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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차 례 1장. 탄허큰스님의 재가 인연 이동식 김종서 최창규 최승순 박재원 김희옥 김의정 이영자 박금규 진민자 전보삼 그런 실력을 갖고 있는 분은 이제는 없어 8 스님 때문에 불교와 교육학을 접목할 수 있었지요 18 스님은 세계적인 사상가 29 내 평생에 만난, 가장 두드러진 분 38 천하의 보물, 제 인생의 스승 52 스님에게 받은 가르침을 꼭 회향하겠습니다 64 민족정신을 강조하신 스님 72 학승과 선승을 초월한 분 80 우리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 93 스님에게 배운 지혜로 여성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년은 공부해야 한다는 그 말씀을 실천했어요 123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19

5 채원화 최정화 이동형 권영채 자기 소명의식을 가졌던 분 스님과의 추억을 잊을 수 없어요 민족정신의 관점에서 불교를 바라보신 어른 소탈한 스님이 그리워요 장. 탄허큰스님과 재가 제자들 박용열 전창열 명호근 고준환 서우담 김문환 김동건 박명혜 장화수 송찬우 버리는 공부를 일러준 스님 내 인생에 이정표 역할을 하신 분 스님과의 만남은 필연이었습니다 자유자재로 진리를 찾고, 전달한 도인 유불선 모든 분야에서 대종사이었죠 행동으로 증명된 대도인 제 인생의 위대한 스승 스님의 가르침으로 불사를 했어요 유불선을 회통한 사상가 종지( 宗 旨 )가 없으면 죽은 학문이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19

6 여익구 박완식 심백강 윤창화 최옥화 나의 불교운동의 지주 선교( 禪 敎 )를 회통한 큰스님 진리와 도의 입장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분 인재양성을 강조하고 실천한 스님 이제는 탄허스님 같은 분이 나올 수 없어요 후 기 411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0

7 1장 탄허큰스님의 재가 인연 이동식 김종서 최창규 최승순 박재원 김희옥 김의정 이영자 박금규 진민자 전보삼 채원화 최정화 이동형 권영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0

8 그런 실력을 갖고 있는 분이 이제는 없어 대상 이동식 이화여대 경북대 교수. 정신치료학회 회장. 신경정신의학회 회장 등 역임, 현재 정신과 의사 일시 2012년 1월 6일 장소 정신치료연구원 서울 성북구 우리나라 정신치료학 분야의 대가(1920년생)이신 박사님이 탄허스님과 인연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탄허스님을 만나시기 전에도 불교와 동양사상에 관심이 있었는 가요? 탄허스님을 만나기 전에는 불교와 동양철학에 관심을 조금 가졌지. 내가 1954년도에 정신분석을 공부하러 미국을 갔는데, 미국에 가기 전에는 별 로 관심을 못 가졌어. 어렸을 적에는 왜놈들이 좋은 것을 가르쳐주지 않아서 주 로 일본말 책, 영어 책 그걸 많이 읽었지. 그러나 그때에는 우리 문화에 대한 특 별난 생각이 없었어. 그런데 일제 말기(1942년)에 경성제대에 가서 신경정신과의 부수보( 副 手 輔 )로 있 으면서 공부할 적에 서양철학을 공부하는 친구에게 우리가 이렇게 열등감을 갖 8 게 되고, 한국을 무시하면 되겠냐고 하였지. 미국 가기 전에, 해방이 되고 나서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0

9 문리대 교정에서 철학과 조교하는 친구인 김규용에게 우리 5천년 역사가 볼 게 없을리가 없다고 하였지. 우리 문화를 서양적인, 과학적 용어로 번역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지. 일제 말기부터 한국 문화에 대한 가치를 느끼셨군요. 미국에 갔다 와서는 어떻게 생각을 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하셨는가요. 내가 미국에 정신분석을 공부하러 1954년에 갔는데, 앵커리지에 서 기름을 넣는다고 할 때 72세 된 캐나다 사람이 내 옆자리에 탔어. 그 사람이 날보고 어디로 가느냐 고 그래. 그래서 뉴욕에 간다고 그랬지. 그랬더니 그 사 람이 무엇하러 가느냐 고 해서, 난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러 간다고 했어. 그랬 더니 그 사람이 나에게 미국은 기초가 없는 고층건물이라고 그랬어. 건물이 높 이 올라갈수록 붕괴된다고 하였단 말야. 그러면서 장차 미국은 도( 道 )가 프리베 이할 것이라는 이런 말을 하더라구. 그런 말을 듣고서 미국에서 정신분석을 공부해 보니 부지하세월( 不 知 何 歲 月 )이 야. 시간이 너무 걸려, 돈도 많이 들고. 그래서 원래는 뉴욕대학에 3년 있으면서 공부하려고 하였는데 마지막 1년은 계약 취소해 버리고 1958년에 그냥 와 버렸 어. 돈도 많이 들고, 배울 것도 없어서 2년 있다가 돌아왔지. 돌아오면서 구라파 를 돌아보고 왔는데, 그때에 베니스 섬에서 열린 세계 제1회 철학자대회에 참가 해서 서양 일류 철학자라는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이게 뭐 이야기하는 게 우리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들이야. 나는 귀국해서 생각하기를 한국 전통문화가 세계 최고이다, 한국인이 최고이 다라는 그런 결론을 얻었어. 그러나 이런 생각을 얻어도 그것을 아무한테 말할 수가 없었어. 왜냐, 사람들이 안 믿으니깐.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0

10 그러셨군요. 그러면 언제, 어떤 계기에 의해서 불교에 관심을 가졌는가요? 내가 1962년부터 성북동에 동북의원이라고 해서 정신병원을 냈 어. 그것이 언제인가? 그런데 역경원에 이재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우울증 이 걸린 이 사람을 어떤 사람이 나에게로 보냈어. 그 사람은 역경위원인데 대처 승이고, 대전 보문학교의 교장이었어. 이 사람이 여기 2층에 입원해서 있었는데 처음 1주일은 아무 말도 없다가, 그 이후에는 서장( 書 狀 ) 을 꺼내서 보더라구. 그 사람이 그 책을 보면서 나에게 그 내용을 물어보더라구. 내가 그 사람의 말에 답 을 하다 보니 불교라는 것이 완전히 정신치료라는 것을 알았지. 불교가 순전히 정신치료다 이거야. 불교의 근본은 집착을 없애는 것이야. 나는 애응지물( 碍 膺 之 物 )이라는 그것을 집착이라고 보는데, 그것은 정신분석으로 말하면 핵심감정이 지. 그 이재복이라는 사람이 날보고 그 책을 한번 번역해 보라 그러는 거야. 그 때에는 지금보다 한문 실력이 더 있었어. 그렇게 답을 하면서, 불교가 어떻다는 것을 알게 된 거지. 그런 인연으로 불교를 알게 되었군요.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는가요? 그래서 나는 동국대 조명기 총장을 찾아갔지. 조명기 총장은 일제 시대에 경성제대 종교사회학과 조수로 있었거든, 나는 정신과 부수( 副 手 )로 있었 으니 내가 알고 있었어. 그래서 동대 총장실로 찾아갔지. 그래서 만났지. 그게 1965년이야. 그래 조명기에게 우리가 불교를 배울 터이니 강사를 소개하라 그 랬어. 그래서 소개받은 이가 죽은 이희익과 조계종단 교무부장을 하던 숭산스님 이야. 숭산스님은 그때에는 행원이라고 했어. 그런데 이희익은 찾지 못해서 우 리들이 행원스님에게서 서장을 배우기 시작했어. 우리가 처음으로 배운 곳은 서 울대병원에 학생심리연구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시작했어. 그런데 그 연구소의 10 조교가 방해를 해서 철학교수 연구실에서 했어. 방해한 조교는 서울 문리대 교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0

11 수를 하다가 은퇴했지. 그런데 숭산스님하고 시작하다가 숭산스님이 많이 바빠서 두 번인가를 하다 가, 자기 후임으로 넘긴 사람이 월운스님이야. 월운스님에게서 끝난 거지. 서 장 을 다 떼었거든. 그때 배운 사람이 서울대 철학과 교수와 심리학과 교수, 대 학원생들이었어. 정신과 교수는 나중에 들어왔어. 김규용이라고 동국대에 있다 1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가 서강대로 간 그 친구도 들었어. 그러면 이제 탄허스님과의 만남을 들려주시지요. 나는 그렇게 동양사상을 공부하면서 정신분석과 도를 결합하기 시 작했어. 그런데 누가 그랬나? 동양사상의 도에 대해서는 탄허스님이 많이 안다 고 그래. 세월이 오래가고, 내가 금년부터는 기억이 좋지 않아서 소개해준 사람 은 기억이 안 나. 그래서 학회에서 초청하려고 하였는데 잘 안 되었어. 그래 2년 이 안 되어서 탄허스님이 동국대에 와 있다고 해서 내가 갔거든. 탄허스님이 바 쁘다고 하면서 기회를 안 주어서 간 거야. 동국대에 참선하는 데(대학선원)를 가서 나도 참선을 한 시간 이상을 하고서 그때 만났는데, 만나는 데 1~2년 걸렸지. 그게 아마 처음이지. 그 이후로는 자주 만나게 되었지. 참으로 어렵게 만나셨군요. 그것이 1966년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 만난 장소가 주로 어디였나요? 지금 기억나는 것은 고려대 옆의 대원암이야. 대원암에서는 단 둘 이 많은 이야기를 서로 하였지. 그리고 그것이 언제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탄 허스님이 나를 초청해서 월정사에 같이 간 적이 있어. 동국대학 불교대 승가학 과 1기생의 첫 연찬회를 월정사에서 5박 6일 하였는데, 그때 나하고 동료 교수 인 박홍규 교수, 서울대에서 플라톤 철학을 전공한 그 교수와 김규용이라고 중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0

12 세철학을 한 우리 또래인 그 교수도 같이 갔어. 그러고 또 내 제자들 상담하고 심 리학하는 교수들도 갔거든. 교육 프로그램을 하니깐, 같이 가자고 해서 간 것이 지. 그래 그런 연찬회를 하니, 나도 강연해 달라고 해서 갔어. 고속도로가 나지 않았을 때, 울퉁불퉁하는 길을 버스를 타고 갔지. 그때 탄허스님이 월정사 조실 로 있었거든. 그때 내 나이가 사십대였을 거야. 그 연찬회 때의 이야기를 더 들려주세요. 5박 6일간 월정사에 있을 때, 그때 탄허스님이 조실이어서 방산굴 에서 나하고 단 둘이서 많이 얘기했지. 이박사 말이야, 자존심이 높은 사람들 은 왜 그러냐 고 그래. 탄허스님의 질문에 나는 열등감이 있으면 그리 된다 고 그랬지. 그러니까 탄허스님이 깊이 생각하더라구. 월정사에서 올라가면 상원사가 있어. 그 입구에 탄허스님이 쓴 방한암대선사 비석이 있거든. 상원사에 올라가서 탄허스님과 우리 셋이 마루에 앉아 있는데, 박교수가 스님은 대선사입니까? 하고 물어봤거든. 그런데 탄허스님이 대답을 안 했어. 탄허스님이 고려대에 가서 교수님들에게 강의를 하였어요. 이런 강의에 이박사님이 관여 하신 것이 없나요? 그거는 탄허스님의 부탁으로 내가 만들어 준거야. 월정사에서 연 찬회를 마치고 내가 서울로 돌아올 때에 탄허스님이 버스타는 데 와서 지식인들 을 모아서 뭘 강의하도록 해 달라고 나에게 부탁했어. 그래서 고려대에서 강의 를 하게 됐지. 그때에 배운 책이 아직도 여기에 있어. 그리고 화엄경을 번역해 서 낸 몇십 권 책도 그때 돈 50만 원 주고 산 것도 있어. 12 하여간 그래서 내가 고려대 교수들에게 이야기를 해서 교수와 학생들이 강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0

13 를 듣도록 하였어. 그래서 외부인도 오고 그랬어. 강의한 것은 장자와 영가집 등 이었지. 처음에는 듣는 사람이 많아서 좌석이 모자랐거든. 그래 서서도 듣고 그 랬어. 그런데 그때에는 학생 데모가 심해서 휴교령이 자꾸 내리고 그래서 사람 수가 자꾸 줄고 그랬어. 또 탄허스님이 고대 철학과 교수인 손명현 교수를 자주 놀리고, 수도 줄어서 30명밖에 안 되니 탄허스님이 재미가 없어 그만 하려고 여 1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러 번 그랬어. 하두 그러기에 탄허스님이 나보다 나이가 여덟 살인가 더 많았지 만, 스님이 불교를 더 잘 아나, 내가 불교를 더 잘 아나 한번 해 보실까요? 그 랬어. 대종사(탄허)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구(이 대목에서 이박사는 허허 하면서 웃었다). 내 가 그렇게 하니깐 탄허스님도 웃으셨지. 운허스님은 강의를 할 때에 한 사람만 있어도 했거든. 대원암에서 보고 들은 것을 더 들려주세요. 그때, 돌아가신 무교회주의자인 함석헌씨가 탄허스님을 찾아와서 자기가 하는 운동에 탄허스님도 참가해달라고, 같이 하자고 하는 그런 걸 봤지. 탄허스님과 박사님은 만나면 서로 좋은 기분이었겠네요. 나와 탄허스님은 만나면 서로 좋았지. 탄허스님은 풍전호텔에서 몇백 명에게 강의를 하는데 거기는 자기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없는데, 우리 모 임에는 알아듣는 사람이 있으니깐 제일 좋아했지. 그리고 참 탄허스님이 나한테 말하기를 사람이 올바른 생활을 하는 것은 스 스로 남에게 굴복하지 말고, 그리고 남을 무시하지도 말고 남을 너무 높이지도 않는 것이 좋다 고 했어. 이 말은 비굴하게 살지 말고, 자존심을 갖는 것이 좋다 는 것이지. 그러니깐 자존심과 도는 같은 것이야.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0

14 탄허스님에게 배웠다고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탄허스님에게서 제일 크게 얻은 것은 유불선이 마찬가지라는 것이 었지. 내 생각과 완전히 같은 거야. 이런 말은 다른 사람에게서는 나오지 않아. 내가 주장하는 도정신치료라는 것은 서양의 정신분석하고 동양의 도가 같다는 것이지. 동양의 유교, 불교, 도교가 결국 하나라는 것, 이게 핵심이야. 그러니깐 박사님의 도정신치료는 탄허스님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군요. 영향이 있지. 누가 나하고 의견 일치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없었어. 딴 사람은 없었어. 내 말을 동의하는 사람이 있어야 내가 자신이 생기지 안 그래? 내 말에 동의해 주는 사람은 탄허스님밖에 없지. 나의 이론은 탄허사상에서 시작된 거야. 유불선이 하나라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에게 는 도움이 되지. 탄허스님의 첫인상이라고 할까, 느낌은 어떠하셨는가요? 그때 탄허스님이 50대였지. 탄허스님에게서 들은 것이 직지인심 자심반조인데, 그것도 핵심이지. 서양의 정신분석, 정신치료에서 공감이라고 말 하는 것과 이런 것들이 일치해. 직지인심 견성성불에서 말하는 자기 마음을 보 는 것, 그것은 동서양이 일치해. 내가 주장하는 도정신치료는 개념이 아니고, 경험이야. 경험만이 진리라는 것 이지. 서양에서도 이론과 지식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 탄허스님도 입산 이전부터 도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그걸을 찾다가 불교에 입문하셨지요. 14 나도 그런 것은 본인에게서 들었어. 입산 이전에 유교와 장자를 통 달하였다고. 그래서 딴 사람과 달리 내가 탁 들어왔지. 그래서 나하고는 기분이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0

15 좋게 만났을 거야. 그리고 탄허스님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어. 날보고 정치교수 라고 농담을 하고 그랬어. 박사님은 탄허스님 이외에도 경봉스님과도 인연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봉스님을 만난 것은 1972년 근처일 거야. 탄허스님을 만날 때에 비슷하게 만났어. 내가 만난 스님 중에서 선이 제일 깊은 스님은 경봉스님이야. 1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그 스님은 순수 도인이지. 탄허스님은 유불선 회통을 주장하여서 경봉스님과는 약간 달라. 그리고 도선사에 있던 청담스님과도 만났지. 청담스님이 거처하는 절에서 4박 5일간 있으면서, 먹고 자고 그랬어, 심리학 철학 교수들하고. 청담 스님도 정신분석을 이용해서 법문을 하고 그랬는데, 정신분석과 불교에서도 자 존심과 정신건강이 핵심이야. 정신분석에 투사라는 말이 있어. 자기가 깨닫지 못하면 마음을 밖에서 본다는 것이지. 청담스님은 바른 마음을 설명할 때에 그 림도 그렸는데, 그런 것이 정신분석과 완전히 통하지. 이곳 정신치료원에서 불교 공부를 하고 그랬나요? 그럼. 여기 2층에서 철학과 교수, 정신과 의사들, 대학원생들이 몇 십 년 했지. 동국대 이종익 교수가 여기에 몇 년간을 와서 했다고. 그리고 월운 스님도 오래 했고, 종범스님은 10년이 넘게 하였는데 요새도 찾아오고 그러지. 또 혜거스님도 불러서 했어. 박사님이 지켜본 탄허스님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십니까? 글쎄, 탄허스님의 정체성은 학승으로는 최고이지. 물론 탄허스님 은 내가 지적하는 것을 받아들인 힘이 있지. 그러나 학승보다는 도( 道 ) 쪽에 정체 성이 많지. 탄허스님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은 좀 어려워.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0

16 얼마 전 박사님께서는 도( 道 )정신치료를 개척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도정신치료가 후학들 에게 계승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박사님의 사상에 불교의 영향이 있다는 것도 더욱 분석 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그렇지. 지금은 미국 친구가 많이 하고 있어. 내 철학에 탄허 스님과 인연이 있어. 도 치료를 정립한 것, 내 사상에 불교가 있다는 것은 후세에 참고가 될 것이야. 공부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거야. 내가 이런 것을 한 것도 50년 넘게 공부한 결과야. 지금은 나처럼 한 분야만 공부하는 사람들이 없어. 예전에 학자들은 독립정신이 많았다구. 요즈음 학자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어. 운허스님도 그렇고, 이상은씨도 그런 말을 했어. 그 전의 학자들은 독립정신이 있었다구. 운허스님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절에 숨어서 스님이 되었다고 그러 잖아. 박사님께서는 탄허스님과의 인연, 교류, 영향 등에 대한 것이 없나요? 글쎄? 그것은 오늘 선생처럼 탄허스님에 대한 것을 묻지 않아서 그렇지. 내가 탄허스님과 인연도 많고, 영향받은 것도 있었지만 이렇게 찾아와 서 스님에 대한 질문을 한 것이 오늘이 처음이야. 말하자면 유불선이 하나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도, 모두 관심이 없으니 탄허 스님에 대해서 말할 기회가 없었지. 유불선이 하나라는 것을 잘 이해도 못하고, 그러니 질문도 하지 않지. 그래서 그냥 지나가거든. 하여간 나는 탄허스님의 유 불선 회통에 공감해서 공부를 하였고, 그런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으니 우 리 서로만 자주 만나고 좋아했지. 제가 탄허스님 탄신 100년이 되어서 찾아온다고 하였을 때의 소감은. 16 벌써 그렇게 되었나 그랬지. 지금도 나는 탄허스님 생각이 가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0

17 나. 이제는 나이가 많아서 기억이 잘 안 나. 그리고 나는 지금도 임상치료를 하 고, 여러 활동을 하는데 시간이 나면 휴식을 하고 있어. 하여간 탄허스님은 내 가 당신을 알아주니깐 좋아했어. 그걸 알아주는 것은 나밖에 없으니. 그래서 오늘 선생이 온다고 해서, 나는 속으로 탄허스님의 이야기를 할 좋은 찬스라고 생각했지. 탄허스님과 같은 그런 실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이제는 없 1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어. 그 스님은 유교와 노장을 공부해서 절에 온 것이 특징이야. 오늘 불편하심에도 불구하고 귀한 증언 감사드립니다. 별 말씀을. 오늘 식사라도 같이 하면 좋은데 내가 요즈음 과로가 겹쳐서 쉬어야 하겠어. 나는 시간이 나면 쉬는 게 일이야.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0

18 스님 때문에 불교와 교육학을 접목할 수 있었지요 대상 김종서 이화여대 및 서울대 교수, 국가교육개혁위원장 역임, 서울대 명예교수, 길상사 자문위원 일시 2012년 2월 21일 장소 김종서 교수 자택 서울, 반포 교수님은 탄허스님과의 인연이 깊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는 한암스님과의 만남도 있었지요. 맞아요. 그런데 올해 내 나이가 여든아홉(1924년생)이라 시력도 좋지 않고 많은 것이 기억이 안 나요. 그렇지만 생각이 나는 대로 이야기를 해보지요. 내가 한암스님, 탄허스님을 만난 것은 1945년 해방되던 해입니다. 그때 해방될 때에 나는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어요. 그때에는 모든 국민이 광복의 벅찬 감 격과 눈물겨운 즐거움에 독립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어요. 나도 감수 성이 예민한 학생이었기에 그런 분위기에 흠뻑 젖어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의 한구석에는 허전하고, 쓸쓸하고, 자칫하면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것은 우리나라는 독립이 되었는데 내 마음은 그 무 18 엇에 항상 예속되고 있으니 나란 도대체 무엇이냐 는 의심이었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0

19 나는 일정 말기부터 불교의 큰스님은 한암스님과 만공스님이라는 것을 들어 서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한암스님을 만나러 오대산 상원사로 떠난 것이 1945 년 9월 1일이었습니다. 월정거리에서 오대산으로 들어가는 트럭을 타고 상원사 로 들어갔습니다. 1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그런 비사가 다 있었군요. 그래 한암스님을 만났습니까? 꿈과 번뇌를 가득 지닌 채 한암스님을 뵈었을 때 나는 스님이야말 로 나의 의문과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는 분이라고 직감했어요. 얼굴이 구슬같 이 맑고 빛이 나는 듯한 느낌에 압도되어 두 무릎을 꿇었지요. 나는 한암스님이 반겨주실 줄 알았는데 스님은 의외로 큰소리로 야단을 치며 나를 꾸짖었습니다. 스님은 나라가 해방되어 젊은 학도들이 할 일이 많은데 어째서 이 산속으로 들 어왔냐 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만 묵고 당장 내일 나가라 는 말씀이었어 요. 그러나 나는 이 말씀에 더욱 매혹되었고, 여러 가지 질문을 드리자 스님은 체념하셨던지 탄허스님을 불렀어요. 얘가 자꾸 물어보니 네가 대답 좀 해줘라 고 하셨지요. 그때 내가 한암스님에게 불교가 무엇이고, 인생이 무엇이냐고 자 꾸 당돌하게 질문을 하였더니 내 질문에 탄허스님이 답을 해주라는 분부였죠. 그때에 보니 탄허스님은 한암스님에게 꼼짝을 못해요. 그러면 상원사에서 어떻게 지냈는가요? 나는 탄허스님에게 1주일간을 불교에 대한 것을 물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너무 흘러서 그 질문의 내용은 기억이 안 나요. 이렇게 해서 탄허스님과 의 인연이 이루어져서 스님이 입적하실 때까지 이어졌지요. 그때 탄허스님은 30 대 초반이었고, 나는 20대 초반이었지요. 탄허스님은 신식교육을 받지 않았지 만 이미 유학, 불교의 대가의 경지에 있었고 나는 서당에 다닌 일이 없어 천자문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0

20 조차 읽은 적이 없는 신학문만을 접한 학생이었어요. 탄허스님은 유학을 공부하 다 오대산으로 입산하여 한암스님에게 무릎을 꿇고 참선을 하여 이미 득도를 하 였으나, 나는 어린 시절에 기독교 분위기에서 자랐기에 불교에 대해서는 그야말 로 백지 상태였어요. 그렇지만 나는 이번 기회에 불교의 핵심을 알고야 말겠다 고 생각하고, 탄허스님이 무엇을 하든 상관치 않고 거머리같이 찰싹 붙어 따라 다니며 질문 공세를 퍼부었습니다. 내가 물은 것은 대부분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이었어요. 그러나 이 질문은 스님의 입장에서는 가소로운 질문이었지만 거 기에 대해서 성심껏 답을 해주셨습니다. 그런 문답을 통해서, 그리고 지켜보신 생활을 통해서 많은 것을 느끼셨을 터인데, 소감이 어떠하였는가요? 그때 내가 스님으로부터 받은 교훈은 너무나 강렬한 것이었습니 다. 그것을 구분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아요. 첫째, 스님의 자신감에 넘치는 모 습에 저는 감동했어요. 어떤 질문을 해도 분명하고 명쾌하게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말씀하셨어요. 신행에서 우러나오는 자신만만한 말씀이었기에 전후 간의 맥이 일관되었어요. 둘째, 신학문의 능통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스님은 성장 배경을 보면 국민학교도 나오지 않았기에 신식 학문을 접할 기회가 없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철학, 과학 등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셋 째, 저는 큰스님의 설명 방식에 감탄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상대방의 근기에 따라 가르치셨다는 것을 그때는 나는 알 리가 없었죠. 스님은 부처님의 교육방 법을 알고, 실천하셨으며 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여러 가지 비유 를 들어가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넷째, 사회 사정에도 능통하셨습니다. 그 당 시 일본이 쫓겨가고 정치인들이 우후죽순 나타나던 시절인데 정치는 물론 사회, 20 문화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갖고 계셨습니다. 다섯째, 수도를 위한 정진의 모습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0

21 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하루에 3~4시간만 주무시고 정진하는 것 같았어 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무서운 정진의 생활을 하셨어 요. 여섯째, 남다른 기억력은 분명히 천재의 경지였어요. 영재라는 말도 있지만, 스님은 영재가 아니라 천재였어요. 특히 유불선의 구절을 막힘없이 줄줄 외우는 데에는 탄성이 나올 뿐이었지요. 일곱째, 스님은 대학자였어요. 스님께서는 당 2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시 30대 초반이었는데 유불선 삼교에 회통하고 있었어요. 모르기는 하지만 당 시 스님과 같이 이 부분의 학문을 그렇게 넓게, 깊게 통달한 학자는 없었을 것입 니다. 여덟째, 한학의 대가였습니다. 한문을 자유자재로 구사함은 물론 이를 토 대로 현재 및 미래를 투시하는 혜안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아홉째, 스님은 분명 히 득도하신 것으로 보였습니다. 나 같은 소인배는 득도의 경지를 감히 짐작도 할 수 없겠지만 스님의 눈에서 가끔 조용하고 잔잔한 빛이 나오는 것을 느꼈거 든요. 이런 스님의 모습은 그 당시 스님이 30대 초반 시절에 그러하였다는 것입니 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는 속담이 있는데, 내가 스님을 처음 뵈었 던 상원사 시절, 해방된 직후의 장면이 이를 말해주는 것일 것입니다. 그때 저는 스님이라는 위치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몰랐고, 부처님에게 절도 하지 않았던 무지한 입장이었지요. 그래서 탄허스님 말씀 하나 하나에 대해 논 쟁을 벌였고, 비판하였으며, 반박하였지요. 그런데 1주일 정도가 지나자 스님의 말씀을 어렴풋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의 논지로 스님의 말씀에 대드는 것은 계란을 들고 바위에 부딪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되 었어요. 이런 생각이 들면서 나의 입은 닫혀졌어요. 감히 질문을 할 수 없었어 요. 나의 태도가 변하자 탄허스님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지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0

22 그러면 침묵한 이후에는 어떤 생활을 하셨는가요? 그 이후에는 선방에 들어가서 벽을 바라보고 묵묵히 앉아 있었지 요. 한암스님에게 선방에 들어가는 것을 승낙받아서 한암스님, 탄허스님과 같이 참선을 했어요. 그때 한암스님이 다른 수좌들에게 저 종서 봐라. 얼마나 열심 히 하느냐, 그런데 너희들은 뭐하냐? 고 하셨어요. 그때 나는 화두도 잡았어요. 나는 중학 시절부터 이게 뭐냐 하는 의심을 했어요. 그때에는 기독교 신자이 면서 그런 고민을 하였는데 그런 이야기를 한암스님에게 드렸더니 한암스님은 그러면 그걸 화두로 잡으라고 하셨어요. 요즈음 말로 하면 시심마 이지요. 그런 생활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추억을 들려주세요. 그때 나는 상원사 옆에 흐르는 개울물, 찬물에 들어가서 세수와 목 욕을 했어요. 고행을 하면서 참선을 하면 뭐가 될까 해서 그리한 것이지요. 그 리고 한암스님의 승낙을 얻어서 상원사 범종을 새벽 세 시 경 무렵에 종을 쳤어 요. 지금은 종에 금이 가서 종을 안 친다고 그러죠. 그리고 내가 그때 상원사에서 30~40여 명의 스님들에게 보건체조를 가르쳐 드렸어요. 스님들은 앉아서 수행을 하셔서 그런지 위장병이 많았어요. 내가 체 조를 가르쳐 드렸더니 스님들이 이 체조를 하면 위장병도 없어지고 좋은데, 공 연하게 위장병 때문에 고생을 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한암스님과 탄허스님이 아주 좋아하셨어요. 참, 그리고 그때에 탄허스님이 하늘로 난다고 양 손을 옆으 로 뻗치시고, 위 아래로 내젖으면서 막 뛰었어요. 아마 그때에 도교를 공부해서 그랬나 봐요. 그곳 상원사에는 뱀이 그리 많았어요. 마당에 가면 여기 저기에 뱀 이 슬슬 기어 다니고 그랬어요. 그런데 뱀에 물린 사람은 없었어요. 그리고 또 상원사 그곳의 김치가 무척 짰어요. 스님들은 많고, 절 사정이 좋지 않아서 그 22 렇게 해서 먹은 것 같아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0

23 그때 상원사에서 만난 수좌 중에서 기억나시는 분이 있나요? 기억이 없어요. 세월이 너무 가서 그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 억이 안 나. 내 나이가 여든아홉이니 너무 늙었어요. 그런데 내가 상원사에 들 어갈 때에 나간 분이 사학자인 황의돈 교수예요. 그 교수님은 일정 말기에 오대 산 상원사에 있었어요. 그리고 그때 본 한암스님은 세수가 일흔이셨는데, 밤 열 2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시 경이면 주무시고, 새벽 두 시경이면 일어나서 정진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 직 정진생활의 연속이었어요. 오대산에서 얼마나 있다가 나오셨나요? 상원사에서 근 한 달을 있었어요. 그때에 한암스님이 나에게 원성 ( 圓 成 )이라는 법명을 지어 주셨지요. 그때에 스님은 이름을 지어 주면서, 함께 게송도 써 주셨어요. 그런데 오대산에서 나올 때에 갖고 나와서 집에 두었는데 6 25사변이 나서 황간으로 피난을 갔다오니깐 그만 없어져 버렸어요. 다른 사진들과 함께 다 없어져 버렸어요. 그것을 가지고 있었으면 참 좋았을 터인데. 그때에 참선의 방법도 모르고, 화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선방에 앉아 있으려 니 온갖 잡념이 뭉게구름같이 떠오르고 다리는 왜 그렇게 아픈지 견딜 수가 없 더라구요. 그러면서도 이렇게 앉아만 있으면 무엇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느냐? 면 서, 낭만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탄허스님이 심각한 표 정을 지으면서 학생! 머리 깎고 나하고 같이 공부하지 그랬어요. 나는 그 말씀 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것은 나의 인생이 달라짐을 뜻하는 것이잖아요? 그런 갈림길에 서 있기도 했어요. 그래 나는 고민하고 갈등하였어요. 그러는 순 간 내 머리에는 부모형제의 모습이 떠오르고, 서울에 있는 친구들이 그리워지 고, 만세를 부르면서 서울 거리를 누비던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어 요. 그래서 고민을 거듭하다가 스님에게 저는 아마도 인연이 안 되는 것 같습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0

24 니다. 저는 속세에 나가 학교생활을 계속 하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리 고 그 다음날 한암스님, 탄허스님에게 감사, 고별의 인사를 드리고 상원사를 내 려와서 서울로 올라갔지요. 오대산과 그런 추억을 갖고 계시는군요. 그런데 나는 상원사에서 나온 이후에는 상원사에서의 참선, 추억 을 전부 잊고 살았어요.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967년 부터는 이화여대에 교수로 있었지요. 얼마 후에는 서울대 사범대에 있으면서 불 교학생회를 지도하였지만. 그러다가 탄허스님이 고려대에서 불교 특강을 하시다가, 강의를 듣는 사람들 에게 옛날 상원사에 와서 공부하던 젊은 사람인 김종서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혹 시 지금 뭐하고 있느냐고 물어 봤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강의를 듣던 사람 중 에 내 친구가 있어서, 지금 이화여대의 교수로 있다고 알려 주었어요. 그래서 탄 허스님이 나를 찾아서 다시 만나게 되었지요. 그래서 만난 곳이 개운사의 대원 암이에요. 내가 이대에 들어가기 전에 스님과 나는 소식이 끊어졌었지요.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다가, 다시 만난 것이지요. 그러나 다시 만났을 때에는 무 덤덤했지요. 불교인들은 반갑다고 호들갑 떨지도 않고, 표정도 없고 그러잖아 요. 담담했지요. 다시 만나서는 탄허스님의 법문을 들었나요? 그것이 삼보법회에서 강의를 하실 때에 가서 조금 들었지요. 그리 고 월정사로 내 처와 같이 가서 만나서, 식사도 하고 방산굴에서 하루 자기도 했 지요. 그리고 스님을 따라다니던 이화여대 출신인 진민자라고 있어요. 진민자가 24 이대에 다닐 때에 내가 교수로 있어서 잘 알았지요. 월정사에서 진민자를 만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0

25 서 우리 처와 함께 좁은 방에서 자기도 하였어요. 대원암 시절에 탄허스님은 화엄경 출판을 하였지요. 맞아요. 스님이 출간한 신화엄경합론이라는 것을 스님은 나에게는 그냥 주셨어요. 스님은 그후에도 사집, 주역선해 같은 것을 출간하셨는데 나에 2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게는 전부 그냥 주셨어요. 나에게는 돈을 받지 않으셔서, 사위인 우담거사가 갖 다 주었지요. 김교수님은 요즈음도 신행생활을 철저히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신행에 탄허스님의 영향이 있나요? 탄허스님을 다시 만나면서 불교에 관심이 생기게 되었지요. 그래 서 이동식 박사가 주관하여 이박사 병원 2층에서 하던 불교 강의를 다 들었어 요. 그때 강의한 분이 종범스님, 지관스님, 이종익 등이지요. 그리고 종범스님 으로부터는 승현사에서도 배웠고요. 그리고 탄허스님이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에도 세 번이나 오셨어요. 그때 우리 집사람이 무엇을 대접할까를 많이 고심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계란도 내 놓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스님은 계란은 무정란이라 잡수신다고 하더구만. 지금 여기 거실에 걸려 있는 스님의 유묵( 向 上 一 路 )은 스님이 대원암에 계실 적에 써주신 것 입니다. 그때가 내 아들인 김성철(동국대 교수)이가 중학교 때일 거예요. 탄허스님이 입적하셨을 때에 월정사에서 있었던 영결식장에 가셨는가요? 문병을 했지요. 스님이 입적하시기 이전, 한양대병원에 입원하였을 때에도 가서 월정사 영결식에는 내 처와 같이 갔지요. 월정사에를 갔더니 서우담이가 날보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26 고 조사( 弔 辭 )를 하라고 그래요. 그러나 나는 조사를 한 번도 한 적도 없어서 거절 을 하고, 대신 국회의원을 한 최창규가 하도록 추천을 하였지요. 최창규는 최익 현의 후손인데, 탄허스님이 최익현의 제자에게 유학을 배워서 내가 서울대 교수 를 하던 최창규를 스님에게 소개를 시켜 드렸지요. 그때 서울대 교수로 국어학 자로 이름이 있는 이응백 교수 부부도 갔지요. 그 교수의 부인이 신실한 불교신 자였거든요. 그때에 영결식을 마치고 운구를 다비장으로 옮길 때에 봉선사의 월 운스님이 자기도 운구를 메겠다고 간청을 하던 것이 지금도 생각이 나네요. 월 운스님은 동국대 역경원장을 하던데, 지금도 잘 지내시지요? 그 스님은 강의를 구수하게 잘 하지요. 나는 그 스님의 불교 테이프 강의를 많이 들었어요. 탄허스님의 정체성에 대한 의견이 있나요? 스님은 선승이기도 하고, 학승이기도 하고, 대학자이기도 합니다. 스님은 밤을 새워서 역경 작업에 주력하셨지만 나머지 시간에는 항상 참선을 하 셨지요. 그리고 머리는 천재야. 기억력이 대단해요. 번역하시는 것에 주력하셔 서 참선할 시간이 부족했을 거예요. 탄허스님은 예언을 많이 하셨지요? 맞아. 탄허스님은 예언자예요. 예언에 대한 말을 많이 하셨어요. 스님이 예언한 것 중에서 내가 기억나는 것을 하나 말해 보면, 스님은 북한의 김 일성 주석이 죽는다는 것과 박정희 대통령이 몸에 쇠붙이가 들어가서 죽는다고 그랬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박대통령이 무슨 수술을 하다가 죽는가 그랬지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총을 맞아서 돌아갔지요. 그리고 일본이 얼마 후에는 가라 앉는다고도 그랬어요. 26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27 학하리에는 가 보셨나요? 탄허스님과 같이 가 보았죠. 스님은 그곳이 명당자리라고 하셨지 요. 보통 절의 화장실은 법당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보통인데, 그곳은 바로 옆에 있어서 나는 이상하게 여겼어요. 스님은 그곳을 인재를 길러내는 도량으로 삼겠다고 하셨는데, 그 꿈을 이루지는 못하셨어요. 2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탄허스님의 생각이 지금도 나십니까? 나지, 매일 나지요. 나는 탄허스님을 존경해요. 스님 때문에 내가 교육학을 공부하면서 불교를 알 수 있었고, 교육학에 불교를 접목시킬 수가 있 었어요. 내가 한암스님, 탄허스님을 존경해요. 한암스님도 그렇고 탄허스님은 불 교식으로 말하면 오직 정진을 하신 분이에요. 두 스님은 정진을 엄청 하신 분이 에요. 한암스님은 도인 같은 분이셨고, 탄허스님은 조금 자존심이 강한 분이지요. 탄허스님은 신학문을 안 한 분인데, 동서 철학 특히 칸트에 대해서도 해박하셨 지요. 대단한 분이야. 요즈음은 신행생활을 어떻게 하시나요? 나는 지금도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국립묘지를 반 바퀴 돌면서 금강경 독송을 합니다. 그리고 길상사로 가는 지하철에서 독송을 또 한 번 하고, 길상사에서 참선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독송을 또 다시 합니다. 그래서 하루에 세 번씩을 합니다. 내가 이렇게 수행생활을 하면서 여생을 잘 보 내는 것도 탄허스님을 만난 인연에서 나온 것입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28 탄허스님 탄신 100주년을 기해서 제가 찾아뵌다는 말을 들은 소회는. 글쎄요. 벌써 백 년이 되었나 여기면서 덤덤했지요. 나는 탄허스 님이 하교( 下 敎 )해 주신 향상일로( 向 上 一 路 )하라는 가르침에 따라서 정서적 사회 적 신체적인 측면에서 향상일로하는 길을 가려고 하고 있어요. 나는 지금껏 스 님의 가르침, 문집, 유묵을 통하여 불교를 믿고 생활해 왔어요. 스님 때문에 불 교와 교육학을 접목할 수 있었어요. 스님의 진면목은 대학자, 대학승, 석학입니 다. 머리가 천재입니다. 그러면서도 부단한 노력을 하신 분입니다. 이걸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오늘 귀한 회고 감사합니다. 내 말이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증언 자료집을 만들 어 주시길 바랍니다. 수고했어요. 28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29 스님은 세계적인 사상가 2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대상 최창규 서울대 교수, 국회의원, 독립기념관 관장, 성균관 관장 등 역임 일시 2012년 8월 4일 장소 새길병원 서울, 성북 교수님은 제가 독립기념관 재직 시절에 모시던 관장님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탄허스님 과의 인연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내가 탄허스님을 만난 것은 1970년대 중반으로 기억합니 다. 서울대 교수였던 김종서 교수가 소개를 해서 만나게 되었지요. 스님이 나를 방문하는 형식으로,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만났는데, 첫인상이 아주 인자하시면 서도 재문( 才 門 ), 재기( 才 氣 )가 발랄하신 것이 인상이 깊었지요. 그러면, 첫 만남 이전에는 탄허스님에 대한 풍문을 들으셨나요? 들었지요. 탄허스님은 유불선을 회통한 고승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어요. 내가 서울대에서 그때 한국사상이라는 과목을 6, 7년간이나 강의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탄허스님도 스님대로 나를 굉장히 만나고 싶었대요. 왜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30 냐하면 스님은 면암의 제자인 이극종 선생의 제자였고, 나는 면암의 현손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에 그러셨대요. 혹시 이극종이라는 분을 만나시지는 않았는가요? 나는 그 어른을 만난 적은 없었고, 주변 사람들이나 집안 어른들에 게서 얘기는 들었지요. 첫 만남에서는 어떤 대화를 하셨는가요? 첫 만남은 퍽 의미가 있었어요. 스님의 재기가 보통이 아니어서, 나는 스님에게서 강한 인상을 느낀 것이지요. 처음 만났을 때에 스님은 칸트의 순수이성을 가지고 논의를 하자고 그래요.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어요. 스님은 칸트를 조사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는 거예요. 스님이 왜 그러셨느냐 하면 만 유의 인식의 모체를 순수이성이라고 하면, 그를 환원할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 고, 그 정답이 순수이성이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칸트에게는 아무런 정 답이 없다고 하시면서 칸트는 죽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스님에게 그러면 답이 있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스님은 그것은 태극( 太 極 )이라고 하시면서 모든 것은 통체일태극( 統 體 一 太 極 )라고 하셨어요. 스님 은 돌은 돌이 아니고, 청산은 청산이 아니고, 똥덩어리는 똥덩어리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것들의 근본에는 태극이 있고, 모든 것은 통체일태극이라, 태극으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칸트의 순수이성에서는 그것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칸트는 죽었다 고 하신 것이지요. 스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대단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때 내가 생각하기에 스님이 칸트의 실천이성을 알았 으면 그렇게 보시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봤지요. 30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31 그 후에도 자주 만나셨는가요? 그럼요. 개운사 대원암, 방산굴, 학하리에서도 만났어요. 우리 집 에도 오시고, 여러 번을 만났어요. 그리고 면암선생의 사당인 충남 청양의 모덕 사에도 오시고 그러셨지요. 3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탄허스님을 만나시면 어떤 이야기를 하셨는가요? 스님과 나는 앞으로 우리 민족의 통일과 나아가서는 세계평화에 대한 대화를 많이 하였어요. 스님께서는 그런 주제에 대해서 나와 대화를 해서 결론을 내고 싶다고 하셨어요. 하여간에 만나기만 하면 민족통일, 세계평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지요. 그럴 때에 주로 나온 것이 현묘지도( 玄 妙 之 道 ), 율곡의 이분수론( 理 分 殊 論 ) 등이었 어요. 그 분은 내가 볼 때에 유불도에 능통한 분이셨지요. 탄허스님은 민족의식이 강렬하셨고, 통일에 대한 관심도 많았지요. 나와 스님과의 대화는 나라 걱정이 초점이었어요. 스님께서는 불 가( 佛 家 )의 입장에서 동양사상 전반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면서, 한민족이 인류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갈구하시는 것이었지요. 그러시면서도 스님은 겸손하시고, 순수하시고, 예리하셨어요. 그때 스님은 여러 사람과 많은 대화를 나누어 보았지만, 내가 말 상대가 된 유 일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때에 스님의 의견에 내가 답을 하면 스님은 기 분이 좋으셔서 옳지, 맞어 하시면서 얼굴이 상기되고 그러셨어요. 흥분된 모 습으로, 나와의 대화에 황홀해 하셨어요. 우리 집에 가끔 오시면 우리 집사람이 콩나물국을 내오면 맛있게 드시고 그랬지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32 현묘지도는 무엇인가요? 스님은 모든 도가 통합이 된다는 거였어요, 통합이 되면 통일을 이 룬다고 보셨어요. 그런데 스님은 문명의 전쟁은 종교전쟁을 말하게 되는데, 통 일이 되면 그런 전쟁은 해소가 되어버린다고 보신 것이지요. 그러면 21세기의 최상의 도는 평화인데, 그 해답이 우리 한민족에게 있다고 하셨어요. 스님은 통 체일태극만을 말씀하셨는데, 내가 통일의 어원이 통체일태극에서 나온 것이라 고 하자 스님은 그러냐고 하면서 기뻐하셨지요. 탄허스님은 인재양성을 많이 강조하였는데, 이런 말씀을 듣지 않았는가요? 인재양성에 대해서도 많은 대화를 하였지요. 스님은 대전 학하리 에 학교를 세워서 인재를 양성하자고 나와 이야기를 같이 하셨어요. 앞으로 그 곳을 세계 인류평화 연구의 메카로 하신다고 그랬어요. 탄허스님의 부친이 독립운동을 하신 내용을 아시나요? 그럼, 알지요. 그 당시에 스님과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지요. 스 님의 아버님은 보천교 간부를 하면서 민족운동을 하였다고 그래요. 나의 할아버 지인 면암 선생은 의병을 일으키시고 대마도에서 순국을 하셨지요. 그래서 스님 과 그런 것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했지요. 그래서 스님과 나는 동질감이 있었 지요. 탄허스님의 은사인 한암스님을 아시지요. 스님에게 들어서 알고 있지요. 스님이 스물두 살 때에 한암스님에 게 편지를 했어요. 탄허스님은 그 편지 내용을 나에게 설명을 하시더군요. 그래 32 그런 인연으로 입불( 入 佛 )을 하셨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깐 한암스님 때문에 유학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33 의 젊은 학도가 불교로 간 것이지요. 즉 유불( 儒 彿 )이 그 분(한암)을 통해 탄허스님 에게서 학문적으로 합일, 회통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탄허스님에 대한 추억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스님과 자주 만나면서 대화를 하다가, 그러니깐 1978년 가을에 내 가 여러 일을 무리하게 하다가 과로로 발병이 되어서 쓰러졌어요. 내가 발병이 3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된 다음 해인 1979년 8월에 탄허스님께서 갑자기 나를 방산굴로 부르셨어요. 스님은 희대( 稀 代 )의 인물인 나를 구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시가 2천만 원짜리 산 삼을 구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최박사가 그것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런데 당신에게는 돈이 5백만 원밖에 없으니 박대통령에게 편지로 그 사정을 이야기 해서 그 산삼을 먹어야 된다는 것이었어요. 박대통령이 나를 좋아하니 돈을 보 내줄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스님은 그 산삼이 나의 치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고 하셨어요. 스님은 이렇게 인간성이 좋으신 분이었어요. 그 산삼을 잡수셨는가요? 먹을 수가 없었지요. 내가 편지를 쓰지 않았어요. 탄허스님에게 그 런 말씀을 들었지만 내가 스님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어요. 우리 집에 90조모가 계시고, 70노모가 계시는데 그 분들은 산삼은커녕 인삼도 제대로 못 쓰시고 생 존하고 계신데 내가 나의 치병에 급급한 나머지 산삼을 먹겠다는 편지를 쓸 수 가 없다고 하였지요. 그랬더니 스님께서는 충신의 가문에서 효자가 난다고 하는데, 면암이라는 충 신의 집안에서 효손( 孝 孫 )을 두었다고 하시면서 충( 忠 )이란 것에 감탄을 하시더군 요. 스님께서는 그 비싼 산삼을 구하지 못하게 되자, 다른 산삼을 구해서 나에 게 먹으라고 주셨어요. 그래서 나는 효과를 봤지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34 교수님이 국회의원을 오래 하지 말고, 학교로 돌아가라고 스님이 말씀하였다는 것을 제가 들었어요. 내가 국회의원이 된 것은 1980년인데, 내 고향인 청양에서 두 번을 하였어요. 내가 국회의원을 처음 할 때에 스님이 학교로 가라고 몇 번이나 하 셨지요. 1980년 그때에 우리나라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어요. 1979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를 당하고, 광주사태가 일어났고,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정당이 새 롭게 등장하고 그랬어요. 이런 것이 이북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일어났어요. 동 양에서는 장군이 쓰러지면 패전이라고 봐요. 박대통령이 죽었으니, 이는 패전의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이런 상황을 도저히 그냥 넘길 수는 없었어요. 그런데 그 무렵, 집권당인 민정당에서 나에게 국회의원에 출마하라는 권유가 심했어요. 그러나 나는 서울대를 떠날 수 없다고 하면서, 그런 제의를 아홉 번 이나 사양을 했어요. 내가 서울대를 나와서 석사, 박사를 거쳐서 교수가 되었기 때문에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서울대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였어요. 그랬더니 전 두환 대통령이 서울대 교수를 겸직하면서 정치 활동을 할 수 있게 명분을 만들 어 놓았어요. 그러니깐 내가 어떻게 안 할 수가 있겠나요. 서울대 교수를 겸직 으로 하면서 국회의원을 한 것은 내가 처음이었어요. 우리나라 정치사에 유일한 일이었지요. 바로 그때에 이런 나의 신상 변화를 갖고 탄허스님과 대화를 하였 지요. 그랬더니 스님께서는 그러면 한 번만 하고, 두 번은 절대 하지 마라고 하 셨어요. 교수님이 탄허스님의 비문을 쓰셨지요. 34 내가 스님이 입적하시고 나서 세워진 비석의 비문을 썼지요. 비석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35 을 만들 때에 스님의 상좌와 관계자들이 나를 찾아와서 비문을 써달라고 부탁을 하였어요. 그러나 나는 처음에는 사양을 하였지요. 그랬더니 그 분들이 사실은 이런 부탁은 우리 뜻이 아니고, 스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유탁( 遺 託 )으로 하신 말 씀이라고 이야기를 하대요. 그래서 승낙을 했지요. 내가 비문에서 강조한 것은 스님은 동방문화의 핵( 核 )이었다는 취지였어요. 3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상원사에서 하였던 제막식에도 갔지요. 그 비석을 본 느낌은 만감이 교차하는 것이었어요. 첫째는 내가 스님을 흠모하는 것이 절실한 것에서 나온 것이고 둘 째는 스님과 함께 둘이서 하려고 한 인류의 영구 평화에 대한 사업을 함께하지 못한 것에서 나온 것이지요. 비석을 세운 후에 비문 글자에서 광채가 나고, 비 석에서 방광( 放 光 )을 하였다고 상원사 스님이 말하는 것을 듣기도 했어요. 탄허스님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시나요? 내가 보기에 스님은 가장 한국적인 사람이었어요. 여기에서 말하 는 한국적이란 것에서 유불선의 회통은 한국 사상의 기본이지요. 인류의 강령인 자유, 평등, 평화라는 것은 천부경( 天 符 經 )에서 나온 것이에요. 이것이 고운 최치 원의 현묘지도로 전파되고, 율곡의 이분수론이란 것도 태극을 통한 현묘예요. 인내천( 人 乃 天 )은 천인합일( 天 人 合 一 )이거든요. 그래서 앞에 나온 인( 人 )도 천( 天 )이고, 뒤에 나온 천( 天 )도 사람인 거죠. 이것은 후천과 선천이 만나서 천부경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나는 스님을 대선사로 보지요. 원래 스님은 학승인데, 학문을 통해서 선의 경 지가 높고 깊어진 것이에요. 그래서 학승 겸 선승으로 봐요. 그리고 나는 어려 서부터 집안에서 한문을 공부해서 유학의 경전은 그런 대로 외우는 편이었는데, 스님이 유불선에 대한 모든 것을 외우는 것은 당할 수가 없더군요. 스님의 암기 력은 당해낼 수가 없었지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36 최근에 탄허박물관이 세워졌어요. 나도 거기에 가 보았어요. 박물관이 세워졌다고 보도가 되어서 알 게 되었는데, 개관기념식 때에는 못 가고, 그 후에 가 봤지요. 교수님은 스님에게서 글씨를 받지 않았는가요? 나도 한 점을 받았어요. 지금도 집에 있을 거예요. 스님께서는 주 일무적( 主 一 無 適 )이라는 것을 직접 써서, 쌍낙관을 찍어서 보내왔어요. 주일무적 은 불가사상이 아니고, 천부경의 사상이에요. 유학, 주자학에서도 자주 쓰이는 개념이지요. 스님은 그것을 한국사상의 핵을 이야기한다는 의미로 직접 써서 보 내 주셨지요. 후학들이 스님에게 배울 점이 있으면 무엇일까요? 우리가 스님에게 배울 점도 주일무적에서 찾을 수 있어요. 사람이 하나의 진리를 집중하면, 그것은 태극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지요. 태극을 통하 면 숫자로는 1이지만, 무( 無 )는 0이에요. 0과 1의 만남이 디지털의 원리잖아요. 주일무적은 우리 동방의 태극사상인데, 스님은 그것을 생활화셨어요. 생활로 실 천을 하셨어요. 그것을 쉽게 풀어서 말하면, 주일무적( 主 一 無 適 )이라고 할 때 주일( 主 一 )이란 하 나를 위주로 한다 는 것이며, 무적( 無 適 )이란 이리저리 변하여 옮겨감이 없다 는 것이지요. 사람의 마음이 오직 하나를 향하게 되면 이것이 나아가 심신( 心 身 )의 통일 혹은 집중상태를 가져오게 되어 마음의 일심( 一 心 ) 상태가 되니, 이것이 곧 경이고 진리가 된다는 의미로 보면 됩니다. 36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37 탄허스님의 생각이 가끔 나시는가요? 그럼요. 자주 생각이 나요. 스님은 가셨지만 내가 스님과 함께 하 려고 하였던 그것을 나 혼자라도 하려고 그래요. 그렇게 해서 스님과 궁리하였 던 것의 만분의 일이라도 완성을 하면 스님의 유업이 달성이 되는 것이지요. 나 는 지금 몸이 불편하지만, 병이 나아지면 천부경을 펴내려고 그래요. 그러면 내 3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책을 통해서, 나를 통해서 스님은 다시 현신( 現 身 )하는 것이지요. 몸이 불편하심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추억을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박사는 예전에 나와 함께 독립기념관에서 한민족의 역사와 얼을 찾는 작업을 하더니, 이제는 불교계 고승들의 역사 복원작업을 하는군요. 아무 쪼록 탄허스님을 세계적인 사상가로 정립시켜 주길 바래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38 내 평생에 만난, 가장 두드러진 분 대상 최승순 강원대 교수, 강원문화연구소 소장, 율곡학회 이사장 등 역임, 강원대 명예교수, 강원도사 편찬위원 일시 2011년 8월 24일 장소 최승순 자택 춘천 강원대 명예교수이신 선생님도 탄허스님과 인연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인연의 시작은 어떻게 되었나요. 나는 1951년 8월에 강릉농고에서 선생을 시작하였고, 1970년부 터는 강원대의 교수로 있다가 지금은 정년퇴임했습니다. 그런데 1950년대 초반 그 시절에 주말이 되면 강릉 향당의 노인들을 찾아다니면서 가르침도 받고, 고 서적을 찾아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강릉의 어떤 노인이 나에게 말하기를, 공연히 나에게 찾아오지 말고 오대산의 탄허스님을 찾아가라 고 그래요. 그 노인은 자네 공연히 우리와 만날 것 없이, 월정사 탄허스님은 내가 만나 본 사람 중에 율곡 이후 처음 보는 대학 자이니 시간이 나면 탄허스님을 만나 보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 노인은 한 38 학과 유학을 한 어른이었는데, 세월이 너무 흘러 이름은 기억이 안 나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39 그렇습니까, 그러면 언제 탄허스님을 만났는가요? 그런 말을 들어서 탄허스님을 만나고 싶었는데, 1950년대 중반인 가 학교에서 오대산 월정사로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학생들의 통솔 은 나이 먹은 학생에게 맡기고, 나는 탄허스님을 찾아갔어요. 그때 월정사는 전 란으로 다 타버리고 함석집밖에 없었어요. 그래 함석집에 가서 탄허스님을 찾으 3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니깐 어느 스님이 따라오라면서 나를 대웅전 옆의 조그만 집(인법당)의 뒷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스님은 그 뒷방에 앉아 있거든요. 그래 나는 스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한 시간 가량 대화를 했습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이 분은 하늘이 내린 분이고, 보통 근기가 아닌 상근기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강릉 노인이 한 말이 딱! 생각나더라 구요. 그래서 그 노인이 율곡 이후로 처음이라는 말을 내게 했구나, 그랬구나 하 고 여겼지요. 그 이후로 자주 만나 뵈었는가요? 그럼요. 스님이 강릉에 오시면 꼭 들르는 곳이 법왕사입니다. 그 러고 나서는 포교당에서 머물지요. 그러면 스님은 인편으로 저를 오라고 하십니 다. 그 시절에는 전화가 없어서 그렇게 사람을 보냈어요. 그러면 스님을 만나서, 서로 얘기하고 그렇게 지냈지요. 한 번은 나에게 말하시기를 오늘이 경신날인데 잠을 자지 않고 나하고 이야기 를 할 수 있느냐고 그래요. 경신날은 스님들은 잠을 안 자고 밤을 새는 날입니 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서, 그날은 스님과 잠을 안 자고 불교 이 야기, 유교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지낸 적이 있지요. 그때에는 책도 없었고, 볼 것도 없었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40 선생님이 강원일보에 기고한 강원문화의 연재 내용에는 영은사로 스님을 찾아갔다는 내 용이 나옵니다. 그것을 들려주시지요. 그것이 아마 1960년대 초일 것입니다. 내가 그 무렵에 조당집 과 해동고승전 을 번역했는데, 강릉포교당의 이수동 포교사가 갖고 있는 불교사전 의 신세를 졌어요. 그러나 그 사전도 시원찮아 스님에게 물어볼 것도 있고 그래 서 스님에게 편지를 썼어요. 찾아가도 좋겠냐고, 그랬더니 스님께서 시경 의 구 절을 인용하시면서 오라는 답이 왔어요. 그래서 겨울방학을 이용해서 갔는데 무 척 추웠어요. 그때 스님에게 받은 편지를 최근까지는 보관했었는데 지금은 어디 로 갔는지 못 찾겠더라구요. 궁촌에서 내려 걸어서 영은사로 찾아갔더니 스님은 그곳에서 5백 미터 떨어 진 일소굴이라는 곳에 계셨어요. 영은사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호롱불을 든 스 님을 따라 산길을 갔더니 산 속에서 불빛이 반짝거리고 강의하는 낭랑한 목소리 가 스님의 음성이었어요. 일소굴이라는 집은 초가 삼칸집이었어요. 한칸은 부 엌, 한칸은 스님방이고, 또 한칸은 시봉을 하던 인보스님이 있던 방이었어요. 영은사에서 보았던 것을 구체적으로 회고하여 주세요. 몇 일간이나 있었나요? 거기에 머문 것은 한 보름 정도는 있었어요. 그때에 동국대 대학원 생 7~8명이 와서 스님에게 장자 강의를 들었어요. 그들은 전부 남자였고, 인솔 교수는 털보교수로 유명한 서경수 교수가 함께한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내가 간 날에도 밖에서 인기척을 하자 나를 방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인사를 드렸더니 나를 그 학생들에게 소개하시고는 장자 강의를 계속하시더라구요. 그 런데 스님은 당신이 갖고 있던 책은 날 주고, 애들을 마저 가르친 후에 우리끼 리 이야기를 합시다 고 하시면서 학생에게 어디까지 했냐고 그러셨어요. 그러 40 니 학생이 어디까지 했습니다 하니까 스님은 책을 보지 않고 장자를 줄줄 외시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41 면서 강의를 하시더군요. 그대로 외워서 하시더라구요. 나는 그때 속으로 장자 를 몇 번을 하면 저렇게 되나 그런 생각을 하였어요. 그래서 율곡 이후에 처음 나온 대학자라는 말을 또 한번 실감했지요. 그때 스님은 조그만한 법자( 法 子 )를 딱 딱 치시면서 말씀을 하셨어요. 스님은 새벽 두 시 반이면 일어나셔서 인근 계곡물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하 4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십니다. 나도 스님과 한방에서 같이 지내고 잠을 잤으니깐 따라가서 계곡물로 세수를 하였지요. 그러고 나서 스님은 그때부터 다섯 시까지는 참선을 하더구만 요. 그래서 나도 할 수 없이 같이 참선을 했지요. 그렇지만 스님은 날보고, 당신 은 출가한 스님이어서 이런 생활을 하지만 손님인 나는 그렇게 안 해도 되니, 잠 을 자고 싶으면 더 자라고 말씀했어요. 그러나 어디 잘 수가 있나요, 같은 방에 있으면서. 공양은 아래 절에서 가져오는 것으로 스님과 같이 겸상을 했어요. 아 침에는 비구니들 몇 명이 와서 스님에게 배웠는데, 그때 비구니들에게는 유교 경서를 흑판에 써서 가르쳤습니다. 일소굴이라는 간판은 스님이 쓰신 한문으로 된 것이 붙어 있었어요. 그런 생활을 하셨군요. 나는 보름을 머물다가, 스님에게 내일 가겠습니다 하고 미리 알 리니까 스님은 인보야, 벼루에다가 먹을 갈아라 그러시더라구요. 그때 병풍채 의 글씨를 스님에게 받아서, 저는 그것을 병풍으로 만들어 가보로 보관하고 있 습니다. 그로부터 20년 후에, 탄허스님도 열반하신 후에 내가 우연히 홍천의 수타사를 가게 되었어요. 거길 갔는데 한 스님이 나를 유심히 보더니, 혹시 강원대 어느 교수님이 아닙니까 하고 물어요. 그래 그렇다고 하니, 20년 전에 영은사에 오 셨을 때에 그 옆방에 있었던 탄허스님 시봉을 하던 인보를 아시겠습니까? 그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42 요. 그러나 나는 기억이 잘 안난다고 그러니깐 그 스님이 제가 인보입니다 라 고 얘기를 하더구먼요. 그래 거기서 재회한 일이 있어요. 그때 탄허스님은 그 스 님에게 인보, 이 멍충아! 라는 소리를 많이 했어요. 그 이후에도 스님을 찾아 뵈었지요. 그렇지요. 월정사를 찾아가면 방산굴에서 자고 그랬습니다. 그때 스님은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사찰에는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세 부류가 있다고 그랬어요. 첫 번째는 보통으로 이야기를 하다가 공양 때가 되면 대중공양 처소 로 안내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나와 겸상을 하겠다고 말해서 상을 올려보내게 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오늘은 내가 손님과 같이 잘 터이니 손님의 이부자리를 펴서 대접하는 것이라고 그랬는데, 이것은 국빈 대접을 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니 나는 국빈 대접을 받은 거지요. 나는 가끔 방산굴에서 스님을 모시고 잤 어요. 그리고 1969년인가 그 무렵인데 강릉의 향교에서 한학자들이 모여서 강릉의 유명한 향토지인 임영집 을 재발간하는 작업을 했어요. 그 작업을 강릉 향교인 명륜당에서 하였는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문을 하는 노인들이었고 나만 30대였어요. 그런데 강릉의 보현사에 있는 낭원국사( 郎 圓 國 師 ) 오진( 悟 眞 )의 비문을 읽는데 한문이 너무 어려워서 그만 거기에서 걸렸단 말야. 그러니 노인 들이 이것을 빼라고 그래요. 한문으로 된 비문만 넣고, 번역이 안 되니 번역하 지 말고 그냥 가자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이것을 빼면 영원히 그 내용을 알 수 없는데, 그러면 유명한 글을 알 수 없게 되니까 번역하지 않고 그냥 놔둘 수 가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내가 오대산 월정사에 가서 탄허스님을 만나서 읽어 오겠다고 그랬어요. 42 그래서 다음 날, 강릉에서 버스를 타고 오대산으로 가서 스님을 만났지요. 그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43 랬더니 스님은 첫마디가 방학이라서 쉬러 왔는가 그래요. 그래서 나는 쉬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일거리를 가져 왔습니다 했지요. 그리고는 스님에게 강릉의 보현사에 가신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았어요. 보현사를 가셨다면 그 비문을 읽으셨겠고, 안 가셨다면 비문을 보지 않았기에 그랬던 것이지요. 그랬더니 스 님은 보현사를 가 본 적이 없다고 그래요. 4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그래서 나는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였지요. 강릉 향교에서 노인들과 비문을 읽 다가 막혀서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을 죽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스님은 내가 들으니 강릉은 문향으로 이름이 나 있다는데 비문 하나를 읽지 못하여 이 더위 에 사람을 여기까지 보냈느냐 면서 그 비문을 보자고 하시더니 처음부터 줄줄 해요. 스님이 읽어 내려가시자, 나는 교수가 강의하면 학생들이 받아 적듯이 스 님이 읽는 토를 달아 내려가기가 바빴지요. 그러면 그 내용을 강릉 향교의 노인들에게 전달하셨지요? 스님은 그 비문을 다 보시고 나서 하는 말씀이 내가 강릉 노인들 에게 한마디를 하면 이 비문에는 유교, 불교, 도교가 다 들어가 있어서 어줍잖 은 유생들은 절대 못 읽겠다 고 하시더라구요. 나는 다음날 향교에 가서 그 노 인들에게 탄허스님의 독후감을 전달했지요. 그랬더니 노인들이 아주 기분이 나 쁜 표정을 지었지요. 그러나 노인들도 더 이상은 아무 말도 못하고, 내가 읽어 왔다고 하면서 비문을 죽 읽고, 설명을 했지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탄허스님은 화엄경 역경, 출판 불사를 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알고 계시지요? 그럼요. 내가 그 전에 동대문 밖의 청룡사에 계시는 스님을 찾아 간 적이 있어요. 거길 가 보았더니 그 절은 비구니들이 사는 절입디다. 그런데 스님이 거기 문간방에 있었어요. 그래 내가 인사를 마치고 나서, 이 절에는 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44 자가 없소. 아니 큰스님을 이런 문간방에 모시고 있어요? 라고 했어요. 그때 그 방에는 비구니들이 있다가, 내 말을 듣고 막 웃어요. 그랬더니 스님이 나니깐 문간방이라도 와 있지, 나 아니면 이런 곳에 오지 못한다 고 하면서 웃으시더라 구요. 역경을 하시던 다른 곳에 가 보셨나요? 대원군 별장에를 가봤어요. 스님으로부터 기별이 왔어요. 화엄경 마지막 교정을 하기 위해서 대원군 별장에 와 있는데 방학이 되면 기회를 내서 올라오라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방학이 되자 시간이 나서 서울에 가서 택시를 타고 대원군 별장을 가자고 하니깐 그리로 데려가 줬어요. 대원군 별장에를 갔 더니, 별장은 보이지 않고 대궐집 같은 것만 보여, 촌놈의 눈으로 보니까요. 택 시기사에게 여기가 대원군 별장이 맞냐고 물으니 자기들은 그렇게 알고 다녔으 니 내리라고 그래요. 택시에서 내렸는데, 사람도 보이지 않아 물어볼 수도 없고 그래서 어디가 탄허스님이 계신다는 별장인가를 찾으면서 왔다 갔다를 했어요. 그런데 얼마 후에 택시가 하나 오더니만 비구니 스님이 내리더라구요. 그런데 그 비구니 스님이 큰 철대문 안으로 손을 넣어서 버저를 누르더군요. 그래서 나 는 그곳이 들어가는 출입구인 것을 알고서는 비구니 스님에게 여기에 탄허스님 이 작업을 하고 계시다고 해서 왔는데 나를 스님에게 안내를 해달라고 부탁했어 요. 그래 그 비구니 스님의 안내를 받아서 안으로 들어갔는데 한참을 들어가고, 대문 몇 개를 통과해서 맨 위에 있는 채의 스님이 계신 방으로 들어갔어요. 방에 들어가서 인사를 드렸더니, 스님이 내 키가 대원군 키와 같다는 그런 말 씀을 하시더라구요. 그리고 대원군이 오면 이 방에서 거처했다고 그러셨어요. 그런데 그때가 겨울이어서 그런지 스님은 나의 인사를 받고 나서는 바로 담요를 44 뒤집어 쓰면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 방이 추워서 그러셨겠지만 큰스님이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45 담요를 쓰고 있는 것이 저는 이해가 안 되었어요. 그래서 내가 스님에게 나라 에 큰일이 났습니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스님은 왜 대학생들의 데모가 일어났 습니까? 그래요. 그래서 나는 신라 이래로 제일가는 역경작업을 해서 그 원고 가 10만 장이 넘는 출판의 마지막 작업을 하는 스님이 이렇게 추워서, 담요를 쓰 신 채로 교정을 보고 계시니 이래 갖고 나라가 잘 되겠습니까? 하였죠. 그리고 4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는 지금 무교동의 맥주집에서는 더워서 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맥주를 마시고 있 을 터인데, 이곳에서는 추워서 담요를 덮고 교정하고 있으니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은 웃으시면서 그게 바로 되는 거요 하 시면서, 맥주집이 추워서 담요를 두르고 있으면 그 맥주집은 술꾼이 없어 망할 것이고, 우리는 한사( 寒 士 )요, 수도하는 한사가 등 따시고 배부르면 다른 생각할 지도 모르기에 한사는 춥고 배고프게 마련이오 이러셨다 말입니다. 스님에게 그런 말씀을 들었는데, 그곳에서는 자지 않고, 구경하고 대화를 하고는 바로 내 려왔어요. 그 방에는 스님밖에 없었고, 집이 크니까 다른 작업자들은 흩어져서 다른 방에서 작업을 하더라구요. 출판 불사와 연관된 내용은 들은 것이 없나요? 한 번은 강릉포교당에서 뵈었는데, 스님의 오른쪽 손가락 하나에 붕대에 감겨 있어요. 그래서 내가 왜 붕대를 감았냐고 여쭈어 보았어요. 그랬더 니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화엄경 원고 16만 장을 쓰고 나니, 만년필이 닿는 그 부분에서 사리가 나왔는지, 뭐가 나와서 그것을 없애는 수술을 했다고 그래 요. 아마 티눈이 박혀 있어서 그러셨겠지요. 그래서 수술했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46 춘천에서는 뵙지 않았나요? 스님이 춘천에 오셔서 전화를 하셨어요. 내가 그 전에 서울에 가서 학생들의 특강에 모시려고 부탁을 하러 갔다가, 동국대 대학선원에 강의도 있으 시고 주말에도 시간이 없어서 어렵겠다는 말을 듣고는 내려왔거든요. 그런데 춘 천에서 전화가 왔단 말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나시면 우리 집에서 주무시고 올 라가시라고 권유해서 하루 주무시고 올라간 일이 있어요. 스님이 그렇게 된 것 은 여기 서봉사라는 절이 있어요. 그 절의 보살이 절을 짓고서 봉불식을 하는데 스님보고 꼭 와달라고 해서 왔는데, 행사에 장차관 부인네 차가 아홉 대나 왔다 고 하시면서 법회를 마치고 서울로 가는 길에 전화를 하신 것입니다. 그래 하루 주무시고 그 다음날 떠났어요. 그날 밤,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원고는 다 되었 는데 출판비가 없으시다면서 걱정하시는 말씀을 했어요. 어떤 사람이 출판비를 대겠다고 하는데 조건부로 하는 것이어서 거절하였고, 조건이 없는 후원을 받아 야 하는데 아직은 출판비가 없다는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나는 스님이 춘천에 오셨다는 것을 몇 사람에게 기별을 했더니, 찾아왔던 사 람이 있었어요. 그 중에 공화당 활동을 하던 분이 있었는데, 스님이 나가실 때 에 자기 사무실을 들르게 해서 스님의 글씨를 한 점 받고 싶다고 해요. 그래서 가시는 길에 그 사람의 사무실에 갔더니만 벼루는 그렇다고 하지만, 붓이 형편 없었어요. 붓이 없으면 나에게 이야기를 하든가 하면 내가 준비를 할 터인데, 쓰 지도 못하는 것을 내놓았더라구요. 그래도 스님은 아무 말도 없이 선념국사( 先 念 國 事 ) 후사사사( 後 思 私 事 ) 라는 것을 써주셨어요. 탄허스님의 상좌분들과도 인연을 가졌는가요? 46 탄허스님에게 오대산 수도원에서 배우던 김운학스님과는 친하게 지냈어요. 그 스님은 강릉포교당에 와서 문학강연도 하고 그래서 알고 지냈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47 데, 강릉 우리집에 자주 오고 나와는 친하게 지냈어요. 그런데 1960년대 초에 내게 편지가 오기를 당신이 지금 설악산 계조암에 있는데 시간이 나면 행각을 할 겸 탐방을 할 겸 해서 놀러 오라구 그랬어요. 그래서 나는 설악산 탐방도 하고, 설악산에 관련된 전설의 현장도 둘러보려고 찾아갔어요. 그런데 그때에는 여름이라 비가 자주, 많이 왔어요. 그때만 해도 설 4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악산의 등산 시설, 보호 시설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깐 비가 조금만 와도 계곡물 이 넘치고 그랬어요. 그러니깐 등산이나 탐방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그곳 에서 열흘간을 머물다가 그냥 내려왔어요. 그때 단벌이 비에 젖어서 스님의 옷 을 빌려 입고 내원암으로 내려갔더니, 지나가는 행인들이 나를 스님인 줄 알고 깍듯한 대접을 해서 예상치 못한 청복( 淸 福 )을 받은 일도 있어요. 그때 운학스님이 계조암 인근에다가 바위에 붙여서 토굴을 조그마하게 지어 놓고 있었는데 바위에다가 탄허스님이 써 준 글씨인 운학산방이라고 새겨 놓았 더라구요. 그것은 운학스님이 탄허스님에게 부탁을 해서 받았다고 그랬는데, 맨 바위에 한문으로 되어 있었어요. 내가 그후에 그곳에 가 보지 못했는데 지금도 새겨져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그대로 있을 거예요. 그곳 계조암 스님이 공 양 때에는 목탁을 탕탕 치면 공양하라고 알려주고 그랬지요. 그리고 희찬스님도 알고 지냈는데 한 번은 월정사에서 하룻밤을 같이 자면서 한암스님의 열반 장면을 말해 주었어요. 한암스님이 좌사( 坐 死 )했잖아요. 그때 당 신이 시봉한 이야기입니다. 그날, 며칠 전부터 한암스님이 잘 안 드시더래요. 그 러더니 열반하는 그날 아침에는 희찬스님보고 오늘이 몇일이냐고 묻고, 좌복을 깔라고 하고, 가사와 장삼을 입혀다오 그랬대요. 그래서 희찬스님은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한암스님이 좌복에 앉아서 가사와 장삼을 입으시고는 눈 을 감으셨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었다고 해요. 그래 가만히 보니 한암스님의 모습 이 이상하고, 열반하실려고 하는 것 같아서 상원사 밑에 있었던 수색대의 중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48 장에게 말을 했답니다. 그 중대장은 불교 신자인 모양으로 아침저녁으로 한암스 님에게 와서 문안을 드리고 그랬대요. 그래서 그 중대장이 카메라를 갖고 와서 찍은 것이 한암스님의 마지막을 찍은 것으로 널리 알려지고, 지금도 상원사에 있는 그 사진이라는 말을 나에게 하시더라구요. 교수님도 탄허스님과 공식적인 대담을 하였지요? 딱 한 번 했어요. 강원대 신문사가 주관한 것인데 내가 주선했지 요. 그게 오대산 방산굴에서 하였을 것입니다. 탄허스님은 미래 예측을 하신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혹시 이와 연관된 것을 들으신 것이 없나요? 나에게 그런 말씀은 별로 없었고, 다만 이런 것은 보고 들었어요. 스님은 그때 우리집에서 하루 주무시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셔서 동전을 가지고 육효를 치시면서 운수를 봐요. 동전의 앞뒤가 안팎으로는 음과 양으로 볼 수 있 으니 그리 하시더군요. 그리고 월정사에 계실 때에, 스님을 모시고 잘 때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것은 월정사 대웅전을 새로 지을 때의 조중훈 회장과의 인연 이야기입니다. 어느 해 초반에 스님이 그해 운수를 보니까 만약 속가에 있으면 천석의 재원이 붙는다고 나왔대요. 내 집에서 동전 갖고 하신 것처럼 하셨겠지요. 그랬더니 천 석이 생긴다고 나와서 스님은 혼자 웃고 말았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해 스님이 동국대 대학선원에서 30여 명을 모아 놓고 법문을 하였는 데, 그때에 조 아무개라는 노인도 있었다고 해요. 그 노인은 탄허스님도 잘 모 르는 노인이었는데, 강의가 다 끝나는 날 스님을 찾아와서는 내일 스님 어디에 48 계십니까? 별일이 없으면 제가 점심 대접을 하고 싶은데, 나오실 수 있습니까?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49 그랬대요. 그러고 그 다음 날에 스님을 모시러 좋은 차가 왔더래요. 그런 차는 서울에서도 몇 대 안 되는 차라고 그래요. 그 차에서 조 아무개라는 노인이 내렸 는데, 그 노인이 어떤 젊은이를 데리고 왔더래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젊은이 가 바로 대한항공의 조중훈 회장이었어요. 그래 그날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그 노인이 하는 이야기가 얘가 월남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 왔습니다. 스님이 돈 4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이 없어 월정사 대웅전을 중수도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제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고 하였던 것이지요. 그러자 조회장이 자기가 돈을 대겠다고 하면서 얼마나 필요합니까? 그랬어요. 그러니 스님은 자기는 자세히 알지를 못하고, 상좌들이 그러는데 얼마가 든다고 그렇게 말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니깐 조회장이 주머니에서 수표책을 꺼내더니 거기에다가 무엇인가를 쓰 더래요. 그래 스님이 조회장에게 이것이 무엇인가 하니깐, 조회장은 스님은 돈 에 대해서는 잘 모르신 모양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현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라고 그랬어요. 스님은 나야 산중에 있어서 돈에 대해서는 모른다 고 하니까 조회장은 그러면 스님의 도장을 여기에 찍어 주세요 하면서, 스님의 도장이 아니면 절대로 돈이 못 나갑니다 는 그런 말을 하였답니다. 그런 인연으로 월정 사 대웅전 중수비의 거의 전부를 받았다고 그랬어요. 그러시면서 그렇게 조회장 의 말을 들을 때에, 스님은 금년 초의 당신 운수에 나온 속가에 있으면 천석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을 생각하고, 바로 이거로구나 하였대요. 그러시면서 나에 게 조회장이 돈을 준 것은 오대산 월정사 보고 준 것이 아니라. 김탄허를 보고 준 거여 그런 말씀을 했어요. 월정사 재건 불사에는 조중훈 회장의 시주가 대단하였지요. 그래 가지고 대웅전 불사 회향식을 하고 조중훈 송덕비 제막식을 하는데 조중훈 회장이 두루마기 한복을 입고, 비행기를 타고 강릉까지 와서, 거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50 기에서는 차를 타고 오대산에 왔더래요. 와서 제막을 하고는 거기에 글자로 대 시주 조중훈이라고 새겨진 것을 보고는 감격을 했단 말이지요. 조중훈씨가 하는 말이 월정사는 역사가 1300년이나 되는 고찰인데, 돈 몇푼을 냈다고 해서 그렇 게 비석을 세워준 것은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돈이 얼마나 더 들어가냐고 묻더래요. 그래서 스님은 총무, 재무를 보는 애들이 알지 잘 모르겠다고 하니 하여간에 자기가 더 보시를 하겠다고 그랬대요. 그래서 오 대산 월정사에 조중훈 송덕비가 서고, 재건불사가 된 것입니다. 탄허스님도 강원도 문화의 인물로 볼 수 있지요. 그럼요. 우리들은 자기와 관계가 조금 있으면 일부러 끄집어 내고, 그것을 자기들의 역사와 문화로 만드는 경향이 있지 않아요. 그런데 탄허스님은 월정사 조실을 하셨으니 저절로 강원도의 문화가 되지요. 그런 이야기는 제가 강원일보에 <강원문화 회고>라는 주제로 연재하던 것을 묶은 강원여지승람 이 라는 책에도 쓰여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탄허스님 열반 시에 교수님이 조사를 기고하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강원일보에 기고한 것입니다. 나와 스님과 친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써 달라고 해서 몇 자 쓴 것이지요. 그 세부 내용은 세월이 가서 잘 기 억이 안 나요. 다만 탄허스님에게서 불교에 대한 것을 들으면 스님 같고, 유교 에 대한 것을 들으면 선생 같고, 도교에 대한 것을 들으면 탄허당 같다는 그런 이야기를 갖고 쓴 것은 기억이 나요. 이 분은 유불선을 다 통합하시지 않았습니까? 제일 문제되는 것이 뭐냐 하면, 탄허스님 같은 그런 재질이 있는 분이 앞으로는 없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 50 은 나는 처음 봅니다. 그런 스님은 세상에 없어요. 우리는 남의 글을 외우기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51 어려운데, 스님은 불경, 장자, 유교경전 같은 것을 다 외우지 않습니까? 누가 그 랬지, 장자가 다시 살아 나온대 해도, 탄허스님보다 강의를 더 잘할 수 없다 고요. 교수님이 탄허스님을 만난 의미를 어떻게 보시나요? 5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나는 평소에 그렇게 위대한 분을 많이 만나지는 못했어도 몇 분은 만났어요. 학교에 다닐 때에는 위당 정인보 선생을 직접 뵙지는 못했어도 더러 들은 적이 있고, 육당 최남선은 학교에 다닐 때에 본 적이 있습니다. 성균관대 학교의 부학장님이 두루마기를 입은 허술한 분을 모시고 학교에 왔더라구요. 그 날은 육당의 특강이 있다고 해서 나도 들으려고 왔는데, 그 강연장에를 갔더니 바로 그 허술하게 생긴 사람을 부학장님이 육당 최남선 선생이라고 소개를 하더 군요. 그래서 나는 외모하고는 많이 다르구나 하면서, 속으로는 깜짝 놀랐어요. 하여간에 그런 분을 몇 분 만났지만, 내 평생에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탄허스님 이었어요. 오늘 귀중한 회고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내가 탄허스님과 인연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오신 것에 대해서 고맙게 여깁니다. 좋은 자료집이 나오길 바랄 뿐이지요. 수고가 많 습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52 천하의 보물, 제 인생의 스승 대상 박재원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국제불교도협의회 수석부회장, 익성회 회장, 한마음선원 이사, 한마음 전국불자회 전국회장 등 역임, 현재 한마음선원 상임고문 일시 2012년 10월 22일 장소 한마음선원 회장님과 탄허스님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요? 저는 연세대 사학과를 나와서 5 16이 나던 해(1961)부터 국사편찬 위원회의 편사연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 을 하다가 문집 같은 것을 보면 왕도정치니 천리( 天 理 )와 같은 개념이 나와요. 이 런 것은 한문으로도 직역이 잘 안 되는 철학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것 을 공부 좀 해서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방면에 조 예가 깊은 탄허스님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탄허스님을 처음 뵌 소감은 어떠하였는가요? 52 제가 스님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60년대 후반 월정사 방산굴이 었어요. 처음 방산굴에서 만나고 나서, 그 이후에는 대원암에서 꾸준히 만났고,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53 또 대전 학하리에서도 뵈었지요. 스님이 서울에 오시면 자주 뵙고 그랬습니다. 저는 스님 옆에 있는 것이 그냥 좋았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뵈었을 때에 제가 이것 저것을 물어보면 스님은 말씀을 잘 안 하시고, 그냥 눈을 감고 계셨습니다. 무엇을 여쭈어 보면 스님은 선문답으로 답 을 하시고, 글쎄올시다 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스님의 말씀도 들어 5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보고, 또 스님의 책을 읽어 보고서 이 어른 밑에서 공부하기는 힘들겠다고 생각 했어요. 그래 저는 탄허스님에게서 배우는 것보다는 탄허스님의 무량한 끝이 없 는 동양철학과 경륜을 모든 사람들이 얻어 배울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 수는 없 을까를 궁리하였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셨는가요? 그 시절에 저는 30여 명의 청년지도자 모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친목회 성격이었지요. 그들 중에는 기독교인도 있었지만, 저는 이 사람들을 데리고 탄허스님에게 가서 인사도 하고, 자주 뵈러 갔어요. 스님은 그럴 때면 저희들에게 질문을 툭 던지시고, 저희들은 그것에 대해 궁리를 하면 서 자꾸 친해갔죠. 그러나 스님은 저희들의 질문에는 잘 대답하시지 않는 조금 은 오만한 분이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스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스님이 서울에 오시면 여기저기 모시고 다니는 등 친근하게 모시다가 10여 년이 된 1970년대 후반 무렵에 저희들의 모임은 익성회라는 이름을 띠고 새출발을 하였습니다. 바 로 그때에 스님께서 익성회( 溺 誠 會 )라는 단체명을 지어 주시고, 그 뜻을 적어도 주 셨습니다. 즉 스님이 익성회를 만들어 주신 것이지요. 그때 스님께서는 저희 회 원 30명 전부에게 수계 법명을 개인적으로 지어 주시고, 그를 증명하는 문건을 직접 붓으로 써주시기도 했어요. 제가 받은 이름은 도안( 道 眼 )입니다. 저는 익성 회의 회장으로 활동을 하여 1980년까지 회장을 하였습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54 저는 익성회 회원들에게 우리가 스님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살펴보라고 그 랬어요. 우리 회원들은 가정형편이 비교적 좋았어요, 그래서 우리들은 외교구락 부에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교육, 정치, 철학, 사상, 종교, 문학 등 각 방면의 권위자들을 초빙하여 강의를 듣고 저녁식사 대접을 하고 헤어지는 행사를 몇 년 간 하였는데 이런 것에도 탄허스님이 버팀목이 되어 주셨지요. 그 시절에 탄허 스님을 따르던 서울법대 전창열, 명호근 등의 불교학생회 출신들이 스님에게 많 이 배우고 있었지만 우리와는 차원이 조금 다르지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스님이 서울에 오셨다고 해서, 내가 대원암에 가 보면 대원암에는 스님을 만나려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운집해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은 대개 스님 의 지식, 학식을 배우려고 하였고 간혹은 스님에게 글씨를 받으려는 사람들이었 습니다. 그들은 스님에게서 무엇인가를 가져가려는 사람들이었단 말입니다. 그 러나 우리들은 스님의 경륜, 뜻을 바깥으로 널리 퍼지게 도와주자는 입장이었습 니다. 스님이 서울에 오시면, 시자 스님으로부터 저에게 전화 연락이 옵니다. 그러 면 저는 부리나케 쫓아가서 뵙고, 어떤 때에는 외부에 같이 가기도 합니다. 석 관동에 있는 박초당 선생 집에 공양갈 때에도 같이 간 적이 있는데, 박초당 여사 가 저를 좋아했어요. 그 분도 박가( 朴 家 )이고, 나도 박가라 친했어요. 그 당시에 제가 경주에 신라오릉보존회를 만들었습니다. 전국에 박씨만 300만 명이 되었 는데, 이를 바탕으로 박씨종친회를 조직해서 내가 상임을 맡아 있었습니다. 그 래서 경주에서 행사를 하면 우리 회원 20여 명이 몇 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같 이 가서 행사를 하는데, 올 때에는 꼭 학하리(장경각)에 들러서 스님을 찾아뵙고 54 인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55 스님의 경륜을 외부로 알렸다는 내용을 들려주시지요. 제가 스님에게 부탁을 해서 거절당한 적이 거의 없었어요. 예를 들 면, 저희 익성회가 주관을 해서 탄허스님을 모시고, 전국에 다니면서 순회 법회 를 가졌습니다. 스님은 외부 법회에 가서 하는 강연 같은 것을 잘 응하시지 않았 어요. 사람들이 와서 강연 요청을 하면, 내 말을 알아들을 사람이 어디 있느냐? 5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못 알아들을 말을 나보고 씨부리라는 것이냐! 나는 만담가가 아니야! 저기 무진 장스님을 데리고 하라 는 말씀도 하시고 그랬어요. 그러나 제가 찾아가서 강연 부탁을 하면 대부분 들어주셨어요. 저는 법회 계획을 갖고 진행하려고 합니다 하면, 스님은 글쎄요 하시면서도 긍정도 부정도 안 해요. 혹은 알았습니다 라 고도 하셨지만요. 그래서 나중에 힘을 모으자고 해서 대전, 대구, 부산에서 전국 법회를 기획하 였습니다.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할 때에는 5만 명이나 왔고, 대구에서 할 때에 도 3만 명이 왔어요. 우리 30여 명 회원들이 대불련 관계, 천태종 관계 등 각종 조직을 동원하는 활동을 해서 그런 인파가 온 것입니다. 부산 구덕체육관 행사 에서는 2만 명은 체육관에 들어오고, 3만 명은 바깥에서 들었어요. 우리 회원들 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행사를 준비한 것입니다. 그때 통도사의 경봉스님이 오셔 서 탄허스님에게 아니 탄허당은 말야, 내가 통도사 절 바깥에서 한 부산 시민 회관 강연회에 모인 숫자가 2400명이 최고인데, 당신이 내 마당에 와서 5만 명 이라는 사람을 모아서 강연을 하였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 고 하였습니다. 이 강연회의 내용은 불교와 동양철학이었는데 그것은 탄허스님의 법문집 부처님 이 계신다면 과 이번에 우담거사가 만든 연보 에도 나옵니다. 지금 현재까지 불 교 법회에서 그렇게 사람이 많이 온 법회는 없어요. 그때 그 법회가 언론에 보도 되고 그랬어요. 내가 그 자료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리고 부처님이 계신다면 을 우담거사가 만들 때에 우리 종친회 사무실에서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56 하였어요. 내가 종친회 상임이사장을 하니깐 사무실이 허리우드 극장이 있는 낙 원빌딩 314호실이었는데, 거기에서 작업을 한 것입니다. 스님은 익성회를 신뢰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요. 우리는 스님과 교감을 10년간 하였기에, 스님이 우리들을 신뢰하신 것이지요. 스님과는 교감을 하기가 어려워요. 스님과 우리들과의 생각 을 완전히 같이 갖게 된 것이 10년이란 세월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희들은 스 님의 뜻을 봉찬하고, 받드는 그런 취지로 스님을 모셨습니다. 대원암에 드나들던 고려대 한승조 교수라고 있습니다. 이 분도 스님과 친분이 있었어요. 제가 알기로는 스님이 한교수에게 박재원이라는 친구를 만나서 지식, 인품 등을 가늠해 보라고 하였다고 그래요. 이러면서 스님이 저를 무척 좋아하 시게 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저를 귀여워하신 것이지요. 제가 듣기에 회장님이 대통령 출마를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된 것입 니까? 그것은 탄허스님과 여기 한마음선원의 대행스님 부탁에서 나온 것 입니다. 1980년에 10 27법난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탄허스님과 대행스님 이 법난이 일어나서 불교가 당하였으니 불교를 위해서 싸워달라고 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제가 스님에게 그런 당부의 말씀을 들은 것은 대원암입니다. 탄허 스님은 저에게 투쟁을 해다오 하셨습니다. 그럴 정도로 스님이 저를 믿었어요. 스님은 당명까지 지어주셨어요. 스님이 당명, 방향 등 그런 것에 대해서 구두로 말씀하시면 저는 전부 메모해서 진행을 하였지요. 그때 스님이 써주신 설명서가 다 있었는데 제가 만든 당이 탄압을 받고 수색을 당하는 바람에 전부 유실되었 56 습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57 하여간 그때에 스님은 저에게 당신께서 마지막에 내가 하는 정치에 모든 것을 걸어보겠다는 말씀도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익성회 회원들에게 동의를 다 받아 서 준비를 하였습니다. 창당은 익성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었고, 그 밖에 외부에 서 정치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일민립당( 圓 一 民 立 黨 )이라 는 당명까지도 정해 주시고, 정관도 나오고, 창당준비위원회도 조직하고, 창립 5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대회도 준비하고 정당의 골격을 갖추고 전국 27군데에 지구당 조직을 만들어 놓 은 다음에 롯데호텔에서 창당대회를 하고 대통령에 출마하려고 하는 날, 입후보 하려고 하는데 어떤 허름한 호텔에 갇혔어요. 잡혀간 것이지요. 잡혀가서 이십 몇 일을 갇혀 있었습니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등록을 안 받으려고 피하고 그 래서 우리쪽 사람들이 가서 실력행사를 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깐 선거 벽보도 못 나왔지요. 그때(1981.2) 후보로 나온 사람이 민정당의 전두환과 민한당의 유치 송인가 단 두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대행스님도 이런 일에 탄허스님과 뜻을 같 이했어요. 대행스님도 대단하신 분입니다. 대행스님을 여자라는 생각을 갖고 접 근하면 큰일납니다. 탄허스님은 정치의식, 민족의식이 대단한 스님이었지요. 탄압을 받아서 무산되었군요. 그래요. 그래서 우리 익성회는 와해되었습니다. 또 당사를 세 군 데나 옮겨야 했습니다. 정부에서 당사를 빌려준 건물 주인과 주인의 자식들이나 연고자들에게 갖은 압력을 주고 그랬어요. 이때에 나는 익성회 회장도 그만둔 것이지요. 저는 법난 때에도 투서에 의해서 태평로 국회의사당 건너편의 특수수 사대가 있는 건물에 끌려가서 이틀간 조사를 받고 나왔습니다. 그때 송월주 총 무원장도 거기에 끌려와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제가 국제불교도협의회보에 조계종을 질타하는 글도 실어서 그랬는지, 조사해 봐야 죄가 없으니 풀려나왔지 만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58 그런데 탄허스님이 왜 고문님에게 정당 창당, 대통령 입후보라는 것을 하도록 제안을 하 였을까요? 글쎄요. 아마 그것은 제가 스님에게 신뢰를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 다. 제가 익성회 회장으로 10년간 교류를 한 것, 그리고 제 나름으로의 조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의 실례를 들면 스님을 모실 때 그 당시에 제가 국제불교 도협의회 수석 부회장을 했어요. 그 단체는 그때 문공부에 등록된 유일한 단체 입니다. 제가 공직에 있으니깐 회장을 할 수 없어서, 부회장으로 있었습니다. 동 대총장을 한 김법린의 며느리, 그러니깐 김인홍 교수의 부인인 하보리심도 이사 로 있었지요. 지금의 증언은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라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제가 정보부의 탄압으로 대통령 출마를 못하게 되자, 김지 견 박사가 불교 야당 계통을 모아서 불교민주당(약칭 불민당)이라는 것을 만들었습 니다. 그래서 그것을 알게 된 탄허스님이 불러서 꾸지람을 하려고 하니깐 김지 견이가 광주로 피신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탄허스님에게 직접 듣지는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들었지요. 탄허스님의 글씨는 유명하지요. 고문님은 보관하고 계시나요? 저는 스님에게 글씨를 백수십 개를 받았지요. 그러나 지금은 한 점 도 보관하고 있지를 않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경주의 행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꼭 장경각을 들릅니다. 그러면 스님이 계시면 인사를 드리지요. 그러다 가 1978년인가 그때에 들렸더니 스님께서 학하리에 바로 옆의 딸기밭을 샀다고 그러셨습니다. 그 딸기밭에 담장을 치면 그 안에 건물을 쉽게 지을 수 있다고 역 58 학으로 풀이하시면서 담장을 치는 데 도움을 주셨으면 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1

59 자리에서 옆에 있는 시자에게 얼마가 드냐고 물어보니 1600만 원인가 그렇다고 해서 회원들에게 얼마씩을 배당해서 바로 일을 할 수 있게 조치한 적이 있습니 다. 그날 밤, 스님은 밤새도록 붓글씨를 써서 법화경으로 8쪽의 병풍을 만들 수 있는 것을 써주시면서 유묵 몇십 점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것을 회원들에게 한 점씩 다 나누어 주었어요. 그때 회원들이 개인당 50만 원씩 냈을 5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것입니다. 그때 돈 50만 원은 작은 돈이 아닙니다. 글씨와 관계된 비화는 없을까요? 그런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한진그룹의 조중훈 회장이 박정희 대통 령 회갑 때에 선물을 뭘 드릴까 궁리하다가 스님의 글씨를 받아서 선물로 드리 고 싶다고 해서 대원암으로 찾아와서 박대통령이 스님의 글씨를 참 좋아하시니 깐 하나 써 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두 시간 동안 대답을 않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시자가 저에게 전화 연락이 오기를, 회장님밖에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없으니 급히 와달라고 그랬어요. 저는 그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나와 대원암으로 달려갔지요. 대원암에 가서 스님에게 저 왔습니다 하고 들어 갔더니 스님은 조회장을 앉혀놓고 눈을 감고 계셔요. 저는 스님에게 스님의 글 씨를 한 점 조회장에게 드리지요 했어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조회장에게 박대 통령이 내 글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 대통령이 나에게 전화하면 되는 것이지 조회장에게 부탁할 일이 있나요? 하셨습니다. 이렇듯이 어떤 면에서는 스님은 자존심이 대단히 강한 면도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수타사에 맡겨 놓은 스님의 유묵에서 한 점을 갖고 오라고 해서 조회장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이 연유가 돼서 스님이 인도 성지순례를 가게 된 것입니다. 그때 한진에 서 스님의 전용차를 준비하고, 비행기를 준비시켜서 갔다 오셨습니다. 성지순례 를 갖다가 돌아오신 때에, 스님 생신 파티 겸 성지순례 보고회를 겸해서 하얏트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60 호텔 오렌지룸에서 파티를 제가 주관해서 열어 드렸습니다. 그때 300명을 모셨 습니다. 참! 저도 개인적으로 스님 글씨를 받은 것이 있었습니다. 내 어머님이 후두암 으로 3년을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스님께서 나를 특별히 생각하셨는지 진묵대사 49재 제문을 쓰셔서 저에게 보냈어요. 그래서 저는 그것을 병풍으로 해서 놔두었는데 우리 모친이 돌아가셔서 용인공원 묘지에 모셨어요. 그때가 12 월이었는데, 옷가지와 유품을 불에 태우다가 그 불씨가 갖고 간 그 병풍에 옮겨 붙어서 그만 그 자리에서 불에 타서 하늘로 올라가 버렸어요. 그런 일이 있어서 저는 스님에게 고맙게 생각을 하였지요. 그 시절의 조계종 종정은 성철스님이었는데, 탄허스님과 비교하면 어떨까요? 제가 보기에 두 스님은 다 훌륭한 분입니다. 하지만 탄허스님의 재 가제자에 이름이 얹혀져 있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무게의 중심을 탄 허스님에게 두고 있습니다. 앞으로 탄허스님 같은 분은 나올 수가 없어요. 유불 선을 회통하신 실력, 민족과 국가를 생각하는 의식, 미래를 전망하는 예지력 등 은 그 누구의 추종을 불허하지요. 지금 스님들은 불교의 선, 교 중에서 일부분 만 조금 알지요. 나도 국제불교도협의회를 할 때에 성철스님을 뵙고 그랬지만 저는 탄허스님을 더 존경합니다. 다만 성철스님은 제자분들을 잘 두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철스님의 추모, 계승, 사상 정리 등이 잘 되었고 그에 비해서 탄허스님은 그런 점이 약해 요. 저는 그 점이 상당이 아쉬워요. 탄허스님에게도 각성 무비 혜거 스님 등 이 있기야 있지만 오대산과 재단이 불편한 것도 걱정입니다. 제가 지금 나이가 80이 넘었고, 몸도 불편합니다. 내 나이가 60대라면 내가 생각하는 것을 위해 60 서 뛰어보고 싶지만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61 탄허스님과는 남다른 인연, 비화를 갖고 계시는군요. 탄허스님에게 배운 점이 있다면 무엇 일까요? 저는 스님에게 인생관뿐만 아니라 우주관, 불교 등 참 많이 배웠어 요. 저로서는 탄허스님 같은 분을 스승으로 모신 게 굉장한 것입니다. 내 마음 의 스승은 탄허스님입니다. 6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탄허스님을 일반 대중들에게 어떻게 소개하고 싶은가요? 탄허스님은 저에게 사상적인 스승일 뿐 아니라 정치적인 스승이었 고, 불교에 있어서도 스승입니다. 저희 익성회 회원들은 스님이 하셨던 오대산 에서의 동양철학 강좌도 들었고, 방산굴에서 가서도 스님 옆방에서 놀기도 하였 습니다. 하여간 저희들에게는 파격적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탄허스님의 생각이 나시나요? 나지요. 특히 불교신문을 보고 있으면 더욱 납니다. 이럴 때에 스 님이 계셨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게 되지요. 하여간에 제가 탄허스님, 대행스님을 만난 것은 저에게는 큰 복입니다. 탄허스님과 대행스님 간에도 인연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죠. 인연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것을 다 말씀드리기에는 그렇 고 추후에는 그런 점들이 종합적으로 정리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제가 이곳 한마음선원에 오게 된 것은 탄허스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그렇게 되었어요. 제가 이곳에 온 것은 1970년대초부터입니다. 탄허스님이 대행스님을 도와서, 대행스 님이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일을 적극적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여간에 탄허스님은 대행스님을 자주 찾아와서 대화를 하시고 그랬어요. 또 1978년부터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62 3년 동안을 이곳에 오셔서 대중 300여 명에게 화엄경 강의를 해주시기도 했어 요. 그 대중에는 이곳의 스님과 재가자 그리고 천주교의 수녀도 있었어요. 강의 하실 때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셨습니다. 또 1979년에는 탄허스님을 모시고 대 한불교회관(지금은 한마음과학원 건물, 구 법당) 신축을 위한 기공식을 하였습니다. 그때 에 덕도지도 라는 좋은 글씨도 써주셨지요. 탄허스님이 한마음선원을 조계종으 로 등록케 하여 좋은 방향으로 회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것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 익성회 회원들의 부인들을 조직하여 심단회( 心 丹 會 )라는 모임 을 만들었습니다. 이 모임도 탄허스님을 뒷바라지를 해드리고 스님 법문도 듣고 그랬어요. 그 대표가 김영숙이었지요. 그래서 저는 익성회 회원, 심단회 회원을 이곳 한마음선원으로 데려와서 불교 활동을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탄허스님이 강조하신 어록을 든다면. 스님은 사람 간의 인과관계, 인격에 대한 것도 저희 회원들에게 말 씀하셨지만 그것보다는 우주섭리, 그리고 인도에는 불교가 없고, 우리 대한민국 에 불교가 있고, 한국이 세계불교의 중심지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리 고 한국이 세계의 중심국이 된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또 빙하가 녹고, 지구의 지축이 바뀌어서 세계 지도가 바뀔 것이라고 하시면서 일본의 3분의 2는 침몰 될 것이고 우리 동해안은 조금 잠기고 서해는 융기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국도 100리는 피해를 보게 될 것인데, 그러면 농담으로 저희들에게 학하리로 오 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스님은 인재양성, 지혜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언제인가 62 는, 자네들의 세대에는 통일이 된다고 보시면서 그때를 준비하는 인재가 절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63 필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남북통일이 되면 정치적인 변고, 변화가 생기는데 그런 것에 적응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지요. 준비가 안 되 면, 인재가 없으면 그런 변화가 헛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탄허스님 탄신 100년에 즈음해서 탄허스님 역사를 채록하는 것에 대한 소감은. 6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탄허스님은 대석학이셨지만 살아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하였습니 다. 제가 모셔보니 스님은 천하의 보물입니다. 이런 스님이 다시는 나올 수 없 어요. 나는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탄허스님 같은 분을 스승 삼을 인연이 또 있 겠냐마는, 그런 인연이 다시 온다면 탄허스님을 모시고 싶어요. 그래서 최근에 오대산 월정사에 가서 정념 주지스님과 기념사업에 협조할 수 있는 방안을 상의 하였습니다. 저와 한마음선원도 적극 참여할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갔어요. 저 와 같이 활동하던 익성회 회원도 대부분은 죽고, 지금 남아 있는 사람은 7~8명 인데 요즈음도 한마음선원에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귀한 증언 정말 감사드립니다. 김교수님이 이곳까지 저를 찾아와서 저의 말을 들어주셔서 감사합 니다. 좋은 증언을 채록해서 기념비적인 책을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64 스님에게 받은 가르침을 꼭 회향하겠습니다 대상 김희옥 검찰청 부산 대전지청장, 사법연수원 교수, 법무부 차관, 헌법재판소 재판관 등 역임 동국대 총장 일시 2012년 8월 9일 장소 동국대 총장실 총장님도 탄허스님과의 인연이 남다르다는 것을 신문 보도를 통해 알았습니다. 우선 불교 인연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저는 고향이 경북 청도의 매전면입니다. 부모님이 불자라서 어릴 적에는 부모님을 따라서 절에 자주 갔어요. 그리고 고향에서 금천초등학교에 다 닐 적에는 인근에 있는 고찰인 운문사와 대비사에 소풍을 가서, 어린 시절부터 절에 대한 추억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총장님은 1968년 동국대에 수석입학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탄허스님의 인 64 연은 어디에서 이루어졌나요? 제가 1968년에 대학에 입학해서 그해 5월인가 그랬는데, 탄허스 님이 동국대 중강당에서 하였던 금강경 대강연을 들었습니다. 1주일에 한 번씩,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65 오후에 두 시간 정도 열여섯 번인가를 강의하였는데 제가 그 강의를 다 들었어 요. 금강경이 32품인데, 하루에 두 품씩 한 것 같습니다. 그 강의를 들었던 학생 들은 거의 없었고 주로 대학교수, 교직원, 서울에 사는 신도들이 들었어요. 제 가 그때에 학교 기숙사에 있었는데 기숙사에 있는 선배들도 안 들었는데, 저 혼 자 그 강의를 들었습니다. 아마 제가 불교에 관심이 있어서 들은 것 같아요. 6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그때 스님은 동국대 대학선원장이었습니다. 대학선원은 지금의 제일병원 자 리, 명성여고가 이전하기 전에 있었던 그 근처에 있었죠. 저는 그때 교재로 나 누어 준 금강경 책을 아직도 집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탄허스님의 강의를 들은 소감이 어땠는가요? 스님의 강의를 들으니깐 굉장히 감동적이었죠. 스님은 강의를 하 시면 듣는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시고, 충격을 주어서 생각을 깊게 하고, 불교 이 외의 것도 생각게 하셨어요. 저는 그래서 스님의 강의를 통해서 감화를 많이 받 았어요. 그때 스님의 금강경 강의는 중강당의 반이 찰 정도로 청중이 많이 왔어요. 성 황을 이루었습니다. 저는 스님의 강의를 듣고, 불교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불교의 본질에 대하여 강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참선을 하면 서 오는 느낌처럼, 깨달음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교, 경전에 대하여 제대로 배우게 되었지요. 그때에 보니까 스님은 분필을 갖고 칠판에 판서를 하면서 강의를 하시는데, 불 교에 대한 어떤 내용도 막히는 것이 없으시더라구요. 불교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스님은 책을 보지 않으시고, 거의 외워서 하셨습니다. 스 님은 사람들에게 확실히 전달해 주는 강력한 힘이라고 할까, 에너지 같은 것을 갖고 계셨습니다. 저에게는 지금도 스님의 그런 인상이 남아 있지요. 하여간에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66 저는 스님의 강의를 통해서 제대로 된 불교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불교에 대 한 상식, 이해는 모두 스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강의 이후에 탄허스님을 대학선원으로 찾아뵙지는 않았는가요?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스님은 고승, 큰스님이면서 대학선원장이 셨고 저는 대학 1학년생이었기에 감히 찾아갈 생각은 못하였지요. 탄허스님은 동국대 이외에도 여러 절에 계셨는데, 학교 밖에서 만나시지는 않았는가요? 학교 밖에서 만나 뵙지는 못하였습니다. 다만, 제가 1976년에 사 법고시에 붙어서 검사가 된 이후에는 1년에 한 번씩 꼭 상원사 보궁을 가서 참 배를 하였습니다. 그럴 때면 스님의 거처인 월정사 법당 뒤에 있는 방산굴을 찾 아가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대전검찰청에 지청장으로 있을 때에는 스님의 생각이 간절해서 스님이 계셨다는 유성의 자광사를 자주 찾아갔습니다. 총장님이 학교를 다닐 적에는 대불련 활동이 본격화될 때인데, 참여하셨는가요? 저는 참가하지 않았어요. 권유는 받았지만 저는 대학 2학년부터는 제 전공인 법공부에 주력하였기에 그럴 형편이 되지 못하였어요. 총장님은 1976년에 사법고시에 합격을 하였는데, 그때 사찰에서 공부하시지는 않았나요? 했지요.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공부를 했어요. 해인사 홍제 암, 청계사, 회암사, 인휴사 등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66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67 탄허스님은 1970년대 중반, 신문에 자주 보도되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어떤 생각을 하였 는가요? 그거야 스님의 근황, 대담이 보도되면 주의깊게 그 기사를 읽었지 요. 그리고 스님에게서 불교 공부를 하던 때도 생각하게 되고, 스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지요. 6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탄허스님은 도의적 인재양성을 아주 강조하셨습니다. 인재양성을 해서, 그런 인재가 사회 로 진출하여 우리 민족,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셨지요. 제가 보기에 총장님도 탄허스님의 그런 것에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합니다. 저도 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은 것 같습니다. 지금 생 각해 보면 스님의 그런 것에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그렇게 볼 수 있죠. 그리고 제가 대학에 수석입학을 하였다고 해서, 입학 직후에 동대신문사에서 저를 인터 뷰하였습니다. 그때에 저는 법과이기에, 우선은 법공부를 해서 즉 고시공부를 해서 사회로 진출하겠지만 언제인가는 학교로 다시 돌아오고 싶다는 포부를 이 야기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것은 법 분야의 교수로 돌아오고 싶다는 것이지, 현재와 같은 학교 관리 책임자가 되고 싶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우연히 들은 것도 사실은 불교에 관심이 있어서 들은 것이라 볼 수 있지요. 그리고 방금 전에 말하였지만, 제가 유성 자광사에 자주 간 것도 스님이 그리워서 간 것입니다. 그 무렵에 갑사도 여러 번 갔습 니다. 탄허스님 이외에 다른 큰스님과의 인연이 있다면, 소개하여 주시지요. 대학 1학년 때 청담스님이 풍전상가에서 하였던 삼보법회에서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것이 토요법회였는데, 청담스님이 하신 강의를 30회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68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1학년 때에 봉은사에 서돈각 교수님, 그리고 동국대 불교대 교수 님들과 함께 가서 판전에서 공양도 같이 하고 그랬지요. 그때 법정스님을 만나 기도 하였습니다. 법정스님은 그 무렵 30대 후반이었는데 동국대 역경원에서 일 을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떤 교수님이 제가 입학시험에서 톱을 하였다고 하 니깐, 저에게 톱은 나무를 잘 잘라야 한다 는 그런 격외의 말씀을 해주신 것이 생각납니다. 그러니깐 저는 그 시절에 훌륭한 스님들을 만나고, 배우게 된 것 이 복이 참 많다고 봅니다. 그런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조인으로 공직에 있으면서 불교와 관련된 일은 없으셨는가요? 제가 사법연수원 교수로 2년간 있었습니다. 1995년 무렵, 부장판 사를 하다가 연수원에를 가 보니, 기독교 천주교의 종교 모임은 있는데 불교 모임은 없더라구요. 그 이전에 있었는데 흐지부지된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연 수생의 자료를 보고서 종교란에 불교라고 쓴 사람들을 불러서 내가 지도교수를 해줄 터이니 종교 모임을 만들라고 권유했죠. 그래서 연수생들이 종교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조계사에서 무진장스님에게 법문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그 모임의 이름은 다르마법회였는데, 그 이름을 제가 지었습니다. 그 후에 학생들은 반야심경을 배우겠다고 해서, 정토회 법당이 연수원과 가까 워서 법륜스님을 초청해서 방과 후에 공부를 하고 그랬어요. 그 모임은 지금 까지 잘 되고 있고, 그 출신들이 전국 각지에 근무하면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 니다. 68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69 총장님은 공직에 있다가, 2년 전부터는 동국대 총장으로 근무하시게 되었습니다. 총장님은 탄허스님이 고대하시던 인재가 되었고, 이제는 인재를 길러내실 중책을 맡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스님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저도 학 교의 책임을 맡아 동국대 중흥을 위한 노력을 하면서, 인재양성을 하려고 여러 준비를 하였습니다. 저도 미래사회를 위해서는 결국 사람을 양성해야 한다고 판 6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 인재양성을 잘 하는 것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 이라고 생각하고, 제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복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저는 제2 건학운동을 하는 것이 동국대를 중흥시키고, 동국대의 정체성 을 정립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동국대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학교를 제대로 정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봐요. 그래서 총장으로 근무하면서 처음 1년간 은 여러 문제를 점검하였고, 우리가 갖고 있던 인재상을 정비하였습니다. 그런 바탕 하에서 인재 동국PROJECT라는 사업을 수립했어요. 우선 이번 2학기부터 가동하고, 내년부터는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입니다. 학생들을 입학 전부 터, 그리고 입학해서 졸업 후까지 전체적인 프로그램에 의해서 인재로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대학은 교육과 연구의 공동체이니까 이런 틀 안에서 시스템을 만들었고, 이제는 구체적인 가동 작업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탄허스님이 동국대 대학선원장을 10년이나 하셨는데, 대학선원을 계승한 정각원에서는 그런 역사가 애매한 것 같아요. 그래요? 그것은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으로는 탄허 스님과 연고 있는 월정사, 탄허재단, 그리고 탄허스님을 존경하는 불자들이 뜻 을 모아서 저희 동국대에 가칭 탄허장학금을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 면 자연스럽게 탄허스님의 정신, 사상이 동국대에서 더욱 빛나지 않을까 생각됩 니다. 이런 뜻이 문도 스님들에게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70 총장님은 탄허스님을 어떤 스님으로 보시나요? 탄허스님을 종교 외적으로 본다면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적으 로 볼 때에도 확실한 교육자이고, 지도자로 봅니다. 그리고 종교, 불교 내적으 로 본다면 스님은 학문과 삶이 탄탄무애하시고, 거침이 없었다고 봅니다. 스님 은 자신이 느끼고, 공부하고, 깨달은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전달해주 신 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재양성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총장님의 삶에서 탄허스님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제 삶에 있어서 저는 스님을 만났기 때문에 불교를 제대로 알게 되 었다고 말을 하고 싶군요. 스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야말로 저의 불교는 소박하 고, 단순하고, 부모님을 따라 절에 다녀서 배운 정도였죠. 그러나 스님에게서 금 강경을 배운 것은 엄청난 것이었고, 제대로 된 불교를 배웠고, 그래서 내 자신 이 제대로 된 불자로 성장하였다고 봅니다. 탄허스님 탄신 100년 기념 책자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찾아뵌다는 말을 들었던 소감은 어떠하였는가요? 저는 스님의 탄생이 100년밖에 안 되었는가, 그렇게 생각을 하였 어요. 올해가 성철스님이 탄신 100년인데, 연락을 받고서야 성철스님보다 1년 늦게 태어나신 것을 알았지요. 저는 탄허스님이 더 오래된 고승인 줄로 알고 있 었어요. 아마 스님은 1960년대, 1970년대에 이미 유명하셨고, 그리고 일찍 돌 아가셔서 제가 그렇게 알았던 것 같아요. 하여간에 저는 스님의 가까이서 지도 를 받은 것을 큰 복을 받았다고 여깁니다. 저는 스님의 장자 남화경이라든가 스 님의 책을 많이 갖고 있어요. 탄허스님처럼 사시는 것도 멋진 삶이라고 봅니다. 70 저는 탄허스님과의 인연으로 불교를 제대로 알게 되었고, 불교정신으로 일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71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총장집무실에는 저의 불교 좌우명인 수처작주( 隨 處 作 主 )도 액자로 만들어 걸어 놓았고, 또 탄허스님과 인연이 있는 아직까지도 살아 계신 대구의 화산스님에게서 받은 유묵 2점도 액자로 하여 걸어 두고 있습니다. 이 유묵은 한암스님의 글씨인데 하나는 중국 중봉선사의 법어이고, 다른 하나는 한 암스님이 후배 스님들을 경책하는 좋은 내용입니다. 화산스님은 제가 자주 찾아 7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뵈는 큰스님이신데, 화산스님은 한암스님의 기일 날 상원사에서 이 유묵을 놓고 탄허스님, 한암스님의 선 수제자인 보문스님과 함께 통곡을 하였다는 비사를 저 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스님과의 인연, 추억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스님으로 인해서 제대로 된 불교를 알게 되었습니다. 스님에게 배운 것을 잘 회 향하기 위해서 저는 동국대에서 좋은 인재를 길러낼 작정입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72 민족정신을 강조하신 스님 대상 김의정 국립민속박물관회장, 조계종 중앙신도회장 역임, 명원문화재단 이사장 일시 2012년 4월 18일 장소 명원다례전수관 서울, 성북동 조계종 중앙신도회장이면서, 명원문화재단 이사장이신 선생님과 탄허스님과의 인연을 듣 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저는 탄허큰스님과 직접적인 인연은 별로 없어요. 오히려 저의 어 머님(명원 김미희)이 큰스님과 직접적으로 인연이 많지요. 저는 어려서부터 몸이 안 좋아서, 그저 어머님을 따라다니는 정도였죠. 탄허스님을 어디에서 처음으로 친견하였는가요? 저희 집에는 큰스님들이 무척 많이 오셨어요. 그럴 때에 탄허스님 도 오셔서 뵈었죠. 그러나 저는 어느 스님이 훌륭한지, 스님들의 특징이 어떠한 지를 잘 몰랐어요. 탄허스님은 공부를 많이 한 스님으로만 기억을 하였습니다. 72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73 오대산 월정사에 모친이신 김미희 여사께서 자주 오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맞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어머님을 따라서 상원사 적멸 보궁에 기도하러 많이 다녔어요. 제가 몸이 아파서, 어머님은 제 몸의 쾌유를 위 해서 기도를 많이 하셨어요. 그러나 저는 솔직하게 말하면 어머님을 따라서 보 궁에 가서 기도는 많이 하였지만, 열심히 하지는 않았어요. 기도할 때에 어머님 7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은 너무 오래 하셨어요. 그때에는 무척 추웠어요. 그리고 지겹게 느끼고 그랬어 요. 그때에 상원사에 세조대왕이 와서 피부병이 나았다는 이야기와 상원사 입구 에 옷을 걸어 놓았다는 이야기들을 들었지요. 하여간에 오대산에는 많이 다녀 서, 오대산은 저의 고향 같은 곳입니다. 오대산 월정사, 상원사에 김미희 여사가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다녔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저희 집안(쌍용그룹)에서 상원사 불사를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 다. 그러나 저는 그 시절에 어린 나이라 세부적인 내용은 잘 모릅니다. 예전에 제가 적멸보궁을 갈 때에 보니깐, 보궁에 오르는 마지막 계단의 우측에 저희 집 안에서 불사를 하였다는 내용을 써놓은 나무판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쇠에 매달 려 있어서, 바람이 불면 그것이 흔들리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보 궁에 갔더니, 그것이 보이지 않더라구요. 지금의 제 마음은 그것이 다시 복원되 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 오대산 불사에는 KAL(한진그룹)에서 그 후에 불사를 워낙 크게 해서 그 이 전의 것은 물거품이 되어 버린 셈이 되었어요. 그 시절에는 제 아버님의 쌍용이 더 재력이 있었고, 제일 먼저 불교계에 시주를 많이 했어요. 그 후에 삼성, KAL, 현대 같은 데에서도 하였지만요. 1960~70년대에는 우리 집안이 전국 불교계의 불사를 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여간에 제 어머님이 누구보다도 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74 먼저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많이 하셨고. 그러나 저는 그 당시에는 그런 것에 관 심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저희 집안에서 상원사와 월정사에 시주한 것은 사실입 니다. 쌍용에서 오대산 월정사에 불사를 한 내용이 이번 기회에 밝혀졌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 시절, 나이가 어리고 또 몸이 아파서 그런 것에 관심을 갖 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가 최근에 여러분들의 원고를 모아서 어머님을 조명하는 책( 시대를 이끈 휴머니스트, 학고재)을 냈어요. 그 책의 도문스님이 쓰신 내용에 저의 어 머님이 오대산에 시주한 것이 조금 나오더라구요. 그것이 1960년대 초인 것 같 은데, 저희 아버님(쌍용 김성곤 회장)과 어머님이 트럭에 쌀과 내복을 가득 실고 가 서 월정사에 대중공양을 냈다는 내용이 나오더라구요. 탄허스님이 1970년대 초, 대원군 별장(석파정)에서 화엄경 작업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별장의 주인이 모친인 김미희 여사였습니다. 이런 내용을 알고 계시지요? 그런 일이 있었지요. 잘 알지요. 세검정에 있는 그곳은 저희 집안 의 것이었는데 거기에 있는 한옥이 멋이 있었고, 국보급의 소나무가 있었어요. 그 소나무는 막걸리를 좋아해서, 막걸리를 먹어야 잘 자란다고 그랬어요. 그때 거기에서 탄허스님이 작업을 했어요. 저는 어머님을 따라가서 스님을 뵙 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시는지는 잘 몰랐어요. 그저 스 님이 무엇을 쓰시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죠. 저는 그때 젊은 나이여서 그런 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지금 같으면 적극적으로 돕고 나섰겠지만 그 시절에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때에 제 어머님이 저에게 여기는 너무 중요한 집이라서 우 리 개인이 살림을 사는 것은 맞지 않고, 큰스님이 와서 중요한 작업하는 것이 맞 74 다 고 하신 말씀은 기억이 납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75 제 어머님이 탄허스님을 위해서 그곳을 내드린 것에는 초당이라는 분이 중간 에 이야기를 해서 그렇게 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 초당이라는 분은 스님의 불 제자가 아니라, 스님들의 친구같이 하시더라구요. 스님들과 격의가 없고 그래 서, 나는 속으로 대단한 분이라고 여겼지요. 7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평창의 스키장 건설을 쌍용의 김석원 회장님이 1970년대 초반에 하였습니다. 지금은 다 른 회사로 넘어갔지만, 탄허스님이 그 장소를 정하는 데 김성곤 회장님에게 지형에 대해 서 자문해 주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요? 저는 그 말을 처음 듣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저희 아버님 은 제 동생인 김석원 회장이 그것을 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셨어요. 아버님은 나 라의 기간산업, 국가에 도움이 되는 생산적인 사업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 요. 제 동생은 어릴 적에 일본에서 공부를 하며 스키를 타봐서, 스키장에 대해 서 알아서 그것을 하였어요. 그것을 만들 때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어떤 사실이 맞는지는 단언할 수 없어요. 탄허스님이 1975년, 신화엄경합론 을 출간하였습니다. 그 책의 서문에는 김미희 여사가 그 책의 종이값을 시주하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저는 그런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몰랐어요. 다만 어머님이 탄허스님 을 도와드렸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그때가 1975년이면, 그 해에 제 아버님 이 돌아가셨을 때이거든요. 그래서 저희 집안도, 제 어머님도 많이 힘들 때입니 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제 어머님은 세금을 현금으로 엄청나게 냈어요. 그렇지만 어머님은 불사의 약속은 약속한 대로 지켜야 된다고 하셨어요. 그런 마음으로 탄허스님의 불사도 도왔을 거예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76 월정사와 쌍용의 인연은 월정사 말사인 삼화사를 쌍용에서 지어준 것, 그리고 그 무렵 조 계종 승가대 건립자금(1억 2천)을 종단에 기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쌍용양회가 삼화사 근처에 공장을 설립하게 되자, 그 근처 에 있는 절인 삼화사를 그 위쪽으로 이전하게 되어서 생긴 것입니다. 그때 삼화 사 주지스님이 저를 찾아오셔서 삼화사가 피해를 많이 입었다고 하셔서, 쌍용에 이야기를 해주어서 그렇게 되었죠. 그때에도 제 개인 재산이 많이 들어갔어요. 제가 뒤에서 많이 후원했어요. 탄허스님이 1983년에 입적하시고, 1985년에는 탄허문화재단이 설립되었어요. 제가 알기 로는 쌍용에서 당시 돈 천만 원을 지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제 어머님이 안 계실 때입니다. 제 어머님이 1981년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때에는 제 남편(이승원)이 쌍용에 근무할 때입니다. 그때 저희 쌍용에서 그 돈이 재단 설립 재원으로 들어간 것은 제가 보기에는 회사(쌍용)에서 일부 대고, 제 개인 돈도 들어갔어요. 그때 돈 천만 원은 지금으로 말하면 5억 이상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저희 집안에서 시주를 하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이 아니라 진실이 밝혀지길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은 말하기는 거북하지만, 제 어머님은 불사에 많은 후원, 시주 를 할 때에 저의 도움을 많이 요청했어요. 저는 아버님에게서 받은 돈을 쓰지 않 고 모아두고 그랬거든요. 그리고 제가 몸이 아파서 돈을 잘 쓰지 않아서, 제가 모아둔 돈이 어머님의 불사 및 후원 비용에 많이 들어갔습니다. 제가 어머님의 뒷바라지를 했어요. 그런데 어머님이 돌아가셨으니, 당연히 제가 한 것이지요. 회장님은 탄허스님을 어떤 분으로 보시나요? 76 저는 스님을 목탁만 두드리고, 벽을 바라보면서 참선만 하는 스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77 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어요. 탄허스님은 학문적인, 학승의 이미지가 강한 스님 이 아닌가 합니다. 불교 학문, 나아가서는 유불선을 회통한 대학자이면서 스님 들에게 개방적인 교육에 큰 기여를 한 큰스님으로 봅니다. 큰스님은 스님과 재 가자들에게 산지식을 불어넣어 주신 스님으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스님은 스님 들이 공부하는 경전 모든 것을 번역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7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명원문화재단 이사장인 회장님은 김미희 여사님의 다도 문화사업을 계승하고 계시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어머님에게 배울 적에는 억지로 배우고 그랬어 요. 그러나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에, 어머님의 뜻과 정신을 깨닫고 나서는 어머 님을 기리면서 차문화 발전을 진작하는 재단을 설립하였고, 이제는 그 분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는 불효를 많이 하였지 만, 이제는 효도를 하고 있어요. 어머님의 역사와 정신을 찾아서 책을 몇 권 내 기도 하였어요. 그런 결과로 저는 차의 대모( 大 母 )가 되었고, 제 어머님은 차의 선 구자가 되었지요. 그리고 모녀가 함께 훈장을 받았어요. 이런 것도 역사 이래 처 음입니다. 탄허스님과 명원 김미희님이 가까웠던 것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제가 알기에는 탄허스님은 민족정신을 강조하시고, 민족의 주체적 인 것을 찾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어머님, 명원선생님도 그런 점 에서는 탄허스님과 같았어요. 명원선생님은 여고에서 배울 적에 일본 차를 접하 고는, 일본 차는 우리 차와 다른 것임을 알았어요. 그것이 출발, 자극이 되어서 우리 전통 차, 전통 문화를 복원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어머님이 탄허스님 을 도와드린 것이 아닌가 그래요. 그런 민족정기가 통해서, 그런 것이 접점이 되 어서 좋은 인연이 되지 않았는가 합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78 최근에는 월정사 개산대제 행사에 명원문화재단의 차 시연팀이 출연하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탄허스님의 맥을 잇고 있는 월정사 주지이신 정념스 님의 제안이 와서 몇 년간 하였습니다. 저희 집안과 오대산 상원사, 탄허스님과 의 인연을 알고 계신 정념스님의 제안으로 그렇게 가서, 차 시연을 하고 그랬지 요. 저로서는 월정사에서 그런 일로 인해서 한국 불교의 차문화를 정립할 수 있 는 계기가 된 대한불교다도연합회를 창립할 수 있었고, 제가 초대 회장으로 추 대될 수 있었지요. 집안에 탄허스님의 유묵이 보관되어 있나요? 아마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님들에게 받은 유묵이 조금 있는 것 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정리가 안 되어서 구체적인 것은 잘 몰라요. 저는 어머 님의 자료 중에서, 우선은 차에 관련된 것만을 찾아서 정리하고 있어요. 언제인 가, 찾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제가 회장님을 찾아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는가요? 특별한 생각보다는, 탄허스님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큰스님은 풍 채가 좋으셨지요. 얼굴이 둥글둥글하시고, 훤하게 생기셨어요. 그래서 세상을 훤하게 하셨지요. 스님은 기도만 하는 스님이 아닙니다. 스님은 유불선을 회통 해서, 우리 불교에 학문적인 방향을 심어 주신 어른이시지요. 제가 보기에 지금 불교, 조계종단에서 크게 활동하는 강백 스님들 중에는 탄허스님의 제자들이 많 은 것 같아요. 아마 제일 많지 않은가 그래요. 바쁘신 가운데, 증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78 탄허스님, 오대산 불교의 역사를 찾으러 다니시는 데 고생이 많습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79 니다. 이번 기회에 이런 작업을 통해 탄허스님의 사상, 역사가 풍부하게 이루어 지길 바랍니다. 이런 것은 할 때에 해야지, 후일에는 하지 못합니다. 수고하세요. 7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80 학승과 선승을 초월한 분 대상 이영자 일본 다이쇼오( 大 正 )대학 문학박사, 동국대 교수, 한국여성학회 회장 역임, 동국대 명예교수, 법화학천태학연구회 회장 일시 2011년 11월 17일 장소 태극당 동대 입구 동국대 명예교수이신 선생님이 탄허스님과 인연이 적지 않다고 해서 이렇게 뵙게 되었습 니다. 오대산 인연의 실마리를 풀어 주시지요. 저는 고향이 강릉입니다. 어렸을 적에 오빠가 오대산 상원사로 소 풍을 가면 부모님이 꼭 방한암스님을 찾아서 인사를 드리라고 하시면서, 얼마간 의 보시를 한암스님에게 드리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방한암이라는 그 말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지요. 그 시절, 동해안 지역에서는 한암스님을 부처님 같이 대접했어요. 그러다가 제가 강릉여고 2학년 때인 1953년 한암스님의 대상( 大 祥 ) 때에 참여 하게 되었어요. 그때 강릉포교당에서 트럭 한 대를 대절해서 포교당 신도들이 올라갔어요. 제 친구 아버지 가운데 목상( 木 商 )을 하는 분이 트럭을 내주어서, 거 80 기에 타고 간 것이지요. 그것이 저로서는 오대산에를 처음 간 것이었고, 월정사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81 라는 큰 절을 처음 본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월정사는 불에 다 탄 그대로였어 요. 월정사를 거쳐 상원사로 가서 대상에 참여했어요. 그 제사에는 사람들이 얼 마나 많이 왔는지 몰라요. 서울 선학원에서도 차 한 대를 대절해서 왔어요. 사 람들이 많이 와서 발 디딜 틈도 없었고, 잠도 잘 곳이 없어서 한귀퉁이에 처박혀 자고 그랬어요. 8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상원사에서 탄허스님을 뵈었는가요? 오대산에 가기 전에 저는 방한암이라는 이름은 분명히 들었지만, 탄허스님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탄허스님을 뵈 었는지는 기억이 막연해요. 다만 지금 생각해 보니 멋있고, 우아한 분을 보았는 데 그 분이 탄허스님인 것 같아요. 저는 희찬스님을 강릉포교당에서 자주 뵈어 서 알고 있었는데, 희찬스님은 빨간 가사를 입은 모습으로 본 것은 분명합니다. 희찬스님은 강릉에 자주 오셔서 일을 보셨기에 알고 있었지요. 교수님이 지켜보신 예전 강릉 불교를 들려주세요. 예전 강릉은 불교가 강했어요. 그런데 강릉 불교는 강릉포교당, 월 정사 말사인 그 포교당이 중심이었어요. 강릉포교당에는 전관응스님이 포교사 로 계시면서 많은 활동을 하였지요. 한마디로 관응스님이 자리를 잡아 놓은 것 입니다. 강릉 사람들은 포교당에서 결혼식을 많이 하였는데, 그러면 관응스님이 거의 다 주례를 서 주었어요. 그것이 관행이었어요. 거기에서 결혼한 기독교인 들도 늘 관응스님 타령을 하였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시절 관응스님은 인기 가 많았습니다. 스님은 법문 잘하지, 학벌 좋지, 의젓하지, 강의도 잘 하시지, 잘 생겨서 여자들이 줄줄 따라다녔어요. 그래서 스님은 토굴로 도망을 다니시다가, 6 25가 나자 다른 곳으로 가버렸지요. 나는 초등학교 4, 5학년 때에 그 포교당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82 에서 연극을 할 때에 세라복이라는 교복을 입고 무용을 하기도 했어요. 그 포교 당에는 일요학교가 있었는데, 기독교의 주일학교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유명했 어요. 강릉포교당은 강릉 예술, 문화의 중심지였어요. 강릉문화를 창조하는 곳 이었지요. 그러면 언제부터 탄허스님과의 인연이 구체적으로 맺어졌는가요? 그것은 제가 대학원에 들어와서부터입니다. 저는 대학원에 다닐 적에 불교문화연구소 간사로 계시던 이기영 박사님의 개인 조수였습니다. 그때 만 해도 학교에서 공적으로 조교를 둘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연고로 저 는 이박사님을 강의 때마다 쫓아다녔지요. 그런 면에서 저는 이박사님의 개인 제자인 셈이었죠. 그런데 이박사님이 대불련의 지도교수로서 월정사 수련회에 다녀오셔서, 탄 허스님에게 감동을 받은 거예요. 탄허스님이 청산유수로 하신 강의를 듣고서는 감동을 받으신 것이지요. 탄허스님은 분필 하나만 있으면 3일 동안을 강의할 수 있을 만큼 기억력이 있는 분이기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이기영 박사님도 석 학이시지만 감동을 받고, 놀라신 것이지요. 그래서 이박사님이 돌아와서 한참 후에, 날보고 탄허스님에게 계를 받고 싶다고 그러셨어요. 계를 받는 것은 법명 을 받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좋지요, 그러면 한암문중의 사람이 되는 것인 데 얼마나 좋아요? 그랬어요. 그런데 이박사님이 계를 받으러 가려고 했는데, 그때에 눈이 많이 와서 오대산에를 가지 못했어요. 그 시절에는 눈이 많이 왔고, 눈이 오면 산골짜기에는 갈 수가 없고 그랬어요. 이박사님은 그 후에 청담스님 에게 설봉이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이름이 좋지 않다고 해서 불연으로 바꾸었지 요. 하여간에 이박사님도 탄허스님을 존경하였다는 것을 그때에 내가 알았지요. 82 탄허스님은 유불선에 통달하셨으니, 지식인들이 보기에는 더 이상의 학자를 볼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83 수 없지 않습니까? 이기영 박사가 탄허스님을 존경하였는다는 증언은 처음 듣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동국대 대학선원장으로 탄허스님을 모실 때 의 정황을 제가 본 것이 있습니다. 대학선원은 통합종단이 등장한 후에 총장으 8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로 오신 범산 김법린 총장이 만든 거예요. 대학선원을 만들 때에는 불교과 교수 들이 반대가 있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후원을 받은 범산이 힘을 받았기에 만 들 수 있었지요. 그렇게 해서 만들고는 초대 원장으로 정선 정암사에 계시던 서 옹스님이 오셨어요. 그때에는 석호스님이라고 하였는데, 이 스님이 양정고보를 나오고 중앙불전 출신이면서 일본 유학을 다녀왔기에 학벌이 좋은 데에도 불구 하고 불교과 교수들이 비구승 출신이라고 해서 탐탁치 않게 여겼어요. 그때에 박성배 교수가 대학선원의 간사를 봤어요. 나는 대학선원에 있는 신도단체인 선 우회의 조수로 일을 봤고요. 그 선우회에는 황산덕 교수 부인 대법선 보살, 전 진한 부인, 김법린 부인, 이한상 부인 등이 회원으로 있었어요. 그런데 범산이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석호스님이 원장을 그만두시 고 가셨어요. 서옹스님은 서경수 박성배 교수가 최고의 선객이라고 하면서 억 지로 가서 모시고 왔지만 결국 가버렸어요. 그러자 박성배 교수도 간사를 그만 두고, 잠시 김항배 교수가 간사를 보았어요. 그러고 나서는 조명기 총장이 대법 선 보살을 간사로 임명했어요. 그 보살은 황산덕 교수 부인인데 기독교에서 개 종하여, 동대에서 재가불교로 석사를 받았어요. 황박사가 국민투표가 능사가 아 니라는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해서 감옥에 들락날락해서, 위로할 겸 해서 임용한 것입니다. 바로 이럴 때에 후임 원장으로 누굴 모실까에 대해서 말들이 나왔는데 탄허스 님을 모셔오자고 그랬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오대산에서 30년을 안 나오셨는데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84 나올리가 없다고 했어요. 30년을 꼿꼿하게 앉아 있던 분이 나오겠냐, 그런 분이 도회지 한복판에 나와 계실 것이냐고 하였어요. 서경수, 박성배, 안진오는 안 내 려오실 거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동대 법인의 사무국장인 법안스님이 찾아가 삼 배를 해서 모셔오자고 해서 조명기 총장의 비서인 김인봉, 법안스님 등이 오대 산으로 가자, 그래 나도 같이 가자고 해서 그럴려고 했어요. 그렇지만 새벽 여 섯 시에 조계사에서 차로 가기로 했는데, 저는 잠이 많아서 그 차에 타질 못했어 요. 그런데 오대산에 갔더니만 탄허스님이 원주로 가서 안 계셔서 만나지도 못 하고 돌아왔어요. 그때에 희찬스님이 법당을 짓다가 산판 벌목 관계로 잘못돼서 원주에 구속되어, 탄허스님이 원주에 가셨던 것이지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탄허스님은 1966년 9월 경에 대학선원장으로 정식 취임하셨지요? 하여간에 그후에 원장으로 오셨는데, 그 과정은 저는 잘 몰라요. 저는 그 무렵에 일본에 공부하러 갔다가 돌아와서 1971년부터 시간 강사로 강 단에 섰어요. 그래 강사 시절에 대학선원에 자주 찾아가서 스님에게 인사를 드 리고 배우고 그랬지요. 새로운 스타였던 이기영 박사의 제자라고 하니까 더 잘 대해 주었어요. 또 대법선 보살도 날 추천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제가 강릉 출신이라서 그런지, 스님이 저를 귀여워해 주시고 그랬어요. 저는 석호스님이 계실 때에 선에 대한 것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탄허스님이 원장 이 되었지만 학생들이 스님의 강의에 잘 안 왔어요. 그래서 불교 과목을 담당하 는 교수, 강사들이 학생들을 몇 명씩 강의를 듣게끔 하였어요. 그래 저도 그렇 게 하면서 스님의 강의를 들었지요. 강의 제목은 참선실수였지만, 스님은 참선 은 안 시키고 선학 이론 및 선법문을 주로 하셨어요. 선학강좌를 하신 것이지요. 선이란 무엇인가를 하시고, 그것을 하다가 유불선 회통을 말씀하시고, 주역도 84 이야기하였다가 장자도 말씀하시고 그랬죠. 강의하실 때에는 칠판에 그 내용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85 외워서 가득 쓰시고 강의를 하셨어요. 원장을 하시기 전에 대학선원의 토요강좌 에 모셨을 때에도 유불선 삼교에 대해서 자신만만하게 강의를 하셨어요. 그 시 절 스님은 잘 생기시고, 거침이 없었지요. 대학선원 시절, 탄허스님을 지켜본 소감은 어떠하셨는가요? 8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저는 그때에 공부를 할 때라, 강의를 듣다가 질문을 간혹 했어요. 스님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너무나 엄청난 내용을 말씀하셔서 그냥 듣기만 했어 요. 그러나 저는 강사 시절이라 거의 습관적으로 질문을 했어요. 더러 모르는 내 용이 나오면 저절로 질문을 하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스님 문장이 이상합니다, 혹은 이런 것은 빼세요 같은 말을 했어요. 그러면 스님은 화를 버럭 내십니다. 그렇지만 스님은 순간적으로 화를 내시지만 그 순간뿐이었지요. 그렇게 강의를 들으면서 저는 속으로 스님은 컴퓨터인가? 아니면 녹음기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다른 교수들은 노트를 들고 와서 칠판에 베끼면서 강의를 하는데, 스님은 모든 것을 외워서 칠판 가득하게 쓰시고 강의를 하셨거 든요. 제가 볼 때에 이종익 교수님도 기억의 대가였어요. 그래 저는 기억력의 대 가는 탄허스님과 이종익 교수라고 보았지요. 이 분들은 기억력의 천재들이었습 니다. 이종익 교수의 강의를 저는 많이 들었어요. 대각사에 있었던 단체로 대각회라 고 있었어요. 그 대각회는 대법선 보살이 돈을 대고, 강사로 이종익 교수가 왔 고, 주역은 신소천스님과 고광덕스님이었어요. 대법선 보살이 돈을 뿌리다시피 하면서 하였어요. 그것이 1956년 무렵입니다. 하여간에 탄허스님의 강의는 모든 것을 암송으로 하셨어요. 그렇지만 저는 그 내용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요. 스님은 선이론 강의를 하시면서 화엄, 유불선, 주역까지 다 나옵니다. 그러면 한 시간이 잠깐이지요. 학생들은 저도 모르고, 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86 도 모르는 심정으로 듣고만 있었지요. 그러나 그렇게 들어놓은 것은 귀에 다 박 힙니다. 귀에 익히면, 입력이 되면 언제인가 활용이 되지요. 나도 강의를 해보 니까 그것을 느끼게 되더라구요. 강단에서 떠드는 것은 입력된 것이 있으니 자 신있게 할 수 있지요. 그 시절 스님은 외모가 반듯하고, 발음도 정확하고 그랬 어요. 발음이 부정확해서 못 알아듣는 것은 절대 아니었어요. 내용을 몰라서 모 르지요. 교수님이 대각사에 다녔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저는 조계사와 선학원을 많이 다녔어요. 저는 태고사는 몰라요. 그 러니까 정화 직후인 1956년부터 비구 스님을 찾아다녔어요. 1956년부터 조계 사에 드나들었어요. 선학원에서 석주스님, 효봉스님, 동산스님, 금오스님 이런 큰스님들을 만나 뵙고, 만나면 무조건 절을 하였어요. 큰스님을 만나면 누구인 지도 모르고 절만 했어요. 나는 비구 스님만을 스님인 줄 알았어요. 대학선원 시절 증언은 참으로 귀합니다. 그 후에는 어디에서 뵈었는가요? 대원군 별장이라는 석파정에 가서 뵌 일도 있습니다. 저는 시간이 나면, 스님을 찾아다니고 그랬어요. 그래 스님이 그곳에 있다고 해서 가보았지 요. 지금은 교통이 좋지만, 그때에는 교통이 불편했어요. 버스를 타고, 한창 걸 어서 가야 했습니다. 거기에를 가보니, 스님이 화엄론절요를 번역하고 계시더라 구요. 가서는 스님께 어떻게 해서 여기에서 어려운 작업을 하시냐고 여쭈어 보 니까, 쌍용의 김미희 여사에게 부탁을 해서 빌렸다고 그러셨어요. 갔더니만 스님의 옆에는 원고지가 엄청나게 인쇄되어 있었어요. 그것은 인철 지처럼, 원고지에 빨간 줄이 그어 있는 원고지였어요. 저는 그때에 천태학을 공 86 부한다고 마음을 먹어서, 스님이 하시는 화엄에 대해서는 마음이 안 내켰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87 저는 한국학을 하겠다고 하면서 제관스님의 천태사교의를 공부한다고 그랬어 요. 그때에 저는 민족주의 의식이 있어서 한국학, 한국불교를 한다고 작정했지 요. 그러니까 스님과는 할 이야기가 많지가 않았어요. 스님은 중국의 이통현 장 자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8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석파정 그때의 탄허스님의 심정은 어땠나요? 대강백이면서 고승인 탄허스님이 작업 장소 를 찾지 못한 것에 대한 것은 없었나요? 좀 있었지요. 말하자면, 당신이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해서 화엄 경 작업을 하고 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한 섭섭함이었지요. 그래 서 심지어는 스님은 지금까지 해온 것을 성냥 한 갑이면 쌓여 있는 원고를 다 태 워버릴 수 있다는 말씀도 하셨어요. 그 누가 도와주지 않는 것에 대한 반감의 표 시였습니다. 그 당시는 우리나라가 라면도 먹지 못하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스님의 작업을 후원해 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아니 스님,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하면서 스님을 위로해 드렸습 니다. 이기영 박사에게 들으니 동양학을 서양에서도 많이 찾고 있으며, 스님이 이 작업을 제대로 잘 해 놓으시기만 하면 찾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라고 하였어 요. 스님이 성과를 내 놓아야 좋지, 그렇지 않으면 누가 읽을 수나 있는가요? 하면서 스님에게 희망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님의 작업은 필생의 과업으 로 하는구나 그런 것을 느꼈지요. 저는 그때 스님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렸어요. 희망 비슷한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후부터는 저를 아주 좋아하시더 라구요. 나는 스님을 할아버지로 생각하였구요. 개운사 대원암으로 찾아가시지는 않았는가요? 왜요, 그곳으로도 찾아가 뵈었지요. 대원암에 자주 갔죠. 그 시절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88 대원암은 개운사 뒤에 있었는데, 그 입구의 개울이 복개되기 전입니다. 버스를 타고 가서, 걸어갔지요. 한 번은 갔더니, 스님께서 서예전시회를 하는데 글씨 백 점을 썼다고 자랑을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스님에게 다른 사람은 몇 달 걸려서 글씨를 써서 전시 회를 하는데 백 점을 언제 썼어요? 하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스님은 뭐, 그거 새벽에 시작해서 밤까지 하루만에 마쳤지 하시면서 과시를 하더라구요. 그래 나는 스님에게는 그것 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네요 했어요. 그러자 스님은 그냥 써지나, 한번 마음을 먹으면 한번에 할 수 있지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나 는 스님에게 그러면 저도 하나 써 주세요 하고 부탁했더니, 똥뚜깐도 없는 것 이 나중에 써주마 하셨어요. 글씨를 걸 집도 없으면서, 부탁을 한다는 것이 지요. 그 뒤에 스님이 오라고 해서 갔더니만, 스님이 횡으로 써줄까 종으로 써 줄까? 하세요. 그래서 저는 횡으로 써주세요, 그래야 집에 걸어도 자리를 차 지하지 않지요 그랬어요. 그래서 써 주신 것이 양득천재( 養 得 天 才 ) 입니다. 그런 데 그 말미에 제 이름으로 이영자( 李 英 子 )라고 쓰셨습니다. 그런데 제 이름이 이영 자( 李 永 子 )이거든요. 그래서 스님에게 제 이름이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렸더니, 그 러면 이것을 우선 가져가고 다음에 다시 써주시겠다고 해서 받은 것이 부다만 덕( 富 多 萬 德 ) 입니다. 그것을 써서 서윤길을 통해서 보내주셨어요. 그때 처음 글씨를 받을 때에 저는 스님에게 천재 라는 것에 대해서, 저는 박사 과정에 있는데 천재 라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였어요. 그러나 스님은 박 사과정도 박사나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천재로 볼 수 있다고 하였지요. 그때, 저 는 일본에 가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였을 때입니다. 스님이 써 주신 글씨의 득 자는 초서로도 이상하게 쓰여졌기에, 아무도 못 읽었어요. 스님이 후에 써주 신 것을 보고, 저는 스님이 저에게 재덕( 才 德 ) 을 겸비하여 부자 되라는 뜻에서 써 88 주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는 스님의 똥뚜깐도 없는 주제라는 말에 분발해서,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89 그 후에 아파트를 마련했어요. 그 전에는 오빠 집에서 살다가, 스님의 말에 자 극을 받아서 스님 글씨라도 걸을 수 있게 잠실에 아파트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스님이 써주신 유묵은 액자로 해서 저희 집에 잘 보관하고 있어요. 그리고 참, 대원암의 공양주가 저희 강릉집의 선산 묘지기 부인이었어요. 그 래서 더욱 친근하고 편해서 자주 갔어요. 그 시절에 대원암에 드나들면서 지금 8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민족사 사장을 하는 윤창화 사장도 보고, 스님이 좋아하신 삼보스님도 만나고 그랬죠. 방산굴과 대전 자광사에도 가보셨나요? 글쎄요? 월정사 방산굴은 손님을 모시고 강릉에 갔다가 돌아오면 서 들른 기억이 있습니다. 방산굴에 가서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식사를 하고 왔지요. 자광사는 가 보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스님에게서 자광사, 학하리 이야 기는 많이 들었어요. 스님은 그곳에 동양학 센터를 만들겠다는 말씀을 자주 했 어요. 탄허스님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이신지요? 글쎄요? 그것은 어려운 질문입니다. 스님은 순수 선사라고 보기도 어렵고, 학승으로 보기도 애매합니다. 일종의 도사( 道 師 )에 가까운 것 같아요. 학 승, 선승도 탄허스님의 성격과는 안 맞아요. 스님은 늘 선을 이야기하면서도, 유 불선을 함께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도 유교와 선을 불교로 끌어들이는 말씀을 하셨지요. 달리 말하면 스님은 불교를 위에 두고, 유교와 선교를 포용하는 입장 이었지요. 스님의 정체성은 유교와 선을 이야기하면서도 불교에 액센트를 두었 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스님은 늘상 동양학의 정체성을 고민하였습니다. 학승이라고 해도 부족하고, 선승은 안 맞고 저로서는 학승과 선승을 초월한 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90 이라고 보고 싶어요. 하여간에 스님은 학승이셨고, 학승으로 고결하셨어요. 보 통 학자들이 갖고 있는 때 같은 것, 세파에 찌든 그런 것은 전혀 없었어요. 당당 하고, 자신만만하시고, 의연하였지요. 교수님은 탄허스님에게 영향을 받았는가요? 글쎄요? 저는 공부를 할 때에 스님께서 동양학의 중요성을 강조하 시고, 일깨워 주신 것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저는 아까도 말 을 했지만 한국학, 천태를 공부한다고 정해서 스님이 강조하신 화엄학과는 약간 달라서 직접적인 것은 없었지요. 그리고 스님은 재가불자, 인재를 키우시려고 무척 신경을 썼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도 스님에게 귀여움을 받은 셈이지요. 그 래서 제가 맨손으로 스님을 찾아가도 좋아하시고 그랬어요. 제가 가면 좋아하시 고, 저를 특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저는 스님에게 가면 여러 이야기를 해드리고 그랬는데, 아마도 스님은 엘리트의 고독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님이 강조하신 유불선 통합은 요즈음 말로 하면 통섭입니다. 그러니 까 스님은 시대를 앞서가신 분이었지요. 그러니 보통 학자들은 스님을 따라가지 도 못했지요. 대전 자광사도 스님은 동양학 센터로 만들고, 그곳을 인재양성의 거점으로 구상하셨습니다. 구체적인 집행은 하지 못하였지만요. 그리고 스님은 학교를 하시려고도 하였습니다. 동국대 교수님들은 탄허스님에 강한 영향을 받거나, 탄허스님을 연구하는 분은 있나요? 제가 보기에 그런 분은 없습니다. 스님의 학통, 영향에 받아서 그 것을 계승한 학자는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약간의 영향을 받았지, 스님의 학문 을 이해하고 계승까지는 못했어요. 90 스님이 강조하는 유불선 회통에 대해서 감히 따라가지도 못하였지요. 그것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91 따라가기는커녕 불교 하나도 제대로 하지를 못하였지요. 스님은 미래 예측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혹시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셨는가요? 저도 그것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것이 언제인가? 5 16 직후에 스님이 진관사에 오셨다고 해서 대법선 보살하고 같이 가서 뵈었는데, 그때에 9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스님은 우리들의 관상을 봐주시면서 미래에는 빙 하가 녹아서 일본은 물속에 잠기고 한국은 솟아오르게 되고, 한국이 미래 세계 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최근에 일본에 물난리가 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스님이 계셨으면 이것 봐라 고 큰소리를 하셨을 것이라 는 생각을 했어요. 스님은 불교뿐만 아니고 주역도 말씀하시고, 천지개벽이 온다고도 하셨어요. 스님은 동양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시려고 하였어요. 그리고 스님은 차천자 이 야기도 많이 했어요. 그리고 강릉분인 조순 교수가 저에게 말하기를, 탄허스님 이 강원도 여자들은 세다는 말을 했다고 그랬어요. 신사임당, 허난설헌 같은 분 을 예를 들면서 그랬다는군요. 교수님은 탄허스님의 생각을 가끔 하시나요? 하지요, 그런데 스님이 너무 빨리 가셨어요. 저는 스님의 장례식 에도 가질 못했어요. 그때에는 일본에서 박사를 받는 문제 등으로 너무 정신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김교수님이 스님 탄신 100주년이라고 하면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서 는 벌써 백 년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다만 저는 탄허스님의 학문 분야와 학 문의 방법이 달라서 스님에게 직접 배울 기회가 적었지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92 오늘 귀한 증언에 감사드립니다. 뭘요, 제가 알고 있는 것만을 이야기해 드렸어요. 김교수님이 알 아서 판단하여 기록으로 남겨 주세요. 탄허스님이 추구하였던 것이 새롭게 정리 되어야 할 시점이 된 것 같아요. 92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2

93 우리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 9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대상 박금규 전주 간호전문대 교수, 원광대 교수 등 역임, 원광대 명예교수 일시 2012년 4월 30일 장소 전주 시외버스터미널, 다방 교수님은 한문에 능하셔서, 탄허스님의 말년에 원고 교정 작업을 같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문을 어디에서 공부하셨는가요? 저의 한문 공부는 제 선친 때문에 시작했어요. 제 선친은 갱정유도 ( 更 正 儒 道 )인 일심교( 一 心 敎 )에 심취했어요. 선친은 해방되던 그해에 정씨( 鄭 氏 ) 왕( 王 ) 이 나온다고 하면서 상투를 틀고 지냈어요. 그때 내 나이가 일곱 살 때였는데, 저는 학교는 가지도 못하고 한복을 입고서 서당에 다녔어요. 친구들은 학교에 가서 뛰놀고 그랬지만, 저는 선친의 엄명으로 서당에서 한문만 배웠습니다. 그 일심교의 교주인 강대성은 우리 집에도 서너 번 오고, 오면 20일도 머물다 가고 그랬어요. 강대성은 나에게도 좋은 세상이 올 터이니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그 랬지요. 강대성은 갑오년에 정씨 왕이 나타나서 계룡산에서 천자로 등극하고, 천하 만국이 우리에게 조종을 바친다고 그랬어요.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열여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94 섯 살까지 학교에 가지 않고 한문만 배웠지요. 그런 역사를 갖고 계시는군요. 그럼 세속의 학교에는 전혀 가지 않았는가요? 그렇게 서당공부만을 하였죠. 그런데 일심교의 교주인 강대성이 6 25 사변 후 1950년대 중반에 죽어 버렸어요.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초야 에 묻힌 인물을 추천하라고 한 것이 빌미가 되었어요. 그때, 일심교 교도들이 강 대성을 엄청 추천하였어요. 그리고 이승만이 예수를 믿으니깐, 이성수라는 교도 가 재림 예수가 나왔다고 하면서 미국 대통령과 유엔사무총장에게도 편지를 보 냈어요. 그러자 미국에 간 이승만이 그걸 알게 되고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서, 돌아와서는 전북 도경찰국장인 김종훈에게 지시를 내리기를 가서 조사해 봐서 재림 예수라면 모시고 오고, 그렇지 않으면 그 세력을 일망타진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경찰국장이 교주인 강대성을 잡아다 고문을 하고, 때려 죽여버렸어요. 그러자 제 선친은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서 그만 미쳐 버렸어요. 아버지는 통곡 을 하고, 밥도 안 먹고 정신이상이 돼버렸어요. 우리 집안은 풍비박살이 났습니 다. 그래서 저는 그때 종교에 대한 거부 반응이 나타났어요. 그래서 저는 서당을 그만 다니고 중학교로 가게 되었습니다. 한문만을 배워서 영어, 수학을 전혀 몰랐어요. 다행히 제 종조부가 김제의 만경중학교에 재산을 기부한 설립자라 제 집안의 아저씨가 교감으로 있었어요. 그래 제가 고등공민학 교 출신이라고 학력이 인정된다는 서류를 만들어서 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을 했 어요. 저는 영어, 산수를 전혀 몰랐지만 서당에서 무조건 외우는 송재( 誦 才 )는 뛰 어나서, 무조건 모든 것을 외웠어요. 그래서 금방 딴 학생을 따라갔어요. 그 후 에는 이리농고를 들어갔지요. 그때에는 이리농고를 알아 주었어요. 94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95 그렇게 하셔서 공부를 하였군요. 우리 집안이 못살고, 살림살이를 맡았던 형은 저를 머슴으로 부려 먹으려고 하였지만 난 학교 간다고 우겨서 진학을 했어요. 제가 그래도 공부는 괜찮게 해서 원광대(국문과)를 4년 장학생으로 다녔어요. 제가 대학 다닐 때에 원 불교에서는 내가 한문을 잘하고 그러니깐 원광대 대학원을 다니라고 그랬어요. 9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그러면 학비를 대주고, 교수까지도 시켜준다고 그랬지요. 그래 내가 교단 측에 그러면 나로 하여금 원불교를 믿게, 원불교가 매력이 있다는 것을 설득시켜 보 라고 그랬어요. 그때 내가 원불교 교전, 책을 읽어보니깐 이것은 종교가 아니라, 사업 단체라고 봤어요. 그래서 저는 대학졸업 후에 이리여중 교사로 갔어요. 그 러다가 그만두고 동국대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그때 양주동 박사가 나를 엄청 사랑해 주셨어요. 그렇게 대학원(석사과정)을 다니는데 원광대에서 교수를 시켜준 다고 오라고 그랬어요. 그때에는 석사가 없어도 교수가 될 때입니다. 양주동 박 사는 학자가 시골에 가면 썩으니깐 가지 말라고 하셨지만, 저는 모교의 강단에 선다는 마음으로 내려왔어요. 그런데 국문과의 한 교수가 저를 절대 반대하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고교에 있으면서 기회를 보는데, 계속해서 후학기, 다음 신학기로 자꾸 미뤘어요. 그래서 저는 거창고에서 15년간 선생을 하였지요. 그때에는 흥사단에 빠져서, 도산 안창호를 민족의 성인으로 보고 흥사단 활동에 전력투구 하였어요. 그러다 가 전주 신흥고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거기는 기독교 학교라, 채플과 성경이 내 마음에 안 들었어요. 이렇게 전주에 와서 있으니 원광대 스쿨버스가 다니는 것 을 보면 제 속이 뒤집히는 거예요. 저 자리에 내가 서서 강의를 해야 한다는 생 각이 들고, 나보다 못한 사람이 교수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미치겠더라구요. 그 때에는 그것이 심해서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때부터 저는 내가 마음속으로는 종교를 안 믿는다고 하지만, 번뇌 망상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런데 그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96 것을 해결할 곳은 절뿐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그 무렵부터 절에 가는 것 이 꿈이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 탄허스님에게로 오시게 되었는가요? 저는 사십이 되면 절에 간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그것은 절에 가서 스님이 되면 금욕생활을 해야 하는데, 젊은 그때에는 정력이 강해서 금욕할 자 신이 없었어요. 그러나 사십이 되면 금욕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을 하였지요. 나는 그 후에 전주의 예수간호전문대 교수가 되었어요. 제가 흥사단 활동을 할 때에 저와 3년간이나 룸메이트를 한 친구가 최욱성인 데, 나는 그 친구가 늘상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친구가 어디에 있는가를 찾 았더니 출가를 하였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 친구가 있는 곳을 여러 사람에게 물 어서 알아봤어요. 함평의 용곡사, 실상사 백장암, 불국사에 연락을 하다가 광주 의 처사집에서 만났어요. 그 친구를 보니까 나도 출가하고 싶은 생각이 더욱 더 강하게 싹트는 거예요. 그 친구가 용타스님입니다. 그래서 나도 청화스님의 문 중으로 가기로 되었고, 청화스님과도 5, 6회를 만났어요. 그때 청화스님은 묵언 중이라서 나는 말하고 스님은 필담으로 했어요. 그래 스님의 문하로 가기로 약 속은 하였는데, 송광사 법정스님의 강의를 듣고 나서 집에 가서 옷을 갈아 입고 절로 가기로 하였는데, 그만 그때에 광주사태(1980.5)가 나서 출가를 못했어요. 곡절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탄허스님은 언제, 어디에서 처음으로 뵈었는가요? 그렇게 되어 출가를 못하니깐 내 마음이 조급했어요. 그래 불국사, 범어사, 통도사를 거쳐 해인사에 가서 일타스님을 만나, 거기에서 한 달간 있었 어요. 일타스님과 한 달간 지내면서 이야기를 해 보니 중 냄새가 안 나요. 일타 96 스님이 날보고, 거사는 해인사 문중은 안 맞고 저기 오대산의 탄허스님이 맞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97 것이니 탄허스님을 찾아가라 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오대산으로 갔더니 스님은 서울로 갔다고 해서, 서울 대 원암으로 갔더니 대전 학하리로 갔다고 하였어요. 그래 학하리로 갔더니 또 서 울로 갔다고 그러더군요. 그래 다시 서울로 갔더니 오대산으로 갔다고 해서 월 정사를 갔더니, 방금 원주로 떠났다고 그래요. 그렇게 하였지만 결국은 못 만나 9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고 집에 와서 한 달간을 있는데, 못 견디겠어요. 그래서 깨끗하게 목욕 재계를 하고, 기도를 하면서 이번에 큰스님을 못 만나면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알 겠다고 생각하고, 꼭 탄허스님을 뵙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했어요. 간절한 만남을 고대하면서, 만나게 되었군요. 그래서 서울에 올라와서, 대원암으로 전화를 해서 큰스님 좀 바 꿔 주세요 하였죠. 그랬더니 탄허스님이 직접 전화를 받으시고는 내가 큰스님 인데 그러셔요. 스님의 그 목소리가 그렇게 깨끗하고, 젊은 사람의 목소리더라 구요. 그래서 나는 스님에게 스님을 뵈려구, 몇 번이나 허탕친 것을 이야기하니 까 스님은 저에게 지금 어디에 있냐고 그래요. 그래서 고속버스터미널에 있다고 하니까 그러면 차를 보내겠다고 하셔서, 보내주신 차를 타고 대원암으로 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스님을 처음 뵈니까 얼굴이 생소하지 않아요. 어디에서 많이 본 익은 얼굴이 었어요. 나는 스님에게 절을 하고 나서 여러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만나자 마자 바로 계속 이야기를 했어요. 역사, 철학, 문학에 대해서 계속해서 둘이, 삼 일간 을 이야기했습니다. 더구나 스님은 내가 한문을 하였다고 하니 논어, 대학, 맹 자, 중용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스님 옆에서 얼굴이 박박 얽은 시봉을 하던 스님이 나를 보고 뭐라고 그래요. 그것은 큰스님을 만나면 불법에 대해서 물어야지, 정치와 역사에 대해서 물으면 어떻게 하냐고 그러더라구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98 큰스님이 있는 그 자리에서, 나에게 그래요. 그랬더니 탄허스님께서 당장 혼을 내시더라구요. 건방진 놈, 나가 라고 그랬어요. 그러면 출가는 하셨는가요? 그렇게 스님과 3일간 이야기를 하고 나서, 나는 스님에게 저 삭발 하겠습니다, 머리 깎아 주세요 하였어요. 그랬더니 스님은 절대 불허하셨어요. 스님께서는 당신도 세상에 나가려고 마음을 여러 번 먹었다, 세상을 건지려고, 큰일을 하려고 그랬다고 하셨어요. 특히 해방 직후에는 꼭 나가려고 작심까지 하였는데 결행하지 못하였고, 갑자년이 되면 또 나간다고 하시면서 불법은 세속 에 있으면서도 공부를 할 수 있다고 그러셨어요. 세속에서 공부를 하다가 모르 면 찾아오면 되지, 함부로 출가해서는 안 된다고 그러셨어요. 그러면서 잘 생각 해 보라고 하셨어요. 그러나 나는 지금 결정한 것이 아니고, 수년간 마음을 먹 은 것이라고 하였어요. 그러고 나서 1980년 봄, 계엄령이 풀려서 저는 전주 간호전문대에 와서 강의 를 하였어요. 그때 광주사태의 전국 계엄령이 풀리고, 대학 휴교가 풀리면서 나 는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울의 스님에게 갔더니 스님은 역정을 내시면서 당장 내려가서 사표를 물리라고 그러셨어요. 그러나 내가 단호한 초발심을 말씀드렸 더니 스님은 일단은 인정하시고는 옷(치의)을 내주시더라구요. 나는 머리는 안 깎 고, 두루마기는 걸치고 그랬죠. 그래도 스님은 나를 박교수라고 불렀어요. 그러 시면서 저에게 한문은 옛날에 배웠지만 당신에게 다시 배우고, 불경 공부를 하 라고 그러셨어요. 저는 그때부터 스님이 번역한 것을 교정하는 일에 매달리게 되었죠. 스님이 번역에 전력을 하시는 바람에 저는 스님에게 배울 틈이 없었어 요. 저는 스님 원고를 현대 용어에 맞게 윤문하고, 철자법을 고치는 일을 했습 98 니다. 제가 한 것이 노자 도덕경, 치문부터 시작해서 원각경, 대승기신론, 능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99 경 등 사집 사교 과정의 불경을 했어요. 그때부터 2년간은 스님을 따라다닌다 고 집에는 가지도 않았지요. 대원암 시절에는 예불은 모셨는가요? 스님은 그 시절에는 번역하시는 것에 주력하셔서 예불도 못 모셨 어요. 그러나 저는 젊은 사람이고, 절밥을 먹으면서 예불을 안 하는 것이 죄스 9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러워서 예불을 하려고 하면 스님은 저에게 불경 교정을 하는 것이 예불하는 것 과 같다 고 하시면서 그러지 말라고 하셨어요. 스님의 말년에 큰 인연을 맺으셨군요. 제가 스님의 주위에 있을 적에는 시봉하는 스님이 정신스님이었 고, 동자승으로는 정심이라는 행자가 있었어요. 삼보 삼지 스님이 자주 오시 고, 희찬스님은 탄허스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셨죠. 또 임환이라는 여자, 최옥화 (일초)가 왕래를 했어요. 그렇게 스님의 주변에서 2년을 꼬박 모시고 있다가, 중간에 사정이 있어서 나 왔어요. 저는 스님을 성인으로 받들고, 이 나라를 구할 국사님으로 모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충언을 드렸는데, 제 충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나왔어요. 그 직 후에는 직장이 없이 보련각의 불교사전을 만드는 데에서 주필로 있었어요. 그때 에는 서옹스님의 법제자인 종성스님이 삼각산 각진선원의 주지로 있었는데, 나 도 그 절에 있으면서 출퇴근을 했어요. 그 절은 장영자가 지어준 것입니다. 탄허스님은 그 무렵에 병원에 입원하셨어요. 맞아요. 저도 스님이 아프시다는 말은 들었지만 못 갔지요. 그런 데 병원에 계신 스님께서 나를 만나기로 원하신다고, 자꾸 오라고 해서 찾아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00 더니, 얼굴이 수척하셨어요. 저는 그런 스님의 모습을 보고 통곡하다시피 엉엉 울었어요. 스님은 제 손을 잡으시고는 도와줄 게 있다고 하시면서 세 가지를 말 씀하셨어요. 그 첫 번째가 노자 도덕경을 교정봐 달라는 것이고, 둘째는 당신 문집을 모아 서 내달라는 것이고, 셋째는 기억이 아리송한데 민족을 지도하고 인재양성과 관련된 그것을 당부하셨어요. 그래서 노자 도덕경을 혜거스님, 박완식과 같이 10일간 집중적으로 보아서 스님에게 갖다 드렸습니다. 스님에게는 제가 건방져 서 외람되지만 180군데를 고쳤는데, 스님께서 꼭 보시라고 하셨어요. 그랬더니 스님께서는 박교수가 봤으면 됐어, 그간 애썼다 고 하시면서, 우담에게 보시를 주라고 그러셨어요. 나는 몸둘 바를 몰라서, 제가 스님의 약값을 드려야 하는 데 절대 받을 수 없다 고 했어요. 우담은 스님이 주시는 것이니 받으라고 하여 받았더니 거금(200만 원)이었어요. 그것은 그 시절에는 큰돈이었어요. 그리고 부 탁받은 문집은 제가 해드리지 못하였지요. 그 후에 스님이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월정사로 뛰어가서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정심이라는 동자와 내가 제일 많이 울었을 거예요. 교수님이 전주대의 박완식 교수를 탄허스님에게 소개하였지요. 그렇지요. 박완식은 남원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했어요. 박교수도 일심교 계열입니다. 안병탁이라는 내 친구의 제자이고, 그 후에는 권추연 선생 에게 가서 배웠어요. 스님이 주역을 번역하실 때에 내가 추천을 하였는데 처음 에는 안 가려고 그랬어요. 스님이 박완식을 보시더니 천재라고 그랬어요. 탄허 스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서옹스님에게 내가 데리고 갔어요. 실력이 대단해서, 앞으로 한문 분야에서는 큰 일을 할 것입니다. 100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01 교수님은 1993년도에 탄허스님의 유불선 회통사상을 논문으로 정리했지요. 그래요. 그러나 부족한 것이 많고, 그 이후로는 스님 연구를 전혀 못 했어요. 제가 보기에 불교사상의 측면에서 탄허스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 을 것이고, 유교 측면에서도 스님보다 더 나을 분이 있을 것이고, 도교 측면에 서도 스님보다 나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불선을 합해서 결론을 내 10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릴 수 있는 사람은 탄허스님이 유일무이( 唯 一 無 二 )할 것입니다. 유불선을 회통해 서 한꺼번에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스님밖에 없어요. 3교를 회통할 수 있는 사람 은 앞으로 나올 수가 없어요. 교수님이 탄허스님에게 배운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스님이 유불선을 해석하는 것이 굉장히 마음에 와 닿았어요. 스님은 불교나 도교나 유교나, 그 관련 성인들의 지향점은 같지만 그 민족에 적 합한 것이 적응된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 세 가르침의 근본은 하나라고 하셨어요. 불교의 석가모니는 마음공부가 우선이고, 공자는 세상 다스리는 것이 80~90% 이고, 도교는 몸 다스리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지향은 동일하였고, 다만 그 시대에 맞는 것이 적용되었다고 하셨어요. 스님은 민족의식이 강렬하였지요. 스님이 민족의 미래와 발전에 대하여 제시해 준 것이 많아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스님은 늘상 우리 민족이 남의 민족의 핍박을 받아왔지만 앞으 로는 민족의 미래에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하시면서, 민족의 지도자 역할을 하 셨어요. 그래서 스님은 민족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유성 학하 리에다가 화엄대학원을 만들려고 했어요. 스님은 나를 보고 너는 문교에 적성이 있으니 뽑고, 또 다른 사람은 교통에 능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02 하면 뽑듯이 각 분야의 인재를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등용시켜서 남북통일의 주 역이 되게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남북이 통일되면, 50년간 분단이 되어서 민족 의 이질성이 심하여 통일되어도 큰 혼란이 일어난다고 봤어요. 그래서 스님은 민족의 이질성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동양사상밖에 없다고 보고, 민족이 합치 려면 3교 회통사상으로 나가야 된다고 하셨어요. 통일을 대비하기 위해 인재양 성을 하고, 인재들을 뽑아서 몇 년간 가르치겠다고 하셨어요. 그 인재들에게 동 양사상을 주입시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시려고 했어요. 탄허스님의 민족의식은 스님의 부친이 민족종교인 보천교 간부를 한 것에서 나온 것이 아 닐까요. 스님은 민족적이면서, 개혁적 진보적인 노선이었어요. 스님은 사 회주의를 강조했어요. 스님은 맹자, 공자가 말하였던 그런 내용을 말씀하시고 그런 것들이 부처가 말한 무소유와 같은 것이라고 그랬어요. 스님의 아버지는 보천교의 제2인자인 목방도인이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저는 스님에게 부친의 상해 임시정부와 안창호 관련의 것을 들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안창호가 임시정부에서 국내에 있는 돈을 끌어다가, 독립운 동에 쓰려고 하였는데 그 일의 책임을 스님의 아버지(김홍규)가 달라고 그랬대요. 안창호는 김홍규의 말을 다 듣고는 내가 당신을 잘 몰라서 거절할 수밖에 없다, 모르는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지 않느냐 고 그랬대요. 김홍규가 말을 잘 했대요. 당위성을 갖고 열변을 토하면서 세 번이나 말을 하였지만 안창호는 거절하였던 것이지요. 그러니깐 김홍규는 전라도의 진짜 쌍소리를 하면서 문을 박차고 나갔 고, 그 이후에 국내로 왔다고 그랬어요. 안창호 주위에 있다가 그런 말을 들은 춘원 이광수는 김홍규가 나간 후에, 안창호에게 옆에서 듣는 저도 등에서 땀이 102 나는데, 어떻게 그것을 거절하였습니까? 하고 물으니, 안창호는 듣는 사람이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03 땀이 날 정도면, 나는 거절하면서 얼마나 땀이 났겠느냐 고 하였답니다. 그러면 서 안창호는 국가대사를 함부로 모르는 사람과 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하였던 것이지요. 이런 것이 안창호 일기에 나와요. 거기에는 김홍규라고 나오지 않고, 모씨( 某 氏 )라고 나오지만요. 탄허스님은 이런 것을 부친에게 들었지만, 그때에는 의아하게 생각하였답니 10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다. 그러다가 그 후에 독립운동을 한 운허스님과 역사학자 황의돈에게서도 듣고 서는 믿었습니다. 운허스님은 춘원과 재종지간이었어요. 그렇게 듣고 나서는 선친의 말과 같더라, 내가 그래서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고 나에게 그러셨 어. 그러시면서 스님은 안창호가 사람을 많이 죽였고, 특히 호남 사람을 복날 개 잡듯이 그리 많이 사람을 죽였다고 말씀했어요. 그런데 나는 안창호를 15년간 이나 숭배했고, 전라도 흥사단 지부장을 한 사람이었기에 안창호를 아는 입장에 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지요. 김구는 사람을 많이 죽일 수 있는 사람이지 만, 안창호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탄허스님을 존경했고, 성인 같은 사 람으로 생각했는데 그런 말씀에는 조금 실망했죠. 탄허스님은 청소년 시절 정읍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이 내용을 아시나요? 스님이 정읍에 있을 적에 저희 집안과 인연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 지요. 갑부이었던 제 종조부(박우상)가 의관공( 議 官 公 )이었는데, 이 분의 아들을 탄 허스님에게 보내서 공부를 배우게 하였어요. 그래 종조부가 월명암에 시주를 하 고, 탄허스님이 월명암에서 2년간 귀하게 얻은 종조부 아들의 독선생을 해주었 답니다. 탄허스님에게 배운 그 아들이 박병수라는 분인데 저에게는 아저씨이지 요. 그 분은 공주사대를 나와서 고교 교사를 하였지요. 그때에는 스님이 천재라 고 정읍 바닥에서 소문이 났대요. 제가 이런 내용을 월명암의 부설전 후기에 제 아호인 계명이라는 이름으로 써 놓았어요. 그것은 오래전에 쓴 것입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04 그리고 스님의 할아버지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고 그래요. 늘상 사람이 많았다 는 것에서는 할아버지가 문학에 뜻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할아 버지가 탄허스님에게 1년간 글자를 연습할 수 있게, 글씨를 쓸 1연의 갱지종이 를 사주었다는 말을 스님에게서 들었습니다. 1연은 100장을 말합니다. 그 갱지 에 글자를 썼더니 능필( 能 筆 )이 되었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할아버지가 두는 바둑 을 어깨 너머로 배워서, 나중에는 할아버지와 할아버지 친구가 두는 바둑을 훈 수까지 두었다고 그랬어요. 참, 그리고 스님이 대원암 시절에 자주 가는 박초당 보살 집에서 바둑대회가 열렸어요. 국회 부의장을 한 윤길중과 같은 지도자급 인사들과 프로 2~3단 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바둑대회였는데, 스님이 거기에 서 2등을 하였어요. 스님이 1등 한 사람에게 서너 집을 졌는데, 간평자의 말은 지긴 졌는데 운세, 기세에서는 이긴 것이라고 그랬어요. 교수님도 한문을 해서 송재에 능하지만, 탄허스님의 송재는 어떠십니까? 스님의 송재( 誦 才 )는 더 대단하시지요. 나는 한시를 좋아해요. 그래 서 그때에도 간밤에 잠이 안 오면, 시를 지어다가 갖다 드렸지요. 그러면 스님 은 시를 짓지 마라, 네가 두보( 杜 甫 )가 되어서 뭐를 할 것이냐 고 그랬어요. 그러 면 제가 그러면 무엇을 합니까? 했어요. 그러자 스님은 도학을 해야지 하셨 어요. 그러면서 당신은 시를 지어서 저에게 보여주었어요. 스님의 강의, 혹은 법문을 들어보셨는가요? 학하리에서 대중특강을 하실 때에 들었지요. 학하리에서도 두 번 인가 크게 하셨어요. 대중들은 마당에 앉고, 흑판을 이용해서 하였어요. 일반 속 인과 스님들이 같이 들었어요. 그리고 대원암에서도 장자 강의가 1주일에 한 번 104 씩 열렸어요. 그곳에서 한 것은 전창열, 명호근이 주관을 해서 되었습니다. 그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05 때 명호근과 전창열이 진실하게 스님을 모셨습니다. 유발상좌로 깍듯이 효자 노 릇 했어요. 스님은 모든 것을 다 외워서 했어요. 강의는 일반사상과 동양사상이었어요. 그때에 이대 출신 진민자도 있었고, 채원화 보살도 있었지요. 스님은 최범술의 부인이 된 채보살을 굉장히 아꼈어요. 10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대전 유성의 학하리에 세우려고 하였다는 화엄대학원이 진행이 되었는가요? 스님이 그것을 만들려고 자금을 만들고 그랬어요. 그래서 후원자 들에게 주려고 늘상 글씨를 써서, 학하리 장경각에 보관해 놨어요. 수백 점이 되 었을 것입니다. 저는 공군사령관 부인에게 줄 병풍에 스님이 직접 글씨를 쓰는 것도 봤습니다. 그런데 월정사 문중이 아닌 객승이 와서 자기가 한번 학하리를 맡아서 주재해 보겠다고 해서, 스님이 그러면 해보라고 하였더니, 그만 사고가 났어요. 장경각의 외부에 철조망을 쳐놨는데, 그 스님이 철조망을 전기톱으로 자르고 글씨를 싹 다 가져갔어요. 제가 알기로는 설계는 했을 것입니다. 스님은 그 화엄대학원 건물을 서울의 4 대문이 있듯이, 거기도 4대문을 만들었다는 말을 스님에게 들었어요. 그곳 자광 사를 지을 때에 땅을 파니까 땅이 층층이 무지개처럼 생겨서 특이하다고, 길지 ( 吉 地 )라고 그러셨어요. 교수님은 탄허스님을 어떤 분으로 보시나요? 스님은 우리들에게 말을 하실 때에 부처님 말씀은 별로 안 하시고 공자, 장자의 말을 더 했어요. 그래서 저는 스님을 우리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 라고 봅니다. 민족에게 긍지와 희망을 주었던 지도자였어요. 또, 스님은 민족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만해 한용운에 대한 것을 많이 이야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06 기하셨어요. 그리고 스님은 앞으로 남북통일의 주역이 되는 인재를 양성하고, 그들을 추천해서 민족을 되살리는 일을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스님은 민족과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일부 문헌에는 정교일치적인 발언도 있어요. 그렇다 면 불교와 정치와 연관이 강한 10 27법난은 어떻게 보셨을까요? 제가 모시던 시절이 법난 직후라서 제가 보고 들은 것은 조금 있어 요. 언제인가 되면 그것을 쓰려고는 합니다만 지금은 그런 것을 다 말하기가 어 렵지요. 제가 본 일부만 말해 보지요. 제가 스님을 모시고 학하리에서 교정을 보 고 있는데 송광사의 구산스님이 오시더니 스님에게 종단이 이 지경이 되었는 데 왜 안 가냐고, 서울에 같이 가서 논하자 고 그랬어요. 그러자 스님은 나는 번역을 하고 있어서, 안 간다 고 그러셨어요. 그때 구산스님이 나를 보더니, 스 님에게 호랑이를 키우고 있구만 그러시더라구요. 스님은 서울에 끝내 안 가셨 어요. 스님은 미래 예언도 많이 하셨어요. 그래요. 저는 스님에게 들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스님을 모실 적 에 삼남지방에 홍수가 나서 흉년이 들 거라고 그러시면서 저보고, 그때를 대비 해서 미리 시래기나 고구마줄기 같은 것을 말려 놓고 보리나 쌀을 사두라고 하 셨어요. 그래서 저는 전주에 가서 쌀을 50~60가마를 사 놓고 사람들에게도 그 렇게 하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때 우기 때 남해안에 한 달간 비가 계속 와서 흉년이 들었어요. 금강 하구의 둑이 범람하고 그랬어요. 그러나 전국적으로는 스님 예언처럼 흉년이 들 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저희 집안에 있던 쌀이 썩어 버렸어요. 내가 아는 사람 106 도 쌀을 사 놓고 그랬어요. 그래서 내가 스님에게 스님의 말씀이 안 맞지 않습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07 니까? 그렇게 말씀하셔서 제가 썩은 밥을 먹고 있습니다 고 하였더니, 스님은 눈을 딱 감으시고는 만민이 기도하면, 하늘도 감응을 해서 그런 것이 소멸될 수 가 있다 고 하셨어요. 그래서 흉년이 조금만 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반 절은 맞은 것입니다. 또, 스님은 전두환을 텔레비전에 보시고는 아이구 불쌍해, 아이구 불쌍해 하 10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셨어요. 그것은 전두환의 얼굴에 신검살이 끼였다고, 그래서 죽는다고 보시고 불쌍하다고 그러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 후에 청와대에서 큰스님을 뵙고 싶다고, 지도자급의 초청을 받아서 갔다 오셨어요. 갖다 오시더니, 참 이상하 다, 텔레비전에서 볼 때에는 그것이 있었는데 직접 보니 없어졌어 라고 그러셨 어요. 그것은 아웅산사건 때에 전대통령이 안 가서, 그런 화를 면하고 나서 그 것이 없어진 것으로 보았어요. 이것은 거의 맞은 거예요. 스님은 직역을 원칙으로 하였지요. 이런 것은 어떻게 보십니까? 나도 번역은 수십 권을 했죠. 나는 이해를 중심으로 번역을 하셨습 니다. 그러나 스님은 공부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신 것이라, 그런 것은 직역을 중 심으로 해야 됩니다. 내가 한 것은 일상적인 통용을 위해서 한 것이라, 현대 용어 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원섭씨처럼 창작을 하듯이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제가 모실 적에 스님은 동대 대학선원장과 역장장을 하셨어요. 그러다 가 둘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해서 선원장은 그만두시고, 역장장은 하셨지요. 교수님은 스님의 글씨를 갖고 있나요? 저는 스님에게 두 점의 글씨를 받았어요. 그런데 한 점은 누가 가 져갔고, 지금은 한 점을 족자로 해서 집안에 걸어 놓았지요. 그것은 장자의 한 구절인데 망적지적( 忘 適 之 適 )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 뜻은 적합하다고 아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08 것보다, 적합한 것을 잊어버린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허리띠를 매거 나 신발을 신었을 때에 허리띠를 매었는지 신발을 신었는지를 모르듯이 하는 것 이 진짜 적합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스님의 일상어록이 있다면. 일상으로 강조하신 말씀은 세월이 너무 많이 가서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스님들이 외우는 경전인 반야심경에 나오는 무유공포( 無 有 恐 怖 )라는 것을 자 주 말씀했어요. 마음에 주관이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 람들은 생명이라는 것이 언제든지 죽는다는 것에 겁을 먹고 두려움, 불안, 혼란 을 갖는다고 보셨어요. 앞으로, 탄허스님의 연구가 많이 되어야 하는데, 교수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저도 스님 연구를 조금 하다가 말았는데, 그 논문에서 스님의 정치 관과 사상관을 쓰기는 썼지만 앞으로는 그런 것을 조명해야 합니다. 오대산에서 도 한암스님만 받들 것이 아니라, 탄허스님의 연구 환경 조성에 나서야 합니다. 탄허스님은 민족 지도자, 스승이었다는 것이 재평가되어야 합니다. 스님이 만해 한용운을 그렇게 좋게 말씀하시는 것은 당시의 이질적인, 분단된 조국을 통일시 키는 것을 자기 책임으로 생각하신 거예요. 스님은 그밖에 의학, 관상, 주역, 풍 수 등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오늘 정말 귀중한 증언을 해주셨어요. 제가 한 말이 어떤지 잘 모르겠구요. 스님의 자료를 집대성해서, 좋은 책을 만들어 주세요. 108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09 스님에게 배운 지혜로 여성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10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대상 진민자 6 3동지회 부회장, 신성대 초빙교수, 건국대 이사, 청년여성문화원 이사장 일시 2011년 8월 31일 장소 청년여성문화원 사무소 서울, 한남동 여성운동에서 많은 활동을 하시고 있는 선생님이 탄허스님과 인연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언제 처음으로 그런 인연을 맺었는가요? 제가 스님을 처음으로 만나뵌 것은 1977년부터예요. 그 시절, 저 는 개인적 문제로 매우 심한 고뇌를 겪었어요. 그런데 저를 어떤 사람이 탄허스 님이 계시던 절에 데려다 준 것입니다. 그곳이 대원암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스 님을 처음 뵙고, 그때부터 탄허스님이 입적할 때까지 인연을 맺어왔고, 지금까 지 제가 여성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은 탄허스님을 만난 그 인연 때문입니다. 그래요. 제가 알기로는 선생님은 이화여대 출신이시고, 6 3사태 즉 한일회담 비준 반대의 주역이십니다. 기독교 계통의 인물이 탄허스님과 인연을 맺은 것 자체가 기이한 일입니다. 그러면 제가 스님을 만나기 전의 과거를 조금만 말씀드리겠습니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10 다. 저는 서울 토박이로서 덕수초등학교를 나와 경기여중고를 거쳐 이화여대에 62학번으로 들어갔어요. 들어간 과는 사범대 물리교육과였고, 3학년 때 총학생 회장을 하였는데 그때에 터진 한일회담 비준 반대의 주역이 됐어요. 그래서 결 과만 말씀드리자면 경찰에 잡혀서 두 달간을 교도소에 있다가 선고유예를 받고 나왔지만, 학교에서 정학을 당해 1년 후에 복학을 했어요. 그런 과정에서 저는 가정이 어렵고, 집안에서 있을 형편이 안 돼서 적산가옥 에 가서 살기도 했어요. 이런 저런 고통을 겪고 나서 졸업은 하였으나 학생운동 을 하였다는 빌미로 취직도 안 되고, 학교와 집안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서 저는 현실에 몸서릴 칠 정도로 헤매는 생활을 하였죠. 이것이 제가 겪은 첫 번째 시 련, 좌절이었습니다. 그후 대학원을 다니던 조교 시절에 공화당이 창당되면서 제가 분명히 거부한 중앙위원의 명단에 포함되는 사건이 겹치면서 저는 그야말 로 학교와도 단절되었어요. 거기에다가 결혼 생활도 순탄치 못했지요. 한마디로 말해 인간, 인생의 실상을 너무 많이 알아서 나온 것이었죠. 그것이 첫 번째 시련이라면, 그후에 그런 일을 또 겪었습니까? 제가 학교와 단절이 되고 간 곳이 크리스찬 아카데미였어요. 그곳 에는 제 대학 친구인 신희영과 총리를 지낸 한명숙이 강원룡 목사 밑에서 스태 프로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도 그곳에서 일을 하게 됐는데, 그곳에서 한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개발도상국의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을 해소시키기 위해 강원룡 목사가 WCC에 5개분야에 매년 1억씩 20년의 지원을 받아서 그 양 극화를 해소하는 데 앞장서는 새로운 지도자를 양성하는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저는 그곳에서 강원룡 목사의 40분 설교를 통해 제가 10 년간 헤매이는 문제를 해치울 수 있게 되었고, 윤후정 선생님의 발제를 통해서 110 는 페미니즘에 매혹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거기에서 결단을 하게 되었어요. 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11 로 이거구나, 내가 할 일을 찾은 것이지요. 그리고 고범서 이문영 선생이 말한 기독교 정신도 저를 감동시켰어요. 그래서 그곳에서 일에 매달리게 되었는데, 그때 제 나이 서른 살이었죠. 저는 나라가 없으면 애국운동을 할 터인데, 나라 는 있지만 조국과 민족을 위한 역사적인 일에 헌신하겠다, 개인적인 일은 희생 을 하더라도 역사와 사회에 기여하는 일을 하겠다고 매일 주기도문을 외고 기도 11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를 하였어요. 그래서 저는 그곳에서 일에 미친 사람이 돼서 열심히 일을 했어요. 심지어는 교육을 받은 30명 중에서 20명을 설득하여 운동가로 만들기도 하였죠. 그리고 정책회의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TEA모임이라고 하였는데, 10여 명의 분야별 직능별 젊은 여성 인재들로 구성된 모임이었죠. 그것이 페미니즘 1세대의 주역 이었던 것이죠. 그후 여기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여성부, 학회, 대학, 가족법 및 호주제 문제를 해결하는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그 모임에서 나온 아이디어들이 여성운동의 노선을 결정하고 그랬어요. 저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여성운동 2세대를 길러야 한다는 판단으로 이런 팀을 한 번 더 구성, 운영해야 한다고 강 원룡 목사에게 건의를 했어요. 그런데 그 건의를 강목사는 동의하였지만, 강목 사 측근에서 반대를 하더라구요. 그러면서 그 무렵에 저를 모략하는 일이 생겨 났습니다. 외곽에서부터 소문이 나고, 음해하는 말들이 난리였습니다. 저는 그 런 걸 겪으면서 모든 것을 다 벗어 던지기로 했어요. 내가 기획, 주관하던 열세 가지를 다 던졌습니다. 잘 차려진 밥상을 차버리는 기분이었어요. 분해서 자살 도 할 수 없었어요. 그러나 하늘의 뜻으로 알고, 두 번째 길을 떠나는 심정이었 어요. 이것이 두 번째 시련이었어요. 그때 제 주머니에는 320원밖에 없었습니다. 그 런 형편이었지만 매일 집에서 나와 저녁 때까지 서울 시내를 하루 종일 걸어다 녔어요. 그렇게 두 달을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서점에서 만났나? 내 또래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12 묘한 남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제 신상과 미래에 대해서 말을 하 더라구요. 이혼에 대해서 말을 하고, 3년이 지나면 운이 바로 잡힐 터인데 그날 을 대비하기 위해서 좋은 인연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교수들 몇 명을 소개해 주었지만, 그 사람들이 속물 같고 그래서 저는 다 거절했 어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안 되겠다 싶어서 그랬는지, 그러면 훌륭한 분을 소 개해 주겠다고 해서 만난 사람이 바로 탄허스님이었어요. 지금 말씀은 믿기지 않을 정도의 드라마틱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탄허스님을 처음 뵐 때 의 인상, 느낌은 어땠는가요? 그때 저는 대원암이 어디 붙었는지도 모르고, 왜 그리로 가는지도 몰랐죠. 갔을 때에는 여름이었는데 스님은 시원한 삼베옷을 입고 계셨어요. 제 가 대원암에 가기 전에 남산의 에밀레박물관을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본 신선 도에 나오는 신선 같았어요. 그래서 너무 친근하게 느껴졌어요. 저는 아버님이 6 25 때에 돌아가시고 그래서 할아버지 집에서 컸는데, 제 할아버지가 군자이 었거든요. 스님을 뵈니, 꼭 우리 할아버지를 뵌 것 같았어요. 그 당시 저는 스님 에 대한 개념이 없었죠. 그래서 인사할 줄도 모르고, 절을 하는 법도 모르고 그 랬어요. 하여간에 만나서 인사드리고는 나왔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 탄허스님과 돈독한 인연을 맺었는가요? 그 무렵 저의 집안 일이 복잡하게 꼬이고 그래서 그 해결책으로 경 상도 남지고등학교의 선생으로 갈까를 궁리하다가, 저를 도와주는 변호사가 차 라리 고시공부를 하라고 그래요. 그래서 나는 이 참에 행정고시를 해서 공무원 이나 되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런데 그 변호사가 공부는 절에 가서 112 해야 좋다고 그래요. 그런데 저는 아는 절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탄허스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13 을 찾아갔지요. 대원암에 전화를 해서 스님이 언제 오시는 것을 확인하고 찾아 가서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어요. 이만 저만 해서, 변호사가 이런 말을 해서, 절 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겠는데 뵌 스님은 스님밖에 없어서 왔다고 하고는 저를 도와달라고 부탁하였죠. 그랬더니 스님께서 학하리 자광사에 가 있으라고 그러 셨어요. 11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그래서 자광사로 내려가셨나요? 내려가게 됐어요. 내려가는데 처량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보따리를 들고 가는데, 제 자신이 한심한 거예요. 그러나 제 속에서는 가슴 아 프고 복잡하고 그랬지만 일단 내려가니 좋았어요. 저는 다 버리고 간 것이지만, 그것이 완벽하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장경각이라는 그곳에서 방을 하나 얻 어 법학책을 읽기 시작하였죠. 그러나 절은 저로서는 낯설고, 절의 법도도 몰랐죠. 동네 사람들이 그래요, 여 기는 터가 무서운 곳이라고 하면서 새벽에 저벅저벅 하는 발자욱 소리가 들린다 는 거예요. 그래서 비구니들도 겁이 나서 함부로 못 다니는 곳이라고 그러는 거 예요. 그러나 저는 밤에 지켜주는 분이 있으니 좋지 무엇이 무서우냐고 그랬어 요. 스님은 한 달에 두 번 정도, 거기에 오셨어요. 스님은 오시면 원고 교정을 하 셨어요. 그리고 저는 그곳에 머물면서 한 달에 5만 원을 냈습니다. 제가 분위기 로 보니 10만 원은 내야 하지만, 저는 그것밖에 낼 수 없었어요. 그래도 스님은 저를 따듯하게 대해 주시고, 오히려 승복감을 주시고 그랬어요. 그러면 저는 그 것을 갖고 투피스나 바지를 만들어서 입고 스님을 따라다니고 그랬죠. 그때에 보니깐 스님의 주변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따라다니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런 사람들이 날 보더니 나이, 생일 같은 것을 물어 보고 손 가락으로 무엇을 계산하더니만 스님, 사람은 괜찮습니다 그러고, 그리고 어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14 사람은 정직하고 좋은 사람입니다 혹은 3년만 지나면 괜찮을 것입니다 그래 요. 어떤 때에는 스님이 따라 나서라고 해서 가보면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시는 거예요. 이렇게 스님은 저는 모르지만, 그 분야의 유명한 곳을 일곱 군데를 저 를 데리고 다녔어요. 아마 저를 사주, 관상 차원에서 보신 것 같아요. 혹시 스님이 하신 역경의 교정 작업에 참여하시지는 않았나요? 저는 돈을 적게 내니까 속으로 모자라는 값을 봉사로 치러야 하겠 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큰스님이 오셔서 그때 하신 것이 능엄경이었는데 한문은 다른 분, 누가 봐요. 저는 한문은 잘 모르지만 한글 교정은 할 수가 있었 어요. 그래서 스님에게 제가 스님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열심히 해 보겠 다고 했지요. 그래서 한글 교정을 보게 된 거예요. 그러면서 스님이 교정을 한 50분 보시다가 10분을 쉬시면 저는 그때에 스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어요. 원래는 큰스님에게 가까이 가도 안 되고, 쳐다보지도 말아야 하지만 저는 눈치 코치도 없이 장난기로 스님에게 질문을 했어요. 예를 들면, 스님 스님, 여기는 절간처럼 왜 조용하기만 해요? 하기도 하였죠. 그리고 서울에서 손님이 오면, 서울식으로 버선발로 나가서 손님을 맞아드리고 하기도 했어요. 제가 질문을 드 리면, 스님은 우선은 어지간히 됐어 하시고는 그 후에 어느 순간에 대답을 해 주세요. 그런데 그 능엄경의 교정을 보다 보니 내용이 무척 재미가 있는 거예요. 법학책보다 더 재미가 있어요. 그러니 자연적으로 법학책은 미루고, 덜 보게 됐 지요. 그래서 1년에 걸쳐 법학책은 한 번 보기만 하였을 뿐이었어요. 거기에서 지내면서 어려운 일은 무엇인가요? 114 저는 잠이 많았어요. 거기에다가 밤에는 법학책을 봐야 하니, 새 벽에 하는 예불시간에 일어나기가 무척 어려웠어요. 그런데 예불시간에 일어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15 지 못하면, 스님이 찍~ 하는 벨소리를 제가 일어날 때까지 누르는 거예요. 일어 날 때까지, 대답을 할 때까지 누르십니다. 그러면 제가 옷을 챙겨 입고 법당에 가면, 그때에 스님도 법당에 오시고 그랬습니다. 예불을 할 때에는 모두 가부좌 를 틀고 앉았는데, 저는 그런 것을 처음 해보니 얼마나 어렵고, 아프고 그래요. 그러니 1분에 한 번씩 발의 위치를 바꾸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조용한 가운데, 11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저만 발 바꾸는 소리가 나니 미치겠더라구요. 그리고 처음에는 아직까지 기독교 신자여서, 어느 날 밤에 기도를 하면서 그랬어요. 여기는 절이니, 절에는 절의 예절이 있으니 예불에 참석하겠다는 기도를 하고 예불에 참석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 큰스님이 아침 예불을 안 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시자스 님에게 물어보았지요. 큰스님은 왜 예불에 안 나오시냐고. 그랬더니 큰스님은 예불에 원래는 안 내려오셨는데, 저를 공부시키려고 탄허스님이 몇 달 동안을 예불에 나오신 거라는 것입니다. 이런 스님의 정성으로 저는 서서히 불교에 빠 지게 되었고, 스님에게 법명도 받았어요. 제가 받은 불명이 금련화( 金 蓮 花 )입니다. 그때 계를 받으면서, 스님이 저에게 써주신 게송도 제가 보관하고 있어요. 금란 지교( 金 蘭 之 交 )의 내용에서 난을 연으로 바꾸어서 써 주셨어요. 제가 그곳에서 스 님의 영향으로 불교와 동양사상을 접하면서 햇수로는 3년, 만 2년을 있었지요. 스님이 선생님을 무척 아끼시게 된 것 같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 무렵에 스님이 인도여행을 가셨어 요. 가시기 전에 스님이 저에게 금련화는 인도에 가서 무엇을 사다 줄까? 그 러셨어요. 그래서는 실용적인 것으로는 도수 없는 안경이고요, 비실용적인 것은 이어링을 사다 달라고 그랬죠. 왜 이어링을 사다 달라고 하였냐 하면, 제가 스 님에게 스님, 관세음보살상은 왜 귀를 길게 하였어요? 그랬어요. 그러니까 스 님은 귀는 커야 좋다, 제가 왜요? 하자, 스님은 귀는 많이 들어야 좋다, 그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16 리고 귓구멍도 크면 좋다 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귀가 약하면 이어링을 하 면 좋겠네요 하니깐 좋지 하였어요. 그래서 제가 그래서 관세음보살상도 귀 를 크게 하였네요 하니깐 스님은 그렇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도에 갔다 오신 스님은 안경은 못 사오시고, 이어링은 사오셨어요. 그때 같이 가신 만화스님이 절 보더니 아니 금련화는 큰스님에게 그런 것을 사 달라고 그랬냐 고 그래요. 내가 왜 그러시냐고 그랬더니 스님이 인도에 가서, 어 느 날 길을 가시다가 먼산을 바라보고 안 가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화스 님이 가시자고 해도, 아무 대답도 않고 있더래요. 그래서 큰스님 볼일이 있으 세요? 하니깐 응 하였답니다. 그때에 보니, 그 앞에 가게가 있었는데, 거기에 서 이어링을 사오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스님에게 받은 이어링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어요. 그런데 사오신 이어링이 십자가 모양으로 된 것이었어요, 제 가 기독교 소리를 만날 하니까 스님은 저에게 기독교, 기독교 그랬거든요. 그 것이 아직도 있어요. 능엄경 교정을 하면서 점차 불교에 경도되었는데, 불교 공부에 대한 소감이 어땠는가요? 불교에 재미를 느끼면서 저는 스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무엇이 나 질문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철없이 굴었던 것이지요. 저는 스님에게 스 님은 사람들이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러면 공부도 욕심이 아닙니까 그랬죠. 스님은 아니니라 하세요. 그래도 저는 그것도 마찬가지예 요 그랬어요. 그러니까 스님은 예전에 미륵 부처님과 석가모니 부처님이 서로 간에 열심히 공부를 해서 먼저 성불한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었기에 이 세상에 먼저 오셨고, 앞으로 오실 부처님이 미륵 부처님이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이런 것처럼 공부는 열심히 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16 그리고 스님에게 스님은 언제 머리를 깎으셨어요? 라고 여쭈니깐, 스님이 속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17 가에서 공부하신 것, 그리고 오대산의 한암스님을 만나러 가신 스님의 역사를 전부 말씀해 주셨어요. 그래서 이지함 선생 종손집의 큰집 사위로 들어가서 스 님이 이극종 선생에게 배우게 되었다는 것을 제가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학하 리에는 선우휘 선생의 두 번째 부인이 자주 찾아왔어요. 그 부인은 기호학파의 마지막을 쥐고 계시던 이극종 선생의 딸이라는 그런 말을 들었어요. 스님은 이 11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극종 선생의 서당에 가서 한문을 배웠다고 그러지요. 저는 그 부인과 친하게 지 내게 되어, 그 부인을 선우언니라고 부르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보천교 이야기 도 많이 들었죠. 탄허스님이 선생님에게 공부를 하라는 말씀은 없었던가요?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그런데 저는 평소에 스님에게 저는 불교 와 동양사상에 관심이 많아서 스님에게 배우고는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사회 로 돌아갈 것입니다 라고 했어요. 제가 서른 살에 사회에서 국가와 사회를 위하 는, 역사적인 일을 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하였던 약속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때에 스님은 절보고 공부를 해서, 머리는 깎지 않아도 되니 네가 공부를 하면서, 여 길 지키면서 기호학파의 맥을 이으면 어쩌냐 고 하셨어요. 그러나 저는 사회로 돌아갈 것이라고 거듭해서 말씀을 드렸더니 아직도 세속의 인연이 남았구먼 하셨지요. 그 시절에, 멱정이라는 스님, 지금은 여익구입니다만 만나지 않았나요? 만났지요. 멱정스님이 그때에 큰스님을 모시고 자광사에 자주 오 시고, 거기에 머물기도 했어요. 멱정스님 하면 생각나는 일화가 있어요. 그때, 탄허스님께서 그곳 자광사의 담을 치면 좋겠다는 말씀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런 말을 전해 듣고, 직접 스님에게 질문을 하였죠. 그랬더니 스님께서 치면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18 좋지 하셨어요. 그런데 담을 치려면 그때 돈 1300만 원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 가 담을 치겠다고 궁리를 하고는 멱정스님에게 말씀을 드리니, 멱정스님은 깜짝 놀라는 거예요. 얼마 후에 제가 스님에게 가서 스님, 제가요 담을 치게 할 터이 니, 담치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스님의 글씨를 하나씩 써서 액자에 담아 보관하게 해주세요 하였어요. 그랬더니 스님은 그거야 그리 하지 이렇게 허 락을 받고서는, 저는 익성회 멤버들에게 그걸 부탁했어요. 그때 익성회 사람들 이 거기를 왔다갔다 해서 이야기를 한 것이지요. 그래서 담을 치지 않았습니까? 1300만 원을 들여서 하고, 스님에게 글씨를 액자로 받아서 그 사람들에게 주었 지요. 그때 멱정스님에게 제가 화주를 하였다고 하니 이 사람이 큰일 날 사람 이라는 말을 하고는, 제가 일을 벌려서 잘못될까봐 월정사로 도망가 버렸어요. 제가 절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일을 벌리고 그러는 것이 납득이 안 돼서 그랬을 거예요. 스님의 법문을 들어보셨나요? 그럼요. 제가 불교에 완전 심취하고, 사주 관상 같은 것에도 빠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 스님이 법문을 하시는 곳이면 다 따라다녔어요. 그때 월정사에서 몇 달간 법문 을 하실 때에는 제가 월정사를 따라가서 시봉도 하고, 방산굴에서 자기도 했어요. 그때 저는 스님의 법문을 듣고는 스님에게 스님 법문을 그렇게 복잡하게 말 씀하세요. 물리학적으로 이렇게 설명하면 좋습니다 라는 말씀도 했어요. 그러 면 스님은 어지간히 됐어 하시지요. 그리고 스님에게 스님은 어떻게 경전을 다 외우셔서 줄줄 강의를 하세요 하면 스님은 남이 세 번 하면 나는 다섯 번 하 고, 남이 다섯 번 하면 나는 열 번을 하였어 그리 말씀했어요. 스님은 제가 질 118 문을 하면 처음에는 어지간히 됐어 하시고는 한참 있다가 지나가는 식으로 툭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19 던져서 말씀을 해주셨어요. 던지는 식으로요. 지금 선생님은 여성운동을 하시면서 동양사상을 대중들에게 가르치시고 있어요. 이런 것 도 탄허스님의 영향이지요? 그렇지요. 저의 요점은 물리교육 차원, 과학적 결론으로는 시대적 핵심이 동양사상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동양 11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사상을 제가 큰스님을 만나지 않았으며 도저히 접하지도 못하였고, 확인할 수 없었지요. 저에게는 큰스님을 만난 것이 일생일대의 큰 계기, 새로운 삶을 살게 하였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님에게 배운 일화를 소개하시지요. 그것이 언제인가? 스님을 모시고 강릉에 간 일이 있었는데, 한 번 은 경포대에 가서 수영을 하러 가자고 그래요. 제가 그래도 수영을 하면 50미터 는 갑니다. 그래서 수영복을 입고 들어가서 수영을 하였지요. 그랬더니 그 다음 날에도 스님이 오늘도 수영을 해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다시 수영복을 입 고 바다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전날에는 수영하는 것이 괜찮았는데, 그날은 도무지 바다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결국 못 들어갔어요. 이것이 왜 그랬냐 하 면, 바로 그날이 입추( 立 秋 )였습니다. 하루 차로 온도가 그렇게 변하더라구요. 저 는 이런 경험을 통해서 절기에 대한 것을 절감하게 되었지요. 이것도 스님이 저 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스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돈 문제로 말썽을 피우고 그랬어요. 그래 서 제가 스님에게 돈을 한꺼번에 줘버리면 사고도 안 치고 좋지 않겠냐고 하였 어요. 그러니까 스님은 물이 너무 깨끗하면 고기가 살 수도 없고, 사람이 사는 사회도 그렇다고 하셨어요. 저는 스님의 그 말씀을 말이 안 되는 소리로 보았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20 데, 절보고 금강산 물에 가봐라, 고기 없지 그러시더라구요. 나중에 제가 금강 산에 가보니 정말로 고기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스님에게 배운 지 혜를 여성운동의 조직을 이끌고 갈 때에 참고하고 있어요. 스님의 입적이 선생님에게는 어떻게 다가왔는가요? 저는 스님이 입원하신 한양대병원에 가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신 스님에게 아무도 모르게 여쭈어 보았지요. 스님 사는 게 중요하나요, 내생( 來 生 ) 이 또 있지 않습니까? 하였지요. 그랬더니 물론 내생도 있지만, 이 생( 生 )이 더 욱 중요하다 는 말씀을 하셨어요. 금생의 삶은 다시 올 수 없는 생이라고 하셨 어요. 그렇게 기가 막힌 말씀을 하신 것을 제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그리 고 사람들은 스님이 운모를 잘못 드셔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들을 하지만, 저는 스님에게 운모를 받아서 효과를 보았습니다. 그걸 먹고 아주 건강해졌어요. 스님이 병원에 계시다가, 진관사를 거쳐서 오대산으로 내려가셨다는 말을 듣 고는 저는 다음 날 예지원에 휴가를 내고 월정사로 내려갔습니다. 방산굴에 가 서는 울면 안 될 것 같아서, 울음을 꾹 참고 스님의 손을 잡고서 저 진민자입니 다, 저를 아시겠어요? 하니 스님은 말씀이 없이 아픈 모습이지만 손으로 그렇 다는 대답을 하셨어요. 저는 스님이 돌아가시고 다비장에서 이틀을 울면서 지냈 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저를 보고 혹시 스님의 딸이 아니냐는 말을 하더 라구요. 스님의 딸이 있지 않습니까? 선생님은 1985년에 청년여성문화원을 창립하시고, 오늘까지 25년 넘게 여성 대중들에게 120 동양사상에 입각한 여성운동을 해오고 계십니다. 여기에도 탄허스님의 정신이 있겠지요? 그럼요. 제가 탄허스님에게 배운 유불선을 통합한 가르침을 저는 전하는 것이지요. 강의 때에 저는 탄허스님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분명히 말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21 합니다. 스님은 저에게 도( 道 )와 예( 禮 )는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전해지는 것이 라고 말씀했어요. 그래서 저는 스님의 뜻, 유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 님은 저에게 천리마( 千 里 馬 )라는 별명을 주셨어요. 그러면서 말은 채찍을 쳐야 가 지만, 천리마는 채찍을 치지 않아도 갈 방향을 안다고 하셨어요. 저는 이 말이 저를 사랑한 말씀으로 알고 지금껏 노력하고, 여성운동을 해왔습니다. 여성운동 12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의 이론을 대부분은 서양이론에서 찾고 있지요. 저처럼 동양사상에서 찾고, 거 기에 접목해서 실천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선생님은 탄허스님으로 상징되는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올린 그 물을 갖고 사상운동, 사회 운동을 하신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생활오행 강좌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제가 하는 모든 것은 스님에게서 배운 것을 근본으로 해서 하는 것 이지요. 저는 이 시대의 화두를 놓고, 그를 불교와 동양사상으로 총섭해서 풀려 고 노력해 왔어요. 스님은 저에게 불법의 공부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라고 하셨 어요. 마음을 비워라 그 말씀을 강조했어요. 저는 이렇게 스님에게 들은 것, 제 가 배운 것을 대중들에게 쉽게 대중화해서 전달하는 것이지요. 저는 분당의 주부서당에서 명심보감을 3년간 강의하였고, 전국을 돌아다니면 서 사서 강의를 19년이나 했어요. 그리고 이곳 청년여성문화원에서도 생활오행 상담사 양성과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의 중부여성발전센터, 서초 여성인력센터를 경영하고 있어요. 이런 것은 다 스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저 는 스님 이외에도 네 선생님에게서 사서, 관상 등을 배웠지만 제 배움의 중심은 탄허스님입니다. 스님은 저의 이름에 문창성( 文 昌 星 )이 있다고 하시면서 강사를 잘할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런 말씀이 저를 오늘까지 이끈 것 같아요. 지난 20여 년간 제가 전력을 기울인 일은 대중이 동양사상과 친해지도록 하는 일, 그리고 동양사상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우리 생활문화를 매개로 해서 여성들을 교육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22 고, 의식화해서 주체적인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신 분이 탄허스님입니다. 오늘 귀한 증언 감사합니다. 저를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스님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크신 은혜에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김선생님이 그것을 도와주세요. 자주 만나요. 이렇게 탄허스님을 놓고 대화한 것이 저로서는 영광 입니다. 122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23 10년은 공부해야 한다는 그 말씀을 실천했어요 12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대상 전보삼 박물관협회 회장, 신구대 교수, 만해기념관 관장 일시 2011년 7월 2일 장소 만해기념관 교수님과 탄허스님과의 인연을 듣고 싶어 찾아 뵈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처음 뵈었는가 요? 내가 탄허스님을 처음 뵌 것은 그게 아마 1960년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예요. 그때 강릉포교당에서 큰 법회가 열렸어요. 그 법회에 강릉의 신도들과 우리 집의 사람들이 다 갔어요. 우리 집안이 강릉포교당과 관 련이 깊어요. 나는 어른들이 가니까 그냥 따라간 것이지요. 갔더니만 키는 크지 않은 스님이 소리를 지르고, 나는 뭔지도 모르는 말씀을 하는 것을 봤지요. 나 는 도대체 뭔가 했지요. 그때에는 졸다가 듣다가 하였는데 나로서는 경이스럽 고, 신기하게 느끼면서 탄허스님을 처음으로 뵌 것이지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3

124 교수님은 강릉 지역에 살았고, 그 지역의 학교에 다니면서 큰 활동을 하였지요? 우리 집이 강릉포교당 근처예요. 그래서 학교는 강릉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인 1962년에 강릉불교학생회 에 들어가서 강릉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인 1968년까지 6년 동안 강릉포교당을 거점으로 활동을 하였지요. 중등부 부장을 중2 때에 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에 는 부회장을 하고, 고등학교 2, 3학년 때에는 회장을 하였어요. 내가 강릉불교 학생회의 47대, 48대 회장인 셈이지요. 그 당시에 회장 선거할 때에는 강릉고, 강릉여고, 강릉상고, 강릉농고의 불교학생회원들 1천여 명이 와서 법당이 꽉 차 고 그랬어요. 그렇게 활동을 하면서 강릉포교당에서 탄허스님을 여러 번 만났고, 그곳에서 큰스님들을 많이 만났어요. 운허스님, 관응스님, 석주스님을 다 그곳에서 만났 고, 도문스님도 그 포교당 주지를 하실 때에 만났지요. 그러니깐 강릉포교당은 나의 안방이고 그랬어요. 거기에서 학생회 잡지인 <보리수>도 만들고, 수많은 행사를 가졌어요. 그 시절에는 학생법회를 하면 수백 명이 모이고 그랬어요. 강릉 지역의 불자들은 탄허스님을 어떻게 말하였을까요? 강릉의 신도나 보살들은 탄허스님을 불교뿐만 아니라 동양철학의 백과사전으로 불렀어요. 한암스님은 부처님, 생불이라고 불렀지만 탄허스님은 근기가 높은 스님, 백과사전으로 많이 불렀어요. 내가 스님들에게 자꾸 뭘 질문 을 하면 탄허스님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탄허스님은 백과사 전이라 다 아신다고 그랬지요. 강릉포교당은 역사 깊은 곳이고, 강릉 지역에서도 유명하였지요. 124 그럼요. 강릉포교당이 지금은 아주 좁고 답답하지만 그때에는 3천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25 평도 넘었어요. 마당이 아주 컸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서 축구도 하고, 시 내 한복판에 있어서 문화공간의 역할을 하였지요. 문화행사를 하면 다 그곳에서 하였어요. 그 시절에 유행한 레슬링, 권투 같은 것을 하면 그 마당에서 열렸어 요. 강릉 문화의 중심지였지요. 그런데 그 시절에는 비구 대처 싸움에 스님들이 강하게 휘말리고 그래서 스님 12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들이 포교당에 상주하지를 못했어요. 그 포교당에서 10년간 주지를 한 대처승 이 나가고 나서 주지로 오신 스님이 도문 도원 법등 혜거 법상 스님이었 어. 주지가 자주 바뀌고, 상주를 하지 않고, 오대산에도 가야 하고 그랬어요. 포 교당에서는 법회를 주로 수요일, 토요일에 하는데 스님이 없으면 내가 스님들에 게서 들은 것을 갖고 대신하고 그랬어요. 그때에 오대산 스님들이 강릉에 오시면 나를 자주 찾았어요. 경직된 곳에 있 다가 강릉에 오면 마음이 풀어지고 그랬는데, 그러면 내가 안내도 하고, 시장에 가서 먹을 것을 사다 드리기도 했어요. 국화빵도 사오고, 특히 지금은 속초에서 의사를 하는 초연스님이 제일 자주 찾아왔지요. 그 스님은 그때 폐병을 앓아서, 병을 고치려면 고기를 먹어야 하기에 내가 시장에 가서 고기를 사서, 남대천가 에서 가서 구어 먹고 그랬어요. 탄허스님을 만나서, 인연을 갖게 된 것을 들려주세요. 내가 중2 때부터 탄허스님을 뵙고, 뵙기만 하면 불교에 대해서 묻 고 만해 한용운스님에 대해서 물으면서 인연이 시작되었지요. 나는 그 시절에 궁금한 것이 많아서, 스님들을 만나면 자꾸 질문을 하였어요. 스님들을 괴롭힐 정도로 물으면 그 스님들은 탄허스님에게 물어보라고 하면서 피했어요. 내가 탄 허스님에게 물은 것이 뭐냐 하면, 사람이 죽으면 어디에 가느냐, 인과가 무엇인 가, 색즉시공이 뭡니까 등등이었지요. 이런 것을 물으면 스님이 툭 던져주는 것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26 에 자극을 받고 불교를 배워 갔지요. 그때에 탄허스님은 학생들에게 공부해 라는 말을 많이 하셨어요. 그리고 사 람이 부지런해야지 뭐라도 된다 고도 하셨고요. 내가 탄허스님에게 들은 것 중 에서 제일 인상이 깊은 것은 공부를 하더라도 새벽에 하라는 것이었어요. 새벽 정신을 강조하신 것이지요. 아침의 한 시간은 저녁의 열 시간과 같다, 아침시간 과 저녁시간은 그 양과 질에서 다르다, 그래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는 데, 그것이 강하게 가슴에 남았어요. 부처님도 새벽 별을 보고 깨치셨지요. 그 래서 나는 아! 공부는 새벽에 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어요.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강릉에서 탄허스님의 법문, 강의를 들으셨나요? 많이 들었지요. 탄허스님은 포교당에서 화엄경 특강 법회도 1주일 간 연속 특강을 하시기도 하였어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저녁에 하면 강릉 사람들 수백 명이 구름처럼 몰려오지요. 거리에는 탄허스님 초청 화엄경 대법회 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우리 학생들이 직접 종이에 쓰고 만든 포스터를 길가에 붙이고 그랬어요. 그런 행사를 여러 번 했어요. 연속 강의를 많이 하였어요. 그럴 때에 보면 탄허스님은 휙 돌아서 칠판에다가 화엄경의 일부 구절을 우선 판서를 하셔요. 스님은 그것을 다 외워서 하는데, 그런 것을 보는 신도들은 벌 써 질려 버리지요. 판서를 다한 다음부터 스님이 설명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화엄경에 대해서 그때부터 들었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요. 교수님은 한용운스님을 평생 연구하시고, 그 관련 자료를 모아오신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126 런 것에도 탄허스님에게서 영향을 받았는지요. 그렇지요. 내가 중학교 2학년부터 만해 한용운스님에 대해서 관심 을 가졌지요. 내가 탄허스님에게 만해에 대해서 물으면 스님은 나에게, 저울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27 가 뭔지 알아? 조그만 쇳덩이가 만 근을 들어 올려, 만해스님은 저울추야, 저울 추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스님은 기분이 좋으신지 웃어, 좋아하셨지요. 저울추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훗날 저울추는 노자의 말 돌덩이 보다 무거운 것은 다듬잇돌, 다듬잇돌보다 무거운 것은 저울추 라는 사실을 인 용하신 것을 알았지요. 12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그런데 탄허스님이 어떻게 해서 만해스님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었을까요? 만해스님이 오대산의 한암스님에게 몇 번 왔다고 그래요. 그러면 한암스님의 옆에 탄허스님이 있었기에, 자연 알게 되었던 것이지요. 한암스님과 만해스님도 가까운 사이였어요. 두 스님이 비밀리에 편지를 주고 받은 사이라고 그래요. 조지훈 선생이 그 중간에서 심부름을 하였다고 하지요, 지훈 선생이 일 제 말기에 월정사의 외전강사를 하였잖아요. 내가 조지훈 선생을 찾아가서 묻기 도 했어요. 이런 것을 우리가 밝히지를 않아서 그렇지, 그런 내용들이 다 있었 어요. 그러니까 탄허스님은 이런 바탕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봐야지요. 탄허스님이 만해스님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확신에 찬 이야기예요. 그래서 내가 만해스님에게 빨려 들어가게 되었지요. 힘 있게 말씀하시니까 내가 만해를 공부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스님은 나에게 공부는 10년은 해야 된다는 것을 강 조하였어요. 그리고 내 법명도 지어 주었어요. 내 이름이 전보삼, 보삼이 아녜 요. 그러니깐 스님이 니 법명은 이름을 뒤집어서 삼보( 三 寶 )라 해라 고 하셨어요. 내가 삼보스님이 있는데, 어떻게 같은 이름을 쓰면 됩니까? 하면, 너는 재가 의 삼보이니까 둘이 같이 삼보이니, 친구로 지내라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삼보스님과 친하게 지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28 교수님이 만해 연구를 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를 탄허스님이 제공하였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스님이 확신에 찬 말씀을 하시니까 내가 만해에 빨려 들어갔다고 보지요. 그때에 스님의 화엄경 강의를 듣고, 고민하다 가 내가 스님에게 만해스님은 선사가 아닙니까? 하고 여쭈어 봤어요. 그러자 스님은 만해는 선사이지, 선사이니까 혁명을 꿈꿨지 그러셨어요. 그리고 만 해스님은 냉돌에 앉아 있었다. 조선 전체가 감옥이니 방에 불을 때지 않고 냉돌 에 앉아 참선을 했다 는 말씀도 하셨지요. 선사이면서 동시에 혁명을 꿈꿨다는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해주셨어요. 그래서 그 이후에 내가 만해를 선사라고 부르 기 시작한 것이지요. 강릉포교당에서 한용운스님에 대한 행사도 있었는가요? 있었지요. 만해스님의 기일에는 우리 학생들이 주관하여 추모재를 지냈어요. 기일에는 늘 했지요. 불교학생들이 모일 이벤트 차원에서 하였어요. 그러면 포교당 주지스님이라든가, 인근 주변에 계신 스님들을 모셔서 하였어요. 그때에 도원스님, 양청우스님이 하신 것 같아요. 간혹 스님들이 못 오시면 내가 주관하여 지냈어요. 우리는 열성적으로 했어요. 또 만해특강도 하였어요. 나는 그때,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만해 연구를 해서 서울에서 발간된 법시 라는 잡지 에 글을 기고했어요. 그리고 또 기억나는 것은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국어수업 시간에 책을 탁 펴니까 만해의 시 <알 수 없어요>가 나와서 나는 깜짝 놀랐어요. 수업이 시작되니 친구들이 이 시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안다고, 나를 들먹였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날보고 그러면 나와서 어디 한 번 이야기를 해 보라고 해서, 내 가 한 시간 동안 만해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어요. 그래서 나는 만해 연구에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었지요. 128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29 혹시 그 시절에 영은사에도 가 보았나요? 가 보았지요. 영은사에는 중학생 시절에 그냥 놀러가는 정도였지 요. 거기에서 혜거스님, 인보스님을 만났어요. 처음에는 일소굴도 없었다가, 스 님을 위해서 지은 것이지요. 12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탄허스님은 교수님의 일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군요. 내가 그렇게 자꾸 묻고 그러니깐 스님이 나를 기특하게 보신 것 같 아요. 날보고 늘 공부를 하라고 하시면서 한 가지를 하더라도 10년은 해야 된다 고 말씀하셨지요. 그러시고 또 만해스님은 당신보다는 서울에 가면 칠보사에 석주스님이라는 분 이 있는데 그 스님이 만해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석주스님을 찾아가라고 알려 주었어요. 그래서 내가 1968년에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에 메모한 정보가 세 가지예요. 첫째가 칠보사, 둘째가 망우리, 셋째가 심우장이었 어요. 이것이 다 만해스님의 연고지이지요. 그래서 내가 칠보사로 가서 석주스 님을 찾아 뵈었지요. 교수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가서 대학을 다니면서 만해 연구를 본격화하지 않 았나요? 그 출발이라고 할까 그 내용은 어떻게 되었나요? 내가 1968년도에 학교는 졸업했지만, 대학 시험에 실패를 해서 강 릉포교당에 자주 오시던 상원사에 계신 원주스님에게 절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 겠다고 부탁을 했어요. 그래서 그 스님을 따라서 상원사에 가 있어 보니, 거기 는 장기간 체류하면서 있을 형편이 안 돼요. 그래서 희섭스님이 사고사에 가 있 으라고 해서, 사고사에서 1년가량 있었지요. 그때 사고사는 비어 있었어요. 뇌 묵스님이 육수암을 지어 나가시고 건강이 좋지 않아서 남방으로 가 있었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30 그래서 내가 혼자 있으면서 법당을 지키고, 밥을 해 먹고 공부했지요. 그 시절, 월정사도 복잡했어요. 법당 불사를 하였는데, 스님들도 별로 없었고 희찬스님은 구속되고 그래서 어수선했어요. 그러니까 목상 김완로라는 업자가 농간도 심하 고, 매일 차에다가 나무를 싣고 나가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목재의 분량을 따 지는 용어인 사이 라는 것을 사전에서 찾고, 그것이 몇 차 분량이라는 것을 알 아서 완로라는 사람에게 따지고 그랬어요. 그래서 내가 김완로가 실어가는 트럭 에 누워서 못 간다고 하고는 막 따진 일도 있어요. 내가 오대산을 그렇게 지킨 일이 있었어요. 그런 면에서 나도 공로자예요. 그러다가 1968년에 울진삼척 무 장공비 사건이 일어나서 오대산에서 나왔지요. 그때에 진부 차부에 있는 할머니 가 자기 아들을 보내서 날보고, 오대산에 나오라고 연락해서 나왔지요.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사고를 당했을 거예요. 교수님이 사고사에 있었고, 김완로와도 싸웠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이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다가 내가 1969년 초반에 서울에 와서 대 성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다시 해서, 1970년에 한양대학에 들어갔어요. 그러 니까 다른 사람보다 2년을 늦게 간 셈이지요. 대학에 가서는 바로 대불련에 들 어갔어요. 그때 회장이 이학용이었어요. 이 사람은 그 이전부터 나와는 아는 사 이였어요. 강릉불교학생회와 조계사, 분황사, 부산 등의 불교학생회와 교류를 하였거든, 그래서 알았지요. 그 이학용이 날보고, 야 너는 목탁 치는 것도 잘하 고, 오대산에 있었으니 종교부장을 하라 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대학 1학년 때 에 대불련 의식을 전담했어요. 그리고 1972년도에는 동국대에서 열린 학생논문 심포지움에 만해의 민족주의 사상을 갖고 나가서 최우수상을 받았지요. 130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31 그때는 만해 한용운전집이 아직 나오지 않았을 때지요? 그렇지요. 만해에 대한 관심은 그때에 대불련에서도 아직 시작하 지 않을 때예요. 그런데 1972년인가에 대불련 차원에서 탄허스님을 모셔서 풍 전상가에 있는 삼보법회 강당에서 특강을 한 일이 있어요. 그때에 탄허스님과 김열규 교수를 같이 모신 것 같아요. 내가 그런 제안을 하니까 전창열, 명호근 13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같은 선배들이 깜짝 놀라는 거예요. 네가 어떻게 해서 탄허스님을 아느냐는 것 이지요. 그래서 내가 강릉불교학생회, 오대산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이해를 하 고, 내 제안에 100% 찬성을 해주어서 강연이 마련됐어요. 그리고 1974년에는 만해스님 입적 30년을 기념하는 강연회를 하였는데, 그때에도 탄허스님이 연사 로 나섰어요. 스님은 만해스님의 불교사의 깊이는 그림으로 그릴 수도 없고, 말 로도 표현할 수 없으며, 무아를 달성한 그의 선적( 禪 蹟 )은 돌덩이보다 무거운 저 울추라고 하신 큰 법문을 하셨지요. 어찌 보면 스님은 나의 증명법사처럼 그렇 게 특강을 하신 것이에요. 그리고 내가 한양대에 입학을 해 보니 불교학생회가 없더군요. 그래서 내가 불 교써클을 만들어 등록을 하려고 하니까 학교에서 등록을 안 해주는 거예요. 그 때만 해도 한양대는 기독교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학교당국에 가서 강한 항의를 하였더니 들어주더라고요. 나는 처음에 학생회 이름을 선지식이라고 하 려고 했더니, 학교에서 불교학생회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서 그렇게 등록 은 했지만 우리들은 선지식이라고 불렀어요. 지금도 한양대 동문들은 선지식으 로 부르면서 만나지요. 불교학생회를 만들어서 내가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탄허스님을 모시고 큰 행사를 가졌어요. 사상강좌라고 부르고, 학교 입구에서부터 강당까지 행사 안내 를 써 붙이고 그랬더니 학교 전체가 들썩이고, 사람들이 갑자기 놀라고 그랬어 요. 그때 모신 분들이 서정주, 이기영, 서경보, 탄허스님이었어요. 이기영 교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32 와 탄허스님이 우리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어요. 스님은 강당을 땅땅 울렸지요. 그 법회를 보도한 스포츠 신문이 있었어요. 그만큼 그 강좌의 인기가 폭발적이었지요. 그 뒤로는 학교에서 불교학생회를 지원했지요. 그후로 한양대 학생들이 대불련 간부에 많이 진출했어요. 나는 대불련의 전국대의원 의장을 하 였고. 한용운전집과 탄허스님과의 관계는 없었는가요? 1973년, 내가 대학년 4학년 때에 전집이 발간되었어요. 그 전에 내가 효당스님을 만나서 전집을 신구문화사에서 내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만해연구 참고문헌을 작성하고 그랬지요. 그런데 막상 전집이 나왔지만 전혀 팔 리지를 않았어요. 스님들이나 사람들이 만해스님을 알아야 사지요. 그래서 신구 에서 파는 데 한계가 있어서 날보고 불교계에서 살 수 있는 리스트를 작성해 달 라고 그래요. 내가 그래서 불교신문사에 가서 최정희 기자에게 절의 명단을 달 라고 해서 신구에 갔다 주었지요. 그랬더니 신구에서 날보고 불교계에 책을 파 는 총판조직을 맡아서 할 수 있냐고 그랬어요. 그래 내가 할 수 있다고 하니까 누굴 보증인으로 세우래요. 그래 대불련 지도교수인 홍정식 교수를 찾아가서 이 야기를 하였더니, 홍교수가 보증을 서준다고 해서 신구문화사와 홍교수가 계약 서에 사인을 하고 나는 그 옆에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힘을 얻기 위해 조계사에 가서 108배를 하고, 기도를 하고 나서 책을 팔러 다녔지요. 그렇게 하였는데 사람들이 만해를 알아야 책을 사니까 대불련 조직을 이용해 서 전국 각지에서 만해특강, 강연을 시켰어요. 그때에 탄허스님도 강의를 하셨 어요. 내가 그럴 때에 강사를 섭외하고 그랬는데, 통도사의 경봉스님이 나서주 겠다, 날보고 기특하다고 그러시면서 경남지방은 당신이 맡아 주시고 그랬어요. 132 석주스님보고 하시라고 하니까 내가 뭘 안다고, 하시면서 사양을 하였지만, 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33 허스님은 서울에서 주로 많이 하셨어요. 스님은 나서서 말씀을 하시는 것을 좋 아하시고, 말씀을 하시면 열변을 토하시고 그랬지요. 그렇게 하면서 대불련에 가입한 대학이 100개 대학이 넘었는데,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가 주관해서 강 연회를 하면 내가 가서 책을 팔고는 그 5%는 지역별 지부별 불교학생회 발전 기금으로 떼어 주었지요. 13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교수님과 탄허스님의 인연이 보통이 아닙니다. 진작 이런 것을 알았으면 좋았을 것인데 아 쉽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군대에 갔어요. 서울비행장(성남)에서 복무하였는데 장교이기에 오후에 시간이 많이 났지요. 그러면 개운사 대원암에 계신 스님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그랬어요. 그때, 화엄경이 발간되었는데 한 질에 10만 원인가 그랬지요. 그래 나는 월부로 사서, 군대 월급으로 그것을 샀어요. 그랬 더니 스님은 너는 돈도 없는데 조금만 내고 가져가라 고 그러셨어요. 그이후로 나는 탄허스님의 책은 나오면 다 샀어요. 그리고 그 무렵에 내가 가면, 스님은 아직도 만해공부 하고 있나? 하고 물어 봐요. 그러면 난 그렇습니다 고 말씀을 드리지요. 스님은 그러면 잘 했다, 계 속해라 고 격려를 해 주셨어요. 그때에 내가 스님에게 화엄경 입법계품의 53선 지식, 선재동자에 대해 묻고, 만해스님의 사상이 화엄사상이 아닌가에 대해서 여쭈어보고 그랬어요. 내가 <불교대전>을 읽어 보니 화엄경에 대한 것이 제일 많이 나오더군요. 나는 스님에게서 늘 화엄경을 많이 들어서 화엄에 대한 것은 머릿속에 들어 있었어요. 그래서 스님에게 쫓아갔지요. 가서는 스님 불교대전 을 읽어 보니 화엄경이 제일 많이 인용되었는데, 이것은 만해스님이 화엄경을 제일 좋아하였다는 것이고, 이것으로 만해사상을 화엄사상으로 볼 수 있지 않습 니까? 하였지요. 그러니까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좋은 생각이라고 하셨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34 어요. 그 뒤에 내가 홍정식 교수에게도 만해사상을 화엄사상으로 볼 수 있지 않 냐고 하였더니, 그 교수님도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한국불교가 화엄사상 이니까 그렇게 볼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또 이기영 교수도 좋은 생각이라고 하 셨어요. 이렇게 해서, 내가 그 후에 박사논문을 <화엄의 관점으로 본 만해사상> 으로 하게 된 것도 스님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그때에 내가 스님에게 만해의 님에 대해서도 자주 물었어요. 그러면 스님은 여 러 말씀을 해주었지만 나는 못 알아듣는 말씀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스님 만해 스님의 사상은 화엄사상이니, 만해의 님은 비로자나 법신불로 볼 수 있지 않습 니까? 하였어요. 그랬더니 스님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좋은 생각이라고 하셨어 요. 하여간에 그때부터 나는 화엄경에 대한 책은 다 사서 모으고, 읽고 그랬어요. 탄허스님은 도의적 인재양성을 강조하셨어요. 그런 말을 들어보았지요? 자주 들었지요. 탄허스님은 스님, 재가자, 학생 등 모두에게 공부 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앞으로는 좋은 세상이 오는데, 좋은 세상에서 네가 잘 하면 그때에 가서는 배운 것을 써 먹을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런 것을 주역 으로 풀어서 말씀하였지요. 이것은 스님이 어려운 시대의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 시지를 주어서 발심을 하게끔 하신 것이지요. 월정사에서 있었던 화엄경 특강을 알고 계시지요. 그럼요. 나는 그때 직장에 있어서 상주하지는 못했지만 월정사에 왔다 갔다 하면서 들었어요. 스님이 하시는 강의 노트 정리한 것을 다 받았지요. 강의가 끝난 후에는 따로 값을 내고, 강의 테이프를 복사해서 갖고 있지요. 그 강의 테이프를 자주 들어보고 했었지요. 134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35 교수님은 탄허스님의 유묵을 보관하고 있지요? 몇 점을 구해서 만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지요. 그리고 강릉의 내 이모집에도 20여 점이 보관되어 있을 거예요. 그리고 내가 2004년 10월 달 에 이곳 만해기념관의 특별기획전을 했는데 그때 탄허스님의 유묵도 전시했어 요. 그 전시회는 만해선사 입적 60주년 기념으로 <만해와 그 사람들>이라는 제 13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목을 갖고, 만해와 인연이 있는 60인 초청 전시회를 하였어요. 그때에 탄허스님 도 그 60인에 포함시켜 유묵을 전시하였지요. 탄허스님이 약간 일찍 가신 게 아쉽지요. 벌써 가신 지가 30년이 되었어요. 스님이 한양대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우리 집안에서 병원비를 대고 그랬어요. 그때 한양대병원의 원장 겸 부총장이 이봉모 선생이었는데 나중에 강 릉에서 국회의원도 하셨지요. 그 분이 내 외삼촌이었어요. 그 외숙부의 집이 천 호동에 있었어요. 그 집에 탄허스님이 가서 쉬시기도 하셨지요. 후에는 강릉에 서 국회의원도 하고 그랬어요. 우리 이모가 6형제인데, 다 불교신도예요. 그 중 에서도 다섯째 이모집(대비행 보살)이 포교당 바로 뒤인데 그 집에 탄허스님이 자주 오셔서 식사도 하시고 쉬었다 가시기도 했어요. 그 이모가 포교당의 신도회장도 하였지요. 교수님이 보실 때에 탄허스님의 위상을 어떻게 보시나요? 일제 때에는 최고의 강백으로 박한영스님을 쳤지요. 그러나 그 이 후에 그 맥이 단절됐어요. 나는 이런 측면에서 박한영스님의 대를 이은 강백이 탄허스님이라고 봐요. 탄허스님도 은근히 당신께서 그런 자부심이 있지 않았나 하고 보지요. 탄허스님이 원래 박한영스님에게로 배우려고 가려다가 오대산에 승려수련소가 생기자, 그 수련소의 중강으로 있게 되어서 서울(개운사)로 공부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36 러 가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한 것으로 나는 봅니다. 그때 개운사에는 청담스님, 조종현 같은 인물들이 다 모여서 공부를 하였어 요. 만약 그때에 탄허스님이 개운사에 갔었다면 더 큰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르 지요. 청담스님과 조종현이 만해스님과도 인연이 있어요. 그래서 나라사랑 에 글을 기고하였지요. 오늘 귀한 증언, 고맙습니다. 내가 오대산, 탄허스님의 인연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것이지 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에요. 나는 그런 인연으로 혜거스 님, 법등스님, 그리고 민족사 윤창화 사장과 인연을 이어오고 있어요. 앞으로는 오대산 스님들이 마음을 합쳐서 오대산 불교문화에 대한 선양 작업을 잘할 줄로 믿어요. 136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37 자기 소명의식을 가졌던 분 13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대상 채원화 연세대 대학원 졸업, 효당 최범술의 수제자, 반야로 차도문화원 원장 일시 2011년 9월 20일 장소 반야로 찻집 서울 인사동 차 분야의 권위자인 선생님이 탄허스님과 인연이 있다는 것을 제가 최근에 알게 되었어요. 저는 효당스님과의 인연이 지중하지만 탄허스님과의 인연도 간단 치 않습니다. 제가 탄허스님의 이름을 접하게 된 것은 대학교(연대, 사학과) 다닐 적에 신문 한 페이지에 나온 내용 때문입니다. 스님이 화엄경론소의 번역을 다 마치고 인쇄, 출판을 하기 위한 후원자를 기다린다는 내용이었지요. 그래서 저 는 그걸 보고, 언제인가 때가 되면 탄허스님을 찾아 뵙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습 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에서 처음으로 뵈었는가요? 제가 사학과에 다녀서 1969년도 가을에 상원사로 답사를 갔습니 다. 그때에는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가는 찻길이 없어서 쌓인 낙엽을 밟고서 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38 들게 걸어 올라갔지요. 상원사에 가서 종( 鐘 )도 보고 나서, 탄허스님을 찾으니 스 님이 거기에 안 계시다고 그래요. 저는 상원사에 간 김에 스님을 꼭 만나보고 싶 었는데, 그때에는 인연이 미치지 못했어요. 저는 그때에 찍은 사진을 아직도 갖 고 있어요. 그랬다가 대학교 4학년 때인 1970년 봄에 서울 동대문 근처에 있는 청룡사로 스님을 찾아가게 되었죠. 제가 스님을 찾아가게 된 동기는 스님이 한문을 잘 하 신다는 말을 듣고서, 저도 스님에게 한문과 유불( 儒 彿 )을 배우고 그 바탕하에서 사상가가 되어 보겠다는 마음이었죠. 그래 청룡사를 찾아가서 뵙고 인사를 드리 고 나서 스님에게 한학의 가르침을 받으러 왔습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 때에 처음 뵈니까 스님은 아주 수려한 모습이었어요. 탄허스님은 나를 딱 보시 더니 첫마디가 자네, 자네 사주의 네 기둥을 아나, 그것을 말할 수 있는가? 이 렇게 묻데요. 그래서 저는 제 사주의 기둥을 바로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스님 께서 날 보는 태도가 딱 달라졌어요. 그 당시에 어느 여대생이 자신의 사주를 바 로 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스님에게 사서( 四 書 )와 유불을 배우고 싶 다고 하였지요. 그런 비사가 있었군요. 그래서 배우게 되었나요? 그런데 그날 스님의 옆에 소호거사라는 분이 있었어요. 그 분은 한 쪽 팔이 없는 유명한 역학가입니다. 소호거사에 대해서는 그 후에 알았지, 그 날 은 어떤 분인지를 몰랐어요. 스님께서 그 소호거사에게 저의 사주를 보라고 하 시니까 그 거사님은 손의 마디를 짚어 가면서 제 사주를 보더니 타고난 도인( 道 人 ) 팔자라고 그래요. 탄허스님도 역학에 대해서는 잘 아시지만 소호거사가 더 잘 보니까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여간 두 분이 절보고 도인 팔자라고 그랬습니 138 다. 소호거사의 풀이에 의하면 제 사주를 속인이 보면 정치를 할 것이라고 볼 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39 있지만, 당신의 풀이로는 도인 팔자라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절을 받을 팔자라는 말도 하였어요. 그러고 나니 탄허스님께서 저를 전형적인 도인 사주로 보시면 서, 저를 보고 도인이 되려면 조건이 있다고 하시면서 그 조건은 결혼을 하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결혼을 하면 기( 氣 )를 자식에게 다 뺏기고 가정에다 가 쓰니까 결혼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3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그밖에 다른 말씀은 없었는가요? 또 있었지요. 탄허스님과 소호거사님 두 분이 저를 바로 인정하고 나서, 소호거사는 그러면 아예 탄허스님 밑에서 5년간 한문을 전적으로 배우라 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자 스님께서는 그랬으면 하는 표정으로 5~7년을 배우면 한문을 달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셨어요. 사실 제가 스님을 찾아간 것은 한 문을 달통해서, 유불선을 통달하고, 그 바탕에서 사상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 었어요.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 않았군요. 그러면 가르침을 받았는가요? 처음 만나 뵙고서 그런 말을 듣고 나서, 바로 저는 청룡사를 들락 거리면서 스님에게 일대일로 한문을 배웠습니다. 스님께서 사서를 배우려면 대 학( 大 學 ) 부터 배워야 한다고 그래서 대학 부터 스님에게 배웠습니다. 그렇게 해 서 스님으로부터 한문 공부를 6개월 이상 배웠습니다. 스님은 저에게 한문에 토 를 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때에 스님 곁에 있으면서 시봉한 분이 지금 민족사 사장 윤창화씨입니다. 제가 계속해서 배우지 못한 것은 그해는 제가 졸 업반이라 졸업논문을 쓰고, 다솔사도 왔다 갔다 하고, 이일 저일로 바빠서 그랬 지요. 그러다가 졸업한 후에는 다솔사에 주저앉으면서 탄허스님에게는 거의 못 간 거예요. 그 뒤에는 탄허스님에게 다솔사에 있다는, 온다 간다는 말씀도 못 드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40 리게 되었어요. 탄허스님은 청룡사에서도 경전 특강을 하였는데, 그 강의는 안 들었나요? 저는 듣지 않았어요. 경전을 배울 겨를이 없었어요. 학교 다니고, 졸업논문을 쓰랴 그래서 그런 시간이 없었습니다. 하여간 소호거사는 탄허스님 밑에서 상원사에 가서 한 5년만 배우면, 탄허스 님은 자기 밑에서 7년만 공부하면 한문에 달통한다는 기라 그러시면서 스님은 내 사주가 여자 사주가 아니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왜 탄허스님의 회상에서 한문을 몇 년간 전적으로 배우질 않았나요? 거기에는 그럴 만한 연유가 있었어요. 제가 탄허스님을 찾아가기 그 전 해에 저는 다솔사의 효당스님을 찾아가서 효당스님에게서 배우겠다는 의 지를 갖게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효당스님을 연세대 교수님들에게 알리자, 연 세대 교수님 사회에서 효당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고, 연세대 사학과 교수님들이 비행기를 타고 다솔사로 오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효당스님의 원효스 님의 반야심경소에 대한 논문이 동방학지 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결과적 으로 그런 인연의 다리를 놓은 셈이었지요. 그리고 연세대 신학과의 한태동 박 사님과 효당스님 간에 서로 아시게 되었지요. 저는 효당스님을 처음 만나보고서 는, 그 학문과 식견에 반하고 이 스님의 가치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서 이 스님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한태동 박사께서는 효당스님과 상의해서 저를 일본에 유학을 보내 는 것을 추진했어요. 그래서 저도 일본 유학 가는 문제가 현안으로 있어서 소호 거사와 탄허스님께서 저보고 전적으로 한문 공부에 매달리라고 권유하셨지만 140 제 유학 문제로 인해서 그럴 수는 없다고 말씀드렸지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41 그러면 일본 유학은 가게 되었나요. 결과적으로는 가지 못했어요. 저를 아끼는 한태동 박사가 강력하 게 추진하였지만 그렇게는 안 되었어요. 한박사는 상해에서 태어나셨고, 그 분 의 부친은 상해 임시정부의 재무부문에서 일을 하신 분이고, 한박사는 미국의 프린스턴과 예일 대학교 두 곳에서 박사를 따신 아주 유명한 분입니다. 한박사 14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님은 효당스님을 당신의 연구실로 오시라고 하셔서 저를 무조건 유학 보내자고 하시면서, 유학을 가려면 두 가지 조건이 있는데 첫째는 일본의 고마자와대학이 나 천리대학으로 가야 하는데 그 대학의 입학허가서를 받아야 한다고 그랬어요. 그러시면서 당신이 알고 있는 학자와 제자가 전 세계에 있기에 그것은 박사님이 책임을 진다고 그랬어요. 두 번째 조건은 일본인 후견자가 있어야 하는데, 효당 스님이 일본에서 공부를 하였으니 이것은 효당스님이 책임을 지고 결정하시라 고 그랬죠. 그러나 효당스님은 제가 일본말도 잘 못한다고 하시면서 썩 내켜 하 지 않았어요. 그러자 한박사는 저를 일본에 던져 놓으면 제가 알아서 말도 배우 고, 공부를 하게끔 해야 한다고 그랬죠. 그런데 제 자신도 일본말이 능통하지 않 았고, 한문도 자신이 없었고, 유학 가서 배울 문제도 딱 찾지 못하고, 그리고 효 당에게 배울 것이 더 있을 것 같아서 머뭇거리다 결국은 가지 못했어요.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이런 내용을 스님에게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소호거사는 일본 유 학 가봐야 별 것 없다고 그러시면서, 지금 일본에 가 있는 김지견 박사가 탄허스 님에게 이런 편지가 왔다면서 일본에 갈 필요가 없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 편지 는 김지견 박사가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을 탄허스님에게 여쭙는 것이었어요. 일 본에 가서 공부하는 김지견 박사도 탄허스님에게 모르고 궁금한 것을 이렇게 물 어오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소호거사는 당장에 상원사로 가라고 막 재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42 촉을 했어요. 탄허스님은 말씀은 안 하시면서 은연중 그랬으면 하는 표정을 지 으셨지요. 선생님은 효당 최범술( 曉 堂 崔 凡 述 )스님과 깊은 인연을 이어갔지요. 그렇다면 탄허스님과 효당스님과의 인연은 어땠는가에 대해서 알려 주세요. 제가 다솔사에서 효당과 인연을 맺고 첫째 딸을 낳은 지 두 달이 된 무렵이었어요. 1974년, 그때 탄허스님, 진관사 주지이신 진관스님, 석남사 의 인홍스님, 성철스님의 따님인 불필스님, 고대 국문과 출신인 옥화(일초) 이렇 게 다섯 명이 다솔사에 왔어요. 그때 탄허스님은 효당스님과 차를 드시면서 이런 저런 말씀을 나누시고, 하루 밤 주무시고 가셨어요. 탄허스님은 제가 머물던 방의 툇마루에 앉으시더니 저 채보살이 결혼을 해서 기가 다 빠졌어, 저 여성이 기가 대단하였는데 하시는 말씀을 내가 들었어요. 스님은 내가 방안에 있는 줄 모르고 그런 말씀을 하셨는 데, 내가 우연히 그 소리를 들었어요. 그리고 탄허스님이 효당스님을 서울 석관동의 초당 선생에게 소개했어요. 그 래서 그 후로 효당이 박초당 선생을 자주 찾게 되었어요. 그 초당 선생도 사주에 서는 한 소리 하는 보통 분이 아니지요. 그래서 저도 초당 선생을 알고 지내고, 효당스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인연을 이어갔지요. 또 전각을 하는 청사 선생의 글을 탄허스님이 잡아 주었다는 말도 그곳에서 들었지요. 그런데 탄허스님의 회상에서 공부를 계속하지 않고 효당스님 회상으로 갔나요? 그것을 이제 와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면 내 기질상 탄허스님과는 안 맞았고, 효당스님과는 맞았다고 봐요. 그때에 탄허스님 주변을 보니깐 서울 142 법대 출신들이 많이 운집해 있었고, 스님을 가까이해 보니 정치에 관심이 많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43 고, 역학에도 굉장히 관심이 많았어요. 그에 비해 효당스님은 뭐라고 그럴까 학 문적이고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논리적이었어요. 멀리서 보면 제헌국회 의원 이라고 그래서 정치적인 것 같은데 가까이 가보니 이 분은 정서적이고 종교적이 었어요. 그래 내 기질상, 내가 그때 유불선을 달통해서 사상사를 전공하려고 하 였으니 자연적으로 효당스님에게서 배울 점이 더 있다고 보고, 그리 끌린 것이 14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지요. 나하고 효당스님 간에는 딱 부딪히는 것이 있었어요. 그래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그랬지만 또 역으로 보면 통하는 것도 있었어요. 탄허스님은 제 기를 인정하시면서, 기를 잘 다듬어 놓으면 도인이 되겠다고 하 셨지요. 제 머리가 좋고, 저의 기를 좋게 보시고, 좋은 말씀을 했어요. 그에 반 해 효당스님은 저의 기가 너무 세다고 하시면서 항상 하심( 下 心 )을 하라고 그랬어 요. 내가 못났다는 마음을 가지라고 그랬습니다. 그때에 저는 그 말을 들으면 저 영감이 왜 그러나 그랬지요. 이상하네, 나를 잡으려고 그러나, 그런 생각도 하 였구요. 혹시 선생님은 탄허스님의 역경에 참여하지는 않았나요? 저도 조금은 있습니다. 저는 다솔사에 있었지만 1년에 몇 번씩은 탄허스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대원암에도 가서 뵙고, 학하리 에도 연세대 친구하고 같이 가서 뵙고, 이틀 밤을 자고 온 적도 있지요. 그것이 언제인가 효당이 막 돌아가신 1978년 직후인 것 같아요. 저는 그 무렵 탈진해서, 허리를 바로 펴지도 못하고 그랬어요. 그런 상태였는데 탄허스님께서 저에게 직접 전화를 하셔서 스님 생각으로는 그때 하시던 주역선해의 교정을 봤 으면 좋겠다고 그랬어요. 스님은 그 주역의 교정을 보던 여자, 박사인지 박사과 정에 있는 사람이 봤는데 영 틀리고 시원찮다고 그러시면서 날보고 교정을 봐 달라고 그랬습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44 그래서 효당이 돌아가시고 난리를 치른 직후이고,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그런 상황에서 스님이 부탁을 하셔서 그것을 했어요. 제가 한 것이 내 기억으로는 서 너 괘는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정한 기일을 맞추지는 못하고 두 차례나 약속을 연장해서 하였지요. 허리가 아프고 그러니 빨리 할 수 없었지요. 그랬더니 우담 이라는 분이 얼른 안 갖다 준다고 야단을 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하면서 더 이상은 안 했어요. 제가 그전부터 주역은 보았고, 저는 초등학교 시 절부터 한문을 배워 알고 그래서 탄허스님이 쓰신 글씨의 내용을 알아보겠더라 구요. 스님께서 저를 보고 한문 배우는 것이 빠르다고 그랬어요. 역사와 인생에서 가정을 하기는 애매하지만, 탄허스님 회상에서 한문공부를 하였으면 여 사님의 인생은 어땠을까요? 제가 탄허스님의 말을 듣고 스님의 밑에서 한문 공부를 하였으면 아마 한학자의 길로 빠졌을 거예요. 그때 스님이 그랬거든요, 자네가 내 밑에 서 7년만 있으면 한국 최고의 한문에 달통한 한학자가 된다 고요. 그러나 저는 그때에 사상가의 길을 가기 위한 마음을 먹었기에 다솔사 효당에게로 간 것입니 다. 효당에게는 신학( 新 學 )이 있어서 아주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었어 요. 거기에 제가 그만 매료된 것이지요. 그리고 효당은 불교 안에 있는 무술적 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 그것을 뛰어넘어서는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연세 대 교수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것을 찾게 되고, 제 자신의 눈이 열려서 그 길을 택하고, 그런 인연을 갖게 된 것이지요. 혹시 효당스님이 탄허스님에 대한 말씀을 한 것이 있었나요? 144 있어요. 효당스님은 탄허스님의 한학이 뛰어나신 것은 높이 평가 하셨어요. 다만 아쉬운 것을 말씀하셨어요. 탄허스님이 청량국사나 통현장자 같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45 은 분을 자주 말씀하시고, 중국불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을 한국불교 에 대한 관심으로 돌렸으면 하는 그런 말씀을 자주 했어요. 효당은 한국불교의 고승 원효스님, 의천국사, 제관스님 같은 스님이 굉장하다고 하면서 그런 스님 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했거든요. 효당은 탄허스님이 우리 한국불교에 관심을 갖도록 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그런 것을 말씀했어요. 탄허스님을 칭송하시 14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면서, 그런 점이 아쉽다고 하셨지요. 우리 불교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반대로 탄허스님이 효당스님에 대한 말씀은 없었나요? 탄허스님은 효당스님이 알고 계시는 것이 뛰어나고, 특히 견해나 사상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한문에는 내가 더 밝지 않느 냐 고 하시면서, 한문은 자기가 최고라고 그러셨습니다. 제가 보기에 두 스님의 접점에는 만해 한용운스님이 계셨다고 봅니다. 효당스님은 만해의 제자였고, 탄허스님도 만해스님을 높이 평가했어요. 어렴풋하지만 탄허스님이 만해스님에 대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어요. 탄허스님은 만해스님과 방한암스님과의 관련을 말씀하시고, 탄 허스님의 아버님이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그런 말을 하신 것 같았어요. 탄허스님 이 그런 방면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내 어린 눈에도 그런 점이 보이더라구요. 탄허스님이 미래 예측을 하셨지요. 그렇지요. 저도 그런 말씀 많이 들었어요. 우리나라는 역학으로 보 면 간방이라 우리나라와 미국은 가까워질 수밖에 없고, 일본은 물에 잠길 것이고, 지구가 제자리를 찾을 것이며 미래는 한국이 중심이 될 것이라는 말이었지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46 그리고 저에게 1980년 초에, 대원암에서 앞으로는 중국이 개방될 것이니 중 국어를 배우라고 그러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스님 말씀을 듣고 중국어 를 배웠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탄허스님의 유묵을 갖고 계시나요? 저는 한 점도 없어요. 그때 많은 사람들은 탄허스님의 글씨를 받고 그랬는데, 저는 자의식이 너무 강해서 글씨 좀 써달라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어요. 그리고 저는 후덕한 글씨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탄허스님의 글씨는 굉장히 날 카로워요. 제 글씨 취향으로는 경봉당 글씨와 허백련 것이 좋더라구요. 이런 점 이 작용해서 그런지 저는 받고 싶지 않은 의식도 있었는가 봅니다. 탄허스님에게서 인간적인 면모를 느낀 것이 있다면. 참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탄허스님이 산삼을 드시고 열이 나 서 며칠 동안을 떼굴떼굴 굴렀다는 그런 말씀을 했어요. 이런 것을 저에게 하신 것은 굉장히 인간적인 면모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스님은 평소에도 인간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리고 스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가 대원암에 가서 뵌 적이 있습니다. 저 로서는 그것이 마지막으로 뵌 것인데요. 그때에는 몸이 수척해져서 바짝 마르시 고 그랬어요. 그때 스님께서 저에게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잘만 하면 120살까 지 살 수 있다고 그랬지만 내 몸뚱이를 지탱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는 말씀 을 하셨어요. 이렇게 스님께서는 허심탄회하게 말씀을 하셨어요. 저는 그런 모 습을 보고서 큰스님도 역시 인간이구나 하는 점을 느꼈어요. 그리고 저에게 아 들딸을 잘 키워야 한다는 말씀도 주셨어요. 모든 것을 수렴한 나이의 효당의 씨 146 를 받았으니, 그 자손을 잘 키워 큰 인물로 만들어야 한다고 그랬어요. 그런 말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47 씀이 기억이 납니다. 탄허스님은 어떤 분으로 보시나요? 저는 스님을 한학적인 측면에서 자기 소명의식을 가졌던 분으로 봅니다. 스님을 돌이켜 보면, 스님이 하신 번역을 보세요. 탄허스님이 스님들이 14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보는 기본 경전을 다 번역해 놓지 않았습니까? 우리 후학들은 그걸 갖고, 그것 을 지렛대로 삼아서 나갈 수 있는 거예요. 만약 그런 스님의 작업이 없었으면 지 금 스님들은 무엇을 갖고 배울 수가 있었겠습니까? 오늘 귀한 증언 감사합니다. 제가 한 말이 탄허스님의 진면목을 찾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 요. 김교수님은 효당스님에 대한 글도 쓰시고 그랬는데, 제가 앞으로 효당스님 자료집을 꼭 만들려고 합니다. 교수님도 그 작업에 참여해 주세요. 이곳까지 오 셔서 이런 대화를 나눈 것 자체가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48 스님과의 추억을 잊을 수 없어요 대상 최정화 고려대 졸업, 대학생불교연합회 활동, 현재 수행 중 일시 2011년 9월 27일 장소 커피클래스 서울, 이촌점 선생님은 고려대 불교학생회 출신으로, 탄허스님과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선 불교와의 인연을 들려주세요. 저의 집안은 본래 유교 집안이었어요. 그렇지만 항상 불교에 관심 이 많았지만 접근할 수 있는 여건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제가 고려대 사학과에 64학번으로 들어가서 불교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지요. 학과에서 답사를 가 게 되었는데, 1학년 봄에 전라도 지방으로 가서 백양사, 내장사, 화엄사 같은 데 를 가게 되었죠. 그때에 독실한 불교 신자인 김동기라는 선배가 대학생불교연합 회라는 것을 알려준 거예요. 그래서 답사 후에 조계사로 가서 대불련 행사를 가 서 보고서 대불련에 가입하고 그해 여름 월정사에서 열린 대불련 하계수련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148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49 그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불교를 만났군요. 월정사로 수련회에 갈 때에는 대불련과 동국대 종비생 1기생과 같 이 그해 7월인가에 갔어요. 그때에 탄허스님이 저희들에게 특강을 해주시고 그 랬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탄허스님을 알게 되어서 그 이후로 자주 탄허스님을 만나 뵙고, 편지도 드리고 그랬죠. 월정사에 수시로 갔습니다. 그때에 탄허스님 14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은 여대생을 아주 좋아하셨어요. 1964년부터 탄허스님과 특별한 인연을 갖게 되었군요. 그러면 1965년 월정사에서의 고 려대 학생들의 사고에 대해서 들려주시지요. 그렇게 탄허스님을 뵙고 그러다가, 제가 대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에 우리 고대 불교학생회 단독으로 수련회를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탄허스님에게 고대 학생들이 월정사로 수련회를 가겠다고 말씀드리니깐 스님께 서 좋다고, 오라고 하셔서 월정사로 가게 된 것입니다. 제가 연계를 시켜서 그 렇게 된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고대 불교학생회 지도교수도 탄허스님과는 그 때에는 가깝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때에는 탄허스님과 연관이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어요. 저는 처음에는 월정사 수련회에 안 간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깐 스님께서 왜 안 오느냐고, 돈이 없어서 그러냐고 그러면 돈을 내준다는 말씀도 하시고 그래서 저도 참가했지요. 그런데 그때에는 고대 불교학생회가 활성화되지 않아서, 수련 회에 참석하는 학생들을 학교에서 전체적으로 모집하였어요. 그래서 그때 수련 회에 참석한 학생들이 38명(남학생 12명, 여학생 26)이었는데 정작 불교 신자는 별로 없었어요. 제가 아는 저의 동기도 몇 명 가고 그랬죠. 지도교수는 두 분이었는 데 손명현 교수는 철학과 교수였고, 김영두 교수는 정외과 교수였습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50 월정사에서의 수련회의 내용을 들려주세요. 월정사에서의 수련은 열흘이었나, 1주일이었나 그것이 아련합니 다. 탄허스님에게서 특강, 유불선을 회통하는 강의를 들은 것 같은데 그 내용은 생각이 안 납니다. 숙식은 서별당, 함석집에서 했습니다. 그때에는 법당을 짓기 전이었습니다. 수련회 회향을 할 때 저희들은 오대산 보궁참배를 하고 나서, 그 때에 돌아가신 원보산스님의 영결식이 상원사에서 있어서 그 영결식에 참석하 기로 하였습니다. 그때에 전국의 큰스님들이 상원사에 다 오신 상황이었지요. 그러면 사고의 상황을 괴로우시겠지만 회고를 해주세요. 그런데 사고가 난 그날, 아침부터 비가 왔거든요. 저희들은 보산 스님의 영결식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후에는 일부 학생들은 비로봉에 올라가고, 저를 포함한 일부 학생들은 먼저 상원사를 출발해서 월정사로 돌아왔어요. 저는 탄허스님에게 먼저 내려간다고 말씀을 드리고 나서 내려왔죠. 제가 내려올 때에 는 사고가 난 동피골의 다리가 아직 안 떠내려 가고 물이 다리에 찰랑찰랑 해서 겨우 건너왔어요. 제가 월정사에서 막 저녁 공양을 하려고 하는데, 사고가 났다는 소식이 들려 온 거예요. 그래서 저희들이 막 뛰어가서 보니까 박하경이라고 사회학과 애인 데, 나하고는 고등학교 동창도 되고 대학교 동기인 애가 제일 먼저 발견되었어 요. 그때에 제가 보니깐 상처도 없었어요. 저는 그 애가 죽은 줄도 모르고 실신 한 것으로 봤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죽은 시체를 본 적이 없어서 그 애가 죽은 줄 몰랐어요. 그때의 상황은 몇 명이 살았는지, 몇 명이 죽었는지를 전혀 몰랐죠. 그 다음 날까지 시신이 다 수습되고 그랬어요. 저와는 친하였던 불교학 생회 회장인 윤복순이라는 경영학과 남학생도 죽었고, 그때에 살아남은 학생이 150 두 명인가 있었죠. 그 중에 한 명이 수학과의 심재학이라고 있었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51 그때 사고를 겪은 일행은 열세 명이었는데, 지도교수 손명현 교수하고 학생이 열두 명이었지요. 월정사로 내려오는데 동피골 다리가 끊어져 있으니 진퇴양난 이었지요. 교수님은 산길로 돌아가자고 하고,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서 물길을 건너자고 하였다고 그래요. 결국은 물길을 스크럼을 짜고 가자고 해서 건너다가 중간에 여학생이 물에 휩쓸리니까 전체 학생들이 물에 빠져서 사고를 당하 15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였죠. 사고 때에 다리 근처의 언덕에 비구니 스님 세 명인가 있었다는 말이 있 었어요. 사고가 난 후, 7월 14일에는 조계사에서 영결식이 열렸어요. 그런데 궁금한 것은 그 사고 에 대한 탄허스님의 반응입니다. 탄허스님은 사고가 날 때에 상원사에 계셨어요. 큰스님들이 상원 사 마루에 앉아 계셨는데, 저는 스님에게 먼저 내려간다고 인사를 드렸어요. 조 계사 영결식을 하기 전에, 월정사에서는 고별식을 갖고 시신을 서울로 옮겼어 요. 그때에는 제가 정신이 없어서 탄허스님이 고별식과 영결식에 계셨는지는 기 억이 없어요. 조계사에서는 계시지 않았던 것 같아요. 사고는 생생한데, 탄허스 님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어요. 탄허스님도 무척 괴로우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고 이후에는 고대 불교학생회를 끔찍하게 생각하셨어요. 제가 궁금한 것으로 조계사 영결식 집전을 춘성스님이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요. 혹시 이 내용을 아세요? 저는 그때 정신이 없어서 그런 데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춘성스님 이 탄허스님과 친해서 그랬는지 모르지요. 저는 망월사에서 춘성스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제가 학교 다닐 적에 동국대 목정배 교수가 주관하던 UBC(서울 시내의 대학교 불교학생들을 모은 모임)라는 단체에 따라다니고 그랬는데, 그 단체에서 망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52 월사의 춘성스님에게 가서 법문을 듣고 그랬을 때에 저도 거기에 있었어요. 사고가 난 이후에, 1년 뒤 사고 장소에 연화탑이라는 비석이 섰지요. 그래요. 저는 사고가 난 후에 계속해서 49재, 100재, 1주기 추도 식에 참석했어요. 1주기 때에 동피골, 그 사고 장소에 저희들이 모금도 하고 그 래서 연화탑을 세웠습니다. 그 탑에는 오가는 나그네시여 잠시 머물러 합장하 소서 라는 비문과 조난당한 학생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요. 그 비문은 김영두 교수가 짓고, 학생들의 이름은 탄허스님의 글씨로 새겨져 있어요. 그때부터 고 려대 불교학생회에서는 매년 7월 10일이면 연화탑에 모여서 기념행사를 해 왔 어요. 저도 해마다 그 행사에 참가하였습니다. 우리 고대 불교학생회 출신들은 그날 모여서 얼굴을 보는 것이 전통이 되었죠. 연화제 그것 때문에 만나요. 월정사와 탄허스님께서도 그 행사에 관심이 많았지요. 그럼요. 처음에는 월정사에서 제물도 차리고 염불도 해주고 그랬 어요. 중간부터는 고대 불교학생회에서 제물을 차리고 그랬지만요. 1주기 기념 겸 연화탑 제막식 때에는 탄허스님이 집전을 해주신 것으로 기억해요. 지금도 그 행사를 하면 월정사 스님이 나오셔서 염불, 독경을 해주시지요. 그리고 월정사에다가 고려대 학생들이 수행하는 절인 대학사를 지으려고 한 일이 있어요. 그것이 세월이 너무 오래가고 그래서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월정 사에서 상원사로 올라가는 중간의 개울 건너서 오른쪽에다가 고대생들이 와서 수행을 할 수 있는 수련원을 짓겠다고 해서, 저도 3학년 때인가 4학년 때인가 대 구 동화사에 저 혼자 가서 모금 약정을 받은 일도 있어요. 그러나 저는 그 장소 에 가 보지는 못했어요. 고대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니까 탄허스님이 흔쾌하게 152 땅을 주신다고, 장한 일이라고 격려를 해주시고 그랬어요. 그런데 모금을 하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53 가 중도에 흐지부지된 것 같아요. 이것은 고불회(고려대 불교학생회 출신 모임) 동문들 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추진하다가 불발탄이 된 것이지요. 선생님도 사고로 인해서 정신적인 고통이 적지 않았지요? 그래요. 저는 사고 이후에 불교학생회에 자주 안 나갔어요. 그래 서 지금 말한 연화탑과 대학사의 건립에 대한 진행과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릅 15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니다. 불교학생회에 나가면 그 사고가 자꾸 연상이 되고 그래서 의식적으로 피 한 것 같아요. 적극적이지 않았어요. 그리고 제가 젊은 나이에 중 된다고 통도 사 내원암, 용인의 화운사에도 왔다갔다 하고 그랬어요. 그러나 탄허스님에게 말씀은 드리지 않았고, 그렇게는 되지 않았어요. 저도 그래서 방황을 많이 했어요. 그걸 잊고 싶어서요. 지도교수이던 손명현 교수는 학생들로부터 좋은 반응은 없었는데, 김영두 교수는 학생들에게 좋은 인 상이 있어서 계속 불교학생회를 지도해 주셨고, 학생들이 따르고 그래서 졸업 후에도 그 교수님을 계속해서 찾아다니고 그랬다고 해요. 김영두 교수님이 지금 은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시기 전에는 치매가 걸렸으면서도 정화 왔냐 고 하면 서 저를 찾았다고 후배들이 그러더라구요. 저는 김영두 교수님도 찾아뵙지 않았 어요. 그쪽의 일을, 그 사고를 잊으려고 해서 그 관련자들을 애써 회피한 것이 지요. 탄허스님과의 인연은 계속되었나요? 그렇지요. 사고난 후에도 탄허스님은 계속 찾아뵈었습니다. 스님 이 서울에 오시면 여기 저기 모시고 다니고 그랬어요. 스님을 모시고 조중훈씨 댁에도 가고, 쌍용그룹 김성곤 회장의 집에도 가고, 을지로 3가에 유불선에 능 한 민 이라는 분에게도 모시고 갔습니다. 세검정의 석파정, 대원암, 동국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54 대학선원, 월정사에서 스님을 자주 뵈었지요. 탄허스님은 인재를 중요시 여기고, 대학생들에 동양사상을 공부해야 한다고 권유하였지요. 그렇습니다. 스님은 대학생을 무척 좋아하셨지요. 그리고 동양사 상을 공부해야 한다는 말씀을 귀가 아플 정도로 들었죠. 스님은 역학도 좋아했 어요. 스님은 한마디로 유불선에 능통하신 분이지요. 그런데 저는 그 당시에는 학구적이지 않았어요.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고요. 그때에 탄허스님을 찾아오 던 이화여대의 장미자라는 사람이 생각이 납니다. 탄허스님에게 글씨를 받지 않았나요? 많이 받았지요. 저는 월정사 방산굴에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은 어디에 갔는지, 하나도 집에 없어요. 탄허스님이 가신 지도 30여 년이 되었고, 얼마 후면 탄신 100년이 됩니다. 저는 결혼을 하고 나서는 탄허스님과 거리가 멀어졌어요. 결혼을 해서 부산에 가서 살기도 하였지요. 그러다가 제가 우리 아들이 일곱 살 때인가 에 현충일 연휴를 맞아서 오대산 월정사에를 갔는데, 가는 날에 스님이 열반하 셨다는 종이 울리더라구요. 그날 방산굴에 갔더니만 스님은 정신도 없는 그런 상황이어서 저는 아들하고 스님에게 절을 하고 나왔어요. 그런 슬픈 일을 겪었 어요. 선생님에게서 탄허스님, 월정사는 어떠 의미인가요? 154 탄허스님을 자주 뵈다가 보니 오대산 스님들하고도 인연을 이어 갔습니다. 월정사를 하도 드나들고 그래서 월정사 스님들을 잘 알게 되었지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55 희찬스님, 삼보스님, 삼지스님, 혜거스님 등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지금 민족사 사장을 하는 창화스님도 알고 지냅니다. 또 월정사에 가서 삼보스님, 삼지스님 과 머루와 다래를 따 먹던 일도 이제는 아련합니다. 그리고 탄허스님과 인연이 많은 운학스님과도 자주 만나고 그랬어요. 그때에는 월정사에 가려면 아침에 출발해서 하루 종일 걸렸어요. 월정거리에 15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서부터 걸어서 가고 그랬어요. 저는 그 이후에도 1년에 몇 번씩 갔어요. 상원사 에 가서는 일면스님, 태응스님을 만나고 그랬죠. 오대산은 저에게는 고향 같아 요. 최근에는 비로봉도 처음으로 올라가 보고 그랬어요. 그리고 저는 월정사에 가면 불전함에 돈을 넣기보다 탄허스님 시절 후원 보살이었던 강릉보살 할머니 에게 용돈을 드리고 그랬어요. 지금은 그 할머니가 몇년 전부터는 월정사 입구 의 노인요양원에 가 계신다는 말을 들었는데, 잘 계신지 궁금하네요. 오늘 귀한 증언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다하시네요. 제가 아는 내용이 탄허스님 역사를 복원하 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잘 기억을 하지 못해 죄송하네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56 민족정신의 관점에서 불교를 바라보신 어른 대상 이동형 고려대 졸업, 대학생불교연합회 활동, 불전 번역에 주력 일시 2012년 5월 9일 장소 민족사 선생님은 선림보훈 을 번역해서 펴내는 등 불교 고전 작업에 주력하고 계십니다. 선생님 도 탄허스님과의 인연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렇습니다. 저는 고려대 72학번인데 학교에서는 재료공학을 공 부했어요. 그렇지만 고려대 불교학생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탄 허스님을 알게 되었지요. 불교학생회가 수련회를 월정사로 갔었는데, 고려대 불 교학생회는 선배들이 60년대 중반 상원사에서 사고당한 것을 기리는 월정사에 있는 연화대에 가서 해마다 행사를 했습니다. 이런 연고로 탄허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공학도로서 불교와의 깊은 인연을 갖게 된 것이 특이하군요. 156 저는 고등학교 시절 폐병을 앓았는데, 그때 제 아버님이 사다 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4

157 현암사의 불교 시리즈 책을 거의 다 통독했어요. 이것이 제가 불교를 만난 인연 이지요. 대학에 들어가서는 불교학생회에 가입하고, 또 탄허스님을 만나게 되었 는데 스님이 계시는 대원암으로 본격적으로 찾아가서 인사도 드리고 불교와 유 교에 대해서 여쭈어 보게 되었죠. 제가 놀러가면 스님은 저를 손자처럼 대해주 셨어요. 15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대원암으로 가서 스님을 뵌 특별한 연고가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공대생의 기질과 안 맞고, 불교철학이 맞았기에 저 혼자 불교 공부를 하였는데, 그런 저를 스님이 지도해 주신 셈이지요. 그리고 저의 집안이 이퇴계의 집안입니다. 스님은 유불선 전체에 대해서 대단한 조예를 갖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나는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찾아가서는 불교와 유교에 대하여 많은 질문을 했어요. 탄허스님은 고려대에 가서 강연, 강의를 하셨는데 그런 것을 지켜보셨지요? 그럼요. 고대 불교학생회는 1년에 두 번, 봄가을에 외부인사를 초 청하는 대강연회를 여는 것이 전통입니다. 스님도 초청을 받아서 강연을 하였습 니다. 그 강연회는 고대 101호실이라는 강당에서 늘 열렸는데, 스님이 오셔서 강연을 하시면 700~800여 명의 학생들이 와서 듣고 그랬어요. 스님은 고대에 서 자주 강연을 하셨어요. 그때 스님은 강연을 끝내시고는 중국 노래를 한 곡씩 불러 주고 그랬어요. 고려대의 강연회에는 청담스님을 비롯한 큰스님들이 안 오 신 분이 없을 정도입니다. 지금은 그런 것이 다 없어졌지만. 왜 그렇게 고대생들이 많이 들었을까요? 스님은 강연을 하실 때에 불교의 이야기를 하시면서도 유교, 도교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58 등을 해박하게 이야기하시면서 우리 한민족의 미래에 대한 것을 많이 말씀하셨 습니다. 미래불교의 전망, 미래 예측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시니까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지요. 이런 것이 감동이었고, 스님의 메시지가 전달되었어요. 그리고 스님은 대학생을 무척 아꼈어요. 인재양성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이지 요. 사실 그때에는 대학생도 적었고, 대학생이 불자가 된다는 것은 한국에서는 획기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당시 분위기도 그랬고, 종단에서도 대학생 불자를 미래를 위해서 키워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그랬어요. 이런 흐름에 스님이 앞장 을 서신 것입니다. 참 그리고 스님은 그때 고대생들에게 강의하시면서, 예언하 기를 고대에서 대통령이 나온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내가 한번 고암종정을 찾아갔더니, 그 스님도 고대에서 대통령이 나온 다고 예언을 했어요. 스님은 고려대 교수들에게도 강의하였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그럼요. 불교학생회의 지도교수였던 김영두 교수라고 있었어요. 이 교수님의 전공은 정치사상이었는데, 그 분야의 대가입니다. 스님과 이 교수 가 죽이 잘 맞았어요. 두 분이 미래전망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죠. 김 영두 교수는 4 18 고대 교수들의 데모를 주도한 분인데, 그때에 교수들이 나 가야 한다고 주장한 분입니다. 또 손명현 교수도 있었는데 이 교수님도 불교에 관심이 많은 학자였어요. 김영두 교수는 스님과 서너살 차이밖에 안 났지만, 아 주 가깝게 지냈어요. 스님이 고대에 오셔서 장자 특강을 하시고, 화엄학 강의도 한 것으로 알고 있 어요. 저는 학생이라 들을 수는 없었고, 그런 것을 알고는 있었어요. 장자를 강 의하신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고대 교수들은 이 어른에 158 대한 좋은 반응을 가졌죠.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59 그 무렵 탄허스님의 고뇌는 무엇이었을까요? 제가 그 무렵 스님의 고뇌를 말해 본다면, 스님은 우리 민족정신을 깨쳐 보자는 강한 집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스님은 그런 것을 할 수 있 는 인재를 양성하시려고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열매를 맺지는 못하신 것이 아닌 가 합니다. 그때 스님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이 이 어른의 뜻을 반( 半 )도 이해하지 15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못하였어요. 그런 스님의 뜻을 끈질기게 받아들이려고 달려든 사람도 없었어요. 또 당시에는 지식인들이 한문소양도 없었어요. 그런 스님의 진면목, 고뇌는 이 해하지 못하고 관상이나 보러 대원암에 가고 그랬지요. 우리 친구들 대부분이 그랬습니다. 이 어른이 항상 하시는 이야기가 한민족의 미래 모습입니다. 그런 것을 굉장 히 많이 고민하셨어요. 한편으로는 기독교 문명의 종말론까지 이야기를 하셨어 요. 지금 스님이 한 말이 사실이 되어가고 있지요. 또 스님은 남북통일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하셨어요. 물론 불교 이야기도 많이 하셨지만, 어떤 면 에서는 유교, 주역 이야기도 많이 하셨어요. 주역의 괘를 갖고 앞으로 한민족의 미래가 밝은데, 그것을 담을 그릇이 없다고 하셨지요. 이것은 인재가 없다는 말 이지요. 동양사상의 근본은 인간론이니깐 유교에서 말하는 군자론, 도교에서 말 하는 진인론,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론 등 이런 것을 조화시키는 것을 갈구하셨 습니다. 그러면서 기독교 문명에는 회의적인 입장이었어요. 선생님이 탄허스님에게 받은 영향은 무엇이었나요? 스님은 저에게 열심히 공부를 하면 대학 총장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고 저를 격려해 주셨지요. 저를 보시고는 철학을 하면 좋은데 하시면서, 무척 사 랑해 주셨어요. 제가 대학시절에 근사록 의 무극과 태극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 더니, 스님은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공부를 하게, 공부를 열심히 하면 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60 절로 알게 돼 그러시더라구요. 그때 저는 삼보법회가 풍전상가에서 하였던 스 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것이 대승기신론, 원각경, 화엄경회석인데, 이것을 저는 다 들었어요. 취직공부는 안 하고 이런 강의나 들었지요. 제가 대불련 서 울지부장을 하였는데 그 당시 대불련 사무실이 풍전상가에 있어서, 스님 강의를 자연스럽게 듣게 되었어요. 제가 강의를 들으면 스님은 아주 좋아하셨어요. 스님은 저에게는 친근하게 대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은 엄하게 느꼈어요. 저는 학교에서는 공학을 공부하였지만 집안 환경, 제 고민 이런 것이 어우러져 서 스스로 한문과 불교를 공부했어요. 제가 본격적으로 불교에 대한 작업을 한 것은 1979년에 쓴 지장경과 효사상을 정리한 책입니다. 효사상이라는 개념은 동양사상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책에서 저는 김교각스님에 대해서 중국의 사적을 근거로 하여 제일 먼저 존재와 사실을 밝혔죠. 탄허스님은 항상 책을 내실 때에 강조하신 것이 주소( 註 疏 )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 영향을 받아서 주소를 철저히 합니다. 사실 주소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주 소를 보지 않고서 내는 책은 수박 겉핥기 식입니다. 금강경의 주소를 한 사람이 500명이나 되지 않습니까? 탄허스님의 현토와 직역 중심의 번역을 어떻게 보시나요? 스님이 하신 현토, 직역은 상당한 가치와 의미가 있어요. 탄허스 님 같은 분이니까 현토와 직역을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스님은 주소를 제대로 다 신 분입니다. 만약 의역을 하더라도 주소의 함입( 陷 入 )이 저절로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불교에서는 주소를 보지도 않고, 거기까지 가지도 않아요. 불교 책을 쓰는 사람으로 솔직한 이야기를 해 보면 한문권 불교, 전통적인 불 교, 우리 고유적인 불교는 없어질 것입니다. 지금 한국불교에는 초기불교, 남방 160 불교, 티베트불교, 요가 등 별의 별 것이 다 들어오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이런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61 것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한국불교는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탄허스님이 현토 작업을 해 놓았기에 명목을 유지해 나가고 있는 것입 니다. 만약 탄허스님이 그런 작업을 해 놓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 뻔하였습니까? 지금 한국불교의 승속( 僧 俗 )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굉장히 불행한 것 입니다. 그때 탄허스님은 이렇게 공부를 안 하고, 책을 안 보면 일본이나 미국 16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에서 가서 불교를 배워 오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스님이 일본이나 미국에 가서 불교를 배워올 것이라는 예측은 충격적입니다. 스님이 말씀하신 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스님은 질과 양의 문제도 언급하셨어요. 질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양으로만 가는 것을 대단히 걱정했어요. 지금 교수들 중에서 경전 해석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이렇게 되면 고려대장경도 못 팔아먹어요. 번역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대장경 번역을 다시 해야 합니다. 지금 나온 한글대장경은 도무지 말이 안 됩니다. 탄허스님의 역사성, 위상, 정체성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 당시에 스님들이 탄허라는 스님은 교학자이지, 선승이 아니라 는 말이 나왔어요. 무진장스님과 대만에 유학을 갔다 온 법산스님은 탄허스님만 큼 해박한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이해되지만, 해박하지도 못한 사람이 그 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냐고 하였어요. 공부도 하지 않은 사람이 탄허스님을 말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한국불교는 선에 치우쳐 있어서 문제입니다. 간화선도 제대로 몰 라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철스님이 승화가 되었어요. 최근에는 성철선이라는 말도 있던데 이것은 문제입니다. 성철스님은 산에 있으면서 선을 해서 인정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62 받았지만, 탄허스님이 갖고 있는 가치는 더 많다고 봅니다. 그리고 종단 자체와 학자들도 더욱 더 문제가 많아요. 제가 공부한 견지로 보 면 경허스님에게 선 이론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도교적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한암스님은 선의 이론에 치밀합니다. 선을 정리한 것은 한암스님입니다. 경허스 님처럼 도교적인 성격을 갖고 있고, 도교에서 온 황벽스님 같은 경우는 거칠어 요. 그러나 유학에서 온 한암스님과 종밀선사의 경우에는 이론이나 수행이 치밀 하지요. 이런 것은 중국의 역대 선사를 보더라도 같아요. 지금 한국불교에서는 선을 제대로 모르면서도 선을 망치고 있어요. 이런 여러 측면을 고려하면서 탄허스님의 정체성을 정립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님을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요. 스님은 유불선을 회통하였고, 나아가서 는 예언, 개벽, 해원사상이 있는 증산도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스님을 정의 하기가 힘들어요. 스님을 정확하게 단정하기가 어려워요. 그렇지만 저는 스님은 승복을 입었기에 대선사( 大 禪 師 )라고 봐야 된다고 봅니 다. 스님을 굳이 강백으로 말할 필요는 없어요. 스님은 방한암스님의 법을 이어 받았으니 응당 선사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같은 후학들은 지켜야 할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스님을 선사라고 봅니다. 탄허스님이 다른 고승과 차별점이 있다면. 스님은 사실, 굉장히 범접하기가 어려운 분입니다. 그러나 인자한 면도 있어요. 저는 스님을 할아버지처럼 느꼈어요. 도산서원의 원장을 한 저의 조부님이 이 어른보다 다섯 살이 더 많았거든요. 스님은 인간의 예의와 염치를 중요시했어요. 항상 예의를 지켜야 하고, 염치 를 모르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162 예의와 염치를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다른 스님들은 이런 것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63 잘 말하지 않아요. 탄허스님의 다면성, 사상의 특별성이 있지 않을까요? 탄허스님에게는 불교학자 이외에도 문학 방면의 학자, 교수들이 많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 문학평론을 하였던 백철 선생, 김운학 16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스님이 탄허스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분들이 외국의 이론을 갖고서, 일본 문학에 영향을 받고 연구를 하였지만 탄허스님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아 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문학평론을 하는 분들의 이론, 책을 보면 불교적인 시공관의 구절이 나옵니 다. 그런 것의 하나로 삼세관, 과거 현재 미래의 직관이 동일하다는 것이 있 어요. 그런데 이것은 화엄경의 통일장, 화엄경의 원융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나선비구경 의 결론에서 말하는 삼세일체론이 무애사상으로 흘러가 버렸지만요. 탄허스님을 연구하려면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할까요? 저는 스님을 연구하려면 스님이 펴낸 신화엄경합론 의 의미를 제 대로 짚어야 한다고 봅니다. 스님이 하신 그 작업은 민족적 작업입니다. 그 책 은 굉장히 중요한 책입니다. 그러나 그 책을 지금 시대에 맞게 다시 출판해야 한다고 봅니다. 스님이 하신 것은 고투 번역이어서 애매하고, 지금 사람들은 알 수가 없어요. 그를 알아보지 못 해요. 그래서 현대 용어에 맞게 해야 합니다. 지 금 이 시대의 한학자, 불교학자들이 덤벼들어서 제대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 국불교가 선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도 화엄경이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예를 들면 평창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 때에 월정사가 주관이 되어서 화엄경 오교장의 주소를 달아서 펴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월정사가 화엄도량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64 이니, 월정사와 강원도가 합작으로 그런 것을 펴내면 문화올림픽으로 승화시킬 수가 있어요. 탄허스님의 어떤 점을 계승해야 할까요? 그런데 솔직히 이야기를 하면, 지금 불교에서는 한국의 유교나 한 문을 제대로 몰라요. 여기에서 탄허스님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한국의 정신에서 불교와 유교를 빼놓고서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불교와 유교가 민족 정신입니다. 그런데 탄허스님은 민족정신의 관점에서 불교와 유교를 바라보신 어른입니다. 민족정신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불교를 제대로 봐야 하고, 유교도 봐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유교는 이승만에 의해서 말살되고 향교 재산도 다 없어졌어요. 그래서 유교는 돈이 없어요. 근래의 스님들 중에서, 승려사회에 서는 퇴계에 사상이 있냐 없냐고 하고 있어요. 또 율곡에도 철학이 있느냐고 의 아심을 갖고 있어요. 그러나 율곡문집을 보면 사상이 다 있어요. 불교를 믿는다 고 하면서, 불교 이외에는 무조건 배척합니다. 이래 갖고서는 민족정신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여간에 스님은 불교도 망했고, 유교도 망했다고 보시면서도 민족정신을 되 살려내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탄허스님이 그렇게 불 교와 유교가 망할 줄을 미리 아시고 민족정신을 되살리는 일환으로 화엄경을 현 토, 번역하신 것입니다. 지금 승가는 이원론, 이율배반적인 사고에 빠져 있어요. 그러나 이런 모순, 문 제를 배척한 분이 바로 이 어른(탄허)입니다. 지금 스님들은 머리만 깎고 출가하 였을 뿐이지 무지몽매의 상태로 있습니다. 책을 보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고서 는 불교가 갖고 있는 민족정신을 찾을 수가 없어요. 지금 한국불교는 고려말 불 164 교의 분위기입니다. 승복만 입어도 신도들에게 삼배를 받으니 대단한 줄로 알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65 요. 탄허스님 연구를 제대로 해서 스님들에게 경종을 울려야 합니다. 제가 거듭 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탄허스님은 불교가 21세기에 민족정신의 근간으로 나 아갈 방향을 제시한 분입니다. 탄허스님의 정체성은 유불선의 통합을 갖고서도 말할 수는 있지만, 탄허스님의 특성은 불교를 민족정신 차원에서 발견한 것입니 다. 이런 것이 큰스님이 펴낸 책에 들어가 있습니다. 스님은 민족의 뿌리를 불 16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교와 유교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님의 작업은 중요한 것이었 습니다. 사실, 스님이 오대산에서 서울로 온 목적도 이런 당신의 뜻을 펼치기 위 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번역, 강의 같은 것에 너무 혹사하시는 바람에, 그 런 일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본연의 일을 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학자 들이 제대로 밝혀내지 않아서, 대중은 모를 뿐이지요. 이런 것을 후학, 제자들 이 하지 않으면 직무유기입니다. 특히 월정사가 그 중심에 서야 되지 않을까 합 니다. 선생님은 탄허스님의 영향으로 출가할 마음은 없었나요? 왜요? 저도 스님의 밑에서 출가를 하려고 했어요. 대학교 다닐 적 에 머리를 밀고서 대원암으로 스님을 찾아갔지요. 그랬더니 스님은 너는 안 돼 해서, 하루만 자고 나왔어요. 만약 제가 스님 밑에서 출가를 하였으면, 한문과 불교사상을 많이 배워서 큰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르죠. 탄허스님의 유묵을 갖고 있지 않나요? 저는 없습니다. 그전에 탄허스님이 조선일보에 대담한 것이 1면 전체에 보도되고 그랬어요. 저는 그것을 다 모아 두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66 새로운 관점, 그리고 솔직한 의견을 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제가 말한 것이 탄허스님 연구의 지평을 새롭게 하는 데에 참고가 되길 바랍니다. 탄허스님의 연구, 화엄경을 조명하는 출판 작업이 조속히 활성 화되기를 기대합니다. 166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67 소탈한 스님이 그리워요 16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대상 권영채 탄허스님 전속 기사(6년간), 자영업(강릉, 성산) 일시 2012년 7월 25일 장소 권영채 자택 강릉시 성산면 지금은 자영업을 하시지만, 예전에는 탄허스님을 전적으로 모신 기사님이라는 말을 들었 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독일 광부로 있으면서 돈을 조금 모아서 1973년에 귀국하였어요. 그래서 강릉에서 택시운수업을 하였어요. 그런데 1974, 1975년 에 중동의 유류 파동이 나자, 그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해서 저의 사업은 그만 망했죠. 그러자 저는 할 일이 없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쉬고 있는데, 저를 아는 택시기사가 저를 월정사에 소개를 했어요. 그 기사는 삼보스님, 도명스님 등의 월정사 스님들을 모시고 다녔는데, 삼보스님이 포니 완을 사서 탄허스님을 모시 려고 하면서 전속 기사가 필요하게 되자, 저를 소개한 그 기사에게 마땅한 사람 을 찾는다고 해서 탄허스님을 모시게 된 것이죠. 저를 면담한 삼보스님은 좋다고 하면서, 같이 고생을 하자고 해서 일을 하게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68 되었습니다. 저는 그 이전에 월정사, 보현사는 왔다 갔다 하면서 희찬스님은 뵈 었지만 탄허스님은 뵙지 못하였어요. 탄허스님을 모신 것을 지금에 와서 회고해 보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로서는 큰스님을 1978년부터 6년간이나 모신 것은 아주 좋은 일이지요. 그런 일을 하게 된 것이 고맙죠. 감사하고 영광이죠. 다만 스님을 모실 때에 불교 공부를 하였으면 좋았을 터인데, 운전만 하는 바 람에 불교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 남아요. 저는 스님이 열반하신 후에 는 집의 애들을 결혼시키고서는 절로 들어가려고 했어요. 그래서 공부 좀 하려 고 했는데,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되었지요. 탄허스님은 매정하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가까이서 뵌 당사자로서는 어떠신지요? 그런 말들이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요. 제가 스님을 모시고 정 주영 현대그룹 회장집을 몇 번 간 일이 있습니다. 정주영 회장님의 사모님이 독 실한 불자이고, 스님을 좋아하셔서 자주 갔어요. 사모님이 계신 그 집에는 정주 영 회장님의 차를 제외하고도, 차가 세 대나 있었어요. 모시고 가서 공양을 할 때가 되면, 사모님이 스님의 상을 따로 차려서 드립니다. 그러면 스님은 저를 따 로 먹게 하질 않고, 꼭 스님과 같이 식사를 하도록 하십니다. 사모님이 저는 따 로 차려줄 것이라고 해도, 그냥 당신 상에 수저 하나만 더 놓으면 된다고 하셨어 요. 그러면 저는 그런 식사가 참 어렵죠. 소탈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군요. 168 그럼요. 1980년인가 전두환씨가 대통령으로 등장하기 이전 정국 이 혼란할 적에 스님은 노태우, 김복동, 전두환 이 세 사람의 집을 찾아가서 만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69 난 적이 있습니다. 김복동씨는 그 분의 처갓집으로 갔어요. 그 세 사람을 3인방 으로 불렀지요. 이 분들을 스님은 두 번씩 만났어요. 통행금지가 있을 때인데 스 님은 그 분들의 집에 밤 열두 시 경에 가서는 새벽까지 대화를 하십니다. 그럴 때에는 그 양반들이 번들번들한 차를 보내서 모시게 합니다. 그렇지만 스님은 그 차를 절대 안 타시고, 포니 투를 타고 갑니다. 그러면 그분들의 차는 조그만 16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우리 차를 에스코트해서 가고 했지요. 스님이 그분들과 대화를 할 때에는 저는 같이 있지를 않고 따로 있었지만 식사를 할 때에는 꼭 저를 불러서 같이 하십니 다. 그리 매정한 분이 아닙니다. 그런 비사가 있었군요.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은 그때에 스님이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저를 보 고, 누가 대통령이 되면 좋겠냐고 묻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그때에 보안사령관 을 하던 노태우씨가 되는 것이 제일 낫겠다는 제 생각을 말씀드렸어요. 그랬더 니 스님은 아무 말씀 않고, 빙그시 웃는 것을 제가 백미러로 보았습니다. 그때 스님이 수경사에 가셔서 지금의 남산에 있는 충정사라는 절의 위치를 잡아 주시 고 그랬어요. 그 무렵에 스님 주위에서 스님은 왕사, 국사 같은 위상이라는 말이 나왔어요. 대통령을 지도하시고 가르치시면 왕사, 국사가 아닙니까? 그러나 스님은 스님 스스로 왕사라는 말은 하시지 않았죠. 탄허스님은 새벽부터 글을 쓰시고 그랬지요. 제가 스님을 모실 때에는 주로 개운사 대원암, 대전 학하리, 월정 사 방산굴에 주로 계셨어요. 저녁에 주무실 적에는 시봉하는 스님의 안내를 받 아서 주무시지만, 저는 스님이 새벽 몇 시에 일어나시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70 러나 아침, 다섯 시 무렵에 스님의 방에 들어가 보면 스님의 방은 깨끗하게 치워 져 있고, 스님은 딱 정좌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스님은 보통 스 님들이 하듯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는 것보다는 어떤 공부에 대해서 생각하시는 것 같았어요. 눈을 감으시고, 손가락으로 뭘 쓰시는 것 같았어요. 스님은 늘 정좌하시거나 항상 글을 쓰고 그랬습니다. 또 신도집에 가셔도 원 고 보따리를 들고 가셔서, 틈만 있으면 원고를 쓰셨습니다. 시간만 나면 번역이 지요. 주역의 번역을 마친 후부터는 원고 보따리를 갖고 다니시지 않았지만요. 그리고 원고를 쓰시다가 팔이 아프시거나 피로하시면 종로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의사가 와서 침도 놔 드리고 뜸도 뜨고 그랬습니다. 탄허스님이 공부하신 것이 대한 것을 들은 것이 없나요? 탄허스님의 실력은 그냥 나온 것 이 아니잖아요. 스님은 상원사에 가시면 상원사를 둘러보시고는 꼭 북대에를 가셨 어요. 꼭 한 번씩 들렸습니다. 이것은 스님이 일제 때에 입산하고 나서 상원사 에서 한암스님을 모시고도 있었지만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스님은 북대 에 혼자 가서 책을 보았답니다. 지금은 길이 좋아졌지만, 내가 스님을 모시고 다 닐 적에는 길이 나빴어요. 그리고 스님을 모시고 고향에 간 적이 있습니다. 은사는 만나지 않았고, 고향 친구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그 친구들은 학자는 아니고, 평범 한 농부로 사는 분들이었어요. 그분들은 스님에게 말을 놓으면서 공부만 그리 하더니, 글이 높아졌다며, 그렇게 높게 되었다며 라고 했어요. 그분들이 스님은 서당에서 글을 배우는데 열네 살 적에 서당 선생이 나는 이제 더 이상 가르칠 수가 없으니,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 고 그러셨대요. 그 분들은 스님이 큰 170 스님이라는 것을 잘 몰랐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71 스님은 미래 예측에 관심이 많았어요. 스님은 비결파이었지요. 어디에 유명한 사람이 나왔다면 꼭 가서 만났습니다. 그러면 그 유명한 사람에게 저의 관상, 미래를 보게 시켰습니다. 그 래서 제가 모델이 된 적이 수없이 많았어요. 그러면 스님은 눈을 감고, 가만히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었죠. 17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스님이 아낀 스님, 학자들은 누구였는가요? 글쎄요. 제가 지켜본 입장에서는 스님 중에서는 희찬스님을 제일 로 쳤어요. 희찬스님이 탄허스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시지 않았습니까? 희찬스님 을 제일 아끼고 믿었죠. 그리고 부동스님이 글재주가 있다고 좋아하셨지요. 처 음에는 공부를 잘 한다고 그래서, 저는 그 스님이 수제자가 된다고 그랬어요. 또 공부와 관련 없이는 삼보스님을 제일 좋아하셨지요. 그리고 재가 학자로는 전주대의 박완식이 실력이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상투 틀고 스님을 찾아오던 심백강을 스님은 참으로 많이 아꼈죠. 그러나 저는 아쉽 게 생각하는 것은 스님께서 상좌들을 좀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하시면 서 가르치셨으면 하는 점이지요. 상좌교육을 잘 하셔서, 당신 후계자를 키워 놓 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제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 님은 번역하시고, 책을 내는 것에 주력하셔서 그럴 시간도 없었어요. 탄허스님과 친근한 고승은 누구였는가요? 제가 모실 적에 제일 가까운 큰스님은 석주스님이었어요. 석주스 님이 스님을 더러 찾아오셨고, 또 스님도 칠보사에 자주 가셨습니다. 비구니 스 님으로는 진관사의 진관스님이 자주 오시고, 스님은 진관스님의 말이라면 흔쾌 히 듣고 그랬어요. 진관스님은 스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셨어요. 그래서 진관사에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72 는 자주 갔지요. 그리고 한 번은 스님이 해인사를 들른 적이 있습니다. 다른 곳을 갔다가, 우연 히 시간이 나서 제가 모실 적에 해인사를 갔습니다. 스님은 해인사에 가서 특별 한 말씀은 안 하시고, 절 경내를 둘러보셨지요. 그때에 탄허스님이 오셨다고 하 니까 해인사 종무소에서 소임을 보는 스님이 나와서 인사를 하고 그랬어요. 그 스님의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성철스님의 상좌라고 그랬어요. 그래 그 스님이 탄허스님을 시봉하는 스님에게 큰스님들께 이야기를 해서, 큰스님들끼리 만나 게 하자고 그랬어요. 즉 탄허스님과 성철스님의 만남을 주선하면 어떻겠냐고 그 랬어요. 그런데 탄허스님은 좋다고 하셨는데, 저쪽 성철스님이 안 만난다고 연 락이 와서 성사되지 못했지요. 저는 두 스님은 서로 간에 이야기가 안 통한다고 보았어요. 성철스님은 참선 만 강조하고, 그냥 나오는 대로 말씀을 하시는 분이잖아요. 더욱이 성철스님은 책을 보지 마라고 그러셨잖습니까? 그러나 탄허스님은 학승이라고 불리면서, 모든 것을 책에 근거해서, 책을 위주로 해서, 책에 나오는 것을 자료로서 말씀 하시는 분이잖아요. 그러면 자연 안 맞지요. 성철스님이 하신 것,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게 도무지 무슨 말입니까? 그게 화두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을 해서 알아듣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저 는 그 말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탄허스님을 모실 때에 혹시 야단맞은 일은 없었나요? 그런 것은 없었어요. 제가 모시고 다닐 때에 다행히 사고도 없었어 요. 다만 제가 과속을 해서 벌금은 몇 번 받았지요. 스님은 급한 편이었지만, 그 래도 별 말씀이 없었습니다. 172 다만, 제가 스님이 입적하시기 2년 전에 스님 모시는 것을 그만두려고 그랬어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73 요. 스님을 모시면서 받는 월급으로는 생활이 어려웠어요. 애들이 셋이나 되고, 대학을 들어가기 시작해서 그만두려고 그랬는데 스님께서 지금 나가봐야 더 고 생을 할 것이고, 아마 2년 후에는 스님에게도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권기사에게도 좋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말렸어요. 사실, 그때 저는 월정사에서 나 가서 할 일이 뚜렷하지는 않아서 스님 말씀을 듣고 일을 계속하였지요. 17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인 연 1980년 초반, 오대산이 분란이 일어났을 때에 스님의 고민이 많았지요. 그럼요. 스님이 말씀은 안 하셨지만, 속이 많이 상했지요. 지금에 와서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그때 스님이 방산굴에 계시다가 월정사를 떠 날 적에 차 안에서 제가 스님에게 스님의 말을 제일 잘 들을 사람은 동수스님 입니다 라고는 했어요. 제가 말을 해서 그런지 동수스님이 주지가 되었지요. 동 수스님은 그때에 인기가 별로 없었어요. 그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스님에게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니깐 스님은 어떤 결정을 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 얼마 나 골치가 아프셨겠어요? 탄허스님이 약간 일찍 열반하셨어요. 스님은 평소에 90살, 120살까지 살 수 있다고 그러셨어요. 그런데 동남아 여행을 갔다 오신 뒤부터는 병이 났습니다. 그때 저는 휴가를 얻어서 집 에 있었는데, 스님이 귀국하시고는 식사를 하시면 소화가 잘 안 된다고 그랬어 요. 그래서 진찰을 해았더니 요즈음 말로 위암이었습니다. 희찬스님께서 수술을 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지만 스님은 그것을 거부하셨어요. 그때에 수술 을 하였으면 좋았을 터인데, 스님은 완강하게 별일이 아니라고, 무슨 소리냐고 하시면서 당신 몸에 칼을 못 대게 했어요. 내가 보기에 스님은 오래 사실 것이라 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스님의 말씀이면 상좌스님들은 꼼짝 못 하시고 그랬으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74 니, 더 이상 말을 못했지요. 스님이 열반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 중에서 기억나는 것은. 스님은 병이 심해지자 한양대병원에 입원하셨어요. 그러시다가 병 원에서 나오셔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27일 후인가에 돌아가신 것으로 기억 해요. 그리고 방산굴에 오셔서 스님이 내가 몇 일 후에, 몇 시에 가신다고 말을 하셨어요. 스님의 마지막에도 시봉한 사람이 저와 시봉한 상좌, 또 한 사람이 박 임환입니다. 박임환을 만나면 새로운 것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박임환이 는 스님이 보관하던 편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거예요. 탄허스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하시나요? 나는 스님을 시대를 초월한 큰스님으로 보고 싶어요. 스님은 보통 사람,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셨어요. 스님은 오직 공부만 하다가 가신 어른입니다. 오늘 하시기 어려운 말씀을 해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제가 한 말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사는 이런 촌구석까 지 찾아오셔서 감사드립니다. 174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75 2장 탄허큰스님과 재가 제자들 박용열 전창열 명호근 고준환 서우담 김문환 김동건 박명혜 장화수 송찬우 여익구 박완식 심백강 윤창화 최옥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76 버리는 공부를 일러준 스님 대상 박용열 월정사 입산, 아동문학가, 동시 작가, 속초에서 의사 활동, 한국불교청소년문화진흥회 이사장 등 역임 일시 2010년 2월 16일 장소 부영아파트 속초 선생님은 한때 탄허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으며, 오대산 수도원에서 공부하면서 문학에 뜻을 두어 아동문학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속초시에서 40여 년간 의사로도 활동하 였지요. 오대산과의 인연을 들려주세요. 나는 이북에서 청진의학전문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6 25가 나서 1950년 11월 27일에 남으로 왔어요. 미군의 LMG를 타고 구룡포에 내려 서, 여기서 국군에 입대했어요. 3사단 수색대였죠 때에 군에 있다가 어떤 인연으로 오대산으로 오게 되었나요? 제가 6 25전쟁 때 부상을 당해서 하사로 제대를 했어요. 1954년 도 4월 1일, 대구에 있는 육군병원에서. 그 후 대구에 있는 화학연구소에서 몇 176 달을 문관으로 근무했지요. 그런데 내가 폐가 한쪽밖에 없어서 거길 나와서 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77 을 무렵 오대산으로 들어온 것이지요. 내 딴에는 오대산에서 죽으려고 오대산 산속을 헤매다가 마침 약초꾼을 만났는데, 아래로 내려가면 큰절인 월정사가 있 는데 가면 의탁할 수 있다고 해서 월정사로 내려갔지요. 그런데 처음에는 월정사에 있던 스님이 날 받아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 달 간을 월정사를 들락거리면서 부탁하였지요. 그런데 어느 날 탄허스님이 서울에 17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서 오시더니, 누구냐? 들어오라 고 그랬어요. 아마 희찬스님이 내 이야기를 좋 게 하였던 모양이에요. 탄허스님은 오는 사람 내쫓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말 라는 말이 있다면서, 날보고 있으라고 하였어요. 그래서 머리를 깎고, 허름한 승 복으로 갈아입고서는 처음에는 나무해서 불을 때는 부목으로 있었습니다. 몸도 나쁘고, 일도 못하고 그러니깐 불만 때는 허드렛일을 한 1년 했어요. 선생님이 예전에 회고한 기록에는 서기를 보았다는 내용이 있어요. 그렇게 월정사에 들어와서 부목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인가 원주 에 있는 1군사령부 평창 사령관이라는 사람이 별을 달고 월정사에 왔어요. 그런 사람이 오니까 난리가 났지요. 그런데 내가 딱 보니깐, 우리 형 친구더군요. 그 래서 난 창피해서 밥상을 들다가 그만 마을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 사령관이 가면서 내 앞으로 편지를 쓰고 희찬스님 앞으로도 편지를 썼어요. 내 편지에는 돈 3만 원을 넣었더군요. 그 편지를 본 희찬스님이 날 부르시더니, 이력서를 쓰 라고 그랬어요. 스님은 내 이력서를 보더니 놀라더라구요. 그러면서 왜 그런 학 벌이 있는 사람이 그런 것을 말도 안했냐고 그래요. 그러나 당시 내 생각은 중이 되는 데 무슨 학벌이 필요하냐고 해서 그런 것은 일체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 서 그 후에 내가 서기로 있었지요. 희윤이라고 지금은 죽었는데, 그때 재무를 보 았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78 그 무렵, 월정사에는 오대산 수도원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지켜본 내용을 들려주 세요. 수도원은 1956년도 봄에 시작했어요. 탄허스님이 인재양성을 하 려고 세운 거예요. 불교는 대교과, 일반은 대학 출신들에게만 자격을 주어서 뽑 았어요. 그때에는 이런 사람들이 드물었어요. 수도생들은 한 20명 되었어요. 그 런데 일반인들은 전쟁으로 오갈 데 없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소요스님 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 스님도 수도생 출신입니다. 머리는 비상한데, 스님 노릇을 잘 못하는 것 같았어요. 이북에서 온 민기스님도 수도생 출신입니다. 그 러나 중이 된 지는 나보다 늦었지요. 오대산 수도원이 개설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는가요? 신문에 공고를 했어요. 공고를 했으니 외부 사람들이 알고 들어왔 지요. 그때에는 월정사 가려면 서울 종로3가에서 강릉으로 가는 버스가 딱 한 대 있었어요. 그나마 얻어 타기도 힘들어요. 월정사는 아주 산골이었지요. 아주 말할 수 없는 산골이었어요. 수도생들에게 탄허스님이 법명을 주어서 스님을 만들어 주었지요? 그래요. 난 지산( 志 山 )이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수도생들은 도자( 道 子 )라고 불렀어요. 나는 용열이었기에 열도자라고 했습니다. 종후라고 있 었고, 전라도에서 온 운학이라고 있었어요. 운학스님은 초등학교도 안 나오고, 나이도 속이고 그랬어요. 한번은 종후하고 운학스님 때문에 대중공사가 붙어서 둘을 내쫓았어요. 그래 종후가 보따리를 들고 나가는 것을 내가 붙잡아 다시 오 게 했어요. 종후가 나처럼 이북에서 나왔는데 거기서 나가면 굶어 죽지 어떻게 178 되겠어요. 대중공사가 붙으면 결정대로 해야지 별 방법이 없어요. 그러면 탄허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79 스님도 어떻게 못해요. 그때에 보니 운학스님은 공부를 지독하게 하더라구요. 그리고 시은이라고 있었어요. 그 사람은 이윤찬이었는데 일제시대에 헌병 보조 원 출신입니다. 내가 사무를 맡았는데 시은스님이 나한테 일을 다 시키고 그랬 어요. 나는 몸이 아픈데. 김곤경은 늙은 사람이었고, 최장송은 법명이 망해입니 다. 이 사람이 밥을 많이 먹어서 내 공양도 떠서 주고 그랬는데 탄허스님이 그것 17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을 보고는 밥을 많이 먹으면 바보가 된다는 그런 말을 했어요. 이필규는 지도스 님입니다. 지도스님은 해병대 2기 출신인데, 아주 다혈질이었어요. 여자들은 지 장암에 있으면서 탄허스님의 강의를 들었어요. 신옥선이 있었고, 비구니로 향엄 이라고 있었어요, 수도생 중에는 문학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만. 문학평론을 하던 김종후라고 있었어요. 김운학도 종후 때문에 영 향을 받아서 문학평론가가 되었어요. 김종후는 이름을 인상이라고 하였는데, 낙 산사 최원허스님의 상좌가 되었지요. 그런데 김종후가 낙산사 고아원 보모와 연 애를 하고 속가에 나오려다가 홍천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죽었어요. 김종후의 묘 소에 와서 배부른 여자가 와서 우니깐 알았지요. 그 여자가 지금도 속초에서 유 치원을 하고 있어요. 수도원생 중에서 특이한 사람들을 회고하여 주세요. 유생도 한 분이 왔다 갔어요. 상투 틀고 갓 쓰고 왔지요. 스님으로 는 운학스님이라고 한 분이 있었어요. 그리고 거기 있을 때 의사들이 세 명이나 의사를 그만두고 오겠다고 편지가 왔어요. 그러나 안 받아 주고 내쫓고 그랬 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80 수도원의 생활은 어떠하였나요? 새벽 세 시에 일어나서 밤 아홉 시에 잘 때까지 스님들하고 똑같이 했어요. 수도원 생활은 철저해요, 생활이 엄격했어요. 처음에는 그렇게 하니까 죽겠더라구요. 토요일과 일요일은 빨래도 하고, 진부에 함께 나가서 술도 먹고 그랬지요. 나물 뜯으러 가기도 하고. 그런데 간혹 밤중에도 수도생들이 진부에 내려가서 술을 먹고 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지금도 부산에 있는 각성이라는 스님이 있는데, 그 사람도 수도원에 와 있었는데 우리를 보고 술을 먹고 온다고 막 뭐라고 하더군요. 그 사람은 탄허스님이 아끼는 사람이었어요. 하여간 수도 생들이 술을 먹기도 하고, 사회에서 살다가 왔으니 이런저런 비사들이 있었 지요. 수도생들은 서별당의 함석집 방 하나에 두 명이 들었지요. 그러나 난 서기라 혼자 방을 썼어요. 그리고 월정사 산판하는 것도 내가 다 했고, 측량도 많이 했어요. 언제인가 현해스님이 오대산에서 내가 서기를 제일 잘 보았다는 그런 소리를 하시더라구요. 난 지도스님과 친했어요. 그런데 그 스님은 다혈질이었 어요. 수도생은 아니지만, 수도원에 오고 간 인물들은 누가 있었나요? 종정하였던 혜암스님도 사굴사에 있으면서 가끔 들으러 왔고, 문 인들이 많이 왔어요. 문학평론가인 조연현, 중앙대 문리대 교수 하던 백철 그 분 도 와서 강의를 들었고, 기자들이 와서 취재도 해 갔어요. 그래 <불꽃>이라는 소 설을 쓴 선우휘씨도 자주 왔어요. 1957년도인가 조선일보, 그 신문에 자주 나 왔어요. 선우휘씨가 탄허스님을 참 좋아했어요. 많이 왔다 갔어요. 신문 양면, 3면을 점령하다시피 했어요. 탄허스님의 사상이 소개되었지요. 그때 박완일은 180 우리가 월정사 있을 때에 원주 구룡사 주지로 임명받고 있었어요. 내가 서기니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81 까 임명장을 써 주고 그랬어요. 양주동 선생도 왔다 간 것 같고, 함석헌씨도 왔 다 갔지요. 함석헌씨는 탄허스님의 강의를 듣고 사상에 영향을 받았어요. 수도원 운영 재정은 어떻게 마련하였는가요? 건봉사 주지를 하던 양청우스님이 재정을 댄다고 하였는데, 그것 이 잘 안 되었어요. 건봉사의 비구, 대처 싸움 때문에 그리 되었지요. 내가 사무 18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실에 서기로 있었기에 잘 알지요. 식량이 없어 우리는 진짜 배를 많이 곯았어요. 우리는 보리깨죽을 많이 먹었어요. 그래서 수도원이 해산된 것이에요. 실제 운 영은 희찬스님이 하였지요. 희찬스님이 고생 많았습니다. 나는 서기로 있으면서 임야도 취급했거든요. 동아연필에서 날 매수하려고 눈감아 달라고 한 것을, 난 도둑질 할 줄 몰라서, 나무를 동아연필에게 팔아서 그 돈을 희찬스님에게 몽땅 다 갖다 주었어요. 난 그때 시( 詩 )를 쓰고 그랬지만 원고지 살 돈도 없었어요. 그 리고 난 여기 건봉사 포교당까지 분담금을 걷으러 오기도 하였어요. 그러면 수도원에서는 무엇을 배웠는가요? 강의는 탄허스님이 칠판 강의를 했어요. 교재로 한 것이 영가집하 고 기신론, 노자 도덕경, 화엄경, 장자 남화경, 육조단경을 배웠어요. 강의는 탄 허스님이 혼자 했어요. 하루에 두 시간 했어요. 그 교재는 수도원 서기로 있으 면서 내가 프린트하고 그랬어요. 나는 육조단경, 노자 도덕경, 기신론을 하고 작 년에 죽은 시은스님이 영가집을 하고 그랬지요. 가리방 긁고, 프린트하고, 책자 를 만드는 것을 나 혼자 다 했어요. 시은스님은 자기가 하는 것도 날보고 다 시 키고 그랬어요. 어느 날 난 교재 프린트하는 것 때문에 몇 달을 강의를 안 들어갔어요. 그랬는 데 강의를 할 때에 탄허스님이 넌 강의 참석을 못해서 해석을 시켜도 못할 것이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5

182 라고 그래요. 그래서 나는 한번 시켜보시라구 그랬어요. 탄허스님이 시킨 것을 내가 쫙 해석했어요. 그랬더니 수도원에 있던 사람들이 머리가 좋은 녀석이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때 오대산 수도원이라는 간판은 붙어 있었고, 원훈은 탄허스님 글씨로 강의하는 벽에 딱 붙였어요. 액자에 넣지 않고. 수도생인 김종후 일기에 보면 수도생들도 특기를 살려서 돌아가면서 특강을 하였다는 내 용이 있어요. 난 의학 강의를 했지요. 그리고 수도원에서는 소임으로 간병( 看 病 ) 을 봤어요. 나는 어디에 가도 간병이었어요. 이남에 내려와 보니, 의사들이 공 부를 안 했어요. 실력도 없고 엉터리가 많았어요. 이북에 있을 때, 우리는 공부 를 많이 했어요. 수도원이 해산되기 이전에 대처승이 쳐들어와서 공부 분위기가 망쳐졌다고 합니다. 대처승이 만날 쳐들어와서 우리와 싸움을 많이 했어요. 나는 싸움 을 잘해서 대처승을 때렸는데 그만 대처승 얼굴에 10cm나 상처가 났어요. 그래 대처승 쪽에서 나를 상해죄로 원주경찰서에 고발하여 절에서 그때 돈 5만 원을 물었어요. 예전에 박선생님이 쓴 글에 보면, 탄허스님에게 고무신도 안 사준다면서 대들었다는 표현 이 나와요. 그건 사실입니다. 고무신도 없으니, 맨발로 다니고 그랬어요. 내 가 탄허스님에게 퉁명스럽게 뭐라고 그러니까 스님이 야 멍청아! 버리는 공부 를 하러 절에 들어왔으면, 버리면 되지 뭘 그래 그랬어요. 그래도 탄허스님과 182 그 시절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183 수도원이 해산되고, 탄허스님은 어디로 가셨는가요? 수도원이 해체되고, 탄허스님은 영은사로 가셨어요. 탄허스님은 거기 가셔도 강의를 했어요. 영은사에 사람이 많았어요. 운학스님, 배도원스님, 비구니 명성스님, 녹원스님도 와 있었어요. 비구니들이 거기 많았어요. 댓 명이 따라갔어요. 18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박선생님은 수도원이 해산되고서는 어떻게 되었나요? 나는 월정사의 영감사라는 이조실록을 보관하던 절에 가 있었습니 다. 그러다가 희찬스님이 몸이 아프니까 금천포교당에 가 있으라고 그랬어요. 그래 가보니까 배도원스님이 거기 주지로 있었죠. 지도스님은 해인사로 갔어요. 거기서 다시 직지사 관응스님에게 가서 좀 배우면서 1년을 있었는데 관응스님 이 나를 자기 상좌 만들려고 애쓰고 그랬어요. 김천 개운사에도 가 있었고, 그 후에는 남방으로 내려가서 있었어요. 저는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았습니다. 탄허스님 상좌 중에서 하동산스님에게 계를 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 어요. 그때에 탄허스님이 편지로 내 법명을 초연( 超 然 )으로 하라고 그랬어요. 선생님은 영은사에 가지 않으셨나요? 왜요, 가끔 갔지요. 내가 영은사에 가니까 탄허스님의 어머니가 거 기 왔더라구요. 거기에서 화엄경과 노자 도덕경을 배웠어요. 스님의 노자 도덕 경과 장자 강의는 세계적이에요. 내가 폐가 나쁘니까 탄허스님이 나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래 날보고 영은사 옆에 있는 신흥사에 가서 있으라고 그랬어요. 그때 영은사에는 배도원, 오녹원 스님이 와 있었죠. 혜거스님은 그때 행자로 들어왔는데, 요새 불교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더군요. 수중스님, 두구스님이 있 었고, 저 경상도에 있는 법등스님도 있었는데 그 스님은 배도원스님의 상좌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184 죠. 희찬스님의 친동생 지금 보현사에 있는 인보스님도 거기에 있었고, 운학스 님도 와 있었고, 비구니들은 절 바깥에 있으면서 공부하러 들락날락 하였어요. 수도원이 지속하여 발전할 수 있었으면 한국불교 차원에서 좋은 교육불사였을 것으로 생 각할 수 있습니다. 수도원의 안은 탄허스님이 낸 것으로 알고 있고요. 사실은 월정사 나무를 팔아서 아카데미 같은 수련원을 만들려고 했어요. 그런데 비구, 대처 분 쟁 때문에 안 되더라구요. 내가 종무소 서기를 볼 때, 뭐인가? 아카데미 같은 집 을 지으려고 교통부장관을 지낸 이종린이라고 그 사람이 실제 설계까지 해 가지 고 왔어요.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때에는 강원( 講 院 )도 별로 없었어요. 화제를 바꾸어서 선생님이 소설 <하산>을 쓴 홍주스님과 인연이 있다고 들었어요. 선생님 과 홍주스님이 오대산에서 만났지요? 그 사람이 내가 어디를 가도 날 쫓아다녔어요. 홍주스님의 문학적 소질도 나한테 배운 것 같아요. 내가 선학원에 있을 적에 홍주가 찾아와서 봐달 라고 해서, 내가 교정하고 많이 잡아 주었지요. 홍주스님이 <하산>을 쓰고 나서, 강화도 인근의 휴전선에서 총탄을 맞은 시신으로 발견되 고, 그로 인해서 오대산 스님들도 정보부에 끌려가서 고초를 겪었지요. 나도 홍주스님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불려가서 욕 좀 봤어요. 3개 월간 밥도 제대로 안 주고 그래서 고초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신분이 확실 한 사람입니다. 내가 상이군인이지 않습니까? 홍주가 나를 찾아왔을 때 속가에 나와서 한의과대학에 다니라고 권해도 말을 안 들어요. 내가 사람을 병들게 하 184 고, 사람을 죽인 거예요. 영은사에 있는 오덕수라고 그 사람이 지금 한의사를 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185 는데 그것도 내가 이야기해서 그리 된 것입니다. 내가 영은사에 있을 때, 몸이 나빠서 삼척 신흥사에 가 있었는데 덕수 아버지가 그 절의 대처승이라 내가 오 덕수를 알게 되었지요. 최근에 부산에서 <하산>에 대해서 박사논문을 쓴다고 여 자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자료 좀 보내달라고. 18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그밖에 홍주스님, 소설 <하산>에 대해서 들려주실 내용은 없나요? <하산>이 나오고(1967년 6월) 나서, 내가 홍주스님과 같이 김동리 선 생의 집으로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김동리 선생이 잘 썼다고 그러더군요. 그때 김동리가 내 시를 보더니, 노자 장자 사상이 있는 것 같다고 그랬어요. 아마 내 작품에 탄허스님의 영향이 있었던가 봐요. 나중에 <하산>을 어느 출판사에서 다시 낸다고 나에게 몇 번 여자들이 찾아왔 어요. 그렇게 다시 나오고, 신문에 보도가 되니까 홍주의 누이동생이 속초에 사 는데 내 병원으로 날 찾아왔어요. 난 반가워서 그랬는데, 그 여자는 인세를 달 라고 그래요. 책이 많이 팔려나가 큰돈이나 번 것처럼 생각하더군요. 어느 기록에 보니까 선생님은 탄허스님이 입적하였을 적에 조가를 만들었다고 해요. 그건 내가 조계종 총무원에서 지었어요. 가사도 짓고, 작곡도 하 였지요. 그래서 행사날 거기에 온 찬가를 부른 여자들이 부르고 그랬어요. 수도원의 의미를 찾는다면? 한국의 얼을 찾는 데 기여한 것 같아요. 수도원생은 당시로서는 최 고 엘리트였어요. 서울대학 출신도 있었어요. 당시는 대학 출신이 드물었습니 다. 하여간 탄허스님은 하나의 인재를 키워 보겠다는 그런 것이었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186 수도원의 사진, 교재 같은 것을 보관하고 계시나요? 교재는 없어요. 벌써 몇십 년 전의 일인데, 그런 것이 보관될 수가 있나요? 사진은 조금 있어요. 산에 가서 표고버섯을 재배하고 찍은 것이 이것입 니다. 찾으면 탄허스님과 같이 찍은 것도 어디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오대산 수도원을 중심으로 탄허스님을 회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세월이 가서 많은 것을 기억 못해요. 그리고 최근에 몸이 불편하고 밖의 내왕도 잘 못해요. 탄허스님의 기일에는 꼭 월정사에 가려고 합 니다. 월정사에 가면 탄허스님 생각이 납니다. 제가 불교를 알게 된 것은 탄허 스님 때문이지요. 186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187 내 인생에 이정표 역할을 하신 분 18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대상 전창열 국방부 법무관리감, 육군본부 법무감, 법조불교인회 회장, 변호사 활동 일시 2012년 1월 31일 장소 전창열 사무실 변호사님은 탄허스님과의 인연이 무척 깊으시지요. 우선 불교와의 인연이 어떻게 되었지 부터 말씀을 들려주세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적에 공부는 잘 안 하면서 친구들과 몰려다니 다 보니 싸움을 하다가, 그만 학교에서 정학을 맞았던 일이 있습니다. 그래 이 래서는 안 되겠다고 여기고 사람들과 안 어울리려고, 친구들이 오지 못하게 오 지로 공부하러 떠났습니다. 그래서 간 곳이 사자산 법흥사였습니다. 법흥사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는 정말 산골의 산골이었어요. 그것이 1960년도입니다. 거기에 가 있다 보니, 종소리 풍경소리를 듣고 같은 또래의 스님들을 만나면서 불교가 좋아진 거예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188 대학에 가서 불교 활동을 하셨지요? 1961년도에 서울법대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간 서클이 법철학회이 었어요. 그런데 들어가 보니 나하고는 안 맞았어요. 그 다음에 들어간 곳이 법 불회였어요. 법불회는 1959년에 만들어졌고, 그때의 회장이 신호철군이지요. 그때에 모신 큰스님이 청담스님, 금강경으로 유명한 신소천스님이었어요. 그 시 절에는 서돈각 박사 집에서 먹고 다니면서 동국대 최동수군과 김윤권, 나하고 신호철 이렇게 네 명이 늘 붙어 다녔어요. 이들이 대불련 창립의 주역이지요. 그 리고 홍도스님이 있었고. 대불련 창립은 최동수군이 만들자고 제안을 해서 시작되었지요. 중간에 명호 근, 고준환도 합류했고요. 하여간 내 기억으로는 대불련의 필요성을 제안한 것 은 최동수였어요. 그런데 언제, 탄허스님을 만나시게 되었나요? 대불련이 1963년 9월에 결성되고 그해 겨울에 대불련이 법주사에 가서 제1회 수련대회를 하였어요. 그때 추담스님이 있었지요. 그러고 나서 그 다음해에 이기영 박사가 오대산에서 대불련의 제2회 수련대회를 하고 나오셨어 요. 이때에 나는 대한불교청년회가 주관한 이기영 박사의 원효의 대승기신론 강 좌를 들어서 이박사를 알고 있었지요. 이박사가 월정사에를 갔다 오시더니, 오 대산에 생불( 生 佛 ) 같은 스님이 있다고 하시면서 탄허스님을 극구 칭찬하시더라 구요. 나하고 명호근이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얼마 후에 신문에 탄허스님이 조 계사에 나오신다는 기사가 나왔어요. 그래 나하고 명호근이 스님을 뵈러 조계사 주지방에 간 거지요. 잠시 인사만 드린다고 하였는데, 그만 한 시간이 넘어가 버 렸어요. 그때 우리들은 대학생으로 혈기가 펄펄하였을 때였고, 그 당시만 해도 188 젊은 불자가 없을 때예요. 그래서 그러신지 우리를 만난 스님은 동양의 역사에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189 서 시작하여 국가와 불교의 문제를 죽 이야기하셨어요. 왕도정치와 패도정치, 국가적 과제와 지도자의 자세 그리고 안창호 선생님의 말씀도 하시면서 청년들 의 자세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셨어요. 동양사상과 역사적 사례를 자유자재로 구 사하시면서 논리적으로 말씀을 하셨어요. 그런 모습을 본 우리는 완전히 뿅 간 것이지요. 그때 스님은 돌안경을 쓰셨는 18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데, 얼굴이 훤한 게 달덩이 같았어요. 눈에서는 광채가 나서, 사람을 꿰뚫어 보 는 것 같았지요. 그런 감격적인 만남이 있었군요. 조계사에서 스님 말씀을 들은 우리는 스님에게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 그날 저녁 무교동 인근의 중국집으로 가게 되었지요. 그날 저녁에 스님 과의 대화에 참석한 사람은 우리들하고 대불청 회원들도 같이 가게 되었어요. 그것은 이기영 박사가 대불련과 대불청을 다 관여, 지도한 것에서 온 것이지요. 이박사가 대불청에서 대승기신론소를 강의하였어요. 그래서 우리들도 대불청의 손창대, 이일소, 김정호 등과 알고 가깝게 지냈지요. 그리고 그때에 스님을 시 봉한 스님이 도문스님이었어요. 그날 대화를 한 이후, 연 2~3일을 조계사 앞의 한성여관 거기에서도 스님의 말씀을 들었어요. 그리고 기억나는 것은 그 무렵 조계사에서 금강경 강의를 하 던 분으로 천재 소리를 듣던 이원선씨라는 분이 탄허스님을 만나는 것을 지켜봤 지요. 우리들은 호기김이 발동해서 두 분이 법담을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았어 요. 그런데 이원선씨가 스님에게 인사를 하더니, 몇 마디만 서로 하시고는 별로 묻지를 않더라구요. 두 분이 하였던 대화 내용은 기억에 없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190 그 후에는 어떻게 만나셨는가요? 그 다음에 우리가 오대산에 갔습니다. 우리 젊은이 생각으로는 그 렇게 고매한 인격과 깊은 학문을 지닌 스님이 산속에만 계신 것이 안타까웠지 요. 그래 방산굴에 가서는 스님에게 도회지로 나오십시오 하면서, 세상을 이 롭게 해달라고 졸라댔어요. 그랬더니 스님은 아직 때가 안 되었다고 하시면서 겸손의 말씀을 하시었지요. 스님은 내가 면장 하나도 못했는데, 김탄허가 나라 와 국가를 위해서 할 일이 있겠어? 라고 하셨어요. 그러시면서도 싫지는 않은 표정이셨지요. 탄허스님은 그 이후(1966년)에 동국대 대학선원장으로 나오셨지요? 맞아요. 그래서 스님의 서울 근거지가 생겼으니 우리가 자주 찾아 가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당시 대학선원에서 하였던 스님 의 강의에는 듣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어요. 대학생들도 소수였고, 많지 않 았어요. 그때 삼보스님이 시자로 있었지요. 스님의 강의가 인기가 높아진 것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예요. 삼보법회 때 에는 대중들이 강연을 많이 들었어요. 탄허스님은 국가와 정치에 관심이 많으셨지요. 그럼요. 사실 스님은 국가의 현실 속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역할 에 대해서도 나름의 원칙이 있으셨어요. 스님은 크게는 우주의 진리를 펴는 것 이 중요하다고 보셨어요. 그래서 옛날 식으로 동양사상에 입각해서 집권자를 제 대로 교화시켜서 세상에 진리를 구현하시는 방식을 생각하였어요. 이를테면 왕 사의 역할을 기대하셨지요. 스님은 출세간에서도 할 역할이 있지만, 세간에서는 190 국왕에게 부촉을 해서, 국왕이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을 하게 해서, 나라를 공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191 평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도 사람의 의지와 의리를 강조하셨어요. 어떤 사람이 집이 찢 어지게 가난하면서도 나라와 사회에 헌신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셨어요. 그렇 게 끼니가 없이 가난한 사람이 찾아오면 용돈도 주시면서 일생을 나라를 위해 바쳤다는 칭찬을 하셨어요. 일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바치고, 해방이 되어서는 19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건국 시기에 올바른 정치를 하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을 높이 평가하신다는 뜻이 었지요. 스님 주위에는 그런 사람이 많이 찾아오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우리 젊 은이에게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그러셨어요. 스님을 찾아온 사람 중에서 기억나는 사람이 해운거사지요. 그 분은 주역, 정 역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관상을 봐주고 그랬어요. 그때 우리는 젊었 으니 불교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현상, 현실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니까 해 운거사의 말에 솔깃하였지요. 변호사님이 젊은 시절에 스님에게 영향받은 것이 있다면. 그 시절은 하두 어려웠을 때예요. 그 시절은 사회 전체가 어려웠 고, 나는 집안도 어려운 상태에서 고시공부한다고 해서 생활 자체가 어려웠지 요. 그랬을 때에 스님은 중국 역사에 나오는 사람으로 단계라는 사람이 있었는 데, 이 사람이 팔십이 될 때까지도 과거시험에 안 되었지만 그 사람이 내가 가 는데 운명, 네가 뭐냐 운명아 비켜라 하는 식으로 결연한 의지로 결국에는 성 취했다는 말을 하시면서 나에게 마음과 의지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셨어요. 용기 를 잃지 말고,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중국 역사 속에서 찾아 그리 용기를 북돋아 주셨지요. 특히 나는 집이 가난해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겨우 학비와 생 계비를 마련했어요. 그래서 대학 1년을 마치고 휴학을 하였으나 그래도 어려워 취직을 하려고 하였더니 스님이 나를 보고 맹자의 한 구절을 들려주면서 힘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192 불어넣어 주셨지요. 그 내용은 하늘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기 전에는 반드 시 먼저 그 심지를 괴롭히며 근골을 수고롭게 하고 혹은 궁핍하게 하고 하는 일 마다 어렵게 하여 고난과 시련을 주어서 분발하고 인내케 하여 그의 잘하지 못 하는 능력을 더욱 배양시킨다는 것이었지요. 이 말을 듣고서 나는 공부를 계속 했고, 지금도 이 구절을 생활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어요. 변호사님은 대불련의 봉은사 대학생 수도원에도 잠시 있었고, 구도부원들과 성철스님을 찾아서 수행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것은 내가 졸업한 직후, 대학교 후배들이 봉은사에 있었던 수도 원을 만들고 들어가 있었는데, 후배들이 김용사에 계시는 성철스님에게로 가서 공부를 하자고 해서 갔지요. 두 달간 있었지요. 그때 성철스님이 거기에서 백일 법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최초의 법문을 하셨어요. 그러고 마지막에 일주일 간 밤을 새우면서 용맹정진을 처음으로 하였지요. 내가 겪어 본 성철스님은 폭포수 같았어요. 성철스님은 한꺼번에 줄기차게 쏟 아부으셨지요. 그에 반해서 탄허스님은 보슬비 같았어요. 언제 젖었는지 모르게 젖었지요. 그것이 두 분의 차이인 것 같아요. 성철스님은 최상의 진리라는 것을 확신하면 당신의 몸을 던져서 당위로 주장하셨어요. 그런 면에서 스님은 이상론,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지요. 나는 이런 것을 스님에게 매일 세뇌당했지요. 그 때에 나는 내게 출가하라고 권유한 스님의 말씀이 어떤 면에서는 몸으로, 머리 로는 이해가 갔지만 결단을 할 수가 없었어요. 가슴속에서는 결단이 안 나와요. 내 주변의 현실, 인연 이런 것을 끊고 출가한다는 것이 어렵더라구요. 스님에게 는 사회에 나와서 할 일이 있기에 출가할 수는 없다고 하였지만, 지금에 와서 보 면 그것은 나 자신을 속인 거예요. 그때 법대 출신 둘이는 출가했지요. 192 탄허스님에게도 출가 이야기를 하였어요. 그랬더니 스님은 너는 못해 그러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193 시더라구요. 출가할 사람이 있고, 사회에 남아 있을 사람이 있는 것이라고 하셨 어요. 스님은 출가하라고 권하는 법이 없어요. 스님은 사람을 모아서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하셨어요. 우리가 사회에 나와서 그런 일을 해야 되지 않겠 냐고 하셨지요. 이렇게 성철스님, 탄허스님 양 산맥은 달랐어요. 물론 그 시절에도 향곡스님, 월산스님 등 다른 스님들이 계셨지만, 이 스님이 양대 산맥이었어요. 19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변호사님은 그 이후에도 스님을 계속 찾아가셨지요? 내가 1968년도에 사시 패스를 하고 군법무관으로 군대에 갔어요. 그리고 그 다음 해인가 스님이 부산 삼덕사에서 화엄경 교열을 보실 때에는 이 따금씩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지요. 그리고 청룡사 시절에도 자주 찾아갔어요. 내가 군인으로 근무를 서울에서 하였기에 시간이 많이 났기에 찾아갔지요. 그 시절에 기억나는 것이 청룡사에서 스님의 동양학 강의를 들은 것이에요. 그것이 토요일, 일요일 저녁에 해서 나도 거의 다 들었지요. 그때 장자 강의도 하셨는데, 그 강의 내용은 그때 맨 앞자리에서 듣던 방화백이라는 사람이 전부 정리를 해서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 사람은 불란서에 유학을 하였다가 다시 돌 아왔다고 하는데 나이도 우리와 비슷하지만 한두 살 많은 70대 중반이에요. 스님을 연구하려면 연구 소재가 부족한데 그런 강의록을 정리해서 책으로 내면 좋겠습니 다만. 그런데 스님이 생전에 설법, 강연하신 거 그런 것을 정리한 것밖에 없어요. 스님이 직접 서술한 책은 없어요. 스님은 성인들의 말씀을 공부하고 해 석하면 되지, 하물며 당신의 사견을 붙여서 세상을 시끄럽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스님의 지론입니다. 난승스님이 스님의 화엄경 강의를 정리해서 책으로 냈 는데, 그것도 일부분이지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194 청룡사 시절에 중국어 강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들으셨는가요? 그럼요. 그때가 닉슨 대통령이 중국과 핑퐁외교를 하기 직전인데 스님은 우리들에게 앞으로 우리나라가 중국과 통한다고 하시면서 중국말을 배 우면 출세를 한다고 그러셨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조선 말엽에 일본말을 아는 사람이 일제시대 때에 득세를 하고 일할 수 있었고, 일제시대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해방이 돼서 득세를 하고 일할 수 있었다면서 앞으로 중국과 가 까워질 터이니 중국어를 배워 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중국어를 배우려면 중국어 선생이 필요해서, 내가 선생을 찾으러 갔어 요. 시청, 프라자 호텔 뒤에 중국 책방이 유일하게 하나 있었어요. 그 책방 주인 의 딸이 화교학교 선생이었는데, 내가 그 여성에게 강의를 해줄 수 있겠냐고 하 여 초청을 해서 시작하였어요. 강의는 스님 방에서 하였는데 한 3개월을 하였지 요. 동양사상 강의는 청룡사의 누각 위에 있는 보제루에서 하였는데 4, 50여 명 이 들었지만 중국어는 열댓 명이 들었어요. 나도 끝까지 들었지요. 그때 탄허스 님은 중국어를 배워서 짧은 의사표시도 하고, 중국 스님이 오시면 대화를 자유 롭게 하실 정도가 됐어요. 중국 스님들은 고사에 어두우니깐 스님이 고전, 한문 을 가르쳐 주시고 그랬어요. 하여간 스님은 중국과 통하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 고 계셨어요. 그러나 우리는 실제 그렇게 가까워질까 하면서 확신이 없었지요. 다만 배워 놓으면 좋다고만 했지, 확신이 없었어요. 그리고 또 할 일도 있고 해 서. 그 통에 간단한 이야기와 발음 정도만 알았지요. 그 이후 스님은 석파정, 대원암으로 가셨습니다. 그 시절 보고 들은 것이 있다면. 그때에 보고 들은 것으로는, 스님은 가서 묻지 않으면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요. 스님은 누가 와서 묻기 전에는 답을 안 해요. 스님은 우리에게 나 194 는 약장사 식으로 하는 법문은 안 한다고 하셨어요. 본인이 의문을 갖고 오면,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195 거기에 대해서 답을 해주는 대기설법을 하시는 것이지요. 그냥 하시는 것은 없 어요. 그때 찾아오는 사람에게 스님은 글씨를 많이 써 주셨어요. 그래서 나도 스님 에게 글씨를 하나 써달라고 하였더니, 스님은 똥뚜깐도 없는 게 글을 달라고 한 다면서 집을 마련하면 도배할 정도로 많이 써주신다고 하였지만 끝내 하나도 받 19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지 못했어요. 나는 그런 데 뜻이 많지 않기도 했어요. 탄허스님이 다른 큰스님들과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스님이 다른 스님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스님은 현실 문제에 대해 서 상당히 깊은 관심을 갖고 계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누가 물으면 당신 나름 대로의 처방을 갖고 계셨어요. 다른 스님들은 선문답이나 불교의 기본 교리를 전하는 것이 원칙이라면 스님은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동양의 역사 속에서 적 합한 사례를 찾아서 설명하시고 구체적인 방안, 처방을 내놓으셨어요. 내 생각에는 그 분은 그렇게 현실적으로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동양 역사 를 통해서 현실의 대안을 내놓으셨어요. 스님은 우선 유교의 가르침을 제시하 고, 다음에는 현실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도교, 선교를 제시하고 그 연후에는 그 런 것을 회향하기 위해 불교라는 종지로 정리하셨지요. 그러면서 스님은 불교 종지를 강조하셨는데, 스님은 선지에 들어와야 한다고 하셨어요. 불교의 종지라 는 것은 말로 할 수 없고, 근본 자리로 들어가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어요. 어떤 면에서 보면 그분의 이야기는 대기설법이지만, 어떤 말씀을 하시더라도 늘 종지 에 의해서, 선지에 의해서 하신 것이지요. 즉 스님은 말이 없는 본원 자리로 가 도록 모든 사람을 가르쳤어요. 스님이 입산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한암스님 이 중강을 시키지 않았습니까? 나는 그 전에는 한암스님이 스님을 너무 편애하 신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봤어요. 그러나 학문이 깊으니 그리 하신 것이고,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196 입산 후에 3년간 묵언을 시킨 것도 선을 체득시킨 게 아닌가 하고 봅니다. 스님 은 거기에서부터 이미 선의 경지에서 학문을 한 거예요. 사실 따지고 보면 화두 아닌 게 없어요. 구태여 우리가 간화선, 조사선을 거론 하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화두가 아닌 게 없어요. 모든 것에 의심을 갖게 돼요. 그러나 그런 것도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그래서 스님은 그 자리, 공 ( 空 )도리 그 자리, 본원( 本 源 ) 자리로 회향하도록 사람들을 그리로 데리고 가신 것 이에요. 이런 면에서 보면 성철스님을 아까 내가 소나기로, 탄허스님을 보슬비 로 비유하였지만 두 분의 귀일점은 같다고 보지요. 스님의 정체성을 말씀해 주세요. 내가 얼마 전에 감산자전 이라는 책을 봤는데, 보통 우리는 그 감 산( 憨 山 )스님은 석학, 강사 정도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내가 알기에 그 감산스님 은 명나라 3대 선사의 한 스님이에요. 그 정도로 그 스님은 선사이면서도 능가 경, 금강경, 능엄경 등의 책을 주석하였고 또 중용직지, 대학직지 같은 유교경 전을 선의 입장에서 풀이까지 하였어요. 그러면서 가시는 곳마다 절 불사를 많 이 해서 많은 중창을 하였지요. 그렇지만 그 분은 사판이 아녜요. 인연대로 불 사도 하고, 중생구제도 하신 고승이지요. 나는 이 스님에 대해서 각성스님의 강 의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그 스님은 잘 드러난 분이 아니에요. 바로 이런 감산스님이 탄허스님일 거예요. 탄허스님은 이리역 사고가 나자 붓 글씨를 써서, 그것으로 서예전시회를 열고, 그 판매된 것을 다 이재민들에게 나 눠 주셨어요. 스님은 유불선의 경전을 번역해서 낼 사람이 한국에 없으니, 유불 선의 경전을 법( 法 )으로 보고 그것을 대중들에게 전해 주기 위해서 하신 분이지 요. 그러면서도 현실, 국가, 민족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대중들을 지도해 주 196 셨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197 그렇다면 스님의 화엄사상을 어떻게 보시나요? 내가 보기에 참선은 말이 없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도 자기 스스로는 모르잖아요. 예를 들면 우리가 눈으로 써 대상을 보지만 눈은 눈 자신을 모르는 것이지요. 우리가 마음을 안다고 할 때 에는 안이비설신의가 전부 대상이라, 그래서 그 자리는 달마( 達 磨 )가 침묵할 수밖 19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에 없었다고 하신 것과 같은 것이지요. 내가 나를 드러내는 것은 내가 이 잔을 내리치면서 나는 소리 이것밖에 없는 거예요. 그 소리를 통해 들어가는 것이지 요. 이런 것을 사람들은 알 수 없다고, 그런 것을 그래도 조금 친절하게 말로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교학체계가 최상으로, 종합적으로 드러난 것이 화엄경이라 는 것이지요. 그래서 스님은 화엄경을 강조하신 것뿐이에요. 그러나 그것도 어 떤 면에서는 마설( 魔 說 )에 지나지 않을 수가 있다, 말로 조작된 것이라고 보셨어 요. 이런 면에서 스님의 선사( 禪 師 )의 경지가 딱 드러나지요. 제가 보기에 탄허스님의 현실의식, 민족의식은 보천교 간부를 지냈으며 독립운동도 하였 던 부친에게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영향을 많이 받았으리라고 봐요. 우리에게도 부친을 제일 존경한 다고 했어요. 스님의 아버지는 진보노선이었는데 경직된 이데올로기에서 보면 그것을 나쁘게 볼 수도 있지만 민족이 도탄에 빠져서 그것을 구할 방법이라는 차원에서 봐야 할 것입니다. 탄허스님의 아버지(김홍규)는 탄허스님 생존 당시에 는 말할 수 없었지만 이제 와서 보면 나라 없는 백성들의 할 일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당신을 희생한 것입니다. 스님의 은사인 한암스님에 대해서 들은 것이 있나요? 한암스님에 대해서 자주 말씀하셨어요. 상당히 존경하셨고, 어른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198 은 이렇게 하셨다 혹은 나는 한암스님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간다 는 말도 했 어요. 내가 보기에 부모 이상으로 존경하셨어요. 그러니깐 한암스님이 화엄경을 번역하라는 부촉을 받고, 그것을 위해서 일생을 번역하셨지요. 그리고 내가 듣 기로는 스님이 한암스님의 전기를 쓰시기 위해 그 자료를 갖고 6 25 때인지 피 난을 갔는데 그것을 소실하셨다고 그랬어요. 그것을 무척 아쉬워했어요. 스님이 한암스님에 관해서 정리하려고 하였는데, 그 자료가 유실되었다고 하셨어요. 동산스님 49재 전 날, 범어사에서 스님이 하신 설법 이야기 들었죠? 우담거사 와 명호근은 그것을 들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보면 스님의 선사적 기질은 인 정해야 돼요. 스님보다 나이가 삼십이 많은 춘성스님이 권유해서 한 것을 보면 그냥 한 것은 아니지요. 혹시, 한암스님의 선방면 법제자인 보문 난암 스님에 대해서 들은 것이 있으면 들려주시 지요. 탄허스님은 보문 난암 스님에 대해서도 우리들에게 말씀했어요. 스님은 보문스님을 상당히 존경하셨는데, 요절했다고 했어요. 그리고 난암스님 은 일본에 가 있었는데, 그 스님이 탄허스님의 실력과 천재성을 높이 사서, 일 본에 눌러 앉히려고 하였대요. 그래서 탄허스님에게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했 지만, 스님이 다른 것은 다 이해가 되지만 난암스님이 주체사상에 빠진 것 그것 에 실망을 해서 그리는 안 했다고 하셨지요. 스님은 불교는 어떤 면에서 보면 자유, 평등, 평화를 추구하는 것인데, 그래서 부처에도 매이지 않고 조사와 신에게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을 추구하는 것이 본 질인데 하물며 김일성 거기에 매인 것에 실망을 하셨다고 그랬어요. 아마 그 스 님들이 다 훌륭한 스님이었지만, 한암스님이 이런 것을 감안해서 스님에게 법통 198 을 전하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199 탄허스님과 다른 고승과의 인연에 대해서 들은 것은 없나요? 경봉스님이 친아들과 같이 대했다는 말은 들었어요. 친아들 이상 으로 아꼈다고 그러지요. 그래서 스님은 오대산의 보물 1호라고 평가하였대요. 탄허스님이 성철스님의 책을 보지 마라, 혹은 선문정로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다 19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는 증언이 있어요. 글쎄, 그런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어떤 말 하나만 갖고 큰스 님들의 평가, 위상에 왔다 갔다 하면 안 됩니다. 내가 김용사에 들어가 있을 적 에 들은 것은, 성철스님이 육조단경은 탄허 번역만 보라고 그랬어요. 성철스님 은 탄허스님의 한문 실력이 그래도 제일 낫다고 하셨어요. 성철스님도 탄허스님 을 인정했어요. 두 분은 서로 존경했어요. 내가 보기에 탄허스님이 남을 비판하는 어법을 고려할 때에 성철스님을 비판 하였다는 것은 인정하기 어려워요. 두 분은 서로 존경하는 외우( 畏 友 )예요. 성철 스님이 월정사 대웅전 공사할 때에 1주일을 방산굴에 머물렀다고 그래요. 그리 고 선법으로 보면 점수( 漸 修 )와 돈오( 頓 悟 ) 아닌 게 어디 있겠어요. 그것은 그때 그 때의 방편설이거든요. 그런 말끝에 놀아나면 안 돼요. 스님은 도의적 인재양성을 강조하셨어요. 그것은 내가 화엄론 회석의 서문에 조금 이야기해 놓았어요. 스님 은 원시시대부터 역사를 이야기하시면서 오행설에 근거하여 말씀을 하셨어요. 원시시대에는 목극토이기에 농경사회(농기구)가 온다, 그 다음에는 금극목이기에 철기구가 주도하는 사회가 오고, 그 후에는 화극금이기에 화약이 지배하는 사회 가 온다고 하셨어요. 그러나 그 이후 시대는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그러나 내가 보기에 수극화예요. 수는 물이지만 지혜이기도 해요. 수극화가 의미하는 사회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200 상징은 컴퓨터예요. 분별지가 최고의 극치가 되는 것이지요. 원시시대에서부터 부정을 거친 긍정이기에 앞으로는 도의적 인재가 필요한 세상이 온다는 것이지 요. 그러면 도의적 인재는 무엇인가? 이것은 일즉다( 一 卽 多 )의 세계, 일즉다 다즉 일을 생활하는 세계, 그것을 아는 세계, 말하자면 자기를 잊는 것 즉 동체대비 ( 同 體 大 悲 )인 거죠. 그런데 그것은 말로만 표현하지, 실제는 그리 안 되잖아요. 요 즘 시대를 보면 거의 안 돼, 하나도 안 돼요. 그래서 도의적 인재라는 것은 화엄 경의 몇 구절을 아는 것이 결코 아녜요. 어떤 면에서는 도인( 道 人 ), 달사( 達 士 )가 많 이 나와야 된다는 것인데, 그런 큰 인물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려면 자기 에고가 엷어지든가 해야 하는데, 지금의 지도자들은 남을 등지 고 있어요. 이것은 지도자가 아녜요. 스님이 말한 도의적 인재는 도덕, 윤리, 질 서와 같은 가치를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고 동체대비, 다즉일, 에고(자기)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 갖추어진 인재를 말하는 것이지요. 분별지마다 지혜를 갖추어야 하고, 그런 사람에게는 직관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고도 볼 수 있지요. 내가 우 주라는 화엄적인 생각이 있는 것이에요. 하여간에 도의적 인재에 대한 개념은 전달하기가 어려워요. 탄허스님은 조계종단과 공부 안 하는 스님들의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스님은 불교라는 주물 틀을 우주 진리가 감싸고 있고, 당신은 국가 를 지도할 능력이 있으며, 살아 있는 진리를 민족에게 전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 에서 비구 대처의 싸움을 하는 조계종의 이권 다툼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지요. 스님은 민생구제와 국민정신 순화는 위정자의 몫이고 스님들은 위정자에게 철 학과 사상을 제시하고, 뒤에서 역할을 독려하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러시면서 나라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비구승 열 명을 기르는 것보다 한 명의 불교 정치가 200 를 기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201 결국은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원음( 原 音 )을 승려들에게 가르쳐서, 승 려들이 그 본류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중흥이자, 부처님의 가르침으 로 보셨지요. 그것이 그분의 시종일관한 교육관, 불교관이에요. 어떤 때에는 앞 으로 불교는 흥하지만, 조계종은 망한다고 농담 비슷하게 하셨어요. 스님은 한 국에는 불교의 형태는 있지만 정신은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셨어요. 20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스님에게도 부친에게서 배운, 전해진 습기( 習 氣 ) 같은 것이 있었을 거예요. 부 친이 종교를 통한 독립운동, 개벽을 지향하였으니 스님도 말년에는 개혁을 말씀 하셨어요. 수월스님, 혜월스님이 농사, 고행을 통해서 보살행을 하였는데 그런 농사, 고행은 그 스님들이 좋아하는 것이고 그것이 습기인 셈이지요. 이처럼 스 님이 깨달았다면, 스님은 보림의 수도 차원에서 자기 적성에 따라서 그런 것을 한 것이지요. 즉 스님은 선사로서의 면모로 경학과 교육을 하신 것이지요. 그것 을 당신의 살림살이로 삼은 것이 아닌가 해요. 스님은 대전 학하리를 인재양성의 근거로 삼으려고 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아요. 스님이 인재양성을 한 것은 오대산 수도원이 제일 먼저이 고, 두 번째가 우리입니다. 그리고 스님은 무엇인가를 도모하려면 사람을 잘 뽑 아서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사람을 골라 쓸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사람의 사주 를 보겠느냐고 하시면서, 사람의 관상법이 최고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스님이 장자의 관상법, 공자의 관상법 등 성인들의 관상법 그리고 마의상법도 말씀하셔 서 우리들도 마의상법을 스님에게 직접 배웠어요. 그렇게 스님은 교육을 제일 강조했어요. 교육이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뜻을 같이해야 단체가 되지, 모이는 것은 정으로는 되지만 의지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하셨어요. 즉 일을 추진할 때 에는 사람을 만들어 쓰는 것보다는 사람을 골라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 하셨어요. 또 스님은 일본의 명치유신을 자주 말씀하셨어요. 명치유신처럼 소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202 정예가 일본 변화의 원동력이라고 하시면서 뜻과 이상을 같이해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 생각을 말씀했어요. 그러니 앞으로는 사람을 골라서 일을 추진하여 불 교를 새롭게 하고, 새로운 뜻을 흘러 보내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지 그렇지 않 으면 곤란하다고 하셨어요. 그래 나도 각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해서 일을 추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한된, 고정된 그룹의 사람 갖고는 어떤 일을 추진하기 어 려워요. 스님은 학하리를 도의적 인재양성의 터전, 거점으로는 제일 적지라고 말씀했 어요. 그곳은 송시열의 사당이 있던 곳인데, 스님은 늘 그곳을 인재양성의 적지 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스님이 진관사에 계실 때에 나하고 명호근이 가서 뵈다 가 우연히 인재양성에 대해서 말이 나와서 우리가 앞으로 스님의 뜻, 유지를 이 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법인을 만들겠다고 하였더니, 그러면 그 법인의 이름 을 3 1 로 하라고 이름까지 지어 주셨어요. 아마 그 3 1은 주역, 삼위일체, 삼덕일심 등 불교적 상징의 의미가 있을 것 입니다. 스님이 돌아가시고 재단을 만들 때에 3 1로 하려고 하다가, 그래도 스 님의 이름을 넣어서 해야 한다고 하여 재단명칭에는 넣지 못했지요. 그러나 우 리는 각성스님을 모시고 연 서울 강북의 포교당을 만들 때에는 3 1선원이라는 명칭으로 했어요. 지금은 여러 사정상 문을 닫고 있지만 조만간 다시 열려고 합 니다. 3 1선원은 1985년도에 만들었는데, 한국불교 교양대학의 효시입니다. 처음에는 방배동에서 시작하였지만, 그 포교당의 커리큘럼을 짜는 것, 법사를 모셔오는 것은 손창대 형이 주관으로 했지요. 그 형은 대불청 주관으로 법통사 에서 나온 불교성전을 만든 주역이라, 그런 것에 능했어요. 앞으로는 3 1포교 당을 재단 정관에도 넣으려고 합니다. 202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203 변호사님에게서 탄허스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입니다. 내가 가장 어려울 때에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시고, 내 인생의 길에 이정표 역할을 해주신 분이 바로 스 님입니다. 부모님 이상으로 제 인생에 많은 영향을 주신 어른이십니다. 20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스님이 가신 지가 30년이 되었고, 곧 탄신 100주년이 됩니다. 소회가 어떠신지요? 저도 스님의 유지를 받들고, 계승하는 것에 대해서는 미흡한 것이 많아 책임을 통감합니다. 스님의 상좌, 출가스님들도 그렇겠지만 저희들처럼 스 님의 기대를 받았던 재단 관계자들도 깊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김박사님이 스님의 자취, 뜻을 찾아 정리하는 일에 고생이 많으신데, 우리가 할 일을 대신 하는 것 같아 정말 감사합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204 스님과의 만남은 필연이었습니다 대상 명호근 쌍용투자증권 사장, 쌍용양회 사장, 쌍용양회 부회장 역임, 대한불교진흥원 이사, 불교방송 이사 역임, 현재 (주)해주 사장, 탄허불교문화재단 부이사장,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총동문회 총재 일시 2012년 7월 4일 장소 명호근 사무실 남부터미널 인근 탄허큰스님 탄신 100년을 맞이하여 이런 회고, 증언에 대한 소회가 어떠신지요? 구체적인 증언, 탄허큰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 우선 저 의 마음을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군요. 큰스님~ 큰스님~ 큰스님 참으로 보고 싶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큰스님에 대한 상념( 想 念 )이 새록 새록 납니다. 큰스님께서 이 사 바세계에 몸을 나투신 지가 100년이 되시고, 열반에 드신 지도 30년이 되었고, 제가 스님을 모시고 배운 것이 20년이니 제가 스님을 만나뵌 것이 거의 50년 전 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생사( 生 死 )는 본래 없고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으나, 큰스 님은 왔다가 가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미혹한 저는 큰스님이 가신 것이 정 204 말 못내 마음이 아프고, 스님이 그립습니다. 큰스님을 보고 싶습니다. 제가 이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205 세상에 온 가장 큰 보람은 불법을 만난 것과 큰스님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저의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큰스님께서 이 사바세계에 다시 출현하셔서 일체 중생과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을 하실 때에 제가 스님을 모시고 일하는 것입니다. 부디 속히, 이 사바세계로 오셔서 저희들을 깨우쳐 주시고 지도해 주시길 간청합니다. 20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회장님은 탄허큰스님과의 만남을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시는군요. 그렇죠. 저는 제 일생에 탄허큰스님을 만난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탄허스님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었다고 봅 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가득해서, 만약 큰스님이 다시 오신다면 큰스님을 다 시 모시면서 이 세상과 사회를 위해서 일을 하고 싶은 심정이 간절합니다. 큰스 님은 당신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가셨거든요. 저는 이것이 못내 아쉬워요. 그래서 큰스님을 모시고, 정말 참다운 일을 하고 싶어요. 저는 큰스님의 가르침 이 저의 인격 형성의 근간이 되었고, 제 생활 및 사고의 80~90%는 큰스님의 말 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큰스님 살아생전에는 스님의 제자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밝히지 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제가 큰스님께 누가 될까봐 두려웠 기 때문이죠. 그러나 큰스님께서 열반하신 후 재단법인인 탄허불교문화재단을 만들면서 스님의 제자라는 자부심으로 일을 하게 되었죠. 탄허큰스님을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으로 여기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제가 대학 1학년 때 철학 강의에서 배우기를 서양철 학의 원조인 플라톤이 자기가 태어나서 네 가지를 고맙게 여긴 것이 있다고 들 었습니다. 그 첫째는 자기가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것이고 둘째는 남자로 태어난 것, 셋째는 소크라테스와 동 시대에 태어나서 소크라테스를 스승으로 모신 것,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206 넷째는 감수성이 예민하였을 때에 소크라테스를 만난 것을 감사하게 여기었다 고 들었거든요. 저는 플라톤의 이 말을 들은 이후 대학 3학년 때에는 불법을 만 나고, 대학 4학년 때에는 탄허큰스님을 친견하고 그후에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저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것은 첫째로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났고, 둘째는 남자로 태어났으며, 셋째 는 감수성이 가장 예민할 때에 불교를 만났고, 넷째 불법을 만나면서 나는 누구 인가 하는 생사( 生 死 ) 문제와 불법의 대의에 대하여 고민하던 중에 탄허큰스님이 란 선지식을 친견하게 되어 불법의 종지( 宗 旨 )를 파악하게 된 점에 늘 고맙고 홍 복( 洪 福 )으로 생각하며 세세생생 불법문중과 큰스님을 모시고 수행 정진하겠노라 는 서원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큰스님이 사바세계에 다시 출현하시 면, 스님을 따라서 큰스님을 도우면서 정말 멋진 일을 하고 싶습니다. 회장님은 탄허큰스님을 어떤 스님으로 보고 싶나요? 저는 탄허큰스님을 보통의 큰스님, 강백스님으로 부르는 것에 강 한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선지( 禪 旨 )로 모든 것을 말씀하신 분입니 다. 한마디로 말하면 선지가 큰스님의 당체입니다. 그것은 동산큰스님의 49재 법문에서 큰스님이 하신 법문이 그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고 강조하고 싶어요. 제가 대학을 졸업한 그 해인 1965년도 여름에 부산 범어사의 동산 종정스님 이 열반하셨어요. 그 무렵 저는 선지식을 갈구하고 찾던 무렵이었습니다. 그런 데 제가 동산스님의 49재 법회에 갔는데, 그때 탄허스님의 법문을 듣게 되었어 요. 거기에서 탄허큰스님을 다시 만나게 되어서, 저는 반가워서 인사를 드렸습 니다. 그때에 탄허스님보다 스무 살이나 더 많으신 춘성큰스님이 50대 초반인 탄허큰스님에게 절을 하며 법을 청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제방의 선지식 및 고 206 승대덕 큰스님 등 당대 대선사님들이 계셨습니다. 종사 열반 자리에 법문을 청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207 하니 탄허큰스님께서 사양하시면서 법상에 올라갔습니다. 큰스님께서 주장자를 세 번 치시더니 하동산큰스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아니고 또 가신 것도 아 닙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닙니다. 대중은 한마디 이르시 오 하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주장자를 한 번 탁 치시고 금정산이 높 으니 범어사가 오래되었구나 하는 게송을 읊으신 후 법상에서 내려오셨습니다. 20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저는 이때 탄허큰스님의 새로운 진면목을 더욱 알게 되었고, 아주 감명이 깊었 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경( 經 )이 나올 자리가 아닙니다. 고승대덕 큰스님들이 전국에 서 다 모인 그 자리에서 그런 법문을 하였다는 것은 선지( 禪 旨 )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큰스님께서 경( 經 )과 학( 學 )을 말씀하신 것은 격외( 格 外 )도리를 가지고 법문을 하시면 알아듣는 사람이 없으므로 부득이 방편으로 가지각색의 상황에 맞게 불교,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방편 차원에서 하신 것입니다. 일반 대중에게 부처님 말씀, 조사님의 어록을 인용하기 위한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탄허큰스님은 입산 직후에 한암큰스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바로 깨 달았지 않았는가 합니다. 탄허큰스님은 입산 이전에 이미 도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고민하였고, 그런 고민 해결 차 원에서 상원사로 입산하였지요. 제가 알기로 큰스님은 입산 이전에 유교, 장자, 주역 공부를 다 하 셨어요. 그러시면서 늘상 격외도리, 문자 밖의 소식을 아시려고 고뇌하였습니 다. 그러다가 오대산의 대선지식인 한암큰스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시고 편지로 3년간 대화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깐 이 3년간의 편지 문답에서 벌써 불교와 도에 대한 것을 다 공부하신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고 나서 오대산 상원사에 입산하시고 나서도 3년을 묵언정진을 하지 않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208 았습니까? 이 묵언정진은 참선을 말하는 것인데, 이때 한암큰스님으로부터 화 두를 받아서 정진을 한 후, 한암대종사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 다. 저는 여러 가지 정황을 미루어서 볼 때 3년 묵언정진에서 참선공부는 끝냈 다고 봐요. 이렇게 출가 전에 문답으로 공부하셨고, 입산 직후에 바로 묵언 참 선 정진을 한 이런 경우는 이 세상에 없어요. 대단한 것입니다. 전무후무한 일 입니다. 큰스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경( 經 )을 보시다가 뜻이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그냥 딱 책을 덮으시고 2~3일을 졸고 나서 보시면 그 뜻을 환하게 알게 된다고 하셨어요. 큰스님은 참선이라 하지 않고, 조신다고 했 어요. 이렇게 큰스님은 선지로써 경을 보신 것입니다. 탄허큰스님을 학승, 학자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정말 큰스님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탄허스님은 경을 보기 위해 입산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큰스님에 있어서 경은 후학 및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이었어요. 따라서 큰스님이야말로 대선 지식이고, 대강백이시고 또한 세간적으로는 경세적인 사상가, 중생의 아픔을 감 싸안으셨던 대보살이셨습니다. 한암큰스님이 탄허큰스님에게 화엄경 번역을 부촉한 것은 어떻게 보시나요? 탄허큰스님은 화엄경뿐만 아니라 스님들이 배우는 사집, 사교 등 거의 모든 경전을 다 번역하였습니다. 대선지식이라고 불리웠던 한암큰스님도 번역은 못하셨어요. 그러나 선지식인 한암큰스님께서 선지로 탄허큰스님을 살 피시고, 경을 보라고 하셨고 화엄경 번역을 부촉하였습니다. 이것은 한암큰스님 께서 탄허큰스님이 아니고서는 난해한 화엄경을 현토역해할 사람이 없다는 것 을 아시고, 후학과 중생들을 위하여 간곡히 부촉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사 208 람은 각기 이 세상에 올 때에 각자의 임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아신 한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209 암큰스님이 탄허큰스님에게 화엄경 번역을 부촉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스님은 화엄경에 머물지 않고, 사집 사교 등 모든 경전을 다 번역하였던 것입니다. 이 런 일은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스님은 입산 이전에 격외도리, 근본도리를 터득하고 거 기에 불교의 참선을 통해서 대사( 大 事 )를 마쳤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큰스님의 20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이력을 미루어 볼 때에 큰스님에게 선, 경, 문자 이런 것을 갖고 고정적인 해석 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까 말한 만약 탄허큰스님이 학승이었다면 동산 종 정스님 49재라는 그런 자리에서 법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잘못하면 방망이를 맞을 수 있는 그런 자리에서 말입니다. 탄허큰스님의 특성, 즉 다른 큰스님에게서 찾을 수 없는 것으로는 종지( 宗 旨 )를 강조하였다 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종지를 강조하신 것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큰 스님의 논리는 명쾌하였어요. 큰스님이 종지를 강조하였던 것은 경( 經 )의 차원에 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큰스님은 도, 우주, 근본, 마음 등에 대한 것을 늘상 고 민하시고, 그것을 저희들이나 대중들에게 말씀했어요. 큰스님은 생각이 끊어진 그 자리가 본래 우리 마음자리라고 말씀하셨어요.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자리는 다른 말로 하면 도( 道 ), 법신( 法 身 ), 불성( 佛 性 )을 증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한 생각이 끊어진 것은 곧 분별심이 끊어진 그 자리입니다. 탄허큰스님께서는 이미 우주가 생기기 전, 부모미생전의 도리를 확연히 깨달으셨기에 법문을 하실 때나 청중들 앞에서 강의를 하실 때에도 팔만대장경의 경구( 經 句 )를 막힘 없이 말씀하 셨습니다. 스님은 일념( 一 念 )이 생기기 이전, 일념이 끊어진, 일념이 없는, 즉 무 명이 생기기 이전의 자리를 법신, 당체, 진심이라고 보셨지요. 즉 한 생각이 일 어나기 전이 본래 마음자리이기에 분별심이 있을 수 없고, 분별심과 망상이 끊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210 어진 그 자리는 공적영지( 空 寂 靈 知 )이기에 생사( 生 死 ), 이름, 모양, 빛, 색깔 등이 있 을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큰스님은 팔만대장경의 요지를 일언( 一 言 )으로 요약 하면 명심견성( 明 心 見 性 )이라고 하시면서 마음을 밝히면 성품자리, 즉 본래 진면 목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에 대하여 다른 큰스님들은 우물쭈물하였지만, 탄허큰스님은 명쾌하 게 말씀하셨어요. 스님은 도, 불법을 확연히 아시고 핵심적인 것을 이야기하셨 는데, 그것이 바로 종지( 宗 旨 )입니다. 큰스님은 종지를 파악하면 자재기중( 自 在 其 中 )이라고 하시면서, 종지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있어, 모든 것을 알게 된다고 하 셨습니다. 그래서 큰스님은 고구마 줄기를 당기면 고구마의 뿌리까지 고구마의 모든 것이 딸려 오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여 말씀도 하셨습니다. 부처님이 깨닫고 나신 이후 그 요지를 대중들에게 말하였지만, 알아듣지를 못 하니까 49년간 돌아다니시면서 설법을 하시고, 돌아가실 때에는 한마디도 안 하 였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탄허큰스님이 선지에 의해서 불법, 도를 깨쳤지만 사회에 있는 젊은이나 사람들에게 불법을 심어 주기 위해서, 불법을 통해 도의 적 인재양성을 하고, 그래서 사회 각 분야에 제대로 인재가 들어가서, 사회와 국 가를 위해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온 정열을 다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회장님의 불교와의 만남을 들려주세요.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경남중학교 3학년 때까지는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시절부터는 왠지 교회가 저와는 잘 안 맞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는데, 대학입시 공부하는 것에 바빠서 교회에는 안 나갔습니 다. 그 후 1961년에는 서울법대에 들어갔습니다. 대학 3학년 때이니까 1963년 봄이었을 것입니다. 하루는 오후 강의가 없어 뜰 210 앞에 있는데 친구가 학교에서 불교 강연을 하는데 한번 가서 들어보자고 그랬습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6

211 니다. 그래서 인생문제에 고민이 많을 때라 호기심이 나서 법문을 들었는데, 그 날 오셔서 법문하신 분이 청담큰스님이었습니다. 서울법대에는 법불회( 法 佛 會 )라 는 모임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강연을 주관한 것이었습니다. 하여간 저는 그날 청담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불교와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21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청담큰스님의 법문은 어떤 내용이었고, 왜 그렇게 급작스럽게 불교로 다가갔나요?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나는 누구인가 하는 고민을 하고, 인간은 무엇인가 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그런 내용을 일기에 쓰기도 하였습니다. 6척밖 에 안 되는 인간이 전쟁을 일으키고 남을 해하는데 도대체 어떤 존재냐는 이런 고민을 하는 상태에서 대학에 들어가게 되자 김형석 안병욱 교수님의 철학 강 의를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그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인생관, 사생관( 死 生 觀 ), 세 계관, 국가관을 잘 세우라고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니체와 소크라테스에 대한 내용을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특히 안병욱 교수님의 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온(daimonion)에 대해서 말한 것이 인상이 깊었어요. 다이모니온이란 자기 자신에게만 들리는 내심의 음성으로 체 험되는, 즉 적극적인 지시는 하지 않으나 어떤 일을 하지 못하도록 불리한 행동 을 미리 막아주는 것에 대한 열강에 감명 받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명상을 하면 마음으로부터 소리를 듣는다는 체험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았습니다. 김형석 교 수의 논리학 강의도 일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니 체 등의 철학서적을 탐독했습니다. 그런데 서양철학을 접하다 보니 인생의 해답 은 없고, 오히려 고민만 늘었습니다. 2학년 때부터는 고시공부를 시작했는데도 삶에 대한 고민은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큰일을 하려면 사생관( 死 生 觀 ) 을 확립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12 그런 고민을 할 때에 청담스님의 법문이 가슴에 와 닿았군요, 그렇습니다. 청담큰스님의 말씀이 바로 이전에 제가 고민한 사생 관에 딱 맞는 것이었습니다. 스님은 그때 법문에서 꿈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 니다. 우리가 깨치면 현실의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꿈에서도 불을 보면 뜨겁고, 또 고통스런 것은 고통을 느끼지만 깨고 나면 그것은 꿈일 뿐이다. 그래서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꿈을 깨고 나면 고통과 번뇌도 없는 것 이라는 불교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또 청담큰스님이 손을 좌에서 우로 흔들 면서 지금 내가 이렇게 손짓하면 내년 태풍에 영향을 준다 는 말씀을 하셨어요.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 는 과학이론인 에드워드 로렌츠(E. Lorentz)의 나비효과 얘기가 나오면 청담큰스 님이 생각납니다. 청담큰스님의 법문을 들은 1963년도에는 4 19와 5 16을 거치는 격동의 시 기였고, 그래서 저희 같은 학생들은 민족, 민족 주체성, 민족주의 같은 것에 민 감했습니다. 또한 남북 학생회담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 크게 이슈가 되었죠. 그 러자 큰스님께서는 너희들 가운데 열 명이 옷을 활딱 벗고, 휴전선을 넘어서 이 북으로 가 담판을 할 수 있는 청년들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통일은 문제가 아니라고 법문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말씀을 듣고는 아! 이런 것이 바로 사생관 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평소에 고민해 왔던 인생의 해답을 불교에서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불교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것 입니다. 그 후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요? 212 그날, 강연이 끝난 후에 교문까지 청담큰스님을 따라가서, 스님 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도봉산 도선사에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13 저는 큰스님에게 도선사로 찾아가서 뵐 수 있는가를 여쭈었습니다. 그러니깐 언 제든지 찾아오라고 스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법불회에 가입을 하고 전 창열, 고준환, 신호철, 그리고 후배인 황정원과 도선사에 가서 예불을 하고, 참 선을 하고, 청담큰스님에게 법문을 들으면서 점점 불교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확실하게 발심하고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기회가 되면 선지식을 뵙 21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고 지도를 받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고시공부를 절에 가서 하면서 불교를 알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경험이 없 으신가요? 3학년 때 충남 예산의 수덕사 말사인 보덕사 관음암에 가서 한여 름 동안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관음암에서 아침 예불도 하고, 한 시간을 참선 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때는 모기가 물어도 참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그 절의 어머님뻘 되는 비구니 스님이 저에게 불교의 여러 이야기를 자상 하게 일러 주셨습니다. 혜능스님이 공부한 것, 참선하는 법 등을 말씀해 주셔서 불교 공부를 깊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에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좌선을 하던 중 비몽사몽 간에 의자에 앉아 계시던 부처님께서 의자와 함께 저의 몸 안으로 쑥 들어왔습 니다. 그런 경험 이후에는 더욱 더 불교를 신심으로, 확신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지불식간에 이차돈 성사의 순교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나에게 불교를 믿으면 목을 벤다고 해도 광화문 네거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목을 내놓겠으며, 세세생생 불법문중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습니 다. 부처님이 과거생에 히말라야 선인으로 수행할 때 제석천이 나찰로서 읊어 주셨던 게송인 제행무상( 諸 行 無 常, 모든 행이 무상)하니, 시생멸법( 是 生 滅 法, 이것이 생하고 멸하는 법)이라. 생멸멸이( 生 滅 滅 已, 생하고 멸하는 법도 멸해 버리면)이면, 적멸위락( 寂 滅 爲 樂,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14 적멸하여 즐거우리라)이라 는 글귀가 계속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이는 위법망구하는 신심이었고, 불교에 대한 철저한 발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에는 출가하겠다 는 마음도 일어나고 그랬습니다. 이후 여름방학이 끝나고 서울법대 동기인 전창 열이 대학생불교연합회를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대불련 창립활동에 참여했습니다. 탄허큰스님과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되었나요? 불교를 접하다 보니 선지식을 만나 불교 공부를 깊게 하고 싶었습 니다. 1964년 여름, 이기영 박사께서 오대산에 1주일간 수련대회를 다녀오시더 니 이번에 월정사에서 만난 탄허스님은 생불( 生 佛 ) 같은 위대한 스승이라 고 말 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기영 박사는 그때 외국에서 공부하고 귀국을 해서 동국대 교수로 부임하였는데, 대불청의 지도교수를 맡았어요. 당시 이기영 박사 가 천주교에서 불교로 개종했다고 하니 불교인들도 반신반의하던 분위기이고, 평소에는 스님들의 얘기를 잘 안 하시던 분이어서 더욱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그러나 이기영 박사는 그때 당시에 혜성같이 나타난 대학자이십니다. 그런 교수 님이 생불이라고 하시니까 저는 속으로 꼭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어요. 하여간 저는 큰스님을 꼭 만나고 싶다는 상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964년 겨울에는 오대산으로 가기로 했는데, 탄허큰스님이 조계사에 와서 계신다는 것 을 1964년 12월에 불교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잘 됐다 싶어 저는 대학 동기이고 도반인 전창열군과 상의하고, 제가 조계사로 전화를 해서 주지 양청우스님에게 인사만 드리겠다고 요청을 드렸더니 어렵게 허락을 해주셨습니다. 대불련 창립 의 주역인 저와 전창열이 조계사 주지실에서 큰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스님을 뵈니 눈에서 형형색색의 광채가 나더라고요. 그리고 어떤 큰 바 214 위가 탁 하고 서 있는 것처럼 그런 위엄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스님에 대한 첫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15 인상이었습니다. 다른 스님에게는 느낄 수 없는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탄허스 님은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으라고 하셨어요. 저는 그 당시에 법대를 다니면서 도 우리 나라의 미래, 사회 발전 이런 것을 고민했어요. 저도 어렵게 자라서, 어 려운 사람을 돕는 그런 인재가 되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마음을 키워 가던 시절 이었어요. 그리고 그때에는 서구사상이 풍미하여서, 저는 우리 동양사상, 한국 21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사상은 왜 없는가를 고민하였지요. 마침 그때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적 민주 주의를 말하고 그래서 우리 것을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랬어요. 이런 바탕이 있었지만, 나라의 장래에 관심이 많았지요. 이런 것이 저와 큰스님이 계 합된 연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큰스님에게 앞으로 대불련이 나아갈 방향과 저희들의 자세에 대해 물 으니, 큰스님은 3천 년 된 고목나무(불교)에서 꽃이 필 것이라 고 하시더라고요. 스님은 꼭 세존응화 몇 년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스님은 청량국사의 이론에 근 거하여 당시 종단이 쓰는 불기와는 다르게 불기를 쓰셨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불교가 빛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옛날에는 독립정신과 민족정신이 있었는데 요새 젊은이들은 기상과 기개가 없다고 하셨어요. 스님은 젊은이들이 기상이 있어야 민족정신, 민족의 기개가 살아날 수가 있다고 하시면서 도산 안 창호 선생님을 소재로 말씀하셨습니다. 안창호 선생의 강연 장소에는 항상 일본 순사가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안창호 선생은 강연 말미에 해를 가리키며 저 해 가 떨어질 때라고 얘기하셨다고 하는데 큰스님은 이 부분에 대해 말씀하실 때 방안에 있는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쩌렁쩌렁한 큰 소리로 얘기하셨습니다. 그런 감명 깊은, 드라마틱한 첫 만남이 있었군요. 그런데 저는 큰스님의 말씀이 저와 전창열만 듣기에 너무나 아깝 다는 생각이 들어서, 중간에 밖으로 나가서 대한불교청년회 부회장이신 손창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16 형에게 전화를 해서 탄허스님의 법문을 대한불교청년회 회원들과 같이 들었으 면 좋겠다는 연락을 하였더니 아주 좋다고 하더라구요. 청년회가 주축이 되고 저와 전창열도 가입한 모임으로 송산이라는 모임이 있었거든요. 그러고 나서, 저는 탄허스님에게 저희들은 큰스님과의 대화가 너무 아쉬워서 오늘 저녁에 시 간을 내셔서, 식사도 하시면서 대화를 할 수 있는가 를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 랬더니 큰스님은 흔쾌히 승낙을 해주셔서 대한불교청년회 부회장이던 손창대 형이 무교동의 청요리집인 대려도라는 곳에 전화를 해서 예약을 하고는 그리로 스님을 모시고 가서 식사를 하면서 계속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 그 모임 에 있었던 사람이 이기영 박사, 대학생불교연합회 소속인 나와 전창열, 손창대, 김희순, 김무송, 이정호, 이정우, 박명규, 이일소씨 등 대한불교청년회 간부로 열다섯 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에 탄허큰스님을 시봉하고 온 스님이 도문큰 스님이었습니다. 우리들이 큰스님에게 감동받은 것은 큰스님이 영월의 태백산 정상(망경암)에 있 는 단종대왕의 비문을 소재로 하신 말씀입니다. 큰스님께서는 그 비문을 지으셨 는데, 영월 사람들은 단종이 산신령이 되었다고 말들을 한다면서 그 비문에서 장차 우리나라가 동으로는 일본을 아우르고, 북으로는 만주를 아우르게 될 것인 데 이것은 태백산 산산령의 위신력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썼다고 했어요. 이 렇게 비문을 설명하시면서 우리 민족의 기상, 번창, 정신을 갖고 말씀하시는 것 에 우리 청년들 모두는 감동을 받은 것이지요. 그 말씀에서 우리는 스님의 생각 을 딱! 알게 되고, 느끼게 된 것입니다. 스님의 생각이 어디에 있나 하는 것을 알 아차렸지요.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고, 만주까지 우리 땅이 된다고 하시니 우리 의 가슴은 흥분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가 큰스님에게 다 반해 버린 것입니다. 암 울한 시절에 그런 웅변에 감동을 받은 것이지요. 그런 말씀을 들은 우리들에게 216 큰스님은 한 줄기 빛이 된 것입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17 그러면 그 날의 대화는 그렇게 해서 마치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저희들은 큰스님과 대화를 더 하고 싶다고 하니까 큰스 님께서는 요새 젊은 사람들은 하룻밤만 새면 픽픽 쓰러지지만, 당신은 몇 날을 잠을 자지 않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밤을 새자 고 결정을 하고는, 그 즉시로 종로의 화신백화점(지금, 국세청) 뒤에 한옥의 함평여 21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관이란 곳으로 스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저희들은 큰스님과 그렇게 대화를 하였 는데, 스님이나 저희들은 밤을 새워서 이야기를 하였지만 모든 사람들이 눈이 초롱초롱하였습니다. 큰스님은 다방면의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서 답변이 명쾌했습니다. 탄허큰스님께서 저희들과의 첫 만남에서 그런 파격을 베푸신 것은 아마, 인재를 양성하시겠다는 원력이라고 할까 그런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큰스님은 젊은이들을 아주 좋아했고, 불교의 미래를 생각하며 젊은 저희들에게 그렇게 배려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과연 어떤 스님, 선지식이 청년들을 처음 만나서 이렇게 밤을 새워 가면서 토론을 할 수 있 겠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그때 큰스님은 월정사 조실이었어요. 아마 탄허큰스님 의 사례가 유일한 것이 아닌가 그럽니다. 삼천대천세계에서 이런 일은 있지 않 았습니다. 다른 선지식들은 말로만 중생을 위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탄허스 님은 승속을 초탈하신 것입니다. 스님은 불법만 말씀하시지 않고, 국가와 민족 의 장래를 걱정하셨고, 헐벗은 백성을 걱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보살행입 니다. 승속을 불문하고, 첫 만남에 이렇게 진지한 대화를 하신 사람이 어디에 있 겠습니까? 보통 스님들은 불법이니, 마음공부만을 이야기하지 탄허스님처럼 미 래의 희망과 국가관을 이야기한 경우는 거의 없어요. 이것은 승가의 기존 양식 을 벗어난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스님에게 압도당하고, 감화받고서 제자가 된 것입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18 지금 생각을 해 보면 당시 큰스님은 민족의식의 입장에서 백성이라든가, 나라 의 장래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걱정을 하시다가, 저희들 같은 젊은 청년들이 이 야기를 듣고 싶어 하시는 것에 대견하게 보시고 시간을 내주신 것이 아닌가 합 니다. 스님은 화엄사상과 동양사상에 바탕을 둔 도의적인 인재 배출을 늘 갈구 하셨습니다. 이런 인재들이 많은 일을 할 때 사회가 잘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 모임을 갖고는 저희들은 뜻을 합쳐서, 앞으로도 스님을 계속해서 모시자 는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리고 김정호라는 사람을 월정사에 계시는 탄허큰스 님에게 보내서, 가서 스님에게 배워 와서 우리들에게 전달해 달라고 했어요. 그 랬더니 그 사람이 오대산까지 갔다 왔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별명이 소탄허 가 되었습니다. 그해 여름에는 저희들이 미니버스를 대절해서 오대산 월정사까지 내려가서 뵌 적도 있었는데, 그때는 길이 나쁘고 해서 열세 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이러한 탄허큰스님과의 인연이 현재까지도 이어오고 있군요. 대학 졸업 후 북한산 승가사에서 고시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주지가 도원큰스님이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예불에 빠지지 않으니 도원스님이 부산의 묘관음사에 계시는 향곡스님이 아주 큰스님이고, 선지식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저는 향곡스님을 만나고 싶어서 부산 범어사로 내려갔습니다. 그때가 범 어사의 동산스님이 입적하신 후의 49재였는데, 거기로 향곡스님이 오신다고 해 서 그리로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범어사에를 갔더니, 늦 은 밤이어서 아무 곳에서 대충 자고 그 이튿날에 만나려고 향곡큰스님이 어느 방에서 주무시냐고 물어 봤습니다. 다음 날 새벽 네 시인가에 풍채가 크신 향곡 큰스님이 아침 예불을 하시고는 도량을 도시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향곡큰스님 에게 다가가서는 땅에서 삼배를 하고, 인사를 드리고는, 불교 공부를 하고 싶어 218 서 스님을 찾아왔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은 저에게 무엇을 하느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19 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고시공부 한다고 하니 1년 후에 다시 오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에는 제가 출가와 불법외호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하였 을 때인데 그때 스님이 저를 잡았으면 눌러앉았을 것입니다. 선지식에 대한 갈망이 대단하였군요. 21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그래요. 저는 선지식을 만나서, 불법을 공부하고 출가까지 하려는 의식이 강했어요. 그러다가 1965년 초여름인가 그때 종정이신 효봉스님이 돌아 가셨어요. 그래서 동국대에서 수유리까지 장례 행렬이 시가행진을 하였습니다. 저도 대불련 출신이었기에 그 행진에 참여했어요. 그때 사람들에게 듣기를 경봉 스님의 법이 높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경봉스님이 계신 선학원에를 아침 열 시 무렵에 무조건 찾아갔어요. 가서 인사를 드리고 제 소개를 하고 가르침을 받으려고 왔다고 하니까 큰스님은 저를 보시더니 도( 道 )라는 것은 메마른 땅에 물이 스며드는 것과 같은 것이라 고 하셨어요. 그러시면서 저를 기특하게 여기 시더니 오늘 시간이 있냐고 그래요. 그래서 나는 특별한 일이 없어서 시간이 있 습니다 고 하였더니, 그러면 내 시자가 촌놈이라서 서울에 처음 올라왔으니 창 경궁을 구경시켜 줄 수 있느냐 고 하셨어요. 그래서 나는 좋습니다 하고, 택시 한 대를 대절해서 창경궁, 비원, 남산을 경봉스님과 그 시자를 구경시켰어요. 그 하루에 나는 평생에 그렇게 많이 웃은 적이 없었어요. 경봉스님의 재치, 해학에 감복하면서 승속을 떠나서 구경을 하면서 웃기 바빴지요. 하여간 무념무상으로, 동심의 상태에서 하루를 지냈는데, 그런 것은 도인의 경지에서 나를 대한 것이 었지요. 경봉스님에게 들은 것을 회고해 주세요. 그때 큰스님에게 들은 것이 남의 집에 가서 잘 차려진 밥상을 받으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20 면 고마워서 다 먹고, 반대로 시원찮게 차린 밥상은 괘씸해서 다 먹는다고 하 셨어요. 그리고 스님은 우리 인간, 인생을 춘하추동으로 비유해서 설명하셨어요. 봄이 되면 온화한 기운으로 만물이 소생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사람들도 처음에는 대인관계에서 처음 만나면 부드럽게, 호감을 가는 인상으로 대하고 그러잖아요. 그러나 여름이 되면 곡식들은 열정적인 기운이 있 어서 자라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것처럼 사람들도 열정에 의해서 일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 후에 가을에 되면 열매가 맺게 되는데 이것은 냉랭한 찬바람 의 기운으로 인해서 곡식이 여무는 것이에요. 그와 같이 사람에게서는 냉랭한 기운은 이성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하시면서, 사람의 친교도 모든 일도 성숙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겨울이 되면 새로운 잉태를 위해서 나무나 곡식은 죽 게 돼요. 추운 기운으로 다 죽어, 투쟁이 끝나는 것이지요. 이렇게 스님은 춘하 추동을 비유하여 우주, 인간에 대한 것을 절묘하게 말씀해 주셨어요. 그리고 그 때 스님은 남산에 올라가셔서, 서울이 학의 모양이라고 그러시더라구요. 통도사 극락암에는 가지 않았는가요? 갔지요. 내가 스님을 서울 안내를 한 공로가 있잖아요. 극락암에 를 가서 하룻밤을 잤더니, 스님이 그 다음 날에 나를 따라와 하시면서 선방을 구경시켜 주었어요. 그때 그곳에서 내가 스님에게 제가 출가를 하면 어떻겠습 니까 하였지요. 그랬더니 스님은 딱 안 된다고 그러셨어요. 스님은 내가 공부 를 하고 앉아 있어도 사람들이 너를 필요로 해서 끄집어 내기에 출가는 할 수 없다 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나는 출가에 대한 것은 접었지요. 나는 아니구나 하 였어요. 220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21 서울에 올라오셔서 언제 다시 탄허큰스님을 만났나요? 그렇게 나는 출가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회에서 불 교를 외호하는 것에 주력하는 것으로 정했어요. 그러고 나서 아무래도 탄허큰스 님과의 인연이 더 각별하니까 탄허큰스님에게 불교를 배우면서 고시공부를 해 서 사회에 나가려고 한 것이지요. 22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그래서 1965년 가을 무렵에 제 친구인 전창열과 의기투합해서 선지식을 찾아 서 불교공부를 더욱 하기로 하였습니다. 너는 남쪽에 가서 성철큰스님으로부 터 법을 배워오고, 나는 북쪽에 가서 탄허큰스님에게 법을 배워와 서로 만나 얘 기해 주자 고 서로 간에 약속했습니다. 전창열을 비롯한 봉은사에 있던 대불련 구도부 소속의 친구들은 김용사에 계 시던 성철큰스님에게 백일법문 들으러 가고, 저는 오대산 월정사로 가서 탄허 큰스님을 뵙고 고시공부도 하자는 생각으로 1965년도에 오대산으로 갔습니다. 저는 월정사에 가서 희찬큰스님의 안내를 받아서, 방산굴에 계시는 탄허큰스 님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삼배로 절을 하고 나서는 저는 스님에게 제 가 25년을 살아왔고, 대학 졸업까지 16년간 학교 공부한 것은 불법을 만나기 위 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큰스님께서 고개를 끄덕이시고, 제 대로 알았다고 하시면서 이제부터 동양사상의 핵심인 유교, 불교의 법통과 종지 를 가르쳐줄 테니 받아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스님은 동양사상은 유불선 삼교인데, 불교는 근본 체라고 할 수 있지만 앞으로의 사회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유교의 참뜻을 알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저에게 대학, 중용의 종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가 한문을 잘 몰라 자꾸 물 으니 큰스님께서 안 되겠다고 생각하셨는지 제 노트에다 그 종지를 직접 써주셨 지요. 그 노트가 있었으면 좋은 증거가 될 터인데, 지금은 없어졌어요. 큰스님 께서는 앞으로 매일 저녁 공양 후 이곳 방산굴에 와서 배우라고 하셔서 월정사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22 를 떠날 때까지 4~5개월간 가르침을 받았고, 이때부터 큰스님을 제 스승으로 세세생생 모시리라 결심하였습니다. 큰스님께 배운 것을 조금 말씀해 주시지요? 큰스님께서 항상 강조하셨던 것이 종지( 宗 旨 )를 파악하라는 것이었 습니다. 처음에는 저에게 유학의 종지를 파악하고, 그 연후에 불법을 배워야 한 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저에게 유교의 대학과 중용의 중요한 구절을 말씀 하시면서, 저보고 그것을 받아쓰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그 내용은 조 금은 들어 알고 있지만 그를 한문으로는 잘 쓸 수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스님께 서 그 내용을 제 노트에 직접 써서 저에게 주시더라고요. 그때 스님께서 대학 첫 장에 나오는 대학지도( 大 學 之 道 )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리 고는 대학의 마지막 구절인 물유본말( 物 有 本 末 ) 하고, 즉 모든 물에는 근본과 지엽 이 있고, 사유종시( 事 有 終 始 ) 하니, 즉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으니, 지소선후( 知 所 先 後 ) 면, 즉 먼저 하고 나중 할 바를 알면, 즉근도의( 則 近 道 矣 ) 하리라, 즉 곧 도에 가까운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지요. 제가 사회생활하면서도 이 말을 응용해 일에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는 일을 구분해서 하고, 개인일과 회사일이 겹치면 항 상 중요한 일을 먼저 했지요. 또 다른 하나는 중용에 나오는 희노애락지 미발위지중( 喜 怒 哀 樂 之 未 發 謂 之 中 ) 입니 다.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따위 감정인 희노애락이 생기기 전 그것이 중 ( 中 )이라는 것입니다. 중야자 천하지대본야( 中 也 者 天 下 之 大 本 也 ), 화야자 천하지달도 야( 和 也 者 天 下 之 達 道 也 )니라 즉 중( 中 )이라고 하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라는 것이 고, 화( 和 )라고 하는 것은 천하의 통달된 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학의 핵심이 라 할 수 있는데 우리가 한 생각이 나기 전, 즉 분별심이 있기 전의 상태를 중 222 ( 中 )이라 합니다.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이나 성이나 우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23 리 마음이나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학에 신기독야( 愼 其 獨 也 ) 즉, 어두운 방안에서도 속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 다. 여러 사람이 있을 때는 근신하지만 혼자 있을 때 근신하는 사람이 군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저에게 맹자( 孟 子 ) 고자편( 告 子 篇 )에 나오는 것, 즉 하늘이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히고 그 22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몸을 지치게 하는 등 고난과 시련을 주어서 분발하고 인내케 하여, 일을 더 많이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함이라는 것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 말 씀을 저의 좌우명으로 삼아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어려운 일을 극복할 수 있었지요. 저는 지금도 큰스님께서 들려주었던 이 이야기가 잊혀지질 않습니다. 그리고는 한국 유학의 도통( 道 統 )을 유학의 초조라고 보신 설총에서부터 최치 원, 안향, 정몽주, 이규보 그리고 조선시대 김장생, 송시열, 이황, 유성룡, 박세 당, 박지원, 강세황, 박제가 등 유명한 유학자에 이르기까지의 계통을 전부 말 씀해 주시면서 종지를 파악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향교의 배 향, 제사의 원칙, 순서라고 하셨습니다. 탄허스님께서 유교의 본질을 가르쳐 주셨군요. 큰스님은 우리나라에 유학이 아니라 양명학 즉 중국 송나라 때 주 자에 의해 확립된 성리학의 사상에 반대하여 명나라 때 왕양명이 주창한 학문이 들어왔다면 우리나라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씀했어요. 불교와 양명학은 심학 이라 서로 보완이 되니 잘 됐을 것이라는 얘기였습니다. 양지( 良 知 )를 이룩하여 사물을 바르게 하는 방법으로 양명은 확정했지요. 대학 의 격물치지를 해석한 주자의 입장에 반대한 양명학에서는 앎은 마음의 본체이 며, 마음은 자연히 알 수 있도록 가르친다고 설명하셨어요. 부모를 뵈면 자연히 효도할 줄 알고, 형을 보면 자연히 공경할 줄 알며,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24 것을 보면 자연히 측은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의 선천적인 앎의 능력인 양지( 良 知 ) 를 설명했습니다. 양지는 본래부터 안다 는 것이지요. 불교에서는 우리 마음이 본래부터 지혜가 있다고 하는 만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탄허큰스님께서는 왕양명의 전생이야기를 즐겨 들려주셨어요. 왕양명 은 재상까지 했습니다. 그는 문인이었지만 전쟁에 나가면 백전백승이었지요. 그 이유는 전생에 스님으로 수도를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산길을 가 다 한 암자를 지나가는데 법당 문이 굳게 잠겨 있어 스님들께 열어주기를 부탁 하니 절대로 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힘에 끌려 왕양명이 문을 억 지로 여니 시 한 수가 있었습니다. 五 十 年 前 王 守 人 (오십년전왕수인) 開 門 人 是 閉 門 人 (개문인시폐문인) 精 靈 剝 落 還 歸 復 (정령박락환귀부) 始 信 禪 門 不 壞 身 (시신선문불괴신) 오십년 전 왕수인이여 문을 여는 사람이 문을 닫은 사람일세 정령이 바뀌어 다시 돌아오니 비로소 선문에 불괴신이 있음을 믿겠네. 왕양명은 전생에 중국 저장성에 있는 금산사( 金 山 寺 )에 주석하셨는데 늘 선정을 닦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욕재계하고 가사장삼을 수하고 법당에 들어가면 서 제자들에게 이르되 이 법당 문을 절대로 열지 말라 고 부탁하고 바로 열반 에 들었습니다. 그런 지 50여 년이 지난 어느 날에 왕양명이 봄 소풍을 왔다가 금산사 법당의 문을 여니 거기에는 한 노스님이 가사장삼을 수하고 입정한 채로 미아라가 되어 굳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왕양명은 지행합일설( 知 行 合 一 說 ) 을 주창했다고 합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둘인데 왜 하나가 되느냐. 참으로 알면 행은 저절로 나오고, 따라서 정각 224 을 이루면 대자대비는 저절로 나온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25 은 둘이 아니요, 지행합일이 안 되면 참 앎도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불법의 이치를 통달하신 탄허큰스님께 들은 불교 얘기가 궁금하군요. 큰스님은 항상 유불선을 같이 얘기하셨어요. 먼저 다른 종교 얘기 를 예로 든 다음 불교로 마무리하셨지요. 불교에서도 역시 종지를 알아야 한다 22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고 하시면서 불교에서 중요한 도( 道 ), 마음, 본래 자리, 마음의 본체, 분별심, 돈 오점수, 견성 등을 자세하게, 그러나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큰스님은 불법은 마음( 心 ) 법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는 마음이 미( 迷 )하면 중생이 되고, 마음을 깨치면 부처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것을 탄허스님은 즉심시불( 卽 心 是 佛 : 내 마음이 곧 부처) 이라고 설명하셨지요. 큰스님께서는 우리 중생이 원래 부처인데 현실적으로는 따로 생각하게 된다 고 하셨지요. 원래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고 하는데 왜 부처님은 신통이 자 재하고 중생은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부처도 마음으로 된 것이고, 중생 도 마음으로 된 것이니 마음으로 지었다는 점에서 같기 때문에 깨치면 부처가 되고 미하면 중생이 되는 것이다. 모두가 마음의 작용이니 그래서 부처가 곧 중 생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그리고는 중생도 수행정진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때 부처의 성품을 찾게 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큰스님은 팔만대장경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명심견성( 明 心 見 性 ) 즉 마음을 밝혀 성품을 봄이라고 하셨어요. 또한 도라는 것은 한 생각, 분별 심이 끊어진 자리에서 아는 것이 도요, 분별심이 붙어서 아는 것을 술이라 한다. 도는 본래 마음자리를 말하는데 한 생각 끊어지고 분별심 끊어진 그 자리가 우 리의 본래 청정한 마음자리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선악도 아니요, 냄새나 빛 깔도 없고, 네모지거나 둥글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검거나 흰 것도 아닌 것이 라고 하셨지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26 큰스님께서는 불법을 공부하고 정진하는 데 세 가지 길이 있다고 하셨어요. 첫 째는 염불문이요, 둘째는 경전문이요, 셋째는 참선문이라고 하셨지요. 이중 하 나를 선택해도 되고 같이 해도 된다고 얘기하셨어요. 탄허큰스님은 많은 부분을 말씀해 주셨는데 다른 스님들과 달리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그렇게 하신 경우는 드물다고 저는 봅니다. 탄허큰스님의 일과나 들으신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그때에 저는 오전, 오후 내내 공부를 하고는 저녁 무렵이면 방산굴 에 가서 스님을 찾아가서 배우고는 캄캄한 밤길을 내려와서 제 방으로 가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상원사와 보궁에도 가 보았어요. 그때에 보니 탄허큰스님은 하루 종일 화엄경 번역을 하시고, 저녁에는 저와 대화를 조금 하시고, 밤 아홉 시가 되면 무조건 주무시고, 새벽 한 시면 딱 일어나셔서 아침 공양 전까지 참선 을 하시고, 계속해서 번역을 하시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그렇게 규칙적이고, 초 인적으로 번역과 수행을 하셨습니다. 그때 탄허큰스님에게 들었던 내용 중에서 특기할 것을 소개하여 주세요. 그때에 탄허큰스님이 방산굴( 方 山 窟 )이라고 이름 붙인 것에 대해서 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원래는 스님께서 상원사에 계시다가 월정사에 내려오시 면 방산굴이 있던 그 자리에 자주 오셨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서 계시면 편안하 시고, 오래전에 왔던 느낌을 받아서 처음에는 방산굴을 재래암이라 하려고 하였 지요. 그러다 화엄론 40권을 보시고는 이통현 장자가 공부하신 곳이 밖에서는 호랑이가 지키고, 하늘에서는 천녀들이 식사를 대접하였다는 내용을 보시고는 방산굴 로 작명을 하였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나는군요. 그리고 탄허큰스 226 님이 저에게 근검절약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흐르는 물도 아껴 써야 한다고 일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27 러 주셨습니다. 그때에 스님이 번역하는 원고를 보니까 스님은 번역하신 문장을 고치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글을 쓰다가 흔히 나오는 파지라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게 완벽하게 경전 번역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상상을 할 수 없는 그런 경지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그런 것이 었습니다. 22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당시 월정사에서 뵈었던 스님들을 기억하시나요? 그럼요. 그때에는 희찬큰스님이 주지 소임을 보시고 각수 인보 스님이 있었고, 혜거스님은 재무를 보았을 것입니다. 중학생이던 삼보스님, 삼 지스님, 삼중스님은 행자였습니다. 그때 월정사에 갈 때에 꿀 한 병을 갖고 갔 었는데, 삼보스님이 감기몸살이 나서 제가 토종꿀을 타 준 기억이 납니다. 방산굴로 탄허스님을 만나러 다양한 사람들이 오셨다고 하는데 지켜보신 것이 있나요? 한번은 신부가 찾아오니까 탄허스님이 신부에게 기독교에서 주장 하는 삼위일체에 대해 물었습니다. 성부 하느님, 성자 아들 예수, 성신 성령이 다른데 왜 삼위일체 즉 하나로 보느냐고 물었어요. 그러니깐 신부가 그 질문에 대해서 답을 못한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그때 스님은 달을 비유로 하시면서 그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달의 본체인 법신( 法 身 )이 있고, 달의 빛인 광명이 있으며,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면 천 개의 달이 되듯이 달이 수천 곳에서 나타나는 모습 이 있지만 본체( 本 體 )인 달은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법신, 보신, 화신은 하 나라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기독교에서는 원죄가 생기고,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런 것이라고 했어요. 선악은 분별심의 대표적인 명 사라고 말씀했어요. 그러시면서 도라는 것은 분별심이 끊어진 자리를 말하고,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28 그 자리를 깨우치면 원죄 또한 사라지는 것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선 악과는 분별심이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는다는 것은 분별심을 낸다는 것입니 다. 분별심을 가지고 있는 한 도와 근본 마음자리는 멀다고 했습니다. 즉 도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영원히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분별심이 끊어진 자리를 터득하면 원죄가 없어진다고 했습니 다. 근본자리를 알지 않고는 견성성불을 얻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스님은 불 교에서 말하는 도라는 것은 마음, 하늘 천, 가운데 중과 같은 개념으로 보시면 서 선악, 옳고 그른 것 등등의 분별심이 끊어져야 그 본체, 본마음을 증득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탄허큰스님께서는 성경도 다 읽었던 것 같습니다. 탄허큰스님은 성경에서 네가 돌이켜서 동자( 童 子 )로 돌아가지 못하 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구절을 갖고 그를 보완해서 설명하였습니다. 동자는 어 린애를 일컫는 것인데 어린애는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할 수 없고, 웃었다가 금새 울기도 하는데 이는 분별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큰스님께서는 동자처럼 분별심 이 없을 때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얘기하셨지요. 그래서 부처님도 영아행( 兒 行 )을, 노자도 적자( 赤 子 ) 즉 붉은 핏덩이를 최고로 쳤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스님은 불교의 진리를 명쾌하게, 동양철학을 완전 섭렵한 경지에서 설명하였습 니다. 스님께서 화두( 話 頭 )를 설명하실 때에도 이렇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선사에 게 와서 소금 맛이 어떻습니까? 하고 물으면,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설명하고, 소금을 만드는 과정, 모양 등등을 갖고 말을 하지만, 정작 소금을 먹어 보지 못 228 한 사람에게는 실감이 안 나죠. 그런데 선사들은 불법의 근본대의가 뭡니까? 소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29 금이 뭡니까? 하면 바로 소금을 탁 집어서 입에 털어 넣어주고는 네가 씹어서 먹고, 느끼고, 알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말로써 맛을 설명할 필요 없다는 것입 니다. 월정사는 얼마 동안 있었고, 그 후의 서울에서의 인연은 어떻게 이어갔나요? 22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저는 월정사에서 몇 달만 있었지요. 월정사에 가니 희찬큰스님이 제가 머물 방을 안내해 주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함석집이 있었습니다. 그 함석 집에 있는 조그만 방 하나를 내주었는데, 바로 옆의 큰방은 1965년도에 고대 학 생들이 조난사를 당해서 죽은 시체를 놓아 두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방의 바로 옆에서 지내려고 하니까 그게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시체들 을 두었던 방에서 지냈다니까요. 그 당시는 전기도 안 들어오던 때입니다. 제가 그래도 불교공부를 해서 지낼 수 있었지 않았나 봅니다. 제가 서울로 올라온 뒤 저희들이 큰스님에게 오대산 산속에만 계시지 말고 서 울에 올라오셔서 일반 대중을 위한 활동을 해 달라는 간청을 드렸습니다. 그랬 더니 스님은 이화장, 이승만 대통령이 살던 집을 빌려주면 나와서 국사를 보겠 다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님은 통 안에서는 통을 굴릴 수 없다고 하시면 서, 통 밖으로 나와서 통을 굴려야 한다는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기에, 저희들 이 그런 말씀을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 무렵 저희들은 스님에게 오대산에 머물지 마시고, 서울로 나오시라고 간청 을 드렸어요. 그래야만 스님의 원력인 화엄경 출판을 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 지요. 그리고 서울로 나오셔서 중생 교화를 해주셔야 된다고 간청을 하였지요. 그래서 청년들을 지도해 달라고 하였지요. 그러시면 저희들이 적극 돕겠다고 하 였지요. 하여간에 산에서 내려오시라고 적극 권했지요. 그러나 스님은 그때 아 직 화엄경 번역을 다 끝내지 않으셔서 그런지 바로 응하시지는 않았어요. 그렇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30 지만 얼마 후에 이런 저희들의 권유가 주효해서인지 1966년 후반에는 동국대 대학선원장으로 서울로 나오셨지요. 우리들의 강력한 권유가 단초가 되었죠. 그 래서 우리들은 동국대 대학선원으로 몰려가고, 늘 스님을 따라다니고 그랬어요. 화엄경 교정 작업과 불사에 많은 도움을 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부산에 가서도 몇 달을 교정 작업에 참가했습니다. 그때 각성 무 비 통광 스님들하고 그 작업을 하였습니다. 전창열은 왔다가, 며칠 하다가 서 울로 갔고요. 부산에서 작업을 마치시고는 서울에는 처음에는 홍은동의 보살 절 에 계셨는데, 그런 데 스님이 오래 있을 수가 없으셔서 청룡사로 오셨습니다. 거 기에 오신 큰스님을 저희들이 설득을 해서 일반 대중을 위한 동양학 강의를 하 였습니다. 그때 한 200명이 모였는데, 그것은 저희들이 소문을 내고 해서 된 것 입니다. 그때 저희들이 돈을 모아 칠판을 사서 시작했는데, 제 선후배들과 청룡 사 대중이 다 들었지요. 화엄경을 책으로 내는 불사가 보통이 아니었는데, 듣기로는 손창대 선생님을 추천해서 작 업에 동참시켰다고 합니다만. 큰스님께서는 은사이신 한암큰스님으로부터 여러 경전을 현토 역해할 사람은 탄허 너밖에 없다 는 위촉을 받아 10년을 하루같이 경을 쓰셨지 요. 화엄경 80권, 화엄소 150권, 논 40권, 요해 9권, 통현장자 요해 9권, 보조 국사 원돈성불론 등 총 287권을 집대성했습니다. 원효스님 이후로 화엄경 완간 은 최초입니다. 200자 원고지 10만 매인데, 초판은 47권 한장본으로 만들었지요. 뒤에 2권씩 합해서 양장본 23권으로 묶었어요. 너무 오랜 작업이다 보니 탈고 후 견비통 230 으로 3년을 고생하셨지요. 그런데 원고는 됐지만 돈이 없어 또 7년을 기다렸습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31 니다. 그러다 해운대관광호텔 김진선 거사가 당시 돈으로 500만 원(현재 돈으로 약 2억 ~3억)을 보시해서 청룡사에서 출판 작업을 했어요. 큰스님께서는 가장 좋은 종이 에 가장 좋은 제본으로 하시겠다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사진식 자기 3대를 구입해 작업을 했습니다. 23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그래 탄허큰스님의 작업이 편집 작업을 통해 이제는 사식 작업을 하고, 인쇄 를 해야 하는데 그 편집 일을 할 사람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희와 함께 대한불교청년회 활동을 같이 하며 우리가 큰 형님으로 모셨고 우리말 팔 만대장경 이라는 책의 작업을 한 손창대 선생이 편집 경험이 있어 찾으러 다녔 습니다. 손창대 선배는 처음에는 연락이 안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선호 텔을 지나가다가 거기에서 딱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런 제안을 했더니, 그 선배 가 저와 전창열이 도움을 준다는 조건으로 응해서 그 일을 하였습니다. 화엄경 불사를 위하여 매달 쌀과 여러 물품을 지원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사정은 어떻게 된 것인가요? 대원암에 들어가기 전에는 대원군 별장인 석파정에서 작업을 했습 니다. 거기 들어간 것은 그 별장의 주인이 쌍용양회의 김미희 여사였던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박초당 여사가 김미희 여사에게 탄허큰스님의 사정을 전하면서 부탁을 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때에 저도 옆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조금은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석파정에 가서 큰스님을 돕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스님이 석파정에 들어가게 된 것에는 김법린 동국대 총장의 며 느리, 즉 김인홍 교수의 부인인 보리심의 역할이 있었어요. 보리심이 석주스님 을 비롯한 큰스님들을 많이 시봉하였는데, 탄허스님을 알게 되면서 환희심을 내 어서 스님을 따랐어요. 그러면서 보리심이 초당 여사를 소개하였어요. 그래서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32 탄허스님을 인정하게 된 초당의 주선으로 이문동 보문난야에 들어갔고, 초당이 쌍용의 김미희 여사를 소개하였어요. 그런데 석파정의 주인이 쌍용이었어요. 그 런 인연으로 대원군 별장에서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석파정에서 작업을 할 때에는 김미희 여사가 대중들의 양식을 대고, 저도 그곳에 3개월간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 쌍용 김성곤 회장의 회갑 때에 스님께서 진묵대사가 모친을 추모하는 제문을 쓴 병풍을 만들어서, 제가 신문로에 있는 김성곤의 집 에 갔다 준 것도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석파정에서 작업을 하시다가 대원암으로 오셨는데, 그때에도 스님의 불사를 할 때에 작업 인력이 많고 하니까 탄허스님은 그런 재원을 만들기가 어 려웠습니다. 월정사에서 희찬큰스님이 어떻게 지원하셨는지는 저는 알 수 없었 지만 저도 제 나름대로 지원을 했습니다. 그때에 매달 쌀 한 가마와 필요 물품들 을 탄허큰스님에게 갖다 드렸습니다. 하여간 탄허큰스님이 서울에 오셔서 활동을 하실 때에 외부적인 일은 제가 거 의 많이 맡아서 했습니다. 탄허큰스님을 모시는 시봉스님들이 있었지만, 그 스 님들은 주로 탄허큰스님의 지근거리에서 시봉, 화엄경 만드는 것들을 주로 하셨 지만, 그 외의 일은 거의 제가 맡아서 했습니다. 저는 그러니깐 탄허큰스님을 평 생 시봉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탄허스님은 평생을 역경불사라는 대작불사를 하셨는데요.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이 라 보시나요. 대원암에 계실 적인데 어떤 사람이 스님에게, 스님 생활을 하시 면서 그렇게 평생을 번역, 출간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고 여쭈어 봤어요. 그랬더니 스님께서는 출가해서 도를 공부하는 것에는 묘미가 있는데, 그것은 232 이 세상의 다른 것에 비교할 수 없는 훨씬 특별한 묘미, 깨달음이 있다 고 말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33 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님 생활을 하신다고 하셨지요. 탄허큰스님의 예지력이 대단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스님의 예지력은 대단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을 잘 안 하 셨지만 월남전에 미국이 참전하자마자 패배할 것이라고 저희들에게 말씀하셨어 23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요. 저희들은 미국의 화력을 설명하며 못 믿겠다고 하면서 스님 어디 다른 곳 에 가셔서 그런 말씀을 하지 마세요 하였어요. 그렇지만 큰스님께서는 미국이 월남에서 망해서 나올 터이니 그런 줄 알아라, 미련한 것들 두고 보라 고 얘기 하셨지요. 그것이 청룡사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그 후에 정말 미국이 월남에서 망하다시피 하고 철수를 하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스님의 말을 믿기 시작하였지요. 큰스님께서는 또 중국을 알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앞으로는 우리나라가 미국 보다 중국과의 교역이 더욱 빈번하게 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예측을 하셨습니 다. 앞으로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견하시고는 중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스님과 저희들 몇 명이서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고려대 총장 을 지낸 김상협의 모택동 사상 이라는 책이 그 당시에는 금서로 지정됐을 때인 데, 그때에는 중국 하면 죽( 竹 )의 장막이라고 했고, 지금과 같은 왕래는 생각도 못할 때입니다. 이런 것을 40년 전에 예견하신 스님의 지혜는 놀라운 것이었습 니다. 그래 저희들은 청룡사에서 스님과 함께 몇 명이 중국어 공부를 했어요. 전창 열이가 중국어 여자 교사를 데리고 와서, 1주일에 한 번씩 매주 수요일 저녁에 공부를 하였지요. 저희들은 사회 생활을 하니까 바빠서 3개월만 하였지만 스님 은 1년간을 하셨습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34 탄허스님의 상좌인 희찬스님과도 같이 일을 한 것은요? 스님은 무슨 일이 있으면 저와 전창열을 불러서 상의를 했습니다. 탄허큰스님이 서울에 오시면 저희들이 모시고 다니고, 출판 등에 힘을 보태니 상좌들을 대신해서 스님을 모신다고 하시면서 늘 고맙다고 얘기하셨지요. 특히 제가 국가에 신화엄경 합론 현토역해 47권 발간을 비롯하여 사회에 끼친 공로 로 훈장 추서를 요청해 49재 전에 은관문화훈장을 받아오자 희찬스님이 너무 기 뻐하신 모습이 생생합니다. 탄허스님이 은사인 한암스님을 모신 것은 어떤 내용이 있을까요? 제가 알기로는 스님이 한암스님에 대해서는 지극한 효심이 있었다 고 봅니다. 월정사에서 매년 음력 3월 27일에 지내는 법회에 가 보면 스님은 정 성을 들여서 행사에 임하였습니다. 상원사에서 한암스님을 모신 대원경 보살에 게 들은 것인데 한암스님은 탄허스님을 특별하게 엄청나게 아끼셨다고 합니다. 탄허스님에게 비단 옷을 특별하게 줄 정도로 애지중지하셨답니다. 그리고 6 25가 일어나던 그해 8월 말인가에 스님이 계시던 고양 흥국사에서 한암스님이 걱정이 되어서 오대산까지 걸어가서 안부를 물은 것도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남들은 남쪽으로 다 피난을 가는데, 인민군에게 잡히면 생사를 장담 할 수 없을 때에 은사스님을 뵈려고 그 험한 길을 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그 때 탄허스님을 모시고 간 신희윤스님에게 들었어요. 희윤스님이 나에게 말하기 를 그때에 가다가 갑자기 인민군이 나타나서 산의 풀속에 숨었는데 밤송이에 찔 려서 고생하였다고 그랬어요. 또 상원사에서 탄허스님과 인민군 장교가 만났는 데, 그 장교가 스님들을 반동분자라고 말하자 스님이 불교에는 콩까지도 나누어 먹는다고 하면서 불교와 공산주의가 다르지 않다고 말해 화를 면했다는 말도 했 234 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35 오대산 월정사 주지 자리를 놓고 일어난 내분 때에 탄허스님이 고생하였지요? 월정사에서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저는 바로 월정사로 내 려갔습니다. 능혜스님이 주지 발령장을 끊어서 들어오고, 그것을 막으면서 소동 이 일어났습니다. 갔더니 경찰이 개입해서 절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못 들 어가게 막고 그랬습니다. 저는 그런 것을 제치고 방산굴로 탄허큰스님을 찾아갔 23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더니만, 탄허스님은 오대산 산중에 들어오신 지가 50년이나 되었는데 이제는 이 산중에서 쫓겨나가게 되었다 고 하시면서 크게 한탄을 하시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에 스님에게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터이니 걱정을 마시라 고 하고는, 전창열과 아는 검찰 등의 인맥을 동원하고, 찾아다니고 해서 해결에 심혈을 다 했습니다. 그때에 저는 원주까지 내려가서 담당 판사에게 오대산 법통, 탄허스 님의 위상 등등을 설명하면서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했어요. 이렇게 뛴 덕분인지 오대산이 안정이 되었는데, 이 일로 탄허스님은 저를 무척 좋아하신 적이 있습 니다. 스님께서는 평소에 당신은 살아생전에는 망신살이 많지만, 사후에는 명성이 더 나을 것이라고 하셨어요. 스님이 계시던 그 시절 오대산은 6 25로 인해서 모든 전각이 다 타고, 먹고 살기도 어려워서 스님은 번역에 쓸 원고지와 잉크도 부족했어요. 또 월정사에 분란이 많아서 심지어는 절 이름을 법계사로 고치기도 했어요. 월정은 흥망에 의해서 달이 기운다는 느낌이 나고, 분란이 자주 일어나 서 절 이름을 고쳐서 용금루에 법계사라는 간판이 걸리기도 했어요. 1990년대 초 오대산이 분란이 있을 적에 희찬스님의 상좌로는 현해스님, 원 행스님, 현각스님, 정념스님 등이 있었는데 그 스님들이 월정사를 다시 찾을 때 조계사에서 농성부터 했었지요.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서의현스님이 전창열 변 호사와 재가연대 대표인 김동건 변호사에게 신세진 일이 있었는데 그 일로 배려 를 많이 해줬습니다. 의현스님은 우리들에게 탄허불교문화재단에서 주지 추천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36 서를 가져오라고 파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허불교문화재단 추 천으로 월정사 주지에 현해스님이 임명된 것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이 모든 것 이 탄허큰스님의 복력이었고, 한국불교가 지탱해온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탄허큰스님이 입적하지 않았습니까? 탄허큰스님은 서울의 병원에서 월정사로 내려가시면서 일주일 되 는 날 유시에 당신의 열반을 예언했습니다. 저도 바로 월정사로 내려갔습니다. 내려가서는 방산굴에서 큰스님의 마지막을 지켰습니다. 저는 스님의 발을 만져 보았는데, 발이 차갑지 않고 그래도 온기가 있더라고요. 제가 어디에서 듣기를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발부터 차가워진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하여간 저는 큰 스님의 발을 주물러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스님의 최후가 다가오자 방에서 나와 서, 방산굴의 쪽마루에서 큰스님을 향해 삼배를 드리는 순간에 저는 거기에서 대성통곡을 한 것입니다. 너무도 슬프고, 큰스님과의 이별을 받아들일 수가 없 어서요. 그냥 눈물이 나고, 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큰스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회사일 때문에 서울로 올라오면서 스님에 게 기도를 했습니다. 스님, 중생들을 위해서 사리를 남겨 달라고요. 그런데 그 날 밤, 제가 큰스님의 사리를 본 꿈을 꾸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나서 제가 꿈을 깨고 일어난 순간에 월정사에서 저와 같이 대외적인 일을 많이 했던 수중스님에 게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그때에 저는 수중스님에게 내가 먼저 말을 하겠다 고 하면서, 사리가 나와서 전화한 것이 아니냐고 하였더니 수중스님이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하여간 저는 이렇게 큰스님에 대한 것이 저의 일생에서 저의 분신 과 같았습니다. 스님이 돌아가신 날짜는 6월 6일이었는데, 그때가 연휴였어요. 저는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되어서 스님 영결식에 참석했습니다. 그 비통함은 236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저는 수중스님과 영결식 진행에 대하여 상의하였지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37 그리고 그때 제 후배인 김문환에게 카메라를 갖고 와서 영결식 장면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전부 사진으로 찍으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탄허스님의 절약 내용에 어떤 것이 있을까요? 최근에 법정스님이 돌아가시고, 무소유라는 말이 널리 퍼지고 있 지만 이런 것은 탄허큰스님에게도 있었습니다. 탄허큰스님께서 당신의 입적을 23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예견하셨는지 어느 날 저를 부르시더니 당신이 갖고 있던 통장을 저에게 전해주 고는, 그 통장을 희찬스님에게 전달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입적 을 하면, 그 돈을 갖고 당신의 장례를 치르라고 그러셨던 것입니다. 그때 월정 사는 가난해서 돈도 없고 그랬습니다. 이렇게 스님은 당신의 가는 것도 깨끗하 게 다 정리했습니다. 그때 그 통장에 700~800만 원 정도 들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또 스님은 흐르는 물을 보시고, 물을 아껴야 한다고 그랬어요. 탄허스님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제가 스님에 대해서 가장 싫어하는 말은 스님을 학승, 강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스님은 늘 저희들에게 종지를 파악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스 님은 종지에 자재기중( 自 在 其 中 )이라고 하시면서, 거기에 중요한 것이 다 있다고 하셨습니다. 스님은 팔만대장경을 한마디로 하면 명심견성( 明 心 見 性 )이라고 하셨 어요. 즉 스님은 선지로써 모든 것을 파악하신 것입니다. 탄허불교문화재단 설립을 추진하셨는데요. 재단 설립을 주도한 연유가 있다면? 제가 큰스님을 모시고 다닐 적에, 저의 친구들이나 주변에서 저를 보고 스님의 수제자라는 말을 했어요. 그러면 그때에는 그런, 쓸데 없는 소리를 하지 마라고 그랬어요. 스님의 수준, 위상이 상당히 높으신데, 나는 수제자도 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38 니고 그런 말은 스님에게 누( 累 )가 된다고 생각하였죠. 그런데 막상 갑자기 스님 이 열반에 드시니까 스님의 일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거기에 맏상좌이 신 희찬스님도 바로 돌아가시고 그러니, 적막강산 그 자체였지요. 수중스님만 왔다 갔다 하시는 정도였지요. 큰스님은 늘상 인재양성을 원하셨어요. 그리고 인재양성을 하기 위해서는 자 립을 통한 수도원을 만드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그러 기 위해서는 재단법인을 설립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탄허스님은 앞으로 세 월이 가면 신도들의 시주에 의존하지 말고, 독립적인 일을 해서 후학들을 지도 할 시기가 온다고 말씀하셨지요. 스님은 한 번도 시주를 권유한 사실이 없습니 다. 스님은 이제는 자립을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경 출판을 통해 나오는 잉여 자금으로 자립을 모색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스님 열반 5~6년 전부터 논의하면서 자연스레 재단법인을 만들어야 된다는 발상이 나왔어요. 그때에는 만약 재단을 만들면 3 1재단으로 하자고 그랬지요. 그런 재단 설립에 대한 말이 언제부터 나왔는가요. 제가 제자임을 송구스러워하다가, 열반하시기 전에 한양대 대학병 원에 계셨을 때 찾아가서 스님에게 바닥에서 삼배를 올리며, 법인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스님이 가시더라도, 제가 스님의 뜻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재단법인을 만들어 스님의 사상과 업적을 후대에 전할 테니 걱정 마시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언제인가는 스님의 뜻이 재단을 기반으로 전해지고, 후일에는 인재, 제자가 나와서 스님의 뜻이 반드시 조명되고 계승될 것이라고 했어요. 이것은 제가 스님께 드린 약속이었습니다. 평소 탄허큰스님은 공자님 말씀이 그렇게 2천 년을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공자 사후 180년 뒤 공자의 뜻 238 을 받든 맹자가 나타나 공맹사상을 펼치면서 그것이 가능한 것이라고 하셨거든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39 요. 재단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 큰스님의 사상을 이을 수 있는 제자가 나온다면 스님의 큰 뜻을 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큰스님이 오대산에서 서울로 처음 나오실 때에도 스님은 이미 시주 은 혜에 의지하지 않고 불교 출판, 사업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였습니다. 이 런 스님의 생각, 구상이 스님이 열반하신 후 법인을 통하여 그 기반이 이루어졌 23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스님이 돌아가신 뒤에 저는 보문회에서 5천만 원, 쌍용이 준 천만 원을 합한 6천만 원을 종자돈으로 재단법인을 만들었어요. 그때에 스님의 집안 사람인 김 연우, 서우담의 양해와 동의를 받아서 가능하였습니다. 재단 명칭도 3 1로 하 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저는 탄허스님의 이름을 재단 이름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 하였지요. 제가 상임이사를 맡고, 희찬스님이 이사장을 맡아 탄허큰스님의 사 상, 정신 뜻을 영원히 이어가기 위한 법인을 만들기 위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 스님을 이어받을 인재를 양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래서 대전 학하리 자광사에 공부하는 방을 만들어서, 거기에서 인재들이 공부를 하게 하려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법인을 만드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동기인 전창열 변호사와 후배인 김동건 판사의 적극적인 협조로 법 인이 만들어졌습니다. 스님들의 이사 추천은 희찬스님이 다 맡아서 하셨지요. 얼마 안 있어서 희찬스님도 그 해에 입적하지 않았습니까? 탄허불교문화재단이 막 출범하는 그 찰나에 희찬스님이 갑자기 돌 아가셨습니다. 큰스님의 뜻을 펴려고 하는데 주도적으로 활동해야 할 희찬스님이 그렇게 가시니 참으로 저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적막 강산과 같은 분위기이었어요. 그 무렵에는 스님의 제자들은 자취도 없었어요. 희찬스님이 입적한 이후에는 오대산에 좋지 않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40 희찬스님이 가시고 나니 재단법인 설립도 어려워졌어요. 그래서 초대 이사장으 로 서돈각 선생님을 모시고 1984년도에 낙원상가 옆 건국빌딩에 사무실을 차리 고 탄허불교문화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저를 포함해 몇 명이 사재를 털어 사무장 에게 당시 월급 80만 원을 주면서 운영했습니다. 이후 신사동 네거리로 포교당 을 옮겨 혜암 종정 큰스님을 모시고 개원법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포교당 전 세 보증금 천만 원을 십시일반으로 모아서 마련했어요. 저는 그때에 제 집도 없 어서 전세를 살 때입니다. 이후에는 부산의 각성스님을 모시고 정기법회를 했지 요. 희찬스님이 살아계셨다면 탄허불교문화재단이 우리 불교계에 큰 역할을 했 을 것인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탄허큰스님의 5주기, 10주기, 15주기, 20주기 추모행사는 펼칠 수 있었습니다. 탄허스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지금도 실천하시는 수행법이 있다면. 큰스님은 평소에 경을 보시다가 막히거나 뜻이 잘 떠오르지 않으 시면 책을 탁 덮으시고, 그냥 2~3일을 조십니다. 여기에서 조신다는 것은 참선 에 드신다는 뜻입니다. 저는 스님에게서 이런 말씀을 듣고서, 저도 일을 하다가 복잡할 때에는 나름대로 절에 가서 기도도 하고, 화두 참선을 하는 생활을 해 왔 습니다. 저는 그런 것이 제 삶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제가 스님에게 받은 화 두는 판치생모( 板 齒 生 毛 )입니다. 스님에게 받은 그 유묵을 액자로 해서 보관하고 있지요. 회장님은 탄허큰스님의 가르침으로 일생을 사셨다고 볼 수 있군요. 그럼요. 저의 사회생활의 근간은 대부분 큰스님의 말씀을 체득한 것이었습니다. 스님이 사람들을 대하는 원칙은 그 사람의 장점을 취하였다는 것 240 입니다. 스님은 중생에게는 좋은 점, 허물이 다 있다고 하시면서, 그렇지만 사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41 람들의 좋은 점만을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스님의 이런 말씀을 받아들여서 사회생활을 하였지요. 그리고 제가 큰스님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관상에 대한 것도 있어요. 스님께 서는 동양사상은 천지인( 天 地 人 ) 삼재( 三 才 )를 갖고 설명을 다 할 수 있다고 하셨습 니다. 그러시면서 천을 배우는 것이 천문학이고, 지를 배우는 것은 지리학인데, 24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인을 배우는 것은 관상학이라고 하시면서 이 관상학이 사회 생활에서 제일 중요 한데 연구하지 않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 예로 김옥균이 3일천하 라는 갑신정변을 도모하였지만, 3일만에 실패로 끝난 것을 말씀했어요. 김옥균 이 정변 후에 자기 비서로 데리고 있었던 사람에게 암살당한 것도 사람을 잘 보 지 못한 결과인데 자기 사람도 못 보면서 무슨 천하의 일을 도모할 수 있겠냐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이런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관상학을 공부했어요. 여러 상법에 대 한 책을 읽고, 그 방면 전문가에게 배웠습니다. 제가 1976년에 삼보증권의 인 사과장을 시작으로 해서 쌍용그룹, 쌍용증권 등에서 사장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 을 내 손으로 뽑았어요. 그 수는 엄청나지요. 이렇게 저는 스님의 가르침을 사 회생활에 적용하였습니다. 탄허큰스님 탄신 100년을 맞이해서 탄허재단이 나갈 길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큰스님의 원력은 도의적 인재를 양성해서, 그런 인재가 사회의 각 분야에서 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게 하여, 결과적으로 요순시대와 같은 이상사회 를 만드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요순시대는 불교적인 관점으로 말하 면 불국정토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스럽고, 행복하고 평화롭게 사는 사회라 고 볼 수 있지요. 그래서 큰스님은 그 어렵던 시절에도 오대산 수도원을 개설하셨고, 그 수도원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7

242 에서 스님과 재가자를 가리지 않고 가르치고, 더욱이 무료로 유불선을 가르쳤습 니다. 바로 이런 사상을 구현, 계승하는 것이 재단의 설립 목적입니다. 지금까 지 재단의 지향, 활동 등에서 어려움이 있었으나 앞으로는 재단의 정체성을 살 려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오늘 제가 평소에 하지 않은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이것은 탄허큰 스님의 역사를 찾는 것에 일조를 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평소에 사람들이 탄허 큰스님을 단순히 학승이나 강백이라고 하는 것이 강한 이견을 갖고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역해하시고, 대선사들 앞에서 선법을 하신 것은 선지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큰스님이야말로 선교를 회통하신 대선사이십니 다. 그리고 늘상, 백성을 걱정하신 것을 보면 진정한 보살이라고 볼 수 있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정말 아쉬운 것은 스님을 20년간이나 모시고 배우면서, 보고 들은 것을 메모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때에는 직장 다니기가 바쁘고, 후일에 여 쭈어 보겠다고 하였는데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참으로 아쉽지요. 저는 지금껏 스 님과 인연이 된 것은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스님의 일에는 일구월 심, 초지일관으로 참여했어요. 저의 이런 점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제 생 각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42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43 자유자재로 진리를 찾고, 전달한 도인 24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대상 고준환 동아일보 기자, 교수불자연합회 초대 회장 등 역임, 경기대 명예교수 일시 2011년 8월 3일 장소 본각선교원 종로오피스텔 교수님은 정년 퇴임하신 후 본각선교원을 여시면서 새로운 불교 활동을 하시는데 교수님 의 불교 활동 저변에는 탄허스님과의 인연이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제가 탄허스님을 만난 것은 서울법대에 다닐 때(1961~1964)로 기억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서 그 시절에 뵌 정황은 잘 기억나질 않아 요. 그렇지만 여시아문( 如 是 我 聞 )의 입장에서 회고를 해보지요. 서울법대에는 법불회라고 동기생 10여 명이 만든 불교 서클이 있었습니다. 저 희들이 불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청담스님의 법문을 들은 것에서 시 작되었어요. 그 이후로 큰스님들을 친견하고, 나아가서는 대불련을 창립하기까 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탄허스님을 뵌 것으로 기억하지만 언제 처음 만나 뵈었는가, 그게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탄허스님의 유발상좌 비 슷하게 되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죠.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44 대불련 출범 초기 상황에 대해서 기록이 부족하고, 증언이 다양한데 교수님의 경험을 들 려주세요. 법불회가 등장하고 신호철이 초대 회장으로 있었어요. 그때 제가 생각한 것은 불교가 청년화, 대중화, 지성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러자면 불교계를 움직일 스님이 필요하다고 봤어요. 그래서 그때에 활약이 많은 홍도스님, 일명 방울스님을 찾아가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제 안했습니다. 그러니깐 홍도스님이 좋다고 해서 대불련을 만드는 일이 시작되었 어요. 그때 만난 사람들이 동대에 최동수, 육사불교회에 하장춘, 외대의 여학생 한 명, 이화여대의 학생 두 명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직이 시작되려고 하니 신 호철과 최동수가 서로 회장을 하려고 해서 내가 나서서 신호철이 회장을, 최동 수가 사무총장을 하게끔 하고, 부회장은 부산 출신인 이대의 강혜정을 하게 하 고는 나는 백의종군하는 입장으로 관여하지 않았어요. 그 후로는 명호근과 전창 열이 나서서 많은 일을 하였어요. 이들은 출범이 거의 완성될 때에, 조직을 만 들려고 시작한 수개월이 지난 후에 들어왔지만 그 어려운 과정에 가장 공헌을 많이 한 명호근의 공을 깎아서는 안 되지요. 난 그 후에 동문회 대의원 의장을 하였지만. 그러시군요.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탄허스님과의 인연은 지속되지 않았는가요? 저는 청룡사, 대원암, 학하리 등지에서 탄허스님을 뵙고, 배우고, 많은 감명을 받았어요. 특히 서울 청룡사에 스님이 주석하실 때에는 화엄경 장 자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때에는 법불회 동기인 박준수, 전창열, 명호근, 김문 웅, 김춘오 등과 함께 저녁마다 법회에 참석하여 스님의 법문을 듣고 많은 감화 를 받았습니다. 그 후로도 탄허스님의 법문이 있는 곳이면 대원암이건, 삼보법 244 회건, 고려대학교 등지를 따라다니면서 학문과 영원에 대한 갈증을 풀면서 많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45 것을 배웠습니다. 그 시절에 스님이 불교에 대해 여러 말씀을 하신 것, 노장과 유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신 것이 생각나는군요. 특히 장자 소요유라든가, 성인에게는 두 마음이 없다고 하신 말씀, 화엄경의 사사무애 중중무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생각이 납니다. 24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탄허스님은 1975년에 화엄경을 번역하여 책자로 출간하였는데요. 이 작업에 교수님이 관 여하신 것은 없는가요? 저는 그 작업에 직접 참여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저로서는 스님을 특별히 도와 드린 것이 없어서, 해드릴 것이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그 신화엄경 합론 의 출간에 즈음하여 이병도 박사, 박길진 원광대총장, 천관우 선생을 찾아 가 신간평, 추천사를 받아서 스님에게 갖다 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 기 억에는 청담스님이 이차돈 순교 이래로 제일의 불사가 탄허스님의 화엄경 번역 불사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남아 있습니다. 신간평을 받아서 드렸다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증언입니다. 저는 신간평을 받아서 스님에게 드린 것은 사실인데, 그것이 잡지 등에 실린 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스님에게서 신화엄경합론 한 질을 받았어요. 그때 스님은 저에게 군자유삼락이왕천하불여존언( 君 子 有 三 樂 而 王 天 下 不 與 存 焉 ) 이라는 글을 함께 내려주셨어요. 저로서는 너무나 고마운 거지요. 그래서 저는 그 책자와 이 유묵을 집안의 가보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희집에는 심외무불( 心 外 無 佛 )이라고 스님이 쓰신 액자도 보관하고 있어요. 스님은 사람들에게 책을 잘 주지 않았어요. 저를 주신 것이 제가 학자의 가능 성이 있고, 저의 미래를 내다보시고서 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저는 평소에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46 스님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제가 평생 학생부군의 체질이고, 학문적인 것을 인 정하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탄허스님의 수준에서는 멍텅구리 수준이지만. 화엄경이 출간된 직후 무렵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교수님이 고은, 여익구 등과 함께 대원 암으로 탄허스님을 찾아가서 배우다가 경찰에 연행된 일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학교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일을 했어요. 그러다가 독재권력의 언론 탄압에 항의해서 해직되고, 이른바 동아자유언론투 쟁위원회를 조직해서 활동했어요. 그렇게 활동을 하면서 저는 민족주의, 민주적 인 것이 나라의 바탕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지요. 그러기 전에 저는 법 조계 출입기자를 하면서 박정희와 맞서서 감옥에 갔다 온 일도 있습니다. 그 당 시는 기자들이 취재를 해서 글을 쓰지 않고 던져주는 것만을 갖고 기사를 썼어 요. 그러나 저는 기사도 역사의 기록이라는 입장에서 그러지 않고 취재를 해서 썼거든요. 그때 정부에서 국회의원 79명을 사전 선거운동이라는 빌미로 잡아 넣 으려고 하는 것을 제가 알고 신직수 법무부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직전에 보도해서 입건 구속되었어요. 그래서 90일 동안 있다가 미결수로 나왔어요. 제 가 그 무죄를 입증하는 데 8년이나 걸렸어요. 이런 이력이 있어서 해직이 되고, 언론투쟁을 할 때에 보니 기독교, 천주교 등 은 사회봉사도 하고 독재정권과 맞서고 있는 활동이 많았어요. 그러나 불교는 그런 움직임이 거의 없어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그때에 그런 입장에 있었던 법 정스님을 제가 동아방송에 모셔서 내보내고, 일부러 인터뷰해서 제가 자주 뵈었 죠. 동아투위에 130여 명이 있었지만 불자는 별로 없었는데, 저는 스님들과 친 하고 고기도 먹지 않고 불교적 입장이 뚜렷하여서 모든 사람이 저는 불자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불교도 보살도의 입장에서 권력이 국민을 억압하지 246 못하게 당연이 도와서 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것은 북돋워 주어야 한다고 보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47 습니다. 그런데 탄허스님은 융통성도 많으시고, 얘기가 통하는 어른이어서 고 은, 황석영, 용산고 후배인 여익구, 대학생인 전재성 그런 사람들을 제가 규합 해서 탄허스님을 찾아가 두 번인가를 배웠죠. 그런 배경이 있었군요. 그때에 탄허스님이 하신 말씀은 어떠하였는가요? 24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성북서에서 체크가 되어서 저는 4박 5일간 경찰서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고 거기서 잤죠. 그러나 탄허스님은 경찰서는 가시 지 않고 예의상으로 대원암에서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내용 은 동아투위의 기록에도 나와요. 그때 탄허스님이 하신 말씀은 기억이 나지 않 고, 원효스님과 만해스님에 대한 것을 들었지요. 원효스님은 당대에서 가장 명 석한 스님이었고, 깨달은 분으로서 백성과 중생의 편안함을 위해서 화쟁과 통일 을 실천한 분으로 내 마음에 각인이 되어 있었죠. 그리고 만해스님은 지조가 있 고, 독립운동가였고, 시도 쓰는 아주 멋있는 스님이 아니었습니까? 그때에 여익구와 전재성은 오랜 기간 구속되었어요. 그런데 그 모임이 민중불교회라는 말 도 있어요. 그래요? 그러나 그때에는 이름을 붙일 단계가 아니었습니다. 이름 을 논의할 단계가 아니었습니다. 탄허스님은 인재양성을 무척 강조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듣지 않았나요? 스님은 인재양성에 대한 말씀을 자주 했어요. 스님은 우리나라가 언제인가는 통일이 된다고 보셨어요. 그리고 지하에서 뜨거운 것이 융기하여 동 쪽과 남쪽은 내려가고, 서쪽은 융기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통일이 되어 세계를 이끌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런 장래를 대비해야 하고, 나라를 이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48 끌고 나가면서 세계를 지도할 인재가 많이 필요한데, 그런 인재를 키워야 한다 고 말씀했어요. 그런 것이 우리들의 뇌리에 늘 있었지요. 지금 교수님이 하시는 본각선교원도 그런 것과 연관되나요? 그렇지요. 저는 탄허스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으니 당연히 스님의 인재양성이라는 것과 무관할 수 없지요. 제가 이곳에서 하는 본각선교원은 시각( 始 覺 )이 본각( 本 覺 )이기 때문에 그런 이 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선과 교를 겸하는 것이라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제가 하는 것의 시작은 작지만 앞으로 저는 대학원 대학이라든가, 불자마을 같은 것 도 세우려고 합니다. 이미 저는 1994년도에 이런 것을 하려고 철원에 3만 8천 평을 마련해 놓았어요. 저는 우리의 일생을 살아나감에는 깨달음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깨 달음에 이르는 것은 딱히 정해진 것이 없어요. 다만 자기에게 적합한 것을 택해 정진하다 보면 단박 깨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런 체험을 가진 사람들을 모셔서 일요일 법회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과목도 설 강을 해 놓았습니다. 21세기는 복잡 다단한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각 인류 문명을 창출하는 것을 지론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깨달은 사람들이 문명을 창 출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고 있어요. 탄허스님은 거사불교에 대한 입장도 밝히셨나요? 탄허스님은 거사불교의 시대가 열린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그런 시대를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스님들 중심의 종단은 그것대로 잘 되면 좋고, 제가 추진하는 것은 거사불교를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후에는 한 248 국 거사회도 만들고, 세계불자연합 등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각 인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49 류 문명을 창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세계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를 중 흥시켜야 하는데, 불교라는 진리는 좋은데 불교는 사회적인 힘이 없어요. 이런 입장에서 나는 탄허스님의 뜻을 따라서, 스님의 뜻을 부흥시키려고 내 인생의 후반부를 전력 질주하려고 합니다. 나는 스님만의 불교, 스님 중심의 불교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현재 조계종 24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단은 2부대중의 불교입니다. 사부대중의 불교가 아닙니다. 그 중에서도 비구니 의 역할은 1%밖에 안 돼요. 내가 그래서 혜암 종정과 월주 총무원장에게도 말 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스님들도 내 말이 맞지만 지금은 못한다는 거예 요. 그것은 패거리가 무서워서 부처님 법을 실천 못한다는 것이지요. 내가 맞는 말을 하지, 교수로서 말이 안 되는 것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다가오는 거 사불교 시대를 위해서 준비하고, 노력하고 있어요. 교수님께는 탄허스님의 영향이 보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죠. 저의 생각 저변에는 탄허스님의 사상이 깔려 있어요. 불 교적으로 말하면 저의 일생을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가는 것에 비유해서 스님, 거사 등 많은 사람이 저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오 랜 영향을 준 분은 탄허스님입니다. 그 다음은 법화경을 가르쳐 준 설송스님이 고, 혜암 종정, 화두를 주신 경봉스님 등입니다. 1980년에 나온 탄허스님의 책인 부처님이 계신다면 의 출간에 교수님이 관여하셨다는 기록이 있어요. 글쎄요. 제가 출간의 인연을 만들어 준 것은 어렴풋하게 기억되지 만 구체적인 일은 기억나지 않아요. 아마 제가 출간하게끔 권유하였을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스님의 생각과 사상이 많이 퍼지고, 그래서 사람들이 스님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50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데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우리가 고승대덕에게는 배우 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큰스님에게 일일이 물을 수도 없지요. 탄허스님에게 잘 못 물으면 멍텅구리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지요. 그러나 책을 통해서는 고승들의 인간적인 면을 이해하게 되고, 친근감이 가니까 대중들에게는 좋지요. 교수님은 역사 서술에도 큰 업적을 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신문기자를 할 때에도 기자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보았어요. 그리고 나라가 잘 되려면 나라의 국어, 국사 같은 국학이 정립이 되어 서 자주정신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주정신이 분명한 인재가 양성되어 야 합니다. 이 점을 탄허스님이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학교에 다닐 때 에 영어, 국어, 국사는 전교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잘했고, 특히 국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습니다. 나라가 잘 되려면 제대로 된 역사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역사는 식민주의 사대적인 역사가 주류를 이루고, 북한에 서는 계급주의와 유일사상을 칭송하는 것이 주류입니다. 저는 이런 것을 극복하 고, 통일을 대비하는 역사가 서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런 사관이 담 긴 책을 여섯 권이나 썼습니다. 제가 이렇게 역사에 관심이 많고, 역사책을 낸 것에는 탄허스님의 영향이 있 었을 것입니다. 스님은 부처님의 법이라는 진리를 연구하시고 말씀하시면서도 민족, 국가에 관심이 많았어요. 현실 세계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조 국인 한국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인재양성을 강조하셨지요. 탄허스님의 정체성에 대한 의견은 어떠신지요. 교수님은 탄허스님을 어떻게 보십니까? 250 그런 것은 이름을 붙이는 것인데, 저는 부처님이나 탄허스님을 한 인간으로 봅니다. 탄허스님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은 불교적으로는 스님이지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51 다만 스님은 스케일이나 방향이 유불선을 종합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님과 부처님은 종교의 테두리에 있는 분이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절대적인 진 리를 찾아내고 설명하신 분입니다. 부처에게는 주의나 이즘이 없어요. 우리들이 부처가 찾아내고 주장한 것에 이름을 붙인 것이지요. 이 말을 알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탄허스님은 일체 경계에 머물지 않고, 자유자재로 진리를 찾고, 전달하 25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는 것을 지향한 도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탄허스님을 선사라고 해도 맞고, 법사라고 해도 맞고, 선교를 아우른 대종사라 해도 맞습니다. 이름은 대 명사에 불과합니다. 탄허스님은 실상에 접근하는 것은 언어도단( 言 語 道 斷 )이라고 하셨습니다. 탄허스님 같은 도인이 다시 나올까요?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똑같은 유형이 나올 수 없어요. 우선 시 대가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고, 보살도를 실천하고, 국가와 민족이라는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고, 나아가서는 인류를 구 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견성성불, 중생구제라고 말을 하지만. 다만 탄허스님은 독특한 인물이었습니다. 본래 기독교에서 예수를 독생자라 고 하는데 이것은 번역을 잘못한 것입니다. 독특한 아들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 수도 우리 같은 인간인데, 독특했던 분이었습니다. 탄허스님이 가신 경지는 독 특하였고, 그래서 독특한 분이라고 해야 되지요. 탄허스님은 멍청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하지요. 스님은 저희들이나 후학들이 답답하시면 멍충이라는 말을 많이 하 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 말이 맨날 입에 붙으셨지요. 나는 이렇게 이해를 합니 다. 제가 청담스님에게 처음으로 불교를 접한 지가 50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법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52 문을 해 보면 어떤 때에는 무지무지하게 답답하거든요. 그러면 탄허스님의 심정 이 이해가 됩니다. 탄허스님 같은 깨친 사람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하셨겠습 니까? 탄허스님같이 머리가 좋은 분은 드물거든요. 거기에다가 한학까지 하셨 으니, 그런 분은 더욱 드물지요. 탄허스님과 대화를 하다가 보면 한문, 거기에서부터 막혀 버리는 거예요. 저 같은 경우는 서구문물이 들어오고 유교가 사라질 때에 학교를 다녔어요. 초등학 교 5, 6학년 때에는 한자를 배웠죠. 중학교에 가서도 한자는 배웠지만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어요. 우리집 옆에 서당이 있어서, 늘 그 앞을 지나가니까 천자문, 명심보감을 저절로 외웠지요. 그러나 불경이나 주역 같은 것을 보게 되면 한문 에 대한 약점이 있으니 멈칫멈칫하게 됩니다. 그러나 깨달음이나 삼매를 겪는 체험을 하게 되면 그런 것은 다 커버가 된다고 봅니다. 탄허스님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지요. 그것은 고래 한 마리가 멸치 만 마리보다 더 낫다는 입장이었을 것 입니다. 도의적 인재양성과 나라와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 라고 저는 봅니다. 탄허스님의 생각을 가끔 하시나요? 그럼요. 저는 탄허스님의 절대경계는 여여( 如 如 )하다고 봅니다. 그 런데 문제는 상대세계입니다. 상대세계는 분별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서는 가 족, 후손, 국민, 역사, 나라 등이 중요시됩니다. 그래서 스님도 우리나라, 민족 이 신바람이 일어서 강대국이 되고, 보살도가 행해지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252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훌륭한 인재가 많아야 되고, 특히 통일이 되기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53 위해서, 나아가 만주까지 영토가 넓혀지고 나서는 더욱 더 인재가 많이 필요 하다고 말씀했어요. 북빙하가 녹아서, 그 얼음이 녹으면 일본은 물에 잠기고, 우리나라도 동쪽과 남쪽은 침해되지만 서쪽은 융기된다고 했어요. 그런 시대가 온다고 말씀했어요. 그리고 우리나라가 잘 되고, 우리나라의 불교가 종주국이 되는 때가 온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세계불교도연합을 만들려고 하는 것입 25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니다. 교수님과 스님만의 일화는 없을까요? 스님이 제 목소리가 좋다고 하셨어요. 제 목소리가 아나운서가 갖 고 있는 소리라고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굉장히 기뻤습니다. 그런 말씀을 제가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들었다면 아마 저는 법대에 가지 않고 음대에 갔 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학교에 다닐 적에 국어, 국사, 영어 등은 거의 백점을 맞 았는데 음악, 미술, 보건은 60점을 왔다 갔다 했어요. 미술은 그래도 열심히 해 서 90점도 받은 적이 있는데 음악은 잘 안 됐어요. 저는 콩나물대가리에 익숙하 지 않아 점수가 나빴는데 그럭저럭 대학에는 들어갔어요. 저는 다른 재주가 없 고, 그저 책상물림이어서 법과를 갔지만 탄허스님의 그런 말씀을 5년 전에만 들 었다면 음악대에 갔을 것입니다. 그러면 골치 아픈 법과대를 가지 않았을 것입 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탄허스님에게 감사를 드리지요. 오늘 귀한 증언 감사드립니다. 별 말씀을. 제가 예전의 일을 자세히 기억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 다. 김선생도 탄허스님을 연구하는 학자이니, 추후에는 제가 추진하는 본각선 교원에도 관심을 기울여 주시길 바랍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54 유불선 모든 분야에서 대종사이었죠 대상 서우담 월정사 입산, 삼덕사 주지 등 역임, 도서출판 교림 대표 일시 2011년 10월 25일 장소 도서출판 교림 거사님은 탄허스님의 저작물을 전담해서 출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남다르게 탄허스님 역사를 많이 알고 계셔서 찾아왔습니다. 우선 탄허스님의 형제 분에 대한 것과 법명 등에 대한 내용부터 알려 주세요. 탄허스님의 형제는 8남매인데, 아들이 5형제이고 누이가 셋이었 습니다. 탄허스님은 그중에서 아들로 둘째이지요. 동생으로는 인허스님, 택근 스님이 있었죠. 그리고 상원사로 입산해서 받은 법명은 택성입니다. 그런데 이 택성도 삼십 시절까지는 목탁탁 소리성이었으나( 鐸 聲 ), 삼십 후반부터는 집택 이 룰성( 宅 成 )이었죠. 그리고 한암스님 밑에서 7년간 이력을 보고 나서 받은 법호가 탄허( 呑 虛 )입니다. 254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55 탄허스님은 입산 이전 구도의 자세로 한암스님과 편지 왕래를 하다가 입산하였지요. 그런 데 왕래한 편지가 남아 있나요? 원본은 남아 있지 않아요. 탄허스님의 상좌인 희태스님이 시봉하 면서 자기가 본다고 가져갔는데, 그것을 어떤 스님이 가져가 버렸다고 그래요. 지금 전하고 있는 것은 탄허스님이 강의하실 때에 스님이 기억을 되살려서 흑판 25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에 쓴 것을 각성스님과 제가 받아서 쓰고, 그것을 탄허스님이 확인한 것입니다. 스님은 입산 초기에는 참선만 하시다가, 상원사에 수련소가 생겨서 중강으로 있었지요. 그 런데 수련소가 생기기 전에는 개운사의 박한영스님에게 경학을 배우려고 하였어요. 혹시 박한영스님에 대한 말을 듣지 않았나요? 박한영 진진응 두 스님에 대하여 칭찬을 많이 하셨어요. 그때에 도 이 두 스님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고 그러셨어요. 두 스님에게서 편지가 왔었 는데 거기에는 올 필요가 없다, 이미 다 갖추어져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그랬 어요. 그런데 이 편지도 남아 있지 않아요. 거사님은 1960년대에는 스님이었지요. 그때에 스님에게 강의를 들은 적이 있나요? 들었지요. 그때가 언제인가 하면, 1963년 무렵이었어요. 그때 내 가 월정사 원주를 보면서 방산굴에서 들었는데 도원스님, 법등스님, 법명스님, 지도스님과 같이 들었고, 비구니들은 육수암의 자호 자흔 혜운 향엄 스님이 있었고 지장암의 선경스님이 있었지요. 그 무렵에 현보스님은 공양주, 각수스님 은 채공이었어요. 1964년 1월, 월정사에서 대처승과의 싸움이 있었을 때 월정사에 있었나요? 저는 그때 월정사에서 나와 대흥사에 가 있었어요. 청우스님을 모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56 시고 대흥사 정화를 하였어요. 그때까지 대처승들이 안 나가서, 거지왕으로 유 명한 김춘삼을 데리고 가서 정화를 하였어요. 그러나 거지들을 데리고 갔지만 비폭력주의로 하였어요. 대처승으로 유명한 박영희가 그때 김춘삼이 자해하면 서 버티니까 겁을 먹고 스스로 나갔어요. 탄허스님은 양청우스님과 친하였는데, 대흥사에는 안 가셨나요? 청우스님이 대흥사 정화를 할 적에 박영희라는 대처승에게 고생 을 많이 했어요. 청우스님이 그런 고생을 할 적에, 대불련의 법회를 대흥사에서 1주일간을 하였지요. 그때 박영희가 탄허스님을 찾아와서 서로 인사를 하고 나 서는 협조를 하였던 일이 있어요. 그때 탄허스님이 대흥사 큰방에서 강연을 하는데, 대처승 쪽의 강사급 승려가 30여 명이 와서 들었어요. 흑판 강의를 하였는데, 그때 만약 탄허스님이 강의를 못하고, 대처승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못하였으면 죽인다는 그런 말도 나왔어 요. 그때 12인연법에 대해서 강의를 하였는데, 대처승 강사가 그 배대법에 대해 서 질문을 하자, 스님이 즉각적으로 답변을 하는 등 기가 막히게 강의를 하니 강 의를 마치고 나자, 대처승들이 전부 일어나서 탄허스님에게 합장을 했어요. 그 후로는 양청우스님이 대흥사에서 탄탄대로로 살았어요. 동산스님의 49재에 참석하신 탄허스님이 멋있는 법문을 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효봉스님을 좋아했고 그 스님 권속과 친해서, 효봉스님 을 따라서 범어사의 동산스님 49재 법회에 참석했어요. 법회 전날, 보제루에서 여러 스님들이 시시콜콜한 법문을 했어요. 그것을 들은 춘성스님이 양이 안 차 서 그랬는지 스님에게 와서 청법을 했어요. 아버지뻘 되는 춘성스님이 청법을 256 하니 나갈 수밖에. 스님은 나가셔서 법상에서 2~3분간 멋있는 법문을 했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57 주장자를 두 번 치고는 하동산은 세상에 온 것도 아니고, 하동산이 간 것도 아 니고, 여기에 머무른 것도 아니다. 여기에 있는 대중은 한 말씀 하시오 했는데 아무 말이 없자 금정산이 높았더니 범어사 오랫구나 하셨어요. 그랬더니 춘성 스님이 가사를 벗고서는 춤을 추셨어요. 스님의 이런 선지는 경봉스님 자료집에 나와요. 통도사 경봉스님의 유묵집 25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인 禪 門 墨 一 點 (선문묵일점) 의 머리말 한편에는 당시 종정인 서옹스님의 서문이 있고, 다른 편에는 탄허스님의 글씨가 있었어요. 보통 사람들은 서옹스님을 선 객( 禪 客 )이라고 그러고 우리 스님을 강사라고 말을 하는데, 그것을 보면 서옹스님 이 강사이고 탄허스님이 선객이라는 느낌을 받지요. 그렇게 탄허스님의 글씨도 속이 시원하지요. 탄허스님은 육십 이전에는 글씨를 잘 안 썼다고 그러지요. 스님은 육십 이전에는 화엄경 번역하는 것에 집중하시는 바람에 글씨를 많이 쓰시지 않았어요. 그 전에는 쓰신 것이 조금 있지만, 주로 육십이 넘어서 한 것입니다. 탄허스님은 1970년에 화엄경을 번역하신 것을 갖고, 부산 삼덕사로 가셔서 교열 작업을 하셨는데 이런 일에 거사님이 관여하셨지요? 제가 그 무렵에 만행을 다니다가 무량사에 있었는데 어느 수좌로 부터 탄허스님이 출판 작업을 진행하시지 못하고 영은사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래서 부아가 나서 당장 부산으로 가서 송정에 있는 삼덕 사의 창건주 보살을 만나서 내가 탄허스님을 모시고 화엄경 출판 준비 작업을 해야 하겠는데, 절을 빌려달라고 해서 약속을 받고는 스님에게 가서 말씀을 드 렸죠.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58 그래서 강릉택시를 영은사로 불러 대절을 해서, 그 택시에 원고를 싣고 부산 으로 가서 작업을 하였지요. 그때 스님은 기분이 좋으셔서 택시 안에서 어깨춤 을 추시고 그랬어요. 내가 그렇게 스님을 모시고 가니까 주위에서 나를 비방하 는 말이 많았어요. 당신 상좌도 아니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따라가냐 고 그랬어요. 그때 스님은 나는 그 놈이 검은 것을 희다고 하면, 희다고 믿는다 는 말씀을 하시고 온 것이지요. 부산에 가니까 스님이 통도사의 경봉스님에게 가서 인사를 드리고 오라고 해서, 극락암에 갔다 왔어요. 그러니까 경봉스님이 부산 법회에 가셔서 탄허라는 도인이 부산에 왔으니 친견을 하라고 하시면서 탄 허가 죽으면 한국불교가 죽는다는 말을 했어요. 그리고 동아일보사 부산지사장 을 하던 정준기라는 사람이 TBC방송의 부산사장을 불러서 탄허스님을 인터뷰 하는 방송을 내보내게 했어요. 그래서 논설위원이 진행하는 프로에 스님과 내가 나가서 대담을 하였어요. 그걸 보고 유력한 보살 몇 명이 찾아왔고, 이런 영향 으로 인해서 삼덕사라는 조그만 절에 버스가 50대가 왔어요. 그 산골짜기에 이 런 일은 처음이라고 그랬어요. 해운대부터 송정까지 버스가 가득하였으니 장관 이었지요. 한암스님의 상좌인 조용명스님이 그때에 울산 문수암 주지를 하셨는 데, 탄허스님을 찾아오시고 나에게는 돈 30만 원을 주면서 그 돈으로 화주 활동 비를 하라고 주셨지요. 그때 돈 30만 원은 무척 큰 돈입니다. 탄허스님은 부산에서 화엄경 화주를 만나고 그랬지요. 그때 저는 스님에게 교정을 시작하였으니 해인사에 가서 기도를 하고 오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허락을 받고서 해인사 장경각에 가서 기도 를 하려고 하니까 처음에는 개인 기도라 받아줄 수 없다고 그래요. 그러나 저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장경각 입구에 거적을 깔고 3만 배를 시작했어요. 일타 258 스님 처소 옆에 있는 현호 법혜 스님 두 분이 쓰는 방의 다락방에 거처를 마련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59 하고 하였지요. 내가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본 일타스님이 감동을 해 서, 대중회의에서 개인 기도로 볼 수 없으며 탄허스님의 작업은 신라 원효 이래 1300여 년 내 쾌거인바 이 불사를 위한 기도를 허락해 주자고 해서 장경각 문이 열렸어요. 그렇게 기도를 끝내고 나서 나는 성철스님에게 가서 인사를 했어요. 성철스님 25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은 장하게 기도를 하였다고 격려를 해주셨지요. 그 길로 나는 탄허스님에게 바로 가질 않고, 부산 해운대관광호텔 사장이 생각이 나서 탄허스님의 불사에 화주를 하라고 권유했지요. 그랬더니 그 사장은 즉시 하겠다고 하면서 약정액 500만 원 가운데 우선 100만 원의 어음을 끊어 주었어요. 이렇게 제가 기도한 효과를 보 았지요. 그런 비사가 있었군요. 그리고 원래 송정의 그절은 신곡산 혜광사였는데, 스님이 가서 화 장산 삼덕사로 절 이름을 바꾸었어요. 또 저는 그 무렵에 스님에게 사제관계를 맺어서, 건당을 하여 스님으로부터 우담이라는 이름을 받았어요. 그 전에는 법 천이었지요. 삼덕사에 찾아온 스님들은 없었나요? 청담스님과 범행스님이 찾아왔어요. 청담스님은 이차돈 순교 이래 최대 불사라고 하시면서 천만 원을 화주하신다고 하였고, 범행스님은 3백만 원 을 한다고 했어요. 그러나 그것이 이행되지는 않았지요. 청담스님은 탄허스님이 하시는 작업의 성격을 잘 모르셔서 관응스님과 운허스님에게 물어보았다고 해 요. 관응스님은 부처님 이래 화엄경의 경 논 소초를 다 번역한 것은 처음이라 고 그랬다고 합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하지 못하였잖아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60 거사님이 작성한 탄허연보에 보면, 1970년에 대전 학하리 자광사를 그때에 세웠다고 적 혀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전후사정을 알려 주세요. 맞습니다. 그때에 마련한 것입니다. 삼덕사에서 작업을 할 때 그 것을 장만하였어요. 본래 자광사 자리는 송시열이 어려서 다니던 서당이 있었 고, 그 후에는 송시열 사당이 있어서 향교로 지정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거기에 가면 그곳에 지방문화재라는 비석이 있어요. 그런 곳이었는데 병원을 하 는 서원장이라는 사람이 인수해서 불단을 놓고, 자광사라는 간판을 붙여 놓고 서원장 보살이 지키고 있었지요. 탄허스님은 그 원장을 알고 지내다가, 스님이 저를 보고 인수하라고 해서 장만한 것이지요. 저는 처음에는 반대했어요. 그래 서 1970년 겨울, 삼덕사에서의 교열 작업을 마치고 당장 떠나야 해서 싼값으로 사 놓은 것이지요. 스님의 책, 옷가지 등을 그곳으로 이전시켜 놓고 스님의 누 님을 모셔놓고 지켰지요. 그리 해 놓고, 원고지 뭉치만 갖고서 서울로 올라온 것 입니다. 스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자광사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다가, 보광명 사라고 바꾸었지요. 나는 그때에 절 이름을 바꾸는 것에 반대했어요. 서울에 올라오셔서는 여러 곳을 전전하시면서 후속 작업을 하였지요? 처음에는 홍은동의 홍은사라는 보살 절에 있었어요. 방 두 개를 얻 어서 하나는 스님이 쓰고, 다른 방은 내가 쓰면서 있었어요. 그 절은 지금도 있 어요. 그런데 거기를 윤호스님이 와 보고는 안 된다, 우리 절로 가자고 설득해 서 청룡사의 선방을 내주니까 탄허스님이 미안해서 청룡사 누각 지하방을 주면 들어가겠다고 해서 갔지요. 거기에서 작업을 하는데, 진경스님이 와서 보고는 비구니 스님의 절 지하에 사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 진경스 님이 종단에서 힘이 없어서 절을 주려고 해도 잘 안 되었어요. 260 그때에 청담스님이 승가사 주지가 죽자, 49재가 지나서 승가사를 내주어 내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61 주지로 발령이 났어요. 승가사로 우리를 들어가게 하고, 비구니들을 시내 포교 당을 주어서 바꾸게 한 것이지요. 그러자 전국의 비구니들이 승가사에 모여 우 리 입주를 반대하고, 스님도 노발대발하시면서 승가사에 들어가기를 싫어해서 안 들어갔지요. 그래서 나는 사표를 내고, 스님 주변에서 나로 인하여 불사가 늦 어진다는 말이 나오고 그래서 나는 스님께 하직 인사를 드리고 속가로 나와버렸 26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어요. 그후에는 초당이 가정집을 사서 보문난야로 만들어서 거기에 들어가 있다 가, 초당이 김미희 보살에게 이야기해서 석파정을 빌려 주었어요. 1970년대 초반, 화엄학연구소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내용은 어떻게 된 것인가요? 그것은 1972~73년 무렵입니다. 그것이 대원군 별장시절인 것 같 은데, 서울 시내 종로구의 낙원빌딩에 있었는데 내가 만들고, 내가 그 사무실에 있었어요. 허리우드극장에 박씨종친회 사무실이 있었는데, 그 회장의 사무실 한 칸을 빌려주어서 간판을 달고 있었지요. 그것은 스님의 출판 사무와 시내 연락 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곳에 스님은 자주 오셨고, 거기에서 조 선일보 이준우 문화부장과 인터뷰도 하고 그랬어요. 종친회장인 박재원은 스님 과 친했고, 익성회라는 신도단체의 회장이었지요. 그러다가 내가 속가로 나가니 까 자연 문을 닫게 되었지요. 익성회는 대행스님 쪽으로 가서 한마음선원을 만 들고 그랬어요. 스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박재원이 대통령 선거에도 나가고 정치적 색채가 있다고 반대하고 그랬어요. 거사님은 화엄경 출판이 종료된 이후부터는 탄허스님의 일에 관여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스님은 화엄경을 출간하시고 나서는 역경을 더 안 하시려고 했어 요. 왜냐하면 너무 힘이 들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 스님은 자금이 없어서 엄청 고생을 했어요. 모금은 초당이 앞장서서 하고, 서석 보살이 나서고 그랬어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62 요. 그래서 육영수 여사도 내고, 김미희 보살도 내고, 그래도 모자라서 선급금 을 받아서 했어요.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 오랜만에 나를 보시더니 우시더라 구요. 그러나 저는 어차피 교재로 화엄경을 하신 것이니까 나머지 경전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스님이 승낙하셔서 저는 그 이전에 오대산에서 공부할 때에 쓰던 노트를 갖다 드리고 참고하시라고 그랬지요. 그래서 사교가 먼저 나 오고, 그 후에 사미, 사집이 늦게 나오게 되었지요. 그때에 저는 주역도 꼭 해놔야 됩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그것은 1982 년도에 나오고, 노자 도덕경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마지막 교정을 보셨지요. 그 후에 나는 노자 도덕경을 부랴부랴 작업을 해서 스님 49재 영전에 올렸어요. 장 자 남화경은 최근에 나왔어요. 그것이 늦게 나온 것은 장자의 주석이 중국에서 만 800개나 되어서, 그것을 다 구해 보시고 책을 내려고 하였기에 보류하였고, 살아계실 적에는 작업을 할 형편이 아니었어요. 그러면 최근에 나온 장자 남화경은 어떤 원고에 의해서 나왔나요? 거사님은 탄허스님이 1941년에 쓴 원고를 갖고 하였다고 주장하지요. 제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스님의 장자를 번역한 친필 원고를 갖 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선 이 장자 원고지를 왜정 때부터 쓰던 것으로 보는 것 입니다. 이 원고의 철자법도 아주 오래된 것이고, 이 원고에 나오는 강술, 대의, 구두 등에서 이런 번역은 40년대 번역이라야 맞다고 나는 자신해요. 그리고 어 디에 보니깐 당신이 27세인가에 했다는 표현을 제가 봤어요. 그리고 내가 스님 에게서 스님이 장자를 보게 된 것은 한암스님의 밑에서 이력을 7년 보고 나서, 한암스님의 승락을 받아서 장자를 보았는데 천 독( 千 讀 )을 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262 그리고 윤고암스님이 나에게 그랬어요. 느그 스승이 아주 지독하다, 장자를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63 손에 들고 천 독을 했다 는 말씀을 했어요. 또 내가 탄허스님에게 질문을 했지 요, 스님 장자 그것을 혼자 읽었습니까? 하였지요. 그랬더니 스님은 아니지, 내가 석사( 釋 辭 )를 했지. 한암스님이 날보고 수좌들에게 설명을 하라고 해서 하였 어. 그러니깐 방선시간에, 한 철(3개월) 동안 그때 쓰신 것이라고 나는 봅니다. 스님은 유교와 불교를 공부한 힘을 갖고, 장자를 자득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 26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니까 한암스님은 장자가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면 가섭보다 부처님의 수제자 였을 것이고, 공자님 당시에 태어났으면 안연보다 공자의 수제자였을 것이라는 말을 탄허스님에게 하였다고 그랬어요. 한암스님이 그렇게 장자를 칭찬하면서, 우리 수좌들도 꼭 장자를 읽어야 하겠다고 그랬습니다. 이런 말을 탄허스님이 법문에서 많이 했어요. 스님의 은사인 한암스님께서 경허스님의 법제자가 아닙니까? 혹시 스님이 경허스님에 대 한 말씀은 없었나요? 스님은 법상좌를 중요하게 여겼어요. 그리고 법문을 하시면서 경 허스님의 말씀을 많이 했어요. 경허스님은 말마다 장자 말씀이라고 하셨지요. 한암스님의 장자에 대한 발언은 귀한 증언입니다. 화제를 돌려서 탄허스님이 일본에 가서 특강을 하였지요. 그 내용을 아십니까? 일본에는 두 번 가셨는데, 내가 모시고 간 것은 홍은사 시절이지 요. 한 열흘 있었지요. 가신 것은 난암스님을 만나러 가셨는데 능가스님이 모시 고 가셨어요. 처음에 가실 적에는 영암스님도 같이 가셨지요. 내가 모시고 갔을 때에 일본 동경대에 유학을 가 있던 김지견 박사가 홍법원 에서 만났는데, 시간이 나서 김지견의 논문을 교정해 주셨어요. 교정이 끝나고 나서 김지견이 동경대 화엄학연구소에 대한 말을 해서 특강을 하게 되었지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64 아침부터 시작해서 점심 먹고 하루 종일 하셨는데 60여 명이 들었어요. 들은 사 람들은 전부 노인인데, 선비들이지요. 통역은 김지견이 하고, 스님이 강의를 얼 마나 멋지게 하셨는지 강의가 끝나니까 사람들은 전부 의자에서 나와 땅바닥에 서 절을 하였어요. 중간에 일본 사람들이 질문도 하였고. 스님이 홍법원에 와서 그 사람들이 총칼을 들이밀어도 탄허에게 절을 하지 않을 사람인데, 나에게 꿀 려서 절을 하였다 는 말을 하셨어요. 그때 스님이 나에게 여러 차례, 거듭해서 말씀을 하셨어요. 그것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물었을 때 답을 못하면,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안 와, 그러니 언제든 지 답변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 하셨어요. 그것은 하루아침에 역 량은 쌓아지지 않으니, 평소에 노력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지요. 즉 언행일치를 하고, 헛소리를 하지 말고, 필요한 말만 하고 적재적소에서 말을 하라고, 말을 줄이라고 하셨어요. 그렇지 않으면 말이 귀양간다는 말을 하셨지요. 대만에 가셔도 특강을 하였다고 하지요. 그래요. 그러나 그때엔 내가 모시고 가지 않고 능가스님이 모시고 갔어요. 능가스님이 주선한 세계불교도대회 때에 한국에 나온 스님이 한국 최고 의 고승을 초청해서 탄허스님이 가신 것이지요. 스님은 대만을 갔다 오시더니, 대만 불교는 살아 있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그것이 1980년인 것 같아요. 그후 에는 동남아시아를 여행하셨는데, 그때에는 희찬스님이 모시고 갔어요. 탄허스님과 친근한 고승은 누구였는가요? 스님은 관응스님, 월산스님, 고암스님, 청우스님 그리고 춘성스님 과 친했어요. 월산스님은 스님이 입적하시자 나에게 휘호, 탄허대종사 각령, 死 264 中 得 活 을 보내 오셨어요. 이것을 쓰고 얼마 안 있다가 돌아가셨지요. 이것은 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65 금껏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지요. 청우스님은 언제인가 일본에서 양털로 만든 내의를 구해서 보내 주셨어요. 추운 오대산에서 고생한다시면서. 춘성스님은 스 님을 참 좋아했어요. 춘성스님은 젊어서는 화엄학자였지요. 고암스님은 귀한 음 식이 있으면 인편으로 보내 주셨고, 춘성스님은 홍삼엑기스를 큰병으로 가져오 신 것이 기억이 나요. 또 경봉스님은 스님 생각하는 것을 간절하게 했어요. 날 26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보고 스님 시봉 잘 하라고 격려를 해주시도 했어요. 한 번은 조계사에서 만났더 니 잠깐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렸더니 봉투에 돈을 많이 넣어주시길래 도선사까 지 쫓아가서 돌려드리니깐, 화를 버럭 내시면서 내가 돈을 아무에게나 주는 줄 아느냐? 느그 스님이 용수보살의 후신이어서 주는 것이야 라고 하셨어요. 관응 스님과도 친했지만, 유식학에 능하신 관응스님이 강의하실 때에 스님께서 들었 다는 말이 있는데, 탄허스님은 불치학문( 不 恥 學 問 )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박정희 대통령과 스님과의 인연이 있다고 합니다만. 동국대가 관선이사로 넘어가 있을 때, 박대통령의 장모가 탄허스 님 같은 사람이 동국대를 운영해야 동국대가 잘될 것이라고 해서 스님이 청와대 에 가서 박대통령을 만나 동국대를 다시 찾아온 거예요. 스님이 박대통령을 만 나서 동국대를 인수하는 서류를 들고 온 것이지요. 그러나 스님은 그 서류를 동 국대에 던져주고는 오대산으로 들어가셨어요. 그 말을 들은 박대통령이 속았다 는 말을 했다고 하지요. 그러자 스님은 나는 부처님 것이 남의 손에 들어가 있 는 것을 다시 찾아온 것뿐이다 라고 하였어요. 이 이야기를 내가 스님에게 여러 번 들었고, 주변 사람들도 많이 들었어요. 그 후에도 스님은 동국대이사장, 총 무원장 말이 나올 때마다 거절하셨지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66 스님의 저서인 부처님이 계신다면 은 어떻게 하여서 나온 것인가요? 그것은 내 친구인 국회부의장을 지낸 임채정이 나를 찾아와서 스 님의 책을 내보겠다고 했어요. 이 사람이 동아일보 기자를 하다가 해직이 되어 서 부인 이름으로 출판사를 냈어요. 그래서 내가 스님의 자료를 모아 놓은 것을 주었더니, 그것으로 책을 낸 것이지요. 그때에 고준환이 동아투위 회장으로 있 어서, 고준환과 같이 왔어요. 그래 예조각에서 책을 냈어요. 스님 모르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스님 귀에 들어갔지요. 그래서 스님께서 노발대발해서 책을 갖다 드리니까 이 책이 니 책 이지 내 책이냐 고 하셨어요. 그래서 내가 스님에게 스님! 스님 잣대로 세상을 보지 마세요. 눈높이를 중생의 눈으로 낮춰야 합니다. 중생들에게는 이것도 어 려운 것입니다 라고 하였지요. 그래서 스님 모르게 해서 그 책 초판 1쇄에는 스 님의 머리말이 없어요. 그러다가 2쇄에 스님의 < 多 言 의 病 >이라는 머리말이 들 어갔지요. 그리고 발문은 동아일보에 있는 김중배가 썼는데, 그것은 임채정이 시킨 것이에요. 김중배는 기자 시절에 삼덕사로 스님을 찾아온 적이 있어요. 부 산에서 제주로 가는 배가 침몰한 것을 취재하러 왔다가 들렸지요. 탄허스님은 화엄사상을 불교의 핵심이라고 강조하셨어요. 스님이 보신 화엄사상을 쉬운 말로 하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나요? 그것은 화쟁사상으로 말할 수 있어요. 담마기금( 擔 麻 棄 金 )이라는 말 이 조사어록에 많이 나옵니다. 삼장사가 혼자서 100리 길을 걸어가다가 산의 길 에서 금덩어리를 만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리석은 삼장사는 금을 보고서도 지 금까지 삼을 지고 온 고통, 정성을 잊지 못하고 금을 줍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것을 부처님이 비유하였고, 탄허스님은 8만 4천 경을 삼으로 보시고 화엄경을 266 금덩어리로 보시면서 화엄사상을 강조했어요.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에도 아난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67 에게 유의경에 의지하라고 하였는데, 유의경이 화엄경이지 않습니까? 스님의 유불선 회통하는 정서와 성철스님의 참선 위주, 보조 배격과는 차별이 있지요. 탄 허스님이 성철스님을 비판했다는 말이 있는데. 비판까지는 아니고, 강의하실 때 누가 돈오돈수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 이런 비유는 하셨어요. 장님이 지팡이를 짚고 다닐 때에는 더듬거리니깐 26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실수를 안 하는데, 장님이 눈을 뜨면 넘어지고 자빠지고 그런다고 했어요. 돈수 라고 해도 점수인 보림을 항상 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지요. 깨친 가운데에도 보 림을 못하면 도로 흐려진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리 가르치셨어요. 탄허스님이 계실 때에는 성철스님이 그리 심하게 말을 안 하시다가, 돌아가니까 돈오돈수를 강조하고, 보조를 미워하고 그랬지요. 성철스님이 계실 적에는 해인사 강원에서 도서, 절요를 못 가르치게 하였잖아 요. 그래서 학인들이 통도사나 범어사에 다시 가서 그것을 배웠지요. 묘엄스님 도 사집반에서 그것을 빼고 가르쳐서, 일부 학인들은 운문사로 가고 그랬어요. 그리고 특설반이라고 해서 거기서 도서, 절요를 다시 가르쳤지요. 스님은 근거를 강조하셨지요? 스님은 무엇을 가르치셔도 그에 대한 근거를 철저하게 제시했어요. 스님과 성철스님을 비교하자면 철스님은 거두절미하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 이다 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조사어록에 보면 그것이 엄청나게 나와요. 스님은 반드시 조사어록의 어디에 나온다고 하셨어요. 꼭 근거를 들이대고 말씀했어요. 서돈각 교수, 한승조 교수와 학자 대여섯 명이 큰스님들을 찾아다녔어요. 그 러다가 탄허스님에게 와서는 하루 동안 이야기를 듣고 하는 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들이 성철스님에게도 가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철스님의 말씀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68 태평양의 가운데에서 만난 것 같았다고 그랬어요. 태평양에 가니 동서남북을 분 간 못하겠고, 말을 듣다가 보니까 육지로 나와서 합천 해인사에서 머물렀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탄허스님에게 와 보니 처음에는 오대산 골짜기였는데 강릉을 거쳐, 동해안을 지나, 태평양에 다다랐다고 하였어요. 이것이 두 스님의 차이점 이지요. 기본학문이 없으면 광활한 것 같지만, 전문지식을 파고서 들이대면 끝 이 보여요. 그러나 탄허스님은 파고들면 무궁무진하게 벌어지지요. 사서삼경에 그것의 잔주까지 들이대셨지요. 그러니 태평양의 일엽편주가 되는 셈이지요. 탄허스님은 우리들에게 대중들에게 함부로 가서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 랬어요. 강의를 하려면 충분한 자료를 갖고 가라고 그러셨지요. 청중 중에서 어 떤 질문이 나오더라도 제대로 답변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스님은 법상에 오르는 것을 싫어했어요. 주로 흑판을 이용해서 강의를 하셨지요. 그러 시면서 부처님을 대변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하셨어요. 탄허스님의 역경은 직역이 원칙입니다. 이에 대해서 들려준 것이 없나요? 그것은 스님의 원칙입니다. 수원 용주사에 역경하는 역장이 들어 서고, 역경위원을 양성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스님도 증의위원으로 그곳에 계시 면서 번역도 하시고, 강의를 하셨지요. 그때에 국어학자인 최현배씨도 와서 같 이 작업을 했는데 생사윤회를 죽살이 바퀴 돌리기 이렇게 풀어서 번역을 했단 말입니다. 이 주장에 운허스님도 동의했을 거예요. 그러자 탄허스님이 그것을 지적했어요, 생사윤회라고 하면 중생들이 그것을 짐작은 하지만, 죽살이 바퀴 돌리기라고 해 놓으면 오히려 중생들의 눈과 귀를 어둡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반대했어요. 스님은 고유명사나 개념은 그대로 두면서 번역을 하되, 그것이 어 려우면 가급적 괄호 안에다가 설명을 하는 식으로 번역을 하자고 그러셨어요. 268 그리고 스님은 번역한 사람들의 이름을 원고 말미에 쓰자고 그러셨어요. 그런데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8

269 이런 제안을 운허스님이 반대하니까 보따리를 싸들고 용주사에서 나오셔서 오 대산으로 들어가셨지요. 스님은 나는 직역을 하는 도매상이지, 의역을 하는 소 매상은 안 한다고 그랬어요. 탄허스님의 직역과 현토는 유명하지요. 26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청담스님이 종정을 하다가 다시 총무원장을 할 때입니다. 청담스 님이 큰스님들을 조계사로 모이게 했어요. 그래서 관응 운허 춘성 고암 탄허 스님 등 20~30여 명 스님이 다 모였어요. 청담스님이 제안하기를 능엄경의 토 가 통도사, 범어사, 해인사 별로 중구난방으로 다르니 이것을 통일하자고 제안 했어요. 그러자 관응스님이 탄허스님이 만든 토가 제일 정확하고, 교재로도 쓰 이고 있으니 따로 손질할 것이 없이 탄허스님의 것으로 하면 된다고 그랬어요. 탄허스님은 입적하실 때에 당신이 가는 일자를 미리 말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그래요. 스님은 65세 때에 위암 판정을 받았어요. 그래서 수술 권 유를 받았지만 거절했지요. 그때에 스님은 의사에게 병이 나 탄허를 못 잡아간 다 고 하시면서 나는 일흔한 살 음력으로 4월 23일 유시에 간다고 예언을 하셨 어요. 그러시면서 3개월밖에 못 산다고 말한 의사에게 내가 3개월 후에 가면 당 신은 천하의 명의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의사직을 내놓으라고 하니까 의사는 아무 말을 못했어요. 스님은 평소에 등운봉 선사, 환계 지안선사, 보조국사를 존경한다는 말을 자 주 했어요. 이 스님들은 죽음을 자유자재로 하였지요. 등운봉은 물구나무를 서 서 갔고, 지안은 불타는 장작더미에서 갔고, 보조는 백문백답을 하고 툇마루 끝 에서 갔지요. 이렇게 스님은 세 스님을 존경하면서 용무생사( 用 無 生 死 )를 하는 정 도가 되어야 한다고 노상 법문에서 강조했어요. 스님은 어떤 놈이 공부를 얼마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70 나 하였는지 모른다, 마지막 갈 때에 공부의 힘이 나온다고 하셨어요. 용무생사 는 보조어록에 나옵니다. 한암스님도 그렇게 가신 것이고, 탄허스님도 그리 가 신 것입니다. 저는 갈 때 가봐야, 공부 힘이 나타난다고 봐요. 입적의 순간을 회상해 주세요. 스님은 가시기 3개월 전에 저를 진관사로 불러서 준비하라고 하셨 어요. 그리고 한양대병원에 계시다가 오대산으로 가자고 해서, 방산굴에 도착하 니까 밤이었어요. 하루를 주무시고, 방산굴에 50~60여 명이 모였지요. 스님이 말한 입적 시간이 다 되어가니까 환원이라는 시봉하는 상좌가 궁금하여 스님에 게 스님 여여( 如 如 )하십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러자 스님은 멍충한 놈 그럼 몰 롱하냐 그랬지요. 그 후에 그 스님이 스님에게 스님 이제 법연( 法 緣 )이 다한 것 같습니다. 한 말씀 해주세요 하자, 스님은 일체( 一 切 ) 무언( 無 言 ) 이란 말씀만 하 셨지요. 그 후에 몇 시냐고 하셔서 제가 유시( 酉 時 )입니다 라고 하자, 얼마 후에 큰 숨을 몰아쉬고는 그대로 가셨지요. 저는 스님들이 탄허스님처럼 공개적으로 가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탄허스님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시나요? 그러니까, 스님은 평상시에 나는 당대 일을 하지 않는다, 명전천 추( 名 傳 千 秋 )하는 일만 하겠다 고 했어요. 즉 천추에 전해지는 것만 하겠다는 뜻이 지요. 이 말을 가끔 하셨어요. 달리 말하면 스님은 종합적인 면에서 대종사이셨 고, 유불선 모든 분야에서 대종사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스님은 강의를 하시면 유교, 도교, 불교를 동시에 말씀하셨어요. 강의를 듣는 사람이 다양하니까 그들 에게 알맞은 것을 다 들려주고, 마지막으로는 불교를 이야기하시면서 마음, 참 270 선 같은 것을 알려 주었지요. 스님은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사명감을 갖고 왔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71 그렇지 않고서 초심으로부터 화엄경에 이르기까지 이 많은 원고를 쓰며 책을 간 행하겠냐 고 하시면서, 당신은 부처님의 심부름꾼으로 왔다고 하셨어요. 이 말 이 스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탄허스님의 비석, 비문을 최창규 선생이 썼지요.? 27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그래요. 최창규는 최익현의 후손이지요. 스님은 아버지 친구(백남 구)의 소개로 보령으로 가서 최익현의 제자인 이극종에게 배운 인연이 있어서 최 창규가 스님을 뵈러 자주 왔어요. 그 사람은 서울대 교수를 하다가 국회의원을 하였는데, 스님이 한 번만 하고 교수로 가라고 더 이상은 못하게 했어요. 그래 도 그 사람이 말을 안 들어서 그 부인에게 약마중태( 弱 馬 重 汰 ) 라고, 즉 약한 말은 벼슬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면 주저앉는 법이라고 그랬어요. 그래도 더 하다가 중풍에 걸렸지요. 스님이 최창규를 이뻐했고 요로에 선전을 많이 해주었 어요. 이렇게 스님에게 자주 다닌 것을 아는 삼보스님이 스님의 비문을 만들 때에 주 선해서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다가 언제인가 각성스님에게 비문을 다시 받아서 세우고, 최창규가 한 것은 없어졌지요. 거사님이 하시는 교림과 탄허스님과의 비사는 없는가요? 이 출판사는 광문출판사라는 것을 제가 인수해서 운영하는 것입니 다. 그때에는 조계사 앞에 있었어요. 교림이라는 것은 탄허스님이 주역에 근거 해서 지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스님이 자주 오시기도 하였어요. 탄허스님의 부친 김홍규 선생이 독립운동가이지요? 그럼요. 스님이 부친의 이야기를 저에게 몇 차례 했어요. 김홍규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72 는 영사라는 한약 특효약을 갖고 전국을 다니면서 장사를 했는데, 그걸 하면서 독립자금을 모금했어요. 탄허스님은 국내의 독립운동이 더 고통스럽다고 했지 요. 그러나 자료가 없어서 입증을 못했는데 제가 10여 년을 여러 곳을 쫓아다녀 서 독립운동가 포상 신청을 해서 가능했지요. 김홍규는 보천교 핵심간부로 독립 자금을 임시정부에 댔는데 제일 많은 자금을 냈다고 그래요. 해방이 되자 임정 의 최초 국무회의를 정읍의 김홍규 집에서 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구, 이승 만이 다 왔다고 그럽니다. 탄허스님에 대한 증언에 감사드립니다. 스님의 탄신 백주년사업이 잘 되길 바랍니다. 저도 저대로 기념하 는 일을 궁리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재단에 사진 앨범 다섯 권, 신문철 세 개, 스님이 나온 조선일보 동판 앨범 등을 주었는데 그것이 없어진 것이 안타깝 습니다. 저는 스님의 자료가 잘 보관되고, 스님의 진면목이 구현되기를 바랄 뿐 입니다. 272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73 행동으로 증명된 대도인 27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대상 김문환 국민대 교수 및 국민대 총장 역임, 탄허불교문화재단 감사, 국민대 명예교수 일시 2012년 3월 7일 장소 동행 사무실 여의도 교수님은 탄허스님과 인연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교수님의 불교 인연부터 듣 고 싶군요. 저는 경북 의성이 고향인데, 제 어머니가 돈독한 불교 신자였어요. 그래서 어릴 때에 어머님을 따라서 절에 열심히 다녔어요. 저는 누나가 넷이었 데, 그 다음에 제가 태어났어요. 제 위로 형이 둘이 있었는데 어릴 적에 죽어서, 어머니가 불공을 드려서 제가 늦둥이로 태어나 저는 사랑과 귀여움을 많이 받았 지요. 그리고 중 고등학교는 대구에서 경북중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외가집에 서 다녔습니다. 외할머니도 신실한 불교 신도였어요. 중고등학교 때에는 절에 열심히 다니지는 않았지만, 그 시절의 대구는 불교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이렇 게 청소년 시절에도 불교 분위기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74 그러면 서울법대에 다니면서는 법불회나 대불련 활동을 하셨는가요? 저는 1965년에 대학을 갔는데, 학교에 가서는 노는 데 바빠서 불 교활동은 안 했어요. 그러나 룸비니회에는 조금 다녔지요. 지금의 종로 3가에 있는 대각사에 가서 법문을 들었지요. 그러나 제 은사가 서돈각 총장님이었 는데, 그 교수님은 독실한 신자이시잖아요. 교수님 댁에 가면 불단( 佛 壇 )이 있어 요. 그래서 그 불단에 예불을 하였지요. 그러니까 불교를 완전히 놓은 것은 아 니지요. 탄허스님과의 인연의 출발을 말씀해 주세요. 저는 졸업하고 대학원을 갔는데, 대학을 졸업하면서 명호근 선배 님을 따라다녔습니다. 호근이 형은 탄허스님을 제일 존경하고 따라다니던 분이 아닙니까? 그래서 1970년대 초, 그러니까 1971년인가 1972년 무렵부터 호근 이 형을 따라서 스님을 자주 뵈었습니다. 뵌 곳은 초기에는 월정사였고, 그 후 는 대원암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었군요. 그러면 결정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 사정이 있었는가요? 그런데 제가 1973년도에 군대를 갔는데, 공군 교관으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1974년에 제 아버님이 그만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49재를 지내는 데, 그 재를 대방동에 있는 공사의 법당에서 지냈습니다. 그때에 호근이 형과 상 의해서 법사로 탄허스님을 모셨지요. 호근이 형이 49재 법사를 큰스님으로 하 면 영가천도가 좋다고 해서 스님을 모신 것이지요. 그래서 탄허스님이 오셔서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님을 모신 것은 저로서는 큰 영광이지요. 스님은 49재 같 274 은 곳에 가시지 않고, 그런 의식을 싫어하셨어요. 자유분망하신 분이라 형식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75 싫어하셨기에 저의 부친 49재 법문을 해주신 것은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그때에 제 누나를 비롯한 형제들, 공사생도 등 200여 명이 참석했어요. 그렇 지만 그때 스님이 하신 법문은 기억나지 않고, 다만 법문 마지막에 가서 스님께 서 제 부친 성함을 부르면서 영가는 어디 가 있느냐 고 큰소리로 할을 하신 것 이 인상적이었죠. 27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특별한 인연을 맺었네요. 그래요. 그 이후로는 저는 더욱 더 스님을 자주 찾아가서 뵈었어 요. 그리고 제 친구들, 고등학교 동창이나 대학교 친구들을 데리고 갔죠. 제가 군대생활을 거의 6년을 했어요. 그래서 외롭고, 의지가 필요해서 그런지 스님을 자주 찾아갔어요. 그리고 제가 군에 있을 때에 스님은 저에게 사람을 지도하고, 사회에서 활동을 하려면 양념으로 관상을 배우는 것이 좋다고 해서 고대 앞에 있었던 그 방면의 대가인 양학형 선생님에게 가서 배웠어요. 다른 사람들은 몇 달 듣고 그만두었지만 저는 1년 동안 다녔어요. 지금에 와서 보면 관상이 100% 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80%는 맞는 것 같아요. 저는 지금도 사람을 볼 줄 압니다. 그리고 참, 제가 동국대 총장을 지낸 홍기삼하고 친해요. 홍기삼 전 총장이 그 시절 동국대 교수를 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스님이 동국대 이사를 하셔서 시를 쓰던 석지현스님이 홍기삼을 인사시킨다고 데려왔어요. 그때 스님이 석지현스 님에게 네 살 때에 무슨 일 있었지? 하니까 석지현스님이 그렇다고 했어요. 나는 그것을 지켜보면서 스님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관상에 관심 을 가진 것이지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76 군대에서 나와서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인연은 지속되었지요? 그럼요. 제가 제대하고 나서 1979년도에 국민대에 교수로 들어갔 습니다. 그 무렵인가? 광주사태가 난 무렵인데 한 번은 대원암에를 갔더니 스님 께서 연세대에 특강을 하시러 간다고 해서 제가 모시고 갔습니다. 스님이 하신 강연 주제는 80년대 한국 사회의 전망 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에 사회는 암담하 고 그럴 때 아닙니까? 스님께서는 그에 대해서 주역( 周 易 )을 갖고서 희망적인 말 씀을 하셨어요, 우리나라가 앞으로는 좋다, 젊은이를 보더라도 그렇고 사회의 미래를 보더라도 그렇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때 학생 하나가 스님에게 질문을 했어요. 학생은 자기가 주역을 다 섯 번이나 달달 읽었는데, 주역에는 스님의 그런 말씀이 안 나온다고 질문을 했 어요. 그랬더니 스님은 그 학생에게 친절하게 답을 해 주시지 않고 무식한 녀석,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라는 투로 답을 했어요. 어떻게 주역을 다섯 번을 읽었다 고 해서 스님이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겠어요. 몇백 번을 읽어도 알 수 없는 것 이지요. 그래도 그 학생이 수긍하지 않아서 내가 중간에 나서서 정리를 했습니 다. 스님의 고차원적인 수준에 비하면 학생은 초등학교 수준이 아닙니까? 스님은 주역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은 철인( 哲 人 )의 경지이지요. 내가 스님의 그런 수준을 직접 보고, 충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내가 대전 학하리에 있을 때인데 그때에 조선일보 주필을 한 선우휘 선생과 선 우휘 선생의 친구분이 스님을 뵈러 왔어요. 그래서 2박 3일간을 먹고 주무시면 서 스님과 많은 이런 저런 담소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선우휘 선생이 가니까 스님은 저와 호근이 형에게 선우휘 일행을 비난 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실망하였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선우휘 선생은 그 276 래도 나라를 대표하는 지성인인데 하는 이야기가 하찮은 이야기만 하였다는 것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77 입니다. 보통 사람이면 그 자리에서 깔보고 그럴 터인데 스님은 3일간은 정성껏 대해 주셨어요. 가시고 난 후에 스님은 넋두리같이 우리에게 세속의 이야기, 하 찮은 싸구려 이야기만 하였다고 하셨어요. 소위 인간의 본질, 사회의 고민 등 근 본적인 고뇌에 대한 발언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스님의 그 말씀을 듣 고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어른의 정신세계가 대단하구나 하는 그런 27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것을 느꼈어요. 아주 깜짝 놀랐어요. 지금도 생각하면 전율이 와요. 나는 스님이 연대에서 학생에게 친절하지 않게 대하는 것에 약간은 의아스럽 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선우휘 선생과의 면담을 하고 난 후에는 저는 스님의 정 신세계는 엄청나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그때부터 저는 더욱 더 스님을 존경 하게 되었고, 아니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때 대학교 교수이고, 그래도 엘 리트 코스를 밟아 왔다고 자부하던 사람인데 나도 쓰레기 같은 인간이 아닌가 하는 그런 자책을 했어요. 하여간에 저는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 때 결심을 했어요. 나도 이제부터는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하겠다고 다짐을 했습 니다. 그래서 얼마 후에 준비를 하고 나서, 저는 학생으로 미국에 공부하러 갔 습니다. 대학 교수가 학생 신분으로 유학을 갔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결단입니다. 제가 미국을 간다니까 스님은 호근이 형을 통해서 짧은 사자성어 를 붓글씨로 세 점 써 주셨습니다. 미국에 가서 지도교수에게 주고, 활용하라는 것이지요. 저는 그전에 스님에게서 학귀자득( 學 貴 自 得 )이라는, 즉 학문은 깨달아 야 귀하다 는 뜻을 가진 글씨를 받았어요. 저는 그래서 그중에 한 점은 지도교 수에게 주고, 한 점은 한국인의 선배에게, 또 한 점은 미국에 있는 유명한 화가 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제가 유학을 간 곳은 미국 뉴욕에 있는 NYU라고 뉴욕유니버시티라는 대학입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78 니다. 그 대학의 제 지도교수는 하버드 그린버그라는 유태인 사람이었어요. 저 는 유학을 가서 지도교수의 배려로 8400$이나 되는 학자금을 면제받았어요. 그 돈은 지금 돈으로는 6만 불이나 되는 큰 돈입니다. 저는 그 지도교수에게 도움 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1993년도에 제가 그 교수님과 사모님을 한국으로 초청 을 해서 한 달간 여행을 시켜드렸습니다. 물론 그 초청 경비는 그 대학 출신의 모임인 동문회에서 부담하였지만요. 그래서 저는 그 은혜를 갚은 셈이 되었지 요. 그런데 그 교수님이 한국에 나오실 때에 제가 드린 탄허스님의 유묵을 갖고 나와서는 저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유묵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그 교수님은 자신은 이제 죽을 때가 다 되었다고 하시면서,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 교수님은 귀한 것을 자기가 갖고 있을 수 없다고 그랬어요. 저 는 그 교수님을 보고, 미국 사람을 다시 보았습니다. 미국 사람들 대단한 사람 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인간미가 뭐냐 이런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그 유 묵은 내가 보관하고 싶었지만, 호근이 형에게 이야기하고 호근이 형에게 주었습 니다. 호근이 형은 스님을 그렇게 따라다녀도 스님의 유묵 한 점도 없어요. 그 래서 제가 드린 것이지요. 제가 탄허스님을 공부해 보니, 스님은 보통 스님들과는 다른 점이 있어요. 제가 보기에 탄허스님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강조하셨어요. 스님은 물질을 좋아하는 것은 하수, 동물이라고 보셨어요. 항상 정신을 강조했어요. 스님의 그런 것을 알 수 있는 실례가 있어요. 김선생도 아시겠지만 스님의 대 담, 하신 말씀을 수집하고 정리해서 낸 책 부처님이 계신다면 이 있지 않습니 278 까? 그것은 고준환 형이 소개해서 만든 책인데, 그 책은 스님이 계실 적에 1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79 에 30만 부가 나갔다고 그랬어요. 그래도 스님은 그런 책에 대해서 하찮은 것이 라고 하시고, 당신의 상을 내시지 않았어요. 그러시면서 스님은 세상 사람들이 부처님이 말씀한 것은 거들떠보지 않고, 위대한 말씀인 부처님의 법문은 보지도 않고,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하찮은 글들이 베스트셀러라는 것에 대해서 중생들 이 얼마나 미련하냐고 하셨어요. 27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잘났다고 나서고, 얼마나 상( 相 )을 냅니까? 보통 스님이 면 내가 잘났다고 해야 할 것을, 당신의 책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그 책도 사실은 누가 나서서 스님의 동의도 안 받고 그냥 낸 것입니다. 스님 주위에 서 스님도 글을 쓸 수 있고, 대선지식이니 책을 내시자고 해도 스님은 당신은 부 처님을 따를 수가 없고, 당신의 고뇌는 부처님이 다 해놓았다 하셨어요. 다만 당 신은 부처님 말씀이 중국어와 한문으로 되어 있어 해득하기 어려우니, 부처님 말씀을 중생들이 이해할 수가 없으니, 그것을 번역하는 것을 당신의 일생의 업 무로 하겠다고 말씀하셨지요. 스님의 그런 자세는 결사적인 마음가짐이지요. 스님은 그 흔한 출판기념회도 안 했어요. 주위에서 그래도 출판기 념회라도 해야 되지 않냐고 권해도 절대 안 하셨지요. 그러나 스님은 팔만대장 경을 다 번역하고 나면, 출판기념회를 하겠다고 하셨답니다. 그러나 건강이 좋 지 않아서 번역을 다 못하시고 돌아가셨지요. 그리고 스님은 모든 번역을 다 하고, 출판기념회도 한 후에는 동양학, 유불선 삼교를 회통한 것을 상하( 上 下 ) 두 권 분량으로 총정리하는 책을 내고 일생을 회 향하겠다는 말씀도 하셨어요. 그러나 이것도 이루시지 못하고 그냥 가셨지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80 스님은 미래 예측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들으신 것이 있다면. 하루는 스님이 야, 소련이 무너진다 고 하셨어요. 그것이 아마 1970년대 초인 것 같아요. 그리고 또 에베레스트산에 가면 조개가 있다 고 하 시면서 옛날에 에베레스트산이 바다 밑에 있었다 는 말을 하셨어요. 그래 내가 스님에게 스님,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 하지 마세요 그랬어요. 그리고 스님 다 른 말은 그렇지만 그 말을 하시면 사람들이 정신이상자라고 합니다 라고 그랬어 요. 그랬더니 스님은 부드럽게, 강하지 않게 당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소련이 무너지고, 지구의 판부조론이 입증이 되지 않았습니까? 스님은 전두환 대통령의 호, 일해를 지어 주어서 전두환을 옹호했다는 말이 있어요. 일해라는 호를 지어준 것은 사실입니다. 또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 통령이 된다는 것도 사전에 말씀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스님은 독재 정권을 아주 비판하셨어요. 독재를 하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스님은 독재정권 을 아주 언짢아 하셨어요. 그래서 박정희 정권도 찬성하지 않았어요. 스님은 인간의 존엄을 굉장히 중요하게 말씀하셨어요. 스님은 인간 존엄, 그 게 불교정신이라고 하셨어요. 그 시절 그런 것을 말한 스님은 아무도 없었어요. 아무도 말하지 않았어요. 하여간 스님은 독재를 비난하시면서 인간 존엄이 불교 의 핵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에도 충격을 받았어요. 스님을 언뜻 보면 은 시골의 촌로와 같은 중인데, 그런데도 그런 스님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 니 하면서 나는 스님을 새롭게 봤어요. 나는 그런 말을 처음 들었거든요. 그런 현대적으로 표현한 인권에 대한 말을 들으셨군요. 280 저는 그 말을 들었을 때에 제가 보수적이라 귀담아 듣지 않았어요. 저는 개인보다는 사회의 안정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으니까요. 그러나 그런 말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81 은 대단한 것 아닙니까? 제가 보기에 스님은 사회주의적인 요소도 있어요. 스님 의 부친이 보천교의 간부가 아니었습니까? 이를테면 스님은 진보적인 민족주의 자였습니다. 탄허스님은 정치의식이 강했어요. 28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맞습니다. 스님은 정치적 성향이 강했어요. 스님은 정치 이야기를 많이 하시고, 만해 한용운의 이야기도 우리에게 자주 하셨어요. 스님은 우리에 게 사내가 할 일은 정치밖에 없다 는 말도 하셨어요. 그런 말을 들은 저는 스님 에게 그러면 스님은 정치를 하시지 왜 스님이 되셨습니까? 하고 물어도 보았 어요. 그랬더니 스님은 사람이 가는 길이 다 다르다. 그래서 정치를 못하고 스 님이 되었다 고 하셨지요. 지금은 정교분리를 강조하는 시대이지만, 스님의 어록을 보면 정교일치적인 발언도 간혹 나와요. 1980년대 초, 그러니깐 그때가 5 18(광주민주화운동)이 난 직후 5월 20~25일 경일 것입니다만 스님이 동아일보에서 대담한 것이 있어요. 그 신문 기사를 찾아보세요. 제법 크게 났어요. 그때는 사회가 우울하고, 어수선할 때였 습니다. 그 대담에서 하였던 스님의 발언 요지는 우리 민족이 앞길에 서광이 비 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일부에서는 스님이 전두환을 옹호하는 것이 아 니냐는 오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장래를 보고 그렇게 우리 사회에 대 한 희망, 발전을 보았고 그것을 소신으로써 말씀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월간 마당 이라는 잡지가 그때 있었는데, 스님이 대담한 것이 그 잡지 에 났어요. 그 잡지사 사람 두 명이 월정사로 와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때 내 가 옆에 있었어요. 그 대담에서 스님은 당신의 힘은 불이 났을 때 양동이 갖고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82 불을 끌 수 있는 힘밖에 없다고 하셨어요. 이렇게 스님은 당신의 위치를 냉철하 게 파악하고 계셨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이 있었어요. 보통 사람들은 전부가 내 잘났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중생들은 그러잖아요. 그러나 스님은 종교적인 측면에서, 인간적인 측면에서 당신의 일생은 오직 부처님 제자일 뿐이라는 의식 에 철저했어요. 스님은 당신이 정치를 하는 것은 중생구제를 통한 정치를 하신 다는 의미를 말씀하셨어요. 지근거리에서 본 스님의 인상은 어떠셨는가요? 제가 보기에 스님은 한 인간으로서 매력 있는 분이었습니다. 스님 은 훈훈하고, 굉장히 자상하고, 따듯했어요. 물론 차가울 때에는 아주 차가우셨 지만. 스님에게서 사랑을 아마 제가 제일 많이 받았을 거예요. 오늘날의 제가 있 게 된 것은, 그리고 국민대학교 총장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스님의 사랑, 가르 침 덕분입니다. 저는 스님 생각을 많이 합니다. 스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스님은 사람을 꿰뚫어 보는 그런 것이 있어요. 스님은 중이 되지 못할 사람에게는 하지 마라고 하시고, 중이 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하라고 하셨어요. 오덕수라는 유명한 한의사가 있는데 이 분이 한의사가 된 것은 스님의 말씀을 듣고 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속초에 있는 박용열이라는 의사가 있는데, 이 분도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분은 동시를 쓰는 작가인데, 아주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스님은 고대생들에게도 장학금을 주었어요. 일초라는 비구 니가 있었는데, 이 스님이 스님의 장학금을 받고서는 개운암에 와서 스님의 일 을 돕다가 머리를 깎았지요. 또 스님은 운동, TV, 소설 같은 것을 싫어하셨어요. 운동을 하거나 소설을 볼 282 시간이 어디 있냐, 그 귀한 시간에 왜 그런 것을 하냐는 것이지요. 그리고 인생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83 이 연극인데 텔레비전 연속극을 왜 보냐고 했어요. 스님은 성격이 화통하시고, 개방적이었어요. 그러면서 스님은 불교에만 매이지 않았어요. 그러나 부처님 제 자임을 떠나시지는 않았지요. 탄허스님의 정체성에 대한 의견이 있다면. 28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저는 스님을 대도인( 大 道 人 )으로 봅니다. 우리들은 주변에 있는 사람 들의 겉만 보고 그 진면목은 잘 모릅니다. 저는 이런 것을 선우휘 선생과의 대담 에서 파악했어요. 보통은 스님의 주역, 관상에 대한 말만 듣고는 스님의 본질을 잘 몰라요. 스님이 도인이 아니고서는, 깨닫지 않고서는 그런 말씀을 할 수가 없 는 것입니다. 저는 스님을 지난 100년간 가장 위대한 도인으로 봅니다. 이런 도인은 다시 나올 수 없어요. 도인으로는 성철스님도 유명하지만, 나는 성철스님을 뵙지는 못했는데, 성철스님이 유명하게 된 것은 물론 훌륭하시고 수행도 많이 하신 스님이지만 그 스님은 해인사, 종정이라는 배경이 있었고 매스미디어의 힘에 의 해 널리 알려진 측면도 있어요. 그러나 탄허스님은 시절과 환경이 어려웠어요. 보통 우리들은 그 사람의 말을 갖고 판단하는데, 그러나 말만 갖고서는 그 값 어치를 볼 수 없어요. 그 행동을 봐야 합니다. 저는 스님의 강한 에너지를 봅니 다. 스님은 늘 삼매에 드셨어요. 스님은 강한 에너지로 새벽 세 시에 일어나셔 서 하루 종일 번역을 하신 것이지요. 어쨌든, 스님은 불쌍한 중생을 제도하는 것 이 핵심인데,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서 한평생 번역을 하신 것입니다. 보통은 상 구보리해서 하화중생을 한다고 그러지만, 스님은 먼저 하화중생을 하기 위해서 그 열정으로 매일 번역을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인간적인 고투를 우리는 봐야 합 니다. 30만 부나 나간 당신의 책에 대해서 상을 내시지 않은 것의 본질을 알아 야 합니다. 요즈음 주위를 보면 얼마나 엉터리가 많아요. 지식인과 종교인이 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84 그러잖아요, 선생님도 교수를 하니깐 잘 알지 않습니까? 이런 면에서 스님이 도 인이라는 것은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교수님에게 탄허스님은 어떤 의미입니까? 제가 오늘날까지 올바른 길을 가도록 영향을 주신 어른입니다. 저 는 스님에게 영향, 충격을 받고서 결심한 것이 있어요. 그 첫째는 주색잡기( 酒 色 雜 技 )를 일체 하지 않는다고 다짐했어요. 둘째는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하였습니 다. 물론 여기에는 제 아버님의 영향도 있었지만요. 그래서 제가 그래도 한 대 학의 총장도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귀한 증언 감사드립니다. 수고했습니다. 저도 탄허스님의 재단 일을 보고 있지만, 아쉬운 것 이 많아요. 스님 탄신 백 년을 맞이해서 스님의 진면목을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 다고 봅니다. 284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85 제 인생의 위대한 스승 28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대상 김동건 서울고등법원장, 서울지방법원장, 참여불교재가연대 대표 등 역임, 현재 불교포럼 대표, 탄허재단 이사, 법무법인 바른 의 대표 변호사 일시 2012년 11월 2일 장소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님은 불교계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신데, 탄허스님과도 인연이 많지요. 혹시 법불 회 회원이었는가요? 저는 서울법대를 1965년도에 들어가서 1학년 시절에 탄허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한두 번인가 들었습니다만, 서울법대 불교학생들의 모임인 법불 회에 정식으로 가입하지는 않았어요. 그때 탄허스님이 서울대에 오시면 허연 모 자를 항상 쓰시고 다녀가는 모습을 본 기억은 분명합니다. 저는 그 당시에 금강 경의 내용은 잘 몰랐어요. 그렇지만 1학년 때에는 법학 분야 이외에도 관심이 있어 이기영 박사의 원효 사상 연구 라는 책을 읽어 보았어요. 그때 이박사가 그 책을 내고, 출판기념회 를 갖고, 언론 출판계에 좋은 반응으로 보도가 되고 무슨 상을 타고 그랬어요. 이런 경험으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이기영의 저술을 읽기 시작했지요. 또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86 인문대에 가서 이용희 교수의 국제외교사 강의도 듣는 등 법학 주변부에 대한 관심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탄허스님과 인연을 갖게 되었나요? 저는 대학 2학년부터 본격적으로 고시공부를 하였어요. 그래서 다 른 분야, 체육활동, 종교활동 등을 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사 법고시에 붙고, 판사로 활동하면서 법불회 초창기 회원이면서 탄허스님을 모 시고 따라다니던 전창열, 명호근, 박준수, 김문웅, 김춘오 등의 선배들을 따라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법불회 회원이 되어 버린 셈이지요. 그러면 어디에서 탄허스님을 만났는가요? 주로 개운사의 대원암에서 뵈었는데 1970년대 초반 무렵이었는 데, 대원암에서 하신 강좌를 열심히 들었어요. 그때 저는 스님의 말씀을 열심히 받아적은 기억이 납니다. 그때에 스님은 가르칠 내용을 칠판에 가득 적었습니 다. 깨끗한 글씨로, 오자 하나도 없이 그러시면서 강의를 하셨는데 정말 대단하 였죠. 그리고 그때에 저희들은 고대 앞에서 상학( 相 學 ), 즉 관상에 대한 강의를 양 학형 선생에게서 듣기도 했습니다. 양학형 선생에게 배울 적에 탄허스님도 몇 번 같이 가셔서 듣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방산굴로 자주 찾아가서 뵙기도 했습니다. 그때에 상원사에 계시던 희 찬스님도 월정사 주지로 내려오셔서 저희들과 같이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지요. 희찬스님이 그때에 방산굴이 청와대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 무렵 탄허스님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요? 286 그때에 스님은 예언자적인 그런 것으로 사회적으로 각광을 받았습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87 니다. 우리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 발전 등을 많이 말씀하셨는데 저도 그런 말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내용에서는 스님 말씀에 반신반의( 半 信 半 疑 ) 한 적도 있어요. 대원암에서 강의를 마치시면, 강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갖고 차담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일찍 간 적도 있지만, 그런 차담 시간 에 참여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스님 말씀을 듣던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28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대전 학하리에서 뵙지는 않았는가요? 제가 1979년 11월에 대전지법 판사로 발령이 났어요. 그때는 이 난 직후이지요. 그 이후에는 학하리를 자주 찾게 되고, 그곳에서 스님을 자 주 뵐 수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스님께서 화엄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의 번역을 해서 다 출간한 이후입니다. 저도 스님의 책 화엄경합론 을 한 질 얻었습니다. 하여간 대전에 제가 있을 적에 스님에게 자주 찾아갔습니다. 그때에 갔더니 스 님은 주역을 잘 한다는 나이가 많은 이해운 선생과 담론을 하시고 그랬어요. 또 스님을 후원하던 보문회 회원들이 그곳에 내려오고 그랬어요. 학하리 불사를 위 해서 온 것이지요. 그래서 보문회장, 즉 김표진 교수 사모님도 그때부터 알고 지 냈습니다. 그리고 스님을 대전 우리집에 초청해서 스님에게 국수를 만들어서 대 접한 일도 있습니다. 학하리의 스님 유묵이 도난당했을 때 변호사님이 해결하였다는 말을 들었어요. 참!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학하리에 있던 어떤 젊은 스님 이 스님의 책, 유묵 등을 훔쳐갔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저를 부르셨는데, 스 님을 찾아뵈니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스님은 누가 가졌는지 짐작은 되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하시면서 저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때 제가 대전지법에 있을 때인데, 당시 대전검찰청의 1호 검사인 김종빈 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88 사에게 그 해결을 부탁했어요. 김종빈은 고대 출신으로 불교에 관심이 있는 분 이어서 부탁을 한 것입니다. 저와는 평소에 불교를 소재로 많은 이야기를 하면 서 친근하게 지냈고, 대전에 사는 아파트도 우리집 부근에 있어서 부탁했지요. 그랬더니 그 분이 유능한 형사 둘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때 그 형사들이 밴의 일 종인 차를 타고 일을 하였는데, 어느 사찰에 탁! 가서 도둑을 잡아 와서, 해결을 하였지요. 저도 김종빈 전 검찰총장이 탄허스님과 인연이 있다는 것을 봉은사의 일요법회보에서 읽 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그후에 검찰총장까지 올라갔고, 최근에는 봉은사 신도회 장도 지냈어요. 그 분은 영월 법흥사에 자주 출입하면서 기도를 열심히 하였 는데 아마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을 거예요. 요즈음에도 만나면 그 이야기를 합 니다. 저도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저도 법흥사에게 가서 기도를 하였지요. 사실 저 는 절에 가서 기도를 많이 하였죠. 저는 제 아버지의 생신날이 되면 가족, 친지 들을 대전으로 불러 하루는 호텔에서 자고 그 다음 날은 자광사로 가서 하루를 쉬면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또 상원사에 가서 하루를 지내기도 했고, 법흥사에 가서 하루 자고 그곳에서 생신 공양을 내기도 했어요. 탄허스님은 민족의식, 정치의식이 강하셨다고 보지 않는가요? 그렇지요. 1980년 초에 비상계엄이 선포되는 등 세상이 어지럽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던 그때에도 스님은 가장 당당하게 겁을 안 내시고, 과감 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라가 나갈 방향을 소신껏 말씀하시고, 군인들이 스님을 288 친견하고 여러 가지를 물으면 그때에도 당신 소신을 밝힌 것으로 알고 있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89 스님의 부친이 보천교라는 종교 단체에 관여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그래 요. 저는 그 종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런 연고로 어린 시절부터 국가의식, 민족의식을 갖고 계셨다고 보입니다. 민족지사가 아닌가 합니다. 그 시절에는 일제의 탄압을 받아서 그런지 산에 들어가서 소승적으로 도( 道 )만 닦았던 스님들 이 많았지 않았습니까? 28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탄허스님의 부친은 그런 공로가 인정되어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탄허스님이 1960년대 중반에 오대산에서 나와 서울 도회지에서 법대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으신 것은 대단한 것이라고 봅니 다. 그 당시 스님은 50대 초반이었고, 재력도 별로 없을 때였는데 그런 것을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을 하신 것은 탁월했다고 봐요. 그렇게 스님이 나서자 법불회 1기생들이 스님에게 빠져버린 것이지요. 스님께서 승려로서 쉽고 편안한 삶을 마다하고, 도회지에 돈 많은 만만한 신 도들을 만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런 것을 포기하고 대학생들에게 민족, 미래 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신 것은 대단한 용기이시지요. 선각자적인 기질이 있지 않나 싶어요. 그 당시 스님이 법불회 학생들과 친할 때, 법불회는 10년간은 잘 되었습니다. 저는 정식 회원이 아니었고 졸업한 후에 법불회 출신 선배님들과 함께 탄허스님을 따라다녔지만 법불회 그 팀들의 공부는 대단했어요. 우리들은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에 유명하신 탄허스님을 가까이 뵈었지만, 저기 부산 에 있는 백봉 김기추 거사가 계신 곳에도 가서 선문강의를 다 들었어요. 백봉거 사 밑에서 정진을 1주일씩은 다 거쳤습니다. 탄허스님에 대한 것은 그 당시에 많이 보도되었지요. 당시 유력한 신문에 스님에 대한 것이 많이 보도되었지요. 스님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90 동아일보가 주는 인촌상을 타셔서 그런지, 동아일보에 스님의 보도가 좋게 나갔 어요. 그리고 조선일보의 선우휘 주필과도 친근하셨고, 두 분이 대담하는 것이 조선일보에 크게 나왔습니다. 그 시절 선우휘씨는 조선일보에서 얼마나 막강했 습니까? 참, 그리고 선우휘씨의 사모님도 제가 고대 앞에서 상학을 배울 때에 같이 배운 것으로 어렴풋하게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지금 야권의 원탁회의 좌 장인 백락청의 사모님도 같이 상학을 배웠어요. 또 스님의 저서인 부처님이 계 신다면 은 나오자 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어요. 스님이 입적하시고, 월정사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가셨는가요? 저는 1981년 5월에 서울로 발령을 받아서, 다시 올라왔어요. 그래 서 서울에서 스님을 뵙다가 그해 8월에 외국 유학을 갔습니다. 영국으로 갔죠. 스님 입적 때에는 영국에 있었기에 스님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습니다. 탄허재단 설립 당시에 변호사님이 수고를 하였다는 말이 있어요. 스님은 살아생전에 학하리를 인재양성의 거점으로 만들려고 하셨 고, 그곳에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을 재단법인으로 해야 한다는 큰뜻을 갖고 계 셨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열반하시고 나서 스님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서 법인 을 만들어야 한다고 전창열, 명호근 선배들이 말씀을 했어요. 그러면 법인을 어 떻게 만들 것인가를 서로 상의하고, 궁리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 그 실무를 추진할 사람으로 김희순 선배가 나섰고, 저도 옆에서 많이 도왔습니다. 법인의 허가를 그 당시 문공부가 담당해서, 그 당시 문공부장관인 이진희 그 분에게 제가 테니스 시봉을 6개월 이상을 했습니다. 그 분과 함께 장 충동의 테니스장에서 같이 운동을 하였고, 또 경복궁 내의 테니스장에서 매주 290 테니스를 치고, 끝나면 목욕하고 밥도 같이 먹고 헤어지고 그랬어요. 그렇게 같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91 이 운동을 하면서 이진희 장관에게 탄허스님을 기리는 법인을 만들려고 하는데 도와주십시오 하였죠. 그랬더니 그 분이 종무실 직원을 불러서 지시를 해주셨 어요. 그런데 3~4개월이 지나고, 5개월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요. 그래 다시 이 진희 장관에게 이야기를 하였더니 그 분은 화를 내시면서 이놈의 자식들 아직 도 안 했어! 하시더니, 그후에 조치가 되어서 어렵게 법인을 만들었습니다. 그 29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래서 재단법인을 만들고, 이사회를 구성하고 그랬지요. 그런 비사가 있었군요. 그때에 전창열 명호근 김희순 선배들과 같이 법인을 만들어서 스님의 뜻을 이어가자고 많은 대화를 했어요. 그런데 법인을 만들려면 스님의 유품과 재산을 법인에 출연해야 됩니다. 그래서 명호근 선배가 속가 가족들을 만나서 동의를 받았습니다. 또 법인의 설립 기본 조건이 부동산 이외에 그 당시 에 3억을 현찰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저희들은 많은 고민을 하였지요. 그래서 쌍용의 김석원 회장 사모님도 만나고, 박초당 여사도 만나서 도움을 받 았어요. 그렇게 하여 법인 설립의 최소한의 조건을 만들었는데, 애를 먹었어요. 그런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탄허스님은 인재양성을 무척 강조하였습니다. 그렇죠. 스님은 항상 도의적 인재양성을 강조했어요. 앞으로는 그 곳이 한국의 중심이 된다고 하시면서 학하리에 그런 거점을 만들려고 하였지만 당신이 이루지는 못하고 가셨습니다. 그런 것을 재단이 계승해야 하는데 어려움 이 많습니다. 지금도 학하리 자광사는 황야에 홀로 서 있는 기분입니다. 아직 주 변 정리, 부지 정리가 제대로 안 되었어요. 최근에는 혜거스님이 이사장이 되셔 서 서울 수서에 탄허박물관도 세우시고 그래서 앞으로는 이곳이 재단의 중심이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92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최근 7~8년 전에 진관사에서 탄허스님과 연고가 있는 사람 다섯 명을 축하해 주는 법회를 열었습니다. 내가 법원장이 되고, 김문환은 국민대 총장이 되고, 박명자씨가 명성여고(동대부여고) 교장이 되어서 이런 것을 축하해 주는 법 회를 한번 했어요. 진관스님이 마련해 준 것입니다. 그때 백락청 교수도 왔어요. 진관사 진관스님은 탄허스님과 아주 가까워서, 스님이 서울에 오시면 진관사에 자주 가 계시고 그랬어요. 스님의 생신이 정월 대보름이었는데, 그때가 되면 어 디에서 생신 모임을 차릴까를 궁리하였는데 주로 진관사에서 많이 했어요. 진관 사 그곳이 조금은 추워도, 진관스님이 탄허스님에게 잘 해드리고 그래서 그 절 에 자주 가셨지요. 또 그곳 음식은 정말 맛도 좋아요. 지금도 계호스님이 저희 들을 성의껏 잘 해주시구요. 탄허스님은 민족의 미래를 맡을 인재들을 키우시려고 고민을 하였답니다. 제가 한 번은 예산 수덕사에 갔다가 서울로 올라오는데, 오다가 그 근처에 있는 윤봉길 사당을 들른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그 사당 의 마당에 은행나무 잎이 쫙 깔린 것입니다. 그때에는 윤봉길 선생의 사모님이 살아 계실 적입니다. 물론 거기는 안 계셨지만. 그때에 제가 가만히 보니 윤봉길과 이효상은 거의 같은 연배였어요. 이효상씨 가 살아 있을 적입니다. 그런데 서울에 올라와서 바로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동 행한 도반들과 함께 스님을 뵌 것이지요. 그래 저는 탄허스님에게 스님 수덕사 에 갔다가 윤봉길 의사의 사당을 들렸습니다 라고 말씀을 드리면서 제 생각을 이야기했어요. 저의 생각의 요지는 윤봉길은 젊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몸을 버렸지만 영원한 삶을 얻었고, 이효상은 가톨릭에서 성자에 준하는 대접을 받고 292 국회의장까지 하였지만 그 분이 돌아가시면 그 분의 산소 가에 비석 하나 제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93 로 서겠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분을 비교해 가면서 설명을 드렸더니 스님께 서 제 도반들이 옆에 있는 자리에서 저를 아주 극찬해 주신 것이 생각납니다. 그 러나 저는 방산굴에서 꾸지람을 받은 일도 있어요. 스님이 저에게 역정을 내신 적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래도 저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그러시지 않았나 그리 봅니다. 29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변호사님은 탄허스님을 어떤 분으로 보고 싶나요? 저는 요즈음 불교계의 스님들이 자기 정체성을 선사, 율사, 강백 이렇게 분류해서 밝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스님들은 각 분야의 기본적 인 모든 것을 다 해야 되지 않는가 합니다. 이런 면에서 탄허스님은 모든 방면의 지식, 학식을 다 갖추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교학에 남달리 뛰어 난 분이었지요. 스님이 강의하실 때에 분명하게 하시는 말씀, 오자( 誤 字 ) 하나 없 는 글을 칠판에 가득하게 적으시고 하신 강의를 들어보면 대단하다고 감탄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스님은 그 당시 불교계의 비주류였습니다. 어찌 보면 비 주류였기에 그런 고민, 작업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은 당대에는 주류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제가 보기에 불교는 수행과 실천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요즈음 스님들 은 자기 수행에 힘쓰기보다는, 사회에 나와서 하는 하화실천과 현실 사회에서의 교화에만 신경을 씁니다. 반면에 신도들은 어찌 보면 삼귀의례, 사홍서원 정도 의 교리, 신앙만 갖고 사회 참여를 해도 될 터인데 참선과 경학 공부를 스님들이 하듯이 노력해서 자기도 깨달아서 부처님이 되려고 하는 역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여간에 저는 수행과 실천이 본래의 모습, 구도가 아닌가 합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94 탄허스님은 고뇌 속에서 자기 길을 묵묵히 가지 않았나 싶어요. 탄허스님이 서울에 오시면 어느 곳에서 특별한 후원, 지원을 받지 않았어요. 강사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스님은 보살들의 후원을 받는 스타일도 아닙니다. 그 무렵 스님은 서울에서 오시면 지금의 한마음선원에 가서 강의를 통한 지원을 많이 해준 것은 사실입니다. 한마음선원은 지금은 번 듯하지만 그 당시에는 안양의 벌판에 천막을 치고 하던 시절입니다. 아마 돈 받 는 곳은 거기뿐인 것 같았어요. 그 시절 스님 원고를 보면, 원고지에 두 줄로 쓰 신 것을 보세요. 그것이 어려움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변호사님에게서 탄허스님은 어떤 존재인가요? 저에게 있어서 스님은 제 인생의 위대한 스승이지요. 위대한 스승 이라는 것이 각인이 되어서 저는 스님에 대한 모든 것이 좋게만 보입니다. 외부 에서 탄허스님에 대한 것을 놓고 왈가왈부( 曰 可 曰 否 )가 많아요.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일부분만을 보고서 말들을 하지요. 전체적인 것은 보지 않고서. 하여간 탄 허스님은 여러 면을 갖고 계시고 그래서 여러 평가가 나온다고 보여집니다. 탄 허스님 같은 분이 지금 이 시대에 과연 몇 사람이나 있겠냐는 것입니다. 스님이 쓰시는 한문을 보면 그런 것은 어린 시절에 이미 문리가 터져서 그리된 것 같아 요. 불교뿐만 아니라 유불선 전체에 대해서 그렇게 해박한 인물이 앞으로 다시 나올 수는 없다고 봅니다. 저로서는 스님을 20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만나서, 40대 초반까지 근 12~3년 을 아주 가깝게 모시고 지냈습니다. 대학 때부터 보자면 15~6년입니다. 그 기 간에 스님을 모시고, 배우고, 야단도 맞으면서 가르침을 받은 것 그 자체가 제 삶의 족적입니다. 또 열반 이후에는 재단을 만들어서 지금껏 법인이사로 활동하 294 고 있는 것도 보통의 인연은 아닙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95 변호사님도 탄허스님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여집니다. 그럼요. 불교계, 조계종단에서는 저를 오대산 문중으로 다 알고 있 어요. 탄허스님의 제자라고 알려져 있지요. 저는 어디에 가서도 이것을 분명하 게 말합니다. 제가 스님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저는 불교의 사회활동에 관심이 많고, 지 29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금까지 그런 일을 많이 해왔어요. 제가 탄허재단 이사로서 불교NGO의 하나인 참여불교재가연대의 상임대표를 5년간이나 했어요. 지난 연말까지 일을 하였지 요. 그런데 그 재가연대는 기본적으로 총무원과 갈등관계에 있습니다.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재가연대와 연고가 있는 종교자유정책연구원의 일은 하고 있어 요. 서강대 박광서 교수가 이사장이고, 저는 이사로 참여하고 있어요. 이 연구 원도 법인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조계종중앙신도회의 지도위원이었다가 최근 신도회장이 지도위원장을 하라고 강권하고 있는데, 저는 종단과의 관계를 완전 히 배제하지는 않고 있어요. 탄허스님의 유묵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지금은 한 점도 없어요. 제가 대전에 근무하다가 서울로 발령이 나 서 올라간다고 하니까 스님께서 특별한 글씨를 하나 써주셨습니다. 그것은 노자 도덕경 1장의 구절인데요, 도를 도라고 부르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는, 도가도 비상도( 道 可 道 非 常 道 ) 명가명 비상명( 名 可 名 非 常 名 )이었습니다. 저는 스님에게서 그것 을 받고 나서 노자 도덕경의 책을 사서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것을 꼭 달라기에 주었지요. 그 후에 자광사의 주지로 있었던 원행스님이 스님의 글씨를 전각하였는데, 그 것을 한 점 얻었는데 그것은 내용이 좋아서 지금도 저희 집에 딱 걸어 놓았지요. 그것은 인의자실( 忍 衣 慈 室 )이라는 내용입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96 탄허스님 글씨는 선필( 仙 筆 )로 유명하지요. 혹시 박정희 대통령이 스님 글씨를 받고서 기분이 좋았다는 것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월정사의 제일 큰 화주를 한 사람이 KAL의 조중훈 회 장입니다.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시고 나서 쓸쓸한 박대통령이 조중훈 회장이 선 물한 스님의 글씨, 진묵대사의 49재 추도문을 보고 기분이 좋았다고 그래요. 대 통령의 심정을 달래주는 것이 쉬운 게 아니지요. 조중훈은 그 선물을 드렸는데 박대통령이 가납을 하였고, 그때 박대통령이 조회장에게 스님에게 좋은 선물 을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하면서 스님을 모시고 인도 성지순례 를 한번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해서 스님의 인도순례가 이루어졌다는 말을 들었어 요. 그래서 KAL에서 모든 준비를 하고, 순례하시는 것을 KBS가 따라가서 찍어 서 그 이듬해 초파일 특집으로 몇 차례 나누어서 내보낸 것이지요. KAL은 냉난 방이 되는 전용차를 준비하는 등 신중하게 스님을 모셨습니다. KBS가 PD를 붙 여서 보내고 촬영을 하였던 것도 KBS 단독으로 결정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전후사정이 있어서 가능하였던 것이지요. 그때 스님이 인도로 가시기 전에, 출발을 앞두고 저희들과 인사동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인도에 가서 쓸 선물을 준비해야 되는 것이 아니 냐고 말씀을 드린 것이 기억납니다. 탄허스님 탄신 100주년을 기리는 행사를 준비 중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입적 몇 주기 하는 행사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 니다. 위대한 인물은 탄신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중국에서도 등소평을 탄신 기 념으로 행사를 하고 있어요. 탄신 100년이 되었으니 탄허스님과 같은 새로운 인 296 물이, 스님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누군가가 탄허스님의 가르침을 이어갈 후예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97 로 사회에서 준비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지금껏 재단에서 탄허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가려고 그래도 노력은 하였지만, 저희 같은 속인들은 한계가 있어요. 재단의 명맥을 유지하였다는 자부심은 있었 지만요. 성철스님의 상좌인 원택스님이 성철스님은 종정도 하셨지만 재단을 만 들지도 못하였다면서, 탄허스님은 입적하신 직후에 그렇게 빨리 만들었다면서 29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부러움을 표한 글을 제가 어디에서 본 적이 있어요. 오늘 증언 감사드립니다. 제가 요즈음 심신이 피곤해서, 저의 기억을 제대로 말씀을 드렸는 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탄허스님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해주시길 바랍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98 스님의 가르침으로 불사를 했어요 대상 박명혜 보문회 회장 역임, 자행회 회장, 탄허불교문화재단 이사 일시 2011년 11월 24일 장소 박명혜 자택 성남, 분당 박회장님은 탄허스님과 인연이 지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선 회장님과 불교와의 인 연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올해 나이가 일흔아홉입니다. 저는 서울이 본거지인데 6 25 때 피난을 갔다 와서 1950년대에 이화여대 영문과를 다녔어요. 그런데 대학교 3학년 1학기를 다니다가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결혼을 해서 친구를 따라서 초 파일에 고무신 신고, 긴 치마를 입고, 미끄런 길을 올라가서 승가사를 구경가게 되었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불교를 전혀 몰랐어요. 그런데 승가사를 가니까 제가 안정감 이 있고, 기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 거기를 슬슬 찾아가게 되었 지요. 그래서 사찰과 스님들을 돕는 불사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그런 일을 하다 298 보니, 저는 힘은 부족해도 그런 일을 이끌어 나가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299 그리고 그런 일이 재미가 있더라구요. 그랬군요. 그러면 승가사를 도운 일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세요. 제가 승가사를 도운 것이 근 40년 이상이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부처님 법도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를 내세우지 않고, 표나지 않게 했 29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어요. 그래서 승가사에 1년 먹을 소금, 콩, 절에 쓰이는 그릇 등을 사서 드렸어요. 큰돈은 아니었지만 그런 일을 하기 시작했지요. 그러자 차차 소문이 나면서 스님 들에게 인정을 받았어요. 그러니깐 나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내가 주관해서 기도를 하면 영험하다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면 대학입학 기도를 할 때에 저는 스님에게 정성으로 축원을 해 달라고 부탁 하고, 매달 일정액을 기도드리는 신도들의 돈을 모아서 목돈을 드렸어요. 또 기 도비가 없는 신도들에게는 불전 공양미만 내고서 기도 동참을 하도록 했어요. 그리고 기도 효험, 가피를 받으면 그때에 가서 기도비를 갚는다는 마음으로 불 사에 참여하게 했어요. 또 제 자신은 개인 기도할 것이 너무 많아서 내가 편하게 그저 효도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달라고만 하였지요. 이런 마음을 갖고 시작했 고, 기도를 하면 제 자신이 남보다 두 시간 먼저 일어나서 우리 회원들의 축원을 해주었어요. 이렇게 하였더니 그해에 제가 주관한 기도에 참가한 신도들의 자녀가 다 패스 를 했어요. 그래서 난리가 났지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하니 다 성취되는구나 하 는 것을 느끼게 되었죠. 부처님을 바로 믿으면 이렇게 가피를 주는구나, 부처님 은 저에게 자신감을 주도록 하였구나, 부처님에게 몰입할 수 있도록 힘을 준 것 같다고 느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전생법인 것 같아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300 그런 결과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요? 그러자 제가 주관하는 모임에 신도들이 50여 명이었는데, 200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왔어요. 사람들이 박회장이 하는 기도에 가면 모두 성취한다 고 하면서 몰려든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모태가 되어서 보문회라는 단체가 되 었어요. 보문회는 1979년에 만들어졌는데, 제가 그 회장을 20년을 하였지요. 그런 일을 하면서 큰스님들과의 인연도 있었겠지요. 그럼요. 처음에는 선학원에 계시던 대의스님과 인연이 되었어요. 친구를 따라서 정월기도를 하기 위해 선학원을 갔더니 대의스님께서 저에게 절 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 대도심( 大 道 心 )이라는 이름을 붓글씨로 써주셨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대의스님이 권유하는 책 불사도 하였어요. 그런데 제 꿈에 책 불 사하는 꿈을 꾸었더니, 대의스님이 책 불사를 권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래 저는 대의스님에게 잘 해보겠습니다 하고, 그것을 원만하게 마쳤지요. 본래 보문회가 만들어진 곳이 보문사였습니다. 보문사에서 기도를 해서 영험 하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죠. 그때 보문사 부전스님이 참 기도를 잘했어요. 보 문사에서 3천 배 기도할 때에 저는 인등을 2박 3일간 지키고, 아침에는 마당도 청소하고 정성으로 기도를 하였더니, 그 바람에 지금 말한 것처럼 축원해준 학 생들이 올 패스를 하였어요. 그때에 칠보가 가득한 파란 상자를 본 꿈을 꾸었는 데, 그 내용을 성수스님에게 이야기했어요. 그때 보문사 주지스님이 성수스님이 었어요. 그래서 우선 보문사부터 불사 외호를 하였지요. 그때 성수스님이 요사 채 불사를 시작할 때인데 우리가 이부자리, 베개 등 공사비의 10분의 1은 했어 요. 그래서 성수스님이 보문회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그러면서 전국 사찰 에 불사 외호를 엄청 했어요. 그러나 저는 그런 일을 부처님 이름으로 하였지요. 300 전국적인 불사를 했어요. 보문회처럼 전국적으로 한 단체도 없을 것입니다. 보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29

301 문회에서는 1년에 월정사, 보리암, 구룡사, 제천 대각사, 보문사, 승가사에는 꼭 기도하러 갔습니다. 보문회는 모금한 돈을 알차게, 잘 쓰고 그랬어요. 그러면 탄허스님과는 어떻게 인연이 되어서, 많은 후원을 하게 되었는가요? 그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불사를 돕다가, 오대산 상원사의 기와 불 사를 보문회에서 했어요. 또 종 불사 2천만 원도 우리가 했어요. 그때 돈 2천 만 30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원은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그리고 보궁의 영안수 불사, 중대의 우물 불사도 보 문회 단독으로 한 것입니다. 또 치악산 구룡사에도 탑 불사를 했고, 천 불( 千 佛 ) 중 700구 불사, 그리고 방석과 괘불도 불사했어요. 그렇게 하자 탄허스님께서 불사가 끝나고 상원사에서 우리 보문회원들에게 법문을 해주셨어요. 탄허스님 이 우리 단체에게 1978년에 처음으로 해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탄허스님의 말씀을 처음으로 들으니까 저는 뭐가 막! 터질 것 같은 기 분이 들었어요. 저는 스님을 만나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알아보니 스님이 개운사 대원암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그래서 대원암으로 스님을 찾 아가서 친견을 하였어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저를 굉장히 반갑게 맞이해 주셨어 요. 그때부터 스님을 보필하기 시작하였지요. 대원암에는 비구니 스님들의 기숙 사가 있었어요. 그래서 내 생각으로는 우선 비구니 스님들을 잘 해줘야 스님을 보필할 수 있겠구나 여기고 구공탄, 피아노, 냉장고 등을 보시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제가 스님에게 간청을 해서 한 달에 한 번씩 보문회원들에게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운문사에 갔을 때 스님께서 저를 찾는다는 연락이 왔어요. 그래 저는 속으로 스님께서 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구나 여기면서 스님을 찾아갔지요. 갔더니만 스님께서 저를 보고는 원력보살이 왔다고 하시면 서 그렇게 너무 좋아하셨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02 보문회 회장으로 많은 불사 외호를 하시는 것에 대해서 탄허스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이 없 었는가요? 제가 대원암에 갔을 때에, 스님은 저에게 허공을 무서운 줄을 알 라 고 그러셨어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 저는 허공이 허공이지 뭘 무서워 해? 그랬어요. 그런데 차츰 스님 말씀의 뜻을 알아듣게 되었지요. 스님의 말씀 은 모든 일은 준비를 해야 하고, 온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아야 하며, 노력을 해 야 한다는 것으로 알아들었어요. 이렇게 알아들은 것은 스님이 입적하시기 직전 에 가서야 알아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스님은 저에게 비가 내려도 그 지방의 심성에 따라서 비가 오기도 하 고, 비가 안 오기도 한다 는 말씀도 하셨어요. 달동네에 가면 아침 화장실이 왁 자지껄하지만, 부자 동네에는 아침이 되어도 특별한 일이 안 일어나는 것과 같 다고 했어요.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마음을 잘 써야 된다고 하시면서, 너희들은 사 하라 사막에 가도 환히 비추는 길을 가게 될 것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암흑에 휩 싸인 것처럼 꼼짝 못하게 된다고 하셨어요. 스님의 말씀을 듣고, 불사를 해서 절 과 스님들을 도와서 그런지 제가 하는 일이면 뭐든지 길이 잘 열렸어요. 그래 저 는 짐작으로 어렴풋하게 내가 남에게 잘하니, 이렇게 되는구나 하고 여겼지요. 탄허스님은 학승, 강백의 이미지가 강하신 큰스님이신데 그런 기도, 불사에 대한 말씀을 들으니까 흥미롭습니다. 스님은 제가 하는 불사는 불비보시( 不 費 布 施 )라고 하셨어요. 이것은 제가 비용을 부담하지 않는 보시라는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대통령이 장관들에 게 이런 것을 하면 좋다고 말하면 장관들이 알아서, 꼼짝 못하고 일을 집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제가 회원들에게 보시를 하자고 마음을 내서 말하면, 회 302 원들이 알아서 돈을 내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저는 비용을 들이지 않고 보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03 시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스님이 하시는 말씀을 느낍니다. 제가 그 당시에 아침이 되면 누가 제 어 깨를 주무르는 느낌을 받았아요. 그러면 어깨가 뜨듯해지는 것 같은데, 그것은 저를 옹호하는 신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장이 저를 옹호하는 느낌을 받았어 요. 신장들이 오늘 대도심에게 돈을 갖다 주어야지 그렇게 회원들에게 말을 한 30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다고 탄허스님이 말했어요. 신장들이 회원들을 독려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 기는 들어도 좋잖아요. 이렇게 저는 스님에게 기도와 영험 이야기를 들었어요. 회장님과 탄허스님과의 인연이 보통이 아니군요. 하루는 스님이 날 데리고 초당 여사에게 데리고 가더라구요. 초당 여사는 날 보더니 사주를 보고 나서는 스님에게 복이 있고, 영감이 박사이고, 아들이 셋이나 있고 그러니 스님의 막내 딸로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요. 이를테면 스님의 마지막 상좌의 의미로 말한 것이지요. 그렇게 탄허스님과 가까워지시면서 많은 외호를 하셨지요. 그럼요. 저는 스님을 아버님처럼 여기면서 따르고 그랬어요. 그리 고 저는 어린아이처럼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그랬지요. 스님은 저를 보면 보문 회장으로 부르지 않고, 항상 바보보살, 못난이 대도심이라고 부르면서 불교를 포함한 모든 것을 잘 가르쳐 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허물없이 묻기도 하고 그랬 지요. 대원암에서는 스님은 왜 절이 없으세요, 스님은 월정사같이 좋은 곳을 두 고 오막살이 같은 학하리 거기에 계세요? 라고 하였지요. 그러면 스님은 다 그 럴 만한 이유가 있다 고 하셨지요. 그 이유에 대해서 스님은 추후에는 인재난이 오는데, 그것을 대비해서 학하리에 인재를 키우는 거점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랬 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04 하여간에 저는 스님을 가까이 모시면서 학하리(자광사) 불사를 참 많이 했어요. 100인이 밥을 먹을 수 있는 대접, 방석 천 개, 냉장고 등 그곳의 생활에 필요한 일체의 것을 다 준비했어요. 그때 저는 스님을 도와드리고자 대전에다가 조그만 아파트 하나를 마련하고, 학하리에 왔다갔다 하려고도 했어요.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요. 그래서 저는 학하리 스님 방 옆에 있는 방을 하나 얻어서, 거기에 살 작정으로 저의 살림 일체를 갖다놓고 그랬습니다. 스님에게 종신으로 마음을 바치겠다고 그랬어요. 그 무렵 스님은 저를 바보보살, 원력보살이라고 하시면서 무척 좋아하였지요. 그런데 제가 그렇게 하는 것을 두고 남자들은 은근히 싫어 했어요. 그것이 저는 섭섭해요. 대전 학하리에다가 탄허스님은 동양학을 아는 인재를 양성하는 총본부를 만들려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일을 아는 것이 있으면 들려주세요. 스님은 그런 말씀을 많이 했어요. 스님은 서울은 김빠진 맥주와 같 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학하리는 안산( 案 山 )이 있고, 거북형이고, 낮은 산으로 둘 러싸인 아늑한 명당자리이고 좋은 땅이라고 하셨지요. 다만 물이 흐르는 강이 없는 것이 나쁜 조건이라고 하셨어요. 그러시면서 학하리에 1층은 법당, 2층은 연구실, 3층은 스님과 공부하는 사람들의 처소가 들어가는 건물을 만들려고 하 셨습니다. 인재를 키우는 도량이 되어야 한다고 그랬어요. 스님은 공부를 좋아 해서, 공부하는 대학생들을 좋아하셨어요. 그런데 스님의 구상대로 3층 집을 짓자면 그때 돈 1억이 든다고 했어요. 그때 돈 1억이면 지금 돈으로는 100억 정도 될 것입니다. 하여간에 그런 불사였습니 다. 그래서 저는 스님에게 절을 짓는 데 빚을 지는 것은 싫으니, 우리 보문회에 서 5천만 원을 하는 것은 약속을 하지만, 나머지는 스님의 복력으로 하십시오 304 그랬어요. 그래서 저는 회원들에게 권유를 해서 10개월에 6,643만 원을 모았습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05 니다. 그때가 1982년 무렵일 것입니다. 그런데 스님은 불사를 할 때에 스님께 서 돈을 내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어요. 그래 제가 스님에게 스님께서 한 말씀 을 해주셔야 잘 됩니다 하여도 스님은 그런 것은 스스로 해야지, 내가 내라고 하면 본 뜻에서 어긋난다 고 하셨어요. 그래서 불사를 하기 힘들었어요. 아마 스 님은 말빚을 지기 싫어하신 것 같았어요. 30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그때 김소호라는 사주를 잘 보는 사람이 스님 주위에 있었어요. 그 사람이 그 때 영감이 있어서 사람들의 심정을 울렸어요. 그래서 스님이 돈을 모을 때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아요. 스님은 저에게도 그 사람을 소개시켜 주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만나보라고 하셨지요. 그렇지만 스님이 아프시고, 병원에 입원하신 후에 열반하셔서 그 불사는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입적하시면 인 도에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하셨어요. 대단한 모금으로 탄허스님을 도우려고 하였군요. 모금한 재원은 어디로 갔는가요? 그것은 스님이 열반하시고 나서, 탄허재단의 설립 자금으로 들어 갔지요. 스님이 아프시니까 인재양성 거점을 만드는 것이 추진될 수 없었어요. 스님이 아프실 때에 한양대병원에 가 뵈니 스님께서 저를 강철보살이라고 그러 시더라구요. 스님이 제가 약속을 잘 지키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본 것으로 알아 들었지요. 그리고 스님이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저는 방산굴에 가서 스님에게 제가 약속한 것은 약속대로 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때에 우리가 모금한 돈은 탄허스님의 재단을 만드는 데 들어갔습니다. 그랬군요. 그 과정을 이번 기회에 자세하게 들려주세요. 탄허스님 재단 설립자금으로 보문회 돈 5천만 원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초당이 천만 원을 냈지요. 이것을 확실한 역사이고, 진실입니다. 이런 것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06 이 지금까지 잘 밝혀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재단 설립비로 내고 남은 돈(1600만)은 스님의 열반 뒷처리 비용으로도 썼습니다. 스님이 돌아가시자 버스 몇 대를 대절해서 서울에서 월정사까지 문상 객을 실어 날랐지요. 또 월정사 입구에 식당을 예약해서 문상을 오는 사람들에 게 공양을 내기도 하였지요. 열반 이전에도 보문회는 오대산에 정월기도를 가서 쌀 열 가마를 매년 댔어요. 이것이 역사입니다. 그 시절에는 세상도 살기 어려 웠고, 월정사도 살기 어려웠을 때입니다. 또 열반 비용으로 남은 것을 굴려서 동 국대에 장학금으로 내 놓았지요. 그것이 송석구 총장 때에는 그 결과를 알려주 고 그랬어요. 장학자본금이 5천만 원까지 늘었어요. 회장님은 이번에 조계종에서 주는 포교상(원력상)을 받았지요. 수상할 때 탄허스님의 생각 이 나지 않았는가요? 저는 이번에 불교여성개발원이 추천을 해 줘서 상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감격스럽지요. 불자들이 어느 한 사찰에 불사를 하는 경우는 많지만, 우 리 보문회처럼 전국적인 불사를 한 경우는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에 상을 받은 것이 감사할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탄허재단으 로부터 보문회에 대한 것이 제대로 인정 못 받고 그러는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 다. 탄허재단은 보문회가 설립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보문회가 있음으로 해 서 재단이 된 것입니다. 불사를 하면서 상( 相 )을 내는 것 같긴 하지만 이번 기회 에 탄허재단으로부터 보문회의 공적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사실입니 다. 재단이 보문회에 고마운 마음을 살려주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그럽니다. 그런 헌신, 불사의 외호는 역사에 반드시 기록되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306 제가 그런 불사를 하게 된 것에는 저만의 소신이 있었습니다. 그것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07 을 지난번 어느 기자에게도 말했더니 재미가 있다면서 신문에 소개한 적도 있어 요. 그것이 뭐냐 하면, 무통장입금 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통장에 돈을 입금하고, 얼마 후에는 통장에 10만 원이 남았다, 얼마가 남았다는 것을 알지요. 그런데 저의 통장은 보이지 않는 통장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제 통장에 얼마가 있는지를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통장을 보지는 못하지만 계속해서 30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그 통장에 복을 집어 넣는다는 것이지요. 즉 지속적으로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저 자신을 위해, 제 미래를 위해 복을 짓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의 무통장은 살 아 있지 않겠나는 심정으로 헌신했어요. 늘, 입금을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불사 외호를 했어요. 그리고 제가 이런 일을 할 때에 저를 지극한 정성으로 도와준 장 경숙 보살님을 꼭 말하고 싶어요. 이 보살님은 제 모금활동에 기둥 역할을 해주 셨고, 모금이 모자라면 늘상 채워주신 어른이었어요. 이 분의 헌신을 강조하고 싶네요. 저는 그런 심정으로 저의 생을 희망으로 만들며 살아왔어요. 이런 것을 저는 느끼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탄허스님에게 들은 것은 이젠 늙어서 생각이 잘 안 나요. 그렇지만 제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탄허스님을 친견하면서 얻 은 지혜에서 나온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회원들에게 모금을 할 때에 말을 탁 던 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공(말)을 회원들에게 던졌을 때 회원들이 그 공을 받는 자 세를 보고서 돈을 낼 것인가 안 낼 것인가를 가려서 진행했어요. 스님에게 받은 유묵은 없는가요? 저는 지금은 스님에게 받은 병풍 한 점은 보관하고 있어요. 제가 학하리 시절 회원들에게 모금을 할 때에 300만 원 이상을 내는 회원들에게는 스 님의 글씨를 하나씩 준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스님에게 가서 글씨 몇 점을 써 달 라고 하였지요. 그렇지만 저는 한 점도 안 갖고 그 일을 하였지요. 회장인 내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08 갖는 것은 욕심이라고 보고, 남을 먼저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았어요. 그랬더 니 스님께서 저에게도 제 남편의 이름으로 하나 써 주시면서, 이제는 다시는 안 쓴다고 하셨지요. 자광사에서 받았지요. 참 그 무렵에 스님은 절보고 보증수표 라고 했어요. 딱! 보증수표와 같다 고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나요. 탄허스님과 연관된 자료, 사진은 없는가요? 그것이 있었는데 제가 나이가 많다 보니 죽음을 대비해서 정리하 고 있어요. 그래서 스님에게 받은 염주, 부처님을 김동건 변호사에게 주었어요. 그리고 갖고 있던 사진, 불사 내역의 장부, 스님을 모실 때에 제가 쓴 일기 등을 자광사 청아스님에게 컴퓨터에 입력하라고 주었어요. 대의스님에게 받은 계첩 은 찾으면 나올 것입니다. 탄허스님을 어떤 분으로 보시나요? 스님은 너무 훌륭해요. 고승이고, 큰스님이시지만 우리 스님은 인 간미가 있고 평범해 보이면서도 따뜻했어요. 그러나 아주 냉철하십니다. 저에게 는 바보 왔구나 그러셨어요. 스님의 상좌들은 멍충이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저 는 바보 소리를 여러 번 들었어요. 회장님은 지금은 장애인을 돕는 역할을 많이 하지요? 그래요. 저는 장애인을 돕는 자행회 회장을 7년째 하고 있는데요. 그런 공로로 최근에는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그 전에는 장애인을 소홀하게 대 하였는데, 요즈음 장애인들을 후원하다 보니, 교육의 효과를 지켜보면서 장애인 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람도 갖고 있어요. 308 저의 마지막 생의 마무리를 이렇게 아름답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을 행복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09 게 느끼고 있어요. 남을 후원하고 돕는 생활이 너무 고마워요. 저는 오늘 최선 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지냅니다. 이번에 받은 포교상의 상금도 자혜학교, 청년 여성개발원, 자행회에 나누어서 기부했지요. 오늘 귀한 증언 감사드립니다. 30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제가 마음에 담아 둔 것을 속이 시원하게 이야기하니 정말 기분 좋 습니다. 추위에 고생하시는데, 좋은 책을 만들어 주세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10 유불선을 회통한 사상가 대상 장화수 고려대 졸업, 국방대학원 중앙대 교수 역임, 중앙대 명예교수 일시 2011년 8월 9일 장소 장화수 교수 자택 교수님은 일찍이 15년 전에 탄허스님과의 대담을 담은 21세기 대사상 이라는 저서를 펴 냈습니다. 스님과의 인연의 실마리를 풀어 주세요. 내가 탄허스님과 인연을 맺은 장소는 1973년 무렵 개운사의 대원 암입니다. 인연이 되어서 스님을 찾아뵈면 나를 잡고는 안 놔줘요. 탄허스님은 마의상법에 능하셨고, 나도 그 무렵에 명리학, 사주, 미래학 등에 관심이 많아 서 스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교수님은 경제학을 공부한 학자이신데 어떻게 해서 젊은 시절에 그런 분야에 관심이 많았 310 나요? 나는 원래 초등학교 시절에는 웅변을 잘했어요. 8 15해방 되던 해 9월 3일에 학교에 들어갔는데, 한글을 다 떼고 갔지요. 그때 미군의 전단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11 외우고 다녔어요. 그러면 내 아버지가 잘한다고 하시면서 시골의 면사무소, 우 체국, 한전 같은 곳에 데리고 다니면서 웅변을 하라고 시켰지요. 그래서 학예회 에서도 송사, 답사 같은 것을 도맡아 하였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는 플루타 크 영웅전을 보면서 역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중학교에 가서도 그랬고, 전주고 등학교에 가서도 역사는 늘 1등이었지요. 우리 집안의 7남매는 다 박사예요. 이 31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런 분위기 속에서 자랐는데 형의 친구들하고 외교사, 사회사상 문제를 대화하면 내가 앞서기도 했지요. 학생 시절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군요. 그렇지요.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갑자기 고민이 오더라 구요. 세상이 무엇인지, 생로병사가 왜 오는지,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 커서는 무엇이 될까 이런 것들을 궁리하였어요. 공부는 안 하고,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싫어지고 그런 것을 고민한 것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신들린 거예요. 그때에 6개 월간 대인공포증도 생기고 그래서 책을 많이 보았는데, 그때에 레닌의 사회사상 을 최고로 쳤지요. 사상가, 영웅으로서 국가건설을 한 것으로는 레닌을 최고로 본 것이지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뭔가 탁! 트이는 듯한 환희, 감격 같은 것을 느꼈어요. 세상이 다 내것으로 보이더라구요. 그로부터는 나는 만족하고, 득의 한 기분으로 지냈어요. 그런데 고3 때에는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두 번이나 하였는데, 그 당시에 수술에서 깨어날 때에 슬프고, 허무한 것을 많이 느꼈지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역사와 사회과학에 달통을 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대학에 가서도 그랬나요? 나는 1959년도에 고려대 경제과에 입학했는데 공부는 경제사 분 야를 주로 했어요. 그러다가 1960년 4 19 때에는 데모에 앞장섰지요. 난 대학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12 에 들어오기 이전에 당수, 공수도를 해서 유단자였는데 4 18과 4 19 때에 내 가 고대생들을 이끌고 데모 일선에 있었어요. 내가 대의원이었고, 문무를 겸해 서 나와 관련된 우리 고대생들은 죽은 사람이 없었어요. 그때 AP통신이 찍은 4 19 당시 사진에 내가 나와요. 그후에 나는 민족통일연구회에 가입해서 진보 쪽 노선에서 활동했어요. 그러다가 7 27선거 직후부터는 다시 세상이 싫어졌어요. 그래 학교는 대충 가고 하숙집에 딩굴면서 갖은 고민을 했어요. 두 번째 병이 도진 것이지요. 이 런 것을 서양에서는 정신적인 위기라고 하더군요. 하여간 나는 허무상태가 되었 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고등학교 때에 은사인 한양대 차재철 교수를 찾아갔어 요. 그랬더니 그 교수님께서 자기도 그런 것을 겪었다면서 날보고 너 일본책을 봐라 그래요. 그 선생님은 나에게 유명한 책을 적어 주었어요. 나는 차선생이 적어 준 자본론, 유물론 등 그 당시에는 불온서적으로 분류되던 맑스 레닌의 책 을 구해서 읽다가 한순간 찰나에 머리가 터지고, 환희심이 나게 되었어요. 대학원에 들어와서는 경제사상사를 주로 공부하면서 이 분야를 달통했어요. 그러면서 나는 그 시절에 고민을 하면서 기독교의 원죄, 맑시즘에서 말하는 사 유재산이 문제라는 것을 파악했어요. 그러면서 그 무렵부터 미래학, 사주명리 학, 주역, 통일 문제 등에 대한 많은 책을 읽고 고민과 사색을 하였지요. 바로 이 때에 시국, 국운에 대해서도 연구를 했어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언제 처음으로 탄허스님을 만났는가요? 내가 스님을 만난 것은 1973년도 9월이지만, 그 전에 대학을 다닐 때에는 유명한 스님이라는 정도의 말은 들었어요. 내가 대학 4학년 때에 한미협 정을 반대하는 6 6데모를 주동했어요. 그때에 사조연우회의 지도교수인 정재 312 각 선생은 나에게 공부나 하라면서 자중을 하라고 그랬지요. 그런데 정재각, 불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13 교학생회 지도교수였던 손명현, 김영두, 노장철학의 대가인 김경탁 교수 등 20 여 명이 탄허스님에게 장자 강의를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것이 내가 대 학원에 다닐 때이지요. 그리고 나는 석사과정에서 자본론을 갖고 논문을 썼어 요. 이는 사상사로 자본론을 쓴 것인데, 내가 처음이었어요. 그러나 그 시절 나는 탄허스님에게는 감히 접근할 수는 없었고 교수님들로부 31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터 유불선에 통달하고, 총기가 대단하여 경을 다 외우고, 운허스님과 쌍벽을 이 루는 위대한 스님이고 대단한 양반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러다가 내가 고대 강의를 나오면서 무역협회의 조사위원으로 있을 적으로 기억하는데, 대학의 경 영학과 후배로 울진 출신인데, 불교학생회 회장을 한 사람이 탄허스님을 만나러 간다고 해서 나도 따라간 것이었지요. 첫인상이 어떠하였는가요? 같이 간 사람들하고 큰절을 올리고 나서 스님을 뵈니 인상이 특이 했어요. 달마스님처럼 장대한 둥근 몸에 서기가 어린 눈빛이 나시더라구요. 그 때에 내가 스님에게 인생이, 사는 것이 뭐냐고 질문을 한 것 같아요. 그랬더니 스님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갖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시면서 차안( 此 岸 )의 세 계와 피안( 彼 岸 )의 세계(극락, 내생)를 갖고 그 실마리를 푸시면서 화엄경 세계에 들 어오기만 하면 인간으로서 도통할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세계가 있고, 그런 사 람들은 삼라만상을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다고 그러셨어요. 인간의 카테고리에 서도 해탈할 수 있다고 말씀하셔서 나는 아! 하고 감응했지요. 그 후에 탄허스님을 뵈었을 때에 내가 스님에게 주역과 정역의 원리를 갖고 그해(1973)의 시운과 다가올 시운(1974~1976)을 내 나름으로 본 견지를 말씀드렸지 요. 그러면서 스님은 어떻게 보시냐고 하였더니 스님은 천기누설을 한다면서 나 를 꾸짖으면서도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내가 당돌하게 질문을 잘 하거든요. 그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14 날은 한 서너 시간을 이야기한 것 같아요. 같이 간 친구들은 내가 스님과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니까 입을 뻥긋도 못하고 신기하게 경청하기만 하였지요. 그 이들은 오직 스님에게 글씨를 받으려고 기다렸어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교수님이 탄허스님과 미래 예측을 한 대화를 하시고, 그 내용이 1975 년에 출간된 책인 동아시아의 도전 에 포함된 전후사정이 궁금합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에 6 6데모를 주동한 다섯 사람의 하나예요. 이 데모를 이끈 단체가 사조연우회였는데 그때 나하고 같이 주축을 이룬 사람이 손주환과 정재원이었어요. 정재원은 고대 정외과 출신으로 그 후에는 김영삼의 신민당 대변인을 거쳐서 천안에서 국회의원을 두 번 하였어요. 그때 이 친구가 할 일이 없으니 나를 찾아왔어요. 할 일이 없어 무역이나 하겠다고 그랬는데 먹 고 살기 위해서 만든 것이 물결이라는 출판사지요. 광화문에 사무실을 두었는 데, 사무실에 내 자리도 마련해 놨다고 하였지만 나는 그곳에 가보지도 않았어요. 지금 말씀하신 사조연우회는 무슨 단체입니까? 그 단체는 일종의 사상서클이지요. 6 25가 난 직후에 서울대와 고려대에서 평화통일을 주장한 단체로 서울대에는 신진회가 있었고, 고려대에 는 협진회가 있었어요. 서울대에는 유근일과 김근호가 주동이고, 고려대는 김낙 중이 주동이었지요. 그런데 김낙중이 평양을 갔다오고 그래서 해체되었어요. 그 러다가 1959년에 나와 손주환이 주축이 되어 고려대 협진회의 전통을 이어서 새로 만든 것이 사조( 思 潮 )연우회이지요. 서울대에는 민족주의비교연구회가 나타 나서 그 전통을 이었고요. 314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15 그러면 탄허스님을 만나서 본격적인 대화를 한 것은요? 그런데 1974년 봄의 어느 날 정재원 이 친구가 느닷없이 찾아와서 는 차를 타고, 탄허스님에게 같이 가자는 것이었어요. 내가 스님과 친한 걸 아 니깐 그랬는데, 그때에 김중위가 따라왔어요. 그러니깐 정재원은 녹음기를 놓고 탄허스님과 대담하라고 그러고, 김중위는 자기가 인터뷰를 한다고 작심을 하고 31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온 거예요. 김중위가 스님에게 저 스님 우리 한국의 장래는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어요. 탄허스님이 볼 때에, 이 친구들이 천둥벌거숭이처럼 갑자기 이야기를 하라고 그러니까 스님이 이야기를 할 수 없잖아요. 그러자 스님은 골치가 아프다고 하 시면서 돌아서 외면해 버렸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요? 할 수 없이 내가 나섰지요. 내가 주역, 정역, 지리상학적인 상식을 갖고 스님에게 질문을 하였지요. 한국이 정역으로 보면 간방( 艮 方 ) 국이라는 것과 미국을 비롯한 국제정세를 갖고 여쭈니 스님의 답변이 슬슬 풀어져 나온 거지 요. 그렇게 실마리를 내가 풀었어요. 그때 내가 국방대학원 교수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그렇게 해서 나온 녹음 테이프를 내가 가져가서 풀었어요. 그래서 나온 책이 동아시아의 도전 이 었는데, 그 안에 탄허스님과 나와의 대담이 들어간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책이 나왔을 터인데, 그것을 탄허스님에 갖다 드렸겠지요. 이렇게 책이 나와서, 나는 책을 두 권 가지고 대원암으로 갔지요. 가서는 고대 출신인 최옥화(일초)를 불러내서 한 권은 옥화를 주고, 또 한 권은 스 님의 기분이 좋을 때에 드리라고 그랬어요. 스님에게 혼날까 봐, 스님이 무서워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16 서요. 그리고 나는 돌아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옥화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스 님이 바로 보자구 그래서, 나는 차를 몰고 갔지요. 가면서 스님에게 무슨 청천 벽력의 소리가 나올까 하면서 몹시 긴장하고, 두근두근 하였어요. 그러면서 스 님을 찾아갔는데, 스님은 뜻밖에도 책의 내용이 아주 좋다고 하셨어요. 기분이 무척 좋으셨어요. 스님은 스님 주위에 사람이 많지만, 이렇게 자신의 뜻을 잘 정 리한 놈이 없었는데, 내 뜻 이상으로 깊이 만들었다고 하면서 칭찬을 해 주셨어 요. 그 책이 엄청 팔리고 그래서 사람들이 스님의 존재와 실력을 잘 알게 되었지 요. 그래서 선우휘가 반한 거예요, 특히 정치인들이 스님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아주 흥미로운 회고입니다. 교수님의 저서에는 탄허스님이 환갑날에 도회지에 나가 거사 불교를 본격적으로 하겠다고 부처님에게 고하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 말을 들었나 요? 물론이지요. 그 말은 스님이 여러 번 했어요. 스님이 환갑(1973)날 에 부처님에게 고하고, 속세에 나가보겠습니다 고 하셨다고 그랬어요. 그러시 면서 앞으로는 부처님에게 공양도 못 올리고, 만행을 하겠습니다 고 하였다고 나에게 말씀했어요. 그렇게 부처님께 고하고 도회지로 나온 거예요. 한암스님에 대해서 들은 것은 없었나요? 스님은 한암스님과 수차례 편지를 했다고 하셨어요. 2년간 편지를 하다가 상원사에 가서 머리를 깎았다고 그랬어요. 그 전에는 차경석의 보천교에 서 열두 살까지 있다가 최익현 계열의 이극종에게 가서 유학을 배웠고 한암스님 을 찾아서는 불교를 배운 것이지요. 한암스님의 밑에는 제자가 다섯이 있었는 316 데, 셋은 어디로 가고 스님과 일본에 있었던 난암스님만이 남아 있었다고 했어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17 요. 그중 한 스님은 묘향산으로 들어갔는데, 이 스님이 법력이 높았다고 하였어 요. 난암스님은 일제 때부터 사회주의에 물이 들었는데, 스님이 일본을 거쳐 대 만을 갈 때에 일본에서 만났다고 그러지요. 난암스님이 대정신수대장경 한 질을 주어서 받았다고 그래요. 그때에 우리 정보부에서 난암스님을 회유하려고 그랬 대요. 그리고 그 당시 일본의 사또 수상이 스님의 12폭 병풍을 당시 돈 300만 31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에 구해 갔다는 말도 들었어요. 거사불교의 육성과 대전 학하리의 관계는 어떻게 된 것인가요? 스님은 불법승 삼보 중에서 승보( 僧 寶 )의 문제점을 많이 지적했어 요. 심지어는 승보가 없다고도 하셨어요. 비구 스님들은 공부를 하지 않고, 여 차하면 환속을 하고 그랬대요. 이런 상황에서는 불교가 중흥, 발전되지 않는다 고 그러셨어요. 스님은 당시 스님들이 공부를 안 하는 것을 개탄했어요. 그러시면서 기존 승보 갖고는 안 되겠다고 하시면서, 유발승과 처사들을 모아 서 거사불교로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바로 거사불교의 중심으로 학하리 터를 잡으신 것이지요. 내가 알기로는 스님이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전국을 여 덟 차례나 돌았는데, 마침내 학하리 터를 잡았다고 그래요. 그 터를 잡는 데 공 을 들인 사람이 해운거사라는 사람이에요. 학하리를 거사불교의 성지로, 새종교 운동의 본부로 만들려고 하신 것이지요. 스님은 날보고 거사불교를 키워서, 그 조직을 한손에 잡고 흔들어야 한다고 그 러셨어요. 전국적인 조직을 움직일 사람이 필요했어요. 이를테면 몇십만의 신도 들 중심의 새종교운동을 생각하신 것이지요. 이런 운동의 총본부를 만들기 위해 학하리를 마련한 것이에요. 그런데 나는 행동력이 약하니깐 이세기를 불러오라 고 하더라구요. 이세기는 4 18 때에 고대 학생회장을 해서 나하고 친했어요. 그런데 그때에 반혁명 사건으로 피해를 보고 고대 총장인 김상협 비서도 그만두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18 고서는 다시는 정치, 사회운동을 안 하겠다고 그랬어요. 내가 가서 탄허스님의 말을 전했더니 자기는 사회운동을 하고 싶지 않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깐 스님 은 내가 문무( 文 武 )를 겸하고 스님과 친하니깐, 나에게 기대를 했어요. 내가 스님 이 하시는 일의 총무 겸 사무총장으로서 모든 일을 하라고 그러셨지요. 그런데 그 무렵에 나는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되어서, 유학을 갔다 와서 나서려고 그랬어 요. 그렇지만 귀국 후에 바쁘다 보니, 스님과 연결이 안 되고 바로 이어서 박정 희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정국이 급변하고 그랬어요. 나는 그 시절에 한다고 하 면 나설 마음이 있었지요. 탄허스님은 만해 한용운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는 말을 들었어요. 이런 점과 관련한 것을 들으신 것이 있나요? 스님은 한용운에 대해서도 많은 말을 하셨어요. 한용운스님은 힘 이 장사고, 일본놈들이 가한 고문을 이겨냈다고 하셨지요. 민족대표 33인의 대 부분은 변절했지만 만해가 변절하지 않은 것, 그것으로 대장부와 영웅이 되었다 고 그랬어요. 그리고 스님은 백용성스님도 뵈었다고 그러셨어요. 탄허스님과 백 용성스님이 다 전라도 출신이잖아요. 탄허스님과 박정희 대통령과의 비사는 없나요? 이번 기회에 그것을 알려주시지요. 스님께서는 국사( 國 師 )의 혜안이 있었습니다. 그때 김성곤의 부인이 육영수 여사의 모친을 통해서 탄허스님을 국사로 모셔야 한다는 말을 해서 그것 이 청와대에 들어갔어요. 그때에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인 지만이가 육사에 들어 갔는데, 육사 교장으로 정승화가 있었어요. 정승화는 군승장교를 통해 탄허스님 의 의견 여러 가지를 전달받았지요. 지만이를 가르치는 것을 포함해서. 그러니 318 군승은 아침저녁으로 스님에게 물으러 와요. 그러면 스님에게 들은 것을 갖고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19 박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올렸어요.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정승화의 보고는 박대 통령에게 반영되지 못했어요. 박정희는 그것을 못 본 거지요. 스님이 돌아가신 지도 30년이 되어 갑니다. 스님의 미래학에 대해서 지금은 어떻게 생각 하시나요? 내가 스님을 만날 때에는 나는 우리나라의 통일문제에만 관심을 가졌어요. 4 19세대여서 그랬지요. 그러다 보니 스님이 말씀하신 미래의 예측 31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안 썼는데,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 보니 스님이 말 씀하신 것이 대부분 맞았어요. 스님이 말씀하신 후천개벽을 믿지도 않았어요. 스님은 후천개벽, 즉 새로운 문명의 질서가 도래하는 과정에서 통일은 부수적으 로, 자동적으로 오는 거라고 하셨어요. 이를테면 한반도가 세계의 중심이 되고, 경천동지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고 보셨어요. 나도 이제는 스님이 말씀하신 지 구 대변동에 관심을 갖고 있고, 스님이 예언한 시기가 임박했다고 봐요. 탄허스님이 말씀한 미래에는 도의적인 인재, 능력 있는 지도자가 나타난다는 것은 어떻게 보십니까? 스님은 어느 시대가 오면 득도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고 했어 요. 내가 보기에 지금 우리나라에 인재는 많아요. 스님은 이런 인재를 발굴해서, 그런 사람을 조직화해서 하나의 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봤어요. 그러나 스님은 조직과 사회과학을 모르셨기에 그런 역할을 나에게 하라고 그러셨지요. 지금 스님은 가셨지만 나는 스님의 뜻을 이어서 옳, 밝, 넋, 앎이라는 네 가지 의 교리를 내세워서 정명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운영해요. 회원은 160여 명이 돼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20 교수님은 스님에게 들은 것, 사상 등을 계승 구현할 생각은 없나요? 나는 탄허스님의 사상을 정리하고, 또 내가 생각하고 있는 여러 내 용을 정리해서 책 네 권으로 내려고 준비해 놓았어요. 내년부터 세상에 변화가 오면 그것을 출판하려고 하지요. 거기에 담긴 골격이라고 할까, 기본사상은 다 음의 세 가지 모순으로 보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이지요. 그것은 우선 유물사관 에서도 말하는 것이지만 사유재산이 정치권력의 씨앗이 되면서 인간을 불행하 게 하였다는 것,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추방되었다는 식의 원죄사상, 또 하나 스님도 말씀하셨지만 지축이 23도 7분이 기울어져서 지 구가 변동되고 그 안에 사는 인간이 굴절되었다는 것을 모순이라고 봤어요. 나 는 이것을 3대 모순으로 보고, 그 근원을 학문적으로 분석하였어요. 그렇지만 스님도 말씀하셨지만 앞으로는 지구가 똑바로 잡히면서 일어나는 후 천개벽의 질서, 천지인( 天 地 人 )이 바로 잡히는 것에 대한 것을 담아 놓았어요. 지 구의 윤도수가 없어지고 지구가 바로 서면 이상세계가 오고, 유토피아가 온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인간들은 화합하고, 부조리의 세계에서 조리가 있는 후천세계 가 온다는 것이지요. 나는 이런 것을 선험적인 교훈으로 유념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입장이에요. 이 를 무시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기후나 환경의 변화, 민주화, 생활 수준 을 높이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인간의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고 봐요. 결론적으로 후천개벽이 오는 것을 설명하고, 그런 질서를 대비하 는 것에 대한 것을 설명하는 책이지요. 나의 철학과 주장은 유불선과 한국 토속 신앙을 결합시킨 것이에요. 그리고 여기에 다시 서양의 사상이 결합, 조화되면 인간의 유토피아가 온다고 봅니다. 이렇게 내가 사상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탄허스님으로 촉발을 받은 것이에요. 거의 절대적인 영향이지요. 320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21 조만간에 교수님의 책을 보고 싶습니다. 오늘 증언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김교수를 만나서 반가웠어요. 요즘 일본 해일이 일어난 후에 는 탄허스님의 관심이 높아지고, 가끔 나에게도 연락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주 연락을 주시고, 이곳에도 또 놀러와요. 내 말이 탄허스님의 전체는 아니고, 내가 보고 들은 한 부분이란 것을 알기 바래요. 탄허스님은 큰스님이고, 유불선 32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을 회통한 사상가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22 종지( 宗 旨 )가 없으면 죽은 학문이지 대상 송찬우 통도사 입산, 선림고경총서 등 30여 권 번역, 중앙승가대 교수 일시 2011년 12월 13일 장소 동현학당 서울, 낙원동 교수님은 탄허스님의 제자로 알려졌습니다. 유년 시절의 한문의 인연 및 불교와의 인연부 터 들려주세요. 저는 고향이 고흥입니다. 제가 태어난 그 시절은 전 사회가 먹고 살기가 어려웠고, 저도 가난한 농군집 출신입니다. 저는 고향에서 시경까지는 읽고, 절에 들어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시골에 한문 서당이 있었어요. 저는 서 당에서 세 철은 다녔고, 그 나머지는 전부 독학을 했습니다. 그 시절의 시골에 서 저는 책을 구할 수가 없어서, 동네에 책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빌려서 늘 나 혼자 봤죠. 시골에는 선생도 없고, 번역본도 없어서 혼자서 자득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천자문을 떼었는데, 자꾸 한문에 관심이 갔어 요. 그때에는 신문을 보는 집이 거의 없었어요. 관에서 보내주는 집인 동네 이 322 장집에 오는 신문을 온 동네에서 돌려가면서 보고 그랬어요. 저는 어린 나이이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23 지만 그 신문을 봤어요. 그 당시 신문은 절반 이상이 한문이지만, 제가 그것을 다 읽었습니다. 그렇게 한문을 공부하다가 중학교를 마치고 나서 집에서 가까운 절인 선암사로 들어갔어요. 그랬군요. 유년 시절부터 한문에 대한 소양이 만만치 않았군요. 32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고향에서 가까운 선암사로 들어갔는데, 그때의 선암사는 비구, 대 처의 분쟁 이후였기에 어수선했어요. 사찰 정화도 안 되었고, 분쟁의 피해가 많 이 남아 있었습니다. 똑똑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나가 버리고, 능력이 없는 노스님만 절에 남아 있었어요. 그러니 절에는 초발심자경문도 가르쳐 줄 스님이 없어요. 그래서 야반도주를 해서 범어사로 갔어요. 그때가 1960년대 후반이었 습니다. 그때 범어사에는 제 은사가 되신 성수스님께서 주지로 계셨습니다. 그런데 성 수스님께서 얼마 안 있다가 주지를 그만두시게 되었습니다. 돌 사건이 표면에 있었지만 문중 차원의 배척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은사스님은 주지를 내놓으시고 통도사 취운암으로 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제 큰 사형이 되신 태응스님과 함 께 취운암으로 갔어요. 그리 가서 저는 월하스님을 계사로, 성수스님을 은사로 해서 정식으로 계를 받고 본격적인 중노릇을 시작했어요. 그때 받은 이름이 보 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탄허스님과 인연이 되었나요? 그렇게 취운암에 있다가 법주사 강원을 가 보았어요. 그러나 도무 지 적성에도 안 맞고, 강원의 수준을 보고 나서는 있을 마음이 들지 않아서 하루 만에 그냥 나와 버렸어요. 그래 초발심자경문을 나 혼자 봤고, 그 이후에는 선 방을 다녀야겠다고 해서 선방에 있었습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24 그러다가 제 나이 스물한 살 때인가 동국대에서 스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 때(1971년 경) 탄허스님께서 동국대 대학선원장으로 계셔서, 1주일에 한 번씩 강 의를 하러 오시더라구요. 근데, 오셔서 강의하실 때에 책은 안 들고 오시고, 분 필 하나만 들고서 유불선 삼교의 원전을 전부 외워서 강의하시는 것을 보았습니 다. 어린 나이에 그런 강의를 처음 보고서는 저는 너무나 놀랐어요. 그래 나는 저런 사람이 다 있구나, 얼마나 공부를 하면 저리 될까를 생각하였어요. 그때부 터 스님은 나의 흠모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 충격을 받으시고, 흠모를 하시게 되었네요.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는가요? 저는 저런 분, 탄허스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려면 사서삼경, 노 장학은 기본으로 되어 있어야 하겠다고 여겼습니다. 시경이라도 읽을 실력이 있 어야 책을 내밀겠다고 보고서는 그때부터 서경, 주역, 예기, 춘추좌씨전, 노장 학 등을 민족문화추진회에 가서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개인적으로도 한문공부 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공부를 하면서, 탄허스님에게 가게 된 것이죠. 어디에서 탄허스님을 만나셨습니까? 개운사 대원암으로 찾아가서 뵙고, 주로 대전 학하리에 가서 배우 고 모시기 시작했어요. 그때 저는 스님을 흠모해서 스님에게 건당하려고 했어 요. 그러나 제가 건강이 나빠져 세속으로 나오게 되어서, 실질적인 건당까지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회에 나와서도 노스님의 옆에서 늘 지냈습니다. 스님은 저를 아껴 주셔서 제가 결혼을 할 때에 주례까지 서주셨어요. 스님은 절 대로 승속의 차별이 없어요. 제 결혼 기념으로 8폭병풍의 글씨도 주셨어요. 그렇게 스님과 특별한 인연이 돼서 받은 이름이 동현( 東 玄 )입니다. 스님은 제가 324 일반인이 되었어도 건당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동현이라는 이름을 주셨는데, 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25 님은 자네는 세간법에 구애되지 않을 것이니 천상 동현으로 해야 하겠다 고 했 어요. 그래 제가 왜 그럽니까 하였더니, 스님은 동쪽나라의 현묘한 도( 道 )를 찾 는 일밖에 더 있겠냐 고 하셨어요. 그 말은 공부할 것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그 러나 오대산 문도들은 거의 몰라요. 32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탄허스님의 유묵은 유명한데요, 결혼 기념으로 병풍까지 써 주셨네요. 노스님(탄허)은 남들이 글씨를 써 달라고 하는 것을 귀찮아하셨습니 다. 글씨를 쓰려면 먹을 제대로 갈아야 하는데, 스님은 먹 가는 시간을 아까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먹을 갈지 않고, 먹물을 사다가 글씨를 쓰셨습니다. 그래서 스님의 유묵은 힘차고 독특한 글씨이지만, 간혹 글씨가 탁하고 묵색이 좋지 않은 것이 그런 이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스님은 화선지 종이도 아 깝다고 하셨습니다. 탄허스님이 종이가 아깝다고 하셨다는 것은 처음 듣는 말입니다. 노스님께서는 화엄경을 번역하실 때에 원고지와 파카 잉크도 부족 하였답니다. 그래서 당신이 번역 원고작업을 하실 때에 찾아온 임도문스님이 뭣이 필요하십니까 물었을 때에도 파카 잉크가 필요하다고 그랬대요. 그래서 임도문스님이 파카 잉크를 열 병을 사왔는데, 스님은 그 잉크를 다 쓰지 않았지 만 화엄경 번역을 끝냈다고 그러시더라구요. 탄허스님도 그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 번역을 하셨군요. 저는 노스님으로부터 일제시대 상원사 시절, 몹시 곤궁하였다는 것도 들었어요. 이종욱스님이 월정사 주지를 30년간이나 하였는데, 그때에 영 암스님은 총무를 20년을 봤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지암스님이 한암스님을 모시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26 고 상원사에 들어올 때에는 본사인 월정사에서 식량을 다 대주기로 하였답니다. 말로는 그렇게 해 놓고서, 실제로는 한 것이 없다고 그랬어요. 어려운 일제시대 에는 월정사에서 식량을 대주지 않아서, 선방 대중들은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고 그래요. 살림을 사는 상원사 원주는 살림을 극도로 아껴야 된다고 했어요. 원주 는 구두쇠 놀부보다 더 아껴서 간장과 기름은 한 병으로 살아야 할 정도였고, 모 든 것을 허비해서는 안 되는 것이 원칙이었답니다. 그래 선방 살림을 보는 원주 가 한 철 잘 살았다고 하는 그 말은 선방 대중이 그만큼 고됐다는 말이지요. 그 때 원주를 보았던 희섭스님은 강릉에서 콩 한 가마를 들고 오대산 상원사까지 걸어왔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간식으로는 감자와 옥수수 그런 것밖에 없어서 탄 허스님은 돈이 생길 일이 없었대요. 탄허스님이 그런 고통을 받았다는 것은 처음 듣습니다. 당시 상원사에서는 누가 일이 있어서 외출을 하면 딱! 왕복 버스의 교통비와 점심값만 준답니다. 그러면 탄허스님은 그것을 아끼기 위해서 상원사 에서 새벽 예불이 끝나면 부지런히 걸어내려오면 오대산 월정사에서 아침을 먹 고, 거기서 도시락을 싸서 부지런히 걸으면 점심 때에 대관령에 도달한답니다. 그래 대관령 꼭대기에서 가져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부지런히 걸어 내려가 면 강릉교당에 도착한답니다. 그때에 거기에는 관응스님이 계시면서 이름을 드 날리고 있을 때인데 두 분이 단짝이었대요. 거기에서 일을 보시고, 관응스님은 풍족하니깐 여비를 보태주면, 부지런히 걸어서 대관령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부지런히 걸으면 월정사에 저녁에 도착한답니다. 당시 지암스님은 서울에 가서 숫제 일을 하였기에, 총무인 영암스님이 주지 역 할을 거의 하였대요. 영암스님은 오대산의 돈을 서울로 보내, 지암스님의 정치 326 자금을 댔답니다. 탄허스님의 말에 의하면, 영암스님이 등짝이 다 벗겨져 있었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27 다고 그랬어요. 탄허스님은 화엄경 원고를 쓰기 위해 영암스님에게 서울에 가면 파카 잉크와 만년필을 사다 달라고 부탁을 했답니다. 그런데 영암스님이 서울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제천을 거쳐 강릉으로 오고, 거기에서 버스를 타고 월 정삼거리를 거쳐 오대산으로 오곤 하였는데, 그만 청량리역에서 가방을 도둑맞 았다고 그래요. 그러니 탄허스님은 얼마나 분통이 터지겠습니까? 탄허스님의 32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파카 잉크와 만년필이 날아가 버렸잖아요. 그런 쓰라림 속에서 공부, 역경을 하였군요. 또 탄허스님은 당신의 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그러셨어요. 일제 시대, 상원사에서 공부하실 때에도 화엄경이 없었대요. 그래서 고암스님의 책을 빌려서 하셨는데, 10년에 걸쳐서 번역을 완성하여 출판하시고 나서, 고암스님 에게 보답하시는 차원에서 화엄경 한 질을 드렸다고 그러셨어요. 그리고 노스님(탄허)은 책을 안 사요. 스님은 대학자, 대강백이라는 말을 들었 기에 당연히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스 님에게는 책이 없어요. 스님은 늘 책을 빌려 본 것입니다. 스님은 책을 빌려서 짧은 것은 외워버리고, 긴 것은 만년필로 필사를 해 가지고 봤답니다. 그렇게 하 면서 공부를 하신 분입니다. 사람들은 스님이 경전을 다 외우시니까 책이 많을 줄 아는데, 책이 없어요. 스님은 사집, 사교까지 다 번역을 하셨지만 당신이 가지고 있는 서재의 책은 별로 없어요. 스님은 그런 식으로 번역을 다 하신 것 입니다. 송찬우 교수님의 증언은 충격 그 자체입니다. 스님은 종이에 대한 애착이, 그것이 굉장히 강해요. 만년필, 잉크 를 중요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종이도 무척 아꼈습니다. 예전에는 달력이 한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28 장씩 뜯는 것이 많았잖아요. 그런 달력을 신도들이 사다 주면, 그것을 뜯어서도 절대로 안 버려요. 그것을 쌓아 두고서는 필요할 때에 쓰셨습니다. 그럴 정도로 어렵게 살았어요. 임도문스님이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라고 물었을 때에 다른 스님 같았으면 돈 이 필요하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스님은 돈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으 셨어요. 오로지 머릿속에는 만년필과 잉크밖에 없었어요. 스님은 돌아가실 때까 지 파카 만년필을 한두 자루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만년필을 여러 개 갖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여러 자루의 만년필이 들어가는 특별한 지갑을 주문해 서 만든 것을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셨어요. 그러니까 스님은 이동하는 연구 실이라! 탄허스님은 시간을 아껴서 번역을 하셨지요. 맞아요. 스님은 신도 공양청에 가셔도 시간이 나시면 원고를 쓰셨 어요. 절대 시간이 난다고 잡담을 안 하십니다. 스님은 얼마나 부지런한지 몰라 요. 스님은 저녁 아홉 시만 되면 주무십니다. 그러시고 나서 빠르면 새벽 한 시 에 일어나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두 시 경에는 일어나십니다. 그러면 한 시에 일 어나시면, 더 자지를 않으시고 세면을 하시고 그냥 앉아서 한 시간 동안 정진을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는 책을 펴고, 원고를 쓰십니다. 그러면 아침 공양을 여 섯시에 하시면 남들이 한나절에 한 것 이상을 벌써 새벽에 다 하신 것입니다. 신 도가 와서 스님에게 인사를 드리면 스님은 인사를 받고 간단한 안부를 물으시고 나서는 더 이상 자질구레한 말은 않으시고 딱 돌아서 원고를 쓰십니다. 그러면 신도가 미안해서 가곤 했지요. 328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29 교수님이 탄허스님의 역경에 도움을 드린 것이 있나요? 나는 스님을 도와 드릴 형편이 아니었어요. 스님에게 배울 형편이 었지요. 그리고 나는 성질이 고약해서 교정 같은 것을 못 봐요. 그런 것은 스님 주위에 있는 딴 사람, 대학을 나온 시자들이 하고 그랬어요. 저는 어떤 식으로 배웠냐 하면 내가 책을 읽고 의문난 점이 있으면, 스님이 계 32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신 곳에 찾아가서 물었지요. 저는 주로 학하리에 가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스님 은 강원 식으로 가르쳐줄 시간이 없었어요. 그러면 언제 시간이 나느냐? 스님은 커피를 좋아하셔서, 공양을 하시고 나서 커피를 잡수시면서 쉬실 때에, 그 시간 을 이용해서 이 구절은 어떤 뜻입니까 하고 의문점을 물었어요. 그러면 스님 께서 답을 해주시지요. 이렇게 저는 그때 그때에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서 돌아가실 때까지 배웠지요. 교수님이 탄허스님에게 그렇게 배웠다는 것을 일반인들은 잘 모릅니다. 제가 스님이 살아 계실 적에 동현이라는 이름으로 건당까지 하려 고 하였다는 말은 아까 이야기하였지만, 스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오대산 문 도회의에서 스님의 기일날, 제삿날에 각성스님과 함께 건당했어요. 월정사 대웅 전에 스님과 신도들이 가득하였을 때에 스님의 영정 사진 앞에서 절을 하고 건 당을 했지요. 제가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문중에서 해준 것입니다. 동현 은 내 개인적으로 스님과의 추억이고, 오대산 문도 차원에서는 보문으로 부르지 요. 그래서 탄허스님의 비석에도 속가제자로 제 이름(보문)이 올라갔죠. 탄허스님의 학문, 강맥은 누구에서 받은 것이 아니고 스스로 독학해서 이룬 것이라고 볼 수 있나요? 전강에 대한 것을 들려주세요. 탄허스님이 평소에 하시는 말씀이 선방에서는 면면심수( 面 面 心 受 )를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0

330 해야 하기에 반드시 시험을 거쳐서 인가를 받아야 되는 것이지만, 강원에는 전 강이라는 것이 없었답니다. 스님은 전강이라는 괴이한 풍습을 무시하셨어요. 경전을 읽을 때에 불교에는 술어가 너무 많아서, 보기가 힘들어요. 그러나 고 려시대에는 불교수준이 높아서 사전이 없어도 볼 수 있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는 불교가 배척을 받아서 경전을 보려면 깜깜절벽이었어요. 그래서 인악스 님, 연담 유일스님 같은 거물 스님들이 나와서 경전을 주석해 놓은 것이 소위 사 기( 私 記 )입니다. 그 사기가 사전 역할을 한 것입니다. 사기가 없으면 경전을 못 봐 요. 그런데 이것도 강사 스님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성격이 있었어요. 그래 사기 는 필사본만 있지, 판각본이 없어요. 유통을 안 시켜서 그리 된 것입니다. 강사 스님들이 몰래 그것을 보면서 가르치고, 자기가 죽을 때가 되면 자기를 잘 받들 어 주고 자신의 강맥을 이어나갈 사람에게 전달했어요. 그렇게 사기를 전달하는 것이 전강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사기는 기득권 유지 성격을 갖는 것이지요. 그래 탄허스님의 앞에 어떤 스님이 와서 전강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내가 봤 습니다. 그러면 스님은 나는 한암스님에게 전강받은 일도 없는데, 무슨 놈의 전 강이냐? 고 하셨어요. 또 스님은 자기가 실력이 있으면 강사를 하지 말라고 해 도 강사를 할 것이고, 자기가 실력이 없으면 아무리 강사를 하고 싶어도 강사를 할 수 없다고 하셨어요. 일제시대에 들어와서 사전이 나온 이후에는 전강이라는 것의 의미가 없어져 버렸어요. 요즈음 하는 것은 자기 권속을 늘리는 방편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수님은 춘성스님의 망월사 회상에서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탄허스님과 춘성스님이 330 친근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나는 망월사 선방에 있었고, 춘성스님을 자주 뵈었죠. 나는 탄허 스님에게 듣기를 당신이 6 25 때에 피난길에 망월사에 머물다가 내려간 것 같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31 아요. 그때 상좌 하나를 데리고 갔다고 그러죠. 그런 연고가 있어 춘성스님의 비 석을 스님이 흔쾌히 써주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탄허스님은 6 25가 나기 전에 통도사로 피난을 가셨는데, 통도사에 있다가 경기도에 잠 시 있다가 오대산으로 내려가셨는데, 그때에 망월사에 들르신 것 같습니다. 탄허스님이 6 25가 나기 이전에 통도사 백련암으로 가셨을 때에 산중 대중들에게 몇 번 특강을 해주었는데, 그때 대중들을 놀라게 해준 일이 있 33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었다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통도사 산중의 대중들이 강의를 해 달라고 요청 을 해서 하였는데, 대중들은 스님이 옛날 식으로 책을 펴놓고 할 줄 알았던 모양 입니다. 그러나 스님은 흑판을 몇 개 이어붙인 것을 놓고 강의를 하셨는데, 순 전히 백묵만 갖고 외워 제끼니까 듣던 사람들이 놀래 버렸단 말입니다. 우리나 라에서 경전 강의를 하시면서 흑판을 갖고 하신 것은 탄허스님을 최초로 봐야 합니다. 통도사에서의 칠판 강의에 대한 증언은 놀랍습니다. 제가 스님에게 여쭈어 봤어요. 언제부터 번역을 하시기 시작했냐 구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당신 나이 마흔다섯 살(1957년) 때부터 번역을 시작했다 고 그래요. 아마도 태백산 영은사 일소굴에서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화엄경이 10년인가, 9년만에 탈고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스님이 화엄경을 배우게 된 것은 일제 때, 한암스님의 회상에서 화엄 론이 있었던 것에서 나온 것이랍니다. 그때에 한암스님께서 탄허스님에게 강의 를 하도록 시켰다고 그래요. 그때 스님은 한암스님 앞에서 거의 선지에 입각해 서 경전을 풀어내신 것이지요. 그걸 하다 보니, 머리에 흰 머리가 날 정도였는 데, 그래서 그런 과정을 거쳐 토를 뗀 것이었다고 그러셨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32 스님은 상원사에 처음 와서는 일체 경전을 안 보려고 3년간 선방에서 정진을 했대요. 그러나 한암스님께서 글을 할 줄 아는 탄허스님에게 글을 봐야 한다고 해서 그때부터 경을 보기 시작했다고 그러지요. 입산 이전에 한문을 달통하고 들어갔으니, 하루 종일 경만 읽었는데 탄허스님이 경을 한암스님 앞에서 쭉 읽 기를 무려 7년간을 했대요. 그때에 경덕전등록, 선문염송을 다 봤다고 그러셨습 니다. 탄허스님의 경전관과 한암스님의 경전관은 같았습니까? 스님은 한암스님에게 경전을 배웠는데, 한안스님의 경전관은 선의 입장에서 본 것입니다. 탄허스님 역시 그렇습니다. 탄허스님은 한암스님으로 부 터 선사의 안목으로 경전을 어떻게 보느냐 그것을 배운 것입니다. 선지로 어떻 게 해석하느냐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탄허스님의 강의가 일반 강사 와는 달리 특수하게 보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님은 만약 한암스님 이 살아 있으면 지금도 한암스님에게 배울 것은 선지를 통해서 경전을 보는 것 을 배우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스님은 종지( 宗 旨 )를 강조하셨습니다. 스님은 다른 강사들은 종지가 없 다고 하시면서, 종지가 없으면 그것은 단지 글자만 새기는 것이며 죽은 학문이 지 그러셨어요. 늘 종지를 강조했어요. 탄허스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은 어떤 것입니까? 저는 스님에게서 분명하게 들었어요. 스님은 책 한 권을 빌리면 그 책을 완전히 외울 때까지 보고, 그것을 외운 후에야 딴 책을 보셨답니다. 그것 에 대한 하나의 예를 말하면, 스님은 기신론을 외우고 싶어서 외우신 것이 아니 332 라, 아무리 봐도 무슨 말인지 도대체 종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종지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33 드러날 때까지 반복해 읽다 보니, 저절로 외우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스님 을 가장 골탕을 먹인 책이 이통현 장자의 화엄론이라고 하셨지요. 한암스님에 대한 일화를 들은 것이 있으면 들려주세요. 어느 해 삼복 더위에 걸망을 지고 한암스님을 따라나섰다고 합니 다. 한암스님이 수박을 원체 좋아하셨대요. 그래서 수박을 사서, 걸망에 넣고서 33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무더위에 계속 걸어가셨다고 그래요. 수박을 샀으면서도 바로 그 자리에서 잡수 시질 않으시니 그러신 것이지요. 그러니 탄허스님은 걸망이 무거워서 죽을 지경 이었답니다. 그렇게 걷다가 어느 농가의 사랑방에서 자게 되었는데 그 주인이 한암스님에 게 물었답니다. 월정사에는 방한암스님이라는 도인이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정 말로 그래요? 하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한암스님이 저도 그런 소리를 들었습 니다 하고는, 자신이 한암스님이라는 것을 끝내 말하지 않았다고 그랬어요. 탄 허스님은 한암스님이 그런 도인이었다고 하시면서, 그 일화에서도 도인임을 알 수 있다고 하셨어요. 탄허스님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렇지요. 내가 그것을 물어보았어요. 언제부터 학문에 대해 자 신감이 생기셨습니까? 하고요. 그랬더니 스님께서는 화엄경을 번역한 이후에 는 통 두려운 것이 없었고, 그때부터 자심감이 생겼다 고 그러시더라구요. 스님의 유묵은 일반적인 글씨와는 다르지요. 혹시 이런 것에 대해서 들으신 것이 없을까요? 내가 알기로는 스님은 입산한 직후에는 붓을 놓았습니다. 그러니 까 20대에 붓을 놓으신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글씨를 잘 쓰시게 되셨냐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34 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스님께서는 붓으로 쓰는 것이나 만년필로 쓰는 것이 다 른 것이 없다, 똑같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스님은 화엄경 번역 10만 매를 쓰고 났더니 저절로 필력이 생겼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스님이 만년필을 갖고 글씨를 쓰는 것을 지켜보았더니, 스님은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것과 같이 그리 쓰시지 않 고, 만년필을 붓 잡는 식으로 써요. 그렇게 쓰시니까 원고지의 획이 전부 분명 해요. 그러면서도 당신은 그리 쓴다는 것 자체를 몰라요. 당대 최고의 명필이라는 일중 김충현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탄허 스님의 글씨를 보더니, 글씨가 좋다고 독특하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어요. 그 말을 스님에게 와서 전해 드렸더니, 스님은 그런 사람에게는 칭찬을 못 들어 도, 뺨만 맞아도 영광인데 그런데도 칭찬을 했냐구 그러시더라구요. 보통 글씨 만 쓰는 사람들은 필경사라고 봐야 하겠지요. 그러나 선비의 글씨는 글씨 쓰는 기술에 엄격한 학문이 뒷받침된 것입니다. 추사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뱃속에는 만 권의 시서( 詩 書 )가 있고, 팔에는 백 가지 기예를 익혀야 된다고요. 탄 허스님의 글씨는 선비의 글씨입니다. 스님은 인재양성을 강조하셨어요. 미래의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를 키우시려고 노력하였 습니다. 이 점이 보통 큰스님들과는 다른 점입니다. 스님은 절대 사람의 장점을 보지, 단점을 보지 않아요. 단점이 10 분의 9이고, 장점이 10분의 1이어도 장점 그것만을 봐요. 그런데 사람이 무난 하더라도 아무런 장점이 없으면 사람으로 안 봐요. 이런 것을 알 수 있는 좋은 예가 해운 선생입니다. 스님은 사람의 장점을 칭찬하지, 단점은 이야기하지 않 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사교, 노자 도덕경의 번역을 끝내고 방산굴 334 에다가 인재양성의 기반을 만들려고 하셨어요. 대전 학하리도 검토하였으나 거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35 기는 터가 너무 적어서 안 되고, 월정사에다가 하시려고 구상을 했어요. 지금은 방산굴 앞이 선방이 되었지만 그곳은 경사진 밭이 제법 있었습니다. 바로 그 자 리에다가 방이 많은 집을 지어서, 쓸만한 사람 20여 명을 받아서 공부를 시키려 고 했어요. 절집에서 공부를 후원해 주는 구상을 했어요. 월정사가 후원해야, 절 이 뒷받침을 해야 된다고 그러셨어요. 그런 꿈을 스님은 꾸었어요. 스님은 공개 33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적인 강의를 한 일이 없어요. 어떤 경전 한 권을 놓고 강의를 하신 적은 평생 동 안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강사로 자처한 적도 없어요. 그때 스님의 나이가 70 이 되니깐 그런 생각을 하셨지만, 바로 병이 나서 돌아가셔서 실행이 되지 않았 지요. 그때 스님은 20년을 더 산다고 그러셨어요. 만약 더 사셨으면 그것을 하 셨을 거예요. 병이 안 났으면 하셨을 것입니다. 스님은 20년을 키우면 인재가 안 나오겠냐는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탄허스님에게는 엘리트 주의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것은 철저하게 절에서 길들여졌다고 봅니다. 스님은 입산 이전 에 유교, 노장을 다 떼고 한문의 문리가 난 상태에서 절에 들어왔으니 방한암스 님이 얼마나 아꼈겠어요. 그래 출가할 때에 행자생활도 못하게 하였다고 그러지 않아요. 탄허스님이 수계할 때에 먼저 입산한 행자와 동시에 수계를 시키고, 먼 저 입산한 그 행자를 탄허스님의 상좌로 만들어 주기도 하였지요. 그 행자가 희 태스님일 것입니다. 그 정도로 한암스님이 아꼈어요. 그러나 스님은 권위의식은 없어요. 일반인과 똑같아요. 다만 학문에 대해서는 철저했어요. 스님은 권위의 식도 없으시고, 승속을 구분하지도 않았어요. 상좌들에게도 결혼하고 싶냐? 그 러면 나가 살아라 하셨고, 나갔으면 왜 나갔냐, 잘 사느냐 못 사느냐? 이런 말 을 안 물어보십니다. 또 스님은 신도가 와서 절을 하면 당신과 동갑이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면 꼭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36 맞절을 하지, 절대 앉아서 절을 받지 않았어요. 연하 사람에게는 절을 받았지만 요. 그리고 스님은 전화를 받을 때에도 김탄허입니다 이러셨지, 탄허스님입니 다 라고 안 하셨어요. 당신 스스로 스님이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리고 스님은 소승 이라는 말을 안 했어요. 조선시대에 승려를 스스로 천대한 말을 왜 쓰느냐 고 하셨어요. 탄허스님은 정치의식, 민족의식이 강하셨지요. 정치의식과 관련해서 스님에게 들은 말을 전해 드리지요. 당신이 6 25 무렵에 인민군이 와서 총을 들이댔다고 그래요. 그래서 스님이 우리 불 교도 사회주의이다. 봐라, 우리 불교는 삼의일발( 三 衣 一 鉢 )밖에 더 있냐, 그리고 개 인 소유가 없다. 그래서 절대평등한 제도를 만들었지 않느냐? 그러니 이것이 사 회주의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 고 하였대요. 그러자 인민군이 동무 그러냐고, 고생을 하고 있는데 걱정 말라고 곧 해방시켜 줄 테니깐 하고 그냥 갔다고 그랬 어요. 그리고 스님의 아버지는 보천교의 핵심 간부로서 거기에 장관급이라고 하 셨어요. 그 아버지는 6 25 때 인민군 치하에서 정읍의 군수를 했어요. 어떻게 보면 좌익이고, 온건하게 보면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당신은 부르 조아지였지요. 또 스님은 민족 주체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 원각경과 기신론을 번 역하실 때에 원효소와 함허득통소를 활용한 것에서도 나와요. 그때에 스님은 우 리나라에도 이런 스님의 좋은 책이 있는데, 굳이 중국 것을 이용할 필요가 없고 우리나라 스님의 것으로 해야 된다고 하셨지요. 탄허스님과 친근한 고승은 누구였는가요? 336 내가 보기에는 관응스님과 아주 친근하셨어요. 만나면 농담을 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37 시고 그랬어요. 성철스님은 방산굴에 한 번 찾아 오셨더랍니다. 그래서 몇 일을 대면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하였대요. 머리는 천재인데, 선방에서 혼자 공부하셨 다는 말은 하셨어요. 탄허스님의 정체성에 대한 소회를 갖고 계시나요? 33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제가 돌아가실 때에 한양대병원에 가서, 스님에게 가시면 어디로 태어나시겠습니까? 하고 여쭈었지요. 그랬더니 스님은 그 무엇으로 태어나도 상관없다고 하셨어요. 나는 이 말씀을 듣고서 탄허스님의 사상에는 노장학이 짙 게 깔려 있었다고 봅니다. 무위자연 사상이지요. 그 뒤로 얼마 안 돼 월정사로 가셔서 돌아가셨지요. 그리고 한암스님의 전법제자라는 말이 있지요. 그러나 스님은 당신이 한암스 님의 전법제자라는 것을 한 번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한암스님의 법은 보문 스님과 난암스님이 이었는데 보문스님은 불행히도 50으로 단명했고, 난암스님 은 일본에 가서 조총련의 거물이 되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박정희가 난암스님 의 영향력이 커서, 그 스님을 회유하려고 탄허스님을 일본에 보내서 만나보았답 니다. 난암스님에게 가 보니 김일성의 사진은 대문짝만하게 걸어 놓고, 박정희 것은 조그만하게 걸어 놓았대요. 그리고 난암스님이 김일성을 거의 수양아버지 로 여기고, 방에는 김일성에게 받은 훈장이 즐비하였고, 석가나 공자도 김일성 을 못 따라간다고 여겼으니 회유가 되겠어요. 그때 스님은 난암스님이 준 신수 대장경 원본을 받아서 가져왔어요. 그것이 학하리에 있었어요. 하여간 스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당신이 한암스님의 수제자라고 이야기하지 않 았어요. 그러나 오대산을 끝까지 지킨 사람이 없었고 다 떠나고 그랬지만, 오대 산을 끝까지 지킨 사람이 탄허스님 계열밖에 없으니 자동적으로 탄허스님이 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38 교수님은 중앙승가대에서 후학을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지금의 교수님이 있기까지에 탄 허스님의 영향력이 있다고 보시나요? 저는 거의 100%의 영향력을 스님에게 받았어요. 저는 노스님의 말씀대로 항상 종지 위주로 공부를 했고, 그 사상이 골수에 박혔다고 봐야지요. 저는 지금도 이 동현학림의 방에 제 은사이신 성수스님 사진과 탄허스님의 사진 을 함께 걸어놓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스님의 사진을 항상 모시고 다니고 있습 니다. 저는 스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 이 어록을 중요하게 봅니다. 이 방에 스님의 글씨로 되어 있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 있잖아요. 천하무이도( 天 下 無 二 道 ) 천하에 두 가지 길이 없다, 이런 것을 깨달은 성인에게는 두 마음이 없다는 것입 니다. 공자, 부처, 예수가 다르지 않다고 보시면서 삼교통일, 삼교회통을 평생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노장자, 주역을 유난히 좋아하셨어요. 또 스님 은 도학( 道 學 )이 없으면 아무리 박식해도 무시해 버려요. 나는 스님의 그런 정신 을 철저히 이어받은 사람입니다. 하여간에 스님은 종지를 강조하시고, 글자만을 새기는 것을 평가하지 않았어요. 탄허스님의 가르침, 끼친 영향 등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저는 늘 탄허스님의 책, 가르침을 대하고 살지만 세상에서 스님의 원력, 실천성은 잊혀지고 있어요. 그러니깐 스님의 껍데기만 남은 것이지요. 그 리고 스님이 번역을 왜 그렇게 하셨느냐 하면, 산중 강원에서 너무 엉터리 강의 를 많이 하니, 당신이 강의한 책을 보고서, 글자라도 제대로 새기면서 강의하라 는 배려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뜻으로 번역을 하신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대 중화가 안 돼요. 전문 강사나 전문적으로 한문을 하는 사람에게는 유용하지만 338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이라. 요즈음 사람들이 한문을 알아야 보지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39 불편하심에도 불구하고 귀한 증언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스님에게 들은 것을 저는 전달만 할 뿐입니다. 탄허스님의 진 면목, 가르침을 느낄 수 있는 자료를 많이 찾아 주세요. 고생하십니다. 33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40 나의 불교운동의 지주 대상 여익구 민주화 운동, 대불련 사무총장, 민중불교운동연합 의장, 여운형추모사업회 사무총장 일시 2011년 8월 17일 장소 여익구 사무실 서울, 양재역 선생님은 탄허스님과 인연이 무척 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 처음으로 뵈었는가요? 나와 탄허스님과의 인연은 상당히 깊어요. 제가 스님을 처음 뵌 것 은 대학교에 다닐 때에, 스님이 동국대 대학선원장을 하실 때 법문을 한번 들은 것이지요. 그때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옛날에는 왕사( 王 師 )가 있었는데, 지금이라 도 국사( 國 師 )제도가 있어서 내가 국사로 있으면 나라를 잘 만들 수 있다고 하신 것이 인상이 깊었지요. 그것은 내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에 가기 전이에요. 그래서 아! 저런 큰스님이 있구나 하였던 기억이 있어요. 제가 알기로는 그 후에 개운사 대원암에서 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 340 다만. 그렇지요. 내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에서 나오자( ) 마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41 자, 나는 전국의 큰스님을 만나기 위해 돌았어요. 그래서 구산스님, 경봉스님, 지리산에 은거하는 스님 등 전국의 큰스님들을 찾아가서 만났어요. 그런데 스님 들을 만나 보니, 스님들은 전부 선( 禪 ) 도리만 이야기하지, 즉 체( 體 )만 말하지 용 ( 用 )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더라구요. 역사의식이 너무 없었어요. 그때의 박정 희 정권의 문제, 민중의 고통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었어요. 34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그런데 마지막으로 탄허스님을 대원암으로 찾아간 거예요. 기억이 가물거리 는데 그때에 고준환 교수가 나를 안내해서 간 것 같아요. 고준환은 그 이전부터 스님을 알고 있어서 나를 안내 겸 스님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같이 갔어요. 찾아 갈 때에는 옛날 법문이 생각이 났었는데, 스님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깐 스님은 역사의식에 대한 이야기도 하시고 그래서 나는 조금 끌렸지요. 만족할 수는 없 었지만 내 마음에 와 닿았어요. 그랬군요. 그날의 만남을 구체적으로 회고해 주세요. 그래서 스님에게 말씀을 드렸지요. 대원암 여기에서 불교의 역사 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한 모임을 하려고 하는데, 법문을 해달라고 하였지요. 그 러니까 스님이 공부하는 사람이 누구누구냐고 물길래 나는 고은, 황석영, 전재 성 그리고 몇몇 대학생들의 이름을 댔지요. 이렇게 이름을 대니까 스님은 귀가 번쩍 뜨이면서 동의를 해주신 거예요. 내가 보기에 그때에 스님은 인재를 아쉬 워하던 차에 그런 제안을 하니까 내가 해 주마 하시면서 OK를 하신 것 같았어 요. 이렇게 해서 스님이 모임을 적극적으로 하시겠다, 만나 보자고 하셨죠. 대원암에서의 활동을 들려주시지요. 그때가 1975년 3월 경이었지요. 그때부터 내가 대원암에 자주 가 서 스님을 뵙고, 상의를 하고 그랬어요. 공부를 하는 정식 모임은 두 번 정도를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42 가졌고, 비공식 모임은 여러 번 있었지요. 왜냐 하면 모임 준비에 대한 것도 상 의하고, 스님이 나를 파악할 시간도 필요하잖아요. 내가 사기꾼인지, 소문으로 는 빨갱이라고 하는데 실제 그런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하여간 그래서 나는 조계종에서 스님은 저 분(탄허스님)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고 은, 황석영 그 사람들을 끌어들였지요. 고은, 황석영 그 사람들도 불교 모임이 있기를 간절히 바랬어요. 그 사람들이 불교적인 소양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는 데 그런 것을 갈망했지요. 기독교 측에서는 그런 모임이 많았지만, 불교에는 없 었거든요. 탄허스님의 인재양성에 대한 바람과 우리들의 갈망 그런 것이 시기적 으로 맞아떨어진 것이지요. 그것은 혹시 선생님의 자의적인 해석이 아닐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 후에 내가 스님의 상좌 노릇을 하면 서 중노릇을 했지요. 그때에 스님에게 직접 들은 것이 있어요. 이것은 처음으로 말하는 비사( 秘 史 )입니다. 상좌를 하면서 목욕을 가서 때를 밀어 드리면서 스님과 나는 은밀한 대화를 하기도 했어요. 그때에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스님의 사형 ( 師 兄 )이 되는 난암스님이라고 일본에 있다고 했어요. 탄허스님이 대원암에서 민 중불교를 하기 1년 전에 일본에서 이 스님을 만나고 오신 거예요. 그때 난암스 님이 조총련의 핵심이었는데, 탄허스님보고 남한에 있는 중들은 역사의식이 없 다고 하신 것에 자극을 받으신 거예요. 그래서 스님이 나라도 한번 해보아야 하 겠다고 생각을 하셨다고 그러시더군요. 그 난암스님을 만나고 온 이후에는 스님 도 안기부의 추적을 받았을 거예요. 대원암에서 탄허스님이 법문하신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342 그 말씀은 세월이 너무 흘러서 자세한 것은 잘 기억나지 않고 원효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43 스님, 만해 한용운스님을 높이 평가하셨어요. 내 느낌상으로는 그랬어요. 우리 나라의 최고의 중은 원효스님과 한용운스님이라는 요지였지요. 한국의 역사상 최고의 중은 이런 스님이라고 스님이 마음속으로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대원암 모임은 민중불교회라고도 합니다. 그 공부 모임을 민중불교회라고도 불러 34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도 되나요? 그 모임을 주도한 나는 처음 시작할 때에 민중불교회 조직을 만들 려는 마음은 있었어요. 그렇지만 사람들에게는 민중불교를 공부하자고 그랬고, 우리 모임은 민중불교 공부 모임이라고만 하였지요. 민중불교회를 만들기 위한 회칙은 나하고 전재성하고 같이 만들었어요. 고준환도 참여한 것 같고. 가리방 으로 긁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랬어요. 그래서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도 민중불교회로 알았을 거예요. 그런 것에 대해서 합의를 했지요. 그렇지만 그 회 칙에 의거해서 정식 출범을 하기도 전에 안기부의 추적, 구속을 받아서 출발은 못했어요. 그 회칙은 안기부에 뺏기고 지금은 나도 갖고 있지를 않아요. 그러면, 왜 안기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는가요? 그거야 우리 모임이 안기부에 포착이 된 것이지요. 내가 감옥에 갔 다 온 이후에도 형사들이 나를 따라다녔거든요. 내가 대원암에 왔다 갔다 하고, 전화를 하고 그러니까 안기부에서 추적을 한 것이지요. 내가 그 모임을 하면서 그해 여름에는 전국의 대학생들을 모아 놓고, 탄허스님을 모시고, 황석영과 고 은도 부르고, 또 탈춤하는 친구들도 불러서 큰 대회를 하려고 구상했어요. 민중 불교회의 모임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탄허스님을 그 대회의 중심에 놓고서 준비 를 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안기부에서 자극을 받아서 사건이 커진 것은 설문지 때문이에요. 설문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44 지라는 것은 내가 대불련 회장을 하던 전재성을 통해서, 전국 대학생들을 상대 로 앙케이트 조사를 시켰어요. 대불련 조직에서 설문지를 통해 불교인의 의식구 조를 조사해서, 그것을 분석해서 불교운동의 기초를 삼고, 민중불교회의 방향을 만들자 이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지요. 설문지는 스님들의 의식과 일반 대중의 의식 이렇게 두 종으로 나누어서 하였는데, 대학생들이 그 설문지를 받으러 다 니고 그러니까 대학생들이 막 움직이고 그러니까 안기부에서는 그것을 확증으 로, 증거자료로 잡아서 우리를 구속시켰어요. 내가 알기로는 그때 안기부에서는 민중불교회와 기독교의 모임을 합해서 제2의 민청학련 사건을 만들려고 했어 요. 그러나 그렇게는 되지 않았지요. 지금껏 이 사건에 대한 실체가 애매하였는데, 지금의 말씀으로 그 개요가 파악이 됩니다. 그러면 구속에 대해서도 말씀을 해주시지요. 나하고 전재성은 안기부 지하감방에 잡혀가서 조사를 받았지요. 그리고 고준환 교수는 성북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고, 황석영은 중부경찰서, 고은은 세종호텔에 가서 조사를 받았지요. 그러니깐 소위 일망타진된 거예요. 나는 안기부에서 두 달인가를 지하실에서 조사를 받았어요. 그러니까 6월에 잡 혀 가서, 8월에 기소유예 처분으로 나왔지요. 탄허스님은 대원암에서 여러 번 참고인 조사를 받았어요. 여익구를 어떻게 알았냐, 여익구가 빨갱이인 줄을 몰 랐냐는 것이었는데 그 후에 스님이 그렇게 조사받았다고 말씀을 했어요. 선생님은 그 후에 다솔사로 출가하였지요? 그렇지요. 안기부에서 나와서 나는 그해 10월에 다솔사 효당스님 에게로 갔어요. 사실은 그때까지는 조계종의 중이 되겠다는 의식은 없었어요. 344 출가를 하더라도 조계종으로 출가하여 여자 관계를 끊을 확신까지는 안 되고 그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45 래서 다솔사로 간 것이지요. 효당스님에게 간 것은 그 전에 전국의 스님들을 만 나러 다닐 때에 그래도 제일 의식이 있는 사람이 효당스님이었어요. 그렇지만 사실은 내가 중이 되려고 맨 처음에 찾아간 곳은 그때에 봉은사 다 래헌에 있었던 법정스님이었어요. 나는 법정스님에게 출가를 하고 싶은데, 제자 로 받아 달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법정스님은 자기는 제자를 받지 않는다고 하 34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면서 다솔사의 최범술(효당)에게 가라고 하면서 소개장을 써 주더라구요. 이런 사 람이 가니, 웬만하면 받아서 중을 만들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나는 그때에 법 정스님에게 조금은 섭섭했어요. 그 시절에는 불교계에서는 최고의 지성인이면 서 투사였던 스님이 나를 제자로 안 받겠다고 딱 거절을 하니까. 중이 된다는 것 은 보통 결단으로는 할 수 없어요, 애욕까지 끊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잖아요? 나는 그런 확신이 그때에는 없었어요. 다솔사에 가서의 내용을 알려주세요. 다솔사에 가서 효당스님에게 멱정( 覓 丁 )이라는 이름을 받고 출가하 였어요. 나는 그 멱정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어요. 멱자는 찾을 멱이어서 찾 는 놈이라는 뜻이고, 정자는 주역에 나오는 것으로는 작은 촛불이라는 뜻이에 요. 효당스님이 너는 큰 불꽃은 못 되니, 세상을 밝히는 작은 불꽃이 되라고 하 면서 그런 이름을 주셨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1년간 있으면서 효당스님에게서 천태사교의, 반야심경, 원 효에 대한 것을 배웠지요. 그 중에서도 나는 반야심경에 대해 관심이 많이 갔어 요. 효당스님이 공( 空 )을 놓고 해석하는데, 공을 현대적으로 인식하면서, 그것도 역사의식으로 보시더라구요. 그러고 모택동의 우공이산( 牛 公 移 山 )에 대한 이야기 도 그곳에서 들었어요. 그때에 그곳에 효사라는 시인도 조금은 같이 있었고 채 원화도 그때 거기에 있었어요. 효당스님은 내가 지켜보니, 그 양반은 천재예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46 대처를 한 분이어서 그렇지, 참으로 아까운 분이에요. 대단한 인물이었어요. 내 가 그 후에 탄허스님을 찾아서 대원암으로 간 후에는, 효당스님이 서울에 오면 가끔 대원암에 와서 탄허스님과 대화하는 것을 들어보니, 사상이 무척 깊으시더 군요. 그리고 탄허스님과 정신적으로 교류가 있고 통하는 것이 있었어요. 두 분 은 깊은 철학적 대화를 하시고 그러시더라구요. 다솔사에서 있다가, 탄허스님을 찾아 대원암으로 가셨지요? 그렇지요. 다솔사에 있다 보니까 그곳의 세속적인 분위기에 그만 싫증이 났어요. 반야로의 채원화가 와 있으니깐 효당의 전 부인이 와서 만날 둘 이 싸우고 그랬어요. 그래 나는 그곳에서 나와 버렸지요. 나올 때에는 효당스님 에게 조계종 절로 가겠다고, 탄허스님에게 가겠다고 하고는 나왔지요. 그러니까 효당스님은 탄허스님은 훌륭한 기질이 있는 스님이라고 하면서, 마음적으로 통 하는 스님이라고 좋게 말씀을 해주셨어요. 탄허스님을 찾아가서는 무엇이라고 말씀을 드렸는가요? 내가 다솔사에서 근 1년을 있다가 갔으니 1976년 9월인가 그랬지 요. 대원암에서 가서 그간의 경과를 말씀드리고, 멱정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쓰 게 해주시고, 탄허스님을 은사로 해서 재출발하겠으니 받아달라고 그랬어요. 그 런데 나는 기가 막힌 게 그때에 스님이 받아 주지를 않으면 갈 곳이 없었어요. 조계종 어느 곳에서도 나를 안 받았지요. 그러니 나는 어디에 의탁할 곳이 없지 요. 그러니 만약 탄허스님이 받지 않겠다고 하시면 나는 갈 곳도 사실 없어서 절 망적인 마음이었어요. 그런 마음으로 스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대원암에 있겠다고 하니까 스님은 346 그리하게 하시면서 있으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해서 나는 있게 되었지만 스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47 은 내심으로는 조금은 떠신 것 같았지요. 왜냐하면, 경찰은 노상 나를 따라다니 고 오대산의 문중 스님들은 전부 반대를 하고 그랬으니까. 오대산에서는 스님이 나를 받는 것에 대해서 반대가 무척 심했어요. 내가 절에 해꼬지를 할지도 모르 고, 사고를 칠까봐, 그래서 스님에게 누를 끼칠까봐 그랬던 것이지요. 34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그런 반대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문중 스님들이 강력하게 반대를 하면 스님은 알았다, 저 리 가 있어라, 가만히 있어라 는 정도만 말씀을 하시고는 침묵을 지켰어요. 그 래서 스님은 나를 받고는 반대가 심하니 어떤 명분이 필요하셨던 것이 아닌가 해요. 내 느낌으로, 그러셔서 그랬던지 스님은 나를 진관사로 데리고 가서 석주 스님에게 부탁을 해서 석주스님을 계사로 하고, 당신을 은사로 해서 수계를 하 게 해주셨어요. 하여간에 처음 두 달간은 참 어려웠어요. 그러시면서도 스님은 동시에 대원암 초창기에는 당대의 관상쟁이, 사주쟁이를 다 모이게 해서 내 관상과 사주를 보게 했어요. 나는 그걸 몰랐지요. 나중에 그 사람들이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어서 알게 됐지요. 나는 그 시절에는 사회과학적 인 것에만 신경썼지, 그런 것은 제껴 두고 그랬어요. 그런데 탄허스님이 보신 것 과 관상쟁이가 본 것이 일치하였다고 그래요. 스님은 저 놈은 속세의 인연이 많 아서 나갈 것이다, 그런데 혹시 절에 남아 있으면 큰 불사를 할 것이라고 하시면 서 큰 재운이 붙어 있다고 그러셨대요. 그러시면서 스님은 나에 대한 확신을 갖 고 스님의 옆에 있게 하신 것이지요. 내가 열정이 많아서 사고를 칠 수도 있다 고 불안하시면서도 그렇게 해주셔서, 그때부터 스님은 내 아버지 같았어요. 대원암에서는 어떻게 지내셨는가요? 그때부터 나는 스님의 시봉으로서 밥 나르고, 빨래하고, 목욕을 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48 시면 등을 밀어드리는 상좌가 되었지요. 그때 고대 출신인 최옥화(일초스님)와 같 이 시봉을 했어요. 그때 옥화에게 혼났지요. 스님과 한방에서 잤는데, 스님은 새 벽 두 시 경에 일어나셔서 참선을 하시는데, 그러면 시봉인 나도 일어나서 참선 을 하지만 꾸벅꾸벅 졸다가 벽에 머리를 부닥치고 그랬어요. 그러면 스님은 젊 은 사람은 혈기가 많으니 열을 식혀야 한다 고 하시면서 잠을 더 자라고 그러셨 어요. 그러나 그러신다고 잠을 잘 수 있나, 못 자죠. 그러면서 스님에게 정식으 로 학문을 배웠어요. 나를 놓고 일대일로 가르치셨어요. 그렇게 가르치시는 일은 흔하지 않은 일인데요. 그것은 스님이 나에 대한 애정이 많으셔서 그리 하신 것 같아요. 그때에는 그것을 몰랐는데, 지금이야 느끼고 있지요. 나는 스님에게 사서삼경을 배웠는데, 다 하지는 못하고 중용과 대학까지는 배웠어요. 그날 배운 것은 다음 날 외워 바쳐야 했는데, 내 머리가 굳어 있었고 내가 학문에는 재주가 없어서 내 자신에 대해서 절망감을 느꼈지요. 나의 그런 자질에 대해서 스님도 답답하셔서 책을 내 던지고 그러셨어요. 스님은 내가 따라오지를 못하니까 너는 바깥 경계 에 끄달려 있다 고 하시면서 안의 경계를 알아야 하는데, 그래야 사람이 튼튼 해지는데 그렇지 못하다 고 막 야단을 쳤어요, 이 멍충아 하시면서. 그래서 나 는 절망했지요. 그래도 스님은 한 6개월을 끈기 있게 나를 가르쳤어요. 나를 제 대로 된 사람을 만들려고 그렇게 하셨는데 잘 안 되었어요. 나도 내가 한탄스러 웠고 스스로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어요. 그때 내가 제대로 배웠으면 지금은 대 학자가 되었을 터인데 그렇게 되질 못했어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군요. 348 그렇게 6개월을 배웠지만, 스님은 나에게 너는 안 되겠다고 하셨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49 어요. 그러시면서 선방이나 가서 머리를 식히고 오라고 그러시더라구요. 그래서 나도 배우는 것은 포기하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스님 곁을 떠나서 경봉스님이 계 시던 통도사 극락암으로 갔어요. 그 전에 경봉스님과 인연이 있어서 그리 간 것 이지요. 가서는 두 철을 나고는 대원암으로 돌아왔어요. 내가 선방에 가게 된 것에는 그 당시 사건과 연결이 된 것도 있어요. 이것은 34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뭐냐 하면, 내가 민청학련 사건으 로 감옥에 가 있을 때에 친하게 지내던 김남주라는 시인이 있어요. 그런데 김남 주가 속해 있던 남민전에서 동아그룹의 최원석 집에 가서 강도짓을 하였어요. 그렇게 하고서는 김남주는 나에게 오대산으로 도망가겠다고 그리 알라고 그랬 어요. 그래서 오대산이 뒤집어졌어요. 그러니 내가 오대산으로 갈 수도 없어서 그러던 차에 스님이 선방에 가서 너의 길이 어디에 있나를 알아보라 고 해서 나 는 학문도 못하고, 오대산에 갈 처지도 안 돼서 경봉스님에게 간 것이지요.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요? 그리고 돌아와서는 월정사에 가서 지냈어요. 그때에 스님이 하신 것이 화엄회상, 화엄산림을 하셨지요. 거기에 내가 관여가 되었어요. 스님이 신화엄경합론 을 펴내셨는데, 지금 원주 성불원에 있는 현각스님이 그때 월정 사 교무를 맡고 있었는데 현각스님이 화엄회상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아이디어 를 냈어요. 나는 대원암 시절부터 현각스님과는 친하게 지냈어요. 그 스님이 오 대산 출신 가운데 학문적이고, 철학적이고 순수해서 나는 그 스님과 많은 이야 기를 하고 통했어요. 현각스님이 그런 아이디어를 냈지만, 자신이 그것을 탄허스님에게 말씀드리 기는 거북하니 나보고 스님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방산굴에서 스님에게 말씀을 드려서 스님에게 OK를 받은 것이지요. 그랬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50 더니 스님은 그때 주지를 맡고 있었던 희찬스님과 상의를 해서 오대산 차원에서 하기로 결정한 것이지요. 그런 것을 하려면 오대산 조직이 동원되어야 하고, 많 은 후원이 필요하잖아요. 많은 사람이 와서 공부를 하려면 먹고 자고 지내는 것 이 간단하지 않아서 산중회의를 해서 동의를 받아 결정하였어요. 그런 큰 불사 를 하려면 각 말사 별로 담당도 해야 하고, 신도들의 후원도 받아야 하지요. 그 렇게 돼서 그 불사가 이루어진 것이에요. 나는 그 불사가 성사되는 것을 보고 스 님이 나를 깊게 사랑한다는 것을 느꼈어요. 화엄산림 불사가 잘 진행되었지요? 그렇지요. 탄허스님이 화엄경 특강을 한다고 공고를 하니까 정말 눈밝은 스님들이 구름처럼 몰려오더라구요. 200명 가깝게 온 것으로 알고 있 어요. 그런 공고, 행정적인 실무는 현각스님이 교무담당이어서 거의 담당하였 지요. 그때 스님이 강의하신 것은 화엄경, 능엄경, 주역선해였어요. 나는 그때 방산 굴 스님의 방에서 같이 지내면서 시중을 들었어요. 그리고 유학자 출신인 심백 강도 방산굴에서 같이 지냈어요. 그 분은 한문의 천재여서 스님이 그 사람을 학 자로 대우해 주었어요. 스님은 두 시 기상, 새벽 네 시 예불, 새벽 다섯 시 강의, 아침 공양, 여덟 시부터 강의, 열한 시 점심 공양, 오후 한 시 강의, 다섯 시 저 녁 공양, 여섯 시 저녁 예불, 일곱 시에 강의, 열 시에 취침으로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정력적인 강행군이었어요. 하루에 열 시간을 분필 하나만 들고, 세 달 동 안 강의를 하셨지요. 그리고 내가 그때에 시중을 들다 보니까 스님은 새벽 두 시 에 일어나셔서, 앉아서 뭔가를 중얼중얼 하시더라구요. 내가 보기에 그것은 주 력을 하신 것이 아니라고 추정하는데, 그날 강의하실 것을 강의 초안을 머리에 350 서 미리 돌리신 것이라고 봐요. 그런 것 같아요. 그 전에 내가 모실 때에는, 평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51 소에는 그냥 참선만 하시지 그렇게 중얼거리지 않았거든요. 머릿속에서 테이프 를 돌린 거예요. 하루에 열 시간을, 3개월 가깝게 그렇게 하셨지요. 그 불사에 참여한, 강의를 들은 대중들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요? 강의를 들은 스님들은 전부 다 껌뻑 죽었지요. 대중들은 탄허스님 의 강의를 처음 들었던 것이지요. 직접 탄허스님의 강의를 듣고서는 대단하다고 35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그랬어요. 그에 대한 반응은 말로 다 못 해요. 표현하기 어렵지요. 특히 나는 제 안한 당사자여서 기쁨이 더 했지요. 하여간에 나를 포함한 모든 대중이 환희에 젖었어요. 주역선해 같은 강의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것이었잖아요. 동양 사상을 회통한 그런 강의는 아마 처음일 거예요. 조계종사에서도 처음이라고 볼 수 있어요. 나는 그때에 스님의 강의를 듣고서는 스님의 학문은 도저히 딸 수 없는 별이 라고 생각했어요. 탄허스님의 학문의 깊이에 감복하고, 나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수준이기에 그런 것에 따라가려는 생각을 포기하였지요. 거기에 온 중들도 그리 느끼지 않았을까 해요. 하여간에 대중들은 감격 일변도였어요. 내가 보기에 그 런 정도의 회상을 다른 절에서는 만들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런 강의를 할 수 있 는 실력 있는 스님이 있어야 하고, 그런 불사를 해낼 수 있는 후원과 조직력이 있어야 하지요. 그러나 오대산은 그것을 해냈어요. 그때 현각스님이 그랬지요, 저 스님들이 돌아가시면 탄허스님의 세대가 가면, 이 시대의 큰중은 다 없어진다고 그랬어요. 현각스님의 그 말이 맞아요. 나는 현 각스님이 큰 역사를 이루어낸 것으로 봐요. 역사에 남을 일을 한 것이에요. 나 로서는 현각스님이 그런 역할을 한 것이 고맙고, 나도 보람을 느꼈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52 화엄경 특강이 선생님의 인생에도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로서는 그 불사가 민중불교 차원에서도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봐요. 이렇게 보는 것은 내가 스님을 민중불교의 최대 후원자로 보려는 것과 관 련이 있어요. 나는 민중불교를 하면서 스님을 중심 역할로 모셨어요. 민중불교 의 씨앗이 오대산 월정사에서 나온 것이에요. 그때 오대산에 모인 스님들이 소 장층이 많았는데, 그런 똑똑한 스님들이 한자리에 저절로 모이게 되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 스님들을 만난 거지요. 해인사의 현응스님, 연관스님, 비구니 성 일스님, 통도사 정우스님도 만났지요. 정우스님은 그때에 동관음암 암주를 하면 서 강의를 들었는데, 나는 그 스님과 친하게 지내고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그 래서 밤중에 동관음암에 자주 올라가서 이야기를 하고 지냈어요. 이런 스님들을 그 후에 내가 대불련 지도법사단을 할 때에 참여하도록 만들었지요. 그렇지만 선생님은 얼마 후에 환속을 하고, 종단개혁과 민중불교운동에 나섰지요. 그렇지요. 내가 세속에 인연이 생겨서 나가게 됐어요. 그래서 스 님에게 말씀을 드리니 스님은 알았다, 이놈은 사주팔자대로 간다 고 하시고는 더 이상의 말은 없었어요. 그러나 나는 스님 옆에서 스님의 사랑을 대단히 받았 어요. 나는 1980년의 5 17이 나던 그날 구속을 당했어요. 5월 17일 열흘 후에 조계사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되어 있었지만, 나는 보안사에 구속되어서 결혼 식장에는 오지도 못했어요. 그러자 스님은 진노하시고는 스님이 아는 사람들을 불러서 노발대발하셨어요. 전창열이라고 그때 군법무관을 하면서 실세였던 사 람, 그리고 보안대의 양근하를 불러서 호통을 쳤어요. 그래서 내가 예정보다 빨 리 나와서 그해 가을에 대각사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대각사 법당에서 하였는 데, 스님을 주례로 모시고 했어요. 대각사에서 한 것은 내 사건 이후로는 조계 352 사에서 결혼식하는 것을 한동안은 정부에서 폐쇄시켜서 할 수 없었기에, 탄허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53 님과 인연이 있었던 대각사의 도문스님에게 부탁을 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지 요. 스님이 자신의 상좌였던 사람을 주례한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그랬어요. 그 정도로 스님은 나를 사랑하셨어요. 스님은 내가 결혼한 이후에도 우리집에 몇 번을 찾아오셔서 나와 내 아내에게 위로와 격려를 해주셨어요. 그때에 내 큰딸 이 스님의 무릎에 안기면 스님은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어요. 35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혹시, 대전 학하리를 재가불교의 본부로 하시겠다는 말을 들으셨나요? 그런 것은 내가 스님을 시봉할 적에 스님에게서 들었지요. 내가 알 기로는 스님은 종단의 스님 교육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시고 그랬어요. 조계종의 승려들에 대해서 실망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재가자 중에서 인재를 뽑아서 키 우겠다는 것이 스님의 마음속에 있었어요. 그래서 인재들을 양성하겠다는 작정 을 하시고 재단 같은 것을 만들려고 구상을 하시고 그랬어요. 서울법대의 전창 열, 명호근 같은 사람들 그리고 이화여대 출신 중에서 진민자라고 총학생회장도 하고, 한일회담 반대의 주역을 한 사람이 스님에게 자주 들렀지요. 그러나 그런 구상은 실행에 옮기지 못하시고 입적하신 것이지요. 하여간 그런 생각은 실천단 계까지는 못 갔지요. 여익구라는 사람의 삶에 있어서 탄허스님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스님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나는 봐요. 내 인생을 전기와 후 기로 나눈다면, 후기는 민중불교운동으로 시작됐고, 그래서 이름이 조금 나고 그랬지요. 그런데 이런 후기 인생에서 민중불교운동을 하게 된 자산이라고 할까 자양분이 되신 것이 탄허스님이었어요. 나는 그런 운동을 한 것을 불사에 기여 하였다고 보지요. 이것을 내 입장에서 보면, 탄허스님이 나의 미래를 예언한 대 로 살았다고 봅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54 왜냐하면, 내가 환속해서 대불련 사무총장을 하고, 그때에 대불련 지도법사단 을 만들었을 때에 스님을 법사단의 증명법사로 모셨어요. 이런 것은 대불련 자 료에도 나와요. 그리고 내가 대불련의 간부들을 몰고 스님에게 가면 스님은 매 번 격려를 해주시고 그랬어요. 또 대불련 법사단의 법회를 조계사에서 하면 스 님이 오셔서 법문을 해주셨어요. 그리고 1982년인가에 내가 주도한 종책 연구 소, 한상범 교수가 만든 불교사회문화연구소의 법회에서도 스님이 나오셔서 법 문을 해주셨어요. 이럴 때에 스님은 한 번도 내 청을 거절하지 않으셨어요. 전 두환 정권 때에는 전국의 큰스님들이 말도 일체 안 하고, 숨을 죽이고 있었어요. 그러나 스님은 당신 상좌가 하는 일에 기꺼이 지원해 주었어요. 스님은 내가 가 는 방향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그런 정신적 물질적 지원(법문)을 해주신 것이지요. 알게 모르게 후원해 주었어요. 그래서 스님은 대불련, 민불련의 보이 지 않는 지주가 된 거지요. 이런 의미에서 스님은 민중불교의 정신적인 지주예요. 원효 만해는 죽어 있 는 정신적 지주였지만 스님은 현재 살아 있는 정신적인 지주였어요. 이런 측면 에서 스님은 민중불교의 큰 자산이었지요. 물론 이런 것이 객관적으로, 역사적 으로 어떻게 인정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런 것을 인정하고 주장해요. 지금의 주장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역사가 아닙니까? 물론 그럴 수가 있지요.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1980년대에 민불련 이 만들어지고 해인사에서 승려대회가 열린 것은 오대산에서의 화엄산림이 자 산이 되어서, 거기에서 공부한 스님들이 만든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요. 1980년대에 불교의 사회참여 활동 역사에서 지금까지는 여익구만 보였지 만, 보이지 않는 큰산이 있었는데 그것이 스님이었다는 것이지요. 탄허스님의 354 정신적 물질적 지원이 없었다면 매우 어려웠을 겁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55 스님이 방산굴에서 입적하셨을 때에 지켜보셨는가요? 그랬지요. 나는 그때에 그런 생각을 했어요. 천재적인 스님의 머 릿속에 있는 것의 10분의 1만 내 머리에 이전될 수 있으면 내가 대학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그랬으면 좋겠다는 염원이었지요. 스님은 당신의 학맥을 이을 제자가 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어요. 그런 점을 스님도 평소에 35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정말 아쉬워했어요. 그때에 스님은 우리들에게 절대 움직이지 말고 금강경을 외 우라고 그러셨어요. 그리고 참, 이것도 처음 말하는 것인데 내가 스님의 등을 밀어 드릴 때에 당신 이 언제인가 임종 직전에 가면 비구니나 보살들은 염불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말씀을 나에게 했어요. 그렇게 하신 이유는 사람이 마지막 가는 길에 애욕 이 가장 강하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성의 소리를 들으면 해탈을 하는 데 무 애 상태로 가지 못하고 다시 착( 着 )이 되어서 세상을 떠돌아다닐 수 있다고 하였 어요. 그러나 나는 차마 그런 말을 하지 못했어요. 할 수 없는 형편이었지요. 탄허스님의 정신, 사상의 계승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나요? 내가 볼 때에 스님은 당신을 사상가로 자처하지 않았어요. 사상가 로 불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시고, 자신은 불교 중흥자로만 여기셨지요. 나 는 스님, 본인 자신이 늘 겸손하셨다고 봐요. 스님과 같이 유불선을 회통한 경 지에 이른, 그런 수준에 이른 인물은 나오지 못할 거예요. 탄허스님 탄신 100주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소회는 어땠는가요? 나는 김선생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어요. 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 렀는가를 생각하고서. 제가 볼 때에 앞으로는 스님의 고뇌, 인간적인 삶, 역사 적 고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봐요. 나는 그런 스님의 인생에 있어서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56 5년간 스님을 모시면서 같이 지낸 사람이에요. 그래서 스님의 진면목의 한편을 본 사람이에요. 나는 무엇보다도 스님이 민중불교의 기둥이라고 생각해요. 정신 적 지주였다고, 그것은 틀림이 없었다고 봐요. 내가 그 시절에 스님에게 청을 하 면 한 번이라도 거절하신 적이 없어요. 나는 스님이 그쪽으로 평가되길 바라는 것이지요. 내가 가는 길을 뻔히 아시면서도, 내 제안을 다 받아 주셨어요. 전두 환 정권 시절에는 누구도 나서지 않았어요. 그러나 스님은 내 상좌가 하는 일에 당연히 내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서나 하시면서 나를 도와주셨어요. 나와 스 님의 의식적 지향은 같다고 나는 봐요. 그리고 스님의 나에 대한 애정을 생각하 면, 나는 스님을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납니다. 오늘 귀한 증언 정말 감사드립니다. 김선생,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앞으로 자주 만납시다. 전국을 다니면서 스님의 어록, 일화를 모으느라고 정말 수고가 많습 니다. 356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57 선교( 禪 敎 )를 회통한 큰스님 35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대상 박완식 고전번역원 전주분원장, 전주대 교수 일시 2012년 4월 22일 장소 남부터미널 인근 커피숍 서울, 서초 선생님은 지금 전주대 한문교육과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탄허스님의 말년에 인연을 갖고 있지요. 저는 한문을 경남 합천의 초계면에 계시던 권추연 선생님에게서 배웠죠. 그러다가 탄허스님이 주역선해 작업을 하실 때, 마지막 교정을 하실 때 에 학하리에서 만났거든요. 대전 자광사에서, 스님을 만나서 주역선해의 원고 교정 작업을 하였지요. 어떻게 해서 그런 인연을 갖게 되었나요? 그것은 박금규 선생님이 저를 스님에게 소개했죠. 저를 탄허스님 에게 소개해 주신 분이 박금규 선생님이신데, 이 선생님은 원광대 한문과 교수 를 하시다가 지금은 정년을 하셨는데, 저도 만나뵌 지가 오래되었어요. 박선생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58 님은 고등학교에서 선생을 하시다가 그만두고는 대학에 가기 전에 학문적인 방 랑을 많이 하셨어요. 그런 고민 과정에서 탄허스님을 찾아가서 배우고, 몇 년 동 안 시봉을 하신 분입니다. 참여하신 것이 주역선해뿐입니까? 아닙니다. 주역선해도 하였고, 노자 도덕경도 하였죠. 주역선해의 원고 교정은 학하리에서 하였고, 그리고 주역선해를 책으로 내기 전에 인쇄 출판 교정 은 고대 뒤에 있는 대원암에서 하였습니다. 오자, 탈자를 잡아내는 교정 작 업을 하였죠. 그리고 노자 도덕경은 월정사 방산굴에서 마지막 원고 교정을 하 였습니다. 박선생님도 주역을 강의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주역과 탄허스님의 주역은 같은 것인가요? 제가 스님에게 가게 된 것, 그리고 교정에 참여한 것은 제가 주역 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는 것과 탄허스님이 하셨던 것은 좀 다릅니다. 스 님은 주역선해를 하셨는데, 그것은 불가적( 佛 家 的 ) 입장에서 주역을 설명한 것입 니다. 그러나 제가 하는 것은 주역총목( 周 易 總 目 )을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탄허 스님의 주역선해는 세 권인데, 두 권은 불교적인 입장에서 주역을 설명한 것이 고 또 한 권은 주역총목이 중심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주역총목을 중심으로 공부를 했기에, 그것을 주로 교정보는 것입니다. 저는 유가의 내용은 알지만 불 교 이론은 모르지요. 그래서 스님의 입장과 저의 입장은 달라요. 주역총목은 주역이 발생하기 이전 하도( 河 圖 ) 낙서( 落 書 )에서부터, 주역의 응용 원리가 다 들어 있죠. 주역의 기본적인 원리 개념이죠. 이것은 주역을 바라보는 358 유가의 이론입니다. 그러나 주역총목은 불가, 도가가 공통으로 알아야 할 대상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59 입니다. 탄허스님의 지근거리에서 교정을 보면서, 스님에게 배웠던 점은 무엇일까요? 제가 스님의 옆에서 교정을 보면서 스님에게 배운 점이 있다면 그 것은 스님이 3단논법으로 회통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탄허스님은 원체 정리를 35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잘 하시거든요. 다시 말하자면 전체적인 회통을 잘 치거든요. 교정을 보면서 짬 짬이 이야기하는 과정 속에서 보면 스님은 참 대단하거든요. 저는 그때 당시에 는 유서만 봐 왔고, 유서 쪽의 여러 선비들을 많이 찾아다니다가 왔지만 회통치 는 분은 탄허스님을 처음 봤어요. 스님이 모든 것을 요약해서 회통을 치시면 저 는 마음으로 존경했죠. 지금도 모든 경전을 그렇게 요약하고, 회통쳐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런 분은 별로 없거든요. 간혹 사람들을 만나보면, 탄허스님을 흔히 장자에 능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렇게 평하는 사 람이 있어요. 실제로 탄허스님은 장자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지요. 그렇지만 항상 결론에 가서는 불교로 회통쳐요. 그렇게 회통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는 못 봤어요. 탄허스님은 인재양성을 무척 강조하였지요. 그래요. 저도 스님에게서 그런 것을 느꼈죠. 그러나 스님의 인재 양성은 작은 인재양성이 아니었어요. 스님의 인재양성은 큰 인재양성이었다고 봅니다. 마치 소매상과 도매상이 있듯이 스님은 큰도매상이었어요. 스님은 개인 적으로 와서 묻고 그래도 답을 잘 안 하십니다. 스님은 항상 책을 쓰시고, 책을 통하여 인재를 양성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 저는 마음속으로 대단하구나 하고 여겼죠. 그리고 스님은 학하리를 인재양성의 도량으로 만들려고 하셨죠.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1

360 탄허스님을 어떤 분으로 보시고 싶나요? 제가 알기에 스님은 학문의 초기에는 유가였고, 중기에는 노장이 었거든요. 상원사로 출가해서도 노장을 많이 공부하신 것 같아요. 스님은 노자 보다는 장자를 더욱 공부하신 것 같아요. 스님은 장자 내칠편을 다 외우고 계셨 거든요. 그리고 스님은 장자가 비유라는 측면에서 최고의 문학이니까 항상 장자 를 많이 이야기하셨죠. 그렇지만 스님은 무슨 말씀을 하셔도 불교로 회통을 쳤거든요. 제가 보기에 스 님은 장자를 방편으로 말씀하셨지, 종지로 말씀하신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스님 은 항상 불교로 회통을 치는 것을 제가 한두 번 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 들은 듣기 좋은 장자만 갖고서 스님을 말하는 것 같더라구요. 하여간에 스님은 불교사상이 중심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스님은 선교( 禪 敎 ) 회통주의로 봐야지요. 스님은 선교를 서로 윤회하는 관점에서 보시지 않았나 합니다. 그래서 저는 스 님을 선교를 회통한 큰스님으로 보고 싶습니다. 스님의 그런 입장, 선교 회통주의를 보완해서 말씀해 주세요. 스님의 행적을 지켜본, 제가 교정을 볼 때에는 스님은 보통 새벽 서너 시부터 교정을 시작하거든요. 그리고 스님을 가만히 혼자 있을 때에 보면, 남들이 하는 참선방에 안 갔을 뿐이지 스님은 일상선( 日 常 禪 )을 한 것 같더라구요. 스님은 책을 보시다가 막히거나 모르시면 책을 덮으시고 무심히 앉아 계시지요. 그러고 나서 책을 다시 보거든요. 스님은 우리에게도 그리 하라고 그랬죠. 책을 너무 집착해서 보면, 책을 천착해서 보면 막힌다고. 스님은 일상선으로 학문자 세에 임하시더라구요. 360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61 박선생님은 탄허스님에게서 배운 것의 핵심을 드신다면 무엇을 거론하시나요. 사실, 스님은 직접적으로 말씀을 잘 안 하세요. 그 무렵 제가 스님 에게 영향을 받아서 출가를 하려고 그랬거든요. 그렇지만 스님은 직접적으로 출 가하라는 권유의 말씀도 않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이럴까 저럴까 하다가 인연이 안 돼서 그만 출가를 하지 못하였죠. 그리고 스님은 공부하라는 말씀도 직접적 36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으로 잘 안 하셨어요. 그렇지만 제가 스님에게서 배운 것은 단지 일상 생활에서 법문을 하시거나, 사 람을 제접하실 때에 3단논법으로 회통치는 것입니다. 스님의 논법은 화두를 던 져 놓고 풀어가고, 그 후에는 다른 것으로 회통을 치면서 풀어가는 것입니다. 이 런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제가 지금 생각을 해봐도 그 방법은 뛰어나구나 그렇 게 여깁니다. 탄허스님의 직역 중심의 번역을 어떻게 보시나요? 저는 스님의 직역을 높이 평가합니다. 의역 이것은 일시적으로, 계 도용으로 당대에는 필요하지만 생명력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의역은 일시에 사 라져 버려요. 그러나 교재라든가, 소의경전은 직역 중심으로 나가야 됩니다. 이런 면에서 탄허스님의 직역은 조선시대의 사서언해와 같은 위상을 가질 것 입니다. 유가에서도 언해본과 의역 체제가 있습니다. 불가나 유가에서도 교재를 할 경우에는 직역 중심으로 가야 하고, 원전을 살려가면서 해야 합니다. 탄허스 님이 가신 지가 3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스님의 책이 교재 역할을 하면서 존재 하지 않습니까? 만약 스님이 의역으로 하셨다면 이렇게 생명력이 길지 않고, 이 미 존재 가치는 끝났을 거예요. 그러나 스님의 그런 부분을 의역 중심 체계에서 비평하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제 생각은 의역은 일시적인 충족은 되지만, 교재 적인 측면은 안 돼요. 조선시대의 사서언해는 500년을 존속하였지만, 일제시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62 때에 의역한 것은 다 사라져 버렸어요. 조선시대 때, 상원사에 있었던 신미대사가 있지 않습니까? 세조 당시에 간경 도감을 만들고, 신미대사가 그 책임을 맡아서 처음으로 불경 번역을 하였습니 다. 신미대사도 번역을 하였는데, 그 스님이 한 능엄경을 보면 상당히 의역을 했 어요. 그러나 다른 책을 보면 직역 체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간경도감에서 한 것 이 오래 갔다고 봅니다. 하여간에 저는 그런 면에서 의역을 하면 생명력이 길지 않다고 봅니다. 탄허스님이 스님들의 모든 경전을 현토, 번역한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까? 그럼요. 그런 것은 스님도 말씀을 하셨어요. 그것은 일종의 자신 과의 약속이고, 자신의 온 정력을 투자한 도매상과 같은 성격이라고요. 인재양 성을 하기 위한 것이고, 인재들이 배울 교재를 만들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읽혀 질 책을 만들어 내는 것을 당신의 사명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안목은 대 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스님이 직역을 잘 했다고 봅니다. 박선생님이 탄허스님을 모시던 시절, 스님 주위에는 누가 있었나요? 제가 스님을 모시면서 교정을 볼 때에는 시봉하는 분으로 박임환 이라는 재가 여성분이 있었어요. 그 분은 동국대 불교과를 나와서 출가하려고 그랬고, 스님을 시봉하면서 교정을 많이 봤어요. 그리고 혜거스님도 있었고, 지 금 월정사 주지하시는 정념스님도 잠시 봤고, 송찬우 교수(보문)는 왔다 갔다 하 였지요. 지금도 탄허스님 생각이 많이 나시나요? 362 저는 스님에게 조금 배웠지만 제가 스님의 도( 道 )를 이야기할 입장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63 은 아니고, 학문적인 입장에서 다른 것이 아니라 스님에게 배웠던 학문하는 자 세는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탄허스님의 안목으로, 지금도 스님과 같이 강의하려고 신경씁니다. 스님이 보여주신 강의체제는 저에게 큰 자극을 주 었어요. 스님은 항상 주제를 던져 놓고 해석하시고, 3단논법으로 다시 회통을 쳐서 강의를 하셨습니다. 36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탄허스님이 다른 큰스님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글쎄요. 제가 사실은 서옹스님을 모셔 봤거든요. 그리고 성철스님 이 계시던 백련암에서도 상당히 있었죠. 그분들도 특장( 特 長 )이 있죠. 여러 큰스 님들도 나름대로는 특징이 다 있죠. 그러나 다른 것은 모르겠고 탄허스님처럼 선교를 회통치는 것은 보지 못하였어요. 그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제가 서 옹스님을 모시고 다녀 봤는데, 그 스님은 선지가 밝고 수준이 높으신데 그런 것 은 우매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거든요. 그런 수준은 선사들이나 가능하지요. 세 어른은 다 특장이 있어요. 그러나 어떻든 탄허스님의 회통은 대단한 것입 니다. 탄허스님의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지요. 저는 스님이 저에게 써주신 8폭 병풍은 갖고 있어요. 스님께서 소 강절( 邵 康 節 )의 시( 詩 ), 주역음을 쓴 것이 있습니다. 제가 찾아 뵙겠다고 연락을 하였을 때 소감은 어떠셨는지요? 저도 스님의 사상, 문학 등 모든 것을 찾아서 심층 연구를 해야 한 다고 봅니다. 그런 것이 필요하죠. 그런데 저와 스님과의 인연이 적고, 아는 것 이 별로 없어서 많이 망설였어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오늘 제가 말씀을 드린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64 것처럼 그 내용이 너무 적어요. 저는 스님이 위독하셔서 한양대병원에 계실 때 에도 찾아갔고, 어떤 면에서는 스님의 총애를 받았지만 스님에게 배웠다는 이름 을 걸 정도로 학자의 길을 잘 가고 있나를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364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65 진리와 도의 입장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분 36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대상 심백강 한학 수학, 연변대 박사, 대한상고사학회 부회장, 민족문화연구원 원장 일시 2011년 8월 5일 장소 양평 커피숍 한학자 출신으로, 상고 역사학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을 내신 선생님이 탄허스님과 인 연이 있다고 해서 찾아뵈었습니다. 한문으로 편지를 탄허스님에게 보냈다고 알고 있습니 다만. 그렇습니다. 저의 고향은 파주인데, 저는 부친으로부터 아주 어렸 을 적에 한문을 배웠어요. 그래서 다섯 살에 천자문을 떼고, 어쨌든 10대에는 사서삼경을 읽고 각처의 유학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유학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열여덟아홉 살 무렵에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그 시절 에는 지금과 같이 스님들을 대접하지 않았어요. 스님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그 냥 중으로 부르고 인식도 지금과 완전히 달랐지요. 바로 그때에 언론에 나온 스님이 탄허스님이었습니다. 조선일보에 선우휘와 대담한 기사가 나면서 널리 알려지고 그랬어요. 유교, 성리학의 궁극은 우주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66 인생관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런 의문을 갖고 탄허스님에게 편 지를 보냈지요. 편지는 어디로 보냈는가요? 편지는 대원암으로 보냈지요. 그때에 편지에다가 제 나이를 밝히 지 않았어요. 제 편지에 대해서 스님의 답장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답장이 아 주 높이는 문투로 보내셨습니다. 제 나이를 모르니깐, 후에 만나 뵙고서 알았지 만 저를 팔십 먹은 노인으로 알았답니다. 탄허스님이 회신한 편지를 보관하고 있나요? 그 편지를 제가 보관하고 있다가 누가 와서 탐을 내서 가져가 버렸 어요. 그러나 제가 그 편지를 외우고 있어요. 저를 노인으로 알고 높임 문장으 로 쓰셨는데, 그 첫문장의 한문의 뜻을 말해 보면 이랬어요. 보내주신 편지를 받 고라는 문투로 시작하였고, 실로 아름답게 합석해서 담화한 것 못지 않다고 하 시면서, 누가 편지를 주고 받은 것이 대담한 것에 못하다고 하겠느냐로 시작했 습니다. 보내 주신이라는 문투는 굉장히 높여서 보낸 것입니다.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저를 노인으로 공경한다는 입장에서 쓰셨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끝 내용은 중국 고사를 인용하셨는데 반가운 손님이 오면 방석을 깔아 주고, 그 손님이 가면 방석을 천장에 매달아 놓았다가, 손님이 다시 오면 그 방 석을 깔아 준다는 그런 기다림의 고사를 쓰시면서 방석을 준비해 놓았으니 찾아 오라는, 만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 대원암으로 찾아가서 만났는가요? 366 그럼요. 내가 대원암으로 가서 만났는데, 가서 내가 그 편지를 쓴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67 당사자라고 하니까 탄허스님이 깜짝 놀라셨어요. 노인인 줄을 알았는데, 젊은이 가 오니깐. 그러시면서 그 날에 그런 말씀을 했어요. 탄허스님 당신이 한암스님 과의 만남이 그렇더라구 하시면서, 스님이 한암스님에게 편지를 보낼 때의 나이 가 열아홉 살로 저와 같았다고 했어요. 이렇게 저와 스님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 습니다. 36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참으로 희귀한 만남이었군요. 지금 생각해 보면, 탄허스님은 저를 나이가 적은 젊은이로 대하지 않고, 학자로 대접하신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스님이 화엄경을 내시고 그 후에 월정사에서 화엄경 특강을 하셨지 않습니까? 그때 스님께서 저에게도 참석을 하 라고 그러셔서, 저도 그 특강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유가의 집안에서 나 고 배워서 불가의 법도, 큰스님에게 대접하는 예의범절 같은 것을 전혀 몰랐습 니다. 그때에 스님은 처소인 방산굴에 계시지 않았습니까? 다른 대중은 요사채 에 있었지만 저는 방산굴에서 먹고 자고 그랬어요. 어떤 때에는 스님과 같은 방 에서 자기도 하고, 옆방에서 자기도 하였지요. 이것은 스님이 저를 학자로 대접 하시면서도 격의없이 대해준 것입니다. 그리고 방산굴에 있다가 강의를 하러 가면, 저도 스님을 따라서 법당으로 가 는데 스님이 중문으로 들어가시면 저도 그 문으로 나가고 들어갔어요. 일반 대 중들처럼 옆문으로 들어가지를 않고요. 저는 그런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 면 탄허스님이 그런 것을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좋았을 터인데, 아무 말씀을 안 해 주셨습니다. 유교에는 그런 것이 없거든요. 나중에 그 강의 현장에 있었던 스 님에게 들었는데, 대중들 중에서 저에 대해서 말을 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던 모 양입니다. 그 강의 기록에 보면 저도 나올 것입니다. 그때에 수료증도 받고 그 랬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68 스님의 법문을 들어보셨나요? 그럼요. 스님이 삼보법회에 가서 법문을 하시면 저도 따라가서 강 의를 들었죠. 다른 곳의 법회에서도 법문을 하시면 저도 같이 갔어요. 대원암 시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스님을 뵈러 그곳을 왕래하였습니다. 그 시절에 만난 분 들은 누구였나요? 해운선생이라는 노인이 있었지요. 그 분은 대전 유성에 사시는 분 이었는데 정역( 正 易 ) 계통의 술객( 術 客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도 그 어른과 대 화를 하기도 했어요. 또 김민자라고 한문을 하는 분도 있었구요. 그리고 중앙대 교수를 하던 장화수라는 분, 고려대 한승조 교수도 왕래를 하였습니다. 그때에는 신문사에서도 오지 않았는가요? 제가 스님을 알게 된 이후에는 탄허스님께서 웬만한 일이 있으면 저를 불러요. 사람들이 오거나 특별한 일이 있으면 저를 배석하라고 전화가 옵 니다. 장화수 교수하고 이야기를 할 때에도 그렇고, 조선일보에서 인터뷰를 할 때에도 제가 배석했어요. 그때에 조선일보 이준우 문화부장이 스님과 대담을 하 였는데, 저를 불러 옆에 앉게 했어요. 그때에 탄허스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이준 우 부장이 다 못 알아들어요. 그렇다고 대담이 끝난 후에 다시 물을 수도 없잖아 요. 그러면 그런 것을 저에게 물으면, 제가 자세히 알려주었어요. 탄허스님은 사 람들이 잘 모르면 그것도 몰라, 혹은 멍충이라고 면전에서 막 면박을 주거든요. 스님은 또 아무개 국회의원이 온다고 하시면서 저에게 연락을 하여 제가 배석 을 한 적도 있어요. 이렇게 스님이 저를 배석시키는 것은 제가 참여해서 인사를 시키려는 것이 있고, 그리고 나도 이런 제자가 있다는 것을 은연중 알려주려고 368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여간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죠.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69 선생님은 한문을 잘하시니까 화엄경 교정을 볼 때에 참여하라는 말씀은 없었는가요? 화엄경 할 때에는 없었고, 그 뒤에 능엄경을 할 때에는 제가 관여 하였죠. 스님이 번역을 하시고, 그 원고를 갖고 만나서 원고를 읽어 나갔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들은 교열 겸 교정이라고 합니다만, 그것을 했어요. 스님이 저보 고 읽으라고 하지요. 그럴 때에 서로 간에 견해가 있으면, 저는 제 의견을 말하 36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지만 스님이 취사선택을 하였죠. 스님이 번역을 하실 때에도 간혹 저를 불러서 상의를 했어요. 그 시절에 탄허 스님은 대가였기에, 탄허스님과 같은 수준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어요. 별로 상의할 데가 없어요. 그래서 가끔 저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그랬습니다. 능엄경 번역, 교열에 선생님이 관여되었다는 것은 처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일을 한 곳은 대원암, 학하리였고 그때에 제가 잠실에 살았는 데, 제가 있는 곳으로 오시기도 하였죠. 능엄경을 할 때에는 저만 관여되었습니 다. 하루는 스님께서 저에게 보사( 輔 嗣 )가 무슨 벼슬이냐고 물어보시더라구요. 그 것이 능엄경을 번역하는데 거기에 나오거든요. 스님은 벼슬 이름으로 알고, 저 에게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보사는 왕필( 王 弼 )의 자( 字 )이거든요. 보사라는 것은 옥편에도 잘 안 나오는 것인데, 제가 그것을 알려드리니까 스님이 무척 좋아하 셨지요. 불경에도 유교 용어가 많이 나옵니다. 스님의 화엄경 서문에도 많이 나 오지 않습니까? 능엄경 이외에 관여하신 것은 없는가요? 그런 것과 관련하여 제가 스님의 작업에 유감된 일이 있습니다. 스 님이 거의 돌아갈 무렵에 주역선해 라는 책의 번역을 하셨습니다. 그때에 스님 께서 저에게 그것을 한번 봐달라고 하셨어요. 저는 한문도 하고, 현대적인 감각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70 도 있어서 그러신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 무렵에 저는 정신문화연구원에 들어가 있을 때인데, 무척 바빠지고 이것 저것에 관여되고 그래서 스님도 자주 뵙지 못 할 때라 그것을 못해 드렸어요. 스님께서 일부러 부탁한 것인데, 그것을 못해 드 린 것이 아쉽고 미안하고 그래요. 선생님은 경의문답 이라는 유학의 중요한 책을 펴내셨지요. 이것에 탄허스님과 관련된 것 이 있나요? 저는 10대에 사서삼경( 四 書 三 經 )을 다 배웠어요. 제가 열아홉 살 적 에, 탄허스님을 만나기 전에 유교 경전 13경(역경, 시경, 서경, 주례, 예기, 의례, 춘추좌씨 전,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논어, 효경, 이아, 맹자)에 대한 번역을 했어요. 그리고 그것을 1979년인가에 출간했어요. 그런데 그 서문을 탄허스님이 써주셨습니다. 스님은 서문에서 한문을 공부하 는 사람이 전혀 없는 세상에, 나이도 어린 사람이 이런 경학의 핵심사상이 담긴 13경을 번역했으니 이것은 가히 화중련( 火 中 蓮 )이라고 할 수 있다고 표현했어요. 저도 그때에는 불교를 전혀 모르던 시절이라, 그 뜻을 잘 몰랐지요. 나중에 스님 이 화중련 은 굉장히 칭찬한 말이라고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 서문의 원본을 제가 보관하고 있다가, 누가 빌려 달라고 해서 주었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어요. 스님과 선생님 사이에만 있었던 비사, 일화는 없었을까요? 그런 것이 하나가 있긴 있습니다만, 사실 이것은 오늘 처음 하는 이야기입니다. 스님이 아프실 때에 대원암으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스님께서 스님의 뒤를 이어서 나가는 것이 어떻냐고 하셨습니다. 그후에도 구파발의 진관 사로 오라고 그러셔서 갔습니다. 저녁에 갔더니 저에게 불교 공부를 본격적으로 370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정식으로 머리를 깎고, 제자가 되어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71 불교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죠. 사실 그 시절에 탄허스님과 같이 불교를 제대로 알고, 선과 교를 겸한 스님들 이 거의 없었지 않았습니까? 공자가 제자를 가르칠 때에도 제자들 중에서도 방 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 마루에만 들어올 수 있는 사람, 마당에만 있는 사람, 집 밖에 있는 사람 등 다양했어요. 37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어쨌든 저는 방산굴에서 스님과 같이 있으면, 그곳에서 먹고 자고 했고, 차를 끓여 내오면 그것을 먹고, 한문의 기초가 돼 있다고 해서 대우를 받았습니다. 스 님은 제가 공부한 것의 대강을 아니까 그런 제안(출가 권유)을 하신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때의 저는 푸른 꿈을 가질 때라, 그런 말씀에 대해서 답을 드리지 못 했습니다. 그 후에 또 대원암으로 부르시더라구요. 그래 갔더니만 스님은 저에 게 생각해봤냐구 하셨어요. 그렇지만 그때에도 답을 하지 않았어요. 탄허스님은 주역 원리에 의거하여 미래 예측을 하셨습니다. 혹시 선생님과 그런 대화를 같 이 나누지 않았는가요. 저와도 더러 그런 대화를 했죠. 탄허스님이 살아 계시던 그 시절만 해도 우리나라의 경제가 발전되지 못하였어요. 제가 탄허스님을 처음 만날 때에 는 스님은 자가용도 없었어요. 그러다가 어떤 스님이 포니를 사 주었고, 그 후 에는 중고차를 기증받았지요. 그런데 그때 스님은 한국 경제가 앞으로는 굉장히 좋아질 것이라고 누누이 말 씀했어요. 한국의 미래가 밝다고 하셨어요. 그때 스님은 무엇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느냐고 하셨냐면, 어린이들의 얼굴을 보라고 그러셨습니다. 어린이의 눈을 보라, 눈이 얼마나 초롱초롱하고 생기가 있느냐, 얼굴이 살아 있고 잘 생기지 않 았느냐고 하시면서 한국의 미래는 밝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스님은 지구가 멸망 한다는 것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성숙이라고 표현했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72 스님이 도의적 인재양성을 무척 강조하였다는 말씀을 들었나요? 스님께서 월정사가 아니고, 학하리라는 좋은 터를 잡은 것은 인재 양성의 뜻에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스님이 학하리에다가 인재양성을 위한 기틀을 만들려고 한 것은 불교 집안의 인재만 양성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 다. 스님은 국가와 민족의 인재를 양성하려고 한 것이지요. 탄허스님은 우리나 라가 통일된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고, 통일이 되면 필요한 인재를 미리 양성해 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통일 이후를 이끌고 나갈, 남쪽의 자본주의 북쪽의 공산 주의를 넘어서는 통일국가를 이끌고 갈 인재, 그런 인재를 키울 작정으로 학하 리라는 그런 터를 정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 시절에는 그때만 해도 자금이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시 절에 정치인도 그 정도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는데, 스님은 그런 원대한 꿈을 갖 고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면 스님의 그런 뜻을 계승해야 하는 것이 후학들이 할 일이라고 봅니다만. 유교 경전인 중용에는 효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은사인 그 분의 뜻 을 계승하고, 그 사업을 추진하여, 그 사업을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 러면 탄허스님의 뜻이 어디에 있었느냐, 그것을 알아서 하는 것이 효입니다. 탄허스님이 입적하셨을 때의 소회는 어떠하였나요? 저는 스님이 입적하였을 적에는 정신문화연구원에 근무하는 직장 인이었어요. 그래서 스님의 임종을 지켜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입적에 대한 감회 는 어쨌든, 옛날에 공자가 돌아가시니깐 태산이 무너지고, 기둥이 무너졌다는 말이 있었는데 저도 바로 그런 감회가 들었죠. 372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73 선생님의 인생에서 탄허스님의 존재는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탄허스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그냥 전통적인 유학자의 길로 가겠죠. 그러나 스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유불도라는 동양사상을 공부하고, 그 분야의 책을 낼 수 있었습니다. 유학에서 동양사상으로 저의 인식이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이죠. 제가 동양사상과 역사 분야에도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솔직 37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히 말하면 탄허스님의 영향에서 나온 것입니다. 선생님은 탄허스님을 어떻게 보시나요? 저는 탄허스님을 멋쟁이로 봅니다. 스님은 여름에는 간혹 하얀 두 루마기를 걸치시고, 돌안경을 쓰십니다. 매우 어울리지 않습니까? 제가 볼 때에, 그 시절에 스님을 보고 불교가 아니라 동양사상가라는 이야기도 나왔거든요. 스님이 유불선을 이야기하고, 주역과 노자의 말을 많이 하시니까 그 런 말이 나왔어요. 그러나 제가 본 견지에서는 스님은 불교를 근본으로 하신 분 입니다. 그래서 스님입니다. 스님을 모르는 사람이나 폄하하려는 사람들이야, 스 님은 입만 열면 논어, 맹자, 주역을 찾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러나 탄허스님이 논어, 맹자를 말하신 것은 그 말이 쉬우니까 포교하는 차 원에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스님은 늘상 부처님 경전을 대학원 수준으로 말 씀했고, 공맹은 중고교 과정으로 말씀했어요. 그러니까 스님은 불교를 체( 體 )로 하고, 나머지 유학과 선을 용( 用 )으로 활용한 분이지요. 불교는 스님에게서 근본 입니다. 스님이 쓰신 돌안경에 대해서 아시는 것이 있나요? 스님이 쓰신 것은 경주 남산에서 난 돌안경입니다. 그것이 그때 돈 몇십만 원을 주시고 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주 남산의 것을 돌안경에서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74 는 제일로 치지요. 스님은 원고를 많이 쓰시고, 하루 종일 책을 보시었기에 그 리 하였을 것입니다. 저도 스님의 영향을 받아서 중국에 가서 돌안경을 구해서 집에서 주로 썼어요. 그러면 돌안경이 눈에 그렇게 좋아요. 약간 무거워서 그렇 지, 하루 종일 쓰고 책을 봐도 피로한 줄을 모릅니다. 스님의 기일날에는 오대산 월정사에 가시고 하였나요? 저는 스님의 기일날에 가고 싶어도 가질 못했습니다. 제가 스님을 모실 때에 지금 오대산 스님들과 깊이 사귄 스님이 없어서 그런가 봐요. 그래도 제가 스승으로 생각하는 스님이고, 그래도 제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신 분인데, 앞으로는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탄허스님의 사랑을 받았는데, 앞으로 는 탄허스님의 뜻을 이어서 인재양성도 하려고 합니다. 탄허스님 탄신 100주년이라는 말을 들었지 않습니까. 어떤 생각이 듭니까? 김선생이 스님 탄신 100주년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찾아온다고 하 였을 적에 저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이 있고, 살아도 죽 은 사람이 있다고 노자가 말한 것이 있어요. 대통령이나 장관이 죽으면, 죽자 마 자 바로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경우가 있고, 죽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분이 있 습니다. 탄허스님은 저에게 당신은 통반장도 못했다고, 세상에서 벼슬이라고 그 것도 못 했다고 했습니다. 세속적으로 보면 그렇지만, 이런 분은 진리와 도의 입 장에서는 영원히 살아 있을 분이거든요. 탄허스님은 시간이 지나가면 갈수록 빛 이 난다는 말입니다. 100년이 지나면 당연히, 오히려 더 빛이 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100년이면 잊혀질 터인데, 스님은 더 빛이 나고 기억될 것입니다. 374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75 탄허스님의 유품을 보관하고 계신가요? 저는 스님이 주신 것 몇 점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이 쓰시던 만년 필, 입으시던 두루마기, 여름에 쓰시던 모자 등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스 님이 펴내신 책은 거의 다 갖고 있지요. 37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더운 날씨에 귀한 시간을 내주시고, 귀한 증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런 곳까지 내려오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연락을 주시 고, 저도 탄허스님의 뜻을 기릴 수 있도록 김선생님이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76 인재양성을 강조하고 실천한 스님 대상 윤창화 월정사 입산, 해인사 강원 수학, 민족사(출판사) 대표 일시 2012년 3월 22일 장소 민족사 윤창화 사장님은 탄허스님을 수년간 시봉하면서 공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선 오대 산 인연부터 말씀해 주세요. 저는 1965년 12월에 월정사로 입산했어요. 우리 동네에서는 한암 스님을 도인으로 여겼지요. 스님은 축지법을 쓰고 다니셨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한암스님의 상좌이신 탄허스님도 대단히 큰 고승이고, 한문에 능한 도인이라는 말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월정사로 간 것도 탄허스님 밑에서 한문 공부를 해 보고 싶다는 것이 있었지요. 입산한 직후에 탄허스님을 뵈었죠? 376 그럼요. 그 당시 탄허스님은 월정사에 계셨습니다. 우리 대중들은 조실스님으로 불렀죠. 공식적으로는 주지이셨지만, 우리는 그렇게 불렀어요. 그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77 러다가 스님은 동국대 대학선원장으로 가시게 되었고, 그 후에는 일이 있을 때 에나 가끔 내려오셨어요. 선생님은 탄허스님의 시봉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요? 그것이 언제부터인지는 가물가물합니다. 아마 1967년일 것 같은데 그 때 방산굴에 주역에 능하신 해운거사라는 분이 오셔서 두 달간을 머물렀어요. 그 37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러자 그때에 시봉을 하던 삼보스님이 혼자서는 밥상 두 개를 나를 수가 없으니 까 제가 그 상을 같이 나르게 되면서 시작됐어요. 이를테면 보조시봉을 한 것입 니다. 그런데 1968년 겨울에 울진 삼척의 무장공비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 사건이 일어나기 한 달 전쯤 탄허스님께서는 방산굴에 있던 화엄경 원고를 영은사로 옮 겨 놓으시고는 월정사를 떠났어요. 대중들은 스님이 원고를 옮겨 놓고 월정사를 떠나시는 것을 대단히 섭섭하게 생각하였지만 어른 스님이 하시는 것이라 어떻 게 할 수가 없었죠. 무장공비가 출몰할 때에 저는 월정사에 있었는데 그때 군인 들이 월정사에 주둔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들은 잘 때에도 몽둥이를 머리맡 에 두고 자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1969년 초에 그 사건이 마무리되자 탄허스님 이 월정사로 돌아오셨는데, 와 보니 당신의 거처인 방산굴이 아주 난장판이 되 어버린 것을 보게 되었던 것이죠. 그러니 스님은 월정사에 계실 마음이 없어지 게 되었지요. 그래서 얼마간 계시다가 월정사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시게 되 었는데 그 무렵부터 제가 본격적으로 시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탄허스님은 언제 월정사를 떠나셨고 어디로 가셨는가요? 그때가 아마 1969년 2월 경으로 보입니다. 당시 탄허스님께서는 2월 말 경 월정사를 떠나서 맨 처음으로 가신 곳이 강릉포교당입니다. 그곳에서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78 약 한 달간 계셨는데 그때 포교당 주지는 법등스님이었어요. 그후에는 삼척 영 은사에서 한 달, 그 후에는 서울로 가서 강법해스님의 형님 집에서 한 달, 이어 서 진관사에서 두 달, 여름 무렵에는 대전 학하리에서 서너 달을 지내시다가 그 해 가을에 월정사가 주지문제로 복잡해지자 그것을 수습하기 위하여 다시 월정 사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실 때에는 책을 갖고 다 니시지 않았어요. 단출하게 싼 짐을 제가 가지고 다니는 정도입니다. 평소에는 좌선을 하시고,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랬죠. 아마 그때부터 스님은 출판문제를 고민할 겸 바람 쐴 겸 해서 다니신 것 같아요. 그러면 그때부터 1969년의 1년간은 월정사에서 시봉을 한 것이군요. 그래요. 스님 시봉을 할 때에는 저는 딱 새벽 세 시 직전에 일어나 서 부엌에 가서 스님의 양치물과 세숫물을 떠서 앞마당에 대령합니다. 그러면 스님은 그 물로 세수를 하시는데, 특이한 것은 스님은 세수를 하신 후에 수건을 사용하시지 않고 그냥 얼굴을 말리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수하신 후에는 스님 은 좌선하셨고, 번역 같은 일을 하셨지요. 스님 시봉을 하게 되면 큰절에서 하는 예불, 대중 일에는 꼭 참석하지 않아도 되었어요. 잠은 방산굴 시자실에서 자고, 하루 세 끼 스님 공양을 챙겨서 가지 고 가고 그랬지요. 스님으로부터 아침에 서장( 書 狀 )을 배웠어요. 한 30분 정도 하 였을 것입니다. 스님에게 배울 적에는 그 전날에 배운 것을 무조건 외워서 바쳐 야 합니다. 외우지 못하면 다시 책을 들고 나오는데 그런 때는 좀 민망하죠. 부 끄럽기도 하고요. 378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79 탄허스님은 1970년 초, 부산 삼덕사에 가서 화엄경 교열 작업을 하셨는데 거기에 참여하 셨는가요? 참여하였지요. 시봉으로. 당시 스님은 영은사에 있는 화엄경 원고 를 싣고 부산 송정에 있는 삼덕사로 가셨습니다. 그것은 화엄경 교열 작업을 하 시기 위해 간 것이죠. 그런데 저는 그때 새벽에 방산굴에서 스님의 아침 공양을 37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준비하러 내려오다가 그만 미끄러져서 다리가 부러졌어요. 그래서 진부에 있는 병원에서 20일 동안 있다가 나와서 월정사 동별당에 두 달 누워 있었어요. 깁스 를 하였으니, 삼덕사로 갈 수가 없었지요. 스님은 가시면서 저에게 언제 오라, 치료를 잘 하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그냥 떠나셔서 마음이 좀 허전했어요. 두 달간 요양을 하자 조금씩 걷기 시작했어요. 당시 월정사 주지는 강법해스님인데 내가 완치되자 나에게 원주 소임을 보라 고 그래요. 그래서 할 수 없이 한 달 동안 해보니, 도무지 나의 적성과는 맞지도 않고 또 탄허스님을 따라가서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한 문 공부를 하려면 아무래도 스님을 모시고 살면서 해야한다고 생각했지요. 제가 본래 한문공부를 하려고 입산했기 때문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스님 시봉하는 것 을 좀 힘들어했는데, 저는 그런 것을 크게 느끼지 않았어요. 공부를 하자면 시 봉을 하는 것은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 법해스님에게 부산으로 가겠다고 하 니, 차비를 조금 주더라구요. 그 길로 강릉을 거쳐서 부산 삼덕사로 갔습니다. 삼덕사에서의 정황을 회고하여 주세요. 그때가 1970년 4월 중순인가 그럴 것입니다. 삼덕사에 갔더니 벌 써 화엄경 교열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어요. 각성스님, 무비스님, 통광스님, 비 구니 성일스님, 김상숙씨, 인허스님이 와서 있었고, 얼마 후에 자민스님, 혜등 스님도 오고 명호근씨도 잠시 와서 있었어요. 최근에 입적한 정무스님도 간혹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80 왔었습니다. 삼덕사는 김귀덕이라는 보살의 절이었는데, 스님이 화엄경 교열 작 업을 할 수 있게 해 드린 것이지요. 그 보살은 아마 얼마간의 생활비도 댄 것 같 은데, 대중들의 생활, 운영비 등은 모두 우담거사(당시 법천스님)가 화주를 해서 마 련했고, 저는 단순 시봉이었지요. 그 작업을 할 때에는 노스님을 중심으로 해서 각성 통광 무비 스님, 김상숙 이렇게 네 사람은 항상 있었어요. 당시 각성스님은 역경위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각성스님에게만 보시를 3만 원 드렸을 것입니다. 탄허스님께서 화엄경 교열 작 업은 각성스님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김상숙씨는 숙대 국문과 출신으 로 국문법을 담당했지요. 그리고 거기서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 특강이 있었어 요. 강의는 무비스님이 요청해서 했어요. 무비스님은 탄허스님에게 배우려는 입 장이 강했어요. 선생님은 그 작업에 계속해서 참여했나요? 제가 교열볼 정도는 못 되고 시봉만 했는데, 그해 가을 무렵에 작 업이 끝났어요. 그 후 강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노스님께 통도사 강원에 가겠 다고 말씀을 드리니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더라구요. 시봉하는 놈이 간다니 기분 이 썩 좋을리 만무하지요. 결제 3일 전에 통도사 강원에 입방을 해보니 공부 방 법이 도무지 맞지를 않아서 한 달 있다가 나왔지요. 그때 통도사 강주는 홍법스 님, 중강은 종범스님이었어요. 통도사에서는 그날 배운 것을 외우지 않더라구 요. 역시 한문경전을 배우자면 노스님 밑에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삼덕사로 돌아와서 시봉을 하였지요. 380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81 탄허스님은 그 후에는 서울로 오셔서 본격적인 출판 작업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실마 리를 풀어주시지요. 1971년 1월 무렵, 탄허스님, 법천스님,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 이 출판을 위해서 서울에서 와서 처음 있었던 곳이 홍은동의 홍은사라는 보살 절입니다. 아주 신심이 있는 보살이었어요. 거기에서 세 달인가를 있었는데, 그 38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때까지는 화엄경 원고를 가져오지 않았어요. 노스님은 우담거사와 출판문제로 자주 외출을 하고 그랬죠. 그때 거기에 지금 수덕사 방장이신 설정스님도 계셨 던 기억이 납니다. 그해 초파일을 홍은사에서 지내고, 숭인동에 있는 비구니 절인 청룡사로 가게 되었어요. 청룡사 주지인 김윤호스님은 본래 홍상근이라는 비구니 스님의 상좌 인데 해방 전부터 상원사 한암스님에게도 자주 다녀가서 탄허스님과는 지면이 있었지요. 그 무렵 청룡사에는 비구니 강원이 있었는데 강사를 하던 명성스님이 운문사 강사가 되어 내려가자 김윤호스님은 후임 강사를 찾고 있었어요. 그래서 탄허스님께 청룡사에서 강의를 좀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는데, 스님으로서는 강 사를 할 입장도 아니었고 지금 화엄경 출판 작업을 위해 서울에 와 있어서 그에 응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마땅히 있을 곳이 없어서 탄허스님은 후임 강사를 추천해 주겠다는 약 속을 하고 우선 청룡사로 들어가셨어요. 청룡사에서는 방 두 칸을 썼는데 한 칸 은 탄허스님이 쓰시고, 한 칸은 법천스님, 나, 편집을 맡았던 손창대씨가 같이 썼어요. 스님은 파계사의 도원스님을 불러서 강사를 해주면 좋겠다고 말씀했어 요. 도원스님께서 처음에는 할 듯 하다가는 비구니 강원이라서 그러셨는지 2~3 일 후에는 할 수 없다고 그랬어요. 탄허스님의 입장이 난감해졌지요. 그때 누가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심사에 있던 자민스님이 강사로 떠올랐어요. 자민스님은 영은사 수도원 시절에 탄허스님께 배운 적이 있었지요. 그래서 스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82 이 편지를 써서, 강사를 부탁하였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지요. 자민스님은 강의도 잘 하시고, 인정도 많고 자상해서 학인들이 잘 따랐지요. 그래서 청룡사 강원이 안정되어서 스님도 마음에 부담을 덜었지요. 청룡사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우선 화엄경 출판을 위한 기초 작업을 하셨지요. 본격적인 출판을 하기 전에 편집의 원칙, 방향 등을 세우고 그랬죠. 그 작업의 실무자로 온 사람 이 손창대씨입니다. 책에 쓰일 부호, 표기, 원칙을 검토하고 그 후에는 원고를 가져와서 일일이 한 장 한 장 작업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노스님은 거기에서 동양학 특강을 열었습니다. 여름에 1주일에 한 번 씩 서너 달을 했어요. 완전히 오픈했는데 청룡사 대중은 100% 듣고 외부에서도 많이 왔지요. 전창열 명호근 선생 등 스님을 따르던 재가자들이 많이 왔지요. 청중이 한 200여 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한여름이라 더워서 2층 보제루에서 했 어요. 하루에 두 시간 반 정도를 했는데, 흑판 강의였어요. 그때 쓴 강의노트가 어디에 있을 것입니다. 탄허스님의 칠판 강의는 순전히 초서( 草 書 )입니다. 그래서 초서를 모르면 필기가 불가능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대로 그려가지고 강의가 끝 나면 별도로 여쭈어서 정자( 正 字 )를 확인하고 그랬는데, 지금 초서 몇 자 아는 것 은 그때 배운 것이지요. 당시 강의는 대단했습니다. 탄허스님은 3~4개월 동안 두 시간씩 강의하셨지만, 메모노트 없이 하십니다. 줄줄 외우시는데 감탄할 정 도입니다. 아마 고승들 가운데 그런 분은 드물 것입니다. 저는 스님에게 본격적 인 강의를 처음 들은 셈이지요. 거기에서 중국어도 배웠다는 말이 있습니다. 382 탄허스님은 언제인가는 중국이 개방이 된다고 강조하셨어요. 그리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83 고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미리 중국말을 배워 두 면 좋을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중국어 선생, 화교 여자 선생을 불러서 배 웠어요. 한 10여 명이 들었나 그랬죠. 저도 당연히 들었고, 그때 총무원에서 국 장으로 근무하였던 법주사 혜정스님도 와서 열심히 들었지요. 그때 스님은 중 국말을 조금 하셔서, 그 선생과 서로 질문을 하고 그랬지요. 그 뒤에 나는 YMCA 38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에서 1년 동안 중국어 학원에 다니기도 했지요. 탄허스님은 청룡사에서 나오셔서 보문난야라는 곳으로 옮겨 가셨지요? 제가 1972년 2월 말경에 해인사 강원으로 갔는데 4월인가 소식을 들으니 이문동 보문난야로 가셨다고 하더군요. 제가 해인강원 13회입니다. 강 원 동기가 무관스님, 수경스님, 장윤스님, 향적스님입니다. 저는 강원을 마치고 나서, 월정사로 일단은 갔다가 다시 서울로 와서 탄허스 님을 찾아갔습니다. 해인강원에 가서도 공부를 해 봤지만, 강원 공부가 겉핥기 식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스님 밑에 있어야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겠다 싶어 또 다시 서울 이문동에 있는 보문난야로 온 것이지요. 탄허스님의 성격이 어떤 때 에는 불같아서 모시기가 어렵지만, 그런 것을 감수하면서 배워야 된다고 생각하 고 온 것입니다. 보문난야에 와서 인사를 드렸더니, 스님은 반색을 하시더군요 그때 거기에는 각수스님이 시봉을 하면서 계시더라구요. 그리고 공양주는 비구니 자하스님이 했어요. 자하스님은 그때 나이가 50이 넘었지만 탄허스님 화엄경 불사에 공양 주를 자청해서 정성껏 했어요. 거기에서 각수스님과 함께 서장을 배웠지요. 거 기에서는 외우지는 않았어요. 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못 되어서였지요. 각수 스님은 얼마 후 선방에 간다고 떠났구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84 보문난야에서의 특기사항은 어떤 것입니까? 거기에서 화엄경 출판을 위한 조판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보니깐 손창대씨가 조판된 교정지를 갖고 왔다 갔다 그랬어요. 그리고 그곳 근 처에는 박초당 여사의 집이 있었어요. 길 건너 5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어요. 그래서 스님은 그 선생 집에 자주 가셨어요. 스님은 거길 가시면 두세 시간을 계 시는데 저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기다렸지요. 그러다가 보문난야를 매각하 고 정릉에 가서 한두 달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를 초당 여사가 와 보더니, 큰스 님이 이런 허름한 집에 있으면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해서 석파정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 것이지요. 석파정은 세검정에 있던 대원군 별장이었지요. 그래요. 그리로 가게 된 것은 그곳의 주인이 쌍용양회 김성곤 사장 인데, 부인인 김미희 여사와 초당 선생은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석파정 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1973년 5월인가 그 무렵입니다. 석파정은 매우 큰 한옥이었는데 아주 넓고, 심산유곡에 있는 것 같았어요. 거기서는 처음에는 노스님, 나, 자하스님 이렇게 딱 세 명이었어요. 거기서도 화엄경 출판 교정을 보는데 내가 화엄경 원전을 읽 고 탄허스님께서 대조하여 교정을 보는 방법이었는데, 무지하게 면박을 당했어 요. 간혹 교정을 읽다가 모르는 한자가 나오면 이것도 모르냐고 하시면서 심하 게 구박을 주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요. 제가 강원은 나왔지만, 각성스님 과 같은 수준이 되지는 못하잖아요. 그래서 시봉하기가 싫어져서 난승스님에게 시봉을 부탁해 놓고 월정사로 내려와 버렸지요. 그래서 그해 8월에는 삼보스님 과 함께 보름 동안 울릉도 여행을 다녀오고 늦가을까지 월정사에서 지냈어요. 384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85 그런 구박을 받고 도망간 것이네요. 도망을 가서 월정사에 있었는데 그해 가을 서울에 계시는 탄허스 님으로부터 갑자기 전보가 날라왔어요. 주지인 희찬스님과 삼보스님에게 속히 올라오라는 것이었습니다. 3일 만에 희찬스님이 내려오셔서 나를 부르시더니, 서울에 올라가서 노스님을 모시고 살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또 석파정으 38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로 갔는데, 올라와 보니 조판기계인 사진 식자기계가 한 대 들어와 있었어요. 그 리고 무비스님, 연관스님, 시몽스님, 성파스님이 교정을 보고 계시더라구요. 강 법해스님, 명호근 선생 등도 참여하였지요. 법산스님도 인근 절에 있으면서 다 녔어요. 거기서 직접 사진식자기로 조판을 하고 교정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이지요. 종래 위탁에서 직영 체제로 전환된 것입니다. 그렇게 된 저간의 사정 이 있지만 생략하고. 저는 시봉 겸 그 업무를 관리하기 시작하였지요. 탄허스님은 당시 큰스님이었지만 안정된 작업 공간이 없어, 여러 곳을 옮겨 다녔는데 그 에 대한 불만은 없었는가요? 그런 것을 평소에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홍은사, 석파정에 손님들이 찾아와서 이렇게 누추한 곳에서 계시냐, 종단에서 큰스님의 대우가 말이 안 된다는 등의 말이 나오면 그제서야 약간의 불만의 말씀은 하셨지요. 석파정에 있다가 대원암으로 이주하여 작업을 하였지요. 석파정에서 안암동 개운사에 있는 대원암으로 옮긴 것은 1974년 2월 초입니다. 그리 간 것은 당시 총무원장인 경산스님의 배려입니다. 대원암으 로 가기 이전에 흥국사와 적조암을 추천해서 제가 탄허스님을 모시고 답사해 보 았어요. 그런데 흥국사는 너무 멀어서 기술자들이 출퇴근을 할 수가 없었고, 적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86 조암은 절 입구의 500미터는 길이 좁아서 사식기계가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그 래서 누가 조정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흥국사와 대원암을 바꾸게 된 것입니다. 그 역시 손경산스님이 조정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원암에 있는 비구니 스님 들이 흥국사로 가고 우리가 대원암으로 들어갔어요. 그런 비사가 있었군요. 그래서 그해 2월에 석파정에서 교정팀과 기술자, 그리고 기계시설 을 갖고 대원암으로 이사했어요. 대원암은 작고 신도도 없는 그런 암자입니다. 그러나 화엄경 출판 작업을 하기에는 흥국사, 적조암보다는 훨씬 적합했습니다. 대원암에서도 사식, 교정, 시봉, 관리 등 모든 일은 제가 다 맡아서 하게 되었습 니다. 그런데 가만히 조판 일정을 계산해 보니 기계 한 대 갖고는 3년이나 걸릴 것 같았어요. 그러면 그 3년 동안 대중들의 식생활비만 해도 적지 않아서 감당 할 수가 없다고 판단했어요. 그리고 교정 인력이 3년 동안 아무 탈 없이 간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님께 말씀을 드려서 작업을 1년 안에 끝낼 수 있 게 하기 위해서 사식기계를 두 대를 더 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식자기 세 대를 동원해서, 주야간을 풀가동해서 사식 작업을 했습 니다. 기계 한 대당 기술자 두 명을 두고 주야간으로 하였어요. 한 사람은 아침 9시부터 저녁 8시까지, 다른 사람은 저녁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교대로 작업을 하게 했습니다. 꽤 큰 조판소였습니다. 그리고 교정팀에는 무비스님, 일장스님, 연관스님, 시몽스님, 강법해스님, 비구니 경일스님, 혜선스님이 있었 어요. 일장스님, 연관스님, 시몽스님은 아마 무비스님께서 권유해서 왔을 것입 니다. 조판기술자가 여섯 명, 교정한 것을 수정하는 아가씨가 네 명이 있었구요. 주 386 야간으로 기계가 돌아가고, 수정하는 각 팀별로 일이 쉴새 없이 진행되었습니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87 다. 교정은 공식적으로 5교까지 봤어요. 모든 것이 수작업으로, 아주 타이트하 게 진행되었지요. 무엇보다도 탄허노스님께서 교정보시는 데 차질이 없도록 하 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일의 최우선이었습니다. 대중들은 새벽 4시에 기상해서, 그때부터 교정을 시작하였고 밤 11시까지 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그 일을 하면 서 신경을 쓰고, 과로해서 코피까지 쏟은 적이 있습니다. 38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그때에도 공양주는 자하스님이 자청해서 하셨고, 노전은 인허스님, 행자가 한 두 명이 있어서 모두 20여 명의 대중이 있었어요. 노스님만 독방을 쓰시고, 나 머지 대중은 몇 개의 큰방에서 같이 지냈어요. 그때 제 나이가 스물세 살이었습 니다. 그 나이에 모든 업무를 총괄했는데, 제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고 때마침 할 사람이 없어서 부득이 제가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최옥화(일초)라고 고대 국 문과 2학년에 다니던 여대생이 스님을 존경하여 머리를 깎고 있었어요. 최옥화 씨가 시봉을 담당하게 되니 한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아침에 는 탄허스님이 대중들에게 노자 도덕경, 논어 등을 강의해 주었어요. 대원암에 계실 적에 고려대에 가서 특강을 하였지요? 일주일에 한 번씩 저녁 공양을 하신 후에 고려대학교에 가셔서 장자 특강을 하셨습니다. 한 30여 명의 교수들이 들었어요. 그때 스님은 장자 강의를 신이 나셔서 하였는데, 마치 춤을 추듯이 하셨습니다. 저는 맨날 따라가서 들었 지요. 그 강의는 아마 이동식 박사가 주선했을 것입니다. 그 시절에는 대원암이 북적북적했습니다. 화엄경 출판 작업도 그렇고, 스님이 거기에 계시니까 기자, 언론인들이 많이 찾아왔어요. 특히 진보적인 인사들이 많이 왔습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88 작업은 언제 끝났나요? 작업은 1974년 10월 말경에 끝났어요. 작업이 끝나자 기술자도 거의 다 나가고, 대중들도 많이 가서 남은 사람은 저하고 일장스님, 일초스님, 인허스님과 공양주가 남았지요. 그러다가 일장스님도 갔지요. 그러면 언제부터 인쇄를 했고 어떻게 진행되었는가요? 1974년 10월에 조판은 완료하였으나 출판비가 없어서 더 이상 진 행할 수 없었어요. 확보된 자금이 없으니 막연했지요. 조판할 때에는 부산 해운 대호텔 사장(김진선씨)이 당시 돈으로 매달 100만 원을 보내 주었어요. 당시 그 사 장님은 사업이 어려웠는데도 끝까지 후원해 주었지요. 그리고 울산에 박원만성 (당시 조흥은행장 고태진씨 모친) 보살님이 500만 원인가 희사했고 김미희 여사(김성곤씨 부인)가 500만 원인가 희사했지요. 월정사에서 희찬스님이 가끔 오셔서 탄허스 님에게 얼마를 내놓았지만 저는 그 액수를 모르지요. 저는 탄허스님에게 돈을 타서 운영하였기 때문이지요. 재정이 부족하여 탄허스님도 고민을 많이 하셨지 요. 희찬스님, 삼보스님, 전창열 변호사, 명호근 회장도 많은 고민을 했어요. 저 는 걸핏하면 출판 방안에 대해서 탄허스님께 이런 저런 말씀을 드렸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지요. 더욱이 문제는 사진 식자로 조판한 것이 점점 탈색되고, 습기로 인해서 인화 지 상태가 나빠지게 되었어요. 더 이상 방치할 수가 없어서 필름 작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외주를 주면 제판비(필름작업)가 500만 원이나 들 것 같아서, 직접 촬영 기계를 사서 기술자 한 명을 고용해서 약 두 달 동안 작업을 마쳤어요. 들어간 돈은 약 150만 원 정도였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출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 어요. 출판을 하자면 종이값, 인쇄비, 제본비 등 약 3천만 원이 필요했습니다. 388 그러나 이런 비용이 탄허스님에게는 없었습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89 화엄경은 1975년 여름에 출간이 되었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는 예약 출판이라는 것이 있었을 때입니다. 미리 예약을 받 아서 출판하는 방법인데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해 보니, 화엄경 출판도 예약을 받 아서 하면 어떤가 하는 방안이 떠올랐어요. 그래 노스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그 리 해 보라 고 하셨어요. 저는 200질은 예약이 들어오지 않을까 하였어요. 정가 38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를 15만 원으로 정하고, 예약가는 10만 원으로 해서 안내지를 만들어서 전국 사 찰에 보내고, 불교신문에 광고를 한 번 하였더니 두 달만에 180여 질이 신청이 들어왔어요. 예약금이 약 1,800만 원이 들어왔지요. 그러나 여전히 1,200만 원 이 더 필요하였지요. 예약을 받았으므로 어떻게든지 완간시켜야 하므로 작업을 강행했지요. 우선 출판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갖고 있던 식자기계 두 대를 팔고, 한 대만 남기기로 했어요. 한 대는 추후에 스님의 사집, 사교, 노자, 장자 등의 작업을 하실 것을 대비해서 남겨둔 것이지요. 두 대를 팔았더니 500만 원이 나 왔어요. 그래도 500만 원 이상이 모자랐지요. 그런 비사가 다 있었군요. 화엄경 한 질은 한장 체제로 47권입니다. 1질에 47권이라는 것은 지금도 방대하여 엄두를 못 내는데, 당시로서는 정말 어마어마한 대작불사입니 다. 탄허스님 한 개인의 힘으로 무려 1질에 47권이나 되는 방대한 책(화엄경)을 번 역하여 간행까지 한다는 것은 금세기 출판 역사에서는 드문 일일 것입니다. 그 래서 제가 2010년 근현대 한국 불교 명저 50선 을 쓰면서 탄허스님의 신화엄 경합론 을 넣었습니다. 조계종단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전창열 명호근 선생도 매주 대원암으로 왔는데, 그 분들의 외호가 많았어 요. 그들은 서울법대 출신인데 신심도 대단하고, 탄허스님을 사부로 생각하는 분들이었어요. 희찬스님, 삼보스님도 자주 들렸구요. 당시 삼보스님은 월남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2

390 에 참전하여 받은 보상금 50만 원을 출판비로 내놓았지요. 1975년 4월 초, 한국제지회사에 가서 현금을 주고 종이 계약을 했습니다. 맞 는 종이를 별도로 주문한 것이지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인쇄 작업에 들어갔습니 다. 저는 매일같이 인쇄소에 출근하다시피 하였습니다. 간혹은 일초(최옥화) 비구 니도 같이 가기도 했죠. 제본도 한식 제본이어서 수작업으로 했어요. 제본에 약 두 달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족한 재원은 어떻게 해결이 되었는가요? 작업을 진행하고는 있었지만, 부족한 돈을 해결하는 방안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 월정사는 가난해서 기댈 형편도 안 되었어요. 그러다가 하루는 동국대에 가서 돈을 빌리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때 동대 총장은 이선근 박사인데, 이 분은 탄허스님을 존경하는 입장이어서 가능하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내가 탄허스님께 제 생각을 말씀드렸더니, 스님은 멍하니 아무 말씀도 없이 천장만 쳐다보고 계시더라구요. 평소 스님은 고승의 반열에 있었고, 돈과는 거리가 멀게 지내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으로서 학 교에 가서 돈을 빌려달라고 말한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래 서 재차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말씀드렸지요. 가시기만 하면 제가 말씀을 다 할 터이니, 동대 총장과 만나시기만 하면 된다고 하였지요. 겨우 묵시적인 동의 를 받아서 그 자리에서 동국대 총장 비서실로 전화를 걸었지요. 탄허스님께서 내일 동국대 총장을 뵙고 싶어하니 시간이 되겠느냐고 했어요. 그래서 다음 날 오후 두 시에 동국대 본관 2층에 있는 총장실로 찾아갔습니다. 가서는 두 분의 간단한 상견례를 하고 난 후에 내가 이선근 박사에게 전후 사정 을 이야기했지요. 제가 탄허큰스님을 모시고 온 것은 화엄경 출판비로 약 만 원이 부족한데, 동국대에서 빌려주시면 3개월 이내에 갚도록 하겠다는 것이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391 었지요. 그런데 이선근 총장은 단도직입적으로 학교 돈은 법적으로 도저히 빌려줄 수 가 없다고 그래요. 단 1원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아찔한 것이 가슴이 꽝 하 고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어렵게 노스님을 모시고 갔고 또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재차 지금 작업 중인데 돈이 없으면 책을 가져 나올 39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수 없다고 하면서 선처를 부탁했어요. 그랬더니 한참을 생각하고서 총무처장을 올라오라고 하더니 무슨 방법이 없겠는지 상의를 하더군요. 저는 속으로 조마조 마하였지요. 총무처장도 어렵다고 하면 방법 없이 노스님(탄허스님)을 모시고 돌 아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총무처장이 뜻밖에도 가능하다고 하면서 조금 기다라고 그러더니 잠 시 후에 경리과에서 돈을 가져왔습니다. 자기앞수표, 어음, 현금 조금 해서 가 져왔는데, 자기앞 수표는 봤어도 은행도어음이라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저걸 돈으로 믿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총무처장이 이 어음은 몇일 날 은행 에 가지고 가면 지불해 준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 자리에서 영수증을 쓰고 돈을 가지고 노스님을 모시고 왔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다 노스님의 법력이지 제가 무슨 재주가 있었겠습니까? 6월달에 빌린 돈은 8월 말 경에 갚았지요. 신화엄 경합론 서문에 보면 인쇄로부터 제책에 이르기까지는 융자와 선불예약금으로 하게 된 것이다 라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 융자는 동대에서 빌린 것을 뜻합니다. 탄허스님은 제본에 대단히 신경을 쓰셨지요. 책을 예약한 분들이 책을 받고서 파본이 있으면 절대 안 된다고 해서 저는 제본소에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작업 을 했어요. 사람을 사서, 한 권 한 권 페이지를 확인했는데 별도로 사무실을 마 련하여 그곳으로 책을 옮겨서 매일 나가서 확인을 했습니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392 많은 곡절, 고난을 겪고서 출판이 되었군요. 그래요. 그래서 그해 8월에 책이 나왔어요. 책이 나오자 예약한 사 람 중에 지방에 있는 사람은 화물로 발송하고, 서울에 있는 사람은 와서 찾아가 라고 하였어요. 그리고 탄허노스님께서는 김진선 부산 해운대관광호텔 사장, 박 원만성 보살, 김미희 여사, 박초당 선생, 무비스님 등 교정자와 그리고 그간 물 심양면으로 도와준 이들에게 한 질씩 기증했습니다. 동국대 이선근 총장에게도 감사의 뜻으로 한 질을 기증하였구요. 탄허스님은 그 책의 발간 공로로 제3회 인촌문화상을 받았지요. 그 상은 그해 9월 경에 받았어요. 시상식은 3 1빌딩 25층에 있는 인촌문화상사업회에서였지요. 동아일보에서는 스님의 인촌문화상 수상에 대하 여 사설까지 썼습니다. 금세기 드문 업적이라고 아마 그 상은 당시 동아일보 논설위원인 안재준 선생이 주선했을 것입니다. 상금이 300만 원인가 그랬는데, 그것은 그때 제일 많은 상금일 것입니다. 그때에는 서울시내 한옥집 웬만한 것도 200만 원이면 살 때입니다. 탄허스님의 평소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요? 스님은 복고적 개혁을 꿈꾸었던 분입니다. 요순시대의 왕도정치를 그리워했다고나 할까요. 권모술수가 판치는 세상이 아니라, 왕도정치가 구현되 어서 많은 백성들이 다 잘사는 그런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 면서 스님은 그런 사회가 만들어지도록 당신이 뛰어들어야겠다는 의식이 있었 어요. 그런 사회가 되도록 초석을 놓고, 정신적인 이데올로기를 제공해야 한다 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392 또 스님은 훌륭한 인재양성, 즉 인격과 도덕적 가치관을 동시에 갖춘 인재를 길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393 러내야 한다고 생각하셨지요. 인간형성이 되면 법이 그다지 필요없다고 말씀하 셨지요. 그렇다면 탄허스님을 어떤 분으로 봐야 합니까? 그것은 표현하기가 어렵죠. 스님은 대단한 학자였고 석학이었고 39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강사였지만, 그것을 지향하지도 않았고, 향상일로( 向 上 一 路 ), 일초직입여래지( 一 超 直 入 如 來 地 ), 그리고 말이 끊어진 자리를 추구하셨지만, 선사에 얽매이지도 않으셨 죠. 제가 최근에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가 있었는데, 스님은 선승, 학승이었지 만 나름대로 사상가를 지향하지 않았나 그렇게 봅니다. 불교적으로는 화엄의 법 계연기, 특히 사사무애( 事 事 無 碍 )사상을 바탕으로 제법( 諸 法 ), 즉 모든 존재들이 공존공 생하는 것을 생각하셨고, 도교적으로는 무위지치( 無 爲 之 治 )를 생각하셨고, 또 유교적 으로는 인의( 仁 義 )와 도덕, 예의에 바탕한 이상( 理 想 )사회를 생각하셨는데, 굳이 말 한다면 요순시대로 돌아가고자 하는 복고적 개혁주의라고 할까요. 그리고 도덕 을 바탕으로 한 인간성 회복, 인간형성, 인격형성에 뜻을 두었다고 봅니다. 이 렇게 본다면 사상가적인 면모를 갖고 있었다고 보여지기도 합니다. 탄허스님은 교육을 무척 강조하셨지요. 맞습니다. 스님이 화엄경 번역을 하신 것도 사실은 오대산 수도원 의 학인들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수도원을 여신 것도 단순히 스님들 의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스님, 재가자, 여성, 법대생, 유생 등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배웠어요. 말하자면 불교와 동양적인 가치관을 가르치고, 그들이 인재가 되어, 한국불교와 우리나라를 이끌어 가야 한다고 보신 것입니 다. 그래서 저는 스님의 그런 것을 교육결사의 형태였다고 이름을 붙인 적이 있 어요. 그래서 제가 10여 년 전에 김광식 선생께 오대산 수도원과 김탄허 라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394 글을 발표하시도록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아마 오대산 수도원을 조명 한 논문으로는 처음일 것입니다. 스님은 교육을 대단히 강조했어요. 스님은 늘상 공자가 16년을 주유천하한 다 음에 노나라에 와서 70명의 제자를 길러낸 것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공자가 정 치를 그만두고 교육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오늘날 공자가 있게 된 것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로 본다면 장구한 역사의식을 갖고 있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대산 수도원에 대해서 자주 말씀하였는가요? 그럼요. 수도원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지요. 화엄경 작업을 하 시면서도 간혹 하셨구요. 그때에 스님은 당신이 화엄경 출판이 끝나면 오대산 수도원 같은 것을 다시 해야 하겠다, 재정이 확보만 되면 또 하겠다 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지요. 스님은 오대산 수도원에 대한 미련을 갖고 계셨지요. 여건이 된다면 대원암에 오대산 수도원의 후신인 중앙수도원 같은 것을 만들겠다는 말 씀도 하셨습니다. 유성 학하리에 있는 자광사에 인재양성의 거점을 만들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1978년에 환속을 해서 그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릅니다만 아 마 그러셨을 것입니다. 사실 학하리 땅과 조그만한 집 계약은 제가 처음 스님을 모시고 가서 했습니다. 그것이 언제인가 하면 1975년 가을일 것입니다. 탄허스 님이 매입하기 전에는 불교학자인 한길로 선생이 거기에서 생활을 했어요. 부 인, 가족과 함께요. 그 집은 방이 4~5개가 있었는데 방도 크고 시골집치고는 규모가 있었습니다. 학하리는 1969년 여름에 제가 탄허스님을 모시고 2~3개 월 살았습니다. 그때부터 인연이 있었지요. 394 그 땅과 집의 주인은 유성 청은의원 원장이었는데, 1975년 가을에 아무 연락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395 없이 찾아갔어요. 탄허스님을 모시고 갔는데 그 분은 탄허스님보다 나이는 10 여세가 많았고, 탄허스님을 참 존경했어요. 갑자기 갔더니 의아해 하시더라구 요, 탄허스님께서는 연배이면 맞절을 하셨는데, 인사를 나눈 후 제가 그 분께 그 땅을 노스님께 양도해 달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랬더니 난감해 하시더군요. 누차 말씀드렸더니 억지로 긍정을 하셨는데 이번에는 땅 값이 문제였습니다. 그 원장 39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님이나 스님은 가격에 대해서 말씀할 입장이 아니지요. 인격적인 분들이었기에, 그래서 제가 300만 원을 드릴 터이니 적지만 꼭 넘겨주세요 하였어요. 그 땅 가 격은 500만 원은 가는 것이었어요. 원장의 젊은 부인은 파는 것에 반대하였구 요. 그래서 제가 재차 그 땅의 용도, 탄허스님의 미래 구상 등을 설명하면서 부 탁하였더니 마지 못해서 파신 것입니다. 그래 그날로 계약을 하고, 돈도 미리 어 느 정도 준비해 가지고 갔으므로 그 자리에서 바로 지불했습니다. 번개치기를 한 것이지요. 그리고 1976년 봄에 공사를 해서 1차로 증축을 했는데, 그 공사는 배정신스님이 담당했어요. 스님은 권력과 명예를 싫어하였지요. 그렇습니다. 스님은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셨어요. 공부를 하지 않 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공찰 주지 하는 것을 싫어하고, 주지를 하 지 말라고 하셨지요. 그런 것을 하면 공부 못 한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어요. 주지를 하면 사람 버린다, 공부 못 한다 고. 스님은 명예와 권력 같은 것은 절 대 추구하지 않았어요. 1960년대 월정사 주지로 있었으나, 이름만의 주지이고 실제 운영은 만화스님이 다 알아서 했어요. 그리고 스님은 잔잔한 정은 없지만 커다란 측면에서의 생각, 배려는 많았어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396 스님을 학문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보십니까? 학자적인 입장에서도 그런 분은 드물다고 봅니다. 스님이 쓰신 화 엄경 원고만 6만 2천 장이고, 그 밖에 사교( 四 敎 ) 사집( 四 集 ) 등을 합하면 무려 10만 장이 넘어요. 어느 학자가, 누가 이렇게 쓸 수가 있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님은 번역만 하신 것이 아니고, 그 책을 출간까지 하셨어요. 이것은 탄허스님의 법력과 덕망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유교의 사서( 四 書 )를 마치고, 그리고 불 교에서 사교( 四 敎 )를 마치고 나서도 공부하겠다는 생각이 없거나 참선하러 가지 않으면 죽일 놈이라고 하셨어요. 사서( 四 書 )를 마치고 나면 저절로 한문, 도학 공 부에 뜻을 두어야 하고, 강원에서 사교를 마치고 나면 저절로 경( 經 ) 공부를 하거 나 선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잘못 가르치고, 잘못 배웠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상과 정신, 가치관을 가르치지 못한 것이고, 사 명감을 갖도록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가르친 선생도, 배운 제자도 모두 내쫓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스님은 단순하게 글자만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입지( 立 志 )를 할 수 있 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전을 공부할 때에 종지( 宗 旨 ), 즉 핵심을 파악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탄허스님의 기억력은 대단하셨지요? 제가 스님 시봉을 할 때 하루는 스님은 어떻게 해서 장자, 논어, 대학, 중용, 화엄경 등 모든 것을 다 외우십니까, 요즈음도 그런 것을 외우시거 나 복습하십니까? 하고 여쭈었어요. 그랬더니 스님은 나에게 야, 이놈아. 그 쓸데없는 짓을 왜 하느냐 고 하시면서, 강의를 하다 보면 저절로 생각이 나서 쓸 396 뿐이라고 그러셨어요. 젊은 시절에 수없이 읽다 보니 저절로 다 외워진 것이라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397 고 볼 수 있어요. 스님은 타고난 천재인데, 노력도 대단하십니다. 후학들이 이 런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탄허스님의 본질, 구현 등이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고 봅니다만. 탄허스님의 위상, 가치 등이 아직 역사 속에서 100% 자리매김되 지 못한 것은 우리 불교가 지나치게 선종 중심으로 흘렀기 때문입니다. 전통적 39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인 선사만 중시하는데 이런 일방적이고 편협적인 가치관이 변해야 탄허스님의 진면목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불교가 교학의 중요성에 눈 뜨게 되면 그 대 표적인 연구 대상이 탄허스님이 되겠죠. 탄허스님은 돈오점수적인 입장이었지요? 스님은 성철스님이 강조한 돈오돈수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이 었어요. 스님은 보조 지눌적인 입장(돈오점수)입니다. 그 당시에 성철스님은 돈오 돈수를 강조하고, 법맥도 태고국사를 강조하는 입장이었어요. 성철스님은 선문 정로 를 출간하기 전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그러나 탄허스님은 돈오돈수는 문제가 있다고 말씀했어요. 탄허스님은 보조국사의 정혜쌍수에 의지해서 공부 를 해야 한다 그리고 돈오점수적이고 화엄선적인 입장이었어요. 스님은 한암 스님께서 1937년에 펴낸 보조법어 를 번역하시고, 그것으로 강의도 하셨어요. 탄허스님은 평소에 어떻게 지내셨는가요? 스님은 늘상 좌선을 하셨어요. 또 화엄경을 번역, 교정하시는 시 간 외에는 항상 앉으셔서 무언가 사색을 하셨습니다. 사람들하고 농담, 잡담 같 은 것도 잘 안 하십니다. 시간이 아까워서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스님은 잡글 쓰 는 것을 아주 싫어했어요. 잡서를 보는 것도 시간 낭비라고 말씀하셨어요. 책이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398 라면 스님은 오로지 경전과 경서( 經 書 ) 중심이었지요. 성현( 聖 賢 )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쓰신 것은 비문만 쓰셨지요. 잡글은 백 년도 못 가지만 비석 의 글은 천 년을 간다고 하였지요. 이런 면에서 스님은 상당히 역사의식이 있었 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인재양성과 교육에 노력하신 것이지요. 복고적이면서 도 진보적인 개혁의식이 있었습니다. 하여간 스님은 대단히 특이한 분이었음은 분명해요. 선생님은 탄허스님을 모시면서 배운 것이 많겠네요. 교육에서 청소년 시절에는 위인전을 읽게 합니다. 그 이유는 위인 전을 읽고 그와 같은 인물이 되라는 뜻이지요. 훌륭한 분의 삶과 가르침은 후대 인들에게 귀감, 지침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탄허큰스님의 탄신 100주 년을 기념하는 것도 그 분의 삶을 통하여 훌륭한 인격을 갖추자는 것입니다. 오늘 정말 다양한 증언 감사합니다. 이런 기록이 많아야 탄허 연구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추후에도 생각이 나면 전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탄허스님의 연구가 부진한데 이런 증언이 언제인가는 빛을 볼 날이 올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398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399 이제는 탄허스님 같은 분이 나올 수 없어요 39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대상 최옥화 고려대 졸업, 대원암에서 출가, 대전에서 수행 중 일시 2011년 7월 29일 장소 네이커피숍 대전 대덕 선생님은 탄허스님의 화엄경 교정 작업에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탄허스님과의 인 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요? 저는 탄허스님과의 인연이 개인적으로 깊어요. 제 언니(최정화)가 고 대를 나왔어요. 그런데 언니가 64학번으로서 고려대 불교학생회의 일원으로 1965년 7월에 월정사로 수련회를 가서 사고를 당할 때에 살아 남았어요. 그러 다 보니 자연적으로 탄허스님과 인연이 깊었고, 저도 고대 국문과를 1972년도 에 들어가서 언니 영향으로 불교학생회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고려대 학생들이 월정사에서 수련회 도중에 사고당한 일이 있었지요. 언니가 그 당사자이 었군요. 탄허스님이 언니에게 월정사에 와서 수련회를 하라고 그랬대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400 그래서 불교학생회는 참가할 학생들을 모집해서 갔는데 수련회를 할 때에 원보 산스님이 돌아가셔서 상원사에서 제사를 지냈고, 거기에 참여한 학생들이 내려 오다가 사고를 당했어요. 언니는 어느 스님과 먼저 내려와서, 월정사에서 공양 준비를 하다가 사고 소식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고려대 불교학생회는 여름에는 수련회를 월정사로 가고, 겨울에는 송광사로 가고 그랬어요. 송광사 법흥스님이 고대 54학번 국문과 출신인 연고로 그랬어요. 하여간에 언니와 스님이 인연이 깊어서, 저도 탄허스님이 석파정에서 화엄경 출판 준비를 하실 때에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어요. 스님은 대학생을 좋아하고 그러셨어요. 그 무렵에 저는 불교에 관심이 많아서 승가사에 왔다 갔다 하면서 상륜스님의 유발상좌가 되었을 때입니다. 탄허스님은 그 무렵에 개운사 대원암으로 화엄경 출판 작업 장소를 이전하였지요? 그래요. 그것이 1974년 여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대원암은 고 대에서 아주 가깝지요. 고대에 있는 인촌묘소 근처로 담을 넘어서 가면 저는 5 분 이내에 대원암에 갈 수 있었어요. 그래서 시간이 나면 자주 가서 탄허스님을 뵈었습니다. 그때에 제가 학생 신분으로 가서 보면 무비 시몽 돈연 성일 일장 경희 스님 등이 스님과 함께 교정을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탄허스 님이 그 원고를 저에게 주시면서 한번 읽어보라고 그러시더라구요. 스님은 제가 원고를 읽었더니 잘 읽는다고 하시면서 시간이 나면 와서 교정을 보라고 그랬습 니다. 그래서 그 후로 수업이 없거나 시간이 나면 대원암에 가서 교정을 보았습 니다. 그런데 그 무렵에 일초라는 이름으로 비구니 스님이 되지 않았나요? 400 제가 탄허스님 옆에서 교정을 보고, 스님의 법문을 듣다가 스님에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401 게 영향을 받아서 나도 공부를 해서 부처가 되어 보겠다고 해서 1974년도 5월 초, 개교기념일 무렵에 머리를 깎았어요. 탄허스님은 법문을 하시면, 누구나 다 성불할 수 있다는 선법문을 하셨어요. 스님은 주객이 끊어진 자리, 시공이 끊어 진 자리를 항상 찾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항상 말씀하 셨어요. 그래서 저는 젊은 혈기에, 객기에 나도 공부를 해서 부처가 되고 싶다 401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요. 그때에 저는 순진해서 학교 교무과에 가서 머리를 깎고도 학교에 다닐 수 있 냐고 물어보았더니 상관은 없다고 그래요. 제가 머리를 깎겠다고 하니까 탄허스 님은 처음에는 말리셨어요. 그러나 저는 고집이 세고, 한번 무엇이 꽂히면 몰입 하는 성질이라, 탄허스님이 머리를 깎아주는 조건으로 그리했어요. 그런데 저는 비구니 상좌가 되는 것은 싫어서, 탄허스님 밑에서 머리를 깎고 1974년도 12월 경 영은사에서 탄허스님에게서 사미니계만 받고 행자로 있으면서 대원암에서 스님을 도와 교정을 보았죠. 머리를 깎은 후에는 대원암을 주 거주지로 해서 학 교를 다니고 그랬습니다. 그때 지장암에서 온 스님이 원주를 보았는데, 그 스님 과 같은 방을 썼습니다. 그러면 머리를 깎은 후의 하루 일과는 어땠나요? 새벽 네 시 무렵에 일어나서, 스님 방으로 가서 문안 인사를 드리 고 나서 그때부터 바로 교정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아침 공양 때까지 교정을 보고, 학교에 수업이 있으면 학교에 가고, 돌아와서도 화엄경 교정 작업 을 하였어요. 그때에 탄허스님의 동생이신 인허스님이 화엄경 불사의 외호를 위 하는 기도를 계속하였지요. 제가 있을 적에 탄허스님께서 아침 예불을 하신 기 억은 저에게는 없어요. 새벽 네 시부터 바로 교정 작업을 하셨습니다. 그때에는 교정 출판 작업이라는 큰불사에 전심전력을 할 때라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때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402 창화스님은 출판에 전념하고 그래서 스님이 외부에 가시면 제가 시봉을 해서 모 시고 다녔어요. 진관스님의 상좌가 아니었나요? 그게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제가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선방에 가 보겠다고 해서 석남사 선방에 가서 여름 안거 한 철을 났습니다. 제가 선방에 가 기 위해서 진관스님의 상좌로 이름만 걸었기에 그런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진관스님은 가끔씩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곤 합니다. 교정 작업 시, 그 시절에 대원암에 왕래한 사람들은 누구였는가요? 자민스님이 완교 작업 시에 조금 참여하였고, 여익구씨는 1976년 후반부터 스님과 인연이 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장화수 교수도 왔고, 심 백강이라는 사람은 상투를 틀고 왔다 가고 그랬지요. 또 전창열, 명호근씨도 오 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기억나는 것이 교정 작업에 참여한 대중들을 스님은 봉 암사패라고 그러셨어요. 봉암사 선방에 있다가 교정 작업에 참여하였다고 해서 그리 불렀어요. 무비 시몽 연관 스님 등이 봉암사 선방에 있다가 오셨어요. 그때의 대원암은 인법당이 있었고, 인법당 뒤에 슬라브 집이 한 채 있었어요. 그 집의 마루 우측에 있는 방이 스님의 방이었고, 왼쪽 편의 방이 객실 비슷하게 쓰였어요. 해운 선생님 같은 분이 오시면 그 방에서 주무시기도 하였는데, 그 방 에서 대중 전체가 모여서 더운 여름날에 선풍기를 틀어 놓고 교정 작업을 하였 습니다. 그 후에 제가 대원암을 가 보았더니 많이 바뀌었더라구요. 스님은 대원암 시절, 고려대에 가서 특강을 하였지요? 402 제가 지켜본 것은 정신의학회가 주관해 고대 강의실을 빌려서 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403 님에게 장자 강의를 부탁한 것입니다. 스님은 바쁜 와중에서도 고대 불교학생회 에서 특강을 요청하면 가셔서 하셨어요. 스님을 모시고 몇 번 하였죠. 고대 개 교기념일에 고대 불교학생회에서 스님을 모시고, 대강당에서 특강을 하면 강당 이 다 찰 정도로 학생들이 와서 듣고 그랬습니다. 학생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고, 고대 한승조 교수는 스님을 찾아오고 그랬어요. 403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1975년도 초에 화엄경 불사가 완료되었는데, 그 화엄경 서문에 보면 수고한 사람의 명단 에 일초가 나옵니다. 이에 대한 소회는 어떤가요? 거기에 제 이름이 나온 것은 저로서는 과분한 것이지요. 물론 저는 한다고 하면 열심히 해요. 그러나 잠깐 2년 정도 작업을 하였는데, 그런 것으로 이름이 올라간 것은 과분하죠. 이름이 날 만큼 고생을 한 것도 아닌데. 대원암에서 화엄경 불사를 마치고 나서, 선생님은 어떻게 되었는가요? 불사를 모두 마치고, 스님은 인촌상을 타셨어요. 그때 스님이 인 촌상을 받으러 가실 때 저도 시봉하고 따라갔죠. 그 무렵 스님은 대원암, 대전 학하리, 월정사 등지를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 대중들은 다 흩어지고, 대원암에 는 스님, 저, 창화스님이 같이 있었죠. 그러다가 저는 학교를 졸업하고(76.2), 1976년도 여름에 석남사 가서 한 철을 지내고 나서 본격적으로 불교 공부를 한 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전 학하리에 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여익구씨가 스님을 시 봉하고, 모시고 다녔어요. 저는 학하리에서 스님에게 대학 을 배우고, 배운 것 을 외워서 바치면서 공부를 하였구요. 그때 스님은 사교과정의 경전을 번역하신 것을 교정하셨는데, 저는 조금 참여하였고 무비스님, 시몽스님, 윤창화씨가 주 로 도와 드린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 준비를 스님은 평소에 다 하셨는데, 스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404 님은 아주 부지런하셨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어떤 연고로 환속을 하였나요? 제가 학하리에 있고 스님이 내려오셨을 적에, 제 남편이 된 사람이 학하리로 와서 스님을 만났습니다. 그 후로는 대전에 있는 남편의 집에 스님이 자주 가셨어요. 그러면 저도 스님을 모시고 같이 가게 되었죠. 제 남편(동원 이정 래)은 그 당시 유학자로, 사주를 보는 사람으로 유명했어요. 그리고 한의학의 원 리에 대한 책도 많이 쓰고, 명리학과 관상학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는데 국운, 민족의 장래에 대한 것(기문둔갑)을 예측하고, 그래서 스님과는 친하게 지냈습니 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탄허스님이 없을 적에도 학하리에 저를 만나러 오게 되 면서 인연이 되어, 제가 환속을 하고 1977년도에 결혼을 하고 대전에서 살게 되었지요. 제가 절에서 나갈 때에는 스님에게 말씀을 드렸는데, 제가 나가는 것 에 대하여 서운해 하셨다는 말을 그 후에 들었어요. 스님이 저를 무척 아끼셨거 든요. 그랬군요. 혹시 학하리에 계실 적에 탄허스님으로부터 그곳에 인재양성을 하는 수도원을 세우겠다는 말을 듣지 않았는가요? 그런 것에 대하여 스님은 늘 생각을 하셨어요. 그리고 가끔 말씀도 하셨구요. 그러나 실행은 하시지 못하였습니다. 학하리 터를 좋은 터라고 하시 고, 그곳에 수도원을 세우면 좋겠다는 정도였어요. 하여간에 스님은 공부하는 사람들을 무척 아끼셨어요. 제자들이 열심히 하면 칭찬을 해주셨지만, 공부를 안 하는 스님들에게는 야단도 안 치고, 무관심하였지요. 사람들을 야단칠 때에 는 멍청이라는 표현을 하셨어요. 404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405 탄허스님에게 배운 것이나 감명 깊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글쎄요. 제가 지금도 스님에게 배운 것을 생각해 보면, 탄허스님 처럼 훌륭하게 강의하신 것을 보지 못했어요. 스님은 모든 것을 다 외워서 하셨 어요. 유교, 불교, 도교 등의 모든 것을 인용하시고, 그것을 즉석에서 판서를 하 시면서 폭포와 같이 강의를 하셨습니다. 스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저는 탄허스님 405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과 같이 법문하는 것을 못 보았어요. 스님처럼 그렇게 다양한 근거를 갖고, 알 아듣기 쉽게 법문하는 것을 못 봤어요. 물론 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럴 정도가 되기까지 스님은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하셨겠어요. 그리고 스님은 심해( 心 海 ) 법문을 주로 하셨어요. 스님은 경을 위주로, 경 공부 를 하라고 법문하시지 않고 마음공부, 참선 공부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스님은 불법을 말씀하실 때에 보면 인용하시는 것의 근거가 아귀가 맞았습니다. 그러니 까 사람들이 스님의 법문을 듣고 감명을 받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도 스님을 뵙 고서 부처가 되겠다는 객기로 머리를 깎지 않았습니까? 제가 화엄경 교정을 보 려고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스님은 예전에는 비구니들도 공부를 많이 해서 도 인이 된 경우들이 있었다고 하시면서, 여자들도 성불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셨어 요. 스님은 늘 불법을 이야기하실 때에 언어도단( 言 語 道 斷 ), 심행처멸( 心 行 處 滅 )을 주 제로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대학생이나 공부하는 사람을 만나면 상 좌보다 더 좋아하시고 그랬어요. 저는 스님이 1977년 화엄경 특강을 하실 때에 가서 듣지 못한 것을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탄허스님의 마음공부에 대한 내용은 탄허사상의 재조명과 관련하여 중요한 지적입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탄허스님의 훌륭한 점은, 법문의 결론을 마 음공부로 강조하시면서 누구나 부처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음 밖에 법이 따로 있는 것( 心 外 無 法 )이 아니다, 마음을 찾는 정진을 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마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406 음자리에 대한 표현을 많이 하셨어요. 이런 말씀을 하실 때에 육조단경, 혜능, 홍인의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어요. 스님은 항상 장광설( 長 廣 舌 )로 온갖 경을 갖고 말씀하시지요. 불교에서는 다양 한 경전, 유학에서는 사서삼경, 도가에서는 장자를 인용하시면서도 결론은 마음 공부해서 깨달음의 도를 이루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탄허스님이 마음 법문을 많이 하였다는 것은 새로운 증언입니다. 그러면 탄허스님의 정체 성과 관련한 생각을 피력해 주세요. 스님은 단순한 강사, 강백이 아닙니다. 물론 삼보법회에 가셔서 원각경, 대승기신론 같은 경전을 강의하셔서 그렇게 부를 수는 있을 것입니 다. 그때에도 제가 모시고 가 보면 스님은 강의를 알아듣기 쉽게, 이해가 가도 록 하셨어요. 그렇게 강의하신 강백이 없었어요. 유불선을 회통하고, 그것을 갖 고 선법문을 하신 탄허스님 같은 분은 지금은 없다고 봐요. 스님은 초발심자경 문 부터 강원의 모든 교재를 다 번역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스님 법문의 결 론은 시공이 생기기 이전의 자리, 우주가 생기기 이전의 자리를 늘 찾아야 한다 는 마음 법문이었어요. 스님은 삼보법회 때나 월정사에 가셔서 상당법문을 하실 때에도 보면 항상 선 ( 禪 )을 주제로 법문을 하셨습니다. 스님은 한 생각을 바꾸면, 백척간두에서 진일 보하면 그 자리에 도( 道 )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탄허스님의 어록이나 인용하신 경전에서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는 스님을 모시고 군부대, 석남사, 법주사에도 가고 그랬어요. 그때에 보면, 스님은 글씨를 잘 쓰시고 그래서 유묵을 남기고 그랬어요. 스님은 406 그럴 때에 금강경오가해의 야부선사의 게송을 자주 쓰셨어요. 그것은 죽영소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407 진부동( 竹 影 掃 階 塵 不 動 ), 월천담저수무흔( 月 穿 潭 底 水 無 痕 )입니다. 그 뜻은 대나무 그림 자가 섬돌을 쓸어도 먼지 하나 움직이지 않고, 달빛이 호수 밑을 뚫어도 물결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이 구절이 생각나는군요. 스님은 늘 붓 글씨로 마음자리에 대한 것을 많이 썼습니다. 그리고 향상일로( 向 上 一 路 )도 자주 쓰 셨어요. 이것도 선의 공부를 지속적으로 하라는 것이 아닙니까? 저의 집에도 스 407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님의 이 글씨를 액자로 담아 놓은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가고 없어요. 탄허스님은 장광설을 하셨지만, 스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은 스스로 공 부한 것이 있으니 그리 할 수 있는 것이죠. 하여튼 스님은 늘 마음공부를 강조했 어요. 스님 법문의 귀결은 마음공부, 진정한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이었어요. 스 님의 경공부라는 것도 이 마음공부와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할 것입니다. 스님의 탄신 100년이 얼마 안 남았어요. 선생님이 오신다고 해서 생각을 해 보았어요. 몇 년 전에 스님 입 적 20주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행사를 할 때에 저도 갔거든요. 그래서 생각을 해보니 스님 탄신 100주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세월의 무심함을 알게 되었어 요. 저는 이곳 대전에 살다 보니 기일날에는 자광사에 가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참! 스님은 스님의 생신날에도 오후불식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방일하시지 않은 스님의 업적을 잘 정리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최근에는 스님 생각을 많이 하고, 불교 공부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제 남편이 타계를 한 이후에는 시간도 나고 그래서 저는 산을 좋아해서 등산도 다 니고, 불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어요. 몇 년 전에 우연히 무비스님의 서장 강 의 테이프를 듣게 되었어요. 탄허스님의 제자인 무비스님이 계속해서 공부를 하 시고, 대중들을 위해서 전법하시는 것을 보니 보기가 좋더라구요. 무비스님 강 의 테이프를 듣다가 스님의 생각이 더욱 났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지만 탄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408 허스님의 강의 실력을 재삼 느끼기도 했어요. 스님이 예전에 강조하시던 마음공 부에 대한 생각이 나서 저도 지금은 화엄경, 법화경을 다시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대산 월정사에도 가셨는가요? 그럼요. 저희 고대 불교학생회에서는 매년 사고가 난 7월 10일날 의 그 주 일요일에는 월정사를 꼭 갑니다. 저도 가지요. 그 사고터에 연화대라 는 기념비석이 있지 않아요. 그곳에 씌어진 글은 김영두 교수가 지은 것이고, 글 씨는 탄허스님이 쓰셨어요. 저는 월정사에 가면 제 친정에 온 것 같습니다. 오 대산에 가면 서대를 거쳐서 비로봉과 보궁으로 등산도 하고, 나물도 뜯고 그러 지요. 그리고 제가 최근에 나온 그리운 스승 한암스님 과 새로 편집한 한암일발록 을 읽어 보았어요. 저는 큰 감동을 받았어요. 한암스님이 정말 훌륭한 스님이었 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암스님의 사상을 대변하는 승가오칙 같은 것을 지금 의 스님들이 이어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실, 한암스님에 대한 것을 탄 허스님이 하셨어야 하는데 제가 모실 때에는 한암스님에 대한 것은 별로 언급하 지 않으셨거든요. 지금이라도 한암스님의 유지를 받들어야 하고, 그리고 탄허스 님의 유지를 월정사에서 받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스님들이, 수좌들이 공부하는 도량으로 월정사, 상원사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습니다. 최근에 오대산 차원에서 한암 탄허 스님을 정리하는 작업도 그런 지적에 부 합될 것입니다. 한암스님의 승가오칙에서 특히 경전 공부를 하라는 것에 대해서는 탄허스님도 말씀을 하셨어요. 탄허스님은 선방에서 불립문자라고 하는 것에 대 408 하여 강한 비판을 했어요. 문자도 모르면서, 무식한 사람들이 구들장에 앉아만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409 있어서는 도를 만날 수 없다고 그랬어요. 공부도 하고, 참선도 해야 한다는 말 씀이었어요. 최근에 일본에 해일사고가 나면서, 탄허스님의 미래 예측에 대한 것에 대해서 사람들의 관 심이 되었어요. 저는 스님이 예언자로 인식되는 것이 아쉽고, 그것은 잘못되었다 고 봅니다. 스님은 미래와 정치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그러나 그것은 스님이 처 409 탄 허 큰 스 님 의 재 가 제 자 들 음에 유학부터 공부를 하신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유학에서는 수신제가 치국평 천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직전에 스님께서 저희 집 에 오셔서 제 남편과 그런 대화를 하시는 것을 제가 잠시 들은 적은 있습니다. 제가 볼 때에 스님이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78년 이후, 말년이었을 것 입니다. 제가 대원암에 모시고 있을 적에는 그런 것을 저는 못 보았어요. 탄허스님 같은 인물이 다시 나올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요. 한암스님, 탄허스님이 계시던 그 시절에는 수행자가 있었어요. 옛 날 큰스님들은 제대로 수행도 하시고, 제대로 공부를 하였지만 요새는 스님들이 직업인이 되었다고 봐요. 이런 것은 환경 즉 문명의 발달과 물질의 풍요가 공부 에 지장을 주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단순하게 살 수 있었지만, 요즈 음은 단순하게 살 수가 없어서 공부에 장애가 되지 않았나 봅니다. 오히려 재가 자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 같아요. 이제는 탄허스님 같은 분이 나올 수 없어 요. 스님은 불립문자를 말하시면서, 문자도 모르면서 구들장을 지고 앉아 있으 면 나올 것이 없다고 그러셨어요. 스님은 경전 공부와 참선을 병행하라고 그러 셨어요. 경전에 너무 매달려도 안 되고, 불립문자를 지나치게 강조해도 안 된다 고 하셨지요.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410 오늘 귀한 증언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한 말들이 탄허스님의 진면목과 사상을 조명하는 일에 도움 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제가 사는 곳까지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석남사 선방에 갈 때에 스님이 주신 화두가 여사미거 마사도래( 驢 事 未 去 馬 事 到 來 )입니다. 이제껏 챙기지 못한 이 화두를 챙기면서 불교 공부를 다시 하고 싶 어요. 힘써서 좋은 자료집을 만들어 주시고, 추후 행사할 때에 연락을 주세요. 410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411 411 후 기 후 기 필자는 지난 2년간 탄허큰스님의 일화, 가르침, 사상 등을 찾기 위해 전국을 순방하였다. 그 결과 탄허, 그 위대한 족적 발간이라는 대작불사에 참여하였 다. 이로써 필자는 오대산 불교와의 인연이 간단치 않았음을 새삼 절감하였다. 동시에 탄허 찾기를 통해 한국 근현대 불교사 및 오대산 불교사상의 연구가 절 실함을 확인하였다. 필자는 10년 전부터 오대산 불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근현대 공 간에서 종정을 네 차례나 역임한 고승, 도인이었던 한암큰스님에 대한 관심에서 촉발된 것이다. 그러한 결과 필자는 2006년에 그리운 스승, 한암스님 을 펴냈 다. 이 책은 한암스님의 가르침과 한암스님이 갖고 있던 근현대 불교사에서의 위상을 진솔한 구술 증언으로 담아내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후 필 자는 한암스님과 탄허스님을 시봉하면서 오대산 재건불사를 담당한 주역이었던 만화스님의 수행과 가르침을 정리한 오대산의 버팀목 을 2011년에 펴냈다. 이 책은 가람불사의 정신, 은사에 대한 헌신, 상좌에 대한 가르침 등의 전범을 보 여주는 증언 자료집이다. 그리고 필자는 2012년에는 한암스님의 선 계승자이면 서 철저한 두타행을 하여, 신비적인 수좌로 알려진 보문스님의 실체를 복원한 보문선사 를 펴낼 수 있었다. 그런데 필자는 위와 같은 오대산불교에 관련된 10년간의 구술 채록 작업을 할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412 때에 늘 접하였던 고승이 있었으니 그는 탄허큰스님이었다. 한암 희찬 보문 스님의 증언 그리고 오대산 불교의 이야기에는 탄허스님이 빠짐없이 등장하였 다. 탄허스님을 제외하고는 오대산 불교를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그래서 필자는 탄허스님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졌다. 탄허스님은 지금껏 대강백, 대학자, 역경가 등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사실이었 다. 그런데 필자는 오대산 불교의 증언 작업을 하면 할수록 탄허스님의 기존 정 체성에 대하여 깊은 의아심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탄허스님에 대한 총체 적인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요컨대 탄허스님에 대한 광범위한 자료수집 및 분석, 연구 등이 절대적으로 요청되었던 것이다. 탄허스님이 오대 산 불교의 중심임을 자료적으로, 학문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필요함을 인식하였 다. 나아가서는 한국 현대불교사에서 탄허스님이 갖고 있는 역사성, 정체성의 재정비가 시급함도 알게 되었다. 이런 배경하에서 탄허스님의 탄신 100주년, 입적 30주년을 기하여 탄허스님 을 다시 찾기, 재조명하기 차원에서 본 구술 증언 자료집이 기획, 준비되었다. 이런 대작불사에 필자가 참여하게 되고, 필자의 손에 의해 귀한 내용들이 정리, 분석될 수 있음을 큰 영광으로 여긴다. 지금까지 탄허스님에 대한 다양한 책, 자 료집, 연구논문이 있어 왔지만 본 책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 각된다. 첫째, 탄허스님이 오대산 불교의 중심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 주는 자료집 이다. 탄허스님은 오대산으로 입산, 출가하였고 오대산에서 수행을 하였다. 그 러면서 시대의 선각자, 시대의 선지식이었던 한암스님의 가르침과 사상을 전수 받았다. 그리고 오대산에서 수도원을 열면서 후학을 가르치는 등 스님의 활동은 오대산을 떠나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로써 탄허스님이 오대산 불 412 교의 중심이면서, 탄허스님의 불교 현장이 오대산이었음을 역사적으로 웅변하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413 는 책이라 말할 수 있다. 둘째, 이 책은 탄허스님의 정체성을 재인식케 하는 귀중한 자료집이다. 지금껏 413 후 기 탄허스님은 유불선을 회통한 강백, 화엄경을 역경한 고승이라는 관점에서 접근 되었다. 그러나 본 책에 수록된 다양한 증언, 회고를 접하면 그런 기존 인식은 편협한 것이 저절로 입증된다. 탄허스님에게는 선사, 철저한 수행자, 교육가, 사 회운동가, 사상가, 선교일치적인 사상 등 다양한 다면성이 자리잡고 있다. 이제 부터는 본 책의 내용에 의거하여 탄허스님 연구를 총체적으로 접근할 당위를 만 날 수 있다. 셋째, 본 책에는 탄허스님이 수행한 결사적( 結 社 的 )인 내용이 다수 나온다. 탄허 스님의 수행, 유불선을 망라하였던 학문, 교육 내용의 중심에는 신화엄경합론 의 번역, 출간이라는 대작불사가 있다. 그리고 오대산 수도원, 영은사 수도원의 개설 및 운영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탄허스님의 대작불사, 수도원 운영은 그 자 체가 결사였다. 수십 년간 지속된 그 행보는 가시밭길이었다.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분야를 개척한 고독한 행보였다. 물론 여기에는 스님과 동행하였 던 다수의 스님, 재가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스님과 그들은 결사를 하였다. 이 같은 스님의 고투, 행보를 단순한 역사로만 단정할 수 없다. 이제 스님의 역사 를 결사적인 차원에서 접근, 해석, 평가해야 할 것이다. 넷째, 이 책은 큰스님 에 대한 재평가, 재조명을 기할 수 있는 증언이 다수 있 다. 지금껏 우리들은 훌륭한 고승들을 큰스님 으로 불러 왔다. 그러나 진정, 참 다운 큰스님은 누구인가? 혹은 큰스님은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심화된 고민 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는 탄허스님의 증언 작업을 통해서 큰스님은 인간 적인 면모에서 우선적으로 접근해야 된다는 것을 느꼈다. 큰스님의 다양한 활 동, 성격 중에서 인간적인 측면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즉 탄허스님은 인간승 리의 표본이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을 감화시키고, 스님들의 가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414 슴을 요동치게 하였던 것이다. 다섯째,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해서 재음미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탄허스님의 역사에는 역경, 강학, 교학이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거기에는 선교일치, 선사상, 유불선을 회통하는 동양사상, 사회 의식, 민족의식 등도 찾을 수 있다. 이런 내용을 통하여 필자는 한국불교 및 조 계종의 정체성을 재검토할 수 있다고 본다. 지금껏 한국불교의 정체성은 통불 교, 종합불교라고 지칭하였지만 실제적인 불교사, 구체적인 인물(승려)에서 그런 것을 검증, 추출한 경우는 희소하였다. 필자는 탄허스님의 사례에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상과 같이 본 책에서 찾을 수 있는 특성을 필자의 관점에 의거 추출하여 보 았다. 필자의 관점 이외에서도 새로운 면을 찾을 수 있겠지만, 필자의 관점도 하 나의 참고점이 될 것으로 본다. 본 책의 증언 채록, 편집 등의 실무 작업에 많은 지원과 편의를 제공해 주신 오 대산 월정사의 스님, 탄허불교문화재단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피력한다. 그 리고 탄허스님과의 인연을 생각하여 필자를 따듯하게 대해 주시고, 세월의 무게 에 짓눌려서 역사의 뒤안길에 숨어 있었던 가슴 한켠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증언 자 여러분들의 정성에 머리 숙인다. 이와 같은 감사, 정성에 보답하기 위하여 필자는 지속적으로 오대산 불교 및 탄허스님에 대한 관심을 갖고 더욱 심화된 연구에 임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목멱산 자락의 연구실에서 414 김 광 식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415 방산굴의 무영수 하 ( 方 山 窟 의 無 影 樹 ) 불기 2557(2013)년 2월 20일 인쇄 불기 2557(2013)년 2월 24일 발행 편 자 발 행 처 주 소 전 화 팩 스 월정사 김광식 오대산 월정사 우)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63 033) ) 출 판 처 출판등록 주 소 전 화 팩 스 도서출판 민족사 제1-149호(1980년 5월 9일)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 58 두산위브파빌리온 1131호 02) ~4 02) 정가 25,000원 최종-방상굴의 무영수 (하).indd 오전 10:4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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