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의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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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열의사록 예문관 박성진

2 소개글

3 목차 1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5 2 박열 어록 28 3 개새끼(1922년2월) 32 4 박열( 朴 烈 )의 항일투쟁과 신조국건설운동 34 5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40 6 한국일보 박열 특집 59 7 박열의 옥중단가 60 8 박열 의사 출옥 후에 보내온 지인들의 휘호 63 9 박열의사 관련 사진첩(1) 박열열사 이야기(이규태 조선일보) 일본 여인을 사랑에 빠뜨린 박열의 무정부주의 [중앙일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 재일 아나키스트들의 항일투쟁(한국일보) 박열 독립운동사 박열-가네코후미코 일본대심원 판결문 박열의 옥중단가(아키타형무소에서) 납북이후 박열의사의 행적 나의 옥중잡영(박열 한시) 박열 의사의 친필 박열의사기념사업회 및 박열의사 기념관 연혁 박열 作 옥창( 獄 窓 )의 시(동아일보 1926년 1월 1일)2수 대역죄로 사형 선고 받은 박열 재판장, 수고했네 [이덕일의 事 思 史 근대를 말하다] 박열의사와 가네코후미코 그리고 기념관 불령사( 不 逞 社 ) 동지 명단 박열과 가네코후미코 동지들 사진 북한의 새로단장한 박열의사 등의 묘역 162

4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21 근대사와 아나키즘 등장(이덕일칼럼 중앙일보).pdf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4

5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5

6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6

7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7

8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8

9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9

10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10

11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11

12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12

13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13

14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14

15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15

16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16

17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17

18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18

19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19

20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20

21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21

22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22

23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23

24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24

25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25

26 근대사와 아나키즘의 등장(이덕일 칼럼 중앙일보 연재물) 26

27 박열 어록 :57 박열 어록 27

28 이치가야형무소 형사자위령탑 박열 어록 28

29 이치가야 ( 市 ヶ 谷 )형무소) 예심조서에서 박열은 1924년 2월4일 이치가야( 市 ヶ 谷 )형무소에서 있은 제6회 예심 조서에서 일본 천황과 그 황실에 대해서 자신의 확고한 신념과 의지를 나타냈다. 나는 일본에게 억압을 당하고 있는 조선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일본의 천황, 황태자, 황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증오와 반역의 마음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으며 존경심은 추호도 가지고 있 지 않았다. 일본의 천황과 황태자는 하나의 우상( 偶 像 )에 지나지 않는다. 가련한 제분기( 製 糞 機 ) 이자 희생자에 불과하다. 특히 조선의 일반 민중들은 천황과 황태자가 일본의 명실상부한 실권 자이다. 한 하늘 밑에서는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존재를 지 구로 부터 추방해 버리는 것은 조선의 민중들을 감격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보다 전투적인 기 분을 가지게 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실로 가장 의미있는 방법중의 하나라 할 수 있 을 것이다. 박열은 일본 사법부의 갖은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조선청년의 철저한 민족적 독립 의지와 확고한 항일투쟁 의식을 잃지 않고 끝까지 대항하며 싸웠다. 그는 1923년 가을에 있을 예 정인 황태자결혼식에 폭탄을 사용할 목적과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첫째, 일본 국민에게 있어서 일본의 황실이 얼마나 일본 국민에게 고혈을 갈취하는 권력자의 간 판격이고, 또한 일본국민들이 미신처럼 믿고 신성시 하는것 신격화하는 것의 정체가 사악한 귀 신과 같은 존재임을 알리고, 일본황실의 진상을 밝혀서 그 신성함을 땅에 떨어뜨리기 위함이었 다. 둘째, 조선 민족에게 있어서 일반적으로 일본 황실은 모든 것의 실권자이며 민족의 증오의 대상 이기 때문에, 이 황실을 무너뜨려서 조선민족에게 혁명적이고 독립적인 열정을 자극하기 위해서 였다. 셋째, 침체되어 있는 일본의 사회운동가들에게 혁명적인 기운을 불어 넣기 위해서였다. 나의선언 멸하라! 모든 것을 멸하라! 폭탄을 날려라! 독을 퍼트려라! 기요틴을 설치하라! 정부 에,의희에,감옥에,공장에,인간시장에,사원에,교회에,학교에,마을에, 거리에. 모든 것을 박열 어록 29

30 멸할 것이다. 붉은 피로써 가장 추악하고 어리석은 인류에 의해 더렵혀진 세계를 깨끗이 씻을 것이 다 나는 독립국의 머슴이고싶다 박열은 출옥후 아키다( 秋 田 )현과 야마가다( 山 形 )시 그리고 동경에서 동포들이 환영하는 모임과 민중대회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스스로 민중의 지도자가 될 계획은 없다. 나는 내가 경애하는 조선민중의 수족이 되어 심 부름꾼이 되고, 내가 신성한 목적 달성 때문에 30수년을 살아 지내온 이 목숨을 거듭 바치고자 굳게 맹세할 따름이다. 그리고 조선인의 한사람으로서 세계인의 한사람으로서 조선인의 발전과 자유조선의 독립완성에 헌신할 것이다. 이 신성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장애가 되는 일체의 모든 것에 대하여, 철저하게 싸우고 이를 배제하여 나간다고 말하였다. 그는 또 일본의 천황제가 제 국주의 군국주의로 몰고간 전정( 專 政 )의 위험에 대해 지적하였다. 일본 민중에 대해서는 결코 적으로 하는 것은 없으며, 조선과 일본뿐만이 아니라 각 민족은 금후 공존공영으로 매진해 나가 야 할것이다. 박열 어록 30

31 개새끼(1922 (1922년2월) :49 청년 박열 개새끼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개새끼(1922년2월) 31

32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감상노트 *가네코후미코가 1922년 2월 일본유학생들이 펴낸' 조선청년' 에 실린 박열의 개새끼 시를 읽고 내 마음속에 찾던 그 사람이 바로 박열이라고 확신을 하 게 된다.) 개새끼(1922년2월) 32

33 박열( ( 朴 烈 )의) 항일투쟁과 신조국건설운동 :46 박열 ( 朴 烈 )의 항일투쟁과 신조국건설운동 김명섭 (단국대학교 강사) 1. 머리말 박열은 일제 강점기동안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중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18세의 나이 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흑도회 흑우회 등 항일 사상단체를 이끌어 온 그는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학 살의 와중에 일본국왕을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른바 대역사건 ( 大 逆 事 件 )으로 인해 그는 1945년 10월 27일 아키다( 秋 田 )감옥에서 석방될 때까지 22년 2개월이라는 세계최장의 옥살이를 치루어야 했다. 해방후 맥아더 정부에 의해 석방된 박열은 신조선건설동맹에 이어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단장을 맡았으 며, 1949년 영구귀국했다가 한국전쟁으로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고 말았다. 북한에서 그는 조소앙 엄항섭 등과 함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해 회장을 맡아 군대축소와 국제적 중립국화에 노력하였다. 1974년 1월 17일 서거하 여 현재 그의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하지만 항일투쟁과 신조국건설에 끼친 공로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은 남북한 양쪽을 비롯해 고향에서조차 제 대로 알려지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 이유는 미소 냉전체제의 이데올로기 대립과 아나키즘 사상에 대한 오해에서 비 롯되었지만, 밑바탕에는 일제의 천황제 체제는 물론 남북한 정권의 철권통치 모두를 거부하고자 했던 그의 자유정신 에서 찾을 수 있다. 다행이 지난 2001년 문경의 뜻있는 지역유지들을 중심으로 기념사업이 진행 중에 있어 업적에 대 한 재평가가 기대된다. 2. 성장과 항일투쟁 박열은 1902년 3월 12일(음력 2월 3일)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샘골) 98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 ( 咸 陽 )으로 부친 박지수( 朴 芝 洙 )와 모친 정선동( 鄭 仙 洞 )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초명은 혁식( 赫 植 )이었으 나 어려서부터 열( 烈 )로 불렀고, 호적에는 준식( 準 植 )으로 되어 있다. 어린 시절을 보낸 마성면 오천리 일대는 일찍이 일제에 의한 광산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개 조선총 독부의 후원아래 일본 자본가들이 마구잡이로 개발한 광산촌에는 조선인에 대한 가혹한 노동착취와 저임금, 인권유 린 등의 각종 폐해가 뒤따랐던 만큼, 지역주민들의 반일정서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일찍이 오천리에는 인근 산지의 삼림과 식수관리, 경로사업 등 마을자치 활동을 펼치는 성산조합( 星 山 組 合 )이 결성되었는데, 이 단체는 1919 년 1월 권농조합으로 개칭되었다. 박열의 맏형 정식과 둘째형은 이 조합의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년경 마을 박열( 朴 烈 )의 항일투쟁과 신조국건설운동 33

34 구장을 맡아보는 등 마을일에 적극 앞장섰다. 박열의 집안은 누대로 전통적인 양반 가문으로 지방 사민( 士 民 )이었다. 하지만 경술국치 이후 자작농업과 소작료 수확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할 정도로 궁핍하였다고 한다. 7세인 1908년부터 서당교육을 받았으며 10세 때에는 집에서 40리나 떨어진 함창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이 지방 최초로 설립된 4년제인 보통학교에 통학하면서, 소년 박열은 민족의식 형성에 큰 계기를 갖게 된다. 즉 1916년 3월 졸업식을 앞두고 조선인 선생님이 학생들을 모아 놓고, 자신이 그동안 일본의 압력에 못 이겨 거짓교육을 시킨 것에 대해 눈물로 사과하며 조선역사의 존엄성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일본교사는 형사 라는 선생님의 말에 큰 충격과 감동을 받은 소년 박열은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계속 공부하여 민족을 위한 큰일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보통학교 졸업 후 박열은 농사를 지으라는 맏형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 전신) 사범과에 진학하였다. 재학 중 그는 일본인 교사로부터 고토쿠 슈스이( 幸 德 秋 水 )의 이른바 대역사건( 大 逆 事 件 ) (일 본천황을 암살하려 했다는 음모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후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참여하 였던 박열은 일본인이 세운 학교에 다니는 치욕을 견딜 수 없다며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고향 문경에 돌아온 이후에도 박열은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는 등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로부터 일제의 가혹한 고문과 탄압 만행을 전해 듣고, 더 이상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힘 들다는 판단 아래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1919년 10월경 그는 도쿄( 東 京 )로 가는 배에 몸을 싣게 되 었다. 도쿄에 도착한 박열은 여느 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신문배달과 날품팔이, 우편배달부, 인력거꾼, 인삼행상 등의 노동에 종사하였다. 이러한 험난한 고학생활 속에서도 그는 틈틈이 단기어학 전문학원인 세이소쿠( 正 則 )영어학교에 다니며 학업에 전념하였다. 나아가 오스기 사카에( 大 杉 榮 ) 사카이 토시히코( 堺 利 彦 ) 이와사 사쿠타로( 岩 佐 作 太 郞 ) 등 당시의 저명한 일본 사회주의자들을 찾아가 직접 교류하면서 그들의 반제 자유의식과 아나키즘사상에 공명하게 되었다. 박열은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김찬 조봉암 등 도쿄에 거주하는 고학생들을 규합해 의혈단 ( 義 血 團, 후에 鐵 拳 團 - 血 拳 團 - 撲 殺 團 으로 개칭)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친일 행위자들에게 협박장을 보내 떠나라고 명 령하고, 철저히 응징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도쿄의 최대 조선인 노동단체였던 조선고학생동우회( 朝 鮮 苦 學 生 同 友 會 )에서 김약수 백무 최갑춘 등과 함께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1922년 2월경 박열은 그의 평생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 다. 요코하마 태생의 그녀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성적학대로 제국주의 일본의 모순을 온몸으로 받아오면서 천황제와 군국주의에 반감을 가져온 자유여성이었다. 약 7년 동안 조선 땅에서 갖은 고생을 한 바 있는 그녀는 도쿄시내의 작 은 오뎅집에서 일하면서 조선유학생들과 교류하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조선잡지에 실린 박열의 자작시를 읽고 강 한 감동과 함께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곧 만남을 통해 사상공감에 이르렀고, 민족적 차이를 넘어 계급적 동지로서 함께 항일활동을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3. 흑도회와 흑우회, 불령사 활동 도쿄 고학생 동우회와 혈권단 등으로 항일활동을 펼치던 박열은 김약수, 원종린 등 유학생들과 함께 1921년 11 박열( 朴 烈 )의 항일투쟁과 신조국건설운동 34

35 월 29일 첫 사상단체인 흑도회( 黑 濤 會 )를 결성하였다. 저명한 일본 아나키스트인 이와사 사쿠타로의 후원아래 다양한 항일투사들이 결집된 흑도회의 회원들은 세계노동절 행사를 비롯해 일본 사상단체의 반정부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나아가 그는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흑도회의 기관지인 흑도( 黑 濤 ) 의 발간책임을 맡아 창간호와 2호를 발간하여 항일세력의 규합과 선전활동에 전념하였다. 흑도회는 1922년 8월 니카다( 新 潟 )현 나가스가와( 中 津 川 )에서 조선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착취와 학대로 다수가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박열과 김약수를 조사단으로 파견하였다. 이어 사건의 진상조사 결과를 9월 7일 도쿄 YMCA에서 보고하기에 이르렀는데, 일본과 조선의 지식인들을 비롯해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이는 등 큰 관심과 반향 을 불러 일으켰다. 박열은 이 사건과 같은 반인도적 행위가 민족차별과 식민체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이의 근본 적인 파괴의 필요성을 역설하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니카타현 조선 노동자학살사건의 조사를 계기로 흑도회는 식민체제의 근본적인 파괴와 의열투쟁을 강조하는 박 열과 대중적 전위정당을 추구하는 김약수와의 균열이 발생하였다. 실제로 박열은 국내에 사건보고를 위해 들어왔다가 김한( 金 翰 ) 등 의열단 간부들을 만나 폭탄구입을 요청하였다. 김약수 역시 조선인노동조사회와 노동자동맹을 결성함 에 따라 흑도회의 해체를 불러왔다. 박열은 1922년 12월경 김약수 등과 결별한 후 직접행동을 추구하는 회원들과 함께 흑우회를 조직하였다. 결성 당 시 회원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포함해 신영우 홍진유 서상일 박흥곤 장상중 등이었다. 흑우회 멤버들은 곧 사무실 내에 민중운동사를 세우고 1923년 5월경 기관지 민중운동( 民 衆 運 動 ) 을 발간하였다. 순수 조선문으로 발간 된 이 월간 사상잡지의 발행을 위해, 박열은 흑우회 사무소에서 편집 및 통신을 비롯한 기타 일체의 사무를 보았다고 밝혔다. 흑우회는 일본 및 조선의 여러 사회단체들과 함께 연대활동을 전개하였다. 흑우회원들은 후데이센징( 太 い 鮮 人 ) 과 현사회( 現 社 會 ) 라는 기관지를 통해 과격사회운동 취체법안 에 대해 반대의견을 개진하고 대규모 연합 시위에 참여하였다. 또 일본 노동단체 주최로 열린 세계노동절 행사에 참가해 8시간 노동제 실시 와 조선의 해 방 을 외치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등 흑우회 멤버들도 대회에 참가하다가 경찰의 검속에 걸 려 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이밖에도 흑우회원들은 조선문제강연회를 열어 항일의식을 고취시 키는 한편, 서울과 도쿄의 노동단체들과 연락관계를 맺는 등 활발한 대외 연대활동을 펼쳤다. 4. 일왕폭살계획과 옥중투쟁 박열은 1923년 4월 중순경 흑우회와 별도로 불령사( 不 逞 社 )를 조직하였다. 조선인 15명과 일본인 6명 등 총 21명 으로 조직된 불령사에서 박열은 정기모임을 통해 일본 아나키스트의 강연을 듣거나 국내의 파업투쟁을 후원하고, 사 회주의를 매도한 조선기자를 폭행하는 등 반일 직접활동을 주도하였다. 나아가 그는 보다 적극적이며 파괴적인 의열 투쟁을 펼치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다. 박열은 외국에서 폭탄을 반입할 방도를 논의하거나 직접 제조하려 하는 한편, 의열단의 중요간부인 김한( 金 翰 )을 만나 폭탄구입을 요청해 폭탄 50개를 반입하려 하였다. 세 번째에 걸친 폭탄 반입 실패에도 불구하고, 박열은 1923년 가을의 일본 황태자 결혼식 소식을 접하고 다시 거사계획을 세웠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듣고 도쿄로 찾아온 김중한 ( 金 重 漢 )에게 폭탄구입 여부를 타진하였으나, 구입비용 때문에 잠시 보류하였다. 이때까지 박열은 폭탄을 구입해 이 박열( 朴 烈 )의 항일투쟁과 신조국건설운동 35

36 를 언제, 어디에 투척할 것인지 분명한 계획을 세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9월 1일 돌연 도쿄에 대지진이 발생해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이런 와중에 일본내각과 군부는 1918년 쌀폭동 당시의 민란움직임을 사전에 막기 위해 도쿄시내와 인근 5개 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출동시 켰다. 완전무장한 상태의 군대와 경찰은 이 기회를 사회주의자와 조선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로 악용하였다. 정부 의 고의적인 유언비어 살포로 인해 자경단과 민중들조차 이 광란의 대학살에 참여한 나머지, 오스기 사카에를 비롯한 일부 노동조합 간부들과 약 6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무참히 희생당하였고, 6천여 명이 검속되기에 이르렀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그리고 불령사 회원들 역시 9월 3일경 보호검속이란 명목으로 검속되었다. 일본경찰은 이 어 일정한 거주 또는 생업 없이 배회하는 자 를 명분으로 한 달간의 구류에 처하더니, 곧 불령사를 비밀결사의 금지 위반혐의로 들어 구속 기소시켜 버렸다. 이러한 조치는 박열과 불령사를 오랫동안 감시해온 경찰의 사전계획 에 의해 취해진 것이다. 경찰의 취조 도중 박열의 폭탄구입계획 사실이 알려졌다. 이때부터 일본정부와 검찰은 불령사를 폭동과 천황암살 을 꾀한 조직사건, 즉 대역사건 으로 비화시키기 시작했다. 검찰은 이듬해 1월 27일 박열 부부의 폭발물 유입계획 과 불령사 조직을 연결시켜 이 사건을 대진재( 大 震 災 )를 틈탄 조선인 비밀결사의 폭동계획 으로 보도하였다. 조선 인 대학살에 대한 각계여론과 조선인들의 들끓는 비난을 모면하려는 일본정부의 계략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 는 검찰이 박열과 가네코 후미고 김중한 세 사람 이외의 나머지 불령사 회원들을 증거불충분으로 석방함으로써 스 스로 실패하였음을 인정하였다. 박열은 검찰에 기소된 이후, 1923년 10월 24일부터 1925년 6월 6일까지 총 21회에 걸친 신문조사를 받았다. 조사 과정에서 그는 일본천황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특히 그는 공판에 앞서 재판장에게 죄인취급하지 말 것과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조선 관복을 입을 것, 조선어 사용 등 4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일본 사법부가 그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임에 따라 그는 조선 전통관복을 입고 출두해 반말투로 답변하는, 초유의 법정투쟁 을 벌인 것이다. 나아가 미리 써 두었던 음모론 과 나의 선언, 불령선인이 일본 권자계급에게 준다 등의 글을 읽으며 일본 천황의 죄를 폭로하였다. 일본정부는 1926년 3월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1주일만에 특별 감형시킨다고 발표하였다. 스스로 조작사 건의 실체를 드러내 준 꼴이 아닐 수 없다. 사형판결 후에 박열은 미소지으며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 하였고, 가네코 후미코는 사면장을 갈갈이 찢어 버렸다. 이러한 두 사람의 저항의지에 대해 일본 재판장까지도 감동하여 호의적인 발언을 했다가 파면 당하기도 하였다. 두 사람은 사형선고 1개월 전에 혼인서를 제출함으로서 영원히 삶과 죽음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 불행 한 세기의 연인은 각각 치바( 千 葉 )형무소와 도치키( 栃 木 )형무소로 옮겨짐에 따라 눈물의 이별을 해야 했다. 가네코는 옥중에서 자신의 가혹한 삶과 자유사상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라는 책자에 고스란히 담아 출간하였다. 일제는 두 사람의 항일의지를 꺾기 위해 사상전향 공작을 끊임없이 펼쳤다. 편지왕래나 독서내용을 제한한 것은 물론, 글 쓰는 것도 방해하거나 전향을 종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26년 7월 23일 급작스럽게 가네코 후미코의 자살소식이 전해졌다. 자살의 원인이나 방법도 알려지지 않은 타살의 의문 속에, 그녀의 사체는 교도소 측에 의해 서 둘러 가매장되었다. 유골은 옛 동지들의 노력으로 인해 비밀리에 박열의 친형에게 전해졌고, 무사히 경북 문경 팔령 산( 八 靈 山 )에 옮겨 묻힐 수 있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기구한 삶과 사랑은 두 사람의 다정한 포즈가 담긴 사진이 언론에 알려짐에 따라 또 다 시 일본정계를 뒤흔들었다. 즉 두 사람에게 호의와 존경심을 가졌던 검사와 예심판사가 두 사람을 동석시켜 사진을 박열( 朴 烈 )의 항일투쟁과 신조국건설운동 36

37 함께 찍었고, 이 사진을 빌미로 야당에 의해 대역죄인 우대 라는 정치공세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내각의 총사퇴와 사법관 파면 등 세간의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일제는 박열에게도 꾸준히 전향공작을 펼쳤다. 일본 사법당국은 1934년부터 1938년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전향선 언을 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전향서라고 밝힌 글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 천황의 적자 를 자처하거나 불교에 귀의 하겠다는 등 일관성이 없으며, 이전의 문투와 달리 일본식 표현을 쓰는 등 조작의 흔적을 짙게 남기고 있다. 더욱이 일제는 그에게 어떠한 감형이나 출옥의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1945년 10월까지도 정치범이 아니라 대역사 범( 大 逆 事 犯 )이라는 이유로 석방하지 않으려 했다. 제국주의와 천황제에 맞서 싸운 박열을 일제가 얼마나 두려워했는 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5. 해방 후 재일본거류민단 단장 활동과 납북 21세의 젊은 나이에 투옥된 박열은 1945년 10월 27일 홋카이도( 北 海 島 ) 변방의 아키다( 秋 田 )형무소에서 44세의 중 년이 되어 석방되었다. 실로 22년 2개월이라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최장의 수감기록이 아닐 수 없다. 23년만의 생 환 못지않게 해방 후 박열의 삶 역시 극적인 사건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우선 도쿄에서 열린 석방환영 대회에서 그를 옥중에서 감시했던 형무소 소장 후지시타 이사부로( 藤 下 伊 三 郞 )가 수 천의 조선동포들 앞에 서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연설을 하였다. 이날 그는 참회의 뜻으로 자신의 아들을 박열의 양 자로 바치고, 이름 또한 박정진( 朴 定 鎭 )으로 개명한다고 밝혀 주위를 감동시켰다. 박열이 도쿄에 돌아오자, 당시 재일조선인연맹 등 조선인단체들이 앞다투어 그를 지도자로 모시려 하였다. 하지만 그는 반공산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고 이강훈 원심창 등 항일동지들과 함께 1946년 1월 20일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 하여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민주주의적 건국의식 사해동포적 세계협동 근로대중의 동지 등의 문구가 들어있는 동맹의 강령에서는 아나키즘의 자유사상과 개방적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등 중도우파의 색채를 읽을 수 있 다. 이러한 가운데 박열은 1946년 5월 백범 김구의 부탁을 받아 3열사들의 유해송환 책임을 맡았다. 즉 항일 의열투쟁 의 선봉에 섰다가 일본의 형무소 뒷자리에 쓸쓸히 버려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등 3열사의 유해를 발굴하여 고국으로 모셔오게 된 것이다. 이어 그는 자신의 민족자주적 독립사상과 자유평등 이념을 밝힌 신조선혁명론 을 발간하였다. 신조선건국동맹은 1946년 10월 3일 김구의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삼는 재일조선건국촉진동맹 등 우파 단체들과 통 합하여 재일조선거류민단(이하 민단)을 발족시켰다. 박열은 초대단장으로 추대되었고 부단장에 이강훈, 사무국장에 원심창, 도쿄지국장에 고순흠 등이 맡았다. 이로써 초기민단은 일제치하에서 아나키즘 사상을 통해 함께 항일운동을 펼친 동지들이 중추를 이룬, 반일 반공산주의적 재일동포단체로 자리잡아갔다. 당시 이승만도 일본에서의 입지를 고려해 미국 방문길과 귀로에 박열을 만나 향후 진로를 상의하였다. 이 회담 이 후 박열은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 는 방침을 대내외에 밝히고, 이승만 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지지하는 방향으로 정치노선을 굳히고 말았다. 이후 1947년경 이승만 정부는 민단을 재일동포를 대표하는 유일 한 단체로 인정하였다. 하지만 박열의 이승만 정부지지 방침은 오랜 수감생활로 인한 정세판단의 미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를 대한민국 국무위원으로 초빙하겠다는 이승만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고, 독재정권의 부패와 권력남용으로 인한 박열( 朴 烈 )의 항일투쟁과 신조국건설운동 37

38 부작용은 민단 내부의 분열만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박열은 1948년 2월 대한민국거류민단 으로 바뀌기 전, 민단의 재정고갈과 이승만 정권 반대세력 등의 내부갈등으로 인해 단장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후 박열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전에 초대되어 귀국했으며, 고향을 찾아 부인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를 참배하고 친지들과 옛 스승을 만났다. 그리고 재단법인 박열장학회를 설립하여 후학들을 위한 장학사업에 뛰 어 들었으며, 이듬해 5월 영구귀국을 결심해 돌아와 서울에 머물렀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밀고 내려와 서울을 점령했고, 사흘 뒤 인민군은 그를 북으로 데리고 간 것이다. 북으로 건너간 이후 박열의 행적에 관한 자료는 아직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그와 함께 북으로 끌려간 다른 납북인사들의 소식과 함께 일부 전해질 뿐이다. 그중 주목할 만한 일은 그가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한 사실이다. 이 협의회는 당시 그와 함께 북으로 끌려간 조소앙 안재홍 엄항섭 김약수 등 민족 지사들이 남 북한 정권 모두에게 자주적 평화통일 원칙을 촉구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이 단체의 주요 강령을 살펴보면, 외국군 대의 즉각적 철수와 군대 축소, 임시정부의 수립과 국제적 중립화의 선언 등 민족공동의 이해와 민중 생존권에 입각 한 자주 평화노선을 천명하고 있다. 또한 남북한 자유왕래와 교류, 총선거 실시와 통일헌법 제정 등 5단계에 걸친 통일방안을 제시하였으나, 북한정권의 불협조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박열을 비롯한 조헌영 등은 이 협의회에 몸담으면서 위원장과 최고위원 등을 맡으며 평화통일을 촉진하는 활동을 꾸준히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중 1974년 1월 17일 평양에서 72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그해 2월 남한에서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회가 열렸다. 박열( 朴 烈 )의 항일투쟁과 신조국건설운동 38

39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 年 譜 ) :21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39

40 박열의사가 복역한 형무소와 기간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40

41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출생과 성장 1902년 3월12일(음2월3일) 문경군 호서남면 모전리 (현 문경시 모전동 311번지) 에서 父 박지수 ( 朴 之 洙 )와 母 정선동( 鄭 仙 洞 )의 1 女 3 男 중 막내로 출생 초명 혁식( 赫 植 ), 호적 준식( 準 植 )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 98번지 번지( 샘골)로 이주하여 성장 1906년(5세) 父 사망 兄 정식 호주상속 논밭 10 두락씩 (1두락 150평 내외) 상속 받음. 1908년(7세)~1910년(9세) 서당에서 천자문, 동몽선습, 치감강목, 통감6권 수학 1909년(8세) 유명( 幼 名 ) 혁식( 赫 植 ), 민적법시행 준식( 準 植 )으로 개명( 改 名 ), 一 名 열( 烈 ) 1911년(10세)~1915년(14세) 함창공립보통학교(4년제) 다님 1916년(15세) 3월24일 함창공립보통학교 3회 졸업 4월8일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 입학 1919년(18세) 경성고보 3년 재학 중 3.1독립만세운동 참여 독립신문 발행, 격문배포. 중퇴 1919년 10월 동경으로 건너감 1920년~1921년 兄 정식과 두식등 가족들은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샘골)98번지에서 상주군 화북면 장암 리 870번지로 이사. 이후 1936년에 형의 가족들이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은리 847번지로 이주해감. 일본동경 유학과 항일독립운동 1919년(18세) 10월 일본 동경으로 건너감. 정칙영어학교에 다님 1920년(19세) 일본의 사상가이며 아나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 大 杉 榮 ), 사카이 도시히코 ( 堺 利 彦 ), 이와사 사쿠타로( 岩 佐 作 太 郞 )와 교유( 交 遊 ) 11월 재동경 조선인 학생 15~16명 의거단( 義 擧 團 )결성, 이 단체는 의거단( 義 擧 團 ) 철권단( 鐵 擧 團 ) 혈 권단( 血 拳 團 ), 박살단( 撲 殺 團 ), 혈거단( 血 擧 團 : 1921년 11월) 으로 명칭을 바꾸어 계속 활동 김약수, 원종린, 정태성 등과 고학생동우회 결성 회원50명 1921년(20세) 1월 박열, 정태성, 김천해, 최갑춘, 이기동, 유진걸, 박일병, 김약수 등 재일조선인고학생 동우회 확대 개편 4월 박열, 경성에서 이강하등과 함께 조선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 흑로회( 黑 勞 會 ) 조직 11월29 동경기독교청년회관 흑도회( 黑 濤 會 ) 창립대회 개최 박열, 정태신, 김약수, 조봉암, 원종린, 김판국, 정태성, 서상일, 황석우등 조선인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동경 흑도회( 黑 濤 會 ) 창립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41

42 박열 일본외항선원 스기모토( 杉 本 貞 一 ) 외국 폭탄입수의뢰 1922년(21세) 1월 박열, 정태성, 김약수등과 함께 재일조선인 고학생동우회에서 전국노동자 제군에 격 함" 발표. 동우회가 고학생 및 노동자 구제기관임을 버리고 계급투쟁의 직접적 행동기관임을 선언 2월4일 박열, 원종린등 11명 연명 조선일보 에 동우회 선언 발표 2월 상해임시정부 一 員 최혁진, 경성의 파괴계획 연락. 박열과 에도가와( 江 戶 川 )공원에서 밀회( 密 會 ) 2월 박열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 만남. 동경에서 가네코가 청년조선 잡지 교정중 정우영( 鄭 隅 影 )을 통 하여 "개새끼"라는 시를 읽고 감동받음. 22년 5월부터 동거를 시작함. 5월1일 흑도회( 黑 濤 會 ) 동경 노동절 참가 7월10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 흑도회( 黑 濤 會 ) 기관지 黑 濤 창간 7월 니이카다( 新 潟 )현 탄광 조선인 노동자 100여명 살해사건 박열주도 흑도회 진상규명, 항의투쟁, 규탄 연설회 개최 8월 시노가와( 中 津 川 )댐공사 조선인학살사건 현장조사. 조사위원 박열, 김약수, 라경석, 백무 黑 濤 2호 간행 9월7일 동경기독교청년회관 조선인노동자학살문제연설회 개최 9월 경성, 니이카다( 新 潟 )현 조선인학살사건 조사회 초청 경성 경운동천도교회당 연설 조선 무산자 동 맹위원 김한 면담 10월~11월 동경 오오시마( 大 島 )제강소 쟁의 박열 지원 11월 재경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흑우회( 黑 友 會 ) 조직 박열,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 후도이 센징( 太 鮮 人 ) 창간 박열, 경성의 의열단원인 김 한에게 폭탄 입수 의뢰 동경 조선 노동자 동맹회 발족 12 月 末 후도이 센징( 太 鮮 人 ) 제2호 발간 1923년(22세) 1월12일 김한, 의열단원 김상옥사건 관계 혐의 체포 박열 폭탄 입수계획 좌절. 박열, 서울 도착 김한과 면담 3월15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 現 社 會 ( 太 鮮 人 改 題 ) 제3호 발행 4월중순 불령사( 不 逞 社 ) 설립 박열외 5명 동아일보 주필 장덕수를 神 田 宝 亭 에서 구타. 박열, 간다( 神 田 ) 暑 에 검거 되어 이찌가야( 市 谷 )형무소에 투옥 간수와 대난투극을 벌임 4월26일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김중한 경성 동경체류(박열방문) 5월 후세 다츠시( 布 施 辰 治 ), 박열 관련 조선인 불법감금규탄연설회 동경 간다( 神 田 )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서 개최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42

43 5월20일 박열, 김중한 폭탄입수계획 상해 연락 의뢰 6월30일 현사회( 現 社 會 ) 제4호 간행 8월3일 흑우회( 黑 友 會 ) 주최 조선문제연설회 간다( 神 田 ) 기독청년회관 개최 관동대지진과 박열의 법정투쟁 1923년(22세) 9월1일 관동대지진 발생 조선인에게 누명을 씌워 6,000여명 학살 9월3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 보호검속 9월4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 경찰범처벌령 구류연장 10월20일 동경지방재판소 검사국 치안경찰법위반용의 기소 被 起 訴 者 : 박열,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외 14명 10월22일 동경지방재판소 예심판사, 불령사( 不 逞 社 ) 전 원에 대하여 예심 10월24일 대역죄혐의로 구속기소 재판회부 (1925년6월6일까지 17회의 동경지방재판소 예심받음) 논문4편 저술 일본 권력자계급에 전한다 나의 선언 無 爲 徒 食 論 음모론 년(24세) 7월17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 대역죄 폭발물취제규칙 위반 용의 기소 대심원 제2특별형사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에 대하여 형법 제73조 대 역죄 적용 공판개시 결 정 1926년(25세) 2월26일 대심원 대역사건 제1회 공판 (박열 조선예복, 金 子 文 子 한복) 2월27일 제2회공판 2월28일 제3회공판 3월 1일 제4회공판 3월23일 우시꼬매( 牛 込 )구역소( 區 役 所 )에 박열,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 혼인계 제출 3월25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 사형선고 4월 5일 무기 감형 4월 6일 박열, 이치가야( 市 谷 )형무소 지바( 千 葉 ) 형무소 이감( 移 監 ) 1936년 7월 지바( 千 葉 )형무소에서 코스게( 小 菅 )형무소 이감( 移 監 ) 1943년(42세) 8월 코스게( 小 菅 )형무소에서 아끼다( 秋 田 )형무소 이감( 移 監 )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43

44 일본의 패망과 출감 1945년(44세) 8월15일 정오 일본천황, 포츠담선언(무조건 항복) 수락. 한국해방 10월15일 동경 히비야( 日 比 谷 )공회당 재일조선인연맹 결성대회 박열석방청원 데모 1945년(44세) 10월27일 아키다 ( 秋 田 )형무소) 오오다테 ( 大 舘 )지소에서 석방 (22년 3개월) 朝 鮮 人 連 盟 秋 田 縣 本 部 주최 大 舘 驛 前 廣 場 에서 박열출옥환영회 개최 11월16일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 결성 12월8일 동경 히비야( 日 比 谷 )음악당에서 박열환영회 개최 1946년(45세) 1월20일 신조선건설동맹 결성 (위원장 박열, 부위원장 이강훈 원심창) 2월19일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 주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열사 추도회 개최 3월25일 박열후원회 일본총본부주최 박열선생부인 故 금자문자 여사추도회 동경 神 田 一 橋 공립강당 개최 2월~6월 백범 김구선생의 부탁을 받아 3의사(윤봉길,이봉창,백정기) 유해봉환 추진위원장으로 세분 열사의 유해를 발굴 본국으로 보냄 10월3일 재일조선거류민단 창단(단장 박열. 부단장 이강훈, 사무총장 원심창) 1대( ~ ) 2대( ~ ) 3대( ~ ) 4대( ~ ) 5대( ~49.4.1) 12월10일, 1947년4월8일 일본 동경을 거쳐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이승만박사와 동경 제국호텔에서 2차 례 회담 1947년(46세) 2월15일 동경 청년회관에서 장의숙( 張 義 淑 )과 결혼 장의숙 : 황해도 진남포면 출생. 서울여상졸업. 동경청산사범대학 속성과 졸업. 일본국제신문기자-광음사( 光 音 社 )에 근무하면서 '붉은 서울의 3개월'기고 6월30일 박열, 민단신문 에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 발표 10월1일 박열, 민단정기대회에서 이승만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노선을 적극 지지 1948년(47세) 2월10일 박열, 재일조선인거류민단 단장직 사임 발표 4월 박열, 사설기관 박열장학회 박열문화연구소 설치 7월1일 이승만 초대대통령으로 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임명 받음 8월10일 신조선혁명론 저술 출판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44

45 8월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 및 광복축전에 박열외 13명 참석 10월8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개칭( 改 稱 ) 1949년(48세) 4월1일 민단 제6회 대회에서 단장 사임 5월4일 영구귀국 서울도착. 재단법인 박열장학회 설립 8월5일 대구방문(2박3일) 8월7일 문경방문(2박3일) 1950년(49세) 6월25일 한국전쟁 발발( 勃 發 ) 6월28일 서울 모처에서 피랍( 被 拉 ), 납북 1974년(73세) 1월17일 북한에서 사망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장 (향년 73세) 2월8일 서울 명동YWCA강당에서 곽상훈 추도위원장 외 1,000명 참석한 가운데 박열의사추도식 거행 1976년2월12일 부인 장의숙여사 사망(58세). 경기도 파주시 금촌공원묘지. 아들 영일, 딸 경희 1989년3월1일 대한민국건국훈장 대통령장(제 85호) 추서 1991년11월21일 박열등 15명 납북독립유공민족지도자추모제 거행(국립묘지 현충관) 1993년 6월 1일 대한민국 국가유공자 지정(12-181호) 2001년 10월 10일 법인설립 허가(국가보훈처 호) 2001년 10월 30일 사단법인 박열의사 기념사업회 설립 2004년 6월 28일 박열의사 생가 문화재 지정(경북지방문화재 148호) 聞 慶 郡 麻 城 面 梧 泉 里 に 生 まれる 1908 書 堂 に 通 学 1910 公 立 普 通 学 校 入 学 1915 京 城 公 立 普 通 高 等 学 校 入 学 日 本 人 教 員 から 幸 徳 秋 水 の 天 皇 暗 殺 計 画 の 話 を 聞 き 思 想 的 影 響 を 受 ける 運 動 に 参 加 独 立 新 聞 発 行 檄 文 を 散 布 学 校 を 中 退 故 郷 に 戻 った 後 東 京 へ 渡 る 新 聞 配 達 製 ビン 工 場 人 力 車 夫 ワンタン 屋 夜 警 深 川 の 立 ちんぼう 中 央 郵 便 局 の 臨 時 配 達 夫 中 頃 血 挙 団 を 組 織 義 挙 団 に 加 入 本 郷 駒 込 で 友 達 と 間 借 り 生 活 黒 濤 会 結 成 月 末 か12 上 旬 頃 朴 烈 が 京 橋 区 南 小 田 原 町 柴 田 武 福 を 訪 ねる その 晩 の 朝 鮮 基 督 青 年 会 館 演 説 会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45

46 での 演 説 依 頼 をする 月 上 旬 か4 日 岩 佐 作 太 郎 方 忘 年 会 に 出 席 柴 田 杉 本 貞 一 神 田 区 仲 猿 楽 町 カフエ 豊 生 軒 に 立 寄 り 吉 原 に 泊 まる 翌 朝 柴 田 方 で 雑 談 の 末 外 国 には 爆 弾 が 在 るかと 尋 ねる 杉 本 が 答 えると 夫 れは 至 極 好 い 物 だ 是 非 夫 んな 物 が 欲 しい ( 杉 本 は 後 に 出 鱈 目 と 供 述 ) 名 の 連 名 で 朝 鮮 日 報 紙 1 月 4 日 号 に 同 友 会 宣 言 を 発 表 頃 上 海 臨 時 政 府 の 一 員 崔? 鎮 から 破 壊 計 画 を 伝 えられる 秋 田 雨 雀 を 訪 問 秋 田 雨 雀 日 記 280 頁 淀 橋 署 に16 日 間 検 束 < 英 国 皇 太 子 来 訪 のため 予 防 拘 束 > 金 子 文 子 と 同 棲 東 京 府 荏 原 郡 世 田 谷 池 尻 412 相 川 新 作 方 二 階 現 在 地 世 田 谷 区 池 尻 か ら17 国 道 246 号 下 り 方 向 池 尻 バス 停 辺 り 2003 年 10 月 世 田 谷 区 立 中 央 図 書 館 調 べ 現 地 確 認 黒 濤 創 刊 号 東 京 府 下 世 田 谷 池 尻 412 黒 濤 発 行 所 発 行 人 兼 編 集 人 兼 印 刷 人 朴 烈 直 接 行 動 の 標 本 烈 生 ボロ 長 屋 の 二 階 より 金 子 活 浪 朴 烈 朴 烈 から 黒 濤 第 二 号 此 の 態 を 見 て 呉 れ 烈 生 思 ったこと 二 つ 三 つ ふみ 子 東 支 線 駐 屯 の 日 本 軍 烈 生 ボロ 長 屋 の 二 階 から 金 子 文 子 朴 烈 から 朝 鮮 光 州 に 印 刷 職 工 の 罷 業 烈 栄 養 研 究 所 所 長 佐 伯 博 士 に ふみ 子 信 濃 川 虐 殺 真 相 調 査 会 が 組 織 され 調 査 委 員 として 参 加 頃 新 潟 現 地 調 査 に 赴 く < 新 居 格 の 信 濃 川 虐 殺 に 関 する 論 文 に イニシャルBとあるが 朴 烈 の 事 か > 調 査 会 主 催 新 潟 県 朝 鮮 人 労 働 者 虐 殺 問 題 演 説 会 朴 烈 は 現 地 調 査 を 報 告 1922 ソウルの 思 想 研 究 会 から 招 待 され 信 濃 川 虐 殺 真 相 報 告 演 説 会 に 出 席 ソウルで 義 烈 団 員 周 辺 にいた 金 翰 と 会 う 大 島 製 鋼 争 議 支 援 黒 濤 会 分 裂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46

47 黒 友 会 を 組 織 再 びソウルで 金 翰 と 会 う 爆 弾 の 件 頃 太 い 鮮 人 第 一 号 枠 外 に フテイ 鮮 人 と 記 載 取 締 法 案 朴 烈 日 本 人 の 自 惚 れた 朝 鮮 観 に 就 いて 烈 生 破 れ 障 子 から 金 子 文 子 朴 烈 太 い 鮮 人 はモット 早 く 出 る 筈 だったが 朴 烈 が 例 の 信 濃 川 の 虐 殺 事 件 で 現 場 へ 行 ったり 所 用 有 って 朝 鮮 落 ちをしたりで 遅 れた 頃 太 い 鮮 人 第 二 号 亞 細 亞 モンロー 主 義 に 就 いて 朴 烈 所 謂 不 逞 鮮 人 とは 朴 文 子 学 者 の 戯 言 烈 生 破 れ 障 子 から 文 子 去 四 日 朴 烈 が 京 城 から 病 魔 に 護 衛 されて 帰 ったりオマケに 十 五 日 許 り 寝 込 まれたので スッカリ 喰 い 違 って 四 苦 八 苦 の 揚 句 ヤット 今 日 印 刷 屋 へ 廻 すべく 漕 ぎつけた 朝 鮮 の 詐 欺 共 産 党 烈 生 朝 鮮 古 代 芸 術 を 排 す 烈 生 秘 密 結 社 血 拳 団 組 織 ソウルで 金 翰 と 会 い 爆 弾 入 手 依 頼 黒 友 会 機 関 紙 民 衆 運 動 朝 鮮 文 創 刊 現 社 会 第 三 号 世 田 谷 池 尻 412 烈 生 註 タイトル 本 文 テキスト 全 て 潰 れていて 不 明 もなし 働 かずにどんどん 食 ひ 倒 す 論 朴 烈 後 に 獄 中 で 執 筆 する 同 タイトルの 論 文 とは 内 容 が 異 なる 在 日 鮮 人 諸 君 に 金 子 ふみ 朝 鮮 記 念 日 金 子 ふみ 破 れ 障 子 から 文 子 金 子 文 子 と 東 京 府 豊 多 摩 郡 代 々 幡 町 代 々 木 富 ヶ 谷 1474 番 地 に 移 る 現 渋 谷 区 富 ヶ 谷 1-28 NTT 裏 辺 り 2003 年 5 月 現 地 確 認 不 逞 社 を 組 織 東 亜 日 報 主 筆 張 徳 秀 への 殴 り 込 みで 神 田 署 に 検 挙 される 市 ヶ 谷 刑 務 所 に 送 られ 既 決 囚 扱 いで 頭 髪 を 刈 ろうとする 看 守 と 乱 闘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47

48 金 子 文 子 はメーデーに 参 加 来 日 したばかりの 金 重 漢 に 爆 弾 運 搬 依 頼 朴 烈 新 山 初 代 を 訪 問 不 逞 社 への 入 会 を 勧 める 本 郷 区 駒 込 蓬 莱 町 一 八 現 文 京 区 向 丘 二 丁 目 確 認 不 逞 社 第 一 回 例 会 朝 鮮 の 運 動 がテーマ 金 重 漢 に 爆 弾 の 件 を 取 り 消 し 不 逞 社 第 二 回 例 会 望 月 桂 を 招 く 不 逞 社 第 三 回 例 会 加 藤 一 夫 を 招 く 頃 不 逞 社 第 四 回 例 会 中 西 伊 之 助 出 獄 歓 迎 会 現 社 会 第 四 号 代 々 木 富 ヶ 谷 朝 鮮 の 民 衆 と 政 治 運 動 朴 烈 朝 鮮 の 衡 平 社 運 動 に 就 いて 朴 烈 スッパ 抜 キ バクレツ 或 る 会 話 金 子 ふみ 破 れ 障 子 から 文 実 は 同 志 十 名 許 りが メーデーの 夕 方 丁 度 にも 再 び 裟 婆 へとオッポリ 出 された メーデーの 日 私 は 他 四 五 名 の 同 志 と 共 に 愛 宕 署 の 御 厄 介 になって 一 夜 を 明 かした 府 下 代 々 木 富 ヶ 谷 1474 現 社 会 社 省 線 原 宿 市 電 渋 谷 下 車 名 教 中 学 下 < 現 東 海 大 附 属 高 校 > 不 逞 社 第 五 回 例 会 親 日 派 の 東 亜 日 報 記 者 を 殴 る 黒 友 会 主 催 朝 鮮 問 題 演 説 会 神 田 基 督 教 青 年 会 館 で 開 く 黒 友 会 臨 時 例 会 解 散 を 決 める 金 重 漢 が 爆 弾 計 画 の 話 を 暴 露 不 逞 社 第 六 回 例 会 馬 山 のストライキの 話 題 金 重 漢 と 論 争 警 視 庁 が 新 山 初 代 を 訪 れ 不 逞 社 の 動 向 を 訪 ねる 午 前 中 滝 野 川 高 麗 社 にいる 張 祥 重 を 訪 問 四 ツ 谷 の 布 施 弁 護 士 を 訪 ねる 朴 烈 金 子 文 子 代 々 木 富 ヶ 谷 の 自 宅 で 世 田 谷 警 察 署 により 検 束 不 逞 社 のメンバーが 検 挙 され 始 める 東 京 地 裁 検 事 局 治 安 警 察 法 違 反 容 疑 で 朴 烈 と 不 逞 社 メンバーを 起 訴 大 阪 朝 日 記 事 < 不 逞 鮮 人 の 秘 密 結 社 大 検 挙 > 予 審 判 事 予 審 尋 問 を 始 める 朴 烈 への 訊 問 陳 述 を 拒 否 新 山 初 代 予 審 尋 問 で 供 述 を 始 める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48

49 新 山 初 代 病 死 危 篤 状 態 で 獄 外 に 出 される 谷 中 法 蔵 院 に 墓 碑 金 子 文 子 第 六 回 予 審 尋 問 にて 朴 烈 の 爆 弾 入 手 意 図 と 目 的 を 供 述 朴 烈 第 三 回 予 審 訊 問 にて 金 子 文 子 の 供 述 を 認 める 自 分 が 話 さないと 不 逞 社 の 仲 間 に 迷 惑 がかかる 朴 烈 第 四 回 予 審 訊 問 朴 烈 第 五 回 予 審 訊 問 朴 烈 第 六 回 予 審 訊 問 朴 烈 第 七 回 予 審 訊 問 朴 烈 金 子 文 子 金 重 漢 爆 発 物 取 締 罰 則 で 起 訴 される 朴 烈 論 文 日 本 の 権 力 者 階 級 に 与 ふ を 獄 中 で 執 筆 朴 烈 第 八 回 予 審 訊 問 朴 烈 第 九 回 予 審 訊 問 朴 烈 第 十 回 予 審 訊 問 朴 烈 第 十 一 回 予 審 訊 問 東 亜 日 報 記 事 韓? 相 は6.24に 保 釈 出 獄 李 小 岩 は 早 暁 ソウルの 鍾 路 警 察 に 検 束 論 文 俺 の 宣 言 執 筆 論 文 働 かずしてどしどし 喰 ひ 倒 す 論 執 筆 論 文 陰 謀 論 を 執 筆 朴 烈 第 十 三 回 十 四 回 予 審 訊 問 朴 烈 第 十 五 回 予 審 訊 問 朴 烈 第 十 六 回 予 審 訊 問 朴 烈 第 十 七 回 予 審 訊 問 朴 烈 第 十 八 回 予 審 訊 問 朴 烈 第 十 九 回 予 審 訊 問 朴 烈 第 二 十 一 回 予 審 訊 問 予 審 終 結 決 定 検 事 総 長 朴 烈 と 金 子 文 子 に 対 し 刑 法 73 条 と 爆 取 罰 則 で 起 訴 判 事 朴 烈 と 金 子 文 子 に 対 し 接 見 禁 止 書 類 物 品 の 授 受 禁 止 にする 朴 烈 第 一 回 予 審 訊 問 朝 鮮 日 報 夕 刊 記 事 不 逞 社 事 件 予 審 を 終 わる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49

50 朴 廷 植 証 人 訊 問 大 邱 地 方 法 院 尚 州 支 庁 朴 烈 第 二 回 予 審 訊 問 朴 烈 第 三 回 予 審 訊 問 朴 烈 テキスト< 刑 務 所 消 息 不 逞 の 烙 印 > 自 我 人 第 二 号 掲 載 朴 烈 第 四 回 予 審 訊 問 検 事 総 長 小 山 大 審 院 第 二 特 別 刑 事 部 裁 判 長 判 事 豊 島 に 大 審 院 公 判 に 付 すべきという 意 見 書 提 出 大 審 院 公 判 開 始 を 決 定 接 見 禁 止 を 解 く 朴 烈 金 子 文 子 山 崎 今 朝 弥 を 私 選 弁 護 人 として 選 任 朴 烈 金 子 文 子 布 施 辰 治 上 村 進 を 私 選 弁 護 人 として 選 任 公 判 準 備 調 書 作 成 のため 朴 烈 に 訊 問 朴 烈 金 子 文 子 中 村 高 一 を 私 選 弁 護 人 として 選 任 東 亜 日 報 記 事 大 審 院 重 大 犯 人 の 結 婚 式 布 施 弁 護 士 結 婚 届 け 三 通 を 差 入 署 名 捺 印 を 求 める 朴 烈 金 子 文 子 の 記 事 が 解 禁 東 京 日 日 新 聞 夕 刊 < 震 災 渦 中 に 暴 露 した 朴 烈 一 味 の 大 逆 事 件 > < 来 月 八 九 両 日 特 別 裁 判 開 廷 ( 本 日 解 禁 ) 罪 の 裏 に 女! 躍 動 する 朴 烈 が 内 縁 の 妻 金 子 ふみ> < 予 審 免 訴 十 五 名 >< 変 転 の 運 命 から 逆 徒 の 友 へ>< 惨 苦 の 中 に 真 っ 赤 な 恋 > < 検 束 で 名 物 の 朴 夫 妻 >< 同 志 の 新 山 初 題 は 獄 死 >< 新 山 初 代 肺 患 に 冒 されヤケの 生 活 > < 審 問 は 傍 聴 禁 止 宣 告 のみ 公 開 >< 朴 筆 を 傾 けて 獄 中 に 自 叙 伝 雑 誌 自 我 人 にも 寄 稿 > 写 真 < 大 逆 事 件 の 首 魁 朴 烈 とその 筆 蹟 > 東 京 朝 日 夕 刊 < 震 災 に 際 して 計 画 された 鮮 人 団 の 陰 謀 計 画 > < 近 く 刑 務 所 で 正 式 の 結 婚 >< 自 叙 伝 を 書 く 文 子 と 読 書 にふける 朴 烈 > 末 か12 初 め 接 禁 解 除 後 中 西 伊 之 助 が 朴 烈 に 面 会 朴 烈 金 子 文 子 晋 直 鉉 を 私 選 弁 護 人 として 選 任 東 亜 日 報 記 事 < 正 式 結 婚 手 続 き> 東 亜 日 報 記 事 < 結 婚 に 関 して> 朝 鮮 日 報 記 事 < 獄 中 結 婚 は 風 説 > 東 亜 日 報 記 事 < 書 面 上 の 結 婚 だけだろう> < 鑑 定 人 の 報 告 > 市 ヶ 谷 刑 務 所 内 診 察 室 に 於 て 被 告 と 初 めて 対 顔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50

51 私 はパックヤールです 併 し 私 は 鑑 定 の 通 知 書 を 送 り 返 し 同 時 に 鑑 定 を 拒 否 する 旨 を 既 に 大 審 院 に 申 し 送 ってあるのに それに 対 しまだ 何 等 の 返 事 を 受 取 りません 故 に 私 は 大 審 院 より 何 等 かの 返 事 を 受 取 るまでは 鑑 定 を 受 けるこ とは 断 然 謝 絶 します 論 文 所 謂 裁 判 に 対 する 俺 の 態 度 執 筆 朴 烈 君 のことなど 冬 日 記 中 西 伊 之 助 文 芸 戦 線 掲 載 朴 烈 裁 判 長 に 対 し 法 廷 での 四 条 件 を 提 出 朝 鮮 日 報 記 事 < 条 件 を 提 出 したこと> 東 亜 日 報 記 事 < 条 件 を 提 出 したこと> 朴 烈 朝 鮮 大 邱 の 弁 護 士 金 完 燮 に 公 判 出 席 を 要 請 朴 烈 朝 鮮 大 邱 の 金 完 燮 を 私 選 弁 護 人 とする 届 け 第 一 回 公 判 大 審 院 人 定 質 問 再 結 成 された 黒 友 会 を 中 心 に 傍 聴 等 の 支 援 文 子 手 記 二 十 六 日 夜 半 執 筆 第 二 回 公 判 金 子 文 子 手 記 朗 読 検 事 論 告 死 刑 求 刑 第 三 回 公 判 弁 護 人 弁 論 日 曜 開 廷 には 反 対 があった 第 四 回 公 判 弁 論 文 子 の 最 終 陳 述 朴 烈 はしなかった 東 亜 日 報 社 説 朴 烈 の 思 想 行 為 と 環 境 牧 野 裁 判 長 の 観 察 朝 鮮 日 報 社 説 朴 烈 事 件 に 鑑 みて 安 在 鴻 執 筆 自 我 声 ( CHIGASEI と 欄 外 にローマ 字 標 記 ) 創 刊 号 在 大 阪 の 朝 鮮 アナキストが 発 行 強 者 の 宣 言 朴 烈 ほとんど 伏 字 後 に 叛 逆 者 の 牢 獄 手 記 に 所 収 の 同 タイトルのテキストか? 朴 烈 特 別 公 判 朝 鮮 礼 服 に 身 を 飾 り 朴 烈 事 朴 準 植 法 廷 に 立 つ 傍 聴 禁 止 二 月 十 六 日 午 前 九 時 大 審 院 法 廷 で 開 廷 された この 日 鮮 人 及 主 義 者 検 束 十 数 名 警 戒 の 厳 重 なる 大 阪 のギロチン 團 公 判 と 東 西 共 に 近 時 稀 に 見 る 有 様 なりき ( 高 ) ギロチン 團 控 訴 判 決 編 集 後 記 朝 鮮 文 で 発 行 の 予 定 が 日 文 とある 結 婚 届 けを 出 す 死 刑 判 決 大 阪 朝 日 新 聞 < 恩 赦 も 知 らぬ 獄 中 の 朴 夫 妻 きのうきょうの 生 活 は? 流 石 に 夫 を 案 ずる 文 子 > 判 決 後 四 日 間 外 界 の 何 事 も 知 らず 市 ヶ 谷 刑 務 所 の 独 房 で 妻 と 夫 も 名 ばかりで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51

52 会 うこともならずただ 黙 々として 静 かな 日 を 過 ごしている このごろの 彼 等 への 差 入 は 朝 鮮 からはるばる 出 てきた 晋 直 鉉 弁 護 士 が 食 事 の 全 部 を 負 担 し 差 入 ているが 朴 は 朝 は 牛 乳 一 合 にパン 一 片 昼 は 三 十 五 錢 の 弁 当 夜 は 官 弁 という 質 素 な 食 事 に 反 し て 文 子 は 朝 は 鶏 卵 二 つに 五 十 錢 弁 当 に 特 に 許 されて 菓 子 が 添 えられている 朴 は 晋 弁 護 士 の 五 十 錢 弁 当 が 贅 沢 だからとて 安 いのに 代 えたもので それとは 知 らぬ 文 子 はさすがに 夫 を 案 じ 朴 は 肉 類 が 好 きだからなるべく 肉 食 をさせてくれ と 註 文 をし てきたので 差 入 屋 もこのごろは 註 文 に 添 ってはしりの 野 菜 類 等 を 入 れてやっている と しかし 判 決 言 渡 後 は 一 切 面 会 は 両 人 とも 拒 絶 せられている ただその 中 で 山 梨 県 から 出 てきた 文 子 の 母 たか 子 は 特 に 許 され 判 決 当 時 僅 か 五 分 間 変 り 果 てた 娘 の 顔 を 見 ることができたが これもただ 涙 だけで 深 く 語 る 暇 もなく 母 親 は 刑 務 所 を 出 た 一 方 また 朴 は 判 決 後 は 読 書 も 余 りせず 密 かに 死 の 準 備 を 急 ぐのか 公 判 第 一 日 に 着 た 朝 鮮 礼 装 一 揃 えをまづ 二 十 七 日 夕 方 差 入 屋 に 戻 し 文 子 も 書 き 続 けていた 生 立 の 記 が 完 成 したので 伊 藤 野 枝 全 集 を 読 み 耽 っているというが 彼 女 のためには 食 事 を 除 いた 身 の 廻 りを 小 説 家 中 西 伊 之 助 君 夫 妻 が 何 くれと 世 話 をやき 判 決 当 時 文 子 はふだん 着 で よいというので 中 西 夫 人 はわざわざ 自 分 の 着 物 を 脱 いで 贈 ってやった なお 刑 務 所 内 の 最 近 の 生 活 について 秋 山 所 長 は 全 体 としては 別 に 変 ったこともないようで 朝 六 時 に 起 き 夜 八 時 の 就 寝 まで 元 気 というよりもむしろ 静 かに 読 書 や 手 紙 を 認 めて 過 ごしていますが 自 分 が 判 決 当 時 会 って 気 持 ちを 聞 いた 時 には ただ 何 も 感 想 はありませぬ と 語 って いました 東 京 朝 日 記 事 23 日 に 結 婚 届 けを 出 す 恩 赦 で 無 期 懲 役 に 減 刑 朴 烈 千 葉 刑 務 所 に 移 監 朴 烈 絶 食 を 始 める< 金 子 文 子 の 自 殺 と 恩 赦 前 后 の 処 遇 布 施 文 書 には6 日 恩 赦 伝 達 後 からと 記 されている> 千 葉 刑 務 所 長 絶 食 中 止 を 説 得 朝 日 新 聞 記 事 < 千 葉 刑 に 送 られると 朴 烈 は 絶 食 を 始 める> 思 出 の 朴 烈 君 の 顔 里 村 欣 二 文 芸 戦 線 掲 載 朝 鮮 時 論 創 刊 号 在 朝 鮮 日 本 語 雑 誌 朴 烈 事 件 に 鑑 みて の 翻 訳 掲 載 金 子 文 子 死 亡 宇 都 宮 刑 務 所 栃 木 支 所 現 在 地 は 栃 木 市 立 文 化 会 館 と 図 書 館 栃 木 駅 から 徒 歩 10 分 余 り2003 年 7 月 23 日 現 地 確 認 刑 務 所 跡 を 示 す 碑 は 無 し 舎 房 棟 跡 は 文 化 会 館 正 面 入 口 前 広 場 以 降 布 施 弁 護 士 は 朴 列 に 面 会 文 子 の 死 を 伝 えた 瞬 間 に 面 会 を 打 ち 切 り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52

53 朴 烈 金 子 文 子 の 取 調 べ 中 の 写 真 をめぐり 怪 文 書 が 配 布 される 不 逞 社 のメンバーであった 張 祥 重 鄭 泰 成 が 黒 友 会 組 織 < 朴 烈 より> 立 松 懐 清 予 審 判 事 快 写 真 問 題 で 引 責 辞 職 朴 烈 の 兄 朴 廷 植 息 子 を 伴 い 東 京 に 着 く 朴 烈 の 兄 朴 廷 植 が 朝 鮮 に 戻 る 京 城 日 報 < 文 子 の 葬 儀 は 純 朝 鮮 式 で 行 う 写 真 はまだ 見 ない と 朴 廷 植 釜 山 で 語 る> 釜 山 特 電 獄 中 の 実 弟 朴 烈 に 会 い 金 子 文 子 の 遺 骨 を 受 取 る ため 本 月 十 四 日 夜 東 京 に 向 った 朴 烈 の 実 兄 朴 廷 植 は 二 週 間 振 りで 二 十 九 日 朝 実 子 朴 烱 來 ( 一 二 )をともないカーキ 色 の 労 働 服 にささやかなバスケット 一 個 を 携 えて 釜 山 に 上 陸 したが 官 憲 の 監 視 の 中 に 二 三 鮮 人 青 年 からいたわる 様 に 出 迎 えられひそひそ ばなしの 後 九 時 十 分 発 特 急 で 大 邱 に 向 ったが 朴 廷 植 は 語 る 弟 には 身 体 の 具 合 が 悪 いというので 面 会 ができなかったがいづれまた 健 康 でも 快 復 すれば 面 会 に 行 きたいつ もりです 文 子 の 遺 骨 は 私 が 直 接 持 って 帰 るはずであったが 警 視 庁 から 受 取 ってか ら 別 送 する 方 が 安 全 だというので 遺 骨 は 警 視 庁 に 頼 みましたがも 早 郷 里 についている でしょう 文 子 は 私 の 弟 の 嫁 として 郷 里 で 朝 鮮 式 の 葬 儀 をいとなんでやりますがその 日 の 取 はまだきめておりません 内 地 からはだれも 来 ないでしょう 写 真 のことについては 弟 から 送 ってやるとのことで 手 紙 は 来 ていましたが 私 はまだ 見 たこともありません 子 供 は 布 施 弁 護 士 が 養 成 するという 様 なことは 噂 で 私 の 通 譯 のために 連 れて 行 ったまでで す 朴 廷 植 は 直 に 北 行 したが 同 人 は 二 十 九 日 大 邱 に 一 泊 する 予 定 だと 東 京 日 日 記 事 石 黒 鋭 一 郎 手 記 快 写 真 の 件 司 法 省 快 写 真 の 経 緯 を 発 表 真 相 を 認 める 1926 政 争 化 したる 朴 烈 問 題 江 渡 由 郎 青 年 政 治 協 会 ( 青 年 パンフレット 第 3 輯 ) 1926 朴 烈 問 題 の 批 判 鶉 山 学 堂 1926 若 槻 内 閣 と 不 景 気 朴 烈 事 件 と 憲 政 会 内 閣 豊 島 新 聞 社 今 村 東 京 地 裁 所 長 無 罪 を 宣 告 されるも 検 事 控 訴 される 秋 山 市 ヶ 谷 刑 務 所 所 長 大 審 院 懲 戒 裁 判 所 で 無 罪 確 定 秋 山 所 長 奥 村 看 守 長 懲 戒 処 分 を 受 ける 1928 強 者 の 宣 言 朴 烈 叛 逆 者 の 牢 獄 手 記 行 動 社 同 人 編 に 掲 載 入 獄 中 のアナキスト 朴 烈 の 動 静 特 高 月 報 内 務 省 警 保 局 保 安 課 1935 大 逆 事 件 犯 人 朴 烈 の 思 想 転 向 社 会 運 動 の 状 況 内 務 省 警 保 局 入 獄 中 のアナキスト 朴 準 植 の 思 想 転 向 特 高 月 報 内 務 省 警 保 局 保 安 課 東 京 日 日 記 事 朴 烈 転 向 新 聞 雑 誌 の 閲 読 禁 止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53

54 小 菅 刑 務 所 に 移 される 朴 烈 の 所 感 朝 鮮 総 督 府 高 等 法 院 検 事 局 思 想 部 思 想 彙 報 第 16 号 秋 田 刑 務 所 に 移 される 大 館 支 所 か? 朴 烈 秋 田 刑 務 所 大 館 支 所 を 出 獄 大 館 駅 前 で 出 獄 歓 迎 大 会 開 かれる 1946 独 立 の 指 導 者 朴 烈 鄭 泰 成 新 朝 鮮 建 設 同 盟 宣 伝 部 国 会 図 書 館 所 蔵 1946? 新 朝 鮮 建 国 の 指 標 : 独 立 指 導 者 朴 烈 朝 鮮 半 島 における 自 由 解 放 の 指 導 者 朴 烈 の 獄 中 詩 歌 在 日 朝 鮮 人 同 胞 へのメッセージ 日 本 の 新 聞 に 対 する 声 明 等 を 収 録 した " 独 立 指 導 者 朴 烈 " 及 び 朴 烈 による 新 朝 鮮 建 国 に 対 する 朴 烈 の 信 念 思 想 を 収 録 した " 新 朝 鮮 建 国 の 指 標 "を 収 録 University of Hawaii at Manoa Asia Collection, 梶 山 コレクション 所 蔵 運 命 の 勝 利 者 朴 烈 布 施 辰 治 張 祥 重 鄭 泰 成 共 著 世 紀 書 房 民 団 新 間 創 刊 号 発 行 民 団 第 二 回 大 会 団 長 朴 烈 副 団 長 李 康 勲 元 心 昌 朴 烈 三 たび 八 月 十 五 日 を 迎 へて 民 団 新 聞 週 刊 13 号 在 日 本 朝 鮮 居 留 民 団 中 央 総 本 部 朴 烈 留 日 朝 鮮 学 徒 の 進 路 民 団 新 聞 週 刊 14 号 朴 烈 主 張 第 廿 五 回 関 東 大 震 災 民 団 新 聞 週 刊 15 号 当 時 自 ら 不 てい 鮮 人 社 と 名 乗 った 我 々の 同 志 も 文 字 通 り 一 網 打 尽 に 検 挙 されて 有 無 を 言 わさず 全 く 投 獄 されてしまった 由 来 ゲーペーウー 式 の 日 本 帝 国 主 義 的 陰 謀 によって 裁 かれ 私 は 遂 に 死 刑 を 宣 告 され さらに 彼 等 の 勝 手 な 判 断 によって 終 身 の 懲 役 に 処 せられ さらにまた 彼 等 帝 国 主 義 の 世 界 戦 争 敗 戦 の 結 果 として 二 十 三 年 余 の 獄 中 から この 明 るい 社 会 に 出 てきたのである 無 署 名 記 事 関 東 大 震 災 廿 五 周 年 を 迎 えて 想 起 すれば 当 時 大 地 震 直 後 陸 軍 憲 兵 司 令 部 の 謀 略 に 依 り 朝 鮮 人 三 万 名 が 日 本 無 政 府 主 義 者 と 内 応 して 日 本 襲 撃 に 上 陸 して 来 た と 言 う 捏 造 のデマを 廣 島 より 全 国 に 飛 ばして 置 いてそれを 口 実 にかかる 不 可 抗 力 むの 機 会 を 逆 用 して 日 本 軍 部 及 青 年 団 が 白 昼 公 然 と 国 際 社 会 の 面 前 にかかる 大 事 件 を 三 日 間 も 続 けて 敢 行 したのである 然 しアナキスト 系 では 天 変 地 異 は 不 可 抗 力 である 本 当 の 愛 と 相 互 扶 助 との 懸 念 の 下 に お 互 に 相 あわれむのみであった 月 1 2 日 民 団 第 三 回 大 会 ( 大 阪 ) 団 長 朴 烈 1947 年 張 義 淑 と 再 婚 一 九 四 八 年 八 月 一 五 日 新 朝 鮮 革 命 論 朴 烈 中 外 出 版 株 式 会 社 目 次 自 序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54

55 第 一 章 思 想 立 国 第 一 節 世 界 は 一 なり 第 二 節 現 実 に 徹 する 思 想 第 三 節 共 産 党 を 語 る 第 四 節 死 に 生 くること 第 二 章 建 国 の 指 標 第 一 節 独 立 とは 形 式 ではない 第 二 節 具 体 的 に 建 国 の 立 地 条 件 を 究 めよ 第 三 節 戦 線 統 一 への 方 向 第 三 章 青 年 と 民 族 の 運 命 第 一 節 立 国 の 支 柱 としての 青 年 第 二 節 操 志 ある 青 年 第 三 節 高 き 文 化 の 使 徒 青 年 第 四 章 生 活 革 命 運 動 の 展 開 第 一 節 民 族 的 欠 陥 の 反 省 第 二 節 社 会 を 発 見 せよ 第 三 節 公 式 論 原 則 論 を 排 す 第 四 節 身 を 以 て 再 起 へ 付 録 一 三 千 万 我 等 とともに 罪 あり 二 対 日 協 力 者 戦 争 犯 罪 人 等 の 処 断 に 関 する 法 案 をめぐりて 三 祖 国 の 正 しき 産 業 建 設 のために 在 日 業 界 人 の 反 省 を 促 す 四 前 科 者 受 刑 者 現 科 者 五 祖 国 愛 と 国 際 的 観 念 六 世 界 の 現 実 に 学 び 世 界 の 現 実 に 捉 われる 勿 れ 七 われらは 先 ず 道 義 の 昂 揚 から 八 小 児 病 的 左 翼 陣 の 暴 挙 を 排 す 1948 年 11 月 20 日 政 党 人 に 望 む 発 行 人 朴 義 淑 東 京 都 杉 並 区 阿 佐 谷 一 丁 目 七 四 六 番 地 発 行 所 中 野 区 野 方 町 一 丁 目 七 三 二 番 地 朴 烈 文 化 研 究 所 1949 年 4 月 2 日 民 団 第 六 回 大 会 選 挙 に 敗 れて 団 長 を 辞 任 1949 年 朴 烈 は 家 族 と 共 に 韓 国 に 向 かう 李 政 権 の 国 務 委 員 となる 1950 年 4 月 張 義 淑 は 二 人 の 子 長 男 栄 一 と 長 女 慶 姫 を 連 れて 帰 国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55

56 1950 年 6 月 25 日 ソウルは 南 下 した 北 朝 鮮 軍 の 動 きにより 混 乱 状 況 1950 年 6 月 27 日 張 義 淑 大 元 ホテルに 止 宿 中 の 朴 烈 止 連 絡 がとれたのは27 日 の 未 明 子 供 たちをつれて すぐよその 家 へうつれ 今 後 連 絡 が 絶 えても 革 命 家 の 妻 として 恥 ずかしく 行 動 をせよ 朴 烈 はこれだけ 言 って 電 話 をきった たまりかねた 張 義 淑 が 慶 姫 ( 当 時 8ヶ 月 )を 隣 家 にあずけ 栄 一 (2 年 4ヶ 月 )をつれて 大 元 ホテルまでたどりつくと 部 屋 には 朴 烈 がひとり 目 をつむったまま 座 っていた 国 民 のほとんどがソウルに 残 っているのに おれだけ 逃 げられるか 帰 れ 義 淑 は 秘 書 に 送 られて 桂 洞 まで 戻 る 夜 になり 雨 が 降 り 出 した もう 一 度 朴 烈 のところへ 行 こうと 決 心 ホテルに 出 かけた やっとたどりついたホテルに 朴 烈 はいな かった 夜 が 更 けるにつれ 砲 声 はいよいよ 近 く 機 関 銃 が 地 底 からのような 音 をひびかしている 午 前 三 時 砲 声 がやみサイレンが 鳴 った 北 朝 鮮 軍 が 中 央 庁 に 入 った 合 図 にちがいない 夜 が 明 けると 幾 千 幾 万 とも 知 れぬ 足 音 が 聞 こえ 人 民 共 和 国 万 歳 の 叫 びが 伝 わってくる 共 産 軍 に 捕 らえられた 朴 烈 の 居 所 を 察 知 しようとして 西 大 門 刑 務 所 に 出 かけたのもそのころだった 十 五 年 目 のエンマ 帳 その 一 朝 鮮 の 人 朴 義 淑 さん 臼 井 吉 見 より 朴 烈 行 方 不 明 になる 1960 年 1 月 十 五 年 目 のエンマ 帳 その 一 朝 鮮 の 人 朴 義 淑 さん 臼 井 吉 見 婦 人 公 論 1960 年 1 月 号 掲 載 < 再 婚 相 手 は 東 京 女 子 大 で 臼 井 ゼミの 学 生 であった> 1963 年 3 月 4 月 朴 烈 金 子 文 子 事 件 森 長 英 三 郎 法 律 時 報 1966 年 6 月 共 産 主 義 者 と 私 朴 烈 統 一 評 論 掲 載 私 は 一 時 日 本 で 社 会 運 動 をおこそうと 思 い 政 治 団 体 を 組 織 したことがあった そして 日 帝 の 監 獄 にぶ ちこまれて 苦 労 もしてみた 私 は 共 産 主 義 者 の 幅 広 い 度 量 とあたたかい 同 族 愛 に 深 く 感 動 させられ 目 頭 が 熱 くなる 時 が 一 二 度 では なかった 祖 国 と 民 族 を 憂 えるすべての 人 々は 一 切 の 外 勢 を 排 撃 して 南 北 が 力 を 合 せて 祖 国 の 自 主 的 統 一 を 実 現 する 大 道 を 前 進 しなければならない 1967 年 民 団 在 日 韓 国 人 の 民 族 運 動 鄭 哲 洋 々 社 余 白 の 春 瀬 戸 内 晴 美 著 ムンギョン 金 子 文 子 の 墓 所 で 碑 の 除 幕 式 朴 烈 の 兄 所 有 の 土 地 朴 烈 金 一 勉 著 合 同 出 版 朴 烈 朝 鮮 民 主 主 義 人 民 共 和 国 で 死 去 と 報 じられる 春 一 番 臼 井 吉 見 展 望 第 200 号 掲 載 < 解 放 後 の 朴 烈 と 再 婚 小 説 >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56

57 山 梨 県 東 山 梨 郡 牧 丘 町 杣 口 の 金 子 家 の 敷 地 で 金 子 文 子 の 碑 除 幕 式 1977 朴 烈 金 子 文 子 裁 判 記 録 再 審 準 備 会 黒 色 戦 線 社 < 手 書 きのまま 複 製 > 栗 原 一 男 死 去 運 命 の 勝 利 者 朴 烈 復 刻 版 布 施 辰 治 黒 色 戦 線 社 1988 続 現 代 史 資 料 アナーキズム 小 松 隆 二 編 みすず 書 房 < 訊 問 調 書 を 活 字 化 難 波 大 助 大 逆 事 件 黒 旗 事 件 資 料 も 収 録 > 朴 烈 金 子 文 子 裁 判 記 録 黒 色 戦 線 社 < 本 文 は 続 現 代 史 資 料 アナーキズム の 複 製 > 付 録 として 大 審 院 判 決 減 刑 等 の 公 判 書 類 原 本 縮 小 パンフ 黒 濤 太 い 鮮 人 現 社 会 の 復 刻 連 帯 誌 < 山 梨 での 碑 の 除 幕 式 報 告 掲 載 > 発 行 が 刷 り 込 まれている 金 子 文 子 自 己 天 皇 制 国 家 朝 鮮 人 山 田 昭 次 影 書 房 金 子 文 子 を 支 えた 人 々 栗 原 一 男 を 中 心 に 佐 藤 信 子 甲 府 文 学 金 子 文 子 と 布 施 辰 治 シンポ 開 催 金 子 文 子 自 己 天 皇 制 国 家 朝 鮮 人 韓 国 語 版 刊 行 朴 烈 金 子 文 子 裁 判 記 録 運 命 の 勝 利 者 朴 烈 布 施 辰 治 朴 烈 金 一 勉 金 子 文 子 自 己 天 皇 制 国 家 朝 鮮 人 山 田 昭 次 を 主 として 参 考 にした 박열의사 생애와 발자취( 年 譜 ) 57

58 한국일보 박열 특집 :58 한국일보 이왕구 기자께서 직접 일본 현지를 발품팔아 쓴 특집기사 입니다. 한국일보 박열 특집 58

59 박열의 옥중단가 :58 박열의 옥중단가 59

60 박열이 가장 오랬동안 수감된 치바형무소. 지금도 10년이상의 장기수들이 복역하고 있다. 박열의 옥중가( 獄 中 歌 ) (제2의 괴사진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문제의 제2 사진 중에 씌어 있는 박열이 지은 단가( 短 歌 )이다) 시월달 달밝은 날 새벽에 가시니라 계신 데로 나의 님은 가시니라. * 먼저 가서 기다리리라 그대 오길 기다리리라 가는 이는 벽을 넘어 그런 말씀 하시니라 * 언제던가 복도에서 손잡은 일도 있었건만 박열의 옥중단가 60

61 그 언젠가 우연히 만나 손잡은 일도 있었건만 * 곁에 있던 간수께선 얼굴을 찡그리더라 안된다 안된다고 얼굴을 찡그리더라 * 가을날 바람 차고 구름은 덮였는데 아침부터 공중에서 비행기가 오고간다 * 오고가는 비행기에 타고앉은 비행가야 네중에는 한 사람의 테러 도 없는고야.(1926년 8월 30일 동아일보 수록) 박열의 옥중단가 61

62 박열 의사 출옥 후에 보내온 지인들의 휘호 :39 박열 의사 출옥 후에 보내온 지인들의 휘호 62

63 서예가 오세창 선생의 휘호 " 창해역사 명진열방 장상충혼 생환고국" 박열 의사 출옥 후에 보내온 지인들의 휘호 63

64 이시영 부통령의 휘호 " 존군자심 행장부사" 박열 의사 출옥 후에 보내온 지인들의 휘호 64

65 함께 납북된 삼균주의 주창자 조소앙 선생의 휘호 " 타도천황지선봉 개벽민주지건물" 박열 의사 출옥 후에 보내온 지인들의 휘호 65

66 박열의사 관련 사진첩(1) :20 박열의사 관련 사진첩(1) 66

67 박열의사 관련 사진첩(1) 67

68 박열의사 관련 사진첩(1) 68

69 민단간부들과 박열의사 관련 사진첩(1) 69

70 박열과 가네코의 동경시절 사진 박열의사 관련 사진첩(1) 70

71 가네코의 유해를 인수하기위해 일본을 방문한 박열의사의 형과 조카, 그리고 후세변호사(후세변호사의 집에서) 박열의사 관련 사진첩(1) 71

72 함양박씨종친회 창립대회에 참가한 박열 박열의사 관련 사진첩(1) 72

73 박열의사 추도대회에서 의사의 약력을 보고하는 전비서실장 박성진씨 박열의사 관련 사진첩(1) 73

74 출옥후 동지들과 함께 박열의사 관련 사진첩(1) 74

75 박열의사 관련 사진첩(1) 75

76 박열열사 이야기(이규태 이규태 조선일보) :01 새로복원된 박열생가 박열열사 이야기(이규태 조선일보) 76

77 [이규태 역사에세이] 박열열사 이야기 1923년 가을, 지금의 일본 임금의 아버지요 당시 왕세자였던 소화일왕의 결혼식이 약정돼 있었다. 한데 이 시기에 때 맞추어 폭탄을 해외로부터 입수하려고 물색하는 한국 청년이 있다는 제보가 일본 경찰 당국에 들어 왔다. 제보자는 니이야마라는 일본 아가씨다. 그녀의 한국인 연인인 김 중한이 독립사상을 품은 한 한국 젊은이의 부탁으로 폭탄 입수의 일을 진행중이라고 밀고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 왕과 왕세자를 폭살하려 음모 했다는 소위 박열사건의 발단이다. 사진설명 : 박열 사건을 보도한 당시의 조선일보 지면 몽타주 주모자인 박열은 경북 문경 점촌 태생으로 경성 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3 1운동을 겪고 잃어버린 나라 를 위해 일해보겠다는 작심으로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당시 젊은이들을 매혹시켰던 오스기의 무정부 운 동에 동조하여 그 산하에 한국인 동지 16명을 규합, 불령사라는 결사를 했다. 바로 고자질을 한 김중한과 니이야마도 그 결사의 같은 동지였다. 불령이라는 말은 일본 당국이 독립사상을 품거나 독립운동을 하는 박열열사 이야기(이규태 조선일보) 77

78 한국인을 지층하는 불은이란 뜻으로 결사 이름부터 반항적임을 알수 있다. 그는 직업을 물으면 법정에서 까지도 불령업 이라고 대꾸했을 정도로 민족의지가 투철했다. 박열은 평소에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 의회란 국가라는 이름의 대강도단의 소두목 회의요 천황(일왕)이란 국가란 강도단의 소두목을 거느린 대두목이다 는--. 박열은 1922년에 두 번 서울에 가 의열단의 한사람인 김한에게 폭탄을 의뢰했고 이 두사람과의 연락을 서 울의 기생인 이소홍이 맡아했는데 암호편지로 내왕했다 한다. 한데 때마침 서울에 김상옥 의사의 폭탄사 건이 일어나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또한 그가 우편배달부로 임시 고용되어 일본 임금이 사는 궁성 내부를 드나들며 내부구조를 익히기도 했다. 곧 범죄 예비는 했을 망정 폭탄을 입수하거나 실행한 구체적 행동은 없었다. 이 박열 사건을 이해하고 진행하는데 일본 여인 가네코후미코를 빼고는 불가능하다. 일본 발음으로 부르 지 말고 금자문자로 불러달라던 박열 의사의 연인이다. 박열이 금자문자를 만난 것은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이는 오뎅집이었다. 그 집에서 막심부름하던 그녀의 생각이나 지성이 너무 진보적이고 날카로우며 풍부 한데 반한 것이다. 박열을 만나기 이전까지의 그녀의 인생역정은 어떤 통속소설보다 기구했다. 아버지는 첩을 들여놓고 어머니를 밤낮으로 패길 일삼았다. 어머니의 출타 중에 한 집에 살던 이모를 겁탈하는 아버 지를 숨어본 것은 금자문자의 여섯살 때 일이다. 끝내 문자를 업고 가출한 어머니는 방직공장에 다니면서 호구를 했는데 나카무라라는 사나이와 동서 생활하면서 문자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방이 하나라 추잡한 일을 할 때면 엄동설한에 밖에 내쫓기길 일쑤였다 한다. 이 귀찮은 존재인 문자를 조선 경상도 김천에 동 양척식회사의 개척이민으로 가 사는 외삼촌 집에 맡겼다. 후에 쓴 옥중기에 보면 조선에서 살았던 6년 간 은 매일처럼 철로변에 나아가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뛰어들까 말까하는 추억밖에 없다 했다. 그는 도쿄에 돌아와 허리에 방울을 달고 달랑대며 신문팔이를 하면서 정칙영어학교에 들어가 중등교육을 받았다. 이 학교 문예반에서 알게 된 것이 박열을 대역이라는 어마어마한 혐의로 고자질한 니이야마다. 그녀의 일생을 살았다고 가정하면 이 세상 어느 누구가 세상의 부조리에 저항하지 않을 수 있으며 허무주 의자가 되지않고 배겨났겠는가. 박열을 만난 금자문자는 이 부조리에의 억하심정을 무정부 운동의 열정으 로 쏟았다. 그들은 결사의 기관지를 편집하며 과격 논설을 싣는 등 의기투합하여 심신을 같이하는 동서생 활을 일본 빈민가 게다집 셋방에서 시작한 것이다.그 셋방에서 박열은 왕족폭탄살해 음모죄로 금자문자는 그 공범으로 잡혀든다. 박열이 과격한 반일 항일주의자인 것만은 틀림없고 일본국의 수장인 일왕을 폭사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평 소에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일본 법정이 밝힌 대로 실행에 옮겼는지는 근거가 박약하며 따라서 조작 설이 유력하게 나돈 채 의혹으로 남아 있다. 박열로 하여금 그런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조작할 정치적 배 경을 훑어볼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은 1923년 9월에 일어난 관동지방의 대지진이 온상이다. 이 때 있었던 한 국인 대학살은 그 처참함이나 무도함으로 온세상을 경악시켰고 일본이 궁지에 빠지게 한 사건이었다. 일 박열열사 이야기(이규태 조선일보) 78

79 본 자경대라는 민간단체에서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돼있지만 일본 정부나 군부 경찰이 배후 조작했다는 사실은 저희네 조사로도 엄연한 사실이 되고 있었으며 외국에서도 그 사실을 알아 날이 갈수록 외교적 입 장이 난처해지고 있었다. 이 학살의 정치적 조작을 한 배후로 당시 일본 내무대신이요 3 1운동 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한 국통 미즈노가 지목되기도 했다.그는 관동 대지진 이전에 일어났던 일본 각지의 쌀 파동의 무서움을 체험 해 알고 있는지라 대지진 후에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될 식량 파동에 겁을 먹고 있었다. 시어머니한테 호통 맞은 며느리가 부엌에 들어와 무고한 강아지 배때기를 차 깨갱거리게 하여 스트레스를 전위시키듯이 팽배 한 일본민중의 욕구불만을 한국인으로 향하게 하여 분출시키는 불만 전위정책을 쓴 것이다. 한국인이 난 리 틈에 일본인을 습격하고 샘물에 독약을 풀고 다닌다는 루머를 퍼뜨려 대량 살상을 야기시킨 것이다. 이 무자비하고 잔인무도한 학살 사례가 구미 각국에 외교채넬과 신문 보도로 알려지자 열강에서 항의 규 탄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일본 주재 외국대사들이 연서명하여 한국인 학살을 항의하는것을 필두로 세 계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이에 대한 정치적 음모 하나를 진행시킬 필요가 생기고 이것이 바로 박 열 사건인 것이다. 곧 일본인이 재일 한국인에게 그토록 모질게 굴 수밖에 없는 골치아픈 한국인임을 세상 에 알리기 위해 한국인이 일본 왕을 죽일 뻔했다는 연극을 조작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당시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박열과 금자문자의 옥중괴사진도 이 조작선상의 한 작품이다. 괴사진이란 판사의 예심조사실에서 박열이 앉아있는 무릎에 금자문자가 태평스레 책을 들고있는 사진이다. 뿐만 아니 라 취조하던 다치마쓰 예심판사는 피의자인 박열과 금자문자를 취조실에 놓아두고 변소가는 척 오랜 시간 을 비워두곤 했다 한다. 당시 일본 우익은 괴사진을 두고 춘화라 표현하고 사법권의 문란이라 하여 당시 와카키 내각의 사퇴를 들고 나오기까지 했다. 끝내는 박열과 금자문자가 옥중결혼을 했다는 설이 끈질기 게 나돌았다. 당시 조선일보에 보면 옥에 갇히기 전 1년 남짓을 동거한 사이로 굳이 옥중결혼까지 할 아무 런 필요를 느끼지않는다 하고 당사자들이 부인한 것으로 보도되었지만 일본에서는 사법사상 전례없는 옥 중결혼을 시킨 것이라 하여 떠들석했다. 이 괴사진과 옥중결혼은 그들의 공작대로 피의 사실을 자백케하 기 위한 유화정책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공판이 열리기 전에 박열은 면회갔던 조선 학우회의 조헌영에게 자신과 금자문자가 한복을 입고 재판받게 해달라 부탁해서 한복을 차입했다. 공판정에 입정한 박열은 쌍학교비하는 혼례복에 사모를 쓰고 관대를 둘렀으며 태극선을 든 채였고 금자문자는 흰 옥양목 저고리에 검은 공릉치마 차림이었다. 일본 왕을 대표 하는 재판관이라면 나는 한국민족을 대표하기에 한복을 요구함이며 재판관석과 피고석의 높이를 동등하게 하라고 요구함이며 나는 한국말을 사용할 테니 통역을 딸려라고 말함이며 심문에 재판관이 꿀릴만큼 기개 가 당당했다.그는 지구를 깨끗이 청소하는 일 가운데 첫걸음이 일본 제국을 쓸어버리는 일이다는 등 보도 하지 못하게 한 아의 선언 등 극단 발언이 많았다. 형법73조인 왕 왕비 왕세자 왕세손에 위해를 가하 거나 가하려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규를 적용, 사형을 언도하자 박열은 태연히 웃음을 띠었고 금자 박열열사 이야기(이규태 조선일보) 79

80 문자는 박열과 나를 한 교수대에서 같이 목매어 죽여달라. 그리고 죽은 백골도 더불어 묻어달라 고 진 술했다. 1926년 3월25일의 일이었다. 한데 10일이 지난 4월5일에 무기징역으로 특사를 받는다. 특사를 받은 지 넉달이 되는 7월23일 우쓰노미야 형무소 여죄수 독방에서 금자문자가 수인작업인 마니라 삼끈을 꼬다가 그 끈을 창살에 매어 목매어 자살 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소설보다 더 기구한 한많은 25세의 삶을 그렇게 맺은 것이다. 꼭 그 시기에 죽을 이 유도 없고 또 작은 심경 변화에도 글로 써 나타냈던 평소 성격으로 보아 자살이라면 유서를 남겼을 텐데 흔적없이 사라진 게 또 하나의 의혹이 응어리진 것이다. 그 무렵 박열의 형인 박정식씨가 금자문자를 면회 코자 신청을 했으나 이유없이 거절당한 사실이 복합되어 더욱 그러했다. 옥중에서 일어난 일이라 추측이 만발했는데 그 중 유력한 추측이 임신한 것이 외형으로 드러났고 옥중임신이 알려지면 사법부가 또 한번 곤욕을 치러야 하기에 낙태수술을 하다가 치사한 것을 자살로 변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20년의 옥살이를 하고 일본의 패전으로 출감한 박열은 한국거류민단장을 하다가 6 25전쟁 때 납북 된 것이다. 그후 금자문자는 경북 문경읍 마성면 오천리 박열의사 기념공원에 이장되어 한국 땅에 잠들고 있다. 박열열사 이야기(이규태 조선일보) 80

81 일본 여인을 사랑에 빠뜨린 박열의 무정부주의 [중앙일보] :47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1903~1926)와 박열( 朴 烈 1902~1974) 두 사람의 기개를 존중한 다케마쓰 검사와 예심판사가 투옥 중인 두 사람을 동석시켜 찍은 사진. 다정한 포즈를 취한 두 사람의 사진이 신문지상에 보도되자, 대역 죄인을 우대했다는 빌미로 정쟁이 벌어져 내각이 붕 괴되는 등 큰 파장이 일었다. 일본 여인을 사랑에 빠뜨린 박열의 무정부주의 [중앙일보] 81

82 [그때 오늘] 일본 여인을 사랑에 빠뜨린 박열의 무정부주의 [중앙일보] 기사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1903~1926)와 박열( 朴 烈 1902~1974) 두 사람의 기개를 존중한 다케마쓰 검사와 예심판사가 투옥 중인 두 사람을 동석시켜 찍은 사진. 다정한 포즈를 취한 두 사람의 사 진이 신문지상에 보도되자, 대역 죄인을 우대했다는 빌미로 정쟁이 벌어져 내각이 붕괴되는 등 큰 파장이 일었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일본 여인을 사랑에 빠뜨린 박열의 무정부주의 [중앙일보] 82

83 1922년 2월 일본 유학생들이 펴낸 잡지 조선청년 에 실린 박열의 시 개새끼 를 읽은 가네 코 후미코는 숙명적 사랑에 빠졌다. 내가 찾고 있던 사람, 내가 하고 싶었던 일, 그것은 틀림 없이 그 사람 안에 있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사람이다. 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미친 바람이 몰아치던 와중에 두 사람은 천황을 폭살 하려 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법정에 섰다. 멸하라! 모든 것을 멸하라! 불을 붙여라! 폭탄을 날려 라! 독을 퍼트려라! 기요틴을 설치하라! 정부에, 의회에, 감옥에, 공장에, 인간시장에, 사원에, 교 회에, 학교에, 마을에, 거리에. 모든 것을 멸할 것이다. 붉은 피로써 가장 추악하고 어리석은 인 류에 의해 더럽혀진 세계를 깨끗이 씻을 것이다. 1924년 옥중에서 박열이 쓴 나의 선언 이 잘 말해주듯, 두 사람을 맺어준 연결고리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힘 국가 법 감옥 사제( 司 祭 ) 재산 등 이 사라진 세상을 꿈꾸는 아나키즘이었다. 일본 민중에 대해서는 일본 황실이 일본 민중의 고혈을 착취하는 권력자의 간판이며 신과 같 은 자가 아니라 유령과 같은 자에 지나지 않음을, 조선 민중에 대해서는 실권자로 생각하며 증 오의 과녁으로 삼고 있는 일본 황실을 쓰러뜨려 조선 민중에게 혁명적 독립적 열정을 자극하 기 위해서다. 나는 처음에 민족적 독립사상을 가지고 있던 차에 광의의 사회주의에 빠져들 었고, 그 후 무정부주의로 변한 후 다시 현재의 허무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지만, 지금도 민족독 립사상을 내 마음 속에서 떨쳐버릴 수 없다. 그러나 후미코와 달리 차별 받는 식민지 사람이 었던 박열의 법정 진술이 잘 말해주듯이, 그의 뇌리 깊숙이 각인된 민족의식은 어떠한 지우개로 도 지울 수 없었다. 낱낱의 개인을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전체에 종속시킨 군국주의의 광기 속에서도 개인의 양 심을 굽히지 않은 일본인은 후미코만이 아니었다. 박열 부부의 죄로 말하면 일본인으로는 말 로 할 수 없는 큰 죄이지만, 경우를 바꿔 생각하면 박열만 나쁘다 할 수 없다. 이 발언으로 직 을 내놓은 마키노( 牧 野 ) 재판장. 이들의 변호를 맡았던 인권 변호사 후세 다쓰지( 布 施 辰 治 ). 모 래사장에서 찾은 바늘과 같기에 이들에 대한 기억은 한 일 두 나라 시민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밝힐 희망의 등불로 더욱 빛난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 한국근현대사 일본 여인을 사랑에 빠뜨린 박열의 무정부주의 [중앙일보] 83

84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 재일 아나키스트들의 항일투쟁(한국일보 한국일보) :40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을 다룬 1927년 1월 21일자 국내 신문. 가네코가 박열의 아이를 임신한 채 죽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 다.(왼쪽), 1926년 3월 25일 도쿄 대심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기 직전의 가네코 후미코(왼쪽)와 박열(가운데). 산처럼 제 공 [한일 강제병합 100년] <15>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 재일 아나키스트들의 항일투쟁 국경 초월한 무정부주의자의 사랑 죽음 앞에서도 '천황제'에 온몸 항거 천황 폭살 모의하다 붙잡혀 사형선고 받은 후 부부 인연 박열, 23년간 복역후 석방, 가네코는 옥중서 의문의 자살 두 사람이 추구했던 아나키즘 독립운동가들에 큰 영향 도쿄=이왕구기자 [email protected]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을 다룬 1927년 1월 21일자 국내 신문. 가 네코가 박열의 아이를 임신한 채 죽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왼쪽), 1926년 3월 25일 도쿄 대심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기 직전의 가네코 후미코(왼쪽)와 박열(가운데). 산처럼 제공 가부장제 저항한 1세대 신여성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 재일 아나키스트들의 항일투쟁(한국일보) 84

85 조선인들 달동네와 일본인 번화가 경계선 남아 클릭하시면 원본크기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클릭하시면 원본크기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926년 2월 26일 오전 도쿄 대심원 대법정. 정복 차림의 경찰 150명과 헌병 30명이 법원 안팎을 통제하는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한 조선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이 피고석에 앉았다. 사내는 하얀 비단 바탕에 보라색을 띤 상의와 쥐색 바지를 입고 허리에는 학을 새긴 각대를 두 르고 있었다. 여성도 하얀 비단 저고리를 걸치고 머리에는 장식 두 개를 꽂은 단정한 모습이었 다. 조선식 의복을 착용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 법정을 향해 무언의 항의 표시를 한 피고인들은 박열(1902~1974)과 그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ㆍ1903~1926)였다. 이들의 혐의는 형법 제73조와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 일제의 형법 제73조는 왕, 왕비, 왕세자, 왕세손에게 위해를 가하려 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이른바 대역죄( 大 逆 罪 )였다. 증거도 없고, 폭발 물 테러의 대상과 날짜도 명시하지 못한 허술한 기소였지만 3월25일 결심공판에서 대역죄인 박 열 부부에게는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하지만 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다. 퇴정하는 판사를 향해 박열은 "재판은 비열한 연극이다!"라고 외쳤다. 가네코 후미코는"만세"를 외치며 천황제 국 가 일본을 조롱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민족해방운동을 이끈 이념으로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꼽지만 제3의 사 상, 아나키즘도 간과할 수 없다.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되는 아나키즘은 개인적 자아의 해방 과 자율성을 주장하며 민중을 착취하는 모든 권력을 부인한다. 아나키스트들은 우파 민족주의는 물론 당에 권력이 집중된 공산주의 역시 비판과 경원의 대상 으로 삼았다. 신채호, 이회영, 조봉암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아나키즘의 세례를 받았거나 이 를 적극 지지했다. 박열은 경북 문경 출신으로 경성고보에 입학, 3ㆍ1운동에 참가한 뒤 탄압을 피해 도쿄로 건너가 일본 내에서 차별받는 조선인들의 현실을 폭로하는 데 앞장섰다. 재일 유학생들, 일본인 아나키 스트들과 의기투합해 '흑도회' '불령사' 등의 모임을 꾸린 뒤 천황가에 대한 폭탄 테러를 모의했 다. 만물절멸을 주장한 그의 아나키즘이 허무주의로 폄하됐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박열은 법정 진술에서 자신의 이념을 "소극적으로는 나 하나의 생명을 부인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지상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 재일 아나키스트들의 항일투쟁(한국일보) 85

86 에 있는 모든 권력의 타도가 궁극의 목적"이라고 진술했는데, 이는 그의 아나키즘이 개인적 희 생을 통해 사회를 구원하겠다는 살신성인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는 1923년 9월 구속돼 사형 판결을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 1945년 10월 아키타 형무소에 서 풀려날 때까지 23년간 복역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에서 단일 사건으로는 최장 의 수감 기록이다. 박열은 한국전쟁 당시 납북돼 1974년 북한에서 사망했고, 1989년 항일투쟁에 대한 공로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무적자로 태어난 가네코 후미코는 부모와 친척들로부터 학대를 받고, 조선에 서 6년간 생활하며 식민지인들의 아픔을 체험한 뒤 아나키즘에 경도됐다. 그는 박열과 동거하며 조선의 해방과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다 스물셋의 나이에 옥중에서 의문의 자살로 생을 마친 인 물이다. 그의 생은 시련의 연속이었으나 그것은 권력과의 대결이라는 그의 신념을 더욱 굳게 했다. 일본 인 판사는 재판 과정에서 "왜 일본인인 당신이 조선인 편을 드느냐"며 여러 차례 전향을 강요했 지만 그는 "나는 권력 앞에 무릎을 끓고 살아가기보다는 오히려 기꺼이 죽어 끝까지 나 자신의 내면적 욕구를 따를 것이다.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흔적을 찾아 나선 지난달 29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공휴일인 쇼와 ( 昭 和 )의 날이었다. 히로히토 전 일본 천황의 생일이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체포돼 1923년 9월부터 1926년 4월까지 함께 복역 했던 도쿄 신주쿠 도미히사마치의 이치가야( 市 個 谷 ) 감옥 터. 박열 부부는 이곳에 수감돼있는 동안 천황제의 허구성에 대해 일본 법조계와 치열한 법정 논쟁을 벌였다. 박열은 이 감옥에서 자신의 사상을 함축한 '일본의 권력자에게 줌'을 비롯해 '나의 선언'과 '음모 론' 등의 글을 썼다. 가네코도 이곳에서 원고지 3,000매에 달하는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 들었는가'를 썼으며, 200여 편에 이르는 단가( 短 歌 )를 남기기도 했다. 가네코가 도쿄 북쪽 도치기 ( 栃 木 ) 형무소로 이감되기 한 달 전인 1926년 3월, 두 사람은 이치가야 감옥에서 구청에 결혼신 고서를 제출함으로써 정식 부부가 됐다. 신주쿠역 동쪽에서 15분가량 '감옥거리'라 불렸던 좁은 골목을 따라 걸으면 이치가야 감옥터를 찾을 수 있다. 지금은 구립 아동 놀이터와 작은 공원이 돼있다. 휴일을 맞아 공원을 산책하는 노 인 한두 명 외에는 인적이 드문데, 한 구석에 1964년 일본 변호사연합회가 세운 '형사자( 刑 死 者 ) 위령탑'이 이곳이 감옥터였음을 알려준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 재일 아나키스트들의 항일투쟁(한국일보) 86

87 박열 부부가 투옥됐던 이 감옥에서 1932년 히로히토 천황의 암살을 시도한 이봉창 의사, 1924년 황궁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의사가 순국했다. 많은 일본인들이 아직도 "일본 고유의 제도인 천 황제에 대해 외부에서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하지만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묻는 것을 여전히 금기시하는 일본의 현실을 떠올리면 이 쓸쓸한 감옥터는 전체주의와 결합된 천황제가 어떤 비 극을 낳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게 한다. 박열과 가네코가 동거했고 23명의 한ㆍ일 무정부주의자들의 모임인 '불령사'가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기도 한 2층 셋집은 신주쿠에서 지하철로 10분 거리인 요요기( 代 代 木 )에 있다. 간선도로인 야마노테 거리의 북서쪽 지역으로 박열과 가네코가 머물던 당시에는 도시빈민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지금은 중산층의 깨끗한 맨션이 즐비하지만 언덕과 언덕 사이에 위치한 저지대라 볕이 잘 들지 않고 잦은 비로 습기에 차 있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불령사( 不 逞 社 )' 표찰 을 걸고 벽에는 '반역( 反 逆 )'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었다는 옛집은 사라졌지만, 1923년 9월 1일 대지진이 나자 박열과 후미코가 여진을 피해 노숙했다는 언덕은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비극으 로 끝난 두 사람의 사연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20세기초의 일본 아나키즘을 연구하고 있는 가메다 히로시( 龜 田 博 ㆍ57) 전 도시샤( 同 志 社 )대 인 문연구원은 "박열이 추구했던 아나키즘은 개인의 가치를 중시하기 때문에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만큼 세력이 크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나 일본의 진보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 었다"고 말했다. 문화"천황제 허구 폭력성 밝혀 항일투쟁 금자탑" [한일 강제병합 100년] 김명섭 '자유공동체연구회' 연구간사 단국대 강사 김명섭 '자유공동체연구회' 연구간사.단국대 강사 식민지 청년 박열과 일본 민중 가네코 후미코의 투쟁과 사랑은 그야말로 1920년대 조선과 일본 사회를 뜨겁게 달군 핫 이슈였다.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으로 바짝 긴장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 에게 도쿄 한복판에서 추진된 박열의 일왕 폭살 계획은 그 사실만으로도 경천동지할 사건이었 다. 1905년 러일전쟁을 통해 명실상부한 국가신앙으로까지 권위를 차지한 일본의 천황제는 어떠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 재일 아나키스트들의 항일투쟁(한국일보) 87

88 비판이나 저항도 허락하지 않는 신성불가침 영역이 되었다. 천황제는 일본 국민 전체를 맹신도로 만들어 전쟁터로 내몰았고,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태평양 전체를 장악하려는 제국주의 사상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당당 히 천황제의 허구성과 폭력성을 밝힌 투쟁은 그야말로 반전 반제 항일투쟁의 금자탑이라 할 만하다. '박열 사건'은 1923년 9월 1일 도쿄를 강타한 대지진의 와중에서 일본 지배층이 자행한 조선인 대 학살을 모면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단지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6,000여명을 잔혹하게 살해하 고, 6,000여명을 보호검속한 일제는 '무정부주의자들의 폭동'을 명분으로 박열과 불령사 회원들 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러나 권력층의 의도는 이들의 당당한 투쟁으로 철저히 어긋났고, 그 대가로 박열은 세계 최장 기간의 기록인 23년 간의 투옥, 가네코 후미코는 의문의 죽음을 당해야 했다. 이후 박열의 항일 유지를 받든 아나키스트들은 보다 조직적이고 강렬하게 투쟁했다. 흑우회와 흑우연맹 등은 항일과 반공산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며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들과의 연대 활동 에 나서 재일 한인들을 규합했다. 3,000여명의 조합원을 가진 조선동흥노동동맹과 조선자유노동자조합은 그 대표적인 항일 노동단 체인데, 친일 단체에 대한 투쟁은 물론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에도 크게 기여하며 1937년까지 활 동했다. 이외에도 계림장과 신문배달인조합, 자유청년연맹 등 도쿄에서만 9개 조직 3,200여명의 아나키 스트들이 활동했고 오사카와 효고, 아이치 현 등에서도 13개 단체 800여명이 조직된 것으로 알 려졌다. 재일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1940년말 비밀결사 건달회가 적발될 때까지 합법ㆍ비합법으 로 꾸준히, 치열하게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처럼 일본에서 풍부한 이론 습득과 다양한 활동을 경험한 젊은 아나키스트들 중 일부는 1931 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중국으로 망명해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였다. 원심창, 나월환, 이하유, 박기성, 이현근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상하이 남화한인청년연맹을 비 롯해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나아가 광복군 제5지대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천황제와 군국주의 에 온몸으로 항거했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유지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독립운동과 자유 공동체사회 건설에 기틀이 되었던 것이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 재일 아나키스트들의 항일투쟁(한국일보) 88

89 박열 독립운동사 :01 수감 중에 가족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들 박열 독립운동사 박열( 朴 烈 )의 일황( 日 皇 ) 저격 1925년 9월 일본 정부는 조선인 박열의 대역사건( 大 逆 事 件 ) 음모를 적발한 후 저간예심( 豫 審 ) 중 에 있던 바, 이제 그 예심을 종결하고 대심원( 大 審 院 ) 공판에 회부하였다고 발표함으로써 국내 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일본인들의 소위 대역 사건이란 일본 황실( 皇 室 )에 관한 범죄로써 박열 독립운동사 89

90 그들의 구 형법( 舊 刑 法 ) 제73조에 의하여 극형에 처하게 마련돼 있었다. 즉 천황 황후 태황( 太 皇 ) 황태후 황태자 황태자비( 皇 太 子 妃 ) 등 천황의 직계 존속과 비속( 卑 屬 ) 누구에 대하여서든 지 위해를 가했거나 위해를 가하려한 자는 사형에 처하되, 재판도 대심원(대법원 격)에서 단 한 번만 하게끔 그 형법은 규정하고 있었다. 박열사건 이전에 이 조항을 적용하여 처벌한 예로써는 일본 사회주의 개척자이고 언론 저술가이던 무정부주의자( 無 政 府 主 義 者 ) 행덕추수( 幸 德 秋 水 )와 그의 동지들 20여 명이 대역 음모를 꾸몄다고 1910년에 일망 타진을 당하고, 이듬해인 1911년에 처형된 사건이 있었고, 동경( 東 京 ) 대진재( 大 震 災 ) 직후에 사상 계통과 행동 목적을 알 수 없는 그러나 유력한 집안 출신이라는 설이 있던 일본인 20대 청년 난파대조( 難 波 大 助 )가 지금의 일본 천황 유인( 裕 仁 )이 섭정( 攝 政 )을 하고 있을 적에 밖에 나들이 할 일이 있어서 궁문( 宮 門 )을 나와 차를 달리고 있는 것을 권총으로 저격 했던 소위 호지문 사건( 虎 之 門 事 件 )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형법 제73조의 적용을 받아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역 사건이란 신문 용 어도 행덕 추수 사건 이래로 쓰여 졌었다. 당시 일본 신문도 검열이 심하여 박열의 음모 내용의 구체적인 것은 보도할 수가 없고, 소위 공 판도 줄곧 방청 금지 비공개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길이 없었으나, 변호사 등 의 입을 통하여 쉬쉬하며 전해진 바로는 1923년 9월에 지낼 예정이던 일본 황태자 결혼식을 기 하여 일본 천황과 황태자를 한꺼번에 폭살하려는 목적으로 폭탄 입수를 계획하고 첫번엔 일본 인 선원( 船 員 ) 송본정일( 松 本 貞 一 )과 다음에는 의열단원( 義 烈 團 員 ) 김한( 金 翰 )과 모의하였으나 모 두 여의치 못하여 실패했고, 같은 해 5월 불령사( 不 逞 社 ) 동지 김중한( 金 重 漢 )을 상해에 밀파하 여 폭탄을 반입할 계획을 추진 중에, 그해 9월 동경 대진재가 나고 불령사 동지가 일체 검거를 당하여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건 경과를 거슬러 올라가며 검토해 보면 처음에 동경( 東 京 ) 경시청( 警 視 廳 )은 박열과 그 동지들인 불령사가 무엇인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 는 어떤 낌새를 눈치채고, 당시 언론 출판 결사 집회 등을 규제하는 소위 치안경찰법( 治 安 警 察 法 )에 걸어서 박열 등 불령사원 16명을 일제 검거하여 경찰 조사를 끝내고 검찰에 송치, 예심 에 회부했다. 이것이 사건 발전의 제1단계였다. 그리고, 경시청의 이 검거는 이른바 관동( 關 東 ) 대진재( 大 震 災 )가 일어나기 직전인 1923년 8월 하순에 시작하여 진재 직후인 이듬해 9월 상순까 지에 걸친 일이었다. 예심에서 사건을 진행하다 보니, 불령사가 비밀 결사라는 증거가 불충분하 므로 이를 치안 경찰법을 적용해서 입건할 수는 없다 하는 판정이 나려져서, 이 부분은 일괄 면 소( 免 訴 )하는 동시에 박열 금자문자 김중한 등 세 사람을 제외한 일행은 이를 전원 석방했다. 박열 독립운동사 90

91 그리고, 제외된 박열 등 세 사람은 이들이 폭탄 등 무기 입수를 획책하고 있었으니 만큼 그 사 실을 따져봐야겠다고 별도 폭팔물( 爆 發 物 ) 취체규칙( 取 締 規 則 )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예심을 속 행했다. 이것이 사건 발전의 제2단계 였다. 그리하여 예심을 또 진행하다 보니, 김중한은 박열로 부터 폭탄 입수에 관하여 의뢰를 받았고 또 그것을 응락하기는 했으나 그 용도에 관하여서는 전 연 아는 바 없고, 들은 바도 없다고 강경히 부인하니, 그는 폭발물 취체 규칙 위반죄로만 다스리 게 하고, 박열과 금자문자는 그 폭탄의 용도가 황실에 대하여 위해( 危 害 )를 가할 목적이었다고 추궁하면서 그들의 소위 형법 73조를 적용하겠다고 사건을 다시 분리하여 별도 예심을 진행하게 됐다. 이것이 사건 발전의 제3단계였다. 박열이나 금자문자도 처음에는 이 사실을 강경히 부인했다. 그리하여 예심은 지지부진했다. 그 런데, 이때는 소위 관동 대진재를 당하여 동경 재주 우리 교포 대량 학살 사건이 백일하에 드러 나서 일제의 조선 통치 상에는 물론, 국제 여론 상에서도 일본은 대단히 궁지( 窮 地 )에 함입하게 됐다. 그래서 조선 사람 중에 박열과 같은 불궤( 不 軌 )의 무리가 있기 때문에 큰 재해로 말미암은 사회적 혼란을 틈타서 애국적인 일본인 대중을 자극하여 조선인 집단 살해와 같은 불상사가 일 어난 것이라고 구실 아닌 구실을 만들기 위해 박열 금자문자를 희생 제물( 犧 牲 祭 物 )로 삼았던 것이라고 박열사건의 진상을 설명하게 되었다. 한편 불령사 사건에 연좌하였던 육홍균( 陸 洪 均 ) 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불령사 사건 관계의 예심 조사를 받을 적에 예심 판사는 박열의 행동 계 획에 관하여 엇비슷하게 물어 보곤 했다 한다. 이로써 추측하건데 일행을 검거한 경시청은 처음 부터 모종 힌트를 포착하고 있었던 모양 같다. 그렇더라도 예심에서는 물적 증거가 없으니 결국 박열의 자공( 自 供 )을 얻어내야 할 터인데, 예심 판사 입송회청( 立 訟 懷 淸 )은 고심 끝에 진재 때 조선인 학살 사건과 관련시켜 박열을 설득하기에 힘쓰고, 또 국법을 어겨 가면서까지 박열을 우 대( 優 待 )하였다가 나중에 소위 괴사진( 怪 寫 眞 ) 사건과 내각 도괴에 이르는 사태로 발전했었다고 풀이하게끔 되었다. 단 이것이 예심 판사 일개인의 공명심( 功 名 心 )에서 나온 자의( 恣 意 )였던지 아니면 상사의 지시에 따랐었던지는 그때도 지금도 밝혀낼 수가 없다. 이상과 같은 사건 발전의 세세한 경위에 관하여서는 이하에서 점차 구체적으로 기술 하려니와 실상 박열이 일본에 건너가서 민족 독립운동과 사회사상 운동 선상에서 활약 하다가 마침내 일 황 폭살을 기도하게 되기까지의 그의 행적은 3.1 이후 우리나라 역사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갖 는 것이었다. 즉, 3.1 대한민국정부를 거족적으로 치르고 나서 우리 국내에서는 문화 운동( 文 化 運 動 )이라는 이름 밑에 일종의 대중 계몽( 啓 蒙 )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국외 중심이었지마 박열 독립운동사 91

92 는 독립운동전선에서는 무력 항쟁( 武 力 抗 爭 )으로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문화 운동의 급진 적( 急 進 的 ) 부면이 사회주의( 社 會 主 義 ) 사상 운동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단계를 반영한 것이 박 열의 저간의 행적이었다. 이른바 박열사건의 진상을 말하기에 앞서 그 이전의 박열의 행적에 관 해서 먼저 서술하는 소이다. 박열의 초명은 준식( 準 植 )이며 일명 혁( 爀 )이라고도 했다. 그가 열( 烈 )을 이름하기는 그가 도동 ( 渡 東 )하여 사회사상 운동을 전개하면서 행동 제일을 표방하며 일본말의 폭발을 뜻하는 폭렬( 爆 裂 =바꾸레츠)을 상징하여 스스로 찬자( 撰 字 )했던 것이라 한다. 그는 1902년 2월 3일 경북 문경군 ( 聞 慶 郡 ) 문경면( 聞 慶 面 ) 오천리( 梧 泉 里 )에서 박영수( 朴 英 洙 )의 제3자로 태어났었다. 그러나, 사 정에 의하여 상주군( 尙 州 郡 ) 화북면( 化 北 面 ) 장암리( 壯 岩 里 )에 옮겨 살며 자랐기 때문에 그의 호 적상 원적지는 상주로 되고, 전기 오천리에는 일족과 선영( 先 塋 )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14세 때에 관립경성고등보통학교( 官 立 京 城 高 等 普 通 學 校 )에 입학하여 18세 되던 3월에 3.1 독립운동의 일어나니, 거기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퇴학 처분을 받고 그해 10월에 동경으로 건 너갔다. 거기서 그는 신문 배달을 하면서 정칙영어학교( 正 則 英 語 學 校 ) 등에서 수학했다. 이 당시 일본 사회 운동의 선각자인 대삼 영( 大 杉 榮 ) 등이 크게 활약하고 있던 때이므로 박열은 곧 그들 과 교유하며 자기의 인생관( 人 生 觀 ) 사회관( 社 會 觀 )을 형성했다. 당시 일본의 사회사상계는 범 사회주의( 汎 社 會 主 義 ) 시대이고, 그러한 시대에 있어서 각국의 통례가 그러했던 바와 같이 아나 키즘(무정부주의)이 지도적 위치에서 이끌고 나가더니만큼, 박열의 사회사상 형성도 아나키스트 대삼영의 영향을 많이 받았었다 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겠다. 그러나, 박열의 아나키즘과 대삼 영 내지 일본인 일반의 아나키즘 사이에는 그 내용상 큰 차이가 있었음을 면 할 수 없었 다. 즉 당시 일본인들의 아나키즘은 일본 국가주의( 國 家 主 義 )에 대한 정면 반대와 일본 천황제 ( 天 皇 制 )에 대한 정면 폐지론자( 廢 止 論 者 )이었음에 반하여 박열의 아나키즘은 철저한 혁명적 민 족주의( 革 命 的 民 族 主 義 )가 그 바탕이었던 것이다. 박열은 민족이 민족을 지배하고 압박하며 착 취함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그는 조선 민족의 완전 자주 독립을 주장하는 반제국주의자( 反 帝 國 主 義 者 )였고 독립된 민족 사회 내부에서 압제와 착취를 부정하고 빈부 격차가 완전 타파되며 모든 사회 성원의 균등한 경제 생활을 실현하겠다는 의미에서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라 할지라도 소련( 蘇 聯 )과 같은 독재체제( 獨 裁 體 制 )는 이를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여 그 는 처음부터 반공( 反 共 )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일본인 행덕 추수가 최초의 대역 사건 으로 당하고 대삼 영 부처가 동경 대진재 혼란 통에 반동 군벌( 反 動 軍 閥 )의 마수에 의하여 피살 박열 독립운동사 92

93 되는 등 각각 생명을 잃은 것은 그들의 신념 때문에 바쳐진 자기 희생이었다면 박열의 일황 폭 살을 기도하였다는 소위 박열 대역 사건은 한 민족 해방을 위해 바쳐진 그의 희생이었다. 박열은 1921년 5월 동경에서 흑도회( 黑 濤 會 )를 조직했다. 이것은 3.1 이후에 있어서 우리나라 최 초의 사회주의적 사상 단체였다. 여기에는 박열 외에 백무( 白 武 ) 김약수( 金 若 水 ) 김종범( 金 鍾 範 ) 조봉암( 曺 奉 岩 ) 등 후일 공산주의적 분파( 分 派 )로 갈라져 나아간 인물들을 망라하고 있었던 사실로 보아 이른바 범사회주의 클럽 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겠다. 흑도회에서도 기관지 흑도 (일본문)를 월간으로 발간했다. 그러나 흑도회는 곧 분파 작용을 일으켜서 김종범 등은 동경 에 북성회( 北 星 會 )를 설립하고 그 기관 척후대( 斥 候 隊 ) 를 발간하였으며, 조봉암은 서울에 화 요회( 火 曜 會 )를 만들었다. 한편 박열은 흑도회를 개편하여 반공적( 反 共 的 )인 아나키스트만을 규 합해서 흑우회( 黑 友 會 )를 동경에 설립하였으며, 얼마 있다가 김중한 이강하( 李 康 厦 ) 등 10여 명 은 서울에 흑노회( 黑 勞 會 )를 조직했다. 박열은 흑도회 개편과 동시에 그 기관지이던 흑도 도 폐간하고, 별도 잡지형의 월간지 불령 선인( 不 逞 鮮 人 ) 을 발간해 냈다. 이 불령 선인이란 말 은 당시 일제가 조선 사람 독립운동자를 모욕하기 위하여 경찰이 쓰기 시작한 것이었는데, 못된 조선 놈이란 뜻이 있었다. 박열은 그러한 욕칭( 辱 稱 )을 잡지 제호에 역용( 逆 用 )해 썼던 것이다. 검열 당국이 그 제호 사용을 금지하니 후도이 센징 으로 바꿨다. 후도이 라는 일본말 속 어( 俗 語 )는 역시 못된 놈 이란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이 제호도 금지하니 현사회( 現 社 會 ) 로 고쳤다. 이것은 박과 그 동지들이 동경 대진재를 만나 일제 검거를 당할 때까지 지속했 다. 현사회 지( 誌 )의 내용은 현사회 제도에 대한 신랄한 공격과 일제의 조선 식민 통치에 대한 격렬한 반대 논설로 가득 찼었고, 또 독립운동과 사회사상 운동전선( 戰 線 ) 동향에 관한 보도 기 사를 곁들인 것이었다. 당시 이러한 출판물을 검열 당국이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출판물이 인쇄소에서 떨어져 나오자 마자 곧 발매 금지( 發 賣 禁 止 ) 몰수( 沒 收 ) 처분을 받았다. 그러므로 박열 측에서는 언제나 잡지 인쇄 공장을 절대 비밀에 붙여둬야 했었고 몰수를 당하드라도 될 수 있는대로 경찰의 장악에서 벗어나는 부수가 많게하여 비밀 반포를 하게끔 버티고 경찰에서는 될 수 있는대로 그런 탈출구 를 막아보려고 힘쓰는 등, 잡지 출간기가 되면 언제나 양자 간에는 전쟁 상태가 벌어지곤 했다. 또 소위 내검열( 內 檢 閱 )이라 하여 인쇄에 붙이기 전에 교정쇄( 校 正 刷 )를 검열 당국에 미리 제출 하여 저촉되는 개소를 지적받아 지형( 紙 型 ) 동판에서 깎아내고 인쇄하는 방법도 있었다. 이것은 발매 금지 몰수를 면하는 편익은 있으나 박열의 현사회 지로 말하면 전문 삭제를 하여야 하 박열 독립운동사 93

94 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이런 것을 인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다만 깎으라는 개소를 제 대로 깎지 않고 비밀 발행을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위험성이 동반하는 고된 전쟁이 었다. 이러한 악조건 밑에서 박열은 잡지 발행을 계속했다. 그는 출판 비용 조달과 잡지 보급에 관한 용무 등 주로 대외 활동을 담당했었고, 금자문자는 잡지 편집과 원고 쓰기 등 내부 일을 맡아서 했다. 그녀는 뛰어나는 문필가였다. 박열의 이름으로 발표된 논설 기사는 대부분이 그녀 가 대필( 代 筆 )하였던 것이라 한다. 박열은 이 당시 그 뒤의 사건 발생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일, 또 한 가지 일을 했다. 그것은 곧 비밀 결사=불령사( 不 逞 社 )의 조직이었다. 당시는 아직 이른바 치안유지법( 治 安 維 持 法 )의 제정이 없었고, 결사 집회 관계의 규제( 規 制 )에는 명치( 明 治 ) 시대부 터 있어 오는 치안경찰법( 治 安 警 察 法 )이 있을 뿐이었다. 이것을 후일의 치안유지법 에 비하 면 거의 경법( 輕 犯 ) 처벌 규칙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박열은 잡지 발행 사업도 그렇게 힘 이 들고 기타 집회와 단체 운동에도 제한이 하도 많으니, 애여 치안 경찰법 의 존재 같은 것 은 무시하고 반일( 反 日 ) 행동 단체로서의 불령사 를 세웠던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사원을 일제히 검거하게 된 일제의 구실이었거니와 잡지 제호로 쓰기에 두 번씩이나 금지된 불령 사 을 굳하여 단체 칭호에 썼었다는 점에 역시 비밀은 깃들어 있었다 하겠다. 당시 박열과 금자문자는 벌써 동서( 同 棲 )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적의 현사회 지상에서 그 녀는 자주 박문자( 朴 文 子 )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박의 아내임을 스스로 공언하였다 하려니와 당시 동지 사회에서도 그들의 내연 관계를 공인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은 극히 간 고했다. 잡지 발간회를 조달하고, 또 생활비도 마련하여야 하니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박순천 ( 朴 順 天 )의 회고담에 의하면 박열은 순천보다 네 살 아래였으므로 순천을 누이라고 부르며 자주 찾아 다니고 늘 군자금( 軍 資 金 ) 이라면서 돈을 꾸어갔다. 당시 경응 대학( 慶 應 大 學 ) 이재과 ( 理 財 科 )에 재학하던 변희용( 卞 熙 瑢 )은 박열의 흑도회원이었고 아직 순천과는 미혼중( 未 婚 中 )이 었다. 회용이 순천에게 구애( 求 愛 )하는 의미도 있었겠지마는 순천의 생일 선물로 당시 12원( 圓 ) 이나 하는 값비싼 책이던 국민경제강화( 國 民 經 濟 講 話 )를 사준 일이 있었다. 박열은 군자금을 청 구하러 왔다가 현금이 없다고 하면 그 책을 빌어다가 전당포에 맡기고 5원을 변통해서 쓰고 뒤 에 다시 찾아다 돌려 주곤 하기가 일쑤였다 한다. 그런데, 금자문자는 일본 국적을 가졌으나 실상 조선서 자라난 아주 불우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박열과 동갑인 1902년 어머니 금자성녀( 金 子 姓 女 )의 사생자( 私 生 子 )로 이 세상에 태어났었다 이 사실은 그 어머니가 일본 광도현( 廣 島 縣 ) 안예군( 安 藝 郡 ) 음호정( 音 戶 町 )에서 전 순사 좌백문일 박열 독립운동사 94

95 ( 佐 伯 文 一 )과 술집 영업을 하면서 문자를 포태했었는데 문자가 아직 출산되기 이전에 두 사람은 헤어졌기 때문에 사생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외가집에서 나서 어머니 성을 따라 금 자문자 라 이름하고 자랐으나, 네 살에 이르기까지 호적에 들지 못하고 있다가 여섯 살 적에야 어머니 친정인 일본 산리현( 山 梨 縣 ) 동산리군( 東 山 梨 郡 ) 취방촌( 諏 訪 村 ) 산구( 杣 口 )의 금자 가 ( 家 )에 이모( 姨 母 )가 난 자식이라고 가탁( 假 託 )하고 입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달리 개가하였기 때문에 문자는 이붓 아비 밑에서 천더기로 무척 고생하며 자라다가, 그녀가 아홉살 적에 그 외숙이 조선 이민을 오게 되니 그를 따라 처음에 김천( 金 泉 )에 와 살다가 나중에 경부선 ( 京 釜 線 ) 부강역( 芙 江 驛 )전에 옳겨 살았다. 열한 살에 비로소 일본인 심상소학교( 尋 常 小 學 校 )에 입학하여 글자 쓰기와 글 읽기를 배웠다. 천성이 총명한 그녀에게는 이제 별천지가 열리었다. 즉 그녀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 외에 신문 잡지 등을 탐독하여 사회 물정과 세상 환경에 관한 지식을 흡수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편, 그녀의 외숙은 약포( 藥 舖 )라는 간판 밑에서 아편 잠매( 阿 片 潛 賣 )를 전업하고 있으니 문자로써는 참을 수 없다 하는 터에, 외숙과 외숙모는 무슨 기집애가 가사일 돕기에는 정신 없이 책만 들고 앉아 있다고 욕설을 퍼부으며 볶아대니, 문자는 이 악마의 소굴 같은 데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다 결심하고, 1920년 4월 12일 그 집을 도망쳐 나와 부산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문자 당년 19세요, 3.1운동 이듬해이니 그녀 는 조선이 일제의 폭정에 항거하여 거족적 독립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그 열렬한 모습을 현지에 서 실지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문자가 대판( 大 阪 )까지 왔을 때에 여비가 딱 떨어져서 그녀의 새로운 고난이 시작됐다. 신문 팔 이를 하고, 남의 집 처마 끝에서 노숙하며, 때로는 끼니를 걸르면서 겨우 동경까지 도착했다. 동 경서도 얼마 동안 그 식으로 지내다가 어떤 요식점( 料 食 店 )에 고용되어 오전 중 손님이 없는 틈 을 타서 정칙 영어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계속했다. 여기서 신산초대( 新 山 初 代 )를 만났다. 후 일 불령사원이 된 이 신산초대는 문자보다 조금 언니였다 한다. 두 여성은 의기 상통하여 서로 토론하고 연구하던 끝에 당시 일본 사상계에 세력을 펴고 있던 사회주의에 공명하게 되었고, 문 자는 박열을 알게 되었다. 문자는 총명하고 정의감( 正 義 感 )에 강하며 또 문재가 있었다. 그녀는 일제가 조선에서 범하고 있는 죄악적 정책과 그 행동에 관해 현지에서 실지 목도하며 증오를 금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박열이 일제에 항거하여 제일선에서 투쟁한다 할 때에 곧 공감이 갔던 것 이다. 그녀가 박열에게 대하여 얼마나 기대하며 존경했었던가는 만일 조선에 박열과 같이 열 렬한 투사가 30명만 있다면 조선 독립의 당장 전취( 戰 取 )는 물론, 조선 민족은 참말 전세계를 제 박열 독립운동사 95

96 패할 수 있을 것이라 고 했다는 에피소우드를 갖고 짐작이 간다 하겠다. 박열이 흑도회를 조직하고 헌사회 등 기관 잡지를 발행하며 한창 활동 중이던 1922년 7월 일본 신석현( 新 潟 縣 ) 탄광에서 조선인 노동자 근 백여 명을 살상했다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노동시장( 勞 動 市 場 )이 아직 완전 자유화되지 못하고 전근대적( 前 近 代 的 ) 잔 재가 남아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신석현 그 탄광에는 소위 감옥방제도( 監 獄 房 制 度 )라 는 것이 남아 있어서 외부에서 노동자들을 감언이설로 유인하여 광산 노동 판에 끌어들인 후, 그 광산이 사설한 감옥방에 그 노동자들을 강제 수용하고, 저임금( 低 賃 金 ) 장시간 기타 극한적 인 악조건 하에서 혹사하다가 만일 탈출 도망하려는 자가 있으면 용서 없이 체포하여 구타하며 혹 사살( 射 殺 )까지 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에 당시 일본으로 거의 무작정 도항( 渡 航 )해 갔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걸려들어서 사실상의 노예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가, 집단 탈출하려는 것을 감시대( 監 視 臺 )가 발견하고 사격을 가하여 백여 명의 사상자가 나고, 아직도 적지 않은 수가 억 류당해 있다는 내용의 사건이었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기는 구사 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한 당사자가 이 어마어마한 노동 지옥 의 실상을 폭로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박 열은 곧 당시 동경 있는 조선인유학생회 간부들과 연락하여 신석현( 新 潟 縣 ) 조선인노동자학대사 건( 朝 鮮 勞 動 者 虐 待 事 件 ) 진상조사단( 眞 相 調 査 團 )을 구성한 후 조사단을 이끌고 현지에 급행하는 한편, 동경과 대판( 大 阪 ) 등 일본 국내 중요 도시에서 규탄 연설회( 糾 彈 演 說 會 )를 열었다. 우리 국내에서도 민간 신문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전 민족을 격분시켰다. 진상조사단에서는 서울 서도 연설회를 열고저 하였으나 경찰의 금지로 부득이했다. 이와 같이 국내외의 여론이 환기되니 일본 정부에서도 방치할 수 만은 없어서 결국 이 사건이 계기로 일본의 전 근대적 노동 감옥방 제도가 폐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만 신석현 뿐만 아 니라 북해도( 北 海 道 )와 화태( 樺 太 -지금의 사할린)에도 마찬가지의 감옥방 제도가 있다는 사실이 그 뒤 일본 언론 기관에 의하여 떠들썩하게 보도되니, 여기서의 전근대적 유제( 遺 制 )들도 일소 될 수 밖에 없었다. 이 신석현 사건은 일본 노동시장의 근대화를 위하여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 라 일제의 조선 통치 정책의 맹점( 盲 點 )과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즉,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통치 10년이 지나지 못해서 우리 민족 대중의 생활은 점점 궁핍화하여 농민의 다수가 남 북 만 주 각지에 이주유랑( 移 住 流 浪 )하고, 국내에서는 화전민( 火 田 民 )이 부쩍 늘어나고, 일본에 도항하 는 노동자가 격증하였다. 이 도항 노동자는 거리 관계상 삼남( 三 南 ) 출신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들은 거의 전원이 일본말에 통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조선 옷차림으로 어떤 사람은 상투를 틀 박열 독립운동사 96

97 고 갓쓴대로 무작정 건너 갔었다. 따라서 거기서 직업을 변변히 얻어 잡을 수 없고 옥외( 屋 外 ) 토목 공사( 土 木 工 事 ) 판에서 날품팔이를 하다가 신석현 탄광과 같은 감옥방 노예 노동에 휩쓸려 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신석현 사건을 문제삼아 박열 등이 맹열한 활동을 하였음은, 또한 일제의 조선 통치가 우리 민족사회의 맨 밑바닥에 가져온 궁핍화 현상에 대하여 공세( 功 勢 )를 취한 것이 된다. 이때 이래로 박열의 성가가 일본과 우리 국내에서 크게 선전되었음은 결 코 이유 없지 않았다 하겠다. 이 당시 박열은 또한 본장 제2절에서 이미 언급하여 둔 바와 같이 총독부에서 세운 아부충가( 阿 部 充 家 )가 뻗혀 오는 회유의 손길에 걸려들어 그로부터 학자금( 學 資 金 )을 얻어 쓰려는 우리 유 학생 중 타락 분자의 발생을 극력 경계하고, 또 발견 되는대로 이를 실력 제지( 實 力 制 止 ) 했다. 그러다가 국내에서 소위 사기 공산당( 詐 欺 共 産 黨 ) 사건이란 것이 생겨서 그 관련자의 한 사람인 장모( 長 某 )가 국내에서 좌익계 청년들에게 시달리다 못해 미국에 공부 간다고 동경에 들린 것을 박열은 그의 뒤를 밟아 횡빈( 橫 濱 )까지 따라가서 실력 행사를 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이던 유 광렬( 柳 光 烈 )의 회고담에 의하면 실상 장 모는 이 사건에서 억울하게 당하였다 한다. 그의 설명 을 들어보면 사건의 발단은 이동휘( 李 東 輝 )가 혁명 러시아에 교섭하여 조선 독립운동자금 원조 를 한다고 당시 노화( 露 貨 ) 40만 루불에 해당하는 금괴( 金 塊 )를 받아다가 그 중 5만원을 국내 공 작비로 장에게 보낸 것을 장은 전액을 최 모( 崔 某 )에게 넘겨 주었더니, 그 뒤 이 자금의 거처( 去 處 )에 관하여 말썽이 난 다음에야 최는 돈을, 대여 민족 대표 중 한사람이던 박희도( 朴 熙 道 )를 사장으로 하고 동아일보 논설 위원이던 김명식( 金 明 植 )이 주관하는 사상 잡지 신생활사( 新 生 活 社 )를 설립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당시 박열이 입수한 정보는 국내에 들어온 자금액은 20만 원, 그것을 장이 총독부와 짜고 전액 착복 하였으며 장이 미국가서 쓸 학자금도 실상은 그 돈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부정행위를 그냥 묵과할 수 없다 함이 당시 박열의 입장이었다. 그 는 사회사상상의 계열( 系 列 ) 관계를 따지기 이전에 민족을 대신하여 부정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 에 대한 응징에 나섰던 것이다. 1922년 4월 중의 일이었다. 1923년 9월 1일 상오 11시 58분 일본 동경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일본의 관동( 關 東 ) 지방을 휩쓴 이 대지진은 삽시간에 동경 횡빈( 橫 濱 ), 삼포반도( 三 浦 半 島 ) 전역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지진 자체가 입힌 파괴도 컸으나 그 직후에 도처에서 일기 시작한 화재로 동양 제일을 뽐내던 동경은 가옥의 3분의 2가 도괴, 또는 불타버리고 불과 18시간만에 초토화하고 말았다. 동경에서만도 17 만 4천여 명이 사망했으며, 당시 목조 건물이 대부분인데다가 지진으로 수도물이 끊어져 불길을 박열 독립운동사 97

98 잡을 수가 없었다. 특히, 본소구( 本 所 區 ) 육군( 陸 軍 ) 피복창( 被 服 廠 )에서 일어난 참상은 이루 형 언하기 힘들 정도였다. 불길을 피해 피복창의 넓은 마당에 몰려든 피난민들은 사방에서 포위해 들어오는 불꽃과 연기속에 아비규환( 阿 鼻 叫 喚 )의 지옥을 이루었고, 여기서 만도 3만 2천여 명이 죽었다. 이렇게 엄청난 천재를 당한 당시 일본인들을 처음에는 그저 놀라고 비탄할 따름이었으나 어디 서인지 모르게 사회주의자와 조선인들이 방화( 放 火 )했다 불령 선인( 不 逞 鮮 人 )들이 혼란을 틈타서 습격해 온다. 조선놈들이 부녀자를 능욕하고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 는 등의 유언 비어( 流 言 蜚 語 )가 퍼지기 시작하자 군중 심리적인 자극을 받은 일본인들의 분노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일본인들은 군 경 민할 것 없이 일본도( 刀 ) 대창( 竹 槍 ) 몽둥이 등 온갖 흉기를 동 원 초토화한 거리를 수천 명씩 몰려 다니면서 조선 사람과 사회주의자를 색출해 가지고는 무차 별 학살을 감행했다. 이것이 관동 대진재 조선인 학살 사건이요, 심천구( 深 川 區 ) 구호( 龜 戶 )에서 의 사회주의자 집단 살해 사건이었다. 완전히 이성( 理 性 )을 잃고 미친듯이 날뛰는 이때 일본인들은 나중엔 머리뒤가 납작한 사람만 보 면 센징 (조선놈)이라고 규정, 손을 댔었기 때문에 일본인 중에서도 조선 사람으로 오인되어 피살되는 사례까지 생겼다. 전기 사회주의자들이 집단 살해되었다는 구호경찰서 관내에서 만도 3백 80명의 조선 사람들이 학살됐다. 9월 2일에는 기병( 騎 兵 ) 1개 중대( 中 隊 )가 연병장( 練 兵 場 )에 수용되어 있는 조선 사람을 처음엔 총으로 쏘아 죽이다가 총성 때문에 인근 사람들이 놀란다고 해서 나중엔 칼로 베어 죽였는데 그 중 임신한 부인의 배를 갈라 태아가 울음을 터뜨리자 그 태 아마저 찔러 죽이더라고 한 목격자가 후에 전했다. 또 선교정( 船 橋 町 )에서는 군인이 호송해 가 는 38명의 조선 노동자를 소위 자경단원( 自 警 團 員 ) 수백 명이 대창 몽둥이 일본도 갈고리 등 을 들고 습격, 마구 찔러 죽이고 땅에 꿇어앉아 살려달라고 비는 것도 겨우 어린이 1명만 빼놓 고는 한사람 남김없이 학살해서 길바닥에 버렸다. 그들은 시체를 물속에 던지기도 했는데, 우전 천( 隅 田 川 ) 영대교( 永 代 橋 ) 밑으로는 1천 2백 3백 구의 손발이 꽁꽁 묶인 조선 사람 시체가 떠 내려 왔다고 한다. 그 우전천에서 끌어 올린 조선 부인 시체 하나는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었 다. 등에 한 어린이를 업고 가슴과 양 팔에는 두 어린이씩 모두 다섯 아이와 엉켜 죽어 있더라 고 일본인 목격자 누군가가 말했다고 전한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일본 정부는 계엄령 ( 戒 嚴 令 )을 펴고 조선 사람들을 여러 군데에 집결시켜 보호하는 척 했으나, 미쳐난 일본인 군중 들은 그 집결소를 찾아다니며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박열 독립운동사 98

99 이 당시 일본 군부의 악질 분자와 우익 반동 단체는 우리 교포 학살 외에 저들 용어로써 사회 주의자 사냥 이라는 것을 감행했다. 그것이 위에서 잠시 언급했던 소위 구호사건 이요, 또 대삼영 부처( 大 杉 榮 夫 妻 ) 학살 사건이었다. 구호는 동경의 공장 지대요, 빈민촌( 貧 民 村 ) 지구인 심천구( 深 川 區 )의 일부분 이었다. 이러한 지대였으니 만큼 사회주의자 노동조합 운동자들이 많 이 살았고, 또 우리 교포들도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반동들이 발동하여 사회주 의자라고 지목 받던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잡아 죽였다. 혹 조선인 학살에 동조하기를 꺼려하는 보통 일본 사람에겐 너도 사회주의자로구나 하며, 죽이고 조선 사람은 모두 사회주의자라 인정하며 죽이는 등 그야말로 옥석구분( 玉 石 俱 焚 ) 격의 참변이었다. 조선인 대학살의 풍문이 우리 국내에 퍼져 들어 올 것을 두려워한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유언 비어( 流 言 蜚 語 ) 취체령( 取 締 令 )을 재빨리 우리 국내에서도 실시했다. 그리고 당시 총독 재등실 ( 齋 藤 實 )은 9월 21일 께인데도 지금까지로는 확실한 증거가 없고 조선인 피해자는 겨우 2명을 알 고 있을 뿐이라고 잠꼬대 같은 수작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가 바로 문화 정치 를 표방하고 내임했던 일본 총독이었다. 저들이 얼마나 비양심적이며, 기만적이었던가 함을 알 수 있을 것이 다. 관동 대진재, 조선인 대학살, 사회주의자 사냥, 이러한 북새통에 박열과 그의 불령사 동지들 일 행 16명이 동경 경시청에 검거되었다. 사건 관련자 중 한 사람이던 육흥균의 증언에 의하면 그 는 그 이전에 고향인 경북 선산군( 善 山 郡 )에 돌아와 휴가 중 추석( 秋 夕 )을 맞이하고 있을 적에 경찰이 덮쳐 들어 조선옷을 입은채 잡혔다 한다. 그것이 바로 8월 28일이었다. 경찰관의 호송을 받으며 부산서 배를 타고 문사( 門 司 )에 내리니 거기에는 벌써 경시청 형사들이 와서 기다리다가 호송을 인계했는데, 그때 보니 김 중한도 꼭 자기와 같은 꼴(조선옷 차림)로 잡혀 오고 있었다. 김 중한도 그 이전에 고향인 평남 용강군( 龍 岡 郡 )에 돌아가서 쉬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보면 불령사의 검거는 관동 대진재 직전에 시작되었었음이 확실하다. 이 사실은 일행에게 오히려 다 행하였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일행 중 전원은 조선인 학살 또는 사회주외자 사냥 어 느 한 쪽이다, 혹은 양쪽에 모두 걸리는 대상자들이었는데, 경찰에 미리 검거됐었기 때문에 그 어느쪽의 재난( 災 難 )에서도 피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때의 검거 사건이 박열의 대 역 음모 라는 큰 사건을 배태( 胚 胎 )하고 있을 줄은 아무도 박열이나 금자문자 자신들까지도 그 당장에는 몰랐었다. 그 때 검거된 불령사 16명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상과 같이 이들 중에는 일본인 동지 남녀 5명을 포함하고 있어서 그들이 전원의 약 3분의 1을 박열 독립운동사 99

100 차지하고 있는 사실에 관하여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당시 일본의 사회주의 사상 운 동자들은 특히 3.1 이후의 우리 민족 독립운동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장래 일본의 사회 개조 내지 사회 혁명의 실현은 조선 민족 독립 투쟁과 제휴한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지 고 우리 민족 운동을 대하는 듯 하였다. 그래서 1919년 년말 상해 임시정부 대표 여운형( 呂 運 亨 ) 이 일본 정부의 초청을 받아 도일( 渡 日 )하였을 적에는 특히 동경제국대학( 東 京 帝 大 ) 신인회( 新 人 會 =당시 범사회주의 사상 단체)에서는 그를 위한 환영회를 열었으며, 그 석상에서 대삼영( 大 杉 榮 )은 조선 독립 만세 를 선창했다. 이 대삼영은 그 뒤 일본을 탈출하여 상해에 밀행하였을 때에도 여 운형과 비밀 회담을 했었고, 일본에 유학하는 우리 대학생 간에서 적지 않은 지면( 知 面 ) 관계를 갖고 있었다. 하여간 전기 다섯 명 일본인 동지들 중에서 신산초대는 면소 출옥한 직 후 결핵성( 結 核 性 ) 질환으로 죽었고, 율원 일남은 박열 금자문자 재옥 중, 열심히 옥바라지를 하다가 1925년 대구진우연맹( 眞 友 聯 盟 ) 사건에 중요 관련자의 일원으로 연좌하여 징역5년 판결을 언도 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리고 전기 명단을 보면 남북한 각도 출신 거의 전부가 망라돼 있고, 특히 충북 출신으로 승적( 僧 籍 )에 몸을 담고 있던 하세명이 들어 있음이 눈에 뜨인 다. 이는 당시 불령사가 이데올로기적 순수성보다는 반일( 反 日 ) 민족 투쟁이라는 공약수( 公 約 數 ) 선에 의하여 구성되었던 운동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겠다. 요컨대 박열의 불령사는 당시 우리 나라 역사적 한 단면( 斷 面 )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의 불령사 검거 사건이 3단계적 발전 을 거쳐서 박열 금자문자의 대역 사건으로까지 확대되었음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박열 금자문자 김중한 등 3명을 제외한 불령사 동지 13명이 증거 불충분으로 면소 출감하기는 1924년 8월 달의 일이었다. 박열 대역 사건이란 것이 한번 발표되자, 일본 전국의 각 신문들과 우리 국내 신문들은 연일 대 서 특필로 이를 보도하고 박열의 동지들은 물론, 동경의 조선유학생학우회( 朝 鮮 留 學 生 學 友 會 )가 총궐기 태세로 재옥 중의 박열을 원호했다. 당시 박열은 25세 작지도 크지도 아니한 키에 명주 흰 두루마기와 흰 바지 저고리에 조끼를 바쳐 입고, 한쪽 가리마로 단정하게 깎은 머리에 곱게 빗질하고, 언제나 온유한 미소를 지으며 찾아 오는 면회객들을 맞았다. 또 형무소(당시 동경시 곡[ 牛 込 區 市 谷 ] 형무소)측에서도 대우를 극진히 하여 면회 장소로써는 전옥( 典 獄 )의 응접실을 개 방했고, 면회실로 박열을 안내하고 입회( 立 會 ) 하는데는 반드시 간수장( 看 守 長 )이 했다. 금자문 자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으나, 면회객과 재감인 사이에 응접 테이블을 놓고 서로 대담을 할 수 있게 했다. 그것도 보통 옥규( 獄 規 )에는 없는 대우였다. 그리고, 당시 금자문자는 박열 독립운동사 100

101 어엿한 일본 부인복에 두루막(일본어의 하오리)을 곁들어 입고 있었다. 그녀는 근시( 近 視 )여서 옥중에서도 안경 쓰는 것이 허용됐었다. 그녀는 옥중에서 매일 독서에 열중하고 있다는 이야기 였다. 그녀도 기분이 지극히 명랑하여 사건의 귀취가 어찌될 것인가 하는 데 관해서는 아무 걱 정 근심도 없는 모양 같았다. 이 무렵부터 변호사 포시진치( 布 施 辰 治 )의 활동이 전면에 크게 나 타났다. 그는 당시 우파( 右 派 ) 사회주의 계통에 속하는 일본 전국 법조계의 실력자로 박열사건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농민들의 소작 쟁의( 小 作 爭 議 )가 성행하니 그는 자진하여 무료 변호차 내 한했었고, 또 우리 민간 단체의 초청을 받아 서울서 조선 소작 쟁의 진상 보고 강연회 를 열 기도 하였었다. 그는 박열 대역 사건이란 것이 공표되자 곧 자진 변호계( 辯 護 屆 )를 제출하고 방 대한 사건 심문기록을 등본( 謄 本 )하며 박열을 누차 단독 면회하여 사건 진상을 규명하면서 공판 에 임할 준비를 진행했다. 그는 사금( 謝 金 )을 요구하지 않았음은 물론 기록 등본 등에 요하는 적 지 않은 비용 일체를 자비 부담했다. 다만, 그와 긴밀히 연락하는 임무만을 박열 동지인 장 상중 과 당시 유학생 학우회 회장이며 간부이던 조헌영( 趙 憲 泳 ) 윤길현( 尹 吉 鉉 ) 등이 맡고 있었다. 위에서 박열의 일본 황실에 대한 소위 대역 음모 사건이란 관동 대진재 조선인 학살 사건과 유관하다 함을 지적하였거니와, 그 학살 사건의 진상은 그 뒤 어떻게 판명 되었던가. 당시의 동 경( 東 京 ) 조선유학생학우회( 朝 鮮 留 學 生 學 友 會 )의 진상조사단( 眞 相 調 査 團 )이 한 달여에 걸쳐 밝혀 낸 피학살자의 수는 4천 9백 명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 숫자는 확실한 근거에 의해 확인된 것일 뿐이고 실지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나 진상 조사단이 얻은 더욱 중요한 부분은 대학살의 원인이 된 유언비어의 출처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10월 22일자 보지 신문[ 報 知 新 聞 은 유언의 근원은 9월 1일 밤 횡빈( 橫 濱 ) 형무소에서 풀려나온 죄수들이 각처에 서 능욕 강탈 방화 등 여러 가지 악행을 범하면서 돌아 다녔는데, 그것을 조선인의 소행이라 잘못 알고, 소문이 전광적( 電 光 的 )으로 전파되었었다고 보도했었으며, 내무성( 內 務 省 ) 경보국( 警 報 局 )측에서는 이 소문은 횡빈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입헌노동당( 立 憲 勞 動 黨 =당시의 우익 반동 단체)의 산구정헌( 山 口 正 憲 ) 일파가 퍼뜨리며 돌아다녔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조사단이 밝혀낸 바로는 유언 비어의 출처는 내무성과 경시청, 그리고 군부의 최고 간부 몇 사람이 모였던 비 밀 회담이었다 는 결론을 얻었다. 이같은 사실은 내무성 경보국장이 각 지방 장관에게 보낸 전 보문 등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도대체 진재 당시의 일본 내무 대신은 수의연태랑( 水 野 鍊 太 郞 )이 었다. 그는 우리 3.1운동 당년 9월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政 務 總 監 )이 되어 총독 재등과 함께 부임하다가 남대문 역두에서 강우규로부터 폭탄 세례를 받았으니 우선 조선 사람에 대한 감정 박열 독립운동사 101

102 이 좋지 못했다. 적어도 조선이 일제에 대한 반항적 민심이 지극히 험악함을 그는 알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일본은 우리 3.1운동 전년인 1918년에 쌀소동( 米 騷 動 )이란 이름의 민중 폭동이 동경 대판을 비롯한 전국 중요 도시에서 일어나 군대까지 출동해서야 겨우 진압( 鎭 壓 )했던 쓰라린 경험을 치렀던 터이라, 관동 대진재와 같은 비상 사태하에서도 그러한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지 않고, 이번에는 조선인과 사회주의자가 합세하여 그러한 사단( 事 端 )을 벌릴 것이라는 일종 강박 관념( 强 迫 觀 念 )에 저들은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하여 저들은 사전 예방 조처로써 조선인 학살과 사회주의 사냥을 계획적으로 저질렀다 함이 우리 유학생 학우회 조사단이 내린 결론이 었다. 유학생학우회에서는 이 사실을 국제 여론에 호소하려 했으나 일본 관헌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 지 못하였다. 당시 일본 정부가 이 문제에 관하여 얼마나 신경을 날카롭게 하고 있었던가는 당 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상협( 李 相 協 )이 사내에서 자원하여 진상 조사 취재차 동경을 갔었는데, 중도 교통이 두절되는 등 사고로 천신 만고하며 겨우 동경에 도착, 사건 진상도 그 윤곽을 파악 하였을 적에 예의 아부충가( 阿 部 充 家 )(전 경성 일보 부사장으로 동경 조선인 유학생 회유를 담 당하고 있던 자)가 헐레벌떡 찾아와서 그대까지도 계엄 사령부에서 처치하겠다는 것을 그대가 취재한 사실을 신문 기사화하지 않을 것은 물론, 그대만 알고 있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 함을 조건으로 겨우 무마( 撫 摩 )해 놨으니 속히 퇴거하라 고 등을 떠밀어 내다시피 했다는 한가 닥 곡절( 曲 切 )을 갖고도 짐작이 간다 하겠다. 또 일본 정부는 소위 유언 비어 취재령 이라는 긴급 법령을 발포 실시했지마는 이는 조선 사람을 악선전하는 유언 비어를 단속하기 위해서이 기 보다도 조선인 학살 사건에 관한 정보가 전파됨을 막기 위한 목적에 전용됐었다. 할 수 없이 유학생 학우회에서는 진상 조사를 마치자, YMCA 회관에서 관동대진재( 關 東 大 震 災 ) 피학살동 포추도회( 被 虐 殺 同 胞 追 悼 會 ) 를 열었다. 여기에 일본 경찰이 또 개입하여 우선 피학살 중, 학( 虐 ) 자를 못 쓰게 하고, 각 단체에서 보내온 만잠( 輓 章 )에도 학자는 일일히 먹을 지우거나 흰 종이를 오려 붙이게 했다. 또 조사( 弔 辭 )를 읽는 사람이나 구연자( 口 演 者 )가 입밖에 학 자 가 튀여 나오기만 하면 임석 경찰이 예외 없이 검속해 갔다. 그러나 이래 매년 9월 1일 진재 기 념일이면 유학생회 주최로 이 행사가 되풀이 되었다. 그때마다 경찰대와 참석 대중과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서 30 50명의 피검속자가 나곤했다. 이날만은 사상적 계열( 系 列 )의 구분 같은 것 은 완전히 초월하고 오직 조선 민족이 일제 학정에 대해 쌓이고 쌓였던 울분을 터치기 위하여 민족 이 한 자리에 모이는 기회를 삼았던 것이다. 박열 독립운동사 102

103 이와 같이 조선인 대학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본 정부가 곤경에 빠진 기회를 이용해서 예심 판 사 입종 회청은 박열을 설득하여 그 소위 대역 음모 사건이란 것의 자인( 自 認 )을 얻어 내려 했 다. 박열은 검사정( 檢 事 廷 )에서부터 태도가 아주 강경하여 검사가 작성한 조서( 調 書 )를 읽어보고 자서( 自 書 )하라는 것을 몇 번이고 찢어 버렸으며, 옥내 대우가 나쁘니 너희가 정 이럴진대 절식 자진( 絶 食 自 盡 )하고 말겠다고 며칠씩이나 밥 먹기를 거부하며 단식으로 항쟁하기도 했다. 예심 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박열이 자인하지 않는 이상 조서를 제대로 꾸밀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박열 설득 공작이었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공작이 입송 위에 있던 상부 지시에 의한 것인지 공명심에 탐이 난 입송 개인의 일방적 계교였던지는 분명치 않 다. 아마도 후자의 가능성이 더 많았을지 모른다. 그는 우선 형무소 당국과 연락하여 옥중에서 의 기거 음식 절차 보건 의료 등 박열에 대한 특별 대우를 하게 하고, 또 박과 문자를 예심정 으로 불러 내서 조사하는 척 하다가는 특별실에 두 사람만 남아 있게 하고 재판소 직원들은 물 론, 호송에 따라온 형무소 간수들까지도 일체 접근을 금지하면서 3~4시간씩이나 자유 방임하기 도 여러 번 했다. 그리고 차분하게 달래며 관동 대진재 조선인 학살 사건을 들어서 설명하고 일 본은 지금 조선 통치상, 또는 국제 체면상, 이 불상사에 대한 변명 거리가 될 수 있는 희생 제물 을 찾고 있던 차에, 그대의 대역 음모가 적발되었다. 그러므로 그대가 아무리 사건을 부인하려 해도 면할 길이 없이 된 국면( 局 面 )이라면서, 노상 일본의 무슨 국가 기밀( 國 家 機 密 )이라도 털어 놓는 듯이 또 헤어 나올 수 없는 함정에 빠진 박열을 동정이나 하는 듯이, 입송은 박열 설득에 전력을 기울였다. 한번은 박열이 고향에 있는 어머니 정 씨( 鄭 氏 )가 아들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심히 걱정하여 친 히 면회 오겠다는 것을 아직 말리고 있는 데, 우선 사진이라도 찍어 보내고 싶다 하니 입송은 이를 쾌락하고 1924녈 5월 2일이었거나 7월 9일, 또는 10월 7일 중 어느날 재판소 본관 예심실에 서 서기( 書 記 ) 오산모( 奧 山 某 )도 간여하게 해서 박열과 금자문자가 함께 사진을 촬영하게 했다. 그 중 한벌이 후일 외부에 유출되어 저 유명한 소위 괴사진( 怪 寫 眞 ) 사건으로 터져나서 입송 자 신이 신세를 망치고, 나중에 내각경질( 內 閣 更 迭 ) 사태에까지 번지게 되었음은 운명의 작희( 作 戱 ) 도 기이하다 않겠다. 그러나, 아무리 입송의 설득이 은근하고 그의 박열 대우가 아무리 융숭하 다 할지라도 그런 것에 꼬임을 당하거나 그런 것으로 말미암아 꺾어질 박열이나 금자문자가 아 니었다. 그러나, 어찌 어찌하다 보니 박열의 대역 사건은 입송 예심 조서에서 성립이 되어 1925 년 5월 이 사건을 대심원 공판에 회부하기로 예심 종결을 보았던 것이다. 박열 독립운동사 103

104 이상과 같은 경위를 거쳐서 박열의 대역 사건은 성립되었으며, 대심원( 大 審 阮 )에서 단 한번의 재판만을 할 수 있도록 한 당시 일본 법제상 규정에 의하여 대심원 공판이 열리게 되었는데, 재 판장은 당시 대심원장이던 목야국지조( 牧 野 菊 之 助 )였다. 박열은 재판 개정에 관련하여 재판장에 게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조건을 통고한다. 첫째 자기는 피고인( 被 告 人 )이 아니라 조선 민족 대표자로써, 조선의 주권( 主 權 )을 강탈한 일본 대표자와 담판하는 위치에 있다. 둘째 좌석은 재판장과 대등좌석( 大 等 坐 席 )으로 할 것. 셋째 자기는 조선의 예복으로 정장( 正 裝 )하고 용어( 用 語 )는 조선 국어( 朝 鮮 國 語 )를 사용한다. 넷째 재판하기 전에 조선 민족 대표로써 선언문( 宣 言 文 )을 낭독한다. 이에 대하여 대심원 심판부에서는 여러 날 동안 숙의한 결과, 박열은 조선 시대의 구관복( 舊 官 服 )이며, 또 당시까지만 하여도 신혼 신랑이 혼례식 예복으로 입던 사모 관대( 紗 帽 冠 帶 )의 예복 을 입게 하고, 피고라는 용어 대신 재관장은 박열을 그편 (일본말의 소찌라)이라 부르고 박 열은 재판장을 그대 라 호칭하게 했다. 공판은 언제나 방청 금지 리( 裡 )에 진행되었다. 재판 정 밖에는 경찰대가 동원돼서 철통 같은 경계진을 펴고 있었으며, 구름 같이 모여든 방청객들은 재판정 안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밖에서 기다리다가 박열과 금자문자가 출정( 出 廷 )하였다 퇴정 하는 것을 먼 발치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신문 기자들도 방청이 허락되지 않았고, 오직 포 시진치 등 변호사들만이 재판장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민간인이었다. 그리고 재판이 시작되 기 이전에 아마도 변호사 포시의 주선이었다고 기억되는데, 박열과 금자문자는 재판부의 양해 하에 재감 중이던 시곡 형무소 소재 지번( 地 番 )을 주소로, 정식 결혼계( 結 婚 屆 )를 동경시 우입구 구청에 제출하였다. 이로써 박열과 문자는 정식 부부가 된 것이었다. 1926년 3월 25일 일본 대심인 공판정은 박열과 금자문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박열은 의연한 태 도로 미소를 지으며 재판장 자네 수고하였네 했고, 금자문자는 만세 3창을 불렀다. 이 판결 언도는 기정 사실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아무도 놀라거나 의외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 나 일본 정부는 또 한번 잔재간을 부렸다. 천황의 특별 은사( 恩 赦 )라 하면서 그 해 4월 5일에 박 열과 금자문자에게 사형에서 감일등( 減 一 等 )하여 무기 징역으로 형을 낮추어 주고, 교수대에가 아니라 박열은 천엽( 千 葉 ) 형무소에 금자문자는 우도궁( 宇 都 宮 ) 형무소 회목여감( 檜 木 女 監 )에 각 각 무기 징역수( 囚 )로 수용했다. 그리고 조선 총독은 조선 사람 들으라고, 황은( 皇 恩 )에 감읍( 感 泣 )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노라고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박열 독립운동사 104

105 그러나 이때에 우익 반동 단체의 박열 우대와 특사에 대한 반발( 反 撥 )이 일어났다. 그것이 저 유 명한 괴사진( 怪 寫 眞 ) 괴문서( 怪 文 書 ) 사건이었다. 그 사진인 즉, 장발( 長 髮 )한 박열이 일본 옷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의자에 앉아서 역시 일본 옷으로 허술하게 차린 금자문자가 좀 수줍어하 며 박의 무릎 위에 뒤로 기댄채 박에게 안긴 것이었다. 이 사진이 허가 없는 비밀 출판으로 다 량 복사( 複 寫 ) 제작되고 여기에 역시 비밀 출판으로 제작된 문서를 붙여서 정계 요로와 중요 언 론 기관 등에 뿌려졌다. 그 문서에서는 박열 금자문자는 황실에 대하여 위해를 가하고져 한 극악 무도한 국적( 國 賊 )임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을 국사( 國 士 ) 이상으로 대우해서 옥중 특별실에 기거( 起 居 )하게 하며 동서 생활까지 시키고 또 감형의 은전마저 베풀었음은 무엇이냐, 이는 정 부 자체가 국적이 된 것이 아니냐 고 정부의 처사를 맹렬히 비난 공격했다. 이른바 괴문 서 였다. 이 괴사진 괴문서가 비밀 유포되고 있는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자, 세상은 또 한번 발칵 뒤집혔 다. 당시의 일본 정부는 민정당( 民 政 黨 )의 약규예차랑( 若 規 禮 次 郞 ) 내각이었는데, 그는 곧 이 사 건에 관한 신문 게재 금지 조처를 하고, 정계 원로( 政 界 元 老 )들의 빈번한 질의( 質 疑 )와 국회안에 서의 시끄러운 야당측 질문에 대하여서는 그런 사진을 찍게 한 사실도 없거니와, 박열 금자문 자에게 특별 대우한 적도 없었다고 일관 부인해 오다가 제2 괴문서 가 나타나서 그 사진의 출처가 예심 판사 입송 회청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물의( 物 議 )는 더욱 확대됐다. 입송과 그 서기 등을 환문 조사했으나 그 이상 감출 수가 없는 궁지에 몰려들어 입송 회청을 면파[의원면 ( 依 願 免 ) 형식으로]하고 난국을 뛰어넘어 보려 했었지만 기강해이( 紀 綱 解 弛 ) 국가위신( 國 家 威 信 ) 실추( 失 墜 )라는 이유를 들어 정계내에서의 공세는 그냥 계속되고, 마침 송도유곽( 松 島 遊 廓 ) 대만은행( 臺 灣 銀 行 ) 등을 둘러싼 의옥( 疑 獄 ) 사건이 겹쳐 일어나니 결국 약규 내각 자체가 명맥을 유지할 수 없어서 무너지고 말았다. 이 괴사진이 위에서 이미 언급했던 입송의 응락과 그의 서기 오 산모의 간여하에 찍어졌던 것임 에는 틀림없었다. 사실은 그 때에 박과 금자문자가 각각 따로 한 장씩을 찍고, 또 부본( 副 本 )으 로 박과 문자가 한 의자에 앉아서 찍게 한 후, 서기 오산의 책상 서랍에 넣어서 보관하고 있던 것을, 당시 재판소 출입하던 신문 기자 석흑모( 石 黑 某 )가 알고 괴사진 다운 부본 사진 한벌을 훔 쳐내서(혹은 서기 오산과 짜고) 외부에 반출, 처음에 변호사 고정모( 高 井 某 )(박열사건과 무관)에 게로 가고 다시 우익계 인물 진천용지조( 辰 川 龍 之 助 )를 거쳐 우익계 모 단체에게 넘겨져서, 괴 사진 괴문서로 제작 출판되었던 것이라 한다. 하여간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심 판사 입송회 박열 독립운동사 105

106 청이 박열 설득을 위하여 어떠한 수단까지 동원했었던가, 그리고 박열 금자문자에 대한 옥중 대우가 왜 그렇게 파격적이었던가 하는 그 까닭도 이때에 비로소 백일 하에 그 진상이 드러났 다. 또한 이 사건으로 내각이 도괴되기도 했지마는 입송 자신도 사법관 파면을 당한 것은 말하 자면 제 도끼를 갖고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 금자문자가 무기 징역수로 당시 우도궁 형무소 분감( 分 監 )이던 회목 여감에 수용된 지 석달 밖 에 되지 않는 1926년 7월 23일 그녀가 자일( 自 縊 )해 죽었으니 시체를 인수해 가라고 1주일이나 지 나서야 동경의 변호사 포시진치에게 기별이 왔다. 마침 소위 괴사진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석하 던 터이니, 이는 문자의 자살이 아니라 옥중에서 박열과 동서하면서 임신이 되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처치에 곤란하여 교살( 絞 殺 )하였다는 풍문이 어디서인지 모르게 퍼져 돌아갔다. 이 때 동경 있던 불령사 사건 동지들인 육홍균과 장상중은 당시 흑우연맹( 黑 友 聯 盟 )의 젊은 동지들을 이끌고 휘목으로 달려갔다. 현지에 도착하여 분감장( 分 監 長 ) 이하 감옥의 관계 직원들과 만나 사인( 死 因 )을 밝히라고 엄중 담판( 談 判 )하니 저들은 당황스러워 쩔쩔 매면서도 교살했다는 풍설 을 부인하고 시체는 가매장( 假 埋 葬 )해 두었으니 실지 검증하라면서 일행을 묘지로 안내했다. 가 매장한 것을 파내서 관( 棺 )을 들어 올리니 그것은 일본인들의 매장 풍습을 따른 입관( 立 棺 )이었 다. 관의 키는 1미터 남짓하고 그 안에 시체를 앉혀서 넣었는데, 관의 윗 뚜껑을 뜯으니 시체의 머리가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므로 육홍균이 먼저 손을 대서 머리카락을 집어 들어 숙인 고개를 젖히고져 하니, 당 절 여름 더운 날씨에 벌써 입관한지 6 7일이 지난 터이라 부취( 腐 臭 ) 가 코를 찌르고 잡힌 머리카락이 는질 는질 손에 묻어날 뿐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에는 관의 앞면을 뜯으니 시체의 얼굴은 퉁퉁 부어서 문자임을 알아볼 수도 없이 되었고 손은 양쪽 모두 바짝 말라서 피골이 상접, 마치 빈 장갑( 掌 甲 ) 켜레와도 같이 희고 납작해졌었다. 할 수 없이 화장터로 옮겨서 다비( 茶 毘 )에 붙였다가 그 날 저녁에 유골을 수습하여 상자에 담아가 지고 당시 동경 고전잡사개곡( 高 田 雜 司 介 谷 )(조시가야)에 있던 변호사 포시진치 집으로 회정해 왔다. 여기서 또 한번 풍파가 일어났다. 그것은 대삼영 부처의 유골을 인수하였을 적에 우익 반동들이 그 유골마저 탈취하고저 하여 그의 동지들과 그 반동들과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던 전례가 있 으므로 이쪽에서도 미리 경비하였지마는 관할서인 고전 경찰서가 정복 경관대를 파견하여 포시 변호사 집을 포위하고 외인 출입을 금지하며 흑우 연맹 간부급 인물들을 속속 검속해 갔다. 이 래선 안되겠다고 대책을 강구한 결과 하루 저녁 날이 이미 어두어진 시각을 이용, 날씨가 하도 박열 독립운동사 106

107 더우니 어름 사러 간다 핑게하고 바케츠(양동이)에 유골 상자를 밑에 두고 그 위에 보재기를 덮 어 밖으로 반출, 처음엔 지대( 池 袋 )에 있던 율원 일남 집에 두었다가 그 뒤 몇 군데로 전전하며 경찰대를 따돌리고 당시 경북 상주에 살던 박열의 맏형 박정식( 朴 廷 植 )을 가만히 불러 들였다. 그가 왔으므로 그에게 유골을 넘겨주어 조선 땅에 묻게 했는데, 그 때 이 일을 꾸민 사람들은 아마도 박정식이 연락선을 탈 때 쯤은 발각이 되리라고 예상하였었더니, 경찰이 포시 집에서 유 골이 반출된 수일 후에야 눈치를 채고 저희들 상부에 보고했기 때문에 각 신문이 금자문자 유 골 분실 됐다고 대서 특필하여 보도했다. 동시에 전국 경찰이 긴장하여 잃어진 유골을 찾다가 산양선( 山 陽 線 ) 광도( 廣 島 ) 근처 차중에서 이동 경찰(지금의 철도 경찰)이 박정식을 만났다. 이로 부터 저들의 호위를 받아가며 문자의 유골은 무사히 상주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서 다시 문경 선영으로 옮겨 매장했는데, 당시 형사자( 刑 死 者 )는 장례를 지내지 못하며 뚜렷한 묘표(비 석)까지도 못세운다는 당시 일본 법규에 의하여 초라한 봉분( 封 墳 )만을 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금자문자의 교살설( 絞 殺 說 )은 마침내 확인이 되지 못하였다. 당시 어떤 신문 기사가 그녀는 다만 사회 제도나 현실에 반항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 운명에까지 반항한 철저한 레지 스탕스를 살았다고 평한 일이 있었는데, 꼭 적중한 것은 아니더라도 멀지 않다 하겠다. 그리고 여기서 밝혀두어야 할 것은, 문자가 죽었을 때에 그 시체를 인수하라고 산리현에 있는 금자가와 문자 어머니에게 먼저 교섭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변호사 포시에게 교섭 했었다고 일본측 문헌이 몇 군데서 기록하고 있지마는 이것은 와전( 訛 傳 )이라는 사실이다. 육홍 균이 확언하는 바에 의하면 금자문자는 일찌기 자기 친정이나 어머니에 관하여 언급함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한다. 그녀는 생모의 애정조차 알지 못하고 혹은 잊어버리고 살아 온 사람이었 다. 그만큼 그녀는 박열의 사랑과 주의상 동지애( 同 志 愛 )에 완전 포섭 동화되어 있었다는 것이 다. 그러하던 금자문자의 무덤이 경북 문경 박씨 집안 선영에서 춘풍추우 38년 돌을 맞이하는 1963년에 이르러 일본의 어떤 여류 작가(세도우찌라든가)가 문자를 주제로 소설을 쓰겠다고 자료 수집 차 내한하여 이 분묘를 찾아보고 돌아가서 일본신문에 널리 보도한 것이 계기가 돼서, 현 재 우리 국내에 있는 박열 계통 동지들과 사회 유지들이 성금을 거두어 그 해 7월 23일, 바로 그 녀의 제38주 기일( 忌 日 )을 기하여 그 무덤을 크게 수보( 修 補 )하고 비명( 碑 銘 )도 크게 해서 세웠 다. 이리하여 그녀는 마침내 소망이던 조선의 딸 이 되었던 것이다. 이 일을 주관한 이는 이 계통 동지들 중 원로인 정화암( 鄭 華 岩 )이었고 그 건비( 建 碑 ) 제막식( 除 幕 式 )에는 박열 금자문자 와는 불변의 동지인 율원일남이 멀리 동경서 참석했었다. 그는 금자문자가 옥중에서 써서 남긴 박열 독립운동사 107

108 유고( 遺 稿 )를 모아 그녀의 옥중기( 獄 中 記 )를 그 전에 출판하기도 했었다. 한편 박열은 천엽 감옥에서 한때 북해도 망주( 網 走 ) 형무소에 이감되었다가 다시 추전( 秋 田 ) 형무소로 옮겨서 1945년 10월 23일 미( 美 ) 점령군( 占 領 軍 ) 사령부( 司 令 部 ) 지시에 의하여 석방될 적에는 추전 서 출감했다. 저간 장장 23년이라는 세계에서도 기록적인 장기옥고( 長 期 獄 苦 )를 겪었다. 북해도 망주 에는 얼마 동안이나 있었는지 모르지마는 만일 사실이라면 이곳은 기후 도 불순할 뿐만 아니라 일본 전국에서의 장기 흉악범들만 수용하는 특별 감옥이었다. 이런 데다 가 박열을 잠시나마 수용했었다면 그것은 반드시 일본 정부의 악의( 惡 意 )에 찬 조처였음이 틀림 없다. 박열과는 불변의 동지이고동경에 영주( 永 住 )하던 장상중은 천엽과 추전을 자주 찾아 박열 을 위로하곤 했다. 박열에게 폭탄을 입수하여 제공하기로 했던 김중한은 박열 공판이 끝난 다음에 얼마 안 있다가 동경지방재판소에서 공판이 열리었다. 검사가 적용법인 폭발물 취체 규칙의 최고형인 10년을 구 형한 데 대한 재판부 판결은 6년이 언도되니, 검사와 변호사 포시진치 쌍방에서 공소한 결과 2 심 판결에서는 징역4년에 예심 미결구류기간( 未 決 拘 留 其 間 )을 통산한다는 언도가 내려져서 그 미결 구류 기간이란 것이 형기를 채우고도 남는 계산이 되어 즉일 출감했다. 그는 투사형( 鬪 士 型 ) 인물이었다. 관립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이다가 3.1 만세 시위운동에서 앞장서고 퇴학 처분이 되자, 서울로 올라와서 배재( 培 材 )고등보통학교에서 졸업하고, 우리 국내에서 최초의 아 나키스트 사상 단체인 흑노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동경으로 건너가 박열과 손을 잡게 되었던 것 이다. 그는 공판은 거쳐 석방되자, 곧 귀국하여 고향일 용강군의 항시( 港 市 )인 진남포( 鎭 南 浦 )에 서 마침 한창이던 신간회( 新 幹 會 ) 운동에 참가하여 활약하고 있다가 일제의 박해를 피해 만주 방면에 망명하였으나 그 뒤 실종되고 말았다. 또 김중한과 연락하여 폭탄 입수 공작을 하였다는 의열단원 김한은 서울의 서대문 형무소에서 동경의 시곡 형무소로 이감되어 증인 심문만 받고 는 거기에 눌러서 복역하다가 만기 출옥했다. 박열은 미결 재옥 중 동지들에게 자주 한시( 漢 詩 )를 써서 내보냈는데 운( 韻 )도 안달 고 시작( 時 作 ) 규칙을 전연 무시한 것들이었다. 그 몇 수( 首 )를 받은 당시 어떤 동지는 이를 주 먹글 이라고 하였거니와 박열은 그 주먹글 가운데에 정의를 추구하는 불멸의 정렬을 담고 있 었다. 그가 재판장에게 제시한 재판에 임하는 전제 조건 4개 항목을 보면 거기에는 그의 사회사 상면보다도 항일 민족 투쟁면이 강하게 나타나 있음을 곧 간취할 수 있다. 위에서 박의 사회사 상은 항일 민족 투쟁을 바탕으로 하였다고 말 할 수 있은 소이었다. 그리고, 그가 대삼영계의 사 박열 독립운동사 108

109 회사상에 동조하게 되었음은 당시 일본 사상계에서는 소위 아나볼 논쟁( 論 爭 )이라 하여 아나키 스트와 볼쉐비스트 간에 러시아 혁명의 현실을 둘러싸고 크게 논란이 일어났었다. 박열에게 있 어서는 볼쉐비스트 측이 러시아를 세계 무산 대중의 조국이라 하는 등 논란에 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 우리나라 마르크스주의 클럽이 점점 대소의존주의( 對 蘇 依 存 主 義 )에 기우 는 경향이 짙어지자. 아나키스트 측의 반공( 反 共 ) 태도는 더욱 더 뚜렷해지고 굳어졌다. 그러한 유풍( 流 風 )은 국내 외 아나계 사상 운동자들의 공인된 노선이 되고 말았다. 우선 국내 아나계 에서는 신간회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것은 민족단일전선의 의의를 부정함이 아니었고 공산 주의자와 함께 일할 수 없다는 그들의 신념 때문이었다. 그들은 국외에서 도리어 혁명적 민족주 의 노선과 제휴했다. 이을규( 李 乙 奎 ) 김종진( 金 宗 鎭 ) 등이 백야( 百 冶 ) 김좌진( 金 佐 鎭 )의 한족총 연합회( 韓 族 總 聯 合 會 )에 가담하였던 사실, 상해서 정화암( 鄭 華 岩 ) 백정기( 白 貞 基 ) 김지강( 金 芝 江 ) 등 행동파 아나계들이 김구( 金 九 )계 행동파와 제휴 활동하였던 사실. 그리고 중경( 重 慶 )으로 옮겨갔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유 임( 柳 林 )이 조선 무정부주의 총연맹 이라는 간판을 지고 김 구 주석( 主 席 ) 하에 입각( 入 閣 )하였던 사실 등은 모두 그 실례로 들을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 리나라 항일 민족 투쟁사상 또는 사회사상 운동사 의 한 특징이라 하겠다. 이러한 특징 을 인정치 아니하고는 단재( 丹 齋 ) 신채호( 申 采 浩 ) 우당( 友 堂 ) 이회영( 李 會 榮 ) 등이 아나키즘을 포회하고 공공연히 표방하며 그 실지 운동에 참가하였던 동기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박열과 그의 투쟁은 이러한 우리나라 역사적 단계를 반영( 反 影 )하는 최초의 신호( 信 號 )였다. 박열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점령군 사령부의 지시에 의하여 1945년 일본 추전 형무소에서 석방 출감했다. 당년 44세였다. 그는 그해 12월경 재일 교포들의 열광적 환영을 받으며 동경에 도착했다. 그는 이듬해 2월 8일에 동경에서 신조선건설동맹( 新 朝 鮮 建 設 同 盟 )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 委 員 長 )이 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3일에는 조선 거류민 단장( 朝 鮮 居 留 民 團 )(대한민국거류민단의 전신)에 추대되었다. 저간 박열은 양연( 良 緣 )이 있어 결 혼하였으니, 그는 박을 인터뷰하러 왔던 일본 국제 신문( 國 際 新 聞 )의 여류 기자 장의숙( 張 義 淑 ) 양이었다. 1948년 광복절( 光 復 節 )을 기하여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될 적에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환국하여 그 축전( 祝 典 )에 참석했다. 그는 계속해 본국에 체류하면서 일본서부터 구상해 오던 장학사업( 獎 學 事 業 )에 헌신하려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 6.25사변을 만나 북쪽 공산군에게 납북( 拉 北 )되었다. 당년 49세였다. 그 뒤 25년 만인 1974년 1월 17일 북쪽 방송을 청 취한 일본 동경의 통신 보도에 의하여 박열이 향년 73세로 별세하였음이 알려졌다. 박열 독립운동사 109

110 조야( 朝 野 )가 합동으로 박열의사추도식( 朴 烈 義 士 追 悼 式 ) 준비위원회( 準 備 委 員 會 )를 구성하고 그 해 2월 8일 상오 11시부터 서울 중구( 中 區 ) 명동( 明 洞 )기독교여자청년회관에서 장엄한 추도회를 엄숙히 올렸다. 당시 유족으로는 미망인 장의숙과 장남 육군 중위( 陸 軍 中 尉 ) 박영일( 朴 榮 一 ), 그리고 딸 박경희( 朴 慶 姬 ) 등이 서울에 살고 있었다. (독립운동사 제7권 의열투쟁사 박열의 일황저격에 게제된 독립운동사) 박열 독립운동사 110

111 박열-가네코후미코 일본대심원 판결문 :45 박열 가네코후미코 재판기록집 박열-가네코후미코 일본대심원 판결문 111

112 대심원 재판 법정 전경 재판받고 있는 박열과 가네코후미코 박열-가네코후미코 일본대심원 판결문 112

113 재판받고 있는 박열과 가네코후미코 金 子 文 子 朴 烈 大 審 院 判 決 死 刑 理 由 被 告 準 植 は 其 の 幼 時 より 受 けたる 環 境 の 影 響 民 族 の 現 状 に 関 する 不 満 の 念 よりして 偏 狭 な る 政 治 観 及 社 会 観 に 陥 り 遂 に 地 上 の 万 類 を 絶 滅 し 自 己 亦 死 するを 以 て 究 極 とする 其 の 所 謂 虚 無 主 義 を 抱 持 するに 至 り 此 の 思 想 を 実 現 せしむる 為 我 皇 室 に 対 し 危 害 を 加 ふるの 非 望 を 有 し 被 告 文 子 は 幼 にして 父 母 の 慈 を 享 けず 荒 らたる 家 庭 に 生 立 ち 早 く 既 に 惨 憶 に 流 離 辛 苦 の 余 骨 肉 の 愛 を 信 ぜず 孝 道 を 否 定 し 権 力 を 呪 ひて 皇 室 を 蔑 視 し 現 代 社 会 は 其 の 身 を 絶 望 の 域 に 陥 らしめたるものなりとして 其 の 無 情 を 憤 り 生 類 の 絶 滅 を 期 する 虚 無 的 思 想 を 懐 くに 至 り 大 正 十 一 年 二 月 頃 被 告 両 名 相 識 るや 互 に 其 の 思 想 を 語 りて 意 気 投 合 するものあり 同 年 五 月 頃 東 京 府 豊 多 摩 郡 代 々 幡 町 代 々 木 富 ヶ 谷 に 一 戸 を 構 へ 同 棲 するに 尽 いて 両 者 の 略 一 致 せる 極 端 なる 思 想 は 輒 滋 々 高 潮 して 其 の 理 想 を 実 現 せしむる 為 具 体 的 計 画 を 樹 つるに 至 れり 大 正 十 二 年 の 秋 頃 挙 行 あらせらるる 趣 に 伝 えられたる 皇 太 子 殿 下 の 御 婚 儀 の 時 を 機 として 至 尊 の 行 幸 又 は 皇 儲 の 行 啓 を 便 宜 の 途 に 擁 し 鹵 簿 に 対 し 爆 弾 を 投 擲 して 危 害 を 加 へ 奉 らむことを 謀 議 し 其 の 企 画 遂 行 の 用 に 供 する 爆 弾 を 入 手 せむが 為 被 告 文 子 と 協 議 の 上 被 告 準 植 は 大 正 十 一 年 十 一 月 頃 朝 鮮 京 城 府 に 赴 き 当 時 義 烈 団 と 画 策 せる 朝 鮮 人 金 翰 と 同 府 観 水 洞 四 十 七 番 地 なる 其 の 住 居 に 於 て 会 見 し 爆 弾 の 分 与 を 申 し 込 み 其 の 約 諾 を 得 越 て 大 正 十 二 年 五 月 亦 被 告 文 子 と 協 議 の 上 被 告 準 植 は 東 京 市 本 郷 区 湯 島 天 神 町 一 丁 目 三 十 一 番 地 下 宿 業 金 城 館 其 の 他 に 於 て 数 次 無 政 府 主 義 者 金 重 漢 と 会 合 し 前 示 義 烈 団 と 連 絡 して 上 海 より 爆 弾 を 輸 入 せしむことを 委 嘱 し 其 の 承 諾 を 得 たるも 之 を 入 手 するに 至 らざ りしものなり 証 拠 を 案 ずるに 以 上 の 事 実 中 被 告 朴 準 植 に 於 て 金 重 漢 は 義 烈 団 と 連 絡 を 取 るこ とを 承 諾 せるのみこして 爆 弾 輸 入 に 付 承 諾 せるに 非 ずと 否 認 し 被 告 金 子 文 子 に 於 ては 金 重 漢 に 対 する 依 嘱 に 関 与 せず と 否 認 する 外 前 示 犯 罪 事 実 は 総 て 各 被 告 の 当 公 廷 に 於 て 認 むる 所 なるのならず 박열-가네코후미코 일본대심원 판결문 113

114 本 件 犯 罪 及 其 の 原 因 動 機 に 付 ては 左 に 挙 示 する 所 に 拠 りて 其 の 証 憑 十 分 なりとす 被 告 朴 準 植 が 朝 鮮 京 城 に 趣 き 金 翰 と 会 見 し 爆 弾 分 与 の 交 渉 を 為 したる 事 実 は 各 被 告 の 訊 問 調 書 に 同 趣 旨 の 供 述 記 載 あり 又 証 人 金 翰 の 訊 問 調 書 に 大 正 十 一 年 十 一 月 頃 日 本 政 府 に 反 抗 する 目 的 を 以 て 組 織 されたる 暴 力 団 義 烈 団 の 金 元 鳳 と 呼 応 し 朝 鮮 に 爆 弾 の 輸 入 を 画 策 し 当 時 其 の 数 個 既 に 安 東 県 に 到 着 し 居 り 数 日 を 出 ずして 入 手 する 手 筈 なりし 折 柄 京 城 に 於 て 朴 準 植 と 会 見 し 同 人 より 爆 弾 分 与 を 依 頼 せらし 之 を 承 諾 したる 趣 旨 の 供 述 記 載 あり 別 件 記 録 中 ( 治 安 警 察 法 違 反 爆 発 物 取 締 罰 則 違 反 事 件 を 指 す 以 下 皆 同 じ) 同 証 人 訊 問 調 書 にも 京 城 観 水 洞 四 十 七 番 地 なる 居 宅 に 於 て 朴 と 会 合 し 爆 弾 の 分 与 を 受 諾 したる 旨 及 朴 とは 妓 生 李 小 紅 事 李 小 岩 の 訊 問 調 書 に 金 と 朴 との 間 に 於 ける 文 書 往 復 に 付 取 次 を 為 したる 旨 の 供 述 記 載 あるとに 依 り 之 を 認 むべく 金 重 漢 との 関 係 に 於 ては 証 人 金 重 漢 の 訊 問 調 書 に 大 正 十 二 年 五 月 中 湯 島 天 神 町 一 丁 目 三 十 一 番 地 下 宿 業 金 城 館 其 の 他 数 か 所 に 於 て 朴 烈 と 会 合 せる 際 同 人 より 爆 弾 を 輸 入 する 為 連 絡 を 取 ることを 依 頼 せらし 之 を 承 諾 したるに 相 違 なき 趣 旨 の 供 述 記 載 あると 別 件 記 録 中 の 被 告 金 重 漢 の 訊 問 調 書 中 に 右 と 同 趣 旨 及 自 分 は 上 海 に 赴 き 独 立 党 又 は 共 産 党 の 者 に 朴 の 意 思 を 伝 へ 其 の 連 絡 を 取 り 取 次 を 為 さば 自 分 の 任 務 を 了 る 筈 に て 朴 に 費 用 の 支 出 を 求 めたる 旨 及 或 時 朴 烈 より 今 秋 御 婚 儀 に 使 用 する 為 上 海 の 義 烈 団 と 連 絡 を 取 り 爆 弾 を 手 に 入 れ 呉 れと 頼 まれ 其 の 位 のことならば 行 ふべしと 承 諾 したるに 朴 烈 は 費 用 は 有 島 の 処 より 調 達 することとせる 旨 の 供 述 記 載 あり 同 記 録 中 に 於 ける 被 告 朴 準 植 の 訊 問 調 書 に 爆 弾 の 入 手 を 金 重 漢 に 依 頼 したる 旨 の 供 述 記 載 あるによりて 之 を 認 む 金 翰 及 金 重 漢 に 対 する 依 嘱 が 被 告 両 名 の 共 謀 に 出 でたることは 被 告 朴 準 植 の 当 公 廷 に 於 て 自 認 するのみならず 同 被 告 の 訊 問 調 書 に 金 翰 金 重 漢 に 対 する 依 嘱 に 付 ては 金 子 文 子 も 其 の 相 談 に 与 しる 旨 の 供 述 記 載 あり 別 件 記 録 中 の 被 告 金 子 文 子 の 訊 問 調 書 に 金 重 漢 の 人 と 為 りを 認 めたるより 朴 と 相 談 の 上 朴 より 金 重 漢 に 対 し 爆 弾 を 上 海 より 輸 入 せしむことを 依 頼 したる 旨 の 供 述 記 載 あるに 由 り 之 を 観 れば 被 告 両 名 の 共 謀 に 出 たること 明 にして 被 告 文 子 の 当 公 廷 박열-가네코후미코 일본대심원 판결문 114

115 に 於 て 金 重 漢 の 依 嘱 には 関 与 せずとの 弁 疏 は 之 を 採 用 せず 右 爆 弾 入 手 の 企 図 が 畏 くも 我 皇 室 に 対 し 危 害 を 加 へんとするの 目 的 に 出 たることは 被 告 両 名 の 当 公 廷 に 於 て 自 認 する 所 なるのみならず 被 告 朴 準 植 の 訊 問 調 書 に 天 皇 陛 下 皇 太 子 殿 下 に 対 し 危 害 を 加 ふることを 計 画 したるに 相 違 なき 旨 被 告 金 子 文 子 の 訊 問 調 書 に 同 趣 旨 の 各 供 述 記 載 あると 別 件 記 録 中 に 於 ける 被 告 朴 準 植 の 訊 問 調 書 に 自 分 は 日 本 より 虐 げらるる 朝 鮮 民 族 の 一 人 とし て 日 本 の 皇 室 に 対 しては 拭 ふべからざる 叛 逆 心 を 有 する 旨 朝 鮮 の 一 般 民 衆 は 我 天 皇 陛 下 皇 太 子 殿 下 を 名 実 兼 備 の 実 権 者 にして 倶 に 天 を 戴 くこと 能 はざる 讐 敵 なりと 思 ふが 故 に 其 の 存 在 を 地 球 より 抹 殺 し 去 るを 以 て 朝 鮮 民 衆 の 革 命 的 独 立 の 熱 情 を 刺 戟 するに 有 効 なる 一 方 法 なりと 考 へたる 旨 殊 に 大 正 十 二 年 秋 季 に 挙 られるべき 皇 太 子 殿 下 の 御 結 婚 期 に 爆 弾 を 使 用 するは 朝 鮮 民 衆 の 日 本 に 対 する 意 思 を 世 界 に 表 明 するに 最 好 機 なりと 思 ひ 出 来 得 る 限 り 其 の 時 期 までに 間 に 合 ふよふ 計 画 を 進 めたる 旨 而 も 是 単 なる 理 想 に 止 まらずして 其 の 実 現 を 期 し 計 画 を 進 めたる 旨 の 供 述 記 載 あり 又 別 件 記 録 中 に 存 する 被 告 金 子 文 子 の 訊 問 調 書 に 大 正 十 二 年 四 月 頃 の 新 聞 紙 上 に 皇 太 子 殿 下 の 御 結 婚 が 同 年 秋 季 頃 に 行 はるるとの 報 道 掲 載 ありしより 此 の 時 期 を 好 機 として 爆 弾 を 投 擲 せんと 計 画 したる 旨 朴 が 京 城 に 赴 き 金 翰 に 交 渉 したる 当 時 に 於 ても 其 の 時 期 までに 爆 弾 を 間 に 合 はし 呉 れるよう 話 したる 筈 にて 金 重 漢 との 関 係 に 付 ても 自 分 と 朴 との 間 には 行 列 に 使 用 すべく 話 したることある 旨 及 天 皇 陛 下 を 爆 弾 投 擲 の 対 象 とせざりしにあらさるも 比 較 的 可 能 性 多 き 皇 太 子 殿 下 を 第 一 対 象 として 計 画 を 進 めし 旨 の 供 述 記 載 あるに 依 り 明 確 なり 犯 罪 の 原 因 動 機 に 関 しては 被 告 人 朴 準 植 が 朝 鮮 慶 尚 北 道 聞 慶 郡 麻 城 面 の 一 農 家 に 生 れ 家 貧 な るに 拘 らず 学 に 志 し 朝 鮮 総 督 府 の 施 設 せる 公 立 普 通 学 校 の 過 程 を 卒 へ 進 みて 高 等 普 通 学 校 師 範 科 に 入 るに 至 り 日 鮮 人 間 に 差 別 待 遇 あるものと 做 し 日 本 の 統 治 に 不 満 を 懐 き 民 族 的 独 立 の 思 想 を 抱 きて 大 正 八 年 十 月 頃 東 京 に 来 り 各 種 の 下 級 労 務 に 服 し 僅 に 生 活 を 支 ふるに?ひて 広 義 の 社 会 主 義 に 入 り 次 で 無 政 府 主 義 に 変 じ 更 に 虚 無 的 思 想 を 抱 くに 至 り 人 類 社 会 は 弱 肉 強 食 を 事 とする 醜 悪 の 府 なりとし 自 己 は 圄 ( 固 )より 万 物 の 存 在 を 否 定 すると 同 時 に 堪 へられざ 박열-가네코후미코 일본대심원 판결문 115

116 る 虐 待 の 下 に 弱 者 として 忍 従 するを 得 ず 総 ての 物 の 絶 滅 を 志 し 一 面 朝 鮮 民 族 の 一 人 として 日 本 の 権 力 階 級 に 対 して 叛 逆 的 復 讐 心 を 有 し 之 が 為 我 皇 室 に 対 して 報 復 せんと 企 て 畏 くも 天 皇 陛 下 皇 太 子 殿 下 に 危 害 を 加 え 奉 らむことを 図 り たることは 別 件 記 録 中 に 存 する 被 告 朴 準 植 の 訊 問 調 書 に 其 の 旨 の 供 述 記 載 あり 又 被 告 金 子 文 子 は 佐 伯 文 一 金 子 きくのの 間 に 私 生 子 として 生 れ 幼 にして 父 母 相 次 で 他 に 去 り 孤 独 の 身 と 為 り 其 の 慈 愛 に 浴 するを 得 ず 朝 鮮 其 の 他 各 所 に 流 寓 して 備 に 辛 酸 を 嘗 め 人 生 を 悲 観 し 社 会 を 呪 ふに 至 り 大 正 九 年 の 春 東 京 に 出 て 爾 来 或 は 夕 刊 売 となり 或 は 夜 店 商 を 為 し 又 或 は 他 家 に 雇 はれ 其 の 間 学 校 に 通 学 したることあり 又 思 想 に 関 する 書 籍 を 耽 読 し 且 各 種 の 主 義 者 と 交 り 過 去 の 生 活 の 総 て 強 者 より 蹂 躙 せられたりとして 権 力 を 否 認 し 人 類 の 絶 滅 を 期 するを 理 想 とし 大 正 十 二 年 二 月 頃 被 告 朴 準 植 と 相 知 るや 両 人 の 主 義 思 想 の 投 合 する あるよりして 東 京 市 外 代 々 木 富 ヶ 谷 に 一 戸 を 構 へ 同 棲 し 遂 に 本 件 犯 行 を 為 すに 至 りたることは 別 件 記 録 中 に 於 ける 被 告 金 子 文 子 の 訊 問 調 書 に 其 の 旨 の 供 述 記 載 あるに 依 りて 之 を 認 む 之 を 要 するに 本 件 犯 行 は 以 上 叙 述 するが 如 く 被 告 等 の 環 境 の 影 響 と 謬 しる 社 会 上 政 治 上 の 観 念 とに 依 り 其 の 主 義 思 想 の 悪 化 せるに 基 くものにして 被 告 朴 準 植 は 日 韓 併 合 の 真 相 を 解 せず 被 告 金 子 文 子 は 矯 激 なる 偏 見 に 囚 はれ 肯 謀 りて 畏 くも 皇 室 に 対 する 大 逆 事 犯 を 企 画 し 因 て 以 て 光 輝 ある 我 国 史 に 一 大 汚 点 を 印 したる 其 の 罪 責 は 極 めて 重 きものと 謂 はざるべからず 法 律 に 照 すに 被 告 両 名 の 前 示 すの 如 く 皇 室 に 危 害 を 加 へむとしたる 所 為 は 刑 法 七 十 三 条 に 該 当 し 右 の 目 的 を 以 て 金 翰 金 重 漢 に 爆 発 物 を 注 文 したる 所 為 は 明 治 十 七 年 太 政 官 布 告 第 三 十 二 号 爆 発 物 取 締 罰 則 第 三 条 に 該 当 し 爆 発 物 の 注 文 は 皇 室 に 対 し 危 害 を 加 へむとしたる 所 為 に 外 ならざれば 刑 法 第 五 十 四 条 第 一 項 前 段 に 依 り 重 き 同 法 第 七 十 三 条 の 刑 を 以 て 処 断 すべく 訴 訟 費 用 は 刑 事 訴 訟 法 第 二 百 三 十 七 条 第 一 項 第 二 百 三 十 八 条 に 依 り 被 告 両 名 をして 連 帯 負 担 せしむべきものとす 仍 て 主 文 の 如 く 判 決 す 박열-가네코후미코 일본대심원 판결문 116

117 検 事 小 山 松 吉 同 小 原 直 関 典 大 正 十 五 年 三 月 二 十 五 日 大 審 院 第 一 特 別 刑 事 部 裁 判 長 判 事 박열-가네코후미코 일본대심원 판결문 117

118 박열의 옥중단가(아키타형무소에서 아키타형무소에서) :26 *역자 주 일본 고유의 정형시인 단가( 短 歌 )는 우리 시조처럼 나름의 운률이 있어 한글로 번역하면 그 맛이 사라집니다. 번역은 단지 참고일뿐입니다. 멋지게도 눈보라에 떠는 버들아 아키타 감옥의 겨울 낮이 지나가네 누르면 들어가는 고무공인데 부풀어 올 때 그 꿈을 잊지 말거라 빙빙도는 도르래 우물 뜨르박 오르고 내리기도 할 수 있다네 바람 맑은데 펄떡 뛰니 들가운데 길이로구나 구불구불 크게 둥근 피는 눈사람 박열의 옥중단가(아키타형무소에서) 118

119 사람보다 아쉡게 지는 꽃단풍 흩어지며 영광된 몸 으뜸 알게나 가을 밤 깊은데 집에 누우니 폭풍은 휘몰아 치네 세계를 생각하며 눈감고 생각하네 꿈에본 그대는 꿈인가 생각하네 이것 보았네 입무거운 보배의 그늘 변경( 辨 慶 ; 인명)을 이것은 똑같은 그 손길의 원숭이 심파 한가한 뜬 세상의 구름 엿보고 철침대는 밤 달과 친구를 하네 吳 竹 세월은 꺽이지 아니하는 행세를 하고 좋은 마디 마디의 힘을 알게나 아래가 되고 위가 되는 도루래 머리 둘둘 돌아가며 마지리구나 이내 몸 가을 나뭇잎 지듯 하면 봄에 피는 꽃이 많이도 피리 세상 중에 옷걷고 시내에서 돌놀이하고 쌓았다가 부쉈다가 다시 쌓기도 하지 서쪽으로 꺽이고 동쪽으로 굽어가는 시냇물은 가는 곳 물어보니 그저 바다라 하네 고생되지만 잠깐만 참으면 겨울나무 서듯 꽃 피는 봄이 있지 않은가 나무입니다. 눈보라에 봄의 향기가 있다고 박열의 옥중단가(아키타형무소에서) 119

120 납북이후 박열의사의 행적 :08 납북이후 박열의사의 행적 120

121 납북이후 박열의사의 행적 121

122 박열의사의 북한 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납북 당시의 상황은 부인 장의숙씨가 쓴 박열선생의 납북진상과 박하산의 투혼의 별은 살아있다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고 납북 후의 집단생활은 동아일보에 연재한 죽음의 세월에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납 북인사중 많은 분들이 결혼이나 동거 등을 한 경우도 있으나 북한에서의 가족관계가 나타난 적은 없다. 산 발적 자료들에 나타난 북한에서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발생 당시 서울 대원호텔에서 투숙 6.25일경 장의숙 여사 대원호텔로 박열의사 방문하여 함께 남하할 것을 권유 하였으나 모든 국민들이 서울에 남아있는데 독립투사인 내가 그들을 버리고 서울을 떠날 수 없다고 하고는 서울에 잔류함. (박열선생의 납북진상. 장의숙) 7월중 7월중 감옥에 구치되어 있으면서 보위부에서 심사 북으로 납북인사들과 함께 끌려감 50년7월부터 54년 4월까지 평양인근 납북자들 합숙소에 나뉘어 생활 50년 11월중 강계에서 약간 떨어진 약수동 일대 농가에서 합숙(김규식, 조소앙, 원세훈 등과 함께 지냄) 당시 박열의사는 심한 고열로 심하게 코피를 쏟으며 밤낮을 지냈다고 납북자들의 북한생활 납북이후 박열의사의 행적 122

123 을 기술한 '죽음의 세월(동아일보)'에서 전함 50년 12월 2일 조국통일전선위원회(약칭 조통)에서 제공한 별오리 합숙소에 수용됨 이 곳에서 공산주의 이론강의와 사상검토 등 집중적인 회유 및 개조공작이 시작되었음 54년4월 평양 인근에서 합숙생활을 하다가 조통의 지시로 평양 모란동 고가( 古 家 )로 와서 합숙생활을 함 55년 일본 조련계 간부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박열을 방문하기 원하여 대일전략에 이용함 이후 북한정권에서 일본 재일교포 북송 및 선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대일 대남 방송 을 강제로 시킴 55년 6월 20일 재북평화통일촉진회 발기인 대회개최(평양 중앙방송위원회 소회의실) 준비위원으로 선임됨(준비위원 총25인) 55년 7월 2일 오후1시 모란봉 극장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회" 결성대회를 개최 납북이후 박열의사의 행적 123

124 안재홍 개회사 조소앙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결성과 임무 보고 박열의사를 상무위원 겸 집행위원으로 선임 그날 대동강호텔 연회장에서 개최된 결성대회 축하연에서 조국전선의 최성환과 박열 의사 사이에 의견다툼이 있어 최성환의 늑골이 부러짐. ( 잊혀진 민족지도자들의 근황을 복원코자라는 글의 신경완 증언에서 요약함) 납북이후 박열의사의 행적 124

125 56년 7월 10일 김일성이 노동장 중앙위원회 회의 중에 납북 민족지도자들에 대한 예우와 처우를 개선하라 고 지시하고 직장을 마련해주며 인민경제대학에 특설반을 개설하여 더 공부할 수 있도록 지시. 상무위원은 중앙공급 1급대상(북한의 장관급)으로 지정하여 병원 검진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고 홍부동 단층양옥집을 제공하였다함. 56년 11월부터 58년 11월까지 2년과정으로 인민경제대학특수반에 강제 입학시킴 74년 1월 17일 북한에서 사망. 사망 당시 재북 평화통일 촉진 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었음 평양 신미리 재북통협 특설 공동묘지에 정인모, 백관수, 현상윤 등 여러 납북인사들과 함께 안장되어있 다. 북한과학백과사전에 소개된 재북평촉 안내문 2월 8일 서울 명동 YWCA 강당에서 박열 의사 추도식 거행 납북이후 박열의사의 행적 125

126 1989년 3월 1일대한민국 건국 훈장 대통령장 추서 납북이후 박열의사의 행적 126

127 나의 옥중잡영(박열 한시) :13 靑 山 年 年 春 色 新 청산은 해마다 춘색으로 새로운데 碧 海 歲 歲 霑 四 濱 푸른바다 오래오래 사방 물가 적시네 獄 中 夜 半 深 自 愧 옥중에서 깊은 밤에 부끄러움 깊은데 吾 不 能 濟 五 尺 身 오척단신 이네 몸 내가 잘못 다스렸네 金 風 戱 梢 笑 聲 高 가을바람소리 높이 나무끝에 탄식하고 斜 陽 照 窓 影 漸 長 창에 비친 석양에 그림자 길어져가네 落 葉 舞 天 似 金 鳥 하늘에 춤추는 낙엽 금새 날개처럼 반짝이는데 省 獄 無 爲 獨 斷 腸 옥에 있는 나는 하릴없이 홀로 이 간장 애어지네 乾 坤 車 輪 轉 천지라는 수레는 돌아가는 것 本 來 無 尊 卑 본래 높고 낮음이 없는 것이다 世 界 渾 圓 球 세계 원래 둥근 하나의 공인데 何 處 有 邊 耶 어디곳이 궁벽진 곳이겠느냐 나의 옥중잡영(박열 한시) 127

128 形 骸 是 婢 僕 형해는 비복이요 死 生 卽 恩 愛 사생은 은애로다 帶 東 恩 愛 屬 동쪽에 은애를 띠처럼 감싸고 逍 遙 雲 內 外 내외를 구름처럼 소요하도다 大 我 無 我 亦 自 我 대아와 무아 또한 나로부터이니 無 物 萬 我 皆 大 五 만물과 만아가 모두 한 덩어리이다 遮 莫 學 者 說 敎 家 영특한 학자와 설교가를 막지를 말라 自 由 人 進 大 奔 放 자유인 나가는데 크게도 바쁘다네 나의 옥중잡영(박열 한시) 128

129 박열 의사의 친필 :38 박열 의사의 친필 129

130 박열 의사의 친필 130

131 박열 의사의 친필 131

132 박열 의사의 친필 132

133 박열 의사의 친필 133

134 박열 의사의 친필 134

135 박열 의사의 친필 135

136 박열의사기념사업회 및 박열의사 기념관 연혁 :11 박열의사 기념사업회 연혁 : 발기인 대회 개최 : 사무국장 김동석 임명 : 창립총회 및 이사회 임원구성 초대회장 최창규 성균관장 박열의사기념사업회 및 박열의사 기념관 연혁 136

137 부회장 박인원 신라오릉보존회장 : 법인 설립 허가 호(국가보훈처) : 사단법인 설립등기 (사단법인 박열의사 기념사업회) : 박열의사 탄신 100주년 기념 행사 한일 대학생 합동수련회 개최 : 이사회 황병태 제2대 이사장 취임(2003년 2월 11일) : 박열의사 추모 서화전 개최 : 가네코후미코 묘소이전 업무 협의차 사무국장 일행 일본방문 : 임시이사회개최(3대 황병태 회장 중임) : 박열의사 기념사업회 사무실 이전(박씨종친회사무실 : 박열의사 한.일 연구자 공동워크숍 개최 : 8월의 독립운동가 선정기념 학술회의 개최(서대문형무소 역사관) : 이사회 개최(박인원 부회장을 4대 회장으로 선임) : 박열.가네코 후미코 한.일 연구자공동 워커숍 개최 2010년 10월 현재 사단법인 박열의사 기념사업회 임원 현황 회장 박인원 이사 이한성,황병태,신국환,변우량,이문창,김왕경,박돈영 감사 유대식, 김명섭 사무국장 박휘규 박열의사기념관 연혁 박열의사 기념사업 기본 설계(사단법인 국민 문화 연구소) : 박열의사 기념관 건축 실시설계 (토담건축 설계사무소) : 부지매입 완료 - 총 14필지 4,373평 : 박열의사 기념관 전시 실시설계(한국전시협동조합 예문관) : 기념공원 조성지구 개발허가(문경시) : 가네코후미코 묘소 이전 조성 문경읍 팔영리 산58-1에서 기념공원조성 지구내로 묘소 이장 : 박열의사 기념관 건축허가(문경시) 부지허가 면적 - 14,455m2(4,373평) 건축 연면적 - 1,602.94m2(484.89평) : 박열의사 기념공원 조성공사 입찰 박열의사기념사업회 및 박열의사 기념관 연혁 137

138 건축, 토목, 조경, 설비 - 동일건설(주) 전기공사 - 문경경전사 통신공사 - 대흥종건(주) 소방공사 - (자)서울전기 건축, 전기감리- 토담건축, (주)동영엔지니어링 : 박열의사 기념공원 조성공사 계약 : 박열의사 기념공원 조성공사 기공식 거행 공사기간 ~ (48개월) : 기념관 전시시설 공사 입찰 계약(충무용사촌) 공사기간 공사감리 : 주) 예문관 인테리어 : 태양인테리어 전시패널 : 디자인피드 영상장비 : 뷰로테크 영상제작 : 미디어컴 모형 : GM 어소시에이트 그룹 전시자료수집정리 : 주)예문관 : 기념관 전시자료수집 및 업무협의차 박휘규 국장 외 일본 현지방문 2011년 진입도로 보상시작 2012.기념관 전시공사 준공 개관(예정) 박열의사기념사업회 및 박열의사 기념관 연혁 138

139 박열 作 옥창( ( 獄 窓 )의) 시(동아일보 1926년 1월 1일)2수 :18 박열 作 옥창( 獄 窓 )의 시(동아일보 1926년 1월 1일)2수 139

140 박열 의사 작 옥창의 시 (동아일보 1926년 1월 1일 설을 앞두고) 옥창( 獄 窓 )의 겨울 밤은 아득히 깊었는데 찬 기운은 살을 애이고 언( 凍 ) 하늘에 주린 듯 허리 굽은 그믐달은 철창( 鐵 窓 )으로 엿볼제 우당탕 지게ㅅ 문을 흔드는 찬 바람 아- 저 달이 몸서리를 친다 달아 반가운 명절은 왔건마는 닥쳐오는 풍한( 風 寒 )을 어찌하랴 부와 귀에 추세( 追 勢 )하는 명절이 헐벗고 주린 우리에게 박열 作 옥창( 獄 窓 )의 시(동아일보 1926년 1월 1일)2수 140

141 어찌 그리 반가우랴 고르지 못한 세상 생지옥( 生 地 獄 )의 이 세상 아 원수의 생지옥 달아 풍한( 風 寒 )에 수족이 얼었으리니 추( 醜 )하나마 쉬어가라 달아 이 밤은 나와 함께 이곳에서 동학( 東 學 )이나 강론( 講 論 )하자고나 乙 丑 暮 去 丙 寅 明 來 流 去 流 來 歲 月 不 止 中 途 事 敗 ( 次 句 省 略 ) 身 獄 裡 ( 次 句 省 略 ) 夢 中 送 迎 去 舊 新 年 去 年 一 年 ( 次 句 省 略 ) 去 年 好 年 謹 祝 暮 年 我 迎 新 年 士 氣 彌 振 今 年 好 年 謹 賀 新 年 을축년 해가 저물고 병인년이 밝아 오는구나 흘러가고 흘러오는 세월 멈추지않네 중도에 일 그릇쳤으니... 이내 육식은 감옥에 있고... 꿈속에 보내고 맞이하니 낡은 해가 가고 새해를 맞네 지나간 1년... 지나간 해는 좋은해 저문해를 근축하네 내 새로운 해를 맞으니 사기 더욱 떨쳐진다 금년은 좋은해 신년을 경축하도다 박열 作 옥창( 獄 窓 )의 시(동아일보 1926년 1월 1일)2수 141

142 대역죄로 사형 선고 받은 박열 재판장, 수고했네 [ [이덕일의 事 思 史 근 대를 말하다] :54 대역죄로 사형 선고 받은 박열 재판장, 수고했네 [이덕일의 事 思 史 근대를 말하다] 아나키즘 등장하다 2 박열 부부 대역사건 제277호 입력 아나키즘의 특징은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과 직접행동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프롤레타리아트 의 계급 독재도 부인하고, 혁명의 결정적 순간까지 기다리지도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목숨을 던져 직접행 동에 나서기에 일제는 아나키즘을 두려워했다. 도쿄대지진 때 불타는 도쿄경시청. 일본은 도쿄대지진의 혼 란을 한인들에게 돌리기 위해 유언비어를 유포해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사진가 권태균] 도쿄대지진 때 불타는 도쿄경시청. 일본은 도쿄대지진의 혼란을 한인들에게 돌리기 위해 유언비어를 유포해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사진 대역죄로 사형 선고 받은 박열 재판장, 수고했네 [이덕일의 事 思 史 근대를 말하다] 142

143 가 권태균] 일본에서 고학 중이던 아나키스트 홍진유( 洪 鎭 裕 )는 1922년 도쿄 간다( 神 田 )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 린 조선인노동조사회 창립대회에 참석했다. 일본 니가타현( 新 潟 縣 )에서 발생한 한인 노동자 학살사건이 계 기가 되어 창립된 단체였다. <새 사상이 들어오다3 일본유학생과 북풍회 참조> 홍진유는 나는 그날 일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방청하러 가서 보니 조선인 공산주의자인 김약수가 그 모 임의 사회를 보고 있었다. 내가 보니 노동조사회에 노동자 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했 고, 김약수 일파가 매우 뻐기면서 노동자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을 해서 나는 야유를 퍼부었다 (홍진 유 제2회 신문조서)고 전하고 있다. 이때 신영우( 申 榮 雨 )가 주소를 가르쳐 달라면서 노동자의 일은 노동 자 자신이 해야 한다. 저들은 야심으로 한다 고 말하고, 반 달쯤 후에 찾아와 박열( 朴 烈 )을 알게 되고 흑 우회( 黑 友 會 )를 만들게 되었다고 전한다. 재일 유학생들이 만든 흑도회( 黑 濤 會 )는 아나키즘과 볼셰비즘 사 이의 노선투쟁인 아나-볼 논쟁 을 거치면서 아나키즘 계열은 흑우회가 되고 공산주의 계열은 북성 회( 北 星 會 )로 갈라섰다. 박열 홍진유 같은 20대 초반의 고학생들이 흑우회를 결성하고 김약수 김종범 같은 20대 후반~30대의 유 학생들이 북성회를 만들었다는 특징도 있다. 흑우회에는 박열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와 구리하라 가즈오( 栗 原 一 男 ) 같은 일본인 아나키스트들도 함께했다. 박열은 흑우회 기관지 후테이 센징( 太 い 鮮 人 ) 을 1923년 3월부터는 보다 온건한 제목의 현사회( 現 社 會 ) 로 바꾸어 발행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 로 직접행동가 였다. 1 가네코 후미코. 박열의 부인이자 아나키스트였다. 23세에 옥중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2 박열과 가네 코. 옥중에서 찍은 이 사진은 일본에 큰 여파를 일으켰고 사진 촬영을 허가한 판사가 파면당하고 와카쓰키 내각도 무너졌다. 그는 일왕( 日 王 ) 및 주요 인사들이 모이는 곳에 폭탄을 터뜨리는 것을 당면 목표로 삼았다. 박열은 무산자 동맹회의 초청으로 니가타현 한인 노동자 학살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1922년 9월 서울에 와서 김 한( 金 翰 )을 만났다. 박열은 김한이 의열단과 관계 있다는 사실을 알고 폭탄 구입을 요청했다. 박열은 11월 다시 서울로 되돌아와 김한에게 늦어도 1923년 가을까지는 폭탄을 인계해 달라 고 요청했다. 1923년 11월로 예정되어 있는 왕세자 히로히토( 裕 仁 )의 결혼식을 염두에 둔 것이다. 박열 부부는 1923년 4월 정태성 홍진유 육홍균 이필현, 구리하라 가즈오, 니야마 하쓰요( 新 山 初 代 ) 등 과 도요타마군( 豊 多 摩 郡 ) 요요하타초 요요기도미카야 1474번지 2층 셋집에서 따로 불령사( 不 逞 社 )를 조직 대역죄로 사형 선고 받은 박열 재판장, 수고했네 [이덕일의 事 思 史 근대를 말하다] 143

144 했다. 박열이 불령사 라는 나무 간판을 집 밖에 내건 것처럼 비밀조직은 아니었다. 정태성은 불령사 에서는 아나키즘 연구뿐만 아니라 직접행동도 논의되었지만 직접행동은 회원들의 자유의지에 맡기기로 했 다 고 말하고 있는데, 역시 직접행동에 나서기로 한 것은 박열이었다. 박열은 1921년 12월 외항선원 모리다( 森 田 )를 통해 외국에서 폭탄을 구입할 것을 논의하기도 하고, 약국 수 백 군데에서 폭약 판매 허용치인 0.02g씩을 사 모아 폭약을 제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박열은 서 울의 기생 이소홍( 李 小 紅 )을 통해 여성용 손수건에 알파벳과 숫자를 조합한 암호편지를 김한에게 보내 폭 탄 구입을 재촉했다. 그러나 김한이 1923년 1월 의열단원 김상옥( 金 相 玉 )의 서울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 건과 관련되어 체포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박열은 포기하지 않고 김중한( 金 重 漢 )에게 조선에 돌아가 폭탄을 구해 줄 수 있겠느냐 고 물었다. 김중 한은 귀국하면 수행해 보겠다 고 답했다. 그런데 박열은 훗날 일제 신문조서에서 다른 방법에 의해 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로 생각을 굳히고 있어서 김중한에게 부탁했던 것을 거절했다 고 전하고 있 다. 그러자 김중한과 애인 니야마 하쓰요는 불령사 모임 때 박열에게 크게 항의하고 8월 31일 도쿄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조선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인 9월 1일 낮 12시 도쿄 일대에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10만5000여 명이 사망하고, 10만9000여 동이 무너지고, 21만2000여 동의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다. 일본인들이 공황상태에 빠진 상황에 서 그날 오후부터 돌연 조선인이 방화했다 우물에 독약을 탔다 는 유언비어가 퍼져 나갔다. 일본 각의는 이날 밤 계엄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출동시켰는데, 일본 내무성은 어딘지 모르게 흘러나온 조선 인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조치 라고 발표했다. 도쿄일일신문( 東 京 日 日 新 聞 ) 9월 3일자에 불령선인( 鮮 人 ) 각소( 各 所 )에 방화, 제도( 帝 都 )에 계엄령 선포 라고 보도했다. 아이치현( 愛 知 縣 )의 도요하시( 豊 橋 )일일신문 9월 5일자는 대화재( 大 火 災 )의 원 인은 지진도 있지만 일면에는 불령선인 수천 명이 폭탄을 투하하고 시중에 방화한 데 있다 고 보도했다. 이는 대지진의 공포를 한인과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 등으로 돌리려는 일본 극우세력의 조직적 음모였 다. 이 때문에 저명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 大 杉 榮 ) 부부 등이 헌병 장교에게 살해되고 일본 노동조 합 간부들도 살해되었다. 가장 집중적인 피해를 본 사람들은 재일 한인들이었다. 재향군인 등으로 구성된 자경단( 自 警 團 )은 무차별 한인 학살에 나섰다. 살해된 한인들의 숫자에 대해서 일본 사법성( 司 法 省 )은 233명이라고 발표했지만 도쿄 대 교수를 역임한 요시노 사쿠조( 吉 野 作 造 )가 2613명이라고 발표할 정도로 실상을 축소 왜곡한 숫자였다. 대역죄로 사형 선고 받은 박열 재판장, 수고했네 [이덕일의 事 思 史 근대를 말하다] 144

145 상해 임정의 독립신문 은 6661명이라고 보도했다. 한인으로 오인되어 살해된 일본인이 59명에 달했으니 얼마나 무차별 학살이 이루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 군부와 경찰은 9월 3일부터 불령선인들을 수색하고 선량한 조선인들을 보호한다 는 명분으로 한 인들을 검속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9월 3일 새벽 세다가야( 世 田 谷 )경찰서로 연행된 것을 비롯해 정 태성 장상중 최규종 홍진유 등 불령사 회원들이 일제히 검속되는 등 모두 6200여 명의 한인이 검속되었 다. 박열을 연행한 일본 경찰이 집주인에게 영구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니 다른 사람에게 집을 빌려 주는 게 좋겠다 고 말했던 것처럼 의도적 검속이었다. 일본 정부는 10월 16일에야 한인 대학살 사건에 대한 신문 기사를 해금시키는 한편, 10월 20일 느닷없이 불령사 회원 16명을 비밀결사 조직 혐의로 검사국에 기소했다. 일경은 불령사를 무정부주의 경향의 사 회운동 및 폭력에 의한 직접행동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단체 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불령사는 간판 까지 내건 공개 조직이란 점에서 전형적인 희생양 만들기였다. 박열 부부에게는 왕세자 결혼식 때 일왕 등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형벌이 사형 하나뿐인 대역 죄( 大 逆 罪 )를 적용했다. 그 유일한 근거는 김중한의 애인 니야마 하쓰요가 그런 말을 전해 들었다는 진술 뿐이었다. 일제 검찰은 1924년 2월 14일 박열 부부와 김중한에 대해 천황 폐하와 황태자 전하에게 위해 를 가하려 한 대역 예비죄 라고 예심을 종결지었지만 폭탄 구입에 관해 논의한 것을 대역죄로 모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나머지 불령사 회원들은 예심 종결과 함께 1924년 6월 방면돼 이 가운데 홍진유와 서상 경은 귀국해서 흑기연맹을 만들었다. 박열 부부 재판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의 국가 사회제도를 제1계급-황 족, 제2계급-대신 및 기타 실권자, 제3계급-민중 으로 나누고 황족은 정치의 실권자인 제2계급이 무지 한 민중을 기만하기 위해 날조한 가엾은 꼭두각시이자 나무인형이라고 생각한다 고 진술해 큰 충격을 주 었다. 박열도 결혼식에 폭탄을 투척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 앞에서 박열이 다른 방법에 의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로 생각했다 고 서술했는데, 해방 후 흑우회원 최영환( 崔 英 煥 )은 재판 과정에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상해에서 도쿄까지 실제로 폭탄을 운반했다 고 말 했다. 그러면서 도쿄 대지진이 일어나지 않아서 예정대로 결혼식이 거행되었으면 폭탄을 투척했을 것 이 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1926년 3월 판결공판 때 사형을 선고하자 박열은 재판장, 수고했네 라면서 내 육체야 자네들이 죽일 수 있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라고 태연했고, 가네코는 판결 순간 만세! 라고 외쳐 재판장을 대역죄로 사형 선고 받은 박열 재판장, 수고했네 [이덕일의 事 思 史 근대를 말하다] 145

146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가네코는 모든 것이 죄악이요 허위요 가식이다 라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대역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무기로 감형되어 각각 다른 감옥으로 이감되었는데, 도치기현 우쓰 노미야( 宇 都 宮 ) 형무소로 이감된 가네코가 1926년 7월 23일 갑자기 사망했다. 형무소 측은 자살로 발표했지 만 후세 다쓰지( 布 施 辰 治 ) 변호사와 원심창( 元 心 昌 ) 등 흑우회원들의 사인 규명과 시신 인도 요구를 모두 거절해 타살 의혹 이 짙어졌다. 옥중에서 한 번은 저버린 세상이지만/글 읽으니/가슴에 솟는 가여운 슬픔 (나는 어디까지나 불행했나이다)이라는 시를 짓기도 했던 가네코는 23세에 불과했다. 박열은 일제 패망 후인 1945년 10월 27일에야 아키다( 秋 田 ) 형무소에서 22년 만에 석방되었다. 대역죄로 사형 선고 받은 박열 재판장, 수고했네 [이덕일의 事 思 史 근대를 말하다] 146

147 박열의사와 가네코후미코 그리고 기념관 :50 박열의사와 가네코후미코 그리고 기념관 박성진 (예문관 대표) 박열 선생의 가계( 家 系 ) 함양박씨 종중이 자랑하는 조선조 중기 향오린( 鄕 五 鱗 )이 있다. 향오린( 鄕 五 鱗 )이란 고려 말 재상( 宰 相 )의 지위에 올라 함양부원군( 咸 陽 府 院 君 )에 봉해졌으며 사후( 死 後 )에 예천 금당실 금곡서원( 金 谷 書 院 )에 배향 된 문제공( 文 齊 公 ) 치암( 恥 庵 ) 박충좌( 朴 忠 佐 )의 7세손인 찰방( 察 訪 ) 訥 (눌)의 아들 거인( 巨 鱗, 掌 令 ), 형 린( 亨 鱗, 吏 曹 參 議 ), 홍인( 洪 鱗, 大 司 憲 ), 붕인( 鵬 鱗, 翰 林 司 書 ), 종인( 從 鱗, 吏 曹 正 郞 ) 5형제를 말한다. 이를 후세( 後 世 ) 사람들은 삼난가( 三 難 家 : 生 五 子, 難 五 子, 登 科 難 또는 登 科 俱 文 難 )라 부르기도 하였다. 의사는 치암공의 7세손인 눌( 訥 : 1448년~1528년)의 아들 5형제가 모두 대과( 大 科 )를 거쳐 예천 금당실에 터를 잡은 막내 종린( 從 鱗 : 1496년~1553년)의 셋째아들 운( 蕓 : 1535년~1596년)의 13세손이며 이때부터 이 지방의 함양박문의 세( 勢 )를 이루게 되었다. 1880년대에 이르러 가세( 家 勢 )가 기울어 가고 동학을 통해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세상 물정에 밝은 조부는 증조부가 사망하자 외아들 지수( 之 洙 )를 선동의 동래정씨와 혼인을 시키고 윗대 어른들의 행적과 가르침 을 따라 대대로 물려받아 이어져 내려왔던 정든 고향땅 예천 금당실 선동을 떠나 함창 인근의 모전(음지 마)으로 이주, 의사는 1902년 3월 12일(음력 2월 3일) 문경군 호서남면 모전리(현 문경시 모전동 311번지)에 서 아버지(족보에는 朴 之 洙, 호적에는 朴 英 洙 로 되어 있다)와 어머니(정선동, 鄭 仙 洞 )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초명( 初 名 )은 혁식( 赫 植 )으로 어려서부터 열( 烈 )이라 불렀지만 호적에는 준식( 準 植 )으로 되 어 있다. 유년기와 3 1 만세운동 박열이 태어난 지 몇 해 안되어 마성면 오천리(샘골)로 이주한 박열의 집안은 조부가 살아 계실 때까지만 해도 많은 재산을 가진 지주 집안으로 상당한 가세를 유지하였으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무슨 영문인지 도 모르게 아버지마저 일찍 돌아가시자 점차로 가세가 기울어지고 소작과 자작전 수입으로 가족의 생계를 박열의사와 가네코후미코 그리고 기념관 147

148 유지해 나가면서 박열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어린나이(3세)에 아버지를 여윈 박열은 유복자처럼 길러졌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범상치않았던 박열은 천자문과 동몽선습 등 한문을 배우다가 아홉 살 때 집에서 40리나 떨어진 함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새벽밥을 먹고 통학했다. 박열이 소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어느 한국인 교사가 자기는 이때까지 일제의 압 력에 못 이겨 거짓 교육을 시켰노라고 울면서 사과한 일이 있었다. 박열은 이 선생님으로부터 반일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가난한 중에서도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대구로 가서 도지사의 추천을 받아 관비로 공부할 수 있는 경성고보 사범과(지금 경기고)에 입학한다. 재학 중 박열은 3 1 운동이 일어나자 지하신문을 발행하고 격문도 살포하는 등 시위에 적극 가담했다 이때 3.1독립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한 경성의 많은 학생들은 일본 경찰을 피해 숨어 있으면서 자진해서 학 교 를 그만두거나 학교로부터 퇴학처분을 받고 학교를 떠나고 있었다. 형식은 학교 내의 잘못된 제도에 항 거하며 동맹 휴학을 하거나 자퇴하는 등의 형식을 취하였지만 일종의 반제국주의적 표현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해 10월 박열은 자퇴하고 드디어 일본으로 떠나기 위해 경성역에서 부산을 향해 출발하였다. 김 천역에서 선동에 사는 고종사촌 교근형을 만나 함께 부산에 도착하여 교근형의 배웅을 받으며 배에 올랐 다. 박열은 먼저 자신을 그토록 사랑해 주시는 어머님과 오늘에 있기까지 뒷바라지 해주신 형님에게 한없는 정을 느끼며 부디 건강하게 오래 오래 잘 사시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기대와 관심으로 늘 보살펴 주신 누님과 자형, 고모님, 외갓집 식구들에게도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지나온 18년 간의 삶을 뒤 돌아보면서 일렁거리는 갑판을 붙잡고 가슴을 때리는 뱃고동 소리가 뼛속 깊은 곳까지 아려오는 몸 서림 에 참을 수 없는 회한의 눈물이 두 뺨 위를 흐르고 있었다. 식민지 조선청년의 기약 없는 인생 역정을 싣 고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 무렵 많은 애국 독립지사와 청년학생 농민들은 상해와 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로 독립운동의 근거지와 삶을 찾아서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3.1독립만세운동으로 말미암아 상해에서는 민족운동지도자들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국내 외 선포하고 명실공히 우리 민족의 최고기관으로서 외교활동과 독립전쟁을 지도 통할하게 되었다. 또한 간도와 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에서는 비밀결사단체와 항일무장 독립군 단체들이 속속히 조직되어 치열 한 독립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국내로 잠입 일본 제국주의 심장부를 향해 끊임없는 암살과 파괴공작 을 시도하여 그야말로 항일 독립투쟁을 줄기차게 이끌어왔던 이 시기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가장 눈부 신 독립전사( 獨 立 戰 史 )를 남겼다 동경에서의 생활 박열의사와 가네코후미코 그리고 기념관 148

149 1919년 10월 3.1독립만세운동으로 모든 학교는 폐쇄되었으며 앞장서서 활발히 만세운동을 일으켰던 주동학 생들은 검거 투옥되었다. 그 외 적극 가담 학생들은 퇴학당하거나 자진해서 학교를 그만 둔 학생들도 많았 다. 이 무렵 국내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찾아 중국 상해, 만주, 시베리아, 연해주, 미 주, 일본 동경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또한 독립운동 계열에 있던 학생들도 고향을 떠나 상해로 동경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생들은 동경 조 선 기독청년회(YMCA)를 중심으로 학우회 활동을 하며 민족적 독립심과 학문적 욕구를 통해 사상적으로 성장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박열은 동경의 간다( 神 田 )에 있는 정칙영어학교에 다니면서 신문배달, 제빙공 장직공, 막노동꾼, 우편배달부, 인력거 인부, 중국요릿집 배달, 야경수, 점원, 인삼행상, 조선엿장수 등 온 갖 모든 밑 바닥의 직업을 두루 겪는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생활속에서도 박열은 여러 유학생 단체에 가입하여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자주접촉하면서 1920년 11월 김약수, 원종린, 정태성 등과 같이 고학생동우회를 결성(회원 50여명), 간부로서 활발한 활동 을 하였다. 아나키스트 박열 3.1독립만세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민족주의적 온건 노선으로는 조선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점차 고 조되어 유학생들 사이에는 사회주의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때 박열, 김약수, 백무, 최갑춘, 황석우, 정태성을 중심으로 고학생 동우회를 결성 친목단체로부터 점차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이념단체로 발전 하게 된다. 당시 유학생들은 요시노 사쿠조, 후쿠다 교지가 주도하는 여명회, 사카이 도시히코의 코스모스구락부, 다 카츠 마시미치의 효민회, 가토 가즈오의 자유인연맹등에 가입 활동하였다. 특히 동경 기독교 청년 회관에서 있었던 일본사회주의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사회 운동에 진 출한 김판권, 정우홍, 강인수와 다카츠 마시미치의 효민회에 참가하여 유학생들에게 급진사상을 전파한 권희국을 비롯하여 김약수, 박열등은 일본의 사회운동가이자 아나키즘의 지도자인 오스키 사카에와 이와 사 사쿠타로에 출입하여 아나키즘에 공명하게 되었다. 무정부주의(Anarchism)란 조직화된 정치적 계급투쟁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정치적 조직, 규율, 권위 를 거부하고 국가권력기관의 강제 수단의 철폐를 통해 자유와 평등 정의와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유 토피아적 이데올로기 및 운동으로 국가나 정부기구는 본래가 해롭고 사악한 것이며 인간은 그것들 없이도 올바르고 조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신념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 청년학생들에게는 민 족독립을위한 행동방식으로 구원의 이념이 되었던 것이다. 박열의사와 가네코후미코 그리고 기념관 149

150 가네코후미코와 박열의사 1922년 2월 동경에는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다.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는 유라쿠( 有 樂 )정 스끼 야바시( 數 崎 屋 橋 ) 근처에 있는 이와사끼( 岩 崎 ) 오뎅집에서 일하면서 오전의 한가한 틈을 이용해 세이코 쿠( 正 則 ) 영어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와사키( 岩 崎 )라는 사회주의자가 경영하는 오뎅집으로 주로 지식인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의 집합장소로 자주 이용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정우영을 만나 알게되어 세이코 쿠 영어학교 가는 도중 정우영의 하숙집에 들러 조선청년이라는 제목의 잡지 교정 인쇄를 보게 되었다. 그 책에는 개새끼 라는 박열의 시가 게재되어 있었다. 그때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는 박열의 이름을 처 음으로 알았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 끼로소이다!/ 높은 양 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는 이 시를 읽고 강한 감동을 느꼈었다. 뭔가 힘이 강한 시였다. 한구 한구마다 나 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갔다. 그리고 이 시를 다 읽었을 때 마치 황홀에 젖어 있을 정도였다. 나의 가슴에 피는 들끓고 어떤 힘이 나의 전 생명을 떠 받치고 있었다. 그리고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는 정우영에게 지금 오랫동안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을 이 시속에서 찾은 느낌이 듭니다 라고 말하였다. 박열의 강열함에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는 한층 더 이끌려 내가 찾고 있던 사람, 내가 하고 싶었던 일, 그것은 틀림없이 그 사람 안에 있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사람이다. 그야말로 나의 일 을 갖고 있다 라고 느꼈다. 이 때 박열은 일정한 직업도 없이 친한 친구집을 전전하면서 생활을 하였다. 얼마가지 않아 1922년 5월 박 열과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는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는 박열과 만나서 박열의 사상과 행동 생활방식 속에서 자기의 삶의 방향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박열의 항일사상과 직접투쟁 평생 동지이자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를 만나게 된 박열의사는 아나키즘단체인 흑도회 흑우회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한편, 흑도회 기관지인 흑도 민중운동( 民 衆 運 動 ) 후토이센징( 太 い 鮮 人 현사회( 現 社 會 ) 등의 잡지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당시 일본의 사회운동가와 재일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사회의 개조와 변혁을 통한 조선독립을 쟁취하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보다 적극적이고 강력한 방안을 찾고자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강연회와 사상 잡지 발행단체 규합 등으로 행동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선두에는 항상 박열이 나섰던 것이다. 박열의사와 가네코후미코 그리고 기념관 150

151 1923년 4월 의사는 불령사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의열 투쟁을 추진하였다. 그해 가을 일본 태자의 결혼식 소식을 전해들은 선생은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거사에 사용될 폭탄 구입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923년 9월 관동에 대지진이 발생하였고, 이를 기회로 일제는 한국인들과 일본내 사회주의자들 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을 자행하였다. 이때 선생과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한 불령사 회원들도 피체 되었고, 경찰의 취조 도중에 일왕 폭살을 위해 추진한 폭탄 반입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 일본 경찰은 9월 하순부터 10월 상순에 이르러 박열,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외 불령사 회원 14명을 차례 로 검거 검속 취조하여 박열을 비롯한 불령사 동지 16명을 치안경찰법 제10조 툌비밀결사는 이를 금( 禁 )함 을 적용 10월 20일 동경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의해 치안경찰법 위반용의로 기소 이찌가야형무소에 수감시 켰다. 또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박열에게 대역죄 혐의를 적용, 구속 기소하고 1923년 10월 24일 이찌가야형무소 에 수감되어 재판에 회부 1925년 6월 6일까지 2년반 동안 동경지방재판소에서 무려 17회에 걸친 예심판사 다테마쓰의 예심을 받았다. 박열은 당시 조선인 유학생 회장이던 조헌영(1901~1988. 조지훈시인의 아버지)이 조선시대의 관복과, 신랑 이 혼례 때 예복으로 입던 사모관대를 지입하여 관복차림으로 법정에 출정한다. 또 재판장은 박열을 피고 라고 하지 않고 그편 이라고 부르고 박열은 재판관을 그대 라고 호칭했다. 실로 일본 재판 사상 전 무후무한 사건 이 벌어진 것이다. 1923년부터 1925년에 걸친 총 20여 회의 조사과정에서 박열 의사는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그리고 사형 판결이 나자 의사는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 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라고 일갈하며, 불굴의 독립의지와 민족정신을 표출하였다. 대심원은 1926년 3월 25일 박열과 가네코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어 10일 뒤 무기징역으로 형을 낮추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우익세력과 군부는 이를 극렬히 반대하면서 내각에 대한 탄핵 움직임까지 보였다. 이에 더해 이른바 괴사진 춘화( 春 畵 )사건마저 일어나 정국( 政 局 )을 뒤흔들었다. 이후 무기형으로 감형되었지만 일제 패망 이후에도 대역사범 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지 못하다가 1945년 10월 27일에야 풀려났다. 그러나 가네코 후미코( 金 子 文 子 )는 옥중에서 사망했다. 일본 당국은 가네코씨가 그 해 7월 일본 우쓰노미 야 형무소 여죄수 독방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가네코후미코가 자결한 후 그녀의 소원대로 그녀의 유골은 형 박정식과 헌병들의 호위속에 문경으로 옮겨 져 주흘산 자락 팔령 중턱 아무도 찾지않는 박열의 선대들이 잠들어 있는 선산에 봉분도 없이 묻히고 철 저히 통제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역사 속에 사라졌다. 박열의사는 1945년 해방이되고도 출옥하지 못하다가 겨우 그 해 10월에 아키타 형무소 오오다테 지소에서 출옥하고 전 재일교포와 조국의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재일 교포의 새로운 지도자로 재일본 대한 박열의사와 가네코후미코 그리고 기념관 151

152 민국 거류민단의 전신인 신조선건설 동맹을 결성한다. 이 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거류민단의 초대부터 5대회장을 역임하고 1949년 조국에 귀국하여 모든 정치적 유혹을 뿌리치고 재단법인 박열장학회를 결성하 여 인재들을 일본으로 유학보내기 시작하였으나 1950년 동란으로 납북되어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장을 맡고있다가 1974년 1월 17일에 73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타계후 1989년 삼일절에 건국훈장 대통령 장을 추서했다. 2003년 12월 팔령의 깊은 산속에 있던 가네코후미코 묘소는 박열의사기념사업회에 의해 오천리의 박열의 사 기념공원 경내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성지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가네코 여사는 일본을 움직 인 10대 여장부 라고 하여 그분에 대한 일본인들의 추모 열기는 대단하다. 문경의 기념관 옆 묘소에는 지 금도 매년 500여명 이상의 일본인들이 다녀가고 있다. 박열의사기념관의 건립 2001년 10월 23일 오전 10시반 문경 점촌에서는 민족의 제단에 몸 바친 불굴의 애국지사 박열 의사의 위대 한 애국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사단법인 박열의사기념사업회 창립 현판식과 현창강연회가 열렸다. 박열 의 사께서 태어나신지 한 세기가 흘렀으며 북한에서 사망한지 4반세기만에 고향땅에서 그를 추모하는 기념사 업회(회장 박인원 전문경시장)가 태동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문경지역의 뜻 있는 박씨 문중 어른들이 모여 서 박열 의사를 기리고자 모임을 갖기 시작하고 생가를 보존하고 기념비를 세우며 사당과 기념관을 지어 박열 의사의 높은 사상과 덕을 후세에 영원히 물려주고자 불철주야 노력한 결과 3년 만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던 것이다. 좌우의 극한 대립 속에 납북이라는 비운을 맞이한 박열 의사는 그가 이루고자 했던 민족적 경륜과 포부를 펴보지 못한 채 진실이 은폐된 장막 속에 마지막 남은여생을 북한 땅에서 보내게 되었다. 근현대사의 한 중심에서 일제에 맞서 온몸을 던져 헤쳐 나가고자 했던 위대한 사상가요 행동가인 박열 의 사의 항일독립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비록, 동족상잔의 아픈 역사 속에 납북 당하고 북녘에서 사망하여 잊혀진 인물이 되었지만, 이제 박열 의사가 남긴 숭고한 애국 정신과 구국사상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오 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으로 남았다. 박열의사와 가네코후미코 그리고 기념관 152

153 불령사( ( 不 逞 社 ) 동지 명단 :10 불령사( 不 逞 社 ) 동지 명단 153

154 가네코후미코의 법정진술 조서 가운데 불령사( 不 逞 社 ) 동지 명단 朴 烈, 金 子 文 子, 洪 鎭 禮, 崔 圭 悰, 陸 洪 均, 徐 東 星, 鄭 泰 成, 小 川 武, 金 重 漢, 新 山 初 代, 張 詳 重, 韓 睍 相, 徐 불령사( 不 逞 社 ) 동지 명단 154

155 相 庚, 河 世 明, 野 口 品 二, 栗 原 一 男 金 子 文 子 女 史 墓 碑 銘 小 白 山 鳥 嶺 기슭 여기이곳에 女 流 아나 키스트 金 子 文 子 女 史 가 고히 잠들어있다 女 史 는 一 九 0 四 年 一 月 二 五 日 日 本 山 梨 縣 에 本 籍 을 두고 橫 濱 市 에서 태어났다 가난하고 不 遇 한 家 庭 環 境 속에 자라난 女 史 는 한때 姑 母 의 誘 引 으로 韓 國 땅 芙 江 에 放 浪 하였다 纖 細 한 感 受 性 과 明 晳 한 頭 腦 의 女 史 는 當 時 日 本 帝 國 의 暴 虐 한 侵 略 下 에서 塗 炭 에 빠저있는 韓 國 人 의 悽 慘 한 모습을 남달리 敏 感 하였다 姑 母 의 虐 待 에 못이겨 日 本 으 로 뒤돌아갈때는 벌서 女 史 의 가슴속깊이 自 己 의 母 國 日 本 의 不 正 不 義 에 對 한 義 憤 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런 女 史 가 日 本 帝 國 主 義 에 抗 拒 抗 爭 하는 革 命 鬪 士 朴 烈 先 生 과 生 死 를 같이할 同 志 일뿐만 아니라 夫 婦 로 結 合 하였다는것은 必 然 의 結 果 다 黑 濤 會 黑 友 會 의 盟 員 으로 活 躍 하는 朴 烈 先 生 은 女 史 와 같이 日 本 帝 國 主 義 의 象 徵 인 天 皇 을 謀 殺 할 計 劃 을 세워 秘 密 裡 에 工 作 을 펴어 오든중 一 九 二 二 年 四 月 에 金 重 漢 新 山 初 代 陸 洪 均 張 祥 重 韓 睍 相 徐 東 星 徐 相 庚 鄭 泰 成 河 世 明 洪 鎭 裕 崔 圭 悰 栗 原 一 男 小 川 式 野 口 品 二 들 諸 氏 와 더불어 革 命 結 社 不 逞 社 를 組 織 하고 現 社 會 라는 機 關 紙 를 發 行 하여 果 敢 한 鬪 爭 을 展 開 하였다 一 九 二 三 年 九 月 東 京 大 震 災 當 時 에 不 逞 社 盟 員 全 員 이 檢 擧 投 獄 되었다 이렇게 檢 擧 되어 豫 審 을 받던 過 程 에서 陸 洪 均 氏 외 十 三 名 은 釋 放 되고 朴 烈 先 生 과 女 史 는 四 年 이라는 긴 歲 月 에 十 七 回 의 豫 審 을 거쳐 一 九 二 六 年 二 月 二 十 六 日 에 第 一 回 裁 判 開 廷 을 보게 되었으나 그들의 思 想 은 秋 毫 의 動 搖 없이 天 皇 有 害 論 弱 小 民 族 解 放 韓 國 獨 立 의 正 當 性 人 間 의 自 由 를 始 終 如 一 하게 主 張 하였다 급기야 그들은 大 逆 罪 로 死 刑 宣 告 를 받자 女 史 는 萬 歲 를 외치고 朴 烈 先 生 은 裁 判 長 에게 수고했군 하며 嘲 笑 를 지었다 이 思 想 의 一 貫 性 이 態 度 의 沈 着 性 이 生 死 의 超 越 性 은 萬 歲 에 있어서 思 想 家 의 龜 鑑 이 아닐 수 없다 同 年 七 月 二 十 三 日 女 史 는 收 監 中 이던 분 木 刑 務 所 에서 疑 問 死 로 그 恨 많은 一 生 을 마쳤으니 亨 年 二 十 三 歲 다 同 年 同 月 에 女 史 의 遺 骸 는 그 무서운 日 本 警 察 의 눈을 避 하며 많은 同 志 와 媤 叔 朴 廷 植 氏 들의 精 誠 으로 本 國 에 返 葬 되었으나 日 警 의 날카로운 監 視 로 成 墳 조차 제대로 하지못한채 五 十 星 霜 을 거치는 동안 風 磨 雨 洗 로 그 痕 跡 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이를 안타까이 여겨 同 志 들은 모든 誠 意 를 모아 有 志 들의 贊 助 를 얻어 封 墳 을 改 築 하고 墓 碑 를 세워 그 鬪 魂 을 永 遠 히 記 念 하기로 한다 一 九 七 三 年 七 月 二 十 三 日 金 子 文 子 墓 碑 建 立 準 備 委 員 會 竪 眞 城 李 源 箕 書 蔚 珍 張 宗 萬 刻 貢 助 委 員 金 善 求 姜 錫 海 불령사( 不 逞 社 ) 동지 명단 155

156 가네코후미코묘비 건립위원 불령사( 不 逞 社 ) 동지 명단 156

157 불령사 동지였던 陸 洪 均, 韓 睍 相, 栗 原 一 男 등의 이름이 보인다. 불령사( 不 逞 社 ) 동지 명단 157

158 박열과 가네코후미코 동지들 사진 :42 박열과 가네코후미코 동지들 사진 158

159 박열과 가네코후미코 동지들 사진 159

160 박열과 가네코후미코 동지들 사진 160

161 북한의 새로단장한 박열의사 등의 묘역 :41 평양 신미리에 우리의 국립묘지에 해당하는 애국열사릉이 있고 특설묘지의 하나인 재북평화통일촉진회(우 리의 광복회에 해당)의 묘소가 있다. 납북자중 재평통의 리더였던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류동열, 윤기섭, 오하영, 엄항섭, 최동오 등의 묘소 는 애국열사릉에 있고 나머지 인사는 특설묘지에 모셔져 있다. 2002년 당시의 특설묘지 안장자는 다음과 같다. 북한의 새로단장한 박열의사 등의 묘역 161

162 그 당시 묘소는 개별 무덤으로 조성되어 있었고 무덤앞에 그의 무덤임을 말해주는 백비가 서있었으며 당 시 박열의사의 무덤은 아래와 같았다. 북한의 새로단장한 박열의사 등의 묘역 162

163 2011년 현재 신미리 애국열사릉의 재평통 묘지는 우리의 국립묘지 형식으로 완전히 바뀌어 있었으며 봉분 을 없애 지하로 하고 사진을 부착한 새로운 비석을 세워 깨끗하게 단장한 모습이었다. 어렵게 입수한 사진 을 공개한다. 먼저 새로 조성된 시미리 특설묘역(재평통)의 사진이다. 북한의 새로단장한 박열의사 등의 묘역 163

164 북한의 새로단장한 박열의사 등의 묘역 164

165 박열의사 옆으로 김효석 선생과 그 유명한 김약수 선생이 누워있다 북한의 새로단장한 박열의사 등의 묘역 165

166 이 가운데 박열 선생의 묘역은 다음과 같다. 북한의 새로단장한 박열의사 등의 묘역 166

167 북한의 새로단장한 박열의사 등의 묘역 167

168 묘비에 부착된 박열 의사의 사진 북한의 새로단장한 박열의사 등의 묘역 168

169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집행위원이면서 조국통일상수상자라는 문구가 새로 들어가 있다. 북한의 새로단장한 박열의사 등의 묘역 169

170 경북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 출생이라고 기록하여 현재의 문경시를 표기하지는 아니하였다. 북한의 새로단장한 박열의사 등의 묘역 170

171 북한의 새로단장한 박열의사 등의 묘역 171

172 박열의사록 블로그 저자 동양문화이야기 예문관 박성진 발행일 :06:52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복제와 전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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