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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부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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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의병의 개념과 시기 구분 1. 의병의 개념과 시기 구분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갑오변란과 청 일 전쟁을 전후하여 일제의 군사적 위협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조선인들은 외세 침략을 당면의 극복 과제로 인식하면서 의병을 조직하여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의병 항쟁은 한민 족의 반침략 반개화 투쟁이며, 국권 침탈 이후 독립전쟁을 일으키게 한 정신적이며 인적인 연원이 된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의병이란 맥켄지가 자유를 위한 투쟁 (The Fight For Freedom)에서 정의군 (Righteous Army)이라고 표현하였듯이 정의를 위해 일어난 군대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한말 의병 은 이와 같은 뜻만으로 설명하기가 부족하다. 박은식( 朴 殷 植 )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 國 獨 立 運 動 之 血 史 ) 에서 의병( 義 兵 )이란 민군( 民 軍 )이다. 국가가 위급할 때 즉각 의( 義 )로서 분기( 奮 起 )하여 조정 ( 朝 廷 )의 징발령( 徵 發 令 )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 從 軍 )하여 적개( 敵 愾 )하는 자 1) 라고 정의를 내렸다. 여기에서 의병은 민군으로, 곧 군주의 원한을 풀고자 하는( 敵 愾 ) 충의 군임을 알 수 있다. 즉 의병이란 충의정신에 입각하여 외적의 침략에 자발적으로 무장 항쟁 하여 대항한 민군( 民 軍 ) 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이처럼 한말 의병은 정의감과 충의정신에 기초하여 개화정권을 극복하고자 하였으며, 동시에 일본이라는 외세를 몰아내 국권을 수호 하고자 한 반침략의 구국항쟁의 민족독립운동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의병 정의를 다시 5상[ 常 ; 삼강오륜의 5륜( 倫 )을 의미함-필자] 정신에 입각하여 살펴보면 바로 군신유의( 君 臣 有 義 ) 의 의( 義 )와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의병의 주요 이념이 성리학의 의리론에 기반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내적으로는 사육신과 같은 불사이군( 不 死 二 君 )의 절의파를 배출해 냈다면, 대외적으로 민족의 위기에는 사생취의( 捨 生 取 義 ) 와 주욕신 사( 主 辱 臣 死 ) 의 정신에 투철한 의병으로 표출된 것이다. 따라서 의병이 비록 현재 관점에서는 봉건적이라는 사상적 한계가 있다 할지라도 충군과 근왕이라는 고유의 성격을 내포한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러한 개념의 의병은 이미 임진왜란 때에 나타났다. 임진의병이 보 1)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 國 獨 立 運 動 之 血 史 ), 상해, 유신사, 1920, 제11장 <각지의병지약력( 各 地 義 兵 之 略 歷 )> 11

4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여주었던 근왕정신이 한말 의병에서는 존화양이론( 尊 華 攘 夷 論 )이라는 민족문화의 주체적 논 리가 추가되면서 민족자존적 정치문화운동으로 발전된 것이다. 한말 의병은 비록 초기 단계에는 유학자가 중심이 되어 반침략 반개화 항쟁을 전개하였 으나, 점차 민족의 위기가 심화되면서 여기에 농민과 포수, 심지어는 동학교도까지 합세하 여 민족적 대항전을 펼쳐 갔기에 의병 항쟁은 민족주의 운동으로 발전될 수 있었다. 후기 의 병에는 척사사상보다 반개화성, 특히 반봉건성이 더 나타난다. 의병 항쟁을 민중운동사의 측면에서도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에서 항일운동의 성격이 보이지만, 이를 의병적 이라고 할지언정 의병이라 하지는 않는다. 비록 동학농민군들이 자신들을 충의군 이라고도 불렀을지라도, 동 학의 항일운동 이념은 동학사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동학은 의병운동이라기보다는 반봉 건적 사회개혁 또는 혁명운동의 차원에서 의의를 평가해야 한다. 또한 년간 동학농민전쟁이 전개될 때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일부 지역에서는 민군을 편성하였다. 갑오의려( 甲 午 義 旅 ) 또는 유회군( 儒 會 軍 )이라 불리는 민군은 자신들을 의병이라고도 불렀다. 안중근의 공초( 供 招 )를 보면 조부가 의병장이었다고 기록되었는데,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갑오의려는 관군 또는 일본군과 연합하여 동학농민군과 항쟁하였으니, 항쟁의 대상이 외세가 아닌 동학군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 또한 의병과 구분된다. 민란에 참여한 세력도 그러하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비록 충의군적인 성격을 띠었 다 하더라도 투쟁 대상이 관군이었으니 이들도 의병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의병의 개념을 분명히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의병적 성격 또는 단순히 정 의의 군대 라는 일반적 개념으로서 의병 과 임란과 구한말 외세의 침략에 주자학 사상의 충 의정신에 기초하여 무장 투쟁한 역사적 개념으로서 의병 은 구별해야 할 것이다. 2) 한편 한말 의병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면서 의병사의 체계화를 위한 시기 구분법으로는 2 시기 구분법, 3시기 구분법, 4시기 구분법 등이 있다. 위 구분은 시간의 원근, 봉기 원인의 차이, 참여층의 변화에 따른 의병 부대의 성격 차이 등을 기준으로 시도되었다. 2시기 구분법은 을미의병을 전기 의병으로, 을사 정미의병을 후기 의병으로 구분하는 것 으로, 주로 시간의 원근과 주도 세력의 성격 차이 등으로 나뉜다. 3시기 구분법은 그간 주 로 이용되던 방법으로 의병 연구의 효시라 할 뒤바보의 의병전 에서 비롯되었다. 3) 이 구분 2) 김상기, 한말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304쪽. 3) 뒤바보, 의병전, 독립신문, 상해, 1920년 4월 27일 5월 27일자. 12

5 1. 의병의 개념과 시기 구분 법은 해방 이후에도 사용되었으며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등 간지( 干 支 )를 사용한 분 류법이 일반화되었다. 4시기 구분법은 1970년 강재언의 주장에서 비롯되었는데, 1초기 단 계( ), 2재기 단계( ), 3고조 단계( ), 4퇴조 단계( )로 구분하였다. 이 구분법은 1909년 일본군에 의한 이른바 남 한 대토벌 작전 이후 의병의 퇴조와 독립군으로의 전환 과정을 별도의 한 단계로 파악한 것 이다. 4) 조동걸도 최근의 연구 성과까지 수용하여, 1전기 의병( ), 2중기 의병 ( ), 3후기 의병( ), 4전환기 의병( )의 4단계 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조선말 반일 의병의 기점을 기존의 1895년 을미의병에서 1894년의 의병으로 고쳐 잡고, 의병의 하한을 1914년 대한독립의군부의 해체가 아닌 1915년 채응언의 체포로 설정한 점이 주목된다. 5) 의병사의 시기 구분과 관련하여 북한에서 출간한 오길보의 조선근대반일의병운동사 도 참고된다. 이에는 의병을 크게 2단계로 구분하여, 119세기 말 반일 의병 운동( ), 220세기 초 반일 의병 운동( )으로 구분하였다. 그 중 제2단계는 다시 1반일 의 병 운동의 재개( ), 2반일 의병 운동의 앙양( ), 3반일 의병 운동의 확대 발전( ), 4일제의 조선 강점을 전후한 시기 반일 의병 운동( ) 의 4단계로 나뉜다. 의병의 기점을 1895년 7월 김원교가 평안도 상원에서 봉기한 상원 의병 으로, 1914년 김정환 의병의 유정리 전투를 의병의 하한으로 잡은 것이 우리와 다르다. 6) 이 글에서는 한말 의병을 전기, 중기, 후기 의병의 3시기로 구분하고자 한다. 4시기 구분 법에서는 1909년 일본군에 의한 남한 대토벌 작전 을 전후하여 후기 의병과 전환기 의병을 구분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이를 한 시기로 묶어 후기 의병이라 지칭하고자 한다. 비록 1909 년 10월 이후 의병 활동이 퇴조한 것은 사실이나, 의병 부대의 활동이 연속되었으니 의병의 이념이나 목적 등의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독립군으로의 전환을 준비하는 특성 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는 1910년 이후에 나타나는 후기 의병의 한 특성으로 볼 수 있으며 별도의 시기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 이와 같은 한말 의병의 전개 과정을 시기적으로 1전기 의병 ( ), 2중기 의병( ), 3후기 의병( )으로 구분할 수 있다. 4) 강재언, 반일의병운동의 역사적 전개, 조선근대사연구, 동경, 일본평론사, ) 조동걸, 한말의병전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조선근대반일의병운동사,

6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2. 의병의 역사적 배경 1) 전기 의병 전기 의병은 1894년 6월에 일본군이 무력으로 경복궁을 침범한 갑오변란, 그리고 을미사 변, 단발령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일어났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고 관군의 연이은 패퇴에 조선 정부는 청에 군사를 요청하 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는 일본에게 조선 침략의 기회를 제공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일본 군은 일본공사관 및 거류민 보호 라는 구실 하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고, 출발할 때부터 청 세력을 물리치고 조선을 대륙 침략의 전진 기지로 차지하려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이들은 서울에 위협적인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1894년 5월 중순 이후 조선 정부에 내정 개혁을 제의 하였으며, 6월 1일에는 총 27개조에 달하는 내정 개혁안을 강요하였다. 조선 정부는 내정 간 섭이라 거절하고, 불법 진주한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면서 철군 후에 독자적으로 개혁할 것 임을 밝혔다. 조선 정부에서는 6월 11일에 교정청을 설치하여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 혁안의 일부를 받아들여 정치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의 태도에 대해 일제는 개전 결의를 분명히 하고, 6월 21일에 경복궁을 공 격 점령하는 갑오변란을 일으켰다. 이 변란은 일제가 조선 침략의 야욕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첫 단계의 사건이다. 경복궁을 무력 점거한 일제는 열강에게 자신들의 행위를 은폐하기 위 하여 대원군을 유인, 입궐시켰다. 대원군의 등장은 곧 민씨 정권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제는 고종에게 정무와 군무를 대원군에 위임토록 조치하였다. 더욱이 조선군의 무장까지 도 강제로 해제시켰다. 이어 부일개화파들에 의한 친일 정권인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 여 갑오경장을 추진하였다. 이 사태에 격분한 동학농민군은 1894년 9월경부터 반개화 투쟁과 아울러 반침략 투쟁을 재개하였으니 이것이 제2차 봉기 이다. 그러나 갑오변란을 비롯한 일련의 사태를 위기상태 로 인식한 세력층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지방 유생들 역시 침략 행위로 간주하여 반침략 투 쟁을 개시한 것이다. 그 징후는 궁궐 침범 1개월 여 후인 7월 말에 나타났다. 청풍의 유생 서 상철( 徐 相 轍 ) 등이 안동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격문에서 궁궐을 침입한 갑오 변란이 직접적 요인이 되어 기병하였음을 분명히 하였다. 지평의 유생 안승우( 安 承 禹 ) 역시 14

7 2. 의병의 역사적 배경 고향에서 의병 봉기를 시도하였다. 을미사변 이전인 1895년 7월 봉기한 김원교( 金 元 喬 )의 상원 의병 또한 봉기의 주요 요인이 갑오변란에 있었다. 이들이 발표한 격문 내용에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한편 척사유생들은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의병 투쟁을 더욱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들 역시 갑오변란을 망국의 시작으로 인식하였다. 유인석( 柳 麟 錫 )이 대표적 인물로, 그는 봉 기하면서 발표한 격고팔도열읍( 檄 告 八 道 列 邑 ) 에서 마침내 갑오년 6월 20일 밤에 이르러 우리 조선 삼천리 강토가 없어진 셈 이라고 통분하였다. 1896년 2월 진주에서 거의한 노응 규( 盧 應 奎 ) 역시 병인소( 丙 寅 疏 ) 에서 갑오변란을 6월의 변 이라 표현하여 을미사변과 같은 변란으로 인식하였다. 한편 홍주 을미의병의 총수였던 김복한( 金 福 漢 )은 갑오변란을 전후하 여 승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자정( 自 靖 )하였다. 그의 심정은 을미의병 후 체포되어 1896년 1월 23일 고등재판소에서 가진 문초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홍주 을미의병 주도자 중의 한 명인 이설 역시 갑오변란에 충격을 받고 우부승지의 직을 사직하고 고향인 홍주로 낙향하였으 니 의병 봉기를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전기 의병이 봉기하였던 또 다른 배경으로 을미사변이 있다. 을미사변이란 1895년 8월 20 일에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된 사건을 말한다. 일제는 갑오변란 이후 조선을 장악하고 개화를 구실로 한 침략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명성황후의 반대에 직면하였다. 러시아 세력과 제휴하려는 명성황후의 시도에 결국 시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는 국제적 범죄 행위 로 조선을 식민지화 하려는 침략 행위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이다. 국모의 시해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일제와 친일 정권에 대하여 적개심이 솟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일제는 자신들의 책임을 부인했으며, 친일 내각도 오히려 폐비 조치를 내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러한 처사에 조선인의 분노는 드디어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폐비 조칙이 공포되던 1895년 8 월 23일 서울에서는 창의소( 倡 義 疏 ) 고시문이 붙었으며, 9월 초에는 왕후의 폐서인에 신하 된 자로서 복수토적( 復 讐 討 賊 )의 의거가 없는가 라는 내용의 고시문이 지방에도 나돌았다. 같은 해 9월 중순에 서울 종로에는 8월 20일의 왕비 시해는 훈련대가 아닌 일본인의 소행 이라면서 적개심을 품은 내용의 방이 붙었다. 원주 지방에서는 사림들이 모여 거의( 擧 義 )의 뜻을 드높이는가 하면 구월산에서도 명성황후 시해의 죄상을 성토하는 집단적인 행동이 있 었다. 한편 안동에서는 8도의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인을 격퇴해야 한다는 격문이 게시되었 15

8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으며 이를 안동부 관찰사가 수거하여 내부에 보고하였다. 1895년 9월 18일에는 대전의 유성 에서 문석봉에 의한 항일 의병이 일어났다. 문석봉은 국수보복( 國 讐 報 復 )을 목적으로 봉기하 여 을미의병의 효시를 이루었다. 이와 같이 서울을 비롯하여 안동, 원주, 구월산, 유성에서 의 의병 봉기는 을미사변에서 비롯되었다. 을미사변은 갑오변란과 함께 반일 의병 투쟁의 주 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추진된 변복령과 단발령 역시 의병 봉기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 용하였다. 조선말 의복 제도는 수차에 걸친 개정을 거쳐 점차 서양식 복제로 바뀌어 갔다. 이 개정은 유생들의 주체적인 문화 인식에 충격을 가져와 반일 봉기에 중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의 바탕에는 법복 으로 상징되는 전통 문화에 대한 독존적이며 배타 적인 가치부여의 동기가 내재해 있었다. 1894년 9월에 의복 제도의 개정 문제가 제기되었다. 군국기무처에서 의제 개정에 관한 의 안을 상정하였던 것이다. 같은 해 12월에는 칙령 제17호를 반포하여 관복을 더욱 간소화 시 키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895년부터 조신의 대례복에는 검은 색 깃인 흑단령을 입게 하고 궁에서의 통상 예복으로 흑색의 두루마기[주의( 周 衣 )]와 조끼형의 관복인 답호를 입고 관모 인 사모( 紗 帽 )와 화자( 靴 子 ; 사모관대를 할 때 신던 신발)를 착용하게 하였다. 또한 일반 백 성에게도 흑색의 두루마기를 입도록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을미변복령의 요체로 흑색의 두 루마기를 입도록 조처한 이유를, 첫째 의제상으로라도 관민을 구별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둘 째는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을미변복령 은 의병 봉기의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대표적인 을미의병 장 유인석이 을미변복령 이 반포된 뒤 을미훼복시립언 ( 乙 未 毁 服 時 立 言 )을 발표하여 천지 ( 天 地 )와 성현( 聖 賢 ), 선왕( 先 王 ), 부조( 父 祖 )에 죄를 지은 것이니 살아서 장차 어찌하리요 라 고 절규하는 것으로도 입증이 되고 있다. 최익현도 청토역복의제소 ( 請 討 逆 復 衣 制 疏 )를 올 려 의제를 바꾸는 것이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전통적인 의복 제도를 조선 문화의 긍지로 인 식하던 수구적 지식인들은 변복령의 반포로 인해 심각한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들에게 복제의 개정은 그 자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지선극미한 전통 문물의 단 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귀착되었던 것이다. 특히 음사( 陰 邪 ) 로 상징되는 흑색의 복제를 채택 한 데 대해서는 더욱 그러한 성향이 강하게 노정되었으니, 변복령은 을미의병의 중요한 동인 16

9 2. 의병의 역사적 배경 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김홍집 내각은 1895년 11월 15일에 단발령 을 선포하였다. 이때 내세운 명분은 위생에 이 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 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교 윤리가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 깊 이 뿌리 내리던 조선 사회에서 상투는 곧 인륜의 기본인 효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 로 단발령이 내리자 유생들은 이것을 신체적 박해로, 더 나아가 인륜의 파멸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반감은 절정에 달하였다. 단발령 공포는 백성들의 뜻과는 배치되는 일부 매판관리 집 단에 의한 자의적 조치였다. 학부대신 이도재마저도 단발령이 공포된 직후 사직 상소를 올리 고 단발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단발령이 사회적 문화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처사임을 비난하였다. 또한 정계에서 은퇴한 김병시도 단발령 철회를 호소하는 상소 를 올렸다. 그는 단발령이 일제의 사주를 받은 부일파들의 소행임을 지적하였다. 단발령에 대한 재야 유생들의 반향은 더욱 커 극단적인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단호한 행동 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단발령이 반포된 다음날로 의병 투쟁의 기치를 들고 울분을 토로한 남한산성 의병장 김하락( 金 河 洛 )은 재야 유생의 입장을 대변한다. 유인석도 이러한 단발령에 대하여 변복령과 동일한 차원에서 화이론적 가치관에 입각해 통박하였다. 그는 상투와 원몌 ( 圓 袂 ; 둥근 소매) 의 수호 여부에 따라 화이( 華 夷 )와 인수( 人 獸 )의 결판이 난다고 보았다. 즉 상투와 원몌가 화( 華 )와 인( 人 )을 상징하고 수구와 자주를 의미한 데 비해 삭발과 변복은 이 ( 夷 )와 수( 獸 )를 상징하고 개화와 예속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유교 통념의 사회에서 단발령은 한민족의 문화적 자존의 표상이던 상투를 제거함으로 전 국민의 울분을 자아냈다. 강요된 단발령은 결과적으로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걸 쳐 큰 혼란을 야기시켰다. 그리하여 단발 강요에 대한 반감은 개화 자체를 증오하는 감정으 로 발전하였고, 이것은 또 일본화로 받아들여져 반일 의식으로 연결될 수가 있었다. 즉 유생 들은 개화를 상징하는 단발령을 인륜을 파괴하여 문명인을 야만인으로 전락케 하는 처사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전통질서를 수호하려는 유생들은 반침략 반개화의 의병을 봉기하여 이를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17

10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2) 중기 의병 중기 의병은 1904년 2월 개시된 러 일 전쟁과 그 직후에 체결된 한일의정서, 그리고 1905년 11월 강제 늑결된 을사5조약 등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에 맞서서 민족의 독립을 지키 고자 봉기하였다. 1904년 2월에 일제는 러 일 전쟁을 도발하였다. 청 일 전쟁에서 청국을 물리친 일제는 영국과 미국이 청국과 필리핀에서 우월권을 갖도록 보장해주는 대신 한국에 대한 우월권을 보장받았다. 그리고 다시 조선에서의 경쟁자인 러시아를 물리치고자 전쟁을 도발한 것이다. 러 일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2월 9일 서 울에 입성하여 전쟁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면서 중립 선언을 무시하고 공수( 攻 守 )와 조일( 助 日 ) 을 앞세운 의정서의 체결을 강압하였다. 일제의 강요 아래 2월 23일에 한일의정서 가 이 지용과 하야시 곤스케( 林 權 助 ) 사이에 체결되었다. 모두 6개조로 된 의정서의 내용은, 1한 국 정부는 일본을 신임하여 시설 개선 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일 것, 2일본 정부는 한국 황 실의 안전을 꾀할 것, 3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할 것, 4제3국의 침략으로 한국에 위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일본은 이에 곧 대처하며, 한국 정부는 이와 같은 일본의 행 동을 위하여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고 일본 정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략상 필요한 지 역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것, 5한국과 일본은 상호간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서는 협 정의 취지에 위배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지 않을 것, 6조약에서 미비한 사항은 양측 대표가 협의하여 시행할 것 등이었다. 이 의정서는 러 일 전쟁을 수행하는 데 조선의 지원을 명문 화한 것이었으며, 장기적으로는 일제의 조선 침략을 위한 발판이 마련된 것이었다. 이후에 일제는 이를 근거로 대한방침( 對 韓 方 針 ), 대한시설강령( 對 韓 施 設 綱 領 ), 세목( 細 目 ) 등을 강요, 시행하였다. 대한방침에서는 한국에 대한 군사상 보호의 실권을 확립하고 경제상으로 이권의 발전을 도모할 것 이라고 하여 조선에 대한 침략 의도를 더욱 노골화하 였다. 대한시설강령에서도 외정( 外 政 ) 과 재정 을 감독하고, 교통과 통신을 장악한다고 명 시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의 토지는 일본군의 군용지로 전락하였다. 3월 말에는 한국의 통 신 기관도 군용으로 강제로 접수되었다. 5월에는 우리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맺었던 모든 조 약을 폐기시켰고, 경인선과 경의선의 철도 부설과 통신망 가설 등의 이권을 일본이 차지하였 다. 6월에는 전국토의 4분의 1이나 되는 전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였다. 조선인은 이러 18

11 2. 의병의 역사적 배경 한 황무지 개척권 요구로 인해 러 일 전쟁 개전 이래 쌓였던 반일 감정이 폭발하여 반대 집 회 투쟁을 전개하였다. 중기 의병은 1904년의 한 일의정서 체결을 전후하여 시작되었다. 1904년 5월에 허위( 許 蔿 )의 이름으로 작성된 격문이 13도에 발송되었으며, 김동수( 金 東 壽 )의 황성의병소와 홍천의 병소의 격문이 발견되었다. 중기 의병은 1905년 9월에 러 일 강화조약이 조인될 무렵부터 더 구체적인 전개상을 보였다. 그 가운데 원주의 원용팔, 단양의 정운경의 기의가 주목된다. 중기 의병은 1905년 11월의 을사5조약의 늑결로 격화되었다. 일본은 러 일 전쟁 중 미국 과 태프트 가츠라 밀약을, 영국과는 제2차 영 일 동맹을 체결하여 조선 침략에 대한 사전 묵인을 받았다. 이어 러 일 전쟁의 승리로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조 선 정부의 동의만 얻으면 조선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다. 일본은 1905 년 11월에 이토 히로부미를 특파대사라는 자격으로 파견하고 한일협약안을 정부에 제출하며 위협을 가하였다. 이들은 궁궐을 포위하고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고종과 내각은 조약 체결을 정식으로 거부하였으나, 이토가 조약 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한 뒤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승인을 받아냈다. 여 기에 서명한 대신은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으로 이들을 을사오적 이 라고 한다. 그리고 이재극을 통해 황제의 재가를 강요한 다음, 그날로 외무대신 박제순과 일 본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 조인하게 했다. 조약은 모두 5개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제가 행사하고, 그 일을 맡아 볼 통감부를 서 울에 두도록 하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은 일본에 박탈당하여 외국 에 있던 조선의 외교기관은 전부 폐지되었다. 동시에 영국 미국 독일 등의 조선 주재 공사 들은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2월에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으 로 이토가 취임하였다. 통감부는 일본이 필요로 하는 사항을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까지도 직 접 우리 정부에 명령하고 집행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 이에 유생과 전직 관리들이 극렬한 상 소 투쟁을 벌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민영환 조병세 등 뜻있는 인사들은 죽음으로 써 조선의 주권 수호를 호소하였으며, 이근택 이완용 등을 암살하려는 개인적인 의열 투쟁 도 일어났다. 을사5조약이 늑결되자 의병은 전국적으로 발전되었다. 이 시기 일어나 대표적 인 의진( 義 陣 )으로는 홍주의진 산남의진 태인의진 등이 있다. 19

12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3) 후기 의병 후기 의병은 1907년 7월 고종의 강제 퇴위와 같은 해 8월 1일 구한국군의 강제 해산이 직 접적 요인이 되어 봉기하였다. 고종은 년 러 일 전쟁 전후부터 열강에 특사를 파견하여 국권을 수호하려는 외교 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열강 중에서 미국과 러시아에 대하여 측근 신하나 외국인을 파견하여 친서를 전달하며 한국의 독립 지원을 요청하였다. 고종은 1905년 6월에 러 일 강 화회담이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탁지부대신 이용익을 페테르스부르크에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친일적인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중재하는 회담에서 한 국의 독립을 인정하지 못하고 만약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치는 일본이 대한제국 정부와 합의하에 할 수 있다 는 단서조항을 넣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고종은 미국에게도 지원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다. 1905년 7월에는 미국에 체류 중인 이 승만을 밀사로 선정하여 미국 정부 요로에 한국 독립의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전달하게 하 였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주권 유지와 독립 보전에 대한 청 원을 전달하였다. 고종은 전 주한 미국공사 알렌에게도 운동자금 1만 달러와 옥쇄가 찍힌 친 서 등을 전달하게 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러한 요구들을 모두 묵살하였다. 고종은 이와 같은 미국의 반응을 보고 세계 열강에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알리는 외교 활동 을 하게 되었다.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 하여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5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 에게 호소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3인의 특사가 1906년 6월 25 일 고종의 신임장을 가지고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고종은 또 다른 한편으로는 헐버트를 특별 위원으로 임명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태리 헝가리 벨기에 중국 등 9개국 국가원수에게 친서를 전달하고,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 조선 문제를 제소 할 뜻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이상설 등은 6월 27일에 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 에게 일본이 국제법을 무시하고 무력으로 조선을 핍박하였으며, 황제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조선의 정사를 시행한다는 내용의 호소문을 전달하고 평화회의에 대표로 참석하게 해 줄 것 을 요청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일제의 침략상을 담은 공고사 를 각 국 대표들에게 보내고 전문을 평화회의보 에 발표하였다. 이위종은 7월 9일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서 한국의 호소 란 주제의 연설을 하여 즉석에서 각국 기자들은 한국의 처지를 이 20

13 2. 의병의 역사적 배경 해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평화회의 참석은 끝내 거부되었다. 절망과 울분 속에서 식음을 전폐하던 이준은 비분강개하다가 7월 14일에 자정순국 하였다. 헤이그 특사의 활동에 당황한 이토 히로부미는 7월 6일에 이완용을 시켜 고종의 폐위 공작 을 펴게 하였다. 그 결과 소위 비상내각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는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임선준, 농공상부대신 송병준, 법부대신 조중응, 학부대신 이재곤, 탁지부대신 고영희, 군부 대신 이병무 등 7인이었다. 송병준이 이때 고종에게 친히 일본으로 건너가서 천황에게 사죄 하고 황태자의 교육을 부탁하는 일과 대한문에 나가 하세가와( 長 谷 川 ) 대장을 맞이하여 두 손을 묶고 항복하는 일 이라는 패역의 망언을 서슴치 않았다. 7) 일본 정부는 7월 12일에 한국의 내정을 직접 감독 하기로 의결하고, 15일에 외무대신 하야 시 다다스( 林 董 )를 한국에 파견하였다. 이토는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하는 한편, 이완용 내각 에게 고종의 퇴위를 결정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이완용은 16일에 고종에게 퇴위를 권고하기 에 이르렀다. 17일에는 각의에서 다시 고종께 퇴위를 권유하였다. 고종은 격노하여 죽더라 도 퇴위하지 아니할 것 이라고 하였지만, 8) 결국 19일에 군국 대사를 황태자로 대리하게 한 다 는 조칙을 내리고 말았다. 9) 일제는 이를 근거로 20일에 순종의 즉위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며칠 후인 7월 24일에 이른바 정미7조약을 조선 정부에 강요하였다. 이완용 등 친일내각은 순종의 재가를 받아 통감부에서 이를 조인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 제2조 한국정부의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통감의 승인을 받는다. 제3조 한국의 사법 사무는 일반 행정 사무와 구별한다. 제4조 한국의 고등 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제5조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한다. 제6조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없이 외국인을 고용 초빙하지 않는다. 7) 박은식, 한국통사, 제47장 ; 나라자키 게이엔( 楢 崎 桂 園 ), 한국정미정변사( 韓 國 丁 未 政 變 史 ), 1907, 33쪽. 8) 皇 帝 讓 位 前 後 の 重 要 日 記, 장서각 자료, 史 部 2-312, 1907년 7월 12일 17일자. 이 자료는 아사미 린타로( 淺 見 倫 太 郞 )가 작성한 이태왕실록( 李 太 王 實 錄 ) 의 일부분으로, 1931년 2월에 기쿠치 겐조( 菊 池 謙 讓 )가 그 중에서 고종황위의 양위 전후 상황만을 정리하여 편찬한 것이다. 1904년 2월 9일부터 1907년 7월 22일까지의 일기가 포함되어 있다. 9) 고종실록, 광무 11년 7월 18일자 ; 皇 帝 讓 位 前 後 の 重 要 日 記, 1907년 7월 19일자. 21

14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제7조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일한협약 제1항을 폐지한다. 10) 이 조약으로 인하여 통감부가 친일 내각을 직접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중앙 정부와 지방 행정 기관에는 일본인 차관을 비롯하여 수 천 명의 일본인 관리가 임명되었다. 이로써 통감 은 조선의 내정을 장악하게 되었으니,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셈이었다. 정미7조약의 협약안보다 더욱 문제가 큰 것은 극비에 붙인 부수각서 였다. 이 각서에는 협 약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내용이 담겼다. 그 중에는 군대 해산에 관한 조항이 들어 있다. 즉 부수각서의 제3항 군비 정리 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한국 육군의 현상을 보건대 교육은 불완전하고 규율도 엄명( 嚴 明 )치 못하여 일조( 一 朝 ) 유사 시를 당하여 참다운 국가의 간성으로 신뢰할 수 없다. 이것은 필경 용병주의를 취하기 때문 에 의용봉공( 義 勇 奉 公 )의 신념이 풍부한 연소기예( 年 少 氣 銳 )의 장정을 모집할 수 없다는 사 실과 사관에게 군사적 소양을 가진 자가 적다는 사실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 있어서도 장 래는 징병법을 시행하여 정예한 군대를 양성키 위해 지금부터 그 준비에 착수하기 위해 좌개 방법으로 현재의 군비를 정리하고자 한다. 11) 이어서 제3항에는 군대 해산의 방법과 해산병의 처리 문제가 열거되었다. 첫째, 육군 1대대를 존치하여 황궁 수위의 임무( 任 )를 담당( 當 )하게 하고 기타는 이를 해산할 것. 둘째, 군부를 비롯한 육군에 관계하는 관아를 폐지할 것. 셋째, 교육있는 사관은 한국군대에 머물 필요가 있는 자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일본 군대로 부 속시켜 실지( 實 地 ) 연습을 시킬 것. 넷째, 해산한 하사졸( 下 士 卒 ) 중 경찰관의 자격이 있는 자는 이를 경찰관으로 채용하고 기타 는 가급적 실업( 實 業 )에 종사하도록 할 것. 그 방법은 예컨대 간도로 이주시켜 개간에 종 사시킬 것. 둔전병으로 황무지 개간에 종사시킬 것 등이다. 12) 1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1970, 쪽. 1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1970, 237쪽. 1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1970, 쪽. 22

15 2. 의병의 역사적 배경 일제는 고종을 폐위시키고 한국을 강제 병합하는데 다급한 것이 조선의 병권을 빼앗는 것 이었으니, 이에 따라 구한국군의 해산을 강행한 것이다. 일제는 군제 개혁이란 명목 하에 1894년 갑오경장 때부터 조선군의 해산을 추진해 왔다. 군사 고문으로 임명된 노즈( 野 津 )는 1905년 4월에 소위 군제개혁안을 제의하였는데, 군 기구를 확장한다면서 오히려 조선군의 원수부를 해체하였을 뿐 아니라 병력을 반감하였다. 이로서 1907년 현재 조선군은 겨우 7천 여 명에 불과하였다. 해산 당시 조선 군인은 서울에 시위대 2개 연대(1개 연대는 3개 대대)와 헌부( 憲 部 ), 연성( 硏 成 ), 무관, 유년학교 등에 약 5천여 명, 지방진위대에 약 2천여 명이 배치 되어 있었다. 조선군에 대한 해산 명령은 8월 1일에 하달되었다. 아침 7시 서울의 각 대대장급 이상자에 대한 긴급 소집령이 내렸다. 이들은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의 관저에 집결하였다. 해산 조 칙은 군무대신 이병무가 낭독하였다. 이어서 하세가와가 나와서 조용히 해산을 실행하라 고 하면서 장교만은 해산 대상에서 제외하였다고 덧붙였다. 부대로 돌아 온 대대장들은 각 중대 장에게 해산 조칙을 알렸다. 중대장들은 사병들의 총기를 반납하게 하고 오전 10시까지 훈련 원에 집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훈련원에는 이미 해산식 준비를 완료해 놓았다. 그러나 훈련원에 끌려 온 병사는 불과 6백 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미 남대문 쪽에서는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병력이 해 산에 항거하여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훈련원은 총소리에 일시 술렁거렸으 나, 빈손으로 모인 이들은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해산식은 오후 2시가 넘어서 시작 되었다. 소낙비가 퍼붓는 가운데 해산식이 진행되었으며, 하사에게는 80원, 병졸에게는 50 원과 25원(1년 이하 복무자)의 소위 은사금이 지급되었다. 서울시위대를 무력으로 해산시킨 일제는 지방진위대의 해산에 착수하였다. 8월 3일에 개성과 청주진위대, 8월 4일에는 대구 진위대, 5일에는 안성진위대, 6일에는 공주와 해주, 평양진위대, 7일에는 안주진위대, 8일에 는 수원진위대, 9일에는 광주와 의주진위대, 10일에는 홍주와 원주진위대, 11일에는 강화와 문경진위대, 13일에는 강릉과 진남진위대, 14일에는 전주진위대, 16일에는 안동진위대, 17 일에는 울산과 동진( 東 津 )진위대, 19일에는 북한( 北 漢 )과 경주진위대, 23일에는 강계진위대, 24일에는 함흥진위대, 9월 3일에는 북청진위대 등 1개월에 걸쳐 지방진위대를 해산시켰다. 13) 1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1970, 246쪽. 23

16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일제가 구한국군을 강제 해산하자 이에 항거한 군인들과 의병이 서로 연합하여 대대적인 무장 항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해산된 군인의 항전은 서울의 시위대로부터 시작되었다. 8월 1일 해산 조칙에 접한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朴 昇 煥 ) 참령은 비통함을 참지 못하 여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니 만번 죽어도 아깝겠는 가 ( 軍 不 能 守 國 臣 不 盡 忠 萬 死 無 惜 )라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이를 목격한 시위대 군인들은 무장하여 병영을 장악하고 일본군과 시가전을 감행하였다. 서울 시위대의 해산 거부와 항전 소식을 접한 원주 강화 홍주 진주 안동 등 지방의 진위대 병사들 역 시 대일 항전의 대열에 합세하였다. 이들은 각기 의병에 가담하여 의병 전력을 강화시켰다. 원주진위대는 특무장교 민긍호의 지휘 아래 병사층을 중심으로 거의하여 강원도와 충북 일 대에 본격적인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군대 해산 이후 후기 의병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으 니 문경의 이강년 부대, 원주의 이은찬 부대, 영천의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영해 의 신돌석 부대, 호남의 기삼연 심남일 이석용 전해산 안계홍 부대, 충남의 정주원 부 대, 함경도의 홍범도 최덕준 부대 등은 특히 이름난 의병 부대다. 1907년 11월경에는 전국 연합의병의 성격을 갖는 13도창의군이 결성되어 서울 탈환 작전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24

17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1) 전기 의병 1 유성의병 1895년 8월 20일에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친일 내각과 일제가 사건의 책임을 부인하고 명성황후에 대해 폐비 조치를 내리자 조선인의 일제와 친일정권에 대한 항쟁이 개시되었다. 8월 23일부터 9월 사이에 창의소 고시문이나 복수토적을 외치는 고시문과 각종 방들이 서울 도성 안에 나붙고, 지방 각지에서 의병의 조짐이 거세어졌다. 그러나 본격적인 의병 투쟁은 그로부터 한달이 채 안된 9월 18일에 문석봉( 文 錫 鳳 )의 유성의병( 儒 城 義 兵 )에서 시작되었으 니 을미의병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14) 문석봉( )은 1893년 5월 별시 무과에 급제한 후 그해 12월 진잠 현감에 제수되어 충청도에 내려왔다. 문석봉의 의병 투쟁은 을미사변 직후 시작되었다. 그는 명성황후의 시 해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가 민영환 등을 만나 의병의 뜻을 밝혔다. 민영환은 문석봉에게 환도를 풀어주며 격려했다. 그는 우범선을 살해한 인물로 잘 알려진 고영근과도 서울에서 만 났다. 고영근은 문석봉이 봉기하기 직전인 9월 13일에 편지를 보내어 의병을 격려하였다. 대 전 지역의 좌의정 출신인 송근수와 신응조 같은 유학자들도 문석봉의 뜻에 찬동했다. 문석봉은 9월 18일(양력, 11월 4일)에 충청도 유성에서 의기를 들었다. 문석봉은 창의한 후 대장이 되어 선봉에 김문주, 중군에 오형덕, 군향에 송도순을 임명하는 등 지휘부를 조직하 였다. 김문주는 공주 출신의 유학( 幼 學 )으로 문석봉과는 동학군 진압을 위한 소모군 때부터 참모사로 동고동락했던 동지였다. 문석봉은 지휘부를 조직한 후 통문을 각지에 발송하였다. 그는 통문에서 을미사변을 천고에 없는 대변 으로 규정하고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 사직 을 건져야 할 것을 호소하였다. 문석봉은 유성장터에서 부대를 편성한 후 공격 목표를 공주부 관아로 잡고, 우선 무기를 획득하기 위하여 회덕현을 급습하였다. 10월 20일(양력, 12월 6일)에 탈취한 무기로 무장한 3백여 명의 의병이 유성 장터에 모였다. 문석봉은 이를 인솔하고 다음 날 오전에 진잠으로 들어가 군수 이세경을 만나 의병에 합세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이세경은 오히려 의병의 14) 김상기, 조선말 문석봉의 유성의병, 역사학보 134 5합집,

18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동태를 관찰사에게 보고하는 등 협조를 거부하였다. 유성의병은 그로부터 1주일 후인 10월 28일에 공암을 거쳐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공주부 관찰사 이종원은 전 중군 백낙완과 이 인 찰방 구완희에게 각각 100명씩 이끌고 가 대응케 하였다. 의병부대는 이들과 공주 와야동 (지금의 공주시 소학동)에서 일전을 겨루었으나 매복했던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문석봉은 패산( 敗 散 ) 후 중군 오형덕 등과 함께 경상도 고령, 초계 등지에서 재봉기를 준 비하였다. 우선 고령현감에게 원조를 요청하고, 감역 윤희순으로부터 군자금 지원의 약속을 받기도 하였다. 초계군수 신태철은 관에서 상금 만금을 그대들에게 걸었으니 잠시 숨어 후 일을 도모하시오 라고 안위를 걱정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고령현감의 고변으로 순 검들에 의해 체포되어 대구부에 구금되고 말았다. 문석봉의 유성의병은 개화정권의 구조적 모순 타파와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격퇴라는 민족 적 과제를 쟁취하지 못하였으나, 을미사변의 비보에 한국인이 즉각적으로 일제와 친일 내각 에 항거하였으며 나아가 단발령 공포 후 의병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유성의병은 회덕의 송근수, 진잠의 신응조 등 중신들의 찬동과 협조 속에서 가능하였다. 또 한 송준길의 후손인 송도순과 김경여의 후손인 김성의 등의 참여는 유성의병이 향촌 유림 세 력의 지지기반 위에서 반침략 항일 의병을 전개하였음을 알려준다. 2 홍주 을미의병 홍주 을미의병은 청양의 안창식 등 재지 유생들과 김복한 등 홍주 지역 관료들의 연합으로 전개되었다. 안창식 등은 을미사변의 비참한 소식에 접하고 의병 모집 무기 수집 등의 구체 적인 행동 개시에 들어갔다. 이들의 의병 추진은 11월 15일에 단발령이 공포된 후 더 구체화 되어 갔다. 한편 홍주 출신의 김복한과 이설은 문과에 급제하고 승지의 직임을 띠고 고종을 보필하였 으나 청 일 전쟁 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1894년 6월에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였다. 두문불출하던 이들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의 공포에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김복한은 이설 과 홍건을 만나 협의하였으며 관찰사 이승우를 만나 거병을 권하였다. 그는 이승우의 거절을 받고 11월 27일에 홍주향교 전교 안병찬을 만나 의병을 협의하였다. 이미 부친 안창식과 함 께 의병을 준비하던 안병찬은 김복한과 의기투합되어 다음날 11월 28일에 화성의 강변에 사 26

19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는 이인영 집에서 향회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김복한은 별도로 이봉학 이상린과 청양군수 정인희에게도 글을 보내 의병에 참여할 것을 권하였다. 12월 1일 저녁에는 정산과 청양의 이 봉학 이세영 김정하 등 수백 명이 나그네 또는 장사꾼으로 가장하고 성안에 들어와 숨었 다. 12월 2일에 안병찬의 척숙 박창로가 수백 명을, 청양의 선비 이창서가 청양군수 정인희 의 명령을 받아 수백 명을 인솔하고 각각 홍주부에 집결하였다. 여기에 안병찬 채광묵의 민 병 180명이 대기하였으니 그 군세는 홍주부를 위압하기에 충분하였다. 김복한은 12월 2일에 수백 명의 민병이 관아에 집결하였을 때 관찰사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경무사 강호선과 참 서관 함인학의 목을 베고자 하였다. 민병들이 경무청을 부수고 이들을 동문 밖으로 끌어내어 결박, 구타하기에 이르렀다. 관찰사는 이들을 살려줄 것을 호소하고 결국 거의에 참여할 것 을 승복하였다. 이어 존화복수( 尊 華 復 讐 ) 라 쓴 기를 세우고 거의 방법과 계략을 협의하였다. 다음날(12월 3일) 홍주성 내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이 대장에 추대되었다. 김복한은 홍주부 관할 22군과 홍주군내 27면에 통문을 띄워 각 고을 대표들은 집을 순회하며 노약자 와 독자를 빼고 매호마다 한 사람씩 응모하기를 청하였다. 집집마다 이를 피하지 않고 죽을 것을 맹세하고 자진 응모하였다. 한편 관찰사 이승우는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 이란 이름으 로 절제사에게 관내에 명령을 내려 당일로 군사를 모집하여 오게 하였으며, 이설을 불러 장 계 및 각국 공사관에 조회하는 격문을 작성토록 하였다. 창의소에는 김복한과 이설 안병찬 이상린이 잔류하였으며, 의병 초모와 산성 수리를 위 하여 송병직 채광묵 이창서 이세영 이봉학 이병승 조의현 박창로 정제기 등을 파 견하였다. 이로써 년의 홍주의병은 비로소 진용을 갖추었으니, 기병이 성립하기 까지는 1895년 4월부터 8개월에 가까운 준비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청양군수 정인희는 창의소를 별도로 청양읍내에 설치하고 홍주부에 연락을 취하여 포군 500명과 화포 1천 자루 를 관찰사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창의소를 설치한 후 하루만인 12월 4일에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고 말았다. 그는 처음부터 의리에 따라 죽을 마음이 없었다. 유생들의 권유와 위협에 마지못해 의병에 참여하 기는 하였으나 실패를 두려워하였다. 그는 김복한과 이설을 비롯한 총 23명을 구금하였다. 12월 7일 서울에서 신우균이 군사 250명을 이끌고 내려와 김복한 등으로부터 진술서를 받았 다. 12월 30일에 수감자 23명은 결박당한 채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1896년 1월 1일 신 례원에 도착하는데 이때 아관파천과 김홍집의 처형 소식을 듣고는 다시 홍주감옥에 구금되 27

20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었다. 1월 12일에 김복한 등 6명(홍주6의사)을 압송하라는 법부의 훈령에 이들은 1월 17일 한 성재판소에 이송되었다. 2월 23일에 고등재판소 재판장 이범진이 공초를 하였으며 김복한에 게 유배 10년, 홍건 이상린 송병직 안병찬은 징역 3년, 이설에게는 장60을 선고하였다. 이어서 판사 김교헌은 이들을 불러들여 임금의 특지에 따라 전원 사면 석방시켰다. 15) 3 제천의병 제천의병( 堤 川 義 兵 )은 1896년 1월에 안승우( 安 承 禹 ) 이춘영( 李 春 永 )이 거의한 지평의진 에서 비롯되었다. 안승우는 지평의 포군장 김백선( 金 伯 善 )을 비롯한 포수 400여 명을 주병 력으로 하여 원주 관아를 점령하였으며, 이어서 1월 17일 제천에 무혈 입성하였다. 이때 서 상렬 이필희 오인영 배시강 등이 참여하였다. 이필희를 대장에 추대한 지평의진은 단양 군수를 구금시키고 일본군과 관군을 장회나루 전투에서 크게 물리쳤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 군의 계속된 추격에 의병대는 영월로 퇴진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접한 유인석은 요동행을 포 기하고 제천의병을 지휘하게 되었다. 1896년 1월 28일(음력, 12월 15일)에 (총대장에 추대 된) 유인석은 의진을 제천으로 진격시켜 관아를 접수하고 관아 뒷산인 아사봉에 본영을 설 치하였다. 그리고 중군장에 이춘영, 전군장에 안승우, 후군장에 신지수, 선봉장에 김백선, 소모장에 서상렬을 임명하고 각지에 격문을 띄워 전국민의 항일전 참여를 호소하였다. 16) 그는 격문에서 소중화의 조선이 왜의 침략과 이를 방조한 개화파 관리들의 개문납적( 開 門 納 賊 ) 으로 금수의 지경에 떨어지게 되었다고 밝힌 뒤 일제 침략의 전초가 된 갑오변란으로 부터 조선은 망한 바나 다름없으나 그를 이어 국모 살해와 단발의 화가 계속됨에 각도의 충 의지사는 과감히 일어나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무릇 각도의 충의지사는 다 같이 성조( 聖 朝 )에서 길러낸 인물이다. 환난을 피하는 일이 죽음 보다 심함이 없으니 망하기를 기다림보다 토벌함이 나을 것이다 (중략) 여기서 감히 먼저 일어난 처지에 이렇게 포고하는 것이다. 위로 공경( 公 卿 )으로부터 아래로 신민에 이르 기까지 그 누가 절박한 마음이 없을 것이랴. 이야말로 참으로 존망의 시기이니 각자가 거적 자리에서 자고 창을 베게삼으며 또한 모두 끓는 물에라도 들어가고 불에라도 뛰어들어서 이 15) 김상기, 년 홍주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전개, 윤병석교수화갑기념논총, ) 김상기, 한말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28

21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나라의 재조( 再 造 )를 기약하고 천일( 天 日 )을 다시 밝게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글을 보내 어 효유하는 것이 이후에 혹시라도 영을 어기고 도망가거나 태만히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 은 곧 역적의 무리와 같으므로 단연 군사를 먼저 옮겨 토벌할 것이니 각자 명심하여 후회하 는 일 없게 하고 적은 성의나마 다하여 함께 대의를 펴가야 할 것이다. 17) 의병진은 주로 동일한 지역과 학통 그리고 혈통(신분)의 배경 하에 결성되었던 것이 일반 적인 경향이었다. 따라서 의병진 간의 통합은 위의 성격을 충족하여야 가능하기 때문에 용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인석이 위와 같은 격문을 전국에 발표하자 원근의 유생들은 각기 민 병을 거느리고 동참해 왔다. 제천의병은 1896년 2월 16일에 충주성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시기 의병의 총수는 1만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8) 2월 17일(음력, 1월 5일)에 남한강 상류인 북창나루를 얼음 위로 건너 충주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충주성에는 경군 400여 명과 지방진위대 500여 명 그 리고 200여 명의 일본 수비대가 있었으나 큰 피해 없이 충주성을 함락하였으며 관찰사 김규 식을 체포 처단하기에 이르렀다. 19) 제천의병의 충주성 점령은 전기 의병에서 최대 전과로 평 가되며 이후 각지에서 의병 봉기를 고무시키는 데 큰 자극이 되었다. 충주성 함락 후 유인석은 소모장 이범직을 호서 지역에 파견하여 천안군수 김병숙을 처단 하고 선유사 신기선을 잡아 가두었다. 당시 단발을 혹독하게 강요한 자로 천안의 김병숙( 金 炳 肅 )이 지목되었던 것이다. 20) 유인석은 각처의 의진에 연락을 취하여 합세할 것을 청하였 다. 이에 원근 지방의 의병들이 충주성으로 모여들어 제천의병은 중부 지역의 의진을 규합한 연합 의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제천의병은 수안보와 가흥에 주둔하던 일본군 격퇴를 주요 목표로 삼아 작전을 폈다. 그러 나 2월 26일 수안보전투에서 이춘영이 전사하고 충주성 공방전에서 주용규가 전사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 제천의병은 3월 5일에 다수의 희생자를 낸 채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후퇴하였다. 유인석은 안승우를 중군장으로 삼아 전열을 정비하였다. 이때 이강년이 의병을 이끌고 의진을 찾아와 유인석과 사제의 의를 맺었다. 이외에도 영춘에서 권호선이 포수를 이 17) 유인석, 격고팔도열읍( 檄 告 八 道 列 邑 ), 소의신편( 昭 義 新 編 ), 1 2쪽. 18) 朝 鮮 時 事. 東 京 朝 日 新 聞, 1896년 2월 26일. 19) 이정규, 종의록( 從 義 錄 ), 독립운동사자료집 1, 30쪽. 20) 이정규, 위의 책, 31쪽. 29

22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끌고 왔으며 이명로의 횡성의병도 합류하였다. 그러나 3월 27일 선봉장 김백선의 처형 사건 이후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고, 제천의병은 결국 5월 25일에 제천의 남산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패하여 서행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고종의 해산 조칙에 유인석은 구제도를 회복하지 못한 점과 침략군인 일본군을 물리치지 못한 점을 들어 해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후 춘천 양구 안변 영흥 맹산 덕 천 운산을 거쳐 8월 24일 초산에서 압록강을 거쳐 중국의 회인현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제 천의병은 회인현재( 懷 仁 縣 宰 ) 서본우의 제지로 8월 29일에 무장해제 당하였으며 유인석 등 21명을 제외한 나머지 의병은 강제 귀국 당하였다. 유인석 일행은 심양으로 들어가 현재( 縣 宰 ) 가원계( 賈 元 桂 )에게 군사 지원을 요구하였으 나, 가원계는 청국과 일본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외국과의 전쟁 사단을 일으킬 수 없다는 이 유로 거절하였다. 이로써 유인석은 청국의 원병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원세 개에게 가던 길을 돌려 결국 그해 음력 9월에 통화현( 通 化 縣 ) 오도구( 五 道 溝 )로 들어갔다. 일 행은 그곳을 복고제( 復 古 制 ), 척왜독립( 斥 倭 獨 立 ) 을 위한 근거지로 정하고 망국단( 望 國 壇 ) 을 만들어 참배하며 재기를 기다렸다. 21) 2) 중 후기 의병 1 단양의병 1905년 8월 충북 단양 지방에서 정운경( 鄭 雲 慶, )이 의병을 일으켰다. 정운경 은 송강 정철의 후예로 충청북도 제천 출신이다. 정운경은 을미사변에 항거하여 의암 유인 석 의진에 참가하여 1896년 1월 중군장에 임명되어 충주성을 점령하고, 청풍 평창 등지에 서 전공을 세웠던 의병장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의 무효를 부르짖으며 거의한 원용팔 ( 元 容 八 )이 9월에 체포되고 의진이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단양의 장림에서 이규석( 李 圭 錫 ) 김홍경( 金 鴻 卿 ) 강수명( 姜 秀 明 ) 지원영( 池 源 永 ) 김지현( 金 知 鉉 ) 정해훈( 鄭 解 薰 )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10월 6일에 단양읍으로 들어가 순교( 巡 校 )와 서기 등을 포박 하여 장림으로 데리고 와 각 면의 포수들을 규합하도록 지시하고 의병을 모았다. 의거의 깃 발을 올리니 수일간에 단양 제천 영춘 청풍의 4군 일대에서 3~4백 명의 의병이 모여들 21) 김상기, 년 제천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전개, 백산박성수교수화갑논총,

23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었다. 정운경은 10월 11일에 단양읍으로 나가 이강년에게도 연락을 취해 의병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다. 정운경은 의진의 부서를 정하고 인근 각지의 지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대일 전투 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전투 태세가 정비되기도 전인 10월 13일에 원주진위대의 공격을 받고 정운경은 영춘에서, 함께 거의한 의당 박정수( 朴 貞 洙 )는 청풍에서 각각 체포되니 의진은 와 해되고 말았다. 정운경은 군부로 압송되어 엄중한 심문을 받다가 1905년 11월에 평리원의 재 판을 거쳐 유배 10년형에 처해져 1906년 11월에 황주 철도( 鐵 島 )로 유배되었다. 1907년 12월 에 고종의 특사로 풀려났다. 22) 한편 1905년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유학자 박세화( 朴 世 和 )도 문인인 윤응선과 함께 제천의 남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청풍에서 체포되었다. 박세화는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 제 나라가 망하게 되어 도( 道 )와 화( 華 )가 더불어 망하게 될 터이니 장차 어찌 할 것인가 라 며 식음을 전폐한 지 23일 만에 순국하였다. 23) 년 홍주의병 1896년에 홍주의병을 주도하였던 안병찬 채광묵 박창로 이세영 등은 을사5조약의 늑 결 소식을 듣고 1896년 의병 때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의병 투쟁을 통한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짐하였다. 특히 안병찬은 왜놈들에게 대권이 옮겨져 있으니 비록 천장의 상 소와 백장의 공문서를 올린들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는가. 한갓 소용없는 빈말만 할진대 차 라리 군사를 일으켜 왜놈 하나라도 죽이고 죽는 것만 못하다 라고 1906년 초부터 의병 봉기 를 추진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초모하는 동시에 정산에 거주하는 전 참판 민종 식을 찾아가 총수의 책임을 맡아줄 것을 청하였다. 민종식은 3월 15일(음력, 2월 21일)에 이 를 받아들여 의병장에 올랐으며 박토 10여 두락을 팔아 5만 냥을 군자금으로 내놓았다. 민종 식은 대장에 추대되어 의진의 근거지를 정산의 천장리로 삼고 항전에 돌입하였다. 의병에 참 여한 주요 인물로는 안병찬 이세영 채광묵 박창로 등과 이용규 홍순대 박윤식 정재 호 이만직 성재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격문과 각국의 공사에게 보내는 청원문과 통문 을 작성하였다. 2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 쪽. 23)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쪽. 31

24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민종식은 의진을 편성하고 광수장터(지금의 예산군 광시면)로 진군하였다. 이들은 이곳에 서 편제를 정하고 대장단을 세워 천제를 올리고 의진을 정비하였다. 이들은 이튿날 바로 홍 주로 향하여 홍주의 동문 밖 하고개에 진을 쳤다. 다음날 의진은 광시장터로 집결하여 군제 를 바로잡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공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의병진은 화성의 합천(지금의 청 양군 화성면 합천)에 진을 쳤다. 이 소식을 듣고 공주 주재 일본헌병대가 급파되어 홍주군 관 군과 함께 오후 6시 먹고개에 도착하여 탐문하고 10시경 합천 인근에 쳐들어와 잠복하였다. 다음날인 3월 17일(음력, 2월 23일) 오전 5시에 이들의 공격을 받아 안병찬과 박창로를 비롯 한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어,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의병장 민종식은 합천 전투에서 간신히 탈출하여 각지를 잠행하다가 전주에 거주하는 친 척 민진석( 閔 晉 錫 ) 집에서 은신하던 중 이용규 등과 재기를 협의하였다. 곧이어 이용규가 초 모한 의병을 중심으로 의병을 재기하였다. 이용규는 합천 싸움에서 패한 뒤 전주 진안 용 담 장수 무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는 여산에서 의진을 결성하고 지 티로 와서 민종식을 대장에 재추대한 것이다. 민종식은 다시 대장에 추대되어 부대를 정비하였다. 민종식은 이때 선봉장에 박영두, 중군 장에 정재호, 후군장에 정해두를 임명하였다. 이들은 홍산 관아를 점령한 뒤 서천으로 행군 하였다. 이튿날 비를 무릅쓰고 문장동을 거쳐서 5월 13일(음력, 4월 20일)에 서천읍에 도착 하였다. 의병은 남포에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남포의 관군은 공주부의 관군과 합세하 여 요새인 남포성을 의지하여 반격하였다. 5일간이나 전투가 이어졌으며 의병부대는 남포성 의 함락에 성공하여 남포군수를 감금시키고 병사 31명을 의병진에 귀순시켰다. 유회군 33명 도 영입하였다. 홍주의병은 결성으로 진군하여 하루를 지내고 5월 19일(음력, 4월 26일)에 홍주로 들어가 5월 20일 아침에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의병진에서는 진용을 정비하고 소를 잡아 천제를 지냈다. 민종식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인근의 각 군수에게 훈령을 내려 양 식과 군기의 징발과 징병의 일을 지시하였다. 일본군은 5월 20일부터 공주의 고문부 경찰과 수원의 헌병부대를 증파하여 홍주성 공격 에 나섰다. 그러나 의병은 굳건한 성벽을 이용하여 이들의 총격에 잘 대응하였다. 5월 21일 에 일본 경찰대에서 경부와 보좌원 순검 13명이 성을 향해 총을 쏘며 공격하였지만, 의병 측 에서는 대포를 쏘아 이들을 물리쳤다.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몇 차례 공격에도 전세가 의병 32

25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통감 이토는 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명령하였다. 사령관 하 세가와( 長 谷 川 好 道 )는 5월 27일 대대장의 지휘아래 보병 2개 중대를 홍주에 파견하여 경찰 과 헌병, 진위대에게 협조토록 훈령하였다. 이에 보병 제 60연대의 대대장 다나카( 田 中 ) 소 좌 지휘 하에 보병 2개 중대(약 400명)와 기병 반개 소대 그리고 전주수비대 1개 소대가 합 세하여 30일 홍주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다나카 소좌의 지시에 따라 30일 밤 11시에 동문으로부터 약 500미터 지점의 숲속에 잠복하였으며, 31일 오전 2시 반에 공격을 개시하여 3시경에 기마병 폭발반이 동문을 폭파시켰다. 이를 신호로 하여 일본 보병과 헌병 대, 경찰대가 기관포를 쏘며 성 안으로 진입하였다. 또한 2중대 1소대와 4중대 1소대는 각각 갈매지 남쪽 고지와 교동 서쪽 장애물 도로 입구에서 잠복하여 의병부대의 퇴로를 차단하였 다. 이때 의병 측에서는 성루에서 대포를 쏘면서 대항하였으나 북문도 폭파되어 일본군이 밀 려들었다. 의병은 치열한 시가전을 감행하면서 방어했으나 결국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처참하게 죽어갔다. 유병장 유준근을 비롯하여 소모장 최상집, 좌익장 이상구, 참모 안항식, 돌격장 남규진, 참 모 신보균과 이식, 서기 문석환, 그리고 우익장 신현두 등 9명(홍주 9의사)은 8월 6일(음력, 6월 17일)에 대마도로 유배되어 이즈하라( 嚴 原 )에서 감금 생활을 하였다. 이들의 대마도 유 배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에 의해 자행되었다. 한편 홍주성 전투에서 패퇴한 민종식을 비롯한 지휘부는 성을 빠져나왔다. 이용규는 그해 7월에 청양의 추티에서 의병을 재집결하여 부여와 노성 지역을 행군하여 연산의 부흥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때 조병두는 중상을 입고 체포되어 대전역에서 사망하였으며, 채경 도와 오상준 등은 공주부에 감금되었다. 이용규는 그해 10월경에 예산 현곡(지금의 대술면 상항리)에 있는 이남규의 집으로 가서 민종식 등을 만나 재기를 추진하였다. 이때의 지휘부 는 대장에 민종식, 중군장에 황영수와 정재호, 운량관에 박윤식, 참모에 곽한일 이용규 김덕진으로 편제하였다. 이들은 11월 20일에 예산을 공격하여 활동의 근거지로 삼기로 결정 하고 민종식을 다시 대장에 추대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에 일본헌병 10여 명과 지방병 40여 명, 그리고 일진회원 수십 명의 포위 습격을 당하여 곽한일 박윤식 이석락 등이 체포되었다. 이남규 이충구 부자도 함께 체포되어 온갖 악형 을 당하였다. 이때 체포된 곽한일을 비롯하여 박윤식 김덕진 정재호 황영수 박두표 등 33

26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은 종신 유배형을 받고 지도(전남 신안군)로 귀향갔으며, 홍순대와 김재신은 고군산도(전북 군산시)로 귀양갔다. 한편 안병찬 박창로 최선재 윤자홍 등 수십 명은 공주감옥에 감금 되었다. 민종식은 미리 신창군 남상면의 성우영 집으로 대피하였다가 다시 공주 탑곡리 쪽으로 피 신하였다. 일본경찰대는 신창에서 김덕진과 신창규를 체포하여 고문 끝에 민종식의 은신처 를 파악하였다. 결국 민종식은 11월 20일에 체포되어 공주부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1907 년 7월 3일에 교수형을 선고 받았으나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유배형으로 감형 처분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다. 24) 3 당진의병 당진 지역의 인사들 역시 을사조약의 늑결에 항거하여 즉각적으로 의병을 봉기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당진 의병장으로 최구현( )이 있다. 그는 면천의 매염리 출신으로 고종 3년(1866) 태어났다. 그는 정유재란 중인 1597년 영천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충신 공 최준립의 12대 후손으로 고종 24년(1887) 12월에 무과에 급제하고 1888년 훈련원봉사로 벼슬길에 올라 군부에서 근무하던 중인 1904년 일본에 의해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는 것을 보 고 군부참서관 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이어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1906년 4월 기지시에 병오창의도소 를 설치하고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 등지에 격문을 발표하고 37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는 창의영도장 에 추 대되어 의병을 지휘하고 인근 지역을 돌면서 위세를 떨치고, 5월 10일(음력, 4월 17일) 초저 녁에 면천성을 공격하였다. 다음날 새벽까지 일제의 경찰대와 치열한 공방전을 수행하였으 나 화승총으로 일본 경찰대의 신식 무기를 이길 수 없었다. 최구현은 죽음을 각오한 의병 36 명을 인솔하고 밤에만 행군하여 5월 16일(음력, 4월 23일)에 소난지도로 들어갔다. 최구현은 소난지도에서 이들을 맞이해주는 또 다른 당진의병을 만날 수 있었다. 또한 화성창의장 홍 일초 부대 40여 명도 있었다. 이어서 5월 27일(음력, 윤4월 5일)에 서산의병 참모 김태순 등 28명이, 6월 7일(음력, 윤4월 16일) 홍주성에서 패한 홍주의병 차상길 등 15명이 소난지도에 합세하였다. 24) 김상기, 1906년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 37,

27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이들 소난지도에 주둔하던 의병들은 1906년 6월 18일 면천군에 돌입하여 군수 이교영을 포박하고 이속들을 난타하고 결전 350냥과 양총 5정, 탄환 85발, 환도 2정을 탈취하였다. 소 난지도 의병대는 그 해 8월 중순에도 다시 면천군을 습격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군수가 지방에 출타 중이었는데 의병 수백 명 은 총 6정과 실탄 30여 발을 탈취해 갔다. 그러나 이 들 120여 명의 소난지도 의병은 8월 24일(음력, 7월 5일) 일본경찰대의 대대적인 기습 공격 을 받았으며, 최구현 의병장은 체포되어 면천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고 옥고의 후유증으로 그해 12월 23일(음력) 사망하고 말았다. 25) 3) 충청 지역의 의병장 1 전기 의병장 충청 지역의 의병장은 전기, 중기 의병은 반개화, 반침략의 이념에 철저한 지방 유생을 중 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후기 의병에 들어서는 해산 군인 등 일반 평민의병장의 활동이 더욱 치열하였다. 충청의병장들은 비록 전기 의병에서 강제로 해산되었을지라도 1905년 이 후 의병을 재기하였으며, 1910년 이후 만주 지역으로 망명하여 독립전쟁에 참여하는 등 의 병의 특성을 잘 보여주었다. 전기 의병의 대표적인 의진인 제천의병의 지휘부를 보면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있다. 26) <제천의병의 지휘부> 창의대장 : 유인석 중 군 장 : 이춘영(안승우, 이원하, 원용석) 전 군 장 : 안승우(홍대석, 이정의) 후 군 장 : 신지수(원용석, 유치경) 선 봉 장 : 김백선(김용준) 좌 군 장 : 우기정(정원모) 우 군 장 : 안성해(원규상, 이강년) 중군종사 : 오명춘 중군군사 : 조준교 중군참장 : 한동직 중군참모 : 김사두 중군아장 : 이원하 소 모 장 : 서상렬, 이범직, 정인설 유 격 장 : 이강년 유격중군 : 윤기영 분 의 장 : 이희두 25) 김상기, 1908년 당진 소난지도 의병의 항일전, 한국근현대사연구 28, ) 김상기, 한말 전기의병, 독립기념관, 2009, 쪽. 35

28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좌 익 장 : 우필규 별 진 장 : 원우규 진 동 장 : 이필희 운 량 감 : 이필근(최병식, 이범직) 장 의 장 : 이원하 참 모 : 이조승, 윤정섭, 주용규, 이직응, 박주순 종 사 : 조석증, 주영섭, 이세희, 홍사구 총재서무 : 유홍석, 심영섭 장 서 기 : 이병회 장 빈 객 : 장충식 *( )안은 후임자임 우 익 장 : 윤성호 좌 선 봉 : 김용준 한 어 장 : 이형구 군 기 감 : 우헌영(유해붕) 장 재 용 : 김영록 수성중군 : 홍우범 제천의병은 1896년 1월부터 전투를 개시하여 8월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회인현으로 들어 갈 때까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군장 이춘영과 전군장 안승우를 비롯하 여 후군장 신지수, 선봉장 김백선, 소모장 서상렬과 이범직 등을 비롯하여 다수의 의병들이 전사하였다. 제천의병 중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문석봉의 유성의병 지휘부에는 의병장 문석봉 외에 선봉장에 김문주, 중군장에 오형덕, 군 향관에 송도순이 있다. 이들 중에 문석봉과 김문주가 대구부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러나 이들은 대구감옥에서 탈옥하여 재기를 도모하였다. 문석봉이 대구관찰사의 취조에 문 답한 문건이 문집인 의산유고 에 남아 있다. 홍주 을미의병의 지휘부는 다음과 같다. 27) <홍주 의병(초기) 지휘부> 창 의 대 장 : 김복한 참 모 : 이설, 안병찬, 이상린 북면 소모관 : 송병직 남면 소모관 : 채광묵, 이창서 공주절제사 : 이세영, 이봉학, 이병승 임존산성 수리 : 조의현, 박창로, 정제기 27) 김상기, 한말 전기의병, 독립기념관, 2009, 190쪽. 36

29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홍주의병은 위와 같은 지휘부를 구성하고 홍주관찰사 이승우를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 으 로 참여시켰으나, 이승우가 하루만에 배반하고 1895년 12월 4일에 의병 지휘부를 체포하고 말았다. 이로써 김복한과 이설, 이상린, 안병찬, 송병직, 홍건 등 6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 렀다. 1896년 2월 25일(양력, 4월 7일) 고등재판소에서 이들을 판결하였는데, 김복한은 유배 10년, 이상린 안병찬 송병직 홍건은 징역 3년, 이설은 장60대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다 행히 고종의 특지로 전원 사면되었다. 이 중에 김복한과 이설의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복한( 金 福 漢, )은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출신이다. 1892년 문과에 급제하 고 사헌부 지평, 형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우부승지 등을 지냈다. 1894년 6월 일제의 침략 이 노골화되자 관직을 내던지고 1895년 11월 단발령 공포에 항일 의병을 봉기하였다 년 12월에 홍주관아를 점령하고 창의대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홍주부 관하 22개 군에 통문 을 띄워 의병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송병직 등을 소모장으로 임명하여 의병 모집을 독 려하였다. 정인희와 이세영에게 공주부 공격의 명령을 내리고 정제기에게는 대흥의 임존산 성의 수리를 명하였다. 그러나 의병에 참여하였던 관찰사 이승우가 뜻을 번복하고 김복한을 비롯하여 주도자 23명을 체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김복한은 이설, 안병찬 등과 함께 1896년 1월에 서울로 압송되어 구속되었으며, 2월 25일에 유배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다행 히 고종의 특지로 석방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그는 이설과 함께 상경하여 을사5적의 매국 행위를 성토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경무청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다음해 홍주의병이 일어나자 옥고의 후 유증으로 걸음걸이마저 어려운 몸이 되어 의병에 참전할 수는 없었으나 주위 인사들에게 의 병에 참전할 것을 권고하였다. 의병장 민종식이 지휘하는 홍주의병은 홍주성 전투에서 큰 희 생을 치르고 패산하였다. 김복한은 이때 민종식과 더불어 의병을 계획했다는 혐의로 일본군 에 체포되어 한성경무청에 구금되었다. 그해 11월말 풀려났으나, 다음 해 10월에 민심을 선 동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보령군에 구금되었다. 일본인 순검들은 그를 공주 감옥으로 이송 하는 도중 의병의 소재지를 대라며 구타하고 끝내는 총살시키려 하였다. 다행히 한인 순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0월 22일에 풀려난 그는 12월에 홍성군 결성면 산수동에 은거하였으며, 1910년 8월 국망의 소식에 죄인으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1919년 거족적인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민족대표에 유림계가 빠진 것을 알고 호서 지역의 유림과 곽종석 37

30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등 영남의 유림들과 함께 일제의 침략과 조선의 애족장을 호소하는 장서( 長 書 )를 작성하여 서명한 후 이를 파리의 강화회의에 발송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 파리장서운동이 발 각되어 그해 7월 공주 감옥에 구속되어 7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불온문서 서명배포 죄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제자들에게 한학을 교육하면서 유교부식회의 설 립을 지도하다가 1924년 3월 한 많은 생을 마쳤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8) 이설( 李 偰, )은 충청남도 결성군 화산면에서 태어났다. 1895년 10월 일제의 명 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김복한 등과 함께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1896년 1월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장60 의 판결을 받았으나 국왕의 특지로 석방되었다. 1904년에 일본이 전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분개하여 전국에 격문을 돌리어 이를 반대하고 민 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국왕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항거하여 일제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일제 경찰 에 체포되어 한 때 투옥되었으나 석방되었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서 식음을 전폐한지 수십일 만에 1906년 4월 29일에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 중기 의병장 중기의 충청의병으로는 1906년의 홍주의병이 있다. 의병장은 민종식으로 지휘부의 명단 을 보면 다음과 같다. <홍주 의병(중기) 지휘부> 대 장 : 민종식 군사장 : 김상덕 참모장 : 김광우, 조희수, 채광묵 중군장 : 정재호, 황영수, 이세영 유격장 : 채경도, 김광현, 윤상배, 이만식 좌군장 : 윤필구, 윤병일, 송순묵 후군장 : 정해두 서 기 : 문석환 운량관 : 성재두, 박제순 향 관 : 박윤식 좌익장 : 이상구, 김성진 우익장 : 신현두, 이봉규 28) 김상기, 김복한의 학통과 사상, 한국사연구 88, 1995 ; 김상기, 김복한의 홍주의병과 파리장서운동, 대동문화연구 39,

31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우군장 : 이병년, 이범구, 홍순대 소모장 : 지우범, 박두표, 최상집 신석휴, 김윤식 소모관 : 이만직 수문장 : 최선재 수성장 : 조병순 참 모 : 안병찬, 박창로, 안항식 신보균, 이용규 유병장 : 유준근 유병소향관 : 민정식 참모사 : 이식 돌격장 : 남계원(남규진), 안병림, 곽한일 홍주의병은 홍주성 전투에서 채광묵 등 3백여 명이 전사하는 등 희생이 컸던 의병이다. 체 포된 포로 중에서 서울로 압송된 인물이 78명이다. 이들 중에 민종식을 비롯하여 안병찬 곽한일 이용규 등의 행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민종식( 閔 宗 植, )은 경기도 여주에서 판서 민영상( 閔 泳 商 )의 장남으로 태어나 1882년(고종 1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1895년 을미사변 후 벼슬을 버리고 충청남도 청양의 정산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늑결되 자 항일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의병장에 추대되어 1906년 3월 15일(음력, 2월 21일) 광수장터(지금의 예산군 광시면)에서 의병을 봉기하였다. 대장단을 세워 천제를 올리 고 이튿날 바로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저항에 오히려 대장소마저 위태롭게 되 어 다시 마을 밖으로 나와 진을 쳤다. 의병은 화성의 합천 전투에서도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 에 패산하였다. 민종식은 각지를 잠행하다가 5월 9일(음력, 4월 16일) 충청남도 홍산군 지티 에서 의병을 재기하였다. 민종식은 의병을 이끌고 서천, 비인, 남포를 거쳐 홍주에 도착하여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홍주성에서 패주한 일본군이 공주 병력을 지원 받아 20일부터 홍주성 을 둘러싸고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의병부대가 이를 격퇴하였다. 몇 차례의 일본 경찰과 헌병 대의 공격에도 전세가 의병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통감 이토는 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 견을 명령하였다. 사령관 하세가와의 명령을 받은 보병 제60연대의 대대장 다나카( 田 中 ) 소 좌는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반개 소대 그리고 전주 수비대 1개 소대를 거느리고 30일 홍주성 을 포위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전투에서 홍주성은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 되었으며, 참모장 채광묵 부자와 운량관 성재평과 전태진 서기환 전경호를 비롯하여 300 여 명이 학살되었다. 민종식은 성을 빠져나와 예산 이남규의 집에서 재기를 도모하였다. 민 39

32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종식은 처남인 이남규의 도움을 받아 11월 20일에 예산을 공격하여 활동의 근거지로 삼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에 일본 헌병 10여 명과 지방병 40여 명, 그리고 일진회원 수십 명의 습격을 당하여 곽한일 박윤식 이석락 등이 체포되었다. 이남규 이충구 부자도 함께 체포되어 온갖 악형을 당하였다. 민종식은 다행히 미리 공주로 피신하여 체포를 면했으나 결국 11월 20일에 체포되었다. 민종식은 체포된 후 12월 7일과 25 일에 모두 4차례의 심문을 받았는데 일본 경찰은 계속하여 궁중과의 관련을 추궁하였다. 이 에 대하여 민종식은 사실무근이라고 강하게 부인하였다. 민종식은 1907년 7월 2일 내란죄 로 교수형을 선고받으나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유배형에 처해져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12월 순종의 즉위를 맞아 특사로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1963년 그의 공을 기려 대통령장 을 추서하였다. 29) 안병찬( 安 炳 瓚, )은 청양군 화성에서 안창식( 安 昌 植 )의 아들로 태어났다 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사건이 발발하자, 충청도 방면에서 제일 먼저 의거의 깃발을 올 린 것은 충남 홍성에서였다. 그는 1895년 12월 1일에 채광묵과 함께 부친의 지시를 받고 향 병 180여 명을 이끌고 다음날인 12월 2일에 홍주성 입성하여 김복한을 의병총수로 추대하고 조양문 위에 홍주의병진의 기치를 높히 게양하였다. 그러나 이틀 후 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 로 그를 비롯한 23명이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옥중에서 자결을 시도하여 인사불성에 이르 기까지 하였다. 임승주의 극진한 간호로 이튿날 깨어나 목에서 흐르는 피로 문종이에 혈시를 써서 관찰사에게 전하게 하였다. 그는 1896년 1월 17일 한성감옥에 구금되었으며 2월 25일 에 홍건, 송병직, 이상린과 함께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지로 석방되어 향리에 돌아와 재기를 위한 준비를 하였다. 1905년 결국 일제는 을사조약을 늑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정치를 강행하였 다. 이때 그는 왜놈들에게 대권이 옮겨져 있으니 비록 천장의 상소와 백장의 공문서를 올린 들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는가. 한갓 소용없는 빈말만 할진대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왜놈 하 나라도 죽이고 죽는 것만 못하다 라며 결연히 일제를 물리치기 위한 의병 투쟁을 재기하기 에 이르렀다. 그는 1906년 초부터 의병 봉기를 추진하였으며 정산에 거주하던 민종식을 총 수로 추대하고 3월 14일(음력, 2월 20일)에 광수장터(지금의 예산군 광시면)에서 봉기의 깃 발을 들었다. 부대 편성을 마친 홍주의진은 광시면 하장대리에서 천제를 지내고 홍주성 밖 29) 김상기, 1906년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 37,

33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하우령에 유진하여 홍주성을 공격하였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득이 퇴거하여 청양군 화성면 산정리 합천에서 유진 중 일본군의 야습을 받았다. 대부분의 병력이 패산하고 박창로 등과 함께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구금된 그는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다행히 임금의 특 지로 석방되었다. 그는 출감하자마자 2차 홍주의병에 참모사로 다시 참여하여 수백 명의 의 병이 산화한 홍주성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한 후 청양 지역에서 부대를 수습하 여 다시 기의하려다가 친일분자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수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19년 전 민족적인 3.1운동을 일어남에 김복한과 함께 유림들의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에 서명하 였다. 이 일로 그해 6월 피검되어 공주감옥을 거쳐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었으나 단식투쟁을 하는 등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수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 운동의 공을 기려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곽한일( 郭 漢 一, )은 1906년 5월 남규진( 南 圭 振 )과 더불어 예산에서 기병하고 민종식 의진이 홍주성을 점령한 소식을 듣고 홍주의진에 합류하였다. 곽한일은 돌격장으로 임명되어 일본군과의 홍주성 전투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5월 31일 새벽에 일본군의 대공세 로 홍주성이 함락되고 의진은 궤멸하고 말았다. 곽한일은 성을 탈출하여 예산 지방을 중심으 로 재기를 계획하였다. 그는 예산의 한곡( 閑 谷, 지금의 대술면 상항리)에 사는 전 참판 이남 규( 李 南 珪 )의 집에서 민종식을 대장으로 추대하기로 하고 참모의 직임을 맡았다. 그러나 일 진회원에 밀고로 거사 계획이 일본 헌병대에 알려졌다. 10월 2일 새벽에 적의 기습을 받은 곽한일은 이남규 부자, 박윤식, 이용규, 이석낙( 李 錫 樂 )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공주 경 무청으로 압송되었다가 경성 평리원( 平 理 院 )으로 이감되어 문초를 받았다. 곽한일은 종신유 배형을 선고받고 전남 지도( 智 島 )에 유배되었다가 1912년에 풀려났다. 1913년 2월에는 독립 의군부( 獨 立 義 軍 府 )의 총무총장에 임명되어 재정 지원을 약속하고 온양 일대에서 모금을 계 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어 1913년 8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 6 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출옥 후에도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다가 1914년에 체포되 어 유배 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 장을 추서하였다. 이용규( 李 容 珪, 1859?)는 충남의 부여 출신으로 1906년 3월 15일에 매부인 민종식이 예 산의 광시에서 홍주의병을 일으킬 때 안병찬 등과 함께 의병진 편성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 하였다. 홍주의병은 다음날 청양의 합천 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하고 안병찬 등이 체포되기에 41

34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이르렀다. 이용규는 이때 체포를 피해 전주 진안 용담 장수 등 전북 지역에서 의병을 모 집하였다. 그는 여산에서 의진을 결성하고 부여의 지티에서 민종식을 대장에 재추대하였다. 그는 참모사가 되어 의병의 홍주성 점령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5월 31일에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홍주성이 함락당하자 탈출하여 다시 청양의 추티에서 의병을 수습하여 400명의 병력으로 부여 노성을 지나 연산에 이르러 왜병과 교전하였다. 이용규의 활약상 에 놀란 일본군은 그의 거처를 확인하기 위해 6월 17일에 그의 아내 박씨와 어린 아들 성문 ( 星 文 )을 칼로 찌르고 고문을 자행하여 그의 아들은 끝내 사망하였다. 그는 예산의 이남규( 李 南 珪 ) 집에서 재거를 계획하였다. 거사 일을 10월 5일로 정하고, 일단 민종식을 성우영( 成 佑 永 )의 집으로 피신시키고 예산 관아를 습격할 구체적인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0월 2일 에 일진회원의 밀고로 계획이 드러나 김가진( 金 嘉 鎭 )이 이끄는 관군에게 포위되어 이남규 부 자 곽한일( 郭 漢 一 )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1907년 2월 평리원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으며, 같은 해 7월 2일에 평리원 고등재판소에서 감 1등되어 내란죄 로 종신유배형을 선 고받아 지도( 智 島 )에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11월에 특사로 풀려났다. 1911년 10월에는 옥천 에서 전 승지 노병직( 盧 秉 稷 ) 전 참의 장남기( 張 南 基 ) 송순태( 宋 舜 台 ) 등과 의병을 일으킬 논의를 하였으나 1912년 4월에 밀고에 의해 30명이 함께 잡혔다가 같은 해 8월에 풀려났다. 그 뒤에도 계속 의병운동을 전개하다가 1917년 4월에 잡혀 통영 욕지도로 유배되었다 년 12월 파리강화회담에 보낼 자료를 준비하던 중 예심원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뒤 1919년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충청남도 대의사( 大 義 士 )가 되었으며, 서울시민에게 보내는 취지문을 인쇄하여 배포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경성지검에서 12월 19일 징역 10월 형을 구형받았으나 1920년 3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 판결을 취소하고 무죄를 선고하여 풀려났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3 후기 의병장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충청 지역에서의 후기 의병은 전 중기 의병에서 보여 준 관료와 지방 유생 중심의 의병이 아닌 일반 평민 중심의 성격으로 바뀌어 갔다. 이는 1906년 5월의 홍주성 전투에서 큰 희생이 있었고, 양반 유생으로 이루어졌던 지휘부 인사들이 대거 희생되 고 체포된 이유도 있었으며,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부대를 독자적으로 편성하거나 의병대에 42

35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참여하면서 나타난 특성이기도 하였다. 충청 지역 의병 중에 판결문이 남아 있는 이들의 인 적 사항을 보면 다음 표 1 과 같다. 표 1 충청 지역의 후기 의병장 현황 순번 이 름 출신 거주지 직업 신분 활동 부대 활동 장소 활동 내용 비고(형량) 1 강덕보 공주 농업 이관도 부대 공주 군자금 모집 징15년 2 강수원 영춘 이강년 부대 영춘 일 순사 처단 징15년 3 김경문 괴산 상업 병천 군자금 모집 징10년 4 김낙진 (김낙선) 부안 연산 유7년 5 김동운 영춘 김상태 부대 영춘 밀정 처단 징15년 6 김득수 연산 유10년 7 김말출 연산 이봉백 부대 순흥 군자금 모집 징5년 8 김명심 청주 농업 한봉수 부대 청주 보은 밀정 처단 징15년 9 김법윤 전주 상업 공주 군자금 모집 교수형 10 김보령 장석홍 부대 남포 군자금 모집 징5년 11 김상태 단양 이강년 부대 단양 일군과 교전 교수형 12 김성구 강릉 정봉준 부대 음성 보은 일군과 교전 유15년 13 김성환 청주 서당훈장 청주 항일 의식 고취 금고1월 14 김수동 영춘 농업 이강년 부대 단양 영춘 밀정 처단 교수형 15 김쌍봉 해미 해미 밀정 처단 교수형 16 김용현 이강년 부대 제천 태80대 17 김재성 보은 서당훈장 김재성 보은 일본인 살해 교수형 18 김제환 청주 서당훈장 청주 항일 의식 고취 금고1월 19 김춘삼 청풍 농업 조동규 부대 군사 충주 일군교전 군자금모집 유10년 20 김현규 대흥 농업 민창식 부대 대흥 군자금 모집 취소 21 김황간 선산 농업 황간 상주 군자금 모집 징5년 22 김흥용 홍주 설인도 부대 청양 홍주 군자금 모집 종신형 23 맹의섭 보은 농업 보은 의병 모의 징3월 24 박경삼 석성 무직 금산 군자금 모집 교수형 25 박득용 제천 농업 이강년 부대 제천 영춘 군자금 모집 유5년(사면) 26 박일복 남포 상업 신도여 부대 홍산 밀정 처단 교수형 27 박정문 남포 잡화상 박일복 부대 부여 정산 의병 참여 징10년 28 박치량 청주 보은 군자금 모집 징7년 43

36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29 배창근 청주 청주진위대 하사 청안 군자금 모집 징7년 30 백남충 청양 농업 신여도 부대 임천 군자금 모집 징5년 31 성정모 회덕 농업 이석재 부대 남포 공주 군자금 모집 징7년 32 손명선 대구 정봉준 부대 음성 일군과 교전 유10년 33 손응현 당진 농업 정주원 부대 당진 군자금 모집 징5년 34 송헌준 청주 이발업 김형백 부대 청주 군자금 모집 징2년6월 35 신순중 당진 농업 정주원 부대 분대장 해미 군자금 모집 징15년 36 양치선 청주 농업 오양선 부대 보령 주재소 방화 징10년 37 염만순 보은 농업 보은 군자금 모집 종신형 38 우상옥 충주 농업 정봉준 부대 충주 총포 수리 유15년 39 원화상 음성 상업 방인관 부대 진천 충주 총기 소란 징3년 40 유덕삼 영춘 농업 영춘 문경 군자금 모집, 일진회원 처단 교수형 41 윤순채 청주 한봉수 부대 청주 군자금 모집 유10년 42 이강년 문경 무관 이강년 부대 제천, 충주 일군과 교전 교수형 43 이기석 청주 청주진위대 배창근 부대 청안 일군 처단 교수형 44 이덕경 공주 상업 공주 군자금 모집 교수형 45 이만봉 청주 농업 유덕삼 부대 청주 보은 군자금 모집 징5년 46 이명선 연산 연산 군자금 모집 징10년 47 이상곤 보은 농업 보은 의병 모의 징2월 48 이상덕 태안 정주원 부대 당진 일군과 교전 징15년 49 이성택 남포 신여도 부대 남포 일군과 교전 징10년 50 이양삼 연기 김순오 부대 군자금 모집 유죄 51 이용업 영춘 농업(포군) 이강년 부대 단양 제천 충주 일군과 교전 52 이원오 공주 상업 조경환 부대 공주 귀순 기각 징5년 53 이용운 연풍 청주진위대 배창근 부대 충주 군자금 모집 징5년 54 이일봉 보령 장석홍 부대 남포 일군과 교전 징5년 55 이자성 여산 한봉수 부대 보은 유10년 56 이정구 목천 농업 한봉수 부대 청주 일군처단, 총기탈취 종신형 57 이종칠 청주 한봉수 부대 청주 일군 처단 징5년 58 이춘성 공주 부상 부여 군자금 모집, 주재소 습격 교수형 59 이필봉 홍주 오양선 부대 홍주 일진회원 처단 종신형 60 이 홍 남포 장석홍 부대 남포 일군과 교전 징5년 61 장석홍 남포 장석홍 부대 남포 일군과 교전 징7년 62 장윤삼 진천 농업 이병필 부대 진천 밀정 처단 교수형 63 장인식 단양 농업 이강년 부대 영춘 일군과 교전 유3년 64 정시항 충주 정봉준 부대 음성 일군과 교전 유15년 44

37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65 정용운 보령 오양선 부대 보령 일군과 교전 징3년 66 정운기 괴산 측량사 괴산 의병 모의 징5년 67 정주원 당진 양반 정주원 부대 당진, 경기 일본군 공격, 관아점령 종신형 68 정중택 제천 시위대병사 이강년 부대 영춘 단양 일군교전 군자금모집 유10년 69 정춘서 청주 청주 강도 살인교사 교수형 70 조봉선 음성 전병현 부대 십장 충주 음죽 총기 휴대 유7년 71 조성윤 이강년 부대 제천 태80대 72 조운식 상주 한봉수 부대 보은 일군과 교전 교수형 73 진근선 영동 농업 황간상주 총기 휴대 종신형 74 최대옥 청풍 농업 청풍 군자금 모집 징5년 75 최명기 충주 농업 청주 군자금 모집 징5년 76 최성천 충주 광부 김상태 부대 단양 청풍 군자금 모집 교수형 77 최성필 포군 허열 부대 연산 군수품 모집 유7년 78 최순돌 면천 어물상 오양선 부대 보령 군자금 모집 징7년 79 한봉수 청주 상등병 무직 김규환 부대 한봉수 부대 청주 진천 괴산 일군, 밀정 처단 교수형 (면소) 80 한치순 회덕 무직 김기수 부대 공주 군자금 모집 징7년 81 황경문 청풍 무직 이강년 부대 충주 일군과 교전 태100대 82 황덕화 황간 무직 신명선 부대 금산 군자금 모집 징10년 표 1 은 비록 재판 기록이라는 제한성은 있으나, 의병의 봉기 현황과 의병 주체의 직업과 신 분, 그리고 활동상의 특징 등 후기 충남 의병의 성격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우선 모두 82명의 의병 중에서 이강년과 정주원, 그리고 김제환 김성환 김운로 정도가 양반으로 보 인다. 그 외의 인물의 신분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직업이 표시된 50명의 현황을 보면 주로 농업(25명), 상업(9명), 해산 군인(6명), 그리고 측량사, 이발업, 광업 등으로 보아 대 부분 평민들로 생각된다. 충청 의병의 경우에도 군대 해산 이후 의병은 전기, 중기 의병에서 김복한, 민종식, 유인석과 같이 당대 최고의 유학자 또는 당상관 이상의 고위 관직을 지낸 인물들이 거의했던 상황과 성격이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또한 의병들이 1907년 7 8월 직후 봉기하여 1910년 초에는 대부분 소멸되는 것으로 보인다. 김운로, 이상곤, 정운기 3명이 1914년 8월에 활동한 것은 3명이 이때 의병 봉기를 공모하다 가 체포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김제환, 김성환 형제의 1913년의 활동은 서당 훈 장으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여 체포된 것이다. 의병들의 활동 사항을 보 면 주로 군자금 모집인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밀정이나 일진회원 처단 등의 활동이 있으 45

38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며, 일본군과의 전투 행위는 많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후기 충청 의병은 평민 중심 으로 소규모의 항일 유격대를 편성하였으며, 일본군과의 전면전보다는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일진회원이나 밀정과 같은 친일 세력을 처단하는 활동을 주로 한 것으로 보인 다. 이는 충청 의병의 투쟁 방법의 변화라기 보다는 일본군의 탄압으로 의병 활동이 위축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10년 이후에는 충청 지역에서 그러한 활동마저도 찾아보기가 어 렵다. 충청 지역에서의 후기 의병 중에 이강년을 비롯한 활동이 두드러진 인물들의 행적을 소개 하기로 한다. 이강년( 李 康 年, )은 경북 문경 출신으로, 8척 장신으로 병서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1880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활동하였으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 정국이 혼란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공포되고 유인석이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1896년 1월에 문경에서 의병을 봉기하였다. 거의( 擧 義 ) 직후 안동 의병에 쫓겨 도망 중이던 안동관찰사 김석중( 金 奭 中 )과 순검 이호윤( 李 浩 允 ) 김인담 ( 金 仁 覃 )을 체포하여 문경의 농암 장터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효수하였다. 이어 제천으로 유 인석을 찾아가 문인이 되고, 제천의병의 유격장으로서 수안보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 는 등 충주, 문경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 해 5월 제천의병이 장기렴( 張 基 濂 )이 거느린 관군 과의 전투에서 패해 유인석이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가자 의병을 해산하고 단양 금채동에 서 노모를 모시고 은신하였다. 1907년 4월에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을미의병의 동지였던 안성해( 安 成 海 ) 등과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다시 일으켰다. 그해 8월에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정미7조약으로 한국군 대가 해산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원주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해산군인 민긍호 부대와 연 합하여 원주의 배향산에 진을 쳤다. 고종은 이 소식을 듣고 그에게 밀조( 密 詔 )를 내려 도체찰 사의 직을 하사하였다. 그는 민긍호 부대와 함께 제천에서 일본군 소대 병력을 격파하였다. 제천 전투 후인 1907년 8월에는 김상태 등 40여 의병들에 의해 제천의 의림지에서 도창의 대장에 추대되고, 김상태를 중군장, 우군장에 이중봉, 우선봉장에 백남규, 좌군장에 이용로, 좌선봉장에 하한서, 전군장에 윤기영, 감군장에 이세영 등을 임명하여 의진을 편성하였다. 의병대는 9월 10일 문경의 갈평 전투에서 적의 시체가 산과 들에 가득 찼다 고 할 정도로 대 승을 거두었다. 9월 16일에는 싸릿재, 9월 27일에는 죽령, 10월 5일에는 고리평, 10월 23일 46

39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에는 백자동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 해 12월에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 탈환을 위해 양주에 집결해 이인영을 대장으로 한 13도창의대진소를 편성하자, 호서창의대장( 湖 西 倡 義 大 將 )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1908년 봄부터 의병들을 독려하여 가평 용소동 전투를 비롯해 대청리 전 투, 포천의 청계 전투, 인제의 백담사 전투, 안동의 서벽 전투 등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대담 한 유격전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의 지휘를 받는 의병들은 엄격한 군율로 기강이 서 있었 고 지역 지리에 밝았으며 지방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908년 7월 2일에 제 천 금수산의 작성( 鵲 城 )에서 일본군과의 격전 중에 발목에 총알을 맞고 붙잡혔다. 수원의 일 본수비대에 구류되었다가 같은 해 7월 8일에 서울의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압송되었다. 이곳 에서 다시 평리원으로 옮겨져 9월 22일에 내란죄 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그해 10월 순국하였 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30) 김상태( 金 尙 台, )는 단양의 영풍 출신으로 본관이 삼척이다. 1895년 을미사변 과 단발령 공포에 항거하여 1896년 이강년이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중군장( 中 軍 將 )으로 활약하였다. 이강년이 유인석의 제천의병에 가담하자 그를 따라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유인 석이 제천 전투에서 패한 뒤 서간도로 들어가자 이강년을 따라 고향에서 은거하였다 년에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자 정운경과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강년 의진과 합세하였다. 제천의 의림지에서 이강년을 도창의대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중군장을 맡았다. 이때 이중봉이 우군장, 백남규가 우선봉장, 이용로가 좌군장, 하한서가 좌선봉장, 윤기영이 전군장이 되었다. 의병대는 9월 10일에 문경의 갈평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9월 16일에 는 싸릿재, 9월 27일에는 죽령, 10월 5일에는 고리평, 10월 23일에는 백자동 전투에서 큰 전 과를 올렸다. 그는 1908년에도 중군장으로 의병들을 독려하여 가평 용소동 전투를 비롯해 대청리 전투, 포천의 청계 전투, 인제의 백담사 전투, 안동의 서벽 전투 등에서 일본군과의 교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1908년 7월에 이강년이 체포되자 그는 대장이 되어 단양을 비롯한 소백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으며 일본 헌병과 교전한 것이 10여 회에 달하였 다. 1909년 3월에는 단양군내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2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총독 부는 그에게 상금 5백금을 내걸었고, 결국 돈에 눈이 먼 종사 우중수( 禹 中 守 )의 고발로, 1911 년 5월에 순흥 남목리에서 체포되어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3차에 걸친 심문 끝에 ) 운강선생의일록( 雲 岡 先 生 義 日 錄 ) ; 김의환, 항일의병장열전, 정음사, 1975 ; 윤병석, 한말의병장열전, 독립기념관, 1991 ; 김상기, 보병14연대 진중일지 를 통해 본 이강년 의진의 활동, 지역문화연구 9, 세명대 지역문화연구소,

40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년 대구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의분을 참지 못한 그는 순경의 칼을 빼앗아 자 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일본 놈의 욕을 보느니 차라리 자살 하겠다 고 결심하고 단식하여 1912년 7월 28일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이강년의 무덤 곁에 반장( 返 葬 )되었다가 제천시의 의병묘역성역화계획 에 의해 제천시 고암 동 의병골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 서하였다. 최성천( 崔 聖 天, )은 충북 충주 신기리의 광부 출신이다. 1908년 김상태 의진에 가담하여 단양 청풍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봉화에서 체포되었다가 탈출한 후 경북 예천 봉화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최성천은 김상태 의진에 1908년 6월경부터 참여하여 활동하였 다. 그는 이듬해 3월 김상태 의병장과 더불어 단양군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2명을 사 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8월 25일에는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에서 일본군 수비 대의 밀정 권흑이( 權 黑 伊 )의 밀고로 체포되었다가 탈출하여 같은 달 30일 권흑이를 처단하 기도 하였다. 이후 일제의 의병 탄압이 가열되자 최성천은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하는 소부대 유격전으로 맞서기 위해 김상태 의병장과 함께 소백산으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이 때 김상태 의병장이 소부대 유격전에 맞게 의진을 분진하였으므로 최성천은 의병장이 되어 10명~20명 정도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소백산을 근거지로 대일 항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또한 그 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1910년 1월 2일 경북 봉화군 물야면 서리에서, 2월 6일에는 수곡리에 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3월 26일에는 20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경북 예 천군 왕천( 汪 川 ) 시장에서 군수금품을 징발하는 한편 일본인 야마우치( 山 內 銀 三 郞 )를 처단하 였다. 그러나 1910년 4월 한명선( 韓 明 善 )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어 1910년 11월 12일 대구 지방법원에서 재물탈취강도죄 로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 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봉수( 韓 鳳 洙, )는 충북 청원군 북일면 세교리 출신이다. 1907년 9월경 해산 군인 김규환( 金 奎 煥 )을 만나 감화를 받고 함께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병에 가담하였다. 그는 청주 세교장( 細 橋 場 )에서 기의하여 해산 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9 월 15일에는 미원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으며, 10월 28일에는 문의군을 습격하 여 군수를 처단하였다. 1908년 1월에는 청주의 교자동에서 일진회원 김홍식을 처단하였으 48

41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며, 이후 군자금을 모금하는 한편으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계속하였다. 그해 5~6월경에 는 속리산에서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는데, 6월 29일에는 괴산군 서면에서 우편물을 호위하 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그 중 일본 헌병대위 시마자키( 島 崎 善 治 )를 사살하고 수송되던 세금을 군자금으로 확보하였다. 10월 1일에는 미원 헌병분견소 대원들과 격전을 벌이고 헌병보조 원 정태헌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후 전의 목천 평택 여주 횡성 문경 등지에서 일본군 과 30여 회의 격전을 치르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한편 그는 괴산의 김규환, 보은의 노병대 ( 盧 炳 大 ), 상주의 조운식( 趙 雲 植 ) 의병 등과 연합하면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 뒤 상해로 건너갈 생각으로 서울 선교사 집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다가 남대문역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1910년 6월 2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폭도 강탈 살인 의 죄목으 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경성공소원에 항소하였으며 1910년 8월 29일에 이른바 합방대사 령( 合 邦 大 赦 令 ) 을 받아 면소 판결되어 석방되었다. 1919년에는 고종 황제의 국장에 즈음하 여 상경하였다가 귀향하여 3월 7일에 청주의 서문장터(우시장)입구 마차 위에서 이태우( 李 太 雨 ) 임봉수( 林 鳳 洙 ) 등과 함께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1일에는 북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다시 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다음날에는 내수보통학 교 학생 80여 명과 같이 만세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6일 공 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 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1) 정주원( 鄭 周 源, )은 당진의 고대면 용두리에서 양반으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가 육군 장교였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으나, 고종 황제가 강제로 폐위되고 구한국 군인이 강제로 해산된 직후인 1907년 8월 죽산(지금의 경기 안성군 이죽면 죽산리)에 서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서용범( 徐 用 凡 )의 권유를 받고 그 부대에 가입하여 부장으로 명을 인솔하며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그는 용인군 굴암 등지에서 의병을 초 모하고 경기도 죽산 양지 수원 안성 지역과 충청도 당진 서산 등지를 배로 이동하면서 활동하였다. 1907년 8월 25일 안성에서의 초모 모임에 참석하고, 8월 29일에 일본군과 교 전하였다. 25일 이후는 주로 죽산과 양지 지역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한진에서 배를 타 고 고온포에 건너가 충청도의 당진과 서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정주원 부대는 당진분파소 31) 독립운동사 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편찬위원회,

42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를 습격하여 물품을 탈취하였다. 일본 경찰은 이들이 배를 타고 어디론가 도주했다고 보고하 고 있다. 계속해서 정주원은 충청, 경기 지역의 의병을 불러모아 연합 의병을 조직하고 일본 경찰서를 공격했으며, 우편배달부를 공격하는 등의 활동과 함께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 세 력과 의병 고발자들을 처단하였다. 당진군 상대면의 심사성( 沈 士 聖 ) 처단 건은 대표적인 일 이었다. 정주원은 이를 시장에 광고하여 경각심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정주원은 각 면의 면 장에게 통고하여 결전( 結 錢 )을 일본인에게 상납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아울러 순행하는 의병들에게 보조금을 주어 일인에게 포살되는 농민이 있는 것을 알았음도 밝혔다. 32) 1908년 음력 2월 다시 안성과 양지 죽산 등지로 옮겨 활동하였다. 정주원 부대는 일본군의 추격을 받던 중 3월 31일 오전 5시 40분경 죽산군 원삼면 능촌에서 숙영하는 일본군 이천수비대와 경찰대 연합대를 공격하였다. 정주원 부대는 6월 15일에 서산의 동음암면 송내리에서 일본 인 체신부 아라키( 荒 木 臺 藏 )를 죽이고 천의를 지나 16일에는 오후 8시경에 면천군 감천면 삼 화리 이장의 기와집과 쌀 7석을 방화하였다. 이어서 당진군 읍내에 들어가 순사 전재길 집의 가구를 파괴하고 군아의 부속 건물에 방화하는 등 17일 오전 5시경까지 당진군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정주원은 결국 7월 19일 성환수비대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7월 17일 오후 3시 반경 아산의 서방 약 40리에 있는 행해도(지금의 행담도) 부근에서 성환수비대 소속 미조타 ( 溝 田 ) 중위가 인솔하는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정주원은 일본군과의 해상 교전 이틀 뒤인 7 월 19일 아침 8시경 추격해 온 일본수비대에 의해 해미군 적서촌(지금의 당진군 대호지면 적 서리)에서 부하인 이상덕과 함께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정주원은 체포 당시 당진의 대호지 면의 차숙보의 집에 기거하였다 한다. 그는 대호지의 대성인 차씨 문중의 보호를 받으며 당 진포 건너의 천연 요새지인 적서리 방구바위( 防 寇 巖 ) 산록에서 부대 훈련을 시켰는데 일본군 에게 체포된 의병의 안내를 받은 일본군에 의해 소대장 이상덕과 함께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정주원은 1908년 9월 29일 경기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그해 11월 24일 경성공소원에서 종신형으로 감해졌다. 그 사유는 그를 내란죄의 수범으로 오인 했으나 내란 죄의 종범 에 해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석방 후 당진군 하대면 용두리에서 농사를 짓다 가 1925년에 사망하였는데, 그의 묘는 당진군 송악면 가학리 당현 후록에 있다. 정부에서는 정주원에게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여 공을 기렸다. 33) 32) 홍비수제122-1호(융희 2년 3월 1일), 暴 徒 ノ 貼 紙 ニ 關 スル 件 부속 문서 < 各 面 面 長 ニ 廣 告 ス> (국가기록원 소장본), 폭도에 관한 편책 33) 김상기, 한말 정주원의병의 항일투쟁, 충청문화연구 1,

43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정주원이 이상덕과 함께 체포된 후 정주원 부대는 급속히 무너졌다. 그러나 안춘경은 스스 로 대장이 되어 수원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최동식은 정주원을 밀고한 자를 체포하고 일본 인을 처단하였으며, 신현구는 죽산에서 일본인을 처단하고 이 일로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하 기도 하였다. 정선경과 하군배는 당진주재소를 공격하다가 체포되었으며, 황명운은 양지군 에서 일본 순사의 총에 순국하는 등 1910년까지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상덕(1884~?)은 태안군 하대면 출신으로 구한국 군인 참위 출신으로 알려졌다. 1908년 3월경에 정주원 의병에 가입하여 당진과 면천 등지에서 소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의병 장 정주원과 함께 활동 중 1908년 7월 17일 오후 3시 반경 아산의 서방 약 40리에 있는 행해 도 부근에서 성환수비대 소속 미조타( 溝 田 ) 중위가 인솔하는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당 진 대호지면 적서리에서 결국 정주원과 함께 체포되었다. 1908년 9월 29일 경성지방재판소 에서 유배형 15년을 선고받았다. 최종성은 당진 출신으로 정주원 부대의 부장으로 하군배 정선경 심주현 등 의병 30여 명을 이끌고 활동하였다. 1907년 5월 3일 정선경 등과 함께 당진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유 희영을 처단한 일이 대표적이다. 당진군 출신으로 직업은 농업이다. 1908~9년 3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당진 서산 해미 홍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는 하여 일제의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1909년까지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일본 경찰과 헌병의 수사망을 피하였으 나 함께 활동한 정선경 심주현 하군배는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하군배(1854~?)는 당진 외맹면 찬동 출신이다. 상민으로 농업을 생업으로 하였다 년 체포 당시 56세의 고령이었다. 1906년 정주원 의병의 부장인 최종성의 권유로 의병에 가 입하였다. 1908년 5월 3일에 최종성 등 의병과 함께 당진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유희영을 처단하였다. 1909년 1월 3일 밤에 정선경 심주현 등과 함께 당진 외맹면 송당리의 한인동 과 인노수 집에서 당목( 唐 木 ) 35척과 3원을 거두고 이어서 외창리 인문식 집에서 솥 1개를 거두었다. 5월 15일에는 의병 20여 명과 함께 당진 외맹면 찬동에서 활동하다가 당진주재소 순사들과 교전을 벌였으며 부상을 입고 정선경 심주현과 함께 체포되었다. 1909년 5월 28 일 공주지방재판소로부터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상고하였으나 그해 7월 23일 경성 공소원에서 이를 기각하였다. 정선경(1863~?)은 하군배와 같은 마을인 당진 외맹면 찬동 출신으로 농업을 생업으로 하 였다. 1906년 정주원 의병의 부장인 최종성의 권유로 가입하였다. 1908년 5월 3일에 최종성 51

44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등과 함께 당진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유희영을 처단하였다. 5월 15일에는 의병 20여 명과 함께 당진 외맹면 찬동에서 활동하다가 당진주재소 순사들과 교전을 벌였으며 부상을 입고 하군배, 심주현과 함께 체포되었다. 정선경은 1909년 5월 28일 공주지방재판소로부터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심주현(1872~?)은 당진 남면 행정리 1통 5호에 거주하였다. 신분은 양반으로 알려졌으나 농업을 생업으로 하였다. 정주원 의병부대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08년 5월 3일에 최종성 등 과 함께 당진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유희영을 처단하였다. 정주원이 체포된 뒤인 5월 15일 에 의병 20여 명과 함께 당진 외맹면 찬동에서 활동하다가 당진주재소 순사들과 교전을 벌 였으며 부상을 입고 하군배 정선경과 함께 체포되었다. 심주현은 1909년 5월 28일에 공주 지방재판소로부터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최기운 (1884~?)은 당진군 읍내리 출신으로 정주원 부대의 의병으로 당진 서산 일대에 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08년 6월 15일에 의병 부대원과 함께 서산의 동음암면(지 금의 음암면) 송내리에서 홍주우편국의 일본인 직원을 붙잡아 처형하였다. 최기운은 이날 오 전 10시경에 음암면에 와서 점심을 먹고 해미군 서면 무릉산 쪽에서 온 의병 30여 명과 함께 쉬던 중 일본인 체신부 아라키( 荒 木 )를 만나 습격하였다. 부대원의 무기는 연발총 1정과 화 승총 14정, 스나이더총과 모젤 총 4정, 칼 2자루 정도였다 한다. 최동식은 출신지가 미상이나 정주원 의병부대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정주원이 체포된 후 당진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의병 3명을 인솔하고 1909년 4월 26일 오전 4시경에 정주원을 밀고한 면천군 신북면 한진의 이윤삼 집을 급습하여 체포하였 다. 최동식 일행은 이윤삼을 체포하고 소선 2척에 분승하여 당진군 외맹면 보덕포(당진에서 동북쪽으로 약 30리) 앞바다에서 1박한 뒤 다음 날 김성일과 박화숙 집에서 명주 등 물품과 현금 1원을 거두었다. 최동식은 같은 날 오후 4시경에 면천군 창둔면 성구리로 이동하여 배 를 타고 정박해 있던 일본인 후쿠다( 福 田 久 兵 衛 福 田 淸 松 ) 부자를 처단하고 이들의 배를 탈 취하여 면천군 신북면 쪽으로 떠나 수원군 수근리의 후포에 내렸다. 이 사실은 최동식 의병 을 이동시켰던 배의 소유주로 보이는 면천군 창둔면과 성금리에 사는 임창실과 최선용 박 모 등이 체포되면서 알려졌다. 손응현( ~ )은 당진군 하대면 당산리 출신으로 농업을 영위하였다. 1908년 52

45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1월 5일 정주원 의병에 가입하여 해미 서산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08년 음력 1월 15일 밤에 당진군 하대면 석동의 강달선 집에서 담배와 음식 주류 등을 탈취하고 음력 3월 27일 밤에는 서산군 동암면 남촌의 이종우 집에 들어가 그를 납치하여 해미군 염솔 면 천의시에서 배에 태워 당진군 내맹면 대난지도와 소난지도 부근에 구류시키고 3일 후인 3월 30일 장고항리에서 그의 아들이 가지고 온 돈 30원을 받았다. 그는 체포되어 1910년 3 월 28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경성공소원에 공소했으나 같은 해 4월 19일에 공소의 이유가 없다고 기각당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하여 공을 기렸다. 신순중(1884~?)은 당진 고대면 용두리 출신으로 농업을 영위하였다. 정주원 부대의 분대 장으로 1908년 5월 9일에 의병 여러 명과 함께 해미군 사기소리 이인정의 집에 들어가 군자 금 명목으로 4원을 거두었으며, 5월 19일 서산군 성연면 상평리에서 한태원에게 8원, 6월경 에는 성연면 창리에서 김인택으로부터 10원을, 창리의 홍모로부터 2원을 거두었다. 그는 정 주원 의병장이 체포된 후에는 신갑균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분대장이 되어 1908년 7월경에는 서산군 대산면 고하리 이영우로부터 10원, 11월 13일에 대산면 독관리의 이성윤으로부터 겨 울바지 10벌 등을 거두었다. 이 일로 1909년 11월 26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았으나 항소하여 1909년 12월 21일에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김쌍봉(1880~1908)은 충남 해미군 부산면 원평리 출신으로 직업은 농업이다. 정주원 의 병에 들어가 해미와 당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5월(음력)에 신갑순 이용백 등 30 여 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해미군 천의면 승비리의 남모 집에서 군자금 명목으로 2백냥 을, 당진군 구루지 이 주사 집에서 70냥을 수납하였다. 같은 해 6월 중순(음력)에는 해미군 일도면 상시평에서 일제의 밀정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그러나 그해 8월에 홍주경찰서의 순사에게 체포되었다. 1908년 9월 16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다. 1908년 11월 6일 경성공소원에서 다시 교수형을 선고받고, 다시 대심 원에 공소하였으나 1908년 11월 25일에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성백(1883~?)은 면천군 감천면 창덕리에 거주하였는데 직업은 고용인이었다. 정주원 의병대에서 김쌍봉과 함께 활동했으며 1908년 음력 6월 해미 일도면에서 일제의 밀정을 처 53

46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단한 일로 1908년 8월에 김쌍봉과 함께 홍주경찰서 경찰에게 체포되어 검찰에 송치되었다. 김쌍봉은 이로 인해 결국 대심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김성백 역시 체포되어 비록 살인 사건을 자백하면서도 전혀 이를 반성하지 않아 유사한 선고를 받았을 것으로 보이 나 아직 김성백의 판결문이 확인되지 않아 사후 행적은 알 수 없다. 김수동( 金 壽 童, )은 충북 영춘 출신이다. 1907년 군대 강제 해산 후 이강년 최성천 의진에 가담하여 충청 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강년은 1907년 7월 정미7조 약에 격분하여 봉기하였다. 이강년 부대에는 김상태( 金 尙 台 )를 비롯한 백남규( 白 南 奎 ) 변학 기( 邊 鶴 基 ) 성익현( 成 益 鉉 ) 김운선( 金 雲 仙 ) 등 해산 군인과 합류하였다. 김수동은 이강년 이 기병한 1907년 9월부터 참여하여 11월 26일까지 의병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의병 2백여 명과 함께 경북 문경, 충북 단양 영춘, 강원도 영월 군내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벌이는 한편, 일진회 회원 및 친일관료 등 매국매족 행위자를 처단하였으 며, 의병 활동에 필요한 군수품을 조달하였다. 그 후 1908년 6월 청풍 까치재에서 의병장 이 강년이 적에게 체포되자, 그의 부장들은 저마다 의병을 거느리고 활약하였는데 영월 지방에 서는 김상태, 삼척 지방에서는 성익현, 영양 울진 지방에서는 변학기가 오랫동안 활약하였 다. 김수동도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이 때 그는 소백산을 중심으로 경술국치 직전까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산간지대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의병 활동을 하던 최성천 의진에 들 어갔다. 1910년 6월 6일 경북 영천군 두내면 반구( 盤 邱 ) 시장 부근에서 영천군 봉향면 상망 동에 사는 정갑이( 鄭 甲 伊 ) 및 상주군에 사는 정인수( 鄭 寅 守 ) 등 두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정인수가 단발을 한 것을 보고 순사( 巡 査 )이며, 정갑이 또한 밀정으로 의병 활동을 정탐하러 온 자임을 직감하였다. 이에 동료 의병 5명과 함께 그들을 결박하고 영천군 호문면 화기동 지내( 地 內 ) 반구천( 盤 邱 川 ) 제방에서 처단하였다. 이 일로 1910년 10월 7일 대구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았으나 불복하여 공소하였다. 그러나 11월 15일 대구공소원에서 기 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 장을 추서하였다. 박일복( 朴 一 福, )은 충남 남포 출신이다. 그는 1907년 9월 신도여 의진에 가담 하여 동료 의병 280여 명과 함께 1908년 6월경까지 충남 보령 남포 청양 등지에서 군자 금 모집을 위해 활약하였고, 1907년 11월경에는 홍산군 읍내에 거주하는 밀정 함성덕( 咸 聖 54

47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德 )을 오갑진( 吳 甲 辰 )과 같이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후 각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1909년 1월 29일 경성공소원에서 이른바 폭동 및 고살( 故 殺 )죄 로 교 수형을 언도받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유덕삼( 柳 德 三, )은 충북 출신으로 1907년 8월 기의하여 수백 명의 의병을 인 솔하며 그중 3백명에게 각각 총기를 휴대시키고 충북 청주 보은 지방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음력 11월 20일에는 홍치경( 洪 致 敬 ) 등 4명과 함께 경북 순흥군에 거주하는 박씨 집 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같은 달 하순경에는 충북 영춘군 대곡면 해일리( 海 日 里 )에 거주하는 일진회원 우성문( 禹 成 文 )을 원건상( 元 建 常 ) 등 8명과 함께 포박하여 연행한 후 총 살하였다. 1908년 음력 12월 20일에는 김운선( 金 雲 先 ) 등과 함께 밀정으로 파악된 충북 영춘 군의 조명숙( 趙 明 淑 )을 처단하였다. 또 1909년 음력 1월 10일에도 경북 순흥군 단산면에 거 주하는 마을 이장 안모( 安 某 )가 의병 홍치경을 헌병에게 밀고한 것을 알고 그를 처단 응징하 였다. 1909년 2월 10월에 김운선 등 의병 여러 명과 함께 옥대리에 거주하는 목모( 睦 某 )의 집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그해 3월 14일에는 경북 문경군 동노소면 적성리에서 김운선 등 4명과 함께 의병이 되기를 거절한 김인호( 金 麟 浩 )를 처단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등 의 활약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1909년 경성공소원에서 살인 및 강도죄 로 교수형을 선 고받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춘성( 李 春 成, 1876~1909)은 1908년 음력 2월 충남 부여 일대에서 신여도( 申 汝 道 ) 외 20 여 명을 인솔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8월 24일에는 이종화( 李 鍾 化 ) 오양 선( 吳 良 善 ) 민창식( 閔 昌 植 ) 등과 합동하여 80여 명이 각기 총칼을 휴대하고 보령읍내 순사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10월 15일에는 30여 명의 선봉장이 되어 아산군 신창읍내 순사주재소 를 공격하여 군수품 50여 종을 확보하였다. 1909년 음력 3월부터는 설인수( 薛 仁 洙 ) 박성돌 ( 朴 成 乭 ) 최봉실( 崔 奉 實 ) 외 수십 명의 부하와 함께 청양 정산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약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1909년 11월 24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죄로 유죄 판결 을 받고 공소했으나 1909년 12월 25일 경성공소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 에서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필봉( 李 弼 奉, 1884~1950)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오양선이 이끄는 의병진에 가담하였 55

48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다. 그는 1908년 11월 19일에 정택하( 鄭 澤 夏 ) 전봉학( 田 奉 學 ) 채한영( 蔡 漢 榮 ) 등과 같이 홍 주군 화성면 제곡동에서 일진회원 이종국( 李 鍾 國 )을 결박하여 같은 면 용두리로 끌고가 참살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1909년 6월 11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모살죄 로 종신 징 역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8월 16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하여, 형이 확정되었 다. 1919년 8월에 감형되어 출옥한 후 1940년 3월에 만주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정춘서( 鄭 春 瑞, 1885~1911)는 충북 청주 출신으로 1907년 4월 초에 고향 청주에서 한봉수 ( 韓 鳳 洙 )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거의하였다. 4월 중에 의병 9명과 함께 무기를 휴대하고 각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음력 5월 10일 괴산군 서면 사치( 沙 峙 )에서 의병장 한봉수의 명령으로 우편물을 호위하며 통과하는 일본군 수비대 2명을 동료 9명과 함께 일제 사격을 가하여 사살하고, 군용총 2정, 총검 2자루, 탄약함 2개, 수통 1개, 탄약 10발을 확보하였다. 이때 이들 의진의 활약과 거점 등을 청주군 북강 내이면 화죽리에 거주하는 박내천( 朴 來 舛 ) 이 왜경에게 제보하여 의병에 큰 피해를 입히자 체포하여 사살하였다. 11월 8일에 한봉수와 결별하고 12월에 이종칠( 李 鍾 七 ) 외 1명과 총 2정으로 무장하고 16일에 청주군 북강 외이면 양청리( 陽 淸 里 ) 유 주사( 主 事 )집에서 44원 10전을 군자금으로 모금하는 등 목천 일대에서 계 속 활약하였다. 이러한 행적이 드러나 체포되어 내란 살인 강도죄 로 교수형이 선고되어 상고하였으나 1911년 6월에 형이 그대로 확정되어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 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56

49 4. 경기 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 4. 경기 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 1) 전기 의병 1 이천의병 이천의병은 단발령 공포 다음 날인 1895년 12월 31일(음, 11월 16일)에 봉기하였다. 34) 서울 에 있던 김하락은 구연영 신용희 김태원 조성학 등 젊은 유생들과 경기도 이천으로 내 려가 이천 화포군 도영장 방춘식( 方 春 植 )을 영입하고, 포군 100여 명을 포섭하여 이천의병을 결성하였다. 김하락은 우선 이천의 이현( 梨 峴 )에 진영을 설치하고 구연영을 양근과 지평 방 면에, 조성학을 광주 방면에, 김태원을 안성 방면에, 신용희를 음죽 방면에 파견하여 의병을 모집하게 하였다. 이들은 곧 9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민승천( 閔 承 天 )의 안성 의병 과도 연합하여 이천창의소를 결성하였다. 민승천을 창의대장으로 삼고 김하락은 도지휘, 조 성학은 도총, 신용희는 우군장, 구연영은 중군장, 김태원은 선봉장을 맡아 의병 항쟁에 돌입 하였다. 이천창의소는 부대를 편성한 후 3기( 騎 ) 9대( 隊 ) 법에 따라 전투 편제를 편성하였다. 이천의병은 1896년 1월 18일 이천의 백현에서 일본군과의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35) 이어서 이현 전투를 치룬 의병은 광주군수를 처단한 광주의병, 심상희( 沈 相 熙 )의 여주의병 등과 합세하여 2월 28일에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서울 진공 계획을 수립하였다. 연합의진의 남한산성 점령은 일제 침략군과 개화정권에 매우 위협적이었음이 분명하다. 3월 5일부터 남 한산성에서 관군, 일본군의 연합 공격은 시작되었다. 연합의진은 아관파천 후 새로 조직된 친러 정권의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정부에서는 의병진에서 파견한 밀사를 체포한 것으로 볼 때 의병과 정부의 관계는 적대적이었음이 분명하다. 연합의진에서는 궁극적으로는 서울에 진격하여 일본군을 구축하고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고종을 환궁시키고자 하였다. 정부에서는 참령 장기렴에게 1개 혼성대대의 병력을 주어 이를 공격하게 하였다. 장기렴 부대는 일본군의 지원을 받으며 20여 일간 공격했으나 의병의 반격으로 격퇴당하였다. 그러 나 후군장 박준영과 좌군장 김귀성이 관군의 꼬임에 빠져 3월 22일 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김하락 등은 박준영 3부자를 처단한 후 탈출하여 이후 안동 의성 경주 등지로 옮겨다니 면서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다. 김하락 일행은 4월 9일에 여주를 경유 4월 12일에 제천에 도 34) 유한철, 김하락의진의 의병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 김하락, 진중일기( 陣 中 日 記 ), 독립운동사자료집 1, 1971, 쪽. 57

50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착하여 제천의병의 환대를 받았으며 유인석으로부터 합류할 것을 제의받았다. 김하락 등은 제천의병에 합세하여 전투를 수행하면서 다시 단양 풍기를 거쳐 4월 20일 안동에 도착하 였다. 안동에서 서상열 의진과 연합을 시도하였으나 상호간 전투 방법의 차이로 인해 의성의 금성면에 있는 수정사를 거점으로 확보하고 독자적인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하락 의진에서 벌인 주요 전투로는 5월 14일의 청송의 성황현 전투, 5월 20일의 의성의 비봉산 전 투가 있다. 계속된 관군의 추격에 김하락은 경주로 이진하여 경주의병과 연합의진을 설치하 였는데 경주의병의 대장은 이채구( 李 采 九 )였다. 경주 연합의진은 6월 17일에 경주성을 공격 점령하였다. 그러나 대구부에서 파견된 관군 과 대구 주둔 일본군 수비대의 경주성 공격으로 6월 23일에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이후 김 하락은 영덕에서 신돌석과 연합하여 영덕 전투를 수행하던 중 전사하였다. 그의 죽음으로 이 천의병의 항일 투쟁은 종지부를 찍었으나 제천의진, 안동의진, 경주의진, 영덕의진 등과 끊 임없이 연합의진을 편성하면서 끈질긴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등 투쟁성에서 큰 자취를 남겼다. 2 양평의병 1895년 11월 단발령 공포 후에 이춘영 안승우 등 지평 출신의 화서학파의 문인 및 김백선 과 그의 추종 세력은 이를 국가의 위기로 인식하고 지평의병을 일으켰다. 지평의병은 1896 년 1월 12일 원주의 안창에서 거의하여 원주 관아를 점령하였는데, 이때의 의병의 수가 1천 여 명에 달했다. 1월 17일에는 제천 관아를 점령하였는데, 제천 일대에서 서상렬 이필희 이범직 등 화서학파 문인을 비롯하여 의병이 합세하였다. 제천군수는 도주하였으며 의진에 서는 대장에 이필희를, 군사에 서상렬을 추대하고 이춘영은 중군장, 안승우는 군중도유사, 김백선은 선봉장을 맡았다. 지평의병은 1월 19일에 단양의 장회협 전투에서 진위대 1개 중대와 첫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 전투에서 서상렬과 김백선이 거느린 포군은 추격해 온 관군을 장회협의 협곡에서 매복, 급습하여 승리하였다. 이 전투 후에 지평의병은 관군과 일본군의 재공격에 대비하고자 경상 도 지방으로 이동하여 의병을 더욱 모집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의병의 대오 이탈을 초래하고 말았다. 지평의병이 해산된 뒤에도 이춘영 안승우 김백선 등은 유인석의 휘하에서 중군 장 전군장 선봉장 등 지휘부를 맡아 핵심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중군장 이춘영 58

51 4. 경기 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 은 1896년 2월 26일 수안보 전투에서 전사하고, 중군장의 책임을 맡은 안승우 역시 5월 25 일 제천 남산전투에서 장렬히 순국하였으며 김백선은 불행하게도 군률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의진 내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한편 양근 출신의 이승룡( 李 承 龍 )은 양근 지역에서 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입성하여 항 쟁하다가 관군의 꼬임에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36) 이보다 앞서 광주 출신의 구연영이 이천에 서 의병을 일으키고 양근과 지평으로 와서 의병 300여 명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이천수창의소의 주력 부대 중 하나로 활동하였는데 이때 이승룡 역시 양근의 의병들을 이끌 고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승룡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민영환을 만나 통곡하고 양근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몰아내고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그는 척왜국모보수 지기( 斥 倭 國 母 報 讎 之 旗 ) 라고 쓴 기를 30여 개 만들어 세워놓고 의병을 모아 전술 훈련을 시 켰다. 그는 가사를 아들인 연년( 延 秊 )에게 맡기고 의병을 이끌고 서울을 향하여 음력 1월초 (양력으로는 2월 하순에 해당함)에 남한산성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광주군수 박기 인을 체포하여 참하였다. 37) 김하락의 이천의병은 양근의병이 입성한 이후인 2월 28일(음력 1월 16일) 남한산성에 입 성한 것으로 보인다. 38) 이에 대하여 김윤식도 속음청사 에서 양근과 광주의 비도들이 남한 산성으로 모여들어 백성들의 전곡을 거두어들이며 굳게 지킬 계획을 하여 경영병( 京 營 兵 )이 이들을 공격하였으나 패퇴하고 대포 1문을 잃었다. 적세는 더욱 떨쳤다 한다 고 하여 의병을 비도 로 보는 관리의 태도를 보여주었지만, 남한산성에 양근의 병사들이 주력 부대의 하나로 편성되었음을 알려준다. 이 양근의병이 바로 이승룡이 모집하여 이끌고 간 부대로 보인다. 남한 산성의 의병은 3월 22일(음력 2월 9일)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성을 내주고 양근 방향으로 패산했다. 이처럼 이승룡은 2월 하순경에 양근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입성하였으며, 3월 18일 양근의병장으로 활동했으나 그는 서울의 윤모로부터 내외에서 협공하자는 비밀 서신을 받고 상경하려다가 오히려 관군에 의해 체포되어 1896년 3월 27일(음력 2월 14일) 남한산성 에서 살해되었다. 39) 36) 김상기, 한말 영평에서의 의병항쟁과 의병장, 호서사학 37, ) 이연년, 강령공휘승룡가장( 康 翎 公 諱 承 龍 家 狀 ) (필사본). 38) 유한철, 김하락의진의 의병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989, 17 18쪽. 단, 김하락의 진중일기 에서는 1월 30일 (양력, 3월 13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9) 김상기, 한말 양평에서의 의병항쟁과 의병장, 호서사학 37, 2004, 150쪽. 59

52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3 춘천의병 춘천의병은 강원도 관찰부의 소재지인 춘천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을 말한다. 이 지역은 이항로의 학통을 이은 유중교, 유홍석, 이소응 등 척사론자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던 곳으 로 의병 봉기의 분위기는 성숙되어 있었다. 춘천의병은 1896년 1월 18일에 춘천유생 정인회 가 군인 성익환과 상인 박현성을 포섭하고 포군 400여 명과 함께 춘천관찰부를 습격, 점령 하면서 시작되었다. 40) 이들은 단발한 박 초관을 처형하고 전 유수인 탐관오리 민두호의 생사 당을 파괴한 후 봉의산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이어서 인근의 농민과 보부상이 참여하여 의진 이 확대되었으며 1월 20일에는 당시 명망이 높던 이소응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대장에 오른 이소응은 격문 격고팔도 를 공표하였는데, 그는 왜노( 倭 奴 ) 와 적신들이 국모 를 시역하고 군부의 머리를 깎은 처사에 거의했음을 분명히 밝혔다. 이어서 중화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쳐 국가의 원수를 갚아 치욕을 씻을 것이며 의병을 방해하는 지방관은 응징할 것 을 천명하였다. 춘천의병은 1월 28일에 단발하고 부임하는 신임관찰사 겸 선유사 조인승을 가평에서 체포, 춘천으로 압송하여 춘천부 청사 앞의 처형장 개못개 에서 총살하였다. 41) 정부에서는 춘천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1월 31일에 진위대 1개 중대를 급파하고 2월 5일에 는 2개 중대의 지원군까지 증파하였다. 춘천의병 역시 전열을 가다듬고 서울로 진격하였다. 2월 1일에 성익현 휘하의 의병 선봉대는 경춘가도의 안보역에 도착하여 관군과의 접전을 준 비하였다. 다음 날 관군이 가평에 주둔한다는 소식에 더 진격하지 못하고 가평의 벌업산[ 寶 納 山 ]에 진을 쳤다. 춘천의병은 이충응이 거느리는 가평의병과 연합하여 관군과 전투를 감행 했으나 무기와 훈련 부족으로 춘천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대장 이소응은 그의 종제 이진응과 이경응에게 의진을 위임한 뒤 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지평으로 갔으나 오히려 맹영재에게 구 속되었다. 이소응이 없는 사이에 관군의 연이은 공격으로 이진응이 전사하고 춘천 의병은 패 퇴하고 말았다. 의병들은 관군이 회군한 직후, 이진응의 동생 이경응을 대장에 추대하고 의병을 다시 모 아 3월 15일경에는 군세가 전보다 2배나 성했다 한다. 춘천의병은 재차 서울로 진격하여 3월 17일에 양근에서 20리 떨어진 광진 상류에서 한강을 넘어 이천의병과 연합 작전을 모색하였 다. 그러나 남한산성이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포위되고 얼마 안가 함락됨에 춘천으로 회군하 40) 오영섭, 춘천지역의 을미의병운동, 북한강 유역의 유학사상,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 오영섭, 위글, 187쪽. 60

53 4. 경기 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 였다. 관군의 공세가 계속되자 5월초에 대장 이경응과 순문장 장한두 성익현 등은 의병을 거느리고 강릉의 민용호 의병에 합류하였다. 유중락 유홍석 김경달 등 가평 일대에서 유 격전을 수행하던 의병들은 유인석의 제천의병에 합류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42) 4 민용호의 강릉의병 여주 출신의 민용호( 閔 龍 鎬 ) 43) 는 1월 30일에 평창, 영월, 정선 지방의 포수들로 의진을 구 성하여 1896년 1월 17일 원주의 남쪽 30여리 떨어진 신림에서 이병채 송현순 등과 함께 의 병을 일으키고 대장에 추대되었다. 민용호 의진은 평창을 점령하고 1월 24일 방림에서 격문 을 발표하여 의병의 뜻을 밝혔다. 민용호는 1월 29일에 강릉 진입을 눈앞에 두고 의진을 편 제하였다. 민용호는 강릉에 진입하여 강릉의 토착 세력을 포섭하고 경무관보 고준식을 처단 하였으며, 강릉의 선비 권인규를 초빙하여 각종 포고문을 작성하여 의병의 뜻을 널리 전파하 였다. 육지와 해안에 봉수장( 烽 燧 將 )과 망해장( 望 海 將 )을 두었으며, 무사청과 예빈소도 설치 하였다. 또한 권익현 권명수 이경한 김윤희 등을 강원도와 함경도 각지에 소모사로 파견 하여 의병 모집과 일본군 방어의 임무를 맡겼다. 민용호가 이끄는 2천여 명의 강릉의병은 원산의 일본 거류지 공격을 목표로 세우고 3월 2 일에 강릉을 출발하였다. 민용호 부대는 북상을 계속하여 3월 9일에는 고성군수의 영접을 받았다. 3월 17일 원산에서 7~80리 떨어진 안변의 신평에 도착할 즈음 폭우를 만나 진을 멈 출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일본군의 급습을 받기에 이르렀다. 일본군 원산수비대 병력과 원산에 정박하던 군함 다카오호( 高 雄 號 )에서 파견한 육전대는 19일 새벽 3시에 안변에 도착하여 신평에 주둔하던 의병을 3면으로 포위하고 8시 40분부터 공격하였다. 오전 10시 30분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의병들은 비가 내리는 상황에서 무기의 열세로 인하여 백병전을 수행하면서 일본군을 맞아 결사 항전을 했으나 30여 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패퇴하고 말았다. 일본군 수비대장 나카가와( 中 川 祐 須 ) 소좌는 3월 21일 군함 다카오호 함장인 오다( 小 田 亨 ) 대좌에게 신평장에서 압수한 무기와 기타 서류가 너무 많아서 아직 조사를 완료하지 못했 습니다. 또 포로 여러 명을 구금하였습니다 라고 승전보를 올렸다. 그는 또한 이 전투에 참 42) 이구용, 춘천의병의 항일투쟁, 춘천항일독립운동사, 춘천문화원, 1999, 60쪽. 43) 민용호( )는 경남 산청의 오고( 梧 谷 ) 출신으로 청년 시절 서울과 여주로 이거하여 살았다. 자는 문현( 文 賢 ), 호는 복제( 復 齋 )이다. 문집으로 복제집( 復 齋 集 ) 이 있다. 61

54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여한 의병의 총수를 1천여 명으로 보고하였다. 44) 민용호 부대는 전투에서 패하고 강릉으로 집결하였다. 민용호는 각 지역의 의병장에게 격 문을 보내어 상호 협력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영양의 김도현 의병장이 6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합세하였으며, 삼척의 김헌경 의병장과도 연합하여 삼척의 삼봉산에서 전투를 치렀 다. 4월 14일에 치러진 전투에서 의병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항전하였으나 탄약의 고갈 로 인하여 결국 오십천변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민용호 부대는 6월 중순 양양 전투에서 승 리하는 등 항전을 계속하였으며 그 후 고원 영흥 정평에서 활약하다가 9월 18일에 함흥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의병의 전력이 쇠퇴해져 결국 개마고원을 넘 어 만주로 들어가 후일을 기약하였다. 5 권인규의 강릉의병 권인규( 權 仁 圭, )는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공포되는 사태를 보고 비록 나이 먹 어 병들었으나 목숨 바쳐 도이( 島 夷 : 섬나라 오랑캐) 를 물리칠 것을 맹서하였다. 45) 권인규 의 거의 논리는 철저한 위정척사론에 기반하였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척사부정( 斥 邪 扶 正 ), 즉 사도를 물리치고 정도를 붙잡는 행위로 보았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의병을 일으키는 행위는 의리를 실천하는 것으로 하늘의 도움으로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면서 의 병 참여를 호소하였다. 46) 권인규는 민용호 의병에 참여하여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독자적으로 창의포고문 을 발표하여 민용호 의진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여주 출신인 민용호는 단발령이 내려진 직후 여 주를 떠나 1895년 12월 1일 원주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송형순 이병채 등과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민용호는 평창의 방림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인근에서 의병을 모 집하였으며 12월 18일(양력 2월 1일) 강릉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도사 이승학 등 강릉의 토착 세력에게 군무첩을 내려 이들을 의병에 편입시켰다. 47) 44) 민용호( 閔 龍 鎬 ) 부대의 신평( 新 坪 ) 전투에 대하여는 박민영의 대한제국기 의병연구, 한울, 1998, 쪽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관동창의록 에 의하면, 이때 의병이 수십 명 사망했고, 일본군은 부상자가 180여 명 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45) 권인규( 權 仁 圭 )는 헌종 9년 강릉의 초당( 草 堂 )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헌규( 獻 圭 )이고 자는 경행( 景 行 )이며, 호는 동빈( 東 濱 ) 또는 소운( 巢 雲 ), 소은( 巢 隱 )이라 한다. 본관은 안동으로 추밀공파에 해당한다. 생부는 사필( 思 珌 )이었으나 동생인 극( 極 )의 양자로 들어갔다. 46) 권인규, 창의포고문, 소은창의록, 독립운동사자료집 3, 261쪽. 47) 박민영, 대한제국기 의병연구, 한울, 1998, 122쪽. 이때 군무첩을 받은 강릉의 인물로는 이승학 김노원 심홍택 정규섭 이 승찬 최돈익 김양선 임익상 정헌중 김인수 전치운 강동오 등이 확인된다. 62

55 4. 경기 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 권인규는 민용호 의진에서 주로 격문 또는 포고문 등의 문서를 작성하여 의병의 당위성을 피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작성한 문서들은 문집인 소은창의록 에 수록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활동 내용과 창의 이념을 알 수 있다. 소은창의록 의 의병과 관련 있는 문서로는 예 안 창의소에 답한 통문, 창의 포고문, 창의 통문, 관동 창의소 포유문, 관동 창의사 효유 문, 서고문 등과 서간문인 의병장 민용호에게 보낸 편지 와 유진장 이병채에게 보낸 편지 가 있다. 권인규가 민용호와 만난 것은 민용호가 강릉에 들어 온 직후로 보인다. 권인규는 만남 이 후 민용호에게 큰 기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민용호 의진에서 나온 그는 12월 말에 독자적 으로 창의포고문 을 작성하여 민용호 의진인 관동9군도창의소 가 설치된 사실을 널리 알리 고 의병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48) 포고문에서 권인규는 일본을 임진왜란의 원수이며, 국모를 시해한 섬 오랑캐 라면서 철저 한 척왜론적 인식을 견지하였다. 그는 우리가 원수를 갚지도 못했는데 또 고개를 숙이고 단 발령과 같은 정책을 따를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권인규의 포고문은 그가 민용호를 만난 직후인 12월말에 발표했던 것으로 보인다. 49) 권인규는 1896년 설을 세고 민용호 부대에 다시 참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그는 관 서와 관북 지역의 사민들에게 의병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창의통문 을 작성하였다. 여기 에서 그는 강릉 지역에 의병도창의소가 창설되었음을 알리고, 관북은 이성계가 왕업의 기초 를 닦은 곳이요, 관서는 기자( 箕 子 )의 첫 교화를 받은 곳이라면서 이 난세를 당하여 한번 죽 어 대의를 이룰 것을 주창하였다. 50) 권인규는 또한 각 항구에서 일본에 붙어서 생활하는 자 들에게 효유문 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효유문에서 우리 땅에 머물러 있는 왜놈은 종자도 없이 모조리 없애야 한다 거나 소위 우리나라 대신으로 왜놈의 심복이 된 자와 수령들로 백 성을 협박하여 머리를 깎게 하는 자는 용서없이 처단해야 한다 면서 일제와 그에 붙은 부일 개화파를 철저히 처단 할 것을 밝혔다. 아울러 의병이 거리에 넘치고 있으며, 의병이 가는 길에 일제와 붙어 협력하는 자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음을 경고하였다. 이어서 의병에 합세 하여 일제를 격퇴하는 데 합력할 것을 호소하였다. 51) 48) 독립운동사자료집 3, 261쪽. 49) 의병장 민용호에게 보낸 편지,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3, 263쪽. 50) 창의통문, 위책, 265쪽. 51) 관동창의사효유문, 위책, 273쪽. 63

56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2) 중기 의병 원용팔( 元 容 八, 일명 元 容 錫, )은 러 일 전쟁 개전 이후 일제의 정치 군사적 침략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1905년 8월에 강원도 원주에서 재기하였다. 원용팔은 화서학파 의 성재( 省 齋 ) 유중교( 柳 重 敎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전기 의병기에는 여주 일대에서 활 동하던 심상희( 沈 相 禧 ) 의진에 참가한 뒤 제천의병의 중군장을 지내는 등 의병 활동에 참여 했던 인물이었다. 원용팔은 원주의 금마둔( 金 馬 屯 )에 있던 박수창( 朴 受 昌 )을 찾아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 을 요청하였다. 박수창은 군자금과 화포 등의 군수품을 지원하기로 하고 소를 잡아 천제를 지내고 의병 봉기를 결의하였다. 원용팔은 8월 16일 원주 풍정( 楓 亭 )에서 종제인 원용수( 元 容 銖 )와 채순묵( 蔡 淳 默 ) 김낙중( 金 洛 中 ) 등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때 박수창은 명포수인 최 병덕( 崔 炳 德 )과 정재식( 鄭 在 植 ) 등을 보내 의진에 합류시켰는데, 원용팔은 이들을 좌 우 총 독장( 總 督 將 )으로 선임하였다. 원용팔은 의병을 봉기하면서 일제 침략을 성토하는 격문과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서구 열 강과 청국 공사관에는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그리고 일본 공사관에는 한국 침략의 죄상을 성토하는 격문을 보냈다. 52) 산림천택을 모조리 점령하고 재정과 토지를 제 것으로 만들었으며 왕실이 불탄 것과 같다. 새둥지가 엎어졌으니, 알이 온전할 리 없다. (중략) 가죽을 보존할 수 없는데 털을 어찌 보전할 수 있겠는가. 탐욕스럽고 무자비한 무리[ 豹 狼 ]가 우리 백성을 학대하니 악하기가 진 실로 심하고, 별볼일 없는 하찮은 무리[ 犬 羊 ]가 우리의 예속을 더럽히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차마 들을 수 없도다. 심지어는 간악한 백성이 혈당( 血 黨 )을 널리 벌여 이른바 일진회라는 것 이 지독한 난적의 무리이니 만약 저들의 소위를 그대로 둔다면 반드시 나라를 없애고야 말 것이다. 또 고문( 顧 問 )이라는 관작을 두고서 고을[ 州 縣 ]의 관직을 빼앗고 전국 각지에 역당의 앞잡이들을 배치하여 온 나라를 그물질하고 우리 인민을 속박하였다. 요 순 우 탕 제왕 의 전통은 마침내 그림자도 없이 끊어지고 공 맹 정 주 성현의 학문은 멸망의 참변을 당 하게 되었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과거 조선의 전형은 복구할 수 없게 되고 소일본( 小 日 本 )의 모습이 되고 말 것이다. (중략) 진실로 문을 열고 도적을 받아들인 무리가 아니라면 누구 인들 저들의 고기를 먹으며 가죽을 베고 잘 마음이 없겠는가. 53) 52) 원씨진소( 元 氏 陳 疏 ). 대한매일신보 1905년 8월 24일. 5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말의병자료집, 200~201쪽. 64

57 4. 경기 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 원용팔은 이 격문에서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와 일진회의 매국행위를 폭로하였다. 또 일제가 고문정치를 자행하면서 매국관리들을 포섭하고 내정을 침탈하는 양상을 격렬한 어조 로 성토하였다. 그리하여 제왕성현 의 한국이 소일본 으로 전락하는 절대 절명의 위기상황 에서 항일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주살할 것을 호소하였다. 원주에서 거의한 원용팔은 곧바로 강원도, 충청도 각지에서 전력 확충에 들어갔다. 영월군 주천에서는 인근 각지에서 포군 수십 명을 모은 다음 다시 단양으로 행군하였다. 단양에서는 정운경( 鄭 雲 慶 ) 이구영( 李 九 永 ) 장익환( 張 益 煥 ) 이규현( 李 奎 顯 ) 지원영( 池 源 永 ) 등 전기 의병 때의 동지나 지역 유지들의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단양은 일찍부터 향약 조직을 통해 포군을 두어 도적을 막았기 때문에 이들 포군 세력을 의병으로 흡수하여 전력을 보강할 수 있었다. 원주의병은 8월 26일에는 장졸 및 포군 30여 명과 종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영춘군으로 들어갔으며, 이곳에서 다시 외촌( 外 村 )의 포군 10여 명을 모집한 뒤 이청( 吏 廳 )에서 하룻밤 을 유숙하였다. 이로써 영춘 지역에서 의진의 규모가 수백 명에 이르게 되자 정운경은 다음 과 같이 의진을 편제하였다. <원주 의병 지휘부> 전 군 장 : 이정의 수 성 장 : 이회승 소 모 장 : 오두갑, 유해붕, 조준원, 남필원, 엄태간 파 수 장 : 조윤식, 김순익 참모종사 : 김태관, 채경묵, 엄성하, 엄기섭, 정대억, 지규창, 지병언 서 기 : 장지환, 홍범식 원주의병은 이처럼 원주 제천 영춘 등지의 유생들로 전기 의병에서 활동한 다수의 인물 들도 확인된다. 전군장 이정의, 소모장 남필원, 참모종사 엄성하, 서기 장지환 등은 제천의 병에서 활동한 인사들이었다. 일부 군인 서리 출신들로 보이는 인사들도 기용되었으며, 또 군전이나 군량 무기 등의 군수품을 지원한 인사들도 있었다. 54) 원용팔 의병은 영춘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뒤 영월로 이동하였다. 영월에서는 보덕사의 승 54) 권영배, 구한말 원용팔의 의병항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우송조동걸선생정년기념논총 2, 나남출판, 1997, 쪽. 65

58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려 김상의( 金 尙 儀 )를 승장으로 임명하는 한편, 엄성하를 수성장, 김내현( 金 乃 鉉 )을 소모장, 박제방( 朴 齊 昉 ) 이긍하( 李 兢 夏 ) 정이항( 丁 履 恒 )을 참모로 선임하여 지역 방어 체제를 갖추 었다. 그리고 마차( 磨 差, 현 영월군 북면)로 다시 행군하였는데, 이곳에서도 윤덕배( 尹 德 培 ) 와 김경로( 金 敬 魯 )를 파수장, 김영두( 金 盈 斗 )와 양한용( 梁 漢 用 )을 교련장으로 삼았다. 이들 가운데 마차에서 교련장으로 선임된 윤덕배와 양한용은 1907년 대한제국군 강제 해산 이전 에 의병에 가담하여 군사교련의 책무를 담당하였던 사실이 주목된다. 의병진은 다시 정선으 로 진출하여 이곳에서도 지역 방어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엄기섭( 嚴 基 燮 )을 선봉장으로 삼고 수성장에 김상규( 金 尙 圭 ), 파수장에 심경화( 沈 景 化 ) 전명심( 全 明 心 ) 양숙도( 梁 叔 道 ), 참모종사에 이상렬( 李 象 烈 ) 정태영( 鄭 台 永 ) 김홍근( 金 鴻 根 ) 정병도( 鄭 炳 燾 ) 최한섭( 崔 漢 燮 ) 등을 선임하였다. 이 시기 원용팔의 원주의병은 지방관들을 크게 위협하였다. 강원도 관찰사가 내부( 內 部 )에 보고한 문건을 언론이 보도한 바에 의하면, 원용팔 의병대장이 처음 영월군으로 들어갈 때는 그 규모가 포군 명 정도였으나, 정선 군에 이르러서는 이미 200여 명이나 되었는데, 불과 며칠만에 확대된 진세였다. 55) 라고 하면서 대책에 부심하였음을 보여준다. 원용팔 의병의 중군 김낙중은 이 무렵 일진회 첩자 고영달과 일본인 체신부 1명을 처단하 였다. 또한 원용팔은 비밀리에 원주로 들어가 진위대 군인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로 약속 한 뒤 돌아왔다. 이어 원용팔 의진은 평창군 봉평으로 이동하여 많은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진세를 강화하였다. 이곳에서는 특히 추성구 천락구 배진환 추병철과 천후근 강윤중 강형진 곽재호 신경집 등의 동지들을 참모 종사로 영입하였다. 이어 홍천 서석에서도 권 영섭 정장화 이은상 이규원 등을 참모 종사에 임명하였다. 원용팔 의병은 이처럼 원주에서 재기한 뒤 그 동안 단양 영월 정선 홍천 등지를 전전 하면서 많은 인사들을 영입하여 전력을 확충하는 한편, 각지로 항일 의병의 기세를 확산시켜 갔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가 누설되자, 정부에서는 원주진위대에게 원용팔 의병을 해산하도 록 지시하였다. 이에 원주진위대장 김구현( 金 龜 鉉 )은 일진회원들을 동원하여 의병진 와해공 작을 벌인 결과 많은 이탈자가 발생하여 의병의 규모가 300명으로 격감하고 말았다. 56) 원주 55) 의병점치( 義 兵 漸 熾 ), 대한매일신보 1905년 9월 20일. 56) 권영배, 구한말 원용팔의 의병항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33쪽. 66

59 4. 경기 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 의병은 일진회원들의 농간으로 원주진위대와 연합하기 위해 원주 활곡으로 갔던 원용팔이 진위대의 공격을 받고 체포됨에 따라 해산되었다. 원용팔은 서울로 압송되어 경성감옥에 투 옥되어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3) 후기 의병 1 경기 지역 1907년 8월 구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고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되는 사태에 의병의 대일 항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경기 강원 지역은 도 경계를 뛰어 넘어 서로 긴밀하게 연계 하거나 연합의진을 형성하여 항전하였다. 경기 지역은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의병 초모, 군수품 조달 등에서 유리한 조건에 있었다. 경기 의병은 처음에는 남부 지역인 1907년 7월경부터 안성과 이천 지역에서 움직임 이 일어났다. 계속해서 수원 죽산 여주 등지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여주에서는 이구 채 김현국 윤성필이 이끄는 의병이 조직되어 우편취급소와 순사분파소를 기습하였다. 이 천에서는 김봉기가 양지 출신의 임옥녀와 함께 의병을 봉기하였다. 이들은 이천읍내의 순사 분파소와 우편취급소를 파괴하면서 광주 용인 죽산 양근 등지로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 다. 음죽과 장호원에서는 정봉준과 방인관 등이 이끄는 의병이 활동하였는데 장호원에서 일 본군경에 타격을 가한 후에 관동창의군에 가담하여 13도창의군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후반부터는 경기 남동부 지역인 양평 음죽 용인 등지로 확산되어 갔으며, 점차 이 지역은 경기 지역 의병의 중심지가 되어 갔다. 특히 양평 지역은 용문산이 자리잡고 있어 유격전에도 유리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의 의병과 일본군의 항전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양근읍 출신인 조인환과 권득수는 군대 해산 직후 거의( 擧 義 )하여 용문산으로 들어가 용문사 와 상원사를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1907년 8월에 양근 읍내를 습격하여 관아와 세무서, 파출소, 우편물 취급소, 일본인 가옥 등을 파괴, 방화하였으며, 지평에도 들어가 관 아와 순사파출소를 습격하여 지평군수 김태식을 처단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9 월 상순 아카시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의 공격을 받고 양주, 파주 지 역으로 일시 물러났다. 일본군은 이 과정에서 상원사와 용문사 사나사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편 1907년 11월초에는 지평의 삼산리에 이인영 의병장의 지시에 따라 5천여 명의 의병 67

60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이 집결하였다. 이 연합의진은 이인영 의진의 약 1천여 명으로 시작되었으나, 얼마 안가 2천 명으로 증가했으며, 허위 부대 등 각지의 의병부대가 집결한 결과 5천여 명에 이르렀던 것이 다. 이 부대는 1908년 1월 서울 탈환 작전을 감행한 13도창의진의 기간 부대가 된 이인영 의 병장(참모장)과 허위 등의 연합의진으로 서울 진공 작전을 목표로 전국 의진에 통문을 돌리 고 작전을 개시하던 중이었다. 57) 일본군은 아카쿠라( 赤 倉 ) 대위가 인솔하는 1개 중대가 11월 6일 원주를 출발하였고, 이 보다 앞서 서울에서 사카베( 坂 部 ) 소좌가 1개 중대를 인솔하여 왔 다. 삼산( 三 山 ) 전투는 11월 7일부터 2일에 걸쳐 벌어졌는데, 일본군의 포화에 다수의 사상자 를 낸 의병은, 삼산에서 철수하여 양주쪽으로 이동하였다. 이 연합의병에 양평에서는 김춘 수가 안무장( 安 撫 將 )으로 참전했다. 58) 일본군의 양평 지역 의병 탄압은 혹독했다. 의병의 근거지라고 하여 유서 깊은 용문사와 상원사 사나사를 불태웠다. 상원사와 용문사는 1907년 8월 24~25일간에 일본군 보병 제 52연대 제9중대에 의해 불태워졌으며, 59) 사나사는 그 해 10월 27일에 일본군 보병 제51연대 제11중대에 의해 불태워졌다. 60) 또한 일본군은 양평 지역에서 수많은 민가를 불태우는 만해 을 저질렀다. 1907년 8월에 지평의 수동에서 200여 호, 61) 10월에는 양근읍내에서 200여 호, 사탄과 역곡에서 90여 호, 옥천에서 20여 호의 민가가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62) 11월에 도 일본군은 양근읍의 민가 수백여 호를 불태웠다. 63) 강화도에서는 강화분견대 군인들이 무장 봉기하면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해산 군인 연기 우와 지홍윤 등은 무기고를 점령하고 주민들과 함께 강화읍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의 1차 공 격은 물리쳤으나, 2차 증원군의 공격에 지홍윤 부대는 해서 쪽으로, 연기우 부대는 장단으로 이동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장단 출신의 김수민은 강화 지역에서 활동하였는데 경기도와 57) 김상기, 한말 영평에서의 의병항쟁과 의병장, 호서사학 37, ) 폭도에 관한 편책 원비발 제46호의1, 1907년 11월 10일( 한국독립운동사자료 8, 104~5쪽) ; 같은 책, 한헌경을 제404호, 융희 2년 4월 9일(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0, 128~9쪽). ; 신용하, 전국 십삼도창의대진소 의 연합의병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 1987, 17~18쪽. 59) 참( 參 )1발( 發 ) 제83호 (1907년 8월 28일) 한말의병자료 4, 독립기념관, 58쪽. 한국주차군사령관은 일본 참모총장에게 보병 제 52연대 제9중대는 24, 25일 양일 간에 적의 근거지인 상원사 및 용문사는 집적해 있던 다량의 양식과 함께 불태웠음 이라고 보고하였다. 조선폭도토벌지 ( 독립운동사자료집 3)에 의하면, 양근, 이천 방면으로 파견된 아카시 중대는 23일 양근에 도착, 24일 양근 동북 약20리에 있는 폭도의 소굴인 장수동 연안막( 蓮 安 幕 )을 습격, 궤란하는 폭도를 습격하여 용문사 근거지를 무찔러 장래의 화근을 끊기 위하여 그것을 소각해 버렸다 (692쪽)고 보고되어 있다. 60) 조선폭도토벌지 ( 독립운동사자료집 3, 709쪽) 10월의 폭도토벌 에 의하면, 보병 제51연대 제11중대는... (중략)... 27일에는 양근 61) 황성신문, 1907년 8월 29일, 잡보. 62) 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 8일, 楊 邑 又 燒. 63) 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6일, 잡보. 68

61 4. 경기 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 황해도를 넘나들면서 활동했다. 13도창의대진소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1908년 8월까지 활동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경북 선산 출신의 허위는 경기도 북부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였다. 그는 1907년 음력 9월경 김진묵과 왕회종 등에 의해 의병장에 추대되어 적성 삭령 등지에서 활동하였 다. 그후 그는 김규식과 연기우 등의 의병대와 합세하여 연합의진을 형성하였다. 허위는 경 기도 지역의 다른 의병대와 긴밀히 연계하면서 13도창의대진소를 구축하여 서울 진공 작전 을 주도하였다. 이 작전이 좌절된 후 그는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을 중심 무대로 항전을 지속 하였다. 그러나 1908년 6월 허위는 고향 친구의 밀고로 은신처인 경기 영평군 서면 유동에 서 체포되었다. 이은찬은 허위가 체포된 후 중국 만주 지역으로 거점을 이동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 자 경기도 포천에서 의병을 재기하였다. 부대 명칭을 창의원수부라 하였는데, 선봉장에 김 귀손, 좌군장에 윤인순, 우군장에 정용대, 부장에 박순근 임운명 강기동 이준식, 참모에 이종협 윤대구 이주호 엄해윤, 군량장에 이계복, 종사에 이사인, 부관에 장수봉을 임명 하였다. 창의원수부는 1909년 2월 양주의 적석면 돌압산에서 일본 순사대와 조우하여 치열 한 공방전을 수행하여 격퇴하였다. 같은 해 3월에는 좌군장 윤인순이 수비대와 교전 중 전사 하였다. 이은찬은 만주로 망명할 계획을 수립하던 중에 밀정의 덫에 걸려 서울 용산에서 체 포되고 말았다. 2 강원 지역 1907년 8월 이후 강원 의병은 춘천과 원주 지역은 물론 홍천과 강릉 울진 등 각 지역에서 봉기하여 활발히 항쟁하였다. 이들 의병 부대는 춘천 원주 강릉 등을 서로 오가면서 활동 하였다. 강원도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중에 비교적 규모가 큰 부대로 연기우 김춘수 이종 협 김억석 조북동 채응언 유학근 등이 있다. 장기 항전을 주도한 의병으로는 김광옥 최도환 정경태 연기우 강두필 김상태 이태영 의병 부대가 있으며, 일본군경과의 전 투횟수가 많았던 의병으로는 김광옥 최도환 유학근 이종협 김억석 조복동 부대가 두 드러졌다. 그중에서 김춘수는 강원도 홍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부하 200여 명을 데 리고 양평을 비롯한 광주 가평 홍천 등 경기도와 강원도를 넘나들면서 활동하였다. 그는 1908년 4월 가평과 홍천 등지에서 방곡령을 지시하면서 활동하다가 가평에서 체포되었다가 탈옥하여 다시 활동하다가 1909년 12월에 자수하였다. 69

62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강원도 원주에서는 이은찬과 이구채가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전국적인 규모의 의병대를 구 축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여주 출신으로 전기 의병기에 유인석 의병대에서 활동한 이인영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활동하였다. 이인영은 원주에 의병원수부를 설치하고 관동창의군을 봉기 하여 다음과 같이 편제하였다. <관동 창의군 지휘부> 대 장 : 이인영 총 독 장 : 이구채 중 군 장 : 이은찬 좌 군 장 : 방인관 우 군 장 : 권중희 유 격 장 : 김해진 좌선봉장 : 정봉준 우선봉장 : 김병화 후 군 장 : 채상준 운 량 관 : 현이보 재 무 관 : 신창광, 민춘원 좌총독장 : 김현복 우총독장 : 이귀성 진위대사령부 : 민긍호 64) 이인영 등은 1907년 11월 15일자로 경고장을 원주진위대에 보냈다. 이어서 이인영은 해외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 을 국외 거주 동포들에게 보내어 의병 전쟁의 정당성을 천명하였다. 이들은 전국적인 연합의진을 결성하기 위하여 지평으로 이동하여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면서 전국 의병대와 연결을 취했다. 이인영은 각 지역 의병을 통합하여 둑을 무너뜨릴 것 같은 기 세를 이루어 근기 지방으로 쳐들어가면 천하는 우리의 것이 될 수는 없더라도 한국 문제의 해결에 유리할 것 이라는 내용의 통문을 전국에 보내어 의병 부대의 연합을 강력히 촉구하였 다. 전국 각지에서 16개 의진이 합세한데 이어서 허위 부대 등도 합세하니 양주에 집결한 의 병은 모두 1만여 명에 달했다. 각도의 의병장들은 연합의진을 편성하여 13도창의대진소라 하고 이인영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1908년 1월경 편제는 다음과 같다. <연합 의진 지휘부> 13도창의총대장 : 이인영 교 남 창 의 대 장 : 박정빈 군 사 장 : 허 위 진 동 창 의 대 장 : 권중희 관 동 창 의 대 장 : 민긍호 관 서 창 의 대 장 : 방인관 호 서 창 의 대 장 : 이강년 관 북 창 의 대 장 : 정봉준 65) 6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 8, 157쪽. 65) 대한매일신보 1909년 7월 30일. 70

63 4. 경기 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 13도창의대진소는 서울 공략을 목표로 하였다. 이들은 서울을 공략하여 통감부를 격파한 후 을사조약을 철회시킨 다음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1907년 11월의 경기도 삼산 전투와 마전 전투가 대표적이었는데, 군사장 허위는 300여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1907년 11월부터 서울로 진격하여 동대문 밖 30리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그러나 후발대의 지원이 끊어져 퇴 각하는 과정에서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여 대장직에서 사퇴함에 따라 서울 진공 작 전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서울 진공 작전이 좌절된 후 허위는 경기도 임진강 유역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조인환 권준 왕회종 김진묵 박종한 김수민 이은찬 등 의병장들과 긴밀히 연락하여 의병부대 를 재정비하였다. 1908년 4월에는 허위 이강년 이인영 유인석 박정빈의 연명으로 전 국 13도 의병의 재기를 요청하는 통문을 발송하였다. 그러나 증강된 일본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 제2차 서울 진공 작전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4) 경기 강원 지역의 후기 의병장 경기 강원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은 경기 강원도 출신 뿐 아니라 충청 경상, 심지어 는 평안도 출신 의병장도 있었다. 이 지역 역시 후기 의병장은 양반 유생보다는 농민이나 광 산노동자 포수 등 평민 출신이 증가하는 특징을 볼 수 있다. 경기 강원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운데 여기에서 소개하는 인물은 다음의 표 2 와 같다. 표 2 경기 강원 지역의 후기 의병장 현황 순번 이 름 활동 지역 의병장 판결일 형량 비고 1 유상덕 양근 조인환 유10년 2 전성환 양근 조인환 유10년 3 나응완 양근 조인환 유7년 4 김성완 춘천 권득수 유7년 5 김천복 서울 김태선 유5년 6 김영근 서울 김태선 유5년 71

64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7 박계문 서울 김태선 유5년 8 신재만 양근 권득수 유10년 9 김봉기 이천 김봉기 교수형 애국장 10 이연년 홍천 김춘수 유10년 애국장 11 정철화 양근 방인관 유15년 독립장 12 박순길 포천 지영기 유10년 애국장 13 김창식 양주 이인영 유15년 애국장 14 한원태 양주 이인영 유15년 애국장 15 이기상 양주 이인영 유7년 애국장 16 이연태 용인 홍일초 유10년 17 김태동 수원 남상목 유10년 애국장 18 김재선 수원 남상목 유15년 애족장 19 송주상 수원 남상목 유10년 애국장 20 정치삼 교하 정용대 유10년 애족장 21 강상봉 교하 정용대 유10년 애국장 22 임허옥 용인 윤관문 유10년 애국장 23 김규식 양주 김규식 유15년 독립장 24 신화선 과천 유7년 25 이구영 과천 심성완 한창렬 유7년 26 최광미 과천 유7년 애국장 27 윤수정 양주 김규식 유10년 28 임만성 장단 김수민 유7년 애족장 29 이재복 경기 강원 이은찬 유7년 애국장 30 채운걸 경기 강원 이은찬 유10년 애국장 72

65 4. 경기 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 31 허 위 경기 강원 허 위 교수형 대한민국장 32 이덕현 포천 연기호 유7년 애족장 33 장익준 포천 연기호 유15년 애국장 34 김치연 징5년 애족장 35 강대여 징10년 36 강명선 징15년 애국장 37 서영백 강화 김태선 박종환 종신징역 38 양충신 징5년 39 이동민 징5년 40 송금종 징7년 41 이학선 파주 정용대 유5년 애족장 42 이성준 양주 박래경 유3년 애족장 43 전복규 연천 김수민 유15년 애국장 44 이은찬 경기 강원 이은찬 교수형 대통령장 45 이인영 경기 강원 이인영 교수형 대통령장 46 신현구 정주원 교수형 애국장 47 김수민 장단 김수민 교수형 독립장 48 정용대 파주 정용대 교수형 독립장 49 이성서 지평 정재학 교수형 애국장 50 김화서 죽산 안성 정봉준 징15년 애국장 51 박광천 지평 김상진 교수형 애국장 52 정영운 지평 임행숙 교수형 애국장 53 엄해윤 영월 노응규 교수형 애국장 73

66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이들 중에 허위를 비롯하여 이인영 이은찬 김수민 김봉기 정용대 신현구 엄해윤 등은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으며, 서영백은 종신징역형, 김규식과 정철화 김화서 한 원태 김재선 강명선 등은 1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들 외에도 교수형을 받은 인물로 이성서와 박광천 정영운 등이 있으며, 10년형을 선고받은 강상봉 이연년 등이 있다. 1 허위 허위( 許 蔿, )는 경북 구미 출신이다. 그는 관료 유생으로 1895년(고종 32)에 을 미사변과 단발령이 공포되자 이기찬( 李 起 燦 ) 이은찬( 李 殷 贊 ) 조동호( 趙 東 鎬 ) 이기하( 李 起 夏 ) 등과 함께 1896년 2월 김천에서 봉기하였다. 이기찬을 대장에 추대하고 대구로 진격 할 태세를 갖추었으나 대구와 공주부 관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패퇴하고 말았다. 흩어진 군사 들을 수습하여 재봉기를 준비하던 중 고종의 의병해산령을 받고 귀향하였다. 1899년에 조정 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성균관 박사, 평리원 수반판사,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 참찬 등을 역임하고, 1905년에는 비서원승( 秘 書 院 丞 )이 되었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침략상을 성토하는 격문을 발표하여 옥고를 치렀다. 1907년에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그해 9월 경기도 연천 양주 파주 등지 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연기우 부대와 김규식 부대까지 포섭하여 군세를 강화하였다. 포천의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이고 일진회원을 색출하여 포살하였으며, 철원의 우편취급소를 소각하고 일본인 순사와 친일파를 소탕하였다. 한편 그는 격문을 작성하여 서울의 각국 공 사관과 신문사에 발송하였으며, 1908년 가을에 전국의 의병부대를 양주로 집결하게 하여 13 도창의군을 편성하였다. 이인영을 총대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군사장이 되어 1908년 1월 서 울 진공 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는 정병 300명의 선발대를 인솔하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 지 진출하여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렀으나 본군의 지원이 늦어져 패하고 말았다. 이때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여 귀향하자 총대장의 중책을 맡아 의병들을 수습한 뒤, 임진강 방 면으로 나아가 박종한 김수민 김응두 이은찬의 의병부대들과 함께 연합부대를 편성하였 다. 1908년 4월부터는 제2차 서울 탈환 작전에 나섰는데, 의병연합부대는 서울 외곽을 비롯 한 경기도 일대에서 치열한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일제는 본국의 제6사단 제23연대와 제7사 단 제27연대를 한국에 증파하여 서울 근교에 배치하여 의병부대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의병 74

67 4. 경기 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 부대는 고양군 일대를 점령하고 서울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무기가 열악하고 탄환이 부족하 여 일본군의 방어선을 뚫을 수 없었다. 그해 5월에는 박노천( 朴 魯 天 )을 서울에 파견하여 고 종 황제의 복위, 외교권의 환귀( 還 歸 ), 통감부 철거, 경찰권의 회복 등 30개 조에 달하는 요 구 조건을 통감에게 제출하게 하였다. 그는 서울 탈환 작전을 지휘하고 은신하던 중인 1908 년 6월 11일에 경기도 양평군 유동( 柳 洞 ) 마을에서 일본군 헌병대의 급습을 받고 붙잡혔다. 같은 해 9월 18일 내란죄 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21일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 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66) 2 이인영 이인영( 李 麟 榮, 년)은 경기도 여주 출신이다. 정동현( 鄭 東 鉉 )의 문인으로 일찍 이 대성전 재임( 齋 任 )을 지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 지자, 유인석의 의거에 호응하여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유인석의 제천의병에 별영장 ( 別 營 將 )으로 참여했으나 제천 전투 후에는 경상북도 문경으로 이주, 은둔 생활을 하면서 농 업에 종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1907년에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되고 군 대가 해산되자 의병 활동을 재기하였다. 원주에서 해산 군인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킨 이 은찬과 이구채가 해산 군인 80명을 포함한 5백여 명의 의병을 모집한 뒤 1907년 9월에 그를 찾아와 총대장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망설였으나, 원주로 출진, 관동창의대장( 關 東 倡 義 大 將 )에 오른 뒤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또 한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도 관동의병대장 이름의 격문을 보내 일본의 불의를 성토하고, 의병은 순수한 애국 단체이니 열강은 이를 국제법상의 교전 단체로 인정하여 적극 도와줄 것 을 요청하였다. 아울러 미국을 비롯한 해외동포들에게도 격문을 발표하여 힘을 합쳐 일제 를 격퇴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가 의병장에 추대된 경기 강원 지역을 돌면서 의병 규합에 힘쓴 결과 군세가 크게 강화되었다. 그는 의병장들에게 격문을 보내 1907년 12월에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그는 분산적인 대일 항쟁을 지양하고 전국 의병대를 결성하여 서 울을 공격하여 일제를 몰아내고자 한 것이다. 그의 격문에 경기도의 허위, 황해도의 권중희, 66) 국역허위전집, 아세아문화사, 1985 ; 외솔회, 나라사랑 27(허위특집호), 1997 ; 김의환, 항일의병장열전, 정음사, 1975 ; 윤병석, 한 말의병장열전, 독립기념관, 1991 ; 신용하, 허위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 박영석교수화갑기념논총, 탐구당,

68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충청도의 이강년, 강원도의 민긍호, 경상도의 신돌석, 전라도의 문태수, 평안도의 방인관, 함경도의 정봉준 등이 망설임없이 조사들을 이끌고 몰려들었다. 이인영은 대장에 추대되어, 기일을 정해 동대문 밖에 모여서 서울을 공략할 작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민긍호 부대와 이강년 부대가 일본군과의 전투 때문에 미쳐 양주에 진입하지 못했다. 허위가 이끄는 부대만 이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여 분전하였다. 그런데 이 중대한 시기에 이인영에게 아 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는데, 그는 12월 25일 문경으로 돌아갔다. 그 뒤 의병들이 찾아가 재기할 것을 권유했으나, 아버지의 3년 상을 마친 뒤 다시 13도 창의군을 일으켜 일제를 소 탕하겠다며 거절하였다. 그는 노모를 모시고 충청북도 황간군 금계동에서 은거하다가 1909 년 6월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경성지법에서 8월 13일 내란수범죄 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9월 20일에 순국하였다. 판결문에 의하면, 문반 출신으로 배외사상 특히 일본을 배척하는 사상을 가진 자로써 지난 13년 전 당시 정부 에 반항하는 내란( 內 亂 )을 준비하였던 사람으로 항상 통감정치에 대하여 불평의 회포를 가지 고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67) 3 이은찬 이은찬( 李 殷 瓚, )은 강원도 원주 부흥사면 출신으로, 1907년 고종의 퇴위와 군 대 해산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일어나자, 그 해 9월 이구재( 李 九 載 )와 원주에서 의 병을 일으켰다. 그는 이구재와 함께 문경의 이인영을 찾아가 관동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자 신은 중군장이 되어 의병 항쟁에 돌입하였다. 이인영과 함께 원주를 떠나 횡성 지평 춘 천 등지를 전전하며 의병 규합에 진력하는 한편, 전국 의병장에게 격문을 띄워 양주로 집결 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양주로 집결한 의병들로 13도창의군을 편성하고 이인영 을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13도창의군은 서울을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1907년 12월에 이인 영이 부친상을 당하여 문경으로 돌아가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그는 자신의 의진을 거느 67) 윤병석, 의병과 독립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69 4. 경기 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 리고 양평 포천 방면으로 이동하여 임진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허위( 許 蔿 )와 함께 임진강의 병 연합부대를 편성하고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08년 말 허위가 잡혀 순국하자, 의병부대 를 인솔하고 양주 포천 영평 연천 연안 등지의 육지와 해상도서에서 유격전술을 펼쳐 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민폐를 없애는 데 힘써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는데, 1909년 1월 초순에는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받고 남방의 연안 도서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같은 해 1월 19일에 야음을 틈 타 2척의 배에 승선하여, 연평도 지역에서 일본군 파견대를 기습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 히고 증산도( 甑 山 島 )로 후퇴하였다. 같은 해 2월 27일에는 3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양주 군 석우리 북방에서 일본 군인과 헌병 연합부대와 격전을 벌여 타격을 입혔으나, 의병 진영 에서도 수십 명의 희생을 냈다. 그는 국내에서 의병 활동의 한계를 느끼고 서간도로 항일 거점을 옮겨 정병을 양성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서울에 있던 박노천과 신좌균 등이 이와 같은 계획을 탐지하고 군자 금을 제공하겠다는 미끼로 유인하였다. 그들의 말을 믿고 3월 31일 서울의 용산역에 나타났 다가, 잠복하던 일본경찰에 잡혀 1909년 5월 8일 경성지방재판소 검사국에서 내란죄 로 교 수형을 선고받고 그해 6월 27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하였다. 68) 4 김수민 김수민( 金 秀 敏, 1857~1909)은 경기 장단 출신으로 동학운동에 가담한 전력이 있다. 힘이 남달리 세고 사격술이 뛰어나며 화약과 탄환의 제조 기술도 있었다. 1907년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농민운동을 조직화시켜 항일운동으로 발전시킬 것을 결심하고 음력 8월 25일에 장 단군 북면 솔랑리( 率 浪 里 )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구한국 군대의 무기를 빼앗아 무장하고, 덕음동( 德 蔭 洞 )을 거점으로 군량을 준비하였으며 보부상으로 정보대를 편성시켜 적정( 敵 情 ) 을 탐색할 뿐 아니라 산악 전투에서 의병을 보호할 수 있도록 복장을 소나무색으로 염색하여 입혔다. 그는 민폐를 덜기 위하여 부호의 양곡과 의복을 징발하여 군용에 충당시켰다 ) 독립운동사 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 의병과 독립군, 윤병석,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7 ; 조동걸, 한말의병전쟁, 독 립기념관, 1989 ; 김도훈, 한말 이은찬의 연합의병운동과 창의원수부의 활동, 북악사론 5,

70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년 9월 김수민은 부하 병력이 300여 명에 이르자 대장이 되어 9월 중에 경기도 개성군 대흥 산 창고에 있던 관군의 대포 30문과 소포 150문을 탈취하여 병력을 강화시켰다. 10월 11일 밤 경기도 장단군 북면에서 일본군과 한 차례 교전을 하였다. 11월 27일에는 개성수비대와 격전을 벌였으며 열은동( 悅 隱 洞 ) 일대에서 농민들을 재규합하였다. 12월에는 부하 100명을 이끌고 이인영 부대와 합병하고 이인영 이은찬 등과 같이 경기도 내의 장단 마전 등 각지 에서 세력을 떨쳤으며 황주 해주 서흥 등지의 일본군 수비대와 여러 차례의 교전을 전개 하였다. 김수민은 20명에서 30명 정도의 인원으로 유격대를 편성한 후, 1908년 4월 16일에는 구화 장( 九 化 場 ) 헌병 분견소를 기습 공격하여 병기와 탄약을 탈취하였다. 그 후 장단 풍덕 일대 에서 맹위를 떨쳤는데, 1908년 10월 상순에는 강화도를 기습 공략하여 그곳 재류 일인을 완 전 처단하는 전과를 세웠다. 일제는 용산의 일본군 보병 제13연대 1소대 30명을 강화도로 급파하여 10월 30일 강화에 상륙시켰다. 이때 전등사에 있던 약 100명의 의병들은 일군과 1주일에 걸친 격전을 벌여 치 명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이 11월 1일 광성( 廣 城 )으로 재상륙하여 전등사로 돌격하였 으나 그 어느 곳에서도 김수민의 의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일제는 의병들을 소탕시킬 목적 으로 개성 수비대의 30명, 용산 주차 보병 부대의 70명, 해주 수비대의 34명, 연안 수비대의 7명 등을 동원하여 이들을 8대( 隊 )로 나누어 3일 동안 의병 진압전을 전개하였다. 11월 26일 부터 시작된 수색전 첫날에 20여 명의 김수민 의병은 정두동( 亭 頭 洞 )에 매복해 있다가 일본 군에 집중 사격을 가하여 7명 중 4명을 쓰러뜨리고 서북방으로 후퇴하여 배를 이용하여 황 해도와 주변 섬으로 이동하였다. 1909년 2월부터 김수민은 적성( 積 城 )과 강원 충청 황해도 일대에서 연기우( 延 基 羽 ) 하 상태( 河 相 兌 ) 이진룡( 李 鎭 龍 ) 한정만( 韓 貞 萬 ) 이인순( 李 仁 淳 ) 정용대( 鄭 用 大 )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그 후 적의 정보를 파악하여 더욱 완강한 항일전을 전개할 목적으로 의진을 동 생 김백수( 金 白 洙 )에게 잠시 맡기고, 자신은 차부( 車 夫 )를 가장하여 서울로 잠입하였으나 불 행하게도 검거되었다. 서대문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탈옥하려고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 했다. 1909년 10월 14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내란 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11월 22일 기각되어 순국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78

71 4. 경기 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 5 정용대 정용대( 鄭 用 大, )는 경기 파주 적성 출신으로 해산 군인이다. 구한국군에서 정 교( 正 校 )를 지낸 그는 군대 해산 이후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병을 봉기하고 스스로 창의좌군 장( 倡 義 左 軍 將 )이 되어 양주 풍덕 교하 등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는 인근의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은찬 의진과 함께 1908년 2월 27일 양주 군 석적면에서, 그리고 3월 2일 회암면에서 일본 헌병 및 경찰대와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이은찬 의병장이 체포된 후에는 윤인순 의진과의 연합 전선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6월 8일 부평군 내면을 습격하였으나 오히려 일본순사와 수비대의 공격을 받아 의병 4명이 생포되고 무기 9정을 빼앗기는 패배를 당하였다. 그는 일본군과의 효과적인 교전을 위한 군자금도 조달하였다. 1908년 4월 23일 부하 이종 근( 李 宗 根 ) 외 18명으로 하여금 통진군 대패면의 심진사( 沈 進 士 ) 집에 가서 27동 동장과 양 릉면 28동 동장과 산빈면 24동 동장을 일제히 불러서 총의 구입 비용을 염출해 줄 것을 요청 하여 5일 후에 대금 1만 5천냥을 거두었다. 4월 24일에는 대패면에 거주하는 부위 김순좌( 金 順 佐 ) 군도 1자루, 양릉면 곡촌 한( 韓 ) 모 군도 2자루, 교하군 민( 閔 ) 판서에게 양총 7자루 탄환 9백 발 그리고 마을 사람에게서도 군도 4자루를 거두어 전력을 보완하였으며 마을 사 람 조운원( 趙 云 遠 ) 등과 미리 통하여 헌병 순사의 동정을 탐지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1909년 10월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1909년 10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 지법위반 으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12월 1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당하였다. 다 시 고등법원에서 상고하였으나 기각당하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에 건국훈장 독 립장을 추서하였다. 6 김봉기 김봉기( 金 鳳 基, )는 경기도 이천 출신이다. 그는 1907년 8월 을사조약을 체결 한 이완용( 李 完 用 ) 등 7적( 賊 )을 성토하는 격문과 이토 히로부미 및 각국 영사에게 보내는 글, 그리고 동포에게 보내는 포고문을 2회에 걸쳐 작성하여 윤평순( 尹 平 順 )으로 하여금 대 한매일신보 에 게재하게 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같은 달 25일경에는 이근풍( 李 根 豊 ) 주창룡( 朱 昌 龍 ) 등과 함께 경기도 광주 용인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거의하고 서 79

72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울 전동에 있는 홍세영( 洪 世 永 )의 집에 가서 군자금을 모집하려다가 체포되었다. 그 후 이듬 해인 1908년 3월 13일 평리원에서 소위 내란죄로 교수형을 언도받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 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7 민긍호 민긍호(? 1908)의 본관은 여흥으로 서울 출신이다. 그는 1897년 원주진위대 고성분견대 의 정교( 正 校 )로 있다가 춘천분견대에 전입하고, 1901년 특무정교가 되어 원주진위대에 전입 되었다. 1907년 8월 일제가 원주수비대를 해산하려 하자 약 3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원주 우편취급소와 일본경찰을 습격, 3시간 동안 격전하였다. 그는 의병부대를 소단위의 여러 의 병부대로 편성하고, 제천 죽산 장호원 여주 홍천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적에게 큰 타격 을 주었다. 특히, 강원 충청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한 허준( 許 俊 ) 이경삼( 李 京 三 ) 김만군 ( 金 萬 軍 ) 고석이( 高 石 伊 ) 김군필( 金 君 必 ) 이한창( 李 韓 昌 ) 한기석( 韓 基 錫 ) 한갑복( 韓 甲 復 ) 윤기영( 尹 起 榮 ) 이강년( 李 康 年 ) 변학기( 邊 鶴 基 ) 조인환( 曺 仁 煥 )의 의병부대와 긴밀 한 연락을 취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이강년의 부대와 밀접한 협력 관계를 맺었다. 1907년 8월 12일 약 200명으로 편성된 부대로 여주를 기습하여 경무분견소를 포위, 공격 한 뒤 이곳 일본 경찰과 가족들을 처단하고 무기를 접수하였다. 이때 많은 지방민의 의병부 대 지원으로 의병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8월 중순 이강년과 같이 충주 공략의 작전 계획 을 세운 뒤 23일 충주를 공격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나 점령하지 못하고 장호원으로 후퇴하였다. 9월 17일 약 600명을 2개 부대로 나누어 홍천을 습격하여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고, 9월 10일 약 200명의 의병으로 재차 홍천을 기습하였다. 또한, 나머지 400명의 의 병은 낭천군아( 狼 川 郡 衙 )를 기습 공격하여, 총기와 탄약을 접수하였다. 그는 춘천 남방의 정 족( 鼎 足 ) 부근과 횡성에서도 일본 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10월 26일 횡성 둔촌( 屯 村 )에서, 11월 27일 홍천 서남 양덕원( 陽 德 院 )에서, 12월 8일 원주 동북 작곡( 鵲 谷 )에서 계속 격전을 벌여 용맹을 떨쳤다. 1908년 2월 29일 일본군과 접전끝에 20여 명의 의병이 사살되고 그는 사로잡혀 강림으로 호송되었다. 그날 밤 부하 60여 명이 강림을 습격하여 구출을 시도하였으나 탈출 도중에 전 사하였다. 민긍호가 거느린 의병은 당시 강원도 일대에서는 가장 세력이 컸던 부대로 강원 80

73 4. 경기 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 충청 경상도로 전전하면서 모두 1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8 김규식 김규식( 金 奎 植, )은 경기도 양주 사람이다. 육군 부교로 육군연성학교에서 근 무하다가 음력 1906년 10월경 퇴직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당하자 통분하여 육군 정위 현덕호와 함께 의병을 계획하고 양주의 허위 부대를 찾아가 합류하였다. 이인영 부대에 도 합세하여 연천 마전 삭령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체포되어 1908년 8월 25일 유형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12년 3월 만주로 망명하여 서일 김좌진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는 등 무장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1923년 5월에는 고려혁명군을 조직하고 총 사령에 선출되어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1925년에는 김좌진 김혁( 金 赫 ) 등이 북구( 北 溝 ) 영안현( 寧 安 縣 )에서 민족주의 대표를 망라하여 신민부를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 다. 그러나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노심초사하던 독립군의 호랑이 장군 김규식은 공 산계열의 동족에 의하여 이역 땅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 장을 추서하였다. 9 정철화 정철화( 鄭 哲 和, )는 서울 서부의 신문 밖 출신이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와 한국군의 해산을 계기로 유생 신분으로 의병에 참여하였다. 그는 허위( 許 蔿 ) 휘하의 관서 창의군 방인관 부대에 들어가 서기( 書 記 )로서 경기도 여주군 이모산( 二 毛 山 ) 일대에서 일본 군과 교전하였다. 또 전병규( 全 炳 奎 ) 의병부대에서 30명 의병 지휘관 이 되어 안성군 죽산면 칠장사( 七 長 寺 )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안성에서 군자금 수납 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의 반격에 밀려 서울 남대문 사축동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하다가 1907년 9월 15일에 체포되었다. 1908년 5월 29일에 경성지법에서 유형 15년을 선고받았다. 1913년 9월 임병찬 등이 조직한 대한독립의군부의 일원으로 국권 회복을 위해 일제 내각 총리대신 조선총독 등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군자금 모집 운동 81

74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을 벌이다 1914년 4월 다시 체포되었다. 1915년 5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 및 보 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3년형을 선고받았다.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같은 해 7월 23일 경성복 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뒤 1932년 만주 지역으로 망명하여 지내다가 1941 년 환국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0 신현구 신현구( 申 鉉 九, 1827?)는 경기 죽산군 원삼면 분촌 출신으로 농업을 영위하였다 년 음력 1월에 정주원 의병에 가입하여 그해 음력 3월 대장 정주원 등 수십 명과 함께 죽산군 근삼면 백암리에 들어가 주민 백윤삼으로부터 군자금 20원을 거두었다. 그해 3~4월에는 서 대구 등 여러명과 함께 백암리에 다시 들어가 이석진 집에서 290원 어치의 군수품을 탈취하 였다. 1910년 음력 4월 16일 새벽 2시에 정대준( 丁 大 俊 ) 등 의병들과 함께 죽산군 서삼면 시 암 시내의 여인숙에 묵었던 일본인 3명을 곤봉으로 구타하여 살해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 는 1910년 8월 17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3일 경성공소원에서 이 를 기각함에 따라 순국하였다. 11 조인환 조인환( )은 양근의 양반 출신이다. 그는 1907년 군대 해산 직후 국권을 회복하 고자 거의하여 용문사와 상원사를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였다. 의진의 규모는 4백여 명에 달 했다. 69) 1907년 8월 3일 양근 읍내를 습격하고 관아와 세무서 우편물 취급소 일본인 가옥 등을 파괴, 방화하였으며, 8월 5일에는 지평의 순사파출소, 8월 12일에는 양근 순사파출소, 8월 19일에는 지평관아를 공격하여 군수 김태식을 처단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아카시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의 공격을 받고 9월 상순 양주 파주 지역으로 일시 물러났다. 일본군은 이 과정에서 상원사와 용문사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조인환은 9월 17일 다시 양근으로 들어와 남종면의 분원동 남방의 고지에서 일본군 수비 대 제47연대 제1소대와 격전을 치렀으나 의병 20여 명이 전사하였다. 그 후 조인환의 행방 69) 폭도에 관한 편책, 경경수비( 京 警 收 秘 ) 제151호의 6, 융희 4년 3월 7일(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7, 376쪽). 82

75 4. 경기 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 이 묘연하자 잔여 의병들은 해산 군인인 신창현( 申 昌 鉉 )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활동하였다. 70) 조인환은 그 후에도 이천 여주 일대에서 활동을 계속했지만 1909년 12월 20일 군수품 배분 문제로 불만을 품은 자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정부에서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하였다. 12 이연년 이연년( 李 延 年, 1874~1944)은 이승룡의 장자로 1874년 12월에 양근의 대흥리에서 태어났 다. 초명은 목년( 穆 年 )이고 자는 경문( 敬 文 ), 호는 송석( 松 石 )이다. 벼슬은 부사과에 올랐다. 그는 선친이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을 점거하였다가 적에게 살해당한 후 항상 왜놈을 증오 하고 복수심에 불탔다. 그는 1907년 일제가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사건을 일으키 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해 7월 초순경(음력) 양근에 거주하는 민기희( 閔 基 熙 )가 현 재 정부 대신의 국가를 그르치는 것이 이처럼 심하여 강토와 생령이 회복할 여지가 없게 되 었으니 의병을 일으켜 일본인을 물리치고 구제도를 회복하려 하니 그대가 두령이 되어 큰 일 을 이룩하자 고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이에 이연년은 이들을 이끌고 활동을 개시하였으며 지평의 우곡에서 김춘수 의진에 합류하여 종사가 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보름께 홍천의 남창에서 12월초에는 여주의 천양에서, 12월 보름께는 홍천 의 각길리에서 일본군과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08년 정월(음력)에는 귀순한 의병장 정대 무( 丁 大 武 )의 선봉장 김응서와 함께 지평의 황경평에서 의병을 재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후 대송면 곡수에서 한인 순사 김연상을 살해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08년 3월 청운면 삼성리의 벗고개에서 일본군 수비대와의 치열한 전투 중에 유탄을 맞아 부상을 입고 체포되 었다. 지평옥에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다가 서울로 이송되어 그해 5월 22일에 평리원에서 내란죄 로 유배 10년형을 선고받고 완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유배 후에는 대흥리 본가 에 대곡서당을 열고 후학을 지도하였다. 71) 정부에서는 1986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 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70) 독립운동사자료집 3, 727쪽 ; 독립운동사 1, 538쪽. 71) 폭도사편집자료, 독립운동사자료집 3, 509, 734쪽 ;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쪽. 83

76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13 엄해윤 엄해윤( 嚴 海 潤, )은 강원도 영월 출신으로 의원이었다. 진주의병장 노응 규가 1906년 가을 충북 황간의 상촌면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노응규와 서은구( 徐 殷 九 )의 권 유로 의병에 참여하였다. 선봉장으로 무기를 수집 제조하고 군사들을 모집하여 훈련을 실시 하였다. 이윽고 병력이 증강되자 총기와 화약을 모아 무장하고 경부철도와 일본군 시설을 파 괴하였다. 이들은 장차 서울로 진격, 일본 세력을 물리치려는 웅대한 포부 아래 투쟁하였다. 그러나 1907년 1월 밀정의 간계에 속아 의병장 노응규를 비롯한 중군장 서은구, 종사 노공일 ( 盧 公 一 )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들은 옥중에서 강경한 태도로 항일의 대의를 주장하며 절 개를 굽히지 않았다. 결국 노응규 의병장은 그해 2월에 옥사하고 엄해윤은 그해 5월 18일 고 등재판소 평리원에서 유형 7년을 받아 황해도 장연군 백령도로 유배되었다. 광무 황제의 특사로 유배에서 풀려난 1908년에 그는 다시 이은찬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는 이은찬 의진에서 참모로 활동하였으나, 1908년 음력 12월 이종협 ( 李 鍾 協 )이 분리 독립한 뒤에는 이종협 의병진의 참모로 활동하였다. 1908년 12월 황해도 금 천 토산군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09년 4월 13일 탈출했으나 다시 체포되어 1910년 10월 18일 대심원에서 내란죄 로 교수형을 선고 받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4 안춘경 안춘경( 安 春 京, 1878?)은 경기 수원군 태촌면 진언리 출신으로 대장장이였다. 1907년 8 월 정주원의 권유로 의병에 가입하였다. 선봉장으로 4백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충청도 홍주 군 일대와 경기도 수원 안성 용인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음력 12월에는 수원의 광 덕에서, 1908년 음력 6월에는 문덕준 등과 함께 수원군 청룡면 대미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 금하였다. 그는 정주원이 체포된 뒤에는 스스로 대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1909년에는 이천 경 정성삼 최육해 배수만 이춘명 차언석 노준경 등 의병을 지휘하고 경기도 일대에 서 활동하였다. 1909년 이천경과 정성삼이 체포되면서 안춘경의 은신처가 노출되어 결국 1909년 12월 수 원군 문시면의 처가집에서 수원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그의 은신처가 알려진 것은 84

77 4. 경기 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 12월 6일이었다. 순사 가와노( 河 野 鶴 寄 )와 니시카와( 西 川 勘 作 )는 밀정 5명을 끌고 취침 중인 안충경을 급습하여 체포하였다. 안춘경은 재거의 목적을 달치 못하고 너희들에게 체포됨은 종생( 終 生 )의 유한이다 라고 원통해 하며 저항하였다 1910년 5월 9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5 강명선과 강상봉 강명선( 姜 明 善, )은 경기 마전군 서면 출신이다. 1907년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후 대한제국군 특무정교 출신인 박종환( 朴 宗 煥 ) 의병진에 참가하였다. 그는 강대여( 姜 大 汝 ) 등과 함께 장단과 마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2월 마전군 서면의 최사음( 崔 舍 音 ) 집에서 곡식을 거두는 등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다가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같은 해 9월 29일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상고하였으나, 1908년 11월 10일 대심원에서 소위 내란죄 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강상봉(1889?)은 경기 통진의 포수 출신이다. 정용대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 풍덕 교 하 통진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강상봉은 정용대 의병장의 지시로 정치삼 등과 함께 1908년 4월 경기도 풍덕군 조강리에서 일본 순사대와의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는 교하군 분포동에 서 실탄을 확보하는 일을 하였으며, 이후 의병 활동의 재개를 모색하며 통진군 봉상리 자택 에 잠복해 있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1908년 7월 14일 고등재판소평리원에서 내란죄 로 유형 10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6 권득수 권득수( 權 得 洙, )는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족보에는 각( 恪 )으로 기입되었 으며, 자는 성근( 成 根 )이며 본은 안동이다. 부친 권신영( 權 信 榮 )은 무과 출신으로 안동권씨 추밀공파 정승공( 政 丞 公 )의 33세손이다. 72) 권득수는 김정화( 金 正 和 )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 학하였다. 또한 그는 무장으로서의 기상도 뛰어나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1905년 양평군 양근리 장로교 신자인 홍씨 부인의 집에 정착하였다. 그는 장로교회를 72) 안동권씨추밀공파대보. 85

78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개척하여 선교 활동과 문맹퇴치에 헌신하는 김연옥( 金 演 玉 )을 만나 동지가 되어 구국을 위한 창의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교회에서 젊은이를 모집하고자 하였으나, 김연옥으로부터 교회보다 시장에서 의병을 모집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가산을 정리하여 무기를 구입한 그는 소장수로 가장하고 양평 양주 이천의 장날을 택하여 격문을 붙이고 창의하였다. 그가 창의한 때는 1907년 음력 7월로 보인다. 용문산을 근거지로 하여 양평 양주 이 천 지평 일대에서 200명이 넘는 의병진을 편성하는데 성공하였다. 73) 의병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고자 양평군 양서면 문호리의 나루터를 도강하려 했으나 일본 기병대에 발각되어 치 열한 격전을 치렀다. 이 전투에서 일본 헌병 2명을 사살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용문산으로 후퇴하였다. 용문사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조인환 의진과 함께 활동하던 권득수 의병은 1907년 8월 일 본군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의 급습을 받았는데 8월 23일 양근에 도착한 9중대는 24일 의 병의 근거지인 용문사를 불태웠다. 74) 이에 의병은 상원사와 운필암으로 후퇴하면서 항쟁하였다. 이는 8월 말(음력 7월 23일)에 양근의 수회리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을 하였다거나 8월 31일에 해산 군인인 김성완( 金 聖 完 ) 이 수회리에서 권득수 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갔다는 진술 등으로 뒷받침되며, 이를 보면 권득 수는 매일 의병들에게 급료까지 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75) 이후 권득수는 9월 8일(음, 8월 1 일)에는 양주의 회촌으로 가서 그곳에 거주하는 신재만에게 국가를 위하여 창의할 것을 권 유하고 자금 5만원과 양총 및 조총 등 13정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76) 권득수는 1907년 9월(음 력) 원주의병장 민긍호 부대를 비롯하여 장기환( 張 箕 煥 ) 의병 최두환( 崔 斗 煥 ) 의병 한갑 복( 韓 甲 福 ) 의병 박래봉( 朴 來 鳳 ) 의병 주석민( 朱 錫 敏 ) 의병 등과 연합하여 인제군 일대에 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 연합의병이 1만여 명에 달했다는 신창현의 진술 77) 로 보아 권 73) 조선총독부 경무국 편, 폭도사편집자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507쪽). 이 자료에 의하면, 권득수를 소 장사를 하던 자인 바 한때 부하 200여 명을 인솔하고 지평 양근 이천 양주의 각지를 배회 출몰하여 현재 소재 불명인 바 일설에는 부하에게 살해되었다고 전한다 고 보고하고 있다. 74) 조선폭도토벌지, 독립운동사자료집 3, 692쪽. 75)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2쪽, 김성완판결문. 김성완은 체포되어 1907년 11월 5일 유배 7년형을 선고받았다. 76)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2-13쪽, 판결서 형제 46호 56호. 77)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69쪽. 이 자료에 권득주( 權 得 珠 )라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권득수( 權 得 洙 )의 오기로 보인다. 신창현은 1908년 6월 18일 (음, 5월 20일) 체포되어 9월 15일 종신유형을 선고받았다. 86

79 4. 경기 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 득수 의병의 행적은 1907년 음력 9월까지는 확인된다. 1909년 3월 16일 경기도 관찰사 김사 묵이 내부대신 박제순에게 보고한 폭도사편집자료 에 의하면, 권득수에 대하여 현재 소재 불명인 바 일설에는 부하에게 살해되었다고도 전한다 78) 고 하였으나 사망 일시와 경위는 지 금까지 알 수 없다. 79) 권득수가 용문사 일대에서의 활동할 때인 1907년 8월말 인근의 오촌리 김윤구의 99간 저택이 권득수 의병에게 무기와 군량을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불태워지기까 지 하였다. 80) 정부에서는 1986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하였다. 17 김춘수 김춘수( 金 春 洙, )는 양근군 북면 소설리 출신의 유생으로, 81) 본명은 노수(일명 병수), 본관은 광산이다. 1874년 8월 옥천면 신복리에서 부친 영석과 모친 고성 이씨 사이에 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8월 이후 홍천에서 창의하여 200여 명을 인솔하고 양 평 여주 광주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참모장에 백영기, 종사에 김응서 이연년이 있다. 그 리고 의병으로 이춘명 이천보 고정복 신원영 등이 확인된다. 김춘수는 허위 부하인 김규 식 등과 연계하여 1907년 12월 13도창의진에 안무장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20여 명의 의병 을 이끌고 1908년 4월에 양근군의 북면으로 들어가 4월 8일자로 된 두 종류의 격문을 각지 에 보냈는데, 그 중 하나가 양근군 북면 면장과 각 동장에게 보낸 것이데, 격문의 내용은 다 음과 같다. 근처에 왜적( 倭 賊 )이 있어서 세력이 왕성하다. 그러나 의병이 재거( 再 擧 )하고 또 청국병도 역 시 동( 動 )하여 아 국민은 소생할 수 있을 것이다. 화약과 화승을 준비하라. 자위대장( 自 衛 隊 長 )은 참살한다. 문무( 文 武 ) 중에 의기 있는 자는 의병에 투( 投 )하라 82) 78) 독립운동사자료집 3, 507쪽. 79) 폭도사편집자료 에 의하면, 황재호( 黃 在 浩 ) 약 37세, 포천군 산내면)에 대한 기록 중에 그해(1907년, 필자) 9월 상순 적성군 폭도 권 덕수( 權 德 洙 )라는 자로부터 더불어 일을 일으키자는 꾀임을 받았으나 일단 응낙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이미 폭도의 수괴로써 행동하려는 의사가 있었다. 그 후 도당을 모아 권덕수와 합동하였으나 서로 불화하여 마침내 권덕수를 살해하고 스스로 수괴가 된 자로서 ( 독립운동사자료집 3, 509~510쪽)라고 하여 권덕수가 황재호( 黃 在 浩, 보병 하사 출신)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보고 되어 있다. 이때의 권덕수( 權 德 洙 )가 권득수( 權 得 洙 )가 아닌가 한다. 80) 김윤구는 1919년 3 1운동에 참여하여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독립운동사자료집 5, 491쪽). 81) 폭도사편집자료, 위책, 506쪽. 82) 폭도에 관한 편책,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0, 143쪽. 87

80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또 하나의 격문은 오빈동 공산리 주민에게 보냈는데 의병의 대군이 근일 양근( 陽 根 )을 습격하려 한다. 고로 처자가족( 妻 子 家 族 )은 피난하라. 또 화약 탄환을 준비하기 어렵거든 짚신과 양식을 준비하라. 83) 라고 하여 의병부대가 곧 양근을 공격할 것을 알리면서 의기있는 이들의 의병 참여를 요청하 였다. 아울러 주민들에게 화약이나 화승총 또는 짚신이나 양식을 준비해 줄 것도 요구하였으 며,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위대원은 참살할 것임을 경고하였다. 그는 북면에서 의 병 귀순자 3명을 잡아 가평군 남면으로 끌고 가 처형하기도 하였으나 1908년 4월 19일 가평 수비대장 나이토( 內 藤 ) 중위에 의해 가평군 청평천의 북쪽 구정리에서 체포되었다. 84) 그가 이후에 어떻게 탈출했는지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1909년 12월 양주경찰서에 자수하였다. 85) 18 이춘명과 박광천 이춘명( 李 春 明 )은 강원도 양구 출신으로 양평군 용암리에서 거주하였다. 1910년 현재 33 세로 직업은 농업 겸 뱃군 이다. 1907년 9월경(음력)부터 김춘수 의병진에 가입하여 활동하 였다. 같은 해 12월 양근분견소에 자수하였다가 다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12월 14일(음력) 고정복 신원영 이천보 등과 함께 남시면에서 군수품을 탈취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춘명은 이 일로 체포되어 1910년 4월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86) 박광천( 朴 光 天, 1854~1910)은 1907년 8월(음력) 김상진 의진에 참여하여 강원도 홍천군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8월 20일(음력) 같은 해 홍천군 동신대 동은교동에서 친일 밀고자 김 윤여를 김상진의 명령에 따라 화승총으로 총살하였다. 그 후 이 일로 체포되어 1909년 11월 26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 및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경성공소원과 고등 법원에 항소하였으나 12월 23일과 1910년 1월 27일 각각 기각되어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 다. 정부에서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87) 83) 폭도에 관한 편책,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0, 143쪽. 84) 폭도에 관한 편책,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0, 149, 151쪽. 85) 폭도에 관한 편책,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7, 쪽 : 김순덕, 경기지방 의병운동 연구, 한양대 박사학위논문, 2003, 42쪽. 86)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53쪽. 87)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쪽. 88

81 4. 경기 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 19 정영운과 이재복 정영운( 鄭 永 雲, 1879~1910)은 경기도 지평에서 태어나 양근군 남시면 상백석동에 거주 하였다. 임행숙 의진에 가담하여 동료의병 100여 명과 함께 각지를 다니면서 활약하던 중 1907년 11월 1일에 경기도 여주군 홍곡면 충신동 산 속에서 여주경찰서 소속 순사 5명을 만 나 와타나베( 渡 邊 卷 太 郞 ) 등 4명을 사살한 뒤 의병 활동을 계속하다가 체포되었다. 1910년 2 월 16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고 항소하였으나, 3월 1일 경성공소원에서 교 수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88) 1991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재복( 李 再 福, 1881~?)은 양평의 지평 상동면 삼상리 출신으로 직업이 농업이다. 1908년 3월부터 7월까지 이정숙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 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일본수비대 와 총 4회의 전투를 수행하는 등 치열한 반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08년 9월 1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유형 7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89) 정부에서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여 공을 기렸다. 20 이성서 이창준 부자 이성서( 李 聖 瑞, 1856~1909)는 지평의 양곡 출신으로, 1909년 당시 경성의 중부 소립동에 거주하였으며, 직업은 미장이었다. 1907년 음력 7~8월경에 정재학( 鄭 在 學 ) 의병에 들어갔 으며, 8월 1일(음) 정재학 의병장을 비롯하여 80여 명과 함께 총기로 무장하고 경기도 적성 군과 마전군 등지에서 활약하던 중 일본인 약상인 기시모토( 岸 本 源 四 郞 )를 총살하였다. 같 은 달 신중원과 의병을 거느리고 경기도 삭녕군 읍내에서 주사 모씨로부터 총 30정과 탄약 5 근, 돈 160원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아들 이창준( 李 昌 俊 )과 함께 황해도 토산군 토산시장에서 동장과 집강 등을 붙잡아 220원을 모집하고 군청의 이방을 위협하여 탄약 1상자와 탄환 3천 발을 탈취하였다. 1909년 11월 19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이성서는 강도 및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12월 14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으며, 이창준은 징역 2년 6 개월에 처해졌다. 90) 이성서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88)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50, 169쪽. 89)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215쪽. 90)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쪽. 89

82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5. 중부 지역 의병 항쟁의 의미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갑오변란과 청 일 전쟁을 전후하여 일제에 의한 군사적 위협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이에 따라 1894년 이후 조선인들은 반침략을 시대 적 과제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의병을 조직하여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한 피의 항쟁을 전 개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의병 항쟁은 한민족의 반침략 반개화 투쟁이며 아울러 국권 침 탈 이후 독립전쟁을 일으키게 한 정신적 인적 연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는 실로 크다 하겠다. 한말 의병의 시기 구분은 2시기, 3시기, 또는 4시기로 구분하여 설명되기도 하나 이 글에 서는 전기 의병( ), 중기 의병( ), 후기 의병( )의 3시기 로 구분하였다. 전기 의병은 1894년 6월 일본군이 무력으로 경복궁을 침범한 갑오변란과 을 미사변, 단발령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일어났으며, 중기 의병은 1904년 2월 개시된 러 일 전쟁과 그 직후에 체결된 한일의정서 그리고 1905년 11월 강제 늑결된 을사5조약 등과 같 은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 때문이었고, 후기 의병은 1907년 7월의 고종의 강제 퇴위와 1907 년 8월 1일 구한국군의 강제 해산이 직접적 요인이 되어 봉기하였다. 이 글에서는 한말 중부 지역(충청 경기 강원)에서 일어난 의병의 활동과 대표적인 의병 장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특히 그중에서도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인물들의 판결문 내용을 검 토하여 활동상을 구체적으로 밝히고자 하였다. 중부 지역 중 충청 지역에서는 전기 의병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최초의 을미의병이 대전의 유성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대구 출신으로 진잠현감을 역임한 문석봉은 1895년 9월 명성황 후의 원수를 갚고자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는 공주부에서 파견한 관군과의 항전에서 패 퇴하여 경상도로 내려가 재기를 도모하던 중에 대구부에서 파견한 순검에 의해 체포되었다 가 탈옥하여 원주에서 재기를 도모하던 중에 병으로 순국하였다. 충남의 홍성 지역에서는 승 정원 승지를 지낸 김복한과 이설 등이 재지 유생인 안병찬 등과 홍주성에서 의병을 봉기하였 다. 비록 홍주관찰사 이승우의 변심으로 체포되었지만, 이들의 항쟁은 1906년 홍주의병으로 계승되었다. 김복한을 비롯한 이설 안병찬 송병직 홍건 이상린 등 6명은 서울로 압송되 어 고등재판소에서 유배 10년, 징역 3년 등의 판결을 받았으나 고종의 특지로 석방될 수 있었다. 90

83 5. 중부 지역 의병 항쟁의 의미 유인석을 총수로 하는 제천의병은 전기 의병사에서 최대의 의진으로 평가된다. 제천의병 은 충주성을 점령하고 충북을 비롯하여 충남 강원 경북의 인접한 지역을 아우르는 세력 범위를 형성하였다. 의병에 비협조적인 개화파 관리를 처단하였으며, 수안보와 가흥에 주둔 한 일본군의 진영을 급습하여 타격을 입혔다. 일본군이 설치한 군용전신선을 절단하였으며 일본군 수비대와의 교전도 감행하였다. 제천의병은 관군이나 일본군과의 항전에서 많은 이 가 전사하거나 현장에서 모두 총살당하는 등 치열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1905년 충청의병은 재기하였다. 1905년 8월 충북 단양 지방에서 정운경과 박정수가 의병 을 일으켰으나 원주진위대의 공격을 받고 체포되었다. 유학자 박세화( 朴 世 和 )도 문인인 윤응 선과 함께 제천의 남현에서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켰다가 청풍에서 체포되었다. 1896년에 홍주의병을 주도하였던 안병찬 채광묵 박창로 이세영 등은 을사5조약의 늑결 직후에 청양의 정산에 거주하던 민종식을 의병장에 추대하고 홍주의병을 재기하였다. 이들 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일본 경찰과 헌병대는 이를 몇 차례 공격했으나 홍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통감 이토가 일본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명령함에 따라 일본군 2개 중대가 서울에서 파견되어 홍주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공 격을 감행하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 수백 명이 희생되고 체포되었다. 체포된 곽한일을 비롯 하여 박윤식 김덕진 정재호 황영수 박두표 등은 종신 유배형 을 받고 지도로, 홍순대 와 김재신은 고군산도로 유배되었다. 안병찬 박창로 최선재 윤자홍 등 수십 명은 공주 감옥에 감금되었다. 유병장 유준근을 비롯하여 최상집 이상구 안항식 남규진 신보균 이식 문석환 신현두 등 9명은 대마도로 유배되어 이즈하라( 嚴 原 )에서 감금생활을 하였다. 민종식도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 받았으나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 유배형 에 처해져 진 도에 종신 유배되었다. 당진 지역도 을사조약의 늑결에 항거하여 즉각적으로 의병을 봉기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 인 당진 의병장으로는 최구현과 정주원 등이 있다. 최구현은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옥고를 겪어 순국하였다. 정주원은 7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진의 홍일초 부대는 소난지도에서 일본 경찰대와 항전했으나, 무기의 열세로 의병대 거의 전원인 100여 명이 희생되는 참극을 입었다. 충북 지역의 의병장으로는 제천 지역에서 활동한 이강년과 청주 지역의 한봉수와 단양 지 역의 김상태가 있다. 특히 이강년은 문경 출신으로 제천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91

84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이강년은 체포되어 사형당했으며, 김상태는 교수형을 선고받고 옥중에서 단식 자결하였다. 경기 강원 지역 역시 전기 의병에서부터 활동하였는데 후기 의병기에 더욱 치열하게 전 개되었다. 전기 의병의 경우 경기 지역에서는 이천과 양평, 강원 지역에서는 춘천과 강릉 지 역에서 활발했다. 이천 의병은 김하락 등이 단발령 공포 다음 날 이천의 이현에서 일으켰다. 이들은 광주 의병, 여주 의병과 연합하여 광주의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서울 진공 계획을 수 립하였다. 이천 의병은 관군과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남한산성 전투에서 패했으나, 경상 지 역으로 이주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화사학파의 문인인 안승우 등은 양평의 지평에서 의병 을 일으켜 원주 관아를 점령하는 등 활동하였다. 양근 지역에서도 이승룡이 의병을 일으켜 부대를 이끌고 남한산성에 입성했으나 관군의 꼬임으로 살해당하고 말았다. 한편 춘천에서는 유생 정인희와 군인 성익환 등이 의병을 일으키고 이소응을 대장에 추대 하였다. 춘천 의병은 춘천 관찰부를 점령하고 신임 관찰사 조인승을 처단하였다. 춘천 의병 은 일본군의 공격에 이경응 등이 살해되자 일부는 강릉 의병에, 일부는 제천 의병에 합류하 였다. 여주 출신 민용호가 일으킨 강릉 의병은 원산의 일본인 거류지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 고 진격하던 중에 일본군의 급습을 받고 결사 항전했다. 강릉 의병은 이후에도 영양의 김도 현 의병 강릉의 김헌경 의병과 연합하여 삼척의 삼봉산 전투를 치렀다. 1905년 중기 의병기 경기 강원지역의 중기 의병으로는 원용팔의 원주 의병이 있다. 원용 팔은 영월과 단양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일진회 첩자와 일본인 체신부를 처단하는 등 대 일 항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8월에 구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고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되는 사태에 경 기 강원 지역은 도( 道 ) 경계를 뛰어 넘어 서로 긴밀하게 연계하거나 연합 의진을 형성하여 항전하였다. 경기 지역에서는 처음에는 남부 지역인 안성 이천 죽산 여주 일대에서 일 어났는데, 여주의 이구채 김현국 윤성필, 이천의 김봉기, 양지의 임옥녀 등이 그들이다. 1907년 후반부터는 양평 용인 지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특히 양평은 용문산이 있어서 유 격전 활동에 유리한 곳으로 조인환과 권득수 등이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강화도에서도 연기 우 지홍윤 등이 활동하였으며, 장단 출신의 김수민은 경기와 황해도를 오가면서 활동하였 다. 선산 출신의 허위는 경기 북부 지역에서 김규식, 연기우 부대와 연합하면서 활동하였다. 1907년 8월 이후 강원 의병은 춘천 원주 지역은 물론 홍천 강릉 울진 등 각 지역에서 92

85 5. 중부 지역 의병 항쟁의 의미 봉기하여 활발히 항쟁하였다. 이들 의병부대는 춘천 원주 강릉 등을 서로 오가면서 활동 하였다. 강원도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중에 비교적 규모가 큰 부대로 연기우 김춘수 이종 협 김억석 조북동 채응언 유학근 등이 있다. 장기 항전을 주도한 의병으로는 김광옥 최도환 정경태 연기우 강두필 김상태 이태영 부대가 있으며, 일본 군경과의 전투횟수 가 많았던 부대로는 김광옥 최도환 유학근 이종협 김억석 조복동 부대가 두드러졌다. 일본군의 의병에 대한 탄압은 혹독했다. 의병의 근거지라고 하여 용문사와 상원사 사나 사 같은 유서 깊은 사찰은 물론 양평 제천 등지의 수많은 민가를 소각시켰다. 또한 체포된 의병들에 대하여 가혹하게 처벌하였다. 단순 가담자라 하더라도 2 3년의 유배형에 처해졌 으며, 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은 폭동죄 와 내란죄 를 적용하여 사형이나 10년 이상의 유배형 을 받았다. 경기 강원 지역 의병장 중에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한 의병장으로 허위와 이 인영을 비롯하여 김봉기 김수민 이은찬 신현구 정용대 등이 보인다. 의병을 근절시키 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중형을 부과하였기에 희생이 더욱 컸다고 보인다. 91) 의병의 강력한 반일 투쟁은 일제의 식민화 정책을 지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일제는 1909년 후반 경 조선을 강점하려 하였으나, 의병 투쟁이 장기화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 였다. 결국 일제는 대규모의 군대를 투입하여 의병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이후에야 조선을 식 민지로 삼을 수 있었다. 91)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의 의병 관련 판결문은 의병을 폭도( 暴 徒 ) 난도( 亂 徒 ) 등으로, 의병장을 폭도의 수괴( 首 魁 ) 거괴 ( 巨 魁 )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군자금 조달이나 모금 활동을 약탈로 규정하는 등 일제에 대한 항거를 의도적으로 폄하하고 있다. 따라서 의병 운동을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재판 기록 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93

86 참고문헌 고종실록, 기려수필,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東 京 朝 日 新 聞 박은식, 한국통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10, 별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강재언, 반일의병운동의 역사적 전개, 조선근대사연구, 동경, 일본평론사, 구완회, 한말의 제천의병, 집문당, 김상기, 한말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의환, 항일의병장열전, 정음사, 박민영, 대한제국기 의병연구, 한울, 1998., 한말중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윤병석, 의병과 독립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7., 한말 의병장열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조동걸, 한말의병전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홍영기, 한말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권영배, 구한말 원용팔의 의병항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우송조동걸선생정년기념논총 2, 나남출판, 김도훈, 한말 이은찬의 연합의병운동과 창의원수부의 활동, 북악사론 5, 김상기, 년 홍주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전개, 윤병석교수화갑기념한국근대사논총, 1990., 년 제천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전개, 백산박성수교수화갑논총, 1991., 조선말 문석봉의 유성의병, 역사학보 134, 5합집, 1992., 이설의 항일민족운동에 대한 고찰, 우강권태원교수정년기념논총, 1994., 김복한의 학통과 사상, 한국사연구 88, 1995., 김복한의 홍주의병과 파리장서운동, 대동문화연구 39,

87 김상기, 1908년 당진 소난지도 의병의 항일전, 한국근현대사연구 28, 2004., 한말 양평에서의 의병항쟁과 의병장, 호서사학 37, 2004., 1906년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 37, 2006., 한말 정주원의병의 항일투쟁, 충청문화연구 1, 2008., 보병14연대 진중일지 를 통해 본 이강년 의진의 활동, 지역문화연구 9, 신용하, 허위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 박영석교수화갑기념논총, 탐구당, 오영섭, 춘천지역의 을미의병운동, 북한강 유역의 유학사상, 한림대아시아문화연구소, 유한철, 김하락의진의 의병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이구용, 춘천의병의 항일투쟁, 춘천항일독립운동사, 춘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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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hwp 방송연구 http://www.kbc.go.kr/ 텔레비전의 폭력행위는 어떠한 상황적 맥락에서 묘사되는가에 따라 상이한 효과를 낳는다. 본 연구는 텔레비전 만화프로그램의 내용분석을 통해 각 인 물의 반사회적 행위 및 친사회적 행위 유형이 어떻게 나타나고 이를 둘러싼 맥락요인들과 어떤 관련성을 지니는지를 조사하였다. 맥락요인은 반사회적 행위 뿐 아니라 친사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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