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동원 양
- 6 years ago
- Views:
Transcription
1 2013 년도상반기서울역사강좌 선사에서통일신라까지 서울이야기
2
3 2013 년상반기서울역사강좌일정 주일시강의주제강사및소속 1 3/8 개관 : 선사에서통일신라까지신형식시사편찬위원회 2 3/15 선사시대살았던서울지역사람들박희현서울시립대학교 3 3/22 한국사의기원과국가형성, 그리고서울송호정한국교원대학교 4 3/29 백제이전마한사회를들여다보다. 박순발충남대학교 5 4/5 비류와온조는형제인가? 경쟁가인가? 양기석충북대학교 6 4/12 백제의품격을높인근초고왕강종원충남역사문화원 7 4/19 고구려는왜서울을공략했는가? 임기환서울교육대학교 8 4/26 한강을둘러싼성왕 양원왕 진흥왕의대결노용필한경대학교 9 5/3 한주 ( 漢州 ) 로보는통일신라한준수국민대학교 10 5/10 고대서울의항구도시적성격윤명철동국대학교 11 5/24 불교, 삼국의가치관을바꾸다. 조경철연세대학교 12 5/31 백제가수도를세번옮긴까닭은? 문동석서울여자대학교 13 6/7 유적과유물로 ʻ 백제 ʼ 를보다. 이훈충남역사문화원 14 6/14 과학을통해보는삼국시대이야기이종호한국과학저술인협회 15 6/21 일본열도속백제의흔적나행주대진대학교
4
5 목 차 제 1강좌개관 : 선사에서통일신라까지 신형식 / 1 제 2강좌선사시대살았던서울지역사람들 박희현 / 13 제 3강좌한국사의기원과국가형성, 그리고서울 송호정 / 37 제 4강좌백제이전마한사회를들여다보다. 박순발 / 53 제 5강좌비류와온조는형제인가? 경쟁가인가? 양기석 / 73 제 6강좌백제의품격을높인근초고왕 강종원 / 91 제 7강좌고구려는왜서울을공략했는가? 임기환 / 113 제 8강좌한강을둘러싼성왕ㆍ양원왕ㆍ진흥왕의대결 노용필 / 133 제 9강좌한주 ( 漢州 ) 로보는통일신라 한준수 / 151 제10강좌고대서울의항구도시적성격 윤명철 / 167 제11강좌불교, 삼국의가치관을바꾸다. 조경철 / 187 제12강좌백제가수도를세번옮긴까닭은? 문동석 / 203 제13강좌유적과유물로 ʻ백제ʼ를보다. 이훈 / 227 제14강좌과학을통해보는삼국시대이야기 이종호 / 249 제15강좌일본열도속백제의흔적 나행주 / 289
6
7 제 1 강좌 개관 : 선사에서통일신라까지 -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신형식 1. 역사를배우는목적 2. 역사를보는시각 3. 서울역사 2 천년
8
9 1. 역사를배우는목적 1) 역사는위대한교훈이다.( 前事不忘後事之師 ) 과거의잘 잘못을밝히는데는사람이곧거울이요옛날역시거울이된다. 미래의교훈을밝히는데는착한것도내게는스승이요나쁜것도스승이된다. [ 明燭往事之是非人爲鑑而古亦爲鑑昭示來者之勸戒善吾師惡吾師 삼국사절요 ] 가난하고천한것은부끄러운일이아니다. 학문을배워이를실행하지않은것이진짜부끄러운바이다. 조강지처는버리는것이아니고가난하고천할때사귄친구는잊지않는다. [ 貧且賤非所羞也學道而不行之誠所羞也糟糠之妻不下堂貧賤之交不可忘 삼국사기 열전강수전 ] 국가의성쇠, 백성들의안위에관한일또는본받아야할착한일, 경계해야할나쁜일을다루어이책 ( 자치통감 ) 을엮는다.[ 자치통감 진서표 ( 進書表 )] 우리의옛책 ( 古記 ) 이문자가거칠고잘못되어내용 ( 事迹 ) 이빠진것이많음으로왕의잘 잘못 ( 善惡 ), 신하의잘 잘못 ( 忠邪 ), 국가의안위그리고백성의잘 잘못 ( 理亂 ) 을들어내어후세사람들에게경계를권할수없었다.( 皆不得發露以垂勸戒 ) 이에역사를기록하여후세 ( 萬世 ) 에교훈이되어해와달, 그리고별과같이밝히고싶다.[ 삼국사기 진삼국사표 ( 進三國史表 )] 개관 : 선사에서통일신라까지 3
10 2) 역사를통해서올바른판단력을기른다. 새도끼자루는헌도끼자루를보고본을삼는다. 뒷수레는앞수레를거울삼아경계하는것이다. 지난세월의흥망은실로장래의교훈이된다. [ 新柯視旧柯以爲則後車鑑前車而是懲己往之興亡實將來之勸戒 고려사 서문 ] 도덕을지키고산사람은한때는적막하기마련이다. 권세에아부한사람은만고에처량한법이다. 달인은물건밖에있는물건을볼수있으며몸뒤의자신을생각하는것이다. 따라서차라리한때는적막했을지라도만고의처량함을말아야할것이다. [ 棲守道德者寂寞一時依阿權勢者凄凉萬古達人視物外之物想身後之身寧受一時之寂寞毋取萬古之凄凉 채근담 ( 菜根譚 ) ] 3) 역사는투철한국가관을함양시킨다. 오늘날공부깨나한사람들이모두중국의책들 ( 五經, 諸子之書 ) 은널리통하여알고있으나, 우리나라의사실은몰라그시말을모르고있으니심히통탄할일이다. 우리것을바로아는것이역사이다.( 삼국사기 서문 ) 옛사람이말하기를나라는멸망할수있으나역사는없어지지않는다고한다. 나라는물질 ( 형태 ) 이고역사는정신이기때문이다. 정신이존재하는한어느때고물질은되살아난다. [ 國家滅史不可滅蓋國形也史神也神存而不滅形有時而復活也박은식, 한국통사 ] 신하노릇을하자면충성만한것이없고, 자식노릇을하려면효도만한것이없다. 국가의위기를보고목숨을바치면충효를함께하는것이다. [ 爲臣莫若忠爲子莫若孝見危致命忠孝兩全 삼국사기 신라본기 ] 4 서울역사강좌
11 박제상 ( 朴堤上, 삼국유사 에는金堤上 ) 의자세차라리계림의개 돼지가될망정왜국의신하는될수없으며, 차라리계림의매를맞을지언정왜국의벼슬과녹을받을수없다. 왕이노하여제상의발바닥가죽을벗기게하고갈대를베고는그위로달리라하였다.[ 삼국유사 기이 ] 2. 역사를보는시각 1`) 역사는시대정신의산물이다. 7세기 : 김유신, 을지문덕-삼국통일 8세기 : 불국사, 석굴암-통일신라 9세기 : 최치원, 견훤, 궁예 15세기 : 세종, 성종-사육신 16세기 : 이이, 이황-임진왜란 19세기 : 대원군-동학혁명 2) 역사는필요과정 ( 必要過程 ) 의결과물이다.( 시행착오 : 서울 ~ 부산고속도로 ) 영국의선거법개정 ( ) 신라의통일 : 백제멸망 고구려멸망 당군축출 (660~676) 개관 : 선사에서통일신라까지 5
12 3) 역사해석의고정관념을탈피 역사해석의획일성극복 ( 화랑, 화백 ) 역사적인물의평가문제 ( 신숙주와성삼문, 이순신과원균 ) 4) 한국사에있어서의독자성을이해한다. 한강유역의의미 남북한의이질성문제 서울의위상 6 서울역사강좌
13 4) 남 북한의시대구분비교 남북한비교 남한 북한 왕조명 시대구분 주요항목 시대구분 주요항목 선사시대원시시대석기시대원시무리 모계공동체원시시대청동기시대 군장시대부계씨족공동체 부족국가 초기국가시대 노예제시대노예소유자사회 삼국시대 고대시대고대국가시대 봉건제도의성립기 통일신라시대 남북국시대 봉건제도의발전기 고려시대 918년귀족문벌사회봉건적예속강화기무신정권 몽고간섭기 < 무신관료배의정권장악 > 중세사회권문세족 신흥사대부봉건사회 1392 양반관료사회 봉건체제의재편성 사림정치 < 리조봉건국가의성립 > 근세사회조선후기사회변동 자본주의적관계의발생 조선시대 양반사회파탄 봉건제도의위기 년 개화 보수의갈등 부르죠아운동의시작 동학혁명 근대개혁근대사회부르죠아개혁근대사회 15 대한제국 국권수호부르죠아운동의종말 일제시대 년일제시대 국권회복운동 1926년 26~45 항일무장투쟁시대 1945 년 45~48 미군정시대 45~50 민주건설 대한민국 현대사회 48~60 이승만정부 [1] 김 50~53 조국해방전쟁 60~61 장면정권 [2] 18 일성 53이후사회주의건설 시 61~63 군정시대 1968 주체사상확립현대사회대 63~81 박정희정부 [3 4] 81~88 전두환정부 [5] 83~93 노태우정부 [6] 1994 김일성사망 93~98 문민정부 김 1994 김정일승계 98~03 국민의정부 정 2003~08 참여정부 일 08~13 MB정부 세 13~18 박근혜정부 습 2011 김정은 개관 : 선사에서통일신라까지 7
14 3. 서울역사 2 천년 1) 왜서울역사 2천년인가서울역사2천년이라는사실은 2009년에서울시사편찬위원회에서발간한 시민을위한서울역사 2000년 ( 영문판 일어판 중국어판동시출간 ) 에서도강조하고있다. 그러나아직도서울시민들 ( 물론전국민들도 ) 은그의미를잘이해하지못하고있다. 그저백제수도 ( 한성 ) 500년과조선왕조 ( 한양 ) 이후 600년을합친천여년의역사로만기억하고있다. 따라서우리가살고있는서울이앞의두시기 ( 백제와조선왕조 ) 외에는분명히수도 ( 서울 ) 가아니었는데왜 1천년간 ( 신라 고려 ) 을합해서수도와같은의미로설명해야하는가를알아야할필요가있다. 그것은웅진천도 (475) 이후의신라및통일신라시대와고려시대에있어서의천년간에서울지역이어떤존재 ( 서울과같은의미 ) 였는가하는문제풀이가된다. 어느나라든지그나라의서울 ( 首都 ) 은그국가의상징이다. 런던 ( 영국 ), 파리 ( 프랑스 ), 베를린 ( 독일 ), 베이징 ( 중국 ), 그리고도쿄 ( 일본 ) 는그나라의얼굴이기때문에서울도결국은우리나라의대명사 ( 간판 ) 가된다. 그러므로수도를함부로옮기지않았으며, 외적에게함락되었을때일시로옮기지만, 정세가환원되면다시돌아왔다. 그러므로수도를정할때는주변환경과정치적입장을고려해야한다. 정조 ( 正祖 ) 가 홍재전서 에서 ʻ천도할때는무엇보다도백성을설득할수있는명분과천도 ( 遷都 ) 의필요성과함께그곳에살수없는이유가있어야한다ʼ고하였다. 평양천도이후고구려가 ʻ엉망진창 [ 魚肉 ]ʼ이되었다는개로왕 (455~475) 의표현 ( 북위에보낸글 ) 이과장만은아닐것이며, 백제의경우웅진천도 3년만에문주왕 (475~477) 이피살된사실이이를증명한다. 그러므로신라가끝까지경주를떠나지않은사실과고구려와백제가수도를옮긴결과를비교할필요가있다. 고구려의평양천도 (427) 는결과적으로산악지방에서평원지역으로, 내륙생활에서해양생활을하게되면서고구려의전 8 서울역사강좌
15 성기는이룩되었으나수도이전에따른귀족간의갈등으로국내의혼란이닥쳤으며끝내는만주벌판을버려약소국가로전락되어나라를잃게된결과가되었다. 백제는서울지방의유리한조건을상실함으로서나라를멸망케한단초가된것은사실이다. 결국한국고대사는 ʻ한강유역을차지하려는쟁탈의시기ʼ였고, 신라는이지역을확보함으로서통일과번영을이룩한새로운민족사의출발이가능하게되었다. 그러므로신라 ( 통일신라포함 ) 와고려시대의한강유역은수도이상의의미가있었다는사실이다. 따라서한국사의운명을한강유역의확보가좌우한다는역사적교훈은우리의과거가말해주기때문에서울 2천년의당위성이여기에있다. 또한편, 로마 ( 이탈리아 ), 아테네 ( 그리스 ) 등을제외하고고대의서울이현대의수도로이어진경우는거의없다. 중국의경우장안과낙양이오늘의북경으로연결되지않았으며, 일본의교토가오늘의도쿄로계승되지않은사실은오늘서울을이해하는데큰도움이될것이다. 이를통해서볼때서울은한반도의중심지로서삼각산이음 양 [ 山水 ] 의정기를받아성립된백제 500년이전통의출발로시작된것이다. 이어신라 500년간의통일과번영으로운명을지켜준후또다시 500년의고려왕조는서울의의미를조선왕조 (500년) 로계승시켜오늘의서울을이룩하게된것이다. 고대에서현대에이르기까지그역사적 정치적 지리적정통성이중단없이이어졌다는데서울역사 2천년의당위성이있다. 서울지역은한반도의허리로서일찍부터남북문화가교류 융합될수있는자연조건이탁월한곳이다. 연평균기온이 12 의쾌적한기온에다가산 ( 북악산 ) 과강 ( 한강 ) 의음양조화는물론바다 ( 黃海 ) 를가까이두고있어구석기시대이래인간이살기시작하여대표적인신석기문화유적 ( 암사동 ) 과청동기문화 ( 가락리식토기와역삼동주거지, 그리고고인돌문화 ) 가발달했던곳이다. 그러므로지리정치적 지리문화적환경이복합된이러한유리한환경에서백제가일찍정치와문화의발전을이룰수있었으며, 그전통이조선왕조를거쳐현대로이어졌다. 개관 : 선사에서통일신라까지 9
16 2) 서울2천년역사의제1단계서울역사 2천년의시작 ( 제1단계 ) 은백제의한성시대 (BC.18~475) 였다. 이시기에백제는 21왕이존재하면서한강유역의유리한자연환경을바탕으로 3국중가장먼저고대국가를완성하였다. 이러한정치적조건을기반으로근초고왕 (346~375) 은고구려를공격하여고구려왕 ( 고국원왕 ) 을패사시켰다. 이어요서지방에진출하는바탕을마련함으로서 ʻ바다로나가는것ʼ이백제의살길로생각하여우리역사상첫번째로해외진출의길을열어특히일본문화개발이라는역사적임무를시작하였다. 그러나 4세기이후 3국의국가적발전이본격화되어한강을둘러싼각축으로격렬한싸움이계속되면서 3국의운명을건충돌로이어진다. 따라서한강유역의주인공도백제-고구려-신라로바뀌기시작하였다. 그러므로 5~6세기의시련 (5세기는고구려, 6세기는신라의위협 ) 이전까지백제는일찍정치 사회의안정으로서울 2천년역사의제일보를힘차게열수있었다. 그러나백제는 475년에서울을웅진 ( 공주 ) 으로옮길수밖에없었다. 고구려장수왕의백제정벌 ( 한성함락 ) 은과거의치욕 ( 고국원왕피살 ) 을갚는다는명분을앞세웠지만내면은한강유역의확보를위한정책의추진이었다. 그러나백제는수도를남으로옮겼지만, 한강유역 ( 북부 ) 을완전히포기한것이아니었고흐트러진민심을바로잡기위해화려한궁궐을조성하고 ( 문주왕 3년, 동성왕 8년 ) 신라와협조하여한강유역에대한지배권을유지하는데노력하였다. 이러한사실은단순히잃어버린영토의회복이아니라서울지역의의미를지키려는노력의표현이었다. 10 서울역사강좌
17 3) 서울2천년역사의제2단계 6세기에이르러신라의법흥왕 (514~540) 과진흥왕 (540~576) 은백제와고구려의정치적혼란을틈타백제와의군사협력을파기하고단독으로서울지역 ( 한강의북부일대 ) 을장악하게된다. 여기서서울2천년역사의제2단계가시작된다. 한강유역은한반도의허리로서남 북문화가공존 ( 융합 ) 할수있는지리적환경이나서해로의관문이되는유리한조건을갖춘요충지였다. 그러므로우리나라가남북으로대립되었을때한강유역은 ʻʻ서로차지하려는보배같은곳이어서이를오래지닌자는번성하고통일의대업을이룰수있지만, 이를잃는쪽은쇠약혹은패멸한다.ʼʼ는이병도박사의지적을떠올릴수있다. 그러므로진흥왕은이곳에신주 ( 新州, 뒤에는한산주 한주 ) 를두고북방경비및북진의전진기지로삼고북한산순수비를세워이지역확보와자신의권위를하늘에고하고북진과통일을맹세하기에이르렀다. 이와같은한강유역의확보로신라가 3국중최강국임을내외에과시할수있었고, 삼국통일의기반을마련한것이다. 통일신라는전국을 9주로개편할때이곳에한주 ( 漢州 ) 를두고북쪽으로황해도평산 ( 패강진 ) 으로부터남으로한강상류 ( 충주 ) 까지지배하게하였다. 당시한주는대동강 임진강 한강유역을포함하여신라의 4분지1에해당하여한반도의중부와서부를포함하고있었다. 당시전국의 120개군 ( 郡 ) 가운데 28 개군을이곳한주에두었고, 전국 305현가운데 49현을이곳에두었으며, 전국의지방군대 (10정) 중에 2정 ( 이천 여주 ) 을배치하여지켜주었다. 결국한주 ( 한산주 ) 는삼국통일은물론통일신라의정치안정과문화개발에바탕이되었다. 신라는이러한한강유역 ( 현재서울일대 ) 의힘을믿고수도를바꾸지않은것이다. 더구나경덕왕 18년 (826) 에는황해도남부일대 ( 금천 ~ 재령남부 ) 에장성까지쌓았던사실은한강유역을지키면서신라가북방진출의강한의지를나타낸것이며, 낙동강 ( 남 ) 과한강 ( 북 ) 을하나로묶어경주의한계를극복할수있었다. 개관 : 선사에서통일신라까지 11
18 따라서진흥왕으로부터경순왕까지의 500년역사는서울지역이경주가수도로서의역할을할수있도록후원자가되었으며, 그보호자로서통일신라의융성을가능케함으로서서울 2천년사의제2단계가되었다. 이와같이백제사 500년을이은신라는한강유역을확보하여신라의번영은물론민족통일을달성하여통일국가의기반을확보함으로서또다시 500년의서울역사를이어갔다. 이로서한강유역은민족국가의터전으로서고려시대 ( 제3단계 ) 로연결시킬수있었다. 특히통일신라는북방진출의강한의지를나타냈으며, 한강유역과낙동강유역을하나로묶어경주의한계를극복할수있었다. 12 서울역사강좌
19 제 2 강좌 선사시대살았던서울지역 사람들 - 서울시립대학교박희현 1. 머리말 2. 서울지역의선사시대유적 3. 선사시대주거생활 4. 먹거리와농경의시작 5. 맺음말
20
21 1. 머리말 오늘날한국사연구의경향에서보여주고있는특징은정치사, 사회경제사, 제도사, 국제관계사같은기존의연구방향을유지하면서도당대의생활사에대한관심이커지고있다는점이다. 한국사학계에서한동안 ʻ어떻게살았을까?ʼ 가화두이기도했다. 오늘의주제도이러한범주를벗어나지않는다고생각한다. 즉, ʻ선사시대의서울사람들은어떻게살았을까?ʼ라고하는내용을다루게된다. 문헌기록이전의역사를연구하는선사시대사에관한것인만큼이시기의연구를위해서는온전히선사고고학발굴자료만을가지고연구해야하는한계를벗어날수없다. 고고학은과거사람들이남겨놓은유물 유적을연구대상으로삼는학문이다. 고고학이추구하는궁극적인목적은이유물 유적을통하여당시의문화내용을밝히고과거에살았던인간생활을복원하는데있다고한다. 이와같은전제하에서선사시대문화의총체를알기위하여선사유적에서발굴한자료를종합정리, 분석하는과정을밟아당시의문화내용을해석하는것은당연한일이라할수있다. 선사시대에서울지역에살았던사람들은어떤생활을하였을까?, 선사시대살았던서울지역사람들은어떤모습이었을까? 이주제는매우재미있기는하지만그내용을세밀하게알기에는자료가턱없이부족이다. 그것은조사및연구내용이그다지많지않기때문이다. 그리고서울지역에서전개되었던선사시대의생활상을이해하기위하여오로지서울지역으로만제한하여따져보는것은별로의미가없다고할수있다. 따라서그당시의생활상을이해하기위하여서울지역을포함한한강유역으로범위를확대하여알아보는것도큰 선사시대살았던서울지역사람들 15
22 무리는아닐것이라사료된다. 여기에서는우선지금까지서울지역에서확인한선사시대의유적을알아보고, 선사시대사람들이한강을배경으로하여생활했던모습중에서유적의분포와생활상 -주거의특징, 연모와그릇제작, 농경문제등- 을살펴본다. 마지막으로서울지역에분포하고있는선사시대의유적이갖고있는의미를정리하고자한다. 2. 서울지역의선사시대유적 1) 구석기시대유적한반도의경우구석기시대유적의분포상이전국적인규모를보이고있는만큼, 최근에는서울지역에서도구석기시대의석기와토양층이확인되어앞으로의조사결과에많은기대를모으고있다. 중랑구신내동 (2007, 한강문화재연구원 ) 에서는고토양층에서석영제의여러면석기를수습하였다. 강동구암사동유적 (2009, 경희대박물관 ) 은선사유적기념관의주변 ( 인근지역 ) 을조사하는과정에서빗살무늬토기문화층아래에서주먹도끼등뗀석기를찾은것으로알려졌다. 강동구고덕동유적 ( , 경희대박물관 ) 에서는본격적인발굴을통하여주먹도끼, 찍개, 긁개, 몸돌, 격지류등규암을이용한뗀석기가많이출토되었다. 16 서울역사강좌
23 < 그림 1> 고덕동유적출토구석기유물 지표조사 (2003~2005, 상명대박물관 ) 를통하여서도여러지역에서구석기시대의석기를찾았다. 하일동, 상일동, 삼성동, 창전동, 사간동지역에서석영과규암을돌감으로한몸돌, 여러면석기, 격지등뗀석기를여러점확인한바있다. 그리고 2009년에발굴이끝난동대문운동장자리 ( 중원문화재연구원 ) 와상일동지역및구파발지역 (2008, 한강문화재연구원 ) 의토층에서도구석기시대에형성된토양쐐기를확인하였다. 이것은서울지역에도현재의지표아래에구석기시대의고토양층이매우넓게분포하고있음을암시하는것이며구석기시대유적이있을개연성을보이는것이다. 서울가까이한강하류에위치한파주운정지구와고양삼송리유적을 년에걸쳐발굴하여여러유형의주먹도끼를비롯하여여러종류의구석기시대뗀석기를다량찾은바있다. 특히파주운정지구는방대한지역에구석기시대의유물층이매우두텁게그리고석기가매우넓게분포하고있음을확인하였다. 이러한점도서울지역에또다른구석기시대유적이많이남아있을가능성을보여주는것이다. 선사시대살았던서울지역사람들 17
24 2) 신석기시대유적 1 암사동유적서울지역에서가장대표적인신석기시대유적은강동구암사동유적이다. 이유적은서울을관통하는한강유역에서뿐만아니라한반도전체에서도매우중요한유적이다. 암사동유적은 1925년을축 ( 乙丑 ) 대홍수로인해우연히발견되어한반도에서처음조사된신석기시대유적이다. 이유적은일제강점기때의지표조사와 1967년이후여러차례의발굴조사를통하여그성격이알려졌다. 연구결과유적은약 7,000~4,000 년전신석기시대전기 중기에이르기까지많은사람들이한강가에모여다양한빗살무늬토기를만들며움집을짓고마을을이루고살았던곳으로밝혀졌다. 암사동유적에서발굴한빗살무늬토기들은한반도의신석기시대 ʻ중한토기 ( 中韓土器 )ʼ를연구하는데중요한기준이되고있다. 그리고집터에서토기류이외에석제의도끼, 보습, 곰배괭이, 낫, 갈돌및갈판, 숫돌, 화살촉, 그물추같은당시의생활물품을발굴하여암사동지역에서이루어진신석기시대의생활모습을유추할수있다. 강동구고덕동지역과성동구응봉에서도일제강점기에지표조사를통해신석기시대의토기파편이발견된바있다. < 그림 2> 암사동신석기시대움집터 < 그림 3> 암사동유적출토토기 18 서울역사강좌
25 3) 청동기시대유적서울지역의몇곳에서청동기시대집터가발굴되었고, 지표조사를통하여여러곳에서당시의토기파편과석기를수습하였으며고인돌을확인한지역도있다. 1 명일동유적 (1961, 고려대박물관 ) 명일동유적은강동구명일동의낮은구릉위에위치하고있었고, 여기에서집터를찾았지만조사이전에이미많이파괴된상태였기때문에유적의전체규모는알수없다. 남아있는집의규모는지름이약 6m 정도의타원형으로서쪽벽을따라기둥자리로보이는 9개정도의구멍이발견되었다. 집의중심부에가까운두곳에서숯이집중적으로널려있었고, 그주변에서간돌칼 [ 磨製石劍 ] 2점, 화살촉 7점, 숫돌 4점, 갈판 1점등의석기가출토하였다. 그리고완형은알수없으나 ʻ가락동식ʼ 계통의비교적두터운민무늬토기 [ 無文土器 ] 파편이상당량나왔다. 출토유물로보아유적의연대는청동기시대중기의것으로보고있다. 2 가락동유적 (1963, 고려대박물관 ) 가락동유적은송파구가락동의나지막한구릉위에있는청동기시대유적이다. 한강지류인탄천옆의해발약 40m 정도되는낮은구릉위에서움집터 1기를발견하였다. 집터의모양은장방형 ( 동서약 10m 남북약 7m 깊이약 10~50cm ) 의반지하식이며이곳에서기둥구멍은발견되지않았다. 집터에서출토한유물들은대부분토기류이고약간의석기류가있다. 토기류는민무늬토기로서심발형 ( 深鉢形 ) 토기, 단지형 [ 壺形 ] 토기, 접시등이다. 가락동유적의심발형토기는서북지방의팽이토기 [ 角形土器 ] 와비슷하지만바닥지름이팽이토기보다비교적크고몸통은직선에가깝고입술부분은위로곧게올라갔다. 특히입술부분은팽이토기처럼밖으로꺾어꼭꼭눌러서 선사시대살았던서울지역사람들 19
26 얇게 2중입술을만들었다. 단지형토기는입지름이비교적작으며곧은목을갖고있다. 이러한유형의토기들이서울역삼동유적, 여주흔암리유적등한강이남중부지방에분포하고있어학계에서는이러한토기를 ʻ가락식토기 ( 可樂式土器 )ʼ라고부르고있다. 석기류는돌낫 [ 石鎌 ], 돌화살촉, 돌송곳, 가락바퀴, 숫돌등이출토하였다. 석기류중에서돌낫이있다는것은이곳에서살았던청동기시대사람들이주로농경생활을하였음을보여주는것이다. 가락동유적의연대는민무늬토기의양식적인특징으로보아팽이토기보다시기가약간늦은 B.C. 7세기전후로추정하고있다. 3 역삼동유적 ( 현재도곡동 ; 1966, 숭실대박물관 ) 역삼동유적은한강의지류인양재천옆의해발약 90m 되는강남구도곡동매봉산의능선상에서발굴한곳이며, 청동기시대의움집터한채를확인하였다. 움집터의모양은동북 서남장축인긴네모꼴 (16m 3m 깊이약 50~60cm ) 이다. 기둥구멍들은움집의가운데에서발견하지못하였고움벽을따라서만벽에바짝붙어서 1~2m 간격으로마련하였으며, 구멍의크기는지름 10~15 cm이고깊이는 10cm안팎이다. 남아있는나무숯 [ 木炭 ] 으로보아기둥은모두참나무를사용한것같다. 움집터안에서화덕자리는확인하지못했다. 그리고움집의남벽이분명하지않고경사를이루고있으며, 기둥구멍도확인되지않아남쪽이나들이 [ 出入口 ] 였던것으로짐작된다. 따라서역삼동유적의움집은남향집이었던것으로생각된다. 석기류와토기류가출토하였으며대부분움의벽면가까이에서나왔다. 석기류는양날돌도끼, 돌끌 [ 石鑿 ], 돌화살촉, 반달돌칼 [ 半月形石刀 ], 숫돌, 갈판과갈돌, 그리고망치돌같은간석기 [ 磨製石器 ] 이다. 토기류는구멍무늬토기 [ 孔列土器 ] 를비롯한민무늬토기와붉은간토기 [ 紅陶 ] 가나왔고, 그외다수의토기파편이출토하였다. 20 서울역사강좌
27 역삼동 유적의 연대는 구멍무늬토기 유형의 유물 갖춤새로 보아 B.C. 8~6 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④ 고덕동 유적(2010, 경희대 박물관) 강동구 고덕동 유적은 한강을 북쪽으로 바라보는 해발 35~50m의 낮은 구 릉 정상부와 사면에서 찾은 유적으로 청동기시대의 움집터 5기를 발굴하였다. 집터는 등고선과 나란하게 분포하고 있으며 대부분 유실이 심하여 전체적인 현황을 파악하기 어렵다. 남아있는 규모로 보아 집터의 평면 모양은 모두 장방 형으로 추정된다. 집의 크기는 집터가 남아 있는 상태로 실측하건데, 큰 집(4호) 이 6.3m 1.6m 깊이44, 작은 것(5호)이 2.7m 2m 깊이38 정도이다. 움집터의 내부 모습은 대체로 풍화암반에 움을 파서 그대로 바닥으로 사용 한 상태이며, 일부 바닥에 진흙을 다지기도 하였다. 가운데에 화덕자리가 마련 된 경우도 있고 벽을 따라 설치되었던 작은 기둥자리도 남아있다. 고덕동 유적의 움집터에서 나온 유물은 구멍무늬를 새긴 민무늬토기와 돌화 살촉, 반달돌칼, 돌도끼, 돌끌, 갈돌, 대롱옥[管玉] 등이며 모두 한국 청동기시 대를 대표하는 유물들이다. 출토유물로 보아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은 사냥 과 농사짓기를 병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발굴자는 조사 구역 바깥 능선에도 집 터가 분포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림 4> 고덕동 청동기시대 3호 집터 <그림 5> 고덕동 청동기시대 집터 출토유물 선사시대 살았던 서울 지역 사람들 21
28 암사동유적에서도신석기시대문화층보다위층에서청동기시대문화층을확인하였다. 신석기문화층보다두께는얇으며유적의일부지역에서만나타났다. 이문화층에서는민무늬토기, 이중입술토기같은청동기시대의토기류와가락바퀴, 돌도끼, 돌끌, 청동촉등이출토하였다. 대체로일제강점기에지표조사를통하여청동기시대의유물을수습한것으로보고된서울지역으로는동대문구전농동, 성동구응봉, 광진구구의동, 강남구논현동, 노원구불암산등지이다. 수습된유물은민무늬토기파편, 돌도끼, 간돌칼, 간돌화살촉 [ 磨製石鏃 ], 돌창, 반달돌칼, 숫돌등이다. 그리고동대문구망우동, 강동구고덕동, 서초구반포동에서고인돌을확인한것으로보고하였다. 특히망우동고인돌주변에서는토기파편과함께돌창, 반달돌칼, 홈자귀 [ 有溝石斧 ], 화살촉, 석제검자루끝장식 [ 劍把頭石 ] 등을수습하였다고한다. 3. 선사시대주거생활 1) 구석기시대사람들의한강유역에서의주거생활서울지역에서는 ʻ구석기시대사람들이어떻게집을짓고생활했을까ʼ에대한궁금증을풀어줄만한유적을아직발견하지못했다. 그러나당시사람들의생활모습이대체로비슷하였다는전제하에한강유역에서확인한구석기시대의주거생활에관한연구결과를검토해보면그내용을유추해볼수있겠다. 한강유역에서는구석기시대사람들이석회암동굴을주거공간으로이용하거나, 강가의한데에막집을짓고생활한주거흔적을확인할수있다. 구석기시대사람들은남한강상류에넓게분포하고있는조선계 ( 朝鮮系 ) 석회암동굴중에서생활하기에마땅한동굴을생활터전으로선택하였다. 대표적인유적 22 서울역사강좌
29 으로제천점말용굴, 단양금굴, 단양상시바위그늘, 단양구낭굴, 영월연당리쌍굴, 평창기화리쌍굴등이있다. 단양상시 1바위그늘유적에서는중기구석기시대사람인슬기사람 (Homo sapiens) 의머리뼈일부, 앞팔뼈, 뒤팔뼈, 어깨뼈등이나와그를 ʻ상시사람ʼ이라고부르고있다. 이외에제천점말용굴, 단양구낭굴, 영월연당리쌍굴유적에서도당시사람을체질인류학적으로연구할수있는인골의일부가출토하였다. 구석기시대의동굴유적에서는당시에살았던동물이화석상태로출토하는것이특징이다. 동물화석은층위에따라서원숭이, 하이에나, 코뿔이같은 ʻ더운기후동물ʼ과동굴곰같은 ʻ추운기후동물ʼ의뼈혹은현재지구상내지한반도에살지않는동물뼈들이발굴되어구석기시대사람들의사냥감을쉽게알수있다. 이동물뼈들은당시의기후를이해하는데도매우중요한학술자료로활용하고있다. 동물의종류는매우다양하지만그중에서사슴과 (Cervidae) 동물이많은수를차지하고있다. 그중에서도어린개체의사슴뼈가많은것이주목된다. 이것은당시사람들이주로순하고어린동물을중요한사냥감으로삼았음을말해준다. 뼈에는찍히거나자른자국이남아있는경우가있다. 이것은사냥감을사냥한후해체하였음을짐작케하는것으로뼈연모제작과함께구석기시대사람들이행한생활의한단면이라고할수있다. 동굴집터에서는동물화석과함께당시사람들이만들어사용했던연모를발굴하여그당시의생활상을좀더상세하게파악할수있다. 출토된연모는석기와뼈연모로나뉜다. 유적에따라석기가주로출토된곳 ( 금굴유적 ) 이있는가하면뼈연모가주된곳 ( 점말용굴유적, 상시바위그늘유적, 구낭굴유적 ) 이있다. 연모 특히뼈연모 를사용한인간의문화행위를뚜렷하게밝히기위하여전자주사현미경 (Scanning Electronic Microscope) 방법을이용하여관찰한결과, 연모를뗀흔적과사용에의해생겨난자국을확인하였다. 선사시대살았던서울지역사람들 23
30 단양금굴유적의최하층 ( 약 60만년전 ) 에서동물화석과함께발굴한석기들은이른시기의제작기법을보여주고있어전기구석기시대것으로밝혀졌다. 이것은한강유역에서구석기시대사람들이이미전기구석기시대부터생활했음을증명하는것이다. 특히이유적은구석기시대는물론선사시대각시기의문화내용을갖춘집터이다. 금굴유적과점말용굴유적, 구낭굴유적, 영월연당리쌍굴유적에서는화덕자리와불땐흔적도찾았다. 제천점말용굴유적의중기구석기층에서는당시사람들이남겨놓은예술품이나와주목을받았다. 코뿔이 (Rhinoceros) 앞팔뼈 (radius) 의표면에사람의얼굴모습을새겨넣은것이다. 남한강유역에분포하고있는석회암동굴은전기구석기시대부터후기구석기시대에이르기까지여러시기에걸쳐구석기시대사람들의생활터전이었음이밝혀졌다. 한데유적은남 북한강의본류나지류에서확인할수있다. 특히두개의강물이만나는두물머리 [ 合水地點 ] 는일찍이사람들이살기에좋은조건을갖춘곳으로판단하였음을알수있다. 대표적인한데유적으로남한강유역에는단양수양개, 제천창내, 여주연양리, 양평병산리, 남양주호평동유적이있다. 북한강유역에는양구상무룡리, 춘천금산리갈둔, 춘천거두리, 홍천하화계리, 홍천내 외삼포리유적등이분포하고있다. 한강유역에서확인한구석기시대의한데집터로는창내유적을들수있다. 창내유적은후기구석기시대막집터로서남한강과그지류인창내 ( 제천천 ) 가만나는두물머리 [ 合水地點 ] 에위치하고있다. 이유적에서는후기구석기시대에만들어진많은석기와함께기둥구멍자리, 화덕자리, 문돌, 당김돌, 석기제작장소등을갖춘막집구조를찾았다. 남한강가까이에있는창내유적의막집터는출입구가남한강쪽을바라보는동남쪽을향하고있다. 남아있는구조에따라막집을복원해본결과, 내부의면적은약 10m2정도로이곳에서 3~4명이생활했던것으로짐작된다. 집바닥의모양은문돌을중심으로대체로둥글며, 집앞에화덕자리를갖추었 24 서울역사강좌
31 다. 막집의외형은대체로원뿔모양으로복원된다. 복원한막집은모양과규모면에서프랑스후기구석기시대유적의하나인센강 (la Seine) 상류에있는팽스방 (Pincevent) 유적의막집과도비교된다. 창내유적에서는집터를중심으로긁개, 밀개, 찍개, 찌르개, 톱날석기같이여러유형으로잔손질된연모와몸돌, 격지, 모룻돌, 돌망치등을발굴하였다. 창내의막집터는후기구석기시대사람들이남한강가에서다양한석기를만들면서사냥과고기잡이를주로하며생활했던집터로생각된다. 또집터의화덕자리에서불에탄복숭아씨도나와당시생활의일면을짐작해볼수있다. < 그림 6> 창내유적막집복원모습 선사시대살았던서울지역사람들 25
32 2) 신석기시대사람들의주거생활구석기시대보다날씨가따뜻해진신석기시대에는사람들이여러지역에퍼져정착하며살았다. 한강유역에서는구석기시대와마찬가지로북한강유역보다남한강유역에서신석기시대유적이많이확인된다. 한강유역에살았던신석기시대사람들은주로강가에움집을짓고생활하였다. 서울강동구암사동유적이그대표이다. 최근의발굴조사를통하여서는남양주호평동지새울유적, 인천영종도중산동유적, 시흥능곡동유적, 안산신길동유적, 화성석교리유적같이구릉상에서도움집터를찾은바있다. 그리고매우드문경우이지만단양금굴유적이나제천점말용굴유적, 단양상시제2바위그늘유적, 영월연당리쌍굴유적에서는구석기시대사람과다름없이신석기시대사람들도석회암동굴이나석회암바위그늘을생활근거지로삼았음을확인할수있었다. 춘천교동유적에서는풍화가심한화강암인공동굴을생활공간으로이용하였다. 신석기시대사람들이강가에서움집생활을했던모습을가장쉽게이해할수있는곳이암사동유적이다. 암사동유적에서는수많은움집터가발굴되었다. 움의규모와모양은장축이 5m 6m 정도, 깊이가 50cm ~1m 내외인 ʻ모줄임네모꼴 [ 抹角方形 ]ʼ 혹은원형이다. 움안에는중앙에취사와난방을위한화덕자리가하나씩있고, 저장시설로추정되는것도있다. 강돌을한줄돌려마련한화덕은대체로원형이나타원형또는방형이나장방형이고, 크기는 50 cm 70cm정도이다. 저장시설은토기의밑부분을잘라거꾸로박아놓았다. 움집의바닥은대부분진흙으로다졌으며돌을깐예도있다. 움집의바닥에는기둥구멍자리가여러개있어지붕을올렸던것을쉽게알수있다. 기둥구멍은 4개의중심기둥외에교체하여새로만든기둥, 중심기둥의버팀목을세운기둥때문에여러개가발굴된예도있다. 26 서울역사강좌
33 움집은모서리에 4개의기둥을세우고도리를얹은다음서까래를비스듬히기대어땅에닿도록하고지붕을덮어움집의겉모습을만들었다. 지붕끝은 ʻ까치구멍ʼ으로처리하여환기가되도록하였다. 집을복원해보면움집은외형이원뿔모양이다. 내부의넓이는대체로 20~40m2로서 5~7명의가족이생활했던곳으로보인다. 나들이는남쪽또는동남쪽이나서남쪽방향에계단식으로또는경사지게마련되어있어햇볕이잘드는방향으로집을지은것을알수있다. 복원한신석기시대움집을보면여름에는시원하고겨울에는따뜻한움집의특징과함께신석기시대사람들이갖고있던건축기술을음미해볼수있다. 암사동유적의움집터중에는매우큰규모 (7.9m 6.6m) 의집터도있다. 아마도공동창고나공동작업장으로쓰였던공간으로짐작된다. 흔하지는않지만움집터의안이나바깥에따로원형의저장구덩이시설이마련된경우도있다. 음식물을저장하기시설로짐작되며큰것은지름이 85~90 cm, 깊이가 35~43cm정도이다. 암사동유적에서는이러한움집터가한강가에여러채모여있는상태로여러지점에서발굴되었다. 이러한점으로미루어보아신석기시대사람들이한강가에서수십채이상의움집이지어대단위의마을을형성하였던것으로쉽게상상할수있다. 그외에암사동유적에서야외노지와돌무지시설 [ 積石施設 ] 이나왔다. 여기에서는불탄흙과나무숯, 빗살무늬토기파편들이나와토기를굽던한데가마터나공동의조리를위한화덕자리로추정하고있다. 움집터안에서다양한종류의신석 < 그림 7> 암사동유적움집복원모습기시대빗살무늬토기가발굴되었다. 선사시대살았던서울지역사람들 27
34 암사동유적에서확인된빗살무늬토기의유형은서해도서지방을포함한한반도중부지역에넓게분포하고있는한국신석기시대의대표적인토기유형이다. 빗살무늬토기에는그릇을보다튼튼하게만들기위해바탕흙에운모, 석면, 활석또는조가비가루같은보강제 ( 補强劑 ) 가섞여있다. 토기를만들때는손으로빗거나, 고리모양을쌓아올리거나또는흙띠를감아올리는방법을이용하였다. 그릇의모양은곧은아가리와뾰족밑이주류를이루어전체적으로반달걀모양이나포탄모양을하고있다. 빛깔은대체로부드러운갈색을띠고있다. 토기는용도와크기에따라구분된다. 특히크기에따라크고작은것을나눌수있는데, 이경우그릇을만들때당시사람들이갖고있던잣대 ( 뼘 ) 의반증이아닐까하는연구결과가나오기도하였다. 그릇모양을완성한다음굽기전에겉면에여러가지무늬를넣었다. 우선그릇의안팎을긍개로매끄럽게다듬고나서겉면에끝이수정같이뾰족한석기나톱니, 나무줄기, 조가비, 손톱등여러가지무늬새기개로긋거나찍거나하여다양하게무늬를새겼다. 무늬는그릇의입술부분 몸통부분 밑부분에각기다른여러가지종류로묘사하였다. 무늬중에서가장많은것이입술부분의평행밀집단사선문과몸통부분의어골문이다. 그릇겉면에이두가지무늬를조합하여새긴경우도있고그릇전체에같은무늬를새긴예도있다. 간혹점물결무늬가찍힌토기도있다. 무늬의의미는자연물상이나자연현상등을묘사한것으로해석되고있다. 이러한무늬는아름다움의표현이기도하겠지만그속에는신석기시대사람들이갖고있었던생활속의믿음이담겨있다고여겨진다. 아울러토기제작을보다쉽게하기위한과학적인안목의일부로도파악된다. 완성된날그릇은지상에파놓은구덩이에또는돌무지 [ 積石施設 ] 에나무를쌓고그위에올려놓은다음불을지피는 ʻ한데가마 [ 露天窯 ]ʼ를이용하여구워냈 28 서울역사강좌
35 다. 암사동유적의토기는자연과학방법으로분석한결과 600~800 의온도에서, 하남미사동유적의경우는약 500 정도의온도에서구운것으로밝혀졌다. 이와같이신석기시대에토기를만드는과정은바탕흙을준비하여그릇을완성하기까지매우힘들면서도섬세함을요구한것임을쉽게이해할수있다. 토기를만들기가비록어려운과정이었다하더라도여러민속자료나민속지의예를보았을때토기제작은주로여성들이관여한것으로이해하고있다. 암사동유적의신석기시대토기들도그당시여성들의손을거쳐만들어진것으로보아큰무리는없을것이다. 토기들은식물 ( 食物 ) 준비용, 조리용, 저장용등으로쓰였던것으로짐작된다. 토기중에는금이생긴토기를수리해서사용했던것으로보이는 ʻ수리공ʼ 이남아있어눈길을끈다. 이것은당시사람들이토기를쓰다가금이생겨깨지기전에끈으로단단히묶어소중하게사용했음을말해주는것이다. 이것은토기만들기가쉽지않았음을보여주는자료임과동시에토기를오랫동안쓰고자했던당시사람들의 ʻ생활속의지혜ʼ를우리에게보여주는한예라고생각한다. 암사동지역에서신석기시대사람들이수천년동안시기를달리하면서오랜기간생활했던이유는과연무엇일까? 그것은강을비롯한자연지세도빼놓을수없겠지만그보다더중요한이유는주변에서양질의진흙을쉽게얻을수있었다는점이다. 암사동, 명일동, 고덕동, 상일동등지에넓게분포하고있는고토양층에주목하여야할것이다. 암사동유적에서는신석기시대의석기들도많이발굴되었다. 석기는뗀석기가주류를이루고있고약간의간석기도나왔다. 대표적인석기로는돌화살촉, 돌도끼, 돌공이, 긁개, 찍개, 돌그물추이며, 맷돌, 갈판과갈돌, 반달돌칼, 돌괭이, 돌보습, 돌낫등도출토하였다. 석기들의용도를추측해보면돌화살촉은들짐승을사냥하는데, 돌도끼는 선사시대살았던서울지역사람들 29
36 나무를자르거나땅을파는데, 돌공이는짐승의뼈나열매를부스는데, 긁개는가죽을무두질하는데에사용하였을것이다. ʻ물수제비뜨기ʼ에적합한자갈돌을이용하여만든돌그물추는고기잡이에, 맷돌이나갈판과갈돌은도토리같은열매나낟알을갈아가루를내는데에썼던연모들이다. 아울러반달돌칼, 돌괭이, 돌보습, 돌낫등은농사와연관지어볼수있는석기들이다. 암사동에살았던신석기시대사람들은사냥과채집활동그리고고기잡이를한것은물론, 농경생활을했을가능성도그려볼수있다. 3) 청동기시대사람들의주거생활명일동유적, 가락동유적, 역삼동유적, 고덕동유적의집터를근거로하여알수있듯이, 청동기시대에서울지역에서살았던사람들은한강이나그지류가가까이흐르는야트막한구릉에움집을짓고생활하였다. 서울지역에서는아직확인이되지않았으나남 북한강유역에서청동기시대에마을을이룬대규모의집터와논또는밭유적, 무덤등이속속조사되고있다. 서울지역의유적에서는한채또는여러채의움집이조사되었다. 각유적의시기를나누고있으나움집의구조는시기별로큰차이를보이지않는다. 10~60cm정도땅을파고만든움집의평면은대체로장방형내지세장방형 ( 細長方形 ) 이고원형또는타원형인예도있다. 바닥면적은 10~70 m2의범위에든다. 움집바닥은진흙으로다진예가있으며, 집안에화덕을마련한경우와그렇지않은경우도있다. 역삼동유적에서와같이집안에화덕자리가없는움집은계절과관련이있을것으로짐작된다. 집안에저장시설을갖춘곳은매우드물다. 기둥은벽선을따라간격이일정하게또는그렇지않게세워지붕을올렸다. 가락동유적에서와같이기둥자리가발견되지않은경우도있다. 30 서울역사강좌
37 < 그림 8> 역삼동유적움집복원모습 청동기시대에한강유역에서살던사람들은대단위로마을을이루고살았음을쉽게알수있다. 최근에조사한북한강유역의화천용암리유적 (169동) 과화천거례리유적, 춘천천전리유적 (71동) 등이그대표적인유적이다. 서울지역의청동기시대집터에서쉽게볼수있는것은밑이납작한민무늬토기이다. 민무늬토기도빗살무늬토기를만드는방법과비슷하지만바탕흙에석영이나장석을섞어보강제로이용하였다. 서울지역의청동기시대민무늬토기를몇도의열도에서구웠는지는정확히알수없다. 다만이유적보다한강상류에있는하남미사리유적에서발굴한청동기시대의민무늬토기를분석한결과, 그소성온도가 530~560 또는 870 이하인것으로밝혀졌다. 굽는방법도신석기시대와마찬가지로 ʻ한데가마ʼ를이용하였다 ( 충북청원궁평리유적의경우, 땔감으로상수리나무나소나무를사용한것으로밝혀졌다 ). 아무튼이토기들은소성도가낮은상태에서구웠기때문에적갈색을띠고있다. 선사시대살았던서울지역사람들 31
38 역삼동유적의집터에서구멍무늬토기와함께붉은간토기가나와주목할만하다. 매우정선된바탕흙을이용하여만든붉은간토기는겉면에붉은안료를발라간토기이다. 또서울지역에서발굴한청동기시대토기유형에서매우주목할것이있다. 이지역에서한반도서북지방의민무늬토기유형 ( 팽이형토기 ) 과동북지방의유형 ( 화분형의구멍무늬토기 ) 을같이볼수있다는점이다. 이것은서울지역에두지방의토기문화가함께유입된것임을의미하며, 양지역의사람들이남쪽으로이동하면서서울지역에공존하였음을보여주는것이다. 반달돌칼, 돌낫이나돌화살촉같은석기류가출토한것으로보아이곳에서살았던청동기시대사람들이농사를지으면서산에서사냥하고또는강에서물고기잡이를병행한것으로짐작된다. 그리고집에서갈돌과갈판을이용하여낟알을갈고, 숫돌로간석기를만들면서돌도끼나돌끌을실생활에사용한것으로보인다. 또한옥가공에도관심을가졌다. 4. 먹거리와농경의시작 2012년여름에강원도고성군문암리신석기시대유적에서한국선사고고학계를흥분시킨놀라운소식을보내왔다. 지금부터 5000년전의밭유적을찾은것이다. 한반도에서신석기시대중기부터밭을일구어조와기장을재배한것이다. 한국사에서최소한신석기시대중기부터농사를지었다는점을새롭게인식하게만든것이다. 개인적으로는이미 1984년에발표한논문에서 ʻ한반도에서늦어도신석기시대중기부터농사를지었다ʼ고주장한바있다. 32 서울역사강좌
39 < 사진 9> 고성문암리밭유적전경 서울지역은과연어떠할까? 아직까지도신석기시대에농사를지었다는자료는나오지않고있는실정이다. 하지만암사동유적을중심으로발굴자료를다시해석해보고한강유역의다른유적의사례를참고할필요가있다. 암사동유적에서신석기시대사람들이취한먹거리종류를알수있는구체적인자료로서불에탄도토리와새뼈가있다. 이것은주변의가까운구릉지대에서주워왔거나잡아온것임을알수있다. 그리고출토한석기들에근거하여야산에서사냥한들짐승과강에서그물을이용하여잡은물고기가좋은먹거리였을것이다. 발굴자료에의거할진대, 암사동에서살았던신석기시대사람들의먹거리로는농사문제에대하여더이상거론할수없다. 다만암사동유적에서나온석기류에서실마리를찾아야할것이다. 암사동유적에서반달돌칼, 돌괭이, 돌보습, 돌낫같이농사와연관되는여러가지연모들이나왔다는것은매우흥미있다. 돌괭이는 10호움집터 (5,510±110 B.P., 실제연대 4,490~4,330 B.C.) 선사시대살았던서울지역사람들 33
40 에서, 그리고돌보습과돌낫이 4호움집터 (4,730±200 B.P., 실제연대 3,740~3,270 B.C.) 에서출토되었다. 이것은암사동유적에서신석기중기이전부터사람들이농사를지었을가능성을말해주는것이다. 아울러암사동유적에는시기를달리하면서지은신석기시대움집터가한강가를따라약 500채이상있던것으로보기도한다. 암사동유적이이같이대규모의취락유적이라면 아무리시기를달리하는집터라할지라도 당시사람들의식량조달이문제된다. 과연도토리를따고사냥과고기잡이 ( 그물이용 ) 만하여서식량문제를해결할수있었는지가의심스럽다. 이러한측면에서도암사동유적에서원시단계이나마신석기시대중기이전부터의농경문제가설정되어야하는것이다. 암사동유적보다한강하류에있는유적에서신석기시대사람들이이용한먹거리로확인된것은조류나물고기를비롯한야생동물과함께도토리, 가래, 사과같은식물열매나과실그리고볍씨가있다. 그중에서볍씨에주목할필요가있다. 출토된볍씨는단립형 (Oriza sativa japonica) 으로한강하류지역인김포가현리유적 (4,020±25BP) 과일산지역 (4,330± 80BP) 의유적에서나왔다. 이것은늦어도 4,000년전이전에한강유역에서벼농사가이루어졌음을말해주는매우중요한단서이다. 강화도근처의우도에서는장립형 (Oriza sativa indica) 의볍씨가찍혀있는빗살무늬토기파편이발견되기도하였다. 이와같은자료도신석기시대에암사동지역에살았던사람들이농사를지었을까하는궁금증에시사하는바가매우크다. 청동기시대에서울지역에서살았던사람들이농사를지었다하는점은재론의여지가없다. 앞에서농사와연관된석기류를언급하면서그문제에대해논한바있다. 다만당시의농경에대하여구체적으로알수없을뿐이다. 따라서한강유역의다른유적에서밝혀진연구결과로서울지역에서의청동기시대농사문제를유추해볼수있겠다. 34 서울역사강좌
41 청동기시대에한강유역의다른곳에서는벼농사를비롯한잡곡농사를지었음이밝혀졌다. 여주흔암리유적에서는 3,000년전에쌀과보리, 조, 수수를생산하였다. 하남미사동유적이나광주궁뜰유적, 양평양근리유적, 일산지역, 춘천중도유적에서는식량생산과관련한낟알자국이남아있는민무늬토기의밑부분을찾았다. 더욱이최근에춘천천전리유적에서는대규모의청동기시대의마을유적과함께논유적및밭유적을발견하였다. 이러한자료를통하여서울지역에살았던청동기시대사람들도벼농사를비롯하여농사를짓고생활하였음을짐작해본다. 5. 맺음말 선사시대에서울지역에서살았던사람들의생활모습을구체적으로그리기는아직어려움이많다. 서울의면적에비해이시기에관한자료가매우부족하기때문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서울의강동지역에서는구석기시대이래신석기시대와청동기시대로이어지는선사시대유적이발굴되어이지역이당시사람들에게삶을위해중요하게인식되었음을알수있다. 유적들이대부분한강변과그지류가까이에분포하고있어서울지역에서도선사시대사람들은큰강과그주변이그들에게중요한생활터전이었음을새삼스러이일깨워준다. 따라서신석기시대이래지속적으로살아가면서궁극적으로해결해야할식량생산문제에도커다란관심을가졌을것이다. 그러므로서울지역에서도일찍부터농경문화가이루어졌던것으로짐작된다. 당시의농경은쌀농사를비롯한잡곡을재배하는혼합경작이이루어졌을것이다. 그시작은늦어도신석기시대중기이후일것이라생각된다. 그리고서울지역의선사시대사람들특히청동기시대사람들은한강변여 선사시대살았던서울지역사람들 35
42 러곳에서무리를지어집을짓고농사를지으며미래에대한꿈을키워갔다. 그꿈은선사시대사람들이국가를만들고자한것이다. 선사시대부터이지역에서이루어진사람들의삶의연속은그후한강하류지역에마한세력 ( 예 : 김포운양동유적 ) 이등장하거나백제가건국하는데중요한바탕이되었던것이다. 36 서울역사강좌
43 제 3 강좌 한국사의기원과국가형성, 그리고서울 - 한국교원대학교송호정 1. 고조선의발전과국가형성 2. 고조선 - 한전쟁 3. 고조선의후기문화와한강유역
44
45 1. 고조선의발전과국가형성 1) 고조선의국가형성 요령지역 ( 遼寧地域 ) 은중국의전국시대 ( 戰國時代 ) 를지나면서연 ( 燕 ) 으로대표되는중국세력이진출함에따라중국문화의영향을많이받게되었다. 중국의선진문물이전수되고토착청동단검문화가움무덤과철기를사용하는문화로변화하게된다. 기원전 4~3세기를전후하여고조선사회가독창적인세형동검문화와철기문화를주도하게되는것은중국이라는외부의영향을생각하지않을수없다. 중국과의교역을통한교섭이라든가유망민을통해전국시대철기문화와움무덤에대한지식을얻은것이하나의요인으로작용했을것이다. 그러나고조선사회에선진적철기문화가확산되는데에는이러한외적인요인외에선진문화를받아들일수있는내적인조건을갖추고있었다는점에도주목해야한다. 한반도서북부지역에서는고조선의준 ( 準 ) 왕조가지속되는동안진 ( 秦 ) 한 ( 漢 ) 교체기의철기문화를받아들임으로써초기철기시대로접어들게되었다. 서북한지역에는기원전 4~3세기무렵부터거대한마을을이루고토성까지축조하는독자적인지역집단이성장하고있었고, 대동강유역에서는주조철부와세형동검을지닌지배자가집중하여나타났던것으로보인다. 고고학상으로움무덤을조영하는기원전 4세기평양상리유적 ( 주조철부, 경에이르면이른바세형동검문화가새로이성장세형동검, 수레부속구 ) 한국사의기원과국가형성, 그리고서울 39
46 하고, 이를바탕으로고조선은일정지역을중심으로지역집단들을통합하고중앙부족밑으로편제하여나갔던것으로보인다. 기원전 5~4세기당시고조선은비록소국연맹 ( 小國聯盟 ) 상태에있었지만국가로서의특성을어느정도갖추었다고볼수있다. 물론기원전 4세기당시에는국가 ( 國家 ) 가되기위한기본요소들은갖추었지만, 본격적인의미에서중앙집권적인고대국가 ( 古代國家 ) 단계에이르렀다고는말하기어렵다. 1) 기원전 4세기당시고조선에는 ʻ왕 ( 王 )ʼ이존재하고있었고, 전쟁등국가의중대사를왕과함께논의하는대부 ( 大夫 ) 2) 라는관직도보인다. 진 한시대의대부직책은국가가논의해야할문제를취급하던관직이었으므로, 3) 국왕에대해충고한고조선의대부는나라의중요한문제들에대해왕에게직접충고할수있는직위를가진관리였다고보인다. 당시 ʻ조선후국 ( 朝鮮侯國 )ʼ의왕은주변에산재한지역집단의연맹장이라는직책을수행하면서, 전문적인관리가필요했던만큼미숙한관료체계를마련하였던것이다. 그러나고조선의관직은이후시기인위만단계에서도모든관직을 ʻ상 ( 相 )ʼ이라부를정도로분화되어있지않은점으로보아조선후가존재할당시의관직도분화되지않은초기적인모습이었을것으로보인다. 대부로표현되는왕의보좌역할을하는직위정도가있었다고보면틀림없을것이다. 중국의경대부제도가실시되는상황과관련지어볼때고조선의관직체계가발달했다고보는것에는미흡한면이많다. 1) 기원전 4세기말단계까지고조선에는일반적으로국가 ( 國家 ) 의구성요소라고할수있는관직 ( 官職 ) 및행정체계의모습이나지배권력의확립, 상비군 ( 常備軍 ), 법률 ( 法律 ) 등의존재 ( 엥겔스 김대웅번역, 가족사유재산및국가의기원, 한울, 1984) 가대단히미약한수준으로존재한것으로보이며, 그영역또한명확히설정하기가어렵다. 2) ʻ대부 ( 大夫 )ʼ는원래주 ( 周 ) 나라의관등으로그밑에는 ʻ사 ( 士 )ʼ가있었고, 위로는 ʻ경 ( 卿 )ʼ이위치한고급관리였다. 진 ( 秦 ) 한 ( 漢 ) 시대의대부는국가가논의해야할중요한문제를취급하던관직이었다. 3) 陶希聖, 中國政治制度史 第二冊秦漢, 啓業書局, 1962, 78~88 쪽 ; 徐連達編, 中國歷代官制詞典, 1991, 54쪽. 40 서울역사강좌
47 연맹 ( 聯盟 ) 단계에서는아직정치권력을배경으로하는지배 복속관계라든가또는각지역의세력집단이나소국전역을포괄하는단일한결속체를상정하기는어렵다. 고조선의경우도기원전 5~4세기경에는중국에서이른바 ʻ조선후국 ( 朝鮮侯國 )ʼ이라부르는정치권력이맹주가되어그주변에위치한예맥 ( 濊貊 ) 진번 ( 眞番 ) 임둔 ( 臨屯 ) 등소국 ( 小國 ) 세력에대해일정한영향력을행사하는단계에있었다. 정백동나무곽무덤중국에서전국시대 ( 戰國時代 ) 제후국 ( 諸侯國 ) 의성장과관련지어볼때고조선이기원전 4세기에 ʻ왕 ( 王 )ʼ을칭 ( 稱 ) 한사실은고조선지배권력의성장에따라그에상응하는권위가필요하여취해진조치로볼수있다. 여러지역집단들과계층으로분열되어있던고조선은계속되는중국의동진세력과대립관계가조성되면서점차국왕을정점으로전지역을포괄하는지배체제가정비되었고중앙정부의통제력이강화되어갔다. 왕권이부왕 ( 否王 ) 에서준왕 ( 準王 ) 으로계승되는것을볼때왕위계승이비교적안정적이었다고할수있다. 준왕이위만 ( 衛滿 ) 에게고조선서쪽지역에대한통치를맡기고박사 ( 博士 ) 직위를내린것을보면대외적으로도일정한집권력이있었다고보인다. 고조선후기단계인위만조선의도읍지왕검성은대동강유역에있었음이분명하다. 그것은한대 ( 漢代 ) 이후낙랑군의유물이집중하여나오고고조선의한국식동검문화가집중분포하는곳이바로대동강유역이기때문이다. 다만그고조선이언제국가를형성했는지는더논의가필요하다. 움무덤을조영하는단계에이르면이른바세형동검문화가새로이성장하고이를바탕으로고조선은일정지역을중심으로지역공동체세력들이통합되고중앙부족에게편제되어나갔음을엿볼수있다. 이지역에중심수도가건설되 한국사의기원과국가형성, 그리고서울 41
48 었으며, 고조선의수도왕검성의위치는자연대동강유역에서찾아져야할것 이다. 나아가지배권력의확립과일정한지역에대한통제권을확립한단계야 말로고대국가의기본적인모습을보여주는것이아닌가생각한다. 2) 연 ( 燕 ) 의동방진출과고조선의약화 삼국지 동이전한조 ( 韓條 ) 에인용된 위략 ( 魏略 ) 기록에는고조선이연나라장수진개 ( 秦開 ) 에의해서쪽땅 2,000여리를빼앗기고세력이위축되었다고나온다. 4) 이기록을두고대부분의학자들은기원전 300년경에요하를경계로고조선 ( 古朝鮮 ) 과연 ( 燕 ) 나라가무력충돌한것으로해석한다. 특히당시고조선은요서 ( 遼西 ) 지역에진출해있었는데, 이고조선을동쪽으로밀어내고요동반도서부지역일대인만번한 ( 滿番汗 ) 을중국한나라와경계로했다고보았다. 그러나당시요하서쪽에는동호 ( 東胡 ) 로표현되는오랑캐들이거주하고있었기때문에고조선서쪽땅 2,000여리를있는그대로받아들이기는어렵다. 고조선과연사이에긴장이높아갈즈음내몽고자치구방면에서는동호 ( 東胡 ) 가성장하고있었다. 사기 흉노열전에따르면전국시대부터한대에이르기까지요서지역에서동호가성장하고있었는데, 이들이더이상커지는것을막고자장수진개를시켜 1,000여리의땅을빼앗고동호를북쪽으로축출하였다. 5) 중국동북지방에서동호가사라진뒤중국의군현세력과맞서요령지역에서힘을키웠던나라는바로 ʻ조선후국 ( 朝鮮侯國 )ʼ6) 이었다. 요하동쪽과한반도서 4) 삼국지 위서동이전한조 ʻʻ 昔箕子之後朝鮮侯見周衰燕自尊爲王欲東略地朝鮮侯亦自稱爲王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大夫禮諫之乃止使禮而說燕燕止之不功後子孫稍驕虐燕乃見將秦開功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番汗爲界朝鮮遂弱及秦幷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 ʼʼ. 5) 사기 흉노열전 ʻʻ 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ʼʼ. 6) 여기서 ʻ조선후국 ( 朝鮮侯國 )ʼ이란기원전 4세기말 ~3세기초 ʻ조선 ( 朝鮮 )ʼ이 ʻ왕 ( 王 )ʼ을칭할때그전에는 ʻ조선후 ( 朝鮮侯 )ʼ라칭했다는 위략 ( 魏略 ) 의기록에근거하여조선이王을칭하고일차적인성장을이루기전의중국연 ( 燕 ) 에의해후국 ( 侯國 ) 으로불린단계를조선후국 ( 朝鮮侯國 ) 이라부른다. 42 서울역사강좌
49 북부지역의농업에유리한조건을바탕으로청동기문화를발전시키던조선후국은기원전 4세기무렵, 즉전국시대중기가되면중국선진문화의영향을받아성장을지속하고그성장된세력을바탕으로중국연나라와대립하게되었다. 고조선초기인기원전천년기전반에는고조선의힘이미약하고중국세력의동방진출도시도되지않았으므로고조선과중국간에는대규모무력충돌이없었다. 따라서중국기록에서는제 ( 齊 ) 나라와무역하는동쪽지역의나라로 ʻ조선 ( 朝鮮 )ʼ만이간략히언급되고있다. 그러나전국시기에들어오면 ʻ조기원전 2~3세기고조선의영역범위선후 ( 朝鮮侯 )ʼ가존재했고그가성장하여 ʻ왕 ( 王 )ʼ을칭했다고기록하고있다. 이것은기원전 4세기경부터조선후국의세력이성장하여중국연 ( 燕 ) 과대등한정도가되었다는표현이다. 계속되는기록에서조선이연을치겠다는표현은일정정도병력을동원할수있는중앙정부의세력으로성장하였음을말해준다. 그리하여기원전 4세기에는중국인들이 ʻʻ교만하고사납다.ʼʼ7) 고기록할정도로조선후의세력이강했다고보인다. 다만기원전 4세기경에고조선이 ʻ왕ʼ 을칭했다고해서고조선의비약적인성장을추측하는것은무리이다. 위략 의저자는바로이시기에요하동쪽에서가장성장한정치세력이 ʻ조선ʼ이었기때문에연과대립하는유일한세력으로 ʻ조선후국ʼ을들었던것이다. ʻ조선후ʼ는기원전 323년에연이스스로왕을칭할때자신도스스로왕을 7) 삼국지 위서동이전한조 ʻʻ 昔箕子之後 後子孫稍驕虐 ʼʼ. 한국사의기원과국가형성, 그리고서울 43
50 칭하고요동지역의예맥 ( 濊貊 ) 거주지역을통제하에넣었고, 아울러서진하여연을공격하려하였다. 연왕과조선후의군대는대체로요하를경계로맞닥뜨리게되었고전쟁은이미피할수없는상황에이르렀다. 8) 위략 의기록에따르면조선왕이연을먼저공격하여자신이주 ( 周 ) 왕실을받들겠다고공언하자고조선의대신가운데대부 ( 大夫 ) 벼슬을가진예 ( 禮 ) 등이연에대한공격은현실적으로커다란손실을초래할것이라는점을들어반대하였다. 대신사신을파견해연과화친관계를유지하고자했다. 고조선의왕은대외적으로는선제공격을주장했지만, 수십만대군을거느리고고조선에대한공격태세를갖춘연을공격한다는것은사실상무리였다. 이러한상황에서고조선왕은굳이무리할필요는없었다. 고조선왕은이를고려해예 ( 禮 ) 의조언을받아들여연에대해화친정책을펴기로했다. 고조선왕은대부예를연나라에사절로파견했다. 예는연왕을만나고조선이먼저공격하지않을것이니연도고조선에대한침공을취소하라고요구했다. 고조선의국가적성장을알고있던연으로서도이러한제안은반가운일이었을것이다. 더욱이서쪽의조 ( 趙 ) 와남쪽의제 ( 齊 ) 를의식해야하는상황에서동방원정은후방의위협을자초할수있었다. 이를고려한연왕은고조선의제안을받아들였다. 연은동방원정준비를중단했고, 고조선도선제공격준비를취소했다. 이후양세력간에는평화관계가지속되었다. 연의침공을차단하고왕국의길로들어선고조선은요동과한반도북부지역에대한지배를더욱강화할수있었다. 이를바탕으로고조선은다시독자정책을펴기시작했다. 이러한정책은다음왕대까지이어졌다. 연은고조선의번영과독자정책을점점 ʻ교만하고포악한ʼ 행위로받아들이기시작했다. 이는두세력의대립을새로운차원으로증폭시키고있었다. 8) 삼국지 위서동이전한조 ʻʻ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潘汗爲界 ʼʼ. 44 서울역사강좌
51 연의장수진개는동호와싸워승리한위세를타고동진하여기원전 3세기초에고조선을공격하여승리하였다. 9) 조선후의세력은연군의타격을받아영토가축소되고그국가적인위상또한쇠락하게되었다. 10) 이후연과고조선은만번한 ( 滿番汗 ) 을경계로하게되었다. 만번한은옛요동군의문현 ( 汶縣 ) 과번한현 ( 潘汗縣 ) 으로, 오늘 고조선의각종철기 고조선의무기 ( 세형동검 ) 날의개주시 ( 蓋州市 ) 와그주변지역, 즉천산산맥서남쪽에해당한다. 연은진 개의침공으로고조선서쪽의 2,000여리를빼앗았다. 그러나이범위는있는 그대로거리로계산해서는안된다. 아마도고조선서쪽땅상당부분을빼앗 았다는의미로받아들여야한다. 요서일대에는동호가있었고, 이들로부터빼 앗은땅만해도 1,000여리가되기때문이다. 따라서진개가실제로정복한범 위는요하 ( 遼河 ) 부터천산산맥 ( 千山山脈 ) 일대로보인다. 고조선과연의전쟁은대외정책을둘러싸고발생했고, 실질적으로요동 ( 遼 東 ) 을사이에두고다투었던전쟁이었다고할수있다. 전쟁의결과고조선은 요동땅을상실함으로써기존의강성했던위상에적지않은타격을받게되었다. 고조선은연에게자기영토의서부지역을내주었으나나머지세력은잘지 켜낼수있었다. 연의압박은고조선내여러세력의단결을요구했다. 이는 왕검성의지배세력이지방세력에대한통제를강화하는계기로작용했다. 한편 진개의침공으로연과고조선이요동반도에대치한것은향후오랜세월동안 중국세력과한민족이요동을놓고격돌하는역사적배경을제공하게되었다. 9) 사기 조선열전 ʻʻ 自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爲置吏築障塞 ʼʼ. 10) 삼국지 위서동이전한조 ʻʻ 燕乃遣將秦開功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潘汗爲界朝鮮遂弱 ʼʼ. 한국사의기원과국가형성, 그리고서울 45
52 2. 고조선 - 한전쟁 1) 전쟁발발의국제적배경기원전 128년에예군남려 ( 濊君南閭 ) 가우거 ( 右渠 ) 의지배에서벗어나 28만구 ( 萬口 ) 를거느리고한 ( 漢 ) 의요동군 ( 遼東郡 ) 에내속 ( 內屬 ) 하였기때문에무제 ( 武帝 ) 는그땅을창해군 ( 蒼海郡 ) 으로하였다. 11) 이군 ( 郡 ) 은 2년만에폐지되지만예군남려의내속 ( 內屬 ) 은한 ( 漢 ) 과조선 ( 朝鮮 ) 의관계를악화시켰음에틀림없다. 그후흉노 ( 匈奴 ) 의왼팔 ( 左臂 ) 을단절할목적으로기원전 109년 ( 元封 2) 에무제는조선을침공하여멸망시키고그땅에 ʻ군 ( 郡 )ʼ을두었다. 12) 위만은혜제 ( 惠帝 ) 여후 ( 呂后 ) 시기에요동태수의중개에의해한 ( 漢 ) 의외신 ( 外臣 ) 이되었다. 외신이된조건은새외 ( 塞外 ) 의만이 ( 蠻夷 ) 에대한수비를하고중국의변경을침범하지않도록하는것이었다. 나아가만이의군장이중국의천자에게알현하려고할경우그것을방해하지못하게하는것이었다. 그러나위만의손자우거왕 ( 右渠王 ) 대에이르러주위의국가들이중국의천자에게알현하려고하는것을방해하고, 또중국으로부터의망명자가상당수조선땅으로들어가게되었다. 이러한상황에서한 ( 漢 ) 무제 ( 武帝 ) 는섭하 ( 涉何 ) 를파견하여우거왕에게외신 ( 外臣 ) 으로서의의무를다할것을요구하지만우거는응하지않았다. 섭하는돌아가는길에조선의비왕 ( 裨王 ) 장 ( 長 ) 을죽이고국경안으로도망하였는데, 무제는섭하를 ʻ요동동부도위 ( 遼東東部都尉 )ʼ에임명하였다. 조선에서는섭하를원망하여, 병사를보내섭하를죽이기에이른다. 이것이 사기 ( 史記 ) 조선열전에전하는조선출병의원인이다. 한사군설치로인해한 ( 漢 ) 무제 ( 武帝 ) 는동방에서위만조선 ( 衛滿朝鮮 ) 의위협 11) 후한서 권 85, 동이예전 ʻʻ 濊君南閭等畔右渠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武帝以其地爲蒼海郡 ʼʼ. 12) 사기 권 115, 조선열전 ʻʻ 天子募罪人擊朝鮮 誅成己以故遂定朝鮮 ʼʼ. 46 서울역사강좌
53 을제거할수있었고, 또한북쪽으로흉노와연합할수있는위험을사전에제거할수있었다. 한 ( 漢 ) 의서역 ( 西域 ) 진출이일면에서흉노의오른팔을끊었던것같이, 동방고조선지역으로진출한것은흉노 ( 匈奴 ) 의왼팔 ( 左臂 ) 을끊는다는목적을지니고있었다. 13) 이러한의미에서볼때한무제의위만조선정벌과한군현설치는동방에서흉노의세력을견제하고고립시키는원대한전략의일환이었다고할수있다. 한 ( 漢 ) 은한사군 ( 漢四郡 ) 을설치하여이전위만 ( 衛滿 ) 에게부여한외신 ( 外臣 ) 의역할보다더강력하게중국동북지역의만이 ( 蠻夷 ) 세력을군현제 ( 郡縣制 ) 하에묶어두고통치를하려고했다. 한 ( 漢 ) 은낙랑 ( 樂浪 ) 을통하여주변의여러정치세력에대한통제를원하였고, 교역 ( 交易 ) 의이익을얻으려하였던점은분명하다. 군현 ( 郡縣 ) 의영역밖으로부터필요한생산품을얻어내기위하여군현 ( 郡縣 ) 은한 ( 韓 ) 예 ( 濊 ) 의거수들에게관작 ( 官爵 ) 인수 ( 印綬 ) 의책 ( 衣幘 ) 등을주어그들과조공관계를맺기도하였다. 이를두고삼한과낙랑의관계를조공무역 ( 朝貢貿易 ) 으로해석하는견해도제기되어있다. 고조선 ( 古朝鮮 ) 과한 ( 漢 ) 의전쟁과정을보면양자의전쟁은필연적인결과로볼수있다. 고조선은주변소국들이중국과교류하는것을통제 독점함으로써부를쌓고국력을강화해갔다. 고조선의우거왕은중간무역의이익을독점하기위해한강이남에있는진국 ( 辰國 ) 등여러나라가한 ( 漢 ) 과직접통교하는것을막았다. 14) 이같은고조선의행동은한 ( 漢 ) 과위만 ( 衛滿 ) 사이에맺은이른바 ʻ외신 ( 外臣 )ʼ의규정에는어긋나므로한 ( 漢 ) 을자극하였을것이다. 한 ( 漢 ) 무제 ( 武帝 ) 이후, 조선과한의충돌은조선왕조가중국의정책대로움직이지않고독자적성장을지속하는한필연적으로일어날수밖에없는사건 13) 한서 권 73, 위현전 3126 ʻʻ 東伐朝鮮起玄菟樂浪以斷匈奴之左臂西伐大宛三十六國結烏 孫起敦煌酒泉張掖以鬲婼羌裂匈奴之右肩 ʼʼ. 14) 사기 권 115, 조선열전 ʻʻ 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又擁閼不通 ʼʼ. 한국사의기원과국가형성, 그리고서울 47
54 이었다고보인다. 한은고조선과흉노의연결가능성을차단하고, 한반도와만 주지역을제압하고자전쟁이라는수단을택한것이다. 2) 왕검성전투와고조선의멸망 15) 한나라의지배자인무제는흉노와손을잡으려는고조선의움직임을끊고자섭하 ( 涉何 ) 를사신으로보냈다. 그러나고조선은한나라의뜻을따르지않겠다고섭하의요구를거절했다. 성과없이귀국길에오른섭하는배웅나온고조선장수 ʻ장 ( 長 )ʼ을살해하고패수 ( 浿水 : 고조선과한의경계를이루었다는강, 지금의청천강또는압록강 ) 을넘어도망쳤다. 한무제는돌아온섭하에게 ʻ요동군동부도위 ( 遼東郡東部都尉 )ʼ라는벼슬을내렸다. 그것은바로고조선을마주보는요동 ( 遼東 ) 땅의군사책임자자리였다. 이에분노한고조선의마지막왕우거 ( 右渠 ) 는군사를동원해섭하를살해하였다. 이사건을계기로고조선과한의관계는극도로나빠진다. 한나라무제는정벌군을조직했고, 서기전 109년가을, 육지와바다양쪽에서대대적으로고조선을공격하였다. 한나라의누선장군양복 ( 楊僕 ) 은 7,000명에이르는수군 ( 水軍 ) 병력을이끌고산둥반도에서고조선의수도왕검성 ( 王儉城 ) 을향했고, 흉노를정벌한공이있는좌장군순체 ( 荀彘 ) 는 5만의육군을이끌고공격에나섰다. 그러나고조선은험한곳에군사를배치하여첫싸움에서대승을거두었다. 싸움이불리해지자한무제는위산 ( 衛山 ) 을사신으로보내협상을하려했다. 한편고조선에서도잠시여유를얻기위해거짓으로위산에게항복하는척하였다. 16) 우거왕은태자에게말 5,000필과양식을가지고한나라군대에가서사죄하 15) 이하의내용은 사기 조선열전의전쟁기록을바탕으로복원한것이다. 16) 사기 조선열전 ʻʻ 使衛山諭降右渠右渠遣太子山使不能剸決與左將軍計相誤卒沮約今兩將 圍城又乖異離以故久不決 ʼʼ. 48 서울역사강좌
55 도록했다. 태자가이끄는고조선사람만여명이군량미와무기를가지고막패수 ( 浿水 ) 를건너려고할때, 한의사신위산과순체는그들이변을일으킬까두려워고조선태자에게사람들에게병기를버릴것을명하도록했으나고조선의태자도역시위산과순체가자기를속이고죽일까의심하여결국패수를건너지않고, 사람들을이끌고되돌아가버렸다. 협상은결렬되고말았다. 위산이한나라황제에게돌아가이러한사실을보고하니, 황제는화가나서위산의목을베어버렸다. 그뒤왕검성부근까지쳐들어온한나라군대는왕검성을포위했으나, 고조선의완강한저항앞에별반성과를얻지못했다. 게다가한나라군의두지휘관, 곧순체와양복의사이가나빠지기시작했다. 좌장군순체는한에서다시보낸사신공손수 ( 公孫遂 ) 와상의하여양복을잡아가두고, 군대를합쳐새로운기세로맹렬히왕검성을공격했다. 첫머리에크게진적이있는데다가고조선의항전이완강하여시간을오래끌게되자, 한나라는정면대결을하면서동시에고조선의지배층을매수, 분열시키는방법을택했다. 한편왕검성안에서는너무오래동안포위당한채있게되자, 한나라와화해하자고주장하는세력과평양청암리토성 ( 왕검성으로추정 ) 끝까지싸우자는세력이나뉘어져대립하였다. 처음누선장군양복에게항복하려고했던고조선의대신들은누선장군이갇히고좌장군이계속공격해오자, 맞서싸우기두려워항복하고자했다. 그러나우거왕은끝내항복하려하지않았다. 그과정에서상 ( 相 ) 노인 ( 路人 ) 과한음 ( 韓陰 ), 니계라는지방출신인상 ( 相 ) 참 ( 參 ), 장군 ( 將軍 ) 왕협 ( 王俠 ) 은도망해한나라군대에항복했다. 그가운데노인은항복하러가는도중에죽었으나, 상 ( 相 ) 참 ( 參 ) 은사람을보내우거왕을살해하 한국사의기원과국가형성, 그리고서울 49
56 고결국한나라에투항했다. 왕자인장 ( 長 ) 까지투항했으나왕검성 ( 王儉城 ) 은아직함락되지않았다. 고조선의대신성기 ( 成己 ) 가성안의백성을지휘하여끝까지항전했기때문이다. 그러자장과노인의아들최는백성을선동하여성기를살해하고말았다. 이리하여마침내왕검성은함락되고고조선은멸망했다. 서기전 108년여름의일이었다. 동북아시아의강력한국가고조선은이렇게무너지고말았지만, 그정신과전통은고구려및백제, 신라로이어지게된다. 한편, 한은고조선땅에 4곳의 ʻ군 ( 郡 )ʼ을두었다. 그러나낙랑 ( 樂浪 ), 임둔 ( 臨屯 ), 진번 ( 眞番 ), 현도 ( 玄菟 ) 4개군중 3개군은얼마지나지않아폐지되었고, 낙랑군 ( 樂浪郡 ) 은우여곡절을겪으며존속하다가서기 313년에고구려에완전히흡수되었다. 설치된시기부터멸망시까지여러변화가있었고그존속기간이 400년이넘는긴시간에걸쳐있었기때문에한군현 ( 漢郡縣 ) 의역사는우리역사와밀접한관련을맺었다. 고조선과한과의전쟁 50 서울역사강좌
57 3. 고조선의후기문화와한강유역 한강유역, 특히서울등한강하류지역에서는단면원형점토대토기, 흑색마연장경호및세형동검등의세형동검기전기에해당하는유적이나유물들이다수확인된다. 그러나단면삼각형점토대토기, 주조철기등의준왕 ( 準王 ) 고조선과관련된초기철기유물, 유적및다량의단조철제무기류를수반하는위만조선관련초기철기유적유물은결여되어있다. 그후의낙랑관련한대 ( 漢代 ) 의발달된철기문화만이비로소한강유역에출현하고있는데, 이는한강의원삼국시대 ( 삼국시대초기 ) 에해당된다. 한강유역은세형동검전기이후정체성을강하게지니고있는일종의문화주변지역적인성격을띠고있음을확인할수있다. 한강유역특히, 서울일비롯한한강하류지역의이러한주변적성격이백제건국세력이이지역에쉽게정착할수있었던배경으로작용하였다고보기도한다 ( 박순발 ). 문헌상으로는 사기 조선열전과 한서 조선열전에의하면기원전 2세기경까지한반도중남부지역은 ʻ진국 ( 辰國 )ʼ 또는 ʻ중국 ( 衆國 )ʼ으로만기록되었다. 구체적인한 ( 韓 ) 소국의활동기사가나타나는것은서기 1세기초엽의것이가장오래된것이다. 삼국지 와 후한서 의기록에의하면진한 ( 辰韓 ) 또는삼한 ( 三韓 ) 모두가이진국으로부터발전된것으로되어있다. 그런데 사기 의판본이 ʻ중국 ( 衆國 )ʼ 이외에 ʻ진국 ( 辰國 )ʼ으로기록된것이있다는사실이알려진이래 ʻ진국 ( 辰國 )ʼ 자체에대한논쟁이제기되고, 진국과삼한의발전관계에대해서도서로다른견해들이제기되었다. 진국이존속했던 2세기의중남부지역에세형동검문화가발달했던점과 ʻ진왕 ( 辰王 )ʼ이마한에서나왔던점에주목하여진국의지리적위치를충청남도와전라도지역일대로비정하는논자가많다. 진국 ( 辰國 ) 의위치는 사기 나 한서 의기록에근거해보면, 진번고지인황해도근처의한강하류지역에비정될가능성이높다고하겠다. 한국사의기원과국가형성, 그리고서울 51
58 그런데 5세기에편찬된 후한서 ( 後漢書 ) 에는진국이삼한전부의전신이라고하며, 마치진국이삼한고지전역에걸쳐있었던것처럼기록되어있다. 이기록을근거로진국의범위를한강이남전역으로보기도하였다. 또, 사기 조선열전에상벼슬을하던역계경은우거왕이한나라를막기위한자신의계책을받아들이지않자, 2000여호 ( 戶 ) 를이끌고한반도남쪽에있었다는 ʻ진국 ( 辰國 )ʼ으로망명했다고한다. 이때진국 ( 辰國 ) 을중국 ( 衆國 ) 으로해석할수도있지만기록자체의신빙성을두고볼때한강이남의지역으로볼가능성도높다. 52 서울역사강좌
59 제 4 강좌 백제이전마한사회를 들여다보다. - 충남대학교박순발 1. 머리말 2. 마한의시간적공간적범위 3. 마한사회의변천
60
61 1. 머리말 마한 ( 馬韓 ) 이라하면얼핏백제가연상될정도로백제와마한은불가분의밀접한관계에있다. 그러한까닭으로마한은그자체로인식되기보다는백제의국가성장과정과관련하여점차잠식 소멸되었던역사적실체로거론되는경우가많다. 그러나마한은한반도의역사전개상선사시대와역사시대를연결하는초기철기시대및원삼국시대는물론이고, 삼국시대에들어와서도그모습이문헌사료에나타나고있어단순히백제와의연관속에서만이해되고말것은아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마한의모습은좀체명료하게드러나지않은채그존속의시간적공간적범위만이어렴풋하게그려지고있다. 사실마한이라는명칭의의미가구체적으로무엇을가리키는지에대해서도학계의의견이완전히모아지지않았으며, 그에따라그시간적공간적위치비정에있어서도유동성이완전히가시지않았다. 마한이라는이름은문헌사료에등장하는역사적실체이므로관련문헌사료가충실하거나또는그에대응하는고고학적연구가높은해상력을가질정도로명료하지않는한이와같은상태를돌파하기는쉽지않다. 본고에서는그간의연구성과를취합하여대략적인마한의시간적공간적범위를설정한다음, 최근까지알려진고고학자료를통해마한사회의변천과정을묘사해보고자한다. 2. 마한의시간적공간적범위 문헌사료에의하면마한은한 ( 韓 ) 의일종으로서그위치는위만조선 ( 衛滿朝鮮 ) 백제이전마한사회를들여다보다. 55
62 의남쪽 1) 혹은대방 ( 帶方 ) 의남쪽에있었다. 한초 ( 漢初 ) 에고조선의준왕 ( 準王 ) 에게귀부하여거짓으로조선의번병 ( 藩屛 ) 자임하던위만에의해기원전 194~ 180년사이의어느시점 2) 에왕위를빼앗긴뒤좌우궁인 ( 宮人 ) 혹은수천인을데리고바닷길을이용해한의땅에이르러왕이되었다고한다. 3) 기원전 2세기초이전에이미황해도이남의한반도남부지역은 ʻ한ʼ 혹은 ʻ마한ʼ으로불리고있었다고하겠다. 한편, 위만조선의마지막왕인우거 ( 右渠 ) 재위시절고조선의남쪽에는진번 ( 眞番 ) 및그곁에진국 ( 辰國 ) 이라불리던정치체도있었다 4). 진번은위만조선멸망후한이설치하는 4군가운데하나로서지금의황해도지역에위치한것으로보는것이일반적이므로그곁에있었던진국의위치는한강유역일원에비정가능하다. 진국과한혹은마한의관계에대해서는문헌사료에따라차이가있어, 삼국지 동이전한조 ( 韓條 ) 에의하면진한 ( 辰韓 ) 만이진국의후신으로인식하고있는데반해 후한서 동이전한조에는마한 진한 변진 ( 弁辰 ) 이모두진국의후신으로표현되어있다 5). 전자에따르면한혹은마한과진국은 1) 1 韓在帶方之南, ( 中略 ) 有三種, 一曰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辰韓者, 古之辰國也. 2 侯準 ( 中略 ), 爲燕亡人衛滿所攻奪,,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 이상 三國志 魏書東夷傳韓條 ). 2) 한 ( 漢 ) 여후 ( 呂后 ) 집정기 ( 기원전 194~180 년 ) 에이성 ( 異姓 ) 제후들을제거할때에연왕 ( 燕王 ) 노관 ( 盧綰 ) 이흉노로망명하는사건이있었고, 이때위만도고조선의준왕에망명해오고이어서왕위를찬탈하였다 ( 삼국지 위서동이전에인용된 위략 ). 3) 1 주1) 의2. 2 朝鮮王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韓王 ( 후한서 동이전한조 ). 4) 眞番傍辰國, 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 사기 조선전 ). 판본에따라서는 ʻ진국 ( 辰國 )ʼ이 ʻ중국 ( 衆國 )ʼ으로되어있으나, 오늘날황해도지역으로비정되는진번남쪽이진국이라는하나의정치체만존재하였다고하기어려우므로그의미상으로는중국, 즉여러정치체가있었던것으로볼수있다는것이일반적인인식이다. 5) 1 韓在帶方之南, ( 中略 ) 有三種, 一曰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辰韓者, 古之辰國也. 2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 中略 ) 皆古之辰國也 ( 후한서 동이전한조 ). 56 서울역사강좌
63 공존한것이되지만, 후자를따르면진국이마한에선행한것이된다. 이상의문헌사료의내용으로만보면위만조선성립이후한강유역이남에는준왕이내려와왕으로군림한정치체, 진국, 그리고마한등이있었던셈이되는데, 이들사이의관계는확실치않다. 이와관련하여다음과같이이해하는견해도있다. 고조선준왕이한지혹은마한의땅에내려와나라를세운것이 ʻ한국 ( 韓國 )ʼ이고, 그무렵진역 ( 秦役 ) 즉진의 6국통합과정에서발생한유이민들이 ʻ한국ʼ에포함되지않았던동쪽의마한인들과잡거하게되는데이들을순수한마한과구분하여진한 ( 秦韓 ) 혹은진한 ( 辰韓 ) 이라불렀다 6). 이들은준왕의 ʻ한국ʼ과독립된정치체를구성하였으므로진국 ( 辰國 ) 이라하였는데, 위만조선멸망이전조선상 ( 朝鮮相 ) 역계경 ( 歷谿卿 ) 등이 2,000여호를대동하고진국으로내려오기도하였다 7). 변한 ( 弁韓 ) 은원래변진 ( 弁辰 ) 으로불렸는데, 고조선지역으로부터남하한것으로추정되는 ʻ변ʼ 족단으로서역시진국에속하였으므로변진이라하였다. 진국의왕인진왕은토착마한인이대대로이어왔는데, 준왕의 ʻ한국ʼ이절멸 ( 絶滅 ) 되자진국의지배자들인마한인이그곳을되찾음으로써 8) 진국은마침내삼한을모두포괄 9) 하게되었다. 그리고진왕은그들의마한연고지에있는목지국 ( 目支國 ) 에도읍하면서삼한전체의왕 10) 이된다는것이다. 이상문헌사료에보이는한또는마한, 삼한, 진국등의관계를일별하였는데, 정리해보면기원전 2세기초위만조선성립및준왕의남하무렵에한강유역이남의남한지역은 ʻ한ʼ의땅으로인식되고있었고한은곧삼한으로나뉘기 6)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삼국지 위서동이전진한조 ) 7)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 삼국지 위서동이전한조인용 위략 ) 8)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辰王.( 후한서 동이전한조 ) 9)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 中略 ) 皆古之辰國也 ( 후한서 동이전한조 ). 10)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후한서 동이전한조 ) 백제이전마한사회를들여다보다. 57
64 전의순수한으로서마한을가리키기도한다. 마한의서쪽에위치한 ʻ한국ʼ이있을때그에소속되지않은한의동쪽지역은진한으로불리게되었으므로마한과진한의구분은기원전 2세기초무렵에시작되었을가능성이있다. 그러나삼한으로세분된시점은현재로서는분명치않으나, 사기 나 한서 에는조선전만입전되어있을뿐삼한에대한내용이없다. 반면에 후한서 및 삼국지 에는삼한에대한내용이자세하게기록되어있어대략기원전 1세기무렵에는한사회가삼한으로구분인식되고있었을가능성이크다. 문헌상에등장하는종족혹은정치체를고고학자료를통해동정 ( 同定 ) 하는것은그리간단하지않다. 일반적으로종족성과같은차이는물질자료의양식 ( 樣式 ) 에반영되는것으로이해되고있다. 양식이란어떤일을하는여러가지가능한것가운데특정한하나의방식이라할수있다. 즉, 동일한기능을수행할수있는구체적인선택방식이다. 그러나, 구체적인물질자료관찰에서무엇이기능과관련된것이고무엇이기능이외의양식과관련된것인지를변별하기는매우어려워특정물질자료의총체적다양성을기능과양식의두부분으로설명가능한것으로만이해할뿐이기도하다. 한편, 그러한양식은특정문화의규범을수동적으로표현하는것이라는관점과, 반대로특정양식을통해존재감을능동적으로나타내는것으로보는관점이양립하고있으나, 어느경우이든특정양식을표방하는집단의내부또는집단사이의사회적 경제적긴장이높을수록양식의차이가뚜렷해지는경향이있다는것이다. 이와같은방법론에입각할때기원전 2세기초무렵 ʻ한ʼ 혹은 ʻ마한ʼ으로인식되고있던역사적실체의고고학적문화내용은점토대토기 ( 粘土帶土器 ) 세형동검 ( 細形銅劍 ) 문화라할수있으며, 한반도지역에서그시작은기원전 300 년무렵이후로이해된다. 새로운문화의전개가곧인간의교체를의미하지는않음은물론이며, 중국동북지역으로부터점토대토기문화인들이일부남하하기는하였으나역시기존의한반도남부지역의청동기문화인들이이들과융합되는과정을거쳐결과적으로점토대토기문화가주류를점하게된것이다. 58 서울역사강좌
65 기원전 300년경에성립된한강유역이남의점토대토기문화를마한의고고학적실체로인정할수있다면마한의시간적범위의상한을이무렵으로설정할수있을것이다. 그렇다면마한의하한은언제로보아야할것인지에대해생각해보기로하자. 이와관련해서도역시문헌사료에대한검토가선행되어야한다. 고고학자료그자체로써는양식의지속성혹은그에서유추되는문화적인연속성만을인지할수있을뿐특정시점의문화내용에대한종족성은인식은불가능하기때문이다. 위에서이미본바와같이 후한서, 삼국지 등에는각기동이전에한조가기록되어있어후한대 ~ 삼국에걸쳐마한이존속하고있음을잘알수있다 11). 후한서에는한의구성을마한 54국, 진한 12국, 변진 12국등으로기록하고있고, 삼국지에는각국의이름도기록하고있다. 삼국지에는동이전이외에도 261년한과예맥이조공하였다는기사 12) 가있다. 여기의한이삼한가운데구체적으로어디인지는분명하지않지만마한이조위 ( 曹魏 ) 본국과원거리직접교섭하였던것으로보는견해도있으며, 몽촌토성출토회유전문도기 ( 灰釉錢文陶器 ) 를그러한원거리교역의흔적으로보기도한다. 그러나, 회유전문도기의분포는중국의장강 ( 長江 ) 중하류지역의동오 ( 東吳 )~ 동진 ( 東晋 ) 시기에성행하고있는것으로서한강유역풍납토성 몽촌토성출토품은동진으로보고있어그입수과정과관련된원거리교섭의실상은그리간단하지는않을것으로보인다. 이에대해서는다시후술할것이다. 진서 ( 晉書 ) 에도마한전이있는데, 그내용은 277~290년사이에 7차례정도서진에견사조공하였다는것이다. 13) 3세기중 후엽에는한강유역의백 11) 후한서는남조의유송 ( 劉宋 ) 때범엽 ( 范曄 ) 이찬한후한대 195년간 (25~219) 의정사 ( 正史 ) 이고, 삼국지는그보다앞선진 ( 晉 ) 의진수 ( 陳壽 ) 가찬한삼국시대 66년간 (220~265) 의정사이다. 후한서의내용은삼국지를답습한것이많아삼한이 78국으로구성되어있던시점은대략 3세기전반 ~ 중엽경의사실로이해된다. 12) ʻʻ 秋七月樂浪外夷韓濊貊各率其屬來朝貢 ʼʼ( 삼국지 위서본기진류왕경원 2년 (261) 조 ) 백제이전마한사회를들여다보다. 59
66 제가국가단계로성장하였으므로그내용은백제와관련된것으로이해하는입장이지배적이다. 한편, 영산강유역의마한정치체로이해되는신미국 ( 新彌國 ) 을비롯한일련의정치체가진에견사조공한사실도있다 14). 마한신미국등역세미부자 20여국이함께견사조헌 ( 遣使朝獻 ) 한시점은진무제의재위연간인 265~289년사이로비정된다. 291년에도동이지역 17국이동이교위부 ( 東夷校尉府 ) 에내부하였다는기록이 15) 있으나, 그가운데마한이포함되어있는지의여부는분명하지않다. 만약마한이포함되어있다면그주도세력은역시한강유역의백제였을가능성이높다. 그러면, 마한을비롯한한반도의정치체들이견사조공한대상지역에대해잠시살펴보기로하자. 대략후한대까지는낙랑 대방등중국의군현이그대상이었으나 3세기후반이후에는군현을거치지않고중국의중앙정부와직접교섭한것으로이해하고있다. 그렇지만이것이곧당시중국왕조들의도성에견사조공한것으로이해하여서는안된다. 외이 ( 外夷 ) 에대한보호, 귀부, 책봉, 그리고공헌및무역등의사무는모두교위부소관으로서한반도를포한한동이지역의경우는동이교위부의관장사항이므로마한이직접견사조공하였던대상지역은동이교위부의소재지임이분명하다. 조위 ( 曹魏 ) 대의동이교위부는그존재여부에대한직접적인기록은없으나지금의요녕성요양 ( 療養 ) 인양평 ( 襄平 ) 에두었던것으로보는입장이우세하며, 13) 진서 는당 ( 唐 ) 정관 ( 貞觀 ) 18~20 년간 (644~646) 에방현령 ( 房玄齡 ) 등이찬한것으로서진 (265~316 년 ) 52년간및동진 (317~418 년 ) 102년간의역사를기록하고있다. 그러나동이전에는마한과진한만이입전되어있는데, 마한조의내용은삼국지의그것에 277~ 290년사이에 7차례정도있었던마한과서진의교섭내용이추가되어있다 ( 武帝太康元年 二年, 其主頻遣使入貢方物, 七年 八年 十年, 又頻至. 太熙元年, 詣東夷校尉何龕上獻, 咸寧三年復來, 明年又請內附 ). 14) ʻʻ 東夷馬韓新彌諸國, 依山帶海, 去州四千餘里, 歷世未附者二十餘國, 幷遣使朝獻 ( 진서 권 36 열전6, 장화전 ) 15) ʻʻ 是歲, 東夷十七國, 南夷二十四部竝詣校尉內附 ʼʼ( 진서 권 4 혜제기진영평원년 (291 년 ) 조 ) 60 서울역사강좌
67 진 ( 晉 ) 대에도그대로이어졌다. 그러나전연 ( 前燕 : 349~370년 ) 이후동이교위부는지금의요녕성조양 ( 朝陽 ) 인화룡 ( 和龍 ) 으로옮겨가이후북위 ( 北魏 ) 대까지이어지다가 518~519 년고구려문자왕 ( 文咨王 ) 을동이교위로추증 ( 追贈 ) 하고그를이은안장왕 ( 安藏王 ) 에게동이교위직을주면서사실상소멸된다. 결국 3세기후반이후마한혹은한강유역에서국가단계로성장하고있었던백제를대표로하는여러정치체들의견사조공대상지는요양이었던것이다. 그렇다면전술한바와같이한강유역의전문도기도요양을통해입수된것일까. 현재까지의중국내의그분포양상으로보아그가능성은극히낮다. 진의무제이후팔왕 ( 八王 ) 의난등정권다툼이일어나고그결과 291~306 년사이에는화북일대가전란에휩싸이게되고 319년모용외 ( 慕容廆 ) 에의해고구려등이격파되면서전술한바와같이동이교위부는조양으로옮겨간다. 앞서보았듯이마한등의대서진교섭이 291년이후에는더이상보이지않는점도그러한당시의사정과무관하지않을것으로보이며, 아마도그무렵백제로대표되는마한주도세력은북중국대신장강이남의정치세력과대외교섭을추진하였을것으로추정된다. 한강유역출토전문도기의시기비정을어떻게하느냐에따라그교섭대상은동오일수도있고그에이은동진 ( 東晋 ) 이될수도있다. 한편, 전연과의연관성을보여주는표비 ( 鑣轡 ), 마탁 ( 馬鐸 ) 등의마구들이천안두정동 ( 斗井洞 ) 이나청주봉명동 ( 鳳鳴洞 ) 에서확인된바있는점으로보면백제는북중국과도교섭이있었을가능성이있다. 이후마한과관련된기록은주로 삼국사기 백제본기온조왕대에보이고있다. 신록 ( 神鹿 ) 을잡아마한에보낸일 ( 온조왕 10년 ), 견사하여천도를알리고강역을획정한일 ( 온조왕 13년 ), ʻ말갈ʼ, 즉예계추장을사로잡아마한에보낸일 ( 온조왕 18년 ), 웅천책을치다가마한왕의항의을받은일 ( 온조왕 24년 ), 한성의민가에서말이머리하나에몸이둘인소를낳은사건을두고진한과마한을병탄할수있는조짐으로받아들인일 ( 온조왕 25년 ), 마한의점차약해지고상하가등진것을틈타몰래마한을습격하고국읍을병탄하자원산 ( 圓山 ) 금 백제이전마한사회를들여다보다. 61
68 현 ( 錦峴 ) 두성이저항하다가 ( 온조왕 26년 ), 마침내두성이항복하고그백성을한산 ( 漢山 ) 의북으로사민하고마한을멸망시킨일 ( 온조왕 27년 ), 마한의옛장군주근 ( 周勤 ) 이우곡성 ( 牛谷城 ) 에서반란을일으키자그것을평정한일 ( 온조왕 34년 ) 등이그것이다. 삼국사기의이기사들은백제가국가로성장한다음마한의맹주국이었던목지국을멸망시키기까지의과정을반영한것으로서그시점은 3 세기중엽경으로이해할수있다. 이후마한과관련된기록은더이상보이지않다가, 478년 송서 ( 宋書 ) 왜국전 ( 倭國 ) 에왜왕무 ( 武 ) 가유송 ( 劉宋 ) 에서제수 ( 除授 ) 한장군호에 ʻ모한 ( 慕韓 )ʼ이다시등장한다 16). 여기의모한은마한의또다른표기로서영산강유역의정치체를일컫는것으로이해된다. 영산강유역이백제의지방으로완전히편제되는시점은 500년을전후한시점으로볼수있는데, 그때까지마한이라는명칭은남아있었던것으로이해할수있다. 그밖에도 일본서기 ( 日本書紀 ) 에는 ʻ남한 ( 南韓 )ʼ, ʻ하한 ( 下韓 )ʼ, ʻ동한 ( 東韓 )ʼ 등의표현이나오는데, 그내용으로볼때남한과하한은사천 진주등의가야지역을, 동한은호남내륙동부지역을의미하는것으로이해된다. ʻ한ʼ이라는표현은준왕의남하시점에도이미있었던것으로서국가단계에이른정치체들사이의각축지역혹은상호의세력이균형을이루고있는가운데영역에포함되지못한지역을그렇게불렀던것으로볼수있는데, 그앞에붙은위치혹은방위방위는백제의관점에서본것으로이해된다. 지금까지살펴본바와같이마한은시간적으로기원전 300년경의점토대토기문화단계부터기원후 500년무렵까지이어지고있어그존속기간이매우길뿐아니라정치 사회적인성격도단일하지않다. 그러므로필자는백제의국가성립시점을기준으로그이전을 ʻ전기마한ʼ, 그이후를 ʻ후기마한ʼ으로부르기도하였다. 전기마한의맹주국은목지국으로알려져있는데, 이는기원 16) ʻʻ 使持節都督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 ʼʼ 62 서울역사강좌
69 후 3세기중엽이후백제가국가단계로성장하면서마침내멸망한다. 그이후영산강유역으로비정되는신미국이백제의지방으로편제되지않은지역의마한정치체들의대표주자로떠오르게된다. 영산강유역의마한정치체들은나주반남 ( 潘南 ) 지역을중심으로사회 문화적통합을기반으로백제주도의지배적인동맹관계를유지하면서남해안을무대로일본열도의세력과도밀접한교류를지속하다가한성의함락에따른백제의남천을기점으로하여 6세기 1/4분기에는마침내백제의지방으로재편된다. 3. 마한사회의변천 취락유형 (settlement pattern) 이란넓은의미로는인간서식처에서관찰되는일정한정형성이라할수있는데, 정주취락의등장이후주거지가밀집되어의미의거주지점과더불어죽은자를공식적으로처리하는묘역등을포함하는여러시설물들의공간적인분포정형을의미한다. 그러한취락유형에는특정시점의인간사회의구조가반영되어있으므로취락유형의변화를통해사회의변천을이해해볼수있을것이다. 앞서보았듯마한사회의변화상을구체적으로살필수있는문헌사료는매우제한적이다. 여기서는대략기원전 300년경이후의취락유형변화를통해마한사회의변천의일단을그려보고자한다. 점토대토기문화가중국동북지역에서한반도로남하하고있을무렵은청동기시대의후기에해당되는데, 이당시의사회모습은최근까지의고고학자료를통해점차분명해지고있다. 마한과밀접한관련이있는한강유역이남의청동기문화는송국리유형 ( 松菊里類型 ) 이라할수있는데, 그사회의경관을그려보면, 농경에유리한지점을중심으로대략 2~3km 의간격으로농경마을이자리잡고있는가운데그주변에는지석묘를비롯한석관묘 토광묘 옹관묘 백제이전마한사회를들여다보다. 63
70 등으로구성된무덤으로구성된묘역이위치하고있었다. 그러한마을가운데역사가비교적오랜마을에는더많은지석묘가모여있고마을주변에는환호 ( 環壕 ) 혹은목책 ( 木柵 ) 이둘러져있기도하였다. 송국리유형단계의사회복합도와관련해대체로 3단계정도의취락위계를상정하고있는것이일반적인데, 상위의중심취락을정점으로그아래의중위취락과하위의일반취락이직접적혹은간접적유대간계를맺고있었던것으로이해된다. 대표적인중심취락으로인정되고있는부여송국리유적에서는의례공간으로추정되는목책과울타리에의해겹으로둘러싸인대형건물지등이확인되었으며, 그와유사한유구는사천이금동에서도알려져있다. 한편이무렵의유적들을살펴보면주거지로만구성된것, 주거지와분묘역으로구성된것, 주거지와저장유구로구성된것, 주거지 + 저장유구 + 분묘역으로된것, 그리고주거지 + 저장유구 + 분묘역 + 의례공간등으로구성된것등으로다양하여취락간의기능분화가존재하였으며, 의례공간이있는송국리와같은중심취락은주변의저장전문유적으로부터식량을공급받았을것으로보는견해도있다. 저장전문유적으로상정하고있는취락과송국리취락사이의거리가반견 10km 정도인점으로볼때과연이무렵의사회 경제적통합이그정도였는지에대해서는검토의여지도있다. 아무튼, 전술한바와같은청동기후기송국리유형사회에기원전 300년경을전후하여점토대토기문화인들이유입되기시작하면서사회적인변화가야기된다. 한반도에유입된점토대토기문화는길림성의휘발하 ( 揮發河 ) 유역및요하중류의심양일대에걸쳐분포하고있는양천 ( 凉泉 ) 문화로알려져있는것이지만, 그연원을거슬러올라가면기원전 800년을전후한시점의노노아호산 ( 努魯兒虎山 ) 동쪽지역의 ʻ능하유존 ( 凌河遺存 )ʼ에서비파형동검조기형과공반되는단계가가장이르며, 이후기원전 500~300년기간의노노아호산서부지역의 ʻ수천유존 ( 水泉遺存 )ʼ 혹은 ʻ수천문화 ( 水泉文化 )ʼ와요하동쪽의양천문화에서동시에확인되고있다. 능하유역일대의고고학문화에대해기원전 300년에있 64 서울역사강좌
71 었던연 ( 燕 ) 진개 ( 秦開 ) 에의한동호 ( 東胡 ) 및고조선 ( 古朝鮮 ) 서방지역공취와관련된맥 ( 貊 ) 종족의실체로이해하는견해도있다. 요서및요동지역이전국시대연 ( 燕 ) 의영토로편입되고장성이축조되면서특히요하중류및길림남부지역의주민들이한반도로남하하게되는데, 그경로는서해안을통한해로와더불어육로가함께활용되었던듯하다. 상당한수준의사회적통합이진전되고있던청동기후기에서이들의등장은사회적혼란및재편의계기가되었던것이다. 강릉방동리 ( 芳洞里 ), 남양주수석리 ( 水石里 ), 화성동학산, 안성반제리 ( 盤諸里 ), 보령교성리 ( 校城里 ), 합천영창리 ( 盈倉里 ) 등지금까지알려진이른시기의점토대토기문화취락이거의대부분후대의삼국시대산성의입지와동일한고지 ( 高地 ) 에입지하고있는점으로미루어토착사회와의마찰을짐작할수있다. 그러나시간이경과하면서점토대토기문화는토착사회에수용되고, 점토대토기와세형동검등을표지로하는새로운고고학적문화로전환된다. 이무렵의사회재편의일단을대전지역의경우를예로들어보기로하자. 점토대토기문화등장이전대전지역의청동기사회는대략 2개정도의지역공동체로구성되어있었다. 동쪽의비래동 ( 比來洞 ) 지석묘군및신대동 ( 新垈洞 ) 취락 분묘군으로대표되는공동체와서쪽의유성 ( 儒城 ) 진잠 ( 鎭岑 ) 등의지석묘군으로대표되는공동체가그것이다. 점토대토기문화가이입되면서보문산성 ( 普文山城 ) 과같은고지성유적이등장하나곧이어노은동 ( 老隱洞 ) 이나궁동 ( 弓洞 ) 과같은저평지에취락및분묘가등장한다. 그후세형동검을비롯한청동기를출토하는문화동 ( 文化洞 ) 유적 탄방동 ( 炭坊洞 ) 유적 괴정동 ( 槐亭洞 ) 유적은앞선시기의지역공동체들의중심지사이에위치하는것으로서새로운사회재편의결과부상한것으로이해된다. 다수의청동기를부장한괴정동의피장자로대표되는세력은대전분지일원을통합한주체로이해할수있는데, 그범위는대략현재의대전분지에해당되는직경 8~9km 정도이다. 이와다소의시간차는있으나, 삼국지 동이전한조에의하면마한사회는 ʻ국ʼ으로표 백제이전마한사회를들여다보다. 65
72 현된 54개의정치체로구성되어있으며, 각국에는중심취락인 ʻ국읍 ( 國邑 )ʼ이있으며, 그아래크기나인구규모에서위계적인관계를가지는취락들이있었을것이다. 이러한취락유형을읍락 ( 邑落 ) 이라부를수있다면, 점토대토기문화를수용하여재편된당시의취락유형을초기읍락사회라해도좋을것이다. 한강유역을비롯한중서부지역의경우그공간범위는지석묘사회의중심취락 2~3개를포함하는직경 10~15km 정도로추정할수있다. 초기읍락사회인마한에진 ( 秦 ) 의전국통합과정을전후하여야기된중국대륙의유이민들이유입되기도하였는데, 그와관련된고고학자료들이중원식동검출토유적으로볼수있다. 평남평원신송리, 평양석암리, 황해도재령고산리, 파주운정리, 익산신용리, 완주상림리, 함평초포리등지에서발견된중원식동검은그기원지가산동 ( 山東 ) 지역에위치한제 ( 齊 ) 로비정되며, 그유입시점은 3세기후엽으로볼수있다. 기원전 194~180 년사이의어느시점에위만에게왕위를빼앗긴고조선의준왕이일단의무리를대동하고남하하여지역정치체의왕이된다. 준왕의남래지는지금의익산을중심으로한금강하류지역으로보는견해가지배적인데, 시기적으로이와가까운고고학자료는장수남양리 ( 南陽里 ), 부여합송리 ( 合松里 ), 당진소소리 ( 素素里 ), 완주갈동 ( 葛洞 ), 익산신동리 ( 信洞里 ) 등의주초철기를공반한청동기부장무덤들로볼수있다. 현재까지알려진것은모두분묘자료로서 10여기이내로구성된묘역뿐이지만이들과관련되는취락유적이분명히존재하였을것이다. 이와같은일련의사회변화과정에서청동기후기의지석묘는점차소멸되고기원전 2세기전반무렵에는새로운주구묘가등장한다. 점토대토기문화가보편화되면서등장한무덤은토광에목관을넣고그주위에돌로보공 ( 補空 ) 한이른바토광목관위석묘 ( 土壙木棺圍石墓 ) 로알려져있으며, 대전괴정동 화순대곡리등과같이토광이깊은목관묘가얕은것에비해피장자의위상이높은것으로이해되고있다. 이러한무덤은요동반도의윤가촌아래층 2기문화단 66 서울역사강좌
73 계에초기형세형동검과함께등장한것으로서지석묘사회의토착묘제로보기는어렵다. 이와는별도로기원전 2세기전반혹은중엽경에이르면주구묘 ( 周溝墓 ) 라는새로운묘제가나타나고있다. 보령관창리 ( 寬倉里 ) 유적에서처음알려진주구묘는매장주체부가삭평되어주구만잔존하고있어그정확한출현시점비정이어려웠으나, 영광군동리 18호주구묘에서적색마연토기호와동일한형태의흑색마연토기호가출토됨으로써그시기를짐작할수있게되었다. 필자는흑색마연토기호의기형으로보아그시점을기원전 2세기전반또는중엽으로비정한바있는데, 최근이와거의같은흑색마연토기원저호가최근전남영암엄길리지석묘에서도출토된바있어주구묘의출현시점이지석묘와연속적일가능성을시사하고있다. 주구묘의기원을중국대륙에서찾는견해가있으나, 중원지역의묘제의경우춘추이전까지는지상에표시가없는이른바 ʻ불수불분 ( 不樹不墳 )ʼ을특징으로하는반면중국동북지역과한반도에는일찍부터적석 ( 積石 ) 또는암괴 ( 巖塊 ) 로써그존재를지상에표시하는전통이있어그계통이같지않음을분명히알수있다. 방형혹은장방형으로지석묘주위를표시한예가있을뿐아니라최근춘천천전리 ( 泉田里 ), 천안운전리 ( 云田里 ), 서천오석리 ( 烏石里 ), 진주대평리등지에서청동기시대전기의주구석관묘가확인되고, 청동기시대의후기에도마산진동 ( 鎭東 ) 과같이봉분을만들고주위에구를돌린주구묘가확인된바있어토착사회의그러한전통에서주구묘가기원한것으로볼수있다. 지석묘는점토대토기문화와함께새로들어온토광목관위석묘에대비되는기존사회의묘제이므로그후신으로등장하는주구묘는토착사회의묘제라할수있다. 그러한의미에서마한기층사회의묘제라해도좋을것이다. 주구묘는이후원삼국시대마한지역의보편적인묘제로정착되어, 특히영산강유역에서옹관을매장주체로하는고분구의집단묘형태로발전하였다. 그러나주구묘의전개과정에서기원전 2세기후반 ~ 기원후 2세기중엽경까지의자료가아직확인되지않고있으며, 그에따라토광목관묘와주구묘의교체과정도 백제이전마한사회를들여다보다. 67
74 잘알려져있지않다. 광주신창동등에서기원전 1세기대의옹관묘군이확인된만큼장차의조사를통해그내용이밝혀질것으로기대되는데, 이무렵의묘제는대구팔달동등영남지역을통해보면아직토광목관묘가주류를이루고있는점이참고된다. 기원후 2세기후반이후의주구묘는경기남부이남부터금강이남전지역에걸쳐확인되고있다. 이들은대체로지금의면소재지이상의전통적인인구집중지역인근에묘역을이루고있다. 당시의취락유적은아직까지발견예가많지않은데, 이는후대의취락과중복된때문으로이해된다. 그러나묘역인근멀지않은곳에취락이분포하고있었을것으로보아도좋다면주구묘군의분포는 삼국지 동이전의마한각 ʻ국ʼ의중심지인국읍 ( 國邑 ) 또는그예하의거점읍락의위치를추정하는단서가될수있다. 3세기말 ~4세기전반에이르면주구묘는더이상축조되지않는대신백제의묘제로볼수있는토광묘 석곽묘 횡혈식석실묘등이등장한다. 이러한변화는마한소국의멸망과그에따른백제의한지방으로편제되었던사정을반영하고있는것으로이해된다. 삼국사기에는마한맹주국인목지국의멸망및잔여세력의저항등이그려져있어당시마한사회에불어닥친혼란상이짐작된다. 최근연기응암리나대전용계동등지에서이무렵으로비정되는취락유적이확인된바있는데, 이들은비교적높은구릉상에위치하며, 주변에는환호를배치하고있어백제에대응하는모습을엿볼수있다. 전술한바와같이중서부지역에서대부분의평상시읍락은후대의취락들과마찬가지로저평지에입지하였고, 그결과고고학자료로발견되지않은반면 3세기말 ~4세기전반에국한된시기의취락들은이후재점유가없었던고지에입지하였기때문에그모습이남아있었던것으로이해할수있다. 대략 5세기중엽경까지금강이남노령이북지역의마한사회는완전히백제의영역으로편제된것으로볼수있으나, 그이남의영산강유역은백제와지배적인동맹관계를유지하면서일정한정치 사회적통합을유지하고있었 68 서울역사강좌
75 던것으로이해된다. 영산강유역양식토기의성립과주구묘의전통을이은고분구옹관묘의지속등으로써뒷받침된다. 그러나백제의한성함락이후축소된영토를영산강유역등남방의마한지역에대한지방재편으로보완하려는백제의전략에의해이지역의정치 사회적통합은더이상진전되지못한다. 일본열도와의해상교통의길목에자리한까닭에일찍부터밀접한관계를유지하고있었던영산강유역에는다수의일본열도기원문물이수용되기도하였다. 그가운데전방후원분 ( 前方後圓墳 ) 은 5세기후반 ~6세기전반의기간에걸쳐한시적으로나타나고있는데, 백제가영산강유역의정치적통합의구심력을약화시키면서반사적으로지역정치체의독립성이제고된상황에서표출된사회 문화적현상으로이해된다. 이러한현상은영산강유역정치체와일본열도지역정치체사이의교섭권이각각백제의중앙정권과야마토 ( 大和 ) 중앙정권에귀속재편되면서막을내리고, 이로써마한을표방하는정치체는완전히소멸하게된다. 백제이전마한사회를들여다보다. 69
76 < 참고문헌 > 논문李賢惠, 三韓의對外交易體系, 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 ( 上 ), 김수태, 3세기중 후반백제의발전과馬韓, 馬韓史硏究, 忠南大學校出版部, 楊軍, 辰國考, 北方文物 3, 金範哲, 錦江중 하류역청동기시대중기聚落分布類型硏究, 韓國考古學報 57, 김장석, 송국리단계저장시설의사회경제적의미, 한국고고학보 67, 朴淳發, 漢江流域의基層文化와百濟의成長過程, 韓國考古學報 36, 1997., 前期馬韓의時 空間的位置에대하여, 馬韓史硏究, 忠南大學校出版部, 1998., 漢城百濟의對外交涉, 百濟硏究 30, 1999., 百濟의南遷과榮山江流域政治體의再編, 韓國의前方後圓墳, 忠南大學校出版部, 2000., 百濟の南遷と倭, 古代日本と百濟, 大巧社, 2002., 周溝墓의起源과地域性檢討, 충청학과충청문화 2, 충남발전연구원부설忠南歷史文化硏究所, 2003., 遼寧粘土帶土器文化의韓半島定着過程, 錦江考古 창간호, 忠淸文化財硏究院, 2004., 한국고대사에서종족성인식, 韓國古代史硏究 44, 2006., 墓制의變遷으로본漢城期百濟의地方編制過程, 韓國古代史硏究 48, 서울역사강좌
77 崔完奎, 百濟成立과發展期의錦江流域墓制樣相, 韓國上古史學報 37, 中村大介, 方形周溝墓の成立と東アジアの墓制, 朝鮮古代硏究 5, 程尼娜, 護東夷校尉考, 北方文物 4, 賀雲翶 馮慧 李洁, 東亞地區出土早期錢文陶瓷器的硏究, 考古與文物 2, 李澤求, 한반도중서부지역의馬韓墳丘墓, 한국고고학보 66, 李亨源, 韓國靑銅器時代의聚落構造와社會組織, 忠南大學校大學院博士學位論文, 喬梁, 燕文化進入前的遼西, 東烏旗中國邊疆考古硏究專家國際學術演討會發表文 ), 趙賓福, 遼西山地夏至戰國時期考古學文化時空框架硏究的再檢討, 邊疆考古硏究 5 輯, 저서朴淳發, 百濟國家의形成硏究, 서울大學校大學院博士學位論文, 朴淳發외, 馬韓史硏究, 忠南大學校出版部, 成璟瑭, 韓半島靑銅武器硏究 - 中國東北地域과의比較 -, 全南大學校大學院博士學位論文, 백제이전마한사회를들여다보다. 71
78
79 제 5 강좌 비류와온조는형제인가? 경쟁자인가? - 충북대학교양기석 1. 들어가면서 2. 백제의건국시조는누구인가? 3. 백제를세운사람들은어떤사람들인가? 4. 삼국사기 초기기록의어느정도믿을만한가? 5. 백제는어떤세력들이국가발전을주도하였는가?
80
81 1. 들어가면서 백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전하는백제의온조시조설화에의하면고구려의건국자인주몽 ( 朱蒙 ) 의둘째아들인온조 ( 溫祚 ) 가형인비류 ( 沸流 ) 와함께남하하여한강하류유역에서각각정착하여나라를세운것으로되어있다. 백제의건국시조로주장되는온조는한강남쪽에도읍을정하고 10명의신하의보필을받아 ʻ십제 ( 十濟 )ʼ라는나라를세웠는데이때가기원전 18년이었다고한다. 이온조시조설화에의하면백제의건국세력은고구려계이주민이었음을보여주고있다. 학계에서는서울석촌동을비롯한한강유역에존재하고있는적석총의존재가이를입증하는고고학적근거로보고있다. 반면에관련문헌사료를통해볼때백제의건국세력은부여계이주민과관련이있는것으로나타난다. 백제왕실에서는부여의족조 ( 族祖 ) 인동명 ( 東明 ) 을모시는동명사당에배알하는의식이국초부터행해져왔고, 그밖에부여씨라는왕성을사용한점, 472년백제개로왕 ( 蓋鹵王 ) 이북위에보낸국서에서부여계승의식을천명한점, 그리고 538년백제성왕이사비천도와함께국호를일시적으로남부여 ( 南扶餘 ) 로고친사실등을통해볼때부여에그국가적기원을설정하고있었음을알수있다. 그런데백제의건국연대를 삼국사기 백제본기의기록대로기원전 18년으로보는데에는많은문제점이제기되고있다. 온조왕 13년에백제의강역이북으로예성강, 남으로안성천, 서쪽으로는서해, 동으로춘천일대에까지미쳤다는기사나온조왕 27년마한멸망기사등은실제로는 3~4세기의사실로받아들여지고있기때문에사실그대로취신하기에는문제가있다. 후대의사실을건국주인온조왕의사실로일괄부회하여시조의업적을크게부각시키려 비류와온조는형제인가? 경쟁자인가? 75
82 는의도에서나온서술로생각된다. 고고학적으로백제건국을뒷받침해주는부연관련자료는거의발견되지않았지만, 고구려와관련이있는자료는 3세기중반이후에나출현하고있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나타난건국연대와는시기적으로큰차이가있다. 더구나중국사서인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와는달리 3 세기경에마한의 54개소국의하나인백제국 ( 伯濟國 ) 으로기록하고있다. 이에따라 삼국사기 백제본기기록을그대로믿는긍정론도있지만반면에백제초기기록을부정하거나또는비판적으로재구성해서보는절충론도제기되고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초기기록을비판적으로검토하여백제의실제건국연대를밝히기위한연구가진행되어야한다. 이를위해먼저십제 ( 十濟 ) 백제국 ( 伯濟國 ) 백제 ( 百濟 ) 로바뀌는백제국호의변천과정을검토하여백제가국가형성과정에서과연어느시기에백제가실질적으로건국되었는가를살펴보아야한다. 이어논란이많은백제초기왕계를비판적으로검토하여백제초기왕계의계승관계를살펴보고백제초기사이해의방향에대해고찰해야한다. 백제의건국시기를검토하는데에는기본사서인 삼국사기 초기기록과중국사서인 삼국지 위서동이전내용에대한신뢰성여부가큰쟁점이되고있으며이에따라부정론, 긍정론, 분해론이제기되고있다. 그중분해론이현재까지상이한역사상을담고있는두사서를함께원용할수있는유효한역사연구방법론의하나로볼수있다. 백제의건국은계루부출신의주몽집단이소노집단을누루고새로운맹주세력으로대두하였고, 또한유리왕이집권하던정치적변동속에서기원전후에온조와비류집단이남하하여한강하류유역에정착한것으로보는것이이지역에철기문화가유입되는새로운문화상으로볼때보다합리적인해석일것이다. 그리고고구려계온조집단이한강하류유역에이주해와서세운단위정치체는십제 ( 十濟 ) 였으며, 백제의건국시기는고구려가계루부중심의세력교 76 서울역사강좌
83 체를단행하는과정에서이탈한주민들이대거남하하는배경과관련하여서력기원전후로보여진다. 십제 ( 十濟 ) 는마한맹주국의승인을받아사방백리규모의거주공간을확보하였는데소국 ( 小國 ) 의규모와맞먹는것이었다. 십제는우월한단조철기 ( 鍛造鐵器 ) 문화를바탕으로하고, 한강유역이갖는수운교통로상의이점, 그리고빈번한대외전쟁의수행을통해국가적성장을한것으로보인다. 십제는온조계에의해왕위가이어졌으며, 독자적기반을가진세력을우보 ( 右輔 ) 라는관직을통해행정과군사업무를효율적으로수행하였다. 특히십제의성립직후단행된하남위례성으로의정도 ( 定都 ) 는십제가단순한읍락단계를넘어단위정치체를형성하는데중요한계기가된것으로보았다. 이런면에서볼때십제의국가적성격은성읍국가에해당하는소국단계로볼수있다. 이처럼백제초기왕계기록상에나타날수있는몇가지문제점을중심으로초기사이해의방향에대해언급하였다. 이는백제의건국시기를어느때로보느냐의문제와깊은관련이있기때문이다. 그결과백제초기관련기록들이부분적으로잘못되었다고해서이를곧바로불신론의근거로받아들여서는안되며, 오히려그기사자체를인정하는가운데문제점이제기될경우그기사가갖는한계와역사적의미를찾아재구성하려는태도가필요하다. 아울러백제와유사한역사적경험과과정을거쳤던고구려나신라의연구성과도비교사적관점에서검토해야한다. 2. 백제의건국시조는누구인가? 백제는마한의한소국이었던백제국 ( 伯濟國 ) 이성장 발전하여세운나라이 다. 그러나백제국은어디에서기원하였으며, 또한그국가로서의성장과정이 비류와온조는형제인가? 경쟁자인가? 77
84 어떠하였는지에대해서는확실치않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온조왕조에실려있는백제의시조설화에의하면, 그시조는고구려에서내려온북방계이주민인것으로기록되어있다. 그런데부여나고구려, 그리고신라의경우건국설화에는건국시조의영웅전승적인내용을담은신화적인요소가많이포함되어있는데반해, 백제의건국설화는신화적요소가배제된역사적사실에입각하여서술되어있는점에서차이를보여주고있다. 그리고그건국시조에대해서도여러인물들이거론되고있어많은궁금증을낳게하고있다. 그렇지만온조나비류를백제의건국시조로보는견해가과거여러사서에적지않게주장되는것으로보아건국과정에여러세력들이참여하였음을보여주고있다. 1) 온조가백제의시조다 백제를건국한사람을온조로보는견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온조왕조 등기사에의거하고있는데많은사람들이정설로받아들이고있다. 백제의시조는온조왕 ( 溫祚王 ) 인데, 그의아버지는추모 ( 鄒牟 ) 이며혹은주몽 ( 朱蒙 ) 이라고도한다. [ 주몽은 ] 북부여에서난을피하여졸본부여에이르렀다. [ 그때 ] 졸본부여왕은아들이없고딸만셋이있었는데, 주몽을보고는보통사람이아니라는것을알고둘째딸을아내로삼게하였다. 얼마지나지않아부여왕이죽자주몽이왕위를이었다. [ 주몽은 ] 두아들을낳았는데, 맏아들은비류 ( 沸流 ) 이며, 둘째아들은온조 ( 溫祚 ) 라하였다 혹은 ʻ주몽이졸본에도착하여월군 ( 越郡 ) 의여자를아내로맞아들여두아들을낳았다ʼ 고도하였다. 주몽이북부여에있을때낳은아들 [ 孺留 ] 이와서태자가되자, 비류와온조는태자에게용납되지못할까두려워하다가마침내오간 ( 烏干 ) 마려 ( 馬黎 ) 등열명의신하와함께남쪽으로갔는데백성들이따르는자가많았다. [ 그들은 ] 드디어한산 ( 漢山 ) 에이르러부아악 ( 負兒嶽 ) 에올라가살만한곳을바라보았다. 비류가바닷가에살고자하니열명의신하가간하였다. ʻʻ생각하건대이강남쪽의땅은북쪽으로는한수 ( 漢水 ) 를띠처럼띠고있고, 동쪽으로는높은산을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기름 78 서울역사강좌
85 진벌판을바라보고, 서쪽으로는큰바다에막혀있으니, 이렇게하늘이내려준험준함과지세의이점은좀체로얻기어려운형세입니다. 이곳에도읍을세우는것이또한좋지않겠습니까?ʼʼ 비류는말을듣지않고그백성을나누어미추홀 ( 彌鄒忽 ) 로가서살았다. 온조는한수남쪽의위례성 ( 慰禮城 [ 河南慰禮城 ]) 에도읍을정하고열명의신하를보좌로삼아국호를십제 ( 十濟 ) 라하였다. 이때가전한성제 ( 成帝 ) 홍가 ( 鴻嘉 ) 3 년 [B.C.18] 이었다. 비류는미추홀의땅이습하고물이짜서편안히살수없었는데, 위례성에돌아와보니도읍이안정되고백성들도평안하므로마침내부끄러워하고후회하다가죽으니, 그의신하와백성들은모두위례성으로돌아왔다. 그후백성들이올때즐겨따랐다고하여국호를백제 ( 百濟 ) 로고쳤다. 그세계는고구려와함께부여에서같이나왔기때문에부여 ( 扶餘 ) 를성씨로삼았다. 위기사에의하면백제의시조인온조는고구려의건국자인주몽 ( 추모 ) 의둘째아들인데, 후에부여에서주몽의아들인유류가아버지를찾아와서왕위를잇자형인비류와함께남쪽으로내려와형제가한강유역인위례성과미추홀에서각각나라를세웠다고한다. 그후비류가나라경영에실패하여사망한뒤그백성들이온조의위례성에합류하게됨으로써나라이름을십제에서백제로고쳤다는내용이다. 온조시조설화는신화적요소를전혀찾아볼수없는비교적사실적이고합리적인내용으로되어있다는점이주목된다. 천지창조이야기라든지, 천신계와지신계가결합되어건국시조가나라를세우는그런신화적이고도신성성을가진모습들이전혀나타나지않고있다. 예컨대고조선의건국설화에는환인-환웅-단군으로이어지는천신계의계보와지신계의웅녀와결합하여고조선을세우는과정이그려져있고, 또부여와고구려의동명설화에는태양신의강령에의해탄생하는동명이지신계의하백의딸과의결합을통해나라를세우는모습이나타나있다. 그리고신라의 6촌장설화나 6가야의 6란 ( 卵 ) 설화와같이건국자가하늘에서강림해왔다는설화도있다. 반면백제의건국설화는온조와비류형제가북쪽에서남으로이주해와한강유역에서각각나 비류와온조는형제인가? 경쟁자인가? 79
86 라를세운사실적인이야기들이담겨져있을뿐이다. 그리고천신계와지신계의결합과같은신이적이고도영웅전승적인모습은어디에서도찾아볼수없는것이특징이다. 원래백제는부여 고구려와같이동명을같은족조 ( 族祖 ) 로받들고있었기때문에역시동명설화를공유하고있을것이다. 따라서백제건국설화의원형에는부여나고구려처럼똑같이태양신이강림하였다는동명설화와백제의실질적인건국자와관련된설화가가미된형태를갖춘것이아닐까한다. 이러한설화가고려중기이후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가편찬되었을단계에서는점차신화적성격이거의없어지고온조와비류에대한사실적인시조전승만이남아있게된것이아닐까한다. 다음으로백제의건국주체세력이부여족계통의고구려이주민출신이었다는점이다. 위의시조설화에의하면온조는북부여에서피난을해온주몽과졸본부여왕의둘째딸사이에서출생한둘째아들로되어있다. 이를통해보면온조는고구려건국자인주몽과깊은관련이있는것으로나타난다. 삼국유사 에서도역시주몽에서온조로이어지는왕실계보를백제왕실의근간으로보고있다. 비류와온조형제가남하하게된동기는주몽의북부여에서낳은아들인유류가졸본부여에와서왕위를잇게된때문이라하였다. 이를통해보면백제의건국은고구려유리왕의즉위를둘러싼왕실내부의권력다툼과는깊은관련이있는것으로파악된다. 비류와온조형제로대표되는졸본지역의구세력이부여에서내려온유리집단에게왕위계승에서패한후남하한것으로볼수있다. 이때온조와함께남하한세력으로는오간과마려등열명의신하로대표되는족단들이백제의건국세력에합류한것으로판단된다. 이들세력들이연맹체를형성하여십제 ( 十濟 ) 라는백제초기의국가체를이룬것으로볼수있다. 80 서울역사강좌
87 2) 비류가백제의시조다온조이외에백제의건국시조로주장되는인물은온조의형으로되어있는비류가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온조왕조에온조설화와함께별주로기록되어있다. 또는다음과같이말하기도한다. [ 백제 ] 의시조는비류왕 ( 沸流王 ) 인데그아버지우태 ( 優台 ) 는북부여왕해부루 ( 解扶婁 ) 의서손 ( 庶孫 ) 이었고, 어머니소서노 ( 召西奴 ) 는졸본 ( 卒本 ) 사람연타발 ( 延陁勃 ) 의딸이었다. [ 소서노는 ] 처음에우태에게시집가서아들둘을낳았는데, 맏이가비류이고둘째는온조라하였다. 우태가죽자 [ 소서노는 ] 졸본에서과부로홀로지냈다. 뒤에주몽이부여에서용납되지못하자전한건소 ( 建昭 ) 2년 (B.C.3)] 봄 2월에남쪽으로도망하여졸본에이르러도읍을세우고국호를고구려 ( 高句麗 ) 라하고소서노를맞아들여왕비로삼았다. 주몽은그녀가나라를창업하는데자못내조가컸으므로그녀를총애하고특별히후하게대접하였으며, 비류등을자기자식처럼대하였다. 주몽이부여에있을때낳은예씨 ( 禮氏 ) 아들유류 ( 孺留 ) 가오자그를세워태자로삼았고, 왕위를잇기에이르렀다. 이에비류가동생온조에게말하였다. ʻʻ처음에대왕이부여에서의난을피하여이곳으로도망해왔을때우리어머니께서집안의재산을기울여나라를세우는것을도와그애쓰고노력함이많았다. 그런데대왕이세상을떠나시고나라가유류 ( 孺留 ) 에게속하게되었으니, 우리들은한낱혹처럼답답하게지내기보다는차라리어머니를모시고남쪽으로가서땅을택하여따로나라의도읍을세우는것만같지못하다.ʼʼ 드디어동생과함께무리를이끌고패수 ( 浿水 ) 와대수 ( 帶水 ) 두강을건너미추홀 ( 彌鄒忽 ) 에이르러살았다. 위의기사에는비류와온조가위의온조설화처럼형제사이로되어있지만, 백제의시조를비류라고단정한점, 가계의흐름과거주지역등에서일정한차이가있다. 이설화는형인비류를중심으로설정되어있는데, 이에의하면비류와온조형제의생부는북부여왕해부루의서손인우태이기때문에주 비류와온조는형제인가? 경쟁자인가? 81
88 몽은의부가되는셈이다. 그어머니는졸본사람연타발의딸인소서노인데전남편우태가죽은뒤부여에서망명해온주몽에게개가하였으며, 그후주몽의원자가와서태자가되자그형제들은무리를이끌고남하하여미추홀에서백제를건국한것으로되어있다. 위기사에서는비류가미추홀에정착하여나라를세운것으로되어있는데, 이를비류중심의건국설화라고할수있다. 비류중심의시조설화에서그조상을해부루라고한점에서그비류집단의성은해씨 ( 解氏 ) 로추정된다. 온조를시조로하는건국설화와비류를시조로하는건국설화가남게된것은처음비류가인천의미추홀에서, 온조는서울의한강유역에서각각나라를세운후두집단이중심이되어연맹을형성하고연맹장을배출한것을반영해주는것이라하겠다. 그리고비류시조설화가후대까지남아전하게된것은비류를시조로하는집단이백제후기까지계속그세력을존속하였기때문인것으로추측된다. 비류세력은압록강유역에서주몽으로대표되는계루부세력과다투던송양국의비류국과관련이있기때문에그출자를비류수지역인혼강 ( 渾江 ) 유역의소노부세력과연결시켜볼수있다. 어쨌든비류가형으로되어있는것은초기연맹체에서온조세력에비해우위를점하였을뿐아니라시기적으로먼저이주해왔던사실을보여주는것이아닐까한다. 위의온조시조설화에서비류가죽었다는내용은위례의온조세력이미추홀의비류세력을통합하여후기연맹체의주도권을장악한사실을반영한것으로볼수있다. 3) 구태, 도모, 우태도백제의시조다 온조와비류의시조설화이외에백제의또다른건국시조로주장되는인물 로구태와도모등이있다. 82 서울역사강좌
89 북사 ( 北史 ) 와 수서 ( 隋書 ) 에서는모두다음과같이기록하였다. ʻ동명 ( 東明 ) 의후손에구태 ( 仇台 ) 라는사람이있었는데, 매우어질고신의가돈독하였다. [ 그는 ] 처음에나라를대방의옛땅 [ 帶方故地 ] 에세웠는데, 한나라요동태수 ( 遼東太守 ) 공손도 ( 公孫度 ) 가자기딸을아내로삼게하였으며, 마침내동이 ( 東夷 ) 의강국이되었다.ʼ 구태시조설은 주서 ( 周書 ) 백제조에처음나오는데, 백제를마한의속국, 부여의별종이라면서구태란사람이대방지역에서나라를세웠다고한다. 백제에서는해마다시조구태를사당에 4번제사를지낸다고하였다. 이기사가 수서 단계에이르면구태를부여의위구태 ( 尉仇台 ) 와혼동하여대방태수공손도의딸과의혼인기사로첨가되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재인용되었다. 이구태를 ʻ구이ʼ로읽어백제의제8대고이왕 ( 古爾王 ) 과동일한인물로보는견해가있으나, 부여에서는인명끝의 ʻ 台 ʼ를 ʻ태ʼ로읽는경우가많기때문에받아들일수없다. 또한구태를우태와같은인물로보고이를비류계의시조로보는견해가있지만백제말기까지온조계와동등하게비류계사당이존재하여숭앙되는것으로보는것은성립되기어렵다. 이는백제의건국설화가정착한이후온조와비류시조설화와는다른정치적상황에서비롯된것이아닐까한다. 그런데대방군은백제가건국될당시에는아직설치되지않았기때문에구태가백제가대방고지에나라를세웠다는것은연대상맞지않는다. 따라서백제의또다른시조로주장되는구태가건국한지역이대방지역이었다는점에주목하여이를백제가고구려와대방고지에대한영유권다툼에서구태의시조설을내세워대방고지에대한영유권을주장하기위한것으로보는견해가참고가된다. 다음으로시조도모 ( 都慕 ) 설은 속일본기 권40 연력 8년과 9월조에나온다. 백제의태조도모대왕은태양신이몸에내려온분으로부여에머물러나라를열 었다. 천제가록 ( 籙 ) 을주어모든한 ( 韓 ) 을통솔하고왕을칭하게하였다. 비류와온조는형제인가? 경쟁자인가? 83
90 위사료에보이는도모는동명이나 광개토왕릉비문 에고구려시조로나오는추모 ( 鄒牟 ) 와같은인물로보인다. 이는백제멸망후일본열도에이주한백제계유민들이부여와고구려를포괄하여범부여계의족조인동명을시조로인식한데에서비롯된것으로볼수있다. 그밖에시조를우태 ( 優台 ) 로보는설이 해동고기 에기록되어있다. 이책에서는백제의시조로동명과우태설을함께소개하면서동명시조설이명백하다는입장을밝히고분명히밝히고있다. 이처럼백제의시조에대해서는다양한견해가제시되어있는데 삼국사기 기록이외에결정적인근거가될만한사료가거의없기때문이다. 삼국사기 기록조차온조시조설과비류시조설, 그리고구태시조설등을비판없이제시하였기때문에혼란이가중되어왔다. 더욱이고고학적으로이러한사실을입증해줄만한적극적인유물유적이아직발견되고있지않았기때문에앞으로이에대한논쟁이계속될것이다. 3. 백제를세운사람들은어떤사람들인가? 백제의건국설화를통하여백제의건국주체세력이부여계또는고구려계에기원을둔범부여계통임을알수있다. 여러사서에서주몽-온조계나부여-비류계등으로주장될만큼백제의건국주체세력이복잡하게구성되어있었음을알수있다. 온조를시조로주장하는경우는주몽또는동명을강조하고있기때문에고구려에서갈라져나온세력으로보인다. 그리고비류를시조로주장하는경우는현재의환인지역인혼강일대의비류수지역에거주하였던송양국의소 ( 연 ) 노부와관련시켜볼수있다. 그리고온조가남하할때동행한오이 마려등 10신으로대표되는세력집단, 유리왕때간언이받아들여지지않고파직된협보 ( 陜父 ) 등은어떤정치적인이유로남하해온고구려계로 84 서울역사강좌
91 구성되어있음을알수있다. 백제왕실의출자가부여계또는고구려계라는전승을보여주는것은무엇보다도백제왕실스스로에의해표방되었다는사실이주목된다. 이는백제가고구려와의경쟁관계가심화됨으로인해정치외교적인목적에따라자신의출자를때로는부여에, 때로는고구려에연결시키기도하였다. 시조온조의아버지가고구려를세운주몽임에도불구하고그출자를고구려에서나온것으로하지않고고구려와더불어부여에서나왔다고한것은부여족임을강조하여고구려와비견하려는정치적인의도에서비롯된의식의소산으로볼수있다. 이는개로왕이북위에보낸국서에서 ʻʻ 臣與高句麗源出扶餘 ʼʼ라한기사 ( 삼국사기 백제본기개로왕 18년및 위서 ( 魏書 ) 백제전 ) 나,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4년조에성왕의아들여창 ( 餘昌, 威德王 ) 이고구려장수와전투를벌이기앞서고구려와같은성씨라고한점, 그리고 538년백제성왕이사비로천도하면서국호를일시적으로남부여 ( 南扶餘 ) 로고친사실등에의해서도입증된다. 또한서울시송파구석촌동과가락동일대에분포하는적석총이고구려와의연관성을입증해주는실물자료이다. 이처럼백제는직접적으로고구려에기원을두고있었지만멀리는부여에국가적기원이있음을표방하기도하였다. 이는백제왕실이고구려를의식하여부여의정통적자로서그정체성을강조하기위한것으로동명묘배알의식을통해서도발현되었다. 그러나고고학적으로백제가부여계통임을입증하는자료는거의없다. 중서부지방의토광묘를계통적으로길림의유수노하심유적과남성자유적동쪽의모아산유적과직접연결되는것으로볼수없기때문이다. 그런데고고학적으로볼때백제의건국주체세력이고구려와관련성이보다명확하게확인할수있는것은서울시송파구석촌동과가락동일대에분포하는적석총의존재이다. 지금의서울석촌동일대에는 1916년당시적석총이 66기가분포했던것으로알려졌다. 현재는 4기정도만남아있는데외형상으 비류와온조는형제인가? 경쟁자인가? 85
92 로압록강유역의고구려적석묘와관련이깊은것으로알려졌지만그내부구조면에서는순수하게돌로만채워넣은 1호분남분과 3호분, 점토를판축한 1 호분북분과 2호분 4호분은고구려와는다른면을보여주고있다. 그리고한강상류와임진강유역에서는이에선행하는무기단식적석묘가널리분포하고있는데 2~3세기경의것으로생각된다. 이러한점에비추어볼때백제의건국세력은 3세기이전에이미시기를달리하면서한강유역으로남하하여각지에정착하였을것으로판단된다. 이것이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보이는백제국 ( 伯濟國 ) 과관련이있을것이다. 이에의하면 3세기경의백제국가모습은마한 54개국중의하나에불과한존재로나타나고있다. 석촌동지역적석묘의조성연대는대략 3세기중반이후로보고있다. 이는백제가고구려에서기원하였다는온조시조설화와는시기적으로전혀맞지않고있다. 이런이유때문에 4세기기마민족에의한정복왕조설도제기되었다. 그러나부여계기마민족이고구려를지나한강유역에까지남하하여새로운백제국가를세웠다는것은설득력이없다. 한강과임진강, 한탄강유역에분포하는적석묘에는철촉 청동검 청동환 청동방울등이출토되었는데, 고구려초기적석묘와관련이있는것으로알려졌다. 현재로서는한강유역에분포하는적석묘를고구려계통으로단정하기에는문제가있다. 다만고구려계이주민들에의해적석묘가지역화과정을거치면서백제화된적석묘로변화시킨것이아닐까한다. 그렇다고하다라도백제의건국문제는문헌자료와고고학자료간에서로시기적으로상충되는문제를어떻게해결할것인가가앞으로의해결해야할과제이다. 86 서울역사강좌
93 4. 삼국사기 초기기록의어느정도믿을만한가? 백제의건국문제를언급할때가장핵심으로떠오르는문제가 삼국사기 초기기록의신빙성문제이다. 3세기중반고이왕 ( 古爾王, 234~286) 이전에해당하는초기백제의역사에대해서는관련사료가너무부족하기때문에 삼국사기 백제본기의사료적신빙성여부문제가제기되고있어논란이많다. 그초기기록의사실성을인정하려는 1긍정론과, 대략적인추세는인정하지만구체적인연대나왕실계보에는일부문제가있는것으로보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의내용은가급적분해하여보아야한다는 2분해론, 그리고 3부정론으로서초기기록자체를아예부정하거나또는 4세기후반기마민족이남하하여세운일종의정복왕조설을주장하고있을정도로초기백제사의이해에대한여러시각이있다.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기록과 삼국지 위서동이전기록의차이에서기인하며, 초기백제에대한사실을뒷받침해주는고고학자료가많지않아서그해석여부를둘러싸고여러논의가분분하다. 최근에는분해론이대세인데, 이견해에따르면 삼국사기 기록의대략적인추세는인정하지만, 다만구체적인왕실계보나영역확장기사등에는다소문제가있는것으로보고있다. 따라서 삼국사기 백제본기초기기록을비판적으로분해하여보는입장에서 삼국지 위서동이전기사를단계적으로비교검토하여초기백제의역사를재구성하는방향으로나아가고있다. 5. 백제는어떤세력들이국가발전을주도하였는가? 이처럼백제의건국세력이한강하류지역에정착한후인근의작고큰세력 집단을흡수 통합하여백제국을형성한것이다. 온조집단에의한백제국의 비류와온조는형제인가? 경쟁자인가? 87
94 성립과정은한강유역에널리분포하는원삼국시대의유물유적과관련시켜이해된다. 서울풍납동, 가평마장리와이곡리, 양평대심리, 춘천중도, 수원서둔동유적등을들수있다. 특히최근조사된화성기안리유적에서는제철을담당한낙랑계이주민들이집단적으로이곳에정착하여철생산과철기문화를널리보급하는데큰역할을한것으로드러났다. 이처럼한강유역에철기문화가보급 확산하게된배경은낙랑과고구려계주민들의유입이라는측면에서검토될수있다. 낙랑을통한철기문화의유입은생산력과도구제작기술의향상을가져왔을뿐아니라상대적으로정치적통합이늦었던한강유역의읍락사회를정치적으로통합시키는외적요인으로작용한것으로이해된다. 서울풍납동토성발굴조사결과종래무문토기를개량한풍납동식무문토기를사용하던선주민집단과조질유문토기를차츰백제식토기 ( 김해식토기 ) 로발전시킨현상이나타나고있어건국주체세력이선주민을차츰흡수 동화시켜나가는과정으로이해된다. 경질무문토기와함께밀폐된오름가마 [ 登窯 ] 에서높은온도로구워낸회색또는회청색의타날문토기, 그리고낙랑의제작기술이반영된낙랑계토기가제작사용되었다. 집자리는출입시설이있는 ʻ 呂 ʼ자형또는 ʻ 凸 ʼ자리내부에부석식 ( 敷石式 ) 화덕이나또는부뚜막과함께 ʻㄱʼ자형태의터널형화덕이사용되었다. 묘제는점토대토기문화단계의토광목관 목곽묘가조영되었지만중부지역에는무덤주위에도랑 [ 溝 ] 을돌린마한계의주구토광묘가축조되었다. 관방시설로는풍납토성안에서발견된 3중환호 ( 環壕 ) 로된시설을들수있는데백제국단계의국읍중심촌일가능성이있다. 이단계에서는백제국은마한연맹체의일원으로종속되어있었다. 백제건국세력인온조집단에의한백제국은마한의묵시적인양해하에서이루어진것이다. 마한은선진철기문화를소유한유이민들을이용하여간헐적으로침입해오는낙랑이나예 ( 濊 ), 동옥저등의침입을막아보려하였다. 초기백제는마한연맹체가가지는결속력미약이라는정치적한계성속에서성장이가능했던것으로볼수있다. 88 서울역사강좌
95 한편백제국건국초기에는한강유역에서선주토착집단과북방이주민집단들사이에연합 흡수 정복의과정을되풀이하면서백제국을비롯하여새로운단위정치체들이성립하였다. 한강유역에분포하는무기단식적석묘의존재로보아북방이주민세력들이바로이러한단위정치체를형성한주체세력들로여겨진다. 이들은백제국의건국세력들과종족적 문화적으로많은공통점을갖고있었다. 이러한유대를바탕으로한강을통한경제적교환관계와중국군현이나말갈등의침입에대한공동의군사적협력관계를필요로하였을것이다. 이연맹체에는미추홀 ( 인천 ) 지역의비류집단, 북부의해루 ( 解婁 ) 와진씨 ( 眞氏 ) 집단, 그리고동부의홀우 ( 屹于 ) 집단등이참여하였다. 이들은각지역의유력한세력으로서독자적이고소규모의정치조직과군사기반을갖고있었다. 그리고단위정치체인국읍에서독립적인지배권을행사하면서백제국이영도하는연맹체에좌보 ( 左輔 ) 우보 ( 右輔 ) 좌장 ( 左將 ) 등의주요관직을통해점차백제국에편입되어나갔다. 초기백제국은마한의제후국과같은위치에있었으나늦어도 3세기초반까지는미추홀 ( 인천 ) 과강화도지역을포함하는경기만지역으로영역을확대해나갔다. 그리고 3세기중반한 ( 韓 ) 의대방군기리영공격사건을계기로한반도중부에서기존의마한맹주세력인목지국이쇠퇴하고백제국이우위를점하게되었다. 이를토대로백제는아산만유역에진출하였고, 4세기전반에는금강유역을통합하였다. 공주나익산지역이백제에통합되는것은 4세기전반백제비류왕대에들어서부터이다. 그리고근초고왕 24년 (369) 영산강유역의침미다례 ( 강진 해남일대 ) 정벌을시작으로전라남도일대까지세력권을확대시켜한반도서남부지역의마한세력을간접지배하게되었다. 비류와온조는형제인가? 경쟁자인가? 89
96
97 제 6 강좌 백제의품격을높인근초고왕 - 충남역사문화연구원강종원 1. 근초고왕의출자및왕위계승 2. 왕비족의성립 3. 영역확장과대외교류 4. 제도의정비
98
99 1. 근초고왕의출자및왕위계승 근초고왕은백제제 13 대왕으로 346 년 ~375 년까지 30 년간재위하였다. 근 초고왕의출자및왕위계승과관련된사료는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간략 하게기록되었다. 근초고왕은비류왕의둘째아들이다. 그는체격이크고용모가기이하였으며, 원대한식견이있었다. 설왕이사망하자그가왕위를이었다. 1) 근초고왕은비류왕의둘째아들이다. 병자년에즉위, 치세는 29 년간이었다. 2) 근초고왕의출자에대해서는일반적으로초고계로서비류왕의제2자라고하는내용에대해별다른의문이제기됨이없이그대로받아들여지는경향이있었다. 물론근초고왕이전의기록을불신하는입장에서근초고왕대새로운왕조의출현이라는측면에서의검토는있어왔지만, 근초고왕이비류왕의직자 ( 直子 ) 인가아닌가에대한구체적인검토는없었다. 다만비류왕 ( 比流王 ) 의왕명이온조의형으로기록된비류 ( 沸流 ) 와글자는다르나음이같은것, 근초고왕의재위시정책성향이비류왕의정책과는크게다른것등에의하여직자관계가아닐가능성에대한언급이있었으며, 최근에비류왕과근초고왕을이질적인계통으로보려는견해가있다. 사료에서보면근초고왕은비류왕의제2자로계왕의뒤를이어왕위에오르 1) 삼국사기 권 24, 백제본기근초고왕원년조의 ʻʻ 比流王第二子也體貌奇偉有遠識契王薨繼 位 ʼʼ 참조. 2) 삼국유사 권 1, 왕력 1 의 ʻʻ 近肖古王比流王第二子丙午立理二十九年 ʼʼ 참조. 백제의품격을높인근초고왕 93
100 고있으며, 외견상왕위계승에문제가없는듯보이고있다. 그런데비류왕사후근초고왕이즉위하기까지의왕위계승과정을통해나타나고있는몇가지사실에의해근초고왕과비류왕과의관계에대해의문을갖지않을수없다. 첫째, 비류왕의사후계왕이즉위하고있다는사실이다. 비류왕은초고계로고이계인계왕을대신하여왕위에올랐던인물이었는데비류왕사후초고계가계속해서왕위를승계하지못하고있다. 더욱이비류왕에서계왕으로의왕위승계가자연스럽게이루어지고있는것처럼기록되어있다. 따라서계왕의왕위계승에는어떤정치적의도가내재해있을가능성을추측할수있다. 둘째는근초고왕의왕명에서볼수있는것처럼초고계를계승한다는의미에서앞에 ʻ근 ( 近 )ʼ자를붙이고있다는점이다. 이미초고계로의왕위계승이비류왕대에이루어졌음에도불구하고다시근초고왕대에이를새삼강조하는것은비류왕을이어고이계인계왕이즉위하였던사실때문만은아닐것이다. 이는비류왕이초고왕의직계가아니며, 근초고왕이초고왕과직계관계에있음을암시하는것으로볼수있지않을까? 비류왕이비록초고계의일파임은사실이지만구수왕의제2자가아니었으며, 근초고왕역시비류왕의직자가아닌동시에오히려초고왕 ( 肖古王 ) 구수왕 ( 仇首王 ) 사반왕 ( 沙伴王 ) 에직접연결되는혈연관계에있었던것으로보아야한다. 셋째는근초고왕의재위시에있어서의정치성향이비류왕과는전혀다르다고하는점이다. 즉, 근초고왕은활발한대외정책을펴고있으나비류왕은주로내정에치우치고있음을볼수있다. 넷째는비류왕후기의정국운영상에보이는현상을통해추정해볼수있다. 진씨세력이재등장한비류왕 30년이후에들어오면서는정국운영에있어상당히위축된측면을보여주고있다. 진씨세력은근초고왕대이후부터는왕비족으로등장하고있는데, 근초고왕과인척관계를맺은것은비류왕대후기로추정된다. 따라서근초고왕이비류왕의직자라고한다면진씨세력이비류왕과는밀접한관계에놓이게되므로왕권을강화하는데유리했을것이다. 또 94 서울역사강좌
101 한두세력간의정치적연합관계를통해보다강력한정국운영을수행해나갈수있었을것이다. 그러나실제는그러한추론과는달리비류왕의정치활동에대한기록이지극히소략하게기술되고있다. 다섯째, 왕위계승에있어서제2자로서왕위에오른인물을검토하면, 제28 대혜왕의경우만을제외하고는모두가직자관계가아니며, 전왕과의혈연관계를부회하기위해사용된것으로파악된다. 따라서근초고왕의경우에도단지비류왕과의혈연관계를나타내기위해둘째아들로기록하였을뿐실제부자관계가아닐가능성이높은것으로추정된다. 따라서근초고왕의 ʻ근 ( 近 )ʼ이초고왕을계승한다는의미에서붙여졌다고한다면근초고왕의왕계는바로초고왕에서찾아야할것이다. 그렇다고한다면근초고왕은혹고이왕에의해폐위된사반왕의직계일가능성이크지않을까생각된다. 즉, 초고계의직계는방계인비류왕이즉위함으로써어느정도정치적인활동을재개할수있었을것이며, 진씨세력과인척관계를맺는과정을통하여정치적입지를강화시킬수있었던것으로볼수있다. 그리고근초고왕의즉위는초고계직계로의왕위계승권이확립되는계기가되었다고하겠다. 2. 왕비족의성립 백제는근초고왕대중앙집권적인귀족국가가완성되었다. 근초고왕대의대 표적중앙귀족세력으로는왕족인초고계직계를비롯하여왕비족으로성립되 는진씨세력이있다. 봄정월, 천지신명에제사를지냈다. 진정을조정좌평으로삼았다. 정은왕후의 친척이었다. 3) 백제의품격을높인근초고왕 95
102 근초고왕대중앙귀족세력의중핵을차지한것은왕을중심으로한왕족이었다. 그런데조정좌평에임명된진정의존재를통해진씨세력이중앙의유력한정치세력을형성하고있었음을알수있다. 백제역사에서진씨가등장하는것은건국기부터였던것으로생각된다. 이들은북부라고하는재지기반을토대로일찍부터정치세력화하여중앙에서도일정한입지를확보하고있었던것으로보인다. 진씨의정치세력화과정을보여주는기록으로는다음이있다. A. 겨울 10월, 우보흘우를좌보로삼고, 북부진회를우보로삼았다. 4) B. 가을 9월, 북부의진과에게명령하여군사 1천명을거느리고말갈의석문성을습격하여빼앗게하였다. 5) C. 여름 4월, 진충을좌장으로임명하여내외의군사에관한직무를맡겼다. 6) D. 가을 8월, 위나라유주자사관구검이낙랑태수유무, 삭방태수왕준과함께고구려를공격하자, 왕은그틈을이용하여좌장진충으로하여금낙랑의변방주민들을습격하여잡아오게하였다. 7) E. 봄정월, 남쪽제단에서천지신명에게제사를지냈다. 2월, 진충을우보로임명하였다. 진물을좌장으로임명하여, 군사에관한일을맡겼다. 8) F. 2월, 진가를내두좌평, 우두를내법좌평, 고수를위사좌평, 곤노를조정좌평, 유기를병관좌평으로임명하였다. 9) 3)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근초고왕 2년조의 ʻʻ 春正月祭天地神祗拜眞淨爲朝廷佐平淨王后親戚 ʼʼ 참조. 4)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다루왕 10년조의 ʻʻ 冬十月右輔屹于爲左輔北部眞會爲右輔 ʼʼ 참조. 5)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초고왕 49년조의 ʻʻ 秋九月命北部眞果領兵一千襲取靺鞨石門城 ʼʼ 참조. 6)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고이왕 7년조의 ʻʻ 夏四月拜眞忠爲左將委以內外兵馬事 ʼʼ 참조. 7)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고이왕 13년조의 ʻʻ 秋八月魏幽州刺史毋丘儉與樂浪太守劉茂朔方太守王遵伐高句麗王乘虛遣左將眞忠襲取樂浪邊民 ʼʼ 참조. 8)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고이왕 14년조의 ʻʻ 春正月祭天地於南壇二月拜眞忠爲右輔眞勿爲左將委以兵馬事 ʼʼ 참조. 9)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고이왕 28년조의 ʻʻ 二月拜眞可爲內頭佐平 ʼʼ 참조. 96 서울역사강좌
103 G. 가을 7 월, 대궐을수리하였다. 진의를내신좌평으로삼았다. 10) 먼저사료 A를통해서다루왕 10년 (37) 에진회가우보에임명되었음을알수있다. 우보의직에는대개왕족내지는유력세력이임명되고있다. 따라서진씨세력이우보의직에임명되었다는사실은그들이일찍부터상당한정치적입지를확보하고있었음을의미한다. 그리고그들의재지기반이북부였음을알수있다. 진씨는북부를기반으로중앙에서도상당한정치적위상을확보할수있었음을보여준다. 그런데진씨세력이활발하게중앙정치세력으로등장하는것은고이왕대이다. 사료 C에서보면진충이새로신설된좌장에임명되어내외의군사에관한직무 ( 內外兵馬 ) 의일을관장하게된다. 그리고고이왕 14년에는진충이우보에, 진물이좌장에임명되고있다. 고이왕대진씨세력이중앙정치에서두각을나타내는이유는그들이북부를재지기반으로많은군사력을보유하고있었기때문에가능하였을것이다. 즉, 고이왕 7년좌장직의신설은강력한군사력을보유하고있었던진씨세력을회유하기위한목적과아울러이들을중앙통치체제내에편제시킴으로써왕권을강화하고자하는정치적목적에의한것으로추정된다. 왕비족으로서진씨는근초고왕즉위시절대적지지세력으로작용함으로써왕비족이되었으며, 왕족다음가는정치적영향력을확보하게되었다. 진정이왕후의친척으로서성품이사납고어질지못하며, 또한일을처리함에있어서매우세밀 ( 臨事苛細 ) 하였고, 세력을믿고모든일을제맘대로처리하여국인이미워하였다고한다. 이러한점으로보아그가왕비족으로유력한정치세력을형성하고있었음을알수있다. 10) 삼국사기 권 25, 백제본기비류왕 30 년조의 ʻʻ 秋九月修宮室拜眞義爲內臣佐平 ʼʼ 참조. 백제의품격을높인근초고왕 97
104 3. 영역확장과대외교류 1) 영역확장 (1) 가야지역으로의진출백제는 4세기후반에들어와활발한대외팽창을시도하고있는데, 먼저가야지역으로진출하였다. 백제가제일먼저진출했던지역인탁순 ( 卓淳, 대구 ) 은당시의세력관계에서볼때김해가야나신라의세력확대를저지하기위해주변에서새로운세력과의동맹을필요로하였다. 또한중국군현의소멸이후가야지역에서는북방선진지역과의교류축소문제를타개하기위해서도백제와의교류가필요한상황이었다. 이와같은가야내부의정치적상황과맞물려가야지역진출이시도되었다. 백제는왜와의통교를모색하기위해갑자년 (364) 에탁순에사신을파견하였으며, 근초고왕 21년 (366) 에이르러서는탁순을통해왜와정식으로통교가이루어졌다. 내용을검토해보면, 탁순에모여왜가신라를공파하였을뿐만아니라이로인해가야 7국을평정하였으며, 이를백제에하사하였다는것으로되어있다. 이때평정된비자발 ( 比自㶱 ) 남가라 ( 南加羅 ) 녹국 ( 㖨國 ) 안라 ( 安羅 ) 다라 ( 多羅 ) 탁순 ( 卓淳 ) 가라 ( 加羅 ) 는창녕 김해, 밀양 영산, 함안 합천 대구 고령등대부분낙동강이서지역에비정된다. 일본서기 에는봄 3 월황전별과녹아별을장군으로삼아구저등과함께군대를거느리고건너가탁순국에이르러신라를치려고하였다고기록되어있다. 그리고탁순에모여신라를격파하고비자발 남가라 록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등 7국을평정하였다고기록하고있다 ( 일본서기 권9, 신공기 49년 3월조 ). 백제와가야와의관계를알수있는내용으로구이신왕대목만치의임나전횡, 성왕의회상내용중근초고왕과근구수왕대양국이자제 ( 子弟 ), 부형 ( 父兄 ) 의관계로묘사되고있는사실 (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2년조 ) 등이있다. 98 서울역사강좌
105 (2) 남부마한세력의복속백제의성장과정은마한 54국가운데하나였던백제국 ( 伯濟國 ) 이여러소국을복속하여가는과정이기도하다. 따라서백제의영역국가로의이행과정은마한세력의재편과정과밀접한관련을맺고있다. 한편, 백제가마한을병합해가는과정은앞의사료를통해그전모를추정할수있다. 특히온조왕 26년 ( 서기 8년 ) 마한의국읍을병합한것은마한의맹주국이었던것으로생각되는목지국의병합으로이해되고있다. 목지국의위치에대해서는여러견해가제기되고있으나, 대개금강이북지역에해당되며, 금강이남에는마한의일부소국들이여전히잔존하고있었다고보고있다. 다음의기록은이러한사실을확인시켜주고있다. 동이마한신미제국이산과대해에의존하고주로부터사천여리떨어져있어역대로귀부하지않았던 20여국이함께사신을보내조공하였다. 11) 이가운데신미국의위치에대해서는반도중부이남의서해안지대에위치한여러소국가운데하나또는신미국을비롯하여 20여국의위치가모두전라도해안지역을중심으로산재해있었던것으로보았다. 그런데국내사료의부족에도불구하고 4세기백제의남부마한지역에대한진출사실을보여주는것이바로 일본서기 의다음내용이다. 봄 3월황전별과녹아별을장군으로삼아구저등과함께군대를거느리고건너가탁순국에이르러신라를치려고하였다. ( 중략 ) 함께탁순에모여신라를격파하고비자발 ( 比自㶱 ) 남가라 ( 南加羅 ) 녹국 ( 㖨國 ) 안라 ( 安羅 ) 다라 ( 多羅 ) 탁순 ( 卓淳 ) 가라 ( 加羅 ) 등 7국을평정하였다. 또군대를옮겨서쪽으로돌아고해진에이르러남쪽의오랑캐인침미다례 ( 忱彌多禮 ) 를무찔러백제에게주었다. 이에백제왕초고와왕 11) 진서 ( 晋書 ) 권 36, 장화전. 백제의품격을높인근초고왕 99
106 자귀수가군대를이끌고와서만났다. 이때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4읍이스스로항복하였다. 이에백제왕부자와황전별 목라근자등이의류촌 [ 지금은주류수기라한다 ] 에서함께서로만나기뻐하고후하게대접하여보냈다. 오직천웅장언과백제왕은백제국에이르러벽지산에올라가맹세하였다. 12) 위의신공기 49년조기록은보정연대로근초고왕 24년 (369) 의사실을기록한것이다. 그러나 일본서기 의내용을근초고왕대의사실로인정한다하더라도이를그대로믿기보다는사료에대한엄정한비판과함께사료의면밀한검토가필요하다. 여기서백제가복속한지역은남만 ( 南蠻 ) 으로지칭된침미다례 ( 忱彌多禮 ) 뿐이고, 비리 ( 比利 ) 벽중 ( 辟中 ) 포미지 ( 布彌支 ) 반고 ( 半古 ) 의 4개읍은자연항복하고있다. 그리고이들항복한지역을백제의직접통치아래에두었는가하는문제는복속의문제와는별개로이해할필요가있다. 그런데 일본서기 신공기 49년 3월조의 ʻ 唯千熊長彦與百濟王至于百濟國登辟支山盟之復登古沙山共居盤石上時百濟王盟之 ʼ라는내용이주목된다. 즉, 앞의사료에서천웅장언 ( 千熊長彦 ) 과백제왕이 ʻ백제국 ( 百濟國 ) 에이르러ʼ라고하고있어, 남으로부터북행하는과정에서백제영역에이르고있음을알수있다. 여기서피지산 ( 辟支山 ) 은백제의벽골군, 지금의전북김제군내의어느산을지칭하는것으로, 고사산 ( 古沙山 ) 은전북옥구군임파면부근의산으로비정하여근초고왕이남정하기전의남계를전북과전남의경계인노령산맥으로보는견해가있다. 이들지명비정이타당하다고한다면당시김제지역을남계로하였을가능성이매우높다고생각된다. 따라서근초고왕대백제의정치적영향력은전라도전역을포괄하고있지만실제이지역을강역으로삼아직접통치를시행한것은아니었다. 근초고왕대이미이들지역이백제에정치적으로예속되었을것이라는점은동성왕 20년 (498) 탐라국을정벌하기위해무진주까지진출하고있는사실을통해서도알수있다. 탐라국과관련해서는다음의기록이주목된다. 12) 일본서기 권 9, 신공기 49 년 3 월조. 100 서울역사강좌
107 A. 여름 4월 탐라국이 방물을 바치자 왕이 기뻐하며 사자를 은솔(恩率)로 삼았 다.13) B. 8월 왕이 탐라(耽羅)가 공부를 바치지 않자 친히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렀다. 탐 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여 그쳤다.14) 탐라가 백제에 신속(臣屬)한 것은 문주왕 2년인데, 아마도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함에 따라 자국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미리 신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13)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문주왕 2년조. 14)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동성왕 20년조. 백제의 품격을 높인 근초고왕 101
108 2) 대외교류의확대백제의활발한대외팽창정책은국제적인외교관계를통해서도살펴볼수있다. 4~5세기백제의대외관계는주로중국대륙진출설을비롯해왜와의칠지도하사문제가주를이루어왔으나기록을통해확인되는내용을중심으로살펴보기로한다. (1) 동진과의외교수립백제는 4세기에들어와대내적으로는남부마한세력의복속을비롯해가야지역으로의활발한진출을시도하고있으며, 동시에대외적으로는주변국들과의외교관계를수립하는등영향력의확대에도많은노력을기울이고있다. 그리고이러한노력은일정시기에있어서는상당한성과를거두었으며, 그결과대중국외교수립이라는결과를가져왔을뿐만아니라동진 ( 東晋 ) 으로부터 ʻ진동장군령락랑태수 ( 鎭東將軍領樂浪太守 )ʼ라는관작을받음으로써명실상부하게낙랑 대방고지에대한정치적우월권을확보하고있다. 그러나백제가중국과백제국명 ( 百濟國名 ) 으로공식적인외교관계를맺고, 이것이기록에나타나는것은근초고왕대이다. A. 咸安二年春正月辛丑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六月遣使百濟王餘句爲鎭東將軍領樂浪太守 ( 晋書 권9, 帝紀 9 簡文帝咸安 2년 ) B. 春正月遣使入晋朝貢 ( 三國史記 권24, 근초고왕 27년 ) C. 春二月遣使入晋朝貢 ( 위의책, 근초고왕 28년 ) 먼저사료 A 의간문제 ( 簡文帝 ) 함안 ( 咸安 ) 2 년은근초고왕 27 년 (372) 에해당한 다. 따라서사료 A 와 B 의 진서 와 삼국사기 에근초고왕대외교관계가성 립된사실이동시에기록되고있음을알수있다. 불교의수용을비롯해백제 102 서울역사강좌
109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동진제 청자 등은 그 대표적 예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는 확립된 왕권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 및 통치이념의 도입을 통해 통치체 제를 일신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침류왕 이후 한 동안 동진(317~418년) 과의 외교관계가 기록에 보이고 있지 않다가 전지왕 2년 (406)에 가서야 다시 진과 통교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 다. 이는 진사왕 이후 고구 려의 남진으로 인해 동진에 사신을 파견할 여유가 없었 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후 5세기에 와서는 송에 빈번 하게 사신을 파견하여 선진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런데 개로왕 대 와서 기존에 남조와 일관하여 이루어지던 외교가 북조의 북위와도 진행되 었는데, 이는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또한 백제지역에서 출토된 중국제 도자기를 보면(2003년 기준), 한성기 74점 가운데 서울지역 52점, 각 지역 17점, 미상 5점 등으로 서울지역이 절대적 비 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왜와의 통교 백제의 대왜관계를 제일 먼저 보여주는 자료로는 일본서기 를 들 수 있다. A. 46년 봄 3월 을해 초하루 이때 백제 초고왕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 고, 다섯가지 빛깔의 채견(綵絹) 각 1필과 각궁전(角弓箭) 및 철정(鐵鋌) 40매(枚) 를 이파이(爾波移)에게 주었다. 또 보물창고를 열어 여러 가지 진기한 것들을 백제의 품격을 높인 근초고왕 103
60-Year History of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of Korea 제4절 조선시대의 감사제도 1. 조선시대의 관제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무신란에 의하여 붕괴되고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이 지배층으 로 되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새로이 신흥사대부가 대두하여 마침내 조선 건국에 성공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조선양반사회의
More information¹é¹üȸº¸ 24È£ Ãâ·Â
2009.가을 24호 2_ . 02 03 04 08 10 14 16 20 24 28 32 38 44 46 47 48 49 50 51 _3 4_ _5 6_ _7 8_ _9 10_ _11 12_ _13 14_ _15 16_ _17 18_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에서 개식사를 하는 김구(1940.9.17) 將士書) 를 낭독하였는데, 한국광복군이 중국군과 함께 전장에
More information지도학발달06-7/8/9장
3 1 7 17 95101G 421d 221 2 3 4 1971 34 12 1804 1866 1972 31866 4 1 5 33 1866 3 6 31866 3 1803 1877 1804 1866 2 02333 318 4 51 633 3 6 2022 222 31866 1955 1931 3 916 7 1925 1925 10 9 1862 65 8 7 2 1931
More information120~151역사지도서3
III 배운내용 단원내용 배울내용 120 121 1 2 122 3 4 123 5 6 124 7 8 9 125 1 헌병경찰을앞세운무단통치를실시하다 126 1. 2. 127 문화통치를내세워우리민족을분열시키다 1920 년대일제가실시한문화 통치의본질은무엇일까? ( 백개 ) ( 천명 ) 30 20 25 15 20 15 10 10 5 5 0 0 1918 1920 ( 년
More information1362È£ 1¸é
www.ex-police.or.kr 2 3 4 5 6 7 시도 경우회 소식 2008年 4月 10日 木曜日 제1362호 전국 지역회 총회 일제 개최 전남영광 경우회 경북구미 경우회 서울양천 경우회 경남마산중부 경우회 경북예천 경우회 서울동대문 경우회 충남연기 경우회 충남예산 경우회 충남홍성 경우회 대전둔산 경우회 충북제천 경우회 서울수서 경우회 부산 참전경찰회(부산진)
More information제 53 회서울특별시과학전람회 예선대회작품설명서 본선대회작품설명서 쓰나미의피해를최소화시키는건물과 건물배치에대한탐구 출품번호 S-504 출품분야학생부출품부문지구과학 학교명학년 ( 직위 ) 성명
제 53 회서울특별시과학전람회 예선대회작품설명서 본선대회작품설명서 쓰나미의피해를최소화시키는건물과 건물배치에대한탐구 출품번호 S-504 출품분야학생부출품부문지구과학 2012. 5. 14. 학교명학년 ( 직위 ) 성명 - 1 - 그림 1 쓰나미의발생과정 그림 2 실제쓰나미의사진 ρ - 2 - 그림 3 땅을파는모습그림 4 완성된수조의모습 - 3 - 그림 5 삼각기둥그림
More information¹ßÇ¥¿äÁö229-286
5. 정비계획의 기본구상 5.1 유적 및 유구 정비 복원 사례연구 5.1.1 미륵사지(彌勒寺址) 미륵사지는 삼국유사 백제 무왕조에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로 가는 길에 용화산 밑의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 왕비의 청에 의하여 이곳을 메우고 3개의 불당과 탑, 회랑 등을 세웠 다는 기록이 있으며, 미륵사의 배치는 삼원병렬식(三院竝列式)으로 동 서
More informationuntitled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2) 2호 주거지 주거지는 해발 58.6m의 조사지역 중앙부 북쪽에 3호 주거지와 중복되어 위치하고 있다. 주거지는 현 지표층인 흑갈색사질점토층(10YR 2/3)을 제거하자 상면에 소토와 목탄이
More informationallinpdf.com
이책은북한에대한이해를돕기위해통일교육원에서발간한교재입니다. 각급교육기관등에서널리활용하여주시기바랍니다. 차례 Ⅰ. 북한이해의관점 Ⅱ. 북한의정치 차례 Ⅲ. 북한의대외관계 Ⅳ. 북한의경제 Ⅴ. 북한의군사 Ⅵ. 북한의교육 차례 Ⅶ. 북한의문화 예술 Ⅷ. 북한의사회 Ⅸ. 북한주민의생활 차례 Ⅹ. 북한의변화전망 제 1 절 북한이해의관점 Ⅰ. 북한이해의관점 Ⅰ. 북한이해의관점
More information3 Contents 8p 10p 14p 20p 34p 36p 40p 46P 48p 50p 54p 58p 생명다양성재단 영물이라는 타이틀에 정 없어 보이는 고양이, 날카롭게 느껴지시나요? 얼음이 따뜻함에 녹듯이, 사람에게 경계심 많은 길고양이도 곁을 내어주면 얼음 녹듯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길 위에 사는 생명체라 하여 함부로 대하지 말아주세요. 싫으면 외면해주세요.
More information<B3EDB9AEC0DBBCBAB9FD2E687770>
(1) 주제 의식의 원칙 논문은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야 한다. 주제 의식은 논문을 쓰는 사람의 의도나 글의 목적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협력의 원칙 독자는 필자를 이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따라서 필자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나 표현을 사용하여 독자의 노력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논리적 엄격성의 원칙 감정이나 독단적인 선언이
More information2020 나주도시기본계획 일부변경 보고서(2009).hwp
2020 나주도시기본계획일부변경 2009 나주시 목 차 Ⅰ. 나주도시기본계획변경개요 1. 도시기본계획변경의배경및목적 1 2. 도시기본계획변경의기본원칙 2 3. 도시기본계획변경의범위 3 4. 추진절차 4 Ⅱ. 도시현황및특성 1. 도시현황및특성 5 2. 역사적 문화적특성 20 3. 도시세력권 24 4. 도시기능 25 5. 상위및관련계획검토 26 6. 개발잠재력분석
More information3 4 5 6 7 8 2/25 26 27 28 2 3 3. 2 3. 2~8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15 3.28 3.29~30 1 8 15 2 9 16 3 10 17 4 11 18 5 12 19 6 13 20 7 14 21 4. 2~5 4.18
More information152*220
152*220 2011.2.16 5:53 PM ` 3 여는 글 교육주체들을 위한 교육 교양지 신경림 잠시 휴간했던 우리교육 을 비록 계간으로이지만 다시 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우 선 반갑다. 하지만 월간으로 계속할 수 없다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솔직히 나는 우리교 육 의 부지런한 독자는 못 되었다. 하지만 비록 어깨너머로 읽으면서도 이런 잡지는 우 리
More information<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01 02 8 9 32 33 1 10 11 34 35 가족 구조의 변화 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원만한 생활과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해 다양한 기능 사회화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행동 가구 가족 규모의 축소와 가족 세대 구성의 단순화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 1인 또는 1인 이상의 사람이 모여 주거 및 생계를 같이 하는 사람의 집단 타나는 가족 구조의
More information한국사 문제1급
1 2. 1. 3. 2 4. 5. 6. 7. 8. 3 9. 10. 11. 12. 4 13. 다음 중에서 고려 시대 문화재를 모두 고른 것은? [2점] 15. 다음 주장을 입증하는 근거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기 전까지는 제도 운영, 국왕 및 왕실 구성원 명칭, 국가 의례에서 실질적인 황제국을 지 향하였다. ① 원구단을 만들어 하늘에
More information(001~010)206교과-앞부속(수정)
(284~299)206지도서2-3 2012.9.17 21:21 페이지284 mac01 T 세계화 시대의 지역화 전략 1 단원의 개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면서 물자와 사람들의 지역 간 교류가 증가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세계 각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경쟁력 있는 특성을 발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지역의 독특한 자연 세계화 시대의 지역화 전략 교 통과 통신이
More information<B3EDB4DC28B1E8BCAEC7F6292E687770>
1) 초고를읽고소중한조언을주신여러분들게감사드린다. 소중한조언들에도불구하고이글이포함하는오류는전적으로저자개인의것임을밝혀둔다. 2) 대표적인학자가 Asia's Next Giant: South Korea and Late Industrialization, 1990 을저술한 MIT 의 A. Amsden 교수이다. - 1 - - 2 - 3) 계량방법론은회귀분석 (regression)
More information<694D424320B5B6C7D0C7D0C0A7C1A620B1B3BEE7B0F8C5EB2031B4DCB0E820B1B9BBE F37B1B3292E687770>
차례 제1편선사문화와고대국가제1장선사문화와고조선 27 확인학습문제 41 제2장삼국시대 51 확인학습문제 75 제3장남북국시대 88 확인학습문제 104 제2편중세사회제1장고려사회의성립과발전 117 확인학습문제 140 제2장고려의경제 사회 문화 154 확인학습문제 171 제3편근세및근대태동기사회제1장조선사회의성립과발전 185 확인학습문제 209 제2장조선전기사회변화와외세침략
More information#7단원 1(252~269)교
7 01 02 254 7 255 01 256 7 257 5 10 15 258 5 7 10 15 20 25 259 2. 어휘의 양상 수업 도우미 참고 자료 국어의 6대 방언권 국어 어휘의 양상- 시디(CD) 수록 - 감광해, 국어 어휘론 개설, 집문당, 2004년 동북 방언 서북 방언 중부 방언 서남 방언 동남 방언 제주 방언 어휘를 단어들의 집합이라고 할 때,
More informationHWP Document
key point 제2편 선사시대와 국가의 형성 19 01 + 출제유형 및 핵심 포인트 역사 상황 및 쟁점의 인식 (가)에 들어갈 자료로 적절한 것은? [3점] ① ④ ② ③ ⑤ 제시된 자료는 선사 시대 문화 축제에 대한 포스터이다. 선사 시대 의 유적지와 유물을 연결하는 문제이다. 경기 연천 전곡리에서는 주 먹도끼가 출토되었다. ① (X) 독무덤은 시신,
More information2011-67 차례 - iii - 표차례 - vii - 그림차례 - xi - 요약 - i - - ii - - iii - 제 1 장서론 대구 경북지역인력수급불일치현상진단과해소방안에대한연구 1) ( ) 574 208 366 263 103 75.6 77.9 74.3 73.0 77.7 19.3 19.2 19.4 20.5 16.5 3.0 1.0 4.1
More information단양군지
제 3 편 정치 행정 제1장 정치 이보환 집필 제1절 단양군의회 제1절 우리는 지방자치의 시대에 살며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주민의 복지증진을 꾀 하고 있다. 자치시대가 개막된 것은 불과 15년에 불과하고, 중앙집권적 관행이 커 서 아직 자치의 전통을 확고히 자리 잡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으며, 앞으로의 과제 가 더 중요하다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우리지역 지방자치의
More information목 과 속 종 뼈점수 % 뼈점수마리수 % 마리수 우제목 사슴 큰꽃사슴 큰꽃사슴 63 22.5% 사슴 누렁이 1 0.4% 큰뿔사슴 넓적큰뿔사슴 13 4.6% 상원큰뿔사슴 2 0.7% 소 소 첫소 3 1.1% 물소 물소 8 2.9% 돼지 돼지 멧돼지 23 8.2% 기제목 말 말 상원말 15 5.4% 코뿔이 쌍코뿔이 큰쌍코뿔이 127 45.4% 식육목 개 이리 이리
More information- 2 -
공공도서관정책제안자료집 2010. 7 02-529-7310, Fax: 02-6442-7310, E-mail : cultureandlibrary@ gmail.com - 2 - 1. 강원도 [ 표 1] 2008 년말기준전국공공도서관 1 관당지표 도서관수 ( 관 ) 연면적 ( m2 ) 장서수 ( 권 ) 직원수 ( 명 ) 사서수 ( 명 ) 예산 ( 천원 ) 자료구입비
More information200706ºÎµ¿»êÆ®·£µåc02ªš
06 2007 SUMMARY PartⅠ 아파트 시장동향 1. 매매가격동향 2. 전세가격동향 3. 분양실적 및 계획 PartⅡ 토지 시장동향 1. 권역별 지가동향 2. 용도지역 이용상황별 지가동향 3. 토지거래동향 주요 News Real Estate Trend June 2007 Vol.11 KOREA APPRAISAL BOARD 2 3 4 5 Real Estate
More information5 291
1 2 3 4 290 5 291 1 1 336 292 340 341 293 1 342 1 294 2 3 3 343 2 295 296 297 298 05 05 10 15 10 15 20 20 25 346 347 299 1 2 1 3 348 3 2 300 301 302 05 05 10 10 15 20 25 350 355 303 304 1 3 2 4 356 357
More information<B9AEC8ADC0E7C3A2766F6C2E31325FBDCCB1DB2E706466>
2012 44 45 2012 46 47 2012 48 49 추억의 사진 글 사진 최맹식 고고연구실장 죽음을 감지하고 미리 알아서 죽은 미륵사지 느티나무 이야기 느티나무가 있던 자리 미륵사지는 가장 오랫동안 발굴 작업이 이뤄진 곳 미륵사지는 발굴 종료 당시, 우리나라 발굴 역사상 가장 오랫 동 안 발굴했던 유적이다. 1980년 7월 7일 발굴을 시작해 1996년
More information......-....4300.~5...03...
덕수리-내지(6장~8장)최종 2007.8.3 5:43 PM 페이지 168 in I 덕수리 민속지 I 만 아니라 마당에서도 직접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장팡뒤의 구조는 본래적인 형태라 고 할 수는 없으나, 사회가 점차 개방화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폐쇄적인 안뒤공간에 위치하던 장항 의 위치가 개방적이고 기능적인 방향으로 이동해가는 것이 아닌가 추론되어진다.
More information한국사능력검정시험-부속물.indd
Preview 02 한국사 핵심 이론의 체계적 정리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 Chapter 출제포인트 다년간의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중급 문제(3 4급)의 수준과 경향을 완벽하게 파악하여 분석한 후 방대한 한국사 이론의 핵심에 해당 되는 이론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였다. 1 고조선의 8조법에 대한 내용을 파악하자. 2 명도전 등 철기 시대의 유물을 제시하고
More information<B9CEBCBCC1F828C8AFB0E6B1B3C0B0292E687770>
iv v vi vii viii ix x 1 2 3 4 5 6 경제적 요구 생산성 경쟁력 고객만족 수익성제고 경제성장 고용증대 외부여건의 변화: 범지구적 환경문제의 심화 국내외 환경규제의 강화 소비자의 의식 변화 환경비용의 증대 환경단체의 압력 환경이미지의 중요성 증대 환경적 요구 자원절약 오염예방 폐기물저감 환경복구 삶의 질 향상 생태계 보전 전통적 경영 경제성과
More information741034.hwp
iv v vi vii viii ix x xi 61 62 63 64 에 피 소 드 2 시도 임금은 곧 신하들을 불러모아 나라 일을 맡기고 이집트로 갔습니다. 하 산을 만난 임금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말했어요. 원하시는 대로 일곱 번째 다이아몬드 아가씨를
More information<34BFF9C8A320B4DCB8E9B0EDC7D8BBF32E706466>
ISSN 2288-5854 Print ISSN 2289-0009 online DIGITAL POST KOREA POST MAGAZINE 2016. APRIL VOL. 687 04 DIGITAL POST 2016. 4 AprilVOL. 687 04 08 04 08 10 13 13 14 16 16 28 34 46 22 28 34 38 42 46 50 54 56
More information지표조사보고제 2017-36 집 금산군북면외부리 685-1 번지일원태양광발전시설부지내 국비지원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2017. 8. 금산군북면외부리 685-1 번지일원태양광발전시설부지내 국비지원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2017. 8. 재단법인 동방문화재연구원 - 일러두기 - 1. 이보고서는유지순외 7인이의뢰하고, 한국매장문화재협회와협의를거쳐국비지원으로실시한 금산군북면외부리
More information2011 년 3/4 분기지역별고용조사잠정결과 2011 년 3/4 분기지역별고용조사결과 ( 요약 ) . 시지역및군지역의고용특성 . 고용특성별시군현황 . 지역별고용현황 1. 경기도 80.0 (%) 고용률실업률 (%) 10.0 70.0 60.0 50.0 40.0 30.0 20.0 56.0 56.6 53.6 54.6 53.8 55.9 55.7 53.0
More information(연합뉴스) 마이더스
The monthly economic magazine 2012. 04 Vol. 98 Cover Story April 2012 _ Vol. 98 The monthly economic magazine www.yonhapmidas.co.kr Contents... 14 16 20 24 28 32 Hot News 36 Cover Story 46 50 54 56 60
More information지표조사보고제 2018-22 집 서산부석면강당리산 189 번지태양광발전시설 B 부지내국비지원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2018. 7. 서산부석면강당리산 189 번지태양광발전시설 B 부지내 국비지원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2018. 7. 재단법인 동방문화재연구원 - 일러두기 - 1. 이보고서는 JKS태양광발전소 ( 정기상氏외 16인 ) 이의뢰하고, 한국매장문화재협회와협의를거쳐국비지원으로실시한
More information*074-081pb61۲õðÀÚÀ̳ʸ
74 October 2005 현 대는 이미지의 시대다. 영국의 미술비평가 존 버거는 이미지를 새롭 게 만들어진, 또는 재생산된 시각 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 정의에 따르 면, 이미지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지는 보는 사람의, 혹은 이미지를 창조하는 사람의 믿음이나 지식에 제한을 받는다. 이미지는 언어, 혹은 문자에 선행한다. 그래서 혹자는
More informationÃѼŁ1-ÃÖÁ¾Ãâ·Â¿ë2
경기도 도서관총서 1 경기도 도서관 총서 경기도도서관총서 1 지은이 소개 심효정 도서관 특화서비스 개발과 사례 제 1 권 모든 도서관은 특별하다 제 2 권 지식의 관문, 도서관 포털 경기도 도서관 총서는 도서관 현장의 균형있는 발전과 체계적인 운 영을 지원함으로써 도서관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간되 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를 통해 사회전반의 긍정적인
More information더바이어102호 01~09
www.withbuyer.com Highquality news for professionals www..kr Tel. 031)220-8685 2 Contents 01 02 08 17 18 TEL. 064720-1380~87 04 06 08 10 12 14 17 18 www.withbuyer.com 3 20 23 24 26 24 26 28 29 30 32 33
More information문화재이야기part2
100 No.39 101 110 No.42 111 문 ᰍℎ᮹ šᯙŝ $* ᗭ} 화 재 이 야 기 De$** 남기황 ᰍℎ šᯙŝ $* ᗭ} 관인은 정부 기관에서 발행하는, 인증이 필요한 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편찬토록 하여 그 이듬해 문서 따위에 찍는 도장 이다. 문화재청은 1999년 (1447) 만든 석보상절을 읽고나서 지은 찬불가(讚
More information현장에서 만난 문화재 이야기 2
100 No.39 101 110 No.42 111 문 ᰍℎ᮹ šᯙŝ $* ᗭ} 화 재 이 야 기 De$** 남기황 ᰍℎ šᯙŝ $* ᗭ} 관인은 정부 기관에서 발행하는, 인증이 필요한 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편찬토록 하여 그 이듬해 문서 따위에 찍는 도장 이다. 문화재청은 1999년 (1447) 만든 석보상절을 읽고나서 지은 찬불가(讚
More information³»Áö_10-6
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이 책에서는 단순히 가난한 관리들의 이야기보다는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사심 없이 헌신한 옛 공직자들의 사례들을 발굴하여 수록하였습니다. 공과 사를 엄정히 구분하고,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공무를 처리한 사례, 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최부, 송흠
More information2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VOL.13 No.4 2011 08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CONTENTS XXXXXX XXXXXX 2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3 XXXXXXXXXXXXXXX XXXXXXXXXXXXXX 4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5 6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More information새국어생활제 14 권제 4 호 (2004 년겨울 )
새국어생활제 14 권제 4 호 (2004 년겨울 ) 네티즌들이궁금해하는어원몇가지 (3) 115 새국어생활제 14 권제 4 호 (2004 년겨울 ) 네티즌들이궁금해하는어원몇가지 (3) 117 새국어생활제 14 권제 4 호 (2004 년겨울 ) 네티즌들이궁금해하는어원몇가지 (3) 119 새국어생활제 14 권제 4 호 (2004 년겨울 ) 네티즌들이궁금해하는어원몇가지
More information나하나로 5호
Vol 3, No. 1, June, 2009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KACPR) Newsletter 01 02 03 04 05 2 3 4 대한심폐소생협회 소식 교육위원회 소식 일반인(초등학생/가족)을
More informationOD..Network....( ).hwp
예비타당성조사에활용되는 O-D 및 NETWORK 의분석지침연구 한국개발연구원 100 죤번호 죤명 인구수 죤번호 죤명 인구수 죤번호 죤명 인구수 1 종로구 190619 42 중구 99971 83 동안구 ( 안양 ) 334582 2 중구 125050 43 동구 342951 84 소사구 ( 부천 ) 204502 3 용산구 246613 44
More informationMicrosoft PowerPoint - MonthlyInsighT-2018_9월%20v1[1]
* 넋두리 * 저는주식을잘한다고생각합니다. 정확하게는주식감각이있다는것이맞겠죠? 예전에애널리스트가개인주식을할수있었을때수익률은엄청났었습니다 @^^@. IT 먼쓸리가 4주년이되었습니다. 2014년 9월부터시작하였으니지난달로만 4년이되었습니다. 4년간누적수익률이최선호주는 +116.0%, 차선호주는 -29.9% 입니다. 롱-숏으로계산하면 +145.9% 이니나쁘지않은숫자입니다.
More informationº´¹«Ã»Ã¥-»ç³ªÀÌ·Î
솔직히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 그렇게까지 군대를 가려고하냐, 미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후회는 없다.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조차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군대는 하루하루를 소종하게 생각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점점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며
More information**09콘텐츠산업백서_1 2
2009 2 0 0 9 M I N I S T R Y O F C U L T U R E, S P O R T S A N D T O U R I S M 2009 M I N I S T R Y O F C U L T U R E, S P O R T S A N D T O U R I S M 2009 발간사 현재 우리 콘텐츠산업은 첨단 매체의 등장과 신기술의 개발, 미디어 환경의
More informationexercise 0 자료 따지기 한국사의 바른 이해 0초 20. 9급 지방직 00 다음과 같은 주장에 가장 적합한 역사 서술은? 역사가는 자기 자신을 숨기고 과거가 본래 어떠한 상태에 있 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자신의 지상 과제로 삼아야 하며, 이 이 주제에서는 역사의
차례. 선사 고대 2 4 5 6 7 8 9 0 2 4 5 2. 고려 한국사의 바른 이해 구석기 시대의 생활과 유적 신석기 시대의 생활과 유물 청동기 철기 시대의 생활과 유물 고조선의 건국과 발전 여러 나라의 성장 고구려의 건국과 발전 백제의 건국과 발전 신라의 건국과 발전 가야 연맹 삼국 간의 항쟁 삼국의 통치 체제 삼국의 금석문 대외 항쟁과 신라의 통일 통일
More information화보 끝없는,, 끝나지 끝나지 않는 않는 즐거움 끝없는 얼음벌판 인제빙어축제 강원도 인제군 내설악 지류와 내린천의 관문인 소양호, 눈 덮인 내설악의 환상적인 경관을 배경으로 은빛 빙어를 주제로 펼쳐 지는 축제가 있다. 바로 인제빙어축제이다. 인제빙어축제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 민국 대표축제이다. 10회 축제기간 동안 방문객 100만 명 돌파(2007년 기준,
More information지발홍보책_도비라목차_0125
남북교류 접경벨트 서 해 안 동 해 안 내륙벨트 신 산 업 벨 트 에 너 지 관 광 벨 트 남해안 선벨트 Contents Part I. 14 Part II. 36 44 50 56 62 68 86 96 104 110 116 122 128 134 144 152 162 168 178 184 190 196 204 Part I. 218 226 234 240 254 266
More information6 7 8 9 1 12 13 14 15 1-1 16 17 1-2 18 1-3 19 1-4 20 2 22 23 24 25 2-1 26 2-2 27 2-3 28 2-4 29 2-5 30 3 31 32 33 34 3-1 35 3-2 36 3-3 37 3-4 38 4 39 40 41 42 4-1 43 44 45 4-2 46 47 4-3 48 49 4-4 50
More information1. 2. 3. 4. 5.
1. 2. 3. 4. 5. 1 10 11 12 13 14 부여는 그 도장에 예왕지인( 濊 王 之 印 : 예왕의 인장)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 나라에는 오래된 성이 있는데, 이름을 예성( 濊 城 )이라 고 한다. 본래 예맥의 지역인데, 부여가 그 가운데 왕으로 있었다. 1 15 16 17 18 19 20 1 2 21 2 22 1 2 23 24 1 2 25 26
More information고 시 서울특별시고시제 호도시관리계획 [ 용산지구단위계획구역 ( 서부이촌동일대 ) 및계획 ] 결정 ( 변경 ) 및지형도면정정고시 구분 도면표시번호 지구명 지구의세분 위치 면적 ( m2 ) 연장 (m) 폭원 (m) 최초결정일 비고 기정 1 미관지구 역사문화미관
고 시 서울특별시고시제2016-32호도시관리계획 [ 용산지구단위계획구역 ( 서부일대 ) 및계획 ] 결정 ( 변경 ) 및지형도면정정고시 구분 도면표시번호 지구명 지구의세분 위치 면적 ( m2 ) 연장 (m) 폭원 (m) 최초결정일 비고 기정 1 미관지구 역사문화미관지구 청암동 ( 구계 ) ~ 401 20,069 (8,673) 1,675 (730) 12 건고제
More information학부모신문225호최종
02 04 10 11 06 15 2 225 2010.06.05 Q Q Q Q Q Q Q Q Q Q Q 2010.06.05 225 3 Q Q Q Q 4 225 2010.06.05 2010.06.05 225 5 6 225 2010.06.05 2010.06.05 225 7 Q A Q A Q A Q A Q A Q A Q A Q A Q A Q A Q A Q A Q A
More information¼øâÁö¿ª°úÇÐÀÚ¿ø
13 1. 객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 객사는 영조 35년(1759년)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관청 건물입니다. 원래는 가운데의 정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 오른쪽에 서대청, 앞쪽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 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있습니다. 정당에서는 전하 만만세 라고 새 긴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More information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담아 석회암이나 동물의 뼈 또는 뿔 등으로 조 각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는 빙하기가 끝나 고 다시 기후가 따뜻해졌다. 이 시기에는 작고 빠른 짐승을 잡기 위해 활을 사용하고, 이전보다 작은 잔석기를
01 선사 문화의 발전과 여러 나라의 성장 1 선사 문화의 발전 출제 포인트 핵심 정리 구석기 시대의 주요 유적지(연천 전곡리)를 알아두자. 신석기 시대의 주요 유물, 특히 토기를 청동기 시대와 구분하여 알아두자.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구분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도구 경제 활동 뗀석기, 뼈도구 사냥, 채집, 고기잡이 간석기(돌보습, 돌괭이, 돌삽,
More information소식지수정본-1
2010. 7 통권2호 2 CONTENTS Korea Oceanographic & Hydrographic Association 2010. 7 2010년 한마음 워크숍 개최 원장님께서 손수 명찰을 달아주시면서 직원들과 더욱 친숙하게~~ 워크숍 시작! 친근하고 정감있는 말씀으로 직원들과 소통하며 격려하여 주시는 원장님... 제12차 SNPWG 회의에 참석 _ 전자항해서지
More information*부평구_길라잡이_내지칼라
발 간 등 록 번 호 54-3540000-000057-01 2012년도 정비사업 추진 지연에 따른 갈등요인 길라잡이 INCHEON METROPOLITAN CITY BUPYEONG-GU INCHEON METROPOLITAN CITY BUPYEONG-GU 1970년대 부평의 전경 1995년 부평의 전경 2011년 부평의 전경 백운2구역 재개발지역 부평4동 재개발지역
More information저작자표시 - 비영리 - 변경금지 2.0 대한민국 이용자는아래의조건을따르는경우에한하여자유롭게 이저작물을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및방송할수있습니다. 다음과같은조건을따라야합니다 : 저작자표시. 귀하는원저작자를표시하여야합니다. 비영리. 귀하는이저작물을영리목적으로이용할
저작자표시 - 비영리 - 변경금지 2.0 대한민국 이용자는아래의조건을따르는경우에한하여자유롭게 이저작물을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및방송할수있습니다. 다음과같은조건을따라야합니다 : 저작자표시. 귀하는원저작자를표시하여야합니다. 비영리. 귀하는이저작물을영리목적으로이용할수없습니다. 변경금지. 귀하는이저작물을개작, 변형또는가공할수없습니다. 귀하는, 이저작물의재이용이나배포의경우,
More information<303330395FC0FCB8C15FC3D6C1BEBABB2E687770>
2003년 가을호 5.0 4.0 3.0 2.0 1.0 (%) 2.6 2.8 2.4 1.2 주택매매가격 0.8 주택전세가격 1.6 0.4 0.0-1.0-2.0-0.1-0.6-0.2-0.9 02.1 3 5 7 9 11 03.1 3 5 7 8 160 140 120 100 80 60 40 20 0 (천호) 149 2001년 2002년 2003년 46 46
More information(중등용1)1~27
3 01 6 7 02 8 9 01 12 13 14 15 16 02 17 18 19 제헌헌법의제정과정 1945년 8월 15일: 해방 1948년 5월 10일: UN 감시 하에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 제헌 국회의원 198명 선출 1948년 6월 3일: 헌법 기초 위원 선출 1948년 5월 31일: 제헌 국회 소집. 헌법 기 초위원 30명과 전문위원 10명
More information쌍백합23호3
4 5 6 7 여행 스테인드글라스 을 노래했던 하느님의 영원한 충만성을 상징하는 불꽃이다. 작품 마르코 수사(떼제공동체) 사진 유백영 가브리엘(가톨릭 사진가회) 빛은 하나의 불꽃으로 형상화하였다. 천사들과 뽑힌 이들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하며 세 겹의 거룩하심 가 있을 것이다. 빛이 생겨라. 유리화라는 조그만 공간에 표현된 우주적 사건인 셈이다.
More information표지안 0731
32 33 특집 Ⅰ 공유도시, 공유경제 _ 도시정부와 공유경제 2. 도시정부는 공유경제의 발전에 있어 주요한 역할 수행 도시정부 자체적인 공유경제 서비스 제공의 대표적인 사례 : 공유 자전거 전세계 공유자전거 지도 Bike Share Map 8) < 서울의 공유 자전거 서비스 > 서울특별시 공공자전거 : 여의도, 상암동 일대에서 운영중 - 2010년
More information저작자표시 - 비영리 - 변경금지 2.0 대한민국 이용자는아래의조건을따르는경우에한하여자유롭게 이저작물을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및방송할수있습니다. 다음과같은조건을따라야합니다 : 저작자표시. 귀하는원저작자를표시하여야합니다. 비영리. 귀하는이저작물을영리목적으로이용할
저작자표시 - 비영리 - 변경금지 2.0 대한민국 이용자는아래의조건을따르는경우에한하여자유롭게 이저작물을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및방송할수있습니다. 다음과같은조건을따라야합니다 : 저작자표시. 귀하는원저작자를표시하여야합니다. 비영리. 귀하는이저작물을영리목적으로이용할수없습니다. 변경금지. 귀하는이저작물을개작, 변형또는가공할수없습니다. 귀하는, 이저작물의재이용이나배포의경우,
More information속표지(도큐)
인묘(유 소아묘)와 성인묘 양자가 뚜렷이 구분되어지는 객관적 기준(점)이 설정된다면, 이러한 기 준을 이용하여 인골이 출토되지 않는 다른 유적에 적용 가능하지 않을까한다. 먼저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인골이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어 연령 및 성별에 따른 고분의 성격 을 가장 잘 파악 할 수 있는 예안리고분군 목곽 석곽 유 소아묘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 다.
More informationi - ii - iii - 1 - 연도 보험급여 총계 (A) 장해급여 유족급여 일시금연금일시금연금 연금계 (B) 연금비중 (B/A, %) 기타 급여 1) 1998 14,511 3,377 979 1,657 30 1,009 7.0 8,467 1999 12,742 2,318 1,120 1,539 38 1,158 9.1 7,727 2000 14,563 2,237 1,367
More information복지백서내지001~016화보L265턁
Photo S tory 사진으로 보는 서울의 사회복지 1950년대 아동복지시설 연합 체육대회 (창경원) 3 1950년 삼성농아원 초창기 구화교육 (이진주 선생) 1928년 용정부녀자합동급식소 (명진보육원 전신) 1920년대 초기 태화유치원 교육 1930년대 무산아동운동장 (태화여자관 전경) 1936년 경성양로원 (1927년 설립, 1954년 현재의 청운양로원으로
More information지표조사보고제 집 서산음암면도당리산 9-5 번지위험물처리및저장시설부지내 국비지원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지표조사보고제 2016-54 집 서산음암면도당리산 9-5 번지위험물처리및저장시설부지내 국비지원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2016. 11. 서산음암면도당리산 9-5 번지위험물처리및저장시설부지내 국비지원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2016. 11. 재단법인 동방문화재연구원 - 일러두기 - 1. 이보고서는이상현氏의의뢰로 ( 사 ) 한국매장문화재협회와협의를거쳐국비지원으로실시한 서산음암면도당리산9-5번지위험물처리및저장시설부지내국비지원문화재지표조사
More information01¸é¼öÁ¤
16면 2012.7.25 6:14 PM 페이지1 2012년 8월 1일 수요일 16 종합 고려대장경 석판본 판각작업장 세계 최초 석판본 고려대장경 성보관 건립 박차 관계기관 허가 신청 1차공사 전격시동 성보관 2동 대웅전 요사채 일주문 건립 3백여 예산 투입 국내 최대 대작불사 그 동안 재단은 석판본 조성과 성보관 건립에 대해서 4년여 동안 여러 측면에 서 다각적으로
More information071115-2
Copyright eyesurfer. All rights reserved. 2007년 11월 15일 목요일 [매일경제신문] 04면 종합 -9- 2007년 11월 14일 수요일 [내일신문] 17면 산업/무역 - 11 - 2007년 11월 15일 목요일 [매일경제신문] 37면 인물 - 16 - 2007년 11월 15일 목요일 [동아일보]
More information단양군지
제 1 편 제 1 장 역사 단양의 선사문화 44 45 균 강수량은 1,702mm 내외이며 침엽수림과 혼효림(混淆林)이 잘 발달되어 있고, 강원도 경기도 매포읍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측백나무 집단 자생지(천연기념물 제62호, 1962 년 12월 3일 제정)가 있다. 단양군 충청북도 충 청 남 도 제3절 경상북도 대전 단양의 선사유적 위치도 ❶ 상시유적
More informationMicrosoft PowerPoint - 26.pptx
이산수학 () 관계와그특성 (Relations and Its Properties) 2011년봄학기 강원대학교컴퓨터과학전공문양세 Binary Relations ( 이진관계 ) Let A, B be any two sets. A binary relation R from A to B, written R:A B, is a subset of A B. (A 에서 B 로의이진관계
More information(012~031)223교과(교)2-1
0 184 9. 03 185 1 2 oneclick.law.go.kr 186 9. (172~191)223교과(교)2-9 2017.1.17 5:59 PM 페이지187 mac02 T tip_ 헌법 재판소의 기능 위헌 법률 심판: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면 그 효력을 잃게 하거 나 적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 탄핵 심판: 고위 공무원이나 특수한 직위에 있는 공무원이 맡
More informationbm-200200004.hwp
구분 지원단체 지원품목 수량 금 액 지원경로 2000 북한동포돕기제주도민운동본부 감귤 3,000톤 237 독자창구 강 원 도 농업용 비닐 27,000롤(415톤) 55 한적 북한동포돕기제주도민운동본부 당근 2,000톤 58 독자창구 강 원 도 연어치어55만미방류자재1식(21종)등 13 솔잎혹파리 공동방제 관련 약제 23 한적 남북강원도협력협회 농업용비닐 195톤
More information국어 순화의 역사와 전망
전문용어의국어화 강현화 1. 들어가기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 사용의 전형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본고는 전문 용어의 사용자가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포 될 수 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출발점을 시작으로 과연 전문 함 용어의 국어화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한다. 2. 전문 용어 연구의 쟁점 2.1. 전문 용어
More information.....6.ok.
Ⅳ 성은 인간이 태어난 직후부터 시작되어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므로 성과 건강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청소년기에 형성된 성가치관은 평생의 성생활에 영향을 미치며 사회 성문화의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성과 건강 단원에서는 생명의 소중함과 피임의 중요성을 알아보고, 성매매와 성폭력의 폐해, 인공임신 중절 수술의 부작용 등을 알아봄으로써 학생 스스로 잘못된 성문화를
More information2019 년도제 2 회경상남도지방공무원임용필기시험합격인원및합격선 합격선 : 조정점수가있는직류는총점으로표시됩니다. 직렬명 임용선발예정출원응시필기합격자기관인원인원경쟁률인원응시율인원 합격선 비고 합계 1,944 18, , % 1,765 - 간호8
2019 년도제 2 회경상남도지방공무원임용필기시험합격인원및 : 조정점수가있는직류는총점으로표시됩니다. 간호8급 창원시 16 223 13.9 160 71.7% 18 81.00 간호8급 진주시 2 49 24.5 39 79.6% 2 77.00 간호8급 통영시 7 68 9.7 52 76.5% 7 71.50 간호8급 사천시 6 101 16.8 82 81.2% 7 80.00
More information- 2 -
- 1 - - 2 - - 3 - - 4 - - 5 - - 6 - - 7 - - 8 - 49),, 2009/08/04;,, 2009/08/16;,, 2009/10/05. - 9 - - 10 - - 11 - 56),, 2009/10/10. - 12 - - 13 - - 14 - 58) 통일부발간 2010 북한권력기구도 의조선로동당조직도를수정하여필자가작성한것임 -
More information%±¹¹®AR
2004 CONTENTS 03 04 06 14 21 27 34 40 06 07 08 09 10 11 12 13 14 15 16 17 Historical Dictionary of North Korea Auf den Spuren der Ostbarbaren Czech-Korean Dictionary 18 19 Transforming Korean Politics:
More information- I - - II -
- I - - II - PAGE - III - - IV - - V - - VI - - 1 - ~ ~ - 2 - - 3 - - 4 - - 5 - for - 6 - - 7 - - 8 - - 9 - - 10 - - 11 - - 12 - - 13 - - 14 - - 15 - - 16 - - 17 - δ - 18 - - 19 - - 20 - - 21 - - 22 -
More information지표조사보고제 집 세종송학리산 10-9 번지관상수식재사업부지내 국비지원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지표조사보고제 2015-21 집 세종송학리산 10-9 번지관상수식재사업부지내 국비지원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2015. 07. 세종송학리산 10-9 번지관상수식재사업부지내 국비지원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2015. 07. 재단법인 동방문화재연구원 - 일러두기 - 1. 이보고서는국비지원으로실시된 세종송학리산10-9 번지관상수식재사업부지내국비지원문화재지표조사 의결과물이다.
More information- 89 -
- 89 - - 90 - - 91 - - 92 - - 93 - - 94 - - 95 - - 96 - - 97 - - 98 - - 99 - 있다 장정임 ( 2009). Toylor 와 Betz(1983) 의 진로결정자기효능감 척도 와 및 등이 개발 (career 와 한 진로결정자기효능감 척도 단축형 은 미래계획수립 문제해결과 같은 자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More information01 02
아라뱃길 아라뱃길의 수향4경으로 대포분수, 아라뱃길 이야기마당 등 시민을 위한 친수 공간과 야생초화류가 만발하는 야생화 테라스 가든을 조성할 예정인 이곳은? (4p 참조) 1 귤현워터프론트 2 시천워터프론트 3 환경교 4 마리나리조트 2011년 8월호 뱃 아라 길 응모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당첨되신 분께는 소정의 상품을 보내드립니다.(문의 : 042-629-2230)
More informationÈ޴ϵåA4±â¼Û
July 2006 Vol. 01 CONTENTS 02 Special Theme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Beautiful Huneed People 03 04 Special Destiny Interesting Story 05 06 Huneed News Huneed
More information(4) 무덤 : 독무덤, 널무덤 4. 청동기와철기시대의예술 (1) 발달 : 종교나정치적요구와관련되어발달 (2) 종류 1 의식용도구 : 청동거울, 청동방울, 청동검 제사장이나군장의권위과시 2 껴묻거리 : 사후세계에대한믿음을보여줌 3 바위그림제작 : 자신들의소망과기원을담음
Ⅰ. 우리역사의형성과고대국가의발전 선사문화의발전 1. 선사문화의전개 구석기시대 시기약 70 만년전부터기원전 8000 년경부터 유적지 도구 경제 평남상원검은모루동굴, 평남덕천승리산동굴, 경기도연천전곡리, 충남공주석장리등 뗀석기 : 찍개, 주먹도끼, 찌르개, 긁개, 슴베찌르개 뼈도구 : 동물의뼈나뿔로제작 사냥, 채집, 어로 무리생활, 이동생활 신석기시대 서울암사동,
More information목 차
Ⅴ. 광교지구택지개발사업지구단위계획결정 ( 변경 ) 도서 목 차 Ⅴ. 광교지구택지개발사업지구단위계획결정 ( 변경 ) 도서 1. 지구단위계획구역결정 ( 변경 ) 조서 가. 총괄 ( 변경없음 ) 도면표시번호 구역명위치 기정 면 적 ( m2 ) 변경후 변경 계 1단계 2단계 비고 - 수원시영통구매탄동, 이의동, 광교지구원천동, 하동, 팔달구우만동, 제1종지구단위계장안구연무동일원획구역용인시수지구상현동,
More information01정책백서목차(1~18)
발간사 2008년 2월, 발전과 통합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출범한 새 정부는 문화정책의 목표를 품격 있는 문화국가 로 설정하고, 그간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보완하는 한편 권한과 책임의 원칙에 따라 지원되고, 효율의 원리에 따라 운영될 수 있도록 과감한 변화를 도입하는 등 새로운 문화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란 국민 모두가 생활 속에서 문화적 삶과 풍요로움을
More information2013_1_14_GM작물실용화사업단_소식지_내지_인쇄_앙코르130.indd
GM작물실용화사업단 인식조사 및 실용화 방향 설정 GM작물 인식조사 및 실용화 방향 설정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김욱 박사 1. 조사목적 GM 작물 관련 인식조사는 사회과학자들을 바탕으로 하여 국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GM 작물 관련 인식 추이를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모니터링하여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탐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2. 조사설계 2.1.
More information2011년_1분기_지역경제동향_보도자료.hwp
< 목차 > 2011 년 1/4 분기지역경제동향 ( 요약 ) * 생산은광공업생산지수, 고용은취업자수이며, ( ) 의숫자는전년동분기대비증감률임 < 분기주요지역경제지표 1 > [ 전년동분기비, %] 시 도 ( 권역 1) ) 광공업생산지수 2) 대형소매점판매액지수 3) 취업자수 10.2/4 3/4 4/4 11.1/4 p 10.2/4 3/4 4/4 11.1/4 p
More informationÀÚ¿øºÀ»ç-2010°¡À»°Ü¿ï-3
2010 희망캠페인 쪽방의 겨울은 유난히 빨리 찾아옵니다. 하늘 높은지 모르고 오르는 기름 값은 먼 나라 이야기 마냥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내 몸 하 나 간신히 누일 전기장판만으로 냉기 가득한 방에서 겨울을 보내야 합니다. 한 달에 열흘정도 겨우 나가는 일용직도 겨울이 되면 일거리가 없어, 한 달 방값을 마련하 기 어렵고, 일을 나가지 못하면 밖으로 쫓겨 날
More information11+12¿ùÈ£-ÃÖÁ¾
Korea Institute of Industrial Technology 2007:11+12 2007:11+12 Korea Institute of Industrial Technology Theme Contents 04 Biz & Tech 14 People & Tech 30 Fun & Tech 44 06 2007 : 11+12 07 08 2007 : 11+12
More information37 동대문구 청량리8 추진위 청량리동 ,314 재개발 38 성북구 돈암6 추진위 돈암동 ,050 재개발 39 성북구 동소문2 조합 동소문2가 33 20,657 재개발 40 성북구 동선1 추진위 돈암동 ,235 재개발 41 성북구
서울시재개발재건축구역현황 (2016.12월기준 ) 연번 자치구 구역명 시행단계 주소 면적 사업구분 1 종로구 무악2 착공 무악동 46 11,059 재개발 2 종로구 신영1 조합 신영동 158 15,669 재개발 3 종로구 옥인1 사업시행 옥인동 47 30,282 재개발 4 종로구 충신1 조합 충신동 1-1 9,602 재개발 5 종로구 이화1 구역지정 이화동
More information2019달력-대(판형키워)
조국개황 72 주년 2019 4352 오직나에게덕이있어야항상향기롭다 興聖爲伍 성인과짝이되고성인의대열에들어가야한다. 1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2 23 24 30 35 26 27 28 29 2019 1January 2 24 25 26 27 28 3 4 5 6 7 8 9 10 11 12 13
More information조사보고서 완본(최종인쇄본).hwp
뉴질랜드 농업투자환경조사보고서 ( 주 ) 제이앤드에이 Ÿ Ÿ Ÿ Ÿ Ÿ Ÿ Ÿ Ÿ Ÿ 2.3) Waipara Limestone Vineyard Estate 토양특성 [표 2-7] Waipara Limestone Vineyard Estate 부지 토양 특성 유효
More information2002report hwp
2002 연구보고서 220-11 초 중등교육과정의성인지적개편을위한양성평등교육내용개발 한국여성개발원 발간사 양성평등교육내용개발진 연구요약 1. 연구목적 2. 연구방법 3. 7 차교육과정및교과서내용분석 가. 도덕과 나. 사회과 다. 실과 / 기술 가정과 4. 각교과별양성평등교육내용개발가. 도덕과 나. 사회과 다. 실과 / 기술 가정과 5. 결론 목 차 Ⅰ 서론
More information기본소득문답2
응답하라! 기본소득 응답하라! 기본소득 06 Q.01 07 Q.02 08 Q.03 09 Q.04 10 Q.05 11 Q.06 12 Q.07 13 Q.08 14 Q.09 응답하라! 기본소득 contents 16 Q.10 18 Q.11 19 Q.12 20 Q.13 22 Q.14 23 Q.15 24 Q.16 Q.01 기본소득의 개념을 쉽게 설명해주세요. 06 응답하라
More information1960 년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1960 년대 1960 년 35 1960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36 37 1960 년 [ è ] 1851 1 [ ] 1 é é é 1851 É 1960 년 2 1 2 11 1952 22 38 1961년 1961년 39 1961 년 3 월 14 일, 한국일보 4 면, 2 3 2 3 40 1962년 1962년 41 1962 년 1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