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0CEB9AEB0FAC7D0BFACB1B833315F E687770>
|
|
- 금식 호
- 6 years ago
- Views:
Transcription
1 世祖의즉위과정과정치문화의변동 52) 오종록 * 목차 1. 머리말 2. 세종연간정치의특징 3. 소위癸酉靖難과그이면의욕망 4. 王位簒奪과반세기만의功臣冊封 1) 왕위찬탈과그직후의인사 2) 靖難功臣冊封 3) 세조연간의정승 5. 세조즉위과정이정치문화에끼친영향 6. 맺음말 1. 머리말 왕조사회에서는국왕의업적이훌륭하면그가왕이되는과정에어떤 문제가있었는지는가려지게마련이다. 얼마전까지世祖의경우도그 러하였다. 세조를 왕권을재확립한임금 이나 경국대전체제를성립시 * 성신여자대학교사학과교수
2 290 인문과학연구 제31집 킨 군주 등으로 규정할 때, 그가 저지른 여러 악행이 논란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재확립하였다는 왕권의 내용에 결함이 있 다면, 경국대전체제의 내용에 하자가 있다면, 그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 게 된다. 이제까지의 연구 성과들을 보면 세조가 권력을 장악하고 즉위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비판적 인식과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에 비해, 그의 국 가 통치와 업적에 대해서는 긍정적 인식과 비판적 인식이 대립하고 있 다. 세조가 소위 癸酉靖難 을 하여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조선시대 당 시에 비판적으로 기록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도 死 六臣과 生六臣에 관련된 기록 등을 바탕으로 세조의 권력 장악과 즉위 과정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가능하였고, 나아가 서는 그 비판적 인식이 일반화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국왕으로서 세조가 행한 정치와 그가 남긴 업적은 오랜 동안 긍정적으로 평가되어 왔다. 李相佰이 韓國史 <近世前期篇>에서 世祖는 그 卽位 前後의 端宗에 대한 措置를 비롯하여 非難을 받을 점 이 적지 않았으나 그 卽位 後의 治積은 多大하여 太宗 世宗을 거쳐 確 立된 國家의 基礎는 世祖에 의하여 더욱 鞏固하게 되었다. 라 서술한 것에서 그 동안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1) 흔히 震檀學會 韓國史 라 부르는 한국사 개설서 시리즈 가운데 한 책으로 이 저작이 발간될 때인 1960년대 초엽은 아직 조선시대의 역사 전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기 전이었다.2) 그러다가 1980년대에 집현전 학사에 대한 연구, 세 조의 권력 장악 과정과 재위연간 동안에 책봉된 공신 연구 등 정치세력 1) 李相佰, 1962 韓國史 <近世前期篇> (乙酉文化社, 서울) 99 쪽. 이후의 연구로서 세조의 정치와 업적을 긍정적으로 인식한 대표적 성과로는 韓永愚, 1973 왕권의 확립과 제도의 완성(세조 성종)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과천) 를 들 수 있다. 2) 조선시대사에 대한 연구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53 년에 조선왕조실록 영인에 착 수하여 1958 년에 완간한 것이 크게 작용하여, 1960 년대부터 활발해질 수 있었다. (오종록, 2005 조선전기사 연구 50년 한국사 연구 50년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 원 편 (혜안, 서울))
3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291 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비로소 점진적으로 근대 역사학의 관점에 입각한 비판적 인식이 제시되기에 이르렀다.3) 이어서 1990년대에는 세 조연간의 정치운영과 정치사상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 종래 긍정적으로 인식되어온 세조의 정치사상과 업적에 대해서도 비판적 인 식이 대두되었다.4) 그러나 세조의 정치와 업적에 대한 학계의 일반적 평가는 여전히 긍 정적이다. 현재 읽는 이가 가장 많다고 알려져 있는 한국사 개설서, 대표 적인 조선시대사 개설서 양자 모두 세조의 권력 장악과 즉위 과정에 대 해서는 비판적 내용을 담고 있으나 그의 정치와 업적에 대해서는 대체로 경국대전체제 의 성립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5) 이러한 사정 속에서 최근 발표된 세조 관 련 학술 논문과 역사서술에서는 부정적 인식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긍 정론이 새롭게 대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그 가운데에는 이러 한 세조 때의 정치에 대한 인식의 대립에 착목하며 15세기 정치의 핵심 을 집권체제의 강화 와 공적 영역의 확대 로 규정하고 태종 세종 때에 이어 그것이 세조 때에도 계승되었으며 그에 대해 반발하고 있던 양반지 주층의 생각을 드러내는 존재로서 사육신과 생육신을 이해하는, 종전에 비해 훨씬 치밀해진 연구가 제출되어 주목된다.6) 3) 鄭杜熙, 1983 集賢殿學士의 社會的 背景과 政治的 成長 ; 世祖-成宗代 功臣集團 의 政治的 性格 朝鮮初期 政治支配勢力硏究 (일조각, 서울) 4) 金泰永, 1994 朝鮮 初期 世祖王權의 專制性에 대한 一考察 한국사연구 87 (한국 사연구회) 崔承熙, 1997 世祖代 王位의 脆弱性과 王權强化策 조선시대사학보 1 (조선시대 사학회) ; 1998 世祖代 國政運營體制 조선시대사학보 5 (조선시대사학회) (이상 은 崔承熙, 2002 朝鮮初期 政治史硏究 (지식산업사에 재수록) 5) 한영우, 1997 다시 찾는 우리역사 (경세원,서울) 李成茂, 1998 朝鮮王朝史 1 (동방미디어,서울) 다만 후자는 세조연간 당시의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다. 6) 김용흠, 2007 조선 세조대 정치를 보는 시각과 생육신 역사와 현실 64 (한국역사 연구회) 세조와 그의 정치에 대한 긍정론 및 부정론에 관련된 성과들은 이 글의 주 2)를 참조. 다만 이 논문에서 세조와 그의 정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의 성과로 첫 머리 에 들고 있는 韓永愚, 1981 王權의 確立과 制度의 完成(世祖-成宗) 한국사 9 (국사
4 292 인문과학연구 제31집 이 글은 위에서 살펴본 기존의 세조에 대한 평가, 세조의 정치에 대 한 인식에 적지 않은 문제들이 있다는 판단 아래 준비되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조선시대의 역사를 이해할 때 집권체제나 공적 영역의 변천 보다 더 중시되어야 할 것이 특권의 내용과 그 세습을 보장하는 제도의 변천이다. 그리고 당시 특권을 소유하고 행사하는 것, 그리고 특권적 지 위를 세습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도록 하는 문화를 파악하여 설 명해내는 일이 역사학자가 수행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이러한 생각 아래 세조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조 선의 정치문화 변동에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음을 세종연간과 세 조연간의 정승들을 분석함으로써 밝히고자 한다. 이 글에서 서술한 내 용의 상당 부분은 앞에 제시한 1980년대 이래의 주요 연구 성과들에 의 지하면서 한편으로는 가능한 한 필자의 새로운 생각을 반영하고자 시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리한 추리와 해석이 생겨났을 수도 있는데, 여러 분의 질정을 기대한다. 2. 세종연간 정치의 특징 조선초기의 정치는 여러 측면에서 많은 가변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비록 太宗의 통치 기간을 거치면서 거듭된 量田과 戶籍 작성을 통해 국 가의 통치 기반을 갖추고, 議政府의 설치와 六曹直啓制로 대표되는 중 앙정치제도의 개편과 道制로부터 郡縣制 및 面里制로 이어지는 지방통 치체제의 개혁을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고, 李居易 李佇 父子, 閔無咎 閔無疾 兄弟, 李茂, 李叔蕃 등 공신세력과 외척세력을 사 형에 처하거나 관직에서 축출하여 왕권 강화를 이루었다고는 하나, 가 변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당초에 세자로 책봉되어 왕위 승계를 준 편찬위원회,과천)에 대해 필자는 오히려 긍정적 시각이 더 강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5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293 비하고 있던 讓寧이 결국 왕위를 잇지 못하고 1418년(태종 18년) 忠寧大 君이 새로 세자로 책봉된 데 이어 곧 왕위를 계승한 사건은 다시금 가 변성을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커다란 정치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정치적 가변성이 증폭되었다는 정황은 1419 년(세종 원년)에 御殿에서 벌어진 의정부 참찬 金漸과 예조 판서 許稠의 논쟁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논쟁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便殿에서 政事를 보고 술상을 마련하여, 여섯 순배를 나누고 파하였다. 참 찬 金漸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정치를 하심에 今上皇帝의 법도를 따라야 합니다. 하니, 예조판서 許稠는 말하기를, 중국의 법은 본받을 것도 있고 본받지 못할 것도 있습니다. 하였다. 김점이 신은 황제가 친히 죄수를 끌어내 자세히 심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하께서도 본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라 하니, 허조는 그렇지 않습니다. 設官 分職하여 각기 有司가 있는데, 만약 임금이 대소를 막론하고 죄수를 親決한 다면 장차 法司를 두어 어디에 쓰겠습니까. 라 하였다. 김점이 萬機의 政務는 전하께서 친히 摠覽하시고 신하에게 맡기지 말아 야 합니다. 라 하니, 허조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진 이를 구하기 위해 애쓰 고, 인재를 얻으면 쉴 것이며,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이 있으면 맡기 지 말아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삼가 大臣을 택하여 六曹의 長을 삼으셨으니 위임하여 책임을 성취하게 하셔야 하며, 친히 細事를 궁리하여 아래로 신하 의 직임을 행해서는 안 됩니다. 라 하였다. 김점이 신이 뵈오니, 황제는 위엄과 용단이 측량할 수 없이 놀라와, 6부의 장관이 정사를 아뢰다 착오가 생기면, 즉시 錦衣의 衛官을 시켜 모자를 벗기 고 끌어 내립니다. 라 하니, 허조는 대신을 우대하고 작은 허물을 포용하는 것은 임금의 넓으신 도량이거늘, 이제 말 한 마디의 착오로 대신을 법으로 죽 이며 조금도 용서하지 않는다면, 너무도 부당한 줄 아옵니다. 라 하였다. 김점이 시왕지제는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황제는 불교를 崇信하여, 중국의 신하들은 名稱歌曲을 誦讀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 중에 어찌 異 端을 싫어하는 선비가 없겠습니까마는, 다만 황제의 뜻을 본받기 위해 부득
6 294 인문과학연구 제31집 이 그러한 것입니다. 라 하니 허조는 불교를 믿는 것은 제왕의 盛德이 아니 니 신은 취하지 않겠습니다 라 하였다. 김점은 말할 때마다 지리하고 번거로우며 얼굴에 怒氣를 드러냈고, 허조 는 서서히 반박하되 낯빛이 화평하고 말이 간략하니, 임금은 허조를 옳게 여 기고 김점을 그르게 여겼다.7) 金漸과 許稠 두 重臣 사이에 벌어진 이 논쟁의 초점은 時王之制的 君主政과 先王之制的 君主政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이상적인가, 따라서 앞으로 세종의 정치는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가에 놓여 있었다 고 할 수 있다. 김점이 세종에게 따르도록 요청한 時王之制는 자신이 보고 돌아온 明의 황제가 행하고 있던 군주정 체제, 즉 조선초기 당시 의 명의 제도를 말한다. 당시 명은 2품 이상의 宰相을 두지 않고 3품 이하의 관직만을 두어서 황제가 직접 국가 행정 전반을 관할하였고, 학 자들은 이를 皇帝獨裁政治 또는 皇帝專制政治라 부르며, 그 이념을 君 主專制主義라 부른다.8) 명의 역대 황제들은 관료와 지배층의 반란을 미 리 탐지하여 막기 위해 宦官으로 구성된 비밀경찰기구인 東廠을 운영하 기도 하였다. 한편 허조가 주장한 것이 先王之制인데, 여기서의 先王은 조선의 先 王이 아니라 중국 고대의 先王을 말하며, 주로 周시대의 王政을 뜻하였 다. 周禮 또는 周官 이라 부르는, 그러나 실상은 漢代에 정리된 것으 7) 御便殿視事 仍置酒 六行而罷. 參贊金漸進曰 殿下爲政 當一遵今上皇帝法度. 禮曹判 書許稠進曰 中國之法 有可法者 亦有不可法者. 漸曰 臣見皇帝親引罪囚 詳加審覈 願 殿下効之. 稠曰 不然 設官分職 各有攸司 若人主親決罪囚 無問大小 則將焉用法司. 漸曰 萬機之務 殿下宜自摠覽 不可委之臣下. 稠曰 不然 勞於求賢 逸於得人 任則勿疑 疑則勿任 殿下當愼擇大臣 俾長六曹 委任責成 不可躬親細事 下行臣職. 漸曰 臣見皇 帝威斷莫測 有六部長官奏事失錯 卽命錦衣衛官 脫帽曳出. 稠曰 體貌大臣 包容小過 乃人主之洪量 今以一言之失 誅戮大臣 略不假借 甚爲不可. 漸曰 時王之制 不可不從 皇帝崇信釋敎 故中國臣庶 無不誦讀名稱歌曲者 其間豈無儒士不好異端者 但仰體帝 意 不得不然. 稠曰 崇信釋敎 非帝王盛德 臣竊不取. 漸每發一言 支離煩碎 怒形於色 稠徐徐折之 色和而言簡 上是稠而非漸.( 世宗實錄 卷 3, 세종 원년 정월 丙辰(11일)) 8) 徐連達 吳浩坤 趙克堯(중국사연구회 옮김), 1989 중국통사 (청년사,서울) 쪽
7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295 로 알려져 있는 책에 수록되어 있는, 후대의 사람들이 周시대의 것이라 여겨온 設官分職 의 내용을 이상적인 정치제도로 파악하고 이를 先王 之制 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한 마디로 말하면 세종에게 宰相 중심의 정치를 할 것을 요청한 것이었다. 재상 중심의 정치는 조선의 관료들, 나아가서는 양반 지배층 전반이 지지하는 제도였고, 중국의 唐代에 시 행된 三省六部制, 고려시대의 宰樞 중심의 정치는 물론이고 조선 건국 직후 鄭道傳이 구상했던 제도도 이에 해당한다. 논쟁의 결말에 이르러 실록의 기록은 세종이 허조의 주장을 옳게 여 긴 것으로 못박고 있으나, 이는 史官 내지는 실록 편찬자의 판단일 뿐 이다. 사관이든 더 고위관원일 실록 편찬자이든 이들 또한 관료이자 양 반지배층의 구성원으로서 허조와 공감대를 갖추었기에 논쟁의 분위기 또한 허조의 편을 들어 묘사하였을 개연성이 크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세종 역시 대체로 태종이 잡았던 정치 노선을 계승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자신의 권력 기반이 강화되고 국왕으로서의 권위가 확고해지기 전까지는 육조직계제를 계속 관철하였 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주목하여 기록을 살피면 결국 세조 때에 이르 러 전보다 더 분명하게 時王之制 를 추구하는 양상이 전개되었던 사실 을 파악할 수 있다. 태종이 조선왕조 통치체제의 큰 골격을 갖춘 군주라 한다면, 세종은 그 뒤를 이어 문물제도 전반에 걸쳐 구체적인 내용을 갖추면서 세련된 모습으로 가꾸어 간 군주라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태종이 공신과 외 척 세력을 제거하면서 여러 정치적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전혀 공 신을 책봉하지 않았던 것을 세종 또한 계승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것이 세종연간의 정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다.9) 9) 태종 즉위 직후에 공신을 책봉한 이후 태종, 세종, 문종연간에 걸쳐 공신 책봉이 이루 어진 바 없다는 사실은 조선전기 정치사 연구자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 라 할 수 있으나,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탐구한 연구는 아직 없다. 공신세력을 중심 대상으로 하여 조선초기 정치세력을 연구한 鄭杜熙의 경우도 세종연간 정치세 력에 대한 연구에서는 그 대상을 臺諫과 集賢殿學士로 바꾸어 고찰하였을 뿐이며,
8 296 인문과학연구 제31집 세종의 재위 초엽에도 몇 차례 逆謀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태종 때 친태조세력이 태종의 축출을 목적으로 일으킨 趙思義의 난(1402;태종 2 년)을 진압한 뒤, 유력 공신이었던 李居易 李佇 父子를 이들이 정종을 복위시키려 했다는 죄목을 씌워 처벌한 뒤(1404;태종 4년), 定社 佐命 공신이자 왕비의 아우들인 閔無咎 閔無疾 형제와 그를 추종하던 세력 을 숙청한 뒤(1410;태종 10년) 등 어느 경우에도 공신 책봉을 하지 않았 던 것과 마찬가지로10) 세종 때에도 크고 작은 여러 사건을 처리한 뒤 공신을 책봉한 일이 없었다. 세종 때에도 여러 역모사건이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국구로서 영의정에 오른 沈溫을 처형한 사건은 태종이 주도 한 것이었으므로 예외로 한다면, 그 나머지는 태종 때의 사건들에 비해 정치적 중요성이 크게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세종 때에는 태종 때와 달리 대마도 정벌과 여진 정벌 등 군대를 국경 밖으로 보내 군사활동을 전개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둔 바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軍功에 대해서도 주요 공로자에게 관직과 물품으 로 보상하였을 뿐 공신을 책봉하지는 않았다. 이는 태종에 이어 세종 역시 국왕의 초월적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이 새롭게 생겨나지 않 도록 각별히 주의하였음을 나타낸다. 세종의 정치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주요 관직에 임용된 관 원들이 장기간에 걸쳐 재직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관원들을 관직에 오 래 재직하도록 하는 것은 세종의 일관된 방침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방침 은 세종 재위 전반에 인사관리규정을 정비함으로써 실현할 수 있었다. 관 원을 褒貶, 加資하는 단위 기간을 통일하고 그 대상을 西班에까지 확대 한 조치, 循資法 규정과 관리를 강화한 조치 등이 인사관리규정 정비의 주요 내용이었다.11) 그 결과 전반적으로 승진이 지체되는 현상이 나타 공신을 책봉하지 않은 사실과 관련된 서술은 찾아볼 수 없다. (鄭杜熙, 1983 앞 책 ) 10) 이상 태종 때 왕권 강화와 관련하여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는 최승희, 2005 개국 초 왕권의 강화와 국정운영체제 조선초기 정치문화의 이해 (지식산업사,서울) 쪽 참조 11) 南智大, 1993 朝鮮初期 中央政治制度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쪽
9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297 나 세종 재위 후반에는 參上 관직에 등용할 관원이 부족해져, 行守法을 시행하여야만 했다.12) 관원들이 주요 직책을 맡았을 때 장기간 재직하는 양상은 특히 정승 곧 의정에게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가장 단적인 예로 꼽을 수 있는 사 례가 잘 알려져 있는 黃喜의 경우이다. 그는 1426년(세종 8년) 우의정에 임명된 뒤 1427년 좌의정을 거쳐 1431년 영의정부사가 되고, 이로부터 1449년(세종 31년) 영의정부사로 致仕하기까지 18년이나 재직하였다. 특 히 그가 좌의정으로 재직하던 시기에는 영의정부사직이 공석이었으므 로, 좌의정이 수상이었다. 따라서 그가 수상으로 재직한 기간은 무려 22 년이나 된다.13) 황희는 1416년(태종 18년) 세자 폐출 논의가 진행될 당 시 양녕대군을 옹호하다가 파직당한 적이 있고, 1418년 판한성부사로 있을 때 다시 세자 폐출을 반대하다 처벌을 받아 유배생활을 하였고, 세종이 즉위한 뒤 4년이 지나서야 上王인 태종의 특명으로 관직에 복귀 할 수 있었다.14) 즉 뒤집어 본다면 황희는 자신이 왕위 계승자가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한 인물이었음에도 세종은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 하여 관직에 임용하고 결국은 장기간 수상 직책을 맡겨 국정의 상당 부 분을 위임하였던 것이다. 세종연간 3의정의 재직 양상을 각각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15) 12) 南智大, 1993 위 논문 쪽 13) 세종은 1427년 李稷이 영의정부사를 사직한 뒤 공석으로 남겨 두다가 李稷이 1431년 사망한 뒤에야 좌의정 黃喜를 승진시켜 임명하였다. ( 世宗實錄 卷 53, 世宗 13 년 9 월 甲子(3 일)) 14) 文宗實錄 卷 12, 文宗 2 년 2 월 壬申(8 일) 黃喜 卒記 15) 탄핵을 받는 등의 이유로 잠시 관직을 비운 경우는 반영하지 않았으며, 전거는 아래 와 같음. 世宗實錄 券 1, 世宗 즉위년 9월 庚戌(3일) ; 같은 책 卷 2, 世宗 즉위년 12월 壬午(7일) ; 같은 책 卷 14, 世宗 3년 12월 丙戌(7일) ; 같은 책 卷 24, 世宗 6년 6월 癸亥(20일) ; 같은 책 卷 25, 世宗 6년 9월 己卯(7일) ; 같은 책 卷 31, 世宗 8년 1월 庚戌(15일) ; 같은 책 卷 32, 世宗 8년 5월 丙午(13일) ; 같은 책 卷 35, 世宗 9년 1월 甲寅(25일) ; 같은 책 卷 53, 世宗 13년 9월 甲子(3일) ; 같은 책 卷 60, 世宗 15년 5월 戊辰(16일) ; 같은 책 卷 67, 世宗 17년 2월 癸卯(1일) ; 같은 책 卷 81, 世宗 20년 5월 壬寅(19일) ; 같은 책 卷 85, 世宗 21년 6월 戊子(12일) ; 같은 책 卷 107, 世宗 27년 1월 戊戌(24일) ;
10 298 인문과학연구제31집 영의정부사 : 韓尙敬 (1418년 7월 ; 세종즉위당시 )- 沈溫 (1418년 9월 )- 柳廷顯 (1418년 12월 )- 李稷 (1424년 = 세종 6년 9월 )- 李稷사임 (1427년 = 세종 9년, 이후 4년동안영의정부사공석 )- 黃喜 (1431년 = 세종 13년 9월 )- 河演 (1449년 = 세종 31년 10월 ) 좌의정 : 공석 (1418년 7월 ; 세종즉위당시 )- 朴訔 (1418년 12월 )- 李原 (1421년 = 세종 3년 12월 )- 柳廷顯 (1426년 = 세종 8년 3월, 5월유정현사망 )- 李稷 (1426년 = 세종 8년 5월 )- 黃喜 (1427년 = 세종 9년 1월 )- 孟思誠 (1431년 = 세종 13년 9월 )- 崔閏德 (1435년 = 세종 17년 2월 )- 崔閏德사임 (1436년 = 세종 18년 7월, 이후약 5년종안좌의정공석 )- 許稠 (1439년 = 세종 21년 6월, 이해 12월許稠사망, 이후약 5년동안좌의정다시공석 )- 申槩 (1445년 = 세종 27년 1 월, 1446년 1월申槩사망, 이후 1년 5개월좌의정공석 )- 河演 (1447년 = 세종 29년 6월 )- 皇甫仁 (1449년 = 세종 31년 10월 ) 우의정 : 李原 (1418년 7월 ; 세종즉위당시 )- 鄭擢 (1421년 = 세종 3년 12월, 1423년 5월정탁사망, 이후 1년 1개월우의정공석 )- 柳寬 (1424년 = 세종 6년 6월 )- 趙涓 (1426년 = 세종 8년 1월 )- 黃喜 (1426년 5월 )- 孟思誠 (1427년 = 세종 9년 1월 )- 權軫 (1431년 = 세종 13년 9월 )- 崔閏德 (1433년 = 세종 15년 5월 )- 盧閈 (1435년 = 세종 17년 2월, 1437년 10월노한파직, 이후 7개월동안우의정공석 )- 許稠 (1438년 = 세종 20년 5월 )- 申槩 (1439년 = 세종 21년 6월 )- 河演 (1445년 = 세종 27년 1월 )- 皇甫仁 (1447년 = 세종 29년 6월 )- 南智 (1449년 = 세종 31년 10월 ) 위와같이세종때영의정부사로재직하였던인물은韓尙敬, 沈溫, 柳廷顯, 李稷, 黃喜, 河演등 6인, 좌의정에재직하였던인물은朴訔, 李原, 柳廷顯, 李稷, 黃喜, 孟思誠, 崔閏德, 許稠, 申槩, 河演, 皇甫仁등 11인, 우의정으로재직하였던인물은李原, 鄭擢, 柳寬, 趙涓, 黃喜, 孟思誠, 權軫, 崔閏德, 盧閈, 許稠, 申槩, 河演, 皇甫仁, 南智등 14인이다. 영의정부사는평균 4년 8개월, 좌의정은평균 2년, 우의정은평균 2년 4개월정도씩 같은책卷 116, 世宗 29 년 6 월신미 (10 일 ) ; 같은책卷 126, 世宗 31 년 10 월임자 (5 일 )
11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299 재직하였다. 좌의정으로 재직한 인물의 수가 우의정으로 재직한 인물의 수보다 적은데도 평균 재직 기간이 짧은 까닭은 세종연간에 좌의정직이 비어 있던 기간이 약 10년 정도 되는 데서 비롯되었다. 세종 초엽의 의정들은 대부분 功臣이거나 공신의 아들 또는 국왕의 장인 등 당시 權貴라 호칭하는 부류의 인물들이었다. 韓尙敬은 開國功 臣이고, 沈溫은 개국공신 沈德符의 子이자 세종의 장인인 까닭에 영의 정부사에 제수된 경우이며, 李稷은 開國功臣이자 佐命功臣이고, 朴訔 李 原 趙涓은 佐命功臣이며, 鄭擢은 좌명공신이자 定社功臣이다. 다만 柳 廷顯만이 공신과 무관한 상태에서 의정에 올랐을 뿐이다. 그러나 1427 년(세종 8년) 영의정부사 李稷이 사임한 이후로는 거꾸로 의정으로 재직 한 인물 대부분이 공신과 무관하고 왕실과의 혼인관계도 없었다. 다만 南智만이 개국공신 南在의 손자일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세종이 부왕 인 태종의 신료들이 아닌 그 자신의 신료들로 조정을 구성하는 변화가 있어난다고 평가되는 1428년(세종 10년) 이후로는 공신이 아닌 관료들에 게 국정을 맡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세종의 재위 중반에 이 르러 개국공신 정사공신 좌명공신들이 거의 모두 사망한 결과로 자연 스럽게 다다른 결과라고도 할 수 있으나, 그 한편으로는 공신을 책봉하 지 않는 방침이 이루어낸 결실이었다. 세종 때의 의정들 가운데에는 재직 중 사망한 인물이 적지 않다는 점 도 눈에 띈다. 좌의정으로 재직하다 사망한 柳廷顯 許稠 申槩와 우의 정으로 재직하다 사망한 鄭擢 등이 그들이다. 이것은 노년에야 의정이 될 수 있었던 데서 연유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이미 태종 때 영의 정부사로 임명된 韓尙敬과 태어난 해를 확인할 수 없는 沈溫 皇甫仁 南 智를 제외하고 처음 의정이 될 때의 나이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柳廷顯: 67세, 朴訔: 49세, 李原: 54세, 鄭擢: 59세, 李稷: 63세, 柳寬: 79세, 黃喜: 64세, 趙涓: 63세, 孟思誠: 68세, 崔閏德: 58세, 權軫: 75세, 盧閈: 60세, 許稠: 70세, 申槩: 66세, 河演: 70세
12 300 인문과학연구 제31집 여기서 다시 태종이 상왕으로 있던 시기에 의정에 임명된 柳廷顯, 朴訔, 李原, 鄭擢을 제외하고 보면, 60세 이전에 의정에 오른 인물은 무장으로 서 婆猪江 여진족 정벌에 공을 세운 崔閏德이 유일하다. 심지어는 70세 를 넘겨서 의정에 처음 오른 인물도 여럿임을 볼 수 있다. 이를 앞에서 살핀 내용과 묶어서 설명하면, 세종 때에는 하급 관원은 물론이고 상급 관원들에 대해서도 인사관리가 비교적 철저하게 이루어졌고, 세종은 오 랜 관직 경험을 쌓아 노련한 관원으로 성장하여 능력을 검증한 인물 가 운데서만 정승을 임명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세종 때의 안정된 정치는 이로부터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역으로 보면 뛰어난 능 력을 가진 인재라도 고위 관원이 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였다. 黃喜가 80대의 노령으로 영의정부사를 맡고 있던 세종 말엽에 이르러 육진 개척으로 큰 공을 세운 金宗瑞가 60대가 되어서 비로소 판서를 맡 게 되었던 것이 이를 나타낸다. 그나마 김종서는 승진이 빠른 편이었다. 집현전에서 학문 연구에 종사한 학자 관료들은 특별한 공을 세울 기회 가 적어 승진과 정치적 성장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세조가 권 력을 장악하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 상당수의 집현전 학사가 참여하였 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16) 14세기 중엽 고려 恭愍王 때부터 조선 太宗이 즉위할 무렵까지 이 땅 의 관료들은 빠른 승진에 익숙해 있었다.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아 공을 세울 기회는 많았던 데 비해 국가 재정은 열악하여, 공을 세운 관원을 승진시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고위 관 원의 양산으로 귀결되었다. 科田法을 시행함으로써 私田을 개혁하였다고 는 하나, 관료들이 농민과 농경지를 지배하는 특권적 수단인 科田과 功 臣田의 收租權을 소멸시키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고위 관원을 양산하는 것은 곧 국왕의 초월적 특권을 약화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조선의 태종과 세종의 정치는 이 위험 요인을 약화하는 쪽으로 일관 16) 집현전 학사와 관련해서는 鄭杜熙, 앞의 集賢殿學士의 社會的 背景과 政治的 成長 참조.
13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301 성을 갖추어 진행되었다. 그 첫째는 토지와 농민을 철저히 파악하여 재 정을 강화하는 것이었고, 田結數와 戶口數의 비약적 증대를 통해 그 성 과를 확인할 수 있다 년 量田의 최종 결과는 총 798,127결에 불과하였으나, 세종실록지리지 에 기록된 전국 농경지의 총액은 1,719, 806 결로 증가하였고, 조선 건국 이듬해인 1393년(태조 2년) 왕명으로 軍籍 을 작성한 결과 파악된 馬兵 步兵 船軍 등의 戶首와 奉足을 합산한 액수가 20만 800명에 불과하였으나, 세종실록지리지 에 기록된 戶의 총수는 70만을 상회하게 되었다. 태종 즉위 때까지 3차례 공신을 책봉 한 결과로 功臣田 총액이 늘어나 있는 조건 속에서 관원수가 꾸준히 늘 고 있던 데서 초래된 私田 부족 문제를 과전 지급액을 줄이고 지급 대 상을 축소함으로써 대처하는 한편으로, 私田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강 화시켜 갔다. 관료들에 대한 인사관리규정을 정비하고 그 규정을 철저 히 시행하여 고위관원으로의 승진을 강력히 통제한 까닭도 이러한 맥락 에서 이해 가능하다. 또한 태종과 세종이 공신을 책봉하지 않는 정치를 펼 수 있었던 바탕도 국가 재정이 강화된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세종의 정치는 왕권의 초월적 권위를 강화시킨 측면 에서 태종의 정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있었다. 세종 때 이루어진 續 六典 으로 대표되는 법률제도의 정비와 世宗實錄五禮 의 정리, 龍飛 御天歌, 農事直設, 七政算 內篇과 外篇의 간행 등은 흔히 문물제도 정비 성과로 들고 있다. 그러나 이 성과들을 다른 관점에서 보면 모두 국왕의 권위와 연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법률과 국가 의례의 정 비는 표면상으로는 法治와 禮治를 겸비하기 위한 사업으로 규정할 수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품격을 갖춘 국가로 자부하기 위해 필요한 요건 을 충족한 것에 해당한다. 그 한편 의례는 이미 규정된 질서를 반복적 으로 재현하는 장치로서 작동하여 君臣 사이의 上下關係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각별하였다. 여기에 더해 주요 국가 의례와 직결되어 반복적으로 선왕의 덕을 칭송하는 노 래를 연주하고 또 듣도록 되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4 302 인문과학연구 제31집 조선이 天命을 받들어 개창한 왕조이고 따라서 그 국왕이 초월적 권 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노래로 지은 것이 龍飛御天歌 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세종은 먼저 민간에 퍼져 있는 荒山大捷을 비롯한 태조 이성계의 여러 전공과 관련된 설화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太 祖實錄 總序의 내용과 高麗史 의 내용을 보완토록 한 뒤 마지막 작업 으로 龍飛御天歌 를 간행하였다. 그 결과 당초 역사기록으로 들어가기 어려웠던 신비스러운 내용들이 대거 추가됨으로써 조선 왕실과 국왕의 권위에 신비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龍飛御天歌 에 수록된 여 러 악장가사를 주요 국가 의례에 연주하도록 하였던 것이다.17) 이에 비 해 農事直設 은 농업의 발달을 통한 농민생활의 향상과 국가 재정의 강화를 목적으로 제작된 책이라는 점에 이견을 달 수는 없다. 그러나 儒敎思想에서 天命을 받은 존재는 牧으로서의 하늘의 권능을 부여받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점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이 또한 국왕의 권 위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간취할 수 있다. 그리고 七政算 內篇과 外篇 은 天命을 받든 왕조로서 天文 현상을 중요시하는 측면과 농업 생산을 위해 24절기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현실적인 필요성이 결합되어 이루 어진 성과였다. 당초에 왕위 계승권에서 벗어나 있어서 민간 생활을 경 험해서인지 세종은 백성들의 사정을 잘 아는 군주였으며, 民本과 爲民 을 명분으로서만 내세우지 않고 실제로 실천에 옮긴 군주였다는 평가 는18) 일면 타당하나, 왕권의 행사를 民의 생활과 직접 연결시키려는 논 리는 다른 쪽에서 보면 지배층의 긍정적 역할을 부인하는 논리이며, 또 한 時王之制 를 옹호하는 논리라는 점을 살필 필요가 있다. 여하튼 세 종의 왕권의 초월적 권위를 강화하려는 여러 노력 또한 양면적으로 문 종과 세조의 정치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세종이 신료들의 반대와 반발을 극복하고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정 17) 김승우, 2012 용비어천가 제작의 주요 배경과 기반 용비어천가의 성립과 수용 (보고사,서울) 18) 崔承熙, 2002 앞 책, 211 쪽
15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303 치를 전개해 간 방법은 다양하였다. 때로는 반대하는 관원들의 사소한 잘못을 들춰서 문책을 하여 기를 꺾음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였는 데,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의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여 러 관원들의 의견을 반복적으로 듣고서 그 가운데 합리적인 쪽을 선택 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대개는 議政府와 六曹의 당상관, 臺諫 등 정치의 핵심 기관에 소속된 관원들의 의견을 중심적으로 취합하였지만, 貢法을 제정해 가는 과정에서는 농민들에게까지 그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하였었다. 그러면서도 새벽에 일어나 정무를 보기 시작하여 밤 늦게까지 일을 한 군주가 세종이었다. 국정 전반을 꼼꼼히 챙겼다는 점 에서는 시왕지제 의 군주의 모습에 가까웠으나, 중요 사안에 대한 결정 과 정책 집행에서는 그 수준에 맞추어 의견을 듣고 그에 따라 처리하였 다. 특히 1436년(세종 18년) 議政府 署事制를 시행한 뒤로는 웬만한 일 은 의정부 大臣들에게 위임함으로써 선왕지제 의 군주에 흡사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19) 3. 소위 癸酉靖難과 그 이면의 욕망 수양대군의 권력 장악 및 그 과정과 관련하여 따져보아야 할 점들을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癸酉靖難 이라는 명칭의 문제이다. 둘째는 端宗이 어린 나이에 즉위한 것이 과연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라는 점 이다. 셋째는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왕권에 대한 야욕의 문제이며, 넷 째는 端宗의 顧命大臣에 대한 평가 문제, 그리고 다섯째가 왕자의 난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결국 왕위에 오른 太宗 李芳遠이 私兵을 거느리 고 있었던 것과 달리 수양대군은 어떠한 군사적 기반도 없었을 터인데 어떻게 政變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의 문제이다. 여기에 19) 세종의 국정 운영 방식에 대해서는 崔承熙, 2002 世宗朝의 王權과 國政運營體制 朝鮮初期 政治史硏究 (知識産業社,서울) 참조.
16 304 인문과학연구 제31집 더해 세종으로부터 단종을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여러 集賢殿 學士들의 정치적 진로가 갈라진 것에 대한 판단의 문제가 있다. 먼저 癸酉靖難 이라는 명칭의 문제부터 따져보기로 한다. 1453년(단 종 원년) 10월 세종의 둘째 왕자이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자신을 따르는 무사들을 시켜서 左議政 金宗瑞 등이 안평대군을 왕으로 추대 하려는 逆謀를 하였다 는 이유로 그의 집으로 가서 김종서를 살해하고, 領議政府事 皇甫仁과 吏曹 判書 閔伸, 兵曹 判書 趙克寬, 議政府 右贊成 李穰 등을 궁궐로 오도록 하여 입궁하는 차례대로 살해하고, 尹處恭 趙 藩 李命敏 元矩를 군사들을 보내 살해하고, 당일로 義禁府 都事를 시켜 安平大君을 江華로 압송하고, 三軍 鎭撫를 시켜 안평대군의 아들 李友 直 또한 강화로 압송한 사건이 발생하였다.20) 안평대군과 김종서의 무 리로 지목된 관원들에 대한 처벌은 이튿날에 계속되었으며, 수양대군이 領議政府事로서 兼判吏兵曹事로 임명되는 등 대대적인 인사조치가 취해 졌다.21) 그리고 안평대군과 김종서의 무리로 지목된 관원들을 관직에서 축출하고 처벌하는 작업이 연일 이어진 뒤 사건 발생 5일 만에 수양대 군 이하 43명이 靖難功臣으로 책봉되었다.22) 우리는 이 일련의 사건을 癸酉年에 일어난 靖難이라는 이유로 아직도 계유정난 이라 부르고 있 다. 이 점은 이 사건의 모델이라고도 할 수 있는 李芳遠이 鄭道傳 등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을 제1차 왕자의 난 이라 호칭하고 있는 것과도 명확히 대비된다. 이 계유년에 일어난 사건에서 핵심이 되는 내용인 안평대군과 김종 서 등이 반역을 꾀했다는 물증은 전혀 제시된 적이 없다. 사정이 너무 급박하다는 이유로 김종서와 황보인 등 핵심 인물을 먼저 살해하고, 안 평대군도 鞠問하는 절차 없이 곧바로 강화도로 압송하였다. 즉 靖難 에 성공한 뒤에도 안평대군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20) 端宗實錄 卷 8, 단종 원년 10 월 癸巳(10 일) 21) 端宗實錄 卷 8, 단종 원년 10 월 甲午(11 일) 22) 端宗實錄 卷 8, 단종 원년 10 월 戊戌(15 일)
17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305 어떠한 조치도 취한 바가 없다. 다만 정난 을 하는 동안 관련자와 그 식솔이나 하인, 노복 등의 언행의 기록을 통해 그들이 반역을 도모했을 수 있다는 정황을 내비치고 있을 따름이다. 더구나 단종이 즉위한 뒤 이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약 1년 반에 걸친 시기 동안 정국의 구도는 안 평대군과 김종서 일파가 확고하게 주도권을 장악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 어서, 굳이 이들이 반역을 꾀할 필요는 없었다. 모종의 조치가 필요했다 면 그것은 수양대군 일파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을 터인데, 이러한 조 치를 의논했을 수는 있으나 구체적으로 이를 꾀한 자취 또한 발견되지 않는다. 이방원은 쿠데타의 명분으로 정도전 일파가 자신을 제거하려 하였다는 것에서 찾았는데, 그것이 당시의 정황에서 가능성이 있었던 것과도 다르다. 따라서 이 사건을 癸酉靖難 이라 부르는 것은 勝者의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인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 사건의 명칭 을 다시 정하기 위한 학문적 시도가 필요하다. 제1차 왕자의 난 이라는 이름을 본딴다면 숙부의 난 정도가 될 것이다. 둘째 문제인 단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한 것이 과연 그렇게 중요한가 라는 점을 따져보기로 한다. 1450년 세종이 사망하자 세자로서 10년 넘 게 정치경험을 쌓은 文宗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학문을 좋아하고 집 현전 학사들을 아낀 것 등등 문종은 부왕인 세종과 흡사한 점이 많았다. 따라서 문종은 세종을 이어 훌륭한 정치를 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병 약한 것이 큰 결함이었다. 자주 病席에 눕던 문종은 결국 1452년 재위 2년 만에 사망하였고, 그 뒤를 이어 어린 端宗이 즉위하였다. 즉위할 때 단종의 나이는 우리 나이로 계산하여 12살이었으므로, 당 시 成年으로 간주하는 나이인 16살에 근접해 있어서 실제 나이가 큰 문 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더구나 단종은 이미 1448년(세종 30년)에 王 世孫에 책봉되어 짧기는 하나 국왕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은 바 있었다. 따라서 나이가 어리다는 문제보다는 오히려 뒤에서 후견인의 역할을 할 왕실의 어른이 없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단종의 할머니인 昭憲王 后는 물론이고 모친인 顯德王后 또한 이미 사망한 상황이어서 垂簾聽政
18 306 인문과학연구 제31집 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미 문종 재위기간 부터 문종의 동생 즉 단종의 叔父들 가운데서 首陽大君과 安平大君이 정치적 욕망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 단종에게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다. 이를 단종과 비슷한 나이에 즉위한 成宗과 비교해 보면 왜 단종은 왕위 를 지키지 못했고 성종은 25년 동안 군림할 수 있었는지 그 차이를 쉽 게 알 수 있다. 성종은 단종보다 한 살 많은13살에 즉위하여서 단종보 다 조금 조건이 유리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자세히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성종은 세자로 책봉된 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사망한 懿敬世子 의 아들인 까닭에 왕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는 성종의 약점이 더 두드러진다. 그러나 성종에게는 어머니 昭 惠王后, 할머니 貞熹王后 등 뒤에서 보살펴줄 사람이 여럿이 있었고, 그 에게 백부나 숙부에 해당되는 생존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성종 에게는 백부나 숙부에 해당되는 생존 인물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가 장 중요하다. 즉 단종에게 문제가 된 것은 나이보다도 그의 숙부 가운 데 두 명이나 권력을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세 번째의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왕권에 대한 야욕의 문제 중 안평 대군에 대한 부분은 어느 정도 앞에서 설명하였다. 안평대군은 喬桐縣으 로 移置된 뒤 결국 죽음을 당하였는데,23) 그가 왕위를 차지하고자 했다 는 증거가 없다는 점에서 이는 억울한 죽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 무런 죄가 없는데도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면 이 또한 잘못된 판단이라 해야 한다. 黃標政事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단종 즉위 후 1년 반 동안의 시기에 김종서 황보인 등이 권력을 천단하고, 안평대군이 이와 밀착되 어 있었던 것은, 비록 세조의 권력 장악을 합리화하기 위해 부각된 측면 이 없지 않으나 엄연한 사실이라고 판단된다.24) 성삼문 등이 여러 차례 23) 端宗實錄 卷 8, 단종 원년 11 월 辛丑(18 일) 24) 端宗實錄 은 본래 魯山君日記 라는 이름으로 세조 때 편찬되었으며, 당연히 세조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안평대군에 대해 불리하게 서술된 내용이 많다. 심지어는 단종이 즉위교서를 반포한 날, 문종의 사망에 대해 수양대군이 애통해한 것과 달리 안평대군 은 얼굴에 기쁜 모습을 나타냈고, 물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을 평상시와 같이 했다고
19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307 김종서 황보인 등을 엄중히 탄핵했던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25) 넷째 端宗의 顧命大臣에 대한 평가 문제이다. 고명대신이란 先王이 사망함에 따라 이미 왕위를 이어받도록 정해져 있는 嗣王이 왕위를 승 계하는 정상적인 왕위 세습이 이루어질 때, 선왕의 遺命을 받들어 遺敎 를 작성하여 선포하는 역할을 맡은 大臣을 말한다.26) 嗣王이 정상적으 로 왕위를 잇도록 되었음을 증명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고명대신인 까 닭에, 이들의 정치적 비중은 매우 클 수밖에 없었다. 文宗이 사망하기에 앞서 端宗이 嗣王임을 확인한 顧命大臣은 영의정 부사 皇甫仁, 좌의정 南智, 우의정 金宗瑞 세 사람이었다. 단종은 즉위 하자 즉위교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一. 古事에 정사는 모두 中書省에서 나왔다. 더구나 나는 어리고 施政에 어두우니 모든 措置를 모두 議政府 六曹와 의논하여 행하겠다. 一. 전에 육조에서 항상 직계하던 公事를 지금으로부터 모두 의정부에 보 고하면 의정부에서 啓聞하여 시행한다.27) 문종이 즉위한 이후 세종 후반에 시행하기 시작한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다시 육조 직계제를 부활했었다. 그런데 즉위교서의 이 내용 은 단종이 즉위하자 곧 의정부 서사제로 돌아갔음을 보여준다. 이로써 황보인 김종서 남지 세 대신은 고명대신이라는 위치에 더하여 제도적 으로도 강력하게 국정을 주도할 수 있도록 되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안평대군과 사돈 관계에 있던 남지는 단종 즉위 후 5개월만에 風疾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端宗實錄 卷 8, 단종 즉위년 7월 甲午(11일)). 25) 이에 대해서는 앞서 인용한 鄭杜熙, 1983 集賢殿學士의 社會的 背景과 政治的 成長 朝鮮初期 政治支配勢力硏究 (일조각, 서울)과 崔承熙, 2002 世宗朝의 王權과 國政 運營體制 朝鮮初期 政治史硏究 (知識産業社,서울) 참조 26) 吳宗祿, 1996 朝鮮時代 國王의 卽位過程과 卽位儀禮 朝鮮時代 卽位儀禮와 朝賀 儀禮 硏究 (文化財管理局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27) 一 古事政事 皆出中書 矧予幼沖 昧於施爲 凡所措置 悉與政府六曹擬議以行 一 前此六 曹常行直啓公事 今皆報政府 啓聞施行( 端宗實錄 卷 1, 단종 즉위년 5월 庚戌(18일))
20 308 인문과학연구 제31집 이유로 辭職하여 교체되었다. 이때 김종서의 의정부는 養病하는 곳이 아니다 라는 발언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기록에 나타난다.28) 남지 가 교체된 뒤 두 달여 만에 鄭苯이 우의정으로 임명되어 김종서가 좌의 정으로 승진하였고, 이로써 황보인과 김종서, 정분이 3정승으로 의정부 에 포진하게 되었다.29) 그러나 고명대신인 황보인, 김종서와 신임 의정 인 정분의 권위가 대등할 수는 없었으며, 따라서 국정은 자연히 황보인 과 김종서가 주도하게 되었다. 또 그 가운데서도 성격이 매우 강한 김 종서가 주도권을 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종서와 황보인 두 사람은 모두 문신이며, 세종 때 承政院의 承旨 직책을 맡으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하였고, 재상의 반열에 오른 뒤에는 兩界 즉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의 군사 업무를 담당함으로써 정승의 지 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30) 세종의 정치 운영의 특성에 따라 정치적 안정을 이루어 전반적으로 관원들의 승진이 침체되 는 가운데서도 이들은 승지로서의 경력과 문신이면서도 군사 부문에 능 력을 갖추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최고위 관원이 되는 데 유리했던 것이 다. 그런 가운데 이들이 단종 때에 관원 인사에서 전횡을 하였다는 사 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銓曹 즉 관원 인사 행정을 담당하는 吏曹와 兵曹에서 3望을 갖추어 망단자를 올린 뒤 의정부에서 擬議할 때 그들이 임명을 희망하는 인물의 이름에 황표를 붙여서 국왕 이 그 사람의 이름에 낙점하도록 사실상 강요했다는 黃標政事였다.31) 28) 端宗實錄 卷 4, 단종 즉위년 10월 己丑(1일), 南智는 질병의 문제도 있었지만 전반 적으로 국정 운영에서 소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보았던 顧命謝恩使 선임과 관련하여 안평대군이 자신과 사돈 관계에 있는 남지를 빼고 황보인과 김종서 두 사람에게만 청탁했다고 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안평대군이 죽 음을 당했음에도 남지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29) 端宗實錄 卷 4, 단종 즉위년 12 월 己亥(11 일) 30) 김종서와 황보인의 군사 활동에 대해서는 吳宗祿, 1991 朝鮮初期 兩界의 軍事制度 와 國防體制, 高麗大 博士論文 ; 金順南, 2007 朝鮮初期 體察使制 硏究 (景仁文化 社,서울) 참조 31) 是政 議政府堂上 每日詣賓聽 吏兵曹堂上就議所 除臺省政曹 沿邊將帥及守令 必書三
21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309 이 황표정사의 구상이 김종서의 생각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32) 특히 학문 활동을 중심으로 관직생활을 하고 있던 집현전 학사들의 경 우는 황보인과 김종서 등 고명대신들의 인사 행태에 불만이 많았다. 김 종서와 황보인이 집현전 학사들에 대해 홀대하고 있는 데에는 두 사람 이 집현전에서 근무한 경험이 없다는 점도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아 보인다. 이상의 논점을 살피면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숙부의 난 이라 바 꿔 부를 수 있는 소위 계유정난 에는 세종연간에 지속된 안정적인 정치 의 반작용이라는 속성이 강력하게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14세기 중 반부터 형성되어 온 관원들의 급속한 승진과 고위 관원이 양산되는 정 치적 지형 속에서는 당연히 그에 맞는 정치문화가 발달되어 왔다. 세종 의 문물제도 정비 에 해당하는 여러 사업과 그 성과에 의해 세종 말엽 에 이르러서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정치문화도 일변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 세대 정도 이전까지 백 년 가까이 지속된 급속한 출세를 지 향하는 정치문화의 힘은 정치적 환경이 바뀌면서 다시 발휘되어, 새로 운 양상의 정치문화를 만들어가게 되었다. 4. 王位 簒奪과 반세기만의 功臣 冊封 1) 왕위 찬탈과 그 직후의 인사 정변에 성공한 수양대군은 領議政府事로서 判吏曹事와 判兵曹事를 겸 임하고, 이어서 中外兵馬都統使도 맡았다.33) 영의정부사는 수상의 직책 人姓名 取其中可用者一人 付黃標以啓 魯山但以筆點之而已 時人謂之黃標政事( 端 宗實錄 卷 2, 단종 즉위년 7 월 癸巳(2 일)) 32) 이하 단종 원년 10월 초까지의 관원 인사와 관련된 자료와 서술 내용은 鄭杜熙, 1983 集賢殿學士의 社會的 背景과 政治的 成長 朝鮮初期 政治支配勢力硏究 (일조각, 서울), 쪽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임.
22 310 인문과학연구 제31집 이고, 중외병마도통사는 정규 관직체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임시 직책으 로, 서울과 지방의 병력 전체에 대해 지휘권을 행사하는 임시 직책이다. 따라서 제도적으로 보면 이는 단순히 수양대군이 군사지휘권을 포함하 여 국정 전반을 장악한 것을 뜻한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논점은 그것이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살해할 때부터 이미 계획되어 있었던 것인가, 그 이후의 정세에 의해 추동된 것인가에 모아진다. 이 문제는 전반적 정황으로 보아 소위 계유 정난을 일으킬 때 이전부터 이미 계획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만 계 유정난이 일어난 뒤의 사회 정세가 수양대군이 왕이 되어야만 하는 쪽 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수양대군이 국정 전반에 대한 권 한을 장악한 이면에는 그가 김종서 등을 살해하고 정변에 성공하자 조 선사회 전체가 큰 동요를 일으키고 있었던 점이 자리 잡고 있다. 즉 수 양대군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사회 곳곳에서 대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따라 수양대군에 반대하는 세력을 압살하는 것을 목적으로 위와 같은 비상조치가 취해진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수양대군 일파의 정변은 의외로 쉽게 성공하였다. 이 정변은 수양대군이 權近의 후손으로서 집현전 학사 출신인 權擥과 武士 楊汀 洪順孫 柳溆, 가 동 林於乙云을 거느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가서 그에게 중상을 입히는 데 서 시작하였다. 이에 앞서 수양대군은 새벽에 權擥 韓明澮 洪達孫 을 불러 말하기를 오늘은 요망한 도적을 소탕하여 宗社를 편안히 하겠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약속과 같이 하라. 내가 깊이 생각하여 보니 姦黨 중에 서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것이 金宗瑞같은 자가 없다. 저 자가 만일 먼저 알면 일은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한두 力士를 거느리고 곧장 그 집 에 가서 선 자리에서 베고 라 하였다. 또 수양대군은 김종서의 집으로 갈 때, 옷을 붙잡으며 말리는 宋碩孫 등을 발로 차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 하기를, 지금 내 한 몸에 종사의 이해가 매었으니, 운명을 하늘에 맡긴 33) 端宗實錄 卷 8, 단종 원년 10 월 己酉(26 일).
23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311 다. 장부가 죽으면 社稷을 위해 죽을 뿐이다. 따를 자는 따르고, 갈 자는 가라. 군사는 신속한 것이 귀하다. 내가 곧 姦凶을 베어 없앨 것이니,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 라 하였다.34) 일견 말과 행동이 그럴듯해 보이는데,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이 자객을 보내 암살하거나, 부하들만 보내서 살해한 것이 아니라 수양대군이 직 접 김종서와 황보인을 살해하는 현장에 나가 부하들 앞에서 이들이 죄 인이라고 일종의 웅변을 토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한 행동이 征 伐 이나 討伐 에 해당한다는 것을 내세워 명분을 얻으려는 데서 나온 행동이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 행동을 조선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유교문화에 비쳐 보면, 君子다운 행동과는 전혀 거리가 먼, 오히려 불한 당이나 하는 짓에 가깝다.35) 먼저 임금에게 아뢰어야 한다며 몇몇이 반 대하자 수양대군이 망설이는 것을 보고 뒤에서 반대 의견을 무시하도록 사주하며 불한당의 행동을 서슴지 말도록 부추긴 것은 韓明澮였다. 수 양대군의 이 행동은 아마도 자신의 祖父인 太宗 李芳遠이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 부하 몇을 거느리고 가서 鄭道傳을 살해한 것을 본 딴 것 으로 보이는데, 그렇다고 해도 불한당의 짓에서 바뀔 것은 없었다. 오히 려 이 정변이 처음부터 왕위 찬탈을 목적으로 계획된 것이었을 개연성 이 크다는 사실을 드러내줄 따름이다. 정변이 성공한 뒤 이어진 일들로는 첫째로 수양대군 일파가 주요 관 직을 차지하는 인사 작업을 들 수 있고, 둘째로 안평대군 및 김종서 등 과 관련된 세력 그리고 수양대군과 그 일파에 반대하는 세력을 축출하 고 처치하는 작업을 들 수 있으며, 셋째로는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도 록 여러 공작을 전개한 것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궁극적인 목적은 34) 世祖晨召權擥 韓明澮 洪達孫曰 今日當掃妖賊 以安宗社 諸君宜如約 我熟思之 姦黨 之最姦黠者 莫如金宗瑞 彼若先知 則事不集矣 我率一二力士 徑詣其家 立斬之 碩孫 等牽衣止之者再三 世祖怒曰 汝等盡往先告 吾不汝資 遂援弓起立 蹴其止者 指天誓曰 今吾一身 宗社利害係焉 托命於天 丈夫死則死於社稷而已 從者從 去者去 兵貴拙速 吾卽剪除姦兇 孰敢枝梧 ( 端宗實錄 卷 8, 단종 원년 10 월 癸巳(10 일)) 35) 이에 대한 지적은 崔承熙, 2002 앞 책, 쪽 참조
24 312 인문과학연구 제31집 수양대군이 국왕으로 즉위하도록 하는 데에 있었음은 당연하다. 따라서 첫째와 둘째 작업은 사대부들의 여론과 민심을 엿보면서 강도와 속도를 조절할 수밖에 없었다. 관료 조직을 개편하기 위한 인사는 정변이 일어난 다음날에 즉각 시 행되었다. 이때 임명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36) (1) 議政府 首陽大君 領議政府事 領經筵書雲觀事 兼判吏兵曹事 鄭麟趾 議政府 左議政 許 詡 議政府 左參贊 (2) 六曹 鄭昌孫 吏曹 判書 金 銚 禮曹 判書 李季甸 兵曹判書 朴仲林 戶曹參判 朴仲孫 兵曹參判 洪達孫 兵曹 參議 金子鏗 刑曹 參議 (3) 兩司 權 蹲 司憲府 大司憲 許 錘 司諫院 左獻納 金季友 司諫院 右獻納 孔 頎 司諫院 右正言 (4) 承政院 崔 恒 承政院 都承旨 申叔舟 右承旨 朴彭年 左副承旨 朴元亨 右副承旨 權自愼 同副承旨 (5) 中樞院 李宗睦 僉知中樞院事 (6) 監司, 兵使, 水使 閔 騫 忠淸道 觀察使 奇 虔 平安道 觀察使 成 勝 忠淸道 兵馬都節制使 朴好問 咸吉道 兵馬都節制使 金允富 忠淸道 水軍都安撫處置使 36) 端宗實錄 卷 8, 단종 원년 10 월 甲午(11 일)
25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313 이날 새로 임명된 관직은 대부분 황보인이 맡고 있던 영의정부사, 김 종서가 맡고 있던 좌의정 등 정변에 의해 희생되었거나 안평대군과 김 종서, 황보인의 일당으로 지목되어 축출 제거하기로 의논된 사람들의 자리였다. 즉 이 인사의 이면에는 정변에 의한 慘殺과 숙청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그러한 까닭에 연이어 후속 인사가 이루어지면서 수양대 군 일파가 속속 관직에 진출하게 된다. 이 점도 뒤에 살필 靖難功臣 책 봉과 아울러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이 미리 계획된 것이라는 사실을 나 타내는 주요 증거라 할 수 있다. 2) 靖難功臣 冊封 수양대군과 그 일파가 요직에 진출하는 관직 임명에 이어서 정변 5 일 뒤에는 靖難功臣의 책봉이 이루어졌다.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37) 靖難功臣 名單 (1) 1등공신 首陽大君 鄭麟趾 韓 確 朴從愚 金孝誠 李思哲 李季甸 朴仲 孫 崔 恒 洪達孫 權 擥 韓明澮 (2) 2등공신 權 蹲 申叔舟 尹士昀 楊 汀 柳 洙 柳 河 奉石柱 洪允成 郭連城 嚴自治 田 畇 (3) 3등공신 李興商 李禮長 成三問 金處義 權 躽 薛繼祖 柳 泗 康 袞 林自蕃 柳子晃 權 擎 宋益孫 洪順孫 曹 潤 柳 溆 安慶孫 韓明溍 韓瑞龜 李蒙哥 洪純老 이상의 공신 명단을 앞의 관직 인사 명단과 함께 볼 때 눈에 띄는 37) 端宗實錄 卷 8, 단종 원년 10 월 戊戌(15 일)
26 314 인문과학연구 제31집 것 가운데 하나가 정변과 전혀 관련이 없고 뒤에 세조를 축출하고 단종 을 복위시키고자 했던 주역인 朴彭年과 成勝 成三問 父子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오래 전에 집현전에 몸담았던 鄭麟趾와 李思哲 崔 恒을 비롯해 權擥 成三問 申叔舟 등 집현전 학사 출신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었다는 것은 김종서와 황보인이 주도하던 조정의 모습과 달라진 대목이었다. 이것은 수양대군 일파가 기왕에 관료조직 내부에 쌓인 불 만을 일부 해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사대부의 여론을 얻으려 한 때문 으로 판단된다.38) 그런데 큰 안목으로 보면 이 정난공신 책봉은 조선왕조 정치사의 전 개에 거대한 변동을 야기한 사건이었다. 그 하나는 이로부터 훈구세력 이라 부르는 정치세력의 대두가 본격화한 것으로, 이미 이 점에 대해서 는 잘 알려져 있다. 훈구세력의 대두는 국왕이 관원들의 충성을 요구하 는 중요한 수단의 하나였던 科田法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과 전법 아래에서 과전은 당초에 관원 신분을 갖춘 모든 이들에게 지급되 었었다. 이러한 과전의 收租權은 토지와 그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에 대 한 지배력을 보장하는 일종의 특권이었다. 그런데 과전의 지급 면적이 줄어들다가 세조 때에 이르러 현직 관원에게만 지급되는 職田法으로 바 뀌고, 이어서 성종 때에 職田稅로 바뀜으로써 토지와 농민에 대한 관원 의 실질적 지배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토지와 농민을 지배하는 특권으로서 수조권을 지급받는 존재로는 功臣田을 받 는 공신들만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즉 국왕과 왕실 구성원, 왕실과 혼 인관계를 맺은 세력 등에 버금가는 특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공신이었는데, 이 공신이 대거 생겨나게 된 것이다. 정난공신을 주목해야 하는 역사적인 이유는 태종 즉위 이래로 공신 세력이 약화 일로를 걷고 있던 추세가 정반대의 방향으로 바뀐 데에 있다. 38) 이 측면에 대해서는 鄭杜熙, 1983 世祖 成宗代 功臣勢力의 政治的 性格 朝鮮初 期 政治支配勢力硏究 (일조각, 서울) 참조
27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315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에 구실이 되었던 것 가운데 하나가 태종과 세 종 때에 전개된 정치를 계승 발전시키는 데에 있었다는 사실은 새삼스 럽지 않다. 세조가 태종, 세종에 이어 민본정치와 부국강병을 표방한 것 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태종과 세종 때에는 공신을 한 번도 책봉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조가 왕이 되는 과정에서 정 난공신을 책봉한 것은 그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임이 분명하다. 세종 때에 왕조의 차원을 넘어 민족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 는 여러 업적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 도 세종은 공신을 한 번도 책봉한 적이 없었다. 토지와 농민의 지배와 관련된 특권을 행사하는 존재가 수십 명 이상으로 늘어난다는 것은 한 편으로는 왕권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데다가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심각한 폐해를 끼칠 우려가 크기 때문에 세종이 공신을 전 혀 책봉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와 달리, 세조 때 이후 로는 새 국왕이 즉위하면 의례적으로 공신 책봉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는 세조가 정난공신에 이어 1455년(세조 1) 9월 佐翊功臣 46명을 책봉 하면서 관례로 자리 잡았다. 또 1455년 12월에는 原從功臣을 2,000명 넘 게 선정하여 책봉하였고,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추록되어 그 수가 2,200 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39) 이어서 1467년(세조 13)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반란을 진압한 뒤 다시 공신을 책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조연간을 거치는 동안 공신을 중심으로 거대한 정치세력의 결집이 가 능해졌다. 이 때문에 15세기 말엽 이후 16세기까지의 공신과 이를 주축 으로 하는 정치세력은 한편으로는 국왕의 초월적 특권에 의지하면서 한 편으로는 사회적으로 왕권에 버금가는 특권을 행사하는 집단으로 존재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변화는 부국강병 의 지향이 껍데기 만 남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공신이 늘고 공신전의 면적이 급 증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로 들어갈 조세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을 의 39) 崔承熙, 2002 앞 책, 308 쪽
28 316 인문과학연구 제31집 미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말의 농장 발달과는 양상이 다르기는 하나, 훈 구세력의 농장이 발달하면서 국가 재정은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훈구 세력은 고리대로 수익을 더욱 늘리고 늘어난 수익으로 땅을 사들여 농 장의 덩치를 더 키웠고, 땅을 잃은 농민들은 결국에는 노비로 전락해 갔다. 즉 민본정치가 허구로 되는 데에는 대규모 공신세력의 형성이 중 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또 국가 재정이 약화되면 당연히 강력한 군 대를 갖추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법이다. 따라서 부국강병도 공염불이 될 수 밖에 없었다. 3) 세조연간의 정승 세조는 즉위한 이래 부왕인 세종의 정치를 계승하고자 여러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세조의 의도와 나타난 결과가 얼마나 일치하는가는 다시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다. 예를 들면, 세조가 圓丘에 나아가 하늘에 제사를 지낸 것이나 새로운 악곡을 제작한 것 등은 세종 이 龍飛御天歌 를 짓도록 한 것과 같이 왕권의 초월성을 강화시키는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많은 공신을 책봉한 가운데 이들의 특권 을 약화시키고 통제할 수 있는 실질적인 조치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 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국왕의 초월적 특권의 힘도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후대의 왕위계승에 따라 지속적으로 공신 책봉의 관행 을 만들었다는 점은 태종과 세종이 걸어온 정치 행보를 전면으로 거스 르는 일이었다. 이로부터 비롯된 문제점은 어떤 사람들이 세조 때 정승이 되었는가 를 통해 파악이 가능하다.40) 세조 때 영의정에 오른 인물은 鄭麟趾, 鄭 昌孫, 申叔舟, 具致寬, 崔恒 등 5명이고, 좌의정은 韓確, 李思哲, 姜孟卿, 韓明澮, 具致寬, 黃守身, 曺錫文 등 7명, 우의정은 李思哲, 鄭昌孫, 申叔 40) 이 부분은 주로 鄭杜熙, 1983 앞 책, 쪽에 의거하였음.
29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317 舟, 權擥, 具致寬, 黃守身, 朴元亨, 康純 등 8명이 각기 역임한 바 있다. 평균 재직 기간은 단순히 계산하면 영의정이 약 2년 4개월, 좌의정 1년 10개월, 우의정 약 1년 7개월이어서 영의정을 제외하고 보면 세종 때에 비해 조금 짧아진 정도인 것으로 나타나나, 한 사람이 解職되었다가 다 시 임명되는 일이 반복되는 경우가 몇 차례 있어서 실제로 장기간 의정 에 재직하였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것보다 주목되는 것은 鄭麟趾, 鄭昌 孫, 韓確, 姜孟卿, 具致寬 黃守身 정도만이 처음 의정이 되었을 때의 나 이가 50대 또는 60대이고, 나머지 인물들은 40대에 의정에 올랐다는 사 실이다. 대표적으로 申叔舟가 우의정이 되었을 때의 나이는 42세였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것은 의정에 오른 사람들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공신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41) 세조 즉위 후 佐翼功臣을 책봉하였을 때 그 핵심인 韓明澮, 申叔舟, 權擥이 각각 41세, 39세, 40세 였는데,42) 이들과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이들이 주로 공신에 책봉되었 던 것이 그 원인이었다. 공신인 인물로만 의정이 임명되는 양상은 뒷날 성종 재위 25년 동안에도 지속되었다. 성종 때 공신이 아닌 인물로 의 정이 된 경우는 尹豪가 유일하였는데 그는 왕실의 외척이었다. 앞의 세조연간 의정의 인사 내용은 세조 즉위과정에서 정치적 지형 이 크게 바뀌었다는 사실의 한 부분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세조는 그 재위기간 동안 인심을 수습하기 위한 목적과 친위세력을 키우려는 목적 아래 加資를 빈번하게 시행하였다. 즉위 직후에 백관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加資를 하였을 뿐아니라, 단종 복위운동을 처리한 뒤에도 역 시 대대적인 가자를 시행하였고, 재위 후반에는 圓覺寺에 瑞氣가 나타 났다거나 佛事를 거행하는데 瑞氣가 나타났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가자 를 한 일도 있었다.43) 당시 明에서도 祥瑞로 일컫는 신비로운 현상을 41) 鄭杜熙는 이와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鄭杜熙, 42) 鄭杜熙, 1983 위 책, 43) 崔承熙, 2002 앞 책,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도 거의 모두 공신들로 임명되었음을 1983 위 책, 219 쪽) 215 쪽 쪽.
30 318 인문과학연구 제31집 皇帝의 권위를 높이는 데 이용하는 사례가 빈번하였고 그 사실이 조선 에도 잘 알려져 있었으나, 태종 세종연간에는 국내정치에 祥瑞를 적극 적으로 이용하려는 양상은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세조는 정통성의 결함을 극복하고자 祥瑞 현상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고, 이에 따라 관 원의 승진이 빨라지는 양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세 조가 국정을 운영한 결과는 官品이 이미 높이 올라간 관원이 많으나 고 위 관직이 제한되어 있어서 이들이 관품보다 훨씬 낮은 官職도 마다하 지 않고 맡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成宗 때에는 심지어 100여 명의 堂上 官이 8, 9픔의 軍職을 行職으로 제수받는 일까지 나타났는데, 이는 세종 연간에 守直 중심으로 行守制가 시행되었던 것과는 정반대되는 양상이 었다. 또 당상관들이 祿이 없는 遞兒職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지적마저 나오고 있었다.44) 세조는 국왕으로서 공적 국가제도를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 고 측근세력을 형성하는 사적인 목적에 이용하였다. 이러한 세조의 모 습은 공신들 사이에서도 방법은 다르나 일종의 모범으로 작용하였다. 태종연간 이래로 일종의 금기가 되었던 공신들 사이에 혼인을 통해 적 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일이 공공연하게 전개된 것이다. 한명회가 신숙 주 집안과 연달아서 혼사관계를 맺었다. 권람도 한명회의 집안과 혼사 관계를 맺으려 하니, 한명회가 거절하기가 어려워서 신숙주에게 물었다. 신숙주가 이건 쉬운 일이오. 우리 세 사람은 공로가 같은데 신숙주 집 안과 혼인하고 또 그대의 집안과 혼인한다면 임금이 혹시 우리 세 사람 이 지나치게 가깝다고 여겨 의심하지 않으리오라 하면 되지 않겠소 하 였다. 곧 신숙주의 말처럼 답하니 권람이 흔연히 말하기를, 나의 생각 이 미처 이르지 못하였소. 하였다. 는 일화는 어디까지 사실인지 정확 히 알 수는 없으나 당시의 정치문화가 일변하였음을 드러낸다.45) 44) 한충희, 1994 관직과 관계 한국사 23 (국사편찬위원회,과천) 45) 李肯翊, 燃藜室記述 世祖朝故事本末 相臣 韓明澮
31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세조 즉위과정이 정치문화에 끼친 영향 지금까지도 많은 연구자가 세조의 즉위과정이 당시의 유교적 정치문 화가 용납하기 어려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 고, 일부 연구자는 그럼에도 세조와 그 정권이 이룬 업적은 높이 평가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양자 모두 평가 기준이 과연 유교 내지는 성리학적 가치관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가 의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세조의 즉위과정을 비판적으로 보는 연구자들의 인식은 士林들의 인식과 유사한 측면이 많고, 그와 달리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勳舊勢 力의 인식과 유사한 점이 많은 것이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이러한 인식 수준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좀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당시의 정치적 변화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세조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정변으로서 叔父의 亂 이라고 부르는 것 이 더 적절한 癸酉靖難 으로부터 조카로서 왕위에 있던 端宗에게서 왕 위를 선양받아 즉위하는 과정은 조선의 정치적 지형도를 크게 바꾸기에 이르렀다. 이미 고려말엽에 거듭된 내우외환을 겪으면서 상당한 정도로 지배층의 확대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나, 조선의 건국 과정에서 이들이 얼마나 관원층으로 수용되었는지는 미지수이다. 그러 나 몇 차례 왕위의 세습이 이루어진 뒤인 15세기 후반에 이르는 동안 사회경제적 발전과 아울러 인구 규모도 점진적으로 커지고 관원층의 수 또한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다짐하며 조선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했던 이들의 자손들도 관직에 진출하면서 더욱 크게 증가하였던 것으로 나타 난다. 관원이면 반드시 實職이든 檢校職, 同正職 등의 散職이든 관직을 보유해야만 했던 고려시대의 원칙이 폐기되어 1444년(세종 26)에 이르러 이른바 관품과 관직의 분리 가 이루어지게 된 것도 이러한 관원층의 증 가가 주된 원인이었다.46) 그러한 가운데 세종연간에 인사관리규정이 속 46) 南智大, 1993 앞 논문, 쪽.
32 320 인문과학연구 제31집 속 정비되어 시행된 결과 세종 말엽에 형성된 정치적 지형은 국왕을 정 점으로 하여 소수의 60 70대 노숙한 관원들이 정승, 판서로 재직하고, 관원의 대다수가 7품 이하의 품계에 묶여 있어서 參上官職에 임명할 사 람이 부족하여 守職을 중심으로 행수제를 시행해야만 하는 모양새로 자 리를 잡았었다. 이에 비해 15세기 말엽 성종연간에 이르면 세조의 즉위 과정에서 진행된 반세기만의 功臣冊封과 연이은 百官加資가 관행으로 정착함에 따라 고위관원의 수가 급증하는 결과로 나타나, 당상관에 오 른 관원의 수가 300명을 훨씬 넘게 되었다. 經國大典 에 규정된 京官 職에서 당상관의 正職은 遞兒職과 無祿官職까지 東班 78, 西班 30, 합하 여 108窠이고,47) 外官職은 觀察使 8, 兵馬節度使 7, 水軍節度使 5, 합하 여 20窠이므로, 200명 정도의 당상관 관원들이 하급 관직을 行職으로 맡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世祖가 4품 이상 관직에 대한 臺諫의 署經 절차를 없앴다는 것은 고위 관원들의 관료적 속성보다는 정치인으로서의 속성을 강화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치적 지형의 변화 중 공신 수의 급증 현상은 이미 충실하 게 밝혀져 있다. 그리고 서로 혈연관계가 있는 공신들이 개국 초의 開 國 定社 佐命功臣에도 일부 있었기는 하나, 세조의 권력 장악과 즉위 과정에서 책봉된 靖難 佐翼功臣으로부터 그 비중이 크게 늘어나기 시 작한다는 점도 밝혀져 있다.48) 이러한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공신을 선 정하는 주도권이 공신집단 자체로 상당한 정도 옮겨갔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49) 이로부터 비롯된 폐단은 中宗反正 이후 反正功臣과 靖 47) 韓忠熙, 1994 앞 책, 101 쪽 <표 2>, 106 쪽 <표 4> 참조 48) 開國 定社 佐命공신은 王室 구성원이거나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은 인물들이 많았고 예외적으로 李居易 李佇 父子와 閔無咎 閔無疾 兄弟가 있기는 하나 李佇는 太宗과 사 돈관계였고 閔無咎 형제는 태종의 처남이었다.(鄭杜熙, 1983 앞 책, 9 10쪽 <표 1-1>, 31쪽 <표1-4>, 41 41쪽 <표1-6>). 世祖 때의 공신 상호간의 인척관계와 成宗 때의 공신 상호간의 인척관계는 위 책, 214쪽, <표 4-7>과 245쪽 <표 4-20>을 참조 49) 功臣을 선정하는 권한을 국왕과 공신집단 중 누가 주도적으로 행사하였는가의 측면 에 대해서는 崔承熙, 2002 앞 책, 쪽과 2005 앞 책, 쪽에서 분석한
33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321 國功臣을 책봉할 때에 이르러 공신들이 공신을 선정하는 주도권을 행사 하는 것을 넘어서서 사실상 스스로 공신을 선정함으로써 극대화되었다. 조선건국 초엽 靖難 佐翼功臣 등의 공신집단이 국왕을 중심으로 하여 상호간에 느슨한 관계망을 형성하였다면, 15세기 후반 이후 16세기 전 반의 공신집단은 중심에 선 국왕의 비중이 점차 약화되고 상호간의 관 계망은 더 촘촘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開國 定社 佐命功臣은 그 출신이 다양하였다. 여진족 족장 출신인 李之蘭은 특수한 예에 해당하겠지만, 武將 출신이 많고, 文臣들도 新進 士大夫에 해당하는 이와 고려의 전통적 名門家 출신인 이가 혼재되어 있었다. 그것이 공신 상호간의 인척관계가 별로 형성되지 않았던 중요한 이유로 생각된다. 이에 비해 世祖代 이후의 공신들은 대부분 조선건국 후 대대로 고위관원을 배출한 가문 출신이었다. 세조 때 공신의 세 핵심 도 모두 그러했다. 韓明澮의 조부인 韓尙質은 開國功臣으로 領議政府事 를 지낸 韓尙敬의 형이다. 權擥은 權近의 손자이며, 申叔舟는 藝文春秋 館 大提學을 지낸 申檣의 아들이다. 이러한 공신집단 내부의 속성 변화 는 그들의 세력을 쉽게 약화시키지 못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자연히 공신집단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커져가게 되었다. 開國功臣 52명, 定社功臣 29명, 佐命功臣 46명인 것에 비추어 보면, 세조 즉위과정에서 책봉한 靖難功臣 43명, 佐翼功臣 46명과 이시애의 반란을 진압하고 책봉 한 敵愾功臣 45명은 규모가 별로 커졌다고 하기 어렵다.50) 그런데 개국 공신 중 鄭道傳과 南誾 등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피살되면서 죄인으로 규정되었고, 정사공신 중 李芳懿와 李芳幹은 제2차 왕자의 난으로 공신 록에서 삭제되었으며, 개국공신이자 좌명공신인 朴苞, 정사공신이자 좌 명공신인 李居易 李佇 부자, 閔無咎 閔無疾 형제, 李叔蕃 등은 태종에 바 있는데, 開國功臣과 그 原從功臣에 대해서만 太祖가 冊封을 주도하였고 따라서 開國功臣의 권력은 알려진 것보다 약하다는 분석을 하였을 뿐 그 밖의 다른 功臣들 에 대해서는 그와 같은 분석을 하지 않았다. 50) 각 공신의 규모는 鄭杜熙, 앞 책, 9 10쪽 <표 1-1>, 31쪽 <표1-4>, 쪽 <표 4-1>, 쪽 <표 4-5>, 쪽 <표 4-11> 참조
34 322 인문과학연구 제31집 의해 숙청당해 죽거나 禁錮되었다. 특히 이렇게 공신에서 제거된 이들이 공신집단의 핵심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비해 세조와 관련하여 책봉된 靖難 佐翼 敵愾功臣 중에서는 成三問이 死六臣 사건 으로 알려져 있는 端宗 復位 시도 사건에 의해, 楊汀이 세조에게 불경한 죄로, 그리고 康純과 南怡가 睿宗 즉위 후 남이의 옥사 로 알려져 있는 사건에 의해 죽음을 당했는데, 세조 때의 공신집단에서 핵심을 이룬 세 력은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이 결국 成宗 즉위 후 佐理功臣으로 75명이 책봉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던 것이다.51) 王權에 버금가는 特權을 지니는 功臣勢力과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 하는 권한을 지니는 堂上官 관원층의 비대화를 가장 강력한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적 지형은 곧바로 건국 후 세종 때까지 이어져오던 흐 름과는 반대되는 정치문화의 흐름이 생겨나게 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세습성의 강화였다. 관원의 세습성이 강화되는 양상은 기 록을 통해 직접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방 증은 여러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하나가 서서히 中人이라는 새 로운 신분 계층이 형성되어 간 것이다. 16세기에 譯官과 醫官 등 이른 바 고급 技術官이 특정 가문에서 지속적으로 배출된 양상은 이미 잘 알 려져 있거니와, 畵員에서도 유사한 양상이 전개된 바 있다. 또 그 동안 6품으로 去官하면서 그 상당수가 縣監 등의 관직으로 진출하던 上級書 吏인 錄事 역시 15세기 말엽부터는 入仕가 전혀 불가능하게 되었는데, 그 원인을 蔭敍로 入仕하는 인원이 급증한 것 외에는 다른 데서 찾을 수는 없다.52) 賢良科를 둘러싼 갈등도 그 내면은 성리학 윤리의 실천이 현저한 士林과 음서로 관직에 진출한 이들 사이에서의 出六을 둘러싼 대립이었다. 중종 때 비로소 士族의 자격을 규정했다는 점도 세습성의 강화라는 맥락 위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51) 鄭杜熙, 위 책, 쪽 <표 4-17> 52) 오종록, 2001 조선전기의 京衙前과 중앙행정 高麗-朝鮮前期 中人硏究 延世大 國學硏究院 편 (신서원, 서울) 쪽.
35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323 조선초기의 정치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는 成俔( ; 세종 21 연산군 10)의 庸齋叢話 가 있다. 그 가운데서 부분적으로나마 정치문화의 변화 양상을 알려주고 있는 것을 아래에 제시하고자 한다. 풍속이 옛날과 같지 않은 것이 많다. 옛적에는 잔치를 한 뒤에 음악을 연 주하였으며, 먼저 수고비를 갖춘 뒤에 기생을 불렀다. 음식에도 규제가 있었 고, 음악은 眞勺 慢機 紫霞洞 橫殺門 등의 곡을 연주하게 하고, 조그마한 잔을 돌려 酬酢을 하나 술은 조금씩 따르고,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불러 떠들 고 주정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근래에는 잔치가 모두 사치스럽다. 密 果를 모두 짐승의 모양으로 만들어 사용하고, 饌床을 마련하고도 또 饌盤을 갖춘다. 좋은 안주와 맛있는 음식이 없는 것이 없고, 탕과 구운 고기를 모두 여러 가지로 하여 한 가지가 아니다. 술이 끝나기도 전에 가야금 줄을 당기 고 피리를 불라고 재촉하여 장고 박자에 춤을 추며 쉴 줄 모른다. 더러는 射 會를 빙자하고, 더러는 迎送을 빙자하는데, 帳幕이 성문 밖에까지 이어지며, 하루 종일 마음대로 놀고 職事를 돌보지 않는다. 또 저택에 세 사람만 모여 도 반드시 기생과 악공을 부른다. 여러 관청의 노비들에게 돈을 꾸어서 음식 을 장만하게 하고, 조금이라도 성에 차지 않으면 반드시 매질을 하니 노비들 이 날로 빈곤해진다. 노래하는 기생에게 수고비는 주지 아니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어다니도록 만들어 치마와 저고리가 다 해질 지경이며, 청하는 서신을 보내는 자들이 너무 많아 악공들이 악기를 조율할 겨를이 없게까지 되었다.53) 世祖는 즉위 직후부터 여러 명목으로 행사를 하면서 잔치를 열고 술 자리를 베풀어 임금과 신하가 함께 취했다 고 할 정도여서 이를 酒席 政治 라 규정한 연구도 있다.54) 常參을 하고 나면 으레 술자리를 열었으 므로 거의 매일 신료들과 술을 마셨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당연히 관 료사회에도 영향을 끼쳤다. 53) 민족문화추진회, 1971 국역 대동야승 Ⅰ, 용재총화 권 1, 20 쪽. 번역문은 원문을 확인하여 필자가 수정한 것임. 뒤의 인용문도 이와 같음. 54) 崔承熙, 2002 앞 책, 쪽.
36 324 인문과학연구 제31집 洪仁山은 과거에 급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世祖의 靖難을 도와 성상의 총애를 입어 賞賜를 많이 받았다. 또한 재물을 모으는 데에 힘써서 돈꾸러미 를 모아 둔 것이 鉅萬이나 되었으며 곡식은 그 배였다. 여러 고을 수령이 보 낸 官奴로서 物貨를 가져와 바치는 자가 그치지 아니하고, 짐을 실은 수레가 문 밖에 가득 차고, 늘어선 사람들이 거의 만 명이나 되었다. 대궐 같은 집을 지었는데, 못가에다 堂을 지으니, 世祖가 傾海 라는 두 글자를 써 주었다. 이 름 있는 유생과 큰 선비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지 않는 날이 없었으니, 음식이 넉넉하여 비록 何曾의 萬金의 음식이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악기 소리가 맑게 울려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고, 坐客들이 그 위엄에 눌려 만취하지 않을 수 없어 말을 거꾸로 타고 집으로 돌아 갈 지경이었다. 기생들의 수고비로 쓰이는 돈도 또한 헤아릴 수 없었다. 부귀를 누린지 20여 년에 명성과 권세가 더욱 빛났다.55) 위는 仁山君 洪允成에 대한 기록이다. 世祖의 酒席政治 의 영향이 정난공신의 서열에서 제일 끝에 있었던 홍윤성에게서 어떻게 나타났는 지 위의 내용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처럼 정치문화가 탁 해지는 변화에도 초연하게 선비다운 모습을 보인 이도 있었다. 아래에 보이는 佐理功臣인 益城君 洪應이 그 예이다. 임금의 명을 받들고 使臣으로 가는 사람이 있으면 동료들이 모두 맞이하 여 술자리를 베풀었고, 또 떠나는 날에는 모두 교외로 나가서 전송하였는데, 비록 勳臣과 貴臣이라 할지라도 속태를 면치 못하였다. 오직 洪益城만이 임 금의 명을 받들고 궁궐에 나아갔을 뿐, 다른 곳에는 인사를 가지 않았으며, 또 마중이나 전송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서울로 오는 사신이나 각 도의 감 사가 떠나는 날도 다만 錄事를 보내 술 한 병을 가지고 가서 전송하게 하였 으니, 당시 사람들이 홍익성이야말로 재상의 체모를 얻었다 하였다.56) 洪應이 錄事를 보내서 전송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른 것은 성종 때이 55) 민족문화추진회, 앞 책 용재총화 권 4, 48 쪽. 56) 주 54)와 같음
37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325 므로, 위의 일은 성종 때를 나타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5세기 전반 에는 고려 때의 전별연이 너무 과도하게 비용을 썼다며 간소하게 할 것 을 요구하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15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고려 때 의 모습이 재연되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앞에 제시한 기록을 보면, 과 거와 달리 관원들이 단순히 술자리를 자주 갖는 것을 넘어서서 그 비용 을 관노비에게 전가하고, 기생들에게는 수고비를 주지 않는 횡포를 부 리기 시작하였음을 볼 수 있다. 관노비들에게는 그것이 횡포이지만, 관 원들에게는 그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의 발로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에 따라 세종 때까지 강조되었던 爲民政治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나 아가 온갖 수단을 써서 약자를 괴롭히며 이익을 취하는 것이 어느덧 당 연한 일로 여겨지게 되었다. 옛날에 새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을 제재한 것은 호탕한 선비로서의 기를 꺾고 상하의 구별을 엄격히 하여 각 관청 특유의 규칙을 따르게 하려는 목적 에서였다. 바치는 물품이 물고기면 龍이라 하고, 닭이면 鳳이라 하였으며, 술 은 청주면 聖이라 하고, 탁주면 賢이라 하였고 그 수량도 제한이 있었다. 처 음으로 관직에 나가는 것을 許參이라 하고 10여 일을 지나 舊官과 자리를 같 이하는 것을 免新이라 하여 그 정도가 매우 분명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성 균관 예문관 승문원 교서관의 四館뿐만 아니라, 忠義衛 內禁衛 등 여러 衛의 군사와 吏典, 僕隸들까지도 새로 배속된 사람을 괴롭혀서 여러 가지 귀 하고 맛있는 음식을 졸라서 바치게 하는데 한이 없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흡 족하지 않으면 한 달이 지나도 같이 자리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아니하고, 사 람마다 연회를 베풀게 하되 만약 기생과 악공이 없으면 여러 가지로 요구하 는 것이 끝이 없다.57) 이 내용은 文科 及第者가 4館 分館을 하여 관료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겪는 免新禮가 가혹해졌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것이 관청에서 일하 57) 주 52)와 같음
38 326 인문과학연구 제31집 는 文臣, 武臣, 中人, 奴婢 각각에서 공히 유사한 흐름으로 변하고 있었 음을 알려준다. 면신례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그 의례의 내용은 각 공동 체가 유지해 온 전통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초기의 여러 관청들도 업무의 성격 등에 따라 그 구성원으로서 근무하는 방식에도 많은 차이가 있었고, 따라서 면신례의 내용도 서로 달랐다.58) 그런데 15 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각 관청에서 기존의 구성원이 그들과 대등한 신분적 지위를 새로 확보하여 동료로 근무하기 시작하는 이들에게 자신 들의 기득권을 특권으로 이용하여 갖은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장치로 면신례를 이용하는 변화가 일어났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건국 후 世宗 때까지의 정치문화의 흐름이 爲民을 표방하면서 近世的 인 내용을 지향하고 있었다면, 世祖의 즉위 이후에 나타나는 정 치문화의 흐름은 분명히 그 이전 시대의 것과 흡사한, 반동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세조의 여러 공 신 가운데 최고 실세라 할 韓明澮의 王室과의 重婚이다. 두 딸이 睿宗 妃인 章順王后와 成宗妃인 恭惠王后가 되었고, 예종 때와 성종 때 각기 國舅로서 領議政을 지낸 인물이 바로 한명회이다. 그의 卒記에 남긴 史 官의 논평에서도 그의 시대에 정치문화가 어떤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는 지를 살펴볼 수 있다. 史臣이 논평하기를, 韓明澮는 젊어서 儒學을 業으로 삼아 이루지 못하고, 世祖가 潛邸에 있을 때에 알아줌을 만나, 大策을 贊成하여, 그 공이 제일을 차 지하였으며, 10년 사이에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고, 마음속에 항상 國務를 잊 지 아니하고, 품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 이루어낸 것 또한 많았다. 그 58) 朝鮮初期에 司憲府와 司諫院은 그 관원의 공동 활동도 빈번하고 서로 상대 관청의 관원으로 교체되어 임명되는 일도 잦았으나 그 근무하는 방식이 전혀 달랐음은 庸 齋叢話 에 기록되어 있고, 일찌기 崔承熙, 1976 朝鮮初期 言官 言論硏究 (서울대 韓國文化硏究所)에서 소개한 바 있다. 중앙 관청 면신례의 구체적 내용으로는 司憲 府 監察의 면신례와 承文院 成均館 校書館 3館의 면신례가 위의 내용과 별도로 庸齋叢話 에 기록되어 있다.
39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327 러므로 權勢가 매우 성하여, 趨附하는 자가 많았고, 賓客이 문에 가득 하였으 나, 응접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여, 一時의 宰相들이 그 문에서 많이 나왔 으며, 朝官으로서 말채찍을 잡는 자까지 있기에 이르렀다. 라 하였다.59) 15세기 후반부터 정치문화가 바뀌어가는 내용의 핵심은 特權과 世襲 의 강화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法과 制度에 의해 보장된 官員들의 특권은 科田法의 변천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약화 소멸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고, 그 변화 추세는 世祖 때에도 또 그 뒤 成宗 때에도 職田法과 職田稅로 제도를 바꾸어 시행함으로써 일관성을 유지 하고 있었다. 政治的 地位의 세습도 법과 제도로는 특별히 그 보장을 강화하는 변화가 이루어진 바 없었다. 그러나 武斷的으로 권력을 장악 하고 王位를 넘겨받는 형태로 세조의 즉위가 이루어진 결과는 정치문화 의 흐름을 퇴행시키게 되었고, 결국 조선왕조의 역사가 흘러가는 방향 도 크게 바뀌게 되었다. 6. 맺음말 조선시대의 역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15세기 후반은 경제가 전반적 으로 발전하면서 지주제가 본격적으로 발달하는 시기로 평가된다. 그런 데 지주제의 발달을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가 자영농의 몰 락이며, 사회적으로는 노비가 급증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경제 발전의 과실이 훈구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특권층에게 집중되는 양상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가 진행되는 데 결정적 계 기로 작용한 것이 세조의 권력 장악과 왕위 탈취였다. 조선 건국과 그 직후의 왕위 계승 과정에서 정치적 격변을 겪은 이 59) 成宗實錄 卷 209, 成宗 18 년 11 월 己酉(14 일)
40 328 인문과학연구제31집 후태종 세종연간에전개된정치와문물제도의정비는왕권의초월적권위를강화하는데초점이맞추어져진행되었다. 건국과왕자의난등태종이즉위하기까지의주요사건과관련하여책봉된공신들은숙청등의과정을거쳐통제되었고, 공신들은국왕을매개로상호관계를형성할뿐세력화할수없었다. 관료제도와그운영원칙이정비되어강력하게적용되면서고위관원의수도적절한수를넘지않았다. 예악의정비와 용비어천가 간행등세종때진행된문물제도의정비는왕실과국왕의권위강화작업의백미였다. 그러나세조가권력을장악하고즉위하는과정에서책봉된공신들은이미상호관계를갖추고있었고, 특히세조가죽은뒤훈구세력으로서큰힘을발휘하였다. 관료제도의운영원칙은세조에의해왜곡되어고위관원이비대해졌고, 고위관직도전보다자주교체되었다. 왕권에버금가는특권을지니는공신세력과정치적의사결정에참여하는권한을지니는당상관관원층의비대화를가장강력한특징으로하는새로운정치적지형은곧바로건국후세종때까지이어져오던흐름과는반대되는정치문화의흐름이생겨나게하였다. 특권을공공연히행사하여약자로부터이익을얻어내는일이만연된것, 특권적지위의세습성이강화된것이세조즉위과정에서나타난정치문화변화의핵심이었다. 오랜동안세조와그의정치에대한역사적인식은조선왕조의문물제도정비과정이라는인식의틀안에서이루어져왔다. 조선초기정치사의연구가제도사중심으로이루어져왔단측면이그객관적인식을저해하는요인으로작용하였던것이다. 근래제도사에서벗어난연구가차츰진전되면서전보다객관적평가가시도되고있다는점은다행이라할수있다. 그렇지만아직출발선에서별로멀리나아가지못한까닭에앞으로더구체적인연구를기대한다.
41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329 참고문헌 <자료> 太祖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睿宗 實錄 成宗實錄 大東野乘 練藜室記述 <논저> 김승우, 2012 용비어천가 제작의 주요 배경과 기반 용비어천가의 성립과 수용 (보고사, 서울) 金順南, 2007 朝鮮初期 體察使制 硏究 (景仁文化社, 서울) 최승희, 2005 조선초기 정치문화의 이해 (지식산업사, 서울) 崔承熙, 2002 朝鮮初期 政治史硏究 (지식산업사, 서울) 한영우, 1997 다시 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서울) 李成茂, 1998 朝鮮王朝史 1 (동방미디어, 서울) 鄭杜熙, 1983 朝鮮初期 政治支配勢力硏究 (일조각, 서울) 李相佰, 1962 韓國史 <近世前期篇>(乙酉文化社, 서울) 徐連達 吳浩坤 趙克堯(중국사연구회 옮김), 1989 중국통사 (청년사, 서울) 김용흠, 2007 조선 세조대 정치를 보는 시각과 생육신 역사와 현실 64 (한 국역사연구회) 오종록, 2005 조선전기사 연구 50년 한국사 연구 50년 이화여대 한국문화 연구원 편 (혜안, 서울) 오종록, 2001 조선전기의 京衙前과 중앙행정 高麗-朝鮮前期 中人硏究 延世 大 國學硏究院 편 (신서원, 서울) 崔承熙, 1997 世祖代 王位의 脆弱性과 王權强化策 조선시대사학보 1 (조선 시대사학회) 吳宗祿, 1996 朝鮮時代 國王의 卽位過程과 卽位儀禮 朝鮮時代 卽位儀禮와 朝賀儀禮 硏究 (文化財管理局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金泰永, 1994 朝鮮 初期 世祖王權의 專制性에 대한 一考察 한국사연구 87
42 330 인문과학연구 제31집 (한국사연구회) 한충희, 1994 관직과 관계 한국사 23 (국사편찬위원회, 과천) 南智大, 1993 朝鮮初期 中央政治制度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吳宗祿, 1991 朝鮮初期 兩界의 軍事制度와 國防體制 (高麗大學校 博士學位論 文) 韓永愚, 1973 왕권의 확립과 제도의 완성(세조 성종) 한국사 9 (국사편찬 위원회, 과천)
43 世祖의 즉위과정과 정치문화의 변동 오종록 331 <Abstract> The enthronement of King Sejo of Joseon Dynasty and Change of Political Culture Oh, Jongrok * 60) This article is prepared for prior evaluations about the politics of King Sejo(世祖) have substantial problems. From my point of view, while comprehending the history of the Joseon Dynasty(朝鮮王朝), what is more highly considered is the context of privilege and the change of system which guaranteed that heredity, rather than the transition of governing system and public sphere. Also, as a historian, it is a significant work to expatiate on the culture that took wielding the prerogatives and transmitting the privileged class for granted. Thus, I will disclose the fact that the momentous political changes under the process of coming into power of King Sejo worked as conclusive factors for the cataclysm of political culture of Joseon, by analyzing the ministers between under King Sejo and under King Sejong(世宗). From the founding of the Joseon Dynasty to directly after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the politics and organization of culture and institutions placed the focus on fortifying the transcendental sovereign power. Worthy retainers who were appointed by the principal cases-until the acceding to the throne of King TaeJong(太宗), such as Establishments of Dynasty and Rebellion of prince-were controlled through the course like purges, so they could not become more * Professor at the department of history, Sungshin Women s University
44 332 인문과학연구제31집 powerful, just built the co-relation through the medium of the king. Besides, since the bureaucracy and rules were improved and applied potently, the number of the high officials did not outnumber the proper number. The advancement of culture and institutions of the era of King Sejong-like enhancement of courtesy and music, publication of [Yongbiecheonga( 龍飛御天歌 )], etc-was the gem of the reinforcement of sovereignty. However, while the King Sejong seized the power and become king, the retainers already formed the correlation, and particularly after the death of King Sejo, they exerted their enormous power as Hungu forces( 勳舊勢力 ). Rule of bureaucracy were distorted by the King Sejo, consequently, high-ranking officials enlarged and their term of office became much shorter compared with former times. In other words, new politics which were characterized by the retainers with great power similar to the royal power and right to participate in decision-making of public officials of Dangsangkwan( 堂上官 ) engendered the current of political culture that are antithetic to the previous stream from Foundation to the era of King Sejong. To put it pithily, the crux of changes in political culture during the process of King Sejo enthronement is that gaining lots of profits from the weak by exercising their privilege became widespread and heredity of privileged status became intensified. 주제어 : 왕권 (power of king), 공신 (retainers), 특권 (privilege), 세습 (heredity of privileged status), 정치문화 (political culture) 투고일 : 2013년 1월 17일 심사완료일 : 2013년 1월 31일 게재확정일 : 2013년 2월 6일
60-Year History of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of Korea 제4절 조선시대의 감사제도 1. 조선시대의 관제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무신란에 의하여 붕괴되고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이 지배층으 로 되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새로이 신흥사대부가 대두하여 마침내 조선 건국에 성공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조선양반사회의
More information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KR000****4 설 * 환 KR000****4 송 * 애 김 * 수 KR000****4
More information741034.hwp
iv v vi vii viii ix x xi 61 62 63 64 에 피 소 드 2 시도 임금은 곧 신하들을 불러모아 나라 일을 맡기고 이집트로 갔습니다. 하 산을 만난 임금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말했어요. 원하시는 대로 일곱 번째 다이아몬드 아가씨를
More information- 2 -
- 1 - - 2 - - - - 4 - - 5 - - 6 - - 7 - - 8 - 4) 민원담당공무원 대상 설문조사의 결과와 함의 국민신문고가 업무와 통합된 지식경영시스템으로 실제 운영되고 있는지, 국민신문 고의 효율 알 성 제고 등 성과향상에 기여한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를 치 메 국민신문고를 접해본 중앙부처 및 지방자 였 조사를 시행하 였 해 진행하 월 다.
More informationDrucker Innovation_CEO과정
! 피터드러커의 혁신과 기업가정신 허연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Doing Better Problem Solving Doing Different Opportunity ! Drucker, Management Challenges for the 21st Century, 1999! Drucker, Management: Tasks, Responsibilities,
More information152*220
152*220 2011.2.16 5:53 PM ` 3 여는 글 교육주체들을 위한 교육 교양지 신경림 잠시 휴간했던 우리교육 을 비록 계간으로이지만 다시 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우 선 반갑다. 하지만 월간으로 계속할 수 없다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솔직히 나는 우리교 육 의 부지런한 독자는 못 되었다. 하지만 비록 어깨너머로 읽으면서도 이런 잡지는 우 리
More informationº´¹«Ã»Ã¥-»ç³ªÀÌ·Î
솔직히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 그렇게까지 군대를 가려고하냐, 미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후회는 없다.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조차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군대는 하루하루를 소종하게 생각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점점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며
More information<B3EDB9AEC0DBBCBAB9FD2E687770>
(1) 주제 의식의 원칙 논문은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야 한다. 주제 의식은 논문을 쓰는 사람의 의도나 글의 목적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협력의 원칙 독자는 필자를 이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따라서 필자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나 표현을 사용하여 독자의 노력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논리적 엄격성의 원칙 감정이나 독단적인 선언이
More information<B1DDC0B6B1E2B0FCB0FAC0CEC5CDB3DDB0B3C0CEC1A4BAB82E687770>
여 48.6% 남 51.4% 40대 10.7% 50대 이 상 6.0% 10대 0.9% 20대 34.5% 30대 47.9% 초등졸 이하 대학원생 이 0.6% 중졸 이하 상 0.7% 2.7% 고졸 이하 34.2% 대졸 이하 61.9% 직장 1.9% e-mail 주소 2.8% 핸드폰 번호 8.2% 전화번호 4.5% 학교 0.9% 주소 2.0% 기타 0.4% 이름
More informationDocHdl2OnPREPRESStmpTarget
자르는 선 5 월 월말 성취도 평가 국어 2쪽 사회 5쪽 과학 7쪽 자르는 선 학년 5 13 4 47 1 5 2 3 7 2 810 8 1113 11 9 12 10 3 13 14 141 1720 17 15 18 19 1 4 20 5 1 2 7 3 8 4 5 9 10 5 월말 성취도평가 11 다음 보기 에서 1 다음 안에 들어갈 알맞은 말을 찾아 쓰시오. 각 나라마다
More information춤추는시민을기록하다_최종본 웹용
몸이란? 자 기 반 성 유 형 밀 당 유 형 유 레 카 유 형 동 양 철 학 유 형 그 리 스 자 연 철 학 유 형 춤이란? 물 아 일 체 유 형 무 아 지 경 유 형 댄 스 본 능 유 형 명 상 수 련 유 형 바 디 랭 귀 지 유 형 비 타 민 유 형 #1
More information5 291
1 2 3 4 290 5 291 1 1 336 292 340 341 293 1 342 1 294 2 3 3 343 2 295 296 297 298 05 05 10 15 10 15 20 20 25 346 347 299 1 2 1 3 348 3 2 300 301 302 05 05 10 10 15 20 25 350 355 303 304 1 3 2 4 356 357
More information문화재이야기part2
100 No.39 101 110 No.42 111 문 ᰍℎ᮹ šᯙŝ $* ᗭ} 화 재 이 야 기 De$** 남기황 ᰍℎ šᯙŝ $* ᗭ} 관인은 정부 기관에서 발행하는, 인증이 필요한 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편찬토록 하여 그 이듬해 문서 따위에 찍는 도장 이다. 문화재청은 1999년 (1447) 만든 석보상절을 읽고나서 지은 찬불가(讚
More information현장에서 만난 문화재 이야기 2
100 No.39 101 110 No.42 111 문 ᰍℎ᮹ šᯙŝ $* ᗭ} 화 재 이 야 기 De$** 남기황 ᰍℎ šᯙŝ $* ᗭ} 관인은 정부 기관에서 발행하는, 인증이 필요한 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편찬토록 하여 그 이듬해 문서 따위에 찍는 도장 이다. 문화재청은 1999년 (1447) 만든 석보상절을 읽고나서 지은 찬불가(讚
More information³»Áö_10-6
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이 책에서는 단순히 가난한 관리들의 이야기보다는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사심 없이 헌신한 옛 공직자들의 사례들을 발굴하여 수록하였습니다. 공과 사를 엄정히 구분하고,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공무를 처리한 사례, 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최부, 송흠
More information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발행일 : 2013년 7월 25일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정]--------------------------------------------
More information한국사 문제1급
1 2. 1. 3. 2 4. 5. 6. 7. 8. 3 9. 10. 11. 12. 4 13. 다음 중에서 고려 시대 문화재를 모두 고른 것은? [2점] 15. 다음 주장을 입증하는 근거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기 전까지는 제도 운영, 국왕 및 왕실 구성원 명칭, 국가 의례에서 실질적인 황제국을 지 향하였다. ① 원구단을 만들어 하늘에
More information기본소득문답2
응답하라! 기본소득 응답하라! 기본소득 06 Q.01 07 Q.02 08 Q.03 09 Q.04 10 Q.05 11 Q.06 12 Q.07 13 Q.08 14 Q.09 응답하라! 기본소득 contents 16 Q.10 18 Q.11 19 Q.12 20 Q.13 22 Q.14 23 Q.15 24 Q.16 Q.01 기본소득의 개념을 쉽게 설명해주세요. 06 응답하라
More information<5BB0EDB3ADB5B55D32303131B3E2B4EBBAF12DB0ED312D312DC1DFB0A32DC0B6C7D5B0FAC7D02D28312E28322920BAF2B9F0B0FA20BFF8C0DAC0C720C7FCBCBA2D3031292D3135B9AEC7D72E687770>
고1 융합 과학 2011년도 1학기 중간고사 대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 빅뱅 우주론에서 수소와 헬륨 의 형성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4 서술형 다음 그림은 수소와 헬륨의 동위 원 소의 을 모형으로 나타낸 것이. 우주에서 생성된 수소와 헬륨 의 질량비 는 약 3:1 이. (+)전하를 띠는 양성자와 전기적 중성인 중성자
More information¹é¹üȸº¸ 24È£ Ãâ·Â
2009.가을 24호 2_ . 02 03 04 08 10 14 16 20 24 28 32 38 44 46 47 48 49 50 51 _3 4_ _5 6_ _7 8_ _9 10_ _11 12_ _13 14_ _15 16_ _17 18_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에서 개식사를 하는 김구(1940.9.17) 將士書) 를 낭독하였는데, 한국광복군이 중국군과 함께 전장에
More information....pdf..
Korea Shipping Association 조합 뉴비전 선포 다음은 뉴비전 세부추진계획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 조합은 올해로 창립 46주년을 맞았습니다. 조합은 2004년 이전까 지는 조합운영지침을 마련하여 목표 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추진해왔습니 다만 지난 2005년부터 조합원을 행복하게 하는 가치창출로 해운의 미래를 열어 가자 라는 미션아래 BEST
More information(012~031)223교과(교)2-1
0 184 9. 03 185 1 2 oneclick.law.go.kr 186 9. (172~191)223교과(교)2-9 2017.1.17 5:59 PM 페이지187 mac02 T tip_ 헌법 재판소의 기능 위헌 법률 심판: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면 그 효력을 잃게 하거 나 적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 탄핵 심판: 고위 공무원이나 특수한 직위에 있는 공무원이 맡
More information2003report250-12.hwp
지상파 방송의 여성인력 현황 및 전문화 방안 연구 한국여성개발원 발간사 Ⅰ....,.,....... .. Ⅱ. :...... Ⅲ.,,. ..,.,.... 9 1 1.. /.,. PD,,,,, / 7.93%. 1%... 5.28% 10.08%. 3.79%(KBS MBC), 2.38 %(KBS MBC) 1%...,. 10. 15. ( ) ( ), ( ) ( )..
More informationCC......-.........hwp
방송연구 http://www.kbc.go.kr/ 텔레비전의 폭력행위는 어떠한 상황적 맥락에서 묘사되는가에 따라 상이한 효과를 낳는다. 본 연구는 텔레비전 만화프로그램의 내용분석을 통해 각 인 물의 반사회적 행위 및 친사회적 행위 유형이 어떻게 나타나고 이를 둘러싼 맥락요인들과 어떤 관련성을 지니는지를 조사하였다. 맥락요인은 반사회적 행위 뿐 아니라 친사회적
More information10월추천dvd
2011 10 DVD CHOICE dvd dvd?!!!! [1] [2] DVD NO. 1898 [3] Days of Being Wild 지금도 장국영을 추억하는 이는 많다. 그는 홍콩 영화의 중심에 선 배우였고,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거짓말 같던 그의 죽음은 장국 영을 더욱 애잔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 이 장국영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More information레이아웃 1
Seed Money Bank Savings Banks vol.126 Seed Money Bank Savings Banks + vol.126 www.fsb.or.kr 20163 + 4 Contents 20163 + 4 vol.126 www.fsb.or.kr 26 02 08 30 SB Theme Talk 002 004 006 SB Issue 008 012 014
More information4 7 7 9 3 3 4 4 Ô 57 5 3 6 4 7 Ô 5 8 9 Ô 0 3 4 Ô 5 6 7 8 3 4 9 Ô 56 Ô 5 3 6 4 7 0 Ô 8 9 0 Ô 3 4 5 지역 대표를 뽑는 선거. 선거의 의미와 필요성 ① 선거의 의미`: 우리들을 대표하여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을 말합니다. ② 선거의 필요성`: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지역의 일을 의논하고
More information*074-081pb61۲õðÀÚÀ̳ʸ
74 October 2005 현 대는 이미지의 시대다. 영국의 미술비평가 존 버거는 이미지를 새롭 게 만들어진, 또는 재생산된 시각 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 정의에 따르 면, 이미지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지는 보는 사람의, 혹은 이미지를 창조하는 사람의 믿음이나 지식에 제한을 받는다. 이미지는 언어, 혹은 문자에 선행한다. 그래서 혹자는
More information141018_m
DRAGONS JEONNAM DRAGONS FOOTBALL CLUB MATCH MAGAZINE VOL.136 / 2014.10.16 Preview Review News Poster PREVIEW K LEAGUE CLASSIC 32R JEONNAM VS SEOUL / 14.10.18 / 14:00 / 광양축구전용구장 서울과 뜨거운 한판 승부! 전남드래곤즈가 오는
More information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2 목차 편집자의 말 ------------------------------------------------------------------------------------- 3 한국의 * 상1 개괄 한국의 병역거부운동 -------------------------------------------------------------------------
More information내지-교회에관한교리
내지-교회에관한교리 2011.10.27 7:34 PM 페이지429 100 2400DPI 175LPI C M Y K 제 31 거룩한 여인 32 다시 태어났습니까? 33 교회에 관한 교리 목 저자 면수 가격 James W. Knox 60 1000 H.E.M. 32 1000 James W. Knox 432 15000 가격이 1000원인 도서는 사육판 사이즈이며 무료로
More information국어 순화의 역사와 전망
전문용어의국어화 강현화 1. 들어가기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 사용의 전형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본고는 전문 용어의 사용자가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포 될 수 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출발점을 시작으로 과연 전문 함 용어의 국어화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한다. 2. 전문 용어 연구의 쟁점 2.1. 전문 용어
More information178È£pdf
스승님이 스승님이 스승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알라는 위대하다! 위대하다! 알라는 알라는 위대하다! 특집 특집 기사 특집 기사 세계 세계 평화와 행복한 새해 경축 세계 평화와 평화와 행복한 행복한 새해 새해 경축 경축 특별 보도 특별 특별 보도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도가니! 스승님과의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More information단양군지
제 3 편 정치 행정 제1장 정치 이보환 집필 제1절 단양군의회 제1절 우리는 지방자치의 시대에 살며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주민의 복지증진을 꾀 하고 있다. 자치시대가 개막된 것은 불과 15년에 불과하고, 중앙집권적 관행이 커 서 아직 자치의 전통을 확고히 자리 잡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으며, 앞으로의 과제 가 더 중요하다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우리지역 지방자치의
More information나하나로 5호
Vol 3, No. 1, June, 2009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KACPR) Newsletter 01 02 03 04 05 2 3 4 대한심폐소생협회 소식 교육위원회 소식 일반인(초등학생/가족)을
More information할렐루야10월호.ps, page 1-12 @ Normalize ( 할 437호 )
www.hcc.or.kr news@hcc.or.kr Hallelujah News PHOTO NEWS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제437호 2007년 10월 7일 (주일) 화요청년찬양부흥회 날짜: 10월 16일, 11월 6일, 11월 20일 12월 4일, 12월 18일 (매달 1 3주 화요일) 장소: 할렐루야교회
More information<34BFF9C8A320B4DCB8E9B0EDC7D8BBF32E706466>
ISSN 2288-5854 Print ISSN 2289-0009 online DIGITAL POST KOREA POST MAGAZINE 2016. APRIL VOL. 687 04 DIGITAL POST 2016. 4 AprilVOL. 687 04 08 04 08 10 13 13 14 16 16 28 34 46 22 28 34 38 42 46 50 54 56
More information가해하는 것은 좋지 않은 행동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쌍해서이다 가해하고 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받을 것 같아서이다 보복이 두려워서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화가 나고 나쁜 아이라고 본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생각이나 느낌이 없다 따돌리는 친구들을 경계해야겠다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More information¼øâÁö¿ª°úÇÐÀÚ¿ø
13 1. 객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 객사는 영조 35년(1759년)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관청 건물입니다. 원래는 가운데의 정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 오른쪽에 서대청, 앞쪽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 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있습니다. 정당에서는 전하 만만세 라고 새 긴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More information041~084 ¹®È�Çö»óÀбâ
1998 60 1 1 200 2 6 4 7 29 1975 30 2 78 35 1 4 2001 2009 79 2 9 2 200 3 1 6 1 600 13 6 2 8 21 6 7 1 9 1 7 4 1 2 2 80 4 300 2 200 8 22 200 2140 2 195 3 1 2 1 2 52 3 7 400 60 81 80 80 12 34 4 4 7 12 80 50
More information쌍백합23호3
4 5 6 7 여행 스테인드글라스 을 노래했던 하느님의 영원한 충만성을 상징하는 불꽃이다. 작품 마르코 수사(떼제공동체) 사진 유백영 가브리엘(가톨릭 사진가회) 빛은 하나의 불꽃으로 형상화하였다. 천사들과 뽑힌 이들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하며 세 겹의 거룩하심 가 있을 것이다. 빛이 생겨라. 유리화라는 조그만 공간에 표현된 우주적 사건인 셈이다.
More information¾Æµ¿ÇÐ´ë º»¹®.hwp
11 1. 2. 3. 4. 제2장 아동복지법의 이해 12 4).,,.,.,.. 1. 법과 아동복지.,.. (Calvert, 1978 1) ( 公 式 的 ).., 4),. 13 (, 1988 314, ). (, 1998 24, ).. (child welfare through the law) (Carrier & Kendal, 1992). 2. 사회복지법의 체계와
More information#7단원 1(252~269)교
7 01 02 254 7 255 01 256 7 257 5 10 15 258 5 7 10 15 20 25 259 2. 어휘의 양상 수업 도우미 참고 자료 국어의 6대 방언권 국어 어휘의 양상- 시디(CD) 수록 - 감광해, 국어 어휘론 개설, 집문당, 2004년 동북 방언 서북 방언 중부 방언 서남 방언 동남 방언 제주 방언 어휘를 단어들의 집합이라고 할 때,
More informationÃѼŁ1-ÃÖÁ¾Ãâ·Â¿ë2
경기도 도서관총서 1 경기도 도서관 총서 경기도도서관총서 1 지은이 소개 심효정 도서관 특화서비스 개발과 사례 제 1 권 모든 도서관은 특별하다 제 2 권 지식의 관문, 도서관 포털 경기도 도서관 총서는 도서관 현장의 균형있는 발전과 체계적인 운 영을 지원함으로써 도서관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간되 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를 통해 사회전반의 긍정적인
More information연구노트
#2. 종이 질 - 일단은 OK. 하지만 만년필은 조금 비침. 종이질은 일단 합격점. 앞으로 종이질은 선택옵션으로 둘 수 있으리라 믿는다. 종이가 너무 두꺼우면, 뒤에 비치지 는 않지만, 무겁고 유연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두꺼우면 고의적 망실의 위험도 적고 적당한 심리적 부담도 줄 것이 다. 이점은 호불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단은 괜찮아 보인다. 필자의
More information(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 평균 ( 만원 ) 자녀상태 < 유 자 녀 > 미 취 학 초 등 학 생 중 학 생 고 등 학 생 대 학 생 대 학 원 생 군 복 무 직 장 인 무 직 < 무 자 녀 >,,.,.,.,.,.,.,.,.
. 대상자의속성 -. 연간가수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평균 ( 만원 ) 전 국,........,. 지 역 도 시 지 역 서 울 특 별 시 개 광 역 시 도 시 읍 면 지 역,,.,.,.,.,. 가주연령 세 이 하 - 세 - 세 - 세 - 세 - 세 - 세 세 이 상,.,.,.,.,.,.,.,. 가주직업 의회의원
More information2ÀåÀÛ¾÷
02 102 103 104 105 혁신 17과 1/17 특히 05. 1부터 수준 높은 자료의 제공과 공유를 위해 국내 학회지 원문 데이 >> 교육정보마당 데이터베이스 구축 현황( 05. 8. 1 현재) 구 분 서지정보 원문내용 기사색인 내 용 단행본, 연속 간행물 종 수 50만종 교육정책연구보고서, 실 국발행자료 5,000여종 교육 과정 자료 3,000여종
More information40043333.hwp
1 2 3 4 5 128.491 156.559 12 23 34 45 안녕하십니까? 본 설문은 설악산과 금강산 관광연계 개발에 관한 보다 실질적인 방향을 제시하고자 만들어졌습니다. 귀하께서 해주신 답변은 학문적인 연구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다가오는 21세기 한국관광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할 것입니다.
More informationÀÚ¿øºÀ»ç-2010°¡À»°Ü¿ï-3
2010 희망캠페인 쪽방의 겨울은 유난히 빨리 찾아옵니다. 하늘 높은지 모르고 오르는 기름 값은 먼 나라 이야기 마냥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내 몸 하 나 간신히 누일 전기장판만으로 냉기 가득한 방에서 겨울을 보내야 합니다. 한 달에 열흘정도 겨우 나가는 일용직도 겨울이 되면 일거리가 없어, 한 달 방값을 마련하 기 어렵고, 일을 나가지 못하면 밖으로 쫓겨 날
More information내지(교사용) 4-6부
Chapter5 140 141 142 143 144 145 146 147 148 01 02 03 04 05 06 07 08 149 활 / 동 / 지 2 01 즐겨 찾는 사이트와 찾는 이유는? 사이트: 이유: 02 아래는 어느 외국계 사이트의 회원가입 화면이다. 국내의 일반적인 회원가입보다 절차가 간소하거나 기입하지 않아도 되는 개인정보 항목이 있다면 무엇인지
More informationITFGc03ÖÁ¾š
Focus Group 2006 AUTUMN Volume. 02 Focus Group 2006 AUTUMN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 모두를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 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감돌아간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이
More information0.筌≪럩??袁ⓓ?紐껋젾001-011-3筌
3 4 5 6 7 8 9 10 11 Chapter 1 13 14 1 2 15 1 2 1 2 3 16 1 2 3 17 1 2 3 4 18 2 3 1 19 20 1 2 21 크리에이터 인터뷰 놀이 투어 놀이 투어 민혜영(1기, 직장인)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가치가 있는 일을 해 보고 싶 어 다니던 직장을 나왔다. 사회적인 문제를 좀 더 깊숙이 고민하고, 해결책도
More information**09콘텐츠산업백서_1 2
2009 2 0 0 9 M I N I S T R Y O F C U L T U R E, S P O R T S A N D T O U R I S M 2009 M I N I S T R Y O F C U L T U R E, S P O R T S A N D T O U R I S M 2009 발간사 현재 우리 콘텐츠산업은 첨단 매체의 등장과 신기술의 개발, 미디어 환경의
More information¾ç¼ºÄÀ-2
양성평등 캠퍼스 문화 조성을 위하여... 고려대학교 양성평등센터 는 2001년 6월에 제정된 성희롱 및 성폭력 예방과 처리에 관한 규정 에 의거하여 같은 해 7월에 설치된 성희롱및성폭력상담소 를 2006년 10월 개칭한 것입니다. 양성평등 센터 로의 개칭은 교내에서 발생하는 성피해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과 상담 제공뿐만 아니라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양성평등
More information41호-소비자문제연구(최종추가수정0507).hwp
소비자문제연구 제41호 2012년 4월 해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이용약관의 약관규제법에 의한19)내용통제 가능성* : Facebook 게시물이용약관의 유효성을 중심으로 이병준 업 요약 업 규 규 논 업 쟁 때 셜 네트워 F b k 물 규 았 7 계 건 됨 규 규 업 객 계 규 므 받 객 드 객 규 7 말 계 률 업 두 않 트 접속 록 트 른징 볼 규 업 내
More information<352831292E5FBBEABEF7C1DFBAD0B7F9BAB02C5FC1B6C1F7C7FCC5C25FB9D75FB5BFBAB05FBBE7BEF7C3BCBCF65FA1A4C1BEBBE7C0DABCF62E786C73>
5. 산업중분류, 조직형태 및 동별 사업체수, 종사자수 단위 : 개, 명 금정구 서1동 서2동 서3동 Geumjeong-gu Seo 1(il)-dong Seo 2(i)-dong Seo 3(sam)-dong TT전 산 업 17 763 74 873 537 1 493 859 2 482 495 1 506 15 519 35 740 520 978 815 1 666 462
More information광주시향 최종22
광주시향 최종22 2015.8.26 4:22 PM 페이지1 VOL.7 2015. 09 9월 4일(금) Masterwork Series Vl 프랑스 기행 9월 22일(화) 가족음악회 팝스콘서트 광주시향 최종22 2015.8.26 4:23 PM 페이지23 20세기 이전의 유명한 작곡가가 쓴 비올라 곡은
More informationÇѹ̿ìÈ£-197È£
2014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LASTING FRIENDS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LASTING FRIENDS
More information01¸é¼öÁ¤
16면 2012.7.25 6:14 PM 페이지1 2012년 8월 1일 수요일 16 종합 고려대장경 석판본 판각작업장 세계 최초 석판본 고려대장경 성보관 건립 박차 관계기관 허가 신청 1차공사 전격시동 성보관 2동 대웅전 요사채 일주문 건립 3백여 예산 투입 국내 최대 대작불사 그 동안 재단은 석판본 조성과 성보관 건립에 대해서 4년여 동안 여러 측면에 서 다각적으로
More information<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01 02 8 9 32 33 1 10 11 34 35 가족 구조의 변화 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원만한 생활과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해 다양한 기능 사회화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행동 가구 가족 규모의 축소와 가족 세대 구성의 단순화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 1인 또는 1인 이상의 사람이 모여 주거 및 생계를 같이 하는 사람의 집단 타나는 가족 구조의
More information감사회보 5월
contents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동정 및 안내 상장회사감사회 제173차 조찬강연 개최 상장회사감사회 제174차 조찬강연 개최 및 참가 안내 100년 기업을 위한 기업조직의 역 량과 경영리더의 역할의 중요성 등 장수기업의 변화경영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윤정구 이화여자대학교
More informationCR2006-41.hwp
연구책임자 가나다 순 머 리 말 2006년 12월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원장 - i - - ii - - iii - 평가 영역 1. 교육계획 2. 수업 3. 인적자원 4. 물적자원 5. 경영과 행정 6. 교육성과 평가 부문 부문 배점 비율(%) 점수(점) 영역 배점 1.1 교육목표 3 15 45점 1.2 교육과정 6 30 (9%) 2.1 수업설계 6 30 2.2
More informationº»ÀÛ¾÷-1
Contents 10 http://www.homeplus.co.kr 11 http://www.homeplus.co.kr 12 http://www.homeplus.co.kr 13 http://www.homeplus.co.kr Interview 14 http://www.homeplus.co.kr Interview 15 http://www.homeplus.co.kr
More information2002report220-10.hwp
2002 연구보고서 220-10 대학평생교육원의 운영 방안 한국여성개발원 발 간 사 연구요약 Ⅰ. 연구목적 Ⅱ. 대학평생교육원의 변화 및 외국의 성인지적 접근 Ⅲ. 대학평생교육원의 성 분석틀 Ⅳ. 국내 대학평생교육원 현황 및 프로그램 분석 Ⅴ. 조사결과 Ⅵ. 결론 및 정책 제언 1. 결론 2. 대학평생교육원의 성인지적 운영을 위한 정책 및 전략 목
More information2016년 신호등 10월호 내지.indd
www.koroad.or.kr E-book 10 2016. Vol. 434 62 C o n t e n t s 50 58 46 24 04 20 46 06 08, 3 3 10 12,! 16 18 24, 28, 30 34 234 38? 40 2017 LPG 44 Car? 50 KoROAD(1) 2016 54 KoROAD(2), 58, 60, 62 KoROAD 68
More information2017 Summer.Vol. 07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 소식지 제4산업혁명시대 핵심인프라 공간정보 그 미래를 KAIA가 함께 합니다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은 국토공간정보의 효율적, 체계적 생산 및 가공과 다양한 국토공간정보의 활용 융합 서비스 기술 구현을 통해 국민 편의와 산업발전 향상을 도모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4산업혁명시대 핵심인프라 공간정보 그
More information2저널(11월호).ok 2013.11.7 6: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
24 2저널(11월호).ok 2013.11.7 6: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sibility Study) 등을 수행하여 인니전력 이다. 공사(PLN)를 비롯한 인니
More information통계내지-수정.indd
안전한 나날을 그리다 안전한 나날을 그리다 01 16 22 28 32 36 40 44 50 54 58 02 62 68 90 94 72 98 76 80 102 84 03 04 106 142 110 114 118 122 126 130 134 148 154 160 166 170 174 138 05 178 182 186 190 194 200 204 208 212
More information04 Çмú_±â¼ú±â»ç
42 s p x f p (x) f (x) VOL. 46 NO. 12 2013. 12 43 p j (x) r j n c f max f min v max, j j c j (x) j f (x) v j (x) f (x) v(x) f d (x) f (x) f (x) v(x) v(x) r f 44 r f X(x) Y (x) (x, y) (x, y) f (x, y) VOL.
More information국사관논총_26집_황.hwp
조선초기 중앙집권제론의 검토 남 지 대* Ⅰ. 머리말 Ⅱ. 개설서의 검토 1. 國史大觀 2. 國史槪論 3. 韓國史新論 4. 韓國史 近世前期篇 5. 韓國通史 6. 한국사 9 10 7. 조선통사 Ⅲ. 과제와 제언 1. 시 각 2. 토지생산력과 토지제도 3. 戶口의 파악과 役制 4. 신분제 5. 정치제도 Ⅳ. 맺 음 말 Ⅰ. 머 리 말 조선초기 사회는 중앙집권적인
More informationad-200400012.hwp
제17대 총선과 남녀유권자의 정치의식 및 투표행태에 관한 연구 - 여성후보 출마 선거구 조사를 중심으로 - 2004. 7 여 성 부 제17대 총선과 남녀유권자의 정치의식 및 투표행태에 관한 연구 - 여성후보 출마 선거구 조사를 중심으로 - 2004. 7 여 성 부 연구요약 표 주제 및 연도별 여성유권자 연구 현황 표 출마한 여성후보 인지시기 투표후보여성
More informationGwangju Jungang Girls High School 이상야릇하게 지어져 이승이 아닌 타승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텔에 여장을 풀고 먹 기 위해 태어났다는 이념 아래 게걸스럽게 식사를 했다. 피곤하니 빨리 자라는 선생님의 말 씀은 뒷전에 미룬 채 불을 끄고 밤늦게까지 속닥거리며 놀았다. 몇 시간 눈을 붙이는 둥 마 는 둥 다음날 이른 아침에
More informationePapyrus PDF Document
1. 사회인구학적특성 1) 범죄자범행시연령 2) 범죄자범행시성별연령 3) 범죄자직업 4) 범죄자생활정도, 혼인관및부모관 5) 강도범죄자생활정도, 혼인관및부모관별직업 6) 절도범죄자생활정도, 혼인관및부모관별직업 7) 강간 강제추행범죄자생활정도, 혼인관및부모관별직업 8) 범죄자교육정도 9) 범죄자범행시성별정신상태 10) 범죄자국적 Ⅳ-1-1 죄종 (%) 연령 범죄자
More informationallinpdf.com
이책은북한에대한이해를돕기위해통일교육원에서발간한교재입니다. 각급교육기관등에서널리활용하여주시기바랍니다. 차례 Ⅰ. 북한이해의관점 Ⅱ. 북한의정치 차례 Ⅲ. 북한의대외관계 Ⅳ. 북한의경제 Ⅴ. 북한의군사 Ⅵ. 북한의교육 차례 Ⅶ. 북한의문화 예술 Ⅷ. 북한의사회 Ⅸ. 북한주민의생활 차례 Ⅹ. 북한의변화전망 제 1 절 북한이해의관점 Ⅰ. 북한이해의관점 Ⅰ. 북한이해의관점
More information33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문 * 웅 입주자격소득초과 34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송 * 호 입주자격소득초과 35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나 * 하 입주자격소득초과 36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최 * 재 입주자격소득초
1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김 * 주 830516 입주자격소득초과 2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김 * 연 711202 입주자격소득초과 3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이 * 훈 740309 입주자격소득초과 4 발산지구4단지 ( 임대 ) 59A 이 * 희 780604 입주자격소득초과 5 발산지구4단지 ( 임대 ) 59A 안 * 현
More information2013unihangulchar {45380} 2unihangulchar {54617}unihangulchar {44592} unihangulchar {49328}unihangulchar {50629}unihangulchar {51312}unihangulchar {51
Proem Se 4 산업조직론 (ECM004N) Fall 03. 독점기업이 다음과 같은 수요함수를 각각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소비자 그룹에게 제품을 공급한다고 하자. 한 단위 제품을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은 상수 이다. 다음 질문에 답하시오. P = A B Q P = A B Q () 두 그룹에 대하여 가격차별을 하고자 할 때 각 그룹의 균형생산량(Q, Q )과
More informationRed Dot Award: Communication Design 에 참 하기 결정해 주셔서 기쁩니다. "성공을 위한 안내서"는 등 절 에 대해 안내 니다. 지체 말고 언 든지 연 해 주 오. Red Dot 은 등 절 또는 등 후 절 를 기꺼 와드 겠습니다. 01 Int
Your Guide to Success Interface Design Red Dot Award: Communication Design 에 참 하기 결정해 주셔서 기쁩니다. "성공을 위한 안내서"는 등 절 에 대해 안내 니다. 지체 말고 언 든지 연 해 주 오. Red Dot 은 등 절 또는 등 후 절 를 기꺼 와드 겠습니다. 01 Interface Design
More informationJkafm093.hwp
가정의학회지 2004;25:721-739 비만은 심혈관 질환, 고혈압 및 당뇨병에 각각 위험요인이고 다양한 내과적, 심리적 장애와 연관이 있는 질병이다. 체중감소는 비만한 사람들에 있어 이런 위험을 감소시키고 이들 병발 질환을 호전시킨다고 알려져 있고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건강을 호전시킬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런 믿음을 지지하는 연구들은
More information<C3E6B3B2B1B3C0B0313832C8A32DC5BEC0E7BFEB28C0DBB0D4292D332E706466>
11-8140242-000001-08 2013-927 2013 182 2013 182 Contents 02 16 08 10 12 18 53 25 32 63 Summer 2 0 1 3 68 40 51 57 65 72 81 90 97 103 109 94 116 123 130 140 144 148 118 154 158 163 1 2 3 4 5 8 SUMMER
More information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안 경 광 학 과 세부내용 - 남을 도와 준 경험과 보람에 대해 말해 보세요. - 공부 외에 다른 일을 정성을 다해 꾸준하게 해본 경험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 남과 다른 자신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 말해 주세요. - 지금까지 가장 고민스러웠던 또는 어려웠던 일과 이를 어떻게 해결하였는지? - 자신의 멘토(조언자) 또는 좌우명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More information지도학발달06-7/8/9장
3 1 7 17 95101G 421d 221 2 3 4 1971 34 12 1804 1866 1972 31866 4 1 5 33 1866 3 6 31866 3 1803 1877 1804 1866 2 02333 318 4 51 633 3 6 2022 222 31866 1955 1931 3 916 7 1925 1925 10 9 1862 65 8 7 2 1931
More informationA Time Series and Spatial Analysis of Factors Affecting Housing Prices in Seoul Ha Yeon Hong* Joo Hyung Lee** 요약 주제어 ABSTRACT:This study recognizes th
A Time Series and Spatial Analysis of Factors Affecting Housing Prices in Seoul Ha Yeon Hong*Joo Hyung Lee** 요약 주제어 ABSTRACT:This study recognizes that the factors which influence the apartment price are
More information»êÇÐ-150È£
Korea Sanhak Foundation News VOL. 150 * 2011. 12. 30 논단 이슈별 CSR 활동이 기업 충성도에 미치는 영향 : 국가별 및 산업별 비교분석 최 지 호 전남대 경영학부 교수 Ⅰ. 서론 Ⅰ. 서론 Ⅱ. 문헌 고찰 및 가설 개발 2. 1. 호혜성의 원리에 기초한 기업의 사회적 투자에 대한 소
More information2016년 신호등 3월호 내지A.indd
www.koroad.or.kr E-book 03 2016. Vol. 427 54 C o n t e n t s 40 50 24 46 04 20 46? 06,! 24 50 3, 08! BMW,? 28 54 12,! KoROAD 2 30 58 16, 34 60 18? 38 62? 40 64 KoROAD (IBA) 4!,, 2016 CEO!. 427 2016 3 2
More informationÈ޴ϵåA4±â¼Û
July 2006 Vol. 01 CONTENTS 02 Special Theme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Beautiful Huneed People 03 04 Special Destiny Interesting Story 05 06 Huneed News Huneed
More information닥터큐3.indd
MEDICAL MAGAZINE drq.busan.com 2013 03 vol. Tel. 051. 903. 5417Fax. 051. 852. 5417www.dnafactory.kr YOUR SMART HEALTH SPECIALIST 201303 DOCTOR Q vol. YOUR SMART HEALTH SPECIALIST DOCTOR Q vol. 03 C O
More information<C1DF29BCF6C7D02031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84 85 86 87 88 89 1 12 1 1 2 + + + 11=60 9 19 21 + + + 19 17 13 11=60 + 5 7 + 5 + 10 + 8 + 4+ 6 + 3=48 1 2 90 1 13 1 91 2 3 14 1 2 92 4 1 2 15 2 3 4 93 1 5 2 6 1 2 1 16 6 5 94 1 1 22 33 55 1 2 3 4 5 6
More information°¨Á¤Æò°¡0708 04-49
Issue Focus3 우리나라 복합개발사업 발전방향에 관하여 Ⅰ. 서 론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도시집중화로 인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통 등 여러 측면에서 도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지금처럼 무계획적이고 성장일변도의 도시화는 미래에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문제점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이는 지난세월 우리가 무분별하게 추구해 왔던 수익성 위주의
More information(중등용1)1~27
3 01 6 7 02 8 9 01 12 13 14 15 16 02 17 18 19 제헌헌법의제정과정 1945년 8월 15일: 해방 1948년 5월 10일: UN 감시 하에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 제헌 국회의원 198명 선출 1948년 6월 3일: 헌법 기초 위원 선출 1948년 5월 31일: 제헌 국회 소집. 헌법 기 초위원 30명과 전문위원 10명
More information120~151역사지도서3
III 배운내용 단원내용 배울내용 120 121 1 2 122 3 4 123 5 6 124 7 8 9 125 1 헌병경찰을앞세운무단통치를실시하다 126 1. 2. 127 문화통치를내세워우리민족을분열시키다 1920 년대일제가실시한문화 통치의본질은무엇일까? ( 백개 ) ( 천명 ) 30 20 25 15 20 15 10 10 5 5 0 0 1918 1920 ( 년
More information2009°íÁ¾ÈƱ¹»ç ~37š
64 65 66 67 68 69 01 03 05 07 02 04 06 08 70 71 D y n a m i c H i s t o r y 2006년 9월 정답률 82% 명으로 옳은 것은? 2005년 9월 01 밑줄 친 ~ 에 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정답률 66% 하의 대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정답률 54% 2005년 9월 03 자료에 제시된 사건이
More informationp529~802 Á¦5Àå-¼º¸í,Ç×ÀÇ
제5장 >>> 성명서 선언문 항의 - 건의서 및 각종 공한 取材妨害 正 副統領 選擧 取材기자 暴行사건(서울)에 대한 聲明 1960년 2월 14일 / 聲明書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13일 영등포구청 앞 노상에서 한국일보 趙鏞勳기자와 미국 CBS서울주재 韓永道기자가 취재임무 수행중 수명의 폭력한들에게 피습된 불상사의 진상을 검토한 끝에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 사상에
More information(연합뉴스) 마이더스
106 Midas 2011 06 브라질은 2014년 월드컵과 2016년 올림픽 개최, 고속철도 건설, 2007년 발견된 대형 심해유전 개발에 대비한 사회간접자본 확충 움직임이 활발하다. 리오데자네이로에 건설 중인 월드컵 경기장. EPA_ 연합뉴스 수요 파급효과가 큰 SOC 시설 확충 움직임이 활발해 우 입 쿼터 할당 등의 수입 규제 강화에도 적극적이다. 리
More information2015년9월도서관웹용
www.nl.go.kr 국립중앙도서관 후회의 문장들 사라져 버릴 마음의 잔해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이번 해에도 배추농사에서 큰돈을 남은 평생 머릿속에서 맴돌게 될 그 말을 다시 떠올려보 만졌다 하더라도 지난 여름 어느 날 갑자기 들기 시작한 았다. 맺지 못한 채 끝나버린 에이드리언의 문장도 함께. 그 생각만은 변함없을 것 같았다. 같은 나이의 다른 아이 그래서
More information정부3.0 국민디자인단 운영을 통해 국민과의 소통과 참여로 정책을 함께 만들 수 있었고 그 결과 국민 눈높이에 맞는 다양한 정책 개선안을 도출하며 정책의 완성도를 제고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서비스디자인 방법론을 각 기관별 정부3.0 과제에 적용하여 국민 관점의 서비스 설계, 정책고객 확대 등 공직사회에 큰 반향을 유도하여 공무원의 일하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More information피해자식별PDF용 0502
국제이주기구(International IOM 인신매매 방지 교육 지침서 시리즈는 인신매매 피해자 Organization for Migration, IOM) 에 대한 지원 서비스를 향상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개발 는 전 세계 곳곳에서 인신매매 방지 되었다. IOM의 풍부한 현장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실무자에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비정부기구, 정 게 도움이 될
More information소식지수정본-1
2010. 7 통권2호 2 CONTENTS Korea Oceanographic & Hydrographic Association 2010. 7 2010년 한마음 워크숍 개최 원장님께서 손수 명찰을 달아주시면서 직원들과 더욱 친숙하게~~ 워크숍 시작! 친근하고 정감있는 말씀으로 직원들과 소통하며 격려하여 주시는 원장님... 제12차 SNPWG 회의에 참석 _ 전자항해서지
More informationviii 본 연구는 이러한 사회변동에 따른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서 전문대 학의 역할 변화와 지원 정책 및 기능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수요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문대학의 기능 확충 방안을 모색하 였다. 연구의 주요 방법과 절차 첫째, 기존 선행 연구 검토
vii 요 약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를 겪으며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변 동은 정책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정책은 기존의 정책 방향과 내용을 유지 변화시키면서 정책을 계승 완료하게 된다. 이러한 정책 변화 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과 조직,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영향을 주게 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