. 모든 것은 어미의 말에 따랐다. 여러번 태자를 식사에 청했다. 그러나, 태자의 보모는 경계심이 아주 강해서, 식사전에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다. 그리하여, 독약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서도 손을 쓸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한선제( 漢 宣 帝 )는 왜 황후의 구족을 멸하였는가? 125

126 곽광은 죽었지만, 조정의 모든 주요부문은 곽씨가족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곽광의 아들인 곽우( 霍 禹 )와 조카손자인 곽산( 霍 山 ), 곽운 ( 霍 雲 )은 모두 요직에 있었다. 이들은 조금도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했고, 매일 먹고 마시고 놀면서, 조회를 열 때도 셋은 자주 산에서 사냥을 하면서, 조회에는 가노( 家 奴 )를 보내어 대신 참가시켰다. 이처럼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했지만, 다른 신하들이 그들을 질책하지 못했따. 곽부인은 더욱 도를 넘었다. 원래 남편이 죽었으면 조금은 조심해야 할텐데, 그녀는 딸이 황후라는 것을 빌미로 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궁 중에 출입했고, 궁중을 자기집의 정원처럼 행동했다. 이뿐아니라, 곽부인은 과부의 적막을 견디지 못하고, 가노인 풍자도와 놀아나게 된다. 한선제는 점차 곽씨가족의 권력을 약화시킨다. 마침 이때 곽부인이 순우연을 매수하여 허황후를 죽인 일이 소문나게 되었다. 곽부인은 여인 의 몸으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곽우, 곽산, 곽운과 밀모하여 황제를 폐하고 곽우를 새황제를 옹립하기 로 하였다. 그러나, 밀모는 누설되고, 한선제는 곽씨가족의 세력을 배제시킬 구실을 찾지 못했었는데, 마침 이것은 좋은 구실이 되었다. 그리 하여 일망타진하게 된다. 곽산, 곽운은 자살하고, 곽우튼 참형에 처해진다. 곽부인과 딸들은 시장에서 사형에 처해진다. 연좌되어 주살된 자가 수천집에 이르렀다. 곽성군은 황후가 된지 5년만에 폐위되고, 12년후에 자살한다. 한선제( 漢 宣 帝 )는 왜 황후의 구족을 멸하였는가? 126

127 왕망( 王 莽 )의 황위찬탈후 발생한 사건들 :19 왕망은 한평제( 漢 平 帝 )를 독살하고, 그의 어린 아들 영( 嬰 )을 폐했다. 그리고는 한나라의 강산을 차지하고 스스로 국호를 신( 新 )으로 고쳤으 며, 연호를 시건국원년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부득불 전한과 작별하고 후한시대로 돌입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왕망이 찬위한 후에 영을 정안공( 定 安 公 )으로 봉하고, 그를 정안공부( 定 安 公 府 )에 연금시키고, 아무도 그와 말을 나누지 못하게 하였다. 그저 마실 물과 먹을 음식을 보내줄 뿐이었다. 이때, 재동( 梓 潼 ) 사람인 애장( 哀 章 )은 소위 "천서( 天 書 )"를 왕망에게 바친다. 그런데, 왕망은 이 천서에 열거된 순서에 따라 공신들을 임명하 게 된다. 왕순( 王 舜 )을 태사안신공( 太 師 安 新 公 )에 봉하고, 평안( 平 晏 )을 태부취신공( 太 傅 就 新 公 ), 유흠( 劉 歆 )을 국사가신공( 國 師 嘉 新 公 ), 애장을 국장미 신공( 國 將 美 新 公 )에 봉하니 이들을 사보신( 四 輔 臣 )이라 불렀다. 그리고 견감( 甄 邯 )을 대사마승신공( 大 司 馬 承 新 公 ), 왕심( 王 尋 )을 대사도장신공( 大 司 徒 章 新 公 ), 왕읍( 王 邑 )을 대사공융신공( 大 司 空 隆 新 公 )에 임 명하니 이들을 삼공( 三 公 )이라 불렀다. 또한 견풍( 甄 豊 )을 경시장군( 更 始 將 軍 ), 손건( 孫 建 )을 입국장군( 立 國 將 軍 ), 왕흥( 王 興 )을 위장군( 衛 將 軍 ), 왕성( 王 盛 )을 전장군( 前 將 軍 )으로 봉 하니 이들을 사장군( 四 將 軍 )이라 불렀다. 애장은 졸지에 고위직에 오르게 되었으니, 너무나 기뻤고, 왕망에게 삼궤구고의 예를 드려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왕순, 평 안, 유흠, 견감, 왕심, 왕읍, 견풍, 손건등 8명이야 원래 왕망의 심복이었으니 괜찮은데, 왕흥, 왕성의 두 사람은 애장이 마음대로 이름을 날조 해서 집어넣은 경우였다. 그러니, 그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애장은 그렇다고 솔직히 털어놓을 수도 없었으며, 그저 혼자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알았으랴. 왕망은 이를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사람을 사방에 보내서 조사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두 사람과 성 명이 같은 사람들은 장군에 오를 수 있었다. 일이 교묘하게 되느라고 성문영사( 城 門 令 史 )중에 왕흥이라는 자가 있었고, 호떡을 파는 장사꾼중 에 왕성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바로 불려와서 조정에서 일하고 장군의 직위를 받는다. 이 두 사람은 하늘에서 떨어진 관직 을 받았으니 아마도 꿈인가 생시인가 했을 것이다. 이처럼 신황조의 구조를 짜나가고 있는데, 돌연 서향후( 徐 鄕 侯 ) 유쾌( 劉 快 )가 병사를 일으켜, 왕망을 토벌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유쾌가 즉묵에서 피살되기는 하였지만, 왕망은 유씨의 후손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 걱정되어 아예 한나라제후왕들을 모두 서인으로 폐했다. 오로지 옛 노왕( 魯 王 )인 유민( 劉 閔 ), 중산왕( 中 山 王 ) 유성도( 劉 成 都 ), 광양왕( 廣 陽 王 ) 유가( 劉 嘉 )는 일찌기 왕망의 공덕을 칭송한 바 있으므로 서인으로 강등되지 않을 수 있었다. 한평제의 황후는 정안태후( 定 安 太 后 )가 되었는데, 원래 그녀는 왕망의 딸이었다. 그러나 성격이 부친과는 달랐다. 왕망이 황제위를 찬탈한 이 후, 매일 궁궐에 머물면서 수심이 가득했다. 왕망은 그녀의 나이가 아직 젊은 것을 생각해서 궁중에서 적막하게 살기 힘들 것이라 생각하고, 자기의 심복인 손건의 아들인 손예( 孫 豫 )를 딸에게 소개해준다. 손예로서는 기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의사를 데리고 정안태후의 병을 보 러가는 것처럼 해서 정안태후의 방으로 갔다. 그의 눈빛이 심상찮음을 느끼고 정안태후는 내실에 들어간 후, 말을 전해준 시녀는 공연히 얻 왕망( 王 莽 )의 황위찬탈후 발생한 사건들 127

128 어맞는다. 손예는 바깥에 서있었는데, 안에서는 채찍질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고, 할 수 없이 그냥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왕망은 딸이 절개 를 지키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재가시킬 생각을 접었다. 이 일이 전해진 후, 또 다른 호색한이 나타나서, 태후와 결합하고 싶어했다. 이 자는 바로 경시장군 견풍의 아들인 견심( 甄 尋 )이었다. 견심은 성격이 경박하여, 문화심류( 問 花 尋 柳 )하는 스타일이었다. 왕망이 손예를 사위로 삼고싶어한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이 좋지 않았었다. 나중에 손예가 실패했다는 말을 듣자 한가지 방법을 강구해서 행동에 들어갔다. 이때 왕망은 대신들을 임명한 천서가 위조된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점점 천서로 인하여 자리를 얻은 대신들에 대하여 엄격하게 대하기 시작 하였고, 다시는 황당한 얘기를 퍼뜨리지 못하게 단속했다. 견심의 부친인 견풍은 원래 대사공이었는데, 왕망이 공신을 임명할 때, 자기의 지 위는 원래 자기보다 낮던 사람들보다 오히려 아래가 되어서, 항상 앙앙불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견심은 왕망이 이미 천서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하여 그 명의로 정안태후를 얻을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우선 천서를 위조하여 이백( 二 伯 )을 두도록 왕망에게 올려서 왕망을 시험했다. 왕망은 두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우백( 右 伯 )에 임명하고, 태부 평안 을 좌백( 左 伯 )에 임명했다. 견풍은 이 방법이 괜찮다고 생각하여 다시 왕망에게 천서에 이런 문구가 있다고 올렸다. "고한평제후, 응위견심처 ( 故 漢 平 帝 后, 應 爲 甄 尋 妻, 고 한평제의 황후는 견심의 처가 될 것이다)" 그는 왕망이 이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앞으로 태후가 자신에 게 시집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궁중에서 한가지 소식이 들려왔다. 왕망이 노기충천하였다는 것이다. 견심은 이제서야 자신이 일을 잘못벌였다는 것 을 알았고, 금은을 수습해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반나절도 되지 않아, 과연 많은 사병들이 견씨집을 포위했고, 견심을 수색했다. 견풍은 사정을 물어본 후에 놀라서 혼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고, 바로 아들을 붙잡아서 함께 입조하여 죄를 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들 견심을 찾 아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목숨으로 사죄하기로 하고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왕망은 견심이 이미 도망쳤다는 말을 듣고 바로 전국에 체포령을 내렸다. 견심은 화산으로 도망쳤는데, 결국 붙잡혀서 장안으로 끌려왔다. 그 는 고문끝에 친구인 시중( 侍 中 ) 유분( 劉 ), 유분의 동생인 장수교위( 長 水 校 尉 ) 유영( 劉 泳 ), 기도위( 騎 都 尉 ) 정륭( 丁 隆 ), 좌관장군( 左 關 將 軍 ) 왕기( 王 奇 ) 등까지 끌어들여 모조리 하옥되었고, 모조리 사형을 당했다. 유분의 스승은 유명한 문인인 양웅( 揚 雄 )이었는데, 그도 이 사건의 혐의자가 되어서 조사를 받았다. 양웅은 촉도 성도사람이었다. 원래 말을 더듬었는데, 사고는 민첩했다. 평소에 그는 사마상여를 아주 존경했고, 사마상여의 작품을 모방하기를 즐겼다. 한성제때, 대사마 왕음의 추천 으로 궁중에서 일했고, <<감천>> <<하동>>의 2부( 賦 )를 바쳐, 한성제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한애제, 한평제의 두 황제시절에는 승진 하지 못해서 평소에 우울하게 지냈고, 그저 글이나 쓰며 시간을 보냈다. <<태현경>> 과 <<법언>>의 두 책을 썼다. <<법언>>은 <<논어>>를 본 떠서 쓴 글이고, <<태현경>>은 <<주역>>을 본떠서 쓴 글이다. 글이 어려워서 보통사람들은 읽기가 쉽지 않았다. 유흠은 양웅의 재주와 학문을 높이 평가해서, 아들인 유분으로 하여금 양웅을 스승으로 모시게 한 것이다. 이때 양웅은 이미 대부( 大 夫 )직을 받았으며, 천록각교서를 하고 있었다. 돌연 유분때문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다. 양웅은 자신의 나이 가 이미 70이 넘었으므로 혹형을 견디기 힘들 것으로 생각하고, 그냥 죽어버리겠다고 생각해서, 이를 악물고 누각에서 뛰어내린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다. 신하 한 사람이 그가 나이도 많은데, 누각에서 뛰어내려, 얼굴이 붓고 코가 멍들고 한 것을 보고는 가련하게 생각하여 그를 부축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스스로 왕망에게 보고했다. 왕망은 그의 죄를 면해주었다. 단지 견심, 유분등을 죽였을 뿐이다. 이번 변고로 연루된 사람이 수백명에 이르게 된다. 그중에서는 양웅 한 사람만 살아남는다. 나중에 양웅은 왕망을 칭송하는게 그를 위하여 <<극진미신문( 劇 秦 美 新 文 )>>이라는 글을 써서 바치는데, 후세인들의 조소를 받게 된다. 가련한 양웅은 만년에 조심하지 못하여, 후세인들에게 웃음거리를 남기고, 자신의 명성을 훼손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왕망( 王 莽 )의 황위찬탈후 발생한 사건들 128

129 당시 광록대부인 공승( 勝 )도 덕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왕망의 찬탈이 있자, 바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되돌아가서, 세상일에 관여 하지 않는다. 왕망은 찬위후에 그를 매수하고자 하였고, 사람을 보내여 예물을 많이 하사했다. 그래도 공승은 응락하지 않았고, 결국 절식하 여 죽고 만다. 그외에도 많은 명사( 名 士 )들이 왕망이 찬위하자 관직을 버렸다. 제( 齊 )의 사람 설방( 薛 方 ), 율융( 栗 融 ), 패( 沛 )의 사람 진함( 陳 咸 ), 북해( 北 海 ) 사람 소장( 蘇 章 ), 산양( 山 陽 ) 사람 조경( 曹 竟 )등이 그들이다. 왕망이 이들에게 다시 관직을 맡을 것을 부탁했지만, 모두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거절했다. 패의 사람 진함은 그 자신이 관직을 버렸을 뿐아니라, 이미 관직에 나간 세 아들 진참( 陳 參 ), 진풍( 陳 豊 ), 진흠( 陳 欽 )까지 불러들였 고, 그들에게도 왕망의 밑에서 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왕망( 王 莽 )의 황위찬탈후 발생한 사건들 129

130 동한왕조내부의 피비린내나는 투쟁: 외척과 환관 :18 동한왕조의 황제는 두번째인 유장( 劉 庄 )부터 시작하여, 죽을 때 모두 청장년이었다. 황위를 계승한 황제의 나이는 많아야 십여세이고 가장 어린 경우는 100일이 안된 경우도 있었다. 그리하여, 통치계 층에는 외척( 外 戚 )과 환관( 宦 官 )이라는 두 개의 괴물이 나타났고, 이는 동한왕조의 멸망을 재촉하게 된다. 황제가 어렸으므로, 모친인 황태후가 자연히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봉건적인 유가학파의 의식에서 황후는 정치를 하거나 다른 남자와 접촉해서는 안되는데, 제국의 최고권력이 홀연 그녀의 손에 떨 어진 것이다. 황후는 이를 악물고 아주 낯선 정치를 하여야 했고, 순식간에 그녀는 심리적인 면과 능력의 면에서 모두 제대로 처리할 수 없게 된다. 마치 옷을 모두 벗기고 세상 사람들 앞에 서있는 것처럼 공황을 느끼고 고립무원을 느꼈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잘 알지도 못하는 조정대신들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같이 지내던 친가의 친척들이었다. 그녀는 이런 사람들이 도와주 어야 비로소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네번째 황제인 유조( 劉 肇 )는 즉위때 나이가 겨우 10세였다. 그의 모친인 두태후( 竇 太 后 ) 도 아직 서른이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오빠인 두헌( 竇 憲 )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다섯째 황제인 유륭( 劉 隆 )은 즉위시에 막 3개월인 영아였다. 그의 모친인 등태후( 鄧 太 后 )도 그녀의 오빠인 등즐( 鄧 )에 의지하여 조정을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계속되는 어린이황제가 줄을 이어 나타 났고, 외척들이 하나하나 고개를 바짝 들고 활보하기 시작했으며 조정을 장악했다. 외척중 세력이 가장 컸고, 권력을 장악한 시간이 가장 길었던 것은 등황후의 등씨척족들이다. 이들 은 30년간 권력을 잡았으며, 후작에 봉해진 사람이 29명이나 되었고, 2명이 재상에 올랐고, 13명이 대원수를 지냈고, 상서( 尙 書 )급의 관리가 14명이나 되었고, 자사( 刺 史 ), 태수( 太 守 )는 근 50명에 달 하였다. 이로써 방대하고 견고한 권력집단이 이루어졌다. 중앙정부에서의 위치는 워낙 공고하여 동 요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가 점차 성장하면서, 황권을 외척들이 쥐락펴락하는 것을 두고보지만은 않았다. 그리하 여 외척의 수중에서 권력을 자기가 되찾아오고 싶어했다. 이리하여 정권과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외척과의 사이에 대립관계가 형성되게 된다. 열번째 황제인 유찬( 劉 纘 )은 9세였는데, 외척의 거두인 양기( 梁 驥 )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견디지 못하고, 당시 아주 유행한 말인 "발호장군( 跋 扈 將 軍 )"이라 는 말을 내뱉었다. 양기는 두말도 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서 이 외조카인 황제 유찬을 독살해 버린 다. 황제가 외척과 투쟁을 벌이려면 먼저 직면한 위기를 해결해야 했다. 이러자면 반드시 외부힘으로부 터 도움을 받아야 했다. 조정의 사대부관리들과 연합하거나 궁중의 환관과 연합해야 했다. 이 두가 지 방법밖에 없었다. 사대부와 연합할 가능성은 아주 적다. 왜냐하면 황제와 그들의 관계가 그다지 동한왕조내부의 피비린내나는 투쟁: 외척과 환관 130

131 밀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의 아주 짧은 시간동안에 그들은 얼굴을 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 중 누가 외척세력에 꼬리를 흔드는 자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 는 것은 어릴때부터 곁에서 떨어지지 않은 환관들이었다. 환관은 사람들이 보통 태감( 太 監 )이라고도 부르는 자들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들의 기원은 기원전11 세기의 서주왕조때부터이다. 그때 돈있는 귀족남자나 추장 및 군왕들은 모두 상당한 수에 이르는 처첩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녀들이 다른 남자와 바람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들을 죄수처럼 경비가 삼엄한 정원과 후궁에 가둬두는 것이다. 문제는 후궁내의 일들 예를 들 어, 시장에서 물건사는 것같은 일은 모두 자기의 여자가 가서 해야 하는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외 부의 남자들과 접촉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아주 이기적인 남자에 있어서 안심할 수 없게 만 드는 일이었다. 그래서 서주왕조의 희( 姬 )씨성의 군주들은 아주 잔인한 방법을 생각해낸다. 그것은 바로, 금전의 유혹과 강박의 수단으로 남자의 생식기를 제거시킨 후에 일을 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환관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짐승같은 잔혹한 제도는 삼천여년간 지속되었다. 20세기에 들어 서서 황제제도가 사라지면서 비로소 사라지게 된다. 10세기전에, 환관은 아주 보편적이었다. 돈있는 사람은 집집마다 매매할 수 있었다. 이는 송나라때 가 되어서야 비로소, 정부가 민간에서 엄노( 閹 奴 )를 두는 것을 금지하게 된다. 이리하여 환관은 황 제의 전유물이 된다. 그러나, 환관은 모두 불행한 사람들이다. 세계에서 어느 남자도 기꺼이 스스로 환관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 집안이 가난하여, 어쩔 수 없이 환관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의 심리는 어느 정도 왜곡 되게 된다. 그들은 자식을 낳을 수 없으므로, 스스로 비하하게 되고, 동시에 그들은 보통사람에 대 하여 원한과 복수의 심리를 갖게 되며, 오로지 황제에게 잘보여 총애받는 것만 신경쓴다. 그래서 그 들이 일단 권력을 장악하면, 그들은 보통 통상적이지 않은 일들을 벌이게 된다. 동한의 황제중 외척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네번째 황제인 유조였다. 그는 하루종일 같이 놀던 환 관인 정중( 鄭 衆 )과 연합하여 그의 외삼촌가족에 돌연 칼을 빼들게 된다. 일세를 풍미하던 두헌은 어 쩔 수 없이 자살하게 된다. 이어서 여섯째 황제인 유우( 劉 祐 )도 환관 이윤( 李 閏 ), 강경( 江 京 )과 연합 하여 외삼촌인 등즐을 자살하게 한다. 이후 한 무리의 용감한 새로운 외척세력이 등장하나, 다시 환 관에 의하여 하나하나 제거된다. 마치 풀이 어느 정도 자라면 하나하나 잘려나가듯이 새로 성장하 고 다시 잘려나갔다. 외척은 장렬하게 참패했는데, 원래 권력의 지팡이를 되찾으려고 생각했던 황제는 이 권력의 지팡이 가 어느 순간 환관의 손에 떨어질 줄은 생각도 못했다. 최고권력을 장악한 환관은 마치 영원히 실 패하지 않는 땅을 차지한 것처럼 보였다. 이어, 환관은 정부관리의 신분으로 기세등등하게 등장한다.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은 외척과 마찬가 지로 줄줄이 지방행정관리로 임명받아, 환관을 중심으로 하는 그룹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죽어라 뇌 물을 받고 권력을 농단하는 외에 다른 것은 전혀 몰랐다. 심지어 외척이 권력을 잡았을 때 보여준 악랄한 행동보다 배는 심했다. 그리하여, 환관으로부터 해를 입은 외척집단은 환관을 언급하기만 해 도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고 불공대천의 원수였다. 2세기말, 외척인 하진( 何 進 )이 사대부관리와 연합 하여, 환관그룹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게 된다. 동한왕조내부의 피비린내나는 투쟁: 외척과 환관 131

132 하진은 여동생이 열한번째 황제인 유굉( 劉 宏 )의 처였다. 그는 아주 민감하게 역대 환관과 외척의 다 툼에서 환관은 황제의 지지를 받고, 외척은 고립무원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 관과 싸우려 들었으니 이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전에 생명을 댓가로 얻은 교훈을 되살려 사대부와 연합체를 결성해야만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89년, 한영제 유굉이 병사하고, 태자인 유변( 劉 辯 )이 즉위한다. 하태후( 何 太 后, 하진의 여동생)이 조정을 장악한다. 하씨가족은 비록 외척으로 일세를 풍미했지만, 이전의 "발호장군" 양기와 비교하 면 아무래도 손색이 많다. 환관집단은 정부의 중앙에 우뚝서서 궁정내외, 조야상하에 뿌리를 틀고 있었으며 세력도 크고 네트워크도 넓은 환관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하여 외척집단으로서는 이 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하씨오누이는 이에 대하여 불만이었고, 사대부 거두중의 하나인 금위군관 ( 禁 衛 軍 官 ) 원소( 袁 紹 )와 연맹을 맺게 되며, 이로써 환관을 뿌리뽑고자 한다. 원소는 이렇게 건의한다: "병주목 동탁( 董 卓 )에게 밀지를 내려 병사를 이끌고 수도로 들어오게 하십 시오, 청군측( 淸 君 側, 황제 곁의 간신을 제거한다)을 명분으로 삼아 환관을 토벌하십시오" 하진은 그의 말에 따른다. 그러나 또 다른 금의군관인 조조( 曹 操 )가 반대를 한다. 그는 환관을 상대하는데 는 법관 한 명만 있으면 되는데 굳이 돌아갈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렇게 반란을 유도하면, 나중에 수습하기 힘들 뿐아니라 천하가 어지러워 질 것이라고 보았다. 주부인 진림도 맹목적으로 일을 벌이는 것에 반대했다. 그리하여 하진에게 "속담에 눈을 가리고 참새를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 다. 이것은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입니다. 자잘한 것 하나 잡으려는데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물며 국가대사임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장군은 황제의 인척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데 환관을 제거하려면 불에 발갛게 달구워진 화로에 머리카락을 태우는 것처럼 쉬운 일입니다." 이것은 조조가 말한 바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 권한을 주면 공을 세울 수 없을 뿐아니라 나중에 후환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사람의 명석한 분석은 채택되지 않았고, 머리에 쓸데없는 생각만 있던 하진은 어리석은 계획을 실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환관은 이목이 많고, 계획이 나오자 마자 그들도 알아버렸고, 그들은 먼저 상대방을 제압하 는 수법을 써서 하진을 궁중으로 유인해 죽여버린다. 원소는 밀모가 들통난 것을 보고, 환관들이 자기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금위군으로 하여금 궁문을 불태우게 하고, 황궁으로 밀고 들어갔으며, 환관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나이가 많건 어리근, 평상시의 행위가 어떠했든 가리지 않고 모조리 도륙한다. 당시 나이가 조금 있 는 낙양시민중에서 수염이 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환관으로 몰려 횡액을 당한 경우도 적지 않았 다. 환관중 큰손격인 장양( 張 讓 )과 단계( 段 桂 )가 새로 막 즉위한 황제 유변를 끼고 포위를 돌파하여 북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두사람의 운은 정말 좋지 않았다. 나중에 뒤에서는 낙양에서 추격병이 추격해오고, 앞에는 청군측의 명분을 걸고 온 동탁이 이끄는 양주군단이 길을 막고 있었 다. 두사람은 어쩔 수 없이 황하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이 사건은 중국에서 유사이래 사대부와 환관간에 발생한 첫번째 결투였다. 궁중의 환관은 거의 모 두 죽여버렸다. 모두 3천여명의 환관이 죽임을 당한다. 여기에는 물론 수염이 없어서 환관으로 오인 되어 불쌍하게 당한 관리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사대부들도 기뻐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왜냐하 면 이때 동탁의 칼이 이미 그들의 목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 동한왕조내부의 피비린내나는 투쟁: 외척과 환관 132

133 동한왕조내부의 피비린내나는 투쟁: 외척과 환관 133

134 중국의 의술명가 : 서씨가족 :17 삼국, 동진, 서진, 남북조시대에 정부에서도 의학교육을 하였으나, 세습되는 의술가문도 여전히 존재 했다. 그 중에 서씨가족은 7대에 걸쳐 12명의 명의를 배출하였다. 그 중 서도도, 서문백, 서성백, 서 지재, 서지범은 모두 궁정에 들어갔고, 어떤 사람은 태의서에서 일을 했으며, 어떤 사람은 고위관직 을 받기도 하였다. 서씨가족의 기업을 창업한 사람은 서희( 徐 熙 )였다. 일찌기 남조의 송나라의 복양태수를 지냈다. 나 중에 진망산에 숨어들어가서 은사가 되었는데, 하루는 도인을 만났다. 도인은 그에게 호로병을 하나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의 자손은 도술로 사람을 구할 것이고 부귀를 누릴 것이다" 서희는 호로 병을 열었고, 안에는 <편작경경>이 한 권 들어 있었다. 그는 이 책을 깊이 연구하였고, 얼마되지 않 아 의술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서희의 아들인 서추부( 徐 秋 夫 )는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 역시 유명한 의원이 되었다. 전설에 의하 면 귀신의 병도 치료하였다고 한다. 서추부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서도도와 서숙향이고 둘 다 의 술이 뛰어났다. 서도도( 徐 道 度 )는 내과 외과에 모두 뛰어났다. 그는 다리에 약간의 병이 있어서 일어나고 걷는데 불 편하였다. 송문제는 그에게 황자의 병을 보도록 시키고, 그로 하여금 가마를 타고 궁에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서도도가 치료한 병들은 서도도의 손이 닿으면 모두 낳았다. 송문제는 감탄해서 말했다. "천하에 오절( 五 絶 )이 있는데, 모두가 전당( 錢 塘 )일대에서 나오는구나" 여기서 오절이라는 것은 당시에 금( 琴 )을 잘 타던 두도국( 杜 道 鞠 ), 시를 잘 짓던 범열( 范 悅 ), 글에 뛰어났던 저흔원( 楮 欣 遠 ), 바둑을 잘 두던 저윤( 楮 胤 ), 그리고 의술에 뛰어났던 서도도를 합쳐서 부른 말이다. 서도도는 <<요각약잡방>>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것은 세계 최초의 각기병을 치료하는 전문서적이다. 서숙향( 徐 叔 響 )은 침구, 소아과, 본초학등에 연구가 깊었고, 저술도 많이 했다. 서씨가족은 4대에 이르러 서도도의 아들 서문백( 徐 文 伯 ), 서숙향의 아들 서사백( 徐 嗣 伯 ), 서성백( 徐 成 伯 )의 세 사람이 의술로 명성이 높았고, 아주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 이로써 서씨가족의 명성은 최고봉에 이르게 된다. 서문백은 황제의 곁에서 어의를 지냈다. 그리고는 많은 병을 치료하였다. 송 효무제때 태후가 갑자기 배가 아파서 참기 힘들게 되었는데, 다른 어의들은 속수무책이어서 서문백 을 불러왔다. 서문백은 진맥한 후에 "태후의 병은 분명히 "석박소장( 石 搏 小 腸 )"입니다"라고 하였다. 요즘말로 하면 담결석, 비뇨계통의 질병이다. 이후 서문백은 소석탕을 이용하여 치료하였고, 태후는 금방 결석을 배출했고, 배는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었다. 태후는 이로 인하여 서문백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송명제때는 한 궁녀가 요통을 앓았는데, 아플 때는 심장에까지 미쳤다. 병증이 한번 발 작하면 기절할 지격에 이르렀다. 다른 의원들은 "육( 肉 )"으로 진단했으며 아마도 궁녀의 뱃속에 이 물이 들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서문백은 "발( 發 )"이라고 진단하고 두발로 인하여 일어난 병 중국의 의술명가 : 서씨가족 134

135 이라고 진단한다. 그래서 기름을 사용하여 토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궁녀는 진짜 머리카락같은 물 체를 토하게 되는게 길이가 3척이나 되었다. 토한 후에는 병이 완전히 낳았다. 또 한번은 송의 후폐 제가 궁을 나가서 한 부인이 임신한 것을 보았다. 황제도 진맥을 할 줄 알아서, 진맥을 하고 난 다 음에 "이 배에는 여자아이가 들었도다"라고 하면서 서문백에게 진맥하라고 하였다. 서문백은 "뱃속 에는 두 명이 있습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입니다. 남자아이는 왼쪽에 있고 푸르고 검으며, 여자 아이보다 약간 적습니다" 황제는 마음이 급해서 임산부의 배를 갈라보려고 했다. 서문백은 측은하게 생각하여 말하기를 "만일 칼을 쓰게 된다면 변고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침으로 조산을 시키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고는 족태음경과 수양명경의 두 곳에 침을 놓았다. 태아가 침을 놓자 나왔다. 두 아이가 이어서 나왔는데, 과연 그가 말한 바와 같았다. 서숙향의 아들인 서성백( 徐 成 伯 )은 황제의 중용을 받았다. 북위의 헌문제는 그가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듣고는 병자들을 장막 뒤에 있으라고 하고는 서성백에게 병자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서성백으로 하여금 장막을 사이에 두고 병자들을 진맥하라고 시켰다. 서성백은 진맥을 한 후에, 명 확하게 병자들의 증세를 알아냈고, 병자의 얼굴색과 병의 증상도 아주 정확하게 묘사했다. 헌문제는 그의 의술에 크게 찬탄하고 그에게 관직과 작위를 주었으며, 자신의 곁에 있도록 하였다. 나중에 효 문제가 외부에 순행갈 때, 갑자기 중병에 걸렸었다. 서성백은 밤낮을 달려가서 효문제의 곁으로 갔 고, 정성을 다하여 치료하여 효문제의 병이 낫게 하였다. 이후부터 효문제는 잔치를 베풀때면 항상 서성백의 자리를 상석으로 준비해주곤 하였다. 그리고 문무백관에게 서성백이 뛰어난 의술로 자신 을 구했던 것을 자랑하곤 하였다. 서성백은 양생에도 뛰어나서, 장생단약을 만드는게 열중했고, 숭 산에 1년간 은거한 적도 있었다. 이 때 황제에게 연년익수의 금단을 만들어 바쳤다. 그 자신도 자주 양생약을 먹었으며 80이 되어도 머리카락이 검었고, 정력도 충만했다고 한다. 서숙향의 또다른 아들인 서사백( 徐 嗣 伯 )도 난치병을 치료하는데 고수였다. 남제( 南 齊 )의 한 장군이 추위를 두려워하는 병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연단이 유행하여 이 대장군도 오석산을 먹었었다. 오석 산( 五 石 散 )은 자석영, 적석지, 종유석, 백석영, 유황등의 다섯 가지 석약으로 만든 단약이었다. 이것 으로 자기의 한증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석산을 먹고나서는 추위를 더욱 무서워 하게 되었다. 서사백은 아주 독특한 치료법을 사용했다. 눈이오는 추운 날에, 대장군으로 하여금 발 가벗은 몸으로 차가운 돌맹에위에 앉게 하고는 사람을 시켜 한통의 찬물을 대장군의 머리에 부었 다. 이 냉수가 대장군의 몸에 부어지자 차가움에 뼈골이 시렸고, 대장군은 그대로 기절하였다. 옆에 있던 가족들이 도저히 더 볼 수가 없어서 서사백에게 그만두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서사백은 만일 대장군의 병을 낫게 하고 싶다면 가족들은 관여하지 말라, 내 스스로 언제 멈춰야 하는지 알고 있 다고 말한다. 백여통의 냉수를 부은 후에, 대장군이 움직일 수 있게 되고, 등에는 열기가 나왔다. 다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대장군은 앉아서 찬물을 마시고 싶어했다. 이렇게 대장군의 항증은 서사백의 보기드문 치료방법으로 완전히 낫게 되었다. 서씨집안의 제5대에는 서문백의 아들인 서웅( 徐 雄 )과 서성백의 아들인 서천( 徐 踐 )이 가업을 이었 다. 두 사람도 유명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부친에 비하여는 손색이 있었다. 서씨집안의 제6대에는 서지재( 徐 之 才 )와 서지범( 徐 之 範 )이 나와서 서씨집안에 또 한번의 휘황한 시 절을 가져왔다. 두 사람은 서웅의 아들이다. 서지재는 5살때 효경을 읽고 13살때 태학생이 되면서 '신동'으로 이름을 떨친다. 처음에는 남제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나중에 북위의 포로로 잡히면서 북 위, 북제에서 벼슬을 한다. 일찌기 대장군, 상서, 좌복야, 상서령등의 관직을 지내고 서양군왕에 봉 중국의 의술명가 : 서씨가족 135

136 해진다. 서지재는 의술도 뛰어났다. 특히 약재학과 산부인과에 조예가 깊었고, 일찌기 <<뇌공약대 >>, <<약대>>를 저술한다. 약을 선, 통, 보, 사, 섭, 활, 조, 습, 경, 중의 10제로 구분하였다. 그는 << 가전비바>>, <<소아방>., <<명원가록>>등의 책을 지었다고 하는데, 전해지지는 않는다. 서지범은 북 제의 상약전 어의로 관직이 태상경에 이르렀다. 서씨집안의 제7대에는 비교적 이름있는 자로는 서지범의 아들인 서민재( 徐 敏 齋 )가 있다. 그는 박학 다식했고, 아주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서씨집안의 의술이 점점 몰락하였다. 중국의 의술명가 : 서씨가족 136

137 서복( 徐 福 )은 일본으로 건너갔는가? :15 기원전210년, 서복은 진시황의 명을 받아, '동남동녀 3천명'과 '백공( 百 工 )'을 데리고,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배를 타고 동해를 넘어 장생불 로약을 찾으러 떠났다. 그렇다면, 서복은 정말 일본으로 건너갔을까? 어떤 사람은 서복이 확실히 일본으로 갔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서복이 일본으로 가서 일본왕조를 건립했으며, 서복이 바로 신무천황( 神 武 天 皇, 진무텐노)라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많은 학자들은 서복이 일본으로 갔다는데 의문을 표시한다. 그들은, 서복의 함대는 해양의 광풍과 파도를 견틸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최근 들어, 국내학자 들이 당시의 조선기술과 항로에 대하여 깊이있게 연구를 하고, 서복의 상륙지점에 대하여 고증을 한 끝에 수수께끼는 하나하나 풀려가고 있 다. 첫째 수수께끼: 서복은 일본으로 건너갔을까? 서복은 서불( 徐 市 )이라고도 부른다. 진나라때의 방사( 方 士 )중의 하나이다. 기원전210년 서복은 진시황의 명을 받아 발해의 삼신산으로 장생불 사약을 찾으러 떠나는데, 그 후에 소식이 끊긴다. 서복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서복이 향한 목적지에 관하여, 학술계에서는 서복이 선단을 이끌고 일본으로 갔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주산열도로 갔다 고도 하고, 대만으로 갔다고도 하며, 조선으로 갔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북경대학 역사학과 부교수인 유화축은 서복이 조선으로 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료에 기록이 없어서 성립되기 힘들다. 서복의 처음 목적지는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산이다. 산위의 신선들에게 장생불사약을 달라고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예와 지 금은 발해( 渤 海 )의 해역에 대한 개념이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고대인들이 말하는 발해는 중국의 동쪽 바다를 말한다. 여기에는 발해, 황해 내지 동해가 포함된다. 중국 동쪽의 바다에는 지금의 대만섬도 있고, 필리핀의 루손섬도 있고, 일본의 여러 섬도 있다. 서복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사마천도 이에 대하여는 명확히 써놓지 않았다. 현재, 많은 학자들은 가장 먼저 서복이 일본으로 가서 정착했다고 주장한 사람을 오대( 五 代 ) 후주( 後 周 )의 의초( 義 楚 )화상이라고 생각한다. 유화축은 사실 <<삼국지.오서.오주전>>에 서복의 거취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230년, 오나라는 대장 위온( 衛 溫 )과 제갈직 ( 諸 葛 直 )을 이주( 夷 州 )와 단주( 亶 州 )로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겨우 이주(지금의 대만)에만 닿았을 뿐, 단주는 너무 멀어서 도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단주는 바다 가운데 있고, 전설에 따르면 서복이 동남동녀 수천명을 이끌고 바다로 가서 이 섬에 까지 간 후에 돌아오지 않았 다고 했다. 진수( 陳 壽 )의 기술을 보면 이렇게 단언할 수 있다: 단주는 대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위온과 제갈량이 대만에만 갔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루손섬( 呂 宋 島 )도 아니다. 왜냐하면 진수가 단주에는 인구 수만가가 있다고 되어 있는데, 루손섬에 대하여 원나라 세조때까지도 여 전히 '백성이 이백호도 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산열도는 더더구나 아니다. 왜냐하면 주산열도는 육지에서 가까워 쉽게 도 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의 단주는 도대체 어디일까? 프랑스인 시글러의 저작 <<중국사료중 불분명한 여러 나라의 고증>>에서 단주를 일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서복( 徐 福 )은 일본으로 건너갔는가? 137

138 사실, 일본의 사적이나 문헌에서, 서복이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기록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일본학자 오야리웅( 奧 野 利 雄 )은 서복이 일본에 도착한 후에 주로 활동한 지역이 일본규슈( 九 州 ), 구마노( 熊 野 )일대라고 고증했다. <<부사고문서>> 연구가인 영목정일( 鈴 木 貞 一 )이 연구한 바 에 따르면, 서복은 70여살때 사망했다. 대만학자 팽쌍송( 彭 雙 松 )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각지에 서복의 이름과 관련된 묘, 비, 궁, 묘, 신장등 유적지가 50여곳에 이르고, 상륙지점이 20여곳이며, 전설고사가 30여개이다. 이들 유적과 전설은 비록 모조리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사실과 관련은 있을 것이다. 서복이 수천명을 이끌고 일본에 도착하여, 중국의 선진적인 농경방식, 백공의 기술과 습속문화등을 가져왔다. 일본은 금방 신석기시대에서 동 기,철기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어렵경제시대인 죠몬( 繩 紋 )시대에서 농경경제의 야요이( 彌 生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도 있다. 벼농사, 양잠, 약물등이 보급되어, 일본경제문화의 대발전을 이룬다. 일본 민간에서 서복을 농신( 農 神 ), 잠상신( 蠶 桑 神 ), 의약신( 醫 藥 神 )으로 모시는 것이 그 방증이다. 이상의 사실들을 보면, 서복이 확실히 일본열도에 도달했다고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수수께끼: 서복은 어느 항구에서 출발했는가? 서복이 출발한 장소에 관하여, 중국학자들은 논란이 뜨겁다. 일본학자들이 '광동연해설'을 주장하는 외에, 중국대만의 어떤 학자는 '절강연해 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대륙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강소연해설'과 '산동연해설'이다. 유화축은 서복이 출발한 항구를 확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현지의 물질적 조건이라고 말한다. 첫째는 경제가 발달해야 하고, 둘 째는 항구의 자연상황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량의 인원이 모여서, 대량의 물자를 모으고, 많은 선박을 건조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리고 항만이 아주 넓어야 하며, 배후에 편리한 교통로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비교적으로 말하자면, 이상의 우수한 조건을 갖춘 곳으로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의 낭야( 琅 邪 )밖에 없다. 전국시대때 초나라가 월나라를 멸망시키기 전에, 월나라는 낭야를 수도로 정한지 이미 100여년이 되었다. 낭야는 한때 강대한 월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다. 전국 시대 중기에 제( 齊 )나라에 귀속된 후, 제나라의 도성 임치( 臨 淄 )를 제외한 또 다른 중요한 경제문화중심이었다. 진나라가 통일한 후, 낭야는 낭야군의 치소이고, 위치의 중요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낭야는 경제조건이 뛰어날 뿐아니라, 전국시대 및 이후의 진나라에서 저명한 항구중 하나이다. 낭야대는 석하( 石 河 )가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곳이고, 부근에는 화강암의 침식으로 인한 해안의 모양을 갖추고 있어, 물이 깊고 항구가 넓다. 항구로서의 조건이 아주 좋다. 이외에 서산 부근에는 크고 작은 주산, 낭야산등의 산들이 있고, 산에는 우수한 목재도 많다. 선박을 건조할 충분한 자원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사서.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서복은 제1차때 낭야에서 글을 올린 후 즉시 현지에서 바다로 나가서 신선에게 불사약을 구하게 하 였고, 제2차때는 진시황이 친히 낭야에서 바다로 전송했다고 한다. 세번째 수수께끼, 서복의 항로는 어떠했을까? 서복의 선단은 낭야에서 일본까지 갔다. 도대체 어느 항로로 갔을까? 현재 학계에는 "북행항로설"과 "남행항로설"이 있다. "북행항로설"은 서 복이 선단을 이끌고 낭야에서 출발한 후, 요동반도남쪽을 거쳐 한반도 서해안을 지나, 쓰시마해협을 넘어 일본의 키타큐슈와 와카야마( 和 歌 山 )등지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남행항로설"을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하나는 산동반도의 청도 혹은 성산두( 成 山 頭 ) 혹은 지부( 芝?)에서 바 다를 가로질러, 한반도 남부를 거쳐 일본 큐슈등지로 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북연해의 여러 항구(출발항구에는 의견차이가 있음)에서 황해를 가로질러, 혹은 한반도의 제주해협을 거쳐 일본 큐슈로 갔다고 하거나, 아니면 직접 일본으로 갔다고 한다. 서복( 徐 福 )은 일본으로 건너갔는가? 138

139 유화축에 따르면, 사기에는 서복의 항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그저 당시의 조선기술, 항해지식, 해양조건을 고려 하여 전후항로의 흔적을 찾고 고고학적 성과등을 결합하여 합리적으로 논증해야 한다. 월나라는 역대 이래로 조선과 항해의 전통이 있다. 회계에서 낭야로 천도한 후, 오나라의 조선기술과 항해지식을 흡수하여 낭야지역의 조선 과 항운업이 더욱 발전하게 된다.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한 후, 월, 오, 제의 세 해상강국의 조선, 항해기술을 결합하여, 진나라의 조선업과 항해술은 공전의 발전을 이룬다. 진 나라가 흉노를 공격할 때, 연해의 낭야등지에서 양식을 싣고 발해를 거쳐 황해로 들어가서 황하이북의 전선에 공급해주었다. 이는 진나라의 조선과 항해기술이 어느 정도 원거리항해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일찌기 전국시대에 중국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가는 항해노선을 개척한 바 있다. 제위왕, 제선왕 및 연소왕때, 적지 않은 제나라와 연나 라의 방사들이 바다로 삼신산을 찾아 신선에게 장생불사약을 구하러 떠났다. 방사들이 바다로 떠난 지역은 갈석( 碣 石 ) 혹은 산동반도였다. 바 다로 들어간 후, 한반도 남부 혹은 왜인거주지까지 갔을 것이다. 한무제때, 일찌기 산동반도에서 선박으로 흉노를 치러간 적이 있다. 그때 거 쳐간 곳은 북행항로를 거쳐 한반도 서해안에 이르는 길이었다. 이 때의 항로는 110년전의 서복이 갔던 항로와 아마도 같은 항로일 것이다. 일본인 궁태언료( 宮 泰 彦 了 )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동해에는 좌선( 左 旋 )의 회류( 回 流 )가 있다. 이 회류를 이용하면, 한반도 남부의 진한에서 일본의 산음( 山 陰 )으로 향할 수 있다. 중국, 조선, 일본의 고대 사신은 이 항로를 통하여 근 천여년을 왕래했다. 북행항로가 지나는 길에서는 전국시대 연나라, 제나라의 도폐( 刀 幣 )가 계속 발견되고 있다. 그외에 청동검, 청동과, 동탁( 銅 鐸 )등도 발견된다. 이는 전국시대에 이미 이 항 로가 개척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복( 徐 福 )은 일본으로 건너갔는가? 139

140 진나라시대 백년간의 사천이민현상 :14 기원전 316년 진나라는 당시 사천에 자리잡고 있던, 파( 巴 ), 촉( 蜀 )을 멸명시켰고, 사천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게 된다. 이때 진나라는 장기간 의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중이었고, 파, 촉의 개조는 진나라의 통일이정표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진나라는 인구, 정치, 경제의 여러 측면에서 파, 촉에 대하여 개조를 진행하고, 파 촉을 자신의 후방기지로 삼는다. 진나라의 혜문왕때부터 시작하여 진시황에 이르기까지 근 1세기동안 사천으로 이민을 보내어 사천은 이민열기가 뜨거운 곳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진나라는 촉후( 蜀 侯 )를 세번 옹립하고 세번 죽였 다. 경제적으로, 진나라 사람들은 파촉지방에서 세금을 과중하게 거두어 파인( 巴 人 )들이 반란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진나라가 육국을 통일하 는 과정에서 파촉지방의 역할은 더할 나위없이 컸다. 기원전314년, 촉지방에 첫번째 이민붐이 일었다. 예전에 조용히 지내던 촉지방에는 한무리 또 한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 중에는 진나 라의 상국( 相 國 )을 지낸 여불위( 呂 不 韋 )도 있었고, 국가에 버금가는 부를 지닌 것으로 유명한 조( 趙 )나라의 탁씨( 卓 氏 )도 있고, 노나라의 정정 ( 程 鄭 )도 있었다. 그리고 의복이 남루하고 손에 수갑을 찬 죄인들도 있었다. 이처럼 신분이 서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동일한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촉지방이었다. 촉지방은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고, 촉도( 蜀 道, 촉으로 가는 길)은 험하기로 유명했고,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이 처럼 어려움에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촉으로 이사를 가는 것일까? 기원전314년부터, 이러한 이주가 일어났고, 거의 중단되지 않으면서 1세기 간 지속되었다. 도대체 누가 이러한 전무후무한 대이주를 기획하였는가? 기원전300여년의 어느 날, 한무리의 먼지를 뒤집어쓴 무리들이 험준한 촉도를 걷고 있었다.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렵다는 촉도에서 그들은 있 는대로 고생을 했다. 목적지인 성도( 成 都 )까지 가려면 아직도 한참 걸어야 했다. 그들은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유배를 오는 것이었다. 그 들 중에는 진나라의 백성도 있고, 조나라, 위나라의 귀족들도 있었다. 이외에 수갑을 찬 죄인들도 있었다. 이들 중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진 나라의 상국 여불위도 있었다. 상국, 귀족, 백성, 범인으로 구성된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같은 이 무리는 한중( 漢 中 )에서 사천에 이르는 연도에 사는 백성들에게 낯선 풍경 이 아니었다. 기원전 314년부터, 이 촉도에는 거의 매일 이런 이주대열을 볼 수 있었다. 원래 사람이 적던 촉도는 이때 아주 번잡한 주요도로 가 되었다. 강대한 진나라는 그들에게 함께 가도록 했다. 진나라 장수인 사마착( 司 馬 錯 )은 진왕에게 촉을 멸하도록 건의했고, 이 물산이 풍부하고 백성이 부유하고 풍족한 촉지방을 진나라의 후방기지로 삼아서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돈과 물자를 제공받고자 했다. 촉을 멸한 후, 촉지방을 어떻게 개조할 것인가가 진나라사람들에게 떨어진 과제였다. 진나라 사람들은 촉후라는 허수아비를 내세워서 정치적인 개조작 업을 진행했다. 성도성을 쌓아서 군사적인 개조도 진행하였다.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고 사람을 많이 동원한 것은 경제적인 개조작업이었다. 이때의 진나라는 육국의 병사들을 대적할만했다. 그리하여 파, 촉의 지방에서의 물자를 급히 필요하게 된 것이다. 통일은 군사실력의 각축이 지만 국력의 비교이기도 하다. 강대한 군대는 강력한 국력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왕이 되는 것이다. 이민은 바로 경제개혁을 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진나라의 혜문제는 명령을 내리는데, 6국의 왕공귀족, 지주부자중에서 진나라와 적이 되었거나, 법규를 어기면, 온 집 안이 함께 사천으로 이주해야 했다. 진나라 국내의 범죄자도 사천으로 유배되었따. 진나라 혜문왕이 죽은 후, 그의 법령은 자손들에게도 이어 졌고, 1세기에 걸친 이주가 계속되면서, 수만에 이르는 이민자들이 파촉역사상 제1차 대규모이민을 불러왔다. 진나라에서 사천지방에 첫번째로 이민을 보낸 것은 기원전314년이다. <<화양국지>>의 기재에 의하면, "오랑캐무리들이 여전히 강성하므로, 이 민을 많이 보내어 사천지방을 충실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번의 이민규모는 매우 커서, 1집에 5식구가 있다고 보면 개략 5만명가량이 진나라시대 백년간의 사천이민현상 140

141 되었다. 이민자들은 대부분 성도로 왔다. 일부는 촉으로 들어오는 길가에 자리잡기도 하였다. 사실상 이 5만명은 그저 선구자였다. 진시황제 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이민행렬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대다수의 이민자들에게 있어서, 이번의 힘든 이주는 영원한 이별에 다름아니었다. 촉의 땅은 멀어서, 한번 고향과 친척을 떠나게 되면 평생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이 되는 것이다. 촉의 땅에 대하여 그들은 잘 알지 못했다. 어디에 비옥한 경작지가 있는지도 몰랐다. 촉지방 사람 들이 하는 '이상한 사투리'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토박이들의 말은 외지인들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촉지방 사람들도 고향사람들처럼 순박할 것인가? 길떠난 사람들에게는 이주길의 고생을 하면서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이들을 감싸고 있었다. 진나라군대가 남정북벌을 하면서, 한무리 또 한무리의 이민들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지고 사천으로 왔다. 기원전238년, 이주대열에 한 큰 인물이 들어있게 된다. 그는 바로 여불위였다. 이때의 여불위는 진시황에 의하여 직위해제 당하고 유배오는 길이었다. 그는 원래 상인이었고, 젊었을 때는 단신으로 큰 부를 이루었다. 상국의 높은 자리에까지 올랐고, 문신후에 봉해졌던 여불위는 한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그 러나, 그의 문객이 반역을 언급하다가 진시황에게 주살당하고, 그 자신도 연루되어 촉의 땅에 유배오게 된 것이다. 여불위는 자기가 수십년 경영했던 정치사업이 허공에 뜬 것을 보고, 촉지방에서 또 어떤 대우를 받을지 몰라서, 비관끝에 음독자살하게 된다. 그리하여 촉으로 가는 도중에 그는 죽는다. 여불위는 아마도 이들 이민자중 가장 유명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정치를 장사하듯이 했고, 파산후에는 상인의 가장 극 단적인 저항방식을 선택했다. 여불위의 축출과 더불어, 그의 가족과 많은 문객들도 진왕조의 유배대상이 된다. 유배는 아주 독특한 형벌의 방식이다. <<한서>>의 기재에 의 하면, "진나라법: 죄가 있으면 촉한의 땅에 유배보낸다" 이로 미루어볼 때, 촉의 땅에는 죄인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 일부 귀족 상인들도 진나라에서 이주대상으로 삼았다. 부자들은 조, 위, 초등의 나라에서 왔다. 집에는 천금을 가지고 있고, 모두 현지의 명문집안들이었다.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킨 후, 그들은 이미 진나라사람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사람들이다. 이들은 돈도 있고 세력도 있었다. 진나라사람들은 이들이 고향에 남아서 일을 저지르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하여 이들을 사천으로 유배보낸 것이다. 그들이 고향에 남아서 진라에 대항하는 것은 전혀 진나라사람들이 원치 않는 일 이었다. 유배가는 사람들도 이를 원했다. 서남의 요지인 사천땅은 진나라의 통치가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고, 오히려 이곳에서 장사에 종사하면서 편안히 살아갈 수 있었다. 조나라에서 온 탁씨의 말은 이들을 대변한다. "내가 듣기로 민산(사천의 산)의 아래에는 옥토가 있고, 아래에 토란도 있어, 굶지는 않는다고 한다...사람들이 시장에 모여 장사가 쉽다고 한다. 그래서 멀리 이주하기를 청했다" 조나라의 탁씨는 적 극적으로 사천에 들어온 것이다. 이로써볼 때 이들은 성도로 오는 것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같다. 조나라의 탁씨는 임공(지금의 공래)로 왔고, 임공산에 철광이 풍부한데 아무도 캐지 않는 것을 보고는 기뻐하면서 대량으로 사천과 운남의 백성을 끌어모아 광물을 캐도록 하였고, 따라간 장인들로 하여금 철로 만들게 하였다. 탁씨는 채광을 하면서 정부에 약간의 은량을 바쳤을 뿐이므로 원가는 거의 들지 않고 이익을 많이 남기는 사업을 하였다. 전국시대때 철기는 사천에서 아직 유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탁씨의 철 기는 사천백성들로부터 아주 환영을 받았다. 여러해가 지나서 조나라 탁씨의 재산은 천하제일로 성장했다. 집안의 노비만 천명에 이르렀다. 노나라의 정정( 程 鄭 )도 임공에서 철강주조로 돈을 벌었고, 탁씨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화양군지>>에 의하면 이들의 재산이 전국시대 문객 만 3천명을 두었다는 전문( 田 文 ) 즉, 맹상군보다 많았다고 하였으니, 이들 탁씨, 정정의 재산규모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백성들에게, 고향을 멀리 떠나게 되면 그들의 생활은 이전과 많이 달라진다. 사천지방으로 와서 어떤 사람들은 척박한 밭을 약간 나눠받 고, 해뜨면 일하고 해지면 쉬는 생활을 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성도에서 장사를 하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손재주도 고향에서는 별 것이 아니지만, 사천에 오면 아주 희귀한 재주가 된다. 점차 그들은 정착생활에 적응해갔다. 많은 사람들은 촉지방의 여인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점차 촉지방사람이 되어갔다. 그 이후 다시는 사천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점점 촉지방의 사투리를 알아듣게 되고, 촉지방사람 들도 이들이 가져온 문화 글자가 점차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진나라왕들이 바라는 바였다. 진나라왕이 대규모로 이민을 시킨 것은 육국에 대응하는 것 외에도 사천이 개발되어 촉인 진나라시대 백년간의 사천이민현상 141

142 과 진인이 융합하면서 점차 적대감정이 완화되었고, 진왕조의 후방기지로서 충실히 역할을 해냈다. 효과가 괜찮은 것을 보고서, 진나라사람들 은 한걸음 더 나아가 파촉문자를 폐기하고, 촉지방에 소전( 小 篆 )을 보급시켰다. 학자인 동은정은 파촉이 진나라가 극력 문자통일을 시행한 첫 번째 지방이라고 보고 있다. 이민자들이 사천지방에 오는 것과 동시에 대규모의 진나라군대도 따라왔다. 촉국이 망하고 사천으로 이주해 들어간 귀족, 범죄자들은 반란등 을 일으킬 가능성이 컸으므로 진왕이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진왕의 지시하에 진나라장수인 진장, 장약, 장의등이 대군을 이끌고 촉으로 들 어왔다. 이렇게 사천에 투입된 부대는 분명 진나라의 정예부대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지금까지 조사해본 진나라의 공식사료중에 이 진나라군대의 상황을 알려주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다. 진한시기 에 국가를 위하여 변방을 지키는 일은 국가에서 가장 영예로운 일이었는데, 왜 진나라의 사관들은 변방을 지키는 이들 병사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까? 설마 이것이 진왕조의 최고국가기밀이라도 된단 말인까. 전국시기에, 진나라군대는 소금과 장극을 들고 중국각지를 누볐고, 사천에 들어온 진나라군대는 분명 그중 극히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사료를 통하여 이들 신비로운 군대의 행적을 알 수는 없었다. 진나라사병은 1992년년이 되어서야 신비의 면사를 벗었다. 1992년 3월, 성도 용 천역에서 수백개의 묘장이 질서정연하게 그의 만평방미터의 구역에 퍼져 있었는데, 묘의 주인의 신분이 금방 드러났다. 그들이 바로 2000여 년전에 사천으로 건너온 진나라병사였던 것이다. 묘장은 4개구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아마도 군대에서 서로 다른 병과를 표시하는 것같다. 역사적으로 묘의 방향은 죽은 자의 죽기전의 신앙 과 희망을 알 수 있다. 고촉인들의 묘장은 고향인 민산을 향하고 있다. 진나라사람들은 동북방을 향하는데, 분명히 그들의 고향쪽일 것이다. 이들의 묘는 그다지 후하게 매장되지는 않았다. 이로 봐서 이들의 신분이 그다지 높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묘장에서 나온 것들 은 당시 진나라사병들의 생활을 짐작하게 해준다. 예리한 동모( 銅 矛 )가 그들의 무기였다. 진왕조의 화폐인 진반량이 그들의 묘에서 출토된다. 그리고 식기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도기도 나온다. 이외에 낫, 도끼등도 발굴되었다. 이들 사병들은 변방을 지킬 뿐아니라 스스로 자급자족했 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곳에 묻혀 있는 진나라병사들이 모두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중 한 병사의 이름을 알 수 있다. 그는 바로 "양비( 楊 悲 )"이다. 묘의 발굴과정에서 고고학자들은 하나의 동인( 銅 印 )을 발굴하였는데, 도장에는 양비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이 양비라는 병사 는 분명히 군내에서 문서업무를 담당하던 하급군인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군대에서 명령을 반포할 때는 공문에 도장을 찍는다. 많은 사병들과 마찬가지로 양비도 이 곳에 묻혔다. 그와 일생을 함께하였던 도장도 함께 묻힌 것이다. 2000여년이 지나서 양비의 유물은 행운스럽 게도 발굴되어 후세인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진나라시대 백년간의 사천이민현상 142

143 병마용( 兵 馬 俑 )의 발견자는 누구인가? : 년을 전후한 몇개월동안 중국에서는 섬서성 임동현 서양촌 하화촌 일대에서 출토된 병마용을 둘러싸고 기세가 대단한 대규모의 논쟁이 벌어진바 있다. 이 논쟁의 주제는 아름다움으로 전세계에 유명한 병마용은 도대체 누가 "발견"했느냐는 것이다. 논쟁의 촛점은 도대체 누가 병마용의 "발견자"라고 불릴 자격을 갖추었느냐는 것이다. 이 "발견자"의 자격쟁탈전에는 쌍방에서 주요한 당사자들이 모두 드러났고, 대치국 면도 아주 명확했다. 한 측은 일찌기 우물을 파다가 진용을 파낸 서양촌의 양신만( 楊 新 滿 )등 9명의 농민이고, 다른 한 측은 발굴에 참여한 고 고학자들이다. 일시에 중국내외, 중앙부터 지방까지, 동남연해에서 서북고원까지 여러 매체들이 진용의 "발견자"를 두고 서로 다른 보도의 글을 내보냈다. 춤추는 눈꽃처럼 온 하늘을 뒤덮어 버린 것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혹은 논밭두렁에서 무의식중에 신문 하나를 꺼내들면, 언제 든지 진용의 "발견자"에 관한 소식과 뉴스를 볼 수 있었다. 이외에 사람들은 TV의 모니터에서도 자주 몇명의 창로한 농민이 활처럼 굽은 허 리를 하고, 양식을 매고 성, 시의 유관기관을 찾아다니면서 호소하는 영상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자주 일부 저명한 고고학자들이 미디어의 인 터뷰를 통해서 정중하게 담화하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서양촌 농민들이 하는 말은 아주 많지만 핵심적인 의미는 아주 간단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진용은 어쨌든간에 그들이 우물을 파다가 먼저 "발견"한 것이라는 것이므로, 자기들이 병마용의 "발견자"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상반되게 일부 고고학자들은 "과학적 인 발견"의 "발견"은 "고도의 지적"인 노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병마용에 대하여 성격을 규정하고 이름을 규정한( 定 性, 定 名 ) 고고학자들 만이 병마용의 "발견자"로 불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갑론을박을 통하여 쌍방은 모두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이리하여 병마용의 "발견자"를 둘러싼 시시비비는 일순간에 당시 여론의 핫이슈가 되어버렸고, 사회뉴스면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뉴스가 되었다. 오랫동안 병마용에 관한 사항은 표면적으로는 아주 고요했다. 이번에 논쟁이 드러난 것은 비록 "발견자"에 관한 시시비비일 뿐이고, 더욱 민 감하고 근본적인 문제까지는 건드리지 않았다. 다만, 어떻게 말하든간에 조용한 나날, 평온한 상태는 이때 타파되었다. 이때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잘 느끼지 못했다. 진보하는 것인지 퇴보하는 것인지도. 그리고 이런 변화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어쨌 든 사람들이 미디어의 최근동태를 잘 관찰해보면, 개혁개방이 가져온 가벼운 분위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쌍방이 논쟁하는 내용만을 놓고 보면, 보통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일과 사람과 더욱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누가 되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있고, 견해가 있으면 누구든 지 일어나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논쟁의 형식은 "공격측"도 있고 "방어측"도 있다. 쌍방의 진세와 경계는 분명하다. 누구든지 링에 오르고 싶으면 누구든지 올라서 충분 히 발언할 권리가 있다. 논쟁의 분위기를 보면 모두 날카롭게 자기의 주장을 펼치고, 전혀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약간은 아는 것은 모두 말 하고, 말은 끝이 없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하고싶은 말을 다하는 것은 과거에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원래, 병마용의 "발견자"와 같은 논쟁은 성격과 내용이 아주 단순하다. 현재의 정치문제에 관련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민감한 국책과도 무관하다. 그래서 이 런 논쟁을 펼칠 공간이 충분하고 넓었던 것이다. 누가 병마용의 "발견자"인지의 논쟁에 대하여 만일 더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계속 진행되고 깊이있게 진행되었다면 아마도 현 재 존재하는 허다한 의문들을 모두 수면위로 끌어올려, 공평하고 공정한 원칙하에서 결론을 얻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이상한 일은 겨우 몇개월의 시간이 흐른후, 처음의 열기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일부 문제에 대하여 일정한 정도 얘기한 후 어떤 당사자들은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일부 관련있는 정부기관과 기구들도 돌연 입을 봉했고,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 병마용( 兵 馬 俑 )의 발견자는 누구인가? 143

144 놀라운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니면 어떠한 고려에서 나온 것인지는 몰라도, 아주 시끄럽던 진용의 "발견자" 논쟁은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는 상황에서 돌연 조용해 지고, 끝이 나버렸다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앞에 내놓았던 많은 문제들은 하나하나 냉각되어 갔고, 한편으로 밀어 두었으며, 아무도 정리작업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유시무종( 有 始 無 終 )의 논쟁은 아주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것은 당초에 사람들이 가장 관심가지고 가장 기대를 가졌던 결론에 대하여 예견가능한 장래에는 만족할만한 답변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인 가? 이를 기준으로 추단해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누군가가 다시 들고 일어나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여러 사람들이 갑론을박하면서 싸운 것이 그저 아무런 의미도 없고 결과도 없는 입씨름에 지나지않 았는가. 그리고 아무런 실질적인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일찌감치 이럴 줄 알았다면 당초에 왜 쌍방은 그렇게 핏대를 세워가면 서 구호를 외쳤으면서도 실질적인 결과가 전혀 나오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단 말인가. 이번의 "머리만 있고 꼬리는 없는" 발견인과 관련한 풍 파는 사람들에게 뭔가 결핍되어 있다는 기분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여기에 무슨 큰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 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퇴각나팔을 분다면, 이것은 그 중의 한 당사자가 이미 예정한 목표를 달성했다는 뜻은 아닌가. 혹은 그 중의 일방당사자가 계속 논쟁을 해나가다보면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닌가. 지금 다시 병마용 "발견자"논쟁의 쌍방을 살펴보면, 누가 자기가 예정한 목표를 달성했다고 볼 수 있는가? 서양촌의 아홉 명의 농민이 그들 이 예정한 목표를 달성했는가? 이것은 명백히 No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많은 주관부서와 관련기관은 서양촌 농민의 요청에 대하여 한번도 적극적이고 지지하는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번 병마용 "발견자"자격에 대한 호소는 더 많은 사람들 특히 일부 고고학자에게는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서양촌의 아홉 명의 농민에게 있어서 이런 아무런 결과도 없는 난감한 국면에 대하여 스스로 만족할 리는 절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원래 호소한 목적은 전혀 달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일부 권위인사들이 제기한 "병마용에 대하여 '성격을 부여하고, 명칭을 부여한' 고고학자들이 비로소 병마용의 발견자이다"라는 관점에 대하여도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들고 일어나 정면으로 유력하게 반박했다. 이것은 그들이 외부여론에서는 이미 절대적인 우세를 점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더이상 이 권위있는 학자의 주장을 반박할 수 없게 되었다면 그들이 원래 설정한 목표는 달 성되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시황병마용"이라는 이 성격부여, 명칭부여가 뒤집어지지 않는 한, 사람들이 이러한 성격부여, 명칭부여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 가장 최선의 결과이다. 병마용의 "발견자"의 논쟁의 막은 서서히 내려지고 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은 서안에서 천리바깥인 고도 남경에 살고 있던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진경원'이라는 백발노인이 분연히 들고 일어나 북경에서 온 기자에게 말했던 것이다. 병마용 "발견자"의 논쟁은 아직 완결 되지 않았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더이상 할 말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직 많은 의견을 가지고 있고, 아직 다 말하지 못했다. 병마용의 성격부여, 명칭부여문제는 과거 학술상의 맹점이었다. 외부인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기왕의 30여년동안 진경원과 서안의 고고학자들간에는 병마용의 성격부여,명칭부여를 놓고 많은 의견차이가 있었다. <<진용신탐>>이라는 글이 발표된지 얼마되지 않아, 서안의 고고학계는 진경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급히 학술토론회를 마련한 후 회의에서 진경원의 주장을 만장일치로 부정한다고 한 후, 논쟁의 대문을 꽉 걸어잠궈버렸었다. 그리고는 병마용의 성격부여,명칭부여에 대 한 문제에서 계속 발언할 기회를 봉쇄했다. 이후 사람들은 진경원이 자기의 주장을 드러내는 글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다만, 현재 서안측에 서 적극적으로 병마용의 '성격부여, 명칭부여'문제를 제기하였고, 이것이 대중들에게 전달되었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하고 참고 있을 수 는 없게 된 것이다. 병마용( 兵 馬 俑 )의 발견자는 누구인가? 144

145 아방궁( 阿 房 宮 )의 이름의 유래 :11 진시황에 6국을 멸하고 통일대업을 완성한 후, 스스로 공적이 삼황오제를 넘어섰다고 생각해서 수도인 함양에서 크게 토목공사를 벌였다. 건 축한 궁전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아방궁이었다. 아방궁에는 당시 전국각지 궁전의 장점을 모두 모아놓았다. 규모도 공전절후였고, 기세도 대단했다. 원래, 아방궁은 그저 조궁( 朝 宮 ) 전전( 前 殿 )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궁전은 준공되지 못했고, 그래서 전체 궁전은 아방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궁전은 왜 "아방( 阿 房 )"이라고 이름했을까? 역대이래로 의견이 일치되지 못하고 있다. 대체로 나누자면 세 가지 정도의 견해가 있다. 첫째, 아방은 궁전의 부지가 함양에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사기. 진시황본기>>에는 "진 아방궁은 즉 아성( 阿 城 )이라고 한다. 옹주( 雍 州 ) 장안현( 長 安 縣 )의 서북 14리에 위치하고 있다. 궁은 상림원( 上 林 苑 )의 가운데 있었고, 옹주 곽성의 서남면이 바로 아방궁성의 동남면이 다" 그래서, 안사고( 顔 師 古 )는 "아( 阿 ), 는 근( 近, 가깝다)이다. 그곳이 함양에서 가깝기 때문에, '아방'이라고 하였다" 이 첫번째 견해는 부지 의 위치에 따라 이름을 정했다는 말이다. 둘째, 아방궁의 건축품격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아방이라는 말은 "사아방광( 四 阿 旁 廣 )"의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 阿 )라는 것은 고 어중에는 정원의 굽은 곳이라는 의미이다. 두목의 <<아방궁부>>에서 이 궁은 '5보에 1루가 있고, 10보에 1각이 있다, 회랑의 허리는 굽어 있 고, 처마는 뽀죡하고 높다"는 것은 바로 아방궁의 "아"의 특색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사기. 진시황본기>> 색은중에 이 궁명을 해석할 때, "이것은 그 형태를 따서 명명한 궁이다. 그 궁이 사아방광이라는 것이다" 셋째, 아방이라는 것은 궁전이 대릉( 大 陵, 큰 언덕) 위에 건축되었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은 <<한서. 가산전>>에 나온다. 그곳의 주석에는 "'아'라는 것은 '대릉'이다. 그래서 '아방'이라고 한 것이다. 그 말은 높이 높은 언덕 위에 있는 방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아 방궁은 확실히 높은 언덕위에 기초를 하고 지었다. 아방궁( 阿 房 宮 )의 이름의 유래 145

146 전국옥새의 뒷이야기 :11 전국옥새는 진시황제 이래로 황제를 상징하는 물건, 황권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이에 따라 전국옥 새를 차지하여 황제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혈안이 되어 전국옥새를 노렸고, 전국옥새는 진시황이 래로 많은 곡절을 겪고, 많은 이야기를 남기게 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전국옥새를 차지한 인물들 을 시간 순서대로 언급하고자 한다.(앞부분은 전 글 화씨벽과 전국옥새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간략히 소개) 1. 춘추시, 초나라 사람 변화( 卞 和 )가 화씨벽을 얻음. 2. 초위왕은 소양이 월을 멸망시키는데 공을 세워 화씨벽을 상으로 내림. 이후 도둑맞음. 3. 조나라 영현이 얻은 후, 조혜왕이 뺏음. 4. 기원전 228년 진시황이 화씨벽을 얻음. 이사에게 명하여 "수명우천, 기수영창"의 여덟글자를 함양 의 옥장인 손수에게 명하여 화씨벽을 편평하게 갈게 하고 깍아서 옥새로 만들게 함. 5. 기원전 219년 진시황제가 동정호에서 수렵시 분실 (후에 찾은 것으로 알려짐) 6. 기원전 206년 10월 유방의 군이 함양을 함락시킬 때 진왕 자영이 시황제의 옥새를 바침. 이후 유 방이 천자에 오른 후 대대로 이어짐. "한전국새( 漢 傳 國 璽 )" 또는 "한전국보( 漢 傳 國 寶 )"라고 함. 7. 서기8년 왕망이 찬달. 왕망의 고모인 효원황후에게 한전국새를 내놓으라고 핍박하자 효원황후가 바닥에 버려 한쪽 귀퉁이가 깨지고, 왕망은 귀퉁이를 금으로 입히게 함 년 10월 4일, 왕망의 패함. 상인 두오( 杜 吳 )는 왕망을 죽인 후 교위 왕헌( 王 憲 )이 옥새를 취함. 왕헌은 스스로 한대장군이라 칭함. 10월 6일, 이송, 등화가 장안에 들어왔으나 왕헌이 옥새를 내놓 지 않으므로 왕헌을 죽이로 옥새를 취함. 이송은 전국옥새를 가지고 완( 宛 )으로 가서 녹림군( 綠 林 軍 )이 옹립한 한경시제( 更 始 帝 ) 유현( 劉 玄 )에게 바침. 9. 서기 25년 6월, 적미군( 赤 眉 軍 )이 별도로 황족후예 유분자를 황제로 옹립하고 연호를 건세라 함. 같은 달에 유수( 劉 秀 )가 고읍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한이라 하고 연호를 건무라 함. 9월에 적미군 번 숭등은 10만을 이끌고 관내로 들어오고, 경시제 유현은 옷을 벗은채 도망침. 10월에 유수는 낙양에 들어가고, 12월에 적미군은 경시제 유현을 추살함. 서기 27년 1월 적미군이 의양에서 패하고, 유분 자와 번숭은 무리를 이끌고 유수에게 투항하면서 전국옥새를 동한 광무제 유수에게 바침. 10. 동한 말년에 환관이 득세하며 소제 광희원년(189년 8월) 원소군이 궁중에 난입하여 환관을 죽인 후 단규가 황제를 모시고 북궁으로 도망치는데, 옥새가 실종됨. 11. 헌제쩨, 동탁이 난을 일으킴 191년 장사태수 손견이 군사를 이끌고 낙양에 들어갔는데, 성남쪽 견관정에서 오색기운이 있는 것을 보고 손견은 사람을 시켜 우물에 들어가보게 하였더니 한전국새 가 있었다. 글에는 수명우천 기수영창이 새겨져 있었고, 방원 4촌, 손잡이에는 오룡이 있었고, 한쪽 귀퉁이는 깨져있었다. 손견은 이 옥새를 처 오씨 있는 곳에 감추어둔다. 후에 손견은 원술은 손견처 를 붙잡아 옥새를 뺏는다. 손견이 죽은 후 형주자사 서규가 옥새를 가지고 허창으로 가서 조조에게 바치며, 조조는 당시 한헌제를 데리고 있었으므로 옥새는 다시 한황실로 돌아오게 된다 년 조조의 아들 조비가 헌제를 핍박하여 양위하게 한다. 조비는 사람을 시켜 전국옥새의 어 깨부분에 8글자를 전자로 새기게 한다 "대위수한전국지새( 大 魏 受 漢 傳 國 之 璽 )" 전국옥새의 뒷이야기 146

147 년 12월 사마염이 같은 방법으로 황위를 찬탈하여 위제 조환을 퇴위시키고 위나라를 진나라 로 바꾸며 진무제에 오른다. 전국옥새는 이로써 진( 晋 )에 귀속된다 년 5월, 전조(흉노) 유총( 劉 聰 ) 이 진회제 사마직을 포로로 잡으면서 전국옥새는 전조( 前 趙 ) 로 넘어간다 년 9월, 후조( 後 趙 )의 석륵이 전조를 멸망시키면서 전국옥새를 얻는다. 전국옥새의 우측에 "천명석씨( 天 命 石 氏 )"라는 글자를 추가로 새긴다 년 1월 염민이 후조의 황제 석감을 살해하고 전국옥새를 얻어 업성에서 스스로 황제에 오른 다. 국호를 대위( 大 魏,)를 세운다 년 선비족인 모융준이 전국옥새를 얻기 위해 위를 공격한다. 3월에 염민은 패하여 포로가 되 고, 5월에 살해된다. 위나라 대장군 장간은 태자 염지를 보좌하여 업성을 사수한다. 장간은 동진의 사상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사상은 대시를 보내서 구하게 한다. 대시는 장간에게 전국옥새를 내놓을 것을 요청하여 얻어내고, 사상은 이를 진목제에게 바친다. 다시 사마씨의 수중으로 전국옥새가 들어 왔다. 8월에 모용평은 업성을 함락시키고 11월에 전연의 모용준은 황위에 올라 황제가 되는데, 스스 로 전국옥새를 얻었다고 주장하며 연호를 원새( 元 璽 )로 바꾼다 년 6월, 유유가 진공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며 국호를 송이라 한다 년 4월, 소도성이 송순제를 핍박하여 양위하게 하며, 남제를 세운다 년 4월, 소연이 남제를 뺏어 양나라를 세운다 년 8월, 후경이 반란을 일으켰다 552년에 피살된다. 시중인 조사현은 옥새를 가지고 광릉으 로 도망쳐서 북제의 신술에게 바치고, 신술은 북제조정에 바침으로써 북제의 고씨 소유로 넘어간다 년 1월 주무제 우문옹이 북제를 평정한 후, 옥세는 주( 周 )나라로 간다 년 2월 양견이 북주 정제를 폐위시키고 수( 隋 )나라를 세운다. 전국옥새는 수나라 궁중으로 들어가는데, 전국옥새를 수명새( 受 命 璽 )라고 부른다 년 3월, 수양제 양광이 우문화급에게 강도에서 피살된다. 소후는 양제의 어린 손자 정도와 전국옥새를 데리고 막북의 돌궐에게 도망쳐서 수왕( 隋 王 )으로 칭한다. 25. 당나라의 이세민은 전국옥새를 얻지 못하여 수명현새( 受 命 玄 璽 )를 파서 "황천경명, 유덕자창"이 라고 새겨서 쓰다가, 630년 이정이 돌궐을 치면서, 지리카한을 포로로 삼으며 동돌궐을 멸망시킨다. 같은 해에 소후는 양정도와 함께 중원으로 돌아오며, 전국옥새는 당나라 궁중으로 돌아온다 년 4월, 당말에 천하가 어지러우면서 주황이 당애제를 폐하고, 전국옥새를 뺏어 후량을 세운 다 년 10월, 후당의 이존조는 후량을 멸하고 전국옥새도 후당에 들어간다 년 1월 11일, 후당의 하동절도사인 석경당이 거란군을 데리고 낙양을 친다. 말제 이종가는 전국옥새를 안고 현무루에서 분신한다. 전국옥새는 이 때 사라진다. 이후에 몇번 전국옥새를 찾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후의 전국옥새는 모두 가짜 라고 보고 있다. 첫째 경우, 년 송나라 철종 때 함양현의 백성인 단의가 땅을 파다가 옛날 도장 하나를 발굴한다. 색은 녹색이고 따뜻하고 광택이 있으며 용손잡이가 있다는 것이다. 다음해 황제에게 바치며 예부, 어사대 등에서 고증을 하고 13명의 학사관원이 여러 차례의 고증을 거친 후에 시황제가 만든 전국옥새라고 결론을 내린다. 철종은 매우 기뻐한다. 전국옥새의 뒷이야기 147

148 년 4월, 이 옥새는 정강의 변이후에 휘종흠종 두 황제가 납치된 후 전국옥새는 다시 금나 라에 빼앗기고 행방을 모른다 년 1월, 원세조 쿠빌라이가 죽었을 때, 대도에 전국옥새가 갑자기 나타난다 년 1월, 주원장이 남경에서 명을 세우나, 원순제는 몽고초원으로 도망친다. 15만대군을 세번 이나 몽고로 보내어 도망친 몽고조정을 쫓았으나, 결국 전국옥새는 찾지 못하고 만다. 둘째 경우 1500년 명 홍치 13년 섬서성현민 모지학이 니하빈에서 옥새를 얻었는데, 수명우천기수영창으로 되 어 있고, 색이 흰색으로 약간 푸른 색을 띄며, 용손잡이가 있었다. 고증후 가짜로 결론을 내림. 셋째 경우 1632년 청태종이 차하얼부의 린단한을 궤멸시킨 후 린단한의 장자 어저가 무리를 이끌고 귀순하며 원나라때의 전국옥새를 바친다. 청태종은 이를 얻은 후, 진시황의 전국옥새가 아니라는 것은 바로 알아보지만, 이를 활용하여 여진을 만주로 고치고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고치며 연호를 숭덕으로 고친다. 청나라초에 궁내 교태전에는 39개의 각종 어새를 보관하였는데, 그 중에 진나라때의 전국옥 새로 추정되는 도장도 있다. 건륭 11년 1746년 건륭은 고증을 거친 후 가짜로 판정한다. 전국옥새의 뒷이야기 148

149 화씨벽( 和 氏 壁 )과 전국옥새( 傳 國 玉 璽 ) :10 후세에 기록을 근거로 위조한 것으로 보이는 " 受 命 于 天, 旣 壽 永 昌 "을 새긴 도장. 1. 화씨벽의 내력 춘추( 春 秋 )시대에 초( 楚 )나라에 변화( 卞 和 )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산에서 한 개의 박( 璞, 옥을 싸고있는 돌덩어리)을 얻어서, 초여왕( 楚 勵 王 )에게 바쳤다. 초여왕은 옥장인에게 돌을 감정하게 하였는데, 옥장인은 그냥 평범한 돌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초여왕은 변화가 자기를 속였 다고 생각하고, 변화의 왼쪽 다리를 잘라버렸다. 나중에 초무왕( 楚 武 王 )이 즉위하자, 변화는 다시 박을 가져다 초무왕에게 바쳤다. 초무왕도 역시 옥장인에게 감정을 시켰는데, 옥장인은 또 그냥 돌맹이일 뿐이라고 말했다. 초무왕도 변화가 자기를 속였다고 생각하고 다시 변화의 오 른 다리를 잘라버렸다. 초문왕( 楚 文 王 )이 즉위하자, 변화는 박을 안고 산에 가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삼일 밤낮을 울어서 눈물도 모두 마르고, 피눈물이 나기 시작했 다. 초문왕이 이 소식을 듣고 기이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서 물어보았다. "천하에 다리 두개가 잘린 사람도 많은데, 너는 왜 이렇게 슬프 게 우느냐?". 변화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다리 두개가 잘린 것을 슬퍼해서 우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옥석을 돌맹이라고 얘기해서 슬픈 것 이고, 충정있는 사람이 사기꾼으로 볼리는 것이 슬픈 것이다." 초문왕은 다시 옥장인에게 명을 내려 박을 쪼개보도록 하였다. 과연 박안에는 보옥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이 옥을 변화의 이름을 따서 "화씨벽"이라 하였다. 2. 조혜왕( 趙 惠 王 )은 어떻게 화씨벽을 얻게 되었는가 초문왕이래로, 화씨벽은 계속 초나라에 머물러 있었다. 초위왕( 楚 威 王 )의 시대에 이르러, 초위왕은 공이 많은 초나라의 재상인 소양( 昭 陽 )에 게 화씨벽을 상으로 내렸다. 소양이 한번은 크게 연회를 연 적이 있는데, 이 때 화씨벽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런 데, 연회중에 화씨벽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렸다. 소양은 장의( 張 儀 )가 훔친 것으로 의심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초위왕이 장의를 받아주 지 않아, 장의는 살길이 막막하여 당시 소양의 문하에 기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양은 장의를 피부가 터지고 살이 뭉그러지도록 때렸으며, 몇번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장의는 결국 초나라를 떠나서 진나라로 돌아갔다. 후에 소양은 천금을 내걸고 이 화씨벽을 사겠다고 하였지만 화씨벽을 훔친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소양은 결국 화씨벽을 찾지 못하였다. 50년이 지난 어느날, 먼 곳에서 온 손님 하나가 조나라의 환관인 영현의 집에 와서 하나의 옥벽을 팔았다. 영현은 이 옥벽이 흰색에 윤이 나 고 하자가 없으며, 빛을 내뿜는 것을 보고는 오백금을 주고 사들였다. 후에 영현은 옥장인에게 옥을 감정하라고 시키자, 옥장인은 깜짝 놀라 면서 이것이 바로 화씨벽이라고 하였따. 영현은 매우 기뻐하며 이를 감추어 두었다. 그러나, 이 일은 이미 사람을 통해 조혜왕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조혜왕은 영현에게 화씨벽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영현은 화씨벽을 너무나 아껴 즉시 바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조혜왕 은 크게 노하여 사냥하러 가는 길에 갑자기 영현의 집안으로 들이닥쳐 화씨벽을 수색해서 가지고 가버렸다. 3. 화씨벽은 15개 성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화씨벽의 가치는 성에 필적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물론 과장된 것이다. 진소왕( 秦 昭 王 )이 성 15개를 줄테니 교환하자고 한 일은 있으나, 이것은 기만하려는 수법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화씨벽은 분명히 일반적인 옥과는 다른 특유한 공능을 가지고 있다. 화씨벽( 和 氏 壁 )과 전국옥새( 傳 國 玉 璽 ) 149

150 고서의 기재에 의하면 화씨벽은 대체로 원형의 가운데 작은 동그란 구명이 있는 판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마치 가운데 중간에 구멍을 뚫은 둥근 전병같은 형태이다. 이것을 어두운데 놔두면 화씨벽은 빛을 내고, 먼지를 제거하며, 사악한 귀신을 쫓는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야광지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을 방안에 놔두면 겨울에는 따뜻하여 화로를 대신할만하고, 여름에는 매우 시원하여 100보이내로 파리 모기가 들어오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화씨벽은 희세의 진기한 보물로 여겨졌다. 4. 진소왕은 화씨벽을 얻었는가? 당시 요현에게 옥을 감정해줬던 옥장인이 우연히 진나라로 오게 되었고, 진왕을 위하여 옥을 깎게 되었다. 옥장인은 무의식중에 화씨벽에 대 하여 얘기하였고, 그 행방을 얘기하였다. 진소왕은 조혜왕이 화씨벽을 가진 것을 알고는 이걸 속여서 손에 넣고자 하였으며 "완벽귀조( 完 璧 歸 趙 )"라는 고사는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인상여( 藺 相 如 )의 용감함과 기지로 인하여 진소왕의 음모는 수포로 돌아가고, 진소왕은 화씨벽을 얻을 수 없었다. 후에 진시황이 육국을 멸망시킨 후에야 비로소 화씨벽을 얻게 되었다. 5, 화씨벽의 행방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육국을 멸망시킨 후, 좋은 장인으로 하여금 화씨벽을 깍아서 전국옥새로 만들게 하였다. 이사( 李 斯 )로 하여금 " 受 命 于 天, 旣 壽 永 昌 "(하늘로부터 명을 받았으니, 영원토록 창성하소서라는 정도의 의미임)이라는 여덟글자를 충조전자( 蟲 鳥 篆 字, 벌레와 새와 같 은 전서체의 글자)로 새기게 하였다. 이로써 화씨벽은 전국옥새( 傳 國 玉 璽 )가 되었으며 황제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다. 전국옥새는 진시황의 시대에도 한번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기원전 219년 진시황이 용주를 타고 동정호를 지날 때, 갑 자기 풍랑이 일어 용주가 기울어졌다. 진시황은 급히 전국옥새를 호수에 던지며 하늘에 풍랑을 잠재울 것을 기원하였다. 이로 인하여 옥새는 실종되었는데, 8년후에 화음평서도의 어떤 사람이 다시 전국옥새를 찾아 진시황에게 바치게 된다. 진이세 호해가 사망한 후 자영이 한고조 유방에게 전국옥새를 바쳤다. 왕망이 찬탈한 이후에 왕망의 고모인 효원황태후에게 옥새를 내달라고 핍박하였다. 태후는 대노하여 옥새를 바닥에 집어던져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왕망은 사람들에게 황금으로 보완하게 하였다. 이로써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옥새는 후세에 계속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동한 말년에 각 제후들이 동탁을 토벌할 때, 먼저 낙양성에 들어온 손견은 우물에서 발견한 한 궁녀의 시신에서 붉은 색의 상자를 얻었으며 그 상자안에는 전국옥새가 들어 있었다. 손견의 아들인 손책은 옥새를 원술에게 바치고 병사와 말을 빌린 적이 있다. 손책은 이 옥새를 주고 원술에게서 3천의 병장을 얻어서 손씨의 오나라를 세우는 기반을 다지게 된다. 원술이 황제를 칭하였으나 실패한 후, 옥새는 조조에게 귀속 된다. 그 후에 옥새는 약 1천년간 왕조를 바꾸어가며 전해지게 된다. 위( 魏 ), 서진( 西 晋 ), 전조( 前 趙 ), 동진( 東 晋 ), 송( 宋 ), 남제( 南 齊 ), 양( 梁 ), 북제 ( 北 齊 ), 주( 周 ), 수( 隋 )를 거쳐 당( 唐 )에도 전해진다. 이후 오대( 五 代 )의 후당( 後 唐 ) 마지막 황제인 이종가( 李 從 珂 )가 거란의 야율광이 낙양으 로 쳐들어오자 화씨벽을 안고 도망치다가 현무루에서 불에 타 죽으면서, 옥새가 실종되었다고 한다. 화씨벽( 和 氏 壁 )과 전국옥새( 傳 國 玉 璽 ) 150

151 순식( 荀 息 )과 이극( 里 克 ): 진( 晋 )의 가장 참혹한 궁중정변 :09 진헌공( 晋 獻 公 )이 죽자, 그의 고굉지신인 순식과 이극이라는 두 원로급의 대신은 누구를 다음 군주로 할 것인지의 문제에서 이견이 나타난다. 순식은 진헌공의 넷째아들 해제( 奚 齊 )를 내세워 즉위시킨다. 이극은 이에 반발하여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오지 않는다. 순식은 아주 경계했다. 위험한 시기인 것을 잘 알아서, 만의 하나를 방지하기 위하여, 그는 해제가 얼굴을 드러내는 모든 기회를 차단하여, 위험을 피하려 한다. 그래서 아무도 해제가 도대체 어느 곳에 거주하는지를 몰랐다. 이극은 참을성있게 기다린다.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제가 어떻게 숨어 있더라도, 진헌공의 장례식날에는 얼굴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는 것을. 1개월후. 장례식에 참석한 인원이 궁에서 나왔다. 순식은 경계를 강화해서, 인원으로 네모로 방진을 만든다. 해제를 가장 한가운데에서 걸어가도록 했 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물소가죽으로 만든 방패로 해제를 꼭꼭 에워싸서 튼튼히 막았다. 이와 동시에, 이극이 매수한 자객은 장례업무를 담당하는 인원으로 변장하여, 사람들 무리에 섞여 들어갔다. 장례인원이 교외의 묘지에 도착한다. 사람들이 곡을 하기 시작한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바로 이때, 자객은 혼란을 틈타 해제의 곁으로 다 가간다. 비수를 꺼내서 물소가죽방패를 뚫고 그 자리에서 해제를 찔러죽인다. 졸지에 혼란이 발생한다. 갑사들이 몰려들어 자객은 그 자리에서 무수히 찔려서 숨을 거둔다. <좌전>은 사실대로이 음모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겨울 시월, 이극은 해제를 차( 次 )에서 죽였다" 여기서 '차'는 '상차( 喪 次 )' 즉 장례를 치르는 곳이다. 책에서는 "그 군주의 아들을 죽였다"( 殺 其 君 之 子 )라고 쓴다. 이극은 일생동안 진헌공이 명이라면 그대로 따랐던 인물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는 주군의 아들을 죽인다. 해제는 그의 부친 진헌공의 장례식 현장에서 죽는다. 새로운 군주가 즉위한지 1달도 되지 않았고, 아직 정식으로 등극하지도 않았었는데, 불 귀의 객이 되고 만 것이다. 그는 진폐공( 晋 廢 公 )이라 불리며, 향년 14세이다. 순식은 마침 진헌공의 유체에 대하여 곡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마지막 장례의식을 치르고 있었는데, 매장을 끝내지도 못했었다. <좌전>에는 "미장야( 未 葬 也 )"라고 적고 있다. 돌연한 변고소식을 듣고 대경실색하여 급히 달려가보니 해제는 이미 피를 샘처럼 흘리며 이미 숨을 거둔 상 태였다. 순식은 해제의 시신을 끌어안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갑자기 통곡을 한다. 이번에는 진짜로 통곡을 한 것이다. "나는 주공의 유명을 받 들어 아들을 보호했는데, 태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저의 죄입니다. 내가 살아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볼 면목이 있단 말입니까" 말을 마치고 그는 머리를 석주로 부딛쳐 갔다. 그렇게 죽을 작정이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그를 붙잡아 말린다. 주공의 장례도 아직 다 치르지 못했는데, 죽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순식이 말한다: "나는 주공에게 맹세한 바 있다. 그런데 지금 해제가 이미 죽었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숨을 쉬고 살아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한번 꺼낸 말은 절대로 식언할 수 없다. 나는 오늘 주공과 지하에서 만나겠다." 곁에 있는 사람이 그에게 권하여 말한다: "비록 해제는 이미 죽었지만, 탁자( 卓 子 )는 아직 살아있지 않습니까. 탁자도 주공의 친혈육입니다. 당신이 탁자를 보좌하여 즉위시키면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탁자는 여희의 친여동생 소희의 아들이다. 진헌공의 다섯째 아들이고, 해제의 동생이다. 당시의 나이는 10살도 되지 않았다.(사마천의 글에 순식( 荀 息 )과 이극( 里 克 ): 진( 晋 )의 가장 참혹한 궁중정변 151

152 따르면 1살이다). 순식은 그 말을 듣고, 옳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는 죽지 않는다. 백관들과 상의한 후, 즉시 아무 것도 모르는 탁자를 새로운 군주로 앉힌다. 순식은 계속 조정을 장악했다. 이극은 모르는 척한다. 순식은 양오( 梁 五 ), 동관오( 東 關 五 )와 비밀리에 모의한다. 해제의 죽음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이극 일당이 저지른 것이다. 그들이 암살을 하 면 우리라고 못할 것이 없지 않은가. 며칠 후, 해제의 장례식 때, 이극이 분명히 올 것이니 우리가 장례식때 그를 죽여버리자고 결정한다. 그러나, 누가 죽기를 각오하고 그를 죽일 것인가? 동관오는 말한다. 내가 무사를 길렀는데 최고수이다. 이름은 도안이( 屠 岸 夷 )이다. 그는 절기를 지니고 있으며 힘이 다른 사람보다 강하다. 삼 천균의 무거운 물건도 등에 질 수 있다. 그의 무술은 시인발제( 寺 人 勃?)에 못지 않다. 만일 후한 녹을 내리면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동관오는 도안이를 찾아나서고 조건을 협상한다. 도안이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도안이는 변신에 능한 인물이다. 그는 돌아온 후에 이리저리 생각해보고, 이해득실을 따져본 후에 이극의 세력이 그래도 크다고 생각 하여, 그는 한밤중에 이극의 집으로 간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주인을 배신한다. 수일후, 해제를 매장하는 날, 양오, 동관오는 묘지부근에 여러 겹의 매복을 설치하고 이극이 걸려들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나, 이극은 오지 않는다. 그는 그들이 모두 성을 나간 것을 알고는, 집안의 사병을 이끌고, 정변을 일으킨다. 궁중이 빈 틈을 타서 왕궁을 점령한다. 순식이 그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황급히 해제를 묻고는 급히 궁으로 돌아간다. 이오( 二 五 )장군이 병마를 모아서 달려와 이극과 대치한다. 이때 도안이는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있던 동관오의 목을 베어버린다. 졸지에 군내가 어지러워진다. 도안이는 크게 소리친다: "공자 중이( 重 耳 )와 이오( 夷 吾 )의 병마가 이미 성밖에 도착했다. 나는 이극대부의 명을 받들어, 과거의 태자 신생( 申 生 )의 원한을 풀고, 간신을 제거하고, 반당을 교살하려 했다. 중이를 새로운 군주로 맞이하자. 원하는 사람은 모두 나를 따르라." 병사들중 그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양오는 동관오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순식, 탁자와 함께 도망칠 준비를 한다. 그러나 이극에게 추격당하여 따라잡힌다. 이극은 검을 뽑아 양 오를 두동강이낸다. 순식은 얼굴색이 변하여 왼손으로 탁자를 안고, 오른 손으로 소매를 들어 갑추었다. 탁자는 가슴 속에서 울고 있었다. 순식은 이극에게 말한다: "아이는 죄가 없다. 나를 죽여라. 선군의 혈육은 목숨을 남겨주기 바란다." 이극이 크게 소리친다; "신생은 어디에 있는가? 설마 신생은 선군의 혈육이 아니란 말이냐. 도안이. 아직도 손을 쓰지 않고 뭐하느냐?" 도안이는 순식의 수중에서 탁자를 빼앗아 온다. 그리고 돌계단으로 집어던진다. 탁자는 졸지에 혈육이 모호한 시신이 된다. 오호애재라. 순식은 대노하여, 패검을 뽑아, 도안이를 죽이고자 한다. 이극이 소리쳤다. "백옥에 때가 묻으면 갈면 된다. 사람의 언행에 오점을 남기면 영원히 씻어낼 수가 없다. 너는 지난번에 죽었어야 했다. 그 런데 죽지 않았다. 너는 이미 한번 식언을 했다. 오늘 다시 죽더라도 공연히 죽는 것은 아니다." 순식이 말한다: "내가 선군에게 약속한 말은 절대로 식언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살로 생을 끝마친다. 이극은 검을 들고 앞장서고, 사람들이 뒤를 따른다. 모두 그의 지휘하에 궁중으로 들어가, 여희를 수색한다. 여희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이미 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그들은 그녀의 시신을 건져내어 육시한다. 진헌공이 구월에 죽었고, 이극이 해제를 죽인 것은 시월이다. 탁자를 죽인 것은 십일월이다. 이극은 난으로 난을 막았고, 연속으로 2명의 무 고한 어린 군주를 죽였다. 그리하여 춘추역사상 가장 참혹한 궁중참변이 된다. 여희도 죽고, 순식도 죽었다. 해제, 탁자도 죽었다. 양오, 동관오도 죽었다. 이 일파는 깨끗이 제거된 것이다. 승리자는 정의를 대표한다. 이극은 억울하게 죽은 태자의 명예를 회복시킨 대영웅이다. 역사는 이렇게 잔혹한 것이다. 이번 정변을 통하여 2달동안 연속 3명의 국군이죽는다. 진나라의 실권은 이극의 수중에 떨어진다. 순식( 荀 息 )과 이극( 里 克 ): 진( 晋 )의 가장 참혹한 궁중정변 152

153 중국고대 스와핑으로 인한 멸족사건 :06 중국고대에도 스와핑( 換 妻 )사건이 있었다. 춘추시대의 기승( 祁 勝 )과 오장(? 臧 )이 그들이다. 이들 둘은 동료였고, 같은 상사를 모시고 있었다. 그 상사는 바로 진( 晋 )나라의 대부( 大 夫 )인 기영( 祁 盈 )이다. 중국역사상 기영은 무슨 유명인사라고 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의 조부는 대명이 자자한 인물이다. 그의 조부는 바로 기황양( 祁 黃 羊 )이다. 기 록에 따르면, 기황양은 진도공( 晋 悼 公 )시절에 중군위( 中 軍 尉 )를 지낸 인물이다. 그가 나이들어 은퇴할 때쯤, 진도공은 그에게 후임자를 천거 하게 했다. 기황양은 이렇게 말한다: 해고( 解 孤 )가 괜찮습니다. 정치력도 있고, 업무도 뛰어나니, 이 자리는 그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 다 진도공은 의외로 생각했다. 내가 알기로, 해고는 너와 원수지간이 아니냐. 너는 왜 이 자리에 그를 추천하느냐? 그러자, 기황양은 담담하게 말했다: 공께서 물어보신 것은 누가 나의 후임자가 되면 좋겠느냐는 것이지, 누가 나의 원수인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듣고 진도공은 그의 도량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해고는 큰 병이 들어, 취임한 후 얼마지나지 않아 죽고 만다. 진도공은 할 수 없이 다시 기황양에게 적합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번에 기황양은 간단히 답한다: 저는 제 생각을 숨긴 적이 없습니다. 이번에 제 생각에는 기오( 祁 午 )가 적절합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진도공은 얼굴색이 변했다: 무슨 소리냐. 기오가 네 아들인 것은 누구든지 알고 있지 않으냐? 그러자 기황양은 담담하게 또 말한다: 그렇습니다. 기오는 확실히 제 아들입니다. 그러나, 공께서 물은 것은 누가 적임자냐는 것이었지, 누가 나의 아들이냐는 것은 아 니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기오가 중군위를 맡게 된다. 기오는 바로 기영의 부친이다. 확실히 기황양, 기오 부자는 행운이었다. 그러나, 이런 행운은 그의 집안에 계속되지 못했다. 기영은 정반대였다. 어느 날, 기영은 확실한 정보를 하나 얻는데, 그의 가신인 기승과 오함이 통실( 通 室 ) 한다는 것이었다. 통실은 처를 바꾸는 것, 즉 요즘말 로 하면 스와핑을 말한다. 자신의 가신이 이런 황당한 짓을 저지르는 것을 알고는, 기영은 분기탱천한다. 그리하여 이 둘을 처리하려고 마음 먹는다. 손을 쓰기 전에, 기영은 사마숙유( 司 馬 淑 遊 )에게 의견을 물어본다. 사마숙유는 경전의 고사를 인용하였다: 민지다피, 무자립벽( 民 之 多?, 無 自 立?) 사마숙유가 읊은 것은 <<시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 뜻은 대체로, 백성들에게 좋지 않은 습관이 많이 있는데, 네가 굳이 그런 것 들을 상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영은 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마숙유는 다시 한 마디를 던진다: 무도립의, 자구불면( 無 道 立 矣, 子? 不 免 ) 이 말은 함축적이면서도 침중하다. 대체적인 뜻은 현재의 우리 나라는 소인이 정권을 잡고 있다. 이렇게 하다 가는 오히려 골치아픈 일을 당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영은 그 말에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이유는 바로 나는 내 가신을 징벌 하는 것인데, 국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기승과 오장을 붙잡아서 가두어둔다. 그러나, 붙잡힌 기승과 오장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그들은 주인인 기영의 조치는 자신들을 조금도 존중해주지 않는 것이며,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공연히 관여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집안식구들로 하여금 윗사람을 찾아가게 한다. 그들이 찾아간 것은 순력( 荀?)이었다. 순력은 진나라의 육경( 六 卿 )중 하나였다. 순력은 기승과 오장과 관련된 사안을 상세히 조사하여 파악한 중국고대 스와핑으로 인한 멸족사건 153

154 후, 이 일을 진경공( 晋 頃 公 )에게 보고한다. 순력은 원래 이 일을 그냥 재미있는 사건 정도로 보고했는데, 진경공은 진지했다. 진경공은 그 말 을 듣고 안색이 완전히 변했다. 진경공은 바로 두 가지 명령을 내린다: 하나는 사형( 私 刑 )을 엄금하는 것으로, 기영으로 하여금 즉시 스와핑 을 한 기승, 오장을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다른 하나는 일벌백계로, 임의로 가신을 구금한 기영을 엄벌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기영은 체포된다. 기영은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도덕의 보위하는 자로서, 스와핑행위를 징벌한 것이 어찌 범법행위가 될 수 있는지, 이는 흑백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 기영이 감옥에 갇히자, 기영의 부하들이 파업을 했다. 그들은 자신의 주인이 억울하게 벌을 받는 것이고, 모든 죄는 기승, 오장에게 있다고 보았다. 의분 때문에, 그리고 아마도 옥중에 갇힌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기승과 오장을 죽여버린다. 진경공이 보기에, 기승과 오장은 자신의 신체는 자신이 지배할 수 있는 권리 를 가진 자들이었다. 그런데도 기영이 무고하게 징벌을 가했 으니, 그들 둘은 무고한 피해자이다. 그리하여 진경공은 그들을 풀어주게 하고, 기영을 가둔 것이다. 그런데, 기영의 부하들이 피해자인 기승 과 오장을 죽여버리다니,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고의로 진경공의 뜻을 역행하는 일이다. 이는 일부러 자신에 대항하는 일이다. 기영부하 들의 이런 행위에 진경공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즉시 이 사건을 난( 亂 ) 으로 규정한다. 난 은 요즘 말로 하면 반정부행위이다. 이는 대역죄이다. 진경공은 진노하여, 신속히 그리고 무겁게 처벌한다. 가을이 오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여름 유월에 기영의 전일족을 주살한다. 다 죽이고 나서도 부족하여, 기영을 동정하던 양이아( 楊 食 我 )의 일족까지 죽여버린다. 기씨, 양 씨( 羊 舌 氏 )는 진나라에서 참초제근 당한다. 이 일은 <<좌전>>에 나온다. 좌구명이 어디에서 이 자료를 찾았는지는 모르겠다. 만일 이 사건을 좌구명이 날조한 것이 아니라면, 춘추시대의 진나라는 스와핑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고대에 통실 에 대하여 관대한 전통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하여, 필자는 <<좌전>>을 살펴보았다. 보다보니, 등에 식은 땀이 날 정도이 다. <<좌전>>의 기록에 따르면, 진경공이 재위한 기간은 아주 길지는 않았다. 기원전525년에서 기원전512년까지 약14년간이었다. 그보다 100여년 전인 진헌공( 晋 獻 公 )이 재위하던 기간에 여러 공자( 公 子 )를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리하여 진나라에는 공족( 公 族 )이 몇 남지 않게 된다. 진 경공시대에 이르러서는 공족중에서는 난씨( 欒 氏 ), 기씨, 양설씨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만 남는다. 공족이 수는 적지만, 진나라의 자원을 대거 점유하고 있었고, 봉지의 면적도 컸다. 그리하여 진나라의 경제발전에 장애가 되었다. 진경공은 이에 여러 번 손을 쓰고자 하였으나, 명분이 없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기영이 스와핑한 수하를 사사로이 처벌한 일이 알려진다. 진경공은 이때 장계취계로 기씨가족의 대표인물인 기영을 감옥 에 집어넣는다. 이는 확실히 아무 것도 아닌 일을 트집잡은 혐의가 있다. 그런데도 기씨 일족은 연유를 따지지도 않고, 기승, 오장을 죽여버 렸다. 이는 진경공에게 오랫동안 기다렸던 구실을 마련해주었다. 그리하여 진경공은 이를 기화로 기씨, 양설씨를 멸족시켜 버린 것이ㅏ. 기씨, 양설씨가 멸족되자 진경공은 기씨의 영지를 7개 현( 縣 )으로 나누고, 양설씨의 영지를 3개 현으로 나눈다. 이 10개 현은 중앙정부 직속 의 영지로, 진나라의 국왕이 직접 관할했다. 진경공이 기씨, 양설씨를 타도한 것은 중국고대의 호족을 타도한 전형적인 사례이다. 원래 진경 공이 중시한 것은 기승, 오장의 자유권이 아니라, 기씨, 양설씨의 대량토지였던 것이다. 중국고대 스와핑으로 인한 멸족사건 154

155 현대중국인의 조상은 어디에서 왔는가? :05 최근 들어 국제학술계는 대체로 이런 결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현대인류의 기원은 20만년전의 아프리카이다. 다만, 중국 고인류학분야에서, 한가지 관점은 여전히 다지구기원설 을 견지하고 있다. 즉, 중국인은 독립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다. 즉, 동아시아지역에서 이미 발견된 고인류화석과 북경원인 의 후대라는 것이다. 최근 들어, 최신의 분자인류학은 현대중국인의 군체유전인자를 분석한 후, 수만년전에 빙하(이사광은 화하 제4빙하기)가 중국대륙을 뒤덮었 고, 북경원인 의 후대는 일찌감치 멸종되었다. 북경원인 은 현대중국인의 직계조상이 아니다. 군체유전인자분석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보여준다: 현대중국인의 조상은 6만년전과 3만년전 동아프리카에서 출발하여 여러 차례로 나누어 동 아시아에 왔고, 이에는 수만년이 소요되었다. 이 견해는 오늘날 보기에도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 1998년, 중국의학과학원, 생물연구소의 저가우( 嘉 祐 ) 교수등이 <<중국인군의 유전관계>>를 <<미국과학원학보>>에 발표한다. 중국과학자중에 서 가장 먼저 현대아시아인류가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분자인류학 실험방법으로 STR표기를 이용하여 유전인자를 연구했고, 아시아지역에서는 일,이백만년전의 직립인에서 현대인류까지의 연속된 진화과정이 없고, 현대중국인에게서는 북경원인 의 유전인자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하였다. 바꾸어 말해서, 북경원인 은 현대중국 인의 직계조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가우와 김력( 金 力 )은 28개 중국인군체의 유전인자 샘플을 가지고, 중국인이 단독으로 아프리카인에게 없는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는지 여부 를 조사했다. 결과적으로 발견하지 못했다. 중국현지의 직립인과 아프리카에서 온 현대인간에 유전인자가 융합된 증거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역시 찾지를 못했다. 이같이 여러 번 반복된 실험을 통한 결과를 통하여, 그들은 현재 국제과학계에서 제기한 현대인류아프리카기원설 에 찬동하게 된 것이다. 과학자들은 계속하여 대량의 군체유전인자분서을 해왔다. 2001년 김력등은 <<동아시아현대인의 아프리카기원: 12000개 Y염색체의 이야기>>를 사이언스지에 발표한다. 여기서 현대중국인의 아프리카기 원설을 다시 한번 논증한다. 김력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2001년의 논문을 작성할 때, 나는 내가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조상이 아프리카에서 왔단 말인가라는 의 문을 품었다. 나는 시험해보고 싶었다. 한 사람이라도 아프리카인의 후손이 아닌 사람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전체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시 베리아의 약 12000명, 163개군체의 유전인자를 분석한 후 나는 멍해졌다. 결론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학생에게 말했다. 수치를 보고, 다시 한번 해보라고 했다. 그리하여 다시 400여개 샘플을 다시 시도해보았다. 결과는 여전히 같았다. 현대아시아인이 아프리카인의 후손이 아니라 는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 현대아시아인의 기원은 아프리카라는 것이 맞다. 이 두 편의 논문 및 관련연구는 각각 2005년과 2007년에 국가자연과학2등상을 받는다. 2005년, 김력교수와 그가 일하는 복단대학 현대인류학연구센터는 미국국가지리협회와 IBM이 공동스폰서하는 유전인자맵계획 에 참가한 다. 인류이동은 전세계적인 범위의 프로젝트이다. 이동하는 인류는 국경을 넘을 뿐아니라, 대륙을 넘는다. 이 분야의 연구는 세계각국의 여러 사람들이 하고 있다. 도구와 수단은 계속 발전중이다. 결과는 각지의 각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분류방법 과 분자표기에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수치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현재는 통일된 기준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 프로젝트에 참 가하는 장점의 하나는 바로 각국의 실험실과 서로 데이터를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유전인자맵계획 에 참가한 이후 시야는 더욱 넓어졌다. 전세계적인 각도에서 우리의 연구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3년동안, 그들이 샘플을 채취한 지역은 동남아의 라오스, 캄보디아등국에 이르렀다. 동남아는 동아시아현대인류의 요람이기 때문이다. 중국국내에서, 그들은 개략 2개노선으로 샘플을 채취했다. 하나는 동남연해에서 계속 북으로 향하여 교동반도를 거쳐 동북까지 이르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중국인의 조상은 어디에서 왔는가? 155

156 낼규의 사천, 티벳, 청해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길이다. 이렇게 채취한 샘플의 많은 데이터가 정리분석된 후, 논문이 계속 발표되고 있다. 고대 중국인의 이주경로가 이미 개략적으로 그려지기 시작 했다. 분자인류학자들의 실험연구결과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보여준다: 현재의 중국인은, 가장 먼저 고대 아프리카에서 동북방향으로 향하고, 동아 시아남부를 거쳐 이주해왔다. 이 과정은 수만년이 걸렸다. 분자인류학자는 Y염색체의 표기를 이용하여, 원고중국인군의 이주도를 그렸다. 모든 표기는 군체가 분화될 때, 일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새 로 만들어진 유전인자를 가지고 이주한다. 이런 것들이 군체의 표기가 된다. 원고시대에는 이주가 아주 느렸고, 가다가 멈추고 가다가 멈추고 했다. 그렇게 하여 수만년이 걸린 것이다. 국제 Y염색체명명위원회 는 전세계 인류의 Y염색체를 A부터 R까지 크게 분류한다. 중국인들이 지니고 있는 것은 O형과 D형이다. 그중 D형은 비교적 오래된 것으로, 초기아시아인 이다. 그들은 최소한 6만년전에 아시아로 이주했다. O형은 후기아시아인 이다. 절대다수의 중국인들은 이런 유전인자표기를 지니고 있다. O형 염색체는 01,02,03형으로 구분된다. 이에 상응하 는 것은 M122, M95,M119등의 유전인자위치이다. 그들은 3만년전에 아시아로 이주했다. 3만년전에 아시아대륙은 빙하기(제4기방하기)를 거쳤다. 지금 초기아시아인 의 분포는 아주 많이 흩어져 있다. 필리핀과 말레이시아의 일부 도서에 일부 키가 작도 피부가 검은 소흑인 이 있 는데, 그들의 염색체는 기본적으로 D형이다. 일본의 아이누인도 D형이다. 아시아대륙에서 O형의 후기아시아인과 D형의 초기아시아인의 경쟁이 있었다. 기술과 체력에서 모두 우수한 후기아시아인이 이겼고, 초기아 시아인은 각지에서 융합되고 사라졌다. O형염색체를 지닌 후기아시아인들은 히말라야산의 남록에 도착한 후, 천천히 확장한다. 이런 확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매일 어느 지방 을 향하여 계속 전진하는 것이 아니다. 일종의 인구의 자연확산이다. 진도도 아주 느렸다. 예일대학 의과대학 유전학과에서 포스타닥터과정을 밟고 있는 이휘의 주장에 따르면, 종족인구가 일정한 규모로 발전하면, 이 지역의 자원이 거의 소모되므로, 일부 사람을 나누어서 다른 지방 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이주는 이땅에서 저땅으로 가는 보행거리로 따져서는 안된다. 왕왕 천년, 만년이 걸리는 것이다. 1987년이래, 유전학자들은 세계각지 현대인의 DNA를 검사하여 세계각지의 현대인이 모두 개략 20만년전의 아프리카할머니로부터 유래했다 는 것을 밝혀냈다. 개략 15만년전에 이 아프리카할머니의 후손은 아프리카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바깥으로 계속 확산하여, 현대인류를 이루게 된다. 즉, 원고인류는 일찍이 두번 아프리카에서 벗어났다. 한번은 200만년전의 고인류이고, 또 한번은 10여만년전의 현대인조상이다. 다만 이 이론에 따르면, 200만년전에 아프리카를 벗어나, 각지에 흩어진 원고인류의 후손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유전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수백만년의 변천을 통하여, 그들은 근본적으로 살아남지를 못했거나, 더욱 환경에 잘 적응하고, 더욱 총명한 현 대인류로 대체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중국의 인류학자들은 이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 1920년대 북경원인 화석이 나타난 이래, 중국은 인류진화의 중심중 하나로 인 식되었다. 이는 거의 중국경내에서 대량으로 발견되는 초기인류화석이 증명해준다. 인류학자들의 분류에 따르면, 인류의 기원은 4단계로 나뉜 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이와 대조적으로, 200만년전에서 10만년(혹은5만년)전까지 이 체 인의 거의 모든 화석을 중국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1998년이래, 중국의 유전학자들은 연이어 중국인의 DNA와 중국인의 기원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다. 검사를 거쳐, 중국의 유전학자들은 현 대중국인은 아프리카에서 기원한다 는데 동의한다. 그리고 이들은 개략 6만년전에 동아시아 남부에 도착하고, 3만년전에 다시 한 무리가 도 착하며 이 두 차례에 걸친 이주민들의 일부가 중국경내로 들어와서 현재 중국의 각 민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유전학자들은 또한 중국의 고인류화석 체인에서, 상당한 빈고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10만년-5만년전의 이 구간이다. 이때 인류화석은 거의 없다. 특히, 현재 발견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화석은 거의 모두 5만년을 초과하지 않는다. 유전학자들은 이런 빈 고리가 나타난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것은 바로 이 기간이 제4기빙하기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아시 아지역의 원고인류는 거의 모두 살아남지 못했다. 바로 이시기가 지난 후에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현대인류가 중국경내로 진입해 들어왔다. 즉, 저명한 북경원인 의 후손은 5만년전에 소실되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연소고디지 않는다. 더더구나 현재의 중국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현재 과학자들이 우리에게 주는 관점은 다음과 같다: 현대중국인의 조상은 어디에서 왔는가? 156

157 현대 중국인의 직계조상은 20만년전의 아프리카할머니이다. 개략 6만년전(초기아시아인)과 3만년전(후기아시아인)이 선후로 중국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번성하고 발전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현대중국인의 조상은 어디에서 왔는가? 157

158 진( 晋 )나라의 형제지쟁( 兄 弟 之 爭 ) :04 민간에 이런 말이 있다: '배를 잘못고르더라도, 이름은 잘못 짓지 말라." 이것은 이름을 잘 짓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름을 짓는 것에는 부모의 바램이 들어 있다. 그런데, 이름이 과연 앞날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건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일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진나라 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이름을 잘 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진목후( 晋 穆 侯 )의 부인은 제( 齊 )나라 출신이다. 그가 즉위한지 7년이 되던 해에, 부인이 첫번째 아들을 낳는다. 당시, 진나라는 막 출병하여 조( 條 )라는 곳을 토벌했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진목후는 자신의 아들에게 "구( 仇, 원수라는 뜻)"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태자로 삼는다. 3년후, 진나라는 천무( 千 畝 )라는 곳을 공격하여 역시 승리를 거둔다. 부인이 또 한 아들을 나았는데, 진목후는 이름을 "성사( 成 師 )"라고 붙인 다. 당시에 사복( 師 服 )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를 보고는 탄식했다고 한다. 우리의 군주는 이름을 참 이상하게도 지슨다. 태자는 '구'라고 하더니, 어린아들은 '성사'라고 짓는구나. 성패가 거꾸로 되었으니, 이후 진나라가 어찌 어지러워지지 않겠는가? 사복의 예언은 결국 들어맞게 된다. 진목후가 죽고, 태자인 구가 즉위하기도 전에, 숙부인 상숙(? 叔 )이 권력을 빼앗아버린다. 태자는 할 수 없이 도망치게 된다. 4년째 되던 해, 태자 구가 반격을 하여, 승리를 거둔다. 그가 바로 진문후( 晋 文 侯 )이다. 이것은 기원전 780년에 일어난 일이다. 진문후는 35년간 재위하고, 그 의 아들인 진소후( 晋 昭 侯 )가 즉위한다. 소후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숙부인 '성사'를 곡옥( 曲 沃 )이라는 지방으로 보낸다. 그런데, 곡옥은 진나 라의 수도가 있던 익( 翼 )보다 땅이 넓었다. 성사는 환숙( 桓 叔 )으로 불리며, 당시 이미 58세였다. 그는 베풀기를 좋아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 고, 예절도 바르기 때문에, 진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존경했다. 이때 또 한 사람이 예언을 한다: 진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근원은 분명이 곡옥일 것이다. 본말의 실력이 전도되어 있고, 인심까지 얻고 있는데, 어지럽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총명한 사람들은 아마도 일찌감치 이런 추세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소후가 재위 7년만에 대신 반부( 潘 夫 )에게 피살당한다. 반부가 곧이어 한 조치는 바로 곡옥으로 가서 환숙을 모시러 갔다. 환숙은 반부를 따라 국군( 國 君 )이 됨으로써 좋은 명성은 모조리 날아가버린다. 그런데, 진나 라의 다른 사람들이 그를 따르지 않고, 환숙에 항거하여 승리를 거둔다. 환숙의 작전은 실패하고, 할 수 없이 곡옥으로 되돌아간다. 진나라사 람들은 소후의 아들이 평( 平 )을 국군으로 올리니 그가 진효후( 晋 孝 侯 )이다. 그리고 군주를 살해했던 반부는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진다. 환숙은 진효후가 즉위한 8년째 사망한다. 그러나, 그에게도 그의 후계자가 있었다. 바로 곡옥장백( 曲 沃 庄 伯 )이다. 곡옥장백은 부친의 유지를 잊지 않고, 다시 7년이 지난 후, 기회를 잡아서, 진효후를 죽여버린다. 이제 곡옥의 주인은 진나라의 국군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진나라사람들이 다시 단결하여 곡옥의 주인에게 반항한 것이다. 전투가 시작되고 진나라사람들이 승리를 거둔다. 곡옥장백은 할 수 없이 곡옥으로 물러났다. 진나라사람들은 진효후의 아들을 국군으로 모시니 그가 진악후( 晋 鄂 侯 )이다. 진악후는 6년간 재위하다가 사망한다. 곡옥장백도 6년간 실력을 키웠다. 기회는 다시 무르익었다. 곡옥주인은 병력을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한 다. 이것은 주평왕( 周 平 王 )때의 일이다. 주나라천자는 진나라의 일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주평왕은 진나라의 상황을 잘 알았고, 직접 병력을 파견하여 곡옥장백을 토벌한다. 장백은 적수가 되지 못했고, 다시 곡옥으로 물러난다. 곡옥과 진나라는 마치 서로 적대적인 두 나라와 같았 다. 진나라는 진악후의 아들인 광( 光 )을 국군으로 모신다. 그가 바로 진애후( 晋 哀 侯 )이다. 진애후가 즉위한지 둘째해에, 곡옥장백이 죽는다. 그의 아들 대( 代 )가 그를 대신하니, 바로 곡옥무공( 曲 沃 武 公 )이다. 곡옥의 주인도 이미 3대 진( 晋 )나라의 형제지쟁( 兄 弟 之 爭 ) 158

159 째에 이른다. 곡옥이 진나라를 차지하겠다는 꿈은 아직도 꿈에 머물러 있었다. 진애후 9년, 진나라는 곡옥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진애후는 곡옥무공의 포로로 잡힌다. 그러나, 진나라는 굴복하지 않았다. 진나라사람들은 계속하여 곡옥에 반항했다. 그리고 진애후의 어린아들을 국군 으로 올리니, 그가 진소자후( 晋 小 子 侯 )이다. 곡옥은 여전히 진나라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진소자후가 즉위한 해에, 곡옥무공은 진애후를 죽여 버린다. 이 당시, 곡옥은 더욱 강해졌고, 진나라는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 이런 배경하에, 진소자후는 평화협상을 하려고 생각하게 된다. 재위4년째 되 는 해에 곡옥무공도 평화회담을 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이리하여, 진소자후는 친히 나서서 곡옥무공과 평화협상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생각 지도 못했다. 이것은 곡옥무공의 음모였던 것이다. 진소자후가 도착하자마자 곡옥무공은 그를 죽여버린다. 주나라의 천자 환왕( 桓 王 )은 다시 정의를 바로세우기 위하여, 병력을 보내어 곡옥을 공격한다. 곡옥무공은 곡옥을 방어하는데 성공한다. 진나라사람들은 다시 진애후의 동생인 민( 緡 )을 국군으로 올린다. 그가 진후( 晋 侯 )이다. 곡옥무공은 비록 진나라의 군주를 죽였지만, 진나라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진나라사람들의 그에 대한 반감은 약화되었다. 문제는 주나라 천자 의 강력한 견제였다. 그로 인하여 곡옥의 무공은 자신의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곡옥무공이 그렇다고 그만둘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계속 노 력한다. 진후는 아마도 재위기간이 가장 긴 국군중 하나일 것이다. 진후가 즉위한지 28년째 되는 해에, 곡옥무공은 다시한번 전쟁을 일으킨 다. 이번에는 철저한 승리를 거두고, 진나라는 완전히 패망한다. <<사기>>에는 이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한다. "곡옥무공이 진후민( 晋 侯 緡 )을 공격하여 멸했다( 滅 之 )". '멸했다'라는 말은 좀 이상하다. 진나라를 멸한 것인가? 아니면 진후민을 멸한 것인가? 만일, 후자라면, 왜 시 ( 弑 )와 같은 류의 말을 쓰지 않은 것일까? 곡옥무공은 아랫사람으로써 윗사람을 죽였다. 이는 당연히 주나라천자의 분노를 사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곡옥무공이 경험을 통해서 배운 것이 있었다. 주나라 천자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주나라천자에게 대량의 선물을 보낸다. 이때의 주나라천자 는 주리왕( 周 釐 王 )이었다. 그는 곡옥무공의 선물을 기꺼이 받았고, 그를 정식으로 진나라의 국군에 임명한다. 원래 진나라의 국군은 후( 侯 )였 는데, 공( 公 )으로 승격시키기까지 한다. 이리하여 곡옥무공은 정식으로 진무공( 晋 武 公 )에 오른다. 주나라 천자가 뇌물을 받고 이렇게 하였으 니, 천하의 도리가 없어졌다고 할 것이다. 환숙이 곡옥을 분봉받은 때로부터 곡옥무공이 성공적으로 진나라를 차지할 때까지, 꼬박 67년이 걸렸다. 3대의 사람들이 부단히 노력하였으 니, 그 야심은 칭찬할 만하다. 진무공이 진나라의 국군이 된 다음 해에 사망한다. 진무공의 아들은 진헌공( 晋 獻 公 )이다. 진헌공에게 아들이 있 으니, 그가 나중에 아주 유명해진다. 바로 진문공( 晋 文 公 )이다. 이것은 춘추시대를 여는 서막이다. 무질서와 혼란. 전쟁과 살륙. 이 모든 것들 의 배후에는 한 가지가 존재한다. 끝까지 싸우는 정신이 그것이다. 진( 晋 )나라의 형제지쟁( 兄 弟 之 爭 ) 159

160 오월( 吳 越 ) 전쟁의 심리전술 :03 월( 越 )나라는 오( 吳 )나라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고, 우( 禹 )임금의 후예이며, 회계( 會 稽 )가 봉지이다. 이 족속은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카락을 잘랐으며, 기풍이 용맹하고 강인했다. 오초( 吳 楚 )전쟁때, 월나라는 항상 초나라의 동맹국이 되어, 오나라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았다. 손무( 孫 武 )는 일찌감치 월나라가 오나라에 위협적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오왕 합려( 闔 閭 )에게 만일 북으로 진격하여 중원의 패자가 될 생각이 있다며, 먼저 월나라를 정복하여 후환을 제거해야한다고 건의한 바 있다. 이로 인하여, 오왕 합려는 서쪽으로 강국 초나라를 격파한 후, 군대 를 쉬게 하면서, 병사를 열심히 훈련시켜, 월나라를 칠 기회만 노렸다. 오왕 합려18년, 월왕 윤상( 允 常 )이 죽고, 그 아들 구천( 句 踐 )이 즉위한 다. 다음 해, 합려는 월나라가 상중이고, 새로 등극한 왕이 나이가 어려 전쟁경험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이 기회를 틈타서 군대를 이끌고 월 나라를 토벌하고자 했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군대는 취리( 李 )에서 대치한다. 구천은 오나라군대가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었고, 전투와 진법에 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똑같이 진법으로 대응해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교전을 시작하기 전에 병사들로 하여금 백명의 사형수를 앞으로 밀어내서, 오나라군대의 진에 가까이 다가간 후 하나하나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하게 하였다. 이런 괴이한 전술은 오나라군대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하여 장병들이 모두 깜짝 놀라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구천은 이 기회를 틈타 병력을 몰고 진격하니, 오나라군대가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고 어지러워졌다. 오왕 합려도 월나라의 대부 영고부( 靈 姑 浮 )의 창( 戈 )에 발목에 상처를 입고, 회군하는 도중에 사망한다. 합려가 죽은 후, 태자인 부차( 夫 差 )가 즉위한다. 그는 취리의 치욕을 잊지 못했다. 그리하여 부친을 위하여 복수하겠다고 다짐하고, 계속 오자 서( 伍 子 胥 ), 백비( 伯 )등 노신들을 중용하고, 양초( 糧 草 )를 확보하여 전쟁에 대비한다. 월왕 구천은 부차가 밤낮으로 군대를 훈련시키는 것 을 알고는 선제공격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오왕 부차2년에, 수로를 따라 북상하여 오나라를 공격한다. 부차는 이 소식을 듣고는 온나라의 병력을 모두 모아 10만의 병력으로 월나라군대를 맞이한다. 쌍방은 오나라의 경내인 부초( 夫 椒 )에서 만나 전투를 전개한다. 양군은 대낮부터 싸워서 밤까지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오자서의 계획에 따라, 두 무리의 수군을 뽑아서, 밤을 틈타 횃불을 들게 하고, '죽여라'고 고함을 지르게 하며, 양쪽 날개부분에서 월나라군대로 쳐들어가도록 하였다. 월나라군대는 오나라의 지원병력이 도착한 것으로 생각하여,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나라군대의 주력은 이 틈을 타서 진격하니, 월나라군대가 궤멸한다. 회계산까지 밀려 가서 오나라군대에 겹겹이 포위된다. 구천은 할 수 없이 대부 문종( 文 種 )을 파견하여 엄청난 재물로 오나라의 중신 백비를 회유하고, 적극적 으로 오나라에 신하를 칭하고 공물을 바치겠다고 한다. 그리고 영토를 상당부분 때어주기로 한다. 이렇게 하고서야 비로소 목숨을 부지한다. 이 전쟁은 오나라의 부초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부초지전'이라고 한다. 상술한 두 개의 전투사례에서 비록 승자도 다르고, 전투장소도 다르지만, 사용한 심리전술은 같다. 취리지전에서는 월나라군대가 먼저 사형수 의 자결이라는 방식으로 오나라군대의 배치를 흐트리고, 그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혼을 빼놓았다. 이렇게 한 다음에 정면으로 공격하였 다; 부초지전에서는 오나라군대가 밤을 틈타서, 양날개의 수군으로 하여금 월나라군대를 오인하게 하고, 오나라의 지원부대가 증원되었다고 믿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상대방의 투지를 꺽고,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없게 만들었다. 그 후에 치니 월나라군대는 바로 궤멸했다. 세( 勢 )는 군사분야에서 추상적인 철학개념이다. 그 의미는 바로 군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은 적극적이고 합리적으로 자신의 군사실력을 활용해 야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정병( 正 兵 )과 기병( 奇 兵 )을 시간과 공간에 분포시키고 움직이게 함으로써, 유력한 대세를 만들고 강력한 충격을 가 해야 한다. 오월( 吳 越 ) 전쟁의 심리전술 160

161 <<도덕경>>에서는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시작이고( 有 名 萬 物 之 始 ), 이름이 없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無 名 萬 物 之 母 )." 이 양자를 함께 나오지만 이름이 다르다. 함께 부르면 현( 玄 )이 된다. 즉, '유'와 '무'는 원래 하나이고 모두 심오하고 막측한 것이다. 공동으로 세계의 근원을 구성한다. 군사적으로 응용할 때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군대는 '유형'(실체)과 '무형'(정신)의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양자는 모두 중요하 다. 군대가 자신의 전투력을 유지하려면, 양자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안된다. 이 이원론에 따라 병세를 유형과 무형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혹은 유형과 무형의 두 가지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상술한 세는 주로 유형중의 세이거나 세가 유형중에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세가 무형중에 나타나면 상대 방에 대한 심리적인 위하력이 있다. 바로 이런 위하력은 상대방의 군심을 흔들리게 하고, 투지를 와해시킨다. 이를 보면, 심리전술은 양군이 교전할 때 아주 중요하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를 잘 사용해야하고, 그래야 일당백의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 이외에 국가에는 반드시 강인한 기풍에 제대로 훈련받은 군대가 필요하고, 장수는 태산이 무너져도 끄덕하지 않을 정신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수시로 변하는 전쟁터의 상황에 흔들리거나 미혹되지 않고,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고, 백전불패의 전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오월( 吳 越 ) 전쟁의 심리전술 161

162 갑골문( 甲 骨 文 )의 살인비밀 :02 청나라 광서25년(1899년), 금석학자인 왕의영( 王 懿 榮 )은 북경의 한약방에서 파는 용골( 龍 骨 )에 오래된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다. 왕의영은 청나라 광서6년에 진사, 한림이 되었다. 중국의 고대문물에 대하여 깊이있게 연구한 인물이었다. 당시에 왕의영은 이들 소위 "용골"이 보통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은상( 殷 商 )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했다. "갑골문"이라는 단어는 왕의영이 발견하면서 붙여졌다. 현재의 갑골문은 대부분 은허( 殷 墟 )에서 출토되었고, 시간은 중국의 상나라 후기(기원전 14세기-기원전 11세기)때의 것이다. 당시 상왕실은 점을 치기 위하여 귀갑( 龜 甲 )과 수골( 獸 骨 )에 문자를 새겼다. 갑골문은 중국에서 발견된 고대문자중 시기가 가장 빠르고 체계가 완벽한 문자 이다. 갑골문은 아주 중요한 고한자자료이다. 동시에 비교적 완벽한 상나라의 역사이기도 하다. 거기에 담겨있는 역사코드는 아주 중요하다. 사람을 산 채로 제사지냈다( 活 人 祭 祀 ). 이것은 갑골문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역사정보중 하나이다. 중국의 고대인들은 아주 미신적이었고, 귀신을 숭상했고, 조상을 섬겼다. 사람을 희생물로 삼아서 제사지내는 것은 이 원시종교신앙에 따른 것이다. 상나라때 점복술( 占 卜 術 )이 아주 발달했고, 무당의 지위가 아주 높았다. 이들은 상왕의 정치참모였다. 앞으로 며칠 내에 비가 내릴지 아닐지, 재난이 있을지 없을지, 농작물이 풍년일지 아닐지, 전쟁에서 승리할지 아닐지, 심지어 자식을 낳고, 병이 들고, 꿈을 꾸는 등의 일에 대하여도 모두 점을 쳤고, 신령의 의지와 일의 길흉을 알아내고자 했다. 점복의 결과는 왕왕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상왕이 신으로 받든 것은 자연신 이외에, 가장 주요한 제사대상은 그 자신의 이미 돌아가신 조상들이었다. 점복이 잦고, 사람수는 많아서, 대량의 사람들이 제사를 위하여 죽임을 당했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 이외에 또 하나의 비인도적인 사망현상을 나타낸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왕에 의하여 산 채로 제사지내졌는가? 1930년대부터, 오기창, 동작빈, 우성오, 진몽가, 구석규, 호후부, 허진 웅, 상옥지, 요효수, 장병권, 이학근, 황전악, 황천수, 방도남등의 여러 중외의 고문자전문가, 고고전문가들이 갑골문에 대한 해독을 시작했고, 통계를 내기 시작했다. 파악하고 있거나 연구한 갑골문의 수량이 서로 다르고, 출토시기와 차수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어느 학 자도 확실한 숫자를 내놓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저 그 숫자가 놀랄 정도로 많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중국고대에 특수한 제사풍속이 있었는데, 제사를 지낼 때 사람을 제물로 하여 신령에게 제사지내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산 사람을 죽인다. 이는 은상시대에 가장 성행했고, 가장 참혹했다. 도대체 상왕이 산 사람을 제사지내는 것은 어느 정도였을까?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구체적 인 수치를 내놓으려고 노력한 바 있다. 중국에서 이미 사망한 갑골학자이자 사학자인 호후부는 1974년에 그가 알고 있는 갑골문자료에 근거하여, 제사로 살해된 사람수를 통계낸 바 있다. 호후부가 1974년 <<문물>> 잡지에 <<중국노예사회의 인순( 人 殉 )과 인제( 人 祭 )>>라는 글에서의 통계에 따르면, 반경천은( 盤 更 遷 殷, 상왕 갑골문( 甲 骨 文 )의 살인비밀 162

163 반경이 수도를 은으로 옮긴 것)으로부터 제신망국( 帝 辛 亡 國 )에 이르기까지(기원전 1395년부터 기원전 1123년까지, 구체적인 연도에 대하여는 학설상 이견이 있다), 8세12명의 상왕이 집권한 시기동안, 모두 13,052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1145개의 갑골문 복사에는 인생( 人 牲 ) 의 숫자가 적혀 있지 않은데, 하나당 1인으로 치더라고, 제사에 희생으로 살해당한 사람의 수는 최소한 14,197명에 이른다. 호후부의 통계로 계산해보면, 반경천은에서 제신망국에 이르는 273년동안, 평균 매년 50명이 신령의 희생물이 되었고, 산채로 죽임을 당했다. 사실상, 제사에서 살해된 숫자는 이것을 훨씬 초과할 것이다. 아마도 수배에서 수십배이상일 것이다. 호후부는 제사에서 살해된 인생의 수량이 약간 변화한다고 보고, 상나라때의 활인제사를 4단계로 나누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무정(기원전1339년-기원전1281년) 시기: 58년간 9,021명을 죽임 조경, 조갑(기원전1280년-기원전1241년)시기: 39년간 622명을 죽임 늠신, 강정, 무을, 문정(기원전1240년-기원전1210년)시기: 30년간 3,205명을 죽임 제을,제신(기원전1209년-기원전1123년)시기: 83년간 104명을 죽임. 호후부는 이 놀라운 숫자는 완전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일부는 해외로 유실되고, 어떤 것은 아직도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내의 갑골문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하여도 지금까지 완전하게 통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만일 이들 갑골문에 들어있는 사람을 희생으 로 삼은 경우를 모조리 통계낸다면 숫자는 더욱 많아질 것이라고 했다. 갑골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대상으로 삼은 숫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통계를 통해 나오는 숫자도 서로 다르기 마련이다. 또 다른 상왕의 활인제사에 관한 통계버전은 <<상대의 포로>>라는 글에서 나타난다. 이 글은 중국고문자학자인 요효수가 1964년에 쓴 글이 고, 1979년 8월에 출판된 <<고문자연구>>(제1집)에 실렸다. 상나라때의 인생( 人 牲 )은 대부분이 전쟁포로였다. 요효수의 글에서 통계낸 갑곰룬의 총편수는 688개였다. 요효수는 상왕이 사용한 인생을 초 기, 중기 말기의 세 시기로 나누었다. 초기: 무정시기에 5,418명을 죽임 중기: 조경에서 문정까지 1950명을 죽임 말기: 제을, 제신시기에 75명을 죽임. 서로 다른 버전의 통계숫자를 보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감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료를 보면, 제을, 제신의 집권후반기에는 전쟁으 규모와 지속기간이 초기, 중기를 훨씬 넘어섰다. 전쟁에서 붙잡은 포로의 숫자도 훨씬 늘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왜 활인제사의 수량은 감소했을까? 인류사회발전사에 약간의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상나라후기에는 생산력수준이 이미 새로운 수준으로 늘어났다. 이전에 전 쟁포로의 용도가 이미 바뀌게 된 것이다. 이미 "인생"에서 "노예"로 바뀐 것이다. 이런 신분변화의 배후에는 인류문명의 진보가 있다. 다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살아있는 목숨이 상왕의 칼아래 죽어나갔는지는 갑골문의 배후에 숨겨져 있던 또 하나의 비밀일 것이다. 영원히 확실한 답을 알아낼 수 없는 하나의 수수께끼일 것이다. 갑골문( 甲 骨 文 )의 살인비밀 163

164 허창인( 許 昌 人 ); 화석과 중국인의 기원문제 :01 최근들어, 하남성 허창 영정( 靈 井 )의 구석기시대유적지에서 비교적 완벽한 고인류 두개골화석이 발견되었다. 전문가들은 이번 발굴이 엄격하 고 과학적인 의미에 부합하는 발굴로 인정한다. 10여명의 권위자들이 감정한 후에 일치하여, "허창인" 두개골화석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8만 년 내지 10만년전이라고 인정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발견으로 동아시아와 중국의 인류기원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근거가 제공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번 발굴로 중국과 동아시아 인류의 기원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어줄 수 있을까?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하여는 먼저, 두 가지 개념을 명확히 해야 한다. 하나는 인류의 기원문제이다. 즉, 유인원에서 인류로의 변환이다. 이에 대하여는 현재 그다지 논쟁이 없다. 즉, 인류의 기원은 230 여만년전의 아프리카대륙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현대인(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기원문제이다. 유럽 주류의 고인류학자들은 대부분 아프리카 단일중심기원론을 지지한다. 즉 개략 13만년전에 인류는 아프리카의 동일한 여성 시조 '이브'에서 기원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 류의 기원은 아프리카단일지구라는 설은 구미의 주류이론이 되었다. 다만, 중국에서는 복수중심이론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 "중국고인류연속 진화학설"이 그 중의 하나이다. 여러해동안, 중국고고전문가들은 계속하여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이 학설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각지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볼 때, 기쁜 일 과 우려되는 일이 섞여 있다. 부합하는 것이라면, 중국고인류진화의 시간체인이 기본적으로 환상시스템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200만 년전의 "무산인( 巫 山 人 )", 115만년전의 "남전인( 藍 田 人 )", 50만년전의 "북경인( 北 京 人 )", 35만년전의 "남경인( 南 京 人 )", 10만 내지 20만년전의 요녕 "금우인( 金 牛 人 )", 1만 내지 4만년전의 북경 "산정동인( 山 頂 洞 人 )"등 거의 완벽한 진화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우려되는 것이라면 이런 환상구조는 시간적으로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아프리카 인류기원론이라는 주류이론을 뒤집을 수 없다는 점이다. 더구나 현대인의 기 원에 있어서 핵심적인 단계가 빠져있다. 즉, 5만-10만년전의 인류화석이 없는 것이다. 이 시기는 바로 '이브'가 세계각지로 이주하여 각지의 초기 현대인(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을 이루는 핵심시기이다. "허창인"화석의 발견은 눈이 번쩍 뜨이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 화석은 마침 중국현지인류진화의 체인에서 빠져있던 5만년-10만년의 부분을 메워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번 중국의 고인류화석발견이 있을 때마다, 중국사람들은 아프리카기원론이라는 주류이론을 깨트릴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매번 고고학적 발견이 이루어질 때마다, 전문가로부터 매체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예외없이 희망은 실망으로 바뀌 었다. 이 점에 대하여, 중국과학원 고척추동물및고인류연구소 연구원인 황만파( 黃 萬 波 )는 가장 잘 알고 있다. 이것은 매번 놀라운 발견이후에, 이는 그저 중국현지인의 진화노선에 빈 틈을 메워줄 뿐이지, 현대과학기술의 DNA기술상 확인을 받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204만년전의 삼협 "무산인"과 동시대의 "건시인( 建 始 人 )"은 중국고인류전문가들이 모두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고, 인류가 아프 리카에서 기원하였다는 주류학설을 깨트릴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엄격한 고인류전문가, 예를 들어 "무산인"에 대하여 연구를 많이 한 황 만파 교수는 아프리카가 인류문명이 요람이라는 주장을 결국 채택하고 말았다. 그리고 또한, "허창인" 화석이 발견되기 전에, 내몽고 오르도 스지구의 "하투인( 河 套 人 )"이 발견되어 현대인의 복수기원론을 지지할 유력한 근거로 본 적이 있었다. "하투인" 화석은 1922년 프랑스의 천주 교신부, 지질및고생물학자인 상지화( 桑 志 華, Emilie Licent, )가 처음 발견하였고, 1980년대에 중국과학원 고척추동물및고인류연구 소와 중국과학원난주의 환경공정연구소가 공동으로 연구했다. 그러나, 쌍방은 "하투인"화석연대감정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중국 과학원 고척추동물및고인류연구소는 "하투인"의 정확한 '연령'이 5만년을 초과하지 않으며, 3.5만년 정도라고 보았다. 이 주장에 따르면, "하투 인"의 연령과 "산정동인"의 연령은 동일한 시기에 속하고, 중국인이 스스로 진화하여왔다는 학설을 뒷받침할 수 없다. 난주쪽의 전문가들은 "하투인"이 살던 시기가 5만년이전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하면, 아프리카 '이브'가 유라시아대륙으로 이주해온 동시에 중국대지에도 현대 호모 허창인( 許 昌 人 ); 화석과 중국인의 기원문제 164

165 사피엔스사피엔스 가 함께 발전한 것이 된다. 그러나, 논쟁의 여지가 많은 이 이론은 과학적인 설득력이 부족했다. "허창인"이 생활한 연대는 도대제 언제일까? 관건은 여전히 전문가들이 최종적으로 과학적인 결론을 내려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논증은 반드시 전세계의 전문가들이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화자찬식의 주장일뿐 과학적인 근거라 하기 힘들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류가 아프리카의 '이브'에서 기원했다는 이론은 세계각지에서 출토된 화석이라는 실증자료가 있을 뿐아니라, 또한 현대 과학적인 의미의 DNA성분분석의 생물학적 증명도 거쳤다는 점이다. 1980년대의 미국고고학자가 DNA측정을 통하여 현대인은 모두 아프리카 '이브'의 후대라는 것을 증명한 후, 영국 캠브리지대학의 동물학전문가인 안드레아 마니카와 일본 사가대학의 최근연구도 이 점을 검증해주고 있다. 그들은 5대주 105개민족의 4666개 남성두개골의 37곳의 서로 다른 위치에서 측량을 했고, 길이 너비 높이가 서로 다른 것을 가지고, 그 들의 조상이 이주한 경로가 서로 다름을 얻어냈다. 미국 스탠포드대학의 분자인류학자인 Peter A. Underhill은 세계21곳 1062명의 남성에게 서 얻은 160개의 Y염색체의 돌연변이를 추적한 후에, 이 1000여명의 최근공동조상은 8.9만년전에 아프리카에서 생활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는 심지어 그 당시 아프리카의 인구는 겨우 2000명이라고 결론내렸다. 그리하여, 이런 상황하에서, 중국의 "허창인"이 만일 중국의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독립하여 진화하였다는 이론을 지탱해줄지에 대하여는 연대감정을 정확히 하는 것뿐아니라, 생물학적 유전자측면에서도 방증을 얻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허창인"이 아프리카의 "이브"와 시대 가 중첩된다고 하더라도, 심지어 중국의 고대륙에서 정말 맞부닥친다고 하더라도, 그는 "근원( 源 )"이 아니라 "지류( 流 )"에 불과한 것이다. 허창인( 許 昌 人 ); 화석과 중국인의 기원문제 165

166 중국 기녀( 妓 女 ) 역사상 중요한 3명의 남자 :59 기녀( 妓 女 )는 '특정' 업종에 종사하는 여인을 가리킨다. 남자들이 비칭으로 "계( 鷄, 중국어로 妓 와 鷄 는 발음이 같음)"라고 한다. 기( 妓 )자는 왼쪽에 계집녀( 女 )변이고 오른쪽에 지( 支 )가 있다. 남자들이 보기에, 여인은 원래 집에서 남편을 모시고 자식을 키워야 한다. 그러나, 일부 부 득이한 사유로 청루로 와서 기녀가 되어, 만인을 남편으로 삼고 사니 여자로서는 특이한 유형, 하나의 갈래( 支 )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른 듯 하다. 사실 모계씨족사회에서 여인은 모두 만인을 남편으로 삼았다. 자녀는 "모친을 알 뿐, 부친은 누구인지 몰랐다" 당시는 여자들이 주인이 었고, 성의 주동권도 여자들이 장악했다. 남자는 여자들의 성도구에 불과했다. 그런데, 부계씨족사회로 바뀌면서 남녀의 지위에 변화가 일어 난다. 성의 결정권이 남자에게 가버린 것이다.여인은 남자들의 성도구로 바뀌었다. 삼황오제시기에 이미 기녀가 있었다고 한다. 최초의 기녀 는 홍애기( 洪 涯 妓 )라고 한다. 다만, 남성이 주류인 계급사회에서, 기녀의 운명은 완전히 남자에게 달렸다. 중국역사상 기녀업의 진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세 명의 남자가 있다. 첫째, 관중( 管 仲 ) : 춘추시기 제나라의 재상 그는 기녀업의 조사야( 祖 師 爺 ), 창기신( 娼 妓 神 ), 기녀의 보호신, 성산업화의 비조( 鼻 祖 ), 중국에 '홍등가'를 최초로 설립한 사람으로 불리고 있 다. 원인은 그가 제나라에서 처음으로 '국영기원( 國 營 妓 院 )'을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역사상 문자로 기록된 첫번째 기원이다. 이전에, 기녀들은 일반적으로 여노( 女 奴 )의 신분이었다. 귀족지주의 집에서 종으로 있었는데, 가기( 家 妓 )라고 불렀다. 이외에 군주의 집안에는 여노가 더욱 많았다. 이들은 관기( 官 妓 )라고 불렀다. 이때까지는 길거리에서 영업하는 조직적인 기원은 아직 없었다. 관중의 국영기원은 여시( 女 市 )라고 불렀다.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기녀들은 여려( 女 閭 )라고 불렀다. 관중은 번화한 도성인 임치에 시범적으로 7개의 정부가 운영하는 '여시'를 열었다. 매 곳에 여려 100명이 있어, 합계 700명의 여려가 있었다. 관중의 국영기원은 다섯가지 측면에서 큰 역할을 한다. 하나는 국가의 세수를 증가시킨 것이다. 관중은 여시를 두고 남자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국고에 넣었다. 나중에 말하는 '화분세 ( 花 粉 稅 )' '화분연( 花 粉 捐 )'이 그것이다. 이로서 국고수입을 늘였다. 둘, 대량의 여자노비들의 취업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셋, 많은 남자들이 성 욕을 발산하지 못하는 고뇌를 해결해 주었다. 넷, 돈을 좋아하고 미녀를 좋아하는 사방의 남자들을 제나라로 오게 함으로써 제나라의 발전을 이루었다. 다섯, 오락업의 발전을 규범화할 수 있었다. 제나라가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었고, 춘추오패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국영 기원의 역할을 무시하지 못한다. 기녀들이 정규화, 합법화되니 여러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당시 다른 나라들도 하나하나 본받기 시작했다. 기녀들은 처음으로 법의 보호를 받고, 정당하게 영엽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관중이 이런 조건을 마련해준데 대하여 아주 감사히 생각했다. 그러니, 그를 창기신으로 부른다고 하여 이상할 것도 없다. 중국에서 3천년동안 그는 기녀의 신으로 모셔졌다. 둘째, 유영( 柳 永 ): 송나라의 유명한 사인( 詞 人 ) 기녀들에게 "화간황제( 花 間 皇 帝 )"로 불리우고, 기녀들의 보호와 존경을 받으며, 기원에 가더라도 돈한푼 쓰지 않고 마음대로 놀수 있었던 사 람은 유영이 전무후무하다. 그 원인은 바로 그의 '사( 詞 )'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기녀를 단순히 '육체'를 파는 직업에서, '육체'와 '예술'을 함께 파는 직업으로 승격시켜준 사람이 그이다. 유영이 비록 처음 그렇게 한 사람은 아니지만, 기녀들을 육체를 팔아서 먹고사는 사람에서 '고급기 녀', '예술기녀'로 변모시킬 수 있게 해준 스승이 바로 그이다. 송나라때는 유영이후로 기녀업의 발전이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최고통치 자인 황제에게까지 알려진다. 송인종은 유영의 사를 좋아해서 유영에게 명을 내려 '사를 쓰라'고 하게 된다. 그리하여 유영은 황제의 명을 받 아 기녀들의 이야기를 사로 쓰는 작가가 되고, 스스로 '봉지전사유삼변( 奉 旨 塡 詞 柳 三 變, 황상의 명을 받아 사를 채우는-사는 쓴다고 하지 않 중국 기녀( 妓 女 ) 역사상 중요한 3명의 남자 166

167 고 채운다고 함-유삼변. 유삼변은 유영을 가리킴)"이라고 하게 된다. 송휘종에게는 후궁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기녀인 이사사( 李 師 師 )에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이사사가 다른 후궁들보다 예뻐서가 아니라, 그녀의 '예술'기품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유영이 살아있을 때, 송나라의 각 큰도시에 있는 가녀무기들은 그의 팬이 아닌 경우가 없었다. 그가 지은 "난주최발, 집수상간누안, 경무어응 일( 蘭 舟 催 發, 執 手 相 看 淚 眼, 竟 無 語 凝 噎, 배는 떠난다고 재촉하는데, (헤어지기 아쉬워) 서로 손을 잡고 눈물어린 눈을 쳐다보며, 말은 못하고 울먹이기만 하네)" "의대점관종불회, 위이소득인초췌( 衣 帶 漸 寬 終 不 悔, 爲 伊 消 得 人 憔 悴, 옷과 허리띠가 넓어져도(살이 빠져도) 아무런 후회가 없다네, 그대를 위해서라면 초췌해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리)"와 같은 유영의 사는 전국에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우물물이 있는 곳 이면 모두 유영의 사를 노래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고, 기녀들은 그에게 먹을 것과 잘 곳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사를 지어주면 여악사들은 그에게 '고료'를 주기도 했다. 유영이 죽었을 때, 변경성의 기녀들이 돈을 모아서 그의 장례식을 치러준다. 모든 수도의 기녀들이 영업을 멈추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그녀들의 곡성이 하늘을 진동했고, 수리밖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황제가 죽거나, 친아버지친어머니가 죽어도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후 매년 청명절이 되면, 변경성의 기녀들은 유영의 묘를 찾아갔다. 이 풍습을 "조유칠( 弔 柳 七, 유칠도 유영을 가리킴)"이라고 했다. 모든 업종에서는 가장 뛰어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기녀들중에서도 그렇다. 가장 뛰어난 기녀를 '화괴( 花 魁 )'라고 부르는데, '화괴'는 단순이 용모가 빼어나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내재적인 기질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유영'이 기녀들에게 준 '고통속의 존엄'이다. 셋째, 모택동 모택동은 기녀의 처지를 동정했다. 기녀들 중에서 가정환경이 빈곤하여 청루에 팔려온 경우가 있고, 호족이나 폭력배들에 의해 강제로 창기 가 된 경우도 있다. 물론 편안하게 살고자 해서 스스로 치부의 수단으로 기녀가 된 특수한 경우도 없지는 않다. 신중국이 건립되었을 때, 모 택동이 거리를 다니다가 하루는 노보( 老 鴇, 포주)가 기녀를 때리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분노하여 호위병에게 포주의 행동을 제지하게 한 다. 그 후 모택동은 명을 내려 기원을 금지시킨다: "신중국은 창기가 곳곳에 있고, 흑도가 횡행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방을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하룻밤만에 북경의 224개 기원은 모두 폐쇄되고, 이어 전국적으로 기녀해방운동이 벌어진다. 기녀들이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고객들이 울건 웃건, 모택동은 강경한 행정수단으로 중국 5천년 역사에 성행하던 기녀현상을 뿌리뽑아버렸다. 외국기자가 한번은 당시 외교부장을 겸하고 있던 주은래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중국에 기녀가 있나요?" 그러자, 주은래는 유머스럽게 "있습니다. 중국의 대만성에"라고 대답하였다. "수요가 있다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다"라는 이론에 따르면, 기녀의 명줄도 끊어지기 힘들지 않을까? 대만에서 기녀단체들은 길거리에서 시위 를 하면서 성서비스도 합법화시켜달라고 요구한다. 그녀들의 이유는 하층인민은 살아가기도 힘들고, 병들어도 고치지 못하고, 공부하지도 못 하여, 많은 하층부녀들은 그저 성서비스를 통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사회의 '불평등'이 기녀를 만들어내는 것같다. 행 정명령만으로는 이를 뿌리뽑을 수 없을 것이다. 기녀라는 이 "홍수"에 대하여 우임금과 같이 '소통시키는 방법( 疎 )'을 쓸 것인가? 아니면 우임금의 부친과 같이 '막아버리는 방법( 堵 )'을 쓸 것인가? 사회는 기녀들의 생존에 영향을 주는 네번째 남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중국 기녀( 妓 女 ) 역사상 중요한 3명의 남자 167

168 공주와 옹주 :15 흔히 임금의 딸을 공주, 혹은 옹주라 부르는데 이의 차이는 정궁, 즉 중전의 몸에서 난 적녀인가 혹은 후궁의 몸에서 난 서녀인가 하는 차이 이다. 중궁의 몸에서 난 여식을 공주( 公 主 ) 후궁의 몸에서 난 여식을 옹주( 翁 主 )라고 불리운다. 고려초기에는 왕의 딸들을 궁주( 宮 主 )라고 불리웠으며 궁주라는 명칭은 황제의 후궁에게도 붙일 수 있는 칭호였다. 고려후기, 고려가 원나라 의 부마국으로 전락되자 본격적으로 임금의 딸들을 공주라 불리우기 시작했고 후궁들을 궁주, 혹은 옹주라 불리우다가 조선초기, 태종임금이 내명부의 품계를 정렬하게 되었고 비로소 공주와 옹주의 구분이 확연히 자리잡게 된 것이다. 원래 공주라는 말은 중국 진나라와 한나라에서 왕의 딸을 시집보내야하는데 이를 주관하던 사람들이 바로 삼공( 三 公 )의 벼슬을 가진 관리들 이었다. 고대 황실에서 공주들은 나라를 위해 이민족들에게 시집을 가 정략혼인의 증인들이었는데 그 중 행복하게 평생을 살다간 왕녀들은 거의 없었다. 예를 들어 청나라 순치황제의 딸인 건녕공주의 경우 삼번왕 중 한 사람인 오삼계의 아들인 오응웅과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훗날 삼번의 우두 머리 오삼계는 다시 대명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이는 삼번의 난을 일으키자 순치황제의 아들인 강희황제는 오삼계와 경중명, 상가 희들을 정벌하였다. 이를 두고 역사에서는 삼번의 난이라 부르는데 훗날 건녕공주는 어린 아들을 안고 자결하고 말았다. 왕녀들은 임금들의 금지옥엽이고 왕실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여인들이었다. 세상 어느 여인들보다 우아하고 고결한 피를 타고난 여자들이지 만 인생을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없는 반쪽짜리 행복을 타고난 가여운 여인들이었다. 왕녀들은 본명이 따로 있었고 그들이 효혜, 덕혜라 명호를 넣는 까닭은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조에서 덕과 예, 효를 숭상하라는 의미에서 호 와 본명을 따로두었다. 1. 불가로 귀의한 경순공주. -경순공주는 조선을 창립한 태조 이성계의 딸이다. 태조대왕에게는 신의왕후 한씨와 신덕왕후 강씨의 두 부인을 두었는데 왕후가 되기 이전 에 신의왕후의 경우 향처라 불리웠고 신덕왕후의 경우 경처라 불리웠다. 당시 이성계는 무인으로서 자주 변방에 발직되는 경우가 많았는 데 강씨는 이성계가 지방의 무관으로 활동할 적에 만난 사이라고 되어 있다. 일설에 의하면 강씨는 매우 빼어난 외모와 젊은 나이를 지니고 있어 항상 이성계를 흡족하게 해주었고 급기야 한씨가 왕후가 되어보기도 전 에 죽자 강씨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왕후가 되었다. 강씨는 이성계와의 슬하에 방석, 방번, 경순공주를 두었는데 방석, 방번이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죽음을 당하였고 신덕왕후 강씨는 태종대왕 의 노여움을 사 왕후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동생들의 죽음, 남평 흥안군 이제의 죽음을 슬퍼한 경순공주는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불가로 귀의를 해 비구니가 되었는데 머리를 파르라니 깍도 승복을 입고 있는 경순공주의 모습을 매우 가여이 여겨 이성계는 자주 그녀를 찾아돌봐주었다. 공주와 옹주 168

169 언제 죽었는지 그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다. 2. 세종대왕의 영원한 아픔. 정소공주. -세종대왕은 역대 조선 임금들 중에서 가장 많은 아들을 본 임금으로 아들 19명, 딸 4명을 슬하에 두었다. 그는 소헌왕후 심씨에게서 난 딸 정소공주를 가장 애틋하게 여겼는데 정소공주가 13살의 나이로 죽자 세종은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늘 정소공 주가 타고놀던 그네를 바라보며 딸의 죽음을 애틋하게 여겼고 정소공주의 슬픔을 너무도 격하게 느낀 나머지 한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지병인 소갈(당뇨)과 안질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3. 공주에서 노비로 전락한 비운의 왕녀, 경혜공주. -경혜공주는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에게서 난 공주이고 단종임금의 누나이다. 한낱 세자 향의 후궁으로 있던 권씨가 그녀를 낳음으로써 왕후 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녀는 영양위 정종에게 시집을 갔으며 훗날 숙부인 세조임금에게서 동생과 지아비를 잃은 슬픔으로 통탄했고 대 신들의 주청에 따라 그녀는 공주의 작위를 박탈당하고 노비가 되고 말았다. 그녀는 노비가 되어서도 공주 특유의 기품과 당당함을 잃지 않아 그 지방 현감을 아주 곤혹스럽게 했다고 하는데 세조는 조카인 경혜에게 다 시 공주의 작위를 찾아 주었다. 4. 남편의 주색 때문에 스트레스를 대량으로 받고 살았던 현숙공주. -현숙공주는 예종과 안순왕후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풍천위 임광재에게 시집을 갔다. 그녀는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효시를 제공한 임숭재 를 시아버지로 봉양했고 성종의 딸인 휘숙옹주와는 사촌지간이면서 동서지간이었다. 풍천위 임광재는 부마라는 지위를 부담스럽게 혹은 당당 하게 여겼는데 그는 주색에 능해 공주 몰래 기생과 여종들을 희롱하거나 겁간하는 것을 예사로 삼았다. 형법상 부마는 왕녀 이외에 첩을 들이는 것을 금기시 했는데 현숙공주가 매일 울면서 친정인 왕실로 달려오면 안순왕후 한씨는 성종에게 주 청하여 사위인 임광재를 처벌해달라고 지청구를 올릴 정도였다. 하는 수 없이 성종은 임광재에게 벌금이나 형벌을 받게 했는데 그래도 그의 주색잡기는 그칠 줄 몰랐고 공주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다고 하여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주를 폭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훗날 공주가 독살 당할 뻔한 사건이 발생되었는데 이 일로 공주를 모시던 상궁과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임광재는 그래도 자신의 잘 못 을 뉘우치지 않아 평해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5. 친오빠와 간통을 즐긴 휘숙옹주. -휘숙옹주는 성종임금과 숙의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녀이고 연산군이 통치 할 때 그의 권력을 등에 업고 온갖 재물을 모아들이고 연산군 과 간통을 저지르게 되었다. 그는 당대의 간신 임사홍의 며느리이고 현숙공주와는 동서지간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풍원위 임숭재이다. 당시 조선시대는 유교의 교리가 어느 곳보다 강한 나라여서 남매끼리 얼굴을 마주 보고만 있어도 간통이 성립되는 나라였다. 훗날 연산군이 진성대군에 의해 폐위당했을 때 그녀도 장녹수와 더불어 직첩을 효수당하고 저자거리에서 사람들이 던진 돌팔매에 맞아 죽었 다는 설이 있지만 어느 것이 명확한지 아직 확인된바 없다. 6. 시아버지 김안로의 집착이 그녀를 죽게 만들다. 효혜공주. 공주와 옹주 169

170 -효혜공주는 중종과 장경왕후 윤씨 사이에서 낳은 딸로 인종의 누나이다. 본명은 옥하( 玉 荷 )이다. 그녀는 당대를 주름잡던 희락당 김안로의 며느리이고 연성위 김회의 아내이다. 김안로는 며느리 효혜공주를 방패로 중종과 친분을 유지하고 정사를 농단하려고 했지만 며느리가 일찍 죽자 권력을 마저 행사하지도 못한 채 그녀가 죽은 칠개월 뒤에 죽게 된다. 효혜공주는 시아버지의 권력 도구였고 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그녀는 몸이 매우 약해 잔병치레를 자주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중종은 그런 딸 이 걱정되어 직접 그녀를 문병하러 올 정도로 그녀를 귀애했다고 알려져 있다. 7. 일생을 서슬푸른 원한에 사로잡혀 살았던 정명공주. -정명공주는 선조임금의 최초의 적통공주이고 선조 나이 쉰이 넘은 나이에 본 공주라 선조의 사랑을 지극히 받은 공주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계축일기의 주인공인 인목대비 김씨이며 그녀의 남편은 풍산 홍씨 가문의 홍주원이다. 선조는 공주를 너무도 사랑하여 그녀의 혼사만큼 최고 로 성대하게 해줄 정도였다. 그녀는 홍주원 과의 사이에서 7남 1녀를 둔 역대 공주들 중에서 가장 다복한 삶을 살았지만 오빠인 광해군의 횡포로 인해 어머니 인목대비와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그녀는 어머니 인목대비와 함께 서궁으로 강제로 유폐당해 공주의 지위를 박탈당한 채 숨죽이며 살았다가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축 출하자 공주의 신원이 회복되었고 숙종의 사려깊은 배려를 받으며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다. 역대 공주들 중에서 가장 긴 생을 유지했던 공주이기도 했다. 8. 오빠에 서슬푸른 복수의 칼날에 휘둘린 효명옹주. -효명옹주는 인조와 귀인 조씨의 딸이고 인조의 고명딸이다. 귀인 조씨가 인조의 총애를 받자 그녀 또한 인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김자 점의 손자인 세룡과 혼인하였다. 그녀는 시할아버지 김자점의 며느리이자 권력 도구였으며 김자점은 사돈인 조귀인과 결탁하여 소현세자와 빈궁을 죽이는데 앞장서고 말았다. 그 결과, 효종이 즉위하자 효종은 형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아래 조귀인과 김자점, 김세룡의 효수하였고 동생인 효명옹주의 작위를 박탈하 고 목을 치게 되었다. 일설에 그녀는 인조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교만함을 달고 다녔다. 또한 그녀는 오빠인 소현세자 와 올케인 민회빈 강씨를 어머니 귀인 조씨와 함께 투기하였고 결국 그들을 죽게 하는데 동조하게 되었다. 그녀는 권력의 희생양일까? 아니면 인과응보의 벌을 받은 악녀일까? 9. 조카의 후궁에게 아들을 잃은 숙안공주. -숙안공주는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딸이다. 그는 현종을 남동생으로 두었고 숙종을 조카로 두었다. 그는 풍산홍씨 가문 의 아들인 익평위 홍득기와 결혼을 했고 그 슬하에 1남 홍치상을 두었다. 그녀는 매사 성격이 꼼꼼하고 예리했고 아녀자의 덕과 효, 예를 가장 중시여겼다. 그녀의 시댁은 당시 명문서인가였고 그녀 역시 시댁의 규 율에 따라 서인의 편을 들었으며 그리하여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 민씨를 중궁으로 앉히길 권유했다. 당시 숙종은 남인들에게 눈독을 돌리 고 있었고 남인들은 거상 장형의 조카딸 장옥정을 천거하여 후궁으로 앉혔는데 그 때문에 숙안공주는 늘 장옥정을 곱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 보았고 본대없는 중인집 여식이라는 모멸감을 늘 주었다. 그 때 숙종은 남인들을 등용하여 서인들을 등한시했는데 그 때 서인의 거두 우암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죽었고 숙안공주의 아들 홍치상 역시 장옥정의 서슬푸른 칼날을 피할 수 없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는 자신보다 높은 신분인 숙안공주를 죽일 수 없으니 대신 그 아들을 죽여 숙안공주의 비참함을 비웃고자 했던 의도일 것이다. 공주와 옹주 170

171 숙안공주는 서인의 의를 위해 아들에게 죽지 말라 간언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덤덤하게 아들 치상의 죽음을 바라보며 속으로 피눈물을 쏟아 냈다. 그녀의 지아비 득기는 청렴결백하기로 이름난 대신이었고 청나라 사은사로 다녀와 효종을 기쁘게 하였다. 그녀는 인현왕후의 복위를 위해 물 심양면 힘을 쓰고 노력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 밖에 현종의 딸인 명안, 명선공주 역시 명문 서인가의 여식이라 인현왕후를 위해 장옥정을 몰아내라 숙종에게 지청구를 드린 사연이 있 다. 10. 공주가 열녀문을 하사받다. 화순옹주. -화순옹주는 영조와 정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이다. 알다시피 영조는 두 명의 중궁을 맞이했지만 정성, 정순 왕후에게 후사를 보지 못 했고 후궁들 몸에서 자녀들을 본 임금이다. 화순옹주는 효명세자의 누이이고 월성위 김한신에게 시집을 갔다. 왕녀들은 정략결혼이라는 것을 부부애를 거의 느끼지 못했지만 유달리 화순옹주는 남편인 김한신을 사랑하였고 김한신 역시 옹주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김한신이 갑자기 원인도 알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아프더니 결국 눈을 감고, 화순옹주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여 물은 물론이고 곡기를 끊고 몸져눕게 되었다. 당시 영조임금의 나이 칠순이었고 화순옹주 소식을 접한 영조는 딸에게 직접 미음을 떠다먹이는 정성을 보였지만 화순옹주는 쉽사리 미음조 차 먹으려 들지 않았다. 영조는 애간장이 끊는 슬픔을 느껴 화순옹주에게 어명을 보태어 미음을 먹으려 했지만 오히려 죽을 각오로 먹지 않 았고 결국 단식 17일만에 화순옹주는 스스로 생을 마감해버렸다. 유교를 어느 곳보다 숭상하던 조선에서는 반가의 아녀자가 열녀가 되어도 칭찬이 자자했는데 하물며 왕녀가 열녀가 되니 슬퍼서 우는 사람이 한 두사람이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넋을 기리기 위해 열녀문을 하사받았고 조선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왕녀가 열녀문을 하 사받게 되었다. 11. 둘도 없는 효녀, 둘도 없는 누이, 화평옹주. -화평옹주는 영조와 선희궁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옹주이다. 영빈 이씨한테는 맏딸이고 기록에는 현숙하고 현명하여 영조가 딸들 중에 서 화평옹주를 귀애했다. 수시로 화평옹주가 사는 사가로 납시어 며칠이 가도록 궁궐로 돌아오지 않기 일쑤였다. 그녀는 현명했고 착한 딸이자 누이였다. 당시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를 중재하던 이는 바로 화평옹주였다. 화평옹주 는 아버지 영조에게 항상 동생인 사도세자의 마음을 헤아려 고하였고 사도세자에게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타일렀다. 그러나 화평옹주는 원인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영조는 당시 궁궐에도 가지 않고 화평옹주의 침전에서 그녀의 임종까지 돌봐주 었는데 화평옹주가 죽자 영조는 며칠을 곡기를 끊어가면서 딸의 죽음을 애도했다. 또한 그녀를 공주의 예법으로 장례식으로 치뤄주었고 대신들에게 그녀를 말할 때는 귀주( 貴 主 )라고 부르라고 말할 정도였다. 한편 사도세자는 누나인 화평옹주가 죽자 탄식을 하며 가로되 "아. 이제 누가 나의 어려움을 알아준단 말인가? 화평누이... 왜 이리 일찍 가 시었소. 나만 두고... 이제 나는 어찌하면 된단 말이오." 세자는 눈물을 흘리며 누이의 죽음을 슬퍼했다. 화평옹주는 금성위 박명원의 아내였고 박명원은 반남박씨의 자손이다. 그는 바로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와 인척관계에 있으며 직접 정조에 게 수빈 박씨를 천거하여 후궁으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출생콤플렉스를가지고 있어 아들과 딸들은 모두 명문가의 자손으로 혼인을 시켜주었다. 12. 그녀에 대한 모든 기록은 틀렸다. 화협옹주. -그녀는 앞서 거론한 화평옹주의 동생이고 사도세자의 누나이다. 그녀는 영빈 이씨와 영조 사이에서 태어난 옹주이고 그녀 역시 영조의 지극 공주와 옹주 171

172 한 사랑을 받은 옹주이다. 일설에는 영조가 사도세자와 화협옹주를 극도로 혐오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런 낭설이 떠돈 이유는 혜빈 홍씨의 한중록을 바탕으로 그녀를 평가했기 때문이다. 영조는 딸들 중에서 화평옹주를, 며느리 중에서 현빈 조씨를 총애했는데 한중록에 의하면 "성상께서는 화평옹주를 사랑한 반면, 화협옹주를 극도로 싫어했으며 며느리 중에서 현빈을 총애했지만 나 역시 총애를 받았다." 라고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영조실록에는 영조가 며느리 현빈 조씨와 화평옹주를 끔찍이 사랑한 기록은 있지만 어디서도 혜빈홍씨를 총애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녀는 평산 신씨 가문의 아들인 영성위 신광수에게 출가를 했고 계축년에 죽었다. 그녀는 살아생전 각전(왕과 왕비를 지칭하고 그들이 가진 사유재산을 말하는 것 같음)에 진 빚이 상당했다고 전해지는데 영조는 즉시 화협옹주의 빚을 청산해주고 균역을 실시해 그 폐해를 다시는 일 으키지 않으려 애썼다. 화협옹주 역시 영문을 모른 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는데 연이어 일어난 딸들의 죽음에 관해 세상 사람들은 대빈궁(희빈 장씨)과 그 아들 경 종의 원혼이 딸들에게 붙어 다녀 죽이고 다닌다며 낭설을 찧고 다녔다. 화협옹주가 죽자 영조는 화협옹주의 시댁으로 가 그녀의 마지막을 보았으며 매우 애통해하고 슬퍼하였다. 13. 왕녀 최초로 정사에 관여한 화완옹주. -화완옹주는 영조와 선희궁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선희궁의 막내 딸이다. 그녀는 일성위 정치달에게 시집을 갔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어려 사 내에게서 느껴지는 풍모를 도무지 느낄 수 없었다. 그와 사이에서 딸을 하나 두었지만 그 딸이 두 살도 채 넘기지 못하고 죽고, 남편인 정치 달까지 죽고나니 그녀는 세상 사는 낙을 오로지 궁궐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부왕인 영조를 찾아뵙는 것이다. 그녀는 왕녀 특유의 오만함과 당당함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영조는 늘 옹주에게 하는 소리가 "옹주가 사내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뿐 했다." 라 고 우스갯 소리를 했다. 연이어 딸들을 잃어버린 영조는 오로지 화완옹주를 바라보는 재미로 살고 있었고 그녀는 남편 정치달의 먼 친척인 정석달의 아들 정후겸을 양자로 이십대 후반에 맞아들였다. 그 때 정후겸의 나이가 16살이고 좀 더 어린 아들을 원하는 옹주에게 정후겸이 명석한 두뇌로 그녀의 마 음을 움직여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오빠인 사도세자와 반대의 길을 갔으며 결국 그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당시 사도세자는 정순왕후, 숙의 문씨, 김 귀주와 김한구, 문성국 일파들에게 무참하게 도륙당하는 처지였는데 영조는 나경언이 읆은 세자의 열가지 비행목록을 듣자 분을 참지 못해 나경언을 단칼로 베어버렸고 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가라 명한뒤 그 곳에서 굶겨죽게 했다. 훗날 영조가 죽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조는 정순왕후는 제외한 숙의문씨와 화완옹주를 폐출시켰는데 숙의문씨는 작위가 효수당하고 문녀 라고 불리우다 사약을 받고 죽었고 화완옹주는 성왕이 총애하던 옹주라 하여 정조가 사면을 해주었다. 그러나 옹주의 지위를 박탈당해 정치 달의 아내라는 뜻의 정처라고 불리우다가 할머니 숙빈이 묻힌 소령원에 시묘살이를 하면서 젯밥을 얻어 먹고 살다가 말년에 다시 옹주의 작 위를 돌려받았다. 14. 오라버니를 살려주세요. 화길옹주와 화령옹주. -화길, 화령 옹주는 영조와 숙의 문씨 사이에서 태어난 옹주들이다. 어머니 숙의 문씨는 처음 화길옹주를 가졌을 때 아들이라 기대를 했지만 낳아보니 딸인 것을 크게 실망했다고 전해진다. 화길옹주는 청송위 심능건에게, 화령옹주는 능성위 구민화에게 시집을 갔는데 당시 구민화의 집안이 곤궁하여 영조가 딸 화령옹주를 위해 직 접 인부를 데려다 시댁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특히 구민화는 청나라로 사은사를 다녀왔고 영조의 총애를 받는 부마였다. 그들은 노론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데 참 아이러니 하게도 오빠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위기에 처하자 두 옹주가 눈물로 아버지 영조 에게 세자를 해치지 말라고 간언했다. 그러나 영조는 두 딸의 청을 무시했고 세자가 죽자 크게 대성통곡을 했다. 훗날 정조가 숙의 문씨의 작호를 빼앗고 그녀를 사사했을 때 두 고모를 살려둔 것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지 말라고 간언을 했기 때문이다. 두 딸은 정조에게 어머 니를 살려달라 간청했지만 정조는 그것만큼은 들어줄 수 없다고 못을 박았고 대신 두 옹주의 작호만은 거둬지지 않았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공주와 옹주 172

173 살려달라고 한 그들의 간청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5. 할머니 정순왕후의 지극한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숙선옹주. -숙선옹주는 정조와 수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옹주이고 정조의 애틋한 사랑을 받은 여식이다. 그 어머니 수빈 박씨가 후궁의 도리에 맞게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할 줄 알기에 숙선옹주를 대하는 태도가 모두들 공손했다. 그녀는 영명위 홍현주와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이에 따른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숙선옹주가 시집을 가려 하는 준비하던 찰나, 그녀에게는 큰 고민이 있었으니... 질문이 재대로 열리지 않은 고민이었다. 어의로부터 옹 주가 여자구실을 하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는 말을 전해들은 정조는 고민에 빠졌지만 일단 혼례를 시켜야 했기에 그 사실을 숨기고 홍현주에 게 옹주를 맡겼다. 홍현주는 아내와의 첫날밤을 기대했지만 옹주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어 그와 잠자리를 하는 것을 며칠동안 거부했고 혈기왕성한 홍현주 는 사실을 파헤치려 강제로 옹주의 방에 들어가 그녀와 합궁하려 찰나, 옹주의 비밀을 알게 되고는 그 자리에서 말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옹주는 이제는 다 틀렸다며 단도로 목을 겨눠 죽으려 하는 찰나, 홍현주가 작은 과도를 가지고 오더니 옹주에게 다가가 옹주의 막혀 있던 질구를 벌려주었고 그리하여 두 사람은 아들 하나를 보게 되었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후궁들 중에서 수빈의 권력이 가장 좋았지만 수빈은 웃전인 혜빈과 효의왕후를 절대로 불순하게 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후궁으로써의 도 리를 지키면서 두 분을 공경했다. 그러한 연유로 정순왕후는 왕실의 여인들 중에서 수빈 박씨를 가장 총애했고 기록에 의하면 수빈을 지칭할 적에 '수빈 저하' 지칭하도록 권유를 했다고 한다. 어느 날, 혜빈의 오라비 홍낙임이 정순왕후 일가 중 한 사람과 언쟁을 하였는데 이 일로 정순왕후는 심기가 불편하여 홍낙임을 귀양조취 하 려 했다. 그러자 혜빈과 효의왕후, 수빈 박씨가 나서 정순왕후에게 홍낙임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 왕실에서 아들을 낳은 여자에게 최고의 권력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수빈은 비록 순조를 제 몸으로 낳았지만 엄연히 법적인 어머니 효의왕후가 존재하고 있었기에 정순왕후의 화를 누그러뜨리는데 성공했다. 또한 정순왕후는 숙선옹주를 두고 대신들에게 명하길 "숙선옹주의 작호를 공주보다 낮고 옹주보다 높은 것으로 채택하여 내게 알리라." 라고 명령했다. 대신들은 당연히 그런 전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했고 수빈 역시 정순왕후에게 그 명을 거둬달라고 간청했으니 그 일은 아예 무산되고 말 았던 것이다. 16. 삼일천하의 겁없는 진보주력의 아내 영혜옹주. -영혜옹주는 숙의범씨와 철종사이에서 태어난 옹주이고 철종의 후궁 소생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지만 15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것도 시집을 가고 나서 죽었다. 반남박씨 가문의 영효와 결혼을 하여 영효는 금릉위에 봉해졌지만 한 살 많은 옹주의 죽음, 결혼한 지 칠개월 만에 본 아 내의 죽음. 그는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훗날 중국 상하이 한 객잔에서 의문의 자객에게 암살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17. 고종의 웃음과 눈물 덕혜옹주.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이고 환갑이 넘은 나이에 본 딸이라 고종이 특별히 애지중지 기르던 옹주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복녁당 귀인 양씨 이고 옹주를 낳자 고종의 총애를 입어 제일 많은 월급을 받았고 귀인으로 품계가 올라갔다. 양씨의 집안은 천한 어물전 집안이었는데 양씨는 당시 명성황후의 시위궁녀로 있었고 명성황후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고종의 은근한 총애를 입고 후궁이 되었다. 당시 양씨가 후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안 양씨의 집안은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부와 명예를 드안게 되었고, 양씨의 오라비는 누이가 옹주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저자거리 한복판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정도로 기뻐했다. 공주와 옹주 173

174 고종은 늦게 태어난 옹주를 바람에 날려갈까 비에 휩쓸려갈까 늘 전전긍긍하면서 키웠다. 그는 항상 옹주를 안은 상태에서 강녕전에서 함 께 뉘어잤고 유모가 젖을 물리기 위해 뒤를 돌아있을 때도 환하게 웃으며 "과인에게 부끄러워 할 필요 없다. 옹주가 젖을 잘 먹고 있는지 보 고싶구나." 라며 유독 딸앞에서는 여느 아버지와 다름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옹주는 어릴 때부터 명석했다. 두살이 되던 해, 상궁 중 한 명이 "옹주자가. 자가의 외가댁은 어디시옵니까?" 라고 물으니 옹주는 한치의 오 차도 없이 "내 외가댁은 감고당일세."라고 말하여 주변을 감동케했다. 당시 모든 왕실의 자녀들은 죽은 명성황후를 어머니로 생각해야 당연한 것이었다. 고종은 옹주를 위해 손수 궁안에 유치원을 두어 명망높은 사대부가 여식들을 데려다 교육을 받게 하였다. 하루는 민씨집 여자아이가 오줌을 싸 치마를 더럽혔는데 울고 있는 아이에게 옹주가 다가가 손수 치마를 벗어주며 아이에게 입혔다. 자신은 속치마 차림으로 있었는데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아 주변을 당혹하게 했지만 영민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당시 옹주는 김황진의 손자인 김장한과 약혼을 한 사이라 고종은 아쉽지만 그녀를 시집보내 일본왕실로 시집을 가지 않도록 계획을 짰는데 사전에 이 계획에 누설되어 옹주는 하는 수 없이 대마도주에게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옹주는 정략결혼으로 희생된 자신의 삶을 전혀 위로받 을 길이 없었고 그와의 금슬은 좋지 않았다. 급기야 그녀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조발성 치매진단을 받아 자신이 조선왕실의 왕녀라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다. 딸 정혜에 대한 일 화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아직 정확하게 파악된 것은 없다. 정혜(마사에)는 원자폭탄을 맞아 죽었다는 설과 등산을 나가 떨어져 죽었다는 설, 그리고 어머니 옹주를 극도로 미워했다는 설과 존경했다 는 설이 있지만 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다. 1962년, 치매가 완치되지 않은 채로 한국으로 돌아와 순명황후와 함께 낙선재에서 지냈다. 그녀는 1989년 낙선재에서 쓸쓸하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낙선재: 순조임금이 후궁인 경빈 김씨를 총애한 나머지 그녀를 위해 지은 전각이고 훗날 경빈 김씨가 살아생전 전각에서 살았지만 순조가 죽고 대신들의 주청에 의해 낙선재를 고스란히 왕실로 헌납했다. 공주와 옹주 174

175 중국 최고의 여황제 측천무후~! :12 측천( 則 天 )은 그녀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녀가 죽은후 후인들이 추존하여 붙혀준 호칭이었다. 정식 호칭은 측천순성황후( 則 天 順 聖 皇 后 )였다. 봉건시대의 대부분 여성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이름이 없었다. 처음 황궁에 들어 왔을때, 당태종은 그녀에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의미의 이 름으로 미( 媚 )를 내렸다. 후에 그녀는 황제가 되기 직전에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조( )라 지었다. 해( 日 )와 달( 月 )이 하늘( 空 )에 떠있는 형상의 이 글자는 백성이 사는 대지를 밝게 비춘다는 의미가 담겼다. 바로 이 미( 媚 )에서 시작하여 조( )로 끝난 인생 역정이 측천무후의 길이었다. 측천의 부친 무사심( 武 士 심)은 태원( 太 原 )의 부상( 富 商 )으로, 당고조 이연이 기병을 하였을때 적지않은 공을 세워 당나라 조정과 인연을 맺 었다. 당태종 이세민은 황제가 되고나서 대단히 색( 色 )을 밝혔다. 그는 어느 가문에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궁으로 불러와 비 ( 妃 )로 삼았다. 측천이 궁에 들어온 해는 정관 11년(637년),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안시성에서 참혹하게 패배하여 줄행랑을 치던 해로 부터 아직은 8년 전의 일이었고, 그때 그녀의 나이 열 넷이었을 때였다. 일반적으로 여자가 황궁에 들어가면 대단히 호강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생을 놓고 본다면 행복이라는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재난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다. 황궁에는 수 천명의 여자가 있지만, 진실로 남자 구실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황제, 그 하나 뿐이었다. 따라서 황제의 은총을 받지 못 한다면 쓸쓸히 늙어 갈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여자는 일평생 궁에 살았어도 황제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생을 마칠 때도 있다. 보아주는 사람 없이 아름다운 꽃이 홀로 피었다가 가을이 되자 안타깝게 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측천이 궁에 들어갈때, 그녀의 어머니는 통곡을 하면서 말렸다. 그러나 열네 살에 불과한 측천은 당차게 어머니를 달래며 태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제를 만나고 안 만나고는 제 복이고, 행복하고 안하고는 제 뜻이 아닌가요? 측천은 궁에 들어가자, 아름다운 용모와 집안의 지위에 걸맞게 재인( 才 人 )이 되었다. 당시 당나라의 궁궐에는 내명부( 內 命 婦 )라는 품계가 있는데 재인은 무척 낮은 품계였다. 최고의 위치는 황제의 부인인 황후( 皇 后 )이고, 그 아래로 부인( 夫 人 )에 해당하는 귀비( 貴 妃 ), 숙비( 淑 妃 ), 덕비( 德 妃 ), 현비( 賢 妃 )가 포진하며, 다시 아래로 내려가면 9빈( 九 嬪 )으로 소의( 昭 儀 ), 소용( 昭 容 ), 소원( 昭 媛 ), 수의( 修 儀 ), 수용, 수원, 충의( 充 儀 ), 충용, 충원이 있으며, 다시 그 밑으로 27세부( 世 婦 )가 있는데 첩여( 妤 )가 9인, 미인( 美 人 )이 9인, 그리고 재인( 才 人 )이 9인 등 모두 27명이었다. 그 아래로 81인의 어처( 御 妻 )가 있는데 보림( 寶 林 ) 27명, 어녀( 御 女 ) 27명, 채녀( 采 女 ) 27명이었다. 숫자를 모두 합하면 총 122명, 이것이 법률로 정해진 당나라 시기의 황제 부인과 후궁의 정원이었다. 여기에서 재인은 33위에 해당된다. 그것도 재인 9명 가운데 제일 첫 번째 순서를 차지하면 그렇다는 것이고 뒷자리를 차지하면 서열은 42 위가 된다. 그래도 재인은 내명부의 품계상 서열이 비록 낮았지만, 정식적인 위치를 차지한 후궁의 서열이었다. 문제는 황제를 과연 만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니면 그녀의 행운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황제 이세민은 그녀를 보고 한 눈에 반하여, 미( 媚 )라는 이름을 내렸다. 한편 그녀의 성씨인 무( 武 )는 용맹하고 씩씩한 남자의 의미가 있어, 아담하고 귀여운 뜻의 무( )로 바꾸어 무미( 媚 )라고도 불렀다. 또한 당대에 유명한 노래가 한 곡 있었는데, 곡명이 춤추는 아리따운 여자 라는 의미의 무미낭( 舞 媚 娘 ) 이었다. 여색을 극히 밝힌 당 태종이 이런 노래까지 염두에 두고 그녀의 이름을 미( 媚 )라고 지어 주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녀는 얼굴에 걸맞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었 다. 궁중의 많은 비빈( 妃 嬪 )들은 측천을 아리따운 꼬마아가씨 라는 뜻의 아미( 阿 媚 ) 라고 불렀으며, 화가 나거나 시기를 할 때는 여우 같은 계집얘 라는 의미로 호미( 狐 媚 ) 라고도 불렀다. 락빈왕( 駱 賓 王 )이 측천무후를 비판하며 지은 [위서경업전격천하문( 爲 徐 敬 業 傳 檄 天 下 文 ;서경업이 전하는 천하에 호소하는 글)]에서도 그녀를 중국 최고의 여황제 측천무후~! 175

176 여우와 같은 아리따운 계집이 주군을 속이고 미혹시킨다( 弧 媚 偏 能 惑 主 ) 라고 욕하면서 호미( 弧 媚 ) 라는 이름을 거론하였다. 어쨋든 무미( 武 媚 )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현재 그녀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 전해지지 않는 상황에서 정확하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는 모르겠 으나, 용문석굴( 龍 門 石 窟 )에 있는 석조로사나불( 石 造 雕 盧 舍 那 佛 )이 측천무후의 얼굴을 본떠서 만든 불상이라고 전해지는걸 바탕으로 유추한다 면, 그녀는 통통하고 풍만한 여자였다. 얼굴이 넓고, 눈썹이 길며 눈이 컸다. 눈꺼풀의 선이 부드럽고 코가 높았으며, 입이 크고 입술의 곡선 이 아름다웠다. 현대 여성의 기준에서 본다면 농염( 濃 艶 )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 唐 )대의 미인기준은 건강과 풍만함이었으므로 그녀는 매 우 자극적인 유혹미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미의 궁중운( 宮 中 運 )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일찌기 중국을 통일하고 주변의 나라에까지 이름을 날리던 당태종 이세민은 이미 나 이가 들어서인지, 변덕이 심하고 자주 병으로 누웠다. 더욱이 말년에는 도가장생( 道 家 長 生 )의 비법( 秘 法 )에 빠져 많은 양의 단약( 丹 藥 )을 복 용하여 오랜 기간을 침상에 누워 지냈다. 이른바 살아있는 시체와 같았다. 정관 23년(649년)에 그는 5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빛나는 공훈과 위대한 업적을 남긴 당태종도 세월의 도전은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무미( 武 媚 )의 나이는 의욕이 왕성한 스물 여섯에 불과했다. 그녀에게 운명은 때때로 가혹하였다. 젊고 아름다우며 사람을 끌어당기는 미모에다 총명하고 똑똑하며 생기발랄하고, 의욕과 정욕이 폭발적 이었던 그녀는 엄격한 황법( 皇 法 )에 따라 비구니( 比 丘 尼 )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에 황제가 죽으면 황자( 皇 子 )를 낳지못한 궁녀들은 모 두 감업사( 感 業 寺 ) 니고암( 尼 姑 庵 )에 호송되어 머리를 깎아야 했다. 그것이 국법이었다. 황제의 성은을 입은 여자는 그 주인인 황제가 죽는 것과 동시에 살아 있으되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원에 갇혀사는 운명이었다. 니고암은 오로지 푸른 등( 燈 )과 누런 불경( 佛 經 )이 전부였다. 꽃처럼 아름답고 암표범처럼 발랄한 궁녀들은 참혹한 세월을 인고와 슬픔 속 에서 살지 않을 수 없었다. 무미는 가혹한 운명을 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천명( 天 命 )이라는 이유로 여자를 속박하는 현실의 제약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열 넷에 궁중에 들어온 그녀는 자신의 미모와 재능을 걸고 일생일대의 도박을 결심하였다. 당태종이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던 시기에 그녀은 자신의 운명 을 선택하였다. 주사위를 던졌을 때 나올 수 있는 확률로 본다면 6개의 면 가운데 하나이므로 어차피 선택의 확률은 3할이 넘는 것이다. 하 물며 다음에 황제가 될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주사위를 던지는 일보다 쉽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나이가 들어 이미 삶의 끈이 오락가락한 당태종에게서 일찌감치 눈을 떼고, 다른 사람에게 도박의 대상을 옮겼다. 그 사람은 바로 태자 이치( 李 治 )로서, 후에 당나라의 3번째 황제가 되는 당고종( 唐 高 宗 )이라는 인물이었다. 당태종은 처음에 큰 아들인 이승건( 李 承 乾 )을 태자로 삼았다. 이승건은 태종이 스물 네살이었을때 세상에 태어났다. 그는 호방하고 담대하 며 용맹한 성격은 부친을 그대로 빼닮았다. 하지만 행동이 지나치게 방종하고 무례하였다. 이 점은 당태종과 판이하게 달랐다. 일반적으로 황태자가 성인이 되었는데, 즉위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부황( 父 皇 )과 간간히 불화가 발생한다. 더욱이 황제와 태자의 성 격이 모두 불같으면, 일반 백성의 경우처럼 부자( 父 子 )사이에서 말다툼이 일어나고 그 끝에 가서는 충돌이 벌어진다. 만일 황제가 화를 참지 못하면 곧바로 태자를 바꾸려 의도하고, 태자가 이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반란이 일어난다. 이승건은 불같은 성격의 당태종과 번번히 충돌하였고, 당태종은 태자를 바꾸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승건은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고, 검 주( 黔 州 )로 유배를 당하였고,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당태종은 후환( 後 患 )을 막기 위하여 모종의 수단을 강구하였다. 그는 성격이 유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하며, 부친에게 효성이 지극한 아홉째 아들인 이치( 李 治 )를 태자로 삼았다. 태자 이치는 당태종의 예상대로 매우 공손하고 효성스러웠다. 하지만 영웅적인 아버지와 유약한 아들 사이에도 알 수 없는 반발심리가 있 게 마련이다. 649년 그 해 봄, 당태종이 병을 얻어 눕자 이치는 그의 곁에서 며칠을 간병( 看 病 )했다. 무미는 이때를 기회로 삼았다. 그녀는 황제의 침소 에서 정성껏 간병을 하면서 이치를 유혹하였다. 무미는 이치보다 네살이 많았다. 그녀는 남녀의 방사( 房 事 )에도 경험이 풍부하고 이치( 理 致 )에도 밝았으며, 심지( 心 智 ) 방면에서도 태자보다 성숙하였다. 우선 그녀는 황제를 극진히 보살피면서, 틈이 나면 태자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때로는 어머니처럼 자상하고 따스하게 태자를 감쌌으며, 어떤때는 누나처럼 다정하고 친근하게 태자를 대하였다. 중국 최고의 여황제 측천무후~! 176

177 이치는 감정을 다스리고 표현하는데 미숙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보살핌이나 가족들의 눈길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성장한 그는 무미의 행동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어느덧 이치는 무미를 보게되면 마음이 평안하고 따스해졌다. 변화는 알 수 없는 시간의 흐름속에서 싹이 트고 꽃이 폈다. 어느 날, 무미는 차와 과자를 이치에게 건네면서, 슬쩍 부드러운 자신의 손으로 태자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이치는 숨이 막힐듯한 감정 상태로 무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무엇을 갈망하는듯한 그윽한 눈빛으로 이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얼 른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이후로 이치는 무미를 만나면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하루는 태종이 깊은 잠에 들자 태자 이치는 그의 머리 맡에 앉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이치는 불현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언제 들어 왔는지 무미가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그의 등 뒤에 서 있었 다. 얇은 옷을 걸친 그녀의 모습에 이치는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봉긋한 가슴과 백설같은 피부가 눈에 아른거렸다. 이치는 당장에 일어나 그녀를 안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무미는 태자의 심 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다가 슬며시 밖으로 나갔다. 어느덧 태자의 마음 속에는 그녀를 탐하는 욕망이 자리잡았다. 이제 남성으로서 아버지 이세민의 연적( 戀 敵 )으로 발전하였다. 아울러 부친 의 존재( 存 在 )와 지위( 地 位 )와 소유( 所 有 )에 반발하고 보복하려는 생각이 서서히 꿈틀거렸다. 여름이 되었는데도 당태종의 병은 낫지 않았다. 이 날도 태자 이치는 밤새워 당태종을 간병하였다. 새벽녘이 되었을때, 그는 측간( 厠 間 )에 가고 싶어 부친의 침소를 빠져 나왔다. 많은 궁녀들이 기둥에 기대어 잠이 든 모습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그는 궁녀를 깨우고 싶지 않아 조 용히 걸음을 옮겼다. 측간에 다다랐을때 그는 등 뒤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바로 무미였다. 이치는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 여 공손하게 물었다. 무 재인은 어떻게 이곳에 왔습니까? 무미는 가볍게 무릎을 접으며 예를 올리고 대답했다. 소첩( 小 妾 ;궁중에서 궁녀가 자신을 낮추어 하는 말)이 태자를 위하여 갱의( 更 衣 )를 하겠습니다. 고대의 황제나 귀족들은 측간에서 모두 갱의( 更 衣 )를 하였다. 이는 상전이 볼 일을 보고나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비( 侍 婢 )가 옷을 바 꾸어 입혀주는 천한 일이었다. 이치는 얼른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무 재인은 부황( 父 皇 )께서 아끼시는 분인데, 어찌 태자인 내가 갱의를 받을 수 있습니까? 이치의 말이 끝나자 무미는 태자에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앞으로는 태자를 모시고 싶어도 그럴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태자의 웃 옷을 벗기고서 그의 품안에 얼굴을 묻었다. 이치는 그녀의 뜨거운 숨을 느끼며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입술을 깨 물었다. 무미는 더욱 태자의 품을 파고 들으며 고개를 들어 태자의 입술에 예쁜 자신의 입술을 덮었다. 둑이 무너지면 쏟아지는 물이 걷잡을 수 없듯이, 태자의 감정도 일시에 폭발하여 전신에 퍼져나갔다. 두 사람은 열열하게 몸을 더듬으며 입 술을 맞추었다. 폭풍우가 지나자 무미가 굵은 눈물을 흘리며 울먹였다. 소첩은 이미 태자 마마의 소유입니다. 오로지 태자에게 의탁하고저 하오니 제발 헌 옷처럼 버리지나 말아주세요. 깊은 밤을 고독으로 지 새우지 않게만 해주세요. 이치는 그녀의 손을 꼬옥 감싸며 말했다.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그날까지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재인을 반드시 불러 주겠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태종의 침소로 돌아왔다. 얼마후, 그들의 바램대로 태종 이세민이 세상을 떠나고, 효성스런 태자 이치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당태종의 어행( 御 幸 ;임금과 관계를 맺는 것)을 받고도 자녀를 낳지 못한 궁녀들은 법에 따라 장안성 밖에 있는 감업사( 感 業 寺 ) 니고암( 尼 姑 庵 )에 압송되었다. 무미는 똑같은 처 지의 궁녀와 함께 니고암에서 새 해를 맞이하였다. 중국 최고의 여황제 측천무후~! 177

178 당고종( 唐 高 宗 ; ) 이치는 650년 새해 첫 날에 년호를 영위( 永 徽 )로 바꾸었다. 영휘 원년(650년) 봄은 이곳 니고암에도 어김없이 찾아왔 다. 무미는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수절 생활을 하면서 이치를 기다렸지만 황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치를 원망하며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한가닥의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어느덧 일 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당태종의 기일이 훨씬 지난 어느 날, 이치는 감업사 니고암에 나타났다. 사원의 비구니들은 모두 옛날에 당태종을 모시던 궁녀들이다. 그녀들은 황제가 사원에 나타나자 모두들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오로지 한 여자만이 미소를 지었다. 무미는 깨끗하게 단장하고 조용히 방에 앉아 뛰는 가슴을 가라 앉혔다. 그녀의 예상대로, 당고종은 향을 사르고 난 뒤에, 은밀하게 무미를 찾았다. 그녀는 당고종의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울먹였다. 폐하께서는 소첩을 잊지 않았군요? 당고종은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무미는 치렁치렁한 머리를 깎아 대머리였 지만 그윽한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당고종은 그녀에게 반드시 궁으로 데려가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당고종이 궁에 돌아오자, 왕황후( 王 皇 后 )는 그에게 조용히 물었다. 폐하께서 감업사에 가셨다고 하시던데, 어느 보살을 얻으려 가셨나요? 이치는 숨길 수 없다고 여기고, 무 재인( 才 人 )의 일을 황후에게 말했다. 황후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는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이신데,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을 어찌 니고암의 비구니로 만들었나요? 이치는 설명하기 곤란하여 입을 다물었다. 당시에 북방에 사는 호인( 胡 人 )들은 아들이 아버지의 가업을 계승하면, 친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여인을 첩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치의 선조들은 대대로 북방의 선비족과 함께 생활을 하였고, 일부는 그들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방면에는 그다지 제약이 없었다. 하지만 천하를 얻고난 뒤에는, 유교적 도덕률로 인하여, 아들이 부친의 첩을 취하면 패륜아( 悖 倫 兒 )로 낙인 찍혔다. 왕황후가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말했다. 이 일이 무어 그리 어렵다고 고민을 하십니까? 선황제께서 이전에 물려주었다고 공표하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누가 감히 반대를 하겠습 니까? 이치는 왕황후에게 극구 고마움을 표시하고 무미에게 머리를 기르도록 하였다. 왕황후가 황제에게 무미를 궁중으로 불러들이게 권한 진정한 이유는, 결코 질투를 해서는 안된다는 봉건적인 도덕률 때문이 아니었지만, 사 실 이도 따져보면 결국은 질투, 바로 투기( 妬 忌 )라고 하는 여자의 질투 때문이었다. 황후인 그녀는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늘 불안하였고, 그녀의 경쟁 상대인 소( 蕭 ) 숙비( 叔 妃 )가 이치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어, 심 각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왕황후는 이치의 사랑을 받고있는 무미를 궁중으로 끌어들여, 황제의 총애를 분산시키고 결국에는 소숙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게 주요한 목적이었다. 그것은 마치 늑대를 끌어들여 여우를 내쫒는 미련한 짓이었으나, 왕 황후 그녀에게는 그런 권력의 이치를 생각할 수 있는 마음 의 여유가 없었다. 무미는 영위 5년(654)에 감업사에서 나와 궁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궁에 들어오자 많은 사람들에게 공손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하였다. 특히 왕황후는 극진히 모셨다. 무미는 왕황후의 시녀를 통해 황후가 좋아하는 일이나 음식을 미리 알아냈고, 좋아하는 패물도 미리 준비하고 있다 가 때때로 바쳐 환심을 이끌어냈다. 무미가 가장 신경을 써서 준비한 일은 소숙비에 관한 정보였다. 그녀는 왕황후 앞에서 소숙비의 못된 성격이나 행동을 들먹이며 황후의 답 답한 심사를 즐겁게 해주었다. 왕황후는 매우 흡족하여 무미야말로 자신의 가장 충실한 오른팔이라고 생각했다. 왕황후는 이후 황제의 앞에 가면 무미가 건네준 정보를 이용하여 소숙비를 힐난하였다. 동시에 무미의 아름다움과 공손한 태도, 순결한 마음씨를 극구 칭찬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황제는 소숙비를 멀리하고 오히려 무미를 더욱 총애하기 시작했다. 입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미는 소의( 昭 儀 )에 올랐 다. 내명부의 서열상 33위에서 6위로 뛰어 올랐다. 명분상으로 본다면 소의라는 직위는 후( 后 )와 비( 妃 )보다 아래였지만, 총애를 가지고 생각 한다면 황후나 숙비보다 훨씬 높다고 볼 수 있었다. 더욱이 무소의( 武 昭 儀 )는 황제에게 2명의 아들을 선사하였으니 그녀의 지위는 날이 갈수 록 튼튼해져 갔다. 당고종 이치가 무미를 총애하는 이유는 단지 왕황후의 적극적인 칭찬에만 있는게 아니었다. 거기에는 이치의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복잡한 중국 최고의 여황제 측천무후~! 178

179 감정이 얽혀져 있었다. 이치는 당태종 이세민의 정부인( 正 夫 人 )인 장손황후( 長 孫 皇 后 )가 낳은 세 아들 중에서 막내였고, 당태종에게는 9째 아들이었다.. 그의 동모 ( 同 母 ) 두 형인 태자 이승건과 위왕( 魏 王 ) 이태( 李 泰 )는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태종 이세민과 장손황후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이치는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하고, 말도 어눌하며, 행동도 기민하지 못해서 부모의 주시와 애정을 받지 못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심리적인 중압감과 불안감을 지닌채 성년을 맞이하였다. 태자 이승건이 당태종과 마찰을 일으켜 자리에서 쫒겨 났을때, 그들의 외삼촌인 장손무기는 비교적 이치가 유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하여, 당 태종 사후에 쉽게 황제를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치를 적극적으로 태자에 추천하였다. 황제가 되고나서도 이치는 어렸을때의 유약하고 겁많은 성격을 전혀 고치지 못하였다. 그는 자신감의 결핍과 무미건조한 생활에 염증을 느 끼고 만사를 귀찮게 여겼다. 무미는 이치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빨리 파악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이치의 행동과 기분에 적즉적으로 맞추어 나갔다. 무미는 따스하고 부드러우며, 누나같고 엄마같은 행동으로 이치를 감싸안았다. 일반적으로 목표가 뚜렷하지 못하고 의욕이 없는 황제는 복 잡다잡한 조정의 업무에 쉽게 싫증을 느끼게 마련이다. 엄청난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는 황제들은 보통 나약하고 부드러운 여자를 학대하여 거기에서 불안하고 억눌린 감정을 보상받는 변태적인 심리와 행동을 가지게 마련이다. 이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일상적인 감정상태에서 벗어나 중압감이 밀려오면 변태적인 행동을 취하여 쾌감을 얻었다. 무미는 일찍 그걸 발 견하고, 이치와 함께 잠자리에 들면 갖가지 이상스런 행동과 기술로 황제를 품안으로 끌어들였다. 이치는 다른 여자에게서 전혀 느끼지 못하 는 쾌락과 만족을 얻으면 얻을수록 무미에게 빠져들었다. 적당한 시기가 되자, 이치의 유약한 마음에는 무미의 강렬한 인상이 뿌리박히기 시작하였다. 무미가 슬퍼하면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면 함 께 기뻐했다. 무소의는 빠른 시간 안에 소숙비를 제압하고, 계속해서 왕황후의 자리를 넘보기 시작하였다. 이치를 꼬득인게 그녀의 첫 번째 선택의 결과 였다면 이제 궁안의 궁녀와 대신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끌어 들이는 2번째 도박을 단행하였다. 당고종의 부인인 왕황후는 권문세족의 출신으로, 신분에 걸맞는 행동과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봉건적 도덕윤리에 따라 남편이 무엇 을 하든 받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자였다. 황제의 주변에 있는 비빈( 妃 嬪 )들을 제대로 거느려야 하고, 그녀들에게 인심을 베풀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인 유씨( 柳 氏 )는 거만하고 고약한 성격을 가졌다. 유씨는 때때로 왕황후를 만나러 궁에 들어오면 다른 사람을 눈 안에 두지 않았다. 무소의는 황후궁에 자주 드나 들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궁인( 宮 人 )들과 안면이 있었다. 궁인들이 황후와 유씨로부터 목욕을 받거나 수모를 당하면, 무소의는 부드러운 말투로 위로하거나 선물을 보내 환심을 샀다. 궁인들은 그런 무소의를 존경하고 따랐다. 무소의는 황후궁의 주변에 정보망을 구축하고 황후의 행동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었다. 무소의는 황제와 잠자리에 들면 우선 황후의 근황을 물어보고 조금씩 황후를 헐뜯기 시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치는 소숙비에 이어 왕황후도 점차 싫어하는 눈치를 보였다. 몇 달이 지나서 무소의는 임신을 하고 공주를 낳았다. 보름달이 빛나던 어느날 왕황후는 무소의가 낳은 딸을 보기 위하여 소의궁에 찾아왔다. 황후가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이번에는 황제가 찾아왔다. 무소의는 매우 기쁜 표정으로 황제의 허리에 매달리며 교태를 부렸다. 한차례 장난이 끝나자 무소의가 소궁주가 잠자고 있는 내실로 황제 를 이끌고 들어갔다. 궁녀가 조용히 이불을 걷어올리자 뜻밖에도 소공주는 조금도 울지않고 움직이지 않았다. 무소의가 급히 안아 올리며 살펴보았다. 아이는 이 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무소의는 두 눈을 부릅뜨고 비통한 눈물을 떨구며 울먹였다. 방금 누가 다녀갔느냐? 궁녀는 안색이 시퍼렇게 변하면서 모기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후 마마께서 다녀 갔습니다. 당고종 이치는 무소의보다 더욱 화를 내며 소리쳤다. 황후가 나의 공주를 죽였구나! 소숙비를 그렇게도 미워하더니, 이제는 무소의마저 시기하여 이런 엄청난 일을 꾸미다니, 도저히 용서할 중국 최고의 여황제 측천무후~! 179

180 수가 없구나. 무소의는 힐끗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폐하, 황후 마마께서는 잠시 눈이 어두워 이런 일을 저질렀는가 봅니다. 용서 하십시오. 제가 다시 폐하께 공주를 낳아 드리겠습니다. 무소의는 목적을 위해서는 혈육도 독살한다는 잔인한 모정( 母 情 )을 그대로 실행하였다. 그녀는 황후를 모함하고 자신의 지위를 다지기 위하 여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식을 죽였다. 그리고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알림이었다. 공주의 죽음이 있고나서 며칠 후, 황후궁의 어느 궁녀가 무소의를 통해 황후의 비리를 황제에게 밀고했다. 황후 마마와 모친 유씨가 궁중에서 사사로이 무당을 들여와 황제 폐하와 무소의 마마를 저주하는 축주( 祝 呪 )를 하였습니다. 이치는 더이상의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지 않고 유씨의 입궁을 금지하고, 황후에게 근신( 謹 身 )을 명령하였다. 황제의 마음 속에는 황후를 폐 출시킬 의도가 점점 깊어갔다. 그러나 황후를 폐출시키는 일은 그리 쉽게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당고종이 즉위한 초년에는 대부분의 권력이 장손무기와 저수량(저 遂 良 )과 같은 고명대신( 顧 命 大 臣 ;선황제가 특별히 후임황제의 보필을 위임한 신하)의 손안에 있었다. 그들은 당태종의 부탁을 받고 황제를 보필하는 신하들로, 예의 바르고 품행과 덕망이 높은 왕황후가 그런 축주를 했다고 믿지 않았다. 더욱이 장손무기는 무소의가 황제의 침상에서 갖은 교태로 홀려서, 그녀의 아들을 태자로 옹립하고 자신이 황후가 되려는 야욕을 눈치채고 강력하게 반대를 표명하였다. 만일 무소의가 황후가 된다면, 곧바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하지만 장손무기와 저수량의 권력을 시기하는 많은 대신들은 당고종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찬성하면서, 암암리에 장손무기 일당의 권력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예를 들어서 개국공신인 이적( 李 勣 )은 당고종의 물음에 대하여 아주 쉽게 대답하였다. 폐하, 그것은 황실의 문제에 속하므로 남에게 굳이 의견을 들으 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애써 대답을 피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장손무기가 고명대신이라는 이름을 빌어 황후나 태자의 문제에 사사건건 간여하는 문제를 꼬집 은 것이다. 예부상서( 禮 部 尙 書 ) 허경종( 許 敬 宗 )은 더 나아가 노골적으로 조회와 같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의견을 내보였다. 시골의 농부는 몇 되의 양식을 거둘 수 있느냐에 따라서 마누라도 몇이 될 수 있느냐가 결정됩니다. 하물며 천하의 주인이신 폐하께서 황후를 어느 분으로 세우는가 하는 문제는 어느 누구도 간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가 감히 폐하의 결정에 망령되이 반대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치는 많은 대신들의 찬성에 고무되어 끝내는 영휘( 永 徽 ) 6년(655년)에 무소의를 황후로 내세웠다. 이듬해 황제는 다시 정비( 鄭 妃 )의 소생 인 태자 이충( 李 忠 )을 폐위시키고, 무황후의 소생인 이홍( 李 弘 )을 새로이 태자로 삼았다. 무소의가 황후로 책봉을 받았을때, 그녀는 나이 설흔 두살이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몸을 가꾸어서 그런지 대략 예닐곱은 젊어 보였다. 그녀 는 항상 신선하고 아름답고 교태스러운 스무살의 처녀와 같았다. 왕황후와 소숙비는 무소의가 황후로 책봉되는 순간에 서인( 庶 人 )으로 폐출하고 냉궁( 冷 宮 )에 유폐시되었다. 이치는 매우 우유부단하고 감정에 약한 황제였다. 일개월도 지나지 않은 어느날, 황제는 왕황후와 소숙비가 보고 싶어졌다. 이치는 태감의 뒤를 따라 궁에서 가장 한적한 구석에 위치한 냉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들이 머물고 있는 냉궁은 조그마한 집 한채가 전부였다. 대문 과 창문은 굵은 통나무로 가로질러 굳게 잠갔고, 대문 옆에 식사를 들일 수 있는 조그마한 구멍이 외부와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이치는 매우 비통한 심정으로 구멍에다 소리쳤다. 왕 황후, 소 숙비, 그대들은 어디에 있소? 왕황후와 소숙비는 황제의 목소리를 듣고 너무나 비통한 나머지 통곡했다. 왕황후가 구멍에 손을 내밀고 한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소첩은 이미 죄를 지어 노비가 되었는데, 어찌 그렇게 황송한 칭호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치는 더욱 가슴이 찢어질듯 아팠다. 소숙비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지난날의 정을 잊지 않으셨다면, 우리 두사람에게 햇빛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이 집을 회심원( 回 心 院 ) 이라 불 러 주십시오. 이치는 주먹을 불끈쥐고 왕황후와 소숙비에게 맹세를 하였다. 과인이 곧바로 조치를 내리겠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왕씨와 소씨는 처음에 원수처럼 미워했으나 처지가 같아지자 마치 친자매처럼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황제가 혼쾌히 허락을 하고 맹세까지 중국 최고의 여황제 측천무후~! 180

181 하자, 어둠 속에서 광명을 찾을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튿날 아침, 그녀들은 대문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둘은 서로를 껴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태감이 그녀들에게 황제의 성지를 읽어 내려갔다. 왕씨와 소씨는 그만 놀라 혼절하고 말았다. 두 사람에게 내려진 명령은 곤장 백대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소숙비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이 여우같은 계집애, 너무나도 악랄하구나. 네가 죽어 쥐가 되면 나는 반드시 고양이로 태어나 찢어 죽이고 말겠다. 무황후는 후에 태감으로부터 그 소리를 전해듣고 궁중에서 고양이를 키우지 못하게 명령을 내렸다. 가녀린 왕씨와 소씨는 일백대의 곤장을 맞자 온 몸의 뼈마디가 부서지고, 피와 살이 한데엉켜 몰골이 흉하게 변하였다. 하지만 벌은 이것으 로 끝난게 아니었다. 무황후는 다음날 다시 명령을 내려, 왕씨와 소씨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몸만 커다란 항아리에 담고, 머리만 밖에 내놓고 숨을 쉬게 하는 가 혹한 조치를 내렸다. 체형( 刑 )이라고 부르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무황후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직접 냉궁으로 찾아가 독하게 소리쳤다. 네년들의 몸뚱아리를 장에 담가 죽이고 말겠다. 왕씨와 소씨는 열흘도 지나지 않아 처참하게 생을 마쳤다. 무황후는 더나아가 죽은 그녀들의 목을 잘라 소금에 절여 보관하게 하였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무황후는 상대를 학대하면서 느끼는 쾌락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더욱 잔인한 수법을 가하여 극치의 자극을 만들어 낼 줄도 알았다. 무황후가 왕씨와 소씨를 잔혹하게 죽인 소식은 곧바로 황제의 귀에도 전해졌다. 이치는 매우 불쾌한 심정으로 황후궁에도 들르지 않고 침 전에 혼자 머물려 울분을 달랬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는 무황후의 교태가 그리워져 결국은 황후궁으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황제가 처음 왕황후와 소숙비가 머물고 있는 냉궁에 갔을때, 무황후가 심어놓은 그녀의 정보원은 이를 재빨리 황후에게 통보하였다. 그녀는 황제가 침전으로 들어오자 온순한 표정과 애교를 거두어 들이고 냉랭한 어투로, 왕황후와 조숙비를 사면한다는 조서( 詔 書 )를 철회하라고 윽 박질렀다. 자심만만하게 맹세까지 하였던 황제는 무황후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두 사람의 상대를 제거한 무황후는 이후 더욱 교태스러운 몸짓으로 황제를 보살폈다. 우울해던 황제도 만사를 잊고 그녀의 교태를 탐닉하는 데 정신이 팔렸다. 봉건시대에 여자가 황후가 되면 가장 높은 지위에까지 오른 셈이다. 그렇지만 무황후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과거, 당태종은 자주 깊은 밤에 대신들이 올린 건의서나 정책서를 읽고 국정을 처리했으며, 어린 무미( 武 媚 )는 황제의 곁에서 시중을 들었 다. 그녀는 당태종이 피곤하면 어깨를 주므르면서 가끔씩 조정의 대사( 大 事 )를 처리하는 절차나, 상벌은 어떻게 내려야 하며, 관직의 제수는 어 떤 근거로 해야 하는지등, 갖가지 정사( 政 事 )를 묻곤 하였다. 당태종은 총명한 그녀가 귀여워 꺼리낌없이 얘기를 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여자들 앞에서 남자의 권위를 자랑하고 싶은 무의식적인 감정이 발동한 탓도 있었다. 궁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않아 무미는 당나라의 법령이나 정치관습에 대하여 하나씩 지식을 습득해 나갔다. 당고종의 소의( 昭 儀 )가 되고난 후에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황제를 모시면서 갖가지 정사( 政 事 )를 대신 처리했다. 당고종은 당태종과 달리 정치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능력마저도 현저하게 떨어졌다. 무소의도 예전의 어린 무미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정사를 처리하는데 있어, 무소의는 황제보다 민첩하였고 고명하였다. 하지만 대신들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견해를 결코 밖으로 드러내지 않 고 모두 당고종의 의사와 행동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무소의가 황후가 되고 나서는, 이미 두사람 사이에는 조정의 업무를 처리하는데, 상당한 정치적 묵계가 이루어졌다. 업무는 대부분 무황후 가 처리하고, 발표는 당고종이 하는 그런 관계였다. 이렇게 해서 당나라의 권력은 점차 무황후에게 기울기 시작하였다. 당금 조정에서 무황후를 세우는데 가장 공로가 컸던 사람은 이의부( 李 義 府 )와 허경종( 許 敬 宗 )이었다. 초기에 그들은 황실 내부의 분위기나 황제의 마음을 읽고, 무소의를 적극적으로 천거하였다. 무소의도 그들과 연락하여, 황제를 통해 그들 에게 상을 내리고, 높은 관직을 제수하도록 종용하였다. 얼마 후, 가슴속에 여우를 키우고 있다는 간신 이의부는 관직이 계속 상승하여 중서시랑( 中 書 侍 郞 )에 올라 조정의 중신( 重 臣 )이 되었고, 허 경종은 위위경( 衛 尉 卿 )에서 예부상서에까지 올랐다. 조정의 대사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여러 회의를 주관하게 된 두 사람은 무소의를 황후로 내세우는데 반대하는 의견을 점차 잠재우고, 결국은 무소의를 황후로 만드는데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중국 최고의 여황제 측천무후~! 181

182 무황후는 황후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에게 재상의 직위를 내렸다. 그들은 모두 이것이 황후의 역량과 세력이라고 굳게 믿었다. 처음부터 무황후를 황후로 내세우는데 반대한 사람은 고명대신인 장손무기와 저수량이었다. 이중에서 조정의 세력이 미미했던 저수량은 무 황후가 들어서고 얼마 후, 중앙의 관직에서 쫒겨나 지방으로 좌천이 되었고, 후에는 이의부와 허경종의 모함을 받아 외지( 外 地 )에서 죽고 말 았다. 장손무기의 말로( 末 路 )도 이와 비슷했다. 혈연적으로 본다면 장손무기는 당태종의 정부인인 장손황후의 오라버니이고, 당고종의 외삼촌이었 다. 공로면에서 본다면, 그는 당태종이 일으킨 태자인 형과 아우를 죽이고 아버지를 황제의 자리에서 내쫒은 현무문 사건의 주요 계획자였다. 더욱이 당고종을 황제로 만드는데 가장 공로가 큰 원훈대신이라고 볼 수 있었다. 더욱이 그는 당태종이 늙어 정사를 제대로 볼 수 없었을때에 대부분의 권력을 잡고 있어서, 조정내에 많은 측근세력이 있었다. 무황후는 장손무기가 건재하고 있는한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따라서 무황후는 허경종을 통해 언제든지 장손무기의 죄를 만들어 모함할 준비를 마쳤다. 허경종은 본래 당태종 이세민이 천하를 도모하고자 진왕부( 秦 王 府 )로 불러들인 18학사 의 일원으로 재주가 뛰어나고 정치적인 감각을 미리부터 확득한 사람이었다. 현경( 顯 慶 ) 4년(659년), 허경종은 장손무기에게 모반죄를 되집어 씌우는 대담한 계획을 꾸며 무황후에게 보고하였다. 무황후는 이번 기회에 장손무기를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얼마후 장손무기는 영문도 모른채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는 끝내 모반 을 꾸몄다고 거짓을 진술하였다. 장손무기는 원훈대신임을 감안하여 처형은 면하고 모든 관직을 박탈당한채 저택에 감금되었다가, 얼마후 핍박을 받아 자살하였다. 무황후는 드디어 저수량과 장손무기를 제거하여, 당고종의 주위에 포진되어 있는 주요한 상대를 제거하는 원대한 계획을 성공시켰다. 당고종은 현경 5년(660년) 이후에 척추신경의 마비와 두통으로 거의 자리에 누워 조정의 사무를 처리하지 못하고, 무황후가 대신 관장하였 다. 무황후는 이미 풍부한 정치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심복대신의 도움을 받아 조정의 사무를 원할하게 처리하였고, 일부는 그들에게 분담시켰 다. 설사 당고종의 병이 쾌차하여 정사를 본다해도, 업무를 분산시켜 황제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또한 대부분의 업무는 황후의 도움을 받아 야 처리하게끔 만들었다. 당고종은 여러차례 병이 들었다 나았다를 반복하였다. 당연히 업무의 연속성이 끊겨져 황제는 원할하게 처리할 수도 없었고 정사( 政 事 )를 장악할 수도 없었다. 이제 대부분의 사무는 당고종의 명의를 빌어 무황후가 결정하고 처리했다. 당고종은 가끔씩 의견을 내었지만 번번히 무황후에게 거절을 당 하고도 어쩌지를 못하였다. 이때 비로소 당고종은 마누라가 매우 강인하고 결단력 있는 여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몇 년이 흘러가자 당고종은 허수아비가 되어갔다. 그는 점차 무력한 자신을 발견하고, 마누라의 손에서 권력을 찾아오는 방법을 강 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비록 유약한 황제였지만, 황제의 권리중에서 황후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고종은 왕년에 무소의가 왕황후를 모함시 킨 사례를 그대로 본받아, 무황후를 내쫒을 준비를 하였다. 인덕( 麟 德 ) 원년(664년) 말, 당고종은 서대시랑( 西 臺 侍 郞 ) 상관의( 上 官 儀 )를 불러들여 그에게 대책을 구하였다. 황후가 조정의 정사에 간여하여, 조상의 유훈( 遺 訓 )을 거역한지 이미 오래 되었소. 근자에 환관 왕복승( 王 伏 勝 )이 고발하기를, 왕황후가 사사로이 도사( 道 士 ) 곽행진( 郭 行 眞 )을 궁으로 끌어들여 굿을 벌이고 축주( 祝 呪 )를 하였다고 하는데, 어떻제 조치하면 좋겠소? 당시의 당율( 唐 律 )에 따르면 도사는 궁에 들어올 수가 없으며, 만일 황후가 굿을 벌이거나 축주( 祝 呪 )를 하다 발각되면 폐출의 죄에 해당되 었다. 궁중의 법률에 정통한 상관의는 황제의 심사를 헤아리고, 죽음을 각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황후께서 만일 축주를 행하였고, 조정의 정사에 간여했다면 당연히 조서를 내려 황후를 폐출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당고종은 그자리에 상관의에게 황후의 폐출을 명한 조서를 기초하게 지시했다. 무황후는 매우 빠른 정보망을 갖고 있었다. 조서의 기초가 끝나고 아직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무황후는 궁으로 달려가 탁자에 놓여있는 조 서를 읽으면서 소리쳤다. 폐하께서 저를 죽이시려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이 자리에서 죽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무엇때문에 이처럼 비겁하게 저 를 모함하여 죽이려고 하십니까? 중국 최고의 여황제 측천무후~! 182

183 무황후는 아직 옥새( 玉 璽 )가 찍히지 않은 조서를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버리면서 통곡했다. 폐하의 보살핌을 받아 십여년 동안 한마음으로 모셨건만, 폐하께서는 그 뜻을 저버리시니, 이곳에서 저를 죽일때까지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무황후는 이치의 다리를 부여잡으며 더욱 세차게 울부짖었다. 당고종은 허약한 성격을 고치지 못하고 무황후가 궁으로 뛰어 들어오자 시위들에게 막으라고 소리도 못치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있고 말았 다. 더욱이 그녀가 울고불며 다리에 매달리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판단을 세우지 못했다. 이때 무황후는 나이가 마흔이었지만 갓 설흔을 넘긴 여자처럼 몸매가 수려하고 피부가 고왔다. 백설처럼 고운 그녀의 피부가 눈에 들어오 자 당고종은 춘심( 春 心 )이 발동하여 그녀를 가슴에 안았다. 당고종의 머리속에는 선황제 당태종이 병으로 누웠을때, 측간에서 처음으로 그녀와 포옹하던 그때의 광경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마음이 약해져 황후에게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고 없었던 일로 생각하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무황후는 여전히 울먹이며 당고종을 원망하였다. 당장에 곤란을 피하고 싶었던 당고종의 눈에 상관의가 보였다. 황후, 사실 나는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상관의가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알려 주어서... 당고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황후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 상관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런 못된 간적( 奸 賊 ), 폐하가 불명( 不 明 )하면 흐트러짐이 없도록 보필해야 하는 몸으로서, 오히려 거짓을 꾸미고 황후를 모함하다니... 그 죄가 죽어 마땅하도다. 무황후는 상관의를 심하게 질책하고, 곧이어 황제에게도 입을 열었다. 폐하, 소첩이 이를 알고도 묵인한다면, 위로는 조종( 祖 宗 )의 혼령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아래로는 백성의 질책이 황제의 체통을 손상 시킬까 두렵습니다. 소첩은 이한 몸, 폐하를 위해 죽는 그날까지 황실을 지키는데 다하겠습니다.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당고종의 두 손을 자신의 가슴에 모았다. 당고종은 갑자기 이렇게 충성스러운 황후를 폐출하려고 했던 자신 의 행동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무황후는 당고종이 완전히 자신의 술수에 말려 들었다고 판단하자, 침전으로 황제를 끌고 갔다. 두사람의 사랑이 끝나고, 극도의 쾌락에 젖 은 당고종은 천하를 그녀에게 넘겨 주어도 하나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무황후는 사태를 수습하자 곧바로 보복에 들어갔다. 무고를 올린 왕복생은 사형을 받아 처형되었고, 무고한 상관의는 조서를 기초하였다는 죄명으로 온 가족이 몰살을 당하였다.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왕복생은 본래 태자였던 이충( 李 忠 )의 동궁( 東 宮 )에 속한 환관이었다. 또한 공교롭게도 상관의마저 동궁에 속하였다. 지난날의 태자였던 이 충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이 내려졌다. 상관의나 왕복생의 측근, 또는 가깝게 지낸 조정의 대신들은 대부분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무왕 후는 이때부터 더욱 확고하게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고종도 무황후를 제거할 생각을 감히 꾸미지 못하고 그녀에게 수렴청정( 垂 簾 聽 政 )을 지시하였다. 그녀는 역사상 처음으로 황후의 신분으로 황제가 살아 있는데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 최초의 여자가 되는 기록을 남겼다. 당고종은 마누라를 무서워 했고, 정사를 처리하는 능력에서도 뒤졌으며, 판단과 감각에서도 미치지 못하여, 조회에 나가면 항상 용상에 앉 아 입도 벌리지 않았다. 결정과 지시는 뒤에 앉아있는 무황후가 처리했다. 어느덧 관원의 승진과 좌천은 물론이고 생사여탈권까지 그녀가 장악하였다. 조회에 나서는 대신들은 황후의 위엄에 눌려, 그녀를 황제와 더 불어 이성( 二 聖 ) 이라고 호칭했다. 당고종은 아주 바보황제가 아니었다. 철수무정이라는 이름의 가남풍을 부인으로 두었던 진혜제( 晉 惠 帝 )처럼 백치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무 황후의 위세에 눌려 점차 꼭두각시가 되어가자, 그녀에게 반발심이 다시 생겨났다. 당고종은 지난번에 실패하였던 폐출을 다시 생각하였다. 하지만 섣불리 폐출을 실행하지 않고 기회를 노리기 시작하였다. 당고종의 걱정은 자신의 사후에 벌어질 권력다툼이었다. 무황후의 성격과 욕심에 비춘다면 틀림없이 당나라는 무씨( 武 氏 )의 강산으로 변할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당고종은 명부( 冥 府 )에 나아가 무슨 명목으로 조상과 선황제 당태종의 얼굴을 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허수아비 황제의 국면을 뒤집을 기회를 기다렸다. 그는 권력의 일부를 태자 이홍에게 이양하는 문제를 떠올렸다. 무황후도 자신의 친 아들인 이홍에게 권력이 넘겨진다면 반대는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무황후가 권력을 장악해도 이씨의 당나라는 유지될 것이라는 소박한 그의 판단이었다. 건봉( 乾 封 ) 2년(667년) 가을, 당고종은 질병을 핑계로 삼아 태자를 감국( 監 國 )으로 임명했다. 나라의 정사를 감시하는 감국( 監 國 )의 지위는 중국 최고의 여황제 측천무후~! 183

184 사실 이름 뿐이었고, 진실한 의도는 태자의 지위를 강화하려는 조치였다. 당고종 이치와 무황후의 치열한 권력투쟁의 서막이 올랐다. 이때 무황후의 선택은 과감하고 무서운 결단이었다. 혈육을 희생시켜 권력을 유 지하는 방법이었다. 함형( 咸 亨 ) 4년(673년), 당고종은 학질( 虐 疾 )에 걸리자 이를 핑계삼아, 곧바로 대신들에게 조서를 내려, 주청이 있으면 모두 태자에게 올리 도록 하였다. 태자는 이때부터 연복전( 延 福 殿 )에 나아가 조정의 사무를 상당부분 감당하기 시작하였다. 무황후는 태자가 아직 조정의 정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주요한 권력을 장악하고 중신( 重 臣 )들을 자신의 수중에 포섭시켰다. 하지만 당고종은 점차로 무황후의 세력과 권력을 봉쇄하였다. 또한 총명한 태자 이홍도 날이갈수록 업무를 장악하고 사람들의 복종을 이끌 어냈다. 어느덧 권력게임의 무대에서 무황후는 유약한 당고종에게 패할 기세였다. 상원( 上 元 ) 2년(675년), 총명한 부인의 압박과 모멸감 속에서 점차 명석하고 판단력이 예리하게 변해간 당고종 이치는, 권력각축의 승리를 결정짓는 중대한 승부수를 던졌다. 이 해 봄, 그는 문무백관을 소집하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과인은 몸이 불편하고 판단이 흐려서 황후에게 섭정을 하도록 하려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떻소? 이치의 의도는 조정의 대신들과 수많은 재야( 在 野 ) 문사( 文 士 )들의 공개적인 토론을 이끌어 내려는데 있었다. 황제가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황후의 섭정이라는 문제가 돌출되자, 유교적 명분과 전통적인 관념을 충실히 따르는 수많은 대신들이 들고 일어나 격렬하게 반대했다. 당고종 이치의 의도는 맞아 떨어졌다. 그는 많은 대신들의 공개적인 반대를 이끌어어 낸 다음에, 틈이 나면 자신은 태상황으로 물러나고 황 제의 자리를 태자에게 물려주려는 계획을 수립했다. 당고종의 승부수는 시기가 정확했다. 예상대로 신하들이 황후의 섭정을 반대했다. 당고종은 연복전에서 조정의 업무경험을 쌓았고, 나이도 이미 성인이 넘은 태자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면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 해 4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건강하고 활달했던 태자가 갑자기 궁중에서 쓰러져 원인도 모른채 생을 마감했다. 무황후는 당고종의 복안을 미리 판단하고, 자신의 친아들인 태자 이홍을 살해한 것이다. 무황후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당고종은, 태자 가 죽은 다음날 그에게 효경황제( 孝 敬 皇 帝 ) 라는 시호를 내렸다. 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하고 죽은 다음에, 살아있는 황제에게 존호( 尊 號 )를 받은 예는 이제껏 한번도 없었다. 이는 당고종의 비 통한 심정을 어느정도 헤아려 볼 수 있는 참고자료이다. 당고종 이치는 곧바로 이현( 李 賢 )을 태자로 삼았다. 이현도 형인 이홍과 마찬가지로 무황후의 소생으로 학문에 밝고 재주가 뛰어나면 널리 품덕이 알려져 있었다. 그는 동궁에 머물면서 당고종의 보살핌 속에서 충실하게 황제의 수업을 받았다. 무황후는 자신의 야망에 방해가 되는 이현도 처치할 기회를 노렸다. 이현이 태자가 된지 다섯해가 지난 어느날 무황후는 그를 모반죄로 몰 아 체포하였다. 당고종은 끝까지 태자의 모반죄를 부정하였지만 무황후의 핍박에 못이겨 태자를 폐위시킨다는 조서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 다. 태자 이현은 폐출이 되고 얼마후 어머니 무황후의 강압에 의해 자살하고 말았다. 당고종 이치는 두 아들이 죽자 드디어 패배를 시인하였다. 그는 울화병으로 쓰러지자 더이상 살고 싶은 욕심이 없었다. 이듬해 홍도( 弘 道 ) 원년(683년)에 당고종이 생을 마감하였다. 이 해부터 무황후는 태후( 太 后 )의 신분으로 각기 1년밖에 황제노릇을 하지 못한 당중종( 唐 中 宗 ; , ) 이현( 李 顯 )과 당예종( 唐 睿 宗 ; , ) 이단( 李 旦 )을 대신하여 섭정을 시작하였고, 684년에는 년호를 광택( 光 宅 )으로 바꾸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바야흐 로 중국의 역사상 처음으로 여황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이어서 690년에는 국호를 당( 唐 )에서 주( 周 )로 바꾸고 년호는 천수( 天 授 ) 라 하였다. 그녀는 무려 여든 두살이 되는 705년 그날까지 20년간 천하를 통치하였다. 황제가 되고 국호까지 바꾼 그녀의 결단력 있는 승부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자가 황제가 되는 기록을 남겼다. 숱한 황태후들이 수렴청 정을 하거나 권력을 휘둘렀어도 측천무후처럼 황제가 되려는 꿈을 갖지 못했으며 설사 꿈을 지녔다해도 끝내 황제가 된 여자는 이전에도 없 었고 그후에도 없었다. 705년에 병이 들자 대신 장간지( 張 柬 之 ; )가 정변을 일으켜 예종을 복위시키자 황위에서 물러난 그녀는 임종을 맞았을때 주( 周 )나라 를 개창한 여황제의 신분보다는 이씨( 李 氏 )의 황후라는 신분으로 매장을 해달라고 유언을 내렸는데, 반대파가 거의 없는 조정에서는 그녀의 뜻에 따라 그대로 시행하였다. 그녀의 영향력이 사후에도 얼마나 컸던지 후에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당중종( 唐 中 宗 ; , 년) 도 그녀가 생전에 썼던 신룡( 神 龍 )이라는 년호를 3년간( )이나 사용하였다. 중국 최고의 여황제 측천무후~! 184

185 이로볼때 측천무후는 전무후무한 음모가이자, 정치적인 감각과 능력이 매우 뛰어난 걸출한 여성정치가였다. 당고종이 무황후를 폐위시키려 다 실패하고, 실질적으로 정사를 무황후에게 맡긴 인덕 원년(664년)부터 계산하면 그녀는 무려 40년을 국가권력의 최고통치자로 있었다. 측천무후는 40여년간의 정치생활중 비교적 많은 정치개혁을 이루었고, 적지않은 유능한 대신을 중용하여 당대( 唐 代 ) 사회의 경제, 문화를 세계최고의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또한 신라의 요청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여 선황제인 당태종도 못이룬 고구려의 멸망을 끌어내어 이 지역의 패자가 되는데 가장 많은 공을 세웠다. 측천무후는 뛰어난 정치적 재능으로 고도의 정보조작을 단행하여 정적( 政 敵 )을 제거하고, 또한 특무조직을 활용하여 백성과 반대파를 감시 하였다. 그녀는 당황실과 자신을 반대하는 정적에 대해서는 가혹한 수단으로 제거하였다. 그녀는 사람을 죽이는데 있어서는 눈하나 깜빡이지 않고 무차별 처형했다. 측천무후가 지배하던 시기에 이루어진 정치집단 내부의 암투와 살육, 모함과 폭력은 당나라 이후의 역사에서도 거의 볼 수 없는 참혹한 경 지였다. 일반적으로 현대사회에서도 정치적 숙청은 항상 존재했다. 이런 관점에서 측천무후의 행위를 정당화 한다면 무엇일까? 흉악하고 잔인한 행동은 그녀의 천성이 아니라, 전제정치가 그녀와 같은 권력자에게 부여한 수단이자 품격이다. 권력투쟁은 일종의 위험한 게임으로, 경기에 임하는 순간부터 당사자는 항상 긴장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만일 조금의 방심이라도 보인다면 그것은 곧바로 파멸이자 죽음 뿐이다. 더욱이 봉건시대의 여자에게 있어서는 더욱 절실한 문제이다. 일반적인 권력각축의 법칙을 과감하게 파괴하고, 신속하 고 정확하게 상대의 허점을 파고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패이다. 봉건시대에서 여자는 남자에 비하여 성공률이 희박하고, 위험이 더욱 크다. 때문에 그녀는 상대가 예상하지 못하는 특출한 비상수단으로 자 신을 보호하고 상대를 제거하는데 심혈을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여기에는 오로지 황제만을 조종하지 않으면 안되는 여자의 처지를 고 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무력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봉기를 할 수 있다. 당고조 이연이 무력으로 수나라를 무너뜨리고, 당태종 이세민이 또한 무력으로 형제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였듯이, 남자의 세계에서는 다양한 방법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궁중에 갇혀있는 여자는 오로 지 황제를 뒤에서 조종하며, 승리하는 그날까지 자신을 반대하는 대신과 궁녀, 환관, 황족의 도전을 이겨야 한다. 이런 면이 그녀를 악독하고 잔인한 성격의 여자로 만들었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혈육의 정까지 끊게하는 행동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옛말에 호랑이와 같은 짐승도 독( 毒 )은 제자식에게 먹이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그녀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 되었다. 그녀는 황후시절에 두 아들을 죽였고, 섭정을 하는 기간에는 손자를 죽였다. 이것으로 볼 때 그녀는 사람을 죽이는 오락을 즐겼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혈육을 죽 일때 아름다운 그녀의 가슴에는 슬픔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누구도 대답은 할 수가 없다. 중국 최고의 여황제 측천무후~! 185

186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49 제 1장 황제의 사치향락 권력이 강화되면 될 수록 그들의 마음 한켠에느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메울 수 없는 진공상태가 점점 확대되며 또아리를 틀게 된다. 황제 들은 블랙홀이라고나 불러야 할 심적 공허감을 어떻게든 메꾸어 보려고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으며 현란한 사치에 빠져들었다. 1. 주지육림 총명한 악마 주왕 중국 역사상 절대권력을 손 안에 거머쥔 천자가 끝없는 향락에 빠진 예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은왕조(지원전 약 1700년 - 기원전 약 1100년)의 주왕은 그 최초의 인물이다. 은나라는 현재까지 그 실재가 확인된 중국의 가장 오래된 왕조로서, 거북의 등껍질이나 짐승의 뼈를 불로 지지면 생겨나는 균열의 형태나 수를 보아 길흉을 점치고 중대사를 결정하는 주술적인 제정일치 국가였다. 그러나 세계 최고수준으로 일컬어지는 세공된 청동기에서도 엿 볼 수 있듯이 문화적인 수준은 대단히 높았다. 주왕은 은나라에 앞선 전설의 왕조인 하나라 최후의 천자 걸과 함께 걸주라 불리는 폭군의 대명사로, 전설에 묻혀있는 고대왕조 은나라 제 30대 천자이다. 주왕은 결코 무능한 천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타고난 천성이 총명하고 언변이 뛰어나며 행정수완도 보통을 뛰어넘는 인물이었다. 탁 월한 지적 능력에다 맨손으로 맹수와 결투를 벌일 정도로 힘도 셌다고 하니 그야말로 호랑이에 날개 달린 격이었다. 다만 주왕은 이 축복받은 자질을 오로지 나쁜 방향으로만 발휘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타고난 총명함을 무기로 충직한 신하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으며, 뛰어난 말솜씨로 자신의 잘못을 덮어 보리고 흰 것을 검은 것이라 우겨댔다. 무엇이든지 마음 먹은 대로 할 수 있게 된 주왕은 승리의 쾌감에 취해 이 세상에 오직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서 완전히 기고만장해져 버린다. 이렇듯 거칠 것 없던 즉위 9년째, 주왕은 징벌한 유소씨로부터 절세미녀를 상납받았다. 바로 달기이다. 타고난 호색한인 주왕은 한눈에 달기의 미모에 반해 맹목적인 사랑에 불탔으며, 그때부터는 오로지 달기를 껴안고서 한껏 사치를 부리며 향락의 나날을 보낼 뿐이었다. 주왕은 어떠한 궤변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사치를 부렸다. 그는 우선 사슴각이라는 어전에다 엄청난 금은보화를 쌓아놓고, 거교라는 창 고에 대량의 곡물을 저장해 놓았으며, 진기한 것이면 무엇이든 궁전 가득히 모아들였다. 게다가 별궁에는 사구(모래언덕)라는 정원을 만들 어 놓았고, 건물을 확장하기도 하는 등 자신을 위한 위락단지를 조성하여 각 지방에서 모아들인 들짐승이나 새를 놓아 기르게 하였다. 물론 미녀도 전국에서 불러들였다. 여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경비는 권력을 휘드르며 명분없는 세금을 거둬들여 조달하였다. 주지육림의 늪 권력과 온갖 부를 거머쥔 주왕은 재산을 탕진하기 시작했다. 위락단지인 사구에 연못을 만들어 술을 가득 채워 놓는가 하면 나뭇가지에다 말린 고기(당시에는 최고의 요리였다)를 주렁주렁 매달아 육림을 조성하였다. 그리고는 벌거벗은 남녀가 술래잡기를 하도록 하고, 자신은 달기를 옆에 끼고 그 광경을 보 면서 밤새도록 연회를 즐겼던 것이다.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주지육림이다. 결국 주왕은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한 엄청난 재물로 장난감 상자를 뒤엎어 놓는 듯한 모래언덕 별궁 을 조성하고, 밤새도록 마소처럼 먹고 마시는 데 다 써버린다. 이런 유형의 사치는 오로지 먹고 마시는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186

187 데 마구잡이로 부를 탕진한 것이기 때문에 저급한 사치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러한 주왕의 사치향락 행태에 대해 어느 역사가는 주왕은 이른바 주지육림에서 단지 술을 마셨던 것으로, 당시의 사치는 무엇이든 분량을 중시했던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게다가 사치라는 문자를 볼 때 원래 사는 큰 사람이라고 쓰고, 치는 많은 사람으로써 모두 분량적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고 서술하 고 있다. 정상적인 테두리를 벗어나는 욕망을 탕진하는 행위는 자칫하면 잔혹한 사디즘으로 이어진다. 주왕의 경우도 그런 잔학성을 나타내는 에피소드가 수없이 많다. 재물을 탕진하는 방식은 물량적 범주를 벗어 나지 못했던 반면, 잔혹함을 발휘하는 데는 매우 다양한 방식을 구사했다. 예를 들면 무도함이 극에 달한 주왕에게 반기를 든 제후는 포락형으로 처벌했다. 이것은 기름을 바른 구리 기둥위에 죄인을 눕히고 기둥 밑에서 불을 달구는 형벌이다. 물론 죄인은 미끄러지면서 불 속으로 떨어져 곧 타 죽게 되는 것이다. 심지 굳은 중신들 대부분이 주왕을 떠나 국외로 탈출한 후에도, 오직 혼자 남아 주왕에게 충언을 다 한 숙부 비간도 어김없이 주왕의 잔혹한 취미의 희생양이 되었다. 비간의 간언에 화가 난 주왕은 성인 의 가슴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나 있다고 하던데 정말 그러한가 하면서, 산 채로 비간의 가슴을 절개하 여 심장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잔학무도함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사치와 음란, 잔 혹함을 끝없이 즐기던 주왕은 주나라의 무왕이 이끄는 제후동맹군의 공격을 받아 사슴각의 보물전에 쫓 겨 올라가 호화찬란한 보석이 박힌 옷을 몸에 휘감고, 불 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 고대 은왕조는 이렇게 멸망했던 것이다. 주나라 무왕은 주왕이 총애했던 달기 역시 모든 악의 근원으로 단죄하여 처형했다고 한다. 황제들의 물량주의 사치 중국의 역사는 은나라 주왕을 시작으로 하여 사치와 음란, 잔혹한 행위로 광분하다가 자멸하는 것이 왕조 멸망의 전형이 되었다. 망국의 천자는 아니지만 진시황제(기원전 259년 - 기원전 210년)나 한무제(기원전 156년 - 기원전 87 년)등 고대의 황제에서부터, 수양제(569년 - 618년)나 당의 현종(685년 - 762년) 등 중세의 황제를 거쳐, 명나라 만력제(1563년 년)나 청나라 건륭제(1711년 년) 같은 근세의 황제에 이르기까지, 사 치삼매경으로 이름을 날린 최고 권력자들이 부린 사치의 양상은 주왕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요컨대 어떤 경우든지 보물과 식량, 미녀 등 이것저것 모두 한손에 거머쥔 다음에 거대한 건조물이나 정원을 조성하기도 하고 호화판 여행을 떠나는 등, 말하자면 양적 개념에 입각한 대대적 물량소비작전 을 벌였던 것이다. 최상의 권력이란 아마도 그것을 수중에 넣을 자의 신경을 엄청난 기세로 마비시키는 속성이 있는 듯 하다. 권력이 강화되면 될 수록 그들의 마음 한켠에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메울 수 없는 진공상태가 점점 확대되며 또아리를 틀게 된다. 황제들은 블랙홀이라고나 불러야할 심적 공허함을 어떻게든 메꾸어 보려고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으며 현란한 사치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런 사치 충동이 자극을 찾다 잔학성과 연결되었을 때 결정적인 타락이 시작되며 마침내 자 신의 권력기반을 무너뜨리며 파멸에 이르는 것이다. 주왕도 주지육림의 향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다가 무서운 기세로 파멸의 구렁텅이에 곤두박질쳤던 경우인데, 절대적인 권력에 불가피하게 따라 다니는 지 독한 암흑의 마성을 전형적으로 드러낸 예이다. 2. 사후불멸을 꿈꾼 광기의 역사 진시황 출생의 비밀 기원전 221년 진왕 정(시황제)은 5백여 년 이어진 춘추전국의 분열국가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 전역을 통일,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제국 진왕조를 세웠다. 13세 약관에 나이에 부친 장양왕의 뒤를 이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187

188 어 진나라 왕위에 오른 지 26년 만에 중국 천하를 통일한 것이다. 이 위대한 패자 진왕 정의 출생에는 의문이 남아 있는데, 장양왕의 친자가 아니라 후원자 여불위(? - 기원전 235년)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대상인이었던 여불위는 상품의 가치를 찾아내는 데 귀 신 같은 감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런 여불위의 촉수에 조나라에 인질로 보내진 진나라의 서출 공자 자초(후예 장양왕이 됨)가 걸려들었던 것이다. 자신의 촉수에 걸려든 쓸 만한 물건을 놓치는 법이 없는 여불위는, 불우함을 구실 삼아 자초에게 접 근하여 곤궁한 처지에 있던 그의 후원자가 되었어며, 교묘한 정치공작을 펼쳐 마침내 기원전 249년 자 초를 진나라 왕위에 오르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듯 진왕 정은 여불위와 자초의 끊으려야 끊을 수 없 는 관계 속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 자초는 여불위의 저택에서 열린 연회에서 마주친 조나라의 수도 한단 출신의 미녀 에 반해, 여불위에게 간청하여 자신이 맞아들였다. 이 미녀가 실은 여불위의 애인으로, 이미 그의 아들 을 임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녀는 그 사실을 숨기고 자초으 애희가 되고 이윽고 사내아이를 낳는다. 이 아이가 진왕 정이라는 것이다. 자초, 즉 장양왕은 여불위의 덕택으로 진나라 왕위에 오르지만 즉위한 지 불과 3년 만에 죽고, 기원전 247년에 13세의 진왕 정이 뒤를 이었다. 정식으로는, 이듬해인 246년이 진왕 정의 원년이 된다. 그러나 나이가 어린 탓으로 실권은 모두 배후 실력자인 여불위가 장악했음을 두말할 나위도 없다. 여불위는 호 사스런 저택을 지어 3천 명의 식객을 두고 그 중에서 글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뽑아 백과전서 여씨춘추 를 편찬하는 등 최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게다가 여불위는 태후에 올라선 진왕 정의 모친과 다시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다 진왕 정이 성 장함에 따라 추문으로 이어질 것이 뻔한 태후와의 관계가 자신을 파멸로 이끌 것을 두려워하여, 음탕한 태후에게 노애라는 정력 센 사내를 소개해 주고 관계를 끊어버렸다. 태후는 환관으로 가장하여 궁중에 들어온 노애를 총애하여 몰래 두 명의 아들까지 낳았다. 태후의 이같은 애정행각은 오래가지 못하고 진왕 정 즉위 9년인 기원전 238년에 발각된다. 22세의 청 년 군주 진왕 정은 과감하게 이 사건을 처리하였다. 반란을 꾀한 노애를 잡아들여 일가족과 가신을 모 조리 사지를 찢어 죽이고 태후가 낳은 아들도 살해한 뒤 이 애정행각의 주모자인 여불위의 관직을 박탈 하여 실각시킨 것이다. 여불위를 극형에 처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 자초를 왕위에 오르게 한 절대적인 공로를 배려했기 때문 이다. 그러나 여불위는 실각 후에도 은연중 세력을 유지하였고, 이에 화가 난 진왕 정은 여불위를 촉나 라 사천성으로 유형을 보냈다. 기원전 235년의 일이다. 유형 통지를 받은 여불위는 이것이 마지막임을 받아들이고 독을 마시고 자살한다. 진왕 정은 이 시점에서야 명실공히 진나라 최고 권력자가 되었던 것 이다. 철저한 기능주의자 진왕 정은 질척질척한 피의 고리를 단절하고 부친살해를 단행함으로써 자립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전환점으로 진왕 정은 권력 재패에 대한 불타는 의지로 천하통일의 발걸음을 착실하게 밟아 나갔다. 목 표는 오로지 권력뿐. 목적을 위한 수단을 가리지 않는 비정한 야심가 진왕 정의 모습을 위료는 이렇게 평하고 있다. 벌처럼 날카롭게 높은 코, 째진 듯 치켜올라간 눈초리, 매나 독수리처럼 튀어나온 가슴, 승냥이 같은 목소리. 진왕 정의 이러한 풍모는 애정이 부족하고 호랑이나 이리 같은, 즉 인간적 구속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약육강식의 본능만이 번뜩이는 인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는 재빨리 태연하게 남에게 자기를 낮추지만 뜻을 이루었을 때는 예사로 남을 깔보고 죽여버린다. 나는 어떤 지위도 관직도 없는 사람이지만, (지금은 이용가치가 있다고 보고) 그는 늘 필요이상으로 나에게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188

189 자신을 낮추고 있다. 만일 진왕 정이 천하를 통일하게 되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노 예로 만들 것이다. 이런 인물 옆에서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진왕 정의 위압적이고 사나운 풍모, 잔인하고도 혹독한 공격성을 띤 성격을 잘 나타내는 이야기이다. 위료가 간파한 대로 그 복잡한 출생 배경 때문인지 정서가 바싹 메마른 진왕 정은 인간을 무슨 기구의 부품 이상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진왕 정은 인간에 대한 불신, 혐오가 밑바닥에 깔린 철저한 기 능주의를 잣대로 인간을 보았다. 그의 이러한 기질적인 기능주의는 실은 진나라의 전통적인 국가체제와 일치하는 것이기도 했다. 애초 진나라는 진왕 정이 최초로 통일을 이루기 130여년 전인 효공(재위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8 년) 시대에, 상앙(기원전 300년 - 기원전 328년) 의 정책에 따라 법률을 강화하고 부국강병에 힘쓴 결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진왕 정은 이른바 상앙의 변법이념을 계승하고 더욱 확대강화하여 천하통일의 최대무기로 삼았던 것이다. 진왕 정의 가장 뛰어난 참모는 이사(? - 기원전 208년)였다. 이사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하는 성 악설을 주장한 순자의 문하생이었다. 그는 초나라 출신이지만 입신출세를 위해서는 초대국인 진나라에 서 일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야심만만하게 진나라로 건너갔다. 그때는 마침 진왕 정이 왕위에 올랐을 즈음이었다. 이사는 처음에는 여불위의 식객으로 있다가 그의 추천으로 진왕 정의 시중을 들면서 급속도로 두각을 드러내 진왕 정의 천하통일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진왕 정은 이사의 적절한 조언을 받아들여, 즉위 17년째인 기원전 230년 한나라를 쳐부순 것을 시작 으로 조, 위, 초, 연을 잇달아 정복하고, 기원전 221년 39세에 제나라를 정복함으로써 전국 여섯 나라를 모두 병합, 마침내 숙원인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우주의 지배자 황제 천하를 통일한 진왕 정이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최고권력자인 자신의 호칭을 결정한 일이었다. 진나라에 앞선 통일왕조 주나라의 천자는 왕이라고 칭했지만 춘추전국의 난세를 거치면서 제후도 모 두 왕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진왕 정은 왕이라는 호칭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라는 호칭을 채 택하게 되었다. 황은 천제(우주의 지배자)라는 뜻이며, 제는 전설의 5인의 성왕 5제에서 따온 것이다. 동시에 진왕 정은 시호(죽은 사람의 생전의 공적에 따라 붙이는 호칭)제도를 폐지하고, 스스로 시황제 라고 이름지어 이후의 황제를 2세 황제, 3세 황제라고 칭하도록 신하에게 명하였다. 아들이 부친의 행실 과 공적을 논하고, 신하가 임금의 행실과 공적을 논하여 시호를 붙이는 것이 불경스럽기 그지없다는 게 시호 폐지의 이유였다. 아울러 황제 스스로는 짐으로 호칭할 것임을 선언했다. 이러한 호칭이나 제도를 시행한 진왕 정의 목적은 물론 자신이 범인들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높은 위치에 있음을 표시하려 한 것 이었다. 이리하여 시황제가 탄생한 셈인데, 이러한 행위는 스스로를 천제에 비유하여 모든 것의 시초라고 공 언하는 것으로 만인이 두려워할 만한 강력한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자부심의 이면에는 부친 살해 로 피의 단절을 과감하게 단행하여 자립을 달성한 자신이야말로 천하의 시원이며, 모든 것이 자기 로부터 시작된다는 무의식이 작용했으리라. 명실공히 세계의 중심이 된 시황제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천하통일의 실체를 구체화하기 위한 작업 에 착수하였다. 우선 중국 전역을 36개군으로 나누고, 각 군에 황제가 임명한 관리를 파견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해 권력의 중앙집중화를 꾀하였으며, 동시에 도량형, 화폐, 거궤(수레 양쪽 바퀴 사이의 폭), 문자를 통일하 는 등 사회, 경제, 문화 제도까지 정비 통합하였다. 이렇듯 강력한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7국으로 병립해 있던 전국 시대의 분열에 종지부를 찍고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전면적 개편을 단행함으로써 중앙집권적 대제국을 탄생시킨 것이다. 아마 탁월한 합리주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189

190 의자이자 기능주의자인 시황제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대업적을 단기간에 이룩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 다. 아방궁, 지상과 천상을 대응시키다 누구도 도달해 본 적이 없는 지위에 오른 시황제는 어떤 일이든 방대하게 치르기를 좋아했는데 사치 또한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다. 다만 주지육림의 긴 밤의 연회로 에너지를 소진한 은나라 주왕과는 달리 시황제가 부린 사치에는 일종의 역동성이 흐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시황제는 만리장성을 축조한 일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단히 뛰어난 거대 건축광이었다. 이런 경향은 이미 황제가 되기 이전부터 두드러져 제후를 무너뜨릴 때마다 궁전을 모방한 어전을 진나라 수도 함양 (협서성 함양시의 동북)에 세우고 전리품으로 획득한 미녀나 악기 등을 모아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말하 자면 정복기념관이다. 천하통일에 성공할 즈음 위수 북쪽에는 잇달아 세워진 궁전이 즐비하였고, 각 궁전 사이를 통로로 연 결하여 장대한 궁전 단지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시황제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황제가 된 이듬해인 기원전 220년 위수 남쪽에 새로운 대 궁전인 신궁을 세워 이것을 극묘라고 개칭하였다. 극묘의 극은 하늘의 중심 별자리인 북극성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은 우주의 지배자, 즉 신이 되고자 한 시황제가 지상공간을 천상세계와 명확하게 대응시키 려는 구상으로 새 궁전을 세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상은 즉위 8년 후(기원전 212년) 역시 위수 남쪽에 장대하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아방궁 의 궁전 단지를 세우면서 한층 활기를 띤다. 아방궁의 중심이 되는 아방전전은 동서 5백보(약 6백 75m), 남북 50장(약 1백 13m), 위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였다. 이 아방궁은 2층 건 물의 통로를 통하여 위수를 건너 북쪽 함양의 궁전 단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같은 공간 배치 계획은 하늘의 별자리와 정확하게 대응한다. 즉 아방궁은 천제가 거처한다고 전해 지는 자미궁(북두칠성의 북동쪽에 있는 15개의 별로 구성되는 영역)에, 위수는 은하수에, 위수 북쪽의 함양에 있는 궁전 단지는 영실(페가수스 자리의 두 별. 천자의 궁이라고 전해진다. 군주의 대궐을 세울 때 기준이 되며, 이 별이 정남쪽으로 보이는 때가 건축의 호기라고 전해진다) 에 각각 대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황제가 자신의 본거지를 함양의 궁전에서 아방궁으로 옮겼다는 것은, 그가 인간적인 존재 인 군주의 차원을 넘어 천제가 되고자 하였음을 뜻한다. 시황제는 이렇듯 장대한 공간 배치 계획을 실 행하면서 지상뿐 아니라 천상세계를 포함한 전 우주의 지배자가 되고자 거의 광신자에 가까운 권력 추 종 의지를 불태웠던 것이다. 저승까지 지배하고 싶은 소망 게다가 아방궁은 빙 둘러서 있는 중층의 긴 복도를 통하여 여산의 시황릉(여산릉)과도 연결되어 있었 다. 여산릉은 기원전 247년, 시황제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건축하기 시작하여 천하통일 후 건축계획을 대 폭 확장하였다. 이 어릉은 70만 명의 죄인을 동원하여 완성되었는데 아방궁에 버금가는 규모를 갖춘 호 화찬란한 지하궁전이다. 저 유명한 병마용이 발견된 곳이 바로 이 여산릉이다. 내부에는 수천에 달하는 실물과 꼭같은 크기의 관리, 병사, 말 등의 토우를 빼곡히 세워 놓았고 지상 의 궁전에서 보물을 옮겨와 가득 채웠다. 또한 인공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고 기계로 끊임없이 수은을 집어넣어 인어 기름으로 등을 밝히는 영구적인 장치를 고안하였다. 그리고 사람이 지하궁전의 입구에 접근하면 기계장치 화살이 자동적으로 발사되도록 하는 등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 외부 침입에 대비했 다. 여담이지만 몇 해 전에 제작된 홍콩영화 진용은 스필버그의 인디아나 존스 못지 않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는데 이 영화의 세트가 여산릉이었다. 이 세트는 공상과학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능 안에서 비행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190

191 기가 날아 다니는 등 포복절도할 정도었는데, 상상할 수 없는 여산릉의 규모를 방불케 하여 박력이 넘 쳐흘렀다. 아방궁의 위치와 구조가 우주의 지배자가 되려 한 시황제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산 릉은 저승 즉 명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시황제의 소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현실세계를 지하에 완벽하게 재현하여 사후에도 명계의 왕자로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시황제의 끝내 채우지 못한 꿈이 었던 것이다. 불사의 선약을 찾아서 아방궁, 여산릉 등 거대 건조물은 결국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시황제의 갈망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인간으로서의 한계 그것은 물론 죽음을 말한다.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권력을 획득하여 현세에서는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위치에 오 르자, 천제나 명계의 황자를 흉내내어 인간의 한계를 돌파하고 영생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시황제의 사후불멸에 대한 소망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했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방사들의 어설픈 술수에 넘어가 거금을 쏟아부으며 불로장생의 선약이나 신선을 찾아 헤매는 일도 허다하였다. 예를 들면 기원전 219년 시황제가 천하를 돌아다니던 중에 신선술의 본고장인 산동의 낭사에 들렀을 때, 제나라 방사 서시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그에게 수천 명의 동남동녀를 태운 대선단을 지휘하게 하여 선인이 기거한다는 동해의 삼신산(봉래, 방장, 영주)이 있는지 찾아보게 하였다. 물론 이 대대적인 신산 수색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도저히 단념할 수 없었던 시황제는 서시등 제나라 방사를 포기하고 새로 이 연나라 방사 노생등에게 불사의 선약을 찾도록 집요하게 주문하였다. 기원전 212년 이 광적일 만치 집요한 선약 찾기가 어처구니 없는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노생 등 연나 라 방사들은 선약을 찾아내는 일 따위는 불가능하므로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변명하면서 발뺌을 해 왔 는데, 마침내 발뺌할 거리가 바닥나자 구름으로 몸을 가리고 도망가버린다. 이것을 안 시황제는 격노하 여 노생 등과 관계가 있는 방사는 학자들을 마구 잡아들였고, 혹독하게 심문한 끝에 그 중 4백 60명 남 짓한 사람을 생매장형에 처하였다. 이것이 역사상 악명 높은 갱유 사건이다. 갱유 사건의 발단은 영생에 대한 갈망으로 눈이 먼 시황제에게 가짜 방사 서시와 노생이 선약을 찾는 다고 속임수를 써 거액의 돈을 뜯어낸 데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시황제만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황제는 거대건축 세우기, 선약 찾기, 나아가 천하순유 등으로 거액의 자금과 대량의 인력을 동원하 여 그야말로 목욕탕 물 쓰듯 부를 탕진하였다. 천하순유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천하통일 이듬해 (기원전 220년)부터 죽음 (기원전 210년) 에 이르기까지 10년동안 아주 빈번히 천하순유에 나섰는데 이를 위해 황제 전용 도로를 닦고 가는 곳마다 기념비를 세우는 등 지극히 대규모적인 사업을 벌였던 것이다. 천 하순유는 표면적으로는 물론 진제국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행차였지만, 순유 때마다 신선사상과 관계 가 깊은 산동의 지태산을 방문하는 것으로 보아 실은 선인 선약 찾기 작업의 일환임을 알 수 있다. 지 태산은 신기루가 잘 생기는 토양으로 유명하며 여기서 볼 수 있는 신기루의 신비한 인상 때문에 삼신산 전설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시황제의 합리주의 정책 이렇게 보면 시황제는 천하통일 후 불멸의 생이라는 비합리적인 욕망의 포로가 되어, 천하통일을 달 성한 원동력이었던 철저한 합리주의나 기능주의를 완전히 상실해버린 듯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시황제는 정치가로서 어디까지나 대단히 뛰어난 합리주의자요, 기능주의자로 놀라운 솜 씨를 발휘하였다. 갱유사건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악명 높은 분서 사건은 조금도 사그러들 조짐이 없는 시황제의 엄혹한 일면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갱유사건 전년인 기원전 213년 시황제는 승상 이사의 진언을 듣고 진기 이외의 모든 사서 및 민간에 서 소장하고 있는 시경, 서경, 제자백가 등의 문학서나 철학서를 모조리 몰수한 다음 소각하는 조치를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191

192 취했다. 사상통제를 철저히 하기 위해 언론탄압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서적을 소각한 것은 아니었는데, 의학, 점, 농업 등 실용서는 제외하였다. 실용서만을 남 긴 것은 기능제일주의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인 시황제다운 방식이다. 그리고 조정에서 일하는 학자 70명 만은 어떠한 책을 소장하여도 관계 없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황제의 분서정책으로 모든 문학서나 철학서가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이 사건에서 그는 관리 가능한 어용학자에게만 지식을 전유하게 하고 민간에는 실용서 외에는 유통을 허용하지 않아 통제 를 용이하게 하려는 무서운 의도를 드러냈다. 독재자의 지배욕망이 못 미치는 데가 없음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진시황은 일중독자 지배 욕망의 예를 더 들자면 시황제는 모든 안건에 대하여 직접 결재하여 처리하였다. 시황제는 지칠 줄 모르고 각 건물마다 긴 통로로 연결된 광대한 궁전 단지를 옮겨다니면서도 공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 았다. 종국에는 공문서가 늘어나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자 하루 업무량을 정하기에 이르렀는데, 저울에 문 서를 쌓아 올려 무게를 달아 하루에 한 석(1백 20근, 약 30킬로그램)씩 처리하기로 정하고, 목표량을 달 성할 때까지는 한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했다고 한다. 당시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은 터라 문서는 목간(나무를 얇게 저민 판)이나 죽간(대나무를 얇게 저 민 판)을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종이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상당한 분량이었을 것이다. 거의 일중독자에 가까운 일처리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호사스러운 궁중 안에서 오로지 공문서 결재에 쫓 기는 시황제의 모습에서는 사치를 즐길 기미 따위는 조금도 엿볼 수 없다. 시황제는 장대한 아방궁을 짓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즐기기보다는, 그러한 거대건축 의 설계 계획을 세우고 건조하는 일 자체가 목적이자 쾌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산릉의 건축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꾸어 말하면 시황제는 욕망이 성취되는 과정만을 즐긴 것이다. 사서에서도 시황제가 음식물, 음악, 여성 등 현세적인 쾌락에 흥미를 보였다는 기록은 전혀 나타나 있 지 않다. 물론 후궁에는 전국에서 불러 모은 수천 명이나 되나 미녀가 북적거리고 있었지만 특정한 미 녀를 총애했다는 기록은 없다. 시황제는 인간을 도구 이상으로 보지 않았으므로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 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고 어느 누구도 그런 시황제를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시황제는 골수에서부터 냉철한 합리주의자였던만큼 현세적인 쾌락에 빠지는 것을 스스로 허용하 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각성된 합리주의가 일찍이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제국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된 셈인데, 그러나 그의 최대 약점은 초인에 대한 갈망, 불멸에 대한 욕망이었다. 이리하여 극단적인 합리성과 동시에 극단적인 비합리성이 기묘한 형태로 어우러져, 아주 꼼꼼하게 정 무에 힘쓰는 반면 거대건축을 세우거나 선약 찾기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어 부질없이 낭비를 거듭하는 양극단을 오고가는 불균형이 생긴 것이다. 먼지가 되어버린 진시황의 꿈 끊임없이 영원할 삶을 찾아 헤매던 시황제는 그런 소망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210년 천하순유 도중 중 태에 빠져 그대로 죽고 말았다. 그때 나이가 50세. 진나라 왕이 되고 나서 37년째, 황제가 되고 나서 11 년째의 일이다. 시황제가 죽고 호해가 뒤를 이어 등극했는데, 일체의 비판을 봉쇄한 독재권력은 반드시 안에서 썩어 들어간다는 철칙대로, 진왕조는 내부에서부터 급속도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각지에서 반 란이 일어나 또다시 중국 전역에 혼란 상태가 전개되고, 이 전란의 한가운데서 마침내 항우와 유방이라 는 두 사람의 영웅이 홀연히 떠오른다. 기원전 207년 2세 황제 호해는 유방의 군대가 함양에 당도한 시점에서 자살을 감행하였고, 이미 자멸 상태에 빠져 있던 진왕조는 시황제의 사후 불과 3년도 못가서 멸망해 버린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192

193 이윽고 유방을 밀어 젖히고 함양에 입성한 항우의 군세는 파괴와 약탈의 극을 달렸다. 아방궁을 비롯 한 모든 궁전은 불에 탓는데 그때 궁실을 태운 불이 3개월 간이나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호위병 사도 소용없이 시황제의 관을 거둔 여산릉 또한 약탈의 대상이었다. 먼지와 재로 돌아간 궁전, 마구 짓 밟힌 묘릉. 막대한 돈을 들인 시황제의 못다 이룬 꿈은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3. 거대한 건축광 맹처의 치마폭에 매달린 공처가 문제 진왕조는 시황제가 즉위한 지 불과 40년 만에 멸망했지만, 진나라의 뒤를 이어 고조 유방이 세운 한 왕조는, 전한 후한 시기를 합해서 약 4백 년에 걸쳐 중국 전역을 지배했다. 전한 왕조 제 7대 황제인 무제(기원전 156년 - 기원전 87년)는 화려한 사치를 좋아하는 인물로 시황 제와 나란히 일컬어지는 존재이다. 다만 한나라 무제의 사치는 거대건축을 세우려는 경향이나 막대한 돈을 뿌린 선약 찾기에서도 모두 시황제의 경우를 답습했을 뿐 특별한 독창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수양제(569년 - 618년)는 황제들의 사치 향락사에 일획을 긋는 인물이다. 본명은 양광이 며 수왕조의 창립자인 문제 양견(541년 - 604년)의 둘째 아들이다. 2세기 말에 후한 왕조가 약해지자 중국 전역은 분열과 혼란의 상태로 접어든다. 4세기 이후에는 대체 로 양주의 회수를 경계로 하여 한민족왕조가 남부를 지배하고, 이민족 왕조가 북부를 지배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세간에서 말하는 위진남북조 시대이다. 양견은 북조 북주의 외척인데, 581년 북주를 무너뜨리고 수 왕조를 세웠으며 이어 589년에는 남조의 진을 무너뜨리고 중국 전역을 통일, 4백 년에 이르는 위진남북조 분열상황에 막을 내렸다. 양견은 관리등용 시험인 과거제도를 창설하여 관료기구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꾀하는 등 탁월한 정치수완의 소유자였다. 그는 또한 질실강건을 제일로 삼는 진지한 인물이며, 언제나 열심히 정무에 힘써 쾌락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렇게 나랏일에 충실하니 수의 국력은 비약적으로 강해지고 국 고에는 엄청난 자산이 축적되었다. 문제 양견의 진지한 외곬에 박차를 가한 인물은 맹처 독고 황후였다. 문제는 선비족의 명문 독고 씨 출신인 부인에게 온통 사로잡혀 있었다. 태생과 관련하여 문제 자신은 후한의 양진을 시조로 하는 한민 족 출신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문제와 독고 황후는 대단히 사이가 좋았다. 문제는 남녀관계에 엄격한 황후 때문에 측실도 들이지 않 아, 당시에는 드물게 일부일처제를 엄수하여 5남5녀 모두 황후의 친자를 둔 모범적인 남편이었다. 그렇지만 독고 황후의 결벽성에는 조금 병적인 데가 있어 아들에서부터 친척이나 중신에 이르기까지 남녀관계가 문란한 사람에 대해서는 거의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품었다. 황태자인 장남 양용도 난잡한 여성관계 때문에 모친에게 혐오를 산 사람 중 한명이다. 폭군의 본성을 숨긴 수완가 양제 독고 호아후는 그런 양용에게 정나미가 떨어져서 대신에 일견 진실해 보이는 둘째 양광을 매우 사랑 하게 되었다. 양광은 사태를 파악하는 눈치가 매우 빨랐으므로 본처 이외의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들을 남몰래 깊숙이 숨기는 등 술책을 부려 품행이 방정함을 가장함으로써 모친의 기분을 맞추었다. 양광은 문제와 독고 황후가 자신의 집을 찾으면 미녀는 모두 별실에 숨기고 나이 든 여자와 추녀만을 밖으로 나오게 하여 독고 황후를 기쁘게 하는 한편, 전혀 향응을 멀리하며 생활하고 있음을 가장해 보 이려고 일부러 악기의 현을 끊고 먼지투성이인 채 두어 아버지 문제를 매우 감격하게 했던 것이다. 양광의 수완은 보통이 넘어 인기를 위한 공작에도 심혈을 쏟았는데, 수렵에 나가 큰 비를 만나 주위 사람이 우비를 입으라고 권하면 사졸이 모두 비를 맞고 있는데 나 혼자 입을 수 없다 는 식으로 말하여 감동을 불러일으켜 자신에 대한 좋은 평판을 조성하였다. 후에 세상에 둘도 없는 폭군의 본성을 드러내 기 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193

194 양광은 이런 식으로 독고 황후의 총애를 무기 삼아 황태자 양용 밀어내기를 도모하였는데, 양광이 결 정적으로 우위에 서게 된 것은 명목상이기는 해도 남조의 진을 공략하는 총사령관이 되어 대승을 거둔 일이었다. 여기에다 양광과 결탁한 중신 양소가 부친 문제에게 황태자 양용이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거짓말까 지 한 끝에 마침내 600년, 양용은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나고 양광이 황태자가 되었다. 양광은 온갖 나쁜 수단을 동원하여 형을 끌어내리고 후계자 지위에 올랐기 때문에, 그의 앞날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 파 란을 내포하고 있었다. 피보다 진한 사치욕 아니나 다를까, 양광이 부친의 뒤를 이어 수의 2대 황제가 되기에 이르러 대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앞 서 양광이 황태자에 책봉된 지 2년 만인 602년에, 독고 황후가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렇게 되자 마침내 문제는 독고 황후의 엄격한 감시에서 해방되었고 여봐란 듯이 후궁 미녀를 총애하는 등 급속히 문란해 졌다. 문제는 멸망한 남조 진의 황녀였던 진부인을 가장 마음에 들어하였는데 이 여인의 존재가 무서운 사 건의 계기가 된다. 604년, 문제는 진부인 등을 데리고 수도 장안 서쪽에 있는 별궁인 인수궁으로 나들이하던 중 병에 걸 려 그대로 재기불능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때 중신들과 함께 별궁에 대기하고 있던 양광이 진부인을 강간하려고 하였다. 이에 저항한 진부인이 병실로 도망쳐 들어가자, 문제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 고 다그쳐 물어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고는 독고가 나를 그르쳤구나 하며 몹시 흥분해서 태자 자리를 박 탈했던 양용을 즉시 불러 들이도록 하였다. 양용을 복귀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정보를 입수한 양광의 충신 양소는 이 사실을 즉시 양광에게 알려 엄중경계 태세를 취하도록 하였으 며, 양광의 측근에게 문제의 병실을 포위하도록 하고 진부인 등 궁녀들을 별실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얼 마 지나지 않아 문제는 숨을 거둔 것이다. 사서에도 병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분명한 기술은 없다. 그러나 혼자 남겨진 문제가 양광 측근의 모종의 조치대상이었음은 틀림없다. 양광이 부친을 살해했는지에 대한 진상은 진나라 시황제의 친아머지가 여불위인지 아닌지와 마찬가지 로 역사의 어둠에 묻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엄청난 사치로 이름을 날린 진의 시황제와 수양제(양광)가 둘다 부친 살해 용의자라는 것은, 그들 의식의 밑바탕에는 혈육중의 혈육인 아버지의 피를 뿌려서라도 호사를 부려보겠다는 피보다 진한 사치에 대한 욕망이 흘러 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벌였던 일련 의 사치 행각을 탕진에 탕진을 거듭함으로써 부친 살해의 원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다고 받 아들인다면 지나치게 현대적인 해석일까? 이야기를 다시 되돌려 보자. 문제가 죽은 후 양광은 무리없이 수의 2대 황제가 되었고 그 누구도 두 려워하지 않고 욕망이 닿는 대로 사치에 빠져들었다. 근검절약형이었던 문제가 축적해 놓은 재산이 엄 청났기 때문에 이제는 쓸 일만 남은 것이다. 200여 리에 달한 양제의 대선단 양제도 시황제와 마찬가지로 거대 건축광이었다. 양제가 벌인 최대의 토목공사는 뭐니뭐니 해도 대운 하의 건설이었다. 605년 즉위와 동시에 공사를 시작했는데 그해 안에 회수 북부지대의 백만여 명에 달 하는 백성을 동원하여 황하에서부터 회수 북부지대에 이르는 통제거를 캐통시켰다. 이어 회수 남부지대 의 십만여 명의 백성을 동원하여 회수에서부터 장강(양자강)에 이르는 한구를 개통했다. 이 대운하 개통에 따라 수도 장안에서부터 강남의 강도-지금의 양주까지 곧장 배로 왕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화북과 강남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남북 교통이 용이해진 것은 확실하지만, 양제가 대운하 건설 계획에 몰두한 것은 결코 그런 사회경제적 관점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머 리에는 오직 자기 자신만의 쾌락이 있었을 뿐이다. 대운하가 완성되자 양제는 수만 척의 배를 건조한 다음 곧바로 즉시 부도인 낙양에서 강도로 행차하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194

195 였다. 양제가 탄 용주배는 높이 45척(약 14km), 길이 2백장(약 600m)이고, 4층으로 되어 있으며, 맨 위 층은 황제가 쓰는 궁전과 개인용 방, 그 밑 2층에 후궁용 방이 1백 20개, 맨 아래층에는 환관용 방이 있 었다. 황후가 타는 배도 황제의 것에 비해 소형이긴 했지만 설비는 거의 비슷하였다. 황제와 황후의 뒤를 이어 제왕, 공주, 관료, 승려, 비구니, 도사 등이 탄 수천 척의 배가 따르고 나아가 호위함 수천척이 연이 어 뒤따랐는데, 이 화려하며 아름답게 꾸며진 대선단은 전체 길이가 2백여 리 (약 100km)나 되었다고 하니 놀랄 만한 일이다. 더욱이 운하이기 때문에 도중에서 물줄기가 정체하는 곳도 있는가 하며 또한 물살을 거슬러 가야 하 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운하의 양 끝에 어도라 불리는 도로를 조성하여 인부를 배치하고 배가 순탄 하게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인부들이 배에 달려 있는 줄을 교대로 잡아당겨 인력으로 배를 움직이게 하 였다. 양제의 대선단이 처음으로 행차에 나섰을 때 줄을 잡아당기기 위해 동원된 인부는 10만 여명에 달했 다고 한다. 대운하 개통, 호화선 건조, 그리고 대선단 운항으로 확실히 사상 최대의 인원과 자금을 동원 했을 것이다. 그 후에도 양제의 운하 건설에 대한 정열은 가일층 더하여, 북으로는 북경의 남서쪽 탁군에 이르는 영제거를 건설하고, 남으로는 항주에 이르는 강남하도 개착하는 등 운하를 더 연장하였다. 이리하여 중 국의 남북은 북의 탁군으로부터 남의 항주가지 4개의 운하로 끊기는 지점 없이 연결되었다. 자연의 변화조차 멈추게 한 황제 권력 양제는 대운하 개통과 병행하여 궁전과 대정원, 대규모의 식량저장 창고 등의 건설에도 대단한 노력 을 기울였다. 즉위하자마자 2백만 명의 백성을 동원하여 부도 낙양과 그리 멀지 않은 수안현에 착공한 별궁, 현인 궁은 호화로움의 극치를 달렸다. 또한 낙양 서쪽에 조성된 황제용 위락단지인 별궁 서원은 은나라 주왕 의 모래언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로, 양제의 섬세하고 빈틈없는 취향에 맞추어 꿈결같은 분 위기를 연출하였다. 둘레가 2백 리의 서원 중앙에는 커다란 연못을 팠다. 연못 속에는 동해의 삼신산인 봉래, 방장, 영주 를 본뜬 축소 인공산을 조성하여 정상까지 빽빽하게 누각을 세웠다. 서원의 북쪽에서부터 연못까지는 수로를 파서 만들고 그 끝에는 열여섯 채의 건물을 늘어 세웠다. 각 건물마다 미녀들이 대기하여 양제 의 방문을 기다렸다. 양제는 서원을 그대로 확대한 형태로 장안에서 강도에 이르는 대운하를 따라 40개의 별궁을 짓고 나 서 이르는 곳마다 미녀 후궁과 유희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후궁이란 본디 황제가 사생활을 보내 기 위한 궁전을 이르는 말이었는데, 이것이 전이되어 황후를 비롯하여 황제가 거느리는 궁녀들의 총칭 이 되었다고 한다. 옛날 예기 혼의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천자는 1인의 황후 이외에 3인의 부인, 9인의 빈, 27인의 세부, 81인의 어처로 순번대로 순위를 매긴 총 1백 20인의 후궁을 거느릴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명칭은 시 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지만 이 규정이 후세에까지 후궁제도의 전형이 되었다. 요컨대 황후를 정점으 로 하여 순위가 낮아질수록 수가 늘어나는 피라미드 형태이다. 물론 인원수는 꼭 규정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늘릴 수 있는 구조였다. 서 진의 무제(재위 265년 - 290년)는 후한 말에서부터 3국 분립 시기의 분열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단기간 에 중국 전역을 통일한 인물인데, 3국 중 마지막 남은 오나라를 무너뜨리자마자 음탕하기로 소문난 오 나라 최후의 황제 손혹의 아름다운 후궁 수천 명을 거두어 무제의 후궁은 일거에 1만 명 이상으로 늘어 났고, 그는 수많은 미녀들에 빠져 순식간에 몸을 망쳐버렸다고 전해진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195

196 당나라 시인 백락천은 유명한 장한가에서 후궁의 가려는 3천 명, 3천의 총애 한몸에 있었구나 라고 표현하였다. 요컨대 양 귀비가 현종의 아름다운 후궁 3천 명분의 총애를 독점하였다는 것인데 그러므로 이 3천이라는 숫자도 반드시 과장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양제의 호사스런 성격으로 보아 아마 서진의 무제에 못지 않은 수의 미 인을 후궁으로 모아 곳곳에 있는 별궁에 기거하게 하고 난잡한 애정행각에 빠져들었던 것이리라. 서원으로 이야기를 되돌려 보자. 낙엽 지는 계절의 고적함을 싫어했던 양제가 고안해낸 착상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양제는 색색깔의 비단 옷감을 꽃이나 나뭇잎 꼴로 잘 라서 줄기에 붙이고 색깔이 바래면 다시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다는 등, 정원이 사시사철 화려한 색채 를 띠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양제는 아낌없이 돈을 쓰면서 비록 인위적이지만 자연의 변화까지 멈추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양제는 무엇이건 겉치레와 화려함을 좋아했는데 관료의 옷과 장신구에도 사치를 부리도 록 하였다. 예를 들면 관에 빠짐없이 성대한 깃털 장식을 붙이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 전역의 새라 는 새는 모조리 잡아 털을 뽑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첨단장치의 서재 양제는 대운하와 서원의 건설에서부터 관료의 깃털장식에 이르기까지 자연을 인간의 힘으로 개조하여 인공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에서 더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 인물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게 인 위적인 것을 좋아한 양제는 인공의 극치인 기계장치 제작을 대단히 좋아하였다. 예를 들면 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고 그 일대를 행차할 때는 수백 명의 호위병화 함게 행전이 라는 바퀴 달린 커다란 수레를 타고 이동하고, 숙박할 때는 조립식 판자를 무수하게 연결시켜 행전 주 위를 완전히 푹 덮어 씌웠다. 이것은 행성이라고 불리는 장치인데 조립된 판자의 높이는 20여 장(약 60m), 주위의 길이는 2천 보(약 3km)나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외적의 습격에 대비했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없어서 행전에 자동발사 활을 장치하고 이 활에 줄을 연결하였다. 침입자가 줄을 건드리면 발사되도록 한 것이다. 낙양의 궁전에 만든 황제 전용의 서재 구조는 대단히 독특하다. 양제는 시황제와 달리 독서를 좋아하 여 글에도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 때부터 수집하여 장안의 궁중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서 적에도 관심이 깊었다. 그래서 37만 권에 달하는 장서를 정리하여 3만 7천여 권을 골라낸 다음 특히 귀 중한 50부를 뽑아 필사본을 만들고 수도 장안과 부도 낙양의 관문전에 분산하여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 관문전 앞에 설치된 양제 전용 서재야말로 기계장치 제작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서재 바깥에 비밀 누름장치가 있어 이것을 밟으면 문이 열리고 위에서 신선 인형이 슬며서 내려와 문 안의 장막을 걷어올리면서 양제를 안으로 인도한다. 독서를 마친 양제가 밖으로 나와서 다시 비밀장치를 밟으면 원 래대로 장막이 쳐지고 문이 닫히는 구조였다. 이는 피해망상 기미가 있는 양제의 고육책이지만 그렇다 해도 기발하기 이를 데 없다. 피해망상으로 인한 불면증 양제는 대운하에 초호화 배를 띄우고 장성의 끝까지 행전을 타고 순유하며 기계장치가 설비된 서재에 서 독서에 열중하는 등 더할 나위 없는 사치삼매경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해가 갈수록 피해망상이 심해 져 공포에 시달리게 되었다. 부친인 문제와 형 패태자 양용을 비롯한 육친아나 신하를 잇달아 죽음으로 내몰았던 일, 연이은 토목 공사와 더욱이 세 번에 걸친 고구려 정벌 실패, 백성의 불만이 격화하여 각지에서 반란의 불길이 타오 르기 시작하는 등 양제가 점자로 피해망상에 빠져드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증세는 즉위 8년째인 612년경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해 도둑이 들었다며 벌떡 일어나는 등 밤에는 전혀 숙면을 취하지 못해 몇 명의 궁녀들에게 몸을 맡기고 깜빡깜빡 졸곤 했는데 이런 상태가 몇 년이 나 계속되었다. 양제는 화려한 궁전 안에서 물밀 듯이 엄습하는 파멸의 예감에 떨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196

197 616년, 반란이 더욱 거세어지자 위험을 느낀 양제는 대운하를 통하여 강도의 별궁으로 피난하였다. 여 기에서 1년 남짓 자포자기한 상태로 향락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안, 수도 장안 후에 당나라 왕조의 창설자인 고조 이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동요한 강도 별궁의 근위군이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양제를 살해하였다. 618년 3월, 그때 양제는 50세, 기묘하게도 시황제가 죽은 나이와 똑 같다. 수나라 왕조의 2대 황제가 되고 나서 14년째의 일이었다. 양제라는 호칭은 수나라 멸망 후 618년에 당나라 왕조가 서고 나서 붙인 시호인데 폭군임을 상징적으 로 나타내는 칭호가 되었다. 양 이란 색을 좋아하여 도리를 등지고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을 괴 롭힌 자에게 붙이는 시호 라고 전해진다. 시황제의 진왕조와 양제의 수왕조는 대단히 유사한 점이 많다. 진나라는 5백여 년 남짓 이어진 춘추 전국의 난세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는데 시황제가 왕이 되고 나서 불과 40년 만에 멸망하였고 그 뒤를 이은 한왕조는 4백 년에 걸쳐 중국 전역을 통일하여 지배하였다. 한편 수나라 는 후한왕조 멸망 후 4백 년 이어진 위진남북조의 난세에 종지부를 찍고 통일 왕조를 수립하였는데 이 또한 약 40년 2대를 끝으로 멸망하고 그 뒤를 이은 당왕조는 3백 년에 걸쳐 존속하였다. 요약하면 진나라나 수나라는 수중에 거머쥔 거대한 권력을 지탱하지 못한 채 자멸하여, 뒤를 잇는 대 왕조를 위해 길안내 노릇을 한 셈이 된다. 황제 사치향락사에서 시황제와 양제는 특기할 만한 존재인데 이러한 길 안내 노릇을 하고 단명한 왕 조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그때까지 사분오열되어 있던 광대한 중국이 모두 자신의 영토이며 모든 권 력이 자기 한손에 집중되어 있다는 현기증 나는 현실 앞에 황홀함과 동시에 맹렬한 압박감에 시달렸음 이 틀림없다. 이리하여 그들은 뭇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의 재물 대탕진을 되풀이하다가 그저 죽음을 재촉한 것이다. 시황제와 양제의 차이점 시황제와 양제는 이렇게 재물 대탕진을 되풀이한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결코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는 다름 점이 존재한다. 새삼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시황제는 진왕조의 창설자이며 자기 손으로 일궈낸 부를 탕진한 것이다. 이를테면 모든 비용을 자신이 조달해낸 것이었다. 이에 반해 2대인 양제는 부친 문제가 양초 대신 손톱 에 불을 붙일정도로 근검절약하여 모아놓은 부를 일거에 다 써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부와 권세가 대단한 부모를 둔 방탕한 자식의 전형일 뿐이다. 그보다도 더욱 근본적인 차이는 시황제의 재물탕진이 현세 초월적 성향을 띤 반면, 양제의 경우는 대 운하의 건설조차 화북에서부터 풍광이 뛰어난 강남까지 곧바로 떠들썩하게 행차하는 것이 목표였듯이, 철두철미하게 현세적 쾌락을 탐닉한 점이다. 그러므로 양제의 사치는 오히려 주지육림식의 은나라 주왕의 사치행태와 비슷하였다. 주왕이 별궁의 모래언덕에 말린 고기 숲을 만들었다면 양제는 서원을 능견꽃과 능견 잎으로 장식하는 등 재물의 힘을 빌어 자연의 순리조차 거스르려고 했지만, 기본적인 발상 자체는 다르지 않다. 또한 양제는 결벽증이 있는 어머니 때문인지 반대급부로 호색본능을 폭발해 마구잡이로 색을 탐하였 지만, 음탕한 어머니를 둔 시황제는 미녀보다도 신선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 이 현실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인지 현실 초월적 욕망을 좇는 것인지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으로서 상당 히 흥미진진하다. 위대한 정치가였던 시황제는 스스로 고안해낸 정치, 경제, 문화제도로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그의 사치의 결정체인 아방궁은 한줌 재와 먼지로 돌아가고 여산릉 역시 몇 차례나 수탈의 대상이 된 끝에 지금은 문화유적 으로 보존되어 있는 데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시황제의 사치는 현실적인 효용가 치를 전혀 생산해내지 못한 것이다. 한편 양제는 정치가로서는 거의 평가할 만한 장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인적 욕망을 실현하기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197

198 위한 수단으로 건설했던 대운하는 그 후 중국의 남북교통의 요충으로 활용되었다. 양제는 아마 당시 사 람들이 꿈조차 꾸지 못했던 효용가치가 있는 사치를 부린 것이다. 참으로 풍자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현실의 한정적 틀을 과감히 깨뜨린 막대한 낭비과정에서 때로는 예상도 할 수 없는 문화가 잉태되는 것을 보여주는 적절한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어쨌든 주왕, 시황제, 양제로 이어지는 사치향락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왠일인지 몹시 숨이 가빠진다. 그들의 사치에는 지옥을 생각하고 즐긴다고나 해야 할 듯한 광적인 처절함이 있을 뿐 평안하 고 한가로운 해방감은 전혀 없다. 그들이 욕망 충족을 위해 부를 탕진하는 것과 비례하여 파멸의 시간은 시시각각 다가왔다. 황제들은 사치나 탕진에 자신을 잊을 만큼 단순하지는 않았으므로, 파멸의 그림자가 자신들을 집어삼킬 것을 직 관적으로 느끼면서 더욱더 낭비로 치닫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된 것이다. 황제의 사치는 어딘지 모르 게 우울함을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제 2장 귀족의 사치향락 귀족들의 사치는 황제들의 노골적인 권력 과시형 사치나 상인의 사치에서 보이는 번쩍번쩍한 생명 력이나 강렬한 상승욕구 경향을 촌스러움의 극치라고 배타시하였다. 그들은 섬세한 미적 세계를 추구하 지만 어딘지 모르게 뿌리에서부터 깊이 병들어 있는 듯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세련미를 추구하는 귀 족사치의 특성이다. 1. 세련된 미의식 귀족은 청류파에서 태어났다. 2세기 초, 후한왕조 멸망에서부터 6세기 말 수왕조가 세워질 때까지 약 4백 년은 위진남북조 시대이 며 문화사적으로 6조라고 총칭되는 시대이다. 짧은 주기로 왕조가 흥망했던 이 시대는 혼란과 분열의 난세였다. 중국을 삼분한 위 오 촉 삼국 병립 상태는 위를 멸한 사마씨의 서진왕조(265년-316년)의 전국통일로 일단 해소되기는 했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내란 때문에 국력이 약해진 서진이 북방 이민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자, 소란상태에 빠진 화북을 피하여 강남으로 옮겨간 이주민들이 서진왕조의 일족인 이 전의 황제 사마예(276년-322년)를 옹립하여 타향에서 유랑정권인 동진왕조를 세우기에 이른다. 이리하여 대체로 회수를 경계로 하여 북쪽은 이민족의 왕조가 지배하고, 남쪽은 한민족의 왕조가 지 배하는 남북분열 상황이 확정되어 3백 년 가까이 이어지게 된다. 더욱이 강남의 한민족 왕조만 보아도 약 3백 년의 남북분열 기간 동안 동진(317년-420년), 유송(420년 -479년), 제(479년-502년), 양(502년-557년), 진(557년-589년) 등 다섯 왕조가 어지러이 교체되었다. 그야 말로 난세의 극치였다. 그러나 실상 이 시대의 진정한 주인공은 왕조의 주인이 바뀌어도 아랑곳없이 항상 정권의 요직을 차 지하고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하면서 이 시대에서 저 시대로 굽힘없이 살아남은 귀족들이었다. 이 귀족 들이 현란한 육조문화를 탄생시킨 주인공이다. 육조 명문귀족의 원류는 후한 말에 환관이 주도했던 부패한 정치상황에 이의를 제기하며 역대 왕조에 서 중추적 구실을 해온 청류파라고 불리던 저항파 지식인층이다. 거듭되는 탄압을 헤치고 살아남은 청류파 지식인은 삼국지의 영웅 조조(155년-220년)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라 판단하고 속속 조조의 위나라에 참가하여 천하통일 과정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조 조 정권의 모든 요직은 무관을 밀쳐내고 청류파 지식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류는 위에서 진으로 계승되었는데, 조조 정권의 수뇌부로 변신한 후한 말 저항파 지식인 중 에서 산동성 낭사를 근거지로 하는 낭사 왕씨를 비롯한 신흥귀족이 탄생하였고, 이후 육조 시대를 통하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198

199 여 세력을 자랑하는 문벌귀족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궁중의 식사가 맛이 없다? 귀족의 사치가 두드러지게 되는 것은 귀족의 자제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고 저항파 지식인이었던 선조들에 대한 기억도 흐려지던 서진 시대에 들어서부터이다. 서진왕조는 청류파 지식인으로 조조 산하로 들어가 서서히 기반을 닦은 사마의(179년-251년), 그 장남 인 사마사(208년-255년), 2남 사마소(211년-265년)의 부자 3대가 음험하고 주도면밀한 준비공작을 거듭 한 끝에 사마소의 장남 사마염(236년-290년) 때에 이르러 위나라를 무너뜨리고 탄생시킨 것이다. 서진왕조는 출발에서부터 전망도 없이 패색이 짙었는데 귀족들은 배금주의에 빠져 사치경쟁에 몰두하 였다. 이러한 경향은 서진이 280년 위 오 촉의 삼국 중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오를 멸망시키고 중국 전 역을 일단 통일한 뒤 더욱 격심해졌다. 사마염, 즉 서진의 무제는 당초 이러한 사치 풍조에 뭔가 제동장치를 마련하고자 했지만, 서진왕조의 창업의 일등공신 중 한 사람으로서 위진 교체기에 사예교위(규칙위반이나 반체제적 행위를 단속하는 사 람에 해당)로서 놀라운 수완을 발휘한 하증까지 사치삼매로 세월을 보내는 모습을 보고 규제를 단념했 다고 전해진다. 하증은 식도락으로 재물을 탕진했는데 구미당기는 음식에는 돈을 아끼지 않고 하루에 1만 전이나 썼 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증은 입이 매우 고급스러워 궁중 요리까지 맛이 없다고 젓가락도 대지 않을 정 도였다. 일이 이지경에 이르자 무제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포기하고 오히려 자신도 사치에 몰입, 오나 라 궁전에서 온 강남의 미녀에 빠져 색을 밝히다가 애석하게도 단명하기에 이른다. 찐쌀 말린 것을 연료로 사용하다 세상이 온통 사치 풍조의 회오리에 휩싸이는 가운데 서진의 귀족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기발한 사 치행태를 연출하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온갖 정열을 쏟았다. 진나라 시황제나 수나라 양제와 같은 최고 권력자인 황제들은 무인의 황야를 혼자 걷고 있는 형국이 어서 경쟁의 원리가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귀족, 그것도 명문귀족은 가문의 명예를 건 자존심이 밑천이 되었다. 위진 귀족의 에피소드 모음집 세화신어의 태치편은 가문의 명예를 걸고 경쟁을 벌였던 귀족의 사치행 태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일례를 보자. 왕개가 쌀을 쪄서 말린 것으로 밥을 짓자, 석승은 양초로 밥을 짓고, 왕개가 푸른 능견으로 안감을 댄 보라색 비단천으로 길이 40리(약 17km)가 되는 장막을 만들자, 석승은 50리(약 21km)나 되는 비단 장막 으로 대응하였다. 석승이 산초나무를 벽에 칠하자, 왕개는 적석지를 벽에 칠하였다. 왕개(연대미상)는 무제의 어머니 동생이며, 석승(249년-300년)은 서진왕조 창업공신 석포의 아들이다. 이 두 사람에다가 왕제(연대미상)를 합한 3인은 서진의 사치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3파전이라고 할 만큼 사치경쟁을 치열하게 벌였다. 이 에피소드의 초점은 왕개가 찐쌀 말린 것을 연료로 쓰면, 뒤질세라 석승은 양초를 쓰고, 석승이 산 초나무를 벽에 칠하자 왕개는 적석지를 칠하여 대항하는 등 비싸거니와 본래의 쓰임새도 아닌 물건을 이렇게 무턱대고 연료나 도료로 소비했다는 사실이다. 사람 젖으로 키운 돼지 왕제의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는 사치의 탐닉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왕제는 무제 사마염이 살아 있을 적 자신의 집을 방문하자 그를 대접하는 데 모두 청보석(유리의 옛 이름으로서 당시에는 칠보 중 하나였다) 그릇을 사용하고, 백여 명 남짓한 시녀는 전부 비단 바지와 웃 옷을 입고 음식물을 손으로 바쳤다. 삶은 돼지고기가 맛과 빛깔이 아주 진하여 여느 맛과 달라 이를 이 상하게 생각한 무제가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왕제는 사람 젖을 먹이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무제 는 아주 불쾌한 표정으로 식사를 끝내지도 않도 가 버렸다. 이것은 왕개나 석승도 쓰지 않은 방법이었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199

200 다. 왕제는 오나라 토벌에서 큰 공을 세운 왕혼의 아들로서 무제의 사위였다. 돼지에게 사람 젖을 먹여 키웠다는 이야기는 결코 유쾌한 이야기는 못되는데, 이쨌거나 당시에는 이런 것이 최고 사치의 하나라 고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실제로 찐쌀 말린 것이나 양초를 연료로 하여 지은 밥과 사람 젖을 먹여 키운 돼지고기가 맛이 좋으 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지만, 서진 귀족들은 이와 같이 값비싸고 진기한 재료를 눈에 띄지 않는 연료, 도료, 사료 등으로 사용하여 소비하는 것이야말로 사치의 진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얽히고 설킨 사치형태가 기묘함의 정도를 더하면서, 사치에 물든 귀족들의 감각도 역시 세련 에 세련을 거듭하여 이상한 데까지 예리하게 되어 갔다. 앞에서 얘기한 하증도 이름난 식도락가이자 미 각의 예민함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무래도 순욱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순욱은 어느 날 서진 무제의 연회석상에서 죽순을 먹고 밥을 청했다. 그는 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 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오래 써서 낡은 나무를 장작으로 만들어 지은 것이다." 사람들은 믿지 못하고, 몰래 사람을 시켜 조리장에 가서 물어보게 하였는데 실제 오래된 마차의 각목을 사용하고 있었 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앞서 말한 찐쌀 말린 것이나 양초를 연료로 하여 밥을 짓는 이야기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천재적 미각의 소유자는 사용하는 연료 등 조리 과정을 중시하는 풍조에서 생 겨난 셈이다. 순욱은 미각뿐만 아니라 음악적 감각도 뛰어났으며 서화와 물건을 감식하는 데도 발군의 실력을 자랑 하는 인물로, 비서감(궁중의 도서를 관리하는 비서성의 장관)으로 일할 때 전한 시기 유향의 별록에 기 초하여 궁중 서적을 분류하거나 하남성에 있는 급군의 오래된 무덤에서 나온 죽서를 정리하기도 하였 다. 대단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었다. 다만 순욱은 이러한 미적 감각이 뛰어난 것과는 정반대로 보신을 위해서라면 무제에게 아첨까지 일삼 는 등 염치고 체면이고 가리지 않아 뜻 있는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어쨌든 위진 시대의 귀족은 후술하 는 석승도 그러하지만 한통속으로 묶을 수는 없는 다양한 행태를 연출했다. 카타르시스를 위한 사치 당시의 귀족들이 사치를 다투어 찐쌀 말린 것이나 양초를 연료로 사용하는가 하면, 하증처럼 궁중의 요리는 맛이 없다고 입에 대지도 않는 등 황제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의 행태는 귀족들이 얼마나 절대 적인 힘을 발휘하며 일세를 풍미하였는지 잘 보여준다. 귀족들의 사치벽은 보이지 않는 곳에 사치를 부리고 진기한 소재를 소모품으로 흔적도 없이 써버리는 것으로, 시대의 기념비적인 만리장성이나 대운하 건설로 권력을 과시한 황제들의 사치와는 아주 대조적 이다. 여기에는 틀림없이 농후한 퇴폐적인 분위기를 띤 귀족적 미의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의식이 뭔가 범인과는 다른 일을 하여 남에게 주목받기를 원하는 마음의 화려함과 결부되어 더욱더 세련됨을 응축한 사치경쟁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치경쟁에는 뭐니뭐니 해도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귀족들은 대체 어디에서 자금을 충당했 던 것일까. 석승, 왕개, 왕제 즉 사치 삼인방의 경우 왕개는 무제의 숙부, 왕제는 무제의 사위라는 식으로 왕실 인척으로서 이를테면 금이 떨어지는 나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므로 당연히 자금이 넉넉했을 것이다. 석승은 부모가 물려준 재산이 엄청난데다가 자신이 호북성 형주의 자사(장관)로 재직하고 있을 때 원 정오는 상인들을 위협하여 강탈한 금품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고 전해진다. 위진 시대 귀족들은 대개 정치권의 요직을 독차지하고 권모술수를 부리던 고급관료이며 강력한 군사 권까지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단순히 화조풍월을 즐기며 문화적인 우월감을 느끼는 데 만족하는 이른바 귀족적인 존재는 결코 아니었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00

201 그렇기 때문에 귀족들은 사마씨가 4대에 걸쳐 반대세력에 대하여 가차없이 피의 숙청을 단행하며 조 씨의 위나라를 야금야금 멸망으로 몰아넣었던 위태로운 위진교체기에서도, 재빨리 대세를 파악하고는 목숨을 걸고 사마씨에 가담하여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한층 강 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석승이 산적과 흡사한 행위를 하거나 순욱이 역겨우리만치 아첨하는 인간이라 하여도 결코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위진 시대의 귀족들은 후한 말 저항파 지식인으로서 도의적 고결함을 자랑하던 선조들과는 달리 선비 가 지켜야 할 지조와 절재마저 내팽개치고 세상 물정대로 힘의 논리에 적극 순응하며 살아남은, 어딘가 깊은 곳에 회복할 수 없는 정신적인 상처를 입은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러한 정신적 상처를 해소하려는 무의식의 작용으로 철저히 탕진하며 당치도 않은 사치경쟁을 벌여 카타르시스를 얻으려 했 을 것이다. 중국 제일의 수전노 왕융 서진 시대의 귀족들 사이에는 석승 등으로 대표되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치경쟁을 벌이는 부류가 있는 반면, 돈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축재와 재산증식에 광분한 수전노 귀족이 또 하나의 부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귀족사회에는 화려하게 재산을 날려버리는 자, 오로지 모으기만 하는 자, 어느 쪽이건 돈이 잇으면 날 개가 없어도 날 수 있고 발이 없어도 달릴 수 있다(노포 지음, 전신론)는 식으로, 돈이 없는 것은 생명 을 잃는 것과 진배없다는 노골적인 배금주의 논리가 판치고 있었다. 명문귀족 낭사 왕씨 일족이었던 왕융은 사마씨 세력이 나날이 강해지던 위나라 말기, 죽림칠현 - 노 장사상의 무위자연 이념을 모토로 일체 현실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사마씨 세력에의 합류를 암묵적으로 거부했던 일곱 선비 - 의 일원이었는데, 훗날 사마 정권의 수뇌로 변신한 경력이 있다. 수전노 인간의 일화를 모은 세화신어 검색편은 굴절된 수전노 왕융의 모습을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 다. 사도 왕융은 신분도 높고 집과 대지, 멋므, 소 치는 사람, 기름진 논, 수력제분기 같은 재산이 아주 많 아 낙양에서 견줄 만한 자가 없었다. 증명서와 장부 정리에 쫓겨 언제나 부인과 함께 등불 밑에서 주판 을 놓고 있었다. 세상의 재물과 명예에 대한 욕심을 초월하는 것을 첫째 가는 덕목으로 꼽았던 죽림칠현의 정신은 흔 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또한 이런 이야기도 있다. 왕융은 수전노였다. 부리던 아랫사람이 결혼할 때 홑옷 한 장을 선물했는데, 뒤에 새삼스럽게 그 대금 을 청구하였다. 수전노 왕융은 수전노로서의 세간의 평을 은근히 즐긴 듯한 면도 있었다. 이 밖에 전해지는 일화는 다음과 같다. 왕융은 집뜰에 심어져 있는 오얏나무의 열매를 비싼 값에 팔 곤 했는데, 다른 사람이 씨앗을 입수하면 장사는 끝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오얏열매의 중심 부분에 송곳 으로 구멍을 뚫에 팔았고, 딸이 시집 갈 때 사돈 댁에 수만 전을 빌려주었는데 돈을 갚기 전까지는 친 정 나들이 온 딸을 외면하였다고 한다. 역시 수전노다운 모습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수전노형의 왕융은 귀족의 퇴폐적 미의식을 사치경쟁으로 유감없이 발휘한 석승 등의 사치 삼인방과 는 아주 대조적이다. 하지만 사치형이등 수전노형이든 단순하고 평범한 것을 거부하고 무엇이든 독특한 한 가지에 집중적으로 정열을 쏟아부어 범인과는 다르다는 세상의 평판을 얻으려고 한 점은 한결같았 다. 서진 시대 귀족들이 지옥으로 굴러 떨어져도 돈만 있으면 해결된다는 식으로 황금 제일주의에 빠져 돈을 펑펑 써대는 사치를 부리거나 그 반대로 매우 인색하게 굴지라도 결코 그들이 현실주의자임을 의 미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든 몇 개의 에피소드처럼 귀족들은 한 가지 사치를 부리거나 인색하게 굴 때, 거기서 풍겨나는 뉘앙스와 다양하고 풍부한 갖가지 표현 형태를 중시하였으며 본질적으로 금전을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01

202 노리개 삼아 자신만의 독특함을 추구하는 추상적인 유희를 즐겼다고 할 수 있다. 곡물이 없으면 고기죽을 먹으면 된다. 당시 귀족사회에서는 배금주의적 풍조와는 정반대로 청담이라고 불리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담론이 크게 유행하였다. 여기에 박차를 가한 것이 신경을 흥분시키는 작용을 하는 오석산이라는 마약이었다. 귀족들은 약으로 기분을 한껏 띄우고는 밤새도록 지칠 줄도 모른채 뜬구름 잡는 말의 유희에 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석산을 석종유, 석유황, 백석영, 자석영, 적석지 등 다섯 종류의 광물을 복잡한 과정을 거쳐 조합한 상당히 값비싼 물건으로 이후 육조 시대를 통하여 귀족의 상징처럼 애용되었다. 요약하자면 서진 시대 귀족들은 사치, 수전노 풍조, 마약을 복용하면서까지 청담에 빠지는 일 등 그들 이 보이는 행태는 동일한 정신적 토양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이다. 서진왕조는 성립 당초부터 불안정한 체제였는데 모든 사람들 눈에 그 기반의 취약함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귀족들은 위진 시대의 교체기에 받은 정신적 상처와 아무리 애를 써도 눈사태처럼 무너져 가는 시대의 흐름을 막아낼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현실도피 충동에 사로잡힌 채 추상적인 유희에 몰입하였 다. 따지고 보면 재산증식이나 사치경쟁도 그 일각에 불과하였다. 이런 와중에 무제 사마염이 죽자 8왕의 난이라 불리는 피붙이간에 서로 먹고 먹히는 사마 일족의 내 란이 발발하여 순식간에 서진왕조는 공중분해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무제의 뒤를 이은 장남 혜제의 우둔함이 최대의 악재였다. 혜제는 내란과 더불어 토지가 황폐해져 백성이 잇따른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곡물이 없 으면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느냐 고 물었다는 이야기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참으로 어이없는 인물 이었다. 8왕의 난의 원흉을 혜제의 무능을 구실로 넉살좋게 앞에 나선 부인 가후였다. 권세욕의 화신인 가후 는 음모를 꾸며 잔인하게 반대세력을 쳐나갔는데 이것이 혼란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서진은 8왕의 난이 수십년 간 계속되어 거의 괴멸상태에 이른 시점에서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받고 명맥을 다해 마침내 한민족 왕조는 화북에서 강남으로 이동하기에 이른다. 귀족들의 불길한 예감이 적 중한 것이었다. 왕희지와 고개지를 낳은 동진귀족의 정신주의 그러나 명문귀족은 위나라에서 서진왕조에 이르기까지 자산들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 놓고 있었으므 로 한민족의 지배영역이 회수 이남으로 제한되고 동진왕조가 성립된 뒤에도 그들의 우월성은 그대로 유 지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초 동진왕조 자체가 화북에서 이주해온 귀족들의 연합으로 성립된 정권이므로 낭사 왕씨나 태원 왕씨, 나아가서는 양하 사씨 같은 명문 귀족의 세력은 한층 강력해질 뿐 이었다. 동진귀족의 경우 서진귀족과 같이 돈을 펑펑 쓰는 물질적인 사치는 세련되지 못한 촌스러움의 극치라 고 경멸했기 때문에 그들의 사치는 결코 찬탄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 물론 대대로 내려온 영지나 재 산을 버리고 겨우 살아남아 부랴부랴 강남으로 피난왔기 때문에, 특히 동진 성립 이후 당분간을 아무리 귀족이라고 하여도 물질적인 사치 따위를 기대할 수 없었다. 동진왕조의 기반이 확고하게 다져지자 귀족들은 물질적인 사치는 접어두었지만 사교 모임을 날로 화 려하게 만들어 나갔다. 그들은 청담이 일세를 풍미하는 가운데 언어감각의 세련됨과 뛰어남을 서로 다 투고, 평범한 대화에서도 색다른 기지를 살려 줄곧 익살을 떨고, 감각을 흥분시키는 작용을 하는 오석산 을 앞다투어 복용하였다. 이렇듯 물질보다 정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동진의 귀족사회 분위기는 귀족들의 미의식이나 예술감각을 더욱 세련되게 하는데 힘을 기울였고, 서성이라 불리는 왕희지(307년 - 365년)와 화성이라 불리는 고개 지(346년 - 407년)를 낳기에 이른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02

203 왕희지는 명문 낭사 왕씨 일족이지만 정적 태원 왕씨 일족인 왕술과의 알력에 혐오를 느껴 오십 세를 눈앞에 둔 355년에 과감하게 정계를 은퇴, 산천의 경치가 빼어난 회계군 산음현(절강성 소흥시)에 은둔 하였다. 그의 최고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난정시서는 정계은퇴 2년 전인 353년 3월 3일에 당시 회계 군수였던 왕희지가 그곳에 살고 있는 명사들을 모아 산음현 교외의 명승지 난정의 별장에서 곡수유상(굽이쳐 흐 르는 시냇물에 술잔을 띄우고 순서대로 잔을 건져올려 자작시를 읊는다) 연회를 개최하였는데 그 후 참 석한 사람들의 작품을 정리하여 난정시를 묶어냈을 때 서문으로 첨부한 것이다. '금'곡 연회와 '난'곡 연회 서진 시대 석승의 금곡시서는 교외의 별장에서 연회를 열고 참석자의 시를 묶어 정리하면서 서문을 붙인 것이다. 이것은 296년 하양의 금곡간(하남성 맹현 서쪽)에 있었던 석승의 호화로운 별장에서 왕후 라는 인물의 송별연을 열었던 때의 것으로 왕희지의 난정시서의 선례로 꼽을 수 있다. 석승은 호화로움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자주 연회 자리를 옮겨 높은 장소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하고 물가에 늘어서 앉기도 하였다. 이동할 때에는 거문고(금), 슬(고대 중국의 현악기로서 항상 거문고 와 합주되었다. 금슬의 연원), 생황(관악기의 하나), 축(대로 만든 거문고 비슷한 악기) 등 모든 악기를 수레에 실어 나르고 수레를 멈추는 것과 동시에 일제히 연주하도록 하고 각각 시를 지었다 고 금곡시서 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악기의 반주를 넣어 흥을 돋우는 대규모의 화려한 연회였다. 이에 반해 왕희지의 난정 연회쪽은, 이 땅에는 높은 산, 험한 봉우리, 무성한 숲, 길게 뻗어난 대나무 가 있다. 또한 좌우에 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며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 있어서 이것을 이름하여 유상 곡수라고 하고 그 물가에 나란히 앉았다. 사죽관현의 성대한 연주는 없지만 잔을 비워 시가를 읊으면 풍악을 만끽하기에 부족함은 없다. -난정시서- 는 식으로 의식적으로 호사스러움을 배제하고 마음 맞 는 사람끼리 모여 아름다운 자연과 마주하고 생각하는 것을 시가로 표현해내는 조촐한 자리였다. 금곡 연회와 난정 연회의 차이점은 동진귀족들의 사치나 미의식이 서진귀족들의 벼락부자 취향의 현 란함을 탈피하고 어떻게 세련미를 높여나갔는지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들의 별장 이름에 자연스레 드 러나 있듯이, 그것은 바로 돈에서 난으로 사고의 중심이 이동한 것이다. 왕희지의 난정시서는 동진의 환현(369년-404년)이나 당태종(599년-649년) 등 후세 수집가들의 표적이 될 정도로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왕희지의 글은 그가 살아 있던 당시에도 평판이 높아 호사가들 사이에서 서로 가지려고 다투었는데 왕희지는 전혀 무관심하였다. 예를 들면 왕희지가 어느 서생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 집에 있던 나뭇결 이 매끌매끌한 책상에 마음이 끌려 그 위에서 붓을 휘달려 글을 써내렸다. 행서와 초서가 반씩 섞인 훌 륭한 솜씨였는데, 훗날 아무 것도 모르는 서생의 부친이 무심코 그 필적을 지워 버려 서생은 매우 낙담 했다고 한다. 또한 산책을 하는 도중 육각형의 대나무 부채를 팔고 있는 노파와 만났는데, 그때 왕희지는 재미있게 생긴 부채 모양에 흥이를 느꼈는지 부채를 손에 들고 한 장에 다섯 글자씩 글씨를 썼다. 팔 물건을 아 주 망쳐 놓았다고 볼멘 얼굴을 하고 있는 노파에게 왕희지는 왕우군의 글씨라고 하면 백전은 될 것이오 하고 타일렀다. 아니나 다를까 부채는 날개돋힌 듯 팔리고 노파는 또 부채를 가지고 왕희지에게 달려갔 지만 그는 웃으며 상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세간의 평판 여하와 무관하게 왕희지에게는 글도 일종의 즐거움의 대상이고, 취미의 하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재능의 극치, 그림의 극치, 바보의 극치 노련한 성인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서성 왕희지와는 대조적으로 화성 고개지는 대단한 기인이자 삼 절할 사람이라는 것이 당시 한결같은 평판이었다. 삼절이란 재절(재능의 극치), 화절(그림재주의 극치), 치절(바보의 극치)을 말한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03

204 속임수처럼 보이는 환상술에 열중한다든지, 광적인 서화 수집광 환현에게 그림을 사기당해도 그 그림 은 너무나도 훌륭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신령과 교감하여 승천해 버렸다 고 천연덕스럽게 말하곤 했다. 또한 고개지의 치절을 드러내는 에피소드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다. 상식을 벗어난 기벽과는 정반대로 고개지의 그림에는 천재적인 면이 있는데 특히 대상의 특징을 정교 하게 포착해낸 인물화에 탁월하였다. 고개지는 배해의 초상화를 그릴 때, 뺨 부분에 세가닥의 털을 그려넣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 자 고개지는 이렇게 말했다. "해는 슬기롭고 날쌔며 글이나 말의 조리가 분명하여 시원스럽고 훌륭한 견식이 있었다. 이 털이야말 로 그 견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곰곰히 뜯어보니, 과연 세 가닥의 털을 더함으로써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 없을 때보다 한결 나은 듯이 생각되었다. - 세화신어 교예편 확실하지는 않지만 고개지 그림의 혼이 들어있는 듯 살아있는 모습과 똑같게 그려내는 섬세하고 뛰어 난 화법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동진에서 제일가는 수집가 환현이 고개지의 치절을 이용해 마구잡이로 그림을 뺏으려 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환현은 동진왕조 찬탈 직전까지 일을 도모했던 동진 중기의 거물 환온(312년-373년)의 아들이다. 그는 짧은 자복(장래의 활약을 기하면서 지금은 남에게 굴종하여 때를 기다림) 기간을 거쳐 402년 동진 말기 의 혼란을 틈타 병사를 일으켜 순식간에 수도 건강(남경)을 점령하고 제위를 탈취했지만 삼일 천하로 끝나 결국 패하여 죽고 말았다. 환현의 수집벽은 거의 병적이었는데 서화는 말할 것도 없고 남의 훌륭한 저택이나 정원까지 속임수 도박을 벌여 빼앗는 등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 그야말로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광적인 수집가였다. 광적인 수집가들, 수양제와 당태종 광적인 수집가에 관해서 말하자면 수나라의 양제는 애서광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양제의 책에 대한 애정은 매우 각별해 다음과 같은 믿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양제 사후 4년째였던 무덕 4년(621년) 당나라 왕조는 양제가 낙양의 관문전에 비밀리에 보관했던 귀 중서 약 8천 권을 수도 장안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 당시 나중에 시인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상관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양제가 그가 꿈을 꾸는 베갯머리에 서서 어찌하여 내 책을 장안으로 옮기는 것이 냐 하며 큰소리로 꾸짖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제의 8천 권의 서적을 실은 배가 장안으로 향했는데, 갑자기 몰아닥친 태풍이 배 를 덮쳐 서적은 한 권도 남김 없이 유실되어 버렸다. 그런 직후 상관의는 또 양제의 꿈을 꾸었는데, 이 번에는 양제가 아주 기쁜 듯이 내 책을 되찾았노라 고 말하였다고 한다. 애서광의 귀기 서린 집념을 보 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앞에서 언급했듯이 당나라 제 2대 황제 태종(재위 627년-649년)은 스스로 진서 라는 왕희지전 을 쓸 만큼 왕희지의 옹호자였으며 왕희지 글 수집광으로 전해진다. 태종은 왕희지의 글을 남김없이 입 수할 것을 명령하여, 2천 2백 90지, 13질, 백 28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을 수집하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양 희지의 최고 걸작이라고 전해지는 난정시서만을 종적이 묘연하였다. 혈안이 된 태종은 난정시서를 수중에 넣으려는 일념만으로 8만 가지의 수단을 동원해 행방을 찾던 끝 에, 왕희지가 살았던 회계군 산음현 부근의 영흔사에 비밀리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 나 영흔사 주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난정시서를 바치려 하지 않았다. 이에 태종은 사람을 시켜 왕 희지의 다른 글을 영흔사에 가져가도록 하여 주지를 방심하게 만들고 감쪽같이 속요 난정시서를 빼돌렸 다. 숙원을 푼 태종은 이글을 그지없이 아끼다가 자신의 무덤에 묻도록 유언을 했다고 한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04

205 저승에 가서도 애서에 대한 편집광적 집념을 버리지 못했던 양제와, 무덤에까지 난정시서를 가지고 갔던 당태종은 수집광의 집념이 얼마나 강하게 소유욕과 독점욕으로 연결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양보다 질을 중시했던 사치 경향 동진왕조는 거의 바보나 다름없었던 안제와 그를 에워싼 정부 관료의 부패와 타락, 사회불안이 날로 심해지자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420년 환현의 난으로 인하여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안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송 왕조를 세운 인물은 환현을 물리친 무관 유유였다. 이미 패색이 짙 은 동진의 사마정권을 단념하고 있던 권세 귀족들은 재빨리 변신하여 유유 정권에 협력하였다. 위진 교 체기 이래 계속되어 온 귀족의 속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다.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진 왕조의 동쪽 천도라는 역사적 사건을 사이에 두고, 귀족들의 생활양 ㄱ이 나 미의식은 귀족 시대의 막을 올린 서진에서 동진에 걸쳐 더욱 세련되어졌다. 사치 면에서도 서진귀족들이 돈의 위력에 바탕을 둔 사치경쟁에서 카타르시스를 얻으려고 했다면, 동 진귀족들은 왕희지의 난정 연회가 상징하듯이 쓸데없는 허식을 배척하여 마음의 양식을 쌓고 정신의 풍 요로움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바꾸어 말하면 귀족들은 돈을 듬뿍 쓰며 온갖 것을 향유하는 과정에서, 섬세하고도 우아한 문화적 우 수 집단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물량작전이었던 황제들의 사치와 이면을 강조하는 사치경향이 두드러졌던 서진귀족의 경 우를 비교해 보면, 처음부터 귀족들이 양보다 질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귀족들의 질 중시 흐름이 동진에 이르러 물량작전 따위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촌스러움의 극 치라고 치부하게 되었고 물질보다 정신의 질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둔 우수한 귀족문화를 꽃피우게 되었 다. 2. 여자들의 환상공간 송대 이후의 새로운 귀족들 중국 고전백화 장편소설의 최고 걸작 홍루몽은 18세기 청나라 상류사회 대귀족의 화려한 생활을 묘사 한 작품이다. 엄밀히 말하면 대귀족이라는 표현에는 약간 문제가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중국사상 문벌귀족이 출현 한 것은 3세기 중엽인 위나라 말기이며, 이후 그들은 육조 시대를 통틀어 대대로 황제를 보좌하는 정권 의 요직을 차지하며 일세를 구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특권계급으로서 문벌귀족은 당나라(618년-907년) 에 들어와 점점 내리막길을 걷다가 마침내 소멸하기에 이른다. 송나라(960년-1279년) 이래 귀족을 대신했던 부류는 국가시험인 과거에 합격하여 등용된 고급관료였 다.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관계에 입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관료는 일대로 제한되었으며 세습 귀족과는 아주 달랐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와 함께 송나라 이후 사치의 주역도 귀족에서 고급관료, 나아가서는 진신(원래는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고 재산도 제법 모아서 관료생활에서 은퇴한 뒤 향리로 돌아간 사람들을 말한다) 으로 바뀌었다. 명나라(1368년-1644년)도 중반기 이후가 되자 일종의 지방호족이 된 진신-특히 강남의-중에서 세련미 넘치는 별장이나 정원을 소유하고 서화를 수집하거나 1만 권의 장서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그들은 물론 귀족 계층은 아니었지만 생활양식이나 미의식이 귀족화되었던 것이다. 홍루몽은 이렇게 면 면히 이어져 온 귀족 문화의 본질을 응축한 것이다. 홍루몽을 쓴 조설근은 정말로 극적인 운명의 전환을 경험한 인물이다. 그의 선조는 명왕조를 멸망시 키고 청왕조(1644년-1911년)를 세운 만주족이 중국 본토를 노리고 남하하자마자 항복하여 포의(만주어 로 노예라는 뜻)로서 청나라 정권에 들어갔다. 그러나 포의는 청나라 황제에게는 확실히 노예였으나 사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05

206 회적으로는 황제의 심복으로서 힘을 행사하였고 지위도 매우 높았던 것이다. 특히 조설근의 증조모가 청조 제 4대 황제인 강희제(재위 1661년-1722년)의 유모였기 때문에 조씨 집 안에 대한 강희제의 배려는 각별하였다. 이 덕택으로 증조부 조새가 강남의 견직물 생산 총감독에 해당 하는 강녕직조에 임명된 뒤 3대 4인에 걸쳐 연달아 이 직책을 차지하게 된다. 남경을 본거지로 하는 강녕직조는 대단히 수입이 좋은 직책인데다 직물업 총감독이라는 간판 이면에 는 이제 갓 성립된 청왕조를 위해 반청의식이 강한 강남의 정세를 탐색하여 황제에게 자세히 보고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관료제도 바깥쪽에 있지만 황제와 직결되는 이 중요한 자리를 세습한 것은 조씨 집안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힘과 부를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홍루몽, 퇴락한 귀족 조설근의 잃어버린 시간 조씨 집안은 조설근의 조부 부인(1658년-1712년)의 시대에 전성기를 부구하였다. 조인은 교양이 높은 탁월한 인물일 뿐 아니라 강남에 행차한 강희제 일행을 네 번이나 남경 자신의 집으로 맞이하여 방대한 연회를 열 정도로 재력 또한 대단하였다. 그러나 조인이 세상을 떠나고 10년 후 조가의 비호자였던 강희제의 시대로 막을 내리고, 옹정제가 즉 위하니 조씨 집안의 운명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옹정제 5년(1727년)에 공금 횡령으로 고발당 하여 재산몰수 처분을 받고 조씨 집안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나이 어렸던 조설근도 호사스러웠던 생활에서 일순간 빈궁의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후 죽는 그 순간까지 조설근의 삶에는 볕이 들지 않았다. 불우한 조설근은 실제로 대귀족 그 자체였던 조씨 집안의 영광에서 몰락의 과정을 문학적 창작물로 구체화하는 대대적인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홍루몽은 바로 조설근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서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퇴고에 퇴고를 거듭한 피나는 창작의 나날은 조설근의 수명을 단축시켜 홍루몽은 결국 미완인 채 끝나 버렸다. 홍루몽 1백 20회 중 조설근 자신이 직접 쓴 것은 80회까지이고 후반부 40회는 조설근 의 구상을 기초로 고악이 집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완으로 끝났지만 조설근이 사력을 다해 집필 한 홍루몽은 중국 고전 소설사에 우뚝선 금자탑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조설근은 홍루몽에 주도면밀한 허구적 상황을 설정했는데, 시대와 장소(일단 장안으로 되어 있으나)도 명백하지 않고 무대가 되는 가가도 단지 개국 공신의 자손이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가가 일족의 화려하고 웅장한 저택은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나는 시조인 영국공 가인의 자손으 로서 4대째 후손인 가진을 당주로 하는 영국부(8동쪽 저택)이며, 또 하나는 가인의 동생 가원의 자손으 로서 현재 3대째 후손인 가사를 당주로 하는 영국부(서쪽 저택)이다. 홍루몽의 이야기 세계는 후자인 영 국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남성지배논리를 거부한 남자 가보옥 홍루몽의 주인공 가보옥은 영국부 당주 가사의 동생 가정의 차남이다. 귀공자 가보옥은 용모뿐 아니 라 머리도 아주 총명한 소년이었는데 다만 성격이 좀 기괴했다. 그는 여자는 물에서 나온 몸이고, 남자 는 진흙에서 나온 몸, 나는 여자를 보면 상쾌하지만 남자를 보면 냄새가 나서 가슴이 울렁거리고 역겹 다(제 2회)고 공언할 뿐만 아니라 금릉십이채라고 불리는 미모의 자매나 종자매 나아가서는 시녀들과는 잘 어울려 즐겁게 노는 반면, 어른스런 남자가 되기 위해 필수인 사서오경 공부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 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남자이면서도 남성의 지배논리를 외면하는 가보옥과 개성적인 미소녀들이 만들어내는 복잡 다양한 모습이 홍루몽의 중핵을 이루고 있다. 홍루몽의 최대 특징은 수십 명에 달하는 가족과 수백 명에 이르는 하인들로 구성된 가가라는 대가족 의 내부에 초점이 맞추어진 점이다. 내부이기 때문에 중심이 되는 것은 물론 여자들이며 외부족인 존재 인 성인 남자들은 존재 자체가 아주 희미하게 다루어졌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06

207 두 개의 영국부를 합한 가가 전체의 최고 권력자는 영국부의 당주인 가사, 그리고 가정의 어머니이자 가보옥에게는 할머니가 되는 가모(태사군)이다. 그러므로 가보옥의 부친 가정이 소녀들과 어울려 놀기만 하는 아들을 항상 언짢게 여겨 어떻게든 근성을 뜯어고치려고 했으나, 가모가 손자 가보옥을 극진히 아 끼므로 경솔하게 손을 댈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예를 들면 광대에게 마음을 빼앗겨 제정신을 잃고 시녀와 문제를 일으킨 보옥에게 화가 난 가정이 울 분을 풀 겸 보옥을 호되게 꾸짖자, 대노한 가모는 보옥을 감싸 성인이 된 아들 가정을 심하게 몰아대며 그가 두 번 다시 보옥을 때리거나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맹세하여도 도무지 용서하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너는 나를 돌볼 생각이 없는 것이야, 그렇다면 이 집을 나가 보옥을 데리고 남경(가가의 비 어 있는 집이 있는)에라도 가겠다 고 씩씩거리면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 마침내 진퇴양난에 빠진 가정 은 엉엉 울며 가모에게 용서를 구하는 형편이었다. 귀족 사치의 백과사전 이러한 예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가가 일족에서 가장 윗세대에 속하는 가모는 말하자면 가가의 대모이며 보옥의 엄부 가정되 그 절대적인 권력 앞에서는 아들로서 다만 넙죽 엎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 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홍루몽이 묘사하는 대귀족 가가의 내부세계는 대모인 가모를 정점으로 구성된 여자 중심의 세계였다. 결국 소녀를 지고하게 여기고 세속에 물든 남자를 혐오하는 가보옥은 그의 감각과 가 치관을 높이 평가하는 대모의 비호 아래 여자들 세계에 깊이 관여하는 것을 허락받은 특권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홍루몽은 호화로운 의복, 공들인 요리, 사치스런 일상 용품, 세련미를 응축한 듯한 정원 등에 대하여 자세하게 구석구석을 묘사하여 귀족 사치 백과사전이라고 부를 만한 일면이 있다. 더욱 특징적인 것은 사치를 실컷 향수하는 주인공이 역시 여자들이라는 점이다. 여자들은 어떤 의복과 액세서리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여성인 왕희봉(당주 가사의 장남 가연의 처)을 예로 들어보자. 금실로 꿴 진주와 여러 가지 보석으로 치정을 곁들인 머리를 틀어 올리고, 다섯 마리의 봉황이 각각 입에 진주를 물고 있는 모습을 한 갈래지은 비녀를 꽂고, 목에는 웅크리고 않은 교룡과 합하여 만든 진 주를 장식으로 한 순금 목걸이를 걸고, 치마에는 넙치모양으로 새긴 장미색 옥을 정반대 색깔의 녹색 실로 꼬아 달고 있다. 몸에는 꽃들 사이를 날아 다니는 나비들을 금실로 수놓고, 꼭 맞게 만든 진홍빛 외제 공단 저고리를 입고, 더욱이 위에서부터 은서 모피를 안감으로 대고 오색 실로 모양을 낸 옅은 회 청색의 예복을 걸쳐 입고 있으며, 밑에는 꽃을 흩뿌린 도안으로 엷고 보드라운 비취색의 바탕이 쪼글쪼 글한 비단 치마를 입고 있다. -(제 3회) 육조귀족도 무색해질 정도의 우아함이다. 더욱이 글짓시 대화인 시회를 개최하여 시재를 겨루는 인물 은 임대욱(보옥의 부친 쪽 사촌누이. 보옥이 가장 사랑하는 소녀)이나 설보채(보옥의 모친 쪽 사촌 누이. 임대옥의 경쟁자)를 비롯한 소녀들인 것이다. 이 소녀들은 공부를 싫어하는 보옥 따위는 발 밑에도 미치 치 못할 만큼 교양과 감각이 뛰어났다. 이러한 홍루몽의 이야기 구조는 대모인 가모가 군림하는 대가정 내부의 여자 세계에서 여자들, 특히 미혼 소녀들의 물질적 정신적 사치 행태를 그려낸 것으로, 중국의 전통적 사회구조를 문학이라는 범주 를 매개로 하여 송두리째 뒤집어 보여준 것이다. 그렇지만 성적 차이를 불문하고 가정 안에서 윗세대를 무조건 존중하고 어머니의 힘을 그지 없이 높 이 받드는 것은, 실은 예로부터 내려온 중국 전통이었다. 어쨌든 부모에 대한 효행은 유교사상의 기본이 념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홍루몽의 특징은 가모의 어머니의 힘을 극단적으로 강하게 그려내고 또한 모든 여자들을 남자의 괘의 치 않는 자신과 힘이 있는 존재로 형상화한 점이다. 홍루몽의 작자 조설근은 유교사사의 효행이념을 역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07

208 으로 취하여 또 하나의 이념인 남존여비사상의 존립기반 자체를 부정해 버림으로써 자신의 반골정신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여자들의 천국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가의 소녀들이 화려한 나날을 보낸 무대는 영국부 안에 만든 대관원이라 불리 는 큰 정원이었다. 대관원은 원래 가보옥이 누이로 궁중에 들어가 귀비가 된 원춘이 친정 나들이 올 때 맞이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영국부의 한켠에 만든 정원이었다. 이 대관원은 석승의 금곡원이나 왕희지의 난정처럼 경치가 빼어난 명소를 골라 지은 별장과 달리 도 회지 한가운데에 만든 완전한 인공정원이다. 인공정원은 제한된 공간을 절묘하게 꾸며 세계를 모형으로 연출한 것이다. 우선 대관원의 문을 들어서면 돌연 흙을 모아 만든 축소판 산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이 산이 없다면 정원속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와 아무런 매력도 없어져 버립니다 (제 17회의 가정의 말) 하고 말했다. 이 축소판 산을 돌아가면 각양각색의 기괴한 모양을 한 거대한 흰 돌들이 무리지어 서 있고, 돌 사이 로는 작은 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축소판 산으로 전모를 가리고 길을 구불거리게 하여 거리감을 나타 낸다. 이것은 이른바 중국식 정원의 기본적인 공간처리술이다. 대관원은 이런 기본 구조에다 더욱 특이한 것은 곳곳에 맑은 물이 흐르게 되어 있어, 산 넘고 물 건 너 거닐다 보면 나무와 꽃으로 이어지던 사위에 어느덧 요소요소 독자적 풍모를 띤 아름다운 건물이 홀 연 출연하도록 되어 있다. 확 트인 지점에 당당하게 우뚝 선 정전, 푸른 대나무 숲이 펼쳐진 곳에 흰 벽으로 단장해 지적인 분 위기를 자아내는 세련된 몸집의 소상관, 입구에 진홍색 해당화를 심고 방 안도 정교하게 세공된 가구들 로 장식하여 호화롭기 이를 데 없는 이홍원, 두약과 형무를 비롯하여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향 초에 둘러싸인 우아한 형무원, 꽃이 무리지어 만개한 수백 그루의 살구나무와 어우러진 소박한 시골집 풍의 도향촌 등 인간이 상상해 낼 수 있는 온갖 다양한 취향을 이 건물들이 실현해 낸 것이다. 대관원은 산이 있고 계곡이 있으며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건물이 있어, 그야말로 정밀하게 설계 된 세계의 모형인 것이다. 가가가 막대한 돈을 들여 만든 대관원에는 원춘 왕후의 친정 나들이가 끝난 뒤 보옥과 그이 자매와 종자매들이 각각 시종을 거느리고 살게 된다. 귀공자 보옥은 호화로운 이홍원에, 날카롭고도 섬세한 임 대옥은 세련된 소상관에, 임대옥과는 대조적으로 균형감각이 뛰어난 냉정한 설보채는 우아한 형무원에, 보옥의 죽은 형 가주의 과부 형수 이환은 시골집 풍의 도향촌에 각각 거처했던 것이다. 공간 환상의 극치 대관원에는 특권적 존재인 보옥 외에는 여자만이 거처할 수 있고 그것도 소녀와 과부로 제한된다. 대 관원은 남자의 분위기는 조금도 풍기지 않는 완벽한 소녀들의 정원인 것이다. 대관원은 왜 이러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홍루몽의 이야기 구조와 깊은 관계가 있다. 홍 루몽의 소설세계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 보옥과 여기에 등장하는 소녀들은 원래 천상의 여인 세계 태허환경의 주인이었는데 지상세계로 내려가고 싶은 소망을 버릴 수 없어 인간으로 태어나 가가의 사람 이 되었다고 한다. 대관원은 꿈의 나라 태허환경을 그대로 지상에 옮겨다 놓은 셈이다. 조설근의 상상으로 태어난 대관원은 지상에 내려가고자 하는 천상세계의 꿈과 환상의 정원인 태허환 경과도 겹쳐지면서 결국 이중의 의미에서 환상의 정원이 된다. 정원이란 본래 인간의 공간에 대한 환상에서 기초하는 것이 아닐까. 공간을 설계하여 나무나 꽃을 심 고 혹은 산을 축소하여 만들고 또한 시냇물을 흐르게 하는 등 상상을 구체화해 나간다. 몰락한 가문의 조설근은 자신이 설계한 공간 환상을 실현해 낼 자금이 없으므로 오로지 붓으로 대신하려 했던 것이다. 보고 들은 훌륭한 정원의 기억을 더듬고 가꾸어 되살려낸 환상 정원에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 환상의 소녀들을 살게 한다. 이렇듯 대관원은 조설근의 못 이룬 꿈의 결정체임과 동시에 인간에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08

209 게 가능한 공간 환상의 극치까지 보여주는 것이다. 호화롭기로 치자면 이토록 호화로운 정원은 없을 것 이다. 예술의 경지에 달한 음식 사치 홍루몽에 함축되어 있는 귀족의 사치는 대관원뿐만 아니라 의식주 등 모든 영역을 빠뜨리지 않고 있 는데, 여기에서 음식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하루는 유 할머니라는 시골 노파가 가가를 찾아왔는데, 가지를 완전히 가공한 가상 이라는 요리를 대 접받고 맛이 너무 좋아 깜짝 놀라는 장면이다(제 42회). 그 유 할머니 딸의 시가는 왕씨인데 왕부인(보 옥의 어머니)과 왕희봉의 친가이고 역시 대귀족인 왕씨 일족과 성씨가 같다는 점 때문에 갖고 대우를 받고 있었다. 노파는 가상을 먹으면서도 도무지 그 재료가 가지라는 것을 믿을 수 없어서 그렇게 만드는 비결을 묻 자 왕희봉은 이렇게 대답한다. "간단해요. 가지를 따서 껍질을 벗겨 깨끗한 속살만 남기고 잘게 다져서 닭 기름에 튀깁니다. 따로 닭 의 가슴 고기와 표고버섯, 신순(새로 돋아난 죽순), 마려(버섯의 일종), 오향부간(다섯 종류의 향료를 넣 어 두부를 조려 말린 것), 갖은 말린 과실을 모두 잘게 다져 (가지와 함께) 닭 스프에 넣고 약한 불에 끓인 다음, 참기름을 조금 넣고 거기에 지게미로 만든 기름을 첨가하여 잘 섞어 항아리에 담아 엄중히 봉합니다. 먹을 때는 볶은 계조(닭 발 혹은 가슴 살을 주사위 모양으로 자른 것)와 약간 석으면 되죠." 이야기를 들은 유 할머니는 나무아미타불! 열 마리쯤 되는 닭이 들어가는구나. 그 때문에 이렇게 맛이 나는구나 하고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였다. 시간을 들이고 복잔한 과정을 거쳐 자르고 끓이고 섞은 다음 일정 기간을 봉해서 담가두는 이 조리기 술은 거의 예술적이며, 연료에 공을 들인다고는 해도 그다지 식욕을 돋우지 못했던 서진귀족의 요리법 과는 천양지차이다. 하찮은 가지이긴 하지만 복잡하고 오묘하며 섬세한 맛을 낼 것 같은 느낌이 글을 통해서도 절로 느껴진다. 이 예에서 알수 있듯이 홍루몽 세계에 상징적으로 나타난 청조의 귀족들이 보여준 음식에 대한 사치 는, 단지 비싼 것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벼락부자 취미이다)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공 을 들여 요리하는 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예를 들면 보옥은 설보채의 오빠인 설반의 생일 잔치에서 돈으로 사는 음식물이나 의복은 결국 역시 내것은 아닙니다. 다만 스스로 쓸 글씨나 그림이야말로 내것이 됩니다.(제 26회) 라고 하며 손수 만든 서화를 선물하려고 하였다. 또한 소녀들이 생일 선물로 준비하는 것은 거의 다 손수 바느질하여 만든 자잘한 도구였다. 물론 가 가의 소년소년는 실내에서 거주하는 몸이며 정해진 용돈밖에 지닐 수 없었다고 생각되지만, 그들이 비 싼 물건보다 정성을 들여 손수 만든 것을 더 가치 있다고 평가하는 미의식과 가치관의 소유자임을 잘 알 수 있다. 귀족 사치의 특징, 세련과 퇴폐 육조귀족에서 홍루몽의 대귀족에 이르는 귀족들의 사치의 본질을 요약해보면 호화롭고 현란한 생활양 식을 마음껏 누리면서 동시에 물질적인 풍요로움의 초월을 추구하여 돈과 바꿀 수 없는 정신적 가치를 중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모 가모를 정점으로 하는 홍루몽의 대귀족 가가는 대관원 건축으로 막대한 돈을 쏟아부은 것을 기 점으로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고 마침내 몰락하여 모든 부귀영화도 한바탕 꿈으로 사라져 버린다. 대관원에서 웃고 소곤거리던 소녀들도 병약한 임대옥이 사랑하던 보옥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조설근이 지은 화려한 환상세계는 이렇게 얼어붙 고 막을 내리는 것이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09

210 홍루몽은 근본적으로 불행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는 퇴락하기 시작한 대귀족 일가를 무대로 귀족 사치 의 본질을 웅변하고 있는데, 이것은 조설근 자신의 경험을 생각해 보더라도 상당히 암시적이다. 육조귀족에서부터 홍루몽에서 보이는 귀족들의 사치는, 황제의 노골적인 권력과시형 사치나 다음 장 에서 서술한 상인의 사치에서 보이는 번쩍번쩍한 생명력이나 강렬한 상승 욕구 경향을 촌스러움의 극치 라고 배타시하였다. 그들은 섬세한 미적 세계를 추구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뿌리에서부터 깊이 병들어 있는 듯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세련미를 추구하는 귀족사치의 특성이다. 제 3장 상인의 사치향락 그때는 마침 이교아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주방에슨 생선이나 고기 요리와 온갖 반찬이 있었고, 상 을 내오기 시작하는데 끝이 없었다. 우선 과일 네 접시와 야채 절임 네 접시가 놓이고, 다음으로 두어 한 접시, 집오리 지게미 절임 한 접시, 오피계 한 접시, 무로공 한 접시 등 술 안주 네 접시가 나온다. 이어 네 종류의 요리를 날라왔는데, 한 접시는 얇게 저며 경단식으로 튀긴 고기, 한 접시는 지방이 듬뿍 들어 있는 양간, 또 한 접시는 매끈매끈한 미꾸라지였다. - 금병매 중에서 1. 욕망의 자기증식 상인의 신화 도주공 사마천의 사기 화식열전에는 교역으로 떼돈을 번 고대 중국 대상인의 전기가 들어 있다. 맨 처음 등장하는 대상인은 범려이다. 범려는 춘추시대에 월왕 구천(? - 기원전 465년)의 참모로 활약 한 인물이다. 구천이 온갖 어려움 끝에 숙적이었던 오왕 부차(? - 기원전 473년)를 물리치고 천하의 패 왕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범려의 공이 컷다. 그러나 그 뒤 범려는 구천의 인간성은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은 가능하나 즐거움을 함께 하는 것은 불 가능하다는 생각과 멍청히 있다가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구천에게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뱃길 을 통해 제나라로 탈출하였다. 이리하여 범려는 치이자피라고 이름을 바꾸고 상인 자질을 한껏 발휘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뒤이어 춘추열국의 상거래의 중심지에 해당하는 도나라로 옮겨 가 이번에는 주공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점포를 열었는데, 물건을 저장해 두었다고 시기를 노려 판매하는 방법으로 역시 큰 돈을 벌었다. 범려, 즉 도주공은 기회포착 능력이 뛰어나 문자 그대로 일확천금을 세 번이나 거머쥘 수 있었다. 그 런데 그 중 두 번은 과감하게도 가난한 친구나 먼 친척에게 나누어 주었다. 도주공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욕심을 버려야 할 때와 단념할 때를 알았는데, 노년에는 조금도 주 저하지 않고 사업에서 손을 떼고 자손에게 물려주었다. 그 뒤 자손들은 사업을 더욱 번성시켜 마침내 그는 억만장자가 되었다. 제후의 슬기로운 계략가에서 억만장자로 화려하게 변신한 도주공의 이야기는 상인 신화의 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 더 하자면 범려는 월나라에서 탈출했을 당시, 오나라 왕 부차를 농락하기 위 해 자진해서 오나라에 들어갔던 운명의 미녀 서시를 같이 데리고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도주공은 기원전 5세기 고대 중국의 뛰어난 대상인이었는데, 중국에서 상업이 본격적으로 번창하기 시작한 것을 훨씬 이후인 근세에 들어서이다. 즉 11, 12세기의 송대부터이며, 상인 계층이 멸시당하지 않고 요직을 차지하게 된 것은 15, 16세기 명대 중기 이후부터였다. 그러므로 황제의 사치, 귀족의 사치와 대비되는 상인 사치의 특성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명대의 상인 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명대의 장편 백화소설의 걸작 금병매에서는 상인 사치의 극단적 인 예를 엿볼수 있다. 금병매는 주인공인 벼락부자 서문경의 무한한 욕망의 세계를 묘사한 것이다. 이제 부터 금병매를 중심으로 상인의 사치 행태를 탐구해 보도록 하자. 금병매의 서문경 금병매는 16세기 말 명나라 말기 만력연간(1573년-1620년) 때쯤 쓰여졌다. 이야기는 수호전의 에피소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10

211 드에 살을 붙여 서문경과 반금련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지은이는 소소생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는데 실제로는 어떤 인물인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아주 교양 있는 지식인이라는 점만은 틀림없다. 지은이가 송대 이래 번화가의 일반 서민 생활에 근거한 신흥 문학장르인 소설의 작자임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를 결코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금병매는 문학의 새로운 장르인 소설에서 신흥 벼락부자인 상인을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장편 이다. 금병매의 시기적 배경은 12세기 초 북송 말기로 설정되어 있지만, 실제 무대는 지은이가 살고 있던 16세기 명나라 말기였다. 금병매의 주인공 서문경은 산동성 청하현의 약장수였는데, 젊었을 때부터 방탕하고 불량하고 짝이 없 어 남들이 싫어하던 인물이었다. 다만 눈치가 빨라 상술이 뛰어났고 점차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음탕 하기가 자기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는 반금련과 만났을 때 그는 서른도 채 안 된 나이였다. 그때 이미 그는 현의 관공서에 얼굴을 내미는 등 지역 유지 명단에 올라 있었다. 금병매에서는 서문경의 색정광으로서 편력을 전면적으로 다루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인으로서 승승 장구하여 대사업가로 변해가는 과정, 조정과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기반을 다져나가는 모습 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한마디로 서문경은 색정이 달아오르는 것에 비례하여 정력적으로 사업을 벌여나갔던 인물이었다. 살인도 서슴지 않는 색정 편력의 동반자 단적으로 말하면 금병매는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서는 먼저 서문 경의 색정 편력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서문경은 반금련과 우연히 만나기 전에 이미 정실 부인 오월랑 이외에도 기녀 출신 이교아, 하녀 출 신 손선아 등 두 명의 첩을 거느리고 있었다. 당시는 일부다처제라서 처와 첩의 한 지붕 아래서 생활하 고 있었다. 게다가 가난한 지방관리의 딸이었던 오월랑은 정실이지만 후처였다. 서문경의 애정행각에 둘도 없는 상대역이었던 반금련은 바느질집 딸이었다. 9세 때 아버지가 죽고 어 머니 손으로 왕초선이라는 관리 집으로 팔려가서 화장하는 법에서부터 노래, 춤, 음악을 완전히 통달하 게 되었다. 왕초선이 죽자 반금련의 어머니는 또다시 재산가인 장대호의 하녀로 딸을 팔아 넘겨, 어느새 반금련은 그와 깊은 사이가 되었다. 장대호의 부인은 이러한 관계를 눈치채고 노발대발하며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장대호는 마지못해 반금 련을 시집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상대로 선택된 사람은 떡장사를 하는 땅딸보 추남 무대였다. 반금련은 참을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무대와 살림은 차렸다. 이때 호랑이를 잡아 용맹스럽기로 소문난 관리로 임명된 무대의 동생 무송이 등장한다. 반금련은 무 송의 늠름한 남자다움에 홀딱 반해 버린다. 반금련은 온갖 유혹과 교태를 부려보았으나 형을 끔찍히 생 각하는 무송은 조금도 출장을 가게 되었다. 무송은 형에게 음탕한 형수한테서 눈을 떼지 말라고 신신당 부하고 여정에 올랐다. 무송이 우려한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이 일어났다. 서문경이 우연히 반금련을 보게 되었는데 요 염기가 철철 넘치는 모습에 그만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래서 서문경은 무대와 반금련 부부의 이웃에 사는 왕노파에게 거금을 주고 소개를 부탁하였다. 노련하고 교활한 왕노파가 돈을 두둑이 챙기고서 무 대가 눈치채지 않도록 두 사람을 만나게 하니, 그들은 깊은 사이가 되었다. 반금련도 정력 좋은 서문경에게 완전히 빠지게 되었다. 왕 노파의 집에서 밀회를 거듭하는 가운데, 그 토록 사람 좋은 무대가 부인의 부정을 알아차린다. 어쨌든 무대에게는 호걸인 동생이 있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서문경과 반금련은 왕 노파의 충고대로 무대에게 비소를 마시게 하여 독살해 버린다. 서문경은 약재상이기 때문에 비소를 구하는 일 따위는 식 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11

212 무대를 직접 죽인 사람은 반금련이었지만, 사체의 처리에서부터 장례식까지 모든 뒷일을 도맡아 매듭 지은 사람은 왕노파였다. 왕노파는 서문경과 반금련조차 몸을 사릴 정도로 간악하고 교활한 인물이었다. 뒤늦게 집으로 돌아온 무송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는 관청에 소송을 냈다. 그러나 서문경의 뇌물 에 녹아 있던 관리들은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무송은 서문경을 때려 죽여 버리겠다고 결심하고, 서문경이 현의 관리 이외전과 술을 마시고 있던 요리점으로 달려 들어 갔다. 그러나 정작 서문경은 도망가 버리고 없었고 엉뚱하게도 이외전을 죽이게 된다. 이 사건 때문에 무송은 살인죄로 체포되어, 사형을 간신히 면하고 청하현에서 멀리 떨어진 맹주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위험인물이 없어지자 서문경은 반금련을 다섯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리하 여 무대를 살인한 공범자들은 정정당당하게 성의 유희를 벌였던 것이다. 친구 마누라까지 탐한 서문경의 정력 서문경은 처와 첩을 합해 모두 세 명의 여자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반금련이 넷째 부인이 아니라 다섯 째 부인이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반금련이 남편을 죽인 뒤 장례식이다 뭐다 하고 뒤처리에 급급할 때, 다른 한편에서 서문경은 빈틈없는 왕노파가 시키는 대로 또 한 명의 여자를 맞아들이게 되었다. 네 번 째 부인은 포목점을 꽤 크게 하는 자식 없는 과부 맹옥루였다. 서문경은 셋째 부인이 병으로 죽자 넷째 부인으로 맹옥루를 맞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정실 부인의 오월랑, 둘째 부인이 기생 출신 이교아, 셋째 부인이 하녀출신 손설아, 넷째 부인 맹옥루였는데, 여기에 다하여 반금련이 다섯 번째 부인이 된 것이었다. 맹옥루는 서문경과 혼담이 있기 전에 관리 아들의 후처로 들어가라는 권유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 나 맹옥루는 굳이 가난한 관리 아들의 정실보다 돈 많은 상인 서문경의 넷째 부인 자리를 택할 정도로 이재에 밝고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맹옥루의 선택에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때 이미 사농 공 상 순의 전통적인 계층 구분이 희미해지고 최하층이었던 상인이 떠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색정광 서문경은 다섯 명의 처와 첩 사이를 오가면서도 반금련의 하녀인 춘매와 깊은 관계 를 맺는 등 매우 바쁘게 여성 편력에 나섰다. 그 와중에 유곽 또한 빠뜨리지 않고 드나들었기 때문에 정말 대단히 분주하였다. 이런 서문경 앞에 또 한 명의 몹시 매력적인 미녀가 등장한다. 서문경과 한패 거리인 옆집 화자허의 처 이병아이다. 이병아는 원래 양중서라는 고관의 부인이었는데 양가가 모종의 사건에 연루된 탓으로 헤어지게 되었 다. 그 뒤 환관 화태감의 조차인 화자허의 정실부인이 되었고, 화태감이 병으로 죽은 뒤 화자허 부부는 그의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아 태감의 고향 청하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돈에사 시간까지 남아노는 화자허는 서문경의 놀이패거리에 끼어들게 되었는데, 사실 그 패 거리는 서문경의 측근들일 뿐이다. 주로 가업인 포목점이 파산한 뒤 유곽에서 파묻혀 살고 있는 응백작 을 비롯하여, 부자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떡고물이나 주어 먹으려는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화자허는 그야 말로 둘도 없는 물주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그들의 꾐에 빠져 며칠씩이나 유곽에 머무는 등 화자허의 생활은 완전히 난잡하게 되었다. 화자허의 부인 이병아는 칠칠치 못한 남편에게 점점 정나미가 떨어져 갔다. 이 무렵 아주 정력적이고 의지할만한 서문경을 알게 된 것이다. 서문경은 정력적일 뿐 아니라 중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미 남인 반악(서진의 시인) 못지 않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이병아는 이 미남자에게 한눈에 반해 버렸고, 적 극적으로 기회를 만들어 순식간에 깊은 사이가 되었다. 서문경은 부지런히 담을 타고 넘어 이웃집 이병아에게 들락거렸다. 이런 와중에 화자허는 화태감의 유산을 둘러싼 소송에 휘말려 관에 끌려가고 말았다. 당황한 이병아는 삼천 냥에 달하는 금은재보를 서 문경에게 맡기고, 관에 손을 써 화자허를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서문경은 관의 고관들에게도 얼굴이 알 려져 있었으므로, 큰 돈도 들이지 않고 모양 좋게 화자허를 풀려나게 했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12

213 그러나 석방의 조건은 가옥과 전답을 모두 팔아 다른 친척에게 재산을 분배하는 것이었다. 화자허는 풀려나기는 했지만, 집을 팔아야 했고, 부인 이병아에게는 질책을 당해야 하는 등 완전히 진퇴양난에 빠 져 버렸다. 서문경에게 집을 사달라고 울면서 부탁했지만, 그는 이병아와의 관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 워 전혀 상대하지도 않았다. 이병아는 화자허에게 조금의 미련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이병아가 삼천 냥의 재산도, 관에서 풀 려나게 하는 데 다 들어갔다고 하기로 서문경과 미리 짜고 빼돌려 화자허는 그야말로 빈털털이가 되었 다. 오도가도 못하게 된 화자허는 구매자를 찾지 못한 채 울며불며 집을 떠났다. 비록 그는 돈을 빌려 따 로 집을 구했지만, 실의에 빠진 끝에 얼마 지나지 않아 열병으로 죽게 되었다. 악의 논리가 생의 에너지 반금련의 남편은 독살되고 이병아의 남편은 쫓겨나 병사하였다. 돈 많고 정력적인 서문경과 만난 사 람들은 이렇게 몰락해 갔다. 그야말로 약육강식 논리 그 자체인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어느 경우에나 꼭 여자가 공범이 되고 오히려 서문경을 부추겨 약한 남자를 도태시 켜 버렸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어느 정도 희미해져갈 무렵 서문경은 이병아에게서 받은 삼천 냥의 자금으로 이웃 화자허의 집을 사들였다. 그리고 호화로운 정원을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하 였다. 이리하여 서문경은 예전의 약속대로 이병아를 여섯째 부인으로 맞아들이려 하였다. 그런데 이 일만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정실 오월랑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힌데 이어, 서문경의 전처가 낳은 딸의 시가쪽 인 진가가 모종의 사건에 말려들어 대소동이 벌어졌던 것이다. 진자의 친척인 조정 중신 양전에 탄핵을 당하고 시아버지 진흥도 함께 연루되어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서문경의 딸과 사위 진경제가 서문경 집으로 피신했는데 이로 인해 서문경까지 처벌받는 사태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때 서문경은 잔뜩 겁을 먹고 아랫사람들 득달같이 관청으로 보내 으레 그랬듯이 뇌물작전을 써서 간신히 죄를 면하게 되었다. 서문경이 이 사건으로 허둥대는 사이에, 이 병아는 서문경이 데리러 오는 것을 기다리다 못해 반죽음이 되다시피 했다. 그러다 가끔 치료하려 오는 가난한 의사 장죽산과 깊은 사이가 되어 그 남자와 재혼해 버렸다. 이 사실을 안 서문경은 분통이 터지지 않을 리 없다. 딴 사람을 내세워 장죽산을 호되게 닦아세운 다 음, 장죽산이 빌린 돈 삼천 냥을 떼어먹었다고 억지 누명을 뒤집어 씌워 관청에 끌려가게 하였다. 이병아가 삼천 냥을 관에 뇌물로 갖다바쳐 장죽산은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이병아 는 이 남자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그의 곁을 떠나 버린다. 결국 이병아는 원래 상태로 되돌아갔고 서문 경의 여섯째 부인이 되었던 것이다. 반금련은 서문경의 다섯째 부인이 되고 나서도 이랫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는 등 갖은 풍파를 일으켰 다. 이윽고 이병아가 서문경에게는 첫 아들은 관가를 낳아 주었다. 자연히 서문경의 애정이 이병아에게 기울어지자 반금련은 질투에 불타올랐다. 그러다 자신의 욕정을 위해 남편을 독살했던 독기가 다시 발 동외어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관가를 앙심을 품고 해코지하였다. 결국 관가는 일 연도 못되어 죽어 버 렸다. 위에서 보았듯이 이병아는 여섯째 부인이 되기 전에는 상당히 강렬한 독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 데 여섯째 부인이 된 뒤에느느 마치 악귀가 떨어져 나간 듯이 부드럽게 변한다. 그러다 이병아는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아도 자라지 않는 관가를 키우는 데 심하게 시달리다 관가가 죽자 비탄에 빠져 더욱 쇠 약해졌고, 그만 죽어 버렸다. 어쩌면 금병매에서는 인간의 강한 생명력은 독기 서린 악의 논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13

214 성의 광연 이야기가 앞서 나갔는데 서문경은 소원대로 이병아를 여섯째 부인으로 맞이하고 나서 장사의 규모도 훨씬 커졌다. 그리고 뇌물을 부지런히 바친 덕분에 조정의 실력자와도 관계가 돈독해져 갔다. 그는 관가 가 태어났을 즈음에는 산동 제형소의 이형(재판을 담당하는 관청의 차관) 지위에 오르고, 뒤에는 수장의 지위에까지 오른다. 악랄한 장사를 하기에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서문경은 여섯 명의 처와 첩에 둘러싸여 아쉬울 것 없는 세월을 보낸다. 그러나 욕망이란 끝 없이 꿈틀대고 기승을 부릴 대로 부려야만 하는 것. 여자를 밝히는 색광증은 더욱 심해져 하녀들이나 기생은 말할 것도 없고 양가집 과부에서부터 고용인의 부인에 이르기까지 거의 손대지 않는 여자가 없 었다. 서문경은 이 정도로 성이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촌각이 아까울세라 가까이서 시중을 드는 남자 몸종 을 상대로 남색까지 탐닉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야말로 정력의 화신이라 불러야 마땅한 인물이다. 상대 여자들 중에는 래왕이라는 사람의 아내인 송혜련처럼 서문경과의 관계가 드러나 자살한 불행한 예가 없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자들은 눈치껏 처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서문경이 부리던 어떤 사람의 아내는 남편과 한패가 뒤어 의도적으로 서문경과의 관계를 맺고 끊임없이 금전을 요구하거나 물건을 조르기도 했다. 낯 두꺼운 서문경도 무색할 지경이었다. 이렇듯 서문경은 미친 듯이 성의 유희에 빠져들다 급기야는 피로가 겹쳐 이 생활이 고달퍼지게 된다. 음탕한 반금련은 치사량에 가까운 미약(성욕을 돋우는 약)을 서문경에게 주고 마침내 그는 목숨을 잃는 처지가 된다. 그때 서문경의 나이 33세. 미친 듯이 여색을 탐한 서문경의 말로였다. 졸부의 음식 사치 생각해 보면 상인 서문경은 여성관계뿐 아니라 의식주 모든 면에 대해서도 욕망으로 점철된 삶을 살 았다. 그는 재산이 늘어날수록 번드르르하게 차려 입힌 처와 첩을 여러 명 거느리고 쉴 새 없이 연회를 열 었다. 물론 온갖 산해진미나 맛좋은 술을 대접했다. 게다가 집에는 한껏 화려하게 꾸민 정원을 조성하는 등 의식주 모든 면에 걸쳐 주저없이 돈을 퍼부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송혜련은 끝에 가서 자사랗는 처지가 되었지만, 서문경과의 관계로 득의만면했을 때에는 눈부시게 화려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진주로 장식한 머리띠를 하고, 금등롱 귀걸이를 너울거리고, 겉옷 아래에 있는 붉은 명주 바 지에 수놓은 무릎 바대와 넓은 소매 자락 안에는 향다목서환(향기 나는 차와 물푸레나무로 만든 구슬) 을 넣어 서너 가지나 되는 향을 몸에서 풍기고 있었다. -금병매. 제 23회 게다가 음식대접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연회에서도 눈길을 끌 만한 점이 발견된다. 금병매에는 서문경의 엽색가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노골적인 묘사에 뒤지지 않을 만큼 음식에 대한 묘 사가 많다. 예를 들어 보자. 서문경이 호승(인도에서 온 승려)-서문경의 수명을 단축하는 데 쓰인 미약 제공자-을 대접하는 장면이다. 그때는 마침 이교아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주방에는 생선이나 고기 요리나 온갖 반찬이 있었고, 상을 내오기 시작하는데 끝이 없었다. 우선 과일 네 접시와 야채 절임 네 접시가 놓이고, 다음으로 두어 한 접시, 집오리 지게미 절임 한 접시, 오피계 한 접시, 무로공 한 접시 등 술 안주 네 접시가 나온다. 이어 네 종류의 요리를 날라왔는데, 한 접시는 흰 파와 함께 볶은 호두가 들어간 고기, 한 접시는 얇게 저며 경단 식으로 튀긴 고기, 한 접시는 지방이 듬뿍 들어있는 양간, 또 한 접시는 매끈매끈한 미꾸라지였다. 다음에 또한 탕과 밥이 나왔는데, 탕은 그럿 안에 두 개의 고기 경단이 가늘고 긴 고기 덩어리를 사이 에 둔 모양으로 하고 있어 일룡이주탕(한 마리의 용이 두 개의 진주를 가지고 노닐고 있는 탕)이라 불 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큰 접시에는 정수리가 갈라진 고기 만두가 그득 담겨 있었다. -금병매. 제 49회 거기에다 생선류, 조류, 수육, 간 등등 번쩍번쩍 기름기가 흐르는 값비싼 음식을 이것저것 끝도 없어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14

215 내왔다. 과연 돈을 흥청망청 써 대는 졸부 기질을 여지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 요리사도 아닌 하녀 출신 손설아가 조리장을 꾸리고 있는 만큼, 영양이나 차림새의 균형 때위는 아랑곳없이 어쨌거나 가짓수가 많은 것만이 대수였다. 그리고 그의 처와 첩들은 매번 희희낙낙 처음부 터 상에 달려들어 꾸역꾸역 먹어대기에 여념이 없었다. 금병매에서 나타난 서문경의 음식에 대한 사치 행태는 심미적 기준 따위와는 전혀 상관없었다. 요컨 대 닥치는 대로 성욕을 방출하여 엽색행각을 연출했던 것과 같은 똑같은 방식이었다. 무한증식의 욕망 서문경이 부린 사치의 성격은 여성관계와 의식주에서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세련미를 추구했던 귀족의 경우와 아주 대조적이다. 오히려 주왕과 같은 고대 황제들의 물량작전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정원도 황제의 거대한 정원에 비교할 수 없을만큼 작은 규모였다. 또한 최고의 권력을 휘둘러 전국 각지에서 불러들인 황제의 후궁에 비하면, 서문경이 부지런히 촉수를 뻗어 주위에 모은 여자들의 수 따위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양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던 사치라는 점에서는 확실히 황제의 경우와 공통된 일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상인 서문경의 사치 행태가 단순하게 황제의 사치 행태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황제의 욕망충족은 구심성이 그 특징이며, 여자건 물건이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 없는 것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자신에게 일극 집중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황제의 구심성에 반하여, 상인 서문경의 경우는 욕망 자체가 무한증식해 나가는 원심성을 가 지는 것이 최대의 특징이다. 여성관계만 보아도, 서문경은 보통 이상의 뛰어난 정력과 팽창 일로를 걷던 재력에 보조를 맞추어 여자들에게 촉수를 뻗쳐나간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도 일종의 강렬한 원심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황제는 상대 여성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권력의 힘으로 미녀라는 미녀는 모두 끌어모았다. 그 러나 서문경의 경우는 애정편력의 상대 여성 대부분이 자신들의 색욕이나 혹은 그의 재산에 대한 구미 가 발동하여 적극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어 나가는 행태였다. 이 때문에 서문경과 여자들 사이에는 매 상황마다 먹느냐 먹히는냐 하는 힘의 관계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남녀관계의 역동성은 금병매가 서문경의 엽색행각기에 머무른 황색소설(요컨대 에로소설)류에서 결정적으로 분리시키는 요인이다. 금병매의 이러한 특성은 서문경의 상대 여자들이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본 질긴 생명력의 소유자들 이라는 데서 연유한다. 즉 반금련과 이병아는 모두 어릴 적에 다른 집으로 팔려가는 등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는 가운데 결혼 하고, 그 뒤 서문경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서문경과 공모하여 남편을 죽음에 몰아넣은 끝에 서문경의 집에 들어갔다. 셋째 부인 맹옥루도 역시 재혼이다. 이 박에 서문경이 관계한 여자들은 세파에 닳고 닳은 기생 아니면 하녀, 부리던 사람의 아내 등 모두 억센 여자들뿐이었다. 때묻지 않고 순진한 사 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물론 작가가 서문경의 상대역으로 이러한 여성만을 배치한 것을 관계의 역동성을 중시한 금병매의 이 야기 구조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좀더 파고 들어가 보면 명나라 말 지배적인 시류로 자리잡고 있던 퇴 폐적 미의식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지식인이었던 작가는 서문경의 상대역을 아주 닳고 닳은 여자로 설정함으로써 모종의 의도를 꾀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벼락부자가 된 상인계층의 주체할 줄 모르는 욕망과 천박한 졸부 근성이 빚 어낸 기괴함을 야유하고 있는 것이다. 성욕에 비례한 자산증식 돌이켜 보면 서문경의 내부에서 삽시간에 세포분열 하듯이 늘어난 것은 비단 성욕만이 아니었다. 서 문경은 처음에는 약방만 경영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병아가 맡긴 3천 냥 등을 밑천으로 전당포를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15

216 열었다. 그리고 잇달아 다방면으로 사업을 확장하여 불과 7-8년 만에 엄청난 돈을 움켜쥐게 된다. 금병매에서는 상인 서문경이 번창하는 모양을 중매쟁이 노파 문수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 대목은 중매쟁이 노파 문수가 서문경의 청을 받고 대가집 음탕한 과무 임태태에게 찾아가 중 매를 서는 장면이다. 현청 앞의 서문 나리(서문경)는 지금 제형원 장관으로 계신데, 관리들에게 돈을 빌려주거나(흔히 말하 는 고리대금업), 포목전, 약방, 비단전, 실집 등 네 다섯 개의 점포를 열고 있으며, 이것 말고도 해운업까 지 운영하여 양주에서 소금을 사들이고 동평부(산동성 동평현)에서는 향나무와 밀을 거둬들이고 있습니 다. 지배인이 수십 명이고 도의 채태사(북송 말 조정에서 권세를 구가한 채경을 말한다)님은 이 양반의 양아버지(뇌물작전을 펼쳐 서문경은 채경과 부자관계를 맺었다)이고, 주태위(채경과 결탁하여 역시 악명 높은 인물)는 이 양반의 친척입니다(서문경의 지배인 한도국의 딸이 집사의 첩으로 되어 있다). 순무(지 방의 최고 장관)님이나 순안(각지를 순회하여 지방관리를 감찰하는 직책에 해당)님까지도 모두 절친한 사이이고, 부나 현의 지사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소유하고 있는 전답은 끝없이 넓고, 쌀은 창고 안에 썩을 만큼 있습니다. 붉은 것은 금, 흰 것은 은, 둥근 것은 진주, 빛나는 것은 보석입니다. 그 분 곁에는 대낭자, 이분은 청하좌위 오장관의 따님으로 후 처입니다만, 말고도 첩이 대여섯 명되고, 노래 춤 음악에 능란하여 총애를 받고 있는 시녀가 수십 명이 넘습니다. -금병매. 제 69회 이러한 중매쟁이 말 속에서 여자도 사치품의 일종이며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함을 잘 알 수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서문경이 뇌물작전으로 조정의 실력자와 교분을 두텁데 쌓아 왔다는 사실 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재산 증식을 거듭한 결과 서문경의 자산은 동산과 부동산을 합쳐 10만 냥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문경의 유산 그러나 이러한 경이적 성공도 난잡한 미약 남용으로 서문경의 죽자마자 흔적도 없이 무로 돌아가 버 린다. 지배인이나 총지배인이 잇달아 배신하고, 갑자기 팽창한 기업형태가 파산하기 시작하면서 정실부 인 오월랑은 원래의 약방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정리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서문경과 관계가 있었던 여자들도 집에서 나가 뿔뿔이 흩어지게 되며 그 대부분은 비참한 말로를 걸 었다. 예컨대 반금련은 다시 중매쟁이집 왕노파 밑으로 되돌아간 끝에 전남편 무대의 동생 무송에게 복 수를 당해 살해되고 만다. 금병매의 이야기 세계는 이리하여 벼락부자 상인 서문경이 여자에 장사에 과잉욕망을 극한까지 증식 시킨 나머지 파멸하고, 그 파멸과 동시에 그의 욕망의 대상도 역시 한자락 꿈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지 점에서 막이 내린다. 생각해 보면 그토록 많은 여자들과 관계하면서 서문경에게는 자식이 적었다. 처음의 정실부인이 낳은 딸과 이병아와의 사이에서 생긴 관가, 거기에 후처인 오월랑이 서문경이 죽은 뒤 얼마 안 있어 낳은 효 가까지 합해 이남일녀를 두는 데 그쳤을 뿐이었다. 이 세 명의 자식마저, 관가는 허약하여 요절하고, 딸은 서문경 사후 반금련과 관계하랴 유곽출입하랴 완전히 긴장이 풀려버린 남편 진경제에게 구박당하고 들볶여 자살하고, 단 하나 남은 유복자 효가도 운 명의 끈에 조종을 당해 북송 말기 동란의 와중에서 출가해 버리니 결국 서문경의 혈통은 끊어진 것과 다름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결말지어지는 금병매의 서술방식은 결코 단순히 인과응보라거나 권선징악이라는 상투적인 형 태에 따른 것은 아니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16

217 서문경의 과잉에너지는 폭발 끝에 파멸에 이르는 길밖에 다른 수가 없었고, 결국, 분수를 지킨 고대의 대상인 도주공이 부여준 지속성이라는 것과는 애치당초 인연이 없었던 것이다. 금병매의 종말에서 서문 경의 혈통 단절이 암시되어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의미일 것이다. 다만 개인으로서의 서문경은 파멸하여 그 혈통이 끊어진다고 해도 전체적으로 상업체계 자체는 아무 런 영향없이 지속되어 제2, 제3의 서문경을 낳는다. 그 증거로 금병매 작가는 서문경이 망한 뒤 청하현에서는 제 2의 서문경으로서 장이관이라는 인물이 급속히 두각을 드러내 서문경과 비슷한 방식으로 자산을 불려가는 한편 그 역시 색광 같은 쾌락에 빠지 는 모습을 덧붙여 쓰기를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꿀에 모여드는 개미처럼 이 장이관의 주변으로 응백작을 비롯한 서문경에게 알랑거리며 꾀어들었던 패거리들이 이동하고, 서문경의 제 2부인이었던 기생출신 이교야도 역시 약삭빠르게 자리를 옮겨 장이관의 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런 요소들을 모아서 생각해 보면 무한증식을 그 특징으로 하는 서문경적인 존재의 욕망충족 스타일 은 금병매가 씌어진 명나라 말기의 사회에서 급속하게 확산된 상업체계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 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문화를 사들인다 청대의 염상 1644년, 약체 일로를 걷고 있던 명나라 왕조가 멸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왕 조가 중국 전역을 지배하였다. 이와 같은 명청 교체시기에 발전도상에 있던 상품경제는 일시적으로 타 격을 받았는데, 대상인들은 재빨리 전향함으로써 다시 일어서 전대를 능가하는 번영을 구가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하에서 상업도시로 번창한 곳은, 과거 수나라 양제가 각별히 여겨 그곳에 행차하 기 위해 대운하까지 건조했던 강소성의 양주였다. 남북교통의 요충인 양주는 상업, 특히 염업의 발전과 함께 이 지역으로 주거지를 옮긴 산서성 출신의 산서상인과 안휘성 휘주 출신의 신안상인의 양대 상인 집단을 비롯한 대부분의 염상들이 활약하는 무대 가 되었다. 청 왕조는 명 왕조 방식을 답습하여 정부의 감독하에 한정된 염상에게 면허증을 교부하고 전매권을 주었다. 더구나 이 권리를 세습시켰다. 여기에서 전매권을 얻은 양주의 염상은 대대로 상상을 불허하는 이익을 획득하고, 정부 쪽도 또한 불로소득으로 염상에게서 막대한 세수입을 거두어들이는 구조가 완벽 하게 제도화된 것이다. 염상은 양회(강소, 안휘, 강서, 호북, 호남 등 다섯 개의 성 대부분과 하남성 일부를 합한 염전구역의 명칭)의 제염업자로부터 한 근(약 6백 그램)에 10문씩 사들인 소금을 장강 중류 지역인 한구(호북성 무 한시)까지 운반하여 되파는 것만으로도 이미 50문-60문이 되었다고 하니 그 이윤의 규모를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이미 청나라 초기에 양주의 염상이 이렇게 양회의 염해 지대에서 사들여 장사한 해염의 양은 매년 10 억 근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태였기 때문에 말할 필요도 없이 양주에 있는 염상 중에는 금은을 진흙과 모래처럼 하찮게 여기는 재산가가 많았다. 그들은 1천만 냥 이상의 재산을 가져야 비로소 부상이라 부르고 백만 냥 이하 인 자는 논의대상에서 제외하고 모두 통틀어 소상이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앞에서 거론한 추정자산 10만 냥인 금병매 주인공 서문경은 열등감을 느낄 수 밖에 없 는 청대 양주의 소상 순위에도 들지 못할 정도이다. 시대가 바뀌어 상업체계도 한차례 정비되었다는 점 을 고려한다해도 어차피 서문경은 상업체계의 말단에 매달려 있던 산동의 시골 부자에 불과했던 것이 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17

218 부유한 염상의 사치 규모는 엄청나게 커서 정말로 눈의 휘둥그레질 만하다. 의식주에 돈을 쏟아부어 맘껏 사치를 부렸는데, 양주의 어느 식도락가인 염상 등은 식사 때마다 데리고 다니는 고용 요리사에게 열 몇 가지 종류의 코스 요리를 준비시키고, 테이블에 한 코스씩 죽 늘어놓게 하고는 마음에 들지 않으 면 가볍게 머리를 흔든다. 그러면 즉시 그것이 거두어지고 다시 다음 코스가 죽 차려지는 식이었다고 한다. 한다. 서문경의 균형을 무시한 마구잡이식 향연과는 천양지차이다. 황제도 놀란 강춘의 접대 물질적 사치 면에서, 염상이 가진 부의 어마어마한 저력이 유력없이 발휘된 것은 뭐니뭐니 해도 황제 를 대접할 때였다. 양주의 염상이 번영의 극에 달한 것은 18세기 청조 제 4대 황제인 강희제(재위 1661년-1722년) 후기 부터 제 5대인 옹정제(재위 1722년-1735년)를 거쳐 제 6대 건륭제(재위 1736년-1796년)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이다. 그 존재 형태로 보아 조정안의 염상이었기에 그 사이 부유한 염상은 조정에 막대한 세금을 납부한 것 이외에도 거의 매년 토목공사, 군비 등의 명목으로 몇 만 냥, 몇 십만 냥, 화려한 경우에는 몇 백만 냥 에 달하는 기부금을 조정에 헌납해왔다. 더욱이 빈번하게 수행된 황제의 남순(강남순유) 때에는 그 비용을 부담할 뿐 아니라 대대적으로 접대 하는 데 쓰일 호화로운 정원까지 건조하여 오로지 황제가 좋은 인상을 받도록 하는 데 집중되었던 것이 다. 그 중에서도 1753년 건륭제가 남순길에 올랐을 때 대염상 강춘이 했던 접댄는 전설적이었다. 이 때 강춘은 건륭제의 양주 체재비용 일체를 부담한 다음 아낌없이 재물을 써서 건륭제를 몹시 놀라게 만들 었다. 양주의 대흥원을 방문했을 때 건륭제는 어떤 장소에서 걸음 멈추고 측근을 돌아보며 "여기는 북경 의 남해의 경도춘음과 몹시 흡사한데 백탑(라마탑)이 빠져 있는 것이 애석하구나"하고 말했다. 이를 전 해들은 강춘은 즉시 황제의 측근에게 몰래 일만 냥의 뇌물을 주어 백탑의 설계도를 입수, 대규모의 인 부를 동원하여 벼락치기 공사를 강행, 하룻밤 사이에 백탑을 완성시켰다. 다음날 다시 대흥원을 찾은 건 륭제는 이것을 보고 깜짝 놀라. 헛것을 보는 게 아닌가 하고 만져보다 진짜인 것을 알고 더욱 놀라며 "염상의 재력은 과연 대단하구나"하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문화인'이 되고 싶다 그러나 황제도 깜짝 놀란 이와 같은 물질적인 사치보다도 양주의 염상이 진정으로 열중한 것은 정신 면에서의 사치였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고금의 희귀본, 명화, 유서 있는 문물을 수집한 다음, 이러한 물건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문학자, 학자, 화가, 서가의 후원자가 되어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들 역시 시문을 짓고 서화를 하는 '문화인'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양주의 대염상은 문화적 후견인으로서 정말로 믿음직스러운 존재였다. 이 중에서도 장서가로서 유명 한 사람은, 앞에서 든 강춘 및 양주의 이마라 칭해진 마일관, 마일로 형제이다. 특히 두 동의 서고에 가득 들어찬 마가의 장서는 1762년 당시 건륭제가 모아들였던 정도의 방대한 서 물을 수집, 총서 사고전서를 편찬했을 때 부름에 응하여 7백 76종의 희귀본을 헌상했을 만큼 대단한 것 이었다. 염상이 문화적 후원자인 까닭은 이러한 물량과 함께 뛰어난 장서를 사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까워하 지 않고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료의 방대함이라는 기반하에서 려악(1692년 -1752년)이 마가의 장서를 이용하여 송시기사를 편찬한 것을 비롯하여 많은 학자와 문인이 크게 은혜를 누렸던 것이다. 문화적 후원자로서의 염상은 또한 그들 솔하에 몸을 의탁한 지식인이나 예술가의 생활을 전면적으로 뒷바라지 하였다. 예를 들면, 강춘은 풍취 있게 꾸민 원정(정원에 설치한 정자)인 추성관, 수월독서루, 강산초당에 많은 지식인이나 예술가를 장기적으로 묶게 하여 개중에는 명나라 말기 문학자 오위업의 순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18

219 자 오헌이라든지 서가 방정관처럼 20년 이상이나 체류한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교양이 높고 명사와의 교류가 넓은 점에서는 강춘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마일관 마일로 형제는 더욱 철저하였다. 일로와 친교가 있던 이름 높은 학자 전조망(1705년-1755년)이 때마침 소령낭산관에 머무르 던 중 고약한 질병에 걸리자 막대한 비용을 써 가며 의사를 불러 치료하게 하였다. 이밖에 마형제가 결 혼해서 장례식까지 더할 나위 없이 그야말로 죽음까지 보살핀 학자와 문인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이 다. 18세기의 양주에 출현하여 독특한 화풍으로 잘 알려진 일군의 화가 양주팔괴(김농, 정섭, 이선, 황신, 나빙, 이방응, 왕자신, 고상을 말한다)도 역시 염상과 깊은 연계가 있었다. 염상들 쪽은 그들에게 거금을 지불하고 그림을 그리게 하여 그 그림을 객실에 장식하거나 다른 이에게 선물함으로써 예술적 후견인으 로서의 만족과 긍지를 맛보았다. 화가들 쪽도 그것으로 경제적인 이익을 얻는다. 거기에는 주고 받는 관 계가 성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화가들은 염상이 명화를 구입할 때 가까를 사지 않도록 진위 를 감정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일도 있을 법하다. 문화적 후원자의 헌신 그것은 접어 두고, 문화적 후원자로서의 양주 염상의 활동은 정말로 다기하여 연구 및 교육기관인 서 원개설을 위해 거액의 자금을 제공하고 수많은 학자를 초빙하여 그들의 연구에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였 다. 그 중에는 대진(1723년-1777년), 단옥제(1735년-1815년), 왕염손(1744년-1832년), 왕중(1745년-1794 년), 홍양길(1746년-1809년), 손성연(1753년-1818년) 등 청대 고증학의 내로라하는 대학자들 거의가 포함 되어 있어 청대 고증학은 염상들의 후원에 힘입어 동반자로서 하여 꽃을 피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밖에 염상은 인쇄 사업의 물주가 되어 고금의 서적을 간행하기 위해 아낌없이 자금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양주는 예로부터 인쇄기술에 탁월한 것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이런 이유도 있 어 마씨 형제는 서적 간행에도 대단히 열심이었는데 이름 높은 고증학자인 주이존(1629년-1709년)을 위 해 그의 저서 경의고 간행에 거액의 자금을 제공한 것을 비롯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했는데 이런 이유로 그 책들은 마판서라고 칭해졌다. 또한 사원보(원보는 금은을 자물쇠 모양으로 주조한 옛날 화폐)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대염상 황씨 4 형제도 서적 간행에 조력을 아끼지 않아 송대에 편찬된 태평광기라든지 명대에 편찬된 삼재도회 같은 총서에서부터 당시 양주와 인연이 깊었던 오경재(1701년-1754년)가 쓴 백화장편소설 유림외사에 이르기 까지 그 간행자금을 부담했던 것이다. 더욱이 양주의 인쇄술이라고 하면 조금 시대는 거슬러 올라가지만 홍루몽의 작가 조설근의 조부 조인 (1658년-1712년)도 간과할 수 없는 존재이다. 조인은 1704년 강녕직조(남경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견 직물 생산을 감독하는 강녕직조국의 장관)와 겸임으로 양회순염어서(양회의 염업을 감독하는 장관) 지위 에 올라 양주의 염상에게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1705년에 그는 강희제의 명을 받아 4만 8천 9백여 수의 당시를 담은 전당시, 음운별로 분류 한 대사서 패문운부를 편찬간행하는 총책임자가 된 것을 비롯하여 양주에서 잇달아 큰 서적을 편찬간행 하기에 이른다.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하는 이러한 간행사업은 조인 자신의 자금제공에다 양주의 염상 이 빠짐없이 자금을 분담함으로써 비로소 달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상상을 초월하를 부를 소유한 청대의 염상은 문화와 예술의 후원자로서 정말로 다방면에 걸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염상의 재산 쓰는 양상은 물론 부의 규모야 다르지만 앞에서 이야 기한 금병매의 주인공 명나라 말기 상인 서문경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참으로 흥미 깊은 점이 있다. 정 원 하나만을 예로 들어 보아도 서문경은 자기집 정원에 만든 건물에 첩들을 살게 하고 육체적 향락에 빠진 나날을 보냈다. 게다가 첩들의 거처 이층은 창고가 되어 반금련의 주거 이층은 영업용 약재, 이병 아의 이층은 자신의 경영하는 전당포의 금고에 들어갈 수 없는 전당 잡힌 물건의 산처럼 쌓여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서문경의 묘하게 공리적인 면도 있는 쾌락의 정원에 비하면 거의 사설 도서관이나 사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19

220 미술관이라 해도 좋을 만한 설비를 갖추고 많은 명사나 예술가를 머물게 한 청대 양주 염상의 지적 분 위기에 넘친 원정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것이다. 물론 16세기 명나라 말기의 상인상을 허구라는 필터를 통해 극단화한 금병매의 세계와 18세기 청대 양주에 실재한 염상의 세계를 아무런 매개 없이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서문경이 고대의 황제 주와 비슷하다고 한다면 염상에게는 바로 육조귀족의 풍격이 있다. 상인의 사치도 이렇게 시대의 경과와 함께 한없이 세련되고 그 수준을 높여 스스로도 역시 사대부화하고 있었 다. 이에 비해 금병매의 주인공 명말 상인 서문경은 전통도 사대부 문화도 지체도 모른 것은 아니지만 오로지 자신만의 욕망 충족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체면 따위는 개의치 않는 서문경의 모습에는 틀림없이 유교 이데올로기에 꼼짝달싹 못하는 중 국의 전통적인 사회체제를 뿌리에서부터 뒤흔들 수 있는 일종의 파괴적인 에너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아무리 부가 문화를 침식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긴박감이 흐른다 해도 청대 염상이 상승지향에 따라 전통적인 체제 속에 스스로 얽혀 들어가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그 수준 높음을 무조 건 찬양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금병매의 벼락부자 상인 서문경과 양주의 염상 간에 현저하게 보여지는 이러한 태도의 차이는, 금병 매가 명왕조의 지배력이 쇠잔하고 종래의 정치 및 사회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던 뜨거운 시대 16세기 명나라 말기의 산물임에 비해, 청대 염상의 최전성기가 18세기 이 민족 왕조인 청의 지배력이 안정강화 되고 정치 및 사회체제가 견고해진 차가운 시대에 해당되는 점에 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폐허가 된 염상의 꿈 그러나 그토록 호사스러움을 자랑한 양주 염상의 영화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18세기를 정점으로 하여 그 이후 쇠퇴의 외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해마도 조정에 납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기부금이 서서히 염상의 경영기반을 붕괴시키고 있던 데다, 문화예술의 후원자로서 지나치게 재산을 소비하고 초호화판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양주 염상의 영화도 종막을 고하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염상이 최고로 번영한 18세기 양주의 상황을 상술한 양주화방록(이두 지음. 건륭 60년, 1795년에 완성되었다)이라는 수필이 있다. 이 양주화방록이 쓰여지고 나서 약 40년 후 많은 서적을 편찬 간행한 것으로도 알려지는 이름 높은 학자 원원(1764년-1849년)은 이 글을 위해 발문을 붙여 다음과 같 이 기록하였다. 양주의 전성기는 건륭 4, 50(1775년-1785년)년이며 나는 어릴 때에 이 눈으로 보았다. 가경 8년(1803 년) 양주에 들러 옛 친구와 함께 평산에서 모임을 열었는데 그 후 점차로 쇠퇴하여 누대는 기울어 무너 지고 꽃이나 나무들은 말라 비틀어지게 되었다. 가경 24년(1819년) 양주에 들러 친구인 장기당과 함께 도춘교를 건넜을 때 시를 지어 옛날을 그리워 하였다. 최근 십 수년 동안에 황폐함은 도를 더하였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양주는 염업도시인데 원정을 지은 옛날의 염상들 대부분은 장사를 그만두고 빈궁 중에 뿔뿔이 흩어져 버렸기 때문에 그 서관에 머물던 가난한 지식인도 또한 그 대부분이 청빈에 시달리고 하급관리 하인 고용인 소상인들은 모두 먹고 살기도 어려운 것이다. 이두가 양주화방록을 쓴 것은 건륭 60년(1795년)의 일이고 당시 번영하던 정경이나 풍물을 남김 없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양주화방록의 그림에 따라 원정을 찾아가 보니 그 7,8할은 황토가 되어버렸 다. 양주 염상의 공들여 풍취 있게 꾸민 원정이 무참한 폐허로 변한 모양을 기록하는 이 원원의 후기가 쓰여진 것은 도광 14년(1834년)의 일이었다. 염상의 영환느 이렇게 하여 물거품 같은 덧없는 꿈으로 사 라져간 것이다. 은나루 주왕, 진나라 시황제, 수나라 양제, 또한 육조의 귀족, 홍루몽의 대귀족 가가, 그리고 금병매의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20

221 서문경에서부터 청대 양주의 염상. 그들이 황제이건 귀족이건 상인이건 일반적으로 극도의 호사와 사치 라는 것은 멸망, 몰락, 파멸을 배후에 숨겼을 때에 최고조에 달하는 성싶다. 마치 꺼져 가는 불꽃의 최 후의 빛처럼. 그 정도로 파멸과 사치충동은 깊은 지점에서는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긴밀하게 연결된 것 이었다. 그러나 또한 이와 같이 결국에는 몸을 망치고 가정이나 나라를 파멸시킬 만큼 처절한 사치나 향락은, 양제의 개인적 쾌락을 위한 대운하가 남북교통의 요로가 되고 육조귀족의 거의 병적인 방탕이 왕희지나 고개지의 서화를 낳고 지위상승을 노리는 청대 염상의 후원 열풍이 많은 대학자나 대화가를 사회에 배 출했듯이 후세에 귀중한 선물을 남기는 결과가 되기도 하였다. 도를 넘은 탕진의 사정거리는 근검절약을 제일로 삼는 빈핍한 공리주의가 발밑에도 못미칠 정도로 훨 씬 길었다는 것이다. 제 4장 사치향락의 블랙홀 무뢰배 출신의 위충현은 문맹이었는데 이 약점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는 대단한 기억력의 소유자 였다. 그래서 짬만 나면 자기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관리의 이름을 뇌리 속에서 되살려내어 증오심 을 불태우고 가장 효과적인 보복 수단을 생각하고는 즐거워했다. 설사 그 대상이 이미 세상을 떠난 인 물이라고 해도 일단 기억의 밑바닥에서 되살아 나오면 위충현은 그들의 자손에게 철저하게 복수하고 파 산으로 내몰아갔다. 1. 환관의 저주받은 사치 스스로 거세하는 사람들 환관이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거세함으로써 남성 기능을 상실한 지극히 인공적인 존재이다. 중국 역사상 환관의 탄생은 3천 년 전인 은나라 왕조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 이후 20세기 초의 청나라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환관은 면면히 존속해오고 있었다. 당초 환관의 시초는 정복한 이민족 포로나 죄수를 거세하여 궁정 내부에서 사역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시대가 바뀌어 그 세력이 점차 강해지자 '자궁(스스로 거세하는 것)'하여 환관이 되기를 자처하 나는 자가 증가하였다. 남성 기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에 후궁의 거처에 출입할 수 있도록 허용된 환관은 황제의 혼란스러 운 사생활의 공범자가 되어 어느덧 황제를 음으로 조종하는 어두운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왕조가 아 무리 교체되어도 절대권력자로서의 황제가 존재하고 후궁이 있는 한 어두운 권력자 환관도 역시 계속 존재한다는 구조이다. 저 절대무비의 권력을 구가한 시황제의 진나라에서조차 시황제가 죽자 곧바로 가까이에서 시중을 들 던 환관 조고가 주도권을 장악하여 그 멸망을 재촉했다. 이러한 예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환관 의 어두운 권력이 한도를 넘어 팽창하는 것은 어김없이 왕조가 막판으로 기울어 최후의 불꽃을 피울 때 이다. 중국 역사상 환관의 해독이 가장 극심했던 것은 후한(25년-220년), 당(618년-907년), 명(1368년-1644 년) 시대였다. 이 왕조들은 어느 쪽이나 환관의 전횡에 의하여 정치기구를 갈기갈기 찢긴 끝에 멸망의 외길을 걸었다. 무덤 만드는 취미 후한은 시종일관 외척과 환관의 헤게모니 싸움에 농락당한 왕조였다. 환관의 우위가 결정적이게 된 것은 후한 제 11대 황제 환제(재위 146년-167년) 때이다. 환제는 맹위를 떨치는 외척 양기 일족을 일소하기 위해 단초, 좌관, 서황, 구원, 당형 등 다섯 환관의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21

222 힘을 빌었다. 이 다섯 환관은 비밀리에 일을 꾸며 근위군단을 움직여 일사천리로 양가 일족을 일망타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제는 천하가 그들의 것이었다. 단초 등 다섯 명의 환관은 그 공적에 의해 제후에 봉해지고 오후라고 불렸다. 일족 가신을 수입이 좋은 지방관리직에 앉혀 권세를 휘둘러 뇌물도 잡히는 데로 받는 형국이었다. 이렇게 하여 제 욕심을 채운 끝에 다투어 호화로운 저택을 짓고 기르는 개나 지 니고 있는 말까지 금은이나 새털로 장식하여 사치 삼매경에 빠졌던 것이다. 환제 시대에는 이 다섯 명 이외에도 후람이라는 환관도 또한 권세를 휘둘렀다. 그 수법은 다른 사람 의 주택 3백 81채, 전답 1백 18경(약 5백 41헥타르)을 빼앗은 다음 궁전에 버금가는 호화장대한 대저택 을 짓는 등 참으로 악랄한 것이었다. 이에 더하여 후람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 당당한 규모를 가진 분묘를 건조하였다. 환관은 유산을 남길 만한 자손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온갖 재산을 동원하여 장지와 분묘를 꾸미는 데 열중하였다. 후람은 그 악행의 응보로 결국 탄핵받아 자살했는데 그것도 빙산의 일각이고 환관집단의 발호는 점점 극심해질 뿐이었다. 167년 환제가 죽자 후손을 두지 못한 두 황후는 아버지 두무와 상의 하여 일족 중에서 12세인 유굉을 골라 제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가 바로 영제(재위 168년-189년)이다. 여기에서 또한 후한왕조 항례인 외 척과 환관의 사투가 재연되게 된다. 이때 외척 보무는 환관의 전횡에 반발하는 저항파(청류파) 지식인과 동맹을 맺고 환관세력을 섬멸하 려고 했다. 그러나 이 환관 섬멸작전은 주도면밀하게 펼쳐져 있던 환관의 정보망에 걸려 사전에 발각되 어 수포로 돌아가고 보무는 쫓겨다니다가 자살하고 만다. 이 쿠데타 미수사건으로 위기감을 느낀 환관집단은 비판세력을 철저하게 봉쇄하기 위해 169년 환제가 살아있을 때의 제 1차 '당고의 금'을 몇 배 상회하는 규모의 제 2차 '당고의 금'을 발동, 저항파 지식인을 대대적으로 체포하여 처형했던 것이다. 뇌물이 생명 이리하여 환관의 세력은 날로 강성해졌는데, 최고권력자인 영제는 즉위하자마자 선대 황제인 환제가 남긴 재산이 너무나 적은 데 실망하고, 즉시 궁궐 문에 표찰을 내걸어 관직을 팔게 하는 등 대대적인 매관매직 사업을 수행하여 열심히 축재에 매달렸다. 물론 놀기도 좋아했는데, 이 유희 방식도 특색이 있었다. 모의 점포를 죽 만들어 후궁에게 늘어서게 하고 궁녀들을 장사치로 세운 다음 자신도 상인으로 분장하여 놀았다고 하니 애당초 어지간히 장사가 좋았던 모양이다. 영제와 환관은 이념 없는 욕망의 충족, 쉽게 말하면 돈과 권력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 비슷 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당시 세력을 가졌던 환관은 조충, 장양, 하운, 단규, 송전 등 '십상시'라고 불리우 는 자들이었다. 영제는 그들을 친애하여 평상시에 "장상시(장양)은 나의 아버지, 조상시(조충)는 나의 어 머니이다"라고 공언할 정도였다. 이런 형편이므로 십상시는 더욱더 기세등등해져 모두다 궁전 버금가는 대저택을 갖추었으며 그 사치 스러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면이 있었다. 한번은 영제가 궁중의 망루에 오르고 싶다고 하자, 당당하게 우뚝 솟은 자신들의 호화저택을 보는 것 이 두려워진 환관은 "천자는 높은 곳에 올라서는 아니되옵니다"라고 구슬렸다고 한다. 그들 환관의 주된 재원은 말할 필요도 없이 뇌물이었다. 그런데 이 환관의 뇌물을 둘러싸고 희비극도 펼쳐졌다. 맹타라는 재산가가 벼슬길에 입문하고 싶어 십상시의 한 사람인 장양에게 환심을 사려고 연 줄을 찾아 장양의 노비들에게 오랜 기간 동안 거액의 뇌물을 주었다. 그러나 맹타는 뜻을 이루지 못하 고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미안하게 생각한 노비들이 뭔가 은혜를 갚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자 맹타는 "너희들은 머리 숙여 절 만 하라"고 말했다. 당시 장양의 집 앞은 언제나 면회를 청하는 자들의 수레가 몇백 대나 줄을 지어 기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22

223 다리고 있고 며칠을 매달려도 면회를 못하는 자까지 있었다. 어느 날 맹타의 수레가 마지막으로 다가오자 장양의 노비들이 일제히 맹타에게 절을 하고 다른 수레 를 제치고 즉시 맹타의 수레를 선도하여 한 대만 안으로 불러 들였다. 이 모양을 지켜본 수많은 면회자 들은 깜짝 놀라 맹타가 장양과 특별히 친한 사이라고 생각하고 다투어 맹타에게 진귀한 물품들을 바치 게 되었다. 맹타는 이 모든 것을 장양에게 바치니 크게 기뻐한 장양은 맹타를 양주 장관에 임명한 것이 다. 막다른 곳에 몰린 맹타의 작전이 승리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환관의 세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는 하다. 덧붙이자면 이 맹타의 아들이 삼국 시대 촉나라 장군을 지내면 서 배반하고 위나라에 항복하고 최후에는 또한 위나라를 등지고 촉나라로 돌아간 저 변신에 능한 맹달 이다. 술수에 능한 것은 아무래도 혈통인 모양이다. 수염 없는 자는 모두 죽여라 환관정치에 의한 부패가 이렇게까지 뇌물, 뇌물하고 진행되었다고 하면 말할 필요도 없이 후한왕조에 는 이미 미래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184년 황건의 난이 발발하여 후한왕조는 커다란 상혼을 입었다. 마 침내 189년 환관과 결탁하여 매관매직을 일삼던 영제가 사망하고 하후의 소생인 소제가 즉위하였다. 하후의 오라비인 하진은 후한의 외척들이 했던 그대로 환관집단의 섬멸을 도모하였지만, 이 쿠데타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선수를 빼앗겨 역시 반대로 환관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러나 이번만은 환관이 생각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하진의 쿠데타 계획에 가담한 사예교위 원소 등이 하진이 살해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군사를 이끌고 궁중으로 쳐들어가 환관을 모두 살 해해 버린 것이다. 원소 등의 환관 주살은 너무나 철저하게 실행되었다. 수염이 없었기 때문에(환관은 수염이 나지 않는 다) 환관으로 몰려 살해당한 자도 있었고, 쫓겨다니다가 알몸이 되어 환관이 아니라는 증거를 보이고서 야 겨우 살아난 자까지 있었다. 이렇게 하여 죽임을 당한 환관은 2천명 이상에 달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후한왕조의 고질병이었던 환관은 간신히 섬멸되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환관의 멸망과 동시 에 후한왕조 그 자체도 역시 이 시점에서 실질적으로 멸망하고 만다. 성 불능자인 환관은 왕조가 썩기 시작했을 때 우둔한 황제에 기생한 부패균처럼 음습하게 번식하여 그 멸망의 가속도를 붙인 존재이다. 후한뿐만 아니라 고래로 환관이 망한 때와 왕조가 망한 때가 기묘 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마도 이때문일 것이다. 고역사가 있기에 안심하고 잘 수 있다 당나라 또한 환관이 맹위를 떨친 시대였다. 이 왕조에서 환관 전횡의 계기를 만든 것은 양 귀비와의 비련으로 유명한 제 6대 황제 현종(재위 712년-756년)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환관 고역사(684년-762년) 였다. 고역사라고 하면, 궁중의 연회에 불려온 대시인 이백(701년-762년)이 취기를 빌어 이 권세 높은 대환관을 일부러 욕보이려고 그 면전에서 갑자기 발을 내뻗어 자기의 신발을 벗기라고 강요하여 현종의 노여움을 사 추방령을 당한 에피소드로 유명한 바로 그 인물이다. 이백의 이 '통쾌한 에피소드'에서는 고역사가 단지 희롱당한 악역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실 고역사의 현실 정치에서의 역할에는 상당히 복잡한 면이 있었다. 고역사는 원래 영남(광동성) 출신이며 698년경 영남의 소수민족 반란을 진압한 당나라 왕조의 장군에 의하여 측천무후(재위 690년-705년) 밑으로 보내진 것이 그 궁정생활의 출발이었다.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역사는 궁정에 들어오기 전 소년 시절에 이미 거세되었던 듯하다. 여걸 측천무후가 죽고 난 뒤 당나라 왕조는 극심한 권력투쟁에 휩싸였다. 어머니 측천무후에 의해 퇴 위당했던 무후의 셋째 아들 중종이 복위했지만 710년, 권력욕의 화신이었던 아내 위후에게 독살당한다. 이 때 역시 측천무후에 의해 퇴위당한 경험이 있는 중종의 동생 예종의 셋째 아들로 총명한 이융기, 후 에 현종이 되는 그가 고모인 태평공주(무후의 딸)와 결탁하여 위후 일파를 주살하고 부친 예종을 복위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23

224 시켰다. 머지 않아 이융기는 또한 권력욕의 화신이었던 태평공주를 죽이고 부친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 아 즉위하기에 이른다. 측천무후는 잔인하고 비정하기는 했지만 반면에 정치감각은 탁월한 위대한 여제였다. 그런데 며느리 인 위후나 딸인 태평공주는 무능한 데도 불구하고 권력욕이 강하여 측천무후도 흉내내기 어려울 만한 존재였다. 현종은 이 성가신 존재를 제거하고 기울었던 당 왕조의 기둥뿌리를 바로 세웠던 것이다. 총명한 고역사는 이 피투성이의 권력투쟁 동안 시종일관 현종에 현력하여 분골쇄신 궁정 공작에 몰두 하여 현종 황제 탄생의 최대 공로자가 되었다. 그러니까 현종도 고역사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어 각 지에서 조정에 도착하는 상소문도 우선 고역사가 훑어 보고 하찮은 것은 단독으로 처리하고 중요한 것 만 현종의 결재를 받는 형국이었다. 고역사는 실질적으로 재상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셈이다. 현종은 평소에 "고역사가 수반이 되어 일을 처리해 오기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잘 수 있다"고 하여 그의 유능함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고 전 해진다. 재산을 쓰면 자산이 늘어난다? 이토록 신임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역사가 출세를 노리는 야심가들의 절호의 표적이 된 것은 말할 필 요도 없다. 현조이 만년에 양 귀비를 총애하여 향락에 빠지면서 정치에 소홀하게 되자 눈에 띄게 세력 을 확대한 양국충이나 반란을 일으킨 안록산 등도 처음에는 고역사에게 아첨하여 발판을 마련한 패거리 였다. 고역사의 세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예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고역사는 여현오라는 말단 관리의 미모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환관이 아내를 갖는다는 것도 묘한 이야기이지만 후한 이래 환 관이 아내를 갖는 것은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던 일이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이 덕택에 여부인의 아버지 여현오가 일약 자사(주의 장관)로 발탁된 것을 비롯 하여 그 일족은 빠짐없이 고위관직을 얻었다. 또한 여부인이 사망한 때 장례식의 화려함으로 말하면 전 대미문으로 조정 안팎을 막론하고 고관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참례하니 그 수레와 말의 행렬이 고역사 집 뜨락에서부터 묘지까지 이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고역사의 재산은 왕후를 능가할 정도였고, 호화찬란한 보수불사라는 불교사원 및 화봉도사관이 라는 도교 사원을 자력으로 건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재산을 펑펑 써도 그의 자산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더욱더 늘어나는 구조가 되어 있 었다. 예를 들면 보수사에 커다란 종을 설치하자 그 종을 개종하는 것을 축하하러 수많은 고관이 몰려 들어 평상시에는 한 번 치고 축의금 10만 전을 내던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는데 스무 번이나 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모두 지지 않으려고 계속 종을 울려 적게 친 사람도 열번을 쳤다고 한다. 거액의 축의금 이 이렇게 하여 고역사의 품으로 굴러들어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대규모 제분 공장을 경영하여 여기서 도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었다. 권력의 역전 40여 년에 걸친 현종의 재위기간 중에 고역사에 대한 현종의 총애는 더욱 두터워져 사그라질 줄 몰랐 다. 그것은 고역사가 부귀영화의 극을 누리면서 어디까지나 현종에 대해서는 충실함을 다하고 한도를 넘어서 결코 주제넘는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고역사는 영악한 사내였던 것이 다. 그러나 현종과 고역사의 이인삼각은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755년, 만년의 실정이 꼬투리가 되어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나자 현종은 수도 장안을 탈출, 도피길에 올랐는데 도중에 마외(섬서성 흥편현의 서쪽)에 왔을 때 성난 호위병사들 강요에 못이겨 양 귀비를 죽이는 등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촉나라의 성도까지 도망쳤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24

225 이때 고역사는 성도까지 수행하고 이듬해인 756년 안록산의 난이 평정된 뒤 이미 퇴위하여 상황제가 된 현종과 함께 장안으로 돌아왔다. 정국을 주물렀던 악랄한 양 귀비의 사촌 오라비 양국충도 역시 마 외에서 성난 병사의 손에 걸려 죽임을 당한 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관 고역사가 아무 탈 없이 돌 아온 것은 병사의 격분을 살 만한 행실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점을 역으로 증명하다 할 것이다. 현종의 그림자로 살아온 고역사도 결국은 현종의 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769년 숙종(현종의 3 남. 756년 현종에 이어 즉위하였다)의 환관으로서 세력을 키운 이보국의 조종으로 검중(귀주성)에 유배 된 것이다. 763년 숙종이 죽은 후 고역사는 겨우 사면되었다. 그는 장안으로 돌아오는 도중에야 비로소 자신이 유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종이 사망했음을 알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 의 나이 79세였다. 대체로 고역사에게는 같은 환관이라고 해도 후한의 '십상시'와 같은 죽은 사람처럼 보이는 음습한 면 은 없었다. 물론 현종도 만년에는 실정을 저질렀지만 원래 영명한 군주이고 애당초 후한의 영제와는 비 교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들은 당나라의 국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화려한 시기에 살았기에, 그 관계성 측면에서도 단순히 황제와 그 욕망의 장치로서의 환관 이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종의 만년에 들어서 당나라 왕조는 최고 전성기를 지나 내리막길에 들어서게 되었으며 이후 대를 거듭할수록 활력을 잃고 부패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양길에 접어든 당왕조에서, 현종이 충실한 환 관 고역사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했던 것이 방아쇠가 되어 환관의 세력은 극단적으로 강화되니 황제 를 폐위하는 것도 그 뜻대로 하는 역전현상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의미에서 화려한 환관 고역사 의 존재는 역시 당왕조 멸망에 한 획을 긋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자 내각 원나라 말기 혼란을 수습하고 명 왕조를 설립하여 황제 독재체제를 확립한 주원장(재위 1368년-1398 년)은 역대 왕조가 환관들로 인해 약체화한 것을 거울 삼아 환관이 정사에 관여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그러나 그토록 환관을 경계한 주원장조차 환관을 완전히 배척한 것이 아니라 몇백 명은 남겼을 정도 로 황제에게 환관은 필요악 같은 존재였다. 이런 형국이니 주원장의 유훈은 흐지부지 공문화되고 만다. 주원장 사후에 2대 황제가 된 조카 건문 제(재위 1398년-1402년)를 멸망시키고 3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영락제(재위 1402년-1424년)는 찬탈자라 는 열등감으로 인해 관료를 신뢰하지 않고 환관을 중용하였다. 직접적으로는 이것이 명 왕조의 고질병 이라고 할 만한 환관 전횡의 계기가 된 것이다. 그로부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환관의 세력은 날로 강력해지기만 할 뿐이다. 제 5대 선덕제(재위 1425 년-1435년) 때에는 '사례감'이라는 환관내각제도가 정비되어 완전히 제도화되었다. 그 이후 점차로 절대 권력자인 황제와 밀착한 환관에 의한 그림자 내각 쪽이 고급관료로 구성된 표면의 내각보다 우세한 힘 으로 정국을 좌우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이 그림자 내각은 '동창'이라 불리우는 정보기관을 관할하여 전국적으로 스파이망을 둘러쳐 놓 았다. 환관의 정사에 대한 개입이 제도화된 데다가 정보기관까지 장악했을 정도라면 그 뒷일은 불을 보 는 뻔한 것이다. 제 6대 황제 정통제(재위 1435년-1449년) 시대의 환관 왕진, 제 11대 황제 정덕제(재위 1505년-1521 년) 시대의 환관 유근 등은 이러한 제도를 악용하여 지식인 관료를 탄압, 배제하여 독살스러운 대성공을 거두었다. 검은 부부의 음모 모든 왕조가 그렇듯 말기에 가까워짐에 따라 으레 나이 어린 황제가 나타난다. 그리고 마치 멸망의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25

226 장막을 치는 역할처럼 어린 황제를 결딴내 못쓰게 만들고 국가 기반을 뒤엎는 환관의 존재가 크게 두각 을 나타내게 된다. 명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멸망을 앞둔 제 16대 황제인 천계제(재위 1620년-1627년)가 바로 이 경우 에 해당된다. 이 시기 명 왕조에서도 파렴치한 악랄성 앞에서는 저 왕진이나 유근도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의 악의 화신이 출현한다. 바로 위충현(1568년-1627년)이다. 위충현은 젊었을 때 방탕무뢰하였는데 수시로 도박에 져 놀림감이 되자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충동 적으로 거세하고 환관의 길을 걷기로 작심하였다. 만력 연간(1573년-1620년)에 선발되어 궁중에 들어가 마침내 황제의 장손인 주유교, 즉 뒷날 천계제의 생모인 왕부인 전선(식사를 주관한느 직책)이 되었다. 성불능자인 환관은 성적 결함의 대체행위로서 식 도락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특기를 살려 궁중 요리를 담당하는 환관들이 꽤 있었다. 게다가 신분이 높은 환관은 요리 솜씨가 뛰어난 환관을 요리사로 고용하고, 쌀은 물론 기름, 설탕, 간 장, 식초 등 조미료를 음미하여 풍성한 식생활을 즐기며, 그렇게 단련된 미각으로 교대로 황제용 요리를 담당했다고도 전해진다. 미래 황제의 식사를 담당하게 된 위충현은 이때부터 상관인 환관 위조를 통하여 환관내각의 일원인 왕안에게 아첨하는 등 맹렬하게 출세공작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이리하여 위충현이 두각을 나타냈을 때, 반세기 가까이 제위에 앉아 있던 만력제가 서거, 1620년에 장남인 광종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어쩐 일인 지 이 새 황제는 미약을 너무 많이 복용하여 1개월 만에 갑자기 죽고 만다. 이리하여 제위는 아직 16세 인 광종의 장남 천계제가 물려받게 된 것이다. 위충현이 세력을 확대하는 데 둘도 없는 동반자가 된 것은 이 천계제의 유모인 객씨이다. 객씨는 엄 청난 음모가였는데, 나이 어린 천제는 즉위하자마자 그녀에게 봉성부인이라는 명예 칭호를 수여할 만큼 집착하였다. 음탕한 객씨는 처음에는 위충현의 상관 위조나 부부나 다름없었는데 얼마 안 있어 위충현 과 깊은 관계에 빠져 위조에게 등을 돌렸다. 이 객씨를 둘러싼 삼각관계로 인해 위조와 위충현이 대립하게 되어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 르자, 천계제의 즉위와 동시에 환관내각에 수장이 된 왕안이 중재에 나서 위조를 달래 몸을 빼게 하고 가까스로 소동을 가라앉혔다. 이리하여 악녀 객씨와 악인 위충현은 꺼릴 자 아무도 없이 정식 '대식'(환 관과 궁중여자 관리 쌍)이 되고 한몸이 되어 권력에 대한 전면 착취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이 검은 부부가 최초로 착수한 일은 리더 환관 왕안을 쫓아낸 것이었다. 환관이라 해도 왕안은 강직 한 성격으로 교양 수준도 높은 인물이었다. 게다가 객씨와 위충현의 은인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위충현 은, 이 배은망덕한 행위를 주저하였으나 객씨에게 질타를 당하고 마침내 왕안을 잡아들여 살해하였다. 사대부 콤플렉스 이리하여 두려운 사람이 없어진 위충현은 환관 내각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정보기관 동창을 자신의 지배아래 두어 전대미문의 공포정치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16세기 초두, 만력 연간 중반기 이래 환관파(환관 및 이에 영합하는 관료)에 반대하는 지식인층인 '동 림당'이 대두하여 이 양파는 격렬한 주도권 다툼을 반복해왔다. 위충현은 배후의 내각에서 실권을 장악 하자 동림당 대탄압에 나서 일거에 주요한 멤버들을 투옥, 학살하였다. 더욱이 주목할 일은, 삼조요전 이라는 동림당 범죄사를 날조하도록 하여 악선전을 퍼뜨림으로써 그 숨통을 뿌리째 끊어 버리려고 했던 점이다. 무뢰배 출신의 위충현은 문맹이었는데 이 약점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는 대단한 기억력의 소유자였 다. 그래서 짬만 나면 자기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관리의 이름을 뇌리 속에서 되살려내어 증오심을 불태우고 가장 효과적인 보복 수단을 생각하고는 즐거워했다. 설사 그 대상이 이미 세상을 떠난 인물이 라고 해도 일단 기억의 밑바닥에서 되살아 나오면 위충현은 그들의 자손에게 철저하게 복수하고 파산으 로 내몰아갔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26

227 이 악마적인 기억력을 십분 살려 위충현은 또한 순식간에 동림당을 일소하고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 까지 값진 비중 있는 관직을 모두 자신의 입김이 먹혀드는 자로 독점해 버린다. 생각해 보면 청류파 지식인을 탄압한 후한의 환관도 그러하였지만, 대개 음의 존재인 환관은 양의 존 재인 선비에 대하여 철저한 보복을 가하는 것이 보통이다. 위충현의 동림당 탄압은 가장 극단적인 경우 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림당을 매장시킨 위충현은 나아가 자신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펼쳐져 있던 동창 의 정보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관료는 물론이고 서민조차 떠도는 소문 속에서 조금이라도 위충현 을 비판하면 첩자에게 붙잡혀 손이 뒤로 묶이고 가혹한 형벌에 처해지는데 몸의 가죽을 벗겨내거나 혀 를 뽑아내기도 하였던 것이다. 도읍 북경에서 멀리 떨어진 요양(요녕성)의 사창가에서 어떤 사내가 무심코 비판적인 말을 했다가 즉 각 동창에 체포되었다는 예를 보아도 그 첩보망의 위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악의 조직화라는 점에서 는, 위충현은 두려워할 만한 재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신이 된 환관 천계제는, 그러한 위충현 마음대로 정치기관이 갈갈이 찢겨져 수습이 불가능한 대혼란 상태에 빠져도 전혀 관여할 수 없었다. 유모 객씨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이 황제는 만사에 대하여 유아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목공에 빠져 들었다. 일단 목공을 설계하기 시작하면 그 일에 열중하느라 그밖의 일에 는 완전히 무관심해져버렸다. 위충현은 항상 교묘하게 이 틈을 보아 임금에게 일을 아뢰었다. 그러면 황제는 귀찮다는 듯이 "알아서 하시오 좋도록 하시오"라며 제대로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렇듯 황제가 정치에는 무관심한 채 태평스럽게 '아이들 장난'에 빠져 있을 동안에 위충현은 안팎의 대권을 한 손에 장악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3천 명의 환관 군단을 조직하여 궁중에서 군사훈련을 실시, 위력을 과시하였다. 더구나 자신도 항상 완전무장하고 궁중에서 말을 타고 다녔는데 심지어는 황제의 면전에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멀리 외출할 때의 그 위풍당당하고 화려한 행렬은 황제와 견줄 정도이고, 그가 통과하는 곳에서 는 관리들이 두 손을 땅에 짚고 머리를 숙여 절하고 제각기 '9천세'라고 환호하였다. 황제에게는 '만세'라 하기 때문에 천세만 줄인 것이다. 위충현에 대한 환호는 결국 '9천9백세'까지 격상되었다. 위충현에 대한 아첨은 그 끝이 없어 심지어는 살아있는 그를 모시는 '생사'를 세우는 풍조가 전국 각 지에 퍼졌다. 아첨하는 사람들은 위충현의 그림과 조각앞에서 '9천9백세'라고 환호했던 것이다. 고작 문맹의 한 환관이 황제 독재제도의 맹점을 틈타 이토록 맹위를 떨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한통속인 객씨는 물론 이러한 '지아비' 위충현의 눈부신 진출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녀는 천계제의 총 애가 다른 데로 옮아가는 것을 경계하여 황후에서부터 후궁 여성들에 이르기까지 황제의 아이를 임신하 기만 하면 잇달아 연금시키거나 살해하여 그 싹을 도려냈다. 그래서 천계제는 결국 후손을 두지 못했던 것이다. 참으로 음험하고 끔찍한 책사였다. 이처럼 권세를 떨쳤기 때문에 위충현과 객씨의 생활이 황제를 웃돌 정도로 호사스러웠을 것임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들에게 궁중은 자기집과 매한가지였다. 과거 서원의 연못에서 뱃놀이를 했을 때 위충현과 객씨가 호화로운 큰 배에 타고 느긋하게 연회를 연 것에 비해 천계제는 두 명의 젊은 환관을 대동했을 뿐이고 조심스럽게 작은 배에서 놀고 있었다. 돌풍 이 불자 위충현의 큰 배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나룻배 같은 황제의 작은 배는 맥없이 뒤집어져 환관 은 두 명 모두 익사하고 황제도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엔트로피 흡수장치 그러나 환관은 환관, 어차피 황제에게 기생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위충현 부부가 자가약농지물(자기 집 약 상자 속에 든 약처럼 아무 때나 필요하면 유효하게 쓸 수 있는 사물이란 비유)처럼 여기고 있던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27

228 천계제가 1627년에 사망하고 그 아우인 숭정제(재위 1627년-1644년)가 즉위하자 위충현은 유형에 처해 져 자살하고 객씨도 몽둥이로 때려 죽이는 봉살형에 처해졌다. 위충현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결국 7년 남짓이었다. 그러나 이 악의 화신인 환관이 지배했던 광기의 시간은 이미 피폐의 도를 넘은 명 왕조를 순식간에 붕괴의 늪으로 끌고 갔다. 숭정제는 결코 무능한 황제는 아니었으나 이 붕괴를 향해 치닫는 추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만주족 청이 노도처럼 남하하기 시작하고 풍운이 급박함을 고하는 가운데 한 발 일찍 유민 반란군 유적의 선봉 장 이자성이 수도 북경을 제압했을 때 숭정제는 막다른 궁지에 몰려 자살하였으니, 명 왕조가 멸망하는 순간이었다. 명나라 멸망 직전에 자금성에 있던 환관의 총 인원은 일설에 따르면 1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명의 시조 홍무제 당시 수백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약 2백 배가 된다. 위충현의 권력 착취에 의해 환관은 비약적으로 불어났다. 절제하지 못하는 욕망에 비례하여 무한증식하는 존재인 환관들이 수백 겹으로 황 제를 에워싸게 되었다. 요약하면, 거세에 의해 남성적 기능을 상실한 환관이라는 존재는 그 회복불능의 근원적 결함을 가지 고 스스로 바닥을 알 수 없는 블랙홀로 전화하여 최고권력자인 황제의 엔트로피를 흡수하는 장치가 된 것이다. 왕조가 피폐했을 때, 후한의 환관이나 위충현의 경우에서 두드러지듯이, 이 블랙홀 장치로부터 대대로 누적된 불순한 에너지를 응축시킨 존재가 돌출하여 본체인 왕조 자체를 사멸에 이르도록 내몬 것이다. 이러한 환관의 저주받은 사치는, 바로 과잉에너지의 폭발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것이 특유의 음침함과 교활함으로 채색되어 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할 것이다. 2. 피의 쾌락 희대의 살인귀 장헌충 명나라 말기의 유적 장헌충(1606년-1646년)은 다른 이인, 기인 명단에서 뺄 수 없는 중국 역사상에서 도 극히 드문 희대의 살인귀로서 흉흉한 전설에 둘러싸인 인물이다. 18세기 후반에 쓰여진 야사 촉벽(팽준사 지음)은 그러한 장헌충 살인귀 전설을 극단화한 것이다. 그러 면 장헌충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우선 그 역사적 맥락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환관 위충현의 발호에 따라 명 왕조는 회복불능의 타격을 받았다. 명나라 최후에 황제가 된 숭정제는 즉위하자마자 혼란의 원흉 위충현을 멸하였는데, 때는 이미 늦어 사회는 점점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어갔다. 숭정 연간(1628년-1644년) 초기, 극빈지역인 섬서성의 농민 항쟁을 시발점으로 마침내 중국 전역을 반란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유적이라고 총칭되는 이들 반란군은 처음에는 수많은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서서히 한쪽은 이 자성(1606년-1645년)을, 한쪽은 장헌충을 리더로 하는 두 개의 커다란 그룹으로 정리되고 있었다. 이자 성과 장헌충은 둘 다 유적의 본거지 섬서 출신이며, 일찍부터 반란군에 가담하여 급속도로 두각을 나타 낸 인물이다. 장헌충은 큰 키에 여위 몸, 얼굴은 약간 황색을 띠었으며, 성격은 기민용맹하고 과단성이 있는데다가 협기가 넘쳐 당초 반란군들 사이에서 황호라고 불렸다고 한다. 장헌충이 이자성과 헤어지는 계기가 된 것은 1635년(숭정 8년) 영양(하남성 정주시)에서 반란군 72영 (부대)의 수뇌들이 모여 대회를 열었을 때 작전계획을 둘러싸고 가장 나이 많은 리더 고영상의 부대 이 자성과 대립, 패배한 일이었다. 이후 장헌충은 차츰 고영상 이자성 그룹과 별도의 행동을 취하게 되며, 마침내 자기 군대를 이끌고 남하, 호북성으로 들어갔다. 고영상은 대회 이듬 해에 죽어 이자성이 그 세력을 이어받게 되었고, 이러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28

229 써 반란군의 양국분화 형세가 확정되었다. 호북에 들어간 장헌충은 토착 농민 반란부대를 흡수, 세력을 확대하여 호북성에서부터 안휘성 일대에 걸쳐 명나라 군대와 전투가 거듭하였다. 이 사이 명나라 군대에 격파당해 궁지에 몰려 1638년(숭정 11 년) 위장항복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 때도 장헌충은 뱅부상서 웅문찬에게 금괴 1천 개, 한 말들이 용기에 가득 넘칠 만큼의 진 주 등의 금은보석을 뇌물로 갖다바치며 세력을 보존하였고, 이듬해에는 신속하게 태세를 정비하여 다시 한번 반기를 들고 공세로 돌아섰다. 정부군의 총책임자인 국방대신이 유적으로부터 아무 거리낌도 없이 뇌물을 받을 정도로 명나라의 정 치기구는 철저히 부패해 있었다. 어찌 되었던 장헌충은 거듭 사천성에서부터 호북 안휘성을 양다리에 걸치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싸 워 1643년(숭정 16년)에는 호북의 군사거점인 무창을 탈취, 대서왕이라고 자칭하기에 이른다. 큰 뜻은 사라지고 살인광이 되다 이 시점까지 장헌충은 명말청초의 문학자 오위업(1609년-1672년)이, "맨 처음 장헌충이 무창에 근거했 을 때에는 큰 뜻이 있었기 때문에 지배하에 두었던 도시에 대하여 그렇게까지 참살은 하지 않았다."(오 위업저 수관기략 제 10권 염정뢰)고 말하고 있듯이 반권력 무장집단의 지도자다운 면모를 남기고 있으 며, 잔혹한 살인벽은 아직 드러내지 않았다. 장헌충이 살인마 기질을 폭발시킨 것은 젊은 명나라 장군 좌량옥의 공격을 피해 1644년(숭정 17년) 대군을 이끌고 본격적으로 촉나라 땅, 즉 사천성으로 들아가서부터의 일이다. 그해 6월, 장헌충은 중경을 함락시키고 이어 8월에는 성도를 함락시켜 촉 나라 땅 전역을 제압, 황제 를 자칭하였다. 한편 이자성은 같은 해 3월, 수도 북경을 제압, 명 왕조를 멸망시켰는데, 2개월 뒤인 5월 에는 다음 시대의 진짜 주역인 만주족 청의 공격을 받아 북경에서 쫓겨났다. 요컨대 장헌충의 촉 입성 은 이러한 중심부의 정권교체극이 매듭지어진 뒤 감행된 것에 다름 아니고, 그 상상을 초월하는 살인벽 이 폭발한 것도 바로 이 시점부터였다. 이 점에 대하여 장헌충을 자주 언급하는 노신은 다음과 같이 말 하고 있다. 촉벽과 같은 종류의 책은 장헌충의 살인 사실을 대단히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나 매우 산만하기도 한데,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살인을 위한 살인'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사실 그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는 맨처음에는 결코 그렇게 살인은 하지 않았다. 물론 황 제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후 이자성이 북경으로 진격하고 이어 청군이 산해관으로부터 침입해 와 자신에게는 몰락의 길밖에 남겨져 있지 않게 되고부터 살인, 살인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천하에 이제 자신 의 것은 없고, 지금은 타인의 것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이것은 말대의 풍아한 황제가 죽기 전 에 선조나 자기가 수집한 서적, 골동품, 보물 종류를 소각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심리이다. 그에게는 군대는 있었지만 골동품 같은 것은 없었다. - 준풍월담 수록 신량만기 역시 노신다운, 그야말로 탁월한 견해이다. 그 말대로 장헌충 자신이 점차 형세가 불리하게 되자 "사 천의 인간은 아직 절멸하지 않았도다. 손에 넣었으니 내가 이를 멸한다. 한 사람이라도 남에게는 넘겨주 지 않겠노라"(촉벽 제 3권)고 선언했다. 가공할 말한 '몰살의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출세의 기준은 살인 횟수 이런 이상심리를 축으로 하여 촉 땅으로 들어간 장헌충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살인, 살인'을 철저 하게 실천했다. 장헌충의 난으로부터 약 1백 년 후에 쓰여진 촉벽은 과장된 표현이 많고(이 책에 기록된 사망자 수는 당시 촉나라 땅의 인구를 훨씬 뛰어넘는 식으로), 사실 그 자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 여지는 '장헌충 살인귀 전설'만큼 목적을 상실하고 파괴만을 일삼는 과잉 욕망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29

230 낸 예는 드물다. '욕망의 블랙홀'이란 바로 이런 것일 것이다. 이하에서는 이 촉벽을 기초로 장헌충 살인귀 전설을 더 듬어 보기로 하자. 촉 땅 주민을 모두 죽이기로 결심한 장헌충은 수하의 부장이나 병사를 사방으로 파견하여 심산유곡에 까지 들어가 인간사냥을 감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살인의 기준을 정하고 주민 중에서 남자들을 살해하 여 그 수족 2백대-여자의 경우는 이것의 두배가 필요-를 획득한 자는 파총(최하위 사관)에 임명한다느 느 식으로, 살인을 많이 할수록 출세시킨다는 방침을 채택했다. 이 때문에 하루에 수백 명을 죽여 단번에 도독(사령관)으로 발탁된 병사도 있었다. 이리하여 조직적으 로 대살육을 실시한 결과 몇 십만이나 되는 주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소멸하여 "촉나라 주민은 한 사람 도 살아남을 수조차 없게 되었다"(촉벽 제 3권)고 할 정도였다. 주민뿐만 아니라 촉 땅에 살고 있던 항복해온 명나라 관리도 예외없이 살해했다. 그 방식은 예르르 들면, 장헌충의 조정에 방문하러 온 관리들이 엎드려 인사하고 있는 곳에 수십 마리의 맹견을 불러들여 서 개가 냄사를 맡은 자를 끌어내어 참살하는 식이었다. 이 방법은 '천살'이라 불리운다. 이러한 양상으로 끊임없이 관리들을 죽여 나갔고 처형법도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예컨대 포노(수족을 잘라버린다), 변지(등 줄기를 두 개로 가른다), 설추(공중에 매달아 놓고 등을 창으로 푹 찌른다) 등에서 부터 산 채로 가죽을 벗기를 방식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살인 기술을 구사한 것이다. 살인을 위한 살인 장헌충은 일단 관리등용문인 과거도 실시했는데 때로는 그것도 살인 기호를 만족시키기 위한 적절한 무대가 되었다. 과거를 실시한다는 명목으로 서생을 모이게 한 뒤 시험장 문 좌우에 높이 4척(약 1백 24 센티미터)의 줄을 걸쳐 놓는다. 순서대로 나오게 한 다음 똑바로 선 채 이것을 통과하게 하여 걸린 자는 즉시 죽여 버린다. 1백 20센티미터 남짓한 줄에 성인 남자가 걸리지 않을 리가 없다. 이리하여 이따금씩 섞여 있던 어린 아이 두 명을 남기고 1만 명이나 되는 서생들이 남김 없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르르 황당무계하다고도 하는데 블랙 유모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장헌충 살인귀 전설은 아직도 산더미처럼 남아 있다. 원래 적대적 존재였던 촉나라 민중, 관리를 남김없이 죽여 없애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은 장헌충 은 자기편 사람들에게도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그는 자꾸만 궁지에 몰려 촉에서 거주하기가 어렵게 되자 이번에는 자기 부하와 병사가 너무 많아서 걸리적거린다고 말하고, 5백 명 정도의 고참군단만 남 기고 나머지는 정리해버리려고 하였다. 가장 신뢰하는 부하가, 그래서는 병사들이 소동을 일으킬 염려가 있다고 반대하며 대신에 하나의 묘 안을 제시하였다. 군대 내부에 순찰을 강화하고, 무엇이든지 병사들의 결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구실 삼 아 죽이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술을 마시고 있었네, 소란을 피웠네, 도박을 하고 있었네 등등의 이유로 잇달아 처형했기 때문 에 불과 하루 사이에 죽임을 당한 병사와 그 가족의 수는 무려 10만 명 이상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움츠러든 병사들은 입도 뻥끗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걸려드는 자가 없어지게 되어 체포의 기준을 달성할 수 없게 된 순찰 병사들이 애가 타서 필사적으로 안달하게 되었 다. 그들은 벽에 구멍을 내는가 하면 마루밑에 숨어 들기도 하고, 침실에 잠입하여 휘장 뒤에서 엿듣기 도 하여, 평범한 부부의 소리를 감춘 웃음 소리를 들은 것만으로 갑자기 뛰어들어 그들을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장헌충군 병사들은 아마 가족 단위로 이동했던 자가 많았던 모양이다. 장헌충은 이렇게 하여 전력을 스스로 소진하고 자멸의 길로 질주했던 것이다. 귀여워서 죽이다 장헌충에게는 보통의 인간과는 반대로, "술에 취해 있을 때는 온순하지만 깨어나면 흉악해져 하루라도 눈앞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지 않으면 기분이 언짢아진다"(촉벽 제 3권)는 기벽이 있었다. 이 울적한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30

231 기분에 홀리면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가족이라도 죽여버린다. 어느 날 밤, 무료한 저녁 시간을 보내던 장헌충은 갑자기 "오늘은 아무도 죽일 자가 없었는가"하고 호 통을 치고 측근에게 명하여 아내 및 애첩 수십 명에다 하나뿐인 자식까지 죽여 버렸다. 다음날 이 일을 씻은 듯이 잊고 아내와 애첩을 불렀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래서 측근이, 어젯 밤 명령에 따라 살해해 버렸다고 보고하자 장헌충은 왜 말리지 않았느냐고 화를 내고 이번에는 측근에 서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수백 명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 장헌충의 의사표현 및 감정표현은 모두 죽이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증오하기 때문에 죽일 뿐만 아니라 귀엽다는 이유로 죽이기도 했다. 한번은, 두되가 명석하고 풍채 또한 발군의 인물로서 과거에서 수석합격한 자가 나타나자 그를 마음에 들어 한 장헌충은 이것저것 선물을 주는 등 보기 드물게 친절하 게 대한 적이 있었다. 그러던 끝에, 그는 문득 눈썹을 찡그렸는가 싶더니, "나는 그놈이 지독하게 귀엽다. 그냥 보기만 해도 귀여워서 견딜 수 없어진다. 나는 그놈과 만나는 것이 두렵다. 너희들 나를 위해 그놈은 데꺽 '수습'하 라"고 말하고 부하에게 명하여 '수습'시켜 버렸다. 여기에서 '수습'이란, 일가권속 모두를 죽이는 살인을 가리키는 은어에 다름 아니다. 장헌충의 '귀여움'을 받아 살해당한 인물은 이 수재만이 아니었다. 장헌충은 친구들과 사귀는 것을 몹 시 좋아하여 친지와 만나면 밤을 세워 술을 마시고 산더미 같은 토산물을 주어 돌려보내곤 했다. 그리 고는 손님이 돌아가는 길에 부하를 보내 잠복시켜 두고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오게 하는 것이다. 장헌충은 이들의 머리를 궤짝 속에 넣고 군대가 이동할 때마다 수레에 싣고 운반하였다. 왜 이런 일 을 했던 것인가. 그것은 패거리 중에 술 상대가 없어 적막할 때에 궤짝에서 머리를 꺼내 죽 늘어 놓고 잔을 돌려 술을 따라 권커니 작커니 하며 살아 있는 자와 마주하는 것처럼 소리내어 부르거 즐거워한 것이다. 머리를 상대로 한 이 소꿉질 연회를 이름하여 '취수환연(머리들의 잔치)'이라고 한다. 유일한 즐거움 무차별 살인을 거듭한 끝에 장헌충은 개나 소까지 여덟 갈래로 찢어 죽이고, 용의주도하게 자기의 뒤 를 이어 촉을 영유할 자를 위해 종자를 남기지 않도록 처리하였다. 그는 살아 있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섬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청이나 민가는 말할 것도 없고 정 원, 역참, 사원, 궁전 누각 등 모든 건축물을 파괴하였다. 장헌충군이 통과한 뒤의 촉의 거리는 그야말로 기와 부스러기가 산처럼 쌓여 있다고 할 만큼 철저히 폐허화되었다. 피에 굶주린 장헌충의 명운이 다한 것은 촉을 영유한지 2년쯤 지난 1646년 12월의 일이었다. 부장인 유진충이 한증으로 진격해온 숙왕이 이끄는 청나라의 군세에 항복한 데다 고향 섬서로 북상하여 철수할 수 있는 퇴로를 끊기고 봉황산(사천성 서충시에 있는 산)에서 청군의 급습을 받아 사살된 것이다. 그 때 장헌충 41세. 장헌충이 죽기 얼마 전에 삼국 시대의 촉나라 제갈량(181년-234년)의 예언을 새긴 비문이 출토되었는데 거기에는 "피리를 부는 데 대나무를 쓰지 않고, 한 줄기의 화살이 가로질러 가슴을 맞춘 다"는 구절이 있었다. 사람들을 이를 청나라 숙왕이 장헌충을 사살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즉 촉의 가장 위대한 역사적 영웅 제갈량을 인용하여 장헌충의 말로를 암시한 셈이다. 그리고 장헌충의 사 체를 파헤쳐 보니 심장이 아주 새까맣다든지 그 모양이 오각형이고 간장은 없었다든지 하는 설도 있다. 요컨데 보통의 심장처럼 하트가 아니고 악마적인 특이체질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촉벽은, 촉나라 각지에 퍼져 있는 장헌충 살인귀 전설을 수집하여 이랬느니 저랬느니 과장을 보태 기록하고 있는 것인데, 힘을 너무 기울인 탓인지 기교가 없어, 블랙 유머의 냄새 가 강한 살인을 소재로 한 희극의 걸작으로도 간주되고 있다. 장헌충은 훌륭한 정원에도, 호화로운 식사에도 흥미가 없고, 원래 여성을 혐오하는 기질이 있었기 때 문에 미녀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그의 사치 도락은 오로지 '살인, 살인, 살인'뿐이었던 것이다. 장헌충은 갈 곳을 잃은 과잉 에너지를 죽음에 미쳐 소진하고 있는 악마와도 비슷하다. 이와 관련하여 조르쥬 바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31

232 타이유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생명체는 지표 에너지의 작용이 결정하는 상황 속에서, 원칙적으로 그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이상의 에너지를 받는다. 과잉 에너지, 즉 부는 하나의 조직(예컨대 한 개의 유기체)의 성장에 이용된다. 만일 그 조직이 그 이상 성장할 수 없든지, 혹은 잉여가 성장 중에 모두 섭취될 수 없으면 당연히 그 에너지 를 발산하지 않으면 안된다.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관계없이 화려한 형태로, 그렇지 않으면 파멸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소비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라이벌인 이자성에 선수를 빼앗기고 이어 만주족 청나라 왕조의 기초가 기틀을 마련해 나가는 형세를 눈앞에서 보면서 촉나라에 고립되어 희망도 없어진 전 농민 반란군의 지도자 장헌충은 바로 스스로의 과잉 에너지를 살인으로, 끝까지 소비한 셈이다. 장헌충 전설의 장치 촉벽 등의 자료에서 보여지는 장헌충의 상은 대강 이와 같은 것인데, 장헌충이 상당히 가혹한 일을 했음에는 틀림없으나 결코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장헌충 살인 귀 전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화려하게 윤색되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될 수 있었던 것일까. 노신은 신량만기에서 계속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장헌충은 죽이는 것에 의하여 병사를 얻고 그 병사를 이용하여 또한 죽였다. 자기는 이제 끝장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모두 다같이 멸망의 말로에 이를 것이다, 라는 것이다. 우리도 또한 타인의 것이나 공공의 것은 그다지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게 아닌가. 그러므로 장헌충의 행동은 일견 기괴하기는 하지 만 실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기괴한 것은 그들 살해된 사람들이 어찌하여 언제나 팔짱을 낀 채 수수 방관하고 머리를 곧추세워 그에게 살해당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청 왕조 숙왕이 그를 사살해 주고, 겨우 청나라의 노예가 되어 구제받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더욱이 이것이 이른바 '피리를 부는 데 대나무를 쓰지 않고 한 줄기 화살이 가로질러 가슴을 맞힌다'는 예언대로, 옛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라는 식으로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와 관련하여 노신은 매우 냉소적인 어조로 중국 역사를 다음과 같이 두 개의 범주로 구분해 보였던 적이 있다. 가령 겉치례가 요란한 학자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사서를 편찬할 때, '한민족 발상 시대', '한민족 발달 시대', '한민족 중흥 시대' 따위의 나무랄 데 없는 제목을 잡으려고 하는데 그 호의에는 감사하지만 표현 방식이 뭔가 복잡하다. 좀더 직설적인 표현이 여기에 있다. 1. 노예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시대 2. 당분간 안온하게 노예로 살 수 있는 시대 이 순환이 '선대 유학자'가 말하는 '일치일란'인 것이다. 난을 일으킨 자들은 후대의 신민 입장에서 보면 주인이기 때문에 도로를 청소해온 셈이 되며, 그러므로 '천자를 위해 구제했던 운운'등으로 평가되는 것 이다. -등하만필 분 수록 그렇다면, 장헌충으로부터 심대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예언이다 뭐다 하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이민 족 청이라는 새로운 주인에게 기꺼이 몸을 굽혀 '당분간 안온하게 노예로 살 수 있는' 길을 선택한 것이 된다. 어쩐지 수상쩍은 이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장헌충 살인귀 전설이 더욱 부풀려지고, 화려함을 더 해 갔다고도 할 수 있다. 요컨데 장헌충은 그 뜻에 반하여 다음 세대의 주인인 청나라에 공헌하기 위해 명나라 구체제를 파괴 하고 피의 살육으로 '도로청소'를 과도하게 하다가 자멸한 것이다. 이를 두고 간신히 청나라 노예의 지 위로 떨어진 사람들은, "지독한 것은 장헌충이다", 하고 마침내 그를 희대의 살인귀로 몰아갔던 것이다. 3. 왕조 향락사 총결산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32

233 사라진 가능성 황제 독재체제의 맹점을 틈 탄 환관의 전횡, 그 환관과 결탁한 탐욕스러운 관료의 발호, 이러한 말기 적 증상속에서 명 왕조의 정치기능은 정지되고 국가경제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그 결과 사회 불안이 격 화되고 민중반란이 빈발하여 마침내 명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고대 이래 친숙한 왕조 멸망의 정석을 그대로 밟았던 것이다. 명이 지배하는 시대는 이렇게 하여 진절머리날 만큼 정석대로 종말을 고했지만 그 과정에서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견고한 관료제도로 지탱된 전통사회를 근저에서부터 뒤엎을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었던 시대였다. 첫째로, 이미 제 3장에서 말했듯이, 명나라 후반 15-16세기에 이르면 상업이 현저하게 발전하고 자본 의 논리하에 움직이는 상인계층이 경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되었던 점이다. 둘째로, 이탁오(1527년-1602년)에게서 보여지듯이 관료제도의 이론적 지주가 되어온 유교 이데올로기 의 기만성을 파헤치고 욕망의 논리에 기초한 개인의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사상이 생겨나 그 것이 광범한 지식인의 지지를 받았던 점이다. 특히 이 두 번째 점은 관료제도를 지탱하는 지식인, 요컨대 사대부 계층 자체의 의식변혁을 재촉하는 움직임이었다. 실제로 명나라 중기 이래 왕조정치가 함몰됨에 따라 관료사회에서 탈락하여 거의 광적으 로 '나 자신의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지식인도 증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은 제대로 피어나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명나라 황제 독 재제도가 말기증상에 빠져 감당할 수 없는 몰락의 에너지를 폭발시킨 결과 이자성이나 장헌충을 중심으 로 하는 농민의 무장봉기가 확산되어 명나라 왕조는 그 숨통이 끊겼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노신의 말을 빌자면, 새로운 지배자인 만주족 청나라를 위해 '도로청소' 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청나라 왕조는 이렇게 하여 여러해에 걸쳐 쌓인 고름을 도려내고, 보기 좋 게 정화된 전통적 체제인 황제독재와 관료제도를 더욱 강화하여 소수의 만주족이 압도적 다수인 한민족 을 통치하기 위한 절호의 도구로 이용했던 것이다. 사상은 엄격히 통제되고 상업도 만주의 소금상이 그러했듯이, 결국 황제에게 종속되지 않을 수 없었 다. 요약하면 명에서 청으로 왕조만 바뀌었을 뿐 정치 사회 경제 사상이 모두 그대로 전통의 주술적 강 박에 의하여 동결되고 만 것이다. 재색을 겸비한 맹렬여성 서태후 중국 최후의 왕조가 된 청(1644년-1911년)은 이민족 왕조로서 긴장감이 강하고, 황제 중에도 우수한 인물이 많았다. 이 때문에 역대 왕조의 어리석은 황제들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치에 빠져 금세 무 능력자가 되어 종말을 맞은 예는 보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왕조에서건 대를 거듭할 때마다 엔트로피가 괴어 마침내는 어처구니가 없는 도깨비 같은 존재를 배출하여 자멸하곤 하였다. 청 왕조의, 아니 유사 이래 이어진 왕조시대의, 막을 내리는 악역으 로서 등장하는 것이 저 악명 높은 서태후(1835년-1908년)다. 만주 기인이라는 하급관리의 집안에서 태어난 서태후는 키가 1백 75센티, 야무진 미모의 소유자였다. 만주족이므로 물론 전족도 하지 않았다. 빼어난 미모에다 교양수준도 높아 16세 때에는 오경은 물론, 사 실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역대의 정사인 이십사사까지 통독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요컨데 재색을 겸비 한, 평범한 남자들을 한 다발로 데려다 놓아도 도저히 따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1852년, 18세 때 후궁으로 선택되어 궁정으로 들어가 청조 제 9대 황제인 함풍제(재위 1850년 -1861년)의 사랑을 받아 1856년, 황제의 장자인 재순(뒤에 동치제)를 낳는다. 이것이 그녀의 지위를 비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33

234 약적으로 높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게다가 내우외환에 시달리다 점차로 현실도피적으로 변한 함풍제가 유능한 서태후에게 정무를 맡기게 되니, 이를 기화로 그녀는 강렬한 권력욕을 공공연히 드러내 정치의 중앙무대에 뛰어들었다. 19세기 중반에 접어들자 중국이 예전처럼 '고립된 중화제국'의 꿈을 지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아편전쟁(1840년-1842년)의 패배를 계기로 하여 중국은 마지못해 세계사의 수라장으로 끌려들어가 구미 열강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중국의 근대는 서구물결의 충격에 의해 패배와 좌절로부터 시작 되었던 것이다. 이미 내리막길에 접어든 청 왕조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거듭되는 패전조약 체결, 막대한 배상금 지불, 영토 할양으로 열강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면서 종래의 정치체계에 매달려 연명을 꾀하는 것 뿐이 었다. 서태후는 이렇게 하여 멸망해가는 청왕조 최후의 발버둥을 상징하는 존재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데다 아편전쟁 10년 후인 1850년 함풍제가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만흥한'을 기치로 내세 운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여 중국 내부에서도 대규모 반란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1856년에는 제 2차 아편전쟁이라 할 만한 '에로우호 사건'이 일어나고 1860년에는 영불연합군이 북경 에 침입하였다. 화려한 베르사이유식 정원으로 알려진느 별궁 원명원이 완전 파괴된 것도 이 때의 일이 다. 연합군 침입이 임박하자 무조건 도망갈 준비를 하던 함풍제는 황후와 서태후, 황태자 재순까지 데리 고 열하의 별궁으로 피난하여 그대로 머물던 끝에 이듬해 1861년 병사하고 만다.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서태후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적대세력을 일소하고 실권을 장악, 1862년, 6세된 친아들 동치황제를 보좌하여 소위 '수렴정치'를 개시하였다. 이 때는 이미 함풍제의 하나뿐인 정식 황후 (동태후)도 후견인으로 나서게 되어 동 서 양태후(그녀들의 궁전의 위치에 따라 이렇게 불렸다)가 나란 히 수렴정치를 수행하는 희한한 양상이 벌어졌다. 이런 형태는 약 11년 간 이어졌는데 그 동안 증국번이라든지 이홍장 등 유능한 한인관료가 활약한 덕 택에 '동치중흥'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사회적으로도 비교적 평온한 상태가 이어졌다. 왕조사의 최후 그러나 1873년(동치 12년), 18세가 된 동치제의 결혼을 둘러싸고 사건이 일어난다. 동치제가 어머니 서태후가 권하는 상대를 거부하고 동태후가 권하는 상대를 고른 것이다. 격노한 서태후는 동치제에 대 한 압박을 강화하고 그로 인해 동치제는 이듬해 사망해 버린다. 역사상 최고권력을 장악했던 여성들, 예컨대 전한 시대의 고조 유방의 처 여후, 당나라 여제 측천무후 도 역시 자신의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자마자 친자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으로 몰아넣거나 극단적인 경우는 살해하기도 하였다. 그녀들에게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며 그를 위해서는 모성애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선악의 문제는 별도로 하고, 그녀들은 모든 것을 남김없이 불태울 만큼 강렬한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 었기 때문에 남성 논리가 관철되는 정치 환경 속에서도 권좌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자손을 둘 겨를도 없이 동치제가 젊은 나이에 죽은 뒤 서태후가 고를 후계자는 불과 4세인 조카(여동생의 아들) 순친왕 재첨, 즉 광서제(재위 1874년-1908년)였다. "어린 자라면 교육할 수 있다." 는 것을 염두에 둔 선택이었다. 이리하여 동서 양태후의 제 2차 수렴정치가 재개되는데, 이번에는 서태후의 힘이 현격히 우월해진데 다 설상가상으로 1881년 동태후가 급사(서태후가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함으로써 완전히 서태후의 독무 대가 되었다. 1889년에 서태후는 광서제가 성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자진해서 은퇴하여 자금성에서 별궁 이화원으로 옮겨 유유자적한 생활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광서제에게 '친정'을 허용했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명목뿐이었다. 그녀는 정보원을 풀어 황제의 동정을 감시하고 결 코 실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34

235 광서제의 친정은 1898년까지 9년간 이어졌다. 그러나 그 동안 1894년부터 1895년에 걸쳐 일어난 청일 전쟁에서 패배하고, 이 기회를 틈탄 열강국이 잇달아 강경하게 이권을 요구하는 등 상황은 점점 더 참 담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사태에 위기감을 더해간 개혁파 지식인은 광서제 밑으로 결집하여 정치 겨 제 사회 기구 전반에 걸친 발본적 개혁을 단행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1898년에 시작된 이른바 '무술변 법' 운동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서태후가 변법운동에 반대하는 보수세력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어 이없이 무너지고 만다. 이 결과 광서제는 유폐되고(그 대단한 서태후도 구미 열강을 꺼려하여 살해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퇴위시키는 것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다시금 서태후가 명실 공히 최고권력자의 지위에 복귀하였다. 이 제 3차 수렴정치는 이후 그녀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서태후가 죽은 것은 1908년 11월 15일 광서제의 죽음보다 불과 하루 늦은 것이었다. 그 때 나이 74세. 함풍제 사후 정권을 장악하고부터 47년간, 약 반세기 동안 권력투쟁을 이겨내고 수반의 자리를 사수한 이 여성은,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도 역시나, 꿈이여 다시 한번 식으로, 광서제 동생의 아들로서 불과 3 세였던 부의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마지막 황제 부의가 즉위하고 3년 후 신해혁명에 의하여 중화민국이 탄생하면서 청나라는 멸망했다. 3천 년에 걸친 왕조 시대는 이렇게 하여 마침내 종말을 맞은 것이다. 사치의 국제화 중국 최후의 왕조 청나라와 운명을 함께 한 서태후는 결국 3천여 년 동안 이어져온 황제적 사치향락 을 총결산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물론 그녀가 황제는 되지 못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황제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녀는 궁중의 여자 관리나 환관에게 자신을 '노물야'(부처님이라는 뜻)라고 부르게 하고, 광서제에게 는 '친파파(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했다는 점으로 볼 때, 원래 남자이고 싶어한 여성으로 볼 수 있다. 그 러므로 그 사치 스타일도 과거의 어느 황제에게도 뒤지지 않는 장대한 것이었다. 중국 사치향락사의 핵심요소는 정원, 식사, 연극 등 세 가지로 이야기되는데 이 중 어느 면에서나 서 태후는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였다. 정원은 1888년 북경 교외 만수산 기슭 곤명호 부근의 풍광 뛰어난 곳에 화려함을 집결시켜 놓은 듯한 별궁 이화원을 조경했는데, 여기에다 전기도 끌어들이는 등 과거 어느 황제의 정원보다도 훨씬 쾌적하 게 조성했다. 이를 크게 흡족해 한 서태후는 엄동설한에 자금성으로 되돌아가는 이외에는 모두 이곳에 서 지냈다고 한다. 명나라 궁전을 그대로 계승한 자금성은 설비가 낡고 전기도 없이 단지 넓기만 할 뿐이어서 그다지 거 주하고 픈 마음이 없었을 수도 있다. 이화원을 건조하는 데는 2천만 냥이라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이 것은 1874년에 창설된 세 개의 해군용 군사비를 유용함으로써 충당되었다. 당시 열강과의 전쟁에서 계 속 패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서태후의 식도락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이 방면에서 이름을 날린 청나라 제 6대 황제 건륭제도 얼굴 을 붉힐 정도였다. 서태후 전용 부엌에느느 항상 수백 명의 요리사들이 최고의 요리기술을 응축시켜 요 리를 만들었다. 그녀는 하루 네 번씩 식사를 했다고 하는데 그 중 두 번이 정찬이며 이 때는 1백 그릇의 요리가 차려 졌다고 한다. 오정격 편저 '만족식속여청궁어선'(1988년 요녕과학기술출판사 간)에 인용된 자료에 의하면, 서태후의 식사를 위해 규정상 다음과 같은 재료가 매일 준비되어 있었다. 반육 50근, 멧돼지 1마리, 양 1마리, 노황미 1되 5합, 강미 3되, 갱미면(멥쌀국수) 3근, 백면(흰 국수) 15근, 교맥면(메밀국수) 1근, 밀가루 1근, 완두 3합, 참깨 1합5작, 백당 2근 1냥 5전, 분당 8냥, 봉밀(벌 꿀) 8냥, 호도열매 4냥, 송인(소나무 열매) 2냥, 계란 28개, 구기자 4냥.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35

236 이 밖에 연와(제비집), 어시(생선 지느러미살), 은이(목이버섯) 등이 적당량 준비된다. 이 중 연와는 이미 언급한 '홍루몽'에서도 약용 인삼과 함께 귀중한 물건인데 그것도 마음껏 쓰고 있 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모두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중 서너가지에만 손을 댈 뿐 나머지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손을 대지 않은 채 물려나온 요리는 그대로 버려졌기 때문에 엄청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연극도락도 매우 뛰어나 민간 극단을 자주 불러 공연하도록 한 것을 물론이고 궁중에서 '남부성반'이 라는 고용극단을 만들어 배우를 양성하는가 하면 경극을 몹시 좋아하여 수시로 그들에게 상연하게 하고 즐겼다. 이밖에도, 만주 귀족의 딸로서 단기간이지만 만년의 서태후를 반든 경험이 있는 덕령(1898년-1944년) 의 회고록에 따르면, 희귀한 것을 좋아하는 서태후는 러시아 서커스단을 이화워능로 불러 구경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시대가 시대인 만큼 사치에도 국제화 물결이 밀어닥쳤던 것이다. 덕령은 프랑스 공사로 부임한 아버지와 함께 4년 동안 파리에 주재한 적도 있어 영어와 프랑스어에 뛰어났다. 당시로서느느 드물게 서구적인 교양을 갖춘 이 여성을 특별히 돌바준 서태후는 그녀에게 영 어를 배우려 한 적도 있지만 정말 안되겠는지 불과 두 과를 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고 한다. 의식 비용이 국가수입의 6분의 1 만사에 화려함을 좋아한 서태후가 특별히 그 사치충동을 폭발시킨 것이 지금도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 는, 1894년 11월 29일 그녀의 60세 생일잔치였다. 때마침 청일전쟁이 발발한 그 시기에 그녀는 의복, 액 세사리, 파티 등등을 위해 모두 1천만 냥 남짓한 비용을 마구 썼다고 한다. 이 금액은 청나라 국가 세입 의 6분의 1이나 차지할 정도로 막대한 것이었다. 그 60세 생일에는 온갖 취향을 총합한 향연을 벌였는데 그 중 극치는 서태후의 분신이라 할 만한 환 관 이연영이 계획한 방생 의식이었다. 이것은 새장에서 새를 일제히 놓아주는 것으로, 서태후를 위해 음 덕을 베풀고자 하는 시도였다. 마침내 당일 방생을 하자 새장에서 놓여난 새는 창공으로 날아갔는데 그 중 몇 마리인가가 되돌아 왔 다. 의심스러워하는 서태후에게 이연영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노불야의 은덕을 사모하여 새도 날아 가지 않는 줄로 아옵니다." 이리하여 자존심이 세워진 서태후가 크게 기뻐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사실 이 이야기에는 내막이 숨겨져 있다. 교활한 이연영은 미리 부하 환관에게 명하여, 놓여나도 즉시 돌아오도록 비밀리에 새를 훈련시켜 두었던 것이다. 게다가 날아간 새도 서태후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언덕 뒤에 내려앉도록 훈련시켜, 새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붙잡아 곧바로 팔아버릴 계획을 꾸 미고 있었다. 서태후의 사치가 왕조 최후의 정수를 응결할 것이라고 한다면, 왕조의 부속물인 환관의 아첨 기술 및 이익 추구 기술도 더할 데 없이 정련돼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태후가 권력투쟁에 승리하는 데 훌륭한 동반자가 된 환관 이연영은 원래 멋부리기를 좋아했던 서태 후의 '소두태감'(머리를 빗어주는 계통의 환관)이었다. 사내가 되고 싶어했던 서태후가 멋을 부렸다는것 도 좀 묘한 느낌을 주지만, 그녀는 매우 자의식 과잉이었기 때문에 어쨌거나 의복, 액세서리에 집착하여 외양을 화려하게 꾸몄다고 한다. 그런데다가 외제 화장품이나 향수를 너무 많이 쓰는 바람에 옆에 가면 머리가 아풀 지경이었다고 덕령은 술회하였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젊었을 때부터 헤어스타일에는 이상할 정도로 신경질적이어서 소두태감이 빗 은 머리를 늘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출세의 야망에 불탄 이연영은 여기에 착목하여 북경 안의 유곽 을 모조리 뒤져 기녀들간에 유행하고 있는 헤어스타일을 연구해 솜씨를 닦아 서태후의 머리를 빗어올렸 다. 이를 계기로 서태후의 총애를 받게 된 이연영은 이후 서태후가 죽을 때까지 궁중에서 절대적인 권세 를 누리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덕령은, 이연영이 너무나도 악질의 잔인한 사내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역사의 '저주받은 존재'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36

237 서태후는, 역대 황제들이 역사의 어둠 저편으로 사라져 그 풍모조차 분명치 않는 것과는 달리 1백 매 이상의 사진을 남겼다. 그 대부분은 1903년 70세 생일을 앞두고 찍은 것인데 촬영한 사람은 덕령의 둘 째 오빠이다. 자의식 과잉이던 서태후는 이 문명의 이기에 몹시 호기심을 보였다. 그녀는 촬영할 때 분장하는 것을 특히 좋아해 기묘하게도 스스로 '대자대비 관음보살'로 분하여 '위타천'(불법 수호신 중의 하나)으로 분 장한 이연영 등을 대동하여 카메라 앞에 서기도 하였다. 이 사진들에서 보여지는 서태후는 오히려 비장함까지 엿보이는 험한 표정이 특징적이다. 이 표정은 국비를 쏟아부은 사치도 결국 권력욕에 사로잡힌 그녀의 마음을 결코 온화하게 하지는 못했음을 보여주 는 듯하다. 고대 황제, 은나라 주왕에서 시작되는 황제의 물질적 사치는 이렇게 하여 최후의 왕조 청나라 서태후 에 의해 막이 내렸다. 근대에 들어 왕조라는 제도 자체가 쇠약하고 파탄에 빠진 이 시점에서, 사내인 황 제는 엔트로피를 폭발시킬 만한 힘도 이미 가질 수 없었다. 이 틈바구니에서 과거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토록 권력의 블랙홀에 함몰되지 않을 수 없었던, 궁 녀들을 한을 응축시킨 듯한, 맹렬여성 서태후가 돌출하여 성대하게 엔트로피 폭발시킴으로써 무대의 막 을 내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서태후에게 아무런 명예가 되지 않는다. 시대착오적 권력투쟁의 승리자가 되어 처절하게 사치에 빠진 끝에 그녀가 남긴 것은 열강에 의해 갈갈이 찢긴 무참한 중국뿐이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다룬 후한, 당, 명의 환관, 명말의 장헌충, 청의 서태후는 모두 왕조 교체기 혹은 종언기의 세기말적 상황하에서 누적된 엔트로피를 폭발시켜 탕진과 소진으로써 몸을 망치고 사회에 파국을 일으 킨 자들이었다. 그들은 역사의 저주받은 존재이며, 그 탕진과 사치는 말할 필요도 없이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무엇 하나 기여하지 못했다. 만일 그들의 존재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모든 부 정성을 짊어지고 자폭함으로써, 어찌 됐든 피로하고 피폐한 국가와 사회의 신진대사를 재촉한 데서 찾 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스스로를 회복하고 다시 살아나는 강인한 문명국가 중국의 '블랙홀'이 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제 5장 정신의 탕진 "살아서 이 세상에 있으면 언젠가는 열리게 되는 법. 죽어서 저 세상에 몸을 의탁하는 것도 또한 괜 찮은 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비슷한 것이니, 단지 떠돌가가 타향에 있는 것과 같은 것 아니겠는가." 죽 림칠현을 시작으로 하여, 다른 차원의 자유를 추구했던 육조지식인 귀족, 어떤 때나 꺾이는 일 없이 인 생을 즐겼던 소동파, '시은'으로서 꿋꿋하게 살며 표류했던 당인. 이렇게 하여 그들의 정신의 방탕, 정신 의 사치의 궤적을 더듬어 보면 말할 수 없을만큼 통쾌한 해방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 술독에 빠지고 약물에 취해서 죽림칠현 황제, 귀족, 상인으로부터 역사의 블랙홀에 이르는 중국 사치향락사에서 지식인 집단인 사대부를 빼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대개 지식인은 빈곤한 계층이기 때문에 - 꼭 그렇지만도 않았지만 - 사대부의 사치는 죽림칠현 이래 대개 정신의 사치, 정신의 방탕이 중심을 이룬다. 죽림칠현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완적(210년-263년), 혜강(223년-263년), 산도(205년-283년), 유영(연대 미상), 완함(연대미상), 상수(연대미상), 왕융(234년-305년) 등 일곱 사람이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37

238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3세기 중반, 조씨의 위에서 사마씨의 진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격동의 전환기였 다. 이 위험한 시대에 죽림칠현은, 새로이 등장한 정권의 반대파를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된 사마씨의 첩 보망을 피하기 위해 노장사상의 '무위자연' 이념에 기반한 독특한 생활방식을 창조했다. 그들은 쓸모없 는 존재가 되기를 자처하여 그 생을 마치고자 했다. 죽림칠현의 일원인 왕융이 명문귀족 '낭사 왕씨'의 일족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모두 귀족층이었다. 육조 시대를 거치면서 귀족층과 사대부층은 거의 일치하였다. 이 점이 근세 이후의 사대부층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또한 죽림칠현이 후세에 알려진 모습처럼, 정치적 세계에서 떨어져 나가 죽림에 모여 다 함께 술에 취하고 음악을 즐기는 식으로,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죽림칠현 전설이, 기성 정치체제 속에서 살기를 강요하는 유교적 가치관을 배척하고, 자유롭고 다양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후세의 사대부에게 이상형이 된 것은 틀림없다. 몽환적 인생관 죽림칠현이라 해도 생활방식은 저마다 달랐다. 리더격인 완적이나 혜강의 일견 자유분방한 생활방식 도 실제로는 권력기구와의 숨막히는 긴장관계 속에서 신변의 안전을 꾀하면서도 반항적 태도를 관철하 기 위한 고육책의 성격이 강하다. 이에 반해 주량을 알 수 없는 대주가로 알려진 유영은 이 세상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정신을 통째로 탕진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완적이나 혜강처럼 영향력 있는 거물도 아니었다. 또한 문학자로서도 초일 류급에 속했던 완적이나 혜강과느느 달리 겨우 한 편의 산문-술의 효용을 칭송한 '주덕송'(문선 제 47 권)이라는 작품- 만을 남겼을 뿐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가 매우 홀가분한 처지였기 때문에 더욱 돋보였 다고도 할 수 있다. 유영은 '주덕송'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인 선생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천지개벽 이래 이후를 하루, 일만 년을 한 순간, 태양과 달 을 자기 집 대문, 전 세계를 자기 집 뜰로 생각한다. 어디로 갈 때는 수레 바퀴자국 흔적이나 족적을 남 기지 않고, 일정한 주거조차 없다.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이불 삼아서 생각하는 대로 행동한다. 멈출 때는 술잔을 손에 들고 움직일 때는 술잔과 호리병을 매달고 간다. 오로지 술을 마시는 데만 정신을 쓰 고 그 밖의 일에는 일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유영의 이러한 유유자적한 술 찬가의 근본은 번거로운 현실세계에서 빠져나와 천지자연과 일체가 되 고자 함이다. 넉넉한 생성과 소멸의 섭리에 몸을 맡기는 것이야말로 참된 인간존재의 모습이라는 노장 사상의 이념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 장대한 몽상을 자신의 몸속에 끌어들이기 위한 필수품이 바로 술이라는 것이다. 유영의 삶은 '술에 젖은 것' 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외출할 때는 항상 한 병의 술을 걸친 후 작은 수레에 타고는 시종에게 가래(흙을 퍼 담는 기구)를 지니고 뒤따라오게 하여 "죽으면 즉 시 묻으라"고 말했다. 죽는 그 순간까지 꿈을 꾸듯이 살려고 한 것이다. 왜 나의 잠방이 속에 들어오는가 이 확신범적 알코올 중독자들에게는 이 밖에도 술에 얽힌 일화가 많다. 예를 들면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끊으라고 애원하는 처에게, 신에게 기도하고 금주 서원을 세울 테니 신주를 가져오라고 해놓고는, 술을 가져오자, "하늘은 유영을 낳고, 술로써 이름을 날리게 하신다"며 기도를 하는가 싶더니 신주를 단 숨에 들이키고 금세 곤드레만드레 취해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게다가 그는 취하면 집 안에서 옷을 홀딱 벗곤 했는데 그 모습을 본 사람이 비난하자, 숙련된 노장철 학의 과장법을 방패 삼아 정색을 하고 나섰다. "나는 천지를 집으로 생각하고 집안을 잠방이라고 생각한 다. 자네들은 왜 내 잠방이 속으로 들어오는가"라고 응수해 상대방을 머쓱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유영이 언제나 그렇게 전투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대취한 상태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상대방이 주먹을 치켜들고 때리려고 하자 유영은 유들유들한 말투로 이렇게 받아넘겼다. "나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38

239 는 계륵(닭의 갈비뼈. 버리기는 아깝지만 그다지 쓸모도 없다는 것의 비유)이기 때문에 자네의 주먹을 받을 만한 인물이 못되네." 상대방은 웃어넘기고 긴장은 그 자리에서 풀렸다. 유영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장대한 우주적 환상속에서 정신의 해방을 꿈꾸면서도 우주와 인간을 대비하여 현세의 부질없음을 내보였다. 그는 이렇게 몸을 굽힘으로써 밀려오는 외부의 압력을 비켜가려 한 것이다. 술독에 빠져 산 유영은 위험하다 싶을 때 몸을 굽히는 방법을 완전히 체득하면서 정신적 방 탕을 다하여 위진교체기를 큰 실수없이 살다가 유유히 천수를 다하려 했던 것이다. 이후 서진 동진을 통해 이러한 유영의 정신적 쾌락을 앞세우는 농샬랑(적극적인 관심이 없어 행동에 열의가 없는 모양)한 생활방식을 추종하여 술없이 무슨 인생이 있으랴, 하고 기절할 때까지 취하는 것을 즐기는 모방자가 속출하기에 이른다. 위진 시대는 지식인 귀족들이 쾌락 추구에 모든 것을 내맡긴 시대였다. '지식인은 곧 정치적 인간'이 라는 중국 전통의 공식이 깨끗이 없어진, 역사상 드문 시대였다고 할 수 있겠다. 오석산의 유행 육조를 통하여 지식인 귀족들 사이에 크게 유행한 것이 바로 오석산을 복용하는 것이다. 이 역시 쾌 락원리를 추구하면서 생겨난 현상이었다. 오석산은 석종유, 석유황, 백석영, 자석영, 적석지 등 다섯 광물 을 조합한 마약이다. 제조공정도 까다로웠기 때문에 오석산은 꽤 값이 비싸 보통 서민으로서는 도저히 손댈 수 없는 것이 었다. 그러므로 역으로 오석산을 '복약'하고, 그 후 독성을 발산시키기 위한 '행산'이라고 칭하는 산보를 하는 것이 귀족의 지위를 과시하는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이 때문에 모방자도 잇달았다. 수나라 후백의 소화집 '계안륵'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번화가에서 가난한 남자 하나가 괴로워하고 있어 사람들이 까닭을 물으니, '복석'했기 때문에 열이 나 서 지금 '석발'하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이런 사내가 오석산을 살 수 있을 리 없었기 때문에 계속 추궁 을 하니 사내는 "어제 먹은 쌀 밥 속에 돌이 들어있어서, 지금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부 귀의 심벌로서의 오석산의 위력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이 오석산을 최초로 복용한 사람은 죽림칠현과 거의 동시대인인 하안(190년?-249년)이다. 동시대인이 라 해도 자연파 7현과 귀족 살롱파 하안과는 스타일이 달라 전혀 교류가 없었다. 하안은 어머니가 조조의 측실이었기 때문에 조조의 양자로 궁중에서 자란 멋쟁이이고 유명한 미남자 였다. 그는 또한 상당한 재능을 가져 위나라 말기 정시연간(240년-248년)의 귀족 살롱의 총아로서 그 이 름을 날렸다. 하안은 오석산을 복용하고, "오석산을 마시면 질병이 치료될 뿐 아니라 정신까지 뚜렷해지는 것을 느 낀다"고 선전했다. 하안이 그렇게 말하니 효과는 커서 금세 오석산은 위말 귀족사회에서 대유행하기에 이른다. 하안은 유행의 첨단을 열어젖히는 센스에 탁월했다. 그는 오석산뿐 아니라, 육조 시대를 통해 귀족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졌던 철학강의 '청담'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탁상공론의 쾌감 오석산과 청담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과관계가 있었다. 오석산은 신경을 자극하여 정신적 긴장 을 높인다. 철학적 주제를 둘러싸고 밤을 새워 토론을 하는 청담의 결정적 승부처는 반사신경의 예민함 과 탁월한 언어감각에 있기 때문에 오석산의 복용은 청담의 몰입과 직결된다. 청담의 내용은 크게 인물 비평과 순수철학론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철학론은 이런 식으로 전개된 다. 예를 들면 '장자' 천하편의 '도달하되 도달할 수 없다'를 테마로 잡았을 때, 서진의 악광이 불자(중들 이 가지고 다니는 법구의 하나로서 말꼬리, 삼 등을 묶어서 자루를 단 것인데, 청담 때 손에 들고 있다 고 한다)의 자루를 탁자에 갑자기 탁하고 치며, 질문자에게 "도달했는가"하고 묻는다. 질문자는 물론 "도 달했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이번에는, 불자를 탁자에서 떼고, 악광이 말한다. "만일 도달했다면 어떻게 지나갈 수 있으리." 거기에서 질문자는, 과연 "도달하되 도달할 수 없다"고 납득한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39

240 이것은 위진 귀족들의 에피소드집 "세화신어" 문학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대강 이와 같은 어조로 연연 히 탁상공론을 겨루는 것이 청담의 진수이다. 그리고 오석산에 의한 자극은 이러한 청담의 흥취를 더해 주는 절호의 촉매제가 되었다. 그러나 오석산은 강력한 정신적 흥분과 고양을 가져오는 반면 부작용도 몹시 강했다. 처음 오석산을 복용하면, 약의 독이 퍼져 신체가 울컥 뜨거워진다. 그대로 참고 있으면 목숨이 위태롭게 된다. 어쨌든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 일어설 힘이 없는 사람은 부축해서라도 일어서게 해서 걷게 해야만 한다. 독을 발산시키기 위한 이러한 운동을 '행산'이라고 불렀다. 동시에, 따뜻하게 데운 술을 마셔 약의 작용이 천천히 전신에 골고루 퍼지도록 해야 했다. 이때 찬 술 은 목숨을 앗아가기 때문에 절대로 마시면 안된다. 다만, 오석산의 별명이 '한식산'이라 불리우는 그대로, 음식물만은 차게 한 것이 바람직하다. 이처럼 오석산 복용에는 항상 생명의 위험이 따른다. 또한 해독을 위한 번거로운 절차가 불가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져오는 특이한 정신의 앙양상태에 홀린 사람들은 다투어 이 약을 찾아다녔 다. 수백만 명이 중독사 그러나 아무리 신중하게 해독해도 장시간 복용한 중독자는 약의 힘으로 얻은 정신의 자유, 정신의 방 탕에 비싼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부작용으로 피부가 짓무르고 혹심한 가려움에 시달리거나 몸에 항상 열이 나서 추운 겨울에도 내의 한 장만 입고 차가운 돌 위에 누워야만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쉽게 흥분하여 조그만 일에도 벌컥 화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증상들은 아직 덜한 쪽이고 더 무서운 단말마적 상태에 빠지는 사 람도 많았다. 예를 들면 서진의 배수(224년-271년)라는 인물은, 오석산을 남용한 끝에 착란상태가 되어 극심한 오한 과 발열에 떨고 눈도 멀어, 영문을 모른 채 계속 절규했다. 당황한 주변 사람들은 계속 고열이 나니까 차게 하면 좋다고 생각하고 금기사항인 찬 술을 마시게 한 다음, 수백 석(1석은 약 19리터)의 물을 마구 끼얹었는데 불쌍하게도 배수는 절명하고 말았다. 서진의 학자로서 역시 오석산 중독으로 고통에 시달린 황보밀(215년-282년)은, 이 조치가 완전히 잘못 이었다고 비난하고, "10석(1석은 약 27kg) 벌건 숯도 2백 석의 물을 끼얹으면 차거워지는 법이다. 약의 열이 아무리 심하다 해도 10석의 벌건 숯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수 백 석이나 되는 물을 끼얹으면 추 위 탓에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어쨌거나 대량의 벌건 숯이 인용돼 나오는 것을 보아도 오석산 중독 발작의 발열이 얼마나 처참한 것 이었는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오석산 중독으로 어이없이 절명한 사람은 수없이 많다. 여가석(1883년-1955년)이 방대한 독서와 기억 력으로 온전하게 되살려 정리한 정평 있는 오석산 연구서인 '한식산고'에서는, 위나라 정시연간에서부터 당나라 현종의 천보연간(742년-755년)까지 약 5백 년 동안에 오석산으로 중독사한 사람들이 수백만 명 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더욱이 이 5백 년은 바로 귀족의 시대에 해당된다. 그러나 육조를 절정기로 하는 이 귀족의 시대는 귀족이라는 말이 떠올리는 나긋나긋한 이미지와는 정 반대로 극심한 권력투쟁과 전쟁이 잇따른 난세였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어두운 이 시간대에 살 았던 지식인 귀족은, 술과 약을 매개로 하여 죽음과도 같은 광기로 정신적 방탕을 다했던 것이다. 약파는 미남, 주파는 추남? 그들 중에는 술과 약을 병용한 자도 많지만 궁극적으로는 역시 '주파'와 '약파'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 다. '주파'를 대표하는 인물은 물론 유영이고, '약파'의 대표주자는 말할 필요도 없이 하안이다. 유영은, 키가 불과 1백 44cm밖에 안되는 극단적으로 작은 추남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외견상의 풍모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40

241 에는 전혀 무관심하여, "느긋하게 마음을 멀이 놀게 하고, 육체를 흙덩이나 나무조각처럼 여겼다"('세화 신어' 용지편)고 한다. 이에 반해 미남으로 유명했던 하안은, "하안은 나르시스트로서, 언제나 하얀 분을 손에서 떼지 않고, 걸을 때는 자기의 그림자를 되돌아볼 정도였다."('삼국지' 위서 제 9권. 배송지 주해 '위략')고 하며, 더욱 이, 유행에도 관심이 깊고, 여성의 옷을 즐겨 입는 스타일리스트였다는 설도 있다. 하얀 분을 바르고 치 장하는 것은 데카당스의 미학을 체현한 육조 귀족에게 널리 보여지는 현상이며,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분칠을 하고 다녔는지는 접어두고, 하안을 효시로 하여 서진의 재상 왕연, 동진 초기의 위개, 동진 말 기의 왕공 등 '약파' 중에는 뛰어난 미남이 많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주파' 중에는 이렇다 할 미남이 눈 에 띄지 않는다. 모두 유영과 비슷한 추남뿐이라고 하면 좀 지나친 표현이지만, 아무튼 그런 분위기가 없지도 않다. 하안에서 출발한 청담과 '약파'의 관계는 앞서 말한 바와 같으나, '주파' 사람들은 기절할 때까지 취하 는 것을 쾌락으로 즐겼기 때문에 변변히 말도 못하고, 물론 청담 따위는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때문에 청담은 '약파'의 전매특허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미모의 청담의 명수를 스타로 하는 '약파'쪽이 야만스러운 '주파'보다도 현격히 농후한 데 카당스 색채에 물들어 있으며, 그런 까닭에 한층 더 육조 귀족사회의 기풍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존재 였다고 볼 수 있다. 하인에게 자신을 묻는 데 사용할 삽을 지니게 하면서 술에 탐닉하여 정신적 자유를 추구했던 유영을 비롯한 대주가들, 약물 중독으로 미쳐 죽는 자를 보면서도 굳이 약을 남용하여 정신의 앙양을 꾀했던 오석산 중독자들. 그들에게 공통되는 것은 현실도피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도피에는 이미 보았듯이, 자기 몸을 모조리 태워버릴 듯한 처연한 에너지가 투입되었다. 육 조 지식인 귀족은 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 각각의 의식이나 방법대로 정신적 바탕을 다하였다. 그리하 여 정치원칙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현실사회와는 차원을 달리 하는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기 위한 고유 한 방법을 모색하는데 몰두했던 것이다. 2. 유배도 즐겨 지방 근무를 자청한 소동파 과거에 합격한 진사가 고급관료가 되어 황제를 보좌하는 형태로 정치기구의 중추로 부상한 것은 송나 라(북송 960년-1126년, 남송 1127년-1279년) 시대에 들어서부터였다. 진사를 중심으로 하는 근세적인 사대부 계층이 탄생한 것도 이 이후의 일이다. 과거의 문호는 비교적 널리 개방되어 있어 농민이나 상인의 자제도 과거시험을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세습귀족의 경우와는 달리 개인의 능력에 달려 있는 사대부는 유동적인 계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도 중반기 이후가 되면 진사출신의 관료간에 당쟁이 극심해져 정국은 빈번히 대혼란에 빠 졌다. 근세적 사대부의 정신적 사치를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존재인 소동파(1036년-1011년. 본명 은 소식. 동파는 호)도 급진적인 국가기구 개혁을 주장하는 신법당과 이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구법당의 격렬한 싸움에 휘말려 어지러운 운명의 전환을 경험했다. 탁월한 문학자로서 유달리 눈에 띄는 존재였던 소동파는 구법당의 인물이다. 그는 신법당이 헤게모니 를 잡을 때마다 눈엣가시가 되어 벽지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생활을 즐기는 소동파의 뛰어난 재능은 오 히려 이러한 역경 속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소동파가 두 살 아래인 동생 소철과 함께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생활을 시작한 것은 1057년, 그의 나 이 22세때 일이다. 이 때 뒤늦게나마 부친 소순도 함께 관계에 진출하였다. 이들 3인의 부자가 '삼소'라고 불리우는 송대 굴지의 문장가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소동파는 세차게 솟아오르는 샘물 같은 창작력으로 생애 약 2천8백 수나 되는 시를 짓고 수많은 산문을 남겼다. 소동파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41

242 의 이름은 일찍부터 당시 사람들 사이에 알려져 새로운 시편이 나올때마다 읽혀질 정도로 인기가 있었 다. 소동파는 문학자로서 탁월할 뿐만 아니라 화가로서도 서예가로서도 초일류였다. 게다가 또한 요리-동 파육으로 유명-와 의술, 약학, 토목건축-서호를 준설하고 진흙과 모래를 이용하여 소제를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어쨌든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소동파의 성격은 명랑하고 활달하며,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와도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낙천적인 태도로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았고, 천성적인 호기심을 활용하여 곧 즐거운 소재 를 찾아냈다. 이런 식이기 때문에 너무 딱딱한 것은 성에 맞지 않아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지방 근무 쪽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발탁되어도 기분이 좋지 않아 걸핏하면 중앙에서 도망칠 궁리만 하였다. 하지만 소동 파는 관리로서도 대단히 우수하기도 했다. 돈이 떨어지면 또한 생각합니다 그런 탓에 1071년, 36세 때 풍광이 뛰어난 항주의 통관(부지사)으로 부임한 이후 지방근무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079년 그가 44세이던 청천벽력 같은 필화사건이 일어난다. 많은 시문에서 황제를 어 둠으로 비방했다는 죄상에 따라 체포구금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것은 신법당과 의 알력이 원인이었다. 다행히 사형은 면했지만 황주(호북성)으로 유폐되게 되었다. 소동파 최초의 유죄이다. 황주 땅을 밟았 을 때의 인상을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평소부터 이 입 때문에 성가신 일을 일으켜 왔던 것이 나 자신도 우습다. 나이를 먹으면서 함부로 하 는 정도가 더 심해져 왔다. 하지만 여기는 장강이 성곽을 에워싸고 흐르기 때문에 반드시 훌륭한 고기 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빼어난 대나무 숲이 근처 산들에 펼쳐지니 죽순의 향내가 감도는 듯하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유배된 몸이라는 것도 아랑곳 없이 목청을 울렸던 것이다. 이리하여 소동파는 오 히려 즐거이 가족까지 몽땅 황주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죄인의 몸이라 급료마저 중단된 상황 이었기 때문에 점점 궁색해져 갔다. 그는 이 곤견을 여러 가지 궁리를 다하여 벗어난다. 황주에 막 도착했을 때는 급료가 중단되고 가족도 많아 걱정을 많이 했다. 열심히 절약하여 매일 1백 50문 이상은 쓰지 않도록 했다. 매월 1일이 되면 4천 5백문의 돈을 꺼내 30포로 나누어 천장에 매달아 둔다.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걸어놓은 보따리에서 한 포를 내리고 즉시 보따리를 치워버린다. 따로 커다 란 대나무 통을 준비하여, 쓰고 남은 돈을 저금하여 손님대접에 사용한다. 이것은 가운노(소동파의 항주 부지사 시절 친구)가 가르쳐준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가진 돈으로 1년 남짓 살 수 있다. 돈이 떨어지면 또 생각한다. - 문인인 주관에게 쓴 편지 소동파는 이처럼 가난한 상황에서도 부지런히 모은 접대비를 사용하여 마음 가는 데까지 교류를 즐겼 다. 소탈한 그를 교제범위는 매우 넓었다. 그의 친구 중에는 불교에 관심이 강했기 때문에 승려도 많았 으며 인근의 농부도 있었다. 손님을 초대하거나 손님이 오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누구라도 오지 않으면 재미가 없어 병자처럼 되었다. 그리고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밀주를 담그기도 했는데, 묵히는 방법이 미숙해서인지 언제나 실 패하여 마신 사람은 급성 설사에 걸려 버렸다고 한다. 이듬해에 두 번째로 유배되어 혜주(광동성)로 갔을 때는 계수나무로 술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역시 아들들의 증언에 따르면 형편 없었다고 하니 그처럼 대단한 소동파도 술 만드는 일만큼은 별로였던 것 같다. 새로운 사의 방향성 황주 시절 소동파가 가장 친하게 교제한 인물은 진조였다. 진조는 황주에서 조금 떨어진 기정에 살고 있던 옛친구이다. 소동파는 허물 없는 사이인 진조를 유머 넘치게 놀리고는 매우 즐거워했다. 예를 들면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42

243 이런 식이다. 사자후라는 것은 화가 나서 고함치며 앙알앙알 잔소리 하는 사나운 아내라는 뜻이다. 잠도 안 자고 담론풍발 불교철학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진조가 맹처의 질책을 들은 순간,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툭 떨어뜨리며 움츠러들고 마는 모양을 희화화한 것이다. 진조의 부인은 '유씨'라고 한다. 유씨 일족은 하동(산서성 서부)의 명문인데, 이를 빗대어 소동파는 하 동(유씨)의 사자후(고함치는 소리)라고 조롱했던 것이다. 더욱이 진조는 바람둥이였는데 그는 맹처 유씨 의 질투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소동파의 이 폭로 때문에 진조는 이후에 공처가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말기에 소동파와 절대적인 신뢰관계에 있었던 동생 소철은, 형이 유배되자 즉시 황주로 달려왔다. 소 철은 '입 때문에 성가신' 일을 당한 형을 염려하여 헤어질 때 쉿! 하고 손가락을 입을 막아 보였다. 하지 만 한 가지를 보면 만 가지를 알 수 있듯이, 유배상태에서도 제멋대로 지껄이니 그 충고도 전혀 효과가 없었다. 이리하여 황주 생활 1년 남짓, 소동파는 계획대로 빈털털이가 돼버렸다. 그러나 워낙 친구가 많은 사 람이기 때문에 위기가 닥치면 든든한 구원자가 등장해서 도와주었다. 옛 친구인 마몽득이라는 인물이 소동파 일가의 궁색한 모습을 보고 관청과 교섭하여 병영터였던 거친 땅을 빌려주었다. 소동파는 그 땅을 '동파'라 이름하고, 즉시 스스로 개간하기 시작한다. 밭일에 정성을 쏟는 이 생활에도 소동파는 곧바로 적응했다. 하지만 이 역시 "밤이 되어 동파에서 술을 마시고, 취했는가 생각하니 또한 취기가 돌았다. 돌아온 것 은 삼경쯤. 하인은 천둥 같이 코를 골아 문을 두르려도 전혀 반응이 없다. 나는 지팡이에 기대어 냇물 소리에 귀기울일뿐"이라는 식이었다. 원래 소동파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극소량의 술에 도 기분 좋게 취했다. 또 하인의 코고는 소리가 높은 것을 말했지만 사실 소동파 자신의 코고는 소리도 크기로 유명했다. 지금 인용한 것은, '임강선' 이라는 작품의 일부이다. 이것은 시가 아니라 원래는 정해진 멜로디에 얹 혀 구가되는 '사'(중국의 운문체의 하나)라는 양식에 따른 작품이다. 화류계에서 나온 '사'는, 당나라 말기 부터 문인들에게 주목받게 되었는데 주로 남녀관계의 감상적인 정서를 읊는 것이 보통이었다. 소동파는 이러한 기존의 경향을 대담하게 전환하여 사상적인 내용에서부터 하인의 코고는 소리까지도 자유자재로 읊어냄으로써 이 장르의 영역을 일거에 확대시켰던 것이다. 쐐기 맛이 너무 좋다! 황주 생활 동안 소동파는 밭농사에 힘 쓰는 한편, 수많은 친구와 교제하면서 짬을 내서 인근의 명승 지를 찾아 다니는 등, 생활을 즐기면서 정력적으로 많은 시문을 지었다. 도저히 유배된 몸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는 팔면육비(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는 수완과 능력이 있음)의 대활약이었다. 그러나 이 생활을 마감할 순간이 다가왔다. 유배된 지 6년 후인 1085년, 소동파의 나이 50세 때 신법 당 후원자 신종 황제가 사망하고 10세의 철종이 즉위하여 구법당 후원자인 태황태후(철종의 조모)가 섭 정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온세상은 구법당의 시대가 되니 소동파도 명예를 회복하고 중앙으로 올라가 극적인 승진 을 거듭, 순식간에 한림학사(황제의 비서관)라는 지위에 오른다. 태황태후는 원래 소동파의 열렬한 지지 자였기 때문에 각별히 배려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구법당 내부에서 권력항쟁이 격화하기 시작 하면서, 무슨 일이든 솔직하게 말하는 소동파에 대한 공격도 강해졌다. 이에 염증을 느낀 소동파는 1089년 지방근무를 희망, 과거 부지사를 지냈던 항주에 지사로 부임한다. 서호를 준설하여 소제를 축조한 것은 이 당시에 일이다. 이후 1093년에 충실한 후원자였던 태황태후가 서거할 때까지 소동파는 중앙의 부름을 받고 올라갔다가 곧 지방근무를 자청하여 어지러운 전임을 되풀 이했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43

244 태황태후 사후 정국은 또다시 격변한다. 신법당 후원자였던 철종의 친정이 개시되자마자 신법당이 부 활, 구법당에 보복을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소동파도 1094년 10월 이름뿐인 관직을 제수받고 혜주로 좌천된다. 더욱이 1097년 4월에는 중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해남도로 유배되었다. 주민들 대부분이 소수민족인 여족이었던 해남도는 당시 세계의 끝과 마찬가지였다. 62세의 소동파는 이 미개한 섬에 셋째 아들 소과만을 데리고 건너갔던 것이다. 그러나 소동파는 여기에서도 변함없이 여유작작, 오히려 물을 만난 고기처럼 활기 넘치게 생활했다. 쐐기를 먹어보고는 "조정의 명사들은 이 훌륭한 맛을 모를 것이다. 모두들 이곳으로 모셔와 이 맛을 함 께 나누고 싶다"고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소동파의 유머 감각은 어떤 상황에서도 수그러드는 법을 몰 랐다. 춘몽 아주머니 소동파는 여족인들과도 금세 친해졌다. 중앙의 간섭 때문에 관사에서 쫓겨나 한 푼도 없이 집을 지어 야 하는 상황에서도 여족인들은 앞장서서 거들어 주었다. 비록 허술한 오두막집이었지만 소동파는 하늘 을 품은 듯이 편하게 생활했고 마음 내키는 대로 여족 친구들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나한 기분으로 여족 네 명의 친구들을 차례로 찾아갔다 돌아오는 길, 내나무 가시와 등나무 덩굴에 걸려, 걸으면 걸을수록 길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소똥 자국을 따라가면 돌아가는 길을 금방 알수 있다. 내집은 외양간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산책을 좋아하며, 때로는 커다란 표주박을 머리에 이고, 논두렁길을 태평스럽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가기도 하였다. 그런 소동파의 모습을 본 시골 노파가 "한림학사님, 옛날의 부귀도 지금 와서는 일장춘몽입니다"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소동파는 훌륭한 이야기라고 감탄했고, 그 이후 근방 사 람들은 그녀를 '춘몽 아주머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더욱이 소동파는 이 춘몽 아주머니를 칭송한 시도 지었다. 흔히 그림에서 보게 되는 도롱이 삿갓에 짚신을 걸친 모습은 해남도에서 지내던 소동파의 생활 그 자 체였다. 소동파가 이런 모양으로 걸어가면 여자와 아이들은 재미있다고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며 뒤를 따라가고, 동네 개들도 짖어대면서 소란을 피웠다고 한다. 소동파는 열대섬, 해남도의 생활을 마음껏 즐기면서 그 오두막집에서 예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동진의 은둔시인 도연명의 시에서 차운(남이 사용한 운자를 같은 순서로 써서 한시를 짓는 것)한, 이른 바 화도시를 지어 한단계 성숙한 시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이밖에 부친 소순의 유지를 받아 동생 소철과 분담하여 작업하고 있던 오경 주석 중에서 서경의 주석 도 완성했다. 그리고 아들 소과를 통해 자신이 지금까지 쓴 수필류를 수집 정리하기도 했다.(뒤에 동파 지림으로 정리된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마감할 때가 되었음을 분명히 느끼고 해남도에서 차분히 생애를 총결산하는 작업 을 수행했던 것이다. 긴장을 풀어 헤치는 장난기 해남도 생활이 4년째에 들어선 1100년, 철종 황제가 사망하고 휘종 황제가 즉위하자 또다시 정세가 변화하여 소동파는 사면이 되어 중국 본토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소동파에게 남겨진 시간은 이 제 거의 없었다. 이듬해 1101년, 남경 부근까지 왔을 때 중병에 걸려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향 년 66세였다. 소동파는 근본적으로 역시 분명한 사대부였다. 좋건 싫건 관계없이 그 인생은 관료사회와 견고하게 맺어져 있었고, 살펴 본 대로 극심한 부침을 거듭하여 살아갔다. 하지만 그는 사대부 관료로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외부로부터 규정된 형태로 행동하는 일 은 결코 없었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하고 싶다'는 내적 욕구를 우선시했다. 소동파의 인생철학은 다음 과 같은 말속에 담겨 있다. "인생은 한 순간 머무는 것이니 어찌 즐기지 않을 수 있으리요."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44

245 소동파는 융통성 없이 고지식하게 번민하거나 심각해지지 않고,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면 빠질수록 천 재적인 적응력과 다양한 재능으로 삶을 즐길 소재를 찾아내 유쾌하게 곤경을 타개해 나갔다. 그만큼 재 미있는 사람은 다시 없다. 이러한 소동파의 모습은 이상한 것에 목숨을 걸고 '정신의 방탕'을 다한 육조 지식인 귀족과는 달리, 긴장을 풀어헤치는 풍성한 여유와 장난기로 보는 사람들에게 해방감을 갖게 한다. 소동파야말로 참된 의미에서의 '정신적 사치'를 철저히 실천한 인물로서, 훗날 사대부의 동경의 대상 이 된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3. 표류하는 시은 소주의 사대명인 명대 말기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전반기에 걸쳐 중국 굴지의 대도시였던 소주에 '오중의 사재'라고 그 이름을 떨친 문인 그룹이 출현했다. 축윤명(1460년-1526년), 당인(1470년-1523년), 문징명(1470년-1559 년), 서정경(1479년-1511년)이 그들이다. 그들은 모두 서화시문의 무엇이든 통달한 사람들이었는데, 여기에 나오는 당인은 특히 화가(미인화가 유명)로서 이름을 날렸다. 당인의 자는 백호인데 만년에 불교에 심취하여 육여라고 불렀다. 그는 소주의 고깃간(주막이라고도 전 해진다) 집 아들이었다. 머리가 좋아 장래를 기대한 부친이 일찍부터 공부를 시켜 교양을 쌓게 되었다. 당인의 선생은 소주에서 으뜸가는 화가 심주(호는 석전, 1427년-1509년)였다. 그는 시은(거리의 은둔 자)으로서 생애를 일관했던 인물로서 그림과 시문은 소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훌륭한 선생 밑에서 수학한 당인의 재능은 어려서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는데, '오중의 사재' 중 한 사람으로서 10세나 연상인 축윤명이 먼저 교제를 청할 정도였다. 서예가로서 걸출한 재능을 가진 축윤명은 오른손가락이 6개였다. 이 때문에 '지산' 혹은 '지지산'이라고 스스로 칭했다. 그는 마시기, 치기, 사기-술 도박(마작) 여자- 의 3박자를 두루 갖춘 도락자로서, 기행으 로 유명했다. 당인은 기인 축윤명과 전생애에 걸친 친구가 되어 항상 함께 돌아다녔다. 축윤명은 당인과는 달리 관리의 아들이었다. 그는 과거에 계속 낙제하다가 후년에 다른 루트를 통해 관리가 되지만 오래 지속되지 않으며, 이 또한 은자적 사대부로서 '시은'적 생애를 살았다. 당인의 또 다른 친구 문징명은, 서화시문 모두에 탁월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다만 그는 축윤명이나 당 인처럼 화류계에 출입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문징명 역시 과거에는 낙제했다. 한때는 그의 재능을 높이 사 중앙으로 초빙된 적도 있었지만 관료사회와는 성격이 맞지 않아 결국 소주로 되돌아온다. 이후 그는 '오중의 사재' 중 혼자 장수하여 90 세까지 살아 오랫동안 소주 문단의 거물로서의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문징명과 당인은 나이가 같아 14,15살 무렵부터 친구사이로 지냈다고 알려져 있다. 향락파인 당인과 착실한 인물인 문징명은 전혀 성격이 달랐지만, 자기에게 없는 상대방의 장점을 서로 인정하여 변함없 는 우정을 맺었다. 더욱이 진사 출신 관료였던 문징명의 아버지 문림은 일찍부터 당인을 이해하는 사람 으로, 자신의 교제망을 통해 당인의 재능을 널리 알려주었다. 인생의 전환점 당인부터 이야기해 보자. 친구 축윤명과 문징명은 과거에 낙제하여 관료사회에서 밀려나고 말았지만 당인은 어땠는가. 당인은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과거 예비학교인 부에 다녔는데, 놀기 좋아하는 장난꾸러기로 행실이 단정맞지 않았다. 어느 날, 악동끼리 과수원 옆을 지나치다가 먹음직스러운 과일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걸 훔쳐 먹어야겠다고 맨 먼저 당인이 담을 넘어 들어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분명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45

246 히 혼자서 정신없이 먹고 있는 것이라고 안달복달하고 있던 패거리중 하나가 담을 넘어 들어가자마자 풍덩, 하고 똥통에 빠져버렸다. 살펴 보니 옆에 당인이 있는데, 조금 있다 모두 올 것이니 기다라라고 한다. 조금 지나자 차례로 패거 리들이 풍덩풍덩 떨어져 내렸다. 모두들 완전히 누런 색이 돼버렸다. 장난이 이런 정도니 공부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축윤명도 여기에는 기가 막혀, 학교에 이름만 올리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으나 공부에 열중하든지 생각을 중단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엄중하게 당인을 꾸짖었다. 이 충고를 새겨들은 당인은 마음 을 굳게 세워 장남을 딱 끊고 1년 동안 한눈 팔지 않고 공부에만 열중했다. 이 덕택으로 1498년, 29세 때 남경에서 실시된 향시(지방의 과거시험)에 멋지게 수석합격한다. 향시 수석합격자는 해원이라고 일컬어진다. 당인이 당해원이라고 불리운 것은 이 때문이다. 향시 합격자는 그 이듬해 수도 북경에서 실시되는 본 시험 회시(중앙의 과거시험)에 임하는 것이 관 례였다. 성적이 뛰어난 당인이 이 회시에 합격하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여 기에 함정이 있었다. 그가 생각지도 못한 커닝 하건에 연계되어 체포투옥된 것이다. 그 결과 실격하고 만다. 일설에는, 당인이 회시 수석합격자로 결정되어 있었는데 발표에 앞서 이 정보를 알아챈 동향 사람 도 목이라는 사내-이 남자도 함께 시험을 보았다-가 시기한 끝에 관계 당국에 있지도 않은 일을 밀고했던 것이 이 사건의 발단이라고 알려져 있다. 도목을 이때 당당하게 합격하여 그 나름대로 순조로운 관료생 활을 보냈지만, 당인은 평생 이 인물을 혐오했다. 후년에 절교상태에 있는 두 사람을 화해시키고 쓸데 없는 참견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마침 도목이 오는 것을 모른 채 그 친구집을 찾아간 당인은, 도목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그대 로 돌아와 버렸다고 한다. 또한 당인의 친구, 그 온건한 근엄거사 문징명조차 도목의 이야기가 나오면 안색을 싹 바꾸고 혐오감 을 드러냈다고 전해진다. 이런 일들을 종합하면, 당인의 생애에 불운한 획을 그은 커닝 사건에 도목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반골의 도시 소주 그것을 그렇다 치고, 수치스런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꿈이 깨진 당인은 상심하여 고향 소주로 돌아왔 다. 이런 당인에게 태도를 표변하여 냉대하는 자도 물론 많았다. 그를 잘 이해했던 첫째 부인이 젊은 나이에 죽고 그 뒤 맞이한 두 번째 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던 이 여성은, 낙방한 당인에게 기대할 바 없다고 훌쩍 떠나가 버린 것이다. 그러나 소주라는 이 대도회지에는 관료사회에서 영원히 떨쳐난 당인을 안아줄 만한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예로부터 비단의 명산지로서 번창한 소주는, 14세기 중반 원나라 말기의 대혼란기에 명 왕조의 창립자 주원장의 라이벌 장사성의 근거지였다. 장사성에게 초청을 받아 소주로 옮겨온 문인도 많아 풍 치 있는 소주 문화의 꽃이 만개했다. 그러나 명 왕조가 탄생하자 주원장은 장사성을 지원한 소주의 호족과 상인들에게 잔혹한 보복을 가하 는데, 그 공격의 화살은 문인들에게 겨누어졌다. 이리하여 소주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대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주원장의 대탄압은 역으로 소주 사람들 사이에 불굴의 반권력 정신을 키우는 계기가 된 다. 이리하여 소주에는 명대 중기 이래, 과거의 영화를 되찾은 뒤에도 권력의 힘에 아랑곳하지 않는 강렬 한 저항정신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당인의 스승 심주를 비롯하여 사대부 지식인이면서도 관료사회 와 등을 돌린 '시은'이 계속하여 잇달아 소주 문화의 담당자로서 등장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던 셈 이다. 도회지 은자의 세련됨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46

247 그 사건이 있고 얼마 후에 여행을 떠나 상심을 치유한 당인은 이러한 소주의 기풍을 배경으로 완전히 태도를 바꾸었다. 도화오라는 곳에 주거지를 정하고 관료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을 정도로, '강남풍류제 일재자'라는 인장을 만들어 자작 그림과 시문을 팔아 생계를 꾸리고, '시은'중의 '시은'으로서 단호하게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엉뚱한 행동도 어울려져 당인의 인기는 높아져서 소주 사람들은 다투어 그 작품을 찾았다. 이에 당인은 가게를 내고 의뢰에 따라 쓴 시문을 철해 장부를 만들어 그 표지에 '이시(대복장)'이라고 기록하 여, 글을 팔아 세상을 살아가는 모양을 과시했다고 하니, 더욱 멋진 변신이었다. 앞에서 나온 소동파는, 자신이 처한 상황 자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아무리 어려움에 빠 져도 자신의 처헌 상황 자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아무리 어려움에 빠져도 자신의 의도와 는 무관하게, 속세에서 생활하는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딴 세상의 '한림학사님'이었다. 그런데 상인계층으로부터 상승하려다 실패한 사대부 당인은 처음부터 보통 사람의 일원이었다. 그는 스스로도 속인 수준에서 살고자 했다. '강남풍류제일재자'라고 자칭하고 대복장이라는 장부를 과시한 것 도 그런 결의를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똑같은 은둔이라고 해도, 사천성 벽촌의 대지주 출신이었던 소동파는 전체적으로 농민지향성 이 강하여, 대도시 소주에서 태어나 자란 생짜배기 도시인 당인의 경우와는 전혀 같이 논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발이 묶인 사대부 당인의 지극히 도회지적이었던 '시은' 생활은, 상인이 힘을 강화하여 관료 제일주의라는 전통적인 사회체제에 변화의 조짐이 엿보였던 명나라 시대가 아니고는 나올 수 없다 하겠다. 그런데 글을 팔고 그림을 파는 매문매화 생활도 안정된 뒤 당인의 기인다움은 점입가경으로, 동 료인 축윤명과 한패가 되어 수많은 기행을 거듭하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고정화된 것을 싫어하는 생 활방식을 반영해서인지 그들에게는 변장하는 취미가 있었다. 예를 들면, 걸식하는 거지로 변장하여 부호 들을 놀린다거나, 도사로 분하여 관청에서 도관(도교 사원)의 보조금을 우려내 유흥비로 써버렸다고도 한다. 특히 당인의 변장 취미는 유명했다. 어느 날 당인은 강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스쳐지나 가던 배 안 의 미녀에게 한 눈에 반해 그 뒤를 쫓았다. 그녀가 어느 퇴직한 고관의 집에서 일하는 시녀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는 당장 능숙하게 변장을 하여 가난한 서생 행세를 하며 그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그 집 고용인으로 채용되어 들어갔다. 이후 열심히 근무한 끝에 주인에게 인정을 받아 모양 좋게 그 시녀 추 향과의 결혼에 성공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 입에 가장 많이 회자된 에피소드인데, 이를 소재로 하여 희곡과 소설이 제작되기 도 하였다. 명나라 말, 풍몽룡이 편찬한 단편소설집 '삼언'의 경세통언 제 26권에 담긴 '당해원, 인연에 일소한 일'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이야기가 사실에 기초한 것인지 아닌지는 별개로 하더라도 이것은 기인 당인의 자유분방한 생활방 식이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사로잡았는지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궁극적 사치 권력기구의 조작에 튕겨 나와 그 허망함을 뼈져리게 느낀 후 반권력, 반관료주의를 온몸으로 실천하 여 소주의 '시은'으로서 꿋꿋이 살다 간 당인, 그가 이 세상을 떠난 것은 1523년, 54세 때였다.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작품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살아서 이 세상에 있으면 언젠가는 열리게 되는 법. 죽어서 저 세상에 몸을 의탁하는 것 또한 괜찮은 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비슷한 것이니, 단지 떠돌가가 타향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기성의 가치관을 타파하고 솔직하게 스스로의 욕망을 긍정하고 전통사회의 틀을 넘어 표류했던 당인 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죽림칠현을 시작으로 하여, 다른 차원의 자유를 추구했던 육조시인인 귀족, 어떤 때나 꺾이는 일 없이 인생을 즐겼던 소동파, '시은'으로서 꿋꿋하게 살며 표류했던 당인. 이렇게 하여 그들의 정신의 방탕, 정 신의 사치의 궤적을 더듬어 보면 말할 수 없을 만큼 통쾌한 해방감을 결코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47

248 이 사람들처럼,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절대적 자유를 목표로 하는 정신의 유희에 몸을 맡기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인 사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248

249 중국의 개국황제들은 왜 공신을 죽였는가? :44 역사상 공신을 죽인 것으로 유명한 황제로서는 한나라의 유방과 명나라의 주원장이 있다. 유방이 공신들을 죽인 것은 크게 상궤를 벗어나지 는 않았지만, 주원장의 경우는 조금은 변태적이었다. 주원장은 자기와 함께 천하를 얻은 공신들을 거의 다 죽여버렸다. 그러나, 공신들을 죽 이지 않은 황제도 있었다. 당태종 이세민은 공신들을 죽이지 않았다. 송태조 조광윤도 절충적인 방법을 써서 병권을 내놓게 하였지 칼을 들 이대지는 않았다.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나타난다. 왜 유방과 주원장은 공신을 죽여야만 했고, 이세민은 공신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는가? 황제의 입장에 서 보자면 이유는 두 가지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는 황제의 출신에서의 차이이다. 유방과 주원장은 모두 빈천한 출신이다. 유방은 하층출 신이었지만, 주원장은 유방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이고, 겨우겨우 절에 숨어들어가 연명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세민은 달랐다. 명문귀 족집안출신이었고, 그가 나타나면 공신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중국은 예전부터 귀천을 매우 따졌다. 비록 공신들이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느냐"고 소리치기는 하지만, 귀족들의 자존과 빈민의 자비는 날 때부터 존재하는 것이고, 다만 표현되는데 강약이 있을 뿐이다. 둘째는 황 제의 수준문제이다. 유방이나 주원장이 이렇게 성공하긴 하였지만, 그들의 성공은 그들의 지도력에 있었다. 즉 사람들 잘 다루기는 하였지만, 스스로의 지능이 높지는 못했다. 유방은 싸움마다 모두 졌었다. 주원장은 유방보다는 나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운이 많이 작용한 것이고, 자신은 약하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옹립해서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이었다. 이세민의 경우는 천하를 얻는 과정에서 스스로 삼군을 통솔하고, 당 나라의 건립에 큰 공을 세웠다. 당나라는 이세민이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이세민은 통솔력뿐아니라 지적능력도 뛰어났 다. 자기의 매력으로 천하의 영재를 끌어모았다. 이세민의 부하들은 그에게 마음에서 복종했던 것이다. 그의 부하중에서 물론 스스로 반란을 꿈꾸어본 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스스로의 능력과 힘을 생각하면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하를 얻는데에는 조화와 안정이 필요한 것이고, 일체의 불안정한 요소는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인네의 인자함은 필요없고, 죽 여야 할 자는 죽여야 한다. 먼저 한신을 보자. 이 자는 누구더라도 죽이고자 했을 것이다. 한나라의 절반은 그가 얻은 것이다. 이런 공로는 유방보다 컸는데, 그의 위치 를 어떻게 조정해주어야 할 것인다. 형인 유방은 한왕을 하고, 동생인 한신은 제왕을 한다면 이것은 서로 대등한 관계가 되고, 한신의 야심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한신이 왕으로 봉해달라고 요청한 때부터 그는 죽을 것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욱 아쉬운 것은 회음후로 강등된 후에는 당연히 집안에 틀이박혀 조용히 지냈어야 했는데, 그는 그러지 않고, 사방을 돌아다니고, 병서를 수정하고, 큰소리를 치고 다 녔다. 그를 죽이지 않을 황제가 있겠는가? 당나라의 공신들 중에서 두 명은 죽여야 할 인물이다. 하나는 조군왕 이효공이다. 매우 간단하다. 이 자의 공로가 너무 컸다. 출신도 고귀하 다. 반란을 일으킬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내가 있을 때는 괜찮겠지만, 내가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장이 없다. 그를 죽여야만, 황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계승될 수 있다. 또 하나는 이정이다. 이 자는 관료집안출신이다. 수나라의 중앙정부에서 관리를 지냈을 때부터 재능을 나타냈다. 나중에 당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다. 원래 이연은 그에 대하여 불안해 하였고,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나중에 이정의 재능에 반해서 살려주게 된다. 이 자는 능 력외에도 돌궐을 멸한 후의 그의 카리스마가 만제였다. 전국이 그에게 환호할 뿐아니라 태상황과 다른 중신들까지 그를 높이 받들었다. 민간 에는 이정이 술법에 정통하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이런 자는 무섭다.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의 개국황제들은 왜 공신을 죽였는가? 249

250 송나라의 개국공산은 죽여야 할까? 말아야 할까? 황제의 자리를 위협하다면 죽여야 한다. 다만 하나의 문제가 있다. 송나라의 개국배경을 보 면, 송은 이전에 계속 장군집안으로 이름을 떨쳤다. 황제가 위신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장수들간에는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하였다. 수하의 공신들이 비록 공손하지만, 이들은 반골기질을 가지고 있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면을 몰수할 수도 있다. 이런 배경하에서 이들 공신을 죽 이는데는 조심할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으면 황제의 목숨도 위험할 수 있다. 그래서 송태조 조광윤은 아주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따. 놀라기 는 하나 위험은 없는 방안으로서 술잔을 건네주고 병권을 회수하였다. 송태조의 수하들도 잘 협조했다. 만일 어떤 자가 원망하는 모습을 보 였다면, 죽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명나라이다. 명나라의 공신중 첫번째로 죽여야 할 인물은 남옥이다. 이 자는 병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스스로 권세를 누렸다. 신하로서의 공손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런 강퍅한 신하는 절대 남겨둘 수없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또 하나가 있는데, 그는 바로 주원장의 외 조카인 이문충이다. 이 자는 주원장의 외조카로서 전공이 탁월하였고, 학문도 좋아하였으며, 문인들과도 널리 사귀고, 병사를 다스리는 재주 도 뛰어났다. 이 자는 능력이 뛰어났을 뿐아니라 친구들을 사귀는 것도 좋아했다. 이것은 황제에게 걱정을 끼치는 일이었다. 결국은 죽일 수 밖에 없었다. 공신을 죽여버리는 것은 황제의 보위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죽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공신을 죽이는 것은 리스크를 가지고 있 고, 잘못하면 스스로 다치게 된다. 그러므로, 핵심문제는 황제와 공신의 태도와 관계이다. 태도가 큰 문제이다. 황제는 황제로서의 큰 도량을 가지고 있고,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신하는 신하로서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신하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 일단 황제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충성하여야 하고, 황제가 아끼더라도 절대 스스로의 본분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소집단을 만들고 널리 사귀거나, 스스로의 위망 을 드높이거나, 발호하는 경우에는 전부 살신지화를 불러오게 된다. 중국의 개국황제들은 왜 공신을 죽였는가? 250

251 왜 전세계에서 중국에만 환관이 있었는가? :43 작자: 미상 최근 필자는 호남위성TV의 <<대명왕조. 1566>>을 보았고, 드라마 속에 나오는 여방, 양금수, 진홍, 황근등의 태감( 太 監, 환관, 내시)의 역할에 매우 관심이 갔다. 그래서 태감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태감을 얘기하자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서태후의 곁에 있던 이연영( 李 蓮 英 )을 떠올릴 것이다. 그래서, 태감이라는 단어난 자고이래로 사람의 마음속에서 아마도 뿌리깊은 '낮춤말'이 되어 버렸다. 그렇지 않은가? 그들은 황제의 위세를 등에 없고 온갖 못된짓을 하고, 심지어 황제를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권력을 농단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명나라의 유근, 조흠, 위충현 처럼 국정을 농단해서 망국으로까지 이끌어 천인공노할 악명을 후세에 남기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왜 전세계에서 소중화로 자처하던 조선을 제외하고는 중국에만 태감이 있었던 것일까? 일본에도 태감은 없다. 첫째, 봉건제도 그 자체는 가천하( 家 天 下, 천하를 집안으로 보는 것)였다. 그래서 반드시 황자를 많이 낳아야 했고, 땅을 나누어 군, 왕이 함 께 천하를 지켰다. 현대와 비교하면, 고대의학은 발달되지 않아서, 미성년자사망률이 높았다. 황제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어려서 죽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황제는 강산을 확보하기 위하여 후계자가 필요했고, 반드시 아이를 많이 낳아야 했다. 이를 위하여는 후궁을 많이 들여야 했 다. 이런 황제의 곁에 있는 노비는 반드시 거세한 남자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잡종이 나올 수도 있었고, 강산의 씨가 바뀔 수도 있었기 때 문이다. 둘째, 황제는 황권을 강화하고, 대신을 견제하고 독재정치를 시행해야 했다. 그러기 위하여는 반드시 노비적인 성격을 지닌 태감이 필요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봉건왕조는 세습제이다. 황제는 다른 사람이 자기의 황위를 빼앗는 것을 겁냈다. 일반적인 상황하에서 황제는 조정의 문무대신을 의심했고, 그들이 딴 마음을 품지 않도록 방비했다. 그러나, 조석으로 자기의 신변에 있고 자신이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르고, 신 분이 천하고 후손을 두지 못하는 내시는 아주 믿을만했다. 환관은 궁중에서의 이런 특수한 지위를 활용하여 큰 권력을 차지하고, 심지어 황 제를 조종하기도 했다. 이런 사람은 수량은 많지 않았지만, 노예근성은 강했다. 교활하고 음험했으며, 잔인하고 독랄했다. 일단 황제의 심복이 되면,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들은 사당을 조직하고, 황제를 끼고서 가짜 성지를 내려보내고, 관직을 팔아먹고, 횡령을 서슴치 않았다. 충신들 을 모함하고, 심지어 황제를 폐위시키고 황제를 죽이기까지 하였다. 중국의 봉건사회역사에서 환관의 권력독점은 국가와 민족을 해하는 것으 로 끝나곤 했다. 그중에 동한, 당, 명의 삼대가 가장 심했다. 진나라의 조고, 동한의 후람, 장양, 당나라의 고역사, 구사량, 전령자, 명나라의 왕진, 왕직, 유근, 위충현, 그리고 청나라의 이연영은 역사상 악명을 떨쳤던 환관들이다. 그렇다면, 태감은 어떻게 하여 가짜로 성지를 내리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중국 고대사회의 정보통신과 교통운송이 발달하지 못한 것과 관련된다. 황제가 명령을 발포하면, 전화, 핸드폰과 전보는 쓸 수 없다. 비행기, 자동차등 빠른 교통도구도 없다. 이것은 반드시 황 제의 신변에, 황제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 황제의 뜻을 전달할 수밖에없다. 그래서 태감이 명령을 하달하게 되는 것이고, 마치 태감은 죽은 사 람을 대신하여 말하는 '무당'과도 같이 황제의 말을 대신하여 전하게 되는 것이다. 성지를 전하는 것은 결국 그것을 고쳐서 전할 수도 있는 기회를 잡게 되는 것이다. 태감들은 왜 지고무상의 황권을 감히 잠식하고 나눠가질 수 있었는가? 봉건시대에 황제의 권한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대역무도죄이고 9족을 멸할 죄었다. 일반적으로 대신들은 절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하 어떻게 태감들은 이렇게 할 수 있었는가? 이것은 태감이 황제에 너무 가 까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최고권력에서 가장 근거리에 있고, 장기간 최고권력에 접근하면서 만지게 되면서 더 이상 그들은 황권을 신성하다 왜 전세계에서 중국에만 환관이 있었는가? 251

252 고 보지 않게 되고, 점차 자기의 위치에 대한 포지셔닝을 바꾸어가게 되면서 최고권력을 엿보는 야심이 날로 팽창해진 것이다. 결국은 황권 이 자기와는 그저 한 걸음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현대사회에서 지도자의 비서가 실제 권한을 넘어서 지도자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중국의 태감제도의 화가 가장 컸던 시기는 동한과 명나라이다. 당나라도 포함된다. 이 몇개의 황조시대에는 태감이 심지어 황제를 죽이기도 하고, 스스로 황제를 골라서 옹립하기도 했으며, 결국 나라가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당연히 태감도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태감들의 결점은 거세하였따는 것이고, 그들의 일은 주인을 위하여 노예로서 의 일을 하는 것이다. 당연히 어떤 사람은 심리적으로 변태적이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여러가지 야사와 전설들이 전해지는 것이다. 당나라때는 내시성( 內 侍 省 )을 두고 그 곳의 우두머리를 감( 監 ) 및 소감( 少 監 )이라고 불렀다. <<요사. 백관지>>에 의하면 요나라때의 남면관의 여러 "감'의 지객중 "태감( 太 監 )"이라는 직책이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부를 때는 그저 "감"이라고 불렀다. 예를 들면, 태부감( 太 府 監 )과 같은 것이다. 원나라때는 태부와 각 감이 있었는데, '태감'이라는 관직이 있었다(예를 들어 의문감, 전목감, 전실감, 태부감등에 모두 태감을 두었다). 명나라때는 환관들이 이끄는 24아문이 있었고, 그 곳에 장인태감등의 직책을 두었다. 궁내의 내시들은 황제와 그 가족을 모신다. 명 나라 중엽이후, 태감의 권력이 확대되었고, 사신, 감군, 방어, 정찰등의 대권을 장악한다. 청나라때는 태감은 환관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버린 다. 총관태감등을 수령으로 하고 내무부에 소속시켰다. 환관은 속칭 태감 또는 노공( 老 公 )이라고 한다. 문서상의 칭호는 여러가지있다. 예를 들면, 엄인, 엄신, 환자, 중관, 내관, 내신, 내시, 태감, 내 감등이 그것이다. 이런 남자의 생식기를 제거하고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선인은 역대왕조에서 궁중내에 있으면서 황제와 그 가족을 모셔왔 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의 선진시대와 서한시대의 환관은 전부 거세한 사람은 아니었다. 동한때부터 전부 거세한 사람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황궁의 내궁에는 황태후, 태비, 황후, 비 및 궁녀등 여자들이 많고, 남자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으므로, 불행한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 한 것이었고, 나머지 성년남자들은 궁중내에서 일을 맡지 못하도록 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역대환관의 수는 명나라때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10만명이라고 한다. 청나라때는 명나라때 커진 환관제도를 수술하였 고, 숭정말년의 9만여명을 9000여명으로 삭감하였다. 청나라의 태감은 등급이 엄격했다. 청나라 궁중내에는 태감을 관리하는 기구인 경사방 ( 敬 事 房 )을 두었다. 그리고 궁전감판사처( 宮 殿 監 瓣 事 處 )도 두었다. 대총관, 부총관, 대반수령, 어전태감, 전상태감, 일반태감과 아래의 소태감 등으로 나누었다. 청나라 말기가 되어서는 태감등급은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궁전감에는 총감, 수령, 장안, 회사, 소태감으로 구분되었다. 각 처는 수령, 대사부, 사부, 대반, 진인, 도제등의 구분이 있었다. 이처럼 층층이 나뉘어서 한등급이 다른 한등급을 관리하고 통제했다. 청나라 말기에는 하북성의 청현, 정해, 창주, 임구, 하간, 남피, 탁현, 조강, 교하, 대성, 패현, 문안, 경운, 동광, 그리고 북경시의 창평, 평곡, 그리고 산동성의 낙릉은 모두 태감을 배출하는 고장으로 유명했다. 태감은 가난한 집안출신이고 생활상의 곤란으로 인하여 아이를 궁에 들여 보내서 살 길을 찾곤 하였다. 당시 겨우 10살정도면 정신( 淨 身 )을 했다. 이연영은 8세때 정신을 하고 9살때 궁에 들어갔다. 민국초기에 13살 의 어린태감인 마덕청은 부의의 궁중에 들어가서 일을 하기도 했다. 왜 전세계에서 중국에만 환관이 있었는가? 252

253 신중국 개국대전의 비화 : 년 10월 1일의 개국대전이 열리기 하루 전날 밤. 회인당에는 국연을 위한 식탁이 차려졌으며, 벽쪽의 탁자에는 이미 각양각색의 중국명 주가 놓여져 있었다. 마오타이, 통화포도주...어떤 것들은 이미 병두껑이 열려 있었고, 대청안에는 짙은 술향기로 뒤덮였다. 업무인원들은 비 록 매우 바빴지만 또한 매우 흥분되어 있었다. 그런데, 회인당의 입구에 서 있던 중앙경위처의 처장인 왕동흥과 부처장인 이복곤은 표정이 다른 사람과 달랐다. 그들은 국가지도자들의 안전문제가 더욱 걱정되었던 것이다. 이복곤은 검사실 주임인 왕학빈을 불러서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학빈동지. 중앙지도자동지들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천안문에 오르시지 못하게 해서는 안된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 사람도 술에 취해서 쓰러지게 해서는 안된다. 방법을 강구해서 처리하라" 아마도 급하면 통하 나보다. 왕학빈은 물로서 술을 대신하는 아이디어를 내었다. 연회가 시작되자, 유소기는 이 담담하면서 아무 맛도 없는 "술"을 맛보았다. 한잔을 마셨지만 여전히 기쁜 얼굴이었고, 전혀 신경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특히 소련에서 온 손님들과 자주 건배를 하였다. 주은래의 반응은 달랐다. 그는 술잔을 한번 들어마시고는 맛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눈썹을 잠깐 찌푸리고는 사방을 둘러보았고, 시선이 왕 학빈등을 향했다. 그는 손님들을 제대로 접대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했다. 만일 손님들이 이런 술을 마신다면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마친 비 서인 하겸이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주은래의 귓가에 몇마디 속삭였다. 그러자 주은래의 눈빛은 바로 부드럽게 바뀌었다. 모택동은 먹는데 있어서는 "매운 것"과 "기름진 것"을 찾았을 뿐이고, 술에 대하여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래서 두 잔의 찻잎으로 된 "적포 도주"를 마셨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주덕은 이미 술에 손을 썼다는 것을 통보받았다. 몇번 가짜 술을 들이킨 후, 성에 차지 않아서, 몰래 진짜 마오타이주를 몇 잔 마셨다. 임필시는 당시 고혈압으로 술을 마실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다섯 명의 국가지도자들은 모두 전혀 취해서 쓰러지지 않고 국연을 마칠 수 있었다. 신중국 개국대전의 비화 253

254 중국역사상 수도선택의 원칙 :42 통일중화제국은 진시황때부터 시작된다. 진나라 이전의 각왕조의 수도는 일반적으로 모두 자연적인 원인에 따랐다. 예를 들면 한 부족의 자 연거주지였다(서주, 동주는 약간 특수함). 그러나, 진나라이후에는 국가판도가 커지고 수도를 어디로 정할 것인가에서 선택의 여지가 많았다. 그리하여, 진나라 이후 각 왕조의 수도선택에는 날로 정치요소와 경제요소가 두드러졌다. 수도선택의 정치요소는 왕조의 최대의 위협근원과 너무 멀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신속하게 정보를 접할 수 있고, 효율적으로 군대 를 지휘할 수 있어야 했다. 경제요소는 부유한 지역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야 했다. 이로써 재부와 물자를 획득하기 쉬어야 했 다. 전체적으로 보면, 정치요소가 경제요소보다 항상 우위에 있었다. 서한때 조정의 최대위협은 북방의 흉노였다. 이 시기는 관중지구의 경제가 관동지구보다 낙후되었지만, 정치우선의 원칙에 따라, 장안을 수도 로 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동한에 이르러, 흉노세력은 분화되었다. 남흉노는 귀순하고, 북흉노는 도망쳤다. 그래서, 흉노의 정치위협이 감소했다. 그리고 광활한 중원지 구는 더욱 큰 경제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동한의 수도는 낙양으로 정했다. 한나라 이후에는 동란의 시기를 겪는다. 위나라정권의 주요한 위협은 남방의 오나라와 촉나라였다. 그래서 수도를 선택할 때 남방에 가까운 낙양을 택한다. 사마씨가 설입한 서진정권은 비록 상대적으로 단기간의 평화시기가 있었지만, 북방민족이 다시 궐기했다. 서진정군은 더이상 대항할 힘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낙양에 자리잡았다. 짧은 반세기후에 다시 남경으로 쫓겨가서 동진을 성립했다. 번화한 강남의 땅은 넓었다. 동진이 남경을 선택하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은 것은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에 가까이 있어야 싸우는데 편리했기 때문이다. 남북조시기에 북위정권은 외부의 정치위협이 크지 않았다. 거기에 초기에는 유목민족의 특징이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대동을 수도로 정한 것은 유목경제와 농경경제를 모두 돌보기 위한 선택이었다. 북위정권이 철저히 한화한 후에는 낙양으로 천도함으로써 유목경제를 포기하게 되고, 농업경제를 중시하게 된다. 수나라는 야심이 너무 컸고, 너무 서둘렀다. 짧은 38년의 기간동안 큰 뜻을 펼쳐보지도 못했다. 수나라의 수도선택에서는 복잡한 여러가지 고 려를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나라는 처음부터 각방향으로부터의 적의 위협을 받았다. 그중 주요한 것은 북방의 돌궐이었다. 그래서, 수나라 는 막 건립했을 때, 수도를 장안으로 정했는데, 돌궐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문제는 중국을 통일한 후, 야심이 컸던 수양제가 황위를 계승한다. 북방의 위협에 추가적으로 대응하고, 그 자신의 남방에 대한 편애로 인하여 수양제는 남쪽에 가까운 동도 낙양을 설치한다. 그리고 낙양으로부터 대운하를 건설한다. 목적은 유효하게 남방의 재부와 물자를 운송하여 북방의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수양제는 세번 에 걸쳐 양주에 간다. 제3차로 양주에 간 후에 양주에 주재한다. 왜냐하면 그가 젊을 때 양주에서 왕에 봉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강남 에 미련이 있다고 말하였다. 만일 북방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만 아니라면 다시 남쪽으로 천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운하는 나중에 북경 까지 연결된다. 목적은 고구려를 정복하는데 물자지원을 위한 것이었다. 수양제는 너무 급박하게 공을 세우고자 하였다. 욕속부달. 결국 단명 으로 끝난다. 당나라가 천하통일한 후, 유일한 위협은 북방의 돌궐이었다. 수도를 장안으로 정한 것은 순리에 따른 것이었다. 이외에 당나라는 비단길이 다 시 열렸고, 비단무역은 당나라의 주요수입원이었다. 그리고, 장안은 비단길의 시작지점이었으니 경제상의 중요성도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중국역사상 수도선택의 원칙 254

255 조광윤은 북송을 건립한다. 수도를 개봉으로 정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아주 간단하다. 조광윤은 자 기가 합리적으로 천하를 얻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고, 정변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후주의 공제가 자 기에게 선양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소국인 후주의 도성이 바로 개봉이었다. 이런 분식된 선양을 진짜인 것처럼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조광 윤이 천도하는 것은 적절한 조치가 아니었다. 북송건립후, 어떤 사람은 여러차례 수도를 낙양이나 장안으로 옮기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모두 조광윤에 의하여 거부당한다. "선양"이라는 외관외에 또 하나는 외부의 위협이었다. 북송초기의 주요한 위협은 요나라였다. 개봉은 지리적으 로 낙양에 비하여 요나라에 가깝다. 나중에는 금나라가 요나라를 대체하는데, 북경을 수도로 삼는다. 서쪽으로는 서하가 들어선다. 그러나, 금 나라의 위협은 서하보다 항상 컸다. 그래서, 수도를 정하는 정치원칙에 따라 개봉이 우선시되었다. 만일 가능하다면, 남송은 남경에 수도를 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금나라가 계속 진격해오므로, 남경은 너무 위험했다. 남송은 부득이 상대적으 로 안전한 항주를 택한다. 사실, 남송시기에 더 남쪽인 복건의 천주등도 경제가 매우 발달하였고 더 안전했다. 그러나, 복건은 주요위협원으 로부터 너무 멀었다. 비록 남송이 그리 북방과 대항하고 싶어하지는 않았고, 심지어 악비를 죽여버리기까지 했으나, 그러나 평화협상을 위하 여는 너무 먼 것은 곤란했다. 항주는 지리위치상으로 전쟁이나 평화 모두 비교적 편리했다. 원나라의 수도인 북경은 유목민족이라는 것과 일정한 관계가 있다. 그들은 고향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북경에 는 수양제가 만든 대운하가 있고, 남방의 물자운송이 이전보다 편리해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원나라의 수도는 다른 곳으로 정했을 것이다. 주원장은 문화수준이 높지 않았다. 남경을 수도로 정한 것은 어느 정도 금의환향의 허영이 포함되어 있다. 아마도 경제가 발달한 지역에 가 까이 있으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중국역사상 역대왕조의 개국황제의 묘호는 "조( 祖 )"로 끝난다. 예를 들어, 한고조 유방, 당고조 이연, 송태조 조광윤, 명태조 주원장, 청태조 누르하치가 그들이다. 후사를 이은 황제의 묘호는 일반적으로 모두 "종( 宗 )"이다. 개국황제가 아니면서 "조"를 쓰는 경우는 몇 되지 않는다. 명성조 영락제 주체는 바로 그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청세조 순치, 청성조 강희가 있다. 그 이외에는 대 부분 단명한 소왕조에서 "조"의 범람이 나타난다. 수백년의 대왕조에서 후사황제의 묘호가 "조"인 경우는 모두 특출한 공로를 세운 황제들이 다...명성조는 북경으로 천도하였는데, 그 원인은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이 컸기 때문이다. 도망간 북원황제가 계속 명나라의 변경을 엿보고 있 었다. 수도를 정하는 정치원칙이 경제원칙을 우선한 경우였다. 청나라가 북경을 수도로 정한 것도 역사의 필연이다. 중국의 역대왕조의 정권은 만일 북방민족이 건립한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 북방민족의 거대한 위협을 받았다. 요, 금, 원이 연이어 흥성했다 쇠약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전국적인 정권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청나라의 조상은 기 본적으로 요, 금, 원과 마찬가지였다. 동일한 상황이 다시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청나라는 남북을 모두 고려하는 북경을 수도로 삼았고, 원래의 수도인 심양에도 북경과 유사하게 오부아문을 두었으며, 동북을 통치하는 최고권력기관으로 삼았다. 북방민족의 중원에 대한 위협을 해결한 것은 청나라때 가장 완벽하게 이룬다. 상술한 수도를 정하는 원칙은 기본적으로 중국에서 유효하다. 중국이외의 다른 나라는 지리적인 원인이나 국토의 크기등의 이유로 이런 문제 가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이상의 정도원칙은 중국에서 점차 약화되었다. 고대의 수도를 정하는 원칙중 위협의 근원에 가 까이 있어야 한다는 정치원칙은 현재는 이미 그다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고대에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고, 정보교류가 불편하여 수도가 위협의 근원에서 너무 멀면, 쉽게 감시하고 의사결정할 수 없었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과거에는 경제발달지구에서 너무 멀면, 중앙정권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받기 어려웠었는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중국역사상 수도선택의 원칙 255

256 중국고대의 전쟁포로 처리방법 :39 중국의 고대에 그다지 문명스럽지 않은 전쟁시의 관례가 있었다: 즉, 승전측은 패전측의 사망자의 시체를 큰 길의 양측에 쌓아서, 흙으로 채 워넣어 큰 피라미드형의 무더기로 만드는 것인데, 이것을 "경관( 京 觀 )" 혹은 "무군( 武 軍 )"이라고 불렀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전공을 자랑하였 다. 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형성된 관례이다. 기원전 597년 초나라군대가 필(, 현재의 하남성 무척 동남쪽)에서 진( 晋 )나라군대에 승리를 거두었 다. 이것은 유례없는 대승리였다. 대신인 반당( 潘 黨 )이 진나라전사자의 시신으로 "경관"을 쌓자고 건의했다: '제가 듣기로 적군에 승리를 거두 면 기념물을 만들어, 후순에게 남겨서 전공을 잊지 않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초장왕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 武 )라는 글 자의 뜻은 "지과( 止 戈, 창을 그치다. 전투를 그치다)"라는 의미이다. 즉, 더 이상 병기를 사용하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국가가 무력을 사용하 는 것은 금폭( 禁 暴 ), 집병( 兵 ), 보대( 保 大 ), 정공( 定 功 ), 안민( 安 民 ), 화중( 和 衆 ), 풍재( 豊 財 )를 위한 것이다. 이 7가지를 한다면, 자손들이 무 공을 잊지 않는다. 현재 나는 두 나라의 자제들의 시신을 들판에 가득 차게 하였으니, 잔폭한 일이다; 군대를 출도아여 제후를 겁주었으니, 집병을 하지 못했다; 폭이불집( 暴 而 不 )하였으니, 보대도 하지 못하였다: 진나라가 여전히 존재하니, 공이 있다고 할 수도 없다; 이번 전쟁은 민중의 뜻에 위배하였으니, 안민이라고 할 수도 없다; 자신이 덕이 없어 제후와 싸우게 되었으니, 화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른 나라의 혼란을 자신의 영광으로 삼았으니 풍재도 아니다. 7가지 무덕에 나는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어찌 자손들에게 기념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 리고, 고대의 성왕은 불경한 자를 토벌할 때, 죄가 극악한 자를 쌓아서 경관을 만들었다. 이런 가장 중한 징벌로 악인에 경고한 것이다. 이번 전투에 사망한 자들은 모두 자기의 국군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 것이니 어찌 그들을 쌓아서 경관을 만들겠는가" 라고 하고는 명을 내려 진나 라의 전사자들을 잘 매장해주도록 하였다. <<좌전>>에 나오는 이 기록으로 볼 때, 당시의 습관은 패전국의 전사자들을 쌓아서 경관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초장왕은 경관의 의의에 대하 여 독특한 해석을 하였다. <<좌전>>의 작자는 초장왕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모든 경관에 관련한 기록을 고의로 생략해 버렸고, 초장왕의 이 말을 가지고 일반 전사자들의 시신으로 경관을 쌓는 행위를 비판했다. <<사기>>에는 이런 기록이 아주 많다. 예를 들면, 진시황은 진나라군대가 그가 어렸을 때 거주했던 한단을 함락시키자, 명을 내려 예전에 그 를 괴롭혔던 사람을 전부 "갱살( 坑 殺 )"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불만을 토로한 460명의 유생도 "갱유( 坑 儒 )"했다. 항우도 양성의 수비군들 을 "갱살"했고, 신안의 20만진나라전쟁포로를 "갱살"하기도 하였다. 후세의 역사서적에서는 이런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한서>>에는 왕망이 황제위를 찬탈할 때 그에 반대했던 유신, 적의, 조명, 곽 홍등 및 그의 친척을 모두 "갱살"했다고 되어 있다. 이 책에 기재된 왕망의 이들을 주살하는데 관한 조서를 보면, 분명하게 이들의 시체를 쌓 으라고 되어 있다. "방육장, 고육척( 方 六 丈, 高 六 尺, 육장의 너비, 6척의 높이)"로 쌓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위에는 6척높이의 깃발을 꽂아서, "반노역적경예( 反 虜 逆 賊 鯨 鯢 )"라고 적게 하였다. 이로써 볼 때, "갱" 혹은 "경관", "무군"은 실제로는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 시신을 쌓아두는 것이다. 다만, 사학자들은 초장왕이 얘기한 것처럼 극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 혹은 전사한 적군의 시신을 쌓아두는 경우에는 "경관"이라는 용어를 쓰고,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전쟁포로를 도살한 후 시신을 쌓아두는 것은 "갱"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사적에는 이런 "경관에 대한 기록이 아주 많다. 예를 들면, 중국고대의 전쟁포로 처리방법 256

257 - 418년, 하( 夏 )나라가 관중으로 진공했을 때, 동진군대의 전사자들의 수급( 首 級 )을 가지고 쌓아서, "경관"을 만들었는데, "고루대 ( 髏 臺 )"라고 불렀다. -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다 실패하였는데, 고구려군은 수나라의 전사자들 시체를 쌓아서 경관을 만들었다. 631년, 당태종이 사신을 파견 하여 고구려와 교섭을 벌여, 경관을 철거하고, 수나라군의 해골을 수습하여 장사지냈다 년, 군벌 이희열의 반군이 참춘으로 진공하다가 이호에게 패배했다. "만의 수급을 베고, 시신을 쌓아 경관을 만들었다" - 936년, 요나라는 군벌 석경당을 도와 후당정권을 소멸시킨다. 후당황실인원 및 후강군장병의 시신을 모두 분하의 강변에 묻었는데, "경관으 로 만들었다" - 986년, 요나라군대는 막주에서 송나라군대를 이긴 후에 송나라군의 시신으로 경관을 쌓았다 년, 명나라의 대장 장보는 안남으로 진공하여 안남군대를 격파하고, 2000여명의 전쟁포로를 죽여, "경관을 쌓았다" "갱"에 관한 기록은 역사서에 더욱 많다. 거의 모든 황조마다 있었다. 예를 들면, - <<후한서, 원소전>>에는 200년 조조와 원소의 군은 관도결전을 벌이는데, 조조가 겨우 이겼다. 억지로 투항한 원소의 부대 하나를 모두 "갱"하였다. 그러나, <<삼국지, 위본기>>에는 이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년, 사마소는 제갈탄이 지키는 수춘성을 함락시키고, 동오의 지원군을 포로로 삼는다. 어떤 사람은 오나라사병들이 진심으로 투항한 것 이 아니니 모두 "갱"하여야 한다고 건의한다. 사마소는 동의하지 않고, 포로들을 변방지역으로 보낸다. 이로써 볼 때, 당시에도 여전히 쓸모없 는 전쟁포로는 "갱살"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이다. - <<진서>>에 기록도니 16국혼란시기에 "갱"에 대한 기록은 더욱 많다. 예를 들어, 310년, 석륵은 진나라 관군장군 양거와 무덕에서 싸운 후, 항복한 병사 만여명을 "갱"하였다. 317년, 전조의 유총은 평양귀족을 진압하고, 사병만오천명을 "갱"하였다. 320년에 석호는 전조의 유요를 격 파하고 병졸 1만6천을 "갱"하였다. 321년, 석륵은 진나라 조의의 부대 투항군인 3만명을 "갱"하였다. 349년, 석호가 죽은 후, 여러 아들이 황 제위를 다투는데, 작은 아들 석충이 전투에서 패해하여, 그의 사병 3만여명이 "갱"당하였다. 그리고 전쟁포로를 모조리 "갱"하였다는 기록도 많다. 이들 "갱"은 생매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에는 401년에 후진이 후량의 여륭이 점거하고 있던 고장성(감숙성 무위)을 장기간 공격하여, 성내에 양식이 없었는데, 여륭은 백성들이 성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했다. 도망치려는 백성들은 모두 "갱"하였는데, 시신을 길에 쌓 았다라고 되어 있다. 이로써 볼 때, 이 책에서 말하는 "갱"이 바로 시신을 쌓아두는 "경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말갈3천3백을 모두 "갱"하였다. 북송의 전황이 보주의 반란군을 진압할 때, 먼저 투항을 권유하고, 그 후에 거역한 429명을 "갱"하였는데, 조정에서 칭찬을 받는다. 그너나, <<송사. 전황전>>에서는 전황이 항복한 병사를 "갱"하였기 때문에, 후손이 없었다고 평론하였다. <<명사>>에도 명나라초의 공신인 상우춘이 적군의 포로를 "갱살"하였고, 서달이 말리려고 하였으나 안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같은 "경관" "갱살"의 관례가 중지된 것은 청나라에 의해서이다. 청나라는 입관후, 이러한 행동을 전혀 하지 않고, 전투나 도살이 끝나면, 그 자리에 시신을 묻어주었고, 더 이상 시신을 쌓아놓고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경관"과 "갱"은 더 이상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게 된다. 중국고대의 전쟁포로 처리방법 257

258 중국고대의 전쟁포로 처리방법 258

259 [중일전쟁] 군벌과 중국군대 :38 중국근대사에서 군벌시대란, 청조가 원세개에 의해 무너진후 1928년 장개석이 북벌로서 전토를 통일할때까지를 말합니다. 물론 북벌성공후에 도 여전히 전국에는 군벌이 산재해 있었고 1936년까지 몇차례의 반장전쟁이 있었으며, 이들이 완전히 멸종되는 것은 국공내전에서 공산군이 이기는 1949년이라고 할 수 있죠. 근 반세기간 천여명이 넘는 대소군벌들이 삼국지처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군벌이 바로 봉천파의 거두인 장작림 입니다. 청말 이홍장은 자신의 사병으로 3개의 신식군대를 만듭니다. 그 중 2개는 의화단전쟁당시 8연군을 상대로 싸우다 괴멸되고 그때 유일하게 싸 우지 않고 건재한 것이 바로 원세개의 신건육군이었습니다. 신해혁명과정에서 원세개의 세력은 엄청나게 커지며 남방까지 손을 뻗칩니다. 당시 전국의 도독(군사령관) 총 23명중 20명이 원세계파였습니 다. 그는 대총통자리에 오른후 황제의 자리까지 넘보지만 엄청난 국내외의 반발을 받자 울화통이 터져 결국 죽고 맙니다. 원세개가 죽은후 전국에 퍼져 있던 그의 부하들은 무력을 기반으로 독립을 선포합니다. 북양군은 크게 직파와 환파로 분열되는데, 직파는 풍 국장, 조곤이 대표적인 우두머리이며 그 밑에 나중에 그들을 대신해 대군벌이 되는 손전방, 오패부, 풍옥상등이 있었습니다. 외교적으로는 미, 영에 가까웠고 하남, 호북, 호남등 주로 남방지역을 차지했습니다. 환파는 단기서가 우두머리 였으며 휘하에는 녹종린, 한복구, 유여명, 송철원, 석우삼등이 있었습니다. 외교적으로 일본의 지원을 받았으며 산 동, 몽고, 섬서, 북경등주로 화북지방을 차지했습니다. 그외에 염계인 염석산이 산서성을 차지하고, 전계 당계요(나중에 용운)가 사천, 운남, 귀주를 차지했으며, 계계의 육영정(나중에 이종인, 백숭 희)이 광서, 광동을 차지했습니다. 이것은 대표적인 대군벌만을 말하는 것이지, 이들의 세력기반은 매우 취약했고 통치력은 성 곳곳에 미치지못해 소군벌들이 난무하고 성의 경 계에는 비적, 마적들이 설치고 다녔습니다. 1925년 당시 중국 전토의 군벌군대는 토탈해 정규군만 150만명에 달했고 비정규군, 경찰, 마을 자경대, 상단의 자위대등까지 합하면 그 몇배 에 달했습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지출하는 예산의 80%를 군비로 소요해야 했습니다. 이들 군인들은 원래 농토에서 유린된 농민출신의 실업자가 다수를 차지했는데 그만큼 생산성이 저하되고 식량만 축내는 메뚜기떼가 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장개석이 북벌후 이른바 편견회의를 하여 군대수를 80만명까지 축소하고 군비부담을 예산의 40%이내로 제한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맙니 다. 이는 장개석의 독재강화에 대한 군벌들의 반발탓도 있지만, 애초에 군대의 축소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죠. 군벌들의 세력을 지지하는 것이 바로 군대이며, 동시에 군벌들은 이들을 먹여살려야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들을 해산시키면서 퇴직금과 새 로운 직업을 주어 불만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군대는 당장 주인을 물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중국군대는 징집병이 아닌 지원병이었는 [중일전쟁] 군벌과 중국군대 259

260 데 애국심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는 비적출신들이 상당수였고 오로지 밥과 돈을 주기에 군대에 지원했을 뿐입니다. 말이 자발이지, 생활고를 벗어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이었죠. 근대적인 직업군대가 아닌, 돈 많이 주는 쪽이 장땡인 용병군대라는 거죠.(장개석의 국민혁명군도 마찬가지) 아무런 대책없이 이들을 무작정 해산시켰을때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었고 그러니 끝까지 이 아무짝도 쓸모 없는 비효율적인 비적군대를 축소하여 소수 정예화하는 것은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군벌군대들은 1920년대 군벌전쟁이 극에 달할때에 대군벌들 마다 수십만의 병력을 보유했습니다. 당시 무한의 오패부 20만, 동남의 손전방 20만, 장작림 35만, 당계요 6만, 원조명 5만등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무기와 병사들의 훈련 및 질적수준은 극히 형편없었습니다. 통상 군벌들이 군대를 만드는 과정은 어떤 지역에서 모병전문 브로커들한테 돈을 뿌리고 실업자들을 대상으로 모병을 합니다. 그리고 개인 무기와 군복을 주고 한차례 짧은 훈련을 거친후 그 자체로 한 부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장교들의 수준은 실로 형편없는 것이 당연했습니 다. 무기는 대부분 한세대전의 라이플이었고 창과 활, 칼로 무장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기관총과 슈류탄, 박격포, 자동소총을 보유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아주 적었고 산포, 야포같은 중화기는 더더욱 적었습니다. 통상 가장 잘 무장된 부대가 1000명당 800정의 소총, 5정의 경기관총을 보유했습니다. 나중에는 무장열차, 전차, 장갑차, 항공기같은 최신무기도 수입하지만 역시 그 수는 셀 수 있는 만큼밖에 안되었고 훈련도가 낮아 활용도도 매우 낮았습니다. 더구나 보병이 가진 탄약도 아주 적고 대포의 포탄도 적기 때문에 군벌전쟁시기 수십만이 동원되는 대규모전쟁에서도 실제 전투에 의한 사상 자는 보통 1~2%이하였습니다. 또 병사들의 월급은 체불되기 일쑤였고 봉급을 받지 못한 병사들은 당연히 전쟁수행을 거부합니다. 군벌간의 전투의 승패는 지휘관의 지휘능력보다 얼마나 병사들에게 봉급을 잘 주고 잘 먹일 수 있는가, 또 적의 지휘관을 얼마나 매수할 수 자금을 가지고 있는가에 결정되었습니다. 봉-직전쟁, 직-환전쟁, 안-직전쟁, 북벌전쟁, 중원대전, 중일전쟁직전의 양광전쟁까지 최고 100만이 상의 대군이 동원되었지만 실제 전투의 승패보다 매수 잘하는 쪽이 승자였습니다. 마치 코에이사의 삼국지의 계략을 연상케 하죠. 중국 군벌은 단지 무기만 창과 활에서 신식 소총으로 바뀌었다는 것뿐 전투의 양상은 2천년전과 다를바가 없었습니다.(어떤 의미에서는 오히 려 쇠퇴했는지도) 전투의 양상 또한 참호의 활용, 기동전같은 근대적인 전술은 없었고 적진으로의 무작정의 돌격이 전부였습니다. 중화기가 거의 없었기 때문 에 고대 성벽의 방어력은 여전히 유효해 삼국지시절처럼 사다리를 얹어 공격해야 했습니다. 체계적인 공병도 없었고 병참의 방법은 오로지 약탈이었습니다.(이건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권장되었습니다. 당장은 돈이 적게 드니까.) 의료 는 더더욱 심각하여 부상병들은 그대로 버려져 대부분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고급장교들의 질적수준은 실로 심각해 1911~1928년간 전국에서 연대장을 역임한 장교 1300명중 일본 유학파가 117명, 천진 무비학당 출신이 29명, 보정군관학교 출신이 61명, 청나라 무관출신이 20명이었고 70%는 농민, 비적출신의 문맹이었습니다. 중초급장교들도 다수가 사병에서 진급한 자들이었습니다.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은 다소 나았으나 군벌군대는 군벌부터 참모, 지휘관, 예하 중초급장교까지 질적수준은 마적들의 질적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1910~20년대 군벌전쟁시기에는 서로 같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상관없었으나 곧 전혀 수준이 다른 적과 맞서자 그 형편없는 수준을 고스란히 보여주게 됩니다. 하나가 공산군이었고, 또 하나가 일본이었습니다. 공산군은 개인적 탐욕이 아닌, 일관된 사상과 목표로 무장해 있었고 따라서 대단한 결속력과 높은 사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교들은 제대 로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 많았으나 능력본위로 진급했기 때문에 사고가 유연하고 매우 유능했습니다. 몇배나 우세한 군벌군대를 상대로 뛰어 [중일전쟁] 군벌과 중국군대 260

261 난 기동방어전을 펼쳐 연전연승을 거두었습니다. 일본은 더더욱 강력한 상대였습니다. 일본군 1명이 전사할때 중국군대는 통상 10배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압도적인 화력의 차이, 병참의 부 족, 지휘관의 무능, 낮은 사기탓이었습니다. 중국군대의 내부사정을 보면 장개석이 국내의 엄청난 압력에도 불구하고 왜 개전을 미룰 수 밖에 없었나 이해 못할 바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특별한 외부의 지원없이 1941년까지 무려 4년간 잘 이끌어갔다는 것이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 도입니다. 결국 지친 일본이 태평양전쟁이라는 자살행동을 택하게 만들었죠. 정작 열강들은 일본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조차 못하고 일방적으 로 극동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는데 말이죠. [중일전쟁] 군벌과 중국군대 261

262 위그르족 향비 :56 역사 속의 향비는 청나라에 속한 위구르족의 여인이었다. 몸에서 고운 향기가 난다고 해서 향비라 불렸으며, 건륭황제의 명으로 고향을 떠나 왕비가 되었지만 곧 죽게 되고 그 시신을 다시 고향으로 옮겨 안장하였다. 베이징에는 청의 황제들이 잠들어 있는 동릉이라는곳이 있다. 그곳엔 청조 말기에 권세를 누렸다는 서태후, 즉 자희태후도 이곳에 잠들어 있다. 살아 생전에 그녀가 권력을 다투었던 광서제와 함께 묻혀 있다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또 그곳에서 들은 바로는 마지막 황제 푸이의 무덤도 그곳으로 이장할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세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유릉 속에 잠들어 있는 향비라는 여인이다. 유릉은 건륭제의 무덤이니, 향비는 건륭제의 비인 셈이다. 유릉에는 건륭제의 황후를 비롯한 후궁들 36명이 함께 잠들어 있는데 향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향비의 무덤이 이 동릉 뿐만 아니라 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서쪽 끝에 자리잡은 카슈가르에도 있다는 점이다. 위그르족 향비 262

263 (위구르족은 러시아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아마 이 세상에서 무덤 두개를 가지고 있는 여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위구르에 있는 향비묘는 개인묘가 아니라 가족묘이다. 그러므로 향비묘라기 보다는 종교귀족의 가족묘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향비묘라고 부른다. 정설은 없으나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향비는 이 지역 종교귀족 가문의 딸이었는데, 청조가 건륭제 때 군사 침략을 단행한 뒤, 청의 장군이 황제에게 선물로 바치기 위해 그녀를 사로잡아 북경에 보냈다고 한다. 그녀는 카슈가르에서 한 족장의 부인이라고도 했고, 또 정혼한 사람이 있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여인은 22살 때 청나라의 자금성에 들어온 뒤, 29세 때 사망하였다. 어떤 이는 25년간 자금성에서 살았다고도 한다. 생활은 무척 힘들었던 듯하다. 위그르족 향비 263

264 (향비가 안장된 위구르의 카슈가르 가족묘) 망향병에 시달렸다는 흔적도 있다. 궁중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에 건륭제는 이를 위해 그곳에서 나오는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을 정도였고, 그녀가 위구르의 전통 복장도 입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며, 특별히 그녀를 위해 위구르의 조복까지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궁정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향비의 실존 근거는 청나라에서 벼슬을 지낸 이탈리아 사람이 그린 [향비융장상]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밖에 없다. 이 그림에는 투구를 쓰고 무장 차림을 한 여인이 있는데 이 그림에 작자미상의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향비는 위그르족의 왕비로서 자색이 뛰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몸에서는 특이한 향기가 있어, 나라 사람들이 이름하여 향비라 불렀다. 청나라 건륭제가 이 소문을 듣고 회부에 출정하는 장군 조혜에게 기필코 향비를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회부를 평정한 조혜는 과연 향비를 데리고 북경에 이르렀다." 위그르족 향비 264

265 (제일크고 아름다운 다홍색 비단으로 씌워진 향비의 관) 향비를 본 건륭제는 한눈에 매료되고 말았다. 확실히 향비는 건륭제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뛰어난 미모와 이국적인 체취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경에 온 향비는 항시 칼을 빼어들고 죽음으로써 건륭제의 접근을 거부하였다. 그녀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은 것은 독살하였거나 자살하였기 때문이이라고 한다. 자살설은 그녀 자신이 이미 정혼한 몸이었기 때문에 항상 칼을 가슴에 품고 황제의 접근을 불허하였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황태후가 이 사실을 알고는 그녀를 불러 들여 소원을 묻자, 죽는 것 뿐이라고 말해서 결국 별실에서 자살케 하였다고 한다. 황태후가 환관들을 시켜 목졸라 숨지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어찌 되었든, 향비에 얽힌 이야기는 청의 카슈가르 정복 과정에서 나타난 비극이고, 향비는 그에 저항한 여성인 셈이다. 때문에 그녀의 유해는 동릉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덤은 인간의 산물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산물일 것이다. 카슈가르의 향비 묘에도 그러한 의미가 담겨 있는 듯이 보인다. 아마 위구르인들은 향비를 통해 민족적 자존심을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고, 그 욕망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그르족 향비 265

266 (향비묘 바깥에 있는 일반 위구르족의 묘) 위그르족 향비 266

267 중국 고대 참혹형벌 :36 중국 고대 참혹형벌 267

268 중국 고대 참혹형벌 268

269 중국 고대 참혹형벌 269

270 중국 고대 참혹형벌 270

271 중국 고대 참혹형벌 271

272 중국 고대 참혹형벌 272

273 중국 고대 참혹형벌 273

274 중국 고대 참혹형벌 274

275 중국 고대 참혹형벌 275

276 중국 고대 참혹형벌 276

277 중국 고대 참혹형벌 277

278 중국 고대 참혹형벌 278

279 중국 고대 참혹형벌 279

280 중국 고대 참혹형벌 280

281 중국 고대 참혹형벌 281

282 중국 황제의 여성 편력사 :56 중국 황제의 여성 편력 역사는 황제( 黃 帝 ) 때부터 시작한다. 황제가 이미 1200명의 여인들을 거느렸다고 하니, 참으로 장구한 역사라 할 수 있다. 주나라 때에는 황제가 합법적으로 121명의 아내를 맞을 수 있었다. 우선 1명의 황후가 보름에 한 번씩 황제와 잠자리를 할 수 있었고, 3명의 부인은 역시 보름에 한 번 세 사람이 함께 황제를 모셨다. 9명의 구빈도 마찬가지로 함께 황제와 잠자리를 했다. 그 아래 27명의 세부는 5일에 한번씩 제비를 뽑아 세 명이 함께 황제를 모신다. 마지막으로 81명의 여어들은 남은 14일 중에 매일 다섯이나 여섯 명이 함께 황제와 잠자리를 하였다. 이런 황당한 배정 방식도 나름대로 성 인들에 의해 정해진 것. <예기>에서 그 원문을 찾아볼 수 있다. 진의 시황제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군주답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는데 비빈들의 수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황제가 한 나라를 정복할 때마다 그 왕비와 공주, 귀족 가문의 미인들을 입궁시켰는데 이렇게 거느린 후궁이 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황제의 기록 은 뒤이은 한무제에 의해 쉽사리 깨져버린다. 한무제는 시대의 풍운아인 동시에 희대의 방탕아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는 황제이다. 진시황 때에는 비빈을 8개의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한무 제 때에는 이 등급이 14개로 늘어난다. 이에 맞추어 여성들의 수도 진시황 때의 만여 명에서 18000명으로 증가한다. <구당서 식화지>에는 한무제의 후궁이 수만 명에 달하였다고 적 고 있으며 한무제는 '3일 동안 먹지 않고 살 수는 있어도 여인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18000명의 후궁들에게는 재앙이었다. 황제의 여인들이 워낙 많다 보니, 운이 좋아 총애를 받은 여인도 몇 년이 지나고서야 다시 한 번 황제를 만날 기회가 주어질 정도였다. 한편 단 한번의 총애조차 받지 못한 이들은 그야말로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들은 30세가 지나 황제의 관심을 끌 수 없어졌을 때에 이르러서야 출궁되었다. 서진( 西 晋 )의 진무제 사마염도 한무제에 버금가는 여성편력가였다. 사마염은 273년 공경보다 낮은 집안의 여자들을 육궁으로 삼고자 영을 내 리고, 이를 위한 여성들이 선발되기 전까지 모든 혼인을 금지시켰다. 다음해에 5000여 명의 여성들이 선발되어 입궁되었는데 울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8년이 지나자 입궁한 여성들의 수는 만 여명에 달했다. 한편 궁녀의 수가 너무 많아져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양을 풀어놓고 그 양이 이르는 처소의 궁녀에게 황제가 발걸음을 했다고도 한다. 이렇게 되자 궁녀들은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양이 멈춰 서도록 처소 앞에 먹이를 풀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무제도 사마염도 가장 많은 여인을 거느린 황제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여인을 거느렸던 황제는 누구일까? 정답은 당 현종. 중국 황제의 여성 편력사 282

283 그가 거느린 궁녀만 4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당 현종 당대에는 귀비, 숙비, 덕비, 현비의 4비를 부인으로 하고 후궁은 6국 24사에 설치되어 총 190명으로 모두 품계가 있었다. 한편 품계가 없는 궁녀는 더욱 많아 장안과 대명, 흥경의 3궁과 동도, 상양의 궁녀가 모두 4만 명에 달했다. 이 수치는 당대의 관원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많 다. 당시 당의 총 인구는 5000만 가량으로 백성 천명 중 한 명은 당 현종의 여자였다는 뜻이 된다. 현종이 양귀비 한 사람만을 총애하고 있었을 때, 나머지 4만 명의 궁녀들은 허망하게 황제가 발걸음을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 없었 다. 당대의 시인 원진은 궁 안에서 남의 수족 노릇을 하며 외롭게 늙어가는 궁녀들의 안타까움을 시로 읊기도 했다. 명대는 음식과 여자를 즐기는 것을 인생의 최고 즐거움으로 여기던 시기다. 황제 역시 산해진미와 여색에 탐닉했는데, 명대의 황제들이 유약 하고 명이 짧은 원인이 이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편 도교에 심취하였던 가정제는 불로장생의 욕망과 성욕을 동시에 충족시키기 위해 동정녀하고만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사료를 통해 보면 청대의 궁녀들은 황제의 성욕을 해결시켜주거나 자식을 낳아주는 도구로 전락한 것처럼 보인다. 청대에는 태감들이 패에 여성들의 이름을 적은 후, 매일 밤 황제의 저녁식사가 끝나면 패들을 올렸다. 황제가 마음에 드는 패를 골라 뒤집어놓으면, 태 감이 물러가서 호명된 여인을 데려온다. 이 때 태감은 여인의 옷을 모두 벗기고 외투로 감싼다. 그리고 황제가 누워서 기다리는 어탑까지 업 어온 후 다시 외투를 벗겨 황제의 눈앞에 대령시킨다. 이러한 합궁 과정은 황제가 마치 마음에 드는 여성을 음식처럼 고르는 듯한 느낌을 연 상시킬 정도다. 중국 황제의 여성 편력사 283

284 일본인들의 만행, 난징( 南 京 )학살 사건 :03 난징대학살( 南 京 大 虐 殺 )은 중.일전쟁 도중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입니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6주간에 걸쳐 약 30만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되었던 아주 끔찍한 대사 건을 말합니다. 학살사건 이듬해인 1939년 4월, 일본군은 이른 바 1644부대라는 것을 신설하고 생체실험까 지 자행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중국에서는 이를 난징 대도살이라 부르며 몸서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 렇다면 일인들은 왜 그와 같은 만행을 저질렀을까, 그 자초지종을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지요. 1937년 7월 루커우쟈오(마르코 폴로 다리,노구교( 盧 溝 橋 )라고도 함 : 베이징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8km 정 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다리)사건으로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무력 사건이 터지면서 중.일전쟁이 발 발했습니다. 전쟁 초기에 일본군이 베이징, 톈진 등 북부 주요도시들을 손쉽게 점령하게 되자 일본군 수뇌 부는 "단 3개월 내에 중국대륙을 점령하겠다"고 큰소리 쳤을 만큼 기세가 등등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 하이 상륙작전 전투에서 3개월이상 전투가 장기화됨으로써 일본군이 예상했던 것보다 장기화하였고,중국 국민당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기에 일인들의 예측은 크게 어긋나고 있었습니다. 특히 상하이 전투에서 국민당군은 장제스( 蔣 介 石 )가 엘리트 직계군대를 투입하였기에 저항이 상당히 격 렬했었던 데다가, 일본군은 오송 상륙전투에서 무모한 작전을 전개하다가 예상 외로 엄청난 피해를 입어 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즈음 일본군들의 중국군과 중국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최악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 던 것이지요. 그해 11월, 일본군은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는 가운데 가까스로 상하이를 점령하게 되었고,내 일본인들의 만행, 난징( 南 京 )학살 사건 284

285 친김에 중국 국민당의 수도 난징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파죽지세로 공격해 오는 일본군의 기세에 눌린 중국 국민당군 정부는 수도 난징을 버리고 충칭(중경)으로 천도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 唐 生 智 ) 장군은 결사항전을 주장,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 난징을 지키 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들의 거센 공격으로 포위를 받게 되자 위기를 느낀 국민당 주요 관리와 부유층들은 선봉에서 난징시를 탈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일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약 110만명에 육박했던 대도시 난징은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시민들과 일본군을 피해 도시로 피난해 들어오는 피난민 등 이 뒤엉켜 아비규환을 이루었지요. 당시 난징성을 포위한 일본군 지휘부는 중국군 사령관에게 투항을 강 요할만큼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난징성을 수비중이던 탕셩즈 사령관 휘하 15만명의 중국군은 투항을 거부한 채 도시 밖 요충지 를 포기하고 난징성 안에서 방어하겠다는 전략을 수립,사수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12월 10일, 일본군은 중 국군을 향해 "항복하지 않으면 피의 양쯔강을 만들겠다"는 최후통첩을 하기에 이르렀고,중국군 역시 이에 끝까지 대항하기로 결의하니,일본군은 전면공격을 감행하였고 12월13일 마침내 난징성을 무너뜨리게 되었 지요. 이에 지리멸렬한 국민당군은 저항다운 저항도 못해본 채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난징성이 함락되기 전날,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결사항전을 주장했을 때와늠 달리 세불리를 느끼게 되자 자신의 휘하부대와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한 채,양쯔강을 가장 먼저 건너 줄행랑을 쳤지요. 그러니 그 의 말을 믿고 미처 피신하지 못한 60여만명의 난징 시민과 중국군은 공황상태하에서 약 6주 동안 일본군에 의해 처참한 대량학살을 당해야 했습니다. 1937년 12월 13일, 난징시를 접수한 일본군은 미처 피난가지 못 하고 남아있던 시민들과 병사들이 중국군 포로뿐만 아니라 젊은 남성들을 색출, 성외곽이나 양쯔강 하구 일본인들의 만행, 난징( 南 京 )학살 사건 285

286 에서 무차별 학살(총살)을 자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을 때는 1만여명에 달하는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들이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이나 목 베기 시합 등의 도구로 희생되었고,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에 의해 산 채로 생매장 당하는가 하면 일본도 난자당했습니 다. 뿐만아니라 일본군들은 "패잔병을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모자를 오래 쓴 흔적이 있거나 손에 굳은 살 이 박힌 젊은 남성' 모두를 닥치는대로 양자강에 쓸어넣었는가 하면,어떤 때는 유부녀와 어린아이들이 포 함된 수천여명의 시민들을 광장에 도열시킨 후,이들에게 석유를 부은 후 기관총을 난사함으로써 시신을 불타게 하는 잔인한 수법으로 무고한 시민을 학살했던 것이지요. 제2차세계대전 종료 후 난징대학살에 참가한 어느 일본군의 일기에는 당시의 심경을 밝히는 다음과 같 은 내용도 있었다 합니다.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군들은 군인이나 민 간인을 가리지 않고 학살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잔인한 '인간 사냥'이 극에 달하는 가운데 일본군은 여자들에게 '집단윤간'이나 '선간후살'( 先 姦 後 殺, 먼저 강간하고 다음에 죽임)로 인권을 유린하며 성노리개로 삼았던 것이지요. 당시 처참하게 희생된 여성중에는 10세 이하의 어린이로부터 6,70대 노인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으 며, 수녀와 비구니들에게까지 능욕을 가했다니 그들이 얼마나 잔인무도 했던가를 익히 알 수 있다 하겠습 니다. 다음은 1938년 1월, 일본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 廣 田 弘 毅 )가 주미 일본대사관에 보낸 비밀 전문 내용 의 일부입니다. 특별소식: 믿을 만한 목격자들의 추산과 신뢰할만한 인사들이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일 본군이 저지른 모든 행위와 폭력 수단에 의해 희생된 중국인은 최소 30만명에 달하며,이러한 살륙은 전투 가 끝난 수주후가지 약탈과 아동강간 등의 잔혹 행위가 계속되었다. 일본인들의 만행, 난징( 南 京 )학살 사건 286

287 당시 일본 외무부는 난징학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난징에 주재중이던 서방 외교관들에게 음식과 공연을 제공하며 매수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그와 같이 생목숨이 죽어가던 시기에도 독일 지멘스사 의 직원으로 난징에 근무하던 욘 라베 라는 외교관은, 사업가 등 난징에 있던 다른 외국인들의 조력하 에 '국제위원회 를 조직했습니다. 자신의 자택과 대사관 부지 등을 중심으로 일본군이 들어올 수 없도록 '난징 안전지대 를 설정하였고,20만명 이상의 중국인들이 일본군의 살생으로부터 화를 면할 수 있도록 은 신처를 제공함으로써 많은 중국인들의 생명을 구했던 사례를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1937년 일본 마이니치신문에서 보도되었던 100인 참수경쟁 기사 라는 것도 지나칠 수 없는 비화 한토 막이니 들어보도록 하지요. 난징 대학살이 자행되던 무렵인 1937년 11월30일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 문 ( 大 阪 每 日 新 聞 )과 12월 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 ( 東 京 日 日 新 聞 )에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 向 井 敏 明 ) 소위와 노다 쓰요시( 野 田 毅 ) 소위가 일본도( 日 本 刀 )로 누가 먼저 100명의 중국인을 참살( 斬 殺 )시 키는지를 겨뤘다. 는 사실이 보도되었던 것을 말합니다. 종전 후 두 일본군은 난징에서 군사재판을 받았 는데 최후까지 민간인 학살을 부인하다가 육군중장 다니 히사오( 谷 寿 夫 )와 함께 총살되었다 했습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1937년 12월13일, 난징이 함락된 이후 6주간 계속되었던 피비린내 나는 학살은 1938 년 봄을 종결시점으로 볼 수 있으며,그 후 일본군은 도시 전체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 난징에 있는 중 일본인들의 만행, 난징( 南 京 )학살 사건 287

288 국인들을 피라미드형 편재방식으로 통제하는 방법을 고안했었지요. 1938년 1월1일, 일본은 새로운 시 정부 인 '난징자치위원회'를 구성했으며,이 위원회를 도시의 행정, 복지, 금융, 상업, 치안, 교통 등을 담당하는 중국인 관리들로 구성함으로써 일본군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1939년 4월에는 의학연구기관을 설치하고 마루타(통나무) 형식의 생체실험을 하기에 이릅니다. 'Ei 1644부대'라 칭하는 이곳에서 매주 10여명의 사람들을 생체실험한 후,그 사체는 'Ei 1644부대'의 소각 로에서 처리하였다는 것이지요. 그러던 1940년에는 친일 꼭두각시 정부인 왕징웨이( 汪 精 衛 ) 정권을 수립하 였으나 민중들은 결코 왕징웨이 정권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Ei 1644 부대 등 일본군과 일본인들은 중국 국민당군이 난징에 입성하기 전에 모든 데이터를 파괴하고 도주하려 했습니다. 전후인 1946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난징전범재판이 열렸으며,1천여명의 중국인들이 460여건 의 살인,강간,방화,약탈에 관해 증언했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숨겨진 비화가 속속 공개되었는데, 여기서 일본 신문에 보도된 100인 참수 경 쟁'의 노다 쓰요시 중위와 무카이 도시아키 중위가 재판을 받았던 것이지요. 두 사람은 '살인시합'을 벌인 장본인이었음에도, 재판중에는 두사람 모두 150명 이상을 죽였다는 사실을 부인한 채 외국특파원들이 허 위기사를 썼다고 주장했었으나 1947년 12월18일 사형을 언도받았으며,온갖 만행을 자행했던 난징 주둔 일 본군 6사단장 다니 히사오중장도 난징시 인근 수천구의 유골을 증거로 공개 총살시켰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끔찍한 100명 중국인 참살( 斬 殺 )하기 경쟁도 최근 중국에서는 난징시에 7만평 규모의 난징대학살 역사관을 설립,매년 12월 13일에 추모식을 갖고,일본 의 만행을 국제적으로 홍보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시 중국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의 학살현장에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잔인하게 학살되었거니 와,일인들이 중국여성을 강간한 후에는 그 여성의 수족을 절단하는 방식으로 무참하게 살해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인 군인 포로들을 총검술 훈련에 이용하였는데,이러한 일본의 만행은 후일 일인 사진사였던 무라세 모리야쓰에 의해 밝혀짐 사실입니다. 일본인들의 만행, 난징( 南 京 )학살 사건 288

289 < , 간 장제스 국민당정부의 수도가 난징시에...> 그처럼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일본에서는 아직도 일부 양심적 지식인을 제외하고는,극우세력들은 난징 대학살은 없었다며,환상설이나 부정론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중국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이죠. 그 렇기 때문에 난징대학살 기념관에 게시된 사망자 숫자에 대해서도,서방측에서까지 최소한 15만명에서 20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추론하는데도 일본측 학자들은 중국측의 30만명이라는 주장을 아예 인정하지 않으려 하 고 있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일본정부의 애매모호한 태도 등이 이른 바 부정론에 가깝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1971년 일본의 아사히신문의 혼다 카츠이치 기자가 홍콩을 경유해 중국에 입국한 후 당시 일본 과 국교가 없었던 중화인민공화국을 여행하며 신문지상에 연재한 '중국 여행'이라는 르포가 화제가 되었습 니다. 일본에 난징 대학살 논쟁의 불씨를 당겨진 것은 그 연재물이 인기를 끌게된 것이 계기가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100인 참수경쟁의 이야기나 731부대의 이야기도 일인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런가 하 면 그 르포기사를 반박하는 일본 극우언론인 산케이신문의 스즈키 아키라라는 기자가 쓴 난징 대학살의 환상,이라는 책을 출판함으로써 논쟁이 격해지기도 했지요. 일본인들의 만행, 난징( 南 京 )학살 사건 289

290 그런가 하면 일본의 교과서에는 1965년에 당시 사토 에이사쿠 총리하의 문부과학성 검정 역사 교과서에 서 난징 대학살이 삭제된 채 검정을 통과했습니다. 이에 이의를 제기한 이에나가 사부로 교수의 교과서 소 송 재판이 30년간 이어졌고,1995년에 이르러 최고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의무적으로 실리게 되었으나, `99 년부터 극우세력이 들고 일어나 다시 학살 부정론이 발호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에 고무되 었던 마이니찌 신문은 1937년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와 노다 쓰요시 소위가 100인 목베기 시합을 보 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2005년에는 가해자 유족들이 100인 목베기 시합에 대해 보도했던 언론사들을 명예훼손으로 고 발하는가 하면, 일본 극우세력과 우익단체들은 이 유가족들을 지원하는 모임을 결성하면서까지 진실을 왜 곡하는 소송을 지원했던 것이죠. 이 때 원고측 억지 주장은 "전쟁 수행 중에 일본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고, 국민들에게 선전하기 위해 언론에서 지어낸 얘기일 뿐 실제 목베기 시합은 존재하지 않았다"며 생떼를 썼 으나, 최근 이 사건에 대해 도쿄의 재판소는 100인 목베기 시합 이 없었던 일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며 유족 등 원고측에 패소판결을 내렸습니다. -끝- 일본인들의 만행, 난징( 南 京 )학살 사건 290

291 중국역사를 출렁이게 했던 시안사변( 西 安 事 變 )의 진실 :01 시안사변( 西 安 事 變,)은 1936년 12월 12일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이 국민당 정권의 총통 장제스를 산시성의 성도 ( 省 都 ) 시안( 西 安 ) 화청지에서 납치하여 구금한 후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한 것으로 시안사태 혹은 시안사건이라고도 합니다. 이 사건으로 국민당군과 홍군은 국공 내전을 중지 하고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함께 일본에 맞서 싸우기로 한 정변으로서 중국역사의 흐름을 크게 출렁이게 한 아 주 중대한 변화였던 만큼 그 내막을 소상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쉐량( 張 學 良,장학량) 장군> 젊은 원수로 알려진 장쉐량( 張 學 良,장학량)은 중국 동북지방 즉, 만주의 군벌인 장쭤린( 張 作 霖,장작림)의 장남이었 죠. 1928년 일본군의 폭탄테러에 의해 아버지 장쭤린이 죽자 그 위치를 물려받은 장쉐량은 만주의 젊은 독재자이자 군벌로 위세를 떨쳤던 군부세력이었습니다.그러던 1931년 9월 본격적인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인해 근거지를 잃은 장 중국역사를 출렁이게 했던 시안사변( 西 安 事 變 )의 진실 291

292 쉐량은 장제스에게 의탁하는 신세로 전락 그에 의해 중국 중부지방에서 동북군(만주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홍 군과의 국공내전시 한 축을 담당할 부사령관직을 맡았습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대장정 이후 예안을 근거지로 삼아 동북군과 대치하고 있었으며,장쉐량 휘하의 동북군은 고향 인 만주를 일본에 빼앗긴 상태여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많았고 홍군과의 의미없는 소모전에 지쳐있었던 무렵이었 습니다. 특히 홍군은 동북군 포로들에게 '진짜 적은 같은 중국인인 홍군이 아니라 만주를 침탈한 일본군이라'는 지속 적인 "항일선전"을 폈고 이들이 다시 동북군으로 귀대하게 되니,동북군 사이에는 항일에 대한 요구가 점점 커지게 되 었던 것이지요. 장쉐량 자신도 홍군과의 접촉을 통해 대 일본 전쟁에 소극적인 장제스가 주도하는 난징정부의 "선 통 일,후 저항" 정책에 불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1936년 초 장쉐량의 동북군은 홍군과 비밀리에 접촉을 갖고 서로 적대적인 행위를 중지하고 일본과 항쟁하는 통일 전선을 구축하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도출해냈습니다.이후 장쉐량은 만주시절부터 이어오던 동북군 장교단을 젊고 진 보적인 세력으로 대체하는 한편 공산군과의 접촉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러한 방침하에 이루어진 공산군과의 접촉사실 은 장제스의 난징정부가 모르도록 비밀리에 이루어졌음은 말할 나위 없겠지요. 이로써 중국군 총사령관 및 행정부 주 석직을 겸하고 있었던 장제스와 동북군 원수 장쉐량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은 고조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장제스는 반일감정이 고조된 서북지역의 민심을 뒤로한 채 공산군 토벌에만 몰두하였고 이에 소극적인 동북군을 점차 신뢰할 수 없게 되자 직접 난징의 휘하부대를 직접 동원하여 대규모 홍군토벌을 준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1936 년 10월 장제스는 직접 시안을 방문하여 동북군으로 하여금 공산군 토벌을 독려하였으나 동북군의 젊은 장교들은 대 일본 통일전선 수립 및 소련과의 동맹 및 내전종식을 요구하였고,이들의 의견을 수렴한 장쉐량이 내전을 중지하고 일 본과의 항전을 촉구했으나 장총통은 이를 외면하였지요. 11월 21일 동북군을 대신 공산군 토벌에 나선 후종난( 胡 宗 南, 유능한 전술가로 알려짐)의 제1군이 홍군에게 참패했다는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직접 시안으로 날아가 반드시 홍 군을 분쇄하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다졌지요. 12월 7일 마침내 장제스는 공산군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전용기편으로 직접 시안에 도착하였으며,이에 맞서 동북 군 지휘관들도 다시한번 장총통에게 항일전을 촉구하였으나 거절당했고, 양호성( 楊 虎 城 ) 장군 휘하 4만명의 서북군도 더 이상 홍군과의 소모전은 불필요하다고 판단,동북군과 행동을 같이 하기로 하였던 12월 9일에는 수천명의 학생들이 반일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장제스의 헌병대가 발포, 두명의 동북군 지휘관의 아들이 다치는 자극적 인 사건이 발생했으나 장쉐량의 중재로 성난 학생군중을 무마함으로써 더 이상 큰 사건으로 확산되지 않았지요. 이처 럼 급변하는 상황에서도 장제스는 제6차 홍군토벌 작전계획을 발표하고 총동원령이 임박하였음을 알렸습니다.뿐만아 니라 장쉐량을 경질하고 토벌군사령관을 교체할 계획을 세웠고, 장제스의 친위병력인 남의사( 藍 衣 社 )는 항일을 주장 하는 동북군 장교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작성,동북군의 핵심세력을 제거하고 공산군 토벌에 동조하는 장군들로 대체 하려 했습니다. 중국역사를 출렁이게 했던 시안사변( 西 安 事 變 )의 진실 292

293 장쉐량이 동북군과 서북군의 사단장 합동회의를 소집한 12월11일 밤10시는 바로 이러한 일련의 복잡한 사태가 절 정으로 치닫고 있던 때였습니다. 회의 결과 동북군 1개사단과 서북군 1개연대를 시안 외곽으로 이동하라는 비밀명령 이 떨어졌고,이 병력으로 하여금 총통과 그 참모진을 '체포'하도록 했던 것이지요. 이로써 17만 대군의 반란이 현실화 되었던 이 사건은 그 동기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비난할 수 있을 지 모르나,시의적절한 타이 밍과 눈부신 실행과정에 대하여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주도면밀히 진행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2월 12일 동북군과 서북군의 반란군은 오전 6시까지 시안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취침중에 기습을 당한 장제스 친위대는 무장을 해제 당한 채 체포되었으며,참모부 요원 전원이 영빈관 숙소에서 사실상 구금상태에 들 어갔습니다.성장( 省 長 )인 소력자와 경찰국장이 사로잡힘에 따라 시안시 경찰은 모두 반란군에 투항했고,난징정부의 폭격기 50대와 조종사들은 비행장에서 억류당해야 했습니다.이 때 장총통은 시안에서 10마일 정도 떨어진 온천휴양지 임동( 臨 潼 )에 투숙중... 새벽 3시 장쉐량의 부하들이 장제스가 묵고 있는 호텔을 급습하니,총통은 잠옷바람이요 맨발 인 채 야산으로 도주해야 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는 그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 에서 장총통 체포에 대한 비화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장쉐량의 경호대장인 26세의 손명구( 孫 銘 九 )대위는 200여명의 동북군을 인솔하고 한 밤중에 장제스가 묵고있는 임동에 도착,새벽5시에 작전을 개시하였으며,선발대 15명을 태운 트럭이 호텔로 돌진했 고,보초들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뒤이어 도착한 증원군의 지원을 받아 초병들을 제압함으로써 장총통의 숙소에 무난 히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장총통은 총격전이 벌어지는 동안 황급히 휴양지 뒤편의 야산으로 도주해야 했지요. 이를 알아챈 손대위의 수색대는 눈덮힌 바위투성이의 산비탈에서 총통의 몸종을 찾아냈고 잠시후 장총통을 발견하 는데 성공했습니다.장제스 그는 잠옷 위에 헐렁한 겉옷만을 걸치고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에다가,양손은 산위로 도주 하다 긁힌 상처투성이,혹한에 덜덜 떨면서 틀니조차 빠뜨린 처참한 모습으로 바위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중국역사를 출렁이게 했던 시안사변( 西 安 事 變 )의 진실 293

294 손대위가 총통에게 거수경례를 하자 그의 한마디 귀관이 내 동지라면 나를 사살하고 모든 것을 끝내게 하는 짧 은 한 마디였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각하를 쏠 생각이 없습니다.우리는 다만 각하가 조국을 이끌고 일본에 대항하 기를 바랄 뿐입니다. 장은 바위에 걸터앉은 채 더듬거리며 장쉐량원수를 불러오게 그러면 내려 가겠네 장원수는 이 곳에 안계십 니다. 성내( 省 內 )에서 군대가 봉기하여 우리가 각하를 보호하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타고 내려갈 말 한 필을 가져오게 이 곳에는 말이 없으니 그 대신 제가 업어서 산 아래로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후 손대위는 무릅 을 꿇고 앉았으며, 장은 그 제의를 받아들였고,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 젊은 장교의 등에 업혔다는 것이죠. 삼엄 한 호위를 받으며 하산,산기슭에서 차에 올라 시안으로 향할 때까지 장과 손대위간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각하 지난 일은 과거로 돌리고 이제부터는 중국이 새로운 정책을 취해야합니다.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중 국에 한 가지 급선무가 있다면 그 것은 곧 일본과 싸우는 것입니다. 동북지역 사람들이 각별히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항일전입니다.그런데 왜 일본과 싸우지 않고 대신 홍군과 싸우라고 명령하십니까.? 나는 중국인민의 지도 자야,내가 국가를 대표하고 있네,나는 내 정책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이처럼 약간의 총격전은 있었지만 장 총통은 여전히 굴복하지 않은 모습으로 시안에서 장쉐량과 마주하였던 것이지요. 쿠테타를 일으킨 동북군과 서북군 사단장 전원은 중앙정부와 각 성의 지도자,전체 인민에게 보내는 전문( 電 文 )에 서명하고 발표하기를 총통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그에게 서안에 체류하도록 요청했다고 해명하였습니다. 이 전 문은 또 시안 체류중 총통의 신변에 안전을 보장할 것과 총통에게 제시한 구국 의 요구조건을 공표하였습니다.그 러나 국민당 정부의 사전검열을 받아야 하는 언론에는 일체 보도되지 않았었지요. 당시 동북군 등이 총통체포에 성공 한 직후 난징정부에 제시한 8개항의 요구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난징정부를 개편하고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서 구국의 공동책임은 분담케 할 것. 2. 내전을 전면적으로 즉각 중지하고 "무력항일 정책"을 채택할 것. 3. 상하이의 애국운동 지도자들을 석방할 것. 4. 모든 정치범을 사면할 것. 5. 인민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6. 애국적 단체를 조직할 인민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것. 7. 쑨원 박사의 유지( 遺 志 )를 이행할 것. 8. 전국구국회의를 즉각 소집할 것.등이었습니다. 동북군의 요구조건에 대해 중국 공산당과 중화소비에트 정부,홍군은 즉각 찬성을 표시하고 공산당 대표들 이 시안으로 날아왔고 공동항일투쟁 의사를 발표하였으며,12월14일에는 동북군 약 13만 명, 서북군 4만 명, 홍군 9만 명으로 구성된 "항일연합군"이 구성되고 장쉐량이 연합군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습니다. 중국역사를 출렁이게 했던 시안사변( 西 安 事 變 )의 진실 294

295 이로써 홍군과의 전투명령은 즉각 중지되었고 항일연합군은 새로운 전열을 가다듬고 일본과 전쟁을 준비 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모든 변화는 국민당의 사전검열로 서북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일체 보도되지 않았고 장쉐량은 그저 반란군으로 묘사되고 있었습니다. 난징의 국민당 정부는 총통의 체포와 구금사실을 철저하게 숨기고 서북지역의 반란군을 응징할 준비를 하였고,이는 난징정부의 내부권력 투쟁양상으로 번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구금되어 있는 동안 장제스는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와 면담을 가졌으며,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을 비롯한 난징정부의 대표단이 시안으로 날아와 막후협상을 벌였지요. 대다수 동북군 장교들은 장제스를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중국역사를 출렁이게 했던 시안사변( 西 安 事 變 )의 진실 295

296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공산당 및 다른 온건파들은 장제스가 그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어야만 10 년간의 국공내전을 종식시킬 수 있기 때문에 총통이 체면을 유지한 채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장제스의 실각이나 죽음은 또 다른 내전의 빌미가 될 것이고,결국 일본만 이득을 본다는 결론이었지요. 동북군의 젊은 청년장교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8개 요구항에 대한 문서 서명 확인 없이 12월25 일 석방되었습니다. 반란군, 공산당과 난징정부 대표들 사이에 정확하게 어떠한 합의가 도출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장제스는 더 이상 내전이 없다는 점을 개인적으로 보장했고,장쉐량이 제공한 비 행기 편으로 난징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때 장제스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장쉐량 자신의 전용기편으로 장총통과 함께 난징으로 가 처벌을 기다렸다니 그의 인물됨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장제스 총통 부인 쑹메이링( 宋 美 齡.송미령)> 난징에 도착한 장쉐량은 장총통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을 받기 위해 각하와 함께 난징에 온 것은 그래야만 장총통께서 군율을 잡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 다. 이에 대해 장제스는 자못 근엄한 표정으로 내 부덕함과 부하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소치로 전례 에 없었던 반란이 일어났소, 귀관이 회개의 뜻을 밝힌만큼 나는 중앙당국이 사태를 원상회복시키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요청하겠소. 갖가지 격렬한 행동을 타협적인 조치로 전환시키고,처벌과 보상을 중국역사를 출렁이게 했던 시안사변( 西 安 事 變 )의 진실 296

297 적절히 조정하는데 이처럼 뛰어나고 교묘한 표현이 없을 듯 싶습니다. 이후 장제스는 먼저 반란을 저지하지 못한 무능과 수상으로서의 태만행위를 고백하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했으며,산시성에 파견한 정부군 전원이 철수하도록 명령한 후 총통직 사임의사를 표명했지요. 그러나 그의 사의표명은 진정한 뜻의 사임이아니었고,난징정부 또한 참된 의사로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왜냐하면 장제스 그는 12월29일 중앙집행위원회 긴급상임위원회를 소집하고 국민당 최고의결기관에 다음과 같은 4 개항을 조치해 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즉 장쉐량의 처벌문제를 그가 주석으로 있는 군사위원회에 회부할 것과 서북군 문제해결과 반란군에 대한 군사작전을 중지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장제스는 자신이 부재중에 시안공격을 위해 설치되었던 토벌사령부의 해체,이러한 권고안은 상임위원들 에 의해 고분고분 통과되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장쉐량은 12월31일 군사법정(장제스 불참)에서 10 년 금고형과 5년간의 공민권 박탈을 선고받았지만 다음날로 사면 되었고,그 이후 장제스의 처남이자 난징 정부 특사로 시안에 파견되었던 송자문의 빈객으로 머물게 되었지요.이어서 시안에 설치된 총통의 사령부 가 해체되었으며 국민당내 정학파( 政 學 派 )의 유력지도자였던 친일파 외교부장 장군( 張 群 )이 해임되었고,구 미파( 歐 美 派 )인 왕총혜가 임명됨으로써 시안에서의 약조가 암묵적으로 이행되고 있었습니다. 2월초까지 휴가를 얻은 장제스는 장쉐량과 함께 자신의 고향인 저장성( 浙 江 省 ) 봉화 인근의 총통별장에 서 정양하던 중, 첫번째 사의표명이 반려되자 두 번째로 사의를 표명하는 제스츄어를 표했습니다. 그는 표 면상 공무에서 벗어난 입장이었음에도 서북지역 문제해결 형태를 완전 좌자우지했을 뿐만 아니라,동북군 서북군 홍군 지휘관들과 진행되었던 회담도 완전히 주도해 나갔던 것이죠. 이 무렵 장쉐량은 사면을 받았 다고는 하지만 근신상태 로 장제스 곁에 있어야 했으니 사실상의 포로신세였습니다.1949년에 장제스에 의해 대만으로 끌려가 국민당 정권하에서 1991년까지 자택연금 상태에 있었지요. 사실상 구금상태로 지내던 장쉐량이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장제스 사후인 1993년이었습니다.그 해 처음으로 대만으로부터 출국이 허용되어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으며,1995년부터 2001년 사망할 때까지 하 와이에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2001년 10월14일 오후 8시50분, 미국 하와이 자택에서 101세까 지 장수를 누리다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던 그가 세상을 떠난지 10여년이 지났음에도 대만에서 푸대접 을 받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본토의 중국 공산당 정부로부터는 역사상 누구에 못지않는 영웅 대접을 받을만큼 현대 중국역사를 뒤바꾼 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합니다. 중국역사를 출렁이게 했던 시안사변( 西 安 事 變 )의 진실 297

298 시안사변에 대한 남은 얘기를 이어 가도록 하지요. 난징의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형식적으로는 반란군의 8개항을 거부했으나 국가의 당면한 최대의 문제는 "공산당 축출과 통일"이 아니라 "실지회복"임 을 결의했으며,장제스가 오랫동안 연기해온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조속히 민주제도를 도입할 것을 결 의하였습니다. 그에 더하여 정치적 발언과 언론의 자유를 선포하였고,일부 정치범을 석방하기 시작함으로 써 장제스가 시안에서 약조한 사항을 가시적으로 이행해 나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 일환으로 공산당에 제시했던 것이 4개항의 화평조건이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홍군을 해체하고 국가의 단일 군사력(국민당군) 아래 편입할 것.'소비에트 공화국'을 해체할 것.쑨원 박사 의 "삼민주의"와 배치되는 공산주의 선전활동을 중지할 것.계급투쟁을 포기할 것.이러한 화평조건을 제시 한 난징정부는 반란군의 요구사항과 공산당의 '협력'제안을 거부하는 형식을 취하는 듯하면서도 교묘하게 반란군의 8대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는 책략을 썼던 것이죠. 이 점에 대해 난징정부 내 일부 강경파의 반 발이 있었지만,장제스는 대외적인 유화정책을 강행하였고,1937년 2월에는 동북군을 이동시켰으며,서북군 을 국민당군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서북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공산당과 협상을 주도해 나가는 방편으로는 공산당 대표자격인 저우언라이 등과 여러차례 협상하 면서 마침내 공산당과의 협력관계를 시작했고,공동으로 항일투쟁을 벌이기로 약조했던 것이죠. 일제가 1937년 7월 노구교 사건(1937년 7월7일에 베이징 서남쪽 루거우지아오[ 盧 溝 橋 ]에서 일어난 발포 사건으로 일본군의 자작극)으로 본격적인 중국 침략을 강행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2차 국공 합작을 통해 일본과 전쟁에 나섰고, 이 관계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지속함으로써 당시 열세에 있던, 공산당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시안사변은 2차대전 종료 후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 하여 오늘의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 끝 - 중국역사를 출렁이게 했던 시안사변( 西 安 事 變 )의 진실 298

299 중국역사를 출렁이게 했던 시안사변( 西 安 事 變 )의 진실 299

300 중국역사를 후퇴시킨 마오( 毛 )의 문화대혁명 :59 문화대혁명( 文 化 大 革 命 )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약 10년 동안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진행된 정치적 격동기로서,공 식명칭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문화대혁명( 無 階 級 文 化 大 革 命.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며,약칭 문혁이라고도 합니다.이 운동으로 인해 전국적인 광란분위기가 조성었고,혼돈시대로의 진입 및 극심한 경제침체기로 이어졌습니다. 그 내용 전체를 자세히 논하기에는 너무 광대한 분량,원인과 결과에 중점을 두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역사를 후퇴시킨 마오( 毛 )의 문화대혁명 300

301 한 마디로 문혁은 1966년 5월16일 중국공산당 총서기인 마오쩌둥( 毛 澤 東 )의 주도하에 시작되었으며, 유산계급인 자 본주의적 요소가 당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의 주장에 의하면 중국 젊은이들이 사상 과 행동을 규합해 "혁명후의 계급투쟁"을 통해 이런 요소들을 배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 은 그 후 중국 전역에서 벌어진 홍위병이 준동하도록 멍석을 깔아준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오( 毛 )가 문혁을 제창하면서 가장 큰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은,구 소련의 잘못된 수정주의가 중국에서 재연되는 것을 차단하고, 중국의 이상적인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전후 상황을 들여다 보면, 자신이 주도했던 대약진운동이 실패함으로써 공산당의 권력과 영향력이 덩샤오핑( 鄧 小 平 )과 류샤오치( 劉 少 奇 ) 중국역사를 후퇴시킨 마오( 毛 )의 문화대혁명 301

302 등 개방세력에 넘어 간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모험이었던 것입니다. 1969년에 이르러 마오는 공식적으로 문혁이 끝났다고 선언하였으나, 1976년 그의 죽음과 광적으로 문혁을 지지하 였던 4인방( 四 人 幇 :강청.마오쩌둥 처,요문원.정치국위원,왕홍문 부주석,장춘교부총리)이 체포되기까지의 혼돈 시기를 문혁기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그런가 하면 중국인들은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문혁기간을 십년동란( 十 年 動 亂 ) 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문혁은 수많은 중국인과 외국인,심지어는 중국공산당 내에서도 국가적 재난( 災 難 )이라 깎아내 릴만큼 혹평이 극에 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1981년에 이르러 중국공산당이 정의를 내렸거니와, 그 요지를 마오( 毛 )의 과오( 過 誤 )였는 것으로 발표한 바 있으며,그 주된 책임자로 린뱌오( 林 彪.임표)와 사인방(4 人 幇 )을 지목하였습니다. 불순분자 숙청하려는 사상정화운동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공산당이 실시한 여러 개혁정책은 중국사회에 많은 변화를 초래하 였고,그 이전의 지배층은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재산과 모든 기득권을 몰수당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처형되거나 수용 소에 감금당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권핵심 인사중에는 혁명이 성공하기 직전에서야 공산당 측에 합류한 기회주의자 들이 있었으며,그들 중엔 공산당 집권 후에도 혁명에 동참한 것처럼 지배층에 합류하고 있었던 것이죠.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모순으로 야기된 갈등이나 불만을 봉합하고, 당내 불순분자를 제거하는 사상정화운동 차원에서 "반혁명세력" 및 "우파"를 숙청하곤 했습니다. 중국역사를 후퇴시킨 마오( 毛 )의 문화대혁명 302

303 문화대혁명시만 하더라도 새롭게 선보이기 시작한 라디오가 큰 홍보역할을 하였지요. 중국정부는 초기 준비단계에 서부터 모든 학교, 군부대, 공공조직 등에 라디오를 지급,청취하도록 하였으며,이를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 로 홍보담당자를 선정했습니다. "중앙인민방송국"의 라디오방송은 선전활동을 위한 기구였으며,당시 홍보담당자들이 1960년대 4억의 농촌인구 중 7천만명에 달했다니 홍보요원 규모가 놀랍기만 합니다. 약진운동 이후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이 주도했던 개혁의 핵심은, 집단화를 시정하여 실용적이고 효과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었습니다. 류와 덩의 정책은 "생산보다 자유로운 구매행위 등 새로운 경제정책을 시행하려 했기 때문 에, 마오의 자급자족경제와 크게 상반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류샤오치는 난국을 풀어나가기 위해 인민공사를 해 체하는 등 대약진 이전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이고,이러한 류샤오치의 개혁정책이 성공을 거둠으로써 인민들뿐만 아 니라 고급 당원들까지도 류와 덩을 신뢰하기 시작했던 것이었지요.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마오는 자신의 권력을 회복하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1963년부터 아래로부터의 풀뿌리운 동인 공산주의 교육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그 때까지만 해도 류와 덩은 이 운동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어서 현실정치와 무관할 것으로 보았던 것이죠. 그러나 이 아이들이 몇 년 후엔 마오의 주된 지지세력, 즉 홍위병 역할을 중국역사를 후퇴시킨 마오( 毛 )의 문화대혁명 303

304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1963년에 이르러 마오는 계급투쟁의 이상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류를 공개 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1964년에는 공산주의교육이 "사청운동( 四 淸 運 動 :정치,경제,조직,이념)"이어야 하 고,그렇기 때문에 불순세력을 청산해야 한다며, 류샤오치 등을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오는 1966년 8월에 개최된 제8회 제11차 중앙위원회전체회의( 十 一 中 全 會 )에서 문화대혁명을 공식화 했습니다. 그 는 문혁 초기단계에서 국가주석 류사오치( 劉 少 奇.유소기)와 당 총서기 덩샤오핑( 鄧 小 平.등소평) 등을 권좌에서 축출하 였으며,1968년에는 더 많은 통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군병력을 동원,학교 공장 정부기관 등을 접수했고,어지러운 질 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분하에 우군역할을 했던 홍위병을 깊숙한 산골로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그 후 문혁이 진행되는 동안 마오 주변에서 있었던 권력의 부침에 대해서는 언급을 생략하고, 문혁이 종료되어야 했던 원인 등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오( 毛 ) 사망, 사인방의 체포, 문화대혁명의 종식 1976년 7월26일 새벽 13초 동안의 대지진으로 허베이성 당산시가 초토화 되었습니다.지진 발생 3년후 공식발표한 중국정부의 통계는 25만여명이 사망했다는 것이었으나, 당시 서방 언론에서는 50만명 이상으로 추측했었다니 엄청난 규모의 참변이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지진발생 40여일 후인 9월9일,마침내 천운을 다한 마오쩌둥이 83세를 일기로 사망함으로써 사실상 문화혁명이 막을 내렸습니다. 그해 10월 앞서 언급했던 4인방이 체포됨으로써 문혁이 사실상 종 료 되었고, 연금중이던 덩샤오핑이 정계에 복귀할 수 있는 수순을 밟게 되었던 것이죠. 그보다 앞서 있었던 역사적 전환점이 된 사건 한가지에 대해 언급해야 될 것 같습니다 월8일,오직 마오의 충직한 심복으로 방패막이 역할을 했던 저우언라이( 朱 恩 來 :주은래)가 방광암으로 사망하게 되자, 강청 등 4인방측에 서는 국무원총리인 덩샤오핑을 몰아내고, 그 들 중 한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 했었습니다.그러나 마오가 그들의 속셈을 알아차렸던지, 덩을 실각시키되, 그 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화궈펑( 華 國 鋒 :화국봉)을 총리직에 임명하였던 것이지요. 만약 그 당시 마오가 4인방 중 누군가를 총리로 임명했더라면, 마오( 毛 ) 사후에도 그들이 실권을 쥐게 되었을 것이 고,그랬으면 문혁이 종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중국인들은 그 후 오랜 기간 더 암울한 생활을 하게 되었 을 것이라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는 후문입니다. 어쨌거나 예젠잉( 葉 劍 英 :섭검영)과 같은 유력한 군지도자와 비록 연금 중이었지만 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덩샤오핑, 그리고 인민해방군의 지지아래 화궈펑은 사인방의 체포를 명령하였고, 그 해 10월10일, 인민해방군 특수부대가 사인방 제거함으로써 군권을 확실히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역사를 후퇴시킨 마오( 毛 )의 문화대혁명 304

305 그 후 덩샤오핑의 복권이 이루어지게 된 뒷 얘기로는, 당시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예젠잉은 덩이 정무원에 복직 되지 않으면 자신이 사임하겠다고 화궈펑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고, 이 청을 받아들인 화궈펑이 덩을 다시 정무원 으로 복직시켜 부총리에 임명하였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로써 덩은 화궈펑에 뒤이은 제2의 실력자가 되었으며, 8월 에 있은 제11차중앙위원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재기함으로써 혼란스러운 중국을 개혁개방의 길로 이끌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대혁명의 감추고싶은 진실 무엇보다도 10년간 계속된 문화대혁명 기간에 후세를 위한 교육시스템이 마비되었던 게 중국인들이 입었던 가장 큰 손실이었습니다. 당시 전국의 모든 대학에서는 입학시험을 완전히 취소하였으며, 사인방이 몰락하고도 한참 지난 1979년이 되어서야 다시 교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학생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하방( 下 方 )이라는 미명하 에 농촌의 노동교화소로 내려가야 했으며, 문혁기간 동안 도시의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이주하도록 강요되었고, 그 곳 에서 모든 정규교육을 포기한 채 공산당의 사상교육만을 받아야했으니, 더 이상의 학력 없이 성년을 맞아야 했던 불 행한 세대였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병폐는 지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문혁이 종료된 20년후까지도 문맹율이 40%에 달했다고 하니,중 국인들이 마오의 잘못된 권력욕에 의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던가를 능히 알 수 있다 하겠습니다. 더욱 안타까 중국역사를 후퇴시킨 마오( 毛 )의 문화대혁명 305

306 운 것은 동 기간 동안 중국의 전통 예술과 사상이 완전히 무시되는 풍조하에서 마오쩌둥 사상이 자리 잡아야 했다는 점이며, 홍위병에 가담한 청소년들이 자신의 부모나 스승을 반혁명세력이라고 고발하거나 구타하는 사례가 빈번했었 다는 점이었지요. 당시 문혁지도부는 중국인들로 하여금 문화적 전통을 사갈시하고, 부모와 스승의 가르침을 비판하 도록 부추겼으니, 전통 유교사상을 중시하는 중국들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을까를 짐작케 합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말로 형언키 어려운 손실을 자초하였던 바, 문혁기간 동안 중국의 많은 역사적 유산들이 "구 시대적 산물"로 간주되어 파괴되었으며,값진 전통유물인 공예품들도 탈취되거나 즉석에서 파괴되는 게 다반사였습니 다. 외국인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의 수천년 역사적 유물들이 10년간의 문혁기간동안 거의 파괴되었을 것이 라 했습니다. 중국 역사학자들도 당시의 파괴행위는 기원전 2세기에 있었던 진시황제의 분서갱유( 焚 書 坑 儒 )보다 더 무자비했다고 혹평했던 것으로 보아,약진운동과 문혁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중국의 선진화를 30년 이상 후퇴시켰다는 견해가 옳을 듯합니다. 중국역사를 후퇴시킨 마오( 毛 )의 문화대혁명 306

307 역사를 거꾸로 쓴 약진운동의 진실 :58 중국인의 80%이상인 농민들이 직접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고,해마다 소출이 늘어감에 따라 참으로 오랜만에 여유로운 삶을 느낄 무렵이었 으니까요. 그야말로 1840년의 아편전쟁 이후 외세에 시달리던 110여년 동안 어렵기만 하였던 서민생활이 차차 안정되어 가고 있을 때였는데, 난데 없이 인민들의 생활을 뿌리 채 흔들었던 변화가 바로 대약진운동이었습니다. 이는 근대적 공산주의사회를 만든다는 취지하에 1958년부 터 1960년까지 마오쩌둥의 주도로 시작된 농공업의 증산정책이었지만, 마오( 毛 )와 추종자들이 농촌현실을 무시한 집단농장화(인민공사)와 농 촌에서의 철강생산 등을 강압하에 진행시킨 결과 수천만명에 이르는 최악의 아사자( 餓 死 者 :굶어죽은 사람)를 내고 처참하게 끝난 망국운동이 었습니다. 중국인 3천만명 이상을 굶겨죽였다는 대약진 운동 <사진 :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48킬로미터 떨어진 현장을 방문,30분 동안 흙을 팠다.대약진운동.jpg> 지금도 베이징 톈안문( 天 安 門.천안문) 광장벽에는 세로6m,가로5m 크기의 마오쩌둥 모습을 담은 대형 초 상화가 걸려있습니다. 그 사진이 내려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라면 마오가 이끌었던 중국공산당 홍군이 국 공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군에게 승리했고, 서구를 비롯한 외세를 몰아냈던 공로,즉 하나의 중국을 만 든 공적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다수설입니다. 지금도 대다수 중국인들은 국공내전이 끝나갈 즈음인 역사를 거꾸로 쓴 약진운동의 진실 307

308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부터 1958년 대약진운동( 大 躍 進 運 動 : Great Leap Forward) 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약 8년간이 가장 행복했었다고 고백하곤 합니다. 중국인의 80%이상인 농민들이 직접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고,해마다 소출이 늘어감에 따라 참으로 오랜 만에 여유로운 삶을 느낄 무렵이었으니까요. 그야말로 1840년의 아편전쟁 이후 외세에 시달리던 110여년 동안 어렵기만 하였던 서민생활이 차차 안정되어 가고 있을 때였는데, 난데 없이 인민들의 생활을 뿌리 채 흔들었던 변화가 바로 대약진운동이었습니다. 이는 근대적 공산주의사회를 만든다는 취지하에 1958년부터 1960년까지 마오쩌둥의 주도로 시작된 농공 업의 증산정책이었지만, 마오( 毛 )와 추종자들이 농촌현실을 무시한 집단농장화(인민공사)와 농촌에서의 철 강생산 등을 강압하에 진행시킨 결과 수천만명에 이르는 최악의 아사자( 餓 死 者 :굶어죽은 사람)를 내고 처 참하게 끝난 망국운동이었습니다. 중국인 3천만명 이상을 굶겨죽였다는 대약진 운동 1958년 제2차 5개년계획을 세우고, 당시 세계2위의 경제대국인 영국을 15년 이내에 추월할 것이라고 호 언장담했었지요. 그는 약진운동 시작 직전인 1956년 백화제방( 百 花 齊 放 :많은 꽃을 한꺼번에 피게함), 백가 쟁명( 百 家 爭 鳴 :모두가 자기 주장을 내세우게 함)운동이라 하여 공산당을 마음껏 비판하도록 분위기를 조성 하였습니다.그런 연후인 이듬 해 1957년에는 비판한 지식인들을 골라 반우파 투쟁 으로 몰았고,결국은 그들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한 사전정지작업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제2차 5개년계획의 첫 해인 1958년의 농공업생산 총액이 전년대비 50% 증가했다는 것이며, 그 후로도 계속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했으나, 이러한 성장지수는 관료들이 조작해 서 억지로 만든된 수치인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죠. 실제로 1959년부터 3년간은 극심한 자연재해가 겹쳤던 기간이었던 데다,1960년부터는 구( 舊 )소련이 제공해 오던 경제원조마저 전면 중단함에 따라 대약진 정책을 더 이상 추진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원래 삼면홍기( 三 面 紅 旗 )는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를 뜻하는 바, 사회주의로부터 공산주 의로 진입하는 초기단계라는 미명하에 철강생산을 선진국수준으로 증산하고자 했습니다. 농민들의 가재도 구인 밥솥까지 몰수하여 재래식 방법으로 불필요한 철을 생산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지요.농업생 산량도 100% 이상 증가될 것이라며 모든 가정을 파괴하면서까지 인민들을 직업별,군대식으로 조직하라고 강제하였으나 농민들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 갔습니다. 역사를 거꾸로 쓴 약진운동의 진실 308

309 그러자 1960년부터 류사오치[ 劉 少 奇 ]와 저우언라이[ 周 恩 來 ] 등이 주축이 되어 대약진운동을 중단토록 권 고하였고,사유지와 농기구도 농민들에게 되돌려 주도록 하였으며,각종 인민공사조직도 폐지함에 따라 대 약진운동은 실패한 채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대약진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체 사망자수 5천만 명에 유박하는 많은 사람들을 평시에 굶어 죽도록 한 마오 1인의 아집이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반성하기는 커녕 다시권력을 잡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중국대륙을 혼동의 소용돌이로 몰아갔으며, 그로 인해 중국을 30년이상 후퇴시킨 원흉이 되었던 것이지요. 역사를 거꾸로 쓴 약진운동의 진실 309

310 국공내전( 國 共 內 戰 )과 마오( 毛 )의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57 국공내전( 國 共 內 戰 ), 마오( 毛 )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1921년 공산당이 태동한 이래 대장정 이전인 1924년에는 중국통일을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이 처음으로 합작한 바 있었고, 대장정 이후 시안사변을 계기로 1937년부터 항일전이라는 공동목표하에 두 번째 국공합작이 이루어짐으로써 양당이 공동보조를 취한 적도 있었습니다.그러나 장제스는 공산당을 파트너십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두 진영의 앙숙관계는 골이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늘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 라며 장제스가 공산당을 토벌하려 하자, 마오( 毛.모) 왈 하늘에 태양이 두 개면 어떠리,그중 하나를 백성들이 선택하게 하면 되는 것이지.! 그래서 1927년부터 1937년까지 양측이 벌인 전 투를 제1차 국공내전이라 하고, 2차대전 종료후인 1946년부터 1949년 10월1일 마오쩌둥( 毛 澤 東.모택동)이 톈안먼( 天 安 門.천안문)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기 이전까지,양측이 치열하게 치룬 전쟁을 제2차 국공내전이라 합 국공내전( 國 共 內 戰 )과 마오( 毛 )의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310

311 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그들의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해방전쟁 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 본이 항복하게 됨에 따라 평화를 갈구하는 중국국민의 여망은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점령지정리 등을 둘러싸고 양당간의 견해차도 있었지만, 오랜 전쟁에 지쳐 있었던 터라 내전을 피하기 위 한 협상을 개시했고, 1945년 8월부터 1개월 이상 충칭( 重 慶 )시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직접 만나 평화로운 방식의 건국을 기본방침으로 삼는데 합의했습니다. 공산당은 국민당의 일당독재를 청산하고 무당파 인사들도 대폭 영입하여 연합정부형태의 민주정치를 실현하자고 요구하였습니다.하지만 국민당측이 이에 동의하기를 주저하였습니다.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국민당이 주도하는 통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죠. 양측은 1946년 1월10일 충칭( 重 慶 )시에서 정치협상회의를 재 개하고 5개항 협의를 위한 국민정부설립위원회를 설립키로 했으나, 그로부터 5개월 후인 1946년 6월 국민당측에서 돌 연 협상을 파기하고 병력을 동원 내전을 일으킴으로써,중국 국민들이 간절히 기대하던 평화건국을 실현할 수 없게 되 었던 것입니다. 국공내전( 國 共 內 戰 )과 마오( 毛 )의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311

312 그해 6월 국민당군이 본격적으로 공산당지구를 공격함으로써 전면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던 바, 국민당군은 병력과 장비면에서 공산군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했고, 미국의 일방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객관적인 면에서는 국민 당 측의 압승이 예상되었습니다.이러한 예상을 뒷받침하 듯 1947년 3월13일에는 후쫑난( 胡 宗 南.호종남)장군이 지휘하 는 23만명의 국민당병력이 중국공산당의 본부가 있었던 옌안( 延 安 )을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하게 대도시 위주 점령지를 확대하려 했던 국민당군은 병력이 분산되는 전략적 오류를 범하게 되었지요. 국공내전( 國 共 內 戰 )과 마오( 毛 )의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312

313 당시 국민당군의 병력은 공산당의 3배에 달했고,전국 대도시와 주요도로를 장악하고 있었으며,전 국토의 76%에 해당하는 토지와 인구의 71%를 점유할 만큼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습니다.그럼에도 이후 3년간의 전쟁은 공산 당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두 당의 현저한 역량 차이를 중국공산당은 어떻게 극복하였으며,승리를 거 머 쥘 수 있었을까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화폐개혁실패로 인해 천문하적인 물가폭등이 중국인들의 마음을 국민당에서 떠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요, 둘째로는 군사적인 면에서 공산당군은 농민들의 지지하에 세불리를 느끼게 되면 일단 퇴각했다가 힘를 집중하여 재탈환 하는 작전을 구사했지요, 그러나 국민당군은 초지일관 전국 주요 도시 위주로 군사력을 분산시켰던 것이 두 번째 패인이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무능과 부패,오합지졸이었던 국민당에 비해 공산당 지도층은 대장정에서와 같이 엄격한 위계질서와 국민에 대한 봉사를 중시하였으니,전쟁의 승패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지요. 1946년 이후 중국의 가장 큰 과제는 민주주의 실행여부였습니다. 따라서 부패한 국민당의 일당독재에 반대한다는 외침이 커져 가는 것은 당연한 추세였고,일부 국 민당원까지도 제3의 길을 찾고자 했으며,국민의 대다수가 공산당으로 기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무렵 중국의 미래 에 대한 마오쩌둥의 확고한 신념이었던 그의 저서 신민주주의 이론 이 제7차 공산당 전국대표자대회 등을 통해 당원과 국민들에게 지침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오( 毛 )는 혁명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이 당면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지도이 념을 제시함으로써 국민과 당원들로부터 열성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길을 찾았으며,그 길 은 다름 아닌 민주이고,국민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길로서 1840년대부터 중국국민들이 간절히 염원하던 그 길 이라 주장하면서 2천년간 이루지 못했던 국민의 꿈을 이루자고 외쳤던 것이지요. 중국공산당은 1947년 7월9일 중국 토지정 책에 대한 방안을 마련하고,반봉건적 토지착취제도를 바꿔서 농민들이 토지를 직접 소유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습니 다. 그 결과,실제로 9천여만명의 농부들이 자기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지요. 이는 봉건독재를 근본으로 삼았던 중국 사회의 커다란 변화였기에 농민들이 느꼈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토지제도 개혁은 향후 중 국공내전( 國 共 內 戰 )과 마오( 毛 )의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313

314 국운명을 결정하는 힘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여기서 한 영국학자(한스반드벤 캠브릿지대 교수)의 촌평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세스는 쑨원이나 마오쩌둥과 비교해 보았을 때,중국국민이 원하는 미래의 청사진을 확실하게 제시하 지 못했기 때문에 민심을 얻는데 실패했었고,그로 인해 국민당정권이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1949년 2월에 이르러서는 국민당군의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그 여세에 탄력을 받은 공산당군은 파죽지세로 몰아붙 인 끝에 4월에 접어들어 장강( 揚 子 江 )을 건너 국민당정부가 소재한 수도 난징( 南 京 )을 점령하였습니다. 연이어 5월에 는 최대도시인 상하이를 함락시켰고, 10월에는 국민당 최후의 대도시인 청두( 成 都 )마저 함락함으로써,장제스가 이끄 는 국민당정부를 타이완(대만)으로 쫓겨가도록 했던게 국공내전의 전말이었습니다.패장 장제스가 남긴 변명도 잠시 들어봐야겠지요. 공산당의 힘은 전쟁 이전에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으나 그들은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우 리가 패한 것은 공산당군이 강해서가 아니라,우리가 부패하고 무능해서였고,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약점에 의해 무너 진 것이다. 일종의 자승자박( 自 繩 自 縛 ) 때문이었다는 패장 장제스의 자괴감은, 매사가 그렇듯, 가장 무서운 적( 敵 )은 항상 가까 운 주변에 있었다는 점을 세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내전이 마무리되어 갈 즈음인 1949년 9월21 일 베이징에서 중국정치협상대표회의가 열렸습니다.공산당과 전국의 민주당파,민주단체 및 무소속단체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가의 앞날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였지요. 마오쩌둥은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했다 합니다. 여러분,오늘 우리는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우리의 노력이 인류역사에 기록되고, 세계 인구의 1/4에 달하는 우리 중국인들이 지구상에 우뚝 설 것이라는 희망을 뜻합니다. 이를 바라보는 미국 예일대학 국공내전( 國 共 內 戰 )과 마오( 毛 )의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314

315 교 조나단 스펜스(Jonathan D. Spence)교수의 촌평도 들어둘만 합니다. 공산당의 승리는 특별하고 변화무쌍한 역 사라 할 수 있었습니다. 민중들의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지만 더 많은 것을 얻었고, 결실을 맺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 다. 1949년 10월1일,이 날은 1840년의 치욕적인 아편전쟁 이래 외세에 짓눌려 왔던 중국인들이 간곡히 원해 왔던 자주독립일이었고, 중국의 현실이 결합된 승리의 날이었습니다. 향후 중국이 나아 갈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었으며,그 길은 국가의 번영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 중국만이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하는 과업이었습니다. 감격에 겨워 이어졌던 마오( 毛 )의 말, 1840년 아편전쟁 때부터 시작하여 109년 간 풍상풍우를 거치며 중국은 많은 격변을 치루었고, 그처럼 힘든 과정을 통해 오늘과 같은 중국인민정부가 성립될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베이징의 톈안문( 天 安 門 )은 역사의 아픔 속에 치욕의 산 증인이 되었으며,1919년 5.4운동을 일으킨 중국국민들과 함께 했습니다.그리고 1949년 가을 중국은 새로운 공화국을 수립했습니다. 이 날을 위해 중국인 민들은 형언키 어려운 수많은 고통을 겪어 왔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49년 중국인민공화국을 선포하기 전날 초대주석으로 추대된 마오쩌둥은 그 공적을 기린 비석에 다음과 같은 비 문을 남겼습니다. 3년 동안 인민해방전쟁과 인민혁명중 희생한 영웅은 영원할 것이다. 30년 동안 인민해방전쟁과 인민혁명 과정에서 희생한 영웅 또한 영원할 것이다. 중국민족을 통일하고 거대한 공화국을 세우기까지,모든 영웅의 희생은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로써 사회주의 국가로 새롭게 탄생시킨 중국,마오는 그들을 어디로 이끌 것인가를 국 공내전을 통해 몸소 실천했다 하겠습니다. 국공내전( 國 共 內 戰 )과 마오( 毛 )의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315

316 불가사의한 대장정,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56 불가사의( 不 可 思 議 )하다는 대장정( 大 長 征 ) 손자( 孫 子 )가 이르기를 군주가 무력을 동원하면 많은 영토를 정복할 수는 있어도, 그 영토에 사는 백성들의 마음 을 얻지 못하면 진정한 군주라 할 수 없다 고 민심(general heart)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아닌게 아니라 어느 시 대를 막론하고 민심을 얻지 못한 제왕은 제대로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으며,통치기간 또한 매우 단명했었다는 진리는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겠죠. 대장정( 大 長 征 )은 홍군 남녀병사들의 의지와 용기의 결정체였던데 반해, 홍군에 비하면 최첨단무기와 대병력을 갖춘 장제스( 蔣 介 石 ) 국민당군이 소수집단에 불과했던 마오쩌둥( 毛 澤 東 )의 공산당군을 이길 수 없었던 이유도 민심을 얻지 못한 것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단원에서 다루게 될 대장정에 관한 얘기가 다소 길어지게 되는 것은,그 만큼 중국현대사에서 어느 사건보다도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고 불가사의한 대장정,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316

317 생각되기 때문입니다.이 이야기는 여러가지 문헌을 참고로 하였으되, 모 대학의 '중국학' 강의 중 대장정에 관한 동 영상 을 포함하였으며,동 내용은 중국 CC-TV에서도 방영된 바 있음을 밝혀 두려합니다. 1934년 10월16일에 시작된 중국공산당 홍군( 紅 軍 )의 이동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정( 長 征 )이었죠. 13세기 말( 馬 ) 위주 기병으로 했던 칭기스칸의 몽고군만이 홍군에 비해 이동속도가 빨랐을 뿐, 기타의 어떤 군병도 그들에게 필적할 수 없는 놀라운 행군속도를 기록하였다는 것이죠. 대장정에서는 하루 한번 꼴로 전투가 있었으며,15일 밤낮을 대접전 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총 368일 동안 1만2천Km 이상을 도보로 이동하였고,이중 235일만이 주간행군 일 뿐 나머지는 야간행군이었다 합니다. 해발 4,500m 높이의 만년설 봉우리들과 18개의 산맥을 넘었으며,24개의 강을 건넜고, 어떤 한족( 漢 族 )의 병사들도 범접하지 못했던 6개의 소수민족 거주지역을 포함,12개성( 省 )을 통과했습니다. 점령한 도시와 촌락이 62개였고, 지방 군벌이 지키는 포위망 또한 10개 이상을 뚫었다 했습니다. 이렇게 홍군은 세계전쟁사에서 어떤 무장집단도 시도하지 못한 험난한 역경을 과감히 이겨냈던 것입니다. 어느 무장집단도 이루지 못한 역사적 전사( 戰 史 ) 남겨 후일 국공내전에서 승리를 쟁취,거대한 신중국을 접수하는 데도 이 대장정에서 생존한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었습 니다. 공산군의 행군은 후퇴였지만,한편으론 중국의 운명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전진이었고, 2억이 넘는 주민이 살고 있는 성을 지날 때면 대중집회를 열고,연극 공연을 할만큼 문화적인 면도 중시하였습니다.부유층(유산계급)에게는 부 유세를 부과했던데 비해 많은 노예들을 해방시켰지요. 자유와 평등사상을 강조함으로써 국민당군 등 기득권층과의 차 별화를 부각시킨 결과 민심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기에,시종일관 전진과 후퇴,승리와 패배,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중에도 성공적인 서사시를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35년 10월20일,중국 산시성 옌안( 延 安 )에 홍군( 紅 軍 )병사 7천여명이 몰려 들었습니다.지쳐서 헐벗고 굶주렸지만 병사들의 함성이 지축을 뒤흔들었던 것은,살았다는 안도감과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였었죠. 이른바 대장정 이라는 고난의 길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대장정은 공산군 인 홍군의 명백한 패배였습니다. 장제스( 蔣 介 石 )의 백만여 국민당군이 펼친 포위섬멸작전에 밀린 패잔병들이었니까 요 중국 남부의 공산당 근거지였던 장시성 루이진( 瑞 金 ) 탈출시의 병력 8만6천명이 거의 다 죽고,1/10도 되 지 않는 7천명만이 생존했으니까요.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마침내는 승자가 되어 중국대륙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불가사의한 대장정,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317

318 대장정의 시작과 끝을 따라 자초지종을 알아보도록 하지요.1934년 10월 군사적으로 월등히 앞선 중앙정부의 장제 스 국민당군은 제5차 공산당홍군 소탕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국민당군에 비해 병력과 장비면에서 터무니 없이 열세였 던 홍군은 사력을 다해 저항했으나 장시성의 공산당본부가 포위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지요.생사의 갈림길에 선 홍군은 우선 포위망에서 탈출하는 것이 급선무,,, 긴급회의를 열어 징강산( 井 岡 山.정강산)의 공산당본부에서 퇴각하기 로 하고,장시성 남부 유두( 雩 都.우도)에서 집결한 후,8만6천여 남녀병사들이 2열종대로 무거운 행보를 내디뎌야 했습 니다. 거대한 대륙 중국,이 때부터 20세기 전쟁사에서 독보적인 군사작전이자, 전대미문의 악전고투 속에 쫓고 쫓기는 전 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대장정에 오른 공산당 홍군병사들은 압도적으로 우수한 군장비를 갖춘 장제스 국민당군의 무력 에 밀린 중국공산당 홍군은 매일 동이 트자마자 출발하여 심야에 이르기까지,때로는 하루에 60여Km를 퇴각하지 않으 면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일부에서는 대장정이 전략적 실패였다고 혹평하는 시각도 있으나,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극 적인 군사작전의 하나였으며,위대한 전술이었던 것만은 틀림 없는 듯합니다. 그런고로 대장정은 그렇게 단기간 동안 악조건이 반복되는 중에서의 먼 길을 행군한 인간의 경이로운 투지를 보여 주었던 결과였으며,불가능에 도전한 인간한계의 극복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이같은 행군과정이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 대로 서방세계에 상세히 알려짐으로써,그들의 족적은 단지 중국이란 나라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세계정세를 뒤바꿔 놓은 놀라운 사건이라고 평가받게 된 것입니다.동서고금의 역사에서 무수히 있어왔던 혁명에는 항상 결정적 전환점이 있어 왔듯이, 중국공산당 혁명이 성공하기까지 대장정이란 고난의 역사가 뒷받침하였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볼 수 있 습니다. 여기서 당시 장정에 동참했다 생존한 한 여성홍군이 들려주는 증언을 잠시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되는 불가사의한 대장정,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318

319 지 몰랐어요.그저 무조건 앞으로 나아갔죠.하지만 저에게는 집에 있는 것보다 홍군에 몸담고 있는게 더 좋았어요.군 에서는 잘 보살펴 주었으니까요.집에서는 살기가 매우 힘들었거든요. 당시 중국의 민중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 던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생생한 증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다행스러웠던 점은 국민당군이 홍군의 동태에 대한 정보가 어두웠다는 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국민당군은 홍군이 서쪽을 향해 떠난지 2주일 가량이 지난 후에야 그들이 떠난 사실을 알았다니 말입니다. 그 무렵 중국 서남부 지역 군벌들은 장제스에게 충성스럽지 못했을뿐만 아니라,이 전쟁에서 어느쪽이 이길 지를 저울질 해도 판단이 서지 않았고,더불어 홍군과 싸울 의향도 없었기 때문에 홍군의 대병력이 암묵적으로 통과하도록 했다는 것이지요. 부상당했거나 허약하여 선두행열에 뒤쳐졌던 병사들 외에는 항상 당원과 지도급인사들이 선두에서 행군을 독려하였으며,마오쩌둥 또한 심한 말라리아에 감염되었음에도 들것에 실린 채 동참하는 불굴의 의지를 보였 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홍군이 휴대한 무기인 박격포,기관총,수류탄,권총 등 대부분의 군장비가 국민당군으로부터 노획한 것이었음을 볼 때, 당시 국민당군의 정신력과 전투력이 얼마나 허술하였던가를 입증해 주는 좋은 사례라 하겠 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군에게는 교통수단이 여의치 못해 극소수 지휘관들이 말을 이용하는 경우 외에는 각종 장비 를 휴대한 채 걸어야 했기 때문에 어떤 때는 행군의 길이가 자그마치 80Km에 달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죠. 전투와 행 군을 병행하던 중에도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항상 목적지에 대해 심한 이견을 보였다는 증언도 있습니다.특히 마오쩌 둥은 국민당군이 대대적으로 포진한 장시지구를 직접 돌파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다가 모스크바 공산당지도자(오토브 라운) 등으로부터 힐책당했다는 것이지요 홍군의 제1방면군은 오토브라운의 지휘아래 후난성( 湖 南 省.호남성)을 공산당 거점으로 삼는다는 목표하에 서쪽으로 침투하는 대규모 병력 이동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 지역의 국민당군 20만명을 지휘하는 천지탕( 陳 濟 棠.진제당)장군이 공산당홍군을 저지해야 할 책임자였으나 그의 오판과 사욕이 장제스군에게 엄청난 데미 지를 가하고 말았습니다. 천지탕의 생각으로는 자기가 홍군과 싸우게 되면 세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는 것이데,그 리되면 장제스가 홍군과 더불어 자기를 제거할 것으로 겁을 먹었던 게지요.그래서 공산당과 밀약함으로써,홍군이 장 시성( 江 西 省.강서성)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니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1차관문을 통과했다고는 하지만 홍군을 뒤쫓는 국민당군은 150대 이상의 전투기를 동원,지상군과의 합동작 전으로 집요하게 공격했습니다.전투기가 전무했던 홍군은 국민당군이 휴식을 취하는 밤시간대에 이동하고, 낮이면 나 무 밑에 은둔해야 했으니 많은 병력을 잃어야 했지요. 그런 와중에 후난성의 샹강( 湘 江.상강)을 도강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그 때 장제스군은 강 주변에 40여만명의 병력을 대기시키고 홍군을 일망타진하고자 했습니 다.양측이 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교전을 치루었으나 장비면에서 크게 열세였던 홍군의 피해는 실로 막대한 것이었 습니다. 불가사의한 대장정,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319

320 대장정의 전환점이었던 준이회의( 遵 義 會 議 ) 그 전투에서 휴대했던 많은 장비를 강물에 버려야 했기 때문에 공산군에 대한 귀중한 정보들이 소실되어야 했으 며,극한상황에서 5만여명의 병력을 잃는 처절한 전투 끝에 도강에 는 성공하였지요.그 무렵 서방언론에서는 홍군의 동향파악이 되지않아,그 전투로 공산군은 전멸했거나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도하기까지 했다는 것이지요. 그처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장제스군을 교묘하게 따돌린 홍군은 1935년 1월7일 구이저우성( 貴 州 省.귀주성)의 제2 도시인 준이( 遵 義.준의)시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으며, 비밀리에 공산당정치국 중앙위원회를 소집한 끝에 공산당의 진로를 크게 바꾸는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불가사의한 대장정,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320

321 3일간 계속된 회의에서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집단이동이 비판을 받게 됨에 따라 분산이동과 게릴라전 으로 전환하여 국민당군을 교란함으로써 그들의 허점을 찌르는 게릴라식 공격전술을 구사하기로 했습니다.대장정에 서 준이회의 를 역사적 대전환점으로 중시하는 것은,이전까지 병력 지휘권을 갖지 못했던 당간부 마오쩌둥이 라 이벌 저우언라이( 周 恩 來 )의 지지하에 동맹관계를 맺음으로써 홍군의 지휘권을 행사하게 되었을뿐만 아니라, 중국공산 당 의장에 선출됨으로써,이 때부터 중대사안 결정시라든가 군사작전 수행에 관한 것들이 그의 책임하에 전개해야 하 는 막강한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지난날 샹강전투의 참패로 인해 홍군의 제1방면군은 병력 2/3를 잃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 가 침체된 시기에 마오( 毛 )가 지휘권을 잡았던 것이지요.그때부터 마오( 毛 )는 스촨성( 四 川 省 )에 주둔중인 제4방면군과 합류하기 위해 역사상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아주 험한 산과 강을 건너는 방법으로 국민당군을 피하고자 했습 니다. 여러 그룹으로 분산해서 출발한 그들에게 휴식이란 있을 수 없었고,어떤 날은 70Km 거리를 행군할 정도로 초 능력을 발휘했습니다.더욱 놀라운 것은 일부 특수부대는 하루 100Km 이상을 주파함으로써,2차대전 독.불전쟁 당시의 독일병정보다 2배나 빨리 달렸다고 합니다. 악전고투를 거듭하던 홍군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은 현지 농민들을 통해 국민당군의 동태를 수시로 파악할 수 있었 던 점입니다.그 즈음에는 국민당군도 홍군의 적정을 파악한 상태였기에 양측은 루산고개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했습니다.그곳의 좁은 협곡을 전력질주한 홍군이 간발의 차로 고개를 먼저 점령함으로써 승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대규모 교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이 전투의 경우 지휘관과 부하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수류 탄을 안고 적진에 돌격했던 홍군에 비해,국민당군 지휘관들은 부하들 뒤에서 몸을 사렸기 때문에 우수한 장비를 갖고 도 2개사단의 병력을 잃고 퇴각해야 했습니다. 마오( 毛 )가 처음 진두지휘한 전투에서 대대적인 전과를 거둠으로써 병사들이 그의 지도력을 믿는 계기가 되었고,자 신감과 희망을 갖게 되는 참으로 의미 있는 전투결과였습니다.이에 장제스는 홍군이 진사강( 金 沙 江 )을 건넜다는 소식 에 대노하였고,새로운 부대로 하여금 다음 요지인 러우강에서 홍군을 소탕하려 했습니다. 이 무렵 홍군의 부족한 병 력은 현지 농민들이 자진 입대함으로써 보충할 수 있었던 바,왜 농민들이 공산당을 지지했는가 하면,국민당군을 한족 의 지주계급과 같은 동일선상에서 바라보았던 것은,그들 조상 대대로 한족들로부터 수탈당할 때마다 그들을 붕괴시 켜야 하는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현지 농민들은 국민당군과의 전투에서 홍군이 승리하면 그들의 생활이 크게 나아지리라 기대했었다는 것이지 요.실제로 홍군이 주민과 마주할 때면 그들의 생명과 재산에 위해를 가하지 않았으며,식량을 조달할 경우에도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도록 함으로써 농민과 소수민족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행군 시작 180여일이 지난 1935년 4월, 홍군은 중국인들을 몹시 싫어하는 로로족이라는 소수민족 거주지역에서 그들과 혈맹을 맺는데 성공했고, 산세에 익숙한 그들의 안내를 받을 수 있었기에 어렵싸리 다두강 건널목인 안춘창이란 곳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학자들간 이론이 있기는 하나,이후에 있었던 다두강( 大 渡 江 )의 루딩교( 盧 定 橋 )전투를 대장정 중 가장 극적인 명전 투로 손꼽고 있습니다. 양쪽 강뚝에서 열세줄의 쇠사슬로 지탱해 주는 길이 1백m 이상인 루딩교,장제스군이 나무발 판을 제거한 후 기관총과 박격포로 중무장, 대적했음에도,22명의 홍군특공대는 자살행위나 진배 없는 쇠줄을 타고 응 전하며 도강하였고,장제군의 참호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습니다.이 때 홍군의 사망자는 단지 3명에 불과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결과였습니다. 후일 국민당군은 이 쇠사슬을 절단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하나,1701년부터 이 지역 농민들의 생활 터전이었던 다리인 루딩교의 쇠줄을 차마 걷어낼 수 없었던 것이 홍군에게 행운의 승리를 안 겨준 결정적 요인이었지요. 불가사의한 대장정,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321

322 산 너머 산이라더니 다두강을 건넜다고는 하나 국민당군의 추격이 더욱 거세졌기 때문에, 마오( 毛 )는 그들을 따돌 리기 위한 수단으로 스촨성에 위치한 해발 4,500m인 대설산의 만년설을 통과할 것을 지시하였고,기력이 쇠잔했던 병 사들은 명에 따라야만 했습니다.산악지대를 넘으며 희생된 병사의 수가 9천명에 달했다 했습니다.당시는 행군 시작 240일이 되던 무렵,그들이 이겨낸 극한상황이나 처절한 광경을 어찌 필설로 당시 정황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튼 그 때부터는 국민당군도 홍군 추격을 포기했던 것은,대부분의 홍군이 동사하리라 믿었다는 것이었지요. 하 산시엔 탈진하여 미끄러져 계곡에 떨어져 죽은 병사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들을 또다시 가로막았던 장애물이 다름 아닌 대초원 이었죠. 말이 좋아 초원이지 수백Km의 늪지대였으며,수십일 동안 죽은 동료들을 짓밟고 몸부림치며 살아남았던 어느 홍군병사의 회고담 한마디를 옮겨 보려합니다. 휴대한 식량이 바닥 나 풀뿌리로 연명하다 허기를 느끼면,가죽혁대도 씹어 먹어야 했습니다. 옷이랄 것도 없었지만 동료들은 죽기 전 의식이 있을 때,동지들을 위해 옷 을 벗어 옆에 놓고 죽었지요. 죽은 시체에서 옷을 벗기려면 옷을 벗길 기운이 없는데다, 뼈가 굳으면 옷이 제대로 벗겨지지 않았으니까요.감기 는 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보면 살아있는 동지들보다 죽은 동지들의 시신이 더 많았어요.대설산 통과시보다 대초원 횡 단시 더 많은 동지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1935년 9월 홍군은 목적지인 깐쑤성 남쪽지역에 도착,마지막 장애물과 맞 닥뜨리게 되는바 그 이름이 바로 라쯔커우( 獵 <렵> 子 口 )라는 고개였습니다.그 곳을 통과했던 어느 홍군의 증언입니다.< 증언1>:강 양편에 300m 높이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마주한 4m 넓이의 좁은 강폭이었어요.그 절벽 위에는 국민당군 3개연대와 2개대대가 기관총으로 우리에게 사격을 가해왔기 때문에 절벽을 오르던 많은 동지들이 강물에 떨어져 죽 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강을 건너는 유일한 방법은 이기는 길 뿐이었지요.이 때 마오는 직접적인 공격을 자제하도록 하고,산을 잘 타는 동지들만을 차출,특공대가 공격하도록 명했고, 만약 저 언덕을 정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늪지대로 돌아가 야 한다 는 점을 강조했습니다.칠흙같이 어두운 밤,수시간이 지난 후 장제스군 진지에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섬광이 발하는 것이 목격 되었습니다.우리 동지들 일부가 수류탄 공격을 했으나 국민당군이 끝까지 저항하자 동지 한명이 몸 에 폭탄을 두르고 적진에 뛰어들었던 것이죠. 잠시후 적군이 패주함에 따라 우리는 소름끼치는 늪지대로 돌아가지 않 아도 되었답니다. 1935년 10월20일 마오( 毛 )가 이끄는 공산당의 제1방면군은 장정 출발 368일만에 산시성에 도착,대장정 종료를 선언 하였습니다.그 때까지 공산주의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던 중국민중들에게 홍군의 용기와 인내,그리고 농민들을 향한 애정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마오는 공산당지도자가 아닌 중국민중들로부터 추앙받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홍군이 산시성을 거점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그 지역 주민들이 가난하게 살아오는 동안 자생력 을 갖춘 농민들이었던 이유도 있었습니다. 때마침 일본군이 그 지역으로 침략해 온다는 소문이 나돌던 때라 주민들은 홍군만이 일본군을 이길 수 있을 것이 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공산당 홍군의 이름은 사실상 항일군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동 지들이 대장정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습니다. 80여년전 중국공산당 홍군이 불가사의하게 이루었던 대장정은 오늘 날에도 중국인들에게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고 있으며, 중국인들의 굴기( 崛 起 )의지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중국이 발 사한 우주선에도 장정 이란 이름을 부여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중국정부가 대장정 을 얼마나 중요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오의 대장정 종료선언 대장정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뒤로 처음 있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의 선언이며 선전력이고, 파종기이다. 삼황오 불가사의한 대장정,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322

323 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이와 같은 대장정이 있었던가? 열두 달 동안, 하늘에서는 날마다 적기 수십대가 정찰, 폭격하고 땅에서는 적군 수십만이 포위,추격하며 길을 막고 대오를 끊는 통에, 우리 홍군은 날마다 이루 표현 할 수 없는 고난과 위험에 맞닥뜨렸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두 발로 열한 개 성을 거침없이 오가면서 2만5천리에 이 르는 멀고 험한 길을 돌파했다. 역사에 언제 우리의 대장정과 같은 일이 있었던가? 단 한번도 없었다. 대장정은 선언이었으며 홍군은 영웅들의 군대였고,제국주의자들과 그들의 앞잡이인 장제스 무리가 무능하다는 것 을 온 세상에 널리 알렸다. 대장정은 제국주의자들과 장제스가 벌인 포위,추격,차단,단절이 끝장났음을 보여준 것이 다. 대장정은 선전력이기도 했다. 대장정은 열한개성, 2억명에 달하는 인민들에게 홍군이 걷는 길만이 해방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음을 알렸다. 대장정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리도 빨리 홍군이 이룬 위대한 진리를 인민들에게 알릴 수 있었겠는가.? 대장정은 또 파종기였다. 열한개성에 수많은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머지않아 싹이 트고 잎이 자라서 꽃 이 피고 열매가 맺어서,수확할 날이 올 것이다. 한마디로 대장정은 우리의 승리였으며, 적의 패배로 끝났다. 이상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대장정은 중국공산당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홍군이 인민의 군대라 는 것을 인식시켰으며, 아울러 모택동의 지도노선을 확정해준 결과이기도 했던 것이죠. 이것은 소수의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을 대륙에서 쫓아내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며, 개혁개방이 가속되면 될수록 중국 지도부가 대장정의 정신을 치국치국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것은, 단순한 과거사를 넘어 미래를 열어나갈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기 때문일 것입 니다.<끝> 불가사의한 대장정,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323

324 5.4운동과 중국공산당 탄생에 관하여 :54 5.4운동과 중국공산당 탄생에 관하여 1911년 신해년( 辛 亥 年 )에 일어난 중국의 민주주의혁명을 말하며 흔히 제1혁명이라고도 합니다.이 혁명으로 인해 청 나라가 멸망함으로써 중국은 2천년간 계속된 황제의 전제정치( 專 制 政 治 )가 끝나고,중화민국( 中 華 民 國 )이 탄생하여 새 로운 정치시스템인 공화정치를 향한 출발이 이루어졌던 것이죠. 대만에서는 후베이성( 湖 北 省 ) 우창[ 武 昌 ]에서 최초로 신해혁명이 일어난 10월10일을 쌍십절( 雙 十 節 )이라 하여,지금도 중요한 경축일로 삼고 있습니다.1894년 6월 쑨원( 孫 文 )은 당시 실력자였던 북양대신(북쪽 해군) 이홍장( 李 鴻 章 )에게 서구적 모델에 따른 개혁안을 제시하는 글을 올렸다 가 무시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1919년 중국 베이징에서 5.4운동을 시작했던 대학생들-사진, 위키백과> 하와이로 건너가 조직한 흥중회( 興 中 會 )가 최초의 혁명단체 근간으로 알려지고 있으며,곧 이어 홍콩 흥중회를 조직 하였고, 이를 통해 광저우[ 廣 州 ]에서 반청( 反 淸 )봉기를 계획했다가 실패하였습니다. 망명길에 나선 쑨원이 런던의 중 국공사관에 억류됨으로써 그의 이름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지요. 억류에서 풀려난 그는 대영박물관에서 서구의 새로운 사회상을 접하게 됨으로써 후일 그를 상징하는 삼민주의( 三 民 主 義 : 민족.민권,민생)사상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했던 망명객 캉유웨이[ 康 有 爲 ] 등과 개혁파연합을 모 색하였습니다. 5.4운동과 중국공산당 탄생에 관하여 324

325 삼민주의( 三 民 主 義 )를 외쳤던 쑨원( 孫 文 )의 활약 의화단사건 이후에도 청나라정부의 유럽열강에 대한 굴종적 태도는 더 한층 심해져 갔고,민중들의 생활 또한 더욱 어려워지고 있었습니다.즉, 중국이 서구열강에 의한 식민지화 분위기가 심화되던 1905년,전국 주요지역 반정부세력은 중국최초 정당인 중국 혁명동맹회( 革 命 同 盟 會 )를 결성하였고,각지의 혁명단체를 통합한 1905년 8월 도쿄[ 東 京 ]에서 전 국적인 중국동맹회를 조직,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 中 華 )를 회복,민국을 건립하고,토지제도를 정비한다"는 강령하 에,요즈음 말로 하면 재야운동권 반정부인사 쑨원을 총리로 추대하였지요.이로 인해 그의 삼민주의가 혁명파의 지도 이념으로 빛을 보게 되지요. <1925년 3월 초대총통 쑨원( 孫 文 )은 59세에 암으로 사망함> 만주족이 핵심인 청나라정권 타도와 한족( 漢 族 )국가의 회복을 지향하는 민족주의,민주국가의 수립을 지향하는 민권 주의,사회경제조직을 개혁함으로써 미래사회의 변화를 이끌어가기 위한 민생주의를 중요시하였던 것이죠.혁명파에 맞 서 청황실에서도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도모하였으나 사회적 모순이 들어나게 되었고,조세정책거부,그리스도교 배격 5.4운동과 중국공산당 탄생에 관하여 325

326 등 반정부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지방의 유력자,향신( 鄕 紳 )과 상공업계를 기반으로 한 입헌파( 立 憲 派 )도 등 장하게 되었습니다.1911년 5월 청정부는 철도 국유령을 발표하고, 이를 담보로 열강의 금융자금을 빌려 재정난을 타 개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혁명파는 10월10일 후베이성( 湖 北 省 ) 우창( 武 昌 )에서 중화민국군정부를 수립,신해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임 으로써 순식간에 전국으로 파급되었고,거의 모든 성으로부터 열성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1912년 1월1일 혁명파 는 쑨원[ 孫 文 ]을 임시 대총통으로 한 난징[ 南 京 ]정부를 수립하였죠.놀란 청황실은 임오군란 후 조선주재시 내정간섭으 로 조선을 괴롭혔던 위안스카이[ 袁 世 凱 ]를 기용하여 혁명군을 토벌하려 했으나,서방측의 중재로 혁명군과의 남북화의 ( 南 北 和 議 )가 열리게 되었고,위안스카이는 공화제를 시행하는 조건으로 쑨원으로부터 대총통의 지위를 승계받기로 약 조했습니다. 드디어 1912년 2월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溥 儀 : 宣 統 帝 ]가 물러남으로써 268년에 걸친 만주족에 의한 청 국은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죠.이 때 북양군벌 위안스카이는 서구열강의 지지와 일본과의 야합을 배경으로 혁명파 와의 약조를 위배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는가 하면,되래 쑨원이 이끄는 혁명파를 무력으로 탄압하다 1916년 6월 지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이후부터 중국특유의 분권화된 군벌정치가 시작되었고,이에 군벌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던 쑨 원은 1919년 10월, 5.4운동을 계기로 국민당( 國 民 黨 )을 창당하였으며,1925년 3월 쑨원이 사망한 후에는 장제스( 蔣 介 石 ) 가 당권을 장악하게 되지요. 위안스카이[ 袁 世 凱 ]의 허황된 꿈, 중국인을 울리고 그렇다면 1919년의 5.4운동은 왜 일어났으며,1921년 공산당은 어떻게 창당 되었던가.? 혼미스러웠던 중국사회 내면 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1차대전 종료 직후의 파리강화회의는 중국의 영토주권을 지키려는 정당한 요구를 받아들 이지 않은 채,독일이 산동성에서 이전에 누리던 특권을 일본이 승계하도록 함으로써, 중국이 패전국처럼 분할의 대상 이 되었던 것이죠.그럼에도 불구하고,파리의 화평조약 을 북양군벌정부가 승인한다는 소식을 접한 학생과 시민들 이 격분하여 일어났던 사건이 5.4운동 이었습니다. 5월4일 베이징의 13개대학과 전문학교 학생들이 톈안먼( 天 安 門 )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갖고,파리에서의 중국문제에 대한 결정을 규탄하고,조약에 대한 서명을 거부할 것과 친일파 관료들의 처벌을 요구하였습니다. <중국공산당을 초대 당총서기 천두슈( 陳 獨 秀 :진독수)> 시위대가 친일파들을 구타하고 가택에 불을 지르는 등 격화되자 북양군벌정부는 많은 군인과 경찰을 출동시켜 학 5.4운동과 중국공산당 탄생에 관하여 326

327 생들을 체포하였고,이에 격분한 학생들이 거리로 나가 전국규모의 동맹휴교를 결의하였던 것이죠.6월3일 베이징에서 노천강연중이던 학생들을 북양군벌정부가 체포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베이징 노동자들의 동참내용이 보도됨에 따라, 상하이 노동자와,상인들도 파업에 동조,철시하는 등 5월10일 하루 동안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가 7만여명에 달할 정도 로 대규모였다는 것이지요. 이 때부터 운동의 주도세력이 학생에서 노동자로 바뀌어 갔고, 전국의 20여개 성( 省 )과 1백여개 도시로 확산되어, 민족 부르주아가 참가하는 반제국주의운동으로 확산 되어갔던 것이죠. 이에 견디다 못한 북양군벌정부는 체포한 학생 들을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친일세력을 퇴조시켰습니다. 5월28일에 이르러 강화회의에 참가한 중국대표단이 전 국 인민의 요구대로 조약 에 대한 서명을 거부함으로써 결국 5 4애국운동은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5 4운동이 전개되는 동안 중국공산당이 정식으로 탄생하지는 않았으나,후일 중국공산당 창당시 초기 중앙위원회의장 을 지낸 천두슈( 陳 獨 秀 )등,초보적 공산주의사상을 추종하던 일련의 지식인들이 각지에서 적극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 고,사실상 그들이 선봉에서 반제투쟁을 조직.지휘하였던 셈이지요. 실제로 후일 공산당을 이끌게 되는 마오쩌둥( 毛 澤 東 ),저우언라이( 朱 恩 來 ) 등이 장사 톈진 우한지역 등에서 적극 활약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이후 학생과 노동자계급이 독립된 정치역량을 발휘하며 정치무대에 등장하게 됨으로써, 5 4운동은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에 반대하는 혁명운동이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이는 중국인민 스스로가 민권의 장을 여는 이정표가 되었으며,공산당 태동에 필요한 사상을 무장시키는 토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5.4운동과 중국공산당 탄생에 관하여 327

328 <중국공산당제1차 전국대표대회( 中 共 一 大 會 址 )가 열렸던 중국 상하이의 신티엔디( 新 天 地 ) 루완구( 湾 区 ),사진:위키백과> 공산당이 태동한 배경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다 하겠으나,1917년 10월 레닌을 지도자로 하는 볼셰비키혁명을 성 공시킨 러시아정부가 국제공산주의 운동단체인 코민테른 을 통해 동양에서의 공산주의를 확산려는 데서 그 원인 을 찾아야 합니다.1919년 5.4운동을 계기로 중국공산당의 활동분위기를 조성하는 한편, 창당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정부는 그 방안의 일환으로 중국인들 뿐 아니라 중국주재 서구열강들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파격적 인 제안을 했던 것이죠. 즉, 그 때까지 다른 서방국가들은 서로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중국에서의 기득권을 확대하는 데 중국땅을 되도록 많이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때였으니까요. 돌연 러시아만이 그들이 중국에서 누리던 모든 이권을 포기 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중국인민과 지식인들이 공 산주의에 호감을 갖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하였던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중국인민의 공산혁명투쟁을 적극 지 원할 것을 표명했던 러시아는.1920년 4월 당시 코민테른 동방책임자 보이틴스키(Voitinsky)를 파견,쳔두슈( 陳 獨 秀 ) 등 으로 하여금 공산당 창당을 준비할 무렵, 후난성 제일사범학교 교사직에 종사하던 마오쩌둥이 합류하였습니다 년 7월1일 치외법권지역인 상하이 프랑스영내 한 여학교에서 57명의 당원을 대표한 13명이 참가한 가운데 공산당 제 1기 전국대표대회가 열렸고,쳔두슈( 陳 獨 秀 )를 당 총서기로 선출함을써 공식적인 창당절차를 마쳤던 것이지요. 그들은 노동운동에 중점을 두고 노동조합 설립을 적극 권장함으로써 당원배가운동을 전개한 결과,1925년엔 1천여 명에 불과하던 당원이 2년후인 1927년에는 5만8천명에 이를 정도로 농민과 도시노동자,지식인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 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에 앞서 쑨원 생존시인 1924년 중국 국민당은 제1차 대표자대회를 열고 러시아와의 연합,공산 당과의 공동보조,농공업 발전 지지 등 3대 정책을 논의한 끝에 공산당에서 요구해 온 양당의 협력방안을 받아들이기 로 결정하여 1차국공합작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던 1년 후 중국혁명의 선구자인 쑨원이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지 못한 채 갑자기 숨을 거두었고, 다음 해인 1926년 국민당과 공산당이 이끄는 국민혁명군이 광저우를 출발하여.서구 열강을 물리치고 군벌정권을 타도하자는 구 호하에 북벌길에 나섰던 것이지요.이 행렬을 역사상 최대규모인 농민.노동자가 동참한 이 군중운동을 대혁명이라 부 르기도 합니다. 사태가 그리 된 사연인즉, 국민당은 우파와 좌파로 분열되는 양상이었던데 반해 공산당은 암암리에 독자적으로 세 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926년 3월 중산함사건(황푸< 黃 浦 >군관학교 교장이던 장제스가 승용함( 乘 用 艦 )인 중산호 를 황푸로 회항하도록 명하고서도,이를 반 장제스에 대한 쿠데타라며 3월20일 광저우< 廣 州 >에 계엄 령을 선포하고,많은 공산당원을 체포한 사건)으로 인해 국민혁명군내의 장제스와 공산당, 국민당 내 좌.우파의 대립 이 격화되어 갔지만, 이런 와중에서도 국민혁명군은 민중의 지지하에 후난성( 湖 南 省 ) 등 6개성을 혁명군 영역으로 확 보할 수 있었습니다. 제1차 국.공내전을 자초한 장제스( 蔣 介 石 ) 1927년 3월 상하이 노동자들이 장제스의 혁명군을 열렬히 환영했지만, 그 지역 상공인과 외세의존세력 등 기득권층 은 공산주의 세력이 확산되어 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장제스를 부추겨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를 단절할 것을 강 력하게 요구하였던 것이지요.장제스는 그들의 요구대로 은밀하게 지령을 내렸고,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 5.4운동과 중국공산당 탄생에 관하여 328

329 하였던 바, 이를 4.12사건 이라 부릅니다. 이로써 중국공산당은 당원의 80%인 2만5천여명과 수많은 군중( 07년 중국CC-TV에서 방영시엔 30만명)이 학살되는 참극을 맛보아야 했고, 이 때부터 공산당은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습니 다. 이 사건으로 제1차 국공합작이 와해되었고,양측이 대결하는 내전상태에 돌입하게 되었지요.이처럼 첫 국공합작이 었던 대혁명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젊은 공산당원들은 참극에 울분을 터뜨려야 했으며,이를 계기로 정권을 장악하 기 위한 무력혁명을 추구 했던 것입니다. 정권은 포탄으로 얻는다. 그 즈음 마오쩌둥이 남긴 말입니다. 마오( 毛 ) 는 그 후 한 외국인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중국인들은 원래 총을 쏠 줄 몰랐습니다.평화를 사랑했 으며,평범하게 농사를 짓거나 장사해서 교육을 시켰지요. 교직에 있던 제가 총을 들고 전쟁을 하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무장투쟁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했습니다. 아무튼 1927년 8월 좌절을 딛고 회생한 중국공산당은 난창( 南 昌 )에서 중앙위원회를 열고 토지혁명과 무장혁명방침 을 정했고, 중국공산당은 장시성[ 江 西 省 ] 서남부 변경에 위치한 고원형태의 징강산( 井 岡 山 )을 최초의 농촌혁명 근거지 로 삼아 1931년에는 중화 소비에트공화국의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창당 후 처음으로 장시성( 江 西 省 ) 일대를 중심으로 180개현( 懸 )과 900여만명을 다스리는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민당에 비해 모든 면에서 열 세였기에,1934년 위기에 몰린 공산당 홍군은 대장정( 大 長 征 )이라는 멀고도 험한 피난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시안사변시 상사인 장제스를 구금했던 장쉐랑( 張 學 良 )>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대장정 이후 있었던 시안사변( 西 安 事 變 )을 짚고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는 1936년 12월12일 국민당 동북군사령관 장쉐량( 張 學 良 :1926년 그의 아버지가 일본 관동군에 의해 피살)이 상사인 장제스총통 이 반 공산주의 공세를 위해 방문했을 때,그를 산시성의 시안에 납치.구금하고, 공산당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싸울 것 을 요구한 사건입니다.이에 장제스가 굴복함으로써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제2차 국공합작을 실현함으로써 중국현대 사의 물줄기를 한굽이 바꾼 큰 사건이었습니다. 5.4운동과 중국공산당 탄생에 관하여 329

330 국공 내전 :37 국공 내전 제1차 : 1927년 년 제2차 : 1946년 년 중국 공산당이 공식적으로 승리했으나 날짜 중화민국 정부는 아직 타이완에 존재 1979년 1월 1일 미 중 국교 정상화 이후 사실상의 정전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정전협정이 정식으로 체결된 것은 아님) [1] 장소 중국 대륙과 부속 도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인민해방군의 승리. 중국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결과 중화민국 난징 정부 붕괴.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패퇴. 교전국 중화민국측 :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중국 국민당 1949년 이후 중화민국 (타이완) 공산당측 : 중국 공산당 중국 인민해방군 1949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 국공 내전 330

331 장제스 천청 리쭝런 바이충시 옌시산 허잉친 마오쩌둥 주더 저우언라이 펑더화이 리리싼 린뱌오 허룽 엽전 서해동 병력 430만 (1946년 7월) 365만 (1948년) 149만 (1949년) 120만 (1946년 6월) 280만 (1948년) 400만 (1949년) 피해 규모 약 150만 명 사상 및 실종 약 25만 명 사상 및 실종 국공 내전(중국어 정체: 國 共 内 戰, 간체: 国 共 内, 병음: gu g ng ne zh n, 영어: Chinese Civil War)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해방전쟁으로도 불리는데, 1927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사이에 일어난 내전을 말한다. 1927년에서 1936년까지를 제1차 국공 내전, 1946년부터 1949년까지를 제2차 국공 내전으로 부르며, 결국 중국 공산당의 홍군( 紅 軍 )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의 결과로 본토에는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 민당의 중화민국은 타이완( 臺 灣, 대만)으로 패퇴하였다. 이러한 국민당의 패배는 국민당의 심각한 부정부패와 대부분이 농민 출신으 로 민폐를 끼치는 것을 삼갔던 홍군의 노력 등에 기인한다. 레닌주의를 계승하여 농민을 혁명의 주체로 본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혁 명 이론도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이유 중 하나이다. 1936년 12월 시안 사건을 계기로 1937년부터 1945년까지는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과의 중일 전쟁( ) 수행을 위해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휴전과 공동 항일 전선이 이루어졌는데, 이 휴전 기간의 합작은 제2차 국공 합작이라고 부른다. 배경 1911년 청조가 무너진 이후 중국은 위안스카이로 대표되는 군벌의 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군웅 할거하는 군벌의 지배로부터 중국 북 부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쑨원은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서방 국가들은 별다른 관심은 돌리지 않았고 이 에 쑨원은 이제 공산주의 혁명이 완수된 신생 공산 국가인 소련으로 눈을 돌려 1921년 소련에 도움을 요청한다. 1923년 소련의 대표 단이 상하이를 방문하고 서로 교류하면서 이제 막 탄생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은 군벌 세력으로 분열된 중국을 재통일하고 외 세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제1차 국공 합작을 이루게 된다. 쑨원이 군벌과 대항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절실히 요구되었는데 쑨원은 장제스를 비롯한 몇몇 군인을 소련으로 파견하여 군사 기술 을 배워 오도록 하는 한편 광저우 교외에 황푸군관학교를 세우고 자체적으로 현대적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시기에는 공산주의자도 국민당에 입당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국민당 내 공산당의 영향력이 매우 크게 작용하였다. 이 시기 저우언라이도 황푸 군관학교의 정치부 교관이었고 마오쩌둥도 국민당의 요직을 맡고 있었다. 요컨대 공산당은 국민당 내에서 정당 안의 또 다른 정 당 으로 활동하고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국공 내전 331

332 [편집] 북벌( 北 伐, 1926~1927)과 국민-공산당 분열 1925년 쑨원이 죽자 장제스는 국민당의 군대인 국민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군벌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중국 북부를 국민당의 영향 아래 두기 위해 북벌을 준비한다. 이 무렵 국민당은 우파와 좌파로 분열되었고 공산당은 계속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혁명군 내의 공산당원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국민당 내 우파(장제스 계열)와 좌파(공산당 계열)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 와중에도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민중의 지지로 후난 성, 후베이 성, 푸젠 성, 저장 성, 장시 성, 안후이 성의 6성을 국민당의 세력 안에 편입시켰으며, 우페이푸( 吳 佩 孚 ), 쑨추안팡( 孫 傳 芳 ) 등의 군벌을 격파하고 만주 군벌 장쭤린과 대치하였다. 1927년 3월 상하이의 노동자가 무장봉기하여 장제스 군대를 맞아들였지만, 공산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싫어하는 상공인과 부유층 및 외세 의존 세력은 장제스에게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끊을 것을 강요하였다. 그해 4월 12일 장제스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 인 숙청 처형을 벌여(4 12 사건) 중국 공산당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지하로 숨어들었다. 이로써 제1차 국공 합작은 결렬되 었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분열되어 내전 상태에 들어갔다. [편집] 반공산당 토벌전 장제스는 농촌 지역에서 끊임없이 세력을 키우고 자치 정부(소비에트)를 구성하는 공산군을 토벌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공 격을 개시하였는데 이를 토공전 ( 討 共 戰 )이라 한다. 공산당의 군사 조직인 홍군은 종종 홍비( 紅 匪 ) 또는 공비( 共 匪 )로 불렸다. 이러한 대규모 토벌 작전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홍군을 완전히 분쇄하지 못했는데 이는 인력과 물자가 부족한 홍군이 철저한 게릴라식 유격 전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대규모 토벌전에서 국민혁명군은 종전의 토벌 방식을 바꾸어 대규모 진지, 토치카를 짓고 지구전적인 진지전을 펼쳤는데, 홍군은 이 전술에 말려들어 주요 근거지인 장시 성 해방구를 잃게 될 위험에 처 하였다. 이때 홍군은 필사적인 후퇴 전술을 택해 중국 대륙을 돌아서 산시 성에 이르는 이른바 장정을 감행하고 국민혁명군의 추격을 뿌리치 고 새로운 근거지를 찾게 된다. 홍군의 주력은 무사히 옌안에 도착하고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군벌 출신의 장쉐량과 대치했 는데, 장쉐량은 공산당에 동조적이고 공산당이 주장하는 항일 정신에 경도되었다. 마침내 1936년 12월 장쉐량은 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를 설득,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 통일 전선이 성립하게 된다. [편집] 중일 전쟁 이 부분의 본문은 중일전쟁입니다. 1937년 이후 일본 제국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공산당과 국민당은 제2차 국공 합작을 결성, 공동으로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홍 군은 제8로군과 신사군으로 개편되어 국민혁명군에 소속되지만 사실상 장제스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항일전을 벌였다. 이 항일 전쟁 기간 동안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일본군에 패하여 세력이 점점 약해져 갔고 홍군(팔로군, 신사군)은 세력이 점차 커졌 다. [편집] 제2차 국공 내전 일본이 패망한 직후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점령지 정리 등을 둘러싸고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 었다. 오랜 전쟁에 지쳐 있던 양측은 내전을 피하기 위해 협상을 개시했다. 1945년 8월부터 약 한 달 반 정도 충칭에서 장제스와 마 오쩌둥이 직접 만나 회담을 가졌고 10월에 양측의 협정이 맺어져서 내전을 피하고 정치의 민주화에 대한 합의를 도출했다. 그러나 양측의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고 미국의 마샬 장군이 중재하여 내전을 피하기 위해 양측을 조율하고 공동 정부를 구성하기 위 한 협상이 1946년 1월부터 시작하였고 어느 정도 합의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를 인준하는 과정에서 국민당은 다시 합의안을 번복하 고 공산당은 이에 항의하여 결국 합의안은 실패로 돌아갔다. 1946년 6월 국부군( 國 府 軍, 중국 국민당 정부군)은 본격적으로 공산당 지구를 침공하여 전면적인 내전을 개시하였다. 초기에 국부군은 병력, 장비, 보급 등 모든 면에서 인민해방군(홍군)보다 우세했고, 특 국공 내전 332

333 히 미국의 지원을 받아 무장하고 있어서 내전은 곧 종식될 듯이 보였다. 특히 1947년 3월에는 후쫑난이 지휘한 20만의 병력이 중국 공산당의 본부가 있던 옌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린 국부군은 병력을 지나치게 분산시키는 전략적 오류 를 범하게 되었다. 게다가 국민당 정부의 총체적 부패, 인플레로 인한 경제 붕괴, 그리고 이미 떠난 민심이 어우러져 1948년부터는 공산당 측에 유리하 게 내전이 전개되었다. 1948년 가을 린뱌오가 지휘한 동북 인민해방군이 만주에서 국부군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요심전투)으로 전세 가 역전되고 힘의 균형이 깨졌다. 인민해방군은 1949년 1월 31일 베이징에 입성하였고, 파죽지세로 창 강(양쯔강)을 건너 4월 23일에는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함 락시키고, 5월 27일 중국대륙 최대 도시 상하이까지 손에 넣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하였다. 인민해방군은 1949년 10월 14일에는 광저우를 접수하고, 11월 30일에는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충칭( 重 慶 )마저 함락시켰다. 12 월 10일 장제스는 국민당 정부의 대륙 최후 거점인 청두( 成 都 )에서 타이완( 臺 灣, 대만)으로 탈출했고, 12월 27일 인민해방군이 청두 에 입성함으로써 국민당은 대륙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1949년 10월 인민해방군은 중국대륙과 타이완 섬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인 진먼 섬( 金 門 島 )을 공격하여 고령두( 古 寧 頭 ) 전투 ( )를 벌였으나 국부군에 대패하여 타이완 섬과 이 섬에 대한 국민당 정부의 지배가 굳어졌다. 이 후에도 1958년 8 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중공군은 무려 47만발에 이르는 포탄을 이 섬에 쏟아부었으나 중화민국군에 패하였고(진먼 포격전), 중공 군의 진먼 섬에 대한 포격은 1978년까지 20년간 계속되었다. 1950년 하이난 섬( 海 南 島 ) 전투( ) 및 홍콩 근해의 완샨군도( 萬 山 群 島 ) 전투( )에서 국부군이 인민해방 군에 잇따라 패퇴하고, 상하이 근해의 저우산( 舟 山 )군도( )와 다천( 大 陳 ) 섬( )에서 국부군이 철수함으로써 양안( 兩 岸 ) 사이에 현재와 같은 경계가 만들어졌다. [편집] 조선인의 활약 1945년 이후 국공내전 시기에 동북삼성에서 중공군(중국 인민해방군) 측으로 참전한 조선인의 수는 6만 3천여명으로 연변에서만 3만 5천여명이 참전하였다. 이는 연변 총참군의 85%에 달하는 숫자로 국공 내전시 조선족은 항일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동북삼성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혁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만포진, 청진, 정주 등에는 중공군의 후방기지를 세 워 훈련기지와 병원 등을 제공했다. 이 곳에 주둔했던 중공군의 숫자는 1947년 당시 5만 ~ 7만 5천에 달하였다. 이러한 도움이 없었 다면 중공군은 국부군에 포위되어 큰 위기에 처했을 것이라고 추정될 정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중국공산혁명에 상당한 기여 를 했다. [2] 이후 한국 전쟁 직전, 중공군에 속했던 조선인들은 대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대인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었다. 국공 내전 333

334 중국은 술과 음식의 나라 :50 중국은 술의 나라다. 어느 지방을 가든 지역 술이 있고 술과 함께 하는 독특한 음식문화가 있다. 2008년 말 중국 술 시장 규모는 50조 원을 넘어섰다. 음주 인구는 8억4000여만 명에 달한다. 중국 전역에 산재한 주류 공장만도 1만8000여개, 이 중 중대형 기업은 1160개나 된다. 현재 중국에서 판매량이 가장 많은 술은 맥주다. 중국에는 지역마다 각기 다른 브랜드의 맥주가 수십 가지나 된다. 맥주의 소비가 많은 이 유는 저렴한 가격 때문이다. 일반 가게에서 팔리는 맥주 값은 750mL 1병당 3~4위안(한화 약 480~640원) 안팎인데, 풍부한 보리 생산과 낮 은 주류 소비세 덕분이다. 우리에게 '빼갈'로 잘 알려진 백주( 白 酒 바이주)의 소비량이 적은 이유는 중국인들이 저도주를 선호하는데다 가격이 싸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국 요리집에서 값싼 이과두주( 二 鍋 頭 酒 )를 들이켰던 추억을 떠올린다면 중국 현실은 의외다. 상점에서 팔리는 가장 값싼 백주는 4~5위안(약 640~800원)으로 맥주보다 비싸다. 맥주는 1990년대 중반부터 생산 및 소비량에 있어 주류시장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때 서구 제국주의의 술로 배척받았던 맥주는 오늘날 중국 서민과 젊은이에게 사랑받고 있다. 중국은 세계 최대의 보리 생산국이다. 이는 맥주산업을 발전시킨 밑거름이 됐다. 또한 각지의 지방 정부는 재정확보를 위해 낮은 주류세를 책정하고 맥주회사를 경쟁적으로 설립해 운영했다. 실제 중국 맥주회사 가운데 대륙 전체시장을 상대로 판매하는 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다. 각 지방마다 독자적인 맥주 브랜드가 있어 로컬 시 장 소비량의 절반을 점유하고 있다. 베이징( 北 京 )시는 옌징( 燕 京 ), 광둥( 廣 東 )성은 주장( 珠 江 ), 산시( 陝 西 )성은 바오지( 寶 鷄 ), 충칭( 重 慶 )시는 산청( 山 城 ), 윈난( 雲 南 )성은 다리( 大 理 ), 신강( 新 疆 )자치구는 우쑤( 烏 蘇 ) 등 지역 맥주회사가 현지 시장을 좌우한다. 한국 소비자에게 잘 알져진 칭다오( 靑 島 )맥주도 중국시장 전체로 볼 때 영향력은 크지 않다. 전국 각지에서 골고루 소비되는 맥주 브랜드 중 하나일 뿐이다. 칭다오는 1903년 독일과 영국 상인이 합작해 설립한 중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의 맥주회사다. 중국 최대의 맥주회사로 세 계 6위의 생산량을 자랑하고 있다. 미국 일본 독일 한국 등 60여 개국에 수출하고 있지만, 중국시장 점유율은 17% 안팎이다. 중국은 술과 음식의 나라 334

335 서민이 즐기는 대중주답게 중국에서 맥주는 경기를 잘 탄다. 2008년 중국 맥주산업의 총생산량은 4103만천L로, 전년에 비해 5.4% 증가하는 데 그쳤다. 생산량은 7년 연속 세계 1위를 유지했지만, 성장세가 눈에 띄게 둔해졌다. 한풀 꺾인 맥주 소비는 무엇보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영향이 컸다. 주 소비층인 서민과 노동자, 농민들이 지출을 줄이면서 맥주시장은 한 자리 성장에 그쳐야만 했다. 정체된 시장 상황은 중국 맥주산업을 뒤흔들고 있다. 현재 중국 내 맥주회사는 251개, 공장은 550여개에 달한다. 중국 맥주기업은 생산량의 절대 다수를 오직 국내 소비에 의존한다. 2008년 중국 1인당 맥주 소비량은 30kg에 불과해, 앞으로의 시장 잠재력은 크다. 문제는 대부분 맥주회사가 지방정부의 보호 아래 성장한 로컬 기업이라는 점이다. 이들 기업들은 주력상품이 중저가라서 영업 이익률이 1%에 불과하다. 중국 맥주산업의 어려움은 기업 성적에서 잘 드러난다. 2008년 중국 전체 맥주기업의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16.4% 늘어났지만, 이는 일부 기업의 좋 은 성적에 따른 착시현상이다. 로컬 맥주회사의 평균 영업 손실률은 31.9% 나 달해 강력한 구조조정 압력에 직면해 있다. 중국 3대 맥주회사인 칭다오, 슈에화( 雪 花 ), 옌징의 시장 장악력이 갈수록 커져 가고 기업 간의 합종연횡 도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진행될 맥주시장의 재편과 관련해 주목받는 기업은 단연 슈에화다. 현재 슈에화는 칭다오와 함께 중국 맥주시장의 1,2위를 다투고 있다. 칭다오가 106년의 역사와 국제적 인지도를 갖춘 기업이라면, 슈에화는 젊은 회사다. 슈에화는 1994년 선양( 沈 陽 )이 근거지인 화룬( 華 潤 )과 다국적 기업 SABMiller가 합작해 설립했다. 중국 19개 성시에 60여개의 공장을 운영하여 대륙 전체를 시장으로 삼고 있다. 중국은 술과 음식의 나라 335

336 본래 화룬은 1950년대 말 문을 연 선양맥주에서 시작됐다. 1964년 중국 맥주품평회에서 신 상품을 내놓았는데, 거품이 풍부하고 하얀 눈꽃 같아서 슈에화 라는 명칭을 얻게 됐다. SABMiller와의 합작은 화룬에 있어서 환골탈태의 계기가 됐다. 기업 이름을 아예 슈에화 로 바꾸고 영문 명칭(SNOW)을 강조하는 브랜드 마케팅을 펼쳤다. 톡 쏘고 시원한 맛에다 외국 브랜드를 연상시키는 슈에화는 중국 소비자를 사로잡았다. 철저하게 젊은 소비자층을 노린 마케팅도 대성공이었다. 1978년 이후 태어난 중국 젊은이 들은 한 가정 한 자녀 세대로, 소비 성향이 강하고 유행에 민감하다. 슈에화는 서민의 술인 맥주를 생활과 여가를 즐길 줄 아는 젊은이의 술로 탈바꿈시켰다. 이에 슈에화는 2007년 총생산량이 690만천L를 돌파해 맥주시장 1위에 등극했다. 합작기업이 설립된 지 불과 13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칭다오와 치열한 선두 다툼을 벌이고 있다. 중국 주류 소비량의 1위 자리를 내주었지만, 지난 몇 년간 백주시장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중국 백주산업의 눈부신 성과는 통계에서 잘 나타난다. 2008년 중국 백주시장은 1400억 위안(약 23조8000억원)에 달했다. 이는 금액으로 환산할 때 중국 전체 주류시장의 절반을 차지 한다. 2008년 중국 전체 백주기업의 총생산액은 1460억 위안(약 24조8200억원)으 로, 전년에 비해 29.8%나 증가했다. 영업이익도 180억 위안(약 3조600억원) 으로, 36.8%나 급증했다. 영업이익을 1억 위안(약 170억원) 이상 낸 백주회 사만 19개에 달해 전년보다 9개나 늘었다. 백주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올해 4 월까지 중국 18개 성시에서의 백주 판매액은 전년 동기 대비 15.8%가 늘어 났다. 같은 기간 양주와 맥주, 포도주가 각각 22.4%, 9.2%, 2%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것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다. 고삐 풀린 백주 소비를 막고자, 지난 8월 중국 세무당국은 백주의 주류 소비세를 2~15% 올렸다. 중국은 술과 음식의 나라 336

337 쓰촨 기업은 무엇보다 앞선 판매 전략과 다양한 마케팅으로 시장을 장악했다. 백주시장이 커지게 된 데는 고급 백주의 판매가 급증했기 때 문이다. 지난 5년간 고급 백주시장은 해마다 20% 이상 성장했다. 2010년에는 시장규모가 850억 위안(약 14조4500억원)으로 늘어날 전망이 다. 이는 급속한 경제성장과 중산층 증가가 주요인이다. 중국인은 본래 체면과 위신을 중시하는데다, 선물용과 회식용으로 고급 백주를 선호 한다. 오늘날 중국 최대 백주회사인 우량예는 시장 변화에 누구보다 먼저 움직였다. 우량예는 1990년대 초부터 고급 브랜드 육성에 매달렸다. 1990년대 중반 당시로서는 고가인 400위안대(약 7만원대) 백주를 시장에 처음 내놓았다. 우량예는 고급 백주를 선보이면서 대대적인 광고와 시음회로 기업의 가치를 한껏 높였다. 마오타이가 우량예를 벤치마킹하여 생산연도를 제품에 표기하는 상품을 뒤늦게 내놓을 정도였다. 중국은 술과 음식의 나라 337

338 고급 백주의 새로운 강자 수이징팡은 더욱 독특했다. 수이징팡의 모회사 췐 싱( 全 興 )은 1998년 공장 부지에서 발견된 800년 역사의 양조장 유적을 적극 이용했다. 기네스북에도 오른 유적지에서 곡식을 발효키로 한 것이었다. 백 주는 쌀, 수수, 옥수수, 밀 등 재료를 먼저 발효시켜야 한다. 췐싱은 유적의 발굴 결과 발표회 때 고급 백주 수이징팡을 선보였다. 역사적 의미를 따지 길 좋아하는 중국인의 소비 심리를 노린 마케팅이었다. 중저가 백주시장도 쓰촨 기업이 장악했다. 1990년대 말까지 베이징 중저가 시장은 펀주가 대세였다. 하지만 지금은 징주( 京 酒 )가 펀주를 완 전히 대체했다. 징주는 우량예가 베이징을 타깃으로 내놓은 전략 상품이다. 농향( 濃 香 )형 백주로, 향기는 입 안에서 말리고 술 맛이 오래가 서 베이징요리와 잘 어울린다. 베이징을 위해 특별히 만들었다는 술 이름도 현지 소비자에게 어필했다. 상하이( 上 海 ) 중저가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내놓은 류량허( 瀏 陽 河 )도 마찬가지다. 색깔이 맑고 맛이 깨끗해서, 담백한 상하이요리와 궁합이 잘 맞는다. 우량예는 류량허를 시장에 내놓으면서 같은 이름의 중국 민요 '류량허'을 적극 이용했다. 이에 우량예는 지난 9월 12일 중국주류 유통협회가 발표한 중국 주류기업 순위에서 위안(약 9조304억원)의 브랜드 가치로 1위를 차지했다. 10위 이내 회사 중 백주회사가 8개 였는데, 그 중 5개가 쓰촨 기업이었다. 오늘날 중국 술 시장에서 약진하는 기업의 성공 사례는 우리 기업에게 커다란 시사점을 준다. 첫째, 중국인을 유혹할 수 있는 신상품의 개 발이다. 중국인은 역사적 의미가 깊고 브랜드 가치가 높은 술에 지갑을 아낌없이 연다. 젊은이들은 서구적인 이미지의 맥주에, 중장년층은 고급 백주를 선호한다. 둘째, 지역마다 음식문화와 생활풍습이 다른 중국시장을 고려하여 마케팅 전략을 짜야 한다. 중국에서 술은 음식 및 문화와 관련이 깊다. 중 국을 크게 6~8개로 나눠 각 지방에 맞는 상품을 선별해, 맞춤형 사업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한국음식이 한류 바람을 타면서 중국에서 크게 환영받고 있다. 우리술이 중국인들에게 사랑받는 날이 올지 기대된다. 중국은 술과 음식의 나라 338

339 흉노의 황제 묵특 :28 묵특선우 (흉노 BC 209~174 재위) 진나라의 진시황은 흉노의 침입을 막기위해 만리장성을 쌓고 몽염에게 북방 수비를 맡겼다. 이후 진시황이 죽고 몽염도 권력 다툼의 와중에서 죽게 되자, 흉노가 다시 활기를 찾았다. 이때 흉노의 두만선우는 오르도스 지역을 회복하고 다시 이 일대를 누비게 된다. 묵돌은 그의 맏아들이다. 이 때 두만에게는 후궁이 낳은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두만은 묵돌 대신에 이 아들에게 대를 잇게 하기 위해 묵돌을 월지에 인질로 보낸 후, 월지와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묵돌은 월지의 명마를 훔쳐 흉노로 도망쳐 왔다. 이에 두만은 묵돌에게 태자에게 주게 되어 있는 좌현왕의 작위를 내리고, 1만 명의 기병의 대장으로 삼았다. '용감한 자'라는 뜻을 가진 그의 이름도 이때 나왔다. 하지만 묵돌의 지위는 늘 불안했다. 이에 묵돌은 반란을 도모하였다. 묵돌은 소리나는 화살인 명적을 가지고, 자신의 휘하에 있는 1만의 기병을 훈련시켰다. 훈련 동안 그는 자신이 어떤 표적을 향해 활을 쏘면 모두가 그 표적을 쏴야한다고 가르쳤다. 만약, 이를 어기고 쏘지 않는 자는 반드시 목을 베었다. 기원전 209년, 처음으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명마를 쏘았다. 몇몇 부하가 따라 쏘기를 주저하기에 목을 벤 후, 이번에는 자신의 부인을 향해 활을 쏘았다. 이번에도 몇몇 부하가 주저하기에 또 다시 목을 베었다. 마지막으로 사냥터에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인 두만 선우를 향해 활을 쏘았다. 1만 기병은 한 명도 주저 없이 두만을 향해 활을 쏘았고, 묵돌이 즉위하게 되었다. 예로부터 흉노의 동방에는 동호가 자리잡고 있었다. 묵돌이 즉위하자 동호가 움직였다. 흉노의 황제 묵특 339

340 동호의 왕은 처음 묵돌에게 사자를 보내 흉노의 보물인 천리마를 요구하였다. 일부 신하들이 반대하였지만 묵돌은 천리마를 선물로 주었다. 다시 동호의 왕은 묵돌의 애첩 하나를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번에도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였으나 묵돌은 자신의 애첩 또한 선물로 주었다. 또 다시 동호왕은 양국의 경계에 있는 영토를를 내놓으라고 했다. 한 신하가 묵돌에게 "그 땅은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했다. 하지만 묵돌은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줄 수 있겠느냐!"고 하며 동호에 쳐들어가 동호를 크게 무찌르고 왕을 죽였다. 동방의 동호를 무찌른 묵돌은 서방의 월지도 정복하고, 남으로는 한나라와의 경계 지대를 병합하고 이들과 맞섰다. 기원전 202년, 한고조 유방은 진나라 붕괴 이후 혼란스럽던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고조는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측근인 한왕 신을 북방에 배치하고 흉노 토벌을 명했다. 하지만 한왕 신은 흉노 토벌이 어렵다 생각하여 화평을 시도했고, 이후 고조가 이를 책망하자 흉노로 투항해 버렸다. 한왕 신이 투항하자 묵돌은 그의 인도를 받아 한나라의 땅을 공격해 들어갔고, 현재의 산서성 동쪽의 평성에 이르렀다. 한고조 역시 대군을 일으켜 이에 맞섰으나, 묵돌은 이를 무찌르고, 한나라 군대를 백등산에 몰아 넣어 7일 간 포위하였다. 이후 한고조는 묵돌의 왕비에게 선물을 주어 포위를 풀고 장안으로 도망쳤다. 이후 한고조는 묵돌에게 황실의 여인을 선물하고, 매년 조공을 바치기로 하였다. 한왕 신 이후에도 노관이 유방을 배신하고 흉노로 들어간 바 있다. 이후 한고조가 죽고, 효혜제가 즉위하였다. 묵돌은 고조의 왕비인 여태후에게 "나도 독신이고 그대도 독신이니 잘해보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여태후는 크게 노하여 흉노를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주변에서 모두 그녀를 만류하였다. 묵돌 시절 월지는 흉노의 서방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당시 서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당시 우현왕이 한나라와 소규모 전쟁을 벌인 뒤, 묵돌과 효문제가 편지를 교환하였다. 묵돌이 보낸 다음의 편지에는 월지 토벌의 내용이 나타난다. "지금 작은 관리들이 약속을 깨트렸기 때문에 그 죄를 물어 이번에 우현황에게 그 벌로써 서쪽으로 월지를 토벌하게 하였소. 다행히 하늘의 가호로 단련된 정예병사와 강건한 말로써 월지를 쳐부수어 이를 모조리 죽이거나 항복시키고 누란, 오손, 호게 및 그 인접 26개국을 평정하여 이들을 모두 흉노에 병합하였소. 이리하여 각 유목민족은 합하여 한 집안이 되었고, 북쪽은 이미 안정을 찾았소." 여기에서 알 수 있듯 묵돌은 월지는 물론, 서역의 여러 나라를 점령하여 북방 유목민족을 하나로 통합했던 것이다. 이후 월지는 대월지와 소월지로 나뉜다. 위 편지를 받은 효문제는 답장을 통해 우현왕을 책망하지 말 것을 당부했으며, 선우에게 옷 수십 필을 선물로 주었다. 편지를 교환한 지 얼마 못 되어 묵돌은 죽고, 흉노의 황제 묵특 340

341 아들인 계육이 즉위하여 노상선우라 칭하였다. 흉노의 황제 묵특 341

342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악녀, 피바람 가남풍 :02 악녀 이야기가 나와서 역사에 남은 악녀를 소개합니다. 어쩌면 피로 점철되는게 당연한 중국의 궁중사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가 있으니, 이름부터가 뭔가 포스를 풍기고 전혀 여자이름 같지 않 은 가남풍( 賈 南 風 )이에요. 중국사에서 악녀로서 빠질수가 없는 인물이죠. 잘 알려진 측천무후는 모질어도 여걸이라는 평을 들을만한데, 이 여자는 그냥 킬링필드에요. 중국궁중사에서도 서진은 유송과 더불어서 종친끼리 피비린내 나는 역사로 유명한데(유송이 한 수 위지만...) 그 스타트를 끊은게 가남풍이에 요. 중국 사이트에서 돌아다니는 미화된 이미지의 가남풍. 가남풍은 삼국지에서도 모략질로 유명한 가충(게임 삼국지에서의 능력과 특기가 증명함.)의 장녀인데, 전해지는 얘기로는 '키가 작달막하고,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악녀, 피바람 가남풍 342

343 피부가 검고 거칠며, 성정이 사납고 모질다'라고 해요. 한마디로 성격이 지랄맞고 엄청난 추녀라는 말이죠. 거기에 호색하기까지 하고... 얼마나 성질이 지랄 같았으면 그 어미까지 가남풍을 두려워했다고 해요. 가남풍의 이런 성격과 외모는 워낙 유명해서 사마염의 귀에까지 들어갔어요. 이 분이 서진을 창업한 무제 사마염. 처음에는 그런데로 정치를 잘했지만, 차츰 향락에 빠져 서진이 망하는데 일조를 함. 이에 사마염이 아들인 사마충(중국사에서 유명한 백치황제. 존호는 은혜롭게도 '혜제')의 결혼상대자를 구할때 고민을 하게돼요. 그야말로 특등공신 가충을 생각하면 가남풍을 며느리로 맞아들이는게 옳지만, 소문이 워낙 안 좋으니 고민할 수밖에 없었죠. 이를 본 모략질하는데 둘 째 가라면 서러워할 가충이 가만 있을리 없었고요. 사마염의 신뢰를 받는 부인과 측근들에게 약을 듬뿍 치죠. 당연히 가남풍을 며느리로 맞아들이는게 옳다는 말이 주위에서 들리고, 결국 며느리로 맞이하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엽색행각(양이 끄는 마차를 타고 양이 발걸음을 멈춘 곳, 그 거처의 궁녀와 붕가함)으로 유명한 사마염이 알고보면 엄청난 공처가였다고 해요. 그러고보면 사마씨 가문이 좀 그런 기질이 있죠. 사마의부터 엄청난 공처가였으니... 역시 세상을 지배하는 건 남자지만 그런 남자를 지배하는게 여자죠.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악녀, 피바람 가남풍 343

344 마차를 끄는 양을 유혹하기 위해서 궁녀들의 경쟁이 치열했다고 함. 양이 소금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자 장안에 돌던 소금이 동이났다고 함. 아무튼 가남풍은 꿈에 부풀었어요. 그야말로 몇년 시집살이하면 백치라지만 사실상 계승서열 1위인 남편이 보위에 오를거고, 그럼 백치남편을 치마폭에 가두고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으니 그럴수 밖에 없었죠. 그러나 문제는, 사마충이 모자라다는 것을 잘 알던 사마염도 사마충이 황제질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사마염은 사마충에게 문제를 내리고 시험을 보게해요. 가남충에게는 불행하게도 백치인 사마충이 문제를 제대로 풀 수있는 능력이 없었어요. 이에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가남충이 꾀를 냅니다. 바로 고금의 진리인 약을 치는 것이죠. 시험을 감독해야하는 관리에게 약을 치고 대신 쓰게해서 사마염에게 올리는 것이었어요. 이렇게 만들어진 답안을 받은 사마염은 매우 기뻐하며 사마충을 황태자로 임명하죠. 백치인줄 알았는데 말이 어눌할뿐 알고보니 똑똑하다고... 모든게 돈의 힘이라는 걸 까맣게 모르고...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악녀, 피바람 가남풍 344

345 이 분이 '은혜로은 황제'라는 존호를 받은 백치황제 혜제 사마충. 굶어죽는 백성들을 보고 '곡식이 없으면 고기를 먹지'라는 망언을 남기고, 연못에서 우는 개구리를 보고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저 개구리가 공적으로 우는 것이냐, 사적으로 우는 것이냐'는 아스트랄한 정신세계를 보 여줌. 여기까지는 귀여운 짓이에요. 이제 본격적으로 킬링필드에 들어갑니다. 당시에는 황제나 황태자는 황실의 안녕과 번성을 위해서 많은 여자를 두는게 당연했고 이를 법으로 명시했어요. 당연하게도 백치이지만 사마충도 많은 여자와 배를 맞추게 되고 그 결과가 생길 수밖에 없어요. 가남풍은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이 꼴을 두고보지 못했어요. 수많은 사마풍의 후궁들을 배를 가르고 때려죽이죠. 궁중의 다른이들이 보는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이 때는 조신했어요. 사마염이 죽고 사마충이 보위에 오르자 당연히 가남충의 권세가 오를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가남풍에겐 양지라는 방해물이 있었어요. 게다가 양지에게 태자비 시절에 모욕을 당한 적도 있어서 감정이 좋지 않았죠. 양지는 사마충의 이모지만 사마염의 두번째 정실부인으로 어머니뻘이기도 해요. 이 양지의 가문의 권세가 가남충 가문의 권세와 부딪치게 됩니다. 이에 가남풍은 시동생인 사마위와 혜제의 종조부인 사마량을 끌어들여서 양지 가문을 때려잡아요. 이 때 죽은 사람이 수천이라해요. 이게 역사에 남은 '팔왕의 난'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사건의 시작입니다. 가남풍은 양지를 폐서인으로 만들어 유폐를 시키고 양지의 어머니도 사형에 처해요. 이 소식을 들은 양지가 유폐장소에서 뛰쳐나와 가남충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바치면서 '죄첩(죄 많은 여인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악녀, 피바람 가남풍 345

346 이라 낮추어 이르는 말)에게 성은을 내리셔서 모친의 생명만이라도 지켜주시면 감읍하여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애원해요. 도리를 따지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할 말이 아니죠. 그것도 고대 사회에서...ㄷㄷㄷ 하지만 가남풍은 깔깔거리며 비웃어요. 그리고 시어머니 뻘인 양지마저 유폐 시키고 곡기를 강제로 끊어서 굼겨죽입니다. 거기에 저승에가서 선황인 사마염에게 말할까봐 관에다가 온갖 부적을 붙여서 쉽게 저승에 가지 못하고 떠돌게 하죠. 가남풍의 피바람은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드디어 권력을 잡았지만 사마량과 사마위 같은 중앙정부에서 영향력이 큰 종친들이 눈에 낀 가시였어요. 이에 사마위를 꼬셔서 사마량과 그 일가를 모조리 때려잡은 후, 조서를 위조해서 사마량을 역모죄로 몰고, 종친을 무고했다면서 사마위도 때 려잡아요. 물론 몰살이죠. 가남풍에겐 그야말로 일석이조 였어요. 이제 완전히 권력을 독점하게되자 호색녀로서의 본능이 나옵니다. 백치황제는 혼자 DDR하게 만들고는 황궁의 의관, 무관들과 놀아나기 시작해요. 자기는 그렇게 놀아나면서 남편이 다른 여자랑 손 잡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어요. 물론 혜제의 암묵적인 동의도 있었을 것이에요. 가남풍과 동침하게되면 이 후로 2~3일 동안 비실 거렸다니 밤이 두려웠을듯... 아무튼 가남풍은 이에 그치지않고, 저잣거리에서 미소년들을 납치해서 즐겨요. 그리고 마음에 들면 보물을 주고, 마음에 안들면 목졸라 죽여서 상자나 자루에 넣어 강에다가 유기해요. 그 소년에게는 목숨을 건 붕가죠. 이렇게 죽은 미소년이 워낙 많아서 중국의 평균적인 외모가 떨어졌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어요. 그렇게 우수한 유전자들이 수도없이 죽었으니 일리가 있죠. 이런 행각이 민가에도 퍼져서 야릇한 야사도 생겨요. 내용은, 비렁뱅이질을 하던 한 소년이 있었는데 엄청난 미소년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어느날, 이 비렁뱅이 소년이 삐까번쩍한 옷을 입고 휘황찬란한 보물을 가지고 나타났고, 당연히 관가에서는 도둑질을 한 걸로 보고 체포해서 추궁을 해요. 그러자 소년이 '황후마마가 주셨어요'라고 하고, 얼마나 가남풍의 엽색행각이 퍼졌으면 아무말도 안하고 풀어줬다고 합니다. 앞으로 태자인 사마휼(혜제의 아들)을 타락 시키고 폐서인으로 만든후 측간에서 몽둥이로 때려죽인 것과 있지도 않은 아들을 만들어 태자로 세우는 것, 본격적인 팔왕의 난과 진정한 헬게이트이자 아이러니 하게도 문화적으로 급격한 발전을 이룩한 오호십육국시대의 도래는 더이상 귀찮아서 못쓰겠네요. 너무 길기도 하고... 솔직히 너무 복잡하고 아직도 이해가 잘 안가는 시대라서... 여기까지 피비린내나는 중국궁중사에서도 탑3에 들만한 악녀인 가남풍의 이야기 였습니다.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악녀, 피바람 가남풍 346

347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악녀, 피바람 가남풍 347

348 두 자매의 다른 길-송경령과 송미령 :02 손문은 1924년 간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그 가족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서 를 남긴다. (나는 국가의 일에 전념하느라 가산을 다스리지 못했다. 내가 남기는 책, 의복, 주택 등 일 체는 나의 처 송경령에게 주어 이것으로 기념이 되게 하라. 나의 딸은 스스로 장성하여 자립 하게 하라. 바라건대 각각 자애하고 또 나의 뜻을 이어갈 것을 부탁한다) 그의 유언에서 보이는 부인 송경령의 송씨 가문은 중국현대사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세 자매 중 첫째 애령은 공상희와 결혼했다. 공상희는 공자의 직계 후손으로 나중에 국민당의 재무부장이 된다. 둘째 경령은 중국혁명의 아버지인 손문의 혁명 동지이자 부인이다. 셋째 미령은 손문을 이어 국민당 정부를 이끌다 공산당에 패하고 대만 으로 쫓겨난 장개석의 부인이다. 이 세 자매의 아버지는 12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남부에서 감리교파 목사가 된 후 중 국으로 돌아와 상해에서 정착했다. 결혼 후 그는 목하를 그만두고 외국의 기계를 수입해 파 는 사업가로 변신하여 많은 돈을 모았다. 경령과 그의 자매들은 중국사회의 생활수준보다 월등히 높은. 서구화되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 계통의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그 들의 인생행로는 엄청나게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경령과 미령은 10대였던 1908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을 다녔다. 경령은 미국의 분위기 에 매몰되지 않고 항상 그가 중국인임을 잊지 않았다. 그녀와 달리 동생 미령은 (나에게서 오직 동양적인 것은 나의 얼굴 뿐이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그들 자매는 판이한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손문과 경령이 가까워질 수 있었던 기간은 손문이 혁명에 실패하고 원세개에 밀려나 일본 에 망명하고 있던 시기였다. 1915년 10월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손문의 나이 49세, 경령의 나이 22세였다. 그녀가 손문과 결혼하기 전 손문에게는 부인이 있었으며 그 부인과 두 자매의 다른 길-송경령과 송미령 348

349 의 사이에 3명의 자녀가 있었다. 중매결혼한 사이였다. 그 부인은 헌신적인 아내이자 좋은 어머니였지만 혁명을 함께하는 동지적인 위치는 아니었다. 전통적인 중국의 관습에 의하면 본부인이 있을 경우 첩이 되든가 아니면 본부인이 잘못할 경우 내보내고 새 부인을 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손문은 그 둘 중 어느 것도 아니고 처 음 부인과는 영원한 별거라는, 당시 중국 관습에 있지도 않은 방식으로 관계를 정리하고 경 령과 결혼했다. 물론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그 결혼에 반대했다. 경령의 아버지는 그녀를 가두었으나 그녀는 유모의 도움을 받아 창문으로 탈출하여 결혼을 강행했다. 결혼 후 그녀는 전통적인 중국여성의 이미지를 깨고 남편을 도와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 으며, 손문의 가장 중요한 협조자이자 정치적인 동반자로서 손문이 혁명운동에 전력할 수 있도록 하는 최고의 배우자가 되었다. 손문은 1924년 북경의 군벌정부의 초청을 받아 북경 으로 향했다. 그러나 손문은 심한 병에 시달리고 있어 북경정부와의 협상을 시작하지도 못 한 채 간암으로 최후를 맞게 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경령은 손문 사상의 가장 확실한 계승자로서 중국 수억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을 위한 혁명운동가의 자리에 굳건하게 섰다. 그녀는 북벌운동이 전개되면서 무한정부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특히 1927년 여성 정치 훈련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외국의 한 기자는 당시 그녀의 풍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 고 있다. (태도면에서는 예절바르고 부드러웠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강철 같은 기질이 있었 다. 나는 그녀가 가족과 사회의 온갖 억압속에서도 굳건히 자기의 길을 고수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20년대 말 북벌이 끝난 후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무자비한 탄압을 가할 때, 경령은 공산당에 우호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시시각각 느꼈으며 결국 소련으로 잠 시 망명을 떠나게 된다. 소련에서 환영받던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녀의 동생인 미령이 장개석과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장개석도 부인이 있 었으나 미령과 결혼하기 위해 이혼한 상태였다. 장개석은 손문이 죽은 후 경령에게 청혼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경령은 이 청혼을 거절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정략적인 방편으로 사랑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그녀는 몇 년 전 장개석이 동생 미령에게 청혼했을 때 크게 반대한 적이 있었다. 언니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혼식은 성대하게 그리고 공식적인 행사로 진행되었다. 결혼 식장에는 거대한 손문의 사진이 걸렸다. 장개석으로서는 처가 쪽이기는 하지만 손문과 인척 두 자매의 다른 길-송경령과 송미령 349

350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기의 정치적인 위치를 강화시키기 위한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개석과 결혼한 동생 미령의 생활은 언니 경령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미령은 국민당 정부와 미국 사이의 중요한 고리 역할을 했다. 그녀는 미국의회에서 연설을 행한 최초의 여 성이었으며 미국 사회에서 큰 명망을 얻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미국인들이 뽑은 세계 에서 가장 인기있는 10명의 여성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두 동생인 경령과 미령이 중국의 대정치가의 부인으로서 서로 다른 방향이기는 하지만 대 외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것에 비하면 큰 언니 애령은 공식석상에 나타나는 것보다는 그 늘에 숨어살면서 재산을 모으는 일에 열중했다. 남동생 송자문은 국민당의 재정부장관 외교 부장관 및 행정원장 등을 지낸 사람인데 세계에서 가장 부자라고 널리 알려질 정도였다. 어 쨌든 이런 막강한 인맥으로 송씨 가문은 중국국민당을 이끄는 가장 영향력있는 가문이 되었 다. 송씨 가문을 둘러싼 이러한 경제력, 정치, 군사적 배경은 하나의 거대한 왕국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발단은 아버지의 사업수완, 경령과 손문의 결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당은 장개석 가문, 송씨 가문, 공씨 가문 등 인척으로 얽힌 몇 개의 가문에 의해 운영되었다. 나중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그의 대통령 시절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국민 당을 돕기 위해 우리가 보낸 돈은 모조리 바닥났다... 그 가운데 많은 돈이 장개석과 그의 부인, 그리고 송자문 및 공상희 집안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들은 그 돈을 숨겨서 뉴욕의 부동산에 투자했다) 그러나 경령은 이러한 반동적인 합작을 바라지 않았으며 결국 정치적으로 반대편에서 이 거대한 왕국을 무너뜨리는 길고 험난한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항일전쟁의 시기에 경령의 주임무는 전쟁구호물자를 모아 항일운동을 하고 있는 공산당에 게 보내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 일에 헌신적이었으며, 정작 그녀 자신은 세들어 살았으며 개 인소유는 거의 없었다. 그녀에게 사치는 당시 중국 사정에서는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 나 가난한 중국을 도와달라는 탄원을 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는 동생 미령의 짐은 고급 화장 품과 란제리, 모피코트로 가득햇다. 미 군용비행기의 병사들은 그녀의 특별 구입품을 운반 하면서 분노하여 소지품 상자를 부숴버린 일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두 자매의 다른 길-송경령과 송미령 350

351 이 두 자매의 삶은 중국 현대사를 상징하고 있다. 미령의 삶은 곧 국민당의 부패상과 연결 되고, 경령의 혁명운동은 공산당과 연결되었다. 두 자매의 다른 길-송경령과 송미령 351

352 "황금가족"의 분열 :22 황금가족"은 순수한 몽골인을 가리킨다.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 따르면, 몽골인의 시조는 알랑-고아이고,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 신인의 감 응을 받아 회임하여 낳은 세 아들을 낳는다. 이런 전설이 있으므로 세 명의 신인이 낳은 아들의 후손은 가장 순수한 몽골인 즉 '황금가족'으 로 보았던 것이다. <몽골비사>의 기록에 따르면,징기스칸은 바로 알랑-고아의 세 신이 내린 아들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몽골비사>, <집사>는 모두 징기스칸의 가계에 대하여 대량의 찬송을 보낸다. 그러나 징기스칸이후, 그가 전무후무한 위대한 정복을 이루었으므로, "황금가족"이라는 명칭은 실제로 그의 후손에게만 붙여졌다. 특히, 그와 정실부인 보르테 사이에서 낳은 4명의 아들(주치, 차카타이, 오코타이, 톨루이)의 후손을 말한다. 그후 역사에 언급되는 "황금가족"은 모두 징기스칸의 후예들이다. 징기스칸은 "황금가족"의 영예를 구축한다. 그러나, "황금가족"은 처음부터 깊은 틈을 남기고 결국은 전체 "황금가족"이 분열되고, 결국은 몽 골제국이 분열되게 된다. "황금가족"의 분열은 반드시 주치의 출생부터 얘기해야 한다. <몽골비사>, <집사>에 따르면, 주치의 모친인 보르테는 징기스칸과 결혼한 후 얼마되지 않아, 집안의 원수인 메르키트인에게 붙잡혀 간다. 징기스칸은 부친의 결의형제인 왕한( 王 罕 ) 및 자신의 결의형제인 자무카와 연합 하여 메르키트인으로부터 보르테를 다시 빼앗아 온다. 회군도중에 보르테는 주치를 낳는다. 그러므로 주치가 징기스칸의 혈육인지에 대하여 는 의문이 있다. 다만, 두 사서에서는 모두 보르테가 약탈당했다가 구해진 시간을 명확히 기록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문헌의 해석에서 보 르테가 9개월 혹은 12개월이상이라는 두 가지 가설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주치가 징기스칸의 친아들이건 아니건 간에 확실한 것은 그의 출 신에 대한 의문은 그와 차카타이의 대립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몽골비사>의 기록에 따르면, 징기스칸이 1219년 호라즘으로 출정하기 전에, 그의 비인 예수가 징기스칸에게 진언한다. 원정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후계자를 확정하라고. 징기스칸은 그 건의를 받아들여, 여러 아들과 장수들을 불러서 후계자문제를 논의한다. 이번 회의에서 징기스칸 은 먼저 주치의 의견을 물어본다. 그러나 주치가 대답하기도 전에 차카타이가 즉시 그의 신분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이것은 주치와 차 카타이간의 갈등이 처음으로 폭발한 것이다. 그후 두 사람의 불화는 점차 표면화된다. 특히 징기스칸이 두 사람에게 공동으로 출병하여 호라 즘제국의 수도인 우르겐치( 玉 龍 杰 赤 )를 공격하게 했을 때, 두 사람의 불화로 전투가 지연되게 되고,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다. 결국 징기스칸 이 오코타이를 파견하여 총사령관을 맡게 하여 두 사람과 협조하게 한 후에야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주치와 차카타이의ㅏㄹ등은 "황금가족" 분열의 도화선이었다. <몽골비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의 분쟁과정에 징기 스칸은 말한마디 하지 않는다. 앞에 나서서 화해를 권하는 코코쇼스도 주치의 신분에 대하여는 따로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차카타이가 주 치를 비난하면서 모친인 보르테의 가슴아픈 일을 들추었다고 질책한다. 즉, 당시 징기스칸의 친족이건 심복이건 모두 주치는 징기스칸의 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말이다. 징기스칸 본인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주치는 '황금가족' 내부에서 고립된 위치에 놓인다. 이와 비교하면, 후계자를 선정하는 문제에서 차카타이는 오고타이를 지지한다. 양자의 관계는 아주 밀접했 다. <집사>의 기록에 따르면, 오코타이는 즉위한 후 모든 큰 일에 차카타이의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구육을 차카타이에 게 파견하여 케이테이( 怯 薛, 숙위병)를 맡게 했다. 오코타이가 죽은 후, 차카타이는 여러 왕을 이끌고 토레거나황후( 乃 馬 眞 后 )에게 충성을 표 시하고, 토레거나황후가 칭제감국하여, 구육이 귀국하여 황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이를 보면 양자간의 관계는 아주 친밀했다. 황금가족의 분열 352

353 이와 비교하면, 징기스칸의 넷째아들 톨루이는 오코타이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몽골인들은 막내아들이 집을 지키는 습속이 있다. 톨루이는 징기스칸의 오난하원의 주요 영지를 모두 상속받는다. <집사>에서는 징기스칸이 한때 톨루이에게 칸의 자리를 승계시키려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비록 끝에는 포기했지만. 그러나 십만천명의 몽골대군은 톨루이에게 넘겨준다. <집사>의 고증에 따르면, 당시 몽골대군의 총병력은 십 이만구천명이었다. 이는 결국 톨루이가 오고타이칸의 강력한 경쟁자이자 잠재적 위협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사>의 기록에 따르면, 오 고타이가 즉위하기 전에, 톨루이가 망설였다고 한다. 나중에 야율초재가 적극 설득하여 톨루이가 쿠릴타이를 개최하고 정식으로 오코타이의 칸의 지위를 확립한다. 이를 보면 톨루이와 오고타이간에는 껄끄러운 점이 있었다. <원사> <집사> <몽골비사>에는 모두 톨루이가 오고타이의 병이 위중할 때, 병의 고통을 나누기 위하여 부적을 쓴 물을 마시고 죽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이런 식의 죽음은 의문이 든다. 이로 인하여 오고타이가 톨루이를 모살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집사>에는 두 가지 사건을 기록하 고 있는데, 이는 오고타이계가 톨루이계를 꺼리고 시기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톨루이의 미망인인 소르칵타니-베키의 정절을 논하면서, 작자 는 오코타이가 소르칵타니-베키를 자신의 아들 구육에게 재가시키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르칵타니가 완곡하게 거절했다. 만일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오고타이가 병권을 톨루이계의 손에서 회수하려는 첫번째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페이지에, 작자는 또 다른 사건을 기록하는데, 오고타이는 톨루이의 유산에 속하는 2천의 부대를 자신의 아들인 코단( 闊 端 )의 휘하로 넣어버렸다. 만일 전자가 온 화한 수단으로 병권을 회수한 것이라면 이번에는 전혀 거리낌없이 빼앗은 것이다. 오고타이의 핍박은 톨루이계와 주치계를 계속 접근하도록 만든다. 두 가족은 이익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주치는 징기스칸이 죽기 전에 먼저 죽었다. 그의 둘째아들인 바투가 그의 영지를 승계한다. 1235년, 오고타이는 저명한 '장자서정( 長 子 西 征 )"을 시작한다. 바투가 사령관이 된다. 그의 곁에는 징기스칸의 각 갈래의 대표들이 모여 있었다. "바투의 형제인 오르타, 베르커, 푸반; 오 고타이의 아들인 구육과 허단; 오고타이의 손자인 하이두; 톨루이의 아들인 몽케; 차카타이의 아들인 바이다르와 손자인 부리" 이것은 거대한 규모의 정벌이었다. 몽골철기는 동유럽을 휩쓴다. 그러나 원정도중, 바투와 구육의 다툼이 벌어진다. <몽골비사>에는 연회에서, 바투가 여러 아들의 장자 신분으로 자처하자, 부리와 구육이 불만을 표시한다. 두사람은 바투를 욕한 후에 연회석을 떠나버린다. 바투는 오코타이에 호소 한다. 이번 사건에서 몽케는 바투를 위하여 진언해서 그를 돕는다. 징기스칸이 죽은 후, "황금가족"은 점점 주치-톨루이계와 오고타이-차카타이계의 대립이 형성된다. 진정으로 "황금가족"을 분열시킨 것은 구육이 즉위한 후이다. 1241년 오고타이가 사망하고, '장자서정'은 급히 종결된다. 구육이 몽골본토로 돌아와서 칸에 즉위한다. 그러나, 바투는 킵차크 초원에 머물고 더 이상 동쪽으로 오지 않는다. 즉위후 구육은 바투가 몽골본토로 돌아와서 쿠릴타이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들어 출병하여 토벌하고자 한다. 톨루이의 미망인인 소르칵타니-베키는 구육이 출병한다는 소식을 즉 시 바투에게 전달한다. 주치-톨루이계의 동맹은 갈수록 단단해진다. 그러나, "황금가족"의 내전은 이미 일촉즉발이 된다. 구육의 서정은 그의 사망으로 중단된다. 그러나 그가 갈라놓은 "황금가족"은 이미 다시 합쳐질 수 업게 되었다. 오고타이계는 비록 국가권력 을 장악하고 있지만, 몽골국가는 생간지 겨우 반세기밖에 안되었다. 국가권력이 영향력이나 칸의 통제력이 칸 자체의 능력으로 유지될 수밖 에 없었다. 톨루이게는 톨루이가 남긴 군대를 지니고 있었다. 이들 군대는 당연히 몽골군대의 중견역량이다. 바투는 서정에서 자신의 역량을 확장하였다. 서정의 성과는 주로 남러시아초원지구인데, 이 바투의 영지 서쪽으로는 오고타이,차카타이게가 바투의 영지를 넘여 새로운 정복 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바투는 실제로 최대의 수혜자가 된다. 그의 역량이 커졌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모두 군룡무수의 오고타이계가 신경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투가 종실의 장자의 신분으로 킵차크초원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하고 몽골초원에서 개 최하지 않았는데도, 오고타이-차카타이계의 왕들만 견제했을 뿐, 다른 왕들9톨루이계와 징기스칸의 형제계 및 귀족들은 속속 참가한다. 오고 타이-차카타이의 스레먼(코단의 아들. 오고타이는 코단의 사후에 그를 승게자로 삼는다. 그러나 내마진후가 자신의 아들인 구육의 승계를 원 하여 등극하지는 못한다 이 점은 측면에서 몽골제국에서 존재하는 군사민주제가 비교적 큰 역량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칸인 오고타이 의 뜻이라 하더라도 대항할 수 있는 것이다)가 정변을 일으켜, 쿠릴타이의 개최를 저지하려 하나 실패로 끝나고 포로로 잡힌다. 칸은 이때부 터 톨루이계로 넘어간다. 황금가족의 분열 353

354 이번의 칸의 지위이전은 성공적인 쿠데타였다고 할 수 있다. 오고타이-차카타이계는 거의 반격할 여지가 없었다. 1219년부터 양계의 대립은 마침내 몽케의 승리로 끝이 난다. 이 기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차카타이와 주치의 대립은 황금가족 대립의 도화선이다. 그러나, 주치-톨루이계와 오 고타이-차카타이계의 대립의 근본원이는 칸의 승계권이다. 쌍방의 갈등은 징기스칸이 후계자를 세울 때부터 시작되었다. 주치가 죽은 후, 주치에 대한 미안함에서, 징기스칸은 주치일계를 완전히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주치계와 '황금가족'간의 갈등은 점차 약화된 다. 다만, 오고타이-차카타이연맹은 후계자가 선정된 후에 이미 확립되었다. 그리고 양자의 연합은 지속되고 붕괴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바투는 시종 몽골제국의 권력핵심에서 벗어나 있게 된다. 톨루이는 징기스칸이 생전에 총애했고 수중에 강대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 문에 오고타이-차카타이연맹에서 배척당한다. 그리하여, "황금가족" 내부의 혈통다툼은 징기스칸과 주치의 사후에 오고타이-차카타이계와 주 치-톨루이계의 권력투쟁으로 바뀐다. 자세히 이 맥락을 관찰하면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황금가족"의 틈은 생기자마자 이미 메우기 힘든 상태였다. 이것은 징기스칸의 책임이 가 장 크다. 먼저, 주치에 대한 불신이 '황금가족'의 틈이 생기도록 만든 최초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징기스칸은 주치계를 철저히 없애지 않았다. 또한 주 치계와 차카타이계의 갈등을 해소해주지도 않았다. 바투와 구육, 부리가 결렬한 주요원인은 주치계혈통에 대한 의심때문이었다. 다음으로, 톨루이에 대한 과도한 총애가 '황금가족' 분열의 근본원인이 되었다. 징기스칸은 톨루이를 아주총애한다. 그에게 오난하원의 목장과 오르도스를 넘겨준다. 그리고 몽골군의 주력을 톨루이가 계승하도록 한다. 비록 이 승계는 몽골인의 전통습속에 따라 정해진 것이지만, 실제 로 오고타이와 톨루이간의 최고권력갈등을 불러오고 국가분열의 단초가 되었다. "황금가족"의 내부갈등은 결국 칸의 자리를 다투는 것으로 전이된다. 그러나, 칸이 톨루이계로 넘어간 것은 몽케와 바투가 공동으로 노력한 결과이다. 동시에 군사민주제의 배경하에서 실력정치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몽케시대의 제국은 반드시 몽케와 바투가 나란히 존중되는 국면 을 낳았다. 이런 국면을 타파하기 위하여 홀레구의 서정이 나타난다. 이것은 몽케칸의 톨루이계의 역량이 서쪽으로 확장하려는 노력이다. 이 를 통하여 주치계-톨루이계가 나란히 하는 국면을 타파하고 톨루이계가 독존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몽케가 칸에 오른 후, 톨루이계와 주치게간의 갈등이 점점 더 드러난다. 다만, 오고타이-차카타이계의 세력이 톨루이게와 주치계의 세력 사이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쌍방의 완충지역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주치계와 톨루이계는 직접 충돌하지는 않았다. 몽케-바투연맹은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있어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몽케, 바투가 차례로 사망하면서, 쿠빌라이는 쿠릴타이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 칸에 올라서 '황금가족'의 유대를 철저히 무너뜨린다. 톨루이계의 일한국과 주치계의 킵차크한국은 서아시아에서 대거 출병하고, 오고타이-차카타이계의 하이두는 공공연히 반발한다. "황금가 족"의 내부모순은 마침내 국가와 국가간의 충돌로 번졌다. 억지로 유지되든 몽골제국은 이로서 끝이 난다. 황금가족의 분열 354

355 한영제( 漢 靈 帝 ): 부자가 되고 싶었던 황제 :20 한영제를 얘기하자면 많은 사람들은 제갈량의 <출사표>에 나오는 구절을 떠올릴 것이다: "선제(유비)께서는 한환제, 한영제에 대해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先 帝 未 嘗 不 嘆 息 於 桓 靈 也 )". 제갈량이 보기에, 그리고 많은 역사학자들이 보기에, 한나라가 쇠망한 것은 한환제, 한영제가 나 라를 다스린 20여년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도 확실히 그러하다. 그러면, 한영제는 너무 무능하고 너무 용렬하여 십상시( 十 常 侍 )에게 눈과 귀가 가려지고, 간신들에게 놀아났고 대권을 장악하지 못하여 천하 의 혼란이 일어났단 말인가? 아니다. 정사에 나오는 한영제는 비록 용렬하기는 하지만 멍청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한영제는 아주 총명한 군 주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한영제가 즉위한 초기에 그는 12살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짧은 4년만에, 한영제는 환관세력에 의지하여, 궁중의 가장 큰 어르신인 두태후를 포함한 두씨집단( 竇 氏 集 團 )을 소멸시킨다. 두태후는 울분 속에서 죽는다. 이런 군주가 어찌 무능하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영제의 권력이 확대되면서 그의 욕망도 계속 팽창한다. 말년에 이르러, 한영제는 이미 26살이고,성숙한 군주였다. 이때 외척세력은 이미 모조리 제거되었고, 환관세력이 날로 강해졌다. 막후의 주모자는 바로 한영제이다. 한영제는 조정의 일부 대신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의 존했다. 어쨌든 조정대신의 도움이 없이는 국사를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환관세력을 이용하여 탄압했다. 한영제가 궁전 을 짓고자 했는데, 삼공중 한 명인 사도 양사( 楊 賜 )가 끝까지 반대했다. 한영제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행히 조정의 일부 사람들이 한영제의 눈치를 봐서 일을 처리했고, 결국 궁전을 지었다. 그러나, 한영제의 조정에서의 이미지는 실추되었다. 그래서, 다음 해, 한영제는 삼공 가운데 태위, 사도를 연이어 파면시키고, 그의 궁전공사에 반대했던 사도 양사는 태상시로 보내어 황궁의 물자관리를 책임지게 했다. 그러나, 한영제가 지나치게 총명한 탓에, 총명하여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된다. 황제가 신하에 대하여 일관되게 권모술수만 쓰고, 국가와 백 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의무도 행하지 않는다면, 그 황제는 점차 천하의 정직한 관리 및 천하백성의 공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영제가 느긋하게 지낼 수있는 기간도 길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군왕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무리 머청하더라도 신하가 있으면 우수 한 신하가 있으면 굴러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일부 악인들 예를 들어, 동탁, 조조와 같은 류는 군신간의 한계를 돌파하여 네가 깡패짓을 하면 나도 깡패짓을 하겠다는 식으로 나오게 된다. 한영제는 역대왕조의 군주들 중에서 개성이 확실했던 군주중 하나이다. 비록 당시 천하의 사방에서 폭동이 일어났지만, 한영제가 보기에, 조 정대신과 십상시를 모두 장악하고 있으면, 변방의 소란은 신경쓸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한영제는 시간과 정력을 들여서 자신이 좋아하는 생 활을 즐긴다. 한영제는 당후주처럼 시사를 쓰는 재주는 없었다. 송휘종처럼 회화, 서예에 재주도 없었다. 그러나 한영제는 자신이 독자적으로 추구하는 바 가 있었다. 한영제가 추구하는 바는 바로 천하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돈을 긁어모으는 것이 한영제 이십년의 가장 큰 정치적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한영제는 장사하는 느낌을 좋아했다. 그러나 황궁금지에는 여러가지 규칙이 많았다. 그리고 천하의 땅은 모조리 왕의 땅이니, 한영제가 입만 열면 어느 대신, 어느 백성이 자신의 재물을 바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 군주라도 공평을 추구해야 한다. 그래 서 한영제는 자주 황궁에서 장사연습을 한다. 황궁의 모든 궁녀가 점포를 여는데, 모두 각자의 재능을 발휘하여 특색있는 점포를 열어 황제 의 눈길을 끌고자 한다. 그래서 아주 보통으로 볼 수 있는 채소, 의복, 악세사리에서 각종 골동, 주보,내지는 특색있는 먹거리, 호화로운 해산 한영제( 漢 靈 帝 ): 부자가 되고 싶었던 황제 355

356 물까지 각종 점포가 모두 나타났다. 모두 진지하게 장사를 한다. 장사꾼의 옷을 입고, 말투까지도 장사꾼을 닮으려 했다. 한영제도 보통 상인 으로 분장하고, 여러 태감, 궁녀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여기저기서 장사하는 소리가 들리면 한영제가 아주 기뻐했다. 한영제가 점포에 도착하 면 친히 가격을 협상하고, 가게주인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매각하면 비로소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한영제는 비록 천하의 부자이지만, 항상 부족하다고 느낀다. 비록 조정의 창고에 돈과 재물이 있지만, 그것은 국가의 것이고 황제 자신의 것 이 아니었다. 자신이 뭔가를 하고 싶을 때, 즉 황궁을 더 짓고 싶을 때, 조정관리들이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서 저지하곤 했다. 그는 연습을 마친 후, 점차 알아차린다. 자신의 독립적인 비자금이 있어야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그가 뭔가를 하고 싶어 하면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한영제는 돈을 긁어모으는데 여러가지 수단을 썼다. 첫번째 방식은 달라고 하는 것이다. 한영제는 대신들에게 말한다. 짐이 개를 기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한영제에게 각양각색의 개를 바쳤다. 한영제는 개에게 대신의 모자를 씌우고, 대신의 허리띠를 채워서, '구관 ( 狗 官 )'을 끌고 서원에서 위풍당당하게 다니며 만족해 했다. 개를 데리고 노는 것이 싫증나자, 한영제는 다시 대신들에게 말한다. 여러분들이 모두 마차를 타고 다니는데, 너무나 개성이 없다. 짐은 여차( 驢 車, 나귀가 끄는 차)를 모는게 좋다. 그러자 여러 대신들은 각양각색의 나귀를 바친다. 그래서 한영제는 네 마리의 나귀가 끄는 수레를 타고 서원을 도라다녔다. 조정의 신하관리들은 황제가 나귀가 끄는 수레를 타는 것 을 보고는 유행을 쫓아 속속 말을 타지 않고, 나귀가 끄는 수레를 몬다. 그래서 경성의 나귀가격이 말과 같아진다. 두번째 방식은 비용징수이다. 한영제는 여러가지 취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돈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대신들에게 내 가 돈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영제는 두번째 수단을 고안해낸다. 당시, 조정의 군형봉국에서는 매년 조정에 많은 재 물을 바쳤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진공된 재물은 대사농이 관리한다. 진헌된 말은 태복이 관리한다. 그러나, 한영제는 백성들이 조정에 바친 재물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골라서 자신의 개인금고에 넣는다. 한영제는 당당한 이유를 댔는데, 바로 "도행비( 導 行 費 )"라는 것이다. 통행 세라는 말이다. 그러나, 한영제는 이렇게 버는 돈은 얼마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한영제와 환관심복은 밤낮으로 고민하여 결국 세번째 수단을 생각해낸다. 파는 것이다. 한영제는 돈버는 방법을 알아냈다. 다른 것을 파는 것보다 관직을 파는 것이 돈을 가장 많이 버는 것이다. 빨리 벌 기도 하고 확실히 벌기도 하는 것이다. 한영제는 천하의 관직에 가격을 붙인다. 조정공경의 고위직이지만 생기는 것이 적은 경우는 개당 1천 만이고, 큰 주군의 각종 직위는 낮으나 생기는 것은 많은 직위는 개당 2,3천만이며, 일반적으로 현은 5,6백만이었다. 당시, 관직을 사려는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그중에 유명한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은 1천만을 들여서 태위를 샀다. 당시의 명사인 최열( 崔 烈 )은 한영제의 유모와 관계가 좋은 바람에 절반으로 깎아서 오백만에 샀다. 그러나 한영제는 조서를 쓰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여러번 대신에게 말한다. 너무 싸게 판 것이 아닐까. 너무 싸게 팔았다. 한영제가 보기에, 오백만에 사도 직을 주는 것은 자신의 규칙 을 깨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관리중에 사마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거록태수를 맡았는데, 관례에 따르면 2천만을 지급해야 했다. 한영 제는 사마직이 정직하고 빈한한 관리라는 말을 듣고 특별히 사마직에게 삼백만을 감해준다. 그 결과 사마직은 조서를 받고는 가슴이 아팠다. 돈도 없을 뿐아니라, 지방으로 가서 백성의 돈을 착취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조정의 명령이 있으니 안갈 수도 없었다. 그는 고민하다가 결국은 음독자살하고 만다. 한영제가 관직을 팔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 당연히 한영제시대에 돈이 있다고 관리가 될 수있는 것은 아니었다. 명청시기에 공개적으로 매관 매직한 것과는 달랐다. 한영제가 관직을 파는 것은 조정의 관리가 임명장을 받으면, 등급과 직무의 수입에 따라 돈을 납부하는 것이다. 이렇 게 되자 전국의 관리는 모두 백성들에게 돈을 착취해서 한영제에게 바치는 일꾼들이 된 것이다. 당연히 이들 탐관오리들은 부임한 후 열배 백배 우려먹는다. 손해보는 장사는 누구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한영제가 이처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긁어모으자, 조정대신들의 불만이 쌓이게 된다. 비록 전임 사도 양사가 진언하다가 파면되었 지만, 많은 대신들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환관집단에서도 진흙 속에서 살아가지만 더럽혀지지 않은 대단한 인물인 여강( 呂 强 )이 나타난다. 한영제( 漢 靈 帝 ): 부자가 되고 싶었던 황제 356

357 여강은 한영제와 관계가 좋았다. 예전에 함께 두씨집단이라는 무서운 집단을 상대했었다. 여강은 그러나 장양, 조충등의 행동에 불만을 가졌 다. 그는 오히려 국가사직, 백성의 생사존망에 관심을 가졌다. 여강은 한영제에게 글을 올린다. 완곡하게 한영제에게 조정의 물건을 자신의 개인금고로 넣지 말 것을 권한다. 한영제가 임의로 조종제도를 고치고, 삼공을 거치지 않고 직접 조정관리를 임명하는 방식에도 불만이 있었다. 여강은 말했다. 한영제의 이런 행위는 "간사한 관리들이 이 익을 보고, 백성이 그 폐해를 입는다"고. 관리에게 돈을 달라고 하면, 관리들은 백성을 더욱 괴롭히고,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고. 그 리고 관리선발제도를 고쳐서 공경을 거치지 않고 직접 임명하고, 또한 모든 관직에 돈을 내도록 요구하는 것은 천하관리들의 강렬한 불만을 가져오고, 일단 천하백성과 전체관리가 군왕을 등지면, 대한강산은 위기의 백척간두에 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영제는 일찌감치 돈을 긁어모으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여강의 건의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한영제는 여강의 상소를 한켠에 밀어놓고 거들떠 보지 않았다. 기실 이것만 해도 여강의 체면을 많이 살려준 것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사도이건 태위이건 분명히 관직을 파직시키고, 가산을 몰수했을 것이다. 한영제( 漢 靈 帝 ): 부자가 되고 싶었던 황제 357

358 병마용갱은 누가 불태웠는가? :19 고고여론몰이는 인심을 얻을 수 없고, 부도덕한 짓이다. 문제는 이렇게 발생해서는 안되는 일이 지금 다시 한번 세상 사람들의 앞에서 버젓 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CCTV와 섬서TV의 현장중계를 통하여, 곧이어 각 매체의 제1면 뉴스를 통하여, 가장 높은 빈도로 계속 전파 확 산시키고 있다. 여론몰이의 강도와 물량에서 사상유례가 없는 일이다. 2012년 6월 10일 신화사기자가 서안에서 보낸 소식에 따르면, 진나라 병마용의 제3차고고발굴사업의 성과가 나타났고, 진나라 병마용갱을 불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서초패왕 항우가 최대 혐의자라는 것 이다. 특히 놀라운 점은, 이번 발굴에서 발견된 많은 수량의 채색도용중 크기가 가장 큰 것은 키가 2.5미터이다. 이 모든 것들은 진시황릉과 진용의 문화, 예술등을 한단계 더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항우가 진병마용갱을 불질렀다는 것과 2.5미터 높이의 도용( 陶 俑 )을 발견했다는 것을 기실 고고학적 여론몰이일 뿐이다. 항우가 진나라 병마 용갱을 불질렀다는 것은 1975년 7월 12일 <인민일보>와 1975년 제11기 <문물>잡지에 이미 보도된 바 있다. 위안중이( 袁 仲 一 )등의 저서에서,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번에 이것을 무슨 중대한 고고학적 발견인 것처럼 대거 선전해대는 것은 전세계의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항우가 진나라 병마용갱을 불지른 적이 있는가? 그들 자신 조차도 긍정적으로 결론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저 "항우가 진용 갱을 불지른 최대 협의자이다"라고 발표한 것이다. 진용갱은 도대체 누가 불지른 것인가?진용 고고발굴팀의 장잔민( 張 占 民 ) 팀자은 제6회 진 용학술토론회에서, 명확하게 설명했다: 진용갱은 항우가 불태운 것이 아니다. 필자는 <진용진상>이라는 책에서, 진용갱을 불태운 것은 주장 ( 周 章 )이 이끄는 농민반란군이라고 말한 바 있다. 2.5미터 높이의 도용에 대하여 신화사 기자인 펑궈( 馮 國 )은 이렇게 보도했다. "기자는 9일 진시황병마용박물관으로부터 들어서 알았다. 현재 속칭 백희용갱( 百 戱 俑 坑 ) 내에서 발견된 20여건의 자세가 각각 다르고 파손이 심각한 백희용에서 사람의 주목을 끄는 것은 머리가 없는 도용 이 아주 커다랗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의 측량에 따르면, 머리가 없는 상태하에서 2.2미터이고, 만일 머리를 덧붙인다면 2.5미터라고 한다. 키 가 야오밍( 姚 明 )보다 크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진거인( 秦 巨 人 )'이라고 부른다." <삼진도시보>의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제는 일곱번째 문화유산일이다. 진병마용의 제3차고고발굴사업성과가 공표되였다. 진나라 병마용을 불패운 것은 서초패왕 항우가 가장 큰 혐의자이다. 이번 발굴에서 발견된 수량이 많지 않은 채색도용중 가장 큰 것은 키가 2.5미터이다." 원래, 이 도용은 머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2.5미터라는 키 도 일부 사람들이 추산한 것일 뿐이다. 2009년 6월 13일부터, 진병마용갱은 정식으로 제3차고고발굴을 시작한다. 그래서 그 사업성과에서 2.5미터 도용이 출토한 위치도 국가문물국 이 규정한 제3차발굴의 사업범위내에 들어가야 한다. 진용관에서 공포한 여러가지 자료들은 모두 이 2.5미터 높이의 도용은 진용갱에서 그들 이 파낸 것이라고 한다. 현재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데, 이것은 사람의 시선을 혼란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끼워팔기식의 방법이다. 원리 이것 은 진나라병마용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도용이다. 병마용제3차발굴의 프로젝트에 끼어들어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2.5미터 높이 의 도용은 진시황릉 봉토의 동남 내외성의 사이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병마용 제3차발굴지점과 직선거리로 2.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그 래서 병마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별도의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2.5미터 높이의 도용이 발견된 소위 백희갱은 진시황릉의 배장갱인가 아닌가? 그거은 초기에 출토된 동거( 銅 車 ), 동마( 銅 馬 )와 마찬가지로, 원래 진정한 의미에서의 고고학적 논증을 거친 것이 아니다. 모두 일부인들이 아무런 근거없이 결정해서 확정시켜 버린 것이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이들 물건은 진시황릉 봉토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진시황의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기실 이런 추론은 반박할 가치조차 없다. 많은 사료기록에 따르면, 역대왕조제왕, 후비, 대신, 심지어 환관은 그들이 묘지를 선택할 때, 모두 수천수만의 다른 병마용갱은 누가 불태웠는가? 358

359 사람의 묘지를 침범하고 훼손시키고 점유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진시황릉의 점유부지 56.25평방킬로미터에 전왕조, 전대의 묘장이 하나도 없으리라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묘지를 서로 쟁탈하려는 현상도 연구하지 않고서, 어떻게 고고발굴업 무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과거, 고고학계에는 하나의 잠규칙이 있었다: 누가 발견한 문화재는 발견한 사람이 성격을 규정짓는다. 그리고 발견한 사람이 공식대변인의 자세로 대외적으로 고고학적 결과물을 발표한다. 그가 어떻게 여론몰이를 하든 간에, 누구든지 이에 반박할 수 없다. 이제는 깨어나야 할 때 가 되었다. 학술이 개방되지 않은 시대에 이것은 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터넷정보시대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고고발굴 은 전문성이 강하다. 반드시 고고학자가 규정, 규범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후속고고학적 논증과 연구업무는 고고학자들 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고고발굴자들이 독점할 일이 아니다. 어떤 학술논증과 학술연구도 국경과 지역과 전문가여부, 권위여부를 따지지 말아 야 한다. 누구든지 발언권을 차지할 수 있어야 한다. 학술의 논증은 자료로 말을 해야 한다. 학술연구는 글만 보아야지, 사람을 보아서는 안 된다. 설마 이런 이치도 그들은 모른단 말인가? 병마용을 불태운 것은 진이세( 秦 二 世 )일까? 최근 이틀동안, 이전에 열기를 내뿜었던 진시황 병마용이 다시 뉴스거리로 떠올랐다. 최대의 뉴스는 병마용이 인위적으로 불태워졌 다는 것이 추가로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누가 불태웠을까? 전 병마용관장인 위안중이( 袁 仲 一 )는 아마도 항우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 병마용이 불에 탄 원인은 간단하지가 않다. 아마도 진이세가 시킨 것일 것이다. 소위 항우가 병마용을 불태웠다는 설의 '이론'근거는 유방이 항우에게 열거한 10대죄상중 네번째 죄상때문이다. <사기.고조말기>(권8) 에 따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초회왕은 진나라땅으로 들어가서 폭력을 행사하거나 강탈하지 말도록 약속했다. 그러나, 항우는 진나 라 궁실을 불태우고, 시황제의 무덤을 파서, 그 재물을 개인적으로 가졌다." 이것은 항후가 불을 냈다는 가장 직접적인 역사증거이다. 다만, 이 말에는 항우가 진시황의 병마용을 불질렀다는 말이 없다. 그 대상 은 단지 '진나라 궁실'일 뿐이다. <사기>에 이런 기재가 있는 외에, <한서.유향전>(권36)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 "항적(항우)는 그 궁실과 건물을 불태웠고, 그곳에 간 사람들이 모두 발굴을 했다." 아래 윗 글을 연결시켜보면, <한서>이 이 기록은 <사서>의 기록보다 지향성이 더욱 강하다. 불태운 것 은 진릉의 지상건축물인 것이다. 그러나, 항우가 불태운 것은 진릉의 지상건축물이지, 항우가 병마용갱을 불태웠다고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재 병마용갱에 서 불태운 흔적이 나타났다고 하여, 항우의 행위로 추측하는 것은 사료에 근거가 부족한 것이다. 한발 물러서서 보더라도, 항우가 병마용갱을 불태우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첫째, 병마용갱은 당시에 묻어두었다. 항우는 사람 을 파견하여 아무런 가치도 없는 진흙을 된 진용을 찾으려 했겠는가? 그것이 합리적인가? 둘째, 진용갱은 면적이 너무 넓다. 현대 고고학으로도 일부분만을 발굴했을 뿐이다. 발견면적은 이미 20870평방미터에 달한다. 항우는 그렇게 넓은 면적에 묻어둔 진용갱을 파내서 불태우고 부쉈다? 가능한 일인가? 만일 원한을 풀기 위해서라고 말하낟면, 진시황의 진릉 지하궁전에서 시신을 꺼내서 푸는 것이 더욱 쉽지 않겠는가? 그래서, 항우가 병마용을 불태웠다는 것은 학술적인 추측으로는 가능하지만, 직접적으로 '최대혐의자'라고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이전에 누군가가 안양의 서고혈한묘를 조조묘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근거가 없는 것이다. 신중하지 못하고, 웃음거리가 될 뿐이 다. 병마용갱은 누가 불태웠는가? 359

360 기실, 진릉부근에서 불에 탄 유적지가 발견되는 것을 항우의 행위로 추측하는 것은 병마용이 발굴된 후에 비로소 출현한 것이 아니 다. 일찌기 1960년 3월, 국무원은 진시황릉을 전국중점문화보호단위로 지정한다. 다음 해 2월, 섬서성 문물관리위원회는 '진릉조사공 작조'를 구성한다. 구성원은 섬서성 문물관리위원회의 왕옥청, 낙충여 그리고 임동현문화관의 팽자건 등 3명이다. 조사조는 진릉의 동, 서, 북 삼면의 내성문을 파서 탐색할 때, 각문의 변에서 기와조각, 붉게 탄 흙 그리고 재등 유물, 유적을 발견한 다. 이런 붉게 탄 흙과 재는 당시 사람이 인위적으로 방화한 것으로 추측했다. 1962년 8월 발표된 <진시황릉조사간보>의 결론에서는 이것이 아마도 항우의 소행일 거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며 이 곳은 지상건축물이고, 간보의 추측은 그래도 어느 정도 이치에 맞기 때 문이다. 왜냐하면, <한서. 유향전>의 기록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병마용갱을 불태운 유적도 항우의 소행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견강부회이다. 그렇다면, 진릉의 지하궁전이 불태워졌다는 말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이 일은 항우와 더욱 관계없다. <한서.유향전>의 기록에 따르면, 이것은 항우가 진릉을 파낸 후에 발생한 일이다: "나중에 목동이 양을 치다가 잃어버렸다. 원래 양은 한 지하동굴로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목동은 횃불을 들고 들어가 양을 찾았는데, 잘못하여 불을 내서 진시황이 관을 태워버렸다." 이 기록이 믿을만한지 아닌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별론으로 하고, 진릉의 지궁을 불태운 것도 항우와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시황의 병마용에는 왜 많은 면적에 불탄 흔적이 남아있을까? 항우는 당연히 혐의자중의 한 명이다. 그외에 또 누가 있 을까? 먼저 병마용갱이 불타고, 파괴된 원인을 찾아보자, 그러면 최대의 혹은 진정한 혐의자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병마용갱을 불태운 것은 최소한 이렇게 3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첫째, 기술에 따른 처리수법. 현재 볼 수 있는 병마용은 굽지 않은 것이다. 즉, 완성품이 아니어서 쉽게 손괴된다. 병마용을 완성품으 로 만들어 더욱 단단하게 하려면 현장에서 불로 구워서 단단하게 만들어야 보존하기 좋다. 이곳에서 굽는 것은 실로 하나의 기술이 다. 고대인들은 묘를 만들 때, 묘의 벽을 더욱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이런 방식으로 처리한 현상들이 있다. 이것은 현대고고발굴에 서도 많이 발견된다. 원시건축에서 일반민간건축에서도 이런 '분소법( 焚 燒 法 )'으로벽을 단단하고, 땅을 견고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둘째, 장례풍속으로 인한 것. 중국은 지금까지도 명기( 冥 器, 무덤에 넣는 물건)을 불태우는 풍속이 있다. 병마용은 일종이 명기이다. 대량의 죄수신분의 장인들이 이 기회에 불만을 풀기 위하여 장인들이 미친 듯이 불사르고 파괴했을 수 있다. 어째든 이 때는 감독관 이 와서 추궁할 리는 없으니까...이것도 좋은 해석이다. 왜 병마용이 인위적으로 파괴된 현상이 있는지에 대한. 셋째, 의외상황이다. 진릉의 공사는 대규모였다. 완공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중국최대의 미완공공사'라고 한다. 진시황은 동순 도 중에 사망한 후 이어서 즉위한 진이세 호해는 당시 아주 격렬했던 정계와 사회의 모순을 잘 처리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조고정변과 진승오광의 난이 발생한다. 진나라제국이 무너지고, 농민군이 함양으로 다가올 때, 진이세는 할 수 없이 장한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 릉을 만들고 있던 많은 범죄자와 노예를 풀어주고, 그들로 임시군대를 만든다. 이렇게 하여 30만 진압대군이 만들어져서 농민군에 대 항한다. 이런 배경하에, 대충대충 진용을 땅 속에 묻는 과정에서 의외의 사건이 발생하여 진용이 불타버렸을 수 있다. 당연히 이상이 가능성은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다. 이런 상황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다. 바로 진이세이다. 진이 세의 동의와 지시가 없으면, 일반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병마용갱은 누가 불태웠는가? 360

361 청의 중국 지배(2) - 호복 변발과 팔기( 八 旗 ) 그리고 녹영( 綠 營 ) :35 청의 중국 지배(2) - 호복변발과 팔기( 八 旗 ) 그리고 녹영( 綠 營 ) 나. 회유( 懷 柔 )와 강경( 强 硬 ) (1) 호복( 胡 服 )과 변발(? 髮 ) 다이곤이 이끄는 청나라군대가 베이징에 입성 후 다른 것은 죄다 명의 유습을 존중하고 그대로 두었으나 복장과 머리털 모양만은 그네들의 방식을 따르라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소위호복변발을 강요하고 이를 명령한 것이다. 이런 명령에 대해서 중국인들은 그들의 복장인 호복( 胡 服 )은 비교적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앞과 옆 머리는 빡빡 깎고 뒷머리만 남겨 길게 땋아 늘어뜨리며, 수염도 콧수염만 좌 우 열 개씩만 남기고 나머지는 깎아 버리는 소 위 체두변발( 剃 頭 髮 )에 대해서는 심한 반발과 물의( 物 議 )가 여기 저기서 일어났다. 의관( 衣 冠 )이 곧 신분을 표시하던 동양적인 전근대사회에서 각 민족은 머리털 또한 매우 중시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무사 중심의 흉노( 剃 頭 )와 선비( 削 頭 ), 그리고 몽골( 開 剃 )이나 여진( 剃 頭 ), 일본( 卷 髮 )에서는 그 형태는 조금씩 다르나 남자들은 모두 머리를 깎았 다. 반면 문신 중심의 중국( 長 髮 과 束 髮 )과 조선( 結 髮 )에서는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내 몸과 터럭과 살갗은( 身 體 髮 膚 )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며( 受 之 父 母 ), 감히 이를 손상하지 않고 잘 보존하는 것이( 不 敢 毁 傷 ) 효도의 시작( 孝 之 始 也 )으로 보았고, 특히 머리털과 수염을 깎는다는 것 은 금기( 禁 忌 ) 중의 금기로 여기고 있었다. 이런 중국인들이 몽골 족이 세운 원의 지배하에서는 개체( 開 剃 ) 변발이라 하여, 앞머리에서부터 뒤 꼭지까지는 빡빡 깎고 좌우 옆 머리만을 남겨 이를 두 가닥으로 길게 땋아 늘여 뜰이는 치욕을 당했다가, 명의 성립과 동시에 머리털도 중국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만주족이 들어와 돼지꼬리같은 이런 머리모양을 강요하자 거세게 반발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래서 다이곤도 이런 명령을 내렸다가 반발이 거세자 20 여일 만에 일단 취소하고, 사태를 관망하다가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 다 시 변발을 강요하였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끈질기게 변발을 강요했는가? 여진 사회에서 머리를 기르는 것은 상중( 喪 中 )임을 표시할 뿐, 머리를 깎는 것 자체를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이 만주시 절부터 투항( 投 降 )이나 귀화( 歸 化 )해온 외국인들에도 어김없이 변발을 강요하였고, 심지어 적( 敵 ) 아( 我 )를 머리털로 구별하였다. 겨울이면 혹독한 추위를 막기 위해 털가죽으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감싸고, 여름이면 이를 벗어 던져 더위를 피하는 원초적인 생활습관 에서,목욕은 고사하고 세수조차 재대로 하지 않는 이들에게 머리털은 귀찮은 존재일 뿐, 다른 아무런 가치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그렇게 만 들었을 것이다. 기후와 풍토가 만주와는 다른 중국에서 굳이 이를 강요한 것은, 복장과 머리털을 포함한 전래의 외형을 그들 스스로 지키고, 이를 중국인들 에게 강요함으로서 중국에 동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원대한 포석도 동시에 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힘에 못 이겨 별 수 없이 머리를깎았다. 그런데 이것이 남쪽으로 올수록 반발은 심해졌는데, 순치 2년(1645) 6월, 강소성 청의 중국 지배(2) - 호복 변발과 팔기( 八 旗 ) 그리고 녹영( 綠 營 ) 361

362 ( 江 蘇 /장수)에 변발 명령이 내렸을 때, 이곳 사람들은 하루만에 모두 머리를깎았다. 그러나 양자강 남쪽 절강성( 折 江 /저장)에 같은 명령이 전달되자, 지식인을 중심으로 일반시민, 농민들이 가세하여 들고일어나 어느 변란( 變 亂 )때 보다도 강경하게 반항하였다. 이들은 머리를 깎기 위해 내려온 만주 인들을 몰아내고 일 년 간은 머리털을 지켰다. 그러나 조직력이 없었던 그들로서는 일단 머리털을지키 는데 안도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않고 있다가, 결국 저항력은 무너지고 차례대로 머리는 깎였다. 이래서 3년 후에는 전 중국인들 이 체두변발과 호복 차림으로 거리를 메웠다. 물론 여기에도 예외는 있었다. 앞서 김지준이 제시한 열 가지 조건 중에 도사나 승려 등은 청의 관습에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조항이 적용되 고, 이들은 호복과 변발에서 제외되자, 자존심 강한 학자나 지사들 중에는 출가하여 이를 피하고 지조( 志 操 )를 지켰다. 그런데 풍속이나 유행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기존의 제도에서 이질적인 문화가 유입되면 몸에 박힌 가시를 뽑아 내야 하듯 처음에는 완강 이 이를 거부한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이질문화에 몰입되고 만다. 이것을 원래대로 복원하려 면 이때는 다시 복원 자체를 거부한다. 1851년 청조에 반기를 들고 태평천국을 세웠던 홍수전( 洪 秀 全 )은 변발을 버리고 장발로 돌아가 이상국가를 세우고자 했으나 실패하였고,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무너지고 변발을 금지시키자 이번에는 그에 대한 반발이 다시 일어났었다. 머리털을 두고 시끄러운 것은 예나 이제나 우리들에게도 다를 것이 없었다. 개화기 우리나라에도 을미사변 후 성립된 제 4차 김홍집내각에서는 음력을 버리고 양력을 채택하여, 1895년 음력 11월 17일을 1896년 1월1일 로 정하고, 연호를 세워 건양( 建 陽 ) 원년이라 했다. 동시에 임금 고종이 솔선하여 머리를 깎은 후, 당시 제 4차 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 유길준( 兪 吉 濬 )의 고시로 이른바 단발령을 발표하였고, 국왕을 비롯한 관리들의 복장도 바꾸었다. 그리고는 관리들이 가위를 들고 길거리에 나서서 상투머리를 보는 데로 잘랐다. 그러나 민비시해로 반일 감정이 격화되어 있었고, 음력의 폐지와 단발령 또한 일본의 간계라 하여 유생들을 중심으로 정부의 이런 정책에 심 하게 반발하다가 결국 의병으로까지 확대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서 대다수의 친위대가 지방으로 내려갔고, 임금 고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 끼고 불안한 심기를 감주지못했다. 이런 틈새를 비집고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이범진 이완용 등 친러파는 임금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게 하였는데( 俄 館 播 遷 ) 이 과정에 서 김홍집과 어윤중은 피살되고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친러 내각이 구성되고 다시 이들의 세상이 되었다. 대한제국이 문을 닫고 일제 강점기에 들어섰을 때, 대다수 사람들이 상투를 잘랐고, 자격 면허를 얻어 머리를 전문적으로 손질해 주는 이발 사( 理 髮 師 )가 등장하고, 이발관도 수없이 생겨났으며, 바리캉이라는 프랑스제 머리 깎기 기구도 들어와 서양식 머리문화가 움트기 시작하였 다. 그러다가 1941년 12월, 일본내각총리 및 육군대신을 겸했던 동조영기( 東 條 英 機 / 도조히데키)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대동아공영권을 부르 짖으며 머리를 깎고 설치자 일본조야가 머리를 깎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그 여파가 조선에까지 닥쳐 남자들은 노유( 老 幼 )를 막론하고 모두 머리를 빡빡 깎았다. 광복 후 어른들은 상투머리 아닌 서양식 머리모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중 고등학교 학생들에게는 계속 삭발을 강요하였고, 헌법에 신체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사들은 학생들의 머리가 조금만 길어도 가위를 들고 서슴없이 잘랐다. 이를 두고 학부모나 그 말 많은 언론조차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아예 입을 봉했다. 그래서 이들이 교문을 떠나면 대부분 우선 머리부터 길게 길렀다. 1970년대, 젊은이들의 머리모양이 유행 따라 장발이 주류를 이루자, 이것이 남에게 혐오감을 준다 하여 거리에서 경찰이 이들을 단속하고, 단 발( 短 髮 )을 지시했다가, 이에 응하지 않으면 경범죄로 처벌하였다. 청의 중국 지배(2) - 호복 변발과 팔기( 八 旗 ) 그리고 녹영( 綠 營 ) 362

363 1980년대 중 고등학생들에게도 드디어 두발과 교복 자율화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자율과 자유는 다르다는 억지 논리가 등장하고, 논란끝에 교모( 校 帽 )는 사라졌지만, 교복( 校 服 )은 부활되었고, 두발만은 상대적으로 약해지기는 했으나 학교마다 단속 기준을 정하고 그 간섭은 어떤 형태로든 지금까지 이어지고있다. 물론 여기에는 힘없는 학교가 이런 일방적이고 자의적인 간섭을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고, 청소년보호라는 명분 아래 사회가 합의 하고 이를 학교에 압력을 가하기 때문인데, 지금도 염색된 노랑머리 청소년을 바라보는 많은 성인들의 시각으로는 그 자체가 불량일 뿐 개성 있는 모습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작금의 실정이고 보면, 이런 가치관이 사라지지 않는 한 간섭은 앞으로도 계속될것이다. (2) 팔기( 八 旗 )와 녹영( 綠 營 ) 청나라가 명의 잔존 세력을 토벌하는데는 홍승주와 오삼계를 비롯한 중국인 장졸들을 앞장세우고, 그 뒤를 만주의 팔기 병들이 따르면서 감 시와 독전( 督 戰 )을 병행하여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청나라 군사의 핵심 정예( 精 銳 )는 기병( 騎 兵 )들이었고, 이들이 사막이나 초원지대에서는 십분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중국의 본토에 들어서면 사정이 확연히 달라진다. 산과 바다, 강과 호수가 많은 중국 지형에서는 우선 산악전( 山 岳 戰 )과 수상전( 水 上 戰 ), 그리고 장기전( 長 期 戰 )을 기본으로 치러야 하고, 이런 전투에서 기병의 위력은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날씨가 무덥고 늪과 호수가 많은 남쪽 지방일수록 청나라 군사들은 맥을 못썼다. 청나라는 이런 고민을 풀기 위해 중국 전래의 전투방 법을 채택하고, 명나라의 군사 중 희망자를 따로 모아 이들의 깃발을 녹색( 綠 色 )으로 하여 한인팔기( 漢 人 八 旗 )와 구분하고, 깃발의 색깔에 따 라 녹영( 綠 營 )이라 불렀다. 팔기( 八 旗 )란 글자 그대로 여덟 개의 깃발을 말한다. 황 백 홍 남색의 4색 깃발과, 각 색의 깃발에 태를 둘러 다시 네 개를 더 만들어 모 두 여덟 개로 한 것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앞 글에서 이야기 한데로 이것은 원래 여러 부락이 공동으로 산을 에워싸고 몰이 사냥을 할 때 만든 진형( 陣 形 )을 누르하치가 병농일치( 兵 農 一 致 )의 행정 군사제도로 변형 발전시킨 것이다. 그들의 몰이 사냥 방법이란 대략 이런 것이다. 짐승이 달아날 수 있는 길목에는 황색기를 든 추장이하 부락민이 자리하여 미리 지키고, 그 황색기를 중심으로 남색기를 든 부락민이 좌우로 갈려 타원형으로 진형을 이루고 산을 에워싼다. 여기에 홍색기와 백색기를 든 부락민들은 포위망 한가운데서 시작하여 각각 양쪽으로 포위망을 좁혀 짐승들을 황색기 있은 곳으로 몰아내어 잡는 방법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백색기와 홍색기는 가운데서부터 몰이 역할을, 남색기는 옆으로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포위 역할을, 황색기는 한 곳으로 몰 려온 짐승들을 포획( 捕 獲 )하는 역할을 각각 나누어 맡았는데, 이런 집단 사냥 기술을 군대의 편제와 전투에 응용했다는 것이다. 1616년, 누르하치는 만주족에게 국민개병제( 國 民 皆 兵 制 )를 실시하고, 모든 씨족을 팔기( 八 旗 )에 소속시키고, 기( 旗 )를 구사(gusa/ 固 山 )라 불 렀고,그 우두머리를 구사에젠(Ejen/ 額 眞 )이라 하여 그 일족을 배치했는데 에젠이란 우두머리라는 뜻이고 훗일 도통이라고도 불렀다. 각 구사(gusa/ 固 山 / 旗 )에는 5 갑라( 甲 喇 /잘란/무리라는뜻)를 두었고, 각 갑라는 5우록( 牛?/니루/화살이라는 뜻)으로 나뉘고 각 우록에는3 00명의 장정이 속하게 하였다. 따라서 하나의 gusa( 旗 )에서 전투에 동원될 수 있는장정은 7500 명에 달하였고, 이들 장정들을 기인( 旗 人 )이 라 하였다. 이들을 전부합하면 6만 명이 된다. 처음에는 만주인들 만으로 팔기를 만들었다가 1635년 몽골인 들로 구성된 몽골팔기가 1642년에는 한인( 漢 人 )들로 구성된 한인팔기가 만들어 져, 만주8기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지도록 하였는데, 이로써 8기의 총 병력은 18만명이 되었다. 다이곤이 산해관을 넘어 중국에 들어 왔을 때 팔기병의 총 병력은 10만이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베이징에 들어와서 일반인들을 성안에서 몰 아내고 궁궐 수비와 수도 치안을 맡으면서 천하를 장악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그 후 수도에 주둔하면서 중앙을 수비했던 부대를 금려( 禁 旅 ) 팔기라 하였고, 지방의 요소에 배치된 부대를 주방( 駐 防 ) 팔기라 하였는데, 팔 청의 중국 지배(2) - 호복 변발과 팔기( 八 旗 ) 그리고 녹영( 綠 營 ) 363

364 기에 소속된 기인( 旗 人 )들은 기지를 포함하여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고, 그들의지위가 자손에게 세습되어 특이한 무인 신분으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저 김지준이란 자가 기인( 旗 人 )은 상업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법을 제정했을 때 설마 자기들이 장사를 해서 먹고 살아야 된다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웃어 넘기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 사회는 안정되고 역할은 축소되어 이들의 생활이 어렵게 되었을 때, 그 후손들은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보복인가를 알 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조법( 祖 法 /조상이 만든 법)이라는 족쇄가 이들은 단단히 묶고 있었기 때문이다. 녹영( 綠 營 )은 명나라의 군대로 있었던 사람들이 청이 중국을 지배하자 지원하여 다시 청나라 군대로 이름만 바꾼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 고 있었기 때문에 부대의 편제나 편성도 명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다. 청은 60만에 이르는 이들 녹영을 전국 요소에 배치하고 팔기로 하여금 이를 감시하게 하였다. 반청세력과 잔적( 殘 賊 )을 소탕하기 위해 군대 를 파병했을 때,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녹영을 앞세우고 그 뒤를 팔기가 따르게 하였다. 그 후로도 강남지방 일대에는 해적을 비롯한 반청세력들이 고개를 숙이지 않고 계속 나타나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유력한 한인( 漢 人 ) 출신의 군벌들을 왕으로 세워 이곳을 다스리게 했는데, 이런 군벌로서 왕이 되었던 사람이 오삼계와 상가희( 尙 可 喜 ), 그리고 경중명( 耿 仲 明 ) 등 이었 다. 이들을 흔히 3번( 三 藩 )이라 불렀는데, 결국 강희제( 康 熙 帝 /1661 ~ 1722) 때 난을 일으켜 청나라에 대항했다가 모두 토벌되었는데 이를 3 번의 난(1673 ~ 81)이라고 한다. (3) 젊은 황제 순치제의 순애보( 殉 愛 譜 ) 불과 여섯 살 나이에 황량한 만주 벌판에서 황제로 즉위한 순치제는 철저하게 유학교육을 받고 자랐다. 자금성에 들어와서도 그 주위에는 이름 있는 학자들은 불러 모으고 이들과 담론을 즐기면서 더욱 유가적인 교양을 쌓고 있었다. 황제라고는 하지만 실권은 그의 삼촌이자 섭정( 攝 政 )인 다이 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황제로서 치세한 기간은 다 이곤이 사망한 1653년부터 61년까지 햇수로 불과 8년 남짓하 다. 그런데 그가 다이곤에게 실권을 맡기고 한 창 유가적인 교양 을 쌓고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겼다. 몽골 출신의 순치제의 어머니, 즉 태종 홍타이지의 황후는 이 때 황태후가 되어 있었는데, 이 황태후가 그의 시동생이자 태 종의 동생이며, 순치제의 숙부( 叔 父 )인 섭정( 攝 政 ) 다이곤과 재혼을 하게 된 것이다. 형이 죽으면 그 형수를 동생이 아내로 맞이하는 이른바 형사 처수( 兄 死 妻 嫂 )가 만( 滿 ) 몽( 蒙 )사회에서는 전래된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삼국지위지 동이전 부여조에도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으니 이는 흉노와 같은 풍속"( 兄 死 妻 嫂 匈 奴 同 俗 )이라는 기 록이 있는 것만 보더라도 이것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그들의 풍속이며, 이때까지 그 풍속은 지켜지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 될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 사회의 풍속이고, 이런 일을 생전처음 보게 된 중국 관료들은 밝은 대낮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속으로는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는 그들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입가에 흘리면서 연신 축하한다고 다이곤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이들 중국인들이 더욱 놀랬던 것은, 비록 다이곤이 섭정으로서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는 있었지만 서열 상 황태후보다는 분명히 몇 단 계 아래인 신하의 신분이다. 황태후가 어떻게 신하에 해당하는 사람과 내리 혼인( 降 婚 )을 할 수 있는 가라는 점은 호기심 이상으로 이들을 청의 중국 지배(2) - 호복 변발과 팔기( 八 旗 ) 그리고 녹영( 綠 營 ) 364

365 더욱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나름대로 철이 들었고, 유가적인 교육으로 이미 중국적인 사고가 몸에 벤 순치제로서는 이를 매우 부끄럽게 생각 하였다. 여진족은 몽골 족 이 모든 면에서 그들보다는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몽골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 서 청나라 왕실에서는 몽골 여자를 황후로 삼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로 인해서 순치제는 몽골출신의 어머니가 싫었고, 숙부에게 혐오감( 嫌 惡 感 )을 갖는 동시에 몽골 족까지 밉게 보았다. 순치제의 상심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무분별한 정사( 情 邪 )를 막고 군주독재 권을 확립하기 위해 궁중 법도를 새로이 마련하여 조법으로 발표하였 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런것이다. 중국의 관습상 일부일처는 필부들에게나 해당되는 부끄러운 것이고, 남자가 많은 처첩을 거느리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진나라 시황제가 아방궁을 짓고 3천 궁녀를 거느리면서, 궁녀들 방 앞에는 양의 먹이를 두게하고, 양을 몰고 다니다가 먹이를 먹는 방에 들어가 동침하고 그 정표를 남겼다고하는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황제가 수 많은 비빈을 거느리고 그 몸에서 수 많은 자녀가 태어난 것은 역대 제왕들의 공통적인 사실이다. 이것이 청대에 이르러, 황제의 침실을 관장하는 경사방태감( 敬 事 房 太 監 )이란 환관이 저녁 수라가 끝날 무렵이면 크다란 은쟁반에 황제가 총 애하는 비빈의 이름이 적힌 녹두패( 錄 頭 牌 )를 올리면 황제가 이를 보고 생각이 없으면 그냥 물리고, 그중 하나를 뒤집어 놓으면, 그 날밤의 행운(?)은 그 녹두패의 주인공이 차지하게 되는데, 엄격하게 시간이 정해지고,.. 일이 끝난 즉시 자기 처소로 돌아가야 한다. 이때 경사방태감은 황제에게 수태( 受 胎 ) 여부를 물어보고 유념하라고 하면, 대장에 성명과 연월일시를 상세히 기록하여 훗일 증거를 남기고 그렇지 않을 때는 출산을 하지 못하게 조치했다. 평소 황제가 후궁의 처소를 찾아도 황후의 승인이 없으면 그 후궁은 황제에게 절대로 문을 열어 주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해서 아들이 태어나면 적서( 嫡 庶 )의 차별없이 태어난 순서에 따라 제1 아고(황자) 제2 아고 하는 식으로 번호를 매겨 아고방이라는 곳에 같이 수용시키고 아무 차별없이 교육을 받게 한 후 그 중 가장 뛰어난 아고에게 다음 제위를 계승케 했다. 이런 것이 순치제가 만든 조법이다. 로맨틱한 장면이라고는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고, 씨받이 내지는 씨내리가 남녀간 사랑의 전부라고 할 수있는. 이런 무미 건조한 법을 만들어 후손들에게는 꼼짝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막상 자신은 한 여인을 사랑하다가 24세의 젊은 나 이에 요절했다면, 이를 무엇으로 설명해야 될지? 년 다이곤이 죽자, 죽은 그를 벌( 罰 ) 주고, 몽골출신의 황후를 폐위시킨다고 선언하여 신하들은 다시 한번 깜짝 놀래게 만들었다. 주위에 서 아무리 간해도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관습상 몽골 여자를 다시 황후로세웠지만, 새 황후 역시 버릇없다는 핑계로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이렇게 상심 속에 시름없이 지나던 이 젊은 황제 앞에 생명을 다 바쳐 사랑할 만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가 바로 동귀비( 董 貴 妃 )라고 불렀던, 기록상으로는 만주출신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항간에 떠다니는 소문으로는 양주( 陽 州 /양저우)에서 이름을 떨치던 어느 부호의 애첩 동소완( 董 小 宛 )이라는 미모의 여인이, 양주가 변 란으로시끄러울 때, 포로가 되어 베이징으로 왔다가 어떤 연줄을 따라 궁중에 들어가게 되었고, 젊은 황제를 사로잡았고 한다. 이 젊은 황제는 동귀비가 옆에 없으면 수저도 들지않을 정도로 사랑하고 아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동귀비가 순치 17년(1660) 8월, 병을 얻어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다. 비탄에 잠긴 황제가 이번에는 죽은 동귀비를 황후로 봉한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주위에서 부당함을 간곡하게 아뢰자 인생무상을 느끼고 자금 성의 황제자리를 팽개치고 오대산으로 들어가 죽치고 앉아서 아무리 신하들이권해도 나오지를 않자 할 수 없이 황제가 사망하였다고 발표하 고 어린 그의 아들을 다음 황제로 세워 이를 수습하였다. 이런 것은 다만 민간에서 쉬쉬하는 가운데 소문으로만 전해졌을 뿐, 공식 기록에는 순치 18년(1661) 정월 초이튿날, 황제가 마마를 앓는다고 알려지고, 곧 이어 24세의 젊은 황제의 죽음이 발표되었다. 청의 중국 지배(2) - 호복 변발과 팔기( 八 旗 ) 그리고 녹영( 綠 營 ) 365

366 곧 유조( 遺 詔 )가 발표되고 순치제의 두 아들 가운데 둘째인 여덟 살의 현엽( 玄 燁 )이 청의 4대 황제로서 뒤를 이었는데 이가 희대의 명군 성 조 강희제( 聖 祖 康 熙 帝 / 1661 ~ 1722)다. 청의 중국 지배(2) - 호복 변발과 팔기( 八 旗 ) 그리고 녹영( 綠 營 ) 366

367 청의 중국 지배(1) - 이한제한( 以 漢 制 漢 )과 한간( 漢 奸 ), 섭정 다이곤( 多 爾 袞 ) :33 청의 중국 지배(1) - 이한제한( 以 漢 制 漢 )과 한간( 漢 奸 ),섭정 다이곤( 多 爾 袞 ) 가. 자금성의 새 주인 (1) 산해관( 山 海 關 )을 넘어서 중원으로 청태종이 급사하자 후계 문제를두고 다소간의 마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드러내지 않고 태종의 아홉번째 아들복림( 福 臨 )을 세워 연호를 순치( 順 治 )로 개원했는데, 이가 청나라 3 대 황제인 세조순치제(1643 ~ 61)다. 이때 순치제의 나이는 겨우 여섯 살(1638 ~ 1661),따라서 최 대 실력자인 예친왕( 睿 親 王 ) 다이곤( 多 爾 袞 /도르곤 / 누르하 치의 제14자)과정친왕( 鄭 親 王 ) 제이합랑( 濟 爾 哈 朗 / 지르하란 / 누르하치의 동생인 小 酋 =슈르가치의제6자)이 보정왕( 輔 政 王 )이 되어 어린 황제를 보좌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이곤(도르곤은 곰을 뜻이라고 함)은 사실상섭정( 攝 政 )으로 정치를 전단 하였고, 그에 의해서 한인( 漢 人 )들을 앞 세워 베이징에들어가고, 중국을 지배하는데 성공하였다. 중국이 변방의 이민족을 지배 내지는 복속시키는데사용했던 전형적인 방법으로 기미( 羈?)정책이라는 것과 이이제이( 以 夷 制 夷 )라는두 가지 수법이 있었다. 기미( 羈?)란 말의 재갈과 소의 코뚜레를 말하는데,재갈 물린 말이나 코를 꾀인 소가 주인이 고삐를 당기는대로 움직이듯이, 종주권( 宗 主 權 ) 이라는고삐만 그들이 쥐고 있으면,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멋대로 풀어두고 자치( 自 治 )를허용한다 해도 멀리 달아나지는 못한다는 것으로서 우리나라와 같은 농경사회에 대해서주로 이런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복잡한 유목사회에서는 이런 것이 잘 통하지않는다. 그래서 그들 서로간에 물고 뜯고, 할퀴고 험집 내도록 교묘히 조정하여 힘을뺀 후, 정복하거나 복속시키는 것이 이이제이( 以 夷 制 夷 )라는 술법이다. 몽골이나만주를 다스리기 위해서 주로 이런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런데 이런 낡은 중국의 전통이 이때 와서는 역으로이한제한( 以 漢 制 漢 ) 곧, 중국인으로서 중국인을 제압한다는 방침을 청나라는 세웠고,이 수법이 적중하여 이들은 쉽게 중국으로 들어가 중국을 지배 복속시키는데 성공하였다.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만든 덫에 자기가 걸려던 셈이다. 역시 알 수 없는것은 세상 일이다. 명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은 청나라 조정에도 빠르게전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다이곤은 모든 병력을 서쪽으로 옮겨 산해관 동쪽 1백km 지점에 위치한 영원( 寧 遠 /닝위안)까지 나갔다. 이곳은 1626년 누르하치가 산해관을넘으려고 나갔다가 원숭환의 대포 세례를 받고 중상을 당한 것이 원인이 되어 결국은목숨을 잃게 된 곳이다. 이때 다이곤의 휘하에는 만주 8기와 몽골 8기, 그리고중국인들로 구성된 한인 8기가 있었으며 참모로는 포로가 되었다가 귀순한 명나라장수 홍승주가 따르고 있었다. 만주에서 중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베이징 동쪽300 km 지점에 위치한 산해관( 山 海 關 )을 넘어야 한다. 산해관은 중국 장성( 長 城 )의동쪽 끝 에 해당하며, 글자 그대로 산과 바다가 잇 대어 있는 천험( 天 險 )의 요새( 要 塞 )다. 일찍이 청 태종도 산해관 돌파를 여러 번 시도했으나번번히 실패했었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반년이 겨우 지난 1644년 4월, 다이곤의청나라 군대는 산해관을 넘어 5월 2일에는 중국인들이 길에 향을 사르고 영접하는가운데 당당히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청나라 군대의 뒤를 따라 체두변발( 剃 頭? 髮 )이라는기절초풍할 오랑캐의 머리 모습으로 변신한 오삼계 이하 명나라의 중국 장졸들이뒤 를 따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연출이 가능했을까? 여기에는 이런 사연들이 전해지고있다. (2) 자금성의 새 주인 1644년 3월,18일, 이자성의 유적집단이베이징을 점령했을 때 오삼계( 吳 三 桂 )가 이끄는 명의 최정예부는 산해관에서 더 동 쪽으로나아가 청과 대치하고 있었다. 오삼계가 이곳을 지키고 있는 한 청나라가 이를 쳐부수고다 청의 중국 지배(1) - 이한제한( 以 漢 制 漢 )과 한간( 漢 奸 ), 섭정 다이곤( 多 爾 袞 ) 367

368 시 산해관을 넘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일이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자성의침입을 받게 된 명나라 조정에서는 너무도 급한 나머지 오삼계에게 베이 징으로 돌아와아자성을 막으라는 명령을 보냈다. 이런 명령을 받은 오삼계는 베이징을 향해 군대를돌렸으나, 막상 그가 산해관에 이르렀을 때, 명나라 최후의 황제 의종 ( 毅 宗 ) 숭정제는이미 자결한 후였다. 황제라는 구심점이 없는 마당에서 오삼계의 군대는산해관에 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난처한 입장에 처한 그들에 게 이자성은오삼계의 아버지 오양( 吳 襄 )을 인질로 붙잡아 두 고, 다시 은( 銀 ) 4만냥을 미끼로오양( 吳 襄 )을 시켜서 아들의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를 쓰게 했고, 아버지의 편지를받은 오삼계는 투항을 결심하고 산해관을 떠나 베이징으로 향했다. 그런데 어찌 된영문 인지 막상 베이징 근교에 다다르자 오삼계는 마음을 바꾸고 다시 산해관으로되돌아 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적으로 싸웠던 청나라에 원조를 청하는이런 편지를 보냈다. "우리의 황제는 유적 이자성에게 살해되었다. 나는 이원수를 갚 기 위해 베이징으로 가야 하는데, 귀국의 병력을 빌렸으면 한다..." 이런 제의를 받은 다이곤은 뛸 듯이 기뻤다. 면도칼보다 예리하다는 그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그래서 그는 "인의( 仁 義 )의군대를 동원 하여 유적을 멸하고, 중국의 백성을 구원한다"는 명분을 세우고당장 군대를 이동하여, 4월 5일, 그렇게도 염원했던 산해관에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었다. 한편 베이징의 이자성은 오삼계의 군대가 산해관으로되돌아 갔다는 소리를 듣고 친히 군대를 이끌고 오삼계를 잡기 위해 산해관으로 나갔 다.4월 22일, 드디어 이자성과 오삼계의 군대가 정면 충돌하여 전황이 급박할 때, 만주의8기군이 이자성 진영으로 질풍처럼 달려 들었다. 만주 기병 출현에 혼비백산된 이자성은 베이징으로줄행랑 쳤다가 오삼계의 아버지를 죽이고, 약탈한 보물들은 시안( 西 安 )으로 실어보낸 후, 4 월 29일 그의 7대조상까지 황제와 황후로 높이고는 자금성을 불지른 후서쪽으로 달아났다. 이렇게 해서 5월 2일, 쉽게 베이징에 들어온 다이곤은약탈을 엄격히 금지시키고 비명에 죽은 황제(숭정제)의 장례를 정중히 치렀다. 그리고방 대한 군사비에 충당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각종 세금을 폐지하고 지세( 地 稅 )에 대해서도우선 1/3을 탕감한다고 발표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이전에 있었던 일체의 잘잘못은 묻지 않는다고발표하고, 명나라의 제도와 관료들 대부분을 그대로 수용하였으며, 과거를 열어 성리학 의정통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지식인들의 동참을 유도하였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것은이자성이라는 유적이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결코 아 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주인들이 이리 떼처럼 사나운 약탈자가 아니라예절과 도덕을 중시하는 빼어난 민족으로써, 어려움에 처한 중국의 인민들을 보살피 고도와주는 해방군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한 것이다. 한편 다이곤은 명나라의 멸망을 기정 사실화하고,청나라가 정당하게 그 뒤를 이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명사( 明 史 )의 편찬을 서둘렀다.전조 ( 前 朝 )의 역사를 그 다음 왕조가 쓰게 됨으로서 정통성을 인정받고 이어가는것이 중국의 관례다. 따라서 명나라의 역사를 청나라가 쓴다는 것은 청나라가 중국지배에정통성을 확보하겠다는 주도면밀한 계획까지 다이곤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1636년, 조선에서는 병자호란이라는 홍역을치렀고, 이듬해인 1637년 볼모로 잡혀 갔던 소현세자가 다이곤을 따라서 산해관을넘 어 북경까지 갔었는데, 소현세자는 이때의 사실들을 소상하게 적어서 본국에 보냈다.(소현세자가 보냈다는 글은 본문 말미에 실었음) 국내 외가 어느 정도 안정된 1644년 9월, 다이곤은선양( 瀋 陽 )으로부터 어린 순치제를 베이징으로 모셔와 제법 차가운 가을비가 내리는가운데 다시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하였고, 비에 흠뻑 젖은 명나라의 관료들은 만세를부르면서 새로운 자금성의 주인을 마지하였다. 이미 선양에서 즉위식을 올렸던 순치제가 다시 베이징의자금성에서 즉위식을 올렸다는 것은 청나라가 자금성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다시만 천하에 알리기 위해서다. 청나라는 몽골족이 세웠던 원나라와는 달리 서방세계와의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중국의 전통문화를 존중하고 그 수호자임을자 처하고, 명나라의 제도는 대부분 그대로 계승시켰으며, 관료들의 사회에서도 같은수의 만주인들을 복수로 채용하여 만 한 병용 정책을 추진 하였을 뿐이다. 이를 두고 후세의 사가( 史 家 )들은 촌 떼기 만주족을데릴사위로 맞아들여 기울어져 가던 중국이라는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수 천년간 이어온 중화라는 전래의 중국적인 자존심이 여기서단절된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어려움에 처해도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다음 기회를끈질기게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몸에 베어 있었다. (3) 한간( 漢 奸 )과 이한제한( 以 漢 制 漢 ) 중국에서는왕조의 고체를 혁명이라고 하고, 선양( 禪 讓 )이라는 형식을 빌리는 것이 통례지만실제에 있어서는 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유혈의 대가를 치루고서야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단순한 왕조교체의 범주를 넘어서 이민족인,그것도 오 랑캐라고 멸시했던 만주족이 큰 무리없이 이런 혁명에 성공 할 수 있었던것은 중국인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청의 중국 지배(1) - 이한제한( 以 漢 制 漢 )과 한간( 漢 奸 ), 섭정 다이곤( 多 爾 袞 ) 368

369 중국에서 적에게 빌붙어 나라를 그르치게 하는 매국노( 賣 國 奴 )를한간( 漢 奸 )이라 한다.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았던 명나라 가 망할 당시, 막상 숭정제를따라 자결한 사람은 환관 한 사 람뿐이었으나, 이자성이 자금성을 점거했을 때 궁녀200 여명 을 비롯해서 40 여명의 관료들이 자결하여 고고한 지조를 지 키고자 했다. 그러나 황후의 친정 아버지를 비롯해서 수 많은 관료들은이 자성 부하들의 흙 발에 체이고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얼굴 에는 비굴한 웃음 기를머금고 목숨만은 보전코자 했으나 많 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만주족이들어오자 이들을 마지하기 위해 향을 사르고, 충성을 맹세하고, 만세를 불렀다. 어떻게 보면 이들 모두가 한간( 漢 奸 )들이다. 이런형편없는 무리들을 만주족은 돈이면 만사가 해결된다고 믿고 노예처럼 부릴 수 있었다.그러 나 여기에 빠져든다는 것은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과 같아서 세월이 지나고 서로가흉허물 없이 지내게 되었을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진정한 애국의 길을 아는 사람은혁명 초기의 서슬 푸른 예봉( 銳 鋒 )은 일단 피하고 본다는 음흉하고도 간사한 계산을많은 중국인들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 사회가 안정되고 정의가 바로 서게 되면,이들은 고집을 부리기 시작한다. 아무리 달래고 얼래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이런것을 노회( 老 獪 )라고 하는데, 그래서 청나라가 망했을 때 만주족은 소리없이 사라진반면 중국은 다시 중국으로 남아 있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한간으로 매도된 사람이 오삼계와오삼계의 옛 상관이었던 홍승주, 그리고 명나라의 병부좌시랑으로 있다가 청조에서다시 내각 수보를 지낸 김지준( 金 之 俊 ) 등을 꼽을 수 있다. 오삼계가 조국을 배반하고 청나라에 붙게 된 사실에대해서, 진진원( 陳 圓 圓 )이라는 기생과의 사랑 때문이라고도 하고, 옛 상관이었던홍승주의 권유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특히 기생과의 사랑 이야기는 후대에 윤색가필되어흥미로운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애첩 진랑( 陳 娘 )을 베이징에 두고 전선으로 떠났던오삼계는 오매불망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항복을 권유하는 아버지의편지를 받고 귀순하기로 결심한 오삼계가 베이징 근교에 이르렀을 때, 그렇게도 보곺았던진랑이 이미 이자성의 사람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과 충격을받고 산해관으로 되돌아 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크게는 나라의 운명이, 작게는 가족의 안위가달려있었고, 여기에 각기 사정이 다른 많은 부하를 거느린 상황에서 개인적인 사랑놀음 하나만으로 그렇게 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뭇 사나이들의 애간장을녹였던 진진원이라는 기생이 오삼계의 애첩( 愛 妾 )이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홍승주라는 사람은 복건성( 福 建 省 /푸젠) 출신의 문관이다.그러면서도 뛰어난 군략가로서 이자성 토벌에 큰 공을 세운 것이 인정되어 요동지 방의총수로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당시의 요동 총수란 전쟁에 이기면 시기를 받아목숨을 잃고, 지면 문책을 받아 처형되는 죽음의 자 리였다. 홍승주 역시 오삼계 등 부하 장졸을 이끌고 산해관동쪽에서 청 태종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고, 청 태종은 그를 지나칠 정도로 우대하여마음 을 돌리는데 성공하였다고 하는데, 이에 관한 일화도 수 없이 전해 오고 있지만그 진위를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는 반청세력의 토벌에 앞장 서고 청조를 위해서 많은전공을 세웠다. 김지준은 명나라에 출사했다가, 다시 이자성에게 벼슬하고,그러다가 청이 베이징에 들어 왔을 때 다이곤에게 10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그 조 건이받아들여지면 기꺼이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기용되고 내각의 수보가 된 사람이다. 이가 제시했다는 열 가지 조건이란 그야 말로 당시로서는별 소용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이런 것들이었다. ⑴ 남자는 청나라 조정에 따르지만 여자는 따르지 않는다. ⑵ 산 사람은 따르되 죽은 사람은 따르지 않는다. ⑶ 남편은 따르되 아내는 따르지 않는다. ⑷ 관료는 따르되 아전은 따르지 않는다. ⑸ 노인은 따르되 젊은이는 따르지 않는다. ⑹ 유학자는 따르되 승려나 도사는 따르지 않는다. ⑺ 기생은 따르되 광대나 배우는 따르지 않는다. ⑻ 벼슬길은 따르되 혼인은 그전대로 한다. ⑼ 나라 이름은 따르되 벼슬 이름은 그전대로 한다. ⑽ 부역이나 납세는 따르되 말이나 글은 그전대로 둔다... 얼핏 보기에 이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보여질수 있다 그래서 다이곤은 이를 기꺼이 승낙하고 그를 내각 수보로 임명했다. 내각의수보 가 된 김지준은 다시 왕공은 수도를 벗어날 수 없고, 기인( 旗 人 )은 상업에 종사할수 없으며, 환관들이 궁성 밖으로 나오면 참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만들었다. 이런것이 당시로서는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세월이 지나고 나서 보면 여기에는 엄청난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열 가지를 다시 요약해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청나라 조정에 따르는 것은 남자에 한하며, 그것도 가장이나 지식계층 및 고급관리등 책임 있는 사람들은 한간이 되어 기꺼이 따르겠지만, 반면 여자들과 젊은 이들,아전과 승려 및 도사들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청의 중국 지배(1) - 이한제한( 以 漢 制 漢 )과 한간( 漢 奸 ), 섭정 다이곤( 多 爾 袞 ) 369

370 그리고 광대나 배우, 죽은 사람은 따르지 않겠다는것은 중국인들의 오락과 풍속과 장례 및 묘지에 관한 중국적인 문화전통에 대해서는어떤 간섭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이 열 가지 조건이 받아짐에 따라, 청나라 조정에서는남자들에게 변발을 강요했듯이 여자들에게도 전족을 금지시켰으나 이는 소용이 없 었다.여자들은 따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례나 묘지를 옛 습관대로 지키게되고, 이로써 중국인들은 조상에 대한 불효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아전이 따르지 않는 다는 것은 관( 官 )과 이( 吏 )가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중국사회지만 말단 행정을 담당했던 아전이란 대대로세습 하면서 그 고장의 터줏대감으로 행세하고 있었던 것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으로,황제는 이들을 파면하거나 새로 임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황제의 명령은그가 임명한 관( 官 )에서 그치고 실제 지방 행정의 담당자인 이들 아전들에게는 먹혀들 수가 없었다. 또한 젊은 사람들은 병역의 의무에서 벗어 났으며,오랑캐가 싫은 이름있는 지사나 학자 및 문인들은 승려나 도사가 되어 현실을 도피할수 있 는 길이 열였고, 연극, 예술, 문자, 노래 등도 간섭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자유와전통, 그리고 향락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여유와 공간을 확 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모든 것이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70년이라는 세월을 지나 옹정 건륭연간에 이르러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특히이 와 별도로 김지준이 내각수보가 되어 만들었다는 "왕공은 도성을 벗어날 수없고,...기인들은 상업에 종사할 수 없다"는.등의 당시로서는 별 의미 없었던이런 것들이 천하의 악법이 되어 만주인들에게 족쇄를 채우게 되자,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이미 때는 늦었다. 조법( 祖 法 /조상이 만 든 법)은 한자도 고칠 수 없다는 것이 또한그들의 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앞으로 좀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기에그때 맞추어 하 기로 하고 한간들의 이야기를 좀더 따라가 보자. 청의 중국지배에 저항하는 세력은 세 가지 였다. 첫째가이자성의 잔당들이 였고, 둘째가 이자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장헌충의 무리들로 서이들은 사천성을 중심으로 아직도 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남의 곳곳에는 명의황족을 모시고 18년간 줄기차게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있 었는데 이들 전부를 남명( 南 明 )이라한다. 도르곤은 이자성을 토벌하기 위해 즉각 정벌군을 편성했다.청군의 추격을 피해 섬서( 陝 西 /산씨)로 줄 행낭을 쳤던 이자성의 60만 대군은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게 되자 산속을 헤매던 끝에 이자성은 농군에게 붙들려 살해되고그 부하들은 대부분 항복하였다. 이로써 순치 2년(1645) 이자성의 반란은 매듭을지었다. 안휘( 安 徽 /안후이), 호북( 湖 北 /후베이), 사천( 四 川 /쓰촨)을휩쓸던 장헌충은 1644년 이자성이 베이징으로 들어가 대순황제가 되었을 때, 사천의 성도( 成 都 /청두)에서 대서국( 大 西 國 )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를 잠칭하고 있다가 청의토벌군이 밀어 닥치자 피에 주린 흡혈귀 마냥 살육과 약 탈을 거침 없이 자행하는광란( 狂 亂 )을 펼쳤다. 그는 이곳 사람들이 아무리 깊은 산중에 숨어들어가도그 부하들을 시켜 찾아내게 하여 죽인 후 그 증거로 손을 잘라오게 하였는데, 많이잘라 온 사람에게는 높은 벼슬을 주고, 아예 사람의 씨를 말리기로 작정하였다. 적군인오랑캐에게 단 한 사람도 남겨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가 하면 술을 좋아했던 그는 친구들이 찾아오면융숭히 대접하고, 돌아갈 때는 많은 선물을 주어 보내고 나서는, 그의 부하들을 시켜돌아 가는 길목을 지켰다가 목을 잘라오게 하여, 그 잘린 목을 옆에 두고 술친구로 삼았다. 이런 참혹한 양상이 지금까지 전해진 것은, 이 보다1세기 후 편찬된 촉벽( 蜀 碧 )이란 책의 내용에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흥미본위의많은 픽 션이 가미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전부를 사실이라고 할 수도 없겠고, 그렇다고전혀 허무맹랑한 낭설이라고도 단정할 수 없기에 정신 도착 치고는 너무나 무서운인간 종말의 광기( 狂 氣 )였다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표현이 없다. 사천에 청의 토벌군이 도착한 것은 순치 3년(1646)말, 장헌충을 토벌군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그 부하들은 운남( 雲 南 /윈난) 방면으로달아나 사 천지방이 청의 지배하에 들어 갔으나 운남으로 도망친 그 잔당들은 그 후에도끈질기게 저항하였다. 베이징에서 숭정제가 자결했다는 소식이 명의 배도( 陪 都 /준수도)난징에 전해지자 신종의 손자가 되는 복왕(이자성에게 피살되었던 복왕의 아 들)이사가법( 史 可 法 ) 등에게 옹립되어 연호를 홍광( 弘 光 )으로 정하고 명을 계승한다고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지배계급간에 분란이 일어나고 수하 장졸 역시 오합지졸에불과했다. 순치 2년(1645) 5월 15일, 난징은 함락되고 복왕은도망치다가 난군의 손에 잡혀 죽고 이곳의 문무백관들은 머리를 갂고 변발을 하였다.이때 토벌군의 총수는 한간( 漢 奸 ) 홍승주였다. 최소한 강남지역이남아 지키고자 했던명나라 구신( 舊 臣 )들의 소박한 꿈도 결국은 또 다른 명나라의 옛 거물에게 짓 밟히고말았다. 그 후로도 명의 부흥운동은 한 동안 계속되어, 명나라의후손이었던 당왕( 唐 王 )은 복주( 福 州 /푸저우)에서, 계왕( 桂 王 )은 광동( 廣 東 /광둥)에서의 병을 일으키고 부흥을 도모했지만 모두가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 중에서 정성공( 鄭 成 功 : ) 장황언( 張 煌 言 : )등은 해상세력 을 동원하여 청군( 淸 軍 )과 해전을 벌였으며, 자주 본토의 내륙 깊숙이쳐들어가기도 하였지만 역시 이곳 지리에 밝고 해전에도 익숙했던 홍승 주가 난징에진을 치고 마치 그물 코를 잡아당기듯 속속들이 이들을 차례대로 토벌했다. 1662년 홍승주에게 밀린 계왕( 桂 王 )은 운남( 雲 南 /윈난)성의곤명( 昆 明 /쿤밍)까지 밀려났다가, 그곳에서 이자성에게 붙들려 살해되고 18년간 계 속되었던부흥운동도 막을 내렸고 청의 중국지배는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이제 청으로서는사냥이 끝났으니 사냥개를 잡아 삶을 일만 남았다. 청의 중국 지배(1) - 이한제한( 以 漢 制 漢 )과 한간( 漢 奸 ), 섭정 다이곤( 多 爾 袞 ) 370

371 황성옛터 - 이미자 국역조선왕조실록(인조 22년, 1645년 5월 23일) 인조 /05/23(경술) / 세자가 금군 홍계립을 보내어 자신의 주변 상황을수서로 치계하다 세자가 금군( 禁 軍 ) 홍계립( 洪 繼 立 )을보내어 수서( 手 書 )로 치계하였다. 구왕( 九 王 /다이곤) 이하 여러 진영은 유적을 대파시킨 후에 이미 승승장구의기세를 얻은 데다, 또 오삼계가 미리 전로( 前 路 )의 주현( 州 縣 )에 문서를 돌려서 모두구왕을 맞아 항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왕의 군대가 무령현( 撫 寧 縣 )에 도착하자그 성중의 백성들이 5리쯤 되는 길을 미리 마중 나와 기다렸다가 구왕을 영접하여성문을 열 고 들어가기를 청하니, 구왕이 그 백성들을 어루만져 효유하고, 또 고시문( 告 示 文 )한 장을 주어 각기 자기 생업에 편히 종사하도록 타일렀습 니다. 이때 구왕은 성 안에들어가지 않고 현의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묵었습니다. 다음날에는 일찍 출발하여 영평( 永 平 )의큰 길을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현의 서쪽 아랫길을 향하여 갔으니, 이는 대개 유적이왔다간 후로 연도에 풀 한 포기도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아랫길이 조금 멀기는 하지만풀이 있어 말을 먹이기에 편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날 저녁 에는 창려현( 昌 黎 縣 )에도착하여 묵었습니다. 27일에는 영평부( 永 平 府 ) 난하(? 河 )의하류인 난주(? 州 )의 남쪽에서 묵었고, 28일에는 개평위( 開 平 衛 )의 성 서쪽으로 10리쯤되는 곳에 도착 하였고, 29일에는 옥전현( 玉 田 縣 ) 앞에 도착하였으며, 30일에는 계주(? 州 )의남쪽으로 20리쯤 되는 지역에 도착하여 묵었습니다. 5월 1일에는 통주강( 通 州 江 )의얕은 여울을 건너 저녁에 통주의 서쪽으로 20리쯤 되는 지역에 이르러 묵었습니다.하루 평균 행군이 1백 20 30리 정도가 됩니다. 지난번 계주에 있을 적에 유적 1백여인이 와서 항복하며 말하기를 산해관에서 패배한 후에 그들은 청나라 군대가 쫓아올줄 알고 황급히 재화( 財 貨 )와 부녀자들을 수탈한 다음, 29일 저녁에 화약을 터뜨려궁전을 불태우고 성문으로 도망쳐 나갔다. 고하였습니다. 그러자 구왕이 여러 진영의정예한 군졸들을 뽑아 팔왕( 八 王 )과 십왕( 十 王 ) 및 오삼계 등에게 주어 그들을 급히추격하도록 하고 구왕도 이틀 길을 하루로 당 겨서 급히 전진하였기 때문에, 일행의짐 보따리가 미처 통주에 도착하지 못하였습니다. 신( 臣 )은 그런대로 잘 먹고 지냈습니다마는,시강원 이 하는 모두 이틀 동안이나 밥을 굶었습니다. 2일에는 일찍 출발하여 황성( 皇 城 )을둘러 나갈 적에 구왕이 황제에게서 지난번에 받은 황색 의장( 儀 仗 )을 전도( 前 導 )로삼고, 가마를 타고서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갔습니다. 그리하여 조양문( 朝 陽 門 )으로부터들어가 대궐문 근처에 이르니, 금의위( 錦 衣 衛 )의 관원이 황제의 황옥교( 黃 屋 轎 )와의장( 儀 仗 )으로 구왕을 맞이하였습니다. 구왕은 황옥교를 타고 의장을 앞길에 배열하고서,장안문( 長 安 門 )으로부터 들어가 무영전( 武 英 殿 )에 당도하여서는 황옥교에서 내려걸상에 올라 앉아, 금과( 金 瓜 )와 옥절( 玉 節 )을 궁전 앞에 나열시켰습니다. 신은 이때 구왕의 참모관과 함께 동서로나누어 앉아 있었습니다. 환관을 불러 유적의 형세와 황성이 함락된 이유를 물으니,환관이 대답하기 를 유적이 2월 20일경부터 황성을 포위하여 대포( 大 砲 )와 화전( 火 箭 )으로성중을 공략해 들어왔다. 그런데 성을 지키던 군졸들은 여러 달 동 안 군량을 공급받지못하여 모두 싸울 마음이 없어져서 밖으로 흩어져 나가 있다가 미처 성을 들어오지도못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 4 5첩( 堞 ) 씩을 지키다가 도저히 버틸 수 없어 모두 성을버리고 달아났다. 그러자 적이 마침내 성을 타고 넘어오니, 황제와 황후는 스스로목매어 죽고, 태자와 황자( 皇 子 )인 세 왕은 그들에게 붙잡혔다. 그후 황성의 백성들이황제와 황후를 황성에서 1백 리쯤 떨어진 북쪽 진산( 鎭 山 )에 장사 지 냈다. 하였습니다. 적이 이미 성에 들어와서는 국호를 대순( 大 順 )이라하고, 원년의 연호를 영창( 永 昌 )이라 하고서 황제라 자칭 한 지 42일 동안에 인심을수습 하기 위해 침탈하는 행위를 금지했었는데, 산해관에서 패배하여 돌아온 이후로성중의 재물과 보화를 모조리 수탈하여 가지고 가면서 화약으 로 궁전과 여러 성문을불태웠으나, 다만 인명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구왕이 황성에 들어가자, 황성의 백성들이향을 피우고 두 손을 마주 잡고서 경의를 표하였으며, 심지어는 만세 를 부르는자도 있었습니 다. 그리고 성중의 크고 작은 관원( 官 員 ) 및 환관 7천 8천 명이 또한모두 명함을 내밀고 와서 배알하였습니다. 궁전이 모두 불탔는데 오직 무영전만이우뚝 하게 홀로 남아 있었고, 내금천( 內 禁 川 ) 외금천( 外 禁 川 )의 옥석교( 玉 石 橋 )도파손된 데 없이 완연하게 그대로 있었습니다. 불 타버린 집에서 나온 제비들은 높게혹은 낮게 하늘을 까맣게 가리어 날으니 봄 제비가 숲에 둥우리를 튼다[ 春 燕 巢 林 ] 는말이 참으로 헛 말 이 아닙니다. 구왕이 무영전 앞 행랑 채에 신의 처소를정해 주었는데, 공간이 비좁고 사람은 많으므로, 구왕에게 말하여 무영전 동쪽 방을얻고 나니, 전 보다는 조금 넓고 또 침상 탁자 병기 의장 등도 있습니다. 구왕이 황성에 들어온 후로는 장수 용골대( 龍 骨 大 )등을 시켜 성문을 관장하게 하여 청나라 사람과 우리 나라 사람을 출입하지 못하도록엄 금하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과 신을 따르던 일행의 인마( 人 馬 )들이 모두 성 밖에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청나라 사람이 심양으로 돌아가는 인 편을 만나, 대단히 바쁘고황급한 가운데 대충 적어서 치계를 드리니, 황송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청의 중국 지배(1) - 이한제한( 以 漢 制 漢 )과 한간( 漢 奸 ), 섭정 다이곤( 多 爾 袞 ) 371

372 명조의 흥망성쇠-명의 멸망 :28 명( 明 / 1368 ~ 1644)의 쇠망(2) - 이자성의 난과 명의 멸망 이자성의 난과 명의 멸망 (1) 소설 금병매( 金 甁 梅 )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반, 명나라 가정(1521 ~ 66) 만력(1673 ~ 1620) 연간은 사람들이 힘들 정도로 정치는 부패했고 민심은 사나 웠다. 가정제가 도교에 심취되어 정사를 뒷전으로 미룬 사이 엄숭( 嚴 嵩 )이란 선비는 사대부들이 기피하는 푸른 종이에 붉은 글씨로 쓴 도 교의 제문( 祭 文 )인 청사( 靑 詞 )를 잘 지어 황제로부터 신임을 얻고 20 여 년 간 내각의 수보( 首 補 )로 있었는데, 그 아들이 아버지의 권 세를 믿고 온갖 못된 짓을 다하였다. 1565년, 결국 그 아들은 처형되고 엄숭은 가산을 몰수 당하여 남의 집에 얹혀 살다가 86세의 고령으로 죽었지만, 소위 탁류가 아닌 청류의 내각 수보가 자신이든 아들이든 뇌물을 받고 부정을 저지르는 선례를 남겼다. 위로는 황제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 지 바라는 것은 복록( 福 錄 )과 장수( 長 壽 )였고, 원하는 것은 황금이었다. (명대의 내각이란 문장력이 뛰어난 태학사 출신 3명정도가 모여 條 旨, 표의, 유조 등을 작성하는 황제의 자문기관에 불과하였으나,세 월이 지나면서 그 서열에 따라 수보, 차보 등으로 불렀고, 遺 詔 와 標 擬 의 작성권은 수보에게 있었으므로 명대 내각의 수보는 사실상 의 재상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게 됨) 그런데도 도시는 번성하고 상업자본이 형성되었으며, 서민들도 밥술이나 챙기고 글도 배워 조금이남아 여유와 멋도 부릴 줄 알게 되 었다. 명 나라 사회가 이런 변화의 조류를 타게 되자, 선비들 중에는 세상이 이래서는 안된다는 도덕군자가 나타나는가 하면, 이런 도덕군 자들의 따분하고 고루한 태도를 비웃고, 초야에 묻혀 살면서 무슨 산인( 山 人 )이니 거사( 居 士 )니 하는 아호( 雅 號 )를 짓고 제멋에 도취 된 부류도 있고, 아예 혼탁한 세상에 어울려 주색잡기( 酒 色 雜 技 )를 본업으로 삼는 광기( 狂 氣 ) 어린 부류도 등장하게 되었다. 사회풍조가 이렇게 되면 정직은 위선이고 반항이 정의로 받아들여 진다. 그러나 이런 가치전도의 세상에서 제도와 관습으로부터 인 간성은 해방되고 개성있는 예술은 등장한다. 명대 문화가 이 시기에 이르러 난숙기에 접어든 것도 흥미 있는 사실이다. 자금성의 황 제가 어떻든 세상은 바뀌고 있었다. 융경 원년 1567년에는 타타르 부족과의 마시( 馬 市 ) 무역을 재개하면서 2백년간 고수했던 해금정책( 海 禁 政 策 )을 사실상 포기했다. 무 역이 정치적인 목적 외에 경제적인 이익이 크다는 것을 명분으로 세웠으나, 퇴직관료( 鄕 紳 )들 까지 가세하고, 심하면 해적으로까지 둔갑하는 밀무역을 넓은 국경선을 두고 있는 명나라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었던 것이 현실적인 이유였다. 요지( 要 地 )에는 동향( 同 鄕 ) 출신의 동업상인( 同 業 商 人 )들이 회관( 會 館 )과 공소( 公 所 )를 세우고 상업활동에 열중했으며, 교초라는 불환 지폐 대신에 은화( 銀 貨 )의 유통이 일반화 되자, 만력제 때 내각 수보 장거정은 지세( 地 稅 )와 정세( 丁 稅 )를 은으로 받아들이는 일조편 법( 一 條 鞭 法 )의 새로운 조세제도( 租 稅 制 度 )를 마련하였다. 명조의 흥망성쇠-명의 멸망 372

373 혼미한 세상일수록 문화와 예술은 한 단계씩 도약하는 이상한 징조를 보인다. 명대의 문화도 이런 기류를 타고 한 단계 도약을 하게 되었다. 도예( 陶 藝 )는 청자와 청화백자에 이어 수려한 색채가 가미된 명삼채( 明 三 彩 )가 등장하여 가정년간에 절정에 이르렀다가 만력 년간에는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림은 환관이 우두머리로 있는 어용감( 御 用 監 )아래 화원( 畵 院 )이 있어서 관료화된 직업화가들이 기교본위의 복고주의 화풍을 이어 가고 있었는데, 이런 형식적인 화풍( 北 宗 畵 혹은 北 畵 또는 彩 色 畵 )에 반발해서 심주( 沈 周 /1427 ~ 1509), 문징명( 文 徵 明 / 1470 ~ 1559), 당인( 唐 寅 1470 / 1523), 구영( 仇 英 /?) 등 소위 오파( 吳 派 )라고 불리는 문인화( 文 人 畵 ' 南 宗 畵, 南 畵, 水 墨 畵 )의 4대가가 등 장하였다. 이들을 오파라고 부른 것은 강소성( 江 蘇 省 /쨩쑤성)의 남쪽도시 오현( 吳 縣 / 蘇 州 ) 출신들이기 때문이다. 오현 이웃 송강( 松 江 /쑹쟝)에서 태어난 동기창( 董 其 昌 / 1555 ~ 1636)은 남화( 南 畵 / 文 人 畵 )를 이론적으로 완성시켰고, 측윤명( 祝 允 明 / 1460 ~ 1526)과 더불어 명대 제일의 서예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마카오에 들어온 것이 1562년이고, 만력제에게 자명종( 自 鳴 種 )과 양금( 洋 琴 ) 등을 선물하고 베이징 정 주를 허락 받고 정식으로 포교활동에 들어간 것이 1601년의 일이다. 선교사들에 의해서 서구세계가 알려지고 새로운 문물의 도입은 중국인들의 우주관에도 많은 영향을 입혔다. 또 하나 이때를 즈음하여 아편( 阿 片 ) 이라는 좋지 못한 마약흡연( 魔 藥 吸 煙 )이 궁정과 민 간에 유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아편문제는 훗날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런 광기( 狂 氣 )어린 세태 및 예술세계의 변화는 문학에서도 그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원곡( 元 曲 )에 허구가 가미되고 하나의 이 야기로 정리된 장편소설이 등장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나관중이 썼다는 이야기 삼국지와 시내암의 작품이라는 수호지, 그리고 오승은의 작이라고 하는 서유기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소설의 공통점이라면, 창작이라기 보다는 전해오던 여러 장면들의 잡극( 雜 劇 )을 한데 모은 것으로, 유교와 도교, 그리고 불교의 영향으로 남녀간의 정사( 情 事 )장면이 거의 없는 반면, 중국 특유의 해학과 허풍과 기상천외의 도술까지 덧씌워서 한 번 책을 손에 잡 으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날 새는 줄 모를 정도로 흥미 진진한데 있다. 그런데 금병매( 金 甁 梅 )라는 소설은 이와는 딴판이다.가정( 嘉 靖 ) 말년으로부터 만력( 萬 曆 ) 중기의 창작으로 추정되는 이 소설은 수호 지( 水 滸 誌 )에 잠깐 삽입된 무송( 武 松 )의 형수 반금련( 潘 金 蓮 )과 약종상인으로서 거금을 모은 서문경( 西 門 慶 )과의 간통 사건 및 이와 관련된 몇 구절의 내용을 부풀리고 늘려서 명대 후기 사회의 어둡고 추악한 작태를 폭로한 고발성 소설이다. 주인공 서문경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았고, 많은 처첩을 두고도 간통을 밥 먹 듯 하다가 방탕 생활 끝에 죽는다는 한 탕 아( 宕 兒 )의 회화적인 인생역정을 묘사한 이런 통속소설이 일세를 풍미( 風 謎 )할 정도로 사람들로부터 갈채와 핀잔을 동시에 받게 된 것은, 신흥상인의 파렴치한 부정축재, 남녀 성행위의 노골적인 묘사, 어린 여자아이를 매매하는 밑바닥 서민생활의 애환 등을 여과없 이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의 성격을 명확하게 나타냈고, 돈과 여자와 지위를 싸고 불쌍할 정도로 타락한 본능적인 추악한 몰골의 군상들을 냉혹하고 대담하게 그렸으며, 흔히들 있기 마련인 권선징악( 勸 善 懲 惡 )과 같은 교훈적인 내용이 없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물론 이런 풍기문란하고 방자치졸한 통속소설이 어느 시대건 환영 받을 수는 없다. 금병매를 비롯한 이런 구어체( 口 語 體 ) 문학작품이 한( 漢 ),당( 唐 )으로부터 전래된 시( 詩 ),부( 賦 )를 짓고 사서삼경을 익히는 것이 학문 의 출발이자 끝이라고 본 전통적인 사대부들에게는, 음란( 淫 亂 )이나 도둑질, 만용이나 요행을 가르치는 쌍스럽고 천한 것으로서, 일 고의 가치조차 없는 시정잡배들의 글 장난에 불과하다고 혹평하였고, 아무리 너그럽게 봐 준다고 해도 무지한 서민들의 심심풀이 정 도밖에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평가절하고 무시해 버렸다. 그런가 하면 양학좌파로서 기존의 제도문물을 깡그리 비판했다가 감옥에서 자결한 이탁오( 李 卓 吾 / 1527 ~ 1602)는 이런 구어체 소 설이야말로 위선이 없는 최고선( 最 高 善 )인 순수한 동심( 童 心 )의 발로이며, 오히려 사대부들이 옛 것이나 찾으면서 즐기는 문학은 모 방이고, 가짜며, 죽은 송장과 같다고 비판하고, 손수 삼국지연의(이야기 삼국지)와 수호지의 감상문을 써 크게 환영 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4대기서라로 부르는 이 구어체 소설가운데 유일하게 금병매는 작자의 본명이 없고, 흔흔자( 欣 欣 子 )가 썼다는 그 서문( 序 文 )에 소소생( 笑 笑 生 )의 작이라고만 되어있다.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문장력이라면 당대 제일의 학식을 갖춘 문장가임에는 틀림없겠으나 그도 끝내 자신의 본명을 숨기고 소소생이라는 해학적인 필명만 남겼다. 이런 외설적인 소설에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밝힐 수 있 명조의 흥망성쇠-명의 멸망 373

374 을 정도로 명대사회가 개방되어 있지는 않았고, 청대에 와서는 금병매를 천하제일의 음란서라 하여 금서가 되었다. 한국문학사에서는 한글로 된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등을 고대소설이라 한다. 여기에서 고대라는 시대적 개념은 역사에서 말하는 중 세이전의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가 아니라 16세기 이후의 조선 후기를 말한다. 이 시대에 소설다운 소설이 등장하였다는 의미라고 도 볼 수 있고, 따라서 소설이라는 한국문학의 장르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춘향전 등이 한글 소설에서는 조상할아버지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러다가 개화 기에 잠깐 등장한 국한문 혼용체 소설인 귀위성, 혈의누, 자유종 등에는 신소설이란 이름을 붙여 고대소설과 구분했고, 1917년에 발 표된 이광수의 무정을 시작으로 이후에 등장한 많은 소설을 현대소설이라고 하여 다시 신소설과 구분하였다. 이런 고대소설의 공통점은 유교적인 권선징악과 정절과 효도를 지나칠 정도로 과장하여 뭇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역시 작가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 있어서 언제 누구의 작품인지는 지금까지도 알 수가 없다( 未 詳 ). 글을 많이 배운 사람이 쓴 것은 틀림없겠으나, 당시의 양반 중심 사회에서는 이런 한글소설도 진서( 眞 書 / 漢 文 )에 비교하면 잡문( 雜 文 )에 불과했고, 이런 잡문을 쓴 사람은 잡인( 雜 人 /잡놈)이라 해서 멸시하는 풍조가 끝내 이름을 밝힐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2) 환관 위충현( 魏 忠 賢 ) 명나라 황제들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누어 하루에 세 번 씩 외정에서 신하들과 접견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명나 라 창업의 백년을 고비로 바뀌기 시작하여 8대 헌종 성화제때는 하루에 한번으로 줄였다가 다시 3일에 한번씩으로 더 줄였다. 이런 원칙이남아 후대에 와서는 없어졌다. 따라서 대신들이 직접 황제를 뵙기란 참으로 어려웠고 상주할 일은 환관들을 통해서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환관들의 농간이 개입할 소지가 그만큼 많아지고 그 폐단도 늘어났다. 명의 15대 황제 희종 천계제는 그가 즉위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환관 왕안을 신임하여 그에게 정사를 맡겼다. 왕안은 동림파를 기용하여 정치 개혁을 서둘렀고, 비동림파는 정계에서 쫓겨났다. 정계에서 쫓겨난 비동림파는 그들만이 다시 결속하여 보복의 기회 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광종에게는 그를 키운 궁인 이선시외에 유모( 乳 母 ) 객씨( 客 氏 )가 있었다. 이번에는 이 야심 만만한 객씨가 환관 위충현과 내 통하여 그의 채호( 菜 戶 / 환관의 情 婦 )가 되고 권력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위충현은 하북성 숙녕( 河 北 省 肅 寧 / 후배이성, 쑤닝) 출신으로 불학 무식한데다가 도박으로 많은 빚을 지게 되자 이름은 이진충으로 바꾸고 빚쟁이를 피해 다니다가, 스스로 거세하고 궁중에 들어가 환관이 되었다. 처음에는 왕안 밑에 있으면서 왕안이 병으로 자주 자리를 비운사이 어린 황자에게 놀이를 가르쳐 총애를 얻고, 광종 태창제가 어이 없게도 제위 한 달여 만에 죽고 이 황자가 희종 천계제가되면서 위( 魏 )씨 성을 다시 찾고 충현( 忠 賢 )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간악무도( 奸 惡 無 道 )한 그는 그의 정부( 情 婦 )이자 희종의 유모( 乳 母 )인 객씨( 客 氏 )와 손을 잡고 명나라 역대 황제 중 가장 어둡고 어 리석었다는 희종을 등에 업고 정권을 어지럽게 하여 명나라 멸망을 더욱 재촉하였다. 그는 비밀경찰이며 정보기관인 동창을 장악하여 그를 길러준 왕안을 추방한 후 죽이고, 비동림파와 손을 잡고 말썽 많은 동림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동림당은 투옥 학살 추방되고 각지의 서원도 문을 닫았다. 밀정( 密 偵 )을 사방에 풀어놓고 그를 욕하는 자가 있으면 잡아서 그 혀를 뽑고 산채로 껍질을 벗겼다. 이런 난세에 한 몫 챙기려는 아 첨 배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고, 이들은 위충현을 공자( 孔 子 )같은 성인이라고 추켜 세우고, 사당( 祠 堂 )을 세워 그를 살아 있는 신으 로 받들고 예배를 보게 했다. 이에 반항하거나 예배의 태도가 불손하면 가차없이 목을 베었다. 위충현이 거리를 지나면 길가에 엎드린 관민( 官 民 )이 "9 천세"( 九 千 歲 )를 외쳤다. 황제에게 바치는 만세( 萬 歲 )에서 천세가 모자라는 9 천세를 외치게 함으로써, 그래도 황제보다는 못하다고 스스로 깨친 것만도 천만 다행이었다. 영종 정통 연간의 왕진, 무종 정덕 연간의 유근에 이어 희종 천계 연간에 활약한 이 위충현 이야 말로 명나라의 말기적 병리( 病 理 )를 한꺼번에 들어낸 환관 횡포의 대표적 유형이라 할 수 있다. 명조의 흥망성쇠-명의 멸망 374

375 만주에서는 풍운이 급하고 국내에서는 이렇게 엉망인데도 황제인 희종 천계제는 구중궁궐 깊숙이 묻혀 그의 취미인 목수( 木 手 )일에 만 열중하고 있었다. 원나라 마지막 황제 순제가 목수 일을 몹시 즐겨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목수천자( 木 手 天 子 )라고도 빗대여 불렀 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망국으로 치닫는 명나라 말기에서 이런 일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희종 천계제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위 7년만에 22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죽고 당시 17세의 그의 동생 주유검( 朱 由 檢 ) 이 뒤를 이었는데 이가 명나라 16대 마지막 황제 의종 숭정제다. 위충현은 실각하여 귀양지로 가던 중 자결하고 객씨는 처형되었다. (2) 유적( 流 賊 )의 괴수( 魁 首 ) 이자성( 李 自 成 ) 의종 숭정제( 毅 宗 崇 禎 帝 / 1627 ~ 44)는 비록 나이 어린 황제 였으나 성격이 근엄하고 강직해서 환관 위충현을 제거하고 만력 이후 어지럽게 된 정국을 바로 세우고자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제 갈 길을 각각 걷고 있었다. 그의 치세 17년간 내각의 인원은 50명이 교체되었고, 형부상서 17명이 파면 혹은 사형되었으며, 총독 7명과 순무 11명이 피살 되었다. 황제의 뜻과는 상관없이 세상은 혼탁해 있었고, 이런 세상을 건 질 만한 인재는 등장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가중되는 군사비를 감당할 길이 없었고, 백성들은 더 이상의 세 금을 부담을 능력이 없었으며, 설상가상( 雪 上 加 霜 )으로 자연의 재해까지 기승을 부렸다. 숭정 원년(1628) 섬서( 陝 西 /싼시)에 대기근이 닥치자 연안( 延 安 / 옌안, 지금의 西 安 )을 중심으로 폭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폭동은 삽시간에 하남 하북 산서 지방으로 요원을 불길처럼 번져갔다. 이렇게 된 이면에는 나라에서는 국고가 바닥 나자 역참제도를 폐지했고 많은 위( 衛 ), 소( 所 )에 배치되어 있던 병졸들에게는 군량미를 지급하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역졸( 驛 卒 )들과 군량미를 받지 못한 병졸( 兵 卒 )들이 폭동에 가담하여 그 규모가 한층 커졌 기 때문이다. 숭정 4년(1631) 산서( 山 西 /싼시)에서는 화북지역 유적대집회( 流 賊 大 集 會 )라고 하는,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했던 도적무리들이 모임을 가졌는데, 이 집회에는 36개의 도적집단과 각 집단에 속한 20 만 명의 무리가 모여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이 역졸출신의 이자성(1806 ~ 45)과 병졸출신의 장헌충( 張 獻 忠 / 1606 ~ 46)이 이끄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탐 관오리( 貪 官 汚 吏 )를 처단하고 빼앗은 돈과 식량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준다고 선전하여 민심을 사로잡았다. 이자성의 유적집단에는 규모가 커지자 많은 사대부들이 여기에 가담하였다. 이들 사대부들의 건의로 이자성은 그의 부하 장졸들에게 살인을 삼가게 하고, 약탈한 물자는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부호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균분하는 균전제를 실시 하고, 조세를 대폭 탕감해 주었다. 민심을 사로잡기 위한 인기정책을 썼던 것이다. 이런 이자성의 선심 어린 내용이 알려지자 그의 군문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의 인기는 하늘 높이 치솟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이자성과 그의 무리들은 포악한 유적( 流 賊 )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당당한 혁명군으로 성격이 바뀌게 된다. 사람 들은 새 세상이 온다고 열광하기 시작했다. 숭정 17년(1644) 정월 초 하루, 이자성은 연안( 延 安 )에서 국호를 대순( 大 順 ) 연호를 영창( 永 昌 )으로 하여 왕을 자칭( 自 稱 )하고 곧 이 어 군사행동을 개시, 강을 건너고 사막을 가로지르고 산을 넘어 질풍같이 동쪽 베이징으로 나아갔다. 베이징에는 이를 막을 군대가 없었다.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해서 정예부대 전부가 산해관 쪽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해 3월 18일, 이자성에게 매수된 환관들의 도움으로 그의 군대가 초저녁에 쉽게 외성을 함락하고, 밤중에는 내성으로 들어갔다. 사태가 이미 명조의 흥망성쇠-명의 멸망 375

376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숭정제는 황태자와 황자를 외가( 外 家 )로 보내고, 황후( 皇 后 )는 자결케 했으며 두 딸은 손수 죽였다. 주변을 정리한 숭정제는 3월 19일 새벽, 자금성 뒤 뜰 만세산( 萬 歲 山 / 景 山 )의 수황궁( 壽 皇 宮 )올라, 옷을 찢어 "짐( 朕 )의 유해가 도 적의 손으로 갈갈이 찢겨도 상관 없다. 그렇지만 단 한 사람의 백성도 상하게 하지 말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어 자결했다. 황 후와 두 딸에게는 이들이 적도( 敵 徒 )에게 당할 치욕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는 하나 냉혹할 정도로 비정했지만, 백성들에 대해서는 관용을 구함으로써 황제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다하였다. 그 날 낮 숭정제와 황후의 시신은 고리 짝에 넣어 성 밖으로 내다 버리고, 이자성은 자금성의 옥좌에 앉았다. 이렇게 해서 1368년 태 조 홍무제가 창업한 명나라는 1644년 의종 숭정제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도적의 괴수 주원장이 창업했던 명나라는 276년 후 또 다른 도적의 괴수 이자성에게 나라를 빼앗긴 셈이다. 자금성의 옥좌에 앉은 이자성은 명나라 관리들의 투항을 촉구해서 3일 후에는 문무 백관들이 이자성에게 조하( 朝 賀 )를 올리고 충성 을 맹세했다. 그러나 4품 이하의 관리는 그대로 채용했으나 고급관료 800 여명은 고문을 당하고 알 거지가 될 때까지 뇌물을 바쳤으 나 차례대로 죽어갔다. 이자성의 대순제국은 순조롭게 질서를 재편하고 베이징은 평온을 찾아 가는 듯 했다. 그러나 그 동쪽 장성 너머 요동벌판에는 여진 족이 세운 청나라가 베이징을 향해서 풍운을 몰아 오고 있었고 자금성의 옥좌는 42일만에 다시 새로운 주인을 마지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양자 상속제도가 발달하지 못했던 동아시아에서는 이에 대신해서 반가( 班 家 )라 할지라도 그 자식이 불충하면 영명( 英 明 )한 데릴사위 를 들여서 가계의 번영을 계속 유지코자 했던 유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중화라고 자칭하고 교만방자했던 명나라를 대신해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원의 양자가 아니라 데릴사위로 들어와서 자금성의 옥좌를 차지하고 사상 유례없는 세력판도를 만들어 세계 중심에 중국을 다시 우뚝 세웠다. 그렇다면 오랑캐라고 비하했던 그 여진족 이 어떻게 중국을 차지하고 다스릴 수 있었는가? 명조의 흥망성쇠-명의 멸망 376

377 .명조의 흥망성쇠- 양명학의 등장 시기 :25 명조( 明 朝 / 1368 ~ 1644)의 흥망성쇠( 興 亡 盛 衰 )(5)- 숨겨진 비화( 秘 話 )들 숨겨진 비화( 秘 話 )들 (1) 명대( 明 代 )의 유학과 격물치지( 格 物 致 知 ) 어느 시대건 그 시대를 이끌어가는 사상적 혹은 학문적인 이념이 있고, 그 이념이 바로 그 시대를 반영한다. 이런 것을 이데올르 기라 한다. 명나라를 대표하는 학문을 흔히 양명학( 陽 明 學 )이라고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 시대 유학의 또 다른 유형이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일 뿐학문의 중심은 역시 성리학이었다. 다만 성리학이 관학( 官 學 )으로 자리잡으면서 과거( 科 擧 )에합격하 기 위한 교과서 역할을 담당하게 됨에 따라 더 이상의 학문적인 발전은 기대할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변화되는 새로운 시대에 대 응하기에는 여러 가지 부족한 것이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성리학은 남송시대 주희( 朱 熹 / 1130 ~ 1200)가 사서( 四 書 )에대 한 해석( 四 書 集 註 )을 도덕적인 명분론( 名 分 論 )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풀이한 내용을 중심으로 발전시킨 유학이다. 유학에서 사서( 四 書 )라고 하면, 대학( 大 學 ), 중용( 中 庸 ),논어( 論 語 ), 맹자( 孟 子 )를 말한다. 이 가운데 대학에서 말하는 격물치지( 格 物 致 知 )에대 한 주자의 해석이 잘못되었다 하여 반론을 제기한 것이 왕양명이었고 이런 왕양명의 새로운 학설에서 양명학은 시작된다. 그렇다면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 대학에서 이르기를" 格 物 致 知 誠 意 正 心 修 身 齊 家 治 國 平 天 下 "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에 대한 풀 이를 이미 대학의 편찬 당시 주( 註 )를 달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덕으로 천하를 다스리려면( 平 天 下 ) 먼저 그 나라를다스려야 하고( 治 國 ),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안을 다스려야 하고( 齊 家 ), 그 집안을 다스리려고 하는 자는 먼저 그 몸을 닦아야 하고( 修 身 ), 몸을 닦으려고 하 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하고( 正 心 ), 그 마음을바르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정성스럽게( 誠 意 )해야 된다 ( 誠 意 正 心 修 身 齊 家 治 國 平 天 下 )라고하는 것인데, 여기까지는 이미 편찬 당시의 주해( 註 解 )가 명료하게기술되어 있어서 후대의 학자들간 이설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머지 네글자, 즉 치지( 致 知 )와 격물( 格 物 )에 대한 해석은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에 이를 둘러싸고 북송시대부터 뜨거운 논쟁이 거듭되었으나 결국 주자의 학설을 정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격물치지( 格 物 致 知 )를 사변적( 思 辨 的 )인 철학적( 哲 學 的 )인 가미 없이 글자의 뜻대로 해석하면, 정성스럽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앎에이르러야 하고( 致 知 / 뭘 알아야 하고), 앎에 이르고자 한 자는 먼저 사물을 바로 잡아야 한다( 格 物 /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단순한논리도 말꼬리(?)를.명조의 흥망성쇠- 양명학의 등장 시기 377

378 잡기 시작하면 그 논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정답은 모호하고의문만 가중된다. 이런 사변적( 思 辨 的 )인 논제는 생각하기에 따라 여러 가 지 해설이가능하기 때문이다. 격물치지에 대하여 주자는 천지만물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 氣 )이 있는가 하면 그 형상을 조종하는 마음( 理 )이 있다고 보았고, 다시 그 마음은 성( 性 / 仁 義 禮 智 )과 정( 情 / 喜 怒 哀 懼 愛 惡 慾 )으로 나누어 지는데, 이( 理 / 형상의 조정 능력)는 성( 性 )에만 깃들인다고 하여, 성인이 되 는 길은 마음 속의 본능인 정( 情 / 感 情 )을 멀리하고 이지적 경향인 성( 性 / 理 性 )을 충실히 하는데있다고 하였으며, 이성을 충실하게 하는 방법은 마음 밖의 있는 사사물물의 이( 理 )를 하나하나 밝혀 파악하고( 格 物 致 知 ) 널리 책을 읽고 고전을 연구함으로써 완성된다고 가르쳤다. 다시 말하면 모든 만물에는 理 가 있는데, 이를 하나하나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窮 究 ) 겉과 속( 表 裏 ), 매끄러움( 精 )과 거친( 粗 ) 것이 있는것과 같이 사람의 마음에도 성( 性 / 理 性 )과 정( 情 / 感 情 )이 있고, 性 이 곧 理 라고하여( 性 卽 理 ) 이것을 인간도리의 근본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성인군자가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분수와 체면을 지킬 줄 아는 이성을 기본으로 갖추고 있어야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감정만을 앞 세우면 배움 이라는 게 없기 때문에 이성이라는걸 모르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주자가 생존했던 송 나라시대에는 이민족의 압박으로몹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런 기막힌 현실에서 힘만을 앞세우고 무지막지하게 달려드는 이들 오랑캐들을 도덕적 원리로서 비하( 卑 下 )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인간의 탈은 썼다고 해서 모두 같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으로서 의 예절을 모르는 것은 오랑캐일뿐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왕수인( 王 守 仁 / 陽 明 / 1472 ~ 1528)이 생존했던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은 한족( 漢 族 ) 부흥의 기치( 旗 幟 )를 앞세우고 명나라가 창업( 創 業 )한지 1세기를 지난 후였다. 따라서 고답적( 高 踏 的 ) 원리주의만을 강조하는 성리학만으로는 학문적 욕구나 변화하는 사회를 감당하 고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더구나 정치기강이 문란하고, 뇌물이 판을 치고, 황금만능이 통하는 세상에서 겉치레에 불과한 체면만을 중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며,이런 사회 풍조에 반발해서 사상적으로는 선종( 禪 宗 ) 불교의 영향을 받아 심학( 心 學 )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고, 문학적으로는 시( 詩 ) 부( 賦 ) 대신에 원곡( 元 曲 )을 발전시킨 소설이 등장하여 인간의 복잡한 감정세계를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선지후행( 先 知 後 行 )을 강조했던 성리학에 의문을 가지고 지행합일( 知 行 合 一 )의 실천도덕을 중시하는 양명학( 陽 明 學 )이 등장하 였으며,소위 중국의 4대 기서( 奇 書 )라고 일컫는 연의삼국지( 演 義 三 國 志 )와 수호지( 水 滸 誌 ),그리고 서유기( 西 遊 記 )와 금병매( 金 甁 梅 )가 자리를 잡았다는 것도 이 시대에 나타난새로운 시대 조류라고 볼 수 있다. (2) 폐업( 廢 業 )한 황제 명나라는 그 치세 276년간 태조( 太 祖 ) 홍무제( 洪 武 帝 )를시작으로 의종( 毅 宗 ) 숭정제( 崇 禎 帝 )까지 모두 16명의 황제가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1세( 世 ) 1원( 元 )의 원칙이 확립되어황제는 그 치세기간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 연호에 따라 홍무제니 영락 제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열 여섯명의 황제가운데 황제업은 아예 문을 닫고 너무나 자유분방하게 방탕 생활로 일관했던 것이 10대 황제로 등장한 무종 정덕제( 正 德 / 1505 ~ 1521)였고, 그의 행적에서 단편적이 남아 이 시대의 또 다른 모습도 볼수 있다. 명나라 9대 황제 효종( 孝 宗 ) 홍치제( 弘 治 帝 / 1467~ 1505)는 생모( 生 母 ) 가 묘족 출신의 비천한 여관( 女 官 ) 인데다가 그가 출생했을 때는 만 귀비( 萬 貴 妃 )라는 여걸이 궁중을 휘어잡고 있었기 때문에 성장과정에서 어려움이매우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황제로서는 보기 드문 명군에 속해서, 구준으로 하여금 대학연의보를 편찬케 하였고, 일종의 행정법전인 대명회전의 편수를 착 수했으며,균요법을 시행하여 요역을 공평하게 하고, 대명률 이래의 새로이 마련된 법전을 정리한문형조례를 만들어 재판의 공평을 기했다고 도 한다. 이런 아버지와는 달리 그의 아들 무종 정덕제는 처음부터 음락( 淫 樂 )에만 탐익( 耽 溺 )하여 노는대만 치중할 뿐, 골치 아픈 정무는 유근( 劉 瑾 ) 을 비롯한 8호( 八 虎 )라고 부르던 여덟 명의 환관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새로운 놀이를 찾아 항상 바쁘게 뛰어 다녔다. 모든 정사( 政 事 )는 환관.명조의 흥망성쇠- 양명학의 등장 시기 378

379 8호 가운데 우두머리 격인 유근이라는 자가 전결권을 가지고 황제권을 대행하게 된 것이다. 유근은 중국의 서북쪽 섬서성( 陝 西 / 싼시)에서 보잘것 없는 빈가( 貧 家 )에서 태어나 야심을 가지고 자궁환관( 子 宮 宦 官 )이되어 궁중으로 들어 간 사람이다. 그가 맡은 일은 태자 곁에서 만담( 漫 談 )이나 기예( 技 藝 ) 등으로 무료한 황태자를 즐겁게 해주는 일종의 오락담당이었고, 글은 쓰기는 고사하고 읽지도 못했다. 놀기 좋아하는 황태자에게 여러 가지 사음( 邪 淫 )과 비술( 秘 術 )을 전수하여 노는 즐거움을 제공하고 신임을 얻었다가, 황태자가 황제로 즉위한 후에는 그 신임을 미끼로 일종의 백지위임장(?)을 황제로부터 받아내고 정무를 독단하고 횡포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당황한 중신( 重 臣 )들이 여러 차례 간언( 諫 言 )을 올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환관 유근은 그를 비방하는 이런 중신들을 응징하 기 위해서 정덕 2년(1507) 3월에는 거짓 칙령( 勅 令 )으로 간당부( 奸 黨 簿 )라는것을 만들어 53명의 숙청 명단을 발표했다. 이 53명의 명단 중에는 당시 제일의 시인이자 대학자였던 이몽양( 李 夢 陽 )도 들어 있었고, 병부주사로 있던 35세의 왕수인( 王 守 仁 )도 들어 있 었다. 홍치 12년(1498) 진사에 합격하여 관로( 官 路 )에 올랐던 왕수인은 유근의 횡포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이때 그 보복으로 태장( 笞 杖 ) 40대를 맞고 만지( 蠻 地 )인 귀주 용장이라는 곳으로 좌천되었으나, 운명은 너무도 묘한 것이어서 그곳에서 양명학의 길을 열었다. 유근의 횡포는 여기에서 그치지를 않고 이듬해 정덕3년(1508)에는 다시 관료 3백여명을 옥에 가두어 청류( 淸 流 )의 숨통을 아예 끊어버렸다. 그리고 쫓겨난 그 빈 자리는 유근의 측근이나 추종자들로 채웠다. 이렇게 되자 유근의 문전에는 찾아오는 사람들로 성시( 盛 市 )를이루고, 뇌물( 賂 物 )이 판을 치고, 정의니 원칙이니 하는 것은 오히려 사치에 불 과했고,사방에서 군도( 群 盜 )와 유적( 流 賊 ),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등 가치관이 전도되고 세상은 온통 뒤범벅이 되고 말았다. 결국 유근은 중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환관이 황제가 되겠다는 흉계를 품었다가, 같은 환관의 탄핵을 받고 처형되어 그 시체가 갈기 갈기 찢겨졌다고 하는데, 그 찢겨진 살점을 사서 입에 씹고 그에게 당한 한을 풀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5년 동안 모은 재산 이 당시 명나라 10년 세입( 歲 入 )과 맞먹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잘못된 전제군주제도란 이렇게 위험한것이다. 유근이 실각하자 이번에는 전녕( 錢 寧 )이라는 노예출신의 환관을 총애하여 주씨 성을 주고 양자로 삼았다. 그리고 이 전녕의 권유로 외정에 표방신기( 豹 房 新 奇 )라는 사음( 邪 淫 )의 절간을 지어 악공, 라마승, 이슬람 상인들을 데리고 들어 박힌 체 밤낮으로 난음( 亂 淫 ) 비희( 秘 戱 )에 열 중했다. 그러다가 민란 진압 차 징발되어 온 변경 수비대 가운데 힘께가 쓰고 활 솜씨가 보통이 아닌 강빈( 江 彬 )이란 자가 몽골과 국경지대인 선부 ( 宣 府 / 宣 化 )에는 미녀가 많고, 몽골 초원을 누비면서 몽골인들을 사냥(?)하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라고 부추기자, 자금성을 떠나 표방을 선부로 옮기고 부녀자를 납치하여, 밤낮으로 즐기고는 자신에게 위무대장군총병관주수( 威 武 大 將 軍 總 兵 官 朱 壽 )라는 벼 슬을 내리고 진국공에 봉하여 5천석의 녹봉을 하사한다는,... 황제가 황제자신을 관료로 임명한다는 전대미문( 前 代 未 聞 )의 조칙( 詔 勅 )을 만들 게 했다. 황제를 포기하고 자유분방한 신하로 처신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후세의 사람들은 그가 불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사람 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훗날 청나라 때 편찬된 명사( 明 史 )에서도 그를 폭군이라고 쓰지는 않았다. 거의 같은 시기 조선왕조에서도 연산군( 燕 山 君 / 1494~ 1506)이 성종의 뒤를 이어 10대 왕으로 등극, 두 차례 사화( 士 禍 )를 일으켜 말썽많은 선비( 士 類 )들을 싹 쓸어 몰아내고, 채준사( 採 駿 使 )니 채홍사( 採 紅 使 )니 채청사( 採 靑 使 )니하는 해괴한 관직을 두고 전국의 준마와 미녀들을 뽑 아다가 질펀하게 놀았다. 백마( 白 馬 )의 고기가 정력에는 그만 이라는 근거 불명의 속설을 믿고 말 고기를 즐겨 먹고는 난음( 亂 淫 )에 묻혀 일세를 풍미했던 연산은 제 위 10년을 겨우 넘기고 중종 반정으로 물러났다가 30세를 일기로 병을 얻어 생을 마감했다. 명의 정덕제 역시 종실( 宗 室 )에서 일으킨 반란 진압차 출동했다가 귀로에 호수를 건너다가 배가 뒤집혀 간신히 목숨은 건졌으나 병을얻어 30 의 나이로 그가 만든 표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10대( 代 )라는 옥좌와 30년을살다간 연륜, 병을 얻어 일찍 죽었다는 공통점을 중국과 조선이라 는 공간을 사이에두고 거의 같은 시기에 있었다는 것은, 이를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흥미 있는사실이 아닐 수 없다..명조의 흥망성쇠- 양명학의 등장 시기 379

380 (3) 양명학( 陽 明 學 )의 등장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 시기에 명나라 최대의 학문적 성과인 양명학이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양명학을 일으킨 왕수인( 王 守 人 / 1472 ~1528) 은 절강성( 浙 江 省 / 져쟝성) 여요( 餘 姚 / 위야오) 출신으로 자를 백안( 伯 安 ).호 양명( 陽 明 )이라 하였다. 관직에 있던 부친을 따라 베이징( 北 京 )에서 성장한 그는,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과거에 합격하여 28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었다. 과거에 합격하였다는 것은 그 당시 관학인 성리학을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는것이다. 왕양명에게 학문적으로 길을 열어 준 것은 앞에서 이야기 한 대로 환관 유근의 비행을 적은 상소문을 올렸다가 그 보복으로 태장( 笞 杖 ) 40대 를 맞고 머나먼 귀주 땅 용장( 貴 州 龍 場 )이라는 곳에 역승( 驛 丞 )이라는 미관말직( 微 官 末 職 )으로 좌천된 것이 학문적 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묘족( 苗 族 )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기후도 불순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방( 異 邦 )의 세계였다. 그리고 유근이 보낸 자객( 刺 客 )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한 몸 추스리기도 힘겨워 산 기슭에 석실( 石 室 )을 만들고 거기서 고통스러운 생활을 보냈다. 그가 항상 의심스러웠던 것은 주자가 말한 천지만물 모두에게 있다는 그 많은 이( 理 )를 어떻게 밝혀낼 수 있을까? 저 푸른 대나무와 지천으 로널려 있는 많은 잡초들의 이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등의 의문을 가지고 사색과명상에 들기를 즐겼다고 하는데,... 그르던 어느날 밤 석실 속에서 정좌( 靜 坐 )하고 문득 깨친 것이 심즉리( 心 卽 理 ), 지행합일( 知 行 合 一 ), 만물일체( 萬 物 一 體 )였다고한다. 이때가 정덕 4년(1509) 그의 나 이 37세, 석실생활 2년만에 얻은 이 득도( 得 道 )의요체( 要 諦 )가 양명학의 본질이 되었다. 왕양명의 심즉리( 心 卽 理 )는 마음( 心 )을 성( 性 / 本 性 )과정( 情 / 感 情 )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혼연 일체인 있는 그대로의 마음, 그것을 이( 理 )라고 보아 주자와의 해석을 달리 하였다. 세상의 법이나 관습 등 모든밖의 이( 理 )가 마음 속에 있다는 것으로서, 사람의 마음 속에 내 재되어 있는 성과 정 모두가 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자는 仁, 意, 禮, 智 라는 4 端 만을 참다운 마음, 곧 理 라고 보았으나, 왕양명은 여기에 喜, 怒, 哀, 懼, 愛, 惡, 慾 이라는7 情 도 참다운 마음인 理 에 포함시켜야 된다는 것이다. 격물치지라는 난해한 용어에서 격( 格 )에 대한 해석을 주자는 이르다( 至 )라고 보았고, 왕양명 은 섬기다( 事 )라고 해석을달리 했다는 것인데, 사변적인 철학 용어를 풀이하기에는 그 심연의 경지를 모르는 입장에서 단순히 양명학을 실천 적인 유학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환관 유근이 실각하고 왕양명은 다시 관로에 올라 출세 가도를 달렸다. 이름 난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군략가( 軍 略 家 )로서의 명성도 대단하 여 여러 차례 반란을 진압한 전공도 세웠다. 이렇게 바쁜 가운데서도 학문에 대한 연찬을 계속하다가 가정( 嘉 靖 ) 8년(1529) 1월 광서( 廣 西 / 꽝시)의 적을 평정하고 돌아오던 중 남안( 南 安 )에서 향년 57세로 숨을 거두었다. 이러한 양명학이 중국에서는 두 갈래로 갈라져 정통파는 다시 주자학 쪽으로 기울게 되고, 소위 왕학 좌파는 더욱 격렬한 논조로 발전하여 사람은 배움으로서 완전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배우지 않고도 누구나 있는 그대로가 이상적인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성인군자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명 말의 유학자 이탁오( 李 卓 吾 )는 도덕적규범까지도 악으로 보고 세상의 모든 학자 정치가들을 무능한 위선자라고 침을 뱉고 경 서나 성인군자 역사적 인물에 대한 가치 평가까지 깡그리 뒤집어 엎고 물의를 일으켰다가, 관료와 사대부들의 탄압과 박해를 받았고, 그 박 해가 그를 감옥으로 보내자 자신의 최후 주장을 자결로서 반항하면서 생을 마감하였다. 중국 판 계몽주의 사상이라고할 수 있는 왕학좌파의 이런 주장이 먹혀 들기에는 유학이라는 벽이 너무나 높았다. 현실과 괴리된 종교나 사상은 원산지에서는 빛을 보지못하고 다른 지역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경우는 허다하다. 불교가 그렇고 기독 교 역시 마찬가지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修 身 齊 家 治 國 平 天 下 )라는 유교적인 도덕률을 두고 당시의 조선에서는 언감생심 평천하( 平 天 下 )라는 황제자리는 쳐다볼수도 없는 금단의 문이었다. 다만 치국의 자리인 제후(왕)로서 만족하면서 소중화를 자처하고, 그 전제가 되는 격물치지에 대해서는 끝없는 사변논단을 전개하여 퇴계와 율곡을 정점으로 주리파(영남학파)니 주기파(기호학파)니 하는 학파가 형성되고 성리학을 학문으로서 완성 단계에 이르게 하였다. 양명학이 조선에도 전해져 장유( 張 維 ), 최명길( 崔 鳴 吉 ),정제두( 鄭 齊 斗 ) 등이 연구하였으나 주리학파와 주기학파라는 성리학의 큰 기류에 눌려.명조의 흥망성쇠- 양명학의 등장 시기 380

381 서 빛을 보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를 사문( 斯 文 )으로 폄하( 貶 下 )하고 이단으로 취급하였다는 것은 당시의 조선 사회가 몹 시 경직되어 있었다는 반증이라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조선에서 받아들인 성리학을 제멋대로 재단( 裁 斷 )하고 다시가공( 加 工 )하여 평천하 자리에는 천황( 天 皇 / 텐노)를 앉히고 엉뚱하 게 세계의 중심은 자기들이라고 주장하였고, 양명학을 받아들여서는 이를 연구 발전시켜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근간을 이루었다. (4) 파란( 波 瀾 ) 속에 묻혀 산 세종( 世 宗 ) 가정제( 嘉 靖 帝 /1507~1566) 황제 독재( 獨 裁 ) 권력( 權 力 )이제도적으로 확립된 사회에서는 황제의 개 인적인 자질과 성향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혹독한 시련과 재앙도 세월이 지나면그 속에 묻혀버리고, 이를 외면한 자연의 섭리( 攝 理 )는 또 다른 장면들을 열심히 만들어 간 다. 이런 것을 역사학에서는 발전사관( 發 展 史 觀 )이라고 한다. 무종 정덕제는 아주 열심히 뭇 여인들과 정사( 情 事 )를 즐겼지만, 신체적 인 결함인지 신의 노여움인지는 알 수 없으나 후사( 後 嗣 )가 없었다. 1521년, 내각에서는 유조( 遺 詔 / 죽은 황제의 유언장)라는 걸 만들어 황 태후의 승인을 받고, 효종의 아우로 하북( 河 北 / 후빼이)의 안륙( 安 陸 )에 있던 흥헌왕( 興 獻 王 )의 맏아들 주후총을 모셔다가 뒤를 잇게 했는데 이 가 15살 나이로 명나라 11대 황제가 된 세종 가정제다. 유조( 遺 詔 )를 만들고 세종 가정제를 세우는데 공헌을한 것은 양정화( 楊 廷 和 )라는 내각의 태학사였다. 그는 새로운 황제 지명자가 그의 봉지 ( 封 地 )인 안륙을 떠나 수도까지 오는데 소요되는 40 여일 간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무종 정덕제가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뒷 정리를 단숨 에 해 치우고자 했다. 유조( 遺 詔 )라 하여 수도에 와 있던 국경수비병을 원대복귀시키고, 표방이라는 해괴한 절간도 부셔버렸다. 표방에 머물고 있던 라마승과 일반 승려들과 도사( 道 士 )들, 그리고 수많은 악공( 樂 工 )들과 사방에서 진상한 미녀들도 추방하거나 각자의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 세종이 즉위하자 이번에는 정식으로 조칙( 詔 勅 / 황제의명령)을 만들어 환관들의 정보기관인 동시에 악의 소굴로 악명 높았던 동창( 東 廠 )을 위시해서 서창( 西 廠 ), 내창( 內 廠 )을 모두 없애버렸다. 환관세력에 빌붙어 녹봉만을 축내던 15만명은 파면되고,환관의 양자나 친척으로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과 환관들의 추천으로 전 봉관( 傳 奉 官 )이 된 사람들도 대부분 추방됐다. 이런 일련의 서슬 푸른 조치에 대해서 환관측에서는 분노의 잇 빨만 갈뿐 손 쓸 겨를 없이 쳐다 만 보고 있어야 했다. 그 전의 황제들은 동 궁시절부터 환관들의 손아귀에서 자랐기 때문에 황제 즉위 후에도 그들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지금의 황제는 외부에서 영입했기 때 문에 환관들로서는 새로운 황제를 아는 사람도 없고 특별한 통로도 없었기 때문이다. 선악( 善 惡 )에 관계없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제도를 고치고 기득권을 빼앗는다면 피해 당사자들로부터 골수에 사무친 반발 또한 대단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일련의 연출 담당의 주역이었던 양정화는 암살의 위험으로부터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수백명의 호위군사를 거느리고 나들이를 했으나 얼마 후 그도 결국 황제로부터 신임을 잃고 쫓겨나고 말았다. 이런 문제의 발단은 세종 즉위 후 불과 6일만에 불거지기시작해서 만 3년 반을 끌다가 가정 3년(1524) 9월에야 겨우 결말이 난 "대례( 大 禮 ) 의 의( 議 )"라는 것이다. 세종이 즉위할 때 그의 생부 흥헌왕( 興 獻 王 ) 주유원은 이미 죽은 후였다. 죽은 황제의 생부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불거졌 다. 문제는 중국의 관습상 같은 항렬( 行 列 ) 황제의 뒤를 이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명조의 흥망성쇠- 양명학의 등장 시기 381

382 다시 말하면 전 황제 무종과 세종사이는 사촌 형제간이다. 따라서 세종이 무종의 뒤를 이을 수는 없고, 무종의 아버지인 효종 홍치제를 이어 야한다는 것이다. 결국 세종은 효종 홍치제의 양아들로 치고, 효종을 황고( 皇 考 / 황제의부친), 생부( 生 父 ) 흥헌왕( 興 獻 王 )을 황숙부( 皇 叔 父 / 황제의 삼촌)로 하기로 정하고, 양정화 등 중신들은 이를 조정의 공론이라고 발표하여 여기에 이설을 말하는 자는 간당( 奸 黨 )으로 몰아 부치 겠다는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여기에 대해서 당사자인 세종은 이것은 효도에 어긋난다하여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자기 아버지를 어떻게 삼촌이라 할 수 있느냐는 것이 다. 그래서 세종은 생부 흥헌왕( 興 獻 王 )을 황고( 皇 考 ), 효종을 황백고( 皇 佰 考 / 황제의큰 아버지), 무종을 황형( 皇 兄 )으로 할 것을 고집했다. 이런 것이 보기에 따라서는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세종의 주장을 따를 경우 제사를 비롯한 각종전례( 典 禮 ) 문제는 그렇다 치고, 그의 봉지( 封 地 )에서 수도로 들어오기까지 약 40일간 유 조( 遺 詔 )라는 이름으로 양정화 일파가 단행했던 일련의 사실들도 문제가 될 수있다. 불꽃 튀기는 접전은 그 자체가 위기였다. 세종이 계속 고집을 부리자 양정화 측에서도 일보후퇴하여 효종을 황고, 흥헌왕을 본생황고 흥헌제( 本 生 皇 考 興 憲 帝 )로 부르자고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세종은 끝내 듣지를 않았다. 나이 어린 황제의 고집치고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렇게 평행선을 달리면서 3년 반을 끌어온 대례( 大 禮 )의 의( 議 )는 결국 양정화 등 중신들을 물러나게 만들었고, 세종은 이름 없는 내각을 등 장시켜 그의 뜻대로 생부 흥헌왕을 황고( 皇 考 )라 해서 예종( 睿 宗 )이라는 묘호( 廟 號 )를 지어 바치고, 효종은 황백고라 불렀다. 결국 세종의 최 종 승리로 일이 매듭되었다. 조선왕조의 경우 대원군( 大 院 君 )이라고 불렀던 국왕의 생부( 生 父 )가 세 사람이 있었다. 명종이 후사없이 죽고 나서 그 조카에 해당하는 하성 군이 뒤를 이어 선조가 되었고, 선조의 생부 덕흥군은 덕흥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헌종( 憲 宗 )이 후사없이 죽고 나서 강화도령이라고 불리는 이원범이 그 뒤를 이어 철종이 되었고 철종의 생부 전계군은 역시 전계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철종이 후사없이 죽자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의 뒤를 잇게 하여 고종이 되었 고, 효명세자는 익종으로 추존되었으며, 동시에 고종의 생부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이 되었다. 민비와 흥선대원군의 갈등을 비롯한 조선왕조 말기의 혼미( 昏 迷 )한 정국은 이미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전의 덕흥대원군이나 전계대원군 은그 아들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이미 죽은 후였다. 따라서 대원군이라는 존호만 올려주면 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그의 아들 고종이 12살의 나이로 즉위했을 때(1863), 44살의 혈기 왕성한 청장년으로 살아 있었다. 살아있는 대원군을 어떻게대접해야 하는가? 전례( 前 例 )가 없는 문제를 두고 고심했으나, 아직은 고종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대원군은 대왕 대비로부터 수렴청정권을 위임받아 정치 전면에 나섬으로서 급한 문제는 해결을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많은 문제들이 동시에 잉 태되고있었고 이런 것들이 근대사를 더욱 암울하고 복잡하게 만들었다. (3) 불로장생의 비방들 "대례의 의"는 모처럼의 활력에 찬 물을 끼얹은 격이 되고 말았다. 다시 정치는 문란해지고 고질적인 환관들의 횡포가 사라진 대신 내각을 위시한 조정의 청류( 淸 流 )들이 파벌을 형성하고 권력을 농단 하기 시작했다. 변방에서 어렵 살이 지내다가 어느날 갑자기 황제가 된 세종은 덮어 놓고 오래 살기를 원했다. 그 방법은 도교( 道 敎 )에서 말하는 각종비방 ( 秘 方 )을 구하는 것, 전국에 사람을 보내 선약( 仙 藥 )을 찾게 하고 대궐에는 만수궁( 萬 壽 宮 )을 짓고 도교의 신들을 죄다 여기에 모셨다. 이렇게 되면 진짜건 가짜건 도사( 道 士 )들이 판을 치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선약( 仙 藥 )이 홍연환( 紅 沿 丸 )이라는 일종 의 강장제( 强 壯 劑 )라고 하는데, 그 성분이나 제조과정은 알 수 없지만, 홍연환을 만들기 위해서 8세부터 14세까지의 동녀( 童 女 ) 406명을 두 번에 나누어 궁안에 불러들였고, 세종은 이 홍연환을 수시로 복용했다고 한다. 세종 가정연간은 북로남왜의 극성이 정점에 도달했을 때다. 북에서는 알탄칸이 수도 베이징을 점령하기도 했고, 남쪽에서는 왜구를 앞세운 해적들이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그러나 구중궁궐 깊숙한 곳에서 황제는 불로장생만을 기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경로야 밀수( 密 輸 )건 해적 질이건 상관없이 다량의 은( 銀 )이 유입되면서 화폐경제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고, 상공업이 촉진되었 다. 이런 배경에서 당 나라 중기 이후부터 시작하여 근 8백 여 년 간 지속되었던 양세법( 兩 稅 法 )이라는조세제도가 만력제때 와서는 일조편법.명조의 흥망성쇠- 양명학의 등장 시기 382

383 ( 一 條 鞭 法 )으로 바뀌어 일부 지방을 시작으로 조세의 은납화( 銀 納 化 )가 이뤄지게 되었다. 향신( 鄕 紳 )이라는 새로운 지배 층이 형성되고 그들만의 문화가 꽃을 피운 것도 이 시기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춘화( 春 畵 )에 가까운소설 금병매도 이 시기에 쓰여졌다고 한다..명조의 흥망성쇠- 양명학의 등장 시기 383

384 모택동이 탄복한 인물 `증국번`의 지혜 :52 증국번 ( 曾 國 藩 ; ~ ) 청( 淸 )나라 말기의 정치가 학자로서 자는 백함( 伯 涵 )이며 호는 척정( 滌 正 )이다. 그리고 시호는 문정( 文 正 )으로서 태평천국( 太 平 天 國 )을 진압한 지도자이며 양무운동( 洋 務 運 動 )의 추진자이다. 또한 성리학자이며, 문장가로도 유명하다. 할아버지 증옥병( 曾 玉 屛 )이 일 으킨 부농( 富 農 )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1833년 향시( 鄕 試 )에 합격했고 이후 진사( 進 士 ) 시험에 급제하여 한림원( 翰 林 院 )에 보임되었는 데, 한림원은 전국에서 뛰어난 학자들이 모여 있는 기관으로 궁중의 서식( 書 式 )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수도에서만 13년 이상 근무했 다. 이 시기에 정호( 程 顥 ) 정이( 程 ) 주희( 朱 熹 ) 같은 송대( 宋 代 ) 철학자들의 저작을 읽게 되었고 유교경전의 해석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1852년 예부우시랑( 禮 部 右 侍 郞 : 文 敎 次 官 에 해당)으로 재직하였다. 하지만 1852년 어머니가 죽자, 고향으로 돌아가 3년간의 거상기간( 居 喪 期 間 )을 보낼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조정에 건의했다. 이 허가는 곧 내려졌으나 거상기간 중 함풍제( 咸 豊 帝 )에 의 해 다시 현직에 복귀하게 되었다. 1850년 무장봉기한 태평천국 군대가 1852년에 이르러서는 중국 중남부지방의 비옥한 양쯔 강 유역 을 장악하여 청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했기 때문이다. 결국 태평천국군이 진격해오자 황제로부터 후난[ 湖 南 ]을 방위하라는 명령을 받고, 농민과 병사를 의용군( 湘 軍 )으로 편제하는 한편, 장강수군( 長 江 水 軍 )도 조직하여 태평천국 진압을 주도하였다. 황제와 만주 귀족은 한인세력의 진출을 두려워하여 그의 활동을 제한 하였으나, 청왕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점차 신임을 얻었다. 1860년 양강총독( 兩 江 總 督 )에 임명되어 양쯔강[ 揚 子 江 ] 유역에서 의 태평천국 토벌의 전권을 수여받았다. 그는 이홍장( 李 鴻 章 )에게 회군( 淮 軍 )을 조직하도록 하고, 영국과 프랑스군의 원조를 받아들 여 난징[ 南 京 ]을 공략, 그 탈환에 성공하였다. 양강총독 또는 일시 직례총독( 直 隷 總 督 )으로서 구질서의 재흥에 노력하고 정치의 쇄신 감세( 減 稅 ), 염군( 捻 軍 :폭동을 일으킨 反 淸 的 무장집단) 등 화북농민폭동의 진압하였다. 이 당시 청이 강남( 江 南 )과 화중 지역에서 발생한 태평천국운동(1850~64)의 진압에 몰 두해 있을 때 허난 성[ 河 南 省 ], 산둥 성[ 山 東 省 ], 안후이 성[ 安 徽 省 ] 등의 화북( 華 北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불교의 영향을 받은 백련교( 白 蓮 敎 ) 비밀결사의 한 지파인 염당( 捻 黨 )은 19세기초부터 산발적인 폭동을 조장하고 있던 소금 밀매자, 탈주한 군인, 농민 등으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1850년대의 홍수로 빚어진 기근과 더불어 정부가 태평천국운동의 진압에 몰두하고 있는 것에 자극받아, 몇몇 염 집단이 1852~53년 장낙행( 張 樂 行 )의 지도 아래 연합을 형성해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나가기 시작했다. 3만~5만 명의 병사로 5군( 五 軍 )을 조직한 염군은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863년 그들의 근거지가 점령되고, 장낙행이 체포되어 살해되자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그뒤 염군은 곧 재조직되었고, 태평천국의 수도인 난징[ 南 京 ]이 함락되던 1864년에 살아남 았던 태평군과 결합하여 저항을 계속했다. 이때 그들은 기동력 있는 기마병을 이용해 청군의 약점을 공격하고 근거지로 후퇴하는, 즉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을 폈다. 하지만 청은 태평천국의 문제를 해결한 뒤 염군 반란에 관심을 집중하고 염군 봉쇄정책을 강력하 게 시행하고 증국번의 강력한 진압으로 반란군을 점차 쇠퇴시켜 결국 진압했다. 서유럽 제국에 대한 양보 타협정책 등에 따른 동치중흥( 同 治 中 興 ) 이라 부르는 구질서의 상대적 안정에 기여하였다. 그 사이 에 유럽의 군사기술과 무기 도입으로 군사력 강화를 제창하여 최초로 유학생을 미국에 파견하였으며, 안칭[ 安 慶 ]에 서양 기술을 도입 한 최초의 무기공장을 설립하는 등 양무운동 초기의 추진자가 되었다. 한편, 중국 최대의 애국적 사상가로 높이 평가받기도 하 며, 혹평을 받기도 한다. 저서로 증문정공전집( 曾 文 正 公 全 集 ) (174권) 증문정공수서일기( 曾 文 正 公 手 書 日 記 ) (40권) 등이 있다. 모택동이 탄복한 인물 `증국번`의 지혜 384

385 변화가 있다면 틀림없이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증국번은 처세할 때의 원칙은 언제라도 바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원칙에는 인생의 근본이 담겨 있어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고 만일 그 근본을 잊었다면 나머지 변화도 모두 의미를 상실한다고 보았다. 증국번의 변화는 불변을 기초로 한다. 증국번은 언제나 진심으로 사람을 대할 것을 주장했다. 사람에게는 원칙이 잇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는 믿음을 중요시하는 것이 처세의 기본이다. '믿음'을 대단히 중요시했던 증국번에게 믿음이란 강호에서의 의리보다는 사람을 대할 때의 책략과도 같았다. 성심을 가지면 다른 사람의 신임을 얻을 수 있고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며 공동으로 더 큰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모택동이 탄복한 인물 `증국번`의 지혜 385

386 양계초는 증국번의 성공이 마음과 행동을 바르게 하도록 심신을 닦는 修 身 과 그의 강한 자제력( 愼 獨 )에 있다고 보았다. '수신'해야 자기의 사상과 언행을 바로 잡을 수 있고, 그를 통해 비로소 남의 잘못을 바로 잡고 천하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된다. 증국번의 일생에서 충성과 겸허, 검약 정신은 절대로 변하지 않았다. 증국번은 불변의 원칙으로 숭고한 인격을 형성했고, 광범위한 계층의 존경을 받았으니 이 점들은 많은 인재를 모으고 대업을 성공할 수 있었던 필수 요소가 되었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로운 자를 이길 수 없고, 지혜로운 자는 행동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행동하는 자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를 이길 수 없는 법이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처럼 작심은 쉽지만, 의지가 박약한 사람이 열에 아홉이니 성공이란 역시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증국번;중국의 정치가) 작은 덕이라도 반드시 실천했고, 사소한 원한도 잊지 않고 되갚는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이 훗날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 투영되어 많은 인명을 살상했다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처세: 중국 최고 전략가 증국번의 세상을 이기는 법 18 중에서.. "근대의 사람 중 오로지 증국번에게만 탄복할 뿐이다. 혼란을 수습함에 하나의 결점도 없이 처리하는 점을 볼 때, 오늘날 누구에게 그 역할을 맡긴다 한들 가능하겠는가?" 중국 혁명의 위대한 지도자로 꼽히는 모택동( 毛 澤 東 )은 생전,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이자 학자 증국번( 曾 國 藩 )을 이같이 칭송했다고 한다. "정신은 쓰면 쓸수록 더욱 뛰어나게 됨으로 몸이 약하다고 지나치게 아낄 까닭이 없다. 지혜란 고난을 겪을수록 밝아지므로 상황이 나쁘다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마음은 늘 써야 활발해지고 쓰지 않으면 막힌다. 늘 쓰면 세밀해지고 쓰지 않으면 거칠어진다." 모택동이 젊은 시절, 일기 '강당록'에 적은 문구들도 증국번의 격언과 경구를 인용한 것. 그가 증국번의 처세법에 얼마나 매료돼있었는지 짐 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치에 있어선 라이벌이었지만, 마음에 품은 스승은 하나였던 모양이다. 장개석( 蔣 介 石 ) 역시 증국번의 심신수련법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의 문집과 유작집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내용을 발췌해 만든 책을 황포군관학교의 교재로 썼을 정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19세기 인물, 증국번의 삶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일의 근본은 오늘에 있고, 오늘의 근본은 어제 모택동이 탄복한 인물 `증국번`의 지혜 386

387 에 있을 터. 과거 태평천국의 난을 다스렸던 경륜가 증국번의 삶을 통해, 현재의 우리가 나아갈 길을 모색할 수 있지 않겠는가. < 인생조종법 > (시아출판사. 2006)은 증국번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 지혜를 일곱 가지로 정리해 소개하는 책. 서유럽으로부터 근대기술을 도입해, 청의 자강( 自 强 )을 시도한 '양무운동'의 추진자, 주자학 중심의 학문 연구와 도덕적 수양에 정진한 학자, 태평천국을 진압 한 지도자 등 증국번의 다양한 면모도 함께 엿볼 수 있다. 증국번이 인생을 조종한 비법 7가지 뜻을 세움 나를 강하게 함 겸손 변화를 꿰뚫어 봄 권력의 운용 기회 포착 임기응변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했다는 사실이다. "자기의 약점을 용서하지 말라. 그것은 잘못이다. 절대로 스스로 물러설 여지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 꿋꿋하게 버틴다는 것, 이것이 증국번의 인생철학이다." (제1장 '뜻을 세움' 중에서) 자기계발을 넘어 자기를 '경영'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약점을 스스로 꾸짖고,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음을 신념으로 삼았던 증국번의 삶은 현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청나라 말기 대신 증국번 증국번 ( 曾 國 藩 )은 청( 淸 )나라 말기의 정치가,학자로서 자는 백함( 伯 涵 )이며 호는 척정( 滌 正 )이다. 시호는 문정( 文 正 )으로서 태평천국( 太 平 天 國 ) 농민봉기를 진압하면서 정치무대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양무운동( 洋 務 運 動 ) 추진자이며 또한 성리학자 이고 문장가로도 유명하다. 호남성 상향현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1833년 향시( 鄕 試 )에 합격했고 이후 진사( 進 士 ) 시험에 급제하여 한림원( 翰 林 院 )에 보임되었는데 그는 수도에서만 13년 이상 근무했다. 이 시기에 정호( 程 顥 ),정이( 程 ),주희( 朱 熹 ) 같은 송대( 宋 代 ) 철학자 들의 저작을 읽게 되었고 유교경전 해석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850년 태평천국 군대가 진격해오자 증국번은 황제로부터 호남을 방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장강수군( 長 江 水 軍 )을 조직하여 태 평천국에 대한 진압을 주도했다. 1860년 양강총독( 兩 江 總 督 )에 임명된 증국번은 장강 유역에서 태평천국 군대 토벌에 주력했 다. 증국번은 농민봉기를 진압하면서 두각을 나타낸 후 세력을 확장하는 한편 [양무운동( 洋 務 運 動 )]을 적극 추진했다. 그는 군수공 업인 안경군기소( 安 慶 軍 機 所 ) 세웠는데 이는 중국 양무운동의 시작으로 되였다. 그 후로 증국번은 미국의 기계를 사들여 상해 에 병기, 선박을 주로 제조하는 강남제조총국, 금릉기기국, 복주선정국을 세웠다. 이 군수공장은 근대 공장이 중국에 설립되는 출발점으로 되였다. 증국번은 서양을 알기 위해서는 언어습득이 중요하다고 인식하여 동문관( 同 文 館 )을 설치했고 유학생들을 외국에 파견했다. 증 국번 등이 추진한 양무운동은 서방세계로 향하는 창구로 되였으며 서방의 선진적인 문화를 섭취해 자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추 진한 대담한 탐구로 되였으며 중국 자본주의 산생과 발전을 자극했다. 증국번은 청나라가 성세로부터 몰락하는 과도 시기에 정치, 군사, 문화,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영향을 미친 인물 로, 또한 후세에 쟁론의 대상으로 된 인물로 되였다. 저서로 <증문정공전집( 曾 文 正 公 全 集 )>,<증문정공수서일기( 曾 文 正 公 手 書 日 記 )> 등이 있다. 모택동이 탄복한 인물 `증국번`의 지혜 387

388 명나라가 멸망한 진정한 원인은? :49 명신종( 明 神 宗 ) 주익균( 朱 翊 鈞 ), 즉 만력제( 萬 歷 帝 )는 명나라의 14번째 황제이다. 만력10년(1582년) 그가 친정을 했을 때, "창고에는 재물이 풍부했고, 나라가 가장 부유한 때"였으며, "태창에는 곡식이 가득 싸여서 10년은 쓸 수가 있고, 태복사에는 돈이 400여만냥을 쌓아두었다." 그 러나, 만력중후기에 이르러 "창고를 둘러보아도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변방에 보내야하는 군사물자는 "해가 지나도록 지급되지 않았다." 이 처럼 심각한 재정위기가 닥친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만력제의 "주,색,재,기( 酒 色 財 氣 )"의 네 가지 병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을 챙기기 위하여 황실을 배불리고, 국고를 텅비게 했으며, 백성을 쥐어짰다. 그리하여 명나라가 멸망하는 화근을 남긴 것이다. 휘금여토( 揮 金 如 土 ): 극도의 호화사치와 개인적 욕망을 위하여 돈을 물쓰듯 쓰다. 만력제가 즉위할 때, 그는 10살이었다. 만으로는 9살이다. 내정( 內 廷 )은 생모인 이태후가 주관했고, 외조( 外 朝 )는 고공( 高 拱 )이 수보( 首 輔 )로 있었다. 그런데, 차보( 次 輔 )로 있던 장거정( 張 居 正 )이 궁중태감 풍보( 馮 保 )와 결탁하여 고공을 몰아내고 스스로 수보 겸 제사( 帝 師 )가 되어 외 조를 장악한다. 그는 이태후의 지원을 받아, 개혁을 진행하고, 국고를 늘인다. 그리하여 국고가 충실해지게 된다. 동시에 어린 황제를 엄격히 교육시켜, '요순임금이상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장거정은 지나치게 엄격하게 교육하다보니 어린 황제는 역반심리, 보복심리를 지니게 된다. 만력10년, 장거정이 병사한 후, 개혁의 기풍은 전혀 남아있지 않게 된다. 만력제는 어려서부터 호화사치스러운 왕부와 황궁에서 자랐다. 조부인 명세종( 明 世 宗 )과 부친인 명목종( 明 穆 宗 )의 부패한 생활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비록 궁내에서 이태후와 풍보가 그를 단속하고, 궁외에서는 장거정이 교육을 시켰지만, 그래도 황제의 곁에서 그를 점점 변하 게 만드는 환관들의 영향력을 대적할 수는 없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는 점차 술을 좋아하고, 여색을 밝히며, 재물을 탐하고, 기분내키는 대로 하는 네 가지 나쁜 버릇을 갖게 된다. 장거정이 죽은 후에는 더더욱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만력제는 음식, 의복과 기물에 아주 까다로웠다. 호화사치의 극치를 달리는데 뛰어났다. 명나라때 궁중의 음식은 예부의 산하에 있는 광록시 ( 光 祿 寺 )에서 비용을 부담했다. 만력초기에 매년 13,4만냥을 지출하는데, 만력중기에는 근 30만냥으로 늘어난다. 만력32년말이 되자, 광록시는 이미 돈이 바닥난다. 만력제는 호부에 명을 내려 3만냥을 빌려주게 하고, 태복사에도 2만냥을 빌려주게 한다. 나중에 궁중의 음식비용은 갈수 록 늘어나서, 광록시는 자주 대금지급을 미루게 된다. 궁중에서 쓰는 기물 예를 들어, 부채, 옷, 비단, 자기등도 계속 늘여갔다. 만력제는 수시 로 명을 내려 각지에서 더 많이 바치도록 했다. 궁중에서 혼례, 장례를 치르거나, 책봉을 하거나 제사를 지내는등 각종 행사를 벌일 때면 비용씀씀이가 놀랄 정도였다. 만력6년, 만력제의 결 혼때는 장거정이 국정을 담당했고, 함부로 돈을 쓰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사용한 비용이 7만냥에 불과했다. 장거정이 죽자, 비용은 대폭 증 가한다. 태자책봉에 사들인 금은보화비용만 30만냥이었다. 태자의 혼례를 치르기 위하여 여러번에 걸쳐서 보석을 사들이는데, 만력27년에 이 미 70여만냥을 썼다. 장공주가 시집가는데, 12만냥을 쓰고, 복왕이 결혼하는데 들인 비용만 30만냥이 넘었다. 토목건축공사는 만력제의 친정기간동안 비용씀씀이가 가장 컸던 항목이다. 만력11년, 21세의 만력제는 북경교외 창평에 자신의 미래 능묘의 부지를 선정하고, 다음해부터 건축을 시작한다. 이것이 정릉( 定 陵 )이다. 6년의 시간을 들여서 완공하는데, 비용이 800만냥이나 든다. 이것은 당시 국가의 2년치 수입이었다. 능묘이외에, 다른 토목건축도 경성의 내외에서 많이 벌였다. "도성내외의 사묘사관은 금벽휘황하고 당우장려 ( 堂 宇 壯 麗 )했다" "이궁별원은 새로 면모를 일신했다" 건청궁, 곤녕궁은 만력24년에 화재가 발생한다. 황극전, 중극전과 건극전도 다음해에 불 명나라가 멸망한 진정한 원인은? 388

389 에 타버린다. 나중에 재건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었다. 만력31년부터 3대전을 건축하기 시작하는데, 조정에서는 호광, 귀주, 사천의 3개성에 각종 귀한 남목 삼목을 구하도록 한다. 이 비용은 930여만냥이나 든다. 전체 3개 대전의 재건비용은 그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전색탕금( 傳 索 帑 金 ), 수괄백성( 搜 刮 百 姓 ): 국고에서 돈을 빼내고, 백성들에게서 재물을 긁어모은다. 만력제는 전혀 절제라는 것을 모르고 마구마구 써버렸다. 그러다보니 돈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각종 방법을 써서 재물을 긁어모은 다. 풍보와 장거정의 가산을 몰수하여 모조리 궁정의 내고( 內 庫 )에 넣게 하고, 국고에 넣지 않았다. 그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짐은 천자이 다. 사해의 것이 모두 내 것이다.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다. 천하의 재물은 모조리 짐의 재물이다." 만력제가 "화국위가( 化 國 爲 家 )"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바로 국고에서 돈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전색탕금( 傳 索 帑 金 )"이다. 명 나라초기의 재정수입은 쌀, 보리등 실물을 위주로 하였다. 호부에는 내부십고( 內 府 十 庫 )를 두는데 그것은 중앙정부의 국고이자 황제의 사고 ( 私 庫 )였다. '공사가 구분되지 않았다'. 명나라중기에 이르러,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면서 백은이 화폐화한다. 전부, 요역, 염과, 타과, 관세등 이 점차 은량으로 환산하여 거두어진다. 재정체계도 이에 맞추어 수정이 된다. 조정은 정통7년(1442년), 북경의 호부에 태창을 두어 은을 저 장하며, 은고( 銀 庫 )라 한다.홍치8년(1495년)에 남경에 다시 호부산하의 은고를 설치한다. 이때부터, 태창은고는 중앙정부의 국고가 되고, 내부 는 완전히 황제의 사고로 바뀐다. 정부의 수입지출과 궁정의 수입지출이 기본적으로 분리된 것이다. 내고에는 삼궁(건청궁, 자경궁, 자녕궁)의 전답에서 징수하는 '자립은( 子 粒 銀 )"과 태창에서 매년 100만냥 입고시키는 "금화은( 金 花 銀 )"으로 구성된다. 만력제는 돈을 물쓰듯 하다보니, 금방 내부의 지출이 바닥을 드러낸다. 계소하여 호부에 전색탕금할 수밖에 없어진다. 일찌기 만력6년, 만력제는 혼례에 쓸 보석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태창에 매년 100만냥의 '금화은' 이외에, 다시 내부에 20만냥을 추가로 입금시키도록 명령한다. 나중에 이를 기준으로 하여 매년 20만 냥이 추가로 입고된다. 만력37년에 '호부의 탕금이 고갈'되어 끝이 난다. 만력제의 계속되는 전색탕금요구로 장거정이 사망한 때로부터 만력 11년말까지의 1년반동안, 호부는 230여만냥을 지급한다. "만력중기, 호부에서 매년 들어오는 본( 本 色, 실물을 의미함)과 절( 折 色, 은자를 의미 함)는 모두 천사백육십일만여였다. 그중 절색으로 내고에 입고되는 것이 육십여만이었고, 태창에 입고되는 것은 삼백육십팔만여냥이었다." 국 가에서 징수한 세금의 2/3가 궁정의 내고로 들어갔다. 내각수보 신시행은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태창의 재물도 한계가 있다. 최근 들어 비 용이 무한히 늘어나니...들어오는 것은 적고 나가는 것이 많다. 계속 이렇게 할 수는 없다." 당시의 국고는 호부의 태창고이외에 예부의 광록시고, 병부의 태복시 상영고( 常 盈 庫, 冏 庫 라고 부름), 공부의 절신고( 節 愼 庫 )등이 있다. 이것 들은 모조리 만력제가 돈을 빼내가는 대상이 된다. 국가재정이 날로 부족해짐에 따라, 국고의 잔액도 점차 고갈된다. 그러자,만력제는 공상업 자의 주머니를 노린다. 만력24년부터, 그는 환관을 대거 광감( 鑛 監 )과 세사( 稅 使 )로 파견한다. 광감( 鑛 監 )은 광산 감독하여, 각지의 광산에서 세금을 거둔다. 그리고 그 세금은 내부로 보낸다. 광감은 명목상으로는 금광은광등의 채굴을 감독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이를 빌미로 대거 돈을 긁어모으는 것이다. 멀쩡한 전답의 아래에 광맥이 있다고 하면서, 주인에게 큰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만일 돈을 내놓지 않 으면 전답을 파헤치고, 집을 철거한다. 세사( 稅 使 )는 주요도시, 관문, 항구, 길입구에 세금을 거두는 관문을 두고 지나가는 수레, 배, 상인들을 착취한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광산은 구멍이 필요없고, 세금은 장사를 하지 않아도 거둔다. 민간의 언덕과 전답은 모조리 광산이 며, 관리 농민 공장도 모조리 세금내야하는 사람이다." 그 파급범위는 북으로는 요동, 남으로는 운남, 광동에 미치고, 동으로는 연해에 미쳤 다. "천하에 없는 곳이 없었다." 광감세사가 마음대로 착취하자 각지의 공상업이 파괴되고, 국가의 정상적인 세수에 영향을 준다. 그들은 백성들의 겨우 남은 재산마저 긁어 가 버렸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관청에 정상적인 세금을 납부할 능력마저도 없게 만들었다. 어떤 광감, 세사는 규정된 세액을 거두지 못하면, 지방정부에 원래 국고에 넣을 세금을 내놓아 내부에 넣도록 압박했다. 이런 약탈을 백성을 힘들게 했을 뿐아니라, 국고수입까지도 해쳤다. 실 제로는 일종의 간접적인 '화국위가'이다. 민빈국궁( 民 貧 國 窮 ): 백성은 가난하고 나라고 곤란하다. 그 악영향은 무궁무진하다. 만력제가 호화사치하고 및 개인적인 욕망을 채움에 따라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명나라가 멸망한 진정한 원인은? 389

390 첫째, 관료사회의 기풍이 망가진다. 황제가 재물을 좋아하니, 신하들도 자연히 배우게 된다. 그리하여 관료사회이 부패가 심해진다. 만력제의 명을 받들어 전국각지에서 돈을 긁어모으는 광감, 세사들은 거의 부정부패의 고수들이다. 예를 들어, 산서에서는 매년 45,200냥을 거두는데, 손조는 15,800냥만 내부로 보내고 29,400냥은 개인적으로 착복했다. 내각대학사 조지고의 말에 따르면, 광감세사들이 "상부에 보내는 것은 열 에 한둘이고, 열에 여덟아홉은 개인주머니에 착복한다"고 하였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광감세사들이 만력25년에서 34년까지 10년 간, 개략 황금10만냥, 백은4,5천만냥을 착복한 것이다. 일반 관리들도 공금을 횡령하였다. 재난구호자금이나 공사자금, 심지어 속장은(관리들 이 죄를 짓고 그 죄를 면하기 위하여 납부하는 돈)까지도 횡령했다. 호광순무 진요는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는데, 이임할 때 '속장은 수만'을 반환했다. 일부 내각대학사들도 깨끗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내각수보 심일관은 뇌물을 받기로 유명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초왕으로부 터 황금 1000냥, 백은 1만냥의 뇌물을 받았다. 좌도어사 구순도 일찌기 상소문에서 이렇게 개탄했다: "하급관리들은 사람을 널리 사귀는 것을 능사로 안다. 혹은 관부로 드러나게 돈을 보내거나, 암중으로 고향사람에게 보낸다; 상급관료들은 돈을 취하지 못하는 것을 바보로 안다. 주 머니를 채워서 스스로 배불리거나 돈을 뇌물로 받는다. 돈냄새가 진동을 하는데도 잘못한 것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니, 천하에 청백 리가 보기 드문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둘째, 국고가 텅비어, 통치력이 약화되었다. 거액이 재정결손을 메우기 위하여, 명나라정부는 국가의 저축을 쓸 수밖에 없었다. 호부의 태창은 건립한 이래 '징삼저일'(셋을 거두면 하나는 저장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칠푼은 외고에 저장하여 그 해의 정상적인 비용지출에 쓰고, 삼푼은 노고, 요고에 저장하여, 전쟁이나 재난에 대비했다. 장거정이 사망하고, 만력제가 친정을 시작할 때, 노고에 은200만냥, 요고에 은400만냥이 있었으며,외고에 은300여만냥이 있었다. 합계 900여만냥이 남았다. 만력15년이 되자, 그중 외고의 은량은 기본적으로 바닥을 드러내서 겨우 9 만냥이 남았다. 만력27년이 되자, 요고의 은량도 텅비어버린다. 만력36년이 되자, 노고의 은량도 8만냥이 남는다. 남경호부의 은고에도 만력13 년에는 150만냥이 남아 있었는데, 만력28년이 되어서는 텅 비어 버린다. 이처럼 심각한 재정위기는 여러가지 정상적인 지출에 영향을 주었을 뿐아니라, 군대의 전투력을 약화시킨다. 태복시고의 보관은량은 원래 전 마를 구매하기 위한 마가은( 馬 價 銀 )이다. 마가은이 전용되자, 군대는 전마를 보충할 수 없게 된다. 호부의 태창에서 변방에 군대에 군용자금 을 보내준다. 이것이 군용자금의 주요한 구성부분이다. 그런데, 태창이 텅비다보니, 지급이 자주 지연된다. 만력중기이후,호부는 매년 지연지 급에 대한 보고서를 올린다. 많은 지방의 주둔군은 적시에 군용자금을 받지 못하고, 군정이 부패하여, 상관들이 자금을 떼어먹고 학대하는 일 로 인하여 병변(쿠데타)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군대의 전투력이 하락하는 것은 통치력의 약화를 가져온다. 셋째, 백성의 빈곤이다. 사회갈등이 격화된다. 만력제가 친정한 후, 세금을 계속하여 추가로 거두어갔다. 만력말기 요동전투가 발생하자, 국고 는 고갈되고, 군수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게 된다. 내부의 백은은 작은 산만큼 쌓여 있었지만, 만력제는 이를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3차에 걸쳐 요향( 遼 饗 )울 추가로 거둔다. 전답에 9리씩을 추가하여 합계 520만냥을 거둔다. 백성의 부담은 전례없이 가중된다. 게다가 호족들 이 착취하고 수리는 유지보수가 되지 않으며, 수재는 매년 발생한다. "정부의 창고는 텅 비고, 백성의 집도 열에 아홉은 비었다." 사회갈등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백성들은 항쟁을 시작한다. 만력16년, '부자에게 빼앗아 가난한 사람을 구하자"는 기호 를 들고 영산, 잠산, 태호등지에서 수만의 무리가 반란을 일으킨다. 나중에 관청이 합동공격하여 실패로 끝난다. 도시에서는 수공업자들이 주 체가 되고, 각계층민중이 참가하는 민변( 民 變 )과 민초( 民 抄 )사건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만력22년, 복주의 창미( 搶 米 )풍조가 나타난다; 만력 27년에는 산동 임청의 주민들이 천진 겸 임청 세사 마당에 대항하여 투쟁을 일으킨다; 그리고 형주인민들은 호광세사 진봉에 항거하는 투쟁 을 일으키고, 상민들은 그를 향해서 돌과 벽돌을 던졌다. 만력29년, 소주는 갈성을 우두머리로 한 직공, 염공 이천여명이 세사 손륭의 착취에 항거하여 시위를 벌이고, 손륭의 여러 앞잡이들을 죽이며,세사관청을 포위한다. 손륭은 은퇴한 대학사 신시행의 집에 숨었다가 이틀 후 항주 로 도망쳐서 목숨은 건진다. 같은 시기에, 섬서, 직예, 강서, 복건과 운남, 요동 등지에서 상당한 규모의 민변이 발생한다. 역대왕조의 붕괴는 대부분 고위통치집단의 부패로 인하여 스스로 무너졌다. 명왕조도 마찬가지이다. 만력제의 '화국위가'는 당시 세계에서 가 장 부유한 국가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만력제가 죽은 후 17년만에, 명나라의 농민반란이 섬북에서 폭발한다. 다시 17년이 지나자 명나라의 통 치는 무너진다. 청나라때 편찬한 <명사>에는 이렇게 개탄한다: "명나라의 멸망은 실제로 신종에게서 망했다" 이말이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 다. 명나라가 멸망한 진정한 원인은? 390

391 명나라가 멸망한 진정한 원인은? 391

392 중국고속철의 환상: 2조위안 시장을 주고 어떤 기술을 받았는가? :48 시장을 주고, 기술을 얻는다( 以 市 場 換 技 術 )"이라는 말은 자동차공업에서 처음 나왔고, 고속철에서 집대성되었다. 1980년대초, 중국은 승용차와 경트럭을 수입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중기총공사 동사장이던 라오빈은 이렇게 재안한다. 승용차를 수입하는 동 시에 외국측에 무상으로 관련기술을 제공하도록 요청하자. 이를 통하여 중국자동차공업의 제조능력과 연구개발능력을 제고시키자. 그후, 중국 은 다시 자동차시장을 개방하여, 다국적기업들이 중국에 합자공장을 지을 수 있도록 허용한다. "시장을 주고 기술을 얻는다"는 정책이 점차 펼쳐지면서, 중국의 공업제조능력을 향상시키는 중요한 길의 하나로 자리잡는다. 철도부의 전부장인 류즈쥔시대에, 중국은 고곳철건설에서 시장을 주고 기술을 얻는다는 것이 널리 선전된 큰 성과였다. 중국은 7년의 시간을 들여서 자주적인 지적재산권을 가졌고, 세계최고속도의 기차를 가졌으며, 이를 위하여 겨우 23억달러의 기술라이센스비만을 들였다. 이것은 거꾸로 류즈쥔과 같이 중국에서 고속철을 대거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이유가 된다. 이 고속철의 최고성과를 대표하는 것은 화해호 시리즈의 CRH380모델열차이다. CRH1, CRH2, CRH3, CRH5에서 CRH380까지 중국고속철 도차량은 2004년부터 철도부가 협상을 조직하여 중국에 도입했고, 외국전문가들의 지도로 중국에서 제조하였으며, 나중에는 중국에서 자체조 립생산하게 된다. 이것은 통일적으로 "화해호"라고 명명된다. 2010년 5월 27일, 최초의 CRH380이 장춘객차주식유한공사에서 생산될 때, 신화 사는 원고에서 이 열차의 최고운영시속이 380킬로미터이며, 국산화율이 85%에 달하고, 중국은 100% 자주적인 지적재산권을 보유하였다고 하 였다. 2011년 6월 CRH380이 경호고속철에서 정식으로 운영에 투입된 초기, 고장이 끊이지 않았고, 구후에 원저우에서 40명이 사망하는 "7.23"열차 사고가 있었다. 이는 자신만만하게 해외로 나가려 하던 중국고속철업자들에게는 심각한 타격이었다. 류즈쥔을 대표로 하는 철도부패사건은 급속히 발전하던 중국고속철의 대약진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렇기는 해도, CRH380으로 대표되는 고속철기술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중국철도 인들이 자랑으로 생각하는 성과이다.심지어 현재도, CRH380의 제조업체인 중국남차와 중국북차는 고속철기술을 해외로 수출하려는 웅심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경호고속철이 운영개시된지 1년후인 2012년 5월 22일, 중국남차의 동사장인 자오샤오강은 강연때 공개적으로 말한 바있다. 그는 경호고속철 의 감속운영은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속도를 350 내지 380킬로미터로 회복시켜야 한다. 이유는 시속을 250킬로미터에서 350킬 로미터로 끌어올린 후, 탈궤계수( 脫 軌 係 數 )는 오히려 0.72에서 0.32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속도를 올리면 안전성이 더 커 지지 더 적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오샤오강은 말한다. 이전에 남차는 이미 금년내로 시속 500킬로미터까지 시험할 것이라고. 중국인들의 속도에 대한 사랑은 짧은 기간동안의 침묵후에 다시 끓어오르고 있다. 확실히, 중국은 이미 고속철기술을 이미 보유하고 장악하고 있다고 하지만, 외국의 동종업계(주로 고속철기술수출업체)에서 인정을 받지는 못 하고 있다. 2010년 남차가 해외에서 고속철시장을 개척하겠다고 선포한 초기에, 일본의 카와사키중공업은 변호사를 조직하여 관련특허를 연 구하고 법률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지멘스차이나의 한 내부인사는 그가 친히 겪은 이야기를 해주면서 중국고속철기술 에 대한 견해를 얘기한다: "당시 철도부는 시속을 300킬로미터에서 380칼로미터까지 끌어올리려고 하였다. 380열차의 방향조정기술을 책임진 한 중국전문가는 스트레스 중국고속철의 환상: 2조위안 시장을 주고 어떤 기술을 받았는가? 392

393 를 심하게 받아 밥을 먹지 못할 정도였다. 지멘스가 제공한 영문설계도면을 가지고 지멘스를 찾아와서 구체적인 번역과 수정방안을 물어보았 다. 당시 신문에서는 곧 생산되는 380은 중국이 자주적인 지적재산권을 완전히 보유하고 있다고 선전할 때였다. 지멘스의 전문가는 조롱하듯 이 말했다. '나한테 물어보지 말라.완전한 자주적인 지적재산권을 갖고 있지 않느냐?'" 그 지멘스의 엔지니어가 보기에, 장춘객차의 CRH380은 지멘스로부터 사간 CRH3의 플랫폼에서 만들어낸 것이고, 겨우 차량앞부분의 모양을 바꾸어 약간 더 길게 하였을 뿐이다. 이 점은 적지 않은 중국철도업계 내부인사들도 인정하는 바이다. 철도부의 전 과기사 사장인 저우이민은 공개적으로 말했다. 중국고속철의 차량의 도입한 설계모델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안정성은 검증이 되지 않았다. 속도가 빠를수록, 탈궤계수가 작아지는 문제에 대하여, 중국남 차 주저우공장의 한 부총공정사는 이것만으로 고속이 안전하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이에 대하여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나 는 속도가 일정한 수치에 도달한 후 탈궤계수를 계산하는 공식을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어떻게 바꿔야할지는 우리가 모 르고 있다." "샤리 한대가 가속패달을 밟아서 벤츠의 속도를 낸다고 하여, 샤리가 벤츠로 바뀐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외국측이 중국에서 고속철속도가 맹 목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보고 한 말이다. 6월초 베이징에서 거행된 고속열차세미나에서, 이것은 뒤집어서 말해진다. 북경교통대학 교수인 자리민은 "중국고속철은 벤츠를 샤리속도로 달리게 하는 것이다." 도대체 샤리가 벤츠속도로 달리는 것인지, 벤츠가 샤리속도로 달리는 것인지? 화해호에 관하여 어떤 것이 중국고속철발전을 위하여 포장한 거짓말이고, 어떤 것이 중국자주 지적재산권의 진상일까? 7년에 걸친 '시장을 주고, 기술을 받는다'는 정책은 2개의 중국차량제조업체의 미래발전을 위하여도 중요하고, 중국하이테크기술발전의 선택 에 있어서도 큰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답하는 핵심은 중국이 정말로 가장 선진적인 고속철기술과 생산능력을 사오고,자주적으로 혁신하였는 지가 아니다. 오히려, 중국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댓가를 치르고 소위 고속철 자주 지적재산권을 보유하였으며, 이들 자주적 지적재산권이 향 후 중국에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이냐는 점이다. 국내의 고속철시장을 효과적으로 운영할 것인가? 아니면 고속철기술을 수출할 것인가? 기자는 3개월의 취재를 통하여 중국고속철의 '시장을 주고 기술을 받는다'는 전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득실을 살펴보았으 며, 나중에 교훈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2011년 여름, 경호고속철이 개통되기 전날, 주저우전력기차공장의 고속견인연구소 소장이자, 원사인 류여우메이는 철도부의 초청을 받고 현장 에 갔다. 동시에 초청받은 사람에는, 고속철자주연구개발에 참여했던 7,8명의 전문가들이 있었다. 2002년 고속철자주연구개발방안이 폐기된 후, 그들은 처음으로 다시 만난 것이다. 경호고속철의 개통현장에서 CRH380열차를 보면서, 류여우메이는 만감이 교차했다. 10년전 그는 일지기 고속철자주연구개발의 핵심인물이었 다. 2003년, 전 철도부부장 류즈쥔이 부임하자, 많은 반대의 소리를 물리치고, 이미 10년이나 진행했던 고속철자주연구개발을 중지시킨다. 그 리고 "시장을 주고 기술을 얻는다"는 기술도입방안으로 방향을 바꾼다. 류여우메이와 그의 팀에서 연구개발한 중화지성( 中 華 之 星 )은 고속철발 전의 문밖으로 쫓겨난다. 그는 지금도 이 결정에 대하여는 불만이 크다. 그러나, CRH380의 바퀴가 철궤 위에서 안정적으로 운행되는 것을 보고는 역시 격동을 감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옛날 중화지성의 연구개발로 배양된 인재들이 나중에 각 공장에서 해외기술을 도입하고 소화 시키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번 고속철의 "시장을 주고 기술을 받는다"는 것에서 도대체 무엇을 받았는가? 그의 생각을 들어볼 만하다: "지적재산권으로 말하자 면 모두 제고되었다. 그러나, 핵심기술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 중국고속철의 환상: 2조위안 시장을 주고 어떤 기술을 받았는가? 393

394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반풍자적이다. 옛날 중화지성의 연구개발을 중단시킨 것이 잘된 결정인가 아닌가? 중국은 7년에 걸친 기간동안 고속철 기술을 도입하면서 반성해야할 점이 이것만은 아닐 것이다. 생각해봐야 할 점은 자주연구개발과 기술도입은 무슨 관계인가? 어떤 제품은 자 주개발해고, 어떤 것은 기술도입을 해야하는가? 하나의 수단으로서 '시장을 주고 기술을 받는다'는 것 자체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어떻게 바 꾸어야 가장 적은 댓가를 치르고 가장 큰 효과를 얻을 것인가? 기술에 속박당하지 않으면서. 중국고속철이 처음에 걸었던 길은 자주연구개발이다. 1990년,철도부는 중국고속철발전모델과 계획을 수립한다. 푸즈환은 중국고속철 자주연구 개발노선의 지지자였다. 1998년에서 2002년까지, 푸즈화니 철도부장으로 있을 때, 남징푸전차량공장, 철도부 주저우전력기차연구소(나중의 남 차 주저우전력기차연구소유한공사)와 장춘객차공장을 포함한 몇 개의 국내기차제조업체는 모두 더욱 빠른 속도의 열차연구개발에 주력했다. 그러나, 참여인원이 많지 않고, 투입자금도 적었다. 류여우메이의 말에 따르면, "가난하게 버텼다." 많은 사람들은 '중화지성'을 중국고속철자주연구개발의 대표자로 보고 있다. 류여우메이등 원로철도인사들이 볼 때, 이것은 오해이다. 중국은 당시에 이미 준고속열차모델(시속 160킬로미터 내지 200킬로미터)을 개발하였고, 그중 선봉, 오성과 중화지성은 동력분산노선(동력을 몇 개의 열차차량에 분산시키는 것)이엇고, 남전은 동력집중노선(동력을 열차의 양끝에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선봉호 전기열차는 2000년에 난징푸전에서 연구제조했다. 같은 해 주저우연구소, 장춘객차등은 남전을 개발한다; 2001년 남차 주저우연구소는 오성과 중원지성의 열차를 개발한다. 이들 시험차종중에서, 안정성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남전이었다. 철도부도 이를 구매해서 지금도 광 주-심천선을 운행하고 있다. 오성도 카자흐스탄에 수출된 바 있다. 2001년 4월, 철도부는 "시속270킬로미터고속열차설계임무서"를 하달한다. 류여우메이가 총설계사였더. 동력집중노선을 걷는 중화지성이 정식 으로 연구개발을 시작한 것이다. 임무서는 시속200킬로미터이상의 열차를 생산하고 최종적으로 연간생산능력 15대를 가지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국가계획위원회가 비준한 프로젝트이고, 남차주저우연구소, 북차, 철도과학원등 12개 기업의 최첨단연구개발역량을 집중했으며, 국가에 서는 1.3억위안의 재정자금을 지원했다. 2003년, 최고운행속도가 시속270킬로미터인 중화지성이 진심객차운송전용선에 투입되어 시운전한다. 중국 최초의 자주지적재산권을 지닌 고 속운행열차로 불리웠다. 그러나 참가한 전문가들은 당시의 자주연구개발은 문을 걸어닫고 차량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기술도입, 흡수 및 소화를 포함했다. 류즈쥔이 나중에 대규모로 도입한 것과 주요한 구별은 "이런 기술도입은 소량이었다. 국내연구개발인원이 위주이고, 도입후의 학습과 흡수에 중점을 두었고, 재혁신을 추구했다." 2001년부터 연구개발된 중화지성을 예로 들면, 동력시스템, 제동시스템과 방향조절기등 핵심분야에서 시스템집적과 기술자주를 이룩했다. 그 러나 많은 핵심부품은 해외에서 수입했다. 총설계사 류여우메이는 직접적으로 맗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고속수전궁, 진공단로기, GTO기자재, 이온분리밸드, 고속축, 공기압축기등은 모 두 외국에서 수입해서 국산의 기술부족을 보완할 수 있다." 당시 선봉호와 중화지성의 연구개발에 참여했던 철도과학원의 전문가도 솔직하게 말한다: "당히 우리의 방침은 도입과 동시에 자체연구제작이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당시 자주연구개발은 비록 국가에서 통일적으로 계획하였고, 관련프로젝트는 국가 "8차5개년계획", "9차5개년계획"에 들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기업행위였다. 심지어 난징푸전, 주저우덴리기차공장과 장춘객차공장 및 철도과학원등 차량생산업체와 과학원 간에 연구개발경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런 나를 위주로 한 모색식의 연구개발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국내의 과학연구개발인원의 성장은 시일이 필요했다. 국외기술 중국고속철의 환상: 2조위안 시장을 주고 어떤 기술을 받았는가? 394

395 을 흡수하는 기초위에서 열차를 제조하는 것은 단지 첫걸음이다. 기술이 성숙되고 상업운영단계에 접어들려면 더욱 긴 시간이 필요했다. 2001년 9월에 생산된 중원지성을 예로 들면, 일찌기 경광철로의 정저우역과 우창역을 운행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운영때 고장이 잦았다. 당 시 정저우국 차량단에서 일한 바 있는 철도인사는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차를 타면 느낌이 편하지 않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열차제조시 전체 차량의 진동빈도와 고정빈도가 맞지 않아서 진동이 컸다." 운영기간동안 차량은 자주 중간에 고장나서 승객과 업무인원의 불만이 높았 다. 반년간 겨우 운행하자, 유지보수비용이 지나치게 높아서 운행중단한다. 남전은 광심선에서 운행할 때 역시 고장률이 지나치게 높은 문제 가 나타났다. 그러나 류즈쥔이 고집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술도입을 기초로 하고, 국내공장과 연구소가 자주개발하는 길은 느리지만 굳건히 지속되었을 것 이다. 이렇게 했다면 나중에 전국을 석권하는 고속철대약진은 없었을 것이고, 중국에 지금처럼 "백년이 지나도 원가를 회수할 수 없는" 수조 위안의 고속철투자로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화지성을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세미나 이전에, 류즈쥔은 전문가평가회를 개최한 바 있다. 참석했던 한 전문가에 따르면, 당시 회의에는 중 원지성의 연구개발에 참여했던 몇몇 남차,북차의 총공정사들도 참여해 있었다. 류즈쥔이 사전공작하여, 그들은 제조업체의 명의로 중원지성의 여러가지 문제를 지적했다. 회의에서, 여러 엔니지어들은 지시받은대로 발언했다. 남차주저우연구소의 엔지니어만이 침묵을 지켰다. 말을 듣 지 않은 주저우연구소는 나중에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른다. 2003년 9월 19일 지린성 창춘에서 개최된 "고속동차조전문가세미나"에서 중화지성은 '국외선진기술과 비교하여 기술수준, 제품성숙정도 및 신 뢰성등 분야에서 확실히 차이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이 결론은 중화지성에게 사형판결이다. 이번 회의에서, 철도부는 명확히 국외에서 시 속200킬로미터의 열차와 300킬로미터 이상의 고속열차를 도입하겠다고 명확히 밝혔다. 자주연구개발에 참여했던 많은 원로전문가들이 보기 에, 이번 소위 전문가는증은 그저 정치적 쇼였다. "그들은 필요한 전문가들을 불러왔지만, 널리 의견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정치가 노선을 결정한 것이다." 기존연구개발성과를 모조리 부정하였고, 대거 국외에서 기술을 구매하고 도입한 이유는 류즈쥔등이 고속철건설을 즉시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열차발전은 그의 정치생애의 발판이다. 그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자주연구개발을 기다릴 수 없었다.' 여러해 후, 선봉호의 연구개발에 참여 했던 철도과학원의 원로전문가의 회고이다. 그는 류즈줜에 대하여 원망이 크다.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일본인은 30년의 시간을 들여서 열차 시속을 210킬로미터에서 300킬로미터로 올렸다. 류여우메이도 생각한다. 기술격차는 확실히 존재한다. 그러나 고속철의 연구개발성과는 빠를 수 없다. 기술소화,흡수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차량의 안정적인 운행시험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노반의 침하에는 더욱 긴 시간이 필요하다. 고 속철이라는 이 분야에서 기술자들은 담량이 없었고, 정치인에게는 담량이 있었다. 2004년, 철도부는 시속200킬로미터의 열차프로젝트의 조달입찰에서, 카와사키중공업, 알스톰과 봄바르디어등이 낙찰받는다. 중국에서 자체연구개발한 중화지성은 처음부터 입찰대상에서 제외된다. 왜냐하면 입찰에서 "성숙한 시속200킬로미터이상의 철도열차설계와 제조기술을 가지거나 혹은 국외합작기술지원을 받는 중국제조기업(중외합자기업포함)"일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전에 중화지성은 철도부 에서 조직한 세미나에서 기술이 미성숙했다고 결론난 바 있다. 그외에 중화지성이 추구한 길은 동력집중노선이었고 최대한 8대로 편제한다. 이는 철도부의 사람을 많이 태워야한다는 요구조건에도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쫓겨난다. 2005년 8월에 비록 52명의 원사가 연명으로 국무원 에 호소하여 시운전자격을 억지로 받기는 했지만, 1년후 철도부는 부품이 느슨하다는 이유를 들어 철저히 봉쇄한다. 그러나, 당시 연구개발에 참여했던 일련의 인재들은 나중에 남차사방과 북차장객에서 국외고속철기술을 흡수하고 소화시키는 핵심골간이 된 다. 2003년 중국은 10여년간 논쟁이 이어져오는 경호고속철이 여전히 발개위에서 정식으로젝트로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중앙에서도 수백억위안, 수천억위안이 드는 고속철에 대하여 결심을 굳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고속철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점에는 컨센서스가 있었 중국고속철의 환상: 2조위안 시장을 주고 어떤 기술을 받았는가? 395

396 다. 당시 중국의 상황과 고속철발전상황을 보면, 고속철연구개발은 천천히 이루어져도 된다. 그러나, 류즈쥔의 생각은 명확했다. 선진국의 성 숙한 기술을 '시스템적으로 도입'하여 국내고속철건설을 급속히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기술도입은 하나의 수단이다. 고속철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가 외국업체를 끌어들인 첫번재 주문은 '시속200킬로미터열차입찰'이었다. 2004년 8월, 철도부는 120대열차의 주문을 내놓는다. 이 열차는 철도 제6차속도제고에 쓰일 것이다. 원래 이번에 자주연구개발하고 생산제조능력을 가지고 있던 남전, 오성은 이미 속도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들도 중화지성과 마찬가지로, 입찰에 참가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2003년 상반기, 발개위와 철도부는 공동으로 기술도입의 구체적인 실시방안을 제정한다. 처음에 발개위는 방안설계를 책임지고, 철도부는 구 체적인 업무를 책임졌다. 1990년대말, 발개위의 전신인 국가계획위원회는 지하철기술의 도입을 주도한 바 있다. 그때, 장슈광은 이미 류즈쥔에 의하여 철도부로 불려와 있었고, 고속철기술의 도입업무를 책임졌다. 장슈광은 처음에 자주 발개위 산업협조사 의 사람을 찾아서 외국대기업과 어떻게 싸워야하는지를 물어보았고, 어떻게 하면 기술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협의했다. 2003년 하반기가 되 자, 철도부는 점차 발개위의 통제를 벗어난다. 당시 발개위에는 우대정책이 하나 있었다. 고속철이 국산화율의 요구조건을 완성한 후, 재정세제 및 수입관세에서 보조금과 장려금을 받을 수 있었다. 철도부는 이 장려금이 필요없다고 했다. "그때 그들의 생각은 나는 너의 장려금을 받지 않으면서, 너의 통제도 받지 않겠다는 것 이었다." 한 발개위 인사의 추측이다. 그후, 국무원이 통지를 내려보내어, 명문으로 철도부가 고속철기술도입을 책임지고,발개위가 협조한다고 규정한다. 그후, 국무원은 기술차량전문위원회를 설립한다. 철도부도 당시 철도부 운수국장이던 장슈광을 내세워 열차프로젝트연합판공실을 성립시킨다. 주도권은 이렇게 자리바꿈을 한다. 발개위는 완전히 주변으로 밀려났다. 한 발개위의 관리말에 의하면, "방안조차도 우리가 심사하지 못하게 했다." 세를 얻은 철도부는 마지막 감독자의 감독마저 벗어난 것이다. 이에 따라 기술도입방안이 변경된다. 이전의 지하철기술도입에서는 국가계획위원회가 설계를 책임지고 입찰방안을 심사했으며, 입찰과정을 감독했고, 입찰권한은 지하철사업주에게 위탁한다. 기술도입의 주체는 기업이었고, 기업이 스스로 합작파트너를 찾아서, 합작방안을 협상하고, 다시 공동으로 입찰했다. 기술도입을 실현하기 위하여, 발개위는 지하철입찰방안에서 프로젝트총액임과 기술총책임을 둔다. 만일 외국측이 참 가하면, 기술총책임은 왕왕 외국측이 맡는다. 시간이 흐른 후 발개위는 입찰과정에서 중국측이 기술총책임을 맡는 조항을 집어넣는다. 이를 통하여 외국측이 중국측에 기술이전하도록 추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하철입찰방안에서 순중국기업이 참여하는 것도 배제하지 않았다. 지하 철사업주는 지방정부이므로 비교적 분산되어 있고, 입찰에서 충분한 경쟁과 시장의 선택을 실현할 수 있었다. 당시 참여한 관리에 따르면, 지 하철기술도입은 국가재정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10년의 시간을 들여서 80%가량의 기술이 점진적으로 흡수소화되었다. 고속철기술도입과정에서는 중앙이 철도부에 10여억위안의 전용경비를 지급하여, 철도부가 차체,견인,핸들 및 브레이크의 4가지 핵심기술을 도 입하도록 한다. 그러나, 철도부는 3차의 입찰과정에서 모두 23억위안의 기술비를 지급한다. 그중 CRH1은 합자공장에서 생산하므로 기술양도 비가 없다. CRH2의 기술양도비는 약 6억위안이다;CRH3의 기술양도비는 8000만유로(약8억인민폐)이며, CRH5의 기술양도비는 9억위안이다. 발개위와 다른 점이라면, 철도부는 이 입찰에서 전지전능의 역할을 한다. 입찰방안의 설계자이면서, 사업주이고, 마지막으로는 고속철기술도 입의 주체였다. 제1차열차입찰전에, 장슈광은 먼저 국내의 수십개 열차생산기업을 한 자리에 모은다. 그리고 열차기술도입은 국가와 민족이익에 관련되는 것 이므로, 남차사방주식과 장객주식 2개가 국외의 업체와 협상하고 나머지 기업은 외국측과 접촉할 수 없다고 명확히 한다. 중국고속철의 환상: 2조위안 시장을 주고 어떤 기술을 받았는가? 396

397 그후, 철도부의 분배하에, 국내중점차량제조기업은 각각 세계각국의 선진기술을 양수한다; 프랑스의 알스톰회사기술은 장춘궤도객차주식유한 회사가 양수하고; 일본카와사키중공업의 기술은 남차로 넘겨진다; 카나다 봄바르디아회사의 기술은 청도의 중외합자기업인 BSP로 이전되고, 독일 지멘스 자회사의 기술은 당산기차차량공장으로 이전된다. 푸즈환시대에 자주연구개발의 주력군은 남차 주저우연구소였는데, 기술도입과정에서는 배제된다. 당시에 철도부협상에 참가한 인사에 따르면, "제1차기술도입은 모두 국내기업과 국외기업으로 구성된 연합체였다. 남차 주저우연구소는 다시에 아직 자주연구개발을 포기하지 않아서 적 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불참으로 주문이 없게 되는 것을 발견하고는 비로소 철도부와 지멘스의 재차담판때 적극적으로 신청한다. 그러나, 류즈쥔의 반대로 남차집단은 200,300킬로미터이상의 플랫폼을 독점해서는 안된다는 명분으로, 지멘스의 300킬로미터 플랫폼을 당시 기술역량 이 남차 주저우연구소보다 훨씬 떨어지는 당산궤도객차공장에 넘겼다." 이때부터, 중국고속철은 고속발전시대를 연다. 원래 완성차생산기술역량이 가장 강했던 남차주저우연구소는 배제되고, 그저 부속품생산에밖에 참여하지 못한다. 할 수없이 지하철시장으로 뛰어들어 생존을 모색한다. 그러나, 반풍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주저우연구소 산하의 주저우 스다이가 마지막에 CRH380A의 견인계통공급상이 된다는 것이다. 견인게통은 열차연구개발의 3대핵심시스템중 하나이다. 북차 당산공장과 장춘객차공장에서 생산하는 CRH380B는 지멘스기술에 대한 흡수와 소화가 부족하여, 경호고속철이 운영시작한 후 고장률이 각각 백만킬로미 터당 10.46회 와 27.36회가 되어 부득이 리콜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적으로 지멘스의 전문가를 불러서 난제를 해결하여야 했다. "핵심기술을 도입하는 것은 철도부였다.철도부는 기술을 도입한 후 기업에 분배한다. 이 돈을 국내기술선도기업에 주지 않았고, 기업을 주체 로 한 기술도입도 아니었다. 철도부가 소화흡수할 능력이 있는가? 설마 몇 개의 방에 설계도면만 펼쳐놓으면 된단 말인가?" 발개위의 인사는 입찰부터, 철도부의 역할포지셔닝은 편차가 있었다. 전지전능한 역할에는 반드시 부패가 따르기 마련이다. "실제로 개인이 조종하는 시장에서는 시장의 경쟁매커니즘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때, 철도부의 이런 집중,통일되고 전면적으로 주도하는 협상방식은 일찌기 대거 선전된 바 있다. 지금까지도 여러 철도부 인사들은 유익했 다고 생각한다. 2006년, 제3차고속철입찰에서 철도부의 기술도입협상에서 기술고문을 맡은 우쥔용은 이렇게 말한다: "담판에서 철도부가 주도했다. 모든 외국 업체는 직접 철도부와 협상했다. 중국기업과 시장은 통합되었다. 만일 우리가 야보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아무런 방법이 없다. 우리는 하나하 나 각개격파하면서 4개의 외국업체가 경쟁하게 했다." 그에 따르면, 철도부는 당시에 업계전문가로 6개의 협상소조를 구성한다. 장슈광 본인 은 철도부 고속철기술도입소화흡수판공실의 주임을 맡는다. 매일 저녁이면 각조로부터 진전상황을 보고받고, 가격결정권과 최종결정권은 모 두 철도부의 고위간부들이 가졌다. 독일 지멘스의 예를 들어 이 협상전략의 성공을 살펴볼 수 있다. 협상에 참가한 인사들의 회고에 따르면, 지멘스의 최초태도는 강경했다. 제 시가격은 매 열차원형차량마다 3.5억위안을 요구했고, 기술양도비로 3.9억유로를 요구했다. 입찰전날까지도 지멘스는 양보하지 않았다. 철도부 의 수석협상대표인 장슈광은 확실한 의사를 표명한다. 만일 원형차량가격을 2.5억위안이하로 내리고, 기술양도비를 1.5억유로이하로 내리지 않으면 배제될 것이라고. 결과적으로 지멘스는 제1차열차입찰에서 낙찰받지 못한다. 다시 입찰을 진행할 때, 지멘스는 원형차량의 대당가격을 2.5억위안으로 낮추었을 뿐아니라, 8000만유로의 가격으로 핵심기술을 양도한다. 우쥔용에 따르면, 이 하나의 프로젝트로 "90억위안의 조달비 용을 절감했다." 그러나, 이것은 최초비용이다. 지멘스의 수익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2009년 3월 16일, 철도부와 중국북차집단 산하의 당산궤도객차공사와 장춘궤도객차주식회사 및 중국철도과학원이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한다. 392억위안으로 100대의 신세대 고속열차를 구입한다. 그러나, 중국북 차능 여전히 지멘스로부터 완성차 및 부품을 구매해야 했다. 지멘스는 이로부터 7.5억유로(약70억위안)의 주문을 따낸다. 지금도 북차는 여전 히 지멘스로부터 견인시스템의 핵심부품을 구매하고 있다. 중국고속철의 환상: 2조위안 시장을 주고 어떤 기술을 받았는가? 397

398 브레이크시스템은 주로 독일 크노르사(Knorr-Bremse)가 독점하고 있다. 2004년말, 크노르극동유한공사는 쑤저우고신구에 회사를 설립하는 데, 2010년말의 수입이 근 35억위안이며, 순이익은 7.7억위안이다. 중국은 7년의 소화흡수후에도 핵심부품은 여전히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시 장을 주고 기술은 얻는 철도부의 선전은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것같다. 더욱 크게 보자면, 철도부가 완전히 통제한 입찰하에서, 기업은 들러리가 된다. 입찰권과 주문은 모조리 철도부의 배분에 의존한다. 철도부관 리의 권한은 무한히 확대된다. 장슈광은 동차연락판공실을 일인천하, 만인지상으로 만든다. 수천억위안의 사업을 혼자서 결정한다. 장슈광의 협상능력은 실제로 철도부가 강행한 대규모 고속철시장때문이다. 2004년, 국무원이 심의하여 통과시킨 <중장기철로망계획>에서는 2020년까지, 전국철도운영연장거리가 10만킬로미터에 이르도록 하며, 주로 간 선에서 화차, 객차의 분리노선을 실현하겠다고 한다. 이 <계획>에서는 처음으로 "사종사횡( 四 縱 四 橫 )"의 여객운송노선망을 확립하고, 신규건 설노선이 약 2.8만킬로미터에 달하고, 여객운송선의 속도는 200킬로미터 이상으로 확정한다. 그러나, 류즈쥔에 있어서 여객운송전용선은 고속철과 같은 말이다. 실제건설에서, 여객운송전용선의 속도는 시속 300킬로미터 이상으로 조정 된다. 2008년 철도부는 다시 <중장기철로망계획>을 수정한다. 철도운영연장거리를 10만킬로미터에서 12만킬로미터로 증가시킨다. 류즈쥔은 활 동공간이 더욱 넓어진 것이다. 2005년 10월, "시속300킬로미터열차"의 프로젝트입찰이 시작되어, 입찰로 도입한 열차를 새로 건설한 여객운송선에 사용할 준비를 한다. 2006년초, 카와사키중공업, 알스톰, 봄바르디아 및 지멘스의 4개 외국대기업은 남차, 북차 산하의 기업과 합작하여 낙찰받는다. 계약에서는 차 량구매도 포함되고, 기술도입도 포함된다. 완성차구매에서 부품구매로 점차 발전하고 최종적으로 국내에서 조립생산한다. 중국측은 원형차량 의 도면을 매입 및 외국측의 기술지도에 별도로 대금을 지급한다. 2006년 11월, 철도부는 국내 최초의 고속철인 경진도시간프로젝트를 입찰한다. 최종적으로 지멘스를 대표로 하는 독일기업연합체가 120억위 안으로 낙찰받는다. 이전 두번과 다른 점이라면, 이번 입찰기업은 선로건설과 차량을 포함한 전체공사를 책임진다는 것이다. 공사가 커서, 철 도부는 협상과정에서 목표를 300킬로미터이상의 최선진기술을 받아내는 것으로 삼았다. 나중에 철도부가 상부에 보고하고 대외적으로 선전한 것을 보면, 이번 거액을 투입한 기술도입은 확실히 17억위안을 들여서 세계최선진의 고 속철기술을 매입했다고 묘사하고, 다시 그 이후에는 중국고속철에 자주연구개발과 국산화라는 레테르를 붙이게 하였다. 2010년에 CRH380이 생산개시된 후, 철도부는 중국이 이미 100% 고속철열차의 자주지적재산권을 보유하고 있다고 선전한다. 이것은 고의로 포장한 말이다. 그 뒷면에는 은환이 숨어있다. "류즈쥔이 성공한 것은 시속200킬로미터이상의 고속철시장의 수요를 잘 캐치했 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상품을 빠르게 공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도부는 공급은 통제할 수 있지만 수요를 통제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고속철을 한 사람이 조종하는 시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시장의 경쟁매커니즘을 가지고 일처리하지 않았다. 사람의 욕망은 팽창하기 마련이 다." 발개위 인사의 평가이다. 중국은 이런 "시스템적인 도입"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을까? 전 국가과학위원회 과기간부국 국장이자 과기부연구센터 연구원인 진 뤼중은 다르게 계산한다: 2006년말까지, 철도부는 3차의 열차대입찰을 통하여, 독일, 프랑스, 일본의 고속열차 280대(그중 160대는 시속 200킬 로미터, 120대는 시속300킬로미터), 합계 533억위안어치를 구입했다. 거기에 1098대의 기차(전력기차 420대, 내연기차 678대)에 인민폐 305억 위안을 들이고, 기술양도비 5억달러를 지급했다. 철도부는 모두 900억위안(110억달러가량)을 썼다. 이와 비교하면, 한국은 훨씬 돈을 적게 썼 다. 진뤼중에 따르면, 마찬가지로 후발주자인 한국은 21억달러를 들여서 프랑스로부터 시속30킬로미터의 고속열차 46대를 구입한다. 핵심기술 을 포함한 기술전부를 얻어냈을 뿐아니라, 직접 프랑스의 차세대고속열차개발에도 참여하고, 고속열차수출권리도 받아냈다. 중국고속철의 환상: 2조위안 시장을 주고 어떤 기술을 받았는가? 398

399 중국의 잠재적인 댓가는 이뿐이 아니다. 철도부는 기술도입협상에서 강세를 보인 이유는 류즈쥔이 전례없는 대규모의 고속철시장을 만들어냈 기 때문이다. 중국은 2006년을 전후하여 고속철건설을 대규모로 개시하고, 철도건설자금은 매년 증가한다. 2006년에는 2088억위안, 2007년에 는 2520억위안, 2008년에는 3000여억위안, 2009년에는 6000여억위안, 2010년에는 7000여억위안이었다. 이들 자금은 주로 국내에서 차입으로 조달된다. 은행이 돈을 발려준 것은 중국정부의 고속철발전에 대한 결심을 좋게 보았기 때문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보기에, 대부분의 고속철 노선, 특히 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지역의 고속철노선은 경제적 합리성이 없었고, 이익을 낼 수가 없었다. 세계은행의 2010년 7월분 보고서에 서도 중국이 대규모로 고속철을 건설한 경험은 다른 나라가 본받기 어렵다고 적었다. 철도부의 재무제표를 보면, 2006년에서 2012년 1/4분기까지, 철도부의 순자산은 8623억위안에서 1조5786억위안으로 늘었다. 1.8내가 증가한 것이다. 그런데 같은 기간 부채는 6401억위안에서 2조4298억위안으로 증가하여 3.8배나 증가한다. 특히 2008년에서 2011년까지 고속철을 대거 건설한 기간에는 총부채의 연간복합성장률이 41%에 달한다. 중국경제는 이로 인하여 큰 부담을 지게 된다. 중국사회과학원 금융중점실험실 주임인 류위휘는 글을 써서, 2010년말까지, 철도부의 부채는 1.72조위안(국가개발은행의 대출금 1720억위안 불포함)으로, GDP의 4.3%를 차지 한다고 말한다. 류여우메이, 진뤼중, 장치지를 포함한 여러 1세대 철도전문가들이 안타까워하는 점은 자주혁신과 기술도입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고, 이것 아 니면 저것인 관계가 아니며, 중국이 자체개발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원래 이처럼 방대한 규모로 '시장을 주고 기술을 받을' 필요가 없었 다는 점이다. 전 과기부 연구센터 연구원인 진뤼중은 예를 들어 설명한다. 중국은 20년전에 3억달러를 들여서 유럽오십헤르츠집단으로부터 150대의 8K기차 및 전체기술을 도입하였고 소화흡수후에 재혁신을 이루었다. 중국이 '샤오산'시리즈기차품질은 세계선진수준에 도달했다. 중국철도는 이로 인 하여 몇년내에 5번에 걸친 속도제고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이들 국산기차 및 '샤오산'기차의 실리콘부품은 지금도 대량으로 수출되고 있다. 국제고급시장에서 ABB등 다국적기업들과 경쟁하고 있다. 남전, 중화지성등이 상업화운영에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류즈쥔은 중국이 더빠른 속도로 기적을 창조해낼 수 있 다고 믿었다. 2007년, 고속철기술을 도입한지 3년후, 장슈광은 공개적으로 기술도입의 성과를 선포한다: "3년의 소화흡수를 거쳐, 중국은 이미 열차의 9개 핵심기술 및 10가지 주요보조기술을 완전히 장악했다. 시속200킬로미터 열차의 국산화정도는 70%이상에 달했다. 이 급의 열차는 모두 160대 를 구매했는데, 그중 완성차량은 6대뿐이다. 부품을 수입하여 국내에서 조립한 것이 12대, 나머지 142대는 전부 국외기술을 장악한 국내기업 이 제조한 것이다." 장슈광의 말에는 '시장을 주고 기술을 얻었다'는 성취를 자랑하고 있다. 짧은 3년의 기간내에 국내기업이 시속200킬로미터이상의 열차공업화 제조기술을 확보하여, 푸즈환시대의 고속철자주연구개발속도와 비교하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러면, 비법은 무엇인가? 철도부는 기술도입방식에 이렇게 규정했다. 국내기업은 반드시 국외기업과 합작하여야 주문을 따낼 수 있다. 국산화단계는 3단계로 나눈다: 완성차수입, 국외에서 부품을 수입한 후 조립, 국내기업이 기술흡수후 자체생산. 어느 기업이 국외기업과 합작할 것인지에 대하여 장슈광을 잘 아는 인사는 장슈광이 사적으로 이렇게 털어놓은 바 있다고 한다. 비핵심의 10대보조기술은 국내의 어느 회사로 할 것인지 그가 결정하면 그만이다. 다만, 9대핵심부품의 생산은 상부에서 결정한다. 기술능력이 비교적 강한 국유기업으로 선정하여야 한다. "그것은 리베이트를 받을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상술한 인사의 말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정말 이 3단계를 통하여 고속철제조의 핵심기술을 완전히 장악했을까? 알스톰, 지멘스등 기술양도에 참여한 기술자들은 인터뷰에서 그런 주장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말한다. 당시 기술도입계약에 핵심부품의 중국고속철의 환상: 2조위안 시장을 주고 어떤 기술을 받았는가? 399

400 설계기술을 양도하는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양도하는 것은 단지 제조기술이었다. 즉 외국측이 중국에 양도한 것은 도면이고, 외국측에 서 사람을 파견하여 중국측에 어떻게 조립하는지를 가르쳤다. 그외에, 소위 기술양도계약은 대량의 오리지날수입부품의 구매를 포함한다. 남 차집단의 한 부총공정사는 솔직하게 이렇게 털어놓는다. "실제로는 핵심부품구매계약이다' 그 부총공정사는 이렇게 말한다: 고속철속도를 300킬로미터에서 350킬로미터로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우리는 일부 개선작업을 했다. 도입한 열파의 설계여량을 이용하여 견인전기의 효율을 증대시켰다. 자연히 차량속도는 올라갔다. 그러나, 한꺼번에 설계여량을 모두 써버리고, 실무 경험이 없다보니, 문제가 날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기술전문가들에 따르면, 중국은 확실히 기술도입에서 적지 않은 선진적 제조기법을 배웠다. 예를 들어, 용접정밀도에서 크게 진보했고, 차를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북경대학 정부관리학원 교수인 루펑이 말한 바와 같이 자주혁신의 핵심은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 히지도 않는 암묵적인 지식의 집적과 획득이다. 열차도입에 참여한 바 있는 기술엔지니어에 따르면, 우리는 외국측이 제공한 도면을 가지고 핸들, 전기, 변압기를 생산할 수 있고, 외국측의 핵심부품으로 변류기와 자동제어시스템을 조립할 수 있다. 그러나 차형의 설계근거, 원리는 모른다. 차체를 넓히면 리스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차체의 원시설계계산서는 앋지 못했다. 핸들의 핵심수치와 업그레이그방법은 얻지 못했다. 전기와 변압기의 전자장, 열장, 역장의 계 산기 다차원협동시물레이션기술은 모른다. 더더구나 구조신뢰성이 있는 설계방법, 검사기준과 관련재료의 피로도특성데이타베이스는 얻지 못 했다. 자동통제시스팀의 소프트웨어 소스코드도 얻지 못했다. "이것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핵심적이다. 우리는 도입을 통하여 얻을 수가 없었다." 바꾸어 말하면, 수년의 교육을 거쳐 중국은 확실히 열차의 대규모생산과 제조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슈광이 말한 중국기업이 자 주생산한 열차의 핵심부품은 여전히 국외에서 수입한다. 단지 중국에서 조립을 완성할 뿐이다. 이렇게 짧은 몇년만에 수백대의 열차를 생산 할 수 있었다. 이 점은 자동차업계와 마찬가지이다. 자동차분야의 시장을 주고 기술을 얻는 것은 이미 보편적으로 실패한 경험으로 인식한다. 류즈쥔시대의 고속철기술의 비약적발전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많은 철도인사들이 잊지 못하는 고속철수출에 대하여 한 발개위의 권위있는 인사는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라고 암시한다. 원인은 다른게 아니 라, "기술도입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면 되지만, 수출은 왜 그런지를 알아야 한다." 중국은 현재능력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철도부서와 지멘스가 2005년말에 체결한 경진도시간 60대 CRH3의 구매계약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철도부와 지멘스/당차연합체가 체결한 주문은 모두 60대인데, 그중 3대는 완성차수입이고, 나머지 57대는 조립이다. 전체계약금액은 120억위안이다. 그중 지멘스에 지급한 구매금액은 60억위안이다. 나머지 59억위안은 당차에 지급했다. 나머지 1억위안은 당차 가 지급한 일부 기술양도비이다. 주로 인원교육과 자료비용이다.그외에 철도부는 지멘스에 단독으로 8000만유로의 기술양도비를 지급했다. 철도부가 지멘스에 지급한 60억위안은 3대의 8편조 완성차와 수입부품이 포함되어 있다. 완성차량은 2.5억위안에 1대였다. 합계 7.5억위안이 다. 부품의 계약가격은 5.14억유로이고, 합계 인민폐 50여억위안이다. 지멘스는 중국측 합작파트너인 북차당차, 영제전기공장 및 철도부연구원에 기술양도지원을 제공하기로 약속한다. 당차는 나머지 57대의 열차 생산을 맡았고, 제1단계의 국산화율은 30%이다. 제2단계는 50%이고, 마지막에는 70%에 달한다. 전체 열차는 중국브랜드를 사용한다. 즉 CRH3이다. 이 모델차량의 제동시스템은 독일 크노르사가 제공한다. 견인시스템은 지멘스가 제공한다. 마지막 열차에만 ABB다통회사의 견인 변압기를 장착했다. 제동과 견인시스템은 열차의 가장 핵심인 3대기술중 하나이다. 크노르는 CRH3에 제동시스템과 차량문시스템을 제공하고 5억유로를 벌었다. 그 회사 설립후 100여년만에 최대의 주문이었다. 중국고속철의 환상: 2조위안 시장을 주고 어떤 기술을 받았는가? 400

401 지멘스의 기술자들이 보기에, CRH380은 바로 CRH3의 플랫폼위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차량머리부분을 빼고는 거의 변한 것이 없다. CRH380A 국산화율은 CRH380B에 비하여 낮다. 견인전기, 견인변압기는 남차주저우전기유한공사, 용지신시속전기전기유한책임공사가 제공 한다. 견인전류기, 전기통제, 전기통신은 주저우남차시대와 북차다통전기가 제공한다. 그러나 브레이크시스템은 주로 크노르가 쑤저우공장에 서 공급한다. 작은 부분만 중국철도과학원기차차량연구소와 남경푸전제동설비유한공사가 공급한다. 류여우메이에 따르면, 경호고속철은 실제 운행과정에서, CRH380A의 안잔성이 CRH380B보다 좋았다. 초기에 계산한 고장율은 단지 백만킬로미터당 1.46회였다. 지멘스에서 수입한 부품은 거의 절반가격을 차지한다. 국내에서 조립하므로, 국산화율에 포함된다. "국산화율"은 중국정부부서가 좋아하는 지표중 하나이다. 국내기술수준을 형량하고 있다. 고속철도 마찬가지이다. 2007년, 2008년 고속철의 비 약적발전시기에, 상해철로국은 300킬로미터이상의 열차국산화율을 75%에 달했다고 하였다. 경호고속철 열차의 국산화율은 85%에 달했다고 하였다. 국산화율은 발개위가 지하철기술도입에서 사용했다. 주요 목적은 기술도입속도를 가속화하고, 원형차량구매비용을 줄이기 위함이다. 고속철에 서도 마찬가지의 효과가 나왔을까? 지멘스와의 계약에서, 국산화율은 분명히 표시되어 있다. "완성차수입은 5%를 초과하지 못한다. 부품수입은 15%를 초과하지 못한다. 기술양 도후, 국내생산과 조립하는 부품은 80%이상이어야 한다. " 그러나, 금액의 절반에 달하는 수입부품은 국내에서 조립되므로 국산화율에 포함 되었다. 국산화지표는 공장에서 철도부에 자체보고한다. 계산방법도 각양각색이다. 심사는 하지 않는다. 한 국내견인변압기기업은 인민폐결산기준으로 국산화율을 계산한다. 국외독자기업은 국내공장을 만들어 부품을 생산하면, 국산화로 친다. 국외 수입되어 국내에서 조립되어 판매되면 국산 화로 변신한다. 핵심기술협력업체를 선정하는데, 철도부는 절대적인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이전에 경험이 없는 생산기업들이 관계를 통하여 고속철 분야로 뛰어든다. 그리하여 류즈쥔시대의 기이한 광경을 형성한다. 딩슈먀오가 지배하는 산시즈치는 바로 그 한 예이다. 이탈리아회사와의 합 작으로, 경험이 없던 즈치는 마안산강철등 전통적인 바퀴생산업체를 누르고, 고속철 차륜의 독점공급상이 된다. 핸들의 중요부품인 침량( 枕 梁 )을 예로 들면, 전세계에서 1개업체만이 생산하여 가격이 비싸다. 철도부는 국산화도입을 생각할 때, 이전에 생 산경험이 없던 청도에이아오궤도집단을 선택한다. "국산화를 위하여 3단계로 진행했다: 먼저 웨이아오가 조립하게 하고, 제2단계로 국외기업 이 웨이아오에 주조기술을 제공하게 하고, 제3단계로 웨이아오가 생산한다" 그러나, 실제로 현재 이 3단계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 원래 직접 장춘객차로 보내어 조립하면 될 침량이, 먼저 청도웨이아오로 보내어진 후, 그 곳은 직원이 살펴본 후 다시 장춘객차로 보낸다." 지멘스 CRH3프로젝트에서 일한 바 있는 기술자는 놀리듯이 말한다. "국산화는 다른 지방의 털게를 양청후의 물에 씻은 후 양청후 털게로 변신하는 것과 같다." 10대보조기술들은 기술수준이 낮고 투입이 비교적 적으므로, 많은 민영기업들이 이를 기화로 고속철분야에 뛰어들고 싶어했다. 이들 분야에 서, 장슈광은 큰 발언권을 지녔다. '점정( 點 裝 )"과 가짜국산화가 성행했다. 한 발개위 관리에 따르면, 꽌시를 통하여 진입한 민영기업은 큰 힘 을 들이지 않고 기술도입을 하려 했다. 기술양도를 실현하려면, 기술양도비를 지급하고, 공장을 짓고 설비를 설치하며, 충분한 R&D비용을 투 입하여 대량투자가 이루어져야 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외국에서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했고, 기술을 몰라도 돈을 벌 수 있었다. 철도라는 폐쇄적인 분야에서, 일단 이익관계가 엮이게 되면, 외부의 기업이 끼어들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경쟁을 통하여 기술능력이 향상 되기 쉽지 않다. 예를 들어 고속철 차륜는 경험이 없는 즈치가 독점한 후, 국외에서 이미 제련이 다 된 강철을 수입하여 약간의 가공을 거쳐 중국고속철의 환상: 2조위안 시장을 주고 어떤 기술을 받았는가? 401

402 철도부에 납품했다. 즈치의 실제지배인은 류즈쥔 및 장슈광과 관계가 밀접한 산시의 여상인 딩슈먀오였다. 또 다른 국내기업인 산시 진시차 축이 연구개발해낸 공심차축은 지하철에 납품하고 수출한 실적이 있지만, 진입할 수가 없었다. 2011년의 "7.23"열차사고후, 철도부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국산화는 채택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게 되고, 더 이상 맹목적으로 공급상에 게 국산화율을 강요하지 않게 된다. 국산화는 확실히 원가의 절감을 가져왔다. 철도부는 열차제조가격을 매년 10%씩 감액시키도록 요구했다. CRH2는 남차가 카와사키로부터 도 입했다. 원형차구매가격은 1.78억위안이었다. 2007년에 생산개시된다. 남차에서 공고한 주문으로 계산하면, 2010년 10월에 생산한 CRH2의 제 조가격은 1.21억위안이다. 하락폭이 32%에 달한다. 그러나 북차의 제조가격은 비교적 높고 가격인하효과도 분명하지 않다. 부품을 보면, 핵심부품일수록 가격인하가 어렵다. 가격하락폭이 가장 큰 것은 인테리어분야이다. CRH3를 예로 들면, 청도뤄메이웨이아오는 2006년의 가격표에서 유리강부품가격이 국산화제2단계후 20%하락했다. 지멘스의 기술자가 보기에, 열차핵심기술은 3개부분이다. 견인시스템, 핸들시스템 및 브레이크시스템. 그중 가장 핵심은 견인시스템이다. "열 차의 심장"과 같다. 이들 기술은 외국측이 가격을 깍아줄 생각도 없고, 양도하지도 않는다. 견인시스템중 일부 부품 예를 들어 견인전기는 기술수준이 낮다. 국산화때 국내기업들이 많이 진입했고, 인하폭이 컸다. CRH2의 견인전기는 국산화제2단계에 12.5%가 인하되었다. 전체 견인시스템중에서 가장 핵심이고 기술수준이 높은 것은 소프트웨어시스템이다. 여러 업계전문가에 따르면, 지멘스, 카와사키, 알스톰은 모두 이 기술을 양도하지 않았다. "열차통제시스템을 장악해야 각 부품의 데이타수치를 설치할 수 있고, 진정한 설계능력을 가진다. 이것은 그들이 여러해동안 연구개발한 성과이고 두 손으로 넘겨줄 리가 없는 것이다." 전술한 지멘스기술자의 말이다. 당차의 한 기술자도 말한다. 현재 국내자주개발이라고 떠드는 CRH380B 시리즈차형은 일단 열차운행에 문제가 발생하면 여전히 지멘스에 물어본다. "소프트웨어의 업그 레이드버전도 지멘스가 한다. 시험데이타도 지멘스본사에 피드백한다. 수정하는 주기가 아주 길다." 견인시스템의 이런 핵심기술은 한 열차총가격의 얼마를 차지할까? 20-30%이다. 그중 열차자동통제시스템은 전체 견인시스템의 절반이상을 차지한다. 이윤도 가장 높다. 전 지멘스구매부 인사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 지멘스 구매부서는 견인시스템으로 돈을 번다." 알스톰도 마찬가 지이다. 견인시스템과 마찬가지로, 왹구측이 생존의 근본이라고 보는 것은 브레이크시스템이다.이것도 실질적인 기술이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외국 측의 중국내 합자공장에서 생산한다. "합자공장은 기술양도가 없다. 중국측은 도면조차 보지 못한다." 고속철브레이크시스템은 크노르가 독점 한다. 핵심기술은 양도하지 않는다 3대시스템중 기술양도계약이 체결된 것은 핸들제조이다. 그러나 단지 설치도면만 팔았다. 설계원리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중국측은 그렇게 되 는 것은 알지만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한 참여인사는 이렇게 말한다. 장춘객차는 일찌기 지멘스에 핸들데이타수치가 왜 이렇게 설치되었는 지 물은 적이 있다. 지멘스의 전문가는 그저 모르는 척했다. 현재 핸들의 부품은 장춘객차가 용접하고, 나머지 부품은 국외에서 매입한다. 남차주저우의 한 엔지니어는 이렇게 비유한다. "몇 개의 외국회사로부터 열차를 구매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4마리 물고기를 샀다.그러나 낚 시기술과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자동통제시스템의 핵심부품은 여전히 수입하고, 통제소프트웨어 소스코드는 아예 양도범위에 들어있지 않 다." 고속철기술도입에서, 중국측은 방대한 시장을 만들어 내놓았다. 그러나, 진정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고액의 이윤을 얻어간 것은 해외의 업체 중국고속철의 환상: 2조위안 시장을 주고 어떤 기술을 받았는가? 402

403 들이다. 그들은 핵심기술과 핵심부품을 통제하여 주도권을 장악했다. VIP좌석을 예로 들면, 2009년에 설립한 상하이위안통이 철도부와 1만개 의 VIP의자 생산주문을 체결한다. 동시에 미국회사와 기술협력을 했다. 위안통의 인사에 따르면, "미국측의요구는 가혹했다. 촉동기, 통제기 및 사밀조등 핵심부품은 앞의 1000개 의자는 미국회사에서구매해야 한다. 사밀조는 3000개를 반드시 미국에서 구매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모 든 기술협상에서 중국측은 총도급상이 되어 가공비나 벌고 있다." 그러나, 100% 자주 지적재산권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CRH380에서, 철도부는 기술도입색채를 고의로 드러내지 않았다. 2009년 3월 16일, 철도부와 북차, 철도과학원과의 100대 CRH380BL시리즈의 신세대 고속열차구매계약현장에 지멘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 후, 지멘스의 공식웹사이트에는 "100대고속열차계약에서 지멘스는 7.5억유로어치의 계약을 따냈다"는 소식이 실린다. 철도부는 그 후에 지멘 스와 계약한 것을 부인했다. 지멘스는 핵심기술을 양도하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지멘스의 주문은 북차가 그들로부터 견인시스템을 구매한 것 이다. 총가격 392억위안의 계약에서 지멘스가 20%를 차지한 것이다. 이를 보면 구매금액 자체에서 견인시스템등 핵심기술은 중국측이 흡수하 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반풍자적인 것은 자주개발의 노선을 걷다가 류즈쥔에 의하여 배제된 남차주저우연구소가 남차가 제조하는 CRH380AL시리즈의 공급상 명단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공급하는 것은 가장 핵심인 견인시스템이었다. 류여우메이에 따르면 주저우연구소는 네트워크통제시스템을 포 함한 완전한 CRH380AL의 견인시스템을 제공했다고 한다. 비록 중화지성이 요절했지만, 기술과 인재는 남아 있었다. 이들 유산은 기술도입단계에서 쓸모가 있었다. 남차주저우연구소는 2007년 지멘스 와 합자회사 STEZ를 만들어 DJ4열차를 만든다. 주저우연구소는 DJ4의 열차 수치와 기능을 가지고 리버스엔지니어링을 한다. 이런 방식에 대하여 지멘스의 기술자들이 "주저우연구소는 몰래 우리의 기술을 배웠다"고 폄하한다. 주저우연구소가 만들어낸 견인시스템과 대용량전기는 처음에는 열차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지하철에서 기회가 왔다. 상하이지하철 1호 선의 차량은 원래 지멘스로부터 도입했다. 2006년 수명이 다 되어 개조해야 했다. 지멘스는 가격을 너무 높게 불렀다. 2007년 그들은 주저우 연구소를 찾아온다. 주저우연구소의 전기와 구동계통은 이렇게 하여 상해지하철의 차량에 탑재된다. 그리고 잘 운영되었다. 이때부터 도시궤 도교통에서 시장을 확보한다. 최근 들어 그들의 견인시스템은 국내지하철시장에서 속속 낙찰받고 있다. 열차 CRH380A에서, 가장 먼저 핵심부품인 IGBT칩은 반드시 국외에서 구매했다. 발개위의 한 관리는 이 문제는 나중에 구매로 해결했다. 2008년 10월 주저우연구소의 한 산하기업인 주저우남차시대는 전세계에서 지명도가 있는 반도체부품공급상인 카나다상장회사 Dynex Power Inc의 75%지분을 인수한다. 그리하여 IGBT의 연구개발과 제조기술을 획득한다. 이와 동시에, 철도부의 주저우연구소에 대한 태도가 변화한다. 응용환경이 바뀌어, 선로, 전기공급시스템, 신호환경, 기후환경이 외국과 달랐 다. 2006년에서 2007년까지 열차조립후 운전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기술을 가진 외국측은 문제해결과정에서 협력하지 않았다. CRH5를 예로 들면, 시운전단계에서 자주 알수없는 이유로 정차했다. 나중에 자동 네트워크통제프로세스에 헛점이 있다는 것이 발견된다. 알스톰의 사람이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알스톰의 직원은 국내의 철로직원처럼 철도 부에서 명령하면 바로 밤낮없이 일하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 하나를 해결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같은 문제는 지멘스에서 도입한 CRH3에서도 나타났다. 시급하게 고속철에 투입하여 운영하려는 철도부는 이것으로 골치가 아팠다. 그래서 철도과학원등 각 연구소에 문제해결방안을 찾으라고 한 다.철도부는 국내기업의 기술능력이 올라와야 외국기업의 앞에서 발언권을 지닌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한 주저우연구소의 엔지니어는 이렇게 말한다. "나중에 철도부의 고위층은 사적으로 주저우연구소가 아직도 자주연구개발을 한다는 것을 알 았다. 그러나 회의에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고, 반대하지 않았다. 이런 변화과정은 국내기업에 대한 완전한 불신임에서 국내기업이 자주개 중국고속철의 환상: 2조위안 시장을 주고 어떤 기술을 받았는가? 403

404 발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 것이고, 다시 2008년말에는 철도부 고위층이 국내기업의 자주연구개발을 지지하게 된다."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중국인은 시스템적인 도입과 개발로 시속300킬로미터이상의 열차를 대규모로 생산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 속도는 놀라울 정도였고, 합작파트너들을 걱정하게 만들었다. 2004년 8월의 열차입찰에서 알스톰은 낙찰받은 업체중 하나였다. 60대의 고속열차 주문을 따낸다.2004년 10월 10일, 철도부와 알스톰은 정식 으로 6.2억유로의 계약을 정식으로 체결한다. 알스톰은 7개의 고속열차핵심기술을 양도한다. 2대의 열차는 이탈리아의 공장에서 조립하고, 6대는 부품으로 수입하여 중국측이 조립한다. 나머지 51대는 기술이전을 통하여 장춘객차가 국내에서 생산한다. 당시 알스톰의 기술팀인원에 따르면, 철도부는 2007년 4월 18일 속도제고시, CRH5가 반드시 운행되어야 한다고 하여, 시간이 긴박했다. 이 것은 어길 수 없는 정치명령이다. 철도부의 사람은 심지어 그날 하루만 운행되면 그 후에 멈줘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일단 경합선이 운영하 고 나면 어떻게 멈출 수 있느냐? 당시 알스톰에서 도입한 것은 시속200킬로미터의 기술이다. 그러나, 철도부는 운행속도를 반드시 250킬로미터에 도달하도록 요구했다. 실험 속도는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최적운행속도는 아니다. 이것은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고 있는 것이나 같다. 열차사용수명에 손해가 크다. 알스톰의 프로젝트책임자는 이것은 완성할 수 없는 임무라고 생각하여 사직한다. 사직이메일에서, 그는 3개의 Crazy라는 말로 형용 했다. 이것은 미친 시대이고, 미친 나라에서 발생한 미친 일이다. CRH5형열차가 생산개시된 후 시운행도 없이 급히 투입하여, 경합선(베이징-하르빈)을 운행했다. 통상적이라면 열차 1대의 시운행시간은 생 산주기의 1/3이다. 즉 1개의 열차를 3년에 걸쳐 만들었다면, 1년동안 시험운행해야 한다. 첫번째 열차는 궤도상에서 시험하는 시간이 가장 길다. 시범운행에서는 세부적인 사항을 살펴야 한다. 차량의 제동거리를 보아야 하는데, 긴급제동이면 얼마나 걸리는지를 봐야 한다. 시험 운행을 거치지 않고 투입된 CRH5는 운행한지 며칠만에 고장으로 중간에 섰고, 승객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당시 차량의 한 알스톰기술자는 수치스러움을 감당하지 못했다. 브레이스시스템, 에어컨시스템 및 열차자동문의 고장으로 CRH5의 고장빈도는 CRH1과 CRH2보다 높았다. 철도부는 이로 인하여 더 이상 알스톰과 협력하지 않는다. 액셀을 계속 밟은 결과로 CRH5형 열차를 2007년부터 방향조정장치에 문제가 나타난다. 장춘객차는 알스톰에 수리를 요구한다. 그리고 알스 톰에 사용수명 30년인 차량에 왜 지금 고장이 나타나는지를 물었다. 알스톰은 그저 웃으며 수리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방향조정장치 의 문제는 장춘객차의 확인을 받지 않았다. 이것이 중국의 고속철기술도입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미친 짓은 아니다. 많은 국외기술자들이 보기에, CRH380시리즈열차를 연구제조하는 것 은 더욱 미친 짓이었다. 류즈쥔은 나중에 조금은 머리가 돌아버렸다 CRH380방안토론에 참석한 한 기술자는 이렇게 회고한다. 2009년 380프로젝트를 개시하기 전에, 장춘객차의 기술자는 철도부의 회의에 참석했다. 철도부 고위층은 회의 상에서 경호고속철을 4시간내에 주파 하라고 결정내려버렸다. 이에 따라 시속380킬로미터라는 속도가 계산되어 나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CRH380의 유래이다. 당시 일본 카와사키의 전문가는 지적한 바 있다. 모든 구간을 380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런 차량을 설계하려면 반드시 경호고속철의 노선도를 놓고, 도로상황에 맞추어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목적하에, 이런 기술적인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CRH380의 기술플랫폼은 CRH3이다. 속도를 올리려면 공률을 늘여야 하고, 액셀을 끝까지 밟아야 한다. 안전의 여지를 모조리 없애버린 것이다. 지멘스에서 일한 한 기술자의 말이다. 이 판단에 대하여 국내의 한 차량제조공장 부총공정사도 동의한다. 이렇게 하면 많은 문제 가 있을 수도 있고,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아무도 모른다. 중국고속철의 환상: 2조위안 시장을 주고 어떤 기술을 받았는가? 404

405 많은 국내외전문가들이 보기에, 중국은 고속철기술도입문제에서 범한 잘못은 자주연구개발을 할 것이냐, 시장을 주고 기술을 받을 것이 냐의 선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법칙을 존중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류즈쥔은 고속철을 하루빨리 발전시키려는 목적으로, 모방제작과정에서 충분한 경비와 정력을 들여서 제대로 소화흡수하지 않았다. 비록 계 속하여 도입과 모방을 해왔지만, 많은 핵심기술은 제대로 획득하지 못했다. 중국이 이처럼 비싼 댓가를 치르고 실현한 고속철의 대규모생산능력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겉으로 보기에, 이미 완공된 방대한 국내시장이 거의 유일한 소화채널이다. 2011년 하반기까지, 중국이 투입운영하는 고속철은 6522킬로미터에 달한다. 그러나, 이 고속으로 달리는 시장은 앞으로 오랫동안 수익을 낼 수 없고, 오히려 거대한 채무의 부담을 질 것이다. 그러면, 중국은 고속철기술을 수출할 능력이 있는가? 고속철수 출시장은 얼마나 큰가? CRH380이 세상에 나온 이래, 중국남차와 북차집단은 수출에 큰 흥미를 보인다. 미국, 러시아, 브라질에서 고속철을 준비한다는 소식에 이들 은 속속 뛰어들어 시험해본다. 그러나 특허와 7.23 열차사고는 중국고속철기술의 문제를 드러냈고, 중국고속철의 해외수출에 가장 큰 장애 가 되고 있다. 2010년 12월, 중국남차와 GE는 합작프레임웍계약을 체결했다. 두 회사는 공동으로 5000만달러를 투자하여 미국에 합자회사를 설립하고, 미국 플로리다, 캘리포니아 두 주의 고속철프로젝트에 입찰참여하기로 하였다. 그들의 경쟁상대방은 지멘스, 알스톰 및 봄바르디아등이다. 이 거동은 카와사키중공업을 긴장시켰다. 당시 변호사에 위임하여 특허문제를 연구하도록 했다. 지멘스중국의 한 기술자는 당초 중국철도부 와 기술양도계약을 체결할 때, 계약에 명문으로 양도기술은 중국대륙에서 열차를 생산하는데만 사용하고 해외수출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철 도과학원의 한 원로전문가인 장치지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이 사온 것은 특허이다. 그러나 지적재산권은 여전히 외국측의 것이고, 일정한 조건으로 중국에서 생산하도록 허락했다. 그는 CRH380에서 유일하게 자주적 지적재산권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차량머리부분의 설계 라고 한다. 2010년 핑안증권의 한 업종분석보고서를 통해서 남차가 해외에 수출하는 것은 총도급자의 역할이라고 한다. 즉 일부 핵심부품은 전세계에서 구매하므로, 자신이 고액이윤을 얻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외에, 해외에 중국처럼 커다란 고속철시장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도 어렵다고 한다.세계은행 2010년의 보고서에 따르면, 브라질, 인디아, 러시아, 터키, 영국과 미국등에서도 고속철투자를 고려하고 있기는 하지만, 중국의 경험은 특수성이 있다. 인구와 도시간거리등 선천적인 우 세이외에 정부가 자원건설에 집중할 능력이 있고, 광활한 토지에 이처럼 대규모의 프로젝트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경제규모를 가지고 있는 등 다른 나라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점들이 있다. 미국같은 민주국가에서 이같은 대규모의 인프라건설을 동의받으려면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시속 킬로미터의 저속열차수출은 금년 5월에 말레이시아 프로젝트의 열차가 있다. 그리고 2006년에는 이란에 지하철의 열차를 수출했 다. 다른 수출국은 터키, 스리랑카, 튀니지등이다. 남차의 한 엔지니어에 따르면, 남차북차의 최근 2,3년간의 수출은 도시간궤도열차와 화물열차위주이다. 도시간궤도열차의 속도는 일반적으로 킬로미터이다. 중국은 10년전에 지하철기술을 도입했는데, 플랫폼과 나중의 열차는 같은 것이 아니다. 현재의 지하철 교류 및 제동은 자주연구개발을 실현했다. 주저우전략기차공장은 현재 지멘스, 북차장춘객차와 말레이시아의 또 다른 프로젝트에서 경합하고 있다. 이번 입찰가액은 30여억위안이며,7월 말에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한다. 중국고속철의 환상: 2조위안 시장을 주고 어떤 기술을 받았는가? 405

406 그러나, 어떤 나라는 중국에서 자금을 받아 고속철을 건설하고 싶어한다. 러시아 운수부장관은 기자인터뷰에서 중국에서 고속철열차를 구매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명확히 했다. 다만, 중국회사가 돈을 출자하여 고속철프로젝트에 투자하는 것은 희망한다고 했다. 중국고속철의 환상: 2조위안 시장을 주고 어떤 기술을 받았는가? 406

407 항우: 잔학해서 패망했는가 :40 항우가 잔학하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결론이 나있다. 아무도 항우가 잔학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다시 항우의 잔학에 대하여 재론하고자 하는가. 주로 한 가지 생각때문이다. 항우의 잔혹이 항우의 패망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항우의 잔학함으로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것은 그가 투항한 진나라병졸 20만을 갱살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진나라 사람들의 인심을 완전히 잃고 결국 항우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대지에서 사람들은 이러한 진리를 모두 인정한다: 인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 得 人 心 者 得 天 下 ). 인심을 잃은 자는 천하를 잃는 다( 失 人 心 者 失 天 下 ). 항우가 진나라 투항병사 20만을 갱살했다. 이렇게 잔혹한데 어찌 천하의 민심을 얻겠는가? 만일 한 사람이 민심을 잃는 다면 그가 어찌 성공할 수 있겠는가? 이같은 단계적 추리로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생각한다: 항우의 잔혹은 그가 실패한 주요원인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그가 실패한 유일한 원 인이다. 그래서 항우의 실패원인을 논할 때 그의 잔학을 얘기하지 않으면 그것은 가장 중요한 원인을 말하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추리에 동의할 수 없다! 만일 역사연구가 정말 이렇게 간단하다면, 역사연구는 그 자신의 가치나 매력을 잃어버릴 것이 다. 민심을 잃는 자는 천하를 잃고, 민심을 얻는 자는 천하를 얻는다. 이 두 마디 말을 멋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역사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우리 는 여러가지 사실로 이것이 진리임을 입증할 수 있다. 문제는 역사에 반증이 있다는 것이다: 항우가 진시황보다 잔학했는가? 진시황은 무력으로 육국을 병합시켰고,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래도 제업을 완성한다; 다만, 아무도 진시황이 사람을 무수히 죽였기 때문에 진시황이 패망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껏해야 이렇게 말할 뿐이다. 진시황의 성공 속에 진이세의 망국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 었다. 그러나, 이런 류의 말은 너무나 일반적이다. 어느 개국황제가 건국의 성공 속에 수대, 혹은 수십대 이후의 망국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 지 않다는 말인가. 만일 이를 보편적인 진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보편적이다. 진시황은 생전의 잔혹함으로 진왕조가 진시황통치시기에 붕괴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가지고 진이세때 패망한 진정한 원인이라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가의의 <과진론>에는 "이세지과( 二 世 之 過 )"라는 편이 따로 있다. 가의는 진이세가 만일 진시황의 폭정을 시정하고, 인정 을 실시하였다면 국면을 되돌려서 급속히 패망하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이를 보면, 진시황의 잔혹은 만일 그의 후계자의 손에 의 하여 개혁되었다면, 진나라의 패망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항우가 진시황과 가장 다른 점은 그가 4년동안 인생의 최고봉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잔혹함을 실패의 주요원인으 로 보는 것은 따져보아야할 가치가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만일 우리가 가정을 해서 항우실패의 원인을 검토해본다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유치했고, 군사적으로 항우: 잔학해서 패망했는가 407

408 주도권을 상실한 것이 항우의 잔혹함보다 실패에 더 큰 원인이 되었다. 만일, 항우가 정치적으로 좀더 성숙했더라면(물론 정치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면 항우처럼 잔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최소한 유방을 제 거할 세번의 기회가 있었다. 첫째, 항우입관( 項 羽 入 關 ) 항우가 40만대군을 이끌고, 거록지전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함곡관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유방부대의 저지를 받았다. 만일 이때 항우가 진 나라의 멸망이 유방,항우관계이 역사적 전환점이라는 것을 인식했더라면, 항우는 유방집단을 제거할 가장 좋은 핑계를 잡을 수 있었다. 항우 의 함곡관진입을 거절한 것이다. 항우의 이때 군사력과 명망이라면 한번에 유방집단을 철저히 해결할 수 있었다. 둘째, 홍문연 유방은 반드시 홍문연에 참석해야 했다. 항우에게 설명하고 해명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치명적인 군사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가서 해명하지 않으면 군사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고, 가서 해명하면 살해당할 수 있다. 양자를 비교형량하면 결국 유방은 갈 수 밖에 없다. 유방이 백여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홍문연에 참석했을 때가 유방을 제거할 가장 좋은 기회였다. 셋째, 한나라 원월 8월, 유방이 항우의 분봉을 받은 후 한중으로 돌아간지 겨우 3개월만에, 관중으로 출병했다. 삼진왕중 옹왕 장한이 폐구를 견고히 지키는 외에, 사마흔, 동의는 모두 유방에 투항한다. 장한은 폐구를 꼬박 10개월이나 지켰다. 장한은 이 10개월동안 무엇을 기다렸는 가? 그는 시시때때로 항우를 기다렸다. 만일 이때 항우가 관중으로 출병했다면, 그리하여 장한과 안팎에서 호응했다면, 유방이 아직 관중에서 안정되지 못한 틈을 타서, 최소한 유방을 관중에서 축출할 수 있었을 것이고, 한중으로 쫓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일거에 유방을 제거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항우는 이때 여전히 유방이 그와 천하를 다툴 최대적수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방을 놔두고, 제나라땅으로 출병하며, 제나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렇게 하여 유방에게 틈을 주게 되고, 유방은 관중의 통치를 공고히 한다. 그후 병 력을 일으켜 동쪽으로 진격해서 팽성을 점령하고 이로 인하여 팽성전투가 벌어진다. 이 세번의 기회에서 항우가 그중 하나만 잡았더라면, 유방, 항우의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 했다. 항우는 초한전쟁때 가장 뛰어난 양대군사가(항우, 한신) 중의 한 명이다. 항우의 군사생애는 그의 일생동안 계속된다; 다만, 항우의 초한전쟁 에서 가장 실패한 점은 그가 군사적으로 전투준비에 대한 안목이 결핍되었다는 점이다. 만일 항우가 유방이 한신을 파견하여 북방전선을 경 영하기 전에 일찌감치 북방전선을 개척하거나, 만일 항우가 한신이 북방전선을 개척하는 초기에 북방전선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더라면, 유방 은 최종적으로 항우에 대한 전략적 포위를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항우가 최종적으로 전략적 중대실수로 인하여 사면초가의 곤경에 빠지 지 않았을 것이다. 항우는 군사적으로 전략적인 안목이 모자랐다. 이것이 항우의 최종실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만일 우리가 항우의 정치적 실책과 군사적 실팩을 항우의 잔혹함과 비교한다면,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항우가 실패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잔혹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론적으로 이런 진리를 인정해야 한다: 인심을 잃은 자는 천하를 잃는다. 인심을 얻는 자는 천하를 얻는다. 다만, 우리는 초한전쟁의 현실에서 또 하나의 '진리'를 찾아볼 수 있다: 잔혹은 항우실패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아니다. 최소한 정치적인 유치함과 군사적인 주도권상 실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항우: 잔학해서 패망했는가 408

409 왜 우리는 그 진리가 초한전쟁때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인정해야 하는가? 첫째,잔혹의 지체작용 민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고, 민심을 잃는 자는 천하를 잃는다. 확실히 이것은 세계공통의 진리이다. 다만, 우리는 알고 있다. 민심이 작용 을 발휘하려면 과정이 필요하다. 바꾸어 말하면, 한 통치자가 잔혹한 것을 천하창생이 인식하는데 비교적 긴 역사적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다. 항우의 잔혹은 두 가지 상황으로 집중되어 나타난다. 하나는 진나라 투항군을 갱살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성에 오래 시간이 걸린 곳을 도살한 것이다. 전자는 관중인민의 원한을 샀다. 그러나, 천하창생에 있어서는 진나라군을 도살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통쾌한 일이다. 후자는 비록 손가락질 받을 일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항우가 항상 보인 모습은 아니다. 어쨌든 항우를 격분시켜 온 성을 도륙내는 방식으로 화를 발 설하는 경우는 그다지 자주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다수 천하창생이 항우의 잔혹을 인식하는데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잔혹과 같은 유형이 민심을 잃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려면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렇게 빨리 작용을 발휘하지 않는다. 진시황의 잔혹에서 진나라의 멸망까지 그 중간에 수십년의 시간이 있다. 그리고 진시황의 사후, 진이세는 여전히 폭정을 시행한다. 이렇게 하 여 민심의 향배가 비로소 작용한 것이다. 둘째, 정치, 군사의 직접작용 민심의 지체작용과 달리, 정치,군사적인 조치는 왕왕 단시간내에 거대한 위력을 발휘한다. 만일 항우가 입관한 이후 역량을 집중하여 군사적 인 수단으로 유방집단을 해결했다면, 만일 항우가 홍문연에서 유방을 베어버렸다면, 이런 조치는 즉시 거대한 작용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항우의 잔혹을 항우패망의 중요원인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항우의 정치적인 유치함과 군사적인 주도권상실을 항우실패의 양대원인으로 분석한 것이다. 그렇지만, 왜 사람들은 항우의 실패를 언급할 때마다 항우의 잔혹함을 얘기하는 것일가?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를 반복하기를 너무 좋아한다(민심의 득실과 천하의 득실의 관계같은 것).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로 역 사현상을 해석하기를 너무 좋아한다; 항우가 이미 실패했고, 그가 아주 잔혹했다면, 잔혹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가장 먼저 항우패망의 원인으 로 꼽는 것이 된다.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 진리는 만능이 아니다. 진리는 일정한 적용범위가 있다. 역사현상을 해석하는 가장 좋은 방법 은 구체적인 분석이다. 항우: 잔학해서 패망했는가 409

410 주산( 珠 算 )의 기원 :35 먼저 수수께끼부터 내보겠다: 옛사람이 다리를 하나 남겼는데 한쪽은 많고 한쪽은 적다 적은 쪽이 많은 쪽보다 많고 많은 쪽이 적은 쪽보다 적다. 고인유하일좌교( 古 人 留 下 一 座 橋 ) 일변다래일변소( 一 邊 多 來 一 邊 少 ) 소적요비다득다( 少 的 要 比 多 得 多 ) 다적요비소득소( 多 的 要 比 少 得 少 ) (* 중국 주산은 위쪽의 돌이 한국처럼 1개/4개 혹은 5개가 아니라 2개/5개이다. 그러므로 위쪽의 5짜리가 2개이므로 아래의 1짜리 5 개보다 많은 것이다.) 분명히 확 떠오르는 것이 있을 것이다. 다시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 '오래된 물건'은 우리의 생활에서 멀어진지 너무나 오래된 것같 다. 이제는 모호한 기억만이 남아있다. 지금은 정보통신시대이고, 주산과 같은 옛날 물건은 거의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이 당연하다. 똑똑한 기계들이 도와주어서 '게으른'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계산기가 없으면 숫자계산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특히 가슴아픈 것은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이미 전통의 주산과목이 없어졌다는 것이다.아마도 언젠가는 아이들이 주산이 뭔지모 모를 것이고, 뭐하는 것인지도 모를 것이다. 난통( 南 通 )에 와서 친구와 얘기하다가 무의식중에 북경에는 아직도 옛날 백화점에서 판매원이 손에 주산을 들고, 숙련된 동작으로 결 산을 하는데, 고객들에게는 구경거리였다. 그런데, 이런 것들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말을 꺼냈다. 그랬더니 친구는 "난통에 세계최대의 주산박물관이 있는데 바로 하호허( 濠 河 ) 가에 있다"고 말했다. 나는 적극적으로 가서 보자고 얘 기했다. 사실 아주 신기했다. 난통이 주산과 무슨 연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주산박물관을 만들었을까? 친구에게 물어봐도 모르겠 다고 한다. 모르겠어서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그러나 2008년 세계최대주산박물관이 난통에 세워졌다는 소식만 있고, 다른 얘기는 거의 없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난통에서 보고 들은 것을 생각하다보니, 난통이라는 문화가 깊고 두터운 도시는 고리타분하지 않고 영기 주산( 珠 算 )의 기원 410

411 가 넘쳤다. 현재의 경박한 사회환경하에서 난통처럼 담백하고 영기를 나타내는 것이 아마도 주산예술과 통하는 것이 있는 듯했다. 안내원에게서 주산의 신화전설을 듣고는 아주 재미있다고 느꼈다. 전설에 따르면, 황제( 黃 帝 ) 시대에 통일적인 숫자계산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부락을 통일한 후, 주민들이 안정되자, 매일 어로와 수렵 에 종사하고, 의복과 모자를 만들고, 배와 수레를 만들었다. 나날이 경제가 발전하고 재물이 점차 늘어갔다. 처음에는 밧줄로 표시를 했고, 나무에 부호를 새겨서 일상의 기록을 처리했다. 그러나 나중에 들어오고 나가는 물건이 많아지다보니,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허위보고를 하는 일들도 많아지게 된다. 황제는 이것을 고민했다. 어느 날, 황제의 궁중에 있던 사관( 史 官 ) 예수( 隸 首 )가 산으로 올라가서 들과잉을 땄다. 돌연 땅위에 흩어져 있던 호도가 아주 보기 좋다고 느꼈다. 자세히 세어보니 20개였다. 그는 영감이 떠오른다: 20개의 호도를 가지고 20장의 호피를 표시하자. 앞으로 누가 어떤 사냥물을 가져오면, 그에게 숫자에 따라 호 도를 나눠주자. 몇 개의 사냥물을 받아가면, 역시 몇 개의 호도로 표시를 하자. 그러면 누가 몇 마리를 내고 몇 마리를 가져갔는지 분명하게 될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로, 예수는 황제 궁중의 '수석회계사'가 되고, 모든 재물장부를 관장한다. 그는 각종 들과일로 종류를 나누고, 각각각의 항목을 만들어 질서정연하게 처리했다. 누가 생각했으랴. 좋은 시절도 오래가지 못했다. 들과일은 모조리 변색되고 썩어버렸다. 그러다보니 장부도 혼란해졌다. 예수는 화가 나서 펄펄 뛸 정도였다. 그는 머리를 짜내서 강가로 나가 색깔이 다른 여러 개의 돌맹이를 주워온다. 그리고 이것을 판 위에 놓아서 썩고 변질되는 문제를 해결한다. 그런데, 그가 하루는 외출갔다가 돌아오니, 한 무리의 아이들이 판 위에 여러가지 색깔의 예쁜 돌들이 있는 것을 보고는 앞다투어 차 지하려고 다투고 판이 깨져버린다. 그래서 계산은 다시 엉망이 되어 버린다. 예수는 다시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한다. 처는 그가 고민하는 것을 보고 한 마디 한다: "돌맹이에 구멍을 내서, 끈으로 묶어놓으면 훨씬 안전하잖아." 예수는 그녀의 말에 돌연 깨닫는다. 그는 작은 돌멩이에 구멍을 내어서, 줄로 연결시킨다. 매번 10개, 100개가 될 때마다 중간에 다른 색깔의 돌로 구분하게 해놓았다. 이때부터, 궁의 내외에 더 이상 허위보고하거나 허위기록되는 일이 없어진다. 그러나 얻은 각종 사냥물, 가죽은 숫자가 많아졌고, 품 목도 갈수록 많아졌다. 돌은 연결시켜서 계산하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 예수는 어찌해야좋을지를 몰랐다. 그가 고심을 하 는데 세명의 노신들이 나타난다. 그는 노신들에게 고민하고 있는 바를 얘기한다. 그중 한 노신이 가가대소를 하며 말했다: "백개의 돌맹이만 있으면 십만팔천의 숫자 를 모두 계산할 수 있다." 예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급히 묻는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노신은 예수에게 붉은 과일을 가져오게 하고 다시 10개의 가는 대나무를 꺽는다. 1개의 대나무에 10개를 꽂으니 모두 10줄이 되었다. 이것을 땅 위에 나란히 꽂아놓는다. 주산( 珠 算 )의 기원 411

412 "내가 가르쳐 줄테니 들어라. 오늘 누가 5마리 양을 가져오면 너는 대나무에 5개를 올리면 된다. 내일 6마리를 가져오면 다시 6개를 올리면 된다." 예수가 말한다. "그건 안됩니다. 1줄에는 10개만 꽂여 있어서, 이미 5개를 올렸는데, 다시 6개를 꽂으면 11개가 되어버 립니다. 붉은 과일을 더 밀 수가 없습니다." 노신은 말한다: "너는 하나 앞으로 가면 된다. 갯수로 보면 단지 2개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표하는 것은 11개이다. 즉, 매 10개마다, 매 100개마다 하나씩 올리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수, 십, 백, 천, 만이 된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주산이 탄생하게 되었다. 지금 집안에 주산이 있지만, 이미 원래의 용도를 잃어버렸다. 우연히 꺼내서 갖고 놀아보면 손가락이 주산의 아래위로 재빠르게 움직 여진다. 이것은 운동도 되고 즐겁기도 하고 생각을 할 수도 있게 된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곳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주산은 중화민족의 고귀한 유산이다. 상,주때 맹아가 나타나고, 진,한때부서 시작 되며, 당, 송때 완성되며, 원, 명때 흥성했고, 신중국에서 발전을 이룬다. 천년이 넘도록 성행했다. 박물관은 역대의 주산도구를 수집 하고, 고금의 산서전적을 보관하며, 천년 주산역사의 부침을 기록하고, 백가산법의 요체를 남긴다. 이는 당금에 이로움을 주고, 후대 백대에 공을 세우는 일이다."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조상의 창조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들 '좋은 물건", "옛날물건"들을 남아 있어야 한다. 주은래 총리의 "주산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말이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매몰되 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주산( 珠 算 )의 기원 412

413 황제사후 비불발상( 秘 不 發 喪 )의 비밀 :34 일세를 풍미하고, 권력을 독단,전횡하며 풍운을 질타했던 황제가 죽은 후에 시체가 썩을 때까지 그냥 놔두고 장례식을 치르지 않은 경우들이 있다. 이들 제왕의 시체에는 도대체 무슨 비밀이 있었던 것일까? 제환공의 경우 공자소백( 公 子 小 白 )이 계모를 써서 왕위를 찬탈했으니, 그가 바로 제환공이다. 나중에 송환공, 진선공, 위혜공등과 회맹을 맺었고, 제 후들이 제환공을 패주로 추대한다. 제환공은 춘추제일패가 된다. 씁쓸한 점은 제환공이 죽은 후 사망사실을 감추고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다(비불발상)는 점이다. 제환공은 10월에 사망한다. 그러나, 왕위쟁탈을 위하여, 제환공의 다섯 아들은 서로 편을 갈라서 싸웠다. 궁중은 비어 있었고, 아무도 제환공이 시신을 염하지 않았다. 제환공의 시신은 침대위에 67일간 방치되어 있었다. 시체에서 구더기가 나오고, 그 구더기가 문 위 로 기어올라갔다. 왕위계승인이 되는 자가 제환공의 시신을 수습할 것이다. 나중에 십이월이 되어 공자무궤( 公 子 無 詭 )가 즉위한다. 그제서야 사망소식을 공표하고, 시신을 염하여 입관시킨다. 진시황의 경우 중국의 첫번째 황제인 진시황이 죽은 후에도 그러했다. 그때, 진시황은 친히 갑옷을 입고 나서서 바다위에서 큰 물고기를 쏘아죽인다. 이렇게 하여 장생불로의 약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 다. 돌아오는 길에서, 진시황은 병을 얻고, 그대로 죽는다. 죽기 전에, 진시황은 아들 부소에게 유서를 남긴다. 부소로 하여금 전선에 서 돌아와 장례를 주재하도록 한 것이다. 이 유서는 사실 부소를 후계자로 암시한 것이다. 누구든지 후임 황제가 될 사람이 전임황제 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이다. 당시는 칠월이었고, 혹서의 계절이었다. 이 일로 이사는 골머리를 앓는다. 진시황은 황성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므로, 천하에 진시황 이 죽었다는 것을 알리면, 원래 들썩들썩하던 제후들이 정변을 일으킬 수 있었다. 진시황에게는 아들이 많았다. 황위를 호시탐탐 노 리고 있어서 정변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사는 비불발상을 결정한다. 당시, 진시황을 따라 외출한 관리들은 모두 진시황이 죽은 줄을 알지 못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진시황의 수레에 먹을 것도 넣어주 고, 공문서도 넣어주었다. 이런 모습을 보여서 관리들에게 진시황은 건강하게 살아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수행하던 사람에는 조고와 진시황의 어린아들 호해가 있었다. 조고는 진시황의 유서를 찢어보고는 유서를 뜯어고쳐, 호해를 태자로 삼는다. 황제사후 비불발상( 秘 不 發 喪 )의 비밀 413

414 진시황은 사구평대에서 죽었는데, 지금의 하북성 평향이다. 일행은 보무당당하게 함양으로 돌아온다. 당시는 혹서기이고, 평향은 함 양에서 수천리 떨어져 있어, 시신이 부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목을 가리기 위하여, 조고는 사람들에게 가마안에 죽은 물고기와 새우 를 가져다 놓게 하였다. 사람들에게 썩은 냄새는 물고기와 새우가 썩어서 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시신을 함양으 로 운송해온 후, 장례의식을 거행하고, 진시황을 여산에 묻는다. 이때는 진시황이 죽은 때로부터 이미 2달이 지난 다음이다. 아마도 진시황의 시신은 이미 썩어문드러졌을 것이다. 유방의 경우 평민으로서 거병하여 진나라에 대항하고 천하를 통일한 유방은 진시황과 같은 운명이었다. 그도 자신의 시신을 결정하지 못한다. 사 월십며칠, 유방은 장락궁에서 사망한다. 사후, 여후는 자신의 애인인 심이기와 협의한다. 장군들은 모두 유방과 마찬가지로 평민에서 거병하였는데, 지금 유방이 죽었고, 그들에게 어린 군왕을 보필하라고 하면 분명히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다. 아예 이들 장군들을 모조리 주살하여야 천하가 태평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후와 심이기가 장군들을 없애기로 밀모했으므로, 유방이 죽었다는 소식을 대외에 알려서는 안되었다. 4일이 지난 후, 장군 여상이 심이기에게 말한다. 황제가 죽은지 이미 4일이나 되었는데, 여전히 장례를 치르지 않고, 장군을 주살할 계획을 꾸민다는데, 과연 그 러하다면, 천하가 위험해진다. 장군들이 황제가 죽은 것을 알고, 자신들이 주살당할 것을 안다면 분명히 정변을 일으킬 것이다. 대신 들도 조정내에서 반란에 가담할 것이고, 제후들은 바깥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하가 멸망하지 않겠는가? 여후와 심이기는 다시 협의한 후, 사월 이십며칠이 되어서야 장례를 치른다. 제환공이나 진시황과 비교하면 유방은 행운아이다. 그의 시신은 겨우 십여일만 놓여 있었다. 사월은 약간 더워지기 시작한 때이다. 십일을 놔두었다면 분명 부패했을 것이다. 비불발상의 원인 왜 세명의 제왕이 죽은 후, 시신에서 부패한 악취가 나고, 구더기가 생길 때까지 죽은 사실을 감추고 장례를 치르지 않은 것일까? 첫째, 독재자 자신이 초래한 것이다. 모두 권력을 탐하여, 죽지 않을 줄로만 알았고, 2선으로 물러날 줄 몰랐다. 진시황은 죽을 때까 지 태자를 세우지 않는다. 누가 후계자가 될 것인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 비불발상의 주요원인이다. 이로 인하여 조고는 유 조를 뜯어고칠 기회를 가진 것이다. 둘째, 정치갈등으로 인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한 것이다. 진시황과 한고조의 사후에 장례를 치르지 않은 것은 원인이 같다. 서로 다른 정치세력간의 갈등이 있었고, 만일 바로 장례를 치른다면 각종 정치세력들의 반란이 초래될 수 있었다. 셋째, 정계내부투쟁의 결과이다. 내부투쟁은 중국고대정계의 한 특징이다. 만일 궁정에서 이상한 현상이 보이면, 분명히 내부투쟁이 일어난 것이다. 제환공의 다섯 아들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 죽고 죽였다. 유방이 살아있을 때,외척의 권력장악을 금지했다. 유방이 죽은 후, 여후는 권력탈취를 위하여, 유방이 죽은 소식을 감추고, 장군들을 죽여서, 정권을 탈취하고자 한 것이다. 황제사후 비불발상( 秘 不 發 喪 )의 비밀 414

415 주원장은 개국공신들을 어떻게 죽였는가? :32 많은 사람들은 황제가 된 후, 주원장은 사마살려( 卸 磨 殺 驢 ), 과하탁교( 過 河 拆 橋 ), 토사구팽( 兎 死 狗 烹 )했으며, 항상 구실을 찾아서 공 신을 도살한 마귀라는 것이다. 사실이 그러한가? 만일 공신들이 건국전과 건국후에 모두 높은 덕행을 보였다면 아마도 그런 일은 없 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염라대왕도 사람을 죽이라면 이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 이유없는 살인은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없기 때 문이다. 만일 공신들이 건국후에 국가와 인민의 공적이 되었다면, 그들을 죽이는 것이 더더욱 민심에 부합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주원장이 공신들을 무수히 죽이고도 황제의 보좌에 굳건히 앉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이다. 1368년, 주원장은 남경에서 황제에 오르고 대명왕조를 개창한다. 1370년, 주원장은 자신을 따라 공을 세운 문신, 무장들에게 논공행상을 벌인다. 그는 6명을 공작( 公 爵 )에 봉하는데, 한국공( 韓 國 公 ) 이선장( 李 善 長 ), 위국공( 魏 國 公 ) 서달( 徐 達 ), 정국공( 鄭 國 公 ) 상무( 常 茂, 常 遇 春 의 아들이다. 상우춘은 이미 사망했다), 조국공( 曹 國 公 ) 이문충( 李 文 忠 ), 송국공( 宋 國 公 ) 풍승( 馮 勝 ), 위국공( 衛 國 公 ) 등유( 鄧 愈 )이다. 이들은 모두 국가과 군대의 탁월한 지도자들이고 엘리트 중의 엘리트이며 영웅중의 영웅이다. 28명의 대장군은 후작( 侯 爵 )을 받는다. 탕화( 湯 和 ), 당승종( 唐 勝 宗 ), 육중형( 陸 仲 亨 ), 주덕흥( 周 德 興 ), 화운( 華 雲 ), 고시( 顧 時 ), 경병문 ( 耿 炳 文 ), 진덕( 陳 德 ), 왕지( 王 志 ), 정우춘( 鄭 遇 春 ), 비취( 費 聚 ), 오량( 吳 良 ), 오정( 吳 楨 ), 조용( 趙 庸 ), 요영충( 廖 永 忠 ), 유통원( 兪 通 源 ), 화고( 華 高 ), 양경( 楊 璟 ), 강무재( 康 茂 才 ), 주량조( 朱 亮 祖 ), 부우덕( 傅 友 德 ), 호미( 胡 美 ), 한정( 韓 政 ), 황빈( 黃 彬 ), 조량신( 曹 良 臣 ), 매사 조( 梅 思 祖 ), 육취( 陸 聚 ), 곽자흥( 郭 子 興, 이미 사망했음)등이다. 공,후,백,자,남의 작위중에서 공과 후는 가장 높은 등급이고 지위가 아 주 높다. 육유가 읖었듯이, "당년에 후작에 봉해지기 위해 만리를 찾아다니고, 말을 타고 양주를 지켰다." 그러나, 이들은 육유보다 훨씬 행운아들이다. 공작 후작에 봏해졌으니,조상을 빛내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이다. 그들이 생사를 넘나들며 동서로 싸워주었기 때문에, 주원장의 대명천하는 건립될 수 있었다. 주원장도 이들에게 후하게 대해주었다. 높은 관직과 후한 녹봉을 주었고 그들에게 대량의 토지도 주었다. 그들에게 할만큼 했다. 한국공 이선장은 중서성 좌승상으로 있었 고, 위국공 서달은 우승상이었으며, 조국공 이문충은 대도독으로 군대의 제1인자였다. 이 34명은 모두 38,194호의 전농( 佃 農 )을 보유하고 있었다. 1인당 평균 1,124호의 소작농이 있었다. 주원장은 또한 그들과 친인척관계 를 맺었다. 곽영( 郭 英 )의 딸을 자신의 영비로 삼고, 풍승, 남옥, 서달의 딸을 황자들에게 시집보낸다. 공주는 이선장, 부우덕, 호해, 장룡등의 아들에게 시집보낸다. 이들 군사귀족들은 전공이 크고, 많은 사회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주원장은 그들에게 하나의 신물을 준다. 철권( 鐵 券 ). 철권이 있 으면 사람은 고양이처럼 목숨을 9개나 가지게 된다. 죽은 후에도 다시 한번 되살아나는 것처럼. 본인 혹은 자손이 범죄를 저지르더라 도 몇몇 죽음을 면하게 해준다. 다만, 철권은 사람이 계속 부활하게 하는 신약은 아니었다. 오히려 공신들로 하여금 잘못을 저지르도록 유혹하는 물건이 되고, 죽는 주원장은 개국공신들을 어떻게 죽였는가? 415

416 시간을 앞당기는 철패가 된다. 철권을 믿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금방 부패 변질된다.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해치며, 약자들을 괴롭 히고, 토지를 빼앗으며, 세금을 내지 않고, 부녀를 간음하며, 먹고 마시고 계집질하고 도박까지 하며, 뇌물을 받아들인다. 심지어 도검을 만들거나 용포를 만들어 입는 자들까지 나타난다. 그들은 한 가지 상식을 몰랐다. 임금의 곁에 있는 것은 호랑이 곁에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공로가 크면 군주가 놀라서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다. 공신들이 너무 강하면, 주원장이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꿈에서도 부하가 반란 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한다. 강산을 빼앗기고, 자손들이 다른 사람의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한다. 주원장이 보기에, 이들 공신은 왕조의 장기적인 안정에 심각한 위협요소이다. 그러므로 무정하게 숙청해버린다. 특히 자손에 위협이 되면 반드시 제거했다. 죽여야만 그나 그의 후임황제들이 군대를 통제할 수 있고, 황제의 보좌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그가 공신들에게 뒤집어씌운 죄명은 아주 도식화되어 있다: 모반( 謀 反 )과 연좌( 連 坐 )이다. 사람을 죽이고 싶으면, 누군가 그가 모반을 했다고 고발하게 한다. 그 어느 죄명도 이것보다 악랄할 수는 없고, 편리할 수가 없다. 누구든지 마음에 들지 않거나, 경우를 벗어나 게 되면,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 된다. 그는 한번 죽이면 일가를 모조리 죽였다. 어떤 경우는 살인수단이 극히 잔혹했다. 숙청운동이 연이어 일어났다. 주원장은 호당( 胡 黨 )을 숙청하고, 공인안( 公 印 案 ), 곽환안( 郭 桓 案 )을 처리하며, 백성을 해친 관리들을 체포한다. 몇번의 대사건으로 관리가 근 10만명 죽는다. 다른 사람이 흘린 피로 자신의 마음 속의 분노를 끄고자 하였다. 덕경후 요영충의 면사철권은 첫번째 공수표가 되었다. 그는 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파양호전투에서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 운다. 소명왕을 강물에 익사시켜 주원장이 황제에 오르는데 장애를 없애기도 했다. 1375년, 주원장은 그를 죽인다. 이유는 그가 사사로이 용와 봉황의 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황제의 의복을 입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 이는 나라와 권 력을 찬탈하려는 야심을 드러낸 것과 다름없다. 1380년, 영가후 주량조 부자가 채찍에 맞아서 죽는다. 주량조는 원래 원나라의 맹장이었다. 전투에 용감했다. 여러번 명나라군대에 포로로 잡혔지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항복하지 않았다. 삶아먹든 구워먹든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는 모습을 보였다. 주원장은 그의 용맹함을 좋아하여 그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긴다. 그는 사천을 평정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부하를 함부로 죽여서 황 제의 상을 받지는 못한다. 그는 광동을 지켰는데, 여전히 악습을 고치지 못했고, 현지관리를 채찍으로 때렸고, 부호의 뇌물을 받았다. 이렇게 여러가지 범죄를 저지른다. 번우지현인 도동( 道 同 )이 주원장에게 비밀자료를 보내어 주량조의 죄행을 고발한다. 주량조는 오히려 도동이 그에게 오만무례하였다고 역공한다. 대관에 오만무례한 것은 스스로 죽기를 청하는 것과 같다. 그는 도동을 사형에처하여 죽여버린다. 주원장은 주량조 부자를 남경으로 불러서 채찍으로 때려서 죽여버린다. 1384년, 임천후 호미가 죄를 범하여 처형당한다. 주문정은 채찍으로 맞아서 죽는다. 그는 주원장의 친조카이다. 강서 남창성을 85일간 굳건히 지켜서 진우량의 미친듯한 공격의 기세 를 막아낸 공로가 있다. 이리하여 주원장이 파양호결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는 나중에 교만하고 법을 지키지 않게 된다. 공공연히 부녀자를 빼앗아, 실컷 데리고 논 후에는 우물에 빠뜨려 죽였다. 그리고 사람의 혀를 베기도 하여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용봉의 도안으로 자신의 침실을 장식한다. 주원장은 친히 강서로 가서 그를 체포하고, 안휘에 유폐시킨다. 그의 50여명의 부하들은 다리근육을 절단하여 병신으로 만들어버린다. 조국공 이문충은 주원장의 외조카이다. 여러번의 전투에서 많은 공를 세운다. 그는 문무에 모두 능했다. 1383년 대도독(최고군사지휘 주원장은 개국공신들을 어떻게 죽였는가? 416

417 관)과 국자감제주(국립대학총장격)가 된다. 이문충은 일찌기 황제가 너무 환관에 의존하고 관리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한다고 비판 한 바 있다. 그는 독살된다(일설에는 병사) 이유는 지식인들을 예의로 대하여 그를 따르는 지식인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그는 주 원장에게 사람을 적게 죽이고, 환관의 악행을 방지하라고 충고한다. 주원장은 그 말을 듣고, 이문충의 막료가 교사한 것으로 생각하 여 모든 막료를 죽여버린다. 이문충의 곁에 있던 의사, 노비 60여명이 모조리 멸족된다. 그러나, 주원장은 그의 의견을 일부 받아들인다. 환관의 정치간여를 금지 했고, 환관이 글을 읽고 아는 것을 금지했다. 그렇지 않으면 가죽을 벗겨서 죽였다. 개국제일공신인 위국공 서달은 충후하고 성실했다. 주원장과는 어려서부터 같이 컸고, 담량이 적었다. 주원장이 오왕으로 있을 때, 고의로 서달을 취하게 만든 후, 그를 자신의 대왕침상에 눕혀서 자게 한 적이 있다. 이를 통하여 그의 야심을 시험해보려는 것이었다. 서달은 술에서 깬 후,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주원장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한다. 마치 마늘을 찧는 것처럼. 주원장은 가가대소한다. 바로 이렇게 착실한 서달도 부인이 말 한마디를 잘못하는 바람에 주원장에게 죽임을 당한다. 서달의 처 사씨는 사재흥의 따리다. 주 원장이 스스로 나서서 그녀를 서달에게 시집보냈다. 사재흥에게는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사재흥은 원한을 품고, 장사성에게 가버린다. 주원장은 배반한 장수( 叛 將 )들을 극히 미워했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딸인 사 씨도 좋게 볼리가 없다. 사씨는 무술에 뛰어났다. 백근대철추를 휘두른다. 그러나, 마음씀씀이가 세심하지는 못했다. 마음 속에 있는 말을 감춰두지를 못했 다. 사씨가 입궁하였을 때, 황궁이 금빛찬란하고, 멋진 것을 보고는 마황후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 집은 정말 멋있다. 우리 집은 너희 집처럼 좋지가 못하다." 그런데, 이 말을 주원장이 듣는다. 설마 너도 황궁처럼 집을 만들어야 하느냐. 그리고 그녀의 부친이 배신한 일도 떠올렸다. 그러다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궁중에 연회를 베풀어 서달을 초청한다. 술잔이 오고갈 때, 용 사를 서달의 집으로 보내어 사씨를 죽여버린다. 그 용사는 솜씨가 괜찮았다. 사씨를 죽이고 돌아와서 주원장에게 보고할 때까지도 연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원장은 기뻐하며 서 달에게 말한다: "너는 걱정하지 말라. 이후 멸문의 화는 당하지 않을 것이다." 서달은 그 말을 듣고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집으로 돌 아오니 처는 이미 차가운 시체로 바뀌어 있었다. 그제서야 무슨 일인지 알았다. 처는 죽었지만 그는 감히 원한을 품지도 못했고, 불 평을 할 수도 없었다. 나중에 서달은 등에 악성종양이 생긴다. 거위고기를 먹으면 안된다. 주원장은 좋은 뜻에서인지 고의인지 모르지만, 서달의 병세가 위 중할 때, 찐 거위고기를 그에게 하사하여 먹게 한다. 먹지 않으면 황제의 명을 어기는 것이다. 서달은 사신의 감독하에 먹지 않을 수 가 없었다. 한편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한편으로 치명적인 찐 거위고기를 먹었다. 며칠 후에 그는 사망한다. 1392년, 성격이 인자한 주표 태자가 병사한다. 새로 황태손이 된 주윤문은 더욱 유약했다. 사후의 일은 65세된 주원장에게 골치거리 였다 그래서 그는 살심이 더욱 크게 인다. 그 해, 주원장의 어릴 대 친구인 주덕흥이 자식의 행위로 인하여 피살당한다. 그의 아들은 호유용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어느 해인가, 전공을 많이 세운 섭승이 피살된다. 1394년, 영평후 사성이 피살된다. 주원장은 개국공신들을 어떻게 죽였는가? 417

418 1394년, 영국공 부우덕이 자살한다. 그는 주원장에게 33년간이나 충성을 다했다. 공로도 서달, 상우춘에 못지 않았다. 아들은 부마이 고, 딸은 진왕 아들의 비였다. 남옥이 피살된 후, 정원후 왕필은 주원장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부우덕에게 말한다: 황상의 나이가 많 으니, 우리는 일찌감치 출로를 찾아야 겠다. 그런데, 이 말이 불행히도 주원장에게 들어간다. 주원장은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해 겨울, 황궁에서 연회를 베풀 때, 다 먹기도 전에 부우덕은 습관적으로 일어나서 입술을 훔치고 먼저 물러갈 준비를 했다. 주원 장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불경하다고 질책하고 화가 나서 그에게 말한다. "너는 네 아들 둘을 데리고 와라." 부우덕 이 몸을 일으켜 막 걸어나갈 때, 경비무사를 불러서 말을 전한다: 그의 두 아들의 목을 가지고 오게 하라. 얼마 후, 부우덕은 피가 뚝 뚝 떨어지는 머리 두 개를 들고 나타난다. 연회석의 분위기는 일순 극도로 긴장된다. 공기가 굳어버린 것같았다. 주원장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너는 정말 손을 썼단 말이냐?" 그러자 부우덕은 깜짝 놀랄 행동을 보인다. 그의 넓은 소매에서 비수를 끄집어내더니, 주원장을 향하여 큰소리로 말한다: "네가 우리 부자의 머리를 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럼 지금 가지고 가라." 말을 마치고는 비수를 목에 대고 그어버린다. 피가 백보나 흘렀고, 목숨이 끊어진다. 주원장은 노기를 억제하지 못하고, 그의 가솔을 모조리 당히에는 가장 변방인 운남과 요동으 로 유배보낸다. 부우덕이 죽은지 겨우 3개월만에 왕필이 피살된다. 왕필은 1388년 남옥을 따라 전투에 참전하여 어아해를 생포하였다. 용맹하며 전투 에 능했다. 1392년, 부우덕, 풍승을 따라 산서, 하남에서 군대를 훈련시키기도 했다. 1395년 이월 이십이일, 주원장은 다시 핑계를 잡아 송국공 풍승을 죽인다. 풍승은 원나라승상 하나추의 20만군대를 항복시킨 후, 항 복한 장수를 압송하여 개선했다. 풍승이 돌아와서 승리를 만끽하기도 전에 그는 죄를 지엇다고 선언받고 병권을 박탈당한다. 그리고 안휘로 유배를 간다. 또 다른 견해로는 그가 남경에 돌아온 후, 주원장이 그에게 독주를 한잔내려서 독살했다고도 한다. 풍승은 인생의 최전성기때 굴러떨어진다. 아마도 그가 너무 교만하고 행동이 법도에 어긋났기 때문일 것이다. 1389년, 그의 사위인 주왕은 비밀리에 봉양으로 가서 풍승을 만난 적이 있다. 아마도 그들의 군사동맹관계가 황권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체로 4사람만이 주원장의 손에 죽지 않았다. 그들은 모사 유기, 대장 탕화, 장흥후 경병문 및 무정후 곽영이다. 주원장은 개국공신들을 어떻게 죽였는가? 418

419 남당( 南 唐 ): 독살의 역사 :30 중국 형명( 刑 名 )의 시조는 하우시대의 고요( 皋 陶 )이다. 그가 만든 "오형( 五 刑 )"은 사건을 재판하면서 형벌을 가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 법외지형( 法 外 之 刑 )은 항상 존재했다. 명망이 높은 사람을 죽여야겠는데 형법에 저촉되지 않거나, 궁중의 음모로 적수를 죽여야 하는 경우, 비록 죄명을 붙이려면 뭐든지 붙일 수 있지만, 어쨌든 드 러내고 일처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래서, 법외지형을 가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형벌을 가해서 다른 사람을 겁주 려 하는 것이 아니라면 법외지형의 최선의 선택은 바로 '독살'이다. 남당의 역사는 길지 않다. 제왕은 3명이다: 열조( 烈 祖 ) 이변( 李 煜 )이다. 짧은 39년동안 독살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 원종( 元 宗 ) 이경( 李 璟 ) 그리고 후주( 後 主 ) 이욱( 李 선주( 先 主 ) 이변이 황제에 오른 후, 용맹하고 전쟁에 뛰어난 주본( 周 本 )의 인망이 높고 통제하기 어려워, 이변은 궁안 에서 연회를 베푸는 틈을 타서, 주본에게 극독이 든 술, 잠주( 酒 )를 하사하여 독살하고자 한다. 그러나 주본은 이를 눈치챈다. 주본은 술잔을 받아든 후 술의 절반을 다른 잔에 따른 다음 이변에게 내민다. 그리고, "이 술을 같이 마심 으로써 황상의 천추만수를 기원하면서 동시에 우리 군신이 일심동체라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비록 군신간에 이미 사 이는 멀어졌지만, 겉으로는 아직 완전히 안면을 몰수한 단계가 아니었다. 이 술은 이변이 당연히 마셔야 했다. 그러 나 이변이 어떻게 마실 수 있단 말인가? 이변이 대경실색하여 어쩔 줄 몰라할 때, 배우인 신점고가 앞으로 나서서 춤 을 추며 흥을 돋군다. 그리고 황상에게 술을 자신에게 하사해달라고 요청한다. 황상은 술잔 두 개를 모두 그에게 하 사한다. 신점고는 두 잔의 술을 한 잔으로 만든 다음 한꺼번에 마셔버린다. 그리고 술잔 두 개를 가슴에 품고 자리를 떠난다. 증거도 함께 가져가 버린 것이다. 이변을 위하여 아주 주도면밀하게 행동해준 것이다. 이변이 급히 사람을 보 내어 해독약을 보냈을 때 이미 시간이 늦어 신점고는 머리가 깨져서 죽어있었다. 주본은 인망이 높고, 이변이 황제에 오르는 것을 처음부터 반대했기 때문에, 나중에 우울증에 빠져 죽는다. 이변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3일간 폐조( 廢 朝 )한다. 이변은 많은 단약을 먹어 만성독약중독으로 사망한다. 이변이 대신 주본을 독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그리고 이 사건이 남당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중주( 中 主 ) 이경 시대에 숙질간의 그 독살사건은 남당의 역사를 바꾸는데 충분했다. 그것은 '태자'가 독주를 '숙부'에 게 보낸 것이고, 왕위다툼이었으며, 숙질간의 처절한 싸움이었다. 이변이 죽은 후, 이경은 그의 영구앞에서 맹세한다. 나중에 황제위는 형종제급(형이 죽으면 동생이 잇는다)의 원칙을 따르겠다고. 그는 동생인 경수( 景 遂 )를 태제( 太 弟 )에 봉한다. 그리고 모든 태자의 관속은 태제의 관속으로 바꾼다. 그 런데, 경수는 굳이 사양한다. 나중에 이경의 큰아들인 홍기( 弘 冀 )가 오월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자, 이경은 비로 남당( 南 唐 ): 독살의 역사 419

420 소 홍기를 태자( 太 子 )로 보안다. 하루는 홍기가 법도를 지키지 않아 이경이 대노한다. 격구를 하는 막대기로 홍기를 두들겨 팬다. 그리고 경수를 불러오라고 말한다. 그 직접적인 결과는 태자를 폐위시키고 태제를 봉하는 것이다. 홍기 는 경수가 격구를 하다가 목이 말라 마실 것을 찾는 틈을 타서, 독을 탄 술을 사람을 시켜 보내어 경수를 독살한다. 이 일은 이경에게 발각되지 않고 넘어간다. 그러나, 홍기는 나중에 경수가 귀신이 되어 자주 나타나서 그의 목숨을 달라고 하자, 공포로 인하여 얼마후 죽어버리고 만다. 홍기는 결국 황위에 오르지 못하고, 풍류를 즐기던 이욱 이후 주가 황제에 오른다. 이욱은 풍류재자였다. 그러나 좋은 황제는 아니었다. 남당의 명장 임인조( 林 仁 肇 )는 송태조가 남정하려할 때 가장 강 력한 적수였다. 송태조는 남당의 사신이 송나라조정에 왔을 때, 반간계를 써서 임인조를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송태 조는 남당에서 온 사신을 데리고 임인조의 화상이 걸려있는 곳으로 간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말로 그림 속의 사람이 우리에게 귀순할 것이다. 먼저 화상을 신물로 보냈으며 이미 저택도 지어놓았고, 투항해 오기만을 기다린다고 말한 다. 이욱은 사신으로부터 그 말을 듣고, 임인조를 독살한다. 이욱이 임인조를 죽인 것은 스스로 장성을 무너뜨린 것 이나 다름없다. 1년후, 송태조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한다. 해가 지나자, 이욱은 포로로 잡히고 나라는 멸망한다. 칠월 초칠일. 이욱은 42세 생일때, 작은 누각에 올라서 반달을 바라보며, 지난 일을 회고하며 탄식한다. 그리고 <우미 인. 춘화추월하시료>라는 사를 쓴다. 그 결과 사에 있는 문구인 "고국불감회수월명중( 故 國 不 堪 回 首 月 明 中 )", "문군능 유기다수( 問 君 能 有 幾 多 愁 ), 흡사일강춘수향동류( 恰 似 一 江 春 水 向 東 流 )"의 싯구는 송태종을 분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욱에게 '견기약( 牽 機 藥 )' '독주'를 내리고, 그는 결국 독주를 마시고 죽는다. 그가 생일날 쓴 글이 그의 목숨을 재촉 하는 것이 되었다. 그 <우미인>은 절창이다. 남당의 마지막 국맥이 한 잔의 독주와 더불어 사라진 것이다. 남당역사를 살펴보면, 이변이 주본을 독살하려 하고, 홍기가 경수를 독살하고, 이욱이 임인조를 독살한다. 짧은 39년 동안 왕실, 군신간에 서로 죽고 죽였다. 개국군주는 단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만성중독으로 죽었다. 난세의 후주 이 욱은 결국 송태조의 독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는다.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북송말기, 송휘종이 막 황제에 올랐을 때, 말을 타고 황궁을 순시할 때 이름이 없는 창고방을 발견한다. 좌우에 물어 보고서야 그 곳이 궁중에 독약을 보관하는 창고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인자한 송휘종은 창고안의 독약을 모조리 불태 워버리게 한다. 남당( 南 唐 ): 독살의 역사 420

421 하일도( 夏 一 跳 ): 청나라 궁중의 무림고수 :25 최근 들어 글쓰기를 위하여 청나라궁중의 에피소드를 읽었다. 김역( 金 易 ) 선생의 <궁녀담왕록>이라는 책을 보다보니 돌연 어디선가 본 것같 은 장면이 나왔다. 몇년전에 필자는 협기와 재기를 지닌 태감(환관)인 하일도에 대하여 쓴 바가 있는데, 김역 선생의 글에서도 하일도의 신세 가 언급되어 있었다. 하일도는 천진 정해 사람이다. 청나라궁중에서 근비( 瑾 妃 )의 곁에 있던 태감중 한 명이다. 그는 몸집이 커서, 한번은 서태후가 그를 보고는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고 하여 '일도'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 이름을 그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이름이 이상하 다고 보아서 그를 "하대백( 夏 大 伯 )"이라고 존칭했다. 하일도는 만년에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남긴다. 그는 태감이었지만, 그를 잘 대해주는 하대낭( 夏 大 娘 )과 결혼도 한다. 하대낭은 필자의 집안과 인연이 있다. 그래서 하일도가 나오는 <태감에게 시집가다>라는 글을 쓴 연유이기도 하다. 아쉬운 점이라면, 이 할머니는 하일도가 궁을 나온 후에 취하였고, 하일도는 젊었을 때의 신세내력에 대하여 잘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 태감이 도대체 어떤 신분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 다. 필자는 늦게 태어나서 이 할아버지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물어볼 수는 당연히 없는 일이었다. 그의 출신을 알아보고자 한 것은 하일도에게는 전설적인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모략이 뛰어나고, 경영에도 재능이 있으며, 무예에도 정통 했다. 하대낭에 따르면, 그는 매일 아침에 무공을 연마했다. 연마한 것은 팔괘장이다. 그외에 그는 채찍을 잘 다루었다. 낮에 날아다니는 벌레 를 맞출 수 있었고, 밤에는 향불을 끌 수 있었다. 조금도 실수하는 법이 없었다. 출궁이후 하일도는 업종을 바꾸어 장사를 한다. 사람들과 잘 지내고 잘 응대하여 관내 관외를 다녔다. 거기에는 뛰어난 무공을 지녔다는 점도 큰 역할을 한다. 삼산오악의 친구들이 그의 체면을 봐주었 다. 태감이 도대체 어떻게 무예를 익혔을까? 가장 먼저 필자는 그의 무예가 동해천( 董 海 川 )과 관련있지 않을까 의심했다. 왜냐하면 팔괘장의 창시자인 동해천 본인이 바로 태감이기 때문 이다. 그리고 그는 널리 제자를 받아들였다. 묘지명에 기록된 그의 제자만 하더라도 거의 칠십명에 이른다. 이름이 적히지 않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동해천은 광서8년에 태어났고, 근비는 광서14년에 입궁한다. 만일 이전에 하일도가 입궁하였다면, 아마도 동해천의 제자중 하나일 가 능성이 있다. 동해천은 전해지는 바로는 의군(의화단)이 청나라조정에 심어놓은 첩자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일도도 그와 같은 경우일까? 그러나, 나중에 자세히 계산해보니 맞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일도는 1945년 해방때까지 살아있었고, 육십여세였다. 그렇다면, 동해천이 사망했 을 때 그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외에 동해천은 청나라궁중에 들어가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숙친왕부에서 일했다. 그러므로, 그가 하 일도와 만났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러나, 태감중에서 동해천이 나왔다. 비록 이들 "육근부전( 六 根 不 全 )"의 사람들이지만 자랑스러운 일이다. 조건이 되는 태감들은 팔괘장을 배웠을 것이라는 점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하대낭에 따르면, 하일도의 팔괘장을 실전에서 쓰는 것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채찍술을 쓴 적은 있다고 한다. 그는 이 채찍술로 강 탈하려는 토비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일도( 夏 一 跳 ): 청나라 궁중의 무림고수 421

422 이 기술은 어디서 배웠을까? 지금 김역 선생의 글을 보면, 청나라궁중에는 확실히 채찍술에 뛰어난 태감이 있었다. 그는 <궁녀담왕록>에서 "사금강 오백나한"이라는 부분 에서 청나라말기 제석대연의 광경을 쓰고 있는데 이렇게 적었다: "전체 식사시간동안 폭죽은 멈추지 못하게 했다. 거기에 서장가의 향당에서 는 채찍소리가 들렸다. 채찍으로 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이것은 특별하게 제작한 채찍이다. 반척 길이의 몽둥이에 1장여의 채찍이 있 다. 몇 개의 양창자를 꼬아서 만들었다. 거기에 1척여길이의 채찍손잡이가 있다. 땅 위에 놓아두면 마치 뱀이 또아리를 튼 것같았다. 이런 채 찍을 치는 사람은 모두 훈련을 거친 젊은 태감들이다. 채찍을 한번 휘두ㅡ면, 채짹에서 맑고 경쾌한 소리가 난다. 몇몇 태감이 같이 휘두르면 상하,좌우,전후로 각종 서로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다..." 아마도 이런 향당의 채찍을 행위예술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무술로 생각하지 않고. 그러나 북경에 한 무림고수가 예전에는 점포의 회계출신 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저 시간이 남아서 무료하다보니, 하루종일 손으로 단단한 나무로 된 탁자를 치는 놀이를 했는데, 시간이 지나 다보니 여러번 탁자가 부서졌다. 그러나 그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나중에 토비가 강탈하려고 덤벼들었다. 그는 부득이 손을 들어 막았는 데, 바로 상대방의 배에서 구멍이 나서 피가 흐르고 창자가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한 노인을 보고는 토비 들이 놀라서 도망쳤다고 한다. 이것은 구음백골조와 비슷한 신기한 쿵후일 것이다. 구음백골조는 이렇게 수련한다고 치고, 채찍은 어떻게 수련하는가? 기름을 파는 노인에 따르면, 손에 익었을 뿐이다. 부드러운 채찍을 사용하 는데 주요한 것은 정확성과 통제이다. 향당 태감들은 이런 부드러운 병기를 악기로 사용할 지경에 이르렀다. 실전에서도 상대방이 쉽게 상대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가지 가능성은 있다. 하일도가 입궁한 후 한동한 향당태감을 지냈을 수 있다. 나중에 근비의 곁에서 일하는 태감으로 발탁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일정한 감시의 목적을 수반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근비와 진비는 모두 서태후가 광서를 위해서 골라준 후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무공내력도 이해될 수 있다. 당연히,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그것은 바로 궁중에서 일부 태감들은 비밀리에 전해지는 무림의 고수라는 것이다. 멀리는 김용선생의 벽사검 법(누군가의 고증에 따르면, 귀신을 쫓는 업무를 맡은 태감이 발전시킨 무술유파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쓰는 것은 도목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검법은 귀신처럼 빠르게 승부를 결정짓는 특징이 있다), 가까이는 누군가가 쓴 소설 <송풍>이 있다. <송풍>은 송나라궁중의 노태감 을 신출귀몰한 무림고수로 그렸다. 이 두사람은 모두 문화인이다.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약간의 진실의 그림자가 숨어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하일도가 바로 그런 신비한 태감고수들 중에서 마지막 후대가 아닐까? 이건 그냥 말도 안되는 상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일도( 夏 一 跳 ): 청나라 궁중의 무림고수 422

423 대명제국을 날린 가장 큰 심복지환 流 賊 ----이자성과 장헌충 :54 대명제국을 날린 가장 큰 심복지환 流 賊 ----이자성과 장헌충 명군( 明 軍 )이 녕원( 寧 遠 )에서 후금군( 後 金 軍 )을 재차 격파시킨 해에 섬서( 陝 西 )에서는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봉기가 폭발했다. 이자성( 李 自 成 )은 이번 봉기의 한쪽 봉기군의 영수( 領 袖 )이다. 그는 농민군을 통솔하여 10여 년이나 전투 주비를 하여 일찍이 경사 ( 京 師 )를 점령하고 명왕조( 明 王 朝 )의 300년의 봉건통치를 뒤엎었다. 명나라 말기, 국세는 날로 기울어지고 세력은 점차 약해졌다. 요동( 遼 東 )의 전쟁으로 인하여 매년의 군사비용인 은( 銀 )의 양이 280만 냥에서 2000만냥에까지 올랐다. 농민의 부담이 날로 증가했고 계급모순이 부단히 격화되었으며 사회경제는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섬 서( 陝 西 )는 경제낙후 지역이자 변방의 요충지역이고 게다가 연속 3년이나 큰 가뭄이 들어 인민의 생활은 더없이 악화되어 사람의 뼈로 장작을 삼고 사람의 고기를 식량으로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1627년 3월 백수( 白 水 )의 농민 황이( 王 二 ), 정언천( 鄭 彦 天 ) 등이 기아에 허덕이는 농민들을 인솔하고 등성( 澄 城 )으로 쳐들어가 공납을 재촉하는 지현( 知 縣 )을 죽이고 솔선하여 봉기를 일으켰으 며 이로서 명나라 말기 농민봉기의 서막을 열었다. 이듬해 섬서( 陝 西 ) 각지의 농민들이 분분히 일어섰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자로는 왕가*( 王 嘉 *), 고영상( 高 迎 祥 ), 왕대량( 王 大 梁 ), 장존 맹( 張 存 孟 ) 등이다. 1629년, 산서( 山 西 )와 연수( 延 綏 ), 감숙( 甘 肅 ) 등지에서 명을 받고 경사( 京 師 ) 계엄을 수행하러 오던 변방군들은 상금이 적은 탓으로 변을 일으키고 산서( 山 西 )와 섬서( 陝 西 )로 돌아가 봉기군에 참가했다. 뒤따라 장헌충( 張 獻 忠 )과 이자성( 李 自 成 )도 연안미지( 廷 安 米 脂 ) 각지에서 잇따라 봉기의 깃발을 들었다. 이듬해 2월 연수( 廷 綏 )의 명군( 明 軍 ) 신일원( 神 - 元 )과 신일괴( 神 - 魁 ) 등이 변을 일으켜 봉기군의 행렬에 참가했다. 2, 3년 사이에 봉 기군은 100여 개 부로 발전했고 섬서( 陝 西 )의 50여 개 현성( 縣 城 )에서 활약했다. 이때 명왕조( 明 王 朝 )는 요동( 遼 東 ) 전선에서 후금군( 後 金 軍 )과 전쟁하고 있어 전력을 집중하여 섬서( 陝 西 )의 농민봉기를 진압할 여유 가 없어 위협과 설득을 겸하는 그 중에서도 위로와 안정을 주로 하는 전략방침을 택하여 삼변( 三 邊 )의 총독( 總 督 ) 양학( 楊 鶴 )에게 집 행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이 방침을 실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심한 곤란으로 파산했으며 양학( 楊 鶴 )도 감옥에 들어갔다. 홍승주 ( 洪 承 疇 )가 섬서( 陝 西 )의 총독으로 온 후 토벌로 안정시키는, 먼저 소탕하고 안정시키는 전략방침으로 바꾸어 많은 병사를 모아 봉기군을 공격다. 1631년 각부( 各 部 )의 봉기군은 적들의 소탕에 대처하기 위하여 차례로 강을 건너 동쪽으로 이동했고 활동중심을 섬서( 陝 西 )에서 산 서( 山 西 )로 이동했다. 동시에 분산하고 흩어져 각각 싸움을 벌려 상대적으로 집중하고 서로 호응하여 작전에 들어섰다. 장헌충( 張 獻 대명제국을 날린 가장 큰 심복지환 流 賊 ----이자성과 장헌충 423

424 忠 -팔대왕( 八 大 王 )), 라여재( 羅 汝 才 -조조( 曹 操 )), 마광옥( 馬 光 玉 -노회회( 老 回 回 )), 왕자용( 王 自 用 -자금양( 紫 金 梁 )) 등의 각부( 各 部 )에 는 20여만의 인마( 人 馬 )가 있으며 36영( 營 )이라 불렀다. 이자성( 李 自 成 )도 군중을 인솔하고 고영상( 高 迎 祥 ) 부대로 가입했다. 1633년 5월 36영( 營 ) 봉기군의 주력군이 자주( 磁 州 -하북자현( 河 北 磁 縣 )) 부근에 이르러 명군( 明 軍 )의 자량옥( 左 良 玉 ) 부대는 동남에 서, 조문조( 曹 文 詔 ) 부대는 서북에서의 포위를 당하여 왕자용( 王 自 用 )이 무안남첨산( 武 安 南 尖 山 )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자성( 李 自 成 )은 또 그들의 나머지 부대를 소집하여 천여 명에서 2만여 명으로 확충했으며 하나의 독립적인 봉기군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11월 고영상( 高 迎 祥 ), 이자성( 李 自 成 ), 장헌충( 張 獻 忠 ), 라여재( 羅 汝 才 ), 마광옥( 馬 光 玉 ) 등 각부( 各 部 ) 24영( 營 ) 10여만 명의 봉기군은 명군( 明 軍 )의 소탕을 타파하기 위하여 제원( 濟 源 ), 회경( 懷 慶 ), 임현( 林 縣 ), 섭현( 涉 縣 ) 사이의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어서 그들은 갑 자기 부대를 이동하여 남하했고 황화를 건너서 명군( 明 軍 )의 세력이 비교적 약한 예서( 豫 西 )와 호북( 湖 北 )의 무당산( 武 當 山 ) 지역으 로 진군함으로서 내선작전에서 뛰쳐나와 전역과 전투상의 주동권을 얻었다. 황하를 건넌 후 운양( 나누어 예( 豫 ), 초( 楚 ), 천( 川 ), 섬( 陝 ) 사이를 오가면서 유동작전을 진행했다. 陽 )을 중심으로 약간의 부대를 이듬해, 명나라 조정에서는 각 성( 省 )의 명군( 明 軍 )이 직권이 서로 달라 서로 관망하는 불리한 상황을 바꾸어 병력을 모아 전면 적으로 소탕을 벌리는 방침을 취하였다. 그들은 진기유( 陳 奇 瑜 )를 오성총독( 五 省 總 督 )으로 임명하여 통일적으로 섬서( 陝 西 ), 산서( 山 西 ), 하남( 河 南 ), 호광( 湖 廣 ) 및 사천( 四 川 )의 명군( 明 軍 )을 지휘하여 나누어 전진하여 한번에 공격함으로써 봉기군을 일거에 섬멸하 려했다. 그 무렵 봉기군은 벌써 서로( 西 路 )로 이동하여 차례로 흥안( 興 安 -섬서안강( 陝 西 安 康 )), 한중( 漢 中 ) 및 상락산( 商 상현( 陝 東 南 商 縣 ), 낙남( 洛 南 )일대)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므로 명군( 明 軍 )의 소턍 계획은 또 한번 실패했다. 山 -섬동남 1635년 초 봉기군은 홍승주( 洪 承 疇 )의 소탕을 타파하기 위하여 일개 부대는 한중( 漢 中 )으로 서진( 西 進 )하여 감숙( 甘 肅 )에 진군하고 일개 부대는 북으로 강을 건너 산서( 山 西 )에 진군했으며 일개 부대는 동진( 東 進 )하여 봉양( 鳳 陽 )에 진군했다. 이자성( 李 自 成 )의 부대 는 녕주( 寧 州 -감숙녕현( 甘 肅 寧 縣 )), 진녕( 眞 寧 -감숙정녕( 甘 肅 正 寧 ))에서 두 차례나 명군( 明 軍 )을 섬멸하고 애만년( 艾 萬 年 )을 죽이고 조문조( 曹 文 詔 )를 죽게 하였으며 홍승주( 洪 承 疇 )로 하여금 대성통곡 하게 했다. 계속해서 그들은 함양( 咸 陽 )을 함락하고 서안( 西 安 )으로 임박했다. 마광옥( 馬 光 玉 ), 고영상( 高 迎 祥 ), 장헌충( 張 獻 忠 )의 여러 부대도 그 기회에 재차 동진( 東 進 )하고 하남( 河 南 )으로 진 군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아군이 예( 豫 )에 이르면 도적은 진( 秦 )에서 일어나고, 아군이 진( 秦 )으로 떠나면 도적은 또 초( 楚 )와 예( 豫 )에로 가고 함으로 전면적인 소탕을 진행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고 전역을 나누어 중요 지점을 섬멸하는 방침을 쓰기로 했다. 려상 승( 慮 象 升 )을 직이( 直 隶 ), 산동( 山 東 ), 하남( 河 南 ), 호광( 湖 廣 ), 사천( 四 川 ) 등 오성( 五 省 )의 총리( 總 理 )로 임명하여 관( 關 ), 요병( 遼 兵 ) 을 통솔하고 전문적으로 중원( 中 原 ) 지역을 다스리게 하고 홍승주( 洪 承 疇 )가 서북( 西 北 )을 다스리게 했다. 각자는 자기의 구역을 책 임지고 협동하여 작전하도록 했다. 1636년 고영상( 高 迎 祥 ), 장헌충( 張 獻 忠 )은 저주( 州 -안휘저현( 安 徽 縣 )), 주선진( 朱 仙 鎭 ), 유주( 裕 州 -하남방성( 河 南 方 城 )) 등지에 서 연거푸 려상승( 慮 象 升 ), 좌량옥( 左 良 玉 ) 부대의 추격과 저격을 받아 과반의 병력을 잃었고 나머지 부대는 섬서( 陝 西 )의 한중( 漢 中 ) 지역으로 들어갔다. 7월, 고영상( 高 迎 祥 )이 부대를 거느리고 서안( 西 安 )으로 진군하는 도중 섬서주지( 陝 西 周 至 )에서 손전정( 孫 傳 庭 ) 부대에게 포위 당하 대명제국을 날린 가장 큰 심복지환 流 賊 ----이자성과 장헌충 424

425 여 4일간 혈전을 벌린 끝에 패전했으며 그 자신은 포로가 되어 희생되었고 기타 부대에서는 고영상( 高 迎 祥 )을 이어 이자성( 李 自 成 ) 틈왕( 闖 王 )으로 받들었다. 이때 하남( 河 南 ) 지역의 마광옥( 馬 光 玉 ) 부대와 한중( 漢 中 )의 장헌충( 張 獻 忠 ) 부대는 명군( 明 軍 )이 북으로 이동하여 청( 淸 )을 저항하는 틈을 노려 다시 일어나 군사를 합쳐 호광( 湖 廣 ) 지역으로 진군하여 라여재( 羅 汝 才 ) 부대 등의 20여만 인 과 연합하여 강을 따라 동으로 진군했으며 군사를 분산하여 기주( 州 -호북기춘( 湖 北 春 )서남), 태호( 太 湖 ), 잠산( 潛 山 ), 곽산( 霍 山 ) 일대에서 활약했다. 이듬해 이자성( 李 自 成 )은 부대를 인솔하고 섬서( 陝 西 )에서 사천( 四 川 )으로 진군하여 10여 개의 현성( 縣 城 )을 함락했다. 1638년 봄, 사천( 四 川 )에서 섬서( 陝 西 )로 돌아오는 도중에서 조하( 河 ) 일대에서 홍숭주( 洪 承 疇 ), 손전정( 孫 傳 庭 ) 부대의 습격을 받 아 패하고 민주( 岷 州 -감숙민현( 甘 肅 岷 縣 )), 예현( 禮 縣 -감숙예현( 甘 肅 禮 縣 ))으로 흩어졌다. 그 후 그는 나머지 부대를 거느리고 천섬 ( 川 陝 )의 변경 산간지대에서 활동했다. 장헌충( 張 獻 忠 ), 라여재( 羅 汝 才 ) 등은 투항하는 척하며 각각 곡성( 谷 城 ), 방산( 房 山 )에서 휴식 정돈했다. 농민봉기는 한때 저조기에 들어섰다. 농민 봉기군은 장기간의 반소탕 투쟁을 거쳐 점차적으로 집중, 유동적으로 맞서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1640년, 원래의 72개 진영 등 백여 개의 부대들이 모두 합쳐서 이자성( 李 自 成 ), 장헌충( 張 獻 忠 ), 라여재( 羅 汝 才 ) 등을 수반으로 하는 몇 갈래의 강대한 농민무장대 를 이루었다. 이해 8월 명나라 독사( 督 師 ) 양사창( 楊 嗣 昌 )이 10만 대군을 인솔하고 촉( 蜀 )으로 진군하여 농민 봉기군은 일거 섬멸하려 기도했다. 무산( 巫 山 )에서 군사를 돌려 사천( 四 川 )으로 진군하던 장헌충( 張 獻 忠 )과 라여재( 羅 汝 才 ) 부대는 양사창( 楊 嗣 昌 ) 부대가 줄곧 꼬리를 물고 놓지 않자 단연히 떠나는 것으로 적을 물리치는 책략을 택하고 군사를 인솔하여 남진했다. 12월, 려주( 濾 州 )까지 이르고 나서 갑자기 군사를 동쪽으로 이동하여 뒤쫓아오던 명군( 明 軍 )을 따돌렸다. 두달 후 巫 山 (무산)을 넘어 흥산( 興 山 -호북( 湖 北 )에 속함)과 방현( 房 縣 ) 경내로 진군함으로서 포위에서 빠져나왔다. 진군 도중에서 역사( 驛 舍 )를 불지르고 수비 하고 있는 병사들을 죽임으로써 사천( 四 川 )과 호광( 湖 廣 ) 사이 명군( 明 軍 )의 연락을 단절시켰다. 당양( 當 陽 -호북( 湖 北 )에 속함)에 이 르렀을 때 양사창( 楊 嗣 昌 )의 진영인 양양성( 襄 陽 城 )의 방어가 허술하다는 것을 탐지한 장헌충( 張 獻 忠 )은 일개 부대를 파견하여 뒤쫓 아오는 명군( 明 軍 )을 저격하고 자신는 친히 2000명의 정예기병을 인솔하고 하루에 300리를 행군하여 양양( 襄 陽 ) 경내에 이르렀다. 그 는 200여명의 기병을 명군( 明 軍 )으로 변장시키고 싸움에서 획득한 양사창( 楊 嗣 昌 )의 군부( 軍 符 )와 화살을 들고 성으로 들어갔다. 그 날 밤 성안에서는 약속대로 불을 지폈고 장헌충( 張 獻 忠 )은 군사를 인솔하고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안팎이 협동하여 다음날 새벽 에 양양( 襄 陽 )을 함락하고 양왕( 襄 王 ) 주납명( 朱 昌 )은 자살했다. 銘 )을 죽이고 대량의 군수품, 기계, 동은을 획득했다. 이 소식을 접한 양사창( 楊 嗣 명군( 明 軍 )의 주력이 장헌충( 張 獻 忠 )의 농민군에게 의해 사천( 四 川 ), 호광( 湖 廣 ) 지역에서 억제되어 있던 해의 겨울, 이자성( 李 自 成 ) 은 인의( 仁 義 )를 행하여 민심을 사며, 낙하( 洛 河 )를 거점으로 하고 천하를 얻는다 는 전략방침에 따라 명군( 明 軍 )의 주력부대 와 전략요지를 향하여 기동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중원( 中 原 )의 명군( 明 軍 ) 병력이 허술한 기회를 이용하여 군사를 인솔하여 운양( 陽 -호북운현( 湖 北 縣 ))에서 우회하여 하남( 河 南 )으로 진군하여 계속 영녕( 氷 寧 -낙녕( 洛 寧 )), 의양( 宜 陽 ), 신안( 新 安 ) 등 10여 성을 함락하고 낙양( 洛 陽 )에 대해 포위공세를 취했다. 이듬해 1월 수십만 대군을 지휘하여 낙양성( 洛 陽 城 )을 겹겹이 포위하고 이어 병력을 집중하여 성의 서북쪽을 맹공격하였다. 수비군 이 지탱하지 못하고 총병( 總 兵 ) 왕소우( 王 紹 禹 )의 부대 수백 명 장병이 의지하여 참정( 參 政 ) 왕*창( 王 * 昌 )을 체포하고 북문을 열어 농 대명제국을 날린 가장 큰 심복지환 流 賊 ----이자성과 장헌충 425

426 민군의 입성을 맞이했다. 복왕( 福 王 ) 주상순( 朱 常 詢 )은 잡혀 죽임을 당했다. 이자성( 李 自 成 )은 낙양( 洛 陽 )을 함락한 후, 세 차례나 개봉( 開 封 )을 포위 공격했다. 1월, 일곱 밤낮을 공격했지만 함락하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동쪽의 귀덕( 歸 德 -하남상구( 河 南 商 邱 ))를 함락하고 이어 군사를 예서 ( 豫 西 ) 지역으로 이동했다. 7월에 절천( 浙 川 )에서 좌랑옥부( 左 良 玉 部 )를 공격했다. 이때 라여재( 羅 汝 才 )가 장헌충( 張 獻 忠 )과의 마찰로 인하여 부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 후 이( 李 ), 라( 羅 ) 연합군은 등주( 鄧 州 -하남등현( 河 南 鄧 縣 ))로 진군할 때 단하( 湍 河 )의 북쪽 기슭 에서 보정( 保 定 )의 총독( 總 督 ) 양문악( 楊 文 岳 )이 인솔한 구원군에게 격파당해 항성( 項 城 -하남항성( 河 南 項 城 )남) 부근 지역으로 옮겼 다. 9월 그들은 맹가장( 孟 家 莊 -여남동( 汝 南 東 )) 양측의 삼림 속에 매복하여 섬서( 陝 西 ) 총독( 總 督 ) 전종용( 傳 宗 龍 )과 양무악( 楊 文 岳 )이 인 솔한 4만여 명 군사의 공격을 대파했다. 18일 이자성( 李 自 成 )이 군사를 이끌고 항성( 項 城 )까지 추격하여 전종용( 傳 宗 龍 )을 죽이고 6000여명의 잔여부대를 전부 섬멸했으며 그 기세로 계속 상수( 商 水 ), 남양( 南 陽 ), 우주( 禹 州 ) 등지로 진군하여 당왕( 唐 王 ) 주율막( 朱 聿 )과 연진왕( 延 津 王 ) 주상찬( 朱 常 ) 등을 죽였다. 12월, 재차 개봉( 開 封 )을 포위 공격했지만 끝내 함락하지 못하고 군사를 이동하여 남하했다. 1642년 초 언성( 城 )에서 좌량옥군( 左 良 玉 軍 )을 포위했다. 2월 섬서( 陝 西 ) 삼변총독( 三 邊 總 督 ) 왕교년( 汪 喬 年 )은 어명을 받고 군사 를 인솔하여 동관( 潼 關 )에서 출발하여 곧장 양성( 襄 城 )으로 진군함으로서 좌량옥부( 左 良 玉 部 )와 협동하여 언성( 城 ) 북쪽 지역에서 이자성군( 李 自 成 軍 )을 협공하려고 했다. 이자성( 李 自 成 )은 너무 깊이 들어가 적들이 뜻을 이루게 해줄 수 없다고 여겨 일개 부대 를 남겨 좌량옥부( 左 良 玉 部 )를 감시하게 하고 자기는 주력군을 인솔하여 밤새 북상하여 여하( 汝 河 )까지 진군하여 왕교년부( 汪 喬 年 部 ) 를 습격했다. 17일 양성( 襄 城 )을 함락하고 왕교년( 汪 喬 年 )을 죽이고 성안의 명군( 明 軍 )을 전부 섬멸했다. 4월, 제3차 개봉( 開 封 )을 포위 공격했다. 6월 하순 이자성( 李 自 成 )이 독사( 督 師 ) 정계예( 丁 啓 睿 ), 총독( 總 督 ) 양문악( 楊 文 岳 ) 및 총병( 總 兵 ) 좌량옥( 左 良 玉 ) 등이 인솔한 약 20 만의 구원군이 개봉( 開 封 )에서 서남으로 45리 떨어진 주선진( 朱 仙 鎭 )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소수의 병력으로 계속하여 성을 공격 하여 성내의 명군( 明 軍 )을 견제하는 한편 자기는 주력군을 인솔하여 주선진( 朱 仙 鎭 )의 서쪽 유리한 지형을 점령하고 명( 明 )의 구원군 에게 타격을 가했다. 여러 날의 격전 끝에 각로( 各 路 )의 명군( 明 軍 )은 농민군의 드높은 기세에 눌리어 잇따라 패전하여 철퇴했다. 좌 량옥부( 左 良 玉 部 )는 밤새 겨우 80리를 도주했는데 이자성부( 李 自 成 部 )의 앞뒤 추격으로 진영이 흩어지고 봉기군이 사전에 파놓은 함 정에 빠져 서로 짓밟혀 엄청난 참상을 빚었다. 이번 결전에서 이자성( 李 自 成 )은 10만여 명의 명군( 明 軍 )을 섬멸하고 2만 필의 말을 얻어 기본적으로 명군( 明 軍 )이 하남( 河 南 ) 동쪽 전장의 주력집단을 없앴다. 이자성( 李 自 成 )은 주선진( 朱 仙 鎭 )에서의 승세를 이어 개봉( 開 封 )을 함락했다. 9월 15일 개봉( 開 封 )을 지키고 있던 수비군들은 성을 지켜내지 못한 죄가 두려워 추관황주( 推 官 黃 澍 )의 음모를 이용하여 황하 북쪽 기슭의 순안( 巡 按 )인 엄운경( 嚴 云 京 )과 약속하고 밤새 황하의 제방을 터놓아 이자성( 李 自 成 ) 군대를 물에 잠기게 했다. 성 동북쪽에 진을 치고 있던 이군( 李 軍 )은 미쳐 이동하지 못하고 만여 명이나 익사했다. 17일 개봉성( 開 封 城 )이 전부 물에 잠겨 죽은 사람이 수십 대명제국을 날린 가장 큰 심복지환 流 賊 ----이자성과 장헌충 426

427 만 명에 달했으며 생존자는 백에 한, 둘도 안되었고 이때부터 황하는 길이 바뀌었다. 그 달말 섬서삼변( 陝 西 三 邊 ) 총독( 總 督 ) 손전정 ( 孫 傳 庭 )은 명을 받고 섬서( 陝 西 )의 명군( 明 軍 )을 인솔하여 동관( 潼 關 )에 진입했다. 이에 이자성( 李 自 成 )이 연합군을 이끌고 서진하여 적을 맞아 싸울 준비를 했다. 겹현( 縣 ) 일대에서 적의 매복 습격을 당하고 명군( 明 軍 )의 끊임없는 추격을 당하자 이득으로 적을 유인하는, 적이 혼란에 빠졌을 때 들이치는 수단을 취하여 부대에 명을 내려 행군 도중에 갑옷, 재물 등을 버렸다. 뒤쫓아오던 명군( 明 軍 )이 재물을 빼앗고 총두( 冢 頭 ) 부근에 도착했을 때 막 도착한 라여재( 羅 汝 才 ) 부대와 힘을 합쳐 반격을 가했으며 명군( 明 軍 )의 부총병( 副 總 兵 ) 이하 군관 78명과 수천에 달하는 병졸들을 섬멸했다. 손전정( 孫 傳 庭 )은 하는 수 없이 섬서( 陝 西 )로 후퇴했다. 전쟁 전 이자성( 李 自 成 ) 부대는 익지 않은 감으로 끼니를 때웠으므로 역사상에서는 시원지전( 柿 園 之 戰 )이라 했다. 이때 명군( 明 軍 )은 예악( 豫 鄂 ) 지역에 여녕( 汝 寧 )의 양문구( 楊 文 岳 )와 양양( 襄 陽 )의 좌량옥( 左 良 玉 ) 두개 부대만 남겨 놓았다. 11월 이자성( 李 自 成 )이 군사를 인솔하여 우선 여녕( 汝 寧 )을 점령하고 또한 양문구( 楊 文 岳 )를 잡아 죽였으며 숭왕( 崇 王 ) 주유궤( 朱 由 )와 아들 주자휘( 朱 慈 輝 )를 포로로 잡아 하남( 河 南 )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명군( 明 軍 )을 소멸함으로서 기본적으로 하낙( 河 洛 )을 점령 하는 전략목표를 실현했다. 12월에 양양( 襄 陽 )을 점령했다. 이어서 이자성( 李 自 成 )은 한편으로는 초병안민( 剿 兵 安 民 ) 의 기 치를 높이 추켜들고 3년을 징병하지 않고 백성의 목을 자르지 않는다 는 정책을 선포했다. 한편 군사를 파견하여 남쪽으로 군사 공격을 강화했다. 친히 주력군을 이끌고 동남으로 진군하여 운몽( 云 夢 ), 황피( 黃 陂 ) 등의 현( 縣 )을 점령하고 한양( 漢 陽 )까지 쳐들어갔 으며 일개 군사는 한수( 漢 水 )를 따라 남하하여 승천( 承 天 -호북종상( 湖 北 鍾 祥 ))을 점령하고, 일개 군사는 형주( 荊 州 )에서 강을 건너 송자( 松 滋 ), 석수( 石 首 ), 감리( 監 利 ) 등 성을 점령하고 일개 군사는 공서( 西 )로 들어가 덕안( 德 安 )을 점령했다. 단지 한 달여 만에 형( 荊 ), 양( 襄 ), 육부( 六 府 )의 각 주( 州 )를 휩쓸었다. 이자성( 李 自 成 ) 부대는 개봉( 開 封 )을 세 번 공격하는 과정과 유동 작전 중에서 전종용( 傳 宗 龍 ), 왕교년( 汪 喬 年 ), 손전정( 孫 傳 庭 ), 양문구( 楊 文 岳 ) 등이 인솔한 명군( 明 軍 )의 주력군을 다섯 차례나 섬멸 또는 격파했 으며 서쪽 전역의 형세를 바꾸고 근거지를 튼튼히 하여 농민 전쟁을 한층 더 발전하게 했다. 1643년 2월 이자성( 李 自 成 )은 양양( 襄 陽 )으로 되돌아와서 대순( 大 順 ) 정권을 건립했으며 봉천창의문무대원수( 奉 天 倡 義 文 武 大 元 帥 ) 로 칭하고 하북( 河 北 ), 하남( 河 南 )의 77개 주현을 점령하였으며 백여만 명의 군사를 거느렸다. 3월 라여재( 羅 汝 才 )가 배반한 것을 눈치채고 그를 죽였다. 내부정돈을 거친 후 계속 진군하므로서 천하를 얻음( 取 天 下 ) 의 정치목 적을 실현하려 했다. 당시 대강( 大 江 ) 북쪽에 단지 세 개 주력 병단( 兵 團 )만 남아 있었다. 즉 오삼계( 吳 三 桂 )가 녕원( 寧 遠 -료녕흥성 ( 遼 寧 興 城 ))에 주둔하면서 청군( 淸 軍 )을 방어하고 있으므로 군사를 조달할 수 없었으며 좌량옥( 左 良 玉 ) 군사는 수차 실패하여 이자성 ( 李 自 成 ) 군사와 맞서 싸우기를 두려워하며 오직 관중( 關 中 )의 손전정( 孫 傳 庭 ) 집단이 비록 총두( 冢 頭 )에서는 패했지만 그래도 큰 타 격은 당하지 않았다. 강남( 江 南 )의 명군( 明 軍 )은 아직 병단( 兵 團 )을 형성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장헌충( 張 獻 忠 ) 부대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이자성( 李 自 成 )은 이러한 군사태세에 근거하여 고군은( 顧 君 恩 )이 제시한 전략방침을 택했다. 즉 관중( 關 中 )을 먼저 취하여 원수( 元 帥 )의 상재지방( 桑 梓 之 邦 -원수의 이웃나라로 사이좋게 지내며)으로 하고 진( 秦 )의 이백 산하와 천하의 3분의 2를 얻어 건국입 업( 建 國 立 業 )하고 나서 방략삼변( 旁 略 三 邊 )하며 병력을 모아 산서( 山 西 )를 공략하고 나중에 경사( 京 師 )를 공격하는 것을 전체 책략으 로 한다. 이 방침의 중심은 두개 절차로 나누어 진행한다. 즉 처음 절차는 먼저 관중( 關 中 )을 취하여 근거지로 삼아 나아가 북으로 확장하고 삼변( 三 邊 )의 명나라 군사를 이용하여 자신의 군력을 키우는 것이고 두 번째 절차는 산서( 山 西 )를 경유하여 경사( 京 師 )를 점령하여 결국 명왕조( 明 王 朝 )를 뒤엎는 것이다. 따라서 이자성( 李 自 成 )은 주력군을 예서( 豫 西 )로 이동시켜 관( 關 )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5월 명나라 황제 주유검( 朱 由 檢 )은 손전정( 孫 傳 庭 )을 병부상서( 兵 部 尙 書 )로 임명하고 하남( 河 南 ), 호광( 湖 廣 ), 사천( 四 川 ) 등 7성( 省 ) 대명제국을 날린 가장 큰 심복지환 流 賊 ----이자성과 장헌충 427

428 의 명군( 明 軍 ) 약 10만 명을 소집하여 나누어 하남( 河 南 )으로 진군함으로서 농민군을 향하여 진공을 시각였다. 이자성( 李 自 成 )은 이 에 대응하여 원래의 부서를 개편하여 일개 군사를 수문향( 鄕 -하남형보( 河 南 靈 寶 )서)에 파견하여 적과 맞받아 싸움으로서 명군( 明 軍 )의 주력군을 하남( 河 南 )의 중부 지역까지 유인하여 결전을 벌렸다. 또한 때를 같이 하여 사천( 四 川 ) 명군( 明 軍 )의 하남( 河 南 ) 진입 을 막기 위해 내향현( 內 鄕 縣 ) 일대에 수비를 강화하여 옆쪽의 안전을 엄호하도록 했다. 8월 손전정( 孫 傳 庭 )의 군사는 문향( 鄕 )에 이르렀다. 농민군은 싸우면서 퇴각하여 섬주( 陝 州 -삼문협시( 三 門 峽 市 )서북)를 걸쳐 민지 ( 池 )까지 후퇴하고 낙양( 洛 陽 )을 지나 겹현( 縣 ), 양성( 襄 城 )까지 이동했다. 9일, 명군( 明 軍 )이 여주( 汝 州 )까지 쳐들어왔다. 손전정( 孫 傳 庭 )은 배반하고 항복한 농민군의 군위( 軍 尉 ) 이양순( 李 養 純 )이 제공한 정 보에 근거하여 주력군을 양성( 襄 城 )까지 바싹 다가가 겹현( 縣 ) 서남에 이르도록 명을 내렸다. 게다가 일부 군사를 파견하여 지름길 에서 보풍( 寶 豊 )과 당현( 唐 縣 -당하( 唐 河 ))을 습격 함락하여 농민군 및 그들의 가속을 없애도록 하였다. 농민군은 적을 섬멸하는 여건 을 만들기 위해 한편으로는 겹현( 縣 )과 양성( 襄 城 ) 사이의 깊은 골짜기와 높은 보루를 의탁하여 수비만 하고 싸우지 않음으로서 명군( 明 軍 )을 지치게 하는 한편 정예군을 파견하여 여주( 汝 州 ) 서북에 있는 백사( 白 沙 )를 습격하여 점령하여 명군( 明 軍 )의 식량운반 길을 절단하였다. 21일, 이자성( 李 自 成 )은 손전정( 孫 傳 庭 )이 낙양( 洛 陽 )으로 식량을 납품하러 간 사이에 명군( 明 軍 )이 변을 일으킨 기 회를 노려 공격을 가했다. 다음날 농민군 기병과 보병의 밀접한 배합으로 여주( 汝 州 )와 겹현( 縣 ) 일대에서 명군( 明 軍 )을 포위하고 격전을 벌렸다. 그후 밤낮으로 황하( 黃 河 ) 기슭의 맹진( 孟 津 )까지 추격하여 명군( 明 軍 )의 주력군 4만여 명을 섬멸함으로서 명왕조( 明 王 朝 )를 뒤엎는 기초를 닦았다. 10월, 이자성( 李 自 成 )은 대순군( 大 順 軍 )을 인솔하여 동관( 潼 關 )을 격파하고 손전정( 孫 傳 庭 )은 전사했다. 8일, 그의 좌로( 左 路 )인 유희 요( 劉 希 堯 ) 부대가 상주( 商 州 )를 점령했다. 잇따라 대순군( 大 順 軍 )은 대나무 쪼개는 기세로 서안( 西 安 ), 연안( 延 安 ), 한중( 漢 中 ), 고원 ( 固 原 ) 등의 성을 점령했다. 11월에 유림( 楡 林 )을 함락했다. 12월에 란주( 蘭 州 ), 감주( 甘 州 ), 서녕( 西 寧 ) 등지를 잇달아 빼앗고 또 일개 부대를 파견하여 서안( 西 安 )로 쳐들어가 평양( 平 陽 -산서임 분( 山 西 臨 汾 )) 등의 성을 점령했다. 이로서 대순군( 大 順 軍 )은 진( 秦 ), 롱( 隴 )의 전 지역 및 산서( 山 西 ) 서남 지역을 차지하였다. 이때 장헌충( 張 獻 忠 )은 기지를 세우기 위해 재차 기병, 보병, 수병 등 수십만 명을 이끌고 무창( 武 昌 )에서 출발하여 악주( 岳 州 -하남악양현 ( 河 南 岳 陽 縣 ))를 지나 사천( 四 川 )으로 진입했다. 1644년 초, 이자성( 李 自 成 )은 서안( 西 安 )을 서경( 西 京 )으로 고치고 정식으로 국호를 대순( 大 順 )으로 정했으며 원( 元 )을 영창( 永 昌 )으 로 고쳤다. 그후 북경( 北 京 )으로 진군했으며 ; 유방량( 劉 芳 亮 )은 좌영대군( 左 營 大 軍 )을 인솔하여 평양( 平 陽 )을 거쳐 동으로 태항산( 太 行 山 )을 넘어 예북( 豫 北 )으로 전진한 후 진군 방향을 북으로 돌려 진정( 眞 定 -하북정정( 河 北 正 定 )) 남쪽을 경유하여 북경( 北 京 )을 공 격하며 ; 자신는 주력부대 10여만 명을 인솔하고 용문( 龍 門 )에서 동으로 황하를 건너 북으로 태원( 太 原 )을 향하여 전진한 후 대동( 大 同 )과 선화( 宣 化 )를 거쳐서 북경( 北 京 )을 공격했다. 3월 16일 대순군( 大 順 軍 )의 주력군이 창평( 昌 平 )을 점령하고 북경( 北 京 )에 접근했다. 17일 성 밖에 있던 명군( 明 軍 ) 삼대영( 三 大 營 )이 먼저 투항하고 성을 내주었다. 이자성( 李 自 成 )은 투항한 태감( 太 監 ) 두훈( 杜 勛 ) 등을 성내로 파견하여 주유검( 朱 由 檢 )을 투항하도록 권유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8일 저녁 사전에 성내로 잠입한 대순군( 大 順 軍 )의 사람들이 창의문( 彰 儀 門 )을 지키던 태감( 太 監 )을 책 대명제국을 날린 가장 큰 심복지환 流 賊 ----이자성과 장헌충 428

429 동하여 성문을 열게 함으로서 대순군( 大 順 軍 )은 경성( 京 城 )을 점령했다. 19일 아침 황성( 皇 城 )을 점령하고 주유검( 朱 由 檢 )은 경산( 景 山 )에서 목매어 자살했다. 명왕조( 明 王 朝 )의 통치는 드디어 대순군( 大 順 軍 )에 의해 전복되고 말았다. 북경( 北 京 )의 명나라 정부가 파멸된 후 강남( 江 南 )의 명군( 明 軍 )은 복왕( 福 王 ) 주유송( 朱 由 松 )을 황제로 옹호하고 남경( 南 京 )에서 홍 광( 弘 光 ) 정권을 건립함으로서 정예군을 알선하여 진관( 秦 關 )을 치려했고 ; 요동( 遼 東 )의 청( 淸 ) 정권도 관( 關 )으로 진입하여 대 순군( 大 順 軍 )과 전국의 통치권 쟁탈전을 벌리려고 준비했으며 ; 명을 받고 북경( 北 京 )을 지원하러 떠났던 오삼계( 吳 三 桂 )의 부대는 벌써 녕원( 寧 遠 )을 포기하고 산해관( 山 海 關 )을 넘어 머물 곳조차 잃은 지경에 빠졌다. 이때 장헌충( 張 獻 忠 )이 인솔한 대서군( 大 西 軍 )은 사천( 四 川 )에서의 발전이 순조롭게 진전되어 중경( 重 慶 ), 성도( 成 都 ) 등 여러 성을 점령했고 미쳐 점령하지 못한 주현( 州 縣 )을 함락했다. 11월 성도( 成 都 )에서 황제로 칭하고 국호를 대서( 大 西 )라 했으며 성도( 成 都 )를 서경( 西 京 )이라 개칭했다. 이런 형세를 감안하여 이자성( 李 自 成 )은 정권의 건설을 강화함과 아울러 거용관( 居 庸 關 )에서 성을 바치고 투항한 명장( 明 將 ) 당통( 唐 通 )이 인솔한 부대 8000여명과 좌무태( 左 懋 泰 ) 부대를 산해관( 山 海 關 )으로 파견하여 명나라 총병( 總 兵 ) 고제( 高 第 )를 대신하여 수비하 게 했고 오삼계( 吳 三 桂 )를 후( 侯 )로 봉하고 그의 부친을 동원하여 편지로 투항을 권유하도록 했으며 ; 그 편지를 지닌 사람을 강남 ( 江 南 )으로 보내어 좌량옥( 左 良 玉 )과 유청택( 劉 淸 澤 ) 등 남방의 명군( 明 軍 )에게 투항을 권유했다. 4월 초, 부친께서 형을 받고 곧 사형에 임박해 있고 가족이 치욕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오삼계( 吳 三 桂 )는 도로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철퇴하면서 당통( 唐 通 )을 패전시키고 산해관( 山 海 關 )을 점령했다. 또한 그는 청나라 통치집단에게 출병할 것 을 요청했으며 연합하여 북경( 北 京 )의 대순군( 大 順 軍 )을 공격했다. 13일 이자성( 李 自 成 )은 6만여 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산해관( 山 海 關 )을 수복하러 떠났다. 21일 밤, 오삼계( 吳 三 桂 )는 성을 나가 주야로 달려온 청군( 淸 軍 ) 통수( 統 帥 ) 다이곤( 多 爾 袞 )을 마중했고 머리 를 깎아 투항을 했다. 다음날 대순군( 大 順 軍 )은 석하( 石 河 ) 지역에서 청군( 淸 軍 )과 오군( 吳 軍 )의 협공을 받아 패하고 영평( 永 平 )으로 철퇴했다. 23일 영평( 永 平 )에서 또 패전했다. 이자성( 李 自 成 )은 하는 수 없이 군사를 이끌고 북경( 北 京 )으로 되돌아 왔다. 29일 무영 전( 武 英 殿 )에서 제위( 帝 位 ) 했다. 30일 북경( 北 京 )에서 물러나 서남으로 전략적 이동을 하였다. 대명제국을 날린 가장 큰 심복지환 流 賊 ----이자성과 장헌충 429

430 중국 이야기-6 블로그 저자 발행일 B.S 의 빛을 찾아서 베스 :22:08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복제와 전재를 금합니다.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고대 동아시아의 왕성과 풍납토성 - 풍납토성의 성격 규명을 위한 학술세미나 - pp. 46-67 한국의 고대 왕성과 풍납토성 김기섭(한성백제박물관) 목차 Ⅰ. 머리말 Ⅱ. 한국 고대의 왕성 1. 평양 낙랑토성 2. 집안 국내성 3. 경주 월성 4. 한국 고대 왕성의 특징 Ⅲ. 풍납토성과 백제의 한성 1. 풍납토성의 현황 2. 한성의 풍경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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