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원광대학교 대안문화연구소 차례 연구의 개요 2 연구의 배경 및 필요성 / 연구의 목적 및 기대효과 / 연구범위 및 방법 제 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조사> 8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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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익 산 역 사 유 적 지 구 세 계 문 화 유 산 스 토 리 텔 링 조 사 연 구 용 역 이 보고서를 익산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 유산 스토리텔링조사 연구용역 최종 보고회 자료로 제출합니다 원광대학교 대안문화연구소

2 익산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원광대학교 대안문화연구소 차례 연구의 개요 2 연구의 배경 및 필요성 / 연구의 목적 및 기대효과 / 연구범위 및 방법 제 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조사> 8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 5 6 제 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방안> 13 제 4장 <스토리텔링의 발굴 및 실행방안> 21 제 5장 <부록> 26

3 연구의 개요 1. 연구의 배경 및 필요성 1) 연구의 배경 세계문화유산의 관광자원으로서 가치 제고 우리 익산시는 백제 무왕 대에 조성된 왕도문화유산이 집중분포하고 있으며 너른 평야와 원활한 수로교통의 여건을 바탕으로 궁성과 사찰, 왕릉, 성곽 등의 기 반시설을 갖춤으로써 그 기능을 수행했던 도시의 가치를 인정받아 향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에 따른 세계문화유산의 관광활성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 익산역사유적지구는 유 무형의 세계적인 문화유산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0 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고 2011년 공주 부여와 통합한 백제역사 유적지구 우선추진대상에 선정되었으나 관광목적지로서의 인지도나 매력이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어 관광자원으로서의 활용이 미흡함. 21세기는 문화콘텐츠 산업시대. 문화콘텐츠 산업이 제조업이나 서비스 산업 의 부가가치를 넘어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음. 따라서 기존의 세 계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이 보존 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했으나 이제는 보존을 위한 활용 이라는 관점에서 접근이 시도되어야 함. 2) 연구의 필요성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의 필요성 기존 연구는 역사문화유산에 대한 개별자원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공주 부여 와 연계된 백제역사유적의 보편성과 익산지구만의 특수성을 부각시킬 스토리텔링 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4 에 관한 연구는 이뤄지지 않았음. 익산역사유적지구의 인프라, 콘텐츠, 접근성을 감안하여 기존의 스토리텔링 의 한계를 규명하고, 문화유산을 선과 면적 차원에서 연계하여 객관성, 구성적, 실 존적 진정성에 입각한 스토리텔링 관광화 가능성이 시급함. 이를 위해 점형 관광(통과형 관광)이 아닌 비점형 관광(체류형 관광)을 설계 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 기법을 탐색하고, 선진 스토리텔링의 사례연구를 통해 익 산유적지구의 스토리텔링 개발 패러다임의 제기가 필요함. 세계문화유산의 관광 상품화 필요성 세계문화유산의 관광자원으로서 새로운 가치 발견을 위해 스토리텔링 이론을 적용하여 상품화하고 실태조사 및 해외사례를 통해 관광 상품화 가능성에 대한 방 안모색이 필요함. 우리 익산시의 고도문화유산을 한국의 대표적인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여 미 륵사지 왕궁리유적 등 백제문화유산의 우수성과 가치를 널리 알리고 홍보할 필요 성이 대두됨. 세계문화유산의 등재 효과가 지역사회와 국가의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전 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스토리텔링을 통한 방문객 유도방안과 지역 민의 자긍심 고취에 이바지 할 필요가 있음. 2. 연구의 목적 및 기대효과 1) 연구의 목적 역사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을 위한 스토리텔링 이론적 고찰 스토리텔링의 개념의 정의 대상지역 선정 및 지역자원 분류작업을 수행한 자원의 특성을 바탕으로 권역별, 테마별 스토리텔링을 설계 제시함 역사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실태 조사 국내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현황 및 실태 조사 연구의 개요_대안문화연구소 3

5 외래 방문객을 위한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사례 분석 해외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사례조사를 통한 벤치마킹 및 시사점 도출 세계문화유산에 맞는 스토리텔링 개발 역사문화 관광 명소화 실현을 위한 스토리텔링 모델 제시 기존 역사문화자원의 연계성 강화를 통한 효과적인 스토리텔링 방안 2) 연구의 기대효과 익산이 가진 무형자산의 유형화를 통한 가치 향상 발굴된 역사문화유산의 가치 극대화. 익산 스토리텔링를 활용한 문화관광의 현황 파악 및 추진과제 설정 역사문화유산의 대외 인지도 향상 구체화된 스토리 자원의 활용방안 제시 세계유산 등재 이후 관광수요 증대에 적극적 대처 기여 방문객의 만족도 증가에 기여하고 스토리텔링 마케팅 기법 개발. 관광수요 증대에 따른 도시 이미지 향상 및 경제적 가치창출 방문객에게 문화적 신기성 체험으로 유산의 인지도 향상 및 재방문 유도. 세계문화유산 관광지로의 매력성 증대 고유한 전통성, 역사성을 바탕으로 한 지역민의 자긍심 고취 내외국인의 직 간접적 소비에 의한 지역 및 국가 경제 발전 익산문화유산의 체계적 관리를 통한 관광가치 증대 체계적인 관리와 통제에 의한 문화유산 보존 및 정체성 확립 문화자원의 구체화, 체계화로 실행 가능한 스토리 발굴 매력 있는 역사문화유산의 이야기 개발 구분 기대효과 역할수행 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6 정부 지자체 관광업체 및 종사자 외부 방문객 내부 방문객 양질의 관광 매력 개발 관광객의 매력도 상승을 통한 관광산업의 발전 매력적 역사문화자원의 관광 기회 제공으로 고객만족 및 수 익 증대 차별화된 익산유적지구만의 스토리텔링을 접하는 기회 향 유 지역 문화의 우수성을 깨닫고 지역 정체성 확립 세계문화유산과 연계된 스토 리 개발 사업 수행 인프라, 소프트웨어 지원, 관 광지 스토리텔링 정비 세계문화유산 관광 스토리텔 링 교육 및 실행 내,외국인을 위한 스토리텔링 개발 세계문화유산과의 소개 및 재 방문 지역문화유산에 대한 관심 및 이해 증대 익산 유적지구 역사문화유산의 관광가치 창출 3. 연구범위 및 방법 1) 연구 범위 가. 공간적 범위 금마 왕궁 낭산면 일원의 백제 왕도 관련 유산. 나. 시간적 범위 마한~백제~통일신라시대 5~7세기를 주요 연대로 설정. 백제시대 이후 익산의 역사적 실체를 보여주는 유적 포함. 다. 내용적 범위 무왕의 일대기와 관련 역사, 유적 자원 현황 및 분포 기존 스토리 정리 및 발굴 체계화 기존 스토리텔링 활용 사례 정리(타지역 사례 분석)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문화관광 자원분석(컨셉 개발)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가이드라인) 스토리텔링 발굴 연구의 개요_대안문화연구소 5

7 2) 연구 방법 가. 연구 방법 정량적 연구와 정성적 연구를 통합한 통합연구. 현황, 실태, 사례조사연구를 통한 사례연구. 기존 스토리텔링 및 타지역 스토리텔링 활용도 장단점 비교분석 다양한 분야 연구진 참여를 통해 실행 가능한 가이드라인 제시 나. 조사 대상 익산역사문화지구 내 문화유산 관련 스토리텔링 온라인 웹 정보 및 기존 보고서 스토리텔링 저서 및 논문 다. 조사 방법 익산역사문화지구 답사를 통한 현장 조사 고도 익산의 스토리 자원 조사 세계문화유산 및 국내문화유산 관련 스토리텔링 사례조사 익산역사문화지구 관련 기존 스토리텔링 사례 조사 3) 연구추진체계 및 일정 가. 연구 기본 방향 연구의 질적 수준 제고 다양한 참여 계획의 집행력 강화 분야별 연구실무팀 구성 (전문성 확보) 외부 전문가 참여 및 자 문회의를 적극 활용한 현 실적인 문제 도출 관계기관 및 관련 업체와 의 지속 협의 기술적, 제도적 실효성 확보 나. 연구 수행 방법 1단계 : 2013년 10월 ~ 11월 연구진 온라인 커뮤니티 개설(상시 자료 탑재 및 온라인 회의) 기존 백제왕도 익산의 유 무형의 자산의 정리 자문회의 진행 2단계 : 2013년 12월 ~ 1월 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8 자원의 분류 및 분석 (타 지역 사례와 비교 분석) 현장 답사 진행 (연구진 + 자문위원) 자문회의 진행 3단계 : 2013년 2월 ~ 4월 역사문화 자원의 활용 방안 모색 집필 온라인 자문회의 진행 (자문의견서 취합) 최종 보고서회 개최 다. 연구 세부 추진 일정 내용 사업기간 (월) 비고 연구 수행 체계 1. 고도 익산의 관광 자료조 자문 회의 자문 회의 자문 회의 최종 보고 사 무왕관련 유적자원 현황 조 사 〇 〇 〇 기존스토리 정리 및 발굴 체계화 〇 〇 〇 기존 스토리텔링 활용 사례 정리 〇 〇 〇 스토리텔링 관련 계획 분석 〇 〇 〇 〇 고도의 의미와 타시도 사례 〇 〇 〇 2.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 분석 권역별 및 테마별 자원 분 류 〇 〇 〇 익산 스토리텔링 자원 분석 〇 〇 〇 관광스토리텔링의 SWOT분 석 3. 스토리텔링 문화관광 활용 방안 〇 4. 스토리텔링 발굴 (해설) 연구의 개요_대안문화연구소 7

9 제 1장 익산역사지구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 1.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 자료조사 1) 무왕의 생애와 관련 역사, 유적 자원 현황 및 분포 무왕관련 역사 유적과 스토리텔링 자원 현황 생애 유적명 형태 위치 문헌 비고 출생 전 축실지 토지 금마면 서고도리 용정마을 남동쪽 삼국유사 출생 전 마룡지 연못 금마면 서고도리 용정마을 서쪽 삼국유사 출생 용샘 샘 금마면 서고도리 용정마을 연방죽 삼국유사 유년 오금산 임야 금마면 서고도리 50-3 삼국유사 유년 사자사지 사찰 금마면 신용리 삼국유사 호 도기념물10 유년 오금사지 사찰 금마면 서고도리 오금산 신증동국여지승람 금마지 삼국유사 전성기 미륵사지 사찰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 동국여지승람, 와유록 사리장엄 및 봉안기 사적150호 국보11호 삼국사기 신라본기 전성기 왕궁리유적 왕궁 왕궁면 왕궁리 산 80-1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증보문헌비고 금마지 국보289호 사적408호 전성기 제석사지 사찰 전성기 제석사지 폐기장 사찰 죽음 익산쌍릉 고분 왕궁면 왕궁리 왕궁면 왕궁리 산30-9 익산시 석왕동 산 55 관세음응험기 관세음응험기 사적405호 향토유적2 호 사적87호 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0 (1) 탄생 및 어린 시절 관련 유적 - 축실지, 마룡지, 용샘, 오금산, 사자사지 축실지 축실지는 삼국유사 기이 권 제2 무왕편에 나오는 지명으로 문헌에 의하면 서울 의 남쪽 못 주변에 서동이 집을 짓고 살았다는 내용과 서동모의 생가에 대한 내 용이 등장한다. 축실지는 마룡지, 용샘과 연결되어 서동설화가 전해지는 곳으로 서동이 어머니와 살던 생가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용정마을이 형성된 구릉의 남쪽 끝에 해당되며, 비교적 넓은 평탄지를 형성하고 있다. 정상부는 묘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서쪽으로 는 연동제가 위치하고 있다. 평탄지 곳곳에서는 상당수의 기와편들과 토기편 등이 출토되고 있어, 삼국시대 유구가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으로 추정된다. 마룡지 마룡지는 서동의 탄생과 관련이 있는 못이다. 용정마을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 며, 현재 연동제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백제 무왕 서동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삼국유사 에는 第 三 十 武 王 名 璋 母 寡 居 築 室 於 京 師 南 池 邊 池 龍 交 通 而 生 小 名 薯 童 器 量 難 測 常 窟 薯 蕷 賣 爲 活 業 國 人 因 以 爲 名...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금마지 와 여지승 람 에 마룡지라 기록하고 있다. 원래 마룡지의 규모는 현재의 연동제보다 훨씬 작 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마을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연동제 위로 용샘 사이에 또 다른 용샘이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도 다량의 물이 솟아난다고 하며, 현 재도 물이 차 주변이 잠겨있다. 용샘 용정마을의 서쪽 연방죽골 내 위치하고 있으며, 계단식 논으로 조성되어 있다. 서동이 어려서 홑어머니와 같이 살던 집터에 있는 우물이라는 이야기와 우물에서 용이 솟아 올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현재 용샘은 지름 80cm 정도의 시 멘트로 만들어져 있는데, 마을사람의 전언에 의하면, 용샘은 원래 석축으로 이루어 져 있으며, 그 주변은 둠벙이었다고 한다. 또한 물이 깨끗해 목욕도 하고, 물고기 도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논 주인이 와서 둠벙을 매워서 현재는 둠벙이 남아있지 않으나 아직고 용샘에서 나오는 물에 의해 주변에 물이 가득하다. 오금산 익산토성이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서동이 어릴 때 마를 캐러 다녔던 곳으로 전 해진다. 축실지, 마룡지에서 북쪽으로 약 400~500m 떨어져 있으며,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동이 선화공주에게 황금이 많이 쌓여 있다고 했던 말했던 장소로 추정된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9

11 다. 오금산은 해발120m 내외로 남서-북동 방향으로 능선이 길게 이어져 있다. 오금 산의 남쪽에 형성된 용정마을, 연동마을 사람들은 오금산을 넘어서 미륵사지 방향 으로 다니곤 하였다고 한다. 사자사지 미륵산 정상 밑 해발370m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사자암은 정면 3칸, 측 면 2칸의 대웅전 1동과 그 뒤로 삼성각 1동이 있으며, 그 주변으로 종각 1동과 건 물 2동이 있다. 1992년 사자암 대웅전 개축 공사의 일환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암자 아래 자리에서 백제시대 유구층을 확인하였으며, 至 治 二 年 師 子 寺 造 瓦 명문이 기록된 고려시대 휘안문 암막새가 출토되어 사자암 자리가 사자사 터라 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발굴조사 이전에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 사자사터 였을 것이라 추정만 했을 뿐이었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시대에 용화산 밑에 절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자암 경내에는 3층석탑이 위치하며, 사자암 아래에 는 소동굴과 석축이 있는데, 소동굴 내에는 많은 소동불을 위치해 두었다고 한다. (2) 무왕의 전성기 관련 유적 - 미륵사지,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 석등 하대석, 미륵사지 당간지주, 왕궁 리 유적, 왕궁리 오층석탑, 제석사지, 제석사지 폐기장 미륵사지 백제 무왕 때 창건 된 사찰로 알려진 미륵사지는 미륵산에서 남서쪽으로 살짝 치우친 곡간부 말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양 옆으로 미륵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미륵사지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삼국유사 무왕조에 창건연 기설화가 대표적이며, 조선시대에 동국여지승람, 와유록 에서도 미륵사에 대한 내 용이 나타나고 있다. 미륵사지는 1974년에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에서 동탑지와 그 북쪽에 위치한 석등하대석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며, 75년에는 동탑지 주변의 확 장조사와 함께 노출유구에 대한 정비공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동탑지의 기단구조 가 확인되고 동탑지와 법당지 사이 석등하대석도 발견되었으며, 금동풍탁을 비롯 한 은정, 녹유연목, 녹유덩이가 출토되었다. 이후 1980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서 발굴조사를 통하여 가람배치가 삼원 치식( 置 式 )임이 밝혀져, 새로운 형식의 특 수한 가람임을 알게 되었다. 즉, 동서로 세 곳에 중문, 탑, 금당을 각각 두고 그 주변을 회랑이 둘러져 있으며, 그 북쪽에 강당을 두어 중심랑을 형성한 이른바 삼 원 병치식의 가람배치이다. 중앙에 목탑을 두고 동서에 각각 석탑을 두었음이 확 1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2 인되었고, 동탑의 노반석이 발견됨으로 탑재의 채감비율을 통해 9층인 것으로 추 정되었다. 금당지는 이중의 기단으로서 기단내부에 공간을 갖춘 특수구조이며, 강 당지의 규모는 현재까지 확인된 강당지 유구 중 최대의 규모로 추정되는 것이다. 이후 중심사역의 외곽조사를 통해 통일신라 이후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유 적이 확인됨으로써 백제무왕 때 창건되어 조선시대 전기경까지 사찰경영이 이어져 왔음이 확인되었다. 특히, 서탑의 해체과정에서 금동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가 출토되면서 미륵사의 창건목적과 석탑의 건립연대 등을 정확히 밝힐 수 있는 유물 이 확인되었다. 미륵사지 석탑 석탑의 현존 높이는 14m이며, 탑신의 1층 네면에는 문을 만들어 내부로 들어갈 수 있고, 사방이 통하게 하였으며, 내부의 중앙에는 목탑의 찰주와 같은 사방 99cm의 거대한 사각형 심주석을 세웠다. 탑신 모서리 기둥돌의 배흘림 기법이나 얇고 넓은 옥개석의 네 모서리를 살짝 치켜 올리는 기법 등은 목조건물의 가구수 법을 따르는 것이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되는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한국석탑 의 시원으로서 알려져 있다. 현재 2001년부터 해체,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미륵사지 석등 하대석 중원 목탑지와 동원 석탑지 북편에 2기가 위치하고 있다. 중원의 석등하대석은 한변이 1.05m인 1매의 방형석으로 방형 지대석 위에 놓여 있다. 상면에는 8엽 복 련이 부조되어 있는데, 복련의 안쪽으로 8각형의 간주 받침이 있고, 그 안쪽에 직 경 34cm의 원형구멍이 있다. 동원에 있는 석등 하대석도 규모와 형태가 이와 비 슷하다. 미륵사지 당간지주 미륵사지 경내에는 석탑의 남쪽에 동서로 약 90m의 간격을 두고 규모나 형태, 조성수법이 매우 비슷한 당간지주 2기가 세워져 있다. 장식이 적으며, 단정한 형태 를 보이는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왕궁리 유적 왕궁리 유적은 지형상으로는 미륵산의 동편에서 이어진 한 자락의 낮은 능선이 남쪽으로 2km 이상 길게 이어지다가 마무리되는 마을의 바로 북편 능선(해발 41.8m)에 자리잡고 있다. 문헌상으로는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유지, 운영되 었음이 삼국사기, 관세음응험기, 신증동국여지승람, 금마지 등을 통해서 확인되 었다. 최근 조사에서는 북쪽 벽 등 다수의 궁성 내부 시설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석축성벽의 규모가 남북 490m, 동서 240m의 대규모의 궁성 및 사찰관련시설로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11

13 확인되었으며, 백제시대의 성벽, 석축, 대형화장실, 정원, 와적기단 건물지, 공방폐 기지 등 다양한 궁성관련 유구와 왕궁리 5층석탑과 관련한 금당지, 강당지 등 통 일신라시대 사찰관련 유구가 확인되었다. 왕궁사 대관관사명 명문와, 수부명 인장 와, 연화문 와당, 각종 도가니, 금제 영락, 유리구슬, 뒤처리용 나무막대, 각종 토 기 및 중국제 청자편 등 총 3,500여점의 중요유물이 출토되었다. 왕궁리 오층석탑 전체 높이는 약 8.5m이다. 기단부가 파묻혀있던 것을 1965년에 해체하면서 사 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기단부에 탱주가 두 개 있는 방형석탑이다. 옥신과 옥개석 은 모두 여러 개의 석재로 구성되었는데 옥신부는 사우주와 탱주가 각출된 중간석 등 모두 8개로 되었고, 2층은 4면 1석으로 4개, 3층 이상은 2개의 석재로 조립하 였다. 옥개석은 넓은데, 개석과 받침이 각각 다른 돌이며, 받침은 3단이다. 개석은 1층부터 3층까지 8석으로 되었고 4층과 5층은 4석으로 구성되었다. 추녀는 편평하 고 전각의 반전도 경미하며, 낙수면도 완만하다. 제석사지 제석사지는 왕궁면 왕궁리 궁평마을 소나무숲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제 무왕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가람배치는 남북 일직선상에 목탑과 금당과 강당을 배치한 전형적인 백제의 가람배치임이 확인되었으며, 제석사 명 기와와 더불어 인동당초 문암막새 등 7세기 백제기와가 다수 출토되었다. 현재까지 조사결과 1탑 1금당지 의 가람배치구조가 확인되었다. 금당지에서는 백제시대의 화려하고 우아한 인동당 초문 암막새가 다량 출토되었다. 사찰의 중심건물의 기단 기초를 단단하게 다지기 위한 정교한 달구질 흔적이 확인되었다. 가람배치는 기본적으로 사비기 백제사찰 과 거의 동일하나, 그 규모는 단일구조로서는 최대 규모라 할 수 있다. 특히, 목탑 지와 금당지 사이의 서편공간에서 목탑지와 규모 및 축조수법이 동일한 방형건물 지가 새롭게 확인되어 제석사의 변천양상을 밝히는 새로운 단서를 제공하게 되었 다. 제석사와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으로는 관세음응험기 가 있다. 제석사지 폐기장 제석사지 동쪽에는 북쪽으로 이어지는 소로가 있는데, 약 500m정도 마을을 지 나 올라가면 서쪽의 낮은 구릉이 제석사 폐기장에 해당된다. 2003년, 2004년에 걸 쳐 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전에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어 기와가마터로 추정하 였는데, 시굴조사 결과 폐기장으로 확인되었으며, 이는 관세음응험기 의 내용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다. (3) 무왕의 죽음과 관련된 유적 1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4 익산 쌍릉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군 고적조에 雙 陵 在 五 金 寺 峯 西 數 百 步 高 麗 史 云 後 朝 鮮 武 康 王 及 妃 王 也 俗 號 末 通 大 王 陵 一 云 百 濟 武 王 小 名 薯 童 末 通 卽 薯 童 之 轉 이라 하여 쌍릉 의 위치와 이 능의 주인공을 기록하고 있다. 대정 육년(1917년)에 발간된 고적조사 보고 에 의하면 대왕묘의 봉토는 원형이며 그 주위에는 호석을 돌린 흔적이 있고, 부여 능산리의 백제왕릉이라 전하는 것과 동일한 석실분이다. 현실 내에는 목관이 잔재했고 그 대부분이 썩어 없어졌으나, 그 모양을 복원하여 국립전주박물관에 전 시되고 있다. 또한 현실 입구에서 토기완 1점을 수습하였다. 석실은 장방형판석으 로 단면 육각형인 형태로 가구했으며 玄 室 中 央 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관대를 시설 하고 있었다. 선도는 남쪽에 단면 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소왕묘는 대왕묘와 동일 한 형식으로서 도굴당하여 부장품은 전혀 발견하지 못하였다. 한편 동보고서의 작 성자인 關 野 氏 는 이 陵 은 백제말기의 왕릉으로 추정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무왕 관련 유적자원 분포 현황 종류 유적명 위치 비고 성곽 익산토성 금마면 서고도리 50-3 사적92호 성곽 금마도토성 금마면 동고도리 상제마을 도기념물70호 성곽 미륵산성 금마면 신용리 산124-1 도기념물12호 성곽 용화산성 성태봉산성 여산면 원수리,금마면 신용리 성곽 선인봉산성 여산면 제남리,금마면 산북리 성곽 낭산산성 낭산면 낭산리 고분 성남리고분군 낭산면 성남리 산51 고분 동룡리고분군 왕궁면 동룡리 고분 입점리고분군 웅포면 산 174번지 사적347호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13

15 고분 웅포리고분군 웅포면 웅포리 오류동 산 90 번지일원 고분 원수리고분 편 여산면 원수리 원수제 맞은 유적 사덕유적 왕궁면 구덕리 사덕마을 익 산 JTC 유적 고도리석불입상 금마면 동고도리와 서도고리 사이 보물46호 도요지 신용리 토기요지 금마면 신용리 산 92-2번지 사찰 연동리사지 삼기면 연동리 산220번지 사찰 태봉사 삼기면 연동리495-1번지 유형문화재12호 사찰 심곡사 장암마을 유형문화재192호 사찰 석불사 삼기면 연동리 산220번지 보물45호 1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6 2) 기존 스토리 정리 및 발굴 체계화 (1) 기존 스토리 정리 가. 백제 왕도 스토리텔링 자원 현황(금마 왕궁 낭산면 일원) 지역 주요시대 유적명 성격 스토리텔링 마한~백제 낭산산성 성곽 마한성, 구성, 북성 불림 백제시대 산성으로 확인됨 통일신라 ~ 고려 심곡사 석탑 사찰 사리장엄 발굴 일화 낭 산 면 백제 석불사 사찰 연동리석조여래좌상 일화 백제 태봉사 사찰 무왕의 탄생관련, 태를 봉함 백제 성남리고분 분묘 익산 토착세력의 규모, 성격 무왕의 기반세력 마한~백제 미륵산성 성곽 고조선 준왕의 남천, 기준성 성곽 축성, 청동유물 출토 등 금 마 면 백제 도토성 성곽 백제 미륵사지 (석탑) 사찰 백제 무왕대 조성 익산 도성을 방어하는 역할 미륵사지 창건설화 미륵신앙과 통합, 화합 메시지 사리장엄 출토 일화 백제 사자사지 사찰 미륵사지 창건설화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15

17 무왕의 등극과 지명법사 백제 익산토성 성곽 서동의 효심 마, 오금 등 백제 용샘 우물 서동의 성장, 생활환경 백제 서동생가터 생가 서동의 탄생과 성장, 설화유적 백제 마룡지 연못 서동의 출생, 설화유적 백제 오금산 서동의 성장, 설화유적 백제 오금사지 사찰 서동의 성장, 설화유적 고려 고도리석불입 상 석불 조성내력이 설화로 전해짐 옥룡천 관련 구전 백제 왕궁리유적 왕궁 무왕 천도, 백제 중흥 백제 왕궁리5층석 탑 사찰 무왕 사후 축조 왕궁 사찰로 변화 왕궁 면 백제 왕궁리우물 우물 백제 멸망 징조 백제 제석사지 사찰 무왕 천도, 백제 중흥 백제 제석사폐기유 적 사찰 관세음응험기 기록 증명 불교미술의 진수 백제 사덕유적 생활 익산의 기반세력 규모 팔봉 백제 쌍릉 왕릉 무왕의 죽음 1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8 동 백제 신동리유적 사직 무왕과 선화부인 등 기록 무왕대 국가시설(사직) 생활유적 웅포 면 백제 입점리고분 고분 고분의 발견 이야기 익산 기반세력의 성격 백제 웅포리고분 고분 익산 기반세력의 성격 나. 익산역사지구 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사례 역사 스토리텔링 사례 분류 제목 특징 출처 백제의 거찰 익산 미륵사지 문헌, 학계의 평가 미륵산의 정기 동양 최대의 미륵사 석탑 발굴 스토리, 양식적 특징 미륵산의 정기 미륵사지 당간지주 양식적 특징 미륵산의 정기 미륵사지의 가마솥 논 기이한 이야기 미륵산의 정기 미륵사지 미륵탑과 용 세 마리 기이한 이야기 익산시사 미륵사 망쳤다는 괴무덤 기이한 이야기 익산시사 미륵사지 연혁, 창건배경, 유물 익산시사 미륵사지 석탑 조형적 특징 익산시사 사리봉안기 발굴 조형적 특징 익산시사 사찰의 위엄 드러낸 당간지주 조형적 특징 익산시사 사자암 지명법사가 있던 사자암 문헌, 조형적 특징, 설화 미륵산의 정기 사자암 연혁, 유물 익산시사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17

19 용샘( 龍 泉 ) 마룡지( 馬 龍 池 ) 설화 미륵산의 정기 용샘 마룡지 용샘 간략한 개요 익산시사 전( 傳 ) 마룡지( 馬 龍 池 ) 문헌, 출처 소개 익산시사 오금산( 五 金 山 ) 문헌, 사적 조명 미륵산의 정기 오금산, 오금사지 무왕의 오금사( 五 金 寺 ) 건립 문헌, 사적 조명 미륵산의 정기 오금사지( 五 金 寺 址 ) 문헌, 사적 조명 익산시사 제석사지( 帝 釋 寺 址 ) 연혁, 유물 익산시사 제석사 제석사지 제석사지( 帝 釋 寺 址 ) 목탑지 잃어버린 왕조의 수호사찰 조형적 특징 철학적배경, 기이한 이야기 중국까지 알려진 제석사 문헌 미륵산의 정기 대관사 우물물이 핏빛이 된 이변 문헌 익산시사 대관사지( 大 官 寺 址 ) 연혁, 유물 익산시사 왕궁정 왕궁정( 王 宮 井 ) 문헌, 기이한 이야기 익산시사 궁평 궁평 백제와요지 사적 조명 미륵산의 정기 궁평( 宮 坪 )의 징 기이한 이야기 익산시사 쌍릉 익산의 쌍릉( 雙 陵 ) 문헌, 사적 조명 미륵산의 정기 쌍릉( 雙 陵 ) 조형적 특징 익산시사 창작 스토리텔링 사례 시각 스토리텔링 사례 장르 제목 저자 비고 대본(뮤지컬) 서동요 장준근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0 동화 동화 서동요 -드라마 원작 이미애 2005 동화 이야기 서동요 - 논술적 사고를 키우는 임현진 2005 만화 서동요 강진호 2005 만화 서동요(백제로 시집간 신라공주 이야기) 김지혜 2005 만화 서동요-전설처럼 전해오는 사랑 이야기 유경원 2005 만화 서동요 이구식 2005 만화 선화공주와 서동요 장유정 2005 만화 서동요 조규원 2005 소설 에미 윤흥길 1990 소설 서동요 - 드라마 원작 소설 김영현 2005 소설 서동요 박윤후 2005 소설 서동요-하룻밤에 읽는요 이수광 2005 소설 마동뎐 이병천 2006 시 내 열아홉 서동 박경석 1987 시 서동요 홍해리 1987 시 신 서동요 박상배 1988 시 서동이여 김규화 1991 시 서동의 기쁨 문효치 1991 시 서동 박진환 1991 시 서동 형님의 달 임보 1991 시 서동 1 권천학 1994 시 서동을 부러워 함 함민복 1995 시 서동의 일기 권천학 1998 시 사자암 박미숙 1998 시 신서동요 김석규 2001 시 님 오시는 아침-선화공주 문효치 2004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19

21 시 서동요를 듣다 고영민 2005 시 마동이 선화공주를 안고 김용관 2005 시 미륵사지에서 정군수 2009 시 결코 무너질 수 없는 정양 2009 관광 스토리텔링 연동리석불좌상 황토현 2011 관광 스토리텔링 미륵사지 황토현 2011 관광 스토리텔링 고도리석불입상 황토현 2011 관광 스토리텔링 입점리고분 황토현 2011 관광 스토리텔링 익산쌍릉 황토현 2011 관광 스토리텔링 제석사지 황토현 2011 관광 스토리텔링 왕궁리 유적 황토현 2011 관광 스토리텔링 왕궁리 오층석탑 황토현 2011 관광 스토리텔링 태동사 황토현 2011 여행 스토리텔링 미륵사지 탑-백 팔의 작은 입들의 독경 진동규 1984 여행 스토리텔링 왕궁탑 -불에도 타지 않을 탑 진동규 1984 여행 스토리텔링 서동요 나경수 2005 여행 스토리텔링 무왕의 발자취를 따라서 박동식 2010 여행 스토리텔링 미륵산성 트레킹 유정열 2010 여행 스토리텔링 왕궁리 일대 백제역사여행 이신화 2010 여행 스토리텔링 무왕 길 걷기 이신화 2010 여행 스토리텔링 미륵산자락 연꽃향기를 따라서 이종원 2010 문학 스토리텔링 전북문학지도 3 박태건외 2007 관광 스토리텔링 예시 제목 : 전라북도 관광자원 스토리 120선 -천년고도 익산 저자 : 전숙자 내용 : 이 책은 전라북도가 관광자원 스토리개발을 위해 펴낸 책이다. 각 시군별 문화관광지도가 수록되어 있으며 익산시 편은 12가지 테마로 기술되어 있다. 삼 2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2 국유사 에 기록된 무왕의 출생지라고 할 수 있는 국도 남쪽의 못이 바로 익산 금 마에 위치한 마룡지이다. 또 여지승람 의 내용을 통해 보아도 마룡지가 보덕성 남쪽에 위치하므로 금마면 동고도리 연동마을 입구에 위치한 연못이 바로 마룡지 에 해당된다. 이 마룡지에 사는 용과 관계하여 서동(후에 무왕이 됨)을 낳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여행 스토리텔링 예시 제목 : 천년의 꿈이 서린 백제왕도 익산을, Amazing하게 즐겨라! -무왕이 뛰 어놀던 땅은 그 어디인가 저자 : 박동식 내용 : 이 작품은 익산시가 지원하고 한국 여행작가 협회가 펴낸 여행 가이드 성격의 책자중 일부다. 테마별 여행스토리텔링과 여행지 정보, 먹을거리가 수록되 어 있다. 쌍릉은 산책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주변에 솔숲이 울창하기 때문이다. 특히 남쪽의 왕비릉으로 향하는 길을 걷다 보면 솔향이 코끝을 간지른다. 익산에 서 태어나 선화공주와 사랑을 이룬후, 백제의 왕위에까지 오른 뒤 사후에는 고향 에 묻힌 무왕, 그의 흔적을 더듬다 보면 하루가 짧게 느껴진다. 동화 예시 제목 : 이야기 서동요 저자 : 임현진 내용 : 이 작품은 무왕과 선화 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낸 동화이다. 특징은 서동과 선화 공주의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 췄으며, 뒷편에는 서동요에 관한 여러 가지 지식을 익히고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논술 문제들을 수록하여 교육적 효과를 의도하고 있다. 부록의 목차는 왜 서 동요와 논술인가, 서동요 자세히 알기, 서동요에 관한 다양한 시각, 서동요에 대한 나의 생각, 서동요의 자취를 찾아서 이다. 만화 예시 제목 : 만화 서동요 저자 : 김영현, 조규원, 이구식 내용 : 이 작품은 서동요를 재창작한 학습만화로 총 3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1권 은 말썽꾸러기 서동의 어린 시절을 그리고 있으며, 2권은 학사재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서동의 청년시절을 그리고 있으며, 3권은 서동이 백제 무왕에 오르게 되 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각 권의 뒷편에는 삼국시대의 백제와 신라의 관계를 역사 적으로 조망한 동시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의 문화예술과 금속기술 등이 소개되어 학습만화의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다.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21

23 소설 예시 제목 : 서동요 - 사랑을 부르는 맛둥의 노래 저자 : 박윤후 내용 : 이 작품은 로맨스 소설로 서동과 선화 공주의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를 그려낸 작품이다. 현재 서동요와 관련하여 가장 많은 출판을 기록하고 있으며 전 자책으로도 발간된 바 있다. 이리도 단단히 얽혔으니 서로가 풀기 전에는 억지로 풀 수도 없겠소이다." -서동 이것은 소녀의 마음이니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소녀 를 지켜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세게 쥐어 이 손이 부서지거나 너무 느슨하게 쥐어 이 손이 빠져나가지 않게 하소서. 하여 이 마음이 상처 받지 않게 하여 주소서." -선화 제목 : 하룻밤에 읽는 소설 서동요 저자 : 이수광 내용 : 이 작품은 설화적인 요소에 역사적인 세부사항을 가미하여 원 텍스트가 지닌 서동의 영웅담을 대중들의 기호에 맞춰 가공했다. 줄거리는 백제의 왕자 서 동이 황궁에서 쫓겨난 이유와 아울러 당시 백제의 치열한 왕권을 둘러싼 음모와 권력에 대한 투쟁을 다룬 작품이다. 백제의 위덕왕과 몰락한 귀족가문의 출신인 연미랑 사이에서 덕만 공주의 이야기까지 첨가되어 흥미를 준다. 시 예시 제목 : 결코 무너질 수 없는 저자 : 정양 내용 : 이 작품은 서동설화를 모티프로 창작한 작품으로 서동이야기를 현대적 관 점에서 상상력으로 풀어냈다. 감자 캐던 마동이가 참말로 / 감자로 민요로 덫을 놓아 / 어여쁜 공주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 금덩이를 돌덩이로 여기던 마동이가 / 참말로 서슬 퍼런 백제왕이 되었는지 // 그런 걸 다 딱부러지게 알 길은 없지만 / 왜 하필 金 馬, 五 金 山, 金 堤, 金 山 寺 같은 / 金 字 돌림의 땅을 가려서 / 미륵 님이 下 生 하는가도 딱히 알 길은 없지만 중략 천년 세월 무너져내린 절터에 / 결코 무너질 수 없는 어여쁘고 간절한 소원 하나 / 무너지다 무너지다 만 / 간절한 돌탑으로 남아 있 다 문화 자원별 스토리텔링 예시 제목 : 전북문학지도3 저자 : 박태건 내용 : 이 작품은 전북도청의 지원을 받아 전북지역 문학자원에 대해 쓴 글이다. 2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4 바람의 도시에서 사람들은 가출을 꿈꾼다. 익산의 전통적 공동체가 해체된 것은 농촌인구가 대부분인 연유이다. 공동체는 해체되고 노인만 남은 농촌은 수입개방 으로 다시 피폐해졌다. 고향 잃은 자아와 타자에 대한 연민의 도시. 익산에서 만난 작가들은 고향을 떠나 어디든 정착하지 못하는 유랑민들이었다. 소설가 윤흥길은 에미 에서 이 땅에서 끈질기게 이어온 여인의 초상을 비손이의 마음으로 그려낸 바 있다. 수천 년이 땅의 여염집 뒷켠에선 어김없이 정화수가 모셔졌다. 그 흰 사 기그릇 속에는 간절함이 신앙의 보름달로 둥실 떴을 것이다. 선화공주가 그랬고 황진이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양곡 소쇄양이 그랬으며 가람 이병기가 그랬다. 정화 수 속에 비친 새벽달처럼 그들은 세월의 물결에 흔들리며 차올랐다 이지러지기를 반복했다. 공연 스토리텔링 사례 장르 제목 주관 비고 가무악극 서동의 노래 부여군 충남국악단 2012 국악 칸타타 서동요 경주시, 봉황대 2010 드라마 서동요 SBS 2006 마당극 서동요의 사랑 충남도, 제이앤에이치 2011 마당극 '백제! 하늘아래 다시 서다 충남도, 제이앤에이치 2011 무용 서동의 사랑법 부여,정은혜무용단 2005 무용 Love Story 서동요 익산시립 합창단 무용단 2010 무용극 처용의 꿈 경북도립국악단 2012 뮤지컬 서동요 TJB교향악단, OMT합창 단 2008 뮤지컬 서동요 익산시, 서동축제 2008 발레 서동요 광주시립무용단 2006 연극 밀당의 탄생 PMC 프러덕션 2012 인형극 서동요 부여도서관 2010 전시 서동스토리텔링 익산시, 서동축제 2012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23

25 창극 서동요 공주시, 백제문화제 2008 창작 판소리 서동요 익산시, 전라북도 2005 칸타타 예시 제목 : 서동요 저자 : 곽병창 내용 : 1부(역사적 사실+설화) 한편, 위덕왕 사후 혜왕과 법왕이 불과 4년 사이 에 잇따라 죽는 등 정국은 어수선했다. 이 와중에 법왕의 아들(또는 위덕왕의 막내 아들)이었던 서동은 신분을 감추고 마장수를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과부였던 그의 어머니는 서동의 출신배경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그 녀가 연못의 용과 정을 통하여 서동을 낳았다고 수군거렸다. 본인의 출신성분과 탄생 배경에 대해 잘 알지 못 했던 서동은 매우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다. 마장수를 하며 근근히 끼니를 이었지만 늘 낙천적이었고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좋아했다. 어느 날 신라 진평왕( )의 막내딸 선화공주가 빼어난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서라벌로 찾아가서 노래를 지어 부른다. 신라 서울에 와서 아이들에 게 마[ 薯 ]를 나누어주며 이 노래를 지어 그들에게 부르도록 하였다. 내용은 선화공 주가 밤마다 몰래 서동의 방을 찾아간다는 것이었는데 이 노래가 대궐 안에까지 퍼지자 왕은 마침내 공주를 귀양 보내게 되었다. 이에 서동이 길목에 나와 기다리 다가 함께 백제로 돌아갔다. 서동의 고향으로 돌아간 두 사람은 선화공주가 왕실 에서 받아 가지고 나온 얼마간의 재물을 잘 숨겨 둔 채 평범한 부부로 행복한 세 월을 보낸다. 2부 (역사적 사실+허구) 익산 출신의 부여호족이었던 사택좌평은 기울어가는 나 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웅진(공주)호족들과 사비(부여)호족들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세력다툼을 피해 익산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에게는 연 화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는데 이 딸을 몰락한 왕손 서동과 결혼시켜서 자신의 뜻 을 관철시키려 한다. 서동에게 이미 아내가 있음을 알게 된 사택좌평은 선화공주 를 회유하여 신라로 되돌려 보내려 한다. 그녀가 거절하자 사택은 그녀를 납치하 여 가두고 서동을 윽박질러 강제로 자신의 딸과 결혼하게 한다. 아내인 선화공주 를 살리려는 일념에 사로잡힌 서동은 어쩔 수 없이 사택녀 연화와 다시 결혼한다. 사택녀 연화는 권력투쟁의 와중에 왕궁에서 쫓겨난 서동을 도와 임금으로 만든다. 이렇게 왕비가 된 연화는 나아가 익산을 백제의 도읍으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비 록 즉위에는 성공했지만 무왕은 부여에는 정치기반이 미약했다. 왕비연화는 무왕 이 갖고 있는 혈통적 정통성과 친정의 세력을 연대해 익산지역에 강력한 왕실을 구축하기로 한다. 2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6 왕이 된 뒤에도 선화공주를 잊지 못한 무왕( , 재위 ) 서동은 유 폐되어 있는 선화를 자주 찾아가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현실적인 힘을 지닌 사택 가문과의 인연을 끊을 수가 없어서 그들의 요구대로 익산 천도를 감행하고 신라와 의 전쟁을 이어간다. 무왕과 선화공주 사이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사택왕후는 그 녀를 없애고 싶어하지만 이미 선화에게서 아들 의자를 얻은 무왕은 선화를 끔찍하 게 아낀다. 반면 사택녀는 후사를 잇지 못한다. 괴로움에 시달리던 그녀는 불심에 깊이 의지하게 되고 마침내 아들 교기를 얻는다. 선화는 배다른 아들인 교기를 잘 보살피고 친아들인 의자와 다름없이 진심으로 대한다. 선화의 지극한 마음에 감복 한 사택녀는 마침내 그녀와 화해한다. 어느 날 사택왕후는 사자사로 가는 길에 용 화산 아래의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므로 그곳에 절을 지을 것을 왕에게 청한다. 사택녀 연화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던 무왕은 그녀의 요청대로 미 륵사를 짓고 천도를 서두른다. 무왕이 허락하니 선화공주는 아버지 진평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진평왕은 목수들을 보내 미륵사의 건립을 돕는다. 마침내 지명법사 의 신력으로 못을 메우고 미륵불 3상( 像 )과 전( 殿 ) 탑( 塔 ) 낭무( 廊 廡 )를 각 3곳에 세 워 절 이름을 미륵사( 彌 勒 寺 )라 했다. 3부 (사실+허구, 후일담) 선화공주와 무왕은 사이에 아들을 두었다. 그게 의자왕 이고 그 아래 사택녀 연화와의 사이에서 늦게야 태어난 교기가 있었다. 사택씨를 비롯한 호족들은 끊임없이 신라와의 전쟁을 종용하였다. 왕은 여러 사정상 신라와 적대관계에 있었으나 늘 선화공주에게 미안한 마음을 지녔다. 무왕의 나이 51세에 53세인 사택왕후가 죽었다. 사택왕후가 죽은 뒤 선화가 비로소 정실 왕비가 되었 다. 그 해에 이르러서야 또한 무왕의 장자인 의자가 태자로 책봉되었다. 1) 태자 책 봉 뒤 그는 익산 천도 계획을 중단하고 사비의 방어를 튼튼히 하는 등 웅진의 구 귀족들과 화해를 도모하려 했으나 무왕과 어머니 선화가 이를 반대하여 뜻을 이루 지 못 했다. 무왕과 선화는 사택녀 연화가 낳은 교기를 마지막까지 잘 보살피고 그녀의 뜻을 기려 익산천도를 강행하려 했으므로 태자와 갈등이 심했다. 무왕은 즉위 41년(641년)에 평안히 죽었고 그 해에 의자왕이 즉위했다. 무왕이 죽은 이듬 해 사택왕후가 죽었다. 2) 의자왕은 왕위에 오르자 동생(또는 조카)인 교기와 그 일 가족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하여 그 세력을 제거했다. 생모인 선화공주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여긴 의자왕은 여자에 대한 집 착과 편견이 매우 심했다. 사택가문을 포함한 주변 호족들에 대한 불신으로 자신 의 서자들을 모조리 좌평으로 앉히려고 하는 등 전횡을 일삼던 의자왕은, 호족 등 1) 33년 봄 정월, 맏아들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 일본서기 황극( 皇 極 ) 1년(642년)조는 백제 국왕의 어머니가 죽자 제왕자( 弟 王 子 :왕의 동생) 교기( 翹 岐 :교우기)와 동 모매( 同 母 妹 )의 여자 4인, 내좌평( 內 佐 平 )의 기미( 岐 味 ), 거기에 높은 가문의 40여 인을 섬으로 추방했다 고 적고 있는 데, 이는 의자왕이 모후 사망을 계기로 동생을 포함한 정적을 과감하게 숙청했음을 뜻한다.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25

27 지배세력들과 불화가 깊어지자 신라와의 전쟁을 통해 통치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집권 초기에 신라의 성을 여럿 빼앗는 등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충신들에 대한 지나친 의심, 당나라에 대한 과도한 신뢰와 안일한 상황판단으로 인하여 왕권과 국력은 급격히 쇠퇴해갔다. 게다가 어느 여자에게서도 자신의 상처 를 달랠 수 없었던 말년의 의자왕은 과도한 향락에 빠지고 점점 더 분별력을 잃어 갔다. 결국 나당연합군에게 참패하고 당나라로 끌려가 쓸쓸히 죽었다. 무용 예시 제목 : 서동요 저자 : 이영애 -광주시립무용단 내용 : [프롤로그] 서곡과 함께 막이 오르면 서동과 선화의 딸인 경( 鏡 )왕녀가 커 다란 부채를 들고 앞무대 한쪽에 앉아 지난 과거를 생각하며 깊은 상념에 잠겨있 다. 제1막 1장 눈부신 사랑의 향연 / 궁중법연( 宮 中 法 筵 ) 중간 전환막이 오르면 무 대는 598년 정월보름 경주왕궁 정원의 오후 풍경이다. 백관들과 선화를 흠모하는 화랑이 덕만, 청명, 선화 공주를 호위하여 등장하고, 잠시후 진평왕이 등장하여 백 관과 화랑들의 인사를 받으며 자리에 앉는다. 이윽고 진평왕과 백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젊은 화랑들의 검무와 함께 파드뒤가 펼쳐진다. 이들 화랑의 검무가 끝나 면 선화를 사모하는 화랑이 다른 젊은 화랑과 함께 세 공주 앞에 나아가 같이 춤 을 추기를 원하자 이에 덕만, 청명, 선화공주가 단 아래로 내려와, 5인무가 이루어 진다. 서동왕자가 등장하고 서동은 평소 친분 관계가 있는 세 공주와 차례로 파드 뒤를 춘다. 서동과 선화의 파드뒤는 덕만과 청명의 느낌과는 다르다. 두 사람의 춤 을 바라보던 화랑이 그들을 막지만 이 두 사람의 마음은 점점 가까워진다. 서동 일행을 가로막았던 그 화랑으로 평소 선화를 흠모하며 사랑을 고백했지만, 선화는 서동에게 사랑을 느끼며 자기를 흠모하던 화랑을 외면하고 서동과 함께 퇴장을 한 다. 이를 지켜본 화랑은 분노를 느낀다. 제1막 2장 궁정 비원의 밤 / 사랑의 확인 달빛에 반짝이는 나뭇잎, 그 비원의 숲 속에서 연등을 든 요정들이 등장하여 연등무를 추고, 그 요정들 사이에서 덕만 과 청명의 바라춤에 이어 선화는 커다란 부채를 들고 솔로를 춘다. 무대 한 쪽에 서 선화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서동은 선화에게로 다가가 두 사람은 환상적인 사랑의 파드뒤를 춘다. 서동과 선화의 사랑이 무르익을 즈음 지명법사가 등장하여 선화는 증조부(백제 성왕)를 살해한 원수(신라 진흥왕)의 손녀딸이라는 사실을 이 야기하자 서동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괴로움의 솔로를 춘다. 서동은 선화에게 사랑의 징표로 목걸이를 걸어주고 있을 때 앞 무대에 있던 신라의 궁녀들이 그 장 면을 지켜보고 놀라워한다. 제1막 3장 저자거리 무대가 밝아지면 지명법사와 서동은 선화와의 결합을 위해 2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8 고민을 하던 중 지명법사는 무사들을 불러 아이들에게 서동요를 퍼뜨리게 한다. 잠시 후 무대 좌우에서 어린아이들이 등장하여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저자거리를 몰려다니고, 아이들의 노래를 들은 아낙네들도 소문을 퍼뜨려 진평왕에게까지 전 달된다. 제1막4장 신라 왕궁 집무실 진평왕은 크게 진노하고 있다. 서동을 추방하고 선 화를 궁궐에서 내쫓아야 한다는 백관들과 서동과 선화를 용서하고 서로 사랑으로 두 나라간의 화친을 맺자고 주청을 드리는 백관들의 논쟁이 벌어진다. 딸 선화를 두고 고민에 빠져 있던 진평왕은 결국 선화의 애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궁궐에서 매몰차게 내치고 퇴장한다. 제2막1장 이별과 만남 / 취우령고개 백제와 신라의 국경인 취우령 고개 숲 속. 서동 왕자는 신라 경주에서 선화 공주와의 짧은 밀회의 시간을 그리워하며 방심하 고 있는 사이 신라군이 나타나 백제군과 실랑이가 벌어진다. 무대는 긴장감이 흐 르고 숲 속 여기저기서 백제군과 신라군이 우르르 몰려나와 분위기는 삼엄한 대치 속에 서로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두 나라 병사들간에 전쟁이 벌어진다. 전쟁이 고조되고 백제와 신라의 수많은 병사들이 쓰러진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 까? 텅빈 무대 흐릿한 조명 속에 잔잔하면서도 애절한 음악만이 흐른다. 잠시 후 선화 공주가 나타난다. 선화 공주는 쓰러져있는 백제와 신라병사들 사이를 넘어 누군가를 애타게 찾아 헤매다 무대 앞쪽 바위에 부상을 입고 기대어 있는 서동 왕 자를 발견한다. 선화 공주는 한동안 아무 말을 못하고 미어지는 가슴을 움켜지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다. 제2막 2장 백제 궁궐 밖 백제 백성들은 신라와의 화합을 기원하며 신라의 춤인 처용무와 승무를 펼친다. 잠시후 서동과 선화는 둘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경왕녀 를 데리고 등장한다. 축하의 춤이 끝나면 선화는 그 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부 채를 어린 딸에게 넘겨준다. 서동과 선화의 결혼으로 백제와 신라는 평화협정을 맺게 되고 화합을 의미하는 군무와 피날레를 장식한다. 에필로그 경왕녀는 처음 시작한 위치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 조명이 서 서히 꺼지면서 막이 내린다. 뮤지컬 예시 제목 : 서동요 저자 : 장준근 -TJB교향악단, OMT합창단 내용 : 이 작품은 2008년 5월 대전문화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된 창작뮤지컬로 TJB교향악단, OMT합창단이 참여했다. 제1막 서동요에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서동의 의지를 암시하며 무왕시대 를 건너 뛰어 그의 아들 의자왕에서 하늘과 인간이 조화되는 새로운 이상의 나라 를 건설하려는 의지를 강조한다.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27

29 제2막 불행이도 의자왕의 왕비가 병약하여 죽자 신라 김유신의 계략에 의하여 침투된 신라여인 아지를 의자왕이 군대부인을 맞아 드리고 그녀와 간신 상좌평의 감언 이설에 속아 국정을 소흘히 하며 나약한 왕으로 전락하여 이상향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동정녀들을 모아 천계가 내려 오기만을 기다린다. 충신을 멀리하고 간 신들의 꾐에 빠져 결국 나당연합군에 패망하여 당나라에 불모로 의자왕은 끌려가 게 되며 이런 의자왕을 보는 대비(신라에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서동에게 시집왔던)는 인간 정신의 떳떳함을 위하여 낙화암에서 많은 궁녀들과 죽음을 택한 다. 창작 판소리 예시 제목 : 서동요 저자 : 최기우 내용 : 이 작품은 전북도청과 전북민예총의 지원을 받아 창작된 판소리다. 옛 적 해 뜨는동방에 장허고 장헌 나라 하나 있었으니 그 이름이 백제라. 나라가 백 전 일백 번 건너오고 건너간단 뜻에다가 물에 빠지고 가난에 빠지고 시름에 빠진 만백성부터 심지어는 사랑에 빠져 애타는 처녀 총각까장 모다들 건져준다는 뜻도 있다 허거늘, 그 이름도 참말 가상허였구나. 시조 임금 일찌감치 요동땅서 건너와 한반도 서쪽에 새 터를 삼으니, 그 서역이란 곳이 짐승으로 치자면은 기름지고 찰 진 그 배때기 근방이라. 땅은 비옥허고 강물은 유장허니 사람마다 인심 좋고 고을 마다 살쪘는디, 그 살찐 고을 중에도 으뜸이 바로 금마저 金 馬 渚 라. 그 내력을 살펴 보면 (2) 스토리 발굴 체계화 가. 문화콘텐츠와 스토리텔링 콘텐츠(contents)란 각종 매체에 담긴 내용물을 뜻하며 문화 콘텐츠는 문화 전 반적인 내용물을 뜻한다. 디지털시대가 되면서 문화콘텐츠는 무한한 복제와 변형 및 전송을 통해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문화콘텐츠의 무한한 활용에는 스토리텔링의 힘이 있다. 스토리텔링이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이야기 를 전하는 것이다. 힘있는 문화 콘텐츠는 예술성과 산업성이 담보되어 있으며 그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신선한 아이디어와 재미있는 이야기다. 즉 스토리텔링이 문화콘텐츠의 유통을 결정한다. 인류는 과거 중요한 정보를 기억하고 전달하기 위해서 원 정보를 스토리로 재구 성하고 흥미롭게 전달할 방법을 구안했다. 우화와 전설 민담 등은 스토리텔링의 2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0 기법으로 재구성된 선조들의 메시지인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류문명의 중요한 자산인 역사문화유산을 보존하고 후손에게 전수해야 한 전 지구적 가치를 스토리 텔링 할 책임을 부여받은 셈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문화적 행위결과에 의해 획득된 유 무형의 자료에는 특정 문화 집단의 삶에 대한 지혜가 함축되어 있어 유무형의 자산의 보존과 활용에 힘을 쓸 때 해당 지역사회는 경제적 혜택을 가져다주며, 방문객에게 의미 있고 즐거운 경 험을 제공하게 되기 때문이다.(문화재청 2007) 익산역사지구의 경우 장차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할 잠정목록 에 속해있어 곧 세계적인 문화콘텐츠로 유통될 날이 가까워 오고 있다. 스토리텔링은 문화콘텐츠 를 소비자와 만날 수 있게 하는 네트워크다. 문화콘텐츠들은 스토리텔링으로 통해 하나의 소스로 다양한 분야에 활용이 가능한 원소스 멀티유즈(One Source Multi-Use)로 활용된다. 따라서 전세계인이 향유할 문화유산으로 활용 가능한 역 사문화 스토리텔링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과거 아날로그 시대의 문화콘텐츠는 출판, 영화, 공연, 축제 등 각각의 매체가 따로 움직이는 특성을 보이나, 디지털 시대의 문화콘텐츠는 하나의 소스가 다양한 부가가치를 만드는 유기체적 성격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유기체적 성격 (Style)을 규정하는 것이 스토리텔링이다. 예를 들어 드라마 <대장금>의 이야기는 영상물 자체는 물론 음반과 캐릭터 산업, 촬영지 등이 동반 판매되었으며 나아가 한류를 이끄는 동력이 되었다. 하나의 이야기가 다양한 문화상품을 개발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야기는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통합성을 갖는다. 우리 익산시의 경우 천연자원이나 인구, 자본이 타 지역에 비해 부족하다 년대 익산산업의 기틀을 이뤘던 전통적인 제조업인 섬유산업은 싼 인건비를 찾아 중국과 동남아로 무게중심을 이동한지 오래되었으며 인재유출 또한 심각한 상태 다. 익산시의 경쟁력은 문화콘텐츠 산업에서 찾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익산역사 문화지구 지정은 관광자원의 제공과 과거를 통하여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조망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역민의 자존감을 향상시켜 줄 것이다. 현대인들은 물질문 명의 발전과는 대조적으로 점차 대중 속에 고립되고 있으며 현대인의 인간성 회복 과 정신적 가치의 추구를 위한 현대인의 욕구충족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전명숙 2006) 나. 스토리텔링의 개념과 유형 이야기는 콘텐츠의 소재이자 뼈대이다. 이야기가 부실하면 콘텐츠의 생명 또한 짧다. 이야기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공간을 초월하며 변형과 재생산의 길을 걸었다. 원래 이야기는 신화와 전설, 민담은 원래 이야기로 전해지며 점차 그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29

31 림과 연희, 영화나 방송을 통해 재생산되었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이윤을 창출하 는 상품 이다. 이인화는 스토리텔링을 사건에 대한 진술이 지배적인 담화양식 으로 정의하며 그 특성을 상호작용성, 네트워크성 등으로 적시하였다. 최혜실은 story 와 telling 이 결합된 형태로 보아 이야기성과 현장성, 상호작용성을 적시하였다. 박 기수는 스토리텔링을 매체환경의 특성을 적극 반영한 수용자 중심의 차원으로 보 아 재생산성을 그 특징으로 적시하였다. 이와같은 주장을 정리하면 스토리텔링은 스토리(이야기)를 (독자에게)하다. 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의는 이야기보 다 하다 에 방점이 맞춰져 있다.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가 스토리텔링 의 핵심인 것이다. 따라서 스토리텔링에는 향유자에 대한 고려, (이야기를) 전달하 는 매체의 활용에 대한 고민이 선결되어야 한다. 스토리텔링은 사건에 대한 이야기의 구성이다. 잘 만든 스토리텔링은 참신한 테 마를 가지고 있다. 개성있는 주인공은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이끌어간다. 또한 갈등 요소는 스토리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다. 주인공이 갈등요소를 어떻게 풀어가는 지 의 여부가 스토리 성공의 관건이라 할 수 있다. 익산역사지구 스토리텔링은 서사성이 강한 엔터테인먼트 중심 이인화는 스토리텔링의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누어 엔터테인먼트, 인포메이션, 기 타로 분류한 바 있다. 엔터테인먼트 스토리텔링은 서사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소설, 만화,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캐릭터, 공연, 전시가 여기에 속한다. 소설, 만화 스토리텔링의 성공은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캐릭터 등 2차 매체 제작을 견인한다는 점에서 스토리텔링의 중요한 요소이다. 드라마와 영화는 국내 외 향유자의 관심을 불러오는 영상매체다. 특히 만화는 영상매체로 전환하기 쉬 운 콘텐츠로 어린이와 성인을 아우르는 다중 매체 제이 용이한 킬러 콘텐츠로 각 광 받고 있다. 인포메이션 스토리텔링은 방문객의 만족도 향상에 기여 인포메이션 스토리텔링은 정보를 가공, 배치, 편집, 디자인하는 것으로 축제, 테 마파크, 다큐멘타리, 에듀테인먼트, 데이터베이스, 인터넷콘텐츠, 가상현실이 여기 에 속한다. 축제 스토리텔링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닌 지역의 문화를 방문객과 향 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축제때 면 어디서나 볼 수 원뿔형 천막과 먹거리 장터, 떡매치기 등 비슷한 아이템으로는 지역의 이미지를 각인시키지 못한다. 최근에는 기획단계부터 스토리텔링적 요소를 가미한 이야기가 있는 축제가 주목받고 있다. 방문객이 참여하는 양방향적 스토리텔링의 다양한 면모가 기획되고 있는 것이다. 전시 스토리텔링은 테마를 선정하여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에 따라 전시물 을 배치하는 형태로 구현된다. 좋은 전시 스토리텔링은 시각뿐만 아니라 다양한 3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2 감각을 동시에 자극하여 경험을 강렬하게 하는 효과를 지닌다. 전시 큐레이터에 스토리텔러의 능력이 필요한 이유다. 기타 스토리텔링에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스토리텔링 유형으로 광고, 브랜드, 상 품, 디자인, 기업경영이 여기에 속한다. 광고는 단순한 사실 혹은 정보의 전달로 끝나선 안 된다. 예를 들어 익산의 고도문화유산을 테마로 한 TV광고의 경우, 고 도 익산의 대표적인 문화유산과 역사적 의미를 홍보하는 차원에 머물고 있다. 그 러나 최근에는 이야기가 있는 광고 가 더 선호되는 추세다. 익산역사지구를 브랜드 스토리텔링으로 표현해야 함. 현대인들은 고도 익산의 역사성과 가치에 주목하기보다는 고도익산과 관련된 이 야기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광고도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 아닌 인물과 사건 등 이야기를 만들어 그 안에 익산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인지시키는 편이 좋 다. 예를 들어 하이마트 광고 는 생활 속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표현하여 성공한 케이스이며, 호주 관광청에서 제작한 광고영상에는 도시인들이 꿈꾸는 아름다운 대자연을 배경으로 탐험객의 모험을 그리고 있다. 브랜드란 어떤 제품이나 기업의 차별화된 가치 및 인지도를 의미한다. 현대인들 은 상품의 이미지와 가치를 구매한다. 따라서 브랜드 스토리텔링에서는 제품이나 기업자체를 강조하기 보다, 그 안에 담긴 의미나 이야기를 제공하여 소비자와 브 랜드의 교감을 유도한다. 그런데 익산시의 브랜드 광고는 어메이징 익산 을 반복 적으로 강조하는 데 그치고 있다. 고도 익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본적 정보를 전달하기보다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를 소재로 할 필요가 있다. 익산시민들도 고도 익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따분하게 느낀다. 오히려 익산시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져 온 이어져 왔는지에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과정, 익산시를 방문했거나 살 다 간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활용 할 필요가 있다. 다. 역사문화 스토리텔링 산업의 방향 스토리텔링은 크게 창작, 각색으로 나눌 수 있다. 창작 스토리텔링은 배경과 캐 릭터 새롭게 창작하는 것이다.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는 말과 같이 창 작도 역시 모방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기존의 텍스트의 얼개와 소재를 차용했다 하더라도 작가의 새로운 관점에서 써 내려 가는 것을 창작으로 보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3) 각색 스토리텔링은 고전의 현대적 수용의 측면에서 장려되고 있다. <춘향전>의 3) 각색 스토리텔링과 관련된 상세한 논의는 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방안 1 관광스토리텔링의 유형과 방안 3) 관광스토리텔링의 스토리 활용과 공관시퀀스 구성 참조.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31

33 원텍스트를 읽지 않은 사람도 일상적으로 유통되는 춘향 스토리 를 잘 알고 있다. 각색 스토리텔링은 이처럼 널리 알려진 고전 텍스트를 시대와 공간을 전환하고 인 물의 관점을 다르게 하여 새롭게 읽히게 한다. 검증된 스토리 라인의 재생산을 통 해 보편타당한 가치를 향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지역의 신화, 전설, 민담 등의 이야기를 토대로 다양한 형태의 각색 스토리텔링이 시도되는 이유다. 드라마 <서동요>는 서동설화를 각색하여 55부작 사극으로 만든 것이다. 드라마 각색의 과정에서 서동설화에는 없는 백제 장인의 이야기와 러브스토리가 첨가된 것은 현대인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반영한 결과다. 이처럼 각색 스토리텔링은 원텍스트의 캐릭터와 모티프, 분위기를 따와서 각색자의 상상력으로 새로운 스토 리로 재창작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드라마 <서동요>는 지자체의 지원과 지역민 의 큰 관심에도 불구하고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드라마세트장이 흉물로 방치 되다가 폐기된 것도 관광상품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각색의 과정에서 원텍스트의 재해석이 미진했기 때문이다. 각색을 할 때는 원전의 모티프만 남겨 놓고 수용자의 트랜드를 반영하여 과감히 재해석 하거나, 다양한 볼거리라도 제공 해서 수용자의 관심을 유발시켜야 한다. 한편 현대인의 입맛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역사왜곡의 문제가 제기되는 경우도 있다. 2013년에서 겨울에 시작하여 2014년 방영되는 방송사극 <기황후>의 예가 바로 그것이다. 익산시 여산면에서 출생하여 원나라 황후가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을 제외하곤 드라마 <기황후>의 대부분의 이야기는 창작된 것이다. 이는 역사왜곡 이 후세들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는 사회문제화되기도 한다. 고도 익산문화자원의 각색 스토리텔링을 통한 기회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각 색은 고전텍스트에 새 생명을 부여할 수 있다. 고도 익산시의 역사문화자원을 활 용하여 새로운 콘텐츠로 개발할 경우, 우리 문화에 대한 재발견이 가능하며, 문화 적 전승 또한 용이해 질 수 있다. 과거에 아무리 가치있는 것일지라도 잊혀진다면 존재의 의미가 희미해진다. <서동요>의 모티프를 각색하여 청소년 및 어린이들에 게도 어필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면 이는 <서동요>를 한류의 핵심동력 으로 삼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 기회가 될 것이다. 둘째,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 역사문화콘텐츠는 굴뚝없는 산업 이라고 불릴만큼 친환경적인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잘 만든 스토리텔링으로 가공된 역사 문화 콘텐츠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더해져 세대를 넘머 매니아 층을 형성 하게 한다. 지역민의 고용창출과 문화콘텐츠 산업의 발전에 기여가 기대되는 점이 다. 셋째, 글로벌 콘텐츠로 개발할 경우 세계적인 광고효과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으 로 등재된 곳 중, 킬러 콘텐츠로 각광받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인도의 타지마할은 왕비에 대한 왕의 러브스토리가 예술품과 만나서 글로벌콘텐츠가 된 예다. 고도 익산의 역사문화자원을 세계에 어필할 수 있는 스토리를 발굴, 혹은 개 3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4 발하고 이를 다양한 매체로 표현하는 기술을 갖춘다면 고도익산은 인도의 아그라 처럼 글로벌 콘텐츠의 성지가 될 수 있다. 넷째, 역사교육의 실습장이 될 수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살아있는 역사 교 육을 실시하는 교육장이 된다면 문화콘텐츠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참가자들이 고도익산의 역사문화자원에서 이야기의 소재를 찾고 줄거리를 짜며 이 를 콘텐츠화 하는 과정을 체험한다면 지역의 역사를 삶의 일부로 기억하게 될 수 있다. 주5일제를 통해 확보된 체험여행의 적극적인 활용이 필요한 이유다. 라. 스토리텔링 산업 육성시의 유의점 문화콘텐츠 산업은 원소스 멀티유즈적 속성 때문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대 접받고 있다. 따라서 이를 뒷받침할 스토리텔링도 각 지자체에서 심혈을 기울여 개발하고 있으며 마치 전가의 보도 처럼 스토리텔링만 되면 문화콘텐츠가 완성 이 될 것처럼 생각되고 있다. 그런데 잘 알려진 힘 있는 스토리텔링은 드물다. 성 공한 스토리텔링에는 무엇이 있으며 스토리텔링 개발사업에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 인가? 첫째, 스토리텔링에는 양극화가 심하다. 오로지 최고만 살아남는다. 이는 대 중의 보수적 경향성을 원인으로 한다. 과거 교과서에서 배웠던 역사문화유산이 현 재에도 대표관광지가 된 것은 이러한 결과다. 새로운 이야기를 대중에게 퍼트리고 호의적으로 인지시키기 위해선 막대한 자본과 치밀한 준비가 필요한 이유다. 둘째, 스토리텔링은 모험산업이다. 스토리텔링에 성공할 경우 대박 을 터트릴 수 있지만 변수가 많아서 실패할 가능성 또한 농후하다. 이는 대중 감성의 유행성을 원인으로 한다. 소비자의 감수성은 일시적이며 휘발적이어서 예측하기가 어렵다. 유명한 스타와 유명 감독이 참여한 블록버스터급 영화가 헐리우드식 성공의 공식 을 따랐는데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퇴출당하는 것이 부지기수다. 이는 아무리 유명 한 감독과 배우라도 대중의 기호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셋째, 스토리텔링에 대한 투자환경이 열악하다. 앞에서 예를 든 영화 시나리오 시장에서 작가가 받는 보수는 제작비 대비 미미한 수준이다. 아무리 일급작가라 하더라도 영화배우가 받는 개런티와 비교하면 조족지혈이다. 이런 실정이니 지역 의 문화콘텐츠를 육성하고자 하는 지자체의 경우, 스토리텔링을 문화유산의 홍보 카피 정도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잘 만든 스토리텔링 이 나올 수 없다. 심형래 감독이 제작한 <디워>는 엉성한 컴퓨터 그래픽과 더불어 부실한 스토리라인으로 지적으로 흥행에 참패를 겪었다. 그후 제작된 <고질라>도 큰 호응 을 받지 못한 것은 CG기술은 보강되었으나 스토리라인의 취약성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다. 이런 결과로 우리나라의 스토리텔링 산업은 아직까지 성장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지자체에서 올바른 대접을 못 받고 있는 상태다. 첫째, 대중들의 보수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33

35 적 경향에 의해 유명한 관광지는 오래된 스토리텔링을 사골처럼 우려먹는 경우가 많다. 대중의 기호를 따라가지 못한 낡은 스토리텔링은 부가가치사업의 육성에 도 움이 되지 못한다. 둘째, 콘텐츠의 핵심인 이야기의 기획 및 개발에 대한 투자가 미흡하다. 과감한 투자에서 완성된 이야기도 만들어 진다. 또한 대중의 눈높이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어 뛰어난 스토리텔링 작가를 투입하지 않고서 좋은 결과를 기 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셋째, 지자체를 비롯한 제작사의 투자 환경이 쉽게 나아지기 힘든 구조다. 문화유산의 경우 환경정비에 막대한 비용이 투자되며 영상 제작의 경우, 출연료와 CG기술 도입 등 초기 제작비용에 대부분의 비용이 투자되 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이야기 창작에는 홍보비의 극히 일부만 투자되는 실정 이다. 또한 검증된 작가들을 한정된 금액으로 섭외하는 것도 어렵다.. (3) 구술사를 활용한 역사문화 스토리텔링 가. 구술사와 문화콘텐츠 구술사의 개념 구술사(Oral History)는 광의의 의미에서 과거의 기억을 말로 회상한 것을 주된 자료로 활용하는 역사연구다. 협의의 의미에서는 구술사료를 이용한 역사연구다. 구 술사를 통해 인종적, 민족적 정체성 모색할 수 있다. 구술사의 전통는 성경, 사기, 삼국유사, 펠로폰네소스전쟁사 등 고대의 역사적 문헌에 기인한다. 현대에 들어 인쇄 술과 휴대용 녹음기기의 발달로 구술사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지고 있다. 구술사를 통해 얻어지는 효과로는 1) 문헌사(역사담론)과 대비되는 개념(하위주체 의 말하기) 2) 과거 경험과 현재 상황과의 상호관계 3) 인간들의 의식과 편견을 드러 내고 해명하는 작업 4) 밑으로부터의 대항 역사, 피정복자들의 역사해석을 재구성 5) 기억으로 쓰는 역사. 미시사이다. 구술사료의 종류로는 1)구비전승 : 설화, 유래 등 2) 구술증언 : 개인의 특정 사건이나 경험 3) 구술생애사 : 개인의 과거에서 현재까 지를 서술. 개인의 삶 자체에 초점을 맞춤 4) 집합기억 : 개인의 기억을 사회적, 계 급적 제도의 영향 등으로 나눠진다. 구술사 연구의 선구자인 아스만(A. Assmann)은 기억은 학제적 연구의 주제 라 하여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1970년대 중반의 독일과 프랑스에서 기억은 역사 연 구의 중심 주제로 자리잡기 시작했으며 이는 유럽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국내에서도 최근, 기억투쟁, 기억의 정치, 대항기억, 잃어버린 기억 등의 용어가 출몰하면서 기 억은 학문적 연구 주제를 넘어 대중의 관심을 끄는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역사문화 스토리텔링과 구술사 연구 고용없는 저성장 시대 에 고용창출 효과가 높은 관광산업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3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6 한국관광산업은 경쟁력이 취약하다. 이는 관광의 트렌드변화에 대비해야 하며 원 소 스 개발에 충실해야 함을 뜻한다. 최근 체험학습 관광, 마음 치유 관광이 주목받고 있다. 마음 치유 관광은 소비적 여행을 통해 지역민의 삶이 파괴되는 현재의 여행패 턴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소비적 여행이 주는 여행에 현대인들이 피로 를 느끼고 있다는 반증이다. 익산의 문화관광의 강점은 교통 접근성의 편리함과 역사문화 콘텐츠의 풍부함, 인 근 관광자원(군산, 전주)로 이동이 용이함을 들 수 있음. 그러나 차별화된 콘텐츠 개 발과 맞춤형 관광상품을 설계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전통문화와 관광을 융복 합하는 차별화된 콘텐츠 개발의 시작은 구술사 조사처럼 역사문화 기반조사부터 시 작해야 한다. 구술사는 공간과 사람에 중심을 둔 문화인류학적 기획이다. 구술사 채 록으로 기록된 민중의 기억 을 복원함으로써 지역의 실재적인 문화와 풍속을 관광자 원화할 수 있다. 이것은 소비적 여행의 폐해를 극복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지역 민에게는 공간을 재발견하게 하고 관광객에게는 지역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재인식시 킬 수 있기 때문이다. 구술사를 통해 기획된 역사문화관광은 소비적 관광에서 창조 형 관광으로 가는 길이다. 구술사 채록은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는 위상학적 전환이며 지식인들에 의해 기록 된 장소를 재구성한다. 구술사에 기반한 관광상품은 지역민의 삶을 반영하는 관광의 실천적 행위이다. 전지구적 문화식민화는 지역의 관광상품에 유사성, 스펙타클화를 부축이고 있다. 이는 자본의 상품화와 직결된다. 놀이동산 등 테마파크형 관광상품을 흉내내는 것이 대표적이다. 지역민의 기억과 장소의 기억이 교차하고 공간의 문화적 정체성이 반영된 역사문화관광 상품개발이 요구되는 실정이다. 나. 구술사 구술사채록과 문화콘텐츠의 가능성 구술사 채록과 문화콘텐츠 구술사는 공간과 사람에 중심을 둔 문화인류학적 기획이다. 근대 역사학의 주류는 거시사였다. 거시사는 사회구조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는 관계로 구조의 이면 혹은 뿌리는 주변화되거나 배제되어 왔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나온 것이 미시 사이다. 미시사는 거시사에서 배제된 영역인 민중의 일상생활, 문화와 풍속에 관심을 둔다. 구술사는 미시사적 접근이다.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관광자원화 구축에서 구술 사 채록사업은 선결되어야 한다. 그것은 민중의 기억을 통해 지역의 문화와 풍속을 복원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구술사 채록은 지역민에게는 공간을 재발견하게 하고 대외적으로는 지역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재인식시킨다. 최근의 문화콘텐츠 개발은 스펙타클화를 보이고 있다. 어디서고 비슷비슷한 옷을 입는 지자체의 문화콘텐츠를 자주 보게 된다. 장소가 성찰의 장소에서 상업의 대상 으로 전락하는 경우다. 이제 지역의 문화콘텐츠는 자신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할 때다.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35

37 집단적 정체성을 파악하고 미래를 전망하기보다 자본이 상품화시킨 장소를 만드는 데 급급한 인식은 내부적 모순과 갈등을 번듯한 건축물의 외관으로 은폐한다. 이제 삶의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는 위상학적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 공간의 재구성, 공간 의 실천적 맥락을 집어내기 위해서는 문화담론에 의한 접근이 필요하다. 구술사 작 업을 통한 문화콘텐츠 개발은 바로 그러한 실천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현대는 자본의 세계화라는 씨줄과 신자유주의라는 날줄이 EU와 NAFTA 같은 경 제적 단위로 짜여져 있다. 이러한 시스템 아래에서는 지역문화는 소외되고 무시된다. 상품화의 논리 속에서 지역의 전통문화는 자본에 의해 생산 유통되는 주류 문화에 밀려 그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다. 또한 전 지구적으로 벌어진 문화식민화는 역으로 지역문화의 재발견 이라는 뒤늦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지식기반 사회의 구축이 그것이다. 지식사업의 핵심은 문화콘텐츠 개발이며 이것 은 문화원형 을 발굴하는 것을 선차적 문제로 삼는다. 문화원형이란 고유성과 정체 성을 의미하는 원형(originalty)를 의미한다. 4) 같은 모양을 찍어내는 틀 을 복원하는 것이 아닌, 문화의 원형적 기초를 파악하는 시초로서의 원형발굴을 탐색하는 작업이 구술사 채록의 목적이다. 지역민의 기억과 장소의 기억이 교차하고 공간의 문화적 정체성 및 공통분모를 추출하게 되는 과정을 거쳐 지자체의 문화원형은 복원된다. 그런 점에서 구술사 채록 작업은 단순한 과거의 복원에서 그치지 않고 과거의 장소 를 현재의 시간을 사는 사람들이 재구성하는 창조형 문화콘텐츠의 토대이다. 스토리텔링에 구술사를 활용해야 하는 이유 1995년 지자체가 출범한 이후 지역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지역문화에 대 한 관심은 문화를 소프트웨어로 인식하고 지역 경쟁력을 개발시키려고 한다. 그런데 지역 문화공간의 창출은 쉽지 않다. 대부분 박물관 공원 등에서 구현되는 문화예술 체험은 문화 맛보기에 그치고 만다. 현재 전북도가 추진하는 스토리텔링 사업은 문 화서사를 통한 공간 창출을 목표로 한다. 전주시는 한옥마을과 음식, 전라감영 복원 문제에, 고창군은 동학농민혁명을, 완주군은 한우테마파크 사업을 탄생, 성장, 죽음, 베풂의 단계로 나누어 스토리텔링 사업을 구상하고 있으며 김제시는 일제강점기 토 지 수탈사를 소설 <아리랑>의 기행벨트 조성과 연관지어 구상하고 있다. 그러나 공 간에 대한 서사의 복원보다 효용성을 먼저 따지다 보면 지역의 스토리텔링은 소비된 다. 지역민의 구체적 삶과 밀착되지 않는 스토리텔링이 살아남기란 힘들다. 문화는 가시성과 비가시성을 갖는다. 도시인의 여가와 휴식을 위한 문화체험이 창 조적 문화형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개발을 목적으로 한 스토리텔링은 가공된 훈육의 체험이다. 이러한 문화기획은 근대이후 문명개화의 계몽적 시각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또 다른 경계긋기 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최초의 슬로시 4) 김교빈, 문화원형의 개념과 활용,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8 티라고 할 만한 이탈리아의 그레베 인 키안티 나 오르비에토 등지에서는 지역의 전통문화와 정체성 살리는 것을 우선한다. 지역민 스스로 지역에 대한 이해와 사랑 을 통해 문화콘텐츠를 보존하고 기획하며 스스로 만족감을 느낄 때 장소는 관광객들 에게도 질 좋은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줄 수 있다. 문화산업 이전에 지역 정체성을 먼저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다. 문화는 공간을 사는 사람들의 삶의 양태에서 계승 발 전된다. 지역민의 일상적 삶을 발견해내는 구술사 채록은 지역민의 구체적 삶을 기 반으로 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익산 금마지역은 구술사 채록을 통한 공간의 재발견의 다양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전주시와 군산시가 인접해 있고, 천년도 더 된 오래된 길이 도-농 연결선상에 위치 한 탓에 문화도시로 리모델링 할 가능성을 많다. 이 가능성의 기대치는 익산 금마지 역이 갖는 문화적 낙후성이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해독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기에 더 욱 높다. 지역의 문화원형이 비교적 순수하게 보존된 이곳의 구술사 채록사업은 익 산 금마지역의 대안적 잠재력을 키우는 일이 될 것이다. 다. 익산역사지구의 스토리텔링적 특징 이 장은 익산지역 구술사 채록과정을 통해 드러난 익산 금마지역의 스토리텔링의 자원적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5) 익산역사지구의 문화적 특징 익산역사지구는 노령산맥의 천호산과 미륵산의 동부로 산세를 이루고 있으며 북으 로는 금강을 경계로 논산군과 부여군에, 서로는 옥구평야에, 남으로는 만경강을 경계 로 김제평야에 접하고 있어 전북지역에서는 김제시 다음으로 쌀 생산량이 높은 곳이 다. 지리적 위치는 곧 문화적 다양성으로 이어진다. 북쪽으로는 충청도 중부문화권과 동쪽은 완주에 이어지는 산악문화권 그리고 남쪽의 평야로 이어지는 평야문화권이 5)구술사 채록 경과 : 익산 역사문화 구술채록 사업은 2012년 8월부터 2013년 12월까지 계획되었다. 1단계 사 업은 공간적 구분과 내용적 범주로 기획되었다. 공간적으로는 익산이 급성장하던 백제후기 지역과 철도부설 과 함께 신시가지가 형성된 근대 초기 지역을 선정하였다. 금마면, 왕궁면, 여산면이 고대의 익산지역을 보여 준다면 함열읍, 춘포면은 근대익산의 거울인 셈이다. 특히 익산역사유적지구를 구성하는 유적과 인근 지명 의 유래, 설화에 대한 기초자료의 DB구축을 1차 목표로 하였다. 방법 : 기본적으로 현지조사를 통한 자료확 보를 원칙으로 하되 구술채록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1차 고문헌 자료조사 및 세미나, 2차 선행연구 및 연 구자 면접을 통한 구술방법론 구상, 3차 현장답사의 과정을 거쳤다. 1차 문헌조사는 문화유산과 관련한 고문 헌을 마한백제연구소, 익산고적답사회 등에서 제공받았으며 그 외의 자료들은 한국 고전번역원 등의 DB 를 이용했다. 2차 연구자 접촉은 익산유적답사회 회원들과 2~3차례 만남을 통해 관련지역에 대한 세미나를 준비했으며 세미나에서 주요 안건으로 제기된 지역별 특성은 상황판(구술 대상지역의 지도)위에 표기하여 개괄적 인식을 요점화 했다. 3차 현장실사는 이장 연락처를 확보하여 1차 구술대상자를 섭외하였고, 구술면 접을 통해 확인된 전설과 민담과 관련된 지역의 인물을 소개받아 2차 구술을 진행했다. 이 방법은 여러모로 절묘한 선택이었다는 평가를 얻었다.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37

39 금강이라는 문화적 유통경로와 연결되어 신구문화가 쟁투와 융합을 통해 계승 발전 하게 된 것이다. 지리적 여건이 가져다 준 문화유입은 마한 백제의 문화를 꽃 피웠 다. 고도 익산지역의 문화적 특징으로는 첫째, 해양문화와 관련된 무속의례의 흔적이 많다는 것이다. 웅포와 성포는 조선의 5대 포구로 꼽혔던 곳이다. 웅포 용왕제와 성 포 별신제 등은 금마지역이 해양 문화적 특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지 역민의 무속신앙에 대한 경향은 현대의 익산시를 종교적 도그마의 고장으로 성장한 동력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속신앙의 주요 거점인 모악산을 비롯하여 원불교 의 중앙총부와 천주교의 성지가 지역에 넓게 분포되고 있으며, 기독교의 각종 종파 와 신흥 종교도 전통이 깊다. 무속신앙의 일반화로 명명되는 종교성은 익산의 문화적 토양을 이해하는 데 중요 한 코드다. 익산은 종교의 도시라 할 만큼 다양한 종교와 종파가 자리 잡고 있다. 6) 그러나 시 군 통합에 따른 문화 충돌은 전통적 감수성을 지우고 있다. 신흥도시인 구 이리시 지역민과 구 익산군 출신의 정서적 문화적 차이가 그 원인인데 무속의례 를 경계시하는 기독교로 대표되는 신흥 문화의 일방적 승리로 귀결되는 양상이다. 또한 산업화에 따른 공동체의 해체가 가속화 되면서 전통문화의 명맥이 사라지고 있 다. 둘째, 평야지대의 민중 문화적 특징을 들 수 있다. 삼한 때의 소도 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는 솟대놀이의 유형으로 보이는 금마 기세배 놀이는 농경문화의 전통 을 보여주고 있다. 그 외 익산 우도농악과 목발노래 삼기농요 역시 평야지대에서 자 연 발흥한 문화 산물이다. 근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는 농경 민중 문화적 전통을 약 화시켰으나 노동집약적 공단 형성으로 인해 노동운동으로 전화를 이루게 되었다. 7) 셋째, 귀족문화의 전통이다. 마한과 후기 백제의 귀족문화를 꽃 피운 이지역의 토 양은 이리 향제줄풍류의 고급문화를 배양시켰으며, 근대이후 거문고의 명인 신쾌동, 판소리 명창인 신만엽, 유공열이 지역에서 성장한 것도 지역의 풍부한 물산과 풍류 의 전통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타지 출생인 임방울과 전춘풍, 김성옥이 굳이 이 지역에 와서 활동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 였을 것이다. 6) 원불교의 창시자인 박중빈이 원불교 최대 본부인 중앙총부를 건립한 곳도 익산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이 입국하여 천주교를 전도한 곳도 익산 나바위 지역이다. 기독교의 다양한 종파가 고르게 분포된 것 도 한 측면이다. 익산지역에 종교적 성지가 많은 이유는 교통이 발달하여 교세 확장과 전교에 수월한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신생도시의 특성으로 인해 새로운 종교유입과 확산이 빨랐기 때문이라는 주장과 농경사회 의 특성상 신앙의 흡수가 용이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농경사회의 특성과 종교적 친화성 미륵산 지역의 문화코드를 읽어내는 하나의 지표가 된다. 미륵사 창건과 더불어 서동설화는 민중의 판타지적 소망을 반영 한다. 또한 조선말 삼도민란과 동학운동의 불씨가 이곳 금마와 삼례에 지펴진 사실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 한다. 7) 민주노총 전북지부가 창립되기 전인 1980년 익산시에 설립된 노동자의 집 은 전북 노동운동의 태동지로 일 컫는다. 섬유 봉제 등 노동집약적 산업이 주를 이루던 익산지역은 자연스럽게 야학 등의 사회 운동이 전개 되었으며 문규현 신부 등이 주도한 노동사목 활동이 이루어졌다. 전북지역 최초의 노동운동이 익산시에서 발생한 것은 이러한 지역적 전통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40 이상에서 살펴본 바, 익산지역의 문화적 특성은 다양성과 융합이다. 익산지역은 교통이 발달하여 문화적 배타성을 약했다. 기세배놀이와 같은 평야지대의 문화적 특 징과 웅포 용왕제같은 해안지역의 문화가 어울리고 민중문화와 귀족문화가 어울리며 상호 영향을 주며 문화적 다양성을 꽃피운 것이다. 도 농 통합에 따른 농경 문화유산 의 훼손이 전통문화의 복원이라는 숙제를 남겼다. 라. 익산시의 스토리텔링 발굴 요소 고대의 수도 익산 왕궁평성(모질메성), 백제의 유일한 궁터임. 고조선의 기준왕, 마한의 수도, 백제 무왕, 보덕국 안승의 수도. 물과 관련된 스토리 금강의 웅포(곰개나루)는 유명한 용왕제가 있었던 곳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삼례에서 대야천까지 상선이 들어왔다고 했다.> 금마군 대관사의 우물이 핏빛으로 되어 다섯 장( 丈 )이나 흘렀다 (삼국사기) 경관 - 최대규모의 구룡마을 대나무숲 - 두동마을 편백나무 숲 - 최북단 야생차단지 - 익산국제차문화축제 - 서해 낙조 5선 웅포곰개나루 - 철새 도래지, 신성리 갈대밭 - 황포 돛단배의 추억 성당포구마을 - 고란초 군락지, 조선시대 9대 조창 - 함라 3부자 집의 꽃담 <배가 가라앉을 만큼 많은 돈을 벌었다> 사랑이야기 <둘은 사랑했지만 서로 만날 수가 없었다.> - 천 년 전 서동과 선화공주의 드라마틱한 전설 - 오백 년 전 황진이와 소쇄양의 이야기, 이선희 노래 알고싶어요 - 익산의 고도리 석불입상의 섣달 그믐날 옥룡천 사랑. 여성친화도시의 유래 아름다운 왕비의 몸은 점점 야위어갔다. - 무왕의 왕비인 선화공주 - 고려 충목왕의 왕비의 불사 숭림사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39

41 - 고려후기 원나라 황후가 된 기황후 - 조선조에는 단종 비 명순황후의 고장 삼복지인 가람 이병기 현대시조의 아버지, 3복(난초복, 제자복, 술복)으로 유명함 아사달의 후예들 황등석 등 석재 전문단지. 인근의 석재 가공업소 돌문화 축제 국악(판소리, 우도농악 등) - 정정열 낳고 춘향전 낳다 근대 5명창인 정정렬을 비롯하여 조통달, 오정숙, 신 쾌동(거문고 산조), 이리 우도농악 등. - 황열에 체류했던 임방울의 호남가 풍속은 화순이요, 인심은 함열 - 일제강점기 국민요정 김여란의 숭림사 득음 철도 스토리텔링 - 100년 넘은 철도역사 (1912년 개통) 호남선과 전라선을 씨줄과 날줄로 엮음. - 11일에 일어난 두 번의 폭파 (1950년 7월, 1977년 11월) - 코미디언 이주일, 당대 최고의 스타를 살리다. 문학 스토리텔링 - 원광대 국문과 양귀자, 박범신, 윤흥길, 안도현 등의 작품배경 종교 스토리텔링 - 연동리 석불상, 사내는 나를 꺼내 달라 는 꿈을 꾼다. 왜군에게 목이 잘린 불상. - 순례길 길,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는 명상관광. - 나바위 최초의 순교자 김대건신부가 첫발을 디딘 곳. - 백지사터 천주교 박해의 현장인 여산. - 원불교의 총부를 설립한 소태산 대종사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교회종 (황등교회) 음식 스토리텔링 음식문화의 수도는 익산 - 허균이 쓴 도문대작( 屠 門 大 嚼 ) - 황등 3미 (전주 비빔밥의 원조, 백반, 갈비전골) - 일제강점기 조선의 대표음식점 해신관 - 현재 국가식품클러스터 4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42 민속 스토리텔링 - 성당포구 별신제 : 흉어가 계속되자 한 노인이 꿈에 나타났다. - 성당면 갈산리의 석상 : 석상의 생김새는 이국의 냄새가 난다. - 도깨비 관련 : 작물(고구마, 물고기)을 도깨비가 가져가서 밤새 싸운다 - 땅에 묻힌 돌이 드러나면 마을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 - 기타 풍수지리 및 지형과 관련 된 이야기 동굴, 동물 (호랭이, 말 등) 혈을 끊어서 길을 만드니 피가 나왔다. 대중문화 스토리텔링 - 나훈아의 고향역 의 배경 익산역 - 아침이슬 김민기의 고향 - 익산 교도소 세트장 광복절 특사 등 영화촬영 3) 기존 스토리텔링 활용 사례 (1) 역사문화 스토리텔링의 활용 가. 역사문화 스토리텔링의 성격 역사문화 스토리텔링 활용은 문화의 복합성과 문화 혼종성의 특징을 고루 활용 하여 다양한 수용자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역사스 토리텔링의 서술은 재현(representation)과 재창조(reinvention)의 비중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한 접근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원텍스트에 대한 접근 방식에 따 라 역사적 사실과의 거리 조정이 이뤄진다. 그러나 스토리텔링 활용사례에서 변하 지 않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이야기가 수용자의 생활의 일부분이 될 수 있도 록 한다. (2) 수용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친숙하고 재미있고(Fun) 흥미있는 (Need s) 내용을 활용한다. (3) 관련 역사문화 자원을 특별하고 가치있게 만든다. (4)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과 융합시킨다. 8) 스토리텔링의 활용을 통해 역사문화유산의 가치가 수용자의 내면에 확산이 가능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체험의 모티브를 제공하는 경향이 주목받고 있다. 따라 서 스토리텔링 활용에 앞서 첫째. 역사문화유산에 대한 이해도 증진. 둘째, 역사문 화유산 이야기의 확산. 셋째, 역사문화유산 이야기의 체험의 단계별 활용 전략을 8) 역사문화유산 스토리텔링 활용 사례와 관련된 상세한 논의는 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방안 1 관광스 토리텔링의 유형과 방안 4) 역사 관광스토리텔링의 서술 방식 참조.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41

43 수립해야 할 것이다. 첫째, 역사문화유산에 대한 이해 증진은 역사문화유산에 대한 역사적, 문화유산 에 대한 매체별 자료를 구축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역사, 인물, 풍수지리에 관한 역사적인 자료와 불교, 유교 문화유산과 관련된 정신문화적인 자료, 그리고 주변 문화재와의 상호관련성 규명 및 기타 무속, 민속 관련한 자료가 여기에 해당 한다. 자료구축이 완비된 이후엔 플래시 애니메이션 방영시스템 구축 등 준비된 매체의 특성에 따른 전시 스토리텔링이 완성되어야 한다. 관련 도서 및 패널 제작 으로 역사문화유산에 대한 이해도를 증진시켜야 하며 만화, 다큐멘터리 등 새로 생산될 자료도 지속적으로 구비해야 할 것이다. 둘째, 역사문화 스토리텔링의 확산을 위해선 일반인 대상 공모전과 문화해설사 교육이 병행되어야 한다. 일반인이 참여하는 공모전은 현장에서 진행되는 역사 이 야기 경연대회 와 온라인 공모로 진행되는 역사인물 스토리텔링 공모전 이 여기에 해당한다. 시나리오 공모전은 2차 콘텐츠 개발이 가능하기에 지자체별로 추진하는 곳이 많다. 또한 디지털콘텐츠인 UCC공모전은 제작이 용이하여 더 많은 수용자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고 홍보 효과 뿐만 아니라 교육 자료로 활용이 가능하다. 스토리텔링 전문가 집단을 대상으로 한 문화유산 해설 콘테스트 는 관광적인 측 면에서 문화해설사의 경쟁을 통한 서비스 수준을 제고하고 선진 해설기법의 학습 기회를 제공하는 선순환적인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우수사례 발굴을 통한 좋은 스토리텔링 모델을 구축하고 문화유산 해설시에 즉시 적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학생대상 문화유산해설 영어 콘테스트는 지역민의 참여와 학습 기회를 부여한다 는 점에서 특징을 보인다. 특히 외국인 대상 스토리텔링 기법을 발굴하고 즉시 적 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생 문화유산 해설 콘테스트는 주민참여형 축제로 개발이 가능하다. 셋째, 역사문화유산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체험형 프로그램의 개발이 필 요하다. 미륵사탑 발굴 체험 워크숍을 진행하고 1) 띠뱃놀이, 연날리기, 조명 퍼포 먼스, 야간 스펙터클 등 지역민이 참여하는 연희체험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상품(그림엽서, 퍼즐, 숨은그림찾기 등)와 관람객 참여 프로그램(이야기 이어쓰기, 그림 그리기, 참여형 포토존)을 통해 역사적 현장 을 관람객에서 체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역사문화 스토리텔링의 확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사회적 인식을 제고시 키고, 지역민의 삶과 연계시켜, 주민참여형 모델과 관광객 참여형 모델을 각각 개 발시키는데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왕보와즈 고성의 경우, 지역민이 참여하는 고성 스토리텔링을 통해 상상력과 창의성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확산시켜 관광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왕보와즈 고성 스토리텔링을 벤치마킹하여 고도익산의 스토리텔링의 활용의 개요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4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44 빛의 도시 익산 스토리텔링 구조 배경 : 시간- BC 5~7세기, 장소- 미륵사지와 왕궁, 성벽 인물 : 무왕, 선화공주, 예술장인 사건 : 서동의 사랑, 삼국의 전쟁 기타 : 예술(춤, 의복, 연희), 기술(백제 정원, 금속공예), 무속(별자리, 조명) 나. 역사문화스토리텔링의 관광자원화 길 스토리텔링 불확실성의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은 다양한 스트레스에 포위된다. 자연주의가 도 시 중산층의 탈출구가 된 것은 생명력의 복원이 원초적 욕구이기 때문이다. 자연속 에서 걷기 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다. 걷기는 문명의 이기인 교통수단을 버리 고 원초적인 걸음에 몰입하는 것이다. 트레일은 진정한 나를 찾는 치유의 길이다. 제주도의 골목길을 이은 올레길 이 뜨고 있다. 올레길의 성공은 문화마케팅이 얼 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최근의 마케팅전략은 시장 점유율 (market share)보다 소비자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 상품에 할애할 수 있는가 하 는 시간점유율(time share)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화예술은 경험재의 상품이다. 올레길 처럼 체류시간을 높이면서 부가적인 문화상품을 구매하게 하는 경험재 상품 이 주목받는 이유다. 총길이 215km 에 이르는 제주 올레길은 2008년도엔 3만 명이 찾았고 올해는 이미 그 수를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 은 종교의 순례코스를 문화상품화 한 예이며, 독일의 괴테 가도 는 문학을 관광산업에 활용하고 있는 예다. 일본의 경우 하이쿠 시인 바쇼의 기행 루트를 따라 여행하는 바쇼 동북부기행 이 있다. 산티아고 길 이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종교적 의미의 길이라면 괴테가도 와 바쇼기행 은 지자체에서 문학지도로 재구성하여 지역문화산업으로 특화한 예다. 제주 올레길( 함께 걷기 와 제주올레 아카데미 를 통해 올레 길 체험과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는 강좌를 함께 진행한다. 마을과 마을을 잇 는 평범한 길을 문화콘텐츠화 하는 초기단계를 지나 문화콘텐츠의 다각화와 이미지 전략을 병행하는 고착기에 접어들었다. (올레길과 관련된 내용은 여러 지면에서 소개 된바 있음으로 이 글에서는 소략한다.)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 생명연대 부설 사단법인 숲길 이 산림청과 함께 2011년 완성을 목표로 조성하는 자연생태로다. 지리산 둘레 800리 3개도(전북, 전남, 경남), 5개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16개읍면 80여개 마을길이 씨줄이 되어 이어 졌다. 각자의 문화적 정체성을 간직한 이 길은 마을 주민들과의 협의를 통해 개통되 었다. 다랭이길 로 불리우는 1구간은 남원군 산내면 매동마을에서 출발하여 경남 함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43

45 양군 마천면 금계마을까지 걷는 길이다. 올망졸망한 다랭이논을 끼고 걷는 이 길은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 에서 소년과 소녀가 무지개를 찾아 걸었음직한 정경을 품 고 있다. 이 길이 끝나는 곳부터 벽송사를 지나 세동마을까지 걷는 2구간의 별칭은 산사람길 다. 빨치산의 별칭이었던 산사람들이 자주 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이 길에서는 변강쇠 설화로 유명한 벽송사 목장승을 볼 수 있다. 때론 낮은 곳(구례 토 지 해발 50m)을 걷기도 하고, 산꼭대기(하동 악양 형제봉 해발 1100m)에 오르기도 하는 지리산 길의 모든 구간이 정비되면 총 길이 300킬로미터에 달한다. 지리산을 보자기로 폭 쌓은 것 같은 이 길을 하루 10km씩 걸으면 꼭 한 달이 걸리는 셈이다. 등산로처럼 힘든 코스가 없는 여유로운 산책로 곳곳에 지명의 유래와 산책로를 알리 는 안내판이 있어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좀 더 여유로운 트레일을 원하면 인근의 실상사와 벽송사에서 제공하는 1박 2일의 템플스테이를 이용하거나 함양 마천과 금 계마을의 펜션예약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지리산길( 홈페이지 에서는 필요한 정보와 지도를 내려받아 개성에 맞는 도보여행을 계획할 수 있다. 승 용차를 이용하는 이는 지리산 톨게이트에서 인월읍내로 이동하면 되고 남원-인월간 시외버스도 운행중이다. 둘레길을 활용한 스토리텔링 익산지역 둘레길은 이곳 사람들의 인문지리를 오롯이 반영한다. 강원도 평창 사 람들이 해산물을 구하기 위해 꼭 넘어야했던 선자령 고개길을 복원하여 만든 대관 령 옛길 처럼 길을 걷는다는 것은 옛 사람들의 길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연금술사>의 작가로 알려진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산티아고 가는 길>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한 책이다. 옛 순례자의 발자취를 더듬 어 800km에 이르는 대장정을 하면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꿈꾼다고 한다. 둘레길을 걷는 일이 단지 레져생활에 머문다면 이곳은 그저 거대한 생활체육 시설에 불과할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출발지인 프랑스 남부 생장피에드포르 에 모인 전 세계인들이 찾는 것은 특별한 가치 다. 익산시 둘레길에도 이에 걸맞는 인 문지리적 의미부여가 필요하다. 9) 컬덕(Cultduct)은 문화를 의미하는 컬처(Culture)와 상품을 의미하는 프로덕트 (Product)의 합성어이다. 문화의 적극적인 수용자를 의미하는 컬트(Cult)고객이 늘어 갈 수록 마케팅비용을 줄어든다.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원 령공주>등의 작품을 통해 세계인을 일본문화에 대한 컬트 고객화 시킨 것이 대표적 인 문화마케팅이다.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서 나타난 대자연과 인간의 조화 가 둘 레길의 정신과 다르지 않듯이, 우리 주변의 숲길과 골목길도 세계인의 감성과 만날 수 있다. 진정한 문화콘텐츠의 개발은 우리 걸음의 보폭을 아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9) 지리산 둘레길의 경우 구간별 마을사람들과 지리산길 집행위원들이 함께 내며 구술채록을 스토리텔링에 활용했다. 4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46 할 것이다. 레베카 솔닛은 <걷기의 역사>에서 걷기는 세상을 여행하는 방법이자 마 음을 여행하는 방법이다. 라고 했다. 매일 걷는 주변의 골목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서,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 구술채록을 통해 마을을 안다 는 것은 객체와 주체가 함께 아름다워 지는 것이다. 순례길 스토리텔링 익산-전주-김제에 이르는 한국판 '순례자의 길'(pilgrimage trail)이 완성되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에서 영감을 얻은 총 연장 180km(450리)에 이르는 순례길 은 초 종파적으로 추진되는 것이 특징. 전체 여정의 90% 이상이 숲길과 마을길이 중심 이기에 안정성을 확보했다. 여산의 천호성지에서 강경의 나바위로 이어지는 1구간을 시작으로 미륵사지(불교)-원불교 총부-초남이 성지-전동성당-치명자산-완주 송광 사를 거쳐 다시 천호성지까지 연결되는 6구간이 6박 7일 일정으로 조성되었다. 10) 순례자의 길 조성의 기본 구상은 만리장성 축성 방식이다. 기존의 종교성지(거점 지)를 이어 만든 것. 일반 참여자도 거점지의 종교시설에서 숙박 및 숙식이 가능하 다. 미륵사지를 찾아온 불교신도들이 인접한 원불교 총부에 가서 점심공양을 하고, 초남이 성지에서 잠을 청하는 식이다. 숙박은 종단에서 운영하는 종교시설과 민박을 활용하면 된다. 도착하는 시간이 맞다면 거점지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이용하면 되고 대여해주는 취사도구를 이용해도 된다. 기독교인에게 예루살렘이 있다면 티벳인들에 게는 라싸가 있다. 이슬람교도의 메카와 인도인들의 갠지스강은 죽기 전에 꼭 가봐 야 하는 곳이다. 순례객들에게는 인근의 숙박 및 편의 시설이 포함된 지도가 제공되 며 지도 한 켠에는 순례지의 도장을 찍은 난이 있어서 하나씩 스템프를 늘리는 즐거 움을 주며 칸을 다 채운 이들에게는 순례증명서가 발급된다. 영혼의 안식과 위안은 길 위의 침묵에서 시작된다. 순례길에 참여한 사람들은 역 사 문화유산과 침묵의 대화를 하며 타인과의 소통을 배울 것이다. 종교문화 스토리텔링 종교는 죽은 자를 생각하며 삶의 이정표를 세운다. 인류 최대의 문화 콘텐츠인 종 교의 도그마가 전북이다. 천주교 성지인 천호와 여산, 나바위, 전주 전동성당과 치명 자산. 원불교 성지인 익산총부와 만덕산, 월명암등에는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다. 각기 다른 종교의 성지가 하나의 길로 이어진다. 매력적인 상표는 시장에서 물건 이 잘 팔리게 하는 요소이다. 유명상품은 그래서 상표, 즉 브랜드 자체라고도 한다. 우리 지역은 종교적으로 볼 때 영적인 명품( 名 品 )의 가치를 지녔다. 살고 있는 지역 이 유명 브랜드인 셈이다. 종교성지를 연결한 순례길을 걷는 순간 사람들은 수동적 인 소비자에서 문화의 창조자가 된다. 가장 오래된 것은 가장 미래적인 것이다. 기호 10) 순례길을 만든 사단법인 한국순례문화연구회(순례연)은 순례객 예약 및 프로그램 관리를 총괄하기 위해 각 종단의 종교인과 관관전문가가 만든 단체다.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45

47 로서 상품 소비는 개별 상품을 소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상품의 소비를 둘러 싼 맥락으로서 공간이 함께 소비되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인들은 개별상품으로서 명 품이 아닌 기호화된 공간을 소비한다는 점에서 종교문화 스토리텔링의 관광자원화 가능성은 높다. 11) 철도 스토리텔링 희푸르게 번쩍이는 쌍줄의 선로는 대기가 소유한 예리한 칼이 아니라고는 볼 수 없었다. 이상이 쓴 장편소설 12월 12일 의 한 대목이다. 전주-군산간 신작로와 연 결된 군산선은 식민지 근대를 직조한 씨줄과 날줄이다. 기차를 통해 근대의 충격을 담아낸 천재시인 이상의 글처럼 근대화의 상징인 철도는 전통적인 공간을 단축시키 고 지역적으로 다르게 흐르던 시간을 통일했다. 철도로 연결된 지역은 국가와 민족 으로 상상된다. 또한 익산-군산선은 근대의 길이다. 2007년 운행을 중지한 군산행 통근열차의 궤 적에서 우리지역의 근대문화콘텐츠를 벨트화 할 가능성을 본다. 아직까지 기차의 역 사적 콘텐츠를 실제생활과 접목한 예는 없다. 경기도에 위치한 철도박물관은 퇴역한 기관차를 모아놓은 거대한 집하장이며 전라남도 곡성의 철도마을도 섬진강을 활용한 레저문화에 맞춰져 있다. 근대를 여행하는 증기기관차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차여행은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하거나 문화적 컨셉이 분명히 한다. 유럽의 지붕 이라는 뜻을 가진 스위스의 <융프라우 등산열차>와 노르웨이의 <피요르드 기차>, 아프리카의 <블루 트레인>은 대자연의 파노라마를 차창 안에서 즐 길 수 있어 여행자들에게 한번은 꼭 타보고 싶어 한다. 역사콘텐츠를 활용한 경우도 있다. 철의 실크로드 라 불리는 <시베리아 횡단 기 차>는 레닌이 러시아로 귀국하면서 유명해진 열차. 일본의 경우 역사콘텐츠에 문화 적 감수성을 적극적으로 결합한 사례다. 큐수의 구마모토를 오가는 <아소보이호 기 차>는 디지털시대를 아날로그적 감성을 운행한다. 객실 천장에는 팬이 돌아가고 나 무로 된 복도와 의자들은 옛날식 찻집에 와 있는 기분이 들게 한다. 유후인의 숲 이 11) 익산지역은 선교사가 남한 땅에 첫 발을 내딛은 곳이다.원불교를 비롯한 증산교 보천교 동학 등이 융성 한 곳도 이 지역이다.그 외 모악산을 모태로 한 수많은 신앙들의 기초에는 영적인 세계와 유난히 주파수 가 잘 맞는 지역성이 자리하고 있다.익산시에는 원불교총부가 나바위성당에는 최초의 선교사 흔적이 신 앙의 모태( 母 胎 )적 의미를 증명한다.장소가 곧 콘텐츠인 셈이다.순례길 조성사업이 자체 수요로도 충분 할 거란 기대도 이 때문이다.순례길의 거점지 중 하나인 천호성지만 해도 한해에 12만명이 다녀갈 정도 다.무한경쟁사회에 지친 개인들은 삶의 가치를 순례에서 찾는다.종교의 의식주 문화는 새로운 콘텐츠로 무궁무진하게 재생산될 수 있다.종교별 예복을 개량한 패션쇼와 종교음악회,사찰음식 축제는 그 자체가 축제의 성격을 지녔으며 십자가 비즈공예,묵주 만들기 등의 체험 행사는 자신만의 기념품을 남길 것이 다.이 모든 것이 순례길 조성으로 무르익은 종단간의 협조로 실현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종교콘텐츠 개발은 우리지역이 정신문화의 메카로 발돋음 하는 계기를 만들 것이다. 4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48 라는 뜻을 가진 <유후인 노모리 기차>는 만화적 감성으로 운행되는 것이 특징. 각 지역의 명소를 지날 때마다 승무원들이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며 사진도 찍어준 다. 기차를 교통수단에 그치지 않고 문화콘텐츠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의 절정은 대 합실 한 켠에 자리한 족탕코너는 기차를 기다리며 인근 지역을 여행한 피로를 풀라 는 베려다. 최근 일본의 기업들이 정년퇴직자의 연령대에 맞춰 추억상품 개발에 주 력하고 있다. 움직이는 호텔 이라 불리는 <카시오페이아 열차>는 은하철도 999 처 럼 향수를 자극한다. 도쿄 <우에노역>에서 출발해 최북단 섬 홋카이도 <삿포로역>까 지 달리며 최고급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익산역, 만주행 대륙열차가 출발하던 곳. 열차 명칭의 변천사는 시대를 반영한다. 비둘기호가 월남파병의 유산이었듯 호남 선을 달렸던 태극호와 전라선의 풍년호는 근대를 겪어낸 이름들이다. 일제 강점기 만주행 열차의 이름은 대륙호다. 소설가 채만식이 타고 다녔을 익산-군산발 열차는 사라지고 지금은 장항선과 연결된 무궁화열차가 신군산역과 서천역을 잇고 있다. 한 때 신의주행 기차표를 팔았을 개정역은 이영춘 가옥과 구마모토 농장이 있던 곳. 신 고산타령으로 남은 철도의 속이야기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의 주인공들이 출입했던 개찰구를 근대열차의 전용게이트로 특성화하여 탑승객들에 게 역사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은 어떨까? 옛 지명이 찍힌 기차 표손에 쥐고 승무원에게서 소설 아리랑의 한 부분을 듣거나 근대사 이야길 듣는 것 은 살아있는 역사체험 될 것이다. 기차 박물관은 체험이 어우어진 테마파크로 개발될 수 있다. 큐슈의 <철도박물관> 는 체험이 바탕이 된 테마파크형. 메이지 시대(1909)의 객차 안에는 다다미로 된 의 자와 당시 복장을 한 인형들이 과거의 풍경을 재현하고 있다. 이곳의 특징은 관람객 이 체험할 수 있는 장치. 실내에는 가상 전철운전장치(시뮬레이션)가 있고 밖에는 철 로를 따라 미니열차를 운전해 보는 철도공원이 있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이유 다. 고도문화와 근대문화의 터미널 익산역은 11일과 관련한 두 개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1950년 7월 11일 미군에 의한 익산역 오폭사건은 2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오끼나 와에서 날아온 미폭격기가 익산상공을 선회하다가 폭탄을 투하한 것. 당시 이곳은 교전지역이 아니었기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들이 폭탄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 다. 윤흥길의 소설 아이젠하워에게 보내는 멧돼지 는 이때의 사건과 결부된 궐기대 회를 다룬 작품. 익산역사 한 귀퉁이에는 이때 숨진 200여명의 민간인을 추모하는 위령탑이 있다. 1977년 11월 11일에 일어난 이리역 화물열차 폭파사건은 전 국민에 게 이리 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익산의 트라우마다. 열차폭파가 일어난 후에 당시 무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47

49 명이었던 코미디언 이주일 씨가 최고 스타였던 하춘하 씨를 엎고 병원으로 뛰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정주하는 곳이 아닌 바람의 도시 익산. 익산역은 이 도시의 심장같은 곳이다. 소설 가 양귀자에게 1992년 이상 문학상을 안겨준 작품 숨은꽃 은 귀신사로 가기 전 익 산역에 도착한 작가의 심경을 장문의 묘사로 시작한다. 그녀는 익산역에 다다라서 이 길을 통해 나는 세상에 나왔었다. 한때의 기억들은 모두 이 길의 언저리에서 만 들어졌다. 고 익산역을 회상한다. 일제 강점기에 건설된 송학동 굴다리는 익산역 밑을 감고 나 있는 형국. 지금은 도로확장을 위해 공사중이다. 이리역 지하도는 굴다리, 땅속을 흐른다 / 이곳을 통 과하려면 딱정벌레처럼 어깨를 접어야 하리 라고 안도현 시인이 노래한 이 길을 걸 으려면 내년을 기다려야 한다. 4차선으로 확장공사가 한창인 굴다리에 익산역의 신 난고난한 과거를 기억할만한 장소가 한 평쯤 마련되길 기대한다. 익산역은 호남교통의 심장이다. 익산시의 뿌리인 금마는 어사 이몽룡이 호남 암행 의 첫발을 디뎠던 곳이며 통영에서 올라온 통제사 이순신의 장계도 이곳을 거쳐 한 양궁궐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 철도부설 이후 익산의 중심은 금마에서 현 익산으로 이동했다. 호남선이 남북을 가로 지르고 여수시에 이르는 전라선 철도는 동쪽으로 군산선은 서쪽으로 뻗어 있어 익산역은 전라도의 철도를 실 꾸러미 모양 잡고 있는 형국이다. 역세권 개발로 새단장 중인 익산역 어디에도 근대화와 함께한 철도의 역사는 없 다. 다만 상업문화복합건물이 곧 들어설 예정이란다. 익산역이 가진 역사적 의미가 자본의 가치에 밀린 결과다. 신자유주의 경영을 표방하는 한국철도공사에게 <근대철 도박물관>이니 <기차테마파크>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최근 익산시는 미륵사지 복원을 계기로 익산역사지구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옛 유적을 고도문화로 지정 보존하는 것 이상으로 중 요한 것은 군산의 근대문화중심도시와 연계하여 전북의 서남쪽을 역사문화벨트로 조 성하는 것이다. 문화유산은 유형의 자산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지자체 별로 추진 하는 역사문화콘텐츠를 철도를 활용하여 묶어낸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다. 문화자원의 네트워크화 구술사에서 재발견되는 지역은 물리적인 장소에서 문화콘텐츠의 원소스가 된다. 익산지역의 역사문화자원은 상품화를 위한 스토리텔링이전에 구술사 채록을 서둘러 야 함을 알 수 있었다. 현대사회에서 지식은 모르는 것을 아는 것 에서 끝나지 않는다. 현대사회가 요구 하는 지식은 1)기존의 것을 재조직하고, 2) 체계적으로 분류, 통합함으로써 3)새로운 4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50 개념을 창출한다. 이처럼 재조직화 된 지식은 스스로 성장하고 심지어 기존의 다른 영역의 진화를 유도하기도 한다. 구술사를 통해 발굴된 지역의 이야기는 해당 공간 의 삶의 양식을 반영한다. 따라서 지역인의 삶의 총체적인 모습이 구술사를 통해 나 타나는 것이다. 이른바 로컬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하나는 중앙에 종속된 지방이라는 얼굴 이고, 다른 하나는 나름의 독자성과 역사성을 지닌 지역이라는 얼굴이다. 로컬의 역 사 자체가 이 두 얼굴 간의 긴장 속에서 전개되어 왔다. 이 가운데 중앙에 종속된 지방, 그러니까 중앙의 주변부로 소외되고 배제되고 차별받아 온 것이 지금까지의 지역의 모습이었음은 부정하기 힘들다. 나름의 독자성과 역사성을 지닌 지역이라는 얼굴은 잠재성으로만 존재해왔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분권화와 글로컬리즘 (glocalism, 글로벌리즘과 로컬리즘의 합성어)은 세계사의 대세이다. 세계가 국가들 의 총체에서 무수한 지역들의 네트워크로 변화하고 있다. 요컨대 지역이 세계와 직 통하고 있는 것이다. 12) 익산 역시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에 적극 동참해야 미래를 기 약할 수 있다. 구술사로 재발견된 지역은 곧 분권화와 글로컬리즘의 랜드마크가 될 전망이다. 구술조사를 통해 살펴본 익산의 문화자원들은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어 있는 상태 이다. 요컨대 소외된 점으로 흩어져 있을 뿐이다. 점들로 고립되어 있는 이 문화유산 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거기에 현재적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때 문화도시로의 모 델링이 가능하다. 13) 문제는 문화자원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내고 그것들에 현대성의 숨결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구심점이다. 구술사 채록은 첫째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를 발굴한다. 새롭게 발굴된 기초자료는 익산의 문화, 지리, 환경, 생활 등 제반 분야의 후속 연구를 불러일으킨다. 둘째, 기 존의 콘텐츠의 컨텍스트를 밝혀 내용을 풍부하게 한다. 문제는 사업의 특성상 서둘 러야 한다는 것이다. 구술사 사업을 통해 확인된 익산은 백제의 역사문화적 특징을 보였다. 백제는 삼국시기 중국과 일본의 문화 허브 역할을 하며 동아시아에서 한국 미학의 뿌리를 태동시킨 곳이다. 그러나 통일신라 이후 패국의 문화는 왜곡 파괴되었 다. 이것은 발해와 당나라에 의해 계승 흡수된 고구려 문화에 비해 백제의 것이 상대 적으로 소외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지역의 문화가 건국과 패망을 거듭한 것은 고조 선의 기준왕부터다. 패자의 기록은 왜곡되고 누락된다. 백제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 던 무왕의 근거가 이곳이었으며 후삼국시대의 견훤 또한 이곳을 근거로 세력을 넓혔 다. 통일신라가 세운 보덕국은 무왕 시절에 당한 치욕을 갚기 위한 중앙의 외면경계 였다면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는 견훤에 시달렸던 내면경계의 표시였다. 조선조 역시 풍패지향이라는 허울 아래 이 지역의 문화적 자산을 방치했다. 역사적으로 익산지역 12) 하정일, 박태건 이병기의 문화콘텐츠화 방안과 문화도시의 비전, ) 문화도시가 어떤 도시이고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개괄적 설명으로는 이현식, 문화도시로 가는 길, <<문화도시로 가는 길>>, 다이아트, 참조.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49

51 은 수탈과 탐욕의 대상이었다. 중앙지배계급의 정치적 이해에 따른 지역의 기억은 조선조 말 민란의 주요 발생지 가 되게 했으며 갑오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소외된 공 간의 기억은 근현대에 와서도 계속되었다. 일제강점기 수탈이 인근의 지역까지 확대 된 것이다. 1907년 부설된 철도는 노동자들을 김제, 군산의 개간사업으로 동원시키 는 교통로였다. 따라서 익산인의 기억은 한국 역사의 트라우마를 지닌다. 과거의 기 억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잊을 때 공간은 단순히 남겨진 것에 대한 묘사와 서술에 그치고 만다. 지역의 공간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은 그래서 지역의 역 사적 시공간성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 (2) 서동스토리의 매체별 활용 사례 가. 영상 매체 드라마 2013년 하반기부터 2014년 상반기까지 방영되는 TV드라마 <기황후>는 역사적 사실(fact)에 문학적 상상력(fiction)을 더한 팩션 (Faction)으로 분류된다. 특히 실 제 기황후의 외가가 익산시 여산면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팩션 스토리텔링의 활 용도도 주목받고 있다. 예를 들어 인간 이순신의 갈등과 고뇌를 그린 <칼의 노 래>, 화랑세기 에 기록된 미실을 재조명한 <미실>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재해석한 <다빈치 코드>등의 팩션 소설은 영상으로 제작되어 소설과 함께 큰 주목을 받았 다. 또한 사료의 기록에 상상력을 더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와 연산군과 광 대 하선과의 이야기를 다룬 <왕의 남자>, 세종의 한글창제를 다룬 <뿌리깊은 나 무>가 최근에 인기를 얻은 팩션형 스토리텔링이다. 팩션은 역사책에 기록된 실제의 사건의 병렬적 구조에 드라마틱한 서사구조를 대입하고 상상력을 더해 흥을 유발한다. 특히 팩션형 드라마에는 역사책이 주목하 지 않은 비주류 인물을 부각시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캐릭터로 발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나. 공연 매체 연극 서동과 관련한 연극 중 단연 이슈화 된 것은 2012년 초연된 밀당의 탄생-선화 공주 연애비사 다. 국립극단은 삼국유사 프로젝트는 한국적 상상력과 서사의 원천을 찾는 연극 공 5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52 연이다. <삼국유사 프로젝트>는 천 년 전의 역사/불교/샤머니즘/판타지의 세계가 야사와 민담, 환상담, 단편 등으로 표현된 한국 최고의 고전을 근원적인 동아시아 상상력과 결부시킨 작품이다. 국립극단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서동요 연극 콘텐츠 를 의뢰 제작하는 것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국립극장 삼국유사 프로젝트 예시> - 처용설화 2012년 10월, - 나의 처용은 밤이면~ - 조신설화 -2012년 9월 - 꿈 - 수로부인 -2012년 9월. - 꽃이다 - 도화녀와 비형랑 -2012년 11월 - 로맨티스트 죽이기 - 김부대왕-신라의 멸망 -2012년 11월 - 멸 뮤지컬 서동관련 뮤지컬은 현재 익산시를 비롯하여 부여군과 경주시, 대전시에서 제작 공연된 바 있다.(보고서 공연 스토리텔링의 사례 참조)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한 뮤지컬중 주목할 공연은 경주세계문화엑스포를 기념하여 2011년 7월부터 2013년 12월까지 펼쳐진 <미소2-신국의 땅, 신라>이다. 경주의 역사문화콘텐츠를 대표하는 브랜드 공연을 표방하며 경주 특설무대에서 펼쳐진 이 작품은 화려한 레이저쇼와 함께 신라의 건국신화, 선덕여왕과 화랑, 신라로드 등 천년 신라의 찬란한 역사와 오천년을 이어온 한국의 춤과 음악, 노래가 어우러졌 다. 최근 들어 역사문화콘텐츠 공연에는 국악을 결합시키는 시도가 부여군과 경주 시에서 이뤄졌다. 2008년 익산시도 뮤지컬을 제작하여 서동축제에 초연된 바 있다. 이후 정기적 유료 공연으로 전환하여 내방객들의 체류시간을 연장할 필요가 있다. 다. 전시 매체 온라인 아카이브 스토리텔링 제주도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제주해녀문화 와 관련해 구글 문화연구원(Google Cultural Institute)의 역사적 순간 (Historic Moments) 플랫 폼에 제주해녀문화 관련 사진 및 영상 자료 등을 소개한다. 디지털아카이브 전시 는 제주해녀문화와 관련해 수집 출판한 자료를 적극 활용해 제주해녀의 역사 일상 노래 등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전시를 구성하고, 구글문화연구원에 게재된 아카이 브 전시물을 해녀박물관 누리집과 연동해 이용자가 접근이 가능하도록 하는 온라 인 전시물이다. 특히 전세계 600여 문화 관련 기관이 참여하고 600만개 이상의 영상, 사진, 텍스트가 실린 구글문화연구원에 제주해녀문화 콘텐츠가 소개되면, 해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51

53 당문화유산에 대한 세계적 인지도 향상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 엔터테인먼트 게임 스토리텔링 다사용자간 온라인 게임의 고전인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는 중독적이고 망 상적인 오락에 대한 시선을 바꿔놓았다. 게임의 문법이 개발되고 소설과 영화같은 시나리오가 적용되면서 게임 사용자는 가상현실의 주인공이 된다. 특히 게임은 세 계 최고 수준의 통신기술을 기반으로 한 우리나라에서 매체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게임이 시작하면, 사용자는 특정 공간(맵)에서 자신의 캐릭터와 함께 수많은 사 건을 겪으며 무한정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완벽한 몰이이 가능한 허구적 틀이 주는 체험은 영화보다 강렬하다. 게임은 영화보다 스펙타클하며 또한 강렬한 자극 으로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3) 타 지역의 스토리텔링 활용 사례 가. 해외 스토리텔링 활용 사례 국가별 스토리텔링 지원체제 문화콘텐츠 산업은 참신한 아이디어와 재미있는 이야기만 있으면, 적은 비용을 투입하고도 높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친환경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경제학자인 피터 드러커는 21세기는 각 국의 문화산업에서 승패가 결정될 것이고, 그 승부처 는 문화산업 이라고 했으며 롤프 옌센은 미래사회에선 가장 훌륭한 이야기꾼을 가 진 나라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했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미래학자들은 문화 콘텐츠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스토리텔링은 콘텐츠의 이미지를 높혀 그 콘테츠를 소유한 국가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게 하는 미래형 산업이기도 하다. 같은 이유로 세계 각국은 문화콘텐츠 산업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미국은 문화산업을 군수산업과 더불어 국가의 2대 주력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미국은 대중문화의 다양한 면모를 엔터테이먼트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영화, 애 니메이션, 뮤지컬, 음반, 캐릭터 등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수출하여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다. 미국의 자본가들은 스토리텔링이 곧 돈이 된다는 것을 체험한 결과 힘 있는 스토리를 찾는데 열심이다. 인디언 추장의 딸 이야기를 모태로 만든 영화 <포카 혼타스>와 중국의 설화를 가져다가 만든 <뮬란>, 아프리카 밀림을 소재로 5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54 한 <라이언 킹>의 제작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발굴해서 자국의 문화상품 화 한다. 또한 <인어공주>처럼 잘 알려진 이야기는 물론이거니와 <니모를 찾아서> 처럼 이야기를 창조하기도 한다. 미국은 스토리텔링을 엔터테이먼트의 차원에서 캐릭터 산업과, 게임 산업에 적극적으로 적용한다. 좋은 이야기를 발굴하여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매체환경에 맞춰 개발하며 이것이 성공하며 테마파크 형태로 재 개발하는 방식이다. 역사문화적 자원이 풍부한 영국은 문화콘텐츠를 21세기 창조산업으로 인식하고 국가적으로 육성한다. 전문 스토리텔러를 양성하는 기관만 40개 이상이며 역사문 화 자원을 출판, 방송, 영화와 캐릭터 등 복합 문화 유산으로 개발한다. 특히 영국 의 문화콘텐츠 산업은 셰익스피어라는 한 가지 상품에서 파생된 다양한 문화상품 을 만들어내면서 원소스 멀티유스 산업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타국가의 벤치마킹 사례로 영국을 꼽는 것은 문화콘텐츠의 관광 부가가치 산업 육성의 핵심 에 스토리텔링이 있다는 것을 일찍 주목한 데에 따른 것이다. 영국정부의 전폭적 인 지원에 힘입어 무명작가가 쓴 <헤리포터>는 전 세계에 10억불이 넘는 매출을 창출하는 막강한 콘텐츠로 성장할 수 있었다. 중국도 풍부한 역사문화 유산을 집중 관리하고 콘텐츠화 하는 데 국가적 노력을 쏟고 있다. 동만게임 산업진흥기지 는 중국내 문화콘텐츠를 본격적으로 관리하는 핵심 기관이다. <삼국지>, <적벽대전> 등의 전통적인 스토리를 영화제작과 함께 게임산업으로 육성하는 것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문화콘텐 츠의 육성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설화를 바탕으로 <뮬란>을 제작하여 막대한 이득 을 올린 미국에 비해선 아직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스토리텔링은 미디어 산업의 토대로 인식하고 있다. 일본이 국가의 7대 신성장산업으로 육성하는 문화콘텐츠가 애니메이션을 주축으로 하기 때문이 다. 따라서 국가 이미지 마케팅에 문화콘텐츠적 요소를 적용하여 국가 브렌드화로 전개시키기 위한 연구 및 개발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일본의 문화콘텐츠 산업이 전문화된 스토리텔링 작가를 기반으로 두터운 소비층이 선순환 구조로 문화산업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 일은 흙 속의 진주 를 찾는 일 만큼이나 어렵다. 이에 세 계 각국은 지역의 설화나 동화와 같은 이야기를 찾는 일을 일찍부터 해왔다. 19세 기 유럽에서 진행된 국민국가의 운동에서 시작된 민족 전통의 이야기 발굴이 그것 이다. <그림형제의 동화>는 독일의 민간에 전해오는 설화를 옮겨놓은 것이며, 괴테 의 파우스트 역시 독일의 민간에 전해오는 파우스트 이야기를 각색한 이야기다. 도시마케팅과 스토리텔링 도시 마케팅에서 가장 많이 선호되는 이야기는 사랑 이다. 러브스토리는 인류의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53

55 보편적 정서와 가치의 정수로 대접받는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 의 배경이 된 이탈리아 베로나는 이 유명한 러브 스토리를 현재화한다. 이탈리아 베로나 중심가 21번지에 지어진 13세기 벽돌 저택은 줄리엣의 집 이며 1972년 세워진 줄리엣의 동상은 줄리엣의 가슴을 한번 만지면 어떤 사랑도 이룰 수 있다 는 스토리텔링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 동상을 수 백 년 된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베로나를 찾아오는 외국 관광객의 한해 평균이 연간 550만 명으로 우리나라를 찾는 관광객 수와 비슷하다고 하니, 줄리엣 집과, 동상이 베로나에 미친 경제적 파급 효과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소설과 영화로 유명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의 배경이 되었던 미국 아이오와 주 메디슨 카운티의 로즈만 다리 에서는 모래 한 컵을 3,000원에 판매하고, 영화 여주인공의 집으로 사용된 프란체스카의 집 은 입장료가 1인당 5달러, 프란체스카 의 침대가 있는 호텔 객실은 하룻밤에 225달러를 받는다. 또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라는 이름이 붙은 향수, 장식품, 선물용품, 머그잔 등을 판매하고 있다. 일본 영화 러브레터 의 경우 영화 로케이션지인 삿포로의 오타루, 하코다데가 아시아 관광지로 인기를 구가하였다. 한때 청어 잡이로 북적대던 곳이었으나 지금 은 쇠락한 포구인 오타루는 한국에서 러브레터 가 상영한 1999년 6월을 기준으 로 아시아 관광객이 1,100명(1999년)에서 1,1800여명(2001년)으로 꾸준히 증가해 왔다. <로미오와 줄리엣>,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위대한 사랑에 대한 영원한 이야기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필요 불 가결한 것이다. 사랑 그 자체는 시장을 형성하지 않지만 사랑에는 의식이나 상징 이 수반되고 이에 대해 시장이 형성된다. 즉 사랑에 대한 상징 시장과 의식 시장 으로 나누어 산업적인 접근을 시도해 볼 수 있다. 에니메이션 산업과 스토리텔링 1989년 제작된 영화 <인어공주>는 침체일로에 들어선 디즈니 사를 일으켜 세우 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디즈니는 그리스 신화, 중국의 민담, 유명 동화에서까지 스토리텔링의 소재를 빌려와서 제2의 부흥기를 맞는다. 디즈니의 성공이 가능했던 것은 발달하는 컴퓨터 산업과 에니메이션을 결합하여 더 풍부한 효과를 내었다는 점이다. 픽사는 발전 중의 기술을 사용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는 에니메이션 제작사다. 스 티브 잡스의 참여로 더 유명해진 이 회사의 진보된 기술은 <인크레러블>, <니모를 찾아서>등에서 성과를 이뤘다. 이들의 성공에는 한번도 보지 않는 새로운 이야기 를 새로운 기술로 이야기 하려는 기업의 모토가 있었다. 픽사의 사옥 곳곳에는 스토리 코너 가 마련되어 있는데, 여기에 있는 문구 중 하나는 예술은 기술에 도 전하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불어 넣는다. 는 말이다. 에니메이션 조명 기술자는 5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56 시각적으로 최대한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조명 스토리텔러라는 관점을 가진다. 픽 사의 스토리, 캐릭터, 세계 는 스토리텔링의 3요소로 기술과 예술의 교합에 가교 역할을 한다. 드림윅스는 헐리우드에서 스토리텔링을 최대한 활용하는 제작사로 꼽힌다. 드림 윅스의 히트작 <슈렉>은 백설공주의 이야기에 대한 재 이야기화 로 시작한다. 드 림윅스는 전 세대를 아우르고 공감하는 가치를 스토리테링에서 찾았다. <쿵푸펜 더>, <마다가스카르>는 기존의 상식을 깨는 유쾌한 이야기다. 가장 좋은 이야기가 가장 좋은 에니메이션을 만든다. 는 모토가 스토리를 가다듬는 것이 최고의 스토리 라는 드림윅스의 경영방침에서 드러난다. 재이야기화 란 설득력있는 스토리와 공 감 가는 캐릭터를 토대로 지금, 여기 의 이야기로 바꿔 이야기함을 의미한다. 나. 국내 스토리텔링 활용 사례 지자체별 스토리텔링 지원체제 작가와 문학작품이 관광자원으로 각광을 받는 시대다. 평창군과 양평군의 문학 관광 프로그램 평창군은 작가 이효석 덕분에 연간 2백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여 1백억 원에 가까운 부가가치를 얻고 있다. 동백꽃 과 봄봄 의 작가 김유정을 내세운 문학 관광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춘천시는 내년 김유정 탄생 1백주년을 맞아 선생의 고 향인 신동면 실레마을에 오솔길 5km을 만든 뒤 구간별로 봄봄, 동백꽃 등 소설 제 목을 길 이름으로 붙이기로 했다. 문학 산책로를 주요 테마로 한 김유정 실레문 화마을 만들기 다. 양평군은 내년까지 114억 원의 예산으로 황순원문학촌-양평 소나기마을 을 조성한다. 두물머리에서 멀지 않은 서종면에 징검다리, 섶다리 개 울, 수숫단 오솔길 등 소설 소나기 의 주요 배경이 재현된다. 토지 의 무대인 하 동군 평사리에도 문학체험마을이 들어서며, 청송에도 객주 문학테마타운 조성이 추진되고 있다. 고창군에도 서정주와 그의 시 국화 옆에서 를 앞세운 국화축제가 큰 호응을 얻고 있으며, 남원시의 혼불문학마을도 머지않아 소기의 성과를 낼 것 으로 기대되고 있다. 스트랫포드 어펀 에이븐은 작가 셰익스피어만을 내세웠다. 도시는 굳이 작품을 거론하지 않아도 충분한 효과를 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잃거나 잊 지 말아야 할 것은 이미지보다 문학 본연의 향기, 일상에서 문학을 만나는 일이다. 전라북도내 스토리텔링 사례 전라북도와 14개 시 군은 관광객의 흥미와 재방문을 유도하기 위해 유명 관광자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55

57 원에 얽힌 감동적인 이야기를 발굴, 관광객에게 전달하는 관광자원 스토리텔링 마 케팅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전주시는 한옥마을과 음식, 전라감영 복원 문제 등에 서, 고창군은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스토리텔링 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완주군 은 한우테마파크 사업을 한우의 탄생과 성장, 죽음, 베풂의 단계로 나누고 스토리 텔링 사업을 구성하고 있다. 김제시는 일제강점기 농민들의 토지 수탈사를 극명하 게 드러낸 소설 아리랑 의 주요거점을 선정, 기행벨트를 조성하고, 스토리텔링을 개발하고 있다. 전북도도 각 지자체와 함께 모악산과 새만금, 전북의 문화유산 등 다양한 문화자원들을 스토리텔링화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전주와 음식 스토리텔링 오래된 맛일수록 그 맛에 얽혀 있는 사연이 많은 법. 전주의 음식점 중에서 가 장 많이 회자되는 이야기는 콩나물국밥전문점인 <삼백집>의 욕쟁이 할머니와 박 정희 대통령이야기 다. 박정희 대통령이 콩나물국밥을 먹으러 왔을 때 주인인 욕쟁 이 할머니가 이놈아! 누가 보면 영락없이 박정희인 줄 알겠다. 그런 김에 이 계란 하나 더 처먹어라 했다는 일화다. 이 이야기는 여러 매체를 통해 소개되었고, 다양 한 이본( 異 本 )을 만들면서 성장하고 있다. 이 이야기들은 물론 믿거나 말거나 라는 전제가 달려 있긴 하지만, 대통령이 욕 한 사발과 함께 먹었다는 전주 해장국 이 야기를 읽으면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온다. 현직 대통령을 면전에 두고 욕을 했다던 <삼백집> 할머니는 지금 이 세상 사람 은 아니지만 삼백집 이라는 옥호는 그대로 남아 같은 장소에서 영업을 하고 있고, 이 이야기는 나름대로 전설이 되고 있다. 콩나물국밥집인 <왱이집>은 명절에도 문을 닫지 않는 이유가 있다. 빚에 쪼들려 야반도주했던 한 가족과 관련한 사연이다. IMF 시절, <왱이집>을 찾은 어느 가족 이 숫자는 5명이었는데, 국밥은 2그릇만 시킨 것. 딱한 사정을 들은 사장은 식구 숫자에 맞춰 국밥을 내주었고, 콩나물 등을 싸주기도 했다. 그 가족은 형편이 좋아 지면 꼭 찾아오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아직도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왱이집> 명 절이면 그 가족을 기다리고, 그 가족과 같이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이들에게 식사 를 대접하기 위해 명절에도 문을 닫지 않는다. 3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전주비빔 밥을 파는 <가족회관>은 청와대의 선물로 채워져 온 김장아치 도시락 이나 경주 에 <가족회관>이 생긴 이유 등 여러 이야깃거리가 있다. 스토리텔링은 우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기필코 기승전결을 갖춰야 하거나, 대단한 의미를 내포해야하는 것도 아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의미를 공유하고, 호기심과 호감을 얻도록 하면 그만이다. 다른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고 싶도록 만들면 된다. 전주 음식점의 예에서 살펴봤듯이 사실, 곳곳이 스토리텔링이다. 5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58 남원과 춘향 스토리텔링 우리가 남원 하면 춘향 을 떠올릴 정도로 이야기의 힘은 강력하다. 이야기 속 춘향은 기생 월매와 사또 자제 이몽룡을 떠올리게 하고 이몽룡은 방자, 방자는 향 단이를 떠올리게 한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당시의 자연환경과 신분제도, 남원지 방의 문화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이야기가 단순히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고 자연과 인간의 삶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야기와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박제된 채 문헌에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남원이란 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 아가는 사람들뿐 아니라 타 지역의 사람들에게도 지역의 특색과 삶의 모습들을 보 여줄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남원은 그 명성에 걸맞게 판소리의 모태가 되는 옛이야기들이 여러 지역 에서 구전되고 있다. 현재 남원은 오래전부터 구비 전승되어 기록으로 정착된 옛 이야기를 활용하여 지역문화와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있다. 남원시는 이를 바탕으 로 지역문화를 전국에 알리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해마다 이와 관련한 풍성한 축제를 마련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매년 5월에 열리는 춘향제 다 년 처음 시작된 춘향제는 전국 축제 중 가장 오랜 연륜을 지닌 전통문화 축제로 서, 한국 여인의 사랑과 절개를 대표하는 춘향을 기리기 위한 전통문화예술축제로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남원을 대표하는 춘향제는 새로운 천년, 사랑과 희망의 세기를 상징하는 세계 사랑의 축제 로 창무극 춘향전, 춘향국악대전, 전국판소리 명창대회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와 춘향선발대회, 춘향일대재현전통길놀이, 전통목 기축제, 용마놀이, 남원농악 등 남원의 전통 민속을 느낄 수 있는 축제로 펼쳐진 다. 또한 춘향테마파크를 조성하여 그곳을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사랑가를 부르며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을 재현할 수 있는 체험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춘향제와 더불어 1993년부터 매년 음력 9월 9일이면 흥부제 를 개최하고 있다. 흥부제에서는 남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흥부마을 홍보하기 위해 창극 흥부전 공연, 흥부마을 탐방행사, 흥부학술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판소리, 마당극, 영화, 드라 마, 애니메이션, 발레, 뮤지컬, 게임, 그림, 시와 소설, 지역축제 등 다양한 장르로 확대된 춘향이야기 는 지역의 고유한 문화적 가치를 담고 있는 이야기가 보편성을 획득하여 문화콘텐츠가 될 수 있는 모범적인 사례를 제공한다. 다. 기타 스토리텔링의 육성 사례 캐릭터 산업의 육성 문화콘텐츠산업에서 특히 캐릭터산업의 비중은 막강하다. 캐릭터산업이란 어떤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57

59 대상물의 상징적, 성격적 가치가 상품화로 이어질 때 이것을 상업 활동에 맞게 응 용해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캐릭터산업으로 성공한 사례는 아기 공룡 둘리, 로 봇 태권 V, 홍길동, 고인돌, 영심이, 까치, 꺼벙이, 마루치 아라치, 오돌또기, 망치, 황대장, 용가리, 빛돌이, 도루묵, 까투리여사, 미키마우스, 라이언 킹, 미녀와 야수, 알라딘, 인어공주, 백설공주, 피노키오, 베트맨, 뽀빠이, 슈퍼맨, 원더우먼, 스누피, 심슨, 101마리의 개, 노틀담의 공주, 외계인 ET, 인형 텔레토비, 상어 죠스 등 이 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렇게 문화콘텐츠산업에서 캐릭터산업이 차지하는 중요 성을 생각한다면, 소설을 활용하여 캐릭터별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는 작업은 산업 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기반 작업이기도 하다. 이처럼 소설을 비롯한 문학텍스트 와 각 문화유산들은 수많은 문화원형을 가지고 있으며 조그만 세심하게 연구하고 자원을 투자하면 문화산업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국내의 스토리텔링 공모전 현황 전국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공모전 - 소재 : 인문과학적 소재 전반, 문화원형 - 부문 : 시나리오, 트리트먼트 - 주관 : (재)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관광 스토리텔링 공모전 - 소재 : 한류관광지, 한스타일 - 부문 : 시나리오, 동영상 - 주관 : 문화관광부 관광레저도시 스토리텔링 공모전 - 소재 : 관광지 - 부문 : 비영상부분, 영상부문(스토리보드, 만화, 플래시 파일 등) - 주관 : 한국관광공사 강릉단오제 스토리텔링 공모전 - 소재 : 강릉단오제 - 부문 : 시나리오, 영상, 만화 - 주관 : 사) 강릉단오제위원회 전국 도서 해양 문화콘텐츠 공모전 - 소재 : 도서 해양의 자연과 역사 문화 5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60 - 부문 : 멀티미디어 콘텐츠, 영상콘텐츠, 문화상품 - 주관 : 목포대학교 다도해문화콘텐츠사업단 4) 익산유적지구의 관광 스토리텔링 분석 문화유산 관광 스토리텔링은 문화유산 방문객에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도를 증진 시키는 설명적 성격에서 더 나아가 의사 촉진 수단이 되어야 한다. 즉, 관광 스토 리텔링을 통해 문화유산과 대화하며 지역과의 콘텍스트적 맥락을 호흡하는 참여자 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관광스토리텔링의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1) 관광스토리텔링의 의미 방문객과의 대화 채널 문화유산에 대한 방문객의 태도와 행동의 변화를 촉발시키는 글. 방문객의 호기심과 방문 동기를 유발시키는 홍보의 글. 방문객 스스로 문화유산을 답사하고 조사할 수 있게 하는 참여의 글. 방문객의 인식 변화를 유도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력과 통찰력을 신장시키는 글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고 보전해야 하는 당위성을 알리는 글 문화유산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간접경험의 글. 매체에 따라 적절한 표현을 사용하여 의미전달을 극대화 하는 글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향상 문화유산의 고유성과 역사적 가치를 교육시키는 글. 문화유산에 대한 영감을 높이고 더 많은 내용을 습득할 수 있게 끌어주는 글 (2) 익산 관광 스토리텔링의 현황 익산 관광 스토리텔링은 전국 규모, 지자체 주도, 개인 스토리텔링으로 나뉘어 진행하고 있다. 익산 관광 스토리텔링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학술적 정보 전달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익산시청에서 주도하는 관광스토리텔링은 오프라인 관광스토리텔링과 온라인 스 토리텔링으로 나뉜다. 오프라인 스토리텔링은 관광 안내서 발간, 익산역사유적지구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59

61 가이드북 발간, 리플렛 발간 등이며 온라인 스토리텔링은 익산시청 홈페이지를 중 심으로 진행하고 있다. 익산시청 관광 스토리텔링 분석 - 제목과 내용이 지나치게 학술적이어서 가독성이 떨어진다. - 쉽고 맞춤법에 맞는 표현으로 바꿔야 한다. - 향유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적절치 못한 표현이 있다. 익산시의 관광스토리텔링은 권역별, 관광명소별, 문화유산별 로 세분화되어 있으 며, 일정별 추천코스에 따라 분류화 되어 있다. 그러나 스토리텔링의 내용은 같다. 익산시 권역별 관광 스토리텔링 분류 ᄀ 미륵사지권역 : 미륵사지, 미륵사지 당간지주, 미륵사지 석등하대석, 미륵사 지석탑, 사자사지, 서동공원, 심곡사 대웅전, 심곡사칠층석탑, 익산토성, 태봉사 삼 존석불, ᄂ 왕궁리유적권역 : 왕궁리 유적, 왕궁리오층석탑, 제석사지, 고도리 석조여래 입상, 익산쌍릉 ᄃ 기타 : 웅포관광권역과 보석테마권역은 해당사항 없음. 권역별 관광 스토리텔링 중 미륵사지 당간지주에 대한 내용은 제목부터 지나치 게 학술적이다. 사찰 안에 보물 236호 2기의 당간지주 - 미륵사지 남쪽에 2기의 당간지주( 幢 竿 支 柱 )가 90m의 거리를 두고 서 있다. 당간지주란 절에서 불문을 나 나내는 문표( 門 標 ), 그리고 불교 종풍( 宗 風 )을 드러내는 종파의 기( 旗 )와 같은 역할 을 하였던 당( 幢 )을 걸었던 깃대의 지주( 支 柱 )를 말한다. 미륵사지에서는 당간지주 가 다른 가람에서와는 달리 서탑과 동탑에서 남쪽으로 약 90m를 두고 각각 하나 씩 두 기를 조영하였다. 이 동.서 당간지주가 위치한 지점은 동 서탑이 위치한 것 보다는 절터의 중심 쪽으로 가깝게 자리하고 있어 하나의 가람배치 계획 속에서 조영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관광스토리텔링이라고 하기엔 내용이 어려우며 맞 춤법에 맞지 않은 문장도 보인다. 다음은 왕궁리유적 권역의 익산쌍릉 관광스토리텔링의 예시다. 익산시 석왕동에 자리하고 있는 굴식 돌방무덤이다.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약 150m 사이에 자리 하고 있다. 이 무덤은 고려 충숙왕 13년 왜구의 노략질로 인하여 여러 차례 도굴되었는데 1917년 일인학자에 의하여 발굴이 실시되었다. 이 무덤의 형식은 크 기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부여 왕릉이 자리하고 있는 능산리 굴식 돌방 무덤과 같은 형식의 판석제 굴식 돌방무덤이다. 왕궁리유적 관광스토리텔링 은 미륵사지 당간지주에 비해 가독성이 좋은 편이다. 그러나 여전히 쉬운 표현으 6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62 로 바꿀 성이 강하며 왜구의 노략질 과 일인학자 라는 표현은 보편성을 띄어야 하는 관광스토리테링의 목적에 비해 특정 국가의 향유자를 고려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익산시 테마 여행 관광스토리텔링 분류 - 각각의 점들이 모여 하나의 의미있는 선으로 연결시켜야 한다. - 코스 중심의 제안은 방문객의 호기심을 높이지 못한다. - 방문객의 유형 및 목적에 적합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 문화유산에서 진행되는 매력적인 이벤트를 부각시켜야 한다. 테마 여행을 타겟으로 한 관광스토리텔링은 스토리(Story)보다 텔링(Telling)적 요소가 더욱 요구된다. 따라서 역사적 가치를 부각하기보다 방문객의 감성에 호소 하는 것이 좋다. 좋은 스토리텔링은 방문객의 유형 및 목적에 맞는 테마에 따라 재미와 흥미를 제공하고 나아가 방문객의 시야를 넓혀준다. 익산시청 홈페이지에 나타난 테마여행 메뉴는 일정별 추천코스, 수학여행코스, 역사문화답사, 종교문화답사, 체험여행, 익산둘레길여행, 7080 익산 추억 찾기, 익 산 100배 즐기기로 분류된다. 이중 7080 익산 추억 찾기 와 익산 100배 즐기 기 테마는 역사성과 대중성을 충족하고 있는 반면, 다른 테마는 분류에 그치고 있 다. 종교문화답사 테마 예시 3탑3금당 동양최대의 사찰 미륵사지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30대 무왕(600~ 641년)에 의해 창건되었고, 17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기 위한 호국 사찰로써 성격을 띠고 세워졌던 것 으로 여겨지고 있다. 미륵사는 백제가 망할 때 까지 왕실 사찰로 혹은 호국 사찰 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찰이었다. 이 글은 종교문화답사 코스인 미륵 사지 화산천주교/나바위성당 두동교회 숭림사 원불교총부 중 미륵사지 에 대한 관광스토리테링의 일부다. 익산시의 종교문화 테마는 종류의 다양성과 가 치가 높아 경쟁력이 있다. 특히 미륵사지는 익산역사문화유산의 핵심이라고 할 만 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 위의 스토리텔링에서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마는 호국 사찰 정도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설명으로는 방문객의 시야을 넓혀주기는 커녕 최초 천주교 전래지인 나바위 성당과의 관련성 및 종교문화 성지 로써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실패하게 된다. 테마 답사는 각각의 점이 개념처럼 모 여 하나의 의미 있는 선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위의 스토리텔링으로 익산시의 종교유산의 역사와 가치를 이해하는 데 미흡한 측면이 있다.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61

63 음식 스토리텔링 예시 7080 익산 추억 찾기 테마는 음식 스토리텔링이다. 음식 테마 스토리텔링의 특징은 개인 블로그 사이트와 연계시켜 방문객들의 스토리를 참여시킨 점이다. 첫 번째 음식점의 제목도 감각적이다. 불황속에 성황! 칼국수가 맛있는 집 00칼국수 00 칼국수집 주인아주머니는 한 번 들어온 손님은 자리가 없어도 절대로 내보 내지 않는다. 방문객의 연령층을 7080세대로 정하고 그들의 추억과 입소문을 지 역의 효과적인 홍보 스토리텔링으로 활용한 점도 지역 관광산업의 활성화를 기대 할 수 있는 점이다. 다만 소개된 음식이 칼국수, 만두, 막걸리, 분식, 중화요리 등 역사문화유산과 관련성이 적고, 소재지 또한 도심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 약점으 로 보인다. 역사문화유산 방문객에게 꼭 먹어봐야 할 음식으로 기억되기 위해선 다른 지역에는 없는 무언가를 스토리텔링해야 한다. 서동이 먹었던 마 와 관련된 음식테마를 발굴한다던지, 조선 최초의 음식평론집인 허균의 도문대작 과 익산의 음식문화 특징을 살펴본다면 방문객의 호기심과 지역음식문화의 자부심을 높힐 수 있을 것이다. (3) 익산역사지구 스토리텔링 분석의 시사점 가. 구술사 채록사업과 스토리텔링 이상으로 고도익산 지역과 근대익산 지역을 중심으로 한 스토리텔링 현황에 대해 알아보았다. 스토리텔링은 공간과 사건에 대한 진술이 지배적인 담화 양식이다. 이야 기를 중심으로 전달자와 참여자는 이야기의 생산자이자 동시에 수용자가 된다. 특히 관광 스토리텔링은 지역민의 정신과 정체성을 정립하는 피드백 효과를 갖는다. 따라 서 관광스토리텔링에서는 지역적 특징을 바탕으로한 이야기 제작보다 소통방식의 과 정에 무게 중심을 둔다. 단순히 이야기하기 가 아니라 공간에 기억된 문화체계를 구 현해 내어 공간을 기억하는 주체적 인식을 끌어내는 것이다. 구술사채록사업은 지역민의 주체적 인식을 발견하는 중요한 작업이었다. 구술사에 기초한 스토리텔링 산업개발은 고도육성사업의 발전방향과 동력을 확보하고 이에 기 반한 관광 문화콘텐츠를 구축하는 선순환적 단계 사업이다. 익산지역 구술사사업에 서 축적한 익산역사지구의 신화, 설화 등 문화원형에는 공주 부여의 백제 전통과는 다른 익산역사지구만의 보편적 정서가 담겨 있다. 따라서 고도익산지구의 사회민속 분야의 구술사를 통해 익산의 역사문화콘텐츠를 사례별로 스토리텔링 해야 할 필요 가 있다. 나. 서동스토리의 재구성의 필요 6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64 서동 스토리의 완결성 서동설화는 자체적 완결성을 지녔다. 이는 향가 서동요의 배경설화로서만이 아니라 익산 지역의 마을과 길, 연못, 샘 등에 두루 전승되어 오는 연기설화에서도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오래 된 연애담이, 역사적 증거를 지닌 유물 이 발굴됨으로써 도전 받고 있다. 2009년 1월에 미륵사지에서 발굴된 사리장엄에 미륵사지 창건을 주도한 인물이 무왕의 아내인 사택왕비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 다. <사리봉안기>에 의하면"우리 백제 황후께서는 좌평 사택덕적의 따님으로, (중 략) 능히 정지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중략)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 이를 통해서 기존의 서동설화를 재고해야 할 만한 역사적 사실로 드러난 것은 크게 아 래의 두 가지이다. ᄀ 미륵사를 창건할 시기(무왕 사망 2년 전)에 백제무왕의 아내 (정비)는 사택덕적의 딸 즉 사택녀였다. ᄂ 사택왕비가 땅을 희사하여 절(미륵사)를 짓고 여기에 사리를 봉안했다. 서동 스토리의 설화와 역사적 사실과의 거리 그러나 설화와 역사적 사실을 대립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문학작품의 배경설화가 된 무왕의 로맨스는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 것이며 역사적 증 거에 의해서 도전받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설화와 사실 사이의 거리는 언 제 어느 경우라도 존재한다. 이것이 오히려 설화를 설화답게 하는 요소가 된다. 설 화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했으되 거기에 당대 민중들의 염원과 상상력이 덧입 혀져서 정착,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이다. 설화의 역사적 진위 여부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일이다. 예를 들면, 단군이나 박 혁거세 설화, 인류사의 모든 구비마다 존재하는 인신공희( 人 身 供 犧 ) 설화 등을 두 고 역사적 사실 여부를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서동 스토리텔링의 지속성의 문제 또한 문화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의 진위여부를 바탕으로 삼는 게 아니다. 서 동설화는 당대 민중들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진정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1500년을 살아남아 전해온 노랫말이 이를 입증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현대의 대중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남길 만한 요소를 갖 추고 있는지의 여부를 살펴봐야 한다. 사택왕후의 반영웅성 그런 점에서 역사적 실체를 지닌 인물로서의 사택왕후는 설화의 평면성을 보완,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장치가 된다. 서동설화에서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 서동이 왕으로 추대되기 이전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면, 사리장엄기의 내용 은 왕으로서의 위업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한 두 여인 제1장 고도익산의 역사, 인물, 문화, 관광자료조사_박태건 63

65 의 등장으로 인해서 무왕의 사랑 이야기는 훨씬 입체적이고 극적인 요소를 갖추게 된 셈이다. 새로운 스토리텔링 개발의 필요성 따라서 기존의 서동요 관련 스토리테링이 무왕-선화공주 의 구도에 머물러 있었다면 사택왕후-무왕-선화공주 를 둘러싼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개발이 필요하 다. 때마침 곽병창 교수의 칸타타는 이러한 사실에 기반하여 창작된 시놉시스다. 사택왕후의 이야기를 담은 스토리텔링는 기존의 스토리보다 훨씬 매력적인 으로 어필할 수 있다. 이에 드라마, 영화, 뮤지컬 등의 음악극, 정극 그리고 유적지 주 변의 체험관광용 콘텐츠를 비롯한 여러 갈래의 문화상품들에도 새로 개발되는 스 토리를 적극 적용할 필요가 있다. 6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66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 1)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 관광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지방이나 다른 나라에 가서 그곳의 풍경, 풍습, 문물 따위를 구경함 이다. 그러나 오늘날 관광은 단순히 지역의 풍경이나 풍습 그리고 문 물 따위를 구경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관광은 세계 최대의 단일 산업인 동시 에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더욱이 여가활동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주 5일제 근무가 정착화 되면서 관광형태와 관광욕구는 다변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관광객들의 인식 변화와 관광을 통한 삶의 질 향상 욕구가 더욱 복잡화될수 록 새로운 관광 상품에 대한 요구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관광 상품에 대 한 요구에 발 맞춰 관광을 매개로 한 체험 관광, 생태 관광, 문화 관광 등이 새로운 관광 상품으로 급부상 하고 있다. 관광 상품은 기존 풍경, 풍습, 문물 에서, 다양한 산업간 융복합 의 관광 상품의 등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산업간 융복합 관광 상품을 누가 먼저 개 발하느냐가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품 개발을 통해 관광객 들을 흡인하기 위한 도시간의 경쟁 역시 더욱 치열해 지고 있다. 산업간 융복합 관광 상품은 단순한 상품의 제공 차원을 뛰어넘어, 관광객들에게 차별화 되고 전문화된 잠재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관광 상품의 제공으로 이어져 야 한다. 차별성이 없는 상황에서 도시간의 경쟁은 무의미하다. 예컨대 익산만의 도 시 정체성을 찾고, 확립하여 익산만의 독특한 장소성 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그 리고 익산의 최대의 경쟁력은 바로 역사ㆍ문화 자원이다. 관광 자원은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그 효용 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 비슷한 유적과 문화를 가진 도시들도 각 도시가 가지고 있는 관광자원을 어떻게 이용하고 이미지화 시키느냐에 따라 관광객들의 관광매력성이 크게 차이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역사ㆍ문화 자원의 이미지화 를 통한 상품화 이다. 관광자원이 관광을 이 루는 중요한 자원이라면, 이미지화 를 통한 상품화 는 관광객들이 관광지를 선택하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65

67 는데 있어서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품화 는 이야기(스토리)를 포 함시키고 있는 관광자원의 잠재력을 현재화 시키는 전략이다. 바로 관광자원의 잠재 력을 현재화 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유용한 수단은 바로 스토리텔링 이다. 관광 스토리텔링을 진행하기 앞서 선행되어야 할 과제가 있다. 바로 관광자원의 잠재력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지표개발이 그것이다. 그동안 익산의 많은 유적에 대한 지표개발이 시도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지표개발들은 단순히 조사의 차원을 벗어나 지 못했다. 특히 역사학 관점에서 시도된 지표개발은 관광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 라 학술연구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역사학 관점에서 시도된 지표 개발은 결과적으로 관광객 유입 전략까지 나아가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지표개발 이란 도시가 가지고 있는 자원들을 어떻게 포장하고 상품화 하느냐가 관건이다. 익 산의 유적자원을 관광 권역화하고, 테마를 개발하고, 스토리텔링이라는 옷을 입힐 때 관광객들의 관광 매력성을 향상 시킬 수 있는 이미지 화가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 화는 관광객 흡인에 효과적 방안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 화의 첫 걸음 이 바로 지표개발이다. 그렇다면 익산의 지표개발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우선 익산이 가지고 있는 제일 큰 경쟁력이 바로 유적자원이다. 특히 백제의 다른 고도( 古 都 )라 할 수 있 는 공주ㆍ부여에 비해 익산이 갖고 있는 유적자원은 타 지방의 그것과는 내용적ㆍ숫 자적으로 압도한다 할 수 있다. 또한 유적자원은 고도( 古 都 )를 제외한 타 도시들이 모방할 수 없는 경쟁력이다. 오래전부터 보존되고 내려온 유적자원은 단 시간에 흉 내 낼 수 없는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익산의 지표개발은 이러한 유적자원의 잠재력을 발휘하고, 그 잠재력을 바탕으로 관광객들의 관광 매력성을 끌어올리는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익산의 수많은 유적자 원들은 다른 도시의 관광 자원들과 차별화되는 소중한 관광 자원이다. 그리고 이러 한 소중한 관광 자원에 이야기(스토리)라는 옷을 입혀 각 유적들이 갖고 있는 특성을 부각시킨다면 익산은 단순한 관광의 도시 가 아니라 문화 관광의 도시 로 발돋움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2장에서는 익산의 유적자원에 대한 지표개발을 시도할 생각이다. 우선 익산의 유적자원을 분석하는데 지표개발은 시작된다. 익산의 중요 유적들을 구역별, 시기별 로 먼저 정리할 생각이다. 그 뒤 각 유적이 갖고 있는 특징을 정리할 것이다. 이러한 정리를 통해 익산의 유적자원의 이야기(스토리)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이다. 지표개발을 위한 첫 번째 단계로 <익산 스토리텔링 자원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기존 관광산업은 하드웨어 중심의 물리적 개발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관광객들의 욕구가 다양해짐에 따라 관광자원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다. 특히 관광 자원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개발함으로써 점차 다양화되어가고 다각화되어가는 관광객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때 비로소 관광자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이 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스토리텔링은 단순히 물리적 개발방식을 6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68 뛰어넘어 소프트 콘텐츠 중심의 관광개발을 가능케 한다. 소비자의 상상력을 자극하 고, 이를 상품화로 연결시킬 경우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이에 익산의 문화ㆍ 역사 콘텐츠를 정리 및 발굴하기 위해 익산의 스토리텔링 자원을 분석할 필요가 있 다. 이어 <권역별 자원분류>를 진행할 것이다. <권역별 자원분류>는 단순한 행정 권역 의 경계선이 아니라, 앞에서 파악한 <익산 스토리텔링 자원분석>을 바탕으로, 다양 한 권역을 설정하는 것이 목표이다. 특히 이야기(스토리) 바탕의 권역 분류를 통해 흩어져 있는 문화재에 장소성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해당 권역에 단일한 인상을 부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테마별 자원분류>는 권역을 중심으로 한 관광 상품 개발과 더불어 테마와 권역을 유기적으로 접목시킨 관광 상품 개발에 그 목적이 있다. 특히 관광 문화가 유흥에서 체험형ㆍ콘텐츠 집중형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테마 개발을 통해 관광 객들의 관광 매력성을 증진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 1. 익산 스토리텔링 자원 분석 익산은 미륵사지 석탑을 비롯한 왕궁유적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30여 년 전 1970년대만 하더라도 수도였었다는 견해는 거의 없었다. 부여와 공주가 백제의 수도로써 주목을 받던 시기에도 익산은 백제에 대한 중심에서 늘 벗어나 있던 지역 이다. 부여가 660년 의자왕 20년 나당 연합군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게 된 백제의 마 지막 수도로 알려진데 비해 익산은 익산 시민들조차도 익산과 백제의 도읍과 연관지 어 생각하려는 인식을 갖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김상룡, 고도익산 유적의 세계 문화유산 등재추진에 즈음하여, 세계문화유산 등재추진의 의미와 향후 과제, 마한 백제연구소, 2007) 그러나 익산과 백제의 도읍과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가 진행될수 록 고도( 古 都 )익산이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미륵사에 대한 삼국유사 의 기록, 왕궁리 유적에 대한 연구 그리고 원광대학교 마한백제연구소의 입점리고분 발굴이 백제 고도( 古 都 )익산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미륵사의 경우 삼국유사 의 기록을 통해 무왕에 의해 창건된 국찰( 國 刹 )로 밝혀졌 다. 왕궁리 유적의 경우 무왕의 천도 예정지나 별궁의 개념에서 설명하면서 무왕(서 동)과 익산의 관계에 집중하려는 시각이 주를 이루었지만, 왕궁리 유적의 정밀 조사 와 더불어 입점리고분 발굴을 계기로 5세기 후반 익산과 백제와의 관계를 밝히는 단 초를 제공하기 이른다. 그리고 1970년대, 중국 육조시대( 六 朝 時 代 )에 편찬된 관세음 응험기( 觀 世 音 應 驗 記 ) 에 익산이 백제의 천도지로 언급된 것이 밝혀지면서, 익산은 고도( 古 都 )로써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본격적으로 익산이 고도( 古 都 ) 로써 일반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이후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67

69 이다. 2004년 고도보존에 관한 특별법 이 국회에서 통과됨에 따라 익산도 경주, 공 주, 부여와 같이 고도( 古 都 )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도보존에 관한 특별법 에 의한 고도( 古 都 ) 지정은 익산의 관광 사업에 큰 기회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 하였듯이 불과 30여년 전만 하더라도 익산을 백제의 고도( 古 都 )라고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고도보존에 관한 특별법 이후 익산은 고도( 古 都 )로써 주목을 받고 있으며, 지방의 중소도시가 역사 문화 도시 로써 주목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역설적으로 고도( 古 都 ) 익산에 대한 무관심 덕분에 익산은 리-모델링(Re-Modeling) 이 아니라 모델링(Modeling) 이 가능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델링의 첫 단계가 바로 지표개발이다. 그렇다면 익산의 유적자원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우선 현재 익산시는 남서부의 영등동과 부송동, 남중동, 신용동, 신동 등이 중심지역으로서 익산의 발전을 주도하 고 있다. 또한 익산역을 중심으로 마동, 동산동 등이 구( 舊 ) 시가지를 이루고 있다. 익산의 유적지구는 금마면ㆍ왕궁면을 중심으로 구역화 되어 있다. 그러나 금마면ㆍ 왕궁면을 제외한 지역에서도 원삼국, 백제, 신라, 통일신라의 유적들이 존재한다. 그 렇기 때문에 금마ㆍ왕궁면에 그 지리적 경계선을 긋는 것보다 시기적인 요소를 검토 한 뒤 익산 유적의 지정학적 범위를 설정하고, 그 범위를 바탕으로 <권역별 자원분 류>를 해야 할 것이다. 번호 분류 문화재 소재지 시대 1 국보 11호 미륵사지석탑 금마면 기양리 백제 2 국보 123호 왕궁리 오층석탑 발견유물 국립전주박물관 3 국보 289호 왕궁리 오층석탑 왕궁면 왕궁리 4 보물 45호 연동리 석불좌상 삼기면 연동리 5 보물 46호 고도리 석불입상 금마면 동고도리 6 보물 236호 미륵사지 당간지주 금마면 기양리 신라 7 보물 1753호 미륵사지 금동향로 미륵사지 유물전시관 통일 신라 8 사적 87호 익산 쌍릉 석왕동 백제 9 사적 92호 익산 토성 금마면 서고도리 10 사적 150호 미륵사지 금마면 기양리 11 사적 347호 입점리 고분 웅포면 입점리 12 사적 405호 익산제석사지 왕궁면 왕궁리 13 사적 408호 왕궁리유적 왕궁면 왕궁리 14 지방유형문화재 12호 태봉사 삼존석불 삼기면 연동리 6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70 15 지방기념물 12호 미륵산성 금마면 신용리 16 지방기념물 13호 낭산산성 낭산면 낭산리 17 지방기념물 14호 백제토기도요지 금마면 신용리 18 지방기념물 70호 금마 도토성 금마면 서고도리 19 지방기념물 98호 웅포리고분 웅포면 웅포리 20 지방기념물 104호 사자사지 금마면 신용리 21 지방기념물 105호 율촌리고분군 황등면 율촌리 원삼국 22 문화재자료 143호 미륵사지 석등 하대석 금마면 기양리 백제 23 문화재자료 173호 어래산성 웅포면 입점리 24 향토유적 1호 영등동유적 영등동 원삼국 25 향토유적 2호 제석사 폐기장 유적 왕궁면 왕궁리 백제 <표 : 익산지역 대표 유적 현황 > -원삼국, 백제, 신라, 통일신라시대를 중심으로- 위의 <표>를 살펴보면 익산에 분포되어 있는 원삼국~통일신라 시기의 대표 유적은 총 25개이다. 특히 미륵사지(금마면 기양리)와 왕궁리유적(왕궁면 왕궁리)를 중심으 로 분포되어 있다. 다만 일부 중요 유적은 삼기면과 웅포면에도 분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유적 분포를 미루어 살펴본다면 고도( 古 都 )로써 익산의 정의는 금마와 왕궁을 중심으로 삼기와 웅포에 해당된다. 또한 원삼국 유적이 분포되어 있 는 황등면의 율촌리 고분군 역시 고도( 古 都 )의 유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삼국 유적이 익산에 분포되어 있다는 것은 초기 철기 시대부터 익산이 문화의 중심지였다 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익산을 중심으로 원삼국 문화가 마한ㆍ백제시대 역사와 연 결되어 계승 발전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황등면 율촌리 고분등 원삼 국시대의 유물에 대해 좀 더 깊은 관심이 필요한 것이다. 이에 좀 더 자세한 지역별 유적 분포 및 해당 시기는 다음 <표>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69

71 시대 분류 소재지 원 삼 국 백제 신라 통 일 신라 국보 보물 사적 지 방 유 형 문 화 재 지 방 기 념 물 문 화 재 자 료 향 토 유적 금마면 왕궁면 삼기면 낭산면 1 1 웅포면 황등면 1 1 석왕동 1 1 영등동 1 1 <표 : 구역별 유적 분포 현황> 위의 표에서 살펴보았듯이 원삼국~통일신라시대에 해당되는 익산의 유적은 금마면 과 왕궁면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수치화는 지정문화재에만 해당되는 것으로써 비지정문화재에 대한 꼼꼼한 분석이 어렵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에 익산의 비지정문화재 역시 우리가 익산의 유적으로 조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러한 조사는 <권역별 자원 분류> 및 <테마별 자원 분류>에 활용 될 것이다. 1) 설화( 說 話 )와 유적 스토리텔링 자원 축실지, 마룡지, 용샘, 오금산, 미륵사지, 사자사, 제석사, 서동요 연동리 석불좌상, 고도리 석불입상, 숭림사, 뜬바위 축실지, 마룡지, 용샘은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용정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축실 지는 마룡지, 용샘과 연결되어 서동설화가 전해지는 곳으로 서동이 어머니와 살던 생가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마룡지는 서동의 비범한 탄생이 전해지는 곳이다. 서동의 어머니는 마룡지에서 용 과 결합하여 서동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용샘은 서동이 어려서 그 홀어머니와 같이 살던 집터에 있는 우물이라는 이야기와 그 우물에서 용이 솟아 올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오금산은 서동 생가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산이다. 오금산은 익산토성이 위치하 고 있는 산으로 서동이 어릴 때 마를 캐러 다녔던 곳으로 전해진다. 축실지, 마룡지 7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72 에서 북쪽으로 약 400~500M 떨어져 있으며, 서동이 오금산에서 황금을 채굴해 선화 공주를 얻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사자사지는 미륵산 정상 밑 해발 370M에 위치하고 있다. 사자사지에 대한 스토리 텔링 자료로는 사자사 지명법사의 신통력과 관련된 설화들이다. 우선 첫 번째 설화 는 서동이 오금산에서 채굴한 황금을 지명법사의 신통력으로 하룻밤에 신라로 옮겼 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그리고 두 번째 설화는 미륵사를 창건할 때 지명법사의 신통 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헐고 못을 메웠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이 창건한 백제 최대ㆍ최고의 사찰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 창 건설화는 다음과 같다. 백제 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 獅 子 寺 )에 행차하였을 때 용 화산( 龍 華 山 ) 아래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 彌 勒 三 尊 )이 나타났으므로, 수레를 멈 추고 경의를 표하였다. 왕비가 왕에게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청하였으므로 지명법사 ( 知 命 法 師 )의 도움으로 못을 메워 절을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제석사는 왕궁면 왕궁리 궁평마을 소나무숲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제 무왕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제석사는 백제 무왕( 武 王 :?~641)이 도읍을 왕궁평으로 옮길 계획을 추진하면서, 왕궁 부근에 창건한 것이다. 이곳은 제석천을 모시면서 왕실의 번영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던 내불당인 셈이다. 백제 무왕대에 익산천도의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왕궁평 유적과 관련되어 있다. 이 절의 창건에 관해서는 관세음응험기( 觀 世 音 應 驗 記 ) 에 나타나 있는데,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639년(무왕 40)에 중창된 것을 알 수 있다. 관세음응험기 따르면 제석사는 벼락으로 폐사되었다가 다시 지 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탑 아래 심초석에 넣어 두었던 불사리와 동판 금강반야경 을 넣었던 칠함이 보존되어 있어, 이를 안치하기 위함이었다. 이 밖에 무왕과 관련된 대표적 설화로써 서동요 가 있다. 서동요는 무왕을 관통하 는 대표적 설화이다. 서동요의 간략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왕이 어릴 때 신라 진 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를 사모하여, 머리를 깎고 중과 같이 변장을 한 뒤, 신라 서울 에 와서 마( 薯 )를 가지고 성 안의 아이들에게 마를 주며 노래를 부르도록 하였다. 노 래 내용은 선화공주가 밤마다 몰래 서동의 방을 찾아간다는 것이었는데, 왕이 이 노 래를 듣고 선화 공주를 귀양을 보냈다. 이에 서동이 선화를 맞이하여 백제로 돌아가 후에 서동은 임금이 되고, 선화공주는 왕비가 되었다는 설화이다. 이상은 무왕 중심의 설화 유적들이다. 비록 일부 유적은 그 설화적 배경이 빈약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위 유적들은 무왕의 탄생과 전성기 그리고 죽음을 같이 했다 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위에서 열거한 유적들이 설화 에 기초함은 물론 여러 문헌에서 이와 관련한 스토리텔링 자료들을 찾을 수 있다. 이에 이 유적들은 스토리텔링과 관련해서 다른 지정문화재보다 그 기초가 탄탄하다 고 볼 수 있다. 특히 무왕의 탄생-전성기-죽음에 이르기까지 무왕의 일생과 설화 유 적들과 그 궤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를테면 무왕을 중심으로 다 양한 권역분류, 관광테마개발에 스토리텔링을 응용한다면 하드웨어 중심의 물리적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71

73 개발 방식을 극복하고, 소프트 콘텐츠 중심으로 다양한 개발이 가능할 것이다. 설화 유적들에는 무왕 중심의 유적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익산의 많은 유적들에 는 다양하고 재미있는 설화가 발견된다. 연동리석불좌상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 說 話 )가 전해지고 있다. 첫 번째는 왜군의 행군을 막아냈다는 설화이다. 연동리석불좌상은 정유재란 당시 왜장 가등청정( 加 藤 淸 正, 가토기요마사) 금마와 여산을 지나 한양으로 진격할 시 안개를 퍼트려 왜군의 진 격을 막아냈다는 설화를 갖고 있다. 두 번째는 나라가 어지러울 때 땀을 흘린다는 전설이다. 이 석불좌상은 국가적 흉사 때마다 미리 땀을 흘려 경고를 한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석불좌상이다. 고도리 석불입상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도리에는 두 석불이 서 있 는데, 서쪽의 석불은 남자이고, 동쪽의 석상이 여자이다. 그런데 이 두 석상 사이에 는 옥룡천( 玉 龍 川 )이 흐르고 있어서, 두 남녀는 평상시에는 서로 만나지 못한다. 그 러다 섣달 그믐날 밤 자정에 옥룡천이 얼어붙으면, 두 석상이 서로 건너와 만난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새벽에 첫 닭이 울면 헤어져 1년을 기약한다는 민담이다. 숭림사 설화는 다음과 같다. 고려 충목왕 때 왕비 몸에 난 등창으로 고생을 하였 는데, 어느 날 왕비는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왕비는 어느 사 찰에 머무르며 병을 고쳤고, 꿈에서 깬 왕비는 꿈에서 나타난 사찰의 모습과 산세를 통해 절을 찾았다. 그리고 왕비가 찾은 절이 숭림사였으며, 왕비는 숭림사에서 자신 의 몸을 바쳐 관음보살에게 일주일간 기도를 드렸다. 마지막 기도를 드리던 날에 왕 비는 향긋한 향기에 취해 잠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왕비에게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와 자신의 몸에 난 등창을 핥아주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잠에서 깬 왕비는 자신의 등창을 확인해 보니, 등창이 깨끗이 나은 채 미묘한 향내음이 풍기것 을 느꼈다. 이에 궁궐로 돌아간 왕비는 그 이후 숭림사에 전답을 하사하고, 왕실의 원찰로 삼았다는 민담이다. 금마면 구룡마을에 위치하고 있는 뜬바위는 미륵산에 살던 힘센 장수가 이곳을 지 나가다가 근처의 바위를 발견하고 그걸 집어 올려 다른 바위 위에 올려 놓았다는 이 야기가 전해진다. 바위의 윗돌에는 장수가 오줌을 싸서 흘렀던 골과 가위를 놓았던 가위자리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뜬 바위는 평소 윗돌과 밑돌이 닿아 있지만, 섣달 그믐날 자정이 되면 사이가 떠서 동네 사람들이 명주실을 양쪽 끝에 잡고, 바위 사 위를 통과하면 실이 끊어지지 않고 통과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상은 익산의 설화와 유적들이다. 모든 유적들이 설화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관방유적이나 능묘유적과 같은 경우엔 유적의 목적상 설화를 갖고 있는 경우 가 적다. 다만 관방유적이나 능묘유적의 발굴과 수습 유물을 통해 이야기(스토리)를 유추할 수 있다. 명확한 설화를 가지고 있는 유적이 리모델링의 작업이라면, 유추와 연구가 필요한 유적은 모델링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본 장에서는 설화를 중심 으로 유적을 설명하였지만, 권역별 자원분류와 테마별 자원분류를 통해 다양한 유적 7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74 에 그 의미와 이미지를 메이킹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미지 메이킹에는 당 연히 유적의 갖고 있는 본질을 벗어나지 않은 이야기를 발굴하고, 스토리텔링화가 가능하다. 또한 기존 설화를 갖고 있는 유적들 역시 각 권역ㆍ테마의 중심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 유적 스토리텔링 자원 왕궁리 유적, 쌍릉, 성남리 고분군, 오금산성, 낭산산성, 웅포리 고분군, 입점리 고분군 왕궁리 유적은 현존하는 백제시대의 궁성유적이다. 또한 무왕의 익산 천도의 배경 유적이다. 왕궁리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왕궁리 유적이 무왕 익산 천도의 배 경이 되는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왕궁리 유적 발굴을 통해 백제 왕궁 정원의 모습도 복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쌍릉은 고도( 古 都 )의 4대 조건 중 하나인 왕릉이 익산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고 도 익산을 접근해 나아가는데 빠뜨릴 수 없는 유적이다. 쌍릉은 두 기의 봉토분이 존재하는데, 대왕릉에 무왕이 잠들고 소왕릉에는 선화비가 잠들고 있을 가능성이 높 다. 쌍릉은 발굴 조사를 통해 무령왕릉과 같은 재질의 목관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 다. 이로써 피장자의 신분이 증명되었다. 쌍릉은 다양한 테마로 개발이 가능한 곳이 다. 특히 무왕과 선화가 같이 잠들고 있다는 것은 사랑 테마 설정이 가능한 유적이 다. 익산의 군사적 요충지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은 오금산성과 낭산산성이다. 무왕은 재위 41년 동안 약 12회에 걸쳐 신라 공격을 감행하였다. 익산은 군사적 요충지로써 다양한 관방유적들을 전투에 활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관방유적을 이용하여 답성놀 이 테마나 투석전 테마로 개발이 가능하다. 웅포리 고분군과 입점리 고분군은 익산 지방세력의 위상을 추정할 수 있는 대표적 유적이다. 특히 분묘유적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익산의 주얼리산업과 연개하여 설명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입점리 고분군의 경우 입점리 고분 전시관을 통해 학 습 관광에도 적극 활용 될 수 있다. 3) 창조적 문화 스토리텔링 자원 백제 왕궁 정원(왕궁리유적), 옥룡천, 편백나무숲길, 대나무숲길 투석전, 기세배, 답성놀이 왕비-주얼리산업-여성친화도시 창조적 문화 스토리텔링 자원으로는 자연자원 스토리텔링 자원과 주민/관광객 참 여형 스토리텔링 자원이 있다. 특히 창조적 문화 스토리텔링 자원은 기존 하드웨어 중심의 관광 테마 개발에서 탈피해 소프트웨어 중심의 관광 테마를 개발하는데 유용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73

75 한 자원이다. 이는 전통적 스토리텔링 자원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기존 유적 중심의 스토리텔링 자원의 경우 기존 유적들의 활용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창조 적 문화 스토리텔링 자원은 유적자원의 숨은 이야기를 끌어내고, 관광객들의 흥미를 자극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관광객들의 흥미자극은 관광 매력성과 직접적으 로 연관되어 있으며, 다양한 체험ㆍ볼거리를 제공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익산은 북으로는 금강, 남으로는 만경강, 동으로는 미륵산과 시대산에 둘러싸인 형 국을 취하고 있다. 또한 금강과 만경강의 농수를 이용한 금만평야는 호남 최대의 곡 창지역을 형성하고 있으며, 금강과 만경강은 서해로 나아갈 수 있는 해상왕국의 물 길을 만들어 준다. 또한 익산은 다양한 숲길과 물길이 조성 및 복원중이다. 우선 익 산의 대표적 자연자원으로는 현재 복원중에 있는 옥룡천이 있다. 옥룡천의 경우 금 마 시가지부터 고도리 석불입상까지 2.4Km의 구간을 복원하여 옛 물길을 찾고 있 다. 대표적 숲길로는 성당면 두동마을의 편백나무 숲길과 금마면 구룡마을의 대나무 숲길이 존재한다. 특히 구룡마을 대나무숲길에는 흥미로운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뜬 바위가 자리잡고 있어서 권역 개발에 유용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주목해야 할 자 연자원으로써 왕궁리 유적을 꼽을 수 있다. 왕궁리 유적은 백제 유일의 왕성 유적이 다. 또한 왕궁터 내에서 백제 최고의 정원 유적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왕궁리 유적 에서 발견된 정원 유적은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왕궁 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 한 왕궁 정원을 복원한다면, 익산은 유일한 백제 왕궁 정원을 복원한 도시가 되는 것이다. 특히 2013년 <순천 정원 박람회>의 성공적 개최와 담양 <소쇄원>의 경우 년 평균 20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할 정도로 정원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뜨겁다. 요 컨대 익산은 유일한 백제 왕궁 정원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체험형 스토리텔링 자원들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체험형 스토리텔링의 자원 으로는 기세배놀이, 용왕제, 삼기 지게 목발놀이, 투석전 등이 있다. 기존 관광자원 은 하드웨어 중심의 개발에서 탈피하지 못했다. 체험형 스토리텔링 자원은 소프트 콘텐츠 자원의 개발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인문사회학적 관광 자원의 대표적 룰모 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기세배나 용왕제 그리고 삼기 지게목발 놀이는 익산이 전통적 농경( 農 耕 )ㆍ어업( 漁 業 )사회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투석전의 경우 익산의 관 방유적인 산성을 중심으로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익산에는 많은 산성이 존재한다. 산성들을 이용하여 군사적 요충지로써 고도( 古 都 ) 익산을 강 조하고, 투석전 재연으로 체험형 관광 테마를 개발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투석전뿐만 아니라 답성놀이 테마 역시 익산의 여러 산성을 이용한 관광테마로 개발될 수 있을 것이다. 답성놀이 테마의 대표적 예는 고창읍성이 있는 데, 익산 역시 산성을 이용한 스토리텔링을 진행한다면 답성놀이 테마를 개발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익산이 표방하고 있는 여성친화도시의 이미지 재고에 걸맞은 스토리텔 링 자원이다. 익산은 왕비의 도시이다. 우선 대표적으로 선화공주가 있다. 선화공주 7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76 의 경우 익산을 대표하는 왕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단종비인 정순왕후도 본가가 익산이다. 마지막으로 숭림사 설화의 주인공인 충목왕비 역시 익산과 관계한다. 이렇 게 백제-고려-조선을 관통하며 익산은 각 시대의 왕비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도시이다. 또한 익산은 주얼리산업의 메카이다. 즉 왕비들과 주얼리산업을 결합시킬 수 있는 테마가 가능한 것이다. 흩어져있는 자원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대표적 방법이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이러한 테마를 개발한다면 왕비-여성친화도시-보석 을 스토리텔링을 이용해 하나로 묶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 권역별 자원 분류 관광지는 자연적 또는 문화적 관광자원을 갖추고 관광객을 위한 기본적인 편의 시 설을 설치하는 지역을 뜻한다. 특히 노동시간이 단축되어 여가시간이 늘어났고 도시 화 현상으로 위락공간이 감소되는 등 복잡한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의 다원화로 여가 활동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차츰 높아져 감에 따라 관광활동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 에 관광은 일상생활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성 회복과 보다 나은 사회, 문화창조를 위 한 기본조건으로서의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최근의 관광개발은 자연자원을 활용하여 경관미를 감상하고 휴식을 즐기는 데 필 요한 시설을 갖추어 주는 것과 함께 문화자원의 발굴ㆍ보존으로 문화역사를 감상할 수 있도록 다양한 역사유적지 등의 발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에 관광 자원을 분류하고 테마를 개발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본 장에서는 익산시 문화의 권역별 자원을 분류하려 한다. 권역별 자원분류의 경 우 익산의 유적 분포를 바탕으로 진행 된다면 거점 중심의 관광 상품 개발에 큰 역 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권역이란 한정된 지역범위, 지역의 한 부분을 뜻하는 일반적인 내용을 갖는 용어 이다. 특히 권구조( 圈 構 造 )를 갖는 지역이나 결절지역( 結 節 地 域 )의 성격을 갖는 지역 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경우에 권역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따라서 권역이란 중심 지와 그 기능이 미치는 범위를 뜻하므로 사상( 事 象 )의 단순한 분포에 의하여 규정짓 는 지역과는 그 성질을 달리한다. 즉 권역은 어느 종류의 통일성을 갖는 기능지역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권역은 어느 한 시점으로 볼 때 인간생활의 공간적 범위를 발 견하여 인간생활의 복지와 편의를 위해 합리적으로 적정화한 지역으로 정의된다. 따 라서 권역은 변천성을 지니며 궁극적으로는 지역을 근거로 성립된다. 관광권역 설정은 기존관광자원 및 새로운 관광자원을 개발ㆍ보존하고 관광객의 관 광동기와 관광욕구충족을 위한 관광활동의 합리적 수용뿐만 아니라, 기능이 다른 소 권역별 관광자원을 공간적으로 구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또한 각 지역에 적합한 개발의 방향과 관광자원의 합리적 개발, 보존, 관리 및 이로 인한 관광효과를 기대하 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75

77 이러한 관광권역의 설정은 흩어져 있는 관광 자원에 장소성이라는 의미를 부여하 고, 해당 권역에 단일한 인상을 부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특히 해당 지역의 문화 재에 분포를 분석하여 단일한 권역으로 설정함으로써 거점 중심의 관광 상품의 개발 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관광권역 설정의 대표적 의의는 두 개를 꼽을 수 있는데, 첫째 관광권내의 각종 자원을 종합적으로 개발하는 한편 소권의 중심지를 연결시킴으로써 관광객의 다양하 고 체계적인 활동을 도모하는데 의의가 있다. 둘째 관광권 중심지의 각종 기반시설 및 편의시설의 집중배치로 산발적 개발로 인한 자연 환경의 훼손 방지 및 투자의 효 율성을 제고 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이를 통해 익산의 역사유적지구 권역은 각 거 점을 중심으로 개발하되, 관광권역별 특성화를 통한 관광매력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총 6개의 권역 설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각 권역마다 대표적 유적과 더불 어 이야기(스토리)가 존재하며, 이미 설치된 편의시설의 효율적 이용으로 복수투자를 막고, 경제적 편익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다는 데 큰 장점을 갖는다. 1) 익산의 권역 분류 익산시의 유적은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금마면과 왕궁면에 집중되어 분포되어 있 다. 특히 금마면-왕궁면의 경우 익산의 도시개발지구에서 떨어져 있다는 장점이 있 다. 주지하다시피 익산시의 도시개발지구는 익산시 서남권을 중심으로 개발되었는데, 다행이 금마면-왕궁면의 경우 도시개발지구와 떨어져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문화재 가 개발로 인한 문화재 수난을 비켜갈 수 있었던 것이다. 금마면의 경우 특정 구역 은 이미 도심화가 진행된 곳도 분명 있다. 그러나 고층건물이 입지함으로써 많은 문 화재가 망실된 구역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인위적인 환경 회복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과 연결된다. 또한 문화재의 가치를 살리고 회복하는데 주변 여건이 큰 방해를 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다. 이에 거점을 중심으로 총 6개의 권역별 자원 분 류가 가능하다. 7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78 1. 왕궁리 유적 권역 2. 미륵사 권역 3. 서동생가 권역 4. 쌍릉 권역 5. 낭산 권역 6. 금강 권역 <표 : 권역별 자원분류> 이에 6개의 권역 설정은 다음과 같은 장점을 갖고 있다. 첫째는 자원성이다. 비록 일부 권역은 이야기(스토리)의 흐름이 뒤 엉키는 것도 사실이나, 대다수의 권역이 입 지적 특성 및 동질성을 갖고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둘째는 접근성이다. 권역 설 정시 접근성은 두 가지를 고려해서 권역 설정을 해야 한다. 첫째는 각 권역간의 거 리이다. 위에서 설정한 각 권역들은 도보로 이동이 가능할 정도로 접근성이 좋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둘째는 타 지역과의 접근성이다. 이는 자가용이나 대중교통을 이 용시 타 지역과의 접근성을 고려해서 권역을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설정 한 권역들은 호남고속도로 익산IC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익산포항고 속도로의 개통으로 철도로 이용하기 어려운 익산-영남의 거리가 단축되었다는 장점 을 갖고 있다. 세 번째는 관리 및 운영이다. 이는 각 권역이 관리를 담당 할 수 있 는 전시관 등을 갖추고 있으며, 만약 전시관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권역의 경우 관 리사무소 등을 갖출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관리의 주체를 설정하고, 각 권역에 해 당되는 문화 해설사 등을 양성한다면 권역내의 문화재에 대한 효율적 관리 및 관광 객의 관광매력성을 증대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연계성이다. 이 연계성은 타 권역과의 거리 및 배후도시와의 거리를 뜻한다. 익산 역사유적지구의 배후도시는 당연히 금마라고 할 수 있다. 위 6개의 권역 중 5개 권역은 금마면 시가 지를 배후도시로 삼을 수 있다. 즉 금마면 시가지를 중심으로 권역 설정이 가능하다 는 뜻이며, 체류형 관광상품 개발시 관광객들에게 금마면 시가지를 중심으로 편의를 제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77

79 <지도 : 익산 역사유적지구 권역분류> 익산 역사유적지구는 총 6개의 권역으로 살펴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 이 5개 권역은 금마면 시가지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또한 각 권역에는 권역의 관리의 주체를 맡을 수 있는 전시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만약 전시관이 없는 권역에 는 관리사무소 등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 특히 권역별 자원 분류를 통해 거점 중심 의 관광지 개발과 이에 따른 체류형 관광 상품 개발이 가능 할 것으로 예상된다. 각 권역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다. 7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80 (1) 왕궁리 유적 권역 왕궁리 유적, 왕궁리 오층석탑, 제석사지, 제석사지 폐기장 유적 무왕의 익산 천도 권역, 유일한 궁성 유적, 유일한 백제 왕궁 정원 복원 가능 왕궁리 유적전시관, 타 지역과의 높은 접근성 <지도 : 왕궁리 유적 권역> 왕궁리 유적 권역은 왕궁리 유적(사적 408호)을 중심으로 한 권역이다. 이 권역에 해당되는 문화재는 왕궁리 유적(사적 408호),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289호), 제석사 지(사적 405호), 제석사 폐기장 유적(향토유적 2호) 등이 있다. 왕궁리 유적 권역은 현존하는 유일의 백제시대 왕성 유적인 왕궁리 유적을 포함하 고 있다. 또한 제석사지 유물과 제석사지 폐기장 유물의 경우 관세음응험기 를 뒷 받침 해주는 중요한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왕궁리 유적 권역의 핵심은 왕궁리 유적이다. 왕궁리 유적은 무왕의 익 산천도의 배경 유적이다. 왕궁리 유적은 백제 별도설( 別 都 說 )등 다양한 논의가 진행 되었지만, 오랜 기간 발굴 조사를 통해 수부( 首 府 ) 명 기와가 수습되고, 공방과 관련 된 흔적과 금ㆍ유리 제품 잔여물 등이 확인되며 무왕의 익산 천도의 배경이 되는 궁 성 유적으로 확인 되었다. 일본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 를 통해 무왕의 익산천도 설은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관세음응험기 에 따르면 백제 무광왕은 지모밀지로 천도해 새로 정사를 경영했다 고 전하는데, 특히 정관 13년(무왕 40년) 기해 11월 제석정사의 화재로 법당과 탑 등이 모두 타버렸으나 탑의 심초에 들어있던 금판경과 사리함 등만은 타지 않았고, 다시 그것을 절에 봉안했다. 고 전해진다. 이 기록이 1965년 왕궁리 5층 석탑 해체 작업 중에 발견된 왕궁리 오층석탑 발견유물(국보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79

81 123호)와 일치할 뿐만 아니라 제석사 폐기장을 통해 무왕의 익산 천도설을 뒷받침하 는 고고학적 증거가 되었다. 이렇듯 왕궁리 유적 권역은 무왕의 익산 천도의 중요한 유적 중 하나로써 권역화 를 통해 관광 테마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왕궁리 유적 권역은 왕궁리 유적 전시관 을 거점으로 주변 문화재를 포괄하는 권역을 설정할 수 있다. 왕궁리 유적 전시관의 경우 이 권역의 거점으로써 권역에 포함되어 있는 문화재들을 관리하고, 이에 해당 되는 관광테마들을 주관하는 역할을 수행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왕궁리 유적 권역의 경우 배후도시로 금마 시가지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무엇 보다 호남고속도로 익산IC와 가깝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이는 관광객들이 자가용을 이용하여 익산 역사유적지구를 방문할 경우 제일먼저 왕궁리 유적 권역을 방문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타 지역과의 접근성 역시 왕궁리 유적 권 역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 왕궁리 유적 및 왕궁리 유적 전시관> 8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82 (2) 미륵사 권역 미륵사지, 미륵사지석탑, 미륵산성, 사자사지 익산의 대표 유적 권역, 새롭게 해석된 서동요를 통해 관광객들의 관광욕구 충족 미륵사지 유물 전시관 <지도 : 미륵사 권역> 미륵사 권역에는 미륵사지(사적 150호), 미륵사지석탑(국보 11호), 미륵산성(지방기 념물 12호), 사자사지(지방기념물 104호) 등이 포함되는 권역이다. 미륵사는 고도 익 산의 중흥기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미륵사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써 7세기 백제가람 의 구성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 유적이다. 또한 미륵사는 국찰( 國 刹 )로 일찍부터 많 은 주목을 받아 왔다. 이러한 미륵사는 무왕의 익산경영의 근거 중 하나이다. 삼국유사 에는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로 가는 도중 용화산 아래 큰 연 못가에 이르렀을 때 미륵삼존이 연못 속에서 나타나 수레를 멈추고 절을 하였다. 부 인이 왕에게 이르기를 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우는 일을 묻자 신통력으로 하루 밤사이에 산을 헐어 못 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 이내 미륵삼존을 법상으로 하여 전, 탑, 낭, 무를 각각 세곳에 만들고 미륵사라는 편액을 달았다. 지금도 그 절이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삼국유사 에 미륵사 창건설화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미륵 사는 신라 황룡사에 버금가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현재 미륵사의 서탑은 해체, 복원 중에 있다. 이 서탑의 해체, 복원 중 2009년 탑의 십자형 통로 바로 위 삼주석 상면 중앙에서 사리장엄이 발견되었다. 특히 사리봉안기에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639년)년 정월 29일 사리를 받들어 봉안 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택적덕의 딸 이 등장함으로써 기존 서동과 선화공 주의 사랑이야기인 서동요를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사택적덕의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81

83 딸로 인해 기존 서동요를 각색하고 재해석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선화공주의 라이벌이 등장함으로써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인 서동요 를 좀 더 흥미롭게 각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각색된 서동요를 기획하 고 공연하는 데 있어서 미륵사 권역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특히 이러한 새로운 서동요를 기획ㆍ공연을 통해 관광객들의 관광욕구충족이라는 측면에서 미륵 사 권역은 타 권역과는 구별되는 뚜렷한 장점을 갖고 있다. 미륵사 권역의 또 다른 유적으로는 사자사지가 있다. 사자암은 미륵산 해발 380미 터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천년 고찰이다. 미륵산 정상부 두 개 봉우리 중 미륵사지 쪽에서 보이는 남측 봉우리인 우제봉에 사자암이 자리하고 있다. 사자암은 삼국유 사 무왕조에 나오는 사자사의 법통을 이어온 천년 고찰이다. 사자사는 백제 최고의 사찰이자 무왕의 백제 경영의 근거가 되는 국찰( 國 刹 ) 미륵사를 건립하게 된 계기가 된 사찰이다. 사자사지는 현재 사자암 대웅전 개축 공사의 일환으로 발굴조사를 실 시한 결과 사자암의 위치가 옛 사자사지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특히 사자사의 지명법사는 서동이 백제 무왕에 오르는데 적극적 역할을 한 후원자였던 것으로 파악 된다. 사자사의 지명법사는 서동에게 여러 조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으 로 미륵사 창건과 서동이 신라로 황금을 옮기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한 것으로 알려 져 있다. 지명법사와 관련된 설화는 사택적덕의 딸이 등장함으로써 새롭게 해석된 서동요와 더불어 향후 스토리텔링을 통한 관광테마 개발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 대된다. 미륵산성은 해발 430m의 미륵산의 정상부와 서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미륵산성은 여지도서 전라도 익산 보유 고적조에는 箕 準 城 [ 在 彌 勒 山 絶 頂 世 傳 箕 準 所 築 石 築 至 今 宛 然 ] 라 하여, 미륵산 정상에 세워진 성을 기준성이라고 전하고 있다. 아마도 고조 선의 준왕( 準 王 )이 이곳으로 남하하여 도읍으로 삼았다는 전설에서 나온 이야기로 보 이며, 미륵산성이라는 명칭은 미륵산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세종 실록 지리지에는 彌 勒 山 石 城 [ 諺 傳 箕 俊 始 築 謂 之 箕 準 城 周 回 六 白 八 十 六 步 有 奇 內 有 泉 十 四 冬 夏 不 渴 有 軍 倉 ] 이라 하여 미륵산 석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미륵산성은 또 일 찍이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킬 때 신검( 神 劍 )의 항복을 받았던 바로 그 마성( 馬 城 )이라고도 전하고 있다. 미륵사 권역은 앞에서 언급한 관광객들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권역이다. 특히 새로운 서동요를 기획ㆍ공연하는데 그 배후지로써 큰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또한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이 이 권역의 거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익산의 대 표 유적으로써 관광매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미륵사 권역의 최대 강점이다. 미륵 산성의 경우 오금산성과 연계해 답성놀이를 기획하고, 새로운 사택적덕의 딸이 포함 8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84 된 새로운 서동요를 기획ㆍ공연한다면 체류형 관광상품을 개발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체류형 관광상품 개발시 그 배후도시로써 금마면 시가지를 이용한다면 자연스럽게 관광객들의 관광 동기와 관광욕구충족을 유발 할 수 있을 것 으로 기대된다. <사진 : 미륵사지, 미륵사 석탑, 미륵사지유물전시관, 사자사지>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83

85 (3) 서동생가 권역 축실지, 마룡지, 용샘, 오금산, 익산토성 다양한 설화 존재, 답성놀이 개발 가능 거점의 부재, 축실지, 용샘 등 유적 재정비 필요. <지도 : 서동생가 권역> 서동생가 권역에는 축실지, 마룡지, 용샘, 오금산, 익산토성(사적 92호) 등이 포함 된다. 특히 서동생가 권역은 다양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권역이다. 우선 서동의 비범한 출생과 관련한 설화가 전해진다. 삼국유사 의 무왕조 기록에 따르면 서동의 어머니가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연못속의 용과 통하여 서동을 낳았다 고 기록되어 있다. 20여년 전 마룡지 동측에 위치한 구릉을 논으로 개간하는 과저에서 초석과 백제기와편이 다수 수습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마룡지를 중심으로 남동측에는 서동의 생가터가 존재한다. 그리고 마룡지의 북서측에는 어린 서동이 물 을 길러 마셨다는 용샘이 아직도 남아 있다. 서동생가터 서측 가까이는 서동이 마를 캐어 생업을 삼았다는 오금산과 오금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축실지, 마룡지 그리고 용샘을 통해 서동의 비범한 탄생부터 유년기 시절을 재현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설화로는 오금산과 관련한 설화이다. 서동은 선화공주와 혼인한 뒤 금 다 섯 덩이를 오금산에서 캐서 신라에 보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금으로 인해 서동 은 정치적 기반을 쌓을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오금산이란 이름도 여기서 기인한다. 이 두 설화는 서동 생가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스토리텔링 자료이다. 우 선 서동의 비범한 탄생은 야래자형설화( 夜 來 者 型 說 話 ) 로써 비범한 출생을 통해 그 8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86 대상을 신격화하는데 이용되는 대표적 설화이다. 야래자형설화( 夜 來 者 型 說 話 ) 는 스 토리텔링의 기초자료로 이용할 수 있는 대표적 설화라 할 수 있다. 오금산과 관련한 설화 역시 서동의 비범함을 대표하는 설화이다. 마를 캐던 산에서 금을 캘 수 있었 던 것도 서동의 비범함 덕분에 가능한 이야기이다. 서동생가 권역의 설화는 스토리텔링의 기초자료로 활용 될 수 있다. 예컨대 현존 하는 용샘의 경우는 서동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기초 자료로 활용 될 수 있 을 것이다. 마를 캐어 생업을 삼던 서동은 용샘에서 물을 길러 마셨다고 알려져 있 다. 이러한 용샘은 이 일대가 서동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임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익산토성은 오금산성이라고도 부르며, 고구려의 왕족 안승( 安 勝 )이 일시 거처한 곳 이라고 하여 보덕성이라고 불린다. 익산토성은 지형적으로 왕궁리 유적의 북측에 위 치하여, 당시 왕궁을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적 시설임을 짐작케 한다. 실제로 익산토 성은 1980년과 1984년 원광대학교 마한ㆍ백제 연구소의 시굴조사를 통해 백제 말기 토성으로 축조한 다음 통일신라기에 석성으로 변형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성의 동측 문지와 동문지 내부에서 건물지와 우물 등이 확인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익산토성은 미륵산성과 연개하여 답성놀이를 개발한다면 관광객의 참여를 유도 할 수 있는 관광상품의 개발이 가능할 것이다. 서동생가 권역은 미륵사 권역과 더불어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권역이다. 특히 서동 의 비범한 탄생과 다양한 설화를 바탕으로 스토리텔링이 개발된다면 서동생가 권역 은 미륵사 권역과 더불어 익산의 대표적 관광 권역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서동생가 권역은 자원성과 시장성이 다른 권역에 비해 우수한 권역이다. 서동 생가 권역은 관광자원의 입지적 특성 및 동질성을 뜻하는 자원성이 높은 권역이라고 할 수 있다. 무왕이 익산 출생이라는 사실과 무왕의 비범함을 내포하고 있는 설화를 통해 서동생가 권역은 그 자원성이 우수하다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설화를 바탕 으로 스토리텔링을 개발한다면 그 어느 권역보다 관광수요와 공급에 차질이 없는 지 역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현재 이러한 문화자원을 관리할 수 있는 거점이 부재하 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특히 현재 정비되지 않는 유적과 관광지에 대한 빠른 점검과 관리가 요구된다. 권역 설정은 관광자원의 합리적 개발에 그 목적이 있다. 특 히 경제적 편익효과 극대화 및 사회ㆍ문화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권역 설정이 필요 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서동생가 권역은 다양한 가능성과 더불어 빠른 점검과 관리 가 요구되는 권역이다.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85

87 <사진 : 익산토성, 용샘> (4) 쌍릉 권역 고도(古都)의 4대 조건 중 하나인 왕릉 서동-선화 테마 개발 가능 각종 편의 시설 집중 배치가 가능 <지도 : 쌍릉 권역> 쌍릉 권역에는 쌍릉(사적 87호)을 포함하고 있는 권역이다. 고도(古都)의 4대 요건 중 하나인 왕릉이 익산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고도 익산을 접근해 나아가는데 있 어서 빠뜨릴 수 없는 권역이다. 쌍릉은 두 기의 봉토분이 약 150미터의 거리를 두고 위치하고 있다. 그 중 북쪽에 8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88 있는 비교적 더 큰 봉분을 대왕릉 이라고 부르고, 남쪽에 있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봉분을 소왕릉 이라고 부른다. 쌍릉의 문화재적 가치는 석실 내부가 백제 사비시대를 대표하는 최대 규모의 왕릉 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석실 안에서 목관( 木 棺 )의 파편과 목관을 장식했던 관장식과 옥, 토기편, 금동장식 등이 수습되었다. 목관의 나무는 高 野 槇 이라고 하는 금송의 한 종류로써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목관과 같은 재질임이 밝혀졌다. 이로써 피장자의 신 분이 증명될 수 있다. 또한 석실 안에서 발견된 옥, 금동장식 등은 부여 능산리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유 사한 유물로써 당시 익산지역 백제문화의 현황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 다. 쌍릉은 무왕의 죽음과 관련하여 권역 설정 및 테마 설정이 가능한 유적이다. 특히 서동과 선화가 함께 잠들고 있는 쌍릉은 이러한 테마 설정이 가장 용이한 유적이라 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서동은 선화를 얻기 위해 서동요 를 만들고 퍼트렸다 고 전해진다.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서동의 아내가 된 선화지만, 서동과 더불어 백 제의 국모( 國 母 )로써 백제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를 만드는데 일조하는 등 서동의 아 내이자 백제의 국모( 國 母 ) 역할에 충실했다. 요컨대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서동과 아름다운 사랑을 나눈이가 바로 선화이다. 그리고 서동과 선화가 같이 잠들고 있는 쌍릉은 이러한 사랑 테마를 개발할 수 있는 권역이다. 서동은 훗날 백제의 무왕이 되어 신라와 치열한 전투를 하였지만, 죽음의 순간에도 서로를 잊지 않고 가까운 곳 에 묻혔다는 것은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가늠할 수 있는 단초를 제 공한다. 쌍릉은 단순한 왕릉의 차원을 뛰어넘어 스토리텔링의 훌륭한 자원으로 활용 될 수 있는 유적인 것이다. 쌍릉 권역은 이러한 테마관광을 바탕으로 각종 편의시설의 집중배치가 가능한 지 역이다. 현재 쌍릉은 테마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지만, 관리가 잘 안 되고 있으며 설 치된 시설에 비해 다양한 테마를 공원내에 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요컨대 공원이상의 기능은 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것은 관광객을 유치하기엔 시 설의 테마가 미약하다는 점과 연관된다. 이러한 쌍릉의 시설을 개ㆍ보수하여 관광객 유치가 가능한 테마로 발전시킨다면 쌍릉 권역 역시 앞에서 살펴본 다른 권역과 더 불어 관광객의 다양하고 체계적인 활동을 도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87

89 <사진 : 익산 쌍릉 전경, 대왕릉> (5) 낭산 권역 성남리 고분군, 낭산산성 투석전과 같이 대 신라 전투 복원-미디어 콘텐츠화 가능성, 다양한 분묘 유적 문화재 발굴과 동시에 권역 개발의 가능성 <지도 : 낭산 권역> 낭산권역은 성남리 고분군과 낭산산성(지방기념물 13호)을 포괄하는 권역이다. 낭 산권역은 마한의 도읍지로써 익산을 규명하고, 백제시기 익산의 지위를 규명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성남리 고분군은 성남리 외성마을에서 장암마을로 넘어가는 소로의 북편에 위치한 다. 이는 미륵산의 북쪽지맥으로 해발 40m내외의 낮은 구릉지대에 해당된다. 바로 북편에는 낭산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발굴조사는 1994년~1995년에 실시되었으며, 28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그중 백제시대 무덤은 24기에 해당되며, 확인가능한 무 8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90 덤 중 횡혈식석실분 13기. 횡구식석곽묘는 7기이다. 무덤의 구조 등으로 보아 중심 연대는 7세기 중엽정도로 추정되며, 무왕과 비슷한 시기 익산 또는 금마일원의 세력 집단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낭산산성은 해발 162m의 낭산 정상부에 위치하는 성으로, 舊 城, 北 城 또는 馬 韓 城 이라고도 부른다. 마한성이라 부른 것은 아마도 익산 일대가 마한의 도읍지 라는 것과 관련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깬돌로 쌓은 석성인데 대부분 붕괴되 었으나. 그 흔적은 찾아 볼 수 있으며, 우물 1곳과 성의 동남쪽에는 주춧돌로 보이 는 석재들이 있어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내에서 백제시대 것으로 보이 는 토기편들이 발견되었다. 2006년 전북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가 시행되었 다. 성남리 고분군과 낭산산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우선 첫 번 째는 당시 무왕과 비슷한 시기 익산 또는 금마일원에 강력한 세력집단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익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당시 세력들의 지위를 나타내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두 번째는 무왕이 낭산산성을 비롯한 다양한 관방유적들을 통해 당시 대 신라와의 대외전쟁을 펼쳐 나갔다는 점이다. 삼국사기 를 살펴보면 무왕은 재위 41년 동안 약 12회에 걸쳐 신라 공격을 감행한다. 그리고 익산은 군사 적 요충지로써 적합한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무왕은 익산의 다양한 관방유적들을 활 용하여 신라를 공격하고, 또는 신라의 공격으로부터 방어에 힘썼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익산의 다양한 산성들은 제각기 맞은 역할에 충실 했을 것이며, 낭산산성 역시 무왕의 대 신라 전투에 요긴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다만 낭산 권역은 많은 개발이 필요한 권역이다. 문화재 발굴과 더불어 산성의 복 원이 이 권역 개발의 핵심이 될 것이다. 그러나 훗날 낭산 권역이 발굴 및 개발 된 다면 대 신라 전투와 관련된 관광 테마가 이 권역에서 개발 될 수 있다. 특히 무왕 이 천도 후 신라와의 12회에 걸친 전투를 소재로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할 것이 며, 이는 드라마, 영화와 같은 미디어 콘텐츠와도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낭산 권역 은 개발의 어려움이 따르지만, 훗날 문화재 발굴과 더불어 권역 개발의 가능성이 존 재하므로 권역으로 설정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89

91 (6) 웅포 권역 웅포리 고분, 입점리 고분, 숭림사, 편백나무숲길 생태 테마 및 보석가공 스토리텔링 활용 웅포 관광지 접근 용이, 입점리 고분 전시관 <사진 : 웅포 권역> 웅포 권역은 웅포리 고분(지방기념물 98호), 입점리고분(347호), 숭림사, 편백나무 숲길 등을 포함하는 권역이다. 웅포리 고분은 해발 240m인 함라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 가운데 웅포면 소재지로 이어지는 해발70m 정도 야산의 남동사면에 입지한다. 약 60여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으며, 1986년, 1992년, 1993년에 걸친 조사에서 총 30여기의 고분이 발 굴되었다. 조사된 고분은 수혈식석관분 15기, 횡구식석곽분 12기, 횡혈식석실분 3기 로 분류할 수 있다. 조사된 고분 가운데 4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출토유물로는 단경호, 광구호, 직구호, 삼족토기, 고배, 직구호, 대부호, 개배, 철부, 철도자, 철겸 등이 있다. 입점리 고분은 입점리 칠목재에서 동남으로 뻗은 해발 100m 구릉의 중턱에 분포 하고 있다. 1986년 우연히 1호분이 발견되었다. 총 8기의 고분이 조사되었으며, 1998년에는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13기의 고분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총 19기가 조사되었으며, 수혈식석곽분 11기, 횡구식석곽분 1기, 횡혈식 석실분 7기가 확인되었다. 1986년에 조사된 입점리 1호분에서는 금동제관모와 금동신발, 마구류, 중국제 청자류, 토기류 등 중요유물이 출토되었다. 웅포 권역은 두동마을 편백나무숲길과 최북단차나무군락지와 같이 자연자원을 포 함하고 있는 권역이다. 또한 숭림사 역시 이 권역에 속한다. 9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92 웅포리 고분군과 입점리 고분군은 익산 지방세력의 정치적ㆍ문화적 위상을 추정할 수 있는 대표적 유적이다. 또한 입점리 고분군에서 수습된 유물들은 익산 보석 가공 산업의 스토리텔링 자료로 활용 될 수 있을 것이다. 웅포 권역은 타 권역들과 지정 학적 거리가 떨어져 있는 권역이다. 그러나 주변에 천년고찰 숭림사( 崇 林 寺 ), 웅포관 광지 등 관광개발에 모자람이 없는 권역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웅포 권역내 각종 문 화 자원 및 관광 자원을 종합적으로 개발하는데 큰 메리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특 히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거리는 관광객들의 관광매력성을 충족시키는데 무리가 없 다. 이러한 웅포 권역에 대한 기점으로는 입점리 고분전시관을 꼽을 수 있다. 입점리 고분 전시관은 웅포 권역의 기점 역할을 수행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 입점리 고분, 입점리 고분전시관>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91

93 3. 테마별 자원 분류 1) 관광테마의 정의 및 테마의 특징 앞 장에서는 <권역별 자원분류>를 통해 흩어져 있는 문화재에 장소성이라는 의미 를 부여하였다. 또한 공간의 발견을 통해 관광객의 편의를 도모하고, 관광매력성을 증진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권역별 자원 분류>를 통해 익산 역사유적지구는 총 6개의 권역으로 분류가 가능 했다. 모든 권역이 그 권역 나름의 강점과 매력을 갖고 있었으며, 권역의 분류를 통 해 관광객 유입 전략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 장에서는 익산 역사유적지구의 문화재를 바탕으로 테마별 자원 분류를 시도할 생각이다. 테마의 사전적 의미로는 주제( 主 題 )를 뜻하며 작품의 중심이 되는 사상내 용을 말한다. 오늘날 테마는 상징 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는데, 관광 테마의 경우 관광객들에게 비일상적인 경험을 체험케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여기서 비일상적 체험이란 환상적이거나 신기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일상을 벗어나 추억과 놀이 등을 경험함으로써 느끼는 감정을 비일상적 경험이라고 부른다. 대표적 으로 테마파크를 들 수 있다. 테마파크란 어떤 특정의 테마를 설정해 테마에 따른 환경과 놀이와 이벤트 등 모든 시설과 분위기를 만들어 전체를 구성 운영하는 레저 를 위한 파크의 한 형식 (채용식, 박재완, 홍창식 공저, 현대리조트개발론, 현학사, 289쪽)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관광 테마 역시 특정의 테마를 구축하여 관광객들에 게 비일상적 체험을 통해 관광매력성을 증대시키고, 즐거운 경험을 일상생활에 돌아 가서도 추억으로 삼을 수 있도록 개발 하는 것이 관광 테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권역을 중심으로 한 장소마케팅은 지역문화를 발전시키는 실천적, 생성적 패러 다임이 될 수 있고, 지역문화를 오히려 파괴하는 관념적, 퇴행적 패러다임이 될 수도 있다. 즉 장소마케팅 전략은 지역발전이나 혹은 지역파괴냐를 둘러싼 다양한 의미와 담론 및 실천들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부딪히며, 교섭하는 문화정치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이무용, 지역발전의 새로운 패러다임 장소마케팅 전략, 논형, 38쪽) 그렇 기 때문에 권역을 중심으로 한 관광 상품 개발과 더불어 테마와 권역을 유기적으로 접목시킨 관광 상품 개발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관광문화가 유흥에서 체험형ㆍ콘텐 츠 집중형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광 테마 개발이야 말로 정보를 통한 지식 습득 및 체험을 통한 관광 매력성 증진이라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역별 중심 관광을 기초로 다양한 콘텐츠를 접목시켜 관광상품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테마의 개발은 곧 관광홍보마케팅과 연결된다. 테마는 관광스토리텔링 및 관광홍 보마케팅으로 이어진다. 특히 관광스토리텔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테마를 개발하고 제시하는 것이 필수이다. 관광 스토리텔링의 첫 걸음이 바로 테마이다. 테 9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94 마를 만듦으로써 관광객의 흥미를 유도할 수 있는 마케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익산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양동마을이다. 양동마을은 1984년 중요민속자료로 등록된 이후 2010년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양동마을의 주민들이 항상 자 부심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 말부터 2010년까지 안동마을 주민들은 공공 정책의 경직성 때문에 불만과 갈등을 반복했다. 그리고 이러한 불만과 갈등은 곧 정 주성의 약화로 이어졌다. 이후 2010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주민들 스스로 주인의식을 갖게 되고 이는 곧 긍정적인 정주성의 강화로 나타났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양동마을 주민들의 내적 갈등 해소의 시간이 20여년이나 걸렸다는 점이다. 양 동마을의 경우 아무런 준비 없이 덜컥 문화재로 묶이는 바람에 주민들의 삶이 마치 관광객을 위한 쇼(Show)가 되어버린 것이다. 즉 역사마을을 화석화된 농촌형 민속 마을 로 오인하는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20여년동안 지자체는 이러한 문제 에 적극적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양동마을의 사례를 보더라도 관광 테마 개발 없이, 즉 익산도 준비 없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된다면 양동마을의 전철( 前 轍 ) 을 밟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익산은 관광 테마를 개발을 하고, 그 테마를 바탕으 로 스토리텔링 작업을 거쳐 주민들의 삶의 만족도와 함께 관광객들의 관광 만족도도 높일 필요가 있다. 2) 권역별 유형 분류를 통한 익산 관광 테마 익산 유적지구의 경우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각 권역별로 다양한 이야기(스토리) 를 담고 있는 지역이다. 각 권역은 타 권역과 구별되는 관광매력성을 갖고 있으며, 이는 테마 개발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각 권역은 그 권역 안 에서도 이야기(스토리)의 흐름이 비교적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물론 간혹 이야기(스 토리)의 흐름이 뒤엉키거나,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공통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권 역들이 존재하는 모습도 보인다. 두 개의 권역을 공통되게 관통하는 이야기(스토리) 가 있는 권역들은 테마 자원 분류와 테마 개발을 통해 복수의 권역을 하나의 테마로 묶을 경우 관광 만족도와 관광의 효율성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앞에서 설정한 익산유적지구의 각 권역에 대한 테마별 유형 분류가 먼저 진행되어야 한다. 각 권역에 대한 유형 분류는 크게 인물, 설화, 문 화재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각 권역이 갖고 있는 특징성과 타 권 역과의 연계성을 살펴볼 생각이다. 특히 익산은 무왕이 중심이 되는 지역이다. 이는 무왕을 핵심 매개체로 각 테마를 개발 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반대 로 자칫 잘못 하면 무왕만 중심이 되는 지루한 테마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단점 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역사적 근거와 자료를 바탕으로 설화와 유적지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93

95 권역 이야기 권역 인물 No. (스토리) 유적 왕궁리 유적, 1 왕궁리 유적 권역 무왕 익산천도설 제석사지 유적 등 2 미륵사 권역 미륵사 무왕, 미륵사지 유적, 건립, 선화공주, 사자사지, 지명법사 지명법사 미륵산성 등 신통력 서동의 3 서동생가 권역 무왕, 비범한 축실지, 서동생모, 출생, 마룡지, 용샘, 선화공주, 다섯 개의 오금산성 등 지명법사 금덩이를 얻은 이야기 서동과 선화의 4 쌍릉 권역 무왕, 죽음을 선화공주 관통하는 쌍릉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5 낭산 권역 무왕, 성남리 고분, 지방세력 낭산산성 6 금강 권역 지방세력 입점리 고분, 웅포리 고분 <표 : 권역별 유형 분류> 기타 옥룡천 관세음응험 기 미륵산, 용화산, 옥룡천 삼국유사 여지도서 오금산, 삼국유사 야래자형설화 오금산 위 표는 앞 장에서 설정한 익산의 각 권역에 대한 테마별 유형 분류표이다. 더 자 세하고 세심하게 나눌 수 있지만, 크게 몇 개의 유형으로 나누었다. 이러한 유형이 테마 개발의 기초 자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테마 개발은 1번부터 6번까지 설정한 권역 개발의 핵심이 될 것이며, 자칫 지역문화를 파괴할 수 있는 장소마케팅 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인물과 관련된 테마를 살펴보면 1번 권역부터 5번 권역까지 테마 개발이 가 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때 관통되는 주된 인물은 무왕이다. 무왕의 경우 익산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로서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익산의 다양한 문화재와 연 관지어 설명할 수 있다. 무왕의 비범한 탄생부터 죽음까지 무왕 중심 테마 개발에 1 번부터 5번 권역까지 모두 활용이 가능한 것이다. 인물과 관련하여 두 번째 테마는 서동과 선화의 사랑 테마이다. 이에 해당되는 권역은 2번, 3번 그리고 4번 권역이 9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96 이에 해당된다. 이 권역들은 서동과 선화의 사랑을 테마로 권역을 개발 할 수 있다 는 장점을 갖고 있다. 지명법사의 신통력과 관련된 권역은 2번과 3번 권역이다. 지 명법사는 사자사의 주지로서 서동의 정치적 기반을 닦는데 주된 역할을 한 무왕의 멘토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법사의 신통력을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이용하여 관광객 들이 참여를 유도하는 체험형 관광 테마 상품을 개발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야기 중심의 분류로 테마를 개발한다면 1번 왕궁리 유적 권역에서 무왕 천도 테 마를 개발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주지하다시피 왕궁리 유적은 백제 유일의 왕성 유적이다. 이 왕성 유적을 통해 무왕이 익산 천도를 선포하고, 익산천도의 모습 을 간략하게나마 재연한다면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선사하는 테마 상품 개발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2번 미륵사 권역과 4번 쌍릉 권역을 중심으로 서동과 선화의 아름다운 사랑 테마를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미륵사 서탑 해체 과 정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에 기록되어 있는 사택적덕의 딸 의 등장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인 서동요 를 좀 더 흥미진진한 사랑이야기로 바꿀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된 다. 요컨대 서동요 에 등장하지 않은 선화의 라이벌이 등장함으로써 좀 더 흥미진진 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선화의 라이벌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쌍릉의 대왕릉과 소왕릉에 묻혀 잠든 서동과 선화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스토리텔링 에 이용한다면 지금 보다 더 다양하고 재밌는 서동요 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 다. 유적 중심의 테마에는 우선 각 산성을 중심으로 테마를 기획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산성 중심 테마는 다시 두 가지 테마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각 산성을 연 결하여 답성놀이를 기획할 수 있다. 성밟기와 관련된 스토리텔링이 대표적이다. 예컨 대 고창읍성의 경우 성밟기와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머리에 돌을 이고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에 간다 는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익산의 여러 산성 역시 이러한 스토리텔링 개발이 가능할 것 으로 기대된다. 두 번째는 전투를 주제로 한 테마 개발이다. 무왕은 재임 41년동안 약 12회에 걸쳐 신라 공격을 감행한다. 그리고 익산은 대 신라 공격의 군사적 요충 지로써 다양한 관방유적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관방유적들을 이용하여 신라와의 전 투 장면을 재연하거나, 수문장 교대식을 진행한다면 관광객들에게 체험형 관광상품 이라는 개발과 동시에 관광매력성을 높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유적 중심의 또 다른 테마에는 백제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와 제석사를 중심으로 문화 테마를 기획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1번과 2번 권역에 해당된다. 사 찰을 중심으로 관광 테마를 기획한다면 두 개의 테마를 개발 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미륵사, 제석사와 일본의 백제대사와의 연관성을 규명하는 관광테마이다. 미 륵사의 경우 백제 최대의 사찰이자 국찰( 國 刹 )로 일찍부터 많은 주목을 받아 왔다. 또한 서탑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를 통해 639년이라는 미륵사 서석탑의 창건연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에는 미륵사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95

97 의 서석탑 건립 시기를 639년으로 밝히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일본 최대 규모의 사찰 인 구다라노 오데라( 百 濟 大 寺 : 이하 백제대사) 역시 창건 시기가 639년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관세음응험기 에는 제석사의 소실을 639년으로 밖히고 있다. 이에 세 사찰과의 관계를 통해 백제의 불교, 특히 익산의 불교가 어떻게 일본으로 전파되었 는지 파악하고, 이를 테마로 개발하여 이에 학술적ㆍ문화적 관심을 갖고 있는 일본 인 관광객을 유치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두 번째는 종교유적을 통해 종교 성지로써 익산의 위치를 다시금 고찰하는 테마를 만들 수 있다. 특히 백제 최 대의 사찰인 미륵사와 제석사 그리고 지명법사의 신통력을 간직하고 있는 사자사지 등을 함께 엮어 스토리텔링 테마 관광화 한다면 백제 불교 중심의 종교 성지 방문 테마를 기획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유적 중심 테마의 마지막으로 능묘 중심의 테마가 기획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해당되는 권역은 4번, 5번 그리고 6번 권역이 이에 해당된다. 쌍릉의 경우 고도( 古 都 )의 4대 조건 중 하나인 왕릉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낭산 권역의 성 남리 고분과 금강 권역의 입점리 고분, 웅포리 고분은 당시 익산을 바탕으로 성장한 지방세력들의 정치적ㆍ문화적 위상을 추정할 수 있는 좋은 문화 관광 테마가 될 것 이다. 마지막으로 옥룡천 복원과 발을 맞춰 물길 관광 테마를 만들 수 있다. 옥룡천의 복원은 금마 저수지부터 고도리 석불 입상까지 2.4Km를 물길 복원 구간으로 설정하 고 있다. 금마 시가지 각 권역의 배후도시로써 훌륭한 역할을 수행할 거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도리 석불 입상은 다양한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유적이다. 또한 고 도리 석불입상에서 왕궁리 유적은 도보로 이동이 가능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 다. 이러한 옥룡천 복원과 발 맞춰 이야기(스토리)가 있는 물길 테마를 개발한다면 관광객들의 관광 만족도를 상승시키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앞 장에서 분류한 권역별 자원 분류는 익산 역사유적지구를 권역화 하고 각 권역 의 분석을 통해 관광 개발의 단초를 제공하는데 노력했다. 역사유적지구의 권역화는 각 권역의 특징을 이해하고 그 권역만의 정체성과 독창성을 부여하려 노력했다. 그 렇기 때문에 단순히 지리적 경계선을 뛰어넘어 각 권역의 거점을 설정하고, 배후도 시를 설정함으로써 관광객들의 편의를 증진시키려 노력했다. 또한 각 권역은 그 권 역만의 독창적인 이야기를 품고 있으므로, 단순한 권역화를 뛰어넘어 테마개발의 단 초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소마케팅 전략은 지역문화를 관념적으로 획일화 시킬 수 있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이에 본 장에서는 권역별 기초자료를 분석하여 특정 지역이나 장소가 지니는 문화적 고유성과 정체성 을 실질적으로 살리고 발전시키는 전략을 수립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 때 중요한 것이 테마별 자원 분류이며, 테마 개발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본 장은 이야기(스토 리)를 중심으로 테마별 자원 분류를 시도함으로써 이야기를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연 계된 문화관광콘텐츠 개발ㆍ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테마별 자원 분 9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98 류의 경우 스토리텔링 발굴 및 개발, 관광자원의 연계성 파악, 데이터베이스 구축 등 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3) 익산 관광 테마 이야기(스토리) 우리는 앞에서 익산의 권역별 문화자원을 살펴보고 그 문화 자원의 유형을 분류하 여 익산 관광 테마 자원을 분류하였다. 그렇다면 앞에서 분류한 테마를 기초 자료로 익산의 관광 테마는 다음의 표와 같이 설정이 가능하다. 1. 영웅 탄생 테마 : 서동, 용의 아들 2. 고도 익산 전성기 테마 : 무왕, 백제를 호령하다 3. 신( 新 ) 서동요 테마 서동-선화의 사랑 이야기 4. 투석전 재연 테마 : 무왕, 백제부흥의 꿈 5. 답성 테마 : 산성을 돌아다니며 6. 익산ㆍ일본 대사( 大 寺 ) 테마 7. 익산 불교 성지 테마 : 익산, 호국불교의 성지 8. 능묘 테마 : 백제인, 익산에 잠들다 9. 옥룡천 테마 : 이야기가 있는 물길 10. 생태ㆍ녹색 테마 : 백제 왕궁 정원 11. 왕비-보석 테마 : 왕비-여성친화도시-보석의 메카 <표 : 익산 관광 테마 이야기(스토리)> 익산의 관광 테마는 총 11개의 이야기로 구성이 되어 있다. 무왕의 탄생과 죽음, 선화와의 사랑, 익산 천도, 백제-신라 통일의 꿈, 사찰, 능묘 중심 등의 테마 이야기 (스토리)가 그것이다. 이렇게 9개의 테마는 각 권역들의 특징ㆍ공통점을 묶되, 스토 리텔링 자원으로써 충분히 활용이 될 수 있는 이야기(스토리)를 중심으로 다시 분류 ㆍ결합시킨 이야기(스토리)이다. 9개의 테마는 각 테마별로 시기적-위치적으로 공통 집합을 갖기도 하지만, 이야기(스토리)의 흐름과 스토리텔링 자원이라는 측면에서 각 기 독창성을 갖고 있는 테마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각 테마에 대한 설명과 테마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자.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97

99 (1) 영웅 탄생 테마 : 서동, 용의 아들 서동 중심 관광 테마 인물 스토리텔링 중심의 관광 테마 개발 서동 생가 권역, 쌍릉 권역 영웅 탄생 테마 : 서동, 용의 아들 에 해당되는 권역은 서동생가 권역 과 쌍릉 권역 이다. 서동생가 권역에는 서동의 비범한 출생과 다섯 개의 금을 얻은 이야기 등이 이야 기(스토리)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축실지, 마룡지, 용샘, 오금산성 등의 유적이 아직 도 남아 있다. 무왕은 어릴 때 서동이라고 불렸다 한다. 서동은 그의 생모가 용과 결 합하여 낳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서동은 자신이 살던 집의 지근거리에 있는 산자락 에서 마를 캐어 생계를 유지하며 어머니를 모셨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훗날 마를 캐 던 산에서 금덩이 다섯 개를 발견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산이 바로 오금산이다. 또 한 금을 발견한 자리에 어머니를 위해 오금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전해지니, 그 효심 역시 대단한 자였다. 그리고 다섯 개의 금덩이도 서동의 효심에 감복한 하늘이 내려 준 선물이라는 설화로 전해진다. 이러한 서동이 낳고 자라고 금을 발견한 이야기가 바로 이 테마의 핵심 이야기(스토리)가 될 것이다. 또한 무왕이 잠들고 있는 쌍릉 역 시 이 테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무왕의 비범한 탄생과 더불어 자신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주었던 오금산 자락에 묻혔다는 이야기(스토리)가 이 테마를 관통하 는 이야기(스토리)이다. 이 테마에 대한 문헌의 기록은 삼국유사, 금마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 있 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마룡지( 馬 龍 池 ), 오금사( 五 金 寺 ) 등의 지명이 정확 하게 기술되어 있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스토리텔링 뿐만 아니라 문헌의 기록을 통 한 역사적 근거를 정확하게 관광객들에게 정확하게 제시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 다. 가볍고 재밌는 이야기가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정사( 正 史 )의 기록이라면 관광 객들의 관광 매력성은 더욱 고조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테마에 해당되는 유적은 축실지, 마룡지, 용샘, 쌍릉, 오금산성 등이 이 테마에 해당된다. 비록 지금은 용샘이나 축실지가 정비되지 않았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쌍 릉 또한 단순한 공원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쌍릉은 시민공원 이상의 기능을 수행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관광객들을 맞이하기엔 쌍릉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비록 쌍릉이 도굴로 인한 출토유적이 적은 것도 사실 이다. 그러나 목관의 나무로 추정하건데 왕릉이라는 점이 확실하다는 점은 쌍릉을 단순 공원 이상의 관광지로 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고 있다. 오금산 성 역시 등산 이외의 관광객 유치에는 매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무왕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테마이지만, 그에 비해 관광객을 맞이하는 준비는 덜 되어 있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익산을 대표하는 인물은 무왕이다. 익산은 무왕을 중심으로 다양한 이벤 9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00 트와 축제를 개최하는 것이 사실이나 막상 관광객을 맞이하기엔 많은 부족함과 어려 움이 따른다. 이에 이 테마를 개발하면서 현재 정비되지 못한 많은 유적에 대한 신 속한 정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장소를 중심으로 한 마케 팅은 같은 지역내에서도 소외 현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단점을 갖고 있다. 예컨대 특정 권역에만 집중 투자가 된다면 타 권역의 소외감은 이루 말로 표현 못할 것이 다. 이에 축실지, 마룡지 그리고 용샘을 중심으로 하루 빨리 관광객을 맞이할 수 있 는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축실지, 용샘, 쌍릉 등에서 출토 유물이 적 은 것도 사실이나,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특히 타 고도( 古 都 )의 유적에서는 시도 할 수 없는 스토리텔링 자원이 있다는 것이 바로 이 테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2) 고도 익산 전성기 테마 : 무왕, 백제를 호령하다 고도( 古 都 ) 익산의 전성기 테마 고도( 古 都 ) 익산의 변천과정을 계기적으로 보여줄 것으로 기대 왕궁리 유적권역, 미륵사 권역 고도 익산 전성기 테마 : 무왕, 백제를 호령하다 테마에 해당되는 권역은 왕궁리 유적권역, 미륵사 권역이 이 테마에 해당되는 권역이다. 이 테마는 고도( 古 都 ) 익산의 전성기를 테마로 한 스토리텔링이다. 특히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시대 왕궁 유적인 왕궁리 유적, 백제 최대이자 최고의 사찰인 국찰( 國 刹 ) 미륵사, 왕실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한 제석사가 이 테마에 해당되는 유적이다. 우선 왕궁리 유적의 경우 현존하는 유일의 백제시대 왕성 유적이다. 그리고 그 근 거로써 관세음응험기 를 꼽을 수 있다. 관세음응험기 를 통해 익산의 왕궁리 유적 은 단순히 별궁( 別 宮 )이 아니라 천도( 遷 都 )의 왕궁( 王 宮 )이라는 것을 정확히 파악 할 수 있었다. 특히 수부( 首 府 ) 명 기와가 수습되고, 공방과 관련된 금 세공 제품들의 잔여물들이 수습되면서 왕궁리 유적은 익산 천도설의 강력한 배경이자 유적으로 지 위를 향상하게 되었다. 제석사의 경우 그 위치가 왕궁면 왕궁리 궁평마을로 파악되 는데,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던 왕실 사찰로 파악된다. 미륵사의 경우 백제 최대이자 최고의 사찰이다. 특히 국보 11호이자 현재 해체ㆍ 복원 작업 중인 미륵사 서쪽 석탑의 경우 석탑의 하단부에서 사리장엄과 더불어 9000여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미륵사 석탑의 경우 기존 목탑 양식에서 벗어 나 최초로 석탑으로 탑을 건립한 내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미륵사의 유물과 그 규 모 등을 고려해 볼 때 무왕의 익산경영의 통치력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요컨대 이 테마는 익산이 고도( 古 都 )로써 그 위치와 지위를 다시 한 번 관광객 들에게 주지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관광 테마의 이야기(스토리)로써 이 테마는 여러 모습으로 재연될 수 있다. 첫 번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99

101 째는 3D 가상현실(Virtual Reality)를 이용한 홀로그램 시설물 제작이다. 이는 부여 백제문화단지 내에 있는 홀로그램과 같은 시설물이다. 홀로그램을 이용하여 무왕이 가상으로 익산 천도를 천명하고, 그 의의를 선포하는 것이 이 시설물의 핵심이다. 또 한 유적 전시를 통한 익산의 천도를 알리는 것과 동시에 이야기(스토리)를 활용하여 익산천도의 그 의의를 알려주는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된다. 두 번째는 익산천 도를 간략하게나마 재연함으로써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 대된다. 무왕이 왕궁에 도착하는 모습과 왕궁에서 미륵사를 방문하는 모습을 간략하 게나마 재연한다면 관광객들에게 볼거리 제공이라는 측면에서 관광 매력성이 향상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익산은 매년 서동축제를 개최하고 있는데, 축제의 하이라이트로 매년 선발되는 서동왕자와 선화공주가 익산천도의 모습을 재연하는 것도 즐거운 볼 거리이자 이야기(스토리)거리가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익산이 무왕의 고장이자 고도 ( 古 都 )였다는 것을 타 지역 거주 관광객들에게 자연스럽게 홍보ㆍ기억되는 효과를 거 둘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테마는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 제석사지 등을 차례로 재연하는 기 회가 될 것이며 이는 고도( 古 都 ) 익산의 변천과정을 계기적으로 보여줄 것으로 기대 된다. (3) 신( 新 ) 서동요 테마 : 서동-선화의 사랑 이야기 서동과 선화의 사랑 이야기 제 2의 서동요 제작 각색 스토리텔링을 통한 다양한 사랑 테마 개발 미륵사 권역, 쌍릉 권역 신( 新 ) 서동요 테마 : 서동-선화의 사랑 이야기 에 해당되는 권역들은 미륵사 권역 과 쌍릉 권역이다. 이 테마는 서동과 선화의 사랑 이야기의 모티프를 각색한 각색 스토리텔링으로 개 발한 테마이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미륵사 서쪽 석탑의 해체ㆍ복원 과정 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이다. 이 봉안기에는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재 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639년)년 정월 29일 사리를 받들어 봉안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택적덕의 딸 의 등장은 기존 서동과 선화의 사랑이야기인 서동요 에 대한 일부 부정으로 이어졌다. 특히 무왕의 왕비가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사리봉안기에 기록됨에 따라 많은 이들이 서동과 선화의 사랑 이야기가 허구였다는 것으로 오인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기존 발굴 조사의 성과에 따라 미륵사에는 3 탑이 있었으며, 중앙 목탑과 동탑의 사리봉안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택적덕의 딸 을 정비( 正 妃 )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사택적덕의 딸 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10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02 야기(스토리)를 가미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선화의 라이벌로서 사택적덕의 딸을 등 장시키는 새로운 서동요를 기획ㆍ공연 할 수 있는 것이다. 사택적덕의 딸 은 미륵사지 서쪽 석탑의 사리봉안기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선화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사택적덕의 딸 을 부 정할 필요는 없다. 강한 부정은 더 큰 오해를 낳기 마련이다. 사택적덕의 딸 을 인 정하되 서동요를 새롭게 각색하여 더 큰 재미를 유발시키는 것이 이 테마의 핵심이 다. 그리고 역사학에서 밝힐 수 있는 부분, 즉 동탑과 가운데 목탑의 사리봉안기의 부재 등을 새롭게 각색한 서동요에 녹여 낸다면 많은 관광객들이 고민 없이 이를 재 미있게 받아들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요컨대 역사학과 문학이 함께 손을 잡고 제 2의 서동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이 테마의 핵심이다. 기존 서동요는 서동과 선화의 만남에 주목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서동 요는 미륵사 창건 과정에서 선화의 역할 그리고 서동과 선화의 죽음까지도 녹여낼 필요가 있다. 쌍릉 권역은 서동과 선화의 영원한 안식처로 그려내야 할 것이다. 비록 쌍릉은 현재 대왕릉과 소왕릉으로 거리를 두고 자리잡고 있지만, 이 역시 스토리텔 링적 상상력이 가미가 된다면 새로운 서동요를 만들어 내는데 재미와 흥미를 유발 시킬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새롭게 각색된 서동요를 통해 이 테마는 다양한 테마로 다시 개발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서동과 선화의 애잔한 사랑이야기를 새롭게 각색된 서동요에 담 는다면 미륵사 권역과 쌍릉 권역의 관광 개발이 자연스럽게 따라 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앞에서 수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쌍릉 권역은 현재 공원 이상의 기능을 상실하고, 외부 관광객을 맞이하기엔 초라한 형색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랑을 주제로 한 테마를 개발한다면 비단 쌍릉 권역의 개발 뿐만 아니라 이미지 마케팅을 통한 익 산의 도시 브랜드 역시 향상 될 것으로 기대된다. (4) 투석전 재연 테마 : 무왕, 백제신라 통일의 꿈 산성 중심 관광 테마 군사적 요충지로써 고도( 古 都 ) 익산 강조 지역 민속행사인 기세배놀이를 되살려 투석전 재연과 같은 지역민 참여형 테마 미륵사 권역, 서동생가 권역, 낭산 권역 투석전 재연 테마 : 무왕, 백제신라 통일의 꿈 테마는 익산의 여러 산성( 山 城 )을 중심으로 설정한 관광 테마이다. 이에 해당되는 권역은 미륵사 권역과 서동생가 권 역 그리고 낭산권역이 이에 해당된다. 익산에는 여러 산성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미륵산성, 낭산산성, 금마 도토성 등이 있다. 특히 고도의 4대 조건 중 하나인 산성이 익산에 분포되어 있다. 산성은 국가 를 방어하고, 더 나아가 대외전쟁을 펼치는데 꼭 필요한 건축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101

103 무왕의 익산경영에 가장 중요한 건축물 중 하나인 것이다. 실제 삼국사기 의 기록에 따르면 무왕은 재위 41년 동안 약 12회에 걸쳐 대 신 라 공격을 감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왕은 공격과 수비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산성의 역할에 주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무왕의 익산 천도와 관련해 여러 가 지 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익산이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점도 작용 했을 것이라 는 가설이 존재한다. 무왕이 백제 말 익산을 중심으로 전라북도와 결합을 시도한 이 유로 삼년산성-관산성-아막산성으로 이어지는 신라와의 접경이 익산 천도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그리고 562년 대가야의 멸망 이후 신라의 서진( 西 進 ) 압 박 역시 익산 천도를 결정하게 된 원인이라는 가설도 존재한다. 이러한 가설들은 비 록 역사학에서는 다양한 논의와 합의가 필요하지만 문학과 결합한다면 보다 흥미로 운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여기에 스토리텔링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무왕은 재위 기간 동안 신라와의 전투를 감행한다. 그리고 그 군사 적 요충지이자 자신의 출생지인 익산을 무왕이 놓쳤을 리가 없을 것이다. 무왕은 자 신의 출생지인 익산의 다양한 산성들, 즉 관방유적들을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러한 무왕에게 신라의 서진( 西 進 ) 압박은 피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맞서 싸워야 할 문제였을 것이다. 그리고 익산이야 말로 신라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최적의 군사적 요충지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테마는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 바로 신라와의 전투 장면을 재연한다 거나 무왕의 익산 천도의 이유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무왕, 백제를 호령하다 테마에서 무왕의 익산천도를 3D 가상현실(Virtual Reality)를 이용한 홀로 그램 시설물 제작을 제안하였다. 가상현실의 홀로그램 시설물을 통해 무왕이 익산천 도의 이유와 그 의의를 직접 선포하는 시설물이다. 이 시설물의 내용으로 익산이 천 애의 요새라는 점을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안전한 투석전의 재연 등을 통해 볼거리 뿐 만 아니라 직접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관광 테마상품을 개발하는 것이 이 테마의 핵심이다. 이때 참고할 수 있는 축제가 바로 스페인의 대표적인 축제인 토마티나 (La Tomatina : 이하 토마토축제) 이다. 흔히 토마토축제라고 불리는 이 축제는 스페인의 지역 축제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 세계가 주목 하고 있는 축제로 발전하였다. 익산은 이미 기세배놀이라는 훌륭한 자원을 갖고 있 다. 기세배 단순히 마을의 대표하는 기에 세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기세배를 받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과정을 거친 이후 기세배를 진행한다. 이렇듯 기세배 와 더불어 관방유적을 통한 투석전을 재연한다면 관광객들에게 비일상적 체험을 선 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무왕, 백제-신라 통일의 꿈 테마는 익산의 다양한 관방유적을 중심으로 관 광 테마를 설정할 수 있다. 10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04 (5) 답성 테마 : 산성을 돌아다니며 답성놀이 테마 고창읍성과 같이 성밟기 놀이 개발 스토리텔링 요소를 가미해 각 유적마다 이야기(스토리)가 존재하는 성밟기 미륵사 권역, 서동생가 권역, 낭산 권역 답성 테마 : 산성을 돌아다니며 에 해당되는 권역으로는 미륵사 권역, 서동생가 권역 그리고 낭산 권역이 해당된다. 이 권역에는 미륵산성, 오금산성, 낭산산성 등의 산성이 있다. 앞에서 살펴본 무 왕, 백제신라 통일의 꿈 테마는 각 산성의 관방( 關 防 )역할에 집중하여 테마를 개발하 였다. 그러나 이 산성을 돌아다니며 : 산성 테마 는 관광객들이 산성을 걷는데 그 목적이 있다. 요컨대 이번 테마는 체험형 관광상품을 개발하는데 주요한 테마라고 할 수 있다. 이 테마는 두 개의 이야기(스토리)를 담을 수 있다. 우선 첫 번째는 답성 테마이 다. 특히 이 테마를 기획하는데 있어서 참고할 만한 테마가 존재한다. 바로 고창읍성 의 성밟기 놀이이다. 고창읍성의 성밟기 놀이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 다. 머리에 돌을 이고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 고, 세 바퀴 돌면 극락에 간다 라는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고창읍성을 방문하는 관광 객들은 한번쯤은 고창읍성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성밟기를 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익산은 다양한 산성이 존재한다. 특히 미륵산성과 오금산성에는 이야기(스토리)가 전 해지고 있다. 오금산성의 경우 서동이 다섯덩이의 금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미륵산성의 경우 고조선 기준왕이 내려와 쌓았다는 전설과 태조가 미륵산성 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익산의 산성은 단순히 산성 의 역할 뿐만 아니라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는 유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성밟기 놀이를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관광객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 다. 또한 두 번째 테마로는 산성을 지키는 수문장의 교체식을 재연하는 테마이다. 물 론 이 테마는 항상 재연할 수 없으며, 익산의 서동 축제 등 다양한 재연행사에 맞춰 서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재 진행하고 있는 무왕 길을 찾아 떠나는 여행 (왕궁리 유적 전시관/원광대학교 마한백제연구소 공동 주관)과 같이 특정 행사에 진 행되는 이벤트로는 훌륭한 관광 테마가 될 것이다.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103

105 (6) 익산ㆍ일본 대사( 大 寺 ) 테마 익산과 일본의 대사( 大 寺 ) 연구를 테마 정보를 통한 지식습득 테마 한일 연구자 및 일본인 관광객 유치를 목적으로 함 왕궁리 유적 권역, 미륵사 권역 익산ㆍ일본 대사( 大 寺 ) 테마 에 해당되는 권역으로는 왕궁리 유적 권역과 미륵사 권역이 해당된다. 이 테마의 주된 목표는 정보를 통한 지식습득에 있다. 특히 익산의 경우 많은 국 민들에게 공주나 부여에 비해 백제 고도( 古 都 )의 이미지가 약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 한 이미지를 강화하는데 일반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적극적 홍보ㆍ유치 등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토리텔링을 접목시킨 관광 테마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에 대한 홍보ㆍ유치뿐만 아니라 학술적 논의도 동시에 진행되어 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요컨대 여러 연구자들이 고도( 古 都 ) 익산에 대한 연구와 논 의가 진행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번 테마는 익산과 일본의 사찰을 비교하고, 이에 따른 연구자들의 연구흥미를 유발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일본 연구자들의 익산 유입 그리고 더 나아가 일본의 관광객들을 유치하는데 이 테마의 목적이 있다. 미륵사와 제석사는 백제 최고의 사찰들이다. 14) 미륵사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써 3 탑 3금당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제석사 역시 단일 규모로 비교한다면 1탑 1금당식 가람 중 최고의 규모는 제석사라 할 수 있다. 백제 최고의 사찰들이 부여가 아닌 익산에 창건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또한 두 사찰은 시기 적 공통점을 갖는데 바로 639년이 그 공통점이다. 미륵사의 경우 서탑의 해체ㆍ복원 과정에서 639년 1월에 서쪽 석탑을 건립했다는 사리봉안기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제 석사 역시 관세음응험기 의 발견으로 639년 소실 후 그 폐기물을 멀리 떨어진 곳 에 매몰한 다음, 원래 계획했던 사역에 다시 탑을 비롯한 중문ㆍ금당ㆍ화랑ㆍ승방 등을 갖춘 사찰로 중건하였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일본 역시 639년 백제대사( 百 濟 大 寺 )를 창건하였다. 중요한 것은 백제와 일본이 왜 같은 시기에 대사( 大 寺 )를 창건ㆍ중건한 이유이다. 또한 이 밖에 어떠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지가 이번 테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우 선 주지하다시피 백제 문화의 중심은 불교문화이다. 불교문화를 통해 백제는 다양한 문화적 르네상스를 이룰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왕권강화까지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런 데 이러한 백제 문화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불교문화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대 14) 이하 글은 이다운, 대사창건과 백제ㆍ왜의 교섭, 동북아문화연구, 동북아시아문화학회, 제 34집, , 이다운, 고대일본의 백제불교 전개와 정치변동-사찰 창건을 중심으로-, 원불교사상과 종교 문화,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음. 10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06 사( 大 寺 )가 부여가 아닌 익산에 창건 된 것이다. 그리고 일본 역시 같은 시기에 백제 대사( 百 濟 大 寺 )를 창건하였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우선 두 나라 모두 왕권을 강화하는 목적으로 대사( 大 寺 )를 창건한 것으로 추측된 다. 특히 미륵사 서원 석탑 사리봉안기의 내용을 보면 왕보다도 왕후를 포함한 당대 최고의 귀족 사택씨가 강조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석사만큼은 무왕의 왕권 강 화를 목적으로 무왕이 독자적으로 조영한 것으로 추측된다. 639년은 왜에서도 대사 창건이 이루어진 해이다. 더구나 사명( 寺 名 )을 백제대사라 정하였다. 무왕이 부여가 아닌 익산에 대사를 창건하고 새롭게 왕궁을 조영하였듯이, 당시 일왕도 왜의 옛 도 읍인 아스카가 아닌 이와레( 磐 餘 )에 대사를 창건하고 궁(백제궁)을 새롭게 조영하였 다. 당시 아스카는 최고 권력자 소가노 우지( 蘇 我 氏 )의 본거지이며, 소가노 우지는 백제 사택씨와 마찬가지로 왕후를 배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위 계승에 강력한 영향 력을 행사하였다. 요컨대 무왕이 그러했듯이 일왕 역시 백제대사( 百 濟 大 寺 )를 창건하 여 강력한 왕권강화를 꿈꿨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백제의 고도로써 익 산과 왜는 불교를 교섭 한 것이다. 특히 무왕은 관륵( 觀 勒 )을 파견하는 등 왜와의 불 교 교류를 지속하였으며, 그 교류의 중심에는 익산의 대사( 大 寺 )인 미륵사와 제석사 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익산은 부여와 차별화 된다. 부여에는 단 한 곳의 대사( 大 寺 )도 없을뿐더러 백제대사를 통해 일본과의 교섭에도 익산의 사찰은 부여의 그것을 압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연구가 지속된다면 연구를 목적으로 일본에서 익산을 찾는 연구 자들의 익산 유입이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일본인 관광객들의 유입도 점 차 늘어날 것이다. 특히 익산의 대사( 大 寺 )와 일본의 대사( 大 寺 )가 같은 년도와 같은 목적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앞으로 연구자들이 주목해야 할 연구테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가 끊임없이 학계에 보고된다면, 익산의 불교 사찰의 학술적 위치도 지금보다 더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7) 익산 불교 성지 테마 : 익산, 호국불교의 성지 고도( 古 都 ) 익산의 사찰을 중심으로 한 불교 성지 테마 특히 호국불교의 성지 익산 을 강조 불교 신자 및 타 종교 신자들 유치 가능 왕궁리 유적 권역, 미륵사 권역, 금강 권역 익산 불교 성지 테마 : 익산, 호국불교의 성지 에 해당되는 권역은 왕궁리 유적 권역, 미륵사 권역, 금강 권역이다. 이 테마의 유적으로는 제석사지, 미륵사지, 사자사지, 연동리 석불좌상 그리고 숭 림사 등이 있다. 이 테마는 익산을 불교 성지화 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설화들을 접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105

107 목시켜 관광객들의 흥미를 유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우선 이 테마의 이야기(스토리)는 다음과 같은 스토리텔링 자원이 존재한다. 우선 미륵사 경우 무왕이 백제 최고의 국찰(( 國 刹 )이다. 또한 제석사 역시 무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한 사찰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사자사의 경우 미륵사 창건에 일조한 지명법사가 주지로 몸담고 있었던 사찰로 전해지고 있다. 특 히 지명법사의 경우 그 신통력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지명법사의 신통 력과 관련된 첫 번째 이야기는 서동이 발견한 다섯 덩이의 금을 하룻밤 사이에 신라 로 옮겨준 이야기이다. 서동은 오금산에서 금덩이를 발견한 뒤, 금을 신라로 옮기는 방법을 지명법사에게 의논하였는데 지명법사가 그의 신통력으로 금덩이를 하룻밤 사 이에 신라로 보냈다고 전해진다. 두 번째는 미륵사를 짓기 위해 지명법사가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고 못을 메웠다는 이야기이다. 선화가 무왕에게 큰 연못에 절을 세 우기를 청하였는데, 이에 지명법사가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고 못을 메워 그곳에 미륵사를 지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신통력을 가진 지명법사가 주지로 몸담은 사 찰이 바로 현재 사자암이 있는 사자사지이다. 두 번째 이야기(스토리)는 미륵사지에서 3Km 정도 북서측에 위치하고 있는 석불 사 대웅전의 주불인 연동리석불좌상이다. 연동리석불좌상과 사찰의 조성 과정에 대 해서는 정확한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건립시기는 미륵사보다 약간 빠른 7세 기 초에 건립되어 12~13세기경까지 법등이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연 동리석불좌상에는 재밌는 이야기(스토리)가 전해지고 있다. 바로 왜군의 행군을 막아 내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 땀을 흘린다는 전설이다. 연동리석불좌상은 정유재란 당시 왜장 가등청정( 加 藤 淸 正, 가토기요마사) 금마와 여산을 지나 한양으로 진격할 시 안 개를 퍼트려 진격을 막아냈다는 이야기(스토리)를 갖고 있다. 또한 국가적 흉사 때마 다 미리 땀을 흘려 경고를 한다는 이야기(스토리)도 갖고 있는 석불좌상이다. 연동리 석불좌상은 호국불교의 상징이자 불교성지 테마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숭림사는 신라 경덕왕(재위: ) 때 진표( 眞 表 )가 창건한 천년고찰이 다. 숭림사 역시 연동리석불좌상과 마찬가지로 호국불교의 최전선에 섰던 사찰이다. 왜구들이 금강을 따라 들어와 백성들을 괴롭히고 식량을 노략질 하자 숭림사의 처영 ( 處 英 )스님이 이끄는 승병들이 숭림사를 근거지로 그들을 위협하며 곡창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익산의 불교는 단순히 종교의 차원을 뛰어넘어 나라를 지키는 호국불교의 이야기(스토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익산의 불교를 불교 성지 관광 테마를 개발한다면 다양한 관광객들이 방문할 수 있는 관광 상품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 다. 특히 비단 불교라는 종교를 뛰어넘어 각 사찰마다 품고 있는 이야기(스토리)들을 스토리텔링 자료로 이용한다면 관광객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테마로 발전시킬 수 있 을 것이다. 10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08 (8) 능묘 테마 : 백제인, 익산에 잠들다 능묘 중심의 관광테마 능묘 수습 유물들의 스토리텔링화로 보석의 도시 고도( 古 都 ) 익산 도시 브랜드 창출 입점리고분 전시관을 통한 관광객의 학습 테마 관광 조성 쌍릉 권역, 낭산 권역, 금강 권역 능묘 테마 : 백제인, 익산에 잠들다 에 해당되는 권역으로는 쌍릉 권역, 낭산 권 역, 금강 권역이 있다. 이 테마는 익산의 능묘 중심의 관광 테마이다. 우선 이 테마에서 빠뜨릴 수 없는 유적이 무왕릉이라 일컫는 익산 쌍릉이다. 쌍릉은 고대 도성이 갖추고 있는 4대 요 건 중 하나인 왕릉유적에 속하는 것으로서, 고도 익산을 접근해 나가는데 있어서는 빠뜨릴 수 없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성남리 고분군은 성남리 외성마을에서 장암마을로 넘어가는 소로의 북편에 위치하 고 있다. 미륵사 북쪽지맥 해발 40M 내외의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낭산산 성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낭산 권역 개발이 시급한 지역이라 할 수 잇다. 성남리 고분군은 발굴조사를 통해 28기의 무덤을 확인되었다. 그중 백제시대 무덤은 24기에 해당되며, 고분군의 연대는 7세기 중엽정도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시기는 무왕이 익산 경영을 한 시대와 비슷하며, 이를 통해 익산의 세력집단 무덤으로 추정 할 수 있을 것이다. 익산의 능묘유적 중 빠뜨릴 수 없는 유적이 바로 입점리 고분군이다. 1986년 우연 히 발견된 입점리 고분은 입점리 칠목재에서 동남으로 뻗은 해발 100m 구릉의 중턱 에 분포하고 있다. 최초 조사를 통해 8기의 고분이 조사되었고, 추가 조사를 통해 13기의 고분을 더 찾을 수 있었다. 수습된 유물로는 금동제관모와 금동신발, 마구류, 중국제 청자류, 토기류 등 중요유물이 수습되었다. 웅포리 고분군은 해발 240m인 함라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 가운데 웅포 면 소재지로 이어지는 해발70m 정도 야산의 남동사면에 입지한다. 약 60여기의 고 분이 분포하고 있다. 웅포리 고분에서 단경호, 광구호, 직구호, 삼족토기, 고배, 직구 호, 대부호, 개배, 철부, 철도자, 철겸 등을 수습하였다. 우선 쌍릉의 경우 석실 내부가 백제 사비시대를 대표하는 최대 규모의 왕릉으로 알려져 있다. 출토된 유물과 목관의 재질을 통해 왕릉이라는 것이 증명이 되었다. 한 편 입점리 고분군과 웅포리 고분군은 익산지역이 백제 중앙세력에 편입되는 과정을 알 수 있으며, 백제 중앙 세력과 긴밀한 관계가 유지된 강력한 세력집단임을 추정케 하였다. 또한 이들이 무왕의 익산 경영과정에서 지지 세력으로 성장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능묘유적의 조사 및 연구현황, 익산역사유적지구, 마한백제연구소, 2009년, 126~137쪽) 이 테마는 두 가지 관광 테마를 개발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관광을 통한 학습 테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107

109 마이다. 주지하다시피 입점리 고분군은 현재 입점리 고분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전시관을 활용하여 자연스럽게 관광객들의 관광 학습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 다. 두 번째는 보석 산업 테마이다. 익산은 대한민국 최대의 보석 가공 도시로 알려 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보석 가공 도시에 역사 와 이야기 를 접목시키는 방법이다. 다양한 유물들이 익산 보석 가공의 역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테마는 산업, 관 광 그리고 역사 가 융합된 테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수습된 유물들에 역사 스토 리텔링화 하여 보석의 도시 고도( 古 都 ) 익산 이라는 도시 브랜드를 만들 수 있을 것 으로 기대된다. (9) 옥룡천 테마 : 이야기가 있는 물길 복원된 옥룡천 걷기 테마 금마 시가지 복원과 함께 다양한 관광 테마 사업 발굴 가능성 단순히 걷기가 아니라 사랑 이야기가 흐르는 걷기 테마로 발전 금마 시가지, 왕궁리 유적 권역 옥룡천 테마 : 이야기가 있는 물길 에 해당되는 권역으로는 왕궁리 유적 권역이 있다. 현재 익산시는 고도육성의 일환으로 옥룡천 복원을 진행하고 있다. 옥룡천 물길 복원 구간은 금마저수지부터 고도리 석불 입상까지 총 2.4Km의 구간이다. 그리고 옥룡천 복원과 더불에 관아ㆍ객사터를 발굴, 일부를 복원할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다. 이러한 옥룡천 복원과 발 맞춰 옥룡천 이용한 테마가 바로 옥룡천 걷기 테마이다. 앞 장 권역별 자원 분류 를 통해 배후 도시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그 리고 익산의 많은 권역과 테마들의 배후도시로써 금마 시가지를 삼아야 한다고 재차 강조하였다. 옥룡천 걷기 테마는 금마 시가지를 관통하여, 왕궁리 유적 권역으로 나 아가는 물길 테마가 될 것이다. 특히 단순히 걷기 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를 접목 시켜 이야기가 있는 걷기 테마 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우 선 대표적 이야기로는 고도리 석불입상의 이야기(스토리)가 있다. 이 석불입상은 다 음과 같은 이야기(스토리)가 전해진다. 석불입상은 약 150M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서쪽의 석상이 남자이고, 동쪽의 석상이 여자 석상이다. 그런데 이 두 석상 사 이에는 옥룡천( 玉 龍 川 )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두 남녀는 평상시에는 서로 만나지 못 하다가 섣달 그믐날 밤 자정에 옥룡천이 얼어붙으면, 두 석상이 서로 건너와 만난다 고 전해진다. 그리고 새벽에 첫 닭이 울면 헤어져 1년을 기약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러한 석불입상의 사랑 이야기는 옥룡천 걷기에 충분히 이야기(스토리) 테마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서동-선화의 사랑 이야기 테마와 같이 사랑을 주제로 한 걷 기 테마로 활용 될 수 있다. 옥룡천 걷기 테마는 단순히 걷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야기와 주제를 담을 수 있 10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10 다는 강점을 갖고 있는 테마이다. 익산 역사유적지구의 배후도시인 금마 시가지를 관통하는 옥룡천은 금마 시내권의 개발과 함께 사랑이라는 주제를 덧붙여 이야기가 흐르는 걷기 테마로 발돋움 할 것으로 기대된다. (10) 생태ㆍ녹색 테마 : 백제 왕궁 정원 왕궁리 유적 내 백제 왕궁 정원 복원 테마 2013 <순천 정원 박람회>의 성공적 개최와 <소쇄원>에 대한 관광객들의 관심 포석정, 싱가포르 보타닉가든과 견줄 수 있는 백제 왕궁 정원 복원 테마 왕궁리 권역, 금강 권역 생태ㆍ녹색 테마 : 백제 왕궁 정원 에 해당되는 권역으로는 왕궁리 유적 권역과 금강 권역이 있다. 익산은 다양한 생태ㆍ자연 자원을 갖고 있다. 최북단차나무군락지, 두동마을 편백 나무숲길, 구룡마을 대나무숲길 등이 익산이 갖고 있는 생태ㆍ자연 자원이다. 이는 각 숲길을 통한 관광 테마 개발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뿐만 아니다. 생태 테마 개발시 주목할 유적이 있다. 바로 왕궁리 유적이다. 왕 궁리 유적은 백제 유일의 왕성 유적이다. 특히 왕궁리 유적은 여러 발굴 조사를 통 해 그 규모와 시설물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특히 왕궁의 정확한 위치, 규모, 조성과 정 등을 발굴 과정을 통해 밝혀졌다. 또한 정원 유적과 대형화장실 유적을 발굴한 것은 왕궁리 유적 발굴의 최대 성과 중 하나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로 정원 유 적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왕궁리 유적을 통해 백제 궁궐 내에 정원이 조성 되었다는 것을 확인 하였고, 이는 제한된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는 사적인 오락 공간을 의미 한다. 요컨대 왕궁리 유적에서 발굴된 정원 유적은 현재 유일한 백제 왕궁 정원 인 것이다. 정원에 대한 관광객들의 관광 욕구는 뜨겁다. 대표적으로 2013 <순천 정원 박람 회>와 담양 <소쇄원>을 예로 들 수 있다 <순천 정원 박람회>는 순천만에 세 계 여러 나라의 대표 정원을 재연 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박람회를 마쳤 다. 발표된 방문 관람객만 하더라도 400만명이 넘는다. 또한 담양 <소쇄원>은 년 평 균 20만명이 방문하는 담양의 대표적 관광지이다. 또한 경주의 포석정, 싱가포르의 보타닉 가든(Singapore Botanic Gardens),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Palace and Park of Versailles)은 각 나라를 대표하는 정원이자, 왕실-귀족들을 위한 정원 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광지는 각 지역/나라를 대표하는 관광지이다. 익산의 생태 테마 강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익산의 경우 왕궁리 유적의 발굴을 통한 백제 왕궁 정원 을 복원한다면, 백제 왕궁 정원 은 익산만 갖고 있는 특화된 관광지가 될 것이 다.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109

111 (11) 왕비-보석 테마 : 왕비-여성친화도시-보석의 메카 선화, 사택적덕의 딸, 충목왕비, 단종비 정순왕후 : 익산과 관계하는 왕비들 전통적 왕비 도시인 익산, 사택적덕의 딸과 선화공주의 사리봉안 : 여성친화도시 사리장엄의 정교하고 아름다움은 보석의 도시 익산을 강조 왕비-보석 테마 : 왕비-여성친화도시-보석의 메카 에 해당되는 권역은 미륵사권역 과 금강 권역이다. 익산은 왕비의 도시이다. 선화공주, 사택적덕의 딸, 충목왕비, 단종비 정순왕후은 익산과 관계하는 각 시대의 왕비들이다. 고려 충목왕비의 경우 숭림사 설화에서 익 산과의 관계를 찾을 수 있다. 또한 그녀들이 백제-고려-신라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 은 전통적으로 익산이 왕비-여성과 끊임없이 관계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 한 전통적인 왕비 도시인 익산이 여성친화도시의 대표 도시라는 것은 역사적 맥락에 서 찾을 수 있다. 익산은 보석의 도시이다. 익산의 보석 산업은 익산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할 수 있 는 산업이자, 익산을 대표하는 산업이다. 이러한 보석 산업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바 로 사리장엄이다. 미륵사지 석탑 해체ㆍ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은 그 제작 과정과 양식적 특징이 오늘날의 기술자도 쉽게 따라하지 못할 만큼 정교하고 아름답 다. 그런데 이 사리장엄과 가장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이가 누구인가. 바로 사택 적덕의 딸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 흔적만 찾을 수 있는 중앙 목탑과 서탑의 경우 는 누가 봉안을 했을까. 여기서 바로 스토리텔링의 상상력이 동원된다. 적어도 3탑 중 2탑은 선화공주-사택적덕의 딸이 봉안을 했을 것이다. 국찰( 國 刹 )로써 그리고 대 사( 大 寺 )로써 백제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에 두 왕비가 사리를 봉안했다면, 익산이 왕 비-여성과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관계 하고 있었음을 증명할 것이다. 그리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사리장엄은 익산이 역사적으로 보석 산업의 도시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테마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테마로 만들 수 있다. 우선 보석을 귀금속 보석 체 험의 테마이다. 이는 보석을 직접 꿰거나 다듬어 자신만의 목걸이-팔지 등으로 만드 는 테마이다. 두 번째는 사리장엄을 이용한 다양한 상품 개발이다. 여기에는 열쇠고 리, 펜던트와 같이 일반적인 상품뿐만 아니라, 유골함과 같이 다양한 상품으로의 개 발이 가능할 것이다. 4. 익산 관광 스토리텔링의 SWOT 분석 SWOT 분석이란 내부 환경과 외부 환경을 분석하여 강점(strength), 약점 (weakness), 기회(opportunity), 위협(threat) 요인을 규정하고 이를 토대로 전략을 수립하는 기법을 뜻한다. 이러한 SWOT 분석은 관광 스토리텔링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데, 앞에서 살펴본 <스토리텔링 자원분석>, <권역별 자원 분류>, <테마별 자원 11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12 분류>를 통해 익산 관광 스토리텔링의 SWOT은 다음과 같다. 강점 (S) - 소프트 콘텐츠 위주의 관광상품 개발 가 능성 - 거점 중심 및 배후 도시를 통한 기반 시 설 확보 가능성 기회요인(O) 약점(W) - 가족 숙박시설 부족으로 체류형 관광의 어려움 - 주 관광지의 경우 원활한 대중교통 이용 불편 위협요인(T)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 새로운 서동요 기획 가능 - KTX 호남선 완전 개통 - 무왕, 선화 건축물 부족 - 정비되지 않은 관광지에 대한 점검 - 주민 공동체 의식 복원 < 표 : 익산 관광 스토리텔링의 SWOT> 익산 관광 스토리텔링의 강점(S)은 소프트 콘텐츠 위주의 관광 상품 개발이 가능 하다는 것이다. 기존 관광산업은 하드웨어 중심의 물리적 개발방식 위주였다. 그러나 익산의 관광산업은 스토리텔링과 접목하여 소프트 콘텐츠 위주의 관광 테마 개발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소프트 콘텐츠 위주의 관광 테마는 점차 다양 해지는 관광객들의 관광 욕구를 만족시키는데 부족함이 없다. 특히 스토리텔링은 끊 임없이 관광객들과 소통하여, 빠르게 변화하는 관광객들의 니즈(needs)를 충족시키 는데 부족함이 없는 기법이다. 또 다른 강점으로는 거점 중심의 관광 상품을 개발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거점 중심의 관광 상품은 흩어져 있는 관광 자원들에 장소성이 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단일한 인상을 부여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또한 배 후도시를 금마 시가지로 설정하는데 큰 무리가 없다. 금마시가지를 배후도시로 삼아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편의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익산 관광 스토리텔링의 약점(W)은 가족 숙박시설의 부족으로 인한 체류형 관광이 어렵다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관광산업은 세계 최대의 단일산업인 동 시에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요컨대 관광객들은 소비자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비 자들의 소비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편의 제공이 필수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익산은 금마 시가지라는 배후도시가 최대 강점이다. 그런데 이 배후도시 에는 숙박이 가능한 숙박시설이 전무한 상태이다. 이러한 숙박시설 부족은 당일여행 중심의 관광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약점으로는 주 관광지의 경우 원활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익산 시외버스 터미널, 익산역 등에서 주 관 제 2장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고도지역 문화관광 자원분석_장윤준 111

113 광지로 대중교통을 통해 이동하기엔 불편함이 따른다. 또한 익산시에서 제공하는 시 티투어의 경우 매월 2, 4째 토요일만 운영하고 있다. 타 도시의 사례를 살펴보면 춘 천의 경우 매일 시티투어 버스를 운영하고 있으며, 관광객들의 만족도도 높은 것으 로 조사되었다. 춘천의 경우 2014년 2월 기준으로 주말(토ㆍ일) 평균 약 34명, 평일 (월~금) 평균 약 17명이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목할 점은 평균치가 아닌 일 관광객 2~4명이 이용한 날도 많다는 것이다. 요컨대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 제공 은 방문 관광객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익산 관광 스토리텔링의 기회요인(O)으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이다. 요즈 음 미디어에서는 국격 이라는 단어를 자주 표현한다. 나라에만 국격 이 있는 것이 아니다. 도시에도 분명 도시의 품격이 존재한다. 익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라는 기회요인을 통해 도시의 품격이 한층 올라갈 것으로 기대된다. 관광객들의 증 가는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익산 관광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품격에 맞는 관광 테마를 개발하고,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 역시 익산의 기회요인이다. 사택적덕의 딸 등장은 새로운 서동 요를 기획하고 공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사택적덕의 딸 등장은 위협요인 이 아닌 것이다. 새로운 서동요를 기획하고 개발하여, 어린 서동이 아니라 성장한 무 왕의 이야기를 새롭게 담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KTX 호남선 완전 개통 역시 익산 관광의 기회이다. KTX 호남선 완전 개통으로 서울-익산의 거리는 약 1시간으 로 단축되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서울-춘천의 시간적 거리와 비슷하다. 다만 KTX 호남선 완전 개통과 맞물려 익산역-금마 구간의 대중교통의 정비가 필요하다. 익산 관광스토리텔링의 위협요인(T)으로는 우선 무왕, 선화의 건축물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특히 익산에서 무왕과 선화가 갖는 지위를 생각 할 때 현재 무왕, 선화 건축 물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서동공원이 있지만, 서동공원만으로는 부족하다. 좀 더 공격적인 개발과 투자가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것이 바로 정비 되지 않은 관광지에 대한 점검이다. 방치되고 있는 유적과 관광지에 대한 빠른 점검 을 통해 관광객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특히 쌍릉의 경우 서동과 선화를 중심으로 테마 공원을 가꿔야 할 것이다. 현재 조성되어 있는 시설은 관광객 을 맞이하기에는 부족함이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스토리텔링화를 통한 테마 공원을 조성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 위협요인으로는 주민 공동체 의식이다. 이는 비단 배후 도시로 설정하고 있는 금마면 주민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익산시민들 역시 이 공동체 의식의 복원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공동체 의식의 복원 없이는 관 광산업이 성공 할 수 없다. 특히 관광권역과 관광테마 개발시 소외받는다고 오해하 는 주민들이 생겨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주민들이 익산을 위하여 주도적으로 활동 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주도적 활동의 선행 과제가 바로 공동체 의식의 복원이다. 11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14 제 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 최기우 (최명희문학관) 1. 관광스토리텔링의 유형과 방향 1) 스토리텔링과 관광산업 관광의 의미가 예전에는 둘러보기 등을 통한 휴식이었다면, 지금은 감성과 그 감 성의 욕구를 만족시켜 줄 체험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감성적 체험은 스토리텔링 을 통해 극대화된다. 스토리텔링은 문화원형에 언어 라는 도구적 가치를 활용해서 새로운 이성과 정서 의 세계를 창출하는 동력이다. 단순히 이야기하기 가 아니라, 스토리에 매체의 특성 에 따른 연출이 포괄된 개념이며, 지식기반산업에 언어의 생명에 기운을 더해 새로 운 문화체계를 수립하는 수월성( 秀 越 性 ) 있는 학문이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의미를 공유하고, 호기심과 호감을 얻도록 하는 일. 스토리텔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기필코 기승전결을 갖춰야 하거나, 대단한 의미를 내포해야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전통문화, 신화, 설화, 역사 속 문화원형에는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의 보편적 정서를 사로잡는 스토리텔링 요소들이 담겨있고, 새색시처럼 골목에 숨어 있는 작은 식당에 서도 그 나름대로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관광에서도 스토리텔링은 큰 역할을 한다. 로마의 명물인 스페인 계단을 거닐며 영화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을 떠올리고, 일본 니가타현 에치고 유자와 온천 을 거닐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 을 떠올린다. 한국에서도 드라마 <겨울 연가>의 이야기를 남이섬의 관광 포인트로 활용하는 등 관광스토리텔링을 새로운 관 광 기법으로 활용하고 있다. 관광스토리텔링은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속에 등장한 장소에서 자신이 마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판타지를 제공하면서 큰 효과를 내고 있 다. 관광에서의 스토리텔링 개념은 관광지, 관광시설, 관광프로그램 등에 스토리를 부 여해 관광객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에서 관광지와 관광객이 정보의 체험 을 공유하면서 공동의 스토리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으로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관광 객이 체험의 과정에서 경험하고 느끼는 것에 따라 스토리가 다르게 형성되고, 그러 한 스토리들이 합쳐져 하나의 통합적 스토리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관광지에서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13

115 개성을 추구하며 드러내고자 하는 현대 소비자들 의 욕구에 부합하는 스토리를 제공 함으로써 관광객이 상상 속에 그리고 있었던 특정한 스토리에 자신을 포함시키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관광스토리텔링은 관광객과 관광지가 함께 만들어가는 가치체계를 구축하는 것, 관광지가 가지고 있는 스토리와 이를 경험하고 그러한 경험들이 공유되면서 형성해 가는 공유가치(새로운 스토리) 추구의 과정을 말하며, 관광 전에 경험할 수 있는 관 광스토리텔링과 관광 중에 발생되는 스토리텔링, 관광 후에 발생될 수 있는 관광지 를 둘러싼 이야기 모두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 관광객과 관광지, 지역 주민(혹은 관 광안내자)의 참여에 의해 서로 공유하는 관광지 스토리가 구성돼 간다는 것이다. 또 한 관광스토리텔링은 관광객으로 하여금 방문지에 관한 흥미를 유발시키고 그 지역 을 공간적으로 또는 시간적으로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관광객의 체험과 추억의 관리를 통해 관광객, 관광지, 지역주민이 공동의 감성체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관광스토리텔링의 진정한 의미다. 15) 관광스토리텔링은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스펙터클을 선사하면서, 화제와 감동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이야기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야기를 끄집어내 관광자원화 하는 것이 관광스토리텔링이다. 여기에서 이 야기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재미에 있으며, 사실에 기초한 이야기와 가공 상상의 이야 기로 구성된다. 관광스토리텔링기법은 관광객 유도를 위해 관광지와 관광지에 얽힌 이야기를 유기 적으로 결합시킨다. 제공할 이야기의 지향점을 설정하고, 관광객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어떤 추억을 만들 수 있도록 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가 관광스토리텔링기 법이다. 곳곳에 나열된 역사자원들을 역사 인물 장소 등등 테마화해 스토리로 엮어 관광객을 유인하는 관광코스를 만드는 것도 그 기법 중 하나다. 관광지의 이미지 전달은 인간의 감각기관인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등 인간 의 오감으로 전달되며, 매체는 여행서적, 여행기행문, 여행상품 브로슈어나 팸플릿, 사진, 엽서, 그림, 관광안내책자, 관광안내사의 해설, 표지판,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 를 통해 관광객에게 전달한다. 관광자원이나 관광지를 안내하거나 해설하는 관광안 내자의 경우 관광객에게 관광지에 관한 최종적인 이미지를 전달하는 매개역할을 한 다. 따라서 관광안내자의 능력에 따라 관광지의 이미지가 정형화될 수도 있다. 관광 에 있어서 스토리텔링도 기본적으로 관광안내자의 설명과 해설에서 시작된다. 이들 의 담론과 수사, 서사, 표현 등은 관광의 사회 언어적 본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 문에 관광안내자의 어휘력, 연설, 대화, 목소리, 숙어, 문법, 텍스트 등이 더 중요하 15) 이야기는 인간문화의 필수적인 요소다. 이야기는 우리가 사유하는 방식과 놀이하는 방식 그리고 삶을 이해 하는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 삶의 총제적인 모습을 전달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그 창작자들과 향유자 들이 살고 있는 지역과의 연관성 아래서 전해오고 있다. 우리가 지역의 문화를 이야기 할 때 지역 이란 단순 히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다. 지역은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생명의 땅이며, 고유의 토양 과 지형, 물의 흐름과 기후, 동식물을 비롯한 많은 자연의 특질을 갖추고 있는 독자적인 생명의 장이다. 11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16 게 여겨지고 있다. 전국에 관광지는 널려 있고, 관광산업은 가파르게 변한다. 충분한 자료를 구축하 고, 문화원형을 발굴하고, 정확한 소재를 찾아 깎고 다듬어 새롭고 차별화된 콘텐츠 개발에 더 서둘러야 한다. 스토리텔링이 문화산업 전반의 미학적 가치를 높이는 일 에 충분히 활용될 수 있도록 다양한 학제 간 연구를 통해 그 가능성을 함께 모색해 야 한다. 트렌드는 사람 마음의 무늬( 紋 )를 그려내는 독창적인 스토리텔링이다. 2) 관광스토리텔링의 테마 개발과 스토리 유형 관광에서의 테마는 관광지를 순식간에 떠오르게 하는 하나의 간결한 기호체계이 며,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해설의 중심 아이디어를 말한다. 테마는 관광지가 관광객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관광객의 감성을 바로 자극할 수 있어야 하며, 테마가 표현하는 어휘는 철저하게 관광객이 원 하는 것을 지향해 코드를 맞춰 공동의 감성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테마를 개발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해설 대상에 대한 관광객들의 관심을 집중시 키기 위한 것이며, 이는 관광객들에게 관광지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을 준다. 테마는 방문객들이 한 장소를 체험하면서 그 장소를 하나로 강렬하게 기억하 거나 이해하게 되는 바로 그 무엇이다. 따라서 테마를 선정할 때 관광지가 관광객들 을 사로잡고자 하는 본질을 제대로 포착해야 한다. 관광지가 관광객들에게 제공하고 자 하는 체험이 어떤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여 지역사회의 독특성을 관광객에게 특별 한 것으로 인식시켜야 한다. 테마가 정해지면 각 관광지에서의 해설은 주요 테마를 충실하게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하다. 또한, 각 자원들이 지닌 하위 테마들 역 시 메인 테마를 뒷받침해야 한다. 테마의 유형은 연대, 세부주제, 지역사회의 삶과 역사 등이 될 수 있다. 유형을 구 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든 주제의 흐름이든 테마에는 일정한 연결고리가 있어야 하다는 것이다. 연계성에 의한 테마 제시를 통해 관광객들 자연스럽게 테마 에 빠져들게 된다. 사적인 의미를 지닌 특정 집단이나 과거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주요인물들이 어떠한 행동을 취했는지 등에 초점을 맞춰 연대기적 주제를 정할 수 있다. 전시물과 해설은 에피소드 순서에 따라 전개되어야 하고, 각각의 에피소드 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해설되어야 하며, 전체적인 이야기가 구성될 수 있도록 다른 사건들, 과거와 현재와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높은 산과 같이 눈에 띄는 경관이나 지형이 있는지, 해당 관광지에서만 할 수 있는 활동이 있는지, 역사적 사건 의 발생지나 영화 촬영지와 같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상징성이 있는지, 박물 관의 경우 특이한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는지 등등 관광지의 잠재력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관광객의 특성을 파악하고, 철저하게 관광객 지향적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특함도 중요하지만 일상적이고 익숙하고 평범한 자원들에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15

117 게 더 큰 흥미를 느끼는 관광객도 있기 때문이다. 3) 관광스토리텔링의 스토리 활용과 공간시퀀스 구성 대부분의 관광객은 어느 특정한 한 곳만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근처의 여러 곳을 방문하기 때문에 비슷한 주제로 묶인 권역 공간을 의미 있게 재구성해주기 위해서는 공간의 이동 방향을 제시하는 공간시퀀스를 구성하는 것이 좋다. 가장 간단한 것은 유형의 특성에 따른 스토리 요소를 발굴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관 광지는 주제 시기 역사 인물 체험 테마 등에 따라 구분될 수 있고, 음식 하나만 해도 상호 마케팅 재료 역사 등에 따라 구분되며 주인의 성격도 주요 스토리가 될 수 있 다. 숙박은 상호명과 관련된 이야기나 유명인사가 방문했던 장소, 영화촬영지 등도 주요 스토리가 될 수 있으며, 행사는 지역적 특성을 드러낸 것이나 역사적 사건, 국 제적 스케일, 계절별 특성 등이 발굴될 수 있는 요소들이다. 교통은 인물과 역사, 지 역의 생태나 경관자원, 특정 테마 등과 관련된 모든 요소들이 스토리 자원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스토리 자원들은 늘 가장 최근의 자료를 찾아 관리해야 한다. 스토리를 활용하는 방법은 강조하기와 각색하기, 창작하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스토리 강조하기는 특정 장소 공간, 상품이 가지고 있는 설화 전설 등 기존에 있던 이야기 중에서 관광객이 매력을 느낄 만한 이야기를 강조하거나 부각시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경남 김해 가야역사문화거리다. 이곳은 과거 가야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문화재를 중심으로 화려한 조명시설과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과 왕비 허황옥을 형상화한 상징조형물을 설치했다. 각색은 기존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하거나 변형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의 이야기에 충실하되 관광자원과 관광객의 특성, 관광활동에 따라 원래 이야기를 축소 또는 확대하기도 한다. 기존 스토리가 다른 지역과 차별성이 부족하 거나 특정 공간이나 장소와 연계되지 못한다거나 그 실체가 불분명할 경우 약간의 가공 또는 유사한 장소와 연계하는 등의 각색을 거쳐 관광상품화 한다. 대표적인 예 가 전남 곡성 심청이야기마을과 소설 태백산맥 의 주 무대인 전남 보성 벌교다. 심 청의 고장으로 잘 알려진 곡성은 효를 주제로 한 테마파크 일환으로 심청이야기마을 을 조성했다. 이곳입구에는 나무 아래에서 심청이를 기다리는 심봉사 동상이 있고, 마을에는 심청이가 살았을법한 초가집과 우물 등이 만들어져 있다. 또, 막 인당수에 뛰어들려고 하는 심청의 조형물도 세워져 있어 관광객들에게 그 의 감성을 느끼게 한다. 작가 조정래의 고향이기도 한 벌교에는 소설 속 사건들을 마을 곳곳에 재현해 놓아 사실감을 더해주고 있다. 소설에서 주인공 정하섭과 무녀의 딸 소화가 사랑을 꽃 피웠던 현부자네 집이 언덕 길 위에 있고, 그 옆에는 태백산맥문학관이 있다. 갯 벌을 농토로 만들기 위한 소작민들의 좌 우익의 대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소화다리 나 기찻길 등도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다. 창작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관광 상품화하는 것을 말한다. 영화 드라마 등 11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18 에 등장한 이후 관광지로서 각광받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드라마 <겨울연가> 이후 촬영지가 관광지로 부각된 춘천과 남이섬이 대표적인 예다. 유원지였던 남이섬 을 상상과 꿈의 섬,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창조하면서 연간 국내외 관광객 300만 명 이상이 찾아오는 한류관광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남이섬에서 장군터를 지나면 나오 는 메타쉐콰이어 숲길은 주인공 준상과 유진이가 걸었던 길이고, 잣나무 길을 걷다 가 왼쪽으로 들어가면 주인공들이 첫 키스를 했던 장소가 있는데 남이섬을 찾는 연 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관광명소다. 국내 최대 녹차생산지인 보성 녹차밭 도 각종 CF와 영화 촬영지로 잘 알려져 있다. 4) 역사 관광스토리텔링의 서술 방식 역사를 테마로 한 스토리텔링을 역사스토리텔링이라고 한다. 역사 스토리텔링이란 말 그대로 역사적 사실에 뼈와 살을 붙여 솔깃한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인 과 관계와 새로운 해석, 연표에서 생략되었던 사람의 마음을 포함시키고, 국사 교과 서와는 다른 화법으로 사람들을 역사로 초대한다. 몇 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팩션의 인기는 역사 스토리텔링의 잠재력을 증명해 왔다. 역사가 이토록 흥미로울 수 있다 는 사회적 공감대는 더 많은 역사의 스토리텔링화를 이끌어 냈다. 갈수록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지어낸 이야기보다는 근거(사연)가 있는 이야기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역사 스토리텔링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활용해 이야기를 가공함으로써 의미와 재 미, 정보, 감동을 더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어 세상과 소통하는 하나의 방식이 다. 역사적 사실에 살과 뼈를 붙여 의미와 재미를 더한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작업은 스토리텔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에 철저히 근거해서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재미를 위해 허구의 사실을 만들어내서 적용시키는 것은 사람들에게 거짓된 정보를 준다. 동시에 역사를 왜곡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에 철저히 역사적 사실 에 부합해서 신빙성을 높여야 한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진행하면서도 그 속에 내재된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스토리 텔링은 사실보다 진실을 추구해야 방문객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 고, 방문객들에게 진정한 감동과 교훈을 선사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단순한 사실(fact)을 전달하기보다 구체적인 장면을 조성함으로써 실감 을 유도해야 한다. 이는 관련된 구체적인 사건을 접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듣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고, 집중도 역시 높아져서 실감나게 이야기 를 전달할 수 있다. 과거의 역사를 스토리텔링 하는 것이지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과 익산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함께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지역민들만 방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역민들만 공감할 수 있는 특수성만을 강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17

119 조한다면 타 지역 방문객들이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타 지역 방 문객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과 익산 지역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수성을 함께 강조 하는 것이 좋다. 타 지역 방문객을 해 스토리텔링에 이용할 이야기 소재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역 사 는 기본적으로 과거 사건들을 의미하기도 하고, 과거 사건들에 대한 탐구를 의미 하기도 한다. 즉 쓰인 역사 는 일어난 역사 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6) 스토리텔링 의 도래와 함께 과거에 진행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현재적 의미로 재해석 하는 역사스토리텔링은 최근 들어 특히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역사스토리텔 링은 문화의 원형으로 채록이나 수집에 기반을 둔 설화와 신화 스토리텔링을 비롯해 드라마나 영화 뮤지컬, 게임 등 다양한 방면의 영상이나 공연, 공간 스토리텔링에 이 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활용이 되고 있다. 역사스토리텔링의 서술은 재현(representation)과 재창조(reinvention)의 방법이 있 다. 재현은 삶, 현실, 풍경, 사물 등 가시적이며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어떤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과거를 소재를 재구성해 현재적 시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 여한다. 특히 영상문화 분야에서 재현은 언어나 이미지를 사용해 주변 세계에 의미 를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정통 사극은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왜곡 없이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려는 의지를 표방하려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 예로 전남 신안군의 흑산도유배문화공원 조성을 들 수 있다. 신안군은 흑산도 주변의 어류 해조류 등 227종의 수산자원을 소개한 정약전의 자산어보 를 활용해 여객선터미널 인근에 자 산문화관 건립, 흑산도의 수산물 전시하고 있다.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는 소설가 한 승원과 김훈에 의해 소설화 되어 각각 흑산도 하늘 길 과 흑산 이란 문학작품으로 확장됐다. 다산 정약용의 전남 강진군 유배생활에 착안해 다산초당을 경유하는 정약 용의 남도 유배길 도 한 예다. 남도 유배길 은 정약용이라는 매력적인 과거의 유산 을 활용해 과거를 현재적 감각에 맞게 재현, 유배의 아픔을 겪지만 부단한 자기 채 찍질을 통해 아픔을 극복하는 유배의 서사구조를 내포하고 있다. 경남 남해군은 서 포 김만중의 남해 유배 콘텐츠를 중심으로 2010년 남해군 납해읍에 남해유배문학관 을 개관했다. 재창조는 이미 있는 것을 고치거나 새로운 방식을 써서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 다. 퓨전 사극은 기본적으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거기에 재미라는 항목 을 더하거나 아니면 구설로 전해 내려오는 허구 속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고, SF적인 요소가 가미되거나 현대적인 물품이 등장하는 등 재창조적인 면이 강하다. 영화 <황 산벌>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사극 <다모> <추노> <대장금> <성균관 스캔 들> <해를 품은 달> 등이 대표적인 예다. 16) 정창권, 고전을 활용한 상품 스토리텔링 연구, 돈암어문학 제21호, 2008, 47-76쪽 참고. 11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20 역사스토리텔링의 범위는 광활하다. 역사소설, 역사드라마, 역사극, 역사 영화 등과 같은 역사서사물이 역사스토리텔링의 범주에 포함되며, 역사를 소재로 한 테마파크 박물관 체험프로그램 축제 공연 게임 길 광고, 상품 브랜드 디자인 기업경영 마케팅 교 육 정치 건축 등 역사 이야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소통하는 것이라면 모두 역사 스 토리텔링의 범위다. 2. 관광스토리텔링의 활용과 안내 체계 강화 1) 관광 패턴의 변화와 관광안내체계의 역할 관광의 유형이 크게 변했다. 개인 친구 가족 등 개별여행객이 증가하고 있고, 여행 횟수가 증가하고 매체가 발달하면서 관광객들의 직간접적인 관광 경험이 풍부하다. 또한 관광지에 대해 상세하고 정확한 정보에 대한 욕구가 있다. 따라서 관광안내체 계를 개선해 관광정보를 정확하고 풍부하게 제공해야 한다. 관광정보를 풍부하게 제 공하면 관광객들이 관광경험을 더 풍부하게 하고, 체제일수를 늘리는 촉매제가 된다. 관광 상품과 서비스 판매를 증가시키기도 한다. 관광객에게 관광지로의 접근을 더 쉽게 유도하며, 관광지를 결정하지 않은 이들에게 방문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전에 정보를 습득하게 되면 관광자원의 훼손을 방지할 수 있고, 관광객과 관광지 주민들과의 갈등을 감소시키기도 한다. 관광안내체계는 관광정보의 공급자가 관광정보 수요자에게 관광정보를 전달하는 제반 매개수단 및 운영체계로서 통일성을 갖춘 전체 를 말한다. 관광안내소, 관광안 내판, 공중관광정보망 등 관광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는 제반 전달매체와 시설물, 인적체계를 말하며, 관광안내소, 관광안내표지판, 관광안내전화 17), 관광안내지도, 관 광안내자, IT활용 안내시스템 18), 관광홍보 및 홍보간행물 등을 포함한다. 가장 철저한 관리가 필요한 곳이 관광안내소와 관광홍보물, 관광안내표지판, 그리 고 관광안내자다. 관광안내소는 안내자, 각종 안내장비, 안내자료 등이 갖추어진 장소다. 전문적으로 관광안내를 하는 곳뿐만 아니라 비전문적으로 관광안내기능을 담당하는 곳도 포함하 며, 방문객에게 각종 관광관련 정보와 휴식처를 제공하고, 지역 특산품과 기념품을 전시 판매하며 지역과 지역을 연결해주는 다목적 복합공간을 말한다. 관광홍보물(홍보간행물)은 관광객들의 관광의 편의를 위해 지역의 정보(관광지 홍 보물, 관광책자, 음식책자, 호텔팸플릿 등)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이며, 관광안내지도는 낯선 곳을 여행하는 관광객에게 위치 장소 등 지리적 정보를 제공, 17) 관광안내전화는 관광객의 언어소통 편의 및 국내관광객들의 편리한 관광안내를 위해 운영하고 있다. 내 외 국인 관광객에게 국내여행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안내해주는 한국의 관광안내 대표전화(1330)를 말한다. 18) IT활용안내시스템은 쌍방향성, 국제화, 통합성, 연결성, 저렴한 비용, 재미, 시간의 일치성, 융통성 등의 특 징을 갖고 있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19

121 관광객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다. 관광안내표지판은 세계관광기구(World Tourism Organization)와 아시아 유럽경 제협의체 관광실무그룹(APEC-Tourism Working Group)은 현대적 의미의 관광안 내 표지판을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19) 관광객의 입장에서 필요하거나 도움을 주 는 모든 표지판을 현대적 의미의 관광표지판(안내판)으로 규정할 수 있으며, 관광안 내판의 기능은 관광지 지리안내, 관광자원 시설의 이해 증대, 경관 정비, 개성 연출 등이다. 표지판은 해설 정보와 지도 사진과 그래픽을 담을 수 있는 이차원적인 표지 다. 표지판은 상대적으로 설치가 저렴하고 디자인과 설치가 쉽다는 점에서 소규모 지역사회에서의 실용성이 높다. 표지판은 마을을 관광하는 탐방로의 표식의 기능을 하거나 단순히 흥미로운 관광지와 역사적 사실을 지시하도록 제작 할 수 있다. 관광안내자는 개인 또는 단체 관광객을 위한 교통, 숙박, 관광객 이용시설 및 편의 시설의 이용에 대한 제반 서비스를 제공하며, 관광 대상을 설명하거나 여행을 안내 한다. 2) 관광안내소 관광안내자의 역할과 방향 관광안내소는 관광객을 처음 맞는 관문으로, 관광대상지에 대한 첫 이미지를 형성 하는 것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관광안내소의 기본 역할은 관광안내자와 관광안 내장비, 관광안내자료 등을 갖추고 관광정보 제공과 관광객의 각종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다. 관광객과 직접 대면해 정보를 상호교환하면서 관광객에게 즉시 맞춤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즉, 관광객에게 단순히 관광 목적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던 역할에 서 적인 변화와 관광객의 요구에 따라 정보제공, 예약, 전시 판매, 휴게 공간, 지역연 계 등의 역할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관광안내소의 유형은 서비스 지역범위에 따라 전국 단위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앙 관광안내소, 광역 지자체 단위의 지역 종합 안내서비스를 제공하는 시 도 종합관광 안내소, 기초지자체 또는 해당 관광(단)지에 대한 세부 안내를 담당하는 시 군 지역 관광안내소<관광(단)지 관광안내소> 가 있다. 시 도 종합관광안내소는 특별시장 광역 시장 및 도지사가 해당 시 도 지역 및 타 시 도지역의 관광안내를 위해 설치 운영하 는 안내소를 말하며, 내외국인 관광객에 대한 당해지역 및 타 시 도지역 관광정보안 내 및 부대서비스 제공하며 지역 내 관광정보 부대서비스 발국 및 전국 시 도종합관 광안내소에 제공, 관할 지역 관광안내전화(1330)운영을 한다. 시 군 지역관광안내소 19) 현대적 의미의 관광안내 표지판 관광표지판 분류 일반안내 및 안전 표지판 관광대상물 및 문화 표지판 교통터미널 표지판 관광시설 표지판 장애자 설비 표지판 내 용 관광안내, 출입구 응급구조 등 공원, 해수욕장, 절 등 기차, 항구, 쇼핑지역 등 호텔, 카지노, 식당 등 장애자 주차장, 장애자용 화장실 등 12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22 <관광(단)지 안내소>는 시장 군수 구청장 및 관광(단)지 관리주체가 해당 지역 관광안 내를 목적으로 설치 운영하는 안내소를 말하며, 내외국인에 대한 해당지역 상세 관광 정보 안내와 지역 내 관광정보 발굴 및 해당 시(도)종합관광안내소에 제공한다. 관광안내소는 관광정보센터의 개념(tourist information centers)에서 탈피해 관 광객 정보센터(visitors information centors)로 역할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또한 종합형 관광안내소에서 전시형 관광안내소까지 각 주제별로 설치 운영하고 있다. 그 러나 관광안내소의 관광정보는 관광객을 끌어들일 만큼 안내의 효율화를 꾀하지 못 하고 있고, 대다수의 관광안내소에서 제공되는 관광안내는 단순한 지역관광 안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 국제화 정보화 에 뒤떨어지고 있다. 외관은 익산의 주요 콘텐츠를 연상시킬 수 있는 디자인으로 제작해 시각적인 이미 지텔링을 부여해야 한다. 미륵사탑의 하층부나 성곽(익산토성) 혹은 사리장엄기 등 형태 띄는 것도 한 방법이다. 내부에는 관광전시, 기념품판매점, 컴퓨터 서비스 이외 에도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4개국 이상의 언어로 다양한 테마를 가진 홍보물 을 비치해야 한다.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한 샤워시설이나 음료수 등 간단한 먹을거 리 등을 제공해 여행자들의 쉼터 기능과 다목적 복합문화공간의 기능을 수행해야 한 다. 관광지 안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관광안내자다. 관광안내자는 관광객을 통제 하며 관광의 목적을 원활하게 수행하는 리더의 역할과 편의시설 뿐만 아니라 모든 제반시설과 관광단체와 주민사이, 관광객과 기관사이의 중계자의 역할, 방문지의 역 사, 문화, 생활, 경제, 사회 사정 등의 해설과 함께 관광객의 이해를 돕는 해설자의 역할이 있다. 관광지에 있는 문화자원은 해설을 통해 자원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자원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교육적 가치를 제공하고 있 다. 중계자의 역할은 관광객과 방문지의 문화적 차이를 중재하는 역할로 확대되고 있다. 관광안내자의 역할은 지역민들의 삶을 체험하거나, 공연을 관람하고, 전설이나 사실에 관한 이야기를 청취하는 등의 활동까지 포함된다. 지역의 관광안내자가 관광 자 각각의 특성과 기대수준에 맞춰 탐방로에 대해 해설해 준다면 탐방로에 생명을 불어 넣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관광안내자를 동반한 탐방 여행은 가장 효과적이면서 관광객과의 상이에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즉, 관광안내자는 방문자의 체류 기간 중 가장 중요 한 부분이 될 수 있으며, 지역주민과의 개인적 상호작용의 기회자체가 매우 중요한 데 만약 관광안내자가 능숙한 해설 능력을 보여준다면 관광객은 지역에 대한 한층 고차원의 이해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익산의 전통문화, 역사, 사회, 지리, 경제, 정치 등 사회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하기에 지속적으로 심층적이며 현실에 맞는 교육을 통해 업무의 질을 유지시킬 수 있다. 특히, 국제 관광시장의 급변하는 환경변화에 따른 현실적 감각에 맞는 정보를 통한 자질향상과 전문성을 위한 지속적이며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져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21

123 야 한다. 가장 중요한 기능은 재방문을 유도하거나 소문을 통한 관광상품의 재판매 를 촉진시키는 것이다. 3) 관광안내의 스토리텔링 활용 (1) 관광안내판의 역할과 한계 관광객에게 교육적 성과와 더불어 그 성과를 통한 교훈과 감동을 선사할 수 없으 면, 재방문을 유도하기는 힘들다. 이것은 향후 익산의 역사문화자원을 통한 지역발전 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관광객에게 적게나마 관련된 지식과 특별한 이미 지를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즉 수요자의 입장에서 위에서 언급한 문제점을 생각 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방식이 바로 스토리텔링이 다. 스토리텔링을 단어 그대로 해석하면 이야기를 말하다 이다. 그러나 내포하는 뜻 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좀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상대와 이야기를 나눌 때 가장 힘든 것은 상대의 주목을 끌면서 나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더 나 아가 나의 이야기를 통해 상대방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거나 상대에게 감동을 줄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스토리텔링은 바로 이러한 효과를 얻을 수 있게 한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안내판이다. 안내판의 설치 목적은 유적지를 방문하는 사람이 그 유적지에 대한 정보를 가장 빠르고 쉽게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 나 현재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의 내용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안내판에 게재된 설명글에서 빠진 것들 것들이 많다. 대부분의 안내문은 표면적인 특징과 특성만을 다루고 있거나 문화재청 홈페이지 소개문을 그대로 옮겨 놓았고, 유사 문화재와의 차별점이나 해당 문화재가 지닌 가치와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부족 하다. 또한 백과사전식 서술로 무겁고 딱딱하며, 설명하는 초점이 전문 연구자의 눈 높이에 맞춰져 전문지식이 없는 관광객이 읽었을 때 흥미를 갖기 힘들다. 지역에 대 한 지식이 부족한 관광객에게 이해하기 쉽게 풀이해 설명해주는 것이 이해력을 높이 는데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12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24 (2) 관광안내판 스토리텔링: 마룡지와 서동생가터 서동이 탄생한 곳으로 알려진 마룡지에 가면 그곳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다. 원 문은 아래와 같다. 그림 26 서동생가터 표지석 그림 27 마룡지 삼국유사 무왕조에 의하면 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 이고 그의 어 머니는 과부로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연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고 기록되었다. 이 연못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마룡 지이며, 마룡지 동측에서 초석과 백제시대 기와편이 다량 수습되어 서동의 생가터로 알려져 있다. 용은 왕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로서 백제 왕족이 었던 무왕의 아버지가 익산에 내려와 살면서 장을 낳았고 오금산에서 마를 캐어 생업을 살던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금 을 얻어 백제 제30대 왕위에 오르고 익산으로 천도하였다. 그림 28 안내판: 마룡지와 서동생가터 이 안내판은 문제가 많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23

125 본문의 내용이 삼국유사를 인용한 글이라고 해도 전혀 수정되지 않고 너무 직접적 인 단어가 들어가 있다. 불특정 다수가 읽는 외부 안내판은 읽는 이의 수준을 최소 한 중학교 2학년 정도로 맞춰야 하며, 어려운 단어를 써서는 안 된다. 또한, 누구에 게나 공개되는 외부 안내판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초등학교 3-4학년의 학부형이 라고 생각하고 자녀에게 큰 소리로 읽어준다는 느낌을 가지고, 그 수준에 맞춰서 써 야 한다. 내용의 구성은 해당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어야 하지만, 서동요를 통해 알 려진 전반적인 사항을 써 놓았다. 글을 인용할 때에는 인용한 곳에 대한 정확한 표시가 있어야 한다. 삼국유사 역시 누군가의 해석에 따른 것이기에 해석한 사람의 이름이 들어가야 하고, 전체 글을 누 가 썼는지 밝혀주는 것이 관광객들에게 더 친근한 이미지가 될 것이다. 안내판의 형태는 전반적으로 어두우며, 글씨가 너무 작다. 문장부호들이 잘못 표기된 부분이 많다. 또한 문의할 곳도 적어두지 않았다. 이곳은 장소에 대한 안내판이고, 서동테마에 맞춰 이동하는 관광객이 많은 만큼 이전 장소와 현 장소, 앞으로 갈 장소 등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도 필요하다. 아래는 그 예다. 왕궁 리 오층 석탑 (거 리) 고도 리 석불 입상 마룡지 생 (거 가터(현 리) 위치) (거 리) 용 샘 오 (거 금 리) 산 제목도 마찬가지다. 이 안내판의 제목은 <마룡지와 서동생가터>가 되어서는 안 된 다. <마룡지와 서동생가터>란 단어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기에 꼭 필요한 내용이지 만, 그 아래 별도의 제목이 필요하다. 글의 본 제목이다. 예를 들어, 마룡지에는 용이 산다 백제 무왕의 힘은 이곳, 마룡지에서 기운한다 마룡지에는 백제의 웅 혼한 힘이 담겨 있다 검붉은 홍련이 피는 마룡지 백제 무왕이 태어난 곳, 마룡 지 등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 아래 가는 원문의 문장을 조금 고쳐서 수정해 본 것이다. 연못 속의 용과 관계하 여 는 연못 속 용과 인연을 맺어 로 바꿨으며, 한자어를 한글로 바꾸고, 오타와 띄어 쓰기 등을 교정했다. 가 삼국유사 무왕 조에 의하면 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 이다. 그 의 어머니는 서울(백제의 수도, 현 익산) 남쪽 연못가에 살았는데, 연못 속 용과 인연을 맺어 장 을 낳았다. 고 기록됐다. 삼국유사 에서 말한 남쪽 연못가 가 이곳 마룡지다. 마룡지 동쪽은 장 의 생가터로 알려져 있 12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26 는데, 그곳에서 주춧돌과 백제시대 기와 조각이 많이 수습되었다. 용은 왕 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로, 왕족인 장 의 아버지를 말한다. 서동 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장 은 마를 캐 살다가 동요 서동요 로 인해 신 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 혼인했다. 그후 백제 제30대 왕에 올랐 으며, 익산으로 천도했다. 나와 다는 마룡지 자체의 주변 환경을 고려한 문장으로 고친 것이다. 나 마룡지는 이른 여름부터 홍련이 핀다. 검붉은 홍련은 마치 이제 곧 용이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기세등등하고, 버드나무 가지는 수면에서 초록초록 출렁인다. 삼국유사 무왕 조에는 백제 제30대 무왕의 어머니가 마룡지 근처에 살았는데, 마룡지에 살던 용과 인연을 맺어 그를 낳았다. 고 전한다. 용은 왕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 마룡지 근처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마를 캐 살던 서동은 훗날 재치 있는 서동요 가락의 기운을 얻어 신라 선화공주 와 혼인했다. 백제의 왕이 되면서 그 스스로 용이 되었다. 다 매년 7월이면 검붉은 홍련이 기세도 등등하게 피어오르는 이곳 마룡지는 백제 제30대 무왕이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은 서 동이었습니다. 마룡지 주변에는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인 주춧돌과 백제 시대 기와 조각들이 많이 나와 그 시대를 짐작하게 합니다. 이곳에서 몇 걸음 더 가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어린 서동이 물일 길러 마셨다는 우물터 용샘이 나오고, 선화공주와 혼인한 뒤 금 다섯 덩이를 캐서 신라 에 보냈다는 오금산이 나옵니다. 라는 마룡지의 주인공은 용과 서동어미다. 따라서 서동어미의 감정에 맞춰 구성한 내용을 담았다. 라 마룡지는 백제 제30대 무왕이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서동(훗날 무왕)이 자신의 아버지를 묻는 말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동어미 내가 너를 갖게 된 것은 남쪽 연못에 살던 무렵이었다. 몸이 불편하신 임금님께서 요양을 오셨던 때였지. 어느 날인가, 에미의 꿈에 큰 용이 나타났단다. 에미는 그 용과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도 하고, 산보도 하면서 밤을 지새웠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단다. 괴이하게도 그로부터 열 달 뒤 네가 태어났느니라. 믿어지시나요? 삼국유사 에 있는 내용이랍니다. ^^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25

127 관광지의 안내판은 긴 글이 아니지만, 그래서 더 쓰기가 어렵다. 각 관광지마다의 특 징을 잡아내고, 그것을 지역과 연결시켜야 하며, 이전 이후 방문 관광지와의 연결고 리도 써야 한다. 교열 교정이 완벽하게 된 정확한 문장과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을 만한 문장의 구성 등을 갖춰야 한다. 따라서 어느 특정한 기획사에서 베껴 쓰는 것 이 아니라, 글쓰기 전문 작가를 섭외해야 한다. 고도 익산 지역에서 안내판이 필요한 곳을 확인하고, 거점 지역과 비거점 지역을 파 악한 뒤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이야기로 구성해 제작해야 한다. (3) 관광안내판 스토리텔링: 미륵산, 미륵사지, 미륵사지유물전시관 가장 중요한 곳이 미륵사와 미륵사지, 미륵사지유물전시관 등이다. 아래 각각의 내 용은 거점들을 소개한 곳이지만, 하나의 글로 엮어도 무리가 없다. 가. 천년의 설화가 알알이 담긴 미륵사지 나. 미륵산은 익산을 상징하는 지명이면서 동경의 대상이다. 서동과 선화가 꾸었던 꿈은 그 산 아래 미륵사지에서 깎이고 다시 서기를 반복하면서도 시대의 존엄을 잃지 않았다. 허물어진 미륵사탑을 만지면 역사의 온기가 스민다. 다. 익산에는 백제시대 최고의 규모를 가진 대가람 미륵사가 있다. 2009년 미륵사지석탑을 해체하고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는 미 륵사가 국내 최고의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사찰임을 입증했다. 라. 1400여 년 전 백제의 정기를 품고 있는 익산 금마면 미륵산 아래 미륵 사 옛터에서 찬란했던 백제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미륵사지는 2009 년 1월 미륵사지석탑 해체과정에서 금제사리봉안기 등 국보급 금제사리호 와 금제사리봉안기 등 사리장엄, 은제 관식 등 유물 7백여 점이 출토되면 서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긴 잠을 깨고 세상에 선보인 사리호는 뛰어 난 세공기법으로 다양한 문양이 새겨있고, 봉안기는 문헌사와 백제시대 서체 연구에 큰 획을 그을 수 있어 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로 평 가받았다. 미륵산의 미륵산성과 왕궁리 유적전시관, 5층 석탑을 돌아보면 백제문화를 더 느낄 수 있다. 마. 미륵사지유물전시관과 제석사지, 왕궁리 유적, 익산쌍릉, 미륵산성 등을 함께 둘러보면 백제의 역사와 문화, 백제 사람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소장유물만 19,363점에 이르는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은 미륵사지석탑쌓기 12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28 기와지붕잇기 등을 비롯해 왕과 왕비의 옷을 입어보거나 백제의 기와를 만드는 체험도 가능하다. (4) 관광안내판 스토리텔링: 이야기 순서에 따른 안내판 한 편의 이야기를 각 거점지 별로 나눠서 게재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무왕의 탄 생과 어린 시절(금마면), 훗날의 이야기들을 각각으로 구분해 안내판에 적고, 관광객 들이 이곳을 모두 지나쳐야 한 편의 완성된 이야기를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아 래 1부터 10까지가 이야기의 순서에 따라 각각의 이야기만 담겨 있다. 1 마룡지(용정마을 서쪽 금마면): 서동의 어머니는 이 연못에서 혼자 살다가 못 의 용과 인연을 맺어 서동을 낳았다. 2 축실지(용정마을 남동쪽 금마면): 서동의 생가터. 백제의 제30대 임금인 무왕 의 어릴 적 이름은 서동( 薯 童 )이었는데 어린 서동이 어머니와 용정마을 남동쪽 에서 살았다. 3 용샘(용정마을 연방죽골 금마면): 어린 서동이 어머니와 같이 살던 집터에 우 물이 있었다. 4 오금산(서고도리 일원 금마면): 서동이 어릴 때 마를 캐러 다녔던 곳으로, 훗 날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와 혼인 한 뒤, 이곳에 황금이 많이 쌓여있다고 말 했다. 5 사자사지(금마면): 선화의 말에 금을 캐 언덕처럼 쌓아놓고 사자사 지명법사에 게 신라로 어떻게 옮길 것인지를 물었다. 법사는 신통력으로 보낼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라고 했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가져다놓으 니,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보내어주었다. 6 오금사지(오금산 일원 금마면): 서동은 효성이 지극하여 마를 캐어 팔아서 어 머니를 봉양했는데, 훗날 마를 캐던 자리에서 다섯 덩이의 금을 얻게 되었다. 이는 효성이 지극한 탓이라 하여 인심을 얻게 되었고,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 뒤 무왕은 금을 발견했던 자리에 어머니를 위해 절을 창건하고, 5 금을 얻은 곳이라 하여 오금사라 하였다. 7 미륵사지(금마면): 백제 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에 행차했을 때 용화산 아 래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이 나타났다. 무왕 부부는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했다. 왕비가 왕에게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청했으므로 지명법사의 도움으로 못을 메워 절을 창건했다. 8 왕궁리유적(왕궁리): 백제 무왕은 자신의 고향인 익산 금마 지역으로 천도했 다. 9 제석사지(왕궁리): 백제의 무왕이 왕도를 왕궁평으로 옮겨 잡은 뒤, 궁궐 근처 에 제석천을 주존으로 모시는 내불당으로 절을 창건하고 왕실의 번영과 국가의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27

129 안녕을 기원했다. 639년 큰 뇌우로 창건 당시의 불전과 7층목탑, 낭방 등이 전 소되었다. 10 익산쌍릉(석왕동): 백제 무왕( 武 王 )과 선화비( 善 花 妃 )가 가까운 거리에서 잠들 어 있다. (5) 가로 시설물의 통합 디자인 필요 통합디자인은 거리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통합적으로 디자인하는 개념이다. 각 각의 디자인이 뛰어나다고 해도 전체적인 경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시각적으로 불편할 뿐 아니라 방문객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 안내판 이정표 벤치 등과 같은 가 로시설물들이 백제의 풍경을 느낄 수 있는 테마를 가지고 새롭게 설치돼야 한다. 아래는 도시의 상징을 가로등 디자인에 넣은 예다. 장수는 사과, 진안은 홍삼, 함 평은 나비, 고창은 고추 등 가로등에 지역의 상징물을 넣었다. 익산시도 사리호를 테 마로 가로등을 조성하기도 했지만, 고도 익산 지역에 이곳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만 들어 전체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석등과 미륵사탑 상층부 등을 디자인으로 활용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림 29 정읍 가로등(단풍) 그림 30 고창 해풍면 가로등(해풍고추) 그림 31 전남 함평 가로등(나비) 그림 32 진안 가로등(홍삼) 주요 도로를 보행우선거리로 확대 지정하는 정책 시행도 제안한다. 가로시설물 정 비사업과 더불어 가로경관의 쾌적성을 극대화 할 수 있도록 보행도로의 폭을 넓히고 도로변 불법 주정차와 옥외 광고물 등에 의해 쾌적성이 저하되는 것을 차단해야한 다. 또한 보행자 우선도로를 시민과 관광객이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노면표지판을 설치하고 보행편의시설 정비, 유도표지판 정비, 관광안내소 내 지도 설치 등 관광객 12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30 의 동선 편의를 지원하고, 각각의 동선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거리 네트워 크를 형성해야 한다. 아래는 각 관광명소 거리에 있는 안내판들이다. 그림 33 이정표: 고도 익산(금마면) 그림 35 이정표 영국 그림 34 이정표: 영국 스트래포드어펀에이븐 그림 36 이정표 전주한옥마을 그림 37 이정표: 채만식문학관 아래는 각 관광명소 거리에 있는 안내판들이다. 그림 38 춘천_실레 이야기길 그림 39 춘천_실레마을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 29

131 그림 40 춘천_김유정역 앞 상징물 그림 41 평창_허브마을 그림 42 영국 스트래포드어펀에이븐 거리안내판 그림 43 춘천_김유정문학관 그림 44 이육사문학관 그림 45 통영 박경리묘 13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32 그림 46 원주_토지문학공원 그림 47 원주_토지문학공원 그림 48 전주 한지축제 그림 49 강진 김영랑생가 그림 50 통영 청마문학관 그림 51 익산 서동공원 4) 익산의 이미지를 확산하는 관광스토리텔링 관광 안내의 기본은 해당 장소에 대한 지식 전달에 있고, 그 확장은 감동의 전달 이다. 이를 위해서는 해당 장소와 그를 둘러싼 여러 지식이 필요하다. 안내판도 마찬 가지다. 그곳에 적히는 글은 해당 장소에 대한 지식을 전하는 것이지만, 결국 지역 이미지의 긍정적 변화를 요구한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 31

133 1 한류 문화의 중심, 익산 한류에서 한( 韓 )은 마한 변한 진한이 있던 삼한( 三 韓 )에서 비롯됐다. 삼한 중 마한 목지국의 중심이 익산이니, 한류의 뿌리가 익산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2 전라북도 역사와 문화의 뿌리, 익산 전라북도의 역사와 문화의 뿌리는 백제다. 마한 백제 문화권의 중심인 익 산은 그래서 전라북도의 한중심이다. 익산에는 잃어버린 백제사의 여러 단면을 증거 하는 많은 유물과 유적들이 있으며, 이 땅의 사람들은 자신 들이 더 깊은 내력이 밝혀지기를 익산을 보며 간절히 바라고 있다. 3 왕의 고향, 익산 한 나라의 임금이 한 고장에서 태어나고 묻힌 땅이 어디 또 있는가? 익 산은 백제 무왕의 탄생과 성장, 사후 능( 陵 )까지 있는 진정한 왕의 고향이 다. 4 최고 조건의 고도, 익산 익산은 왕궁과 왕궁 사찰, 산성과 왕릉의 4대 조건을 충분히 간직한 참 의미의 유일한 고도다. 5 고도 익산르네상스 익산의 문화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고도 익산르네상스 는 고도( 古 都 )로 지정된 익산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관리해서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만 들겠다는 취지다. 2013년부터 금마 왕궁 일대에 미륵사지와 왕궁유적지 등을 복원하고, 금마면은 한옥형 숙박시설단지와 역사마을을 조성하고 있 다. 1부터 5까지는 도시 익산에 대한 스토리텔링의 일부다. 스토리텔링은 짧을수록 좋고, 상징적일수록 좋다. 6과 7은 익산에 대한 생각이다. 신동엽 시인과 익산 사 람들이 익산과 무왕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담고 있다. 6 마한 백제의 꽃밭 신동엽 시인은 그의 서사시 금강 에서 익산을 마한 백제의 꽃밭이라고 했다. 마한과 백제의 고도 익산의 미륵산길과 용화산길을 따라가면 미륵 의 불국토를 꿈꾸었던 1400년 전 익산 백제 사람들의 삶과 정신의 향기 를 시나브로 느낄 수 있다. 13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34 7 익산 사람들은 서동 을 귀하게 여긴다 익산에서 가장 큰 도로는 무왕로 다. 백제 무왕에서 유래했다. 익산 인화 동에서 팔봉동을 잇는 서동로, 오산면에서 부송동을 잇는 선화로 다. 그 만큼 익산 사람들이 서동 을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다. 8과 9는 고도 익산 지역인 금마면의 또다른 역사를 통해 색다른 이미지를 심어 줄 수 있는 내용이다. 10은 고도 익산 지역은 아니지만, 익산이 가진 백제의 역사를 다른 측면에서 보여준다. 8 저항의 땅, 금마 익산 금마는 668년 고구려가 붕괴한 후 고구려 부흥군이 보덕국을 세워 신라와 함께 당과 맞서며 새로운 출발을 모색했던 땅이었다. 9 동학의 현장, 사자암 동학의 제2세 교조인 최시형은 1884년 봄과 여름, 미륵산 사자암에서 4 개월 동안 머물며 익산 전주 여산 고산 삼례 등의 백성들에게 동학을 포교 했다. 10 백제시대의 제방, 황등제 김제 벽골제만 백제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전라도 3호(황등제 눌제 벽골 제)로 일컬어지는 익산 황등면 황등제도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 져 있으며, 일본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증축과 폐제의 길을 걸은 아픔이 있는 곳이다. 11과 12는 고도 익산 지역의 대표 유물을 통해 익산만이 가진 백제사의 큰 줄기를 보여준다. 11 한국 최고의 석등, 미륵사지 석등 우리나라에서 전래되는 석등은 6세기 초에 조성된 익산의 미륵사지 석등 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2 한국 최고의 석탑, 미륵사지 석탑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는 불교전래 이후 사찰을 건립 할 때 목탑을 조성했다. 그렇지만, 화재에 취약함은 물론 내구성이 약하다 는 등 여러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재료의 변환이 이루어진다. 이에 따라 중국은 벽돌로 만든 전탑 塼 塔, 한국은 석탑으로 탑을 건립하게 된다. 한국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33

135 에서는 서기 600년경 백제시대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 그 시작이었다. 13부터 17까지는 관광객의 흥미를 끌만한 내용이다. 누구나 궁금해 하고 재미있어 할 내용으로, 경우에 따라 조망점이나 포토존을 설치해도 좋을 지점이다. 20) 특히 미 륵산 남쪽에서 보이는 금마저수지와 익산미륵사지유물전시관 인공호수, 익산토성 정 상에서 보이는 전경 등은 고도 익산 지역의 대표적인 조망지점이다. 13 미륵사지 석탑은 왜 시멘트를 뒤집어썼을까 수리비 약 5만원, 응급수리비 약 2천원. 동경제대 건축과 교수인 세키 노 타다시 박사의 조사단이 조선고적조사 라는 명목으로 익산 미륵사지에 당도한 것은 1910년 12월 3일이었다. 이들은 조선유적조사약보고서 에 긴급수선이 필요한 유물로 미륵사 석탑(서탑)을 지목했다. 1915년 12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응급수리공사가 진행됐다. 콘크리트 범벅이 된 미륵사 석탑의 출발은 바로 여기에서다. 고적수리라는 명분으로 이와 비슷한 시 기에 시멘트 세례를 받은 경우는 미륵사석탑만이 아니었다. 경주 석굴암 과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과 유인원기공비 등도 그 대상에 포함됐다. 겉으로는 그 몰골 간신히 보존은 되었을지라도, 속으로는 골병이 들어 도리어 문화재의 원형과 그 가치를 크게 훼손시킨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14 백제시대 사용된 공동화장실 그림 52 왕궁리 유적에서 발견된 화장실 유구와 기생충 익산 왕궁리 유적을 발굴하던 2003년 재미있는 유구가 확인됐다. 백제 20) 재미있는 스토리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수한 스토리텔러들이 많아야 한다. 스토리텔러는 멀리 있지 않다. 굳이 중세시대 유럽의 성을 돌아다니면서 시나 이야기를 들려주던 음유시인이나 조선시대 강창 사 강독사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머리맡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머니도 스토리텔러이며, 자신 의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리는 블로거도 스토리텔러다. 공유하며 재미나 흥미를 느끼는 순간이 스토리텔링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특히 방문객이 올려놓은 여행리뷰를 꼼꼼히 살피면 익산의 조망점에 대한 새로운 시선 을 갖게 될 것이다. 또한 어느 지역이든 가장 좋은 스토리텔러는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로부터 비롯된다. 주 민들로부터 듣게 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모두 지역스토리텔링의 기초다. 13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36 당시에 사용하던 변소, 칙간, 똥간, 화장실이 발굴된 것이다. 화장실은 배수로 남쪽 가까이에서 나란히 3기가 확인됐다. 가장 큰 것은 깊이가 약 3m, 폭은 1.8m, 길이는 10m로 긴 타원형 구덩이를 파고 좌우 벽에 나무기둥을 세워 올렸다. 이곳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에는 지하 저장 고나 물을 담아 쓰던 저수시설 등 여러 추정을 했지만, 내부에서 채취한 퇴적토를 현미경으로 관찰해 회충, 편충, 간흡충과 같은 기생충 알을 다량 확인하고, 퇴적토에서 당시 뒤처리용으로 사용됐던 나무막대기를 확인하 면서 그 성격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나무막대기는 우리와 같은 화장실이 많이 발견된 일본에서도 같은 형태가 확인되었기에 화장실을 판 명하는데 결정적인 비교자료가 됐다. 또한, 이 화장실 내부 상단부에 작은 배수로가 있어 오물이 어느 정도 차면 배수로를 통해 오수가 처리되는 즉, 오늘날의 정화조 기능을 하도록 돼 있다. 간단하지만 매우 과학적으로 고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익산 왕궁리의 화장실 유적으로 그동안 몰랐던 우리의 고대 화장실의 실체를 알 수 있었고, 내부에 쌓인 퇴적토를 분석 해 백제 사람들의 식생활과 질병 등 여러 정보를 얻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화장실이 발견된 예가 거의 없었지만 일본에서는 우리와 유사한 화장실 유구가 상당히 확인됐다. 특히 일본 후쿠오카에 있 는 고로칸 유적에서는 8세기경의 화장실이 발견돼 왕궁리 유적과 좋은 비 교 예가 된다. 또한, 국내에서는 그동안 부여 관북리 등에서 중국 도자기 를 모방한 손잡이 달린 개인용 변기가 나온 예가 있기 때문에 이로 보아 왕궁리 화장실은 공방생활을 하던 당시 장인들이 이용하던 공동화장실로 추정된다. 15 고도 익산에 한반도가 있다 백제 천년고도에 한반도가 있다. 미륵사지를 감싸고 있는 미륵산(해발 430m) 정상에 서면 익산 시가지는 아파트촌이 숲을 이뤘고, 발아래에는 미륵사지터가 훤하다. 남쪽으로 바라보면 금마(종평)저수지 모양이 한반도 를 꼭 빼 닮았다. 그래서 이 저수지는 지도 연못 으로도 불린다. 일제강 점기인 1941년 일제가 쌀 수탈 목적으로 축조한 금마 저수지는 처음부터 한반도 지형을 고려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안정적인 농사를 위해 둑을 세우고 물을 가두고 나니 한반도 지형이 생겨난 것이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35

137 그림 53 미륵산 남쪽에서 보이는 금마저수지 미륵신앙이 미래의 일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상을 제시하는 것처럼, 어느 주민이 농업용수를 쓰려고 만수를 했더니 저절로 그런 모양이 나타났 다. 고 말한 것처럼, 금마저수지가 온화한 기운으로 통일과 이상을 향한 설렘으로 다가온다. 16 호수에 뜬 미륵산과 미륵사 탑 익산미륵사지유물전시관 동탑 앞 인공호수는 개구리가 산다. 화창한 날에 는 미륵산과 동탑이 호수에 뜬다. 그림 54 익산미륵사지유물전시관 인공호수 17은 익산의 대표 콘텐츠인 기세배를 설명하는 글이지만, 서동요 의 확장된 이미 지가 담겨 있다. 18은 익산시에서 진행하는 사업을 소개하는 글이지만, 익산시의 미 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서술이다. 17 익산토성에 오르면 오래전 내가 보인다 익산토성에 오르는 길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다. 정상에 올라 지금껏 오른 길을 뒤돌아보면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 보이는 것 같다. 13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38 그림 55 익산토성 정상에서 본 전경 18 서동요를 품은 기세배놀이 노래를 통해 가상을 현실로 만든 서동요 의 재기발랄함은 지금 익산 삼 기민요의 근원과 맞닿아 있다. 농경문화를 대표하는 놀이인 기세배는 농촌 각 마을의 풍물패가 농기를 앞세우고 정해 놓은 장소에 모여 만들어진 순서에 따라 형제의 서열을 정 하고, 아우 마을이 형 마을의 농기에 세배를 올린 뒤, 풍물을 연주하고 여 러 가지 놀이를 하는 전라북도 대표 민속놀이다.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인근 12개 마을의 풍물패 가 한 곳에 모여 서열을 정하고, 기( 器 )로 세배하며 음식을 나눠 먹는다. 익산기세배놀이다. 이 의식은 인근 마을의 협동을 꾀했으며, 주민들은 역 동적인 축제를 통해 풍년을 기약하면서 새해를 힘차게 출발할 수 있는 힘 을 얻을 수 있었다. 놀이의 연원을 알 수 없지만, 학계는 삼한시대 마한이 위치했던 금마를 중심으로 행해지던 농경의례와 제천의식에서 전래된 것 으로 보고 있다. 놀이의 구성은 기제사 영행 인솔 당산굿 기세배 기놀이 군 무 등이며, 1995년부터는 익산기세배보존회를 설립해 이 놀이를 계승하고 있다. 19 맛의 고장, 익산 전라북도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맛 의 고장이다. 익산도 맛 의 명성에 빠지지 않는다. 국내 첫 식품전문 산업단지인 국가식품클러스터도 익산시 에 조성된다. 아시아 태평양을 대표하는 국내 유일의 식품전문 산업단지인 국가식품클 러스터가 익산시에 조성되고 있다. 국가식품클러스터 조성사업은 2015년 까지 총 5천535억 원을 투자해 160여개 식품기업 및 연구기관, 대학 등 이 집적된 R&D, 수출지향형 국가식품전문산업단지로 조성하는 국책사업 이다. 익산시 왕등면 일대 약 233만m2에 조성 중이며, 고부가가치를 창출 하는 첨단 식품 기업들을 유치해 신제품 개발 등 식품 연구의 허브로 도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37

139 약, 본격 운영에 들어가는 2020년에는 세계 4대 식품클러스터인 네덜란드 의 푸드밸리, 덴마크 스웨덴의 외레순 클러스터, 미국의 나파밸리, 이탈리 아의 에밀리아로마냐와 어깨를 겨룰 예정이다.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일본의 유명 식품관련 기업들이 국가식품클러스터를 방문하며 잇따라 투 자협약을 체결하고 있는 것은 국가식품클러스터의 창창한 미래를 믿고 있 기 때문이다. 3. 전북 지역 백제 문화재 유적의 관광자원 1) 고도 익산의 역사문화자원 현황 2장에서 고도 익산의 자원을 전반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 자 원들을 미륵산 일대, 금마면 일대, 왕궁면 일대 세 곳으로 나누고 그를 중심으로 역 사문화유적과 산림녹지자원, 농촌자원, 수변자원 등을 살펴본다. 어느 한 지역은 역 사문화자원만으로 설명될 수 있지 않으며, 관광객은 그 지역의 모든 것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21) 이 지역의 역사문화유적은 국가에서 지정한 국보와 보물, 사적인 미륵사지, 왕궁리 유적, 제석사지, 익산토성, 익산쌍릉 등이 있다. 산림녹지자원은 미륵산과 용화산을 중심으로 금오산, 금마산, 아흔아홉배미논 등이 있다. 또한 마을 숲, 마을안길, 옛 가 옥 및 담장, 등 전통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농촌자원이 존재하며, 마을 주변으 로 흐르는 옥룡천과 금마저수지, 주택에 근접해 옛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뚜껑샘, 한샘 등 수변 자원이 분포한다. 고도는 역사문화자산의 유무만이 아니라 한 나라의 정치적 중심지이자 도읍지 기 21) 고도보존특별법 에 의한 고도관리는 단순히 역사문화자산을 보전한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도시재생 사업 차원에서 시행된다. 따라서 중 장기적으로는 역사문화환경과 주거환경이 크게 개선되어 주민들은 보 다 나은 생활환경을 영위할 수 있고, 구도심의 재생으로 차별화된 역사문화경관을 조성할 수 있어 관광객 증 가와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고도육성은 방안은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마련된 다, 첫째, 고도 보존하기 를 통해 고도의 역사적 실체를 보존하고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한다. 고도의 지형조 건, 역사문화유적, 공간적 골격 등을 분석하여 반드시 보전 또는 복원해야할 곳을 구분하는 등의 작업을 통해 고도가 가진 DNA를 재발견하고 진화시켜나간다. 둘째, 도시 활력 넣기 로 역사문화유적 주변의 쇠락한 생 활공간을 역사문화환경과 조화되게 재생시켜 쾌적한 주거환경과 활기찬 삶터를 조성한다. 셋째, 고도의 역 사문화자산과 주민 생활공간의 조화를 도모하여 고부가가치를 거둘 수 있는 고도 보여주기 측면을 고려한 다. 잘 보전되고 복원된 역사적 실체와 현 주민의 삶터를 조화시켜 고도를 관광자원화 한다. 문화국토의 선도 사업으로서 고도육성 문화국토란 각 지역의 문화가 그것의 장소성과 고유한 개성을 발휘하는 국토이며, 경 제활동 공간과 자연환경, 역사문화공간이 조화되어 발전적으로 진화해나가는 국토이다. 전국에 흩어져있는 역사문화자산의 고유성을 보존하고, 생활공간과 함께 진화시켜나가는 문화국토 조성사업이 필요하다. 그러 나 문화국토조성 사업을 일시에 추진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한정된 재원의 투자효율을 높 일 수 있도록, 고도를 문화국토 조성의 선도사업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고도의 역사적 DNA를 재발견하여 국토의 문화적 가치를 높이고, 이것을 국토전반의 역사문화환경을 미래지향적으로 진화시키는 기폭제로 활 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통해 우리 고유의 역사와 문화적 진정성이 국토 전반에 살아 숨쉬고, 역사적 진정성이 경제활동 공간과 삶의 일상에 녹아드는 문화국토를 조성하여야 할 것이다. 월간 문화재사랑 2009년 4월호(글: 채미옥 국토연구원 문화국토전략센터 소장) 13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40 능을 했던 지역을 말한다. 고도는 역사와 문화의 상징이며, 국민의 문화적 역사적 고 향다. 더 넓게 말하면 문화적 민족적 정체성을 고양시키는 지역이다. 고도보존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 에는 고도 란 우리 민족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 로 역사상 중요한 지위를 가진 경주, 부여, 공주, 익산, 그 밖에 대통령령이 정하는 지역으로 규정하고 있다(법 제2조). 고도에는 일반적인 역사문화도시와는 달리 정치 적 역사적 중심지로서의 도읍지만이 갖는 유 무형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과거 우리나 라의 정치적 중심지였던 왕궁 주작대로, 성곽, 사찰, 왕릉 등이다. 국가를 다스리던 다양한 역사 문화의 유적과 환경이 공간적으로 농축되어 있는 지역이 고도인 것이다. 고도의 구성요소 22) 는 단순히 역사문화유산의 분포만이 아니라, 고도를 형성시킨 지형적 조건으로의 산과 하천, 국가를 방어하던 산성, 국가 통치의 중심이 되었던 궁 궐터와 사찰, 고도의 공간적 골격을 구성하고 있던 주작대로와 가로망, 일반 백성들 의 주거지나 생활용구 생산 공간, 통치자의 왕릉과 옛 사람들의 고분군, 그 당시 사 람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역사적 장소와 설화적 장소 등이 포함된다. 고도 익산은 미륵산 일대와 금마면 일대, 왕궁면 일대가 큰 축을 형성한다. 익산 지역의 역사문화자원의 유형은 아래와 같다. 산(미륵산, 용화산, 금오산, 금마산, 봉화산) 마을숲(구룡나무 대나무숲 등) 산 림 자 자 연 적 인 보호수(버드나무, 대나무, 탱자나무, 은행나무, 삼률 원 요소 나무) (심 미 성 장 경작지(아흔아홉배미논) 소성) 하천(옥룡천, 부상천) 수 변 자 저수지(금마저수지, 왕궁저수지, 마룡지) 원 샘(용샘, 한샘, 뚜껑샘, 용샘, 옻샘) 문 화 적 인 국보(미륵사지석탑, 왕국리석탑내유물, 왕궁리오층석 요소 유 형 자 탑) (역 사 성 희 원 보물(고도리석불입상, 미륵사지당간지주) 소성) 사적(익산쌍릉, 익산토성, 미륵사지, 제석사지, 왕궁 22) 채미옥, 고도보존을 위한 역사문화환경 관리 방안, 국토연구원, 참고. 산 하천: 고도의 입지 조건. 방어적 기능과 생활용수 농업용수를 제공하는 핵심적인 자연경관요소 왕궁(궁궐터): 국가를 통치하는 거점 역할로, 고도가 정치 중심지로서 다른 도시와 구분되는 핵심적인 요소 사찰(탑): 사찰은 국가 통치의 중심지 역할 가로망: 도시 골격을 형성하는 뼈대 왕릉(고분군): 고도를 다스리거나 고도에서 살다간 사람들의 역사적 실체로 고도의 예스러움을 높여주는 경관요소 주거지 생산공간: 왕도를 유지시켜주는 경제기반으로 백성들의 주거지와 농경지, 도요지, 철제 도구 제작과 관련된 생산 공간 역사적 사건과 설화의 장소: 고도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요소들로 고도의 장소성과 역사적 상징성을 높여주며, 고도의 관광적 잠재력을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요소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39

141 무 형 자 원 리유적) 축제(익산서동축제) 설화(서동설화, 무왕탄생설화, 아흔아홉배미) 제례(서동제) 민속놀이(기세배놀이) 표 20 오대건, 古 都 익산의 역사경관 보전 및 활용을 위한 지구지정 방안, 전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3, 43쪽 참고. 대나무숲과 기세배놀이 등 문화재와 유적이 아니더라도 고도 익산 지역에서 챙겨야 할 것들은 꽤 많다. 이 모든 것이 고도 익산 관광스토리텔링의 소중한 자원들이기 때문이다. (1) 미륵산 일대의 역사문화자원 미륵산은 미륵사지를 품고 있는 익산의 진산으로 본래 용화산 으로 불렸으나, 미 륵사가 지어진 후부터 미륵산이라 불린다. 서동이 태어나 말을 타고 무술을 연마하 던 산으로 서동이 선화공주와 사랑을 속삭이던 곳이라는 전설도 전해진다. 또한 미 륵산에는 기름 한 말을 끓일 수 있을 정도의 큰 홈이 파인 등잔암과 4m의 높이에 구멍이 나 있는 투구바위, 안질에 좋다는 약수터, 사자암, 심곡사, 왕궁탑 등 명소와 볼거리가 많다. 조선부터 1960년대까지 농사를 지었던 대규모 다랭이논이 있어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미륵산 반대편에는 아리랑고개(다듬재)를 사이에 두고 용화산이 있다. 원래 하나의 산으로 불렸던 용화산은 미륵산과 마찬가지로 높이는 낮지만 조 망이 뛰어나 산책코스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다. 미륵산 중턱에 미륵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고조선 기준왕이 내려와 쌓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태조가 이곳에서 신검 의 항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성내에서 백제 토기 등이 출토되었으며, 1990 년 발굴조사로 백제 이후 성을 쌓아 조선 초기까지 네 차례에 걸쳐 개축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백제 최대의 가람 미륵사가 있었던 미륵사지는 백제 후기 여러 유적 중 백제의 문 화를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꼽힌다. 백제 무왕 때 용화산 아래 연못에 서 미륵삼존이 나타나 왕비의 부탁에 따라 연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세웠다고 전한 다. 또한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고자 지은 호국사찰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미륵사지에는 미륵사지석탑과 미륵사지당간지주 등 많은 역사문화자원이 보존 발굴 되고 있다. 석탑은 서쪽과 동쪽으로 대칭을 이루어 두 개가 세워졌는데 동탑은 복원 이 완료되었으며, 서탑은 해체보수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미륵사지석탑은 현존하고 있는 국내 최고( 最 古 ) 최대( 最 大 )의 탑이며, 석조건축술 역시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 한국석탑의 시원이다. 탑의 양식이 이전에 성행했던 목탑의 각부 양식을 나무 대신 돌로써 충실하게 재현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최고의 석탑으로 불리고 있다. 하 14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42 지만 동탑의 복원 작업에 있어 인위적이고 기계적인 느낌이 강해 그 가치가 낮게 나 타나고 있다. 사찰의 입구에 세워진 미륵사지 당간지주 역시 석탑과 마찬가지로 동 쪽과 서쪽에 대칭으로 서 있어 미륵사지의 대칭적 미를 나타내는데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미륵사지와 미륵사지석탑,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미륵사지 안에서 조화를 이루 고 상호작용으로 하나의 역사적, 경관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북쪽으로 미 륵산이 있어 풍수적으로 명당의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고도 익산의 대표적인 역사 문화자원으로 인식돼 상징적인 가치가 높다. 미륵산 일대는 용화산, 미륵사지, 미륵산성, 미륵사지석탑, 미륵사지 당간지주 등 의 역사문화자원이 있으며,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가 있어 각 역사문화자원들 사이에 서로 땔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뛰어난 경관으로 역사성과 심미성의 가치가 높으며, 미륵산의 경우 심미성 장소성 역사성 희소성 모든 면에서 가치가 높게 나타난다. (2) 금마면 일대의 역사문화자원 익산쌍릉은 백제 고분으로 두 기의 봉토분이 나란히 있는데, 무왕과 선화공주의 묘인 대왕릉과 소왕릉으로 쌍릉이라고 부른다. 백제 무왕과 관련한 다양한 설화와 유적이 있어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가치가 높다. 대왕릉과 소왕릉의 주위로 만남의 광장, 사랑의 정원, 오감생태공원, 설화조각상, 수변정원, 선화광장 등이 배치돼 테마 관광지를 형성하고 있지만 유지 관리가 되지 않고, 특별성 고유성 없이 조성돼 경관 적 가치가 없다. 익산토성은 오금산 작은 계곡을 에워싼 산성으로, 신라가 고구려 왕족 안승을 보 덕국왕에 임명하고 이곳에 살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보덕성으로도 부른다 년대 초의 발굴조사에서 남문지 수구지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백제 후기에 만들어 진 각종 토기편과 기와편 등이 출토되면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금마면 시가지에 있는 금마도토성과 익산향교는 사람들의 삶과 직접 닿아있다. 금 마도토성은 미륵산성과 익산토성과 같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전형적인 백제 토성 의 양식을 취하고 있으나, 지금은 무덤이 많아져서 그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다. 익산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주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지 은 교육기관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복원했으며, 정문에는 과거 익산 동헌자리에 있던 관리들의 공덕비와 선정비 등 비석 17기가 옮겨져 있다. 향교 에는 유교 교육을 상징하는 행단의 의미가 있는 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 그 역사를 알려준다. 전체면적 5만m2 정도로 한강 이남의 최대 대나무 군락지인 구룡마을 대나무숲은 드라마 <추노>의 촬영지다. 이곳 대나무로 만든 죽제품은 우리나라 3대 5일장 중 하 나였던 강경 5일장을 통해 인근 지방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까지 제공될 정도 로 전통이 있었으며, 생금밭 이라 불리면서 익산 지역 경제의 중요한 소득 자원이었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41

143 다. 다른 지역의 대나무숲과 다르게 마을 한 가운데 있어 경관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금마면 시가지를 관통하는 하천은 용화산에서 발원해 만경강으로 유입되는 옥룡천 이 있으며, 옥룡천은 시가지를 벗어나 곧 금마저수지를 만난다. 황화산 자락에 있는 금마저수지는 미륵산과 용화산에서 바라볼 때,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특히 미륵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대한민국 지도와 그 모습이 닮아 지도연못이라고도 불린다. 금마면 일대에는 익산쌍릉, 익산토성, 금마도토성 등 역사문화자원이 많이 분포해 고도 익산의 중심이며, 다른 지역과 달리 주민들의 거주지인 금마면 시가지가 있기 도 하다. 이 일대는 옛 마한과 백제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2012년 3월 문화재청에서 고시한 고도지구지정으로 인해 시가지 일대에서 고도보존사업이 진행되면서 그 중요 성을 더 커지고 있다. (3) 왕궁면 일대의 역사문화자원 왕궁리 성지라고도 불리는 왕궁리 유적은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 나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진다. 백제의 궁성터라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오래 전부터 대동지지 (김정호)의 익산별도 기록과 관세 음응험기 (일본 청령원 발견)의 백제 무왕 지모밀지 천도 기록이 왕궁리 유적의 소 재지명인 왕궁면의 왕궁 과 연관돼 백제 무왕 혹은 보덕국의 안승, 후백제 견훤이 경영했던 왕궁터로 인식돼 왔다. 또한 백제석탑 양식을 충실히 따른 왕궁리 5층석탑 은 발굴조사 당시 탑 주변에서 대관관사, 관궁사 등의 명문기와가 출토돼 궁성으 로 쓰이다 의자왕 대를 전후로 사찰로 변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면서 지은 왕실사찰로 추정되는 제석사지는 호세안민 ( 護 世 安 民 )하고, 왕실의 번창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창건되었다. 전각건물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 백제의 자연친화적인 정원시설 등의 궁성관련 유구 등이 발 견되면서 백제 왕궁의 모습들이 밝혀져 역사적인 가치가 높다. 왕궁면 일대는 고도 익산이 백제 도읍지였다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는 역사문화 자원들이 있다. 무왕대에 왕궁으로 건립돼 후에 사찰로 변화한 왕궁리유적과 변화과 정에 조성된 왕궁리5층석탑, 그리고 제석신앙을 통해 제사를 지었던 절터인 제석사 지와 제석사지폐기유적, 금마면과 왕궁면을 이어주는 무왕길이 있다. 왕궁면 일대 역사문화자원은 국보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왕궁리유적의 유물들 을 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해 2008년 왕궁리 유적 남쪽에 왕궁리유적전시관을 개관했 다. 2) 고도 익산의 백제 문화재와 유적 현황 익산은 마한의 고도( 古 都 )이며, 백제 후기 무왕( )의 천도지 23) ( 遷 都 地 )로 알 려져 있다. 2009년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장엄 사리봉안기 등의 발견과 왕궁리 유적 14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44 의 고고학적인 재인식은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익산 지역의 중요성을 더욱 크게 인 식하는 계기가 됐었다. 이는 익산의 역사문화 정체성 확립의 중요성이 더 두드러지 는 것이다. 익산 지역은 고조선 준왕이 이곳에 정착해 고대 마한문화의 기반이 되었 으며, 이는 한성-웅진-사비로 이어지는 백제 왕실과는 달르게 익산은 지역의 토착세 력인 마한 세력이 그 기반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4) 2012년 현재 전국의 지정문화재는 9.288건, 등록문화재는 266건이다. 이중 전라북 도의 지정문화재는 794건, 등록문화재는 46건이다. 이중 익산시의 지정문화재는 77 건이며, 등록문화재는 8건 정도다. 그 중 백제 문화재는 지정문화재 39건이고, 비지 정문화재(발견유적) 25건을 합해 64건이다. 익산에는 사자사, 연동리 석불, 태봉사 삼존석불, 쌍릉, 미륵사 석탑 등 백제 유적 이 많다. 익산에 제일 먼저 등장했던 백제 사찰은 사자사로 판단된다. 사자사는 미륵 사 창건 이전에 이미 지명법사가 주석하는 사찰로 등장한다. 지명법사는 신통력을 발휘해 금을 신라 궁궐에 보내기도 했으며, 미륵사를 짓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연못을 메우기도 했던 승려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동리 사지의 석불은 백제인 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편년되기도 하며, 7 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현 태봉사에 있는 삼존석불도 백제 불상으 로 편년하지만 이와 관련된 유구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오금사지도 무왕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전해오고 있지만, 아직도 그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왕실에서 지은 것을 알려진 3대 사지 중 대관사지는 삼국사기 기록에 신라 무열왕 의 훙거 예고기사로 등장하는데, 대관사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해 금마땅 5보를 적 셨다 고 하고 있다. 왕궁리 유적의 중심에 있는 사찰로 남북국 이후의 명문와( 銘 文 瓦 )에서 대관관사, 대관궁사, 관궁사, 왕궁사 등의 사찰명칭이 나오지만, 삼국 사기 기록대로 백제 사찰명칭으로 생각되는 대관사가 합당하다. 대관사는 백제가 멸망한 이후인 통일신라까지 석탑의 조영 등 가람을 축소한 상태로 존속했음이 발견 조사에서 밝혀졌다. 대관사지에서는 사비성에서 주로 출토된 8엽단판연화문 수막새 가 창건기와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관사는 610년 이전에 창건된 사 찰로 판단된다. 이러한 수막새는 미륵사지에서도 심심치 않게 출토되었으며, 제석사 지에서도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3대 사찰의 창건은 동시에 기획된 것으로 본 다. 대관사 창건 이후 620년 즈음에 제석사가 창건되었으며, 미륵사는 50년간의 공 사 끝에 의자왕 집권기인 650년 전후로 완성된 것으로 출토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3대 사찰이 동시에 기획되었다고 함은 앞선 시기의 출토유물이 같으면서도 각각의 사찰유적에서 나타나는 가람배치가 판이한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람배치의 다름은 사찰의 조영목적을 달리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23) 학계의 이견이 많다. 다른 측면에서는 백제 후기인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백제 무왕 대에 익산이 왕도로 거론되었다. 고 주장한다. 24) 마한과 백제는 시 공간적인 면에서 중복된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43

145 무왕의 익산 경영에서 핵심은 익산으로의 천도 추진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왕궁리 성곽유적이다. 무왕은 왕경 조영과 더불어 천도를 뒷받침하는 이념적 작업도 동시에 행했다.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미륵사 창건이다. 무왕은 즉위 후 용화산 큰 연못가에서 미륵삼존을 만났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미륵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무왕이 미륵불을 만난 것은 미륵하생경에 전륜성왕( 轉 輪 聖 王 )이 하생한 미륵을 만났 다고 하는 이야기와 상통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무왕이 전륜성왕 의식을 통해 왕권 의 확립을 도모하려고 했다고 전한다. 무왕의 전륜성왕 의식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은 지명법사( 知 明 法 師 )다. 그는 무왕이 모아 놓은 황금을 신통력을 써서 신라 진평왕 에게 보냄으로써 무왕과 선화공주를 결혼할 수 있게 했다든가, 진평왕과 안부의 서 신을 주고받는 등의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 것에서 보듯이 왕의 고문으로서 정치적 실세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주석한 곳은 용화산 사자사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 는 익산 천도를 통해 미륵의 용화세계를 이루려고 했고 그 목적에서 무왕의 천도계 획을 적극 지지하고 또 미륵사 창건에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미륵사지는 금마면 기양리 노상마을에 있다.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는 삼국유사 무 왕조에 전해지는데, 백제 무왕이 왕비와 사자사에 가던 도중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고,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3곳에 탑 금당 회랑을 세웠다는 것이다. 왕궁리유적(사적 제408호)은 행정구역상으로 왕궁면에 속하고, 지형상으로는 미륵 산 동편에서 이어진 한 자락의 낮은 능선이 남쪽으로 2킬로미터 이상 길게 자리 잡 고 있다. 이곳에는 국보 제289호 왕궁리오층석탑이 있으며, 동쪽에 제석사지, 북서쪽 에 미륵사지와 사자암이 있다. 왕궁평, 왕검이, 왕금성 이라고 불리며, 이곳에 고 대의 왕궁이 있었으리라 추측한다. 이 일대가 천도설( 遷 都 說 )과 별도설( 別 都 說 ) 등 고대의 왕궁과 관련된 여러 학설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제석사지( 益 山 帝 釋 寺 址 )는 왕궁면 궁평마을에 있으며, 왕궁리 유적 동쪽 맞은편이 다. 제석사지는 백제 무왕이 왕궁평으로 천도를 위한 왕실사찰로 제석천( 帝 釋 天 )을 불상으로 모신 절이 있던 자리이다. 출토유물은 단판연화문수막새와 인동당초문 암 막새가 같은 층위에서 출토돼 백제 유물로 판단되며, 인장와는 巳 毛, 午 斯 등이 있고, 평기와들은 주로 통쪽와통을 사용해 제작했으며, 등문양은 단선문이 주류를 이 루고 있다. 이들은 왕궁리 유적이나 미륵사지 등에서 보이는 유물이다. 익산 쌍릉(사적 87호)은 석왕동에 있으며 구릉 위에 두 기의 봉토분이 있다. 보통 쌍릉이라고 하며, 북쪽의 고분을 대왕릉, 남쪽의 고분을 소왕릉이라 부른다. 이들은 같은 구조를 하고 있으며, 석실과 봉분 크기에 약간 차이가 있어 명칭을 달리한다. 백제를 대표하는 유물은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 다. 사리봉안기에 삼국유사 무왕조에 미륵사의 창건 발원자로 등장했던 신라 공주 선화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했음을 밝히는 기년이 기록돼 있어 사리장엄구의 가치를 한층 더 높여주고 있다. 왕궁리오층석탑 출토 사 14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46 리장엄구의 백제제작설이나 미륵사 의자왕대 완성설에 힘을 실어 준다. 1965년 왕궁리오층석탑의 해체 복원과정에서도 사리장엄구가 출토돼 보물로 지정 됐다. 왕궁리오층석탑의 사리장엄구와 함께 출토된 금강경판도 백제에 제작됐다. 미 륵사지 금동제사리외호와 왕궁리오층석탑 금제사리내합에서 나타나는 심엽형의 문양 이 비슷한 형태다. 3) 전라북도의 가야 백제 문화재와 유적 현황 (1) 전라북도 백제 문화재 유적 현황 익산시에만 백제시대 등록문화재와 유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전라북도 내 현존하는 가야 백제 시대 등록문화재 유적과 연결 프로그램을 마련해 익산시가 고대 문화의 거점 도시로 위상을 강화해야 한다. 현재 주요 백제시대 등록문화재는 아래 표와 같다. 전라북도 14개 시 군 중 무주 군을 제외한 13개 시 군에 171점의 백제시대 등록문화재가 있다. 분묘 45곳, 사찰 23곳, 석탑 8개, 성곽 21곳, 석불 4개, 요지 4곳, 유적 57곳 등이며, 기타로 수리시 설 2곳과 패총 5곳, 공예품 2점 등이다. 지역으로는 익산시가 30개로 가장 많았고, 군산, 고창, 정읍, 전주 순이었다. 무주 지역은 가야문화권으로 아직까지 백제시대 등록문화재와 유적이 없다. 25) 지역 분묘 사찰 석탑 성곽 석불 요지 유적 기타 계 고창 군산 (패총) 26 김제 (수리) 7 남원 부안 순창 완주 익산 임실 장수 전주 (공예) 12 정읍 (수리) 19 진안 계 표 21 전북 지역 백제시대 등록문화재의 지역별 분포 25) 전라북도 가야 백제 시대 등록문화재와 유적은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참고했으며, 이후 전라북도 문화예술 과에 자료를 의뢰해 조사 정리했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45

147 전북 지역 백제시대 등록문화재와 유적들은 아래 표와 같다. 지역 구분 유적명 고창군 군산시 분묘 사찰 성곽 요지 기타 분묘 사찰 석탑 패총 송룡리 옹관묘, 신월리 옹관묘, 남당리 고분 문수사, 상원사, 창당암, 선운사 서산산성 운곡리 토기요지 신덕리 유적, 신송리 유적, 도산리 유적, 낙양리 유적, 성남리 유적, 광대리 유 적, 우평리 유적, 예지리 유적, 교운리 유적, 봉덕 유적, 만동 유적, 석교리 유 적, 중월리 유적 조촌동 고분군, 창오리 고분군, 여방리 기린마을 고분군, 도암리 고분군, 서포 리 고분, 장상리 고분군, 미룡동 고분, 옥정리 고분군 불주사 탑동삼층석탑 가도 패총, 노래섬 패총, 띠섬 패총, 오식도 패총, 여방리 남전 패총 김제시 남원시 부안군 순창군 기타 분묘 사찰 석탑 성곽 수리 기타 분묘 사찰 성곽 기타 사찰 석불 성곽 기타 사찰 석탑 성곽 내흥동 유적, 신관동 유적, 당북리 유적, 아동리 유적, 여방리 남전 유적, 취동 리 유적, 관원리 유적, 둔더리 유적, 고봉리 유적, 산월리 유적, 나포리 유적 황산리 옹관묘 귀신사, 문수사, 금산사 청도리삼층석탑 금구산성 벽골제 대목리 유적, 장산리 유적, 청하 주거지, 심포리 유적, 석담리 유적 건지리 고분군, 행정리 고분군, 두락리 고분군, 월산리 고분군, 초촌리 고분군, 척문리 고분군 귀정사지, 용담사 남원교룡산성, 척문리산성, 아막성 세전리 유적, 고죽동 유적, 대곡리 유적 내소사, 개암사 용화사미륵불입상 백산성, 우금산성 부곡리 유적, 하립석리 유적, 대동리 유적, 장동리 유적, 신리 유적, 죽 막동 제사유적 구암사 순화리삼층석탑 홀어머니산성, 합미성 완주군 분묘 구억리 고분, 둔산리 고분 14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48 지역 구분 유적명 익산시 임실군 장수군 사찰 성곽 기타 분묘 사찰 석불 석탑 성곽 요지 기타 분묘 사찰 성곽 위봉사, 경복사지 용계산성 구암리 유적, 반교리 유적, 상운리 유적, 배매산 유적, 용암리 유적 율촌리고분군, 웅포리 고분군, 입점리 고분군, 성남리 고분군, 무형리 옹관묘, 원수리 고분, 익산 쌍릉, 제석사지, 사자암, 연동리사지, 미륵사지, 연동리 석조여래좌상, 태봉사 삼존석불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 석등대좌, 간촌리 유적오금산성, 저토성, 금마도토성, 천호산성, 어래산성 신용리 백제토기요지, 왕궁리 전와요지, 구덕리 사덕마을 유적, 신동 유적, 영등동 유적, 신목리 유적, 금성리 유적, 왕궁리 유적, 월곡 유적, 원수리 유적, 유성 유적 금성리 고분군 운수사터, 신흥사 성미산성 분묘 고리 고분군, 동촌리 고분군, 동촌리 고총군, 호덕리 고분군, 봉서리 고분군, 삼봉리 고분군, 삼봉리 고총군 기타 침곡리 유적 전주시 정읍시 진안군 공예 분묘 성곽 기타 분묘 사찰 석불 석탑 성곽 수리 기타 분묘 요지 기타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 은제 도금 금강경/금제 방형 사 리합 원당리 고분, 평화동 고분군, 여의동 백제고분, 덕진동 백제석실분, 중 화산동 화장묘 동고산성 송천동 유적, 여의도 유적, 효자동 유적, 효자동 서곡 유적 은선리고분군, 지사리고분군, 운학리고분군 영은사지, 내장사지 보화리 석조이불입상 장문리오층석탑, 은선리 삼층석탑, 무성리삼층석탑 고사부리성, 우덕리산성, 금사동토성, 두승산성, 은선리토성, 고부구읍 성 가정리 우물 유적 신정동 유적, 관청리 유적, 통석리 유적 황산리 고분군, 여의곡 석실분 월계리 와요지 와정 유적, 삼락리 승금 유적 표 22 전북 지역 백제시대 유적 등록문화재 내역 전북 지역 가야시대 등록문화재와 유적들은 아래 표와 같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47

149 지역 남원시 무주군 완주군 장수군 정읍시 진안군 금지면, 송동면, 수지면 일원 내용 대곡리 유적(생활, 분묘, 생산, 관방, 통신유적) 세적리 유적(생활, 분묘, 생산, 관방, 통신유적) 백두대간 산줄기에 아영분지와 남원 두락리 고총군, 운봉고원과 그 주변지역 안성분지, 봉화산 봉수와 오두치 오두치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금남정맥 산줄기의 주요관문인 보룡고개 충남과 경계인 솔재 물의 운명을 갈라놓은 수분치와 금남호남정맥 산줄기 통일신라시대 때 거사물정이 설치된 산서지구 금남호남정맥 산줄기에 우뚝 솟은 신무산 싸라재에 장수분지, 신무산과 수분치 장계분지 전경, 장수 삼봉리 고총군과 침곡리 산성,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금남호남정맥 산줄기에 우뚝 솟은 팔공산 산서분지 고돔치 금강의 발원지로 아려진 신무산 뜬봉샘 백두대간 산줄기(정상부에 자리한 월성치, 최대 관문인 육십령, 장수군 번암면 등) 침곡리 유적(생활, 분묘, 생산, 관방, 통신유적) 호남정맥과 가는정이(산외면) 호남정맥 산줄기의 주요 관문인 장승백이 고려시대 때 동향소가 설치된 동향 분지와 대량천(동향면)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인 마이산 와정 유적(생활, 분묘, 생산, 관방, 통신유적) 표 23 전북 지역 가야 시대 등록문화재의 지역별 분포. (전라북도청 제공) (2) 전라북도 백제 문화재 유적의 스토리자원 전북 지역 백제 문화재 유적들은 모두 각각의 스토리자원을 가지고 있다. 고창_ 문수사 취령산 중턱에 있는 문수사는 백제 의자왕 4년(644년)에 자장이 지은 사찰. 당나라 청량산에서 수도하던 자장은 꿈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부처님 뜻을 깨닫 고 돌아왔다.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 땅의 형세가 당나라 청량산과 비슷하다고 느끼고, 이곳에 절을 지은 후 문수사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함. 대웅전은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 문수전은 전라북도 시도유형 문화재 제52호로 지정. 문수산 입구부터 문수사 입구까지 진입도로 약 80m 좌우측 일대에 수령 100년 에서 400년으로 추정되는 단풍나무 500여 그루가 자생하는 단풍나무 숲은 천연 14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50 기념물 제463호로 지정. 고창_ 상원사 백제 성왕 24년(546년)에 고봉과 발용 두 스님이 세움. 조선 영조(재위: ) 때 지은 대웅전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6호로 지 정. 고창_ 창당암 선운사에 속해 있는 암자로, 대웅전은 의문화상이 신라 진평왕의 부탁으로 지었 다고 전함.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친 것으로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시대의 것임. 대웅전은 보물 제803호로 지정. 고창_ 선운사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진흥왕이 세웠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 (577년) 고승 검단선사가 세웠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함. 조선 후기 사료에는 진 흥왕이 세우고 검단선사가 고쳐 세운 것으로 기록. 선운사 대웅전 마당에 있는 선운사육층석탑은 지붕돌 등에서 백제탑 양식이 보 이고 있어 지방의 특색이 잘 담겨진 시대 전기의 작품.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 재 제29호로 지정. 대웅전은 보물 제290호로 지정. 선운사 동백나무 숲은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 고창_ 서산산성 고창읍에서 서북쪽으로 약 6km 정도 떨어진 석치동 마을 뒷산 섬틀봉에 있음. 동국여지, 증보문헌비고, 대동지지 등에 서산고성 으로 표기되었고, 삼국 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기록돼 있어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 산성 주변 에 백제시대 석실고분과 고분군이 산재되어 있음. 성곽 내부에서 통일신라 토기도 확인됨.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7호로 지정. 군산_ 불주사 망해산에 있는 절로 백제 의자왕(재위: ) 때 창건됐다고 전하는데, 뚜렷 한 기록은 없음. 조선시대 지어진 대웅전은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 1647년에 조성된 불주사목조관음보살좌상은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93호, 1666년에 조성된 불주사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49

151 군산_ 탑동삼층석탑 1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세운 후 머리장식을 얹은 탑으로, 백제탑 양식을 일부 보임. 옛 백제 지역에 세운 시대의 석탑으로, 백제탑 양식의 흐름을 따르고 있 음.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 김제_ 귀신사 통일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 절에는 남근석인 귀신사석수가 있는데, 남근석을 두는 사찰은 백제 왕실의 내원 사찰( 內 願 寺 刹 )뿐이므로, 이 절은 백제 때의 사찰일 것이라는 설도 있음.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과 사실적인 조각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 는 작품.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64호로 지정. 백제 석탑 양식을 이어받은 시대의 석탑인 귀신사석탑은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 재 제62호로 지정. 김제_ 문수사 백제 무왕 25년(624년) 혜덕선사가 꿈에서 문수보살을 보고 이 절을 지었다고 전함. 대웅전에 모신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선 숙종 41년(1715년)에 만들어졌으며,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78호로 지정. 김제_ 금산사 금산사사적 에 600년에 창건되었는데, 백제 법왕이 그의 즉위년(599년)에 칙령 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 이 절을 창건해 38인의 승려를 득도시킨 것으로 기록됨. 신라 혜공왕 2년(766년)에 진표율사가 두 번째로 확장하여 대사찰의 면 모를 갖추게 됨. 후삼국 시대에 들어서는 후백제의 왕 견훤이 두 아들 신검과 용검에게 유폐된 곳으로 가슴 아픈 역사를 남김. 오랜 세월을 지내온 동안 진표 혜덕왕사 도생승통 원명 진묵 소요 남악 등 수많은 고승을 배출됨. 국보 제62호인 미륵전을 비롯해 시대 석조문화재 및 조선후기의 목조건축 등 11개의 국가지정문화재가 보존된 호국사찰. 이 일대는 사적 제496호로 지정. 김제_ 청도리삼층석탑 귀신사와 가까운 곳에 서 있는 탑으로,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 다시 복원한 것임. 지붕돌이 백제의 석탑 양식을 보이고 있어, 백제 지역에 세운 고려시대 15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52 탑으로 추정.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53호로 지정. 김제_ 금구산성 선암리와 월전리의 경계인 봉두산 봉우리를 둘러싼 산성. 통일신라시대의 토기 조각과 조선시대의 기와조각이 골고루 출토.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85호로 지정. 김제_ 벽골제 삼국사기 에는 신라 흘해왕 21년(330년)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둘 레가 1천 8백보 라는 기록이 있음. 그러나 이 시기는 이 지역이 신라가 아닌 백 제 땅이었으므로 나중에 연도를 고쳐서 신라가 만든 것처럼 보이도록 해놓았을 가능성이 큼. 그러므로 실제로 만들어진 때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년)임. 벽골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쌓아 만든 최고의 고대 저수지 라는 의미뿐 아니라, 당시에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 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서도 획기적인 사실을 제공 해 주는 유적. 사적 제111호로 지정. 남원_ 아막성 남원 아영고원에 있는 돌로 쌓은 산성. 아영고원은 운봉고원과 황산의 산줄기인 데, 이 일대는 백제의 아막산 이나 신라의 모산성 등으로 불렸으며, 역사상 신 라와 백제의 격렬한 쟁탈전이 벌어졌던 곳임. 성안에서 삼국시대의 기와 조각과 백제계의 도자기 조각들이 발견됨.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38호로 지정. 남원_ 용담사 백제 성왕 때 창건됐다고 전함.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인 도선국사와 관련된 전설이 있음. 전설에 의하면 용담천 깊은 물에 이무기가 살면서 온갖 행패를 부리자 이를 막기 위해 도선국사가 절 을 창건해 용담사라 이름을 지으니, 그 뒤로는 이무기의 나쁜 행동이 없어졌다 고 전함. 전설을 뒷받침하듯 대웅전은 북쪽인 용담천 쪽을 바라보고 있음. 조선 전기 숭유억불정책으로 절은 사라지고, 현재는 석불입상(보물 제42호)과 칠층석탑(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1호)이 남아 있음. 남원_ 귀정사지 귀정사는 백제 무녕왕 15년(515년)에 현오국사가 지은 사찰. 한국전쟁 이후 공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51

153 비토벌이란 명목으로 유엔군이 모두 불태워 버림. 본래 만행사 라 불렀던 것을 후에 귀정사라 고쳐 불렀는데, 사찰이름을 바꾼 유 래는, 백제의 왕이 3일간 승려의 설법을 들으며 귀정사에서 국정을 살폈기 때문 이라고 전함.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76호로 지정. 남원_ 척문리산성 산성 안에 계곡을 품고 산의 정상부를 둘러쌓은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돌로 쌓 았음. 요천강 상류의 대평리산성과 동쪽 장교리의 합민산성과 연결돼 백제와 신 라의 국경이 맞붙은 중요한 지역으로, 두 나라간의 격전이 치열했던 산성으로 짐작됨. 삿무늬가 찍힌 백제기와가 다량으로 출토됨.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52호로 지정. 남원_ 남원교룡산성 교룡산의 지형지세를 이용해 돌로 쌓은 산성. 성을 쌓은 입지나 형식으로 볼 때 백제 때 만든 것으로 추정. 최제우가 동학의 경전을 완성한 곳이며, 동학농민혁명 당시 김개남 장군의 군사 들의 거점공간이었음.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9호로 지정. 부안_ 내소사 백제 무왕 34년(633년) 혜구두타( 惠 丘 頭 陀 )가 지었음. 처음 명칭은 소래사 인데, 소래사가 내소사로 바뀐 사료적 근거는 없지만, 중국 의 소정방이 이 절을 찾아와 시주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고쳐 불렀다고 전함. 대웅보전은 보물 제291호로 지정. 부안_ 개암사 부안향토문화지 등에 백제 무왕 35년(634년)에 묘련왕사가 변한의 궁궐을 절 로 고쳤다고 기록됨. 대웅전은 보물 제292호, 개암사영산회괘불탱및초본은 보물 제1269호로 지정. 개암사동종은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 부안_ 용화사미륵불입상 부안군 용화사 뒤 야산에 있는 높이 4.5m 정도의 석불입상. 백제 의자왕 2년에 묘련선사가 미륵사를 창건하고 미륵석불입상을 만들었다고 전하지만, 불상의 양 15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54 식을 볼 때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71호로 지정. 부안_ 백산성 백산에 있는 산성터로, 년 사이에 만들어졌음. 건물터, 옛 우물터, 삼국 시대 토기조각들과 토단 등이 잘 남아있음. 이곳은 조선 말,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군이 근거지로도 사용함. 사적 제409호로 지정. 부안_ 우금산성 개암사의 뒷산에 있는 돌로 쌓은 산성.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백제가 나당연 합군에 항복하자 복신 장군 등은 일본에 있던 왕자 풍( 豊 )을 모셔 왕으로 추대 하고, 백성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킴. 복신 장군이 나당연합군의 김유신과 소정 방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패배한 곳으로, 백제 부흥을 줄기차게 벌였던 백 제 최후의 항거 거점.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20호로 지정. 순창_ 구암사 백제 무왕 37년(서기 636년)에 창건, 조선태조 원년에 중창함. 구암사의 은행나무는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121호로 지정. 순창_ 순화리삼층석탑 순창여자중학교 교정에 있는 3층 석탑이다. 옛 백제지역에 서 있는 고려 전기의 탑으로 백제 양식 특유의 우아한 곡선미가 느껴짐. 탑이 서 있던 터에서 백제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조각이 발견돼 당시의 옛 절터로 추측.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 순창_ 홀어머니산성 백제 때 만들어진 산성으로,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까지 군창으로 사용되었음. 대모산성 또는 백산리산성 으로도 불림. 두 산봉우리를 배 모양으로 감싼 형태 를 하고 있음. 옛날 양씨 부인이 살고 있었는데, 설씨 총각이 결혼할 것을 요구하자 부인은 총각이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올 때까지 내가 성을 다 쌓지 못하면 허락하 겠다. 고 하였다. 부인이 마지막 성돌을 채 올리기 전에 총각이 돌아오자, 돌을 나르던 치마를 뒤집어쓰고 성벽 위에서 몸을 날려 자결하여 정절을 지켰다는 전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53

155 설이 전해 내려옴.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0호로 지정. 순창_ 합미성 백제 때 만든 것으로 추정하며, 조선시대에 성을 보수해 군량미를 저장했기에 합미성이라고 불렀음.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1호로 지정. 완주_ 위봉사 백제 무왕 5년(604년)에 서암대사가 지었다는 설과 신라 말에 최용각이라는 사 람이 절터에서 세 마리 봉황새가 노는 것을 보고 위봉사( 圍 鳳 寺 )라 이름 지었다 는 이야기가 있음. 위봉사 보광명전은 보물 제608호로 지정. 완주_ 경복사지 경복사는 고구려 보덕화상이 국가가 도교를 받들고 불법을 믿지 않아 백제로 옮 겨 온 이후에 지어진 사찰로 조선시대에는 36본사의 하나였다고 전함. 고덕산 능선에 있으며, 경복사터에는 석축이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유물이 많이 출토됨.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108호로 지정. 완주_ 용계산성 천둥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를 돌로 에워싼 형태로서 성 내부에는 건 물터가 있는데 돗자리무늬가 찍힌 백제시대 기와 및 토기편들이 수습됨. 동국여지승람 고산고적조 와 문헌비고 고산조 에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기록됨.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5호로 지정. 익산_ 연동리석조여래좌상 이 불상은 머리만 없어졌을 뿐 불신( 佛 身 ), 대좌( 臺 座 ), 광배( 光 背 )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백제의 작품. 지금의 머리는 새로 만든 것이며, 불상의 현 신체 높이 는 156cm이다. 당당한 어깨, 균형 잡힌 몸매, 넓은 하체 등에서 서툰 것 같으면 서도 탄력적이고 우아한 면을 보여줌. 대좌의 모습과 광배에 새겨진 무늬를 볼 때 장중하면서도 세련된 특징을 보여주는 600년경의 희귀한 백제시대 불상으로 의의가 높음. 보물 제45호로 지정. 15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56 익산_ 율촌리고분군 낮은 구릉의 정상부에 있는 5기의 무덤들. 봉분은 높이가 1m 정도이며 길이는 13m 내외의 네모꼴인데, 분구와 주구내에서 독무덤(옹관묘) 12기, 돌널무덤(석 관묘) 6기, 널무덤(토광묘) 2기가 확인됨. 이 무덤은 마한의 지배계급층 무덤으 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무덤 주변에 구덩이를 돌려 판 주구무덤 형식은 고대 일본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줌.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105호로 지정. 익산_ 금마도토성 서고도리의 해발 87m의 굿대숲에 흙으로 쌓은 성으로, 북쪽으로 미륵산, 서쪽 으로 오금산, 동쪽으로 금마산이 둘러 있음. 성 안에서 금마저( 金 馬 渚 ) 라 쓰인 기와와 백제의 기와, 토기류가 출토되어 백제 때 쌓은 성으로 추정. 이 성터는 이 고을 출신의 소양곡이 말을 타던 자리로 전해지고 있음.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70호로 지정. 익산_ 천호산성 천호산 정상을 돌로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성 주위에서 백제 수막새 기와 와 토기조각들이 발견되고 있어 백제의 성곽으로 추정. 당시 성의 축조방법에 대한 자료적 가치가 있음.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99호로 지정. 익산_ 어래산성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할 때 쌓은 성으로 전해짐. 주변의 함라산성, 도청 산성 등과 함께 백제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됨. 동쪽 능선과 서쪽의 사면을 감싼 테뫼식 토성으로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인근의 익산입점리고분과 관 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3호로 지정. 익산_ 익산백제토기도요지 미륵산 동편에 있으며, 2기의 가마터가 발굴됨. 아가리큰항아리(광구호), 세발토 기(삼족토기), 항아리 등 백제 후기의 토기 모양을 파악할 수 있는 유적으로, 일 본 오사카에 있는 6세기경 가마터의 구조와 비슷한 면이 많아 일본의 토기 제작 기술이 백제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말해 주는 중요한 유적임.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14호로 지정.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55

157 임실_ 운수사터 창건 연대와 세운 목적은 전하지 않지만 백제시대로 추정. 이곳에는 높이 2.54m, 어깨 폭 0.81m의 임실이도리미륵불상(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45 호)이 있는데, 풍수지리설에 의해 산세의 재난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함. 지금은 석불만 남아 있음. 임실_ 신흥사 사자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성왕 7년(529년)에 지었다는 설과 신라 말 진감 국사가 지었다는 설이 있음. 대웅전은 여러 차례 수리 했고, 조각수법은 화려하지 않지만 백제 때의 건축양 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문화재적인 가치가 큼. 대웅전은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12호로 지정. 임실_ 성미산성 성미산을 둘러 쌓은 산성으로, 성 내부 건물터 근처에 삼국시대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는데, 이들 토기 중에 삿무늬토기가 발견돼 백제 때 쌓은 성곽으로 추정. 이 성곽은 신라와 백제가 대립하던 6-7세기에 방어적 측면이 강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전주-남원간 국도와 섬진강변에 있어 지정학적 측면에서 자료적 가치를 지님.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100호로 지정. 전주_ 익산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은제 도금 금강경 마한의 왕궁이 있던 자리에 있는 왕궁리5층석탑(국보 제289호)을 보수하기 위 해, 1965년 해체하면서 탑을 받치고 있던 기단부와 1층 지붕돌 윗면에서 발견 된 유물들. 종이처럼 펼쳐 만든 은제도금판에 글씨를 새겨서 만든 것으로 모두 19장으로 되어 있음. 보존상태가 좋을 뿐 아니라 새겨진 글자들이 정교해 발견 된 유물 중에서도 가장 주목받고 있는 불교 공예품. 국립전주박물관에 있음. 국보 제123-1호로 지정. 전주_ 익산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금제 방형 사리합 금으로 만든 사각형의 뚜껑이 있는 합( 盒 )으로, 국립전주박물관에 있음. 유리제 사리병이 들어있던 금제합은 뚜껑 위에 반쯤 핀 연꽃 봉오리로 있고, 몸체와 4 기둥에는 불꽃모습의 덩굴무늬를 장식하고, 그 주변에는 구슬무늬를 눌러 새겼 음. 금제경판이 들어있던 금제합은 뚜껑의 중앙에 국화를 새기고, 손잡이로 사 용하기 위해 금고리를 달았음. 이 합들은 바깥쪽 외합 안에 들어있어 상태가 완 전하고 도금 상태도 좋아, 원래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으로 공예품 연구에 귀중 15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58 한 자료. 국보 제123-3호로 지정. 전주_ 동고산성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산성으로, 조선 순조 때 건너 편 산성을 남고산성 이라 부르면서 붙여진 이름. 이곳은 예로부터 후백제를 세운 견훤왕의 궁성터라는 말이 전해짐. 백제 재건의 기치를 든 견훤왕은 신라 효공왕 4년(900)에 완산주를 점령하고, 이곳에 도읍을 정해 37년간 존속했다. 1990년 발굴로 전면 22칸(84.4m) 측면 3칸(16.1m) 총 66칸(11,180m2) 넓이의 건물터가 조사되었는데, 이는 우리 나라에서 발굴 조사 된 단일 건물로는 가장 큰 규모이며, 이곳이 견훤왕의 궁성이었다는 주장을 뒷 받침하고 있다. 비록 건물은 사라지고 터만 남았지만, 후백제를 세운 풍운아 견 훤의 발자취가 시대를 뛰어넘어 느껴지는 곳이다.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44호로 지정. 정읍_ 은선리고분군 천태산 서쪽 기슭에 있는 백제의 굴식돌방무덤(황혈식석실분). 10여기의 무덤들 이 밀집됐는데, 돌방(석실)은 깬돌과 판돌을 이용해 직사각형으로 지었음. 무덤 의 내부구조로 보아 백제 웅진시대 후기에서 사비시대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보 임. 은선리 무덤들은 무덤의 축조방법과 구조가 다양해 백제 돌방무덤 연구에 중요한 자료임.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57호로 지정. 정읍_ 지사리고분군 백제 전기인 4세기 말에서 5세기 전반의 것으로 구덩식(수혈식)무덤으로는 가장 큰 규모임. 원래 4기의 무덤이 있었으나, 도로를 만들면서 가장 동쪽에 있는 봉 분이 파괴됨.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59호로 지정. 정읍_ 운학리고분군 천태산 서쪽 구릉에 있는 3기의 무덤. 구덩식돌방무덤(수혈식석실묘)으로 높은 봉분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이 지방 특유의 양식으로 백제 전기에 속 함. 일부 유물이 일본 천황릉의 배총에서 출토된 것들과 같은 유형의 유물임. 백제 문화의 일본전파와 두나라의 관계를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58호로 지정. 정읍_ 영은사지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57

159 백제 무왕 37년(636년)에 영은조사가 지은 절로 이때의 규모는 50여 동이었다 고 함. 옛 터인 영은사지는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63호로 지정. 정읍_ 내장사지 내장산에 있는 옛 내장사터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백련사는 내장사라고도 이 르며 내장산에 있다. 라고 하였다. 백련사는 언제 세운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백 제 의자왕 20년(660)에 유해선사가 세웠다고 전함.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73호로 지정. 정읍_ 보화리석조이불입상 야산 중턱에 나란히 서 있는 2구의 석불입상. 부드럽고 우아한 모습, 아기 같은 체구, 특징 있는 옷차림새 등에서 백제 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는 작품. 보물 제914호로 지정. 정읍_ 장문리오층석탑 백제 지역에 세워 놓은 고려시대 석탑. 1층 기단과 지붕돌의 곡선미 등이 백제 석탑의 양식을 잘 따르고 있어 지방색이 강했던 당시 시대상을 잘 담아내고 있 음.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 정읍_ 은선리삼층석탑 은선리 마을에 세워져 있는 3층 석탑으로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탑으로 추측. 기단과 지붕돌에서 백제 석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 고려시대에 도 옛 백제 땅에서는 백제양식의 석탑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음. 보물 제167호로 지정. 정읍_ 무성리삼층석탑 무성리 마을의 논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탑.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이 옛 백제 지역이었던 만큼, 지붕돌의 곡선에서 백제탑의 양식이 살짝 보 이고 있어 지역적인 특성을 담고 있음.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 정읍_ 고사부리성 성황산 정상부 두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성으로 백제시대에 처음 축조됨. 백제 15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60 시대 상부상항( 上 部 上 巷 인) 라는 인각와( 印 刻 瓦 ), 기마병( 騎 馬 兵 )의 선각와편( 線 刻 瓦 片 ), 통일신라시대의 本 彼 官 명문와 등 다량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사적 제494호로 지정. 정읍_ 우덕리산성 시루봉 위에 쌓은 산성으로, 성내에서 매우 오래된 그릇조각들이 발견됨. 나무 로 울타리를 두른 형태를 하고 있어 백제 때부터 있어 온 성터로 추정.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51호로 지정. 정읍_ 금사동토성 응봉산 금사동 골짜기를 품고 산을 둘러쌓은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의 2중성으로 되어있음. 이중으로 성을 쌓는 방식은 옛 백제 성터의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형 식으로 이 성이 백제 후기의 5방성(동방 득안성, 남방 구지하성, 서방 도선성, 북방 웅진성, 중방 고사성) 가운데 중방 고사성 터로 추정. 성 주변에는 옛 탑과 무덤들이 분포되어 있음. 백제의 것으로 보이는 그릇조각들이 흩어져 있음.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55호로 지정. 정읍_ 두승산성 두승산 산봉우리를 에워 싼 산성으로 성 안에 골짜기를 품고 있음. 성이 지어진 연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성 안에서 발견되는 유물들 로 보아 삼국시대 백제가 쌓아서 계속 사용해왔던 것으로 추정.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54호로 지정. 정읍_ 은선리토성 높고 평탄한 대지에 높이 약 4 5m 정도로 흙을 쌓아 올림. 성 안에서 삼국시 대 토기와 기와 조각 등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백제 토성터로 보임. 전라북도 시도기념물 제56호로 지정.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59

161 4. 역사문화유적을 테마로 한 관광 상품 1) 전라북도 백제 문화재와 유적을 활용한 기행 프로그램 마한부터 백제시대와 남북국시대까지 각각의 유물들은 지역과 시대, 성격, 왕이 포 함된 이야기와 독립된 이야기의 유무, 걷기 좋은 곳, 백제탑이 있는 곳, 출토된 유 물, 불상이 있는 곳 등으로 구분 분류할 수 있다. 이러한 분류 기준에 맞춰 각각의 테마가 있는 백제여행이 가능하다. 시군 면 유적명 시대 성격 왕( 王 ) 스토리 걷기 백제탑 출토 유물 불상 고창 고수면 문수사 백제 사찰 의자왕 고창 고창읍 상원사 백제 사찰 성왕 고창 아산면 창당암 백제 사찰 고창 아산면 선운사 백제 사찰 위덕왕 고창 아산면 서산산성 백제 성곽 군산 나포면 불주사 백제 사찰 의자왕 군산 대야면 탑동삼층석탑 고려 석탑 김제 금산면 귀신사 남북국 사찰 김제 황산동 문수사 백제 사찰 무왕 김제 금산면 금산사 백제 사찰 법왕 김제 금산면 청도리삼층석탑 고려 석탑 김제 금구면 금구산성 백제 성곽 김제 부량면 벽골제 백제 수리 비류왕 남원 아영면 아막성 백제 성곽 남원 주천면 용담사 백제 사찰 성왕 남원 산동면 귀정사지 백제 사찰 무녕왕 남원 이백면 척문리산성 백제 성곽 남원 산곡동 남원교룡산성 백제 성곽 부안 진서면 내소사 백제 사찰 무왕 부안 상서면 개암사 백제 사찰 무왕 부안 행안면 용화사미륵불입상 고려 석불 의자왕 부안 백산면 백산성 백제 성곽 부안 상서면 우금산성 백제 성곽 의자왕 순창 복흥면 구암사 백제 사찰 무왕 순창 순창읍 순화리삼층석탑 고려 석탑 순창 순창읍 홀어머니산성 백제 성곽 순창 동계면 합미성 백제 성곽 완주 소양면 위봉사 백제 사찰 무왕 완주 구이면 경복사지 백제 사찰 완주 운주면 용계산성 백제 성곽 익산 삼기면 연동리 석조여래 좌상 백제 석불 익산 황등면 율촌리고분군 마한 분묘 익산 금마면 금마도토성 백제 성곽 익산 여산면 천호산성 백제 성곽 익산 웅포면 어래산성 백제 성곽 익산 금마면 익산백제토기도요 백제 요지 16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62 시군 면 유적명 시대 성격 왕( 王 ) 스토리 걷기 백제탑 출토 유물 불상 지 임실 임실읍 운수사터 백제 사찰 임실 관촌면 신흥사 백제 사찰 성왕 임실 관촌면 성미산성 백제 성곽 익산 왕궁리 오층 전주 전주 효자동 효자동 석탑 사리장엄구 - 은제 도금 금강 경 익산 왕궁리 오층 석탑 사리장엄구- 백제 공예 백제 공예 금제 방형 사리합 전주 대성동 동고산성 남북국 성곽 정읍 영원면 은선리고분군 백제 분묘 정읍 영원면 지사리고분군 백제 분묘 정읍 영원면 운학리고분군 백제 분묘 정읍 내장동 영은사지 백제 사찰 무왕 정읍 내장동 내장사지 백제 사찰 의자왕 정읍 소성면 보화리 석조이불 입상 백제 석불 정읍 고부면 장문리오층석탑 고려 석탑 정읍 영원면 은선리 삼층석탑 고려 석탑 정읍 칠보면 무성리삼층석탑 고려 석탑 정읍 고부면 고사부리성 백제 성곽 정읍 덕천면 우덕리산성 백제 성곽 정읍 영원면 금사동토성 백제 성곽 정읍 고부면 두승산성 백제 성곽 정읍 영원면 은선리토성 백제 성곽 <표 24> 키워드로 본 전북 지역 백제시대 문화재 (1) 백제 왕의 흔적을 따라 걷는 기행 익산을 제외하고 전라북도에서 백제시대 왕과 관련된 유적은 무왕이 6곳으로 가장 많고, 의자왕 5곳, 성왕 3곳, 무녕왕 법왕 비류왕 위덕왕 각 1곳이다. 익산 지역 백제 왕과 관련된 유적을 포함해 전라북도 전역을 대상으로 <무왕의 흔적을 따라 걷는 길>, <의자왕을 만나러 가는 길> 등 왕을 테마로 한 역사기행 프로그램을 기획하면 왕명 숫자 유적명 무녕왕 1 사찰 귀정사지(남원 산동면) 사찰 개암사(부안 상서면), 사찰 위봉사(완주 소양면), 사찰 내소사(부 무왕 6 안 진서면), 사찰 문수사(김제 황산동), 사찰 구암사(순창 복흥면), 사 찰 영은사지(정읍 내장동) 법왕 1 사찰 금산사(김제 금산면)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61

163 왕명 숫자 유적명 비류왕 1 수리 벽골제(김제 부량면) 성왕 3 사찰 용담사(남원 주천면), 사찰 신흥사(임실 관촌면), 사찰 상원사(고 창 고창읍) 위덕왕 1 사찰 선운사(고창 아산면) 석불 용화사미륵불입상(부안 행안면), 성곽 우금산성(부안 상서면), 사 의자왕 5 찰 불주사(군산 나포면), 사찰 문수사(고창 고수면), 사찰 내장사지(정 읍 내장동) 꽤 호응이 있을 것이다. <표 25> 백제시대 왕과 관련된 유적(익산 제외) 가. 백제 무왕과 함께하는 역사의 숨결: 익산, 부안, 완주, 김제, 순창, 정읍 무왕 관련 유적은 모두 사찰 창건설화다. 무왕 5년(604년) 서암대사가 위봉사(완주 소양면)를, 25년(624년) 혜덕선사가 꿈에서 문수보살을 보고 문수사(김제 황산동)를, 34년(633년) 혜구두타( 惠 丘 頭 陀 )가 내소사(부안 진서면)를 창건했으며, 사찰 개암사 (부안 상서면)는 부안향토문화지 등에 무왕 35년(634년) 묘련왕사가 변한의 궁궐을 절로 고쳤다고 기록됐다. 무왕 37년(서기 636년)에는 구암사(순창 복흥면)와 영은사 (정읍 내장동)가 창건됐다. 특히 영은사는 현재 흔적만 남아 있는데, 영은조사가 지 은 절로 이때 규모는 50여 동이었다고 전한다. 나. 백제 무왕이 꿈꿨던 또다른 백제: 익산 익산은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장이다. 백제 무왕 은 신라의 선화공주와 국적을 초월한 전설 같은 순애보를 남긴 왕이다. 미륵사지 와 왕궁리 유적으로 대표되는 백제의 또 다른 고장, 익산에는 백제의 궁궐터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이 있다. 왕궁면 왕궁리다. 왕궁이 있었을 것이라는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지명이다. 왕궁리에는 사적 제408호로 지 정된 익산 왕궁리 유적이 남아 있다. 무왕 때 천도한 백제의 왕궁이었으며,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는 왕궁터에 사찰을 세운 독특한 유적이다. 익산 왕궁리 유적의 발굴 조사는 1989년부터 지금까지 현재진행형이다. 그동안 동서 245m, 남북 490m에 이 르는 왕궁의 규모와 담장뿐 아니라 왕궁 내부의 건물지와 석축, 백제 최고의 정원 유적, 금과 유리를 가공, 생산했던 공방터, 화장실 유적이 발굴되었다. 왕궁리 유적 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이다. 국보 제289호로 지정된 이 석 탑은 사찰이 언제 세워졌는지 알려진 바가 없어 탑이 세워진 시기도 의견이 분분하 다. 시대가 어떻든 8.5m에 이르는 위풍당당한 이 석탑은 왕궁리 유적을 사방으로 돌아가며 둘러봐야 제맛이다. 특히 서편으로 해가 떨어질 때쯤 붉게 물들어가는 하 16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64 늘 아래 우뚝 솟은 석탑의 실루엣이 가히 장관이다. 익산 미륵사지는 어느 나라에서도 확인되지 않은 3탑 3금당의 가람 배치를 하고 있는 백제 최대의 가람이며,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가장 큰 석탑이다. 익산 미륵사지는 오랜 세월 동안 폐사지로 남아 있다가 일제강점 기 때인 1915년 보수와 함께 실측이 이뤄졌다. 하지만 오히려 시멘트의 흉측한 몰골 로 남게 되었다. 그 후 익산 미륵사지는 1974년 동탑지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1980 년부터 미륵사지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1992년 미륵사지 동탑 복원이 순차적으로 진 행되었다. 2001년에는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 복원이 결정되었다. 복원된 동탑 옆에 서 있는 커다란 가설 덧집이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 복원하는 공간이다. 석탑을 해체 하는 데 무려 8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 해체가 마무리될 무렵 귀중한 유물이 발 견되기도 했다. 석탑 1층 심주석 중앙의 사리공에서 발견된 금제 사리장엄구와 금제 사리봉안기가 그것이다. 특히 금제 사리봉안기에는 백제 왕후가 미륵사를 창건하고 탑을 세웠다는 기록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미륵사의 창건 배 경과 창건자, 건립 연대 등이 명확하게 규명되었다. 하지만 늘 사실처럼 붙어 다니던 서동과 선화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거기에 없었다. 금제 사리봉안기에 따르면, 미륵사 창건을 발원한 사람은 좌평인 사택 적덕의 딸이자 백제 무왕의 왕후이기 때문이다. 익산 미륵사지를 보려면 먼저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1997년 에 개관한 이 전시관에서는 창건에서 폐찰까지 미륵사지의 역사뿐 아니라 1만 9,000 여 점에 이르는 출토 유물 가운데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을 만나볼 수 있다. 금제 사리장엄구와 금제 사리봉안기는 실물 크기로 복제해 전시하 고 있으며, 2000년에 출토된 금동향로(보물 제1753호)도 만날 수 있다. 미륵사지를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도록 관람로를 조성해 3탑 3금당의 가람 배치, 2기의 당간지 주, 연꽃무늬를 새긴 석등받침과 지붕돌인 옥개석 등 미륵사의 옛 모습을 가늠할 수 있는 흔적을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26) 익산은 이야기를 좇아야 재미있는 곳이다. 무왕 때의 백제 유적이 적지 않다. 왕궁 리 유적 전시관은 무왕과 백제 문화의 흔적을 좇는 '무왕 길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매월 1차례 진행한다(혹서기, 혹한기 제외). 올해 마지막 프로그램이 오는 12월 1일 진행된다. 왕궁리 유적,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서동생가터, 용샘, 익산토성, 미륵사 지, 구룡마을 대나무숲, 서동공원을 잇는 약 16km 코스를 답사하는 일정이다. 총 8 시간 소요 된다. 26) 한국관광공사의 <익산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 부분 인용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63

165 다. 백제의 숨결 익산의 둘레길 전북 익산에선 마한시대, 백제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등 여러 시대에 걸 친 문화재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유적지들이 도심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왕궁 면 금마면 등에 흩어져 있어 자전거 이동이 수월한 곳은 아니다. 미륵사 터와 무왕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전해오는 쌍릉, 익산토성, 왕궁리 5층석탑 등 왕궁리 유적지를 돌아보고 다시 미륵사 터로 돌아오는 코스를 잡아볼 만하다. 금마면 미륵산 남쪽의 미륵사 터 일대는 옛 마한의 도읍지로도 추정되는 곳이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절로, 추정 면적이 국내 최대 규모다. 무왕과 선화공주 설화 가 깃들어 있다. 대형 석탑인 미륵사지석탑과 미륵사지 당간지주를 만날 수 있다. 미 륵사지석탑은 높이 14m가 넘는 대형 탑으로 국내 석탑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둘레길은 익산의 다양한 역사문화탐방과 체험, 휴양이 어우러진다. 함라산길, 강변 포구길, 성당포구길, 무왕길, 미륵산길, 용화산길 등 6개 코스로 총연장 99km에 달 한다. 익산은 무왕의 도시이다. 마룡지, 서동생가터, 익산쌍릉, 미륵사지, 제석사지, 왕궁리 유적 등 서동의 탄생과 사랑 그리고 황금기가 있는 곳이다. 둘레길 중 고도 익산과 관련된 길은 무왕길과 미륵산길, 용화산길이다. 무왕1길(18.4Km, 도보 6시간 20분) 익산쌍릉 (2.0km) 익산토성 (3.3km) 미륵사지 (3.6km) 뜬바위 (0.2km) 구룡마을대나무숲 (2.4km) 서동공원 (2.9km) 고도리석불입상 (1.3km) 왕궁리유적전시관 (2.7km) 익산쌍릉 무왕길2(8.3km, 도보 2시간 40분) 왕궁리유적전시관 (2.8km) 제석사지 (4.3km) 서동생가터 (1.2km) 익산쌍릉(익산토성) 무왕길 자전거코스(8.0km) 익산쌍릉 (1.7km) 익산토성 (1.2km) 서동생가터 (1.1km) 고도리석 불입상 (1.3km) 왕궁리유적전시관 (2.7km) 익산쌍릉 미륵산길(18.0Km, 도보 6시간 20분) 미륵사지 (2.7km) 간재선생 묘소(아름다운순례길) (3.5km) 장암마을 (복숭아길) (3.5km) 미륵산성(정정렬 명창길) (1.8km) 구룡마을(기준고 성길) (2.8km) 미륵사지(대나무숲길) 용화산길(7.0Km, 도보 2시간 20분) 서동공원 (2.0km 대나무숲 길(용화세상 여는길 도보 40분) (1.9km 편백나무숲 쉼터(소쇄양 신도비길 도보 40분) (3.1km 가람 이병기선생 생가(장보러 가는길 도보 1시간) 라. 백제 의자왕의 흔적을 따라 걷는 길: 부안, 군산, 고창, 정읍 16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66 의자왕 관련 유적은 5곳이 확인됐으며, 사찰의 창건설화와 산성 입상 등 다양하다. 석불 용화사미륵불입상(부안 행안면)은 용화사 뒤 야산에 있는 높이 4.5m 정도의 석 불입상으로 의자왕 2년에 묘련선사가 미륵사를 창건하고 미륵석불입상을 만들었다고 전하지만, 불상의 양식을 볼 때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사찰 문수사(고창 고 수면)는 의자왕 4년(644년)에 자장이 지은 사찰로 알려졌으며, 내장사지(정읍 내장동) 는 내장산에 있는 옛 내장사터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백련사는 내장사라고도 이 르며 내장산에 있다. 라고 전한다. 백련사는 언제 세운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의자왕 20년(660)에 유해선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사찰 불주사(군산 나포면)는 망해산에 있 는 절로 의자왕 때 창건됐다고 전하는데 뚜렷한 기록은 없다. 성곽인 우금산성(부안 상서면)은 개암사 뒷산에 있는 돌로 쌓은 산성이다. 의자왕 20년(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항복하자 복신 장군 등은 일본에 있던 왕자 풍( 豊 )을 모셔 왕으로 추대하 고, 백성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복신 장군이 나당연합군의 김유신과 소정방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패배한 곳으로, 백제 부흥을 줄기차게 벌였던 백제 최후의 항거 거점이다. (2) 탑에 매달린 풍경 하나_ 백제시대 불상 탑 기행 가. 백제시대 불상 기행: 정읍, 남원, 부안, 임실, 군산, 익산 백제시대 불상은 보화리 석조이불입상(정읍 소성면), 용담사(남원 주천면), 용화사 미륵불입상(부안 행안면), 운수사터(임실 임실읍), 불주사(군산 나포면), 연동리 석조 여래좌상(익산 삼기면)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과 익산 고도리 석가여래입상은 백제와 고려를 대표하는 석불로 오랜 역사와 함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두 석불은 각각 보물 제45호, 제46호로 나란히 지정되었다.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은 미륵사지에서 함 열 방면으로 4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석불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다. 이 석불은 임 진왜란 때 이곳을 거쳐 여산으로 가려던 왜군에게 영험함을 보이다 목이 달아났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석불의 머리는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 새로 만들 어 붙인 것이다. 인자한 부처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둔중한 스님의 모습이다. 하지만 3m가 넘는 광배와 굵직하게 새겨진 광배의 다양한 문양이 자못 볼 만하다. 태안 동 문리 마애삼존불입상과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을 잇는 7세기 무렵의 백제 석불 이다. 왕궁리 유적 인근에는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옥룡천을 사이에 두 고 2기의 석불이 200m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 바라보고 있다. 두 불상은 각각 남 자와 여자라고 전해지는데, 평소에는 바라만 보고 있다가 음력 12월에 옥룡천이 얼 어붙으면 만나서 그동안 못다 나눈 정을 나누다 새벽닭이 울면 아쉬움을 뒤로한 채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두 석불은 봉분 위에 세워져 있 으며, 쓰러져 있던 것을 조선 철종 때 익산 군수가 세웠다고 한다. 동쪽 석불 옆에는 석불중건기가 함께 세워져 있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65

167 나. 백제시대 탑의 양식을 찾는 기행: 김제, 순창, 고창, 군산, 정읍 백제시대 탑의 양식은 귀신사(김제 금산면), 순화리삼층석탑(순창 순창읍), 청도리 삼층석탑(김제 금산면), 선운사(고창 아산면), 탑동삼층석탑(군산 대야면), 무성리삼층 석탑(정읍 칠보면), 장문리오층석탑(정읍 고부면), 은선리 삼층석탑(정읍 영원면) 등에 서 찾아진다. 이를 익산을 중심으로 각각 테마화해서 전북 권역으로 확대된 백제기 행을 꾸리면 된다. (3) 폐사지를 찾아서 익산을 비롯해 전북에는 폐사지가 많다. 전국 들판 산골짜기에 3천여 곳에 이르는 옛 절터들이 흩어져 있다. 이 가운데 손질된 곳은 100여 곳 정도로, 관광객의 발길 이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는 우리 선조들의 손자취 발자취가 소멸해 가고 있는 옛 절터 여행은 충분히 매력적인 기행코스다. 특히 미륵사를 비롯해 백제 의 폐사지들이 많은 익산은 더 없이 좋은 기행코스다. 백제 무왕 때 창건된 백제를 대표하는 대사찰이었다. 총 10만평 터에 조성에만 35년이 걸렸다. 국보 제11호 미륵 사지 석탑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최대 규모의 석탑으로 불린다. 창건 때는 9층이 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지금은 6층만 남아 있다. 현재 석탑 해체 보수작업이 진행 중 이다. (4) 한국불교 성지기행 미륵사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그 의미가 더 크다. 왕궁리 유적 은 현존하는 백제 궁성 유적 중 유일의 왕궁 확인지로 알려져 있다. 백제는 한성시대의 풍납토성 몽촌토성, 웅진시대의 공산성, 사비시대의 관북리 일대 에 왕궁이 있다고 하지만 이는 추정 왕궁지에 불과할 뿐 정확한 왕궁터로 확인된 곳 은 익산의 왕궁리 유적 이 유일하다. 미륵사지 와 왕궁리 유적 은 백제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유적들이다. 한국 고대사 를 살펴보면 불교가 미치는 정치 문화적 영향의 비중은 매우 높았다. 고구려와 백제 의 불교는 계율을 중시했고, 신라는 왕이 곧 부처 라는 왕즉불( 王 卽 佛 ) 사상을 수 용해 정치를 발전 시켜갔으며 삼국시대의 불교는 각 나라와 지역마다 독특한 특성을 지니며 발전해 우리 고대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따라서 한국불교의 성지로서의 역할 이 충분하다. (5) 문화재 발굴 보수 현장기행 발굴현장 보수과정도 상용( 商 用 )가능한 문화콘텐츠다.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국내 매장문화재 발굴조사 건수는 1천여 건을 넘어섰 다. 양적으로 크게 늘어났지만, 그 성과와 과정은 국민들의 삶과는 멀다. 관계자가 아닌 이상 발굴된 전시물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국민들은 단순한 16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68 관람객으로 우리의 발굴문화재에 대해 수동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매장문화재는 모두 국가 소유이며, 매장문화재 조사 성과 역시 국민의 자산이다. 따라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의 과정과 성과는 국민들이 언제든지 열람하고 볼 수 있 어야 한다. 다행히 최근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발굴현 장을 직접 관람해야 한다는 의견이 늘고 있다. 외국의 경우,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해 발굴조사에 대한 간단한 정보와 자원봉사, 방문, 교육 등의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다. 터키에 있는 세계적인 신석기 유적인 Catalhoyuk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이곳 홈페이지에서 특이한 점은 발굴조사의 스폰서로 Boeing IBM 등 세계적인 기업이 노출돼 있다는 것이다. 발굴조사 유적 홈 페이지는 우리나라에도 개설된 곳이 있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 하고 있는 함안 성산산성 발굴조사 현장이다. 최소한 우리나라 IT기술을 최대한 활용해 국민들이 사이버 상에서 현장을 직접 방 문하고, 관련된 정보를 다양하게 열람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적 홈페이지 제작에서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은 최대한 사용자의 입장에서 자료에 접근하고 선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아무리 다양한 정보가 담겨져 있어도 필 요한 자료를 최대한 빠른 시간에 검색해서 열람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익산 왕궁리 유적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곳은 일찍부터 상설 전시장을 마련해 국민들에게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적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발굴하는 현장까지 노출돼 있어 쉽게 구경할 수 있다. 익산 왕궁리유적은 이미 오래전부터 왕궁터로 알려져 왔던 곳이며, 조선시대 기록 에도 고대 왕궁터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 의하면 고조선의 기준왕이 남으로 내려 와서 세운 도읍성이라는 학설부터 마한시대의 왕궁터, 또는 백제시대의 왕궁터, 그리 고 백제 멸망 이후에 후백제 견훤이 쌓은 궁성터라는 학설까지 다양하게 알려졌던 곳이다. 이 유적은 1970년대 원광대학교에 의해 처음 발굴된 이후 1989년도부터 국 립문화재연구소가 본격적으로 매년 발굴을 계속해 지금은 ⅔가량이 발굴되면서 실체 를 드러내고 있다. 언제나 그 현장을 볼 수 있다. 미륵사 석탑의 보수과정도 마찬가지다. 현재에도 그 과정을 지켜볼 수 있지만, 오 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 과정을 공개하고 국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낼 필요가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문화재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으며, 선인들과 지역에 대한 애정이 생길 것이다. 전공학생들에게는 현장실습의 기회가 될 수 있다. 27) 두 곳 모두 교통이 편리해 현장 접근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단지 유적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루 관광코스로도 큰 무리가 없다. 27) 외국의 경우 관람객에게 문화재 보수과정을 공개하면서 입장료를 받기도 하고, 전공자들에게는 돈을 받고 참가시키기도 한다고 전한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67

169 그림 56 왕궁리 유적 (6) 익산 전북 역사문화기행문(예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익산 전북을 여행하고 기행문을 남겼다. 대표적인 예가 불로그 에 올라온 글과 여행전문작가의 글이다. 몇 편의 글을 통해 익산 여행의 지점을 살 펴보자. 익산 무왕길 여행 - 발길 닿는 곳마다 찬란한 백제의 숨결 28) 이번 주 짧고 굵은 장마에 어느 때보다 피곤한 한주를 버텨야했다. 주말 힐링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유다. 휴식과 여행에 목말라 있는 분들 을 위해 길여행 소식을 준비했다. 서동설화부터 찬란한 백제의 전성기를 걷는 '익산 무왕길'이다. 두 발로 마주하는 찬란했던 백제의 역사 2010년 11월 13일, 익산 함라산 둘레길에 이어 백제 시대 무왕의 자취를 느껴볼 수 있는 무왕길이 생겼다. 무왕길에서는 왕궁터와 생가 등 그의 역사적 발자취를 따라 걸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익산토성과 미륵사지, 서동생가터 등 모든 유적지를 하나의 길로 연결해 역사유적탐방코스로도 제격이다. 무왕길은 도보로 걸을 수 있는 2가지 코스와 자전거코스 총 3 가지 코스다. 1코스는 익산쌍릉~익산토성~미륵사지~구룡마을 대나무숲~서 동 공원~고도리 석불입상~왕궁리 유적전시관을 지나 다시 익산쌍릉으로 돌아오는 코스이며, 왕궁리유적전시관~제적 사지~서동 생가터~익산쌍릉으 로 이어지는 2코스, 익산쌍릉~익산토성~서동생가터~ 고도리 석불 입상~왕 궁리유적전시관을 지나 다시 익산쌍릉으로 돌아오는 무왕길 자전거코스로 28) 출처: 전북일보 2013년 6월 21일자(글쓴이: 김영균 전라북도민 블로그단) 16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70 구성돼 있다. 그 중 미륵사지와 대나무 숲을 볼 수 있는 1코스를 선택했 다. 역사 속 물음표로 남아있는 '익산 쌍릉' 무왕길의 시작점인 쌍릉은 익산시 석왕동에 위치해 있다. 쌍릉은 남과 북 으로 2기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는데 북쪽에 있는 묘는 대왕묘, 남쪽의 것 을 소왕묘라고 하는데 북쪽의 묘가 남쪽의 묘보다 크기가 더 크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쌍릉의 주인은 누구일까? 아직 명확 하지는 않지만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첫째는 마한의 무강왕과 그 왕비 의 능이라고 불리는 설, 두 번째는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이라는 설 이 전해진다. 하지만 아직도 역사 속에 물음표로 남아있다. 서동 설화의 흔적이 살아있는 곳, '익산토성' 익산토성은 사적 제92호로 백제 무왕 시절 처음으로 쌓여진 것으로 알려 져있다. 면적 20만2215m2, 둘레 690m. 동서로 뻗은 100m 내외의 산등성 이에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남문지 수구지 건물지 등의 시설이 있다. 익산 토성이라는 이름 외에 이곳은 오금산성( 五 金 山 城 ) 또는 보덕성( 報 德 城 )이 라고도 불린다. 익산토성이 무왕의 주요 유적지가 된 이유는 이곳에서 발 견된 유물들 때문이다. 대부분이 토기 조각, 기와 조각류였는데 백제 말기 부터 고려 시대까지 당대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다. 주로 생활 용 기나 제기, 기와도 명문과 그림 등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이곳이 군사적 목적이 아닌 토속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서동 설화와도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연못 속 용이 백제의 왕이 되다, '서동생가터 마룡지' 이정표를 따라 서동생가터에 도착하면 '마룡지'라는 연못이 나온다. 삼국 유사 무왕조에 의하면 무왕의 이름은 장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과부로 연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연못 속의 용과 관계해 장을 낳았다고 기록 돼 있다. 이 연못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마룡지로, 마룡지의 동쪽 편에서 백제 시대의 기와가 다량으로 발견돼 이곳이 서동생가가 있던 곳이라 알 려져 있다. 어린 무왕이 저 연못을 뛰놀며 자랐겠구나. 이곳에서 탄생 이 야기를 접하고 나니 새삼 그 모습들이 떠올랐다. '고도리 석조 여래입상' 익산 고도리 석조 여래입상은 고려 시대 불상으로 높이 424cm, 보물 제 46호로 지정돼 있다. 이 불상에는 독특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성격 과 배치방법이 특이해 음력 12월 해일 자시에 두 상이 만나 일 년 동안의 회포를 풀고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남녀 상이라는 풍수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정말 새벽에 이야기를 나누는 건 아닐까 궁 금해졌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69

171 유적이 들려주는 백제역사이야기, '왕궁리 유적전시관' 왕궁리 유적전시관은 백제 무왕의 천도설과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 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과 유물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이곳에는 왕 궁리 5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주요 전시물로는 다양한 형태의 금과 유 리제품, 이것을 생산하던 각종 도가니와 인장, 명문와, 수막새, 전달린 토 기, 완, 합 등잔, 대형토기 등 왕궁리 유적 출토유물들이 약 1400여 점 소장돼 있다. 이곳에서는 백제 왕궁에서 사찰로 변화한 한 과정과 모습들 을 유적과 각종 역사적 자료들로 만나볼 수 있다. 백제의 숨결을 직접 발 걸음을 옮기며 느낄 수 있었던 무왕로 둘레길. 서동의 생가터부터 유적전 시실까지 백제의 탄생과 전성기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직접 걸으며 이정 표와 정비가 미흡한 길 조성 등 조금씩 아쉬운 부분들도 있었다. 부족한 부분을 조금 더 정비한다면 학생들에게는 좋은 역사 체험장소로 그리고 전국의 도보 여행객들에게도 좋은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명품 길이 되 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금성(익산토성) 그리고 서동 이야기 29) 사적 제92호 익산토성은 해발 125m의 오금산 정상에서 남쪽 골짜기를 안고 좌우 두 봉우리를 연결하여 축조한 포곡식 산성이다. 금마 소재지에 서 서쪽으로 가다가 우측 쌍릉 雙 陵 옆길로 접근한다. 서동이 마를 캐고 선화공주에게 줄 금 다섯 말을 얻은 산이라 해서 오금산이라는데 산성을 오금산성이라 하고, 고구려 멸망 후 신라에 귀의한 후 금마저 金 馬 渚 에 머 물면서 보덕왕 報 德 王 에 봉해진 안승 安 勝 과 관련 있다 하여 보덕성이라 칭 해지기도 한다. 일부 고 古 기록에 근거, 유래된 것이지만 발굴조사 결과 무 리인 것으로 파악됐다. 대신 성내에서 다수 출토되는 유물들로 미뤄 백제 말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한다. 가장 낮은 남쪽 골짜기를 중심으로 동북, 서북, 서남의 세 봉우리를 700m 가량 둘러 쌓았으며 성 내부는 30도 정도 경사에 성의 전체적 평 면도는 남벽을 밑변으로 나머지 부분은 약간 남쪽으로 기운 반달형을 이 룬다. 성벽 대부분은 토성으로 구성됐지만 남쪽 계곡 근처 30~40m는 석 축을 기초로 하고 상부는 토축을 하여 이 부분은 후대 개축된 것으로 보 인다. 석축부는 상당히 규모가 크게 가공한 10여 단 석축으로 계곡을 막 아 이룬 남벽을 이뤘다. 토축의 폭은 대체로 하부 6m, 상부 3m 가량이 다. 최저지대인 남벽 중앙부에는 수구를 설치하여 성안에서 유출되는 물 을 계곡 아래로 배출했을 것으로 보인다. 남벽 중앙부에서 급격히 상승하 29) 출처: 월간 문화재사랑 2012년 11월호(글쓴이: 문화재청) 17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72 는 서봉쪽 중간부에 토루를 절단하고 너비 4~5m의 문지를 두었으며 문루 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지 양쪽에 4~5m 두께의 4, 5단 가량의 석축 이 있고, 남벽에서 동편으로 경사를 이루며 상승하는 성벽도 토축으로 다 듬어졌으나 서봉과 동봉에서 북봉에 이르기까지는 토축 흔적만 2~3m씩 남았을 뿐 대부분 잡초 속에 묻혔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토루는 고구 1, 2단의 기단석 基 壇 石 을 설치하고 그 위에 토축한 것으로 돼 있다. 기단석 밖에 회곽도 廻 郭 道 를 둔 부분도 있다. 삼문지 외 특별한 시설은 보이지 않으나 동, 서, 북봉의 평탄지에 대지 臺 址 내지 건물지가 약간 있었을 듯 하다. 현재 삼태기 안처럼 아늑한 성내에는 대나무가 무성하여 우물이나 건물지 등의 모습은 찾기 어렵다. 그 부분의 낮고 습기가 있는 곳을 보고 서는 우물터가 아닌가 하는데 거기서 나오는 물은 남벽의 하층 수구를 통 해 밖으로 배출된다. 발굴 당시 성내 계곡의 서편 사면에서 아가리가 넓 고 바닥이 좁아 주머니처럼 된 저장시설, 석축의 원형구덩이가 발견됐다 한다. 오금산은 워낙 주변이 평야지여서 멀리서 바라보면 녹색 접시를 엎어놓 은 듯한 부드러운 산세로 짓푸른 하늘과의 경계에서 부드럽게 흘러가는 선처럼 선명하고 아름답다. 그 품안에 다소곳이 자리한 성안이 어머니의 품안처럼 고즈넉하고 아늑하다. 성 진입로 어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 혀지지 않은 쌍릉도 이 성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며, 오금산 동남쪽 능선 끝자락에 자리한 서동못과 바로 옆 나무 우거진 곳이 맛동이(서동)의 생가 터란다. 이 연못 속에서 서동의 어머니와 용 사이 로맨스, 서동과 선화공 주의 발소리도 아련히 들려오는 듯하다. 벽공과 녹색 오금산을 배경으로 못 속에 다소곳이 앉은 청초한 연꽃이 보고 싶다. 아마 연못가 밭은 공주 를 꼬여내는 데 쓰던 마밭 薯 田 이 아니었을까. 여인을 얻고자 소원을 담고 정성껏 마를 씻던 곳은 이 연못가이었으리라. 망태기 하나 메고 금을 캐 러 가던 오금산이 먼발치서 가만히 굽어보는 속에서. 선화공주님은 / 선화공주님은 / 남 몰래 정을 통해 놓고 / 밤마다 임의 품에 안겨 간대요. 아마 박자를 맞추기 위해 얼레리 꼴레리 쯤 조흥구를 붙여 주면 더욱 좋 으리라. 마를 얻어먹은 경주의 꼬맹이들은 멋도 모르고 신이 나서 동네방 네 뛰어다녔다. 마침내 오랜 뒤에 그 노래는 진평왕의 귀에도 들어가고. 아마 요즘 같으면 스토킹 으로 취급돼 곤욕을 치뤘겠지만 어쨌든 목적을 달성하려던 서동의 집념만은 알아줄 만하다. 예쁜 아내를 얻어 가지고 어 머니 앞에 의기양양 돌아온 맛동이의 모습이 재미있게 떠오른다. 그런 의 지의 인물이었기에 가히 마지막 백제를 일으킬 야망을 품었음 직하다. 후 계자 하나 세우는 데도, 천도하자는 데도 악마구리같이 대들던 신하들도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71

173 보기 싫고 늙은 맛동이는 이래저래 죽어서나마 이 땅으로 돌아와 편히 지 내는지. 여기서 이야기 되는 마 薯 는 이웃에 있는 저토성이 현지명으로는 돗토성 임을 볼 때 소위 민간에서 부르는 돼지감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 현듯 떠오른다. 비록 최근( ) 미륵사지 석탑과정에서 발견된 창건 내력(무왕의 아내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의 금판 발굴로 혼란스러워 지기는 했지만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전해 오는 이 낭만적인 이야기는 설 화로서 이 지역에 앞으로도 오래도록 살아 있을 것이다. 문화유산의 숨결을 찾아 30) 옛 백제 땅의 석탑을 찾아서 라는 주제의 첫 답사지는 익산 왕궁리 5층 석탑이다. 아침에 만나는 답사풍경은 밤새 쌓였던 토론의 여독을 밀어내 고 색다른 빛깔과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예로부터 왕궁평 王 宮 坪 으로 불리던 넓은 공터의 입구에는 예전에 없던 생뚱맞은 전시관이 세워져 있 었지만, 아름다운 벚나무 군락만큼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문화유산 해설자님 曰, 이 벚꽃은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보는 거예요. 발굴 작업으로 이 지역 벚나무 군락이 베어질 거라는 약간의 푸념이 배어 있는 말투다. 왕궁리 5층석탑은 언뜻 보기에도 커다란 덩치에 나이도 정 확히 알 수 없으면서 많은 속설을 지니고 있다. 탑의 비밀스런 속내에 간 직한 사리함과 금강사경, 외모에서 보이는 형식과 구조에 있어 백제계 석 탑이니 신라탑의 양식이 어우러진 고려전기의 석탑이니 하는 미술사적 분 류만으로는 채워지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탑의 근원은 부처의 죽음을 계기로, 남겨진 사리에 대한 봉안이 불상이 없던 시대의 탑파신앙으로 이어진 것이다. 원 圓 에서 각 角 으로 서 西 에서 동 東 으로 탑의 형태적 변화와 이동의 시간만큼 탑은 점차 창조적 영조물 이 되어갔다. 건축과 조각이 같은 기원에서 출발한 것만큼 죽음에 대한 경외심으로 신앙의 대상물을 만든 것은 같은 이치다. 여기에 구조적인 면 과 조형예술적인 측면이 탑의 양식을 설명하는 기술일 뿐이다. 설명과 감 상은 제작자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능숙한 망치질과 예술적 신앙심을 상상케 하는 이 왕궁리석탑은 탑 자체만의 독립된 언어 로 보는 이를 감흥에 빠지게 하는 매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다음 답사지인 인근의 미륵사지에서는 석탑의 해체가 1층 옥신까지 진행 되었다. 석고 조각처럼 외관이 깔끔하게 단장된 동탑과 비견되는, 그야말 로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스며있는 국보 11호 미륵사지의 서탑은 일제 30) 출처: 월간 문화재사랑 2006년 5월호(글쓴이: 문화재청) 17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74 강점기였던 1910년 세키노타다시( 關 野 貞 )가 현지조사를 한 이후 1915년 일인 日 人 들이 콘크리트로 응급 보수를 하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 콘크리 트의 보강부분이 더 이상 탑의 구조적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기에 현재 보수정비가 진행 중이란다. 미륵사지 전시관 주변에는 해체된 탑의 파편 과 구조물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삼원 금당식의 거대한 가람을 이곳에 조성한 이유는 왕의 권위와 신앙심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탑 이라기보다는 강력한 왕권과 신앙심이 한 덩어리로 표현된 상징물이 아닐 까. 백제인의 신앙심과 예술적 상상력은 목탑에 만족하지 않고 작지만 구 조적인 안정성을 꾀할 수 있는 정림사지석탑에서 새로운 조각의 지평을 열어가게 된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백제계 석탑의 모티브를 제공한 탑이 지만 세월의 풍화 때문인지 오늘은 왠지 소슬한 느낌마저 준다. 이에 비 해 다음 답사지에서의 장하리 탑에는 정갈한 모습의 받침돌과 삼층 옥신 의 몸돌이 반 半 만 새겨져 있다. 에스파냐의 화가 엘 그레코는 그의 신앙 심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을 그림에 넣었듯이 제작자의 의도는 일반인의 고정관념을 간단히 깨뜨려 버린다. 장하리에서 김밥을 먹으면서 탑에 대 한 사랑싸움이 벌어졌다. 왕궁리, 미륵사지, 장하리, 정림사지 5층석탑 중 마음에 드는 석탑 하나 를 고르는 일이다. 서울문화 라는 대화명을 가진 회원은, 정림사지 탑은 절세의 미인이지만 당나라의 침략에 목숨을 버린 왕비 같았고, 장하리 탑 은 탑신에 스카프를 날리는 아기 무녀 같았으며, 무량사 탑은 쓸쓸한 불 가의 여인 같지만, 왕궁리 탑은 몰락한 귀족의 여인 같았어요. 이에 비해 성주사지 탑은 소박한 민가의 따님들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라며 긴 관 람평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사람들은 관람객이 아니라 답사의 주인공이 되어가고 있었다. 탑을 통해 해석 이라는 내면화의 영역에 도달한 것이 다. 아무튼, 일행 중 대다수의 회원이 장하리 삼층석탑에 표를 던졌다. 그 다지 웅장하지도 예쁘지도 않은 그야말로 천진스러운 매력에 모두 넋이 나가 버린 것이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73

175 천년 비밀 품은 그 곳 '익산' 31) 쉬이 보던 돌탑이 사뭇 특별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가을과 겨울이 교차 하는 풍경 속에서다. 산 것들이 몸을 잔뜩 웅크리는 순간에도 돌탑은 그 렇지 않으니 마음이 동한다. 전북 익산 왕궁리 황량한 들판에 오층석탑이 있다. 사위가 스산해졌지만 위풍이 참 당당하다. 쓸쓸한 풍경과 대조를 이 루는 것이 오히려 아름답기까지 하다. 탑이 선 자리도 흥미롭다. 백제 왕 궁 터로 추정되는 곳. 들풀 사이로 고개 내민 돌덩이들이 그래서 또 어엿 하다. 섬세하고 은근한 멋_ 왕궁리 유적과 오층석탑 잘 생긴 탑이다. 반듯한 탑신(탑의 몸)은 균형이 꼭 맞다. 또 비례가 어긋 남이 없어보인다. 옥개석(탑의 지붕돌)의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렸다. 화려 하지 않지만 은근한 멋이 풍긴다. 간결하다. 그러면서도 섬세하다. 왕궁면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289호)의 첫인상이 그렇다. 여기에 1,400년이란 세 월의 무게가 덧입혀진다. 탑의 건립연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백제 말기, 통일신라 초기,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라는 주장이 대립하는 가 운데 백제의 탑이라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찬찬히 보면, 대표적 백 제의 탑으로 꼽히는 충남 부여의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참 많이 닮았다. 시간의 깊이가 더해지니 탑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태풍에도 끄떡하지 않 을 만큼 듬직하다. 탑의 높이는 8.5m. '세파에 시달리는 인생들도 눈앞의 탑처럼 당당했으면 ' 싶다. 이른 한기에 들판은 메말랐다. 잎을 다 떨군 나무 사이로 탑은 우뚝하게 솟았다. 겨울의 길목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분 위기는 쓸쓸하지 않다. 구름 한 점 없는 한 낮, 탑과 사람이 마주한 풍경 은 오히려 담담하다. 탑이 선 자리는 야기가 있어 더 흥미롭다. 천년의 비밀을 품은 땅이다. 왕궁리 오층석탑 주변은 백제 왕궁 터로 추정되는 곳(왕궁리 유적). 지난 1989년부터 본격 시작된 발굴 작업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왕궁은 백제 무왕이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로 들어가 선화공주와 결혼하며 세기 의 스캔들을 일으킨 서동이 바로 무왕이다.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 한성(서 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하며 위축됐다. 무왕은 백제를 중흥하려 했다. 그래서 금마(익산)에 도읍을 정하고 왕궁을 지었다(금마도읍설). 일본에서 발견된 '관세음 응험기'는 고서 필사본에 '백제 무광왕은 지모밀지로 천도 해 새로 정사를 경영했다'고 전한다. 익산 천도를 언급한 유일한 문헌이 다. 이를 받아들인 일부 학자들은 '무광왕'이 무왕이고 '지모밀지'는 익산 왕궁리의 옛 지명인 '모질메' '모지밀' 등의 변형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31) 출처: 스포츠한국 2012년 11월 21일자(글쓴이: 김성환 기자) 17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76 왕궁으로서 기능이 다한 자리에 사찰이 들어서고 이 때 오층석탑이 만들 어졌다는 것이다. '왕궁리'라는 현재의 지명도 왕궁이 있던 것에서 연유했 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변은 왕궁 건물터와 사찰 건물터가 혼재해 있다.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비밀에 쌓여 있어 더욱 흥미로운 땅 이다. 백제의 유적지로 공주와 부여를 첫손에 꼽지만 익산에도 유독 백제 의 유적이 적지 않다. 대부분 무왕 때의 것이다. 왕궁리 유적도 이 중 하 나다. 일부 왕궁 건물터와 사찰 건물터, 성곽 등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잡풀 이 몸 낮추는 요즘이 건물 떠받치는 주춧돌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때다. 고대왕국의 신비를 간직한 '비밀의 땅'을 산책하는 기분은 참 흥미롭고 또 호젓하다. 왕궁리 유적 전시관도 둘러볼만하다. 발굴과정과 발견된 유물 등을 전시 중이다. 미륵사지 쌍릉_ 운치있는 폐사지 산책 익산의 볼거리로 금마면 미륵사지 석탑을 가장 먼저 꼽기 마련이다. 재미 있는 것은 현재 미륵사에서 볼 수 있는 옛 탑은 하나도 없다. 미륵사에는 원래 탑이 세 개 있었다. 가운데 웅장한 목탑이, 이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 쪽에 각각 돌로 만든 9층 석탑이 있었다. 중앙의 목탑은 흔적이 없다. 동 탑은 옛 부재를 쓰지 않고 복원한 탓에 그 모양이 아주 우스꽝스럽게 돼 버렸다. 플라스틱 모조품 같다. 서탑은 현재 해체, 복원작업 중이다. 일제 강점기 때 무너져 가던 탑의 뒷부분에 시멘트를 발라 땜질했던 것을 지난 2000년부터 대대적으로 보수하기 시작했다. 미륵사지 석탑은 바로 이 서 탑이다. 탑이 없어도 미륵사지 들러볼 것을 권한다. 이맘 때 고요한 폐사 지 산책이 제법 운치가 있다. 미륵사는 백제 최대 사찰이었다. 신라 황룡사에 버금가는 규모로 알려졌 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과 왕후였던 선화공주가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너른 앞마당에는 두 개의 연못이 있다. 일대에서 발굴한 석재들을 따로 모아 전시장도 만들어 뒀다. 비록 돌덩이들이지만 천년 세 월 품은 사실이 묘한 감흥을 준다. 웅장한 당간지주는 당시 광대한 절집 의 규모를 보여준다. 석왕동에 무왕과 선화공주의 릉( 陵 )으로 추정되는 쌍릉이 있다. 대왕릉에 는 무왕이, 소왕릉에는 왕후가 묻혔다. 각각은 소나무 숲으로 에워싸였다. 두 릉을 잇는 소나무 숲길이 참 예쁘다. 고대왕국의 온기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길이다. 고도리 석조여래입상_ 직선 몸통에 네모 얼굴 세파에 끄떡없을 것 같은 석탑도 좋고, 호젓한 폐사지 산책도 좋다. 여기 에 재미있는 불상 하나 더 추가한다. 금마면 동고도리에 있는 석조여래입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75

177 상(보물46호)이다. 이 불상 참 특이하다. 모습이 토속적이고 우스꽝스럽다. 몸통은 일직선에 가깝고 얼굴은 네모다. 이러니 불상이라기보다 마을 앞 에 세운 장승처럼 보인다. 눈이 가늘고 입과 코가 아주 작으며 머리에는 높은 관과 방형의 갓을 쓰고 있다. 몸통과 얼굴의 비례도 잘 맞지 않다. 들여다보면 절로 웃음 짓게 만든다. 게다가 무덤처럼 만든 봉분 위에 서 있는 것도 독특하다. 백제 것은 아니고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된다. 불상은 두 기다. 약 200m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서 있다. 두 불상 사이 로 옥룡천이 흐른다. 이곳 사람들은 두 불상이 각각 남녀상이라고 생각한 다. 매년 음력 12월, 옥룡천이 얼어붙으면 두 불상이 만나 한해의 회보를 풀고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전설이 있다. 떨 어져 있어도 혼자가 아니라 덜 외로운 불상이다. 초겨울 한기 녹일 만큼 훈훈하다. 천년고도 익산에는 평화의 보석들이 빛난다 익산은 보석만으로 빛나는 곳이 아니다. 기독교와 천주교의 사랑과 평등, 불교와 원불교의 자비와 사은 사상이 곳곳에서 평화의 빛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미륵산은 익산을 상징하는 지명이면서 동경의 대상이다. 서동과 선화가 꾸었던 꿈은 그 산 아래 미륵사지에서 깎이고 다시 서기를 반복하 면서도 시대의 존엄을 잃지 않았다. 허물어진 미륵사탑을 만지면 역사의 온기가 스민다. 함라산 깊숙한 숲에 있는 숭림사는 아담하지만 보광전 불상 머리 위 천 장에 섬세한 용 조각이 있는 닫집이 있어 자못 장엄하다. 보광전(보물 제 825호), 보광전 목조석가여래좌상(도유형문화재 188호), 영원전 지장보살 및 권속(도유형문화재 제189호), 청동은입인동문향호(유형문화재 제167호) 등 4개의 숨은 보물을 찾는 즐거움이 있다. 원불교의 산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원불교 중앙총부(등록문화재 제179호) 는 도심 속 정갈한 순례지다. 일식과 한식이 혼합된 다양한 근대건축물과 잘 가꾼 수목들은 이곳이 성지임을 자연스레 느끼게 한다. 남녀유별의 전통을 따르면서 남녀 모두에게 복음을 전파하려는 두동교회 (지방문화재자료 제179호) 예배당은 남녀칠세부동석 의 전통을 ㄱ 자로 풀어낸 한국교회 초기 건축의 독특한 유형이 그대로 있다. 남녀가 만나는 중심에 강단을 설치했다. 나바위성당(화산천주교회 사적 제318호)은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 부가 사제로서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신앙의 터전이 마련된 것은 1882년 공소가 설립되면서부터다. 1888년 이곳에 본당이 신설되고 초대 주임에 베르모레 신부가 임명됐다. 1907년 제 모습을 갖춘 성당이 건립되면서 금 17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78 강가의 나바위에서 이름을 따 나바위성당이라 불렸다. 이 성당은 일제강 점기인 1929년에도 신도수가 3,200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큰 본당 중 하 나였다. 계명학교( )를 세워 교육에 힘썼고, 1949년 간이진료소 인 시약소를 설립해 가난한 농민들의 건강을 돌봐왔다. 서양식 첨탑을 가 진 성당 건물은 한옥기와가 올라 단아한 조화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또한 내부는 남녀 구분이 엄격했던 시절 탓에 가운데를 나눠 남녀가 따로 앉을 수 있도록 했다. 예배실 중앙기둥이 그 흔적이다. 성당을 감싼 화산 의 정상까지는 십자가의 길 이다. 이 길에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비 와 망금정 이 있다. 길을 따라 성서 이야기를 돌에 새겨놓은 것도 흥미롭다. 금강 황산포가 한눈에 드는 망금정 뒤 바위에 마애불이 새겨 있다. 성당 안에 부처님이 있는 것. 이 부처님은 이곳에 과거 나암창이 있을 때 항해 하는 선원들의 무사항해를 기원하기 위해서 새겨졌다. 조선시대 관아인 여산동헌은 관아보다 천주교 순교지로 더 이름이 높다. 박해의 역사가 어느 지역보다 길고 참혹했던 곳. 참수와 교수, 백지사형 등 형장도 없이 마구 처형이 자행된 비극의 현장이다. 충남과 전북의 경 계인 여산은 학문과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면서 천주교 전래도 다른 지역 에 비해 앞섰고, 신자들은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여산옥터는 옥에 갇혀 있던 신자들이 굶주림에 못 이겨 옷 속 솜을 뽑아 먹다가 처형지로 끌려 나오자 풀까지 뜯어 먹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여산에는 동헌 앞 백지사터 외에도 숲정이 성지가 있다. 지금은 논밭이 되었지만, 박해 당시에는 숲이 우거진 곳. 그래서 숲정이 성지다. 2) 문학작품을 이용한 문화재 스토리텔링 활용 프로그램 문학은 삶이며, 역사다. 문학은 작품으로 만나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작가로도, 공간으로도 만날 수 있다. 작품에서 숨 쉬는 공간은 독자들을 보다 현실적으로 문학 과 만나게 한다. 문학작품을 통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읽는 일은 시민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한다. 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항상 자부심으로 남는 것은 보이지 않는 지역의 힘이다. 32) 스토리텔링이 대세가 된지 오래다. 특히 유 무형 문화유산에 얽힌 이야기를 발굴해 관광객에게 전하는 관광자원 스토리텔링 마케팅사업의 필요성은 더 높아지고 있다. 32) 남원의 예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춘향전 만큼 이본( 異 本 )이 많은 작품은 흔치 않으며, 20세기 이후로 는 시 소설뿐 아니라 연극 창극 마당극 뮤지컬 오페라 영화 드라마 만화 등으로 확장되며 새로운 생명을 얻 고 있다. 21세기에도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함으로써 그 영원성을 실감케 하고 있다. 이는 춘향전이야말로 한 국을 대표하는 콘텐츠이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콘텐츠임을 증명한다. 이는 그 내용의 깊이가 그만큼 깊 고 넓기 때문이다. 서동요 는 춘향전 만큼 훌륭한 문학작품이자, 오랫동안 교과서에 수록된 우리나라 의 대표적인 문학작품인 동시에 대표적인 사랑이야기다. 그러나 서동요 의 활용은 춘향전 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77

179 아쉬운 것은 대부분 새로운 창작 만을 앞세우는 것이다. 사실, 꽤 근사한 스토리텔 링 글은 가까운 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다양한 형태의 문화유산들은 이미 시 소 설 수필 동화 희곡 등 문학작품에서 차분하게 긴 호흡을 내쉬고 있기 때문이다. 고도 익산 지역을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은 꽤 많다. 미륵사지 하나만 해도 먼저 떠오르는 시가 정양의 결코 무너질 수 없는, 정군수의 미륵사지에서, 박미숙의 사자암 등이 있으며, 서동 을 테마로 한 이병천의 판소리소설 마동뎐 과 최기우 의 창작판소리 서동요 가 있다. 고도 익산의 사업 범위에 있는 소세양신도비 (전라 북도 유형문화재 159호) 역시 윤흥길의 소설 에미 와 홍석영의 소설 양곡 소세양 의 빛과 사랑 의 배경지다. 문학작품 속 공간은 독자에게 보다 현실적인 문화적 사 유를 경험케 한다. 문화재가 담긴 문학작품들은 다양한 활용과 확산이 가능하다. 기존 낭송 낭독 프로 그램에 문화재를 테마로 설정해 낭송 낭독 축제를 열 수 있고, 문화해설사의 설명 자 료에 문학작품에 담긴 문화재의 모습을 더해 관광객들과 함께 읽으며 친밀한 느낌을 나눌 수도 있다. 지자체와 협조를 통해 문화재 현장에 관련 문학콘텐츠를 배치하거 나 별도의 알림판 등을 설치해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읽기가 흥하면 쓰기는 크고 기운차게 일어난다. 문학작품을 이용한 문화재 스토리 텔링 활용은 문화재를 테마로 한 글쓰기의 자연스러운 확산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 확산은 문화재에 새로운 생명을 얹히는 창조적 생산의 과정이며, 문화재의 재발견이 다. 이 프로그램은 문화재가 담긴 문학작품 찾기 인터넷 공모 및 데이터베이스 구축 과 문화재가 담긴 문학작품 낭송 낭독 대회 개최 및 다양한 확산 등 두 가지 사업 으로 나뉜다. (1) 문화재가 담긴 문학작품 찾기와 데이터베이스 구축 문학작품에는 유 무형의 문화재들이 이미 많이 소개돼 있다. 예를 들어 최명희의 소설 혼불 은 우리의 세시풍속과 관혼상제, 음식, 노래 등 민속학 인류학적 기록들 을 철저한 고증을 통해 생생하게 복원했다. 또한 소설의 주요 배경지인 남원시 사매 면과 전주시 교동 다가동 일대의 문화자원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다. 이를테면, 전주 의 향교 경기전 한벽루 전동성당 다가공원 등 전주한옥마을에 있는 유 무형의 문화재 들이다. 고은 시인과 서정주 시인도 자신의 탯줄이 묻힌 고향의 문화자원들을 다양 하게 활용한 대표적인 예다. 윤미숙의 동화 소리 공책의 비밀 은 임실필봉농악을 소재로 했고, 윤흥길의 소설 소라단 가는 길 은 익산 소라단을 소재로 했다. 안도 현 박남준 김용택 이기반 정양 등 많은 시인들의 시에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들을 직접 거론한 작품들이 꽤 많다. 유명 작가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지역에 는 널리 이름을 알리지 않았지만 지역의 문화에 지극한 애정으로 윤기를 더하고 있 는 문학인들이 많다. 17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80 이 프로그램은 문학작품 저장공간이자 확산의 발전소인 웹사이트를 제작하는 것부 터 시작된다. 그 뒤 인터넷 공모를 통해 문화재가 포함되었거나 활용된 문학작품을 모집한다. 인터넷으로 전국 문화재를 테마로 한 시 시조 소설 수필 극 등 문학작품을 찾아 참가자들이 직접 저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양귀자의 단편소설 숨은 꽃 에서 김제시 귀신사를 언급한 부분을 찾아 올리거나, 정도상의 장편소설 실상 사 에서 남원시 실상사가 묘사된 부분이나 실상사의 특징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을 찾 아 올리는 것이다. 가. 공모 내용 주제: 문화재를 테마로 한 기성 문학작품 심사기준: 문화재를 직 간접적으로 활용한 문학작품을 원문에 가장 정확하게 많 은 작품을 올린 참가자 대상: 누구나 접수: 웹사이트에 직접 입력 시상내역: 1등 상금 100만원 등 추진 과정: 최종 기획안 확정 / 웹사이트 제작 / 공모전 시작 / 공모전 집중 홍보 / 공모전 마감 / 참가작품 검토 및 감수 / 시상식 / 데이터베 이스 구축 / 결과보고서 작성 나. 프로그램 기대효과 공모전을 홍보하고, 응모하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문화재와 문학작품의 깊은 관계를 살피고, 문화재가 다양한 감성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 다. 문학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만으로도 그 의미는 크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블러 그나 카페 등을 통해 확산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것이기 때 문이다. 또한 일반인들에게는 문화재를 테마로 한 글쓰기의 확산을, 문학작품 생산자 들에게는 문화재를 활용한 또다른 작품의 창작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가) 유의사항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참가작품을 검토 감수는 꼭 필요하다. 현재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문학작품에도 틀린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감수 혹은 시평 소설평 등 을 작품의 하단에 붙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문제는 저작권이며, 저작권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 관건이다. 이 프로그램은 해당 문 학작품의 가치를 더 높여주는 것이기에 자발적인 문학작품 기부를 유도하는 것이 예 산을 절감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이 프로그램을 문학인 지원사업의 하나 로 생각한다면 예산의 폭넓은 활용도 충분히 가능하다. 또한 운문의 경우 작품 전체를 활용하지만, 산문의 경우에는 작품의 일부분을 활용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79

181 한다. 특히 산문의 경우 작품의 일부만을 이용하는 것이기에 저작권에서도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다. 문학인 개인과의 계약보다 문학단체와의 계약을 고려하면, 그 부 담도 조금은 줄어들 것이다. 소개되는 작품에 작가의 무료 기부 여부를 넣는 것도 한 방법이다. (2) 문화재가 담긴 문학작품 낭송 낭독 대회 지역의 문화자원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다양하게 활용되면서 장소마케팅의 성공 적인 예를 가져오기도 했다. 김제시 금산사 옆 작은 절인 귀신사를 배경으로 했던 양귀자의 단편소설 숨은꽃 이 대표적인 예다. 또한 이만희의 희곡인 돌아서서 떠 나라 를 원작으로 한 영화 <약속>은 전주한옥마을에 있는 전동성당에서 마지막 감동 적인 장면을 연출하면서 지금도 전동성당을 찾는 이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곳에서는 영화의 해당 장면을 보여주고, 이를 따라서 해보는 프로그램을 넣으면 유익할 것이다. 또한 대사의 중간 중간에 전동성당이 건립된 역사적 사실이나 외형 의 아름다움, 가톨릭 동정부부인 요한 루갈다의 이야기를 곁들인다면 문화재의 소중 한 가치와 자긍심을 높이는 기회가 된다. 특정한 지역을 몇 곳 골라 지역 순회 낭송 낭독 대회를 개최한다. 해당 문화재가 있는 곳이면 더욱 좋다. 대회의 규모와 횟수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규모의 대회보다 각 지역에서 작은 음 악회 형식의 대회를 권한다. 추진일정이나 예산은 소규모 대회 한 회에 맞춘다. 최종 기획안을 확정하고, 낭송 낭독회 홍보를 하고, 신청자 접수를 받고, 당일 행사를 열고 결과보고서를 제출하면 되는 간략한 대회다. 시상규모 역시 소액의 상품으로 한다. 이 프로그램은 다양하게 확산될 것이다. 시낭송, 소설낭독, 극 낭독 축제로 확산되 고, 문학텍스트들이 화가 만화가 등과 결합해 문학과 미술의 만남을 시도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수혜자 스스로 문화재를 테마로 한 문학텍스트 창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청소년시낭송대회 등 기존 낭송 낭독 프로그램에 문화재라는 테마를 설정해 진 행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가족 단위 등 단체 관람객들은 이미 제작된 웹사이트에서 관련 문학작품들을 출 력해 자체적으로 낭송 낭독회를 진행하는 문화를 만든다. 지자체와 유기적 협조를 통해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시 소설 수필 극 등에 담긴 문화재의 모습을 직접 낭송 낭독하거나 참가자들에게 읽도록 해 친밀감을 유발 할 수 있다. 여행사와의 협약을 통해 해당 문화재의 소재자료를 만들거나 현장에서 문화재를 설명할 때, 문학작품들을 충분히 활용한다. 18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82 문화재 현장에 관련 문학콘텐츠를 출력해서 배치하거나, 별도의 알림판 등을 설 치해서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한다. 3) 공교육 커리큘럼의 역사문화자원 확대 및 활용 프로그램 익산 지역 초 중 고 교과서에 <익산의 역사와 문화> 커리큘럼을 제안한다. 현장학 습을 통한 백제 역사 문화 교육 확대와 교과서에 익산 지역 백제문화에 대한 기술을 늘릴 것을 요구한다. 이에 앞서 익산학 연구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고 실행에 옮겨 야 하며, 고도 익산 배움책 혹은 <익산의 역사와 문화> 지역 교과서를 자체 개발해 야 할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지역 내 인력들의 일자리 창출로도 연결될 것이다. (1) 교과서 내 익산 역사문화자원 게재 현황 고도( 古 都 ) 익산은 일반 도시들과 달리 왕도만이 갖는 유 무형의 흔적인 왕궁, 성 곽, 사찰, 왕릉 그리고 국가 운영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공간적으로 농축된 곳이 다. 익산 지역에는 삼국시대 최대 사찰유적인 미륵사지와 백제시대 왕궁터로 유일하 게 밝혀진 왕궁리 유적이 있으며, 무왕과 그 부인의 묘로 추정되는 익산 쌍릉과 수 도 방어시설인 익산토성 금마도토성 등은 익산이 고도( 古 都 )였음을 뒷받침해주고 있 다. 특히 우리나라 최대의 사찰 터와 현존 유일한 백제시대 왕궁 터는 전 시대를 아 울러 매우 가치 있는 유적들이다. 하지만 몇몇 교과서에 미륵사지 일부만이 게재되 어 있고, 중 고교 교과서 대부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교과서 기술여부 익산지역 백제사 관련 기술 교학사(신) Ⅱ. 삼국의 성립과 발전 3. 삼국의 문화와 교류 (2) 삼국의 예술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의 양식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백제 후기의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에도 계승되었다. 교학사(양) Ⅱ. 삼국의 성립과 발전 2. 과학 기술과 예술의 발전 (2) 불교로 꽃피운 문화 신라의 황룡사와 백제의 미륵사는 규모가 매우 큰 절이었지만 현재 는 그 터만 남아있다. 대교 두산동아 Ⅱ. 삼국의 성립과 발전 3. 삼국 시대 사람들의 생활 (2) 삼국이 고유의 문화를 창조하다. 백제의 탑으로는 목탑의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는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이 남아 있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81

183 미래엔 비상교육 지학사 천재교육 Ⅱ. 삼국의 성립과 발전 5. 고대 문화의 발전과 대외 교류 (2) 고분과 불교 유산을 남기다 - 탑과 불상 백제는 가장 크고 오래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의 정림사지 5 층 석탑을 남겨 놓았다. Ⅱ. 삼국의 성립과 발전 9. 삼국의 불교문화와 문물 교류 (1) 삼국의 불교 예술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에서 만든 최초의 석탑으로 목탑의 건축 양식 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 탑을 더 간소화하여 만든 정림사지 5층 석 탑은 안정되면서 경쾌한 느낌을 준다. 표 26 중학교 검정 역사교과서 익산지역 백제 문화재 게재 현황(남궁훈, 익산지역 백제시대 문화재를 활용한 국사교육 방안 연구, 원광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쪽) 교과서 기술여부 익산지역 백제사 관련 기술 미래엔 법문사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3. 삼국의 성립과 발전 (3) 삼국의 문화와 대외 교류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은 현재 서탑 일부 남아 있으며, 정림사지 5층 석탑과 함께 백제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비상교육 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3. 고대 국가의 성립과 발전 (7) 삼국의 종교 문화 삼국의 불교는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비는 호국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염원을 담은 대규모 사찰과 탑이 많이 세워졌는데, 백제 무왕은 미륵사를 세웠고, 신라 선덕 여왕은 황룡사 9층 탑을 세웠다.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 양식을 띠고 있으며, 신라의 분황사탑은 돌 을 벽돌 모양으로 만들어 쌓은 전탑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삼화출판 지학사 천재교육 표 27 고등학교 검정한국사 교과서 익산지역 백제 문화재 게재 현황(남궁훈, 익산지역 백제시대 문화재를 활용 한 국사교육 방안 연구, 원광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쪽) 18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84 교과서 익산지역 백제사 관련 기술 삽화 여부 미륵사지 왕궁리 유적 교 학 사 (신) 교 학 사 (양) 대교 두산동아 미래엔 비상교육 지학사 천재교육 기 익산지역 백제사 관련 술 삽화 교과서 여 미륵사지 왕궁리 유적 부 미래엔 법문사 비상교육 삼화출판 지학사 천재교육 표 28 중학교 검정 역사교과서 익산지역 백제사 관 표 29 고등학교 검정 역사교과서 익산지역 백제사 련 삽화 게재 현황(남궁훈, 익산지역 백제시대 문화 관련 삽화 게재 현황(남궁훈, 익산지역 백제시대 문 재를 활용한 국사교육 방안 연구, 원광대학교 교육대 화재를 활용한 국사교육 방안 연구, 원광대학교 교 학원 석사학위논문, 쪽) 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쪽) 전국 중학교는 총 8종의 검정 역사 교과서를 사용하고 있다. 교학사(신 양), 두산동 아, 지학사, 천재교육 5종은 익산지역 백제 문화재나 설화를 기술했고, 백제 문화재 관련 삽화는 미래엔 을 제외한 전체 교과서에서 미륵사지 관련 삽화를 게재해 놓았 다. 대부분 2-3줄 내외의 짧은 서술로 미륵사지 석탑 에 대해서만 기술해 놓았거나 사진만 수록되어 있어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고교 교과서 6종 중 법문사와 비상교육만이 미륵사지 석탑 에 대해 간략히 설명되 어 있고 삽화가 수록된 교과서는 한 종도 없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내의 익산 지역 백제 문화재들의 비중은 오히려 줄어든 것이다. 익산 백제 문화재 부분이 전체 교과서 중 30%만이 게재되어 있고, 삽화가 게재된 교과서는 0%다. 이는 익산의 백 제 문화재의 역사적 가치를 판단할 때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익산이 가지고 있는 유 무형의 역사와 문화는 최소한 익산에서만이라도 초 중 고의 체계적인 공교육을 통해 교육되어야 한다. 특히 고도가 지닌 특성은 익산 지역 학교 들과 연계해서 단계적으로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지역에 대한 관심이 넓고 깊어지고 있다. 전주도 전주역사박물관 전북대학교 등을 중심으로 전주학 이란 개념이 생겼고, 이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고 있다. 자신이 사 는 고장을 알아야 더 넓은 세계를 알 수 있다. 자각을 하면 자긍이 생긴다. 공교육을 통해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접근하면 도시에 대한 자긍심을 어린 시절부터 키울 수 있다. 현재 초등학교 3 4학년에 지역탐구 과정이 있고, 지역 내 여러 역사문화시설들을 방문하면서 지역에 대한 학습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좀 더 넓혀 초 중 고 교 육과정에 내가 사는 고장과 고장사람들에 대해 깊이 탐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한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83

185 다. 물론 이는 익산시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전북교육청과 익산교 육청에 익산 지역사 혹은 익산의 역사와 문화 과정을 제안하고, 익산시에서는 참 가를 원하는 초 중 고교에 주요 커리큘럼과 전문 강사진, 예산 지원방안 등을 지원한 다. 이는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것뿐 아니라 지역 내 인력들의 일자리 창출로 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강사진은 고교 대학 졸업을 앞둔 예비사회인과 퇴직 직장인 등 청년층, 주부, 노년층으로 다양하게 구성한다. 자신의 삶에 한 부분이 지 역사이기 때문이다. 각 학교로 파견해 운영하고 있는 문화예술분야의 강사풀제도 운 영형식을 빌릴 수도 있다. 물론 입시중심교육과 지식교육이라는 틀을 반복 강화해 온 현재의 교육체계로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학생, 교사, 학부모의 관심은 교과서에서 시작된다. 역설적이게 도 교과서에 익산의 백제문화유산이 중요하게 거론되어야 지역에 대한 관심, 그 이 상의 관심이 시작된다. 2) 현장학습을 통한 백제 역사 문화 교육 확대 현장학습은 교실에서 진행되던 학습방법인 강의식보다 학습자들의 학습 활동량이 많은 수업이기 때문에 현재 강조하고 있는 학습자 중심의 학습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고,백제시대 중요한 문화재들이 인접해 있는 익산의 장점을 가장 크게 살릴 수 있 는 수업방식이다. 특히 문화재 학습은 일반인이 갖는 역사에 관한 관심을 높이기 위 해서 중요하다. 학교를 졸업한 후의 일반인들은 거의 문화재나 사극을 통해 역사를 접하게 된다. 일반인들이 꾸준히 역사에 관심을 갖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추게 하 기 위해서는 학교교육에서부터 문화재를 이해하는 수준이나 답사하는 태도를 바람직 하게 함양시켜 주어야 한다. 아래 표 33) 는 현직 교사가 현재 익산시에서 매주 둘째 넷째 토요일에 진행하는 백 제 무왕과 함께 하는 역사의 숨결 의 시티투어 코스를 참고한 익산 백제 문화재 현 장견학계획안이다. 활동주제 활동일자 지도대상 활동목표 익산시 중등학교 백제시대 문화재 느끼기 활동장소 지도교사 교실이 아닌 현장으로 나와 익산시내 백제 시기 문화재에 대해 알아보고 지역적 특 성을 느낀다. 33) 왕궁리 유적 학습을 위한 교수학습지도안(남궁훈, 익산지역 백제시대 문화재를 활용한 국사교육 방안 연구, 원광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쪽 18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86 활동단계 활동내용 시간 자료 및 유의점 계획수립 - 답사목적, 코스 파악 - 교통수단 결정 - 답사방법, 시간 배정 - 조별 중점 조사 사항 사전 지도 - 답사자료집 준비 - 조별 필기구 및 카메라 지참 지도 현장체험 학습활동 1. 출석 점검 및 활동안내 - 인원점검 및 유의사항 전달 - 일정 설명 2. 답사 1) 답사코스: 1익산쌍릉 2왕궁리 유 적 3미륵사지 4연동리석불좌상 5서 동공원/마한관 2) 답사내용 - 각 답사지 조별 사전조사 발표 - 질의 응답 - 교사 추가 설명 3) 정리 및 귀가: 안전귀가 지도 360분 - 익산시의 백제시대 문화재의 역사 및 현황을 파악할 수 있 도록 지도 - 수업시간에 배우지 못한 내 용을 파악하고 비교하며 학습 지도 - 익산시의 지역적 특성에 대 해 교육 지도 평가 1. 익산 백제 문화재 지도 만들기 2. 소감 및 발표 3. 보고서 작성 60분 - 학생들이 보고 느낀 현장학 습의 결과를 산출하고 다시 상 기시킨다. 표 30 익산 백제 문화재 현장견학계획안 아래 표 34) 는 역시 왕궁리 유적 의 역사적 의미를 학습하기 위한 수업계획안으로 배움책의 게재 내용의 예시로 작성되었다. 현존하는 백제 유일의 왕궁터인 왕궁리 유적 학습을 통해 그 중요성과 백제 말기의 시대적 흐름을 학습할 수 있게 구성했 다. 한편으로 교과서를 벗어나 폭넓은 사료 활용을 통해 다양한 천도설 을 학습하며 교과서 게재되지 못한 백제 말기 시대적 상황 속의 익산에 대해 더욱 깊이 공부할 수 있도록 구성해 놓았다. 백제의 천도과정 속에 나타나는 역사적 배경의 학습을 통 해 현재 왕궁터 소재지의 역할을 유추해 볼 수 있으며, 익산의 왕궁리 유적 의 발표 를 통해 좀 더 세부적으로 삼국시대 백제의 도읍의 구성에 대해 배워 백제 말기 익 산지역의 역사적 중요성을 학습할 수 있게 했다. 학습주제 학습목표 왕궁리 유적과 백제 말기의 무왕 1 백제시대 왕궁 형태와 왕궁리 유적의 유사점을 말할 수 있다. 2 왕궁리 유적을 통해 무왕대 말할 수 있다. 3 왕궁리 유적의 역사적 의미를 말할 수 있다. 34) 왕궁리 유적 학습을 위한 교수학습지도안(남궁훈, 익산지역 백제시대 문화재를 활용한 국사교육 방안 연구, 원광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쪽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85

187 학습단계 교수 - 학습 활동 교사 학생 자료 및 유의 점 시간 도입 전시학습 및 학습목표 제 시 백제시대 천도에 대해 이야기 한다. 백제의 한성-웅진-사비 로의 천도과정을 발표한 다. 10 백 제 시 대 의 왕궁 백제시대의 왕궁형태에 대해 설명한다. 백제 추정 왕궁의 형태 와 왕궁리 유적의 관계 를 생각한다. 5 전개 왕궁리 유적 및 석탑 학생들의 왕궁리 유적 과 기존 백제 추정 왕 궁 형태에 관련된 발표 를 진행한다. 2개 조로 나눠 발표를 진행한다. 1조-왕궁리 유적 2조-백제 추정 왕궁 형 태 15 왕궁리유적 왕궁리 유적과 관련된 준왕천도설, 무왕 의 금마천도설 등 다양한 학설을 설명한다. 학생들은 다양한 천도설 속의 왕궁리 유적의 의 미를 생각해 본다. 현재의 역사 관과 비교 설 명할 수 있도 록 한다. 15 정리 왕궁리 유적 의 흐름 왕궁리 유적의 궁터, 절터를 비롯해 왕궁리 석탑의 사리장엄등을 설명한다. 왕궁리 유적의 역사적 의의를 생각해본다. 사진자료 비 준 5 표 31 왕궁리 유적 의 역사적 의미를 학습하기 위한 수업계획안 5. 사랑(서동요) 을 테마로 한 관광 상품 1) 사랑의 도시, 익산 이미지 확립 사랑은 인류의 보편적인 감성이다. 따라서 사랑을 앞세운 매체의 성공확률이 높고, 사랑의 도시 를 표방한 곳도 많다. 그러나 성공적인 사례를 거둔 예는 많지 않다. 사랑 도 구체적인 범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달할 수단 이 필요하다. 이는 예술과 문화의 도시 라는 도시 브랜드화가 관건이다. 서동요 의 문학적 배경지인 익산시는 사랑의 도시(love city) 도시 마케팅의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보석, 화장품 향수, 의류 패션, 건강(한방), 장례문화와 관련한 산업 등 사랑을 상징하는 산업들도 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의 사랑문화자산 과 지역산업자원의 유기적인 네트워크와 전략을 통해 지역 경제발전의 새로운 비즈 니스모델을 창출해 나갈 수 있다. 현재 익산시에서 마케팅 전략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은 서동축제에 그치고 있다. 지속적이고도 상시적으로 이벤트화하고 관련 문화상품을 개발해 비즈니스 할 때 성 공적인 도시 마케팅 전략이 된다. 국제화에 대한 시각도 마찬가지다. 사랑의 도시 18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88 익산의 국제화는 사랑을 테마로 한 국제적인 사랑의 도시 들과 교류를 통해 익산을 세계적인 사랑의 도시 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한 외국의 사랑의 문화 를 소개하고 내국인들이 이를 소통할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어 주는 것에서부터 시 작되어야 한다. 사랑을 주제로 하는 비즈니스 전략이 모색되어야 한다. 우선 해결해야 할 과제는 서동 선화를 상징하는 사랑의 테마 찾기다. 청소년과 젊은 연인들과 중년 부부 등 정 확한 마케팅의 타깃을 설정하고 이들의 문화를 수용하고, 이들이 교류할 수 있는 축 제의 장을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서동요는 젊은 층과 중년층을 모두 수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서동의 상품화를 위한 다양한 이벤트를 프로그램화하기보다 사랑과 관련된 문화상 품을 개발하고 사랑의 상징과 의식산업을 활성화해 사랑의 산업 메카 로 육성해야 한다. 결국 도시마케팅은 도시가 가지고 있는 자원 사랑의 자원(인적자원과 물적자원) 을 총체적으로 활용해 이미지화하고 상품화해서 경쟁력을 갖춘 상품으로서의 도시 익산을 만들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이로써 도시가 풍요로워지고 경제적인 부를 이 루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사랑의 상징(선물) 산업과 의식산업을 활성화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 2) 세계 전북의 사랑의 도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사랑 하나만을 살펴봐도 도시마케팅과 이야기는 밀접한 관 계를 맺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 에는 이런 말이 있다. 아름다운 베로나에서 가문을 자랑하는 두 집안의 해묵은 원한이 싸움을 일으켜, 시민의 피는 자신들의 손을 더럽힌다. 이 대사는 이탈리아 베로나를 지칭한 말이고, 실제로 베로나 중심가 21번지에 13 세기 벽돌저택이 바로 줄리엣의 집이다. 이곳에는 1972년 베로나 상공인들이 세웠다 는 줄리엣의 동상이 있는 데 줄리엣의 가슴을 한번 만지면 어떤 사랑도 이룰 수 있 다 는 스토리텔링에 이곳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이 줄리엣의 동상을 수백 년 된 것처 럼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한해 평균 베로나를 찾아오는 외국 관광객이 연간 550만 명으로 한국을 찾는 관광객 수와 비슷해 경제적 파급효과가 얼마나 큰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87

189 그림 57 베로나 줄리엣의 집(13세기) 그림 59 줄리엣의 동상(1972) 그림 58 <로마의 휴일>(1953) 배경지 스페인광장 그림 60 <로마의 휴일>(1953) 배경지 트레비 분수 소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의 배경지도 마찬가지다. 소설과 영화로 유명한 <메 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배경이 되었던 미국 아이오와 주 메디슨 카운티의 로즈만 다리 아래에서 주워 담은 모래 한 컵을 3,000원에 판매하고, 여주인공의 집으로 사 용된 프란체스카의 집 은 입장료가 1인당 5달러, 프란체스카의 침대가 있는 호텔 객 실은 하룻밤에 225달러를 받는다. 또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라는 이름이 붙은 향 수, 장식품, 선물용품, 머그잔 등을 판매하고 있다. 일본 영화 <러브레터>의 경우 한국과 대만에서 크게 히트해 영화 로케이션지인 삿 포로의 오타루, 하코다데가 아시아 관광지로 인기를 구가했다. 한때 청어 잡이로 북 적대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쇠락한 포구인 오타루는 한국에서 <러브레터>가 상영한 1999년 6월을 기준으로 아시아 관광객이 1,100명(1999년)에서 1,1800여명(2001년) 으로 꾸준히 증가해 왔다. 덴마크의 미래학자인 롤프 옌센(Rolf Jensen)는 The Dream Society(1999) 에서 18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90 21세기에는 꿈과 감성을 파는 드림 소사이어티(Dream Society)로 패러다임이 변화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감성에 바탕을 둔, 꿈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이 정보를 기반으 로 하는 시장보다 점점 더 커질 것이며, 감성, 이야기와 화술, 그리고 모든 가치관들 이 매개가 될 것이라며, 특히 사랑의 시장을 점유하려고 경쟁하는 범세계적인 사업 개념이 등장한다고 주장했다. 그림 61 <러브레터> 촬영지인 삿뽀로 오타루 로마를 찾는 관광객들은 스페인광장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진실의 입에 손을 넣 어보며, 트레비 분수에서 동전을 던진다. 영화 <로마의 휴일>이 도시와 적절하게 결 합된 탓이다. 스토리텔링이 도시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도시브랜딩에 도입된 지 오래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이 뽑은 유럽의 멋진 문화도시 에 네덜란드의 암 스테르담, 에스토니아의 탈린,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등이 포함됐다. 런던 파리 로마 등 유럽 대표 도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도 작고 인지도도 떨어지는 이 도시들 의 성공비결은 스토리텔링 전략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암스테르담은 박물관이란 테 마로 도시의 스토리를 만들었고, 탈린은 디지털 도시라는 스토리로 이미지 변신을 했다. 바르셀로나는 건축과 문화예술이라는 스토리로 유럽인들에게 어필했다. 문화도 시로의 변신은 유럽인들의 입소문을 통해 강력한 인지도를 확보하게 되었다. 관광지 와 관광지에 얽힌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관광객을 유도하는 유럽 문화도시 들의 스토리텔링 전략은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 <로미오와 줄리엣>,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위대한 사랑에 대한 영원한 이 야기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필요 불가결 한 것이다. 사랑 그 자체는 시장을 형성하지 않지만 사랑에는 의식이나 상징이 수반 되고 이에 대해 시장이 형성된다. 즉 사랑에 대한 상징 시장과 의식 시장으로 나누 어 산업적인 접근을 시도해 볼 수 있다. 전라북도 내 사랑의 도시를 표방한 곳은 남원시이며, 정읍시의 경우에도 사랑 과 관련된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남원은 판소리 동편제의 고장이자 춘향전 의 배경지로 사랑의 도시 를 시티브랜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89

191 드(City Brand)로 정착시키고 있다. 연인의 사랑, 청춘들의 사랑 을 주요 테마로 하며, 춘향전의 고장이라는 상징이 커서 자연스럽게 관광객을 유도하고 있다. 특히 매년 봄에 펼쳐지는 춘향제는 연륜이 깊은 세계적인 사랑축제다. 사랑과 절개의 상 징인 춘향을 기리기 위한 이 축제는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돼 2012년 82회의 역사를 썼다. 1999년 이래 10년 연속 문화체육관광부의 우수 문화관광 축제로 선정돼 그 명성을 인정받고 있는 축제다. 춘향테마공원에는 철저한 고증을 거쳐 세워진 춘향 촌 이 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 과 인기 드라마 쾌걸춘향 을 촬영한 곳이 다. 영화세트장은 그대로 남아있다. 부용당은 이몽룡과 성춘향이 백년가약을 다짐한 곳. 연못을 만들고 그 한가운데 세운 사랑방은 아담하다. 관광객들을 위한 만남의 장 소인 춘향마당 과 방문객들이 소원을 적어 기원하는 돌탑, 사랑을 맹약하는 옥가락 지를 형상화환 조형물 옥지환, 조선중기의 형태로 복원된 동헌 등이 각각의 테마 를 지니며 방문객을 맞는다. 특히 춘향마당 의 기둥들은 춘향전의 주요 등장인물들 을 이미지와 문자로 나타내 특별한 재미를 안겨준다. 춘향의 옥중생활을 재현한 옥 사정 에선 사랑과 정절을 지켜낸 춘향이 이몽룡과 재회하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춘향 이몽룡 월매 등을 소재로 한 시비 25기가 있다. 그림 62 춘향테마파크: 사랑의 언약판 그림 63 춘향테마파크: 사랑의 언약판 안내판 그림 64 춘향테마파크: 주요 인물 상징물 그림 65 춘향테마파크: 옥지환 19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92 그림 66 춘향테마파크: 영화세트장 중 월매집 그림 67 춘향테마파크: 영화세트장 중 옥사정 그림 68 춘향테마파크: 시비 그림 69 춘향테마파크: 시비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 91

193 정읍시는 정읍사 의 발생지이자 배경지다. 정읍사에 등장하는 여인을 살펴, 부부 사랑 을 테마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그림 70 정읍, 정읍사 부도 그림 71 정읍, 정읍사 시비 3) 서동 선화의 사랑을 연계한 산업 서동과 선화의 사랑은 서동가 에 기초한 어린 시절 연애 이야기와 익산에서 미륵 신앙으로 더 굳건해진 부부의 사랑, 두 형태다. 이는 남녀의 사랑이지만, 사랑의 첫 시작과 연애, 결혼, 부부 등 모든 의미가 담겨 있다. 따라서 사랑 을 테마로 한 다양 한 산업과의 연계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특히 보석산업은 값싼 반지부터 원석을 깎 아 만든 고가의 반지까지 다양하게 각 계층에 맞는 상품을 제작해야 한다. 특히 서 동 과 선화 의 브랜드, 두 사람의 사랑을 상징하는 단어를 축으로 한 브랜드로 청소 년들이 선호하는 상품부터 접근해 나간다면 더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가. 사랑의 상징 산업 주얼리산업: 금 은 보석 등 가공산업 / 상징 브랜드 필요 화장품 향수산업: 화장품 원료산업 및 녹차 재배단지 등 활용 의류 패션사업: 섬유업체, 의류업체, 한국니트산업연구원 등과 협력 한방 건강의료산업: 한양방의료연구단지특구 원광대학교 등과 협력 나. 사랑의 의식 산업 결혼예식 산업: 연인들의 만남 프로그램(커플 미팅) 등 부부 산업: Ten혼식(결혼10주년), 은혼식, 금혼식 등 이벤트 축제 장례산업: 금동사리호를 활용한 납골함 (1) 사랑의 상징 산업과 의식 산업 사랑의 상징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보석이다. 보석은 종류에 따라 사랑의 깊이를 그리고 하트 모양의 목걸이와 같이 사랑의 언어 전달로 표출되고 있다. 다양한 향기 19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94 발산과 강렬한 감성의 상징인 향수 화장품 시장 또한 사랑의 상징 시장이다. 대규모 녹차 재배단지와 화장품 원료 산업이 발달한 익산시는 화장품 산업과의 더 깊은 연 결고리를 만들어야 하며, 특히 외국 메이커와 경쟁할 수 있는 한방화장품을 중심으 로 산업 구조를 확대한다면 좋을 것이다. 향후에는 세계적인 향수 메이커사를 유치 하거나 국내 한방 화장품사를 유치해 나갈 필요도 있다. 이 또한 OEM 방식으로 생 산해 판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서 내의를 선물하는 사회적 관습이 있다. 익산시는 의류산업의 깊은 뿌리가 있는 곳이다. 이는 추후 의류 패션산업과 연계할 수 있는 방안으로 검토돼야 한다. 사랑은 곧 관심의 표현이다. 최근 웰빙 추구로 건강산업이 급성장을 하고 있다. 익산 시는 원광대학교를 축으로 한방산업이 발달해 있다. 익산 인근에 대단위 한약재 재 배단지를 조성해 생산된 우량한 한약재로 다양한 한방음식과 한방음료를 개발하고, 건강 서비스를 실시하는 한방타운을 조성해 나간다면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초 고령화 사회에 대비하고, 한편으로 사랑의 도시 도시마케팅 전략에 대응해 나가는 것이 될 것이다. 사랑의 의식 산업도 마찬가지다. 서동과 선화가 만나고 사랑을 이뤄가는 과정을 통해, 또한 부부가 된 서동과 선화가 미륵의 힘을 통해 사랑을 더 단단하게 다져가 는 모습은 결혼과 장례 문화까지 산업화할 수 있다. 서동과 선화의 설레는 연애와 결혼의 의식을 연출할 수 있다면 은혼식, 금혼식, 텐 혼식(10년 주기), 전통혼례식 등의 결혼 예식문화를 선도해 나갈 수 있다. 또한 각 나라의 이색 혼례 문화들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상품을 개발해 나간다면 지역 산 업을 혁신시킬 수 있는 감성 마케팅 전략이 될 것이다. 중년부부를 테마로 한 축 제 35) 도 할만 하다. 장례문화 산업도 같은 의미에서 시작된다. 장례식은 세상을 떠난 사람을 추억하기 위해 행해지는 것으로 장례문화는 결혼 의식 못지않게 중요하다. 결혼 예식문화 뿐 만 아니라 장례 문화도 또한 선도해 나갈 수 있도록 납골당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미 익산시는 미륵사탑과 왕궁탑에서 발굴된 금 제사리봉안기와 금제사리호 등을 통해 장례문화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노인 인구가 늘어나는 현실에서 오히려 납골문화의 선도적인 중심지가 되면 도시의 가능성은 더 넓어진다. (2) 주얼리산업과 금제사리호 익산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산업은 주얼리산업이다. 36) 35) 부부간의 사랑을 테마로 한 축제는 정읍 <내장산 단풍 부부사랑 축제>를 참고하면 된다. 이 축제는 10월 말(1일간) 정읍시 내장산 문화광장/정해마을/정읍사공원에서 열린다. 정읍사 여인의 숭고한 사 랑에 정열적인 내장산 단풍이 선사하는 부부사랑 추억여행. 사랑의 단풍엽서, 단풍나무 소원지, 단풍잎 책갈 피, 단풍 페이스페인팅, 단풍잎 물들이기, 단풍미인쌀 체험 등 6종의 단풍체험과 백제 왕관, 백제 도깨비가 면, 수제천 연주, 전통혼례, 정읍사 목판 등 5종의 백제문화체험이 특색 있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93

195 익산시는 옛 이야기에서부터 옛 금마저에는 신라 진평왕에게 산더미처럼 가져다 주었다. 는 황금이 산을 이뤘다 하고, 국내 유일한 보석도시인 지금의 익산에는 금과 은, 각종 보석들이 익산보석단지에서 가공되고 있으며, 매년 봄과 가을에는 보석을 테마로 한 축제들이 열리고 있다. 또한 국내 최대의 보석판매센터와 보석박물관 37) 이 있다. 귀금속보석은 상징성과 주술성이 있다. 금속 중에서 가장 안정성을 지닌 금은 수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특성으로 불멸( 不 滅 )의 상징이다. 대표적인 보석인 에메 랄드와 루비, 사파이어, 다이아몬드는 각각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을 상징한다. 중세 서양 사람들은 다이아몬드는 겁쟁이에게 용기를 주고, 에메랄드는 바람을 잠재우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또한 보석은 문화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가치를 인정받았다. 멕시코의 고대문명 아즈텍 문화에서는 에메랄드가 금 다음으로 귀중한 보석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터키석을 귀한 보석으로 여겼지만, 수천 년 동안 중국에서 가장 귀한 보석은 옥이라고 불리는 비취였다. 중국은 다른 보석이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 이다. 중국의 영향을 받았던 한국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금동사리호와 같이 발 굴된 미륵사지 유물 중에는 비취장신구도 다수 포함돼 있다. 익산 미륵사지석탑을 해제하면서 발견된 유물 689점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금제사리봉안기와 금제사리호다. 높이가 13cm에 불과해 한 손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금제사리호의 외면은 연꽃잎과 인동, 당초, 연주 문양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 다. 금제사리봉안기는 미륵사지 창건설화가 담겨 있고, 금제사리호는 정교한 백제의 금세공기술을 보여준다는 것이 유독 눈에 들었던 이유다. 미륵사지 탑에서 2009년 발견된 것은 사리호만이 아니다. 사리장엄구의 유물 중에 는 금제소형판도 있다. 금판에는 중부 덕솔이 금덩어리 1개를 바쳤다( 中 部 德 率 支 栗 施 金 壹 枚 ) 고 새겨 있었다. 백제시대 중하급 관리인 덕솔이 사찰에 금을 바친 것은 그의 재력이 상당했고, 당시 금이 귀중품으로 유통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은 지금까지도 가치를 보장받는 대표적인 귀중품이다. 금은 화학적으로 안정된 금속으 로서 쉽게 부식되지 않고, 다양한 형태의 물건을 만들기도 쉽다. 이러한 특성에 희소 성까지 더해진 결과 동서양을 막론하고 금은 귀중품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36) 익산은 가히 황금의 땅이라. 황금 보기를 마 보듯 했다 는 서동요 의 서동과 미륵사지석탑의 황금빛 유 물들, 보석박물관, 보석문화축제, 주얼리엑스포 등등 익산은 보석들을 아름다운 목걸이로 꿰는 실 과 같은 곳이다. 그래서 익산의 황톳길들은 늘 천이나 만이나 되는 보석처럼 찬란하게 부서진다. 37) 미륵사지 석탑과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등 백제문화유적 속에 있는 익산 보석박물관(왕궁면)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진귀한 보석과 원석 등 11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세계적 수준의 보석의 보고( 寶 庫 )다. 상설전시실은 인식의 장(보석의 역사), 체험의 장(보석과 과학), 아트갤러리(보석의 탑, 오봉산일월도 등), 역동의 장(보석 산업), 감동의 장(보석의 아름다움), 결실의 장(보석과 즐거움)으로 나누어 여러 가지 진귀 한 보석과 원석을 전시한다. 19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96 그림 72 익산미륵사지 탑에서 발굴된 금제소형판 미륵사지 인근 왕궁리 유적에서도 금, 은, 유리 등을 제련했던 도가니 유물이 다수 발굴되어 익산시가 백제 귀금속보석세공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보여준 바 있다. 이런 역사를 볼 때, 익산시가 한국 귀금속보석 산업의 중심지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 다. 21세기 들어 귀금속보석산업은 세계적으로 연간 교역량이 411억 달러에 이를 만 큼 시장 규모를 키우고 있지만, 이중 한국이 차지하는 규모는 2% 미만으로 매우 미 미하다. 세계 귀금속보석시장에서 한국이 맥을 못 추는 이유는 귀금속보석산업의 가 치와 특징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귀금속보석산업은 전통문화와 패션디자인산업, 신소재산업, IT산업이 융합해야 하 는 문화산업이자 가치산업이다. 또한 원석부터 완제품에 이르는 생산과정과 독자 브 랜드에 의한 판매가 한곳에서 이루어진다면, 일반 산업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큰 부가가치가 생긴다. 때문에 벨기에의 연간 귀금속보석 수출액은 한국의 연간 자동차 수출액과 비슷하다. 자본과 기술력만 있으면 원재료의 생산여부와 상관없이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자체 금 생산력이 연간 10톤에도 미치지 못 하는 이탈리아는 매년 400톤 이상의 금장신구를 수출해 유럽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 다. 한국은 귀금속보석산업을 단순한 기술산업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세계시장에 대 응하는 발 빠른 구조조정이 이루어지지 못 했다. 익산 귀금속보석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진 이유도 이와 같은 선에 있다. 그렇다고 귀금속보석산업의 미래가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한국의 보석가공기술과 디자인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다만 상징적인 브랜드가 없기 때문에 하청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핵심 과제는 브랜드 개발이다. 세계화된 경제구조에서 상품의 브랜드 이미지가 국 가 이미지를 초월한 지는 꽤 된다. 소비자에게 티파니, 카르띠에, 불가리 등 브랜드 가 어느 국가 브랜드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브랜드 개발을 위해서는 먼저 자본과 기술력이 겸비된 선도기업이 육성돼야 한다. 브랜드 개발은 오랜 시간 자본 을 투자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진행되어야 할 일은 새로운 산업집적 화이다. 원석가공과 완제품 생산, 그리고 유통과 판매가 같이 이루어질 수 있는 새로 운 집적지(클러스터)가 한국 귀금속보석산업의 핵심 경쟁력을 이룰 것이다. 따라서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95

197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 등 인근의 관광자원과 귀금속보석산업을 연계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한 익산시의 귀금속보석산업클러스트는 꽤 중요한 시도다. 4) 익산쌍릉공원, 계절별 꽃 축제 테마공간으로 조성 익산 쌍릉은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약 150m 거리에 있으며, 북쪽에 있는 대왕릉 으로 불리는 무덤이 무왕, 남쪽에 있는 소왕릉이 선화비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주변은 50,593 규모의 익산쌍릉공원이 형성돼 있고, 주변에는 서동공원과 같이 만남의 광장, 사랑의 정원, 사랑의 나무심기, 오감생태공원, 서동과 선화공주에 대한 설화조각상, 수변정원, 선화광장 등이 조성돼 있다. 그러나 시민 휴식을 위한 공원이 지만, 공원으로서 역할이나 관광객을 맞기에는 미약한 부분이 많다. 그림 73 익산 쌍릉(대왕릉) 그림 74 익산쌍릉공원(아래쪽 전경) 그림 75 익산쌍릉공원(입구쪽 안내판) 그림 76 익산쌍릉공원(관리실) (1) 선언적 테마가 있는 길과 부부사랑의 성지 조성 익산쌍릉공원은 무왕과 선화비가 된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주제로 한 테마공 원으로 가꿔야 한다. 길마다 구간을 나눠 서동과 선화의 이야기가 담긴 이야기로 조 성하고, 각각의 길마다 의미를 두어 연인이 이 길을 걸으면 절대 헤어지지 않는 다. 부부가 손잡고 이 길을 걸으면 백년해로한다. 이 길을 걸으면 어떤 어려 움도 다 이겨내고 결혼할 수 있다. 등등 선언적인 짧은 문장의 스토리텔링을 가미해 사랑의 테마공원으로 구성한다. 19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198 서동요 는 청춘남녀의 사랑 이야기이며, 서동과 선화가 같은 공간에 묻혀 있는 익산쌍릉은 사랑의 완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동의 입장에서는 노래와 소문을 매 개로 사랑을 이뤘으며, 결국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미륵 신앙을 안고 살아가던 이들은 죽음의 순간에서도 서로를 잊지 않고 가까운 곳에 묻혔다. 서동과 선화의 사 랑은, 결국 사랑의 완성에 이르는 것이다. 서동요 를 통해 전국 연인들이 찾아와 벌 이는 사랑의 약속이 익산에서 꽃필 수 있을 것이며, 이는 고도 익산 지역을 전국 규 모로 확산시킬 수 있는 전략적 프로그램이다. 특히 익산쌍릉공원은 익산을 사랑의 도시 로 정착하는 계기를 마련해 연인과 부부 들이 쌍릉을 사랑의 성지순례지로 정착시킬 수 있다. 나란히 놓인 서동과 선화의 묘 를 바라보면서 맹세를 하면 연인관계가 깨지지 않는다는 신비한 믿음을 갖도록 해 전국의 연인들이 찾아오도록 한다. 익산쌍릉공원의 경우, 기혼 부부를 대상으로 부부사랑의 향연, 쌍릉 언약식 을 마 련해 운영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서동과 선화의 묘는 부부의 묘다. 사랑을 언약한 곳이 아니라, 사후세계까지 사랑의 완성이 이뤄진 곳이다. 그래서 쌍릉은 부부사랑의 성지로서 부족함이 없다. 이곳에서 전국 기혼부부들을 초청해 사랑의 언약식을 갖고, 부부사랑의 명소로 만든다. 이 프로그램은 오늘날 사회문제로 대두된 부부의 위기와 이혼을 예방하는 부부사랑운동이 익산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으며, 부부 가 가정을 지키는 원동력으로 부부사랑을 실천해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 가는 의미 가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은 Ten혼식(결혼10주년) 은혼식 금혼식 등 부부산업과 장례 산업과 직접 연결돼 사랑을 테마로 한 산업의 활성화로 이어질 것이다. (2) 꽃 테마 공원 조성 익산쌍릉공원을 상징할 수 있는 또하나의 방법은 넓은 부지를 활용한 꽃 테마 공 원으로의 전용이다.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축제들이 넘치지만 꽃을 테마로 한 축제 는 늘 호황이다. 전라북도에서 벚꽃을 앞세운 축제만 해도 전군도로와 완주 송광사 벚꽃축제, 남원 요천벚꽃축제, 순창 옥천골벚꽃축제, 전주 동물원벚꽃축제, 정읍 벚 꽃축제 등 도처다. 국화는 익산과 고창 등에서 성대하게 열린다. 대표적인 예가 정읍 구절초축제다. 이곳은 단지 넓은 언덕에 구절초를 심어 두었을 뿐이지만, 축제 기간 이 되면 관광객으로 넘친다. 축제가 끝나더라도 꽃이 지기 전까지는 관광객의 방문 이 많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97

199 그림 77 익산쌍릉공원 안내도: 전체적으로 큰 면적은 아니다. 그러나 대왕 릉과 소왕릉를 잇는 길을 비롯해 전체적으로 꽃을 식재하면 자연 스럽게 익산 시민뿐 아니라 관광객들도 몰리면서 쌍릉과 익산 지 역 백제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열릴 것이다. 백제 무왕(武王)과 선화비(善花妃)의 능이라고 전하는 익산쌍릉 주변을 활용한 꽃 테마 축제는 단순하게 꽃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백제의 역사와 문화가 결합된 꽃축제로 큰 호응을 얻을 것이다. 근처에 있는 서동생가터와 연방죽, 우물가 등까지 활용38)하면 그 효과는 배가 될 것이다. 그림 78 정읍구절초축제(1) 그림 79 정읍구절초축제(2) 38) 현재 서동생가터는 생가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풀숲으로 둘러싸인 채 방치돼 있다. 생가터라면 터를 조금 널 찍하게 돋아 확실한 집터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19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00 그림 80 고창청보리밭축제(1) 그림 81 고창청보리밭축제(2) 꽃축제의 경우, 해당 지역의 풍토 등을 해야겠지만 우선 꽃말의 의미를 살리는 것 이 중요하다. 테마가 될 꽃은 국화 장미 등이 아니다. 쌍릉이 갖는 의미가 왕과 왕비 의 무덤이기에 오히려 강아지풀(동심), 냉이(나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보라색 라일 락(첫사랑의 감격), 영산홍(첫사랑), 은매화(사랑의 속삭임) 등과 같이 소박한 것일 수 있다. 39) 꽃말이 나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인 냉이축제 꽃말이 동심 인 강아지풀을 활 용한 강아지풀축제 다양한 색마다 의미를 간직한 라일락축제(백색: 아름다운 인연, 맹세, 순진) / (보라색: 첫사랑의 감격) / (적색: 사랑의 싹) 등이 한 예다. 39) 사랑과 관련한 테마가 있는 주요 꽃과 꽃의 의미 가막살나무: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갈대: 신의, 믿음, 지혜, 끈기, 애정, 순정 강아지풀: 동심 개나리: 희망, 청초 개다래나무: 꿈꾸는 심정 금목서: 당신의 마음을 끌다. 나팔수선화: 자존심, 존경, 짝사랑 냉이: 나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봄색시 달리아(장미색): 당신의 마음을 알아 기뻐요 데이지: 순결, 평화, 성실한 사랑, 명랑 도라지: 영원한 사랑, 성실, 감사, 상냥 미소 라일락(백색): 아름다운 인연, 맹세, 순진 라일락(보라색): 첫사랑의 감격 라일락(적색): 사랑의 싹 마가렛: 마음속에 감춘 사랑, 사랑을 점친다. 보리수: 결혼, 부부의 사랑 복수초:(동양 - 영원한 행복) 분꽃: 사랑의 불꽃, 수줍음, 내성적인 성격 붓꽃: 좋은 기별, 존경 아몬드: 기대, 희망, 진실한 사랑 아스타(보라색): 사랑의 승리 아스타(복숭아색): 달콤한 꿈 아스타(흰색): 나를 믿어 주세요 아이리스: 격정, 기다림, 사랑의 메시지 연꽃: 당신은 마음까지도 아릅답다 영산홍: 첫사랑 은매화: 사랑의 속삭임 은방울꽃: 행복이 돌아옴, 희망, 순애 은사철: 슬기로운 생각 자귀나무: 가슴의 두근거림, 환희 자작나무: 당신을 기다립니다. 재스민: 당신은 나의 것, 사랑의 기쁨, 호색 접시꽃: 풍요, 열렬한 연애 제비붓꽃: 행운은 반드시 온다. 철쭉: 정열, 사랑의 기쁨 칼라듐: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와이무궁화: 당신을 믿습니다, 신선한 사랑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199

201 (3) 꽃을 테마로 한 전북 지역 축제 군산 벚꽃예술제 일시: 4월 초(10일간) 장소: 군산시 월명 종합경기장/은파관광지 주요내용: 군산 사람들은 벚꽃문화예술제가 열려야 봄이 왔음을 실감한다. 벚꽃 아가씨 선발대회와 무용, 동요 부르기 대회, 퓨전난타, 벨리댄스, 사생실기대회, 연극, 밴드, 장기자랑, 백일장, 가수초청공연, 국악페스티벌 등 군산의 문화예술 인이 모두 참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소양 벗꽃길 행사 일시: 4월 초(10일간) 장소: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 주요내용: 송광사와 위봉사, 위봉산성 가는 길. 소양에 벚꽃이 피면 장꾼들과 상 춘객이 어울려 만개한 벚꽃터널이 무색하다. 인산인해, 꽃보다 사람구 경이 더 재미있다. 모악산벚꽃잔치 일시: 4월 초(3일간) 장소: 김제시 금산면 모악산 일대 주요내용: 봄내음 가득한 명산 모악산의 대향연. 40~50년 된 왕벚나무들이 꽃을 피워내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햇살이 비치는 낮도 그렇지만 어슴 푸레한 달빛이 스며든 밤은 더 황홀경이다. 전라북도 문화해설사 스토 리텔링 대회가 주목할 만하다. 모악산진달래화전축제 일시: 4월 초(1일간) 장소: 완주군 모악산 대원사 주요내용: 산 능선을 따라 펼쳐진 진분홍 물결은 수수하면서도 매혹적이다. 봄 의 절정. 화전놀이이기에 먹을거리는 당연지사이며, 옛 기와 그림 전 시, 화전 전시, 대나무 솟대 전시 등 볼거리도 풍부하다. 청소년과 가 족들의 참여가 많다. 요천 벚꽃체험 행사 일시: 4월 중(2일간) 장소: 남원시 십수정 주변 벚꽃길 주요내용: 남원 요천 강물은 벚꽃 잎들이 흐른다. 1,300여 그루의 벚꽃나무에서 떨어진 꽃잎들은 방자와 향단이처럼 재잘재잘 서로 어울려 물의 정적 20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02 을 깨뜨린다. 오색 찬연한 신관사또 부임행차는 봄꽃놀이의 흥을 한층 더한다. 정읍 자생화축제 일시: 4월 중(4일간) 장소: 정읍시 제2청사(농업기술센터) 주요내용: 꽃잔치. 할미꽃, 앵초 등 정읍지역 자생화 2백 여 종을 비롯해 광릉요 강꽃, 복주머니란, 히어리, 동강할미꽃, 노랑할미꽃, 파초일엽 등 흔히 볼 수 없는 희귀 자생화들을 만날 수 있다. 지리산 바래봉 철쭉제 일시: 4월 말(한 달간) 장소: 남원시 운봉읍 바래봉허브밸리 주요내용: 어머니의 산 이라 불리는 지리산. 해마다 5월이면 어머니의 산은 능 선마다 꽃불 이 옮아 붙는다. 한걸음마다 마주치는 철쭉은 지천으로 깔렸어도 신물 나지 않는다. 푸짐해서 좋고, 만날수록 반갑다. 지천으 로 핀 지리산 철쭉은 대단위 군락을 이루며 핀다. 그 군락은 매년 철 쭉제로 산인( 山 人 )을 맞는다. 진안 꽃잔디축제 일시: 4월 말(7일간) 장소: 진안군 진안읍 원연장마을 주요내용: 진안읍을 1km 앞둔 연장리 국도 26호선, 10여 년 전 원연장마을의 출 향인이 30ha일대에 꽃잔디와 철쭉, 개나리, 국화, 백일홍 등을 심어 조성됐다. 산꼭대기까지 뻗은 꽃잔디보다 더 넓고 고운 마음이 돋보이 는 축제다. 고창청보리밭 축제 일시: 4월 말(보름간) 장소: 고창군 공음면 학원관광농원 청보리밭 일대 주요내용: 넓고 건강한 보리밭을 보는 것만으로도 축제의 의미는 충분하다. 보 리밟기와 보리화분 만들기, 보리피리불기, 보리끄스름하기 등의 체험 이 좋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201

203 남원허브축제 일시: 5월 중(9일간) 장소: 남원시 운봉읍 허브밸리 일대 주요내용: 허브는 그 향기만으로도 찾는 이를 행복하게 한다. 사랑의 향기 허 브와 함께 하는 9일간의 행복. 지리산의 풍부한 자생식물과 허브를 접 목시켜 새로운 혁신산업으로 일군 남원은 세계허브산업 엑스포, 허브 밸리와 자생식물 환경공원, 허브경관농업조성 등 허브클러스터를 확대 해 왔다. 무주구천동철쭉제 일시: 5월 중(1일간) 장소: 무주군 설천면 구천동 주요내용: 덕유산은 마치 누군가 일부러 가꿔놓기라도 한 것처럼 무리지어 철쭉 들이 피어난다. 구천동상인회는 1996년부터 덕유산 산신제를 앞세우 고 덕유산 숲길 체험과 화전 만들기, 송어 잡기, 그림 그리기 대회, 특 산물 줌마 선발대회 등 다양한 행사를 마련해 철쭉 구경 오라고 손짓 하고 있다. 새마을채송화축제 일시: 7월 초(1일간) 장소: 진안군 용담면 새마을 채송화공원 주요내용: 하늘을 향해 활짝 핀 채송화와 별꽃. 예뻐진 시골마을. 자연스레 풍물 패가 된 마을 어르신들을 바라보는 이들도 채송화와 별꽃이 된다. 돌 담길에 마련된 새마을 사진전 은 어르신들의 옛 모습을 살필 수 있다. 하소백련축제 일시: 7월 초(6주간) 장소: 김제시 청하면 청운사 주요내용: 불교의 인연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미 군자의 꽃이며 다산의 정표로 알려진 연꽃. 청운사의 대규모 연꽃군락 이외에도 각종 전시를 감상할 수 있다. 인간문화재 탱화장인 청운사 주지스님의 탱화 전시만으로도 발걸음의 의미는 충분하다. 연꽃 핀 곳이 극락이다. 전주연꽃문화제 20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04 일시: 7월 초(2일간) 장소: 전주시 덕진공원 주요내용: 연꽃이 가득 피어난 덕진공원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축제다. 축 제 기간에는 연꽃 만들기와 탁본, 한지공예, 부채 꾸미기 등 전주를 대표하는 다양한 체험행사들을 경험할 수 있다. 순창 도라지축제 일시: 7월 말(2일간) 장소: 순창군 팔덕면 장안마을 주요내용: 순창군 장안리, 덕진리, 평지리, 이목리, 백암리, 장재리 등 강천산 자 락의 6개 마을 주민들이 17ha의 넓은 도라지 꽃밭을 배경으로 마련한 주민주도형 농촌축제. 도라지 까기, 나뭇꾼 선발대회, 연날리기, 미꾸 라지잡기 등 다채로운 행사들이 준비된다. 익산천만송이국화축제 일시: 9월 말(11일간) 장소: 익산시 중앙체육공원 주요내용: 모든 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축제. 익산의 거리가 온통 노란색으로 물 든다. 10만여 점의 국화분이 야외에서 전시되고, 각 아파트 베란다를 비롯해 상가, 각급기관, 단체 등도 국화분 내놓기 시민운동을 전개하 기 때문이다. 옥정호 구절초 축제 일시: 10월 초(6일간) 장소: 정읍시 산내면 옥정호 구절초 테마공원 주요내용: 청명한 가을햇살, 순백의 구절초가 하얗게 뒤덮은 송림은 걷기에 더 없이 좋다. 대표 프로그램은 클래식 음악회. 자연과 조화를 이룬 수채 화 같은 무대, 감미로운 음악선율은 가을로 한 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낭만적인 시간이다. 뱀사골단풍제 일시: 10월 중순(1일간) 장소: 남원시 지리산 뱀사골 야영장 주요내용: 산과 물과 사람의 마음까지도 붉게 물들이는 계곡과 기암절벽. 민족 의 영산 지리산은 오색단풍으로 산인들을 황홀경에 빠트린다. 단풍제 례인 산신제와 등산대회, 산신령께 소원문 쓰기, 판소리 체험 등 다채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203

205 로운 행사가 열린다. 5) 서동공원, 프로포즈 테마공원 으로 조성 금마서동공원은 4만여 평 부지에 서동선화입상과 십이지신상, 분수대 등이 있는 조각공원과 전망대, 미륵광장, 수변광장, 야외무대가 있다. 이곳은 익산쌍릉공원에 비해 찾는 이가 많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관광명소로 칭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그림 82 금마서동공원(조각공원) 그림 83 금마서동공원(전경) 그림 84 금마서동공원(무왕) 그림 85 금마서동공원(서동선화상) 금마서동공원도 익산쌍릉공원과 같이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주제로 한 테마공 원으로 가꿔야 한다. 공원 자체를 프로포즈 테마공원 이나 사랑의 맹세, 사랑의 타 임캡슐 테마공원 으로 조성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사랑의 타임캡술은 사랑의 맹세를 한 내용물을 맹세함에 넣어 일정한 시간동안 밀 봉상태로 보관하고, 특정한 벽면을 조성해 그들의 이름을 써 두는 것이다. 사랑의 타임캡슐 류의 프로그램은 여러 축제의 부대행사에 편성되기도 한다. 그만큼 매력적 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아예 사랑 과 프로포즈, 타임캡슐 을 테마로 한 공원은 없 으며, 그들의 약속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곳은 없다. 프로포즈와 타임캡슐은 그 자체가 미래지향적이다. 전국 모든 연인들을 대상으로 사랑과 미래의 약속을 익산쌍릉공원과 금마서동공원에서 하고, 두 사람의 믿음이 공 식화되어 사랑을 맹세한 확인(문서 벽화)이 공원 한쪽에 장식돼 있다면 이들은 이곳 20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06 을 자주 찾아올 것이다. 6. 문화재를 활용한 문화상품과 프로그램 1) 출토유물을 활용한 문화상품과 프로그램 (1) 사리호와 사리호 문양 사리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영력을 지닌 절대적 진리 자체인 사리를 봉안 하는 그릇이다. 영혼과 그 힘을 강력히 영화시키기 위해 온갖 영기문으로 사리기 표 면을 채운 것이다. 익산에서 출토된 사리호에는 어자문 심엽문 당초문 등이 새겨 있 다. 이 문양들은 모두 높은 상징성을 지녔다. 어자문은 작은 원형으로 물고기 알과 같은 형태인데, 생명을 잉태하는 포자 혹은 씨앗을 의미한다. 심엽문은 씨앗으로부터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다. 힘차게 뻗어 가는 형태의 당초문은 성장과 발전과 무한한 생명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보주의 화생과 우주의 탄생, 백제의 무한한 발전을 염원한 것이다. 미륵사지나 왕궁리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용기의 모습들은 타 지역 40) 에 비해 더 독창적이며, 수준 높은 백제공예 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 86 금동제사리외호 문양(1) 그림 87 금동제사리외호 문양(2) (2) 수막새 암막새 연목와 등 기와 무늬 미륵사지는 독특한 수막새를 창건기와로 제작해 사용했다. 기존 8엽 형태를 6엽의 형태로 새롭게 만든 6엽단판연연화문 수막새다. 또한 미륵사지는 백제 최초로 드림 새에 무늬를 갖춘 전형적인 암막새를 창안한 사찰이다. 암막새는 중앙에 삼릉심엽문 을 두고 좌우로 무성하게 뻗어 나가는 당초문을 시문했다. 연목와는 서까래 앞에 붙 40) 타 지역에서 출토된 사리외호에는 연화문 당초문 보주문 연주문 등이 다양하게 조식돼 있다. 당초문은 무한 한 생명, 연주문은 천상의 빛에 관한 상징을 나타낸다. 금동제 사리외호의 어깨부분에 시문된 것은 불국토 광명의 빛을 상징한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205

207 여 장식하는 기와다.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연목와는 부여에서 출토된 연목와와는 달 리 녹색유약을 시유한 녹유연목와다. 연목와에도 수막새와 마찬가지로 화엽 안에 각 각 5엽의 심엽문을 두고 있다. 미륵사지에서는 암막새 수막새 연목와에서도 심엽문이 라는 동일한 형태의 문양을 도입해 사용했다. 제석사지는 당시 다른 지역에서는 확 인되지 않은 드림새에 문양이 있는 암막새를 사용했다. 중앙에 귀면을 배치하고 좌 우로 인동문을 넣은 형태다. 그림 88 각종 기와 무늬들 (3) 백제 금동풍탁 풍탁은 풍경과 같이 탑의 네 귀에 달아놓는 것으로 소리를 통해 법음을 들려주며, 듣는 이의 영혼을 맑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미륵사지 동탑지에서 발견된 금동풍탁 이 백제의 것으로서는 유일하며, 우리나라 범종의 시원양식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어 떤 스토리텔링을 넣느냐에 따라 큰 인기를 끌 수 있다. (4) 문화상품과 체험프로그램의 예 사리호와 기와의 문양과 금동풍탁을 활용하면 다양한 형태의 문화상품을 제작할 수 있고, 여러 체험 프로그램들을 만들 수 있다. 가. 그리기 공모전 사생대회: 사리호 문양, 기와 무늬 나. 디자인 공모전 창작대전: 사리호 문양, 기와 무늬 다. 문화상품 제작: 벽지 벽돌 디자인, 목걸이 귀걸이 반지 라. 가로정비 시설: 사리호 형태의 가로등, 각 문양을 활용한 벽화 마. 한글문서의 배경 이미지 바. 스토리텔링 글쓰기 공모전 백일장: 각 무늬의 상징성 및 무늬가 나오기까지 20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08 의 과정 등 사. 수험생 대상 머리를 맑게 해주는 풍탁 선물하기 아. 유골함을 사리호로 대치 2) 스토리가 있는 엽서 문화상품 제작 관광지에서 가장 흔한 것은 엽서다. 그만큼 만들기도 쉽고, 수요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진이나 일반 그림을 담은 엽서에 그친다. 여기에서 제안하는 것은 이야기가 있는 테마형 엽서다. 서동요, 무왕의 일대기, 서동과 선화의 사랑이야기, 서동 어머니 이야기 등등 이야기로 담을 수 있는 내용을 선별하고, 기행코스들을 연 결한 고품격 엽서를 제작하는 것이다. 그림 89 셰익스피어가 공연했던 주요 공연장과 작품 그림 90 셰익스피어의 생가 묘 공연장 아내의생가 등 을 연결해서 연결, 건물그림과 소개글로 꾸민 그림엽 그와 관련된 장소만을 연결시켜 그림과 글로 꾸민 그 서. 림엽서. 문학기행이 가능하다. 그림 91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로미오와 줄리엣>의 그림 92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햄릿>의 주요 내용 주요 내용을 10개의 장면으로 선별해서 그림과 글로 을 10개의 장면으로 선별해서 그림과 글로 엮은 그 엮은 그림엽서. 림엽서.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2 07

209 그림 93 영국 소설가 찰스디킨스와 그의 소설 이미 그림 94 영국 소설가 찰스디킨스와 그의 소설 올 지를 모은 그림엽서 리브 트위스트 를 9장의 그림으로 만든 엽서 그림 95 영국 소설가 제인오스틴의 생가를 소개한 그림 96 영국 소설가 제인오스틴과 그의 소설 오 만과 편견 을 10장의 그림에 담은 엽서 사진엽서 그림 97 최명희문학관 테마엽서. 전북 지역 시인 작 그림 98 최명희문학관 테마엽서. 최명희생가터 묘 문 가들의 사진으로 구성, 큰 호응을 얻었다. 학관 최명희길 등을 테마로 한 문학기행엽서 3) 사랑이야기 특별 공모전 전북 지역 혹은 대한민국 전체를 대상으로 전래되는 사랑이야기와 현재 사랑이야 20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10 기를 구분해 글과 그림을 공모하고 시상, 전시 출판한다. 4) 어린이 가족 단체 관광객 대상 체험프로그램 최근 여행레저는 가족 중심의 비중이 높다. 가족과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 험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공원이 단지 쉬는 곳으로만 인식되지 않도록 한다. 더 많은 사람이 공원을 방문하고 오래 즐기면서 특별한 추억을 안고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린이와 가족 단위의 프로그램 개발은 꼭 필요하다. 공원에서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은 어린이들에게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체험을 통해 서동요가 전하는 의미를 가르치고, 익산과 백제의 역사를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가 장 중요한 것은 어린이들이 즐기고 흥미를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이다. 성벽 쌓기 게임 성벽 쌓기는 수학여행단 회사단합대회 등과 같이 여럿이서 공동으로 할 수 있 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플라스틱이나 종이 박스 등을 활용해 실제 성벽돌 크기 로 돌을 제작해서 참가자들이 직접 성벽을 쌓는다. 평평한 땅이 아니라 언덕, 바위, 냇가 등을 조성해서 구불구불하거나 높낮이가 다른 형태의 성벽을 쌓도 록 난이도를 조절한다. 성의 구간을 설정하면 몇 팀이 경쟁으로 할 수 있을 것 이다. 기와 올리기 게임 한옥의 기와 쌓기 게임이다. 백제시대 기와를 플라스틱 등으로 제작해서 작은 크기 집 등의 기와를 올리는 게임. 성벽 쌓기 레고 블록 레고 블록을 활용해서 성을 쌓고 궁궐을 만든다. 백제를 상징하는 연을 만들고, 연날리기 서동, 선화, 무왕 등 백제 옷 입기, 사진 찍기 뮤지컬 판소리 성악 등으로 작곡된 서동요 부르기 나만의 방식으로 서동요 부르기 서동요 가사 바꿔 부르기 익산과 백제를 테마로 한 가족 그림그리기: 탑, 불상, 사찰, 성곽 등 익산과 백제를 중심으로 한 가족퀴즈대회 고무판화로 서동 선화 무왕 용 그리기 서동요 내용에 따른 주요 장면 그리기 천년의 소원을 담은 종이접기 고도 익산 문제집 제작 기존 초 중 고 문제집에 수록된 고도 익산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모아서 별책 으로 묶고, 문화시설 등에 비치한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209

211 나만의 익산 문화재 지도 만들기 익산 지역 내 백제시대 문화재 지도 만들기다. 고도 익산 지역의 지도를 관광 객들에게 나눠주고, 백제시대 문화재 위치를 찾아 그림을 그리거나 스티커를 붙여서 자신만의 지도를 만든다. 별도의 체험 진행팀을 구성하기 어려우면, 익 산 지역의 문화해설사나 중고교생, 대학생들의 자원봉사를 활용해 진행하는 것 도 한 방법이다. 5) 블로거 대상 익산 백제 문화유적 포워딩 대회 포털사이트 블로거들을 대상으로 익산을 여행한 뒤 감상문을 써서 올리는 대회. 총상금 2,000만원(수상자 50명 정도)로 대회 규모를 높이면, 대회를 진행하는 것만으 로도 인터넷에 익산의 백제 문화유적들이 수도 없이 포워딩 될 것이다. 블로거들의 생생한 글과 사진 등 수상작품들은 익산시 홍보용으로 활용하고, 지속적으로 수상자 들을 관리하면 웹 홍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연스럽게 데이터베이스가 쌓이는 큰 장점도 있다. 7. 매체를 활용한 디지털 스토리텔링 활용 방안 스토리텔링이 종이매체에서 표현되면 문학이 되고, 영상매체에서 표현되면 영화가 되며, 디지털매체에서 표현될 경우 디지털 스토리텔링이 된다. 스토리텔링이 마케팅 과 결합하면서 기업의 온 오프라인 광고에 활용되고, 컴퓨터게임 만화 드라마 애니메 이션 영화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이야기 산업의 주축이 되고 있다. 시청각을 자극하는 프로그램은 가장 인상적인 방법이다. 관광객은 글을 읽는 것보 다 시청각 프로그램을 통해 제시되는 정보에 더 몰입하기 마련이다. 영상매체 중 광 고는 스토리텔링을 가장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마케팅전략 도구이다. TV, 라디 오, 지면광고 등을 막론하고 다양하고 창의적인 스토리텔링을 구사해 소비자에게 접 근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과 광고의 결합은 다양한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도구들 중 에서 가장 뛰어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광고의 특성상 스토리텔링의 효과가 극대 화 되는 것이다. 41) 축제는 사람의 오감을 자극하고, 중요한 문화적 사건을 기념한다는 점에서 관광객 들이 지역사회를 배울 수 있는 훌륭한 기회이다. 의례와 의식, 음식, 종료, 의복, 춤, 음악과 같은 살아있는 문화유산들이 축제에 녹아들어가 있다. 축제의 경우 해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관광객들은 의례에 담겨 있는 신화나 종교적 의미, 그리고 축제 기간에 보이는 지역민들의 특별한 행동양식 배후의 원인을 배우고 싶어 하기 때문이 다. 축제는 공연 프로그램 활용으로 지역의 음악과 무용을 공연하고 관광객들을 위 41) 한석진, 브랜드 스토리텔링을 이용한 효과적인 통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IMC)전략, 서울시립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참고. 21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12 해 해설해 줄 수 있다. 전통 음식과 음료, 잔칫상과 전통 식기들로 꾸며진 대규모의 공식만찬과 같은 활동과 의식을 통해 방문객들에게 이 지역의 삶을 엿보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가장 효과적인 것은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한 멀티미디어 쇼의 활용 이다. 이 시설 방식은 무용과 음악, 연극 공연과 특수효과를 결합해 특정시간과 장소 에 와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기 위한 감각적 체험을 제공한다. 이러한 쇼는 대사나 노래를 통해 지식을 전달하기도 하지만, 주요 기능은 관광객의 정서와 감각에 호소 하는 것이다. 멀티미디어 쇼의 경우 비용이 많이 들어 개발이 쉽지 않지만, 대단위의 관광객이나 단체관광객들을 유치하기위해서는 이러한 접근법도 좋다. 문화콘텐츠산업 내에서 하나의 소스(콘텐츠)로 여러 상품의 유형을 만들어내는 원 소스멀티유즈(One source multi use)를 가장 많이 활용하는 분야가 애니메이션이 다.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을 캐릭터 상품화 하고 이를 완구 등으로 연결시키거나 테 마파크에서 이용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업체들은 애니메이션의 방영이나 상영으로 수익을 확보하기 보다는 캐릭터 등 2차 상품에 기대를 한다. 42) 게임 산업은 강한 오락성과 대중성을 바탕으로 소비자에게 끊임없는 호기심을 불 러 일으켜 지속적인 수요를 창출하고, 가상의 오락문화공간을 제공함으로써 현대인 의 다양한 기호를 충족시킨다. 또한 캐릭터와 배경, 소재적인 측면에서 전 세계의 문 화를 포괄할 수 있는 속성은 문화적인 장벽을 제거할 수 있는 강점으로 작용한다. 43) 영화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감독의 주체의식을 담아 이야기를 관중에게 전달한 다. 영화는 여러 예술을 아우르는 총체예술로서 타 예술이 표현 할 수 있는 모든 부 분과 그 이상의 세계를 영상을 통해 종합적으로 그려내는 종합적인 예술이며 파급력 이 막대한 대중적인 문화산업이다. 44)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스토리텔링이 디지털이라는 신기술과 결합된 합성어로, 스토 리텔링이 확장된 개념이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디지털기술을 이용해 이야기를 전 개하는 것이다. 게임과 디지털 영화, 애니메이션, 인터액티브 드라마, 웹 애드, 웹 에 듀테인먼트 등을 모두 포함한다. 디지털스토리텔링은 문학이나 영화 연극 같은 전통 의 이야기예술 뿐만 아니라 디지털공학, 미디어공학, 경영학, 과학 등에서도 널리 연 구되고 있다. 45) 디지털 스토리텔링이 가장 활발하게 시도되는 분야는 온라인 게임이다. 게임에서 스토리텔링은 영화나 애니메이션과는 차이가 있는 개방형 스토리 전개방식(open ended design)을 택하고 있다. 플레이어 캐릭터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를 무한의 스 토리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46) 현재 전해지는 수준에서 서동요 는 쉽고 가 42) 최성규, 문화콘텐츠 산업육성을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역할, 경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참고. 43) 제영호, OSMU을 활용한 애니메이션기획 연구, 국민대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참고. 44) 고동우, 인터넷 발달에 따른 한국영화 문화 변화연구, 청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참고. 45) 손현민, 디지털 스토리텔링 확대를 통한 문화콘텐츠산업 활성화 방안에 관한 연구, 중앙대학교 석사학 위논문, 참고.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211

213 벼운 수준의 게임 제작이 가능할 것이다. 현재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서 선보이는 온 라인퀴즈 정도이다. 1) 영상매체를 활용한 문화상품과 프로그램 지금까지 제작된 영화의 절반 이상이 사랑 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만큼 사랑은 영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서동요 도 영화와 미니시리즈로 제작되기도 했다. 새롭 게 추가된 인물과 사건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쓰이는 제2의 서동요 는 충분히 성인 용 드라마로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 서동요 혹은 변형된 제2의 서동요 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어린이들에게 친 숙한 모습으로 다가가고, 또한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사랑스럽고 익살스러운 고전 캐 릭터를 개발해 청소년 문화에 동화돼야 한다. 또한 창작 개발된 캐릭터를 각종 팬시 용품, 의류 등에 상품으로 개발하고, 서동요 웹 애니메이션 공모전 등을 해마다 개최함으로써 청소년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다양한 사랑 문화콘텐츠를 개발해 엔터 테인먼트적인 요소를 더해 나가는 프로그램의 개발이 필요하다. 해외 유명 애니메이 션 페스티벌에 참가해 한국의 사랑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것 역시 필요한 일이다. 한국의 전통 설화와 전설도 스토리텔링을 통해 관객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경우 한국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표현에 거의 제약을 받지 않는 애니메이션의 특성에 힘입어 제작될 수 있는 화려하고 풍부한 영상과 그 것을 받쳐주고 있는 한국 고전문학의 새로운 스토리텔링에 관객들은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47) 2) 초 중 고교생 서동선화사랑 연극경연대회 (1) 연극경연대회의 개요 서동요 등 익산의 주요 콘텐츠는 어린이 청소년들의 교육과 연계하는 것이 시의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다. 초등학교와 중 고등학교로 <서동선화사랑연극제> 를 개최한다. 연극제 형태지만, 익산의 특성을 살려 연극 이외에도 판소리 마당극 등 전통연희를 적극 활용케 하고, 젊은 감각에 맞춰 뮤지컬적 요소와 퓨전음악의 성격 까지 확대한다. 어린이들이 직접 참여해 지역과 작품에 대한 이해와 고장에 대한 애 향심을 기를 수 있는 기회다. 48) 46)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대표적인 예로 엽기토끼 라고 불리던 마시마로가 있다. 마시마로는 한 대학생이 인터 넷 만화사이트에 올린 플래쉬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것으로, 다양한 돌출행동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토 끼 캐릭터다. 재미있는 엽기적 스토리텔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캐릭터 상품으로 크게 히트했다. 상품 화 이후에도 계속해서 공식 사이트를 통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내보내면서 마시마로 캐릭터 상품을 홍보하는 역할을 해주고 있다. 47) 2003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에서 신라의 화랑 기파랑과 선화낭자의 사랑이라는 전통 소재에 3D 입체영상 기술을 접목해 영상콘텐츠를 선보임으로써 지역 문화상품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준바 있다. 48) 익산시는 연극 프로그램에 많은 관심을 보여 왔다. 매년 가을 열리는 서동축제에서도 연극적 행위를 통해 21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14 초등학교 국어교육에서는 문학교육이 주로 읽기 교재에 포괄되기 때문에 문학교육 의 목표와 내용이 겉으로 명료하게 드러나 보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학생들이 문학 텍스트를 읽고 수용자 입장에서 능동적 감상원리나 대화의 원리를 실현시키는 문학 수업은 꼭 필요하며 49) 이를 더 구체화할 수 있는 연극교육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문학교육에서 이처럼 중요한 감상 수업을 어떻게 하느냐는 교사의 교재관과 수업 개선 의지가 좌우하는 것이라고 볼 때 교육연극을 통한 문학 감상 수 업을 내면화와 창의성의 신장으로 문학교육 목표 도달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 을 것이다. 교육연극은 학생들의 참여와 상상력을 제일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교육연극은 모 든 것이 가능하고 허락되는 놀이 장소에서 우리들의 신체와 상상력을 동원해서 표현 하고 놀이하는 것을 뜻한다. 교육연극의 특징은 학습에 있어 학습자들이 지니고 있 는 본성을 극대화한다는 점으로 문학 감상 수업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문학 교육 의 목표인 감동과 내면화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2) 연극경연대회 운영 방향 기존 성인극으로 만들어진 서동요 를 아이들의 정서에 맞춰 재창작, 익산을 비롯 한 전북지역 소재 개 초등학교와 개 중 고교를 선정해서 학생들과 지역의 연극 인들이 연극을 준비하고 무대에 올린다. 주최 측에서 제공한 하나의 대본을 토대로 각각의 장면을 선택해 작품을 만들어 출전하기 때문에 서동요 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특별한 재미가 있다. 같은 내용의 극이지만 배우가 다른 작품이 참가학교의 숫자대로 오르며, 배우들의 토론에 따라 전혀 새로운 해석이 되는 것이다. 서동요의 기본 줄거리 및 주최단체가 그 해 요구하는 주요 테마를 유지한 채, 학교(혹은 학생) 특유의 개성을 살려 전혀 색다른 형태의 작품을 생산해 낼 수 있다. 지역의 소중한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무 대에서 펼쳐지는 어린이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느낄 수 있는 공연이 될 것이다. 이 공연은 대본의 곳곳에 학생들이 토론을 통해 직접 대사를 만들어 넣는 장면과 아이들의 순수한 감정이 표현될 수 있도록 극을 쉽게 배열해 연극을 통한 교육적 효 과를 배가시킬 수 있다. 일종의 교육연극이다. 연극 이라고 하면 화려한 의상과 무 관광객들의 큰 반응을 얻어냈다. 무왕의 일대기 를 주제로 했던 2005년과 달리, 2006년은 국경과 신분을 초 월한 서동과 선화의 사랑을 테마로 했다. 특히 청년기 서동의 사랑을 집중 조명하고 선화와 만남에 초점을 맞춰, 청년기 서동의 사랑 을 테마로 국내 외 사랑이야기를 엮은 마당극을 선보이기도 했다. 마당극 형태의 퓨전극 <사랑, 사랑, 내사랑아!>는 서동과 선화를 비롯해 로미오와 줄리엣, 향단과 방자, 장녹수 등 다른 많 은 사랑의 주인공들이 등장해 색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또한 무왕즉위식과 무왕혼례식 등의 행사를 지속시 키면서 연극 장르의 확대를 꾀했다. 49) 텍스트 내용의 일차적 이해 이외에도 이른바 감동 과 내면화 로 일컬어지는 심미적 요인과 반영적요인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감동이란 읽고 있는 문학 텍스트가 제시하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독자가 일종의 정서적 감염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내면화란 감동의 한 과정이면서 동시에 감상 이후에 독자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정신작용이다. 다시 말하면 감동은 세계 를 독자의 주관과 가치에 의해 재구성하는 경험이며 내면화는 감동 과 가치적 요소를 오랜 시간을 통해 독자의 인격에 내면적으로 용해시키는 과정이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213

215 대 장치, 반짝이는 조명 그리고 잘 구성된 대본과 그 대본을 완벽하게 암기해서 연 기하는 배우 등일 것이다. 그러나 교육 연극 은 자연스러운 놀이(play) 50) 에 바탕을 두고 공연되는 연극 보다는 과정 중심의 연극 에 역점을 둔다. 다시 말해 공연 예술 중심의 연극이기보다는 참여자의 표현력과 상상력, 개개인의 개성과 창의성, 잠재력 을 개발할 수 있는 과정 중심의 교육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 사업의 운영은 전북지역 내 학교별 경연형식(초교 중 고교)으로 한다. 하나의 대본을 토대로 각각 다른 장면을 선택해 각기 다른 의상과 무대로 각 학교별 개성이 살아 있는 무대극을 선보인다. 주최 측은 3개월 전부터 참가 학교에 전문강사를 파 견해 연극기초이론을 비롯해 무대 활용법, 연극기초훈련 등을 실시해 연극보조강사 역할을 하며, 무대 의상 등을 협조한다. 시상은 가능한 규모를 최대화한다. 예를 들 어 대상학교에게는 1백만 원, 최우수학교에게는 80만원, 우수학교 2팀 50만 원 등이 며, 개인상 시상규모 역시 넓혀 많은 학생들에게 격려할 수 있도록 한다. 최우수 지 도교사에게도 교육장상을 수여한다. 경연대회는 서동축제 기간을 이용한다. 관람은 무료로 하는 것이 많은 관객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며, 유료로 운영할 경우, 수익금 은 전액 다음 대회의 시상금으로 쓰거나, 불우이웃돕기나 장학금 등으로 활용한다. 이미 익산시는 경험이 있다. 2004년부터 이러한 유형의 경연대회를 개최해 큰 호 응을 얻은 바 있지만, 현재 중단된 상태다. 당시 첫 해에는 참여 자체 난색을 표하는 학교가 있었으나, 1회의 결과를 보고 난 뒤 실시된 2005년 제2회 서동요 연극경연 대회에는 어린이들과 초등학교들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51) 제2회 52) 의 경우, 총 6개 50) 놀이는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향수도 일깨워 주는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서 놀이는 모든 사람들에 게 아름다운 꿈과 밝고 맑은 마음을 키워주며 아늑하고 포근한 분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요즈음 음악과 동식물의 사육 재배, 놀이와 정신 수양, 질병치료의 연극요법 등 놀이와 음악, 연극의 위력이 여러 가지 성공 사례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그렇다면 연극을 통해 문학세계를 재해석하는 창의적 구성이 극대화되는 내면 화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51) 당시 익산시청 홈페이지에 한 학부모의 글이 올라왔다. 귀 한국예총 익산지부의 발전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귀 한국예총 익산지부에서는 서동요연극경연대회를 통해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익산의 발전을 위해 우리 고장에 전해오는 서동선화의 임무를 통해 우리고장을 알리며 우리 고장 발전을 위해 매 년 연극 경연대회를 기획하시고 주관하심을 너무나 고맙게 생각합니다. 앞 으로도 우리 익산시의 발전을 위해 우리 익산의 연극 소재가 우리 익산을 알리고 발전을 위한 소재가 있으면 계속 해 이런 행사를 가졌으면 합니다. 익산시청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제목: 초등학교서동요연극경연대회의 발전을 기원하며 지속적인 행사를 부탁드립니다. 작성자: 김회중 번호: 작성일: ) 초등학생들이 연극을 통해 역사를 배운다. 지난해 처음 개최돼 호평을 받은 서동요 초등학교 연극경연대회 의 두 번째 마당이 펼쳐진다. 사단법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익산지부(지부장 신길수)가 주관하는 제 2회 서동요 초등학교 연극경연대회가 오는 11일부터 17일까지 익산 솜리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베풀 어진다. 지난 2004년 처음 서동요를 주제로 어린이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배우고 연극을 통한 꿈과 희망을 키우기 위한 산실로 평가받아온 서동요 연극대회는 어린이들만의 연극의 장이란 점에서 언론매체의 뜨거운 관심을 자아냈던 연극대회다. 올해에도 익산 동북초등학교를 비롯해 함열, 용산, 북, 성당초등학교 등 총 6개 팀이 경연대회를 통해 자웅을 겨루며, 대회 마지막 날인 17일에는 익산중학교가 축하공연을 마련한다. 지난 해에는 다섯 팀이 참가해 열띤 경연을 벌인 이 연극대회는 어린이만을 대상으로 그것도 익산 역사의 중심부 에 서있는 서동요를 주제로 전개됐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남긴바 있다. 올해에도 각 참가팀들은 지도교사 와 함께 6개여월간 준비한 작품들을 올린다. 화려한 조명과 웅장한 음향은 없어도 고사리 손으로 역사를 찾 아가는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다. 익산시가 주최한 이 대회는 앞으로 매년 정기적으로 경연대회를 마련, 21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16 학교를 선발 경연을 벌였지만, 신청학교는 12곳에 달했다. 53) 해당 지역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미래역사의 주인인 어린이들을 고장의 전통문화행사에 참여시켜 고장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할 수 있게 하는 산 교육이기 때문이다. 3) 고도 익산의 문화자원을 활용한 판소리 눈대목 제작 (1) 창작판소리 제작의 개요 고도 익산의 역사문화유적을 활용한 예술작품 제작은 오페라, 칸타타, 창작판소리 등 다양한 장르가 가능할 것이지만, 익산에 오는 관광객들에게는 익산 전북 지역 예 술 고유의 자랑인 판소리와 판소리가 한층 더 발전한 창극의 형식을 보여주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익산시는 여러 소리꾼을 배출하기도 했지만, 함열 지역을 중심으로 소리꾼들이 오 래 머물며 소리공덕을 쌓던 곳이다. 쉽게 말해 소리꾼들의 후원자들이 거주하던 곳 이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전북 지역 판소리의 발전도 없었을 것이다. 판소리는 그 동 안 무형문화재 제도에 의존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지만, 듣기 어렵고, 따라 부르기 어렵고, 지루하고, 단조로와 대중의 무관심속에서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다. 또한 판소리 연구자들도 실용적인 관점에서의 접근보다는 공연의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소리꾼도 사명감만으로 소리를 배우고 가르친다. 이제는 판소리 문화원 형의 복원과 보존도 중요하지만 판소리 대중화와 산업화를 기하고 이를 익산시의 비 즈니스 관광 상품으로 개발해 나가는 전략이 모색되어야 한다. 창작판소리는 제작보다 그 쓰임이 중요하다. 대중화와 산업화다. 판소리를 활용한 다양한 시도를 통해 서동요와 무왕, 익산 지역의 백제 문화를 더 빛나게 할 수 있다. 판소리 본바탕의 맛을 살리면서 서사 구조는 젊은 감각 - 시대의 흐름에 맞는 감각 을 가진 창작품을 생산해내고, 매년 수정해나간다면 익산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을 발 전할 것이다. (2) 창작판소리 소재와 제작방향 소재는 다양하다. 서동요 미륵사 건립사 서동과 선화공주 서동결혼비사 서동 어미의 눈물 마룡지 용의 눈물 무왕 익산 천도사 등등 다양한 소재와 주 제를 선정할 수 있다. 창작판소리 <서동요> 사설 제작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초등학생들에게 익산의 자랑인 서동요를 연극을 통해 각인시킬 전망이다. 매일 공연은 오후 2시에 펼쳐진다. 전라일보 2005년 6월 11이자 <초등학생들이 연극을 통해 역사를 배운다> 53) 연극경연대회는 어린이와 초등학교의 높은 호응을 얻고 있어 학교선정에 있어서도 각축을 벌였으며, 선정 되지 못한 8개 학교에 대해서는 하반기 추경예산을 확보해 제3회 서동요 연극경연대회를 개최할 계획을 밝 히기도 했다.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215

217 서동 어미 마음씀이 두루두루 봄바람 불듯 두루 춘풍이라. 어미 기운 받 자온 서동의 노랫소리는 어느 새 신라 땅 곳곳으로 스며들고 있었으니, 하늘이 돕고, 초목이 돕고, 온갖 새와 짐승이 한 마음으로 도와, 그 모습 이 무척이나 아름답더라. 바람 불어 대숲에서 노랫소리 나고, 꾀꼬리 지저 귀는 노랫가락이 서동의 노랫소리라. 심지어 밥 달라고 꿀꿀거리는 돼지 나 눈만 끔뻑끔뻑하는 소 울음마저 서동요 가락을 닮았으니, 신라 땅이 온통 다 서동요라. 백성들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그것 참 토끼에 뿔이 나고 거북에 털 날 일일세, 하면서도 무에 그리 좋아라고 서동요를 불러 대니, 들일하며 밭일하며 메기고 받는 소리 또한 일품이라. 백성의 입 막 기는 강( 江 ) 막기보다 어려운 것. 후렴 따라 부르는 신라 백성 심사를 누 가 말리리. 서동요 는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드라마, 소설, 만화 등등 다양한 매체로 재조명 되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서동요 원본은 삼국유사 무왕 편에 겨우 2-3쪽 분 량만이 전해질뿐이다. 그러기에 서동요는 여러 학자들의 독자적인 역사적인 해석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여러 설로 각기 다르게 주장되고 있다. 창작판소리 <서동요> 는 다양한 이본 및 주장 등을 세세하게 살펴, 수용할 것은 충분하게 활용하며, 철저 히 고증된 역사에 재미와 작품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범위에서 작가 특유의 객관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제작한다. 가. 방식 다양한 형식과 주제를 모으기 위해서는 국민 대상 공모전을 통한 제작이 가장 적절하며, 추후 전문 작가와 소리꾼의 각색을 진행하면 된다. 나. 사설 구성 5부 30장(작가에 의해 달라질 수 있음) 다. 사설 분량 180매(200자 원고지) 54) 라. 사설집필 전문가 의뢰 54) 동편제 박록주바디 판소리 흥보가(106매), 수궁가(140매), 송만갑 바디 박봉술제 적벽가(180매), 만정판 춘향가(300매), 열녀춘향수절가(360매) 21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18 마. 특징 부르기 쉬운 현대어를 중심으로 작성하며, 판소리 사설의 기본 어법을 지킨다. 익산과 경주를 작품의 주요 무대로 삼고, 서동과 선화의 사랑 무왕과 익산 (미륵사)의 관계는 물론 백제 및 현재의 익산에 대한 설명 사랑에 얽힌 여 러 이야기 등을 부가적인 내용으로 담으며, 또한 마 에 대한 기본 설명 등 극의 재미를 줄 수 있는 다양한 소품을 별도의 눈대목으로 한다. 작은 단락의 눈대목 만으로도 하나의 독립된 성격을 가질 수 있도록 작성하며, 춘향가의 사랑, 심청가의 효, 수궁가의 충 등 기존 판소리 사설의 긍정적인 면 을 충분히 활용한다. 그 중 서동요에서는 서동을 떠나보내는 어미의 심정 서동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노래 선화를 떠나보내는 진평왕의 심사 등 부 모의 자식에 대한 정을 작품의 주요 테마로 설정하고 서동과 선화의 부부애 및 동 서의 화합을 주요 매체체로 설정, 서동요를 통해 궁극적으로 (무력과 외세의 도움으로 인한 신라의 삼국 통일이 아니라) 한반도가 노래로 먼저 하나 되었음을 노래한다. 전라도 방언 및 경상도 방언을 적극 사용하며, 지명 및 나라의 이름, 도시의 이름 등을 당 시대에 걸맞게 사용, 고대의 흥취를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전래 놀이와 민요, 수수께끼 등 전통적인 소재 역시 적극 활용한다. 4구체 향가 서동요는 허용 가능한 범위에서 확대해보고, 다양한 이본을 제시하 며 여러 형태로 불려졌음을 밝힌다. 바. 각 대목의 내용 및 주제 예시 1부: 백제 땅 금마저 장터에서 마를 파는 서동 / 마의 특징 및 효능(마에 대한 다양한 사설) / 전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아니리 / 시대적 배경에 대한 언급(삼국) / 삼국 중 백제는 / 익산과 서동요 / 서동요에 대한 다양한 이론 및 설화 2부: 마 캐는 소년, 마동 서동의 탄생과 성장 / 서동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 / 나무를 해오며 부르는 노 래(익산아리랑) / 출생의 비밀을 듣다 / 너는 용의 아들 / 서동, 용을 만나다 / 서동을 바라보는 용의 마음 / 서동을 떠나보내는 어미의 심정 / 신라로 가 는 서동(백제에서 신라에 이르는 길) 3부: 밤에 몰 안고 가다 삼국 중 신라는 / 신라 진평왕 평화로운 시대 / 머리를 깎으며 다짐하는 서동 /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 / 신라에 도착한 서동 / 아름다운 선화공주 / 홀 로 노래를 부르다 선화공주의 심성 / 노래 퍼지다, 바람결에 들리는 노래 /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217

219 신라왕실의 혼란 4부: 서동, 선화를 만나다 쫓겨나는 선화 / 진평왕, 아비의 씁쓸한 마음 / 딸을 떠나보내는 선화 모( 母 ) 의 슬픔 / 서동, 선화와 만나다 / 서동과 선화의 다짐 5부: 영원한 평화를 노래하다 서동과 선화의 부부애 /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는 삶, 21세기 부부의 도 / 무 왕 즉위 및 업적 / 무왕과 미륵사 창건 / 영원한 동 서의 화합 8.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의 문제점 익산은 전라북도 최고의 교통요지며 호남고속철도의 입지로 발전가능성이 높다. 특히 21세기형 모델인 (전통)문화, 관광, 여가와 관련된 지속가능한 발전이 가능한 곳이다. 고도 육성사업, 미륵사지 관광지 개발, 미륵사지 복원사업, 왕궁리 발굴, 보 석박물관, 보석테마공원, 웅포골프장 등이 그 한 예다. 그러나 스토리텔링을 문화관 광에 활용해 고도 익산에 걸맞은 프로그램을 갖추고 세계적인 문화관광 도시로의 도약 을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한 조건이 있다. 스토리텔링에 있어서는 사리장엄의 발견에 따른 서동설화 다시 쓰기다. 문화콘텐츠는 시와 소설, 수필과 희곡 등 이야기 예술에서 시작된다. 문학텍스트는 방송과 영화, 컴퓨터 게임, 애니메이션, 웹 콘텐츠, 모바일 콘텐츠, 박물관, 테마파 크, 축제 등 문화산업의 장르를 확장하며 기본 콘텐츠로서 활용되고 있으며, 그 의미 와 기능과 효과를 다시 생산해 내고 있다. 문화콘텐츠는 예술작품으로 생산되고 쓰이면서 그 영역의 확대를 꾀한다. 익산의 고도 백제사는 서동요 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동요 의 배경은 경 주시와 익산시이며, 노래가 불린 곳은 경주이기 때문에 아쉬운 점이 있었으며, 서동 요 가 가진 동요적인 특징으로 작품 역시 성인극으로 만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 러나 어린 서동이 아니라 성장한 무왕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고, 시집 온 선화공주가 백제 땅에 적응해 가는 과정 혹은 시집살이도 주제가 될 수 있었지 만, 좀처럼 시도되지 않았다. 2009년 1월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과정에서 금제사리봉안기 가 발견되면서 미륵사 라는 절의 창건 주체 시기 내력에 대한 혼란을 초래했다. 금제사리봉안기 의 기록은 미륵사가 백제 무왕(재위 ) 때인 기해년(639년)에 왕후가 창건한 것 임을 알려준다. 무왕의 왕후도 서동요 의 주인공인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인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백제 서동왕자와 신라 선화공주 간의 21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20 사랑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설화로 판명된다. 따라서 좌평( 佐 平 ) 사택 적덕( 沙 宅 積 德 )의 따님 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추가된 만큼 전혀 새로운 이야기 혹은 기존 이야기의 빈틈을 메울 수 있는 이야기들로 구성된 제2의 서동요 제작이 필요 하다. 사리봉안기의 핵심은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왕후가 자신이 무왕의 왕후가 된 것을 부처님의 공덕으로 돌리고, 이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며 사리신앙을 드러내 고 있으며, 그 봉안할 장소(서탑)을 마련해 기해년(639년) 정월 29일 이를 봉안했다 는 점이다. 그림 99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 백제는 553년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한 후 신라와 적으로 갈라섰다. 그리고 무왕은 백제의 왕 중 신라와 가장 많은 전투를 행 한 왕이다. 그 목적이 내부세력의 규합 또는 왕권강화를 위한 방편 등 다양하지만 결론적으로 선화공주가 신라 진평왕의 딸이라고 전제 한다면 무왕은 장인어른과의 전투를 진행한 것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적지 않다. 그러나 아직까지 학 계에서는 다양한 이견들이 존재하고, 각계의 의견마다 수긍할 점이 있기에 명확한 사실을 알기는 어렵다. 따라서 역사학의 관점보다 문학의 시각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의 발견은 전 국민이 백제의 역사에 한층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된 긍정적인 면이 더 많다. 익산이 관광을 앞세운 도시로 발전하기위해 필요한 것은 기반시설 확충이다. 숙박 시설의 빠른 대안은 주민들의 민박사업 등이 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장기적인 대 안이 필요할 것이다. 숙박시설의 부족은 고도 익산 지역의 밤 문화 실종으로 연결 된다. 관광의 상징은 밤의 흥성거림인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마룡지 용샘 등 정비되지 않은 관광지에 대한 빠른 점검과 관리도 요구된다. 낡고 삭은 시설들과 거칠고 어둡고 지저분한 관광지는 금세 외면당하고 만다. 익산학 정립과 익산의 종합브랜드 발전계획이 필요하다. 익산의 역사, 문화, 전통 제3장 스토리텔링의 문화관광 활용 방안_최기우 219

221 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지원을 확대해 익산의 종합적인 문화상과 정체성을 보다 세밀 하게 정립해야 한다. 이를 통해 역사, 전통, 보석, 돌, 서동, 축제들을 통합하는 익산 의 종합브랜드이미지를 정립해야 한다. 이는 풍부한 지역문화의 부활, 도시정체성 확 보, 시민의 자부심 확대, 도시마케팅 효율화, 그리고 대국민 이미지 각인에 도움이 된다. 이는 백제문화의 종합적 활용계획 수립으로 이어져야 한다. 미륵사지, 입점리, 보석, 돌, 서동 등 백제의 귀족문화와 연계된 자원을 더욱 발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종합계획이 필요하다. 전문가 시민들의 적극적인 프로그램 참여도 요청된다. 아무리 좋은 스토리텔링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행정과 시민의 변화와 적극적인 참여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문 화행정의 효율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문화행정에 문화직렬을 활용하고 이것이 불 가능하면 실무책임자를 문화전문가로 공채하여 활용하는 것이 좋다. 각 사업들을 준 비하고 진행하는 모든 과정에서 각각의 전문가들을 꼭 참여시키고 전문가들이 적극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익산문화재단의 역할을 확대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문화정책의 시민참여를 확대해 문화정책의 결정과정에 다양한 의견수 렴을 가능하게 하고 인터넷 여론수렴 및 공청회를 통해 시민의 다양한 의견개진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22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22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 김병용 (작가) 1. 가장 먼 곳에서 온 이가 가장 많이 안다 : 선사시대 이야기 1) 땅은 넓고 사람은 많지 않았던 시절, 인류의 대이동이 시작되다 까마득한 옛날, 최초의 인류가 아프리카 지역에 출현했다고 한다. 가혹한 자연 환 경에 맞서고, 경쟁 관계에 있던 수없이 많은 동물들과의 생존 경쟁을 이겨내는 과정 은 인류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시간이기도 하다. 케냐피테쿠스, 오스트랄로피테쿠 스, 호모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등 우리가 그 존재를 정확히 규정할 수 없을 만큼 수 많은 인류의 직계 혹은 방계 조상들 사이에서도 적자생존의 내부 경쟁 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학자들은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호모 하빌리스), 직립한 인간(호모 에렉투스),생각하는 인간(호모 사피엔스), 더 똑똑한 인간(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등의 이름으로 나누어 분류하기도 한다. 다른 동물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뒤로 인간들은 더욱 치열해진 내부 경쟁 속에서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를 경험하였으며, 직립하였으므로 더 먼 곳을 보고 보이지 않 는 곳까지 상상하게 된 인간의 숙명적 욕구에 의해, 마침내 인류의 대이동이 시작되 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나온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대략 100만 년 전에서 50만 년 전 사이에 아프리카를 출발한 인류의 조상들은 유라시아의 분기점이 되는 코카서스산맥 근처에 서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어 동진과 서진을 거듭하였다고 한다. 이런 사이 인류는 자연 환경과의 친화 속에서 점차 흑인, 백인, 황인 등으로 나뉘게 되었다고도 말한 다. 이와 같은 고고학적 가설이 맞는 것이라고 한다면, 최초 소수의 인류는 이 광대한 지구의 구석구석에 펼쳐진 갖가지 위험을 향해, 위대한 도전의 여정을 시작한 것이 었으며 이런 과정을 통해 마지막으로 정착한 지역에 새로운 적응을 했다고 할 수 있 다. 현재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선사 시대 우리 인류의 조상들은 수 백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21

223 만, 수 천 만 아니 수 십 억 이상의 여행 궤적을 이 지구 표면 위에 남겼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인간의 수명은 100년도 채 되지 않았고, 지구의 너무 넓었다. 어 느 곳은 추웠고 어느 곳은 더웠으며 어느 곳은 너무 산과 바위가 많고, 어느 곳에서 는 거대한 파도가 길을 막았고, 또 어떤 곳은 온통 모래 천지였다. 그 많은 곳에 마 침내 자리 잡기까지 할아버지가 한 발자국을 걸어 나가면 아버지가 뒤이어 또 한 걸 음을 더 했고, 아들이 터전을 일궜다.인류는 그야말로 우공이산( 愚 公 移 山 ) 속의 우 공들이었거나 혹은 움직이는 산 그 자체였다. 2) 인류의 대이동이 불러온 인류의 지적 발견 이와 같이 누대에 걸쳐 전진과 개척이 진행되는 동안, 어떤 식물이 먹을 만한 것 인지, 어떤 동물을 특히 조심해야 하는지, 인간의 매번 조심하고 시험해보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고, 이와 같은 긴장감이 인류 진보의 또 다른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인류가 생물학적인 변화나 진보만을 겪은 것은 아니었을 것 이다. 구석기, 신석기 등으로 이어지는 인류의 거대한 지적 혁명이 인류의 이동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말하자면, 인류는 이동함으로써 스스로 발견하는 인간, 스스로 똑똑 해지는 인간의 길에 자신도 모르게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수 십 만 년에 걸친 이동 기간 동안 인류는 늘 미지의 세계를 향한 발걸음을 옮겨 야 했고, 그때마다 선택을 해야 했다. 어느 방향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누구와 함께 갈 것인가, 얼만큼이나 갈 것인가? 앞날에 대한 희망과 기대 없이 길을 나설 사람은 없다. 여기보다 저기가 조금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속에 길을 나서지만 대개 마주치게 되는 것은 낯선 환경 속에서 추위에 떨고 배고픔에 시달리는 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류는 그동안의 걸음을 통해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더 멀리까지 나아간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강건하게 자신을 단련 한 사람들이며, 참을성이 많고, 자신 앞에 닥칠 여러 가지 도전에 대해 생각이 많은 사람들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동성을 유지하면서도 서로를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집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람들이다. 함께 길을 걷는 동료와의 유대, 진로 를 결정할 때마다 마주치게 되는 다양한 의견들의 조율, 결정이 내려졌을 때 필요한 과감한 추진력 등에 대해서도 인지하게 되었다. 길잡이가 필요했고, 길잡이에게는 밝 은 눈과 결단력이 요구되었으며, 무리에게는 길잡이에 대한 신뢰와 결정을 따르려는 자발적 의지가 있어야 했다. 또한, 유한한 생명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기억과 기억의 전승의 소중함도 깨닫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어떤 실수를 했는지, 손주가 알고 있어야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 지 않는다. 매번 모든 일을 당대의 감각만으로 즉흥적으로 처리해서는 똑같은 삶이 22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24 반복될 뿐이었다. 또한, 먼 곳을 향해 나아갈 때 그 길을 기억해야 다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마침내 당도한 곳이 도저히 사람 살 만한 곳이 아 니라면, 또 다른 여정을 계획해야 할 터 자신이 알고 있는 안전한 터전으로 귀환 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도 중요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렇게 언어의 필요성과 효용성에 눈을 뜨게 되었을 것이다. 또, 각각의 지역에 자리 잡은 서로 다른 무리가 서로 다른 의사소통 체계를 갖고 있었다 고 가정하면, 서로 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 교환이나 통역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도 어느 시점에서는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옛 어른들이 먼 곳을 이야기할 때 구역( 九 譯 )의 땅 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이런 데 있다. 인류의 확산과 정착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인류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낯선 동 식물과도 만나야 했지만, 차츰 서로 분화해가는 또 다른 인류의 낯선 언어 체계와도 만나야 했다. 조금 쉽게 이해되는 언어도 있는가 하면,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가 되지 않는 언어도 있었을 것이다. 낯선 이들을 만났을 때 생존을 위한 최소한 조 건-호의적 환대, 음식, 잠자리 등-을 요청하려면, 여행객은 자신이 적의를 갖고 있지 않음과 더불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언어 행위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처럼 낯선 언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동질성을 유지한 정착 집 단이 동시다발적으로 지구상의 여러 곳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유목민의 세상이 요즘 말로 하자면 세계주의적인 태도를 요구한다면, 정착이란 근본적으로 민족주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여행이란 여러 집단, 여러 민족, 여러 개의 국경을 가로지는 일일 수밖에 없고, 그 국경의 경계에는 의당 언어의 장벽이 존재했다. 우리 민족어 전체를 알타이 어족 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는데, 이는 곧 우리 조 상들의 이동 경로가 중앙아시아에서 몽골로 이어졌다는 것의 반증이다. 3) 가장 오래 걸어온 사람, 튼튼하고 현명한 인류가 한반도에 도착했다 한반도 지역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있다. 인류 대이동설을 그대로 받아들 인다면, 우리 조상은 인류의 어떤 조상보다도 더 많이 걸어온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한반도에는 인류의 대이동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50만 년 전 전후에 최초의 인류가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마침내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도달한 한반도 최초 인류들은 인 류 대이동을 가장 마지막에 완성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중간 중간에 정착한 다른 인류보다 훨씬 더 호기심이 왕성한 이들이었고, 낯선 곳에 대한 자신들의 호기심을 뒷받침할 만큼 충분한 체력을 소유한 이들이었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23

225 다. 아침에 해가 뜰 때마다 해가 뜨는 저 먼 쪽은 어디인가, 궁금해 했고, 궁금함을 오직 자신의 두 발로 해결하려 한 이들이 곧 우리의 직계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가장 오랫동안 세대에 세대를 이어 여행을 지속해왔기에 이들은 그들이 거 쳐 온 여정의 길이만큼이나 축적된 지식의 양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많은 기 억의 보유자들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이다. 옛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기억을 후대에 전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발견되는 몇 가지 인류학적 발견에 비추어 유추하는 수밖에 없는데, 오 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인 애보리지니(Aboriginal)의 경우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조상들로부터 축적된 모든 기억을 노래에 담았다. 이를 노래의 길(Song line) 이라고 부르는 바, 조상들은 자신들이 걸어오며 만난 바위, 나무, 계곡과 산등 성이에 대한 기억을 모두 노래에 담아 후세에게 전승했다. 후손들은 자신들이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로부터 배운 노래를 길잡이 삼아 자신들의 영역 바깥까지 나갈 수 있었다. 험상궂은 나무, 곰 같은 바위, 검은 물 등과 같은 노래 가사를 통해 자신들 이 아직 가보지 않은 곳까지 머릿속에 지도로 간직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 길을 꿈 꾸듯이 걷는 길(Dreaming-tracks) 이라고 하거나 조상들의 위대한 족적 (Footprints of the Ancestors) 이라고 불렀고, 이를 자신들의 여정과 현재 영역과 삶까지 규정하는 일종의 정해진 법도(Way of the Law) 로 소중하게 간직했다. 오랜 시간, 여행을 하며 자연만물과 나눈 대화와 그에 대한 기억을 이와 같은 방 식으로 간직한 경우는 이들 외에도 우리와 좀 더 가까운 혈연적으로 가깝다고 여겨 지는 몽골리안 계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에도 이제 많이 알려진 몽골의 노래 흐미(Khoomei)는 중앙 아시아의 유목민 들의 노래 전통으로 자신들이 마주치게 되는 하늘과 땅, 구름과 바람은 물론 늑대와 양 모든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으며 그들과 교감을 나누기 위해 부르는 노래로, 그 노래 안에는 자연히 이들의 우주관과 세계관, 즉 그들의 인문지리적 지혜가 담겨 져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중앙아시아의 서쪽 끝에 해당하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키르키즈스탄에서 천 년 넘게 구술 전승된 것으로 유명한 마나스(Manas) 영웅 서사시는 8대에 걸친 영웅들의 이야기가 지금도 열 시간 넘게 연행되는 대하 서사시로 유명하다. 하나의 집단이나 종족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긴 시간이 소요되고, 또 이와 같은 방식의 정체성 확인을 위한 서사시가 필요한 모양이다. 세계 최초의 서사시라고 하는 수메르 지역의 길가메쉬(Gilgamesh) 이야기 또한 몇 몇 영웅으로 압축 상징된 인류의 고된 여행과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깨달음을 다룬 노래로, 이와 같이 오래 된 서사시들은 인류의 집단지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에게는 선사 이전, 우리 조상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문 22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26 헌이 남아 있지 않지만, 기록이 없다고 하여 그 흔적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 大 韓 民 國 )이란 국호는 이를테면 삼한정통설( 三 韓 正 統 說 )을 반영한 국가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누천 년 동안 고(구)려( 高 句 麗 ), 조선( 朝 鮮 )과 함께 한 이라 이름을 특별하게 생각했다. 한반도에 존재했던 국가의 칭호에 이 세 가지 이름은 여러 차례 사용되었다. 한자로 표기가 되어 그 뜻은 명확치 않으 나, 한 은 부족의 명칭이기도 하고, 밝다, 크다 와 같은 뜻을 담았거나 중앙아시아 여러 부족과 국가에서 지도자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된 칸(Khan, 汗 )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많은 이들이 추정하고 있다. 한( 韓 ) 이란 한자에 담긴 뜻 또한 이른 아 침( 早, 朝 ) 높이 휘날리는 깃발( 韋 ) 이나 한 군데 모여 있는( 阜 ) 결속력 강한( 韋 ) 집 단 등으로 풀이된다. 이설이 있긴 하지만, 현재의 익산 지역에 최초로 등장한 정치군사적 집단체를 마 한( 馬 韓 ) 이라고 우리는 기억한다. 이처럼 이제는 그 이름만 희미하게 남았지만, 마침내 이곳에 자리 잡은 우리의 직 계 조상들이 이 땅을 어떻게 생각하고 표현했는가, 혹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다 른 이들은 뭐라고 불렀는가에 대한 단서는 이와 같이 남았다. 해가 뜨는 아침의 땅, 빛나는 사람들, 빛나는 아침의 땅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정 도가 한반도와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최초로 만들어진 역사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4) 새로운 이야기의 길 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는 이제 형해화( 形 骸 化 )된 역사적 파편을 통해, 이 땅에 처음 뿌리 내린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를 노래해야 한다. 비밀의 시간 저 너머 그 두터운 시간의 벽 저 너머에 지금 이 땅에 사는 우리 조상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남긴 것은 몇 천 년 동안 땅 속에 파묻혀 있던 돌멩이 몇 조각이거나 무덤이거나 판축( 版 築 )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 집터나 성터와 같은 것 들 혹은 시간에 의해 마모된 탑이거나, 그 탑 속에 복장( 腹 藏 )되어 있던 사리장엄 같 은 것들이다. 많지는 않지만, 이만하면 충분한 단서들이 우리에게 전해진 셈이다. 후손인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왜 그때 그 사람들은 이것을 남겼을까, 묻고 그 대 답을 위해 고민하고, 그 고민의 결과들을 종합하여 역사문화적인 이야기(Historical Narrative)를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익산은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한반도 서남부의 주요한 정치 군사 문화적 거점이었 다. 그만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살았고, 많은 사연들을 남겼다. 다만, 마한-백제- 보덕국-후백제 등으로 이어진 익산 거점의 정치 집단이 당대의 권력 투쟁 속에서 패 배함으로써 보다 더 많이 남아있을 수도 있었던, 과거의 흔적이 대부분 망실되었다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25

227 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시간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모든 것은 변화한다. 삼국 전쟁의 군사적 승자 는 신라였지만, 후대인들은 고구려와 백제를 신라만큼이나 중요하게 오랫동안 기억 하고 있으며, 그 기억에 유물이나 기록의 개체 수가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아 니다. 고구려와 백제를 기억하는 이들의 마음속에서 이들의 패배는 역사적 사실일 뿐, 역사적 감성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를 묻는다는 것은, 곧 현재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 확인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과거의 어느 시대를 기억하는가, 어떤 인물을 자랑스러워하는가 그게 곧 우리가 스스로 규정하는 우리의 정체성이다. 익산은 어떤 곳인가? 익산에 처음 자리 잡은 선조들, 익산에 살면서 역사에 등장 했던 조상들은 누구인가 묻고, 그렇게 찾아낸 문화적 담론들을 통해 우리는 지금, 여기 익산 을 둘러싸고 있는 유무형의 오래된 미래의 기억 을 복원하고 이를 새로운 무형문화유산의 형태로 당대와 공유하고 후대에 전승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까지 대를 이어가며 살아온 인류의 역사적 생존 방식이다. 과거를 기 억하고, 과거를 현재 속에서 되살려낼 때 그곳에서 새로운 미래가 또 꽃을 피운다. 과거의 기억을 고고학적 유물로만 한정한다면, 우리에겐 박물관이나 전시관만이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살아온 삶은 박물관 안의 박제로만 한정되기엔 여 전히 생동적이다. 과거에 현재가 더해지고 거기에서 다시 미래가 싹을 띄우는 일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우리 당대의 삶 또한 우리 조상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여기에 하나의 나이테로 새겨지고 있는 중이다. 수십 만 년 전부터 이 땅을 향해 걸어온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여기 살았고 지금 은 우리가 산다. 그 사이에는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긴 시간의 장벽이 존재한다. 한 사람, 한 시대로서는 뛰어넘을 수 없는 길고 긴 시간이 다. 이를 왕조 교체 중심의 시대사를 중심으로 받아들이면 그 긴 시간 사이에는 훨 씬 더 많은 격벽이 존재하고 각각의 시간들은 그 속에 갇혀 고여 있게 마련이다. 또 한, 왕조의 영토 전쟁 당시의 국경을 지금의 휴전선과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우 리들의 공간적 상상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이룩한 문화는 정신 문화, 제도 문화, 물질 문화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거대한 매트릭스 라고 할 수 있다. 언어와 종교, 이념, 예술과 같은 관념적 활동의 총체로서 정신 문화, 민족과 집단 의 삶의 방식으로서 가족이나 혼인 제도, 자본주의나 민주주의 혹은 법률과 규범 등 으로 구체화된 제도적 문화, 건축적 양식이나 의복, 식생활 양식 등을 통해 구현되는 물질 문화가 그것이다. 이중, 구체적인 흔적으로 남아있는 생활 양식의 파편을 통해 우리는 선조들의 정 신적 활동과 그들이 구축한 제도의 모습을 추론할 수밖에 없다. 짧은 수명을 가진 인간들은 대를 이어가며 유한성을 극복하는 인간의 시간 으로, 22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28 무한광대한 자연의 시간 을 조금씩 관리하기 시작했다. 문화란 그 인간의 시간 이 잉태하고 낳고 기른 아들이며 딸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민요는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 불렸는지 우리는 감히 짐작하지 못 한다. 하지만, 유래가 불분명하다 하여 오래 된 민요에 담긴 조상들의 정서가 정말 조상들 의 정서인지,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도 그 노래에 감동하기 때문이다. 아리랑 은 조 상들의 아리랑인 동시에 우리들의 아리랑이기도 하다. 대를 잇는다는 것은 이런 것 이다. 마찬가지로, 선사 시대 이 땅에 첫발을 디딘 조상들로부터 지금 여기 사는 우리에 이르기까지, 도도히 흘러오는 문화의 양상이 있다. 책(Text)에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 하는 우리들의 어떤 삶의 맥락(Context) 문학에서는 적층( 積 層 )문학 이라고 하고 요즘에 쓰이는 말로는 집단 지성 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것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 만, 분명히 존재한다. 이야기 말하기(Story-Telling) 의 강조점은 이야기 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말하기 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말한다는 것은 그 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동시에 존 재해야만 성립 가능한, 상호소통 활동이다. 즉, 우리 시대의 상상력으로 과거를 창조 적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동시대적 승인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과거, 특히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역사적 실증은 어려워진다. 당연하다.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의 역사는 오직 유한한 생명을 지닌 인간들이 세대에 세대를 이어 기억으로만 전승해주었기 때문이며,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이야기는 덜어 지거나 더하거나 하는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앞 세대에서 이어받은 이야기를 다음 세대는 창조적으로 수용한 것이며, 또 그 다음 세대에서 새로운 해석과 변형이 일어 나는 것이 문화의 전승 과정이다. 문화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이처럼 변화와 생성의 길을 걷는다. 2. 오래 된 조선, 남녘에 새 둥지를 틀다 : 고조선 시대 1) 처음 조상들은 산기슭에 살았을 것이다 인류의 대이동은 자연스럽게 소규모 집단의 출현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처음에는 혈연을 중심으로 한 가족 단위의 작은 집단이 출현했을 것이고, 이것이 몇 개의 혈 족이 합해진 부족 형태로 커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성장에는 일정한 한계도 분명하게 있었을 것이다. 이동하는 과정에서 수렵 어로 채취와 같은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하는데 있어, 너무 규모가 큰 집단은 기 동력도 떨어질 뿐더러, 식량의 분배 등에 있어서도 서로 동의하기 힘든 고통 분담이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27

229 빈발할 소지가 있었다. 인류의 대이동이 이루어지던 시기, 인류의 도구 사용 수준은 뗀 석기(구석기)를 사 용하던 정도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원시적인 형태의 집단 사냥에 적합한 정도 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한동안 손보다 조금 더 단단한 돌멩이 를 이용해 동물을 잡고, 열매나 과일을 땄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최소한의 생존권 확보를 애쓸 때, 삶의 터전은 평지보다 산지였을 것이다. 나무가 많으면 채취할 과일이나 열매가 많고, 사냥감의 시선을 피하기에도 용이했을 뿐더러 동굴과 같은 천혜의 거처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몸으로 건널 수 있는 정도의 깊이를 가진 개울도 필요했을 것이다. 식수는 물론, 운이 좋으 면 물고기도 잡을 수 있는 곳 이런 곳으로 산등성이와 계곡을 지닌 산 주변만한 곳이 없었을 것이다. 때때로, 고대의 유물이 깊은 산중이나 동굴에서 발견되는 것을 봐도, 인류는 최초 평지보다 산지를 더 좋은 삶의 터전으로 여겼을 것이다. 농경 생활이 시작되기 이전 까지, 너른 개활지는 오히려 자신의 몸을 추위나 더위, 동물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하 기에 적당치 않을 곳이었을 뿐더러 비가 오면 질척거려 이동하기만 힘든, 쓸모없는 땅에 불과했을 것이다. 구석기-신석기-청동기 시대로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반도의 직계 조상으로 여겨 지는 많은 이들이 비교적 북방 산지에 터전을 두고 살았던 것이 이와 같은 연유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한반도에서는 보기 힘들게 되었지만, 산악신앙 은 인 류사에 맨 처음 나타난 원시종교의 한 형식이었다. 산은 땅에서 솟았으되 하늘을 향 하니, 하늘을 우러르는 인간의 마음이 가서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가장자리! 사 람들은 산정 높은 나무 아래 단을 세우고 제를 지내고, 신비한 하늘의 소리를 듣기 도 했을 것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줄기처럼, 사람들은 산 위에서 차츰차츰 산자 락을 향해 퍼져 내려왔을 것이고, 그들 앞에 펼쳐진, 광활한 미지의 개활지를 두려움 에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2) 처음 조선이란 나라가 나타났다 시간이란 생명체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 싹이 나서, 자라고, 크고 마침내 다시 시 드는 과정, 인간의 생노병사에 대한 인식 속에서 할아버지가 죽고 손주가 자라 다 시 할아버지가 되는 과정을 겪는 동안, 사람들은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 었을 것이다. 왜 낮과 밤은 있는 것이며,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은 변화는 또 무엇 인가? 그 사이, 사람들은 왜 늙어가는가? 생명체의 모든 변화를 주관하는 것은 시간이고, 시간은 삶의 영역에 속하며 죽음 이란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라는 인식을 갖기까지 인류는 아주 22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30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든다는 것, 유한한 인간으로선 극복하기 힘든 깨달음 이었을 것이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변화로 인한 망각에 대한 두려움 이 아마도 문자를 만들었을 것이다. 한 생명체가 갖는 기억의 한계도 있고, 자꾸만 커져가는 공동체에 필요한 불변의 규칙 같은 것이 필요해지면서 인간은 문자를 발명 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리 하여, 마침내 우리 조상들의 삶은 책 속에 기록되어 후손들에게 전해지게 되 었다. 우리 조상들이 최초로 결성한 공동체의 이름은 처음 조선, 곧 고조선( 古 朝 鮮 )이다. 이름 앞에 고( 古 ) 가 붙는 경우는 원래 그 이름이 고조선 이 아니라 조선 이었는데, 뒤에 등장한 신( 新 )조선 과 구분하기 위한 것. 우리 한국사에 최초로 등장한 정치군사문화적 공동체, 조선 은 인류사의 발달 단 계에서 이야기하는, 농업 혁명 이후 잉여 생산물 발생 시기 즈음에 등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계급이 발생하고, 조직이 구성되었으며 사후 세계나 조상에 대한 궁금증 등 추상적인 개념이 발생하던 시기 신화 상에서, 첫 조선은 까마득한 옛날에 단군 을 시조로 하여 국가의 형태를 갖 춘 이래, 역사 시대까지 그 왕조가 이어져왔다고 한다. 지금, 아니 고대 왕조 국가와 같은 국가 운영의 형식적 모양을 갖춘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최소한 조선 이란 이름은 생존을 위한 부족 연합 형태에서 우리들에게 민족적 동일성을 부여한 원형임 에는 분명하다. 국가적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대체로 부족 연합체와 같이 느슨한 통제력을 가진 상태로 출발했겠지만, 차츰 차츰 구심력과 원심력을 적절히 행사하는 통치 체제를 갖추어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첫 조선의 강역은 어디서 어디까지였을까? 이에 관해서는 여전히 사계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한반도에 존 재하는 남북한의 강역보다는 훨씬 넓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듯 하다. 만약, 동심원을 그리듯 첫 조선의 지배력이 점차 파급되었다면, 첫 조선 중심 의 역사적 시공간 속에 드디어, 오늘의 익산 땅이 등장할 시점이 다가온 것이다. 3) 그리고, 남쪽 너른 땅에서는 농사가 시작되었다 첫 조선 당시, 현재 한반도 이남 지역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확정적으로 추단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가장 슬기로운 이들이 먼저 농사짓 는 일에 도전했을 것이란 점!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햇빛과 비와 바람, 흙의 성질과 작물의 생육 조건을 적절히 조절하고 관리할 줄 아는, 노련한 농경 전문 지식을 요구한다. 이것은 어느 한 당대 에 취득되는 단순 지식이 아니다. 누대에 걸친 시행착오와 이에 굴하지 않는 탐구심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29

231 이 종합적으로 축적되었을 때에만 발현되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처음 농사일에 뛰어든 이들, 쓸모없는 황무지와도 같았던 너른 들판을 일군 사람들이야말로 당대 최고의 지식과 호기심으로 무장한 이들이었 다. 한반도에 처음 들어온 조상들이 멀고 먼 여정을 모두 감당하며 가장 먼 곳에서 가장 오랫동안 걸어온 이들이었다면, 그 강건한 유전자를 가장 잘 물려받은 이들이 새로운 농업 혁명의 개척자가 되었을 것이다. 신석기 농업 혁명은 21세기가 된 지금까지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류 사 최대의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지속적으로 유목 생활을 유지한 이들도, 현재까지 소수 남아있지만 대부분의 인류는 농경 생활과 함께 정착 생활에 돌입했다. 뒤이어, 축력의 이용이나 관개 수리 시설의 확충, 쌀 농사의 경우 밭벼를 뛰어넘는 생산성을 안겨주는 논벼의 재배 등으 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하면서 농업은 인류의 생존에 안정감을 안겨 주기 시작했고, 부의 축적이나 계급의 발생 등의 사회 경제적인 현상으로 이어졌다. 정착 생활은 이후 인간의 문화 제반 활동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협동을 통한 공 동 경작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인간의 공동체는 더욱 효율적인 조직 구성, 조직 관리의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이와 같은 변화는 단지 외적 형식의 변화 만이 아닌, 삶의 내용 그 자체를 규정하는 세계 인식의 거대한 틀로 작용하기 시작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 사람과 초자연적인 것들과의 관 계, 한 개인과 그가 속한 조직과의 관계 등을 생각해야 했고, 그 관계망의 총합으로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세계관이 등장하게 된 것이 농경 정착 생활이 가져온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개인보다는 가족이, 가족보다는 더 큰 집단을 자신의 확장된 자아로 인식하는 경향이 생기고, 거기에 강한 소속감을 갖게 되면서 인류의 생활상 이나 세계관은 영구히 변화하게 되었다. 공동체적 생활 양식은 공동체적 세계 인식으로 확장되었으며,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관습과 도덕률이 발생하였는가 하면, 교환과 경쟁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 행위 도 인류의 생활에 깊숙이 파고들게 되었다. 직업은 더 복잡하게 분화하기 시작하였 고, 역할의 분담을 강제하고 유지하기 위한 계급 제도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정교 한 규정력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인류사의 거대한 변화는 모두 농경 정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농경 생활의 규모가 커질수록 변화의 속도에도 가속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선사 시 대 인류의 대이동으로 시작된 한반도의 변화는 농업 혁명을 통해 또 다른 변화로 이 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익산 일원은 한반도의 중요한 거점 지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익산은 한반도 최대의 곡창지대의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한 반도는 동고서저의 특성을 지닌 산악 지형이다. 평야부는 30% 정도에 불과하며, 큰 23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32 평야 지역은 한강, 금강, 동진강, 섬진강, 영산강 하계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내포 평야를 지나 논산평야, 대야 평야, 금만평야, 나주평야로 이어지는 충청 호남 평야는 한반도의 대표적 곡창지대라 할 수 있다. 지금은 미곡 생산지 정도로만 여겨지지만, 역사 시대 이래 이 지역은 영토를 둘러싼 각축전의 현장이었고, 서해를 통한 중국과 의 교류 거점이기도 했다. 익산이 갖는 지정학적 중요성, 인문지리적 특성이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첫 조선의 중앙 권력에 변화가 생긴 때부터였다. 4) 중국에서는 전란이 끊이지 않고, 위만의 고민은 깊어진다 오랜 기간, 만주와 한반도 지역의 정치문화적 거점이었던 처음 조선은, 마치 이집 트의 고왕조-중왕조-신왕조와 같이 오랜 기간 통치 집단 내부의 변화만이 있었을 뿐, 느슨하지만 안정적인 통치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증하기는 쉽지 않지만, 처음 조선의 역사는 2,000년 가까이 지속된다. 47위 혹은 74대에 걸쳐 여러 단군이 조선의 강역을 통치했다는 말도 있다. 또, 중국 사서 등의 영향으로 인해 기 자( 箕 子 )조선이나 위만( 衛 滿 ) 조선과 과 같은 논쟁도 말끔하게 정리되진 않았지만, 이 긴 시간 동안 조선(쥬신), 동이, 배달, 예맥 등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초기 민족의 집단적 정체성이 배양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 사이, 조선과 서쪽으로 국경선을 맞닿아 있던 중국에서는 신화와 전설의 시 대를 지나 춘추전국시대의 군웅 할거 시기가 있었고, 진-한으로 이어지는 통일 왕조 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갖춘 통일 왕조의 등장은 첫 조선에 도 여파를 미치기 시작했다. 때는 B.C. 220년 무렵, 그때 조선의 통치자로 새로이 준왕( 準 王 )이 등극했다. 그 전 해인 B.C. 221년엔 오랫동안 혼란에 빠져 있던 중국 땅에서 진시황이 천하 통일을 선포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 왕조를 수립했다. 이로 인해 새로운 변화의 긴장 된 조짐이 아시아 전역을 휩싸기 시작했다. 그동안 중국은 강력한 세력이었던 전국 칠웅이 다투는 사이, 100여 개에 이르는 소국들이 우후죽순처럼 발호하던 때였다. 또, 진시황에 의해 통일 왕조가 들어섰다고 하지만 분서갱유 나 만리장성 과 진시 황릉 의 건설 등으로 상징되는 가혹한 철혈 통치로 인해 유랑민이 속출하고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혼란스러웠던 이 시절에, 동북방 지역에는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안 정된 정치 체제를 이루고 있던 첫 조선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전란의 불길을 피해 중국으로부터 다양한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왔고, 이로 인해 조용하던 조선 땅도 점 차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사를 꿈꾸며 최초의 통일 제국을 건설했던 진시황이 죽고 난 뒤, 중국은 금세 다시 전국 시대와 같은 혼란기로 접어들었으며, 유방과 항우의 본격적인 초한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31

233 쟁패기(B.C )가 이어졌다. 전란이 계속되면 고단한 것은 언제나 민중들의 삶 중국에서 밀려드는 피난민과 망명객들의 숫자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였다. 준왕은 이들을 위해 중국과 가까운 서 북 국경 지역에 거처를 제공하였고, 이게 또 소문이 나면서 더 많은 전재민들이 몰 려들기 시작했다. 이웃의 아픔을 어찌 외면하겠는가, 조선 사람들은 중국 전역에서 몰려온 피난민들 이 전란이 끝난 후에 고향에 돌아갈 때까지,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편의를 제 공했다. 이렇게 하여, 중국과 조선의 국경 지역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살 며 자연스레 문화 점이지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땅과 노동력이 국부의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던 시절인 것을 감안하면, 그동안 잠 잠하게 평정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조선에는 이주민들의 유입과 그들과 함께 들어 온 이국적 요소들로 인하여 경제와 문화에 있어 활기가 도는 동시에 조금 소란스러 워지기도 했을 것이다. 이처럼 피난처를 찾아 조선으로 흘러 들어온 이 중에 위만( 衛 滿 )이란 이가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위만이란 인물은, 한고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 개국 공신들 에게 분봉( 分 封 )을 하는 과정에 연( 燕 )나라의 왕으로 책봉 받은 바 있는, 노관( 盧 綰 ) 의 휘하 장수였다고 한다. 그의 상관인 노관은 유방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동네에서 태어난 친구로, 유방과 함께 전쟁터를 누비다가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나, 토 사구팽 의 일화로 유명한 한신 등의 좌천과 몰락을 지켜보면서 불안해 하다가 B.C. 195년 죽마고우였던 유방마저 죽고 여후( 呂 后 )에 가 정권을 장악, 급속도로 조정이 여씨 천하가 되는 과정 속에서 피의 숙청을 미리 피해 흉노에 귀부해버린 인물이다. 자기가 모시던 상관이 한나라를 등지고 흉노의 사람이 되자 위만은 더 이상 한나 라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힘든 지경이 되었을 것이다. 천하의 주인이 된 유방과 그의 처 여후가 전제 권력을 움켜쥐기 위해 충신과 맹우 를 저버리고 도륙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위만은, 난세를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숱한 고민을 했을 것이고 자기 나름의 처세술을 읽히기도 했을 것이다. 또, 전국 시대-진시황의 폭정-초한 쟁패-유방의 숙청-여씨의 난 등, 중국 내 통일 왕조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벌어진 수없이 많은 죽음을 목도하면서 그 또한 난세를 살아가는 힘없는 백성들의 삶이 무엇인지 많은 생각을 하며 살아나왔을 것이 다. 이처럼, 전쟁과 전쟁보다 더 잔혹한 이전투구의 권력 투쟁의 현장을 피해 위만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조선을 향한 것이다. 그는 조선에 들어올 당시 조선인의 상투를 틀고 조선 복장을 하고 있었다고 하며, 그를 따르는 천 여 명의 무리를 함께 이끌고 들어왔다고 한다. 조선에 귀순하겠다는 뜻을 복색을 통해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3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34 그가 이끄는 무리에는 진나라 이전 각국 출신으로 떠돌이 무사가 된 이들도 있었 고, 지금처럼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딱히 원래 어느 나라 소속이라 고 말하기 힘든 유랑민들도 섞여 있었다. 말하자면, 위만은 전국시대 말엽부터 초한쟁패기 동안에 여기저기서 자연발생적으 로 조직된 유맹( 流 氓 ) 집단의 지도자였을 것이다. 한고조 유방이나 그의 상관이었던 노관이 그랬고, 진의 몰락을 불러온 농민반란군의 지도자 진승이나 오광 역시 유맹 집단을 이끌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이었다. 아마도, 위만은 오광과 진승, 유방 과 노관의 봉기 과정을 지켜보며 자신 또한 그들과 같이 중국 천하의 새로운 패자로 떠오를 야심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격렬한 생존 투쟁의 과정에서 패잔병 을 이끄는 신세로 몰락한 몸 그는 지친 몸과 마음을 의탁할 곳을 찾아왔다는 뜻을 준왕에게 허심탄회하게 고백했을 것이다. 뜻밖에도, 준왕은 위만의 지휘력을 높이 샀고 그를 우대했다. 몰려드는 유민들로 인하여 번잡한 국경 지대는, 이제 막 중국을 재통일한 유방의 한나라와의 국경 획정 문제로 분쟁의 소지가 높아지고 있었다. 중국 천지를 떠돌다 여기까지 흘러 들어온 위만의 경력이 조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위만의 입장에서 보자 면, 그에게는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마 처음 위만은 준왕의 후대에 감격하고, 피 비린내가 진동하는 중국과는 달리 화평한 조선의 땅과 인심에 흠뻑 매료되었을 것이다. 새롭게 주어진 삶의 터전에 감 사하는 마음이 큰 만큼, 조선 풍광이 새롭게 자신의 마음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자리 를 잡기 시작했을 것이다. 왜 이렇게 낯설지가 않은가? 중국 땅에서 태어난 위만은 어린 시절, 자신들의 조상은 모두 조선 땅에서 조선 사람으로 살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전 국 시대가 되고, 각자 영토와 군사 확보에 혈안이 된 전국칠웅들의 군비 경쟁이 과 열되던 중에, 한가롭게 살던 조상들이 어느 날 기습한 연나라 군대에 포박되어 중국 땅으로 끌려들어갔다는 이야기 모두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처음 보는데도 낯설지 않은, 오래 된 고향 땅에 돌아온 것 같은 푸근함이 위만을 감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살아온 자신의 내력이 문제였다. 조상들의 땅에서 지친 심신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위만의 마음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의심과 불안이 그에게 평안과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에 따라 국경 수비를 하는 동안, 그는 전국 시대에서 살아남은 자의 본능적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을 깨달았다. 우후죽순처럼 기치를 들고 일어난 야심가들 사이의 합종연횡, 그리고 배신과 모략이 횡행하던 중원의 모랫바람은 없었지만, 위만의 핏줄기 속에는 여전히 모랫바람이 윙 윙거리고 있었던 것. 여기 조선 사람들은 너무 착했고 조선은 너무 태평했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바람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33

235 은 결국 문 앞에 당도하게 마련 한 왕조의 성립으로 전란은 종식되었다고 하나, 중국 땅에서 일어난 피 바람은 미친 칼바람이 조선을 향해 곧 달려들게 뻔했다. 침략과 약탈 역사는 영토 확보 전쟁의 시기로 돌입하고 있었다. 한 번 불붙기 시작한 탐욕은 걷잡을 수 없었다. 전쟁과 침략에 익숙해진 군대를 가진 한 나라와, 여전히 통일 왕조에 저항하고 있 는 각종 무장 세력들이 창궐하고 있는 시기 조선의 운명은 결국 세계의 변화와 함 께 할 수밖에 없었다. 준왕의 자신에 대한 신뢰가 깊어질수록, 자신의 조선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사람들과 친해지고 기후와 음식에 익숙해질수록 위만의 고민은 깊어갔다. 조선은 2,000년 이상 지속된 국가. 이제 중국에서는 영원히 사라진 채 중국 사람 들의 머릿속에만 남아있는 오래된 기억, 주( 周 )나라를 연상시키는 나라가 조선이었 다. 조선의 강역 내에 있는 크고 작은 집단들은 왕을 구심점으로 느슨한 정치 연합체 를 이루고 있었다. 각자의 자치적 역량을 바탕으로 서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오순도 순 사이좋게 나라를 운영하고 있었다. 불화와 불신, 배신과 모략으로 중국에서 사라 져버린 꿈의 공동체가 이곳 조선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게 위만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전쟁을 모르고 평화를 사랑한다. 자신의 귀순 때 보여준 것처럼, 남을 의심하기보다 반기는 사람들이 여기 조선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조선의 바깥 상황은 어떤가 위만이 거주하는 곳은 조선과 한나라의 접경 지역인 상하장( 上 下 鄣 ). 국경이란 개 념조차 없었을 때부터 조선 사람들의 땅이었지만 연나라 사람들이 여기 일방적으로 금을 그어 자신의 땅이라고 우기다가 중국 천지가 다시 혼란스러워지니 유야무야 다시 조선 땅이 된 곳이었다. 이 땅의 운명이 곧 자신의 삶인 것처럼 위만은 느껴졌다. 경계인의 삶! 중국 땅을 떠돌 때, 그는 자신이 조선의 핏줄이라는 것을 생각했고 조선 땅에 들 어오니 자신은 중국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쪽 다 잘 알지만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못 하는 느낌 다만, 위만은 분명히 감지하고 있었다. 자신의 조상과 자신의 삶의 역정이 그러했 듯이, 예전에는 중요치 않았지만, 내 땅 과 네 땅 에 대한 인식, 분계선이 그려지고 있는 시기가 자신들 앞에 당도했다는 것을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더 분명하 고 더 넓게 경계선을 그어지게 될 것이다. 중원의 군대는 이미 피 맛을 본 늑대떼나 마찬가지였다. 우두머리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산개하고 포위하고 타격할 줄 아는 병법으로 훈련된 피빛 늑대. 그들 이 먹잇감을 사냥할 줄 아는 포식자라면, 조선의 군대는 치안 질서를 수호하는 정도 의 국가 호위 세력 정도였다. 덤벼드는 적을 향해 정면으로 맞설 용기는 가졌지만, 23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36 기본적으로 수세와 방어를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다. 밀려들고 또 밀려들고 다시 또 쳐들어오면 언제까지 모질고 억센 늑대의 이빨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날이 갈수록 위만의 가슴은 타들어갔다. 어쩔 것인가, 나는? 어쩔 것인가, 이 나라는? 사실 이런 질문이 자신의 내부에서 나올 것이라는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자신 과 자신을 함께 하는 무리들은 원래 유랑민, 도망자들이었다. 살 곳을 찾아 어지러운 곳을 피해 다니는 게 자신들이 가장 잘 아는 생존 방식이었다. 위험한 징후가 몰려 오는 이곳을 떠나 또 어디론가 떠나면 그만이었다. 한데, 그렇게 결정이 되질 않았 다. 중원 천하를 전전하는 동안 위만은 수없이 많은 고장에서 유숙하였었다. 중국 천 지는 넓기가 한량없었고 거기 사는 사람이 마음에 들거나 풍광이 마음에 든 곳도 많 이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곳도 자신들의 발길을 그곳에 묶어 두진 못 했다. 조선 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그동안 있었던 고난의 행군이 여기 조선 땅을 찾기 위한 것 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한데, 아무리 조상들이 살던 땅이고 내가 막 정을 붙인 곳이라고 해도,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라면 피하고 볼 일 아니던가 그런데, 이제 이곳이 뭐라고 이렇게 고민을 하는 것인지? 위만은 자신의 고민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것이 그의 또 다른 고민이었다. 나는 왜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을 걱정하는가? 내가 뭐라고? 이곳은 도대체 나에게 무 슨 의미가 있는 곳이란 말인가? 고민이 깊어지는 만큼 조선과 중국을 바라보는 위만의 눈초리는 날이 갈수록 더욱 날카로워졌다. 당시 중국의 형편은 어떠했던가 한고조 유방 사후 자신의 친아들인 혜제( 惠 帝 )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실권을 장악한 여후는, 드러난 정적은 물론 잠재적인 불만 세력 까지 모두 소탕하여 천하를 모두 자신의 치마폭에 가둬두려고 광분하는 중이었다. 언제 여후의 칼날이 동쪽을 겨눌지 모를 일이었다. 전국 시대부터 뼈가 굵은 위만은 잘 알고 있었다, 내부의 불만을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내부의 불만을 바깥으로 돌리는 것이라는 것을 유방이 아니어도, 여후가 아니라도 갓 재통일을 이룩한 중국에는 피 바람이 몰아 칠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다 칼을 휘두르고 피에 굶주린 이들이었다. 언제든 누구든 다시 칼을 뽑을 수 있다는 것을 한 왕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그랬 다. 천지가 요동치는 민란의 한복판에서 그들은 몸을 일으켰고, 마침내 전란의 승자 가 되었다. 하지만, 권력의 정점은 한정되어 있고, 공을 세우고 상을 요구하는 이들 은 많았다. 보상이 성에 차지 않으면 언제든 그들은 칼을 뽑을 수 있었다. 반역의 가 능성을 어떻게든 사전에 제거하려 하는 것은, 비정하지만 인지상정인지도 몰랐다. 그 럴 가능성을 갖고 있는 이들을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바깥으로 내몰아 그 힘을 소모 케 하는 것이 제일 좋은 통치 방책이었다. 무력으로 일어선 나라에서, 누가 최종 승자가 될 것인가? 왕조의 개창자인 유방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35

237 의 사후 한나라는 치열한 내부 숙청을 진행, 보통 민중들의 삶은 더욱 강퍅해질 수 밖에 없었고 동가식서가숙하는 무리들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신이 그랬듯이, 삶의 근거지를 앗긴 이들은 변방에서 자신의 새로운 미래를 찾기 마련 더구나, 자신이 중국에서 흘러 들어와 후대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났는지, 위만 쪽 으로 몰려드는 유민의 수가 날이 갈수록 급증하고 있었다. 그럼, 또 조선은 어떠했던가 위만의 시선은 점차 조선 전역을 향해 펼쳐졌다. 국가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도 왕검성은 전체적으로 강에 의해 둘러싸인 만 주 벌판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쪽으로 요하, 동쪽에는 흑룡강이 흘렀고 그 두 개의 강 줄기 사이로는 횡으로 송화강이 연결되어 외적에게는 방어진이 되었고 내부적으로는 내륙 해운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래 남쪽으로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만주 벌판과 한반도의 경 계선이 되고 있었다. 문제는 이렇게 탁 트인 너른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선 체계적인 방어 훈련이 된 지 역 연합군이 결성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다는 사실 강 주변을 중심으로 형성된 각 부족들은 인근 부족들과의 제한적인 수평적 연대에 익숙할 뿐, 일사불란 한 명령의 체계적 이행 훈련은 거의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위만의 시선은 더 남쪽을 향했다 백두산과 압록강 건너 대동강 대동강을 넘어 한강에 이르기까지 여기까지는 대체로 험준한 산악 지형이 많았다. 서쪽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평양~해주 간 평야 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깎아지른 산맥의 연속이었다. 압록강 이남부터 한강 이북 지 형에 대해 알게 된 위만은, 잠시 안도하는 마음이 생겼다. 압록강 이남 지역으로는 천혜의 방어선이 둘러쳐 있는 셈이었다. 만약의 경우, 한나라와 전투가 벌어지면 동 쪽 산악 지형을 배경으로 유격 기습전이 용이할 터였다 하지만, 이 또한 능수능란한 용병술을 지닌 군 수뇌 집단이 있어야 가능한 이야 기 자칫 분산된 거점과 거점 사이의 연락망이 두절되면, 모두 고립무원 상태에서 각개격파 될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위만은 다시 남쪽의 남쪽, 한강 이남 너머 아래쪽에 대해 생각해봤다. 자신은 그쪽 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다만, 그곳을 다녀왔다는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한강 아래는 그 위쪽과는 또 다는 곳인 듯 했다. 서쪽부터 남쪽으로 너 르디너른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고 한다. 여기 요동평야나 중국의 화북평원에 견줄 만큼 너른 들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기후는 화평하고, 빗줄기는 순하고 풍족했으며 때에 맞춰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곳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곳이야말로 하늘과 땅이 힘을 합해 농사를 짓기에 최적의 조건을 빚어놓은 곳이 아니겠는가 더 흥미로운 것은 그쪽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까마득한 옛날, 그 광활한 들판 에 자진해서 들어간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아직 채 농사가 시작되지도 않았던 아득 한 시절, 굶주림과 추위의 한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고 한다. 밝고 환한 마 23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38 음으로 앞날을 열겠다고 들어갔다고 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서로 한 가족처럼 서로 를 믿으며, 함께 땅을 일궈나간다고 한다. 다툼을 모르고, 수확이 생기면 고르게 나 눠 갖고 슬픈 일은 더더욱 함께 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산다는 것이다. 삶부터 죽음 까지 그들은 모든 걸 함께 나누며 산다고 했다. 위만은 그런 말을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아직도 이런 삶이 가능하단 말인가 중국 천지가 온통 군마에 짓밟히고 칼바람 피보라 휘몰아칠 때, 나이든 어른들이 한 숨을 쉬며 말했었다, 아주 오래 전, 사람들이 다투지 않고 서로 돕고 믿고 살던 때가 있었다고 그저 그러려니 했었다. 설령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한들, 지금은 사라진 시 절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슨 위안이 되는 소리라고, 늙은이들은 저런 이야기를 하는 지 내심 비웃었던 것 같았다. 한데, 그런 땅이 지금 저 남쪽의 남쪽에 있다는 것이었 다! 듣기로, 성( 城 )도 짓지 않고 산다는 것이었다. 방책( 防 柵 )마저 세우지 않았다는 것 이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단 말인가? 무섭지도 않단 말인가? 어떻게 그렇게 태 연하게 활짝 문을 열어두고 산다는 말인가? 방책도, 성도 없으니 그곳 남쪽을 지칭하는 별난 이름도 없었다. 이쪽 왕검성 쪽 사람들은 그곳을 진( 辰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했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건 고 유명사라기보다 일반명사에 가까운 것. 역괘( 易 卦 )에 따르면 진 이란 밝은 동방( 東 方 )을 가리키며, 오행( 五 行 )상의 토( 土 ) 에 해당, 중앙이란 말이다. 결국 진 이란 동방의 중앙, 가장 땅이 많은 지역, 동쪽 밝은 땅, 동명( 東 明 )을 일 컫는 말이었다. 5) 준왕이 남덕( 南 德 )을 열 결심을 하다 별다른 충돌 없이, 위만의 부대는 왕검성 문 앞까지 밀고 들어왔다. 위만의 부대가 천 여리를 달려오는 동안, 어느 부대 하나 그 앞을 제대로 막아서지 못했다는 것은, 곧 위만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뜻 준왕은 수굿이 텅 빈 실내의 침묵을 응시했 다. 벌써 세 시진 째, 준왕은 주위를 물린 채 혼자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왕이시여! 서토( 西 土 )에는 이미 흉맹한 기운이 감도는 바, 곧 이곳에도 전란의 불길이 솟구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소신을 거둬주신 조선의 은혜에 보답하 고자 저는 이미 이 말씀과 함께 제 목을 내놓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나라의 방비를 생각하시어 나라를 옮기시고 위만이라는 자, 처음부터 남달리 비범해 보였다. 몸 전체에서 풍기는 피 비린내가 역했지만, 준왕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피 비린내를 누구보다도 싫어하는 것이 위 만 그 자신이라는 것을 그게 준왕이 위만을 믿고 중국과의 경계에 땅을 내준 이유 이기도 했다. 저 자라면 능히 조선의 서쪽을 방비하는 튼튼한 울타리가 되어 주리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37

239 라! 그가 조선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중국의 사정 또한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다 는 이야기도 듣고 있었다. 역발산기개세 를 자랑하던 항우를 물리치고 진시황 이후 중국 땅을 재통일한 한고조 유방이 죽자, 그의 부인인 여후가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 에 중국 땅은 온통 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그 비정한 이야기를 준왕은 물론 조선 사람들에게는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한 사람이 모든 권력을 틀어쥐려고 하는지, 왜 권력을 움켜쥐기 위해 다른 사람의 피를 요구하는지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 땅에 들어온 지 반 년쯤 지난 뒤부터 위만은 직접 찾아오기도 하고, 사람을 보내기도 하면서 중국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목해야 한다고 경고하기 시작했다. 준왕은 그걸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위만이란 자가 얼마나 이 조선 땅을 사랑하고, 또 걱정하는지 그렇다고 하여, 위만이 고민하는 이야기를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사람을 속이고 죽이는 일은 불행한 일. 옆 나라 중국 땅의 이 야기를 전해들을 때마다 준왕은 가슴이 아팠다. 하여, 그 살육의 현장을 피해 도망쳐 오는 이들은 모두 품어 주자고, 나라의 사람들과 상의하였고 그와 같이 시행하였다. 이 땅에 들어와 이 땅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이 땅의 풍습에 익숙해지면 모두 조선 사람이었다. 상처를 입고 들어온 사람들을 새로운 조선 사람으로 거듭 나게 하는 일 이 자신의 소임이라고 여겨왔다. 위만의 경고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왕께서는 어질고, 여기 조선 사람들은 모두 순후하기만 하니 그것이 진정으로 걱정입니다. 지금은 난세요, 전쟁의 시대입니다. 한 번 칼을 뽑아든 자들이 칼집에 다시 칼을 꽂기를 기다리시나이까? 저들은 더 잘 벼려지고 더 사나운 칼날 앞에서만 자신의 칼을 거둘 뿐, 약한 자들을 보면 가차 없이 칼을 휘두릅니다 위만과 같이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을 준왕은 이전에 만나본 적이 없다. 사람이 어질지 않고 착하지 않음을 걱정해야지, 어찌 순후한 것을 단점이라고 한단 말인 가? 역대 조선의 왕들이 그동안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가장 마음을 쓴 것은 사람들의 심성과 교육 분야였다. 자신이 사는 땅을 사랑하는 마음, 함께 사는 사람들을 아끼는 마음이 곧 나라의 힘이라고 선인들은 가르쳤다. 실제로, 순후하지만 늘 한 몸처럼 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조선 사람들을 옆 나라에서는 부러워하고 존중했지, 업신여긴 적 이 없었다. 좋은 것을 생각하고, 좋은 관계를 맺고, 좋은 방향으로 나가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사람다운 삶이고, 그것을 권장하는 것이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한데, 위만이라는 자는 사람들이 너무 순후하기만 하니 걱정이라고 한다. 위만의 23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40 진언을 받을 때마다 준왕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신이 역심을 품었거나 배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하는 일 은 오직 조선에 대한 충심으로부터 나온 일이며, 임금께서 신을 믿어주신 것에 대한 보답으로부터 나온 일입니다 열흘 전, 위만은 그의 아들을 보내 그의 뜻을 자신에게 알렸다. 자신이 지금부터 부대를 움직여 왕검성을 향해 달려갈 테니, 군사적 방비를 시험해보라는 것이었다. 만약, 중간에 자신의 군대를 막아서는 부대가 있고 충돌이 야기되면 그 죄를 자신과 자신의 아들의 목숨으로 속죄할 것이나, 만약 왕검성 앞까지 별다른 저항 없이 도달 한다면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진언에 대한 답을 달라는 요지였다. 일종의 모의 전투 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득달같이 몰아치는 위만의 성화가 좀 언짢은 기분이 들었지만, 자신의 아들을 사 자로 보냈다는 것과 목숨으로 사죄하겠다는 말의 엄중함에 비춰 위만이란 자가 얼마 나 큰 고민을 한 끝에 이 일을 벌였는지 준왕은 그 절박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준왕은 예하의 방어부대와 각 지역의 부족장들에게 전령을 보내 위만의 군대를 발견하거든, 전투는 벌이지 말고 막아서기만 하라 는 군령을 하달했다. 하지만, 위만의 군대는 신출귀몰했다. 어느 부족의 방어군들도 위만의 부대를 발견 했다는 보고를 해오지 않은 상태였는데, 오늘 아침 갑자기 왕검성 정문 앞에 위만의 부대가 나타난 것이었다. 이제 준왕은 위만을 만나러 나가야 할 참이었다. 준왕은 다시 한 번, 위만이 자신 의 아들을 통해 했던 이야기를 되새겨보았다. 임금께서 아시는 것처럼, 저와 제가 이끄는 무리들은 유랑민들입니다. 진나라 군대나 초나라 군대, 한나라 군대에 속해 군역을 마친 이들도 있고, 아예 도망친 이 들도 있습니다. 이런 오합지졸들을 이끌고 있는 저 또한, 지금 한나라 군대의 이름 높은 장군들에 비길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제 부대가 방어선을 뚫고 왕검 성에 도착한다면 그게 무얼 의미하겠습니까? 지금 중국 땅을 다스리는 여후는 한고 조를 따라 젊은 시절부터 전장을 전전했던 여장부입니다. 만약, 여후가 한꺼번에 십 만 군대를 보내 열 갈래 길로 왕검성을 향해 짓쳐들어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위만은 깜짝 놀라 준왕의 얼굴을 우러러봤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지금 제 목을 임금께 바치러 스스로 포박을 하고 여기 나왔거늘, 어찌 제 목을 치지 아니 하시고 그동안 그대가 내게 전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봤소. 또, 그대가 보여준 용병 능력 도 충분히 보았소. 나도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오.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은 내가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39

241 아니고 그대와 같은 무장이오. 준왕이 손수 위만의 결박을 풀어주고 있었다. 그런 통에 준왕의 어깨가 위만의 어 깨를 슬쩍 눌렀다. 잠깐 어깨가 맞닿을 뿐이지만, 위만은 천근만근 태산에 짓눌린 느 낌이었다. 그대를 만나기 전에 이미 다른 이들과도 상의를 하였소. 다른 이들도 충분히 내 뜻을 이해하고, 내 판단을 따르기로 했소. 다만, 한 하늘에 해가 둘이 있을 수는 없 는 법이니, 나와 내 식솔들은 이곳 성을 그대에게 비워주고 남쪽으로 내려갈까 하 오. 위만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은 자신의 목을 준왕에게 내줌으로써 사태의 긴박성, 닥쳐오는 피바람을 예고하려 하였을 뿐 이런 뜻밖의 제의를 받으리라고 예상조차 못 했었다. 더는 방황치 마시오!?! 준왕의 지긋한 눈빛이 느껴졌다. 하지만, 차마 위만은 고개를 들어 그 눈빛을 마주 하지 못 했다. 더는 방황치 말라 그 말이 벼락처럼 귓전을 치고 가슴을 치고 머리 를 쳤다. 그대는 이미 조선 사람이오. 그대의 조상들도 그랬지만, 그대가 이 땅에 살고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는 한 그대는 조선 사람이오. 그러니, 더는 어디에 서야 할지 방황치 마시고, 여기 단단히 뿌리를 내리시오! 위만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저 너그럽기만 할 뿐, 시 세는 잘 읽지 못하는 왕이라 생각하였는데, 나를 다 읽고 있었구나! 위만의 격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왕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우리는 모두 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위만, 그대는 많이 보고 많이 아는 사람 이오. 나는 이곳 조선에서 왕으로 있으나, 그대만큼 세상을 널리 보지 못 했고 깊이 생각하지 못 했소.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건 내가 아니고 그대와 같은 사람이니 어려운 때, 어려운 짐을 그대에게 넘기고 떠나는 듯 하여 미안한 마음이나, 그대 의 강건한 어깨로 이 나라의 사직을 떠받치고 밝은 눈으로 머리 본 것을, 큰 소리로 이 나라의 백성들에게 이야기하시오. 더는 고개를 숙이지 마시오, 더는 목소리를 낮 추지 않아도 되오. 지금은 그대의 큰 목소리가 필요한 때요. 나는 이미 떠날 준비를 다 마쳤소. 위만은 더 이상 침묵으로 고개만 숙인 채 무릎 꿇고 있을 수만 없었다. 내 행동이 빠르다 여겼더니, 임금은 생각이 빠르구나! 위만은 공손한 태도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 낯선 얼굴들이 었다. 24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42 받들기 힘든 일입니다. 목을 내놓으라 하심이 가당커늘, 어찌 질책하지 아니하시 고 외려 더 무거운 말씀을 내리십니까? 저는 중원의 전장터를 드나들던 한낱 무부로 그동안 듣고 보고 배운 것이라곤 칼 쓰는 것과 군사를 부리는 법뿐이옵니다. 한때, 연나라에서 왕을 모신 적은 있으나, 그것은 참모의 일일 뿐 제가 듣고 본 것이 이 만하니 임금께서는 신을 죽여 국법의 지엄함을 널리 알리심이 가하나이다. 위만은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별다른 동요 없이, 사람들은 준왕과 자신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한 뒤, 위만은 준왕의 다음 답변을 기다렸다. 아니오.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소. 아니, 조선은 이미 그대를 왕으로 모시기로 결 정했소. 그대가 마음을 열어 진솔한 이야기를 했듯이, 나도 그러하오. 지금 이 나라 에는 그대만큼 세상 돌아가는 일을 잘 알고 있는 이가 없소. 모든 이들이 원하는 일 이니 거절할 생각은 하지 마시오. 여전히 위만은 지금 자신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중원을 살피고 조선을 살피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찬위( 簒 位 )의 야망이 잠시 꿈틀대기도 했었다. 준비하기에 따라선 될 법도 했다. 하지만, 이내 위만은 그와 같이 참람한 마음을 깊 숙이 내리눌렀다. - 비슷비슷한 사람들끼리 싸우고 배신하고 죽이는 것! 왕위를 찬탈하는 일 자체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왕을 쫓아낸 자신을 새로운 왕 으로 모실 리 없었다. 터무니없이 착하게 살아온 사람들 아름다운 정체( 停 滯 ), 그 옛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살았던 시절에 조선은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 그대의 마음을 내가 모두 아오. 더는 사양치 마시구려! 그렇구나, 내가 여기에 들어온 까닭이 옛 조상의 땅이어서 그저 살 길 찾아 흘 러들어온 줄 알았더니, 이 땅과 여기 사람들이 나를 불렀구나! 이게 내 운명이었구 나! 위만이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입을 뗐다. 하오면 왕께선 어디로 가시려 하나이까? 준왕이 답한다. 남덕( 南 德 ), 너른 남쪽으로 내려가려 하오. 그곳에 일찍부터 터를 잡고 사는 우리 피붙이들이 있는 바, 그동안 하늘과 바람과 비와 흙을 벗하며 산 이들이 있소. 과연 눈이 밝으십니다. 신이 이곳에 오는 동안, 생각한 바가 그것이었습니다. 그곳이 앞으로 천 년, 만 년 조선 사람들의 밭이 되고 창고가 되고 부엌이 될 곳입 니다. 세상이 자꾸 변해갑니다. 이제 그곳에 가서 그곳 사람들과 함께 천 년, 이 천 년 뒤의 조선을 준비하십시오. 왕께서 제게 소임을 내리셨으니, 더는 사양치 않겠나 이다. 내려주신 말씀과 이 땅을 제 온몸과 온 마음으로 지키겠습니다. 지금 이곳부터 아사달까지는 제가 지키겠나이다! 신이 살아있는 한, 한수 아래로는 누구도 어떤 병 장기도, 병장기를 든 군인도 내려가는 일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제가 전방이 될 터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41

243 이니, 임금께서는 후방에서 덕을 키우십시오. 다만, 지금은 중원의 힘이 융성해지는 시기, 저와 제 자손이 힘써 이 강역을 지키겠으나 백 년을 장담하지 못 합니다. 지금 은 저처럼 중원이 소란스러우나, 곧 저곳에서도 영명한 군주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제 세력을 한껏 동서남북 사방으로 펼치려 할 테니, 그때는 저희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서토는 큰 땅입니다. 그만치 사람이 많고 무엇보다 군인이 많습니다. 하나, 아무리 한나라의 힘이 강성해진다 해도 한 나라가 일으킨 소란이 한수 아래로 는 쉽게 번지지 않을 터이니, 그곳에 오래 살 터전을 마련하소서. 동방의 밝은 빛을 보존하소서! 6) 동방의 밝은 빛이 익산에서 솟구치다 위만은 똑똑한 사람. 처음에는 말문을 열지 못하다가,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 의 뜻을 이해했다. 아니, 자신이 위만의 뜻을 이해했고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됐다. 위만에게 왕궁의 모든 것을 물려준 준왕은 함께 남행을 할 사람들을 추리기 시작했다. 이곳을 고향 땅이라고 한다면, 이제 영영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것 이고 선조로부터 이어진 여정을 잇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 시 옮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2천 년 가까이 이곳 요동 벌판에서 살았다. 툭~ 옷자락 먼지 털어내듯 훌훌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직계 조상들의 뼈가 묻힌 곳을 떠나 려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준왕은 위만과 함께 사람들을 모아 설명했다. - 이제 조선은 두 개로 나뉘게 된다. 두 개의 조선은 모두 중요하다. 하나는 현재 의 조선이요, 또 하나는 미래의 조선이다. 하나는 조상들의 과거를 지키는 일이요, 하나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미래를 새롭게 세우는 일이다. 이미 피운 꽃을 지키는 일도, 새롭게 싹을 틔우는 일도 모두 중요한 일인 것을 그대들도 잘 알지 않는가! - 모두 다 소중한 만큼 어떤 선택도 강요할 수 없다. 다만, 지키는 일과 세우는 일 의 직분이 다른 만큼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를 바라고 권할 뿐 하나의 운명, 하나의 국가, 하나 된 국민으로 살았지만 이제 우리는 서로 나뉘게 되었다. 하 지만, 이는 결별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를 확장하는 것이라 생각하라! - 남으로 간 사람들과 북에 남은 사람들은 왼 팔과 오른 팔처럼 한 손에는 병장기 를 쥐고, 한 손에는 농기구를 쥘 때도 있을 것이며 서로 손을 맞잡아야 할 때도 있 을지니! 2천년 동안 큰 변화 없이 살아왔던 이들이었다. 2천 년, 길 위의 삶보다 집안의 삶에 더 익숙해지기에 넘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 다. 이사를 가는 것인지, 집을 넓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었 다. 24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44 무엇보다 준왕은 떠나고, 새롭게 왕위에 오른 위만은 낯선 인물이란 것이 사람들 의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준왕이 향한다는 남녘은 땅 설고 물 선 곳, 이곳은 태를 묻 은 곳. 선택이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사람들은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다 가질 수 없다는 것, 하나를 가지려면 하나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이들 앞에 닥 친 문제였다. 이와 같이 새롭게 제기된 문제가 현재 자신들이 얼만큼이나 중요한 시 점에 서 있는지, 실감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가운데에도 사람들은 하나, 둘 결정을 내리기 시작했다. 대체 로, 준왕과 새롭게 왕위에 오른 위만이 안내한 방향으로 사람들의 결정도 이뤄졌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호기심이 강한 이들이 준왕을 따라 나서기로 했다. 비옥한 토 지에서 자연의 변화를 관측하며 작물을 키우고자 하는 사람들, 낯선 땅을 파고 들어 가 새로운 광물을 캐내고자 하는 사람들, 더 멀리 가보고싶어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었다. 호기심보다 책임감이 더 강한 이들은 잔류를 선택했다. 조상의 묘를 돌봐야 했고, 무엇보다 떠나가는 이들이 뒤를 걱정하지 않고 떠날 수 있게 돕고 싶은 사람들, 가 족이 많은 이들, 벌여놓은 일이 많은 이들은 거기 남았다. 준왕을 따라 남행을 결심한 이들이 압록강을 건넌 지 보름여 만에 그들은 아사달 을 통과했다. 거기서 또 열흘을 이동하니 해주평야를 지나고 한수가 나타났다. 한수 강변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둘러보니 확실히 자신들이 지금껏 살던 곳이나 지나온 곳과는 그 풍광이 사뭇 달랐다. 준왕의 무리를 호위하기라도 하듯이 왼쪽 편 으로 계속 함께 달려오던 산줄기가 드문드문해지더니, 한수 이남은 현저하게 그 산 세가 평탄해지는 것이 먼빛으로도 뚜렷했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한수 이남도 조선 의 강역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실제로 한수 너머는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었다. 왕검 성에서 한수 이남은 너무 먼 곳이었고, 대부분 개활지뿐이라고 했다. 그 옛날, 그곳을 개척하러 들어간 이들이 있었다는 전설만이 아스라할 뿐, 그들이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세히 아는 이들이 없었다. 다만, 그들이 그 옛날 긴 여행 을 했던 조상들처럼, 작은 집단을 이뤄 나남 없이 서로 평등하게 살아간다는 이야기 만 강가에 떠돌 뿐 직접 그곳을 다녀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니, 들어간 사람들 은 많았지만 거기서 나온 사람들이 드물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한수를 넘어 간 이들은 한결같이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준왕을 따르는 사람들의 수는 한 지점, 한 지점을 통과할 때마다 변화가 생겼다. 요동에서 함께 내려오던 이들 중에 아사달이나 예성강 근처에 자리 잡길 원하는 이 가 있으면 준왕은 흔쾌히 그 뜻을 받아들였고, 또 길가에 나와 준왕의 대열에 합류 하길 희망하는 이가 있으면 또한 반갑게 맞아주었다. 몇 가족이 함께 떠나기도 하고, 또 몇 가족이 함께 들어오기도 했다.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43

245 이와 같이 순행이 진행되고, 낯선 풍광들과 마주치고,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가운데 준왕은 점차 자신이 설레임 속으로 빠져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지금 내 미래를 만나러 가는 것이구나, 우리들의 미래를 만들러 가는 것이구 나! 소명의 자각! 그랬다. 자신이 위만에게 별 미련 없이 왕검성을 양도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은 새로운 천 년,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남행하게 된 것이다. 왕검성에서 어렴풋하게 깨 닫기 시작한 것이 자신이 몸을 움직여보니 보다 뚜렷해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래를 준비하고 설계할 것인가? 그 답도 준왕은 남행 길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미래는 당연히 내 몫이 아닌 것, 자손들의 것. 그렇다면 그 자손들에게 자신들의 세대가 넘겨줄 것은 무엇인가? 길 길이었다!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지리적 교통로, 그 교통로를 따라 이어지는 역사의 길, 길 을 따라 꽃피는 사람들의 삶이 그리는 지도 자신의 순행은 길을 찾고, 그 길을 이 어 지도를 그리는 일에 다름이 아니었다. 요동의 왕검성에서 이곳까지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어야 할 터, 새 롭게 자리 잡는 이들이 거기서 꽃피워 살게 되면 그곳에 사람과 사람들의 기억으로 인한, 문화의 꽃길이 활짝 열릴 것이라 믿었다. 자신은 지금 인적 드문 아랫녘에 문화의 씨앗, 미래의 씨앗을 뿌리러 가는 사람 그 씨앗이 이어진 길을 개척하고 또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준왕이 잠시 한수를 건너지 않고 예성강과 한수 사이에 자리를 잡을까 망설이다 가, 그예 도강을 선택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저 아랫사람들, 한 조상으로부터 갈 라져 나왔으나 지금은 연통이 끊긴 사람들과 다시 관계를 이어가는 것. 더구나, 자신 은 조선을 확장하기 위해 이 먼 길에 나서기를 자초한 사람 그 옛날 사람들도 이 강을 건넜는데, 마땅히 자신도 강을 건너야 했다. 자신이 강을 건너야 다른 이들도 강을 건널 것이며, 그래야 긴 시간 속에서 뚝 끊 긴 과거와 현재를 이어붙일 수 있는 것. 하늘을 나는 새떼가 소식을 먼저 전달하는 것인지, 바람에 실려 전해지는 것인 지 풍문은 늘 사람 발걸음보다 빨랐다. 조선의 왕이 순행( 巡 行 )도 아니고, 자신의 몸을 옮겨 왕의 거처를 남쪽으로 옮긴다는 소식은 곧 한수 이남, 밝은 땅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릴 만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왕이 거처를 옮긴다는 곧 조선의 역사와 그 정통성이 이곳으로 이동해온다는 것! 그동안 변방이거나 자유민들의 영역이었던 이곳에 갑자기 새로운 사람들이 몰려들 고 낯선 기운이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왕, 왕의 신하 무엇보다 그런 이름들 이 낯설다는 것이 그들이 받은 첫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의 생각은 바뀌었 24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46 다. - 따지고 보면 모두 한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사람들 조선의 왕으로 말하자 면, 남녘에 사는 이들에게는 종갓집 장손이나 마찬가지 아니던가! 준왕의 남행 소식은 너른 들 이곳저곳에 드문드문 산개해 농작에 종사하던 남녘 사람들을 기대와 불안에 들뜨게 만들었다. 저 먼 곳에 있던 왕이 왜 이곳까지 내려 온다는 것인지? 북녘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물론, 이런 것도 궁금했지만 더 궁금한 것은 당연히 수많은 인원을 대동하고 오는 왕이란 존재가 자신들의 삶에 어 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하는 것! 이런 반응을 느낀 것인지, 한수를 넘은 뒤로, 준왕의 행차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여기부터는 이제 자신이 뿌리내려야 할 땅! 자신은 북쪽 조선의 전( 前 ) 왕이지만, 이곳 주민들에게까지 자신의 지위를 존중해 달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이 너른 땅 어느 곳이든 자리를 잡고 차근차근 이곳에 먼저 와 자리를 잡은 이들 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설득할 일이 있으면 설득해가며 터전을 넓혀갈 일이었다. 현 재가 아니고 미래를 위해 이곳에 온 사람, 준왕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자신을 타일 렀다. 자칫, 변한 환경에 적응을 하지 못 하고 왜 나를 알아보지 못하지, 남 탓만 하 는 사람이 될까, 준왕은 스스로를 경계하고 또 경계했다. 한수를 건넌 뒤, 준왕은 남쪽 끝까지, 남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또 거기서 서쪽으 로 돌았다. 한수 이남 지역을 모두 돌아보고 싶었던 것. 놀라웠던 것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곳 남쪽에 살고 있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정 규모의 부족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리 고, 서로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 서쪽 은 비옥하고 동쪽은 험준한 지형이라는 점, 그리고 삼면이 모두 바다로 둘러싸여 있 다는 것도 준왕은 몸소 확인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어디에 자리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 준왕의 발걸음은 누군가 잡아끌기라도 하듯이 자연스럽게 익산 쪽을 향했다. 익산은 한수 이남 서남 평야 전역의 한 가운데에 해당하는 곳이었고, 위로는 금강, 아래로는 만경강과 동진강이 흐르고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진안고원이 자리잡고 있었 으며, 서쪽으로는 너른 갯벌과 포구가 즐비한 곳이었다. 농경이며 교통, 방어 모두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무엇보다 익산은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곳! 미래는 결국 사람이었다. 희망은 사람으로부터 발원하고, 사람을 향해 흘러간다. 여기는 밝은 땅, 눈 밝은 사람들이 먼저 들어온 곳. 이들의 지혜와 밝은 마음을 모 아 환한 빛을 피우는 것이 자신의 소임인 것을 준왕은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다. 자 신은 불을 피우기 위해 들어온 사람, 시간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보자면 부싯돌이나 불쏘시개였다. 이곳 익산에 내 운명을 던져 스스로 환해져야 하리. 이 너른 들을 타 고, 저 맑은 물줄기를 타고 환한 문명의 빛이 한반도 전역으로 번져가야 하리!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45

247 3. 익산, 더 크고 더 넓다 : 삼한 시대 이야기 1) 삼한이 삼한인 까닭 준왕의 남행은 한반도 남부에 신선한 충격이 되었다. 각각 독립된 자치구를 이룬 채 부족의 삶을 자영하던 이들의 관심은, 남하한 준왕의 행렬이 동서남북을 종횡하 는 것을 따라 자연스럽게 한반도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가까운 곳에는 오히려 눈길이 머물지 않는 법이다. 밖에서 들어온 이들의 관심이 오히려 안에 있는 사람의 새로운 발견을 유도하는 경우가 많다. 준왕이라는 존재가 그랬다. 준왕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비슷한 복색, 같은 말을 사용했지만 이곳에 오래 전 에 자리 잡은 사람들과는 무언가 좀 달랐다. 준왕은 만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내부 조직, 외적인 연대, 지식의 축적과 전승을 보다 더 크게 확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낯선 이야기로 들렸으나 사람들은 이내 깨달았다, 준왕이 역사적 변화를 감지하고, 자신의 삶의 행보를 남쪽으로 돌렸듯이 자신들의 삶에도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을 자신들은 그동안 이곳에 먼저 발을 들인 선조들의 뜻을 따라 오직 농경 지식을 쌓 고, 이를 후손들에게 전달하는 일에만 온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이들은 한반도의 자연적 조건에 가장 적합한 농경 기법을 개발했고, 천문과 지리에 관한 지 적 역량을 축적했다. 이와 같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 위해선 고도의 집중력이 필 수적이었다. 그것도 몇 대가 긴장을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집중할 수 있어야만 기후 의 변화, 지질의 특성에 어울리는 작물을 고를 수 있었고, 작물의 생장 환경에 필요 한 수리 환경이나 재배법의 혁신이 뒤를 이어야만 했다. 준왕이 내려온 시점은 절묘했다. 단군에 의해 조선이 건국한 시점을 기준으로 하 자면, 2천 년 전쯤, 한 무리의 집단이 요동을 떠나 한수를 건너, 맨 처음 이 땅을 일 구기 시작했다. 호기심 왕성한 전문가 집단이었고, 시간이 흘러도 그들은 입조( 入 祖 ) 입향( 立 鄕 )한 조상들의 유지를 지상명령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이 누적한 농경 지식은 이미 밭벼 재배를 뛰어넘어 논벼에 대한 각종 실험을 시도하는 수준에 이르 고 있었다. 이들은 그야말로 그동안 한우물만 파고 있었고 기술적 혁신이 최고 수준 에 이르러 있었다. 또한, 농사에 필요한 천문과 지리에 관한 지식을 최초에는 부차적 인 필요에 의해 습득하였으나 차츰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말하 지만, 지식 노동자들이고 기술 전문가들이었다. 하지만, 도달한 최고의 높이가 곧 한계점이기도 했다. 눈부실 정도로 빠르게 혁신 을 거듭하던 기술의 진보는 정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외부 자극이 절실한 시점, 말 24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48 하자면 비등점 직전이었다. 새로운 촉매의 자극이 주어진다면 비등점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이때, 준왕이 남하한 것이었다. 농업 기술이 발달할수록, 대규모 노동력과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들 스스로가 먼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달랐다. 문제는 알았지 만 어떻게 일을 진행해야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들은 모두 한 분야의 전문가, 외골수들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분야에서는 독보 적인 경지를 이루고 있었지만, 이와 같이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집중력은 갖 기 위해서는 옆을 돌아볼 겨를을 허락할 새가 없었다. 이들에게 자신의 기술 역량을 더 끌어올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른 집단과의 협 업을 유도하는 일은 오히려 쉽지 않았다. 따라서, 한반도 남반부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도 준왕과 같은 정치인이 필요했다. 횡적인 연대의 설계자, 갈등과 분쟁의 조정자가 절실했던 것이다. 준왕 또한 이게 원 하는 일이었다. 서로 잘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격려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공동체의 모습이 었다. 할 수 없는 일을 맡기고, 왜 수행하지 못 하느냐고 타박하는 것은 분열과 갈등 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준왕과 선 입주민들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계약과 연맹의 관계가 발생했다. 준왕은 새롭게 자신과 함께 하게 된 이곳 주민들을 향해 느슨한 통치를 약속했다. 위만이 맡고 있는 북쪽 조선의 사정은 급박하고 강고한 대오가 필요했으나, 이곳 남쪽은 위 만이 지키는 방벽에 의해 당분간 보호되는 상태. 이곳에 필요한 것은 일사불란한 국가 조직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미래의 씨앗, 지식과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표준화하고 이를 후대에 더욱 개량 할 수 있도록 안전하게 승계하는 체계였다. 준왕은 이를 위해 남반부 전역을 크게 3개의 강역으로 나누길 권고했다. 이곳 주민들이 가진 전문성을 최대화하되, 또한 지역적 특성에 의해 서로가 서로 에게 울타리가 되는 방식이었다. 나누는 기준이 된 것은 강의 수역이었다. 농경 집단 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수자원의 확보였다. 또, 강은 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법, 강의 경계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산의 흐름을 따라 경계를 나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흔쾌하게 준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준왕의 주재 하에 한 반도 남반부에 산재해 있던 각 부족과 기술자 집단의 대표자들이 모두 익산 땅에 모 여 들었다. 이들은 낮에는 함께 해를 보고, 밤에는 함께 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 다.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를 현 시간 속에서 구현하는 일이었다. 모여든 이들은 모 두 흔쾌한 마음으로,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느라 낯이 선 먼 곳의 형제들과 이야기 를 나누고 또 나누었다. 마침내 한반도 남반부에는 최초로 등장하는 거대 연맹체 삼 한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47

249 이들이 합의한 것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한반도 이남 강역을 크게 삼분할하여 지역별로 나누어 모이자는 것이었다. 하나의 동맹체가 이상적이긴 하였지만, 이를 꼭 자신들의 당대에 결성할 필요가 없 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통일된 힘이 필요할 때가 오면, 후손들이 그것을 이룰 터 자신들은 그때를 위해 노둣돌을 놓는 것이 책무였다. 둘로 나눴을 경우, 연맹 간 갈 등이 생길 경우 자칫 폭력적인 해결 방식이 동원될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정족지 세( 鼎 足 之 勢 )는 가장 안정된 체제였다. 선의의 경쟁과 협력, 조정이 가능한 방식이었 다. 마한( 馬 韓 )은 대체로 금강과 섬진강을 기준으로 ㄱ 자 형으로 꺾인 한반도 서남부 에 들어서게 되고, 변한( 弁 韓 )은 섬진강과 낙동강을 기준으로 ㅅ 자 형의 강역 내에 포함되는 지역, 진한( 辰 韓 )은 한수 이북으로부터 낙동강 수역을 따라 흐르는 T 자 형 지역의 오른편에 해당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바다를 기준으로 하자면, 서해 남 해 동해에 근접한 지역들을 세 개의 연맹체로 묶는 것에 모두 동의했다. 둘째, 세 개의 연맹체는 그 안에 소속된 작은 단위 부족들의 갈등 조정 역할과 외 교적, 군사적 대표성을 지닐 뿐 각각의 부족들이 갖고 있는 고유성을 최대한 존중하 기로 했다. 이는, 이 지역에 사람들이 들어서게 된 내력을 존중하는 일이었다. 전문 성은 독자적인 자율성으로부터 배양된다는 것을 누구나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이 또 한 아무런 이의 없이 전원 합의할 수 있는 사항이었다. 세 번째 합의를 도출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준왕이 누구도 예상치 못한 뜻밖의 제안을 한 것이었다. 왕위 계승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연맹체의 회의를 주재하는 자 로서의 대표성은 자신의 당대에 끝날 뿐, 다음 왕위 혹은 각 연맹체의 수장은 회의 를 통해 선출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었다. 준왕이 누구던가, 2천 년 가까이 이어진 조선 왕가의 계보의 적자였다. 어느 부족 이나 가문도 이 왕통을 대신할 수 없었고, 누구도 그 자리를 탐내지 않았다. 위만이 새롭게 조선의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준왕이 남행을 결심하고 조선의 방비를 위해 세운 임시 대리 왕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으며, 준왕의 남하로 조선의 왕조 전체가 남진한 것이라고, 누구나 다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한데, 이게 무슨 말인가! 준왕은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더 천명했다. - 북쪽 조선은 북쪽 조선의 사정에 맞게 국가가 운영되는 것이고, 이곳 새로운 한 국은 이쪽 사정에 걸맞는 국가 운영 체제를 찾아야 할 터 이곳은 독립적 지식인, 창의적 기술자들이 사는 곳이니, 시대가 바뀔 때마다 주력해야 할 과제가 달라질 것 이다. 언제는 국방이 문제가 될 때도 있을 것이며, 외교가 연맹 전체의 가장 중요한 사안이 될 수도 있고, 기술적인 혁신이나 구성원 간의 인화와 단결이 가장 시급한 문제로 떠오를 수도 있는 것. - 내가 조선의 왕위를 위만에게 넘긴 것도 이 때문인데, 여기 와서 내가 왕조를 24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50 열겠다고 하면 이는 무엇보다 내 자신의 결심을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며, 새롭게 왕 좌에 앉은 위만을 모욕하는 일. 준왕은 덧붙여 또 이야기했다, 마한과 진한과 변한의 수장 또한 그리고 각 부족들 의 지도자들 또한 그 자리를 세습하지 않는 것이 이곳 한국의 오래된 전통을 더욱 빛나게 하는 일. 물론, 각각의 부족마다 다 다른 사정이 있을 터이니 어느 곳에서는 부족장 지위가 세습되는 것이 체제의 안정성을 높이는 일일 것이고, 또 어느 부족에 서는 부족장의 선출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일이 될 수 있는 것 각자의 사정에 맞게 운영 체제를 자율적으로 운영하되, 왕이나 부족장의 아들 딸이 능력이 부족함 에도 오직 부족장의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위를 계승하는 것은 오히려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자신의 생각이라고, 준왕의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그리고, 준왕 의 이와 은 마음은 이내 사람들 마음에 파문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위와 계급이 무작정 세습되는 사회에서 역동적인 활력은 생길 수 없다! 준왕의 뜻은 분명했다. 그리고 모인 이들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과연 그랬다. 누구보다 진취적인 이들이 먼저 남하한 것이 이 땅의 역사였다. 신분이나 직렬로 묶어두기 시작한다는 일 자체가 이 땅을 연 자신들의 역사을 스스로 배반하는 일. 그동안 자연스럽게 형성된 부족, 부족 안에서 또 자연스럽게 형성된 어떤 질서 속 에서 깜빡 잊고 있었던, 이주와 개척의 역사, 그 정신을 준왕이 깨쳐준 것이었다. 물론, 통치자의 자질이란 타고 난다기 보다 교육되는 것이기에 왕가나 부족장의 지위가 세습되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의견을 제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최종적으로 이들은 준왕의 제안을 공통 합의 사항으로 받아들였다. 시간이 해결해줄 것! 언젠가 강력한 왕권이 필요한 시기가 오면 그때 그 시대를 사는 후손들이 이 문제 를 그 당대에 맞는 방식으로 해결할 것이라 믿는 것. 시간을 믿는다는 것은 미래를 믿는 것, 그 미래를 믿는 나 자신을 믿는 것! 그게 삼한 부족연맹 성립의 가장 기초가 되는 믿음 아니었던가! 2) 준왕은 이곳에 세 아들의 태를 묻었다 마침내 마한과 진한, 변한 세 개의 한국이 발족하면서, 이 과정을 영도한 준왕이 자리를 잡은 익산은 예전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삼한의 중심 지 역으로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마한 지역의 중심지였던 현재의 익산 지역이 삼한 전체의 중심지가 된 것이었다. 조선의 오랜 전통은 느슨한 수평적 연대였지만, 북쪽을 위만에게 비워주고 내려온 저간의 사정으로 인해 삼한 지역에는 새로운 조직적 질서가 도입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모두 인정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기존의 느슨한 연대를 보다 탄력적이고 응집 력 강한 연대로 바꾸기 위해선 당연히 구심점이 필요했다.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49

251 삼기면 연동리에 자리한 태봉사( 胎 峰 寺 ) 인근에 전해지는 전설은 이 당시의 정치 문화적 상황을 함축적으로 잘 보여준다. 준왕은 왕검성을 떠나 익산에 올 때까지 슬하에 아들이 없었다고 한다. 익산에 자 리를 잡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준왕이 꿈을 꾸니 휘황한 날개를 자랑하는 상서 로운 봉황이 저 북쪽에서 날아오더니 미륵산 아래 기슭에서 날개를 접더라는 것이었 다. 그 꿈을 꾼 뒤에 준왕이 그곳을 찾아 천지신명에게 축원을 하였더니, 이후로 왕 비에게 임신 소식이 있었다는 것 준왕은 익산에 온 뒤에 세 명의 아들을 얻게 되 었고, 아들 셋의 태( 胎 )를 모두 이곳에 묻으니 이로부터 이곳을 태를 묻은 산이란 뜻 의 태봉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태를 묻는다는 것은 땅과 한 사람의 운명이 하나로 묶여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상 징하는 일. 준왕의 세 아들에겐 이곳이 곧 어머니의 자궁이며, 또 훗날 무덤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수명이 다 한 뒤, 먼저 묻어둔 자신의 반쪽, 자신의 태 옆에 묻혔을 것이라는 점을 이 전설은 암시한다. 이처럼 태를 묻는다는 것은 탄생을 기념하고, 땅 과 하나임을 천명하며 이를 통해 미래를 미리 약속하는 일 세 아들이란 삼한을 의인화한 것임에 분명하며, 아들 이란 곧 미래를 말한다. 이 곳 익산으로부터 삼한 공동체의 맹약이 시작되었고, 그 약속의 엄중함을 지신에게 보증케 하고, 이를 사방에 공포함으로써 당대의 약속이 미래에도 지속되길 기원하였 다는 것이 태봉 이라는 지명이 가리키는 바일 것이다. 준왕이 자리 잡았을 무렵, 그 당시 익산의 실제 강역이나 문화지리적 영역은 지금 현재 익산시의 행정 구역보다는 훨씬 더 넓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러 역사적 사료들을 종합해서 생각해봤을 때, 목지국( 目 支 國 )이나 건마국( 乾 馬 國 )이 어느 곳을 가리키는 것인지 정확히 특정하는 것은 힘들지만, 금마저( 金 馬 渚 )나 왕궁( 王 宮 )과 같은 지명이 지금까지 남아 당시 익산의 강역을 비정할 수 있는 단초 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의 금마와 왕궁 지역은 이곳에서 발견되는 여러 유구와 유물을 통해 이곳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라는 점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으 니 이 지역을 기점으로 삼아 시작하면 당시의 건마국이나 금마저의 영역이 드러날 것이다. 익산의 위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아래쪽으로는 만경강이 흐른다. 농경사회에서 안정적인 물 공급만큼 중요한 지리적 조건은 없었다. 또한, 강은 예나 지금이나 천혜 의 방어선이며 경계선이 된다. 최소한 준왕 무렵부터 성도( 成 都 )가 본격적으로 시작 된 익산은 금강과 만경강 사이 전 지역을 아울렀을 것이다. 익산의 서쪽은 서해 바 다이며, 동쪽으로 쭉 뻗어가면 진안고원의 험산준령과 마주치게 된다. 이 또한 자연 스러운 경계가 되었을 것이다. 이를 현재의 행정 구역에 대입해보면, 현재 익산시를 25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52 기점으로 대야평야, 김제시, 전주시, 완주군 지역이 모두 이 강역 내에 속하게 된다. 물론, 이는 그 영역으로 최소한으로 잡았을 경우이다. 시야를 조금 넓혀 보면 만경 강 아래 동진강 유역 혹은 영산강 유역까지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금강 위쪽으로도 경계선이 확장될 수 있다. 학자에 따라 목지국이나 건마국의 위치 가 위아래로 오락가락하기도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영역을 넓히든 좁히든 분명한 것은 익산이 기원전부터 최소한 한반도 서남부, 마한 지역의 심장부였다는 사실 익산, 이곳은 준왕이 자신의 아들의 태를 묻어 후손의 미래를 싹틔운 역사적 상징 공간이다. 여기서 한국이 시작된 것이다. 3) 익산은 길이다 인류의 역사 발전 속도에는 이제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인류가 선사 시대를 끝내고 역사 시대에 돌입했다는 것은 축적된 지적 역량이 기 록으로 남기고 분류, 정리할 만큼 방대해졌다는 뜻이다. 그렇게 기록하지 않 기억하 기 힘들 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고,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기억의 한계는 언어의 한 계, 언어의 한계는 집단 지성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견지에 서, 언어 사용의 고도화, 폭발적 증가는 인류 지성의 비약적 도약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삼한 마한 준왕 익산! 이같은 국명, 지명, 인명이 역사서에 그 이름을 드러내는 것 또한 이런 이유 때문 이다. 이 시기에 한반도의 역사에는 폭발적인 도약이 있었고, 그 존재감을 외부에 확 실히 알렸던 것이다. 익산이라고 명명된 이 지역은 한반도에 산재한 여러 마을 중 역사적 족적을 뚜렷하게 우리 역사문화지도에 남김으로써, 그 이름을 그때부터 이제 까지 유지하게 되었고, 익산 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역사문화적 함의를 지닌 상징 적 공간이 되었다. 물론,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다 하여, 그때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 다. 역사서의 앞장에는 국가의 창건이나 전쟁, 영토의 병합이나 대규모 토목 사업, 천재지변과 같은 것만이 기록되기 때문 그와 같이 큰 일이 아니어도 사람들의 세 상에는 수없이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것이 더 큰 일일 수 도 있다. 따라서, 사서의 기록만으로 한 시기와 한 지역을 마음대로 재단하는 것은 후손들의 폭거일 수도 있다. 역사서에 기록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내부 불화나 외부와의 분쟁이 없었다는 이야 기, 천재지변 등으로부터 안전했다는 이야기 즉, 자기 조율과 자기 통치가 효과적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51

253 으로 진행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삼한과 익산은 준왕의 남행 무렵, 역사서에 이름을 내민 뒤로 한동안 역사 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준왕의 주도하에 삼한 연맹체가 결성된 이후 내 부적 역량 축적의 시간이 알지게 무르익고 있었다는 뜻일 게다. 그렇게 흐른 시간의 양이 상당하다. 고조선의 준왕이 남진한 것이 B.C 194년. 그 로부터 90여 년 시간이 흐른 B.C 108년에는 위만의 손자로 왕위에 앉아 있던 우거 왕( 右 渠 王 )의 군대가 한무제의 군대에 패퇴하였고, 그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부여( 夫 餘 ) 옥저( 沃 沮 ) 동예( 東 濊 )와 같은 이름이 북방 지역에 명멸하고 있을 때에도 삼한에 관한 기사는 쉽사리 보여지지 않는다. 근 500여 년에 가까운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이때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중국 사서에서는 농사와 양잠을 할 줄 알고 씩씩하고 용감하다. 해마다 5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으로 술자 리를 베풀고 집단으로 가무를 즐긴다. 춤출 때는 수십 명이 줄줄이 서서 땅을 밟으 며 손과 발로 장단을 맞춘다 는 기록하고 있다. 이방인이 남긴 몇 줄 인상기만으로 당대의 삶을 복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기록 속에 등장하는 농경 공동체의 모습은 유념할 만하 다. 씩씩하고 용감한 사람들이 농사에 온 힘을 쏟다가 농사철이 지나면 모여 함께 마시고 춤추며 즐겼다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선인들의 모습은 얼마 전까지 우리의 모습이었다. 500여 년, 삼한 사람들의 삶은 그후로도 또 2,000여 년 가까이 지속된 것이다. 이 런 면에서, 우리 삶의 원형적 자질은 삼한 시절, 이미 완성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후로, 삼한이란 이름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와 같이 강력한 왕권을 지닌 고 대 국가들이 등장할 때, 역사적 승자를 빛내주는 배경으로 잠시 드러날 뿐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삼한의 많은 공동체는 각각 고대왕국에 병합되면서 역사의 지층 깊은 곳에 가라앉게 되었다. 하지만, 이 땅에 삼한이란 이름으로 존재했던 시절의 기억은 사라졌다 하여도 조 상들이 살았던 그 땅에 여전히 우리들이 살고 있다. 이 땅의 역사는 조용한 가운데 끊김 없이 지금껏 계속하여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익산은 지금도 교통의 요지였지만, 당시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때 선인들이 오가던 길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그 길이 어디 허공으로 증발한 것은 아니다. 새로운 길이 옛길을 덮었을 뿐이다. 선조들이 걷던 길을 후손들이 또 걷듯이, 시간 위에 시 간이 겹쳐지고 시간의 길을 시간이 뒤덮어갔다. 자동차가 주된 통행 수단이 된 지금, 산악 지역에는 옛길과 요즘 길이 함께 존재 한다. 등짐을 지고 구비구비 고갯길을 넘어가던 길과 터널을 뚫어 평탄한 직선도로 25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54 를 낸 경우, 옛길은 사라지지 않고 도보여행객의 몫으로 남게 된다. 하지만, 익산 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평야 지역이다. 마을과 마을 사이를 잇던 길은 이미 그 옛날에 모두 완성이 되었다. 다만 폭이 좁고, 포장되지 않았던 길들이 폭을 넓히고 아스팔트 포장을 하고 도로 선형을 개선하며 그 모양새가 조금 달라졌을 뿐 이다. 호남선과 호남고속도로, 1번 국도가 지나는 길은 예전에도 익산의 남북 통행 로의 원형이었고, 익산-포항간 고속도로나 26번 국도는 예로부터 익산을 동쪽 지역 과 연결해주던 옛길을 좀 더 개선한 것이다. 삼한의 역사, 익산의 역사, 이곳 사람들의 역사는 이와 같이 과거와 현재가 분리되 지 않고 하나의 길 위에 여러 겹의 지층으로 존재한다. 길과 집이 바뀌면 부지불식간에 사람들은 여기에 있는 나는 누구인가, 묻게 된 다. 낯선 풍경은 그 낯선 풍경을 낯설어 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강제하 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 익산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 대해 역사적 정체성을 묻지 않아도 된다. 삼한에서 백제로, 고려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고 시간이 흘렀을 뿐,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 서남부의 가장 번잡한 교차로였고, 문화가 교환되 는 곳이다. 익산은 길의 도읍이다. 애시당초 길로 이루어졌고, 길이 만나는 곳으로 성장해온 도읍지가 익산이다. 나에게서 너에게로 나아가는 길 네가 나에게 다가오는 길 우리가 형성되는 길 시간과 시간이 만나고 엉키고 또 분리되는 곳.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준왕이 스스로 길이었고, 여기 조성된 마한은 까마득한 옛 날과 백제 이후를 이어주는 길이었으며, 백제는 중국과 일본을 이어주는 문화 터미 널이었다. 익산은 실제로도 길로 이루어진 길의 도시이지만, 길 이란 단어가 주는 상징성도 함께 보유하고 있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문화의 전승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증법적 과정을 전통 과 혁신 이라는 단어 로 설명하곤 한다. 그렇다면, 길의 도읍지인 익산은 전통이 온존하는 곳인 동시에, 늘 혁신이 일어나 는 곳이기도 하다. 길은 오래 된 길이되,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늘 다르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람은 낯선 생각, 낯선 문물과 함께 익산에 들어오고 또 빠져나간다. 또,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도 어느 날, 낯선 곳과 낯선 사람을 찾아 길을 떠난다. 만남과 함께 늘 떠남이 있고, 떠난 자는 언젠가 다시 돌아온다. 그때마다 익산은 행수가 솟꿈질을 하여 물갈이를 하듯, 늘 새로운 면모로 다시 태어난다. 길이 오래 되어야 이와 같이 새로운 사람의 길, 문화의 길이 열리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 익산은 법고창신( 法 古 創 新 ) 이란 추상적 이념을 공간적으로 구현한 곳이 아닐 수 없다. 옛 준왕이 남행하던 길 위에 철로가 놓이고, 삼남대로를 따라 고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53

255 속도로가 뚫렸으며, 모악산에서 미륵산으로 계룡산으로 새로운 토착종교의 길이 열 렸다. 4. 백가제해( 百 家 濟 海 ), 이제 바다로 나아간다 : 백제 전기 이야기 1) 물에서 용이 나오고, 용은 말을 낳는다 육상 교통망 하나만으로 익산이 길의 도읍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익산은 또한 수로가 발달한 곳이기도 했다. 금강과 만경강이 익산을 끼고 흘러 마침내 서해 에 가 닿으며 그 사이로 실핏줄 같은 지천들이 수도 없이 벋어 나간 곳이 익산이었 다. 익산이 일찍부터 중요한 지역으로 떠오른 이유 또한 익산이 너른 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과 함께 이곳의 물길이 좋았기 때문이다. 이곳이 만약 너르긴 하되 메마른 허허벌판이었다면, 사람들이 모여들 리 없었다. 정착 생활과 농경 생활의 첫 번째 조건은 무엇보다도 물이었다. 식수와 생활용수가 확보되지 않는 곳에 사람이 모여들 리 없었고, 그 많은 사람들 이 모여 함께 살기 위해선 더 많은 식량이 필요했으며, 쌀을 얻기 위해선 또 더 많 은 양의 물이 필요했다. 결국, 사람이든 동물이나 식물이든 물이 없는 곳에서는 살 수 없는 법. 고대로부터 익산이 중요시된 데에는 이와 같은 지리적 조건이 깊이 관여하였다. 물론, 농사의 성패에 관여하는 것은 땅과 물처럼 구체적인 조건 외에도 햇빛이나 바람과 같이 하늘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도 있다. 이와 같은 각각의 조건이 지닌 개 별적 특성을 하나로 조합하여, 통합적인 상승 효과로 이끄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들은 하늘을 알기 위해, 땅을 누빌 수 있기 위해, 물을 다스리기 위해 자신들 이 가진 지력을 총동원해왔다. 인류 발전의 역사란 어쩌면 지속적인 자연과의 대화 속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은 인간을 눈물짓게 하기도 하고 함빡 웃게 만들 기도 하였으나, 언제나 자연은 자연의 편일 뿐 인간의 편에 선 적은 없다. 인간들이 천제( 天 祭 )와 기우제( 祈 雨 祭 )를 지내고, 수신( 水 神 )과 지신( 地 神 )을 향하여 고축( 告 祝 )의 신성한 자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온 것은, 인간의 지력 그 너머에 존재 하는 초월적인 힘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힘이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힘. 그 힘은 인간들에게 언제나 두려움과 떨림, 경 탄과 찬양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경외의 마음을 표현하는 인간의 방식은 언제나 비나리였지만 어느 순간부 터 그 비손의 양식이 나뉘게 되었다. 사기 의 기록을 보면 중국 한( 漢 ) 무제 때 거행된 봉선( 封 禪 ) 의식은 매우 비밀스 25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56 럽게 치러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손( 天 孫 ) 천자( 天 子 )임을 자임한 중국 황 제는 최측근들만을 데리고 산에 오르고, 그나마도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자리 에는 그 혼자서만 몰래 올라갈 정도로, 어느 순간부터 하늘 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선택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으로 제한되기 시작하였다. 하늘을 향해 높이 솟구친 안테나와 같은 신성한 산악은 국가에 직접 관리하는 곳 이 되어, 일반인들은 출입조차 할 수 없게 되었고, 민간의 영역에서 곧잘 행해지던 기우제 또한 왕이나 왕의 명을 직접 수행하는 목민관( 牧 民 官 )들만이 행할 수 있는 전속 행사로 변해간다. 요컨대, 하늘 에 속한 일들은 높은 자리 에 있는 사람들만이 처리할 수 있는 몫으 로 변해간 것이다. 뜬 구름 그 너머에 있는 햇빛이나 바람에 대한 기원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 이 도맡게 되자,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 마음의 의지처를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찾게 되었다.낮에 해를 보면서 무언가를 비는 대신 밤에 달을 향해 정한수를 바치기도 했 지만, 밤하늘의 달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자신들의 삶에 직결되는 존재, 땅과 물을 민 중들은 자신들이 섬길 신격으로 삼았다. 거듭, 물이 중요했다. 땅은 자신들이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지심이 좋아지고 나빠진 다는 것을 사람들은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지력이 떨어지면 묵정밭으로 석삼년 묵 혀두고, 논과 밭에서 피 쭉정이나 잡초를 솎아주면 소출이 올라간다는 것도 알게 되 었다. 하지만, 물은 그게 아니었다. 물꼬를 살피고 둑을 쌓아 물을 가두는 일이야 인 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 하지만, 수량 자체가 줄어들거나 물길이 바뀌는 것은 사람 으로서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왜 이 곳은 조금만 파면 우물이 샘솟는데, 저곳은 아무 리 깊이 파고 들어가도 물이 나오지 않는지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하늘이 너무 멀고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라면, 땅은 너무 가깝고 자신들의 힘이 쉽게 미치는 곳 물에 관한 일은 꼭 그 중간계에 있었다. 사람의 손이 닿을 듯 말 듯 한 자리 순하기 짝이 없다가 순식간에 흉맹한 모습으로 돌변하고, 생명의 근원 이면서 또 어두운 죽음의 강이기도 한 두 얼굴의 존재 무섭다고 피해서도 친근하게 여기진다고 해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게 물이었 다.옛사람들이 수신제( 水 神 祭 )를 지내고 용왕제( 龍 王 祭 )를 지내기 시작한 연유가 여 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정한수 한 그릇을 길어 놓고 혼자 비나리를 하며 신명과 대화를 하는 것이든, 우물가에 모여 아낙들이 이야기꽃을 피우든 사람들은 물 가까 이에서 물과 함께 삶의 크고 작은 일을 헤쳐 나갔다. 물을 주재하는 신성한 영물로 서 용 을 상정하고, 용에게 인생의 희노애락을 이야기하고 삼라만상을 이해할 지혜 를 구한 것은 이런 면에서 자연발생적인 원시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산을 거점으로 살아갈 때는 하늘과 산이 신앙의 의지처였지만, 평야에 모여 살게 되면 땅 과 물이 삶의 결정적 요소라는 것을 절로 깨치게 되기 때문이다. 익산을 둘러싸고 있는 강과 하천은 결국 모두 서해로 이어지게 된다. 이 지역 사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55

257 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초월적 존재를 서해 의 용왕 으로 압축하여 상정했을 것이다. 물길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작은 물줄기가 모여 큰 하천을 이루는 것이 인간의 상식이지만, 인간들은 때로 그걸 거슬러 오르는 놀라운 힘을 상상하기도 한다. 마을 의 중심에 놓여 있는 작은 우물 속에서 큰 용이 나온다고 상상상하는 것은, 옛사람 들이 자연과 소통하며 얻은 크고 유쾌한 상상력이 아닐 수 없다.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있다. 말하자면, 어린 아이에서 장성한 어른을 보고, 늙은이 의 얼굴에서 동심을 읽는 것과 같이 융통과 변용이 모두 한 물길 아래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옛사람들은 파악한 것이다. 성당 포구에서 볼 수 있듯, 기수역 ( 汽 水 域 )에서 민물과 짠물은 서로 몸을 섞는다. 그곳에서 굳이 어느 것이 짠물이고 민물인지 가릴 수도 없고 가릴 까닭도 없다. 물은 저처럼 몸을 섞는다. 서해 용왕이 강줄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온다 한들 하등 놀랄 일이 아니다. 또, 물은 땅위로만 흐 르는 것이 아니다. 땅 밑으로는 더욱 거대하고 복잡하게 이어진 물길이 있다. 인간은 그 땅속 물길을 알 수 없지만, 용이라면 알 것이다. 용은 그 땅속 물길을 자맥질하여 오늘은 용화산 우물가에 나타나고, 다음날은 미륵사 바위틈에 행수로 그 모습을 드 러내기도 한다. 이런 게 고대인들의 상상력이었다. 이와 같은 연유로 사람들은 바다에서 용이 나듯, 물에서 말이 나온다고 상상하기 도 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천마, 페가수스 는 파도가 일으킨 거품에서 태어났고 서 유기( 西 遊 記 ) 에서 삼장법사를 태우고 가는 백마는 원래 용왕의 아들로 본신이 용이 었으며, 마침내 천축에 도착하여 소임을 다 하자 다시 용으로 돌아간다. 익산의 오래 된 지명, 금마 와 용화 는 이런 관계가 낳은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기록은 북쪽에서 내려온 준왕이 금마에 터를 잡고 삼한의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지만, 민간에서는 준왕 그 이전부터 이곳은 용이 터를 잡고 용이 변신하여 사람 이 될 수 있는 곳이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역사는 대개 공공 영역의 기록을 보존한다. 우리 역사에서 볼 수 있듯 그 책이 멸 실되면 우리는 그 안에 담긴 역사적 사실도 잊게 된다. 하지만, 민간 여항( 閭 巷 )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천 년 만 년을 이어지는 것. 그러한 민간의 상상력의 단초 가 슬쩍 사서에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명이라거나 탄생 설화 등과 같은 경우가 그렇다. 이 땅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무왕이 그렇고 견훤이 또한 그러하고, 역시 서해 바다를 배경으로 성장하게 되는 고려 태조 왕건 또한 땅과 물의 아들이며, 용 손( 龍 孫 )임을 자랑스러워했다. 까마득하게 먼 곳에서 온 천손의 후예가 나라를 세우는 것은 신성하지만, 물과 땅 의 자손이 용이 되는 것은 이처럼 친근하다. 25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58 2) 이제 바다를 바라보다 익산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서남 평야는 생산 소출이 높아 자연스럽게 높은 잉 여가치가 축적된 곳 일정 궤도에 오르면 역사 발전에는 가속이 붙게 된다. 역사에 기록될만한 전란이나 재해를 겪지 않은 상태에서, 수 백 년 동안 높은 부 가가치를 바탕으로 내적 역량을 다진 삼한은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겪게 되고, 이는 자연스럽게 내부 계층의 분화로 이어지게 된다. 땅속 깊은 곳을 파고 들어가 철광석이나 진귀한 돌멩이를 찾는 이들이 생기고 이 를 단련 주조 연마하는 방법을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그릇을 빚는데 평생을 다 바치 는 이들이 생기는가 하면 보다 개선된 형태의 기와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도 생 긴다. 이와 같은 직업적 분화와 자연스러운 공간적 분할로 인하여 삼한 땅에는 각기 특 색을 지닌 수 십, 수 백 개의 기술 전문가 집단이 발생하게 되고, 이들은 대를 이어 자신들의 역량을 심화하였다. 삼한 땅을 처음 일구었던 선조들이 새로운 도전을 즐 겨 찾았던 이들인 만큼, 새로운 도전을 장려하는 기풍은 더욱 진작되었다. 중국과 가까운 국경 지대로부터는 아비규환에 가까운 영토 전쟁의 소식이 더욱 자 주, 더욱 크고 가깝게 들려왔지만 그럴수록 이들은 더더욱 자신들의 역량을 향상시 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언젠가는 저 병화의 불길이 한강을 넘고, 자신들 또한 치열한 무력 투쟁의 시기에 접어들 것이라는 예감이 들수록 이들은 더더욱 자신의 내부로 파고들었다. 지금 갖춰두지 못 하면, 전란의 시기에는 더욱 힘들 것 그런 이들 중에 점차 바다를 향해 눈길을 돌리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만 한 까닭이 생긴 것이다. 우선, 그들에게는 또다시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땅을 다스리고 내륙의 물길을 파악하기까지 그들은 쉼 없이 달려왔다. 하나의 과제가 완료될 시점이면, 또 다른 도 전꺼리를 찾는 법. 저 수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더 나아갈 수 없는 가 조상들은 가장 먼 곳에서 가장 많이 걸어 온 이들, 익산에 먼저 들어선 이들은 없던 길을 개척하고 복잡한 세계의 지도를 그려낸 이들 그 핏줄이 어디 가겠는가. 이들의 눈은 또 다른 신세계, 더욱 광활한 미지의 세계를 향하게 되었다. 농업 생산 기술의 혁신을 통한 잉여가치의 축적이 진행되는 동안, 무역과 교환가 치에 대해 눈뜨게 되었다는 점도 이들이 바다를 바라보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자 신들이 축적한 기술적 역량을 자랑하고 이를 다른 이들의 역량과 겨뤄보고 싶은 마 음 또한 적지 않았다. 지금 나는 어디까지 왔는가, 그것을 점검하려면 객관적인 비교 대상이 필요했다. 진-한 시대를 거치는 동안, 거친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 땅은 그들이 보기에 야수들이 싸우는 약육강식의 공간인 동시에 매우 냉철한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되는 공간이기도 하였다. 다툼은 싫었지만, 경쟁에서 패할 거라는 생각도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57

259 없었다.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가슴 속에서 순수한 호승심이 솟구치는 것을 이들은 느끼고 있었다. 또, 내부 요인도 있었다. 언제부턴가 이들은 점차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비좁 게 여겨지고 있었다. 각각의 집단은 내부로부터 팽창의 압력을 받고 있었고, 이는 뜻 밖에도 인접 집단과의 마찰을 불러 일으켰다. 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이런 상황 이었다. 내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다른 이들이 가진 것을 넘보는 일. 무엇보다 스스 로 자존감을 해치는 일이었다. 이렇게 내 문제로 인해 남들과 소모적인 분쟁으로 옥 신각신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삼한 사람들은 점차 깨닫게 되었다, 나와 내가 속 한 집단만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에서 넘치는 에너지를 파괴적인 데다 쓰지 않고 생산적인 곳으로 유도할 어떤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행히 이들은 자신 들의 바람을 실천할 수 있는 의지와 그동안 쌓아둔 물적 토대, 그리고 높은 기술력 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의지와 의지를 뒷받침할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하여 일이 금세 성사되는 것 은 아니었다. 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강을 건넌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 강은 아무리 넓다손 치더라도 저쪽 편에 기슭이 있다는 것을 상상 가능하게 해준다. 그런 예측과 믿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강에 뛰어들게 만든다. 하지만 바다는 다르다. 지금 이 포구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끝이 어디일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물살이 어 떻게 흐르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난바다에 휘몰아치는 바람의 칼끝이 어디를 겨눌 것인지 역시 가늠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에 몸을 던진다는 것 은 거의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거리 측정 방법이나 항해술, 조선 기술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한 현대에도 여전히 거친 파도에 흔들리 는 배에 몸을 싣는다는 것은 남다른 용기를 수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당대 사람들이 느꼈을 두려움이나 담대함의 크기를 상상할 수 있을 것 이다. 두려움을 헤치고 바다에 몸을 던진 이들은 수도 없이 좌절을 맛보았을 것이다. 뗏 목에서, 통나무를 통짜로 깎고 그 속을 파 낸 목선으로, 노를 젓는 방법을 연구하고, 돛으로 바람을 제어하는 방법을 익히기까지 젊은이가 노인이 되고, 그 손자가 또 자신의 손자에게 자신의 시행착오를 전달하고 개선하는 방식으로 삼한 사람들은 바 다를 향한 자신들의 조금씩 천천히 그러나 탄탄하게 키워나갔다. 3) 삼한의 눈과 귀가 되어 활동했던 십제( 十 濟 ) 강력하게 통일된 왕조를 이룬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삼한의 각 부족 사이에는 조금 더 강한 응집력을 가진 집단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하였 다. 25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60 준왕의 남하와 삼한 연맹체의 결성 때부터 예고되었던, 변화의 시기가 다가온다는 것을 이들은 점차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기술적 혁신이 거듭되고 내적 역량이 깊이 축적될수록, 인접한 영역의 이웃 집단 과는 조금씩 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높이 쌓이는 느낌 그럴수록 사소한 오해 가 빚은 마찰도 늘기 시작했다. 서로 원활한 의사 소통만 이룬다면, 기술과 기술이 융합되고, 힘을 합해 이제껏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에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모두 그런 마음을 품고 있어도 실제에서는 그게 잘 이뤄지지 않았다. 원만한 조정자, 강력한 지도력은 갈수록 절실했다. 더욱 다양한 영역에서 분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분화의 깊이는 깊었다. 또한, 바다를 건너기 위한 항해술이나 조선 술처럼 서로 공유를 해야 할 원천 기술이 늘어나고 있었으며, 바다에 한 척의 배를 띄우는데 필요한 시간이나 비용 그리고 위험은 서로 나누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필요성이 제기된 이후, 인접한 집단과 집단 사이에 보다 강력한 동맹이 추진 되기 시작하였다. 마한, 진한, 변한과 같은 현태의 느슨한 연맹체보다 훨씬 결속력이 강하고 소규모인 동맹체의 등장은, 오랜 시간 지속된 삼한 연맹체 체제의 근본적인 개혁을 불러 오게 되었다. 그게 시간의 힘이었다. 시절이 바뀌고 상황이 바뀌면 결국 대응의 방식이 바뀔 수 밖에 없는 것 2천여 년 전, 이 땅에 새로운 땅과 새로운 도전을 찾아 들어선 선조들이 있었다. 5백여 년, 조선의 왕 준왕이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이 땅에 찾아 들어 시세의 변화 와 보다 전문화된 기술 역량의 심화와 느슨한 연맹으로서 공동 자치 형태를 제안했 었다. 이제, 다시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새롭게 도전해야 할 바다를 앞에 두고 있었고, 생존의 각축장이 된 중국의 소식이 가깝게 들리기 시작하면서, 마한 변한 진한에 속한 80여 개의 소국들은 각각 새로운 동맹체의 결속이나 동맹체 속으로의 편입 속에서 자신들이 갈 길을 찾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변화의 요구 속에 삼한 역시 새로운 대응 방식을 찾아야 할 시 점에 이른 것이다. 이때까지도 여전히 한강 이남은 무풍지대에 가까웠다. 압록강을 중심으로는 옛 조 선의 후예들이 각기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있었고 그 여파는 한강 이북까지도 영 향을 주고 있었지만, 한강 이남은 삼한 연맹체의 영도 하에 평화스러운 일상 속에 치열한 연구 개발이 진행되는 곳이었다. 이즈음, 북방의 불안한 정세로 인하여 도강을 하여 새로운 세상을 찾아오는 이들 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로 인해 한강 주변은 초라한 몰골로 새로운 꿈을 찾아온 이 들이 늘 북적대는 곳이 되었다. 그곳에는 다른 이들보다 조금 일찍 이곳에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던 이들이 있었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59

261 다. 고구려의 건국 세력이었지만,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하여 주몽과 결별한 이후 세력 을 옮긴 소서노와 그의 아들, 비류와 온조 등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준왕이 남하 한 지 약 2백여 년 뒤, 이들은 준왕의 남행길을 따라 한강 주변에 이르렀다. 초기 정착 과정에서 내부적인 혼란도 있고, 주변과의 알력도 있을 수 있었으나, 삼한 연맹 체에서 이들에게 흔쾌히 터전을 내줌으로써 그간의 문제가 모두 해결될 수 있었다. 그 옛날 준왕이 위만에게 국경선을 맡긴 것과 마찬가지로, 북방 사정에 밝은 이들 에게 한강 주변 지켜줄 것을 권유했고, 그들 또한 자신들이 떠나온 땅과 한 치라도 가까운 삼한의 최북단 지역을 흔쾌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때, 온조 등을 따라 남하한 이들이 10여 개 가문에 이른다 하여, 언제부턴가 이 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십제( 十 濟 )라 칭하였다. 대개 이들은 현재의 남한강 유역에 해당하는 강줄기를 따라 정착했으며, 자연스럽 게 이들은 삼한 연맹 전체의 북방 강변 수비대와 같은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 또 한 십제나 익산 중심의 삼한연맹체에게 모두 기껍게 합의할 수 있는 일이었다. 특히, 십제 사람들 마음 깊은 곳에는 고구려에 대한 경계의 마음이 놓여 있어, 남보다 자 신들의 눈과 귀로 고구려의 소식을 탐문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터전이 마련된 뒤 십제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임에 충실하게 임했다. 그들은 북방 의 소식에 귀를 곤두세웠고, 들려오는 정보를 정확하게 분류하여 삼한의 총수인 익 산에 송부하였으며, 여러 소국에서 개별적으로 원하는 정보를 수집하여 알려주는 역 할에 신명을 다 했다. 그리고, 후손들을 향한 자신들의 유훈으로 다른 일에 기웃거리 지 말고 후손들은 이 일에 진력을 다 하라는 뜻을 남겼다. 대를 이어가는 동안, 선조의 유훈은 철칙이 되어갔다. 이들은 자신들의 소임을 다 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혼란과 격동이 거듭되는 중국의 소식을 수집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한강 유역의 십제와 익산 사이에는, 일종의 정보 고속 도로가 개통되게 되었다. 이 길을 통해 십제는 자연스럽게 삼한 연맹체의 눈과 귀가 되었으며, 익산의 지도 부는 삼한의 머리 역할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삼한 전체가 정보망을 통 해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게 되었다. 다른 집단들이 각각 전문적인 기술을 축적하는 동안, 십제는 정보를 수집하는 능 력을 키워나간 반면, 익산의 사람들에게는 정보의 경중을 가늠하는 능력이 더욱 요 구되었다. 그 정보 속에는 외부에 대한 정보도 있었으며, 삼한 내부의 복잡한 소국들 에 관한 정보도 있었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과 이후 정황으로 인해 시간이 흐를수록, 십제의 역할 비중은 증대되게 되었다. 이들의 첩보망 운영 능력과 정보 분석 처리 기술은 고도화되었고, 일 처리는 민첩하고 세련되게 되었다. 당연히, 십제에 의해 수집된 정보의 양은 방대 해질 수밖에 없었다. 26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62 하지만, 삼한 연맹체의 맹주 익산은 굳이 정보를 쌓아둘 필요를 느끼지 못 했다. 익산에서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십제를 통해 보고되는 정보를 바탕으로 진위, 경중 여부를 판단하고 완급을 조절하여 배포하는 일은, 익산이 해야 할 많은 일 중 의 하나였을 뿐이다. 이런 사정은 다른 집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각기 자신들이 탐구하고 연마해야 할 과제들이 있었다. 땅길이든 물길이든 이들은 각기 자신들 스스로 가야할 길이라고 여기는 길이 있었다. 그 길은 곡물을 향하기도 하고 나무나 풀을 종착지로 삼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흙속에 파묻힌 돌멩이나 짐승들의 질병과 같은 것이 그들이 당도해 야 어떤 목표였다.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고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점차 삼한의 모든 정보는 십제가 오롯이 독점하게 된 것이다. 어느 시점부터 십제를 이루고 있는 열 개의 가문은 각 기 농업 기술, 천문 지리, 외교 군사, 각국 내정, 인물 정보 등으로 정보 분야를 세 밀하게 나누어 각각 한 분야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내부 특화를 단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취득한 정보와 자신들이 구축한 관계망을 통해 조심스럽 게 유통 쪽으로 자신들이 업무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익산의 사전 재가를 받아 시작된 이 일은, 실제로 삼한 연맹체의 공동 이익에 부합하는 일이기도 했다. 각각의 집단이 물류망을 가동하고 유지한다면 그 얼마나 낭비란 말인가? 각 부족은 자신들 의 소임에만 충실하고, 부족과 부족, 부족과 익산 사이에 발생하는 물류 유통은 모두 십제에게 맡기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이들은 생각했다. 물류의 중개와 배달을 도맡게 된 십제의 사람들은, 두어 대가 지나도록 묵묵히 이 일을 수행하다가 자연스럽게 운송 수단의 개발과 개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조심 스러운 목소리로 꺼내기 시작했다. 이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요청이라고, 익산과 연맹체 지도부에서는 생각했다. 십제의 조십스러움에 비하면 매우 빠르게, 그리고 흔 쾌히 삼한 사람들은 십제 사람들의 생각에 동의를 표했다. 십제인들은 삼한 내 모든 집단을 모두 드나들고 있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험로를 마다치 않는 이들이 었고, 때로는 연맹체의 요청에 목숨을 걸고 저 먼 중국 땅까지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만한 편의는 제공하여야 한다는 것이, 삼한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이 떼 십제인들이 삼한연맹을 향해 요구한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들은 기술을 개발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닌 만큼, 마차의 개량이나 배의 운행과 건조에 필요한 정보가 있을 때, 그 기술을 보유한 집단에 자문을 구하겠다는 것 정도가 십제인들의 요구였다.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요청이었고 고민하지 않아 도 될 만큼 단순한 부탁이었다. 각 부족들은 십제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들이 보유 하고 있는 지식과 기술을 아낌없이 십제에게 전수하기 시작했다. 삼한 사람들에게 십제는 쓸모가 많은 집단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마음을 얻은 친구이기도 했다. 무슨 부탁을 해도 들어줄 만큼 십제는 삼한 전체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 처음, 조악하기 짝이 없던 수준에서 시작된 십제 사람들의 조선술은 각 집단으로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61

263 부터 기술을 전수받으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십제는 정보를 모으 고 비교하고 분석하는 일에 이골이 난 집단 이쪽 부족에서 얻은 기술은 용골을 만 드는데 써야 훨씬 효과적이고, 저쪽 부족에서 알려준 닻 제작 기법을 또다른 부족에 서 얻은 흘수 측정법과 결합하여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방식의 조타술을 개발할 수 있는 영민함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발전된 운송 수단을 지니게 됨으로써, 십제는 그야말로 달리는 말이 날개를 얻은 것처럼 더욱 거침없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더 먼 곳까지 더 빨리 더 안전하 게 다녀올 수 있었고, 그만치 더 신속하고 신뢰할만한 정보를 가진 집단이 되었다. 실제로는 하나나 다름없는 십제의 정보망과 유통망은 익산 마한을 중심으로 심한 전 역으로 거미줄처럼 뻗어나갔다. 십제의 정보망은 남해에도, 동해에도 있었고 심지어 바다 건너 산동반도와 요동에도 깔려 있었다. 산속 깊은 곳에서 나는 철광석을 해운 으로 수송하고, 바다에서 얻은 소금을 내륙 깊은 곳으로 운반할 때마다 십제라는 눈 에 보이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더 커졌다. 전문적인 기량을 갖춘 집단과 집단들의 연맹체인 삼한에서 십제의 존재는 이처럼 다소 이색적이었으나, 그 나름으로 필요한 존재였고 날이 갈수록 이들의 존재 가치 는 높아져갔다. 이들은 처음 길의 수문장이었다가 이제는 길의 관리자가 되었고, 슬며시 삼한 전 체를 관통하는 길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자신들의 달라진 역할과 위상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은 것도 당연히 십제 사람들이 었다. 이제 자신들이 없으면 삼한의 유통망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고 있었다. 하여, 십제는 더욱 겸손해졌다. 혹시라도 자신들의 성장을 불편해 하는 부족이 있 을까, 십제는 고개를 조아리고 몸을 사렸다. 십제인들에게는 성급함으로 인한 패배의 기억이 뇌리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이주한 지 1백 년, 2백 년이 흘러도 이들은 그걸 잊지 않고 있었다. 너무 일찍 왕위 계승권을 요구함으로써 주몽 세력으로부터 견제와 의심을 자초, 어이없게 도 자신들의 오랜 터전을 그들에게 내주고 야반도주하듯 남행을 해야 했던 뼈아픈 기억! - 서둘러서는 안 된다, 마지막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다, 그때가 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참고 견딘다! 노인부터 어린 아이까지 십제인들은 이런 교훈을 뼛속에 새겨두고 있었다. 삼한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길, 삼한을 중국으로 이어주는 길, 삼한과 먼 바다 너머 섬 나라 야마토와 잇는 길을 모두 완성할 때까지 그들은 아직도 길을 닦고 있는 사람들 일 뿐이었다. 십제를 통해 눈에 보이는 땅길과 물길이 개척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정보망이 더 크고 넓게 형성될수록, 거간이자 장사꾼인 십제인들을 찾는 삼한인들의 수는 폭발적 으로 늘어났다. 26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64 십제인들은 공손하고 정중하게 익산 마한 왕을 찾아 중요 요충지에 자신들의 유통 거점을 건설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뜻을 밝혔다. 모든 정보망의 중심, 유통의 시 작점과 종착점을 익산으로 하여 삼한 전역을 아우르는 물류 유통망을 건설하면, 익 산의 심한 통치에도 더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설득도 빠지지 않았다. 익산은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기다렸다는 듯이 십제의 열 개 가문은 자신들 을 장자를 모두 익산으로 보내어 익산에서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장차 가문을 책 임질 장자들이 모두 익산에 거주하게 함으로써, 십제인들은 익산과 삼한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효과를 얻었다. 중국의 전국 시대부터 유행한, 사람을 담보로 두는 일, 즉 인질을 파견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삼한의 심장부로 십제의 중심, 십제의 미래가 옮겨온 것이었다. 가문의 미래를 책임진 장자들은 익산에 와서 젊은 시절을 보내며 삼한 각국의 유 력자들과 인연을 만들어 나갔고, 이후 자신이 가문의 경영자가 되어, 한강 유역의 본 가로 돌아가게 되어도 자신의 큰아들은 남겨두었다. 그렇게 대를 이어, 십제 가문의 계승자들은 익산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가문을 운영하는 방법, 관계망을 구축하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나중에는 아예, 은퇴하여 선영에 묻힐 날을 기다리는 날이 될 때 까지 익산을 떠나지 않고 익산에서 가문을 총지휘하는 수장들도 속출했다. 이처럼 삼한의 심장부인 익산에 문을 연 십제 열 개 가문의 분국은 사실상 총부나 다름없었지만, 십제인들은 한결같이 이는 분국에 불과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남들의 주목을 받는 것을 십제인들은 극도로 경계했다. 하지만, 이목을 피한다고 해서 자신들의 활동까지 은밀하게 벌인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활동 영역은 더 넓어지고 이들의 활동은 더욱 공개적이며 사교적인 것으로 변해갔다. 날마다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익산의 분국 문턱은 날마다 닳고 또 닳았다. 자신 들이 기억 못하는 선조대의 기록에 대해 알기 위해, 자신들이 만든 물건을 다른 집 단에게 배달하기 위해 찾아오는 고객들은 날이 다르게 늘어났다. 십제 사람들은 그 때마다 늘 겸손하고 융숭하게 그들이 원하는 정보나 용역을 파격적일 정도로 저렴한 대가만을 받고 제공하거나 수행해줬다. 귀찮고 힘든 일일 처리해주는 대가를 너무 적게 요구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 이들이 간혹 있었지만, 그때마다 십제인들의 대답 은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한결 같았다. 뒤늦게 터전을 찾아온 자신들을 내치지 않고 수용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는 것이었다. 일견, 그럴 듯한 대답이었고 굳이 더 따져 물을 일도 아니어서 대부분 사람들은 그저 감격했다는 표정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다. 이렇게 십제인들은 삼한 연맹 내에서 얻은 신망은 더욱 단단해졌다. 이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자산이라는 것을 십제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후한 십제인들의 응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들도 있게 마 련인데, 이런 이들에게는 십제인들이 뜻밖의 대가를 요구했다. 함께 밥을 먹고 술을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63

265 마시며 자신들이 사는 곳 이야기나 들려주면 된다는 것이, 십제인들의 요청이었다. 귀한 정보를 거의 공짜로 얻거나 어려운 일을 흔쾌히 도맡아준 십제인들을 앞에 두고 이런 요청을 거절할 이가 있겠는가. 더구나 대단한 기밀을 이야기해달는 것도 아니고, 요즘 자신의 나라에서는 코흘리개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이야기해준다는 것이 무에 대수냐 싶었을 것이다. 기록하고 끈기 있게 시간을 기다리는 것, 이게 십제가 스스로 터득한 힘을 기르는 방법이었다. 당대에는 하잘 것 없는 이야기, 그 집단에서는 너무 흔해빠진 것이어서 소홀히 하 기 쉬운 정보를 십제는 모두 주어 담아, 자신들만이 알고 있는 독특한 분류법에 차 곡차곡 나누어 저장했다. 그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된다는 것을 이들은 시간 속에서 배운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곰처럼 웅크려 시간을 곱씹고 있던 십제에게 드디어 삼한 연 맹체 내에서 확실하게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삼한 내 여러 집단의 관심이 이제 바다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 저 너머 에 중국 땅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중국 땅의 사정이 어떤지 어떻게 가야할 것인지 아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삼한 연맹체 내의 소국들은 모두 각각 특기를 지닌 전문가 집단. 전문화가 심화될 수록 이들은 자신들의 영역 깊고 미세한 곳까지 파고들었지만, 자신의 영역 외에 다 른 분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각각의 집단은 자신들이 소유한 원천 기술과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집단이 갖고 있는 기술이 서로 결합하면 더 큰 효과를 낸다는 것도 잘 알지 못 했다. 오직 모든 정보를 거래하고 있던 십제의 사람 들만이 이쪽 집단의 기술과 저쪽 집단의 기술이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고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중국은 늘 혼란스러웠다. 한나라의 성립 이후 한무제와 같이 걸출한 군주 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 황실 사정은 어지러웠고 이는 금세 너른 중국 천지를 무정부 상태로 만들기 일쑤였다. 유맹( 流 氓 )의 무리는 중국 천지 어디나 언제 나 나타났다. 협의( 俠 義 )를 표방하는 무리들도 있었지만 거개가 군도( 群 盜 )였다. 무지비하고 흉맹한 중국 소식은 바다를 건너오면서 더욱 증폭되게 마련. 바다를 건너 중국 땅을 밟아 보고픈 마음을 두려움이 가로막고 있었다. 정확한 정보가 필요 했다. 바다 위에 놓여질 뱃길도 궁금하고, 배가 가 닿을 포구의 지형도 중요했지만, 그곳의 사정 그곳 사람들의 인심이 무엇보다 궁금한 일이었다. 이렇게 십제를 찾는 사람들은 또 늘어났다. 이들이 갖고 온 호기심과 기대, 불안은 바로바로 십제인들의 정보 처리망에 의해 그날 밤마다 정리되고 분류되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십제인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위치와 역할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짧게 보면, 현재 정보 장사로 큰 이문을 취하는 것이었지만 십제 사람들은 곰처럼 26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66 우직하게 때를 기다려온 사람들 더 멀리 봤다. 우선 지금 이 시기는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북에서 내려온 옛 조선의 왕, 준왕이 남하했을 당시와 어딘가 다른 듯이 많이 닮았다고 이들은 이내 분석, 정리하였다. 준 왕이 남하하였을 시, 원 조선은 위만이라는 국경수비대장에게 맡겼다던가 준왕은 이곳에 내려와 부족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느슨한 연대 를 주창하며, 강력한 결속은 후대의 일이라고 이야기했다던가 바로 지금이 그때라고, 십제인들은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제 새로운 형태의 강력한 결속이 필요한 시점. 멀리 보는 눈과 강단 있는 추진력을 갖춘 새로운 형태 의 왕조 국가가 등장할 때가 된 것이었다. 제 4장 스토리텔링 발굴 및 실행 방안_김병용 265

267 부록 - 익산역사지구의 역사유적 관련 스토리 정리 1) 무왕의 성장기 스토리텔링 무왕, 마룡지, 용샘, 익산토성, 오금산, 오금사지, 사자사지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백제(百濟)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는 과부가 되 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그 못의 용(龍)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아이 때 이름은 서동(薯童:마동)이다.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 기가 어려웠다. 늘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마동이라 이름 했다. 그는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가 아름답 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인 서라벌(徐羅伐 지금의 慶州)로 가 서 마를 동리 아이들에게 먹이니 아이들과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그는 동요(童謠)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꾀어 그것을 부르게 했는데 그 노래는 이렇다.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얼러두고 맛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 무 익 왕 산 이런 동요가 서라벌 안에 좍 퍼져서 대궐에까지 들려지니 백관(百官)들이 임 (서 시 금에게 극력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했다. 떠나려 하자 왕후(王 동) 사 后)는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공주가 장차 귀양 터에 이르려 하는데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절하면서 모시 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온지는 알지 못했으나 우연히 믿 고 좋아했다. 이로 말미암아 서동을 따라갔으며 몰래 관계했다. 그런 후에야 서동(마동)의 이름을 알았으며 동요의 영검을 알았다. 함께 백제 로 와서 모후가 준 금을 내어 생계를 도모하려 하니 서동은 크게 웃으면서 물 었다. 이것이 무엇이오? 공주는 말했다. 이것은 황금입니다. 한 평생의 부를 이룰 만합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파던 곳에 황금을 흙처럼 많이 쌓아 놓았소. 공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그것은 천하의 진귀한 보배이니 당신이 지금 그 금이 있는 데를 알면 그 보 26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68 물을 부모님( 眞 平 王 )의 궁전에 수송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은 말했다. 좋소. 이에 금을 모아 언덕처럼 많이 쌓아놓고 용화산( 龍 華 山 ) 사자사( 師 子 寺 )의 지 명법사( 知 命 法 師 )에게 금을 수송할 계책을 물으니 법사는 말했다. 내가 신통한 도의 힘으로써 보낼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시오. 공주는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는 신통한 도의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보내어 두었다. 진평왕은 그 신비로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서동을 존경하여 늘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 武 王 )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의 큰 못 가에 이 르니 미륵삼존( 彌 勒 三 尊 )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 다. 왕비가 왕에게 말했다. 이곳에 큰절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진실로 제 소원입니다.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었더니 법사는 신통한 도의 힘으로써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서 평지로 만들 었다. 이에 미륵삼존의 상( 像 )을 모방해 만들고 전( 展 : 佛 閣 )과 탑( 塔 )과 묘무( 廟 廡 )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 彌 勒 寺 )라 하였다. 신라 진평왕 은 각종 공인( 工 人 )을 보내어 역사를 도와주었다. 그 절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는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 권2 무왕조( 武 王 條 )에 나오는 기록이다. 고본에는 무 강왕( 武 康 王 )이라 했으나 백제에는 그런 왕이 없으니 누구는 30대 무왕이 아 니라 25대 무령왕( 武 寧 王 )일 거라는 추측아래 그 전대인 동성왕( 東 城 王 ) 15년 에 백제와 신라가 통혼한 사실을 두고 꾸며댄 로맨스일 거라고 보는 이도 있 다. 설화 모티브는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과 비슷한 입신출세의 기이담( 奇 異 譚 )으 로 통과제의( 通 過 祭 儀 )로 이 또한 고대소설의 일반적인 특징인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황당한 픽션이다. 연못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는 건 국조나 영웅의 초이적인 탄생 설화 와 같되, 굳이 용으로 한 것은 고대의 농경사회에서 지닌 용신앙( 龍 信 仰 )에서 온 것이다. 마동이 이야기대로 이름 없는 평민 출신이었을까 하는 건 의문이니, 몰락한 왕손 아니면 후궁에서 낳은 서왕자일 수도 있다. 글 중에 나오는 서동요( 薯 童 謠 )는 4구체 민요형인 향가. 풍요. 혜성가와 더불 어 삼국시대의 가요로서 가장 오래된 노래로 일종 참요( 讖 謠 )의 성격을 띠고 있다. 황금을 흙처럼 쌓아놓았다 는 건 실제 금이 아니고 이른바 물물교환이 교역수 단이었을 당시 식료인 마( 薯 預 )가 곧 돈(황금)이라는 시사가 된다.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267

269 지명법사의 신통력 이란 사람의 지혜로는 측량할 수 없는 신비로운 도력( 道 力 )으로 고대인이 믿은 주술력( 呪 術 力 )에서 나온다. 용화산 은 미륵산의 본 이름. 용화( 龍 華 )와 미륵( 彌 勒 )은 같은 뜻이다.) 마동이와 선화공주 옛날에 어떤 과부가 어린애 하나를 데리고 살았다. 집안 살림이 어려워서 남 의 집일이나 해주고 밥을 얻어서 겨우 사는데 아이에게 밥을 주어도 이 아이 는 밥을 먹지 않았다. 가만히 보니까 마만 먹고 있었다. 마를 캐다 준 일이 없 는데 이렇게 끼니마다 마를 먹고 있어서 어디서 그 마가 났냐고 물었다. 아들은 까막까치가 갖다 주더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마만 먹고살아 그 이름 을 마동이라 불렀다. 마동이가 열댓 살 되니까 하루는 어머니에게 어디쯤 갔 다 오겠다고 하고 집을 나갔다. 마동이는 거기서 신라 땅으로 갔다. 신라의 서울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선화공주를 만났다. 한 번 보고 마음에 들어서 어떻게 하든지 마누라를 삼고 말리라 마음먹고 마 누라 삼을 궁리를 했다. 많이 궁리한 끝에 한 꾀를 내어 아이들을 많이 모아 마를 주기도 하고 엿을 주기도 하여 선화공주는 마동이와 좋아지낸다는 노래 를 부르게 했다. 그리고 이 노래는 내가 가르쳐 주었다고 하지 말고 하늘에서 들려와서 불러 보는 것이라 하라고 단단히 일러 놓았다. 아이들은 마랑 엿이랑 얻어먹는 재 미에 자꾸 그 노래를 불러서 그 노래가 서울 안에 쫙 퍼졌다. 신라왕이 이 노 랫소리를 듣고 선화공주가 이름도 없는 미천한 놈과 좋아지낸다고 화를 내고 선화공주를 궁궐에서 내쫓았다. 마동이는 선화공주가 쫓겨나온 것을 만나 데 리고 제 본국인 백제로 왔다. 이렇게 해서 마동이는 선화공주를 얻어 가지고 사는데 하루는 선화공주가 마 동이에게 대장부는 글도 배우고 말도 타고 칼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면 서 책과 말과 칼을 사서 주었다. 그래서 마동이는 글공부를 열심히 하고 말 타기도 연습하고 칼 쓰기도 익혔다. 그리하여 글공부도 늘고 말도 잘 타게 되 고 칼도 잘 쓰게 되어 나중에는 백제의 왕이 되었다. 이 왕이 바로 무왕이다. (같은 설화가 전승되는 과정에 엄청나게 달라짐을 볼 수 있다. 앞의 두 이야기 에 비하여 이것이 훨씬 설화적 요소가 가미되었으며, 그 나름의 현실 감각도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1. 마를 까막까치가 물어다 주었다: 마동이 밥을 먹지 않고 마를 상식했다는 것으로 특별한 아이였음을 부각시키려 했고, 까막까치를 든 것은 고대인에 있 어 새는 길흉의 암시하고 상징함으로서 초이적인 인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로 탈해왕( 脫 懈 王 )의 탄생설을 들 수 있다. 2. 우연히 선화공주를 만나 연정이 싹텄다: 픽션으로 인간 성정의 자연스런 발 로라는 현실적인 해석이 드러났다. 26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70 3. 아이들에게 마랑 엿이랑 주었다: 마 말고도 엉뚱하게 엿이 삽입되었으니 당 시 엿이 있었겠느냐는 의심과 함께 어쨌든 현실감 있는 표현이다. 4. 동요를 하늘에서 들었다고 종용하다: 천의(天意)는 사람으로서 어찌 할 수 없는 일. 그러니 불가피한 운명적 사랑임을 강조하려는 뜻이다. 5. 선화공주가 마동에게 책과 말과 칼을 사주었다: 마동의 입신출세에 따르는 일종의 통과제례로서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에서 사냥을 든 것과 성격이 같 다.) 미륵삼불과 선화공주의 꿈 백제의 무강왕의 왕비 선화공주가 꿈을 꾸었는데 큰 못 가운데서 미륵삼불이 나와서 세상에 나와야겠다고 말했다. 왕비는 꿈을 깨고 나서 왕에게 꿈꾼 이 야기를 하고 미륵삼불을 위하는 일을 하자고 말했다. 왕은 왕비의 꿈 이야기를 듣고 탑을 세 개 세울 것을 의논하고 지금 노상리 에다 둘 왕궁면 왕궁리(탑리)에다 하나를 세웠다. 왕궁리 궁평은 그때 왕궁이 있었던 자리라고 전해지기도 했다. (백제의 무강왕이란 고본에 의한 잘못이고, 노상리에다 두 탑 운운한 것은 동 탑과 서탑을 가리키는 듯 하나 이의 존재 역시 근래에 밝혀진 만큼 최근에 첨 가 되었음직하다. 꿈속에 미륵 삼불이 나타났다는 건 꿈의 예시성(豫示性), 불 가피한 일의 원천을 알리는 몽조(夢兆)의 신비성을 드러낸 말이다.) 마룡지(馬龍池) 금마면 서고도리 연동마을에 위치한 마룡지(馬龍池)는 금마면 서고도리에 있 는 연방죽을 말하는데, 이곳은 백제 30대 무왕이 된 서동의 탄생설화와 관계 가 있는 곳으로 서동의 성장설화와 관계있는 용샘(龍泉)과는 약 200m의 거리 에 있다. 마룡지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참으로 아름다운 연꽃의 향연이 펼쳐지 고, 늦가을 연못가에는 마른 수초만 가득하여 겨울을 난다. 부여 궁남지에 연 꽃이 만개하여 서동출생지라 대대적인 홍보를 하는데 아직도 서동출생지 라는 익 팻말 이외에는 그 어디에서도 맛동 을 만나볼 수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마 산 삼국유사 무왕 조에는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인데 어머니가 과부가 룡 향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못의 용과 관계를 맺어 무왕을 낳았 지 토 다. 어려서 이름을 장(璋)이라 하였는데 그릇이 컸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서 지 생활을 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서동이라 하였다... 라는 연못 과 관련한 설화가 있어 일찍 주목을 받았던 곳이다. 이 삼국유사 기록은 서 동의 母가 주변에 집을 지어 살던 연못에는 지룡(地龍)이 있었고, 둘이 관계를 맺어 서동이 출생하였다고 한다. 지룡에 대해서는 뜻 그대로 연못의 용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池의 음만 빌어 표기한 것이라면 지룡(地龍), 즉 지렁이로 볼 수 있다. 실제 이물 교접 설화 중에는 뱀이나 지렁이 등이 남자로 변해서 자 고 간 뒤에 처녀가 잉태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설화의 내용은 전국적으로 산재 해 있다. 또한 이곳 오금산 아래 마룡지는 서동의 母가 과부로 생활할 때 살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2 69

271 았던 연못이라고 동국여지승람 권 33 익산군 山川條 와 佛子條 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마룡지(馬龍池) 오금사(五金寺) 남쪽 백여 보(步) 되는 자리에 있다. 세상에 전 하기를, 서동대왕(薯童大王)의 어머니가 축실(築室)하였던 곳이다. 한다. 오금사(五金寺) 보덕성(報德城) 남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薯童)이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겼는데, 마를 캐던 땅에서 갑자기 오금(五金)을 얻었다. 뒤에 그는 임금이 되어 그 땅에 절을 짓고 오금사라 하였다. 하였다. 현재 서 동의 출생지로 추정되는 장소는 일명 서출지 라 하여 현재 마룡지 연방죽 우 측 연화가든 꽃게장 음식점 뒤편 언덕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마룡지 연못은 1939년 즉 기묘(己卯) 가뭄 때에도 물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을 정도로 계속 물이 넘쳐흘렀으며 요즘도 가뭄 시에는 인근 주민들의 식수원이 된다고 한다. 한편 오금산과 마룡지에 대한 새로운 위치와 관련된 글이 발표되었는데, 2004 년의 나종우, 백제의 익산 천도에 대한 고찰, 마한 백제문화 16에서 보 면, 오금산을 익산토성(보덕산성)이 있는 자리가 아닌 현재 왕궁면 구덕리 앵 금(鸎金)마을로 보고 있다. 이곳에는 앵그제도 있는데 그 근거로 구전 고증 및 이곳이 왕궁평에서 직선거리 1.6km, 부근에 궁뜰, 제석사지가 있기에 삼국유 사 에 보이는 서울의 남쪽 못가에 서동의 어머니가 집을 짓고 살았다 는 내용 에 부합하다는 것이다. 즉 이 앵금마을 지역은 오늘날 왕궁평, 궁뜰, 제석사지 의 남쪽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현재 무왕의 출생지에 대한 명확한 문헌이나 발굴출토 유물이 나오지 않아 여기에 대한 연구는 더욱 필요한 실정이다. 특 히 최근 드라마 서동요 촬영지를 두고 또한 지역축제를 가지고 익산시와 부 여군이 논쟁을 벌인 경우가 대표적이다. 원조논쟁의 발단은 삼국유사 무왕조 에 기록된 경사남지변(京師南池邊, 서울 남쪽 못 근처) 에 대한 상이한 해석에 서 비롯됐다. 第三十武王名璋 母寡居 築室於京師南池邊 池龍交通而生 에서 서 동이 서울 남쪽의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모호한 내용을 놓고 두 지자 체가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익산시는 이 글귀에서 서울은 당 시 백제의 수도가 부여이고 그 남쪽은 익산을 뜻하며 익산에 집터인 연못 마 룡지와 서동이 마를 캐고 금을 얻었다는 오금산이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또 무왕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미륵산에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점, 무왕과 왕비 (선화공주)가 묻힌 장소로 추정되는 쌍릉 등의 유적을 근거로 서동이 익산에 서 태어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익산시는 이러한 근거를 토대로 1969년에 시작 된 마한민속예술제의 명칭을 2004년부터 아예 서동축제로 바꿨다. 매년 9월 말부터 10월 초 사이에 열리는 서동축제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혼례식과 백제 역사행렬단 재현, 서동 및 선화공주 선발 대회, 무왕 즉위식, 무왕을 소재로 한 뮤지컬과 인형극 등 다채로운 내용으로 꾸며진다. 반면 부여군은 이에 대 해 서동이 부여의 남쪽 지역인 궁남지와 화지산 부근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 며 익산시보다 1년 앞선 2003년부터 연꽃이 절정에 오르는 7월에 서동연꽃축 제를 열어 왔다. 부여군은 궁남지에 서동요의 상징물을 설치하고 이 일대를 서동공원으로 조성해 서동이 마를 캤다고 전해지는 야산과 연못을 재현해 놓 27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72 고 있다. 이 같은 두 지역의 원조논쟁을 의식한 듯 얼마 전 인기리에 막을 내 린 SBS드라마 서동요에서는 서동의 출생과 성장 과정을 담은 드라마 전반부 를 주로 익산에서 촬영하고, 무왕의 활약상 등을 보여준 후반부는 부여에서 찍었다. 하지만 백제 무왕과 익산과 관련된 유적 및 문헌 등을 종합적으로 살 펴볼 때 분명 익산은 무왕출생지이고 그 장소는 이곳 마룡지로 판단된다. 여 기에 대한 역사적 증명이 문헌학이나 고고학에서 빠른 시일 내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三國遺事 卷 第二 紀異第二 무왕(武王) 무왕의 출생 무왕(武王)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 이 없다.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 [註 001] 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못의 용(龍)과 관계하여 [장을] 낳 고 어릴 때 이름을 서동(薯童)이라고 하였다. 재기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 려웠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生業)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 때 문에 서동이라고 이름하였다. 백제 무왕 때 궁의 남쪽에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 부여 남쪽 동남리에 위치 한 궁남지(宮南池, 사적 제135호)를 무왕의 출생설화와 관련된 곳으로 보기도 한다(부여군지편찬위원회, 부여군지, 1987). 이곳은 동남리 마래방죽 으로 명명되던 지역으로 상습 침수 지역인 자연적인 저습지대였으나, 삼국사기 등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연못으로 추정되어 1965년경 실시된 부분적인 복원 공사에 의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현재 사적지정범위 내에는 연 고 문 헌 꽃이 심어져 있고 백마강에 이르기까지 넓은 저지대는 과수원과 농토로 이용 되고 있다. 현존하는 궁남지의 형태는 1965~1967년도에 임의로 축소조성된 것이라 원래 모습은 아니다. 이에 국립부여박물관에서 1990년부터 1993년까 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1995년부터 2006년까지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가 발굴조사를 하였다. 10년간 8차에 걸쳐 조사를 추진한 결과 청동기-삼국시 대 초기에 이르는 선행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고, 백제 사비기의 도로, 수로, 땅을 파서 세운 기둥 굴립주(掘立柱) 건물지, 우물지, 도랑유구 등과 백제시대 의 행정구역명을 알 수 있는 서부후항(西部後巷)명 목간, 짚신, 개원통보(開元 通寶), 다량의 목제품 등을 수습하는 성과가 있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宮南池 發掘調査報告書 3 -남편 일대, 2007). 한편, 무왕의 출생지에 대해서 신증동국여지승람 을 토대로 익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오 늘날 익산시에 무왕의 탄생지라 전해지는 곳이 있는 점, 삼국유사 의 서울 의 남쪽 연못가 를 궁남지(宮南池)로 볼 수도 있으나 궁남지는 삼국사기 에 의하면 무왕 35년(634)에 만들어진 것으로 되어 있어 시간적으로 맞지 않는 점 등을 근거로 한다(김주성, 백제 사비시대의 익산, 한국고대사연구 21, 2001). 그러나 마룡지(馬龍池). 전설 자체는 삼국유사 의 기록과 달리 무왕 의 출생과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은 되지 않으며, 익산의 마룡지는 부여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서울의 남쪽 연못가 에 해당되지도 않으므로 궁남지의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2 71

273 축조 시기와 무왕 출생 시기의 선후 관계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도 하 였다(이도학, 百濟 武王의 系譜와 執權 基盤, 百濟文化 34, 2005).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全羅道) 익산군(益山郡) 산천 마룡지(馬龍池) 오금사(五金寺) 남쪽 백여 보(步) 되는 자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대왕(薯童大王)의 어머니가 축실(築室)하였던 곳이다. 한다. 용샘 현재 연동마을 마룡지의 북편에는 용샘(龍井) 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현재는 시멘트로 우물을 조성하여 예전의 우물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논 가운데 돌로 둘레를 쌓아올린 수면 면적 10미터제곱 정도의 못 이 있었다. 이곳을 못 주변에 줄풀이 우겨져 있어 마을사람들이 따로 옆에 작 익 용 샘 산 향 토 지 은 우물을 만들어 사용하였었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무왕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이곳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한다. 후에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딸 선 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이곳에 와서 같이 살다가 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있었던 우물은 서동의 집터라고 전하는 곳 이라 전한다. 근처에는 서동이 많은 금을 얻었다고 하는 오금산이 있고, 그가 왕이 된 뒤에 어머니를 위하여 지었다는 오금사 터는 현재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서동이 마시고 자랐다는 용샘은 돌보는 이 없이 논 가운데 방치 되어 있다가 결국 소멸되었다. 마룡지와 축실지는 지근거리이고 마를 캐어 팔 았다는 오금산도 북쪽으로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이 있다. 앞의 사진은 최 근까지 남아 있었던 용샘에 대한 몇 년 전 사진을 확인해 보고, 현재 그 터 사진을 제시하고자 한다. 오금산(五金山) 오금산은 금마면 고도리 서쪽에 높이 120m정도의 낮은 5개의 봉우리가 연 이어서 동서로 가로질러 있는 산이다. 산 아래에서 바라보면 낮은 산같이 보 이나 산 정상에 올라가보면 멀리 전주의 모악산과 김제만경 평야까지 훤히 내 다보이는 전망 좋은 산이다. 오 금 산 익 산 시 사 이 오금산에 관하여는 금마지(金馬誌) 에 관련 설화가 실려 있다. 즉 세상 에 전하기를 서동대왕(薯童大王)은 일명 맛동이라고도 하는데, 그 어머니를 지 극한 효성으로써 섬기었으며, 마를 캐다가 팔아서 봉양하였는데, 어느 날 마를 캐다가 금 다섯 덩어리를 얻게 되어 이 산의 이름을 오금산(五金山)이라 하였 다 고 하여 이 산 이름의 유래를 알려주고 있다. 또한 여지승람 익산군 산 천조에서는 이 오금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마룡지(馬龍池)를 서동대왕이 어머 니와 같이 살았던 곳이라고 하였다. 한편 이곳에는 서동대왕이 그 어머니를 위하여 세웠다고 하는 오금사지(五金寺址), 무왕부부가 묻혔다는 익산 쌍릉, 서 동대왕과 관련이 있는 용샘 등 백제 30대 무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적이 산재해 있다. 27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74 한편 오금산의 중봉( 中 峰 )에는 고구려 멸망 후 왕족 안승( 安 勝 )이 신라의 도 움으로 세웠다고 하는 보덕국( 報 德 國 )의 성터라고 하는 보덕성지( 報 德 城 址, 사 적 제92호)가 남아 있다. 또한 오금산의 남쪽 기슭에는 낮으막하게 뻗어 내린 구릉의 중간지점에 익산 쌍릉( 益 山 雙 陵, 사적 제 87호)이 있는데 여지승람 이나 금마지 의 기록에 의 하면 백제 무왕과 그 부인인 선화공주의 능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오금산은 여러 곳에 백제시대, 특히 무왕과 관련된 설화가 아주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마동이와 오금산 오금산( 五 金 山 )은 금마( 金 馬 )의 서쪽에 있는 산인데 산의 봉우리가 다섯 개다. 옛날 이 산에 어떤 홀어머니가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았는데 이 아들은 늘 산 에 가서 마를 캐서 금마장에 갖다 팔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아이를 마동이 라고 불렀다. 마동은 홀어머니한테 효도를 극진히 했는데 나이 열일곱쯤 되어 장가를 들 생각으로 마를 짊어지고 신라 서라벌로 갔다. 그리고 대궐 앞에다 자리를 잡 고 그 근방 조무래기 아이들을 모아 가지고 마를 쪄주면서 선화공주는 마동이 를 좋아한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라고 시켰다. 아이들은 시키는 대로 날마다 노래를 부르자 그 노래가 삽시간에 서라벌 안에 퍼져서 나중에는 임금 귀에까 지 들어가게 되었다. 임금은 화가 나서 왕가에 어찌 이런 불상사가 생겨서 되겠느냐고 하여 곧 공 주를 잡아다가 죽이려 했다. 왕비는 아무리 딸이 못된 짓을 했을 지라도 차마 죽일 수가 없어서 임금 몰래 많은 보물을 주어 어디든지 가서 살라 하며 빼돌 리고는 임금에게는 죽여 없앴다고 했다. 마동은 공주가 궁궐을 나가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주 앞에 나가서 자기는 마동인데 자기 나라에 가서 살자고 했다. 공주는 마동이를 보니까 장 차 큰 인물이 될 것 같아서 그렇게 하자고 마동을 따라서 금마로 왔다. 마동은 공주와 부부가 되어 사는데 여전히 마만 캐다가 팔아서 살아 살기가 매우 어려웠다. 공주는 마동에게 신라에서 가져온 보물이 있으니까 그것을 팔 아서 잘 살아 보자고 하면서 금덩이를 하나 내주었다. 마동이가 보니 바로 오 금산에서 마를 캘 때 얼마든지 보던 것이어서 이것이 그리 귀한 보물이냐고 묻자 공주는 금( 金 )이란 귀물이라고 말했다. 마동은 바로 산에 가서 금덩이 큰 것 다섯 개를 캐다가 공주에게 주었다. 공 주는 깜짝 놀라며 신라에서는 대단히 귀히 여기는 보물이니 아버지에게 보내 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기로 사자암( 師 子 菴 )에 있는 지명법사( 知 命 法 師 )라 는 도승( 道 僧 )을 찾아가서 이것을 신라왕에게 보내달라고 하였다. 지명법사는 마동과 공주의 부탁을 받고 천릿길을 밤새로 가서 금덩이를 신라왕에게 전했 다. 마동이가 사는 산에서 금덩이 다섯 덩이가 나왔다 해서 이 산을 오금산( 五 金 山 )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동이가 오금산에서 큰 금덩이 다섯 덩이를 얻게 된 것은 홀어머니에게 효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273

275 심이 커서 그랬다는 말이 있다. 마동은 후일에 백제왕이 되었는데 이 이가 바 로 30대 무왕이다. 마동은 왕이 된 후에도 고향인 금마에 늘 다녔고 오금산에 다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오금사(五金寺)를 세웠다고 한다. 오금산에는 지금 용못이라고 부르는 방죽이 있는데 옛날에 마동이는 이 물을 길어다 먹고 자랐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설화가 민간에 입에서 입으로(口碑) 전해지는 가운데 부분 적으로 많이 변모 개작되었다. 구전되는 사이에 개인의 기호. 취미. 가치관. 관 습 등에 의하여 주관적 요인이 끼어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두 번째 설화 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비하여 사실적(寫實的) 요소가 가미되어 현실감이 약간 드러나 있다. 그런 점을 들면 다음과 같다. 1. 금마라는 지명을 드러내 지역성을 부각시켰다. 2. 지명법사의 신통력을 주술력 대신 축지법(縮地法)이란 접근하기 쉬운 도술 로 대치했다. 3. 오금산 아래 용못이라는 것도 이물교구(異物交媾)에 의한 서동 탄생설을 배 제한 대신에 설정한 출생지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오금사지 오금사지(五金寺址)는 금마면 서고도리 연동마을 부근지역에 있었던 사찰로 전해지는데, 남아있는 기록으로 보아 확실히 존재하였던 사찰로 보이나 현재 그 절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군 불우(佛宇)조에 의하 면 오금사는 보덕성 남쪽에 자리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이 어머니를 지 익 산 오 금 사 향 토 지 성으로 섬겼는데 마를 캐던 땅에서 갑자기 오금을 얻었다. 뒤에 서동은 왕이 되어 그 땅에 절을 짓고 오금사라 하였다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볼 때 오 금사는 백제 무왕이 그의 어머니를 위해 지은 사찰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기록과 더불어 조선 영조 때인 1756년 익산군수 남태보(南泰普)에 의해 편찬 된 금마지 의 사찰조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과 같은 내용을 수록하고 말미 에 지금은 폐사(今廢)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16-18세기경에는 오금사가 폐사되었음을 알게 하여 준다. 그리고 역시 금마지 의 사찰조에는 은선사(隱 지 仙寺)를 오금사의 자리에 조그마한 암자로 지었다. 고 하는 것으로 보아 오금 사의 자리에 은선사라는 암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98년 원광대학교 마 한 백제 문화연구소에서는 오금산 남편에 위치한 산제 당터를 오금사지로 추 고 문 헌 사 익 자 산 사 향 정하여 발굴하였으나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全羅道) 익산군(益山郡) 불우 오금사(五金寺) 보덕성(報德城) 남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薯 童)이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겼는데, 마를 캐던 땅에서 갑자기 오금(五金)을 얻 었다. 뒤에 그는 임금이 되어 그 땅에 절을 짓고 오금사라 하였다. 하였다. 사자사(사자암) 1. 개요 27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76 사자암으로 불리는 사자사(師子寺)는 금마면 신용리 미륵산 정상 밑에 위치 하는데 삼국유사 무왕조에는 지명법사(知命法師)가 거주했던 사찰로 전해진 다. 지명법사는 서동이 오금산에서 마를 캐다 얻은 황금을 하룻밤 사이에 신 라 궁중에 보내고, 무왕이 미륵사지를 창건하는데 하룻밤 동안에 연못을 메운 신통력이 뛰어났던 승려이다. 1994년 부여 문화재연구소의 발굴 조사 결과 백 제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건물지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사자암은 발굴조사로 인하여 비교적 높은 석축이 남 북을 축으로 하여 동에서 서쪽으로 세 개가 드러났는데 사자암 법당은 이들 석축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리고 이 조사에서 확인된 건물터는 고려 초기에서 중기까지의 것과, 고려말경 에서 조선시대 전기까지의 터, 그리고 조선후기 건물터로 크게 나누어 세 시 기의 것이 확인되었다. 이 중 고려말경부터 조서전기에 걸쳐 사용된 건물터는 가장 넓은 범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상 중 하의 석축 중 중간 석축을 포 함하고 있었다. 이 유구는 건물터와 석축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가장 높은 석 축에는 건물터 흔적은 있었으나 규모와 형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이 유구에서는 고려 말의 기와와 조선전기의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고, 같은 시기 의 분청사기 백자 청자 등의 파편이 많이 발견되었다. 특히, 이곳에서는 지 치 2년(至治 二年) 사자사조와(獅子寺造瓦) 라는 글이 있는 암막새 기와가 출 토되어, 이곳이 사자사 터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고려 초기 건물터에서 통일 지 토 지 신라 토기 및 백제시대 기와가 함께 조사되어 지금까지 전하여온 사자사 터임 을 확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발굴조사 후 과거 법당이 자리에 약간 확장하 여 현재의 대웅전을 건립하였다. 현재 이 사자암내에는 높이 276cm의 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현재 이곳에 있기 전에는 남쪽 길로 30여m 쯤 떨어진 발위 들 길목의 앞길 동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 석탑은 크게 기단부와 탑신부만 남아 있는데, 석재의 크기, 양식 등으로 보아 서로 이질(異質)적인 요 소를 가지고 있어 순수한 탑재만으로 구성된 것 같지는 않다. 기단부는 탑의 부재로 볼 수 없는 경우에 지대석과 꽃잎의 끝을 아래를 향해 오므린 형태의 복련대좌와, 간석(竿石), 꽃잎의 끝을 위로 향한 양련석 가지는 석등(石燈)의 구조 및 양식과 흡사하다. 그리고 양련석 위로 탑신석 3기와 지붕돌 2기가 올 려져 있으나, 맨 위쪽 2기의 탑신석은 적당히 깬 돌을 탑신석용으로 끼워 사 용하였고, 맨 위의 지붕돌은 상 하가 뒤 바뀐 채 거꾸로 놓여 있다. 또한 지 난날에는 이 암자를 중심으로 죽사(竹寺), 수백암(水伯庵), 만방암(萬房庵), 영혈 사(靈穴寺), 명적암(明寂庵), 천정암(天定庵) 등이 있었다고 전하며, 암자 바로 밑 석굴에는 많은 소동불(小銅佛)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또 암자의 서쪽에 있는 2개의 판자바위 板巖 는 석문(石門)이라고 하는데, 이 절을 창건할 때 바위를 깨낸 뒤 문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현존하 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다. 2. 연혁과 현황 사자사(獅子寺)는 현재 금마면 신룡리 산 609-1에 소재한 사자암(獅子庵)을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2 75

277 말한다. 사자암은 백제시대의 사찰로서 미륵사지가 잇는 미륵산( 彌 勒 山 ) 장군 봉의 동남쪽 계곡 해발 320미터의 8부 능선 상에 위치하며, 대한불교조계종 (대한불교조계종) 제 17교구 본사인 금산산( 金 山 寺 )의 말사이다. 현재 정면 4 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법당과 산신각이 있는데 경내의 넓이는 약 1,650m2 (500평)이다. 사자암에 대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 무왕조의 무왕 은 선화비와 함께 용화산 사자사 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 라는 기록에 의 하여 사자암이 지명법사가 거주하던 사자사였을 것이라고 추정하여 왔으며,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사자사( 獅 子 寺 ) 명 명문와가 발견되어져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 의 기록에 나오는 사자사( 獅 子 寺 )임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기록을 통 해 볼 때 사자사는 미륵사보다 앞서는 시기에 창건되었고, 백제의 대표적 사 찰인 미륵사의 창건은 결국 사자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자 사의 위치는 그동안 현 사자사터(미륵산 정상부 남측 7부 능선의 움푹한 계곡 에 위치) 또는 사자사터 주변의 다른 지역일 것이라는 설이 있어 왔는데 1992 년 사자암( 獅 子 庵 )을 개축하는 과정에서 지하유적 확인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발굴조사를 착수하게 되었다. 이 조사결과 현 사자암터가 백제 당시의 사자사터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삼국유사 이후 연력에 대해서는 현재, 문헌자료를 통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단지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이 기와편들과 함께 통일신라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의 기와 등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서 백제 창건 이후에도 법등을 이 어온 것으로 보인다. 사자사가 언제 사자암으로 개칭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사자암( 獅 子 庵 )이 용화산에 있다고 기록된 것 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사자암으로 개칭된 것으로 보인다. 이 후 1992년에 옛 법당을 헐어내고 발굴조사를 거쳐 노출된 유구를 정비한 위에, 뒤쪽의 불 전터에 대웅전을 복원하였고, 파괴된 삼층석탑을 이전 복원하였다. 3. 지명법사 지명법사( 知 命 法 師 )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단지 지명법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무왕조의 미륵사 창건연기설화에 등장하고 있으며, 이외의 기록에서도 대부분 무왕조의 기록을 답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지명법사의 생몰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백제말기 7세기 전후 승려임은 확실하며 그 행적 또한 신이한 면이 있음을 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무왕조에 보이는 지명법사의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30대 임금인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은 서동이었는데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에 들어가 어린이들에게 서동요를 지어 부르게 하 여 결국 선화를 취하게 된다. 이때 비로소 금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데 어릴 때 마를 캐면서 나온 많은 황금을 신라 왕실에 보내고자 지명법사에게 수송의 계책을 묻는다. 법사는 신통력으로 금을 보낼 수 있으니 가져오라고 한다. 공 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 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보내 주었다. 신라의 진편왕은 신비로운 변화를 27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78 이상히 여겨 더욱 서동을 존경하고 늘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른 서동은 선화비와 함께 사자사에 있는 지명법 사를 찾아가는데 용화산 아래 커다란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한다. 이에 왕 과 왕비는 수레에서 내려 경배한 후 왕비는 이 못에다가 커다란 사찰을 세울 것을 간청한다. 그러나 못을 메울 방법이 없어 지명법사에게 그 방법을 물으 니 지명법사는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고 한다. 지명법사의 생애가 자세하지 않아 확실한 평가를 내릴 수는 없지만 이와 같은 신이한 행적과 관련한 밀승(密僧)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진평왕(眞平王) 七年秋七月 지명이 진에 들어 가다 (585년 7월 미상 음력) 7월에 고승(高僧) 지명(智明) [註 001] 이 불법을 배우러 진(陳)나라에 들어갔 다.(秋七月高僧智明入陳求法) [註 001]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2, 지명전(智明傳)에도 동일한 내용의 기 사가 수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2 무왕(武王)조 에 기록된 지명(知命)과 같은 인물로 보는 견해(김복순, 삼국의 첩 보전과 승려, 가산이지관스님화갑기념 한국불교문화사상사 상, 1992 김복순, 신사조로서의 신라불교와 왕권, 경인문화사, 2008, 25쪽)와 완전히 다른 인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백제 무왕과 지명법사, 한국사연구 107, 1999, 3 31쪽). 三國遺事 卷 第二 紀異第二 무왕(武王) 서동이 왕위에 오르다 함께 백제에 이르러 모후(母后)가 준 금을 내어 장차 살아 나갈 계획을 의논 고 하니 서동이 크게 웃고 말했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오? 공주가 말하기를, 문 이것은 황금이니 백년의 부를 누릴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서동이 말하기를, 헌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처럼 많이 쌓아 두었소 라고 하 였다. 공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이것은 천하의 지극한 보 물입니다. 그대가 지금 그 금이 있는 곳을 아시면 부모님이 계신 궁전으로 보 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은 좋다고 말하였다. 이에 금을 모아 언덕과 같 이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註 001] 사자사(師子寺) [註 002] 의 지명법사 (知命法師)에게 가서 금을 실어 보낼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말하기를 내가 신 통한 힘으로 보낼 터이니 금을 이리로 가져 오시오 라고 하였다. 공주는 편지 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가져다 놓았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보내어 두었다.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서동을 존경해서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부터 인심을 얻어서 왕위에 올랐다. (同至百濟出母后所贈金将謀計活 薯童 大笑曰此何物也 主 曰此是黄金可致百年 之富 薯童 曰吾自小掘薯之地委積如泥土 主 聞大驚曰此是天下至寳君今知金之所 在則此寳輸送父母宫殿何如 薯童 曰可於是聚金積如丘陵詣 龍華山 師子寺 知命 法師 所問輸金之計 師 曰吾以神力可輸將金來矣 主 作書并金置扵師子前 師 以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2 77

279 神 力 一 夜 輸 置 新 羅 宫 中 真 平 王 異 其 神 變 尊 敬 尤 甚 常 馳 書 問 安 否 薯 童 由 此 得 人 心 即 王 位 ) [ 註 001] 용화산( 龍 華 山 )은 익산 북쪽에 있는 산으로 미륵산( 彌 勒 山 )이라고도 한다. 지명법사( 知 命 法 師 )가 머문 곳인 용화산은 미륵하생경( 彌 勒 下 生 經 )의 미륵이 하생하여 성불하는 곳으로 나오는 용화수( 龍 華 樹 )에 대비되고, 그가 주석한 사자사( 師 子 寺 )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의 칠보 대( 七 寶 臺 ) 안의 마니전상( 摩 尼 殿 上 )에 있는 사자상좌( 師 子 上 座 )에 앉 아 설법한다고 하는 사자상좌에 대비된다. 따라서 용화산과 사자사 는 미륵신앙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용화산이라는 이름이 미 륵하생경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김영태, 백제의 미륵사상-용화산 미륵사를 중심으로, 백제연구 13, 1982). 현재 미륵산 정상부 장 군봉 동남편 중턱에는 사자암( 獅 子 嵓 )이 남아있는데,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의 사자사지( 師 子 寺 址 )로 보고 있다. [ 註 002] 사자사와 관련된 삼국유사 의 기록에서, 미륵이 출현하기 이전에 사자사가 등장하고 있는 점에 주목한 연구가 있다. 미륵하생경( 彌 勒 下 生 經 )에 의하면 용화산( 龍 華 山 )은 미륵이 하생하여 성불하는 곳으 로 나오는 용화수( 龍 華 樹 )에 대비되고, 그가 주석한 사자사( 師 子 寺 )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의 칠보대( 七 寶 臺 ) 안의 마니전상( 摩 尼 殿 上 )에 있 는 사자상좌( 師 子 上 座 )에 앉아 설법한다고 하는 사자상좌에 대비된 다고 한다. 따라서 사자사는 하생( 下 生 )하기 전의 미륵보살이 도솔천 에서 앉아 있던 사자상좌( 師 子 上 座 )를 뜻하는 것인데 이는 도솔천에 서 하생한 미륵불의 출현과 연결시켜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 왕부부가 사자사로 가는 길목에서 미륵출현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 것은 사자사 때문이므로 결국은 사자사가 미륵불 출현의 한 계기라 고 할 수 있다. 미륵이 하생하기 전에 도솔천 즉, 사자상좌에 있었기 때문에 미륵불 출현의 앞에 사자사(도솔천을 상징)를 등장시킨 것은 순서상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자사로 가다가 미륵불의 출 현을 맞이하게 되었으므로 사자사(도솔천)는 미륵출현(하생성불)의 출발적 계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김영태, 백제의 미륵사상-용 화산 미륵사를 중심으로, 백제연구 13, 1982). 현재 사자사지( 師 子 寺 址 )는 미륵사지( 彌 勒 寺 址 ) 북쪽 용화산 정상부 장군봉 동남편 중 턱(해발 320m)에 자리하고 있다. 사자사지에는 석가모니를 모신 대 웅전과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 그리고 창고 등이 있으며 대웅전 앞에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석탑 1기가 남아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알려졌던 사자암은 임시 건물과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석탑으로 인하여 기록에 나오는 사자사라고 보기 어렵다는 논 란이 있었다. 이에 이곳에 법당을 신축할 계획에 앞서 국립부여문화 재연구소에서는 1993년 2월에서 9월까지 2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 시하였다. 조사결과, 건립당시의 건물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백제시 27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80 대의 기와류, 통일신라시대의 토기류, 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의 불상 과 불구류 등 유물들이 출토되었고, 사자사(獅子寺) 라는 고려시대 의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이곳이 삼국유사 기록에 있는 사자사임 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지금의 사자사지는 백제시대의 절터였음이 분명해졌고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5차례 정도의 개축이 이 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사자암 발굴 조사보고서, 1994). 三國遺事 卷 第二 紀異第二 무왕(武王) 미륵사를 짓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一日王與 夫人 欲幸師子寺 至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全羅道) 익산군(益山郡) 불우 사자암 용화산 위에 있다. 두 바위가 벽처럼 솟아 있는데 내려다보면 땅이 보이지 않는다. 돌길이 갈퀴처럼 걸려 있는데, 부여잡고 올라가면 바로 지명법사가 거주하는 곳이다. 2) 무왕의 전성기 관련 스토리텔링 미륵사 탑, 미륵사지, 왕궁리 유적, 왕궁리 5층 석탑, 대관사, 제석사지 유적, 제석사지 폐기장 미륵탑과 용 세 마리 옛날 백제 30대 왕인 무왕은 왕이 된 뒤에도 자기가 어렸을 때 살던 고향의 사자암이란 절에 선화공주와 같이 늘 다녔다. 사자암에 가려면 노상리 앞의 큰못을 지나야 하는데 하루는 무왕 내외가 그리로 지나는데 갑자기 비가 와서 앞을 가리고 더 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 큰못에서 용 세 마리가 나와 무왕의 앞길을 비쳐주었다. 그래서 무사히 미 륵 익 사 산 지 시 (석 사 탑) 사자암에 왔는데 이런 일을 그 절의 주지인 지명법사에게 말했다. 지명법사는 왕의 말을 듣고 나서 그 큰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다 큰절을 짓고 큰 탑 두 개를 세우면 좋겠다고 말했다. 무왕은 지명법사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하겠다고 했다. 지명법사는 미륵산을 허물어 하룻밤 새에 그 큰못을 메웠다. 왕이 절과 탑을 지을 때 신라의 진평왕은 많은 공인을 보내어 절과 탑을 세 우는 일을 거들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탑만 남았는데 그 탑 도 동쪽 탑은 없어지고 서쪽 탑만 남아 있다. 이 서쪽 탑도 완전히 남지 않고 일부만 남아있다. (미륵사 창건의 모티브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났다는 기존의 기록과는 달리 여기서는 난데없이 용 세 마리가 나타난 것으로 바뀌고 있다. 용은 호국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2 79

281 신( 護 國 神 )으로 숭배되었던 만큼 미래불인 용화 곧 미륵과 결코 무관하게 생 각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야기 끝 부분에 동탑 운운한 것은 근래에 와서야 밝혀진 사실인 만큼 이 부분은 최근에 와서 첨가 삽입된 말일 것이다.) 고양이 무덤으로 미륵사 망쳤다는 괴무덤 미륵사 자리에서 남쪽으로 1킬로쯤 가면 괴무덤이라는 무덤 자리가 있다. 이 무덤에 대하여 그간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전설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 미륵사( 彌 勒 寺 ) 자리의 지형이 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 미륵사는 엄청나게 큰 규모의 절로써 중들의 수효도 놀랄 만큼 많았다. 그런지라 그 많 은 미륵사 중들로 인한 행패도 심하여 그 절 앞을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언제나 호된 봉변을 당했는가 하면 자연히 절 가까운 마을들은 그들에 의해 성가심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이러하던 차에 중들의 행패가 큰 걸 걱정하던 사람이 이 절을 망하게만 할 수 있다면 그 피해는 없어지겠지 하고 생각한 끝에 미륵사를 에워싼 산의 어 구에다 저주하기 위하여 큰 고양이 같이 생긴 물건을 만들어 파묻었다. 본시 쥐와 고양이는 상극이어서 쥐 모양의 미륵사 지형에 맞서는 고양이의 형상을 묻은 것이었다. 그런 뒤로 절이 차차 망해갔고 따라서 중들의 수효도 줄어들어 행패도 자연히 사라져갔다. 그리하여 얼마 가지 않고 미륵사는 사라 져버렸다. 고양이 같은 형상을 묻은 데가 괴무덤이다. 옛날에 미륵사란 큰절이 있었는데 이 절에는 중들이 수천 명이나 있었다. 중 들의 행패가 심했지만 그 중에도 특히 주지( 住 持 )의 성질이 어찌나 못돼 먹었 는지 이 절 앞을 지나 신행( 新 行 )하는 신부를 모조리 잡아다가 욕을 보였다. 그래서 이 근방 사람들은 혼인할때마다 큰 걱정거리였다. 한번은 절 동쪽에 있는 봉산이란 마을에 사는 심씨( 沈 氏 ) 아들이 절의 서쪽 마을인 기양리( 箕 陽 里 )에 사는 권씨( 權 氏 ) 집으로 장가를 들게 되었다. 그러니 걱정이었다. 신부 아버지 권씨는 딸을 어떻게 하면 무사히 절 앞을 지나가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고심하던 끝에 마침내 병이 나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때 마침 길을 지나가던 한 도사( 道 士 )가 이 말을 듣고 권씨를 찾아가서 그 렇게 걱정만 하지 말고 자기 말대로만 하면 아무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그 러면서 말하길 미륵사의 주지는 천년 묵은 쥐가 둔갑한 것이니까 이것을 없애 면 된다 하였다. 그래 어찌하면 되느냐 했더니 오래 묵은 고양이를 잡아다가 절 어구에 묻어 두면 그길로 주지는 죽고 또 절도 자연스레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권씨는 도사의 말대로 오래 묵은 고양이를 한 마리 구하여 절 어구에 묻었다. 그랬더니 과연 주지가 죽고 절도 얼마 가지 않아 망하고 말았다. 그 고양이를 묻은 데가 괴무덤이라는 곳이다. 28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82 (두 개의 이야기이나 기실 핵심은 하나다. 풍수로 보아 쥐의 형상을 한 미륵사 를 저주하여 고양이의 무덤을 씀으로써 미륵사가 망했다는 것이다. 본시 쥐 와 고양이는 상극. 그러니 쥐를 닮은 미륵사의 지형이나, 늙은 쥐가 둔갑한 주 지를 망하게 하는데 고양이를 대치한다는 무속적( 巫 俗 的 ) 사고가 바탕을 이루 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이 전설은 어쩌면 척불사상( 斥 佛 思 想 )이 강했던 조선조 에 와서 절을 싫어하는 민간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일 수도 있다.) 금괴 무덤으로 미륵사 망한 이야기 지금 미륵탑( 彌 勒 塔 )있는 곳에는 옛날 팔만구암자( 八 萬 九 庵 子 )라는 어마어마 한 큰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절이라고는 흔적도 없이 다 망하고 말았다. 옛적에는 팔괘( 八 卦 )를 벌여 팔간( 八 間 )자리 집을 많이 짓고 그 한 가운데에 큰절이 있었다. 이 절이 미륵사인데 이곳에는 중들이 무척 많았다. 중이 많은 만큼 억세고 행패도 심하여 사람들이 그 절 앞을 마음 놓고 다닐 수가 없었 다. 이러하던 차에 어느 지사( 地 師 ) 한 사람이 미륵사의 지형을 보니 노서하전지 형( 老 鼠 下 田 之 形 )이라 이에 대한 조치를 생각해 보았다. 노서(늙은 쥐)란 놈은 앞의 보름동안은 노상리( 路 上 里 ) 즉 미륵사가 있는 데 서 먹고, 뒤 보름동안은 거기서 시오리쯤 떨어진 오상리( 五 相 里 )라는 동네에 가서 먹는 놈이었다. 그래서 그 쥐가 나다니는 길목에다 금괴를 만들어서 묻어 두었다. 그랬더니 그 후로 미륵사는 물론이고 그 절에 속해있던 절들도 까닭 없이 시름시름 망 해가는 바람에 자연 중들의 행패도 사라졌다고 한다. 괴무덤은 이렇게 하여 생긴 것이다. (앞의 전설에 비하여 흥왕했던 미륵사의 성세를 일부러 과장한 느낌이 없지 않다. 또한 지형에 따른 저주라는 점은 같으나, 앞에서 고양이라고 뚜렷이 밝 힌 데 비하여 금괴 라 했으니 이는 금고양이 의 잘못 아니면 또 다른 와전임 이 분명할 것이다.) 미륵탑과 왕궁탑 쌓기 (1) 옛날에 남매가 있었는데 이 두 남매는 서로 사이가 좋아서 누가 더 낫고 누 가 못하다고 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이 남매가 탑쌓기 내기를 하고 누이는 미륵탑을 쌓기로 하고 오빠는 왕궁탑을 쌓기로 하였다. 그런데 누이는 미륵탑을 꼼꼼히 쌓느라고 시간 안에 다 쌓지 못하고 오빠는 적은 규모로 건성건성 쌓아서 먼저 쌓고 말았다. 그래 서 누이는 오빠에게 지고 말았다. 이래서 미륵탑은 지금 반만 남아 있다. 이 탑에 구렁이가 살고 있어서 하늘 에서 벼락을 때렸기 때문에 절반이 떨어져 나가 그리 됐다고도 한다.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281

283 (해학적인 동화(童話)다. 흔히 있는 남매설화와 장사설화가 혼합된 것이다. 여 기 남매란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장사(壯士)였을 것이다. 누이는 치마폭으로 돌을 날랐으므로 미륵탑의 규모가 컸고, 오빠는 그렇지 못해 왕궁탑은 작았다. 그런데 탑의 파괴를 일부러 미완성 축조로 본데다 구렁이 운운한 것은 도무지 논리의 모순이지만 그런 대로 동화다운 재미가 있다.) 미륵탑과 왕궁탑 쌓기 (2) 옛날에 어떤 노인이 두 남매를 두었는데 하루는 어떤 관상쟁이가 와서 보고 는 당신은 아들, 딸 중에 하나만 데리고 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불길하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아들을 두고 딸을 내쫓으려고 딸에게는 큰 미륵탑을 쌓 게 하고 아들에게는 작은 왕궁탑을 쌓게 해서 먼저 다 쌓은 자식은 집에 남기 고 늦게 쌓은 자식은 집에서 내쫓는다고 말했다. 딸은 큰 탑을 맡아 쌓는데 동생에게 지지 않겠노라고 정성 드려 열심히 쌓았 다. 동생은 작은 탑을 맡아 쌓게 되어 천천히 쌓아도 되겠지하고 쉬어가며 엉 성하게 쌓았다. 그런데 남매가 탑을 다 쌓고 손을 터는 시간은 같았다. 이러고 보니 노인은 딸을 쫓아낼 수가 없어 그냥 데리고 살았다고 한다. (앞의 이야기와 내용은 비슷하나 탑을 쌓게 하는 동기 설정이 기발하다. 관상 에 의한 운수 가리기를 탑 쌓기 내기에 두었다는 데서 설화적 요소가 짙다. 또한 미륵탑은 정성으로 쌓았고 왕궁탑은 건성건성 쌓았다는 부분은 외형상 두 탑의 구조미(構造美)를 소박하나마 비교한 것이어서 흥미롭다.) 미륵사지 1. 연혁과 현황 미륵사지는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일대에 소재하며, 1966년 6월 22일 자로 사적 150호로 지정된 문화재보호구역이다. 미륵사는 사자사(獅子寺)가 있 익 산 향 토 지 는 용화산(龍華山) 남쪽 기슭에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의 좌우능선을 두고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현재 미륵사지에는 원래의 서탑과 당간지주 이 외에도 1992년에 복원된 9층의 동탑, 1997년에 문을 열어 340여점의 출토유 물을 상설 전시하고 있는 미륵사지 유물전시관, 대규모 관광객(연간 30-40만 명)들을 유치할 수 있을 정도의 대규모 주차장 등의 부대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다. 익산지역의 문화유적 중에서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며, 중요한 위치 를 차지하는 미륵사지 1975년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에 의하여 동 탑지 발굴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 동탑지와 서탑지가 거의 같은 규모라는 사실 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일부학자들 사이에서 품(品)자형 1탑 2금당식 가람배치 설, 1석탑 2목탑설, 9층탑설 정도의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을 뿐,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오래된 탑 1기와 주변에 널려있는 석재들, 2기의 당간 28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84 지주 등은 일반인들의 큰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1975년 원광대학교에 서의 발굴조사 이후 그 규모의 방대함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1980년 문화재연 구소에서 본격적으로 발굴을 시작하였고, 1994년까지 3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 과 미륵사지의 규모와 의미 등이 거의 밝혀지게 되었다. 15여년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 발굴조사 유구 면적은 70,810평으로 18,710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 며, 줄곧 주장되던 품( 品 )자형의 가람배치가 아닌 삼원병치식( 三 院 竝 置 式 ) 3탑 3금당의 가람배치를 한 사찰이 존재하였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조사유구를 통 해본 미륵사 원래의 가람은 남북자오선상( 南 北 子 午 線 上 )의 서쪽으로 약 23 기 운 중앙축선을 기준으로 남쪽에서부터 중문( 中 門 ), 탑(목탑), 금당( 金 堂 )을 배열 한 중원( 中 院 )과 이를 완전히 둘러싼 회랑( 回 廊 )이 있고, 중원 양옆에 중원의 남북축선과 평행하고 중원의 각 건물과 같은 횡축열선상( 橫 軸 列 線 上 )에 놓인 중문( 中 門 ), 탑(석탑), 금당( 金 堂 )을 배치하여 동원( 東 院 )과 서원( 西 院 )을 대칭으 로 놓은 것이다. 또 동 서원( 東 西 院 )의 외곽 화랑터는 중원의 동 서 승방터에 연결되고, 이 승방터의 북단에서 가람 중심축에 놓이는 강당터 좌우측과 연결 되는 북회랑터와도 연결된다. 그러므로 중원 북회랑터 북쪽에는 중원 남북 중 심축선상에 거대한 강당터가 놓이게 된다. 건물의 배치는 거의 평지상에 놓여 있는데 남쪽의 중문과 연결되는 남회랑터 앞과 강당터 북족에 동서로 길게 놓 인 북승방터 앞에 석축으로 이루어진 축단을 두고 있다. 즉 미륵사의 가람은 삼원병렬식( 三 院 竝 列 式 )의 가람으로 동 서 및 중원으로 구획되어 있는데, 각 원 에서는 중문과 탑 금당을 1동씩 두어 소위 일탑식 가람을 동서 축선상에 나란 히 배치하고 강당은 중원 북쪽에 하나만 두고 있다. 또 중원에는 목탑을 두고, 동 서원에는 석탑을 두어 3금당 3탑식을 이룬 것도 창건연기의 당( 堂 ), 탑 ( 塔 ), 낭( 廊 ), 무, 삼소창지( 三 所 創 之 ) 란 기록과 일치하고 우리나라 고대가람 으로서는 특이하다. 그리고 이 중심사역 외에 서편에는 통일신라 및 고려시대 건물터가 있고, 북편에는 조선시대 가람터가 확인됨으로써 백제 이후 계속된 미륵사의 모습과 하한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사역( 寺 域 ) 남측에 는 거대한 동 서 연못지가 있고 그 규모와 조성방법 등이 발굴조사를 통해 확 인되었다. 각 원의 금당( 金 堂 )은 모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구성되어 있으 나 중원의 금당이 동 서 금당보다 규모면에서 조금 크다. 특히 금당은 바닥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높이 1m 정도의 주춧돌을 마름모꼴로 놓았으며, 초석 위는 귀틀목을 걸친 흔적이 있어 금당 바닥에 빈 공간을 만들어 바닥마루의 습기에 대비한 것 같다. 또한 사지 전역에 있는 고려 조선시대의 건물지에서 온돌시설이 조사됨으로써 온돌의 발전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 고 있다. 미륵사지가 자리하고 있는 미륵산은 삼국유사 에서는 용화산( 龍 華 山 ) 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는 미륵사지 북편의 산을 미륵산 이라 하고, 그 동남-동북쪽으로 이어진 산을 용화산 이라 부르고 있다. 미륵사는 연못을 메 우고 전탑( 殿 搭 )과 낭무( 廊 廡 )를 세 곳에 갖추어 액호를 미륵사라 하였다. 는 하는 삼국유사 무왕조의 기록을 통하여 백제 무왕 때 3탑 3금당식 가람으 로 창건되었으며, 미륵사지가 벼락을 맞았다. 는 삼국사기 성덕왕 18년(719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283

285 년)조의 기옥에 의하여 719년에도 미륵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미륵산 서쪽 기슭에 옛적의 미륵사터가 있다. - 중략 - 밭둑 가운데 7층 석탑이 있는데 그것은 대단히 높고 크며 모두 병풍 같은 돌로 첩첩히 쌓았다. 석주( 石 柱 )는 별개의 돌로 다듬어 만들었으며 그것은 네 귀퉁이를 받치고 있 다. 세상 사람들이 동방 석탑에서 제일이라고 하는데 거짓이 아니다. 백 년 전 벼락으로 인하여 그 반이 허물어 졌으며 아래에는 돌문이 있어 출입할 수가 있는데 세 사람이 동시에 들어가 놀 수가 있다. 서쪽 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탑 위에 올라 서너 명의 농부가 밭일을 하는 연장을 끼고 그 위에 누울 수가 있다. 밭둑 사이에 주춧돌과 석조( 石 槽 )가 어지럽게 널려있는데 그 반이 노출 되어 있기도 하고, 혹은 전체가 드러나 있고, 혹은 파괴되어 비스듬히 있고, 혹은 쪼개진 채 세워져 있으면 종각( 鐘 閣 )의 주춧돌로 생각되는 것이 완연하 고 석상이 남아 있다. 고 기록된 18세기경 강후진( 康 候 晉 )의 와유록( 臥 遊 錄 ), 유금마성기( 遊 金 馬 城 記 ) 를 통하여 조선 중기 18세기 이후에 오면 이미 미륵 사는 터만 남아 있고, 석탑 1기가 반파된 상태로 7층만 남아 있었음을 알려주 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발굴을 통하여서도 살필 수 있는데, 1기의 석탑과 2곳의 탑지, 세 곳의 급당지 등은 삼국유사 에 보이는 대로 3탑 3금당식 가 람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대중 12년( 大 中 十 二 年 ) 과 미륵사( 彌 勒 寺 ) 라 고 두 줄로 음각된 명문이 남아있는 토기는 대중( 大 中 ) 12년, 신라 47대 헌안 왕 2년(A.D858)에는 미륵사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미륵사 명 문이 찍힌 기와류, 백제시대의 석탑,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나 석등, 석탑, 금동 풍탁 등을 통하여 기록에 나타난 미륵사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와 같 은 백제 30대 무왕( )에 의해 3탑 3금당의 거대한 규모로 창건된 미륵 사는 조선중기에 이르기까지 그 명맥이 유지되어 오다가 결국 폐사되고 그 터 에 석탑 1기와 당간지주 2기 그리고 많은 탑 석재들, 석등 대좌 등만 남아있 게 되었음을 기록과 발굴조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출토된 유물은 기와와 토 기가 주류를 이루고 금속, 목재, 석재, 유리 등 다양하다. 기와는 백제 기와로 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다양하게 출토되었으며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은 창건시기인 백제의 것이다. 종류는 수막새 암막새 평기와와 서까래 끝 에 붙이는 녹유연화문연목와( 綠 油 蓮 花 文 椽 木 瓦 ), 녹유연화문연목와( 綠 油 蓮 花 文 椽 木 瓦 ), 용마루 끝을 장식하는 치미(치 尾 ) 등이며 미륵사( 彌 勒 寺 ), 금마저관 ( 金 馬 渚 官 ), 묘봉원( 妙 奉 院 ), 연우사년( 延 祐 四 年 ), 만력십오년( 萬 曆 十 五 年 ) 등 의 문자를 새긴 기와도 전 기간에 걸쳐 다양하게 수습되었다. 사역에서 출토 된 만력십오년( 萬 曆 十 五 年 )(1587) 과 만력십칠년( 萬 曆 十 七 年 )(1589) 명 기와를 통해 이 시기를 전후하여 절이 폐사( 廢 寺 )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동원 석 탑터 주변에서 출토된 부재로 동원( 東 院 ) 석탑의 복원안을 연구한 결과 9층임 이 밝혀져 1993년 동탑이 복원된 바 있고 목탑 역시 복원안이 마련되어 1997 년 개관된 전시관에 그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동 서원의 남회랑 앞에는 당간지주가 각 한 기씩 있는데 이중 서쪽의 것은 보물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이들 당간지주는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8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86 발굴조사 결과 석당간이었음이 밝혀졌다. 한편 미륵사지에서 중부( 中 部 ) 명문 기화편이 발견되었고, 왕궁리에서도 전부( 前 部 ), 하부( 下 部 ) 명문 기와가 출토 된 바가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당시 도성 행정구역을 전 후 상 하 중 등 5부로 나누었다고 한 점과 연관 지어 볼 수 있다. 미륵사 지에는 현재 서탑인 미륵사지석탑( 彌 勒 寺 址 石 塔 )(국보 제11호), 당간지주(보물 제 236호), 석등하대석(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43호)이 있다. 또한 1992년에는 익산 황등산 화강암으로 복원된 동탑이 있다. 1997년에는 미륵사지유물전시관 을 개관하여 미륵사지 출토 유물을 전시함으로써 당시 백제문화의 정수를 알 려주는 산 교육장으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현재 미륵사지 경내의 안내판 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명기되어 있다. 미륵사지 ( 彌 勒 寺 址 ) 백제(B.C.18~A.D.660년)에서 가장 큰 가람이었던 미륵사의 창건은 <삼국유 사>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30대 무왕(A.D. 600~641 년)이 왕비와 함께 용화산에 있는 사자사로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 못( 池 )에 서 미륵삼존이 출연하여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또 지명법사의 도움으로 산을 허물어 못을 메우고 전(금당) 탑 낭무(회랑)를 세 곳에 마련한 가람을 조영 하였는데 신라 진평왕이 백공( 百 工 )을 보내어 도와주었다 고 기록되어 있으며 발굴조사에 의해서 미륵사가 3원 1가람이며 산 흙으로 메운 못에 자리하고 있는 점 등이 밝혀져 삼국유사의 기록이 실증적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믿는다면 미륵사에는 창건 당시 건축 공예 등 백제의 문화역량이 최 대한 발휘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 등 삼국의 기술이 결집되었음을 알 수 있 다. 미륵사 창건은 이곳 금마에 가람을 조영하여 마한 세력을 아우르려는 정 치적 의도도 있었을 것이나 황룡사로 대표되는 신라 화엄신앙에 대비되는 백 제 미륵신앙에 바탕한 것이다. 2. 창건과 변천 (1) 미륵사의 창건배경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 창건배경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의 기록을 통하 여 짐작할 수 있다. 삼국유사 기록은 미륵사 인근 오금산(현재 익산토성, 쌍 릉이 자리하고 있는 곳)에 마를 캐며 홀어머니와 살던 마동이 신라 선화공주 와 혼인하는 서동설화와 미륵사 창건설화로 되어 있다. 선화공주와 결혼한 후 왕이 된 마동 즉, 무왕(백제30대왕, )이 왕비와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에 있는 사자사로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미륵사를 창건하게 되었는데 미륵 삼존을 위하여 전(금당), 탑, 낭무(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미륵사 창건설화를 기록으로 보면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 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및 큰 못가에 이르니 연못 가운데에서 미륵삼존 ( 彌 勒 三 尊 )이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모름지기 여기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라고 말하니 왕이 그것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285

287 을 허락하였다. 곧 지명법사( 知 命 法 師 )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통 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 존( 彌 勒 三 尊 )의 상( 像 )을 만들고 전탑( 殿 塔 )과 낭무( 廊 廡 )를 각각 세 곳에 세워 절 이름을 미륵사 라고 하였다. 고 하여 미륵삼존 이 출현하여 절을 짓고 이름 을 미륵사라 하였다는 점과 이 절이 불교의 미륵신앙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 음을 알 수 있다. 미륵신앙은 미륵상생신앙과 미륵하생신앙으로 나눠지는데, 무왕은 당시 귀족적이고 미륵상생신앙적인 요소가 강한 미륵신앙이 아니라 새 로운 세상을 밝혀주는 미륵하생신앙을 표방하는 미륵사를 부여가 아닌, 자신 과 깊은 연고가 있는 익산지역에 조영함으로써 자신의 세력기반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는 미래의 백제에 대한 새로운 이상향을 제시하여 국가의 정신적인 통합을 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미륵보살이 성불했다는 용화수( 龍 華 樹 )는 용화산(현재의 미륵산)으로, 삼회( 三 會 )의 설법은 삼원병치식( 三 院 竝 置 式 ) 가람배치로 미륵하생신앙을 도상화하면서 미륵사를 조영하고 있음에서도 알 수 있다. 이와 달리 미륵사의 창건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신앙만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 해 마한세력의 중심이었던 이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웠을 거라는 추측이다. 백 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 공예 등 각종 문화수준이 최고도로 발휘됐을 것으로 짐작할 뿐만 아니라, 신라 진평왕이 백 공을 보내 도와주었다는 삼국유사 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삼국의 기술이 집결되었을 것이다. 창건동기에 대하여는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미륵사가 백제불교에서 미륵신앙의 구심점이었음은 분명하며 신라최대 의 가람인 황룡사가 화엄사상의 구심점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이 점은 황룡사 가 1탑 3금당식인 것과 달리 미륵사는 3탑 3금당식 가람배치인 것에서도 분 명한데 황룡사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화엄사상, 미륵사는 미륵신앙을 가람에 구현하고 있다. 미륵신앙에는 미륵상생, 하생신앙이 있고 미래에 이 세상에 올 미륵은 3번의 설법을 통하여 일체중생을 용화 세상에 인도하는 것으로 예정되 어 있는데 미륵삼존의 출현도 이 같은 점에서 이해되며 미륵사의 가람에 구체 화 되어있다. 즉 미륵사는 일반 평민 대중까지 용화세상으로 인도하겠다는 미 륵신앙에 바탕을 두고 조영되었음이 분명하다. (2) 미륵사의 변천 백제 무왕 대 3탑 3금당의 미륵산 창건은 삼국유사 의 기록과 발굴조사에 서도 어느 정도 입증된다. 특히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인각와( 印 刻 瓦 )는 壬 戌 (602), 乙 丑 (605), 中 部 乙 瓦, 甲 申 (624), 申 部 甲 瓦, 己 丑 (629), 丁 巳 (657) 등의 년 대를 환산할 수 있어 건물의 건립 년대를 추정하는데 자료가 된다. 백제 멸망 이후 통일신라대에는 미륵사에 벼락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삼국사기 성 덕왕 18년(719)조에 보면 震 彌 勒 寺 란 기록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벼 락에 의하여 피해를 입은 것이 어느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발굴조사에 의하면 중원금당과 목탑의 주변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집 28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88 중적으로 출토되며 그 이후의 유물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벼락에 의 하여 가람 내에서 가장 크고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목탑이 피해를 입었 을 가능성이 크다. 발굴조사 결과 미륵사는 백제 무왕 대에 3탑 3금당, 강당, 동 서 북승방지, 중문, 회랑이 완성되고 경덕왕 때 벼락이 있은 이후에 사역 의 확장과 증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당간지주 주변의 넓은 공간, 당 간지주 동 남 서쪽의 회랑, 회랑 남쪽의 동 서 연못지는 당간지주가 건립 되는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통일신라 하대인 858년(헌안 왕 2)에 출토된 大 中 十 二 年 銘 토기편을 통해 미륵사지 유물의 절대편년 전후 를 확인 할 수 있다. 이후 후백제 922년(견훤왕32)에는 미륵사탑의 보수 복 원 관련 기록이 있다. 조선불교총보 에 시린 고려 초 승려 혜거국사비문 에 의하면 이 때 미륵사 개탑( 開 塔 )을 계기로 혜거국사가 선운사의 선불장( 選 佛 場 )에 참석하여 단에 올라 설법을 할 때 천화( 天 花 )가 어지럽게 흩날렸다 고 하는 기록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 미륵사는 출토된 유물 및 건물지 흔적으로 미루어 볼 때 중원과 동원은 서원보다 이른 통일신라 말 기를 전후해 사찰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미륵사지석 탑을 중심으로 한 서원( 西 院 )을 중심으로 존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못도 통일신라 초기에 조성되었다가 동쪽 연못은 고려 초 전후, 서쪽연못은 고려말 경에 그 기능이 상실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고려시대 건물들은 초창 가람 과 같이 일정한 비례에 맞추어 정형화된 구획이 보이지는 않으나 초창 가람 상층과 주변지역에 더 넓게 분포되어 있다. 또한 숭불정책에 입각한 고려시기 에 미륵사의 건재는 어느 정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1344년(충목왕1) 익주( 益 州 )로의 승격은 이 지역 익산이씨가 외가인 당시 기황후( 奇 皇 后 )의 영 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177(명종7) 3월에 미륵 산적( 彌 勒 山 賊 )의 난 또한 미륵사에 충분한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 선시대에 이르러 미륵사는 억불숭유정책으로 창건 당시에 비하여 영역이 매우 축소되었고 사찰의 중심도 강당 뒤편 석축의 북쪽지역으로 보여진다. 1410년 (태종 1)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자복사찰( 資 福 寺 刹 )로 지정되기도 하지만 계속 사찰의 규모가 작아져 결국은 1600년대를 전후한 어느 시기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폐사 시기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기록으로는 조선 영조 대 고창무장 선비인 강후진( 康 候 晉 )이 쓴 와유록 ( 臥 遊 錄 )이라는 문집이 있다. 이 중 유금마성기 에 미륵사에 오니 농부들이 탑에 올라가서 낮잠을 자고 있으며 탑이 백여 년 전에 부서졌다고 하더라 는 내용이 있다. 탑에서 농부들 이 낮잠을 자는 형편이라면 이미 절이 없어졌을 것이며 발굴조사에서도 17세 기경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또한 가장 늦은 시기 유물인 만력 15년(1587) 수키와 확인으로 볼 때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폐허로 변했을 것으로 짐작 된다. 또한 폐사 원인에 대해서는 어떤 문헌 기록에도 보이지 않으나 1552년 (명종7년) 미륵사 뒤쪽에 익산지역에서 처음으로 건립되는 화암서원( 華 巖 書 院 ) 과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사회 경제적인 어려움이 원인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는 발굴조사에서 가장 늦은 시기의 건물지 즉 폐사 당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287

289 시의 건물지에서는 화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임진왜란에 의한 직접 적인 화재 피해는 없음을 확인하는 터라 앞으로의 폐사원인 연구가 더 확인되 어야 할 것이다. 백제 무왕과 익산 무왕( )은 법왕을 제거한 실권귀족들에 의해 옹립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 에 의하면 왕이 되기 전 무왕( 武 王 )은 익산에서 마를 캐며 빈한하 게 살던 서동이었다. 아마도 그는 본래 왕족출신이었으나 몰락하였기 때문에 익산에서 마를 캐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실권귀족 들이 이러한 서동을 왕으로 옹립한 것은 그들의 권력을 계속적으로 유지하려 는 목적에서였던 것이다. 즉위 후 무왕은 신라에 대해서는 공세를 강화하고, 고구려와 수에 대해서는 양 세력이 대립하는 상황을 이용하여 등거리 외교정 책을 구사하면서 실리를 추구하였다. 신라에 대한 공세는 602년(무왕3)의 아막 산성 전투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백제는 좌평 해수가 거느린 4만 명의 군대가 대패하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양국은 일진일퇴의 공방을 계속하였 다. 무왕은 이후 왕의 조카 복신을 중용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고 이러한 정치 적 기반 위에 익산으로의 천도를 위한 익산경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익 산은 무왕이 서동으로 생활하였던 곳인데, 그는 이곳으로 천도하여 사비를 근 거로 한 대성팔족들의 견제를 벗어나고자 하였다. 천도를 계획한 무왕은 익산 왕궁리에 새로이 왕궁을 조성하고, 호국 사찰로서 거대한 미륵사를 창건하고, 내제석궁을 지었다. 일본 경도( 京 都 ) 청련원( 靑 蓮 院 )에 소장되어 있는 관세음응험기 ( 觀 世 音 應 驗 記 )에 百 濟 武 廣 王 遷 都 枳 慕 密 地, 新 營 精 舍 하였는데, 이 무강왕( 武 康 王 )은 곧 무왕( 武 王 ), 그리고 지모밀( 枳 慕 密 )은 익산 금마 왕궁리 지역으로 각기 추정된 다. 이로 인한 천도설(황수영)과 별도설(이병도)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내포하 고 있으나, 아직 정확한 결론은 없다. 대체적으로 무왕이 자신의 세력기반인 익산으로의 천도계획을 세워 왕궁을 짓고, 미륵국토( 彌 勒 國 土 )와 전륜성왕( 轉 輪 聖 王 )이로서의 새로운 백제의 이상 제시의 미륵사를 창건했으며, 정략적 목 적하의 신라왕녀 선화공주와의 결혼 등을 통한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익산 경영으로 해석되는 바이다. 그러나 무왕은 이러한 천도이행의 단계적 추진 중 에 귀족들과의 내적갈등으로 결국 완벽한 성공은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 에 그가 서동시절에 익산에다 황금을 산처럼 쌓아 놓았다고 하는 것은 익산경영을 위한 그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또한 무왕 과 무왕비의 능으로 추정되는 쌍릉 등 현재 익산을 중심으로 발굴 조사 되는 익산의 유물 유적들을 통하여 그 실체가 하나씩 벗겨지고 있다. 익산경영을 추진하면서 그는 스스로를 전륜성왕으로 자처하였다. 미륵하생경 에 의하면 미륵이 용화산 아래에 하생하면 전륜성왕이 찾아뵙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삼 국사기 에 무왕이 용화산(현 미륵산) 아래의 큰 못가에서 미륵삼존을 만났다 고 한 것은 자신을 전륜성왕으로 비긴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관산성 폐 28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90 전(554) 이후 백제사회에 팽배해 있던 패배의식을 미륵사상으로서 백성들의 교화와 새로운 이상세계로의 희망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라 진평왕 의 딸 선화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인 것은 정략적 결혼일 가능성이 크다. 국문 학사에서 다루는 서동요 는 역사학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 나 서동=무왕=무강왕=무광왕의 국내외 사서들의 연결고리로서 서동과 선화 공주와의 결혼을 곧 무왕과 선화공주와의 결혼이라는 확대해석에는 아직까지 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선화공주를 왕비로 맞 아들임으로 신라와의 화호를 도모하고, 동시에 대성팔족에서 왕비를 구할 경 우 생겨날지도 모를 정치적 갈등과 간섭을 배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무왕의 익산경영 찬성파와 반대파의 대립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데, 찬성파는 대성팔족의 핵심에서 밀려난 왕의 조카 복신이나 계백 흑치상 지 왕효린 등으로 보인다. 이들은 본래 왕족 부여씨였지만 여기에 분지해 나 와 왕실의 방계집단으로서 귀실씨 흑치씨 계백씨를 칭하면서 무왕의 세력기 반으로 활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익산으로의 천도는 단행되지 못하였다. 천도의 좌절은 대성팔족을 비롯한 실권귀족들의 천도반대를 극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무왕의 정치적 한계였 던 것이다. 이러한 한계에 부딪친 상황에서 지배귀족 내에서는 태자의 책봉을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졌다. 무왕은 33년(632)에 원자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였 는데 이 과정에서 원자 의자를 지지하는 파와 왕자 부여풍을 옹립하는 세력들 이 대립하였던 것이다. 무왕은 왕자 부여풍을 왜에 보냄으로써 이 갈등을 정 리했다. 이러한 귀족간의 갈등과 천도의 좌절로 무왕은 점차 탐락에 빠지게 되었다. 이는 말년에 궁남지에서 빈번하게 연회를 베풀고 정사에 흥미를 잃는 등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왕이 죽고 태자였던 의자왕 (641~660)이 왕위에 오르지만 20여년 만에 백제는 멸망에 이르게 된다. 그렇 다면 선화공주가 무왕과 혼인하였다면 태자 의자는 누구의 아들이며, 사비(부 여)에서의 백제 멸망과 익산세력과 익산왕궁에서 사비로의 재천도는 언제였는 지 앞으로 풀어야할 과제가 많은 상태이다. 무왕과 미륵사 무왕의 익산 경영에서 핵심적인 작업은 익산으로의 천도추진이었다. 이러하 여 무왕은 새로운 왕경( 王 京 )을 조영하였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왕궁리 성곽 유적이다. 이는 곧 무왕의 천도계획의 일환에서 이루어진 토목공사라고 할 것 이다. 한편 무왕은 왕경조영과 더불어 천도를 뒷받침하는 이념적 작업도 동시 에 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미륵사의 창건이다. 무왕은 즉위 후 용화산 큰 연못가에서 미륵삼존을 만났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미륵사를 창건 하게 되었다. 무왕이 미륵불을 만난 것은 미륵하생경에 전륜성왕( 轉 輪 聖 王 )이 하생한 미륵을 만났다고 하는 것과 상통한다. 이렇게 볼 때 무왕은 전륜성왕 의식을 통해 왕권의 확립을 도모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무왕의 전륜성왕 의 식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지명법사( 知 明 法 嗣 )이다. 그는 무왕이 모아놓은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289

291 황금을 신통력을 써서 신라 진평왕에게 보냄으로써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을 간의하게 하였다든가 진평왕과 안부의 서신을 주고받는 등의 관계를 유지하였 다고 한 것에서 보듯이 왕의 고문으로서 정치적 실세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주석한 곳은 바로 용화선 사자사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익산 천도를 통해 미륵의 용화세계를 이루려고 하였고 그 목적에서 무왕의 천도계획을 적 극 지지하고 또 미륵사 창건에도 적극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석탑은 국보 제 11호로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번지에 있으며, 6층 14.24m, 폭 11.5m의 정방형 석탑이고, 목탑을 충실히 모방한 한국 석탑의 시 원( 始 原 )양식으로 간주되고 있다. 미륵사지 내에 있는 이 석탑은 미륵사지 서 원지 경내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 현존하고 있는 국내 최고 최대이며, 석조 건축술 역시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석탑의 시원이다. 그 이유는 석조물이지만 보는 순간 그 양식이 목탑과 비슷함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탑은 이전에 성행되었던 목조탑의 각부 양식을 목재대신 석재로 바꾸어서 충실하게 구현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층수는 6층으로 남아있다. 일제 강점기(1915년)에 이루어진 붕괴방지 보수공사로 서남쪽이 시멘트로 메꾸어져 있어서 보기가 흉하지만 그나마 이렇게 이 탑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의 임시방편적인 보수공사로 인한 우리가 국사책에 그렇게 즐겨보던 시멘트가 발라졌던 국보 제 11호 미륵사지석탑은 이제 영원히 볼 수 없는 상황이다. 탑 의 층수에 대하여 7층과 9층 설로 논란이 있었지만 80년대에 발견된 노반석 의 크기와 남아 있는 탑신의 비례관계 등 조사한 결과 9층탑이었음이 확인되 었다. 화강암을 사용하여 조성된 이 탑의 구조를 살펴보면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으로 축조 되어 있는데 중앙의 1칸에는 탑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 구가 있으며 그 내부의 교차되는 중심에 한 변이 145cm 방형의 초반석이 놓 여 있다. 초반석 중앙에는 사방 99cm인 심주석이 서 있다. 이것이 곧 찰주인 데 이러한 석주가 지탱하고 있는 것도 목탑과 같은 형식이며 그 포개진 면의 정교함은 고도로 발달된 석조기술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기단( 基 壇 )은 목탑 과 같이 낮은 1층을 이루었다. 탑신( 塔 身 )은 1층 몸돌에 각 면마다 3칸씩을 나 누고 가운데 칸에 문을 만들어서 사방으로 내부가 통하게 만들었으며,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을 세웠다. 초층에는 배흘림 형식을 갖춘 장방형 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평방과 창방을 가설하였으며 이 돌들을 통하여 기둥으 로 탑 상부의 수직 하중을 전달하게 되어 있다. 그 위에는 목조건물에서 공포 에 해당하는 3단의 옥개받침이 옥개석을 받치고 있는데 이것 또한 목조건물의 가구 수법을 본받고 있다. 모든 옥개석 추녀의 귀 부분에는 풍탁을 달 수 있 도록 작은 구멍이 뚫려있다. 옥개석은 얇고 넓지만 탑신에 비하면 좁게 보이 며 네 귀퉁이의 전각에 이르러 약간 반전되었다. 2층 이상의 탑신은 초층보다 는 훨씬 얕아졌으나 각 층 높이의 차이는 심하지 않으며 평방이나 창방형태가 29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92 보이지 않고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화 되며, 지붕돌도 1층보다 너비가 줄어들 뿐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3층과 4층의 결구는 탑신 받침이 2단을 놓고 있 다. 탑의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탑신과 층고가 비례적으로 작아지고 있기 때문 에 넓은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탑을 바라볼 때 탑의 상층부를 더욱 작아 보이 게 하는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이것을 교정하여 앙시미를 살리기 위해 아래에 서는 노출되지 않는 탑신 받침석을 4층부터 2단으로 높였다. 그리고 5층 이상 의 층급받침은 3단에서 4단으로 증가되고 있다. 이 석탑에서 이용한 안쏠림 기법과 귀솟음 기법은 현존 목조건축에서는 흔히 볼 수 있지만 석탑의 경우 발견된 예가 없다. 이 석탑의 건립연대에 관하여는 석탑 자체가 지니고 있는 양식과 수법 그리고 삼국유사 의 권2 무왕조 의 내용 등을 종합 조찰해 볼 때 백제 말기인 무왕 대(600~640)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1998년 부터 2007년까지 계획으로 해체보수 공사 중인데 2층까지 해체되었고 2006년 11월 현재 1층 석축 부분을 해체 중에 있다. 해체 중 2층 탑신 서쪽 부분에서 8-9세기경 납석으로 만든 대백사봉성(大伯士<惶>奉聖). 이라 쓰인 그릇편, 연우사년정사(延祐巳年丁巳:고려충숙왕 4년, 1317) 명기와편과 1778년(정조 2) 이후 상평통보 가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만으로 탑의 보수시기 등을 속 단할 수 없으나, 석탑을 쌓는 건축방법 등 당시 문화를 추측할 수 있는 다양 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석탑의 해체 보수과정은 항상 반에 공개되며, 공사의 진행은 전라북도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추진하고 있다. 한편 금후에는 2007년 도까지 사업이 마무리되기 어려운 실정이므로, 차후 사업연장이 불가피할 것 으로 보인다. 사리봉안기 발굴로 창건의 비밀 윤곽 서탑의 해체 작업 중 탑의 맨 밑 심초석에서 사리공이 발견됐다. 그 안에는 금동제 외호(外壺)와 금제 내호(內壺), 그리고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오롯이 남 아 있었다. 찬란했던 백제의 문화가 타임머신을 타고 1400년 만에 우리 곁에 다가온 것이다. 이때 백제의 유물에서만 발견되는 머리꽂이 장식인 은제관식 익 산 시 관 광 책 자 (銀製冠飾)이 680여 점의 유물과 함께 수습됐다. 이렇게 발견된 역사의 타임캡 슐이 유독 주목을 특별한 것은 기록이 들어 있었다. 천 년 전의 백제인이 현 대인에게 쓴 편지인 셈이다. <금제사리봉안기>에는 미륵사지의 창건이 백제 무왕의 왕후이자 좌평 사택적덕의 딸에 의해 이루어졌음이 기술되었다. 이로 써 미륵사 석탑의 비밀이 풀리고 삼국시대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되었다. 미륵사지 서탑은 기단(基壇)이 목탑 양식처럼 낮은 1단으로 이루어졌다. 탑신 (塔身)은 1층 몸돌에 각 면마다 3칸씩을 나누고 가운데 칸에 문을 만들어서 사방으로 내부가 통하게 했다.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을 세우고 각 몸돌의 네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세웠다. 전체적으로는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목조건축의 민흘림기법을 따르 고 있다. 기둥 위에도 목조건축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재료인 평방(平 枋)과 창방(昌枋)을 본떠 설치했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에 이르러 서 살짝 치켜 올려져 있다. 2층부터는 탑신이 낮아지고 각 부분의 표현이 간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2 91

293 결하게 돼 있다. 지붕돌도 1층보다 너비가 줄어들 뿐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 다. 미륵사지 서탑은 한국 석탑의 시원양식( 始 源 樣 式 )으로 지니는 의미가 크다. 축조과정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크기와 조형 미에 있어서 한국 석탑 중 최대의 걸작이다. 이와 똑같은 석탑이 동쪽에 또 하나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현재의 동탑은 1974년 발굴 조사에서 동탑의 기단 규모와 형태가 발견 되어 1992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이곳을 방 문한 이들은 화강암으로 축조된 동탑에서 아직 서탑이 지니는 고풍스러운 맛 을 못 느낀다고 불평이다. 그러나 다시 천년의 세월이 흐른다면 지금 서탑의 아름다움을 후세들도 느끼게 될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먼 훗날을 생각하 는 일. 천 년 전의 백제인이 서탑의 축조와 그 안에 봉안한 사리함으로 알려 준 교훈이다. 당간 지주 당간( 幢 竿 )은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사찰 입구에 세운 기둥이다. 돌로 된 두 개의 당간 지주 사이에 동( 銅 )이나 철( 鐵 )로 만든 막대기 모양의 기둥을 세우 고 거기에 불가( 佛 家 )를 상징하는 깃발인 당( 幢 )을 꽂아 신성불가침 지역임을 표현한 것이다. 사찰의 당( 幢 )은 그 자체가 위엄이어서 당간의 규모가 사세( 寺 勢 )를 드러냈기에 큰 사찰일수록 높이 세웠다. 전국 각 지역의 꼿꼿한 기상으로 세워졌던 당간들은 조선시대에 들어 억불숭 유 정책에 의해 점차 없어졌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당간이 훼손된 것은 일제 강점기였다. 일제는 대동아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전국의 쇠붙이들을 수거했는 데 피식민지의 문화말살 정책에 맞물려 전국에 남아나는 당간이 있을 리 없 다. 대부분의 사찰에는 당간지주만 덩그러니 남아서 여기가 당간이 세워졌던 곳임을 표시해줄 뿐이다. 미륵사지의 남쪽에는 2기의 당간지주가 약 90여 미터의 간격을 두고 서 있 다. 당간이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키기 위해 지주의 안쪽 면에 3개의 구멍을 각각 뚫어 놓았는데, 맨 위의 것만 직사각형 모양이고 나머지는 둥글다. 단순의 미학은 절제된 위엄을 갖는다. 미륵사지의 당간지주는 다른 곳의 당 간지주와 다르게 화려한 장식이 적고 단정한 형태를 보인다. 이와 비슷한 특 징을 갖고 있는 당간지주는 경북 영주시의 소수서원 내에 있는 숙수사지 당간 지주와 부석사 당간지주 등이 있다. 미륵사와 같은 절이 세워질 수 있었다는 것, 더구나 남겨진 서탑과 같은 화려하고 웅장한 탑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만 으로도 현대인들은 당시의 풍요로운 문화 환경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의 문화는 공주와 부여를 거쳐 비로소 익산에 이르러서 활짝 꽃 을 비운 것이다. 미륵사지의 가람배치가 백제 문화의 정신을 표현한 것이라면 서탑은 그 정신의 고갱이에 핀 한 송이 꽃이다. 미륵사지 석탑 사리봉영기 29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94 사리봉영기는 1998년부터 2016년까지 진행하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 비사업 중 2009년 석탑 1층 심주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의 하나이다. 내용은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 己 亥 年 /639년)에 사리 를 봉안하여 왕과 왕비의 안녕과 중생들의 불도를 기원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 석탑의 건립연대 등을 정확히 밝힘으로써 문헌사 연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금석문 자료인 동시에 백제시대 서체 연구에도 큰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되는 유물이다. 삼국시대 역사를 기록한 삼국유사 에도 미륵사 창건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 이 삼국유사의 창건 내용은 창건의 주체 중 하나인 왕비의 이름이 미륵사지 석탑 사리봉영기의 내용과 다르지만, 미륵사 창건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미륵 사의 실체를 문헌으로 확인시켜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금제 사리봉안기 원문해석 가만히 생각하건데, 법왕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근기에 따라 부감하시고 중 생에 응하여 몸을 드러내신 것은 마치 물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으셨다. 그 래서 왕궁에 태어나시고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을 보이셨으며, 8곡의 사리를 남기시어 삼천대천세계를 이익 되게 하셨다. 마침내 오색으로 빛나는 사리로 하여금 일곱 번 돌게 하였으니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 하였다. 우리 백제왕후께서는 좌평 사탁적덕의 딸로 오랜 세월에 선인을 심으셨기에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태어나셨다. (왕후께서는) 만민을 어루만져 길러주시고 삼보의 동량이 되셨으니. 이에 공 손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 원하옵니다. 세세토록 하는 공양이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으로써 우러러 자량이 되어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옵니다. 왕후 당신의 마음은 수경과 같아서 법계를 비추어 항상 밝게 비추시고. 몸은 금강과 같아서 허공과 나란히 불멸하시어 칠세영원토록 다함 께 복되고 이롭게 하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 이루게 하소서. 三 國 史 記 卷 第 八 新 羅 本 紀 第 八 성덕왕( 聖 德 王 ) 十 八 年 秋 九 月 미륵사에 벼락 이 치다 (719년 9월 미상 음력) 가을 9월에 금마군( 金 馬 郡 ) 미륵사( 彌 勒 寺 )에 벼락이 쳤다.( 秋 九 月 震 金 馬 郡 彌 勒 寺 ) 三 國 遺 事 卷 第 二 紀 異 第 二 무왕( 武 王 ) 미륵사를 짓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 彌 勒 三 尊 )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 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모름지기 이곳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293

295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우고 평 백 제 사 찰 지를 만들었다. 이에 미륵(彌勒) 삼회(三會)를 법상(法像)으로 하여 전(殿)과 탑 (塔)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 [註 001] 국사(國史) 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했다 라고 하였다. 진평왕이 여러 공 인(工人)들을 보내서 이를 도왔는데 그 절은 지금도 남아 있다. 삼국사(三國 과 史) 에는 이를 법왕(法王)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 주 (一日王與 夫人 欲幸師子寺至 龍華山 下大池邊彌勒三尊出現池中留駕致敬 夫人 변 謂王曰湏創大伽藍扵此地固所願也王許之詣 知命 所問填池事以神力一夜頹山填池 국 為平地乃法像彌勒三㑹殿塔廊廡各三所創之額曰彌勒寺 囯史 云王興寺 真平王 遣 고 했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百工助之至今存其寺 三囯史 云是 法王 之子而此傳之獨女之子未詳) 사 찰 과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이다. 미륵사의 창건연 대는 본 조의 기록을 토대로 백제 무왕 때 창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성덕왕 18년(719)조의 금마군 미륵사에 벼락이 의 떨어졌다(震金馬郡彌勒寺) 를 통해 통일신라 때까지 미륵사가 경영되었음을 알 비 훤 때(922)에 미륵사탑이 복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미륵사지에서는 고 교 고 수 있다. 그 후 조선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 과 강후진의 와여록(臥旅 수 있다. 그리고 고려초의 승려 혜거국사(惠居國師) 비문에 의하면, 후백제 견 려시대의 유물과 유구가 많이 출토되어 이 시기까지도 절이 번창하였음을 알 문 錄) 을 통해 17세기 말까지 석탑이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헌 미륵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폐사가 되었다는 기 록이 1980년부터 이루어진 문화재연구소의 발굴로 입증되었다(이왕기, 백제 사찰건축의 조형과 기술, 주류성, 2006). 무왕대의 미륵사 창건의 사상적 배 경은 사찰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륵사상 즉, 미륵불국토의 건설이라는 이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미륵사의 창건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사실 들이 미륵경(彌勒經)에 보이는 미륵하생신앙(彌勒下生信仰)과 밀접한 대응관계 를 보이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김영태, 미륵사창건 연기설화고, 마한 백제문화 1, 1975). 이와 같은 미륵사상에 의거하여 미륵사의 3개의 탑이 신 구 술 사 라의 황룡사 9층탑과 같은 9층탑이고 미륵사탑보다 뒤에 만들어진 황룡사 9 층탑이 주변국의 복속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백제인에 의해 건립된 사실에 주 목하여 미륵사의 창건배경 역시 주변국을 복속시키고 미륵불국토를 구현하고 자 하는 신앙적인 염원에서 발현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길기태, 미륵 사 창건의 신앙적 성격, 한국사상사학 30, 2008). 또한 무왕대의 미륵사 창건의 또다른 배경으로, 무왕이 용화산 아래에서 만난 미륵삼존은 성불한 미 륵과 그 보처보살(補處菩薩)로 파악하고 이 삼존불을 만난 무왕을 전륜성왕에 비유될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 한 편 삼국유사 무왕조의 세주에 의하면, 미륵사를 왕흥사라고도 한다고 하 였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5 법왕 2년(600)조에 왕흥사 를 세우고 승려 30여명을 두었다(創王興寺 度僧三十人) 라고 함으로써 법왕대 29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96 에 왕흥사가 완공되어 승려가 주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 사 권3 흥법3 법왕금살조( 法 王 禁 殺 條 )에는 (법왕 2년에) 수도인 사비성[부 여]에 왕흥사를 세웠다. 처음 왕이 절을 짓기 시작하여 끝내 이루지 못하고 돌 아가시자 무왕이 왕위를 계승하여 법왕이 시작한 일을 이어서 몇 년을 지나 완성하니 그 사찰의 이름을 또한 미륵사라고 하였다( 創 王 興 寺 於 時 都 泗 泚 城 [ 今 扶 餘 ] 始 立 栽 而 升 遐 武 王 繼 統 父 基 子 構 歷 數 紀 而 畢 成 其 寺 亦 名 彌 勒 寺 ) 라 고 하여 왕흥사가 무왕대에 완성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부여 의 왕흥사는 무왕대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익산의 미륵사와 동일한 이름으 로 나타나 혼란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 법왕 2년(600)조의 창왕흥사( 創 王 興 寺 ) 기사를 부여의 왕흥사 창건 사실로 보고, 삼국사기 무왕 35년(634)조의 성왕흥사( 成 王 興 寺 ) 기사를 익산의 미륵사 창건사실로 받아들인 견해가 있다(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 또는 왕흥 사와 미륵사는 서로 다른 사찰이지만 왕권의 상징인 왕흥사가 대성팔족( 大 姓 八 族 )의 입김으로 미륵사라고도 불렸을 가능성(김주성, 백제 무왕의 사찰건립 과 권력강화, 한국고대사연구 6, 1992), 미륵과 관련된 절이 왕권의 상징 인 듯한 왕흥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데서 비롯되었을 가능성(김두진, 백제의 미륵신앙과 계율, 백제사의 비교연구,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92), 사 비와 익산에 존재하던 두 개의 왕성( 王 城 )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 되었을 가능성(김선숙, 삼국유사 武 王 條 의 薯 童 說 話 에 대한 檢 討, 韓 國 學 論 集 42, 2007) 등을 제시하였다. 한편, 2009년 1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는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조사 과정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 해 조성한 사리장엄구( 舍 利 莊 嚴 具 ) 일체를 발견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삼국유사 무왕조에는 미륵사의 창건 주체를 백제 무왕과 그의 왕비, 즉 신 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번에 새롭게 발견된 유물에 서는 무왕의 왕비가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의 딸이라는 구절이 발견되었다는 점, 그리고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가 무왕 재위 시대의 기해년( 己 亥 年 ), 즉 무왕 40년(639)이라는 사실 등이다. 三 國 遺 事 卷 第 三 興 法 第 三 법왕금살( 法 王 禁 殺 ) 왕흥사ㆍ미륵사가 세워지다 (600년 미상 음력) 이듬해 경신( 庚 申 )에는 승려 30명을 득도( 得 度 )케 하고, 당시의 서울인 사비성 ( 泗 沘 城 ) 지금의 부여( 扶 餘 ) 에 왕흥사( 王 興 寺 ) [ 譯 註 001] 를 세우게 하여 겨 우 [그] 기초를 세우다가 승하하였다. 무왕( 武 王 )이 왕위를 계승하여 아버지가 닦은 터에 아들은 집을 지어 수십 년을 지나서 완성했는데, 그 절은 또한 미 륵사( 彌 勒 寺 )라고도 한다. 산을 등지고 물에 임했으며 꽃나무가 수려하여 사시 의 아름다움을 구비하였다. 왕은 항상 배를 타고 물을 따라 절에 가서 그 경 치의 장려함을 구경하였다. 고기( 古 記 )의 기록과는 조금 다르다. 무왕은 가난한 어머니가 못의 용과 관계하여 낳았는데, 어릴 때의 이름은 서여( 薯 蕷 )이고, 즉 위한 후 시호를 무왕이라고 하였다. [절은] 처음에 왕비와 함께 창건하였다.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295

297 ( 明 年 庚 申 度 僧 三 十 人 創 王 興 寺 於 時 都 泗 泚 城 今 扶 餘 始 立 栽 而 升 遐 武 王 継 統 父 基 子 構 歴 數 紀 而 畢 成 其 寺 亦 名 弥 勒 寺 附 山 臨 水 花 木 秀 䴡 四 時 之 羙 具 焉 王 每 命 舟 㳂 河 入 寺 賞 其 形 勝 壯 䴡 与 古 記 所 載 小 異 武 王 是 貧 母 與 池 龍 通 交 而 所 生 小 名 薯 蕷 即 位 後 謚 号 武 王 初 与 王 妃 草 創 也 ) [ 譯 註 001]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리 왕은이골에 있었던 사찰로 600년(법 왕2)에 창건되었고, 백제 왕실의 비호 아래 대찰의 면모를 유지했으나 백제의 멸망으로 폐허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폐허 이후 근래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위 치조자 파악되지 않았으나 1934년에 王 興 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수습 됨으로써 그 위치가 밝혀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 全 羅 道 ) 익산군( 益 山 郡 ) 불우 미륵사( 彌 勒 寺 ) 용화산( 龍 華 山 )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무강왕( 武 康 王 )이 인심을 얻어 마한국을 세우고, 하루는 선화부인( 善 花 夫 人 )과 함께 사자 사( 獅 子 寺 )에 가고자 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세 미륵불이 못 속에서 나왔다. 부인이 임금께 아뢰어 이곳에 절을 짓기를 원하였다. 임금이 허락하고 지명법사( 知 命 法 師 )에게 가서 못을 메울 방술을 물었더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 룻밤 사이에 산으로 못을 메워 이에 불전을 창건하고 또 세 미륵상을 만들었 다. 신라 진평왕( 眞 平 王 )이 백공( 百 工 )을 보내어 도왔는데, 석탑( 石 塔 )이 매우 커서 높이가 여러 길이나 되어 동방의 석탑 중에 가장 큰 것이다. 하였다. 금마면 > 용순마을 소선영(1937)남자 B2 : 어르신 그럼 혹시 주변에 괭이무덤 에 대해 아시나요? A1 : 어 고양이 무덤 거그 바로 서편 뒷마을이야 뒷마을인데 여 미륵사지가 지금 사리함이 많이 나왔잖아? 그때 언제냐면 에..600년전이지 아니 1400년전 이지 그때 그래 백제가 여그서 있었을 적에 그 사리함이 나왔는데 그러니까 중이 대체승하고 비구승하고 있었잖아 그러는디 여그는 대체승이 많았던 모양 이여 그래가지고 중이 몇 백명이 살았던 모양이지 거그가서 살으면은 사람은 살았는디 또 미륵사지 안에서 절이 있었잖여 절터가 컸단말이여 거그가서 살 았는데 중들이 거그서 많이 살고 그랬는데 그전에는 양반 상놈 차리니까 가마 타고 장가가고 글잖어 그래서 그러는데 가마를 짊어지고 다니면은 중들이 몹 쓸 짓을 많이 했디야 그래서 고양이 무덤이라해서 고양이가 한번 조사를 하러 왔는데 개무덤이라고 그려 고양이 무덤이라고 해가꼬 거따 묻었다고. B2 : 고양이를요? A1 : 고양이, 고양이, 고양이가 없으면 중이다 망한다 저따 묻어노면 고양이을 묻으게 되면은 중들이 다 망한다 해가지고 거따 고양이 무덤을. B2 : 중이 해코지를 하니까 못하게 고양이를 묻어놨군요. A1 : 응 금바위를 묻었다거나 그런 얘기들이 나와 그래서 고양이를 묻어 노면 은 중들이 다 멸망을 해버린다 하도 중이 기승을 부려싼게 비구승들이 여그를 대니들 못하고 그러니까 그런 전설이 있었어 (현대사이야기) 괘무덤 이라고 했었어 괘무덤 고양이 무덤을 괘무덤 이라고 했었어. 29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298 금마면 > 신기마을 김상용(1942)남자 B1 : 그러면 또 혹시 그 괭이무덤이라는 이야기는 못 들어보셨어요? A : 저그는 왜 그러는고니 그쪽이 미륵사 절이 있었는디 그 절이 쥐혈이랴. B2 : 쥐혈이라는 게 뭔가요? A : 아니 이런 디 보믄은 뱀혈 있고 쥐혈 있고. B2 : 아 쥐모양의 혈. A : 거그가 그래갔고 쥐가 곡식을 그 절로 물어 갔싼게 못 살게 생겼응게로 고양이를 길이다 묻어놨다고 그러더라고. B2 : 고양이를 키우면 되는데 왜 묻어놨을까요? A : 아니 이리 못 통과허게, 쥐가 못 통과허게 길을 옆으가. 그런 얘기도 들었 고 그건 우리 부락이 아니고 거그가 서편 뒤가 있을 거여. 금마면 > 노상마을 조기형(1945)남자 미륵사 절이 있어가지고 절이 항상 했을 적에는 저 스님들이 중들이 그리 권 세가 쌨대. 막 불교가 왕성해가지고 그래가지고 막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 안 으로 길이 이렇게 있는데 길이 길로자 노상이란 말여. 길 위에가 노상인데. 길 이 있기 땜에 길 위에로 인자 저찌가꼬 저짝에 있는데 이 앞으로 저기헌 사람 들은 지나댕기들 아무도 못했대. 어뜨케 권세가 쎄고 쉽게 얘기해서 우리 젊 었을 때라 허지만 예를 들어서 뭐 지나가면서 애들 들여다가 때리고 쌈허는 식으로 요 동네 앞으로 지나갈라믄 깡패들이 많다는 식으로 원채 권세를 부리 고 막 스님들이 그렁게는 이걸 어떻게 해꾸를 해야겄는디 또 누가 그런걸 거 시길 했어요. 근데 이제 먼 주지 수님 저기가 쥐래 쥐. 쥐로 변해가 황당했다 는 얘기지. 긍게 여기서 오래 살다보면은 얘기가 많이 전해지는데 내가 듣기 로는 저 얘기도 저러지만 여기에 그 산사에 원래 그 쥐가 말하자믄 쥐. 그 스 님이 원채 권세를 부리고 헝게는 그 절을 이 절을 망하게 할라믄 어떻게 해야 하냐 긍게 또 그 우에 저기가 쉽게 얘기해서 저길 했는가베. 이 저 거시기 스 님이 쥐기 때문에 쥐를 잡기 위해서는 고양이를 잡어야 할 거 아니여. 근디 여기 막 여기서 절이서라 좋게 저기들이 이 김제 평야로 시주허로 댕겼단 말 여. 그러지 말하자면 옛날 절에서. 나가고 이리 이 아래로 내려가면 이리 호남 평야 길 옆으로 막 가서 저 시주를 해가지고 와서 저기해서 득세를 부링게는 그러면은 저기 못허게 저 고양이를 금고양이를 묻어놓으면은 쥐가 말하자면 인자 지나갈랑게 도망대니고 숨어야 됭게 살살 망하기만 하지. 그래가지고 이 절이 망했다는 전설이 있거든. 그 고양이 고양이 무덤인데 인자 오래 세월이 가다봉게 인제 괴무덤이라고. 왕궁면 > 탑리마을 김정배(1950)남자 A2 : 우리 왕궁탑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다면 그전에 인자 할아버지들이 인자 모여서 말씀을 허시면 그 미륵탑은 누나고, 왕궁탑은 동생이고, 남동생. 근디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297

299 인자 이 쌓을 때 어떻게 보먼 인자 그 먼저 쌓아야만이 안 죽고, 늦게 쌓은 사람이 죽는다, 그러한 전설을 그 할아버님들이 말씀허시는데, 그리서 미륵탑 이 크게, 치마보재기로 가 날르고 남자는 여 우에다가 날르다보니까, 저고리 여그다 옷깃에다가 날르다보니까 그래도 늦고, 가령 그 어떻게보믄 천천히 허 게끄름 맨글라고 부모가 누나한티는 머라도 갖다 주감서 쉬갔고 혀라, 그래갔 고 인자 이 아들을 살릴려고. 인자 그런 전설을 좀 들은 거 같애요. B1 : 누가 더 빨리 쌓았습니까? A2 : 누나가 오래 살었죠. 동생이 먼저 죽고. 암만혀도 탑이 그렇게 널룹게 싸 도 이 치마폭이 널루니까 인자 그렇다라는 이야기들을 인자 할아부지들 말씀 허시고. 왕궁리 유적지 1965년 기울어 가던 왕궁리 오층석탑을 보수했다. 목적은 붕괴를 막기 위함 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새로운 역사가 발견됐다. 그 서막은 탑에서 시작되었 다. 1층 옥개받침과 기단( 基 壇 ) 사이에서 사리병과 금제금강경판, 그리고 금동 불상과 옥, 방울 등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출토되자마자 이 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제123호)로 지정 되었다. 이후 이 탑의 주변에 대한 발굴 작업이 세밀히 이뤄졌다. 1976년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연구소에서 백제 왕궁터 발굴을 실시하여 왕궁 담장의 외곽경계와 석탑의 북측에 위치한 금당 건물터 조사가 이뤄졌다. 학계의 정리된 입장은 백제 무왕이 부여에서 이곳으로 나라를 옮긴 왕궁이었다는 의견으로 모아졌 다. 왕궁리라는 현재의 지명은 그 이유 때문에 붙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 게 보면 탑을 중심으로 한 이곳 절은 왕궁 내에 위치한 내불당이 된다. 무왕이 강성 백제를 꿈꾸던 곳 왕궁의 외곽을 둘러싼 담장은 잘 다듬어진 사구석과 장대석, 돌 등을 사용하 여 폭 3미터 규모로 만들었다. 사람들의 통행이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 남쪽 담장의 돌들은 정성을 들여 다듬은 흔적이 보인다. 실제로 이곳을 발굴한 사 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오층석탑과 금당과 강당 등 사찰관련 유적은 왕궁의 주요 건물들이 위치해야 할 자리에 있고, 석탑의 하부에서 목탑지 또는 선행 한 왕궁건물지의 흔적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추측컨대 사찰로 변한 시기는 의 자왕 시기를 전후로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삼국사기 의 금마군 대관사의 우물이 핏빛으로 되어 다섯 장( 丈 )이나 흘렀다 는 기록이 왕궁에서 사찰로 변 화된 탑사를 말해준다. 이곳에서 백제시대 기와류인 연화문수막새, 태극문수막새, 소문수막새와 토기 류인 대형 항아리, 시루 등이 출토되었으며, 인장토기편, 손잡이 달린 이형토 기, 변기형토기 등도 발견 되었다. 그 외에도 녹색 유리편, 유리구슬과 함께 금사, 금구슬, 금사뭉치, 금제화형장식 등의 금속제품들도 함께 나왔다. 대개 발견된 유물들이 제작된 연대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것들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그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백제가 화려하게 부활한 후 계속 29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00 유지가 되었다면 어떠했을까? 경주의 불국사처럼 우람한 탑과 절집으로 사람 들을 불러 모으지는 않았겠는가? 왕궁유적지에서 출토된 기와나 주춧돌을 가 지고 옛날의 왕궁이나 웅장한 절을 상상해 본다. 백제의 실체는 드러나 있는 것보다 드러나지 않은 것들이 더 많기에 나의 상상은 역사의 편린(片鱗)을 만 지며 과거로 향한다. 누구나 왕궁리 유적지를 걷게 되면 과거로의 상상여행을 익 산 왕 궁 리 유 적 시 관 광 책 자 구 술 사 익 떠나게 될 것이다. 왕궁면 > 오포마을 소길영(1966)남자 포전은 한자로 쓰면은 개 포하고 밭 전 자. 여기를 개밭이라고 해요. 쉽게 말 해서 개라는 것이 우리가 흔히 얘기해서 갯벌, 갯벌밭이라는 얘기야. 갯벌밭이 라는 얘기는 예전에 백제시대 때 보면은 백제 무왕이 천도를 해가지고 이쪽 왕궁탑 쪽에 궁궐을 짓고 천도를 해서 왕궁탑이 있는데 거기서 살다가 궁터 오면 옆 동네 궁평 아닙니까? 궁평에 보면은 제석사지라는 절터가 있는데 그 제석사는 이제 궁궐 안에서 그 중전마마 정도나 왕의 부인이 나라의 백성들을 갔다가 태평성대하기 위해서 제사를 모시고 그럴 수 있는 곳이거든요. 제석사 지가 그런 형태 틀이 있었는데 그래가지고 예전에 궁궐을 짓다보면 앞에 강이 있고 어떠한 궁궐을 수호할 수 있는 형태를 유지해야만이 궁궐 입지 조건이 산 되니까 왜적들이 쉽게 넘어올 수 없고 그래가지고 거기에다 지으면서 이쪽 포 시 전 앞으로까지 전부 강이 됐다고, 이제 뭐 삼국시대 넘어서 백제시대까지 강 사 익 이라고 봐야 되죠. 강이었고 여기는 그래서 개밭이죠. 갯밭 그래가지고 포전이 산 이 평 자가 뜰 평 자잖아. 그래가지고 지금도 마을 분들도 궁뜰 궁뜰 하거든 향 요. 궁이 있는 뜰이라는 말이에요. 또 궁뜰 앞에 이름은 도평이나 관동이라고 토 하던데 거기 도평은 또 옛날 지금도 고어로 쓰는데 섬돌, 어른들이 그냥 섬드 층 지 익 리 섬드리 하는데 말 그대로 섬돌이거든요. 섬돌이라는 얘기는 쉽게 얘기해서 석 산 탑 시 아서 나간다 해가지고 섬돌이 됐지. 그래가지고 아무튼 포전이라는 게 그런 왕 궁 리 5 관 광 책 자 익 왕 궁 리 우 물 제 산 향 토 지 고 되는 것이고 자 인제 포전 밑에 가면은 궁평. 거기는 이제 한자풍이말로 궁평 섬을 돌아간다는, 배가 섬을 돌아간다, 물이 섬을 돌아간다 해가지고 섬을 돌 형태의 개밭이 형태를 이루고. 관동은 예전부터 관동라고 했는데 거기는 암만해도 백제시대나 그 이전시대부 터 거기에 벼슬아치들이 많이 살고 그런 형태로서 관동이라는 의미가 있었던 것 같고, 어떤 사람들은 또 거기에 있는 지형 형태가 각이 져서 그런 형태로 다가. 근데 아마 벼슬하는 사람이 많이 났다고 해서 그래서 관동이라는 이름 이 붙은 걸로 알고 있어요. 춘포면 > 창평마을 손충모(1931)남자 A2 : 나도 잘 알덜 못헌디. 내가 적어왔거든. 창평은 마한 지증왕 유지다. 미 륵산에 기준성. 기양리에 있고 당시 궁궐은 에. 현 궁평에 있고 평장리에는 바 문 로 앞동리고. 대아관 평양사(?)가 살던 그곳. 대아관 평양사(?)가 현재로 말하 헌 익 그 때 궁뜰에 궁창. 궁뜰에 창고란. 창 자여. 창고가 있었고 바로 엽동은 현재 면 뭐여. 대한민국 이걸 해결해주는 사람. 긍게 큰 벼실이지 그게. 창평에는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2 99

301 석 사 지 제 석 사 폐 기 유 적 산 향 토 지 익 산 시 관 광 책 자 구 술 사 익 산 향 토 지 익 산 시 사 로는 사냥할 엽잔디 현재같으면 훈련소여. 엽동 연병장이라고 훈련소. 왕궁탑 은 외궁뜰에 세워 있고. B1 : 예전에 우리 마을에 창을 담아두던 창고가 있었던 겁니까? A2 : 궁뜰은 궁궐인디 궁창이여. 궁궐서 여기따가 창고 져놓고 다 갔다 먹였 다는거여. 기준왕때지. 그리고 이 동네가 활같이 이렇게 생겼어. 미륵과 용화 의 정기가 흐르고 흐르는 마한의 궁창. 마한의 궁평의 창고턴디. 큰 활 되어 돌아 누은 곳. 이렇게 나와 누워있다. 이렇게 이렇게 여가 이렇게 활 안같어 긍게? 활 되야 먹은 곳이란 말이여 이게. 왕궁면 > 탑리마을 김건초(1934)남자 지금은 인제 탑리라고 이렇게, 시방 우리 마을이 탑리여, 이게, 원 마을이름이. 그리서 지금 현주소도 여그 13번지여, 탑리길 13번. 그리고 지금 변동사항 된 것은, 나 살기 전 있을 적이 변동사항 된 것은 탑리라고 헌 거. 부락 명칭이 변동이 됐지. 그전이는 왕금이라고 혔어. 임금 왕 자, 쇠 금 자, 왕금. 그리서 불르기를 왕금이라고 그렇게 불렀어. 그러다가 왕금이라고 허는 것이를 어떻 게 해서 읎앴는가는 몰라, 그건. 그전, 나 살기 전이는 왕금이라고 했어. 긍게 그 왕금이라고 그 유래는 인자 그때 거시기는 여그서 왕이 살어서 그맀다 혀 서 왕금이라고 그렇게. 내가 출생헐 적으도 왕금이라고 혔어. 근디 왜정, 왜정 거시기 끝나고 나서 아마 탑리라고 혔을 거여. 저 왜정 말기 끝나고. 이 탑리 라고 허는 것은 내가 생각허기는 여그 탑이 있어서, 왕궁탑, 탑이 있어가지고 탑동네라고 허는 것보다도 이게 탑리다, 이렇게 허는 것이 불르기도 좋고 그 리서 탑리라고 현 것 같여. 그전에 인자 듣기로는 내가 뭐 알든 못허지만은 그전 역사상이여, 이건. 역사 상인디 저 궁평이라고 있어. 거그는 그전 왕들 있을 적으 궁녀. 궁녀가 그 궁평, 궁녀를 말허자먼 집단적으로 궁녀를 것다가 살었었는게벼. 그리서 궁평 이라고 그려. 우리는 모르지. 긍게 흘러나온 전설이여, 이게 말허자먼. 옛 전설 인가 똑똑히 맞은가 어찐가는 몰라. 그러지만은 그리서 이름이 궁평이여. 그 궁녀들을 것다가 거주혔다고 혀서. 그서 이 근방 동네이름이 거시기헌 디가, 좀 재밌는 얘기가 많이 있어. 거그 인자 궁평, 그 옆으가 신정이여. 거그는 그 전 저 왕들의 말허자먼 신하, 신하들이 거기에 많이 머물러 있었는게벼. 그리 서 신정이라고 그맀어. 그리서 이 부락이름이 신정이여. 그 다음이 여그는 인 자 왕궁 탑리. 왕금이지 인자. 그리서 임금이 살었다 혀서 왕금이고. 그리고 여그 가먼은 도평이라고 있어. 지금은 도평이지만 그전이 이름은 섬드리라고 그려, 도평을. 왜 섬드리냐, 거그가 섬이여. 섬의 입구여, 말허자먼. 지금 말허 자먼 항구. 그리서 그 도평이라는 디가 그전이는 섬드리라고 혔는디 지금은 도평이라고 혀. 또 평작리라고 있어. 지금 이름은 평작리고 그전 이름은 근남 이라고 그맀어, 근남. 근디 인자 근남이라고 헌 것은 그건 모르는디 평작리라 고 현 것은 왜 평작리라고 혔는고니 거그가 들판이 있어, 밭이. 근디 평평허다 고 혀서 평작리여, 말허자먼. 그리서 거그를 뭐라고 거시기 허는고니 이 도읍 30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02 지, 왕 도읍지, 말허자먼 그 군사의 훈련장이여, 훈련장. 그리서 평작리라 그맀 어. 그리서 이쪽으 인자 걸어서 지나가먼은 저그, 그것은 인자 춘포로 들어가 는 데. 춘포로 들어가는디, 춘포의 젤로 끄터머리라고 볼 수가 있지. 춘포면 북상 끄터머리. 거그 가서 창평이라고 있어. 거그는 왜 창평이라고 혔냐, 그 원인이 있어. 군수물자 창고여. 군수물자 창고가 거그가 있어서 창평이여. 왕궁면 > 궁평마을2 이분님(1941)여자, 노금순(1929)여자 B3 : 예전에 궁녀들이 많이 살아서 궁평 마을이라고 했다고 하던데요? A1 : 그것도 사람들 말하면 그려 뭐 왕궁은 왕이 살고 궁평은 궁녀가 살고 신 정은 신하가 살고. A2 : 창뜰, 푸세미 는 그때 옛날에 옛날에 거기다가 푸세미 는 말 먹으라는 풀 그것을 쟁여 놓아서 푸세미 고 창뜰 은 창을 거따 그 곳간에다 쌓아 놓아 서 창뜰 이랴. 왕궁탑( 王 宮 塔 )의 건립 후백제( 後 百 濟 )의 왕 견훤( 甄 萱 )이 어느 날 당시의 유명한 대사 도선( 道 詵 )을 만나 어떻게 하면 왕건을 누르고 후백제가 영성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도 선이 대답하되 완산( 完 山 )의 지리가 마치 개가 웅크리고 앉은 형세( 若 蹲 狗 形 ) 이니 지세를 이용하면 될 것이라 했다. 어찌하면 좋소? 하고 왕이 구체적인 방법을 물었다. 도선이 대답하길 웅크리고 앉은 개의 꼬리를 눌러 놓으면 개가 일어서지 못할 게 아니옵니 까? 그렇겠노라고 견훤이 도선과 상의한 결과 개의 꼬리 부분이 되는 땅에 무거 운 석탑을 쌓기로 했다. 해서 지금의 왕궁탑을 쌓게 되니 완성된 지 사흘 동 안 완산이 대낮에도 캄캄해졌었다고 한다. (이는 여지승람( 輿 地 勝 覽 )에 있는 기록이다. 완산(전주)의 지형이 개가 웅크리 고 있는 모양이니 무거운 돌탑으로 눌러야 된다는 것은 풍수설이다. 도선이 정말 예언했는지 여부는 탑의 건조 시기와 관련이 있고, 사흘 동안 완산이 깜 깜해졌다는 건 일종의 이변( 異 變 )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왕궁탑 복원에 얽힌 이야기 왕궁리의 5층 석탑이 기울어지고 황폐화되어 1965년 4월에 이를 해체( 解 體 ) 하여 다시 고쳐 세우는 복원( 復 元 )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이 때 참으로 신 기한 영험( 靈 驗 )의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다 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아주 옛날 처음으로 이 탑을 세운 이가 천석( 千 石 )이란 사람이었는데 천여 년 뒤 이를 다시 고쳐 쌓게 된 이도 다름 아닌 천석씨였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01

303 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즉 이 탑의 해체와 복원의 공사를 총 감독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공( 石 工 )이 바로 김천석( 金 千 石 )이었던 것이 다. 그리고 탑을 해체하는 작업 중에 옥개석( 屋 蓋 石 ) 이음새에 사용했던 녹쇤 쇠 꺽쇠가 나왔는데 거기에 천석( 千 石 )이란 글자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더라는 것이다. 이는 당초 탑을 쌓은 석공이 천석이란 사람이었음을 표적으로 남긴 것이다. 그러니 애당초 탑을 쌓은 이도 천석이오, 천여 년 뒤에 이를 고쳐 쌓은 이도 천석이니 결코 예사로운 인연이 아니고 신비로운 영험의 사건이라 할 것이다. 또한 두 번째 이야기는 이렇다. 12월 5일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 사이에 탑 의 일부와 기단부를 해체하였는데, 그 1층 개석과 기단 가운데서 엄청난 보물 이 나타났다. 즉 금물을 입힌 불경( 佛 經 )과 금으로 된 함( 函 ) 그리고 청동으로 된 불상 셋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난히 겨울 날씨답지 않게 포근하고 쾌청했는데도 막상 보 물들이 발견되는 순간에 갑자기 먹구름이 해를 가려 깜깜해지면서 안개 같은 뿌연 먼지가 일어났다 한다. 그런 뒤 이 보물들을 엄숙히 거두어 정중하게 수 납한 뒤에서야 구름도 걷히고 먼지도 가라앉았다고 한다. 이는 부처님의 신통 한 조화의 힘에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하였다. 또 세 번째 이야기는 임종을 선고받은 석공이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공사를 마쳤다는 이야기다. 석공 김천석이 탑의 상층부를 해체하는 일에 착수하자마 자 뜻밖의 병으로 쓰러졌다. 급히 병원에 입원하여 진찰을 받았으나 의사들도 도무지 무슨 병인지 알아내 지 못해 갈수록 병은 위중해졌다. 그리하여 가족들은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깨 닫고 퇴원하여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였다. 때마침 탑에서 불상 등 보물들이 발견되었다. 그러자 김씨의 병세가 언제 그 랬냐는 듯이 갑자기 좋아졌다. 그리고 며칠 만에 씻은 듯 완쾌하여 남은 복원 공사를 완전하게 끝낼 수가 있게 되었다. 이 사건 역시 불가 삼보가 들어있는 석탑을 함부로 다룬 데에 대한 부처의 응험이라 믿어진다. (왕궁탑 복원공사에 얽힌 이야기로 불과 35년 전의 일인데도 마치 고대설화처 럼 이적( 異 蹟 )으로 엮어진 게 아주 흥미롭다. 천여 년 전과 오늘의 석공이 똑 같이 천석( 千 石 )이란 이름이었다는 사실은 우연 치고는 너무 지나치다. 게다가 보물의 출현과 동시에 천변이 일어났고 석공이 원인 모를 중병에 걸렸다가 기 적처럼 나았다는 것이 그렇다. 이는 어디까지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복원공 사 자체가 지닌 신성성( 神 聖 性 )을 높이려는 표현이다.) 왕궁리오층석탑 왕궁리5층석탑( 王 宮 里 五 層 石 塔 )은 국보 289호로 지정( )되어 있다. 이 석탑은 왕궁평성 중앙의 대지위에 자리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왕궁탑 이 라고 부르고 있다. 높이 8.5m의 장중한 탑으로 1965년 해체보수되기 전까지만 해 30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04 도 토단( 土 壇 )을 갖춘 희귀한 석탑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해체복원 결과 원래 돌로 기단( 基 壇 )을 구성하였음이 밝혀져 이를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즉, 1단의 기단 위로 5층의 탑신( 塔 身 )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 을 1965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원래 보물 제 44호 로 지정된 이 탑은 1965년 11월부터 1966년 5월에 걸쳐 해체 복원되어 기단 부의 구조가 완전히 밝혀졌으며, 해체 당시 탑 내부에서 금제 사리함, 순금제 금강경판 등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전주박물과에 소장되어 있다. 탑에 관한 기 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호남읍지 익산군 고적( 古 蹟 )조에 보면 왕궁탑은 궁 터(옛궁터) 앞에 있다. 높이가 10장인데 세속에 전하여 오기를 마한시대에 창 건된 것이라 하며 일설에는 도선이 완산(전주)의 자리가 앉아 있는 개 모양이 어서 이곳에 탑을 세워 개의 꼬리를 눌러서 고려 태조가 견훤을 눌러 이겼다. 탑이 완공된 날 완산(전주)은 낮에 3일간이나 안개가 끼어 어두웠다고 한다. 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말에 출판된 익산읍지인 금마지 고적 왕궁 탑조에 다음과 같은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기록에 보면 왕궁탑은 옛 궁터 앞에 있는데 높이가 10장( 丈 )을 돌로써 쌓았다. 세속에 전하여 오기는 마한시 대에 창건된 것이라 하는데, 이 탑과들은 불가의 소성에는 도선이 말하기를 완산의 지리가 앉아 있는 개모양이어서 이곳에 탑을 세워 개의 꼬리를 누르고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압승하게 된다고 하였다. 탑이 완성된 날 완산의 하 늘이 3일 동안 어두웠다고 한다. 위의 두 기록에서 보면 이곳이 견훤이 후백 제를 개창한 왕도를 보고, 또 이 탑이 건립된 시기를 신라 말 고려 초로 보는 건립연대와 관련되는 것으로 주목된다. 한편 이 탑 주변의 발굴조사에서 관궁 사( 官 宮 寺 ) 대관관사( 大 官 官 寺 ) 등의 명문와( 銘 文 瓦 )가 출토되고 있으며, 삼 국사기 무열왕 8년 6월조의 기록에서도 대관사의 우물물이 피와 같이 붉게 되었는데 금마군의 지류( 地 流 )로 오보나 넓게 피가 흘렀다.( 大 官 寺 井 水 爲 血 金 馬 郡 地 流 血 廣 五 步 ) 고 하여 대관사 라는 사명이 이 탑지와 관련하여 자주 보이고 있어서 이곳이 사료에 보이는 661년에 존재하였던 대관사 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하여 이 오층석탑을 대관사지 오층석탑 이라고 도 한다. 탑의 구조는 기단부는 탱주가 두 개 있으며 갑석( 甲 石 ) 또한 1면 3매 의 돌로 짰는데 바깥쪽으로 약간의 경사를 이루고 네 귀는 약간 반전( 反 轉 )을 보인다. 탑신부의 초층 옥신( 初 層 屋 身 )은 4우주와 탱주가 각출된 중간석 등 모 두 8개의 돌로 짜여져 있으며, 2층의 옥신은 4면 1석으로 4개, 3층 이상은 2 개의 석재로 짜여져 있다. 옥개석은 1층부터 3층까지는 8매의 돌로, 4층과 5 층은 4매의 돌로 짜여져 있다. 한편 3단으로 된 옥개받침은 옥새석과 별도로 4매 별석( 別 石 )으로 조성하여 그 위에 옥개석을 얹었는데 옥개받침 간의 거리 보다 3단째의 옥개받침에서 처마 끝까지의 거리가 훨씬 길고, 옥개상면에 낙 수면의 경사가 약하여 옥개석은 평활한 모습을 보이고, 추녀의 선은 네 모서 리에서 가볍게 들리어 비상미( 飛 翔 美 )가 있는 전형적인 백제계 양식의 탑이다. 탑의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 앙화 그리고 파괴된 보륜이 있으며, 탑의 전체 높이는 약 8.5m이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깍은 주춧돌을 기둥삼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03

305 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 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래도 재현하고 있다. 이 팔 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 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조 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 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 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 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을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 로 치켜 올려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층 지붕돌의 윗 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 장식이 남아있다.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 석탑의 양식을 일부 유지하 고 있다. 탑의 높이는 8.5m이고 기단 면석에는 두 탱주를 갖추었다. 1층 몸돌 은 우주를 돋을 새김한 기둥 모양의 돌로 네 모서리를 세우고 탱주를 새긴 네 장의 중간 면석을 짜 맞춰 만들었다. 2층은 4면 1석씩, 3층 이상은 2매씩으로 되어 있으며 각각 우주를 조각하였다. 3단의 층급받침을 지붕과 별도로 4매의 돌로 조성하고 그 위에 지붕돌을 얹었으며, 지붕돌의 경사는 완만하고 네 귀 가 약간 들려 있다. 우선, 첫인상으로 보면 이 탑은 백제탑의 인상을 짙게 풍 긴다. 단층기단과 얇고 넓은 지붕돌 등 전체적 이미지가 부여 정림사터 오층 석탑과 많이 닮았다. 탑신의 체감률이 적은 데서 오는 굳건한 느낌과, 그에 비 해 기단이 좁은 데서 오는 가녀린 느낌, 지붕돌 모서리의 상쾌한 들림에서 오 는 경쾌함 등 대립적 요소들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한눈에 아름다운 백 제탑의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미륵사탑이나 정림사탑과 같은 시대에 조성된 백제탑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탑신부의 돌 짜임의 기법과 3단으로 된 지붕 돌 층급받침의 기법에서 신라석탑의 양식이 보이므로 통일신라 초기의 탑으로 보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옛 백제 지역에서 이어져 오던 백제 양식을 계승하고 신라 양식을 흡수하여 고려 초기에 건립된 탑이라는 견해가 있다. 1965년에 기울어짐을 바로잡기 위해 시행된 해체 복원 공사 중, 1층 지붕돌 과 기단부에 양식상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금제 사리함과 사리병, 19매 의 금판에 새겨진 금강경, 청동여래입상 등이 나왔기 때문이다.(이 유물들은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어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1965년의 발굴 결과 이탑의 기초가 백제 시대의 유적 위에 세워졌음이 확인되었다. 세 번째 주장은 견훤의 도읍인 완산(전주)의 지세가 앉아 있는 개의 형상이므로, 도선이 개의 꼬리에 해당하는 이곳에 탑을 세워 누름으로써 견훤의 기세를 꺾 어 고려 태조 왕건이 이기게 되었고, 이 탑이 완성되던 날 완산의 하늘이 사 흘 동안 어두웠다 고 하는 금마지 의 기록과도 부합한다. 실제로 고려 태조 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 새 국가의 앞날을 평탄하게 하기 위해 도선의 의견에 따라 전국 각처에 풍수지리설에 따른 비보( 裨 補 )를 했다. 그러나 근래의 발굴 과정에서 상부대관( 上 部 大 官 ) 관궁( 官 宮 ) 궁사( 宮 寺 ) 등의 명문이 적힌 기와 30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06 들이 나와, 이곳에 백제의 궁궐이 있었고, 그 내부에 대관사 관궁사 궁사라 불리던 절이 있었으며, 오층탑은 이 절의 유물이라는 추측도 다시 나오고 있 다. 따라서 애초부터 고려초기의 탑인지, 아니면 백제 때 조성된 것을 고려 시 대에 보수했는지, 아직은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석탑 하부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사항은 한 변이 17m나 되는 정방형의 목탑 판축층이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조사과정에서 목탑 판축층의 정교함 과 함께 남북 중심축이 금당지와 강당지의 남북 중심선과 일치되고 있음이 드 러나 사찰 창건 당시에는 석탑이 아닌 목탑이 건립되었던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자료가 되었다. 따라서 지금의 석탑은 목탑이 없어지고 난 후 목탑 의 기초위에 세워져서 그런지 금당지와 강당지가 건립된 구지표가 아닌 한 단 높은 지대 위에 세워져 있다. 5층 석탑 아래의 목탑 판축층은 미륵사지의 목 탑 판축층과 똑같은 형태로 되어 있는데, 판축층은 지표 아래 100cm부터 시 작되며 바닥면까지 모두 32개 층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이 판축층은 밝은 적 갈색점토층과 밝은 황색마사토층을 층층이 번갈아 가면서 다졌다. 특히 마사 토층에서만 목도( 木 搗 )를 사용하여 다진 흔적이 틈이 없이 빽빽하게 확인되었 다. 항색마사토층은 16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16개 층 모두에서 목도 흔적을 확인한 것이어서 층층마다 굳고 고르게 다지는 작업을 얼마나 세심하 게 배려했는지 알 수 있다. 적갈색 점토층은 각 층의 두께가 대체적으로 3~4cm이며 황색마사토층은 2~3cm정도의 두께를 유지하고 있어 마치 떡시루 의 단면을 보는 것과 같다. 왕궁탑 근처 제석사지에 있는 목조7층부도가 재난 을 당하였을 때 신비한 응험이 나타났다고 하는 관세음응험기 기록 유물과 거의 같은 유물이 1965년 4월 7일 왕궁탑의 해체 공사 때 발견되었다. 왕궁리 오층석탑 고스란히 남아있는 백제 장인의 숨결 미륵사지 석탑에 의해 새롭게 시작된 백제의 석탑양식은 부여의 정림사지 오 층석탑과 왕궁리 오층석탑으로 이어진다. 왕궁리 오층석탑은 국보 제289호로 지정된 중요한 유적이다. 학계에서는 백제석탑 양식을 충실히 따른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보고 있는데 왕궁리 석탑이 보여주는 전체적인 안정감과 상승감은 백제의 석탑의 완성이라 할 만하다. 안타깝게도 석탑의 정 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지만 탑 주변에서 관궁사 나 대궁 등의 명문기와가 수습된 것으로 보아 궁성과 관련된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궁리 석 탑 역시 밭 가운데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65년에 해체 수리하여 지금에 이르 고 있다. 이 탑이 있는 마을을 탑리( 塔 里 )라고 하는데 이름의 유래로 볼 때 이 탑이 마을보다 더 오래 전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굴하면서 밝혀진 바 에 의하면, 탑의 기단의 네 모서리에 팔각의 서로 다른 주춧돌이 놓여 있었다. 모서리에 있는 우주석( 隅 柱 石 ) 사이에는 길고 큰 돌을 몇 단 쌓아 올려 모서 리를 받치도록 했다. 궁성 관련 사찰로 추정되는 유물 출토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05

307 왕궁리 탑을 해체 수리 할 때의 이야기다. 보수를 하며 밝혀진 바에 의하면 기단을 마감하고 몸돌을 받아들이는 갑석( 申 石 )과 기단의 측면을 마감하는 면 석( 面 石 )들이 부서져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로 추정할 때 기단의 면석은 가 운데를 받치는 기둥인 탱주( 撑 柱 )가 2개씩이 있는 단층 정사각형으로 밝혀졌 다. 다시 축조하면서 부서졌던 부분 일부를 보강하는 한편, 토단( 土 壇 )을 쌓았 다. 탑신부는 옥신 옥개석( 屋 蓋 石 )이 모두 몇 장의 돌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 옥 신은 우주가 새겨진 기둥 모양의 네 개의 우석( 隅 石 )과 탱주가 새겨진 중간석 ( 中 間 石 )으로 되어 여덟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2층은 사면이 각 한 개의 돌로 되어 있고, 3층 이상은 2개의 돌로 되어 각각 우주( 隅 柱 )가 형태로만 표 시 되어있다. 옥개석은 매우 넓은데, 받침과 지붕이 각각 다른 돌로 되어 있 다. 옥개받침은 각 층이 3단으로 백제탑의 전형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옥개석의 추녀는 얇고 추녀 밑은 수평이나 우각( 隅 角 )에서 가벼운 반전( 反 轉 ) 이 이뤄진다. 이는 아마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옥개 석 모서리 끝에는 풍령공( 風 鈴 孔 )이 뚫려있다. 그리고 상륜부( 相 輪 部 )에는 노반 ( 露 盤 )과 복발( 覆 鉢 ) 그리고 앙화( 仰 花 )와 부서진 보륜( 寶 輪 ) 한 개가 남아 있 다. 특히 석탑에서 발견된 금판제( 金 板 製 )의 금강경첩( 金 剛 經 帖 )은 가장 주목받는 것으로 이 판경( 板 經 )은 순금판 열아홉 장에 각기 열일곱 줄의 금강경을 뚜렷 하게 눌러 찍은 것이다. 이 글자의 모양으로 보아 이것을 눌러 찍기 위해 정 밀하게 조각된 판목( 板 木 )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왕궁유적과 대관사 대관사지( 大 官 寺 址 )는 왕궁면 왕궁리 480번지에 소재한다. 대관사지와 관련한 기록으로는 백제가 망할 때 일어난 이변기를 적은 기사인 삼국사기 무열왕 8년(661) 6월조에 대관사의 우물물이 피와 같이 붉게 되었는데, 금마군의 지 류( 地 流 )로 오보나 넓게 피가 흘렀다. ( 大 官 寺 井 水 爲 血 金 馬 郡 地 流 血 廣 五 步 ) 고 하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를 통하여 금마군에 대관사 가 있었음을 알 수 있 으나 과연 이 대관사가 어디에 세워졌는지에 대하여는 쉽게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도성 안에서 있었던 이변기로서 대관사의 우 물에서와 같은 이변을 싣고 있으며, 동국여지승람 에서는 왕궁정은 금마군 의 남쪽 오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옛 궁궐의 자리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금마지 에서는 왕궁정은 탑에서 이십 보의 거리에 발견된다. 라 하여 기록을 종합하면 왕궁정은 금마군의 남쪽 오리에 있는 옛 궁궐자리의 탑 부근 에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오층석탑이 세워져 있는 옛 궁궐자리 인 왕궁평성( 王 宮 坪 城 )의 발굴조사에서 관궁사( 官 宮 寺 ), 대관관사( 大 官 官 寺 ) 등의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고 있어서 동국여지승람 에 보이는 옛 궁궐 터에 있던 왕궁정 이 곧 삼국사기 에 보이는 대관사의 우물 이며, 오층석탑 이 있는 왕궁평성이 대관사지가 아닌지 연관 지어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왕 궁평성이 있는 이곳을 마을 사람들은 왕금이 왕검이 왕금성 등의 이름으로 30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08 도 부르고 있으며,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왕궁평성( 王 宮 坪 城 )은 마한의 궁궐지 였다든가, 혹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고구려의 안승( 安 勝 )을 금마저( 金 馬 著 )에 두어 보덕국왕( 報 德 國 王 )으로 봉( 封 )하였다는 삼국사기 의 내용과 관련 하여 보덕국의 치소( 治 所 )로 주장되기도 하여 왕궁평성은 줄곧 도읍과 관련한 궁성으로서 그 성격이 주목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궁궐이라고 주장되는 대지 의 한 가운데에 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탑이 궁궐안의 내도량( 內 道 場 )적인 성격을 지닌 사찰에 있었던 탑이었는지, 아니면 궁궐과는 관련이 없는 순수한 사찰지에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그 성격이 정확하게 밝혀지 지 않은 상태이다. 이 탑에 관한 또 하나의 설은 도선이 말하기를 완산의 지 리는 개가 쭈그리고 앉은 형상인데 여기에 탑을 세우면 개의 꼬리를 누르는 것 이라고 하였다. 이에 고려의 태조 왕건이 견훤을 눌러 이기기 위하여 이 탑 을 세웠는데 이때 완산의 낮이 삼일동안 어두웠다. 하는 기록이 금마지 에 전해지고 있어서 풍수지리적인 입장에서 후백제 견훤( 甄 萱 )을 누르기 위하 여 고려 태조 왕건이 이 탑을 세웠다는 전설도 있다. 이 전설은 1965~1966년 에 걸친 왕궁리 오층석탑 해체복원으로 발견된 금판불경( 金 版 佛 經 ) 및 금제( 金 製 ) 사리장치( 舍 利 裝 置 )와 청동여래입상, 1970년대 중반 원광대학교 마한 백 제문화연구소에 의해서 탑 북편의 금당지( 金 堂 地 )가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상 부대관( 上 部 大 官 ) 혹은 관궁사( 官 宮 寺 ), 궁사 등의 명문기와는 이곳이 절터 였음을 입증하는 자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1989년 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에 의해서 금당지와 아울러 강당지가 발견되었고, 1993년의 석탑 축 기부( 築 基 部 )의 조사 결과 석탑의 아래에 하나의 건물지가 나타났으며, 그 바 로 밑에 한 변이 17cm나 되는 목탑용 다져쌓기층이 나타났는데, 이 다져쌓기 층은 이전의 유적인 건물지와 배수로를 파괴하면서 다져쌓기층을 구축하였던 것으로 나타났고, 이 다져쌓기층의 중심축이 금당지와 강당지의 중심선과 일 직선을 이루고 있다고 하는 것이 밝혀져, 석탑이 세워지기 이전에 이미 그 자 리에는 어떤 건물이 세워져있었고 그 이전에는 목탑이 세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이 목탑지는 금당지, 강당지와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 로, 적어도 5층 석탑이 세워지기 전에 이미 이곳에는 절 혹은 어떤 건물이 세 워져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그 건물지 혹은 절터가 삼국사기 에 보이는 661년의 대관사( 大 官 寺 ) 즉 관궁사( 官 宮 寺 )와 관련된 곳이 아닐까 추정되고 있다. 이에 따라 대관사지( 大 官 寺 址 )는 백제 말기인 무왕에 의해 운영되어진 사찰로 왕궁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국가 안의 불교세계를 총괄하는 궁내사원 ( 宮 內 寺 院 )의 성격을 지녔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三 國 史 記 卷 第 五 新 羅 本 紀 第 五 태종( 太 宗 ) 무열왕( 武 烈 王 ) 八 年 夏 六 月 대관사 우물물이 피가 되다 (661년 6월 미상 음력) 6월에 대관사( 大 官 寺 ) 우물의 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 金 馬 郡 )의 땅에 피가 흘러서 그 넓이가 다섯 보( 步 )가 되었다. ( 六 月 大 官 寺 井 水 爲 血 金 馬 郡 地 流 血 廣 五 步 )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07

309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 全 羅 道 ) 익산군( 益 山 郡 ) 산천 왕궁정( 王 宮 井 ) 군의 남쪽 5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옛날 궁궐터 이다. 라고 한다. 제석사지와 관세음응험기 (1) 제석사지 개요 제석사지( 帝 釋 寺 址 )는 왕궁면 왕궁리 궁평마을 247-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 제405호(지정일: )로 지정면적은 24,218m2에 해당한다. 현재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조사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제석사지는 觀 世 音 應 驗 記 및 낭방( 廊 房 )이 모두 불탔다는 기록이 전하져서 7층의 목탑과 불당과 회 랑 및 승방 등을 갖춘 대규모 사찰로 추정된다. 제석사지는 백제 무왕이 지모 밀지( 枳 慕 密 旨 )로 천도( 遷 都 )하여 세운 왕실사찰로 보는 경해 등 다양한 주장 이 제기되었다. 그동안의 발굴조사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 다. 익산지역에 제석사가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일단 제석사지가 위치한 지 역이 일제 초기인 1913년 이전에는 제석면( 帝 石 面 )이라고 불리고 있었다는 점 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출토되어 1943년도 국립공주박물관에 기 탁된 제석사( 帝 石 寺 ) 명의 명문와와 함께 백제시대의 와당들은 이곳이 바로 백제시대의 제석사지임을 확증하게 되었다. 이후 제석사지의 창건 등을 살필 수 있는 문헌자료인 관세음응험기( 觀 世 音 應 軒 騎 ) 가 일본 도쿄대학( 東 京 大 學 ) 인문과학연구소 교수였던 마끼다 박사에 의해 소개되면서 더욱 학계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제석( 帝 釋 )이라 함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본 수미산( 修 彌 山 ) 산 정인 도리천( 忉 利 天 )에 거주하는 천주로서 호국안민하고 인간의 선악을 주제 하는 신으로 숭앙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재석을 바탕으로 한 재석신응은 신라 의 경우 임금의 내제석궁( 天 住 寺 ) 행차 기록과 함께 이를 왕이 창건하였다고 하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는 건국 초에 태조 왕건이 창건한 10대 사 찰 중 내제석사와 외제석사가 보이고 있고 익산의 제석사도 백제 무왕이 창건 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기 때문에 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왕실에서 다투어 제석신앙을 숭앙하고 있음은 國 祖 (국조) 시낭이 천제( 天 帝 ) 신앙으로 그리고 이러한 신앙이 불교의 제석( 帝 釋 )신앙으로 전개되 어 왕실의 권능을 불교에 의해 신장하고 보호해 나가는 한편 밖으로는 호세 안민을 염원하고자 제석사 창건은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육 조시대 육고( 陸 杲 ) 등이 지은 문헌인 관세음응험기 말미에 백제 관련 기사 가 있는데 여기에서 제석사에 관한 내용을 살필 수 있다. 즉 무강왕의 천도와 아울러 제석정사의 창건사실 뿐만 아니라 뇌우에 의한 소진, 가람구성의 내용, 사리장엄의 내용, 가람 재건 등의 사실을 잘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에 천도하여 제석정사를 지었으며 정관 13년에 뇌우에 의 해 불당과 칠급부도 및 낭방이 모두 불탔다. 탑 아래 초석 중에는 종종의 칠 30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10 보와 불사리병 동판으로 만든 금강반야경과 이를 보관하는 칠함이 있었는데 다 불타고 불사리병과 금강반야경의 칠함만이 그래도 남아있었다. 그러나 수 정병은 뚜껑도 열리지 않고 사리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이에 대왕은 법사를 청하여 참회하고 병을 열어보니 불사리 6새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에 대왕과 여러 궁인들의 경신이 배가 되었으며 다시 사찰을 지어 불사리를 모시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제석사는 백제 30대 무왕에 의해 창건되 고 있으며 재건가람의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창건당시는 7층의 목탑과 금당 그 리고 낭방을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백제의 1탑1금당식의 배치양식으로 판단 된다. 그리고 제석사의 사리장엄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는데 불사리병과 동 판의 금강반야경을 칠함에 넣어 봉안하고 있다. 이러한 사리장엄의 형태는 익 산 왕궁리 오층석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중 동판( 銅 版 )이 아닌 금판( 金 版 )이라고 하는 점은 다르지만 역시 금강반야경 사경을 넣어 봉안하고 있음은 주목되는 사실이라 하겠다. 또한 사찰을 다시 지어 불에 타지 않은 사리구를 봉안하였다고 하는 있는데 이 갱조사( 更 造 寺 )의 위치는 원래의 제석사지가 아 닌 왕궁리유적의 목탑에 봉안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뒤에서 밝힐 와요지라고 전해오던 제석사 폐기장의 시굴조사 이후 경조사의 위치는 원래 제석사로 그 생각을 수정하였다. 제석사지에 관해서는 관세음응험기 외 에 다른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이후의 사정에 대해서는 알 수 없 다. 단지 시굴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완벽한 형태의 사찰이라고 할 수 있을 지는 향후 목탑지 등의 조사를 통해 밝혀지겠지만 통일신라시대까지의 유물들이 주로 강당지 주변에서 출토되고 있다. (2) 관세음응험기와 제석사 백제 무왕 대의 익산 천도설이 제기된 것은 일본 경도대학( 京 都 大 學 ) 교수였 던 마끼다( 牧 田 諦 亮 )에 의해서였다. 그는 중국에서 관음신앙 관련 자료를 수집 하여 10세기경에 편찬된 관세음응험기 를 일본 교토( 京 都 ) 소재 청련원( 淸 漣 院 )에서 발견하였다. 이 후 그것에 대한 해석과 연구를 한 六 朝 古 逸 觀 世 音 應 驗 記 の 硏 究 를 1970년에 발간하면서 그 말미에 백제 관련 자료 2건을 소개하 였다. 이와 관련된 논문은 牧 田 諦 亮, 백제 익산천도에 대한 문헌자료 제3회 마한백제문화학술회의. 1977, 146~148쪽이다. 관세음응험기 는 중국 육조시 대에 육고( 陸 杲 ) 등이 지은 문헌으로서 말미에 있는 백제관계 기사에서 이 제 석사지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백제 무광 왕이 지모밀지( 枳 慕 密 地 )로 천도하여 새로 정사를 경영하였다. 재석정사가 정 관13년 11월에 벼락으로 인하여 커다란 재난을 당하였다. 이 때 불당과 칠급 부도( 七 級 ), 그리고 낭방( 廊 房 ) 하나 등 많은 건물이 불타버렸다. 탑 아래 초석 속에는 종류가 다른 일곱 가지 보물과 불사리가 있어 주목되던 수정병이 있 고, 그리고 금강반야경을 새긴 동판을 넣었던 목필함이 있었는데, 초석을 열어 보니 모두 다 불타버렸다. 그러나 불사리병과 금강반야경 칠함만이 남아 있었 다. 사리병은 안과 밖을 환히 볼 수 있었다. 뚜껑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09

311 사리가 모두 사라졌는데 어떻게 없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병을 가 지고 대왕( 武 王 )에게 돌아가니 대왕이 법사에게 곧 참회를 하게하고 병을 열 어서 보니 불사리 6개가 모두 병 안에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6개 모두 밖에서 도 볼 수가 있었다. 그러한 대왕의 불심이 모든 궁인( 宮 人 )에게 미쳐 믿고 공 경하는 마음이 더욱 더 생기게 되었다. 곧 공양을 시작하여 다시 탑을 조성하 고 이들을 넣어 두었다. 여기에서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라는 곳에서 도읍을 옮기어 새로 정사를 지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에서는 무왕을 或 云 武 康 王 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따라서 무광왕의 오기( 誤 記 )로 보이며 정관( 貞 觀 )13년 (639년, 백제 무왕 40년, 신라 선덕여왕 8년)은 무왕의 재위기간(600~641년)에 해당되는 연호이기 때문에 무광왕은 곧 무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지모밀지 로 천도를 하였다고 했는데 이 지모밀지에 대해서는 어원적 연구 등 여러 가 지 연구가 시도되었지만 아직 확실한 지명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다만 지모밀지에 있었던 재석정사와 재석정사 탑 속에서 나온 유물들이 왕궁리 5층 석탑에서 나온 유물과 일치하다는 점에서 재석정사는 왕궁리유적과 가까운 곳 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러한 이유로 제석정사는 제석사지를 지칭한 것이라 보고 있다. 그것은 제석사지에서 帝 釋 寺 (제석사) 명( 銘 )의 기와 가 수습되었고, 또한 이 절터를 발굴조사 한 결과 백제가람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현재 제석사 터에 남아 있는 절반으로 쪼개져 있 는 거대한 초석을 문헌에서 전하는 塔 下 礎 石 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지모밀지는 금마저( 金 馬 渚 )의 또 다른 이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따라서 백제의 무왕이 금마에 천도하여 제석정사를 지었으며, 제석정사는 이곳 궁평 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제석사지를 지칭한 것이라 본다. 관세음응험기의 기록 과 같이 훌륭한 유물들을 안치하였던 제석사는 아마도 궁내의 원당( 願 堂 )으로 써 국력을 기울여 불가 보물을 안치시켰을 것이다. 제석사의 칠급부도는 7층 목탑으로 추정되며 탑 심초석에서 나왔다는 보물들은 왕궁리 5층 석탑의 해체 복원시 발견된 유물과 아주 유사한 것들이었다. 다만 반야경이 동판에 새겨져 있었다고 하였는데 왕궁탑에서는 금판에 새겨져 있었고, 수정 사리병 대신 청 색의 맑은 유리병이 나왔으며, 사리가 6개 들어있었다고 하였는데 왕궁탑 속 에서는 16개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 보물들이 목칠함 속에 있었다고 하였 는데, 왕궁탑에서는 금제함속에 각각 나누어 들어있던 점만이 다른 현상이었 다. 이러한 유사한 유물을 안치하고 있던 왕궁 5층탑은 이 제석사 목탑 속에 있었던 유물을 다시 안치하기 위하여 절을 조성 하였다고 하는 관세음응험기 의 기사와 어떤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 백제 무강왕이 지모밀 지에 천도하여 제석정사를 지었는데 정관( 貞 觀 ) 13년(639) 11월에 뇌우에 의 하여 불당( 佛 堂 )과 칠급부도 및 낭방( 廊 房 )이 모두 불타버림을 알 수 있다. 이 를 통해 보면, 제석사지는 7층의 목탑과 불당, 회랑 및 승방 등을 갖춘 가람이 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현 제석사지에는 목탑리로 판단되는 토단( 土 壇 )이 남 아 있고, 그 위에는 장방형의 사리공이 있는 심초석( 心 礎 石 )이 2매로 절단되어 남아있다. 그리고 이 뒤쪽으로는 일부 민가가 자리 잡고 있지만 민가 서쪽 대 31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12 밭에는 약간 높은 토단이 남아있어 이곳이 관세음응험기 에 나오는 금당지임 을 알 수 있지만 그 외의 사정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잃어버린 왕조의 수호사찰 제석사지( 帝 釋 寺 址 ) 금마에서 왕궁으로 넘어가는 길에 제석사( 帝 釋 寺 ) 터가 있다. 백제 무왕이 왕 궁평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성을 쌓을 무렵 이 제석사를 세웠는데, 무왕은 이 제석사 불사를 통해 수미산을 지키는 수호사찰의 기능을 기대했으리라. 제석 천의 힘으로 왕궁의 안녕과 번영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담긴 제석사는 화재로 사라져버리고 그 절터가 밭이나 논으로 변해버렸다. 백제 왕조의 수호사찰격 인 제석사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불가에 의하면 부처는 수미산에 산다. 그런데 수미산으로 가기는 쉽지가 않 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일곱 개의 물과 일곱 개의 산을 건너야 할 만큼 멀고 힘들다. 절대의 세계로 가는 길은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일 게다. 그 일곱 개의 산과 물 중 팔부 능선에 제석천이 있다고 한다. 제석천( 帝 釋 天 )은 그곳에 서 부처를 방해하는 사악한 무리를 물리친다고 한다. 제석천은 불교의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고대 인도의 신 인드라 (Indra)를 수용한 것이다. 제석천이 사용하는 무기는 인다라망( 因 陀 羅 網 )이다. 인다라망은 제석천궁에 걸쳐진 그물을 말하는데, 그 그물에 수많은 보배 구슬 들이 꿰어져 있다. 적들이 몰려오면 이 구슬들을 흔들어 서로 빛을 발하게 함 으로써 적을 물리친다. 불법에 귀의하기 전, 제석천은 이 무기로 가장 무서운 적인 아수라( 阿 修 羅 )를 물리치고 모든 신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제석천궁에 걸쳐진 그물 인드라망 불교에 귀의한 후 제석천의 인드라망은 새롭게 변신한다. 세상 모든 존재는 홀로 있지 않고 서로 첩첩이 관계를 맺고 있는 인연의 끈으로 그물의 의미가 바뀐 것이다. 이런 인연의 끈을 하나하나 꿰어 결국에는 범아( 梵 兒 ) 가 된다. 그러니까 내 안에 타인이 있고, 또 타인 안에 내가 있다. 는 뜻일 것이다. 불 교의 중심 메커니즘이기도 한 인드라망은 공동체를 이뤄 세상을 제도하는 힘 을 발휘하기도 하고, 남을 사랑하는 자비( 慈 悲 )의 터전이 되기도 했다. 왕실의 번영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던 내불당 제석사는 석가모니나 아미타여래 등 흔히 모시는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지 않 았다. 본존불을 제석천으로 함으로써 국가의 수호와 안녕을 기원하고자 하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다른 사찰에서는 중간 정도의 수호신으로 여겼던 제석천을 독립시켜 본존불로 모셨다는 것은 불교의 위상이 강해져 부처가 기 능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관음사를 지어 관세음보살을 모시거나 약사암 축조에 약사여래를 모심으로서 모든 병을 퇴치하고자 하는 것도 이러 한 기능적 변화의 한 예다. 제석사의 화재는 벼락을 맞아 일어났다. 자연은 역사에서 제석사를 지우고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11

313 싶었던 것일까? 화재사건이후로 제석사는 사라져버렸다. 관세음응험기 에 의 하면 무왕 40년(639)에 벼락으로 절이 모조리 불에 탔을 때 탑 아래 심초석에 넣어 두었던 동판에 새긴 금강반야경과 불사리만은 남아서 다시 절을 지은 후 보관하였다고 한다. 또 최근 발굴 과정에서 탑이 있었던 자리로 생각되는 지 점에서 제석사라고 적힌 기와조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예전 기록의 신빙성 을 더하게 되었다. 한때 한반도는 물론 중국과 일본을 호령했던 백제는 결국 망했다. 더불어 화 려했던 왕궁도, 또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새로이 조성했던 절들도 모두 사라 진 지 오래다. 그런 자리에 말없이 차가운 돌들만이 그 화려했던 세월을 보여 준다. 그래서 그 돌들을 키(Key)로 삼아서 절을 짓고, 궁궐을 세워보는 것도 익산을 찾는 또 하나의 즐거움일 것이다. 왕궁면 > 근남마을 서현식(1928)남자 B2 : 왕궁 터에 대한 이야기 들어 보신 것 있으신지요? A1 : 샴을 판게 그 징이 나왔어 징이 치는 징이 있자녀 그러고 막 이 근방에 울릴 정도로 징이 좋았지 그러 가꼬 어디로 없어졌는가 없어졌지 그것도. 왕궁리 전와요지 왕궁리 전와요지( 王 宮 里 磚 瓦 窯 址 )는 제석사지 폐기장에 해당하는 궁평마을 뒤편에 위치한다. 이 유적은 일찍부터 백제기와가 출토되고 잇는 지역으로 유 적의 정확한 범위와 성격 등을 확인하여 향후 보존대책을 수립하고자 학술발 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다량의 소조상 등과 함께 대량의 백제기와가 출토되었다. 기와는 암막새나 인장와 등은 출토되지 않고 수막새와 암키와, 수 키와만이 출토되었다. 이들 기와는 인근의 제석사지나 왕궁리유적출토품과 동 일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소조상 중 천부상이나 악귀상 및 동물상 두부편은 백제시대 조각상으로는 국내에서 처음 출토되는 것으로 여래상편, 보살상편, 이와 관련된 의습편 등과 함께 백제시대 조각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 다. 이들 유물들을 다량의 소토와 숯재 및 불탄 벽체의 퇴적층 속에서 출토되 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조사에서 와요는 확인되지 않아 정관 13년 제석사 화재 직후 잔재물을 옮겨 쌓아 둔 곳으로 판단된다(원광대학교박물관, 2003, 익산 왕궁리 와요지 시굴조사 지도위원회회의자료 ). 제석사는 잘 아는 바와 같이 백제 무왕이 창건한 후 정관13(639)년에 소실된 사찰로 기록되어 있다. 사지와 관련된 와요지로 전해오던 유적으로 2차에 걸쳐 조사를 진행하는 동안 와요지로 인식되어왔던 유적이 제석사에서 소실된 창건건물 등의 잔재 폐기장 이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본 유적에서는 조사 면적에 비해 많은 양의 유물 이 출토되었는데 건물의 지붕에 올려 졌던 암수평기와를 비롯해 연화문수막새 류, 건물의 벽체편과 포작의 간벽을 메웠던 포벽체편, 건물 안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소조상편들이다. 불에 의해 간접적으로 산화되고 훼손 된 채 옮겨져 와 두터운 퇴적층을 이루고 있다. 대체적으로 3개의 층위로 퇴 적층을 구분할 수 있으나 일시에 매몰한 것으로 층위상의 시기 편차는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막새류는 8엽연화문수막새가 4종류 수습되었는데 모두 만곡 31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14 반전형연판단식으로 서로 유사하나 자방의 연자 수나 그 형태가 약간씩 다르 다 형식 분류가 가능한 작은 편들까지 포함해 총 627점이 수습되었다. 93년도 제석사지 시굴조사에서 출토된 연화문수막새A와 당초문암막새가 한 점도 수 습되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보아 뇌우로 소진된 건물에 올려 졌던 막새류로 판 단되어 그 하단은 639년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상단은 막새의 형식이 단일 종이 아닌 관계로 개보수의 가능성 등을 고려한다 해도 형식상 7세기 초엽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평기와류는 총 7,419점이 조사되었다. 확인되는 제작기법이나 등문양 등으로 보아 7세기 초엽의 평와들로 암키와는 통쪽 와통에 의해 제작되었고 통쪽의 연결방식은 두 구멍 한 줄 엮기가 주류 를 이룬다. 수키와는 토수와도 간혹 확인되나 미구와가 대부분이다. 등문양은 선물이 다양하게 살펴지며 격자문도 극소수지만 조사되고 있다. 출토수량의 44% 정도가 전체 혹은 부분적으로 붉고 단단하게 산화된 상태로 수습되었다. 이에 동반해 지붕즙와에 사용된 홍두깨흙이 산화로 인해 경화된 채 출토되어 당시 즙와 상태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일부 홍두깨 흙에서는 당골마루로 볼 수 있는 흔적도 살펴진다. 명문와는 암키와 등면에 직접 각서한 것들이 3점 수습되었는데 극히 일부의 파편들로 정확한 내용 파 악이 어려우나 와공사지 시굴조사에서 출토되었던 인장와가 본 폐기장에서는 한 점도 수습되고 있지 않는 점 또한 주목된다. 이외에 백체편들이 퇴적층에 다량 포함되어 있었는데 일부 편에는 백회를 바른 흔적이 있으며 퇴색했지만 청녹색, 짙은 고동색, 연한 갈색, 흑색 등의 안료를 사용한 벽화백체의 흔적이 살펴진다. 그러나 너무 작은 파편인 관계로 벽화의 내용은 알 수 없고 벽면의 외곽을 따라 그려진 짙은 고동색의 구획선만이 주로 남아 있다. 벽체의 안쪽 에는 각목이나 대나무 등을 산자처럼 엮고 내 외면에 잔 짚이 잔득 섞인 황토 를 두텁게 바른 후 벽체 안팎의 표면에 미세사림이 포함된 고운 점토를 한 두 차례 미장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그 상면에 백회를 칠하고 다시 그 위에 채색 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 포벽의 빈 간벽을 메웠던 고막이형 포벽체편이 일부 확인되었는데 소루와 소루 사이의 빈 공간을 메웠던 복주머니 형태의 포벽체 편에는 소첨차의 공안부분에 접했던 부분의 곡선 처리 들이 잘 반영되어 있 다. 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ㄴ 자 형태의 포벽체가 출토되고 있다. 복주머니 형태의 포벽인 경우 양 측면에 소로의 오목형 굽 부분이 반영되어 소로의 오목형 굽 부분이 반영되어 소로의 규격을 유추해 볼 수 있어 백제 목 조건축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제석사 건물 내부를 장엄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소조상의 출토량은 매우 많다. 그러나 모두 파편들 로 화재에 의해 크게 훼손된 채 폐기되어 그 원형을 파악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복원되는 편들이 있어 당시 수려했던 조각기법을 엿 보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다만 극히 일부분의 파편인 관계로 소상의 정확한 성격 파악이 어려운 상황이다. 본 시굴조가에서는 총 346점 정도가 수습 조사 되었는데 일부는 서로 접합되는 경우가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본격적 인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면 더욱 증가될 것이다. 소조상은 불 보살 천부상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13

315 류, 신장사류 악귀 동물상류로 분류하고 있지만 출토수량의 대부분을 차지 하는 의습류편들을 불 보살 천두상류에 포함시켰으며 향후 전반적인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전체적인 재검토가 있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소조상의 조상 방식은 단언하긴 어렵지만 소성식과 건조식이 같이 존재하면 소형은 소성도, 대형은 건조식이라는 등식은 현 상황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수 식으로 제작되었으며 제작기법은 상의 크기와 상관없이 각목이나 단면이 둥근 나무, 경우에 따라 잔 나뭇가지 등을 사용해 골조를 만들고 골조에는 새끼를 감고 그 위에 짚이 섞인 점토를 사용해 대략적인 살을 붙이고 다시 그 상면에 미세사립이 포함된 고운 점토를 덧붙여 상의 형태를 상세 조각하고 있다. 의 습을 표현함에 있어 미세점토를 여러 겹 덧붙여 사실감을 주었는데 점토 사이 사이에는 편식의 마포를 덧붙여 점토의 밀착력을 도왔다. 태토에 섞여 잇는 이러한 식물과 직물의 섬유질이 현재까지 잘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상의 크기 나 표현 부위에 따라 사용된 골조의 형태와 안쪽 태토의 성분이 약간씩 다름 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몸체 중앙부에는 각목형 골조를, 가는 팔과 다리 부 분은 단면 원형의 가는 나뭇가지를 사용하였다. 또 양감이 큰 부분은 짚 섞인 태토를 풍족히 쓰고 굵은 사립 등을 포함시켰으며, 후면이나 얼굴, 손, 의습 등 삽질이 없거나 섬세한 표현을 요하는 부분의 태토는 미세점토만을 사용하 는 등 하나의 소조상을 만들매 있어 부위 별로 사용된 골조나 태토성분에 차 이를 보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특히 등신대 이상 크기로 추정되는 대형상의 파편 경우 안쪽 태토에 짚은 물론이고 굵은 사립과 굵직한 화강암재 석립까지 포함된다. 본 조사에서는 소형이 60~70cm내외, 중형이 1m내외, 대형이 등신 대 혹은 그 이상으로 분류해 보았지만 출토품이 대개 파편이고 크기를 유추할 만한 부위의 출토예가 적어 역시 재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정경소상 으로 추정되는 20cm 안팎의 초소형 소조상들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신장상 류는 대좌인 생령좌의 일부분으로 추정되는 악귀두상편의 출토 예로 보아 초 대형의 신장상을 모셨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불보살상이나 천부상, 신장 상, 악귀 동물상 들이 재석사 사찰을 장엄했음은 분명하나 현재로서는 어느 곳에 어떠한 형태로 봉안되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향후 본격적인 발굴을 통한 정밀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제석사의 성격과 제석신앙의 실체를 규명함과 동시에 백제말기 불교미술사, 건축사뿐만 아니라 대외교류사 등 전반적인 백 제문화 연구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궁평( 宮 坪 )의 징 금마에서 동쪽으로 약 2킬로 지점에 옛날 제석면( 帝 石 面 ) 이인리( 利 仁 里 )에 속했으며 백제 때의 제석사( 帝 釋 寺 )의 터였다는 궁뜰( 宮 坪 )이라는 마을이 있다. 사다산( 施 茶 山 = 始 大 山 )의 지맥이 뻗어 우뚝 선 매봉아래 자리 잡은 마을 남쪽 에 독산( 獨 山 )이라는 동산이 있고 탑의 심초석과 종루의 초석이 남아 있다. 이 밖에도 이 마을에는 옛날의 유적을 말해주는 많은 절개석과 기와의 파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 마을에 예부터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31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16 마을 위뜸에 옛날 공동으로 사용하는 한데 샘이 있었는데 아주 물맛이 좋고 수원이 깊어 어떠한 가뭄에도 결코 물이 마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우물이 언제 생겼는지 소상히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이 우물을 파다가 징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이 자랑삼아 동산에 올라 가 한번 쳐보았더니 징 소리가 어찌나 우렁차게 울려 퍼졌던지 한양에까지 들 리어 한양 사람들이 일시에 몰려오는 까닭에 징을 빼앗길까봐 부랴부랴 도로 우물 속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한양 사람들이 마을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없으니까 할 일없이 돌아갔다고 한 다. 그런 뒤에야 다시 꺼내어 소문나지 않게 조심스레 사용했다고 한다. 그 징은 보통 것과는 달리 무척 무겁고 두툼했으며 같은 쇠붙이라도 유난히 금빛이 돋는 것이었는데 일제 때에 소문을 듣고 박물관에서 가져갔다가 뒤늦 게 반환된 일도 있다. 일제 말기 무렵에 그 징은 무당이 푸닥거리를 하던 중 실수로 높은 마루에서 돌 위에 떨어트려 그만 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징의 파편은 당시 총독부 에서 온 일인 관리가 박물관으로 가져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이야기는 옛 사람의 토속신앙(土俗信仰)을 바탕으로 하되, 징이 언제부터 마을에 있게 되었는지 모르는 데서 초시간적 관념이 부여되고, 농악기에 대한 물활론적 사고가 마침내는 전설적 소재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3) 무왕 죽음 관련 스토리텔링 익산 쌍릉 쌍릉(무왕 및 무왕왕비 릉) 익산시 석왕동 왕뫼라고 불리는 곳의 구릉 상에 2기의 원형봉토분(圓形封土 墳)이 있는데 이것이 사적 87호로 지정된 쌍릉 이라고 불리는 무왕과 무왕비 의 릉이다. 쌍릉이라고 하는 명칭은 대왕릉과 소왕릉의 두 고분으로 아울러서 익 쌍 릉 산 향 토 지 일컫는 것이다.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고려사 에서는 후조선무강왕(武康王)과 그 왕비 의 능이라 하였는데 속칭 말통대왕(末通大王) 능이라 한다. 일설에는 백제 무 왕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인데 말통은 즉 서동(마(薯)동)이 변한 것이라고 한 다 라고 하여 쌍릉이라는 명칭은 없지만 쌍릉에 대한 위치와 이 능의 주인공 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군 고적 조에는 쌍릉은 오금사 (五金寺) 봉우리 서쪽 수백 보 되는 곳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곧 조선시 대에 들어서 두 기의 왕릉이라는 의미에서 쌍릉이란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 여 오늘날까지 그래도 이어져오고 있다. 쌍릉은 익산지역이 무왕의 탄생과 성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 15

317 장설화 미륵사창건 등 지역적 배경으로 볼 때 무왕릉과 왕비릉으로 추정된다. 한편 일제시대에 발간된 조선고적조사보고 에 의하면 분묘의 양식은 부여능 산리 백제 왕릉이라 전하는 5호분과 수법이 같은 석실분으로 백제 말기의 것 으로 보고 되었다. 쌍릉 봉토의 규모는 무왕릉이 직경 30m, 높이 5m, 왕비릉 은 직경 24m,높이 3.5m로서 무왕릉의 규모가 약간 크다. 우너형 봉토에 주위 에 괴석( 塊 石 )을 두른 석열의 흔적이 있고 석곽( 石 槨 )은 화강석으로 된 대판석 ( 大 板 石 )으로 짰으며 현실( 玄 室 ) 앞에는 단면 사각형의 연도( 羨 道 )가 있고 장방 형 큰 판석으로 현실 입구를 막았다. 현실( 玄 室 )은 단면 6각평의 간단한 말각 천정( 抹 角 天 井 )을 갖는 평면장방형의 석실로서 석실중아에 화강석으로 만든 관대( 棺 臺 )가 있고 그 위에 위쪽이 넓고 아래쪽이 좁으며 둥근 뚜껑을 덮은 목관을 올려놓고 있는데, 목관에는 10여개의 옥정( 玉 釘 )이 사용되어 백제 말기 왕릉의 구조를 갖추었다. 소왕묘와 대왕묘의 양식은 동시대의 것으로 두 능이 모두 도굴 당하였지만 대왕묘에서는 부패된 목관파편과 토기완( 土 器 碗 ) 1점을 수습하였는데, 이 유물이 이 능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대왕묘에서 발굴된 목관은 남은 조각에 의거하여 그 모양을 복원, 현재 국립 전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한 때 이 능은 고조선 준왕의 남천설( 南 遷 說 )과 결부되어 청주 한씨( 韓 氏 )들이 그들의 조상의 능으로 받들고 석물을 갖추고 묘역을 꾸미고 매년 시제를 지내왔다. 현재에는 익산시에서 이곳을 공원화하 기 위하여 릉 주변의 토지를 청주한씨 로부터 매수하여 정비 사업을 하고 있 다. 지금도 현장에는 청주한씨들이 릉역을 정비하고 석물 등을 설치한 사실을 기록해 놓았던 비석이 위치하고 있다. 서동( 薯 童 )의 출생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 권2, 기이( 紀 異 )2, 무왕조( 武 王 條 )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제30대 무왕( 武 王 )의 이름은 장( 璋 )이다. 그의 어머니가 과부로 서울 남쪽 연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연못의 용( 龍 )과 정( 情 )을 통하여 장( 璋 )을 낳고 그 아이 이름을 서동( 薯 童 )이라 했는데, 서동은 어려서부터 도량이 넓어서 그 의 기량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마를 캐어 팔아서 생활했으므로 그의 이름을 서동이라 했다. 여기에 나오는 연못을 신증동국여지승람(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 에서는 오금산 ( 五 金 山 ) 아래에 있는 마룡지( 馬 龍 池 )라 했다. 마룡지의 용으로 묘사된 서동의 아버지를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 법왕금살조( 法 王 禁 殺 條 )와 무왕조( 武 王 條 ), 삼 국사기( 三 國 史 記 ) 백제본기( 百 濟 本 紀 ), 수서( 隨 書 )에서 법왕( 法 王 )이라 하였다. 사서( 史 書 )의 내용대로라면 분명 무왕은 법왕의 아들임이 틀림없다. 마룡지( 馬 龍 池 )의 용( 龍 )과 정을 통하여 서동을 낳았다는 용( 龍 )은 임금을 상징하고 있 다. 백제가 웅진천도 이후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지방지배조직을 정비하여 담로제도를 확립하는 데, 담로에 모두 자제와 종족으로서 분거하였다. ( 皆 以 子 弟 宗 族 分 據 之 )는 기록 으로 보아 담로에 파견된 자들이 대다수가 왕족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금 31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18 마지역은 일찍부터 준왕( 準 王 )이 남래하면서부터 청동기문화가 발전하였던 지 역이다. 즉 금마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의 중심지이며 일찍부터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토착세력( 土 着 勢 力 )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곳이다. 백제왕 실의 입장에서 보면 금마야말로 어느 지역 못지않게 담로로써 통치하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바로 임금으로 상징되는 마룡지 용과의 사이에서 서동이 태어났다는 것은 금마 담로의 장으로 왔었던 여선( 法 王 )과 마룡지 부근에 살았던 서동모와 통교하여 태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 하겠다. 서동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 동( 書 童 ) 또는 마동( 麻 童 )이라고도 했고 그냥 맛동이라고도 했다는 기록에서 출생이후 어린 시절을 금마에서 마를 캐어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마를 캐어서 홀어머니를 봉양하였음을 말해주는 내용이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 에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선화공주가 신라의 왕실에서 나올 때 왕후가 노자로 주었던 순금을 내놓고 생계를 도모하려 하니 서동이 순금을 보고 크게 웃으면서 자신이 마를 캐는 산에 그것이 흙과 같이 쌓여 있다고 하였다. 공주는 놀라서 그것이 천하의 귀 한 보배임을 알려주고 그 황금을 신라의 궁전으로 보낼 것을 요청한다. 익산 지역에 오금사( 五 金 寺 )에 대한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백제무왕 이 어렸을 때에 맛동이라고 하였으니 그는 그곳 오금산에서 홀어머니와 외롭 게 살며 마를 캐어 저자에 팔아 근근이 생계를 잇더니만 하루는 다섯 개의 금 덩어리를 캤다. 이는 실로 그 효성이 하늘에 통했음이라 해서 곧 모두에게 신 뢰를 얻고, 신라의 미인 선화공주( 善 花 公 主 )를 만나 장가들었다. 이어서 백제의 왕위를 계승하고 금덩이를 사자사 지명법사의 신통력( 神 通 力 )으로 신라로 하 룻밤 동안에 옮기고 그 모친을 위하여 그 곳 산 중에 절을 지어서 오금사( 五 金 寺 )라 이름하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서동대왕( 薯 童 大 王 )이라고 일컫는다. 위 의 내용은 맛동이가 마를 캐다가 금덩어리 다섯 개를 캐게 되었고 그 공덕으 로 선화공주를 얻고 왕이 되었다. 모친을 위해 오금사( 五 金 寺 )를 창건했으며 세인들은 서동대왕( 薯 童 大 王 )이라 칭했다고 하는 내용이다. 이 설화의 내용에 서도 서동은 어린 시절 마를 캐어서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금마에서 홀어머 니를 모시고 마를 캐며 생활하고 있었던 서동이 어떻게 해서 왕이 될 수 있었 던 것일까? 서동의 무왕즉위( 武 王 卽 位 )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깊은 관계가 있다. 서동이 즉위할 당시의 백제의 정치적 상황은 왕권강화에 의해 견제되어 왔던 귀족들이 성왕( 聖 王 )의 관산성전투( 管 山 城 戰 鬪 )에서의 전사를 계기로 정 치적 발언권을 증대시킴으로써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가 이루어지게 되었 다. 이 시기 실권귀족들은 성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위덕왕( 威 德 王 )의 정치적 약세를 이용하여 정국을 주도하여 나갔다. 위덕왕 다음에 즉위한 혜왕( 惠 王 )이 재위 2년 만에 흉( 兇 :왕의 사망을 말함)하고, 이어 법왕( 法 王 )이 왕위에 오르지 만 재위 2년 만에 그도 사망한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실권귀족들에게 있 어서 왕위의 후사문제( 後 嗣 問 題 )는 중대한 문제였다. 실권귀족들은 그들 중심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17

319 으로 지배체제( 支 配 體 制 )를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왕족 중에서도 그 세력기반 이 미약한 조재로서 그들이 보다 조종하기 쉬운 인물을 왕으로 선택해야 했 다. 이 과정에서 법왕( 法 王 )의 아들이면서 적통왕자( 嫡 統 王 子 )가 아닌 금마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마를 캐며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지내고 있던 서동이 후계 자로 선택되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서동의 왕위계승( 王 位 繼 承 )은 당시 지배실권귀족들이 귀족중심 체제를 유지하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 기 위한 정략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즉 금마에서 마를 캐며 어렵게 생활하고 있던 서동은 당시 귀족들의 이해관계의 타협의 산물로서 왕위( 王 位 )에 오르게 된 것이다. 서동은 당시 귀족들의 이해관계의 타협의 산물로서 왕위에 올랐지만 왕자( 王 者 )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과시하면서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일련의 정 책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온 무왕의 왕권강화책은 선화공주와의 결혼 과 익산으로 수도를 천도하는 계획이었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방편으로 미륵 사를 창건하는 일들이었다. 무왕이 왕자( 王 者 )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과시하고 나아가 왕권중심의 정치운 영을 행하려면 귀족들의 정치적 조정에서 벗어나고 또 그들의 정치적 비중을 약화시켜야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무왕으로서는 부여지역에서 세거 하고 있는 귀족들의 세력기반( 勢 力 基 盤 ) 경제기반( 經 濟 基 盤 )을 축소시키고 반 면에 자기의 세력기반을 확대시키는 것이 필요하였다. 왕권중심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귀족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보다 과단성 있게 정책을 추진하여야 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 무왕의 천도계획( 遷 都 計 劃 )이었다. 무왕이 계획한 천도지는 금마를 중심한 익산지역이었다. 금마지 역은 청동기시대 이래 한반도 중부이남 지역의 문화중심지의 하나였으며 수로 교통이 편리하고 또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한 곳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금 마는 무왕에게 있어서는 즉위 이전까지 생활이 이루어진 터전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세력 근거지가 되는 곳이었다. 무왕은 자기 세력근거지를 중심으로 중 흥을 꾀하고자 했으며 실행에 옮기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미륵하생신앙( 彌 勒 下 生 信 仰 )을 내세워 수도경영에 필요한 미륵사라는 사찰건립을 단행했던 것 이다. 무왕은 자신의 의지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지지세력( 支 持 勢 力 )을 금마 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세력을 친위세력으로 형성하고 미륵신앙을 통하여 민심 을 수습하고 정치적 권위를 한층 높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금마진출 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고 미륵하생신앙을 전개시켜 나감에 마한의 중심지 였던 금마지방을 완전 지배하게 됨은 물론 이 지역으로 수도를 옮겨 왕권중심 체제의 정치형태를 확립하여 백제가 웅비( 雄 飛 )하는 발전을 기하려 하였다. 금 마로의 천도는 무왕의 결단에 의해 추진된 것이어서 그 과정에서 왕의 의지를 뒷받침해주는 지지세력은 금마에 기반을 둔 세력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친위세력을 기반으로 금마천도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귀족 세력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결과 무왕이 금마에 왕궁을 조 영하는 등의 천도계획을 세워 추진하였지만 천도 자체를 완성하지는 못했다. 31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20 실제로 무왕이 금마로 수도 천도를 완성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금마 지역에 남아 있는 왕곤지, 미륵사지, 쌍릉 등의 유적과 함께 관세음응험기 에 나오는 백제 무광왕(戊廣王)이 정관13년에 지모밀지라는 곳으로 도읍을 옮기 어 새로 정사(精舍)를 지었다. 고 하였다는 기사를 연관시켜 금마로 무왕이 천 도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백제가 마지막 망할 때의 수도가 사비였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만약에 무왕이 금마로 천도를 완성 하였다면 의자왕 때에 다시 사비로 재천도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천도와 같은 중요한 사건이 삼국사기 등 어떠한 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도 금마로의 천도를 완성하였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무왕은 앞에서 말했듯이 자신의 왕권 을 확립하고 중흥을 꾀하고자 금마지역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계획을 세워 많 은 노력을 기우려 추진하였으며 천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완성단계에 이르렀 지만 사망하게 되자 중단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왕이 천도를 실행하는 과 정을 목격했던 사실을 관세음응험기 에는 천도했다는 용어로 기록되었던 것 으로 해석된다. 저승에서도 그 사랑은 이어지리라 익산 쌍릉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익산시 석왕동 야산에 두 개의 큰 무덤이 생겼다. 이 곳에서는 괴이한 일이 발생했으니 칠흑 같은 어둠 밤에 불빛이 춤을 추며 돌 아다니는 것이다. 불춤을 추고 나면 마을 아낙 중에 누군가는 배가 불룩해졌 다. 마을 사람들은 그 불이 아이를 점지한 것이라고 믿었다. 동양의 전통사상 에 의하면 불은 남녀 간의 합환을 상징하는 것.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불 춤의 영험함을 볼 때마다 그 무덤 앞에서 큰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신기한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지금은 별로 많지 않다. 그러나 마을 익 의 몇몇의 초로들은 이 무덤의 주인공이 각각 선화공주와 서동이라고 믿으며 산 이를 가리켜 쌍릉이라고 불렀다. 불춤의 영험함을 서동설화의 주인공의 조화 시 로 여겼던 것이다. 관 광 애틋함이 담겨 있는 대왕묘와 소왕묘 책 쌍릉은 서동설화의 주인공이 그랬듯 다정하게 모여 있다. 이것은 실제 주인 자 공이 누구였든 두 사이의 사랑이 깊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이 춤을 추며 합방을 한다는 전설의 모티브는 교합을 통한 태기(胎氣)를 의미하는 농경사회 의 향토적 로맨티시즘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이 무덤의 실제 주인공은 누구일 까? 2005년 열린 쌍릉과 관련한 학술발표회는 이 무덤이 백제 무왕과 그 왕 비인 선화공주의 무덤이라는 학술적 주장이 발표돼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 가 사실이었음을 밝혀주었다. 대왕암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문무대왕의 서원(誓願)이 서려 있듯이 무왕의 천도지인 익산을 백제 무왕이 혼이라도 이곳을 지키고 싶었을지도 모 른다. 그래서 왕비인 선화공주와 함께 이곳에 묻혔을 것이다. 이 두 개의 무덤 은 저만치 떨어져 있다. 그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만나고자 하는 마음도 깊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 19

321 었으리라. 그래서 사람들은 서동요 의 내용처럼 아무도 몰래 깊은 밤이면 서 로 만나 은밀한 사랑을 나눈다고 믿었을 것이다. 이승의 애틋함이 저승의 설화로 연결된 쌍릉(雙陵)전설은 남북으로 나란히 앉아 있다. 북쪽의 것이 봉분과 돌방의 크기가 좀 더 커서 대왕묘라 부르고 좀 더 작은 것을 소왕묘라고 부른다. 두 무덤 모두 원형의 봉토무덤으로 흙을 높이 쌓아 만든 봉분 이외에 별다른 장식은 없다. 이 무덤에 관해서는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도 도굴되었다고 전하는데 실제 로 1916년 조사할 당시에도 이렇다 할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한 편에서는 굴식 돌방무덤은 매장 중심이기 때문에 유물이 그다지 많지 않으며 또 있다 할지라도 부패되었을 확률이 높다는 견해가 제기되는 등 쌍릉의 진실을 밝히 는 것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 앞서 이야기한 1916년 발굴한 결과 쌍릉의 구조는 부여 능산리(陵山里)에 있 는 백제 왕릉과 동일한 형식에 속하는 판석제 굴식 돌방으로 밝혀졌다. 이 조 사의 유일한 결과는 대왕묘 안에서 목관의 일부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목관을 복원 한 결과 나무관은 바닥 면보다 위쪽 면이 약간 넓고, 뚜껑의 윗면은 둥 근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관고리에는 8쪽의 꽃잎을 가진 연꽃무늬가 있었던 것도 확인되었다. 발굴 이후 이 나무널(木棺)은 국립박물관 에 보존되었다가 한국전쟁 중 파손된 것을 다시 복원되었다. 발굴 당시 무덤의 높이는 약 3미터였고, 두 무덤 사이의 거리는 200여 미터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었다. 현재는 보수돼 규모가 좀 더 커졌다. 익산 시에서는 쌍릉 주변을 공원화하여 사람들에게 휴식과 건강한 운동장으로써의 기능을 제공 하고 있다. 사랑이 영원하다면 그 영원성은 삶과 죽음으로 이어진다. 선화공주와 백제무 왕은 사랑의 과정도 드라마틱했지만 사후에 그것을 기리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순수함과 열정을 되새기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무덤의 형태처럼 단순하지만 영원한 사랑. 이곳 쌍릉에서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을 떠올리며 청춘의 열정을 되찾아가는 것도 의미가 클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全羅道) 익산군(益山郡) 고 고적 쌍릉(雙陵) 오금사(五金寺) 봉우리의 서쪽 수백 보 되는 곳에 있다. 문 고려사 에는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 및 비(妃)의 능이라 하였다. 속칭 헌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라 한다. 일설에 백제 무왕(武王)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薯童)인데, 말통(末通)은 즉 서동(薯童)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4) 무왕의 천도와 관련한 유적 32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22 익산토성, 도토성, 미륵산성, 낭산산성, 성남리고분, 입점리 고분, 웅포리 고 분, 사덕유적, 고도리 석불 입상, 태봉사, 심곡사 석탑, 석불사 익산토성 익산토성은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산52-2번지 일대에 소재한 사적 제 92 호의 산성이다. 서동이 어려서 마를 캐던 오금산에 있다하여 오금산성 이라고 도 하고 또한 일명 보덕성(報德城)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공식 명칭은 익산토 성(益山土城)이다. 익산시 금마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약 1.5km 거리에 있 는 해발 123m의 오금산(五金山) 정상에서 남쪽으로 작은 계곡을 에워싼 산성 이다. 동서로 뻗은 100m 내외의 산릉에 쌓은 산성으로 남문지 수구지 건물 익 지 등의 시설이 있다. 축성 시기는 출토유물로 보아 삼국시대, 즉 6세기 후반 산 내지 7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산성 내에는 남문지, 수구지, 건물지 등 향 의 시설의 유구가 남아있다. 이 성을 보덕성이라 함은 고구려의 멸망 후 신라 토 에 투항한 안승(安勝)을 670년 6월 금마저(金馬渚)에 두어 고구려왕이라 하였 지 다가 후에 보덕왕(報德王)이라고 한데서 비롯된다. 이 보덕왕이 거처하였던 보 덕성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익산군 고적조에 보 덕성은 군의 서쪽 1리에 유지가 남아 있다 고 한데서 이 오금산성을 지목해 왔고, 이러한 연유에 의해서 보덕성이라 불리고 있다. 그러나 2차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 오금산성은 그 입지나 구조 및 내부시설에 있어 산성의 구조를 충 익 실히 따르고 있어 보덕국의 치소로 보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오금산성이 산 언제 축조되었는가는 문헌의 기록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여기에서 출 토 토되는 유물들로 보아 백제 말기에 축성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三國史記 卷第八 新羅本紀 第八 신문왕(神文王) 四年冬十一月 대문이 반란을 성 도모하다가 죽임을 당하다 (684년 11월 미상 음력) 11월에 안승의 조카인 장군(將軍)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반란을 도 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함께 반란을 도모했던] 나머지 사람 들은 대문이 죽는 것을 보고는 관리들을 살해하고 읍성(邑城)을 점거하여 반 란을 일으켰다. 왕이 장사(將士)들에게 그들을 토벌하게 하니 [반란군은] 맞서 고 문 헌 싸웠다. 당주(幢主) 핍실(逼實)이 죽이고, 읍성을 함락하였다. 반란군들을 수도 남쪽의 주군(州郡)으로 옮기고, 그 지역을 금마군으로 삼았다. 대문(大文)을 어 떤 곳에서는 실복(悉伏)이라 한다. (十一月 安勝 族子將軍 大文 在 金馬渚 謀叛事發㐲誅餘人見 大文 誅死殺害官 吏據邑叛王命將士討之逆闘幢主逼實死之䧟其城徙其人於國南州郡以其地爲 金馬 郡 大文 或云 悉伏) 三國史記 卷第四十七 列傳 第七 김영윤(金令胤) 실복이 반란을 일으키다 신문대왕(神文大王) 때에 고구려의 남은 적(賊)인 실복(悉伏)이 보덕성(報德城) 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신문]왕이 그것을 토벌할 것을 명하였다.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 21

323 (神文大王 時髙句麗殘賊 悉伏 以報德城叛王命討之) 三國史記 卷第四十七 列傳 第七 취도(驟徒) 핍실이 귀당제감이 되다 (684년 미상 음력) 문명(文明) 원년 갑신(684)에 고구려의 남은 적이 보덕성(報德城)에 의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신문대왕이 장수에게 명령하여 이를 치도록 하였는데, [취도 의 동생] 핍실을 귀당(貴幢)의 제감(弟監)으로 삼았다. (文明元年甲申髙句麗殘賊㩀 報徳城 而叛 神文大王 命將討之以 逼實 爲貴幢弟 監)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全羅道) 익산군(益山郡) 고적 보덕성(報德城) 군의 서쪽 1리에 있는데 유지(瀢址)가 남아 있을 뿐이 다. 고구려가 당 나라에 망한 뒤, 대형(大兄) 검모잠(劍牟岑)은 고구려의 부흥 을 도모하여 잔민을 모아 패강(浿江 대동강)에 이르러 당 나라의 관리를 죽이 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西海)의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종실(宗室) 안승(安 勝)을 만나 그를 받들고, 한성(漢城)에 와서 임금으로 삼고 소형(小兄) 다식(多 式) 등을 신라에 보내어 고하기를, 우리의 선왕 장왕(臧王)께서 실도(失道)하 여 나라를 잃었으나, 이제 신 등이 나라의 귀족인 안승을 맞아 군(君)으로 삼 았으니, 원컨대 신라의 울타리가 되고자 하나이다. 하였다. 신라의 문무왕(文 武王)은 안승을 금마저(金馬渚)에 거주하게 하고, 보덕왕(報德王)을 봉했으며 형의 딸을 처로 삼게 하였다. 그 뒤 신문왕(神文王)은 안승을 소판(蘇判)으로 삼았다. 그의 족자(族子) 대문(大文)이 금마저에 머물러 있었는데 모반했다가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 무리가 관리들을 죽이고 보덕성에 근거로 또 반역하였 으나, 임금은 장사(將士)를 보내어 토벌하여 죽이고 그 사람들은 남쪽의 주와 군에 옮기게 하고, 그곳을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았다. 금마면 > 연동마을 김기성(1940)남자 그 약 지금으로부터 한 팔백 몇 년 전에 그 어느 그 옛날에는 보덕성이라고 구 했다 그러드만? 그것은 정확한 거기는 안나와있고 그 인제 무슨 왕이 아니고 술 무슨 왕이 무왕이나 뭐 이런 사람들이 아니고 그 옛날에는 그 역사 드라마 같 사 은 거 보면은 그 어느 지역에 그 지역을 관장하는 그런 성주. 그런 사람들이 거기다가 이제 그 사람들이 씨족을 이루고 부락을 허고 그래가꼬 성을 쌓고 살았던 대여. 금마도토성 익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산 14번지 일대에 소재한 지방기념물 제70호의 금 도 산 마도토성(金馬都土城)이 있다. 금마면 소재지 삼거리에서 북방 약 700m 지점 토 향 에 표고 80m, 비고 약 50m의 남북으로 세장한 독립봉의 중복을 테뫼식으로 성 토 감은 토성이다. 즉 현재 금마소방서 뒤편 아석정 인근에 위치한다. 북으로는 지 미륵산을 등지고 서편으로는 오금산을, 동편에는 금마산 115m 고지를 좌우로 거느리고 있고, 남쪽으로는 익산천 입구가 있는데 매우 협소하다. 금마면 소재 32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24 지 뒤에 있는 금마산 115m 고지는 여지승람 에 건자산(乾子山) 재군북일리 진산(在郡北一里鎭山) 이라한 것이다. 토성이 있는 산봉은 남 북 서 삼면은 평지에 임하고 있으나 북방은 안부(鞍部)를 사이에 두고 표고 100m의 후방 산봉과 연결되고 있다. 토성은 이 안부를 공호로 절단하여 복동변을 형성하고 여타는 상봉중복을 테뫼식으로 토루 상단을 설치한 것이다. 토성의 주위 실측 치는 327m의 원형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남변중앙의 남문지 동편은 평탄하게 다듬은 묘역이 있어 그 형적을 찾기는 힘들다. 이곳은 우주를 형성하여 돌출 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실제 주위는 더 길 것으로 생각된다. 금마도토성(金馬 都土城)은 일명 굿대숲토성, 저토성, 성황산성이라고 한다. 1910년 일본에 의 한 고적조사자료(古蹟調査資料)에 금마면 동고도리 읍치에서 북방 3정(町) 거 리의 성황산(城隍山) 위에 주위가 4정 정도 되는 토성이 있는데, 중앙에 성황 단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 성을 성황산성 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산은 성황산 외에도 굿대섭 향정산 여단재 등으로도 불리며, 주변에 돗 토성 이라는 지명이 전해져 오고 있어서 이를 한문으로 옮겨지면서 저토성(猪 土城) 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 성곽의 연혁을 밝힐 수 있는 자료는 전혀 없기 때문에 어떠한 연유에 의하여 언제 만들어졌고, 언제 폐기되는지 전혀 알 길 이 없다. 단지 주변에서 발견되어지는 유물들에 의해서, 백제 때 만들어진 것 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유물들이 산견되어지고 있어서 이 성곽은 고려시대까지는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될 뿐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에 여단(厲壇)을 설치하였다. 성곽의 평면 형태는 민묘가 있어서 확실하지 않으나 동남쪽 모서리만이 우각을 형성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둥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원형에 가까움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 토성은 익산지 에 저토성 (猪土城) 이라 보이는 것으로 영조대의 태평산인(太平山人) 강후진이 지은 와 유록 (臥遊錄)에 촌사람들이 이 토성을 오금산성 이라 하였다는 얘기가 기록 되어 있다. 또한 이 성터는 이 고을 출신의 양곡 소세양이 말을 타던 자리로 전해져 이 지역 사람들은 이 토성을 말달지기 라 부르고 있다. 테뫼식 토성은 삼국시대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성 내에서는 고려대의 도(陶) 와편(瓦片) 이 산란되며 토루의 형태 등 개축의 흔적이 뚜렷하므로 고려대에 수축을 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여단을 설치하였다. 아마도 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이곳에 단을 설치하고 주인 없는 외로운 혼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한 다. 1. 개요 미 륵 산 성 익 산 향 토 지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산 124-1번지 일원의 미륵산에 소재한 미륵산성(彌勒 山城)은 지방기념물 제 12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고 430m의 미륵산(彌勒山, 일명 龍華山)최고봉인 장군봉과 동쪽계곡을 둘러쌓은 석성(石城)으로 1800여m 의 포곡식(抱谷式)산성이다. 고조선의 준왕이 남하하여 쌓았다하여 기준성(其 準成) 또는 백제무왕대(百濟武王代) 창건(創建)된 성(城)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 륵산성의 길이는 약 1,822m, 높이 4~5m 폭 약 5m로 익산지역 최대 규모의 산성이다. 정상에서 사방으로 능선을 따라 성이 만들어졌고, 그 중 하나는 물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 23

325 흐르는 곳을 향하여 내려가는데 여기에는 동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문에는 작은 성을 따로 쌓아 방어에 유리하게 하였으며, 성안에서는 돌화살촉, 포석환 등 기타 유물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성내에는 건물지들이 있었을 것으 로 추정되는 축대를 쌓은 계단들이 보이며 우물도 두 곳이나 남아있다. 북쪽 능선에서 동문지( 東 門 址 )를 지나 남쪽으로 이어지는 성곽은 일부가 복원되었 고, 현재는 북쪽의 성곽 일부와 수구문( 水 口 門 )지를 복원하는 중이다. 성에는 11곳의 치( 稚 )가 발견되고 있는데 동문지의 좌우인 남쪽과 북쪽 치의 일부가 복원된 모습이다. 또한 성내에는 무문토기편( 無 文 土 器 片 )과 청동기( 靑 銅 器 ), 백 제토기편( 百 濟 土 器 片 ) 및 기와편이 출토되고 있으나 1990년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의 동문지 발굴조사결과 백제시대에 축성되어 조선 초기까지 4 차에 걸쳐 개축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2. 연혁 익산의 산성은 마한 왕도설, 백제 별도설, 백제 천도설 등 일련의 연혁 문제 의 실체는 성곽에 대한 접근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궁궐과 사찰 등과 특 히 왕릉의 존재 등도 관련도 중요하다. 따라서 익산의 성곽(산성)에 대한 접근 은 그만큼 더 신중해야 한다. 마한 도읍설의 경우 고조선의 도읍지 왕검성과 비교 가능한 성터 존재 여부, 백제 별도 및 천도설의 경우 기존의 한성 웅진 사비 왕도와 비교 논의 문제가 그 과제인 것이다. 미륵산성의 연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이나 세종실록 지리지 및 익산군지 등 에 보이고 있다. 기록들은 대체적으로 비슷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 중 동국여지승람 익산군 성곽조를 보면, 이 미륵산성을 기준성( 基 準 城 )으로 기 록하고 있으며, 용화산(현 미륵산) 산상에 있는데, 속전에 기준왕이 쌓았다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함을 밝히고 있다. 중국 측 문헌을 통해 보면, 고조선 준왕은 위만의 난을 맞이하여 해로를 통해 남쪽으로 내려 오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를 밝히고 있 지 않기 때문에 준왕의 남래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어 왔다. 하지 만 우리나의 고려사 등의 기록을 보면 익산 땅임을 밝히고 있으며 국호를 마한( 馬 韓 )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미륵산성 동문지의 시굴조사에서 현 성곽 은 출토되는 유물들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유 물들도 보이지 않고 있다. 준왕의 축성에 관한 사실은 의심이 된다. 신증동국 여지승람 이나 세종실록, 익산군지 등에 이 성곽의 명칭과 규모가 기록되 어 있고, 동문지 발굴조사에서 나타난 유물 등을 통해 볼 때 미륵산성은 익산 지방의 다른 성곽들과는 달리 조선시대 늦은 시기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 단된다. 또한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신검과 견훤을 쫓을 때 이를 토벌하여 마 성( 馬 城 )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마성이 바로 이 미륵산성을 말한다고 본다. 미륵산성과 관련된 기록 중 하나로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대학 자 김성일( 金 誠 一 )의 사위인 김영조( 金 榮 祖 1577~1648)의 글이 실린 망와선 생문집( 忘 窩 先 生 文 集 ) 에는 기준성에 오른 감회를 등기준성( 登 箕 準 城 ) 이란 글 32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26 로 남겨 놓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륵산성이 있는 미륵산(430m)은 남방 에 만경강을 거느리고 있고 북방에는 금강을 띠고 있는 익산평야의 주산을 이 루고 있으며 동으로는 천일산 줄기를 두르고 운장산 등 노령산맥과 연결된다. 남북에 하천을 띤 미륵산은 남 서 북의 삼방면에 지류가 있어 해로로부터의 진입로를 이룬 교통의 요지이며 동방은 소백산맥을 거쳐 신라 가야지방을 공 방하는 후방요충이다. 미륵산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최고봉에서 남북 으로 능성을 이루고 이 능성에서 동방으로 몇 줄기의 지맥이 달리고 깊은 계 곡을 형성하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전라도 전주부 익산군 미륵산 석성(彌勒山石城) 속설에 전하기를, 기준(箕準)이 처음으로 쌓았으므 로 기준성(箕準城)이라 고 한다. 둘레는 6백 86보가 넘으며, 안에 샘이 14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하며, 군창(軍倉)이 있다. 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라도(全羅道) 익산군(益山郡) 문 고적 기준성(箕準城) 용화산(龍華山) 위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기준(箕準) 헌 이 쌓은 것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땄다고 한다. 석축 둘레는 3천 9백 자이고 높이는 8자이다. 시내와 우물이 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7권 변어전고(邊圉典故) 폐지된 산성 전라도 익산(益山) 용화산성(龍華山城) 군의 북쪽 8리에 있는데, 미륵산(彌 勒山)이라고도 한다. 기준성(箕準城)이라 부르며, 석축이다. 낭산산성 낭산산성(朗山山城)은 낭산면 낭산리 산48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방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미륵산에서 북방 약 4km의 낭산리 상랑마을 뒷산인 낭산(朗山)에 위치한다. 이 낭산성은 마한성(馬韓城) 구성(舊城) 북성(北城) 으로도 불리고 있다. 마한성이라고 하는 이름은 익산군지 에 보 이는데, 이 마한성은 부(府)의 서쪽 십오 리 낭산 위에 위치하며 둘레는 일천 낭 산 산 성 익 산 향 토 지 삼백육척이고, 높이는 구척 여라고 기록하고 있을 뿐 이 성곽을 언제 만들었 고 어느 때 폐기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단지 전해오는 바에 의하 면, 마한 때에 이 성곽을 쌓았기 때문에 마한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는 미 륵산성이 기준성으로도 불리고 있는 예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주민의 말에 의 하면, 낭산성 안에서도 화살촉 등 석기류를 습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요즈음 이런 유물은 확인할 길이 없고, 백제시대의 유물과 함께 성곽의 구조가 전형 적인 백제토성의 구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성곽은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유물들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낭산성은 최소한 이 때까지는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益山郡誌 에 箕準城(미륵산성) 報德城(오금산성) 天壺城(천호산성)과 함께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일부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평면의 형태에서 각 모서리는 확실한 우각을 형성하지 않고 지형조건에 따라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 25

327 둥근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남북방향의 능선을 감싼 성곽이 서쪽의 작은 골 짜기를 감싸는 포곡식에 가까운 형태를 보이고 있다. 성곽의 북벽은 급한 경 사면을 따라 거의 직선에 가깝게 내려가는데, 이 북벽의 8부 능선에 북문을 두고 있고 서쪽에서도 서문지가 확인된다. 지표관찰을 통한 성벽의 구조를 보 면, 낭산성은 익산지방에 위치해 있는 전형적인 백제토성인 오금산성이나 저 토성과 구조가 같다. 즉 성벽은 기본적으로 판축 토르를 갖춘 토성으로 판단 되며, 성곽의 취약지나 수구지가 있는 부분에서는 석축을 하였다. 판축 토루는 산 사면을 이용하여 산탁에 의하여 축조를 하였으며, 내부와 수평이 되는 지 역에서부터는 협축을 한 흔적이 보이고 있다. 성벽의 폭은 정확히 알 수는 없 으나 6m 내외로 추정되어 진다. 문지는 서문지와 북문지 남문지의 3개소가 확인된다. 서문지가 정문으로서 수구대지 남쪽에 치우쳐 위치하고 있는데, 서 남향을 하고 있다. 대부분 붕괴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문지의 규모나 구조 등 은 확인되지 않는다. 북문지는 북벽의 서사면 8부 능선 상에 위치하고 있어, 북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서의 접근이 용이하게 되어있다. 서문지는 성벽을 절단한 형태의 것이지만 북문지는 양방향 성벽을 서로 엇갈리게 마무리하여 문지로 만들었다. 이 엇갈린 개구부의 폭이 3.8m정도여서 문지의 폭은 여기에 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북문지가 위치한 지역은 거의 평탄 한 대지를 형성하고 있어서 체성은 협축을 하였으며, 내외벽은 석축을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남문지도 북문지와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성곽 남벽 서사면의 8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어, 남쪽으로 이어지는 성곽외부의 능선에서 접근하기 용이하도록 되어 있다. 남문지도 양방향의 체성을 서로 엇갈리게 마 무리하여 문지를 만들었다. 이 엇갈린 개구부의 폭은 3.8m 정도여서 문지의 폭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도 협축을 하였으며, 내외벽에는 석축을 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수구는 남쪽 수구대지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 파손되고 일부만 남아 있다. 북문지와 남문지도 주변보 다 지형이 낮은 관계로 이 문지를 이용한 수구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낭 산성에서 수습된 유물들은 주로 기와와 토기편 들을 들 수 있다. 백제시대에 해당하는 기와는 주로 무문이거나 단선문이 보이고 있다. 태토는 정선되었으 며, 회색조를 띠는 경질의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기와들은 주로 격자문계와 어골문계의 평기와들이 수습된다. 어골문은 도식화되지 않은 형태로서 순수한 어골문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고려시대 이후로 보이는 유물들도 대부분 고 기와편 들인데 주로 집선문계의 등문양을 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전라도(全羅道) 여산군(礪山郡) 문 고적 낭산폐현(朗山廢縣) 군의 서쪽 8리에 있다. 토성(土城) 옛터가 있는데, 성 헌 익 둘레가 3천 9백 척이고, 안에 샘물이 두 군데 있다. 성남리고분군 남 산 성남리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미륵산에서 북으로 뻗은 지맥의 말단에 리 향 해당되는데 현재는 성남리 성내마을에서 산북리로 통하는 도로를 개설한 관계 고 토 로 분리되어 있다. 이 고분군에서 조망하면 서쪽으로는 평야가 함열을 거쳐 32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28 금강까지 펼쳐져 있고 서족을 제외한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이곳이 산 지와 평야가 만나는 접경이 되고 있다. 고분이 입지한 야산에는 일부묘지로 사용되고 있어 고분이 훼손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석재들이 노출된 경우도 있었다. 고분이 분포된 야산은 남쪽으로 우뚝 솟아있는 미륵산의 북백이기 때 문에 남북으로 능선이 형성되어 고분은 야산의 정상에서부터 동사면과 남사면 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성남리고분군은 1986년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 문화연구소에서 실시하였던 익산군 문화재지표조사시에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고분은 자연유실과 도굴로 인하여 석재가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거나 고분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1995년도에 22기의 고분에 대한 발굴조 사결과 유형을 판단할 수 있는 석축묘는 횡혈식석실분 12기와 횡구식석곽분 7기가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대부분의 고분들이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으며, 도굴이 심하여 유물은 수습되지 않았다. 고분을 축조한 연대를 밝힐 수 있는 유물이 전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고분군의 조성 시기는 고분의 구조적인 특 징을 통하여서만이 추정되었다. 횡혈식석실분은 모두 사비 2식으로 축조수법 분 지 은 장벽의 경우 3-4매의 판석을 세우고 그 위에 장대석을 내경시켜 천장과 가 구하고, 뒷벽은 상부를 가공한 1매의 판석으로 세우거나 상부 양단의 모를 죽 여 가공한 판석을 장방형 판석 위에 올려 축조하였다. 연도(羨道)는 석실입구 의 양쪽에 문주석을 세워 폭을 좁힌 후 중앙에 설치하고 폐쇄는 102매의 판 석을 문비석(門扉石)으로 삼아 막고 있다. 축조서열(築造序列)은 사비 2식 횡혈 식석실분 다음에 축조되는 제 유형 횡구식석곽분은 규모가 작지만 축조석재, 횡구부의 폐쇄석재 등에서 사비 2식을 계승하고 있다. 횡구식석곽분은 백제시 대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특히 17호에서 조선통보(朝鮮通寶)가 발 견되어 고분축조수법의 전통이 오랜 기간 한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음 을 알 수 있다. 고분의 구조적인 특징을 통하여 밝혀진 이 고분군의 조성 시 기는 주로 백제시대 후기인 7세기 중엽 경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 이는 17호석곽분에서는 백제시대의 고분전통이 보이고 있어서 오랜 동안 백 제고분의 전통이 축약과 변형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축조되었음이 밝혀졌다. 이 고분의 피장자는 금마지역 일원의 백제 말기의 유적과 관련이 있는 집단일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입점리고분전시관(笠店里古墳展示館) 황등(黃登)에서 웅포면(熊浦面) 소재지에 이르는 중간지점 새터마을 뒷산에 입 익 점 산 리 향 고 토 분 지 위치한 입점리고분(笠店里古墳)의 유구(遺構)는 북으로 금강에 임하는 해발 100m 내외의 산능선(山稜線) 남사면(南斜面)에 자리하고 있다. 1986년 2월 한 고등학교 학생에 의하여 최초로 발견되어 문화재연구소의 주관으로 실시한 발 굴조사에서 1호분에서 8호분까지 확인되었다. 1호분은 처녀분 이었지만 발견 당시에 유물이 곽란되어 우너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이후 1998년도에 유적의 정비계획의 일환으로 실시된 전면적인 발굴조사에서 모두 13기의 분묘가 조사되었다. 입점리 고분군에 대한 주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조사된 백제시대 석축묘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 27

329 는 모두 19기이다. 이를 유형별로 대별하면 수혈식석곽분 11기, 횡구식석곽분 1기, 그리고 횡혈식석실분은 초기유형 3기, 웅진 1식 3기(1기는 불명), 웅진 3 식 1기 등이다. 1986년에 조사된 8기의 고분은 야산의 8부능선( 部 稜 線 )에 위치하며 구조는 현실( 玄 室 )을 평면 정방형( 正 方 形 )으로, 벽을 자연 괴석( 塊 石 )으로 안쪽 면을 맞 춰 수직으로 쌓고 그 위로부터는 4벽을 내경( 內 頃 )시켜 천정부분까지 좁혀 천 정석을 얹히는 궁륭형( 穹 窿 形 ) 천정의 석실과 횡혈식 석곽으로 나누어지나 1 호분이외에는 출토유물이 많지 않거나 전혀 확인되지 않은 예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연도( 羨 道 )는 어느 한 벽면에 치우쳐 있는 경우가 절대 우세하였고, 배 수로 설치는 1호분에서만 발견되었다. 각 고분의 장축방향에 있어서도 일정하 지 않아 산줄기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입점리고분군에서 사용된 수법인 궁륭식( 穹 窿 式 ) 천정은 백제 때인 한성시대 ( 漢 城 時 代 )로부터 공주시대( 公 州 時 代 )에 걸쳐 유행했던 독특한 수법이다. 금강 유역에서는 공주천도 이후 쓰여졌다. 동편연도( 東 便 羨 道 )에 방형평면 푸랜을 가진 석실은 웅진시대( 熊 津 時 代 )의 전반기 무렵에 해당한다. 6세기에 들어서면 평면은 장방형으로 바뀌고 그 중반 이후에는 연도( 羨 道 )도 중앙에 붙게 된다. 이러한 백제석실의 편년에 비추어 볼 때 입점리고분의 연대의 일단을 5세기 후기 후반의 것으로서 부장된 각종 유물의 연대도 이와 비슷하다. 1호분에서 비교적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금동제관모( 金 銅 製 管 帽 ), 입식 ( 立 飾 ), 식이( 飾 履 ), 이식( 耳 飾 )과 마구류( 馬 具 類 ), 철못, 꺽쇠, 토기호( 土 器 壺 ), 청 자사이호( 靑 磁 四 耳 壺 ) 등 다양했다. 관모는 우리나라에서는 두 번째의 툴초 예로서 나주의 반남면신촌리9호분( 潘 南 面 新 村 里 九 號 墳 )에서 처음으로 금동관모( 金 銅 冠 帽 )와 입화식( 立 花 飾 )을 세운 외관( 外 冠 )과 함께 환도( 還 刀 ) 등이 출토된 예가 있다. 이와 유사한 관모가 일 본 구마모토현에 있는 후나야마고분에서 출토 되었다. 나주의 반남이나 익산 의 웅포와 일본의 구마모토는 모두 백제의 담로( 擔 魯 )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들이다. 토기류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청자사이호( 靑 磁 四 耳 壺 )로서 높이 17cm, 구 경( 口 經 ) 9.6cm, 저경( 底 經 ) 9.8cm로 아가리를 짧게 세웠고 네 귀를 붙인 형식 이다. 밝은 황갈색의 우아한 분위기의 이 청자단지는 중국 남조( 南 朝 )에서의 수입품으로 고대 중국과의 교류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자료이다. 중국 청자의 네 귀 달린 단지, 병 등은 오직 공주무령왕릉( 公 州 武 零 王 陵 )에서 나왔을 뿐이 다. 입점리( 笠 店 里 ) 고분의 하한년대( 下 限 年 代 )가 6세기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은 것으로 보여 부여천도 이전인 공주시대에 해당되는 고분이다. 이 고분에서는 금동제관모( 金 銅 製 管 帽 )를 비롯하여 금동제장신구( 金 銅 製 裝 身 具 )와 철제품 그 리고 중국제 청자 등이 출토되었다. 금동 제품들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이 고분의 피장자( 被 藏 者 )가 왕족( 王 族 )임 을 알 수 있다. 왜냐 하면 그 당시 금동 제품을 사용 할 수 있는 신분은 왕족 32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30 으로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왕족이 이곳에 매장되었는가? 그것은 백제의 지방통치체제인 22담로제도를 통해서 설명되어야 한다. 22담로체제의 기본 기능은 여중국지언군현야( 如 中 國 之 言 郡 縣 也 ) 에서 알 수 있듯이 지방통 치의 기능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경제적( 經 濟 的 ) 수취( 收 取 )와 노동력( 勞 動 力 ) 동원 및 군사권( 軍 士 權 )의 장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연 으뜸은 군사력의 장악이었다. 담로체제 자체가 중앙 집권력의 강화과정에서 빚어진 소산이라는 점과 담로체제가 기본적으로 성( 城 )중심의 편제여서 군사 적 성격을 다분히 띠고 있다는 데서 추측할 수 있다. 담로의 장으로 임명된 성주( 城 主 )는 대체적으로 왕족출신들 이었다. 입점리고분이 위치하고 있는 웅포( 熊 浦 )는 지리상으로 볼 때 아래로는 서해 안으로 이어지는 금강하구가 한 눈에 들어오고 위로는 강경을 거쳐 백제의 수 도로 곧바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외적이 백제로 침입하는데 있어서 길목이 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초기에 적을 격퇴시키지 못하면 적은 바로 수도로 들 어가게 된다. 실제로 백제가 멸망할 때 나당연합군( 羅 唐 聯 合 軍 )인 당나라군의 장군 소정방이 이곳을 지나 부소산성( 扶 蘇 山 城 )으로 입성하여 백제를 멸하였 다. 그렇기 때문에 군사상 이 웅포는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다. 바로 22담로 중 의 하나로 이곳에는 왕족이 파견되어 직접 군사적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백제의 수도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에서 왕족이나 사용이 가능 한 금동 제품( 金 銅 製 品 )이 부장품으로 출토된 입점리 고분의 피장자는 이곳 담로의장이 되는 것이다. 입점리 1호분의 피장자인 담로의 장인 왕족과 함께,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 는 수장은 상당한 세력을 가진 귀족세력이었다. 익산의 건마국이 백제의 영역 으로 편입된 이후 이 지역 수장세력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입점리 1호분 과 함께 위치하고 있는 입점리 고분군이다. 따라서 입점리 고분군의 주인공은 이 지역출신 가운데 가장 우월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세력은 지리적 측면에서 볼 대 건마국과 연관시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건마국은 4세기 전반 경에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입점리 고분군의 주인공은 독자적인 세력이 아니라 백제의 지배체내 내에서 일정한 지위를 인정받은, 즉 백제의 귀족세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건마국이 4세기 초에 백제에 병합되자 그 지배세력의 일부는 백제의 중앙귀족으로 편제되었고 입점리 고분군의 주인공은 이 귀족과 연결되는 존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입점 리 1호분 피장자가 백제 귀족층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 그가 착용하였던 금동관모이다. 관모는 포고 대 리 등과 더불어 공식석상에서 귀족들의 지위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사비시대의 백제의 관제는 왕은 금제의 관식( 冠 飾 )을 사용하였고 솔계 관등을 가진 관료들은 은제관식을 사용하는 금 제관식-은제관제였다. 나주 흥덕리, 남원 척문리, 논산 육곡리, 부여 하황리 등 에서 출토된 은제관은 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기 이전에는 무령왕릉의 금제관식 이외에는 주 로 금동관이 출토되고 있다. 나주 신촌리 9호분 을관 출토의 금동관, 익산 입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29

331 점리 1호분의 금동관, 천안 용원리 9호 석곽묘에서 금동관모 장식 등이 그것 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성 도읍기 및 웅진 도읍기의 백제의 관제는 금제관식금동관모제였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겠다. 한성 및 웅진도읍기의 이러한 관제의 운영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이 왕 후호라고 하는 작호제이다. 왕(王) 후호(侯號)는 관등을 받은 귀족들 가운데 국가에 큰 공로를 세운 귀족들에게 수여한 작호(爵號)인데 근초고왕 대에 처음 실시된 것으로 보인다. 이 왕 후호를 받은 자들은 그 공로에 대한 반대급부로 식읍을 받고 공식석 상에서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관을 착용하였을 것이다. 그 관이 바로 금동 관모(金銅冠帽)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볼 때 입점리 1호분의 피장자는 군사행정상 중요한 웅포 담로의 장인 왕족이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적어도 웅포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수장이 백제의 귀족으로 편입된 이후 어느 시기에 국가에 대한 특별한 공로를 세우게 되었고 그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왕 후호 를 받게 되면서 금동관모를 착용하게 된 웅포의 귀족이었던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이리하여 그는 백제의 고위귀족으로서 자기의 출신지인 익산에 묻힐 때 자신의 위상에 맞게 금동관과 금공신발을 비롯한 화려하고 풍부한 부장품 을 부장한 궁륭상 천장의 석실분을 조영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입점리고분전시관 금강의 본래 이름은 곰강이었으니 웅포(熊浦)는 곰개나루로 불렸다. 곰 은 크 다 는 뜻을 가졌다. 큰강나루 가 웅포가 된 것은 곰 을 한자로 표기할 때 대 (大)가 아닌 곰(熊)으로 하여 현재의 웅포가 된 것이다. 전통을 잊고 사니 본 이름이 잃어버린 경우다. 황해에서 금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뱃길에는 자연스레 포구들이 자리 잡으 면서 여러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곰개마을이 가장 번창하여 웅포면이 되었다. 익 산 시 관 광 책 자 해방 전후만 해도 정초가 되어 웅포에서 용왕제를 지낼 즈음이면 인근의 무속 인들이 웅포로 돈 벌러 나간다 면서 부르지 않아도 찾아들었다고 한다. 웅포 의 용왕제가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일 년에 한 번의 행사를 치룰 뿐인데 웅포 마을 사람들의 씀씀이는 유별났다고 한다. 이처럼 웅포는 유유히 흐르는 금강을 생활터전으로 삼으면서 물자를 실어 나 르는 집하지로 오랫동안 몸집을 키워왔지만 금강하구둑이 생기면서 해수유통 이 막혀버려 포구로서의 기능이 상실되고 말았다. 밀물을 타고 황해바다에서 흘러 들어오는 바닷물과 금강을 타고 흘러 내려오는 맑은 민물이 만나는 곳에 서 잡히던 우어와 황복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도 웅포면 소재 지에는 옛 풍속과 맛을 못 잊는 이들을 위해 수 십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우 어회 식당남아 있어 향수를 달래준다. 웅포에 가면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과거 한반도에서 삼한시대의 한 축이 었던 마한의 역사와 문화, 삼국시대의 한 축을 이루었던 백제의 역사와 문화 를 엿볼 수 있는 입점리 고분과 웅포리 고분이다. 두 고분은 웅포면 소재지에 서 약 5분 정도 위치해 있다. 33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32 칡을 캐다 금동제 모자 발견 1986년 새터 마을에 사는 한 소년이 칡을 캐다가 반짝이는 누런빛을 발견했 다. 금동제 모자의 발견이다. 우연한 사건으로 알려지게 된 입점리 고분은 해 발 240m의 함라산에서 금강변을 따라 뻗은 산의 남동쪽 경사면, 이 지역에서 는 칠목재라 부르는 구릉 중턱에 분포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 지역 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수행하여 총 21기의 고분의 존재를 확인했다. 사적 제347호로 지정된 고분들은 해발 90~120m 사이에 대부분 분포하고 있는데 그 중 3기는 새터마을 뒷산과 군산시 나포면에 위치하고 있다. 입점리 고분군의 유형은 구덩식 돌곽무덤 11기, 앞트기식 돌곽무덤 2기, 굴 식 돌방무덤 7기, 독무덤 1기로 여러 가지 유형의 고분이 뒤섞여 나타나는 특 징을 가지고 있다. 고분 안에서는 금동제 귀걸이 장식을 비롯해서 다량의 옥 과 토기류가 발굴되었다. 출토유물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금동관의 관테와 솟은장식, 관모, 신발, 봉황무늬와 연꽃무늬를 한 관장식편, 금동제 드리개, 귀걸이, 유리구슬 등의 장신구들이다. 철지은장( 鐵 地 銀 裝 )의 재갈과 말띠 드리개, 발걸이, 금동제 안장 꾸미개 등의 마구류, 화살통 장식, 중국 남조시대의 청자 네 귀 단지도 출토되 었다. 이중에서 금동제 관모와 금동제 신발은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웅포리 고분은 입점리 고분에서 북동쪽으로 3km 떨어진 함라산 서쪽 지맥의 남쪽 사면 해발 47~85m 사이에 분포하고 있다. 1986년 60여기의 고분 흔적 이 확인된 가운데 원광대 마한 백제문화연구소에 의해 총 30기의 고분이 발 굴되었다. 유형은 수혈식 석곽묘 15기, 횡구식 석곽묘 12기, 횡혈식 석실분 2 기, 기타 1기 등이다. 웅포리 고분군도 입점리 고분군과 마찬가지로 한 지역에 서 여러 가지 형태의 고분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출토유 물을 보면 금동제 귀걸이 2점을 제외하면 대부분 토기류와 철제품으로 입점리 고분군의 주인공들보다는 부장품의 수준이 한 단계 낮다. 전문가들은 이 무덤 들이 서기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 이 지역에 거주했던 유력한 세력집단 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입점리 웅포리 출토 유물 전시관 2004년 4월 21일 개관한 입점리고분전시관에 들어가면 고분의 주인으로 추 정되는 인물의 모형이 손님을 맞는다. 역사 속 과거의 인물들과 시공을 넘는 대면을 하는 셈이다. 붉은 도포차림에 관모를 쓴 모습에서 권위와 위엄이 엿 보인다. 언뜻 보아도 신분이 상당히 높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26 평 규모에 전시실, 수장고, 자료실 등을 갖춘 전시관에는 사적 제347호인 익 산 입점리 고분과 전북기념물 제98호인 웅포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100여 점 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에서 나와 뒷 구릉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고인돌 2기를 볼 수 있다.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31

333 양지바른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는 입점리 고분군의 입구인 셈이다. 이곳에 묻힌 사람들은 웅포의 금강변에 살다가 죽어서 이곳에 묻혔던 세력가들로 추 정된다. 물도 풍부하고 바다와도 통하며 무엇보다도 넓고 기름진 평야를 가진 웅포는 농경사회 공동체사회 구성의 가장 살기 좋은 입지였을 것이다. 한때 삼국시대의 3대 포구로 불릴 만큼 교통의 요충지였던 웅포의 곰개나루는 중 국, 일본과 무역을 담당하는 백제의 관문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뱃길 이 끊기고 이제는 이름도 생소한 시골로 전락했다. 부여군 양화면과 익산시 웅포면을 이으면서 금강을 가로지르는 웅포대교가 완성되고, 베어리버골프장도 개설되고 관광단지가 조성되면서 웅포는 서서히 비상의 나래를 펴고 있다. 입점리 고분 전시관은 백제의 역사와 문화 및 생활 상을 이해할 수 있는 문화교육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주변 유적과 연계한 관 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웅포리고분군(熊浦里古墳群) 웅포리고분군(熊浦里古墳群)은 웅포면 웅포리 산 90번지 일대에 산재해 있다. 웅포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5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오류동 마을을 거쳐 웅포재를 넘어 함라면으로 통하는 소로가 있다. 이 소로를 따라 소재지에서 약 3km를 가면 단동사(丹洞祠)와 함께 경주최씨 제각(祭閣)이 함라산 서쪽기 슭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제각 못 미쳐 북편(北便) 골짜기 안부(鞍部)에 산기슭 에서부터 정상부근까지 고분군들이 분포하고 있다. 오류동 마을은 원래 배짝골 백제골 이라 불렸는데 이는 백제와 어떤 연 관관계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배가 드나들던 연유에서 불렀는지 확실하지가 않다. 하지만 입점리에서 왕족의 고분이 발견되었던 점에서 백제시대에 정치 적 중심세력이 존재하였던 지역으로 추정하여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바로 이 웅 익 고분군들도 이들과 연관이 있는 당시의 정치세력집단의 고분으로 볼 수 있겠 포 산 다. 리 향 웅포리 고분군의 발굴 전 상태는 지형이 매우 심한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자 고 토 연적인 유실이 심한 상태였고, 특히 도굴, 민묘축조, 칡뿌리 채취 등의 인위적 분 지 훼손으로 인하여 패어진 웅덩이에 석재가 노출된 것이 많았다고 한다. 이 고분군은 1986년도 익산군 문화재 지표 조사시에 발견된 유적으로 60여 기에 달하였다. 1987년도에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2기의 고분을 발굴조사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1992년과 1993에 두 차례에 걸쳐 원광대학 교 박물관에서 28기의 고분을 발굴조사 하였다. 현재 이 지역은 골프장 개설 공사가 한창이어서 여기 저기 토목공사가 이루 어지고 있어서 유적의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 연구소와 원광대학교 박물관에서 학술 발굴조사 하 여 낸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수혈식석곽분(竪穴式石槨墳) 8기, 횡구식석곽분(橫 口式石槨墳) 12기,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1기, 그리고 수혈식석곽분으로 분류할 수 있는 소형석곽(小形石槨) 7기 등으로 대별된다. 횡구식석곽분은 12 기 가운데 8기는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이며, 고려시대의 횡구식석곽분도 4기 33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34 가 발견되었다. 이렇게 웅포리 고분군에는 다양한 고분형태가 복합적으로 혼 재되어 있다. 장축방향( 長 軸 方 向 )운 산 경사에 직교( 直 交 )한 고분, 산 경사에 평행( 平 行 )한 고분으로 구분되는데, 수혈식, 횡구식, 횡혈식의 고분을 대부분 산 경사에 직 교하고 있으나, 시기가 늦다고 생각되는 2기의 고분만은 횡구식이면서도 산 경사에 평행으로 안치되고 있다. 산 경사에 직교한 고분은 장축방향이 동서방향에 가까워 두향( 頭 向 )은 동침 ( 東 枕 )을 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산 경사에 직교한 고분과 소형석곽분 에서는 편평할석( 扁 平 割 石 )으로 바닥을 깔고 있지만 시기가 늦다고 생각되는 2기의 고분에서는 할석을 깔지 않고 있다. 이는 시기의 차이와 목관( 木 棺 )의 사용 유무와 관령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유물을 보면 연적형토기( 硯 滴 形 土 器 ), 삼족토기( 三 族 土 器 ), 단경호( 短 涇 壺 ), 고배( 高 杯 ), 유개대부호( 有 蓋 臺 付 壺 ), 대부소호( 臺 付 小 壺 ), 유개직구호( 有 蓋 直 口 壺 ), 광구호( 廣 口 壺 ), 개배( 蓋 杯 ), 직구호( 直 口 壺 ), 방추차( 紡 錘 車 ), 철부( 鐵 斧 ), 겸형철기( 鎌 形 鐵 器 ), 도자( 刀 子 ). 등이다. 웅포고분군의 연대는 고분의 구조양식에 따른 정확한 축조서열을 파악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주변 고분의 구조와 출토유물을 참고해 볼 때 수혈식, 횡 구식, 횡혈식, 소형석곽분 순으로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중반까지 축조된 고분 으로 보여지고 있다. 고분( 古 墳 )이란 과거 및 현재의 무덤 중에서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자료가 될 수 있는 분묘를 말한다. 분( 墳 )이라는 것은 성토( 盛 土 )를 한 묘를 뜻한다. 고분이랑 과거 우리 조상이 묻힌 무덤을 통칭하는 뜻도 될 것이나, 고고학에 서는 일정한 형식을 갖춘 한정된 시대의 지배층의 무덤을 말한다. 여기서 한 정된 시대란 선사시대 부족사회에서 고대왕조가 확립되는 삼국( 三 國 )의 건국 으로부터,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 火 葬 )무덤이 성행하여 고분축조가 쇠퇴된 시기까지를 말한다. 고분에는 땅속에 파묻는 토장( 土 葬 ), 물속에 넣는 수장( 水 葬 ), 지상에 시체를 노출시켜 썩게 하거나 짐승에게 먹이는 풍장( 風 葬 ), 불에 태우는 화장 등 여러 기본 형식이 있다. 인류가 언제부터 이러한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는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는 구석기시대 중기부터이며 약 7,8 만 년 전의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당시는 땅을 약간 파고 굽혀묻기( 屈 葬 ) 한 형태이었는데, 신석기시대가 되면 고인돌( 支 石 墓 )과 같은 거대한 석조 건조 물이 나타나고, 청동기시대에는 피라미드 같은 거대한 무덤이 건설되기에 이 르렀다. 이러한 무덤에는 각종 지기들을 함께 묻기 때문에 많은 부장품들이 풍부하게 매장되었다. 따라서 무덤이 커지고 내부에 각종 부장품들을 풍부하 게 매장하였기 때문에, 고분의 매장방법을 통하여 고대인의 사상 및 신앙, 기 타 관계 된 풍습과 제도 등을 알 수 있다. 또한 꾸미개 무기 용기( 用 器 ) 등으로 그 시대의 문화 미술 공예 수준과 내용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분은 기록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시기의 문화와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33

335 생활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해준다. 고분에서 주검의 매납( 埋 衲 )시설은 크게 구덩식( 竪 穴 式 )과 굴식( 橫 穴 拭 ) 계통 의 둘로 나누어진다. 구덩식에는 돌방( 石 室 ) 점토곽( 粘 土 槨 ) 나무널( 木 棺 ) 돌 널( 石 棺 ) 등이 있고 굴식으로는 돌방이 있다. 구덩식계통 무덤은 한번 주검을 매납하여 밀폐하고 추가장은 행하지 않지만, 굴식돌방의 경우는 입구에 문을 달아 그 문을 열면 추가장이 가능하다. 이는 매장에 대한 사고방식의 차이에 서 기인하는 것이다. 부장품도 주검의 몸에 매달은 꾸미개 및 무기류 의식용 그릇류 등이 보이는데, 대개 오래된 고분에는 보기( 寶 器 )적인 것이 많고 시대 가 내려오면 실용적인 것이 많아진다. 한국의 무덤은 신석기시대부터 나타나 지만, 청동기시대 이후로 무덤형식이 다양해지고, 역사시대에는 각지에 고분군 이 남아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이후로는 부장품이 빈약해지거나 아예 없 어져서 고고학에서의 고분 연구 성과는 삼국시대의 그것보다는 많이 줄고 있 다. 백제고분( 百 濟 古 墳 )을 보면 여러 특징 중에서 시대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것 은 천장가구 형식( 天 障 架 構 形 式 )이므로 천장가구 형식을 기분으로 고분의 유 형을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백제가 한강 유역에 자리를 잡고 있던 초기 에는 구덩식( 竪 穴 式 ) 돌방무덤( 石 室 墳 ) 널무덤( 土 壙 墓 ) 등이 주류를 이루는데 고구려 고분과 유형이 같은 이 돌방무덤은 서울 광진구 광장동( 廣 壯 桐 ) 한강 연안지역, 경기 여주군 여주읍 남한강 유역, 가평군 북면( 北 面 ) 이곡리( 梨 谷 里 ) 에 산재되어 있다. 백제가 공주로 천도한 중기에는 궁륭식( 穹 窿 式 ) 천장의 돌방무덤이 제일 먼 저 축조되기 시작했는데, 송산리( 宋 山 里 ) 1~5호분이 그 예로서, 이 형식은 한 강유역 시기의 무덤인 가락동( 可 樂 洞 ) 2호분, 매룡리( 梅 龍 里 ) 2호 8호분에서 도 나타난다. 이 형식에 뒤이어 나타난 것이 터널형 전축분( 塼 築 墳 )으로 송산 리 6호분 무령왕릉( 武 零 王 陵 ) 능산리( 陵 山 里 ) 2호분 등이다. 사천장식( 斜 天 障 式 ) 돌방무덤은 공주 부여 지방에서 처음 나타나는 판석형 ( 板 石 形 ) 돌방무덤으로 그 이후에 성행하는 부여지방 판석조( 板 石 造 ) 돌방의 선행( 先 行 )형식으로 볼 수 있는데, 이 형식은 송산리에서 벗어난 변두리의 소 규모 고분인 점으로 보아, 전축분의 후행( 後 行 )형식으로 보인다. 백제가 부여로 천도한 뒤로는 터널형 천장식 고분, 평사천장식( 平 斜 天 障 式 ) 고분, 평천장식( 平 天 障 式 ) 고분 등 3가지 형식이 나타나는데, 터널형 천장식 고분인 능산리 2호분이 송산리의 전축분과 구조형식에서 매우 유사한 점으로 보아 터널형 천장식 고분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다음의 평사 천장식 고분은 구조상으로 사천장과 평천장을 혼합 절충한 형인데, 능산리 동1호분의 경우 천장부분은 판석( 板 石 ), 축부( 軸 部 )는 장대석( 長 大 石 )으로 되어 있다. 평사천장식 고분은 그 예가 많고, 부여지역에 중점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종시기까지 존속한 것으로 보인다. 평천장식 고분은 능산리 1 호분뿐인데, 평사천장식이 부여에 나타날 때와 거의 동시에 나타난 것으로 보 인다. 33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36 웅포리 고분군 출토 유개대북직구호( 有 蓋 臺 北 直 球 壺 ) 웅포면 웅포리 산 90번지 웅포리 백제고분 92-7호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수 혈식 석관의 동벽쪽에서 발견되었고 굽다리( 臺 脚 )는 소성( 燒 成 ) 당시 형태가 일그러져 있으며 약간 파손된 것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 이다. 정선된 태토( 胎 土 )를 사용하여 고화도에서 구워져 군데군데 산화된 흔적이 남아 있다. 뚜껑은 변형된 보주형( 寶 珠 形 ) 꼭지를 부착하고 그 양옆에 역시 직릉 5mm정 도의 구멍을 뚫었고 자연유가 산화되어 면이 거칠고 회백색을 띠고 있다. 입술 부분은 자른 듯이 각을 이루고 약간 안으로 오므려 성형( 成 形 )하고 있 다. 몸체는 직립된 구연을 갖추고 어깨에 2조의 돌대를 평행으로 돌리고 그 아래 로는 희미하게 타날문( 打 捺 文 )이 나타나고 있다. 굽다리는 3단으로 구획하고 맨 위 단에 8mm의 원공( 圓 孔 )과 엇갈리게 8자형 의 투창을 뚫고 있고, 맨 아래에는 아무런 장식을 하고 있지 않다. 역시 굽다리의 바닥은 두껍게 성형하고 가장자리에 음각으로 돌려 장식하고 있다. 규모 : 높이( 高 ) 26.2cm, 뚜껑( 蓋 ) 5.7cm, 입지름( 口 經 ) 14.4cm, 대부호( 臺 付 壺 ) 높이( 高 ) 23.0cm, 입지름( 口 經 ) 12.7cm, 바닥지름( 底 經 ) 17.1cm 웅포리 고분군 출토 단경호( 短 頸 壺 ) 웅포면 웅포리 산 90번지 백제고분군 93-12호분에서 출토된 회색의 경질 토 기로서 정선된 태토( 胎 土 )에 약간의 모래입자( 砂 粒 )가 섞여 있고 완전한 형태 로 갖추고 있다. 구연( 口 緣 )은 목에서 곧바로 외반( 外 反 )했고 입술부분은 좀 치켜세웠고 주연 ( 周 緣 )에 홈대를 돌리고 있다. 몸통의 중간부분이 급격히 팽창하여 몸통최대지름을 이루고 몸통의 아랫부분 은 울퉁불퉁한데 이는 바닥을 따로 만들어 부탁하면서 생긴 것으로 다른 부분 에 비하여 두껍다. 바닥은 편평한 바닥이고 중앙이 들려져 있다. 몸통에는 아무런 시문장식이 없고 다만 회전 손빚음 자국만이 나타나고 있다. 한편 입술과 몸통에 사용 흔 적이 남아 있어 일상용기의 부장으로 여겨진다. 규모 : 높이( 高 ) 10.6cm, 입지름( 口 經 ) 9.6cm, 바닥지름( 底 經 ) 7.0cm 웅포리 고분군 출토 직구호( 直 口 壺 )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35

337 웅포면 웅포리 산 90번지 웅포리 백제고분군 93-11호분에 출토된 흑회색을 띠고 있는 경질토기로서 태토(胎土)에는 모래입자(砂粒)가 섞여 있고 일부 산 화된 부분은 회색을 띠고 있다. 구연(口緣)은 직립(直立)했는데 기벽이 얇게 성형된 것을 알 수 있다. 몸통은 구형(球形)에 가까이 둥글게 성형했고 어깨부분에 승석문이 시문되었 으나 몸통 아랫부분 및 바닥에는 승문(繩文)이 겹쳐서 나타나고 있다. 바닥은 눌려서 편평하며 중앙이 들려져 있다. 규모 : 높이(高) 16.0cm, 입지름(口經) 9.6cm, 바닥지름(底經) 7.3cm 웅포리 백제고분군 출토 개배(蓋杯) 웅포면 웅포리 산 90번지 웅포리 백제고분군 93-4호 출토된 회청색의 경질 토기로서 태토(胎土)에 가는 모래입자(砂粒)가 많이 함유되어 있다. 바닥은 둥글고 깊으며, 작은 편에 속하는 개배(蓋杯)이다. 구연(口緣)은 직립 (直立)하고 입술 부분에는 각을 두고 성형하고 있다. 뚜껑받이 턱을 두었고 둥 근바닥은 덧붙인 흔적이 나타나 있는데 날카로운 시문구를 이용하여 깍은 흔 적도 남아 있다. 구연과 뚜껑받이 턱에 사용 흔적이 남아 있다. 규모 : 높이(高) 3.0cm, 입지름(口經) 9.2cm 함라면 > 소룡마을 장운선(1942)남자 구 술 사 웅포 입점리고분 아시죠? 거기에 궁골이라는 디가 있어, 궁골. 거기에서 왕이 살았다가 인제 그 멸망허니까 묘지는 거그다 얄푹허니 썼더라고요. 거기에서 금동관이 나오고 금 만들어 신, 신이 나왔거든요. 거기에 오신 분은 왕이 아니 고 왕 형제간인가 무슨 저 한 가닥을 끌코 내려왔어요, 살을라고. 왕의 그 후 손들이. 후손인가 형젠가는 몰라. 구덕리 사덕유적 구덕리 사덕유적은 왕궁면 구덕리 사덕마을 호남고속도로 익산 JCT지점에 위 치한다. 유형은 대체로 주거지, 수혈유구, 고분 등이다. 시대는 원삼국시대부터 백제 때까지 해당한다. 이 유적은 전주~함양간 고속도로 건설공사(익산-장수 구간)의 일환으로 1996년 지표조사가 실시되었고, 2002년 6월 4일부터 9월 사 덕 유 적 익 30일까지 시굴조사가, 그리고 2003년 3월 27일부터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실 산 시되었다. 발굴면적은 약 80,000 로 전체적으로 4개의 능선구역과 논 구역을 향 포함하고 있다. 그 가운데 1능선의 조사 유구는 주거지 42동, 수형 47기, 분묘 토 14기, 굴립주 1동, 성격이 불분명한 장방혈 수혈 1기 등이 확인되었다. 주거지 지 는 남북으로 향하는 능선의 동사면 해발 50m에서부터 확인된다. 주거지간에 는 일부 2~3기의 중복양상이 확인되지만 대부분 단독으로 조성되었다. 조사된 주거지는 모두 방형계이다. 35호 주거지의 경우 가장 규모가 큰데 동서 770cm, 남북 650cm, 잔존깊이 60cm이다. 주거지의 내부시설로는 주공, 화덕, 벽구, 배수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주공은 평면상의 분포에서 정형성을 발견할 수 없으며, 주거지외부와 벽에 주공이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전북 서해안지방 33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38 에서 확인된 4주식 주공형태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화덕시설은 대 부분의 주거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주거지에서 출토되는 유물로는 장란형 토기, 심발형토기, 호형토기, 주구토기, 시루 등이 있고 단경호, 대형옹편, 개배, 파배 등이 있다. 수혈유구는 평면형태가 방형과 원형, 부정형으로 나눌 수 있 다. 수혈의 깊이는 100cm 이하가 7기, 100~400cm가 23기이며, 400cm이상의 것도 4기가 있다. 출토유물은 주거지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하다. 한편 발굴조 사가 완료된 13기의 분묘는 횡혈식 석실분인 3호분과 일상용 토기를 사용한 12호분, 잔존상태가가 미미한 14호분을 제외한 대부분 횡구식 석곽분이다. 그 가운데 횡혈식 석실분인 3호분은 주위에 주구를 돌리고 있다.(호남문화재연구 원, 2003 사덕유적발굴조사-익산~장수간고속도로건설구간내 ) 고도리석불입상 일명 금마의 수문장 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고도리 석불은 보물 제46호 ( 지정)이`며, 현재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금마면 동고도리 1086번지 와 서고도리 400-2번지에 각각 위치하고 있다. 석불높이는 4.27m이며, 사각석 주(四角石柱)에 불상을 얇게 조각하였고 머리에는 방형 보관을 쓰고 있는 고 려후기의 불상의 특징을 갖고 있다. 이 불상은 1858년(철종9년) 이 고을에 부 임한 군수 황종석(黃鐘奭)이 넘어져 있던 석불을 세우고 건립한 석불중건기 에 의하면 금마는 동서북의 3면이 모두 산으로 막혀 있는데, 남쪽만 터져 있 어서 마을의 수호를 위하여 이곳에 석불을 세웠다고 한다. 이 불상은 민속적 인 감각이 가미된 특이한 것으로서 금마의 수호신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고 금마(金馬) 소재지에서 전주(왕궁리 오층석탑)쪽으로 약 1km 쯤 가다보면 오 도 른편으로 들판에 금마를 남류(南流)하는 옥룡천(玉龍川)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익 약 200m로 떨어져 마주보며 2구(驅)의 석불입상(石佛立像)이 있다. 이를 속칭 산 인석(人石)이라고도 부른다. 현재는 길이 정비가 잘 되어 사람들이 자유로이 석 향 다닐 수 있도록 하였고, 옥룡천에는 다리를 가설하여 양쪽을 넘나들며 2구의 불 토 석상을 두루 살필 수 있도록 정비하였다. 그리고 석불입상 주위는 석축을 쌓 지 아 정비를 잘 해 놓았다. 이 2구의 석불입상은 하나의 사다리꼴의 석주(石柱) 리 입 에 불두(佛頭)로부터 석좌(石座)까지를 조각하였다. 높이가 4.27m나 되고 머리 상 위에는 네모꼴의 몸통보다 넓은 관(冠)을 얹었으며, 얼굴은 가늘게 뜬 눈, 작은 코, 옅은 웃음기를 담은 가느다란 입 등이 간략하게 표현된 모습은 매우 소박 하면서도 친근하여 오히려 장승과 같은 인상을 풍긴다. 이 석상은 하나의 돌 기둥에 머리에 쓴 관부터 석대좌까지를 조각하였는데, 뒤에서 보면 네모꼴의 모자를 쓴 사각석주(四角石柱)로만 보일 정도로 윤곽이 분명하지 않고 이마에 백호(白毫)가 없고 목에 삼도(三道)가 없으며, 두 손이 결인(結印)하고 있는 모 습이 아닌 점으로 보아 불상이라고 하지 않고 다만 석인상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나, 머리 위에는 높은 관을 쓰고 가늘게 뜬 눈, 작은 코, 가느다란 입술, 한 줄로 처리된 목, 복부 앞에서 손가락을 끼고 있으나, 법의(法衣)로 가려진 양팔, 목에서부터 평행선으로 흘러내려 양쪽 발등 위에 와서 좌우로 벌어진 옷 모양 등의 모습에서 신체의 표현이 절제된 서대한 불상이 만들어졌던 고려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 37

339 시대의 불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사계절 변해가는 주변 들판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어울리는 지킴이처럼 소박해서 믿음직하다. 목은 한 줄로 처리되었고 양팔은 복부 앞에서 손가락을 끼고 있으나 옷으로 가려졌고, 석좌는 앞쪽을 깎아 모를 내었고 발등은 간략하게 처리되었고 어깨는 그대로 흘러내려 아주 좁게 처리되었다. 머리에 얹힌 관만 별석( 別 石 )으로 만들고 몸 통은 한 돌로 만든 이 똑같은 2구의 석불입상( 石 佛 立 像 )은 멀리서 바라보면 불상( 佛 像 )이라기보다는 늙은 도사( 道 士 )가 마치 금마읍의 동구에서 금마를 수 호하는 수호신과 같이 서 있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흔히 인석( 人 石 )이라 호칭 되고 있는 것이다. 이 부근에 위치한 입석리( 立 石 里 ), 구기리 등에서 구전( 口 傳 )되어 오는 촌로( 村 老 )들의 구술( 口 述 )에 의하면 벅수라고 부르기도 하며 장 성 또는 장승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이 2구의 입상 중 동편의 입상은 남자상 ( 男 子 象 )이고 서편의 입상은 여자상( 女 子 象 )이라고 한다. 불상을 세부적으로 보 면 사다리꼴 돌기둥에 의문뿐만 아니라 대좌나 신체의 부분 등을 겨우 나타내 고 있으며 머리에는 파주 용미리석불입상과 같은 사각형인데 볼은 약간 둥글 며 조금 튀어나온 턱이 목 대신 몸통과 얼굴을 구분해주고 있다. 거의 평면에 가까운 안면에 가는 눈과 눈썹 그리고 짧은 코와 작은 입을 음각선으로 나타 내었는데 괴량감은 없지만 퍽 차분하고 웃음기 머금은 인상적인 상호임을 느 낄 수 있으며 극히 단순하고 형식적인 형태의 귀가 길게 묘사되어 있다. 몸통 은 사다리꼴의 사면체 석주에 불과할 뿐이며 옷은 통견으로 양어깨에서부터 평행선을 이루며 내려와 발목에서 좌우로 갈라져 양측면까지 이어졌다. 의습 이 신체보다 약간 도드라지게 되어 있으나 무늬는 전혀 없다. 앞으로 모아 배 에 붙인 손과 팔의 일부가 음각선으로 표현되어 있고 대좌를 밟고 선 발도 형 식적인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 대좌는 신체보다 약간 커서 앞으로 튀어나오게 되어 있으나 역시 아무런 무늬가 없다. 일직선에 가까운 사다리꼴 석주 같은 자세라든지 극히 단순화된 비사실적 표현수법 특히 도포 같은 옷을 걸치고 봉 분처럼 쌓아올린 흙더미 위에 서 있는 모습은 분묘의 문관석 인상과 흡사하여 불상이라기보다는 마을을 수호하는 무속적 성격을 띤 석상인 듯도 하다. 이 상들은 조각수법이 지극히 단순하고 소극적이어서 세부적인 고찰은 어렵지만 높은 관을 쓴 점이라든지 그 위에 보개를 올려놓은 점 등은 이웃하고 있는 논 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과 임천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연 관성을 지니고 있다 하겠으나 조성 시기는 훨씬 뒤인 고려시대 말엽으로 짐작 된다. 이 석불입상( 石 佛 立 像 )은 넘어져 방치되어 있던 것을 조선 철종 9년 (1858)에 익산군수로 부임한 황종석( 黃 鍾 奭 )이 다시 세우고 군남석불중건기( 郡 南 石 佛 重 建 記 )의 비문을 남겼다. 일명 쌍석불중건비( 雙 石 佛 重 建 碑 )라고도 불리 는 비석의 비신( 碑 身 )은 대리석( 大 理 石 )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가 158cm, 폭이 66cm, 두께가 16cm로 형태는 호패형( 戶 牌 形 )이고, 화강암으로 된 방형대석( 方 形 臺 石 ) 위에 세웠다. 비의 글은 하완군민( 下 浣 郡 民 ) 소휘건( 蘇 輝 線 )이 기( 記 )하 였다. 이 비문에서 이 석상을 불상과 같다고 하였기 때문에 불상으로 알려지 게 된 것이다. 이 석불중건기에는 항간의 이에 대한 전설을 몇 가지 수록하여 338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40 놓았다. 즉 금마는 익산 구읍(舊邑)의 자리인데 동 서 북의 3면이 다 산으로 가로막혀 있다. 그런데 유독 남쪽만이 터져 있어 물이 다 흘러나가 마을의 기 가 허하게 생겼기에 기가 누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 한다. 즉 익산읍을 만들 때 수류(水流)의 유출구가 낮아 공허하기 때문에 이를 비보하 기 위하여 두 개의 석불, 즉 음양의 쌍불(雙佛)을 돌에 새겨서 세운 것이라고 하여 수구막이를 위하여 이 석불이 세워졌음 을 말함이다. 또한 금마의 주산 인 금마산의 형상이 마치 말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말에는 마부가 있어야 하 기 때문에 마부로서 인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기에 금마산을 혹자는 마이산 (馬耳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석상은 남녀 석상으 로서 이들이 서 있는 사이로 옥룡천이 흐르기 때문에 이들은 평상시에는 만나 지 못하다가 섣달 그믐날 밤 자정(子正)에야 옥룡천 냇물이 꽁꽁 얼어붙으면 그 때야 두 인석은 서로 건너와서 껴안고 그동안 맺혔던 회포를 풀다가 닭이 울면 헤어져서 다시 제자리에 가 선다고 한다. 이 석불입상은 풍수설(風水說) 에 얽힌 설화만 간직한 채 아무 유적이 없는 들판에 쓸쓸히 서 있는데 아마도 이는 불상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입석의 수호신적(守護神的)인 입장에서 동이 를 수호하는 신상(神像) 즉, 동호신(洞護神)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 또한 이 입 상을 세운 다른 설로는 금마의 지세가 대인(大人) 배출형이라 그 기운을 누르 기 위하여 세웠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이와 유사한 석상의 예는 충남 예산지방에서도 볼 수 있다. 덕산에서 삽교읍으로 들어서자면 오른쪽으로 있 는 수암산 자락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석조보살입상이 그것이다. 산 중턱에 세 워진 이 석상은 전체적으로 굴곡이 없는 원통형으로서 머리 위에 관을 쓰고 있다. 이 석불입상이 자리한 곳에서 남쪽으로 약 2km 정도 가면 국보 제 289 호 왕궁리 5층 석탑이 위치하고 있다. 익산 고도리 석불입상 사랑은 지상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견우와 직녀가 만났다는 오작교는 사랑의 가교(架橋)다. 영원이라는 말은 아마 영혼까지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바로 옆 금마면 고도리에는 석불입상 두 기가 익 200m 쯤 떨어져서 마주보고 있다. 이 석불입상은 인근 논에 버려져 있던 것 익 을 조선 철종 때의 익산군수 황종석이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고 한다. 마을 사 산 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석불입상의 하나는 남자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라고 시 하는데 처음 보는 이는 어느 쪽이 여자인지 갸우뚱한다. 관 둘은 사랑하고 있으나 서로 만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가운데로 흐르는 광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그리워하며 망부석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책 둘은 서로 만나지 못하다가 1년에 딱 한번 만나게 되는데 그날이 섣달 해일 자 (亥日) 자시(子時)이다. 이날은 까마귀가 오작교를 놓듯이 옥룡천이 얼어붙어 그 위에서 회포를 풀다가 닭이 울면 각자 자리로 돌아서야 한다고. 이 석불들 의 사랑은 다시 1년을 기다린다고 한다. 사랑은 기다림이 있기에 더 애달픈 것일까?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 39

341 토속적인 수호신 표정의 인석(人石) 이 석불입상이 어떤 목적으로 세워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석불 옆에 세 워진 석불중건기 를 통해 쓰러져 있던 석불을 세우게 된 계기만 전해질 뿐이 다. 비문에 의하면 이 석불입상은 금마의 기운을 보호하려는 비보풍수적인 성 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금마는 익산의 구읍자리로 동서북의 삼면이 다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데 유 독 남쪽만 터져 있어 물이 다 흘러나가 허허하게 생겼기에 읍 수문의 허를 막 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또 일설에는 금마의 주산인 금마산의 형상이 마치 말 모양 같다고 하여 말에는 마부가 있어야 하므로 마부로서 인석(人石) 을 세웠다고 한다. 섣달 해일(亥日) 자시(子時)의 만남 무슨 연유였는지는 모르나 옛사람이 세웠다가 쓰러진 석불. 그리고 그것을 다시 세운 후세 사람의 마음은 같았을 것이다. 앞 세대가 뒷 세대에게 전해주 는 것이 꼭 재물만 있겠는가? 방비와 경계, 인정과 배려가 풍속을 만드는 것. 이런 연유로 해서 이 석불입상은 인석(人石)이라고도 불린다. 멀리서 이 불상을 보면 마치 늙은 도사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들판 가 운데 서 있기에 더욱 그런 것 같다. 대좌(臺座)와 불상을 같은 돌에 새겼는데, 앞면을 약간 깎아 대좌 같은 모양을 만들고 있다. 사다리꼴의 돌기둥 같은 신 체나 비사실적인 조각수법이 마치 분묘(墳墓)의 석인상(石人像)과 비슷하다. 가 까이 가서 보면 사다리꼴 모양의 돌기둥에 얼굴, 손, 대좌 등이 표현되어 있 다. 또 머리에는 사각형의 높은 관(冠)이 있고, 그 위에 다시 사각형의 갓을 쓰 고 있다. 사각형의 얼굴에는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이 간신히 표현되어 있 는데, 토속적인 수호신의 표정이다. 그리고 목은 무척 짧게 표현 되어서 어깨 와 얼굴이 거의 붙어 있는 셈이다. 몸은 굴곡이 없으며 팔은 표현되지 않고 손의 모양이 간신히 배에 나타난다. 도포자락 같은 옷의 새김은 특별한 무늬 없이 몇 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신체표현이 지극히 절제 된 거대한 석상이 많이 만들어지는데 고도리 석불입상 역시 그러한 작품 중의 하나로 보인다. 섣달 해일 자시에 정말 그들은 서로 만나 1년 동안의 회포를 풀까? 이 두 개 의 석불이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어쩌면 사람의 내면을 반영한 것인지 도 모른다. 전설은 수많은 세월에 걸쳐 정서적으로 공유된 것이다. 사랑은 우 리에게 영원한 과제이다. 비보풍수든 아니면 민간신앙이든 남녀로 구분하여 오랜 세월 들판에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은 외로워 보인다. 아무리 돌이라고 할 지라도 가슴이 서먹서먹한 것이다. 태 익 태봉사(胎蜂寺) 봉 산 태봉사는 삼기면 연동리 150번지 죽청마을 태봉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대 사 향 한불교 태고종에 속하는 사찰이다. 이 사찰이 언제 창건되어졌는가에 대해서 340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42 는 문헌이나 금석문 자료에서는 전혀 알 수 없다. 단지 이곳에서 백제시대(百 濟時代) 양식의 삼존석불(三尊石佛)이 발견되고, 또한 백제 와당편이 수습되었 다고 전하고 있어 백제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판단될 따름이다. 좀 더 확실하 게 말하면 백제 무왕이 익산에 궁성을 짓고 미륵사를 창건하는 등 무왕의 익 산경영시기인 7세기 전반 경에 창건된 사찰로 판단될 따름이다. 이후의 사적 도 전혀 알 길이 없다. 단지 현 사찰의 중창은 바로 이곳에서 삼존석불이 발 견됨에 따라 연유한다고 하겠는데 발견경위와 사원 중창경위에 대해서는 다음 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지금 태봉사의 창건주이며 주지의 생모인 청송심씨(靑 松宷氏) 묘연화(妙蓮華) 여인의 전언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익산 시 삼기면 연동 본가에서 삼대독자인 현 주지의 수명장수를 위해 산신기도를 드렸는데 이때 산신님의 현몽으로 안내를 받아 이곳에 오니 뜻밖에 삼존석불 토 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계기로 삼존석불이 있는 지점에 지 불당을 짓고 절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불당은 작은 규모로 세워 신 앙행위를 하여 오다가 1957년 지금의 대웅전을 다시 짓고 이곳에 삼존석불을 옮겨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을 태봉사 라고 하게 된 것은 사찰 뒤 의 산 이름이 태봉산이란 데서 연유한다. 익산은 기자조선준왕이 위만의 난을 맞아 수많은 궁인들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들어온 지역이라고 하는 사실을 문 헌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또한 많은 준왕 관련 전설이 채록되고 있는 지 역이다. 전설에 의하면 익산에 온 준왕이 왕자를 낳자 이곳에 태를 묻어 태봉 산 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태봉사라 하였는데 득 남을 위한 기도신앙으로 유명하고 실지 영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태봉사와 더불어 인근의 석불사에는 백제시대의 석불이 각각 모셔져 있어서 주목되는 지역으로 당시 불교문화의 전파경로를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 여와 통하는 교통로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주목되고 있다. 고조선 준왕의 태를 모신 곳 익산이라는 지명이 한반도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기원전 194년 고 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에게 쫓겨 이 지역에 터전을 잡고 나서다. 마한의 왕 이 된 준왕은 천하의 모든 것을 가졌으나 슬하에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전국 익 의 영험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득남을 위한 기도를 했다. 그래도 아들 소식은 산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어느 날 왕은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런데 꿈속에 시 서 봉황 한마리가 갑자기 높이 솟아올랐다. 왕은 눈이 부셔서 봉황의 모습을 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솟아오른 봉황이 자신에게 다가왔다가 다시 광 훨훨 날아 미륵산 넘어 어느 작은 산에 사뿐히 내려앉으며 꿈이 깼다. 책 봉황이 상서로운 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왕은 봉황이 앉은 곳을 찾아 그곳 자 에 석불(石佛)을 정성껏 모시고 기도에 정진했다. 준왕이 기도를 시작한 지 백 일이 지나자 왕비는 임신을 했다. 이후 왕은 세 아들을 얻었고 아들들의 태 (胎)를 묻은 후 산의 이름을 태봉(胎峯) 이라고 불렀다. 백제의 무왕은 이 산이 영험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 움집(幕)을 짓고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기도했는데 어느 날 삼존불상이 야지에서 비바람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 41

343 을 맞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무왕은 즉시 사람을 시켜 이곳에 절을 짓게 하고는 태봉사라고 했다.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태봉사의 창건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진다. 예 전에 한 여자가 삼대독자인 아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산신기도를 하다가 산신의 현몽으로 아미타 삼존불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지금의 사찰을 세웠는 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절은 허물어지고 이 불상도 땅속에 묻혀 있었다. 그 러다가 1931년 심묘련(深妙蓮)이라는 여자의 꿈에 나타났다. 잠에서 깬 여자는 꿈에서 본 곳을 파내자 불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지금의 태봉사는 1955년에 세워진 것이다. 위의 전설들은 모두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오는 것이니, 어느 것이 맞는지 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지금도 아들을 얻으려고 이곳에 와서 불공을 드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일종의 기자신앙(祈子信仰)의 성격이 강한 사찰인 것 만은 분명해 보인다. 심곡사(深谷寺) 미륵산 북쪽 기슭 장암마을 위쪽에 자리 잡은 심곡사는 대한불교조계종(大韓 佛敎曹溪宗) 제 17교구 금산사(金山寺) 말사이다. 심곡사(深谷寺)는 신라말엽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창건하였고 허주대사(虛舟大師)가 조선시대에 와서 중건 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동국여지승람 에도 심곡사는 옛 사원으로 수록 되어 있다. 이 절은 긴긴 세월 지나오면서 절터를 옮기기도 하였는데, 100여 년 전 산등성이 너머 200여 미터에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 연전에는 한 밤중에 집중 호우로 당시 고시를 준비하던 젊은이들이 매몰 참사 당하는 사고 도 있었지만 날로 면목이 새로워지고 있다. 1997년에도 주지스님의 선방과 미 륵석존이 새로 조성되었다. 경내에는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왼쪽에 삼성 심 곡 사 석 탑 익 산 향 토 지 각(三聖閣), 오른쪽에 명부전(冥府殿), 그 뒤에 요사채와 대웅전 앞에 7층 석탑 이 있고 절로 오르는 길가에 7기의 부도(浮屠)가 있다. 심곡사(深谷寺) 칠층석탑(七層石塔) 미륵산의 후미 동쪽 계곡에 있는 심곡사(深谷寺)의 7층 석탑은 단층의 기단 위에 7층의 석탑을 건립한 것으로서 탑의 구조를 보면, 지대석과 지복석 위에 대좌형식을 따른 기단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7층의 탑신과 옥개를 올렸으며, 옥개의 정상에는 보주형의 상륜을 안치하였다. 지대석은 그 윗면이 지표면과 일치하고 있어서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으며, 그 위의 지복석은 비교적 높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 위에 대좌형식으로 된 하대석과 중대석 및 상대석이 별석으로 조성되었다. 하대석의 각 면에는 단엽 6판 연화문이 조각되었으며, 연판의 끝은 귀꽃모양의 장식을 한 복력이다. 중대석도 1매의 석재로 구성되 었는데 우주나 탱주가 없는 무각의 부재로 설치하였다. 상대석은 1매의 석재 로 앙련대와 탑신을 받치는 신대를 각출하였다. 앙련의 연판은 단엽이며, 하대 석과 마찬가지로 연판마다 주연을 돌려 구획하고 있으며, 이들 사이에는 역시 형식적인 간엽을 각출하였다. 이 기단 탑신은 낮아 비교적 안정감을 보이고 342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44 있으며, 기단 중대석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각출이 없다. 옥개석은 옥개받침을 낮게 삼단으로 각출한 형식적인 표현을 보이고 있다. 낙수면은 낮아 매우 완 만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으며, 내림마루형의 우동을 표현하였다. 낙수면의 끝 은 수평으로 이어지다가 전각에 이르러 심한 반전을 보이고 있다. 부처 지장 관세음보살 목조삼존불좌상 심곡사는 신라 때 무염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무염대사는 신라 선문구산(禪 門九山) 중에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조이다. 무염대사는 아홉 살 때 해동신동(海東神童)이라는 아호를 받았고 12세에 출가하여 설악산 오색석사(五 色石寺)에서 법성(法性)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정조사(正朝使) 김양(金陽)을 따라 당나라에 가서 화엄경 을 배우고, 불광사(佛光寺)의 여만(如滿)을 찾아가 서 선법(禪法)을 물었는데 이렇게 20여 년을 중국 전역을 보살행(菩薩行) 하였 다. 충남 보령군 성주사지에는 국보 제8호로 지정된 그의 비가 있어 그의 일 화를 전한다. 심곡사의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건축이다. 팔작지붕의 전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아주 단아한 건물이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지장보살 과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불상 역시 이 건물이 지어지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앞에 있는 칠층석탑이 하나 있다. 이 탑은 원래는 심곡사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가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익 탑의 조형미에 대한 설명은 심곡사탑이 이름처럼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음을 산 알려준다. 형식은 신라의 탑과는 사뭇 다르며 그렇다고 다층석탑 양식을 따르 시 고 있는 고구려 형태도 아니다. 대부분 오층석탑인 백제양식에도 차이가 있다. 관 그런데 곰곰이 살펴보면 탑의 여기저기에서 미륵사 서탑에서 보이는 백제인의 광 손길이 느껴진다. 탑신은 연약하고 옥개석의 경사가 완만하며 옥개받침을 간 책 결하게 표현한 것이다. 단지 받침부분에 나타난 고려시대 탑의 양식과 지붕돌 자 받침에 나타난 조선시대 탑의 양식 등으로 볼 때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양식이 혼재된 것이다. 탑의 일부가 나중에 고쳐진 흔적이 있는데 탑신과 옥개석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지만 정감이 간다. 가녀린 탑신에서 풍기는 외 롭고 쓸쓸함이 느껴진다. 심곡사에서 관심 있게 봐야 할 것이 명부전(冥府殿) 안에 모셔진 26구의 지 장보살과 시왕, 그리고 그 권속이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시는 공간 이다. 지장전(地藏殿)은 지장보살만 모신 전각인데 이곳에 시왕을 같이 모실 경우 명부전이 된다. 불가에 의하면 지장보살은 죽은 사람을 제도하는 보살이 다. 그렇기에 지장전을 찾는 사람들은 얼굴에 슬픔을 깃들여 있다. 지장전은 대웅전의 오른 쪽에 있다. 내부에는 지장삼존상을 중심으로 하여 시왕과 동자상, 사자상과 금강역사 등이 펼쳐져 있다. 출입문 양쪽에선 금강역 사는 근육이 불끈 솟아 있어 보는 사람까지 힘이 솟게 만든다. 금강역사는 원 래 인도 토속신으로 추앙 받았으나 불교에 들어와 잡귀를 몰아내는 수호신으 로 변화했다. 금강저를 들고 눈을 부릅뜨고 입을 다물고 있는 금강역사의 모 습은 그 자체가 위협적이다. 사악한 사람을 힘으로 제압하기 위한 제도(濟度)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 43

345 를 표현한 것이라는데 죄 짓고는 불사도 못 찾을 일이다. 심곡사의 명부전 형태는 호남북부지방의 대표적인 사찰인 완주의 송광사나 익산 웅포의 숭림사 등에서 나타나는데 모두 17세기의 양식들이다. 송광사나 숭림사에는 지장보살과 권속들을 둠으로써 중심에 있는 부처의 존위를 높인 것이다. 또 이들 사찰에서는 불상들을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불이라는 점도 특징이라고 한다. 고 문 헌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전라도(全羅道) 여산군(礪山郡) 불우 심곡사(深谷寺)ㆍ장안사(長安寺) 모두 미륵산에 있다. 석불사 석불사는 삼기면 연동리 산220번지의 낮은 구릉지대 능선 상에 위치하는 평 지가람의 형태이다. 원래 대한불교화엄종의 사찰이었으나 현 주지인 정운 이 석준 스님이 1994년 한국불교 화엄종 본산으로 종교단체 등록하였다. 이 사찰 에는 보물로 지정된 백제시대의 석불좌상과 광배가 있다. 주변에서 가공된 기 단석재와 초석 및 와편들이 간간이 보일 뿐 창건 년대나 원래의 사찰 이름을 살필 수 있는 문헌자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이 석불과장과 광배는 1963년 도에 건립된 보호각이 있었는데 주민들이 이 석불을 미륵불이라고 부르므로 미륵전이라는 당호를 붙여 법당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던 중에 보호각을 철거 하고 목조의 불전을 짓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 절터의 일부가 훼손될 염려 가 있어 유구 조사를 통해 기록을 남기기 위하여 1989년 10월 원광대학교 마 한백제문화연구소의 자비 부담으로 이 일대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 익 석 산 불 향 사 토 지 사를 통하여 출토된 유물 등을 통해 볼 때, 이 석불사의 창건은 백제 무왕 대 인 7세기 전반에 미륵사지 창건에 앞서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 면 백제시대 유물인 평기와의 등문양이 대부분 무문이거나 단선문 정격자문을 보이고 있고, 제작기법에서 6세기 후반으로 보이는 부여 정암리 와요지에서와 같이 와도의 절단 방향이 주로 안에서 밖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 암키와들 은 모두 목판모골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 미륵사지의 원형초석과는 달리 부여 의 군수리사지나 왕흥사지 등에서 보이는 방형초석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이 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폐찰 된 시기는 역시 평기와의 등문양을 통해 볼 때, 미륵사지에서 상감청자와 함께 출토되는 어골문과 국화문 혹은 어골문과 반호 문이 결합된 형태의 것이 하한으로 보이므로 고려시대인 12~13세기경까지는 법등을 이어 오다가 폐찰된 것으로 판단된다. 석불사에 모셔진 석불은 두상이 결손된 것을 후에 다시 만들어 붙였는데 여기에 대하여 전해오는 전설이 있 다. 즉 머리가 떨어져 나간 것은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이 칼로 쳐서 떼 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장 가등청정은 수만의 군사를 몰고 이곳으로 쳐들 어오는데 안개가 느닷없이 껴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왜 장 가등은 군사를 풀어 무엇이 있는가를 보고 오라고 하였다. 군사가 돌아와 서 아무것도 없고 돌부처 하나 외에는 본 것이 없노라고 했다. 가등은 이 말 을 듣고 이렇게 안개가 낀 것은 필시 돌부처의 조화일거라고 하여 돌부처가 344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346 있는 곳으로 대군을 이끌고 와서 한 칼로 석불의 목을 내리쳐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후의 사정을 보아 백제시대에 창건된 석불사는 당시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까지 법등을 이어오다 폐찰 된 후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 불상 뒤의 거대한 광배가 절단되면서 석불의 목이 부러진 것 으로 판단된다. 이후 1963년 이 절단된 광배를 다시 세우고 불두로 새로 만들 어 붙인 후 주변에 작은 보호각 형식의 법당을 지어 석불사 라고 부르다가 1990년부터 새로운 법당을 건립한 후 삼성각과 종각 석탑 일주문 등을 지어 오늘날 가람의 면모로 일신하게 되었다. 부처님의 영험으로 왜군을 물리치다 정유재란 때 익산 쪽으로 쳐들어 온 한 무리의 왜군이 있었다. 그런데 파죽 지세로 밀려온 왜군들은 금마지역에 들어서 꼼짝할 수 없었다. 진격을 해보려 고 하면 안개가 끼어 대낮에도 칠흑 같은 어둠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 이 계속되자 왜군의 장수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당황스러웠다. 그래 서 사람을 풀어 염탐케 했더니 병사들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특별한 기미를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작은 절에 모셔진 부처님에게 사람들이 몰려가서 왜군이 빨리 사라지기를 기도하고 있더라 는 보고를 올렸다. 왜군 장수는 한 밤에 그 영험하다는 석불을 찾아 갔다. 석불은 밤인데도 광채가 빛나서 눈을 뜨고 보 기 힘들 정도였다. 왜군 장수는 안개의 조화가 바로 빛을 발하는 석불의 탓이 라고 여기고 칼을 휘둘러 석불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돌아와 진격하려고 하 는데 맑은 하늘에 비가 쏟아져 내렸다. 그 비에 조총은 무용지물이 되고 막사 익 도 비에 젖어 들었다. 마지막 남은 화약까지 모두 젖어 쓸모가 없게 되자 이 산 때 낫과 죽창으로 무장한 의병들이 습격하여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연동리석불좌상 이다. 전설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이 관 석불의 두상은 원래 것이 아닌 새로 만들어 붙인 것이다. 지역 사람들은 이 광 석불의 두상이 왜병 장수에 의해 잘렸다는 전설을 철석같이 믿는다. 책 석불사에 안치되어 있는 연동리석불좌상은 보물 제45호로 백제시대에 조성 자 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석불이 있는 곳이 석불리(石佛里)이다. 왕궁리오층석탑 이 있는 마을을 탑리라고 불렀던 것과 비슷하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 이미 이 석불이 있었다는 뜻이리라. 석불은 머리만 본래의 것이 아닐 뿐 불신(佛身), 대좌(臺座), 광배(光背)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형상이 아름답다. 불상의 높 이는 156 이다. 당당한 어깨, 균형 잡힌 몸매, 넓은 하체 등에서 서툰 듯하면 서도 탄력적이고 우아한 모습이다. 양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자락은 길게 내려 져서 사각형의 대좌를 덮고 있는데, 앞자락은 U자형, 좌우로는 Ω형의 주름이 대칭으로 2단씩 표현되어 있다. 왼손은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 가슴 에 대고 오른손은 세 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을 구부려 다리에 올려놓은 특이 한 손 모양을 하고 있다. 광배의 중앙에는 둥근 머리광배가 볼록 나와 있고 그 안에 열여섯 개의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바깥에는 방사선으로 퍼진 특징이 있다. 몸 광배도 볼 록하게 나와 있고 바깥 부분에는 불꽃무늬를 배경으로 일곱 분의 작은 부처가 제 5장 부록_대안문화연구소 3 45

347 새겨져 있다. 이 석불상은 대좌의 모습과 광배에 새겨진 무늬를 볼 때 장중하 면서도 세련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전설로 전해지다 현몽해 발굴 원래 이 석불은 이 지역의 전설로만 전해 내려올 뿐 실체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이곳에 모셔져 있다가 정유재란 이후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 1930년 어느 날 연동리에 살던 사람이 신기한 꿈을 꾸게 된다. 부처의 형상을 한 인물에게서 나를 꺼내 달라 는 이야기를 듣고 잠에서 깬 것이다. 그 사람 은 날이 밝자 점지해준 땅을 파 보았는데 그곳에 이 석불이 있어 석불사라는 절을 짓고 모셨다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백제 무왕이 재위 11년경에 선화 공주와 함께 태봉사로 기도하러 가다가 미륵사와 태봉사 사이에 있는 이 지점 에 가람을 세우고 미륵본존불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태봉사의 삼존불상과 수 인( 手 印 )을 비롯해 여러모로 비슷한 면이 많은 연동리 석불좌상은 마멸과 석 회분 때문에 볼품이 떨어지지만 우아하고 세련된 대좌는 백제시대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346 익산 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스토리텔링 조사연구용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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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ßÇ¥¿äÁö229-286 5. 정비계획의 기본구상 5.1 유적 및 유구 정비 복원 사례연구 5.1.1 미륵사지(彌勒寺址) 미륵사지는 삼국유사 백제 무왕조에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로 가는 길에 용화산 밑의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 왕비의 청에 의하여 이곳을 메우고 3개의 불당과 탑, 회랑 등을 세웠 다는 기록이 있으며, 미륵사의 배치는 삼원병렬식(三院竝列式)으로 동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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