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원논문집 ( 인문 사회과학편 ) 제 50 집 1 호 (2011) 新羅의衰退에대하여 李基東 *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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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술원논문집 ( 인문 사회과학편 ) 제 50 집 1 호 (2011) 新羅의衰退에대하여 李基東 * 초록

2 2 李基東 차 Ⅰ. 머리말 Ⅱ. 종전의諸說에대한검토 : 6개命題의문제점 Ⅲ. 沙伐州농민반란의분석 례 Ⅳ. 지방豪族세력의대두와국가권력에대한도전 Ⅴ. 맺는말 Ⅰ 머리말

3 新羅의衰退에대하여

4 4 李基東

5 新羅의衰退에대하여 5 Ⅱ 종전의諸說에대한검토 개命題의문제점

6 6 李基東

7 新羅의衰退에대하여

8 8 李基東

9 新羅의 衰退에 대하여 9 로운 사회의 방향을 설계하게 되었다.13) 이렇게 본다면 선종의 대두야말로 신라의 쇠망을 촉진시킨 한 요인으로 지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상적인 측면에서 보다 더 중시해야 할 것은 역시 6두품 지식인ㆍ관료층에 의해 제기된 골품제사회에 대한 개혁 요구와 더불어 불교의 사회적 교의에 대한 비판적인 논의라고 생각된다. 3. 장기간의 국제평화가 국민정신을 타락시켰다는 명제에 대하여 이는 손진태가 지적한 점인데,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장기간에 걸친 평화와 안정 의 대가는 매우 가혹한 것이었다. 로마제국의 쇠망 원인을 탐구하는 연구자들은 거 의 例外 없이 번영이 쇠퇴의 원리를 성숙시켰다고 주장한 바 있다. 즉 로마의 쇠퇴 는 지나치다고 할 만큼 위대했던 한 나라의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런 결과였다는 것이 다. 한편 朝鮮왕조 시대의 정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던 李建昌(1852~1898)이 名著 黨議通略 原論에서 朋黨간의 싸움이 격화된 원인 여덟가지를 거론하는 가운 데 마지막으로 承平의 太久 를 들고 있는 것도 장기 평화의 어두운 한 면을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귀족들은 100년 이상 지속적으로 수행한 국가 保衛전쟁 및 삼국통일전쟁,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 唐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항상 군대의 선두에 서서 용감하 게 싸웠다. 하지만 그들도 통일 후 오랜 동안 국제평화와 안정을 누리게 되자 차츰 무기력해지고 安逸과 사치에 빠져들게 되었다. 통일기 신라귀족들의 사치풍조에 대 해서는 모든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아마도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 고 있는 것은 진골귀족들의 저택인 이른바 金入宅일 것이다. 가령 日本史에서 놀랄 만한 사치 때문에 망했다고 흔히 이야기되는 室町幕府 足利氏의 호화주택이 비교적 큰 규모의 樓閣에 金箔 혹은 銀箔을 입힌 건축물 몇 개에 불과했던 사실을 상기한다 면 서울 昌德宮 안 演慶堂 정도의 규모로 짐작되는 저택에 금박을 한 金入宅이 수도 인 경주에 39개나 존재했던 사실은14)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이다. 興德王이 834년 유명한 사치금지령을 반포하여 진골귀족일지라도 집의 지붕에 중국식 기와를 사용 할 수 없고, 金과 銀으로 장식할 수 없도록 嚴命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 13) 李基東 新羅社會와 佛敎-國家權力과 身分制社會와의 관련에서- 佛敎와 諸科學 (東國大學 校 出版部, 1987) ; 新羅社會史硏究 (일조각, 1997), pp ) 李基東 新羅 金入宅考 진단학보 45(진단학회, 1978); 新羅 骨品制社會와 花郞徒 (일조 각, 1984), pp 및 pp

10 10 李基東 름에 따라 이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그 결과 880년 경이 되면 경주 시내의 民家 에서 기와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그리하여 李佑成은 9세기 경주 귀족들의 사치와 퇴폐적 풍조를 병든 도시문화 로 命名하고, 이것이 건강한 농촌 에 의해 머 지않아 멸망될 것을 必至의 사실로 본 것은15) 실로 흥미있는 비유라고 하겠다. 한편 在美학자 金鍾璿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사회심리학적인 입장에서 추리했 다. 즉 신라가 삼국통일에 이를 때까지 오랜 기간 가혹한 生存전쟁을 계속해 오는 동안에 강요받은 긴장과 고난의 생활, 철저한 사회통제로부터 일단 해방되자 그 餘 毒이 발산되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통일 후 장기간의 평화가 계속되자 종래 외부로 향하여 발산되던 민족사회의 에너지가 이제는 내부의 적, 즉 정치적인 반대파를 말 살하는 狂氣(frenzy)로 변질, 타락했으며, 이것이 9세기에 苛烈해진 왕위계승 쟁탈 전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16) 이는 매우 흥미있는 견해이지만, 다만 통일기 신라의 정치사회사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광기의 에너지란 적당치 않다고 생각된 다.17) 그보다는 武烈王系의 단절과 元聖王系의 성립이라는 王統상의 변화는 골품제 사회의 기반에 큰 起伏을 초래했고 또한 老莊사상과 선종의 대두는 문화상에 역시 振幅이 큰 변동을 초래하여 전반적으로 사람들의 懷疑가 깊어지고, 은둔생활이 유행 하는 등 신라 말기의 知的인 분위기는 발랄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무기력하고 침체에 빠졌던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어쨌든 신라 쇠망의 원인으로 도덕적ㆍ정신적인 측면 을 고려할 때 일반적인 긴장의 弛緩, 지배층의 利己的인 사치생활을 지적해야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 4. 東아시아 국제관계의 변화 때문이라는 명제에 대하여 앞에서 장기적인 국제평화가 가져다 준 나쁜 측면, 즉 긴장이 풀리고 사회통제가 약화한 결과 국민정신이 퇴폐적인 방향으로 흘러 사회 내부의 유대를 약화시켰다는 명제를 검토했는데, 이제 우리는 이 평화가 9세기 말부터 10세기 초에 걸쳐 마침내 파탄을 고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 唐의 멸망(907)과 15) 李佑成, 앞의 논문, pp ) 金鍾璿 新羅 花郞の性格について 朝鮮學報 82(조선학회, 1977), pp ) 李基東 新羅 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 역사학보 85(역사학회, 1980); 新羅 骨品制 社會와 花郞徒, pp

11 新羅의 衰退에 대하여 11 만주에서 渤海의 멸망(926), 그리고 935년 신라의 멸망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신라의 쇠망이 인접 국가들의 몰락과 시기적으로 일치하고 있으므로, 이를 이른바 東아시아 국제관계의 상호 관련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와는 관련 없는 우연한 獨自的인 현상으로 파악할 것인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병도는 신 라의 멸망이 당과 발해의 멸망, 혹은 일본에서 天皇親政의 終焉과 외척인 藤原氏에 의한 이른바 攝關정치의 대두 등 동아시아의 왕조변혁과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데 주 목하고, 나아가 이를 週期的 현상으로 설명하는 견해가 있음을 想起시키면서도 신라 에서 고려로의 왕조 교체를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그것과 우연히 일치하는 현상으로 보았다.18) 한편 국제적인 連帶性을 강조하려는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8 세기 중엽 중국에서 일어난 安ㆍ史의 大亂(755~763)이 한국과 일본에 영향을 끼 치는 등 동아시아 3국에 변혁적 사건이 동시에 발생한 점에 주목하고 9~10세기 중 국과 한국ㆍ일본에서 잇따라 일어난 반란도 서로 無關하지는 않은 것을 인정하면서 도 세 나라가 겉으로는 사회구조나 정치형태, 토지 소유제도가 서로 비슷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사회적 토대를 달리하는 성격이 있는 등 역사적 발전단계가 같지 않은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구조적 차이를 강조했다.19) 한국 歷代 왕조 존속의 한 요인으로 중국에 대한 朝貢과 冊封제도가 흔히 거론되 고 있다.20) 이 假說에 따른다면 唐제국의 쇠망은 필연적으로 그 被冊封國으로서 唐 으로부터 일정한 庇護와 보증을 받고 있던 신라 조정의 위치를 크게 동요시키는 작 용을 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이 문제는 일본의 중국사 연구자 西嶋 定生의 冊封체제론으로 대표되는 고대 동아시아 역사의 국제관계론에서 활발히 논 의되고 있다. 하기야 唐을 중심으로 한 주변국가들과의 관계가 조공ㆍ책봉관계만으 로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동아시아 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견해도 무시할 수 없다. 즉 신라와 발해, 일본이 공통적으로 唐의 문화를 존중하여 이를 흡수함으로써 국가체제를 정비하려 한 점은 사실이지만, 한편 당과 신라의 관계가 조공ㆍ책봉으로 맺어진 宗主國과 藩屬國의 관계인 데 비해 일본은 당과 수교하면서도 책봉을 받지 않는 등 독자적 입장을 견지했고, 이같은 의미에서 발해는 신라와 일본의 중간적 지 위에 놓여 있었다고 보았다. 그런 만큼 8~9세기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 사이에는 18) 李丙燾 韓國史(古代篇) (을유문화사, 1959), pp ) 松本新八郞 東アジア史上の日本と朝鮮 東アジア世界の變貌 ( 世界の歷史 6, (筑摩書房, 1961), pp ) 全海宗, 中國과 韓國의 王朝交替에 대하여-그 교체의 要因에 관한 比較小論- 白山學報 8 (백산학회, 1970); 東亞文化의 比較史的 硏究 (일조각, 1976), p

12 12 李基東 서로 교섭이 있었을 뿐 어떤 구조적 관계는 없었으므로 동아시아 세계의 존재를 주 장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21) 그러나 이와 달리 중국에서 黃巢의 난 (875~884)이 일어난 이래 한국에서 889년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일본에서 平將 門의 난(935~940)과 藤原純友의 난(936~941)이 일어나는 등 세 나라에서 변혁 이 동시에 발생한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걸쳐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은 동아시 아 제민족ㆍ제국가 사이의 결합이 생겼다는 의미에서 동아시아 세계 형성의 端緖가 포착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22) 예를 들면 후백제왕 견훤은 황소의 행위에서 배 운 것이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하며,23) 한편 藤原純友의 인민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 는 견훤에게서 배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는 것이다.24) 이처럼 고대 동아시아 3국의 국제관계론을 둘러싸고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들 사이에 미묘한 입장의 차이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唐과 신라가 조공ㆍ책 봉제도를 기초로 한 매우 긴밀한 관계로 始終했다는 데는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 다. 사실 두 나라의 관계는 단순히 형식적인 조공ㆍ책봉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 다. 당이 건국한 직후인 621년 신라가 朝貢使를 보냄으로써 시작된 양국관계는 645년 당 太宗의 고구려에 대한 침략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뒤 급속히 가까워져서 마침내 고구려를 공동의 적으로 한 군사동맹관계로까지 발전했다. 양국은 연합작전 을 펴서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각각 멸망시켰다. 다만 고구려가 멸망된 후 신라가 백제지역에 대한 領有權을 행사하려고 한 결과 당과의 대립ㆍ갈등이 고조 되어 676년 당의 安東都護府가 평양에서 철수할 때까지 양국 군대는 5,6년 간 한반 도 중부지역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뒤 고구려 유민이 동부 만주지역에서 말갈족을 포섭하여 발해를 건국, 당의 변경을 위협하자 신라는 733년 당의 요청을 받아들여 발해 남쪽방면으로 출동하여 협공의 자세를 취했다. 이 사건 을 계기로 신라와 당은 다시금 지난날의 군사적 동맹체제를 회복했다. 818년 당의 平盧節度使 李師道가 山東반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신라는 당의 정부군을 돕기 위 해 819년 7월 金雄元의 지휘 아래 3만 군을 출병하는 파격적인 好意를 보였다.25) 이때 신라군은 이사도의 반란세력 진압에 종사하면서 도리어 반란 실습 교육을 받았 21) 旗田巍 東アジアにおける日本と朝鮮(10~12世紀) 岩波講座ㆍ日本歷史 4 (岩波書店, 1962); 日本人の朝鮮觀 (勁草書房, 1969), pp ) 藤間生大 東アジア世界の形成 (春秋社, 1966), pp ) 앞의 논문, p ) 앞의 논문, p ) 三國史記 권 10 憲德王 11년 7월 조

13 新羅의 衰退에 대하여 13 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견해도26) 있으나, 당시 신라군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없다. 819년 7월은 이미 반란이 진압된 뒤이므로 신라군이 실제로 출동했는지 조차도 명 확하지 않다. 더욱이 신라는 815년 이래 서부 변경지대에 큰 기근이 들어 민란이 발생하고 流民들이 살 길을 찾아 중국과 일본으로 떼지어 이주했을 때이므로 대군을 편성하여 해외에 파견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또한 880년을 전후한 시기에 황소의 반란군이 당의 수도 長安을 점령하는 등 당의 위기가 크게 고조되었을 때 신라의 憲 康王은 군사 원조를 自請하기까지 했다. 이 제안은 山東반도 일대를 관할하는 靑州 절도사 安師儒가 후방을 방비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함에 실현되지는 않 았다.27) 이같은 신라ㆍ당관계의 긴밀성으로 미루어볼 때 당에서의 내란 내지 변혁적 사건 이 신라조정이나 민간의 야심가들에게 끼친 영향을 忽視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768년 당의 사절단의 副使로 신라에 온 顧愔은 자신이 견문한 바를 기록한 新羅國 記 에서 일찍이 孝昭王(692~702)이 왕위에 올라 당나라 황실의 복을 빌고자 왕경 인 경주에 望德寺를 세웠는데,28) 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킨 755년 同 13층탑이 진동 하고 開合하여 며칠 동안 쓰러질 뻔했던 사실을 놓고 신라인들이 安의 난과 결부시 켜 해석하고 있었음을 증언한 바 있다. 이 반란이 진압된 지 5년 뒤인 768년 신라 에서 귀족들의 대란이 일어나 무열왕 계통의 왕실이 단절되는 시발점이 된 것도 전 혀 우연적인 일치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이로부터 120여 년이 지난 뒤 황소의 난이 일어나고, 그것이 진압된 지 꼭 5년 뒤인 889년 신라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난 것도 마찬가지 경우로 보인다. 최치원은 895년 전국적인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절을 지키다가 죽은 僧兵들을 위해 만든 합천 海印寺 境內의 한 供養塔의 記文에서 唐土에서 벌어진 전쟁과 기근 의 두가지 災殃이 서쪽 唐에서는 멈추었는데, 동쪽 신라로 옮겨와서 惡中惡이 없는 곳이 없고, 굶주려 죽은 시체와 戰骸는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졌다 고 당시의 처참한 상태를 기술하고 있는데,29) 이를 보면 그는 신라의 재앙을 唐에서부터 옮겨온 것으 로 파악했음을 알 수 있다. 唐에서 직접 황소의 난을 체험한 바 있는 그로서는 故國 에서 벌어지고 있던 비슷한 내용의 재앙이 당의 그것이 波及 연장된 것으로 느껴졌 26) 松本新八郞, 앞의 논문, p ) 崔致遠 撰, 東文選 권 33 謝恩表. 28) 三國遺事 권 5 感通 眞身受供 조. 29) 최치원 찬, 海印寺妙吉祥塔記 ( 黃壽永 편저 韓國金石遺文, 一志社, 1976), p

14 14 李基東 을 법하다. 이는 黑水말갈의 침범이 농민반란의 端緖를 이룬 것처럼 파악하고 있던 當代 隨一의 國際通다운 역사감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당시 최치원이 897년 즉위한 孝恭王을 위해 지은 唐의 황제에게 보내는 외 교문서를 보면 정식으로 冊封을 받지 못한채 10년 간 在位했던 진성여왕을 權知 當 國王事 혹은 權守蕃務 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30) 이는 여왕에게는 단 순히 儀禮상의 瑕疵에 그칠 뿐아니라 대대로 唐 황제의 책봉을 받아 온 종전의 관례 에 비추어볼 때 치명적인 약점일 수도 있는 문제였다. 실제로 여왕은 893년 당에 사신을 보내어 旌節을 還納하는 기회에 先王들에 대한 追封과 겸하여 자신도 책봉을 받으려 한듯 하지만 이때 여왕이 당의 황제에게 보내는 외교문서를 작성한 것도 최 치원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사절단의 대표가 항해 중 溺死한 까닭에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최치원이 賀正使로 임명되었으나 도적들이 들끓어 길이 막히는 바람 에 당에 갈 수 없었다. 894년 일본에서는 菅原道眞이 遣唐使 폐지를 건의하여 실현 되었는데, 그가 그 이유로 주장한 것이 唐은 내란으로 피폐해져서 배워야 할 것이 더 이상 없어졌고, 그밖에 海上의 遭難사고와 신라 해적의 피해를 들었다. 이처럼 농민반란으로 신라 해적이 한반도 서남해안 일대에 橫行한 것이 견당사 폐지의 주요 이유가 될 만큼 해상의 안전이 크게 위협받고 있었다. 진성여왕 때 끈질기게 시도된 唐에의 사신 파견 노력은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여 왕이 退位한 직후 가까스로 실현되었다. 897년 6월 여왕이 조카에게 양위할 무렵에 최치원이 작성한 중국 황제에게 보낸 외교문서에 先朝 때로부터 매양 新正의 德을 경축하여 해마다 闕禮가 없는 것이 역사서에 빠짐없이 기록되었아온데, 근자에 鯷岑 (신라를 가리킴)에 안개가 자욱하고 파도가 蜃壑을 놀라게 하여, 臣이 비록 禮를 닦 을 마음이 있었으나 가로막혀 이룰 수가 없었아옵고, 오래도록 梯航이 막혔으니 (황 제의) 斧鉞을 피하기 어렵나이다 고 한 것을31) 보면 그 간의 딱한 사정을 충분히 짐 작할 수 있다. 한편 당시 신라가 직면하고 있던 곤경이 북쪽의 발해에까지 알려져서 897년 7월 신라의 賀正使인 守倉部侍郞 級湌 金潁은 당의 황제 面前에서 발해 사신 에게 봉변을 당하기까지 했다. 즉 발해의 하정사인 왕자 大封裔는 신라가 바야흐로 衰微해졌다는 것을 이유로 신라 사신보다 上席에 자리를 마련해 줄 것을 당의 조정 에 요구했다. 이같은 발해의 요청은 舊例에 어긋난다고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얼마 뒤 신라의 왕은 이에 감사하는 외교문서를 당에 보냈다.32) 요컨대 신라의 멸 30) 최치원 찬, 동문선 권 33 謝嗣位表ㆍ謝恩表. 31) 최치원 찬, 동문선 권 31 新羅賀正表

15 新羅의 衰退에 대하여 15 망 원인을 생각할 때 동아시아 세계 붕괴의 同時性, 특히 907년 朝野에 끼친 영향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믿는다. 당의 멸망이 신라 5. 영토의 확장 때문이라는 명제에 대하여 藤田은 통일기 신라의 지방행정제도를 고찰하면서 영토의 확장이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독특한 견해를 제시했으나, 유감스럽게도 구체적인 설명은 缺如하고 있다. 어쩌면 그의 견해는 (신라는) 경주지방에 偏在해 있을 때는 왕실의 힘이 잘 부근의 土豪를 탄압할 수 있어 국력도 발전했던 셈이지만, 영토가 확대되어 백제ㆍ고구려의 여러 부족을 수용함에 미쳐서는 해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 한 稻葉岩吉의 견해33)를 祖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어쨌든 이같은 생각은 로 마의 멸망 원인에 대한 서양학자들, 특히 로스토프체프(Mikhail I. Rostovtzeff) 의 견해를 想起시킨다. 즉 로스토프체프는 로마가 방대한 국가 유지에 몰두한 나머 지 국내의 사회적ㆍ경제적 문제들을 등한시한 결과 멸망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아주 넓은 영토 내의 지방 割據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것도 그 주요 원인의 하나로 지적했다. 요컨대 그는 로마제국의 확대, 바로 그것이 몰락의 원인이라고까지 생각 했다.34) 그러나 신라의 경우 이러한 로마史의 知見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지 어 떤 지는 의문이다. 삼국통일이라고 해야 백제의 전 영역과 大同江 이남의 일부 고구 려 땅을 차지한 데 불과하다. 이는 신라의 통치 力量에 비추어 볼 때 결코 부담스러 울 정도의 영토확장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기야 한 때 미국의 신진 한국사 연구자였던 언러(Ellen S. Unruh)는 신라가 삼국통일로 말미암아 확보하게 된 방 대한 점령지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만한 人的, 재정적 자원을 갖고 있지 못한 까닭에 백제와 고구려의 지방 엘리트 요원을 고용함으로써 人的 부족을 메울 수밖에 없었다 고 지적한 바 있다.35) 그러나 이는 명백히 실제와 거리가 먼 추측일 뿐이다. 다만 신라가 통일 후에도 경주 중심의 閉鎖性을 그다지 탈피하지 않은 것은 사실 로 인정된다. 신라는 장기간 지속된 통일전쟁 시기에는 전쟁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32) 최치원 찬, 동문선 권 33 謝不許北國居上表. 33) 稻葉岩吉, 朝鮮民族史 朝鮮史講座ㆍ分類史 (조선사학회, 1924), p ) 大類伸 古代ロ マ沒落史觀の槪要 西洋文化史論考 (誠文堂新光社, 1961), pp ) Ellen Salem Unruh, Reflections of the Fall of Silla, Korea Journal, (May, 1975), p

16 16 李基東 위해 경주의 6部民 외에도 지방민의 협조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 때문에 外位만을 부여하던 지방사회의 유력자들에게도 6부민에게만 한정했던 京位를 주는 등 종전의 차별정책을 폐지하는 개방적인 태도로 전환했다. 그러나 통일전쟁이 끝난 뒤 신라는 소극적인 정책으로 후퇴했다. 비록 지방사회의 유력자들은 京位를 받았으나 정치 참 여는 여전히 배제되었다. 그들은 수도에 사는 지배자공동체의 배타적인 신분제도인 骨品제도에 포섭되지 못한 탈락신분층(Out-Caste)으로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계 속 차별을 받았다. 통일에 따른 지방행정제도의 개편을 정력적으로 추진한 神文王은 689년 達句伐 (대구)로 수도를 옮기려 했으나 眞骨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 면 안되었다. 당시 신라는 5개의 小京을 설치하여 경주의 偏在性을 극복하고자 했는 데, 金官京(김해) 한 곳을 제외하고는 현재의 원주ㆍ충주ㆍ청주ㆍ남원 등 小白산맥 너머에 설치되었다. 이는 경주를 기준으로 해서 볼 때 마치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여 방어태세를 취한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소경제도와 더불어 신라 지배층의 영역의식 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국가의 제사가 행해진 五岳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西岳(공주 鷄龍山)하나를 제외하면 모두가 소백산맥 일대와 그 동남쪽에 있는 산들 인 점이 주목된다. 삼국통일로 신라의 국경선이 멀리 대동강 이남에까지 뻗친 점을 감안한다면 북방을 수호하는 鎭山으로서의 北岳은 당연히 서울의 北漢山쯤으로 지 정했어야 옳았을 것이지만, 실제로는 太白山(榮州ㆍ奉化)을 지정했다. 이는 신라의 前身인 斯盧國이 辰韓 12개 국을 병합한 단계에서나 어울림직한 조치였다.36) 더욱이 780년 태종무열왕 계통의 專制주의적 왕권이 무너진 뒤 9세기에 들어와 김헌창의 반란과 왕위계승 쟁탈전을 겪으면서 초기의 영역인 경주와 그 부근을 우선 적으로 고려하는 정치가 행해지는 등 지역적 분파주의(Sectionalism) 경향이 한층 강화되었다.37) 신라는 735년 唐으로부터 浿江(예성강) 이남의 지역에 대한 영유권 을 정식으로 승인받은 뒤 748년까지 그 일대에 14개의 郡과 縣을 설치하고, 다시 820년대에 대동강 유역 평양 이남에까지 추가적으로 몇 개의 군ㆍ현을 설치했다. 이들 지역은 행정 관할상 漢山州에 소속되었으나, 실제로는 782년 平山에 설치된 浿江鎭의 軍政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이 패강진은 발해의 침입에 대비한 최일선의 군단으로 屯田兵制 형태로 유지되었다. 신라 조정은 9세기를 통해서 패강진 관할지 36) 李基東 新羅의 風土와 그 歷史的 特性 千寬宇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正音文化社, 1985); 新羅社會史硏究 (일조각, 1997), pp ) 井上秀雄 古代朝鮮 (日本放送出版協會, 1972), pp

17 新羅의 衰退에 대하여 17 역에서 줄곧 성장하고 있던 지방할거의 경향에 대해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 결과 이 서북 변경의 후진지대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단결력이 강한 봉건 적 단위가 형성되어 농민반란을 계기로 신라에 반항적인 후고구려, 고려에 차례로 접수되고 말았다. 패강진 세력을 핵심으로 한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후삼국시대의 動亂이 수습되고 신라가 그에 자진해서 항복한 것은 매우 逆說的이다.38) 이같은 의미에서 신라는 영토가 팽창되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고유의 지역적 폐쇄 성, 즉 경주 제1주의에 끝까지 집착했던 것을 멸망의 한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고 생각된다. 6. 점령지역의 문화를 융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명제에 대하여 앞에서 소개했듯이 언러(Ellen S. Unruh)는 신라 멸망 원인을 다룬 小論에서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에 의해 倂合된 뒤 두 지역에서의 문화적 흐름에 대해 주목했 다. 그녀는 삼국이 본디 종족적ㆍ문화적으로 차이가 있었고, 그 때문에 언어와 관습 등도 다소간 달랐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아가 그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여러 가지 力量의 제약 때문에 점령지역의 엘리트들에게 통치를 맡긴 결과 이들 지역에서 는 신라와는 다른 고유의 문화적 전통이 溫存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이같은 推理를 입증하는 것으로 든 근거는 모호하다. 즉 그녀는 신라 말기에 반란을 일으킨 주요 지역이 대개 옛 백제와 고구려 영토였던 점에 주목하여 아마도 반란군 을 묶는 유대는 신라조정에 의해 억압을 받은 문화적 전통을 복구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었을까 추측했을 뿐이다. 이같은 의미에서 그녀는 본래의 신라지역과 옛 백제ㆍ 고구려 지역 간의 문화적 차별을 보여주는 가장 공고한 확증이 미술사와 고고학 영 역에서 장차 발견될 것을 기대하면서 지금까지 미술사 연구자들이 이같은 요소에 대 해 거의 言及하지 않은 것에 실망감을 드러낸 바 있다.39) 그녀의 주장은 한국 역사학계의 일반적 通說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로 주목된 다. 왜냐하면 한국의 연구자들은 삼국시대가 전개되는 가운데 중국문화의 영향이 강 력해짐에 따라 그 이전 시기의 다양한 부족적 지역문화가 차츰 同質化되어 갔고, 특 38) 李基東 新羅 下代의 浿江鎭 韓國學報 4(일지사, 1976); 新羅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 조각, 1984), pp ) Ellen S. Unruh, 앞의 논문, pp

18 18 李基東 히 260여 년 간에 달하는 통일신라시대를 통해서 이같은 경향이 더욱 강화되어 마 침내 한국민족, 한국문화의 原型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신라가 한반도의 통일국가로 君臨한 이 시기는 單一 통치 아래 한민족이 형성되는 결정적 기간이었으며 동시에 한국 고대의 잡다한 정치ㆍ사회ㆍ문화적 전통을 하나 의 큰 용광로 속에서 일정한 鑄型으로 융합시킨 기간으로 간주할 근거가 많이 남아 있다. 이 시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唐을 통해 중앙아시아 및 아랍세계의 문화와도 접촉했던 신라가 유독 한반도 내의 점령지역에 대해 문화적 차별 혹은 억압을 꾀했 을 것이라는 추측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하기야 모든 것이 수도를 중심으로 짜여져 있는 신라에서 外來문화의 享有도 수도에 사는 6부민에 의해 독점되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5개의 小京을 통해서 그것이 지방사회에 波及되었을 것은 분명 하다. 실제로 경주를 중심으로 하여 변경과 연결되는 北海通 등 5대 간선 교통망을 통해서 물자 유통과 문화 전파가 충분히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비록 그녀는 言及하지 않았으나 통일기에 옛 백제지역 사람들 가운데 遺民이라는 의식을 갖고 살았던 部類도 없지는 않았다. 그 현저한 사례가 중국의 고승전에까지 올랐던 유명한 眞表이다. 그는 백제가 망한 지 1세대쯤 지난 뒤 현재의 전라북도 金堤지방의 유력한 家門에서 출생하여 백제의 전통을 강하게 의식하면서 성장했다. 그는 12세에 승려가 되어 고통받는 옛 백제지역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구원하기 위 한 一念에서 修行에 정진했다. 그는 彌勒신앙에 傾倒되어 戒律을 통한 理想국가 건 설을 꿈꾸며 주로 옛 백제ㆍ고구려지역에서 포교활동에 종사했다. 그가 추종자들 사이에 영향력을 떨치게 되자 景德王(742~765)은 그를 왕궁으로 초청하여 菩薩 戒를 받기도 했다. 그는 금강산에서 은둔하다가 죽었다. 李基白은 그의 이같은 신 앙 활동을 백제의 정신적인 부흥운동으로 이해하고, 150여 년 뒤 견훤과 궁예, 왕 건 등 후삼국시대의 主役들에 의해 현실적인 정치운동으로 구체화된 것이 아닐까 추측한 바 있다.40) 승려 진표의 경우로 미루어 볼 때 백제지역의 엘리트들 중에서 反신라적인 감정이 싻트고 있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다만 830년대에 張保皐가 현재의 전 라남도 莞島에 설치한 군사기지 淸海鎭을 중심으로 해적을 소탕하는 한편 국제무역 에 뛰어들어 거대한 富와 군사력을 아울러 갖고 있을 때 마침 신라조정이 왕위계승 쟁탈전으로 분열되어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키기 위한 絶好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었 40) 李基白 眞表의 彌勒信仰 신라사상사연구 pp

19 新羅의 衰退에 대하여 19 다. 그러나 그가 신라 조정에 충성을 다 한 것으로 보면 어느덧 백제지역에서의 反 신라적 감정이 사그러든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Ⅲ. 沙伐州 농민반란의 분석 이상 신라의 쇠망 원인에 대한 여러 견해를 여섯 개의 命題로 총괄하여 각각의 문 제점을 검토해 보았다. 그 중에는 직접적인 원인도 있었으나 간접적이랄까 遠因的인 것도 많았다. 어쩌면 첫 번째로 제기한 명제, 즉 귀족ㆍ지방호족ㆍ사찰의 대토지 소 유와 이로 인한 小農의 몰락이라는 사실이 그 으뜸가는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지 않 을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889년 농민반란의 직접적인 도화선이랄까 發火口 가 되었고, 나아가 조정이 이를 초기에 진압하지 못하여 전국적인 내란으로 파급 확 산되어 가는 가운데 끝내 신라가 멸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라의 쇠퇴와 멸망 의 원인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먼저 이 889년의 大破局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종래 역사학계에서는 889년 파탄의 起點을 흔히 836~839년의 왕위계승 쟁탈전 에서 찾았다. 이것은 확실히 편리한 時點이고, 어떤 점에서는 타당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 분쟁으로 말미암아 당시 집권체제가 크게 동요, 약화된 것이 사실이고 또한 이에 反比例하여 지방세력이 증대하였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사료가 워낙 零星한 까닭에 유감스럽게도 우리들은 839년부 터 889년까지의 半세기 간에 걸친 구체적인 사태의 변화를 확인할 수 없는 실정이 다. 다시 말하면 이 시기에 신라의 전반적인 상황이 惡化一路를 달렸다고 짐작은 되 지만, 이를 傍證할 만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장보고의 군사 개입에 의해 서 839년 정월 왕위계승을 둘러싼 近親왕족 간의 內戰이 수습된 뒤 889년에 이를 때까지 정치적인 큰 분쟁이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신라 조정이 성장하고 있는 지방세력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汎진골 귀족세력과 정치적 타협을 모색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41) 요컨대 정치사적 측면에 서 보면 839년 이후 반세기 간의 推移는 반드시 절망적인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41) 李基白 韓國史新論(改正版) (一潮閣, 1976), p

20 20 李基東 희망적인 점도 분명히 있었다. 왕위계승 쟁탈전에서 서로 대립했던 金憲貞ㆍ金均貞 형제를 각기 中始祖로 하는 元聖王系 왕실 내의 양대 家系는 쟁탈전이 끝난 뒤 두 차례에 걸친 혼인관계를 통해 정치적 타협을 이끌어 냈다. 그 결과 861년 김균정系의 憲安王이 後嗣없이 죽어 왕 통이 단절되자 왕의 유언으로 사위인 김헌정의 증손자 金膺廉이 왕위에 올랐다. 이 景文王 계의 왕실은 912년 단절되어 朴氏 왕통이 등장하게 될 때까지 5代 50여 년 간 왕위를 평화적으로 계승했다. 경문왕은 지혜로운 성품에 儒學과 한문학에 대한 造詣가 깊었고 더욱이 화랑으로 활동할 때 명성도 높았으므로, 內外에 큰 촉망을 받 았다. 하지만 김균정 계 일부 귀족들 사이에는 왕의 즉위에 불만을 품고 逆謀를 꾀 한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는 등 왕실을 둘러싼 분위기는 결코 밝지 않았다. 경문왕이 875년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한 장남 憲康王은 태평성대에 어울리는 文人 風의 군주였다. 젊은 왕은 타고난 독서인으로 詩文과 유학에 큰 흥미를 갖고 있었 다. 마침 왕이 즉위하던 그 해 중국에서 黃巢의 농민반란이 일어나 9년 간 唐제국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는데, 그 소식은 신라에 계속 전해졌다. 이에 따라 신 라조정은 국내의 여러 문제를 돌아 볼 모처럼의 기회를 가졌을 법하다. 당시 신라의 형편으로 말한다면 진골귀족집단 전체의 화합과 연대를 꾀하는 한편 이를 토대로 한 강력한 집권체제의 재편성이 긴요했을 때였다. 어쩌면 헌강왕 자신도 문인 다운 남 다른 직관력으로 신라 朝野를 뒤덮고 있는 暗雲이 과연 무엇이었는 지를 간파하고 있었을 터이다. 중앙귀족과 지방호족의 대토지 소유, 귀족사회에 만연한 願刹 건립 의 유행과 사원경제의 肥大化, 이로 인한 小農의 궁핍과 대규모 流民의 발생, 王京 人의 분별 없는 허욕과 사치, 소비풍조 등 갖가지 나쁜 현상에 대한 깊은 省察을 통 해서 이에 急所를 加할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현재 일부 남 아 있는 金石文 자료를 검토해 보면 경문왕과 헌강왕 父子는 종래의 翰林臺를 瑞書 院과 같은 본격적인 文翰기구로 확대 정비하여 學士들에게 文筆과 정치문제의 자문 을 구한다거나 혹은 종래의 洗宅(中事省)과 같은 국왕의 시종ㆍ비서기관을 강화한 다거나 宣敎省과 같은 近侍기구를 두어 권력을 국왕 개인에게 집중시키려는 노력을 끈질기게 꾀했던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42)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두 왕이 정치문제의 현안에 정면 대결하려고 한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특히 文弱한 헌강왕을 보좌하고 있던 上大等 金魏弘은 왕의 숙부로 복잡한 현실의 여러 문제에 42) 李基東 羅末麗初 近侍機構와 文翰機構의 擴張 歷史學報 77(역사학회, 1978); 신라 골품 제사회와 화랑도, pp 및 pp

21 新羅의 衰退에 대하여 21 직접 대처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유능한 현실 정치가는 못 되었고 鄕歌를 수집 정리하는 일에 보다 관심을 쏟았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을 비롯한 상대등, 그밖에 국가 樞要의 직에 있던 인물들은 주요한 정치적 과제들을 거의 방치 한 채 거대한 향락의 소비도시로 변질한 王京 내의 매우 제한된 궁정에서 일부의 寵 臣, 學士들과 어울려 소중한 시간을 허송한 느낌이 든다. 헌강왕이 886년 죽은 뒤 동생 定康王이 즉위했으나 재위 1년에 그쳤고, 그 뒤를 이어 여동생인 眞聖王이 887년 7월 즉위했다. 경문왕의 딸로서 여왕이 물려받은 정치적 유산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은 궁정정치의 퇴폐적인 타성이었다. 여왕은 즉위하자 악화된 재정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전국민에게 1년 간 조세를 면제하는 善心策을 썼다. 그러나 이듬 해 5월 가뭄이 들어 농사를 망치게 되고, 이에 따라 國庫가 바닥을 드러내자 889년 왕은 전국 각지에 관원들을 보내어 貢賦 독촉을 심하게 한 결과 농민들의 거센 저 항을 촉발하고 말았다. 三國史記 진성왕 本紀에는 도적이 벌떼와 같이 일어났을 때 元宗과 哀奴 등이 沙伐州(尙州)를 근거지로 하여 반기를 들자 왕명에 의해 진압에 나선 奈麻 令奇가 반란군의 보루를 바라보고 두려워한 나머지 진공하지 못하자 村主 祐連이 힘껐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는 신라를 멸망의 길로 몰아넣 은 전국적인 농민반란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진실로 疏略하기 짝이 없다는 느낌이 든 다. 그렇지만 이 짤막한 기사 속에는 좀 더 검토해 볼 사항이 적지 않다. 첫째, 조정의 강력한 조세 收納에 맞서 농민들이 즉각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사에 대한 의문이다. 일반적으로 농민들이 조세 독촉에 저항하여 일차적으로 대응 하는 수단은 流亡을 통한 납세의 회피 내지 거부, 즉 抗租운동을 일으키는 것인데, 그것이 곧바로 농민반란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889년 당시의 정치적ㆍ경제적 제 반 상태가 매우 심각한 위기 局面에 처해 있었던 점을 충분히 고려하더라도 잘 이해 가 가지 않는다. 三國史記 新羅本紀에는 이 시기 농민의 流亡에 대한 기사가 거의 보이지 않으나, 한편 寺院 관계 기록이나 혹은 日本側 역사기록을 보면 농민반란이 일어나기 얼마 전부터 다수의 유민이 발생하여 도적이 橫行하던 情況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테면 崇巖山 聖住寺事蹟 에는 保寧 藍浦의 群賊들이 성주사로 쳐들어왔 다가 朗慧和尙 無染(800~888)의 교화를 받아 改過遷善하여 그 중 100여 명이 出 家하여 道를 깨쳤다고 되어 있다.43) 아마도 절에서는 이들에게 陳田이나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권장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이름 높은 禪僧이었던 澄曉大師 折中 43) 曺凡煥 新羅禪宗硏究 : 朗慧無染과 聖住山門을 중심으로 (一潮閣, 2001), pp

22 22 李基東 (826~900)이 888년 駐錫하고 있던 영월 興寧寺를 떠나 공주를 거쳐 進禮郡(금산 ㆍ무주ㆍ진안) 경계를 지나다가 도적의 무리를 만나 길이 막히는 등 만년에 신변의 안전에 위협을 느끼면서 각지를 유랑하다가 강화도에서 臨終을 맞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편 일본의 扶桑略記 894년 9월 조에는 對馬島를 습격하다가 붙잡힌 45隻의 신라 해적선 선원 가운데 賢春을 供招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는 (본국 에) 곡식이 여물지 않고 창고는 모두 비어 王城이 불안하며, 더욱이 왕의 명령으로 곡식과 絹織物을 빼앗아 감으로 이렇게 (일본에) 와서 노략질을 하게 된 것 이라고 자백했다. 이는 최치원이 897년 진성여왕의 退位에 즈음하여 唐에 보낸 上表文에서 모든 창고가 한결같이 비어 있다 고 한 것과44) 놀랍도록 일치한다. 그런데 이처럼 신라인들이 일본 서부지방에 출몰한 것은 농민반란이 일어나기 20여 년 전부터 빈 발한 현상이었다. 즉 日本三代實錄 권16에는 869년 여름 신라 해적선 2척이 北九 州 博多港에서 일본의 貢調船을 습격한 사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아울러 신라인이 九州 일대를 관할하는 大宰府의 고위 관리들과 몰래 結託하여 모반을 꾀한 듯한 기사가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8세기 중엽 이래 신라 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사회적 변화 양상이 서일본 沿海지역에 신라 流民의 증가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만큼 이같은 일본측 역사기록을 예사롭게 보아 넘길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둘째, 농민반란군의 성격을 둘러싼 의문이다. 관군을 물리친 반란군이 사벌주를 근거로 반기를 들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州治인 현 상주시로 特定할 것이 아니라 州 管下의 10개 군, 30개 현 가운데 어떤 한 지역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三國 史記 권34 地理志(1)의 첫머리에 기재되어 있는 사벌주의 관할 범위를 보면 鳥嶺에 서 秋風嶺에 이르는 소백산맥 동서에 걸쳐 있다. 즉 동쪽에 州의 중심인 상주를 비 롯하여 예천ㆍ문경ㆍ안동(일부)ㆍ의성ㆍ선산ㆍ군위ㆍ김천 등지가 이에 포함되며, 산맥 서쪽으로는 보은ㆍ옥천ㆍ영동 지역이 포함된다. 그런데 왕명을 받고 출동한 令 奇가 반란군의 보루를 바라보고 두려워 한 나머지 진격하지 못했다고 한 것으로 미 뤄볼 때 반란군은 단지 烏合之卒의 소규모 지역 농민집단은 아니었던 듯하다. 더욱 이 현지의 촌락을 실제로 대표하고 있던 村主가 힘껏 싸웠다고 한 것으로 보면 적어 도 반란군은 현지에 거주하고 있던 농민들이 아니라 他地에서 이동해 온 것으로 짐 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관군과 맞서 싸운 반란군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여기서 문 44) 최치원 찬, 동문선 권 43 讓位表

23 新羅의 衰退에 대하여 23 득 생각나는 점이 822년 熊州都督 金憲昌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정의 진압상황이 다. 이때 진압군은 소백산맥 일대에까지 진출한 반란군을 보은의 三年산성에서 격파 한 다음 俗離山쪽으로 군사를 돌려 적의 주력을 격파한 뒤 전군이 공주를 향해 진격 했다. 어쩌면 889년 사벌주에서 관군을 격파한 반란군은 각지를 떠돌면서 약탈을 자행하던 流亡농민들이 군사전략상 유리한 소백산맥일대로 몰려들어 그곳에 거점을 확보하고 있던 비교적 큰 규모의 草賊이었을 개연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특히 반란 군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의 이름이 진골귀족 출신에게나 어울리는 元宗을 칭한 것으 로 볼 때 결코 예사스런 농민 출신은 아니었다는 느낌이 든다. 이보다 몇 해 뒤 역사 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는 弓裔도 처음 世達寺에서 승려생활을 할 때 善宗이라 자칭 했는데, 그가 이처럼 당돌하게 행세한 것은 자신이 본디 신라왕의 아들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세째, 반란 진압 명령을 받고 출동한 令奇의 직책도 확실하지 않다. 가령 833년 만들어진 菁州 蓮池寺鐘 명문에는 及干과 大奈末(麻)의 관등을 갖고 있는 2명의 村 主와 나란히 軍師 2명의 이름이 보인다. 이 군사는 삼국통일 이전 시기 在地의 村사 회에서 군사력 편성의 중심 인물로, 통일전쟁에 종군하여 다수가 軍功에 대한 포상 을 받았다. 이 연지사종 명문에 보이는 군사의 존재로 미루어 통일기 王都 및 9州에 편성된 師子衿幢의 실재를 입증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45) 있으나, 다만 군사의 관 등이 새겨져 있지 않은 점이 석연치 않게 생각된다. 그런데 令奇를 法幢 군단에 소 속된 군관이 아니었을까 추측하는 견해가 있다. 이 법당군단이란 삼국통일 이전 시 기 京外의 여러 지역에 편성된 잡다한 부대와 특수 병기를 다루는 몇몇 부대들에 대 한 合稱인데, 통일기에 들어와서는 그 군사적 기능이 거의 消失된 채 주로 勞役軍으 로 잔존해 있었다. 하긴 긴급상황에서는 지방의 치안 유지를 위해 동원되었을 가능 성도 없지는 않다. 889년 농민반란 진압에 나선 병력을 법당군단 소속으로 볼 경 우, 영기가 갖고 있던 관등 나마는 縣令 정도의 직위에 보임될 수 있어 어쩌면 그는 法幢主와 같은 군관직을 겸하고 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는 것이다.46) 그러나 통일기에 들어와 州마다 常駐兵團인 停이 하나씩 설치되었으므로, 반란 진 압에 나선 부대는 아무래도 상주 靑里面에 설치된 音里火停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9세기 초두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元曉를 기리는 誓幢和尙碑에는 제1行에 音里火 三千幢主 級湌 高金ㅿ鐫 이라 하여 음리화정 소속 삼천당주가 鐫字한 것으 45) 李仁哲 新羅政治制度史硏究 (一志社, 1993), p ) 李仁哲 新羅村落社會史硏究 (一志社, 1996), p

24 24 李基東 로 되어 있어 당시 이 부대가 아직 건재했음을 보여준다. 三國史記 권40 職官志 (下) 武官조에 의하면 삼천당주는 各停에 6인씩 배치되며, 그 관등은 沙湌 이하 舍 知까지로 되어 있다. 그런 만큼 나마 관등을 가진 영기는 삼천당주에 보임될 수 있 었다.47) 결국 지방부대의 중견 장교였던 영기는 비겁한 태도를 보임에 따라 왕의 특명에 의해서 참형을 당했다고 하거니와, 이는 국가권력의 쇠퇴에 隨伴하여 군대 역시 쇠퇴했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잘 알려져 있듯 신라는 군사문제에 관한 한 탁 월한 능력을 가진 나라였다. 그것은 특히 군부대의 조직과 전국적인 편성에서 잘 발 휘되었는데, 9세기에 들어오면 지방에 배치된 군대는 물론 수도권을 방비하는 9개 의 부대(誓幢)조차 虛設化되어 겨우 이름만 남아 있었다.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정에서는 주로 진골귀족들이 제공한 私兵에 의존하여 반란군 진압에 나섰 다.48) 이는 병사를 공급하는 자영농민이 몰락한 데 그 근본 원인이 있었겠으나, 한 편 삼국통일 후 오랜 기간에 걸쳐 국제평화가 계속 유지되어 군사문제가 소홀하게 다루어 진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생각된다. 889년의 농민반란은 810년대 주로 國西지방을 휩쓴 기근과 도적 봉기, 나아가 이를 왕권 탈취의 좋은 기회로 포착하여 일어난 김헌창의 반란과 비교하면 훨씬 더 非조직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정은 초기에 반군의 기세를 제압하 지 못하고 도리어 반군에 패함으로써 약체와 무능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말았다. 이 것이 一波萬波로 번져나가 城主 혹은 장군을 자처하는 전국 각지의 지방호족들에 의 한 自立 운동으로 확대되었거니와 三國史記 권50 弓裔傳에 그가 절을 나와서 891 년 竹州(안성)의 箕萱에게 歸附할 당시의 상태를 묘사하여 王畿 밖 州縣의 叛ㆍ附 가 서로 半半이었다 고 했다. 그러니까 지방의 호족 중 조정에 반기를 든 세력과 그 렇지 않은 세력이 대략 비슷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정을 지지하던 세력은 머지않 아 후백제ㆍ후고구려 등 반란국가가 등장함에 따라 신라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돌 아서게 되었다. 이처럼 신라는 농민반란의 洪水와 지방 호족의 離叛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는데, 여기서 소농민층과 호족의 관계 그리고 호족과 국가권력의 관계를 각각 살펴 볼 필 요가 있다. 소농민층이 통일기에 들어와 均質的인 지배가 불가능해 질 만큼 촌락공 47) 통일기 停과 三千幢을 같은 부대로 파악하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지만, 이를 別個의 부대로 보는 연구자도 있다. 즉 停은 기병군단이며 삼천당은 그 예하의 지원부대로서 왕경인 출신 승병으로 편성된 보병이었다는 것이다. 李仁哲 新羅政治制度史硏究 (一志社, 1993), pp 참조. 48) 李基白, 新羅私兵考 歷史學報 9(1957);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pp 및 pp

25 新羅의 衰退에 대하여 25 동체 내부에서 줄곧 계층분화가 진전되는 가운데 발생한 몰락계층인 데 반하여 호족 중 다수를 차지하는 지방 土豪들은 庶民地主로 立身한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村主 출신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촌락 내부에는 相互扶助 的인 관행이 크게 작용하여 공동체 성원들은 어느 정도 집단보호를 받았으나, 장기 간의 전란을 겪으면서 많은 농민들이 사회적으로 몰락해 갔다. 더욱이 통일기에 들 어와 律令制에 입각한 稅役제도가 강화된 결과 다수의 농민들이 貧農ㆍ小農層으로 떨어져 다른 사람의 토지를 경작하는 傭作에 의해서 겨우 연명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에 따라 촌락공동체 내부에서의 부유한 농민층과 빈농층의 대립이 격화되었을 것 으로 짐작된다. 한편 호족은 대토지 소유자로서 국가로부터 何等 탄압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긴 국가가 지주의 토지 소유를 엄격히 제한하는 限田制를 강행하여 호족의 이익을 크게 침해할 경우라면 호족들도 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겠지만, 9세기 신라의 약화된 국가권력으로써는 이같은 과감한 조치를 취할 만한 형편이 못되었다. 실제로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한전제가 실시되면 자연히 토지 매매가 금지되 어 빈궁한 농민은 토지를 兼倂하는 호족들보다도 더 큰 불편을 겪게 마련이었다. 왜 냐하면 빈농인 처지에서 그나마 토지를 처분하지 않고서는 당장 배를 채울 수 없었 기 때문이었다. 호족들은 국가의 탄압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 대다수는 국가권 력과 타협하여 그 庇護를 받게 됨으로써 在地사회에서의 세력을 溫存 내지 확대시킬 수 있었다. 또한 국가의 입장에서도 이들을 회유 조종함으로써 지방사회 末端에까지 국가의 의지를 침투시킬 수 있는 利點이 있었다. 농민반란과 호족의 반란은 이론적으로 截然히 구별되지 않으나, 兩漢 交替期의 中 國史의 事例 검토49)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차이를 抽出할 수 있다. 신라 통일기에 각종 災害로 농사를 망쳐 식량 기근이 들 때마다 농민들은 살던 지역을 떠나 유민이 되어 민란을 일으켰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단 지역에서 遊離된 만큼 더 이상 생산집단이 아니었고 더욱이 郡ㆍ縣과 연계를 도모할 수 있는 정치집 단도 아니었으므로, 결국 각지를 떠돌며 약탈하는 이상의 것을 이루어 낼 수 없었 다. 그들이 다른 반란세력과 연대를 꾀하여 비교적 큰 세력집단을 이룬 것이 889년 尙州의 농민반란이었지만, 그들은 곧 반란의 주도권을 호족들에게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 비해 여러 촌락을 직접 장악한 호족들은 군ㆍ현의 생산집단인 동시 49) 木村正雄 中國古代農民叛亂の研究 (東京大學出版會 1979), pp , p.303(각주 66), p.308(각주 118)

26 26 李基東 에 지방권력과 일정한 수준으로 결합관계에 있는 정치집단이었다. 실제로 호족들의 일족은 胥吏로서 州ㆍ군ㆍ현의 통치에 깊숙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호족 들은 조정에 대해 반기를 들었으면서도 지방민으로부터 안정적으로 稅役을 수탈함 으로써 장기간 반란집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최초 농민반란이 일어난 직후부터 반 세기 가까이 호족세력의 동란이 계속될 수 있었던 근본원인은 바로 이 점에 있었다. Ⅳ. 지방 豪族세력의 대두와 국가권력에 대한 도전 앞 章에서 살펴보았듯이 농민반란이나 지방호족들의 離叛 自立 현상은 국가권력 에 대한 지방사회 불만의 집중적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오랜 기간 국가권력의 庇護 아래 성장을 거듭한 호족층이 바야흐로 조정에 대한 對抗体로 등장하게 된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같은 의미에서 통일기에 들어와 농촌사회 가 재편성되는 가운데 지방세력가들이 어떠한 배경과 조건에서 형성 대두했으며, 한 편 그들의 불만 대상이 과연 무엇이었는 지를 추구하는 것은 긴요한 연구과제가 된 다고 생각한다. 新羅史를 통해서 지방사회가 큰 변화를 겪게 된 계기는 이른바 中古시대(514~ 654)를 통해서 장기간 치열하게 전개된 국가 保衛 및 삼국통일전쟁이었다. 6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신라의 영토확장을 위한 전투는 王京 6部民만으로써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규모로 진행되었다. 왕경 6부는 하나의 戰士공동체로서, 군 복무 야말로 그들의 의무인 동시에 특권이었다. 그러나 6세기 중엽 加耶諸國을 병합하고 곧이어 백제와 고구려를 공동 적으로 한 국가 보위전쟁을 수행하게 되면서 이에 필 요한 인적, 물적 자원의 대부분을 지방민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긴 군 대의 주력인 大幢을 비롯한 誓幢ㆍ郎幢ㆍ貴幢 등 정예부대의 병사들은 왕경인 중에 서 징집 혹은 召募의 형식으로 편성했으나, 外餘甲幢을 비롯한 8개 보병부대와 弩幢 을 비롯한 4개의 특수 兵器로 증강된 부대를 합친 이른바 法幢군단은 모두 지방의 城ㆍ村에서 징발된 농민병사로 편성하여 삼국통일전쟁 당시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이처럼 지방농민들은 장기간 전쟁에 出戰하여 많은 희생자를 냈다. 하긴 촌락사회 내부에서 농민을 직접 장악하고 있던 村主들이나 혹은 촌락민을 이끌고 종군한 軍師 들 가운데 일부는 군사적 공로로 각종 포상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조정은 삼국 간

27 新羅의 衰退에 대하여 27 의 항쟁이 본격화 될 무렵인 624년(진평왕 46년) 倉部에 포상 업무를 전담하는 賞 賜署를 두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군사들 중에는 7세기 중엽 그때까지 지방민을 차별 하는 方便으로 부여하던 外位 관등 대신 왕경 6부민이 독점해 온 京位 관등을 받기 도 했다. 그 뒤 신라가 唐과 모험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인 674년(문무왕 14 년),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에게 새로이 관등을 부여하는 기회에 外位를 정식으로 폐 지하고 京位로 一元化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 뿐만 아니라 지방민들 가운데 삼국통일전쟁에 현저한 공을 세운 일부의 사람에게는 수도로 옮겨 와 거주하는 특전 을 베풀기도 했다. 다만 통일기에 들어와 郡 아래 縣이 설치되면서 그때까지 군에 직속되어 있던 촌주의 실제적 세력기반은 축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촌주는 중앙 에서 파견된 縣令의 지시를 받게 되어 종전에 비해 한층 좁은 지역을 대표할 뿐이었 다. 757년(경덕왕 16년) 당시 117개 군에 현이 293개였으므로, 군은 평균 3개 정 도의 현으로 분할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촌주를 頂點으로 한 지방 촌락사회의 상층부는 모처럼 경위 관등을 받 았음에도 불구하고 律令官制에 규정된 官位相當官, 즉 정식 관원이 되는 길이 계속 봉쇄되었다. 그들은 기껏해야 州ㆍ郡ㆍ縣의 吏屬이 되어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을 보좌하는 역할에 만족해야만 했다. 이는 8~9세기 日本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큰 차이가 난다. 즉 일본에서는 율령국가시대에 들어와 在地首長層이 外位制에 포섭되 어 있으면서도 國 아래 군의 장관직인 郡司로 임명되어 임기 연한에 구애받지 않는 終身職의 특혜를 누렸다. 그러니까 일본에서는 지방 세력가들의 位階가 외위인 까닭 에 官位相當官職을 받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직을 주는 개방적인 정책을 편 반면 신라는 이들에게 관위상당관이 될 수 있는 京位를 주면서도 실제로는 州ㆍ郡ㆍ 縣의 하급직인 吏屬職으로 제한한 것이다. 이는 신라가 통일기에 들어와 骨品제도에 입각한 인재의 등용에 있어서 어떠한 변화도 허용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世界史를 보면 로마 공화정 시기의 역사가 평민들의 참정권(시민권) 획득을 위한 신분투쟁사 였고, 그것이 단계적으로 실현되어 정복전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기 직전의 B.C.4 세기 경에는 마침내 귀족과 평민 간의 차별이 사라지게 되었을 뿐아니라 지방 屬州 출신자인 경우에도 일정한 군복무를 마치면 시민권을 부여했으나, 신라는 삼국통일 전쟁에서 큰 軍功을 세운 지방민에게 관등제도에 있어서만은 왕경인과 지방민의 차 별을 폐지하면서도 정작 긴요한 참정권문제에 있어서는 차별이 여전히 존속하는 모 순이랄까 불철저함을 보였다. 골품제도의 정치적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관

28 28 李基東 등 및 관직에 대한 規制였음을 想起할 때 그 모순은 차라리 의도적인 欺瞞策에 불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골품제도의 모순이야말로 9세기에 들어와 唐에서 유학하 고 돌어온 六頭品 출신의 신지식인 뿐아니라 지방 호족세력들에게 불만의 최대 요인 이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된 뒤 唐이 어제의 동맹국가인 신라마저 羈縻州체제로 간접 통치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자 文武王은 감연히 당과의 一戰을 각오하고 항쟁을 전개 했다. 다행히 이때 吐蕃의 침략 위협에 직면한 당이 평양성에서 군대를 철수함에 따 라 나ㆍ당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이에 따라 오랜 전란이 그치고 小康상 태에 접어들었지만 다만 신라가 昇平의 盛世를 이룩하는 데는 그로부터 반세기 이상 의 세월이 걸렸다. 聖德王(702~737) 말경에 이르러 비로소 국내적으로 안정되고 唐과의 우호 친선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역대 국왕이 治世에 쏟 은 열정은 주목할 만하다. 문무왕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듬해인 669년 2월 대대적 인 赦免을 단행하는 한편 모든 채무자에게 利息을 탕감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 다. 특히 자연재해로 농사를 망친 지역의 농민들에게는 元金(本穀)마저 면제해 주는 일대 德政令을 반포했다. 문무왕이 681년 7월 1일 내린 遺詔에서 그 간 병기를 녹 이어 농기구를 만들었고, 賦稅와 徭役을 가볍게 한 결과 집안이 넉넉해지고 인구가 증가하며 창고가 넘치게 되었다고 자랑한 것을 볼 수 있다. 조정이 장기간의 약탈적 인 戰時경제에서 평상시의 경제체제로 회복시키려고 노력한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문무왕이 세심하게 民情을 보살펴 이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다면, 그의 야심만만한 후계자인 神文王(681~692)은 통일에 따른 집권체제의 정비작업을 정력적으로 추 진했다. 왕은 685년까지 지방행정 구역을 9州로 나누었고, 5 小京제도를 정비했다. 신라는 6세기 영토 확장과정에서 주요 지방사회에 대한 지배권 확립을 목표로 소경 을 설치, 경주 6부민을 집단적으로 徙民시키는 방식을 채택했다. 558년 國原(충주) 에 설치된 소경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통일 후 685년까지 5개의 소경을 두어 전국 적인 규모로 이를 확대시켰다. 이에 앞서 674년 六徒 진골을 소경과 주에 出居시킨 바 있다. 또한 본래의 신라인 외에 고구려ㆍ백제ㆍ말갈 등 피정복민까지 차출하여 중앙군으로 9 誓幢을 편성했다. 이밖에도 왕은 종래 진골귀족 관료들에게 일종의 특 권으로 묵인해 왔던 祿邑을 689년 폐지하고 그 대신 年俸(혹은 月俸)에 해당하는 歲租를 지급하여 국가의 토지 및 농민에 대한 지배를 한 층 강화하였다

29 新羅의 衰退에 대하여 29 신문왕의 차남으로 형 孝昭王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성덕왕은 거의 모든 부문에 걸 쳐 제도를 정비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민생문제에 주력한 점이다, 왕의 재위 시대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물난리와 가뭄이 마치 전염 병처럼 발생했다. 이 때문에 농사를 망치게 되어 식량기근이 만연했다. 조정은 그때 마다 창고를 열어 貧民을 救恤했는데, 707년에는 7개월 동안 한 사람 당 粟 3升씩 을 지급하여 모두 30만 500石을 방출하는 전무후무한 시책을 폈다. 그러나 왕은 이 같은 임시 방편의 구제책으로써는 농민의 궁핍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고 판단하여 근본대책으로 722년 8월 백성에게 처음으로 丁田을 지급했다. 하긴 관련 기록이 너 무나 단편적이어서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가 없고, 이 점 唐의 均田制를 받아들여 丁男에게 口分田을 지급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농민들이 그 전 부터 보유하고 있던 私有地를 국가가 班給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일정한 법적 절차를 밟아 그 소유권을 인정한 것이거나 혹은 그 간 삼국통일전쟁으로 황폐해 진 농경지 를 給田형식으로 농민들에게 분배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50) 무난하다고 생각된다. 한편 일본 正倉院에 있는 신라 帳籍에 보이는 烟受有田畓을 이 丁田과 같은 것으로 보는 데는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성덕왕 때 이르러 정전제를 시행한 일반적인 배경으로 농법의 발전, 철제 농기구 의 보급 확대, 水田 및 牛耕의 확대 실시 등으로 토지의 생산성이 높아졌을 가능성 이 거론되고 있는데, 국가는 이로써 토지면적을 기준으로 농민에게 地稅인 田租를 부과했을 것이 틀림없다.51) 하긴 정전이 완전한 사유지였다면 그 소유에 대한 재산 세를 부과해야 마땅할 것이고 토지 사용에 대한 用益稅라고 할 전조는 부과할 수 없 는 것이었다.52) 바로 이 점이 정전의 복잡한 성격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 은 어쨌든 정전이 公田이 아닌 사유지에 속하는 한에 있어 토지의 兼倂 혹은 상실의 계기를 내포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촌락공동체 내부에서 차츰 부농층과 빈농층으로 양극화되는 계층분화 현상의 가장 주요한 動因 50) 姜晋哲 韓國土地制度史ㆍ上 韓國文化史大系 Ⅱ 政治ㆍ經濟史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65), pp 林建相 신라의 제 에 대하여 사과학 , ; 상 집 (, 2001), pp ) 李 寬 統一新羅土地制度硏究 (一潮閣, 1999), pp 다만 9 제에 의한 지 이 라 結 制에 의 서 田租를 한 것으로 보는 있다. 金基興 삼국 및 통일 신라 세제의 연구 (역사 사, 1991), p ) 중국 고대의 田租를 지소유와 관계 이 산자 그 산에 대 부 다는 의 에서 生産稅라고 命名하기도 한다. 木村正雄 中國古代專制主義の基礎條 中國古代農民叛亂の 研究 pp 참조. 정전 호 임건 전 력 호 혜안 喜 적 등호 아니 負 해 수취 토 견해가 비평 토 없 직접생 가 생 해 납 件 했 미 면

30 30 李基東 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8세기 전반경에 이미 지방사회에는 대토지소유자가 상당수 등장했을 것으로 짐작 된다. 그것은 소경제도에 따라 지방에 정착했거나 혹은 녹읍제도나 관직을 매개로 특정지역과 연고를 맺게 된 진골귀족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세 력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현지의 토착세력과 私的인 결합을 꾀했을 것이 분명하다. 다만 당시만 해도 이들의 토지 획득은 농업경영이나 토지시장을 통한 것이라기보다 는 역시 정치적 특권에 의해서 賜田ㆍ 邑을 받거나 혹은 陳田 개간에 의존했을 것 으로 짐작된다. 한편 이 무렵에는 아직 在地세력 출신의 대토지 소유자는 등장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중앙귀족의 지방 진출에 따라 지역사회의 재편성이 진행되는 가운데 전제주의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景德王(742~765)의 개혁정치가 추진되었다. 특히 757년 3월 녹읍제도를 부활하고 그해 12월 군현제도를 개편한 것은 매우 주목되는 사실이다. 이때 부활한 녹읍을 68년 전에 폐지한 그 녹읍(이른 바 前期 녹읍)과 똑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할지 어떨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서 논란이 많다. 전기 녹읍과 후기 녹읍 사이에 사회경제적 의 차이를 충분히 감안한다면 양자 간에는 뚜렷한 질적 차이를 想定할 수도 있겠으나,53) 근본성격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또한 녹읍이 부활된 지 9개월 뒤 실 시된 모든 郡ㆍ縣 명칭의 漢 字로의 통일도 단순히 명칭의 변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녹읍제도 부활의 의미를 실질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일부 군ㆍ현에 대한 昇 조치를 취하는 등 실제로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는 개편이었다. 三國史記 地理志에 반영되어 있는 757년의 군ㆍ현제 개편에서는 州ㆍ군ㆍ현 간의 지배 領有관계에서 후대의 이른바 地( 境地)와 같은 交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정치 적 통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利害관계를 내포하는 것으로, 국가권력과 在 地세력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갈등관계를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54) 개혁정치에 대한 진골귀족들의 저항이 최고조에 달했던 경덕왕대 말기는 국제정 세도 왕에게 크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755년 11월에 일어난 安ㆍ史의 대반란은 당 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신라 朝野를 충격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 넣었다. 반란 은 763년까지 중국대륙을 휩쓸었다. 경덕왕은 권력투쟁에 지친 데다가 믿고 의지하 던 唐제국마저 크게 흔들리자 정치의 의욕을 잃고 에 탐닉하다가 765년 세상을 食 與件 式 二 降 飛 越 差 宴樂 53) 金基興 앞의 pp ) 木村誠 新羅郡縣制の 立過程と村主制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3(조선사연구회, 1976); 古 代朝鮮の國家と社會 (吉 弘文館, 2004), pp 책 確 川

31 新羅의 衰退에 대하여 31 떠났다. 이에 8세의 어린 아들 惠恭王이 즉위하여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었으나, 768년 7월 一吉湌 大恭과 그 아우 湌 大 이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33일 간이나 포위하기까지 했다. 三國遺事 권2 혜공왕 조에는 대공이 반란을 일으키자 수도를 비롯한 5개 道에 걸친 주ㆍ군에서 96명의 干(진골만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 관등 으로 진골신분에 대한 通稱임)이 서로 싸워 크게 어지러웠다고 한 것을 보면 전국적 인 내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新唐書 권220 신라전에는 이때의 내란이 3년만 에 진정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770년 8월에 일어난 대아찬 金 의 반란을 대공 형제의 난에 연속하는 것으로 파악한 때문인 듯하다. 이 768년의 반란 때 중앙귀족과 지방의 호족세력이 서로 뒤엉켜 싸운 것이 분명 한데, 이를 계기로 하여 호족세력의 큰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즉 삼국통일 후 그간 지방에서 성장해 온 진골귀족 출신의 호족들이 대거 반란에 가담 했다가 큰 타격을 입게 되자 토착세력 출신의 지주들이 그 공백을 메우면서 깊숙이 파고 들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만 8세기 후반은 780년의 역사적인 왕실 교체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에는 이렇다 할 동요 현상을 보이지 않았다. 혜공왕 정 권을 타도한 汎진골 연합세력의 최고 지도자였던 上大等 金良相은 宣德王이 되어 782~783년 그 간의 浿江鎭 설치작업을 완료하여 서북지방의 개척에 를 내디 뎠다. 또한 그의 협조자인 상대등 金 信이 뒤를 이어 元聖王으로 즉위, 뛰어난 정 치 능력을 발휘했다. 왕은 788년 國學의 졸업시험으로 書三品科를 제정하여 인재 를 뽑았는데, 이는 골품제에 입각한 권력구조면에서 볼 때 매우 前 的인 조치였다. 무엇보다도 왕이 사회의 재생산을 확고히 보장하는 기제인 農에 힘쓴 것은 성덕왕 의 그것과 비교할 만했다. 즉 왕은 790년 全州 등 7개 주의 사람을 징발하여 한반 도 제일의 곡창지대에 위치한 骨堤를 증축했고, 죽기 직전인 798년 4월에는 농 민들로 조직된 작업부대인 法幢 소속의 法功 1만4천여 명과 같은 숫자의 농민을 切火郡(영천)ㆍ 郡(경산)에서 징발하여 永 의 둑을 수축하도록 했다. 治水 ㆍ 공사야말로 국가의 기반이 되는 소농민을 유지하고 나아가 새롭게 創出하기 위한 으뜸가는 수단임을 상기할 때 원성왕의 권농정책은 크게 주목되어 마땅할 것 阿 廉 角 融 巨步 敬 讀 向 勸 碧 夫 押梁 川 洑 灌漑 이다. 원성왕이 798년 12월 고령으로 죽은 뒤 그의 후계자들은 극단적인 왕실 친족 곧 宗室 중심의 권력구조를 지향했다. 그 결과 汎진골귀족세력의 정치적 단결은 깨어지 고 각기 家系 단위로 분열 독립하여 정치적 행동을 취하려는 경향이 차츰 농후해졌

32 32 李基東 다. 더욱이 憲德王(809~826) 때는 사회경제적으로도 혹독한 시련기였다. 814년 여름 國西지방에 홍수가 발생한 이래 매년 흉년이 들어 기근이 만성화되었다. 조정 에서는 처음 일년 간 조세와 貢物을 면제한다거나 일부 救恤策을 쓰기도 했으나, 815년 이래 각지에서 草賊이 일어나 국내가 매우 소란해졌다. 自活의 길을 찾아 중 국이나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람이 속출했고, 심지어 자식을 팔아 생계를 꾀하는 사 람도 나타났다. 이른바 新羅奴가 중국의 沿海 일대에서 매매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 렵의 일이었다. 바로 이같은 사회적 혼란을 틈타서 822년 3월 熊州都督 金憲昌이 반란을 일으켰 다. 그는 태종무열왕의 7대손으로, 아버지 金 元이 785년 선덕왕의 후계자로 최초 群臣회의에서 추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등 김경신이 책략을 써서 왕위를 가로 챘다고 거사의 구실을 내세웠다. 그는 반란 직전 4개 州의 도독과 3개 小京의 臣 (장관), 그리고 여러 군ㆍ현의 守令을 위협하여 지지를 강요하는 등 자못 기세가 등 등했지만 결국 지지를 약속한 일부 도독들이 이탈한 결과 고립되어 관군에 의해 비 교적 쉽사리 진압되고 말았다. 이처럼 김헌창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것이 앞 으로 닥쳐올 사태의 전개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것은 첫째로 이 반란이 지방 호족의 割據的 경향을 크게 촉진시켰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며, 둘째로 830년대의 왕 위계승 쟁탈전의 先 을 지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현재 일본 奈良 正倉院에 남아 있는 신라 통일기 촌락 帳籍은 바로 이 시기 西原 京 지방 4개 촌락의 실태를 잘 보여주는 자료로서 주목된다. 이 장적의 작성연대인 未年을 둘러싸고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서기 695년, 755년, 815년으로 比定하는 등 견해가 엇갈리고 있으나, 장적에 보이는 口의 현저한 이동현상으로 미루어 볼 때 사회경제적 현상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9세기 초 곧 815년으로 볼 수 있는 개연성이 가장 크다고 짐작된다. 8세기를 통해서 律令制에 입각한 收 행정 이 차츰 강화됨에 따라 각종 납세와 役에 시달리게 된 농민층은 9세기에 들어와 참으로 피폐해진 모습을 드러냈다. 무엇보다도 4개 촌 중 일부 缺落이 있는 C村을 제외한 3개 촌을 보면 총 36개의 烟 가운데 20개가 토지재산을 기준으로 等級化 한 9等 制 가운데 최말단에 해당하는 下下烟이고, 여섯 번째 등급에 해당하는 下 烟 이상은 찾아볼 수 없다. 이 하하연이 아주 가난한 自然 나 혹은 다른 곳에서 移 入해 온 를 인위적으로 2~3개씩 묶어 만든 成 임을 생각할 때 거의 無田농민 에 가까운 존재들이 촌락 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 周 仕 聲 乙 戶 疲弊 取 課 孔 戶 仲 戶 戶 編 戶

33 新羅의 衰退에 대하여 33 에도 장적에는 等 구분에서 제외된 호도 있는데, 이는 어쩌면 唐에서의 경우처럼 遊離 하는 극빈자들에게 촌락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일정기간 면세 조치를 취한 호 구가 아닐까 짐작된다.55) 한편 4개 촌 전체 인구 462명 가운데 노비는 25명으로 5.4 퍼센트에 불과하여 생각보다 많지 않은 편이다.56) 이같은 사태의 발생은 근본적으로 중앙귀족들이 권력쟁탈에 몰두한 결과 지방사 회의 변화에 副應한 적절한 시책을 소홀히 한 데 있었다.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村主를 매개로 하여 굳게 結 했던 중앙과 지방사회와의 긴밀한 연결망은 촌주 위에 군림하는 새로운 대토지소유자의 대두로 말미암아 차츰 파괴되어 갔고, 그 만큼 조 정의 지방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은 退될 수밖에 없었다. 국가는 일반 농민들이 농 촌 高利 자본에 희생되어 노비로 전락된다거나 혹은 조세 부담에 견디지 못하 고 촌락공동체에서 이탈하여 유민이 되는 데도 제대로 보호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또한 국가는 촌락에 잔류하고 있는 대다수의 소농민들이 자기 토지를 잃고 지방 유 력자의 비호 아래 들어가 대토지소유제에 포섭되는 것을 放 했을 따름이다. 그런데 대토지소유자의 땅을 빌려 경작하는 소농민의 경우 그 농업경영 방식은 어디까지나 개별적으로 자기 경영을 했으므로 국가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처럼 소농민들이 국가의 요구와 지주의 요구라는 重의 압박 속에서 더 욱 貧 化되어 간 것이 889년 농민반란의 근본원인이 되었다. 이밖에 9세기에 들어와 민간의 상업부문이 차츰 성장하고 더욱이 張保皐가 828 년 설치한 淸海鎭의 눈부신 번영이 말해주듯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한 교역이 매우 활발해진 결과 왕경은 물론 농촌사회에까지 상업적 요소가 침투되어 촌락구조 재편 성의 추가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통일기 신라의 귀족들은 여전히 토지에 자산을 쏟아붓고 있었으나, 그 중 일부는 생산 등에 투자하여 8세기 중엽 使行무역의 형태로 일본에 수출하기까지 했다. 하긴 고급 수공업 제품은 宮中에 설치된 30여 개 전문 房에서 생산을 독점하고 있었으나, 기술자( 人)들은 를 租로 받아 작업 에 종사한다거나 업종별로 분화되는 등 그 사회경제적 지위가 향상되었다.57) 또한 9세기 경의 유통경제는 아직 금속화폐가 주조되지 않은 劣惡한 상태에서 와 곡물 을 주축으로 한 현물교환경제에 머물고 있는 등 크게 未 性을 띠고 있었으나, 가난 한 농민 중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 戶 乞食 束 減 貸 負債 置 二 窮 毛氈 工 匠 工價 布 熟 55) 金基興 앞의 p ) 李仁哲 新羅村落社會史硏究, pp ) 朴 守 新羅 業史 (新書, 1996), pp 책 南 手工 苑

34 34 李基東 다.58) 청해진이 설치되던 828년 4월 漢山州 縣의 어떤 術人이 빨리 부자가 되는 법 ( 富之術)을 가졌다고 사람들을 속이다가 먼 섬으로 귀양갔다는 三國史記 新羅本紀의 기사는 당시 빈곤으로 불안해 진 농촌사회에서 미신과 갖가지 예언이 성 행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왕위계승 쟁탈전이 일어난 뒤 신라 조정은 약체화된 왕권으로 지방세력의 성장에 대처하기 어려워진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기방어의 태세를 갖추 기 위한 방법으로 지역차별을 강화하는 동시에 극단적인 수도 중심체제를 守했다. 이처럼 국가권력이 급속히 쇠퇴해 가는 시대적 배경하에서 지방사회의 구조는 한 층 더 力動的으로 개편되어 마침내 토착세력 출신의 대토지소유자들이 신라 全 에서 대두한 것으로 보인다. 興德王이 834년 만연한 사치풍조를 금지하고자 내린 敎書에 의하면 ㆍ ㆍ器用ㆍ 舍 등에 대한 신분별 규정에 있어서 眞村主는 5두품, 次村主는 4두품과 같은 적용을 받는다고 선언했다. 그러니까 조정은 지방 촌주를 왕 경 6부의 平人ㆍ (3~1두품)보다 높은 5두품ㆍ4두품에 하는 신분으로 대우하 는 한편 이들을 上ㆍ下 두 계층으로 분류했음을 알 수가 있다. 하긴 이보다 1년 전 에 만들어진 菁州(진주) 池寺鐘의 명문에는 2명의 村主의 관등이 及干과 大奈 末(麻)로 되어 있어 본인들은 각각 6두품과 5두품 신분을 자처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856년에 만들어진 興寺鐘의 명문에도 촌주가 上촌주ㆍ제2촌주ㆍ제3촌주의 세 계층으로 分化되어 있으며, 아울러 三重沙干ㆍ沙干ㆍ及干 등 모두 6두품만이 차 지할 수 있는 관등을 과시하고 있다. 요컨대 9세기에 들어와 시간이 흐를수록 촌주 의 계층분화가 복잡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촌주들이 공공연히 조정의 규정을 무시하 면서 보다 높은 신분을 주장하고 있던 점에서 그들의 한껏 해 진 자세를 엿볼 수 있다. 호족은 대체로 군ㆍ현 단위의 최상급 촌주에 해당하는 존재였거니와, 지방 사회 구조의 가장 현저한 변화가 발생한 9세기 격동과 전환 시기의 역사적 산물이었 다고 할 수 있다. 9세기 초부터 신라에 流入되기 시작한 禪宗은 흔히 호족불교의 성격을 띠고 성장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九山禪門의 성립사를 연구한 어떤 論者에 의하면 이른바 民의 성장을 배경으로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선종 또한 민의 성장과 함께, 그리고 민의 힘에 의해서 세력을 키워갔다고 한다. 다만 농민반란 이후 선종이 王政 및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의탁함으로써 민의 반감을 유발하여 일시적으로 침체했다 瓢川 妖 速 固 域 色服 車騎 屋 百姓 準 蓮 卿 竅 鷹揚 58) 金昌錫 삼국과 통일신라의 유통체계 연구 (일조각, 2004), pp

35 新羅의 衰退에 대하여 35 는 것이다.59) 여기서 말하는 민 이란 일반 농민층을 지칭하고 있는데, 이들이 신라 말기에 성장하고 있었다는 견해는 朝鮮 후기 민 의 세력이 꾸준히 성장하여 19세기 反권력 투쟁을 줄기차게 이끌었다는 견해와 軌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19세기의 민중항쟁들은 봉건사회 내부에서 새롭게 성장한 신흥 富民層과 일부 상공 업세력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었고, 민중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民(貧農)들 은 이들 농촌 엘리트계층의 야심과 懣에 의해서 동원된 병사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신라 말의 경우도 변혁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정치 참여의 길이 막혀 있던 지방호족세력이었지 결코 소농민은 아니었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 후기나 신라 말 변혁운동에 대한 파악은 계급투쟁론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사회학자 렌스키 (Gerhard E. Lenski)가 제시한 지위의 一致ㆍ不一致 에 관한 이론이 보다 적합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60) 주지하듯이 이 이론에 의하면, 사회적 변동으로 말미 암아 上昇한 사람들은 富를 얻지만 지위와 권력이 이에 隨伴하지 않고, 반면 사회적 으로 몰락한 사람들은 지위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나 富와 권력을 잃고 말아 결국 그 괴리가 불안을, 불안이 분노를, 그리고 분노가 공격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窮 憤 Ⅴ. 맺는말 신라통일기는 東아시아 국제관계가 크게 안정된 번영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실로 이같은 국제평화를 基調로 하여 문화의 교류와 국제교역에 눈부신 진전이 있었 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 韓國 古 文化가 開하여 황금시대를 歌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다만 국제평화의 어두운 면도 작용했다. 즉 신라는 삼국통일을 달성할 때 까지 적에 대항할 필요에서 국내의 정치적 대립을 최대한 自制하고 緩和시켜 오로지 전쟁의 수행에 모든 노력을 집중시켰다. 그 결과 정치적 대립을 잠재우고 국민통합 면에서도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 장기간의 고난과 긴장된 생활에서 해방되자 그 간 어렵게 봉합되어 온 정치ㆍ경제ㆍ사회적 모순이 터져나오 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통일기의 역사 속에서 쇠퇴의 징후를 찾아내기란 典 滿 謳 59) 秋萬 려 선 사상사 연구 (이 과 천, 1992), pp 및 pp ) 李基東 民 史學論 現代 韓國史學과 史觀 (翰林科學院叢書 Ⅰ, 1991) ; 기의 韓國史 學 (일조각, 1999), pp 鎬 나말 초 종 론 실 衆 전환

36 36 李基東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된다. 종래 신라 衰亡의 원인을 둘러싸고 여러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거론한 것이 귀족ㆍ 사찰ㆍ지방호족의 대토지소유와 이로 인한 소농민의 몰락이라는 문제였다. 조정이 889년에 일어난 농민반란을 初場에 진압하지 못하여 半世紀 간에 걸친 지방호족의 自立 및 후삼국의 동란 끝에 신라가 멸망했으므로, 소농민과 호족의 관계, 나아가 양자의 국가권력과의 모순을 추구하는 것이 긴요한 연구 과제가 된다고 믿는다. 소 농민은 대토지소유제에 포섭된 경우라도 개별적인 자기경영 방식을 취했으므로 국 가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그들은 국가와 지주로부터 重의 압박을 받아 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반면 대토지소유자로서의 호족들은 국가권력과 타협하여 오히려 그 庇護를 받았으 나 骨品제도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胥吏職 이상의 정치참여가 봉쇄되었던 까닭에 조 정에 대해 懣을 품고 있었다. 流民집단의 형태를 띠고 起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소농민세력은 889년 반란을 일으켜 緖戰에 관군을 격파하여 기세를 올렸으나 지역과 遊離되어 생산집단도 아니 었고 더욱이 郡ㆍ縣과 연계를 꾀할 수 있는 정치집단도 아니었으므로, 각지를 떠돌 며 약탈 이상의 것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반해 호족들은 조정에 대해 반기를 들었 으면서도 지방민에게서 안정적으로 稅役을 징발함으로써 반란집단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조정이 삼국통일 직후 지방민에게 京位 관등을 부여할 때 王京人에 하는 참정권을 주지 않은 것이 큰 失策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한편 지방호족들이 중앙에 대해 반기를 들 수 있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국가권력이 쇠퇴한 데 연유하고 있는 만큼 汎眞骨연합세력이 家系 단위의 族黨으로 분열하여 왕위계승 쟁탈전을 벌임으로써 국가권력을 결정적으로 弱 化시킨 것도 호족의 성장에 못지 않게 주목되어 마땅하다고 보인다. 二 窮乏 憤 蜂 準 體

37 新羅의衰退에대하여 37 ABSTRACT On the Decline of Silla Ki-Dong Lee*

38 38 李基東 prefecture system after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By the early ninth century, however, socio-economic transformations such as the development of international trade or the infiltration of market economy into rural society gave birth to the unintended consequence of clandestine class differentiation within villages, therefore, some village chiefs could accumulate material foundation for them to transcend into Hojok[local magnates]. Key words; kolpum system, Chingol aristocrats, hojok[local magnates], chonju(village chiefs), capital ranks, local ranks, peasant rebellion. 61) * Mem er, he ational ca emy of Sciences, Repu lic of Korea ** 本 硏究는 2010年度 大韓民國學術院 學術硏究助成 의 에 의하여 行 었. b T N A d b 費 支援 遂 되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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