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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東北亞의 琵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 3- 반면 最南端에서 확인된 자료로는 최근 濟州道 濟州市 三陽洞 제1구역 1호 집터에서 발견된 銅劍片4)이 있다. 圓形竪穴 住居址 內部의 燒土層에서 粘土帶土器 磨製石鏃 石 劍 鐵器 등과 함께 발견된 靑銅片은 등대(脊)의 존재로 미루어 보아 報告者의 見解처럼 琵琶形銅劍의 破片일 가능성이 높다. 인근인 Ⅱ-6호 圓形住居址 內에서 출토된 石製 劍 把頭飾(加重器)의 存在는 이런 추정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銅劍의 형태를 복원할 수 없 으나 粘土帶土器와 鐵器片이 함께 발견되는 점을 미루어 보면 거의 末期의 資料라고 판 단된다. 이렇게 三陽洞 遺蹟처럼 住居址 내에서 琵琶形銅劍이 발견된 것은 中國과 韓國을 통털어 처음이라고 필자는 알고 있다. 최근 北韓의 평안남도 덕천시 남양리 住居址 遺蹟5)과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표대 10호 住居址6)에서 琵琶形銅鉾 1점씩이 각각 角形土器 墨房里型土器와 함께 출토된 적 은 있다.7) 남양리와 표대 주거지의 사례를 참고할 때 濟州 三陽洞 崴 住居址內에서 발견된 銅片도 혹시 琵琶形銅鉾의 破片일 가능성을 완 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남양리에서는 角形土器가 공 반하고 三陽洞에서는 粘土帶土器가 공반하는 것으로 보아 두 遺蹟 사이에는 상당한 時期差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內陸의 草原地帶로부터 韓半島 남쪽의 海岸地帶에 이르기까지 분 포하고 있는 琵琶形銅劍은 서쪽으로는 中國 북경 부근의 望都8)에까 지 발견되고 있다. 한편 1929년 鳥居龍藏에 의해 보고된 바 있는 現 海參崴(Vladivostok)博物館 所藏의 異形銅劍을 琵琶形銅劍의 變形 에 포함9)시킨다면 旣往의 자료로서는 最東端에서 확인된 예이다. 이상과 같이 광범위한 分布를 보이고 있는 琵琶形銅劍이지만 그 중심지는 단연 현재의 遼寧省 일대라고 할 수 있다. 筆者의 調査 에 의하자면 東北亞 일대에서 발견된 琵琶形銅劍의 개수는 現在 총 320여개에 달하고 있다. 이 가운데 遼寧省에서 발견된 예만 [圖 2] 海參 博物館 所藏 銅劍 3) 陳家本 范淑賢, 黑龍江省雙城市出土曲刃靑銅短劍 ( 北方文物 , 1991) p.65. 4) 강창화 外, 濟州市 三陽洞遺蹟 發掘調査 中間報告 ( 湖南考古學의 諸問題, 第21回 韓國考 古學全國大會 發表文集, 1997) pp ) 劉秉興, 檀君 古朝鮮時期の遺跡遺物の發掘成果 ( 朝鮮民族と國家の源流, 雄山閣出版, 1995) p.29. 6) 김종혁, 표대부락터 유적에 대하여 ( 조선고고연구 , 1996). 7)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吉林省 吉林市 江北鄕 哈達村 長蛇山遺蹟 57F2號 住居址에 서도 전형적인 琵琶形銅鉾가 1점 발견된 바 있다(吉林省文物工作隊, 吉林長蛇山遺址的發掘, 考古 , 1980). 8) 鄭紹宗, 河北省發現的靑銅短劍 ( 考古 , 1975). 9) 林沄, 中國東北系銅劍再論 ( 考古學文化論集 4, 文物出版社, 1997) p.239.

4 - 4- 國史館論叢 第88輯 208개체로 총 調査量의 65%나 차지해 琵琶形銅劍文化의 中心地라는 표현이 전혀 무 색하지 않다. [表 1] 東北亞 出土 琵琶形銅劍 地域別 統計 地 域 個 數 百分比(%) 地 域 內蒙古地域 19 6 吉林 長春地域 遼 西 韓半島地域 遼寧地域 遼 東 合 計 個 數 百分比(%) 遼寧省 지역에 대해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遼河를 기준으로 遼西 遼東으로 크게 구분 하는데 반해, 일부 연구자들이 遼西와 遼東 사이에 瀋陽地區 를 별도로 설정하는 경우10) 를 종종 목도하게 된다. 이 경우 瀋陽地區 는 대체로 遼河 中流 일대로 瀋陽 遼中 新 民 鐵嶺 法庫 康平 等地를 포괄하는 지역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발견된 琵 琶形銅劍은 瀋陽 鄭家窪子와 南塔에서 출토된 7件이 전부이며 그 밖에 法庫縣 石柱子村 에서 T 字形 銅劍把와 劍把頭飾(加重器)이 나오는 데에 그치고 있다.11) 靳楓毅는 瀋陽地 區의 曲刃靑銅短劍文化 를 早期와 晩期의 두 시기로 구분하고, 早期에 속하는 遺蹟으로 鄭家窪子 1 2 3地點이 있으며 晩期로는 南塔에서 출토된 半破의 琵琶形銅劍 1件과 法 庫 石柱子村에서 출토된 銅劍柄과 劍把頭飾(손잡이장식) 1건이 있다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資料의 量이 한 지역의 文化相을 설명하기엔 너무나 부족한 형편이며, 瀋陽地區 琵琶形銅 劍 文化의 특징으로 들고 있는 몇가지 점들도 사실은 鄭家窪子 遺蹟의 性格일 뿐이지 遼 河 中流域의 地域相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이다. 遼河 流域에 위치한 鄭家窪子 遺蹟이 遼東이나 吉 長地區의 文化相과는 차이를 보이 고 있으며 오히려 遼西의 十二臺營子 遺蹟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분석은 일리 가 있다고 하겠지만, 이것을 夏家店上層文化로부터 派生된 일종의 地方類型 으로 보려는 시각12)은 주의를 요하는 부분이다. 瀋陽地區를 따로 설정한 것은 결국 주변의 遼東 吉 長地域과 다른 夏家店上層文化의 地方類型이기 때문이라는 論理인데, 과연 朝陽 十二臺營 10) 靳楓毅, 論中國東北地區含曲刃靑銅短劍的文化遺存(上) ( 考古學報 , 1982) 森貞次 郞, 遼寧靑銅器文化 ( 稻と靑銅と鐵, 日本書籍株式會社, 1985) 姜仁旭, 遼寧地域 琵琶形 銅劍에 대한 一考察 ( 韓國上古史學報 21, 1996). 11) 瀋陽市文物工作組, 瀋陽地區出土靑銅短劍資料 ( 考古 , 1964) 瀋陽故宮博物館, 瀋陽鄭家窪子的兩座靑銅時代墓葬 ( 考古學報 , 1975)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東 北工作隊, 瀋陽肇工街和鄭家窪子遺址的發掘 ( 考古 , 1989). 12) 靳楓毅, 앞의 글(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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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東北亞의 琵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琵琶形銅劍의 地域別 出土樣相과 特徵 1) 內蒙古地域 老哈河와 努魯兒虎山脈 사이에 해당하는 內蒙古 東南部地域은 赤峰 以北의 內蒙古 草 原地帶 와 大凌河 渤海灣 沿岸의 農耕地帶 와의 中間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銅劍들은 그 형태에 있어 모두 大同小異한데, 上部의 突起와 下部의 曲刃部가 비교적 잘 발달되어 전체적으로 琵琶形의 모습을 모두 충실히 견지하고 있다. 이 지역의 琵琶形銅劍 들은 南山根 石槨墓 M101 小黑石溝 石槨墓 M8501 汐子 北山嘴 石槨墓 M7501 등의 예와 같이 일반적으로 曲刃銎柄式 曲刃匕首式 銅劍과 동반하고 있다. 또 琵琶形銅劍이 출토된 유적은 대개 石塊을 이용해 묘광의 四壁을 축조한 石槨墓 인 것으로 밝혀져 있다. 최근 琵琶形銅劍이 출토된 유적 중 주목할 만한 곳으로는 寧城 甸子鄕 小黑石溝村 石 槨墓 M850123)이 있다. 小黑石溝 M8501에서는 모두 5점의 曲刃銅劍이 발견되었다. 이 중 3점은 이른바 曲刃銎柄式 銅劍에 속하는 것이었고, 나머지 2점24)은 琵琶形劍身에 琵 琶形銅劍의 전형적인 T자형손잡이와 劍把頭飾(손잡이장식)이 連鑄된 생소한 형식의 동검 이었다. 즉 검신과 손잡이 劍把頭飾(손잡이장식)이 모두 하나로 連鑄된 琵琶形銅劍이 출 토된 것이다. 그 동안 遼寧地域과 吉林地域 그리고 韓半島 등지에서 발견되었던 琵琶形銅 劍은 하나 같이 모두 검신과 손잡이와 劍把頭飾(손잡이장식)를 각각 별도로 제작한 뒤에 조립하여 사용하는 것들이었다. 寧城 小黑石溝 M8501 石槨墓에서 출토된 連鑄의 琵琶形 銅劍은 琵琶形銅劍의 組合 完成된 형태를 보여주는 예이기도하다. 劍身만을 놓고 보았을 때 琵琶形銅劍과 曲刃銎柄式 曲刃匕首式 銅劍은 아주 흡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래서 琵琶形銅劍을 曲刃短莖式銅劍 이라 하여 나머지 두 종류의 曲 刃系 銅劍 銎柄式 匕首式 과 함께 曲刃劍 25) 내지 曲刃靑銅短劍 26)이라 통칭하기도 하였다. 반면 曲刃短莖式銅劍 은 T자형의 손잡이와 劍把頭飾(손잡이장식)이 따로 제작되 어 劍身과 組合되었던 경우만 발견되기 때문에 나머지 두 종류의 손잡이와 검신이 連鑄 된 曲刃系銅劍들과는 마땅히 구분해야 한다 고 하여 東北系銅劍 27) 내지 東群劍 28)이라 23) 項春松 李義, 앞의 글(1995). 24) 필자가 1996년 內蒙古 踏査에서 傳聞한 바에 의하면 小黑石溝에서 출토된 通鑄의 琵琶形銅 劍은 모두 5점 이라고 한다. 25) 烏恩, 앞의 글(1978). 26) 遲雷, 앞의 글(1982) 靳楓毅, 앞의 글( ). 27) 林沄, 앞의 글(1980). 28) 翟德芳, 앞의 글(1988).

8 - 8- 國史館論叢 第88輯 러 별도의 系統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小黑石溝 M8501 石槨 墓 유적을 통해 손잡이가 연주된 琵琶形銅劍이 알려지게 됨으로 써 琵琶形銅劍이 나머지 두 종류의 曲刃系 銅劍과도 일정한 交 流 接觸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小黑石溝 출토의 2개 동검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琵琶形銅 劍은 銎柄式 이나 匕首式 銅劍과는 달리 손잡이와 손잡이장식 부분이 상당히 비대하게 제작되었다. 이런 모양대로라면 琵琶形 銅劍을 實戰에서 효율적으로 사용하기란 대단히 불편하였을 것 이다. 劍把頭飾(손잡이장식)을 포함한 손잡이 부분의 모양과 크 기가 실용적으로 제작되지 않은 것은 琵琶形銅劍의 祖型 내지 애초의 用度와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하다. 기존의 공병식이나 비수식 곡인동검에서 전혀 보이지 않던 T 자형 손잡이가 출현한 것은 외부의 영향이라고 보는 것이 순리 일 듯하다. 즉 內蒙古의 곡인계 동검에서 전통적으로 이용되지 않았던 T자형 손잡이와 劍把頭飾(손잡이장식)의 모티브가 새롭게 채용된 결과 소흑석구 M8501 석곽묘의 동검들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된 것이다. 필자는 소흑석구 M8501의 연주된 T자형 손잡 이와 劍把頭飾(손잡이장식)은 인근인 大凌河流域에서 유행하고 있던 琵琶形銅劍文化의 영향이라 생각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소흑석구 M8501 출토의 琵琶形銅劍은 銎柄式 匕首式 등의 曲刃系 銅劍에서 내려오 던 劍柄合鑄의 傳統을 계승하면서 隣近인 遼西地域에서 流行하던 손잡이 양식을 수용 한 결과 출현한 複合 型式인 것이다. 그러므로 소흑석구 M8501 출토의 T자형 손잡이 가 연주된 琵琶形銅劍을 琵琶形銅劍의 祖型 으로 파악29)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고 할 수 있다.30) 이런 검신과 비대한 劍把頭飾(손잡이장식)의 결합 현상은 忠南 扶餘 附近31)과 慶南 義 昌 平城里 石棺墓32) 出土의 磨製石劍(圖4)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두 마제석검은 모두 有柄式 石劍의 形態를 보이고 있지만 손잡이 아래에 소흑석구의 예와 유사한 모양의 劍 把頭飾(손잡이장식)이 첨부되어 있고 2줄의 血溝가 劍身에 새겨져 있다. 이러한 석검의 형 [圖 3] 小黑石溝 M8501 불 出土 琵琶形銅劍 29) 劉冰, 앞의 글(1992). 30) 劉冰, 앞의 글(1992)에서는 琵琶形銅劍의 祖型을 權杖 내지 巫器 와 유관한 것으로 추측한다. 31) 有光敎一, 朝鮮磨製石劍の硏究 (1957), 圖版第五-3. 32) 沈奉謹, 密陽 南田里와 義昌 平城里遺蹟 出土遺物 ( 尹武炳博士回甲紀念論叢, 1984)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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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10 [圖 4] 國史館論叢 第88輯 忠南 扶餘附近 ① 慶南 義昌 平城里, ② 出土 磨製石劍 이 부족하다. 또한 南山根 M101출토 銅劍의 主內容을 이루고 있는 直刃匕首式 銅劍의 淵源을 中國 殷周靑銅器文化에서 찾으려고 했던 見解40)가 있었으나, 內蒙古地域의 直刃 劍은 北方 草原地帶 靑銅器文化의 影響이라고 이해41)하는 것이 순리일 듯하다. 老哈河 流域에서 琵琶形銅劍과 曲刃系 直刃系 銅劍이 동반하는 유적의 절대연대를 밝 힐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아직까지 없는 실정이다. 이 지역에서 琵琶形銅劍이 伴出하 는 遺蹟들의 공통된 문화적 기반은 주지하듯이 夏家店上層文化 이다. 夏家店上層文化의 력 劉冰, 앞의 글(1992). 40) 烏恩, 關于我國北方的靑銅短劍 ( 考古 , 1978) pp ) 金貞培, 韓國靑銅器文化의 起源에 관한 一小考 ( 古文化 17, 韓國大學博物館協會, 1979) pp.2 22.

11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 11 연대에 대해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데, 秦漢時代(3 2C B.C)說42) 西周初期 戰國時代說43) 戰國時代說44) 西周晩期 春秋早期(9C中葉 8C初葉 B.C)說45) 西周 春秋時代說46) 商末周初 春秋時代說47) 西周 戰國早期說48) 商周之際(西周早期) 戰 國中期說49) 西周中期 春秋中期說50)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중국 고고학자들 사이에 서 夏家店上層文化의 下限에 대해선 春秋時代와 戰國時代를 놓고 많은 論爭이 아직도 진 행되고 있으나, 그 上限에 대해선 대체로 西周初期 (11C B.C) 무렵으로 어느 정도 일치 되었다. 소흑석구 M8501 석곽묘는 동반한 20여개의 中原式 靑銅容器와 3개의 銅戈 등에 의 거할 때 그 年代를 대개 西周晩期 春秋初期 (8C B.C)로 설정51)하고 있다. 또 銅鼎 銅製馬銜 銅聯罐 銅斗 등 靑銅器의 形制에 있어 小黑石溝 M8501과 완전히 일치하는 南山根 M101 石槨墓 역시 西周晩期 春秋初期 (8C B.C) 무렵으로 편년되고 있다.52) 특히 남산근 M101 석곽묘의 경우는 10여건에 달하는 中原式 周代 銅器 資料에 준거할 때 河南省 三門峽 虢國墓 遺蹟53)이나 洛陽 中州路 1 2期墓 遺蹟54)과 동일한 것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어 그 절대연대는 거의 확정적이라 할 수 있다. 老哈河 流城에서 琵琶 形銅劍이 출현하는 시점은 C14 연대측정 결과에 의해서도 보강될 수 있다. 이와 관련 하여 남산근 M101 석곽묘와 유물의 형제나 조합상이 동일한 內蒙古 林西縣 大井 古銅 42) 濱田耕作 水野淸一, 赤峰紅山後 (1938). 43) 中國科學院考古硏究所內蒙古發掘隊, 앞의 글(1961) 中國科學院考古硏究所內蒙古工作隊, 赤 峰葯王廟 夏家店遺址試掘報告 ( 考古學報 , 1974). 44) 內蒙古文物工作隊, 內蒙古出土文物選集 (1963). 45) 遼寧省昭烏達盟文物工作站 中國科學院考古硏究所東北工作隊, 앞의 글(1973). 46) 吉林省考古硏究室 吉林省文物工作隊, 統一的多民族國家的歷史見證 吉林省文物考古工作三 十年的主要收穫 ( 文物考古工作三十年, 文物出版社, 1979) 王承禮 張忠培 林沄 方起東, 東北考古的主要收穫 ( 東北考古與歷史 1, 文物出版社, 1982) 許玉林, 遼寧商周時期的靑 銅文化 ( 考古學文化論集 3, 文物出版社, 1983). 47) 內蒙古文物工作隊 內蒙古博物館, 內蒙古文物工作三十年 ( 文物考古工作三十年, 文物出版 社, 1979)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東北工作隊, 內蒙古寧城縣南山根102號石槨墓 ( 考古 , 1981). 48) 朱永剛, 앞의 글(1987). 49) 靳楓毅, 앞의 글(1987) 周亞利, 遼西夏家店上層文化的年代族屬及其民族的發式之管見 ( 中 國考古集成 東北卷 靑銅器時代(1), 北京出版社, 1996). 50) 孫力, 試談遼寧地區的商周文化 ( 北方文物 , 1995). 51) 項春松, 小黑石溝發現的靑銅器 ( 內蒙古文物考古 , 1984) 塔拉 齊曉光, 寧城縣 小黑石溝夏家店上層文化遺址 ( 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1986) 劉冰, 앞의 글(1992) 項春松, 內蒙古小黑石溝大墓的發掘收穫 ( 中國文物報 90, 1994). 52) 遼寧省昭烏達盟文物工作站 中國科學院考古硏究所東北工作隊, 앞의 글(1973) 朱永剛, 앞의 글(1987) 靳楓毅, 앞의 글(1987). 53) 中國科學院考古硏究所, 上村嶺虢國墓地 (1959). 54) 中國科學院考古硏究所, 洛陽中州路 (1959).

12 國史館論叢 第88輯 礦 遺蹟55)의 石炭을 試料로 한 6개의 C14 연대측정치가 참고가 된다. 2970±115, 2795±85, 2780±100, 2720±90, 2715±85, 2700±100 B.P 56) 등의 연대가 밝혀 져 있는데, C14 연대측정치에 의하자면 고동광 유적의 상한 연대는 대략 西周初期 까 지 소급될 수 있다. 그러나 대정 고동광 유적을 대표로 하는 北部(西拉木倫河 流域)의 夏 家店上層文化( 大井類型 )가 남쪽의 南山根類型 보다 대체로 시기가 앞선다는 연구 결 과57)를 참조할 때, 南山根 M101의 비파형동검은 역시 그 다음 시기인 西周晩期 (18C B.C) 무렵이라고 편년함이 무난할 것이다. 연대 검토에 의하자면 夏家店上層文化가 개시된 후 2 300년 가량이 지난 무렵에야 南山根이나 小黑石溝를 위시한 老哈河 上流 일대에서 琵琶形銅劍의 존재가 확인된다. 琵 琶形銅劍이 夏家店上層文化의 中期에 이르러 비로소 內蒙古 東南部地域에서 出現하는 점 은 琵琶形銅劍의 起源을 夏家店上層文化와 결부시켜 이해하는 중국 고고학자들의 주장에 회의를 가지게 하는 부분이다. 출토 양상과 연대 검토를 통해 볼 때 琵琶形銅劍은 夏家店 上層文化의 재래적인 요소가 아니라 中期에 이르러 流入되는 別系統의 銅劍이라고 이해 함이 순리일 듯하다. 다음으로 內蒙古 지역에서 출토되는 琵琶形銅劍 중 老哈河 上流의 유형과 구분될 만 한 유적으로 敖漢旗 山灣子村 等子山麓에 위치한 墓地群이 있다. 山灣子村 墓地58)는 敖 漢旗 정부 소재지인 新惠로부터 동쪽 36km 지점인 敎來河 右岸의 등자산 동록에 위치 해 있다. 묘지군과 인접한 敎來河 는 內蒙古와 遼西地域의 경계인 努魯兒虎山脈에서 發 源하는 강으로 西遼河의 비교적 큰 支流에 해당한다. 노노아호산에서 발원한 敎來河 는 산만자촌을 지나 계속 동북방향으로 흘러 奈曼旗 北部에서 열하산지를 지나온 老哈河 와 합류한다. 등자산 북록에는 길이 340m 너비 150m의 夏家店下層文化의 山城이 위 치해 있고, 墓地群의 동측 丘陵臺地上에는 夏家店上層文化 遺址가 있어 이 일대의 文化 複合相을 짐작케 해준다. 山灣子村 墓地에서는 모두 9개의 曲刃銅劍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6개는 琵琶形銅劍이 고 나머지는 銎柄式銅劍이다. 琵琶形銅劍 중 4건은 全長이 사이이며 봉부 가 조금 발달해 있는 편이지만, 突起와 脊突이 선명하여 典型的인 琵琶形을 뚜렷하게 견 지하고 있다. 반면 2건59)은 전장 28 이며 검신 중간에 위치한 突起의 上下 內弧가 불 55) 王剛, 林西縣大井古銅礦遺址 ( 內蒙古文物考古 , 1994). 56) 北京大學歷史系考古專業碳十四實驗室, 碳十四年代測定報告(續一) ( 文物 , 1978)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實驗室, 放射性碳素測定年代報告(六) ( 考古 , 1979). 57) 靳楓毅, 앞의 글(1987). 58) 邵國田, 內蒙古敖漢旗發現的靑銅器及有關遺物 ( 北方文物 , 1993). 59) 邵國田, 앞의 글(1993). 圖3-1 참조.

13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명확하고 검신 下部 曲刃部의 너비가 비교적 좁아 전체적으로 4건의 前者보다 細長化된 느낌을 준다. 더욱이 後者의 경우 韓半島 中南部 地域에서 자주 확인되는 莖部 下端의 溝 가 貫通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러나 前者(4건)와 後者(2건)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銅劍型式의 구분 기준으로 연결시키기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6개의 琵琶形銅劍들은 모두 동일한 層位와 墓域에서 출토된 一括遺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劍身의 長短 내지 曲刃部 의 廣狹 또는 莖溝의 有無와 같은 要素는 同時代的인 것으로 樣式의 差異라고 설명하는 편이 적당하리라 본다. 또한 山灣子村 墓地에서는 內蒙古 지역에선 처음으로 滑石製의 琵琶形銅劍 鎔范 1雙(2 扇)이 琵琶形銅劍과 함께 發見되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합범에 음각되어 있는 동검 의 외형은 날부분의 길이가 30.5 에 달하고 명확한 突起와 尾部의 형태 등을 통해 짐작 할 때 標本295 琵琶形銅劍(原發掘報告書 圖3-3)의 형태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된 다. 또 석범의 莖段에 만들어진 淺口 가장자리에 熏黑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數次 銅劍을 鑄造해 낸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산만자촌 출토의 석범은 실제로 수 차 사용되다가 琵琶形銅劍과 함께 埋納된 것이라 보여진다. 또한 이 석범의 존재는 산만 촌 일대 敎來河 유역에서 琵琶形銅劍을 직접 주조 생산하였다는 사실을 반증해 주기도 한다. 山灣子村 서남쪽의 東井村에서도 琵琶形銅劍 1건이 石製加重器 扇形銅斧 등과 함께 출토된 적이 있고 주변의 上石匠溝와 熱水湯村에서도 夏家店上層文化의 墓地가 확인60) 되는 것으로 보아 산만자촌을 중심으로 한 敎來河 上流地域 은 老哈河 上流와 구분되는 또 다른 유형의 문화라고 할 만한 곳이다. 산만자촌 묘지는 夏家店上層文化의 전형적인 토기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黑陶長頸壺 平底短頸壺 二重口緣鉢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土器 調合相은 遼河 동쪽의 無文土器 文化와 상당히 유사하다. 특히 黑 陶長頸壺 는 瀋陽 鄭家窪子의 例와 흡사하여 두 지역 사이의 文化 交流를 생각해 보게 한다. 內蒙古地域 출토 琵琶形銅劍에 대한 이상의 검토에 의하자면 老哈河 流域은 遼西地域 의 琵琶形銅劍文化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敎來河 流域(西遼河)은 遼東地域과 밀접하게 연 결된다고 추단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銅器文化가 발달한 遼西地域과 土器文化가 발달 했던 遼東地域의 對比와 결부되는 현상이다. 60) 邵國田, 앞의 글(1993).

14 - 14 [圖 5] 國史館論叢 第88輯 內蒙古 敖漢旗 山灣子墓地 出土 遺物 2) 遼寧地域 內蒙古 東南部地域과 遼西地域을 구분해주는 지형지물로는 努魯兒虎山脈 을 주목할 만하다. 努魯兒虎山脈은 遼寧省 建平縣의 北部와 內蒙古 敖漢旗 남동부에 동서로 걸쳐 있는 준령으로 西遼河의 상류(老哈河 敎來河)와 大凌河를 남북으로 갈라놓는 分水嶺이 되기도 한다. 노노아호 산맥의 서단은 內蒙古 寧城縣 남부에 이르러 비로소 완만해지며 남북의 왕래가 용이한 지형으로 변하게 된다. 그래서 요즘도 內蒙古와 遼西地域을 연결 하는 交通路가 이 일대의 寧城 凌源間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지형적인 환경을 고려 할 때 과거에도 이 일대가 內蒙古 東南部地域과 遼西地域의 주요 通路로 이용되었음을 짐작 할 만 하다. 두 지역간의 주요 통로였던 것으로 보이는 寧城 凌源間에서도 琵琶形銅劍 遺蹟이 발 굴된 바 있다. 바로 寧城縣 靑山 孫家溝 石槨墓 M737161)이 그것이다. 손가구촌은 內蒙 古 영성현과 河北省 평천현과 遼寧省 능원현의 경계가 만나는 곳으로 영성현의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 영성현을 가로지르는 老哈河 상류의 동남안 약 20km 밖에 위치하고 있어 상기한 老哈河 上流 와는 다소 구분되는 지역이다. 石槨墓 M7371 유적이 위치해 있는 丘陵 臺地 앞을 지나는 河川은 大凌河 의 上流로 凌源을 지나 喀左縣에서 大凌河의 本流 61) 寧城縣文化館, 寧城縣新發現的夏家店上層文化墓葬及其相關遺物的硏究 ( 文物資料叢刊 9, 1985).

15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에 유입된다. 따라서 손가구촌은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론 寧城縣에 속해 있지만 실제로는 능원현 일대의 大凌河 上流와 보다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유적에서는 북쪽의 內蒙古地域과는 달리 餘他의 曲刃系나 直刃系의 銅劍은 보이지 않고 순수히 琵琶形銅劍만 出土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러한 琵琶形銅劍 出土樣相 의 차이는 孫家溝 유적의 지정학적 위치와도 깊은 관계가 있으리라 본다. 老哈河 유역에 서는 여타의 曲刃系 直刃系 銅劍과 琵琶形銅劍이 동반 출토되어 절충된 複合樣相을 드 러내고 있으나, 老哈河 上流와 大凌河 上流의 中間地帶인 손가구 유적에 이르면 琵琶形銅 劍이 독자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러한 琵琶形銅劍 出土 樣相의 차이는 앞 에서도 지적한 內蒙古 東南部地域과 遼西地域의 文化圈 區分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孫家溝 遺蹟이 위치한 老哈河 상류와 大凌河 상류의 중간지대도 銎柄曲刃式 銅 劍과 琵琶形銅劍의 相合地帶라고 파악할 수 있다.62) 老哈河上流와 大凌河上流 지역 사이의 중복지대에서는 銎柄 T柄 獸首式 銅劍이 혼 재되어 나타나는데 그 중 銎柄式銅劍이 주종을 이룬다. 曲刃銎柄式 銅劍의 분포는 대체로 老哈河流城을 중심으로 한 內蒙古 동남부 지역에 국한되며, 努魯兒虎山脈 以南이나 大凌 河 上流 以南 지역에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자료에 의하자면 努魯兒虎 山脈 以南 大凌河 上流 以北에서 곡인공병식 동검이 발견된 지점은 建平縣 水泉城子 M7701 M7801, 萬壽老西店 M72 3, 凌源縣 安杖子 등으로 모두 遼寧省의 最北邊에 위치해 있다.63) 특히 건평현 수천성자와 만수오서점 유적은 努魯兒虎山脈 남사면에 위치 하고 있어 공병식곡인검의 분포권을 짐작하게 해준다. 능원현 안장자는 손가구 유적으로 부터 대능하 상류를 따라 능원 방향으로 조금 남하한 지점으로 老哈河 上流 大凌河 上 流의 中間에 해당한다. 따라서 老哈河와 大凌河의 中間地帶 와 努魯兒虎山脈 上下地帶 를 연결한 橫線은 銎柄式 曲刃銅劍의 南限界線이라 판단해도 좋을 것이다. 重複地帶로부터 더 남하한 大凌河 유역은 여타의 곡인계 동검이 발견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單純 琵琶形銅劍文化 地域이라 할 수 있다. 大凌河 유역의 琵琶形銅劍 文化 의 대표적인 유적을 거론할 때 우리는 주로 朝陽 十二臺營子 石棺墓64)를 언급하게 된다. 十二臺營子 遺蹟은 1958년 봄 大凌河의 수로관개 공사중 南岸에 위치한 柏山의 北坡 高 地上에서 발견되었다. 十二臺營子에선 모두 3기의 石棺墓가 발굴되었는데 묘장의 형태나 출토 부장품에 있어 기본적으로 相同하다. 62) 劉冰, 앞의 글(1992). 63) 建平縣文化館 朝陽地區博物館, 遼寧建平縣的靑銅時代墓葬及相關遺物 ( 考古 , 1983). 64) 朱貴, 遼寧朝陽十二臺營子靑銅短劍墓 ( 考古學報 , 1960).

16 國史館論叢 第88輯 1호 石棺墓를 보게 되면 묘광의 四壁은 自然石塊와 卵石을 이용해 축조하고 바닥은 난 석을 이용해 平鋪하여 南山根 M101 石槨墓와 유사한 구조로 이루어진 듯하다. 그러나 十二臺營子 M1은 11장의 石板을 이용해 墓蓋를 이중으로 덮었으며 또한 西壁에는 70 (高) 60 (寬) 9 (厚)의 大石板을 이용한 墓門이 만들어져 있어 전체적으로 石室 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남산근 석곽묘와 크게 다르다. 또 묘실의 규모도 1.8(長) 1(寬) 1.2(深)m로 남산근 M101 석곽묘65)의 1/2의 크기에 불과하다. 더불어 十二臺營 子는 서벽의 대석판으로 만든 墓門을 통해 二次 追加葬을 한 夫婦合葬의 葬式을 보이고 있어 南山根 石槨墓와 別系統의 墓制라고 해야 할 것이며, 石板 을 이용해 蓋口하는 葬式 은 遼東地域의 石棺墓 내지 石蓋石棺墓와 연관된 전통이라 보여진다. 한편 十二臺營子와 南山根 石槨墓 사이의 차이점은 부장 유물에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十二臺營子 M1에서는 南山根에서 자주 보이는 靑銅容器(鼎 簋 簠 鬲 등)가 1건도 출토 되지 않으며, 오히려 南山根에서 전혀 보이지 않았던 多鈕銅鏡이 2개나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多鈕銅鏡은 老哈河 유역과 大凌河 유역의 琵琶形銅劍 문화 양상을 구분짓는 가장 특징적인 標識遺物이라 할 수 있다. 大凌河 流域을 중심으로 한 遼西地域에서 출토된 多 鈕銅鏡은 모두 7件으로 관계 유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表 2] 鈕銅鏡 遼西地域 多 出土 遺蹟 遺 蹟 名 件數 直徑/厚( ) 鈕數 同 伴 遺 物 石製枕狀加重器1, 扇形銅斧1, 銅刀1, 單 建平 大拉罕溝 M /0.3 2 琵琶形銅劍1, 鈕素紋鏡2, 鏡形器1, 有孔石斧1, 骨鑣2. 琵琶形銅劍1, 銅製枕狀加重器1, 琵琶形銅鉾1, 銅鏃16, 銅鑿1, 銅刀1, 蠻鈴2, 當盧2, 勺形器2, 鏡 建平 炮手營子 M /0.3 2 扇形銅斧1, 形器1, 銅盒1, 鏢形銅器1, 銅扣43, 有孔石斧1, 天河石 製管玉1, 三稜有莖骨鏃1. 琵琶形銅劍2, 石製枕狀加重器2, Y形銅具1, 扇形銅斧1, 銅刀2, 銅鑿1, 銅錐3, 銅牌9, 銅魚鉤3, 銅 朝陽 十二臺營子 M 雙翼銅鏃2, / 鑣6, 銅扣6, 銅節約12, 管狀銅飾59, 有孔礪石1, 石漁 墜1, 細石器2, 陶紡輪1, 陶片2. 琵琶形銅劍2, Y形銅具1, 扇形銅斧1, 雙翼銅鏃14, 環首 游環長板狀銅具2, 雙虺糾結銅具1, 銅鑣5, 長管 朝陽 十二臺營子 M2 2 / 銅刀1, 狀銅具5, 十字形銅具12, 銅帶具7, 銅節約20, 銅扣10, 銅錐1. 朝陽 十二臺營子 M /0.8 3 石製枕狀加重器1. 65) 南山根 石槨墓 M101의 墓室 規模는 3.8(長) (寬) 2.4(深)m이다.

17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상기한 [表2]의 大拉罕溝 M851과 炮手營子 M881 66)은 모두 최근인 1985년과 1988 년에 각각 조사된 곳들로 遼寧地域의 銅鏡 硏究에 있어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만한 가치 있는 유적들이다. 필자는 예전에 中國 東北地方의 石棺墓 遺蹟에서 출토된 靑銅器類를 언 급하면서 劍 鏡 玉 의 同伴與否를 檢討67)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까지의 발굴자료에 의 해 필자는 중국 동북지방의 石棺墓에선 劍 鏡 玉 의 동반은 확인되지 않고 다만 劍 鏡 의 동반은 數處에서 발견된다는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했었다. 그러나 최근 새로운 발 굴자료의 추가로 인해 遼寧地域에서도 韓半島 靑銅器時代에 종종 보이는 劍 鏡 玉 의 동반현상이 확인되었다. 바로 建平 炮手營子 M881 石槨墓의 琵琶形銅劍 雙鈕銅鏡 天 河石製管玉 동반 출토가 그 예이다. 포수영자는 대랍한구와 함께 건평현 중부에 걸쳐 있 는 努魯兒虎山脈의 南麓에 위치해 있으며 大凌河의 상류인 虎山河 유역에 해당한다. 努魯 兒虎山脈 南麓 高山丘陵의 산간지대에서 검 경 옥 의 동반현상이 확인된 점은 琵琶形銅 劍을 사용한 社會의 發展段階를 가늠하게 해주는 좋은 방증자료가 되리라 믿는다. 大凌河 流域에서 琵琶形銅劍과 함께 발견되는 銅鏡들은 모두 鈕의 數가 2 4개의 多鈕라는 공통 점이 있다. [圖 6] (1.M851 2.M881) 鈕銅鏡 建平縣 出土 多 內蒙古 東南部地域의 南山根 M101과 M102에서도 3개의 銅鏡이 발견된 바 있었다. 그러나 南山根의 동경들은 모두 單鈕에 무늬가 없는 素面鏡 이어서 大凌河 流域의 경우와 대조된다.68) 그리고 그 직경도 사이에 해당하여 大凌河 流域의 銅鏡에 비하 66) 李殿福, 建平孤山子 楡樹林子靑銅時代墓葬 ( 遼海文物學刊 , 1991). 67) 金貞培, 中國에서 발견되는 우리나라 靑銅遺物의 問題 石棺墓의 劍 鏡 玉을 중심으로 ( 先史와 古代 1, 1991) pp ) 張錫瑛, 試論東北地區先秦銅鏡 ( 考古 , 1986).

18 國史館論叢 第88輯 자면 1/2 정도 크기의 小型에 불과하다. 두 지역 銅鏡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鈕數와 規格의 차이는 그 용도와 깊은 관계가 있으리라 짐작된다. 單鈕鏡의 鈕는 일반적으로 銅 鏡 背面의 정중앙에 위치한다. 鈕가 중앙에 위치하는 것은 고리를 달아 손으로 잡거나 끼 고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의도한 구조인 듯하다. 따라서 소형의 單鈕鏡은 鈕에 설치한 고리나 끈을 손으로 잡고 사용하는 손거울의 용도로 추정69)할 수 있다. 반면 多鈕鏡의 경우엔 鈕들이 대부분 중심으로부터 떨어져 한쪽 테두리 부분에 치우쳐 배열되어 있다. 大拉罕溝 M851이나 炮手營子 M881의 경우를 보면 2개의 鈕가 나란히 11 의 모양으로 가장자리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다. 이러한 양상은 三鈕의 十二臺營子 M3 출토 동경에서도 확인되는데 111 의 모양으로 역시 한 편에 배열되어 있다. 十二臺 營子 M1 출토 三鈕鏡의 鈕들도 삼각형 모양으로 테두리 부분에 각각 편중되어 분포해 있다. 四鈕의 경우엔 銅鏡 주위에 사각형 모양으로 넓게 포진되어 있다. 이러한 多鈕鏡의 鈕들은 고리를 달거나 끈을 묶어서 손으로 잡고 사용하기엔 부자연스런 형태이다. 특히 11 이나 111 의 모양으로 편중된 多鈕는 그 용도가 어디에 매달거나 걸기 위한 구조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多鈕鏡의 용도는 그 出土 情況을 통해서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十二臺營子 M1 石棺墓에서 多鈕鏡이 출토될 당시의 위치에 대해 原報告書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황 을 기술하고 있다. 1면은 출토 당시 경면이 밖으로 향해 남성의 두개골 정부에 수직으 로 세워져 있었고, 또 다른 1면도 경면이 밖을 향해 발 아래 부분에 비스듬이 서 있었으 나 (모두) 원래의 위치가 아닌 듯하다. 70) 그러나 十二臺營子 M2에서 2면의 多鈕鏡이 출토된 위치도 M1과 동일하여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의문점이 남는다. 多鈕鏡의 출토 위치는 瀋陽 鄭家窪子 M651271)에서 銅鏡의 대체물로 이해되는 鏡形器 72)(原報告文의 鏡 形飾 )가 출토된 정황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鄭家窪子 M6512에서는 모두 6개의 鏡形器가 屍身의 머리 가슴 배 무릎 발목과 발치에 각각 일렬로 배렬되어 놓여 있다. 이 가운 데 2개의 大型 鏡形器가 시신의 두개골 정부와 발 아래에서 출토되어 十二臺營子의 경우 와 똑같은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상의 發見例를 통해 볼 때 多鈕鏡을 死者의 머리 위와 발 아래에 두는 행위는 當時 人들의 埋葬 風俗이라 파악73)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多鈕鏡을 시신의 위에 배치하는 69) 張錫瑛, 앞의 글(1986). 70) 朱貴, 앞의 글(1960). 71) 瀋陽故宮博物館 瀋陽市文物管理辨公室, 瀋陽鄭家窪子的兩座靑銅時代墓葬 ( 考古學報 , 1975). 72) 張錫瑛, 東北地區鏡形器之管見 ( 博物館硏究 , 1985). 73) 張錫瑛, 앞의 글(1985) 張錫瑛, 앞의 글(1986).

19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은 상기한 大拉罕溝 M851 石槨墓74)에서도 확인된다. 대랍한구 석곽묘에서는 1면의 쌍뉴동경이 시신의 흉부 위에서 출토되었다. 따라서 多鈕鏡은 단순한 거울의 용도가 아니 라 사자의 매장에 이용되던 明器나 神器의 일종으로 판단된다. 특히 대랍한구의 경우로 추측해 볼 때 多鈕鏡은 사자의 생전에도 손거울이 아니라 가슴 부위에 걸거나 매달았던 儀器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多鈕鏡을 이용한 매장 풍속이 당시의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필 자의 調査에 의하자면 遼西地域에서 琵琶形銅劍을 반출하는 유적은 50여개소에 이르는데 그 가운데 위에서 제시한 3곳의 유적에서만 多鈕鏡을 이용해 死者를 매장하고 있다. 또 한 多鈕鏡이 매장에 이용된 十二臺營子 大拉罕溝 炮手營子 遺蹟은 하나 같이 규모나 부장유물의 양 질 측면에서 주변의 다른 분묘보다 월등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따 라서 多鈕鏡을 이용한 死者의 매장 풍속은 당시의 유력한 君長 이나 祭司長 과 같은 支配 者의 葬禮에만 적용된 제한된 현상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多鈕鏡은 君長이나 祭司長이 儀式에서 가슴 등의 신체 부위에 걸거나 매달아 자신의 權能(Mana)을 과시하 는 呪術的 儀器로 사용되다가 그들의 死後에는 屍身의 埋葬에 이용하던 明器 내지 神器 의 일종이 된 셈이다. 多鈕銅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十二臺營子를 標識로 하는 大凌河 流域의 琵琶形銅 劍文化에서는 儀式 내지 信仰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던 것 같다. 또한 多鈕鏡의 존재는 內 蒙古 東南部地域과 大凌河 流域의 文化 區分을 가 虢 鈕 능하게 해준다. 현재까지 多鈕鏡의 분포범위가 內蒙 古와 遼西地域을 구분하는 努魯兒虎山脈을 넘지 않 는다는 점도 이러한 설정을 뒷받침 한다. 한편 中原地域인 河南省 三門陜市 上村嶺 虢國墓 地 M1612에서도 雙鈕鏡이 1件 발견75)된 바 있어 주목된다. 虢國墓의 雙鈕鏡은 背面에 虎 鹿 鳥의 動物 文樣이 簡略하면서도 生生하게 四方에 施紋되 어 있다. 그리고 네 文樣의 正中央에 11 자 모양으 로 2개의 鈕가 자리잡고 있다. 鈕의 位置나 文樣의 種類에서 볼 때 中國 東北地方이나 韓半島 등지에 서 출토되는 多鈕鏡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하 풍속 [圖 7] 河北省 國墓 出土 雙 銅鏡 74) 李殿福, 앞의 글(1991). 75) 中國科學院考古硏究所, 上村嶺虢國墓地 (1959) 北京大學考古學硏究室編(宇都木章外譯), 商 周考古學槪說 (燎原書店, 東京, 1989).

20 國史館論叢 第88輯 지만 西周 東周之際 (8C初 B.C)로 편년되는 虢國墓에서 雙鈕鏡이 發見되었다는 점은 大 凌河 流域에서 多鈕鏡이 出現하는 時點과 관련하여 參考가 될 듯하다. 老哈河 上流에 琵琶形銅劍이 등장한 시기는 대략 8C B.C 무렵이라고 이미 검토한 바 있다. 그러나 遼西地域에서 琵琶形銅劍이 출현한 시기를 밝힐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南山根이나 小黑石溝 遺蹟의 경우처럼 표지가 될만한 中原銅器가 출토되지 않았고 또한 C14연대측정 관련 자료도 현재로선 별달리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 다. 그러나 최근 遼西地域 琵琶形銅劍文化의 직전단계에 해당하는 魏營子類型 의 遺址가 數處에서 조사되면서 琵琶形銅劍의 出現期를 地層序列과 重複關係를 통해 간접적으로 나 마 確認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 집중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한 魏營子類型 76) 文化는 遼西에서 夏家店 下層文化期와 琵琶形銅劍文化期( 凌河類型 또는 十二臺營子類型 ) 사이에 介在하는 지방색이 강한 문화로 赤峰 寧城 일대의 內蒙古 東南部地域에선 아직 同類型의 遺蹟이 확인되지 않았다. 魏營子類型 의 年代는 대략 中原의 商末周初 (12C B.C)에 해당하는데 內蒙古地 域의 편년으로 보자면 夏家店下層文化와 上層文化 사이에 해당한다. 魏營子類型 에 해당 하는 유적으로는 朝陽 魏營子遺蹟의 遺物包含層과 土壙墓群,77) 喀左 南溝門遺蹟의 第2期 文化層,78) 喀左 後墳遺蹟,79) 喀左 和尙溝 墓地,80) 喀左 道虎溝 土壙墓遺蹟81) 등이 대 표적으로 지목된다. 魏營子類型의 文化圈은 喀左縣과 朝陽縣 一帶의 大凌河 流域으로부터 渤海沿岸의 錦州地域까지 비교적 밀집된 분포 양상을 보이는데 동쪽으로는 義縣의 醫巫 閭山 을 넘지 못한다.82) 魏營子類型 文化의 성격을 잠시 살펴보면 土器는 대부분 夾砂紅陶 내지 紅褐陶 系統에 속하며 無紋土器와 打捺繩紋土器가 반반 정도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打捺繩紋은 內蒙古 地域의 夏家店上層文化에서 잘 보이지 않는 요소로 鉢과 罐과 같은 지방색이 강한 器種 에서 자주 확인된다. 대표적 器種은 大足鬲 平沿斜直壁鉢 大口罐 大甕이며 그 밖에 小 口甕 豆 鼎 甗 등도 보이며 大凌河 流域에선 처음으로 外反口沿盆이 나타난다. 墓制는 竪穴土壙의 木槨墓로 土壙과 木槨 사이에 灰膏泥를 充塡하고 있으며 墓壙長軸의 방향은 대체로 東西向이다. 葬式은 주로 單人仰身直肢葬이며 猪骨 을 隨葬하는 경우가 많다. 副 76) 郭大順, 魏營子類型的發現及其意義 ( 遼寧省考古博物館學會成立大會會刊, 1981). 77) 遼寧省博物館文物工作隊, 遼寧朝陽縣魏營子西周墓和古遺址 ( 考古 , 1977). 78) 遼寧喀左縣南溝門遺址和墓葬發掘報告 (未刊). 79) 喀左縣文化館, 記遼寧喀左縣後墳村發現的一組陶器 ( 考古 , 1982). 80)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喀左縣博物館, 喀左和尙溝墓地 ( 遼海文物學刊 , 1989). 81) 遼寧喀左縣1979年文物普査報告 (未刊). 82) 郭大順, 試論魏營子類型 ( 考古學文化論集 1, 文物出版社, 1987).

21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葬土器는 주로 屍身의 머리맡에 두고 있으며 木槨과 土壙 壁面 사이의 充塡土內에서 종 종 발견되기도 한다. 副葬靑銅器로는 銅耳環 單鈕鏡 金釧 등의 裝飾品類와 盔甲 등과 같은 지방색이 강한 武器類와 함께 銅容器(銅卣 銅壺) 車馬具(當盧 車轊) 등과 같은 中 原銅器의 影響을 받은 것들이 공존한다. 魏營子類型 遺蹟과 琵琶形銅劍 出土 遺蹟의 層序(重複) 關係를 확인할 수 있는 곳으로 는 喀左縣의 和尙溝墓地와 南溝門遺址가 있다. 1979년에 발굴된 喀左縣 南溝門遺址는 大 凌河 東岸의 大城子鎭 동남쪽 8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遺蹟은 배산임수한 저대지상에 위치하여 草場鄕 河川의 出口를 막고 있는 형상이며 주변의 지세는 험준한 편 이다. 이 유적에선 네 시기의 文化堆積層이 발견되었는데, 가장 아래의 第1期層은 夏家店下層 文 化層으로 회색토가 섞인 황토층이다. 이 층위의 두께는 50 내외로 磨光泥質黑陶의 鬲 尊, 灰陶繩紋의 甗 盆, 그리고 有肩石鏟 등이 출토되었다. 第2期層은 魏營子類型 文 化層으로 두께 50 내외의 흑색토이며 출토 유물은 대단히 적은 편이다. 第2期層에서 출토된 土器片은 전부 夾砂의 紅陶와 紅褐陶로 부분적으로 繩紋 附加堆紋 押印三角紋 帶를 장식하였다. 복원을 통해 鬲과 甕 각 1건씩이 드러났으며 繩紋의 罐片과 盆片이 수 습되었다. 第3期層에선 砌石墓群이 확인되었는데 여기에선 琵琶形銅劍, 甬首直刃劍, 銅 鉾, 雙翼銅鏃, 小型銅帶鉤, 尖首刀幣 등의 靑銅器類가 이 遺址에선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층에서 출토된 土器로는 灰褐色의 無紋大口罐과 灰陶의 繩紋盆 등이 있다. 마지막의 第4期層에선 戰國中期 前後의 土壙墓와 戰國晩期의 甕棺이 발견되었다.83) 琵琶形銅劍이 출토된 것은 3期層으로 2期層의 魏營子類型 다음 단계에 해당한다. 앞서 거론했듯이 魏營子類型의 文化는 그 동안 종합적인 연구를 통해 그 연대가 대체로 기원전 12세기 전후에 해당하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그러므로 南溝門 2期層의 연대도 대략 B.C 12C 전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琵琶形銅劍이 출토된 南溝門 3期層의 연대 는 중간에 공백이 없었다면 그 다음 시기가 되어야 순리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정식 발 굴보고서가 간행되지 않아 구체적인 層位 내의 先後關係나 출토 위치 등을 정확하게 알 수 없어 그 연대를 단정할 수 없는 실정이다.84) 南溝門 2期層과 나란한 시기의 魏營子類 型의 墓葬(魏營子 土壙墓 道虎溝 土壙墓)에서는 간단한 銅飾類와 中原系 銅容器類만 발견되 다가, 다음 시기의 南溝門 3期層에 이르르면 銅劍 銅鏃 銅鉾 등의 銅製 兵器類가 출현 하기 시작한다. 즉 南溝門遺址를 통해서 大凌河 流域의 靑銅器文化 變化相만은 충분히 도 83) 郭大順, 앞의 글(1987). 84) 郭大順, 앞의 글(1987), p.82에서는 南溝門 3期層의 年代를 春秋時代 (B.C )로 설정하고 있으나, 앞선 2期層(B.C 12C 11C)과 時間的으로 懸隔하여 這間의 事情에 疑問이 남는다. 다만 3期層에서 발견되는 尖首刀幣 가 燕의 明刀錢 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그 年代는 春秋末 戰國初 (B.C 5C)에 해당하게 된다.

22 國史館論叢 第88輯 출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遼西地域의 墳墓에서 靑銅製 兵器가 등장하는 것은 南溝門 3 期層의 예와 같이 琵琶形銅劍이 同伴하는 層位로부터 말미암는 현상이라고 짐작된다. 琵琶形銅劍이 출토된 層位의 연대를 좀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은 喀左 和 尙溝 墓地85)이다. 和尙溝村은 喀左縣 中部의 구릉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남쪽으로 縣城인 大城子鎭과 15km, 동쪽으로 大凌河와 4km 떨어져 있다. 유적은 촌 서쪽의 황토대지상 에 위치하는데 북쪽만 산(黑山)에 의지해 있고 三面이 自然河溝에 연해 있다. 유적의 면 적은 대략 15,000 北高南低의 지세로 大凌河를 바라보고 있다. 1979년에 발굴한 4개 (A B C D) 지점에서 22基의 墳墓가 조사되었다. 遺蹟은 出土 遺物의 內容과 型式에 있어 A地點 과 B C D地點 의 두 구역으로 크게 양분된다. A地點에선 4基의 土壙木槨墓(M1 M4)가 확인되었는데 副葬品으로는 卣 壺의 銅容器 類, 耳環 金釧 등의 銅飾類, 石斧 그리고 6件의 土器가 모두 木槨內에서 발견되었다. 土 器들은 모두 夾砂紅褐陶로 手制이며 燒成度는 낮은 편이고 器壁은 비교적 두텁다. 器種은 罐(3件) 鉢(2件) 鼎(1件)의 세가지로 구성되는데 繩紋土器와 無紋土器가 혼재되어 있다. 墓葬의 構造와 副葬遺物들을 살필 때 和尙溝 A地點의 분묘들은 魏營子나 道虎溝의 土壙 墓와 같은 魏營子類型 文化에 포함됨을 일견 알 수 있다. 한편 B C D 3地點에서 출토된 副葬品들은 서로 많은 共通點들을 가지고 있다. 우 선 土器는 22건이 확인되었는데 전부 手制의 夾砂紅陶 혹은 紅褐陶로 繩紋이 없는 無紋 土器들이고 器壁의 內外는 모두 打磨調整되어 있었다. 器種은 간단하여 腹部의 볼록한 부 분이 거의 생략된 鉢과 碗의 유형이 주종을 이룬다. 銅器類는 모두 11건이 발견되었는데 琵琶形銅劍3 銅刀6 銅項環1 銅泡飾1件 등이다. 이 밖에 雙翼骨鏃 石斧 石製劍把頭 飾(손잡이장식) 牛骨 羊骨 등이 동반 출토되었다. B C D 3지점의 묘장들은 기본적으 로 일치된 내용과 특징을 보이고 있어 동시기의 유적들이라 판단된다. 琵琶形銅劍은 B地區 M6과 D地區 M13 17에서 각각 1건씩 출토되었는데 묘제는 모 두 土壙木槨墓인 것으로 밝혀졌다. 3개의 琵琶形銅劍은 동일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모 두 검신의 중간에 뚜렷한 突起가 있으며 鋒部의 길이는 사이로 비교적 짧 다. 劍身은 莖部를 포함한 通長이 35 (M6), 33.2 (M13), (M17)이고 최대 너 비는 사이로 약 8 1 의 길이/너비 비를 가진 비교적 날씬한 모양을 띠고 있다. 和尙溝의 銅劍들은 형태상으론 南山根 M101과 錦西 烏金塘 土壙墓86)에서 출토된 것들과 동일하다고 報告文에선 밝히고 있다. 石製의 琵琶形銅劍 劍把頭飾도 B지점과 C지점에서 각각 1건씩 출토되었는데 CM10의 85)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喀左縣博物館, 앞의 글(1989), pp ) 錦州市博物館, 遼寧錦西縣烏金塘東周墓調査記 ( 考古 , 1960).

23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木棺石槨墓에서 나온 稜脊이 없는 凹腰式 劍把頭飾은 枕狀劍把頭飾 가운데 가장 이른 시 기에 속하는 형식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B지점에서 수습된 壓指槽式 劍把頭飾은 烏金塘 土壙墓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하여 두 遺蹟間의 親緣關係를 짐작케 해준다. 銅鏃을 모방한 雙翼式 骨鏃은 일반적으로 商周交替期(11C B.C)에 보이며 三稜式보다 빠른 것으로 알 려져 있다. 또한 土器의 제작 방법이나 器形이 비교적 원시적이고 A지점에서 출토된 鉢 의 형태에 근접해 있는 것으로 보아 B C D 3지점의 연대도 상당히 올라가며 A지점과 시기적으로 크게 떨어져 있지 않는 듯하다. 이상의 특징들을 근거로 原報告文에서는 和尙 溝 B C D 3地點의 시기를 朝陽 十二臺營子보다는 빠르고 대략 南山根이나 烏金塘 遺 蹟과 同時期이거나 조금 더 앞설 수도 있다고 편년하였다. 和尙溝 A지점과 B C D지점은 모두 동일한 황토대지상에 위치해 있다. A지점은 遺 址 中間의 上部에 치우쳐 있고 나머지 3지점은 A지점 아래의 양측에 東西로 포진되어 있 다. 遺蹟 최서쪽의 B지점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A C D지점이 순서대로 2km내 의 거리에 분포한다. 그런데 後代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되는 B C지점이 A지점과 일정 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전혀 重複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분포 상태는 B C D 3지점 에 묘지를 조영할 때 A지점의 先行墳墓 區 域를 충분히 인지하여 고려했음을 설명해 준 다. 다시 말해 A지점과 기타 지점과의 時間 差가 그리 크지 않았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 다. 4개 지점의 墓制는 기본적으로 土壙墓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규모도 비슷하며, 葬式 도 單人仰身直肢葬으로 일치한다. 더욱이 墓 壙의 長軸도 모두 등고선과 나란한 東西向이 며 屍身의 頭向도 東向으로 일치하고 있다. 墓制에서 나타나는 이상의 共通點들도 B C D地點이 조성된 시기가 A地點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았음을 충분히 방증해 준다. 그러나 A지점에서만 繩紋의 鉢形土器와 中原式 靑銅容器가 나온다거나 또 A지점의 묘장에선 猪骨 을 부장하였는데 반해 기타 3 지점에선 모두 牛骨 이 확인된다87)는 차이 점들은 두 구역 사이에 분명히 時間次 내지 [圖 8] 喀左 和尙溝 墓地B C D地區 出土 遺物

24 國史館論叢 第88輯 遺物의 變化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기도 한다. 그래서 原報告文에서는 두 구역 사이의 구분이 대략 西周中期(10C B.C) 前後 에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면서도, 琵琶形銅 劍을 출토하는 B C D 3지점이 곧이어 連續하였다고 보아 두 區域間에 그리 오랜 시 간이 개재하지 않았음을 喚起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琵琶形銅劍이 출토된 和尙溝 B D 지점의 상한 연대는 西周中期인 10C B.C 무렵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 동안 대부분의 考古學者들은 內蒙古 東南部와 遼西地域에서 출토된 琵琶形銅劍 중 寧城 南山根 M101의 銅劍이 가장 이르며 그 시기는 대략 8C B.C 무렵이라고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和尙溝의 琵琶形銅劍 出土遺蹟이 소개되면서 비록 절대연대를 직접적으로 제공하는 標識遺物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의하면 和尙溝 B C D 地點의 遺蹟이 南山根 M101의 年代보다 빠르다고 판단할 수 있다. 和尙溝 遺蹟의 연대 는 遼西地域 琵琶形銅劍의 出現과 직접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며, 더 나아가 夏家店上層文 化( 南山根類型 ) 銅劍과의 관계를 구명할 수 있는 커다란 단서라고 믿는다. 필자는 原報告 文의 설명대로 和尙溝 B C D地點의 개시연대가 바로 전단계인 魏營子類型의 연대(1 2 11C B.C)와 連續된다는 데에 동의하며, 그 연대는 대략 10C B.C 로 설정해 두고자 한다. 또한 遼西地域의 琵琶形銅劍 登場問題는 기존의 南山根 類型 이나 十二臺營子 類 型 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和尙溝 土壙墓나 南溝門 3期層과 같은 이른바 和尙溝類型 88) 에 있다고 보고자 한다. 大凌河와 小凌河를 중심으로 한 遼西地域에서 琵琶形銅劍이 출토되는 墳墓는 石槨墓 와 土壙墓 의 두 종류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內蒙古 東南部地域에서 유독 石槨墓 에서만 琵琶形銅劍이 나오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石槨墓와 土壙墓라 는 다른 성격의 墓制가 혼용되면서도 똑같이 琵琶形銅劍을 副葬하고 있었던 상황은 당시 의 社會相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한편 遼西地域에서 琵琶形銅劍이 출 토되는 양상을 볼 때 石棺(槨)墓보다 喀左 和尙溝와 같은 土壙墓 遺蹟에서 먼저 銅劍이 부장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和尙溝 土壙墓에서 琵琶形銅劍이 출현하는 무렵에는 石棺墓의 要素가 가미되는 현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和尙溝 B C D 지구에서는 A지구 에서 보이지 않던 石材를 이용한 墓葬이 혼재해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遼西地域의 전통 적인 土壙墓에 石棺墓의 要素가 혼입되는 과정을 시사해 준다. 결국 遼西地域에서 古式의 琵琶形銅劍이 출토되는 유적은 土壙墓이지만 그 시점은 石棺墓葬이 유입되는 단계인 것 87) 大凌河 周邊의 琵琶形銅劍 關係 遺蹟에서는 소나 돼지를 殉葬한 경우가 종종 발견되는데, 이 때 동일한 유적내에서 소와 돼지를 殉葬한 예가 보통 혼재하여 많이 나타난다. 따라서 殉牲이 같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A地點과 其他 3地點 사이의 文化를 根本的으로 區別할 수는 없다. 88)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喀左縣博物館, 앞의 글(1989).

25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이다. 遼西地域에서 琵琶形銅劍이 출토된 대표적인 土壙墓 遺蹟과 그 副葬遺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表 3] 遺 蹟 名 喀左 和尙溝 M6, 13, 17 果木樹營子 建平 喀喇沁 河東 欒家營子 M901 朝陽 袁臺子 M1 錦西 烏金塘 M1, 2, 3 北票 楊樹溝 土壙墓 阜新 胡頭溝 M5 遼西地域 琵琶形銅劍出土 土壙墓 遺蹟 同 伴 遺 物 M6 牛頭骨/M17 銅泡飾, 銅刀, 骨鏃, 石斧. 銅製劍柄首1, 銅製劍柄盤1, 枕狀形石加重器1, 銅環1, 滑石製圓柱形飾2, 銅帶鉤2, 銅戈1, 銅鈴2, 帶柄罐1, 雙耳壺1. 扇形銅斧1, 銅鑿1 枕狀形銅加重器, 扇形銅斧, 銅錘斧, 銅刀, 銅刻刀, 銅鈴, 鴨形銅扣, 金釧, 骨鏃, 石串珠. 銅製劍把, 雙翼銅鏃, 銅刀, 二重口緣碗, 兩耳附二重口緣鉢, 石斧, 骨針. M3 銅鏃, 銅盔, 凹槽形銅加重器, 甲葉, X字形銅鈕, 瑪瑙珠, 扁方形綠松 石. 其他 扇形銅斧, 銅戈, 銅鑿, 銅刀, 長方扁平形銅飾, 盾形銅飾, 長條 形銅飾, 鈴形銅飾, 銅鈕, 銅泡. 銅劍把, 石加重器. 銅劍鏢1, 銅珠20餘件. 遼西地域의 土壙墓에서 출토되는 琵琶形銅劍은 形態에 있어 크게 두 가지로 分類해 볼 수 있다. 우선 和尙溝 烏金塘 胡頭溝의 경우와 같이 突起와 脊突이 뚜렷하고 曲刃이 선 명한 전형적인 형태의 琵琶形銅劍이 한 부류이고, 果木樹營子의 예와 같이 突起와 脊突은 消滅하고 下部의 曲刃만 남아있는 變形의 형태가 또 다른 한 부류이다. 遼西地域에선 遼 東地域의 尹家村 M12 出土의 銅劍과 같이 曲刃마저 消滅하여 완전히 直刃化된 退化形의 琵琶形銅劍은 보이지 않는다. 阜新縣 化石戈 吉營子 胡頭溝墓地89) 上層의 M5 土壙墓는 牤牛河 東岸에서 발견되어 요서지역 중에선 가장 동쪽에 위치한 土壙墓 遺蹟이다. 牤牛河는 北票縣과 阜新縣의 경계 가 되는 河川으로 內蒙古 敖漢旗에서 發源하여 胡頭溝 墓地 앞을 지나 南流하다가 金嶺 寺 동쪽에 이르러 大凌河의 本流에 合流한다. 胡頭溝 墓地의 下層에선 紅山文化 系統의 玉器類가 副葬된 石棺墓 2基(M1 M3)도 함께 발견된 바 있다. 紅山文化에 속하는 下層 의 石棺墓에 대해선 殷周時代 혹은 그 以後의 遺蹟으로 추정하는 見解90)가 최근에 제기 된 바 있으나 積石墳丘墓의 구조나 반출된 土器를 참조할 때 근년에 밝혀지고 있는 凌源 89) 方殿春 劉葆華, 遼寧阜新縣胡頭溝紅山文化玉器墓的發現 ( 文物 , 1984). 90) 中山淸隆, 中國東北地域の先史玉器 黑龍江省の資料を中心として ( 東北アジアの考古學 第 二 槿域, 깊은샘, 1996) p.17.

26 國史館論叢 第88輯 [圖 9] 阜新 胡頭溝墓地 平面圖 斷面層位圖 1.黑土上層, 2.碎陶 石片層, 3.黑土下層 三官甸子 城子山 M2(石棺墓)91)나 喀左 東山嘴遺蹟92) 牛河梁 積石塚群93) 등과 동일한 성격의 紅山文化 遺産이라고 이해94)함이 순리일 듯하다. 胡頭溝遺蹟 下層에서 발견된 紅山文化의 石棺墓( 積石墳丘墓 )는 中國 東北地域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石棺墓 중 가장 시 기가 올라가는 예로서 앞으로 遼寧地方 靑銅器文化 硏究의 중요한 指標가 될 듯하다. 紅山文化 系統의 玉器類가 다수 출토된 M1(石板石棺墓)과 그 주위를 둘러 싸고 있는 石圍圈은 모두 黑土 上層의 堆積이 있기 전에 조영된 것으로 墓壙이 黑土 下層을 掘鑿하 고 만들어졌다. 그리고 黑土 上層의 퇴적이 있은 후에는 M5 M4와 M2가 나란히 조성 되었는데, M5 M4는 토광묘이고 M2는 石塊로 축조한 石棺墓로 墓制의 性格이 서로 다 르다. 그러나 石塊石棺墓인 M2에서 발견된 1건의 전형적인 琵琶形銅劍은 형태에 있어 M5 土壙墓의 出土品과 완전히 符合하므로 두 분묘를 同一時期의 所産이라고 판단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다. 91) 孫守道 郭大順, 論遼河流域的原始文明與龍的起源 ( 文物 , 1984) 秋山進午, 遼寧省凌源縣三官甸子城子山石城遺蹟考古測量調査 ( 東北アジアの考古學硏究, 同朋舍出版, 1995). 92) 郭大順 張克擧, 遼寧省喀左縣東山嘴紅山文化建築群址發掘簡報 ( 文物 , 1984). 93)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遼寧牛梁河紅山文化 女神廟 與積石塚群發掘簡報 ( 文物 , 1986). 94) 郭大順, 遼寧先史考古學と遼河文明の探索 ( 東北アジアの考古學硏究, 同朋舍出版, 1995) pp

27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다만 M2 石棺墓는 土壙墓인 M5와 M4의 中間에 立地하며 規模에 있어서 도 越等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입지 양 상을 볼 때 M2 石棺墓는 胡頭溝 上層 墓地의 中心 墳墓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石棺(槨)墓를 中心 墳墓로 하면서 동시에 土壙墓가 그 주변에 입지하는 분포 양상은 凌源縣 三官甸子 墓地95)에 서도 확인된 바 있다. 石棺墓와 土壙墓 의 同一墓地 共存現象은 당시 사회의 階層化 내지 複合化를 시사해 주는 단 서라고 이해되며, 한편으로 遼西地域의 전통적 墓制인 土壙墓와 새롭게 琵琶形 銅劍과 함께 대두한 石棺墓의 혼재 현 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土壙墓와 石 棺墓의 同一墓地 混在樣相은 遼西地域의 특징적 현상이라 이해된다. 遼西地域에서 琵琶形銅劍과 함께 출토되는 土器의 종류와 수량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 미미한 전개 양상을 보이고 있는 당시 遼西地域의 土器文化를 그나마 확인할 수 있는 유 적으로는 朝陽 袁臺子 M1 土壙墓96)와 喀左 果木樹營子 土壙墓97)를 거론할 만하다. 朝 陽 袁臺子 M1에선 전형적인 琵琶形銅劍과 함께 罐과 碗 각 1건씩이 屍身의 머리맡에서 발견되었다. 두 토기는 二重口沿(外迭脣)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罐의 상부에는 대칭 의 橫耳가 마주보고 붙어 있다. 橫耳 는 遼東地域의 壺 에서 자주 확인되는 요소이며 袁 臺子와 비슷한 형태의 兩耳附罐은 遼陽 亮甲山에서도 琵琶形銅劍과 함께 출토된 적이 있 었다. 현재까지의 자료에 의하자면 遼西地域 土器에서 外迭脣 (二重口緣) 요소의 등장은 魏營子類型 의 後墳遺蹟과 南溝門 2期層의 時期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魏營子類 型의 外迭脣 와 橫耳 는 인접한 醫巫閭山 以東의 高臺山文化의 유입과 관련된 것으로 이 해98)할 수 있을 듯하다. 果木樹營子 土壙墓에선 突起가 退化된 變形의 琵琶形銅劍과 함 께 灰陶의 帶柄罐과 雙耳壺가 1건씩 발견되었다. 특히 雙耳壺에 보이는 다리모양(橋狀)의 [圖 10] 阜新 胡頭溝墓地 上層 M2(右) M5(左) 出土 遺物 95) 遼寧省博物館, 遼寧凌源縣三官甸靑銅短劍墓 ( 考古 , 1985). 96) 王成生, 槪述近年遼寧新見靑銅短劍 ( 遼海文物學刊 , 1991). 97) 劉大志 柴貴民, 喀左老爺廟鄕靑銅短劍墓 ( 遼海文物學刊 , 1993). 98) 朱永剛, 論高臺山文化及其與遼西靑銅器文化的關係 ( 中國考古學會第八次年會論文集, 文物出 版社, 1991).

28 國史館論叢 第88輯 橫耳는 遼東地域의 美松里型土器 에서 자주 확인되는 손잡이 양식이어서 주목된다. 현재 까지 遼西地域에서는 琵琶形銅劍과 함께 伴出한 土器의 양이 극소하여 這間의 事情을 자 세히 알 수 없으나, 일단 遼東地域의 無文土器 文化와 상호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圖 11] 遼西地域의 琵琶形銅劍 同伴出土 土器 1.袁臺子 M1, 2.果木樹營子 우리는 中國 東北地方의 靑銅器文化를 거론할 때 遼東 과 遼西 라는 지역구분을 자주 사용하곤 한다. 遼東 과 遼西 라는 지역구분은 그 用語에서 유추할 때 간단히 遼河以東 과 遼河以西 정도의 의미로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中國 考古學界의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참고해 볼 때 반드시 遼河 를 경계로 하여 東西의 文化相이 확 연히 구분되는 것만은 아니다. 遼東과 遼西의 靑銅器文化 境界線은 명칭으로부터 연상되 는 遼河 가 아니라, 오히려 遼河로부터 100km 정도 서쪽에 위치한 醫巫閭山脈 이라 보 고자 한다. 醫巫閭山 山脈에서 발원하는 여러 하천 가운데 西麓의 하천은 大凌河 로 흘러 들어가고 東麓은 遼河 와 각각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大凌河와 遼河에 의지하여 분포하 는 靑銅器文化들은 醫巫閭山을 天然의 分水嶺으로 하여 東西로 분리되어 있는 양상을 보 이고 있다. 遼西의 魏營子類型 文化가 그러하며, 遼東의 高臺山文化 (順山屯文化) 또한

29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醫巫閭山을 경계로 分布하고 있다. 그러므로 醫巫閭山의 東麓에서 遼河 西岸에 이르는 平 野地帶(新民 法庫)도 遼東地域의 範圍內로 포함시켜 이해99)해야 온당할 것이다. 遼東地域의 지형은 대체로 千山山脈을 기준으로 平野地帶인 遼河流域과 沿海地帶인 遼 東半島로 양분해 볼 수 있다. 遼河流域 이라 함은 醫巫閭山 東麓의 柳河 로부터 遼河 를 건너 동쪽의 太子河 에 이르는 이른바 東北平原 의 南部地帶에 해당한다. 한편 遼東半島 는 渤海 와 黃海 의 沿岸에 위치해 있는 營口 大連 鳳溝 일대의 沿海地帶로 千山의 南 麓에서 발원하는 碧流河 大洋河 靉河(八道河)가 이 지역을 貫流하고 있다. 遼東地域에서 琵琶形銅劍이 出土되는 墳墓遺蹟의 性格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新金(普蘭店) 雙房 M6과 遼陽 二道河子 M1으로 대표되는 石棺墓 遺蹟과 瀋陽 鄭 家窪子 M6512와 長海 上馬石 M3으로 대표되는 土壙墓 遺蹟이다. 突起와 曲刃이 선명한 전형적인 琵琶形銅劍들은 주로 石棺墓 계통의 墳墓에서 출토되며, 突起가 退化하거나 曲 刃이 완만해진 變形의 銅劍들은 대체로 土壙墓에서 확인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出土 樣相의 區分은 時期差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짐작되며, 앞서 살펴본 遼西地域에서 土壙墓 와 石槨(棺)墓가 동시기에 이용되었던 狀況과는 크게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遼東地域에서 전형적인 琵琶形銅劍들이 주로 출토되는 石棺墓 系統의 墓制에는 蓋州 南團山의 大石蓋墓와 大連 崗上의 積石墓도 넓은 의미에서 포함시킬 수 있다. 遼陽 本溪 撫順 淸原縣을 연결하는 遼河 流域에서는 石板을 주로 이용한 전형적인 石棺墓 에서 琵琶形銅劍이 집중 출토되며, 蓋州 大連 新金 岫岩 鳳城縣으로 이어지는 遼東半 島 地域에선 大石蓋墓와 積石墓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된다. 두가지 출토유형의 지형적 구 분선은 앞에서도 거론했던 千山山脈이다. 遼東半島의 琵琶形銅劍이 반출하는 大石蓋墓와 積石墓도 板石을 주로 이용하여 地下에 墓葬의 下部(墓室)를 조성한다는 점에서 石棺墓와 거의 일치한다. 다만 墓葬의 上部를 大 石으로 蓋石 하여 마무리했는가 아니면 塊石 割石 등으로 積(封)石 하였는가 하는 양식 차가 있을 뿐 이다. 두 묘제의 이러한 上部構造는 遼東半島의 支石墓( 石棚 )와 于家坨頭 單坨子 積石墓와 같은 先行墓葬의 전통을 계승한 결과이다. 북한학계에선 일반적으로 석 관묘가 지석묘에 선행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필자는 支石墓( 石棚 )가 石棺墓나 大 石蓋墓보다 先行한다는 사실을 이미 분명히 밝힌 바 있다.100) 그리고 大石蓋墓는 遼東半 島의 선행 묘장인 支石墓와 石棺墓의 中間形態라고 파악해 볼 수 있다. 琵琶形銅劍이 재 래적인 支石墓에서는 보이지 않다가 石棺墓의 양식이 부가되는 大石蓋墓 단계에 이르러 99) 郭大順, 西遼河流域靑銅文化硏究的新進展 ( 中國考古學會第四次年會論文集, 文物出版社, 1983) 遼東地區靑銅器文化の新認識 ( 東北アジアの考古學硏究, 同朋出版社, 1995). 100) 金貞培, 韓國和遼東半島的支石墓 ( 韓國學論文集 4, 北京大學韓國學硏究中心, 1995) pp 韓國과 遼東半島의 支石墓 ( 先史와 古代 7, 1996) p.34.

30 國史館論叢 第88輯 비로소 출현하는 현상은 琵琶形銅劍과 石棺墓의 관계를 충분히 짐작하게 해준다. [表 4] 遼東地域 琵琶形銅劍 出土 石棺墓 大石蓋墓 遺蹟 遺 蹟 名 規 模(m) 劍數 遼陽 二道河子 石棺墓 M 撫順 大甲帮 石棺墓 淸原 門臉 石棺墓 李家堡子 石棺墓? 本溪 梁家村 石棺墓 M M 劉家哨村 石棺墓 新賓 馬架子 大石蓋墓? 寬甸 趙家堡子 石棺墓 西豊 阜豊屯 大石蓋墓 普蘭店 雙房 大石蓋墓 M 岫岩 白家堡子 大石蓋墓(1)? 白家堡子 大石蓋墓(2)?? 西房身 石棺墓 蓋州 牌坊 南團山 大石蓋墓??(火葬) 大連 蔣家村 石棺墓? 劉家疃 石棺墓 同 伴 遺 物 美松里型壺片, 銅斧1, 銅鑿1, 滑石製斧鏃范1雙, 臺附盌2. 美松里型壺2. 美松里型壺1, 扇形銅斧1, 雙翼石鏃1, 骨錐1. 柳葉形銅鉾1, 琵琶形銅鉾1, 銅鉞1. 石製加重器1, 雙鈕銅鏡1. 銅劍把1, 石製加重器2, 加重器護件1, 劍鉤1, 劍鏢1, 銅鉾1, 雙鈕銅鏡1, 獸形銅飾2, 銅環1. 雙鈕銅鏡3, 銅鉾1. 弧刃銅斧1, 雙翼石鏃1, 黑褐陶片(橋形橫耳片). 美松里型壺2, 滑石製斧范2, 疊脣罐2. 四耳直領小圈足黑陶壺 (美松里型壺?). 雙耳陶壺 (美松里型壺?) 石加重器1, 銅鏃1. 石製加重器, 石網墜, 石紡輪, 銅飾件, 鹿角錐, 滑石製串珠. 石珠1, 環狀石器1. 銅斧2, 銅鏃2, 珠飾品3, 石墮1, 瑪瑙球1. 遼東地域의 石棺墓와 大石蓋墓에서 琵琶形銅劍이 출토되는 양상을 보면 별다른 차이점 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두 묘장이 친연성이 강한 동일 계통의 墓制라는 사실을 방증해 준다. 遼東地域의 石棺墓 계통 묘장에서 출토되는 琵琶形銅劍은 크게 두 가지 형 태로 구분할 수 있다. 上部의 突起와 下部의 曲刃이 뚜렷한 典型 의 琵琶形銅劍群과 突 起와 曲刃이 모두 消滅한 退化型 의 細長形銅劍群으로 양분해 볼 수 있다. 鋒部가 현저 히 발달해 있고 평행한 검날이 直刃에 가까운 細長形 銅劍들은 한반도 일대에서 집중적 으로 발견되는 細形銅劍 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세장형의 銅劍들에서는 細 形銅劍 의 標識的 特徵인 抉入部 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琵琶形銅劍과 細形銅劍의 中間型 101) 또는 초기좁은놋단검 102)이라 하여 별도의 형식으로 분류해 볼 수도 있겠으

31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나, 아직 완전한 直刃이 아니라 여전히 曲刃의 여운이 남아 있으며 더구나 下部의 突出部 내지 折刃이 뚜렷한 경우가 종종 발견되므로 넓은 의미에선 琵琶形銅劍의 退化型 내지 終末期 型式으로 분류하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典型 의 琵琶形銅劍에 속하는 예들로는 雙房 M6,103) 門臉,104) 大甲帮,105) 二道河子 M1,106) 西房身,107) 蔣家村,108) 梁家村 M1,109) 李家堡子110) 등의 경우가 해당한다. 典型에 속하는 銅劍들의 출토양상에서 나타나는 현저한 특징은 美松里型壺와 扇形銅斧의 同伴現象이다. 우선 美松里型壺의 동반이 확실한 유적으로는 雙房 M6 門臉 大甲帮 石 棺墓가 있으며, 二道河子 M1과 白家堡子와 阜豊屯 大石蓋墓에서도 美松里型壺의 동반을 追認할 수 있다. 二道河子 M1 石棺墓에서는 美松里型壺의 橫耳部와 口緣部, 底部片이 발 견되었다. 橫耳가 橋狀인 것으로 보아 美松里型壺의 把手일 가능성이 많은데, 근처의 교 란된 石棺 안에서는 전형적인 美松里型壺 2건이 발견되고 있어 M1 陶壺片의 복원에 도 움이 되고 있다. 교란된 石棺墓 내에서 채집된 2건의 陶壺 가운데 경부가 파손되지 않은 완형의 美松里型壺에는 1개의 활 모양 貼耳와 3개의 반원형 貼耳 등 모두 4개의 橫耳가 사방 대칭으로 부착되어 있어 本溪 山城子 C洞 M2의 弦紋壺 와 유사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二道河子 墓地의 石棺에서 채집된 2건의 美松里型土器의 정황에 대해 二道河 子 石棺墓 M2 에서 美松里型壺 1건과 深鉢 1건이 출토되었다 111)라고 설명한 연구자가 있는데 여기엔 착오가 있는 듯하다. 원보고문에 따르면 2건의 토기는 조사가 되지 않았 던 未編號의 교란된 石棺 내에서 채집된 유물들이며 深鉢 이라는 설명도 적당하지 못하 다. 深鉢 이라고 착각하게 된 이유는 사실 원보고문의 陶罐 이라는 잘못된 설명에서 기인 한다. 문제의 토기는 면밀히 관찰해 보면 深鉢 이 아니라 口頸部가 파손 유실된 美松里 型壺 임을 인정할 수 있다. 이처럼 구경부가 파손 유실된 채로 발견된 美松里型壺는 淸 原 門臉과 撫順 大甲帮의 石棺墓에서도 나타난 바 있다. 大甲帮의 경우에는 陶壺 라고 제 대로 기종을 밝히고 있으나, 門臉 石棺墓의 보고자는 二道河子의 착오와 같이 罐 이라고 101) 李淸圭, 청동기를 통해 본 고조선 ( 國史館論叢 42, 1993). 102) 박진욱, 비파형단검문화에 관한 연구 (과학 백과사전출판사, 1987). 103) 許明綱 許玉林, 遼寧新金縣雙房石蓋石棺墓 ( 考古 , 1983). 104) 淸原縣文化局, 遼寧淸原縣門臉石棺墓 ( 考古 , 1981). 105) 撫順市博物館, 遼寧撫順市甲帮發現石棺墓 ( 文物 , 1983). 106) 遼陽市文物管理所, 遼陽二道河子石棺墓 ( 考古 , 1977). 107) 許玉林 王連春, 丹東地區出土的靑銅短劍 ( 考古 , 1984). 108) 許明綱, 大連市近年來發現靑銅短劍及相關的新資料 ( 遼海文物學刊 , 1993). 109) 魏海波, 遼寧本溪發現靑銅短劍墓 ( 考古 , 1987). 110) 淸原縣文化局, 遼寧淸原縣近年發現一批石棺墓 ( 考古 , 1982). 111) 鄭漢德, 美松里型土器の生成 ( 東北アジアの考古學 天池, 六興出版, 1990).

32 國史館論叢 第88輯 만 기록하는 데에 그친다. 門臉 石棺墓의 경우 묘광 바닥의 가장자리에서 耳片, 口沿片, 器底片 등 다수의 토기편이 발견되고 있어 유실된 美松里型壺의 구경부도 그 안에 포함 되었으리라 예상된다. 세 경우와 같은 美松里型壺의 구경부 파손을 葬禮 儀式과 관련된 의도적인 행위라고 해석할 수도 있으나 현재로선 일단 墓壙의 頹落이나 崩壞 등에 의한 돌발적인 파손이라고 보여진다. 二道河子 M1에서 美松里型壺와 동반하는 2건의 臺附盌 (豆)은 그 기형에 있어 新民縣 公主屯 後山遺址112)에서 採集된 4개의 盲耳가 붙은 高圈 足敞口盌 과 아주 흡사하다. 이러한 기종의 유입은 公主屯 後山 1期 文化類型(高臺山文化) 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며, 西北韓 北部의 義州 美松里 洞窟遺蹟 上層에서도 그와 유사한 형태의 豆片이 확인되고 있다. 사실 西北韓地方과 遼東地域에서 출토되는 特徵的 土器遺物로 美松里型土器(壺) 는 일 찍부터 주목받아 왔다. 美松里型壺 라 함은 北韓의 平北 義州 美松里 洞窟遺蹟 上層에서 출토된 마치 표주박의 아래 위를 잘라버린 것과 같이 생긴 목달린 단지류 113)의 특징적 인 토기를 지칭하는 것이다. 미송리형토기 라는 用語는 1963년 北韓의 리병선의 硏究114) 에서 처음 사용되었던 듯한데, 그는 美松里 洞窟遺蹟 上層에서 출토된 여러 形態의 土器 중 표주박의 아래 위를 잘라버린 것과 같은 목달린 단지 만을 미송리형토기 로 언급하고 있다. 한편 1967년 北韓 考古學界에선 미송리형토기 란 용어 대신 구체적으로 미송리형단 지 라 명명하고, 나아가 전형적인 미송리형단지 와 변형의 미송리형단지 로 구분하게 된 다.115) 또한 미송리형토기 를 기원전 8 7세기 사이에 전형의 비파형단검과 동반하는 古朝鮮의 특징적인 토기 유물로 보는 한편 그 변형이라 할 수 있는 묵방리형토기 는 기 원전 7 5세기 무렵에 변형 비파형단검과 동반하는 것으로 이해하기에 이르렀다.116) 이 후 이러한 年代觀은 1980년대 중반까지 북한에서 통념적으로 받아 들여지게 된다.117) 112) 瀋陽市文物管理委員會瓣公室, 新民縣公主屯遺址試掘簡報 ( 遼海文物學刊 , 1987). 113) 김용간, 미송리 동굴 유적 발굴 중간보고(1), (2) ( 문화유산 , , 1961) 미송리 동굴 유적 발굴 보고 ( 고고학자료집 3, 과학원출판사, 1963) p ) 리병선, 압록강 류역의 청동기시대의 특징적인 토기들과 그 분포 정형 ( 고고민속 , 사회과학출판사, 1963) pp )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 용어해설 미송리형단지 ( 고고민속 , 사회과학 출판사, 1967) p.41. 입술형 손잡이와 가는 줄무늬의 띠를 돌린 표주박 모양의 자름자름한 그릇 을 전형적인 미송리형단지 라 하고, 여러 개의 줄을 합쳐 M형의 띠무늬를 돌린 것과 무늬는 전혀 없이 고리 모양의 손잡이만 네 개씩 달린 것 등 을 변형 이라 설명하고 있다. 116) 김용간 황기덕, 기원전 천년전 전반기의 고조선 문화 ( 고고민속 , 1967) 사회과 학원 고고학연구소, 기원전 천년기 전반기의 고조선 문화 ( 고고민속론문집 1, 1969) pp )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조선고고학개요, 과학 백과사전출판사(1977) 조선의 청동기 시대, 사회과학출판사(1984).

33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이러한 연대관에 의문이 제기된 것은 南京 遺蹟118)의 청동기시대 2기 집자리에서 팽 이형 그릇들과 함께 美松里型土器의 변형인 단지들이 발견되면서 부터이다. 특히 3호 집 자리에서는 단지 2개가 완형으로 복원되었는데, 胴最大徑과 손잡이가 밑바닥 부분에 치 우쳐 있어 전체적인 형태에 있어 美松里型土器보다 납작한 느낌을 주는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볼록한 頸部라던가 묶음 줄무늬나 꼭지모양 손잡이와 입술모양 손잡이 등과 같은 미송리형토기의 특징적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또 3호 주거지에서는 미 송리형토기의 변형과 함께 二重口緣의 深鉢形土器가 나왔는데 그 형태가 雙房 M6의 疊 脣罐 과 아주 흡사하다. 미송리 동굴유적 상층에서도 이런 형태의 토기가 발견되었는 바 두 器種 사이의 친연성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다만 南京 출토의 경우 동체부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볼록하고 底部가 좁은 점은 西北韓 지방의 특징적 토기인 팽이형토기 (角 形土器)의 영향일 듯하다. 남경유적 보고서에선 石灘里 遺蹟 집자리들과 비교를 통해, 미송리형토기의 연대를 기 원전 8 7세기로 설정하게 되면 많은 모순이 따른다며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즉 남경 유적의 층위관계와 집자리 짜임새의 변천과정을 검토해 보면 기존의 중요한 편년 기준이 었던 미송리형단지의 연대(기원전 8 7세기)는 재검토를 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송리 형단지 가 나온 유적들 가운데 미송리유적 상층과 신암리 모래산유적보다 앞선 시기의 것 이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되는데, 사실 이것은 당시로선 아주 적절한 지적이었다. 그 러나 보고자가 남경 3호 주거지의 단지를 美松里遺蹟과 新岩里遺蹟의 미송리형단지보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이해한 것은 오판이었다고 보인다. 어째든 보고자는 남경 청동기시대 2기 집자리의 연대를 기원전 9 8세기로 편년하여 기존 美松里型土器의 상한연대를 1세 기 가량 상향 조정하였다.119) 이와 같이 1980년대 전반까지만 하여도 북한학계에서는 미송리형단지 에 대해 요동지 역에서도 변화된 형태를 발견할 수는 있지만 서북한지방에서 주로 확인되는 특징적인 질 그릇이며 이후 墨房里型土器로 변화 발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박 진욱은 전형적인 미송리형단지 를 요동지역에서 초기비파형단검(첫째류형) 과 동반하는 특 징적인 토기(雙房 M6 二道河子 石棺墓 出土)로 새롭게 이해하고, 그 전신을 大連 坨頭 積 石墓에서 출토된 입술형 장식이 붙은 줄무늬 단지 내지 遼陽 接官廳 石棺墓에서 출토된 띠 모양 손잡이가 붙은 점선 물결무늬 단지에서 찾고자 하였다.120) 118) 김용간 석광준, 남경유적에 관한 연구, 과학 백과사전출판사(1984). 119) 김용간 석광준, 앞의 책(1984), pp ) 박진욱, 비파형단검관계문화의 발원지와 그 창조자에 대하여 ( 력사과학 , 1984) 비파형단검문화에 관한 연구 (과학 백과사전출판사, 1987) p.48, p.52.

34 國史館論叢 第88輯 이러한 새로운 연구시각은 1985년 김동일의 연구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확인되는데, 그 의 연구에 의하면 미송리형 단지는 조기 전형 변형의 세 시기로 구분된다고 한다. 조기 에 속하는 유적으로는 新金 雙房 6호 돌상자무덤, 전형은 淸原 門臉 돌상자무덤, 변형은 大連 崗上 무덤 출토 단지 등으로 비정하고, 美松里 洞窟遺蹟 上層에서는 보이지 않고 新 岩里 모래산遺蹟 집자리121)에서 발견되는 입술모양 손잡이와 고리모양 손잡이가 함께 결 합된 형식이 전형적인 미송리형단지 라고 주장하였다.122) 1980년대 중반 북한학계에서 대두된 일련의 새로운 시각은 1980년대 초반 요동지역에 서 새롭게 보고된 雙房 門臉 등지의 돌널무덤 유적을 중요하게 고려했기 때문이다. 하지 만 궁극적으로는 종래 古朝鮮(비파형동검문화)의 遼東中心說 과 결부된 것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1980년대 전반까지만 하여도 서북한지방에서 주로 나타나는 기원전 1, 000년기 전반기 고조선의 토기로 이해되었던 미송리형단지 는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紀元前 2, 000年期末 遼東地域에서 琵琶形銅劍과 함께 起源한 초기비파형단검문화 (古朝鮮國家成立 以前段階)의 특징적인 유물로 북한학계에서는 통념화되었다.123) 이러한 硏究成果를 토대로 하여 1989년 황기덕은 고조선의 국가성립(기원전 8세기) 이 전에 遼河流域으로부터 西北朝鮮의 北部에 이르는 지역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미송리형 단지 만을 미송리류형 단지 라고 새롭게 규정하고 그 문화를 비파형단검문화의 미송리류 형 이라고 불러 송화강유역의 서단산유형 과 대동강 유역의 신흥동유형 (팽이형그릇문화)과 구분하고 있다.124) 한편 미송리류형 단지 의 형태 변천과정을 세가지 부류로 나누어 그 年代와 함께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첫째 부류의 미송리류형 단지가 나 온 유적은 쌍방 돌관무덤 신암리가 있으며, 둘째 부류는 이도하자 갑방 돌관무덤이 있 고, 셋째 부류는 미송리유적 청원부근 돌관무덤 등이 해당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연대 는 기원전 13 11세기,125) 11세기 10세기, 9세기 전후로 각각 편년하였다. 황기덕의 미송리형단지 편년안은 大伙房水庫 石棺墓群 土城里 遺蹟 등 새로운 발굴 자료가 알려지면서 1993년에 이르러 로성철에 의해 다소 수정 보강되었는데 이를 정리 해 보면 다음과 같다. 121) 김용간 리순진, 신암리 유적 발굴보고 ( 고고민속 , 1966). 122) 김동일, 서북조선과 료동지방의 돌상자무덤에 대하여 ( 력사과학 , 1985). 123) 박진욱, 조선고고학전서 고대편 (과학 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8) p ) 황기덕, 비파형 단검문화의 미송리류형 1.미송리류형의 유적유물과 그 연대 ( 조선고고 연구 , 사회과학출판사, 1989) pp ) 황기덕은 앞의 글(1989)에서 첫째부류의 미송리류형 단지 유적를 다시 쌍방 과 신암리 로 구 분하여 전자의 연대를 기원전 13 12세기, 후자를 기원전 12세기 11세기로 각각 편년하고 있다.

35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表 5] 形態分類 1형식(초기) 2형식(중기) 3형식(후기) ) 最近 北韓考古學界의 미송리형단지 編年案 出 土 遺 蹟 年 代 신금 쌍방 돌관무덤, 평북 신암리 모래산유적, 무순 대화방 기원전 13 12세기 축가구돌관무덤, 자강도 토성리유적. 요양 이도하자 돌관무덤, 무순 대갑방 돌관무덤, 무순 대화방 기원전 11세기 소청도돌관무덤 팔보구돌관무덤. 평북 미송리동굴유적. 기원전 10세기 北韓學界에서 1형식(초기)의 미송리류형단지 를 기원전 13세기 무렵까지 소급해 보는 것은 박진욱의 연구에서 비롯되는데, 大連 坨頭 積石墓의 연대인 于家村 上層의 C14 측 정수치(기원전 14세기 3290±90 B.P)와 밀접히 연관된다. 즉 타두적석묘에서 출토된 네 개의 줄무늬와 초생달모양의 덧무늬식 손잡이가 있는 단지를 쌍방 출토의 미송리류형단 지가 직접 계승하고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편년안은 대부분의 남한과 일본 중국학자들에 의해 최근까지도 비판 부정되고 있는 실정이다. 日本硏究者들에 의해서도 미송리형토기 의 형식분류와 조형에 대한 논의는 1970년대 후반 이래로 진행되었다. 우선 미송리 동굴유적의 上 下層을 각각 美松里Ⅱ 와 美松里 Ⅰ 이라 칭하고, 美松里型土器 가 발견된 美松里Ⅱ 를 다시 古 新의 두 형식으로 세분하 여 前者를 美松里Ⅱ1, 후자를 美松里Ⅱ2 라고 구분127)하였다. 한편 美松里 洞窟遺蹟과 인접한 龍川 新岩里 遺蹟 第2地點(모래산) 住居址에서 출토된 新岩里Ⅲ類 토기들을 新岩 里ⅢA 와 ⅢB 로 세분하고, 口脣形把手 (입술모양 손잡이)와 橫橋形把手 (다리모양 손잡이) 가 각 1쌍씩 함께 붙어 있는 新岩里ⅢA 土器는 美松里洞窟 上層 出土의 橫橋形把手 만 부착된 土器보다 先行한 형식이라고128) 인정되기도 했다. 이러한 型式序列은 1980년대 중반 北韓의 硏究成果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美松里型土器의 祖型에 대해서는 북한학계와 마찬가지로 타두적석묘 M40 출토의 貼耳와 沈線紋을 가진 壺에서 찾고자 하는 견해129) 가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太子河流域의 廟後山文化 에서 그 요인을 찾고자 하는 고 안130)도 있었다. 廟後山文化 에 대한 주목은 1980년대에 들어 새롭게 알려지기 시작한 洞穴遺蹟들의 土器 가운데 把手 施紋 등에서 美松里型土器와 흡사한 것들이 종종 발견 126) 로성철, 미송리형단지의 변천과 그 년대에 대하여 ( 조선고고연구 , 사회과학출판 사, 1993) pp ) 西谷正, 美松里洞窟出土の無文土器 西部朝鮮無文土器編年のために(2) ( 史淵 115, 九州大 文學部, 1977). 128) 藤口健二, 朝鮮無文土器と彌生土器 ( 彌生文化の硏究 3(彌生土器), 雄山閣, 1986). 129) 宮本一夫, 中國東北地方における先史土器の編年と地域性 ( 史林 68-2, 1985). 130) 鄭漢德, 美松里型土器の生成 ( 東北アジアの考古學 天池, 六興出版, 1990) p.119.

36 國史館論叢 第88輯 되기 때문이었다. 後者의 견해는 이후 보다 더 구체화되어 馬城子文化 (廟後山文化) 晩期 의 洞穴墓인 山城子(廟後山) C洞 M2 출토의 鼓頸壺(弦紋壺) 를 美松里型壺의 最古型式으 로 이해하고, 나아가 馬城子文化는 그 자체에 琵琶形銅劍의 시원적인 요소를 품고 있다고 판단131)하기에 이른다. 사실 美松里型土器의 연원을 馬城子文化(廟後山文化)와 연결시켜 보는 입장은 최근 중 국학계에서 대두된 경향132)이다. 중국학계에서는 미송리형단지 대신 弦紋壺 라는 용어 를 보편적으로 사용해 왔다. 중국학계에서 弦紋壺 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80년대 廟後山文化 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중반 遼東 北部의 高臺山文化圈과 南部의 雙坨子文化圈의 중간에 위치한 太子河 上流의 千山山地 일대에서 廟後山文化 133)가 알려지면서, 遼東地域 早期 靑銅器文化의 분포양상과 지역상 에 대한 토론은 한 단계 심화되기에 이른다. 廟後山文化 는 土壙墓를 기본 묘장으로 하는 高臺山文化나 積石墓의 雙坨子文化와 달리 자연동굴 안에서 地下墓壙이나 封土 시설 없 이 屍身을 직접 火葬하거나 간단한 石塊나 板石을 이용하여 埋葬 또는 火葬하는 洞穴墓 라는 독특한 매장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 유형의 설정으로 遼東地域 의 早期 靑銅器文化는 遼河流域(遼東 北部)의 高臺山文化, 千山山地(遼東 東部)의 廟後山文 化, 遼東半島(遼東 南部)의 雙坨子文化 등 세 가지 유형으로 정립하게 되었다.134) 遼東地域의 중간에 위치하는 千山山脈의 북록과 남록에는 각각 本溪와 丹東이 위치하 고 있는데 이 일대가 바로 廟後山文化 의 중심된 분포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廟後 山文化 는 1983년 이후 본격적인 조사가 연속되면서 本溪縣의 馬城子村 北甸村 張家堡 村 등 세 지역의 洞穴 遺蹟으로부터 新石器時代 晩期에서 靑銅器時代 早期로 이행하는 새로운 層位가 조사됨에 따라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發展序列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 에 따라 근년엔 기존의 廟後山文化 를 포함하면서 發展序列을 보다 구체화시킨 馬城子文 化 135)라는 확대된 개념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최근의 발굴성과에 의하면 千山山地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馬城子文化의 層位는 크게 上 下 2개의 文化層으로 구성되어 있다. 上層은 靑銅器時代의 洞穴墓 가 조영된 層位이 131) 鄭漢德, 美松里型土器形成期に於ける若干の問題 ( 東北アジアの考古學 第二 槿域, 東北 亞細亞考古學硏究會編, 깊은샘, 1996) p )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本溪市博物館, 馬城子 太子河上游洞穴遺存, 文物出版社(1994). 133) 遼寧省博物館 本溪市博物館 本溪縣文化館, 遼寧本溪縣廟後山洞穴墓地發掘簡報 ( 考古 , 1985). 134) 許玉林, 遼寧商周時期的靑銅文化 ( 考古學文化論集 3, 文物出版社, 1993) 孫力, 試談遼 寧地區的商周文化 ( 北方文物 , 1995) 郭大順, 앞의 글(1995). 135) 李恭篤, 本溪地區洞穴文化遺存的發現與硏究 ( 北方文物 , 1992) 遼寧省文物考古硏 究所 本溪市博物館, 馬城子 太子河上游洞穴遺存, 文物出版社(1994).

37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며 下層은 新石器時代의 퇴적층인데, 1980년대의 廟後山文化論 단계에서는 아직 下層의 존재가 밝혀지지 않았었다. 新石器時代 晩期 文化層은 山城子(廟後山) A B C洞 遺蹟 調査(1979년, 1982년 兩次) 이후에 발굴된 馬城子 B洞136) 張家堡 A洞137) 北甸 A 洞 138) 등에서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보고된다. 사실 최근에 제기된 馬城子文化 는 洞 穴墓葬이 확인되는 靑銅器時代 文化層인 上層 에만 국한된 개념이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馬城子上層文化 인 셈이다. 馬城子文化는 墓葬 型式과 土器에 따라 다시 早 中 晩期 3 時期로 나누어진다. [表 6] 馬城子文化 洞穴墓葬 出土土器 時期區分 區分 標識 遺蹟層 A洞 上層 早期 北甸 馬城子B洞 上層 A洞 4層 前半 張家堡 張家堡 中期 山城子AC洞洞 4,3層3層 後半 張家堡A洞 3層 A洞 2層 晩期 張家堡 山城子C洞 2層 標識的 新出土器 C14年代 刻目突帶紋二重口沿罐, 刻目突帶紋折腹壺, 無紋二重口沿長頸壺. 刻目突帶紋(隆起紋)壺 罐, 突起狀把手附二重口沿罐. 突刺圓點紋直口壺.把手附刻目紋二重口沿深鉢.斜頸壺. 竪耳附斜頸壺, 橫耳附罐. 3600±80 鋸齒狀刻目紋二重口沿深鉢. 鼓頸壺, 突刺圓點紋鼓頸壺. 斜頸壺.(橋狀橫耳) 3015±70 弦紋壺.(半月狀橫耳) 馬城子文化 晩期의 本溪 山城子(廟後山) C洞 第2層 M2 洞穴墓에 이르면 소위 弦紋壺 라는 새로운 형태의 土器가 出現한다. 이 토기는 頸部가 불룩한 鼓頸 의 형태를 띠고 6條 의 弦紋 이 베풀어져 있으며, 더불어 구형인 胴體部의 中下位에는 2雙의 입술모양 橫耳가 붙어 있어 美松里型土器의 古式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최근 美松里型土器의 祖型을 馬城 子文化 中期 後半에 해당하는 本溪 張家堡 A洞 第3層 M45 出土의 鼓頸壺 (ZAM45 6) 에서 찾고자 하는 견해139)가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장가보 A동의 鼓頸壺 는 우선 橫 耳 와 弦紋 이라는 美松里型壺의 두드러진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다. 鼓頸이라는 요소만 가지고 美松里型土器의 淵源을 추론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136) 李恭篤 高美璇, 太子河上游洞穴墓葬探究 ( 中國考古學會第六次年會論文集, 文物出版社, 1987). 發表文에서는 東崴子 B洞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下層을 新石器時代 晩期 의 後窪上層文化 (紀元前3000年 前後)에 相當한다고 이해하였다. 137) 高美璇, 本溪縣單洞洞穴墓地 ( 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1987). 報告文에선 張家堡 라 는 地名 대신 單洞 이라는 名稱을 사용하고 있으며, 下層에서 新石器時代 晩期에 해당하는 花紋陶片이 發見된다고 하였다. 138) 齊俊, 本溪地區太子河流域新石器至靑銅時期遺址 ( 北方文物 , 1987). 139) 李恭篤 高美璇, 遼東地區石築墓與弦紋壺有關問題硏究 ( 遼海文物學刊 , 1995).

38 國史館論叢 第88輯 [圖 12] 1.本溪 山城子 C洞 M2 弦紋壺 2.本溪 張家堡 A洞 M45 鼓頸壺 사실 볼록한 鼓頸 (曲頸 또는 弧頸)이라는 요소는 馬城子文化 土器의 재래적인 기형이 아니라 후반기에 들어서 새롭게 나타난 형식으로, 현재까지의 발굴자료에 의하자면 遼東 北部의 新民縣 公主屯 後山 M3 土壙墓140)나 高臺山 80M86 土壙墓141) 出土의 曲頸壺 가 馬城子文化의 鼓頸壺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있다. 馬城子文化 土器의 보다 전통적인 器 型은 斜頸壺 나 直口壺 라고 할 수 있으며 曲頸 의 요소는 외부 문화의 영향이라 판단되 기 때문에, 美松里型土器 에 보이는 鼓頸 의 연원을 馬城子文化 中晩期의 鼓頸壺 (ZAM4 5 6)에서 찾는 것은 무리일 듯하다. 반면 美松里型土器의 가장 큰 특징이라 볼 수 있는 橫耳 의 출현은 鼓頸 에 비해 馬城 子文化에서도 비교적 일찍 등장하는데, 중기 전반의 張家堡 A洞 第3層 출토의 橋狀橫耳 罐 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장가보 A동 제3층의 횡이관 은 동일 기종이 전후의 층위에서 발견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역시 전통적인 재래 기종은 아닌 듯하다. 遼寧地域의 土器 중 횡이호 는 크게 무문의 횡이호와 현문의 횡이호 두가지 계통으로 구분142)해 볼 수 있다. 무문횡이호는 현재까지의 자료에 의하자면 遼東 北部 老虎冲類型143)의 경우가 가장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老虎冲 78K9 1의 無紋橫耳壺는 鼓頸의 요소도 뚜렷하게 가 140) 瀋陽市文物管理委員會瓣公室, 新民縣公主屯後山遺址試掘簡報 ( 遼海文物學刊 , 1987). 141) 瀋陽市文物管理瓣公室, 新民東高臺山第二次發掘 ( 遼海文物學刊 創刊號, 1986). 142) 藺新建 李曉鐘, 遼寧地區商周時期陶壺硏究 ( 靑果集, 吉林大學出版社, 1993). 143) 曲瑞琦, 瀋陽地區新石器時代的考古學文化 ( 遼寧省考古 博物館學會成立大會會刊, 1981). 1978년 瀋陽에서 發見된 老虎冲類型의 主要 遺物은 모두 祭祀用의 坑藏 내지 土壙墓로 추 정되는 遺蹟에서 出土되었다. 이 類型의 土器들은 周邊의 高臺山文化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器種으로 이루어져 있다. 老虎冲類型의 年代는 C14測定에 의하면 紀元前 2100年 1300年 무렵에 해당한다.

39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지고 있어 馬城子文化 후반기에 나타나는 鼓頸 도 橫耳 의 모티브와 함께 老虎冲類型에서 연원하였을 가능성도 무사할 수 없다. 무문횡이호는 馬城子文化의 중심 분포지인 遼東 東 部의 山間地帶에서 遼東 北部보다 많이 발견되지만 그 연대는 노호충유형에 비해 늦은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馬城子文化 후반기에 보이는 冲 無紋橫耳壺의 연원을 遼東 北部에서 찾는 견해144)는 일 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美松里型土器의 또 다른 특징인 弦紋 이라 는 요소는 위에서 거론한 老虎冲類型에서도 확인되지 않는 양식이다. 弦紋 은 美松里型土器 이외에 雙坨子 1 期層의 Ⅰ式罐 Ⅳ式罐과 2期層의 罐,145) 瓦房店市 長 興島 三堂遺址의 C型鉢,146) 普蘭店市 單坨子 A1類 高麗寨 B類의 黑陶,147) 瀋陽 肇工家遺址 下層의 直筒 罐148) 등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雙坨子 1期層의 C14 연대(기원전 2000년 전후)를 고려할 때 弦紋 은 遼東半島 일대에서 新石器末期 靑銅器初 期 사이에 출현한 紋飾으로 판단된다. 또 이러한 初期의 弦紋은 위의 出土例를 참조할 때 黑陶와 깊은 관계가 있을 듯하며, 器種에 있어서는 주로 罐에서 많이 확인된다. 한편 현재까지의 자료에 의하자면 弦紋 이 鼓頸壺 와 조합되는 것은 雙坨子 3期層에 해당하는 大連 于家村 坨頭 M40 積石墓149) 단계에 이르면서 나타난다고 판단된다. 그런 [圖 13] 老虎 類型 橫耳附鼓 頸壺(78K9 1) 144) 藺新建 李曉鐘, 앞의 글(1993). 145)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雙坨子與崗上 (科學出版社, 1996) p )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吉林大學考古學系 旅順博物館, 遼寧省瓦房店市長興島三堂村新石器時 代遺址 ( 考古 , 1992). 147) 東亞考古學會, 貔子窩 (1929) 蔡鳳書, 關于 貔子窩 的陶器 ( 遼海文物學刊 , 1993). 1929年의 原報告書에서는 單坨子 A1類 土器群을 모두 單一時期의 遺物들로 파 악했으나, 실제로 A1類 土器群에는 상이한 時期의 異種土器가 일부 混入되어 있다. A1 類 土器群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手製 黑陶와 확연히 구분되는 輪製의 灰靑色硬質土器類 가 그것이다. 灰靑色硬質土器類에서 6條의 弦紋이 頸部에 둘려진 長頸壺가 1件 발견된 바 있다. 그런데 최근까지도 일부 硏究者(藺新建 李曉鐘, 1993, 앞의 글 李恭篤 高美璇, 1995, 앞 의 글)들이 이 弦紋의 長頸壺를 A1類 의 대종을 이루는 黑陶類와 同一時期의 遺物로 誤認하 여 新石器末期 靑銅器初期 에 포함시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弦紋의 長頸壺는 胎土나 燒成度 그리고 製作技法 등을 고려할 때 黑陶類와는 別種이라 판단되며, 同伴하는 灰靑色硬 質豆를 基準해 볼 때 대략 春秋前期 以後로 편년해야 마땅할 것이다. 따라서 이 長頸壺에 보이는 弦紋 을 山城子 洞穴墓나 于家坨頭 積石墓에서 보이는 弦紋壺의 先行 紋飾으로 言及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런 長頸壺의 器型(無弦紋)은 瀋陽 鄭家窪子와 長海 上馬石의 土壙 墓에서도 琵琶形銅劍과 함께 發見된 바 있다. 148)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東北工作隊, 瀋陽肇工街和鄭家窪子遺址的發掘 ( 考古 , 1989). 149) 旅順博物館 遼寧省博物館, 大連于家村坨頭積石墓地 ( 文物 , 1983).

40 國史館論叢 第88輯 데 坨頭의 弦紋鼓頸壺 에는 美松里型壺의 특징인 橋狀橫耳 (다리모양 가로손잡이)가 보이지 않고, 삼각형의 입술모양 貼耳만 胴體 上部에 附加되어 있다. 坨頭積石墓地의 C14연대 (기원전 1200년전후)150)를 참조할 때 坨頭 M40 積石墓의 弦紋貼耳鼓頸壺는 山城子 C洞 M2의 弦紋橫耳鼓頸壺의 선행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山城子 C洞 M2에서 보이 는 입술모양의 橫耳 와 弦紋 의 요소는 바로 遼東半島 土器文化의 영향에 따른 결과라고 판단된다. 다만 山城子 C洞 M2의 弦紋壺 坨 단계에 이르면 貼耳가 胴體 중간으로 이동하 고 형태가 반원형의 입술모양으로 신장되어 橋狀橫耳 와 유사한 기능과 구조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손잡이의 변화는 千山山地 以 北地域에서 주로 나타나는 橋狀橫耳 와의 接 觸에 의한 結果라고 짐작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美松里型土器의 特徵인 橫耳 鼓頸 弦紋 의 素材는 遼東地 域 早期 靑銅器文化의 諸要素를 수용 복합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美松里型土 器의 연원을 고찰할 때에는 다각도의 접근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으며, 단편적으로 鼓頸 의 요소만을 강조하거나 또는 弦紋 이나 橫 耳 의 측면에만 주목하여서도 충분치 못할 것 이다. 만약 별개의 특징적 요소만을 강조하 면 美松里型土器의 起源은 연구자에 따라 高 臺山文化의 土壙墓 遺蹟과 관련시킬 수 도 있으며, 또는 馬城子文化의 洞穴墓 내지 雙 坨子文化와 각각 연결되는 혼미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만한 현 상은 鼓頸壺 와 弦紋 과 橫耳 의 세가지 요소가 모두 결합된 형태 즉 이른바 美松里型土 器 단계에 이르면 馬城子文化의 洞穴墓는 소멸하고 石棺墓와 大石蓋墓가 주요 무덤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변화는 美松里型土器의 出土樣相을 정리한 [表 7]을 통해 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요동 산지에서 洞穴墓文化가 갑자기 소멸하고 石棺墓文化가 대두하는 것을 住民의 移 [圖 14] 大連 于家 頭 積石墓地 出土 壺 150)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實經室, 放射性炭素測定年代報告(7) ( 考古 , 1980).

41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動問題와 연관해 생각해 볼 수도 있으나 현재로선 정확한 당시의 상황을 헤아리기 힘들 [表 7] 遺 蹟 名 本溪 廟後山 C洞 M2 平坨子 石棺墓 鄭家 石棺墓 小孤家子 石棺墓 M3 遼陽 二道河子 石棺墓群 石棺墓 M1 撫順 大伙房水庫 石棺墓 M2 M3 M4 M5 M6 碾盤鄕 茨溝 石棺墓 大甲帮 石棺墓 新賓 紅山 石棺墓 M8101 淸原 白灰廠 石棺墓 土口子中學 石棺墓 馬家店 石棺墓 門臉 石棺墓 開原 李家臺 石棺墓 M1 法庫 石砬子 石棺墓 M1 M9 黃花山 石棺墓 M1 長條山 石棺墓 M9 新金 雙房 大石蓋墓 M6 鳳城 東山 大石蓋墓 M7 M9 岫岩 白家堡子 大石蓋墓(1) (2) 遼東地域 出土 美松里型壺 現況 數 器高 20 (小型) 17.8? 16.4 (16)? (17.4) (10.2) ? (13.7) 色調 黑 黑 紅褐 灰黃 紅褐 紅褐 紅褐 紅褐 紅褐 紅褐 紅褐 紅褐 紅褐 紅褐 紅褐 紅褐 紅褐 黑 紅褐 黑 紅褐 紅褐 紅褐 同 伴 遺 ?? 黑 琵琶形銅劍1, 骨石斧范2, 疊脣罐2. 黑 黑 石斧1. 黑 雙耳高領壺1, 石紡輪1, 石鏟1. 琵琶形銅劍1. 琵琶形銅劍1. 物 琵琶形銅劍1, 扇形銅斧1, 銅鑿1, 斧鏃范1雙, 豆2. 雙耳罐2, 石斧2. 石斧1, 雙耳罐1. 石斧1, 琵琶形銅鉾1, 扇形銅斧1. 石紡輪1. 石紡輪1. 雙耳罐1. 琵琶形銅劍1. 陶網墜1. 石斧1, 石鏟1. 石刀1. 琵琶形銅劍1, 扇形銅斧1, 雙翼石鏃1, 骨錐1. 滑石製銅飾范 1雙. 雙耳罐1, 瑪瑙珠1. 裝飾品3. 罐1, 瑪瑙珠1. 다. 다만 山城子(廟後山) 洞穴墓에서 출토된 6개의 額骨을 대상으로 한 廟後山人 들에 대 한 형질인류학적 분석에 의하면 그들의 頭面部 형태는 기본적으로 현재 黑龍江 以北의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種族의 특징과 일치하며, 中國人이나 朝鮮人과는 그 차이가 현저히 크다고 한다. 시베리아의 거주민 가운데에서도 日本 北海島의 Omisaki人, 사할린의

42 國史館論叢 第88輯 i u人, Tongus人, Eskimo人 등의 5개조와 유사한데, 특히 Omisaki人과 제일 흡사 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조사자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廟後山人들의 向北遷移에서 찾고 있으며, 또한 현재 중국 경내에서 거주하고 있는 鄂倫春族 鄂溫克族과 러시아 境內의 通 古斯人(Tongus)들이 遷移한 廟後山人들의 後裔라고 추측하고 있다.151) 중국학계에서는 弦紋壺 를 韓半島 西北地方의 美松里型土器 의 先行形式으로 이해152) 하여 兩者를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弦紋壺 와 美松里型土器 를 거의 구분없이 대등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中國의 弦紋壺 와 우리나라와 日 本에서 주로 사용하는 美松里型土器 용어 사이에 남아있는 개념의 혼란은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中國에서는 西北韓 地方의 토기만을 美松里型土器 라고 이해하고 있는 반면 그 동안 韓國과 日本에서는 遼東과 西北韓 地方을 아울러 美松里型土器 라는 용어를 적용 해 왔다.153) 이 문제는 애초에 美松里型土器 라는 개념을 사용한 북한의 연구 경향이 변 한 데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하여도 북한에서는 서북한 지방 을 전형적인 美松里型土器 의 중심지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요동지역의 출토 예를 주목하 지 못했다. 이후 1980년대 중반 遼東地域의 자료를 전형적인 美松里型土器 로 주목하게 되면서, 美松里 洞窟遺蹟 上層 출토의 토기들은 後期의 美松里型土器 로 수정154)하게 되 었다. 최근 북한학계의 연구도 美松里 洞窟 上層을 여전히 後期型式으로 설정155)하고 있 다. 이와 같은 변화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美松里型土器 라는 용어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은 혼란의 소지가 있다. 美松里 洞窟遺蹟 上層 출토의 목 달린 단지는 더 이상 전형적인 美松里型土器 로 언급 되지 않고 있으며, 출토빈도와 시기를 볼 때 遼東地域의 경우가 훨씬 典型 내지 中心地에 속한다는 것을 주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美松里型土器 라는 용어는 최근의 발굴성과를 충 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부적절한 용어인 셈이다. 그렇다고 中國의 弦紋壺 라는 개념을 대 신 사용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서북한 지방의 출토 예와 마찬가지로 遼東地域에서도 弦 紋 (묶음줄무늬)이 없는 美松里型土器 도 종종 발견되기 때문이다. 典型에 속한다는 二道河 子나 甲帮 등지의 石棺墓에서도 이런 현상은 확인되고 있다. 그러므로 弦紋 이 있는 토기 만으로 국한한다면 소위 美松里型土器 의 外延은 상당히 축소하게 된다. 또한 弦紋壺 는 An 151) 魏海波 張振標, 遼寧本溪靑銅時代人骨 ( 人類學學報 , 1984). 152) 李恭篤 高美璇, 앞의 글(1995). 153) 鄭漢德, 앞의 글(1990), pp 宋鎬晸, 遼東地域 靑銅器文化와 美松里型土器에 관 한 考察 고조선의 위치와 종족문제와 관련하여 ( 韓國史論 24, 서울대, 1991) pp.3 95 참조. 154) 박진욱, 앞의 글(1984) 앞의 책(1987) 김동일, 앞의 글(1985). 155) 로성철, 앞의 글(1995).

43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지역에서 新石器末期 靑銅器初期 사이에 등장하는 弦紋이 있는 호 라는 넓은 의미로 이미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소위 美松里型土器 를 弦紋壺 라 부르는 것 역시 그 내용과 특성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선행하는 여타의 弦紋이 있는 壺 (弦紋壺)들과도 혼동된다. 이에 필자는 소위 美松里型土器 나 弦紋壺 의 모호한 개념 대신 橫耳附鼓頸壺 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橫耳附鼓頸壺란 가로손잡이가 붙은 목이 볼 록한 단지 라고 그 의미를 풀 수 있을 것이다. 명칭이란 그 대상의 형식과 내용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弦紋壺 는 부족하고 美松里型土器 는 부적합 한 과거의 용어라고 할 수 있다. 遼東地域에서 琵琶形銅劍이 등장하는 시기는 弦紋이 시문된 橫耳附鼓頸壺의 출현과 관 련된 듯하다. 근년에 알려진 馬城子文化 晩期의 山城子 C洞 M2의 弦紋橫耳附鼓頸壺는 二道河子 大甲帮 등지의 石棺墓에서 출토된 橫耳附鼓頸壺의 형식과 흡사하며 지리적으 로도 인접해 있다. 馬城子文化 晩期의 馬城子 A洞 M7의 木炭을 시료로 한 C14연대 측 정 결과 紀元前 1025±70년(3015±70) 156)의 수치가 나온 바 있다. 따라서 太子河 渾 河 유역에서 琵琶形銅劍이 출현하는 시기는 紀元前 11 10세기 무렵이라고 추단할 수 있다. C14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1000년 전후 무렵에 해당하는 馬城子文化 晩期에서 弦 紋橫耳附鼓頸壺의 古式이 새롭게 발견된 것은 기존 美松里型土器 의 上限(B.C 8C)157)을 대략 200년 정도 올려볼 수 있는 커다란 수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으로 琵琶形銅劍과 함께 출토되는 청동유물에 대해 살펴보면 위의 [表 4]를 통해 서 확인할 수 있듯이 遼東地域의 石棺墓에선 琵琶形銅劍과 多鈕鏡의 組合은 발견되지만 玉類 의 추가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琵琶形銅劍과 玉類의 공반이라 볼 수 있는 遺蹟이 수처 발견되었는데, 大連 蔣家村 石棺墓158) 劉家疃 石棺墓159) 牌坊 南團 山 大石蓋墓160)가 그곳이다. 蔣家村에서는 琵琶形銅劍과 함께 石珠가 발견되었고, 南團 山에서도 滑石製의 串珠가 함께 나왔다고 한다. 또 劉家疃 石棺墓에서는 珠飾品과 瑪瑙球 가 琵琶形銅劍 2건과 함께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61) 그러나 상기한 유적에서 나온 요동 156)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本溪市博物館, 앞의 책(1994), p ) 鄭漢德, 앞의 글(1990) 宋鎬晸, 앞의 글(1991). 158) 許明綱, 앞의 글(1993). 159) 原田淑人, 牧羊城 (東方考古學叢刊第二冊, 東亞考古學會, 1931). 160)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編, 遼東半島石棚 (遼寧科學技術出版社, 1994). 161) 大連 鐵山鎭 劉家疃 石棺墓에서는 突起가 뚜렷한 전형적인 琵琶形銅劍과 함께 突起와 曲刃이 퇴화된 變形의 琵琶形銅劍이 출토되었다. 만약 두 銅劍이 동일한 石棺에서 반출한 것이라면 琵琶形銅劍의 型式分類에 있어 커다란 宿題이자 指標가 될만한 자료이다. 이러한 경우는 長 海 上馬石 墓地에서도 확인되는데 거기에선 M2와 M3의 土壙에서 각각 출토된 것으로 알려 져 있다. 비슷한 時期 同一墓地에서 전혀 다른 형식의 琵琶形銅劍이 동반한다는 사실은 주목 할 만하다. 그러나 劉家疃 石棺墓의 경우 발굴 정황이 정확하지 않아 충분한 再檢討의 여지

44 國史館論叢 第88輯 石珠들은 전형적인 玉類 로 보기엔 부족할 듯하며 劉家疃에서 동반한 瑪瑙球는 玉으로 보 아도 좋을 듯하다. 또한 石珠와 瑪瑙球 등 玉類의 치레걸이들이 琵琶形銅劍과 함께 출토 되는 지역이 모두 遼東半島 南端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분포상의 특징이라 할 만하다. 遼東地域에서 劍 鏡의 同伴現象은 本溪 梁家村 M1 石棺墓162) 劉家哨村 石棺墓163) 와 寬甸 趙家堡子 石棺墓164)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梁家村 M1 石棺墓에선 돌기가 뚜렷한 琵琶形銅劍과 雙鈕銅鏡이 枕狀의 石製劍把頭飾 1건과 함께 발견되었다. 梁家村의 雙鈕銅鏡은 직경 12.8 두께 0.5 의 소형에 속하는데, 背面의 테두리에는 삼각문의 短 斜線이 둘러져 있고 그 안으로 번개 무늬의 幾何紋이 채워져 있다. 두 개의 鈕는 배면의 한 편에 치우쳐 11 자 모양으로 나란하게 붙어 있다. 현재로선 遼東地域에서 雙鈕鏡이 전형적인 琵琶形銅劍과 발견된 것은 梁家村의 예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梁家村의 雙鈕銅鏡은 형태와 문양에 있어 十二臺營子의 예보다는 建平縣의 大拉罕溝 M851과 炮手營子 M881 出土의 疃 雙鈕鏡에 가깝다. 劍 鏡 의 동반 현상은 遼西와 遼東의 공통점이라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大拉罕溝 M851과 炮手營子 M881 두 묘장의 성격은 石棺墓가 아닌 石槨墓로 밝혀져 있고,165) 遼東地域의 梁家村 M1은 石板을 이용한 石棺墓로 추정되어 墓制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趙家堡子 石棺墓에선 모두 3건 의 雙鈕鏡과 銅鉾가 銅劍과 함께 출토되었다. 趙家堡子 출토의 銅 劍은 突起과 曲刃이 완전히 소멸 한 末期의 退化型으로 梁家村의 銅劍과는 판이하다. 雙鈕鏡 역시 文樣과 形態에 있어 梁家村과는 [圖 15] 大連 劉家 石棺墓 出土 遺物 가 남아있다. 162) 魏海波, 遼寧本溪發現靑銅短劍墓 ( 考古 , 1987). 163) 梁志龍, 遼寧本溪劉家哨發現靑銅短劍墓 ( 考古 , 1992). 164) 許玉林 王連春, 丹東地區出土的靑銅短劍 ( 考古 , 1984). 165) 李殿福, 앞의 글(1991).

45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두 유적간의 차이는 時期差에 의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趙家堡子 출토의 銅鏡 중 1건만이 葉脈紋의 粗紋鏡이며 나머지 2건은 모두 素紋 鏡이다. 趙家堡子의 쌍뉴조문경은 중앙 부근에 위치하는 11자 모양의 왜소해진 쌍뉴의 형태나 가운데로부터 방사선상으로 뻗어나간 葉脈紋 등을 볼 때 인근인 吉林省 集安의 五道嶺溝門 積石墓166)에서 발견된 雙鈕粗紋鏡과 아주 흡사하다. 銅鏡과 함께 출토된 銅 劍과 銅鉾의 형태도 五道嶺溝門의 예와 유사하여 두 유적간의 親緣性을 짐작하게 해준 다. 다만 五道嶺溝門 積石墓에선 鐵鏃이 발견되고 있어 靑銅器만 보이는 趙家堡子의 粗 紋鏡이 약간 시기가 빠를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이상의 劍 鏡 同伴遺蹟에 대한 검토를 통해 遼東地域에서 琵琶形銅劍과 多鈕 鏡이 변화 발전한 서열을 정리할 수 있다. 梁家村 趙家堡子 五道嶺溝門 의 발전 서열 을 보이고 있는 劍 鏡 의 동반현상은 趙家堡子 단계에 이르면 琵琶形銅鉾에서 발전한 葉 狀의 銅鉾가 추가되고 마지막의 五道嶺溝門 단계에선 鐵製武器類까지 부가되어 말기엔 이미 鐵器時代에 진입해 있다. 나아가 이러한 劍 鏡 의 발전서열은 琵琶形銅劍과 銅鉾의 형식 변화에 대한 고찰에 있어서도 유효한 참고자료가 되리라 믿는다. 이밖에 전형적인 琵琶形銅劍이 출토된 유적 가운데 石棺墓로 추정되는 곳으로 大連 雙 坨子 M1167)이 있다. 雙坨子 M1은 1964년 5월 25일 雙坨子 遺址의 서쪽 산 허리에서 돌을 캐던 주민들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이곳에선 琵琶形銅劍 短頸壺 石紡輪 環狀石器 각 1건씩과 부근에서 채집한 石珠 1件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출토된 銅劍은 전형적인 琵 琶形銅劍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大甲帮 石棺墓의 銅劍과 흡사하다. 突起로부터 봉부 끝에 이르는 검신 상부가 이등변 삼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短頸壺의 동체부 중간에는 4개 의 입술모양 橫耳가 상호 대칭으로 부착되어 있다. 이러한 손잡이는 雙房 M6 大石蓋墓 의 橫耳附鼓頸壺에 부착된 半圓形의 貼耳와 아주 흡사하다. 그러나 弦紋이 나타나 있지 않고 頸部가 상대적으로 왜소한 형태를 가지고 있어 橫耳附鼓頸壺로 분류하기는 곤란하 다. 그러나 橫耳附鼓頸壺의 亞類 내지 近似品으로 파악할 수는 있다. 雙坨子 무덤에서 나온 유물과 인골편들은 모두 火燒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火葬 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附近의 崗上과 樓上 積石墓에서 자주 확인되는 火葬의 葬俗과 다른점이라 할 수 있다. 보고서에선 雙坨子 무덤의 연대를 崗上과 상응하 는 기원전 8 7세기 로 설정168)하고 있으나, 여타의 靑銅器가 발견되지 않는 점이라던가 166) 集安縣文物保管所, 集安發現靑銅短劍墓 ( 考古 , 1981). 167)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 중국 동북지방의 유적발굴보고, 1966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雙坨子與崗上 遼東史前文化的發現和硏究, 科學出版社, 1996). 168)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앞의 책(1996), pp

46 國史館論叢 第88輯 또 葬俗의 차이를 볼 때 연대가 더 올라갈 수도 있다. 雙坨子 무덤에서 나온 琵琶形銅劍은 금속성분 분석 자료에 의하자면 Cu 98.19%, Sn 0.19%, Pb 0.72%로 이루어져 있어 靑銅 이 아닌 紅銅 의 범주에 속한다. 이런 紅銅은 주석의 합량이 너무 적어 變形이 쉽게 되고 경도가 약하여 實用 兵器로는 부적합하다. 반 면 崗上 積石墓(M17 M19)에서 출토된 3건의 琵琶形銅劍들은 Cu %, Sn %, Pb %의 坨 성분으로 주조되어 있어 兵器로서의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169) 따라 서 금속성분의 분석결과를 참조할 때 實用性이 떨어지는 雙坨子 무덤의 銅 劍이 崗上 積石墓의 實用兵器로 쓰였 던 琵琶形銅劍들보다 이른 시기에 제 작되었다고 판단해 볼 수 있다. 雙坨 子와 崗上 등지에서 조사된 靑銅遺物 은 韓半島에서 출토되는 靑銅遺物의 化學成分과 동일한 구리 주석 납 의 구조를 보이고 있다. 아연의 성분이 좀처럼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은 요동 반도와 한반도 지역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두 지역 청동기 문화의 친연성을 짐작할 수 있다.170) 1975년 8월 大連 亮甲店鎭 趙王村 에서 발견된 琵琶形銅劍 出土 무덤171) 도 역시 石棺墓로 추정된다. 大石板 1장이 무덤의 바닥에 깔려 있었는데 그 위에서 琵琶形 銅劍 2건이 드러났다. 두 동검의 길이는 27.7, 26.5 (殘)로 비슷하지만 하부 曲弧의 너 비는 각각 6.4 과 4.6 로 크게 차이가 나고 있어서 前者는 검신이 넓고 육중한 느낌을 주는 반면 後者는 상대적으로 세장한 감을 느끼게 한다. 길이 너비의 비를 따지자면 전자 는 4.2 이고 후자는 5.7 이어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두 동검은 한 묘광 안 [圖 16] 大連 雙 子 墓葬 出土 遺物 169)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앞의 책(1996), pp ) 李亨求, 靑銅器文化의 비교 ( 韓國史論 13, 國史編纂委員會, 1983) 崔炷 金秀哲 馬淵 久夫 平尾良光, 옛 韓國 靑銅器에 대한 小考 ( 대한금속학회지 24-4, 1986) 金貞培, 韓國 靑銅遺物의 金屬學的 分析 ( 韓國史硏究 94, 1996). 171) 許明綱, 앞의 글(1993).

47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에서 동반 출토되었으므로 동일시기의 소산이라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趙王村 출 토의 두 銅劍은 琵琶形銅劍의 형식분류에 있어 좋은 기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趙王 村 출토의 27.7 琵琶形銅劍은 崗上 積石墓에서 출토된 동검들과 길이와 형태에 있어 아 주 흡사하다. 따라서 강상 적석묘로 대표되는 遼東半島의 전형적인 琵琶形銅劍 類型에는 趙王村에서 동반 출토된 다소 세장한 느낌을 주는 琵琶形銅劍의 形態도 포함시켜야 타당할 것이다. 石棺墓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琵琶形銅劍의 다음 단계에 해당하는 突起가 퇴화된 변 형의 銅劍은 주로 土壙墓 유적에서 발견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石棺墓 系統의 琵琶 形銅劍 반출 경향은 瀋陽 鄭家窪子 M6512로 대표되는 土壙墓 遺蹟 등장 이전에 집중되 어 있다. 이후의 土壙墓 遺蹟에선 美松里型土器가 발견되지 않고 대신 長頸壺 가 琵琶形 銅劍과 함께 동반하고 있어 뚜렷한 변화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을 기원전 7세 기 무렵을 전후한 시기차에 의한 것이라고 파악172)할 수도 있으나, 遼東地域에서도 遼西 地域과 마찬가지로 石棺墓와 土壙墓가 공존한 시기가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文 化系統의 차이와 地域性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遼東地域의 土壙墓에서도 突起와 曲刃이 선명한 전형적인 琵琶形銅劍이 확인된다. 이 러한 土壙墓 유적으로는 瀋陽 鄭家窪子 M )를 대표적으로 검토할 만하다. 鄭家窪 子 M6512에서는 銅簪과 骨簪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피장자가 소속된 族屬의 結髮樣式 을 추측케 하는 중요한 방증 자료로 이용할 수 있다. 三稜式 銅鏃은 錦西 烏金塘 土壙墓 출토의 銅鏃과 동일한 양식이며, 蛇形有孔銅鑣는 十二臺營子의 三孔銅鑣와 유사하나 형태 에 있어서는 약간의 양식차가 있다. 한편 琵琶形銅劍과 馬具類(銅銜)의 경우에는 장기간 의 사용으로 인한 마모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이것은 琵琶形銅劍이 단순히 부장을 위 한 明器가 아니라 實用의 兵器였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또한 마구류의 수량과 연결 관 계를 분석해 볼 때 네 필의 말을 위한 용구들로 보인다. 네 필의 말로 끄는 수레를 피장 자가 생전에 이용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점은 피장자의 신분이나 지위와 관계된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한편 槨下邊에서 출토된 牛骨은 同墓地인 鄭家窪子 M659 土壙墓에선 시신의 우측 부 분 즉 묘광의 좌변 생토 부분에 부장되었다. 鄭家窪子 M659의 우골은 腿骨로 殉葬을 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殉牛 의 풍속은 魏營子類型文化의 殉猪 풍속과 함께 遼西地 方 土壙墓에서 종종 확인되어 주목된다. 殉牛 殉猪 의 葬俗은 土壙墓의 傳統과 깊이 관 172) 徐光輝, 旅大地區靑銅時代遺存硏究 ( 中國考古集成 (7, 東北卷 靑銅時代2), 1996) p ) 沈陽故宮博物館, 沈陽鄭家窪子的兩座靑銅時代墓葬 ( 考古學報 , 1975).

48 國史館論叢 第88輯 련된 듯하며 北京 남쪽의 琉璃河 西周燕國墓地174)에서 대량으로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燕文化의 영향이 아닌가 짐작된다. [表 9] 遺蹟名 遼東地域 琵琶形銅劍 出土 土壙墓遺蹟 遺 蹟 規 模(m) 副 葬 遺 物 頭上部 琵琶形銅劍2, 鐵鑛石製枕狀式加重器1, 天然孔石 製加重器1, 劍銅鏢2(內含木鞘), 銅銷2, 雙鈕鏡1. 足下部 長頸壺3[器高 30.3/17(弦紋)/12.2]. 棺左部 雙翼銅鏃98, 三棱銅鏃71, 弓囊, 銅泡132, 弓弭. 棺右部 蛇形有孔銅鑣8, 有孔骨鑣8, 奪環式銅銜2, 直杆 式銅銜2, 蝦形銅節約16, 喇叭形銅器4, 單鈕銅鏡形器8, 瀋陽 鄭家窪子 銅泡7, 游環絞具1雙, 銅管33, 銅珠224. M6512 棺內部 琵琶形銅劍1, 枕狀式鐵鑛石製加重器1, 劍銅鏢1 (內含木鞘), 七連銅環, 單鈕銅鏡形器6, 刀囊1(附銅飾牌), 骨柄銅刀1, 骨把銅錐1, 斧囊1(盾形銅飾牌), 扇形銅斧1, 銅鑿1, 銅泡(皮靴裝飾)180, 天河石製石串珠2, 銅簪1雙, 骨簪1雙. 槨外邊 牛骨. 鄭家窪子遺址 琵琶形銅劍1, 鐵鑛石製枕狀式加重器1, 長頸壺(18.6), 陶 M2 紡輪1. 遼陽 亮甲山 M1? 琵琶形銅劍1, 陶口片. M2? 琵琶形銅劍1(紛失), 兩耳附疊脣罐4. M3? 海城 大屯 土壙墓 破壞 琵琶形銅劍1, 銅劍柄1, 銅製護件. 長海 上馬石 M 琵琶形銅劍1. 琵琶形銅劍1, 銅劍柄1, 石製枕狀式加重器1, 銅製貼葉1, M 長頸壺(21.5). 陳家溝 土壙墓 琵琶形銅劍1, 石製枕狀式加重器1. 大連 樓上 M 琵琶形銅劍1, 口脣刻目罐1. 官屯子 堲周墓? 琵琶形銅劍1, 銅劍柄1, 石製加重器1. 葬式 木槨木棺 仰身直肢 殉牛骨 側身屈肢 仰身直肢 仰身直肢 仰身直肢 이와 함께 瀋陽 鄭家窪子 제1지점175)에서 출토된 유물로 雙鈕附銅劍把1, 十字形節約 10, 單鈕鏡形器3, 雙鈕鏡形器5, 多孔鈕鏡形器1, 雙月形飾4, 銅鑿2, 扇形銅斧1 등이 있 다. 이 가운데 雙鈕附銅劍把는 寧城 王營子 錦西 寺兒堡 出土品과 동일하고, 單鈕鏡의 174) 北京市文物硏究所, 琉璃河西周燕國墓地 (文物出版社, 1995). 175) 沈陽市文物工作組, 沈陽地區出土靑銅短劍資料 ( 考古 , 1964).

49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문양은 十二臺營子의 경우와 아주 흡사하다. 瀋陽 鄭家窪子遺址 M2176)에서도 역시 시 신의 허리 우측에서 琵琶形銅劍이 출토되고, 長頸壺는 시신의 발치에서 나왔다. M2 土 壙墓가 출토된 鄭家窪子 遺址 下層(1期層)은 土器와 靑銅器의 특징을 통해 볼 때 인근 한 肇工街遺址 2期層이나 新樂 2期層과 서로 접근해 있다. 鄭家窪子遺址 下層은 漢代 甕棺墓의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戰國時代의 유물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春秋時 代로 編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瀋陽 일대의 鄭家窪子 1期 肇工街2期 新樂 2期 層177)은 대략 春秋時代에 해당하는 층위라고 볼 수 있다. 瀋陽地域의 戰國時代 분묘는 琵琶形銅劍 遺蹟과 전혀 공존하지 않는대, 鼎 盤 壺 匜 등의 특징적인 中原系 土器 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배타적인 層位 重複 관계는 양자의 文化系統이 상이했음을 시사해 준다 長海 上馬石 土壙墓 M2, M3178)에서 출 토된 2건의 琵琶形銅劍은 형태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만 土壙이 조성된 層位와 重複關係를 조사해 보면 인접한 時期의 것임 을 일견 알 수 있다. 따라서 上馬石 M2와 M3의 銅劍들은 琵琶形銅劍의 형식분류에 있 어 좋은 지표가 될 것으로 보이며 突起가 뚜 렷한 동검과 그렇지 않은 변형의 사이에 그 리 오랜 시간이 개재하지 않는다고 짐작할 수 있다. 突起가 남아 있으나 검신의 중간 이하로 내려오고 또 鋒部의 길이가 검신 너 비를 능가한다던지 하는 형태는, 突起가 退 化하고 下部의 曲刃만 남아 있는 變形의 琵 琶形銅劍으로 넘어가는 過渡期의 양식이라 보여진다. 遼東地域에서 銅劍을 반출하는 다른 성격 의 墓制로 石槨墓를 거론할 만하다. 石槨墓 는 遼西地域에서 보다 자주 확인되지만 副 [圖 17] 長海 上馬石 土壙墓 M2, 3 出土 遺物 176)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東北工作隊, 沈陽肇工街和鄭家窪子遺址的發掘 ( 考古 , 1989). 177) 瀋陽市文物管理委員會辦公室, 瀋陽新樂遺址試掘報告 ( 考古學報 , 1978). 178) 旅順博物館, 遼寧長海縣上馬石靑銅時代墓葬 ( 考古 , 1982).

50 國史館論叢 第88輯 葬遺物과 銅劍의 형태에 있어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遼西地域에선 전형적인 琵琶 形銅劍들이 石槨墓에서 자주 발견되는 반면 遼東地域에서 조사된 石槨墓에선 戰國系 直 刃劍의 영향을 받은 退化型의 琵琶形銅劍들만 확인된다. 遼東地域에서의 石槨墓 등장은 銅劍의 형태변화를 통해 추측해 볼 때 戰國系 燕文化의 東漸에 의한 결과라고 믿어진 다. 그 시기와 계기는 史記 나 魏略 등의 古史에 전해지는 燕將 秦開의 東進과 유관 할 듯하다. 이러한 石槨墓의 대표적인 경우가 旅順 尹家村 M12179)이다. 尹家村 石槨墓에서는 細 長形의 銅劍 1건이 석곤봉두 1건과 함께 시신의 우측 허리 부위에서 발견되었다. 이와 함께 短頸壺와 刻目疊脣鉢, 豆 등이 시신의 두골 상부 좌우에 부장되어 있었다. 윤가촌 M12는 2.37(장) 1.25(관) 1.66(심) 규모의 토광 안에 槨의 용도로 석판과 석괴를 이 용하여 벽면과 상개를 만든 토광석곽묘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인골 아래에서 탄화된 목판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점으로 보아 원래 목관에 시신을 안치하고 그 주위를 높이 45 정도의 석판과 석괴들로 둘러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火葬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 는데, 1928년 이 부근의 牧羊城 遺蹟에서 발견되었던 3座의 石槨墓180) 역시 M12와 같 은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반출 토기도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윤가촌 유적에서는 모두 3 개의 층위가 확인되었는데 석곽묘 M12는 2개의 窖藏과 甕棺墓와 함께 제2층에서 발견되 었다. 보고서에선 제2기층을 M12에서 출토된 符號가 세겨진 淺盤細柄豆를 기준해서 戰 國 早期 에 편년하고 있으며, 윤가촌 2기 문화 단계에 이미 燕文化와의 접촉 내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설명181)하고 있다. 한편 1974년에는 尹家村 인근 서남쪽의 하천 북안에서도 銅劍 2건이 세트로 발견된 적이 있었다.182) 그 가운데 1건은 윤가촌 M12의 동검과 같은 직인의 세형을 띠고 있었 고, 나머지 동검은 손잡이가 합주된 전형적인 戰國系 直刃劍( 桃氏劍 )이었다. 이러한 전국 계 직인검은 長海縣 徐家溝 石槨墓183)에서도 봉부가 긴 퇴화된 세장형의 銅劍과 함께 발 견되었다. 이밖에 서가구에서는 T자형의 동검 손잡이와 銅斧, 銅鑿, 劍鏢 등 재래적 성격 의 유물들이 함께 출토되고 있어 琵琶形銅劍文化의 末期 단계로 보여진다. 이런 戰國系 直刃劍의 반출로 보아 尹家村 河北岸의 銅劍과 徐家溝 石槨墓 등의 연대를 戰國 中晩期 에 설정해도 별다른 무리가 없을 것이다. 戰國時代에 들어와 遼東半島 지역에서 나타나는 燕文化의 요소는 윤가촌과 서가구의 179)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 앞의 책(1966)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앞의 책(1996). 180) 原田淑人, 牧羊城 (東方考古學叢刊第二冊, 東亞考古學會, 1931). 181)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앞의 책(1996), pp ) 許明綱, 앞의 글(1993). 183) 許明綱, 앞의 글(1993).

51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경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石槨墓 直刃劍 細柄豆 의 조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戰國時代에 들어와 琵琶形銅劍이 갑자기 尹家村 M12의 銅劍과 같은 세장한 형 태의 直刃劍으로 변하게 되는 이유도 내재적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무렵에 유입되었던 戰國系 直刃劍의 영향이라고 사료된다. 그러나 徐家溝 石槨墓에서는 遼東半 島의 在來 葬俗인 火葬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어 피장자가 土着人이었을 가능성을 암시 해 준다. 그러므로 이 무렵 遼東地域에 나타나는 戰國系 燕文化의 요소를 전적으로 住 民 移動에 의한 결과라고 해석하기에는 곤란한 면이 남아있다. 遼東地域에서 戰國系 文 化를 보다 명확하게 보여주는 직접적인 자료로는 莊河縣 桂云花 淌石流 출토의 平天侯 銘 銅劍184)과 普蘭店市 元臺鎭 後元臺 石槨墓 출토의 啓封銘 銅戈185) 등이 있다. 遼 東半島에서는 퇴화된 琵琶形銅劍들이 주로 戰國系의 石槨墓에서 나타나고, 千山山地 渾江 일대에서는 積石墓, 石棺墓, 大石蓋墓 등의 전통적인 墓制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출토양상의 차이는 住民의 移動 내지 燕文化의 流入에 의한 결과로 遼東半島 지역이 千 山山地와 渾江 流域의 內陸보다 상대적으로 戰國系 文化의 영향을 보다 강하게 받았다 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3) 吉林 黑龍江 地域 재까지 吉林 黑龍江 지역에서 출토된 琵琶形銅劍은 銅劍片까지 포함해 모두 19건 에 달하고 있다. 특히 吉林省 중 남부 일대에 집중 분포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러한 분포 양상은 吉林地域의 琵琶形銅劍이 遼東地域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시사해 준다. 19 건의 琵琶形銅劍 가운데 출토된 유적의 성격이 밝혀진 곳은 불과 8곳에 불과하다. 때문 에 琵琶形銅劍의 출토 양상을 복원하기가 遼寧地域에 비해 수월하지 않은 편이다. 다만 유적의 성격이 밝혀진 곳 중 懷德縣 公主嶺鎭 雙龍 大靑山 土壙墓를 제외하고는 石棺墓 내지 大石蓋墓 積石墓 등의 石築墓 계통에서 모두 발견되고 있다. 특히 전형적인 형태의 琵琶形銅劍은 유독 石棺墓에서만 출토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遼西 遼東 지역의 출토 양상과 다른 점으로 吉林地域의 琵琶形銅劍이 石棺墓文化의 전통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시사해 준다. 또한 이를 통해 琵琶形銅劍文化 시기의 吉林地域이 遼 西나 遼東에 비해 文化 種族的으로 단순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吉林 地域에서 琵琶形銅劍이 출토된 유적의 면모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현 184) 旅順博物館報導組, 旅大地區發現趙國銅劍 ( 考古 , 1973). 185) 許明綱 于臨祥, 遼寧新金縣後元臺發現銅器 ( 考古 , 1980).

52 - 52 [表 10] 遺 蹟 名 星星哨 石棺墓 AM19 小西山 石棺墓 甲M2 腰嶺子 石棺墓 猴石山 石棺墓 80西M26 橫道河子 大石蓋墓 M1 國史館論叢 第88輯 吉林地域 琵琶形銅劍 出土 遺蹟 墓壙規模 (殘) ? M 五道嶺溝門 積石墓 大靑山 土壙墓? 副 葬 遺 物 琵琶形銅劍1, 半月形石刀1, 石斧2, 礪石1, 壺1, 罐1. 琵琶形銅劍1, 石佩飾1, 黑耀石圓頭刮削器1.? 琵琶形銅劍片1, 石斧2, 陶盅1. 琵琶形銅劍1, 銅製劍把3, 觸角式柄細身劍2, 銅刀3, 銅鏃1, 銅扣2, 鐵刀1, 石球1, 石硏磨器1, 石紡輪1, 杯4, 靑石管17, 白石管40, 瑪瑙管2, 綠松石墜1. 琵琶形銅劍3, 銅製劍把1, 鐵鎌1, 鐵刀1, 鐵錛3, 杯2, 藍飾管5, 靑石管5, 白石管68, 瑪瑙管7, 黑石墜2. 銅劍鏢1, 銅鉾3, 銅斧5(扇形4), 雙鈕銅鏡1, 鏟形鐵 鏃2. 環形銅飾1, 直口壺4. 備考 多人 多次 火葬 永吉縣 星星哨 石棺墓 AM19186)에서 琵琶形銅劍과 함께 출토된 壺形土器에는 橋狀橫 耳가 동체부 중간(最大徑)에 대칭으로 1쌍 부착되어 있다. 이러한 모양의 壺는 星星哨 石 棺墓에서 보이는 보편적 기종인데 요동지역의 橫耳附鼓頸壺와 달리 圈足이 없는 넓은 평 저에 세장화된 斜頸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遼東地域과 구분되는 西團山文化 壺만의 특징 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동반 출토된 길이 31, 너비(중간) 7 의 세장한 대형 半月形石 刀 역시 星星哨 墓地를 위시한 西團山文化 石棺墓에서만 보이는 특징적인 石器라고 할 수 있다. 성성초의 예와 같이 길이가 에 이르는 대형의 반월형석도는 永吉 星星 哨水庫 石棺墓群,187) 永吉 東響水村 石棺墓,188) 永吉 小團山 東梁崗 石棺墓群,189) 吉 林 西團山 石棺墓群,190) 吉林市 北郊 猴石山遺址,191) 吉林市 北郊 長蛇山遺址,192) 吉林 市 西郊 騷達溝 石棺墓群193) 등에서도 다수 발견되었다. 대형 半月形石刀의 분포가 대체 로 永吉縣 吉林市 지역에 밀집되어 있음을 일견 알 수 있는데, 이 일대는 東北平原의 平 野地帶로 松花江이 貫流하고 있어 農耕地로서의 충분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따라서 永吉 186) 吉林市博物館 永吉縣文化館, 吉林永吉星星哨石棺墓第三次發掘 ( 考古學集刊 3, 1983). 187) 吉林市文物管理委員會 永吉縣星星哨水庫管理處, 永吉星星哨水庫石棺墓及遺址調査 ( 考古 , 1978). 188) 邵春華, 永吉發現一座靑銅時代石棺墓 ( 博物館硏究 , 1990). 189) 吉林市博物館, 吉林口前藍旗小團山 紅旗東梁崗石棺墓淸理簡報 ( 文物 , 1983). 190) 東北考古發掘團, 吉林西團山石棺墓發掘報告 ( 考古學報 , 1964). 191) 吉林地區考古短訓班, 吉林猴石山遺址發掘簡報 ( 考古 , 1980) 吉林省文物考古硏究 所 吉林市博物館, 吉林市猴石山遺址第二次發掘 ( 考古學報 , 1993). 192) 吉林省文物工作隊, 吉林長蛇山遺址的發掘 ( 考古 , 1980). 193) 段一平 李蓮 徐光輝, 吉林市騷達溝石棺墓整理報告 ( 考古 , 1985).

53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吉林地域에서 집중 발견되고 있는 대형 반월형석도는 당시에도 이 일대가 곡창지대임 을 증명해 주는 표지적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1980년 永吉縣 大海猛에서 는 기원전 7세기 전후의 C14연대를 가지는 탄화된 大豆種子 들이 다수 발견194)된 바 있 었다. 대형 반월형석도는 이런 大豆 와 같은 곡류를 수확하는 데에 이용되었을 것이다. 이상의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 吉林地域의 琵琶形銅劍을 제작 사용했던 西團山文化 人들의 주요한 생업형태가 다름 아닌 農耕 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吉林地域에서 琵琶形銅劍이 출토되는 분묘 유적 중 특이한 구조와 장식을 가진 예로 樺 甸 西荒山屯 橫道河子 大石蓋墓195)가 있다. 이 묘장은 가로 세로 3m 정도의 자연 대석 을 蓋石(封石)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른바 大石蓋墓 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 으나 지하의 묘광은 장방형의 土坑을 이용하고 있어 특이하다. 土壙의 깊이는 대개 m에 해당하여 상당히 깊은 편인데, 이런 지하 土壙의 구조는 遼東地域에서 주로 발 견되는 大石蓋墓 의 지하 구조인 石棺 과 크게 다른 점이다. 한편 개석의 한 쪽은 석판을 세워 만든 墓道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 墓道는 양쪽에 세워진 석벽을 통해 비스듬하게 기 울어져 지하 토광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묘장 구조는 橫道河子 墓地의 보편적 葬式인 多人 多次火葬과 깊이 연관된 듯하다. 즉 경사진 墓道를 통해서 여러 번의 매장과 화장이 추가 로 진행되었던 듯하다. 多人多次의 火葬은 大石蓋墓나 石棺墓에서 자주 확인되지 않는 장 식으로 지금까지의 조사에 의하자면 주로 遼東半島 남단의 積石墓에서 일찍이 유행하였다. 墓制와 副葬遺物을 통해 볼 때 橫道河子 M1과 M6은 동시대의 묘장으로 이해할 수 있 다. 또한 여기에서는 銅劍과 함께 鐵刀 鐵鎌 鐵錛 등의 鐵製 農工具類가 出土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러한 철제 농공구의 동반은 末期 琵琶形銅劍의 연대가 이미 본격적인 鐵器時 代에 진입해 있음을 시사해 준다. 末期 琵琶形銅劍과 鐵器의 동반 출토는 특히 渾江 유역 과 제2 松花江 유역에서 자주 확인되는데,196) 이것은 鐵器文化를 기반으로 한 高句麗 와 夫餘 의 建國勢力과 깊은 관련이 있을 듯하다. 遼東地域의 琵琶形銅劍文化가 쇠퇴한 이후 末期의 琵琶形銅劍은 高句麗와 夫餘가 건국된 渾江 유역과 松花江 流域의 鐵器文化에서 한 동안 지속된 듯하다. 한편 橫道河子 大石蓋墓에서 출토된 銅劍들은 검신 하부에 특징 적으로 左右對稱의 穿孔 2雙이 위치해 있다. 이러한 좌우대칭의 穿孔은 최근에 발견된 黑龍江省 雙城市의 琵琶形銅劍197)에서도 확인되는데 아마도 松花江 유역 琵琶形銅劍의 지역성이 아닌가 짐작된다. 194) 劉世民 舒世珍 李福山, 吉林永吉出土大豆炭化種子的初步鑒定 ( 考古 , 1987). 195) 吉林省文物工作隊 吉林市博物館, 吉林樺甸西荒山屯靑銅短劍墓 ( 東北考古與歷史 1, 1982). 196) 이 일대에서 末期의 琵琶形銅劍과 鐵器가 共伴한 遺蹟으로는 橫道河子 大石蓋墓 外에 集安 五道嶺溝門 積石墓, 桓仁 大甸子 石棺墓 등이 알려져 있다. 197) 陳家本 范淑賢, 앞의 글(1991) p.65.

54 國史館論叢 第88輯 [圖 18] 吉林 黑龍江省 地域 出土 穿孔 琵琶形銅劍 1.橫道河子M1 2.橫道河子M6 3.雙城市 吳家村 4.懷德 大靑山 集安縣 太平鄕의 五道嶺溝門 積石墓는 1981년 調査報告文198)에서 墓制에 대해 方壇階 梯積石墓 類型이라고 고찰한 이후 많은 혼선과 오해를 불러 왔다. 그래서 연구자에 따라 方壇積石墓,199) 方壇階梯積石墓,200) 階墻積石墓,201) 方形臺狀積石塚,202) 基壇積石 墓 203) 등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高句麗 基壇積石塚 의 상한연대가 크게 상향 조정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五道嶺溝門 積石墓의 形制에 대한 再調 査204)가 이루어지면서 方壇階梯積石墓 가 아니라 山石이 굴러 내려와 堆積된 淌石流 의 198) 集安縣文物保管所, 集安發現靑銅短劍墓 ( 考古 , 1981). 199) 林沄, 앞의 글(1980). 200) 靳楓毅, 잎의 글(1982). 201) 魏存成, 高句麗積石墓的類型和演變 ( 考古學報 , 1987). 202) 田村晃一, 高句麗の積石塚 ( 東北アジアの考古學 天池, 六興出版, 1990) p ) 孫永鍾, 高句麗建國年代的再檢討 ( 東北亞歷史與考古信息 , 1991). 204) 張雪岩, 集安靑銅短劍墓及相關問題 ( 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pp

55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基礎 위에 만들어진 積石墓임이 밝혀졌다. 이러한 淌石流式 積石墓 의 연대는 비교적 빨 라 高句麗 建國前에 이미 조영되기 시작하여 建國 前後한 時期까지 連續된 것으로 이해하 고 있다. 그래서 조사자는 五道嶺溝門 墓葬을 紀元前 3世紀末 紀元前 1世紀初의 年代를 가지는 高句麗 淌石流式積石墓로 정의하고, 이후 方壇階梯積石墓(積石塚)로 발전하는 것으 로 이해하였다. 五道嶺溝門 積石墓는 묘장의 형제 뿐만 아니라 銅劍과 함께 출토된 2건의 高句麗系 鏟形鐵鏃205)을 통해서도 高句麗 積石墓임을 확인할 수 있다.206) 五道嶺溝門의 예를 통해 볼 때 渾江 流域의 積石墓에서 주로 발견되는 折刃銅劍 은 高句麗의 文化遺産 이며, 바로 末期의 琵琶形銅劍에서 變化 發展한 형태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吉林地域에서 출토된 琵琶形銅劍 중 시기가 가장 빠른 것으로 대개 星星哨 石棺墓를 거 론한다. 원보고문에선 AM2 石棺墓에서 琵琶形銅劍의 시기를 대체로 西周中 晩期 春秋 早期 로 편년하고 있다. 그 근거는 銅劍의 형태가 烏金塘 十二臺營子 二道河子의 銅劍 과 유사하고 樓上 M3의 경우보다는 이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星星哨 石棺墓群 에서는 C14 연대치가 있어 참고가 되는데, 성성초 C지구 M21 석관묘의 인골을 측정한 결과 B.C 1105±100년 이라는 연대가 나왔다. 따라서 성성초 석관묘 가운데 이른 것은 그 상한이 기원전 12세기 전후까지 소급되는 것이다. 그러나 측정 대상인 CM21에서는 靑銅器가 한건도 발견되지 않고 있어 청동기가 나왔던 AM19보다는 시기적으로 앞섰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星星哨 石棺墓에 대해 시기 구분한 연구207)에 의해서도 CM21은 早期에 속하고, 琵琶形銅劍이 출토된 AM19는 西周晩期 春秋早期 에 해당하는 晩期의 墓葬으로 구분되고 있다. 따라서 길림지역에서 琵琶形銅劍이 출현하는 시기는 星星哨 石 棺墓群의 晩期에 해당하는 기원전 8세기 무렵이라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듯하다. 吉林地域에서는 특이하게도 琵琶形銅劍보다 오히려 琵琶形銅鉾 의 출토빈도가 현저히 높 다. 지금까지 길림지역에서 琵琶形銅鉾가 발견된 곳으로는 永吉 星星哨 DM13 石棺墓, 星 星哨水庫 AM11 石棺墓, 東響水村 石棺墓,208) 吉林市 長蛇山 63M1,209) 蛟河 八垧地 石 棺墓,210) 吉林 猴石山 79西M19 石棺墓,211) 東遼 曲家南山 石棺墓212) 등이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猴石山 石棺墓의 경우엔 琵琶形銅劍이 출토되는 유적보다 오히려 부장유물 205) 耿鐵華, 高句麗兵器初論 ( 遼海文物學刊 , 1993). 206) 박진욱( 초기좁은놋단검 문화의 내용과 발전과정에 관하여, 조선고고연구 , 1987) 은 이 鐵鏃을 後代의 混入品으로 보고 있다. 207) 宋玉彬, 試論星星哨墓葬的分期 ( 博物館硏究 , 1989). 208) 邵春華, 앞의 글(1990). 209) 吉林省文物工作隊, 앞의 글(1980). 210) 董學增, 吉林蛟河八垧地靑銅時代遺址及其附近 堡寨 遺蹟調査 ( 遼海文物學刊 , 1988). 211)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吉林市博物館, 앞의 글(1993). 212) 金旭東, 東遼河流域的若干種古文化遺存 ( 考古 , 1992).

56 國史館論叢 第88輯 에 있어 월등한 내용을 보인다. 銅刀 扇形銅斧 등의 工具類가 세트를 이루고 素面鏡과 玉類가 조합된 유물복합상은 전술한 吉林地域의 琵琶形銅劍 출토 石棺墓보다도 양 질면 에서 앞서 있다. 특히 후석산 석관묘에선 銅鉾 單鈕素面鏡 石玉類 가 일괄적으로 발견 되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러한 출토 양상은 기타 지역의 유적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특성 이다. 遼寧地域이나 한반도에서는 일반적으로 銅劍과 雙鈕鏡의 결합이 자주 확인되는 편 이다. 또한 琵琶形銅鉾를 石棺墓 遺蹟에선 대체로 壺와 罐(盌)의 組合 現象도 확인되고 있다. 청동기의 부장이 다수 확인되는 猴石山의 79西M34 石棺墓에선 人骨을 시료로 한 C14측정 연대가 B.C 325±70년 213)인 것으로 알려져 있고, 長蛇山 遺址는 B.C 405 ±85년 의 연대치가 나온 바 있다. [表 11] 遺 蹟 名 星星哨 石棺墓 DM13 星星哨水庫 石棺墓 AM11 猴石山 石棺墓 79西M19 鉾 吉林地域 琵琶形銅 規 模(m) 出土 遺蹟 件數/通長 1/9.2 1/20 1/19.6 同 伴 遺 物 石斧1, 半月形石刀1, 壺1, 鉢1, 盌1. 石斧1, 半月形石刀1, 壺1, 鉢1, 翠墜2. 銅刀1, 單鈕素面鏡2, 扇形銅斧1, 石斧3, 石 鏟1, 刮削器1, 壺1, 罐1, 白石管77. 銅刀1, 單鈕素面鏡1, 扇形銅斧1, 銅句2, 石 79西M /? 斧1, 壺1, 盌1, 白石管45, 玉墜2, 綠松石飾. 石斧3, 石錛1, 石鑿1, 半月形石刀4, 石鏃21, 長蛇山 住居址 57F2? 1/19.6 環狀石器1, 白石管6, 壺2, 罐1, 盌1, 杯1, 陶紡輪3, 陶網墜3. 石鑿1, 石鏃2, 白石管1, 四耳 東響水村 石棺墓? 1/17.8 半月形石刀1, 附罐1(橋狀橫耳2+橫貼耳2) 이와 같이 吉林地域에선 琵琶形銅鉾가 銅劍보다 오히려 靑銅器文化의 전형을 보이고 있는데 이 점은 遼寧 地域의 琵琶形銅劍文化와 크게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吉林地域에 서 출토된 琵琶形銅鉾 가운데 長蛇山 57F2 住居址 出土品과 星星哨 DM3 出土品을 우리 나라에서 출토된 琵琶形銅鉾들의 起源과 연결해 보려는 입장214)이 최근 제기되기도 항ㅆ 는데 吉林地域을 포함한 동북아의 琵琶形銅鉾文化 에 대해선 추후 종합적인 연구가 더 진 행되어야 할 것이다. 213)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實驗室, 放射性炭素測定年代報告(8) ( 考古 , 1981). 214) 李健茂, 遼寧式銅矛에 대하여 ( 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 1994) p.18.

57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 韓半島地域 韓半島에서 琵琶形銅劍이 출현하는 시기는 그 동안 한국 고고학계의 커다란 논쟁점이 었다. 이 문제는 韓國 靑銅器文化의 起源과 직결된 중요한 사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하여도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韓半島에 琵琶形銅劍이 유입되는 시 기를 기원전 6 5세기 215) 내지 기원전 4세기 216)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당시까지 만 해도 遼寧地域에서 출토되는 전형적인 琵琶形銅劍이 韓半島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 았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 알려졌던 琵琶形銅劍들은 价川 龍興里 出土品 國 立博物館 所藏品 (本11943)217) 慶北大 所藏品 (평양부근 출토품)218) 平壤 中央歷史博物 館 所藏品 219) 등으로 모두 突起가 퇴화되고 봉부가 발달한 變形 만이 알려져 있었다. 이 런 이유로 遼寧地方의 靑銅器文化( 遼寧式銅劍文化 )와 韓半島의 靑銅器文化( 細形銅劍文化 ) 를 별도로 구분해 보려는 시각220)도 대두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4년에 傳尙州(茂朱) 銅劍221)과 扶餘 松菊里 石棺墓 出土 銅劍222)이 報告 되면서 고고학계는 기왕의 설을 크게 수정하게 되었다. 이 동검들은 모두 그 동안 한반도 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전형적인 琵琶形銅劍의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송국 리 석관묘는 한반도에서 전형적인 琵琶形銅劍이 처음으로 정식 발굴 조사된 유적이고, 또한 銅鑿1, 石劍1, 石鏃11, 管玉17, 曲玉2 등의 동반유물까지 확인되어 韓國의 琵琶形 銅劍 硏究에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그래서 1970년대 중반엔 琵琶形銅劍의 출현 시기를 대체로 기원전 8세기 223) 내지 紀元前 1000年紀 初期 224)까지 상향 조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中國 東北地方에서 전형적인 琵琶形銅劍이 출토되었던 南山根 石槨墓 M101과 朝 陽 十二臺營子 石棺墓의 연대인 西周晩期~春秋初期 (紀元前 8世紀)를 염두에 둔 편년이었 다. 한편 이른 시기의 전형적인 琵琶形銅劍이 韓半島에서도 확인됨에 따라 靑銅器時代의 215) 金元龍, 十二台營子의 靑銅短劍墓 韓國靑銅器文化의 起源問題 ( 歷史學報 16, 1961) 韓炳三, 价川 龍興里出土 靑銅劍과 伴出遺物 ( 考古學 1, 韓國考古學會, 1968). 216) 尹武炳, 韓國 靑銅遺物의 硏究 ( 白山學報 12, 1972). 217) 國立中央博物館 國立光州博物館, 特別展 韓國의 靑銅器文化 (汎友社, 1992) pl ) 榧本杜人, 朝鮮の考古學 (同朋社, 1980, pl.184) 國立中央博物館 國立光州博物館, 앞의 책(1992) pl ) 梅原末治 藤田亮策, 朝鮮古文化綜鑑(1) (養德社, 1947) pp ) 秋山進午, 中國東北地方の初期金屬文化の樣相(上 中 下) ( 考古學雜誌 , ) 尹武炳, 앞의 글(1972). 221) 金元龍, 傳茂州出土 遼寧式銅劍에 대하여 ( 震檀學報 38, 1974). 222) 韓國考古學會, 扶餘 松菊里 牙山 白岩里 淸原 飛下里 出土 一括遺物 ( 考古學 3, 1974) 金永培 安承周, 扶餘 松菊里 遼寧式銅劍出土 石棺墓 ( 百濟文化 7 8合輯, 1975). 223) 尹武炳, 韓國 靑銅器時代의 文化 ( 考古美術 合輯, 1976) 金元龍, 沈陽 鄭家窪 子 靑銅器時代墓와 副葬品 ( 東洋學 6, 1976). 224) 金廷鶴, 韓國 靑銅器文化의 編年 ( 韓國考古學報 5, 1978).

58 國史館論叢 第88輯 遼寧地域과 韓半島는 동일한 문화권이었으며, 특히 琵琶形銅劍은 古朝鮮 의 靑銅器文化와 관련되었음이 주장되었다.225) 사실 1970년대 말까지 南韓의 考古學界가 얻은 연구성과 는 1960년대 후반 북한의 주장226)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圖 19] 韓半島地域 石棺墓 出土 琵琶形銅劍 1.松菊里 2.仙岩里 3.大雅里 1980년대 초반에 들어서는 北韓 지역인 黃海道 仙岩里227)와 大雅里228)의 石棺墓에서 도 琵琶形銅劍이 발굴 조사되었다. 선암리 M1 석관묘에서는 銅劍과 함께 石鏃5 管玉2 건이 나왔고, 대아리 석관묘에선 銅鏃1, 石鏃10, 管玉1 등이 동반 출토하였다. 石鏃 과 管玉 등은 扶餘 松菊里 石棺墓와 유사한 내용이지만 琵琶形銅劍 자체의 형태에 있어서는 상호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선암리와 대아리의 琵琶形銅劍은 突起가 퇴화한 이른바 變形 이라고 할 수 있는 형태이다. 이러한 발굴성과로 인해 韓半島에서 출토되는 琵琶形銅劍들은 일반적으로 石棺墓 유 적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1980년대 후반부터 韓半島의 남부지방에서 琵琶形銅劍이 집중 출토되면서 연구에 다시 한번 활기를 불어넣게 되었다. 225) 金廷鶴,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 韓國史 2, 國史編纂委員會, 1977). 226) 김용간 황기덕, 기원전 천년기동안의 고조선의 문화 ( 고고민속 , 1967). 227) 정용길, 신평군 선암리 돌상자무덤 ( 고고학자료집 6, 1983). 228) 리규태, 배천군 대아리 돌상자무덤 ( 고고학자료집 6, 1983).

59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히 全羅南道 南海岸과 寶城江 유역의 支石墓 유적들에서 15점의 琵琶形銅劍이 발견되 면서 麗水半島 일대를 琵琶形銅劍의 새로운 밀집 분포 지역으로 주목하게 된 것이다.229) 근년에 남부지방에서 琵琶形銅劍이 출토된 支石墓들은 全南 昇州 牛山里,230) 寶城 德峙 里,231) 麗川 鳳溪洞232) 積良洞233) 平呂洞,234) 麗水 五林洞,235) 慶北 金陵 松竹 里,236) 慶南 昌原 德川里237) 遺蹟 등이다. 支石墓에서 琵琶形銅劍이 발견된 예는 이미 일찍이 全南 高 興 雲垈里238)에서 알려진 바 있다. 1920년대에 小泉顯夫에 의해 발굴 조사된 운대리 유적은 30여기의 支石墓가 군집되 어 있었다. 지석묘군의 西端에서 1基의 組合箱式 棺 ( m)이 발견되었는데 바닥에 깔린 石板 위에서 琵琶形銅劍片이 하나 발견되었다. 조사자는 발견 당시 石棺 위에 어떠한 구조물도 없었으나 원래 거대한 蓋石 과 支石 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즉 원래 주변의 墳墓들과 같은 구조의 支石墓 였다는 것이다. 이 러한 추정은 적절했던 듯하며 近年에 조사된 麗水半島의 支石 墓群에서도 이러한 예가 다수 발견되었다. 積良洞 M 는 모두 上石이 유실된 支石墓로 추정되는데, 그 石槨 내에서 琵琶形銅劍片들이 각각 1개체분씩 발견되었다. 인근의 麗水 五林洞 M6도 이와 같은 예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여수반도를 중심으로 한 支石墓 遺蹟에서 출토된 琵琶形 銅劍들의 대부분은 破片이거나 再生品으로 발견되었다. 유독 積良洞 M7 支石墓에서만 특 [圖 20] 全南 高興 雲垈里 出土 銅劍片 229) 李榮文, 遺物相으로 본 湖南地方의 支石墓 ( 韓國 支石墓의 諸問題, 第14回 韓國考古學全 國大會 發表要旨, 韓國考古學會, 1990) 全羅南道地方 出土 靑銅遺物 ( 韓國上古史學報 3, 1990). 230) 宋正炫 李榮文, 牛山里 내우支石墓 ( 住岩댐水沒地域文化遺蹟發掘調査報告書(Ⅱ), 全南大 博物館, 1988). 231) 尹德香, 德峙里 신기 支石墓 ( 住岩댐水沒地域文化遺蹟發掘調査報告書(Ⅲ), 全南大博物館, 1988). 232) 李榮文, 麗川市 鳳溪洞 支石墓 (全南大 博物館, 1990). 233) 李榮文 鄭基鎭, 麗川 積良洞 상적 支石墓 (全南大 博物館, 1993). 234) 李榮文 崔仁善 鄭基鎭, 麗川 平呂洞 산본 支石墓 (全南大 博物館, 1993). 235) 李榮文 鄭基鎭, 麗水 五林洞 支石墓 (全南大 博物館, 1992). 236) 曺永鉉, 金陵 松竹里 遺蹟 發掘調査 ( 三韓社會와 考古學, 第17回韓國考古學全國大會發表 要旨, 1993). 237) 李相吉, 昌原 德川里遺蹟 發掘調査報告 ( 三韓社會와 考古學, 第17回 韓國考古學全國大會 發表要旨, 1993). 238) 有光敎一, 朝鮮磨製石劍の硏究 (1959).

60 國史館論叢 第88輯 전형적인 琵琶形銅劍이 完形으로 발견되었는데, 주변의 銅劍片들도 원래 M7의 銅劍과 같은 전형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부지방에서 알려진 근년의 발굴성과에 의하자면 琵琶形銅劍은 石棺墓보다 오히려 變 形支石墓 에서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慶南 昌原 鎭東里의 琵琶形銅劍을 반출하는 石棺 역시 조사자에 의하면 단순한 石棺墓가 아니라 上石을 잃은 支石墓일 가능성이 많다239) 고 한다. 진동리 석관 주변의 3 4m 바로 아래에 支石墓의 上石으로 보이는 大石이 하 나 있고, 북쪽으로 50m 정도 지점에도 支石墓가 있었다는 정황으로 보아 조사자의 견해 가 정확한 듯하다. 더욱이 琵琶形銅劍과 동반한 磨製石劍이나 紅陶片의 존재는 이를 뒷받 침해 준다. [圖 21] 全南 麗川 積良洞 支石墓群 出土 琵琶形銅劍 上石이 流失된 變形支石墓에서 琵琶形銅劍이 출토된 예는 慶南 昌原 德川里240)에서도 근년에 조사된 바 있다. 재가공한 琵琶形銅劍 1점과 石劍 紅陶 각 1점이 출토된 덕천리 M16은 석비레층의 바닥 위에 川石으로 石槨의 네 벽을 무질서하게 쌓아 올린 變形支石 239) 沈奉謹, 嶺南地方 出土 靑銅遺物의 新例 ( 釜山史學 4, 1980) p ) 李相吉, 앞의 글(1993), pp

61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墓라 할 수 있다. 상부시설물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주변 유적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昌 原 鎭東里의 경우처럼 원래는 支石墓의 일종임에 틀림없다. 德川里 支石墓 遺蹟에선 紅 陶 의 부장(M2 M5 M7 M8 M10 M11 M16 M19 M21)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데 이러한 현상은 韓半島 中 南部地域의 支石墓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공통된 특징이 다.241) 德川里 출토의 동검은 재생품이라 그 원형을 정확히 복원할 수 없지만, 그 동안 支石墓에서 출토된 琵琶形銅劍들이 대부분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어 德川里의 경우 도 원래는 突起가 있었던 銅劍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추정은 근년에 조사된 慶北 金陵 松竹里 支石墓242)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송죽리 유적에선 변형지석묘의 외곽 1m지점에서 琵琶形銅劍 1점이 꽂힌 상태로 발견되 었다. 송죽리 출토의 銅劍은 突起가 존재하는 琵琶形을 띠고 있다. 부장 유물에 있어서는 송죽리의 支石墓에서도 紅陶와 石鏃 등이 동반하고 있어 德川里의 상황과 일치한다. 墓制 와 同伴遺物의 일치를 통해 추측해 볼 때 昌原 德川里와 金陵 松竹里의 銅劍은 인접한 시기의 소산인 듯하다. 근년에 연이어 보고된 南部地方의 琵琶形銅劍 出土 變形支石墓 유적들로 인해 필자는 韓半島에서 琵琶形銅劍의 起源 내지 出現 問題는 石棺墓 보다 오히려 變形支石墓 와 밀 접히 관련된 것 같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典型的 石棺墓인 北韓의 仙岩里와 大雅 里에서는 오히려 變形의 琵琶形銅劍이 출토되어 後期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 문 제와 관련하여 韓半島 대부분의 石棺墓에선 細形銅劍 이 출토된다는 사실도 충분히 고려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忠南 大田 比來洞 支石墓243)에서도 琵琶形銅劍 1건이 출토되어 이런 考 案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한다. 琵琶形銅劍이 출토된 比來洞 M1 支石墓의 구조적 특징 은 매장 주체부를 조영하기 위해 일정한 범위의 盛土部를 마련하였다는 점이다 정도의 범위에 걸쳐 雜石 및 황갈색 점토를 이용해 약 0.5 1m 가량 높이로 성토 하면서 동시에 石槨을 축조하였다. 石槨은 板石과 割石을 쌓아서 만들었으며 내부 바닥에 도 얇은 板石을 드문 드문 깔아 놓았다. 石槨의 규모는 약 가량 되는데, 양쪽 의 단벽은 후대의 교란으로 인해 거의 파괴되었다. 蓋石은 반으로 쪼개어진 상태로 발견 되었는데 크기는 이며 표면에서는 24개의 이른바 性穴 이 확인되었다. 241) 金載元 尹武炳, 韓國支石墓硏究 (國立中央博物館, 1967) 盧爀眞, 靑銅器時代 紅陶 ( 韓 國史論 17, 國史編纂委員會, 1987). 242) 曺永鉉, 앞의 글(1993) p ) 성정용, 大田 新岱洞 比來洞 靑銅器遺蹟 ( 호남고고학의 제문제, 제21회 한국고고학전국 대회발표문집, 1997).

62 國史館論叢 第88輯 지하에 매장주체부를 설치하지 않고 성토부를 조성해서 그 안에 石槨을 조영하는 것은 일종의 地上式 變形支石墓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축조 방법은 卓子式 支石墓의 전통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圖 22] 忠南 大田 比來洞 M1 支石墓 出土 遺物 比來洞 M1 支石墓에서는 琵琶形銅劍 1점과 함께 三角灣入石鏃 5점과 紅陶 1점이 石 槨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銅劍은 전체 길이가 16.9 로 琵琶形銅劍 가운데 상당히 짧은 편에 속하며 형태에 있어서도 원형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이다. 이 銅劍에서는 脊突이 보 이지 않으며 突起도 退化하여 흔적만 남아 있는 정도이다. 등대(척)의 단면도 납작한 직 사각형에 가까워 琵琶形銅劍에서 보기 힘든 형태를 띠고 있다. 下部의 曲刃은 파손에 의 해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게 변형되어 있으며 莖部는 상대적으로 비대하게 남아 있다. 比 來洞 銅劍의 이런 특이한 형태는 모두 재가공에 의한 결과인 것으로 짐작된다. 전체적으 로 보아 파손된 이후 다시 가공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돌기의 존재와 굵고 선명한 脊部 의 존재로 보아 比來洞 銅劍도 원래 전형적인 琵琶形銅劍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琵琶形銅劍이 나온 比來洞 M1 支石墓에서는 2860±50 B.P 의 C14 연대측정 결과244) 가 산출되어 주목된다. 대략 기원전 9세기 전후라는 연대는 기존에 韓半島의 琵琶形銅劍

63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出現期로 설정된 기원전 8세기 보다 조금 앞서는 시간이다. 한편 韓半島 地域에서 初期 의 琵琶形銅劍이 출토되는 대부분의 變形支石墓에서는 紅陶 의 副葬을 큰 특징으로 하고 있다. 變形支石墓의 구조는 遼東 吉林地域에서도 다수 확인되는데, 紅陶 의 副葬은 韓半 島 中 南部만의 재래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韓半島에서 출토되는 전형적 형태의 琵琶形銅劍들에서는 莖部 한쪽에 홈(溝)이 하나 패 여 있는 경우를 허다하게 찾아볼 수 있다. 松菊里 積良洞의 경우와 같이 莖部에 홈이 파 진 琵琶形銅劍은 韓半島의 중서부와 남부 지역에서만 분포하고 있어 한반도 중부이남 지 역에서 제작된 特殊型式 으로 간주245)되었다. 최근에는 琵琶形銅劍을 분류할 때 경부에 홈이 있는 유형(有溝莖式) 을 아예 별도의 개별 형식으로 설정246)하기도 한다. 그러나 莖 部에 홈이 있는 琵琶形銅劍은 內蒙古 敖漢旗 山灣子村 墓地247)와 朝陽 부근248)에서도 발견된 바 있어 韓半島 中南部만의 特徵이라고 단정하기가 곤란하다. 이러한 溝 의 용도 는 검신과 손잡이의 결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장치로 이해되며 마제석검 등에서도 종 종 확인된다. 3. 琵琶形銅劍 型式分類의 諸問題 琵琶形銅劍의 型式分類에는 대개 劍身의 길이와 너비, 突起의 有無와 位置, 검날 밑 부분(尾部)의 형태, 鋒部의 길이, 등날(脊刃)의 길이 등 검신 자체에 의한 방법과 동반 되는 劍把(손잡이)와 劍把頭飾(손잡이장식)에 의한 간접적인 분류 방법이 주로 사용되어 왔다. 기존의 분류기준 자체가 객관적인 것이 아니어서 연구자마다 型式分類에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中國 北韓 韓國 日本 각국의 고고학자들에 의 해서 琵琶形銅劍에 대한 연구가 개별적으로 진행되는 동안 상반된 分類案이 제시되기 도 했다. 그 중에서도 1980년대에 들어와 어떤 형식의 동검이 가장 오래된 古式 인가를 따지는 문제는 琵琶形銅劍의 發源地와도 깊은 관계가 있어 큰 論難의 대상이 되었다. 遼西의 南 山根 十二臺營子 型式과 遼東의 雙房 二道河子 型式 사이에 先後 관계가 문제의 초점 244) 성정용, 앞의 글(1997) p ) 李健茂, 韓國의 遼寧式銅劍文化 ( 特別展 韓國의 靑銅器文化, 汎友社, 1992) p ) 李淸圭, 嶺南地方 靑銅器文化의 展開 ( 嶺南考古學 21, 嶺南考古學會, 1997) 李榮文, 韓 國 琵琶形銅劍 文化에 대한 考察 琵琶形銅劍을 중심으로 ( 韓國考古學報 38, 1998) pp ) 邵國田, 앞의 글(1993) p ) 靳楓毅, 大凌河流域出土的靑銅時代遺物 ( 文物 , 1988) 朝總 147-1番 銅劍.

64 國史館論叢 第88輯 이었다. 주로 中國學者들 내에서도 前者가 이르다고 보는 경우249)와 後者가 선행된 형식 이라 주장하는 입장250)으로 나누어진다. 遼西起源說 과 遼東起源說 이라고 각각 명명할 수 있는데, 北韓學界에서는 1980년대까지 遼東起源說을 주장251)하다가 최근인 1993년 평양의 단군릉발굴 이후 달라진 양상을 보이고 있다. 두 설은 검신의 길이에 대해서 상반 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데 前者의 요서기원설은 검신의 형태가 처음엔 길고 크다가 시간 이 지날수록 점차 짧고 작아진다고 보는 반면, 後者는 이와 정반대로 변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상반된 두 설은 좀처럼 의견의 폭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가 최근 1990년대 중반에 들어 약간 달라진 양상을 보이고 있다. 먼저 北韓學界에서는 최근 平壤 부근에서 출토된 琵琶形銅鉾 2개를 주목하고 있다.252) 1993년 가을 평양시 양원군 용곡리 5호 支石墓로부터 琵琶形銅鉾가 1개 출토되었다. 한 편 5호 지석묘와 10m 정도 떨어져 있고 동일한 형식으로 축조되어 동시기의 墓制로 보 이는 4호 支石墓에서는 인골 1개체분과 銅釦 土器片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4호 支石墓의 人骨을 전자스핀공명법에 의해 절대연대를 측정한 결과 4539±167년 B.P. 의 수치가 나온 것이다. 그래서 북한학계는 이 측정 연대치에 의거하여 5호 支石墓의 琵琶 形銅鉾도 기원전 26세기 무렵의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1994년 봄에는 평남 덕천시 남양리의 角形土器( 팽이형토기 ) 관계 住居遺蹟에서도 琵琶形銅鉾 1개가 角形土器 石劍 石戈 石鏃 등 다량의 遺物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南陽里 住居址는 동반유물의 조성 형 식과 琵琶形銅鉾의 형태를 통해 볼 때 앞에서 살핀 龍谷里 支石墓보다도 오래된 것이라 추정하였다. 이런 새로운 발굴 자료는 북한학계가 琵琶形銅劍에 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253) 최근 박진욱은 그 동안의 형식분류에 의하자면 후기 琵琶形銅劍(세째 류형)에 속하는 黃南 峰泉郡 大雅里 石棺墓와 黃北 新坪郡 仙岩里 石棺墓에서 出土된 銅 劍을 最古의 琵琶形銅劍이라 하여 첫째류형 (雙房 二道河子 型式)의 先行段階( 早期 )라고 249) 遲雷, 關于曲刃靑銅短劍的若干問題 ( 考古 , 1982) 靳楓毅, 앞의 글(1982) 論 中國東北地區含曲刃靑銅短劍的文化遺存(下) ( 考古學報 , 1983). 250) 林沄, 앞의 글(1982) 翟德芳, 앞의 글(1988). 251) 박진욱, 앞의 글(1984) 앞의 책(1987). 252) 劉秉興, 檀君 古朝鮮時期の遺跡遺物の發掘成果 ( 朝鮮民族と國家の源流, 雄山閣, 1995) pp 金敎京 外, 平壤一帶の檀君 古朝鮮關係遺跡に對する年代測定結果 ( 上同書, 1995) p.51 참조. 253) 이와 더불어 北韓學界는 최근의 새로운 發掘資料를 계기로 1960年代 이래의 通說을 수정하 여 支石墓와 石棺墓는 4500년 B.P. 무렵 비슷한 시기에 平壤 一帶에서 發生한 古朝鮮의 代 表的 靑銅器時代 墳墓들 이라고 한다(石光濬, 平壤一帶において新しく發掘された支石墓と石 棺墓, 朝鮮民族と國家の源流, 雄山閣, 1995, pp 참조).

65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고찰254)하고 있다. 대아리 선암리 출토 동검은 그 길이가 각각 22.5 과 27 로 대체 로 32 이상인 後期 琵琶形銅劍과는 공통점이 없으며 오히려 28 미만인 初期 琵琶形銅 劍의 길이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또 大雅里 仙岩里 石棺墓에서는 有莖兩翼의 石鏃 銅 鏃과 長二等邊三角形의 無莖兩翼石鏃이 銅劍과 함께 출토되었는데, 이런 유물들은 角形 土器 관계유적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라고 한다. 이런 사실들로 보건대 두 石棺墓에서 출토된 琵琶形銅劍은 결코 後期의 형식이 아니며, 美松里型土器 이전의 角 形土器文化 의 토양에서 발생한 原初型 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銅劍 型式에 대한 再檢討 는 궁극적으로 平壤을 중심으로 한 韓半島 西北地方이 琵琶形銅劍文化의 發祥地라는 결 론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1960년대 이후의 遼東起源說 을 西北朝鮮起源說 로 대폭 수정 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북한 고고학계의 새로운 견해는 많은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우선 이른바 早期의 原初型 琵琶形銅劍 이 출토되었다고 하는 대아리와 선암리 石棺墓 유 적을 角形土器文化 遺蹟이라고 단정할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 有莖兩翼石鏃과 無莖兩翼 石鏃의 존재는 유독 각형토기 유적에서만 확인되는 바가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仙岩里 石棺墓( 돌상자무덤 )는 1980년 4월에 사리원력사박물관에 의해 수습조사된 유적으로 大同 江 上流의 南江流域에 자리잡고 있다. 琵琶形銅劍이 출토된 1호 무덤은 그 규모가 남북 길이 약1.4m, 동서너비 50 60, 깊이 60 정도로 알려져 있으며 묘광 바닥에는 판돌 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255) 여기서 출토된 琵琶形銅劍(圖19-2)은 날부분에 돌기가 이미 퇴화해 버리고 없으며 아래 부분이 좀 볼록하게 남아 있다. 등대의 날은 莖 중간까지 내 려와 무척 발달된 편이지만, 봉부는 거의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 미발달된 상태이다. 일견 하기에도 이런 동검의 형태는 典型에서 벗어난 變型의 형식이라는 것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우선 琵琶形銅劍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突起部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서 이런 형식의 銅劍을 原初型 이라 분류하기는 불가능하다. 1967년에 수습 조사된 大雅 里 石棺墓 출토의 銅劍(圖19-3) 역시 突起가 보이지 않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점차로 퍼지 는 변형된 형태를 띠고 있다.256) 박진욱은 1987년 이후 최근의 연구에서까지 검신의 길이를 형식분류의 중요한 기준으 로 삼고 있다. 상기한 선암리와 대아리 石棺墓 출토의 琵琶形銅劍을 早期에 비정한 데에 도 검신의 길이가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검의 형태를 막론하 254) 朴晉煜, 古朝鮮の琵琶形銅劍文化の再檢討 ( 朝鮮民族と國家の源流, 雄山閣, 1995) pp ) 정용길, 앞의 글(1983) p ) 리규태, 앞의 글(1983) p.176.

66 國史館論叢 第88輯 고 무조건 검신의 길이로만 분류하는 것은 형식분류라 하기 힘든 것이다. 1980년대 이후 부터 최근까지 검신의 길이를 기준으로 한 형식분류가 중국학자와 북한학자들에 의해 복 잡하게 진행되어 왔다.257) 그러나 琵琶形銅劍의 出土例가 꾸준히 증가해 오면서 검신의 길이에 의한 구분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 자명해졌다. 즉 검신의 형태가 동일하다 하더라도 길이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258)나, 반대로 검신의 길이는 비슷 하지만 전혀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경우259)가 더 이상 예외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자주 발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검신의 길이에 의한 일률적인 형식분류는 그 근 거가 없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260) 다음으로 遼東起源論者인 林沄도 자신의 初論 을 최근에 적극 補完261)하고 있다. 再 論 에서는 東北系銅劍 의 검신과 손잡이에 대한 세부적인 형식 분류에 있어서 初論 의 입 장을 상당 부분 수정 보완하고 있는데, 결국 이것은 연구 방법론의 변화에서 기인한 결 과라고 짐작된다. 初論 에서는 秋山進午의 연구 방법과 같이 검손잡이의 형태 변화에 초 점을 맞추고 검신에 대한 유형학적 분석을 시도했었으나, 再論 에서는 劍身과 劍柄에 대 한 형식 분류를 별도로 진행시키고 있다. 이것은 初論 의 연구 방법론을 수정한 것으로 劍柄의 형태 변화에 구애받지 않고 劍身의 형식을 일관되게 분류한 점은 일단 진전된 안 목이라 평가할 만하다. 1960년대 이후 日本과 中國의 考古學者들에 의해 동검 손잡이의 재료와 형태 변화 등 에 역점을 두어 銅劍의 型式을 분류하는 방법론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262) 그러나 최 근의 발굴성과를 접할 때 銅劍 손잡이와 劍身의 형태에서 일관된 흐름을 看取하기란 사 실상 힘들다. 즉 목제 손잡이를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여서 과거의 견해처럼 검 신의 형식이 반드시 전형적인 琵琶形을 띠는 것은 아니며, 또 반대로 銅製의 손잡이와 劍 把頭飾(손잡이장식)이 모두 부착된 경우라고 하여도 劍身의 형태가 전형적인 경우가 자주 257) 靳楓毅, 앞의 글(1982) 박진욱, 앞의 글(1987) 翟德芳, 앞의 글(1988). 靳楓毅는 30, 朴晉煜은 29 를 기준으로 각각 典型과 變型(地方類型)을 구분하였다. 258) 대표적인 경우로 淸原縣 門臉 石棺墓 出土 銅劍(21.8 )과 北票縣 何家溝 石槨墓 M7771 出 土 銅劍(40.2 )을 들 수 있다(靳楓毅, 朝陽地區發現的劍柄端加重器及其相關遺物, 考古 , 1983 淸原縣文化局, 遼寧淸原縣門臉石棺墓, 考古 , 1981). 259) 義縣 頭臺子鄕 出土의 두 銅劍(28.5, 28.2 )이 대표적인 경우이다(義縣文物管理所, 義縣 出土靑銅短劍, 遼海文物學刊 , 1993). 260) 劍身의 길이와 形態(型式)의 聯關性은 時間的 要素보다 오히려 地域別 特性과 관계가 깊을 듯하다. 즉 遼西地域에서는 대체로 劍身의 길이가 짧아질수록 變型의 頻度가 높으며, 遼東地 域에서는 반대로 劍身이 길어질수록 變型의 形態를 띠는 確率이 많은 듯하다. 261) 林沄, 中國東北系銅劍再論 ( 考古學文化論集 4, 文物出版社, 1997) pp ) 秋山進午, 中國東北地方の初期金屬文化の樣相(上 中 下) ( 考古學雜誌 , ) 林沄, 앞의 글(1980) 遲雷, 앞의 글(1982) 靳楓毅, 앞의 글( ).

67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확인된다. 특히 後者의 현상은 內蒙古 東南部와 遼西地域에서 주로 볼 수 있는데 寧城 孫 家溝 石槨墓 M7371이라던가 王營子 出土의 銅劍과 朝陽 十二臺營子 木頭溝 石槨墓 M1 이나 小波赤 石槨墓에서 출토된 銅劍 등의 경우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263) 따라서 銅劍 손잡이의 재료나 型式變化 역시 앞서 본 동검의 길이 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유효한 분류 기준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밖에 銅劍의 형식을 분류하는 데 突起의 位置 尾部의 形態 길이 너비의 비 봉부의 발달정도 등날의 길이 등 다양한 분류기준이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연구자마 다 상이한 기준을 적용해 동검을 형식 분류하다보니 논의가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 되고 있는 실정이다. 기타의 분류방법 중 突起의 位置 는 동검의 상 하부 내지는 전 후 부의 길이비와 일맥상통하는 기준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突起를 기준으로 한 前後比 은 시기 판정의 기준으로 삼기에는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다른 기준과 서로 모순되기도 한 다. 예를 들어 新金 雙房 M6 石蓋石棺墓 出土 銅劍은 後部/前部 길이의 비가 3.16 으로 突起가 있는 여타의 銅劍(대개 사이)보다 월등히 크기 때문에 아주 이른 시기의 것이라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길이/너비의 비(長寬比)는 5.14 로 前部가 짧은 銅劍으로선 상당히 큰 편으로 이것만으로 보면 비교적 늦은 시기의 型式으로 분류된다. 또 突起의 角度도 둥글고 밋밋하게 처리되어 이른바 初期 型式 이라고 분류되는 銅劍들과 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렇게 前後比(突起의 位置) 와 長寬比 그리고 突起의 모양(角度) 등의 기준이 서로 모순되게 하나의 銅劍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같은 遼 東起源論者 안에서도 長寬比 에 치중한 연구자는 初期보다 늦은 시기의 銅劍으로 분류하 고,264) 반대로 前後比 를 중시하는 연구자의 경우에는 最古의 型式으로 간주하기도265) 하는 것이다. 尾部의 形態 라 함은 劍身의 下部에서 曲刃과 莖이 만나는 부분이 둥글에 처리되었는 가 아니면 直線(또는 斜線)으로 꺾이었는가의 여부를 말하는 것이다. 林沄은 再論 에서 A型劍을 2개의 형식으로 세분할 때 尾部의 形態 로 그 기준을 삼으면서 尾部가 꺾이 는 방법이 늦게 등장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둥글게 마무리된 銅劍이 반드시 初期形態라 고 단정할 수는 없다 266)라고 덧붙이고 있다. 필자는 사실 尾部의 形態 는 銅製 손잡이 의 사용 여부와 관련된 문제로 下部의 曲刃部와 손잡이의 口緣 부분이 맞닿을 때 서로 263) 寧城縣文化館, 앞의 글(1985) 張靜 田子義 李道升, 朝陽小波赤靑銅短劍墓 ( 遼海文物學 刊 , 1993). 264) 林沄, 앞의 글(1997) p ) 박진욱, 앞의 책(1987) p ) 林沄, 앞의 글(1997), p.239.

68 國史館論叢 第88輯 부합하기 좋은 모양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木製의 손잡이를 쓰는 경우는 尾部의 形 態가 별로 상관없지만 銅製의 손잡이를 사용할 경우는 尾部의 모양이 아무래도 斜線 내 지 直線에 가깝게 꺾이는 편이 결합하기에 용이할 것이다. 그러므로 尾部의 형태는 동 검 손잡이의 종류와 관련된 것이며 단순히 시기차라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전술했듯이 內蒙古 東南部나 遼西地域은 遼東地域과 달리 銅製 손잡이가 이른 시기부터 銅劍과 함 께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銅製 손잡이의 사용이 비교적 빨랐던 內蒙古 東南部와 遼西 地域에서는 꺾인 尾部의 形態가 他地域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찍 등장한다고 이해해야 순리일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琵琶形銅劍의 型式을 분류하는 기존의 기준들은 상호 모순 없 이 부합되는 경우가 드물다. 따라서 형태상의 한 기준을 잡아 銅劍의 型式을 일률적이 고 도식적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어려우며, 銅劍의 外形에서 확고한 분류의 기준을 잡는 데에도 무리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종종 考古學의 硏究過程에서 型式分類가 지나치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또 때로는 기존의 型式分類가 遺蹟 遺物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장애물이 되는 경우도 종종 만나게 된다. 이런 점들은 類型學的인 硏究 方法이 가지는 한계이며 과감한 반론과 대안이 요구되는 부분 들이라 할 수 있다. 類型學的 硏究方法은 궁극적으로 遺蹟 遺物 사이의 相對編年과 文 化의 變化 發展相을 고찰하기 위한 도구 내지 과정이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琵琶形銅劍의 변화 발전하는 서열을 정할 때 가장 주의 깊게 고찰해야 할 부 분은 銅劍의 同伴關係와 遺蹟의 層位 重複 問題라고 생각한다. 가령 기존의 型式分類案 에 의하자면 전혀 다른 類型에 속해야 하는 銅劍들이 同一 遺蹟 내지 동일한 層位에서 발견된다면, 이것은 결국 기존의 형식분류안이 의미가 없는 도식에 불과했음을 말하는 것 이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기존의 형식분류 기준에 의하자면 다른 형식으로 분류할 수 있는 銅劍들이 종종 동일 유적에서 同伴하는 경우가 확인된다. 또 한가지 琵琶形銅劍의 分類에 있어 주의해야 할 문제는 地域性 이다. 예를 들어 遼寧 地域과 韓半島地域은 그 동반 유물의 성격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게 사실이다. 즉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 琵琶形銅劍 文化圈이라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동반하는 遺蹟 遺物에 있어서는 두 지역의 양상이 뚜렷이 구분되어짐도 부인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결 과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內蒙古, 遼西, 遼東, 吉林地域에서도 상호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琵琶形銅劍을 分類하고자 할 때는 時間의 推移와 함께 地域的 特性도 충 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69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表 12] ) 琵琶形銅劍의 型式에 대한 諸分類案 硏究者 型 式 秋山進午( 68) Ⅰ式 Ⅱ式 金元龍( 76) 祖型 a Ⅰ式 b a Ⅱ式 b 金廷鶴( 78) 前期 中期 後期 烏 恩( 78) Ⅲa Ⅲb A型 林 沄( 80) Ⅰ式 Ⅱ式 遲 雷( 82) Ⅰ式 Ⅱ式 遼西一期 遼西二期 BⅠ BⅡ BⅢ BⅣ 靳楓毅( 82) BSⅠ BSⅡ BSⅢ 尹武炳( 87) 第Ⅰ類 朴晉煜( 87) 첫째유형 둘째유형 翟德芳( 88) 第1段階 第2段階 第3段階 岡內三眞( 89) AⅠ式 沈奉謹外( 92) Ⅰ期 Ⅱ期 琵琶形銅劍 鄭家 李淸圭( 93) 雙房式 十二臺 營子式 窪子式 朴晉煜( 95) 早期 初 期 中期 Ⅰ型式 姜仁旭( 96) a b c 安志敏外( 96) Ⅰ典型式 A型 林 沄( 97) Ⅰ式 Ⅱ式 典形Ⅲ 典 形 Ⅰa 李榮文( 98) 典 形 Ⅰb 典形Ⅱ 分 類 Ⅲ式 Ⅲc 型 Ⅱ式 C型 Ⅱ式 Ⅲ式 Ⅳ式 分類 基準 劍把型式, 突起有無, 鋒部長短, 劍身의 細長化 尾部(關)의 形態(尾角), 祖型段階를 推定設定 突起의 位置 突起와 脊突의 同伴 Ⅲ式 劍把型式, 有無, 劍身의 後前比와 長寬比, Ⅲ式 鋒部長短 突起 大小, 鋒部의 길이 遼西三期 遼東四期 劍身의 長短 輕重 너비, 鋒部의 길이, 突起位置, 突起角(153 ), BⅤ BⅥ BⅦ BⅧ BⅨ BⅩ 脊刃의 길이, 尾部의 曲折과 折角 BSⅣ BSⅤ BSⅥ (125 ) 第Ⅱ類 第Ⅲ類 길이, 血溝의 位置, 突起 세째유형 초기세형동검 劍身의 와 脊起의 大小 劍身 鋒部 脊刃 의 길이, 突起 第4段階 第5段階 位置, 尾部形態 AⅡ式 突起의 有無 Ⅲ期 中 間 型 突起와 琵琶形 曲線의 有無를 기 尹家村式 준으로 琵琶形銅劍과 細形銅劍 大靑山式 上紫浦里式 사이의 中間型을 設定 後期 초기세형동검 早期 大雅里 仙岩里式 Ⅱ型式 突起의 有無 a b 長寬比, 下部 突出 與否 鋒部 劍身長의 비율 Ⅱ過渡式 Ⅲ衰退式 Ⅳ發展式 突起 尾部 鋒部 形態 D型 突起 또는 脊突의 有無, 尾部形 B型 C型 Ⅰ Ⅱ 態, 劍刃形態 變形Ⅰ 등대(脊)의 斷面과 形態, 突起角 과 基底(尾部)角의 차이, 莖部 變形Ⅱ 홈의 有無, 등날(脊刃)의 形態, 變形Ⅲ 異 形 鋒部의 길이 Ⅰ式 Ⅰ式 B 267) 本論文에서 언급하지 않은 論文은 다음과 같다. 岡內三眞, 朝鮮の靑銅器文化 ( 季刊考古學 27, 1989) 沈奉謹 朴恩貞, 韓國 靑銅劍 系 譜와 그 同伴遺物 ( 韓國上古史學報 10, 1992).

70 國史館論叢 第88輯 4. 古朝鮮과 琵琶形銅劍文化의 關係 琵琶形銅劍은 內蒙古 초원지대로부터 韓半島 남단의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대한 분포범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단연 中國의 遼寧省 일대가 중심지역이라 는 데에는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遼寧地域에서 琵琶形銅劍 文化가 유행한 시기 이 일대에 위치해 있었다고 전해지는 朝鮮 의 존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 다. 필자는 예전부터 Altai系의 無文土器人들이 소위 箕子朝鮮 의 중심적 주민이었으며 이들이 바로 中國古史에 자주 등장하는 濊貊 이라는 持論을 가져 왔다.268)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箕子朝鮮 이라는 개념 대신 濊貊朝鮮 이라는 명칭으로 대체할 것을 제기269)하 기도 했다. 중국문헌에서 朝鮮 이라는 명칭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기원전 7세기 무렵 齊나라의 宰相이었던 管仲이 지었다는 管子 로부터이다. 사실 管子 에 대해선 戰國時代 齊나라 사 람들의 저술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지만, 관자 속에 등장하는 朝鮮 濊貊 관계 기사 는 春秋時代 이래로의 전승에 의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후술하겠지만 管子 의 朝鮮 관계 기사를 검토해 볼 때 戰國時代의 내용을 전하는 戰國策 이나 山海經 과는 내용에 있어 차이점이 발견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설사 管子 가 戰國時代의 著作이라 할지 라도 그 내용은 齊 桓公代( B.C)의 전승을 바탕으로 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春秋時代 齊 桓公 때의 얘기를 전하는 管子 에는 發 朝鮮 이 豹皮의 特産地로 기록 되어 있다.270) 發 字의 解釋에 대해선 이미 先學들의 여러 다양한 견해가 있어 왔다. 管子 에 나온 發 字를 보자면 朝鮮 과 분리해서 파악하기 곤란한 文脈으로 이루어져 있 다. 詩經 韓奕篇에 의하면 貊 과 濊(追) 는 貔皮의 특산지로 언급되고 있으며, 또 說文 解字 (9篇)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貔豹屬出貉國 이라 하여 貉(貊)國 을 지목하고 있다. 그래서 發 은 濊 보다는 貊 에 더욱 근사한 것이라 판단되는데, 逸周書 卷7 王會篇에 의하면 稷愼 穢人 發人 등이 別個로 分記되고 있어 이를 더욱 확신하게 해준다.271) 한 268) 金貞培, 古朝鮮의 住民構成과 文化的 複合 ( 白山學報 12, 1972) 韓國民族文化의 起源 (高麗大 出版部, 1973) pp ) 金貞培, 準王 및 辰國과 三韓正統論 의 諸問題 ( 韓國史硏究 13, 1976) 韓國 古代의 國 家起源과 形成 (高麗大 出版部, 1986). 270) 管子 卷23 揆道 桓公問管子曰 吾聞海內玉幣有七莢 可得而聞乎 管子對曰 陰山之礝瑉一莢 也 燕之紫岶金一莢也 發朝鮮之文皮一莢也 同書 卷24 輕重甲 桓公曰 四夷不服 恐其逆政遊 於天下而傷寡人 寡人之行 爲此有道乎 管子對曰 吳越不朗 珠象而以爲幣乎 發朝鮮不朝請 文皮 兌毛服而以爲幣乎 一豹之皮容金而金也 然後八千里之發朝鮮可得而朗也 (金貞培, 韓國民族 文化의 起源, 高麗大 出版部, 1973, pp 참조).

71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 71 편 左傳 昭公 9年(534 B.C)條에 周 景王( B.C)의 사신으로 晉에 간 桓伯이 주위의 나라를 말하는 속에 肅愼 燕 亳 吾北土也 라는 부분이 있다. 여기의 亳 역시 管子 나 逸周書 에 나오는 發 과 같다는 점은 先學들에 의해 이미 지적된 바 있었다. 그렇다면 貊(貉) 과 發 과 亳 은 앞서 언급한 追 字와 濊 字의 關係처럼 同音異字의 範疇 에 포함시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예는 漢代 以前에 燕 을 匽(偃) 으로도 표기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일찍이 發 의 용례는 夏 商의 古史에서부터 이미 등장하고 있다. 즉 發 은 朝鮮 에 비 해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中國古史와 關係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史記 五帝本紀의 北山戎 發 息愼咸戴舜之功 이라는 기사에 의하자면 발 은 순임금 때부터 중원의 북쪽 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 大戴禮記 少閑篇에도 昔虞舜以天德嗣堯 海外肅愼 北發 渠搜 氐 羌來服 成湯率受天命 海之外肅愼 北發 渠搜 氐 羌來服 이라는 기사 가 나오며, 漢書 (卷6) 武帝本紀에도 이와 같은 맥락의 周之成 康 海外肅愼 北發 渠搜 氐 羌服 이라는 기사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위 기사들에 의하자면 發 은 舜의 때로부터 西周에 이르는 장시간에 걸쳐 山戎과 肅愼 사이에 介在한 中原 北方의 一 種族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앞서 거론한 管子 의 發 朝鮮 이란 표현은 바로 西周 이후인 春秋時代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단계에 이르러 새롭게 朝鮮 이라는 명칭이 發 과 倂記된다. 管子 에 의하면 發朝鮮 은 齊나라로부터 8千里 떨어져 있다고 한다. 현재의 그 지역을 정확히 지 목할 수는 없지만 西周 以前 發 의 위치로 미루어 보건대 發朝鮮 역시 山戎과 肅愼의 사 이쯤에 해당할 것이다. 古史에 나타나는 용례를 살펴보면 發 은 종족 주민의 개념과 관 련이 깊은 듯하며, 朝鮮 은 지역 내지 집단에 대한 호칭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管子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나는 發朝鮮 은 發族(貊族)의 朝鮮 이라는 의미 로 해석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이것은 貊族이 당시 朝鮮 의 중심적 주민이었음을 시사하기 도 한다. 그리고 이 貊朝鮮 이란 表現은 山海經 (卷11) 海內西經과 說文解字 (9篇)에 등장하는 貊國 과 상응한다. 朝鮮 은 管子 이후의 戰國策 山海經 과 같은 戰國時代의 기록에서도 계속 확인 되고 있다. 戰國策 (卷9 燕文公)에는 蘇秦將爲從 北說燕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怖 樓煩 이라 하여 燕文公時( B.C) 燕의 동쪽에 朝鮮 遼東 이 있음을 알려준다. 여 271) 近年에 發 의 活動時期가 夏 商代에 해당하고 居住地域은 대략 瀋陽 一帶로 추정되므로 遼 東 北部의 高臺山文化는 바로 發人 의 文化遺産이다 라는 考案(田耘, 順山屯類型及其相關問 題的討論 ( 遼海文物學刊 , 1988)이 提起된 바 있다. 그러나 管子 와 逸周書 를 통해 확인되듯이 發 은 더욱 後代까지 存續하고 있으며 오히려 朝鮮 과 密接한 것으로 나타 난다. 그러므로 時期的으로나 文化性格上으로 高臺山文化 와는 거리가 있을 듯하다.

72 國史館論叢 第88輯 기의 朝鮮 遼東 은 난해한 부분인데 만약 燕과의 近遠순서에 의해 표기된 것이라 이해하 면 朝鮮은 燕과 遼東의 사이인 遼西에 위치하게 된다. 이런 해석 방법은 灤河 를 先秦時 代의 遼河 로 이해하는 논자들의 연구272)에서 주로 확인된다. 또한 朝鮮 과 燕 의 위치 관계를 전하는 기록으로 山海經 을 참고할 수 있다. 山海 經 (卷12 海內北經)에서는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이라고 朝鮮 의 위치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列陽 은 列水의 북쪽 이라는 의미일 것이니 列水 가 정해지면 자연히 朝鮮 도 드러나게 된다. 그 동안 列水 의 위치에 대해선 大同江說273) 遼河 說274) 灤河說275) 등이 문헌 연구자들에 의해 일찍이 제기되었다.276) 山海經 의 列水 는 史記集解 에서 언급된 바 있는 洌水 와 동일한 지명인 것으로 사료되는데 그에 의하 면 洌水는 朝鮮 의 中心部를 흐르는 강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山海經 의 列水를 고찰해 보면 列陽의 남쪽에 위치한 列水 는 燕과 朝鮮의 경계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朝鮮의 中心이었다가 西邊이 되었다는 것은 영역(범위) 축소와 관련한 결과라고 볼 수 있 다. 즉 朝鮮의 서쪽 영역 축소 당시 그 境界線 부근에 列水가 위치해 있었다고 판단된다. 문헌에 기록된 朝鮮의 서쪽 영역 축소는 戰國時代 燕將 秦開의 東進에서 비롯된다. 燕 將 秦開가 東胡를 千餘里 파주시킨 후 長城을 쌓고 上谷 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을 설치하는데,277) 이 때 朝鮮도 함께 西方 2千餘里를 침공당했던 것으로 짐작된다.278) 그 리고 史記 에 의하면 당시 축조한 燕長城은 造陽 에서 襄平 에 이르렀다고 한다. 襄平 은 遼東郡의 治城이었던 지금의 遼陽 이니 文獻에 의하면 당시 燕長城의 東端은 遼河 부 근에 해당하는 것이다. 戰國時代 燕長城의 東端은 조선의 위치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어 중요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279) 근년에 중국 고고학계의 성과는 燕長城에 대한 새론운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 고 고학계의 조사에 의하자면 東北地域의 長城은 크게 세 개의 줄기를 이루며 河北省 內蒙 古 昭烏達盟 遼西地域에 걸쳐 東西로 길게 뻗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河北省 地域의 272) 리지린, 고조선연구 (사회과학출판사, 1964) 尹乃鉉, 韓國古代史新論 (一志社, 1986). 273) 今西龍, 洌水考 ( 朝鮮支那文化の硏究, 京城帝大法文學會 第二論集) 李丙燾, 衛氏朝鮮興 亡考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48). 274) 리지린, 앞의 책(1964) 徐榮洙, 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 韓國史市民講座 2, 一潮閣, 1988). 275) 尹乃鉉, 앞의 책(1986). 276) 일찍이 韓百謙의 東國地理誌, 安鼎福의 東史綱目 (附卷 地理考), 그리고 丁若鏞의 我邦 疆域考 (卷8 浿水辨) 등에서는 列水(洌水) 를 지금의 漢江에 비정한 바 있다. 277) 史記 卷110, 列傳50, 匈奴. 278) 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30 韓 所引 魏略.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 里 至滿番汗爲界. 279) 盧泰敦, 古朝鮮 중심지의 변천에 대한 연구 ( 韓國史論 23, 서울대, 1990).

73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 73 長城調査280)에 의하면 가장 북쪽에 있는 제1도 長城(圍場縣 三義永 老窩鋪)은 秦代의 長 城이고, 그 남쪽에 있는 제2도 長城(圍場縣 夾皮川鄕)은 戰國時代 燕의 長城이고, 제2도 長城의 남쪽과 明長城(지금의 萬里長城)의 북쪽 사이에 있는 제3도 長城(志云 寧城)은 漢 代의 것이라 한다. 또 內蒙古 赤峰 등지에서도 세 갈래의 漢代以前의 長城들이 조사되었 는데 赤北長城(赤峰 북쪽 英金河 北岸)은 秦의 통일 이후의 것이고, 赤南長城(赤峰 남쪽 喀喇沁旗 敖漢旗 北票)은 戰國時代 燕의 것이며, 老虎山長城(敖漢旗 老虎山)은 秦代以後의 것이라고 한다.281) 또한 요서지역(朝陽 阜新)에서도 동일하게 燕 秦 漢 3道의 長城이 동서방향으로 분포함이 밝혀졌다.282) [圖 23] 中國 東北地域 燕 秦 漢 長城 布陣圖 위의 지도에서 확인되듯이 燕長城은 동쪽으로 醫巫閭山 西麓의 阜新에 이르고 있다. 즉 燕長城의 東端은 醫巫閭山 일대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장의 고고학 분야에서 도 검토했듯이 醫巫閭山은 遼西와 遼東을 구분하는 分水嶺이 되고 있다. 史記 에서 거론 한 襄平 (지금의 遼陽) 일대에서 長城의 遺址가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당시 燕長城은 遼河를 넘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면 列水 는 遼西와 遼東의 경계인 醫巫閭山 遼河 부 280) 鄭紹宗, 河北省 戰國 秦 漢時期古長城和城障遺址 ( 中國長城遺蹟調査報告集, 文物出版 社, 1981) pp 布尼阿林, 河北省圍場縣燕秦長城調査報告 ( 中國長城遺蹟調査報告 集, 文物出版社, 1981) pp ) 項春松, 昭烏達盟燕秦長城遺址調査報告 ( 中國長城遺蹟調査報告集, 文物出版社, 1981) pp ) 李慶發 張克擧, 遼寧西部漢代長城調査報告 ( 北方文物 , 1987).

74 國史館論叢 第88輯 근에서 찾아보는 게 순리일 듯하다. 최근 북한의 평북 박천군의 淸川江 유역에서 발견된 大寧江 長城 283)을 燕長城의 東端이라 이해하는 中國學者284)가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견해로 大寧江 長城은 북한의 조사에 의하자면 11세기 高麗의 長城임이 분명하다.285) 戰國策 과 山海經 에 의하자면 朝鮮 은 모두 燕의 동쪽에 위치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반면 이전의 詩經 과 左傳 에서는 濊 貊 亳 등을 모두 北土 내지 北國 으로 묘사하고 있다. 朝鮮 의 용례가 처음 보이는 管子 에서도 齊桓公( B.C)이 말하 길 北쪽으로는 孤竹 山戎 穢貊에 이르러 秦(泰)夏를 拘取하였다 286)라고 하여 이 무렵 穢貊 을 북방으로 표현하고 있다. 戰國時代의 사정을 전하는 전국책 과 산해경 단계에 이르면 遼東 또는 列陽(燕)東 이라고 조선의 위치를 보다 구체적으로 지적하게 된다. 中 國古史에 나타나는 이러한 變化를 일부 연구자들은 濊貊族 내지 箕子族 (箕子朝鮮)의 移 動에 의한 결과라고 보아 왔으나,287) 필자는 이런 현상을 中國의 周邊 種族 集團에 대 한 認識의 擴大過程에서 기인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즉 詩經 의 追(濊) 貊은 韓의 입장에서, 管子 는 齊의 시각에서, 그리고 左傳 은 周의 觀念 속에서 기술되다보니 자연히 濊貊과 燕은 北土 내지 北國 으로 묘사된 것이 다. 다시 말해 春秋時代까지만 해도 燕 은 濊貊 과 더불어 黃河 流域의 中國人들에겐 北 方勢力 정도로만 소박하게 認識되다가, 그 이후 燕 이 中原勢力과의 직접적인 通交를 확 대하고 나아가 中國史에 編入되면서 燕 과 근접한 朝鮮 에 대해서도 보다 구체적이고 정 확한 정보를 얻게 되었을 것이다. 그에 따라 戰國時代에 이르면 遼東 이니 列陽 등의 구 체적인 地名을 擧論하면서 燕 과 명확히 구분하여 그 위치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와 같은 배경에서 朝鮮 의 호칭이 기원전 7세기 무렵의 管子 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管子 에서 朝鮮 이 처음 보인다고 하여 古朝鮮史 의 상한 을 기원전 7세기로 한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중국인들의 북방 내지 동방에 대한 인식의 확대 과정에서 朝鮮 의 등장도 이해해야 한다. 오히려 기원전 7세기는 朝鮮 이 中 國과의 接觸 내지 交流를 開始한 시점이라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283) 사회과학원고고학연구소, 대령강장성 조사보고 ( 조선고고연구 , 1987). 284) 馮永謙, 東北古代長城考辨 ( 東北亞歷史與文化, 慶祝孫進己先生六十誕辰文集, 遼沈書社, 1991) p ) 한인호, 대령강장성의 축조경위에 대하여 ( 조선고고연구 , 1992) pp 한 편 최근 1994년 9월 北京에서 개최된 長城國際學術討論會 에서는 燕長城의 東端은 遼陽이 분명하며, 다만 燕國은 朝鮮半島의 北部와 中部에 長城이 아닌 일련의 障 塞를 쌓았다 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陳可畏, 論戰國時期秦 趙 燕北部長城 ( 長城國際學術討論會論文 集, 吉林人民出版社, 1995, p.102). 286) 管子 卷8 小匡第二十. 287) 金庠基, 韓 濊 貊 移動考 ( 史海 1, 1948) 東方史論叢 (서울대출판부, 1974) 千寬 宇, 箕子攷 ( 東方學志 15, 1974) 古朝鮮 三韓史硏究 (一潮閣, 1989).

75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기원전 7세기 무렵에 中原人들이 朝鮮 을 비로소 認識 接觸하게 된 契機는 아무래도 齊 桓公의 北伐과 연관된 듯하다. 齊 桓公의 북벌에 대해선 이미 管子 에서도 언급된 바 있 으나 그 자세한 내용은 史記 의 世家에 전하고 있다.. (桓公)二十三年 山戎伐燕 燕告急於齊 齊桓公救燕 遂伐山戎 至于孤竹而還 (下略)288). (莊公)二十七年 山戎來侵我 齊桓公救燕 遂北伐山戎而還 燕君送齊桓公出境 桓公因割燕所 至地予燕 使燕共貢天子 如成周時職 使燕復修召公之法289) A B 燕 莊公 27年(665 B.C 齊桓公23年)에 山戎이 侵入하자 齊 桓公은 燕을 구하고 마침내 는 북쪽의 山戎族을 아예 征伐해 버리고 돌아온다. 이 사건을 계기로 燕은 中原의 諸侯들 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었으며, 한편으로 齊는 燕과 인접해 있던 朝鮮 내지 濊貊 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었을 것이다. 기원전 665년의 北伐을 계기로 얻은 北方에 대한 情報는 齊의 宰相이었던 管仲이 管子 를 편찬하는 데에 참고 자료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제나라의 기록인 관자 에 이르러서 비로소 조선 과 예맥 이 등장하 게 된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이 때의 정보도 아직 직접적인 접촉 교류에 의한 것은 아니 였으며 燕을 통해 입수하거나 傳聞한 간접적인 지식이라 짐작된다. 위의 기사에 의하자면 기원전 665년의 북벌에서 제 환공은 산융을 정벌하고 고죽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또 同書 同世家에서는 於是 桓公稱曰 寡人南伐至召陵望熊山 北伐山 戎 離枝 孤竹 이라 하여 齊軍이 孤竹 까지 진군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史記 의 集 解 와 索隱 에서는 孤竹 을 고죽성이 남아 있었다던 당시 遼西郡 令支縣에 비정하고 있 다. 영지현은 灤河 下流 서안에 위치했던 故縣으로 지금의 河北省 遷安縣과 盧龍縣 일대 에 해당한다. 한편 漢書 地理志와 水經注 에 의할 때에도 孤竹 의 都城은 灤河 下流의 河北省 盧龍縣 남쪽에 해당한다290)고 한다. 그러므로 기원전 665년에 齊 桓公은 燕(薊 北京)에 침입하였던 山戎을 擊退한 후 灤河 西岸까지 北進하였으며,291) 이 戰役을 계기로 孤竹의 동쪽에 살고 있었던 濊貊 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 에서 管子 小匡篇에서는 齊 桓公의 北伐이 孤竹 山戎 濊貊 에 이르렀다라고 과장하여 288) 史記 卷32 齊太公世家第二. 289) 史記 卷34 燕召公世家第四. 290) 唐蘭, 從河南鄭州出土的商代前期靑銅器談起 ( 文物 , 1973). 291) 孤竹의 領域과 관련하여 1973년 喀左縣 平房子 北洞村 2號 窖藏에서 出土된 銅罍를 주목할 만하다. 銅罍 表面에는 父丁孤竹亞微 라는 6字의 銘文이 鑄字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西周 初期(紀元前11C)에는 孤竹國 의 影響力이 大凌河 上流의 喀左縣 일대까지 이르렀음을 짐작 할 수 있다(晏琬, 北京 遼寧出土銅器與周初的燕, 考古 , 1975 참조). 그러나 齊 春秋時代에는 大凌河 上流 일대(凌源 喀左)에서 靑銅容器類가 더 이상 發見되지 않으므로 桓公의 進軍이 大凌河 流域까지 이르렀다고 이해하는 것은 무리이다.

76 國史館論叢 第88輯 기록하고 있지만, 실상 桓公의 北進은 灤河 流域 에서 멈추었으며 그 동쪽의 濊貊族 과는 직접 접촉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자면 中國의 先秦文獻을 통해서 朝鮮 의 起源과 出現을 究明하기 란 곤란한 일이다. 朝鮮 의 기원에 대해선 三國遺事 이후의 우리나라 고사류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고전에 기록된 朝鮮 의 기원은 대부분 檀君(壇君)神話의 형태를 빌어서 전해지고 있는데, 고대 사회에서 建國傳承이 神話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흔히 있 는 일로 그만큼 기원이 오래되고 원형에 가까움을 방증해 준다고 이해해야 마땅할 것이 다. 과거 식민지시대 일본인 관학자들에 의해 단군신화가 부정되고 조선 의 실체마저 부인 되었던 왜곡된 연구 시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여기에는 1920년대 이후 한국고대 사를 주체적으로 복원한 신채호 정인보 최남선 등의 학문적 노력이 크게 공헌하였다. 朝鮮 의 기원을 전하는 우리나라의 문헌으로서 현존 최고는 1280년대에 찬술292)된 것 으로 짐작되는 一然의 三國遺事 와 그 비슷한 시기인 1287년에 찬진된 李承休의 帝王 韻紀 이다. 우선 三國遺事 는 古朝鮮 條를 卷首에 두어 고조선이 우리 민족사의 시작임 을 보이고 있다. 고조선 조에선 魏書 와 古記 를 인용하여 단군왕검의 출현과 조선 의 건립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후미에 周虎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 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라 하여 箕子의 被封과 檀君(壇君)의 最後에 대해서 간단히 言及하고, 마지막에는 또 唐裵矩傳 을 引用하여 箕子와 漢四郡에 대한 기록을 첨가하고 있다. 중국측 고사에서 시종 朝鮮 이라는 표현이 일관되게 유지됨에 비해, 우리는 三國遺事 에서 처음으로 古朝鮮 이라고 명명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우선 朝鮮 과 古 朝鮮 의 개념과 범위에 대해 정확히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까지 남한학계에서는 古朝鮮 안에 檀君 箕子 衛滿朝鮮 의 이른바 三朝鮮 을 모두 포괄하는 견해293)가 지배 적이다. 그러나 古朝鮮 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 三國遺事 古朝鮮朝에서는 檀君과 箕子에 관한 이야기는 있으나 위만 에 대한 기록은 일언반구도 없다. 따라서 古朝鮮의 범 위에 위만조선 을 부가하여 포함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한편 古朝鮮을 檀君朝鮮 만으 로 한정하여 보고자 하는 견해294)도 있었다. 그는 箕子朝鮮 을 일절 인정하지 않고 그 292) 金相鉉, 三國遺事의 書誌學的 考察 ( 三國遺事의 綜合的 檢討,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7) pp ) 李丙燾, 古朝鮮問題의 硏究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金哲埈, 古朝鮮社會의 政 治勢力의 成長 ( 한국사 2, 國史編纂委員會, 1977) 李鍾旭, 古朝鮮史硏究, 一潮閣. 1996) 此等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데 現在 南韓學界 대부분의 硏究者들이 이런 傾向을 가 지고 있다. 294) 李基白, 古朝鮮의 諸問題 ( 韓國古代史論, 探求堂, 1975) 古朝鮮의 國家 형성 ( 韓國史 市民講座 2, 一潮閣, 1988).

77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기간을 단군과 관련된 고조선의 연속으로 간주한다. 또한 일연 자신이 三國遺事 에서 고조선 이란 題目에 註記하여 王儉朝鮮 이라고 함으로써 고조선이 곧 檀君朝鮮 임을 분명 히 하였다 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古朝鮮 조의 내용을 살펴보면 분명 기 자의 조선 분봉 을 거론함으로써 壇君 다음 시대의 續開를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古朝鮮 바로 다음의 편목으로 魏滿朝鮮 을 붙이고 있어 一然이 古朝鮮 衛滿朝鮮 의 구도로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만약 檀君朝鮮만을 古朝鮮이라고 이해하면 三國遺 事 에선 1000년 정도의 공백을 건너 뛰어 역사를 서술한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 동안 필자는 古朝鮮을 檀君朝鮮 과 濊貊朝鮮 (종래의 소위 箕子朝鮮 )으로 나누어 보았 던 것이다.295) 한편 帝王韻紀 에서는 소위 箕子朝鮮 을 後朝鮮 으로 표현하고 있다. 後朝鮮 에 앞서 檀君 을 개국의 시조로 묘사하면서 卽位年 과 出自 와 享國年間 과 最後 등에 대하여 설 명하고 있다. 이것은 이후 朝鮮時代에 대두한 三朝鮮說 의 바탕이 되는 것으로 古朝鮮을 檀君과 箕子로 구분해 보았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한편 後朝鮮 에 대응하는 前朝鮮 이란 표현은 朝鮮 初期에 편찬된 高麗史 (1451년)와 世宗實錄地理志 (1454년)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그래서 高麗史 단계가 되면 前朝鮮 後朝鮮 衛滿朝鮮 의 이른바 三朝鮮說 이 정립되고,296)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이다. 古朝鮮을 前朝鮮(檀君朝鮮)과 後朝鮮(箕子朝鮮)으로 구분해 보는 三朝鮮說 은 古朝鮮의 靑銅器文化를 단계적으로 이해하고 시기 구분하는 데에 있어 주목할 만한 문헌적 전거이다. 高麗史 의 三朝鮮 관계 기사를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平壤府本三朝鮮舊都 唐堯戊辰歲 神人降于檀木之下 國人立爲君 都平壤 號檀君 是爲前朝鮮 周武王克商 封箕子于朝鮮 是爲後朝鮮 逮四十一代孫準時 有燕人衛滿亡命 聚黨千餘人 來奪準 地 都于王險城(險一作儉卽平壤) 是爲衛滿朝鮮 ( 高麗史 卷58 地理3 西京留守官) 그러나 고려사 에 의하면 朝鮮 은 檀君 箕子 衛滿朝鮮을 거치는 동안 줄곧 평양 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三朝鮮의 평양중심설 은 이후 世宗實錄地理志 東國通 鑑 東國與地勝覽 등의 조선전기 관찬사서와 東國地理志 東史纂要 東史綱 目 我邦疆域考 海東繹史 등의 조선 후기 사찬사서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지속되 고 있다.297) 특히 17세기 이후에는 南人學者들을 중심으로 三朝鮮의 평양중심설 이 견지 295) 金貞培, 古朝鮮의 再認識 ( 韓國史論 14, 國史編纂委員會, 1984) 앞의 책(1986) pp.7 9 고조선의 국가형성 ( 한국사 4, 국사편찬위원회, 1997) p ) 사실 三朝鮮說 의 起源은 李承休의 帝王韻紀 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帝王 韻紀 에서는 前朝鮮 이라는 表現은 보이지 않으나 檀君 後朝鮮(箕子朝鮮) 衛滿朝鮮의 順序 로 언급하고 있어 이후 朝鮮前期에 三朝鮮說 이 成立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78 國史館論叢 第88輯 되고 있어 주목된다. 최근 북한학계에서도 기존의 遼東中心說을 번복하고 1993년 檀君陵 發掘298)을 계기로 고조선국가가 존속한 3000年 동안 평양이 줄곧 그 수도였다 299)라고 하여 高麗史 이후의 평양중심설을 계승하는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古朝鮮의 中心地가 과연 줄곧 平壤에 있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 면 소위 箕子朝鮮 에 해당하는 시기(기원전 12세기 기원전 3세기)의 古朝鮮 關係 地名이 中國 古史에서는 遼寧地域과 밀접히 관련되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 본 詩 經 管子 左傳 戰國策 山海經 등이 모두 그러한 예들이다. 특히 戰國時代를 배경으로 하는 사서들에서는 구체적으로 遼東과 朝鮮 이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中國 古史와 朝鮮時代의 史書 사이에는 箕子朝鮮 의 위치비정에 대해 차이 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전통사서 가운데에서도 遼東地域이 古朝鮮의 中心地였다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遼東中心說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 대두하게 되는데 洪汝河의 東國通鑑提 綱 (1672년)을 비롯하여 李瀷의 星湖僿說 (1723년) 申景濬의 疆界考 (1756년) 李種徽 ( )의 東史 李肯翊의 燃藜室記述 (1797년) 등으로 계승된다. 조선시대 遼 東中心論 자들의 주된 과제는 箕子朝鮮(被封地)의 위치와 漢四郡의 위치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홍여하는 고조선의 서계에 해당하는 浿水 를 遼河에 비정하고 燕將 秦開의 침략 에 의해 경계가 된 滿蕃汗의 위치도 遼陽省 (遼東)에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나아가 요하 동쪽 요양의 구호가 平壤이며 위만이 도읍했던 險瀆도 遼東에 있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한편 이익은 檀國 (檀君朝鮮)의 중심지를 遼瀋(幽州) 지방으로 이해하여 기존의 통념을 비 판하고, 또 만번한의 위치를 鴨綠水 로 이해하여 箕國 (箕子朝鮮)의 원래 강역 역시 遼西의 山海關까지 포함됨을 주장했다. 이종휘도 箕子가 처음부터 평양에 온 것이 아니라 처음에 는 遼河左岸에 거주하였으며 그 강역은 서쪽으로 遼河 를 넘어섰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18세기에 집중되어 있는 고조선의 遼東中心說 에 대해 安鼎福( ) 丁若鏞 ( ) 韓致奫( ) 등 南人系 역사가들은 遼史 계통 문헌들의 지리고 증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滿洲를 상고사의 중심무대로 설정하는 데에 불만을 표시하 고 있다. 그들은 遼東中心論者들이 주로 이용한 遼史 계통의 자료들은 만주지방에서 297) 韓永愚, 朝鮮前期史學史硏究, 서울大出版部, 1981 朝鮮時代 史書를 통해 본 上古史의 이 해 ( 季刊京鄕 여름호, 1987) 朝鮮後期史學史硏究, 一志社, 世祖 3年(1457)에 撰述된 權擥의 應制詩註 (命題八首 道經西京 註)에서도 前朝鮮 後朝鮮 衛滿朝鮮의 三朝鮮 說을 보이고 있다. 298) 사회과학원, 단군릉발굴학술보고집 (과학 백과사전출판사, 1993). 299) 현명호, 고조선의 성립과 수도문제 (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연구론문집, 사회과학출판사, 1994) p.60 박진욱, 평양은 고조선의 수도 ( 력사과학 , 과학 백과사전종합출판 사, 1994) p.58.

79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나라를 세웠던 북방족들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서 그 편찬 시대가 漢唐宋 時代의 사서보 다 뒤늦어 자료의 신빙성이 낮을 뿐만 아니라 滿洲地方을 중심지에다 놓고 한반도의 역 사를 주변적인 위치로 격하시켜 만주사의 부용적인 존재라는 견강부회적인 고증을 한 것 이 많다 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箕子朝鮮 (濊貊朝鮮)의 중심이 요녕지역에 있었음은 遼史 계통의 사서를 거론 하지 않고도 詩經 管子 戰國策 山海經 등의 先秦文獻과 앞장에서 상세히 고 찰한 고고학적인 연구성과를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소위 箕子朝鮮 에 해당하 는 시기의 중국 동북지방의 문화는 琵琶形銅劍文化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평양 중심의 대동강 유역에선 아직 전형적인 琵琶形銅劍文化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琵琶形銅劍文化의 분포 양상을 살펴볼 때 그 중심지는 遼東과 遼西지역이 되고 있으며, 출토 양상에 있어서 도 遼寧地域의 琵琶形銅劍 遺蹟이 서북한 지역보다 월등히 양 질적인 측면에서 모두 앞 서 있다. 따라서 소위 箕子朝鮮 時代의 중심지를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에서 구하는 것은 空論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기존 箕子朝鮮 說의 허상이 이미 밝혀진 바 있고, 遼寧地域에 거주하고 있었던 주민이 濊貊族 임이 주지된 이상 箕子朝鮮 이란 명 칭보다는 濊貊朝鮮 이라 해야 실상에 부합할 것이다. 설사 箕子 의 이주를 인정한다 할지 라도 그것은 古朝鮮의 靑銅器文化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으며 遼寧地域의 琵琶形銅劍文化 는 濊貊族의 文化遺産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기원전 11 10세기 무렵부터 遼寧地域을 중 심으로 거주하며 특징적 유물인 琵琶形銅劍을 제작 사용했던 濊貊族 이 중심이 되어 세 운 古朝鮮은 濊貊朝鮮 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온당하다. 餘 言 우리는 위에서 琵琶形銅劍이 內蒙古로부터 韓半島 남쪽의 濟州道까지 그 잔흔이 있음 을 살펴 보았다. 이처럼 광대한 지역에서 출토되는 琵琶形銅劍은 지역에 따라 반출하는 유물에 일정한 차이가 보여지고 있는 바, 東北亞 靑銅器文化의 대체적인 흐름을 간취할 수 있는 전거를 마련해 주고 있다. 東北亞의 광활한 지역에 분포해 있는 琵琶形銅劍이지 만 그 中心地는 단연 中國 東北의 遼寧地方이라고 할 수 있다. 遼寧省 등지는 琵琶形銅劍 文化의 典型을 보여주는 지역이므로 주변의 夏家店上層文化圈과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마 땅할 것이다. 內蒙古 赤峰 등지의 夏家店上層文化는 草原 遊牧文化의 영향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이 곳의 풍부한 靑銅遺物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靑銅劍은 이

80 國史館論叢 第88輯 른바 銎柄式銅劍 이다. 銎柄式銅劍 은 夏家店上層文化의 분포범위인 북쪽의 西拉木倫河로 부터 남쪽의 努魯兒虎山脈에 이르는 전지역에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夏家店上層文化圈의 南邊에 해당하는 寧城 등지의 老哈河 上流에서 발견되는 銎柄式銅劍 들은 종종 曲刃을 띄 고 있어 琵琶形銅劍과 유사한 면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老哈河 上流에서 銎柄式銅劍 과 琵琶形銅劍이 동반 출토되는 현상 역시 이 지역의 점이지대로서의 특징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두 銅劍을 면밀히 비교 관찰해 보면 서로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기 어 렵지 않다. 老哈河 流域 대부분의 銎柄式銅劍 은 물결 모양으로 비교적 완만한 곡선을 띄 고 있으며 琵琶形銅劍의 突起나 脊突과 같은 尖部를 가지고 있지 않다. 또 銎柄式銅劍 의 鑄造方式은 琵琶形銅劍과 본질적으로 달라 손잡이와 검신을 일체로 連鑄하고 있다. 이러 한 손잡이 合鑄方式은 역시 草原 靑銅器文化의 영향이라고 믿어진다. 曲刃을 가진 銎柄 式銅劍 은 遼寧地域의 琵琶形銅劍文化圈과 인접한 老哈河 上流와 努魯兒虎山脈 周邊에서 만 나타난다는 사실과 그러한 遺蹟의 年代가 遼寧地域보다 비교적 늦다는 점은 이 지역 의 銎柄式銅劍 에서 종종 보이는 曲刃 모티브의 淵源을 충분히 짐작하게 해준다. 따라서 琵琶形銅劍을 曲刃이라는 이유로 夏家店上層文化의 傳統的 銅劍으로 파악하는 연구 시각 은 본말이 전도된 오해이며 再考의 여지가 다분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寧城 南山根 M102에서 출토된 刻文骨板은 활을 쏘는 사람과 개 사슴 마차가 등장하고 있어 蒙古와 南部 시베리아에서 자주 보이는 岩刻畵의 內容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이 사실은 赤峰 등지의 靑銅器文化(夏家店上層文化)가 어떠한 성격을 지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遼西의 大 小凌河 地域에선 朝陽 등지가 琵琶形銅劍文化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전형적인 琵琶形銅劍의 집중분포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赤峰 등지의 銎柄式銅 劍 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建平의 炮手營子 M881에서는 多鈕銅鏡과 管玉 이 琵琶形銅劍과 함께 출토되고 있어 이 지역 靑銅器文化의 特徵을 분명하게 해준다. 近 年에 喀左 和尙溝 M 에서 출토된 琵琶形銅劍들이 內蒙古 南山根 등지의 동검 보다도 古式에 속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遼西地域에서는 琵琶形銅劍이 石棺 (槨)墓와 土壙墓 遺蹟에서 同時期에 발견되는 바 이 지역의 特徵이라 할만한 현상이다. 특히 凌源 三官甸子와 阜新 胡頭溝 등지에선 石棺墓와 土壙墓가 同一 墓地에 섞여 조영 되고 있는데, 이러한 상이한 墓制의 混在樣相은 遼西地域이 琵琶形銅劍의 登場 以前( 魏營 子類型文化 )부터 土壙墓의 傳統이 강한 지역이었다는 사실과 직접 연관된다. 遼東의 琵琶形銅劍은 朝陽 등지와 마찬가지로 검 손잡이 손잡이장식(劍把頭飾) 등이 조립되는 형식의 銅劍이다. 이 지역 일대에서 주로 보이는 특징적인 토기인 橫耳附鼓頸 壺 (소위 弦紋壺 내지 美松里型土器 )는 石棺墓에서 전형적인 琵琶形銅劍과 함께 반출되는 경우가 많아 주목된다. 특히 弦紋이 있는 橫耳附鼓頸壺 는 遼東半島의 支石墓(石棚) 積

81 東北亞의 琶形銅劍文化에 대한 綜合的 硏究 石墓 文化傳統과 맞닿아 있는데 현재까지의 자료에 의하자면 서쪽으로 醫巫閭山脈을 넘 지 못하고 있다. 支石墓가 遼河 醫巫閭山線을 넘지 못하고 石棺墓가 長城 등지까지 퍼져 있는 분포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이러한 현상은 遼東 琵琶形銅劍文化의 지역적 특성임이 분명하다. 이 지역은 靑銅器文化의 연대가 비교적 이르고 또 土器文化의 내용이 풍부하므 로 琵琶形銅劍을 土器와 연관시켜 논의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하다. 遼東地域은 遊牧보다 는 農耕社會의 모습을 반영하는 遺物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의 雙坨子文 化에서 보이는 다량의 半月形石刀와 石斧 등은 당시의 生業形態를 충분히 짐작하게 해준 다. 遼東地域에서 琵琶形銅劍이 출토되는 유적을 살펴보면 石棺墓와 支石墓가 同一墓地에 혼재되어 남아 있는 경우를 종종 목도하게 된다. 이것은 遼西地域에서 나타나는 石棺墓 土壙墓의 混在現象과 대비해 볼만한 지역적 특성으로 遼東地域에선 支石墓의 傳統이 강 하게 지속되고 있었음을 방증해 준다. 古式 琵琶形銅劍의 年代를 기원전 10세기 전후로 본다고 하면 이것의 起源地를 遼西와 遼東 가운데 택일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同時代的인 出現樣相을 보이고 있음으로 지역적인 特性과 상호간의 交流가 오히려 의미있는 탐구 대상이 될 것이다. 다만 遼西와 遼東을 아울러 살펴보면 琵琶形銅劍이 出現하는 시점은 분명히 石棺墓의 등장과 깊은 관 계가 있다. 遼西의 大 小凌河 流域에서 琵琶形銅劍이 등장하는 시점은 전통적인 土壙墓 文化에 새로운 石棺墓의 墓制가 流入되는 層位 遺蹟에서 부터이며, 遼東地域에서도 전통 적인 支石墓와 積石墓 단계에서는 나타나지 않다가 石棺墓가 대두하면서 부터 琵琶形銅 劍의 發現이 비롯된다. 이러한 遼西와 遼東의 공통점은 바로 琵琶形銅劍의 淵源이 石棺墓 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 石棺墓의 起源에 대해서는 최근 중국 고고학계에 의 해 재조명되고 있는 紅山文化의 石棺墓와 연관하여 충분한 재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琵琶形銅劍을 古朝鮮의 文化로 일반화시켜 단순하게 인식하는 데에는 문 제가 있다. 高麗史 에서부터 소위 三朝鮮說 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거니와 琵琶形銅 劍文化가 古朝鮮의 어느 시기에 해당하는가를 대비시키면 큰 의문은 풀리기 마련이다. 琵 琶形銅劍이 內蒙古로부터 韓半島 南端까지 넓게 퍼져있다는 사실은 이것을 막연히 古朝 鮮의 遺物이라고 단정하는 시각에 誤謬의 가능성이 많음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또한 일정 한 지역 범위내에 정치체를 형성하고 있었을진대 상호간의 地域的 特性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琵琶形銅劍의 分布地域을 古朝鮮과 연결시키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支石墓와 石棺 墓의 傳統이 위주가 된 遼東地域의 墓制에서 전형적인 琵琶形銅劍과 橫耳附鼓頸壺 등이 함께 나타나므로 이 지역에서 古朝鮮 가운데 濊貊朝鮮(소위 箕子朝鮮 )의 位置를 찾고 中 心地를 거론함이 온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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