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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 14 기박물관대학강의표 한국사찰건축의이해 일시내용강사 13:40~14:00 개강식박방룡부산박물관장 9.18 ( 목 ) 14:00~15:50 불교사상과사찰건축최태선 중앙승가대학교불교학부교수 16:00~17:50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 이왕기 목원대학교건축학부교수 9.25 ( 목 ) 10.2 ( 목 ) 14:00~15:50 부산지역의사찰최정혜 16:00~17:50 한국의석탑신용철 14:00~15:50 통일신라의사찰건축 - 신라중대를중심으로 - 양정석 16:00~17:50 조선시대불교건축의이해홍병화 부산박물관유물관리팀장 양산시립박물관관장 수원대학교사학과교수 대한불교조계종문화부책임연구원 10.8 ( 수 ) 답사 08:00~18:00 부산지역의사찰 ( 지 ) 답사 홍보식 부산박물관문화재조사팀장 14:00~15:50 고려시대사찰건축지 - 충주崇善寺址를중심으로 - 김인한 충청대학교박물관학예연구실장 ( 목 ) 16:00~17:50 신라하대와고려시대의僧塔과塔碑박상준 ( 재 ) 불교문화재연구소정책연구실장 17:50~18:00 수료식박방룡부산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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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사찰건축의이해 불교사상과사찰건축 최태선 1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이왕기 13 부산지역의사찰 최정혜 59 한국의석탑 신용철 73 통일신라의사찰건축 : 신라중대를중심으로 양정석 85 조선시대불교건축의이해 홍병화 97 고려시대사찰건축지 : 충주崇善寺址를중심으로 김인한 117 신라하대와고려시대의僧塔과塔碑 박상준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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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불교사상과사찰건축 최태선 중앙승가대학교불교학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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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불교사상과사찰건축 불교사상과사찰건축 Ⅰ. 머리말 문화는한집단이가지는의, 식, 주의표현이고터부에의해결정되는집단의양식체라할수있다. 하나의집단이란자연혈연적집단일수도있고, 사상이나터부를공유하는인위적인집단일수도있다. 이러한집단이공유하는문화요소가시간적인연속성을가지고전달되는것을전통이라고하고이를유지하는것을계승이라고부르고있다고생각된다. 이러한프로세스를기준으로인위적집단체인동일사상을공유하는그룹은어떠한문화체를생산하고생산되는문화체는어떠한의미를가지는것인가에대한고민에빠져보기로해보자. Ⅱ. 불교사상과불탑축조 1. 문화란무엇인가? 문화민족특성 생활의표현양식이창출 기후 지리적성격 문화를구성하는요소로는언어 관념 신앙 관습 규범 제도 기술 예술 의례등이있으며, 문화의존재와활용은인간고유의능력, 즉상징적사고 ( 언어의상징화 ) 의능력에서기인한다. 이러한문화는다음과같은특징을가진다. 생태학적변화 모든사회문화적체계는자연환경의영향을받는다. 문화는전파된다. 문화전파란문화의구성요소인관습 신앙 도구 기술 설화등이한민족이나지역에서다른민족과지역에전해지는것이다. 어떤문화요소는다른요소에비해실용성과이점이더많기때문에다른문화로전파되는것이다. 문화는접변한다. 문화접변이란 2개의상이한문화가접촉하는과정에서문화요소들이변화하는과정을가리킨다

10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문화는진화한다. 문화적진화란문화가지속적으로단순한형태에서복잡한형태로발전하는과정을말한다. 즉시간적인형태의진화가이루어지는것이다. 예 ) 한국문화의특징그동안의한국문화를보는관점 일본학자-관야정 반도의한계성 恨이담긴문화등 柳宗悅 ( 日人 ) 조선왕조의문화에심취 - 한반도가현재의조선으로자리하기에는조선시대에모든것이규정되었다고규정. 한국미술 = 자연미술 로가정할때종교사상의지배를받지않는순수고의본질이라는평가도있으나조선시대의미술이웅장한고려삼국의미술을전적으로반영하지는않는다. 이러한문화의특징들을통해한국문화의특징을결정하게되고, 장단점을논의하게된다. 2. 문화의공간적이동요소 A요소에대해반작용, 작용되는현상즉, 요소들이어떻게변형되느냐 가그문화의특질을찾아내는관점이된다. 이러한문화이론의틀속에서불교사상 ( 문화 ) 의그룹을모델로하여불교사상이양상해내는구조물 ( 문화체 ) 은어떤원리가작용하고있는지를살펴보기로하자. 3. 불교사상과불탑축조 1) 불탑의의미는원래근본팔탑시에는 1차적인분묘의특징을가지고있다. (1차적) 원래는분묘에서출발 ( 유골을안치하여불교이전부터탑을건립 ) 예배공양의종교적행위를행하는본존적인대상 ( 생존시에도모발등을넣은탑을조성 ) 처음 8분탑 ( 근본8탑 ) 의의미도이러한두전통의확산이라는해석 전륜성왕장법 / 기탑품 - 첨부내용참조그러다불교라는종교에서의미하는불탑은사상이가미되어서의미가확대되어신앙의상징적징표로서의변화상을보이게된다. (2차적) 아쇼카왕의 8만4천분탑 이후부터탑건축공양은예배대상으로서의탑으로의미가변화. 종교적의미 ( 유골, 족적, 등불타의모든것으로확대 ( 성지포함 )) 지제 ( 支堤 ): 사리가없는탑 ( 사당을의미 ) - 4 -

11 불교사상과사찰건축 2) 초기불탑의건립위치 석가의행적과관련있는곳을택하여건립. 승단이사원을건립할때도불탑을세우고불탑근처에사원을건립 3) 탑을건립할수있는자 불타, 벽지불아라한, 전륜성왕, ( 대반열반경 ) - 산개의수에따른탑의구분 憎一阿含經 19권四意斷品. 한글대장경 p357~359 사리불과목건련의사리에어떻게공양하리이까. 세존께서는말씀하셨다. 갖가지향과꽃을모아네거리에다네절의탑을세워라. 그까닭은만일누가절을세우려면그는네가지탑을세워야하겠기때문이다. 어떤것이네가지인가. 전륜성왕에게탑을세워야하고, 번뇌가없어진아라한에게탑을세워야하며벽지불에게탑을세워야하고, 여래에게탑을세워야하느니라. 4) 탑을건립하는이유 다시무슨이유로여래를위해탑을세워야하나이까. 세존께서는말씀하셨다. 여래는열가지힘이있고네가지두려움이없으며항복하지않는이를항복받고건너지못한이를건네주며, 도를얻지못한이는도를얻게하고열반하지못한이는열반하게하며, 여러사람들이보고는모두기뻐한다. 그러므로아난다야, 여래를위해탑을세워야하느니라. 5) 전륜성왕의장법 長阿含經 한글대장경 -3권유행경 전륜성왕의장례법은 1. 먼저향탕 ( 香湯 ) 으로몸을씻고 2. 새무명천으로몸을두루감되五백겹으로차례대로감고 3. 몸을황금관에넣은뒤에는깨기름을거기에쏟아라. 4. 다음에는황금관을들어제二의큰쇠곽 ( 鐵槨 ) 에넣고 5. 전단향나무곽으로겉에겹치고온갖향을쌓아그위를두텁게덮고그리고그것을다비 ( 茶毘 ) 에붙여라. 6. 다비를마친뒤에는사리 ( 舍利 ) 를거두어네거리에탑을세워거기에넣고 7. 탑표면에는비단을걸어전국의길가는사람들로하여금다법왕 ( 法王 ) 의탑을보고바른교화를사모해많은이익을얻게하는것이다. 6) 불교사상에서의탑사리장엄사찰에들어서면경내에서가장먼저만나는성보가탑이다. 그탑은근대에새로이조성된것이아니라면삼층또는오층전각형태의석조장엄물만이남아있는것이일반적이다. 그리고그탑에행하는신도님들의예법도선채일배또는삼배의간단한예를갖추거나혹자는무시한채법당으로들어간다. 이러한관습은불탑에서불상으로신앙대상이바뀐시대에사는우리들의익숙한모습이다. 그러나불상신앙형태보다불탑신앙이먼저시작되었음은많은불교강의나불교자료들을통해잘알고있는부분이다. 초기불교의신앙대상이었던불탑은과연탑을세울수 ( 가질수 ) 있는자격은누구이며, 탑의외형은어떠한형태로문화가다른각집단에게전래되었을까? 또한, 탑의내형적핵심은무엇인가라는점에대해서는의외로소홀히생각하는것같다

12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이글에서는이러한궁금증에대해경전적근거를찾아서간략히추적해보고자한다. 석존께서열반하시고다비후, 그사리를 8개부족이팔등분하여각부족의큰네거리에세운것이근본팔탑이다. 라는내용은 佛般泥洹經卷下 에기록되어있다. 이중, 약 300년이지난후아쇼카왕이 7개의탑을헐어정복지마다세우니 팔만사천탑 이고, 이러한경전내용이혼재되어석존의사리는팔만사천과로이야기되기도한다. 그러나산술적으로따지면헐리지않은근본1탑 ( 람그랑유적 ) 의사리와열반경에사리를골고루나누어주고항아리내에꿀을발라붙어있는사리를가지고天部로돌아갔다는신이담의사리를포함하면훨씬많은사리임을알수있다. 여기에서불탑은석존의사리를넣는것을생명으로한다는것을알수있다. 이렇게불탑에신사리 ( 身舍利 ) 를봉안하는신사리신앙은인도뿐아니라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로불교가전파되면서, 건립되는절마다신사리를봉안할수없으므로, 부처님의말씀을적은경전 ( 법사리 ) 으로대체하거나, 후대에는법화경의사상에따라탑안에불상을안치되는형태로변화되기도하지만, 경전에근거할때석존의탑내부에는석존의사리를봉안하는것을기본텍스트로하고있음을알수있다. 그런데, 이러한신앙적탑의건립은석존에게만해당된것은아닌것같다. 憎一阿含經 19권四意斷品. 에보면탑을세울수있는지위를 4그룹으로분류하고있다. 갖가지향과꽃을모아네거리에다네절의탑을세워라. 그까닭은만일누가절을세우려면그는네가지탑을세워야하겠기때문이다. 어떤것이네가지인가. 전륜성왕에게탑을세워야하고, 번뇌가없어진아라한에게탑을세워야하며벽지불에게탑을세워야하고, 여래에게탑을세워야하느니라. 위의경전내용에서여래외에도아라한과벽지불 ( 승려 ), 그리고속인으로서는성군인전륜성왕은신앙적탑을세울수있었음을알수있다. 위경전의내용은많은것을생각하게한다. 그첫째는큰스님의부도를세울수있는당위성도여래의탑과함께 증일아함경 에서제시하고있다는점이다. 이는우리나라사찰에서도다수의부도가남겨져있는데이들부도를가진스님은모두 아라한 이나 벽지불 단계에이른큰스님이었음을알수있다. 둘째는 네거리에다탑을봉안한절을세워라 라는구절은탑신앙을중심으로하는사찰을세웠음을짐작케하는구절이고, 또한그사찰은왕이사는도성의중심부에자리하고있었음을추정할수있다. 이러한사실은인도에서먼거리에있는한반도의초창기사찰이모두왕이사는도성 ( 경주, 부여등 ) 에분포하는것과도상응하는내용이어서흥미롭다. 그런데, 이들 4그룹의탑중어떠한것이전륜 - 6 -

13 불교사상과사찰건축 성왕의것이고여래의것일까라는의문점이생긴다. 인도의탑은외형상흔히반구형이라하여원형의기단위에사발을엎어놓은듯한모습을하고있다. 이러한반구형의탑에서 4그룹을구분하는것은무엇일까? 법원주림 37, 38권의경전에서는이들구분을 노반석이상의숫자로구분한다 고되어있다. 노반석이상이라고하면불교미술용어로상륜부가되고그상륜부에서숫자를구분할수있는것은산개 ( 동북아시아는보륜이라고한다.) 이다. 즉, 지위에따라 9,7,5,3 의순의산개를갖추어그탑의주인을구분하고있었던것같다. 실제인도산치제2탑은석존의탑이아닌것으로이야기되고있고, 그산치제2탑의산개 ( 보륜 ) 은 3개만올려져있는점도이러한구분을방증하는자료라고생각된다. 마지막으로탑의외형에관한내용이다. 탑이인도에서시작되었고, 그외형은당연히인도탑인반구형이전래되어야함에도, 동북아시아에서볼수있는탑의외형은높은전각형상을하고있는것이특징처럼보인다. 그러나이러한외형도자세히관찰하면 3 층, 5층, 7층, 9층의전각위에는항상상륜부라는것으로마지막장엄되고있음을알수있다. 이상륜부는밀교에서는상륜다라니경전을갖출만큼중요시되고있는데, 흔히노반부이상을지칭하고있다. 이상륜부를자세히관찰하면노반부바로위에있는복발앙화보륜부가인도 복발형 탑을축소해놓고있음을알수있다. 이러한점은인도탑의외형이동북아시아에서전각형으로바뀌는것이아니라, 높은전각 ( 기단 ) 위에인도탑의외형을모시고있는것으로해석하는것이좋을듯싶다. 그러한상륜부의보륜 ( 산개 ) 를관찰해보면, 중국이나한반도황룡사목탑을조각한그림, 일본의목탑상륜부를관찰하면사찰중앙에있는석존의탑은모두이보륜이 9개를갖추고있음을알수있고, 이들이모두석존의사리탑으로명칭되고있음을알수있다. 물론통일신라이후우리나라의석탑에서는 9개를갖춘예는없지만, 적어도초기에는이러한경전내용을충실하게이행하고있다는것을알수있다. 이상경전내용을통한불탑의외장과그지위에대해간략하게살펴보았는데, 고등종교인불교는외형, 내형의장엄이엄격하게경전에의해규제되고있음을알수있다

14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대승불교이후경전상의탑공양 1. 아미타경 ( 阿彌陀經 )= 무량수경 정토경전의하나 내용에는사리공양, 불탑신앙에대한언급은없음불탑신앙에서벗어나불상에대한예배로변화하는과정의경전 ( 일본학자의견해 ) 불탑신앙보다미타정토신앙을강조한것으로해석 ( 강우방 ) 2. 반야경 ( 般若經 )- 지혜의완성을핵심으로한경전 ( 익산왕궁리석탑, 제석사탑 ) 간혹불탑신앙을부정하는형태로잘못해석되기도함 ( 造像신앙은복덕을얻는이유이지지혜의완성은되지못함을지적 ) 배경 : AD2-4 세기에는석가를비롯과거불의유골을모시는스투파신앙이성행하였고이를너머여래를친견하려는소망이성행하던시기 지혜의완성자인석가 ( 불탑의본질 = 佛母 ) 로서의불탑숭배를강조 사리탑외형에대한숭배를경고-법신사리신앙으로확대 유골공양보다는반야경공양이더많은복덕을얻을수있다고강조 따라서탑에신사리보다는법사리를장엄하는것으로변화 3. 법화경 ( 法華經 ) ( 국내-황복사탑, 수종사탑, 송림사전탑등 ) 석가의모든교설은중생을교화하기위한방편이고궁극적으로는일불승 ( 一佛乘 ) 에귀결되는것이목적.( 모든중생이성불 ) 불탑신앙과불경신앙을강조 ( 서품 ), ( 방편품 ), ( 법사품- 법사리를강조 ), ( 견보탑품 - 법의입장 ( 법화경 ) 과불의입장 ( 석가, 다보여래 ) 이법화경에서종합된형태 ) 4. 무구정광대다라니경 탑을세우고다라니를염송하는공덕을설명한경전 이러한조탑법을따르게되면수명을연장하거나소원을성취하게된다는밀교적내용. 통일신라시대를전후한시기에성행 ( 법사리의약식화 ) 근본다라니법, 상륜다라니법, 수조불다라니법, 전신사리경등 Ⅲ. 불교사상에서의가람 1. 가람 ( 伽藍 ) 사원, 寺의개념 1) 정의 : 부처님을모시고부처님의가르침을닦는사람이모여있는성스러운곳, 불, 법, 승, 삼보가갖춰진공간 2) 사미율의 ( 沙彌律儀 ) 책 - 출가제자가불법을섬겨받들어가르침에의거해수행하는곳

15 불교사상과사찰건축 3) 중국에서가람의표현 寺 : -홍로사( 鴻矑寺 ) : 한나라명제때인도스님마등과축법란이백마에불경을싣고낙양에들어와최초로머문곳. 원래외국사신이머무는홍로관이홍로사로변화. 정사 : 추잡함과포악이없는곳 적멸도량 : 노사나부처님이화엄경을설한곳 叢林 : 강원 ( 경전강습 ) 율원 ( 계율연구 ) 선원, 염불원이갖추어진곳 ( 승속이한곳에머무는곳 ) 2. 사찰의문화사적의미 1) 개관가. 문헌상에보이는삼국시대의가람 ( 정치적 )-사원정책나. 분포및건립구성원 (( 원찰 ) 왕실, 지방호족 / ( 하안소 ) 승려다. 창건시기 2) 불교사상과가람배치가. 교학가람교학가람은초기의인도, 서역등지에서보이는가람형태를계승하고있으며, 마하승기율 에서설하고있는가람에는불지와승지가엄격하게구분되어있고, 이들두지역은오수도교통해서는안된다는룰을설명하고있다. 실제坂詰秀一의글에서보이는초기동북아시아의가람배치도는모두 마하승기율 의내용과같이구분되어배치되어있음을알수있다 탑을세우는법은기단 ( 基壇 ) 의사방에난간을설치하고원형으로 2층을쌓되사면에각이나오도록한다. 위에는반개 ( 盤盖 : 屋盖 ) 를얹고그위에는길게윤상 ( 輪相 : 寶輪 ) 을세운다... 중략... 승지 ( 僧地 ) 에서는불지 ( 佛地 ) 를침범하지말고또한불지 ( 佛地 ) 에서는승지 ( 僧地 ) 를점령하지말라.... 중략... 주변에는담장을쌓아격리하고서쪽과남쪽에는시탑 ( 侍塔 ) 하는승방 ( 僧房 : 塔殿 ) 을지어야한다. 승방 ( 僧房 ) 의오수 ( 汚水 ) 가불지 ( 佛地 ) 에로들어오지못하게하며또한불지 ( 佛地 ) 에서나오는물도승방 ( 僧房 ) 으로흘러들어오지못하게하여야한다.... 중략. 作塔法者下基四方周欄楯圓起二重方牙四出上施槃蓋長表輪相...( 若言世尊已除貪欲瞋愚癡用是塔爲得越比尼罪業報重故是名塔法塔事者 ) 起僧伽藍時先預度好地作塔處塔不得在南不得在西應在東應在北 ) 不得僧地侵佛地佛地不得侵僧地若塔近死尸林若狗食殘持來汚地應作垣牆應在西若南作僧坊不得使僧地水流入佛地佛地水得流入僧地塔應在高顯處作不得在塔院中浣染衣... < 마하승기율 ( 摩訶僧祇律 )> 권33 명잡송발거법 ( 明雜誦跋渠法 : 대정장22, p.498a6) 이경전은초기소승경전의하나로, 적어도 5세기경에는한역되었던것으로알려져있는데이러한소의경전을토대로할때, 적어도 5세기전까지의가람은불지와승지를엄격히구분하려는의도가있었음을알수있다. 나. 선종가람 ( 칠당가람 ) 사찰은수행, 교육, 포교의세기능을위하여당우가건축되었다

16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당우는 1 불전 2 강당 3 승당 4 주고 ( 廚庫 ) 5 욕실 6 동사 ( 측간 ) 7 산문의원칙에따라건립되었다. 이는석존생시의초기가람인기원정사등의가람과유사한구조이며, 실제초기경전에서는가람의규모를가늠하는척도로승려들이씻을수있는욕실의규모와화장실의개수가활용되고있는것은승려중심의공간이었음을강조하는것으로이해할수있다. 불교사상의변화에따른가람의변화 석존생시의기원정사 석존입멸후탑중심초기신앙탑원을중앙에두고회랑으로불부가구분됨 A.D연간상신앙의대두에따른탑과상의중심영역이원화 상신앙중심의신앙에따른탑의축소화현상 한반도의상신앙중심의신앙에따른탑의축소및양분화현상 선종가람의대두에따른불부와승부영역의붕괴현상 선종가람의 7당배치현상- 초기석존생시의가람으로회귀현상 3) 가람의축조 요소 : 占地 / 測量 / 基壇의造成 / 礎石 / 기둥 / 지붕 / 번와 / 내부장엄가. 占地 ( 입지 ) 평지가람 : 수도왕성을중심으로넓고평평한터에건립중국왕성제도를따라사원이건립 ( 중문-탑-금당-강당 ) 특히왕실의원당이나국가사찰교통의편리함때문에대중적불교형성에큰영향 산지가람 : 산속에자리잡은사찰, 신라말에도입된선종의영향과도참설에의거하여수행에적합하도록설계된특징. 산지가람은수행을위한도량으로전통을지켜옴 석굴형사원 : 천연또는인공의석굴에건립, 기도를위한도량으로서의기능. 삼국초기 - 민간신앙의결합 ( 신유림등강신지 ) 통일신라 - 구산선문, 도참설 ( 풍수지리 ) 고려, 조선 - 혼재나 ) 基壇의造成 기단토축조 ( 地鎭의례 ) 불설다라니집경 ( 권12 작단법 ) / 외장 ( 하대석면석갑석塼石 ) 7세기경에한역된것으로알려져있는 불설다라니집경 권 12에서건물의기단을만드는방법을설명하고있다. 당 ( 堂 ) 을건립할때에는 1...( 밧줄하나를가지고장단을재거나원의넓고좁음을헤아려수대로매듭을정한다음 ) 도량의사방에밧줄을당겨서아래에흰색가루로점찍어표시한다. 2 아사리는동북모서리로부터서남모서리까지밧줄을당겨서고정시키고기둥에서四指떨어진곳아래에점을찍어표시한다. 또한동남모서리로부터서북모서리까지밧줄을

17 불교사상과사찰건축 당겨고정시킨후기둥에서사지四指떨어진곳아래에점을찍어표시한다. 그리고밧줄이교차하는중앙에또점을찍는다. 그리고이들네모퉁이및중앙에깊이일걸의작은구덩이를판다. 3 그구덩이에칠보 ( 금, 은, 진주, 산호, 호박, 수정, 유리,) 를잘게부수어오곡 ( 대맥, 소맥, 도곡, 소두, 호마 ) 과함께명주에싸서오색으로끝을묶어구덩이에매납한다. 매납할때오색의끈은오지정도의길이를밖으로낸다. 4 이보물은한번넣은후영원히꺼낼수없으며이로써금승계지가칠보와합해져서이루어지니모든부처님께서그위에머무시어대승을설하시며법륜을굴리시는곳이다. 여기에佛堂을세우면가장으뜸이되나凡人이그위에머물면조금도이득이없다... 이러한경전의근거가현재고고학조사에서출토되는지진구진단구의표식적지침이되는것으로이해되며, 이러한원칙에서각지역이나시기마다조금씩그문화상들이가미되어다양한지진구진단구의형태로노출되는것으로보아도좋을것이다. 다 ) 바닥마감 당우의마감은원래대부분전으로써처리되거나, 흙으로된곳도있었다고함. (953년초선사가희양산을개창할때시자승이법당을쓸기위해땅에물을뿌리는데물이뿌려지지않은곳이있었다. 불상이많은땀을흘려전각의땅바닥 ( 殿地 ) 을적셨다.) 전과흙으로된공간이라도예불시에는신발을벗는것이원칙. ( 문밖에신발이가득하였다. 백제 ) ( 중국-비구가예불을드릴때자리에일어나오른쪽어깨를벗고신발을벗고오른쪽무릎을땅에댄다 ) ( 동문선-전당의안은종이를바르고왕골자리를깔았으며두루단청을하였다.) ( 김시습의매월당시집- 불당에발을치고대나무평상을깔았다.) 조선시대에마루를깔기시작함 Ⅳ. 맺음말 모든불교문화의원형은불교그룹이가지는터부에서출발하고, 그터부에대한관리는방편경전속에서하나하나를규제하고있음을알수있다. 정치중심의문화사에서는모든것이국가의제도틀속에서움직인다는거시적관점을제시할수있으나, 그속에서도세부적으로들여다보면하나의사상을근거로하는불교그룹같은경우는많은경전속에서그틀을제어하고있음을염두에둘필요가있음을강조하는의미에서이강의를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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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 이왕기 목원대학교건축학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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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 Ⅰ. 역사적배경 한강, 임진강을비롯한한반도서남부해안에는 54개의작은부족국가들로다스려지고있었다. 이른바마한이라고부르는데 54개의소국으로이루어져있었다. 백제를건국한온조는고구려시조주몽의아들로왕위를계승할수없게되자형비류 ( 沸流 ) 와함께오간 ( 烏干 ) ㆍ마려 ( 馬黎 ) 등 10명의신하를거느리고남쪽으로내려왔는데그곳이지금의한강주변이었다. 두형제는갈라져서비류는미추홀 ( 지금의인천지역 ) 에정착하였고, 온조는하북위례성 ( 河北慰禮城 ) 에정착하여나라를세우고국호를십제 ( 十濟 ) 라하였다. 이때가기원전 18년이다. 한강유역은비교적기후가좋고비옥한토지가많아경제적기반을튼튼하게조성할수가있으므로이러한기반을바탕으로국력은점점성장해갈수있었다. 초고왕 (166~214) 대에이르러도읍을하북위례성에서하남위례성으로옮기고국호를백제로고쳤으며, 미추홀에자리를잡고있던비류백제세력까지흡수하여이지역의강력한국가로거듭나게되었다. 고이왕 (234~286) 대에이르러서는마한의맹주였던목지국을병합하면서마한의새로운맹주가되었고, 이를기반으로영토를넓혀동으로는춘천, 남으로는안성, 서북으로는예성강까지그영역을넓혀갔다. 이로써백제는이지역에서고대국가의면모를구축하게되었다. 백제가중앙집권적인귀족국가로서의체제를갖추게된것은근초고왕 ( 近肖古王, 346~375) 때로추측된다. 그리고 371년에는고구려의평양성까지쳐서고국원왕을전사하게하였다. 이로써백제는현재의경기ㆍ충청ㆍ전라 3도와강원ㆍ황해양도의일부까지를점유하는큰영토를차지하게되었고서쪽으로동진, 남쪽으로는倭와통하여국제적인지위를확고히하였다. 1) 384년침류왕대에는불교를받아들여새로운관념체계와사원건축문화의새로운발전의장을열게되었다. 4세기말에이르러서는고구려의광개토대왕과장수왕의세력에대항하여대륙의송 ( 宋 ) 및위 ( 魏 ) 의남북조와통하고신라와동맹을맺었으나, 475년에는수도한성이함락되고따라서문주왕은지금의공주인웅진으로도읍을옮기게되었다. 538년성왕은도읍을다시옮겨지금의부여인사비로천도하였다. 이때에는불교가크게진흥되어일본에까지불경ㆍ불구 ( 佛具 ) ㆍ불상등을보내서불교를전하였고, 이와함께백제의우수했던건축문화가일본에전해지는계기가되었다. 수도의위치를기준으로하여백제사의여러시기를구분한다면, 1 한성시대 (B.C.18~ A.D.475), 2 웅진시대 (475~538), 3 사비시대 (538~660) 의세시기가된다. 그런데, 그중첫번 1) 이기백, 1985, 한국사신론 ( 개정판 ), 일조각, 서울

22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째한성시대는 493년간이나되어백제전역사의대략 4분의 3에해당한다. 이는단일시기로서는너무나장구한기간이다. 더욱이한성시대에백제는큰변화를겪었다. 왜냐하면마한의일국으로탄생한백제가차츰성장하여종주국인마한을압도한끝에마침내마한사회전체를통일했기때문이다. 그러므로백제의마한통일을전후하여한성시대를두시기로나누는것이합리적이다. 이렇게되면백제사는다음과같이모두네시기로정리해볼수있다. 제1기는백제가한강하류의현서울시일원에서조그만성읍국가로탄생, 차츰주변국가를병합하여제1기한성시대전기 B.C.18~A.D.369 연맹왕국을형성했다가마침내마한제국을모두정제2기한성시대후기 A.D.369~475 복하여큰나라가되기까지의기나긴과정이다. 제2 제3기웅진시대 A.D.475~538 기는마한통일로부터고구려의침략을받아한성이제4기사비시대 A.D.538~660 함락되어웅진으로수도를옮기기까지의약 1백년간이다. 제3기웅진시대는국가의기반이몹시취약해진상태에서힘겹게나라의명맥을이어가면서국력회복을위해몸부림치던시대였다. 제4기사비시대는삼국간의항쟁이한껏고조된극심한전란기였다. 백제는이시기에성왕의돌연한전사로말미암아국가적위기에직면하기도했으나그뒤武王때에이르러국력이크게회복되는등한때희망적인시기도있었다. 그러나쉴사이없이전개된신라에대한보복전쟁으로말미암아국력이몹시피폐해졌고더욱이전제왕권의암영속에지배체제는크게분열되어망국의비운을맞게되었다. 2) 백제의중앙정치기구는 6좌평 ( 佐平 ) 을비롯한 22관부 ( 官府 ) 로잘정비되어있었다. 그리고관등제는중국식명칭의 16관등으로상당히체계적인모습을갖고있었다. 중앙통치구역은왕경을 5부 ( 部 ) 로나누고각부는 5항 ( 巷 ) 으로편제되어있었고각부에는방령 ( 方領 ) 1인과병사 500명씩을두어치안을담당하도록하였다. 3) 지방통치조직은한성시대와웅진시대의담로체제가근간을이루고있었다. 담로체제는지방의중요한성에왕의자제나왕족을파견하여그주위의 10여개의성과촌을다스리게한것이다. 담로체제는사비시대에방군제 ( 方郡制 ) 로개편되는데전국을 5방으로나누어그중심지인방성 ( 方城 ) 에는제2관등의달솔 ( 達率 ) 로임명된방령이 700~1,200명의군대를거느리고방을다스렸으며, 방밑에는 6~10개의군을두어각군마다제4관등의덕솔 ( 德率 ) 로임명되는군장 ( 郡將 ) 3인으로하여금다스리게했고, 그외의여러성에는도사 ( 道使 ) 가파견되었다. 백제의지방통치조직은이와같이고구려나신라와마찬가지로행정조직보다는군사조직으로서의성격을강하게띠고있었다. 4) 2) 이기동, 백제의역사와문화, 백제문화대관 중도일보사, ) 삼국사기 권제 40 雜志및 周書, 都下有萬家分爲五部曰上部前部中部下部後部統兵五百人五方各有方領一人以達率爲之.. 4) 한국역사연구회편, 한국사강의, 92 쪽, 한울아카데미,

23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Ⅱ. 문화적배경 백제의문화적특성을밝힐수있는문헌이나유적자료는삼국중에서가장빈약하다. 일반적으로백제문화는크게 3기로나누어지는데초기에한강을중심으로한성시대, 그다음이공주로천도한웅진시대, 마지막으로부여로천도한사비시대로나누어진다. 한성시대는그중에서도특히남아있는자료가빈약하다. 이시기는주변으로부터문화를수용하는초기단계였을것이다. 한강유역은철기시대에들어와서넓은충적평야와농경에적합한기후조건, 그리고철제농구의사용등으로본격적인농경이전개된지역이었다. 이러한문화기반을토대로이지역에는일찍부터여러읍락집단들이형성되어있었고나아가보다선진적인철기문화를가진온조집단이이주해옴에따라백제국이형성되는계기가되었다. 5) 웅진시대는여러분야에서백제문화를새롭게정착시켰던단계였다. 백제가마한 50여개소국을정복하여마한사회전체를통치하게된시기는대체로근초고왕 ( 近肖古王, 346~375) 때의일로짐작된다. 백제가반도의중서부지역을통치의거점으로삼게됨으로서넓은평야지대의농토와노동력을확보하게되었고토지개간, 관개수리, 제방축조등을시행하여농업생산을확대하기도하였다. 따라서이러한경제력을바탕으로왕권을신장하게되었던것이다. 한편금강을통하여중국과해상교류를활발히진행하면서주변의여러나라들과공세적입장에서관계를유지해나간다. 성왕의사비천도는그전에단행된웅진천도와는성격이달랐다. 웅진천도는고구려의침공이원인이었다면사비천도는왕권의강화를위한의도적이었던것이다. 이때부터왕권은크게강화되었고백제의문화를성숙시키는계기가되었다. 사비시대는웅진시대의문화를바탕으로백제특유의문화로성숙ㆍ정착시키는한편주변의여러나라에크게영향을끼치는발전된문화를지니게되었다. 초기의백제는고구려와같은종족으로출발하여그문화적특성이고구려와거의유사한것으로추측된다. 이당시의백제유적에서출토된공예적특징은선이굵고직선적인북방적요소가표현되어나타나는것을볼수있다. 그후세력이남쪽의금강유역으로옮겨지면서차츰독자적이고독특한문화요소가가미되기시작하였다. 이당시의예술문화적특징은고구려에비해온화하고유연하였으며부드럽고격높은것이었음을알수있다. 웅진으로천도한이후의백제문화는동진ㆍ송ㆍ제ㆍ량ㆍ진등중국남조문화의영향을받았으며이를바탕으로백제문화는독자적으로발전시킬수있었다. 따라서백제의문화는 5세기말에서 7세기초사이에황금기를이루었다고믿어진다. 특히불교문화는신라와일본에까지크게영향을주어선구적인역할을하였음을알수있다. 6) 백제는산악지대가국토의주류를이루고있는고구려나신라와는달리넓은평야지대와큰강을끼고있었으며서쪽으로는남북으로긴해안선이형성되어있었다. 이해안선은또한동해안과달리어디든지항구를만들기쉬운조건을지니고있었다. 이와같이넓은평야와큰강, 정박하기쉬운해안선은백제의농업생산을풍요롭게함과동시에강과바다를통한교역의활로를펼쳐주는 5) 양기석, 백제역사의전개, 백제의조각과미술 32 쪽, 공주대박물관ㆍ충청남도, ) 장경호, 한국의전통건축, 79 쪽, 문예출판사,

24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역할을하게되었다. 이러한조건으로인해백제는외부와교류를활발하게하는동시백제문화를꽃피우게하는요인이되었다. 백제인의여유롭고앞선문화를지닐수있었던것은이처럼지리환경이가져다준풍요로운경제력이바탕이되어주었기때문이다. 풍요와앞선문화는백제사람들에게풍류와삶의여유를주었다는근거는 삼국사기 의다음과같은기록에서도찾아볼수있다. 진사왕 7년 (391) 에궁실을중수하고못을파서인공산을만들어진기한짐승과화초를길렀다. 웅진으로천도한후인동성왕 22년 (500) 에는임류각을궁성동쪽에세웠는데높이가다섯길이나되고또연못을파고기이한새들을길렀다. 사비시대로들어와무왕때에는궁전남쪽에연못을파고 20리에서물을끌어대고사방호안에는버드나무를심고물가운데섬을만들기도하니마치방장선산과같다 라고하여여유롭고풍요한문화를즐겼음을알수있다. 뿐만아니라그동안출토된백제의문화유물을당시다른나라와비교해보면정교하면서도멋이담겨져있는것을알수있다. 백제인의정신세계가유물에그대로담겨져있다. 기술문화도다른나라에비해훨씬앞서있었다는사실또한문헌을통해알수있다. 백제의문화는이처럼다른나라보다우수하고풍요로웠던것은백제의개방적인자연환경과그들의문화에대한흡입력이만들어낸기질때문이었던것이라하겠다. Ⅲ. 백제불교의시작과불교사원 삼국시대불교가전래되면서초기에는기존건축물에의존하여예불을하던것이불교가공인되고정착하면서불교사원건립이본격적으로이루어지게되었다. 불교사원건립은단순히건축물건립행위에머무른것이아니라대외문화교류를통하여건축기술을발전시키고발전된건축기술이지역의다른건축물에영향을끼치면서전반적으로건축문화가발전되는결과를가져왔던것이다. 백제의사비시대불교사원은중국남조와의활발한교류과정에서기술문화를접촉하게되었고이를바탕으로백제의건축기술을한단계끌어올리게되었다. 이것이결국삼국중에서백제의건축문화를가장앞서게만든결과를낳게되었다. 그후백제의건축기술은신라와일본에전해져동북아지역의건축기술을선도하는건축기술선진국이되기도했다. 백제에불교가처음들어온것은고구려가불교를받아들인지 12년후인침류왕원년 (384) 이며중국동진 ( 東晋 ) 의마라난타 ( 摩羅難陀 ) 에의해서이다. 7) 그러나불교가백제에서크게번성하게된것은성왕대 (523~553) 부터시작하여위덕왕 (554~ 597), 법왕 (599) 을거쳐무왕대 (600~640) 에이르는 100여년간이었다. 불교가전래된침류왕이듬해에는한산 ( 漢山 ) 에불사를조영하기시작했다. 그러나그불사가어떤형태로지어졌는지, 또다른불사는없었는지더이상상세한기록은없다. 그후백제가도읍을웅진 ( 공주 ) 거쳐사비 ( 부여 ) 로옮기고나서성왕대에양 ( 梁 ) 으로부터공장 ( 工匠 ) 과화사 ( 畵師 ) 를초청하는등불사의조영이성황을이루고또일본에불교를전해주는등활약이컸던것으로믿어진다. 한성시대에불교가전해졌다고해도초창기에는활발한사원조영이 7) 삼국사기 권 24 백제본기

25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일어나지않았던것같다. 웅진시대를거치면서불사조영이조금씩활발해지다가사비시대에이르러비로소성숙된건축기술을바탕으로활발한불사조영이이루어지게된다. 백제의절터가공주지방에서그일부가밝혀지고, 대부분부여와인근지역또는사비시대다른지방에서그흔적이밝혀지는것은이러한이유때문이다. 문헌기록에의하여밝혀진백제사원과발굴조사를통하여알려진백제절터는많이있으나, 발굴조사를통하여백제절터임이밝혀진곳은주로부여지방과공주, 익산지역의몇곳이다. 이들절터중기록에보이는것은다음표 1과같다. 寺名所在文獻內容 대통사大通寺흥륜사興輪寺서혈사西穴寺수원사水原寺왕흥사王興寺호암사虎岩寺鳥含寺 공주반죽동삼국유사 ( 성왕 5) 공주 공주웅진동동국여지승람 공주옥룡동월성사 부여규암면 부여규암면 현존유구로추정강당터와당간지주ㆍ石槽등이있다. 大通寺 라는명문기와가출토. 발굴결과위치불명확 동국여지승람聖王代에謙益이律典을번역이능화불교통사 조사된바탑자리와건물터노출, 절터북쪽약 100m 거리에석굴이있음. 西穴寺 三寶 銘기와편출토. 삼국유사동국여지승람 1978 년탑자리확인, 蠟石製小塔및통일신라시대瓦片출토. 삼국유사삼국사기 삼국유사동국여지승람 보령군성주산삼국사기삼국유사 절터중심부에방형초석잔존, 고려시대의 王興 銘기와출토. 방형초석, 백제기와등발견. 통일신라시대의거찰聖住寺址에서 5~6 세기백제와당이출토되어백제의사지였음이확인. 鳥會寺, 鳥含寺로추측. 鳥會寺 漆岳寺 부여? 삼국사기 금강사터와같은것으로보는학설이있음. 道讓寺 불명 삼국사기 風雨暴至震天王道讓二寺塔又震白石寺講堂 이라함 天王 資福寺 불명 삼국유사 銘기와가동남리와구아리에서나왔다함. 제석사帝釋寺오금사五金寺北部修德寺 익산금마 익산금마 동국여지승람觀世音應驗記 동국여지승람臥遊錄 현王宮里石塔서쪽약 1km 거리에절터가있고塔자리心礎가있음. 武王이어렸을때마를캐다金을얻어붙여진이름이며報德城남쪽에있다고하는데그위치불명. 충남예산삼국유사현수덕사근처로보고있으며여기에서백제기와가출토되었음. 普光寺전주동국여지승람백제의대가람이라하나불명. 미륵사彌勒寺사자사獅子寺암사岩寺 익산금마 익산금마 삼국유사삼국사기 삼국유사동국여지승람 서울암사동동국여지승람 표 1. 문헌기록에나타난백제의불사 문헌과출토유물로확인됨. 1 탑 1 금당식가람이 3 곳나란히배치된三院竝列式배치로확인. 현재獅子庵에서 至治二年獅子寺造瓦 라는銘文瓦가발견되어獅子寺로추측.( 지치 2 년은 1322 년으로고려때임 ) 암사동수원지근처절터에서고려와당과백제초기와당이발견되어백제절터였을것으로추측됨

26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백제의초기불사는한성시대에조영되었다고생각되지만당시사원의이름이나위치, 규모, 형태등에대해서는전혀알려진바가없다. 백제가도읍을웅진으로천도한이후비로소불사에대한기록과유적들이나타나게된다. 표 1에서와같이지금까지기록에나타난불사중에서는웅진시대의것은대통사, 흥륜사, 수원사, 서혈사가있고사비시대의것으로는칠악사, 왕흥사, 미륵사, 사자사, 자복사등많은불사가있다. 이밖에공주지역에는주미사 ( 舟尾寺 ), 남혈사 ( 南穴寺 ), 동혈사 ( 東穴寺 ), 동혈사 ( 銅穴寺 ), 북혈사 ( 北穴寺 ), 만일사 ( 晩日寺 ), 정지사 ( 艇止寺 ), 반룡사 ( 盤龍寺 ) 등이있고, 부여지역에는군수리절터, 동남리절터, 가탑리절터, 구아리절터, 용정리절터, 부소산절터, 동산리절터, 쌍북리절터, 구교리절터, 외리절터, 정림사, 임강사, 금강사, 관음사, 경룡사, 천왕사, 도양사, 백석사, 오금사등이있다. 또한익산지역에 6개소, 서산, 태안지역에 4개소, 보령지역에 1개소가있다. 이모두가백제때의절터라볼수없지만이중에는백제때의절터로생각되는것이많이있다. 지금까지알려진백제의사찰은문헌상에나타난사찰과발굴에의해알려진사찰로구분해볼수있는데문헌에나타난사찰의경우창건년대가밝혀지기도하지만문헌에나타나지않으면서발굴조사에의해확인된사찰의경우거의대부분창건년대를알수가없다. 그러나대통사, 왕흥사, 호암사, 미륵사, 사자사등몇개의사찰은문헌자료와고고학적자료가일치하기도한다. 한편부여능사와같이문헌에나타나지않으면서출토유물에의해창건시기가밝혀지는것도있다. 따라서백제의사찰건축은그유적이거의밝혀지지않는한성시대를제외하면웅진시대와사비시대로나누어진다. Ⅳ. 사비성의사찰건축 백제는사비천도를계기로관제정비작업에착수하여왕권을강화시킬수있는제도적장치를마련한다. 이와동시에왕실의권위를회복하고왕권강화를도모할수있는이념기반도모색하였으리라믿어진다. 이와관련해불교이념이그지배질서의확립, 사상통일, 국력집결에중요한기능을수행하였을것으로생각된다. 왜냐하면사비천도를단행한성왕자신이열렬한봉불론자였으며, 그제도적정비작업도추진한것으로알려져있기때문이다. 8) 사비시대사원유적은웅진시대에비해자료와유구가많다. 사비시대사원역시웅진시대의그것과같이중앙에탑을하나세우고중심축선을설정한다음후면에금당ㆍ강당을놓고주위를회랑으로둘러싸는일탑일금당식가람배치이다. 그대표적인실례로는정림사, 왕흥사, 금강사, 군수리절터, 능사, 동남리절터가있고, 익산의미륵사에서는일탑일금당식가람이 3개가병렬되어있는대규모사원으로서백제불교건축의완성된모습을보여주는것이라하겠다. 8) 이도학, 사비시대백제의 4 方界山과호국사찰의성립 - 법왕의불교이념확대시책과관련하여 -, 백제연구제 20 집 113 쪽, 충남대,

27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1. 정림사 ( 定林寺 ) 1) 연혁 이절이언제누가창건했는지, 그리고창건당시절이름이무엇인지문헌상으로알려지지않고있다. 다만창건은백제시대였다는것은확실하나, 고려시대에들어와정림사라는절이름을썼다는것이출토유물로확인되었다. 1942년과 1943년에걸쳐일본인후지사와 ( 藤澤一末 ) 에의하여부분적으로발굴조그림 1. 정림사터원경 ( 충청남도문화재대관, 1996) 사되었는데, 당시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 라는명문기와가출토되어정림사터라는것을알수있었다. 절터에는 5층석탑과그북쪽에강당터가있고, 이강당터에고려시대의것으로보이는석불좌상이남이있다 년과 1980 년본격적으로발굴조사를하여가람의성격을알수있었다. 9) 출토유물로보아 6세기에속하는것이초창기의것으로추정된다. 그러나석탑의양식으로보면 7세기에세운것으로추정되는익산미륵사석탑보다시대가앞서는것은아니다. 그러므로이석탑은정림사초창기의것이아니라는추정도나오게된다. 만약석탑이초창당시의것이아니라면초창때에는목탑을세웠다가중창하면서목탑대신석탑을세운것이아닌가추정하기도한다. 2) 입지환경그림 년도정림사지이절터는부여읍중심부에자리잡고있으며입지조건으로보발굴조사도아사비도성이조성될당시절터를동시에조성한것으로보인다. 당시도성을만들때는주변의입지조건이외적으로부터안전한방어선을구축할수있는지, 경제적인자립성을확보할수있는경작지는충분한지, 유사시항전할수있는곳이있는지, 그리고궁성위치, 관청위치, 관료들과백성들의주거지, 종교시설위치등을고려하게된다. 정림사지가사비도성내의시가지에남북을중심축으로부소산을배경에두고있는것은처음부터사비도성배치계획과함께이루어진것을말해주는것이다. 지형적으로는평지에자리잡고있으며동으로금성산, 서로는평탄지로이어지다가백마강이막혀있고, 남으로는평탄지와구릉지가이어지다가궁남지와화지산을만나고, 남쪽으로더나가면넓은들을만나는데이곳이대왕펄이다. 대왕펄은곧이어백마강변을만나끝을맺는다. 서에서감돌아온백마강이동으로흘러간다. 북으로는시가지가형성되면서북으로더나아가면부소산이불쑥솟아백마강과이어진다. 정림사지인접하여북으로는낮은구릉이북편을막아주고동으로금성산자락이내려와슬며시평지로이어진다. 남쪽과서쪽은막힘없이넓게터져있다. 9) 충남대학교박물관ㆍ충남도청, 정림사,

28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3) 배치계획남향한일탑식가람으로서남쪽에서부터중문터와 5층석탑, 금당. 강당등이남북축선상에놓이고강당좌우에는작은건물이각한개씩놓였던것같으나확실한흔적은남아있지않다. 중문과강당좌우건물터사이로회랑이연결되었다. 또중문남쪽에는남문이있었으며그앞양쪽에서연못자리가노출되었다. 연못은좌우로 2개가나란히조성되어있었다. 중심지역의규모는동서폭이고려척 (1자 = 약 35.5cm) 으로 130자, 중문에서강당까지의중심거리가 220자로비교적폭이좁고긴구획을이루고있다. 중문에서석탑까지의중심거리는고려척으로 55자이고, 석탑에서금당사이중심거리는 75자로앞서설명한절터들처럼같은거리가아니고탑에서금당까지의거리가더길다. 또금당에서강당까지의중심거리는 90자가되어건물간거리의비례가 1:1.36:1.64 가되므로좋은비례를보이지않는다. 이는석탑이창건때의것이아니라나중에새로만들면서위치가바뀐것이아닌가추정한다. 이때탑의위치가바뀌면서이와같이맞지않는비례도생긴것이아닌가한다. 만일중문과탑과금당의각중심거리를같게수정한다면그비가 1:1:1.4 로서조화를이룰것이다. 발굴조사자료를바탕으로각건물의건축계획을보면다음과같다. 그림 3. 정림사배치도 4) 건축계획 중문석탑에서남쪽으로 19.98m 의거리에건물의중심을두고있다. 초석을발견되지않았으나초석밑에깔았던적심은거의그대로발견되었다. 적심은지표면에서 20~30 cm깊이에위치해있었다. 기단으로추정되는흔적이발견되었으나그흔적을그대로인정하여기단크기를설정할경우너무크기때문에이는중그림 4. 정림사중심구역평면및단면복원도 ( 추정 ) 문의기단으로보기어렵다. 금당의기단폭을중문에적용하면기단폭은기둥중심에서약 3자정도가된다. 이수치를적용하면기단의크기는동서길이약 13.1m, 남북너비약 7.7m가된다. 건물의크기는정면 3칸에 11.3m, 측면 1칸에 5.3m이다. 금당석탑중심에서북으로 26.27m 북으로떨어져건물중심이자리잡고있는데다만건물의남북중심선이서쪽으로 24cm치우쳐있다. 기단은 2중기단으로조성된것으로추정하고있다. 즉하단

29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에기단을만들고적심석이발견되었는데다시그위에다시흙을쌓아기단을만든흔적이남아있는것이다. 2중기단이란초층기단에도초석을배치하고, 상층기단에도초석을배치하는기법을말하는것인데유독백제유적인부소산성건물터와은산의금강사목탑터에서발견되고있는것으로보아백제건축의특징이아닌가생각된다. 금당기단중상층기단은훼손되어규모를알수없으나하층기단은적심석이발견되어그규모를그림 5. 정림사금당정면복원도 ( 장명학안 ) 알수있다. 정면은 7칸에 18.75m 이고측면은 5칸에 13.8m 이다. 만약하층기단의적심석이건물의사방으로돌아가면서퇴칸으로조성된외진주였다면내부는한단을높여기단을조성했을가능성도있다. 이럴경우사방의퇴칸은벽이없는회랑과같은구조일가능성도조심스럽게검토해볼수있을것이다. 하층기단의적심석을기준으로기단의크기를추정해보면동서 20.55m, 남북 15.6m가될것으로보인다. 강당강당은금당에서북쪽으로 31.7m 떨어진지점에건물의중심을두고있다. 석탑으로부터는 57.97m 떨어져있다. 그러나석탑으로부터남북중심축선을그으면동편으로약 20cm를벗어나있다. 금당은중심축선에서서편으로약간치우친반면강당은동편으로치우쳐있는것이특이하다. 강당은고려시대에들어와재건된것이다. 강당지중심에고려시대에조성된석불좌상이자리그림 6. 정림사강당터에재건한불상보호각잡고있는것에서도그것을알수있지만석불주변에화강석으로만든방형초석이있는것으로보아고려시대언젠가건물이만들어졌다는것을알수있다. 기단의구성으로보아원래백제시대강당이있었으나폐허된후고려시대재건하면서기단을새로조성하고백제시대적심석을사용했던것으로보인다. 발굴결과고려시대기단하부에서백제시대적심석일부가출토되었기때문이다. 고려시대강당은백제때의강당크기를거의그대로적용한것으로보인다. 고려시대강당적심석을기준으로건물의크기를보면정면은 7칸에 24.64m 이고측면은 3칸에 10.7m이다. 근래이곳에있던석불을보호하기위하여강당규모에맞춰불상보호각을건립했다. 백제건축에대한연구가부족한시기에이건물에는구조적으로일부불합리한점도있으나백제건축에근접해가는학습과정이라는의미도있다. 백제기단을밝히기위한발굴조사결과전면기둥중심에서약 120cm떨어진곳에서백제기단끝부분이확인되었고, 높이는약 50cm이다. 기단석을만들었다고본다면대체적으로기단폭은약 130cm정도가된다. 이를기준으로건물의기단전체크기는정면이약 27.3m, 측면약 13.3m가된다

30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회랑석탑과금당을에워싸고있는회랑은동서길이 52.2m이고남북길이는 83.5m 이다. 절터의중심축선에서동회랑서회랑중심선까지를각각재보면동서가조금다른데중심선에서동회랑까지는 22.5m 이고, 서회랑중심까지는 22.57m 로거의유사하다. 이그림 7. 정림사복원예상도정도면오차범위내에있다고할수있다. 강당과금당사이의동편회랑터에서 11개소의적심석이발견되었다. 이를기준으로보면도리칸이 3.85m, 보칸이 4.2m이다. 동회랑터남단은훼손되어기둥간격을알수없다. 서회랑터는석탑과금당사이부분의기단이비교적잘남아있으며기단폭은약 5m 정도가된다. 동회랑의적심석보간길이가 4.2m이며이를서회랑에적용해본다면기둥중심에서양기단끝까지는각각 40 cm정도가될것으로추정된다. 따라서동회랑의기단폭도약 5m 이었다고보는것이다. 2. 왕흥사 ( 王興寺 ) 1) 연혁왕흥사는 삼국사기 에창건과함께몇개의기록이있고 10) 삼국유사 에는왕흥사와관련된여러기록이있어 11) 문헌상으로확인된백제사찰이다. 부여규암면신구리에속칭왕은리라는곳인데이곳에서 1934년 왕흥 ( 王興 ) 이라는명문기와가발견되어왕흥사절터였음이확인되었다. 따라서문헌과고고학적으로왕흥사의위치가확인된셈이다. 기록에의하면왕흥사는백제왕실사찰로법왕 2년 (600) 에창건되어그다음왕인무왕 35년 (634) 에완공된사찰이니무려 35년에걸쳐지어진절이다. 무왕때에는익산의미륵사도건립되었는데미륵사창건설화역시 삼국유사 에자세히기록되어있다. 무왕때대가람미륵사를건립하면서왕흥사도함께건립한셈인데무왕때의왕실재정이비교적든든했던것으로보인다. 10) 삼국사기 권 27 백제본기법왕조 2 년봄정월에왕흥사를창립하고승 30 인을두었다. 二年春正月創王興寺度僧三十人 동무왕조 무왕 35 년봄 2 월왕흥사가준공되었다. 왕이매번배를타고절에들어가향을피웠다. 三十五年春二月王興寺成其寺臨水彩飾壯麗王每乘丹入寺行香 동권 28 의자왕조 의자왕 20 년 6 월왕흥사의여러중들이모두배의돛대와같은것이큰물을따라절문간으로들어가는것을보았다. 二十年六月王興寺衆僧皆見若有船楫隨大水入寺門 11) 삼국유사 권 1 태종춘추공조 5 년五年六月王興寺僧皆見如舡楫隨大水入寺門, 동권 2 남부여전백제조 사비수언덕에 10 여인이앉을만한바위가있는데백제왕이왕흥사에가서예불을하려할때먼저이바위에서예불을드렸는데그돌이저절로따뜻해지므로자온대라하였다. 又泗沘崖又有一石可坐十餘人百濟王欲幸王興寺禮佛先於此石望拜佛其石自煖因名㷝石 동무왕조 불전과탑과회랑을세우고절이름을미륵사 ( 국사에서는왕흥사라했다.) 라했다. 殿塔廊廡各三所創之額日彌勒寺 ( 國事云王興寺 ), 동권 3 법왕금살조 다음해경신에 30 인의승려를두고당시도성인사비에왕흥사를창건할때겨우그기지만닦다가돌아가니무왕이즉위하여부친의사업을계승하여수십년을지나서완공하였는데미륵사라고한다. 그절은산을등지고물을내려다보며화목이수려하여사시의미견을갖추었다. 왕이매번배를타고강을건너절에들어가장려한형승을감상했다. 明年庚申. 度僧三十人. 創王興寺於時都泗泚城 ( 今扶餘 ) 始立栽而升遐. 武王繼統. 父基子構. 曆 ( 歷 ) 數紀而畢成. 其寺亦名彌勒寺. 附山臨水. 花木秀麗. 四時之美具焉. 王每命舟. 沿河入寺. 賞其形勝壯麗

31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그러나발굴조사결과 2007 년왕흥사목탑지에서위덕왕 24년 (577) 에건립했다는명문이나타나건립년도가분명하게확인되었다. 12) 삼국사기의기록과는 23년앞선해이다. 건립한왕도법왕이아니라위덕왕이다. 왕흥사도결국결국외교정책의실패로백제가멸망하자왕실사찰이었던이절도융성했던모습이점차사라지고쇠락의길로접어들다가고려조에들어와사찰의수명을다하게되었다. 조선시대의유물도출토되는것으로보아조선초기까지사찰의명맥을유지했다고보이나이때는아주작은암자의형태로간신히명맥만유지했던것이아닌가생각된다. 2) 입지환경 그림 8. 王興 명기와조각 부소산성의서북쪽백마강건너편에부소산을바라보며자리잡고있는왕흥사는후면의드무재산 ( 해발 131m) 을중심으로주위에는높고낮은산과구릉으로둘러싸여있는남사면한아늑한곳이다. 그리넓지도, 좁지도않은골은동남방향으로시야가터져전면에는넓지않은들이펼쳐있고, 그남쪽으로백마강이흐르며강건너에는부소산이솟아펼쳐져있다. 절터에서서남방향으로 1.5km지점에는부산 ( 浮山 ) 이불쑥솟아이곳의위치를짐작케해준다. 그림 9. 왕흥사지및주변경관 ( 왕흥사발굴중간보고서 ) 왕흥사주변에는수많은역사유적들이산재해있는데서북후면의드므재산에는울성산성 ( 蔚城山城 ) 이있고, 북서쪽 1.5km떨어진지점에는호암사지가, 북편강기슭바위에는천정대 ( 天政臺 ) 가있다. 서남쪽의부산에는산성이있고, 부산에서남쪽으로 1km떨어진백제대교건너편의규암면외리인근에는백제문양전이출토된외리절터와외리산성이있다. 왕흥사정면의백마강건너편에는부소산성을비롯하여수많은유적과함께백제왕궁이자리잡고있었다. 왕실의융성을갈망하면서창건된이절은백제왕과왕족들이강을건너이곳으로예불을드리러왔던곳이다. 따라서강안어딘가에는배를접안할수있는나루시설이있었을것으로추정된다. 3) 배치계획 왕흥사는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2000년 9월부터 2004년 6월까지 5차에걸쳐발굴조사를시행해오고있으며아직전체발굴조사가끝나지않은상태이다. 앞으로발굴조사가좀더이루어지면전모가밝혀지겠지만부분적으로목탑, 금당, 강당, 회랑자리로추정되는흔적이확인되고있다. 완 12) 사리함몸체외부에 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 ( 정유년 2 월십오일백제왕창이죽은왕자를위하여절을세우고본래사리두매를묻었을때신의조화로셋이되었다 ) 이라는명문이새겨져있다

32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벽하지는않지만현재까지이루어진발굴조사에의하면탑과금당, 강당이남북중심축을기준으로남북으로나란히배치되고, 주위는회랑이둘러져있는 1탑1 금당식가람배치로추정되고있다. 절의규모는회랑의동서폭이 58.7m이고, 남북길이는 80여미터에이르는것으로알려지고있으며중문이있었을것으로추정되는위치에는동서로길게축대를쌓은흔적이확인되고있다. 서회랑지와부속건물터에서기와를쌓아만든와축기단 ( 瓦築基壇 ) 을만든흔적이확인되었다. 왕흥사의와축기단은하단부에지대석을 1~2단깔고그위에평기와를종방향으로나란히쌓는기법을사용하였다. 이는돌을쓰지않고기와만쌓아만든금성산건물터나 人 자모양의합장식으로쌓은군수리절터의사례와는사뭇다른것이다. 당시백제의와축기단이일반적으로사용된건축기술이었으나쌓는방법은조금씩달랐다는것을알수있다. 왕흥사는아직완전한발굴이이루어지지않아탑, 금당, 강당의크기를알수없다. 왕실의후원으로지어진사찰이라면규모나조형이초라하지는않았으리라추정된다. 왕흥사절터에서백제시대와고려시대의것으로보이는기와조각이출토되어백제뿐만아니라고려때에도활발한불사가있었음을알수있다. 그림 10. 왕흥사지추정배치도 그림 11. 왕흥사지출토백제및고려시기기와조각 3. 금강사 ( 金剛寺 ) 1) 연혁이절터는부여군은산면금공리에위치하고있으며언제창건되었는지그연혁을알수있는근거는없다. 다만백제유물이출토된것을근거로백제사찰로추정하고있을뿐이다. 금강사는문헌에나타나지않으나이곳에서고려시대의것으로보이는 金剛寺 명기와편이출토되었고, 절앞의강이름이금강천이며, 13) 이밖에금강이라는명칭과지명이이근처에남아있는것을근거로금강사로보고있다. 그러나금강사라는절이름이백제때부터사용된것이아니라후대에붙여진가능성도배제 그림 12. 金剛寺 명기와조각 13) 일반적으로 琴江川 으로알려져있으나신증동국여지승람과대동여지도에는 金剛川 으로표기가되어있어이곳이금강사로추정하고있다

33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할수없다. 백제멸망후신라는이곳을점령하면서금당과탑이중건되었던것으로보인다. 후기신라때의유물과중건흔적이거의동시에나타나고있는것으로보아 2차중건은후기신라였음을알수있다. 이사찰은고려때에도경영되었다는흔적이확인되었다. 탑터에서기존의기단위에조잡하게잡석을쌓아만든흔적과고려시기청자편이함께출토된것은고려때 3차중건이있었음을말해주는것이다. 따라서이절은고려때까지경영되다가폐사된후다시중건되지못하고현재에이르게되었다. 2) 입지환경칠갑산에서발원한칠갑천이남으로흐르면서장평을거쳐은산면에이르러금강천 ( 錦江川 ) 으로이름이바뀐다. 이금강천은금강사절이있는금공리 ( 琴公里 ) 에서조금더흐르다가줄기를동으로틀면서부소산북편에이르러백마강으로합수된다. 금강사는금강천의중류은산면금공리금강천서편에자리잡고있다. 북에서남으로금강천이휘돌아흐르고, 강건너로는해발 200m에이르는망월산이남북으로길게이어져있다. 절터의서측으로는해발약 100m 정도의낮은월미산이남북으로길게절터를감싸듯솟아있고그앞으로금강천이흘러지나가고있다. 금강사가앉아있는자리는금강천이흘러지나가는남북으로터져있고동서로산이막혀있으나서쪽에배산을두고동을향하고있는배산임수형국이다. 1964년과 1966년 2차에걸쳐국립중앙박물관에서발굴조사를했는데 14) 건물배치가동향을하고있음이백제의다른사찰배치와구별되는특징이라하겠다. 이렇게동향으로가람이배치된것은이곳의지형조건때문인것으로보인다. 만약이곳에남북방향으로절을배치할경우배산임수의형국을만들기어렵기때문이다. 그림 13. 금강사터전경 ( 충청남도문화재대관 ) 그림 14. 금강사입지및주변지형도 3) 배치계획발굴조사결과건물의주칸을확인할수있는초석일부와적심석, 돌을가공해만든가구식기단석일부가남아있었다. 건물의배치는동서를중심축으로하여가운데탑과금당을두고정면에중문, 후면에강당을배치한 1탑 1금당식구조인것이확인되었다. 중문에서금당까지는탑과금당주위를에워싸는회랑이둘러져있었고, 회랑의동북쪽과서쪽강당외곽에승방이있었던것도확인되었다. 남북 150m, 동서 170m 정도되는넓은대지위에건물을배치했는데절터중심곽의규모는고 14) 윤무병, 금강사, 국립박물관조사보고제7책,

34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려척 (1자 = 약 35.5cm) 으로환산하여남북폭이약 215자이고중문에서강당터까지의중심거리가약 290자로부여군수리절터의중심곽규모와비슷하다. 중문에서탑자리까지의중심거리는 67자이고금당터의유구는후대의것과중첩되어있었지만, 탑자리와초창기금당터까지의중심거리는 65자이어서역시이두개의거리가거의같음을추적해낼수있었다. 금당터와강당터의중심거리는고려척으로 135자가되어동에서부터건물간의거리의비례는 1:1:2가된다. 탑자리는여러번중창되었음을알수있다. 이절터에서는중문과강당양측으로회랑이연결되어있는데, 강당옆에종루 ( 鐘樓 ) 나경루 ( 經樓 ) 없이회랑이직접강당에연결된것이특징이다. 금당기단의규모는고려척으로환산하여남북길이가 54 자, 동서폭이 40자가되어 2변길이의비례가 1.35:1 이된다. 그림 15. 금강사배치도이는규모가미륵사중금당상층기단크기와거의비슷하므로미륵사중금당과같은정면 5칸, 측면 4칸이었을것으로추정된다. 강당기단의규모는길이가고려척으로환산하여 130자이고폭이 54자이며, 강당후면중앙에서는뒤에가로놓인승방터와연결되는듯한회랑자리가노출되었다. 승방터는길이가 250자, 폭이 40자로환산되어그규모가상당히크다는것을알수있다. 창건당시건물기단사이거리를보면중문-탑기단사이는 41자, 탑-금당기단사이는 28자, 금당-강당기단사이는 103자가된다. 그중에서탑-금당의중심간거리는 81자이다. 이 81자를기준으로가람내각건물의거리를비교해보면중문-탑중심거리는 1배, 금당-강당중심거리는 2배, 중문-탑기단사이는 0.5배, 탑-금당기단사이는 0.3배, 금당기단-좌우회랑사이는 1배, 강당기단-좌우회랑사이는 0.5배의차이를보이고있어배치가계획적이었음을알수있다. 탑과금당을조사한결과창건이후 2차에걸쳐다시중수된것으로밝혀졌다. 백제가멸망하자이절또한쇠퇴하면서초창당시의기단이크게훼손되었다. 4) 건축계획 금당금당은창건당시판축흔적이남아있으나심하게훼손되고그후건물이들어서면서뒤쪽으로약 14자옮겨창건당시의규모보다는축소된크기로건물이세워진흔적이확인되었다. 초창기의기단은황갈색의점질토를이용하여판축을했는데한켜의두께는 1~6cm 이고, 흔적으로보아다짐봉의지름은약 3~4cm 정도로추정된다. 기단의규모는고려척으로환산하여한변은약 40자이며판축두께는 6자로확인되었다. 금당터에는기단지대석일부가원형대로남아있었는데, 익산미륵사의것과같이지대석상면에면석을세워놓은턱을안쪽으로깎아내고또기단의모서리에만귀기둥을세웠던흔적을볼수있다. 그후신라가점령하면서금당위에새로운건물을건립하게되었다. 새로지은건물은기존의금당기단을약간후면으로옮기고규모는창건당시의크기와거의같게하였다. 금당의 3차중건은언제인지확실치않으나 2차중건된기단에보토를하여중건한것으로보인다. 이때개수한기단의흙은불순물이많은흑색토를사용하였는데재건기단

35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위에 1자이상두께로다져만들었다. 그후금당이소실된흔적외에는다시재건되지못했다. 목탑그림 16. 금강사금당기단복원도가운데지표밑에서심초로보이는자연암이확인되었는데지름이약 6.6자이고가운데기둥구멍으로보이는구멍은지름약 4자, 깊이 2.2자정도이다. 탑역시신라점령시기금당을 1차재건할당시함께건립한것으로기존의기단에보축을하여중건한것으로보인다. 탑의 3차중건역시 2차중건기단위에잡석으로조잡하게구축한다음건물을앉혔다. 잡석사이에서고려시대청자편이출토되어고려때 3차중건이있었다는것을알수있다. 이목탑의초창기단은고려척으로환산하면한변이약 40자정도가된다. 이를근거로주칸을추정하면일반건물보다주칸의길이가좁을것이므로기단내밀기를제외하고각주칸의길이를약 6자내지 7자내외로하면정면, 측면이각각 5칸이었을것으로추정된다. 강당기단의크기는고려척으로가로세로가각각 130자와 54자이다. 이크기는익산미륵사강당보다작고군수리절터의강당과비슷하다. 그러나주칸의길이를알만한초석이나적심석이확인되지않아서건물의칸수를확인하기가어렵다. 또한기단의지대석이있었다는기술이없지만회랑에지대석이있었다는것으로미루어지대석이있었을것으로생각되며그위에판석을세우고갑석을덮었을것으로추정된다. 화강석을잘가공하여짜맞춘격식이있는가구식기단으로높이는 3자이상이었을것으로생각된다. 중문길이가고려척으로 40자이고폭이 30자이다. 이크기는미륵사중원의중문보다는작고미륵사동ㆍ서원중문보다는약간크다. 이로미루어금강사중문은정면 3칸, 측면 2칸이었을것으로추정된다. 이절의회랑과강당터에서발견된초석은둥근형태로밑면이뾰족한팽이모양을하고있다. 그리고그밑에적심석을받쳐놓았는데판축의표면위에만놓여그리두껍지않게깔려있는형상을하고있었다. 이와같은둥근초석은익산미륵사의것과같이유사한것이어서이러한정초기법이흔히사용되었던것을알수있다. 4. 군수리 ( 軍守里 ) 절터 1) 연혁부여읍군수리에있는이절터는 1935~36년에일본인이시다 ( 石田茂作 ) 에의하여발굴조사되었다. 15) 이절역시언제누가창건하였는지확인되지않고있다. 이절은또한언제어떻게훼손되었는지도기록이나문헌이밝혀주지못하고있다. 2005년도에다시발굴이진행되고있으므로추

36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후그성격이밝혀질수도있으나연혁이밝혀질지는두고봐야할것이다. 절터에서는다른건물흔적이없는것으로보아창건이후폐사될때까지한번도중건이이루어지지않은것으로추정되고있다. 2) 입지환경부여읍남쪽에궁남지가있고궁남지서쪽약 200m 지점에위치하고있다. 주변은평지로주택지와농경지가형성되어있다. 동쪽으로는화지산과궁남지가있고, 서쪽으로주택지, 남쪽으로는넓은농경들이펼쳐지고그남쪽으로백마강이서에서동으로흐르고있다. 대왕포라고하는강변이이근처에있다. 북으로는농경지를사이에두고부여읍중심부가자리잡고있으며읍중심지북으로부소산이솟아있다. 절터후면가까이에아주낮은구릉이있으나이구릉이배산을형성할정도로높지않기때문에이절은평지에자리잡고있는것으로보아야한다. 그림 17. 군수리절터초기발굴배치도 3) 배치계획남향한 1탑1금당식가람으로남쪽에서부터중문, 탑, 금당, 강당이남북축에맞추어배열되고, 탑과금당을가운데두고중문과강당좌우로이어지는동서양쪽으로회랑이감싸고있다. 강당동서에는각각종루, 경루터로그림 18. 군수리절탑터기단부분추정되는방형건물터가각한개씩놓여있고회랑은이곳으로연결되어있다. 백제의전형적인 1탑 1금당식가람배치인것이확인되었다. 중문중심에서탑중심까지는당시사용했던고려척으로약 70자, 탑에서금당까지의중심거리역시 70자, 금당에서강당까지는 100자가되어그거리의비는 1:1.43 이된다. 중심부를에워싸고있는좌. 우양측회랑간의거리는약 200자이고중문에서강당중심까지남북거리는약 240자가되는데그비례는 1:1.2의구형 ( 矩形 ) 이된다. 4) 건축계획 탑기단한변길이가고려척으로 40자정방형인데, 보고서에나타난도면을보면주칸이 5칸으로추정되며건물터의중심에는심초석이지표아래 6자되는곳에있었다. 이렇게심초석이지하에놓이는것은일본의사천왕사나법륭사의목탑자리에흔히사용되었던기법으로추측된다. 탑의기단은자연석기단과와축기단을혼용하고있는것으로보아지속적으로보수가있었던것을알수있다. 15) 朝鮮古蹟調査硏究會, 扶餘軍守里廢寺址發掘調査, 古蹟調査報告 1936( 昭和 11)

37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금당기단규모는동서약 27m, 남북약 18m이고기단은와축기단이다. 와축기단을쌓은모양도정면은여러개의기와를 人 자모양으로맞붙여쌓은기법이고, 나머지 3면은평기와세워쌓기를한기법이다. 금당지에서 2개의초석과여러개의적심석이발견되었는데정면 9칸으로계획된건물임을알수있다. 강당금당에서북으로 18m 떨어진곳에자리잡고있는데동서약 45.5m, 남북약 18m로역시와축기단을하였다. 동ㆍ서회랑외곽에는금당과동서축에맞춰각각하나씩의건물이있었던것으로추정된다. 이렇게횡으로여러건물을배치한것은익산미륵사나고구려의정릉사그리고고려의흥왕사나불일사등에서흔히조영됐던형식이다. 그림 19. 군수리절배치계획도 5. 동남리절터 1) 연혁이절터는부여읍동남리에위치하고있는데역시 1938년일본인이시다 ( 石田茂作 ) 에의하여처음발굴조사되었다. 16) 이절역시언제누가창건했는지알수없고언제폐사되었는지도알수없다. 그후 1993~1994 년충남대박물관에서다시발굴조사를실시하였으나사찰이름이나연혁에대한근거를확인하지못했다. 다만백제사비시대의절터일것이라는추정만하고있을뿐이다. 2) 입지환경부여읍중심부남쪽에부여군청이있고군청서측에동남초등학교가있다. 동남리절터는동남초등학교남쪽농경지에자리잡고있다. 주변은농경지이며동편으로주택지가형성되어있다. 부여군청으로부터는동남향으로약 400여미터떨어져있다. 절터동남방향으로군수리절터와궁남지, 화지산이있고, 서편으로는백마강이남으로흐르다가동으로감돌아지나간다. 북으로는부여읍중심부가자리잡고있으며읍중심지북으로부소산이그림 20. 동남리절터발굴전경솟아있다. 이절터주변가까이에는높은산이나구릉이없으며거의평탄지와같은입지조건을하고있다. 16) 朝鮮古蹟調査硏究會, 扶餘東南里廢寺址發掘調査, 古蹟調査報告 1938( 昭和 13)

38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3) 배치계획남향한가람으로탑을세우지않은특이한절이다. 남에서부터중문, 금당, 강당이남북축선상에나란히놓이고중문과강당터를연결하는회랑이가람중심을에워싸고있다. 강당양쪽곁에는군수리절터와같이종루와경루를두고동ㆍ서회랑이이건물터에연결되어있다. 또중문터의남쪽에떨어져서남문터로보이는유구가발견되어우리나라절터조사에서처음으로남문터가확인된유구이기도하다. 이동남리절터에는탑자리가발견되지않지만금당터앞에쌍탑이있었을가능성도있다는견해도있다. 17) 그러나 1994년도재차조사에서는탑지리가확인되지않아쌍탑의가능성은없다. 각건물의간격을보면금당기단외곽선을기준으로중문까지 70자, 강당까지 70자, 동서회랑까지 70자롤금당주위의각시설물까지모두같은간격을유지하고있다. 금당의남북길이가 70자이고, 강당의남북길이도 70자이다. 이절의배치에서흥미있는사실을발견할수가있다. 즉중문기단에서금당기단까지 70자, 금당측면길이 70자, 금당기단에서강당기단까지 70자, 강당측면 70자가되어 70자라는같은수치를반복적으로이용하고있다는것이다. 4) 건축계획 금당기단크기가정면 100자, 측면 70자이고기단내에서초석이나적심석은발견되지않았다. 대신초석을놓았을것으로추정되는정면 5열, 측면 4열의규칙적인방형다짐토층이 20개가발견되었다. 방형의다짐토층의크기는가로세로가대개 169~180cm이고깊이는 30~50cm이다. 이다짐토층위에적심석과초석을놓았을것으로추정된다. 이흔적을초석자리로본다면금당은정면 5칸, 측면 3칸이된다. 각칸의길이를보면정면가운데 3칸은각각 503~505cm이고양협칸은동측협칸은 380cm가되며, 측면어칸은 570cm이고, 양협칸은 380cm가된다. 금당기단정면외곽에서할석을 3자넓이로깔았던흔적이발견되었다. 아마낙수를받기위한것으로보인다. 그림 21. 동남리절터배치계획도 강당기단규모가정면 174자, 측면 70자이다. 기단정면에는금당과같이 3자폭으로잡석을깔아두고, 금당과강당사이에는돌로포장된돌길을두고있다. 일제때조사당시강당의크기는정면 31.2m, 측면 21.2m로추정하고있으나재차조사에서는동, 서의기단으로보이는유구가약 5m 정도만남아있을뿐아무런흔적을발견할수가없었다. 뿐만아니라중문자리, 회랑자리도확실하게발견되지않아그동안유적이유실되었거나아니면일제때의조사가추정이었을것으로추측하 17) 후지사와 ( 藤澤一夫 ) 는중국에서발생된쌍탑식가람이백제를거쳐왜에전해지는과정에서백제계의쌍탑식가람일가능성이있다는견해를밝히기도했다.( 藤澤一夫, 日本の百濟系雙塔伽藍 - 雙塔樣式の伽藍系譜 (1)- 馬韓ㆍ百濟文化第 4 ㆍ 5 集 원광대마한ㆍ백제문화연구소 )

39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고있다. 남회랑에서는남북으로관통하는폭 2~3 자의판석을덮은배수구유구가발견되었다. 6. 부소산폐사지부소산폐사지는부여의부소산서쪽구릉에위치하는가람으로중문, 목탑, 금당이남북중심축상에위치해있고회랑내에강당이없는특수한형태이다. 최초발굴은 1942년후지와라 ( 藤澤一夫 ) 와요네다 ( 米田美代治 ) 에의해서이루어졌고, 1980년에문화재연구소와충남대박물관, 그리고국립부여박물관에의해 2번째발굴이시도되었다. 금당기단의규모는정면 16.3m, 측면 13.6.m 이며목탑지는기단한변의길이가 8.2m로서중앙부에심초를놓았던곳으로보이는지름 120cm 의구덩이가얕게파여져있다. 중문지는탑지의남쪽에서발견되었고, 여기서약 19m 떨어진경사면아래에남문지로추정되는유적이발견되었다. 18) 부여의다른백제사지들은모두강당이회랑내로유입되어있는배치를보이고있기때문에, 소실된부분이많아가람의확실한전모를알수는없지만배치형태상으로짐작컨대시기상으로가장앞선사지로추정할수있다. 이것은백제의가람배치가중국의영령사식 ( 泳寧寺式 ) 의가람을받아들여발전한것으로볼수도있다. 영녕사의기록중에는강당의기록이없지만, 낙양가람기에기록된다른사찰들중에는구체적이지는않아도회랑밖에강당이위치하고있다고기록되어있기에영녕사도동일한형식이라고추정한다면서복사지의가람형태가영령사의형식을이어받았다고추정할수도있을것이다. 따라서부소산서복사지는부소산성건설과더불어이산성의사찰로서조영되었을것으로여겨지며사비천도와거의동시에이루어진것으로추측할수있다. 절터의규모는남북약 50m, 동서약 40m 정도의작은사찰이라하겠다. 7. 능사 ( 陵寺 ) 1) 연혁 1992년국립부여박물관에서처음시굴조사를하면서건물터가발견되었고, 발굴과정에서금동향로와창왕명사리감이발견되면서왕릉근처에세워왕릉을관리하고, 왕실의기원을빌었던원찰이었다는것이확인되었다. 특히창왕명사리함은사찰의창건년대를밝혀준귀중한유물로이를기점으로당시유물의시대적특징까지가늠할수있게해주는것이다. 이절은왕릉에세운백제왕실의원찰로창건되었으며이곳에서발견된석제사리함 ( 국보제288호 ) 에 백제창왕십삼년대세재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 ( 百濟昌王十三年大歲在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 라는글이새겨져있어백제창왕 13년 (567) 에공주가성왕의위업을기리기위해사리를공양했다는사실이확인되었다. 그러나창왕 13년에사리를공양하기위하여절을 그림 22. 부소산폐사지 18) 장경호, 백제사찰건축에관한연구, 쪽, 홍익대박사논문,

40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창건했는지아니면이미절이건립되어있었고그후사리를공양하는중건불사를했는지는정확하게알수없다. 이로미루어볼때능사는늦어도서기 567 년또는그이전에창건되었을것으로추정하고있다. 백제가도읍을사비로천도한지 30년, 백제가멸망하기 100 년전의일이다. 건물은불탄흔적과함께일시에무너졌으며, 중건되거나재건된흔적이없는것으로보아백제가멸망하면서함께훼손되었으며그후다시중창되지못하고현재에이르고있는것으로보인다. 그림 23. 부여능사와능산리고분군전경이절은문헌에기록되어있지도않고, 전해오는전설도없다. 출토된유물에서도절이름에대한아무런단서를찾지못했다. 따라서이절의이름이무엇인지알수가없으며, 다만왕릉원으로추정하고있는곳에인접되어있어서 능사 라고부르고있다. 능사는대개왕실의후원으로왕릉근처에건립하고, 능을관리하면서왕실의안녕과무궁을기원하는원찰의기능을하는절이었다. 고구려동면왕릉앞에사찰을건립하여 정릉사 라고했던것이그대표적인사례라할수있다. 이절터에서백제금동대향로 ( 국보제287호 ) 가출토되어당시백제인들의사상적단편과백제공예의진수를이해하는데귀중한단서를제공해주기도했다. 2) 입지환경부여를감돌아서에서동으로흘러내려온백마강은중정리에이르러큰들을형성하게되는데이곳이대왕포다. 이대왕포에서동으로더내려가면부여주위를나성이에워싸고있었던나성의동쪽끝자락이나온다. 사비시대부여에는사비도성을에워싸는나성이있었고그흔적이지금까지도유적으로남아있다. 이나성은동으로능산리, 서로는백마강변이되고, 북으로는부소산성과이어지면서그성자락이동으로청산성에닫고다시동남으로이어지다가능산리에이르러남쪽으로꺾어지면서이성벽이나성동편성벽이되어백마강으로내리뻗어끝을맺는다. 남쪽에는성벽을두지않고백마강이자연적인방어선이그림 24. 능사출토 창왕 명사리함되도록하였다. 부여나성동쪽끝나성동문이있었던곳을지나면백제왕실묘역으로추정되는고분군이능산리고분군이다. 능사는부여나성동문의북벽외곽에서능산리고분군사이에좁은골짜기에입지하고있다. 주변에는동으로해발 164m의청마산이, 동남으로는해발 83m의오석산이, 남으로는해발 118m의필서봉이, 서로는해발 121m의금성산이, 북으로는 121m의석목리산이둘러져있고능사남쪽으로는논산으로이어지는길이동서로나있다. 능사북편에는해발 100~120m 정도되는구릉성산이동에서서쪽으로활처럼휘어지면서주변을감싸고있는형상이다

41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3) 배치계획 1992년 1차발굴을시작하여 2000년까지 7차발굴이이루어졌으며 19) 2005년현재까지도주변부의발굴이진행되고있다. 그러나 1996년도 5차발굴이이루어지면서사찰중심지역의규모와형태가명확하게밝혀지게되었다. 발굴조사전에이곳은계단식논으로경작하고있었다. 발굴조사결과남북자오선상에중심축을두고정면남쪽에서부터중문, 탑, 금당, 강당을나란히배치한전형적인 1탑1 금당식의가람임이확인되었다. 탑과금당을마당중심부에두고남쪽가운데중문에서좌우로이어지는회랑은동서그림 25. 능사 ( 터 ) 전경로이어지다가북쪽으로꺾이면서주위를감싸고있다. 동ㆍ서회랑의북쪽끝에는각각커다란건물을배치하고, 강당의동서양측면에도같지는않지만별도의건물이있었다. 서회랑밖에는그리크지않은건물이별도로회랑과인접하여세워져있었다. 동ㆍ서회랑의중심간격은약 53m이고중문중심에서강당중심까지까지남북길이는약 72.5m 정도로부여정림사와비슷한규모이다. 각건물간의거리는중문에서목탑중심간거리는약 17.34m 이고, 목탑에서금당중심간거리는 21.9m이며, 금당에서강당중심간거리는 33.5m이다. 백제의다른사찰에서보면대개중문-목탑간, 목탑- 중문간거리가같거나비슷한데이사찰에서는약 4.5m의차이를지니고있는것이다르다. 능사에서는특이하게도강당, 공방지에서온돌흔적이확인되었다. 이온돌은실전체를깔았던것은아니고외줄고래로만들어온돌의초기형태를보여주고있다. 또한나무그림 26. 능사발굴배치도다리와돌다리를놓았던유적이발견되어당시건축기술의성과를확인할수가있다. 발굴후유적이확인되면서능사내각건물의규모와계획특징이나타나게되었다. 4) 건축계획 중문발굴된건물유적중가장남쪽에위치해있다. 목탑지중심에서남으로 17.34m 떨어져중문의중심이위치해있으며초석이나기단등의유구는전혀남아있지않다. 기단의규모는정면 11.6m, 측면 7.5m로추정된다. 기둥간격을확인할수있는것으로는초석하부에직경 1.55m 규 19) 부여군, 능사 ( 부여능산리사지발굴조사진전보고서 ),

42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모로적심을놓았던흔적만전면에 4곳, 후면에 4곳, 모두 8 곳이확인되었다. 이로미루어볼때중문은정면 3칸, 측면 1칸이된다. 기둥간격은정면약 10m, 측면약 3.7m이다. 정면 3칸의기둥간격은일정하다. 각칸의초석간격은다음과같다. 표 2. 중문의초석간격 ( 단위 : cm ) 도리방향 ( 정면 ) 보방향 ( 측면 ) 서협칸어칸동협칸전면 동측 378 후면 서측 362 중문의동ㆍ서에연접하여남회랑이이어지고있다. 또중문전면중앙에는판석 2매가있어이것이마당에서중문에이르는계단돌로추정된다. 중문에서목탑에이르는곳에는암키와를둥글게세워디딤돌로삼았던흔적이남아있다. 남회랑터에서는기단석이나초석흔적이전혀발견되지않고있다. 회랑은중문의동서중심선과일직선으로이어지고있다. 중문과탑사이에는암기와 4매로지름 39~46 cm로둥글게만들어깊이약 30cm로묻은시설물이 12개가나란히묻혀있다. 이것은중문과탑을잇는디딤돌이었던것으로추측된다. 그림 27. 능사중심구역건물배치평면도 그림 28. 능사복원조감도 목탑금당기단끝에서남쪽으로 7.87m 떨어져탑이위치해있으며이중기단에하층기단의 1변길이는 11.73m 로방형이고, 상층기단은 1변의길이가 10.3m 이다. 하층기단은동ㆍ서ㆍ북측에기단석이남아있으나남측에는중심부에만일부돌무더기가남아있다. 기단석은크기가다양한화강석을사용하였다. 다만동북모서리에는커다란것을사용하였다. 상층기단은북측과서측일부만기단석이남아있다. 기단석은길이 1.1~1.3m 정도되는장대석을사용하였다. 기단후면중심에는길이 2.12m, 너비 0.37m 의계단석이놓여있다. 이로미루어탑의전후에는계단이있었을것으로추정된다. 탑중심의지표아래 1.2m쯤에는 m 크기의방형심초석이묻혀있었는데부식된심주의하부가일부교란된채심초석위에놓여있었고그주변에서는금은제과판장식, 금동제법사리, 각종구슬, 토제불상등다량의유물이출토되었다. 특히주목되는것은심초상면남쪽에서높이 74cm, 밑변 50cm 크기의화강석사리감이발견된것인데윗부분을둥글게아치형으로만들었고, 전후면에도터널형의감실을두었다. 전면남쪽의감실주위에는 백제창왕13년태세재정해

43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매형공주공양사리 (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 라는명문이음각으로새겨져있었다. 내용은백제위덕왕 13년 (567) 에공주가사리를공양한다는뜻으로이절의성격규명에중요한단서를제공해주고있다. 목탑과금당사이중심축선에는 40cm각으로만든방형디딤돌을놓아두었다. 목탑의칸수는초석흔적이남아있지않아알수없으나기단의규모로보아각칸모두 3칸이었을것으로추정된다. 상층기단에맞춰기둥을세웠다면각칸기둥간격은대략 3~3.3m 정도가된다. 이간격과북측계단석흔적을기준으로초층지붕내밀기를추정하면하층기단보다조금더나오게된다. 이를근거로지붕의각도와탑몸의채감율을감안하면탑은 5층이었을것으로추정된다. 금당금당은사찰의가장중심이되는건축물로탑과강당사이에배치되어있다. 기단은탑기단북쪽끝에서 7.87m, 강당기단끝에서남쪽으로 16.26m 떨어져있으며기단의형태는탑과같이이중기단으로만들었는데하층기단은정면 21.62m, 측면 16.16m 이며상층기단은정면 11.94m, 측면 14.48m이다. 하그림 29. 능사목탑복원도층기단은화강석으로짜돌린기단석이남아있으나상층기단은동측면의장대석이약 5m 정도가남아있다. 초석이나적심석은남아있지않으나중문과마찬가지로초석을놓을자리를판축으로다져조성한흔적이잘남아있었다. 이를근거로건물의칸수를확인한결과정면 5칸 (16.93m), 측면 3칸 (11.28m) 이다. 정확하지는않지만정면의각칸기둥간격은어칸 3.6~3.72m, 협칸은 2.7~2.9m 이다. 측면어칸은 5.72~6.07m 이고어칸은 2.44~2.82m 이다. 이수치는초석이나적심그림 30. 능사금당정면복원도이없는상황에서초석밑의판축층을기준으로측정한것이기에어느정도의변수가있는것이다. 이를감안하여주칸의간살은고려척으로정면중앙 3칸은 10자이고, 양협칸은 8자이며, 측면어칸은 16~17 자, 측면협칸은 7~8자정도가된다. 각칸의상세한간격은다음표와같다. 표 3. 금당초석간격 ( 단위 : m) 정면 : 5칸, 측면 : 3칸, 서2칸 서1칸 어칸 동1칸 동2칸 북협칸 어칸 남협칸 정면 동측면 후면 서측면

44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금당의남북양쪽에서금당출입을위한계단시설이확인되었고, 탑과강당사이에는한변길이약 39cm정도의방형디딤돌을놓아두었다. 건축형태는어떠했는지그흔적을확인할수없다. 이보다늦은시기에건립된일본법륭사금당의조형을참고해보면중층에겹처마팔작지붕이고남동쪽하층기단에서치미조각이발견된것으로미루어지붕용마루양끝에는치미를올려놓았을것으로추정된다. 강당강당은금당북쪽에자리잡고있으며금당기단과강당기단사이는 16.26m 떨어져있다. 기단의크기는동서전면이 37.4m, 남북 18m이고금당과는달리잡석과와축기단으로만들었다. 이기단은후에다시만들거나개수한흔적이없는것으로보아처음부터잡석과와편을이용한것이라할수있다. 약한경사지에조성하였기때문에수평을맞추기위해남쪽과북쪽의기단높이가다르다. 즉남측기단은높이가 50~60cm이고, 북측기단높이는 15~20cm이다. 잡석과와편을이용한건물은강당외에공방, 강당동ㆍ서측건물, 회랑밖건물등에서도발견할수있다. 이로미루어볼때탑과금당과같은중심건물은돌을잘다듬은숙석 ( 熟石 ) 으로기단을만들었지만중심건물이아닌부속건물은잡석과와편을이용하여건물의격을구분하였다는것을알수있다. 강당에서는다행히여러개의초석이발견되었다. 건물의평면구조를보면정면 8칸, 측면 3칸으로확인되는데특이한것은가운데어칸과동측단협칸이다른칸에비해반정도짧다는것이다. 이는어칸을중심으로좌우로하나씩방을설치하려고계획했기때문인것같다. 전면열에는초석이거의없어각칸의간격을알수없지만후면열에는초석이남아있어그간격을알수있다. 후면열의초석을근거로전면열의각칸치수를추정해볼수는있을것이다. 표 4. 강당초석간격 ( 단위 : m) 정면 8칸, 34.35m 측면 : 3칸 서협칸 서3칸 서2칸 서1칸 어칸 동1칸동2칸 동협칸 남협칸 어칸 북협칸 전면 불명 불명 불명 불명 불명 불명 불명 불명 서측면 불명 후면 평면구성을보면중앙에복도를둔 2개의큰방이좌우로나란히하나씩자리잡고있으며방과방사이는폭 2.25m의통로를두고있다. 방의전면과후면, 서측면에퇴칸을두었는데퇴칸의흔적을알수있는초석이남아있다. 서쪽방은벽위치에돌을나란히놓은것으로보아통벽이었던것으로추정되면, 동쪽방은독립기초위에기둥을세웠다. 이런흔적을근거로보면동쪽방은심벽이나판벽, 아니면창호로이루어졌고서쪽방은흙벽을쌓아방을막았던것으로추정된다. 특히서쪽방안에는동벽과북벽에연접하여 ㄱ 자형으로꺾어진와축으로조성한외줄구들이있고북쪽기단밖으로굴뚝이나있었다. 이건물은만주집안의동대자유적과온돌이있는방의규모와구조가유사하여좀더심층적인고찰이필요한것으로생각된다. 강당좌우에는익랑채와같은남향한건물이각각하나씩강당과인접해배치되어있다

45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강당동익랑채 ( 불명건물지Ⅰ) 강당의동편익랑채는강당보다폭이좁고정면과측면의길이가비슷한방형의건물이인접되어있다. 동익랑채 ( 공방지Ⅱ) 와대칭되는위치에자리잡고있으며, 발굴조사보고서에서는 불명건물지1 로명기되어있다. 기단은석축으로쌓아만들었는데잘남아있지는않으나흔적은남아있어규모를파악할수있다. 크기는동서정면이 13.5m, 남북측면이 9.9m이다. 기단의동남쪽은일반적인건물기단형태로만들어주변보다한단높이고북쪽기단은배수로를겸하고있다. 서쪽은강당과가까이인접되어있어기단석없이기단면이강당과이어지고있다. 현재남아있는초석으로평면을추정하면강당동측기둥열과는 1.4m 떨어져벽을설치한것으로보이며, 전면과후면, 동측면에퇴칸을둔정면 3칸, 측면 4칸으로계획되었던것으로보인다. 기둥중심에서기단의폭은남쪽으로 0,88m, 북쪽은 1.08m 이다. 초석의크기는한변길이 44~46cm정도크기에초성상부를대략다듬어사용한것으로보인다. 초석을중심으로기둥간격을보면정면 4칸중 3칸은비슷하지만동측협칸은 1.24m 로짧다. 아마동측협칸은퇴칸으로만든것이아닐까생각된다. 건물의초석간격은다음과같다. 이건물은지붕이강당과같은모양으로표 5. 강당동익랑채 ( 불명건물지Ⅰ) 의초석간격 ( 단위 : cm ) 만들었을가능성이크다. 건물이강당과거서협칸어칸동협칸동퇴칸의붙어있고, 강당을맞배지붕으로하고이전면불명불명불명불명건물도맞배지붕으로하면처마가강당처후면 마밑으로들어갈수가있다. 마치객사의중정당과익랑의배치와같은모습이라하겠다. 건물사이가가깝고건물의남북폭이좁은것은지붕구조가다른것이고이지붕이일정한폭으로내밀고있었기때문에지붕높이가차이가나지않으면안된다. 이때문에익랑의측면처마가강당처마밑으로들어가도록계획하였다고본다. 그러나동측단부의지붕은어떻게마무리했는지확인하기가어렵다. 강당서익랑채 ( 공방지Ⅱ) 서익랑채는발굴보고서에서 공방지Ⅱ 로표기된건물이다. 기단은잡석을쌓아만든석축기단이고크기는정면 15.28m, 측면 11.59m 이다. 남, 동, 북측기단은비교적잘남아있으나서측기단은거의훼손되어몇개의기단석만그위치를알려줄뿐이다. 건물은강당후면열에붙여배치하였기때문에정면은동익랑채의정면보다넓다. 기단후면은배수로를겸하고있다. 평면은정면 3칸에 13.24m 이고측면은칸수는명확치않으며길이는 10.68m 이다. 추정해보면측면역시 3칸으로보인다. 초석은전면열과후면열에만남아있으며내부에는초석대신자연석을벽선에따라나란히설치한것이확인되었다. 이석열은벽을따라줄기초를만든것으로보인다. 줄기초위에로벽을설치하여 2개의방을꾸몄고강당과마찬가지로가운데에남북으로복도를두었다. 방의앞뒤면에는퇴칸이있고, 복도에연접한두방안의동ㆍ서벽에는외줄고래가남아있었다. 양쪽방의고래는북쪽기단부근에서하나로연결된다. 각방모두전면중앙에출입문이있었을것으로추정된다. 기단정면에는좌우로하나씩디딤돌을설치해두었다

46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동회랑북편건물 ( 불명건물지Ⅱ) 동회랑북쪽끝, 강당의동익랑남쪽에자리잡고서향으로배치된건물이다. 발굴보고서에서는 불명건물지Ⅱ 로표기하고있다. 서회랑북측건물 ( 보고서에서는 공방Ⅰ ) 과대칭적위치에세워진건물이며, 규모는서회랑북측건물 ( 공방Ⅰ) 과거의비슷하다. 남아있는기단석을보면서, 북편의것은비교적잘남아있으나동쪽과남쪽은심하게교란되어있었다. 그러나부분적으로이어지는기단석이있어전체규모를파악할수있으며주로잡석을이용하여기단을조성하였다. 동측기단일부에서와축기단이확인되어와축기단과잡석기단이혼용되었다는것을알수있다. 기단의크기는정면인서측기단은길이약 18m, 북쪽기단은길이약 11.6m이다. 약한경사대지여서북쪽기단은높이가 40~45 cm이고남측기단높이는약 35~40 cm이다. 사찰의전체적인배치구조는중심구역이대칭으로계획된것으로확인되었으며이에따라동회랑북편건물은서회랑북편건물과같은평면과입면이었을것으로추정된다. 따라서이건물역시전후로퇴칸이있는정면 3칸, 측면 3칸의건물이었을것으로보인다. 이건물에는모두 16개의초석이있어야하나현재남아있는초석은정면 ( 서측면 ) 북쪽에 2개와후면동측면에 3개만남아있다. 건물의양측초석중심간거리를확인해본결과정면은 15.82m 이고, 측면은 10.08m 이다. 기둥간격을알수있는것은정면의북협칸과후면의동협칸이다. 어칸역시추정은가능하다. 서회랑북편건물 ( 공방지Ⅰ) 서회랑북쪽끝에자리잡고있는동향건물이며동회랑북편건물 ( 불명건물지Ⅱ) 과대칭적인위치에자리잡고있다. 발굴보고서에는 공방지 (Ⅰ) 로판단한건물이다. 전후에퇴칸을둔홑집으로 3개의방을꾸민것으로보인다. 가운데방에서금동대향로가출토된건물이다. 기단전면 18.12m, 기단측면 11.28m 로처음에는잡석으로석축을하였으나뒤에무너진부분을보수할때는폐기와를이용하며보수한흔적이보이고있다. 즉대부분잡석으로기단을만들고, 동측면일부분에서와축기단흔적이발견되었다. 서쪽기단남쪽편에는후일추기로확장한기단이확인되었는데확장길이는 11.18m 이고폭은 0.94m 이다. 이확장기단에는부분적으로와축기단을사용한흔적이있다. 퇴칸을제외한전체방의크기는남북전면이 15.72m, 동서측면이 5.16m이다. 이건물터에서는다행히도기단뿐만아니라초석유구도잘남아있어건물의칸수와각칸의크기를확인할수가있다. 평면은정면 3칸, 측면 3칸인데전후면은퇴칸을두어측면의협칸은어칸에비해좁게만들었다. 건물내부에는초석은사용하지않고잡석으로줄기초와같은형태로이어놓은것으로보아벽체를만들었던것으로추정된다. 집의내벽하부는잡석을나란히줄기초로만들고그위에곧바로벽을쳐올렸다. 방중심부에는노 ( 爐 ) 시설을두었던흔적이있으며가운데와북쪽방에는외줄고래가있다. 각방중방전면에는출입문이있었던것으로보인다. 지붕은맞배지붕으로추정된다. 이곳에서향로를비롯하여구슬류, 유리제품, 금동제품등이출토되었고, 특히공예품제작연장과원료등이함께출토되어이곳이공방이었던곳으로추정하고있다. 회랑탑과금당을에워싸는회랑이동ㆍ서ㆍ남쪽으로설치되어있다. 이와같은회랑을두는사찰구

47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조는백제뿐만아니라고구려나중국에서도흔히보이는당시사찰구조의특징이다. 능사의회랑은중문의좌우에서동서로이어지면서중문측면에서약 20m 지점에서동ㆍ서회랑의남측면을만나지만꺾어지지않고양측으로계속 30여미터까지이어지다가양측면의배수로를만나면서끝난다. 동서회랑은남회랑의중간부분에서북으로약 42m 이어진후동서회랑북측건물측면과맞닿는다. 동회랑은기단석이나초석이전혀발견되지않고다만북측건물부근에서기단석으로보이는몇개의잡석과초석 2개, 그리고기단토가확인되었다. 다행히도기단의동서양편에서낙수구로보이는흔적이확인되어기와양끝선의폭을알수있었는데그폭은 6.5m이다. 이를역으로환산하면대략적인회랑의기둥폭을찾을수있을것이다. 서회랑을근거로추정하면동회랑은폭은 2.6m이고전부 11칸으로이루어진것으로보인다. 그림 31. 능사회랑복원도 서회랑은다행히기단석이북에서부터약 38m 정도남아있어기단폭을확인할수가있었다. 남쪽기단은거의훼손되어확인되지않는다. 기단의폭은 4.6m이다. 기단의높이는탑과금당이있는안마당보다 20cm높게만들었는데잡석을 2~3단으로쌓아만든것이다. 동쪽기단외부로는기와편을점토와함께폭 60~80 cm정도로둔덕을만들어두었는데기단석을보호하기위한시설로추정된다. 기단상부표면은회갈색점토를약 5~15cm의두께로깔고다져두었다. 초석은자연석을상면만약간다듬어사용한덤벙주초이고동쪽에 3개, 서쪽에 4개가남아있다. 이를근거로초석간의거리를확인한결과 1칸의간격은 3.55m 이고이를회랑전체에대비해보면약 11칸이된다. 회랑폭은 2.6m이다. 남회랑은동쪽과중간일부에서그흔적이남아있으며기둥간격을알수있는초석이나적심석은그어디에서도확인되지않고있다. 중문의중심선에서좌우로각각 38.8m 이다. 기단석이남아있지않아회랑폭은알수없다. 그러나단부가흐트러지긴했으나남아있는기단토의폭이 4.5~4.7m 인점을감안하면동ㆍ서기단폭과같은 4.6m인것으로추정된다. 서회랑의기둥 1칸간격이 3.55m 이며기둥폭은 2.6m 인것을감안하면동서측으로각각 10칸씩되는것으로추정된다. 서회랑밖부속건물서회랑서쪽바깥에작은건물터가확인되었다. 동서로장방형을이루고있는이건물은용도가무엇인지정확하게확인되지않고있다. 기단의크기는동서약 8.5m, 측면약 4m이다. 북쪽의기단석은약 7.7m 정도남아있고, 다른쪽은기단석이남아있지않다. 초석은남쪽열 4개, 북쪽열 4개가남아있어건물의칸수가정면 3칸에 6.68m, 측면 1칸에 2.45m이었다는것을알수있다

48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특이하게도남측열초석과초석사이에는샛기둥을받쳤을것으로보이는작은초석이각각하나씩놓여있다. 이를근거로추정해보면남측에는각칸중간에샛기둥이있어문을달지못했을것으로보이고반대로북측열에는기둥사이에초석이없다. 따라서남쪽에는창호가없고, 북쪽으로창호를설치했을가능성이제기된다. 따라서이건물은북향건물이었을것으로추정되기도한다. 건물가운데에서타원형재구덩이가발견되었는데이건물이불씨를저장해두었던곳이아닐까추정하기도한다. 나무다리남회랑서측끝에서남쪽으로약 32m 떨어진곳에서나무로만든다리흔적이발견되었다. 북쪽에서부터흘러내려온배수로가이곳에서폭이넓어지면서그위에다리를놓게되었다. 다리의길이약 3.3~3.66m, 폭은약 6m이다. 다리양쪽은석축을쌓고배수로바닥에약 1.95m 간격으로다리기둥을세운뒤상판을놓았다. 백제시대나무다그림 32. 능사나무다리유적 ( 능사발굴보고서, 리로는처음발견되었으며능산리사지는이곳을 2000) 통하여절안으로들어간듯하다. 교각을세우기위해바닥교각받침목은길이 3.2m~3.4m 이고지름 20~30 cm이며받침목양끝부분에지름 10cm크기의촉구멍을판다음교각을세웠다. 교각은양석축에서 10~15 cm떨어져있고석축벽쪽으로폭 20cm, 두께 9cm정도되는나무판자를 1단또는 2단을붙여세워두었다. 교각배수로바닥은받침목높이로조밀하게돌을깔아두었다. 8. 미륵사 ( 彌勒寺 ) 1) 연혁 미륵사에대한기록은여러문헌에나타나있다. 삼국유사 무왕조에 하루는무왕이부인과같이사자사에가는길에용화산밑의큰연못가에이르니미륵삼존이못가운데서나타나므로수레를멈추고경하하며배례를하였다. 부인이이곳에큰절을세우기를원하니왕이그것을허락하였다. 사자사의지명법사 ( 知命法師 ) 를찾아가못을메울것을물었더니신통력으로하룻밤사이에산을무너뜨려못을메워평지로만들었다. 이에미륵삼존을법상으로불전과탑ㆍ랑ㆍ무를각각 3군데에세우고절의이름을미륵사라했다. 는기록이있다. 20) 이밖에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18년 (719) 조에 秋九月震金馬郡彌勒寺 라는기록이있어후기신라때까지미륵사가경영되었음을알수있다. 21) 미륵사창건은율령사회하의백제가예와계 ( 戒 ) 의유불일치사상에의거일찍이미륵상생신앙을 20) 삼국유사 권 2 무왕. 卽王位一日王與夫人欲幸師子寺至龍華山下大池邊彌勒三尊出現池中留駕致敬夫人謂王曰須創大伽籃於此地固所願也王許之詣知命所問塡池事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乃法像彌勒三會殿塔廊廡各三所創之額日彌勒寺 ( 國事云王興寺 ) 21) 삼국사기 권 8 신라본기성덕왕

49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발전시키고나아가백제가익산지역으로진출하여할때일어난문화운동으로미륵하생신앙을발전시켜나가려는의도였던것이라할수있다. 이는사회질서와교단질서의확립을위해경영하려했던신라황룡사와도같은의미를지니고있다고본다. 미륵사창건은또한백제는미륵이출현할인연이있는국토라는신앙적자신감을갖게함으로써기울어져가는백제사회의중흥을위한국민적화합과국력신장을기하는데사상적터전을굳건히하려는의미도있었다. 22) 조선불교총보 에실린고려초의승려혜거국사 ( 惠居國師 ) 비문에의하면후백제견훤때 (922) 에미륵사의개탑을계기로혜거가선운사의선불장 ( 禪佛場, 고창선운사로추측됨 ) 에참석하여단에올라설법할때하늘에서꽃 ( 天花 ) 이어지럽게흩날렸다하였으므로, 이때미륵사탑이복원되었음을알수있다. 미륵사터에서고려시대유물과유구가많이출토되어이때까지도절이번창하였음을알수있다. 그후조선중종때편찬된 동국여지승람 과영조때강후진의 臥旅錄 에기록이있는데,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석탑이극대해그높이가수십척으로동방석탑중제일이다 라고하여이때까지석탑이존속하고있었음을알수있다. 와여록 에도기록이비교적자세히되어있다. 즉 미륵산서쪽기슭에옛미륵사의유구가있다. 밭둑사이에 7층석탑이있는데대단히높고크며, 석벽을첩첩이쌓아올리되각별석으로이루고, 기둥은네귀를받쳤다. 세상에서이르기를동방석탑에서제일이란말이거짓이아니다. 밭둑사이에초석과석조 ( 石槽 ) 가널려있는데, 그반이노출되거나전체가노출되었고파괴되어비스듬히있고혹은쪼개져있으며종각의초석으로추정되는것이완연히남아있다 라고하였다. 이상의기록과그동안발굴조사로나타난고고학적사실로보아미륵사는백제무왕대 (600~ 640) 에창건되어고려시대까지조영되어왔으나조선시대에와서는가람외곽에건물을겨우유지하며절의명맥을잇고있었음을알수있다. 그러다조선중기에들어와절은완전히폐사되고말았다. 미륵사는 1910년경부터간간히조사가이루어지고있었으나대부분석조물이나부분적인조사에그치고있었다. 그러다가 1980년부터본격적인발굴조사기이루어지기시작하면서 1989년까지근 10년에걸쳐발굴조사가진행되었다. 2001년부터반파된채남아있는서탑에대한해체보수정비사업이시작되었다. 2009년서탑심주사리공에서금제사리봉안기 (15.5cm 10.5 cm, 金板에陰刻 ) 가출토됨으로써서기 639년백제왕실의안녕을기원하기위하여왕후가재물을희사하여가람을창건하였다는것이밝혀졌다. 2) 입지환경미륵사의북쪽에는 2개의산이있다. 하나는미륵사의북쪽방향이고다른하나는동북방향이다. 주민들은동북방향에있는산을용화산, 북쪽방향에있는산을미륵산이라부르고있다. 그러나옛날에는북쪽방향에있는것을미륵산또는용화산이라고했다. 미륵신앙의세계를용화세계라하므로미륵산과용화산은둘이아니다. 지금은용화산과미륵산을구분하고있다. 해발약 340m 의용화산의주봉이하나는남으로뻗고 22) 문화재연구소, 미륵사, 유적발굴조사보고서 (1),

50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다른하나는서로뻗으면서다시솟아미륵산을만든다. 미륵산은능선을동서로뻗지않고서북으로내리흐르다가그자락을삼기면성남리에서내리면서끝을맺는다. 미륵산의남록은급하게내려와미륵사의후면에서낮은구릉으로변하면서미륵사의배경을이루고사찰의좌우로는아주낮은능선이솟은듯감싸는듯한형상을하고있다. 미륵사는미륵산의남쪽능선이끝나면서그끝자락구릉이좌우로펼쳐지고펼쳐진능선사이에감싸인평지에남향으로자리잡고있다. 미륵사서남쪽으로는넓은들과낮은구릉이펼쳐져있고, 동남쪽으로는왕궁면의넓은들이펼쳐져있다. 그림 33. 미륵사입지와주변경관 3) 배치계획사찰경내에는반파된서탑이있고그뒤로춤이높은건물터초석이정연히남아있으며, 동쪽에는석탑터와그북쪽에건물터의초석이배열되어당초에는가람의동ㆍ서가대칭을이루고있었다. 또가람의남쪽동ㆍ서에는당간지주가각 1개씩놓여있어대칭적인배치구조였을것으로보인다. 조사결과미륵사가람은 3원병립식 ( 三院竝列式 ) 가람으로동ㆍ서및중원으로구획되어있는데, 각원에는중문과탑, 금당을 1동씩두어 1탑1금당식가람을동서축선상에나란히배치하고강당은중원북쪽에하나만두고있다. 또동ㆍ서원에는석탑을두고, 중원에는목탑을두어 3탑, 3금당을이루고승방은동ㆍ서원북쪽에있어남북으로뻗게하여그양퇴칸을열주로터서강당으로통하는연속되는회랑으로도이용하고있다. 이와같이 3개의가람을나란히배치한것은 삼국유사 창건기에기술된 삼소창 ( 三所創 ) 이란기록을실제로입증하는것이다. 23) 즉유구를통해본미륵사원래의가람은중앙의남북오그림 34. 미륵사발굴배치도자선상에서서쪽으로약 23 기운축선을기준으로남쪽에서부터중문ㆍ탑 ( 목탑 ) ㆍ금당을배열한중원과이를회랑이둘러싸고중원양옆에중원의남북축선과평행하고중원의각건물과같은횡축열선상에놓인중문ㆍ탑 ( 석탑 ) ㆍ금당을배치하여동원과서원을대칭으로놓은것이었다. 23) 일제강점기때후지시마 ( 藤島亥治郞 ) 라는사람은이를근거로 品 자모양의가람이라고했으나조사결과 1 탑 1 금당식가람 3 개가옆으로나란히자리잡고있다는것이밝혀져잘못된주장이라는것이확인되었다

51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동ㆍ서원의외곽회랑은중원의동ㆍ서회랑에대응하는위치에남북길이가전자의것보다약간짧게북쪽으로뻗다가내곽쪽으로꺾여금당북쪽에서폭넓게북으로뻗는동ㆍ서승방으로연결되고, 이승방의북단에서가람중심축에놓이는강당좌우측과연결되는북회랑과연결된다. 그러므로중원북회랑북쪽에는중원남북중그림 35. 미륵사복원조감도 ( 장경호안 ) 심축선상에거대한강당이놓이게된다. 개략적인가람의규모는동서폭 ( 건물기단외벽간 ) 이 m 이고남회랑남단에서강당기단북변까지 148.2m이며탑에서중문까지의건물중심거리는금당까지의중심거리와같은약 31.2m 이다. 또중원의동ㆍ서회랑기단중심거리는 66.36m, 양협원의동ㆍ서회랑중심선간의거리는 48~49m, 금당에서강당중심간거리는 71.6m이며동ㆍ서승방의기단외벽간의거리는 172m 이다. 이렇게하여가람의전체동서폭과남북길이의비는 이되어동서폭을한변으로하는정삼각형의정점한계내에있음을알수있다. 미륵사평면계획은한국의역대사찰중에서그어느것보다완벽하게기하학적균제로이루어졌다는것을알수있다. 가람전체의규모는남회랑의동ㆍ서기단끝까지의길이가고려척으로 490자이고, 중원가람의동ㆍ서회랑의건물중심선사이의거리는 190자이며남ㆍ북회랑터의건물중심간은 246자이다. 그리고동ㆍ서원의동ㆍ서회랑간의거리는 140자이며가람북쪽강당구역에서동ㆍ서승방외측기단의거리는 379자로중문에서강당중심간거리인 380자에가깝다. 또중문에서탑까지의중심거리는 240자이다. 중원가람에서중문과금당중심간의거리인 176자는중원동ㆍ서회랑의내측변주열간거리와같다. 그러므로탑의심주자리를중심으로위의 176자를한변으로하는정사각형을그릴수있는데, 이것이미륵사가람의규모를정해주는기본길이가된다. 이정방형의대각선길이는계산상으로 자가되는데이것은중원의남회랑에서북회랑중심간거리인 246자와거의같다. 전체가람규모에서본다면남회랑의총길이 490자를한변으로하는정삼각형의정점은남변에서높이 424 자가되는데이것은가람남북전체거리인 420자와비슷하다. 그러나본래의강당기단북변이현재의기단보다북쪽으로약 2m, 가람남북총길이보다 1.2m 북쪽에있었던것을감안한다면본래강당기단북변중앙에그정점이놓이는것을알수있다. 24) 이러한가람의남북총길이는전술한정방형의한변인 176자를한변으로하는정팔각형으로도한정되어이팔각형의전폭은계산상으로 176+( )= 자가된다. 또이기본정사각형을북쪽으로연속하여하나를더그려보면이북쪽변은강당기단의남변에일치되어계산상으로중금당에서강당중심간의거리인 204자에서강당기단의남북폭 56자의반을제하면 176자로일치된다. 또강당동서주칸총길이는 176자로동ㆍ서승방의남북주칸총길이와일치된다. 동ㆍ서원에서는남회랑기단북변에서금당남변까지의거리 153자를한변으로하는정사각형을그리면각동ㆍ서회랑의외변주열에한정되며또금당기단의남변을한변으로하는정팔각형의남변은석탑하층기단남변에떨어져남북길이가 85자가된다. 결국미륵사의가람조영계획은정삼각 24) 장경호, 백제사찰건축, 예경산업사,

52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ㆍ사각ㆍ팔각형으로균제를맞추었다는것을알수있고, 이에따라건물의위치를정한것으로믿어지며여러방법으로도식이이루어지는것을알수있다. 이와같이미륵사의가람배치계획은건물과가람규모등이기하학적인유기성을나타내주고있다고하겠다. 4) 건축계획 탑미륵사에는 3개의탑이있었다. 배치계획에서도언급한바와같이미륵사가람은 3원병립식가람이었기때문에중원, 동원, 서원에각각하나씩탑을두고있었던것이다. 발굴조사결과중원의탑그림 36. 미륵사중심구역건물배치도은목조탑이었다는것이밝혀졌고, 동원과서원에는석탑을세웠다. 서원의탑은다행히 6층옥개석까지남아있어그조형적특징을확인할수있지만동원의탑은흩어져있는탑부재만남아있을뿐서탑을근거로그조형을추정할수밖에없다. 서탑은천년이상을지내오면서도다행히동북측 6층옥개석까지만남아있던것을일제때인 1915년더이상훼손을방지하려는목적으로서측붕괴부분에시멘트로보수를해놓은채수십년을지내왔다. 탑을그대로둘경우더는보존이어렵다고판단하여 1998년에안전진단을실시하였다. 그결과붕괴의조짐이확인되어안전한보존을위해정밀실측을하고, 1999년부터해체보수공사가진행되고있다. 서탑은 2중기단으로이루어져있다. 하층기단은지대석과판석으로구성되어있다. 기단한변길이그림 37. 미륵사석탑는하층기단이 12.53m 이고상층기단이 10.75m 이며, 4측면중앙에는계단을 1개소씩두고있다. 지대석은장대석초벌대로설치되어있으며상단에는별도의갑석이설치되어있지않은상태다. 지대석위에바로두께 120mm정도의방형판석을깔아기단윗면을포장하였다. 상층지대석면에서외단부까지의폭은 885mm로되어있다. 상층기단의모서리에는폭 530mm내외의각석을우주석으로세워놓았다. 이기단형식은금당의기단과같은형식이어서축조시기가금당과같다고할수있다. 1층에는주좌를새기지않은방형주초석위에방형기둥을세웠다. 주초석과기둥은일체가아닌별개의부재로놓여있고, 외부기둥도단일

53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부재로만들었다. 1층벽체는기둥칸에 2개의면석으로채웠다. 면석과면석이맞닿는부분에는간주석을세워두었다. 1층기둥상부에는창방석을가로질러놓은다음그위에평방석을올려놓았다. 마치목조건축물의구조와같은모습이다. 평방석위에는장대석을쌓은다음옥개석을걸었다. 특히옥개석은모서리부분을들어올려목조건축의추녀를연상케하고있다. 2층은 1층보다훨씬낮게하였다. 기둥높이도 1층에비해 ⅓에불과하고옥개부에서는 1층과달리포벽으로보이는부재가생략되고옥개받침석과옥개석으로구성되어있다. 3층과 4층탑신과옥개부는 2층과같은형식으로이루어져있다. 5층과 6층에서는옥개받침이 4단으로증가되어있다. 5, 6층에서는하옥개받침석도상옥개받침석처럼처마부가 2단으로조각되어있다. 25) 동원탑터에서노반석과옥개석을비롯한수많은석탑부재가출토되었다. 이를근거로동탑복원연구를해본결과 26) 연구진은서탑과규모가비슷한 9층이었다는것을알게되었고, 그연구결과를바탕으로 1993년동탑을재건하였다. 서탑에사용된석재를분석한결과미륵사뒷산인미륵산남쪽산채를이루고있는흑운모화강암이라는사실이밝혀졌다. 따라서미륵사석탑에사용된석재는절후면의미륵산중턱에서채석사용한것임을알수있다. 27) 동원과서원의중심부에자리잡고있는 2개의석탑은마치목탑을건립하는것과같이만들었다. 돌로기단을만들고그위에초석을놓은다음방형기둥을세워정면, 측면각 3칸의정방형평면이되게했다. 1층탑신중앙칸에는사방으로개구부를두어탑내부로통하게했는데, 그내부에는방형석재옥심주를세워상부의하중을받게하였다. 기둥위에는평방을돌려얹고, 탑신위에는 3단, 4단의옥개받침단을만들어그위에얇은처마선을갖는옥개석을올렸는데추녀부분을약간들어올려앙곡을나타냈다. 이탑은돌을주요재료로사용해만든것이지만전체적인조형과세부적인구조를보면석탑이라하기어려울정도로목조건축물을닮아있다. 기둥을세우고개구부를두어내부공간을만드는것과처마에곡선을두어마치목조탑과같은조형을표현한것은다른일반적인석탑에서는좀처럼보기힘든조형계획이라할수있다. 이것은그동안목탑이주류를이루고있던백제사찰에서석탑을세우는사찰로변화되는초기형식이었음을말해주는것이라하겠다. 중원의탑이목탑이었다고추정하는것은이탑터에서불에탄흔적이남아있는막새기와등이출토되었고, 석탑부재로보이는유물은출토되지않았기때문에목탑으로보고있는것이다. 기단하부는지표에서깊이약 4.5m까지정제된점질 ( 粘質 ) 과사질토로두께 3~5cm의판축층 48켜를조성하고판축층밑에는다시 2m 깊이로 25cm두께의할석층과토층을번갈아깔아서지하수가흘러가도록배려였음이밝혀졌다. 심초석은발견되지않았으나터를발굴해본결과유적이많이교란되었지만다행히도북쪽기단일부와계단이노출되었다. 이목탑의기단은동ㆍ서양탑과같이지대석ㆍ면석ㆍ갑석을갖추었고바깥쪽에는방형의판석을맞추어깔아둔 2중기단이다. 2중기단에서하층기단한변은약 19.4m, 상층기단의한변은 17.6m로추정된다. 이는동서원의석탑기 25) 국립문화재연구소 전라북도, 미륵사지석탑해체조사보고서 Ⅱ, 128 쪽, ) 문화재관리국, 미륵사지동탑복원설계보고서, ) 국립문화재연구소 전라북도, 미륵사지석탑해체조사보고서 Ⅱ,

54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단보다훨씬큰것이었다. 이비례로보아높이는동서양석탑의약 2배가까이되었을것으로추측된다. 미륵사동탑과서탑남편지하에서각각 H 자형태의초석렬이확인되었다. 28) 뿐만아니라 1994년왕궁리 5층석탑남측에서도이러한지하초석렬이확인되었다. 29) 특히미륵사동탑에서발견된 H 형초석렬남쪽동문터근처에서는 3개의나무기둥이동서로나란히 4.9m 간격으로박혀있었던흔적이확인되었다. 이나무기둥의직경은약 40cm정도이고깊이는약 90cm정도로심어져있었는데기둥주변은석비래 ( 石飛來 ) 를넣어다지고상부는지름 30~50 cm정도되는큰화강석을빈틈없이채워기둥을고정시켜놓았다. 이러한나무기둥흔적은동탑동편에서도 1개가확인되었다. 유적의특성으로보아건물을세웠던기둥흔적은아니며그렇다면이나무기둥의기능이무엇인지자못궁금하다. 아마석탑을건립할때사용했던상하운반시설이아니었을까추정된다. 금당금당은모두 3개였다. 동ㆍ서양금당터의크기와구조형태는서로동일하다. 이두금당은탑과같은 2중기단에다춤이약 1m나되는높은초석을배열하였으며정면 5칸, 측면 4칸의건물이었다. 초석윗면에는주좌옆에인방을걸쳤던홈이패어있어마치고상식구조와같이건물밑기단내부에지하공간을마련했음이확인되었다. 이것은목조마루밑에공간을두어마루를보존하는실리적목적도있었을것으로믿어진다. 규모는정면주칸총길이가 12.7m, 측면 9.1m 이다. 중원의금당터에서도역시같은형식의유구가노출되었는데여기에서는춤높은초석이유그림 38. 미륵사동금당발굴평면도실되고그것을받치는반석만이남아있어이것을초석으로이용하여한때건물을세웠던흔적이있었다. 규모는정면주간총길이가약 19.8m, 측면 14m이다. 강당미륵사강당은하나만중원후면에위치해있다. 중원의금당중심에서북쪽으로 71.61m 떨어진곳에강당중심이위치하고있다. 강당은정면 13칸, 측면 4칸으로지대석과면석ㆍ갑석으로높게조성된기단위에배치되어있다. 기단크기는정면 65.9m, 측면 20m( 초창유구는약 22m임 ) 로서우리나라에서현재까지출토된사찰중에서가장큰강당이다. 기단전면의 3개소와측면좌ㆍ우에계단이각 2개소씩있고, 강당측면과승방터와는회랑으로연결되었다. 강당기단북편중앙에서 28) 부여문화재연구소, 미륵사유적발굴조사보고서 Ⅱ, 1996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미륵사지서탑주변발굴조사보고서, ) 부여문화재연구소, 왕궁리, 중간발굴조사보고 Ⅱ,

55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는북쪽에수각 ( 水閣 ) 을세웠던것같은높은복도초석이발견되어이뒤쪽으로통행할수있도록계획하였고, 이것은북쪽의석축위를동서로뻗은또하나의거대한승방터로통하고있음을알수있다. 이러한춤높은초석은가람서편에도 1개소가더놓여있다. 강당동쪽기단밖에서서까래와연목와등이출토되어측면에도처마가있었던것으로짐작되는데그형태로보아우진각이나팔작지붕이었음을알수있다. 승방승방은동ㆍ서금당북쪽에서좀떨어져북쪽으로뻗어있는데기단의폭이약 14m이고길이가 65m이며, 내부에는방을만들기위한고막이돌로한변이 6m되는정방형 2개가한조로구획되어모두네조를이루고있다. 방과방사이에는통로를만들고기단의동ㆍ서양측변두리에만초석을퇴칸처럼배열하여건물한쪽으로는회랑을연장시켜강당으로통하는통로를마련한것으로생각된다. 이때기단의높이도회랑의것과같아통행에불편이없도록하였다. 가람북쪽에있는북승방터는동ㆍ서길이가약 134m, 남북폭이약 14m이다. 위에서살펴본동ㆍ서승방터와같이방을이루었던칸막이는동쪽일부만남았고기타지역은훼손되었지만그규격은같다. 여기에서는모두 8조의방을이루고있음을알수있다. 남문중문에서약 68m 남쪽에남문으로추정되는건물터가확인되었으나유구의교란이심하여정확한간살을알수없다. 다만정면 3칸, 측면 2칸으로추측되고기단은동서 12.2m, 남북 7m로추정된다. 이건물터밑에서판축으로된토담기저부가나와서원래이자리에서토담을구축하였으나후에남문과회랑으로바꾸었던것으로추측된다. 이회랑은남문동쪽으로연장되다가끝에서북쪽으로꺾여올라가남회랑동쪽끝에서그쳤다. 이회랑은길이방향으로 2개의초석렬을갖는단랑 ( 單廊 ) 이다. 남문터앞에는폭 15.6m나되는계단유구가있는데, 계단은대충다듬은장대석을논앞을가로막은형식으로 6단을이루고있다. 회랑회랑의기단석과초석은다른건물에비해많이남아있다. 기단은면석과갑석으로낮게조성하고, 초석은윗면에원형주좌를몰딩없이양각했는데이는고구려의둥근초석과모양이같다. 이초석하단은팽이와같이뾰족하여정초할때구멍을약간파고초석을맞추어놓은다음옆으로쐐기와같이적심석을끼워받쳐정좌시키는기법을썼다. 이것은신라의경우적심석을평평하게층층이깔고그위에밑이평평한초석을정좌시키는것과는다른것이다. 회랑은모두길이방향으로기둥을 3열로배열한복랑으로형성되어경주황룡사의회랑과같다. 기둥간격은보방향으로 2.15m 이고, 도리방향으로 3.3m이다. 동서로뻗은남회랑터와남북으로뻗은가람바깥쪽동ㆍ서회랑터가서로연결되지않고떨어져있으며또이외측회랑터는북쪽으로승방터와연결되어있음이특징이다. 회랑의중간중간에는기단을끊어배수구를관통시키고, 그위에장대석을덮어기단이연장되게하였다. 중원의회랑터는 4방을완전히둘러 ㅁ 자구획을하고있다

56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Ⅴ. 삼국시대고구려신라사찰건축 1. 고구려 고구려가처음본격적으로불교를받아들인것은소수림왕 2년 (372년 ) 이었다. 소수림왕 5년 (375 년 ) 에는국내성에이불란사 ( 伊弗蘭寺 ) 와초문사 ( 肖門寺 ) 가창건되었다고한다. 30) 또광개토왕 2년 (403년) 에는평양에 9 寺가창건되었고, 영류왕재위기간 (618~668 년 ) 동안에는중대사 ( 中臺寺 ), 진구사 ( 珍丘寺 ), 유마사 ( 維摩寺 ), 연구사 ( 燕口寺 ), 대승사 ( 大乘寺 ), 대원사 ( 大原寺 ), 금동사 ( 金洞寺 ), 개원사 ( 開元寺 ) 등이지어졌다. 보장왕 (642~668 년 ) 때에는반룡산 ( 盤龍山 ) 연복사 ( 演福寺 ), 백록원사 ( 白廘園寺 ), 영탑사 ( 靈塔寺 ), 육왕사 ( 育王寺 ) 등이있었다고하나그위치는정확하지않다. 당시불교의성격으로보아도성가까이에불사가건립되었을것으로추정되는데, 아마평지에가람을조영하여당ㆍ탑이매우장엄하였을것으로보여진다. 그러나현재유적지는거의없어져전체적인가람의구조를자세히알수는없다. 지금까지발굴되었거나그터가알려져있는사찰은평양의금강사지, 정릉사지, 광법사지, 상오리사지, 청호리사지, 영명사지, 중흥사지, 낙사리사지, 암사리사지, 평천리사지, 대왕사지등과평원군의원오리사지, 봉산군의토성리사지등이있다. 1) 금강사지 ( 金剛寺址 ) 현재남아있는사찰사지중가장오래된것으로추정되는금강사지는청암리에있어서청암리사지 ( 淸岩里寺址 ) 로도불린다. 최초의조사는 1938년조선고적연구회의고이즈미 ( 小泉顯夫 ) 에의해서진행되었다. 금강사지는평양동북방향으로약 3km 정도떨어져서대동강상류오른쪽언덕에접한지점에위치하여넓은대지위에서남향으로위치한가람이다. 이일대는고구려시재의평양동황성 ( 東黃城 ) 으로추정되는곳으로한변의길이가 9.5m 정도되는팔각형건물터가발견되었고, 팔각전지기단에서남쪽으로 10.56m( 高麗尺으로 35 尺 ) 지점에중문지로예상되는건물지가발견되었다. 팔각전지동서그림 39. 금강사지건물배치도로도중문지거리와거의같은곳에크기 13x23.5m 정도의동금당지와서금당지가발견되었으며팔각전지북쪽으로는 14.5m 떨어져있는곳에북금당지가발굴되었다. 팔각전지에서동ㆍ서금당지로연결되는보도에는옥석 ( 玉石 ) 을바닥에깔았던것으로조사되었다. 이사지는청암리사지로도불리는데, 지금까지알려진여러가지기록으로보아고구려문자왕 7년 (497년) 에창건된금강사로추정된다. 31) 30) 성문사 ( 省門寺 ) 는초문사 ( 肖門寺 ) 의와전 ( 訛傳 ) 인것으로보임. 31) 삼국사기 卷第一九高句麗本紀第七文咨明王기사 7 년 (498 년 ) 가을 7 월에金剛寺를창건하였다, 고려사 卷第一一肅宗七年 (1102 년 ) 기사 9 월에왕이평양금강사에와서옛탑을구경하고돌아갔다, 東國與地勝覽 卷五十平壤古蹟條 금강사는평양의동북 8 리에있다 이밖에청암리사지가금강사의절터로여겨지는이유로는기록상금강사의위치가청암리사지와일치하고있고, 寺址주변의대동강여울과밭을아직도 金剛灘 과 金剛田 이라고부르고있다는점, 그리고고려사에숙종이금강사를방문하

57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1939년제2차조사때에는북금당지기단의북쪽에서또하나의큰건물기단이발견되기도하였다. 또한중문지좌우의유구 ( 遺構 ) 와그외곽부를조사하여중문지와팔각전지, 북금당지, 강당지 ( 講堂址 ) 가남북자오선상에놓여있음을확인하였다. 또한팔각전지의기단을조사한결과대지의중앙부에융기되어있는지상암반 ( 地上巖盤 ) 을팔각형으로깎아내고그위에석재를세워서만들었음을알수있었고, 기단남변과서변의중앙에는계단유구가노출되었는데, 동변과북변에도마찬가지로계단이있지않았을까추정된다. 32) 2) 상오리사지 ( 上五里寺址 ) 상오리사지는평양시교외의북동쪽으로약 6km 정도떨어진대동군상오리에위치하고있으며금강사지에서는남동쪽으로약 2km 정도떨어진곳에위치하고있다. 상오리사지역시고이즈미 ( 小泉顯夫 ) 에의해서 1939 년에조사되었다. 이조사에서한변이약 8.2m 되는팔각건물의기단이발견되었는데, 기단외연 ( 外緣 ) 은직경 25cm 내외의냇돌을써서 4열로가지런히깔았고청암리사지와마찬가지로암반을쪼아팔각형기초를그림 40. 상오리사지중심지발굴배치만든후흙을다져기단을이루었음이확인되었다. 기단안쪽에는깬돌이깔린방형의구획이있었으며기단바깥 90cm 위치에는낙수자국을발견하였다. 팔각전지양변의중심에서동서로약 4m씩떨어져좌우대칭으로건물지가발견되었는데, 동서길이는 12.6m, 남북길이는 25.8m였다. 바닥에는길이약 50cm 정도의판석이깔려있고, 서쪽건물지의유적상태는양호한편이다. 동서건물지와팔각전지사이에는길이약 70cm, 폭 40cm 가량의판석이서쪽에 5매, 동쪽에 3매가놓여있어이건물들사이에통로가있었음을추정할수있다. 3) 토성리사지 ( 土城里寺址 ) 토성리사지는황북봉산군토성리에위치하며서홍강에가까운산록에남향으로배치되어있다. 이사지는고구려의사지가운데가장최근에알려진유적으로, 1987년에발굴조사보고서가간행되어그내용을알수있게되었다. 이유적의발굴결과팔각탑지를비롯하여중금당지, 서금당지가발견되고전돌을깐원형의시설물이발견되었다. 33) 팔각탑지에서는기단의일부가발견되었는데, 한변 7.9m, 직경 18.2m 의팔각형기초위에판석을깔았으며그주위에는기단석을둘렀는데초석은하나도보이지않았다. 탑지외측 1.15m 정도의둘레에폭 0.8m의빗물받이시설이있는데, 밖으로 5도정도기울어져있고청회색의점판암판돌로만들어졌다. 탑의남측면중앙에길이 0.8m, 폭 0.85m 의화강석계단이설치되어있고, 탑외부로돌아가는배수로의한변길이는 9.1m이다. 이탑지의규모로볼때탑의크기는정릉사 였다는기록등을들수있다. ( 이왕기, 북한에서의건축사연구, 발언 ) 32) 小泉顯夫, 平壤淸岩里寺址の調査 昭和十三年朝鮮古蹟調査報告, 5-19 쪽, 朝鮮古蹟硏究會, ) 대한건축학회, 한국건축사, 기문당, 2003, p

58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나청암리사지의탑과거의같은규모로추정된다. 중금당지는탑지로부터 27.3m 떨어진곳에위치하며건물전면에는폭 1.8m의배수로만이명확히출토되었다. 이배수로로추정하건데 3개의금당중에가장클것으로보여진다. 서금당지는탑지로부터서쪽으로 7.4m 떨어진곳에서발견되었으며역시초석은발견되지않았다. 규모는남북 18m, 동서 9.1m 로기단은남변과서변이일부남아있고건물주위에는강자갈을깔아놓은폭 1.4m의배수로가있다. 유구의훼손이심하여서금당과대칭이되는동금당지를찾지못하였지만, 정릉사지에비해작은규모인직경 2.5m 의전돌을깐시설물을확인하였다. 이시설물은팔각탑지의중심으로부터남동쪽으로 36m 떨어진곳에서발견하였다. 34) 그림 41. 토성리사지추정배치도 4) 정릉사지 ( 定陵寺址 ) 정릉사지는해방이후북한의학자들에의해발굴된사지이다. 평양시역포구역무진리에있는동명왕릉에서남쪽으로약 150m 떨어진산기슭에위치한정릉사지는유적에서 정릉 ( 定陵 ), 능사 ( 陵寺 ) 라새겨진토기편이발견되어사찰의이름을추정할수있었다. 1974년정릉사지에대한대규모발굴이진행되었고, 근처에있었던능이발굴조사결과동명왕릉으로밝혀지면서정릉사는동명왕의원찰로추정되었다. 35) 따라서정릉사는 427년평양천도와동시에동명왕릉을옮기고이능의능사로서건축되어진것으로여겨진다. 36) 정릉사지는 5개구역으로나누어지는데, 이곳에서확인된건축지만 18개소였고회랑지는 10개소나되었다. 사지의남북길이는 132.8m, 동서길이는 223m이고총대지면적은 3만m2나되었다. 정릉사지는청암리사지나상오리사지의정확한대칭구조의가람형식에서벗어나있다. 남북중심축선상에팔각탑이있고이탑의동서에각각정면 3칸, 측면 2칸의동ㆍ서금당지가위치하지만, 칸수만같을뿐동금당 m, 서금당 m 로그크기가다르다. 북쪽에는북금당지가있지만초석이심하게훼손되어몇개의기단석을통해크기만을추정하고있는데그크기는약 m 정도일것으로예상된다. 북금당지의동서에는각각정면 3칸, 측면 1칸의종루지와정면 5칸, 측면 2칸의경루지가남향하여자리잡고있다. 이북금당지북쪽으로정면 13칸, 측면 4칸인강당지가있는데, 크기는 m 정도로추정된다. 정릉사지에서가장주목되는것은팔각탑지인데, 그기단은직경이 20.4m이고한변의길이는약 7.3m이다. 현재기초부분과빗물받이부분만이남아있는데, 기초부분은깊이 2m 정도돌을다져만들었고, 바깥으로 0,8m 정도떨어져서폭 0.6m의빗물받이가놓여있다. 이빗물받이시설의동서남북변에폭 2~3m 정도는판돌이깔려있지않아이위치에계단이설치되어있음을알수가있다. 빗물받이한변의길이는 8.4m이다. 이탑지에는목탑이서있었던것으로추정되고, 34) 이왕기, 북한에서의건축사연구, 발언, 1993, pp ) 이왕기, 앞책, p ) 김상언, 한국고대가람의배치에관한연구, 고려대석사논문, 1992, p

59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강당북쪽에는온돌시설을구비한정면 5칸, 측면 3칸의승방지가있었으며그서쪽에는자연석으로돌산을만든정원이발견되었다. 정릉사지에는팔각탑지가있는중심구역의양측면남측구역에각각하나씩도합 2개의특이한시설이발견되었는데, 바닥에벽돌을동심원으로깔고주위는벽돌을세워쌓은직경 4.6m의시설물이다. 하지만이시설물의용도는아직명확히밝혀그림 42. 정릉사지가람발굴배치도진것이없다. 정릉사의가람은한시기에이룩된것이아니다. 정릉사와탑지뒤에는동서방향의회랑지 2개소가발견되었는데, 이것만동명왕릉의사당으로창건되었을당시의것으로추정된다. 따라서원래는북쪽에동서두회랑이있는구조였으나동명왕의원찰로개건되면서남쪽에목탑이추가로세워진것으로판단된다. 37) 또한탑의좌우금당이비대칭으로배치되어있는것으로추정하건데, 이또한수차에걸친증개축과정에서나타난결과라할수있겠다. 38) 2. 신라신라에서는법흥왕 14년 (527) 에이르러서야불교가공식적으로공인받게되었다. 하지만불교는내물마립간말년을전후하여민간사회에포교되기시작하였으며, 고신라에서는불교가민간종교로성행되기시작하였다. 다만고구려와백제와달리국가적으로포교에적극적이지못하였으나, 불교가공인었을때는이미일반백성들까지불교에대한기본인식과불교의식에익숙해져있었다. 이러한토대를바탕으로인접국가의불교건축문화가단기간내에대대적인유입수용이가능했었고불교가공인된즉시홍륜사, 황룡사와같은대사찰이창건될수있었다. 고신라때창건된불사에대한기록은 삼국유사 에많이나와있지만, 이들중사지가확인발굴된것은흥륜사 ( 興輪寺 ), 황룡사 ( 黃龍寺 ), 분황사 ( 芬皇寺 ) 등이있을뿐이다. 특히선덕왕때에건립된것으로알려진통도사를제외하고대부분도심의평지가람이었다. 고신라시대의가람배치구성은고구려, 백제의최초가람배치방식과는달리안정된구성방식에따라조영되었을것으로여겨진다. 이는고구려의초기사찰의가람이독자적인배치구성방법이없어서궁궐의배치구성방식에 37) 리화선, 조선건축사 (1), 평양, 과핵백과사전종합출판사, 쪽, ) 이왕기, 앞의책, 쪽

60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영향을받아실험적으로조영된반면, 시기적으로 150여년이지난시점에서불교를받아들인고신라에서는이미여러과정을통해어느정도확립된가람의배치구성방법에따라서불사를조영했을것으로추정할수있기때문이다. 그러나, 그나마배치의전모가밝혀진가람은황룡사뿐이고, 그또한창건가람의형태가일반적인배치형식에서벗어나는특이한형식의가람이기때문에고신라의보편적인가람배치의형태를밝히기는어려운상황이다. 39) 1) 흥륜사지 ( 興輪寺址 ) 고신라최초의국찰로서법흥왕 14년 (527) 에금교동쪽의천경림에서벌채한목재와석재로공사를시작하여고구려에서온승장의지도하에약 10년에걸쳐공사를진행하여진흥왕 5년 (534) 에완공되었다. 40) 이후황룡사가완공되는진흥왕 30년 (569) 까지는왕실의원찰로서국가적인행사가여기에서행해졌다고전해진다. 41) 그밖에 삼국유사 의기록에의하면왕의친척을승직에임명하기도하였으며, 진흥황이직접 대왕흥륜사 라는현판을하사하고만년에는이곳의주지가되기도하였다는이야기가전할정도의국찰이었다. 사지의전체적인배치형태는밝혀지지않았으나삼국유사의기록중에남문, 좌우회랑 ( 左右廊廡 ), 좌경루 ( 左經樓 ), 전탑 ( 殿塔 ), 남지 ( 南池 ) 등의단어가나와있어 42) 백제의 1탑1금당식가람이었을가능성이높지만추측에불과하다. 1972년과 1978년에부분적인발굴조사로금당지와강당기단의일부, 서회랑기단의일부가발견되었고, 금당지의서남방에있는속칭 탑자리 로불리우는토단 ( 土壇 ) 이발굴되었다. 하부직경 11m, 상부직경 9m, 높이약 1.5m의상하 2단으로축조된유구로서그평면이원형혹은팔각형으로추정하고있지만이것이어떠한성격의구조체인지는아직밝혀지지않고있다. 43) 금당의경우는기단의동서길이가약 166척 ( 동위척 140척 ), 남북길이약 101척 ( 동위척 80척 ), 높이약 8척으로대규모건물이었다고한다. 현재길이 2.3m에너비 1.1m의석조만이경주박물관에옮겨져보관되고있다. 44) 2) 분황사 ( 芬皇寺 ) 분황사는경주남방의소가람으로선덕왕 3년 (634) 에초창된사찰이다. 45) 현재모전석탑 ( 模塼石塔 ) 과당간지주가남아있으나세밀한발굴조사가이루어지지않은상태이므로전체적인배치형태를알수는없다. 3층만이남아있는모전석탑은안삼암을전 ( 塼 ) 모양으로다듬어서쌓은것으로원래는 9층이었다고전해진다. 분황사의가람배치에대해서는 1990 년부터 2003년에이르는발굴조사이전까지그의견이분분하였다. 삼국유사에는분황사의가람배치를추측할수있는내용이기록이있는데, 여기에나온좌전 ( 左殿 ) 북벽 ( 北壁 ) 이라는구절을통해서, 분황사가좌전 ( 左殿 ) 우탑 ( 右塔 ) 의배치를하고있을가 39) 김상언, 앞의논문, 64 쪽, ) 윤장섭, 한국건축사, 동명사, 101 쪽, ) 한국불교연구원, 신라의폐사 Ⅰ, 일지사, 57 쪽, ) 三國遺事卷第三, 塔像第四, 興輪寺壁畵普賢. 43) 김상언, 앞의논문, 65 쪽, ) 대한건축학회, 앞의책, 198 쪽 45) 삼국사기 卷第五, 新羅本紀第五, 善德王三年

61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능성과불사건축의벽화가일반적으로측면에그려지는것을감안하여, 좌전의북벽에벽화가있었다는것은전체적으로가람이서향을하고있다고가정하여탑과당이남과북에병치 ( 竝置 ) 하여좌전ㆍ우탑을이루면서서향을하고있는가람배치로추정하기도하였다. 다른하나는탑원 ( 塔院 ) 과금당원 ( 金堂院 ) 이따로존재하여남과북에위치하여있는서향가람이다. 그러나분황사의당간지주가탑의남쪽에위치하고있기때문에남북축을따라탑과금당을배치하고남향하는백제식 1탑1금당식의가람배치로추정하기도하였다. 46) 이런과거의의견들은최근에이루어진분황가발그림 43. 분황사가람배치도굴조사를통해서많은의문들이해소되었다. 현재발굴조사는분황사는창건가람배치는석탑북쪽에 품 ( 品 ) 자형삼금당을배치한소위 1탑3금당식이었으나이후수차례에걸쳐가람배치의근간이바뀌는획기적변화가있었던것으로조사되었다. 가람의핵심구성요소인금당의경우에는창건시삼금당에서 1차중건이후로는일금당으로바뀌는수적인변화는물론이고그평면규모와위치, 심지어는건물의방향에이르기까지엄청난변천과정을거쳤음을확인할수있었다. 현재분황사의금당인보광전은건물의방향이석탑과무관한서향으로바뀌었을뿐만아니라그면적마저일차중건에비하여약 7.5% 밖에되지않을정도로축소된상태이다. 석탑기단부주변에대한조사결과는창건이후현재까지줄곧제위치를지키고있음을확인했다. 47) Ⅵ. 백제사비시대사찰건축의특징 백제에불교가전래된이래수많은사찰이건립되었던것은문헌과유적발굴을통해확인되었다. 이중에는사찰의이름이밝혀진것도있지만이름을알수없는사찰유적도많이있다. 백제한성시대에이미불교가전래되었으나한성시대의사찰은거의찾아볼수가없고웅진시대의사찰도명확하게드러난유적이없다. 다만사비시대에들어와건립되었던많은사찰유적이확인되고있다. 따라서백제사찰이시대적으로어떤변천과정이있었는지는확인이되지않고있다. 현재까지확인된백제사찰유적을대상으로조형적특징을살펴보면다음과같다. 사찰의입지조건은대개비교적넓은대지에배경에는높은산을두고좌우로낮은구릉이형성되어있는곳을선택하였다. 다만부여군수리절터의경우에는후면에낮은산이있으나배경을이룰정도로높은것은아니고낮은구릉정도로거의평지에가까운들판에자리잡고있는것이 46) 김상언, 앞논문, 쪽, ) 경주문화재연구소, 분황사발굴조사보고서 Ⅰ( 본문 ), 경주문화재연구소, 515 쪽,

62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다른백제절터와다른점이다. 부여동남리절터의경우에도후면에배산을이룰만한지형조건이아니어서이또한평지에자리잡고있는사찰이라하겠다. 이밖에사비시대의거의모든절은배산임수형입지조건을하고있다. 사찰의대지조건으로보면부소산성폐사지, 제석사지를제외하고거의평탄지이거나아주약한경사지를선택하였으며, 또한저습지를선택하여흙으로성토하여사찰을건립한경우도있다. 이러한저습지에사찰을배치할경우전면에는못을두고있는경우가많다. 정림사의경우저습지는아니지만전면에못을두고있으며익산미륵사의경우습지를메워절을세우고전면에정림사와같이좌우에하나씩 2개의못을두었던흔적이있다. 사찰의배치는기본적으로 1탑1금당식배치를하고있으며방위는자좌오향 ( 子坐午向 ) 으로남쪽을바라보게하였다. 건물의배치는중심부에탑과금당을배치하고탑정면에중문, 금당후면에강당을두었다. 이중심건물을회랑이감싸고있는데이회랑은중문좌우에서시작하여탑과금당좌우를감싸면서금당후면의강당으로연결하게된다. 그리고건물배치는거의대부분남향으로배치되도록하였다. 이러한배치구조는자연히전후가길고좌우가짧은장방형배치계획을이루게되는것이다. 그러나특이하게도금강사는동향을하고있는데이는지형조건이서쪽에산이있고동쪽으로터져금강이흘러가고있기때문에지형조건에맞추려는의도로이런배치구조가되었던것이라할수있다. 대부분사비시대사찰이중심부에탑을두고있는배치구조인것에비해부여동남리절의경우에는탑을두지않은무탑식사찰인것으로확인되어다른사찰과구별된다. 또한배치계획이특이한사찰로부소산성폐사지를들수있는데이사찰에서는목탑과금당을두고있으나금당후면에강당이없는배치구조이다. 백제의사찰배치구조는이처럼 1탑1금당식을기본구조로하고있지만익산미륵사의경우에는 1탑1금당식 3개를나란히병렬배치한것으로그규모는가히다른절에서볼수없을정도로크다. 이사찰을건립한시기는백제의왕권이강력하게발휘되면서문화적으로우수했고, 주변다른나라보다선진적이었기때문으로보인다. 백제의건축문화로볼때이무렵우수한기술을구가하고있었던시기였기때문에이처럼거대하고완성된건축술을발휘할수있었던것이라할수있다. 백제사찰의건축조형은부여동남리절터를제외하고거의대부분중심부에목탑또는석탑을세우고그뒤에목조로금당을세웠다. 목탑을세웠던백제사찰로는왕흥사, 금강사, 군수리절터, 용정리절터, 익산제석사, 부여능사, 부소산성절터, 미륵사중원등이있고석탑을세웠던사찰로는정림사, 미륵사동원과서원등이있다. 석탑을세웠던사례는그리많지않으나백제석탑을세운시기는백제후기였던것으로미루어백제사찰이처음에는대부분목탑을세웠으나나중에는석탑으로바뀌었던것으로보인다. 석탑은목탑에비해규모는작지만오래지속될수있다는장점때문에석탑을건립했던것이다. 익산미륵사에서는특이하게도목탑과석탑이함께건립되었는데이는삼국시대전기간을통해보더라도특징을지닌사찰이라하겠다. 금당은탑과함께사찰내의가장중요한건축물이었다. 사찰내건물중높이로보면탑이가장높지만금당은경내에서가장웅장하고장엄한품격을지니도록만들었다. 따라서금당은중층으로하고외진주주위로회랑칸을설치하여건축물을웅장하게보이도록계획하였던것이다. 백제사찰에는반드시중심건물인탑과금당을에워싸는회랑을설치해두었다. 회랑은예불공간

63 삼국시대의사찰 : 백제사찰건축을중심으로 을일정한규모로한정하면서사찰중심공간의경건함을도모함과동시외부공간으로부터경관을차단하여내부공간을보호하려는의도로설치하였다. 또한회랑은사찰내에서활동하는승려들을햇빛이나풍우로부터활동을보호해주는역할도하게된다. 이런배치구조에의해자연히회랑안쪽은성스러운성격을지닌공간이되고회랑밖은속계와같은성격의공간으로구분된다. 따라서승방이나, 식당등은회랑밖에두게된다. 회랑이감싸는면적은탑과금당의규모에의해결정되기때문에특별히정해진규격이나면적은없다. 다만사찰의규모가클경우회랑의폭을넓혀복랑 ( 複廊 ) 으로하고규모가작은사찰에서는단랑 ( 單廊 ) 으로만들어두는특징을보여주고있다. 백제건축은삼국중에서도선진기술을지니고있었다. 그배경에는외래문화를배척하지않고받아들이려는포용력과다른한편으로는새로운것에대한창조정신과개척정신이있었기때문이다. 불교를일찍받아들인것과삼국중에서도유독백제에서만보이는건축기술등은이것을반증해주는증거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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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부산지역의사찰 최정혜 부산박물관유물관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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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부산지역의사찰 부산지역의사찰 Ⅰ. 부산지역의주요사찰 1. 장안사 ( 長安寺 ) 장안사는부산광역시기장군장안읍장안리일원에위치하며문헌기록에의하면신라문무왕 13 년 (673) 에원효대사가창건한사찰로전해오고있다. 처음에는쌍계사 ( 雙溪寺 ) 로불렸으나애장왕 10년 (809) 에장안사로고쳐불렀다. 임진왜란중소실되었으나효종5년 (1638) 태의대사가중건하였으며, 1657년원정ㆍ학능ㆍ충묵스님이중건하였다고전해지는지금의대웅전은보물제1771호로지정되어있다. 장안사에서서쪽으로 800m 떨어진불광산에는원효대사가장안사와함께창건하였다고전해지는척판암 ( 擲盤庵 ) 이있다. 창건시에는담운사 ( 談雲寺 ) 라고불렀으나원효대사가당나라태화사 ( 泰和寺 ) 에서공부하는 1,000 명의승려가장마로인한산사태로매몰될운명에놓인것을알고, 효척판이구중 ( 曉擲板而救衆 ) 이라고쓴큰판자를하늘로날려보내어그절상공에뜨게하였는데, 이것을보고놀란대중이일제히법당에서나와쳐다보는순간에뒷산이무너져서절이매몰되었다. 이에 1,000 명의승려들이우리나라로원효를찾아와서가르침을받고모두도를깨쳤다고한다. 이때의이적을기리기위해절이름을척판암으로고쳐부르게되었으며, 그뒤이절은원효의이적지 ( 異蹟址 ) 로중요시되어많은참선수행승려들이머물렀다. 그러나중건및중수의역사는자세히전하지않으며, 1938년에경허 ( 擎虛 ) 대사가중수하여오늘에이르고있다. 2. 범어사 ( 梵魚寺 ) 화엄종 ( 華嚴宗 ) 10찰 ( 刹 ) 의하나이며, 일제강점기에는 31교구본산의하나였다. 창건에대하여는두가지설이있다. 삼국유사( 三國遺事 ) 에의하면 678년 ( 문무왕 18) 의상 ( 義湘 ) 이창건하였다는설과 1700년 ( 숙종 26) 에동계 ( 東溪 ) 가편찬한 범어사창건사적( 梵魚寺創建事蹟 ) 에당나라문종태화 ( 太和 ) 19년신라흥덕왕때창건되었다는설이다. 당시왜인이 10만의병선을거느리고신라를침략하려하였으므로대왕이근심하고있었는데, 문득꿈에신인 ( 神人 ) 이나타나서의상 ( 義湘 ) 을청하여화엄신중기도를할것을권하였다. 신인은 태백산속에서의상이 3,000 명의대중을거느리고화엄의지법문 ( 華嚴義持法門 ) 을연설하며, 화엄신중 ( 華嚴神衆 ) 들이항상그의옆을떠나지않고수행하고있다. 또동국해변에금정산이있고, 그산정에높이 50여척이나되는바위가솟아있는데, 그바위위에우물이있고그우물은항상금색이며사시사철언제나가득차마르지않고, 그우물에는범천으로부터오색구름을타고온금어 ( 金魚 ) 들이헤엄치며놀고있다. 고하였다. 대왕이의상을청하여함께금정산아래로가서 7일동안화엄신중을독송하면왜병이자연히물러갈것이

68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라고하였다. 왕이그대로하였더니왜선들끼리서로공격하여모든병사가빠져죽고살아남은자가없었다. 왕이매우기뻐하여의상을예공대사 ( 銳公大師 ) 로삼고범어사를창건하였다고하였다. 범어사창건사적( 梵魚寺創建事蹟 ) 에보면당시범어사의가람 ( 伽藍 ) 배치는미륵전ㆍ대장전 ( 大藏殿 ) ㆍ비로전 ( 毘盧殿 ) ㆍ천주신전 ( 天主神殿 ) ㆍ유성전 ( 流星殿 ) ㆍ종루 ( 鍾樓 ) ㆍ강전 ( 講殿 ) ㆍ식당ㆍ목욕원ㆍ철당 ( 鐵幢 ) 등이별처럼늘어서고 360 요사 ( 寮舍 ) 가양쪽계곡에꽉찼으며, 사원에딸린토지가 360결 ( 結 ) 이고소속된노비 ( 奴婢 ) 가 100여호에이르는대명찰 ( 大名刹 ) 이라하였는데, 이많은것이창건당시한꺼번에갖추어졌다고믿기는어려우며상당기간에이루어진것으로추정된다. 그후임진왜란때모두불타버려 10여년을폐허로있다가 1602년 ( 선조 35) 중건하였으나또다시화재를당하였고, 1613년 ( 광해군 5) 여러고승들의협력으로중창하여법당ㆍ요전 ( 寮殿 ), 불상과시왕상 ( 十王像 ), 그리고필요한모든집기 ( 什器 ) 를갖추었다. 현재보물제434호로지정된대웅전을비롯하여 3층석탑 ( 보물 250호 ), 당간지주 ( 幢竿支柱 ), 일주문 ( 一柱門 ), 석등 ( 石燈 ), 3층석탑등의문화재가있으며이밖에많은전각 ( 殿閣 ) ㆍ요사ㆍ암자 ( 庵子 ) ㆍ누 ( 樓 ) ㆍ문등이있다. 옛날부터많은고승들이이곳을거쳤으며, 의상을비롯하여그의고제 ( 高弟 ) 표훈 ( 表訓 ) ㆍ낙안 ( 樂安 ) ㆍ영원 ( 靈源 ) 등이있다. 선찰대본산범어사안내 ( 禪刹大本山梵魚寺案內 ) 에는역대주지 ( 住持 ) ㆍ승통 ( 僧統 ) ㆍ총섭 ( 摠攝 ) ㆍ섭리 ( 攝理 ) 등으로구분하여수백명이기록되어있다. 부산금정구청룡동 ( 靑龍洞 ) 금정산 ( 金井山 ) 에있다. 3. 만덕사지 ( 萬德寺址 ) 만덕사지는금정산줄기의북구만덕동 36번지에위치하고있는고려시대대규모사찰지로 1972 년금당지추정지역은부산광역시기념물제3호로지정되었다. 1990년부터부산박물관에의해모두 3차례발굴조사가이루어졌다. 1차조사에서는금당지, 2차조사에서는성격불명의석렬, 3차조사에서는금당지서쪽ㆍ축대부근에서배수구ㆍ회랑지ㆍ초석ㆍ건물지ㆍ계단지등이확인되었다. 발굴조사에서기와와도자기ㆍ전 ( 塼 ) 등다양의유물들이검출되었으며, 기와류에는막새ㆍ평기와ㆍ치미ㆍ잡상ㆍ연목와ㆍ귀면와등이확인되었다. 도자기류는해무리굽완등의청자류와인화ㆍ귀얄기법의분청사기, 소문백자등이다. 전체적인출토유물의특징으로보아조성시기는대체로통일신라말또는고려초기로볼수있으며, 폐사시기는조선전기로추정된다. 만덕사지는 고려사 와 고려사절요 에고려공민왕이충혜왕의서자석기를소군으로삼아머무르게했던것으로기록된만덕사터로추정되어왔다. 그러나발굴조사결과기비사 ( 祇毗寺 ) 명명문와가다량출토되어이곳이 고려사 의만덕사가아니라삼중대사혜거가주석하였을기비사였을가능성이더높은것으로추정된다 1). 1) 일본동경국립박물관보물관의대정 18 년금산사명향완명문중에 동량스님은기비사주지삼중대사혜거금산사큰스님인미이다 라는내용이있다. 이내용으로보아고려시기에기비사가존재하였으며삼중대사가주석할정도로큰사찰이었음을알수있다

69 부산지역의사찰 4. 송선사지 ( 松善寺址 ) 송선사지는북구만덕동 651번지일원에위치한고려시대사찰터로, 2007 년 11월시민의제보로확인된유적이다 2). 조사결과거주지와전답으로관리되고있는곳에서송선사명명문와와초석등의건물지흔적이확인되었다. 송선사명명문와는 2001년만덕사지 3차발굴조사에서출토된송선사명명문와와똑같은형식을가지고있는데, 그것은이곳의기와일부를인근사찰인만덕사지에서가져가사용하였을것으로추정된다. 유적주변에서는청자편, 토기편, 토제벼루, 연화문수막새, 당초문암막새등이수습되었으며사지위쪽에서는통일신라시대평기와편이확인되어정밀한조사가시급한실정이다. 5. 안적사 ( 安寂寺 ) 안적사는기장읍내리앵림산에위치하며설화에의하면원효대사가창건하였다고전해진다. 차성가 3) 남면 ( 南面 ) 편에안적사에관한기록이있으며또한앵림산을근거지로군사를일으킨최개동에관한이야기가있는것으로보아안적사는임진왜란전에사찰이존재하였음을알수있다. 현재안적사경내에들어서면예전의사찰규모가어떠하였는지짐작하기가어렵다. 임진왜란시장안사와마찬가지로소실된것으로추정되며, 범어사묘전화상이중건하였다. 1873년대웅전과수선실등을경허대사ㆍ해령스님이중수하였으며, 1973년 3월에덕명스님이대웅전ㆍ삼성각ㆍ수선실 2동ㆍ범종ㆍ요사채ㆍ종무소등을중건하였다. 6. 취정사지 ( 鷲井寺址 ) 취정사에대한기록은 1855년에간행된 기장현읍지 불우조 ( 佛宇條 ) 에 취정사는취봉산 ( 달음산 ) 에있으며기장현청에서동쪽 20리이나지금은폐락되었다 ( 在鷲峰山縣東二十今廢 ). 고되어있다. 취정사 ( 鷲井寺 ) 의위치는지금까지취정천 ( 鷲井川 ) 의시원이되는기장군일광면용천리상곡마을원효사부근으로비정되어왔으며마을사람들은절의이름은모르고단순히옛절터로만알고있었다고전해온다. 취정사의위치가용천리상곡마을로추정된것은 기장현읍지 산천조 ( 山川條 ) 에 취정천은현에서동쪽 15리취정동에서시원하여이천포로흘러든다 고하였는데취정동또는취리동을용천리의대리 ( 大里 ) 마을이라하여이마을에서상곡원효사까지는 5리가되므로동쪽 20리와거리가비슷하다는뜻에서나온것으로추정된다. 이봉기 ( 기장군의불교폐사지, ) 는취정사지 ( 鷲井寺址 ) 의위치가용천리가아닌원리라고주장하였다. 이는 1936년에발간된조선환여승람 ( 기장군 ) 에의하면 화전천 ( 花田川 ) 은기장군에서북쪽으로 15리에있으며원리에서발원 ( 청광리를거쳐일광초등학교앞을경유 ) 하여지금의이천강으로유입된다 라고하였음으로이를취정천으로보아야한다는것이며취정사지로추정되는 2) 시민의제보로복천박물관에서현장조사를실시하여고려시대사찰터임을확인하였다. 3) 가사문학으로기장고을의전경이다보이는양산원효산에오른다음그산에서가까운하서면부터시작하여명승고적을두루찾는다는내용이다

70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곳에서이를뒷받침할유물로기와와운문상감청자등이다수수습되고사찰용석축이남아있다는사실을미뤄볼때상당한의미가있다 고하였다. 취정동, 취리동은취봉산에서유래되었으며, 취정천의위치는지금까지알려진바와같이용천리인가에대하여는의문이적지않음으로조사가이루어져야하는부분이다. 7. 선여사지 ( 船餘寺址 ) 와석탑사 ( 石塔寺 ) 선여사지에대한기록은 기장현읍지 불우조에 선여사는서쪽 40리에있는백운산에있다. 산정에는항상흰구름이끼어있다. 신라의고승원효대사가이곳에절을세우고흰구름바다속에떠있는배처럼보인다고하여선여사라하였다. 지금은잔폐하여고적이되었으며, 대룡사 ( 大龍寺 ) 로개칭하였다 고되어있다. 선여사고적지에망일암 ( 望日庵 ) 이있었다고되어있으며, 차성가에도선여사와망일암이소개되어있다. 이가사를지었던시기에선여사는없어지고그자리나인근에망일암이세워졌음을알수가있다. 망일암은일제강점기초기까지있었으나퇴락하고현재는석탑사가신축되어있다. 석탑사뒤편에는무너진석탑재가남아있다. 기단석, 옥개석등의석탑재를확인할수있으며현재부산박물관정원에전시되어있는석탑상륜부가같은석탑의부재로추정된다. 8. 선암사 ( 仙岩寺 ) 선암사는부산진구부암3동 628번지에위치하며 675년 ( 신라문무왕 15) 원효 ( 元曉 ) 가창건하였다고전해진다. 창건당시에는견강사 ( 見江寺 ) 라고불렀으며, 절뒷산절벽바위위에서화랑들이무술을닦으면서절이름을선암사로바꿨다고한다. 1483년 ( 성종 14) 각초 ( 覺招 ) 가중창하면서바꿨다고도한다. 1568년 ( 선조 1) 신연 ( 信衍 ), 1718년 ( 숙종 44) 선오 ( 禪悟 ) 가각각중수했고 1918년에는동운 ( 東雲 ) 이, 1955년에는혜수 ( 慧修 ) 가중수하였다. 9. 마하사 ( 摩河寺 ) 마하 라는명칭은산스크리트어를한자로음사 ( 音寫 ) 한것으로서 훌륭한 이라는뜻이다 년보수공사때대웅전과나한전에서발견된상량문 ( 上樑文 ) 에따르면 5세기에아도화상 ( 阿道和尙 ) 이창건하였다고한다. 임진왜란때건물이전소된뒤 1717년 ( 숙종 43) 대웅전과응진전 ( 나한전 ) 을초암 ( 草庵 ) 형태로건립하였고, 1729년 ( 영조 5) 과 1773년 ( 영조 49) 응진전이, 1791년 ( 정조 15) 대웅전이중건되었다. 1965~1970 년대규모보수공사가이루어져대웅전ㆍ응진전ㆍ대방 ( 大房 ) ㆍ요사 ( 寮舍 ) ㆍ식당등이중건되었고, 1995~1996 년대웅전과삼성각 ( 三聖閣 ) 이중건되어오늘에이른다. 황령산의산봉우리가운데하나인금련산에자리잡고있는데, 풍수지리상금학이알을품고있는금학포란 ( 金鶴包卵 ) 의지세라고한다. 가람배치는일주문 ( 一柱門 ) 과불이문 ( 不二門 ) 은없으며, 상하층을이루는범종각과천왕문이일주문을대신한다. 이문을지나경내로들어가면설법전의뒷면이보인다. 설법전중앙을가로질러몸을낮추고하심문 ( 下心門 ) 에들어서면좌측에나한전과대웅전, 우측에대방 ( 마하대복연 ) 이있고, 그뒤쪽으로요사가보이고, 앞쪽으로는 5층석탑과삼성각이보인다

71 부산지역의사찰 10. 국청사 ( 國淸寺 ) 의상대사가창건하였다고전해지는국청사는 1703년 ( 숙종 29) 금정산성축조와함께중수하여이름을국청사라하였다. 현판에 숙종 29년 (1703) 금정산성중성을쌓은후적을막고지키어나라를보호하니그이름을국청사라칭한다. 라고기록되어있다. 국청사에는임진왜란시승병장이사용했던 금정산성승장인 ( 金井山城僧長印 ) 이란철제인이보존되어있는데승군의사령부가있었음을추측할수있다. 또한 정발장군과송상현부사, 윤흥신장군, 승장만홍 ( 萬弘 ) 스님, 정안 ( 定安 ) 스님, 성관 ( 性寬 ) 스님, 관찰 ( 寬札 ) 스님등수백명의신위가모셔져제사를봉행해왔다 는국청사지 ( 國淸寺誌 ) 의기록도이를뒷받침한다. Ⅱ. 부산지역사찰소장지정문화재목록 1. 보물 유물명지정번호지정년월일시대소재지 부산범어사조계문 ( 釜山梵魚寺曹溪門 ) 부산범어사대웅전 ( 釜山梵魚寺大雄殿 ) 제 1461 호 조선 (17 세기 ) 범어사 제 434 호 조선범어사 기장장안사대웅전 ( 機張長安寺大雄殿 ) 제 1771 호 년중창 장안사 부산국청사청동북 ( 釜山國淸寺靑銅金鼓 ) 제 1733 호 년 범어사성보박물관위탁보관 부산범어사삼층석탑 ( 釜山梵魚寺三層石塔 ) 기장장안사석조석가여래삼불좌상 ( 機張長安寺石造釋迦如來三佛坐像 ) 불조삼경 ( 佛祖三經 ) 주범망경 ( 注梵網經 ) 삼국유사 ( 三國遺事 ) 권4-5 부산범어사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 釜山梵魚寺木造釋迦如來三尊坐像 ) 제250호 세기 범어사 제1824호 년 장안사 제 호 고려말기 범어사성보박물관 제894-2호 고려말기 범어사성보박물관 제419-3호 세기말 범어사성보박물관 제1526호 년 범어사

72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2. 유형문화재 유물명 지정번호 지정년월일 시대 소재지 범어사석등 ( 梵魚寺石燈 ) 제16호 통일신라 범어사 범어사묘법연화경 ( 梵魚寺妙法蓮華經 ) 몽산화상법어약록 ( 蒙山和尙法語略錄 ) 불조역대통재 ( 佛祖歷代通載 ) 금강반야바라밀경변상 ( 金剛般若波羅密經變相 ) 권왕문책판 ( 언문판 ) 선암사목조아미타여래좌상및복장유물일괄 ( 仙巖寺木造阿彌陀如來坐像및服藏遺物一括 ) 운수사대웅전석조여래삼존좌상 ( 雲水寺大雄殿石造如來三尊坐像 ) 운수사대웅전 ( 雲水寺大雄殿 ) 범어사동종 ( 梵魚寺銅鐘 ) 장안사명부전지장보살도 ( 長安寺冥府殿地藏菩薩圖 ) 장안사응진전석가영산회상도 ( 長安寺應眞殿釋迦靈山會上圖 ) 장안사대웅전석가영산회상도 ( 長安寺大雄殿釋迦靈山會上圖 ) 장안사명부전석조지장시왕상 ( 長安寺冥府殿石造地藏十王像 ) 복천사조상경 ( 福泉寺造像經 ) 복천사아미타극락회상도 ( 福泉寺阿彌陀極樂會上圖 ) 복천사지장시왕도 ( 福泉寺地藏十王圖 ) 목조관음보살좌상 ( 木造觀音菩薩坐像 ) 선종영가집 ( 禪宗永嘉集 ) 범어사제석신중도 ( 梵魚寺帝釋神衆圖 ) 선문촬요책판 ( 禪門撮要冊版 ) 범어사기 ㆍ 범어사창건사적 ㆍ 범어사고적 판 ( 梵魚寺紀ㆍ梵魚寺創建事蹟ㆍ梵魚寺古蹟, 板 ) 제 41 호 조선 (1527~1711) 범어사성보박물관 제 40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39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38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30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95 호 조선전기선암사 제 92 호 조선 (17~18 세기 ) 운수사 제 91 호 년운수사 제 90 호 년범어사 제 89 호 년장안사 제 88 호 년장안사 제 87 호 년장안사 제 86 호 년장안사 제 65 호 년복천사 제 62 호 년복천사 제 61 호 년복천사 제 47 호 년내원정사 제 35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52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29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28 호 조선범어사성보박물관

73 부산지역의사찰 어산집책판 ( 魚山集冊板 ) 천수책판 ( 千手冊板 ) 만덕사지당간지주 ( 萬德寺址幢竿支柱 ) 육조대사법보단경 ( 六祖大師法寶壇經 ) 불설대보부모은중경 ( 佛說大報父母恩重經 ) 내원정사묘법연화경 ( 內院精舍妙法蓮華經 ) 염불보권문 ( 念佛普勸文 ) 조상경 ( 造像經 ) 진언집 ( 眞言集 ) 지공직지 ( 指空直指 ) 함허어록 ( 涵虛語錄 ) 태전화상주심경 ( 禪宗永嘉集 ) 원효암서편삼층석탑 ( 元曉庵西便三層石塔 ) 범어사미륵전목조여래좌상 ( 梵魚寺彌勒殿造如來坐像 ) 범어사비로전목조비로자나삼존불좌상 ( 梵魚寺毘盧殿木造毘盧遮那三尊佛坐像 ) 범어사대웅전석가영산회상도 ( 梵魚寺大雄殿釋迦靈山會上圖 ) 복천사원제전집도서 ( 福泉寺禪源諸詮集都序 ) 원효암동편삼층석탑 ( 元曉庵東便三層石塔 ) 원광사석가설법도 ( 圓光寺釋迦說法圖 ) 범어사원효암목조관음보살좌상 ( 梵魚寺元曉庵木造觀音菩薩坐像 ) 마하사현왕도 ( 摩訶寺現王圖 ) 범어사관음전백의관음보살도 ( 梵魚寺觀音殿白衣觀音菩薩圖 ) 범어사사천왕도 ( 梵魚寺四天王圖 ) 제 27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26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14 호 고려 북구만덕동 784 번지 제 37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36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45 호 년 1649 년 내원정사 제 44 호 년내원정사 제 43 호 년내원정사 제 42 호 년내원정사 제 34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33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32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12 호 통일신라말고려초 원효암 제 72 호 조선후기범어사 제 71 호 조선후기범어사 제 67 호 년범어사 제 66 호 년복천사 제 11 호 통일신라말고려초 원효암 제 97 호 년원광사 제 96 호 조선 (18 세기 ) 원효암 제 54 호 년마하사 제 53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51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74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이안눌청룡암시목판 ( 李安訥靑龍巖詩木板 ) 선문염송집 ( 禪門拈頌集 ) 보리달마사행론 ( 菩堤達摩四行論 ) 금강반야바라밀경 ( 金剛般若波羅密經 ) 범어사석조연화대좌하대석 ( 梵魚寺石造蓮花臺座下臺石 ) 범어사관음전목조관음보살좌상 ( 梵魚寺觀音殿木造觀音菩薩坐像 ) 범어사대웅전삼장보살도 ( 梵魚寺大雄殿三藏菩薩圖 ) 범어사의상대사영정 ( 梵魚寺義湘大師影幀 ) 범어사팔상ㆍ독성ㆍ나한전 ( 梵魚寺捌相ㆍ獨聖ㆍ羅漢殿 ) 장안사응진전석조석가삼존십육나한상 ( 長安寺應眞殿石造釋迦三尊十六羅漢像 ) 범어사대웅전제석신중도 ( 梵魚寺大雄殿帝釋神衆圖 ) 범어사당간지주 ( 梵魚寺幢竿支柱 ) 천안사소장송광사판법어 ( 天安寺所藏松廣寺板法語 ) 장안사명부전 ( 長安寺冥府殿 ) 장안사응진전 ( 長安寺應眞殿 ) 선광사석가여래성도기 ( 仙光寺釋迦如來成道記 ) 금정사목조아미타여래좌상및복장유물 ( 金井寺木造阿彌陀如來坐像및服藏遺物 ) 취정사묘법연화경 ( 鷲井寺妙法蓮華經 ) 해광사선원제전집도서 ( 海光寺禪源諸詮集都序 ) 해광사대방광불화엄경권제23 ( 海光寺大方廣佛華嚴經卷第二十三 ) 칠보사목조관음보살좌상 ( 七寶寺木造觀音菩薩坐像 ) 황련사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 黃蓮寺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 폭포사묘법연화경 ( 瀑布寺妙法蓮華經 ) 제 25 호 조선범어사성보박물관 제 82 호 세기범어사성보박물관 제 81 호 세기범어사성보박물관 제 80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73 호 통일신라말고려초 범어사 제 70 호 년범어사 제 68 호 년범어사 제 55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63 호 년중건범어사 제 85 호 년장안사 제 69 호 년범어사 재 15 호 통일신라범어사 제 105 호 년천안사 제 106 호 년중건장안사 제 107 호 년장안사 제 108 호 조선 (15 세기 ) 선광사 제 115 호 년금정사 제 116 호 조선전기취정사 제 117 호 년해광사 제 118 호 제 126 호 고려 (12~13 세기 ) 조선 (1730 년대 ) 해광사 칠보사 제 127 호 년황련사 제 129 호 년폭포사

75 부산지역의사찰 금천선원묘법연화경 ( 金泉禪院妙法蓮華經 ) 고불사묘법연화경 ( 古佛寺妙法蓮華經 ) 백운사묘법연화경 1-3 ( 白雲寺妙法蓮華經卷 1-3) 백운사묘법연화경권4-7 ( 白雲寺妙法蓮華經卷 4-7) 백련사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 ( 白蓮寺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 ) 범어사사자암석조보살좌상 ( 梵魚寺獅子庵石造菩薩坐像 ) 범어사원효암아미타삼존도 ( 梵魚寺元曉庵阿彌陀三尊圖 ) 삼광사석조여래좌상 ( 三光寺石造如來坐像 ) 제 130 호 년금천선원 제 131 호 년고불사 제 132 호 조선전기백운사 제 133 호 조선전기백운사 제 138 호 고려 (11~12 세기 ) 백련사 제 139 호 년사자암 제 141 호 년 제 145 호 세기후반 ~ 18 세기초 범어사성보박물관위탁보관 삼광사 3. 기념물 유적지명지정번호지정년월일시대소재지 만덕사지 ( 萬德寺址 ) 제 3 호 고려 북구만덕동 428 번지일원 4. 문화재자료 유물명지정번호지정년월일시대소재지 묘관음사불자 ( 妙觀音寺拂子 ) 운수사아미타삼존도 ( 雲水寺阿彌陀三尊圖 ) 묘관음사오여래탱 ( 妙觀音寺五如來幀 ) 척판암석조여래좌상 ( 擲板庵石造如來坐像 ) 안적사지장시왕도 ( 安寂寺地藏十王圖 ) 범어사바라 ( 梵魚寺饒拔 ) 범어사연 ( 梵魚寺輦 ) 복천사현왕도및복장유물일괄 ( 福泉寺現王圖및服藏遺物一括 ) 복천사독성도및복장유물일괄 ( 福泉寺獨聖圖및服藏遺物一括 ) 선암사금고 ( 仙巖寺金鼓 ) 제 46 호 조선말 ~ 일제강점기 묘관음사 제 43 호 년운수사 제 42 호 조선후기묘관음사 제 41 호 조선후기척판암 제 29 호 년안적사 제 26 호 조선후기범어사성보박물관 제 25 호 조선후기범어사성보박물관 제 39 호 근대복천사 제 38 호 년복천사 제 37 호 조선후기선암사

76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연등사가영산회상도 ( 燃燈寺釋迦靈山會上圖 ) 범어사석가26보살도 ( 梵魚寺釋迦二十六菩薩圖 ) 마애지장보살좌상 ( 磨崖地藏菩薩坐像 ) 제 33 호 년연등사 제 12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7 호 조선 (17~18 세기 ) 옥련선원 복천사석가영산회상도제 35 호 년복천사 청량사석가모니후불탱 ( 淸凉寺釋迦牟尼後佛幀 ) 혜원정사팔상도 ( 慧苑精舍八相圖 ) 마하사응진전석조나한상 ( 摩訶寺應眞殿石造羅漢像 ) 마하사응진전목조석가여래좌상 ( 摩訶寺應眞殿木造釋迦如來坐像 ) 마하사대웅전석조석가여래삼존상 ( 摩訶寺大雄殿石造釋迦如來三尊像 ) 마하사응진전 16나한도 ( 摩訶寺十六羅漢圖 ) 마하사응진전영산회상도 ( 摩訶寺應眞殿靈山會上圖 ) 마하사영산회상도 ( 摩訶寺靈山會上圖 ) 대원사독성탱 ( 大願寺獨聖幀 ) 선암사괘불탱 ( 仙巖寺掛佛幀 ) 복천사석조석가여래및보살좌상 ( 福泉寺石造釋迦如來및菩薩坐像 ) 범어사목조옴마니반메훔소통 ( 梵魚寺木造옴마니반메훔疏筒 ) 안적사아미타극락회상도 ( 安寂寺阿彌陀極樂會上圖 ) 범어사목조석가여래위패 ( 梵魚寺木造釋迦如來位牌 ) 범어사목조시방삼보자존패 ( 梵魚寺木造十方三寶慈尊牌 ) 범어사칠성도 ( 梵魚寺七星圖 ) 범어사아미타극락회상도 ( 梵魚寺阿彌陀極樂會上圖 ) 범어사청풍당아미타극락회상도 ( 梵魚寺淸風堂阿彌陀極樂會上圖 ) 범어사비로자나불회도 ( 梵魚寺毘盧舍那佛會圖 ) 제 34 호 년청량사 제 9 호 년혜원정사 제 20 호 조선후기마하사 제 19 호 조선후기마하사 제 18 호 조선후기마하사 제 17 호 년마하사 제 16 호 년마하사 제 15 호 년마하사 제 31 호 조선 (19 세기 ) 대원사 제 27 호 년선암사 제 49 호 년복천사 제 23 호 조선후기범어사성보박물관 제 30 호 년안적사 제 22 호 조선후기범어사성보박물관 제 21 호 조선후기범어사성보박물관 제 20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10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11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13 호 조선 (18~19 세기 ) 범어사성보박물관

77 부산지역의사찰 선방축성패 ( 禪房祝聖牌 ) 동치원년명범어사금고 ( 同治元年銘梵魚寺金鼓 ) 도광명유제양이부대발 ( 道光銘鍮製兩耳附大鉢 ) 순치팔년명청동은입사향완 ( 順治八年銘靑銅銀入絲香燔 ) 선암사삼층석탑 ( 仙巖寺三層石塔 ) 관음정사석존상 ( 觀音精舍石尊如像 ) 국청사금정산성승장인 ( 國淸寺金井山城僧將印 ) 범어사내원암석조보살좌상 ( 梵魚寺內院庵石造菩薩坐像 ) 범어사목제어피인통 ( 梵魚寺木製魚皮印筒 ) 범어사고려삼층석탑 ( 梵魚寺高麗三層石塔 ) 신흥사치성광삼존도 ( 新興寺熾盛光三尊圖 ) 용적사독성도 ( 龍積寺獨聖圖 ) 관음사묘법연화경 ( 觀音寺妙法蓮華經 ) 백련사석조여래좌상 ( 白蓮寺石造如來坐像 ) 취정사석조여래좌상 ( 鷲井寺石造如來坐像 ) 홍제사보광암명범종 ( 弘齊寺寶光庵銘梵鐘 ) 안심사삼세불회도 ( 安心寺三世佛會圖 ) 원각사현왕도 ( 圓覺寺現王圖 ) 승학사석조여래좌상 ( 乘鶴寺石造如來坐像 ) 금강사묘법연화경 ( 金剛寺妙法蓮華經 ) 고불사선종영가집 ( 古佛寺禪宗永嘉集 ) 백련사고려사 ( 白蓮寺高麗史 ) 범어사사자암칠성도 ( 梵魚寺獅子庵七星圖 ) 제 6 호 대한제국기범어사성보박물관 제 5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4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3 호 년범어사성보박물관 제 53 호 고려선암사 제 50 호 조선관음정사 제 44 호 조선후기 범어사성보박물관위탁보관 제 48 호 조선 (19 세기 ) 내원암 제 24 호 조선후기범어사성보박물관 제 57 호 고려초기범어사 제 58 호 년신흥사 제 59 호 년용적사 제 60 호 세기전반관음사 제 61 호 년백련사 제 62 호 ~18 세기취정사 제 64 호 년홍제사 제 66 호 년안심사 제 67 호 세기원각사 제 68 호 세기승학사 제 69 호 년금강사 제 74 호 년고불사 제 76 호 조선백련사 제 77 호 세기말 ~ 20 세기초 범어사

78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참고문헌 기장군지편찬위원회, 2001, 機張郡誌上ㆍ下. 복천박물관, 2008, 고고학으로찾은부산의역사. 문화재청, , 부산광역시청, ,

79 한국의석탑 ( 石塔 ) 신용철 양산시립박물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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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한국의석탑 ( 石塔 ) 한국의석탑 ( 石塔 ) Ⅰ. 탑 ( 塔 ) 이란무엇인가 1. 불탑 ( 佛塔 ) 의정의 1) 부처님의사리를안치하고상륜 ( 相輪 ) 을세운구조물 2) 범어 ( 梵語 Sanskrit) 의스투파Stupa, 팔리어巴梨語 Pali의투우파Thupa( 廟 ) 라는뜻 3) 중국에서솔도파 ( 率堵婆 ) 와탑파 ( 塔婆 ) 라고표기 ( 方墳이란뜻 ) 4) 사리가들어있는것을탑이라하고사리가없는것을지제 ( 支提 ) 라한다.( 佛陀跋陀羅역, 마하승기율 제33권 ) 2. 탑을세우는뜻탑을세우는일은성인의훌륭함을나타내고, 이는남을믿게하며, 성인의은혜를갚기위함.( 道世편찬, 법원주림 제37 권, 興造部 ) 3. 탑을일으킬수있는사람 여래 ( 如來 ), 벽지불 ( 辟支佛 ), 성문 ( 聲聞 ), 전륜왕 ( 轉輪王 )( 불타야사, 축불념공역, 413 년 ( 後秦 ), 불설장아함경 제3권 ) 4. 조탑장소 그림 1. 경주황룡사출토불사리 첫째는부처님께서탄생하신곳이니겁비라벌솔도성 ( 劫比羅伐窣覩城 ) 람비니림 ( 嵐毗尼林 ) 에있고, 둘째는성불하신곳인마갈타국의법아란야 ( 法阿蘭若 ) 보리수나무아래금강좌위에있으며, 셋째는법문을처음하신곳인바라니사선인이떨어진곳인녹림원 ( 鹿林園 ) 에있으며, 넷째는열반에드신곳인구시나성 ( 拘尸那城 ) 사라쌍수 ( 娑羅雙樹 ) 사이에있고, 다섯째는왕사성취봉산의죽림원 ( 竹林園 ) 안에있으며, 여섯째는광엄성미후지곁고각당에있으며, 일곱째는실라벌성 ( 室羅伐城 ) 서다림 ( 逝多林 ) 의급고독원에있으며, 여덟째는천하처 ( 天下處 ) 의평림 ( 平林 ) 마을에있다. 처음의네곳은이름하여정함이있는곳이라하고, 뒤의넷을이름하여정함이없는곳이라한다.( 義淨역, 700년, 근본살바다부율섭 제7권, p. 194.)

82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5. 경탑방법과공덕 ( 道世編纂 (668), 法苑珠林, 제37권 ) 1) 탑돌이방법 탑을오른쪽으로돈다는것은경ㆍ율의제도에오른쪽으로돌게하였기때문이다. 만일왼쪽으로돌면神의나무람을받고, 속인들의꾸지람을받나니그러한무리들이많이있다.( 반드시시계방향으로돌아야함 ) 5가지방법을언급 ( 머리를숙여땅을보고, 벌레를밟지말며, 좌우로돌아보지말며, 탑앞의땅에침을뱉지말며, 중간에서서남과말하지말라 ) 2) 탑돌이의숫자 탑을도는숫자는정해져있지않으나최소 3번을돌아야한다. 3번을도는것은삼보 ( 三寶, 불법승 ) 에공경을표하는것이고또 3독 ( 毒 ) 을없애는것이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 ) 삼존 ( 三尊 ) 를만나는것을나타내기때문이다. 3) 탑돌이의공덕 ( 實叉難陀譯, 우요불탑공덕경 ( 右繞佛塔功德經 ) ) 불탑을오른쪽으로도는자는모든천신과귀신들이공양하고, 태어나는곳마다 8난이없는무난처에태어나며생각과지혜를항상잃지않고복과명이장수하며부귀하여재보가많다. 4념처 ( 念處 ), 4정근 ( 正勤 ), 4여의 ( 如意 ), 신족 ( 神足 ) 을구족하며, 4성제를비롯한 7각분 ( 覺分 ) 과성과 ( 聖果 ) 에도달하고모든번뇌를없애어무루 ( 無漏 ) 와 6신통 ( 神通 ) 을얻는다. 6. 탑의층수 1) 주역 ( 周易 ), 계사전( 繫辭傳 ) 天數는一이요, 地數는二이다. 天數는三이요地數는四이다. 天數는五요, 地數는六이다. 天數는七이요, 地數는八이다. 天數는九요, 地數는十이다. 2) 성리대전 ( 性理大全 ), 율려신서( 律呂新書 ), 卷 1 按天地之數始於一終於十基一三五七九爲陽九者陽之成也基二四六八十爲陰十者陰之成也 홀수는天數이며짝수는지수임. 탑은수미산의구체적형상의표현임으로하늘로솟은탑의층수는반드시홀수 ( 양수 ) 를지니고땅을상징하는탑의평면은반드시짝수 ( 음수 ) 로나타내는것이기본임

83 한국의석탑 ( 石塔 ) Ⅱ. 한국석탑의특징과양식전개 < 석탑의특성 > 돌을재질로이용한다 공간을점유한다 서로다른형태를지님 장식성을강조한다 비례를지닌다 표 1. 석탑에쓰이는암석과특징 암석종류생성과정종류 화성암 ( 火成巖 ) 용암 ( 마그마 ) 와관련된암석화강암, 섬록암, 안산암, 현무암 퇴적암 ( 堆積巖 ) 퇴적물에작은알갱이가채워진암석사함, 응회암, 석회암, 셰일 변성암 ( 變成巖 ) 화성암이깊은지하에서열을받아새로운암석으로변한것 점판암, 대리암, 편마암, 혼펠스 1. 한국석탑의성립 1) 자연적환경 노년기지형의산악에서는전국곳곳이화강암산들로이루어져있음. 2) 신앙적환경 돌의영원성을추구한결과물. 3) 기술적환경 화강암불상의창안 - 태안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등 2. 초기석탑의구조와형태 1) 석재확보의어려움 보통 1개의완성된부재는원석 ( 原石 ) 의 20~30% 를떼어내야함. 목탑의기본구조인기둥, 창문, 기둥위에보등을석재로만들기위해서는크고작은석재들이필요 2) 목탑을닮은초기석탑의구조 문과내부심주, 기둥, 공포, 지붕 그림 2. 미륵사지석탑, 7 세기

84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표 2. 한국석탑성립에대한문제 구분미륵사지석탑 (650 년경 ) 분황사모전석탑 (634 년 ) 양식특징목탑의양식을재현중국의전탑혹은모전석탑을재현 3. 신라석탑성립과정에서의탑리오층석탑 1) 기단부 우주와탱주사이에면석을끼워넣음 ( 미륵사탑에서시작, 정림사에서나타남 ) 기단부가백제탑에비하여높아지는양상 2) 초층탑신 우주에면석이붙어있는돌로 1면처리 ( 정림사탑의결구및안쏠림비교 ) 주두를설치는독특, 2층부터탱주로주간을형성한점 ( 미륵사탑 ) 옥개석은분황사탑의영향 - 백제장인이건립에관여 ( 편년은 660~682년을전후한시기 ) 4. 통일신라석탑양식의성립 1) 감은사탑과고선사탑의제작시기 감은사탑 (682년), 고선사탑 (686년이전 ) 2) 문무왕대의석조기술의변화 통일전쟁으로잉여노동력발생 결구식석조기술의전래 ( 돌못의사용, I 자형나비장의사용 ) 3) 구조론으로살펴본감은사탑과고선사탑 이중기단 - 가구식기단에탑구설치 - 백제미륵사탑, 일본호류지오층목탑의기단 ( 초기적 2중기단 ) - 수직력에대한취약점노출그럼에도이중기단을쓴이유 (1. 가람에서의점유면적, 2. 3 층의구조를지니는점 ) 상하층기단의결구방식 - 하층은 ㄴ 자형귀틀석사용 ( 백제탑에는없음신라에서처음사용 ) 그림 3. 감은사지동삼층석탑

85 한국의석탑 ( 石塔 ) - 상층은판석형결구법 ( I 자형나비장사용 ) 몰딩의사용과초층탑신결구법 - 상하층갑석에는각형과호형, 탑신받침에는각형2단 ( 백제는 1단 ) - 초층탑신결구법은정림사탑과동일 고선사탑의초층문비 - 하대에信枋石의사용 ( 탑리석탑과함께유일한구조 ) 4) 2층탑신부터는엇물림식결구법 상층기단 하층기단 도면 1. 감은사지삼층석탑상하층기단결구법 5. 신라석탑의편년요소 상하층탱주의숫자, 옥개받침의숫자, 구성석재의숫자 목탑의구성요소에서번잡스러운요소들을제거해나가는간략화 ( 단순화 ) 과정 1) 기단부 가장많은부재들이결구, 다양한변화과정을보여줌 판석식결구법, 귀틀형결구법 2) 비례 기단부와초층탑신과의관계설정 기단 : 횡장방형에서장방형으로, 탑신 : 장방형에서정방형으로 옥개의체감비 : 80 ~85 로급해지는경향

86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그림 4. 7 세기부터 9 세기까지의신라석탑의비례변화 6. 이형석탑의등장 8세기이후심오한불교사상을배경으로독특한형태의독창적인탑들이제작 불국사다보탑 ( 佛國寺多寶塔 ), 화엄사사사자석탑 ( 華嚴寺四獅子石塔 ), 정혜사지십삼층석탑 ( 淨惠寺址十三層石塔 ), 백장암삼층석탑등 1) 불국사다보탑 기단부터탑신, 상륜에이르기까지도저히화강암을다듬었다고보기어려울정도의놀라운치석술과완벽한비례감 2) 화엄사사사자석탑 기단모서리에 4마리의사자를넣어 화엄경 ( 華嚴經 ) 에서사자좌위에앉아사자빈신삼매 ( 獅子頻迅三昧 ) 에든여래의모습을표현한독창적발상에서만들어진세계에서유래를찾아볼수없는독특한탑 3) 정혜사지 13층석탑그림 5. 구례화엄사사사자석탑 신라선덕왕 ( 宣德王 ) 원년 (780) 중국당나라의백우경 ( 白宇經 ) 이신라에망명와이곳에집을지었는데, 후에이를고쳐절로삼았고이름을정혜사라함 ( 東京通志 ). 북한묘향산보현사에남아있는 8각13층석탑을제외한다면유일한 13층탑. 10층이상의다층은중국적요소 ( 望德寺의동서쌍탑 13층 ) 이며중국탑은밀첨식 ( 密檐式 ) 탑형임

87 한국의석탑 ( 石塔 ) 단층기단, 2중은기단을높게설정함으로서탑신부의세장감과상승감을강조하기위한것인데, 정혜사탑의경우는층수가다층임으로기단부를강조할필요가없음. 특징적인것은 1층탑신의높이를크게설정하여전체적으로시선이 1층부분에머물게하는시각적효과, 지붕모서리에목조건축에서볼수있는내림마루 ( 隅棟 ) 을돋을새김은백제탑적요소. Ⅲ. 불탑을바라보는문화적인식 ( 불탑관佛塔觀 ) 1. 황룡사구층탑의건립과호국적불탑관의성립 1) 안홍 ( 安弘 )( 함 ) 법사 (579~640) 기록검토 - 576년귀국 : 안홍법사가수나라에서법을구하였는데서역승비마라 ( 毘摩羅 ) 등두명의스님과함께돌아와능가경, 승만경과불사리를바쳤다.( 三國史記, 卷第 4, 新羅本紀第 3, 眞興王 37 年條.) - 각훈 ( 覺訓 ),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제2권, 한글대장경, pp. 63~64. 안홍의행적 - 대흥선사 ( 大興善寺 ) 에머뭄 (601~605) - 대흥선사는당시역경 ( 譯經 ) 의중심지 - 費長房, 歷代三寶紀 12 卷, 大藏經 49 卷 (T.2034.), p.102 上. 안홍과 동도성립기 ( 東都成立記 ) - 일층은日本, 이층은중화, 삼층은오월 ( 吳越 ), 사층은탁라 ( 托羅 ), 오층은응유 ( 鷹遊 ), 육층은말갈 ( 靺鞨 ), 칠층은단국 ( 丹國 ), 팔층은여적 ( 女狄 ), 구층은예맥 ( 穢貊 ) 이다.( 三國遺事, 卷第 3, 塔像 4, 皇龍寺九層塔條.) 2) 구층탑의사상적배경 호국의구심체로서의불탑관성립 그림 6. 황룡사구층목탑추정복원 2. 조탑경의전래와불탑 무구정경 과불탑 ( 彌陀山譯, 無垢淨光大陀羅尼經, 大藏經 19 卷 (T.1024) 1) 무구정경 의번역과전래 704 년인도출신의스님미타산 ( 彌陀山 ) 에의하여중국에서번역, 706 년전황복사탑에봉안

88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2) 작법과조탑사례 작법 다라니조탑소탑다라니봉안장소탑돌이봉안의미 근본다라니根本陁羅尼 중수 77 기 소탑내 77 벌의다라니탑내봉안 77 회오른쪽으로돌면서 77 회염송 7 십 7 억여래에게선근을심는것 상륜당다라니相輪橖陁羅尼 99 회쓴다라니를상륜당 오른쪽으로돔 9 만 9 천곳에상륜당을세움 9 만 9 천곳에사리탑을조성 수조불탑다라니修造佛塔陁羅尼 건탑중수 탑속, 중수한탑의상륜당 자심인다라니自心印陁羅尼 중수 99 번쓴다라니를탑속, 탑네귀 오른쪽으로돌면서다라니 108 회염송 9 십 9 억부처님께공양하는것 대공덕취다라니大功德聚陁羅尼 99 번쓴다라니를상륜당가운데, 탑의네귀 9 십 9 억보배탑을조성 육바라밀다라니六波羅蜜陁羅尼 99 기 99 번쓴다라니를탑에넣어상륜당속 9 십 9 억칠보탑을조성, 9 십 9 억여래에게공양하는것 무구정탑의조탑사례 - 한국 : 황복사탑 (706), 나원리석탑, 불국사석가탑, 석남사비로자나불상대좌 (766), 일본오쿠라 ( 小倉 ) 콜렉션소장사리기, 창림사탑 (855), 동화사민애대왕석탑 (832), 봉화축서사탑 (867), 황룡사구층탑 (871), 중화 ( 仲和 )3년명금동원투 ( 金銅圓套 )(883), 해인사묘길상탑 ( 妙吉祥塔 )(895), 선림원지탑, 동화사금당서탑, 봉화서동리동탑, 성주사석탑등 3) 무구정경 에서조탑의공덕 국가의공덕 : 재해ㆍ재변소멸, 원적격퇴, 신장이국가수호, 백성이정법갖춤 개인의공덕 : 현실세계에서공덕을이룰수있다는점이중요 생전의공덕 : 선근, 복덕성취, 수명연장, 업장소멸, 죄ㆍ질병ㆍ번뇌소멸, 보리성취, 전생죄업소멸등 4) 탑돌이의공덕 ( 무구정경 에서의탑돌이 ) 근본다라니-77회오른쪽으로돌면서 77회염송, 상륜당다라니-오른쪽으로돔, 자심인다라니-오른쪽으로돌면서다라니 108회염송 - 수기를받고아뇩다라삼막삼보리 ( 阿耨多羅三藐三菩提 ) 에서물러나지않고모든업장과온갖죄업이모두소멸 신라풍속에해마다 2월이되면初八日에서十五日까지서울의남녀가다투어흥륜사 ( 興輪寺 ) 의탑전 ( 塔殿 ) 을도는복회 ( 福會 ) 를행하였다.( 三國遺事 卷第 5, 感通第 7, 金現感虎條.) 근본다라니의조탑법

89 한국의석탑 ( 石塔 ) 그림 7. 석가탑출토무구정광대다라니경, 불교중앙박물관소장 5) 무구정탑 으로서의황룡사구층탑의중수 구층탑의중수 (872년의중수 ) - 그해 8월 12일처음으로낡은것을없애고새것을만들도록하였다. 그안에다시 무구정경 에의거하여소석탑 99개에각각의석탑마다사리하나씩을넣고, 다라니네가지와경전 1권을, 책위에사리 1구를안치하여철반의위에넣었다. 이듬해 7월에 9층을모두마쳤다.( 皇龍寺九層木塔舍利函記 ) 무구정경 대공덕취다라니 ( 大功德聚陁羅尼法 ) 에의한중수 무구정탑 으로써의황룡사구층탑 - 경명왕승하 (920년), 포석정사건 (927년) - 나라에재변이생길때그탑도변화가생긴다. 삼국시대및초기통일신라 (7세기 ~8세기초 ) 통일신라시대 (8세기이후) 호국적불탑관 개인의추복및모든중생의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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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통일신라의사찰건축 - 신라중대를중심으로 - 양정석 수원대학교사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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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통일신라의사찰건축 : 신라중대를중심으로 통일신라의사찰건축 - 신라중대를중심으로 - Ⅰ. 통일신라사찰건축조사의추이 많은고고학적유적이그러하듯이통일신라시기의사찰유적에대한조사도일제강점기에본격적으로이루어졌다. 1902년명치 ( 明治 ) 정부의지시로동경제국대학주도하에이루어진대한제국의건축관련유적조사는짧은기간동안경주를중심으로통일신라의사찰에대한조사가이루어졌다. ( 韓國建築調査報告 (1904)) 이후이조사를담당했던세키노다다시 ( 關野貞 ) 는 1909년부터 1913 년까지추가적인조사를시행하였다. 본격적인사지에대한조사는 1918년부터시작되었다고할수있다. 이후 1922년, 그리고 1929 년에걸쳐사천왕사지, 망덕사지, 황룡사지, 창림사지등경주의주요사지 ( 寺址 ) 가조사되었다. 특히사천왕사지의경우 1920년대초에서탑지에대한간략한발굴조사가이루어졌는데, 이목탑지의중앙부에당초문이양각된대형전돌이깔려있었고, 녹유전이주변테두리에일렬로깔렸던것이보고되었다. 특히국립경주박물관이소장하고있는사천왕상전의아래부분은이러한조사과정에서출토되었는데, 신라의뛰어난조각가양지 ( 良志 ) 스님이제작한것으로이해하기도한다. 경주천군동사지의경우는 1938년조선고적연구회가조사하였는데, 강당, 부속건물지, 문, 회랑이조사되었다. 그러나당시의발굴조사는아주부분적으로만시행되었기때문에대부분의연구는지표조사수준의현상에대한파악을바탕으로가람배치를추정하는수준의연구를중심으로이루어졌다. 후지시마가이지로 ( 藤島亥治郞 ) 는 1928~1929 년황룡사지의지표조사를바탕으로 1탑 1금당식의가람배치복원안을만들었으며, 요네다미요지 ( 米田美代治 ) 역시망덕사지와천군리사지에대하여지표에노출된유구를바탕으로각건물지의위치와규모를복원하고이를전체사찰의배치와연계하여이해하였다. 이러한방식의연구는이후많은연구자들에게통일신라사찰건축에대한기본적인이미지를제공하였다. 그러나본격적인발굴조사가이루어지지않은상태에서진행된가람배치나구조에대한인식만으로통일신라시기의사찰건축에대해정확한이해를하기는어려웠다. 이러한문제가해결된것은결국본격적인발굴조사가이루어지면서부터라고할수있다. 해방이후국립박물관은 1959년에일제강점기시기의고고학적조사가고분중심으로이루어진것이갖는문제점을제기하고새롭게고고학을정립시키자는의미에서감은사지에대한발굴조사를실시하였다. 이후문화재연구소가 1979년 ~1980년에걸쳐보다면밀하게발굴조사를하여감은사지에대한기본자료를확보하게되었다. 1969년에는이화여자대학교가황룡사지를조사하였는데, 일부유구에그쳤다. 본격적인조사는

94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1976~1983 년까지문화재관리국문화재연구소에서내곽에대한종합적인발굴조사를통해이루어졌다. 같은 1969년에는문화재관리국문화재연구실이망덕사지의탑과회랑등에대한조사를실시하였다. 한편 8세기사찰건축의중심으로이해되는불국사는 1969년부터문화재관리국에의해조사가진행되었지만, 이때는복원공사가중심이었기때문에많은아쉬움이남는다. 70년대에들어서는분황사의경우 1975년동국대경주캠퍼스박물관이기초조사를실시하였다. 이유적은황룡사지와마찬가지로이후 1990년에서2012년에이르기까지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종합적인조사를시행하였다. 이렇게 1970년대초반까지이루어진사지에대한조사는당시조사의한계로인해사역에대한종합적인조사에는이르지못하였다. 1975년에이르면통일신라사찰건축유구중에도드디어사역전체에대한전면발굴조사가실시되는사례가생기게된다. 바로덕동댐건설에따른수몰지구에편입된고선사지이다. 이조사에서금당이있는금당구 ( 金堂區 ) 와동편에삼층석탑을회랑으로둘러싼탑구 ( 塔區 ) 로구분되는전혀새로운가람배치가확인되는성과를가져왔다. 그럼에도여러가지이유로남문지와담장지등회랑외곽에대한조사는이루어지지않았다. 이보다본격적인사찰건축유적에대한종합적인조사는 1976년부터연차적인계획을세워발굴조사가이루어진황룡사지에대한조사부터라고할수있다. 이후건물지의석재부재와삼층석탑은국립경주박물관경내로이전하여복원하였다. 1976년부터이루어진황룡사지에대한조사는중복유구에해석을바탕으로가람의변천과정을고찰할수있는단서를마련해주었다. 따라서이후에이루어진사지에대한발굴조사는이러한문제의식을바탕으로이루어졌다. 1979년, 1980년에이루어진감은사지에대한재조사역시중복유구에대한조사성과를통해삼국시대가람배치의전통이통일기까지계속되고있었음을가람의변천과정을통해이해할수있는계기를마련하였다. 영묘지사( 靈廟之寺 ) 명의기와편이출토되어영묘사로비정되고있는전흥륜사지발굴조사는 1977년부터이루어졌다. 여기서는창건기가람의유구가일부확인되기는하였지만, 8세기이후대대적인중창이있었음을알수있었다. 특히현재까지알려진바로는쌍탑식가람중유일하게동탑과서탑의기단이 8각형으로되어있어주목을받았다. 80년대에들어서는경주박물관과문화재연구소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의해굴불사지가조사되고, 황룡사지서남편외곽지역에서 9세기후반의통일기사지가확인되기도하였다. 이외에도경주지역에서는동천그림 1. 고선사지유구배치도

95 통일신라의사찰건축 : 신라중대를중심으로 동사지, 미탄사지등에대한조사가이루어졌지만, 탑지부근에대한조사에그쳤다. 90년대에들어서는분황사에대한조사가지속적으로진행되었다. 이를통해분황사지의창건과중건, 즉삼국시기와통일신라시기가람의변화과정을알수있게되었다. 경주남산의천룡사지도탑지에대한조사를바탕으로 1996년에경주문화재연구소에의해중심곽에대한전면적인조사가이루어졌다. 2000년대에들어서자마자경주지역에서는남리사지, 인용사지, 천관사지, 그리고감산사지가거의같은시기에조사가이루어졌다. 이러한성과가어느정도정리될때비로소통일신라사찰의기원이라고할수있는사천왕사지에대한발굴조사가 2007년부터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의해이루어지기시작하였다. 현재조사가마무리되고 2권의보고서가간행되고이제마지막 3번째보고서를남기고있는이사찰건축유적부터본격적으로조사성과를검토하고자한다. Ⅱ. 통일신라사찰의조사성과 삼국유사 에나오는 사사성장 ( 寺寺星張 ) 탑탑안행 ( 塔塔雁行 ) 이라는표현에서도알수있듯이통일신라시대신라왕경이던경주에는사찰이매우많았다. 박방용은경주지역에 203개소의사지가있는데, 이중통일신라시대에창건된사찰이 167개소에이르는것으로보았다. 이은석은여기서나아가경주지역의사지가 256개소이며, 이가운데 147개소가남산에위치하는데대부분 9세기이후가중심연대라고보았다. 이와는별도로문헌자료를통해신라중대를중심으로통일신라시기의사찰을살펴보면다음과같다. 문무왕대에사천왕사 (679), 망덕사 (679), 중생사 (679), 신문왕대에는감은사 (682), 봉성사 (685), 효소왕대의불무사, 성덕왕대의감산사 (719), 봉덕사, 효성왕대의법류사, 그리고경덕왕대의장수사 (751), 웅수사 (751), 석가사 (757), 굴불사, 용장사등이그것이다. 이러한사찰중잘알려져있다시피본격적인통일신라기사원은사천왕사에서출발한다고할수있다. 낭산남쪽에형성된단구상의평탄대지에조성된사천왕사는 삼국유사 에는이자리가신라불교공인 (527) 이전의전불 ( 前佛 ) 시대칠처가람 ( 七處伽藍 ) 의한곳으로기록되어있다. 이후당과의전쟁중이던신라는문무왕 10년 (670), 11 년 (671) 당군의침입을막아내기위해명랑법사 ( 明郞法師 ) 를그림 2. 낭산 사천왕사지 망덕사지전경 ( 남에서 )

96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청하여낭산남쪽신유림 ( 神遊林 ) 에절을세웠는데, 바로이곳이다. 여기서명랑이문두루비법 ( 文豆婁秘法 ) 을행하자갑작스런풍랑이일어당나라군의배가모두침몰하였다고전한다. 당시이절의모습을알수있는자료는남아있지않지만, 같은책에서채색비단으로절을짓고풀로오방신상을만들었다고하는것으로보아임시로조성된형태가아닌가한다. 이가람이무엇보다중요한것은당시조영되고있던다른사원과는달리문두루비법등이행해진기록이남아있다는것이다. 따라서이가람의창건이신라밀교사원의성립과밀접한관련이있는것으로이해할수도있을것이다. 三國史記 에는문무왕 19년 (679) 에동궁 ( 東宮 ) 을처음으로짓고, 안팎여러문의편액을정했던내용과함께사천왕사를완성하였다는기록도전하고있다. 이를통해당시사천왕사가문무왕대의궁궐과도성을정비하던시기에조성되었음을알수있다. 더불어 三國史記 직관지에는成典寺院條가있는데, 여기에 四天王寺成典 이라는관청명이기록되어있는데, 이는당시사천왕사가국가에서직접관리하였던사찰임을알수있다. 조사가이루어지기전부터사역내에는금당지, 동 서목탑지, 추정동 서단석지가남아있었는데, 2006년부터이루어진발굴조사를통해추가로가람내곽을둘러싼회랑지, 금당의좌우로이어진익랑지, 석등지의위치가확인되었다. 사역외곽에는머리가없어진동 서귀부와당간지주 1기위치하고있다. 강당지는일제강점기에사역을가로지르는철도의가설로인해완전히파괴된것으로알려졌으나발굴조사를통해강당지일부가잔존하고있을가능성이확인되었다. 이에따라사천왕사의전체가람배치추정이가능하게되었다. 그런데사천왕사지에는일반적인가람배치에서확인되지않는유구가존재한다. 바로금당지의북쪽으로좌우로조영된방형의건축물이다. 이에대해서는후지시마가이지로 ( 藤島亥治郞 ) 가이건물을종루와경루로추정한이래상당히오랜동안그렇게여겨져왔다. 그런데장충식은 삼국유사 에아직도 단석 ( 壇席 ) 이없어지지않았다는기사를바탕으로이를단석으로추정하였다. 특히이건축물의초석은모두중앙에구멍이뚤어져있는데, 이를 관정경( 灌頂經 ) 의 복마봉인대신주경( 伏魔封印大神呪經 ) 에서문두루법에사용하는원목의크기를높이 7푼 ( 分 ), 너비 7푼 ( 分 ) 이라고한점과초석원공직경과의크게차이가나그림 3. 사천왕사지유구배치도

97 통일신라의사찰건축 : 신라중대를중심으로 지않기때문에, 이원공에원목을삽입한것으로추정하기도한다. 이러한단석으로추정되는건축유구와는별도로사천왕사지에는이전부터주목받아온유구가있다. 바로금당의전면에있는쌍탑이다. 많은연구자들이통일신라초기에창건된사천왕사를쌍탑가람배치의선구로보고있기때문이다. 즉이러한사천왕사의쌍탑가람배치는이후 682년에창건된감은사, 685 년에창건된망덕사에직접적인영향을준일종의모본으로이해하는것이다. 발굴조사를통해이들동 서탑지의기단형태는가구식전석축기단 ( 架構式塼石築基壇 ) 으로턱이있는지대석위에녹유신장벽전을면석으로세우고갑석을올린것으로추정되었다. 그리고상층기단지대석외곽에장대석을그림 4. 사천왕사지서단석지발굴조사후전경돌려이중기단이설치되어있고, 각기단면의중앙에계단이위치하고있다. 여기서면석으로사용된녹유신장벽전은많은연구자들에의해사천왕상으로이해되었다. 그림 5. 사천왕사지동탑지북편기단녹유신장벽전출토상태

98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그러나이전부터이벽전이사천왕상인가아니면신장상인가라는논란이존재하였던것도사실이다. 이제발굴조사를통해벽전의종류가 4가지가아닌 3가지이며, 그위치도기단한면에계단좌우로 3점씩총 6점씩배치되어있다는점을알게되어더이상논란의여지가없게되었다. 앞에서도언급한바와같이사찰건축은운용되는기간지속적으로변화가이루어진다. 이를그림 6. 사천왕사지서탑지복원 ( 안 ) 일반적으로중창이라고하는데, 이중건과정은단순히오래된건축물을다시고쳐세운다는의미만이아니라사원성격의변화와도함께고려할필요가있을것이다. 사천왕사지금당의경우발굴조사를통하여현존금당보다작은규모의선대금당이있었다가증축또는수리를통하여현재의규모로확장된것이밝혀졌다. 즉기존의기단토를사선으로잘라내고황갈색토와돌을섞어그뒷부분을잇대어, 기단부바닥부분에는선대금당굴광선뒷부분의생토가그대로잔존하고있는것이확인된것이다. 이러한금당규모의확대는금당의좌우익랑출현시기와관련되므로두차례이상가람배치의변화를추정하는데중요한단서로이해하기도한다. 즉사천왕사지에서확인되는금당의확장은단순히하나의건축물규모의확장이아니라사역의규모를변화시킨다는의미도가지고있는것이다. 이는당시사찰의위상과시대적상황과도관련하여이해할수있다는것이기도하다. 한편사천왕사지에서는건물기초전체에돌을깐온통기초에서성토기초로변화하는모습이명확하게확인되어기단축조의구축방법에차이가있었음을보여주는사례로논의되기도한다. 이사천왕사와함께항상논의되는가람이망덕사이다. 망덕사의창건기록은 삼국유사 에따르면다음과같다. 신라가삼국을통일한뒤인 679년당나라가침입하자부처의힘을빌어당나라세력을물리치기위하여사천왕사를짓게되었다. 사천왕사를짓는다는소문이당나라에전해지자당나라에서는사신을파견하여이를확인하려하였다. 이에신라에서는당나라에서파견된사신을속이기위한방편으로사천왕사의건너편인이곳에절을짓게되었다. 그리고 당나라황제의만수를빌기위하여절을지었다 하여당나라를속일수있었다. 그래서절의이름을당나라의덕을우러른다는의미에서망덕사라하였다고한다. 그뒤절을정식으로다시짓고 692년 ( 효소왕 1) 에낙성재를베풀었다. 이러한사료를바탕으로망덕사를 685년이아닌 692년에완성된것으로이해하기도한다. 쌍탑가람배치의사찰로사천왕사의가람배치와유사한망덕사지는 1969년과 1970년 2차에걸쳐그림 7. 사천왕사지금당의변화

99 통일신라의사찰건축 : 신라중대를중심으로 문화재관리국에서발굴조사를실시하였다. 1969년에목탑지, 1970년에는금당지, 동회랑지, 북회랑지가조사되었다. 사역의동 서쪽에목탑지가남아있으며, 그북쪽으로금당지가자리하고있어통일신라의전형적인쌍탑식가람양식을보여주고있다. 금당지의북쪽으로강당지가있으며이들을둘러싸는회랑지가있다. 금당의좌우에는익랑지가있으며, 중문지의남쪽에는계단지가있고그서쪽에는당간지주가남아있다. 목탑지는금당지에서 18.4m 떨어진곳에위치하고있으며, 동 서목탑지는중심에위치한심초석을기준으로할때, 33m의거리를두고좌우대칭되어있다. 목탑지는사방 3칸으로, 중앙의심초석은 8각형이며중심에사리를안치하기위한이중으로된사각형의사리공이있다. 중문지는탑지에서 16.4m 떨어진곳에자리하고있다. 이와같이사천왕사지와망덕사지에서는두개의목탑으로이루어진쌍탑식가람배치를하고있는데, 이와비슷한시기에조성된감은사지의경우에는목탑대신새롭게석탑으로쌍탑을조성하였다. 연대산에서서남쪽으로뻗은지맥의끝인바다가에위치한감은사지는신문왕원년 (682) 에창건하였다. 감은사는사천왕사와같이성전사원으로국가에서직접그운영와정비를관장하였던것으로생각된다. 이러한감은사지에는현재동 3층석탑과서 3층석탑이남아있는데, 현재신라의가장이른석탑으로이해되고있다. 기단은 1층이 2층보다낮은가구식중층기단이며, 옥개석은밑면은모전석탑양식이보이며, 윗면은목조건축의지붕면을본뜬것으로여기고있다. 목탑과달리석탑은기본적으로단순한구조를지향할수밖에없는데, 동서의탑이동일한모습을하고있는것으로바탕으로법화사상에의한이불병좌사상과밀접한관련을가지고조영된것으로보기도한다. 감은사지는 삼국유사 에의하면신문왕이아버지문무왕을기리기위해 682년에창건한사찰이다. 또한문무왕이해룡이되어감은사를드나들도록하였다고한다. 발굴조사를통해금당의기단동측에구멍을뚫어놓았고, 또금당아래장대석을바닥으로부터떼어놓아공간을만들 그림 8. 망덕사지유구배치도 (1930) 그림 9. 망덕사지동탑지평단면도 그림 10. 감은사창건가람배치도

100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고, 장대석위에초석을놓아금당을세운특수한기단을형성하고있음이드러났다. 일반적으로이러한금당의바닥구조를사료에나오는내용과연결하여이해하고있다. 통일신라기에는기존의삼국시대에조성된가람들도시대의흐름에따라가람배치와개별건축물의변화가이루어지기도하였다. 황룡사의경우크게 3차에걸쳐가람의변화가생겼다고이해된다. 우선진흥왕 14년 (553) 습지를매립하여대지를조성한후최초의가람을조영한것이황룡사창건가람인데, 이때의만들어진중문, 남회랑, 그리고일부건물의유구가일부남아있다. 그리고진평왕 6년 (584) 부터선덕여왕 12년 (645) 까지우리가일반적으로알고있는황룡사의모습이만들어지게되는데, 정면의길이 54m에이르는중금당과그좌우의동서금당, 83m로추정되는 9층목탑등이모두이때만들어진다. 따라서통일신라시기에황룡사는큰변화가없는것으로생각되기도한다. 그러나이시기에도지속적으로변화가이루어지고있었다. 삼국유사 에는신라경덕대왕때 ( 서기 754년 ) 황룡사종을만들었는데, 길이가 1장 3촌이고두께가 9촌이며무게가 49만 7천 5백 81근에이른다고하는내용이전한다. 이무게가그대로사실이라면성덕대왕신종이구리 12만근이라고전하는것과비교하면 4배가넘는매우큰종이라할수있다. 따라서이러한종을설치하기위해서는그에합당한건축물의존재가확인되어야하는데, 황룡사지에는이시기로편년할수있는유구가존재한다. 목탑의전면좌우에위치한방형의건축물이그것이다. 발굴조사를통해확인된유구를바탕으로다음과같은추론이가능하다. 즉새롭게조성한황룡사대종을설치하기위해서는이전에는없던새로운종루가필요하게되었을것이다. 그리고그위치를정한후그곳에대칭되는곳에역시새롭게경루가조성되며, 이에따라가람내곽의규모도확장되어중문과남회랑이남쪽으로이동하였던것이다. 이와더불어승려들의학습공간이라고할수있는강당의경우도가람의변천과정속에서지속적으로중창이이루어졌다. 황룡사지의변화와마찬가지로선덕여왕 3년 (634) 에초창되었던분황사지도통일기에이르러새롭게변화한다. 분황사가람배치에관해서는초기에는 1탑 1금당 좌전우탑 2원가람등의추론이있었으나 1975년동국대학교와 1990~1995 년경주문화재연구소의발굴조사를거치면서탑의동 서 북에금당을둔 품 자형의 3금당임이밝혀지게되었다. 그런데북쪽의중앙금당은창건이후같은자리에서여러차례변화가이루어졌는그림 11. 황룡사최종가람배치도데, 그중가장큰변화는탑을둘러싸고있던세개의금당이전형적인고대의가람배치형태인 1탑 1금당으로변화하였던것이다. 이렇게 1금당으로변화하는시기는 삼국유사 에나오는 을미년분황사의약사여래동상을만들었는데, 무게

101 통일신라의사찰건축 : 신라중대를중심으로 가 30만 6,700 근이고장인은본피부의강고나말이다 라는기사를토대로하여경덕왕 14년 (755) 으로추정하고있다. 이러한거대한불상이조성되었다면그에맞는불전이필요하였을것이고그에따라기존의동 서금당을중앙금당에흡수 통합하였다는것이다. 이와같이삼국시대에조영된황룡사나분황사의기본가람배치구조는통일신라시기에이르러변화하고있음을알수있다. 그림 12. 분황사지금당유구배치도 Ⅲ. 통일신라사찰건축의특징 삼국통일을전후로하여신라불교를적극적으로수용한왕실에의해많은사원이건립되었다. 이가운데신라중대왕실에의해건립된사원증일부에는성전 ( 成典 ) 이라는일반관부가설치되었는데이는승정기구로서의기능을하였다. 성전이설치된사찰은사천왕사, 봉성사, 감은사, 봉덕사, 봉은사, 영묘사, 영흥사등인데, 성전은불교계의재편성과정에서이루어졌고대체로영흥사에성전을설치한해인신문왕4년 (684) 전후로추측하고있다. 통일신라에들어선신라의사찰건축은다양한변화를가지고왔다. 기단의축토방식에있어서이전의주요건물에서사용되었던굴광판축법은점차소멸되어지형과여건에따라간략화된방법을사용하였다. 그리고가람배치방식도새롭게변화하였다. 우선금당앞에세워진단탑이동서로나누어져서쌍탑으로바뀌어소위 2탑 1금당식가람배치로변한것이다. 이와같은가람배치는 9세기까지크게

102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유행하게된다. 이러한형식을쌍탑식또는쌍탑식가람배치라고하는데회랑내곽이정방형평면에설치되어있고강당좌우에건물이배치되어있다. 탑은목탑과석탑이혼용되며대표적인사찰은사천왕사와망덕사, 불국사등이있다. 불전의경우도분황사와같이 3개의금당이하나로통합되어대형의불전이조성되고, 사천왕사와같이작은금당이대형화하는모습을확인할수있다. 이와함께일부사찰에서는가람의내곽에종루와경루, 또는단석으로추정되는시설이새롭게조영되기도한다. 가람의구조에있어서도앞에서살펴보았던고선사지와같이탑과금당이각각별도의공간으로구성되어있어이원화된가람인양원가람도있다. 이런가람배치는나원사지, 황복사지, 창림사지등에서확인할수있다. 탑과금당의위치에따라서좌전우탑, 우전좌탑, 또는전당후탑으로가람형식을분류할수있다. 여기서한걸음나아가경덕왕 10년 (751) 에중창된것으로추정되는불국사의경우는기본적으로는 1금당쌍탑식가람이중심된여러개의원으로구성된평지가람이자산지가람이기도하다. 우선남동향한터의제2단동측에다보탑과석가탑, 대웅전, 강당이차례대로세워져있으며, 불국사의중심영역이회랑으로둘러싸여있다. 대웅전북쪽높은터에는동측제3단에관음전영역이조성되어있고, 이보다한단낮은서측제4단에비로전영역이조성되어있다. 그리고대웅전영역서측, 한단낮은제5단의터에극락전과회랑으로이루어진극락전영역을두었다. 이와같이통일신라시기에이르면새롭게산중으로들어가조성되는산지가람이등장하고, 다불전의사찰이나오기시작한다. 그리고석굴사로대표되는암굴사원도조영되기시작한다

103 조선시대불교건축의이해 홍병화 대한불교조계종문화부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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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조선시대불교건축의이해 조선시대불교건축의이해 Ⅰ. 유습의유지와사림의등장 ; 개국부터기신재의폐지까지 조선은고려의유습인불교를척결하고성리학을중심으로새로운질서를구축하고자했던나라였다. 하지만개국세력이던이성계를중심으로하는신흥무인세력은표면적으로내세운성리학적질서의수립과불교의배척과는달리호불적성격을강하게띠고있었다. 이후훈구세력으로인식되는신진사대부 ( 개국성리학자 ) 들은왕실의이러한성격을인정하고있었던것으로볼수있다. 단적인예로는성종대에만들어진 경국대전 의내용을보면알수있다. 禮典度僧條에기록된僧科와度牒制가들어가는등불교를관리하고싶었던것이지불교를폐지하고싶었다고보기는어렵다. 이후훈구세력에비해더욱성리학적으로철저한입장을취하는사림이등장하면서조선은불교를포함한이단에대한입장은강경해진다. 그렇다고해도결과적으로보자면공권력을동원한강제적방법으로불교를배척했다기보다는국가체제에서불교를삭제하고성리학적이념에철저한군주가도학정치를통해백성을교화하는것을이상적인것으로보았다. 사림이등장하기이전과초기에는왕실이주도하는사찰의창건및중건이있었음을어렵지않게찾아볼수있다. 사림이등장하기이전에는불교를국가의통제하에놓기를원했던것으로이해할수있는것이다. 당시의지배세력이던신진사대부는이미선대부터문중에서분암을소유하여독서하고제사를지내는전통이있었기때문에감히불교와의관계를정리하지못했다는설명이더타당할것이다. 하지만성종이후사림들이정계에진출하면서이들이추구하는가치관에따라朱子가정비한예학의일상적실천을통해도학정치가구현되는이상사회를실현하겠다는생각의일환으로불교가이전까지누리던지위를빼앗기시작하였다고볼수있다. 사림의등장을통해그동안국가가 경국대전 에규정하고있는승과및도첩제를삭제하고관습적으로행해온도교의제천행사를주관하는소격서와불교식선왕선후에대한기신재등을없앴다. 그러나이것은사림의입장에서탄압이라기보다는도학정치실현의시작으로그동안異敎의관습을행하던이들도백성의한명으로보고성군의선정을통해올바르게교화하고자하는것이라고볼수있다. 이처럼국가체제에서불교의요소를없앤시점인 1516 년기신재의폐지는이러한의미에서중요한시점이되는것이다

106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Ⅱ. 국창원찰건축계획의신경향 조선초기의불교건축을파악하기위해서는이시기에창건되거나대대적인중수가있었던사찰의건축을살펴보아야할것이다. 하지만몇몇의특수한경우를제외하고는사찰이창건되거나중수된기록이발견되지않는다. 아마도이것은조선의國是때문에이전시기에비해사찰의창건과중수가쉽지않았을것이며, 간혹있다하더라도공식적이지않아기록을남기지못했을것으로생각된다. 하지만왕실의직접적인호불성향은흥천사의창건, 진관사의중수등개국직후에도사찰을짓고고치는일이없던것은아니다. 하지만이당시에창건또는중수된사찰이현재까지전해지지않거나, 기록만으로남은경우도표현하는방식이구체적이지않아서전모를파악하는데는어려움이있다. 하지만대체적인표현과건물의명칭을보면역시고려시대의전통이어느정도는유지되고있는모습을발견할수있다. 문과랑과요사가보이는데정확한배치를알수는없어도회암사등과의사례를비교해보면전면에회랑이문과함께있고, 좌우로요사가배치되어가운데의안마당을확보하는형식이었을것으로보인다. 그림 1. 봉선사의일제강점기사진왕실에의해주도되는대대적인불사이외에도지방의중소사찰은꾸준히중수되었던것을알수있다. 심지어 1425년폐사가되어터만남아있던완주화암사를중건한다거나, 1426년에지은정수사법당, 1430년에지은무위사극락전, 1435 년중창한봉정사대웅전, 1457 년에건립한개목사원통전, 1473 년에지은도갑사해탈문, 각각 1477년과 1484년에지은개심사심검당과대웅전, 정확한기록은발견하지못했지만 15세기로알려진송광사하사당과국사전, 조선초기양식을하고있는관룡사약사전등과같이왕실의지원과는상관이없어도창건과수리하는일은생각보다드문일이아니었던것을알수있다. 1) 이외에도의미있게조선초기불교건축의경향을지켜봐야할것은바로국창원찰들이다. 국창원찰의본격적인건립은세조대와성종대인데, 세조는역사적으로도유명한호불국왕으로많은사찰을지원하였으며, 성종대에는내명부에서적극적으로지원하는식으로여러사찰들에불사를했다. 봉선사, 상원사, 낙산사, 원각사, 정인사, 회암사, 해인사, 신륵사, 수종사, 용문사등과같은사찰로모두기록과함께유구및유물을통해국가의지원을확인할수있다. 이시기지어진국창원찰의공통점은선왕선후의기신재가설행되었다는것과확인되는몇몇의사찰에서전면의회랑과정문, 그리고丁字閣과같은종루의배치가발견되는것으로능침에서행해지는제례가이곳에서행해지고있음을강하게시사하는건축형식을따르고있다는점이다. 1) 왕실지원여부를현재확정적으로단언할수는없지만현재까지아닐가능성이높은사찰들이다. 물론송광사의경우조선초기까지도 16 국사중 15 세기홍진과 16 세기고봉스님이국사이거나거의반열로인정되고있어왕실지원의가능성은충분하다

107 조선시대불교건축의이해 원각사 1465 상원사 1466 봉선사 1469 정인사 1471 그림 2. 세조 / 성종대국창원찰추정배치도 이시기는유습이지속되는특징을하고있는데, 국가의지원에의한사찰과그렇지않고사족들의가문에서지원하는등주로지배층의지원이고려시대와마찬가지로유지되고있던시기이다. 국가와사족할것없이모두규모만다르지원찰을두고선망부모의극락왕생을빌고독서를하는등의역할로사찰을사용하였기때문에지원이계속이어지던것이다. 하지만사림의등장으로이러한유습의지속은위협을받게되고그상징적단절의시점이바로기신재의폐지시점인것이다. 역시그렇다고願刹이나墳庵의전통이일시에폐절된것은아닌것이분명하다. 지역적으로또는비공식적으로꾸준히사찰을지원하고있었다고보아야할것이다. 물론규모는이전과달랐을것은분명해보인다. 이시기의불교건축을이해하는데한가지주의할점은국가에의해지원된사찰에서보이는건축적특징은분명일관된면이존재한다. 하지만전체사찰에서이러한사찰이차지하는비중은

108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비교적일부에국한될것이기때문에조선초기불교건축의특징을국창원찰의특징으로대신할수있을지는의문이앞선다. 건축형식이란일정한시기에특정한요구에의해새로운건축요소가건축형식에반영되고있다면그경향에주목하여그요소를해당시기의건축적특징으로파악할수는있겠지만이때그경향이전체에서차지하는비중도고려하여야할문제이기때문이다. Ⅲ. 사림의집권과불교의내적동향 ; 사림의등장에서기축봉사까지 조광조로대표되는원칙에충실한성리학자인사림들이등장하면서불교는전혀새로운상황에빠지게된다. 조선을건국한성리학자인훈구파와는다르게성리학적질서의구현에철저한재야유학자인사림은훈구파와는다르게성리학이외의사상에대해서는단호한입장을취하게된다. 이들은경국대전에서불교에대해보장하는禮典度僧條마저폐지한다. 이것은상징적인조치로더이상국가가불교를공식적으로관리하지않는다는것을의미하는것으로도교의제천의식을주관하는소격서의폐지, 불교적의례의성격이강한것으로알려진사찰에서행해지는기신재의설행중지와같이성리학이외의다른이단에대해서는분명한입장을취하는것이다. 이렇게사림이국가의유력한정치세력으로등장하면서국가영역에서이단의내용들을폐지한시점은기신재가폐지된 1516년으로볼수있다. 불교를국가체제에서삭제했다고해서불교를공공연히탄압하여존립의근간을흔들었다기보다는성리학이외의사상에는단호하게대하였지만역시승려도백성의일부로파악하여국왕의선정으로교화해야하는대상으로인식했다고보는것이좀더정확한이해이지않을까싶다. 이후명종대의문정왕후와보우의관계속에서승과및선교양종제의부활이이루어지지만 20년에그치고문정왕후와보우의죽음이후사림이국정을완전히장악하면서이전의상태로복귀가되었다고볼수있다. 선조대에들어서면서사림은완전히국정을장악하고스스로의분화를통해붕당을형성하여도학정치의구현을위해학문적완성에매진하는경향을보인다. 2) 이시기에대한그동안의인식은문정왕후와보우의죽음과사림의집권을통해불교계가극심하게침체되었다는인식이일반적이었다. 하지만이후지속되는연구를통해서는佛書의간행이해당시기에비약적으로늘어나는것을보고불교의침체로볼수없다는새로운견해를제시하였다. 불서의간행이이전시기와비교해서비약적으로늘었다는것은지식의보급에대한가장확실한증거로이시기를침체기혹은정체기라는인식과는상반되는증거가되는것이다. 이시기는불교계내부에서는청허계를중심으로계맥이형성되는등조직적질서가갖추어져가는시기로이후전개되는승가교육의체계화를통한불교계의형식적, 내용적정비가완성되었다고볼수있는시기이다. 3) 이러한변화는통일된승단으로단일한교육이가능했다는것을의미하는것으로기존의 2) 이시기는퇴계와율곡이등장하고유교경전의간행이활발하여성리학의교육체계가성립되어가는시기이다. 3) 승려의교육과정은履歷科程이라고하는데 1 년의沙彌科, 2 년의四集科, 4 년의四敎科, 3 년의大敎科로구성된다. 사미과는기초적인儀禮를배우고, 사미과는禪門의요점을배우며, 사교과는고급경전을배운다. 마지막으로대교과에서는최고의경전과禪語錄을배운다. 이과정을마친후隨意科라고하여임의로

109 조선시대불교건축의이해 인식에서이시기를바라보던인식과는전혀다른결론에이를수밖에없는것이다. 이외에도불교계에많은영향을미친것은임진과정유두왜란이다. 건국이후 200년동안단한번도전쟁다운전쟁을겪어보지않은조선은임진과정유의왜란을겪으면서국가존립에심각한위기에봉착하게된다. 다알려졌다시피조선은국난의극복에국가의통제된힘보다는각계에서일어난조직되지않은자발적힘에의해위기를극복한바가큰데, 승군을비롯한의병의역할이컸다고알려져있다. 이과정에서특히승병의역할이대단했음은이미잘알려진사실이다. 의승병활동은향후전개되는상황에서불교계의입장이이전에비해나아질것이라는예상과함께이렇게조직적으로움직일수있었던불교계의객관적수준을더높게바라봐야하는문제와직면하게된다. 왜란의극복에이바지한바가큰승병은전쟁때입은사찰의피해를복구하는중건불사에국가의지원을받게되고이렇게사찰을재건하는과정에서청허계와선수계로대표되는 16세기를거치면서형성된문중들은결속을통해내부역량의강화도이루게된다. 1624년중건된법주사, 1630년에중건된화엄사, 1632년중건된쌍계사, 1634년중건된금산사, 1641년에중건된통도사, 이보다더뒤인 1660년에중건된선암사등과같이전쟁의피해를겪은많은사찰들이전쟁직후보다는그보다한참이지난시기에대대적인중건을시도하였다는것은중건이단순히전쟁의복구와는다른의미를가진다고볼수있다. 이에대해서는불교사분야의좀더철저한연구가선행되어야하겠지만전쟁직후의중창이외에도왜란이후 30~50년이나지나중건을한다는것은단순히피해의복구로볼문제가아니라새로운계기또는출발로인식할수있는현상인것이다. 이는향후전개될불교계의체력이단단하게길러지는계기가되었다는인식은충분히가능해보인다. 왜란과는다르게병자호란은많이다른양상으로진행되는데, 제대로된항쟁도해보지못하고항복을하는굴욕을당하게된다. 이긴전쟁인왜란의피해가물질적으로는더컸을지모르지만, 진전쟁인호란에서는과거상대도하지않던오랑캐 ( 여진족 ) 에군신관계를강요당하고이를수용할수밖에없었다는치욕을당하게된다. 이러한충격은內治用이라고평가받는북벌의주장이라는현실적대응을선택하게된다. 실제로이때주장된북벌은당시의집권세력인노론이자신의권력을유지하기위한수단이었다는결과적평가와함께성리학적명분론에입각한修己차원의각오로이해할수있다. 하지만실제북벌보다는북벌준비과정에서국내상황을통제하는기능을했다는평가를피해갈수없다. 이러한상황의지속과더불어중화가오랑캐 ( 여진족의청나라 ) 에게점령당해더이상중화가없다는절망적판단까지이르게되면서조선이작지만이제부턴 중화 라는인식까지발전하게된다. 북벌을내세운당시의노론은성리학적무장의방법으로朱子家禮를통한도학의구현을택했다 공부하는과정까지추가되기도한다. 이러한이력과정의성립은 16 세기말에서적어도 17 세기초에는성립되었다는것이학계에서인정하고있다

110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고볼수있다. 이는국가의근본을가족으로보고가족내의禮가국가까지확장되는것이이상적인사회가구현하는방법이라는인식을통해, 가례를강조하여가정을통제하고이것이전체사회로확장되는것이국가차원에서도학정치가실현되는것이라고인식하였다. 이러한분위기는자연스레엄숙하고억압적인사회적분위기를만들게되고이러한엄숙하고억압적인사회적분위기에서조선시대의불교는후기를맞이한다고볼수있다. 이러한격변기는왜란과호란의과정에서전공을인정받아점차사회적위상이높아지고있던불교계의입장에서매우곤란한것이되고있었다. 특히북벌군주로알려진효종이후현종의즉위과정에서벌어지는송시열의두번의봉사 4) 와이의결과로볼수있는전격적인억불정책의실시는당시의정국을설명하기에충분하다. 이는조선건국이래최초이자유일한백곡처능의 간폐석교소 로이어진다. 5) 간폐석교소란국가가시행하는억불책을거두어달라는상소를승려가국왕에게올리는것으로당시억불책이얼마나전격적이며강경한것이었는지를알수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이렇게반발을할만큼불교계가자신감이있었음을의미하는상징적인사건인것이다. 이렇게형성된정국은 17세기중반이불교의입장에서는시기를구분할수있는하나의변곡점이되는중요한시기라는것을잘드러내고있다. Ⅳ. 불교건축의적응력과변호의모색 기신재가폐지된이후의불교건축에대해서는크게알려진것이없다. 보우가문정왕후의지원을받아청평사를중건하면서갖춘사찰의배치계획이발굴조사를통해어느정도확인되었는데, 이것이가장대표적인이시기사찰이라고할수있다. 하지만보우와문정왕후가이룬것은경국대전에서사라진승과및도승제의부활과기신재의再行으로사림이없애기이전으로의복귀이기때문에당연히세조와성종대에중창한국창원찰의건축계획과크게다르지않은것을확인할수있다. 이것은 단절 과 회복 이라는큰대립이있었기때문에청평사의배치계획은자연스런변화와연장에서파악하기보다그림 3. 청평사항공사진는과거의회복이라는연속의측면에서 15세기국창원찰의보편적건축계획을충실히복원하는데에초점이맞춰진것으로볼수있을것이다. 하지만이렇게의도적인불사가있었던사찰이아닌다른사찰에서는새로운배치의변화가자연스럽게일어나고있지않았을까싶다. 이시기는 17세기부터좀더보편화되어사찰건축의한경향 4) 왕에게밀봉하여상주하는의견서. 여기서두번의봉사란 1649 년기축년과 1657 년정유봉사를칭함. 5 장의내용에참조. 5) 백곡처능이현종즉위초년에행해진갑작스런억불정책을거두어달라는조선시대유일한승려가올린상소

111 조선시대불교건축의이해 을완전히갖추게되는수륙재의식에적합한안마당중심의건축이어느정도자리잡았을것으로생각된다. 왜냐하면이미수륙재로대변되는야외의식의성행은 16세기간행된불서중에수륙재의식집이급증하는것으로봐서알수있다. 즉국창원찰이라는전혀새로운건축계획을가진사찰과국가로부터지원을받지못한대부분의사찰과는건축계획에서차이가있었을가능성은충분하다. 또한국창원찰과비슷한시기에형성된안동봉정사나서산개심사의경우전면에회랑과문루가있었던쪽의건물은 17세기이후에새로이지어진건물이다. 하지만지형상이전에도정자각과같은건축요소가있었을것으로생각되진않는다. 그림 4. 봉정사일제강점기배치도 16세기와 17세기전반은불서간행이폭발적으로증가한시기로알려지고있는데, 불서간행이증가하였다는것은분명히당시로서는큰변화로이정도의변화라면불교건축에영향을미쳤을것이다. 불서의간행이전국적으로증가하였다는것은지식을문자화하고유포했다는것을의미하는것으로불교가대중에게전파되어갔다는아주구체적인증거인것이다. 하지만당시불교내부의큰변화가건축에어떻게반영되었는지정확히파악하기란불가능에가깝다. 공교롭게도 16세기건축은거의남아있지않으며, 당시의현상을파악할수있는간접사료조차거의없다. 이시기간행된불서를통해당시어떤내용이불교계내부에서필요했는지를파악할수있어변화의일면을추정할수는있다. 6) 요즘제기되는다양한연구를보면 16세기를불교의침체기로단정하지는않는다. 하지만국가의지원이이전같지않은상황에서전과같은대규모의건축은쉽지않았을것이고, 공사가있었다고하더라도중수기등의찬자가유명관료가아니기때문에기록이남아전해질가능성도상대적으로낮아졌을것이다. 15세기에찬술된봉선사, 정인사, 원각사, 회암사와같은사찰의중창기록은모두당시의신료들에의해쓰여그들의문집에남아전하기때문이다. 7) 16세기의기록은사림의집권이완성된시점으로이전과는달리사림들의찬술이쉽지않았을것이기때문이다. 전대의유습중에하나인사찰에서독서하는것과선망부모에대한제사를절에서지내는것은이미고려시대부터시작된불교와지배층의관계를맺는유형이다. 즉사찰과지배층의생활속에 6) 대표적인대승경전인법화경, 元승려인몽산덕이스님관련서적, 수륙재의식집, 승려의교육과정교재, 부모은중경등이다. 이러한내용을종합해보면당시불교계는적절한대외적대응은물론내적으로선을기반으로교학도중요시하면서승려교육의체계화를통해체력을길렀다는결론이가능해진다. 이러한기반으로는지배층의이탈을수륙재를통한기층민중의흡수로극복하기시작했다는것을알수있다. 7) 김수온, 조위등의문집에남아전한다

112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서맺은서로간의관계는당시정치적으로사림들이불교를배척하는행동과는다르게묵인하듯유지되었던것으로볼수있는데, 실제로는유력가문이라면공공연히墳庵이라하는修己와祭禮의장소로사찰이이용되었던것을알수있다. 여러가지사료를통해이렇게분암을두는것은적어도고려후기까지도그사례를확인할수있는전통이며, 동시에매우광범위하였다는것을알수있다. 이렇기때문에사림집권후공적영역에서불교를제거하였다고는하지만사적그림 5. 남명재사영역에서는불교가완전히배척되었다고하기어려운것이다. 이러한분암의전통은조선후기까지도지속적으로이어지는데高宗代까지도몇몇의사례를통해이러한전통이지속적으로이어지고있음을알수있다. 왜란과호란의극복에서불교계가보여준戰功으로인해이후사찰의재건에제공되는국가의편의와지원은이전과달랐다. 피해는특히정유재란의피해가극심했고이피해에대한복구가이후 20~40 년이후까지지속적으로이루어지고있다고할수있다. 이시기중창되는몇몇의사찰과그사찰에대한사적기의찬술경향을보면재건역의성격을파악할수있다. 중창불사의마무리는사적기나중창기를찬술하면서마무리하는것이보통인데, 이때는국가의지원을받아사찰이主幹이되어불사를이루었기때문에이전과는다르게그규모에대해명확히적고있다. 그래서원찰로서의자기성격을사적기에더욱명확히표명하고있다. 사적기의내용을보면전면에회랑이있었고, 그안에문루가포함되어있으며, 祖宗位를봉안한공간이마련되고있는것을알수있다. 이러한건축요소는 15세기세조와성종대에중창된사찰에서발견되는건축요소와거의일치하는것이다. 다만, 설명이약술하여정자각과같은건축요소가있었는지는불분명하지만, 사적기의찬술을확인할수없는봉은사나봉선사, 낙산사나상원사, 부석사등의비교적규모가큰사찰에서도정자각과같은건축요소가 17세기까지도이어지고있는것을보면 17세기전반에사적기가찬술된사찰은같은문중에의해주도된불사이기때문에정자각과같은건축요소가등장했을가능성이더높다고볼수밖그림 6. 봉은사일제강점기사진에없다

113 조선시대불교건축의이해 이것은 17세기전반기불교건축을규정하는데중요한의미를갖는것이다. 사적기가찬술된사찰의경우는모두대규모의사찰이기때문에당시를우리나라의대표적인사찰이라고는할수있지만, 실제로다수를차지하고있는중소규모사찰까지를포함한전체를대표한다고볼수는없다. 이시기불교건축의면모를어느정도파악할수있는소규모사찰로는완주화암사, 창녕관룡사, 경산환성사등이있는데, 모두불전과문루를마주하고좌우로요사를배치하는형식을띠고있다. 사찰의규모와후원세력의차이가있어도대체적으로안마당을중심으로주불전과문루가마주하고좌우로는요사가들어서는四棟中庭형이이당시보편적인형식이다. 그림 7. 화암사, 관룡사배치도 아마도이것은당시안마당의용도와이주변의건물을사용하는방식이일관되었기때문에사찰마다건물의이름과규모에는차이가있을수있어도중심사역배치의공통점은일관되다고할수있다. 이시기가이전시기와다른특징은사림의집권을통해공식적영역에서불교의영향력이대폭축소되었지만내적으로는불서의간행이눈에띠게증가하고수륙재로대표되는야외의식의설행이빈번해지고임진왜란의전공을통해불교의사회적위치가제고되는등의엄청난변화가있던시기이다. 이러한사회적변화는고스란히불교건축의변화에반영되었을것이다. 주불전과마주하던門은樓의성격이강해지면서야외의식에꼭필요한공간으로변화한다. 더불어좌우의요사는단순하면서격이있던건물에서점차실생활에필요한종합적성격의건물로변화한다. 하지만이러한사례를파악할수있는사찰은아주제한적이라정확한변모를알수없고다만다양한자료를통해추정해볼뿐이다

114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Ⅴ. 반동의시작과불교의적응 ; 송시열의등장에서붕당정치의종말 조선후기시작의계기에대해서는연구분야에따라서로다른기준을제시할수있을것이다. 하지만불교의입장에서보면당시사회분위기변화에결정적인역할을한기축봉사 (1649년 ) 로볼수있을것이다. 이견이있겠지만기축봉사는송시열이효종에게북벌의필요성을강변하는글로서정국을변화시켰다. 왜란의피해가더컸겠지만그것은이긴전쟁이었다. 그러나호란은짧은전쟁기간이었지만그피해로받은조선사회, 특히성리학자들의충격은왜란과비교할수가없었다. 중화가아닌오랑캐에게明이망하고그에이어조선마저절대씻을수없는치욕을당하는것은당시송시열을비롯한노론은납득할수없는충격으로오직잘못된역사를힘으로바로잡아야한다는 북벌 말고는살아야할의미가그림 8. 주희와송시열없었던것으로보인다. 이렇듯북벌을통한복수를강조하며이에필요한군왕의자세를짚어주면서한치의흐트러짐도허용하지말아야한다는긴장된사회분위기를요구하는것이당시집권세력이던노론이할수있는유일한일이었던것이다. 이에노론의수장인송시열은당시군왕이해야할일은주자성리학이라는이데올로기로무장하고이를家禮를통해실천하는것이기때문에이에대한모범을보여야하는것이라고봉사를통해주장하는것이었다. 이렇게형성된지배층의각성은급속하게이단을배척하는주자성리학으로일색된사회적분위기를만들었다고볼수있는데, 기축봉사에이은정유봉사 (1657년) 는이러한분위기를한층더강화하였다. 바로이렇게형성된냉냉하고엄정한정세가 1661년백곡처능의간폐석교소의직접적인원인이되었다고볼수있다. 백곡의간폐석교소가나온당시의배경을추정해보자면, 집권세력인노론을중심으로북벌을위해단호한도학정치에매진하는것은성리학이외의다른사상에대해강한입장을취하는방향으로전개되었는데, 결과적으로兩亂의공적에대한포상과국역을전담하는대가로묵인의단계에이른불교의존재를부정하는것으로귀결되었었다고볼수있다. 이는불교계입장에서는수용할수없는상황으로그동안내적안정을통해전열을갖춘불교계입장에선조선초유이자유일한상소를올리게된사건인것이다. 이것은크게두가지관점에서당시의상황을이해할수있는데, 하나는송시열로대표되는북벌론자들이사회적분위기를강경하게조성하면서불교 ( 이단 ) 에대해강압적분위기를연출하고있다는시각이고, 다른하나는불교계가그동안의안정과정비를통해국가의반불교적정책에대해상소라는유교적방법을통해합법적으로반발할정도의내적역량을갖추고있다는이해도가능한것이다. 두가지시각중어떤시각일지라도당시의상황은엄중하였으며, 불교는이에반발할수밖에없었다는것은분명해보인다

115 조선시대불교건축의이해 이러한사회적상황을통해전기보다완고한조선후기는본격적으로시작되었다고볼수있다. 주자가례의일반적보급을통해가묘가지배층내부에서일반화되어제사에대한불교의의존이더약해지게되었다는볼수있다. 물론조선후기까지이어지는분암의역할에가묘가미친영향은어떠한지는좀더연구해볼문제이다. 이러한사회적분위기는숙종과영ㆍ정조시기로이어지는비교적사회적안정을이룬시기까지이어진다. 그리고불교또한문중불교의풍토가확립ㆍ분화되면서양적확장을거듭하는시기로이미三門修業의정착으로내정안정을이룬시기이다. 안정을이룬다는것은한편으로분화가시작되었다는것을의미하는것으로이미청허계는선수계의분화과정속에서조선후기대표적인문중으로자리매김되며, 다시세세한문중으로분화를거치면서문중간의경쟁도치열했던것으로보인다. 이는결과적으로문중간의경쟁과협력을통해조선후기불교의변화에주요한동력이었을것으로추정해볼수있다. 조선후기일반백성들은전쟁의피해와소작의일반화등으로더욱피곤한삶이일상화되어가고있었다. 이렇기때문에백성에게役을지우기어려워지고대신승려에게역을전담시키다시피하는현상이생기는악순환이발생하게되었다고볼수있다. 그만큼백성의삶은고달프고이를이겨내기위해당시유일한종교인불교에의탁하는것이자연스러운현상이었을것이다. 이시기쯤불교가감당해야했던가장대표적인역은산성을쌓고관리하는것과각사찰에서종이를만들어국가에바쳐야紙役이었다. 이두가지의역은다른잡역을물리쳐준다는차원에서는사찰에도움이되었다고생각할수도있지만, 특히지역의경우는실제그역이과중해서사찰의존폐에영향을미쳤다고한다. 아무튼역이과해피해를호소하는경우도많았지만적어도역을수행하는만큼은존재가인정되는것은분명하였기때문에사찰의존립을위해역을수행해야하는모순적인상황이벌어지기도하였던것이다. 이것은분명불교가국가와백성을위해자의가아니더라도했던일임에는분명한것이다. 이러한상황속에서불교는자신의존재를재확인시키고유일한종교로서의자기역할을충분히수행해나아간다. 전쟁과가난에희생된백성들의천도와피곤한삶의고통을위로받고싶어하는민중들은이것에대한대안을제시하는불교에관심을보이고, 불교또한이탈한왕실과지배층을대신할후원세력으로백성을적극수용한것으로보인다. 구체적으로불교는수륙재와같은커다란종교적행사를자주설행하면서백성들의종교적요구에부응하면서후원세력으로서의기층백성을수용한것이다. 수륙재로대표되는당시의야외의식은괘불, 범패, 작법등과같은설치및연행예술을중심으로백성들이쉽게종교적신성성을경험하게하여이전처럼어려운문자를통한종교적경험과는전혀다른방식의불교대중화가가능했던것이다. 소수의고액시주자보다는다수의소액시주자들이본격적으로사찰을후원하면서는대중조직과이조직의활동을보장하는공간이사찰내에자연스럽게생겨나게되었으며, 승려사회에서도

116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뚜렷한문중의식이성장하여문중의중요성이커지게되었다. 경제적기반으로사찰은토지를소유하고결국문중을통해사제간에토지를상속하는새로운양상이불교계내에서보편적으로자리를잡았다고볼수있다. Ⅵ. 안마당의중심의건축요소확립과산문체계를구성하는건축요소의변화 ; 불교에서대중의집결과공간의확장 17세기후반의불교는국역을전담하다시피하면서도한편으로는수륙재등의야외의식을통하여사찰의후원세력을기층백성으로대체해가고있는시기라고볼수있다. 이러한변화를건축에서확인할수있는사례를찾기는생각보다쉽지않다. 산성의수축이라는새로운임무가불교계에부여된것은당시불교계의입장에서는아주중요한변화라고볼수있다. 그러나산성의수축을목적으로창건된사찰의경우가전체사찰의수에비하자면차지하는비중이아주미미했기때문에이런사찰이새로운경향으로인식될수는있어도당시를대표한다고볼수는없을것이다. 그리고산성내에사찰을짓는다고하더라도산성의수축과관리를담당하는군사적기능만을강조하였다기보다는오히려일상생활과함께군사적임무가부가되는방식이었을것이기때문에전혀새로운형식의사찰이라기보다는일반적인사찰에특수한기능이부가된사찰을지었을것이기때문이다. 이렇듯당시사찰의역할과이에따른건축형식이정확하게대응하여건축형식을형성한다는것은실제거의일어나지않는일이라고할수있다. 다만, 이보다는좀더보편적이면서확실한건축형식의변화를가져왔다고할수있는것은앞에서언급한후원세력의교체, 문중불교의확립, 야외의식의성행등과같은당시를휩쓴보편적인불교자체의변화인것이다. 조선시대사찰이창건된다는것은비교적자주있는일은아니다. 왜냐하면이미사찰이들어설만한좋은위치에는이미모두사찰이들었기때문에조선시대는필요에따라기존의사찰을중건하거나터에중창하는정도가보통이다. 물론, 조선초흥천사, 봉선사, 원각사, 정인사등과 17세기초의김용사와완주송광사그리고완전히이건한홍천수타사, 18세기말의용주사정도가전부라고할수있다. 이시기는사찰을새로짓거나한번에중창을하는경우보다는대부분필요에따라변화에맞게건축의일부를개조하는방식으로불사가진행되었던것을알수있다. 그래서 17세기후반이후부터 18세기동안창건되거나중창된사찰을구체적으로찾아내기는쉽지않다. 대승사의경우 17세기초부터 18세기중간에걸친긴기간동안꾸준히사찰이지어졌으며, 17세기전반에창건된김용사, 홍천수타사, 완주송광사의경우도오히려시기적으로는임란직후중창된사찰들과내용이더가깝다고할수있기때문이다. 굳이구분하자면김용사와수타사의경우완주송광사와는다르게국가의지원에의한중창이아니기때문에서로비교하자면이질적인면이

117 조선시대불교건축의이해 있다. 하지만이시기의특징을파악하는데는매우중요한단초를제공한다고할수있다. 이사찰들과함께 18세기말에창건되는용주사와비교해보면아주적절한배치경향을볼수있다. 용주사의경우김용사, 수타사와는성격이다른사찰로이해해야하는데안마당을중요시하는배치는공통점이있지만안마당을둘러싸는배치의차이는분명하게드러난다고할수있다. 조선시대에설행된일반적인수륙재나국가의지원에힘입은수륙재 ( 혹은수륙재는아니더라도원찰에서행해지는先王先后에대한의례 ) 가어떠한차이가있었는지정확히알수는없지만국가의지원에의해이루어진수륙재에서안마당을둘러싼건축계획의차이는그렇지않은사찰과분명차이가있다그림 9. 천주사ㆍ패엽사ㆍ백담사고볼수있다. 천주사, 패엽사, 백담사, 상원사, 용주사, 낙산사, 봉선사, 봉은사등과같이전면과좌우의건물이연결되어 처럼평면을구성하는사례는안마당을감싸는형식은모두국가가직접관여한사찰에서발견되는건축형식이다. 이중에정자형배치를하는상원사, 봉선사, 봉은사, 낙산사등의사례와그렇지않은사찰로다시세분할수있는데, 이차이도정확히어떤차이가있는지알수는없다. 정인사, 봉선사, 청평사, 봉은사, 낙산사, 상원사, 부석사등에서는이러한배치가확인되지만패엽사, 천주사, 백담사, 용주사등에서는정자형배치를발견할수없어유사한면과그렇지않은면이동시에존재하고있는것은분명해보이지만아직까지그이유에대해서는밝혀진바가없다. 그림 10. 상원사ㆍ낙산사 그리고이러한배치에는이전과마찬가지로정문이있는데, 이때정문은크게문루와정문이분립하는경우와정문없이문루가배치되는경우로구분해볼수있다. 이러한다양함이확인되는사례를시대순으로구분해보면대체로정문과문루가분립되다가점차문루규모가커지면서문루만배치되는경향으로정리되는경향을발견할수있다. 이것은정문이문루와구분될필요가절대적이다가어느순간부터정문이점차없어지고문루가정문의기능을흡수하는방식으로변화하였다는이해가가능하다. 왜이렇게파악을하냐면이러한

118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변화가일어나면서문루를정문으로부르는기록이갈수록늘어나는것을발견할수있기때문이다. 이러한변화의경향은야외의식에필요한정문이없어지는것은야외의식이쇠퇴했기때문이라고이해할수도있겠지만, 이보다는야외의식이설행과정이나절차가변화하여야외의식의주요무대라고할수있는사찰의중심사역의건축요소에변화가왔다고볼수도있다. 이처럼후자의견해가더우세하다고할수있는것은정문과문루가통합되어가는시기라고할수있는 18세기후반에도야외의식에서가장중요하다고할수있는괘불의조성이그다지큰변화가없기때문이다. 비록 18세기후반에전보다괘불의조성횟수가줄어들기는하지만이미이전에만들어진괘불이이시기에도지속적으로사용되고있었기때문에조성횟수의감소가야외의식의설행감소로직결되지는않는다고봐야하기때문이다. 표 1. 조선시대괘불의시기별조성추이 시기 17세기前 17세기後 18세기前 18세기後 19세기前 19세기後 20세기前 수량 특히이시기의변화중에눈에두드러지는변화는안마당의좌우측면에배치되는요사의평면변화이다. 이시기는불교의대중화를통한기층백성이사찰의후원세력으로등장하는변화와문중의확립과분화를거치면서문중간의경쟁이사찰을변화시키는중요한동력이었다고할수있기때문에이와연관지어요사평면의변화를관찰할필요가있다. 조선전기의요사는현재까지확인되는사례가그리많지않아확정적으로생각하기에는쉽지않지만현재까지확인된것으로만본다면단순한一字形평면이면서도 3,4 칸이내의규모가대부분이라는것을알수있다. 그래서당연히단일용도로사용되는사례가일반적이라고볼수있다. 하지만 17세기를넘어 18세기에이르면ㄱㆍㄷㆍㅁㆍH자형인요사를볼수있다. 이렇게요사의평면이복잡해지는것은요사가수용해야할室의수가많아지는것을의미하고요사가이전보다좀더복잡한기능과많은인원을수용해야한다는점을반영하는것으로볼수있다. 그림 11. 내소사설선당평면 17세기후반에는사찰의진입장치인산문체계에서천왕문의등장이특징적이다. 물론천왕문은이미 15세기국창원찰중에도발견되지만보편적이었다고보기에는자료가부족하다. 하지만 17 세기전반기사찰의재건역이광범위하게일어나던시기에천왕문의건립은필수적이라고할수있다. 사찰의규모에따라천왕문이생략되는경우도있었겠지만천왕문은산문체계에서가장필수적인요소로인식한것만은분명해보인다. 이러한조영전통은봉은사에서조성된천왕문의사례와

119 조선시대불교건축의이해 같이 18세기전반까지지속적으로조성되었던것으로보인다. 하지만이후로는작례가발견되지않는데, 그이유는이미대부분의사찰에천왕문이만들어져서이를사용하였다고볼수있을것이다. 하지만이후에창건된용주사에는천왕문이들어서지않는것을보면 18세기후반에는이미모든사찰에천왕문이들어서더이상세워지지않는다는이해보다는천왕문이가지는효용이다른것으로대체되었다는이해가좀더설득력을갖는다. 이러한것을뒷받침해주는변화는신중탱의성행과발달이아닐까한다. Ⅶ. 성리학의위기와불교의선전 ; 세도정치부터조선의멸망까지 조선시대가막을내리기까지의마지막약백년간은사회적혼란이가중되고있었다는역사인식이보편적이다. 그혼란은세도정치를인한민생의곤란과외래종교와사상의유입을인한전통적가치관의혼란등을꼽을수있다. 이시기이러한문제점은사회각분야의지체또는정체로표현되고있어각사회ㆍ문화등全분야에서이러한혼란을발견하기란어렵지않다. 하지만이시기불교건축의변화를모두지체또는정체로이해할것인지에대해서는구체적인검토를거쳐판단할일이다. 성리학의반성과비판이있기는하였지만실학이나양명학, 혹은서학등의새로운학문은성리학이만들어놓은질서를변화시키기에는턱없이부족했다고인정하는것이사실에가깝다. 다만, 성리학의실현이도학정치의구현이라는측면에서본다면성리학자들의일파가형성한세도정치를통해정정이불안해지고결과적으로민생이위협받으면서도학정치가실현되는세상과는거리가먼세상이되어가고있어성리학은성리학자들에의해무너지고있었다는인식이좀더현실적일것이다. 결국세도정치는흥선대원군의등장과함께사라졌지만흥선대원군이원했던조선은새로운조선이아니었다. 즉, 당시는혼란스러운지배층의위기를극복하기위한성리학적질서의개선과강화에노력의중심이있었던것이지, 새시대의변화기운에부응하는개혁하고는거리가멀다는것이다. 이시기불교계는삼종선에대한논쟁이라던가, 儒佛간의간헐적논쟁과교류등과같이당시의사상계를주도하는몇몇의사건들은있었지만역시뚜렷하게두각을나타내는변화는보이지않는다. 다만문중중심으로師僧에대한현창이두드러지고, 각종契를통한현실적補寺활동의빈도가늘었다는점은분명하다. 그리고야외의식은꾸준히설행되고있었지만, 아무래도점차수그러드는과정에들어섰다는이해가더적절할것이다. 또한백성들의구체적희구에부응하는하위신들의봉안이눈에띠게늘어나는경향이존재하는것으로봐서사찰의후원세력이라할수있는기층백성들의요구를세분화하여사찰에반영하는변화가이전에비해두드러졌다고할수있다. 이것은결과적으로신도의신앙적요구에일일이대응하여기복신앙으로흐르게되었다는비판도가능하겠지만, 긍정적으로보자면백성이사찰운영의주체중하나로자리잡게되는계기가되었다고볼수있다. 왜냐하면신도들이포함된사찰계를통해보사활동을벌여얻은수익으로사찰을운영하는것이전국적으로쉽게찾아볼수있어계를통해사찰의운영에참여하였던흔적

120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을쉽게찾을수있기때문이다. 계를통한보사활동이사찰의중요한경제활동으로자리잡으면서신도들의유치와관리가사찰의중요활동이되었을것이며, 이를위해문중간의경쟁도충분히있었을것으로볼수있다. 이러한것이일제강점기까지도남아있었던별방제, 별가제등으로불리던사찰내의문중별독립운영제를통해확인할수있다. 그림 12. 옥천사배치도이처럼대중이모여조직을만들어사찰의운영에직간접적으로참여해야하는사례가점차늘어나는이시기는신도가사찰의운영에적극적으로참여하는신행공동체로서의사찰까지발전하지못하고조선의패망과함께신도가사찰운영에참여하려는움직임이사라졌다고평가해야하지않을까한다. 이러한사찰을둘러싼안팎의변화가불교를변화ㆍ발전시키는동력으로제대로모아지기이전에외세의강압에의해불교가재편되어숱한왜곡을겪었던것이일제강점기한국불교의모습이라고볼수있기때문이다. 이시기는국운이쇠하고사회가혼란스러워지는시기였지만생활의희망을간절히바라던민중들이모인불교에서는대중의공동활동으로사찰을운영하는주체로성장하는경험을하기시작한시기이기도하다. 이는향후우리역사를진보시켜나갈경험을쌓는훌륭한기회이기도하였지만이기회를살리지못하고나라의패망과함께더욱어려운혼란의시대로접어들게된것이다. Ⅷ. 말법시대의희망건축 ; 대중을쫓아가는건축과대중을끌어가는건축 조선말기의불교건축은이전시기와비교하여쇠퇴기라고보는것에동의할수없다. 이시기불교건축의큰특징은산신, 독성, 칠성등의신앙이아주중요하게여겨져서별도의건물로지어지다가 20세기초에들어서는이셋이하나의건물에통합되는삼성각이나타나기시작했을것으로볼수있다. 이와같은하위신의위치는주불전을중심으로주로뒤편의적절한장소에배치되는경향이강해진다. 이외에도다양한신들이신앙되는것을알수있는데, 신중탱에그려지는신들의수가점차많아지는독특한변화가발견된다. 조선시대에유행하는신중신앙은다양한역할을담당하는신중들을하나의화폭에그려넣어봉안하는것으로조선후기에는절대빠지지않는불화의한유형이다. 이것은그만큼백성의요구가다양해지면서도많아졌다는것을의미하는것이며, 사찰에서는이러한요구에일일이부응하는노력을하고있었음을나타내는것이다

121 조선시대불교건축의이해 퇴설당신중도 그림 13. 신중도 대적광전 124 위신중도 신중탱은전각내에봉안되는데, 주불전이나부불전혹은인법당등에도봉안되는등봉안처가다른불화에비해다양해지는특징을보인다. 신중탱이주불전에봉안되는경우주로좌측에봉안되나경우에따라서는우측의경우도있다. 인법당의경우퇴칸의한쪽 ( 주로우측 ) 에봉안되어인법당을하나의사찰로보고마치천왕문과같이인법당을수호하는역할을하고있는설정이라는것을알수있다. 아마도이러한봉안의경향이뚜렷해진것은대형요사의유행과도연관이있을듯하다. 대형요사란이전시기부터형성되던대표적인대중공간으로다양한기능을한건물안에수용해야하는필요성이대두되면서발생한복합건축이다. 이는대중의집중에기인하는데, 특히조선후기의문중분화, 후원세력의대중화와같이많은대중이사찰에몰리면서자극된바가크다. 별가제와별방제라는독립적운영의공간적기초가바로이런대형요사인경우를자주볼수있는데, 모든대형요사가여기에해당되지는않지만결과적으로문그림 14. 송광사일제강점기배치도중불교의공간적근거가바로이러한대형요사라고볼수있는것이다. 대형요사는위계를가지며기능이분화된다양한실들이툇마루로연결되어소통하는평면으로형성되는데, 이와같은건축은이전의불교건축에서는단한번도성사시킨적이없는기능적인건축인것이다. 19세기의건축을퇴조하는건축으로이해하는데에는육중한부재를정교하게깎아화려한구조미와의장미를구현하는것을좋은건축으로보는관점에기인한다. 하지만대형요사는좋은부재를쓰지는못하지만구하기쉬운목재로당시의생활을담을수있는실들을유기적으로구성하여집단을이루는인간의삶에조응하는평면을구성하는것으로생활의관점에서본다면조선시대불교건축의정점이라고볼수있다

122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이처럼문중불교의또다른변화중하나가바로산내암자의발달이다. 이전시기암자란수행처라는개념이강조되는작은사찰이었다면조선후기부터는산내암자가수행처이외에도이를근거로문중이결속하는근거지가되었던사례를발견할수있다. 현재도대형사찰에서는산내암자를문중마다나누어운영하고있는전통이유지되고있는것을볼수있는데, 큰사찰일수록주변의여러곳에산내암자를두어어느곳은수행처로, 어느곳은유력한師僧이주석하며문중활동의근거지로사용하고있는것을알수있다. 결과적으로이러한변화는대중의의지가사찰운영에반영된다는것을의미하는것으로신도들을사찰계로조직하여보사활동에참여시키려는선의의경쟁을통한문중간의발전을유도했을것으로추정해볼수있다. 토지의등기제도가정비된현재까지도사찰계의이름으로토지소유자가등재되어있는경우를아직도심심찮게확인할수있는것으로봐서는보사활동을하되그소유는사찰이아니라계에서가지고있었다는것을알수있어당시의사찰과계원간의관계를추정할수있기때문이다. 이시기불교건축은늘어난대중과쇠퇴하는국운의사이에서개개인의필요에일대일로대응하는신앙의추구하였다. 이는기층대중의집결이불러온결과로주불전의대형화나화려함보다는대중의소통이나생활의편리를추구하는방향으로건축은발전하였다. 장엄은최소한의형식적표현으로치우쳐세련되지는못하고지루한느낌이들기는하지만, 해학적이거나민중적인표현으로친근함은풍부하다고할수있다. 사찰이수용한다양한신앙은서민의일상에해당하는신앙으로사찰에는산신, 독성, 칠성은물론화장실, 부엌, 우물까지도기도해야할신이깃듯곳이되었다. 이는사찰이완벽하게서민의삶과일치하는공간으로변하였으며이러한낮은곳으로의변화가혼란과고통으로극심한조선말기의사회상속에서도불교만큼은쉽게흔들리지않는위상을갖게된것으로봐야할것이다. 그러나이렇게수행보다는신앙중심으로사찰이재편되면서기복신앙의중심이라는시각도가지게되는데, 이러한현실을극복할여유를갖지못하고외세의침탈에국가도불교도쉽게무너진것이아쉽기만할뿐이다. 그림 15. 조왕탱

123 고려시대사찰건축지 - 충주崇善寺址를중심으로 - 김인한 충청대학교박물관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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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고려시대사찰건축지 : 충주崇善寺址를중심으로 고려시대사찰건축지 - 충주崇善寺址를중심으로 - Ⅰ. 머리말 숭선사지는충청북도충주시신니면숭선마을북서쪽계곡에있는산지가람터이다. 절터에는당간지주를제외한석조유물이없고기와편이나도자기편만수습되는그저평범한유적이었으나 崇善 銘명문기와가출토되면서세간의주목을받게되었다. 崇善寺는 高麗史 와 高麗史節要 의光宗 5 年條에母后의명복을빌기위하여창건했다는짤막한기록만이전하고있다가, 충주시신니면숭선마을에위치한절터에서 崇善 銘명문기와가출토되면서두기록에서전하는숭선사가바로이곳임이밝혀지게되었다. 이를토대로예성동호회에서 1995년숭선사지에대한지표조사를진행하였고, 2000년부터 2013 년까지는충청대학교박물관에의해모두 6차례의발굴조사를진행하였다. 조사결과유적의명칭과창건년대가정확하고, 왕실사원으로서고려시대최고수준의유구와유물이확인되어유적의학술적가치를보전하기위해사적제445호로지정되었다. 숭선사는 954년에창건된고려초기의왕실사원으로, 토목, 건축, 공예, 미술등당대최고의문화적역량이발현된사원임에틀림없다. 비록건물의지상구조물은남아있지않지만토목시설과건축물의기초를조성하는기법을연구하는데에더없이중요한유적이라고할수있다. 숭선사지발굴조사를통해밝혀진사찰조성의토목시설과건축물기초시설을비롯하여출토유물에대하여간략히소개하고자한다. Ⅱ. 입지 숭선사지는행정구역상충청북도충주시신니면문숭리 번지일원에위치한다. 지리적으로는충주시내에서 3번국도를따라음성군생극면, 경기도이천시장호원읍방면으로약 22km정도거리의숭선마을북서쪽계곡에자리하고있다. 숭선사지에이르는이길은예부터충주와음성, 이천을거쳐서울로통하는교통로역할을하였던곳으로숭선사지가지정학적요충지에창건되었음을알수있다. 숭선사는수리산의남쪽사면에여러층단형태로조성된산지가람터이다. 사역의가장상단인북단부지역에중심사역이조성되어있다. 사역의서쪽계곡은가람의서쪽을감싸며사역입구의당간지주까지흐르고, 동쪽계곡은숭선사지의북쪽계곡에서시작하여사역을남-북방향으로관

126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통하다가중단부에서서쪽계곡과합류된다. 숭선사지북쪽의주봉을중심으로양쪽에작은봉우리들이감싸고있고, 남쪽에는案山이자리잡고있다. 충주숭선사지전경 충주숭선사지 4 차발굴조사 (2004 년 ) 후전경 ( 항공촬영 )

127 고려시대사찰건축지 : 충주崇善寺址를중심으로 충주숭선사지유구현황모식도 (2013 년기준 )

128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Ⅲ. 연혁 숭선사는고려광종 5년 (954) 에창건되어크게두차례의중창불사와여러차례의소규모중수불 사가있었던것으로추정된다. 1차중창기는고려명종 12년 (1182) 이고, 2차중창기는 16세기중엽 이다. 1) 창건년대를가늠하는유물은 崇善寺三寶 명암키와이다. 高麗史 권 2 光宗 5년 (954) 條 春 創崇善寺追福先妣 라는기록과일치하는명문기와가다수출토되어광종이모후를위해창건한 국찰임이입증되었다. 1차중창기와관련한유물은 上 監役副都監大師性林大匠輰交 / 大定二十二年壬寅四月日 명암키와이다. 大定二十二年 은고려명종 12년 (1182) 인데이시기에제작된것으로추정되는 많은수의와전류와청자가출토되었다. 명종대는전국적으로많은불사가이루어진시기로, 충주 지역에서는숭선사를포함하여대원사, 의림사, 오갑사등이창건되거나중창불사가이루어진다. 2차중창기는 16세기경이다. 이시기에가장중요한점은寺名이변경되었을가능성이높다는 것이다. 중심사역의금당지앞쪽에서출토된기와편에사찰의명칭을표현한 國寺 명암키와가 출토되어이를뒷받침하고있다. 國 字앞부분이잘려나가명확한사명을알수없으나이곳에 希國寺 라는절이있었다는숭선마을의전승과명문의내용이부합된다고할수있다. 따라서 16 세기에사찰을중창하면서寺名이변경되었을가능성이매우높다고판단된다. 표 1. 숭선사관련문헌자료 명 문 내 용 시 기 출전 春創崇善寺追福先妣 954년 ( 高麗光宗 5년 ) 고려사 大定 22년壬寅 1182년 ( 高麗明宗 12년 ) 암키와 成化十五 1479년 ( 조선성종 10년 ) 암막새 嘉靖二十九申亥年 / 三月卄六日 / 化主志閑故 / 主亻 + 又空 1551년 ( 조선명종 6년 ) 수키와 嘉靖四十年 / 辛酉四月日化 1561년 ( 조선명종 16년 ) 수키와 萬曆 / 己卯 1579년 ( 조선선조 12년 ) 암막새 國寺 16세기 ( 추정 ) 암키와 Ⅳ. 건축유구현황 숭선사지는 1995년도의지표조사 2) 와 2000년부터 2013년까지 6차례에걸쳐중심사역과동쪽하단부지역에대한발굴조사 3) 가이루어졌다. 사역의북쪽상단에는사찰의중심사역이있고동쪽과 1) 15 세기경의분청사기와 1479 년제작의 成化十五 명암막새를근거로한 15 세기중창설도가능하지만출토유물의수량이상대적으로매우적은것을감안하면이시기에는소규모적인불사가이루어졌다고보는것이타당하다. 2) 예성동호회, 1995, 숭선사지지표조사보고서. 3) 충청대학박물관, 2006, 충주숭선사지 ( 시굴및 1 4 차발굴조사보고서. 충청대학박물관, 2011, 충주숭선사지 5 차발굴조사보고서

129 고려시대사찰건축지 : 충주崇善寺址를중심으로 남쪽에도배수로와축대, 건물지등이조성되어있다. 중심사역에는금당, 영당, 탑, 남문, 회랑, 답도, 우물등을조성하였으나, 상층유구는대부분훼손되고지금은기단부나적심시설만이남아있다. 1. 건물지 1) 금당지금당은사찰의본존불을봉안한건물로가장중요하고격이높은건물이다. 대체적으로사찰의북단에위치하게된다. 숭선사지금당지는정면 3칸, 측면 2칸의규모로중앙부에만초석과적심이밀집되어있을뿐남단과북단에는유구가거의남아있지않다. 토층조사결과금당은시기와규모를달리하여최소 2차례이상건물의개축이이루어진것으로확인되었다. 창건기금당지의기단은동-서 15.29m, 남-북 14m이다. 기단은지대석-면석-갑석으로이루어진가구기단으로, 2단의지대석을놓은후상면에면석과탱주석으로벽면을조성하였다. 고려시대후기 (13세기) 에조성된예산수덕사대웅전과부석사무량수전기단과비교하더라도석재가공기법과방식이품격있고, 정제된형식임을알수있다. 정면의주간거리는중앙어칸약 5m, 양쪽협칸 2.7m이다. 측면은어칸 3.5m, 협칸 2.5m이다. 충주숭선사지금당지 발굴조사후 ( 좌 중 ), 복원후 ( 우 ) 초석기단지대석기단갑석 영주부석사무량수전전경 ( 좌 ), 기단 ( 우 ) 예산수덕사대웅전

130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2) 추정영당지금당북편에는일반적으로강당이자리하는것이통례이지만숭선사는신명순성왕후의명복을기원하는사찰이므로영당이건립된것으로추정된다. 금당지의북쪽에조성된건물지로 3차례이상개축과수축이이루어졌다. 창건기영당지는전면의축대상면에서북쪽으로약 4.5m 지점에동-서 12.7m, 남-북 6m의기단을마련한후조성하였다. 이시기와관련된유구는현재적심 4기와장대석으로조성한고막석이남아있다. 주간거리는동-서 4.12m, 남-북 2m이며, 정면 3칸, 측면 1칸규모이다. 창건기이후의건물지는유구가많이훼손되고일부분만잔존해있어전체적인규모를파악하기어렵다. 충주숭선사지추정영당지 3) 회랑지회랑 ( 回廊 ) 은궁궐이나종교건축물에서중요건물을둘러싸고있는지붕이달린복도를일컫는다. 위상이나격이높은곳에조성되는건축물이라할수있다. 이러한배치양식을가장잘볼수있는곳은삼국시대평지가람유적이다. 이들사찰터에서는중문과금당, 강당을일직선상으로배치하고외곽을회랑으로둘러싸는형태를확인할수가있다. 숭선사는산지가람임에도불구하고중심사역배치구조가중요건물을남-북일직선상으로놓고회랑으로두르는삼국시대평지가람배치형식을따르고있어매우주목된다. 숭선사지에서는중심사역과동쪽하단의 Ⅱ지구에서확인되었다. 중심사역의회랑지는단회랑으로정교하게다듬은장대석기단을마련하였다. 금당지의동 서쪽과중문지의좌 우, 영당지의좌 우에서확인되었다. 동 서회랑지는금당지의양쪽에남-북방향으로조성하였고북쪽끝은창건기영당지의전면축대와만난다. 특히, 서회랑지는면석과갑석을갖춘기단과방형의전이남아있어주목되는유구이다. 규모는동-서 m, 남-북 39m이다. 서회랑지의주간거리는정면 4.5m, 측면 3.19m 이다. 남회랑지는중문지의동 서편에조성하였다. 회랑지의본래규모는동-서 15m, 남-북 6m이다. 북회랑지는영당지동 서편에조성하였고동단과서단에서 ㄱ 자로꺾어동 서회랑과연결하였다. 방형초석 3매와장대석형태의고막석이일부남아있다. 다른회랑에비해서폭이 1/2 정도로좁다. Ⅱ지구는중심사역의하단대지로써동단축대상면을따라남-북방향동회랑과남단축대상면의동-서방향남회랑이확인되었다. 동회랑은대지의단애부를따라조성하였기때문에동쪽은

131 고려시대사찰건축지 : 충주崇善寺址를중심으로 남-북방향의배수로가있다. 정면 14칸, 측면 1칸이확인되었다. 주간거리는동-서 3.3m, 남-북 4.4m이고, 적심의크기는 120~160 cm로원형이다. 남회랑지는동-서방향으로정면 10칸, 측면 1 칸이확인되었으며, 주간거리는동-서 2.8m, 남-북 3m이고, 적심크기는 cm로원형이다. 이들회랑은 Ⅱ지구의동쪽에건립된건물들의출입을위한시설로축조된것으로여겨진다. 충주숭선사지중심사역서회랑지 충주숭선사지중심사역서회랑지기단 충주숭선사지중심사역동회랑지 충주숭선사지 Ⅱ 지구남회랑지 4) 중문지 중문은숭선사의중심사역으로진출입하는시설이다. 문지의남쪽은중심사역의남단축대상면에장대석을놓아기단을조성하였으며, 북쪽기단은배수로의남쪽면으로이용하였다. 기단의폭은동-서 12m, 남-북 8m 규모로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주간거리는동-서 3.2m, 남-북 3.7m이다. 5) 기타건물지중심사역동쪽하단의 Ⅱ지구와 Ⅳ지구에서도많은수의건물지가확인되었다. 건물지는경작등인위적요인으로인하여많은부분이훼손되었고중복된사례가많다. 토층조사결과와유구의현황등을볼때최소한 2차례이상중창된것으로추정된다. 주변지역에서확인된건물지의현황을정리하면다음과같다

132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표 2. Ⅱ ㆍ Ⅳ 지구건물지현황 건물지 규모 주향 잔존유구 비고 1번건물지 동-서 : 18.6m, 정면 5칸, 측면 3칸 남향 기단석열, 적심 2번건물지 잔존길이 : 6.7m 남향 3번건물지 ( 회랑지 ) 남-북 : 61.6m 동향 적심 4번건물지 적심 1기 5번건물지 정면 5칸 서향 적심 6번건물지 남-북 : 11m, 동-서 : 5.6m 석열 7 번건물지 1 차 : 정면 2 칸, 측면 1 칸 2 차 : 정면 3 칸, 측면 2 칸 서향 8 번건물지정면 3 칸, 측면 2 칸남향 초석, 적심 초석, 적심온돌시설 9번건물지 동-서 : 5.3m, 남-북 : 5.6m 서향 적심, 초석 10번건물지 정면 3칸 ( 추정 ), 측면 2칸 남향 적심, 초석 11번건물지 정면 1칸, 측면 1칸 서향 초석 12번건물지 정면 3칸, 측면 2칸 동향 초석 2. 탑지중문과금당사이에자리하고있다. 금당지남쪽 10m 지점에조성되어있다. 동-서 5m, 남-북 5m의규모로, 중앙에는대형의판석형석재를깔고그주변은크고작은자연석을깔아기저부를조성하였다. 3차발굴조사시석탑부재로추정되는석재가발견되어이곳에석탑이조성되었을것으로추정된다. 3. 배수로사람이기거하는집이나여러건물을조성하는공간의구성에있어세심한설계가요구되는것중하나가배수관계이며, 산의계곡부에위치하는산지가람은더욱그러하다. 넓은산사면과계곡에서흘러드는우수를제때처리하지못하면건축물의안전을담보할수없기때문이다. 산지가람인숭선사는다양한형태의배수시설을곳곳에조성하였는데조성기법이나규모면에서고려시대초기최고의토목기술력을엿볼수있는중요한자료라할수있다. 배수시설은상단대지에서하단대지로연결되는중심사역의축대와금당앞중정에는작은배수로가조성되었고, 사역동쪽과서쪽은계곡수를처리하기위한대규모배수시설이조성되었다. 특히, 중심사역동쪽배수시설은계곡을막은독특한조성방법과 70m가넘는규모는매우주목되는

133 고려시대사찰건축지 : 충주崇善寺址를중심으로 점이다. 향후배수로의남단지역까지발굴조사가마무리된다면그규모는더클것으로여겨진다. 숭선사지배수로는형태에따라뚜껑돌없이양쪽측벽으로만이루어진개거식 ( 開渠式 ), 양쪽측벽에뚜껑돌을덮고수로내부가눈에보이지않도록지표나지하에조성하는암거식 ( 暗渠式 ), 땅속에많은돌을여러층으로채워넣어돌무지전체가배수로역할을하는맹거식 ( 盲渠式 ) 으로구분된다. 1) 중심사역중앙배수로동 서 남회랑의안쪽기단을측벽으로이용한개거식배수로로 凹 자형태이며폭은 46cm이다. 2단으로축조하였는데 1단과 2단모두전면을장방형으로치석한장대석을사용하였다. 2단석재는 1단석재보다들여쌓기를하였으며, 1단석재상면안쪽에 2단석재가결구되는선을만들었다. 동남쪽모서리의집수구로모인우수는중심사역하단의 Ⅱ지구남쪽축대의출수구로배출된다. 집수구에서부터출수구까지는암거로연결되었다. 높이가약 4m에이르는중심사역남쪽축대의뒤채움을하면서암거공간을함께시설하였고, 축대앞마당에서는지하로매설하였다. 충주숭선사지중심사역중앙배수로전경 ( 좌 : 서쪽에서 ), 출수구전경 ( 우 ) 충주숭선사지중심사역중앙배수로전경 ( 좌 ), 남쪽측벽 ( 중 ), 집수구 ( 우 ) 2) 중심사역서쪽배수로 영당지서쪽에서부터 Ⅱ 지구남쪽축대서쪽까지남 - 북방향으로조성된개거식배수로이다. 서

134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쪽측벽은사역의서쪽담장이고, 동쪽측벽은여러건물의서쪽기단으로이루어졌다. 바닥에는불규칙한형태의석재를여러층으로깔았다. 북단과남단에비해중간부분의폭이넓은형태이며, 길이는 66m가확인되었다. 충주숭선사지중심사역서쪽배수로북단부 ( 좌 ), 남단부 ( 右上 ), 배수로동벽 ( 右下 ) 3) 중심사역동쪽배수로 Ⅱ지구동쪽축대와 Ⅳ지구서쪽축대사이에축조된배수로이다. 여러시기에걸쳐규모와형태를달리하며조성되었다. 개거식배수로와암거식배수로, 맹거식배수로의특징을모두볼수있는배수시설이다. 암거형배수로는기반암층에서부터수많은석재를최대폭 30m, 최대높이 6m까지쌓아올려 Ⅳ지구의축대와건물지기초를조성하면서그내부에길이 29m, 폭 160cm, 높이 55cm의배수로를시설한것이다. 내부공간은방형으로마치거대한성벽에시설된배수시설과같은형태이다. 입수구와출수구가 2개씩마련되어있다. 암거형배수로가폐기되고입수구북쪽을성토하고, 기존의배수로상면과성토한북쪽부분에남-북방향의축대를축조하면서배수로내부면이지상으로노출되는개거식배수로를조성하였다. 현재까지조사된배수로의길이는 70m가넘고, 폭은 1.2~11m 이다. 배수로내에는 Ⅱ지구와 Ⅳ지구의통행을위한시설인교각이남아있다. 이들배수시설과 Ⅳ지구건물지의기초를이루는하부는최대폭 30m, 최대높이 6m까지돌을채운토목시설로돌사이사이로물이빠져나가도록한맹거식배수시설이라고할수있다

135 고려시대사찰건축지 : 충주崇善寺址를중심으로 충주숭선사지중심사역동쪽배수로전경앞쪽에서 - 좌, 항공촬영 - 우 충주숭선사지중심사역동쪽배수로 입수구 ( 좌 ), 출수구 ( 우 ) 충주숭선사지영당지축대암거 전경 ( 좌 ), 입수구 ( 중 ), 해체모습 ( 우 ) 4. 답도답도는금당지의남쪽기단에서남쪽으로약 1m 지점에 ㅜ 자형태로남아있다. 편평한석재를이용해 1.45m 폭으로조성하였다. 잔존길이는남-북 6.6m, 동-서 8.5m이다. 금당지의중심에서서쪽으로약간치우쳐시설되었는데, 이는탑지가금당지의중앙에위치했던데기인한것으로추정된다. 잔존유구의상황을보아본래는중문지로부터금당에이르러동 서쪽회랑과연결되어 ㅠ 자형태를이루었을것으로추정된다. 숭선사창건기에조성되었다

136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5. 축대축대는경사진지형에평탄대지를조성하고그대지에건물등을건립하기위한기축시설로산지가람에서는가장필수적인토목구조이다. 수리산의골짜기사면에위치한숭선사도많은축대를축조해사역을조성하였다. 중심사역에 5개소, 하단부의 Ⅱ지구에 4개소, 동쪽배수로맞은편의 Ⅳ 지구에서 9개소가확인되었다. 사용된석재와축석방법에따라서는장대석바른층쌓기와자연석허튼층쌓기로구분된다. 장대석바른층쌓기방식으로축조된곳은중심사역의남쪽축대와영당지축대, Ⅱ지구의북쪽축대이다. 숭선사에서가장중요한전각이건립되는곳의정면을정교하게치석된석재로축조하여왕실사원으로서의격을갖추고자하였다. 남쪽축대는숭선사중심사역의기초이면서진입하는정면이되기때문에가장규모가웅장하고정교하게축조되었다. 위층으로올라가면서안쪽으로들여쌓았다. 높이 4m, 길이 45.47m 의규모이지만, 현재는지면으로부터 5 7단까지남아있다. 충주숭선사지중심사역남쪽축대전경 충주숭선사지 Ⅱ 지구남쪽축대 ( 좌 ), 중심사역영당지축대 ( 우 ) 충주숭선사지기타축대

137 고려시대사찰건축지 : 충주崇善寺址를중심으로 숭선사와비슷한시기에조성된논산개태사의정면축대또한정교하게다듬은장대석을이용해들여쌓기를하였는데이와같은기법은고려의정궁인만월대축대조성기법과동일한것이다. 이보다 3세기가지난고려후기에조성된부석사의축대는자연석을이용한면맞추기방식으로축조하여시대적차이를보이고있다. 논산개태사축대 영주부석사축대와암거배수로출수구 Ⅴ. 출토유물 숭선사는왕실사원이었던만큼고려초기최고의기술력이집약된유물들이상당량출토되었다. 와전류의출토량이가장많고도자기류, 토기류, 토제류, 석제류, 청동제류, 철제류등도출토되었다. 이중가장주목할만한유물은寺名이새겨진 崇善寺三寶 명암키와, 국내에서최초로발견된금동연봉장식와정, 초대형의금동풍탁, 내용물이담긴채출토된분청사기장군등이다. 1. 와전류숭선사에서는명문기와, 막새, 평기와, 서까래기와, 치미, 귀면와, 착고기와, 이형기와, 전등이출토되었다. 가장주목할만한기와류는숭선사의寺名과역사적변화를규명하는결정적단서인명문기와이다. 사명을알려주는명문으로는 崇善寺三寶, 國寺 銘이있고역사적변화시기를알려주는명문으로는 大定二十二年壬寅, 成化十五, 嘉靖二十九申亥年, 嘉靖四十年, 萬曆 銘기와등이있다. 창건기에쓰인연화문수막새와연화당초문암막새, 귀면와등은같은시기고려왕실의진전사원인안성봉업사에서출토된것들과동일한형태인점을볼때사찰조영당시지방장인이아닌국가에서파견된국공들에의해제작되었음을알수있다. 2. 도자기류 도자기류는청자와분청사기, 백자가고르게출토되었으며그중백자가가장많다. 청자는접시

138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가가장많고시기는 10세기부터 14세기경까지다양하게확인된다. 그중중국에서제작된청자와백자도일부포함되어있어주목된다. 분청사기중백자완을뚜껑으로씌운분청사기장군은내부의내용물이그대로보전된채로출토되어 4) 많은관심을받았다. 3. 금속제류금동보살상과금동풍탁, 금동연봉장식와정, 금동장식판, 낫, 호미, 칼, 보습, 자귀, 끌, 철정등이출토되었다. 특히금동연봉장식와정은국내에서최초로확인된사례이다. 철제와정부분과금동연봉형장식부분으로구별되며금동연봉의표면은금으로도금하였다. 이를통해숭선사는금당의지붕을금동연봉장식와정으로아름답게장식함으로써국찰로서의품격을표현하였다. 또한 2013년조사에서출토된금동풍탁은그동안보고된것중가장큰규모로서높이가 31.9cm에달하며, 표면에금도금을입혀장식성을높였다. 금동연봉장식와정과금동풍탁은왕실사찰숭선사금당의장엄함과화려함을대변하는대표적인유물이라고할수있다. 충주숭선사지출토명문기와 ( 崇善寺三寶 - 좌, 大定二十二年壬寅 - 우 ) 충주숭선사지출토유물 ( 서까래막새 - 좌, 귀면와 - 중, 막새 - 우 ) 4) 장군내의액체분석결과알데히드계와케톤계의화합물이검출되었고, 소량의알코올도검출되었다. 그리고고체성분의분석결과벌꿀과비슷한조직을보이고있다. 이러한분석결과를바탕으로분청사기장군내의물질을추측해보면벌꿀이었을가능성이높다

139 고려시대사찰건축지 : 충주崇善寺址를중심으로 4. 옥석제류 불상의이마를장식했던수정으로만든백호 2점과고리형옥이출토되었다. 또한소형석조불상의머리부분과머리가잘린석조불상, 석탑부재, 연화대석등이출토되었다. 충주숭선사지출토금동보살상 충주숭선사지출토금동풍탁 충주숭선사지출토유물 ( 금동연봉장식와정 - 좌, 백자연봉장식와정 - 중, 분청사기장군 - 우 ) 충주숭선사지출토유물 ( 청자류 - 좌, 분청사기병 - 중, 백자류 - 우 ) Ⅵ. 숭선사지의특징 첫째, 高麗史 권 2 光宗 5년 (954년 ) 조에기록된 春創崇善寺追福先妣 라는내용이유적에서출토된 崇善寺三寶 명암키와를통해입증되었다. 또한 숭선 이라는마을이름과 희국사 가있었다는전설역시 崇善寺三寶 명암키와와 國寺 명암키와를통해증명됨으로써지명이나구비전승이갖는역사성의중요성을확인하게되었다

140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둘째, 숭선사는고려시대전기간을통해왕권이가장강했던광종이자신의어머니를위한원찰로서창건한사찰인만큼공역의규모나질적인면에있어당대최고기술력을총동원한국책사업이므로고려시대초기의정치ㆍ사회ㆍ문화적인시대상을연구할수있는매우중요한유적이라고할수있다. 셋째, 숭선사는산지가람이면서도중심사역은중문-탑-금당-영당이남북방향으로놓이고주위를회랑으로두르는삼국시대의전통을계승한형태로조성하였다. 특히회랑의바닥에전을깔았으며, 많은부분이잔존하고있어학술적의미가크다고하겠다. 넷째, 건물조영에있어가장큰특징은정교하게다듬은치석재의사용과가구기단이다. 건물의기단과축대는물론중심사역내부의배수로까지도정교하게치석한장방형의석재를사용하였고, 금당이나회랑과같은건물의기단을가구기단으로조성하여사찰의격을높였다. 현재금당지와서쪽회랑지에지대석-면석-갑석으로이루어진가구기단이남아있다. 면석에는우주와탱주를새겼다. 다섯째, 우수로부터사찰을보호하기위한과학적이고도큰규모의배수시설을조성하였다. 현재길이 70m 이상에폭 1.2~11m 가조사된중심사역동쪽배수시설은규모는물론조성기법또한주목되고있다. 동쪽계곡의기반암층면을따라최대폭 30m, 최대높이 6m까지돌을채운후상면에석축을쌓아건물지를조성하고, 석축사이를배수로로활용하였다. 우수가배수로상면은물론내부에채워진수많은석재사이로스며들어기반암층면을따라물이배출되도록한구조이다. 동쪽계곡에조성된배수로의토목시설전체가하나의배수시설이라고할수있다. 여섯째, 배수시설중가장주목되는시설은중층으로쌓은석축사이에조성한암거형배수로이다. 길이 29m, 폭 1.6m, 높이 55~64cm에달하는암거형배수로는내부가방형구조이고입수구와출수구모두 2개씩이다. 마치거대한성벽에시설된배수시설과같은구조이다. 일곱째, 국내에서최초로출토된금동연봉장식와정을비롯해왕실사원에걸맞은최고수준의유물이다량출토되었다. 그동안학계에서는청자연봉장식와정과백자연봉장식와정만이알려져왔으나도금한금동연봉장식와정이최초로발견됨으로써건축사연구에매우귀중한자료가되고있다. 이밖에도금동불상과금동풍탁, 중국월주요산청자와최고급의고려청자, 막새를비롯한각종와전류등은왕실사원숭선사의격을가늠하는자료이다

141 신라하대와고려시대의僧塔과塔碑 박상준 ( 재 ) 불교문화재연구소정책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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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신라하대와고려시대의僧塔과塔碑 신라하대와고려시대의僧塔과塔碑 Ⅰ. 승탑과탑비의출현과건립과정 1. 승탑과탑비의출현 僧塔과塔碑는고승이입적한후건립한묘탑과비석을말한다. 승탑은승려의무덤인데佛塔과구분하기위해승탑이라지칭한다. 塔碑는고승의공덕을기리기위해僧塔과함께건립한비석을말한다. 사람이죽은뒤장사를지내고그곁에비를세워망자의공덕을기리는것은고대로부터이어져온매우오래된장례관습이다. 佛敎에서는여러가지葬法이있었지만어느시기에이르러입적한고승의墓塔을조성하고그곁에碑石를세우기시작했다. 그러나탑과비석이처음부터동시에출현한것은아니며, 각각별도의장례용으로조성되다가어떤계기에의해세트화된조형물로자리잡게된다. 고승의묘탑이나비석이존재하였다는것은여러문헌을통해확인된다. 삼국유사 에는 600년을전후하여활동한것으로보이는백제승려혜현을석탑에안장했다는기록이있고진평왕대 (579~632) 에활동한것으로보이는혜숙의浮圖가있다는기록이있으며, 삼국유사 와 해동고승전 에는원광법사 (?~641) 의부도가삼기산에있다는기록등이있지만, 탑비의존재에대해서는알수없다. 한편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는아도화상의비석이있었다고하며, 해동고승전 에는안홍의비석이존재했다는기록이있으나승탑의존재에대한기록은없다. 그리고의상대사 (625~702) 의경우는 속고승전 에탑이있다는기록이있고 삼국유사 에대사의비석으로추정할수있는기록이있지만, 승탑과함께탑비를건립하였다고단정짓기에는무리가따른다. 즉이들기록은모두승탑의존재유무또는비석의존재유무정도만을알수있는단편적인기록일뿐이다. 우리나라에서승려의묘탑과함께탑비를조성한최초의예는斷俗寺神行禪師이다. 신행선사 (704~779) 는신라중대에활동한고승으로입적 34년후인 813년비석을건립하였다. 현재비석은전하지않지만다행히탁본이남아있어 9세기초반에승탑과탑비를건립한사실을알려준다. 碑文에는신행선사의탑과비석을건립된내용을다음과같이적고있다. 76 세를사시고대력 14 년 (779) 10 월 21 일에남악단속사에서돌아가셨다. 피눈물을흘리며시신을태우고마음을다하여뼈를묻은지거의 36 년이되었다. 지금우리三輪禪師는전생에뭇묘한인연을심어서본래삼신을가지고있었으며, 마음은자성이없고깨달음은다른사람을말미암지않으므로함께도업을닦아서로스승과제자가되었다. 언젠가참선하는여가에중생을깊이생각하여 형체가없는이치는像을세우지않고는볼수가없고, 말을떠난법은글로드러내지않으면전할수없다. 슬프다. 자애로운아버지가옥을품고돌아오고가난한아들이보배를얻은지가얼마나되었던고 라말하였다. 이로써이름난장인을불러서영정을그리고부도를만들어사리를모시고계향을피우며선정의물을뿌려서간절하고슬픈마음을선성에게드려장차후대에거울이되고자하였다

144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비문의존재와내용을통해신행선사입적후제자인삼륜선사에의해선사의영정, 부도와함께탑비를건립했다는사실을알수있지만, 당시조성한승탑과탑비가어떠한형태였는지는알수없다. 2. 건립과정승탑과탑비는일정한과정을거쳐조성된다. 먼저高僧이입적하면장례를치른연후에승탑을조영하고, 제자들이行狀을엮어國王에게탑비를세울것을청한다. 그러면국왕은諡號와塔號를내리고碑文의내용을찬할사람과글을쓸사람을정하며, 찬과서가완성되면글을새기고탑비를건립한다. 승려가입적을하면장례를치르는데현재불교에서가장보편적으로알려진火葬이중국이나우리나라에서처음부터일반적인장법은아니었다. 高僧傳 에는입적후西方法또는外國法에의거하여火葬을했다는기록이등장하고있다. 그리고道宣 (596~667) 이 645년찬술한 續高僧傳 에는당시中國佛敎의葬法을알수있는구체적인기록이있다. 그런데西域의본래葬儀는그흐름에네가지유형이있다. 火葬을할때에는찐땔감으로불태우며, 水葬을할때에는깊은웅덩이속에가라앉히고, 土葬을할때에는언덕옆에묻고, 林葬을할때에는들한복판에버리는것이다. 法王과轉輪王은다같이화장에의하여장례를치르어세상에서이것을관습으로존중하게되었고, 나머지다른장례는행하는일이드물었다. 중국에전해진것은오직林葬과土葬만이알려졌고, 水葬과火葬의두가지는세간에그발자취를따른사람이거의없었다. 이것은서역의장례법 4가지를설명한것으로말미에중국에는임장즉풍장과토장즉매장만이알려졌고, 수장과화장은보편화되지않았다는것을말하고있다. 우리나라의경우불교에서화장이보편화되는것은고려시대중반부터이다. 신라하대의경우葬法을살펴보면, 기록이있는 9명의승려중확실히화장을한경우는단속사신행선사가유일하다. 다만기록들중장사를지냈다고만간단히언급한경우정확히어떠한장법을통해건탑을하였는지알수없다. 대부분은 1차로매장하고이후에유골을수습하여승탑을조성한것으로보여진다. 즉 2차葬으로서승탑을건립한것이다. 따라서 1차장이끝난후에유골을수습하여승탑을건립하거나매장한경우는유골의수습없이도승탑을건립한것으로보인다. 승탑의건립이진행되는동안제자들은탑비건립을위해行狀을준비한다. 그리고승탑의준공에즈음하여행장을엮어국왕에게올리면왕은승탑준공에맞추어이를기념하는의미로시호와탑호를내리고, 탑비건립을위해비문을지을사람과글을쓸사람을정한다. 그런데비문의찬자와서자가정해졌다고바로비석이건립되는것은아니었다. 비문을찬술하고글을쓰는데걸리는시간외에재원과재료의확보하는것에도많은시간이소요된것으로보인다. 다음은 < 鳳巖寺智證大師碑 >(924년 ) 건립시에석재확보와관련한내용을 965년같은절에건립된 정진대사비문 에서기록한내용이다. 지금寺內에는옛禪師의法碣이있는데, 新羅末前進士였던崔致遠이비문을지은것이다. 그돌또한南海로부터가져온것인데지금까지도그役事에대한원성이전해오고있다.( 鳳巖寺靜眞大師碑文 )

145 신라하대와고려시대의僧塔과塔碑 이기록은 < 정진대사 > 의탑비건립을위해많은비용을들여남해에서석판을구하려는데마침인근에서양질의석재를확보하였다는내용을적으며, 예전에 < 지증대사비 > 의건립시석재확보에많은노동력과비용이소요됐다는것을적은것이다. 이로보아당시승탑과탑비의건립은대단위불사였으며기간도상당히소요되었다. Ⅱ. 조성배경과성격 1. 선종과의관련성 승탑과탑비의건립이본격화되는시기는신라하대인데이시기의승탑과탑비는모두선종승려의것이며, 이들대부분은시호와탑호를받은경우이다. 그렇다면선종승려들이시호와탑호를받고탑비를건립하는것이언제부터였으며, 어떠한이유때문이었을까? 중국의경우隋代와唐代를지나면서승탑과탑비의건립이점차늘어난다. 그리고시간이지나면서신라하대의예처럼시호와탑호를받고승탑과탑비를건립하게되는데이경우선종승려들의예가압도적으로많다. 中國禪宗의제1조인보리달마는 536년입적하였는데唐의代宗代에시호와탑호를받았으며, 2조혜가 ( 德宗 : ), 3조승찬 ( 玄宗 : ), 4조도신 ( 代宗大曆연간 : ), 5조홍인 ( 代宗 : ) 등도 6세기말에서 7세기후반에입적하였지만대부분 8세기에이르러시호와탑호를받았다. 6조혜능역시입적후약 100년이지난 816년에시호와탑호를받았다. 이것은신라하대탑비에서볼수있는시호와탑호를받고탑비를건립하는절차가중국의경우 8세기중반이후부터본격화되었고, 이시기부터선승들이조망받기시작했다는것을말하는것이다. 이는선종의유행이라는일련의과정과궤를같이하고있는것이다. 우리나라의경우는 9세기에들어승탑과탑비를동시에조성한사례가확인되며 9세기중반부터그수가급격하게증가한다. 그리고시호와탑호를받고건립된탑비의주인공이모두禪僧이라는점은중국 8세기의상황과유사하다. 이와관련하여신라하대 <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문 > 에는다음과같은내용이있다. 中和 3 년 (883) 봄 3 월 15 일에문인義車등이행장을엮어멀리王京에나아가碑銘을세워불도를빛나게할것을청했다. 임금이眞宗의이치를흠모하고스승을높이는마음을갸륵히여겼다. 이에담당관사에명하여시호를정하여普照, 탑호를彰聖, 절이름을寶林이라하니, 이는그선종을포상하는禮에서이다. 다음날에또미천한신에게비문을지어뒷날의사람들에게알리도록명하니, 신이삼가두려이왕명을받들어사실대로글을짓는다. 위기록은선사가입적한후승탑과탑비를건립하는과정을알수있게해주는것으로대부분이러한과정을거쳤음을알수있으며, 또한승탑과탑비의건립이선종과밀접한관계를명확하게보여준다. 2. 法脈의중시와祖師의지위 고승의입적후묘탑을세우거나비석을세우던것이선종의성행과함께승탑과탑비를동시에

146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조성하는방식으로정착된다. 그렇다면왜선종에서유독고승의탑을세우고이와함께비를세우는전통이세워지게되었을까? 현재전하는신라하대 ~ 고려시대의탑비들은직접적인예경대상인승탑못지않게상당한조형적가치를지니고있다, 이것은탑비에선사의행적을자세히기록함으로써스승에대한존경을표함과동시에자신들의산문을과시하거나정통성을내세우는역할로삼았기때문이다. 선종의가장두드러진특징중하나는師資相承으로대표되는법맥의전수이다. 禪宗은법을전해주고이어받은스승과제자, 또다음세대의스승과제자의활동에의해서성립되었으며, 禪僧들은자신이스승으로부터계승한법을다음세대의제자들에게전해주는것을자신의매우중요한책무로생각하였다. 신라하대선사들의비문에도중국이나국내에서스승에게법계를전해받은내용을주요하게기록하고있는데다음은몇가지예이다. 元和 9 년 (814) 가을 8 월에부처님의가르침을찾아서쪽으로멀리갔다. 발길달리가는곳없이龔公山地藏大師에게나아갔으니, 즉제 6 조 ( 慧能 ) 는懷讓에게법을전해주었고회양은道一에게전하였으며, 도일은지장대사에게전하였다. 대사 ( 지장 ) 가그 ( 寂忍禪師 ) 의뜻이이미굳고품성이잘깨달을만함을알았으며, 한번보고도예부터알고있던듯하여비밀리心印을전하였다.( 大安寺寂忍禪師碑文 ) 達摩는당나라의제 1 조이며, 우리신라에서는道義大師가제 1 조, 염거선사가제 2 조, 우리선사 ( 보조선사체징 ) 가제 3 조이다.( 寶林寺普照禪師碑文 ) 和尙 ( 澈鑒禪師道允 ) 은지난날중국에가서먼저南泉和尙을친견하고법을이어받았으니, 南泉은江西道一을계승하였고, 江西는南岳懷讓을승사하였으므로南岳은곧曹溪慧能의冢子이니, 그高邁함을가히알수있다. 그리하여大師 ( 澄曉 ) 는道允을모시면서좌우를떠나지아니하고, 東山의법을이어받게되었다.( 興寧寺澄曉大師碑文 ) 법맥의중시는승탑과탑비건립의대상인祖師의지위를단순한스승이상으로올려놓았다. 승탑은불탑과같은예배의대상이되는데신라하대에사자산문을개창한고승인징효대사 (826~900) 가자신의스승인철감선사의탑에참배하러쌍봉사로떠났다는기록이그일례이다. 당시선사들은산문에서의위치뿐만아니라사회적으로도상당한지위에있었다. 주인공을알수있는신라하대의선사들은모두국왕의시호와탑호를받았으며, 비문의내용을살펴보면다소간의과장이있겠지만왕실과의관련등당시선사들의사회적지위를가늠할수있는기록들이다수보인다. 그렇기때문에선사가입적하면국왕은조의를표하고시호와탑호를내렸으며, 당시최고의학자들에서비문의찬술과서를담당하게하였다. 그리고신라하대탑비의형식이된귀부이수형비석은일정한신분이상이어야건립이가능하였다. 隋書 禮儀, 唐六典 에는 3 品 ( 또는 5 品 ) 이상은碑를세우는데螭首龜趺로趺위로부터높이가 9척을넘지못하며, 7 品이상은碣을세우는데높이는 4척이며圭首方趺로한다. 고규정하고있다. 즉귀부이수형비석은일정한신분이상이어야건립이가능한것으로현재전하는탑비가귀부이수형식이라는것은그주인공인승려의지위가상당히높았다는것을말해준다

147 신라하대와고려시대의僧塔과塔碑 Ⅲ. 신라하대의승탑과탑비 < 단속사신행선사비문 > 을통해 9세기초에승탑과탑비를조성한사실을알수있지만실제유물로확인되는것은 9세기중반경부터이다. 승탑과탑비는이시기부터본격적으로조성되기시작하였지만축적된조영전통을바탕으로초기부터완성도높은다수의작례를남기게된다. 강원도양양의진전사터에는도의선사의것으로추정되는승탑이전하고있다. 이승탑은사각의기단위에 8각의몸돌과지붕돌그리고정상에보주를올린모습이다. 기단은석탑에서흔히볼수있는정방형의 2중기단이지만탑신과지붕은이후승탑의전형인 8각의형태를취하고있기때문에석탑양식이차용된승탑의초기형태로해석하고있다. 한편현재국립중앙박물관에소장되어있는 < 염거화상탑 > 은이전과정에서 844년경조성되었다는塔誌가발견되었다. 이승탑은불상의대좌를연상시키는기단부에서탑신, 지붕에이르는전체평면을 8각으로구성하고있다. 기단부의하대석에는사자가조각되어있고중대석에는향로등을조각한안상을마련하였으며앙련을조각한상대석위에탑신을얹고있다. 탑신의받침에는안상을마련하여팔부중을조각하고탑신에는사천왕과문비를조각하였다. 탑신석의위에는비천상이새겨진지붕을덮고있는데지붕에는서까래는물론기왓골까지표현한목조건축물의기와지붕의모습이다. < 염거화상탑 > 은우리나라승탑의주류를이루는 8각당형식의가장이른예에속한다. < 염거화상탑 > 에서시작되었다고할수있는 8각당형식은이후고려시대까지승탑의기본형식으로자리잡게된다. 신라하대인 10세기초까지매우우수한승탑들이조성되는데, 전남곡성 < 태안사적인선사탑 >, 전남화순 < 쌍봉사철감선사탑 >, 전남구례 < 연곡사동승탑 >, 경북문경 < 봉암사지증대사탑 > 등이대표적인예이다. 진전사전도의선사탑 ( 강원양양, 9 세기중반 ) 염거화상탑 ( 국립중앙박물관, 844 년경 )

148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8각당형식의승탑은唐代 < 회선사화장선사탑 >(746년 ), < 구마라즙사리탑 >(800년경 ) 등의예로보아일정부분당대승탑의영향을받은것임은분명하다. 그리고승탑이팔각당형식을채용한것에대해서는몇가지견해들이있지만, 중국에서는초기에 8각당불탑이주류를이루었고탑에봉안된사리기의형태도 8각당형식을보이고있어이와관련된것으로보인다. 특히승탑은기단부의안상조각이나지붕의귀꽃등에서공예적요소를많이담고있기때문에사리기의형태에서차용되었을가능성이높다. 전술한것처럼신라하대에는승탑과짝을이루어탑비가제작되었다. 비석은크게龜趺螭首형식과方趺圭首형식으로구분되는데, 신라하대의탑비는모두귀부이수형식이다. 즉거북모양의받침돌위에글을새긴비신을세우고비신의상부에용이새겨진덮개돌을얹은형태이다. 다만 < 實相寺證覺大師凝寥塔碑 >(9세기중반 ) 의경우이수가반원형이고귀부의머리가거북형인것이다른탑비와구별된다. < 실상사증각대사비 > 이외의이시기탑비는모두 < 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 >(890년 ) 처럼龍頭를한거북받침이고, 용을조각한이수는장방형의형태이다. 탑비는일반적으로귀부는용머리로정면을응시하고있고지대석또는거북의가슴부분에는下甲이조식되고거북의등에는귀갑문을장식한다. 귀부의중앙부에는비신을받치기위해연화문을두른별도의비좌를마련한다. 비좌에는비신이얹혀지며비신의최상부에다시이수를조각하여비신을덮는다. 이수는대부분하단을앙련으로두르고이수전체에구름문과용을조각한다. 용은대부분좌우대칭으로앞뒷면에조각하며이수의중앙에는제액이있고, 이수의상부에는화염보주를조각하는것이일반적이다. 이시기에는 10여기정도의탑비가전하는데 < 쌍봉사철감선사탑비 >, < 쌍계사진감선사탑비 >, < 성주사낭혜화상탑비 >, < 봉암사지증대사탑비 > 등이대표적인예이다. 탑비는비문의내용을담고있는비신까지온전히남아있는예가많아예술적인가치외에도역사학, 금석학, 서예사적으로매우중요한의미를지닌다. 한편이시기의승탑이나탑비는현재처럼야외에노출된형태가아니라예경을위한별도의구조물과공간을마련하여봉안했던것으로추정된다. 신라하대九山禪門의하나인桐裏山泰安寺의 < 寂忍禪師照輪淸淨塔 > 과 < 塔碑 > 는별도의공간에봉안되어있는데, < 적인선사탑 > 은정방형의기단위에정중앙이아닌약간뒤쪽에위치하고있어전면을배례를위한공간으로사용했음을알수있다. 주변에주초석이있는것으로보아원래는현재처럼노출된형태가아니라전각에봉안되었음을알수있다. 또한이절의사적기에는태안사를중창한고려시대광자대사당시에碑殿이있었음을기록하고있어적인선사의탑비역시별도의시설물에봉안되었던것으로추측된다. 이외에도현재노출된형태로있는 < 보림사보조선사탑 > 과 < 탑비 >, < 쌍봉사철감선사탑 > 과 < 탑비 > 등도기록이나주변건물지조사를통해볼때별도의시설물에봉안되었던것으로추정된다

149 신라하대와고려시대의僧塔과塔碑 실상사증각대사탑비 ( 전북남원, 9 세기중반 ) 월광사원랑선사탑비 ( 국립중앙박물관, 890 년 ) 동리산태안사적인선사탑및탑비 ( 전남곡성 ) 가지산보림사보조선사탑및탑비 ( 전남장흥 ) Ⅳ. 고려시대의승탑과탑비 고려시대에도신라하대의전통을이어계속해서승탑과탑비가조성된다. 고려초인 10세기에는신라하대와고려시대전시기를통틀어가장많은수의승탑과탑비가조성된다. 그런데 11세기부터는승탑과탑비건립이감소한다. 이것은승탑과탑비의조성대상에변화가생겼기때문이다. 고려초인 10세기까지는신라하대를이어선종승려들을중심으로승탑과탑비가조성되지만 11세기부터는國師와王師를중심으로승탑과탑비가건립되기때문에이전시기에비해수량이감소한것이다. 또한국사와왕사를중심으로탑비가조성되면서이제탑비의건립은선종만의전통이아니라선 교구분없이불교계전체의전통으로자리잡게된다. 고려시대에는신라하대부터시작된 8각형태의승탑이주류를이루지만시기가지나면서다양한

150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형식의승탑이나타난다. < 흥법사진공대사탑 >(940 년경 ) 은기본적으로신라하대승탑의 8각당형식을유지하고있다. 기단은앙련과복련으로상대와하대를구성하고원형에가까운중대석에는구름에휩싸인용을생동감있게조각하였다. 8각의탑신에는앞뒤로문비가새겨져있고, 날아갈듯치솟은겹처마의지붕은상부에기왓골까지표현하고있으며팔각모서리에는커다란귀꽃을장식하였다. <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 >(1025 년경 ) 역시 8각당형식의승탑인데기단중대석에는팔부중을새기고탑신에는문비와사천왕을조각하였다. 한편 11세기에는팔각당형식에서벗어난승탑이출현한다. <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 >(1027 년 ) 은기단부와지붕은 8각이지만탑신은띠줄과꽃장식이있는원구형으로구성하고있어기존의팔각당형식의승탑과차이가난다. 또한 <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 >(1085년경 ) 은정방형의평면구조인데규모나기단부터상륜부에이르는화려한조각수법등에서최고의조영성을보인다. 이후의승탑은 8각당형식의승탑이지속적으로조성되는한편, < 화장사지공선사탑 >(1370 년경 ) 이나 < 신륵사보제존자석종 >(1379 년 ) 등의예처럼새로운형식의승탑이조성되기도하지만전반적인조영기량은이전시기에미치지못한다. 흥법사진공대사탑 ( 국립중앙박물관, 940 년경 ) 거돈사원공국사탑 ( 국립중앙박물관, 1025 년 ) 한편고려시대의탑비를살펴보면, 고려초기에는승탑과마찬가지로신라하대의전통을계승하여귀부이수형식의탑비를계속해서조성한다. 탑비의이수는 10세기중반경부터는사각에가까운형태를보이며, 귀부는이전시기에비해다소과장된모습을보이는경향이있다. 11세기는그예가많지않지만양식적으로중요하고조형적으로우수한탑비가조성된시기이다. 특히 < 七長寺慧炤國師塔碑 >(1060 년 ) 와 < 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1085 년 ) 의경우비신의측면에생동감넘치는화려한용을조각하고있어주목된다. 한편 <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 > 는고려시대를대표하는秀作으로귀부의사실성이두드러지고, 비신에는측면의용조각외에도비신의테두리와제액

151 신라하대와고려시대의僧塔과塔碑 부분에다양한문양과선각화가화려하게조식하고있다. 또한이수의경우이전에볼수없었던부조에가까운조각수법으로양식의변화조짐이보이기시작한다. 12세기부터는전통양식이쇠퇴하고다양한형식의탑비가조성된다. 비의받침돌과덮개돌에서새로운형식이나타나며, 비덮개돌이사라지고비받침과비신만으로구성된탑비도출현한다. 귀부이수형식의비석도계속해서조성되지만조각기량이예전이미치지못한다. 이시기에는비받침은거북의모양을띤귀부형식이지만비덮개는이수가아닌형식, 반대로비덮개는이수형식을띠지만방형의비받침을갖춘형식, 그리고비받침과비덮개가귀부나이수가아닌형식등다양한형식의탑비가등장한다. 한편고려말기에는 < 회암사선각왕사비 >(1377 년 ) 의예처럼원대의직접적인영향을받은탑비가출현하고일부승려들의경우새로운형식의석종비를조성하기도한다.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 ( 경복궁, 1085 년경 )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 ( 강원원주, 1085 년 )

152 제 14 기박물관대학 > 한국사찰건축의이해 영통사대각국사비 ( 경기개성, 1125 년 ) 회암사선각왕사비 ( 원경기양주, 1377 년 ) 신륵사보제존자석종및석종비 ( 경기여주, 1379 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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