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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롬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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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 설 제1부 총 설 한말 영 호남 지역 의병 전쟁과 의병장 1. 영남 지역의 의병전쟁 2. 호남 지역의 의병전쟁 3. 영 호남 의병의 특성과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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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총 설 한말 영 호남 지역 의병 전쟁과 의병장 김상기 * 1. 영남 지역의 의병전쟁 1) 전기 의병 년 안동의병의 봉기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안동 지역의 유림들은 항일 의병전쟁을 일으켰다. 1896년 1월의 김도화 권세연 이상오 권대일 김흥락 유지호 등의 의병 봉기가 그것이 다. 그러나 안동 지역에서의 의병 1) 전쟁은 공주유생 서상철 등 유림 세력에 의해 이보다 1년 6개월 전인 1894년 7월에 시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군의 보고서에 의하면, 서상철 부대 를 의병 이라고 호칭하여 주목된다. 일본군 제5사단 중로병참감 본부에서 작성한 진중일지 가 바로 그 자료이다. 이에 의하면 이번 불온한 원인인 안동( 安 東 )의 서 아무개( 徐 某 ; 徐 相 轍 을 말함, 필자 주)라는 자는 전에 경성( 京 城 ) 에서 고관으로, 이 자는 일본은 조선에 다른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의병( 義 兵 )을 일으켜 일본인을 쳐서 물리치려는[ 打 攘 ] 것을 목적으로 하여 사방에 격문을 발함에 기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안동의 서 아무개는 적의 큰 우두머리[ 巨 魁 ]로 주의해야 한다. 2) 라고 하여 서상철을 서울에서 고관을 지낸 이로 파악하였으며, 그가 일본인을 물리치고자 격문을 사방에 발하였으며, 그가 일으킨 부대를 의병 이라고 일컬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 충남대 사학과와 한국학중앙연구원(문학박사) 졸업하였고, 현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한말 의병 연구, 일조각, 1997 ; 헤이그특사와 한국독립운동 (공저), 독립기념관, 2007 ; 윤봉길과 한국독립 운동 (공저), 매헌연구원, 2010 ; 한말 일제의 침략과 의병학살, 역사와 담론 52, 2009 ; 충남지역 유교지식인의 동학인식과 대응, 한국근현대사연구 51, 2009 ; 서산지역 3 1운동의 전개와 성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6, 외 다수가 있다. 1) 전반적인 의병의 개념과 시기 구분 및 의병의 역사적 배경 에 대해서는 김상기,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의병운동Ⅰ), 국가기록원, 2011, 11~24쪽 참조. 2) 제5사단 중로 병참감 본부, 진중일지, (일본방위청 도서실자료, 제1군 일청전역 진중일지 M27-15, 142쪽). 11
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언론에서도 점차 이들을 위동학당( 僞 東 學 黨 ) 또는 유사동학당 이라 하여 동학 세력과 구별 하였다. 더욱이 도쿄아사히( 東 京 朝 日 )신문 1894년 10월 23일(양력) 잡보 란에서는 10월 17 일(양력)발 부산통신 을 인용하여 위동학당은 폭민이다 라는 제목 하에 안동 세력은 전라도 의 동학과는 그 성격이 다른 폭민으로서 사대당이라고 표현하여 동학과의 성격상 차이를 알려 준다. 이와 같이 일본의 외교문서에는 서상철을 동도( 東 徒 ) 로, 일본군 보고서는 의병 등으 로 엇갈린 보고를 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여러 자료를 종합할 때 서상철은 동학교도가 아닌 유생 의병장으로 보인다. 경상도 예천 유생으로 을미의병 시 예천의병장으로 추대되었던 나 암 박주대는 그가 편찬한 나암수록( 羅 巖 隨 錄 ) 에서 서상철을 유사( 儒 士 ) 라 하였으며, 이만 도는 예안향교에 나타나 주민들에게 거의( 擧 義 )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음을 말하면서 말 이 바르고 의로움이 굳건하다 고 하여 그의 태도에 경의를 표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눈을 통하여 유생인 서상철의 안동에서의 거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 한편 서상철 본인 역시 한인석 이경재 한수동 등 동지들과 발표한 격문에서 자신을 호 서충의( 湖 西 忠 義 ) 서상철 이라 표현하였으며, 격문의 맨 끝에서 금월 25일 일제히 안동부의 명륜당으로 오시어 적도를 토벌할 기일을 약속해 주시면 이라고 하여 기병 장소로 안동부의 명륜당(향교)을 지정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침입에 각 지방에서는 유생이 중심이 되 어 의려( 義 旅 )를 조직하여 이들을 물리쳤음을 볼 때 동학농민군이 향교에서 기병하자고 약속 할 수가 없다고 본다. 서상철 등이 기의( 起 義 )한 원인은 갑오변란 에 대한 저항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는 격문에 서 기의한 원인으로 임진왜란을 들었으며 병자년의 강제로 체결한 조약을 다음의 원인으로 들고 있다. 그러나 직접적인 이유로서는 1894년 6월 21일에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 황제를 핍박한 갑오변란 에 있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갑오변란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봉기한 안 동 의병은 국왕의 체통을 세우고 민족을 보전하고자 하는, 즉 충의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존 왕양이 론에 기병( 起 兵 )의 주요 이념이 있었다. 이들은 청국 세력을 이용하여 일본군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청나라 군사가 인천항에 포진 하여 있고 소사( 素 沙 ; 현 경기 평택시 소사동)에서는 청 일간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에 이 기회에 기병하여 일본 세력을 한반도로부터 축출하고자 하였다. 반면 청에 대한 태도에는 청 을 중화를 지배한 종주국으로 보면서 청을 배반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격문의 내 12
5 총 설 용을 보고 일본 언론에서는 이 세력을 사대당 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처럼 서상철의 격문을 보면 중화주의에서 탈피하지 못한 한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청 세 력을 이용하여 일본 세력을 물리치고자 하는 외교 수단으로써의 중화주의라고 볼 수 있다. 서상철은 한인석 이경재 한수동 등과 더불어 선림점사에서 격문을 각지에 발송하는 것 으로부터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격문은 경상도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널리 전파되었던 듯하다. 이 격문이 언제 작성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격문이 안동과 인접해 있는 이 만도의 고향인 예안에 도달한 것이 8월 14일인 것으로 보아 그때를 전후하여 작성되어 전달 된 것으로 보인다. 서상철은 격문을 발송하고 직접 의병 초모( 招 募 )를 위해 각지를 순회한 것으로 보인다. 8월 20일에 예안향교에 나타나 8월 25일 안동향교에서의 거의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는 것으로 보아 이를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계획했던 8월 25일의 거사는 대구에서 파견 된 200여명의 관군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되었다. 3) 안동향교에서의 거의가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서상철 등은 9월초 비밀리에 안동 일대에 의병을 모집하여 상주의 태봉에 있는 일본 병참부대를 공격의 목표로 삼았다. 서상철은 청풍 일대에서 전투를 수행한 것으로 보이 며, 그 후 일본군의 정보 보고에 의하면 서울로 잠입한 것을 탐지되었으나 이 후의 행적은 확인이 안 된다. 4) ~96년 안동의병 가. 의진의 결성 안동의병은 1895년 11월 단발령이 내려지고 난 직후에 시작되었다. 안동에 단발령이 전해 진 것은 11월 27일경이었다. 안동 유생들은 이 소식을 듣고 5백년 예의문물이 하루아침에 망 했다고 하면서 거의를 준비하였다. 이 움직임은 당시에 안동 지역에서 대표적 서원이었던 호 계서원( 虎 溪 書 院 )과 청성서원( 靑 城 書 院 ) 그리고 경광서원( 鏡 光 書 院 )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청성서원과 경광서원에서는 12월 1일에 통문을 발하여 5백년 의복문물지향( 衣 服 文 物 之 鄕 ) 에 하루아침에 단발은 불가 하다고 선언하였으며, 12월 3일에 읍내에서 집회할 것과 읍내에 3) 국사편찬위원회,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6)경제87호, 1986, 123쪽. 4) 제5사단 중로 병참감 본부, 진중일지. 13
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서 모이기 전에 먼저 봉정사에서 만날 것을 통지하였다. 12월 3일의 봉정사 모임은 계획대로 추진되었다. 이날 모임에는 4~50명 정도 참석한 것 으로 보이며 이들은 안동부로 들어가 창의( 倡 義 )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이들은 다음 날 유림 대회의 성격을 띠는 향회를 실시하기로 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이에 따라 12월 4일에 안동부 에서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향회를 실시하였으며, 호계서원에 도소( 都 所 )를 차리고 6일 에 창의할 것을 결의하였다. 12월 6일에 안동부 청사내의 삼우당에서 인근의 사민 1만여 명이 집결하였다. 이때 수좌에 는 유치명의 문인인 김흥낙 유지호 김도화와 하회의 유도성 유지영 등 안동 유림의 대표 들이 자리 잡았다. 이들은 창의를 결의하고 대장에 유곡의 권세연을 추대하였다. 권세연은 12월 7일 아침 연무당에서 부장에 곽종석을 임명하는 등 의진( 義 陣 )을 편성하였 는데 지휘부의 편제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5) <안동의병 지휘부 편제표 1> ( 현재) 대 장 : 권세연 부 장 : 곽종석(미취임) 중군장 : 유완 선봉장 : 김옥서 우익장 : 권용현 좌익장 : 이운호 좌부장 : 이의호 나. 전개 과정 안동부는 의병에게 완전히 장악되었으며, 관찰사 김석중은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의병이 창의된 날 밤에 탈출하였다. 김석중은 의병진이 채 갖추어지기 전에 대구부의 관군을 이끌고 안동부의 탈환을 시도하였다. 예천군수 유인형의 지원을 받아 안동부를 탈환코자 한 것이다. 의병소에서 관군의 공격 소식을 접한 것은 12월 12일 무렵이었다. 권세연은 우선 선봉장 김 옥서에게 명령을 내려 포군 70여명을 거느리고 예천 쪽으로 향해 관군에 대응하게 하였다. 선봉장이 거느린 의병과 관군과의 전투가 예천과 안동의 접경지대에서 처음으로 있었으나 5) 이긍연, 을미의병일기, ~14. ; 김도현, 벽산선생창의전말,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2, 편찬위원회,
7 총 설 의병은 패하고 말았다. 관찰사가 수백 명의 관군을 거느리고 안동부에 들어온 것은 12월 16일(양력 )이었다. 안동부를 접수하는데 큰 힘이 되었던 대구 병정 300명은 그날로 돌아갔다. 안동 부를 접수한 관찰사는 19일 의병소에 들어가 의병의 문부( 文 簿 )와 전곡( 錢 穀 )을 압수하여 갔다. 6) 26일에는 스스로 단발을 하고 주민에게도 단발을 강요하였다. 각지에 순검을 풀어 강제로 삭발시켰다. 한편 안동의병은 예안과 예천 등 인근의 읍에서 의진을 편성하였다. 1월 4일(양력 2.16) 선 성의진이 청량산에서 일어나 이중린이 상장에 추대되었다. 예천에서는 1월 5일 박주대가 대 장에 추대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대장직을 사퇴함에 동생인 박주상을 대장에 추대하였다. 7) 권세연의 안동 의병 역시 의진을 수습하여 안동부에 대한 공격을 기도하였다. 관찰사는 이러한 의병의 기세에 눌려 더 이상 안동부에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1월 7일 순검 몇 명을 이끌고 안동을 빠져나갔다. 8) 그러나 그는 문경에서 거의한 이강년 의진에 체포 되어 1월 13일(양력, 2.25) 문경의 농암 장터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안동의병장 권세연은 이상룡 유시연 등과 함께 안동의병을 거느리고 관찰사가 처형된 날 인 정월 13일 안동부에 무혈입성하고 안동향교에 진을 쳤다. 이날 안동의병은 김도현의 선성 의병과 영천의병 등 인근의 의병들과 함께 입성한 것으로 보인다. 권세연은 1월 24일 조직을 보다 전투적인 체제로 개편하여 전투에 대비하였다. <안동의병 지휘부 편제표 2> 9) ( 현재) 상장 : 권세연 도총 : 유난영 부장 : 김하림 중군 : 권재호 6) 박주대, 나암수록, ) 박주대, 앞의 책, ) 이긍연, 을미의병일기, ) 이긍연, 앞의 책,
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안동의병은 이어서 봉화의병, 서상렬 의병과 연합하였다. 이처럼 안동의병이 군자금을 모 금하면서 새 진영을 갖추던 차에, 1월 25일에 봉화의병장 금석주가 포정 50여 명을 이끌고 안동에 왔으며, 1월 27일 오후에는 제천의병 소모장 서상렬이 안동의 안기에 정병 100여 명 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안동의병에서는 이때 의병장 권세연이 사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권세연은 1월 29일(양 력 3.12) 40~50여명의 향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향회에 자신의 사퇴의사를 전했다. 권세 연의 후임으로 향원들은 김도화를 선출하였다. 김도화는 30일 밤에 안동부에 들어와 대장직 에 올랐다. 김도화는 당시 호계서원의 도유사도 겸하였다. 그는 유창식 등의 대장직 수락 요 청에 늙은 몸[ 老 軀 ]을 이끌고 의병 대열에 참여하고 다음과 같이 지휘부를 조직하였다. 10) <안동의병 지휘부 편제표 3> ( 현재) 대 장 : 김도화 지휘장 : 김흥낙 유도성 중군장 : 권재호 부 장 : 유난영 도 총 : 김하림 선봉장 : 유시연 소모장 : 이충언 유창식 아 장 : 최세윤 김도화는 체제를 정비한 후 각지에 격문을 발송하여 의병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어 서 서상렬 부대와 예천에서 집결하여 연합 작전을 수행하기로 하였다. 2월 7일에 김도화는 의병 200여 명을 거느리고 일단 풍산에 집결하여 풍기 순흥 영천 봉화 선성 호서의 진과 함께 예천으로 향하였다. 다. 연합의진의 편성과 태봉 전투 안동의병은 우선 태봉의 일본 병참부대를 공격의 목표로 삼고 서상렬 의병을 비롯한 인근 의 의병들과 연합을 시도하였다. 안동의병을 비롯하여 영남 북부 지역 8읍의 의병들이 2월 9일 예천에 집결하였다. 연합의진에 참여한 안동의병은 중군장 권재호가 거느린 250여 명이 10) 이긍연, 을미의병일기, ~14. ; 김도현, 벽산선생창의전말,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2, 편찬위원회,
9 총 설 었다. 서상렬이 지휘하는 제천의병은 지휘부 49명을 포함하여 100여 명에 달하는 정예 부대 였다. 연합의진은 태봉을 공격하기 전에 예천군수 유인형을 참( 斬 )하여 기세를 올렸다. 연합의진 에서는 16일에 개전하기로 하고 태봉의 지형을 보면서 작전 계획을 세웠다. 연합의진과 일 본군과의 전투는 15일 밤에 개시되었다. 호좌의진( 湖 左 義 陣 )의 선봉장 황기룡이 거느린 의병 과 일본군의 교전이 한밤중에 있었다. 16일(양력 3.29) 아침 일찍부터 연합의진의 태봉 공격 이 시작되었다. 의병들은 태봉을 둘러싸며 공격하였다. 아침부터 시작된 태봉 전투는 제방 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접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제방을 일본군에게 빼앗기고 개울 옆의 산 위에서 대응하던 의진은 저녁 무렵 일본군의 총공격에 밀려 모두 퇴각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태봉 전투에서의 승세를 타고 인근의 의병 진압에 나섰다. 2월 19일에는 예천에 도착하여 의병들이 없자 의병의 집에 방화하여 보복하였다. 이로 인해 부장 장석규 형제의 집과 의병의 집 5채가 불탔다. 일본군은 2월 20일(양력 4.2) 아침 일찍 풍산에 주둔하던 안 동의진을 기습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의병 l명이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안동의 송현까지 추 격해 와 안동부를 의병의 소굴이라 하여 시가와 민가에 불을 질렀다. 마침 바람을 타고 불길 이 온 읍을 덮쳐 안동읍 1천 여 호의 민가가 불탔다. 일본군들은 봉정사에 진을 치고 부중의 재산을 빼앗고 심지어는 마을의 부녀자를 음욕하기까지 하였다. 또 시골의 소를 끌고 갔다. 안동의병은 선유사들에게 격고문 을 보내 단지 2명의 간신을 참하고 흉적을 제거했다고 말할 수 없으며, 1명의 왜놈도 죽이지 않고 복수했다고 말할 수 없다 라며 해산의 칙유에 따 를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효유문을 받고 관군과 일본군에게 쫓겨 더 이상 항전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6월초에 안동의병은 각자 흩어져 영양이나 춘양, 혹은 오천으로 들어가면서 사실상 해산되었다. 이와 같이 안동의병은 부민들의 지원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봉정사 전투 이후에는 항쟁할 전투력을 상실함에 따라 해산하고 말았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의의가 크다. 첫째, 안동의병은 정재 유치명의 문인들을 비롯한 안동부 지역민들의 광범위한 참여로 성 립되었으며, 문중은 물론이고 향교 서원 사당 서당 등 각 기관에서 거액의 군자금을 약 속하고 의연하는 등 향촌 사회의 적극적인 호응과 지원 하에 이루어졌다. 둘째, 안동의병은 태봉에 주둔하던 일본 병참부대를 공격하여 경상도 북부 지역에 대한 일 17
1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본군의 간섭과 탄압의 기반을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또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태봉 지역에 대 한 공격을 통해 부산-서울간 일본군의 연결 통로를 끊어 일본의 침략 정책을 무력화시키려 했던 점으로써 의의가 크다. 비록 태봉 전투에서 패하여 기대했던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었 으나 일본군 다수를 살해하는 등 전과를 올렸으며, 지역민의 항일 의식을 고양시켜 이후 독 립운동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셋째,안동의병은 관군과의 전투는 물론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는 전기 의병이 단지 관군과의 전투만이 아닌 일본군과의 전투 행위가 있었음을 분명히 알려주는 의 의를 갖는다. 11) 3 김산의병 김천 선산 그리고 상주 등지의 유생들은 을미사변의 소식을 듣고 이에 통분, 상호 연락을 취해 거의를 실현시켰다. 우선 상주의 유생 이기찬은 목천에 거주하는 친척인 이기하와 함께 허위를 찾아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협의하였다. 이때 허위는 이미 김산(현재의 김천)과 구성 지역에서 진사 조동석, 유도섭 등과 의병을 규합하였다. 이기찬은 이들과 합세하여 1896년 2월 11일에 군사적 요충지인 김산으로 들어가 의병 근거지로 삼았다. 이때 이곳에서는 이미 이곳의 향반 출신인 여영소, 여중용 등이 중심이 되어 통문을 띄우 고 거의를 준비하였다. 이들은 김산 군수 이범창을 영입하여 관민이 합세한 의병을 조직하 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범창은 관찰사 이중하의 친척으로 거사를 무산시키는데 뜻이 있었으 며, 거사 일을 2월 22일로 늦추도록 하고서 감영으로 가버렸다. 이러한 가운데 상주 선산 측 의 이기찬 허위 등이 의병을 이끌고 김산에 들어와 김산 지역의 여영소 등이 이끄는 의병과 연합하여 3월 10일에 김산향교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이 부대 이름을 김산의진 이라고 부른다. 12) 이기찬은 이때 운집한 의병들에 의하여 창의대장에 추대되었다. 이어서 의진의 진용을 갖 추었으니 조동석을 군문도총, 강무형을 찬획, 허위를 참모장, 이시좌 여영소를 서기, 양제 안을 중군, 윤홍채를 선봉에 임명하였다. 이와 함께 인근에 격문을 발송하여 국난에 처하여 11) 김상기, 1895~1896년 안동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항일투쟁, 사학지 31, ) 권대웅, 김산의진고, 윤병석교수화갑기념 한국근대사논총, 지식산업사,
11 총 설 모든 이가 의병 대열에 나서서 국치를 설욕할 것을 천명하였다. 김산의병은 김산 장날에 읍 으로 들어가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김산군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하는 등 군세를 강 화하였다. 이때 전 무주부사 이탁이 화약 300근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김산의진은 대구부를 공격하기 위해 군량 확충과 모병을 계속해 나가던 중 3월 14 일 지례에서 관군을 맞아 전투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연합부대로 형성된 김산의병은 지 휘 체계의 미비와 전투력의 열세로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 의병장 이기찬을 비롯한 주력 부 대는 부득이 지례( 知 禮 )의 홍심동으로 들어가 진용을 재정비하였다. 김산의진은 천험의 요새 인 홍심동에서 부의장에 이주필, 우익장에 이성백, 도집례에 유인목, 운량도감에 조석영을 추대하여 진용을 보강하였다. 의진은 이곳에서 전 판서 이용직으로부터 쌀 80여석을 군량으 로 지원받았다. 흩어졌던 장졸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으며 이기찬은 이들을 훈련시켜 재기 를 준비할 수 있었다. 또한 의병 중에 조 아무개라는 이가 민가를 약탈함에 그를 체포, 효수 하여 군율을 엄정히 하였다. 이어서 영동군수 민치순에게 가렴주구의 죄를 추궁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인근의 수령들 중 도망치는 사례가 속출하였다. 4월 5일에 김산의병은 구성면 도곡천에서 경상감영의 관군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이 접전에서 의병들은 괴멸하고 말았다. 의 병장 이기찬은 여영소 여중용 양제안 등 지휘부를 이끌고 황간으로 들어갔다. 그 후 김산 의진은 속리산 아래 장내에서 전투를 치렀으며, 충청도의 음성에서 유인석 부대에 합세하였 다. 그러나 김산 지역은 관군에 의해 장악되고 의병에 참여한 사람과 가문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어영소는 가산이 몰수되고 부모는 체포되었다. 여영하의 집도 화를 당했다. 양제안 은 유인석 의진이 패한 뒤 지례로 들어왔다가 관군의 추격을 피해 영일군 죽장면에 은거하였 다. 조동석은 상주의 이교( 吏 校 )에 의해 포살되기까지 하였다. 13) 4 영양의병 영양 지역에서 의병 봉기를 준비한 이는 벽산 김도현이다. 김도현은 단발령 공포 후 안동 에서 의병이 봉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음력 12월 9일에 영양읍 유생들과 창의를 의론하고 통 문을 돌렸다. 그러나 주위의 만류로 중지하고 말았다. 그는 1896년 2월 17일(음력 1.5)에 안 동의진의 소모장 유시연의 권유를 받고 청량산으로 들어가 의병을 봉기하였다. 그는 봉화와 13) 이기찬, 지산유고 (필사본) ; 김상기, 의병열전-이기찬-, 유교신보
1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영주 지역을 돌면서 의병을 모집하고 안동으로 들어갔다. 김도현은 2월 28일에 안동의 영호 루 앞 백사장에서 진법을 훈련하였다. 안동의진과 합진에 실패한 그는 영양으로 회군하였다. 영양에는 조승기가 의병을 봉기한 상태에 있었으나 합진에 실패하였다. 김도현은 예안으로 가서 선성의진에 합세하였다. 선성의진은 1896년 1월 25일에 결성되었다. 대장은 이만도, 부장은 이중린이었다. 안동을 탈출했던 김석중이 경군을 이끌고 안동부를 공격함으로 안동의진이 퇴각하였는데, 이 소식 을 접한 선성의진도 2월 1일에 해산한 바 있다. 선성의진은 2월 16일에 다시 결성되었는데 1 차 의진의 부장이었던 이중린이 청량산에서 다시 거병한 것이다. 김도현은 3월에 선성의진 의 중군장에 초빙되어 합세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영덕군수 부자의 목을 베고 예천회맹( 醴 泉 會 盟 )에 선성의진의 본진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이때 선성의진의 조직을 보면 이중린 대장 밑에 중군장은 김도현, 선봉장은 이인화, 전방장은 이중언, 참모에는 이빈호와 이중엽, 종사 는 이장규 등이었다. 14) 예천회맹에는 안동의병을 비롯하여 선성 풍기 순흥 영천 봉화의병, 그리고 제천의병 등 7개 의병진이 참여하였는데, 이들 의병진은 3월 28일에 예천의 산양에서 회맹하고 함창 을 향해 출동하였다. 의진의 공격은 3월 29일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저녁까지 치열한 전투 를 감행했으나 의병진은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퇴각하고 말았다. 선성의진은 김도현과 함께 퇴각한 병사가 3~4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4월 1일에 안동의병의 구원 요청에 의병 50명 을 이끌고 안동으로 갔다. 그러나 안동부는 이미 일본군의 방화로 불타고 있었다. 그는 중군 장을 사퇴하고 영양으로 돌아왔다. 김도현은 민용호의 강릉의병 소모사인 이호성의 권유를 받고 6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4 월 하순 무렵에 강릉으로 들어갔다. 민용호는 김도현을 선봉장에 임명하고 군사들에게 당포( 唐 布 )를 주어 옷을 만들어 입도록 하였다. 김도현은 민용호 의진에 합류한 후 서울에서 온 관군과 대공산성에서 일대 접전을 벌였으나 관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의병들이 패산하였다. 김도현은 민용호 의병과 함께 삼척으로 이동하여 삼척의병과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이때 민용호 부대의 편제를 보면, 대장에 민용호, 선봉장에 김도현, 수성장에 민동식, 유진장에 김헌경, 중군에 최중봉 강우서 이영찬 전치운 신무섭으로 구성되었다. 이 연합의진은 14) 이긍연, 을미의병일기, ~14. ; 김도현, 벽산선생창의전말,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2, 편찬위원회,
13 총 설 5월 31일(음력 4.19)에 삼척에서 관군과 큰 전투를 수행하였다. 관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 날 전투에서 의병은 처음에는 유리한 지형을 점령하여 우세하였으나 점차 탄약이 고갈됨에 전세가 역전되어 결국 오십천변으로 밀리고 말았다. 의병은 관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결 국 삼척을 떠나 정선 지역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척 전투에서 퇴각한 김도현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고향인 경상도 영양으로 돌아와 검산 성을 쌓고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 산성은 석성으로 성 둑이 1.5km, 면적이 35,000여 평에 달 하는 크기였다. 이처럼 요새를 이용하여 지구전을 감행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김도현은 각 지역의 의병 해산과 패산을 보면서 결국 총 113자루를 숨겨 후일을 기약하면서 1896년 중 양절인 9월 9일(양력 10.15)에 영양군 청기면에서 부대를 해산하였다. 이때의 심정을 그는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아, 이 한 몸으로 어찌 불공대천의 원수를 갚으리까. 천신만고 수 없는 죽을 고비를 겪고 나서 겨우 목숨 을 부지하여 살고 있으나, 세상 일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지 않는 날이 없다. 15) 5 의성의병 의성의병은 1896년 3월 25일(음력 2.12)에 봉기하였다. 의성지역의 유생들은 3월 3일 경 향교에서 통문을 돌리고 3월 14일 향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상종( 金 象 鍾, 1848~1908)이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김상종은 의병을 모집하여 3월 25일에 창의한 것이다. 이때의 진용을 보면, 김상종 대장 밑에 중군장으로 권대직, 선봉장에 김수담, 우익장에 이희 정, 소모장에 김수욱, 관향장에 김수협이 있었다. 이들 주도층은 김상종 회종 형제가 안동 의 유학자 김흥락과 김도화의 문인이었던 것으로 보아 정재학파의 범주에 포함되는 유생들 임을 알 수 있다. 김수담 김수욱 김수협 등은 모두 신안동김씨로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에 세거하는 김상종의 족숙( 族 叔 )에 해당한다. 의성의병의 관군과의 첫 전투는 4월 2일에 의성읍 구봉산에서 일어났다. 4월 1일 오후 에 남쪽에서 관군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들은 의진은 읍내를 뒤로 한 구봉산에 진을 치고 대비하였다. 전투는 4월 2일 새벽에 시작되었다. 이른 새벽에 관군이 의진을 공격한 것이다. 15) 김강수, 한말 의병장 벽산 김도현의 의병활동, 북악사론 2,
1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전투는 오후 1시 무렵까지 계속되는데 이날의 첫 전투는 의병 측의 승리였던 것 같다. 김회 종의 병신창의실록 에서는 의병은 다행히 한 사람도 다친 사람이 없는 반면에 관군은 탄 환에 맞아 죽은 자가 20여 명이었다고 기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진은 관군의 공격 을 끝까지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점차 뒤로 밀리게 된 의진은 읍내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관군은 의성읍내의 집들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적원일기( 赤 猿 日 記 ) 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20일(양력 4월 2일, 필자) 닭이 운 뒤 본진에서 척후의 사통이 또 이르러 말하기를 의성진과 대구 병정 이 구성봉 아래에서 접전하였는데, 의진이 대패하여 인민들은 피하고 적병은 곧장 성내로 들어가 관 공서와 민가를 마구 소멸하여 폐허가 되었다고 하였다. 16) 의성의병은 5월 10일(음력 3. 28)에는 황산에서 대구와 군위의 관군과 전투를 치렀다. 그러 나 전투 중에 큰비가 내려 화약을 쓸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의진은 이 전투에서 참패하고 김수 담 김수협 등 많은 의병이 전사하였다. 김회종의 병신창의실록 에 의하면, 관군이 황산에서 27인, 고무곡에서 2인 도합 29인을 죽였다 한다. 또 관군은 대장 김상종의 고향인 사촌에 가 서는 민가에 불을 질러 소각하였다 한다. 의성의진은 남한산성 전투를 치르고 내려온 김하락의 이천의진과 연합하여 항쟁하기도 하 였다. 연합의진은 5월 20일에 관군 200여 명이 남쪽 산운리 쪽으로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 고 수정사에 본진을 구축하고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천의병의 좌우익장 신용희와 김 경성은 3대를 거느리고 비봉산에 매복하였으며, 조성학은 3대를 이끌고 수정동 입구에 매복 하였다. 의성의진의 김두병은 2대를 인솔하고 비봉산 아래에 주둔하였으며, 중군과 김순삼 은 천마봉에 매복하였다. 김하락은 유격대 1대를 인솔하고 각 대를 왕래하였으며, 김상종은 나머지 의병을 이끌고 남현을 지켰다. 17) 정오 무렵에 수정동으로 들어오는 관군과 첫 전투가 벌어졌다. 수정동에 잠복해 있던 조성학 인솔의 부대가 공격하여 관군을 청로역 방면으로 퇴 각시켰다. 의병대는 오후에 조성학 부대까지 합세하여 관군을 추격하여 전과를 세웠다. 저 녁때 의병대는 수정사로 회군하였다. 관군의 공격은 그로부터 5일 후인 5월 25일 아침에 다 16) 심성지, 적원일기 ) 김희곤 외, 의성의 독립운동사, 의성군, 2002, 94쪽. 22
15 총 설 시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26일까지 계속되었다. 26일은 화약이 날아갈 정도로 바람이 거세 게 불어 의병은 화승총에 화약을 잴 수 조차 없었다. 김상종은 결국 헛되이 죽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서 각자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다. 18) 6 청송의병 청송의병은 1896년 3월 12일에 봉기하였다. 이보다 앞서 안동의병의 소모장 유시연이 3월 8일(음력 1.25) 포병 30여 명을 데리고 청송으로 와서 청송군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고자 하였다. 긴급히 각 면에 연락을 취해 3월 10일 향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100여 명이 참여하였는데 서효원을 장수로 추대하였으나 모임을 이끄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면서 사양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의병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청송 지역의 유생들은 3월 12일에 심성지 19) 를 대장에 추대하고 조성규와 권복규가 각자의 역할을 정했다. 심성지는 춘추대의론에 입각하여 창의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다음 날 대장 직에 올라 유시연을 돌려보냈다. 3월 15일에는 제장을 선임하고 참모와 서기를 뽑았다. 20) 16일에는 대장기를 세우고 남천 백사장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7일에는 축문과 창 서사( 昌 誓 詞 )를 지어 천지신명께 축원하였다. 축문은 서효원이 지었는데, 국왕의 의대소 가 내려진 이상 창의는 우리와 오랑캐, 사람과 짐승의 분별을 위한 춘추대의 라고 규정하였 다. 김상길이 지은 창서사에서는 밀지를 받은 선비의 소임은 흉도를 섬멸하고 오랑캐를 구축하는 것 이라고 밝히고 있다. 21) 청송의진의 지도부는 심성지 등 양반 유생으로 구성되었으며, 병사부는 포병 100여 명과 농민, 그리고 보부상 등으로 구성되었다. 지도부는 대부분 청송 지역에 세거한 가문 출신으 로 덕천의 청송 심씨, 안덕의 함안 조씨, 화목의 의성 김씨, 부동의 달성 서씨, 현동의 영양 남씨, 부내의 파평 윤씨 등이 중심이다. 이들은 학문적으로 대체로 정재 유치명의 문인이거나 정재학파 문인들과 교유 관계에 있는 이들이 많은 특징이 있다. 청송의병은 의병 군자금을 위해 향도청을 설치하여 군량을 모았다. 향도청에서는 각 문중에 일정액을 분담하여 군량을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부유한 집들로부터 자발적인 의연금을 받고자 하였다. 18) 김희곤 외, 의성의 독립운동사, 96쪽. 19) 심성지의 본관은 청송, 자는 사행( 士 行 ), 호는 소류( 小 流 )이다. 20) 청송의진의 편제에 대해서는 권대웅의 김산의진고, 52쪽 참조. 21) 적원일기, ~2. 9. ; 권대웅, 1896년 청송의진의 조직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9, 1998, 75쪽. 23
1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청송의병은 창의 후 안동의병을 비롯하여 의성의병, 영덕의병 등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활 동하였다. 안동의병과는 전후 10여 차례의 사통( 私 通 )을 교환하였다. 의성의병과도 3~4차 례의 사통을 주고받았다. 흥해, 영덕 의병과도 사통을 주고받으며 협조 체제를 형성하였다. 또한 김하락 의진이 의성으로 들어온 후인 5월 13일에는 의성 청송 이천의병의 연합의진 을 결성하였다. 이 연합의진은 5월 14일에 안덕면 감은리 뒷산인 성황현에서 관군과의 전투 를 수행하여 전과를 올렸다. 연합의진은 관군 170여 명이 대구 방면에서 청송 화목으로 들어 온다는 정보를 접하고 이에 대비하였다. 구연영은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덕 후방에 잠복 하고, 신용희는 2대의 군사를 이끌고 안덕 뒤 상봉에, 김경성은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황 산 주봉에 매복하였다. 조성학은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황현에 매복하고 김하락은 높은 지대에 올라가 총지휘하였다. 의성의진은 앞선 전투로 의병의 피로가 누적하여 전투에 참여 하지 못하였다. 청송의진은 안덕 속곡으로 물러나 있었다. 전투가 개시되어 매복해 있던 의 병들이 일제히 공격하자 관군은 앞산을 향해 도망쳤다. 이때 청송의병의 중군 김대락 등이 포군 2대를 이끌고 감은리 뒷산으로 올라 전투에 합류하여 관군을 패퇴시켰다. 이때 영덕의 병은 청송의병을 후원하기 위해 의병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5월 17일 의병이 이전평역에 도 착하였을 때는 이미 전투가 끝난 후였다. 영덕의병은 5월 18일 위로 차 청송의진을 방문하고 돌아갔다. 5월 22일 청송의진에서는 우익장 권성하와 후방장 장무호 등에게 포군 3초를 이 끌고 영덕의병을 후원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영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영덕의병이 관군이 공격을 받고 패퇴한 뒤여서 청송의병은 회군하고 말았다. 이후 청송의병은 경주성 전 투에도 참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22) 7 봉화의병 봉화의병은 1896년 음력 1월말 창의하여 7월 중순경까지 봉화, 안동, 예천 일대에서 활동 하였다. 봉화의병의 대장은 금석주( 琴 錫 柱, 1857~1920)로 3월 8일(음력 1. 25)에 의병을 이 끌고 안동으로 들어가 안동의병 등과 연합의진을 결성하였다. 안동의병과 봉화의병을 비롯 한 7읍의 연합의진은 3월 20일에 풍산도회를 열고 상주의 태봉에 주둔하던 일본 병참부대 와의 전투를 수행하였다. 태봉 전투에 참여한 봉화의병은 대장 이하 70여명에 달했던 것으 22) 적원일기, ~11. ; 김하락, 진중일지, 602쪽 ; 권대웅, 1896년 청송의진의 조직과 활동, 68~73쪽. 24
17 총 설 로 보인다. 봉화의병의 진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23) <봉화의병 편제> 대 장 : 금석주 포 영 장 : 박영우 중 군 장 : 정규철 서 기 : 유진극 참 모 : 이만홍 장성완 김상철 종 사 : 홍환욱 정석연 좌 익 장 : 김진규 관 향 : 김진하 금보연 우 익 장 : 정영룡 군문집사 : 김영주 박영희 군무도총 : 이현규 출령군관 : 윤성근 연기홍 박원석 제군문도총 : 김종대 봉화의병에는 이들 외에 포졸이 53명이 편제되어 중요한 무장 세력이 되었을 것으로 보 인다. 태봉 전투는 안동의병의 활동 부분에서 자세히 언급한 대로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 만 석패하고 말았다. 봉화의병의 일기 에서는 태봉 전투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3월 29일(음력 2. 16) 아침에 포졸 50명과 여러 장관을 거느리고 함께 걸어서 산을 오른 즉 예안 풍기 양진이 먼저 도착하여 소리를 지르고 포를 쏘았다. 각 의진은 일시에 함께 나아가 혹은 산을 의지하고 혹은 천방을 의지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군 42명이 일시에 곧 바로 출병하여 풍기 예안 의진이 먼저 패하여 달아나니 영천 순흥 의진은 군대를 붙들 고 산 위에 있으면서 갑자기 나아가 싸울 뜻을 잃고 말았다. 호좌의병은 15일 밤에 함창에 주둔하여 접전하다가 대패하였으므로 사졸의 사망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는데 이를 두려워 감히 나아가지 않았다. 안동 중군은 태봉의 좌측 산위에 올라 연이어 천보총을 발 사하여 일본군 1명을 죽였다. 그러나 일본군 10여명이 바로 앞에서 총을 쏘아 7~8명이 죽 었다. 봉화의병은 태봉 전투에서 포졸 53명을 5대로 나누어 일본군 병참 앞 천방 아래로 투입하 여 왜병 4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포졸 엄학성이 부상을 입었으며, 일본군의 집중 공격에 다른 의진과 함께 퇴각하였다. 봉화의병은 산양과 경진 등을 거쳐 3월 31일 봉 23) 일기, ; 김희곤 외, 봉화의 독립운동사, 봉화군, 2007, 55쪽. 25
1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화로 퇴각하고 진영을 재정비하였다. 우선 흩어진 의병을 다시 모으고 부유한 집들과 각 문 중에 문배전( 門 配 錢 )을 할당하여 군량을 확충하였다. 이후 봉화의병은 풍기 순흥 영주의 병과 협조 체제를 형성하면서 죽령 이남을 방어하는데 주력하였다. 8 진주의병 진주의병은 1896년 2월에 노응규에 의해 안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그와 함께 거의 한 인물로는 덕유산 기슭에 위치한 장수사의 승려인 서재기를 비롯하여 정도현 박준필 최 두원 최두연 등 그의 문인과 그 외에 임경희 성경호 등이 있다. 노응규는 서재기를 선봉장 에 임명하는 등 의병진을 편성하고 2월 19일(음력 1.7) 저녁에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에 도착 하였다. 이들은 진주향교에 들어가 성안의 동정을 살피고 공격의 계획을 수립하였다. 노응 규 의진은 다음 날 새벽 순식간에 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때 성을 지키던 순검 2명과 중방 1명은 철퇴를 맞고 사망하였으며, 관찰사 조병필과 경무관 김세진은 대구로 도피하였다. 참 서관 오현익은 성을 탈출하여 삼가의 토곡까지 도주하였다가 체포되어 진주로 압송되어 효 수되었다. 노응규의 의병 봉기의 이유는 명성왕후의 시해에 대해 복수하고자 함에 있었다. 다음과 같은 일본공사관의 보고에서 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목적이 왕비를 살해한 것이 전적으로 일인( 日 人 )의 행위라 하여 원수 일인을 조선 국경 밖으로 구 축하는 것에 있었던 까닭에 일본인과 결탁된 자 및 단발한 자를 미워하는 것이 심하였으니 지금까지 살해된 자로는 단발자 40여 명, 일본인과 결탁된 상인 2인, 이유 없이 살해된 자도 실로 100여 명에 달 한다고 한다. 24) 진주성을 점령한 노응규는 고종에게 창의소를 올려 절사는 목숨을 경솔히 버리지 않으며, 의리를 붙잡는 것은 군자의 의무이옵기에 적개심을 이기지 못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고 거 의의 뜻을 밝혔다. 또한 그는 석달 안에 왜적을 축출하고 선왕의 문물과 토지를 회복할 것 을 천명하였다. 24) 주한일본공사관기록 5, 진주방면에 있어서의 폭도의 정황, 국사편찬위원회, 1988, 10쪽 ; 박민영, 신암 노응규의 진주의병 항 전 연구, 박성수교수화갑기념 한국근대사논총, 1990, 219쪽. 26
19 총 설 노응규 의병진이 진주성을 점령하자 진주부민들도 정한용을 대장으로 의병진을 결성, 성 밖에 진을 쳤다. 노응규는 성안에 초현관을 임시로 설치하고 인근에 방문을 내걸고 1)경륜이 뛰어난 자, 2)도략이 과인( 過 人 )한 자, 3)문학에 능한 자, 4)주술( 籌 術 )에 능통한 자, 5)비력 ( 臂 力 )이 과인한 자를 초빙하여 각 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케 하고자 하였다. 노응규는 또 한편으로 의병 초모( 招 募 )를 위해 각 면리에 전령을 보내 매 2호당 군사 1명씩 을 내게 하였다. 2월 26일에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임진왜란 때 진주 수성전에서 순절한 3 장사 및 의기사에도 제사를 올려 지역 주민의 의기를 고무시켰다. 대구로 도망간 경무관 김세진은 대구 진위대군을 지원 받아 진주의병을 진압하고자 2월 26일에 대구를 출발하였다. 대구 진위대군은 2월 28일에 의령에 도착하여 공전을 탈취하고 주민을 강제로 부대에 편입시켰다. 관군의 이와 같은 행위에 군수는 도피하고 의령향교 측에 서는 관군의 행적을 비밀리에 급히 통보해줬다. 노응규는 이 소식을 듣고 선봉장 서재기에게 별동대를 주어 출동하게 하였다 의병은 정암진에서 관군과 만나 패퇴시켰다. 그 뒤에도 대구 진위대군이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현풍을 거쳐 진주로 공격해 들어왔으나 이 역시 의병에 의 해 패퇴되었다. 이와 같이 진주의병은 대구부에서 파견된 관군을 두 차례에 걸쳐 격파하고 다수의 전리품 을 노획하여 의병의 사기는 더욱 고무되었다. 노응규는 점차 활동 범위를 넓혀 부산과 근접 한 함안 김해 일대까지 진출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치열한 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의령 출 신의 이청로 부대도 합세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 파견된 이겸제가 이끄는 관군은 기우만 의병을 진압하고 그 여세를 몰아 4월 중순 무렵에 곧바로 진주로 들어왔다. 이때 토착 세력인 정한용 의병대는 관군의 이간책 으로 합천 삼가로 이진하고, 선봉장 서재기 부대도 안의로 이진한 상태여서 성안에는 노응규 가 인솔하는 소수의 의병만이 주둔하였다. 이겸제가 거느린 경군 5백여 명과 대구 진위대 군 은 일시에 진주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노응규는 간신히 탈출하여 삼가로 갔으나 정한용 은 이미 의병을 해산한 후였다. 선봉장 서재기마저도 안의의 서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결국 노응규는 안의의 서리들에 의해 부친과 친형이 살해당하는 아픔을 겪고 의병을 해산시 키고 말았다. 25) 25) 박민영, 신암 노응규의 진주의병 항전 연구, 225쪽 ; 김상기, 의병열전-노응규-, 유교신보
2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2) 중 후기 의병 1 산남의진 산남의진은 을사늑약( 乙 巳 勒 約 )에 항거하여 경북 영천 영덕 청송 포항 등 경북 남동부 지역에서 활동한 영남 지역 대표적인 의진이다. 산남의진은 중추원 의관으로 고종을 보필하던 정환직의 지시에 따라 그의 아들인 정용기( 鄭 鏞 基, 1862~1907)는 이한구 정순기 등 과 함께 거의하였다. 정환직은 고종으로부터 밀명을 받고 의병 봉기에 착수한 것으로 알 려진다. 정용기는 통문과 격문을 돌려 의병을 소모하였다. 통문에는 일제의 침략으로 5백년 문명 국 이 없어지고 2천만 생령( 生 靈 ) 이 멸절될 위기에 닥쳤다면서 국세를 만회 하고 백성을 구 하고자 의병을 일으켰음을 밝혔다. 26) 산남의진은 1906년 3월 의진을 편성하고 정용기가 의 병장에 추대되었다. 이때 편성된 지휘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27) <산남의진 편제> 1 ( 현재) 의병장 : 정용기 선봉장 : 홍구섭 좌익장 : 정치우 중군장 : 이한구 후봉장 : 서종락 우익장 : 장래의 참모장 : 손영각 좌영장 : 이경구 좌포장 : 이세기 소모장 : 정순기 우영장 : 김태언 우포장 : 정완성 도총장 : 이종곤 연습장 : 이규필 장영집사 : 최기보 도포장 : 백남신 군문집사 : 이두규 산남의진의 규모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많을 때는 1,000여 명에 달했다. 산남의진은 결성 직후 신돌석 의병의 패전 소식을 듣고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청하읍으로 행군하였다. 그러 나 4월 28일에 경주에서 경주진위대장 참령 신석호의 간계에 속아 체포되어 대구 경무청에 압송되었다. 산남의진은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도 전에 대장이 체포되고 만 것이다. 산남의 26)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948~949쪽. 27)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 351~353쪽. 28
21 총 설 진은 중군장 이한구 체제로 항일전을 펼쳤다. 6월 1일에는 영덕의 강구항을 공격하여 일본인 어부를 처단하였다. 그러나 1906년 6월경부터 일본군 수비대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산남의진은 정용기 의병장이 석방된 후에 재기할 것을 기약하며 1906년 7월 하순 활동을 일 시 중지하고 의병을 해산하였다. 정용기는 1906년 9월에 부친 정환직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정환직은 이때부터 의병에 참여하였다. 그는 영천으로 내려가 정용기와 이한구, 정순기 등을 만나 이듬해 5월까지 의병 을 조직하여 강릉으로 북상하여 서울로 입성할 것을 지시하였다. 정환직은 강릉에 본진을 설 치하고 무기와 군량 준비에 진력하였다. 정용기는 옥고 중에 얻은 병을 치료한 후 1906년 4 월에 산남의진을 재기하였다. 이때 조직한 의진의 지휘부 편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28) <산남의진 편제> 2 ( 현재) 의병장 : 정용기 좌영장 : 권규섭 좌포장 : 장대익 중군장 : 이한구 우영장 : 이규필 우포장 : 김일언 참모장 : 손영각 연습장 : 조선유 우재룡 유격장 : 임중호 소모장 : 정순기 도포장 : 백남신 척후장 : 정성욱 도총장 : 박태종 좌익장 : 정래의 장영서장 : 김진영 선봉장 : 홍구섭 우익장 : 김성일 군문집사 : 이두규 후봉장 : 이세기 점군검찰 : 안수원 정용기는 의병을 재기한 후 고종에게 창의의 정당성을 밝히는 상소를 올리고 격문을 발표 하여 의병 참여와 지원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은 중기의병기인 1907년 9월 이 후부터 시작되었다. 산남의진은 9월 27일(음력 8.20) 무렵에 포항을 점령하였다. 그 후 영 천으로 들어가 일본 상인 야마우치( 山 內 銀 三 郞 )를 사살하였다. 이어서 정환직의 지시에 의 해 의병을 모집하면서 군복을 준비하는 등 북상을 준비하였다. 정용기는 북상을 위하여 의 진 100여 명을 이끌고 경주 매현리(현, 포항시 죽장면)에 유진하였다. 1907년 10월 6일(음력 8.29)의 일이었다. 새벽 4시경 일본군이 청송에서 죽장으로 이동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정 28) 산남창의지 하, 42쪽. 29
2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용기는 일본군이 입암에 유숙할 것을 예측하고 의병대를 매복시켰다. 그런데 매복해 있던 이 세기부대가 성급하게 공격함으로 일본군 영천 수비대의 역습을 받았다. 이 입암 전투에서 대 장 정용기와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 등 수십 명이 전사하였다. 입암 전투의 참패로 의진은 무너지고 활동은 중단되었다. 정환직은 1907년 10월에 아들의 뒤를 이어 의병장에 올라 의진을 재기하였다. 정환직은 영일의 북동대산으로 의진의 근거지를 옮긴 뒤 새로이 다음의 의진을 짰다. <산남의진 편제> 3 29) ( 현재) 의병장 : 정환직 선봉장 : 우재룡 연습장 : 김성일 참모장 : 정순기 후봉장 : 박광 도포장 : 고찬 중군장 : 이순기 좌영장 : 이규필 좌포장 : 김성극 도총장 : 구한서 우영장 : 김치현 우포장 : 이규환 소모장 : 김태환 좌익장 : 정래의 장영집사 : 이규상 우익장 : 백남신 군문집사 : 정성우 산남의진은 1907년 10월 20일(음력 9.3)에 청하분파소를 습격하여 순검 1명을 사살하고 분파소를 소각하였다. 이후 청송의 보현산 일대와 영일의 동대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항일 투쟁을 펼쳤다. 1907년 11월 26일(음력 10.11)에 흥해를 공격하여 순검을 사살하고 가옥과 건물을 소각하였다. 그 후 영덕으로 이동하던 중 12월 17일(음력 11.2) 새벽에 유암에서 일본 군의 기습을 받아 영장 남경숙이 전사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의진은 무기와 탄약의 결핍으 로 전력이 약화되어 갔다. 정환직은 북상을 위하여 의진을 해산하고 휘하 의병들에게 개별적 으로 관동에 집결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는 북상을 하던 도중 청하의 각전에서 잠시 병을 치 료하던 중이던 1908년 1월 14일(음력 12.11)에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고 말았다. 결국 그는 영천의 남교에서 총살, 순국하였다. 산남의진의 정순기 등 의병들은 정환직의 후임으로 1908년 3월 18일(음력 2.5)에 최세윤 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최세윤은 북상을 중단하고 경상도 일대에서 지구전을 펴기로 결 29) 산남창의지 하, 42쪽. 30
23 총 설 정하고 진용을 다음과 같이 새로이 편성하였다. <산남의진 편제> 4 30) ( 현재) 의병장 : 최세윤 도포장 : 이종곤 군문집사 : 허서기 중군장 : 권대진 후봉장 : 최치환 유격장 : 이세기(보현산) 참모장 : 정래의 좌포장 : 최기보 우재룡(팔공산) 소모장 : 박완식 우포장 : 이규필 서종락(주왕산) 선봉장 : 백남신 연습장 : 김성일 남석구(철령) 장영집사 : 이규상 임중호(주사산) 최세윤은 본진을 남동대산에 두고, 부대를 소규모로 분산시켜서 보현산과 팔공산 주왕 산 철령 주사산 등지에 유격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긴밀히 연락을 취하면서 때 로는 연합 전선을 형성하면서 일제 군경에 항쟁하였다. 그러나 최세윤도 1908년 8월에 장기 용동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어서 이세기를 비롯하여 서종락과 김사곡 등이 전사 또는 체포 되면서 산남의진은 구심력을 잃고 와해되고 말았다. 잔여 의병들이 유격전으로 항쟁을 계속 하였으나 1910년의 고와실 전투를 마지막으로 산남의진은 해체되었다. 31) 산남의진은 3대 의병장으로 계승하면서 경북 남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대일항전을 전개하 였다. 초기에는 유생 중심이라는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차츰 무장투쟁 세력으로 전 환하여 일제 군경에 큰 손실을 주는 등 투쟁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또한 의진이 해체된 뒤에도 생존 의병들은 1910년대 국내 비밀 결사 운동에 참여하였다. 김성극 이규환 홍구 섭 남정철 남규철 김남준 등은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2 영릉의병 영릉의병은 신돌석이 1906년 4월 6일(음력 3.13)에 영덕에서 일으킨 의진을 말한다. 신돌 30) 배용일, 최세윤의병장고, 사총 31, 1987, 60쪽. 31) 권영배, 산남의진의 조직과 활동, 역사교육논총 16, 1991, 171~174쪽. 31
2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석은 영해 출신으로 전기 의병기에도 김하락 의진의 영덕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다. 신돌석은 고향인 영해의 복평(현, 영덕군 축산면 부곡리)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의진의 이름 을 영릉진 이라 하고 자신이 의병장이 되었다. 그의 휘하에는 중군장 선봉장 좌익장 우 익장 포대장 소모장 참모장 등의 편제를 두었다. 박수찬을 비롯하여 이창영 한영육 이하현 신태종 백남수 김치헌 등이 중요 직책을 맡아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다. 신돌석은 거의 직후 군사 소모와 자금 모집에 힘썼다. 그 결과 1906년 4월부터 5월 초에 걸쳐 1,656냥을 확보하였다. 영릉의병은 4월 30일에 영양읍 관아를 공격하여 무기를 확보하 기도 하였다. 1906년 5월 14일자 황성신문 에 따르면 총 22자루와 다수의 탄환, 그리고 화 승총 35자루와 화약 등을 확보하였다. 32) 영릉의병은 울진의 일본인을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일제는 울진을 어업 침략의 교두 보로 삼았으니, 이미 1890년대 후반부터 일본인 어부와 수산업자들이 잠수기 어선을 동원하 여 해산물을 쓸어갔다. 한인 어부들은 이와 같은 일제의 어업 침탈에 분개하고 있었다. 신돌 석 의병은 여러 차례 울진 지역으로 들어가 일본인 가옥을 파괴하고 일본인을 처단하였으며, 자금을 탈취하는 등 일제의 어업 침탈 세력을 응징하였다. 1906년 5월 8일에 울진에 도착한 영릉의병은 일본인을 사살하고 그들이 살던 가옥을 파괴 하였다. 그해 6월 상순에 울진 관아를 재차 공격하였다. 1906년 6월 하순에는 영해읍을 공격, 점령하고 영해군수의 죄상을 성토하였다. 7월에는 영덕으로 들어가 관아를 공격하였다. 군 수를 체포하여 단죄하고 건물을 파괴하였으며 무기와 군수 물자를 확보하였다. 1907년 1월 에는 울진에 다시 들어가 군수 윤우영을 포박하고 우편취급소를 습격하여 우편물을 압수하 여 소각했다. 1907년 9월에는 강원도 삼척군 원덕면 장호동에서 전복잡이를 하던 일본인을 습격하여 사살하고 노획품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33) 한편 일본군 수비대는 영릉의병에 대한 대탄압 작전을 벌였다. 일본군의 작전은 혹한기인 1907년 11월부터 펼쳐졌다. 일본군 제14연대에서는 제1대대장 아카시의 지휘아래 일월산을 중심으로 영릉의병의 활동지에 대한 토벌 작전을 감행했다. 영릉의병은 태백산맥의 오지 로 이진하면서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나 1908년 하반기 이후 일본군의 공격이 32) 김희곤, 신돌석의진의 활동과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19, ) 김희곤, 앞의 논문. 32
25 총 설 강화되면서 의진의 활동이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의진의 규모와 범위도 축소되었다. 더욱이 일본군의 귀순법 이 발표됨에 따라 귀순하는 의병이 생겨났다. 신돌석 의병장의 활동도 위 축되었으며, 그에 따라 만주 지역으로 이동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1908년 12월 12 일에 이동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김상렬 형제에 의해 타살되 고 말았다. 그 결과 영릉의병의 만주 이동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3) 의병장의 활동 1 전기 의병기 의병장 권세연(1836~1899)은 경북 봉화( 奉 化 ) 출신으로 본관은 안동( 安 東 ). 호는 성대( 星 臺 )이다. 안동에서 살았으며, 참봉( 參 奉 )을 역임하였다. 1895년의 민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격분한 유지호( 柳 止 浩 ) 김흥락( 金 興 洛 ) 등 안동 지역의 유림들은 의병을 일으켜 음력으로 12월 초 3일에 안동관찰부를 점령하고, 권세연을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권세연은 격문을 각지에 보 내어 각지의 의병 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민심을 크게 격려, 고무시켰다. 이 격문에는 침략자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자에 대한 증오심이 설득력 있게 표현되 어, 의병 규합에 큰 몫을 하였다. 그러나 1월 28일에 안동으로부터 도망쳤던 관찰사 김석중 ( 金 奭 中 )이 많은 관군을 끌고 공격하여 의병들이 패배하였다. 그 후 권세연은 주변의 의진들 과 연합하여 반격을 준비하던 중 이강년 의진이 김석중을 붙잡아 처형하자 의병장에서 물러 났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도화(1825~1912)는 안동 출신의 유학자이다. 그는 1895년의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김흥 락( 金 興 洛 ) 등과 함께 거의하여 1896년 1월에 안동부를 점령하고 권세연을 창의대장에 추대 하였다. 안동의병은 도주했던 관찰사 김석중이 관군을 이끌고 다시 안동부를 점령하자 사방 으로 흩어졌다. 안동에서 흩어진 의진의 중심 인물들은 다시 각처에서 병력을 수습하고 점차 전력을 회복하여 2월 중순경부터 다시 안동부에 집결하였다. 의병들은 권세연의 후임으로 김도화를 의병 대장에 추대하였다. 안동의병은 일본의 편에 섰다고 인정되는 예천군수 유인 형 의성군수 이관영 영덕군수 정재관 등을 참형에 처하였다. 이어서 인근의 의진들이 군 사적으로 연합하여 상주( 尙 州 )에 있는 적의 병참( 兵 站 )을 공격하였다. 3월 그믐에 함창 태봉 에 주둔한 일본 수비대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3월 26일에 제1차 공격을 하였고, 29일(음력 33
2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2.16)에 연합 의진의 의병들이 모두 태봉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격렬한 공방전 끝에 태봉 함락은 실패로 돌아갔다. 4월 2일에 적군 50여 명이 안동부로 들어가 시가 에 불을 질렀다. 이때 안동읍 1,000여 호의 민가가 불탔다. 태봉 전투에서 실패한 후 안동부 를 중심으로 한 일대의 의병장들은 다시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이 때 안동의진은 대장 김도화를 중심으로 하여 부장 유난영 도총 김하휴 선봉장 유시연 소 모장 이충언 등이 병력을 보충하여 안동읍을 중심으로 진영을 설치하였다. 이후 그는 고령 ( 高 齡 )으로 직접 활동은 못하였으나 상소를 올리는 등 투쟁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 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노응규(1861~1907)는 경남 안의 출신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광주( 光 州 )로 경남 안의에서 노이선( 盧 以 善 )의 2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학 공부에 힘썼다. 당시 영남 유림의 권 위로 알려진 성재 허전( 許 傳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면암 최익현을 찾아 사사하고, 연재 송병선, 입재 송근수에게도 나아가 학문을 연마하고, 국가사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 때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이어 단발령을 내렸다. 이에 대항하여 1895년 10월에 임최 수 이도철 김재풍 등이 친일정부의 대신들을 처단하려는 사건이 있었다. 노응규도 그들 과 약속하고 12일 새벽을 기하여 경복궁의 건춘문을 열고 들어가서 궁중 수정전에 머물던 대 신들을 죽일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친위대의 공격으로 중도에 좌절되고 말았다 년 1월 7일에 노응규는 승려 서재기 등과 안의에서 거의하였다. 이들 진주의병은 진주성으로 들어가 관리들을 살해하였다. 의병장 노응규는 국왕에게 창의소를 올려서, 창의의 불가피함 을 강조하고 앞으로 국왕을 위해 몸 바칠 결의를 피력하였다. 또한 사방에 격문을 돌려 민중 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호소하였다. 진주 일대를 장악한 진주의병은 3월 28일에 일제의 침략 교두보인 부산항을 공략하기 위해 의병 부대의 별군을 진주에서 김해로 이동시켰다. 이때 수 천 명의 김해 민중들이 적극 호응하였지만, 일본군측은 정보를 수집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 고 있었다. 의병부대를 먼저 공격해 온 일본군과 4월 11~12일(양력) 양일간에 걸쳐 김해 평 야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많은 손해를 입혔으나 부산항을 함락시키지는 못하였다. 이 때 정한용이 관군과 결탁하여 노응규를 배반함으로써 진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또한 아버지 와 형 응교( 應 交 )가 살해되고, 가산을 몰수당하였다. 1897년 10월에 상경하여 지부자현소( 持 斧 自 見 疏 ) 를 올리고, 1902년에 동궁시종( 東 宮 侍 34
27 총 설 從 )의 직책을 맡았으나, 1905년에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렸다. 그 리고 1906년 6월에 최익현 부하로 들어가 활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순창 일대에서 거의 수일 만에 최익현 등 12인이 자진 체포되어, 의진이 해산되는 바람에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는 충청북도 황간으로 들어가 서은구 엄해윤 노공일 등과 의병을 봉기하였다. 1906년 가을 에 매곡면 일대를 사병 훈련소로 삼아 인근의 이장춘 문태수 의진의 의병들과 함께 합동 훈 련도 실시하였다. 경부철도 파괴, 열차 전복 등의 활동을 하였으나, 일경에 체포되어 한성경 무서 감옥에서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가 옥사하였다. 1977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중 후기 의병기 의병장 1906년 이후 영남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으로는 신돌석과 정환직, 유시연 등 대표적이 다. 그러나 신돌석은 상금에 눈이 먼 지역민들에게 살해당했으며, 정환직은 체포되어 재판 도 없이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영천에서 살해되었다. 안동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체 포되어 교수형으로 순국한 유시연도 있다. 이들의 활동을 살펴보기로 한다. 신돌석( 申 乭 石, 1878~1908)은 경북 영해군 남면 복평리에서 신석주( 申 錫 柱 )의 아들로 출 생하였다. 본은 평산으로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申 崇 謙 )의 후예이지만, 영해( 寧 海 )에서 그 의 문중은 서리( 胥 吏 ) 즉 중인 집안이었다. 그는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계기로 평해( 平 海 )에서 기병한 것으로 알려진다. 1905년에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신돌석은 1906년 3월 13일(음력)에 아우 우경( 友 慶 )과 함께 영덕( 盈 德 ) 복평리( 福 坪 里 ) 축산( 丑 山 )에서 기병하였다. 그는 대장기를 세우고 영릉의병장( 寧 陵 義 兵 將 )이 되었다. 신돌석은 먼저 군율 을 정하여 군사들의 기강을 엄숙히 한 다음, 이웃 고을인 진보의 이하현( 李 夏 鉉 ), 영덕의 정 용기( 鄭 鏞 基 ) 그리고 이한구( 李 韓 久 ) 등의 의진과도 연락하여 유기적인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 는 영해읍을 거쳐 평해읍, 울진읍을 행군하며 병력을 점차 증강시켜 갔다. 그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태백산맥의 산악 지대를 이용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피하고, 혹은 해안선을 따라 활동 하였다. 1906년 11월 이후에는 일월산 일대에서 항일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07년 봄에 중 군장인 백남수( 白 南 壽 )와 김치헌( 金 致 憲 ) 등과 함께 영덕 일대 지방민들의 협력을 얻어 가면 서 진용을 보강하고, 친일파들을 처단하여 의진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높아갔다. 같은 해 9 월 15일에는 영양의 주곡에서 일본군 1중대와 격전을 벌였다. 이어서 경주의 동북 대산성에 35
2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이르러 일본군과 수일 간 격전하였다. 10월에 영해로 들어가 경무서를 격파하고 일경을 추 방한 후 수동으로 들어가 군량을 모으고 군졸들을 휴식시켰다. 이때 이인영( 李 麟 榮 )의 의진 을 중심으로 연합 의진이 형성되어 갔으며,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양주에서 합진하자는 이 인영의 격문이 신돌석에게 전달되었다. 신돌석은 대오를 정비하여 1,000여 명을 거느리고 양주로 향하였다. 이때 신돌석은 교남의병 대장으로 임명되었다가 박정빈으로 교체되었다. 1908년 정월에 신돌석은 의진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평해로 들어가 독곡의 일본군을 섬멸시키고 2월에 영양읍에 주둔하였다. 1908년 여름에는 군사들을 휴식시키고 7 월에 의병 활동을 재개하여 평해 한곡에서, 9월에는 영해 희암에서 적과 격전을 벌였다. 10 월에 의진을 거느리고 안동 재산면을 거쳐 영양 금정여점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과 맞부딪쳤 으나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11월에 엄동을 맞이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하지 못 하게 되자, 다음해 봄에 재개할 것을 기약하고 일단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의병을 해산한 후, 가족을 산중으로 피신시키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영덕 눌곡( 訥 谷 )에 이르렀을 때 길에서 우연히 옛 부하였던 김상렬( 金 相 列 )을 만났다. 그의 간청으로 그의 집에 투숙하게 되었다. 그날 밤 김상렬 형제의 음모에 빠져 독주를 마셨다. 신돌석이 쓰러지자 김상렬의 3 형제가 합세하여 도끼로 쳤다. 1908년 11월 18일의 일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 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34) 정환직( 鄭 煥 直, 1843~ )은 경북 영천( 永 川 ) 출신이다. 본관은 영일( 迎 日 ), 초명 은 치우( 致 右 ), 자는 백온( 伯 溫 ), 호는 동엄( 東 嚴 )이다. 용모가 준수하고 재기가 과인하여 이 미 12살 때 지방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1887년에 북부도사( 北 府 都 事 )에 제 수되었다가 이듬해인 1888년에 의금부의 금부도사를 역임하였으며 1894년에 동학농민운 동이 발발하자 그 해 겨울 토포사를 제수 받고 황해도의 구월산에 모여 있던 동학군을 권유 하여 평정한 뒤 이듬해 봄에 상경하여 그 공로가 인정됨에 태의원 시종관의 직을 제수받았다. 1900년에 도찰사에 임명되었다. 1906년에 아들 정용기( 鄭 鏞 基 )에게 의병을 일으켜 강원도 강릉으로 북상하도록 명하였다. 자신은 서울로 올라가 관직을 물러난 동지들과 협력하여 흩 어진 병사들을 모아 오대산으로 보내서 의진에 합세하게 한 후 일제의 감시 하에 있던 황제 를 모시고 탈출한 후 재차 서울로 진공하여 국권을 회복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아들 34) 김의환, 항일의병장열전, 정음사, 68~72쪽 ;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푸른역사, 2001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391쪽. 36
29 총 설 이 이끄는 의병진의 북상 계획이 늦어지므로 1907년 9월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해 10월 7일에 아들 용기가 입암에서 일본군 영천수비대를 맞아 격렬히 싸우다 일본군에게 피 격되어 전사하니 스스로 의병대장이 되어 의병진을 이끌게 되었다. 그리하여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고 진영을 정비하여 4개 소대로 재편성하였다. 제1소장에 조재술( 曺 在 述 ), 제2소장에 남경숙( 南 敬 叔 ), 제3소장에 안흥천( 安 興 千 ), 제4소장에 김경문( 金 敬 文 )을 각각 임명하였다. 그 해 10월 29일 제1소장 조재술에게 의병 80여 명을 이끌고 흥해를 습격케 하여 우편국 분 파소 등을 불태우고 취급소장 등 3명을 사살하였다. 11월에는 신녕을 기습하여 분파소에 보 관된 총기 60여 점을 탈취하였다. 또한 의흥을 습격하여 분파소를 방화하고 총기 49정을 탈 취하기도 하였다. 그 해 11월 8일에는 청송군 유전( 楡 田 )에서 청송 일본군 사카이( 酒 井 )가 이 끄는 부대와 접전하던 중 조재술이 관통상을 입었다. 16일에 흥해군 신광( 神 光 )에서 정완생 ( 鄭 完 生 )을 수장에, 우재룡( 禹 在 龍 )을 부장으로 각각 명하여 다시 흥해를 습격케 하여 분파소 를 불태우고 일본 순사와 한국인 순검 1명씩을 사살하였다. 그 뒤 12월 5일에 영덕 부근에서 일헌병 영덕분견대의 야간기습을 받아 남경숙이 전사하자, 이에 분개하여 7일에 부하 83명 을 이끌고 영덕을 역습하여 적병 20여 명을 목 베어 죽였다. 경주로 이동하고자 하였으나 영 덕군 소택( 小 澤 )에 주둔하던 일본군에게 포위당하자 이튿날 청하군 각전에서 부하들에게 해 산하도록 명령하고 눈물을 흘리며 동대산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산에서 내려와 일본군에 항 쟁하려다 12월 11일 새벽에 고천에서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일본 헌병은 대구로 호송하 면서 여러 방법으로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뜻을 굽히지 않음에 다시 영천으로 호송하여 영천 남쪽 교외에서 총살형에 처하여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 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35) 유시연( 柳 時 淵,1873 ~ 1914)은 안동 임동 고천 출신이다. 자는 박여( 璞 汝 ), 호는 성남( 星 南 ), 본관은 전주( 全 州 )이다. 향리의 대평학숙( 大 坪 學 塾 )에서 유연각( 柳 淵 覺 )으로부터 한문 을 수학하였다. 1896년에 안동의병장 권세연( 權 世 淵 )의 막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적 에게 큰 타격을 주어, 유선봉( 柳 先 鋒 ) 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안동의진이 해산한 뒤, 영남 지 방으로 남하한 김하락( 金 河 洛 ) 의진에 가담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유시연은 35)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쪽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쪽 ; 배용일, 산남의진고-정환직, 정용 기 부자 의병장 활동을 중심으로, 논문집 6, 포항실업전문대학,
3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다시 일어나 소모장이 되어 동지를 규합하였다. 1906년 봄에 경주 분황사에서 열읍( 列 邑 )의 의병장들과 회맹하고 총대장에 추대되어 진보 영덕 평해 등지에서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 렸다. 1907년의 군대 해산 후 호서와 영남 중간에서 활약하던 이강년이 격서를 보내어 서로 손을 잡고 일하자고 요청해 왔다. 그는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삼척 방면으로 가서 이강년 을 만났다. 이 때 친일파 박두일( 朴 斗 日 )의 계략에 빠져 군졸들이 흩어지자, 격분하여 울진 십이령에서 박두일을 사살하였다. 이어 영양 청송 안동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전과를 올렸다. 1911년 8월에 만주로 망명하여 이상룡 김동삼( 金 東 三 ) 안창호( 安 昌 浩 ) 등과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만주 지역이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기에 최적지임을 깨닫고 군자 금을 조달하기 위해 1913년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밀정의 밀고로 5월 영주 반 구왜경소( 盤 邱 倭 警 所 )에 붙잡혔다.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14년 1월에 교수형 으로 순국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36) 3 판결문 속의 의병활동 영남의병장 중에서 이들 외에도 신돌석과 정환직 의진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하거나 옥중 순국한 이들이 있다. 이들 중에 이 책에 판결문을 소개한 인물로는 조준용 이창영 박기운 최경연 김술이 오경명 김완수 이학이 노병대 김반석 배선한 윤 학이 신낙선 강근이 신태용 최산두 구성집 정흥대 권석규 김문오 장학이 김재 수 권계홍 강준학 강운학 금달연 이규성 박성도 윤흥곤 김일원 김수곡 최세윤 등이 있다. 이들의 행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조준용( 趙 俊 容, 1886~1907)과 이창영( 李 昌 英, 1883~1907)은 경북 영양 출신이다 년 음력 3월 20일에 신돌석 의진에 참가하여 영양 석포( 石 浦 )에서 신돌석 휘하의 의병과 함 께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3월 27일에는 의병의 집 사 가 되어 신돌석이 거느리는 75명과 함께 영양의 장파에서 임( 林 ) 초시로부터 80냥을, 다 음 날인 28일에는 영해로 들어가 90냥을 모집하였다. 29일에는 소모관이 되어 영양에서 군 자금을 확보하였다. 4월 13일에는 울산으로 들어가 군의 병정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울산군 청송군 청운역( 靑 雲 驛 )의 손부이( 孫 富 而 )로부터 군자금 100냥, 영양군 진보읍 36)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1970 ; 유규원, 유의사전, 독립운동사자료집 3, 편찬위원회,
31 총 설 이방( 吏 房 )의 집에서 군자금 200냥, 청송군 이전평에서 군자금 350냥 등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다가 영양군 순교한테 체포되어 1907년 2월 5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 하였다. 37) 박기운( 朴 基 運, 1844~미상)은 흥해 출신으로 산남의진( 山 南 義 陣 )에 참여하여 경주 청 송 영덕 일대에서 군수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용기는 부친인 고종 황제의 시 종관 정환직( 鄭 煥 直 )의 지시에 따라 고향인 영천에서 이한구( 李 韓 久 ) 손영각( 孫 永 珏 ) 등을 규합하여 창의하였다. 박기운은 1907년 음력 3월에 산남의진에 참여하여 경주 청송 영덕 일대에서 군수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정용기 의진은 1906년 4월 28일에 일본 군 토벌대에 패한 신돌석 의진을 돕기 위해 영해로 진군하다가 경주 우각( 牛 角 )에서 경주진 위대에 체포되었다. 이리하여 산남의진은 중군장 이한구가 이끌어 가다가 7월 하순 무렵에 해산하고 말았다. 박기운은 1906년에 귀향하여 농사일을 하던 중 음력 5월 26일에 일본 경 찰에 체포되었다. 1907년 9월 4일에 경상북도재판소에서 유배형 15년을 받았다. 38) 최경연( 崔 敬 淵, 1859~1909)과 김술이( 金 述 伊, 1874~미상), 오경명( 吳 敬 明, 1852~미상) 은 경북 지례 사람이다. 1908년 음력 2월 30일에 경북 지례군 증산면에서 박계장( 朴 啓 長 ) 의 진에 입진하여 총기로 무장하고 활동하였다. 같은 해 음력 3월 3일에 경북 지례군 증산면 거 물리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었다. 8월 29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유배형 [ 流 刑 ] 7년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9월 15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고초를 겪었다. 최경연은 옥중에 순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39) 김완수( 金 完 水, 1899~미상)는 경북 영양 사람이다. 성익현( 成 益 鉉 ) 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일 대에서 활약하였다. 성익현은 1907년 음력 7월 무렵 정경태( 鄭 敬 泰 )를 도총장( 都 總 將 ), 변학 기( 邊 學 基 )를 도총독( 都 總 督 ), 이상렬( 李 相 烈 )을 부장으로 삼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1907 년 음력 7월 25일에 경북 평해( 平 海 ) 읍내에 설치된 경무고문분파소를 습격하여 병기와 군 수품을 노획하였고, 이어 경북 울진군 읍내를 공격하여 군청 무기고에 있던 화승총 25자루, 활과 화살 등 병기를 노획하는 등 활동하였다. 김완수는 1908년 4월부터 성익현 의진이 이 37)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 황성신문 ( )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419~420쪽. 38)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39) 판결문( , 대구지방재판소, , 대구공소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쪽. 39
3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강년 의진과 연합하여 1,000여 명의 대규모 연합의진을 형성한 뒤, 활동 근거지로 삼기 위 해 경북 봉화군 내성( 乃 城 )을 포위 공격할 때 참전하는 등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러다가 체포되어 1908년 9월 7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유배형 10년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학이( 李 學 伊, 1874~미상)는 영양군 북초면 출신으로 역시 성익현 의진에 참전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08년 9월 7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유배형 3년을 받았다. 40) 노병대( 盧 炳 大, 1856~1913)는 경상북도 상주 출신으로 성재( 性 齋 ) 허전( 許 傳 )에게 한 학을 배웠으며, 1889년(고종 26)에 창릉참봉( 昌 陵 參 奉 )이 되었다. 1895년 을미개혁 때 향 교가 폐지된다는 소문을 듣고 반대 상소를 올린 바 있다. 1905년에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 결되자 일본을 축출하는 상소를 올려 고종의 신임을 얻어 비서원의 비서승( 煉 書 丞 ) 벼슬 을 받았다. 그는 고종 황제의 뜻에 따라 1907년 8월 경기도 광주에 사는 임용헌( 林 容 憲 )과 충남 연산의 김운로( 金 雲 老 ) 송창헌( 宋 昌 憲 )과 함께 속리산에 들어가 거의하니 응모하는 사람이 200명에 이르렀다. 때마침 군대해산이 강행되매 해산병들이 의병 투쟁에 합세함 으로써 1,000여 명에 달하는 대부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노병대는 대장에 김운로를 추대 하고 보은군을 공격하여 일본인 2명을 사로잡고, 상주 청계사로 진을 옮겼다. 그때 일본군 의 급습을 받고 청주 미원으로 패주하였다. 그곳에서 다시 적 5명을 사로잡았다. 노병대는 성주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노병대는 충북 보은 청주, 경북 상주, 경 남 거창 안의, 전북 무주 등지에서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908년 6월 15일(음력) 에 보은의 관주점( 冠 酒 店 )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일본군은 그의 한쪽 눈까지 빼버리는 악형을 가하였고, 공주지방법원에서 유배 10년형을 선고하였다. 그는 옥고 끝에 1911년 이른바 은사령에 따라 풀려나왔으나 다시 의병을 모으며 항전을 계획하였다. 그러 던 중, 1913년 3월에 다시 붙잡혀 15년형을 받고 대구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는 자결을 결 심하고 28일간의 단식 끝에 순국하였다. 41) 김반석( 金 盤 石, 1879~미상)은 경북 의성 사람으로 박연백( 朴 淵 伯 ) 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청송 안동 의성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박연백은 경북 의성 출신으로 각 지역에 격문을 보 40)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435~436쪽. 41)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33 총 설 내 의병을 모아 공산에서 기병( 起 兵 )한 뒤, 1906년 7월 1일 일본군 수비대와 최초로 교전하 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여 갔다. 이후 경북 의성 의흥 영천 청송 등지로 옮겨다니며 야간 기습 공격으로 일본군을 토벌하여 갔다. 김반석은 박연백 의진에서 종군하면서 1907년 8월 무렵 동료 의병들과 함께 경북 안동군 송제동 재곡( 齋 谷 )에 있는 김파총 집에서 군량미 를 징발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영천의 정용기 의진과 합세하여 경북 경주군 죽지면 입암 리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다. 그 해 11월 25일에 박연백 의병장의 지휘 아래 100 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경북 의성군사무소와 일본군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였고, 12월 23일에는 경북 청송군 월매동에서, 그리고 12월 25일에는 의성군 삼산면 진목동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는 등 맹렬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그는 강진수( 姜 鎭 秀 )와 서 주일( 徐 周 一 ) 의진으로 들어가 1908년 음력 7월에 경북 의성군 옥산면 광전동에서 군자금을 징발하는 등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1908년 9월 21일에 대구지방재판 소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오히려 1908년 10월 13일에 대구공소원에서 징역 15 년형을 선고받았다. 대심원에서도 상고가 기각되어 15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42) 배선한( 裵 善 翰, 1883~1961)은 경상북도 진보군 동면 출신이다. 그는 같은 동면 출신의 윤 학이( 尹 學 伊 ) 신낙선( 申 洛 先 ), 영덕 출신의 강근이( 姜 根 伊 ), 봉화 출신의 신태용( 申 泰 用 ) 등 과 함께 신돌석 의진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배선한은 1906년 음력 3월에 신돌석 의병에 참가하여 50명의 의병들과 함께 영양읍을 공격하여 무기고를 점령하고 다수의 무기를 빼앗 았다. 4월에는 130명의 병력으로 청송읍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받고 패하 여 귀가하였다. 이듬해인 1907년에 신돌석 의진에 다시 들어가 5월에 흥해, 영해, 진보 일대 에서 일본수비대와 싸웠다. 영양, 평해, 청송 일대에서 일군과 싸우다가 1908년 6월에 체포 되었다. 배선한은 1908년 9월 28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15년의 징역형, 윤학이와 신낙선 은 10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강근이와 신태용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43) 최산두( 崔 山 斗 )는 경북 흥해 출신으로 의병장 최세윤의 아들이다. 그는 흥해군 일대에서 군수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08년 3월부터 오두안 오문석 김학림 등과 함께 흥해군의 이호동과 우각동, 강호곡, 그리고 청하군 죽장면 감곡동 일대에서 군수품을 모집 42)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대구공소원 판결문). 43)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439~441쪽. 41
3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하였다. 그는 체포되어 1908년 9월 30일에 대구지방법원에서 종신 징역형을 받았다. 44) 구성집( 具 聖 執, 1876~1909.2)은 경북 의성 사람이다. 1906년 9월 12일 무렵 김동산( 金 東 山 ) 의병장 휘하에서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경북 봉화군 강원도 삼척군 등지에서 의병 활동 을 하다가 같은 달 25일 무렵에는 삼척군 개산동 윤천총( 尹 千 總 )과 이학서( 李 學 瑞 )로부터 각 각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07년 7월 무렵에는 성익현( 成 益 賢 ) 의병장 휘하 에서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동지 200여 명과 함께 경북 울진군 내에서 활동하였고, 또 삼척 군 죽변동 해안에 있는 일본 어선을 공격하여 일인 하야노( 早 野 菊 松 ) 외 2인을 총살하고 군 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8월 5일부터 10월 10일 사이에는 울진군 석호 리 박명칠( 朴 明 七 )과 삼척군의 김자율( 金 子 律 ) 이도장( 李 都 長 ) 김자현( 金 子 賢 )의 집에서 각각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었다. 그 후 1908년 10월 7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살인 및 강도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1909년 2월 2일에 경성공소원에서 기각 되어 순국하였다. 45) 김윤황( 金 允 璜, 1886~ )은 경북 상주 사람이다. 1903년 9월 경북 청도군 팔조령에서 김문진( 金 問 辰 ) 김곤이( 金 坤 伊 ) 김향군( 金 香 君 ) 소춘화( 蘇 春 和 ) 등과 함께 일본인 이노 우에( 井 上 俊 太 郞 )를 살해하였고, 1904년 6월에서 1905년 10월 사이에는 탁영조( 卓 永 祚 ) 이 아무개( 李 某 ) 천생이( 千 生 伊 ) 등과 함께 자인군에서, 그리고 1906년 5월에는 여두명( 呂 斗 明 ) 이도신( 李 道 信 )과 함께 경주군에서 각각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 후 1908년 3월 13 일에서 5월 18일 사이에도 이봉상( 李 鳳 祥 ) 남방우( 南 方 祐 ) 이봉우( 李 鳳 祐 ) 이남산( 李 南 山 ) 이해문( 李 海 文 ) 외 여러 명과 함께 경주군 신녕군 경산군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 며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1908년 10월 9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1908년 10월 31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자 다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12월 2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46) 정흥대( 鄭 興 大, 1860~1909.2)는 경북 문경 사람이다. 1907년 음력 7월 29일에 이인영( 李 麟 榮 ) 의병장의 휘하로 들어가 부하 80여 명과 함께 경북 상주 문경 등지에서 활약하였고 같은 해 음력 8월 1일 무렵에는 의병 30여 명과 함께 문경 읍내에 돌입하여 친일순검 박시영 44)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45)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520~521쪽. 46)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앞의 책, 쪽. 42
35 총 설 ( 朴 時 永 ) 박세진( 朴 世 鎭 ) 집에 방화하여 모두 불태우고 체포되었다. 그 후 1908년 10월 19 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방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검사의 공소( 公 訴 ) 로 1909년 2월 9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47) 고윤한( 高 閏 韓, 1870~미상)은 경북 용궁 사람이다. 고윤한은 1907년 7월 이인숙( 李 寅 肅 ) 등 의병 60여 명과 함께 의병 자금 확보를 위해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서 엽전 200냥을, 9월 에는 이인숙과 함께 강원도 강릉군 중계면에서 엽전 100냥을 군자금으로 징수하였다 년 6 7월에는 봉화군에서 의병 자금을 징수하는 등 지속적으로 의병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1908년 10월 16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을 받아 옥고 를 치렀다. 48) 권석규( 權 錫 奎, 1884~미상)은 경북 순흥 사람이다. 김성운( 金 成 雲 ) 의진에 가담하여 경 북 영양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권석규는 1907년 10월에 김성운 의병장의 명령에 따라 금 전 곡식 및 기타 물품 징발 명령서를 가지고 경북 영양군 일대에서 군자금 및 군수품 수 합 활동을 벌였다. 그는 20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영양군 수비동에서 군수품을 징발 하였고, 같은 군 계동에서는 군량미를 징발하였으며, 같은 군 문암동에서도 미곡 및 군자 금을 징수하였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1908년 11월 30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종신 징역 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49) 김문오( 金 文 五, 1874~미상)는 경북 영해 사람이다. 유시연 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안동 일 대에서 활약하였다. 유시연 의병장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을미의병에 참여하여 권세연( 權 世 淵 )의 부하로서 활동하였고, 1905년 이후 다수의 의병을 모집하여 일월산을 중심으로 한 영 남의 동북부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일제에 막대한 타격을 입힌 의병장이었다. 김문오는 유시 연 의진에서 종군하면서 1907년 음력 12월 18일부터 1908년 1월 말까지 동료 의병 33명과 함께 권총을 휴대하고 경북 안동군 임동면 마령, 같은 면 노곡과 임북면 잔루동 등 3개 처에 서 3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특히 이 때 척후 정찰병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1908년 12월 25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7년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909년 47)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앞의 책, ~ 쪽. 48)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앞의 책, 342~343쪽. 49)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앞의 책, 453쪽. 43
3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2월 13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50) 장학이( 張 鶴 伊, 1881~1909.3)는 경북 상주 사람이다. 1907년 음력 9월 30일 박연백( 朴 淵 伯 ) 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의성군( 義 城 郡 ) 일대에서 수십 명의 동료와 함께 총기 20여 정을 휴대하고 군자금 모집과 밀정 김명준( 金 明 俊 )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8년 음 력 6월 이토옥( 李 土 玉 ) 의진에 가담한 후 부하 8명 등과 함께 총기 7정을 휴대하고 의성군 사곡면과 채동면 등지에서 마포( 麻 布 ) 3필 목면 1필 돈 3관 등의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피체되었다. 1909년 1월 18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살인 및 강도죄로 교수형을 선 고받아 항고하였으나 3월 6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고 3월 23일 대심원에서 형이 확정 되어 순국하였다. 51) 김재수( 金 在 水, 1877~1909.3)는 경북 청송 사람이다. 1907년 10월 15일부터 12월 5일 사 이에 박연백( 朴 淵 伯 ) 의병장 휘하에서 소모장으로 활동하고 박연백 의진 30여명과 함께 경 북 신녕군 안동군 청송군 일대에서 정진사( 鄭 進 士 ) 권대방( 權 大 房 ) 김명원( 金 明 元 ) 김 연전( 金 延 前 )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었다. 그 후 1909년 1월 19일에 대구지 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죄로 종신징역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그해 3월 4일에 대구공소원 에서 교수형으로 형이 변경되어서 고등법원에 상고했지만 같은 해 4월 8일에 기각, 형이 확 정되어 순국하였다. 52) 권계홍( 權 桂 洪, 1871~1945)은 경북 안동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 늑결 이후 박인화( 朴 仁 和 ) 의병진에 가담하여 안동 영양 봉화 등지에서 3년 동안 일군경과 항전을 벌였다. 그 는 동료들과 함께 총검으로 무장하고 안동 및 영양 관내의 경찰주재소를 습격하는 등의 활동 을 벌였으나 1908년에 체포되었다. 그는 1909년 1월 27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내란죄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3월 27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어 옥 고를 치렀다. 53) 강운학( 康 雲 鶴, 1881~1964)과 강준학( 康 俊 鶴, 1887~1964)은 경북 봉화 출신으로 형제간 이다. 강운학은 동생 강준학과 함께 이강년( 李 康 秊 ) 의병 부대가 경북 지역을 거점으로 일 50)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483쪽. 51)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쪽. 52)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앞의 책, 488~489쪽. 53)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앞의 책, 467~ 쪽. 44
37 총 설 본군과 전투를 벌일 때, 1909년 음력 3월에 봉화의병장 정경태( 鄭 景 泰 )의 휘하에 들어가 봉 화 영월 울진 등지에서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중과부적으 로 후퇴, 피신하던 중 함께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이들은 1909년 8월 30일에 대구지방재판 소에서 소위 폭동죄로 각각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54) 금달연( 琴 達 淵, 1874~1914)은 순흥에서 살았으며 본적은 봉화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 래 국운이 날로 기울고 일본인의 횡포가 심해지자 1905년에 영주에서 김낙임( 金 樂 任 )과 함 께 의병을 조직하여 의병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1907년에 순흥의 일 헌병분견소( 日 憲 兵 分 遣 所 )를 비롯하여 인근의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그 때 문경 사람 이강년( 李 康 秊 )이 의병을 일으 켜 경기도 충청도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1907년 음력 8월에 휘하의 포군 수십 명을 거 느리고 이강년의 중군장 김상태( 金 尙 台 )의 진중으로 찾아갔다. 금달연은 이강년을 만나 달 연이 김백우( 金 白 愚 ) 선생께 몸을 바친 지 해가 넘었사온대, 지금 백우 선생의 명으로 감히 뵈오니 죽이건 살리건 처분대로 하옵소서 하였다. 이강년은 도독장( 都 督 將 ) 이만원( 李 萬 源 ) 을 불러 별초종사( 別 抄 從 事 )로 임명케 하였다. 1908년에 이강년의 종사부에서 활약하다가 이강년이 체포된 후에는 김상태와 함께 의병을 수습하고 그 선봉장이 되어 영주 단양 일대 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9년 7월에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대구지방 재판소에서 종신징역을 선고받아 복역 중 1914년 10월 21일에 옥사 순국하였다. 55) 이규성( 李 圭 成, 1870~1949)은 경북 흥해군 기계면 출신이다. 1907년 음력 10월에 정환직 ( 鄭 煥 直 ) 의병장이 이끄는 산남의진에 들어가 경북 흥해 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12년에 체포되어 1912년 3월 4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56) 박성도( 朴 成 道, 1874~1910)는 경북 청송군 현내면 출신이다. 그는 1907년 9월 정용기 의 진에 들어가 청하군 분파소 공격에 가담하였다. 1908년 7월에 청하군 사령을 죽인 일로 체 포되어 1910년 4월 29일에 대구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57) 54)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앞의 책, 502쪽. 55)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 대한매일신보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536쪽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 사자료집 1, 244~ 쪽. 56)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 548~549쪽. 57)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45
3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윤흥곤( 尹 興 坤, 미상~1910)은 경북 청하군 소천면 출신이다. 1907년 정환직 의진에 가담 하여 경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정환직의 명령에 따라 동지 백 수십 명과 함께 총과 칼 을 휴대하고 1907년 10월 29일에 경북 흥해군 읍내에 들어가 우편취급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소장 이치하라( 市 原 爲 太 郞 ) 가족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보관한 300여 원을 군자금으 로 노획하고 근처에 있는 경무분파소 및 기타 13동의 집을 방화 소각시켰다. 같은 해 11월 3 일에도 신령군 읍내에 들어가 군청에서 총 백 수십 자루를 탈취하고 경무분파소 및 친일 순 검의 집을 소각하였고, 같은 달 4일 무렵에는 의흥군 읍내에 들어가 경무분파소에서 총 수백 자루를 탈취하고 분파소 및 순검 주택 3동을 소각시켰다. 1909년 12월 28일에도 그는 김수 곡( 金 水 谷 ) 김일원( 金 日 元 ) 등과 함께 총칼을 휴대하고 의성군 점곡면 서변동에서 군수품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1910년 8월 22일에 대구지방법원에서 불온조 직활동 강도방화파괴 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9월 20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 되어 동지 김수곡 김일원과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58) 최세윤( 崔 世 允, 1867~1916)은 경상북도 흥해 출신이다. 자는 성집( 成 執 聖 執 ), 호는 농 고( 農 膏 )이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특히 병서를 즐겨 읽어 정통하였고, 성품이 청렴 강직하여 절의를 숭상하였다. 흥해군의 형방서기를 역임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전 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896년 전기 의병시 안동의병장 김도화( 金 道 和 ) 의진에 입진하여 아장으로 활약하였다. 그 후 고향에서 후학을 교육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이후 정용기 ( 鄭 鏞 基 )가 의병을 봉기하고 이한구( 李 韓 久 )를 파견하여 거의할 것을 요청하므로 자신이 병 중에 있었고 부인도 임신 7개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국의 결단으로 산남의진에 참여하였 다. 그는 의병장 정용기와 정환직이 연이어 순국하자 1908년 2월에 부장 이세기( 李 世 紀 ) 정순기( 鄭 純 基 ) 등에 의해 보현산 속에서 제3대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의병장이 된 그는 중 군장에 권대진( 權 大 震 ), 참모장에 정내의( 鄭 來 義 ), 소모장에 박완식( 朴 完 植 ) 등을 임명하고, 전군을 인솔하여 흥해 청하 청송 영해 영천 의성 등지에서 활동하며 적을 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의성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고 고립되어 부득이 의진을 해산하고 재기를 준비하였다. 일본군은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다액의 현상금을 걸고 수사망을 펼쳤다. 결 58)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 배용일, 산남의진고-정환직, 정용기 부자 의병장 활동을 중심으로, 논문집 6, 포항실업전 문대학,
39 총 설 국 1908년 7월에 영일군 장기면 용동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다. 1911년 11 월 15일에 대구지방재판소 형사부에서 10년의 징역형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2월 12일에 대 구공소원 형사부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경성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수감된 뒤 그곳에 서 제공하는 음식은 일체 거절하고 부인이 넣어 주는 사식만으로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희 망이 없음을 깨닫고 그 사식마저 거절하고 단식 항쟁하다가 1916년 8월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59) 이상으로 이 책에 판결문을 수록한 의병의 활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를 표로 살펴보면 다음 표1 과 같다. 표 1 중 후기 의병기 영남의병장 현황 번호 이름 출신지 형량 판결일 의병장 활동지역 관리번호 포 상 1 조준용 영양 교수형 애국장 신돌석 영양, 진보 이창영 영양 교수형 - 3 박기운 흥해 유15년 정용기 영천, 경주 1147 애국장 4 최경연 지례 애국장 5 김술이 지례 유7년 박계장 지례 오경명 지례 - 7 김완수 영양 유10년 애국장 성익현 안동, 영양 이학이 영양 유3년 - 9 노병대 상주 유10년 노병대 보은, 상주 940 독립장 징10년 김반석 의성 박연백 청송, 의성, 안동 1151 애국장 징15년 배선한 진보 징15년 애국장 12 윤학이 진보 신돌석 영해, 영양, 울진 징10년 13 신낙선 진보 - 14 최산두 흥해 종신 최세윤 (포항)흥해 1151 애국장 15 구성집 의성 교수형 성익현 봉화, 삼척, 울진 1155 애국장 ) 판결문( 대구지방재판소) ; 산남창의지 하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1972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2 3, ; 배용일, 앞의 논문,
4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번호 이름 출신지 형량 판결일 의병장 활동지역 관리번호 포 상 김윤황 상주 교수형 17 정흥대 문경 교수형 하양, 경주, 경산 1152 애국장 이인영 문경, 상주 1155 애국장 18 고윤한 용궁 징15년 봉화 1152 애국장 19 권석규 순흥 종신 김성운 영양 1152 애국장 20 김문오 영해 징7년 21 장학이 성주 교수형 유시영 안동 1155 애국장 박연백 의성, 의성 1156 종신 김재수 청송 교수형 박연백 의성, 청송 1156 애국장 23 권계홍 안동 징3년 박처사 안동, 영양 692 애족장 24 강준학 봉화 애국장 징5년 정경태 봉화 강운학 봉화 애국장 26 금달연 순흥 종신형 이강년 영주, 문경 1161 독립장 27 박신촌 (박성도) 청송 교수형 정용기 (포항)청하 윤흥곤 청하 독립장 29 김일원 영덕 교수형 정환직 (군위)의흥 영덕, 의성 1541 독립장 30 김수곡 신녕 독립장 31 최세윤 흥해 징10년 최세윤 흥해, 청송 1173 독립장 32 이규성 흥해 징2년6월 정환직 (포항)흥해 1176 애족장 48
41 총 설 이들 외에도 판결문 은 있지만 이 책에 편철하지는 못하였음에도 활동상이 두드러진 의병 장의 활동상을 소개하기로 한다. 김대규( 金 大 圭, 1878~ )는 경상북도 예안 출신이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격 분함을 금치 못하고 11월 17일에 청송의 주치와 울산의 불영사에서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의 지사들과 회합하여 의거를 결의하였다. 이들은 동지 규합을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살포하여 의병 500명을 모병하였다. 1906년 2월에 영양 입암 교동( 橋 洞 )의 자택에서 의진의 부서를 확정하고, 김대규는 도포장( 都 砲 將 )에 피선되었다. 그 후 진보 오누지 작전에 참전하였다. 이 때 의병 탄압의 책임자인 일본 헌병 무토( 武 藤 )을 비롯한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하는 전과 를 올렸다. 1906년 5월에 울진 죽변 왜관 전투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크게 물리쳤다. 8월에 는 잔류 병력을 정비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의병장이 된 김대규는 휘하의 병사들을 훈련시켜 전력을 보강하여 전투에 대비하였다. 10월에 이르러 병왕동( 屛 王 洞 )에서 출동한 일 본군을 맞아 격전을 전개하였으나 역부족으로 적에게 사면이 포위되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야음을 틈타 물속으로 뛰어들어 수영으로 간신히 탈출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 후 안동 임동면 대곡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하였다. 의진의 치열한 방어전에 견디지 못 한 일본군은 산악지대에 불을 놓는 방화 작전으로 대처하였다. 결국 김대규는 불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1907년 11월 21일에 순국하였다. 60) 김병일( 金 炳 一, 1886~1914.2)은 경북 봉화 사람이다. 일제가 조국을 강점하자 경북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군경에 손해를 입히며 활동하다가 1911년 음력 6월 20일에서 9월 11일 사이 에 김영수( 金 永 壽 ) 사문성( 史 文 成 ) 외 여러 명과 함께 강원도 삼척군과 경북 소천면 일대 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12년 5월 30일에서 7월 18일에도 성병태( 成 炳 台 ) 외 여러 명과 함께 경북 안동군과 봉화군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그 사이 7월 10일에는 일 본인에게 협조한 봉화군의 여일구( 余 一 九 ) 안봉순( 安 鳳 順 ) 김유백( 金 有 伯 ) 등 3인의 집 에 방화하여 그들을 응징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13년 3월 28일에서 5월 6일에도 역시 성 병태 등과 함께 강원도 삼척군 봉화군 울진군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 포되었다. 1913년 12월 13일에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 방화 강도 상해 및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914년 2월 18일에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형 60) 김의환, 항일의병장열전, 정음사,
4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61) 김종철( 金 鍾 鐵, 1880~1917)은 경북 봉화 사람이다. 1907년 8월경 강원도 인제에서 박화 암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관포수 등 1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 다. 그는 1908년 2월 무렵 일본군 양양수비대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는 강릉으로 압송 도 중 탈출하여 위기를 벗어났고, 이후 강원도 정선 삼척, 경북 봉화 등지에서 은둔 생활을 하 면서 재차 거병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중 일제의 무자비한 의병 탄압, 특히 1909년 9월부 터 10월까지 전개된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 을 목격하고는 분개하여 재차 거의를 단행하였 다. 그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의병 부대를 조직한 후, 친일 관리 및 밀정 등 부일배( 附 日 輩 )를 처단하여 민족 정기를 선양하는 한편 투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군자금품 수합 활동을 벌 였다. 1910년 음력 3월 10일에 김문도( 金 文 道 )와 김중삼( 金 仲 三 ) 등 부하 의병들과 함께 강원 도 인제군 내면 소한리에 살던 친일 면장 김시원( 金 時 元 )을 처단하려 하였으나, 출타 중이므로 그의 집을 소각하였다. 같은 해 음력 5월 30일에는 김국서( 金 國 瑞 ) 등 부하 의병 4명과 함께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서리에 살던 일진회 회원 엄윤문( 嚴 允 文 )을 총살, 처단하였다. 그리고 1913년 음력 11월 15일에는 이종서( 李 鍾 西 ) 등 부하 의병 3명과 함께 강원도 강릉군 연곡면 퇴곡리에서 군자금과 군수용품을 징발하였다. 또 1915년 5월 8일에는 김종근( 金 鍾 根 ) 장명 수( 張 命 壽 ) 김원실( 金 元 實 ) 정대성( 鄭 大 成 )과 함께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에서 군자금을 징 수하였다. 아울러 같은 해 6월 6일에도 위의 의병들과 함께 연곡면 장천리에서 의병 활동을 밀고한 박군팔( 朴 君 八 )을 총살, 처단하기도 하였다. 또한 같은 해 8월 11일에도 김용원( 金 熔 源 ) 및 위의 의병들과 함께 연곡면 송천리 이치령에서 군자금을 거출하는 등 의병 활동을 계 속하였으나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16년 11월 29일에 경성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됨 에 따라 1917년 4월 19일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하였다. 62) 남석인( 南 錫 仁, 1878~1907)은 경상북도 청송의 농민이다. 1906년 정용기 의진에 들어가 서종락( 徐 鍾 洛 ) 남석구( 南 錫 球 ) 임중호( 林 中 虎 ) 심일지( 沈 一 之 ) 등과 함께 청송 지역에 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남석인은 영천으로 정용기를 방문하였는데, 이미 정용기는 기밀이 61)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쪽. 62) 조선총독부관보 ( ) ; 편찬위원회, 앞의 책, 쪽. 50
43 총 설 누설되어 체포된 후였다. 다만 정용기의 사촌인 정사홍( 鄭 士 弘 )이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있 을 뿐이었다. 남석인은 정사홍과 경주 사람 이운경( 李 雲 景 ) 흥해 사람 정천여( 鄭 千 汝 ) 그리 고 남석인의 6촌 되는 남석문( 南 錫 文 ) 등과 함께 1906년 음력 4월에 거의하고 4월 13일에 영 덕 청련사( 靑 蓮 寺 )로 들어갔다. 여기에는 이미 경주 사람 이한주( 李 漢 主 )가 의병 30명을 거 느리고 와서 절에 머물러 있었다. 본래 이한주는 정용기 의진의 중군이었으므로 합진할 것을 결정하고 부서를 다시 정하였다. 이때 남석인은 포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의진을 정비한 후 4 월 26일에 의병 80명을 거느리고 경주로 향하였다. 그날 정오에 영덕 적암지( 赤 巖 地 )에 이르 렀을 때 경주 진위대 병정 30명이 총을 쏘며 내습해 왔다. 역부족으로 의진을 해산하고 옥동 ( 玉 洞 )으로 돌아와서 나머지 병사들을 타일러 해산시키고 다음날을 기약하였다. 그는 정용기 가 재기한 후에 군사 30명을 모집하여 영천 거동사( 巨 洞 寺 )에 머물면서 독자적으로 청송 흥해 등지의 민가를 다니면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1907년 6월에 청하의 하옥계에서 일본 군의 공격을 받고 은신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6월 20일에 체포되고 말았다. 재판 결과 종신 징역에 처해졌으나, 끝내 옥중 순국하고 말았다. 63) 박수길( 朴 水 吉, 1880~1908)은 경북 청도 출신으로 경남 삼가군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 동하였다. 박수길은 1908년 6월에 경남 삼가군 일대에서 김팔용( 金 八 龍 ) 등 30여 명의 의병 을 이끌고 삼가군 중촌면 덕지면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1908년 8월 1일에 진주의 성내2동에서 김팔용 등과 함께 숙박하던 중 일본 순사 3명과 한인 순사 4 명에 의해 체포되었다. 박수길은 진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아 그 해 10월 10일에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순국하였다. 64) 조운식( 趙 雲 植, 1873~1910)은 경북 상주 사람이다. 1909년 음력 7월에 경북 풍기에서 기 의하여 부하 수백 명의 총대장이 된 후 한봉서( 韓 奉 西 ) 박황성( 朴 璜 成 ) 이인만( 李 仁 萬 ) 김용태( 金 龍 泰 ) 등을 부장( 部 將 )으로 하여 고유문을 작성, 각처에 배포한 뒤 의병을 모집하였 다. 같은 해 7월 중에는 충북 보은군 청주군 등지에서 면장 이상락( 李 相 洛 ) 외 3명으로부터 각각 군자금을 모집 하였다. 1909년 음력 8월에는 의병 30여 명을 인솔하고 경북 상주군 화 북면에서 밀정 정화춘( 鄭 化 春 ) 김경모( 金 京 模 ) 등을 처단하였으며 같은 달 영천군 주막에서 63) 편찬위원회, 앞의 책, 427쪽. 64) 판결문( 대구공소원). 51
4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부하 500여 명을 인솔하고 머무르던 중 일군의 포위 습격을 받고 교전하다 부하 5명이 전사 하기도 하였다. 1909년 9월에서 10월 사이에는 회덕 풍기 청산 청주 보은 지역에서 활 약하였다. 같은 해 10월 13일에 러시아에 있는 이범진( 李 範 晋 )으로부터 국내의 모든 의병 이 러시아로 모여 무기를 정리한 후 다음해 3월을 기하여 일시에 항거하자는 제의를 받았 다. 그는 한봉서 등 부장 4명 및 부하 350여 명에게 무기를 휴대케 하여 이범진 소재지에 보낸 후 의병을 더 모집하여 합진하고자 국내에 머무르던 중 같은 달 15일에 충북 영동경 찰서 순사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 후 1910년 2월 14일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내란죄 로 교수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3월 12일에 경성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 정되어 순국하였다. 65) 65) 판결문( 공주지방재판소 : 경성공소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쪽. 52
45 총 설 2. 호남지역의 의병전쟁 1) 전기의병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 에 조선인의 분노는 전국적으로 폭발하였다. 을미사변 직후 국수보복( 國 讐 報 復 ) 을 기치로 한 항일 의병은 1895년 9월에 무과 출신으로 진잠 현감을 역임한 문석봉에 의하여 대전의 유 성에서 처음으로 봉기되었다. 단발령 공포 후 의병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전기 의병기 호남 의병의 활동은 남한 지역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전 해인 1894년에 동학농민전쟁이 전라도 전 지역에 걸쳐 크게 일어났기 때문 이다.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호남 지역의 농민군이 살해되거나 유이민이 되었다. 그 결과 전기의병기에 호남 지역에서의 의병 투쟁이 크게 일어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전기의병기 호남 지역에서는 장성과 나주 광주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기정진의 손 자이며 노사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기우만( 奇 宇 萬 )은 고향인 장성에서 기삼연 고광순 등과 거의하였다. 기우만은 1895년 8월 을미사변의 비보를 접하고 통곡하며 짚자리에서 잠자고 창을 베개로 삼는다는 거의를 결심하였다. 이윽고 11월에 단발령이 내리자 각지에 통문을 보 내어 거의에 참여할 것을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국모의 원수를 생각하면 신자( 臣 子 )된 자로서 와신상담( 臥 薪 嘗 膽 )해야 할 시기인데 한 사람도 목욕재 개하고 적을 치자고 청하는 자 없으며, 상감을 협박한 변은 바로 곧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날인데 내신( 內 臣 )은 용감하게 나서서 업신여김을 막다가 죽은 자가 없고, 외신( 外 臣 )은 서로 임금의 본의 아닌 명령을 받들어 오직 머리깎기만 독촉하고 있으니 이러고도 나라에 사람이 있다 하랴. 이같 이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짐승 발굽과 새 발자국이 날로 모여들어 문명국이 변해 야만이 되어도 괴이할 것 없다는 것이다. 66) 또한 기우만은 고종에게 상소하여 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을 것과 단발령을 환수하여 옛 법도를 회복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기우만은 유인석의 격문을 받고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 66) 기우만, 격문, 송사집
4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하였다. 유인석의 제천의병의 소식이 장성에 까지 도달하자 기우만 역시 각지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일으켰다. 그 격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임금께서 먼지를 무릅쓰고 계시니 시일을 천연해서는 안 된다. 역당이 목숨도 생하여 근본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음에랴. 천안( 天 顔 )의 한 방울 눈물 자국은 천만 신하의 간담이 무너져도 속죄할 수 없 고, 옥지( 玉 趾 )의 두어 걸음 파천 길은 억조 백성의 뼈가 가루되어도 돌이키지 못할 것이다. 67) 기우만은 고광순 기삼연 김익중 이승학 기주현 고기주 양상태 등과 장성의 향 교에서 창의하였다. 이때 기우만은 각읍의 아전과 군교들에게 통문을 보냈으니 재력과 군 사력을 갖춘 이들이 우선적으로 초모( 招 募 )의 대상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나주부에서도 기우만의 통문을 받고 양반 유생과 이족( 吏 族 )을 중심으로 창의에 적 극 호응하여 1896년 2월 1일에 나주향교에서 의병을 결의하였다. 다음날 이들은 사과( 司 果 ) 이승수와 유생 나경식의 추천에 의하여 전 주서 이학상이 회맹의 장이 될 만하다 하여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들은 이와 같이 거의한 후 통문을 지어 기우만에게 보내 거의 의 뜻을 밝혔다. 68) 기우만은 나주의병의 초청에 응하여 2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2월 11일에 나주부로 들어갔다. 이학상은 전직 관료로 반 동학적 입장을 견지했던 인물이다. 이때 동학 진압에 공을 세워 해주 군수에 임명된 정석진과 담양 군수에 임명된 민종렬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나주의병 은 조직된 것이다. 이러한 나주의병의 조직에 나주부 관찰사는 도피하였으나 참서관 안종수 는 거의를 저지시키고자 시도하였으나 2월 9일에 나주의 아전과 군교들에게 피살된 바 있다. 기우만의 나주 입성은 이러한 분위기에 나주의병들에게는 큰 힘이 되기에 충분하였으며, 이 에 기우만을 총대장에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2월 13일의 일이었다. 나주의병의 활동이 기반을 잡게 된 2월 22일에 기우만은 인근에 다시 통문을 띄워 광주에 집결할 것을 통고하고 자신도 부대원을 이끌고 광주로 이진하였다. 기우만은 광주향교를 본 부로 하는 광산회맹소를 설치하고 의병을 초모하였다. 고향인 장성으로 향하지 않고 광주로 이진하게 된 것은 광주가 전남의 중심지라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로서 67) 기우만, 격문, 송사집 ) 이병수, 금성정의록, 독립운동사자료집 3,
47 총 설 기우만은 광주부를, 이학상을 중심한 나주의병은 나주부를 장악하는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전주 진위대 중대장 김병욱에 의해 해남 군수 정석진과 담양 군수 민종렬이 체포되 었다. 관군의 나주의병에 대한 처벌은 가혹하였다. 정석진이 체포되어 그해 3월 10일 현지에 서 살해되었으며, 김창균과 그의 아들 김철현, 그리고 영광의 향리 정상섭도 처형되었다. 69) 이처럼 나주의병은 관군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되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기우만은 선유사 신기선이 고종의 칙유를 전달하자 그해 4월 의병을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황현은 기우만의 의병 해산을 정석진의 처형과 관련하여 그가 자신에 해가 올 것을 두려워하여 의병을 해산하 였다고 비판적으로 기록하였다. 70) 선봉장 기삼연은 이에 항거하여 장성으로 돌아가 의병의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전주 진위대에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71)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나주의병은 나주의 향리층이 주도하였으며, 참서관 안종수를 처 단하고 나주부를 장악하였다. 기우만 의병은 나주의병에 합세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일본 의 구축과 개화 정책의 반대, 그리고 국왕의 환궁을 주장하였다. 이들 의병은 고종이 환궁한 후 내린 해산 명령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는 이념적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2) 중기의병 1904년 2월에 일제는 러일 전쟁을 도발하고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여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 호남 지역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의진으로 최익현의 태인의병, 양회일의 쌍산의소, 담양 창 평의 고광순 의진 그리고 광양의 백낙구 의진 등이 있다. 1 태인의병 임병찬 등 태인 정읍 일대의 유생들은 충청도 정산에 거주하던 최익현을 맹주로 초빙하 여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최익현의 눈물어린 호소에 인근의 유생들이 의병에 자원하였다. 최익현은 격문을 지어 널리 배포하였다. 그는 격문에서 다음과 같이 역당과 왜적을 죽여 위험한 국세( 國 勢 )를 건지자고 호소하였다. 69) 홍영기, 1896년 나주의병의 결성과 활동, 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 하, ) 황현, 매천야록 건양 원년 병신 정월. 71) 홍영기, 앞의 논문,
4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모든 우리의 종실, 대신, 공경, 문무, 사농공상, 서리, 하인들까지 무기를 가다듬고 마음과 힘을 한 군데 로 모아서 역당( 逆 黨 )을 죽이고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깔고 자며, 원수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씨를 없애고 그 소굴을 두들겨 부수자. 천운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 없으니, 국세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위험한 고비를 바꾸어 편안하게 만들어서 인류를 도탄에서 건져내자. 믿는 바는 군사( 軍 士 )이니 다만 적이 힘이 센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히 이에 격문을 돌리니 함께 나라를 구하기에 힘쓰자. 72) 태인의병 지휘부는 정읍 순창 일대를 돌면서 의병을 소모하였다. 고용진 양윤숙 채영 찬 김송현 등은 각각 수십 명의 포수를 데리고 합류하였다. 그 결과 봉기한 지 1주일 만에 포수 200~300명을 포함하여 900여 명의 의병이 집결하였다. 의병장 최익현 밑에는 임병 찬( 林 炳 瓚 )을 위시하여 김기술 유종규 김재구 강종회 이동주 이용길 손종궁 정시 해 임상순 송윤성 임병대 이도순 최종달 신인구 최제학 등이 있어 우익장, 선봉장, 후군장, 소모장, 좌우종사, 화포장, 수포장 그리고 서기 등을 맡았다. 이들은 군수품과 무기 확보를 위하여 각 군을 돌면서 총기와 화약, 군자금 등을 징발하였다. 군사 활동과 훈련을 위하여 내장사와 순창의 구암사 같은 사찰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73) 태인의병은 기병한 다음 날인 6월 5일에 행군하여 정읍에 들어가 내장사에서 유숙했으며, 6일에는 순창에 들어가 구 암사에서 유숙했다. 8일에는 곡성에 도착하여 격문을 지어 각 지역에 전했다. 10일(음력 윤 4.19)에 순창으로 돌아와 주둔하였다. 태인의병의 활동 소식에 정부와 일제는 진위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고자 하였다. 6월 11일 새벽에는 광주관찰사 이도재가 의병의 해산을 요구하는 고종의 해산 칙유를 전달하였다. 최익현은 이에 내가 상소를 올려 거의의 연유를 아뢰었는데, 소가 만일 상께 도달하면 반드시 비답을 내리실 것이다. 비답을 받들어 진퇴할 뿐이요 지방관이 지휘할 바가 아니다. 74) 라는 뜻으로 회답하였다. 그날 정오 쯤에 일본군이 동북쪽으로부터 공격하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임병찬에서 2개의 기병( 奇 兵 )을 설치하여 맞아 싸우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왜병이 72) 최익현, 창의격문, 면암집 권2 잡저. 73) 홍영기, 한말 태인의병의 활동과 영향, 전남사학 11, 1997, 413~414쪽. 74) 연보, 1906년 윤4월 20일(병술). ; 면암집 부록 권4. 56
49 총 설 아닌 진위대 병력임을 알게 되었다. 전주관찰사 한진창과 순창군수 이건용이 군사를 거느리 고 와서 의병을 공격한 것이다. 최익현은 이들이 왜병이라면 마땅히 사전( 死 戰 )으로 결판을 내야 하나, 이들이 진위대군이면 우리가 우리를 서 로 공격하는 것이니 어찌 차마 그럴 수가 있겠느냐? 75) 라 하고 임병찬을 불러 싸우지 말도록 하였다. 이어서 관군에 글을 보내어 너희들이 왜군이라면 당연히 즉시 사전을 하여야 할 것이나 싸우지 않는 것은 동포끼리 서로 죽이는 것을 나는 차마 할 수 없어서이니 즉시 물러가라. 76) 라고 하였다. 그러나 전주군이 포를 쏘아 탄환이 비가 오듯 하였다. 의병은 흩어졌고 정시 해가 총탄에 맞아 절명하였다. 최익현은 의병의 해산을 지시하였다. 진위대는 최익현을 포 함한 13명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당시 최익현을 끝까지 사수한 제자들을 12의사 라고 하는데, 임병찬을 비롯하여 고석진( 高 石 鎭 ) 김기술( 金 基 述 ) 최제학( 崔 濟 學 ) 문달환 ( 文 達 煥 ) 임현주( 林 顯 周 ) 양재해( 梁 在 海 ) 조우식( 趙 愚 植 ) 조영선( 趙 泳 善 ) 나기덕( 羅 基 德 ) 이용길( 李 容 吉 ) 유해용( 柳 海 瑢 ) 등이 그들이다. 최익현과 체포된 이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18일(음력 윤4.27)에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끌려가 구금되었다. 정부 관료와의 연루설 및 고종의 밀지설과 관련한 조사를 받았다. 일제는 8월 14일(음력 7.8)에 군율위반죄를 적용하여 최익현에게 대마도 감금 3년, 임병찬에게도 대마 도 감금 2년을 선고하였다. 고석진과 최제학은 군사령부 감금 4개월, 나머지 김기술 문달환 임현주 양재해 조우식 조영선 나기덕 이용길 유해용에게는 태형 100대를 선고하였다. 최익현은 임병찬과 함께 8월 27일(음력 7.8)에 대마도의 이즈하라( 嚴 原 )에 압송되어 위수 영의 경비대 안에 구금되었다. 최익현이 도착하였을 때 대마도에는 이미 홍주의병 9명이 유 배와 있었다. 이들은 홍주의병 유병장 유준근을 비롯하여 홍주의병 9의사라고 불리는 이들 이다. 이들 홍주9의사 는 이미 8월 6일(음력 6.17)에 대마도에 도착하여 이즈하라의 사족수 산소( 士 族 授 産 所 )에 구금되었다. 이들이 구금된 지 20여 일이 지나 최익현이 임병찬과 함께 75) 연보, 1906년 윤4월 20일(병술). ; 면암집 부록 권4. 76) 연보, 1906년 윤4월 20일(병술). ; 면암집 부록 권4. 57
5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이곳에 유배되어 홍주9의사와 함께 유배 생활을 한 것이다. 최익현이 도착하자 대마도 경비대장이 검은 옷을 입을 것과 단발을 강요하였다. 이에 항거 하여 최익현이 단식에 들어갔으며 나머지 10명도 동참하여 단식 투쟁을 감행하였다. 결국 경 비대장은 2일 만에 자신의 지시를 번복하여 단발과 변복을 강요하지 않게 되었다. 최익현은 자신들에게 주는 음식 값이 조선에서 오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비로소 식사를 재개하였다. 최익현은 1906년 12월 4일(음력 10.19)에는 병이 났다. 처음에는 감기였으나 점차 위중하였 다. 12월 20일(음력 11.5)에는 문인 고제학과 최제학이 석방되어 면회를 와서 해어탕( 解 語 湯 ) 과 소속명탕( 小 續 命 湯 )을 지어 치료를 하고자 하였으나, 1907년 1월 1일(음력 ) 병 고를 이기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77) 2 쌍산의소 양회일은 1906년 10월에 전남 화순의 능주에서 쌍산의소를 봉기하였다. 쌍산의소에서는 1907년 1월에 격문을 발표하고 의병을 모았다. 의병대는 4월 무렵에 능주와 하순을 점령하 였으며, 광주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의병장 양회일을 비롯한 중군장 임창모 등 이 체포되어 지도로 유배되어 고초를 겪었다. 고광순도 1907년 1월에 담양군 창평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고광순 의진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고광순 의진 편제> 의병장 : 고광순 부 장 : 고제량 선봉장 : 고광수 좌익장 : 고광훈 우익장 : 고광채 참 모 : 박기덕 호 군 : 윤영기 종 사 : 신덕균 조동규 고광순 의진은 1907년 4월에 화순읍을 점령하고 평소 원성이 자자하던 일본인 집과 상점 10여 호를 소각하였다. 그러나 광주에서 파견된 관군과 교전 끝에 패산하고 말았다. 전남 광양에 은거 중이던 백낙구도 1906년 가을에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태인의병의 소 77) 김상기, 최익현의 정산이주와 태인의병, 충청문화연구 7, 2011, 9~18쪽. 58
51 총 설 식을 듣고 합류하기 위해 북상하다가 태인의병의 해산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 의병을 준비하였다. 그는 1906년 11월에 광양 군아를 점령하고 무기와 군자금을 확보하였으나 구례 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남원의 양한규도 1907년 2월에 의병을 일으켰다. 양한규 의병은 음 력 설날 아침에 남원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러나 양한규가 유탄에 맞아 순국하고 말아 의병대는 와해되고 말았다. 78) 3) 후기의병 1907년 8월 1일에 일제가 한국군을 강제 해산하자 이에 항거한 군인들과 의병이 서로 연합 하여 대대적인 무장 항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해산된 군인의 항전은 서울의 시위대로부터 시 작되어 원주 강화 홍주 진주 진위대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각기 의병에 가담하여 의병의 전력을 강화시켰다. 원주 진위대는 특무장교 민긍호의 지휘 아래 병사층을 중심으로 거의하 여 강원도 충북 일대에 본격적인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후기의병기 호남 의병은 박은식이 이미 지적하고 있듯이 전국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전 개하였다. 일제 군경과의 교전 횟수와 교전 의병 수, 그리고 희생 의병자 수에서도 호남 의 병은 단연 많은 통계를 보인다. 이 시기에 호남 지역의 마을마다 의병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으며 수많은 의병장이 나타났다. 호남 지역 대표적인 의병으로 기삼연의 호 남창의회맹소를 비롯하여 전해산의 대동창의단, 이석용의 호남창의소, 김동신의 삼남창의 소, 그리고 고광순과 심남일 안규홍 문태서 등이 거느린 의병 부대가 있었다. 호남창의회맹소는 기삼연이 1907년 10월에 결성하였다. 여기에는 영광의 김용구와 나주 의 김태원, 장성의 이철형, 함평의 이남규 의병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광고문을 발표하여 친일파의 처단과 세금 납부 거부 등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대한매일신보사 등 언론 기관에 의병의 활동을 게재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각국 공사관에 포고만국문 을 발표하 여 의병 봉기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는 장성과 순창 지역, 영광 나주, 함평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나, 1908년 2월에 의병장 기삼연이 체포되어 해산되었다. 대동창의단은 전해산이 조직하였다. 전해산은 전북 임실 출신으로 나주 영광 등 전남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김태원이 전사한 후에 부대원들을 수습하고 78) 박민영, 한말 중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01~154쪽. 59
5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1908년 음력 8월에 부대 이름을 대동창의단이라 하고 독자적인 의병 활동을 하게 되었다. 선봉장에 정원집, 중군장에 김원범, 후군장에 윤동수, 호군장에 박영근 등을 두었다. 대동창 의단은 1908년 후반부터 의병 활동을 전개하여 다음 해 4월에 부대를 해산할 때까지 300여 명의 규모로 전남 서부 지역인 함평 나주 무안 영광 장성 광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전 해산은 다른 의병 부대와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전해산은 심남일 조경환 등의 부 대와 연합 작전을 펼치면서 주로 영광의 불갑산과 함평의 석문산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활동 하였다. 이들은 영광의 불갑산 전투, 장성의 동화 전투, 담양의 한재 전투, 함평의 월야 전투 등에서 전과를 올리며 전남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 부대로 주목받았다. 전해산은 1908년 겨 울 심남일 김영업 오성술 등과 호남의병의 연합조직인 호남동의단을 조직하여 자신이 대 동의병대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호남창의소는 이석용이 조직하였다. 전북 임실 출신인 이석용은 1907년 9월에 진안의 마 이산에서 거의하고 호남창의소라 칭했다. 그의 휘하에는 종사에 전해산과 한사국, 선봉에 박만화 송판구, 중군에 여주목과 김운서, 후군에 임종묵과 김사범, 그리고 총지휘에 곽자의 와 박갑쇠 등이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임실을 비롯한 전북의 동부 지역에 거주하는 유생들 이었다. 병사층은 농민들과 천민들로 구성되었는데 약 300여명에 달했다. 이들은 일본인 구 축, 일본 상품 배격,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 세력 처단, 민폐 근절 등을 담은 14개 조항과 10 개조의 의령( 義 令 ) 을 정해 지키도록 하였다. 이들은 진안읍을 공격하여 분파소와 우편물 취 급소 등을 불태웠다. 또한 공전영수원( 公 錢 領 收 員 ) 등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이나 세무서를 공격하였으며, 의병의 활동을 정탐하여 보고하는 자위단 활동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일제 군경의 계속된 탄압으로 이석용은 1909년 음력 3월에 후일을 기약하며 의병을 해산하였다. 김동신의 삼남창의소, 그리고 고광순과 심남일 안규홍 문태서 등의 활동에 대하여는 다음 장 의병장의 활동 부분에서 후술하기로 한다. 일본군은 호남 의병의 항쟁이 격화되고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한국 병합의 큰 장애물인 호남 의병을 속히 종식시킬 목적으로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까지 약 2개월간에 걸쳐 호남 의병에 대한 대학살 작전을 수행했다. 이 군사 작전은 한국임시파견대의 전 병력을 호남 지역의 의병 진압에 투입하여 호남 의병을 박멸 한다는 계획이었다. 일제는 호남 의병을 탄 압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3기로 나누어 의병 탄압 작전을 시행하였다. 60
53 총 설 제1기 제2기 제3기 9월 1일 ~ 15일 부안에서 하동의 선에서 아래로 법성포에서 황제도까지의 지역 9월 16일 ~ 9월 30일 법성포에서 황제도의 선에서 서남해안에 이르는 전 지역 10월 1일 ~ 10일 서남해안 일대의 제 도서 일제는 전라도 지역을 관할하는 남부수비관구의 모든 병력을 임시한국파견대로 교체 편성하여 의병 탄압 작전에 투입하였다. 임시한국파견대는 현지의 일본 헌병대와 경찰, 그리고 해군 11정대 등과 공동으로 작전을 전개하였다. 임시한국파견대의 제1연대는 순 창-담양-나주-목포를 연결하는 전남의 서북 지역을, 제2연대는 그 연결선상의 동남 지 역에서 작전을 폈다. 일본군은 1일 전진 속도를 4km로 제한하면서 목포-해남 방향으로 의 병대를 압축해갔다. 한편 연안과 도서 지역의 경비와 수색은 11정대를 비롯한 해군이 담당 하여 해안 지역의 의병을 진압함은 물론 의병의 도서 진출을 막기 위하여 군함까지 동원 하였다. 일제는 대포를 탑재한 중무장한 경비선 16척을 건조하여 그중 10척을 전남의 도 서 지역에 집중 배치하였다. 일본군은 이른바 교반적( 攪 拌 的 ) 방식으로 한 지역을 수색하고 다시 돌아와서 그 지역을 수색하는 방식으로 철저하게 의병을 살육하였다. 이 작전으로 임창모와 임학규 등 의병장 들이 살해되었으며, 심남일 안계홍 양진여 강무경 등 의병장들이 체포되었다. 전남경 찰서의 보고에 따르면 이 작전 중에 살해된 의병이 420명으로 보고되어 있다. 79) 호남 의 병은 일제가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 이라고 부른 호남 의병 대학살 작전에 의해 불과 40여일 만에 붕괴되고 말았다. 그 결과 한말 의병 역시 대 타격을 입고 의병의 대일항전은 급격히 쇠퇴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이 작전을 수행하면서 의병만이 아닌 일반 주민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서슴치 않 았다. 호남 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직접 목격한 황현은 매천야록 에서 79) 폭도에 관한 편책 전남경비발 제2082호, 융희 2년 10월 23일 ; 홍순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 서울대출판부, 1994, 162쪽. 61
5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사방을 그물 치듯 해놓고 순사를 파견하여 촌락을 수색하고 집집마다 뒤져서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죽였다. 그래서 행인의 발길이 끊기고 이웃과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의병들은 삼삼오오 도 망하여 흩어졌으나 몸을 감출 데가 없어 강자는 돌출하여 싸워 죽었고 약자는 기어 도망하다가 칼 을 맞았다. 80) 라고 기록하고 있음은 이를 말해준다. 이와 같이 후기의병기 호남 의병은 전국 의병을 대표했다고 할 정도로 격렬했다. 그 결 과 일제의 탄압도 가장 강렬했으며 희생자도 많이 발생하였다. 호남의병은 민중 층이 대 거 참여한 특징이 있다. 특히 후기의병기에는 머슴을 중심으로 구성된 안담사리 의병 이 편성될 정도였다. 따라서 호남 의병은 일제의 축출,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 세력 처단, 일 본 상품의 배격 등과 같은 민족적인 이념은 물론이고, 탐학한 관리의 축출과 같은 반봉건 적인 이념을 동시에 내세우고 있다. 여기에서 호남의병이 동학의 보국안민적인 이념을 계 승한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은 호남의병의 안민적 성격은 의병의 주민 침탈 행위를 엄단하도록 하였다. 안규홍이 주민에게 피해를 주는 의병장을 처단한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호남 의병은 한말 의병 전 기간에 걸쳐 투쟁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주도자 또는 참여자 에서도 농민이나 머슴, 천민 등이 다수 참여한 점에서 의병의 민중성도 나타난다. 이에 따라 호남 의병은 민족주의 이념 외에도 보국안민적인 동학의 이념을 계승하고 있는 측면도 발견 할 수 있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4) 의병장의 활동 1 중기의병기 의병장 중기 의병기 대표적인 호남 의병으로는 최익현과 임병찬을 들 수 있다. 최익현( 崔 益 鉉, 1833~1907)은 조선 말기 화서학파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화서학파 중에서는 드물게 문 과 출신으로 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강직한 선비이기도 하다. 그는 제주도와 흑 산도에 유배되어 고초를 겪기도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교학 활동도 수행하여 제주도 지역 에서 화서학파의 학풍을 진작시키기도 하였다. 1900년에는 충남의 정산으로 이주하여 청 80) 황현, 매천야록 6, 융희 3년 8월. 62
55 총 설 양 예산 부여 등지에 많은 문인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그중에 이식 곽한일 유준근 이교헌 송병직 등과 같이 홍주의병에 참여한 이도 있으며, 윤긍주 최은상 최영복 처럼 태인의병에 참여한 이도 있다. 백관형 유준근 등은 1919년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여 옥 고를 겪기도 하였다. 최익현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5적을 토벌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1905년 12월에는 노성의 궐리사에서 강회를 열었다. 그는 강회에서 강의를 마치고 일제의 침략에 대항할 방책을 제시하면서 이를 맹세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는 1906년 6월에는 태 인의 무성서원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의병을 봉기하였다. 정읍, 순창 일대에서 의병들이 집 결하여 봉기한 지 1주일 만에 포수 200~300명을 포함하여 900여 명의 의병이 집결하였다. 이들은 각 군을 돌면서 총기와 화약, 군자금 등을 징발하였다. 군사 활동과 훈련을 위하여 내장사와 순창의 구암사 같은 사찰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태인의병의 활동 소식에 광주관찰사 이도재는 의병의 해산을 요구하는 고종의 해산 칙유 를 전달하였다. 전주관찰사 한진창은 순창군수 이건용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의병을 공격하였다. 의병장 최익현은 임병찬에게 맞아 싸우도록 하였으나, 상대가 관군임을 알고 동족끼리 싸울 수 없다면서 의병을 해산시키고 12의사 와 함께 관군에 체포되었다. 일제는 최익현에게 대마도 유배 3년형을 선고하였다. 임병찬에게는 대마도 유배 2년형을 선고함에 따라 최익현과 임병찬은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최익현이 대마도에 도착하자 대마도에는 이 미 홍주의병 9명이 유배와 있었다. 최익현은 대마도 경비대장이 검은 옷을 입을 것과 단발을 강요하자 단식으로 항거하였다. 임병찬과 홍주의병도 이에 동참하여 단식 투쟁을 감행하여 경비대장으로 하여금 명령을 번복하게 하였다. 그러나 최익현은 그 해 말에 유배지에서 순국 하고 말았다. 유해는 이즈하라에서 배로 초량까지 운구되었으며, 다시 구포강을 건너 김해 창원 칠원 창녕 현풍 성주 개령 김산 황간 영동 옥천 회덕 공주를 거쳐 12 월 7일 정산의 본댁에 도착하여 장사지냈다. 최익현은 비록 관군과의 전투를 피하기 위하여 의병을 해산하고 자신은 대마도에서 순국하고 말았지만, 그의 의병 봉기는 전국적으로 의병 봉기를 고조시키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81) 81) 김상기, 최익현의 정산이주와 태인의병, 충청문화연구 7,
5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임병찬( 林 炳 瓚, 1851~1916)은 전라북도 옥구 출신으로 본관은 평택이다. 그는 임용래( 林 榕 來 )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학을 배웠으며 39살에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 동첨절제사를 역임하였다. 1906년 2월에 의병장 최익현과 더불어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초 모, 군량 및 병사 훈련 등의 책임을 맡아 홍주의병장 민종식( 閔 宗 植 )과 서로 연락을 맺으면서 태인 정읍 순창 곡성 등 지역을 습격하여 관곡을 취해 군량으로 삼고 진용을 정비하였다. 그 해 6월에 순창에서 최익현과 함께 적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어 일본 헌병에 의해 서울로 압송된 후 감금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의 대마도( 對 馬 島 )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907년 1 월에 귀국하였다. 1910년에 국권을 상실한 후에는 은거하면서 재차 거의할 것을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에 고종 황제가 내린 밀조에 따라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다. 그는 널리 격문을 발 송하고 동지를 초모하는 한편 그 조직을 확대시켜 12월에는 전라남북도 독립의군부 순무대 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1914년 2월에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 李 明 翔 ) 이인순( 李 寅 淳 )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의 편제로 재조직하였 다. 임병찬은 그 총사령이 되어 일제의 내각총리대신, 총독 이하 모든 관헌에게 국권반환요 구서 를 보내 합병의 부당성을 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 대해서도 일제의 통치에 한국 민이 불복하고 있음을 표명하는 한편 국권 회복의 의기를 일으켜 일시에 일제를 구축하려는 항일 의병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 해 5월에 일본 경찰에 의해 그 계획이 사전에 발각 되어 임병찬 이하 관련자들이 대거 체포당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체포된 후에 옥중에서 계획 이 실패됨을 분개하고 3차례에 걸쳐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 뒤 6월 13일에 거문도로 유배되 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16년 5월 유배지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 립장을 추서하였다. 82) 2 후기 의병기 의병장 후기 의병기 호남 의병은 치열한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일제 군경의 탄압도 극심하여 항전 과정에서 많은 의병장이 살상되었다. 이들 중에는 고광순처럼 전투 중에 전사한 의병장이 있 었고, 또한 체포되었으나 재판도 없이 사형을 당한 이들도 많았다. 그중에서 고광순 안규 홍 심남일, 심남일 부대의 부장 강무경, 중군장 박사화 김태원 조경환 박춘실 등의 활 동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82)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쪽. 64
57 총 설 고광순( 高 光 洵, 1848~1907)은 호남의 명가로 알려진 장흥 고씨로 창평 출신이다. 그는 전 기, 중기 의병기에도 의병을 조직하여 항쟁한 바 있다. 그가 수립한 1907년 일제의 침략에 대하여 예기를 축적하여 장기 항전을 준비한다는 축예지계( 蓄 銳 之 計 ) 는 의병 전쟁의 새로 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를 위해 고광순은 1907년 9월 무렵 연곡사가 위치한 지리산 피아 골에 의병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활동하였다. 그는 부대를 3개 대로 나누어 일제 군경에 대응 하였다. 즉 고광수와 윤영기에게 각기 1개 대씩을 주어 경남 화개의 앞뒤 방향에서 공격하게 하였으며, 자신은 고제량 등과 함께 연곡사를 근거지로 삼아 항전하였다. 그러나 그는 연곡 사 일대에서 일제 군경과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이때 그의 부하 의병 20여 명도 함께 순절하였다. 일제는 전투가 종료된 후 연곡사와 문수암을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 다. 피아골 전투에서 살아남은 고광순의 동생 고광훈과 고광문 고광수 등은 흩어진 의병들 을 수습하여 지리산 주변의 구례 남원 곡성 등지와 무등산 일대를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다. 고광훈은 1907년 12월에 체포되어 진도에 3년간 유배되었으며, 고광수는 1907 년 11월에 남원의 자택에서 체포되었다가 탈출하여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 광순의 공훈을 기려 1962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83) 안규홍( 安 圭 洪, 1879~1911)은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보성과 순천 등 주로 동부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보성의 서얼 출신인 안규홍은 극빈한 가정 사정으로 어려서부터 머슴살이를 하 였다. 그는 1907년을 전후하여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머슴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래서 안규홍 의병대는 안담사리 의병 이라고도 불리기도 한 다. 그는 처음에는 강원도 출신이 강성인 의병 부대에 투신하였다. 이 의병대는 순천 조계산 의 향로암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활동하였다. 그러나 강성인은 주민들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 안규홍은 1908년 4월에 부하들과 함께 강성인을 처단하고 자신이 의병대를 이끌었 다. 안규홍은 자신이 머슴살이를 하던 법화마을 인근에 있는 동소산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부장에는 염재보, 선봉장에는 이관희, 운량관에는 박제현 등을 임명하였다. 이 들은 일본인의 구축( 驅 逐 )과 함께 친일 세력의 처단, 그리고 탐학한 관리와 주구자의 근절을 목표로 내세우고 주민 침탈 행위를 엄단하였다. 안규홍 의병은 1909년 9월까지 항일 투쟁을 83)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4, 287쪽. 65
5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 군경의 거센 탄압과 거미줄 같은 포위망에 1909년 9월에 의병 60 여명이 투항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결국 안규홍은 부하들에게 후일을 기약하여 의병을 해산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안 되는 9월 하순에 그는 염재보 등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 고 말았다. 그는 광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어 1911년 5월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1963년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84) 문태수( 文 泰 洙, 1880~1913)는 경남 안의( 安 義 ) 출신이다. 1905년에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 을 예방하여,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 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하였다. 무주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여러 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 무렵에 장수 양악에서 박춘실( 朴 春 實 )을 만나 그를 선봉 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07년 1월에는 무주 부남면 고창곡에서 일본 군을 습격하여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자루를 빼앗았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 도 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 진격 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 호남 및 호 서 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에 6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 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였다.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와 군아 등을 불 질렀다. 이어 1909년 1 월에는 지례군 소재 대덕산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 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 이동면 장전리를 공격하였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 의 항일 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 동북 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일본군과 접 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8월 중순 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 북의 영동 청산 옥천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0월 30일에 경부 선 이원역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 동 옥천 청산 금산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그러나 1911년 8월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갔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대 84)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4, 287쪽. 66
59 총 설 구감옥에서 서울로 옮겨진 뒤 1913년 2월 4일에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 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85) 심남일( 沈 南 一, 1871~1910)은 전남 함평 출신이다. 향리에서 면장과 향교 장의 등을 역 임하고 또 서당의 훈장으로서도 재직한 바 있다. 그는 의병장 김율의 부장이 되어 장성 함평 등지에서 일군과 항전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김율이 전사하자 스스로 대장이 되어 군율을 엄히 하고 진용을 재정비하였다. 이때 그의 예하 장병과 그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심남일 의진 편제> 선봉장 : 강무경 임만선 장인보 중군장 : 안찬재 박사화 후군장 : 노병우 나성화 최우평 김성재 도통장 : 김도숙 통장( 統 將 ) : 유치선 공진숙 군량장 : 이세창 호군장 : 강달주 정관오 기군장 : 장문연 이덕삼 서기 겸 모사 : 염원숙 도 포 : 장경선 김판옥 선도명 도집사 : 최유승 모 사 : 권택 정영태 그의 첫 접전은 1908년 3월 7일에 강진면 오치동( 吾 治 洞 )에서 있었다. 적병 수백 명 을 맞아 아침 6시부터 밤 10시경까지의 교전 끝에 수십 명을 살상하고 무기를 다수 노획하였 다. 이후에도 4월 장흥에서, 6월에는 남평 장담원 전투에서, 7월에는 영암 사촌 전투, 8월 은 나주 반치에서, 9월은 장흥 신풍에서, 10월은 해남과 능주 등지에서 일본군과의 전투 를 수행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듬해인 1909년 3월부터 다시 일본군 수비대와 접전하 였다. 이 때 전수용( 全 垂 鏞 )과 안규홍 의병대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투쟁하기도 하였다. 일 제는 1908년 후반부터 그를 비롯한 호남 의병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 작전 을 모색하여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심남일은 일본군의 집요한 추적 을 피하여 부대장 강무경과 함께 잠복해 있다가 1909년 10월 9일에 체포되었고, 그로부터 1년 후인 1910년 10월 4일에 대구 감옥에서 사형 순국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 을 추서하였다. 85)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쪽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599쪽. 67
6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강무경( 姜 武 景, 1878~1910)은 전북 무장군 풍면 설천에서 출생하였다. 필묵상( 筆 墨 商 )을 경영하던 그는 심남일( 沈 南 一 )로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격문을 받고서 결의형제를 맺고 함 께 의병에 참여하였다. 그는 김율이 사망하자 심남일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선봉장이 되 었다. 그 이후 그의 의병 생활은 심남일과 일체가 되어 시종을 같이하게 되었다. 1909년 7월 21일에 의진을 부득이 해체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해산 후에도 강무경은 심남일과 거취를 함께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병 치료차 이전의 격전지였던 풍치의 바위굴에서 은신생활을 하던 중 적병에게 발각되어 8월 26일에 함께 체포되어 9월 2일에 광주로 이송되었다가 12월 15일에 대구 감옥소로 이감되었다. 결국 이곳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32세의 젊은 나이로 순 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사화( 朴 士 化, 1880~1912)는 전남 나주 사람이다. 박사화는 1908년 2월 전남 함평에서 거의한 심남일 의진에 참가하여 중군장으로 활약하였다. 일제가 '남한대토벌작전' 에 따라 호 남 의병에 대한 대 탄압을 가하자 박사화는 부하들을 구출하기 위해 자수한 뒤, 다시 탈출하 여 의병 항쟁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1910년 5월 19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내 란 및 살인죄로 사형을 받아, 1912년 7월 5일에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86) 김태원( 金 泰 元, 1870~1908)은 나주군 문평면 갈마리에서 출생하였다. 순릉참봉을 역임하 였다. 1907년 9월에 기삼연이 장성에서 거의하자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으로 활약하 였다. 1907년 12월에 함평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순사를 사살하고, 수차례 일본 수비대 와 접전하였다. 그러나 의병장 기삼연이 1908년 1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기삼연 사후에 는 이대극( 李 大 克 )과 연합하기도 하였으나 스스로 대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1908년 3월 21 일에 장성군 광곡에서 부하 약 80명을 이끌고 잠복 활동하다가 일본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암굴에 은거하였다가 밤을 타서 탈출하였으며, 다시 나주 박산촌에서 지병을 치료하다가 결 국 4월 25일에 부하 20여 명과 함께 어등산 전투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87) 86)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4, 294~325쪽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604쪽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218쪽 ; 김의환, 항일의병장열전, 205쪽. 87)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68
61 총 설 조경환( 曺 京 煥, 1876~1909)은 전라남도 광산 출신으로 면암 최익현의 문인이다. 1907년 12월 초순에 광주 함평 등지에서 이원오( 李 元 五 ) 김동수( 金 東 洙 ) 양상기( 梁 相 基 ) 등 의병 을 모아 김태원과 함께 기병하였다. 조경환은 좌익장( 左 翼 將 )이 되어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08년 김태원 사후 9월 7일에 그의 장례식을 거행하고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호남창의대장 이라 칭하고 각지 향교에 수차 격문을 발송하여 항일 사상을 고취시키는 한편 의병을 이끌고 흑석리( 黑 石 里 )와 오수산 전투를 치렀다. 10월에는 함평의 석문과 장성의 고산 등지에서 11 월에는 광주의 동촌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의 격전을 치렀다. 그는 1908년 음력 12월 19 일에 과세( 過 歲 )차 의병을 귀향시키고 몇 명의 막료와 함께 어등산 사동( 寺 洞 )에 은신하고 있 다가 일본 헌병대의 급습을 받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88) 박춘실( 朴 春 實, 1875~1914)은 전북 장수 출신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무주 장수 진안에 격문을 배부하여 이를 보고 모여든 의병 52명을 이끌고 용담 구봉산에서 일군 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6년 가을에 문태수 의진과 연합하여 장수 및 무주 일대 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9년 5월 8일에 박춘실은 문성( 文 城 ) 동북쪽에 떨어진 산중에 130명의 의병과 더불어 주둔하던 중 토리카이( 鳥 飼 )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 함 양수비대와 교전으로 의병 13명이 순국하고 박춘실은 체포되었다. 1909년 7월 17일에 교수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14년에 전주형무소를 탈옥하려다 실패하였다. 그 후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자 벽을 파괴하고 동지들을 탈옥시킨 후 본인은 자진( 自 盡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89) 3 판결문 속의 의병활동 호남의병장 중에 체포되어 판결을 받은 다수의 인물들이 있다. 여기에는 이 책에 판결문 을 번역, 소개한 의병장인 김동신을 비롯하여 정영진 임사유 조정인 이황룡 정원국 여규호 지춘경 임세묵 공성찬 임기서 임기숙 유지명 이운선 이용이 명경안 김 형주 박동식 정홍기 오성현 김맹도리 김진화 정일국 박도경 정낙중 김공삼 김 영백 최산흥 이복근 이원오 황준성 양진여 이중백 이강산 박치일 정인술 박장 88)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55, 138쪽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618쪽. 89)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7, 227쪽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203쪽. 69
6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봉 서성학 양창국 양윤숙 김선여 손덕오 염인서 정기찬 양상기 유병기 양윤 택 임하중 전수용 김치홍 장인초 이세창 김응백 국호남 김선중 김필수 박보 국 정남쇠 홍윤무 박동환 이남용 김상신 한일성 이석용 등의 활동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김동신( 金 東 臣, 1871~1933)은 대전의 회덕 출신 의병장이다. 1906년에 민종식( 閔 宗 植 )이 홍주의병을 일으킴에 그를 찾아가 전라도에서 기병할 것을 약속한 후 약 30명의 의병을 이 끌고 전북 무주군 덕유산에 있는 자원암( 紫 原 庵 )으로 내려와 유진하면서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는 민종식이 홍주성 전투에서 패하고 연계가 되지 않자 금산 용담 전주 등지에서 동지 를 규합해 나갔다. 군대 해산 후 의병 항쟁이 본격화되자 전북 정읍군 백양사에서 고광순( 高 光 洵 )과 더불어 기병할 것을 의논하고 인근에 통문을 돌려 의병을 봉기하고 삼남의병도대 장 이 되었다. <김동신 의진 편제> 선봉장 : 김재성 유종환 이병후 좌익장 : 염준모 우익장 : 노원식 후군장 : 임병주 수성장 : 정기중 군량장 : 박헌태 임대정 모 사 : 정범기 서 기 : 김동현 그는 9월 10일에 8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순창( 淳 昌 )의 우편취급소와 경무고문분파소 를 습격하였다. 이 순창 거의는 군대 해산 후 호남 지역에서 있은 의병 봉기의 선구가 되는 것으로 평가된다. 다음 날인 9월 11일에는 남원 시장에서 일본군과 격전하여 2명을 사살하는 등 큰 피해를 주었다. 10월 10일에는 의병 600명을 거느리고 경남 안의군 월성( 月 城 )에서 일 병 40명을 공격하였고, 10월 21일에는 의병 100명을 거느리고 이석용( 李 錫 庸 ) 의진과 합진 하여 용담군 심원산( 深 原 山 )에서 일병 47명과 종일토록 격전을 벌여 타격을 주었다. 1908년 2월에는 약 10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용담군 구랑 일대에서 일병과 교전하여 타격을 주었으 며, 무주군 황천면 삼곡리에서 일군과 다시 교전하였다. 3월 6일에는 800여 명의 의병을 거 느리고 경남 거창군 매학 일대에서 일병 70여 명과 교전하였다. 이와 같이 전라 경상도 일 대에서 활발한 항전이 계속되자 일제는 김동신 부대의 근거지의 하나인 지리산의 문수암을 70
63 총 설 소각하고, 진해만에 있던 중포병대 1개 소대까지 동원하는 등 진압에 혈안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김동신은 뜻하지 않게 신병( 身 病 )이 생겨 비밀리에 고향인 충남 회덕군 탄동면 덕진 동에서 치료하다가 대전경찰서 일경에게 탐지되어 1908년 6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가 체 포될 때 사령서( 辭 令 書 ) 2매, 일기장, 통문 28통, 왕복문 38통, 주민에게 낸 명령서 7통, 탐 정계서( 探 偵 屆 書 ) 28통, 청원서 11통, 회계서류 10통, 잡서 1봉 등 그의 활약상을 담은 일체 의 기록문서가 일경의 손에 넘어갔다. 그는 1908년 8월 15일에 공주지방법원에서 일본군과 교전내란죄 로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90) 정영진( 鄭 永 珍, 1856~1919)은 화순 출신으로 직업은 지상( 紙 商 ) 이었다. 1907년 7월 하 순에 의병장 고광순( 高 光 洵 )의 의병 소모에 응하여 8월 8일에 박경선( 朴 京 善 ) 강원숙( 姜 源 淑 ) 박화중( 朴 化 中 ) 김산안( 金 山 安 ) 등 4명을 고광순의 의진에 인도하였다. 한편 조진규 ( 趙 晋 奎 )가 소유하던 총 1자루를 강원숙에게 건네주는 등 의병운동을 적극 도왔다. 1908년에 체포되어 9월 30일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유배형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11월 7일 에 대구공소원에서 그대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91) 임사유( 林 士 有, 1880~미상)는 전북 익산( 益 山 ) 사람이다. 이기협( 李 基 浹 ) 의진에 가담하여 여산 함열 용안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음력 12월 초순에 이기협 의진에 들어가 의 병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함열군 제석리 김 감찰( 監 察 )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하고, 같은 군 유 화삼( 柳 化 三 )의 집에서도 군자금을 거두었다. 그는 화승총 4자루, 환도 1자루를 맡아두었다 가 1908년 음력 6월 15일에 체포되어 1908년 12월 16일에 대구공소원에서 유배형 10년을 받 아 고초를 겪었다. 92) 조정인( 趙 正 仁, 1872~1909)은 전라남도 나주 출신이다. 1907년 12월 6일에 호남의병장 기삼연 의진에 들어가 일본 헌병대 및 경찰과 접전을 전개하여 전과를 올렸다. 1908년 6월 에 나주 가산( 佳 山 )에서 의병 심수근( 沈 守 根 )과 함께 의병운동에 사용할 탄약을 제조하던 중 에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내란죄의 주모자로 기소되어 사형을 90) 판결문( 공주지방재판소)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1973 ; 홍영기, 구한말 김동신 의병장에 대한 일고찰, 한국학보 56, ) 판결문( 대구공소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568쪽. 92) 판결문( 대심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571~572쪽. 71
6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선고받았다. 이에 대구복심원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고 다시 대심원에 상고하였으나 역시 기각되어 1909년 1월 18일에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93) 임세묵( 林 世 默, 1876~1909)은 전북 사람이다. 1907년 8월에 기의하여 의병대장으로 부 하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북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이듬해인 1908년 3월에는 김 성구( 金 聖 九 ) 의진에 가담하여 부하 수십 명을 이끌고 남원 구례 순천 등지에서 활약하 였다. 그는 1907년 11월에는 순천 복동에서, 1909년 2월에는 곡성군 두동에서 각각 일본 군과 교전하였다. 1909년 2월부터 4월에는 부하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북 지역에서 군자 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같은 해 5월 7일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내란 및 강도 약인( 掠 人 )죄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같은 해 6월 22일에 대구공소 원에서 교수형으로 변경되자 다시 상고했지만 같은 9월 7일에 대심원에서 기각, 형이 확 정되어 순국하였다. 94) 공성찬( 孔 成 瓚, 1878~1909)은 전남 구례 사람이다. 1908년 2월경부터 김성구( 金 聖 九 ) 의 진의 부장으로서 부하 수십 명과 함께 전북 남원, 전남 구례 순천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같 은 해 11월에는 전남 곡성에서 일본 순사대와 교전하였으며, 1909년 2월 26일에 임세묵( 林 世 默 ) 등 10여명과 함께 무장하고 남원군 두동방 거주 양극중( 梁 極 仲 )과, 같은 해 3월 1일에 같은 군 수지방( 水 旨 坊 ) 거주 박해창( 朴 海 昌 )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던 중 1909 년 4월 무렵에 일본군에 체포되어 5월 7일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같은 해 8월 17일에 대구공소원과 9월 7일에 대심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95) 임기숙( 林 基 淑, 1869~미상)은 전북 남원 사람이다. 1909년 윤2월에 임세묵 의진에 투 신하여 의병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3월 20일에 임세묵 의병장 및 수명의 동료 의병과 함 께 총을 휴대하고 남원군 기지방( 機 地 坊 )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던 박문혁( 朴 文 赫 )으로부터 군수품을 징발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1909년 5 월 7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5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임기서( 林 基 西, 1872~1934)는 전북 남원 사람이다. 임세묵( 林 世 默 ) 의진에 가담하여 전북 남원 일대에서 활 93) 판결문( 대구공소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쪽. 94) 편찬위원회, 앞의 책, 쪽. 95) 편찬위원회, 앞의 책, 쪽. 72
65 총 설 약하였다. 1909년 음력 2월 10일에 임세묵 의병장의 지휘 아래 공성찬( 孔 成 瓚 ) 등 20여 명의 동료 의병과 함께 총 15자루를 휴대하고 남원군 수지방 호곡에서 군자금품 모집 활동을 전 개하였다. 그는 체포되어 1909년 5월 7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5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96) 유지명( 柳 志 明, 1881~1909)은 전라북도 고산( 高 山 ) 출신이다. 1907년 8월에 구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9월 초순 무렵부터 삼남의병대장의 인장이 찍힌 의병 격문을 만들어 이를 게 시하고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였다. 또한 호남의 대부호인 김 진사의 마름[ 舍 音 ] 이성순( 李 聖 順 ) 등 여러 명에게 도조 수백석의 지불을 정지하라는 문서 4통을 만들어 군량을 징발하 였다. 1907년 9월 22일에는 전북 용담군 건무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0월 3일 밤에는 정성일( 丁 成 一 ) 김치삼( 金 致 三 ) 등 수십 명을 이끌고 용담군 읍내의 일본인 거주지에 들어 가 일본인 오이시( 大 石 ) 외 2명을 사살하고, 한국인 경찰 정상권( 鄭 尙 權 )을 쓰러뜨리고 무기 를 탈취하였다. 이어서 10월 10일에 유치복( 柳 致 福 ) 및 동지 3명과 함께 우북면 장암의 이화 순( 李 化 順 ) 집에서 군자금 30원을 조달하였다. 한편 1908년 12월에는 윤병오( 尹 炳 五 )라는 사 람이 의병을 사칭하고 겁탈 강간을 일삼아 의병의 명예를 실추시키므로 부하 유치복( 柳 致 福 )을 시켜서 살해하였다. 그는 1909년 1월 23일에 일 헌병에게 체포되어 3월 22일에 광주 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대구복심법원에서 5월 15일에 항소가 기 각되었다. 다시 대심원에 항고하였으나 6월 5일에 기각되어 순국하였다. 97) 이운선( 李 雲 善, 1882~미상)은 함평 출신이다. 1908년 음력 1월에 김태원 의병에 들어가 장성 담양 함평 광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4월 25일에는 김태원 의병장과 함 께 광주 어등산 전투에 참전하였다. 1908년 음력 12월에는 조경환의진에 들어가 어등산 일 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1909년 5월 5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7년 유배형을 선고받 고 항고하였으나 1910년 6월 5일에 기각되었다. 98) 이용이( 李 用 伊, 1868~미상)는 전북 무주 출신으로 1909년 2월부터 3월까지 전북 무주에서 문태수의 부하 김상진( 金 尙 鎭 )의 의뢰를 받아 화약을 제조하여 공급하다가 체포되었다 년 6월 9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7년을 받았다. 명경안( 明 敬 安, 1852~미상) 96)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전주지부) ; 편찬위원회, 앞의 책, 591~592쪽. 97) 판결문( 대심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4, 703~ ~708쪽. 98) 판결문( 대구공소원). 73
6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도 전북 진안 사람이다. 문태수( 文 泰 洙 ) 의진에 가담하여 전북 용담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1909년 2월 5일에 전북 용담에서 문태수 의진의 김상진( 金 尙 鎭 )의 부탁을 받고 화약 3근을 제 조하고, 총 2자루를 수리하여 공급하는 등 의병부대의 화력 지원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체 포되어 1909년 6월 9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7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99) 김형주( 金 亨 注, 1886~미상)는 전남 순천 사람이다. 1907년 군대 해산 직후에 양경학( 楊 京 鶴 ) 김응천( 金 應 千 ) 등과 의진을 조직하여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1909년 3월 26일에 이 들과 함께 전북 순창군 팔등면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고, 같은 해 4월 3일에는 전북 태인군 장전에서도 군자금품을 수합하였다. 같은 해 5월 25일에 양경학 김응천 등 동료 의병들과 함께 전북 순창군 팔등면 태자동에서 일본군 밀정으로 의병들을 체포케 하는데 앞장섰던 한 경서( 韓 京 西 )를 잡아 같은 군 구암면 산속에서 처단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일경에 체포되 어 1909년 6월 17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910년 4 월 2일에 대구공소원에서 종신 징역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00) 박동식( 朴 東 植, 1867~1909)은 전북 용담군 이동면의 농민 출신이다. 1907년 12월 30일 문 태수 의병에 가입하여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문태수 의병과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치렀다. 1908년 3월 14일은 경북 안의의 영각사에서, 4월 10일은 전북 장수에서, 5월 26일 은 무주의 구천사에서, 6월 24일은 무주의 도현리에서, 7월 22일은 용담의 지장산에서, 11월 27일은 무주의 고청동에서, 그리고 1909년에는 2월 10일 안의의 갈현리에서, 3월 10일은 안 의 서상면 도산리에서 일본군수비대와 전투를 수행하였다. 그는 체포되어 1909년 6월 4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그 해 7월 17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 되어 순국하였다. 101) 정홍기( 鄭 弘 基, 1888~미상)는 전북 옥구 사람이다. 유지명( 柳 志 明 ) 의진에 가담하여 전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정홍기는 1908년 2월까지 동지 수십 명과 함께 총 수십 자루, 도검 수 십 자루를 휴대하고 유지명 의병장의 지휘에 따라 전북 옥구 용담 전주 등지에서 활동하 였다. 그는 1907년 12월 19일에 고산군 읍내 시장 움막, 군아 부속건물 및 인접한 세무서 등 을 불태웠다. 또한 1909년 6월 20일에는 전주의 소양면에서 군자금을 거두었다. 그날 밤 동 99) 판결문(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74, 602~603쪽. 100) 판결문(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 대구공소원 :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쪽. 101) 판결문(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 대구공소원). 74
67 총 설 면 삼중리에서 탄환 구입 자금으로 엽전 500문을 거두는 등 군수품과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 였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1909년 7월 19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5년을 받 아 옥고를 치렀다. 102) 오성현( 吳 成 玄, 1873~미상)은 장성군 서삼면 증암리 출신으로 연초상이었다. 그는 1907 년 10월 중에 기삼연( 奇 三 衍 ) 의병에 들어가 장성 영암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1월 에 화승총 20자루를 휴대한 기삼연 의병 수십 명과 함께 장성군 북이면 평촌리 유상능( 柳 相 能 ) 집에서 1천 냥을 수합하였다. 그는 기삼연의병장 사후에는 1908년 5월에 유종여( 柳 宗 汝 ) 의병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1908년 10월 무렵에는 이 진사( 李 進 士 ) 의병에 들어가 창평 담 양 옥과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2월에는 다시 김영박( 金 永 泊 ) 의병에 들어가 장성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1909년 6월 25일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1909년 7월 29일에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03) 김맹도리( 金 孟 道 里, 1876~1959)는 전북 남원 사람이다. 1907년 2월 12일에 의병장 양한규( 梁 漢 奎 )의 휘하 의병 120여 명과 함께 총과 탄약 등을 구하기 위하여 각자 화승 총과 죽창으로 무장하고 양한규의 지휘 하에 1906년 12월 30일 말 무렵에 남원진위대 를 습격하여 보관 중인 총기와 탄약을 탈취한 후 체포되었다. 1909년 10월 8일에 광주 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7년형을 받았으나 1912년 9월 13일에 소위 특사로 형 집 행이 면제되었다. 104) 김진화( 金 振 化, 1874~미상)는 전남 담양 사람이다. 1906년 6월부터 김동신 의진에 참여하 였다. 그는 1907년 8월 4일에 남원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2명을 사살하였으며, 같은 달 11 일에 구례 순사주재소를 공격하여 병기를 노획하는데도 참여하였다. 같은 해 9월 10일에도 김동신 의병장의 지휘 아래 전북 순창우편취급소와 순사주재소를 습격 점령하는데 참여하여 관물을 노획하였다. 이후 1908년 1월까지 김동신 의병장 및 정일국( 鄭 一 國 ) 의병장의 지휘 아래 전남 구례 담양, 경남 안의 거창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1909년 10월 8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7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105) 102) 판결문(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 편찬위원회, 앞의 책, 606~607쪽. 103) 판결문( 대구공소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713쪽. 104) 판결문(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 편찬위원회, 앞의 책, 649쪽 105) 판결문(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680쪽. 75
6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정일국( 鄭 一 國, 1882~1909)은 전북 남원 사람이다. 1906년 7월에 전북 남원에서 기의하여 1908년 음력 2월까지 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구례 담양 그리고 경남 거창 하동 ( 河 東 )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음력 7월 28일에는 90여 명을 인솔하고 순창 읍내에 진 격하여 우편취급소를 공격, 일본인 2명을 처단하였다. 같은 해 음력 8월에는 의병 40여 명을 인솔하고 구례 순사주재소를 공격하였으며 음력 9월에도 의병 400여 명을 인솔하고 경남 안 의군청을 공격하였다. 1909년 3월 순창 태인 등 각 군에서 활약하다 체포되어 같은 해 10월 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소위 강도 살인 방화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아 순국하였다. 106) 박도경( 朴 道 京, 1874~1910)은 전라북도 고창 출신이다. 기삼연 의진에서 김익중( 金 翼 中 ) 서석구( 徐 錫 球 ) 전수용( 全 垂 庸 ) 김치곤( 金 致 坤 ) 박영건( 朴 永 健 ) 정원숙( 鄭 元 淑 ) 성철수( 成 喆 修 ) 등과 더불어 종사( 從 事 )로서 활약하였다. 1907년 9월에 영광에서는 포사대 장( 砲 射 隊 長 )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천자포를 휴대하고 대원들을 지휘하여 광주 담양 순 창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1월에 의병장 기삼연이 광주에서 순국한 뒤, 박도경은 격 문을 돌리고 김공삼( 金 公 三 )과 함께 흩어진 군사를 수합하여 스스로는 포사장( 砲 士 將 )이 되 어 의병을 지휘하였다. 그는 광주를 습격하여 기삼연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으며, 군사를 이 끌고 다시 장성으로 돌아와 군사를 교련하면서 그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1909년 에 그는 선봉장 이도운( 李 道 云 ), 중군장 손도연( 孫 道 演 ), 도십장 구연역( 具 連 譯 )과 좌우익장 및 참모를 거느리고 의병 1백여 명에 달하는 의병대를 지휘하면서 장성 부안 등지에서 활 약하였다. 음력 4월 무렵에 장성의 화룡시장에서 일본군 수비병 및 한인 경찰대 7, 8명과 교 전하였다. 음력 5월 무렵에는 영광군 고성산에서 수비기병 40명과, 음력 6월경에는 전북 무 장군 군율리에서 수비기병 30명과 교전하는 등 일본군과 20회나 교전하였다. 그는 점차 포 위망이 좁혀져 의병 활동을 전개하기 힘들어지자 의진을 해산하고 가협( 加 峽 ) 산중으로 거 처를 옮겼다. 그러나 은신처마저 적에게 노출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1909년 12월 3일에 광 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내란 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상소하였으나 1910년 1월 18일에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었으며, 고등법원에서 2월 22일에 상고가 기각되었다. 그 는 왜놈의 손에 죽는 것보다 자결하는 것이 옳다고 결심하고 1910년 2월에 옥중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107) 106) 판결문(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 편찬위원회, 앞의 책, 652~653쪽. 107) 판결문(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 대구공소원 :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776~778쪽. 76
69 총 설 정낙중( 鄭 洛 仲, 1884~1910)은 전남 함평 사람이다. 그는 1907년 김태원( 金 泰 元 ) 의진에 참여하여 200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전남 각처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활동하였다. 광주 어등산( 魚 登 山 ) 전투에서 김태원 의병장이 전사 순국하자, 그는 1909년 2월에 박사화( 朴 士 化 ) 의진에 참여하여 대일 항전을 계속하였다. 박사화 의진은 1909년 6월에 나주군 욱곡면 ( 郁 谷 面 ) 방축동( 防 築 洞 )에서 일본 헌병과 보조원 4명을 기습 공격하여, 헌병 1명을 부상시 키고 보조원 1명을 사살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또한 7월에는 영암군 종남면( 終 南 面 ) 화수동 ( 花 水 洞 )에서 친일 동장 김치수를 처단하였으며 지도군( 智 島 郡 ) 압해면( 押 海 面 )에서 군자금 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는 이어 1909년 8월부터는 나성화( 羅 成 化 ) 의진에 입진하여 제4초 십장의 직임을 맡아 군사들과 함께 전남 무안 삼향면에서 일본인 구리야마( 栗 山 鶴 吉 ) 를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러나 결국 일본군에 체포되어 1910년 1월 26일 고등법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어 3월에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108) 김공삼( 金 公 三, 1866~1910)은 전북 고창 사람이다. 1907년 음력 8월 말에 의병장 기삼연 ( 奇 參 衍 )의 휘하에서 중군장으로 전북 고창 무장 부안과 전남의 담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07년 음력 9월 무렵에 고창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추월산에서 일 본군 수비대와 접전하며 활동하였다. 1908년 음력 1월에 기삼연이 체포된 후에는 의병장으 로 추대되어 부하 여 명을 지휘하며 같은 해 음력 2월 25일 무렵에 전남 장성군 송 치산에서 일본군 4명을 저격하고 사살하고, 같은 해 3월 6일에는 장성군 월반( 月 半 ) 장터에 서 접전을 벌여 일본인 순사 3명과 한인 순사 3명을 살해하였다. 또한 5월 18일에는 전북 무 장군에서 일본군 기병 7명을 사살하는 등의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09년 2월 25 일에는 변산에서 일본군 기병과 교전하였고, 6월 20일에는 고창군에서 부하 의병을 해산시 키고 재기하려 계획하던 중 9월 20일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같은 해 12월 8일에 광주지방재 판소 전주지부에서 소위 내란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였으나 1910년 1월 27일에 대구 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109) 김영백( 金 永 伯, 1880~1910)은 전남 장성 사람이다. 1907년 10월에 고향인 전남 장성군 북이 면에서 박화옥( 朴 化 玉 ) 등 의병 1,000여 명을 규합하여 스스로 대장이 되었다. 부대를 편성하 고 총 200자루를 준비하였으며, 탄약 식량 피복 등을 군민들로부터 징발하여 군비를 갖추었 108) 판결문( 대구공소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868쪽. 109) 판결문(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 대구공소원 :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2, 쪽. 77
7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다. 그 후 장성을 중심으로 광주 고부 정읍 태인 부안 흥덕 고창 및 순창의 각 고을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1908년 음력 3월 4일에는 정읍의 단곡리에 주둔하는 일본군 수비대를 공 격하였다. 7월에는 흥덕군 소속의 일본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다. 9월에는 방장산( 方 丈 山 ) 산록 백계동에서 일본 기병과 헌병 및 순사대와 교전하였다. 10월 상순에는 장성군 북이면 신기리에 서, 1909년 1월 말 무렵에는 상곡리에서, 2월 중순에는 동산리에서, 2월 말에는 흥덕군 세곡리에 서, 4월에는 일동면 구수교와 고부군 강고리, 그리고 일남면 유점리에서 각각 일본 헌병과 전 투하여 상호간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09년 12월에 적에게 노출되어 일본 헌병대 고 부분견소에 자수하였다. 12월 20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내란 죄로 교수형을 선고 받고 항소하였으나 1910년 3월 5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자 상고하였으나 4월 7일에 고 등법원에서 이마저 기각, 교수형이 확정되어 1910년 순국하였다. 110) 최산흥( 崔 山 興, 1881~1910)은 전북 순창 사람이다. 원래 잡화 상인이었으나 을사조약의 체결에 격분하여 의병에 투신하였다. 1906년 10월부터 이경춘( 李 慶 春 ) 의병부대의 도십장 ( 都 什 將 ) 전포장( 前 砲 將 )을 맡아 총 80여 자루를 휴대한 의병 120여 명과 함께 12월까지 태 인과 부안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11월부터 이석용( 李 錫 庸 )의 휘하로 옮겨 이듬해 4 월까지 검찰( 檢 察 )의 직을 맡고 임실 남원 진안 용담 등지에서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 3 4월에는 임실 상동( 上 洞 )에서 의병 100명과 함께 임실 수비기병대와 주재소를 습 격하여 기병 1명을 살해하고 2명을 부상시켰다. 1908년 6월부터 1909년 10월까지는 양윤숙 ( 楊 允 淑 ) 의병장의 아래에서 중군장이 되었는데, 의병의 규모는 명으로 늘어났다. 그는 친일파의 가옥 방화, 군자금 모금 등을 계속하였는데 특히 군자금의 모금은 각 이장에 게 할당하여 징발하였다. 1908년 11월 초순에는 양윤숙 의병장의 지시로 검찰 직무를 맡은 최명칠( 崔 明 七 )에게 명하여 의병 34명을 이끌고 순창군 서기 조명운( 曺 明 云 )으로부터 500냥 의 군자금을 모금케 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같은 해 12월 15일에 양윤숙 이하 동료 의병 50 60명과 함께 일본 기병에게 집을 빌려주는 등 협조한 변대규( 邊 大 圭 )의 집을 소각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1909년 12월 27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 수형을 선고받았다. 항소하였으나 1910년 3월 3일에 대구공소원과 4월 8일에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형이 집행됨으로써 순국하였다. 111) 110) 판결문(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 대구공소원 :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 판결문(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 대구공소원 :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751쪽 ;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71 총 설 이황룡( 李 黃 龍, 1886~1910)은 전북 순창 사람이다. 그는 소금과 누룩을 판매하는 상인이었 으나, 조국이 망국적 상황에 처하자 분연히 의병에 투신하였다. 1908년 8월에 양윤숙( 楊 允 淑 ) 의병장과 그 휘하에서 활동하던 중군장 최산흥( 崔 山 興 )의 의진에 가담한 뒤 2 3개월 동안 순 창군 일대에서 항일전을 펼쳤다. 같은 해 8월에는 순창과 임실의 경계인 갈치에서 순창주재소 소속 박경홍( 朴 京 弘 )과 조우, 김희중( 金 希 仲 ) 등 동료 의병들과 함께 그를 사살한 뒤 체포되었 다. 1910년 1월 12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소위 폭동 및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 고 같은 해 3월 3일에 대구공소원과 4월 14일에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순국하였다. 112) 이복근( 李 復 根, 1879~1910)은 전남 영암 사람이다. 박사화( 朴 士 化 ) 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 다가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박사화는 1908년 2월에 심남일( 沈 南 一 ) 의진에 참가하여 중군장으 로 활약한 이후 독자적으로 의진을 편성하여 같은 해 10월에 전남 능주에서 일군과 교전하는 등 1909년 가을까지 전남 나주 영산포 영암 등지에서 15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대일 항전 을 계속하였다. 이복근은 박사화 의진에 소속되어 1909년 6월에 나주군 욱곡면 방축동에서 일 본 헌병과 보조원 4명을 기습 공격하여 헌병 1명을 부상시키고 보조원 1명을 사살하는 등 전공 을 세웠다. 또한 7월에는 영암군 종남면 화수동에서 친일 동장 김치수( 金 致 水 )를 처단하였으 며, 지도군 압해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본군에 체포되어 1910년 2월 19일에 대구공소원에서 소위 폭동, 살인 등으로 교수형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이 해 3월 29일에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됨으로써 4월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113) 이원오( 李 元 吾, 1877~1910)는 충남 공주 사람이다. 이원오는 1908년 음력 10월에 조경환 의진에 들어가 의병 활동을 하였다. 전남 광산 함평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좌익장으로 활 약하였다. 이후 1908년에 의병장으로 추대된 조경환은 그 해 4월에 전해산 의진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하는 등 큰 활약을 보였다. 이원오는 1909년 1월에 조경환 의병장이 일 본군과 교전 중 전사한 후 의병장이 되어 활약하다가 같은 해 음력 6월 12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1910년 2월 24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4월 22일에 기각, 형 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114) 112) 판결문(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 대구공소원 : ,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773~ ~879쪽. 113) 판결문( 대구공소원). 114) 판결문( 대구공소원 : ,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74, 382~383쪽. 79
7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정원국( 鄭 元 局, 1876~1909)은 1909년 1월 1일에서 2일에 걸쳐 전북 전주군 구이동면 및 임실군 상신면 관내에서 부하 4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김선문( 金 善 文 ) 외 6명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한 후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이듬해 2월 24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 서 소위 강도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였으나 그해 4월 24일에 대구공소원, 5월 14일 에 대심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115) 황준성( 黃 俊 聖, 1879~1910)은 전북 진안 사람이다. 구 한국군 참령( 參 領 ) 출신으로 일제 의 강제에 의해서 군대가 해산되자 이에 반대하여 항쟁하다가 체포되었다. 내란죄 명목으로 그 해 12월 25일에 평리원( 平 理 院 )에서 유배형 10년을 선고받고 전라남도 완도에서 유배 생 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일대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강성택( 姜 成 宅 )과 1909년 6월에 유배지 를 탈출, 강성택 휘하의 의병과 함께 총으로 무장하고 완도 해남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그 는 그 해 7월에 추공엽( 秋 珙 燁 ) 황두일( 黃 斗 一 )의 의병 부대와 합류, 대장으로 추대되어 강 성택 추공엽 등을 부장으로 임명하고 휘하의 의병 150여 명으로 부대를 정비하였다. 완도 에서 4개 리의 이장을 소집하여 의병 자금을 모집하고, 해남에서 일진회원과 일본 헌병의 밀 정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다가 대둔사( 大 屯 寺 )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야습을 받아 의 병 부대가 해체되자 숨어 지내다가 1909년 12월에 붙잡혔다. 1910년 2월 26일에 광주지방법 원 목포지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3월 19일에 대구공소원에서, 4월 2일에 고등법원에서 모두 기각되어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116) 양진여( 梁 振 汝, 1862~1910)는 전라남도 광주 출신이다. 의병장 양상기( 梁 相 基 )의 아버지 로 주막업을 하였다. 1908년 음력 7월 20일 무렵 구한국 군인 출신인 아들과 함께 광주에서 격문을 살포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박성일( 朴 聖 日 ) 김익지( 金 益 之 ) 등으로부터 군자금과 군량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진다. 1908년 11월 중순에 광주의 대치산에 서 일본 수비대와 혈전을 전개하였다. 11월 24일에는 다른 의병 부대와 연합하여 추월산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수행하였다. 1909년에는 부하 100명을 이끌고 강판렬( 姜 判 烈 ) 부대 및 전 해산( 全 海 山 )의 의병 부대 270명과 더불어 장성 담양을 습격하고, 뒤이어 일본군의 본거지 115) 판결문(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 대구공소원, 대심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쪽. 116) 판결문(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 : 대구공소원 :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920~925쪽. 80
73 총 설 인 광주를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일본군 대병력이 배치되어 계획을 중단하였다. 그 해 10월에 그는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무동촌에서 일본 수비대와 교전하던 중 체포되고 말았다. 1910년 3월 5일에 소위 내란죄 로 대구복심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4월 8일에 기각되어 5월 30일에 순국하였다. 117) 이중백( 李 仲 伯, 1878~1910)은 전남 장성 사람이다. 1907년 이래 기삼연( 奇 參 衍 ) 의진, 박 도경( 朴 道 京 ) 의진 등에 소속되어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이중백은 기삼연 의병장의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하여 종사( 從 事 )의 직임을 맡아 대일 항쟁을 전개하 였다. 1908년 초에 기삼연 의병장이 체포되어 순국하자 박도경 의병장의 휘하에서 대일 항 전을 계속하였다. 이중백은 박도경 의진 소속의 100여 군사들과 함께 전북 고창 등지에서 군자금을 수합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리고 1908년 8월에는 김여회( 金 汝 會 ) 의병장의 의진 에 소속되어 제4초 십장을 맡아 전남 장성, 전북 순창 등지에서 대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는 1909년에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독자적으로 소규모의 의진을 편성하고 밀고자를 처단 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1910년 3월 5일에 대구공소원에서 소위 폭동, 살인 등으로 교수형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4월 14일에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었고 이 해 5월에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118) 이강산( 李 江 山, 1874~1910)은 전남 함평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하였다. 그는 함평에서 박 치일 정인술 박장봉 서성학 양창국 등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김태원( 金 泰 元 ) 휘하 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4월에 의병장 김태원이 순국한 뒤 심남일 부대에서 부장으로 활동 하였다. 1909년 8월에 함평 영광 각 지역에서 접전한 뒤 나주의 헌병분파소 및 구례의 파 견대 소속 헌병보조원과 밀정인 이판안( 李 判 安 ) 김정태( 金 正 泰 ) 최치도( 崔 致 道 ) 박복남 ( 朴 福 男 ) 등이 이양삼( 李 良 三 )의 주막에 모여 있는 것을 탐지하였다. 이들은 평소에 의병 활 동을 방해해 오던 인물들이었다. 이강산은 함께 동행하였던 박치일 정인술 박장봉 서성 학 등에게 작전을 지시하여 이판안 김정태 최치도를 현장에서 살해하고, 박복남을 산중으 로 연행하여 살해하였다. 그 후 그는 의병을 해산하고 귀순하였다가 밀정을 살인한 일로 체 포되었다. 1909년 12월 25일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살인죄[ 謀 殺 罪 ] 로 교수형 117) 판결문( 대구공소원 :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894~895쪽. 118) 판결문( 대구공소원 :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819~ ~891쪽. 81
7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이 선고되어 항소하였으나 1910년 3월 8일에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고등법원 에 항소하였으나 4월 27일에 역시 기각되었다. 1910년 6월 6일에 마침내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와 함께 활동한 박치일( 朴 致 一 ) 정인술( 鄭 寅 述 ) 박장봉( 朴 章 奉 ) 서성학( 徐 成 學 ) 양창국( 梁 昌 國 ) 등도 그와 함께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119) 양윤숙( 楊 允 淑, 1875~1910)은 전북 순창 출신이다. 1906년에 최익현( 崔 益 鉉 )이 순창에서 의 병을 일으키자 호응하여 참가하였으나 남원 전투에서 최익현이 체포되어 실패하자 귀가, 은신 하였다. 1907년의 군대 해산 후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1908년에 순창군 구림면 국화촌의 뒷산인 회문산( 回 文 山 )에서 의격문( 義 檄 文 ) 을 발표하고 의병을 봉기하였다. 자신이 도총독( 都 總 督 )이 되었으며, 중군장에 최산흥( 崔 山 興 ), 후군장에 이국찬( 李 國 贊 ), 좌선봉에 최화( 崔 華 ), 향관( 餉 官 )에 서기협( 徐 基 俠 ), 우선봉에 임순호( 任 恂 鎬 ), 교련관에 한자선( 韓 自 善 )을 임명하였 다. 그는 1908년 음력 8월에 향관( 餉 官 ) 서기협으로 하여금 부하 22명을 인솔하여 순창군 무림 면 화암리에서 일본군 순창수비대 및 헌병대와 교전하게 하여 전과를 올렸다. 1908년 음력 9 월에는 중군 최산흥이 40여 명을 인솔하고 구림면 국화촌에서 남원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였다. 다시 1909년 음력 정월에는 후군장 이국찬( 李 國 贊 )이 12명의 병력으로 서면 죽전리의 순창수 비대 10여 명을 공격하였고, 음력 2월에는 교련관 한자선( 韓 自 善 )이 병력 30명을 인솔하고 회 문산 기슭 산내리에서 순창수비대 10여 명을 공격하였다. 또 1908년 11월에는 최산흥이 60명 의 병력으로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의 일본군 기병대가 사용하는 민가를 습격하여 소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9년 가을에 일본군의 소위 호남의병대토벌로 거점을 상실하고 은신하였다 가 12월 23일에 김제군 월산면 봉월리에서 피노리수비대 에 의해 체포되었다. 1910년 3월 9일 에 광주지법 전주지청에서 내란 방화 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120) 김선여( 金 善 汝, 1875~1910)는 전북 순창 사람이다. 1908년 4월에 신보현( 申 甫 鉉 ) 의진에 투 신하여 좌익장 및 선봉장으로 의병 활동을 하였다, 1909년 3월에 신보현 의진에서 독립하여 전 라북도 순창군 백방산에서 김재화( 金 在 化 ) 김응선( 金 應 先 ) 등 의병 40여 명을 모집하여 같은 해 11월까지 총기 30여 자루와 칼 3개를 휴대하고 순창, 담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그 119) 판결문( 대구공소원 :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74, 845~849쪽. 120)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전주지부)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1967 ; 편찬위원회, 앞의 책, 888~889쪽. 82
75 총 설 는 일본군과의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면서도 의병 활동을 빙자하여 금품을 약탈하고 악행 을 일삼은 자들을 총살 처단하는 등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09년 6월 27일에 신보현의 부 하인 유종여( 柳 鍾 汝 )가 부하인 김여회( 金 汝 會 )를 살해하고 각지에서 금품을 탈취하고 부녀 를 강간하였음을 알고 부하 40명을 동원하여 순창군 상치등면 구산리에서 그를 체포하여 처 형하였다. 또한 7월 7일에는 유종여와 함께 강도와 부녀 강간의 행위를 한 정삼차( 鄭 三 次 )라 는 자를 체포하여 사살하여 의병의 대의를 지키고자 하였다. 그는 이러한 활동으로 체포되어 1910년 3월 17일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폭동 살인 죄로 교수형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910 년 4월 21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고, 이에 다시 상고하였으나 5월 19일에 고등법원에 서 최종 기각됨에 따라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121) 손덕오( 孫 德 五, )는 전남 보성 출신이다. 목수직에 종사하다가, 1908년 2월 무 렵에 안규홍( 安 圭 洪 )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 휘하에서 도포장( 都 砲 將 ) 좌우포장( 左 右 砲 將 ) 좌우익장( 左 右 翼 將 ) 등을 차례로 맡았다. 그는 1908년 4월에 안규홍의 지시를 받고 염인서 ( 廉 仁 瑞 ) 등 동료 의병 30여 명과 함께 양민의 재물을 약탈하는 의병대장 강용언( 姜 龍 彦 )을 총살하였다. 이후 안규홍을 의병장에 추대하여 주민의 생존권 보호에 역점을 둔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1909년 9월에는 염인서 정기찬( 鄭 奇 贊 ) 등과 함께 순천 낙서면 상고리로 가 서 일진회원 이용서( 李 用 西 )를 체포, 처형하였다. 이 외에도 그는 안규홍 의병대원으로 일본 군경의 통치 기구나 숙소, 재무서 등을 공격하였으며, 일본인과 일진회원, 세금영수원 등을 처단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09년 9월 말에 일본군의 대규모 호남의병 학살 작전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이듬해인 1910년 3월 29일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살인 죄 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6월 2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고등법 원에 항소하였으나 6월 21일에 기각되어 순국하였다. 염인서도 함께 체포되어 모두 교수형 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122) 정기찬( 鄭 奇 贊, 1880~1910)은 전남 보성 사람이다. 1908년 2월 무렵에 안규홍( 安 圭 洪 )이 의병을 일으키자 적극 호응하여 그 휘하에서 포군십장 월군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08년 5월 초순에 안규홍의 지시를 받고 일진회원 염영화( 廉 永 化 )가 의병 활동을 일본 관헌에게 밀 121) 판결문( 대구공소원 : ,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783~785쪽. 122) 판결문( 대구공소원 :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74, 840~842쪽 ; 홍영기, 안규홍의병의 조직과 그 활동, 한국학보 49,
7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고한 혐의를 확인하고 보성 법화촌에서 총살하였다. 같은 해 9월에도 역시 손덕오와 함께 순 천 낙서면 상고리로 가서 양민으로부터 재물을 탈취하던 일진회원 이용서( 李 用 西 )를 체포, 참살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09년 9월 말에 체포되어 이듬해인 1910년 3월 29일 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살인죄 로 교수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였으나, 6월 2일에 대구 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고등법원에 항소하였으나 6월 21일에 기각되어 순국하였다. 123) 양상기( 梁 相 基, 1883~1910)는 전남 광주 출신으로 의병장 양진여( 梁 振 汝 )의 아들이다. 양 상기는 한국 진위대( 鎭 衛 隊 ) 병사 출신으로 1907년 8월의 군대 해산으로 광주( 光 州 ) 경찰서 에 근무하게 되었으나 부친 양진여가 의병장으로 항쟁하고 있었으므로 파면되었다. 그는 의 병에 투신하여 1909년 2월 9일에 30명의 병력으로 담양군 우산면 신기리 거주 안판구로부 터 군자금을 제공받았으며, 같은 날 다른 일부는 창평군 지곡리 거주 김 아무개[ 金 某 ]를 비롯 한 동민으로부터 군자금을 거출하였다. 1909년 2월 26일에도 동복군 외남면 동천동에서 다 시 군자금을 거출하였으며, 같은 달에 담양군 서기 한응길을 체포하고 군자금을 제공케 하였다. 그는 1909년 4월에 담양군 정면 덕곡리 전투에서 패전하여 체포되었고, 1910년에 대구형무 소에서 소위 내란 폭동 등의 죄목으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124) 유병기( 劉 秉 淇, 1883~1910)는 전남 구례의 양반 가문 출신으로서 송병선( 宋 秉 璿 )의 문하 에서 수학하였다. 1907년 봄에 백낙구( 白 樂 九 ) 등과 함께 함평군 나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나산을 거점으로 담양 영광 장성 창평 광주 동복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특 히 창평 전투에서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1907년 9월 중순에 흥덕군 사진포에 사는 일본 인 가옥 3동을 소각하였으며, 11월에도 함평 읍내의 일본인 가옥 3동도 소각하였다. 12월에 는 동복 신평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3명을 사살하였다. 또 1908년 2월 2일에 창평군 무등 촌에서 교전하여 일본군 여러 명을 사살하고, 쌍안경 1개 단총 1개 군도 1자루를 노획하였 다. 2월 21일에는 장성군 남이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피해를 입혔으나 본인도 오른쪽 팔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3월 14일에는 영광군 봉산면에서 접전하여 일본군 기병 중위 수가 이( 管 井 ) 외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3월에는 또 나주군 용진산( 龍 津 山 )에서 격전을 벌여 큰 123) 판결문( 대구공소원 :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1973 ; 편찬위원회, 앞의 책, 840~842쪽 ; 홍영기, 앞의 논문. 124) 판결문( 대구공소원 :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쪽. 84
77 총 설 타격을 입혔다. 4월 중순에는 순창 산막에서 교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나 접전 중에 후군장 백낙구가 전사하였다. 5월 30일에 창평 용흥사( 龍 興 寺 )에서 접전하였으나 크게 참패하였다. 이때 기포장 조기영이 전사하고, 유병기는 왼쪽 팔과 왼편 복부에 다시 총상을 입었다. 총상 을 입은 후 치료에 힘쓰다가 후에 다시 양상기( 梁 相 基 ) 의진의 참모로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양상기와의 견해 차이로 의진을 탈퇴하였다. 그 후 재거를 꾀하던 중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1910년 3월 29일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 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5월 17 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고등법원에 항소하였으나 1910년 6월 16일에 기각되 고 그대로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125) 양윤택( 楊 允 澤, 1876~1947)은 전북 순창 출신이다. 1908년 7월에 순창군 호계면에서 화 승총 1자루를 의병장인 형 양윤숙( 楊 允 淑 )에게 공급하는 한편 일본 수비대, 경찰서, 헌병 등 의 의병 토벌 작전 및 동태에 관한 정보를 의진에게 통보하여 의병 활동을 도와주었다 년 12월 3일에 양윤숙이 일본 헌병대에 잡혔을 때 함께 체포되어 1910년 6월 20일에 광주지 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년에 처해졌다. 항소하였으나 대구공소원에서 7월 19일에 형 이 그대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26) 임하중( 林 夏 仲, 1869~1910)은 전남 보성 사람이다. 농민 출신으로 1908년 3월 무렵에 안규홍( 安 圭 洪 ) 의병에 참여하였다. 그는 의병 부대에서 도십장( 都 什 長 ) 운량관( 運 糧 官 ) 등을 맡아 의병장 안규홍과 함께 1909년 8월 무렵까지 보성 장흥 동복 순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3월에는 보성군 봉동에 살던 일진회원 박봉조( 朴 鳳 朝 )를 잡아 곤봉으 로 주살하였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선봉장 임창모( 林 昌 模 )와 함께 장흥군 회령면 정리에 거주하던 문남서( 文 南 瑞 )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남한폭도 대토벌 작 전 이 벌어지던 기간인 1909년 9월 18일에 부하 30여명과 함께 보성에서 체포되었다 년 3월 30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동 및 강도 살인죄 로 교수형을 선고받아 항소 하였으나 같은 해 6월 9일에 대구공소원에서, 6월 27일에는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순국 하고 말았다. 127) 125) 판결문( 대구공소원 : 고등법원)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965 ; 편찬위원회, 앞의 책, 885~887쪽. 126)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전주지부 : 대구공소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887~888쪽. 127) 판결문( 대구공소원 :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74, 875~877쪽 ; 독립유공자호남 유족회, 담산실기,
7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전수용( 全 垂 鏞, 1879~1910)은 전북 임실 출신이다. 본명은 기홍( 基 洪 )이고, 수용은 그의 자이며, 호는 해산( 海 山 )이다. 1878년에 전라북도 임실군 남면 국화촌 호전동( 菊 花 村 狐 田 洞 )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경서와 역사를 널리 보고 글짓기를 잘하 였다. 1907년 군대 해산 후 의병 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전수용은 그해 겨울 이석용( 李 錫 庸 ) 과 같이 전북 남원에서 기병하였다. 그는 김태원 사후 오성술( 吳 聖 述 )과 연합하여 나주 도림 에 주둔하였다가, 사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08년 6월에는 정원집( 鄭 元 執 ) 의 병진을 받아들여 진용을 확장하였다. 그해 7월 29일에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의병장이 되어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였다. 첫 전투는 영광 불갑산 전투였다. 7월 25일에 삽시간에 일본군에 게 포위당하자, 선봉장이 천보총을 쏘아 두어 명을 사살하고 곧이어 선치에서 매복하였다가 적을 유인하여 기마병들을 죽이고 무기를 포획하였다. 한편 일진회를 경계하여 변영서( 邊 永 瑞 ) 박기춘( 朴 基 春 ) 등 일진회원을 총살시켰다. 그러나 순종의 의병 해산령과 함께 1909년 4월에 영광 오동, 덕흥 전투에서 잇따라 패한 뒤 의병을 해산하였다. 이후 남원에 은신하다 가 조두환의 밀고로 그해 12월에 체포되었으며, 이듬해인 1910년 7월 9일에 교수형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28) 김치홍( 金 致 洪, 1880~1910)은 전남 영암 사람이다. 1908년 10월에 심남일( 沈 南 一 ) 의병진 에 가담하여 기군장( 起 軍 將 )에 선임되어 영광 능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1월에는 박민홍( 朴 民 洪 ) 의병 부대의 제1초 십장( 什 長 )에 임명되어 총기 15자루를 갖추고 부하 30여 명을 인솔하여 나주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같은 해 4월에는 박사화 ( 朴 士 化 ) 부대의 제1초 십장에 임명되어 무장한 부하 26명을 거느리고 영암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에 영산포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1910년 6월 13일 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살인 강도 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며 같은 해 7월 23일에 대구공소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사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129) 장인초( 張 仁 初, )는 전라남도 화순의 목수 출신이다. 1909년 2월 무렵에 안규 홍( 安 圭 洪 ) 의병 부대의 선봉장이 되어 의병 80 90명과 함께 보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28) 판결문( 대구공소원 :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913~916쪽. 129) 판결문( 대구공소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812~813쪽. 86
79 총 설 그는 안규홍의 지시를 받아 염인서( 廉 仁 瑞 ) 염군명( 廉 君 明 ) 임하중( 林 夏 中 ) 등과 함께 양 민의 재물을 탈취한 보성군 봉동에 거주하는 박봉조를 처단하였으며, 민가에 은닉된 총기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한편 1909년 음력 5월 말에는 심남일( 沈 南 一 ) 의병 부대의 선봉장으로 옮겨가 의병 100여 명과 함께 장흥 강진 보성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이른바 남한폭도대토 벌작전 기간인 9월에 붙잡혔다. 1910년 6월 28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폭동 및 강도 살인 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8월 20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고, 다시 상고 했으나 9월 15일에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130) 이세창( 李 世 昌, 1882~1910)은 전남 장흥군 장서면의 농민 출신이다. 그는 1908년 음력 9 월 11일부터 심남일 의병에 들어가 장흥과 영광, 보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08년 음 력 11월 무렵에 장흥의 장서면 공전영수원 문내현이 징수를 가혹하게 함에 살해를 기도하였 다. 1909년 음력 3월 6일에는 장흥의 장동면장 겸 공전( 公 錢 )영수원인 정창현이 징수를 가 혹하게 하고 그 아들 정한익이 일본어를 연구함에 살해하였다. 그는 또한 중군장 안찬재 등 수십 명의 의병과 함께 1909년 음력 3월 2일에 장동면 우치리에서 안덕삼 집에 들어가 엽전 300냥을 수합하였다. 같은 해 음력 4월 21일 무렵에는 강무경 등 40여명의 의병과 함께 보 성군 노동면 봉화촌의 박선경 집에서 엽전 30냥 등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그는 이로 인해 체 포되어 1910년 5월 24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9월 6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어 순국하였다. 131) 김응백( 金 應 伯, 1870~1910)은 전남 광양 사람이다. 황영문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 활동을 시 작하였다. 1908년 8월 5일에 황영문 의병장의 지휘 아래 의병 150여 명과 함께 총과 칼을 휴대 하고 광양군 진하면 망덕리에 들어가 그 마을에 거주하는 일본인 이시다( 石 田 耕 作 )와 수미노 ( 角 野 仁 平 )의 집을 포위하고 수미노 및 그의 가족 4명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가옥에 석 유를 뿌리고 방화하여 소각시켰다. 같은 해 7, 8월 무렵 그는 같은 면 진목정 안윤석( 安 潤 錫 )으 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동지 강치선( 姜 致 善 ) 고운서( 高 雲 西 ) 외 2명과 함께 1908년 12월부터 1910년 1월까지 같은 군 진상면 비촌 황병욱( 黃 炳 郁 ) 집에서 군자금을 징 130) 판결문( 대구공소원 :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898~900쪽 ;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연구, ) 판결문( 대구공소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74, 850~853쪽. 87
8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수하였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1910년 10월 26일에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받 고 항소하였으나, 11월 22일에 대구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132) 국호남( 鞠 湖 南, 1881~1912)은 전북 흥덕군 동일면 출신의 농민이다.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1909년 3월 7일에 흥덕군 북면 사포의 일본인 히라이( 平 井 德 藏 ) 집을 습격하여 가족을 죽이고 가옥을 소각하였다. 5월 30일에는 고부군 거마면의 일본인 오모리( 大 森 五 郞 吉 ) 집을 습격하여 13년식 보병총 3자루 외 6점을 탈취하였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 어 광주감옥 군산분감에 구금 중이던 1910년 10월 26일에 탈출하였으나 다시 체포되었 다. 1910년 11월 30일에 광주지방재판소 군산지부에서 궐석재판으로 교수형을 선고되 었고, 1912년 4월 24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사형이 선고되어 항소하였으나 5월 28일에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상고하였으나 6월 2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 어 순국하였다. 133) 김선중( 金 善 仲, 1885~1912)은 전남 영암 사람이다. 박사과( 朴 士 果 ) 의진에 가담하여 전남 영 암 나주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1909년 음력 5월 무렵 박사과 의병장의 지휘 아래 전남 나주군 방추목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접전하였다. 이 때 헌병보조원 1명을 사살하는 등 항일 무 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1912년 1월 16일에 대구공소원에서 사형을 받고 상 고하였으나, 같은 해 2월 13일에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사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134) 김필수( 金 必 洙, 1875~1913)는 전북 김제 출신이다. 1908년 음력 9월부터 1912년 12월까지 전북 진안 장수 임실 등지에서 이석용( 李 錫 庸 ) 의진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석용 부대의 일 원으로 1908년 음력 9월 6일에 여운서( 呂 云 西 )와 함께 일본 헌병의 밀정 김관일( 金 寬 日 )을 처단하였고, 1911년 4월 14일에는 이석용 외 4명과 함께 김제군 일서면( 一 西 面 )의 공전영수 원( 公 錢 領 收 員 ) 이돈일( 李 敦 逸 )로부터 징수한 세금 64원을 모금하였다. 1912년 2월 2일에는 송판구( 宋 判 九 ) 조영국( 趙 永 國 ) 김순보( 金 順 甫 ) 외 5명과 함께 장수군 수서면 매암리 이 상일( 李 相 一 )로부터 군자금 28원을 모금하였다. 같은 날 장수군 진전면 호병동 최은상( 崔 殷 132) 판결문( 대구공소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794쪽. 133) 판결문( 광주지방재판소 군산지부 :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 대구복심법원 : 고등법원). 134) 판결문( 대구공소원 :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앞의 책, 935~936쪽. 88
81 총 설 相 )으로부터도 군자금 13원 30전과 백목면 3필을 모집하였다. 김필수를 비롯한 박보국( 朴 甫 局 ) 정남쇠( 丁 南 釗 ) 홍윤무( 洪 允 武 ) 박동환( 朴 東 煥 ) 이남용( 李 南 用 ) 김상신( 金 相 臣 ) 한일성( 韓 日 成 )은 이석용과 함께 1912년 11월 22일 밤에 장수군 진전면사무소를 기습하여 공 전영수원 면서기 전 면장 등으로부터 세금 33원 72전, 면비 50원 44전, 개인 돈 28원 82 전, 휴대용 금고 2개를 모집( 募 集 )하였다. 이후로도 김필수는 이석용의 지휘 하에 박보국( 朴 甫 局 ) 이남용( 李 南 用 ) 한일성( 韓 日 成 ) 등과 함께 1912년 12월 17일에 임실군 남면 야당리 의 공전영수원 강정수( 姜 正 秀 )로부터 군수품을 모집하다 일경에 체포되었다. 1913년 2월 22 일에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김필수는 소위 강도 살인 죄로 교수형을, 박보국 정남 쇠 홍윤무 박동환 이남용 김상신 한일성은 10년형을 선고받고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3월 19일에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판결을 받았다. 김필수는 5월 26일에 대구감옥에서 순국 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들의 공훈을 기려 김필수와 홍윤무 박보국 박동환 김상신에게 건 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35) 이석용( 李 錫 庸, 1878~1914)은 전북 임실 출신이다. 그는 1907년 8월의 군대 해산 직 후에 일본의 죄 10가지를 들어 격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9월 12일에 마이산 남쪽기슭 의 용암 위에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하고 의진을 편성하였다. 그는 부대를 창의동맹단 이 라 명명하고, 전해산을 참모에, 선봉에는 포군 출신이 박만화( 朴 萬 華 ), 중군에 여운서( 呂 雲 瑞 )등 용장들을 각 부서에 임명하였다. 9월 13일에는 진안읍을 기습하여 일본군에게 총 상을 입혀 패주케 한 뒤, 그들의 복장 양총 비단 문부( 文 簿 ) 등을 노획하는 대승을 거 두었다. 또한, 우편소를 습격, 파괴하여 우편물을 소각하고, 전선을 모조리 끊었다. 16일 에는 내원사( 內 源 寺 ) 골짜기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0월 8일에는 화 암리 후방산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으나 화력의 열세로 많은 의병을 잃었지만, 진안 용 담 임실 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 남원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후 로도 11월 14일에는 성수산에서 의진을 재편하였다. 11월 17일에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 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하였다. 다시 1908년 3월 5일에는 진안 시동, 3월 14일에 마근현, 3 135)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 편찬위원회, 앞의 책, 35쪽. 89
8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월 17일에 수류산, 3월 27일에 관촌역, 그리고 4월 30일에 가수리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 전하였다. 한편 그는 밀정과 세금영수원, 한인 순사 등을 처단하는 활동도 하였다. 그러나 1909년 9월부터 행해진 일본군에 의한 호남의병 대학살전이 전개되자 잠시 의진을 해산 하고 잠적하였다. 1910년의 한일합병으로 나라를 잃은 뒤에도 일왕을 주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1912년에 임자밀맹단( 壬 子 密 盟 團 )을 조직하였다. 그러던 중에 1912년 임실의 성 수면 삼청리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1914년 2월 7일에 광주지법 전주지청에서 강도 살인 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항소하였으나 4월 16일에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그 해 4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의병 활동에 관한 진중일기를 남겨 정재선생호남창의 일록( 靜 齋 先 生 湖 南 倡 義 日 錄 ) 이 간행되었다. 136) 136)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 대구복심법원 : 고등법원) ;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2, 1970 ; 김의환, 항일의병장열전, 정음사, 1975 ; 강길원, 한말 호남의병장 정재 이석용의 항일투쟁, 원광사학 2,
83 총 설 이상으로 이 책에 판결문을 수록한 의병의 활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를 표로 살펴보면 다음 표2 와 같다. 표 2 중 후기의 호남 의병장 현황 번호 이름 출신지 형량 판결일 의병장 활동지역 관리번호 포 상 1 김동신 대전 종신유 김동신 정읍 940 독립장 2 정영진 화순 유5년 고광순 곡성 454 애국장 3 임사유 익산 유10년 이홍일 이기협 함열 454 애족장 4 조정인 나주 교수형 김태원 나주, 함평, 장성 691 독립장 5 여규호 임실 교수형 이석용 장수, 진안, 임실 1707 애국장 종신 지춘경 김제 조성팔 임피 징10년 임세묵 순창 애국장 교수형 8 공성찬 구례 구례, 곡성 애국장 김성구 임기서 남원 남원, 순천 애족장 징15년 10 임기숙 남원 애족장 11 유지명 고산 교수형 유지명 진안, 용담 (완주)고산 456 독립장 12 이운선 함평 유7년 김태원 조경환 광주 이용이 무주 문태서 애족장 징7년 진안, 무주 명경안 진안 전상진 애족장 교수형 김형주 순천 김형주 순창, 태인 1712 애국장 종신 박동식 용담 교수형 진안, 장수, 문태서 무주, 함양 정홍기 옥구 징15년 유지명 전주, 진안 1707 애국장 18 오성현 장성 징10년 기삼연 유종여 장성 김영박 19 김맹도리 남원 징7년 양문찬 남원 1708 애국장 20 김진화 담양 징7년 김동신 정일국 구례, 담양 1708 애국장 21 정일국 남원 교수형 정일국 남원, 고부 순창, 구례 1708 애국장 91
8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번호 이름 출신지 형량 판결일 의병장 활동지역 관리번호 포 상 22 박도경 고창 교수형 기삼연 영광, 장성 1713 독립장 23 정낙중 함평 교수형 김태원 영광,영암,무안 694 애국장 24 김공삼 고창 교수형 부안, 고창 기삼연 담양, 장성 애국장 25 김영백 장성 교수형 장성, 정읍 김영백 흥덕 독립장 26 최산흥 순창 교수형 이경천 이석용 순창, 임실 양윤숙 이황룡 순창 교수형 양윤숙 최산흥 순창, 임실 1712 독립장 28 이복근 영암 교수형 박사화 나주, 영암 695 애국장 29 이원오 공주 교수형 조경환 광주 애국장 정원국 전주 교수형 정원국 전주, 임실 1707 애국장 강성택 31 황준성 진안 교수형 추기엽 황두일 완도, 해남 2023 독립장 32 양진여 광주 교수형 양진여 광주 독립장 기삼연 이중백 장성 교수형 박찬경 장성, 고창 애국장 김여회 이강산 함평 독립장 35 박치일 화순 애국장 36 정인술 함평 교수형 김태원 함평, 영광 애국장 37 박장봉 함평 애족장 38 서성학 함평 애국장 39 양창국 광주 애국장 40 양윤숙 순창 교수형 양윤숙 순창, 임실 1713 독립장 41 김선여 순창 교수형 신보현 순창, 정읍, 장성 독립장 42 손덕오 보성 독립장 43 염인서 보성 교수형 안계홍 보성, 순천, 장흥 독립장 44 정기찬 보성 독립장 92
85 총 설 번호 이름 출신지 형량 판결일 의병장 활동지역 관리번호 포 상 34 이강산 함평 독립장 35 박치일 화순 애국장 36 정인술 함평 애국장 교수형 김태원 함평, 영광 37 박장봉 함평 애족장 38 서성학 함평 애국장 39 양창국 광주 애국장 40 양윤숙 순창 교수형 양윤숙 순창, 임실 1713 독립장 41 김선여 순창 교수형 신보현 순창, 정읍, 장성 독립장 42 손덕오 보성 독립장 43 염인서 보성 교수형 안계홍 보성, 순천, 장흥 독립장 44 정기찬 보성 독립장 45 양상기 광주 애국장 교수형 김태원 (담양)창평 46 유병기 구례 독립장 47 양윤택 순창 징1년 양윤숙 순창 1712 애족장 48 임하중 보성 교수형 안계홍 보성, 장흥 독립장 49 전수용 임실 교수형 이석용 696 함평, 영광 조경환 463 대통령장 심남일 50 김치홍 영암 교수형 박민홍 영암, 나주 696 독립장 박사화 51 장인초 화순 교수형 안계홍 696 보성 심남일 463 독립장 52 이세창 장흥 교수형 심남일 장흥, 보성 696 애국장 53 김응백 광양 교수형 황영문 광양 696 독립장 54 국호남 장성 교수형 흥덕, 고부, 영광 김선중 영암 교수형 박사화 700 나주 김태원 466 애국장 56 김필수 김제 교수형 애국장 57 박보국 임실 애국장 58 정남쇠 임실 - 진안 59 홍윤무 임실 애국장 이석용 장수 박동환 남원 징10년 애국장 임실 61 이남용 임실 - 62 김상신 임실 애국장 63 한일성 임실 - 64 이석용 임실 사형 이석용 임실, 남원, 장수 1725 독립장 93
8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3. 영 호남 의병의 특성과 의의 전기의병기 영남 지역에서의 의병 활동은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예안 봉화 의성 영양 청송 등 경북 북부 지역인 안동문화권이 중심이었다. 경상남도는 진주의병이 대표적이다. 안동 지역에서의 의병은 제천에서 내려온 유인석 의진의 소모장인 서상렬 의병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태봉 전투를 치르는 등 활동이 컸다. 그러나 태봉 전투에서 일본군에 의해 패퇴하 고 더욱이 안동 시가지가 불태워지는 피해를 입었다. 노응규가 지휘한 진주의병은 진주성을 점령하고 대구에서 파견한 관군을 격파하고 김해로 진출하여 일본군 수비대와의 전투를 치 르는 등 활약하였다. 그러나 진주의병은 정부에서 파견한 이겸제가 이끄는 관군에 의해 성을 빼앗기고 해산되었다. 한편, 전기의병기 호남 의병은 장성과 나주 지역에서 일어났다. 기정진의 손자인 기우만은 고향인 장성에서 기삼연 고광순 등과 거의하였다. 나주부에서도 기우만의 통문을 받고 향 리들이 중심이 되어 나주향교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이학상을 대장에 추대하였다. 기우만은 나주의병의 초청에 의병을 이끌고 나주로 들어가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나주의병은 관군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고 말았다. 중기의병은 일제의 침략이 한층 강화된 어려운 조건 위에서 전개되었다. 1904년 이후 서 울에 일제의 한국주차군사령부가 설치되고, 러일 전쟁을 명목으로 일본군 정예 부대가 주둔 하였다. 의병의 활동이 성공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의병에 투신하는 것은 곧 목 숨을 내건 투쟁이었다. 그럼에도 전기의병에 참여했던 상당수가 재기하였으니 이들에 대한 민족사적 평가는 마땅하다. 중기의병은 전기의병에 비하여 더욱 투쟁적이었다. 중기의병은 전기의병의 한계로 지적되는 지역성과 학통성, 혈연성을 어느 정도 극복해 가는 경향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은 경향은 의병에 참여하는 신분층이 저변으로 확대된 사실과 연관된다. 중기 의병 단계에서는 전술상의 변화도 점차 나타난다. 의병들은 전력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상호 연합 전선의 구축을 시도하였다. 중기의병기 대표적인 호남 의병으로는 태인의병과 쌍산의소가 있다. 최익현의 태인의병은 열국 공사관에 공함을 보내 을사조약 늑결의 부당함과 일제의 침략상을 성토하면서 지원과 협조를 요청하였다. 일본 정부에 항의 서한을 발송하기도 하였다. 태인의병은 관군의 출동 94
87 총 설 에 맞서 전투보다는 동족간의 부전( 不 戰 )을 택했다. 최익현과 임병찬을 비롯한 의병지휘부는 자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최익현의 거의는 한민족에게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큰 외침이었다. 이후 능주에서 양회일, 창평에서 고광순, 광양에서 백낙구, 남원에서 양한규 등 이 의병을 일으켜 항일 전쟁의 대열에 나섰다. 중기의병기 영남 의병은 정용기의 산남의진과 신돌석의 영릉의진이 대표적이다. 이 의병 대는 후기 의병기로 이어진 특성이 있다. 1906년 3월에 편성된 산남의진은 신돌석 의진과 연계하면서 경주와 영덕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정용기는 체포되었다가 다시 석방된 후에도 북상을 준비하면서 항쟁하였다 그러나 입암 전투에서 그를 비롯한 지휘부 여러 명이 전사함 에 의진이 무너졌다. 영릉의진은 영양 관아를 공격하고, 울진의 일본인을 공격하여 어업 침 탈 세력을 응징하였다. 후기의병기 영남 의병으로 산남의진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정용기의 부친인 정환직이 산 남의진을 재기하여 항일전을 치렀다. 정환직은 북상을 기도하던 중에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그 뒤를 이어 최세윤이 경북 남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수행하면서 다대한 전과를 거 뒀다. 신돌석의 영릉의진은 일본군 수비대의 토벌 작전에 태백산맥으로 이진하면서 항쟁을 지속하였다. 후기의병기 호남 의병은 반제국( 反 帝 國 )적 성격은 물론 안민( 安 民 )적인 성격을 띄면서 격렬하게 반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후기의병기 주도층은 지방 유생이 참여하였으나, 그 보다도 농민 보부상 해산군인 승려 산포수, 심지어는 안규홍과 같은 머슴 등 기층민 의 참여가 눈에 띄게 많아진 특징을 갖는다. 특히 유배수들이 탈출하여 의병을 일으킨 경 우도 드러난다. 황준성과 정원집 추기엽 등이 그들이다. 후기의병기 의병들은 장기 항 전에 대비하여 국내외에 의병 기지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호남의병장 고광순이 이를 적극 추진하였는데, 그는 이른바 축예지계( 蓄 銳 之 計 ) 라 하여 지리산을 장기 항전의 기지로 주 목하고 지리산 피아골을 의병 기지로 삼아 항전하였다. 호남 의병은 지역 주민과의 유대 를 강화하였다. 특히 평민 출신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 부대는 가짜 의병과 부호의 토색 등 의 문제를 해결해 주면서 대일 항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주민들은 의병들에게 숙식과 정 보를 제공하여 의병을 지원하였다. 95
8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호남 의병의 출신지는 전남이 전북보다 많게 보인다. 전남의 나주 함평 장성 영광 광 주 순이고, 전북은 순창 임실 태인 무주 부안 고부의 순이다. 이는 유력 의병장의 지 역적 기반과 관련이 된 것으로 보인다. 태인의 임병찬, 순창의 최산흥 양윤숙, 임실의 이석 용 전해산 등이 그러하다. 호남 의병은 전투 중에 전사하거나 체포되었더라도 사형을 당하 거나 10년 이상의 중형을 받았다. <표2>에 소개한 인물 중에서도 조정인 이황룡 정원국 여규호 임세묵 공성찬 유지명 박동식 정일국 박도경 정낙중 김공삼 김영백 최 산흥 이복근 이원오 황준성 양진여 이중백 이강산 박치일 정인술 박장봉 서성 학 양창국 양윤숙 김선여 손덕오 염인서 정기찬 양상기 유병기 임하중 전수 용 김치홍 장인초 이세창 김응백 국호남 김선중 김필수 이석용 등이 교수형을 선 고받고 순국하였다. 한말 의병의 강력한 반일 투쟁은 일제의 식민지화 정책을 지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일 제는 1909년 후반기에 조선을 강점하려 하였으나, 의병의 투쟁이 장기화됨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일제는 남한대토벌작전 과 같은 의병에 대한 무자비한 대 탄압을 가한 후 에 조선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다. 의병은 1910년 경술국치 후에 제국주의 열강의 지원과 비호를 받은 일제침략자에 대한 최 대의 항일 민족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 가운데 한 갈래는 풍기광복단과 대한광복회 그리고 독립의군부 등으로 이어져 1910년대 국내에서의 민족 운동을 주도해 갔다. 또 다른 갈래는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해외에서의 무장 독립 운동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반외세 불굴의 투쟁 정신은 1910년 이후 한국인의 독립 투쟁의 정신적 연원을 이루어 저항적 인 민족주의를 발전시켜 나갔다 할 수 있다. 96
89 총 설
9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의병운동Ⅱ) 참고 문헌 판결문(대구지방재판소, 대구공소원, 광주지방재판소,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황현, 매천야록, 국사편찬위원회,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독립유공자호남유족회, 담산실기, 이긍연, 을미의병일기. 심성지, 적원일기. 산남창의지 하. 폭도에 관한 편책. 강재언, 조선근대사연구, 일본평론사, 국사편찬위원회,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한국독립운동사, 김상기, 한말의병연구, 일조각, 1997., 한말 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의환, 항일의병장열전, 정음사,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푸른역사, 김희곤 외, 의성의 독립운동사, 의성군, 2002., 영덕의 독립운동사, 영덕군, 2003., 영양의 독립운동사, 영양문화원, 2006., 봉화의 독립운동사, 봉화군, 2007, 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 안동시, 박민영, 대한제국기 의병연구, 도서출판 한울, 1998., 한말 중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박성수, 독립운동사연구, 창작과비평사, 안동대 안동문화연구소, 경북독립운동사 1, 경상북도, 오길보, 조선근대반일의병운동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윤병석, 의병과 독립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7., 한말의병장열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조동걸, 한말의병전쟁, 독립기념관,
91 참고 문헌 조동걸, 한국민족주의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지식산업사,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1970., 독립운동사자료집 2, 1970., 독립운동사자료집 3, 1971.,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홍순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연구, 서울대출판부,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연구, 일조각, 2004., 한말 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강길원, 한말 호남의병장 정재 이석용의 항일투쟁, 원광사학 2, 1982., 해산 전수용의 항일투쟁, 역사학보 101, 1984., 담산 안규홍의 항일투쟁, 손보기박사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권대웅, 1896년 청송의진의 조직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9, 1998., 김산의진고, 윤병석교수화갑기념 한국근대사논총, 지식산업사, 권영배, 산남의진의 조직과 활동, 역사교육논총 16, 김강수, 한말 의병장 벽산 김도현의 의병활동, 북악사론 2, 김상기, 1895~1896년 안동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항일투쟁, 사학지 31, 1998., 한말 일제의 침략과 의병 학살, 역사와 담론 52, 2009., 최익현의 정산이주와 태인의병, 충청문화연구 7, 김희곤, 신돌석의진의 활동과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19, 박민영, 신암 노응규의 진주의병 항전 연구, 박성수교수화갑기념 한국근대사논총, 1990., 한말 의병의 대마도 피수 경위에 관한 연구, 한국근현대사연구 37, 배용일, 산남의진고-정환직, 정용기 부자 의병장 활동을 중심으로, 논문집 6, 포항실업전문대학, 1982., 최세윤의병장고, 사총 31, 홍순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참가층과 사회적 기반, 역사연구 창간호, 1992., 1909년 가을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 에 대하여, 고고역사학지 9, 동아대 박물관, 홍영기, 안규홍의병의 조직과 그 활동, 한국학보 겨울호, 1987., 구한말 심남일 의병의 조직과 그 활동, 동아연구 17, 1989., 구한말 김동신 의병장에 대한 일고찰, 한국학보 56, 1989., 1896년 나주의병의 결성과 활동, 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 하, 1994., 한말 호남의병의 특성과 일제의 대응, 전남사학 10, 1996., 한말 태인의병의 활동과 영향, 전남사학 11, 1997., 한말 호남창의회맹소에 대한 일고찰, 한국근현대사연구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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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KR000****4 설 * 환 KR000****4 송 * 애 김 * 수 KR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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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도경상북도지방공무원제 1 회공개경쟁임용시험 - 필기시험합격자및면접시험시행계획공고 ( ) 필기시험합격자 : 491 명 ( 명단붙임 ) 2 필기시험합격자등록및유의사항. : ( ) ~ 7. 6( ) 3 등
- 2012 년도경상북도지방공무원제 1 회공개경쟁임용시험 - 필기시험합격자및면접시험시행계획공고 2012. 5. 12( ) 2012 1. 1 필기시험합격자 : 491 명 ( 명단붙임 ) 2 필기시험합격자등록및유의사항. : 2012. 7. 4( ) ~ 7. 6( ) 3 등록시간 : 09:00 ~ 18:00. : 2 ( 1 ). 1 3 (A4 1매, 워드작성 붙임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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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이 책에서는 단순히 가난한 관리들의 이야기보다는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사심 없이 헌신한 옛 공직자들의 사례들을 발굴하여 수록하였습니다. 공과 사를 엄정히 구분하고,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공무를 처리한 사례, 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최부, 송흠
역대국회의원_PDF변환용.hwp
역대 국회의원 명단 당적표시는 당선당시(총선결과, 재 보궐당선, 의석승계) 소속정당을 나타냄. 제9 10대 국회의원의 당적중 국민회의 표시부분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에서 선출한 국회의원임. 제헌국회 (당적은 당선당시의 당적임) 성 명 선 거 구 당 적 비 고 성 명 선 거 구 당 적 비 고 姜 己 文 산 청 無 所 屬 金 若 水 동 래 朝 鮮 共 和 黨
<표 1-2-1> 시군별 성별 외국인 주민등록인구 (2009-2010) (단위 : 명, %) 구분 2009년 2010년 외국인(계) 외국인(여) 외국인(남) 성비 외국인(계) 외국인(여) 외국인(남) 성비 전국 870,636 384,830 485,806 126 918,
시군별 성별 총인구 및 성비 (2012-2013) (단위 : 명, %) 구분 2012 2013 한국인(계) 한국인(여) 한국인(남) 성비 한국인(계) 한국인(여) 한국인(남) 성비 전국 50,948,272 25,444,212 25,504,060 100.2 51,141,463 25,553,127 25,588,336 100.1 경상북도 2,698,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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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x-police.or.kr 2 3 4 5 6 7 시도 경우회 소식 2008年 4月 10日 木曜日 제1362호 전국 지역회 총회 일제 개최 전남영광 경우회 경북구미 경우회 서울양천 경우회 경남마산중부 경우회 경북예천 경우회 서울동대문 경우회 충남연기 경우회 충남예산 경우회 충남홍성 경우회 대전둔산 경우회 충북제천 경우회 서울수서 경우회 부산 참전경찰회(부산진)
@2019 예산개요 (수정_추은주).hwp
2019 년예산개요 Ⅱ 경상북도예산규모 1. 예산총계규모 2. 세입예산규모 3. 세출예산규모 2019 예산개요 7 8 2019 년도예산개요 근거 : 지방자치법제 133 조 ( 예산편성후행정안전부보고 ) 예산편성심의의결후행정안전부보고, 예산에대한이해의도모와 단체간비교가용이토록정리 예산규모 총계규모 : 24조 478억원 ( 일반 20조 9,774억원, 특별 3조
나하나로 5호
Vol 3, No. 1, June, 2009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KACPR) Newsletter 01 02 03 04 05 2 3 4 대한심폐소생협회 소식 교육위원회 소식 일반인(초등학생/가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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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 객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 객사는 영조 35년(1759년)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관청 건물입니다. 원래는 가운데의 정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 오른쪽에 서대청, 앞쪽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 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있습니다. 정당에서는 전하 만만세 라고 새 긴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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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4 290 5 291 1 1 336 292 340 341 293 1 342 1 294 2 3 3 343 2 295 296 297 298 05 05 10 15 10 15 20 20 25 346 347 299 1 2 1 3 348 3 2 300 301 302 05 05 10 10 15 20 25 350 355 303 304 1 3 2 4 356 357
60-Year History of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of Korea 제4절 조선시대의 감사제도 1. 조선시대의 관제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무신란에 의하여 붕괴되고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이 지배층으 로 되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새로이 신흥사대부가 대두하여 마침내 조선 건국에 성공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조선양반사회의
7 청보 86. 3. 29( 對 삼성 )~4. 5( 對 빙그레 ) NC 13. 4. 2( 對 롯데 )~4. 10( 對 LG) 팀별 연패 기록 삼 미 18 연패 ( 85. 3. 31~4. 29) 쌍방울 17 연패 ( 99. 8. 25~10. 5) 롯 데 16 연패 ( 0
전반, 타격, 투수, 수비 진기록 전반 시즌 최고 승률 0.706 85 삼성 (110 경기 77승 32패 1 무) 기별 최고 승률 0.741 85 삼성 ( 전기 55경기 40승 14패 1 무) 시즌 최저 승률 0.188 82 삼미 (80 경기 15승 65 패) 기별 최저 승률 0.125 82 삼미 ( 후기 40경기 5승 35 패) 시즌 최다 승리 91 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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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요 보직자 명단 (2014년 4월 1일 현재) (1) 교무위원 총장 부총장(인사캠) 부총장(자과캠) 부총장(의무) 일반대학원장 학부대학장 유학대학장 문과대학장 법과대학장 사회과학대학장 경제대학장 경영대학장 자연과학대학장 정보통신대학장 공과대학장 약학대학장 사범대학장 생명공학대학장 스포츠과학대학장 의과대학장 예술대학장 기획조정처장 교무처장 학생처장 산학협력단장
단양군지
제 3 편 정치 행정 제1장 정치 이보환 집필 제1절 단양군의회 제1절 우리는 지방자치의 시대에 살며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주민의 복지증진을 꾀 하고 있다. 자치시대가 개막된 것은 불과 15년에 불과하고, 중앙집권적 관행이 커 서 아직 자치의 전통을 확고히 자리 잡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으며, 앞으로의 과제 가 더 중요하다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우리지역 지방자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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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가을 24호 2_ . 02 03 04 08 10 14 16 20 24 28 32 38 44 46 47 48 49 50 51 _3 4_ _5 6_ _7 8_ _9 10_ _11 12_ _13 14_ _15 16_ _17 18_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에서 개식사를 하는 김구(1940.9.17) 將士書) 를 낭독하였는데, 한국광복군이 중국군과 함께 전장에
경북인의 의열투쟁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 1927 3 1운동 이후 의열투쟁사의 앞머리에는 27결사대의 국내거사 가 자리하고 있다. 27결사대는 고종의 장례일을 기해 을사5적과 정미7적을 응징하고자 서 간도 류허시엔 柳 河 縣 에서 결성된 조직이다. 여기에 울진
제69주년 광복절 기념 기획전 1935 1924 경북인의 1927 의열투쟁 1919 2014. 8. 13 2015. 2. 26 주최 I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후원 I 경상북도 광복회 경상북도지부 안동보훈지청 안동시 경북인의 의열투쟁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 1927 3 1운동 이후 의열투쟁사의 앞머리에는 27결사대의 국내거사 가 자리하고 있다. 27결사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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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06 Vol. 01 CONTENTS 02 Special Theme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Beautiful Huneed People 03 04 Special Destiny Interesting Story 05 06 Huneed News Hun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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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명 497 색 인 인 명 (ㄱ) 강경중 姜 敬 重 182, 193 강덕상 姜 德 相 137 강만철 姜 萬 哲 149, 159 강만희 姜 萬 熙 135 강무형 姜 懋 馨 134 강문선 姜 門 善 88 강병학 姜 丙 學 390 강봉상 姜 奉 相 137 강봉진 姜 奉 辰 150 강석희 姜 奭 熙 133, 139, 158, 225 강선보 姜 善 甫 128,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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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면 2012.7.25 6:14 PM 페이지1 2012년 8월 1일 수요일 16 종합 고려대장경 석판본 판각작업장 세계 최초 석판본 고려대장경 성보관 건립 박차 관계기관 허가 신청 1차공사 전격시동 성보관 2동 대웅전 요사채 일주문 건립 3백여 예산 투입 국내 최대 대작불사 그 동안 재단은 석판본 조성과 성보관 건립에 대해서 4년여 동안 여러 측면에 서 다각적으로
33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문 * 웅 입주자격소득초과 34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송 * 호 입주자격소득초과 35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나 * 하 입주자격소득초과 36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최 * 재 입주자격소득초
1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김 * 주 830516 입주자격소득초과 2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김 * 연 711202 입주자격소득초과 3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이 * 훈 740309 입주자격소득초과 4 발산지구4단지 ( 임대 ) 59A 이 * 희 780604 입주자격소득초과 5 발산지구4단지 ( 임대 ) 59A 안 *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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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매입처 : 유한회사유니스한국자산관리대부 / 연락처 : 02-6010-0084 일련번호생년월일성별고객명대출과목주소1 주소2 1 790208 남 강 * 태 일반자금대출 경기 시흥시 2 900321 여 강 * 희 일반자금대출 서울 서대문구 3 780830 여 강 * 경 일반자금대출 경기 양주시 4 670509 여 강 * 란 일반자금대출 경기 수원시 5 760411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발행일 : 2013년 7월 25일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정]--------------------------------------------
학부모신문225호최종
02 04 10 11 06 15 2 225 2010.06.05 Q Q Q Q Q Q Q Q Q Q Q 2010.06.05 225 3 Q Q Q Q 4 225 2010.06.05 2010.06.05 225 5 6 225 2010.06.05 2010.06.05 225 7 Q A Q A Q A Q A Q A Q A Q A Q A Q A Q A Q A Q A Q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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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 그렇게까지 군대를 가려고하냐, 미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후회는 없다.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조차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군대는 하루하루를 소종하게 생각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점점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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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타당성조사에활용되는 O-D 및 NETWORK 의분석지침연구 한국개발연구원 100 죤번호 죤명 인구수 죤번호 죤명 인구수 죤번호 죤명 인구수 1 종로구 190619 42 중구 99971 83 동안구 ( 안양 ) 334582 2 중구 125050 43 동구 342951 84 소사구 ( 부천 ) 204502 3 용산구 246613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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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고 대한변호사협회공고... 공증합동 법무법인 구성원 등 변경사항----------------------------------------------- 변협공고 2006-1 공증합동 법무법인의 구성원변동, 소속변호사변동 등을 협회 공증합동법률사무소설립등에관한규 칙 제7조 및 법무법인의설립등에관한규칙 제7조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공고한다. 2006.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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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지구총재 354-A지구 1961-1963 全 禮 鎔 (전예용) 서 울 1963-1964 朴 乾 源 (박건원) 서 울 1964-1965 李 大 偉 (이대위) 서 울 1965-1966 鄭 準 謨 (정준모) 서 울 1966-1967 姜 錫 福 (강석복) 서 울 1967-1968 申 禮 鎔 (신예용) 서울남서울 신안과병원 원장 1968-1969 姜 聲 泰 (강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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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Group 2006 AUTUMN Volume. 02 Focus Group 2006 AUTUMN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 모두를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 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감돌아간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이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2 목차 편집자의 말 ------------------------------------------------------------------------------------- 3 한국의 * 상1 개괄 한국의 병역거부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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音 樂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 Hindemith 음악에 대한 분석 연구 - 를 중심으로 - 2002 年 2 月 昌 原 大 學 校 大 學 院 音 樂 科 安 明 基 音 樂 學 碩 士 學 位 論 文 P. Hindemith 음악에 대한 분석 연구 - 를 중심으로 - Sonata for B-fl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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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004. 12 2004. 11 25 26 2004. 12 % 50 40 30 20 10 0 華 東 華 北 中 南 西 南 東 北 西 北 전 체 중 대 형 차 중 형 차 소 형 차 경 차 2004. 11 27 帕 28 2004. 12 2004. 11 29 30 2004. 12 2004. 11 31 32 2004. 12 2004. 11 33 34 2004.
에너지절약_수정
Contents 산업훈장 포장 국무총리표창 삼성토탈주식회사 09 SK하이닉스(주) 93 (주)이건창호 15 한국전자통신연구원 100 현대중공업(주) 20 KT 106 두산중공업 주식회사 24 (사)전국주부교실 대구지사부 111 한국전력공사 30 (주)부-스타 36 [단체] (주)터보맥스 115 [단체] 강원도청 119 [단체] 현대오일뱅크(주) 124 [단체]
Gwangju Jungang Girls High School 이상야릇하게 지어져 이승이 아닌 타승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텔에 여장을 풀고 먹 기 위해 태어났다는 이념 아래 게걸스럽게 식사를 했다. 피곤하니 빨리 자라는 선생님의 말 씀은 뒷전에 미룬 채 불을 끄고 밤늦게까지 속닥거리며 놀았다. 몇 시간 눈을 붙이는 둥 마 는 둥 다음날 이른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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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명 455 색 인 인 명 (ㄱ) 가츠라 타로 桂 太 郞 342, 343, 344 강건회 姜 建 會 164, 294, 295, 313 강규 姜 奎 32, 218 강기만 姜 基 萬 130, 177, 300 강기영 姜 基 永 61, 255, 412 강대근 康 大 根 176 강문 姜 汶 46, 240 강병업 康 昞 業 176, 327, 335, 349 강병주 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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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LASTING FRIENDS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LASTING FRIENDS
항일 봉기와 섬멸작전의 사실탐구
抗 日 蜂 起 와 殲 滅 作 戰 의 史 實 探 究 - 韓 國 中 央 山 岳 地 帶 를 中 心 으로- 이노우에 가츠오( 井 上 勝 生 ) 1) 머리말 지난 해(2015년) 10월과 11월, 日 本 軍 東 學 黨 討 伐 隊 의 進 軍 路 를 한국의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조사할 수 있었다. 後 備 第 19 大 隊 (당시 東 學 黨 討 伐 隊 라고 불리었다) 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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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Shipping Association 조합 뉴비전 선포 다음은 뉴비전 세부추진계획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 조합은 올해로 창립 46주년을 맞았습니다. 조합은 2004년 이전까 지는 조합운영지침을 마련하여 목표 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추진해왔습니 다만 지난 2005년부터 조합원을 행복하게 하는 가치창출로 해운의 미래를 열어 가자 라는 미션아래 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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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제 의식의 원칙 논문은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야 한다. 주제 의식은 논문을 쓰는 사람의 의도나 글의 목적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협력의 원칙 독자는 필자를 이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따라서 필자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나 표현을 사용하여 독자의 노력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논리적 엄격성의 원칙 감정이나 독단적인 선언이
슬라이드 1
NJ52-14-8-062 4. 본지도는지적이표시된지형도또는을기준으로작성하였음 5. 본지도는의사전승인없이복제, 국외반출, 충청북도보은군산외면신정리일원 NJ52-14-8-093 4. 본지도는지적이표시된지형도또는을기준으로작성하였음 5. 본지도는의사전승인없이복제, 국외반출, 충청북도보은군속리산면중판리일원 NJ52-14-8-094 4. 본지도는지적이표시된지형도또는을기준으로작성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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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GONS JEONNAM DRAGONS FOOTBALL CLUB MATCH MAGAZINE VOL.136 / 2014.10.16 Preview Review News Poster PREVIEW K LEAGUE CLASSIC 32R JEONNAM VS SEOUL / 14.10.18 / 14:00 / 광양축구전용구장 서울과 뜨거운 한판 승부! 전남드래곤즈가 오는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 평균 ( 만원 ) 자녀상태 < 유 자 녀 > 미 취 학 초 등 학 생 중 학 생 고 등 학 생 대 학 생 대 학 원 생 군 복 무 직 장 인 무 직 < 무 자 녀 >,,.,.,.,.,.,.,.,.
. 대상자의속성 -. 연간가수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평균 ( 만원 ) 전 국,........,. 지 역 도 시 지 역 서 울 특 별 시 개 광 역 시 도 시 읍 면 지 역,,.,.,.,.,. 가주연령 세 이 하 - 세 - 세 - 세 - 세 - 세 - 세 세 이 상,.,.,.,.,.,.,.,. 가주직업 의회의원
현안과과제_8.14 임시공휴일 지정의 경제적 파급 영향_150805.hwp
15-27호 2015.08.05 8.14 임시공휴일 지정의 경제적 파급 영향 - 국민의 절반 동참시 1조 3,100억원의 내수 진작 효과 기대 Executive Summary 8.14 임시공휴일 지정의 경제적 파급 영향 개 요 정부는 지난 4일 국무회의에서 침체된 국민의 사기 진작과 내수 활성화를 목적으로 오는 8월 14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였다. 이에 최근
2013 국토조사연감 075 전국 대기오염도(SO2) 0.020 0.018 1995년 대기오염도(SO2) (ppm) 0.018 0.016 0.014 0.012 0.010 0.008 0.007 0.006 0.006 2010년 2012년 0.004 0.002 0.000 1
제1장 국토조사 개요 제2장 주요 국토지표 제3장 주요 통계자료 요약 제4장 부록 074 SECTION 6. 환경과 방재 대기오염도(SO2, 아황산가스) 제 2장 주요 국토지표 지표명 대기오염도(SO2) 개념(산정식) 단 위 대기 중 이산화황의 농도 ppm 제공연도 1990~2012 공간단위 시도, 시군구 자료출처 환경부 대기오염도현황 대기오염물질 중 아황산가스의
CR2006-41.hwp
연구책임자 가나다 순 머 리 말 2006년 12월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원장 - i - - ii - - iii - 평가 영역 1. 교육계획 2. 수업 3. 인적자원 4. 물적자원 5. 경영과 행정 6. 교육성과 평가 부문 부문 배점 비율(%) 점수(점) 영역 배점 1.1 교육목표 3 15 45점 1.2 교육과정 6 30 (9%) 2.1 수업설계 6 3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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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희망캠페인 쪽방의 겨울은 유난히 빨리 찾아옵니다. 하늘 높은지 모르고 오르는 기름 값은 먼 나라 이야기 마냥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내 몸 하 나 간신히 누일 전기장판만으로 냉기 가득한 방에서 겨울을 보내야 합니다. 한 달에 열흘정도 겨우 나가는 일용직도 겨울이 되면 일거리가 없어, 한 달 방값을 마련하 기 어렵고, 일을 나가지 못하면 밖으로 쫓겨 날
098-103감사인사
감사인 소식 ❶ 감 사 원 2016년 고위감사공무원 등 임명장 수여 승 김주성, 한상준, 고현정, 김창우, 이태훈, 신영은, 진 2015. 11. 1. 한민주, 이덕영, 김호준, 이철재, 함유진, 정진화, 부감사관 김현태, 한승목, 윤일기, 정용현 유희연, 이은정 2016. 1. 18. 일반직고위감사공무원 IT감사단장 이남구 방송통신주사 이유리 일반직고위감사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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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 2 - - - - 4 - - 5 - - 6 - - 7 - - 8 - 4) 민원담당공무원 대상 설문조사의 결과와 함의 국민신문고가 업무와 통합된 지식경영시스템으로 실제 운영되고 있는지, 국민신문 고의 효율 알 성 제고 등 성과향상에 기여한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를 치 메 국민신문고를 접해본 중앙부처 및 지방자 였 조사를 시행하 였 해 진행하 월 다.
120~151역사지도서3
III 배운내용 단원내용 배울내용 120 121 1 2 122 3 4 123 5 6 124 7 8 9 125 1 헌병경찰을앞세운무단통치를실시하다 126 1. 2. 127 문화통치를내세워우리민족을분열시키다 1920 년대일제가실시한문화 통치의본질은무엇일까? ( 백개 ) ( 천명 ) 30 20 25 15 20 15 10 10 5 5 0 0 1918 1920 ( 년
緊 張 冷 戰 體 制 災 難 頻 發 包 括 安 保 復 舊 地 震 人 類 史 大 軍 雷 管 核 禁 忌 對 韓 公 約 ㆍ 大 登 壇 : : : 浮 上 動 因 大 選 前 者 : : : 軸 : : : 對 對 對 對 對 戰 戰 利 害 腹 案 恐 喝 前 述 長 波 大 産 苦 逆 說 利 害 大 選 大 戰 略 豫 斷 後 者 惡 不 在 : : 對 : 軟 崩 壞
인천개항장역사기행
History Road Map 2 14 28 32 34 36 38 40 43 44 47 51 55 56 58 64 66 67 69 70 72 79 86 88 89 92 93 96 99 100 103 104 105 107 108 110 114 115 117 119 124 126 127 129 131 131 133 135 136 137 140 141 143
제20대국선후보자명단.hwp
후 보 자 명 단 비례대표 국회의원선거 후보자(정당) 명단 비례대표국회의원선거 기 호 정 당 명 비 고 1 새 누 리 당 2 더 불 어 민 주 당 3 국 민 의 당 4 정 의 당 5 기 독 자 유 당 6 민 주 당 7 코 리 아 8 일제 위안부 인권정당 9 개 혁 국 민 신 당 10 고용복지연금선진화연대 11 공 화 당 12 불 교 당 13 기 독 당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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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이 스승님이 스승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알라는 위대하다! 위대하다! 알라는 알라는 위대하다! 특집 특집 기사 특집 기사 세계 세계 평화와 행복한 새해 경축 세계 평화와 평화와 행복한 행복한 새해 새해 경축 경축 특별 보도 특별 특별 보도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도가니! 스승님과의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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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61 62 63 64 65 66 67 68 69 70 71 72 73 74 75 79 80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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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분당판 20권 21호 2014년 5월 25일 생명순활동상활 생명순활동상황 생명순 보고는 토요일 오전까지 마쳐주십시오. 보고자 : 김연호 목사 010-9251-5245 보고 : 각 교구 조장님께서 교구 사역자에게 보고해 주세요. 분당판 20권 21호 2014년 5월 25일 생명순활동상황 전도실적은 전도 한 분이 소속한 교구의 생명순에 전도한 인원수를 추가합니다.
제1부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1. 의병의 개념과 시기 구분 1. 의병의 개념과 시기 구분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갑오변란과 청 일 전쟁을 전후하여 일제의 군사적 위협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조선인들은 외세 침략을 당면의 극복 과제로 인식하면서 의병을 조직하여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의병 항쟁은
제 1 항민사소송관계 1. 민사본안사건건수표가. 제1심 (1) 집계 구분 금년접수소장합계각하법원명령계원고승 원고일부승 원고패각하기타 합계 1,259,031 1,284,430 9, , ,518 26,703 31,343 1, ,788
제 1 항민사소송관계 1. 민사본안사건건수표가. 제1심 (1) 집계 금년접수소장합계각하법원명령계원고승 원고일부승 원고패각하기타 합계 1,259,031 1,284,430 9,986 850,634 790,518 26,703 31,343 1,835 235 101,788 223,773 서울중앙지방법원 315,585 298,627 1,540 196,964 183,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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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02 8 9 32 33 1 10 11 34 35 가족 구조의 변화 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원만한 생활과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해 다양한 기능 사회화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행동 가구 가족 규모의 축소와 가족 세대 구성의 단순화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 1인 또는 1인 이상의 사람이 모여 주거 및 생계를 같이 하는 사람의 집단 타나는 가족 구조의
FSB-12
CONTENTS 02 10 14 18 22 26 30 34 38 42 46 50 52 03 02 September Future Strategy & Business Development 03 02 September Future Strategy & Business Development 05 04 September Future Strategy & Business
名門家 명문가 기록관리의 변천 2011년 부천 족보전문 도서관 變遷 序 文 나이 스물을 조금 넘겨 군대 생활을 할 때 우연찮게 족보를 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 즈음에는 문맹률도 높았고 그래서, 당히 각 가정에서 책을 구경하기란 아마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얘기 같지만 국민학교 교과서 정도가 전부이지 동화나 소설이나 잡지는 구경할 수도 없었다. 혹여 나름대로
문화재이야기part2
100 No.39 101 110 No.42 111 문 ᰍℎ᮹ šᯙŝ $* ᗭ} 화 재 이 야 기 De$** 남기황 ᰍℎ šᯙŝ $* ᗭ} 관인은 정부 기관에서 발행하는, 인증이 필요한 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편찬토록 하여 그 이듬해 문서 따위에 찍는 도장 이다. 문화재청은 1999년 (1447) 만든 석보상절을 읽고나서 지은 찬불가(讚
현장에서 만난 문화재 이야기 2
100 No.39 101 110 No.42 111 문 ᰍℎ᮹ šᯙŝ $* ᗭ} 화 재 이 야 기 De$** 남기황 ᰍℎ šᯙŝ $* ᗭ} 관인은 정부 기관에서 발행하는, 인증이 필요한 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편찬토록 하여 그 이듬해 문서 따위에 찍는 도장 이다. 문화재청은 1999년 (1447) 만든 석보상절을 읽고나서 지은 찬불가(讚
4 7 7 9 3 3 4 4 Ô 57 5 3 6 4 7 Ô 5 8 9 Ô 0 3 4 Ô 5 6 7 8 3 4 9 Ô 56 Ô 5 3 6 4 7 0 Ô 8 9 0 Ô 3 4 5 지역 대표를 뽑는 선거. 선거의 의미와 필요성 ① 선거의 의미`: 우리들을 대표하여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을 말합니다. ② 선거의 필요성`: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지역의 일을 의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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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l 선언부에한글처리 (utf-8) 인코딩선언 - 주간예보열기 - 지역, 구역헤더열기 전국육상주간예보 주간예보제목태그열고닫기 201003080600 발표시각 :yyyymmddhhmm 시간태그열고닫기 - 기상전망열기
赤 城 山 トレイルランニンング レース 大 会 記 録 第 10 回 赤 城 山 選 手 権 保 持 者 男 子 須 賀 暁 記 録 2:35:14 女 子 桑 原 絵 理 記 録 3:22:28 M1 ミドル 男 子 18~44 歳, 距 離 32km 総 登 高 1510m ( 注 :DNF:
赤 城 山 トレイルランニンング レース 大 会 記 録 第 10 回 赤 城 山 選 手 権 保 持 者 男 子 須 賀 暁 記 録 2:35:14 女 子 桑 原 絵 理 記 録 3:22:28 M1 ミドル 男 子 18~44 歳, 距 離 32km 総 登 高 1510m ( 注 :DNF: 棄 権 DNS: 欠 場 ) 順 位 氏 名 記 録 順 位 氏 名 記 録 順 位 氏 名 記 録
할렐루야10월호.ps, page 1-12 @ Normalize ( 할 437호 )
www.hcc.or.kr [email protected] Hallelujah News PHOTO NEWS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제437호 2007년 10월 7일 (주일) 화요청년찬양부흥회 날짜: 10월 16일, 11월 6일, 11월 20일 12월 4일, 12월 18일 (매달 1 3주 화요일) 장소: 할렐루야교회
2014_조석표 변경사항.hwp
2014 조석표 ( 한국연안 ) 항행통보 : 2014 년 7 호 87 항 정정 2014 년도조석표자료를별지의자료로교체 - 3. 개정수및비조화상수 (p.293 p.299) - 4. 기본수준점표성과 (p.300 p.317) 비고 측량 수로조사및지적에관한법률제 8 조제 3 항의규정에의거설치한기본수준점의 성과가신설 변경되어별지와같이추보표를발행하오니, 사용하고있는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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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초 천도교신파의 정세인식과 조직강화* Social Awareness and the Strengthening of Organization by the New faction of Chundogyo in the Early 1930s 1)정 용 서(Jeong, Yong Seo)** Ⅰ. 머리말 Ⅱ. 신간회 해소에 대한 인식 Ⅲ. 반종교운동에 대한 대응
1, 항소이유의 요지 가. 사실오인 및 법리오해 피고인이 피해자와 공사도급계약을 체결할 당시 피고인은 피해자에게 공사대금을 지 급할 의사와 능력이 있었으므로 피고인에게 사기죄의 유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에는 사 실을 오인하거나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어 부당하다. 나. 양
사 건 2013노246 사기 피 고 인 주거 등록기준지 항 소 인 피고인 검 사 이종민( 기소), 김동율( 공판) 변 호 인 법무법인 등대 담당 변호사 원 심 판 결 청주지방법원 2013. 1. 9. 선고 2011고단2709 판결 판 결 선 고 2013. 6. 27. 원심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은 무죄. 피고인에 대한 판결의 요지를 공시한다. - 1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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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도서관정책제안자료집 2010. 7 02-529-7310, Fax: 02-6442-7310, E-mail : cultureandlibrary@ gmail.com - 2 - 1. 강원도 [ 표 1] 2008 년말기준전국공공도서관 1 관당지표 도서관수 ( 관 ) 연면적 ( m2 ) 장서수 ( 권 ) 직원수 ( 명 ) 사서수 ( 명 ) 예산 ( 천원 ) 자료구입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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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8 2004 하계캠프 생명 평화 그리고 연대 2004 대구참여연대 하계캠프를 다녀와서 지난 7월31일~8월1일 1박2일간 의성안계농촌체험학교에서 2004 대구참여연대 회원가족 하계캠프 를 성황리에 마쳤다. 120여명의 회원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하계캠프는 "생명 평화 그리고 연대"라는 주제에 걸맞게 홍근수 목사님의 평화강연,
지발홍보책_도비라목차_0125
남북교류 접경벨트 서 해 안 동 해 안 내륙벨트 신 산 업 벨 트 에 너 지 관 광 벨 트 남해안 선벨트 Contents Part I. 14 Part II. 36 44 50 56 62 68 86 96 104 110 116 122 128 134 144 152 162 168 178 184 190 196 204 Part I. 218 226 234 240 254 266
더바이어102호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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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교통이야기
Traffic talk03 01 Traffic story 02 101 02 103 03 105 107 109 04 111 113 115 05 117 119 121 묵묵히 100년을 달려온 철길 위의 기관차 증기기관차 _1899년 서울~인천 간을 최초로 달린 미국 브룩스사의 모걸형 탱크기관차를 시작으로 양적인 증가를 계속하여 1945. 8. 15 해방 당시 166량,
(012~031)223교과(교)2-1
0 184 9. 03 185 1 2 oneclick.law.go.kr 186 9. (172~191)223교과(교)2-9 2017.1.17 5:59 PM 페이지187 mac02 T tip_ 헌법 재판소의 기능 위헌 법률 심판: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면 그 효력을 잃게 하거 나 적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 탄핵 심판: 고위 공무원이나 특수한 직위에 있는 공무원이 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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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산업중분류, 조직형태 및 동별 사업체수, 종사자수 단위 : 개, 명 금정구 서1동 서2동 서3동 Geumjeong-gu Seo 1(il)-dong Seo 2(i)-dong Seo 3(sam)-dong TT전 산 업 17 763 74 873 537 1 493 859 2 482 495 1 506 15 519 35 740 520 978 815 1 666 462
10월추천dvd
2011 10 DVD CHOICE dvd dvd?!!!! [1] [2] DVD NO. 1898 [3] Days of Being Wild 지금도 장국영을 추억하는 이는 많다. 그는 홍콩 영화의 중심에 선 배우였고,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거짓말 같던 그의 죽음은 장국 영을 더욱 애잔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 이 장국영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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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전 : 25 (14%) 기계화 : 24 (14%) 전차 : 15 (9%) 총170여개 사/여단 미사일/포병 : 30여개 (17%) 보병 : 80 (45%) (단위 : 명) 해병대 : 76 해군 : 396 공군 : 8,459 육군 : 28,100 경상운영비
한류동향보고서 26호.indd
Story Story 2013. 1. 30. Story 26호 STORY Korean Wave Story 2013 STORY STORY 12 2012 한류동향보고 Korean Wave Story 2013 Korean Wave Story 2013 (2012년 1/4분기) 12 12 2012. 4. 9. 2 3 4 5 6 乱 世 佳 人 花 絮 合 集 梦 回 唐
1 [2]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MBL활용화학실험 수일고등학교 윤 상 2 [2]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MBL활용화학실험 구성고등학교 류 우 3 [2]2018개방실험-학생2기[
1 [1]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3D프린터이해와활용 상현고등학교 2 1 28 유 훈 2 [1]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3D프린터이해와활용 수원고등학교 2 6 24 정 찬 3 [1]2018개방실험-학생2기[ 고2]-8월18일 ( 오전 )-3D프린터이해와활용 수원고등학교 2 8 3 김 헌 4 [1]2018개방실험-학생2기[
1. 상고이유 제1점에 대하여 구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2009. 2. 6. 법률 제9444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구 도시정비법 이라 한다) 제4조 제1항, 제3항은 시 도지사 또는 대도시의 시장이 정비구 역을 지정하거나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미한 사항을 제외한
대 법 원 제 1 부 판 결 사 건 2012두6605 사업시행계획무효확인등 원고, 상고인 원고 1 외 1인 원고들 소송대리인 법무법인(유한) 태평양 담당변호사 이인재 외 2인 피고, 피상고인 서울특별시 종로구청장 외 1인 소송대리인 정부법무공단 외 3인 원 심 판 결 서울고등법원 2012. 2. 2. 선고 2011누16133 판결 판 결 선 고 201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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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희은 강 석우의 커버스토리 인기코너 남자는 왜 여자는 왜 를 이끌어 가고 있는 김용석, 오숙희 씨. 2007 06 I 여성시대가 흐르는 곳 I 04 >> 서울시 광진구 중곡동의 소순임 씨를 찾아서 I 창 가 스 튜 디 오 I 08 >> 여성시대의 남자 김용석, 여성시대의 여자 오숙희 I 편 지 I 14 >> 아이들의 용돈 외 I 여성시대 가족을
목 차 1. 농업기계보유현황조사개요 2. 조사대상및범위 3. 연도별주요농업기계보유현황 4. 2011 년말주요농업기계보유현황 5. 2011 년말폐농기계보유현황 6. 2011 년말시 도별농업기계보유현황 가. 조사목적 나. 조사근거 다. 조사기준및방법 라. 조사대상 마. 조사내용 < 기종별구분조사대상 > 3. 연도별주요농업기계보유현황 기종별 년도별 농용원동기경운정지기농용양수기
41호-소비자문제연구(최종추가수정0507).hwp
소비자문제연구 제41호 2012년 4월 해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이용약관의 약관규제법에 의한19)내용통제 가능성* : Facebook 게시물이용약관의 유효성을 중심으로 이병준 업 요약 업 규 규 논 업 쟁 때 셜 네트워 F b k 물 규 았 7 계 건 됨 규 규 업 객 계 규 므 받 객 드 객 규 7 말 계 률 업 두 않 트 접속 록 트 른징 볼 규 업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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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v vi vii viii ix x xi 61 62 63 64 에 피 소 드 2 시도 임금은 곧 신하들을 불러모아 나라 일을 맡기고 이집트로 갔습니다. 하 산을 만난 임금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말했어요. 원하시는 대로 일곱 번째 다이아몬드 아가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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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2월말 정년퇴직교원 정부포상자 명단 =================================================================== 연번 이름 한자 직급 소속 =================================================================== 청조근정훈장(4명) 1 선우중호 鮮 于 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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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도 한일공동이공계학부유학생 선발시험 응시대상자 명단 국제교육진흥원 연번 출신지역 성명 한자명 성별 출신학교 비 고 1 강원도 김경연 金 慶 演 남 원통고등학교 2 강원도 김수리 金 수리 여 춘천여자고등학교 3 강원도 김현석 金 玹 奭 남 강원과학고등학교 4 강원도 변준환 邊 俊 煥 남 강원과학고등학교 5 강원도 송강일 宋 江 一 남 민족사관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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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저널(11월호).ok 2013.11.7 6: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sibility Study) 등을 수행하여 인니전력 이다. 공사(PLN)를 비롯한 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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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 2. 3. 4. 제2장 아동복지법의 이해 12 4).,,.,.,.. 1. 법과 아동복지.,.. (Calvert, 1978 1) ( 公 式 的 ).., 4),. 13 (, 1988 314, ). (, 1998 24, ).. (child welfare through the law) (Carrier & Kendal, 1992). 2. 사회복지법의 체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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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15일 토요일 제 1444 호 ㅣ 법원행정처 ㅣ 2 제 1444호 법 원 공 보 2014년 3월 15일(토요일) 목 차 내 규 521 대법원사건의 배당에 관한 내규 일부개정내규 예 규 523 법관 및 법원공무원 행동강령 운영지침 일부개정예규 신법령 목록 525 인 사 528 공지사항 599 520 2014년 3월 15일(토요일) 법 원 공 보
2015년9월도서관웹용
www.nl.go.kr 국립중앙도서관 후회의 문장들 사라져 버릴 마음의 잔해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이번 해에도 배추농사에서 큰돈을 남은 평생 머릿속에서 맴돌게 될 그 말을 다시 떠올려보 만졌다 하더라도 지난 여름 어느 날 갑자기 들기 시작한 았다. 맺지 못한 채 끝나버린 에이드리언의 문장도 함께. 그 생각만은 변함없을 것 같았다. 같은 나이의 다른 아이 그래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