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논문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이영미성공회대학교 < 논문요약 > 이글은, 문화운동, 문예운동, 문화예술운동, 문학예술운동, 예술운동 등다양한명칭으로불렸던 1970년대 ~1980년대의진보적예술운동의명명에대한고찰이다. 미묘한어감의차이를지니고있는각명칭들은, 예술관의차이와직결되어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초에문화운동이라지칭된대상은, 주로탈춤과마당극을비롯한공연예술분야의운동이었다. 이활동이분명공연예술분야에속하는활동임에도불구하고, 이들은기존의보수적예술계가구축해온예술관을거부하고자하는의도로아예 예술 이란말을버리고 문화 라는말을선택했다. 1980년대말에이르러, 문화운동의담당자들의일부는작품의사상성과미학등, 작품내적인문제에더욱치중하는흐름을지니게되었고, 이들은 문화 대신 예술 이라는이름으로돌아오는경향을보여주었다. 1990년대초에이르러민주화운동이쇠 422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퇴하는한편, 사회전반에서는정치 경제에비해상대적으로덜중요하게여겨졌던문화의중요성에다시주목하는경향이나타났다. 1970~ 1980년대의진보적예술운동의담당자들은, 그동안자신들의성취해온예술의공공적실천의경험들을지역사회와정부의문화정책속에서실천할수있는기회를갖게되었다. 그럼으로써다시 문화 라는말에주목하는시대에도달한것이다. 주요어 : 진보적예술운동, 문화운동, 예술, 문화, 예술관 1. 머리말 1990년대는흔히문화의시대라고일컬어진다. 다양한문화연구의이론들이수입되면서 1980년대까지의리얼리즘론과사상성중심의예술론들을무너뜨렸고, 이는 2000년대국문학계문화연구의토대가되었다. 그런데이러한문화연구가있기이전인 1970년대 ~1980년대의예술문화 운동 1) 내에서예술과문화를둘러싼적잖은사유의변화가자생적으로 1) 이글에서는, 문학, 연극, 미술, 음악, 영화등예술분야의진보적문화운동을지칭하는용어로 예술문화운동 이라는말을쓰고자한다. 이운동이활발히이루어졌던 1970~1980 년대에 예술문화운동 이라는용어는 문화운동, 문화예술운동, 문예운동 등의말에비해그다지많이쓰이지않았던것이사실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이용어를쓰고자하는것은가장객관적이고보편타당한용어라고판단했기때문이다. 이글이, 용어를무엇으로쓰느냐에초점이맞추어져있고논의의많은부분이 문화운동, 문예운동 이라는상용화된말을중심으로이루어질것이므로, 상대적으로덜대중적인 예술문화운동 이라는용어가논의를전개하기에유리한측면이있다는판단도이선택에한몫을했다.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423
싹텄고, 20년의긴기간동안실천속에서갈등했다. 당시이러한운동적실천은 문화운동, 문예운동, 문화예술운동, 문학예술운동, 예술운동 등다양한명칭으로불렀고, 그명칭간의미묘한어감의차이가있었음은이것의단적인예이다. 이글은, 이러한명칭의차이를중심으로하여 1970년대 ~1980년대의예술문화운동내의예술관에대해, 예술의공공성에대한이해와실천의변화에초점을맞추어생각해보고자하는글이다. 이글에서다루는담론이 학계, 예술계 등으로불리는공식화된주류의것이아니어서객관적이고개념적언어를구사되어있지않다. 그러나예술운동담당자들은여러통로로예술과문화에대한관점을드러내고실천으로옮김으로써, 공식적영역의학계 예술계의예술관과경합 교섭하였다. 1990년대 ~2000년대에크게약진한학계의다양한문화연구와정부의예술문화정책등의변화는, 예술운동이만들어내고확산시킨새로운예술관 문화관과밀접한관련을맺고있다. 이글에서는, 예술 / 문화 / 문예운동이라는명칭의변화가그예술관을드러내는징후라는점에주목하고자하는것이다. 자신들의운동을어떤명칭으로부르는가하는문제는, 운동의정체성문제와직결되어있다. 그러나예술 / 문화 / 문예운동의명칭을오락가락하며찾아가고있던이들의정체성문제가 문화분야의운동이냐예술분야의운동이냐 식으로분야의정체성을찾는단순한문제라고는볼수없다. 왜냐하면, 이때의문화개념이 문화인 같은용례에서와같은 교양으로서의문화 개념이아니며, 인간의생활양식과상징체계전체를포괄하는사회학적개념의문화에가까웠고, 따라서예술은그하위범주에속해있기때문이다. 그러므로 1970년대 ~1980년대의예술문화운동은, 어떤명칭으로불렸건간에, 예술이라는분야에서이루어진문 424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화운동이었다. 따라서이시기예술문화운동의명명에서드러나는차이는, 분야 의문제라기보다는, 다소미묘하고섬세한 예술관 의문제라는것이나의생각이다. 이글이단도직입적으로정체성문제를이야기하지않고, 명칭의변화에서징후적으로읽히는지점을중심으로이야기를전개하려는것은바로이러한이유에서이다. 이글은 1970년대에예술문화운동에서 문화운동 이라는말이쓰이기시작했던시기로부터, 1980년대예술문화운동의활력이최고조에달했던 1990년대초를거쳐, 1990년대말예술문화운동담당자들이개입한문화정책관련한활동에이르기까지, 시대순으로예술 / 문화 / 문예운동의명칭이변화하는과정을추적하고이와연동된예술문화운동의실천적변화를기술하고자한다. 이러한변화는예술관의변화와, 이를포함한더넓은문화영역에대한관심이라는, 일종의관점의변화와무관하지않음을설명하고자하는것이다. 2. 탈춤 마당극운동에붙여진 문화운동 이라는이름 문화운동이라는말은, 1970년대중반, 탈춤 마당극등으로진보적인공연예술활동을하는집단에서쓰기시작했다 ( 박인배 1985, 421). 1980년대에들어서서탈춤 마당극운동 2) 의활동이다양해지고그외에 2) 탈춤운동과마당극운동은상당히일치하면서완전히일치하지않는측면이있다. 그것은마당극의탄생이한편으로는 1971 년서울대탈춤반결성과함께시작된탈춤부흥운동의흐름과, 멀리는 1960 년대부터시작된리얼리즘정신을갖춘창작극을중시하는흐름이합쳐지면서생긴것이고, 1980 년대가되어대학탈춤반에서창작작품의공연이본격화되기이전까지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425
민요, 노래, 춤, 풍물등의분야에서운동적활동이본격화되면서, 문화운동은좁게는공연예술분야의운동, 넓게는문학과미술까지를포함한예술문화운동, 좀더넓게는언론 출판 종교 교육등예술이외분야의운동까지를포함하는의미로정착했다. 마당극운동제1세대의대표자로꼽히는임진택의다음글은, 문화운동이라는용어가실제로자리잡을때까지상당한시간이걸렸음을말해주고있다 다소사적인발언으로느껴질수있겠으나필자는이방면의후배들에게 민중문화운동 1세대 라불리는연배에속한다. 그러한호칭을필자는매우과분하게여기고있다. 왜냐하면우리세대는그호칭에담긴하나하나의의미를어느것하나충족시키지못했기때문이다. 우리의활동은민중지향적이긴했으나진정민중적인데까지는이르지못하였고, 삶을규정하는문화전반을다루었다기보다는예술부문그중에서도연행예술부분만을담당했던것이고, 조직적운동이라기보다는개별적공연행위에그치는경우가대부분이었다. 따라서뒤집어말하면 80년대 10년동안많이변화했구나하는느낌은바로우리연배가하지못했던그 민중 문화 운동 이점차심화되고확장되어나왔음을뜻하는것이기도하다 ( 임진택 1990, 126-127). 임진택은 1973년김지하작 연출 < 진오귀굿 > 에서부터마당극을시작하여, 1970년대후반에기존희곡의마당극개작작업으로마당극의양식정립에큰기여를한인물로 ( 이영미 2001, 50), 1970년대그의작품 는탈춤운동이반드시마당극운동이라고이야기할수없기때문이다. 이후, 이글에서는탈춤운동의흐름까지를포괄하여마당극운동이라고통칭하고자하며, 창작된마당극이아닌탈춤에만간여된활동일경우에만국한하여특별히 탈춤운동 이라고지칭하고자한다. 426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은대부분대학이나지식인들의공간에서공연되었다. 임진택의발언에미루어보자면, 기층민중대상의활동이성장하고다양한공연예술장르의활동이어우러져 삶을규정하는문화전반 에간여하는활동으로확산되어조직적이고지속적인사회운동의성격을강하게띠게되는 1980 년대에이르러서야, 비로소 문화운동 특히 민중문화운동 이라는말이정착되었음을알수있다. 흥미로운것은위의인용문에등장하는 연행예술 이라는용어이다. 연행예술 ( 演行藝術 ) 은공연예술과같은뜻으로흔히전근대시대의공연예술을지칭할때에많이써온용어이다. 마당극운동을하던이들은자신의활동을문화운동 연행예술운동이라고는불러왔지만 예술운동, 공연예술운동 이란말은쓰지않았다. 가끔쓰인 연극운동 이라는말도탈춤운동의맥락에있는사람들에게는기피된용어였다. 구태여연행예술이라는낯선명칭을채택한것에서공연예술이라는말에대한기피의심리가엿보이는바, 이와함께 예술 을 연행 이나 연희 란말뒤에붙여 예술 이란말의어감을약화시키고있다는점도주목할만하다. 이런경향으로미루어볼때 1970년대 ~1980년대의문화운동이라는용어는, 예술운동 혹은 공연예술운동 이라는말을기피하는심리와관련있음을짐작할수있다. 예술운동 공연예술운동이라는말의기피심리는, 낯익은용어에묻어있는통념으로부터벗어나고싶었기때문에생겼을것이다. 그활동이분류상예술 공연예술임을거부하는것이라기보다는, 기존예술 공연예술과동류의것으로, 기존예술계나공연예술계내의활동으로받아들여지면안된다는생각인것이다. 즉자신들의활동은, 이미지식인 상류층중심의활동관행이고착된예술계 공연예술계내에서새로운작품경향을흐름을만드는것과는차원이다른, 아예그계를벗어나이들과는다른존재방식을지녀야한다고이들은생각하고있었을것이다.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427
이는문학분야의운동이첫시작부터 1990년대까지줄곧문학운동혹은민족문학운동으로불리며, 기존의문학들과마찬가지로문학지 단행본등합법적출판시장안에서활동한것과대비된다. 문학운동과달리마당극운동, 노래운동, 영화운동등은, 상설공연장중심의연극계, 방송과음반시장, 상설영화관중심의극영화시장에서의활동에서크게벗어나있으며, 그와조응하여주활용매체까지도기성예술계와차이를보이는경우가많다. 미술은전시장과기존미술시장중심으로활동하는축과그바깥의활동에주력하는이른바 현장미술 축으로반분되어있는양상이었다 ( 이영미 2012). 이렇게기성의연극과존재방식이달랐던이들은, 자신들의활동을다른명칭으로지칭하고자했고, 당대연극계에서는낯선 연행예술 이란말을소환해낸것이다. 그러나 예술 이라는말의기피로시작한새로운명칭찾기가 문화 란말에귀착한것은, 이외에몇가지요인이있다고보인다. 그첫이유로들수있는것은, 마당극운동을추동한하나의뿌리인탈춤의존재이다. 마당극운동태동당시탈춤의학술적명칭은 가면극 이었고, 탈춤운동을시작한서울대탈춤반의공식명칭도 민속가면극연구회 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탈춤운동의주체들이탈춤운동을연극운동이라생각지않은것에는, 탈춤의학술적명칭과무관하게그것이연극이라기보다는 전통문화 로주목받은맥락과무관하지않다. 1964년시작된무형문화재제도에서는예술과비예술모두동일하게민족문화, 전통문화, 문화재로명명되었다. 박정희집권기의이른바전통문화는정권과진보적지식인의치열한담론경합의장이었고 ( 이영미 2004, 21-23), 탈춤의소환은, 탈춤이라는한종목의문제가아닌사회 역사적맥락전체에간여된것이었다. 게다가탈춤은서구근대의예술형태분류로보자면연극 춤 음악등이결합된것이었고, 심지어 < 하회별신굿 > 같은농촌탈춤은예술 428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을넘어선굿, 즉의례 축제이기도했다. 탈춤 마당극운동은, 탈춤뿐아니라풍물 ( 농악 ), 무굿등다양한전통공연예술들로관심을넓히면서, 점점서구근대의예술장르구분법에얽매이지않게되었고연극이라는명칭과도멀어졌다. 풍물과무굿은탈춤보다도연극적요소의비중이더적은대신놀이 의례등예술외적측면이더강했고, 이에따라 문화 라는좀더넓은범주의상정이불가피해졌다고보인다. 다른한편으로, 탈춤 마당극운동이출발에서부터사회운동과긴밀한관계를맺어왔다는점도 문화운동 이라는명명에영향을주었을것으로보인다. 마당극의맹아적형태를보인 1960년대중반서울대연극반의 < 원귀마당쇠 >( 조동일작 ) 는연극인동시에한일수교반대운동의한복판에존재했다. 1973년 < 진오귀굿 > 이원주가톨릭농민회회원들을위한교육적목적의연극이었고, 이렇게명확한관중설정과공연의실천적맥락은마당극이라는독특한연극양식을탄생시킨중요한힘이었다 ( 이영미 1991, 16-17). 이후마당극들도 < 진동아굿 >(1975), < 동일방직문제를해결하라!>(1978) 등에서확인되듯사회운동과결합되는경우가빈번했고 ( 박인배 1985, 431-449), 대학생들의마당극조차일종의대리집회로서의성격을지니는경우가많았다. 이렇게공연행위가사회운동의일환으로이루어지고받아들여지면서, 이들의활동은자연스럽게정치적투쟁이나경제투쟁등의영역과구별되는문화적투쟁으로의위상을지니게되었다. 정치, 경제 등의영역과나란히거론될수있는동일반열의용어로는당연히 예술 이아니라 문화 일수밖에없었고, 활동의주체들도자신들의공연이교육적효용성같은여타문화의영역에간여되어있음을인식했을것이라보인다. 이렇게 1970년대중후반문화운동이란용어를시도했던이들은, 1980년대초에이르러대중문화현실에대한비판적인식과결합하여용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429
어사용의근거를확고히하는양상을보여주었다. 황선진 박인배 김성기의 대중문화에대한비판적고찰과실천적대안 은그대표적인글인데, 이글에서는문화를 한사회구성원들의생활에뿌리를박은의식의총체적표현이며, 그사회의정치적 경제적구조와밀접한연관 되어있다는사회학적의미로규정하고, 점점강력해져가는대중문화의문제점을분석한후문화운동의필요성과그간의성과들을정리하였다. 탈춤운동을정리한채희완의 70년대의문화운동 의수록책자제목이 문화와통치 이며그첫글이유재천의 민중문화와대중문화 인것도흥미롭다. 여러논의들이균질하지않다하더라도, 1977년류인렬의 민중문화운동으로서의연극, 1980년임진택의 새로운연극을위하여 ( 임진택 1990) 가연극으로부터이야기를출발하고있는것과달리, 1982년, 1983 년의글들에서는 대중문화대민중문화 라는새로운대립구도가설득력을얻으며확산되기시작했음이확인된다. 자신들의운동이, 사람들의가치체계, 감정 신념 행동양식을변화시키고, 이로써그사회의제도와구조를변혁하는실천이라는생각으로나아간것이다 ( 박인배 1985, 423). 1983년부터각대학에서동아리나학과학부생들의학술대회, 혹은학보나교지의특집등을통해문화운동에대해소개하고정리하는글들이쏟아져나옴으로써, 3) 공연예술분야를중심으로문학과미술까지를포함한예술운동을문화운동으로지칭하는경향이굳어졌다. 이렇게마당극운동에서시작된문화운동이라는명칭은, 초기에는탈춤의특성에서비롯된측면이크지만, 점차민주 민중운동내문화영역에대한존재감을확보하고주체들이문화전반에대한관심이커지면 3) 1982 년에는서울대문학연구회, 1983 년고려대문학연구회, 1985 년서울대국사학과에서학생들의공동연구로문화운동관련글들을발표했다 ( 박인배 1985, 426). 430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서자리를잡았다. 예술문화운동이, 인간의삶의태도, 생활방식, 감성등의광범위한변화를수반하여궁극적으로사회전체의변화를이끄는역할을담당해야한다는생각이자리잡으면서, 이들은 예술, 공연예술 이란말에묻어있는협애화된예술효능의고정관념을떨어버리고, 문화의일부분으로서의예술이지닌존재감과공공적효용성에눈뜨게되었다고할수있다. 문화운동 이라는명칭은, 바로이러한예술관의변화와조응하는것이었으며, 이명칭이보편화되는 1980년대에이들은실천으로예술관의변화를보여주었다. 3. 문화운동 이라는이름값과실천 1) 축제 의례와교육, 생활문화까지 1970년대에시작된 문화운동 이라는명명은 1980년대의예술문화운동의실천의방향과조응하는양상을보였다. 기존의본격예술분야에서여태껏그다지관심을가져오지않았던영역에대해이들은적극적인관심을표명했고, 자신들의활동영역을확산하기에이르렀다. 가장먼저들수있는것이예술작품이놓이는콘텍스트에대한인식이었고, 이들은이를통해생활문화영역의실천으로까지나아갔다. 1980년 3월, 아직제5공화국정권이시작되기이전인이른바 민주화의봄 에발표된임진택의 새로운연극을위하여 와드라마센터무대에서화려하게공연된연우무대의마당극 < 장산곶매 >( 황석영원작, 공동창작극본, 이상우연출, 채희완안무, 김영동음악 ) 는 마당극 이라는새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431
로운연극양식의이름과존재를기존예술계에널리알리고공식화시킨가장중요한두사건이었다. 그러나임진택의 새로운연극을위하여 는기성연극계바깥의활동의강조에도불구하고연극양식으로서의마당극에대한설명또한강했다. 이에비해, 이후 1980년대초의글들은마당극의축제적특질과교육적효용성등, 주로작품외적측면에치중함으로써, 마당극운동의예술관변화를드러내보였다. 앞서언급했던 1982년채희완 임진택의 마당극에서마당굿으로 와류해정의 우리시대의탈놀이, 이듬해에발표된김성진의 삶과노동의놀이 와류해정의 새로운대동놀이를위하여 가대표적이다. 4) 마당극에서마당굿으로 는연희자 관중관계나공연장소등마당극에대한표현방식에대한논의와관심이마당극의전모를이해하지못하도록한다고지적한다. 마당극은 기존연극권의일부로편입된개별양식의하나에불과한것이아니라기존연극권, 나아가서는기존문화권전반을일단부정해야할낡은질서로파악하고이를개선하려는데서, 민중속에서자연발생적으로분출된커다란해일같은것 이라함으로써마당극이 문화운동나아가사회운동의선두 ( 채희완 임진택 1982, 192-195) 에서있다는사회적맥락과가치개념으로서의의미로이해할것을주장한다. 마당극에대한연극양식중심의사고를뒤집어줄것에대한이글의강력한요구는 극에서굿으로의회귀 라는역설을도발적으로제시하는데에까지이른다. 중세의연극에서근대극으로의이행은, 축제와의례의일부로존재했던극성 ( 劇性 ) 을강화하며독립하는것, 즉 굿에서극으로의발전 이라고설명된다. 그러나이글은, 근대의연극이굿 축제 의례로서의성격을상실하여생활인의삶의맥락으로부터유 4) 이글들의마당극운동론사적위상은, 이영미 (1997), 제 II, III 장에서상론하였다. 432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리된현상을극복하기위해서는전근대시대의연극이지녀온굿의성격을회복해야하므로 극에서굿으로의회귀 라는역설적명제 가필요하다고주장한다. 즉마당극은그본질이축제 의례의일부로서의연극이라는것이다. 한편 마당극에서마당굿으로 가마당극의축제적성격을강조하는것에비해, 우리시대의탈놀이 와 삶과노동의놀이 는비전문인들이만든짧고소박한놀이적연극도막들이지니는중요성을설명한다. 촌극, 극놀이, 탈놀이등으로지칭되는이것들은아직독립적인공연이되기는힘든소박한연극도막들에불과하지만, 이러한소박한연극만들기는비전문인의마당극창작의기초인동시에비전문인들의생활체험과인식을객관화하는교육으로중요하다는것이다. 또한비전문인의자기표현교육의성과를바탕으로축제 의례를변화시킨실제사례와실천적제안도담고있다. 이글들이독자적연극공연관행이외의실천을구체적방법론과실천사례로보여주고있음은주목할만하다. 실제로이시대의마당극운동은노동조합 야학의연극교육이나농민대상풍물교육등을수행해왔으며, 이들과함께한공연은조합 마을의축제가되었다. 여기에서나아가이들은기독교의예배같은기존의의례에민요나무굿, 연극의요소를강화한창의적사례도소개하고있다 ( 김성진 1983, 115-162). 특히류해정의 새로운대동놀이를위하여 에서제시한축제의구상은, 1983년 5월의고려대봄축제를 안암대동놀이 라는이름의새로운형태의축제로결실을맺었다 ( 이영미 2011(5권 )). 이후각대학이이방식을받아들여, 1990년대초까지대학의축제는, 1970년대의연예인초청쇼와쌍쌍파티중심의방식을벗어나, 학생들의촌극발표, 민속놀이, 대규모의줄다리기등으로이어지는 대동놀이 방식으로이루어졌다. 또한 1987년이한열장례식과 1991년강경대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433
장례식등 1980년대중반이후민주화운동맥락에있는장례식들이노래 춤과풍물패의행진등연출된공연으로서의성격을띠게된것, 예식장에서이루어지는서양식혼례대신초례청에서의맞절과공연이곁들여지는방식으로구성된새로운혼례가유행한것 5) 등도같은맥락에서이해할수있다. 1980년대에생긴이러한변화는, 비전문인들에의해자연발생적으로이루어진것이아니라, 마당극운동속에서전문적으로구상 기획 연출되고다듬어지면서전국적으로확산된것이었다. 조형예술분야의예술운동에서도양상은비슷했다. 미술운동은예술계안과밖에서활동하는그룹이나뉘어있는양상을보였다. 1980년에진보적미술운동을처음시작한동인 현실과발언 과 1982년에출발한동인 임술년 이, 비록주류미술계의외곽에위치하기는했을지언정주류미술계와마찬가지로전시장중심의활동을했던것에비해, 홍성담이주축이된 광주자유미술협의회 (1979) 와김봉준이주축이된동인 두렁 (1982) 은전시장으로대표되는기존의미술유통구조의바깥의활동에치중했다. 이들은시민미술학교를열어비전문인교육을개최하고다량생산으로값싼공급이가능한판화등을유행시켰다. 또한마당극공연에쓰이는탈과깃발, 탱화를원용한대형걸개그림과벽화등많은사람들이볼수있는야외용작품, 타분야예술과결합한대중적그림인만화등을주로창작하여, 기존의미술계내부의관행과전혀다른방식 5) 동아일보 1987 년 5 월 4 일자에수록된고미석기자의기사 결혼풍조이대로좋은가 (13) 전통혼례늘고있다 에서는, 놀이마당에서하객과어울리는결혼, 마당밟이풍물을앞세우고청색과홍색두루마기를입은신랑신부가초례상에서맞절을하고, 밀양백중놀이의오북춤이축무 ( 祝舞 ) 로공연된결혼식, 일률적인바그너 < 결혼행진곡 > 연주가아닌삼현육각이나풍물반주를쓰고축가로판소리중의 < 사랑가 > 를부르는결혼식등을소개하면서, 이같은현상은 70 년대부터대학가에자리잡은탈춤등우리민속연구에대한관심의연장으로도풀이된다 고설명하고있다. 434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의활동을전개했다. 마당극운동이 무대극 과 마당극 이라는새로운용어를만들어낸것처럼, 이들은기존의전시장중심의미술과구별되는자신들의작품활동을지칭하는말로 현장미술 이라는말을썼다. 흥미로운것은, 이현장미술을시도한두그룹이모두마당극운동과긴밀히연관되어있다는점이다. 광주자유미술협의회는 1980년 5월의광주항쟁을통해광주지역의마당극운동과결합하여함께활동하였고, 두렁은홍익대탈춤반멤버이면서미술대학학생이었던사람들이주축을이루고있다. 이들의작품이, 기존미술계의작품경향과달리, 탱화와굿그림, 민화, 전통연희의여러소품조형물등, 전근대시대조형예술의형상화방식과민속연희의미감을적극계승한것, 전문인들의대형집단창작이많고비전문인창작에적극적이었던점등을한것은, 바로마당극운동의활동방식과궤를함께하며발전했기때문에가능한일이었다. 이들의작업은, 전시장밖의그림, 벽화같은공공미술등을넘어서서, 연극과집회에필요한탈과깃발, 만장등의다양한소품과, 옷이나달력, 손수건같은생활소품으로까지나아갔다. 특히두렁멤버였던이기연이주도한 1984년민족생활문화연구소내의우리옷사업단 ( 이후 질경이우리옷 으로발전함 ) 은, 6) 디자인과문양개발로시작하여본격적인개량한복의제작으로나아갔고, 1980년대말이흐름이급격히확산되어생활한복붐을일으켰다. 1990년대이후전시장바깥으로나간미술운동의흐름은훨씬다양한파급력을보였는데, 1980년대미술운동의막내들은출판계의일러스트일을적극적인자신의일로받아들였고 1990년대이후일어난어린이책붐을맞아본격적인그림책작가첫세대를이루었다 ( 차형석 2013, 54). 또 1990년대말부터활발해진마을벽화그리기 6) ( 주 ) 질경이홈페이지참조 (http://www.jilkyungyee.co.kr/).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435
등의공공미술활동역시이흐름의맥락에있다고할수있다. 이렇게 1980년대에문화운동이라지칭되었던공연예술과미술분야의예술문화운동은, 기존예술계의바깥에서작품경향과유통구조양쪽에서모두다른방식의활동을전개했다. 그방향은모두일반인들의삶과긴밀히결합되는방식을추구한것이고, 작품을삶의공간으로긴밀하게이동시키는방식으로부터출발하여, 삶속의다양한예술적요소들의변화에적극적으로개입하는등의문화적실천을지속적으로해온것이라할수있다. 2) 공동체와조직, 그리고교육이시대의예술문화운동이예술계내의운동이아닌문화운동임을보여주는또하나의지점은 공동체 에대한관심과노력이다. 문화사업이란주로선진문명을후진지역에소개하거나상층문화를하층에보급하는사업을일컫는말로서민중스스로의능력을개발하기보다는일방적으로베풀어주면서물량적으로과시하거나행사적의미에그치는경우가많은데, 문화를빙자해서영리를추구하는경우마저없지않아비판의대상이되기도한다. 문화정책이란관에서주도하는것이므로 ( 중략 ). 그럼문화운동은무엇을말하는가? ( 중략 ) 그리고문화운동이란한시대를살아가는개개인의문화적요소를그동질성과전진성을기초로하여하나의커다란흐름으로합류케함으로써추진력을극대화하고, 아울러그것이다시개개인의심성이나정서속에고루되돌려지게함으로써확대재생산의구조를갖추게하는공동의모임과움직임을뜻한다. 그리 436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하여문화운동은문화의가치 효용성 영향력에대한신뢰를바탕으로인간정신의변혁과민족적 민중적공동체의식의고양을목표로전개된다 ( 채희완 임진택 1982, 196-197). 마당극운동을처음부터이끌었던두대표주자의 1982년글중, 문화사업이나문화정책, 문화주의등과구분지어문화운동을설명하는대목이다. 다분히선언적인표현들로채워져있는이대목에서 공동체의식의고양 이란말은주목을요한다. 이보다앞서임진택의 새로운연극을위하여 에서도 마당극이이루어진근본적인활력이공동체적유대감에있 다고설명하고있지만, 이는관중과연희자가유연하게소통하고때때로하나로통일되는마당극에대한설명에국한한것이었다. 그러나위의인용문을보면 공동체의식, 공동체적유대감, 공동체정신, 공동체문화 등이, 단지마당극의특성에국한되지않고, 문화운동의목표의하나로설정되어있는것이다. 공동체 란말은 1980년대중반까지의예술문화운동에서매우빈번히등장하는말이다. 이는문화운동의의식을지닌이들이, 예술작품의변화를넘어선문화의변화를목표로하고있었고, 그목표의하나로공동체성을지닌문화를상정하고있었기때문이었다. 공연예술분야예술운동과가장긴밀한관련을맺고있던부정기간행물인 공동체문화 7) 의창간사에서도이렇게밝히고있다. 7)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뿌리깊은나무 까지폐간을당한 1980 년대초는, 정기간행물등록이필요없는부정기간행물 ( 당시에는 무크 라는표현을많이썼다 ) 의전성시대였는데, 마당극운동을해오던이들이만든부정기간행물은 1983 년 9 월첫호를내는 공동체문화 ( 도서출판공동체에서출간 ) 였다. 1984 년민중문화운동협의회가창립되면서, 도서출판공동체는이들과같은사무실을썼고 문화운동론 1 2 와 노래운동론 을내기도했으니, 이들의긴밀한관계는문학운동에서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실천문학 과의관계와비견될만하다.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437
우리는민족통일과민중생존에대한심화 보편화된문제제기를위해 전형적이고새로운 문화의개념을정립하고자한다. 문화는한사회의의식구조에바탕에깔려있는 스며드는모체 ( 母體 ) 로서, 식민지배의가장원천적이고가장집요하고가장타락한도구로전락하기도하지만, 그건강하고전투적인민중적감수성이회복여부에따라가장첨단적이고가장효과적인무기가될수있음을우리는제3세계모든실천적문화운동의예에서보았다. 주체적이고통일지향적인 공동체적감수성 을갖춘문화가서민의생존의식속에튼튼한뿌리를내려야함은바로이때문이다. 8) 그러나막상그공동체가어떤의미이며, 공동체문화의성취가무엇을의미하는것인지에대해서는그리명확하게설명하고있지못하다. 같은글안에서도국가 민족단위의민족공동체에서부터전근대사회의농촌공동체같은경제적공동체, 혹은집단적유대감정도의의미로읽히는공동체의식등다양한의미의공동체란말을뒤섞어쓰고있고, 그러면서도이들은자신들의활동이 복고적인공동체회복운동 과는구별되어야한다고주장하고있다. 따라서이들이생각하는공동체의실체가과연무엇인지를정확하게알기는어렵고, 또개인이나그룹마다의편차가크다고보인다. 그나마이시기마당극운동중심의예술운동에서생각하고있던공동체에대한생각을짐작할수있게해주는글이 공동체문화 첫호의권두좌담 공동체에대한역사 경제학적전망과문화운동의시각 이다. 경제학자 역사학자인정윤형, 정창렬과, 민요에관심있는시인신경림, 그리고탈춤반출신으로예술문화운동을해온채희완, 8) ( 미상 ), 분단극복의문화운동, 공동체문화 1 집 ( 공동체, 1983), 4 쪽. 창간사에해당하는이글은 공동체선언 이라는꼭지이름이붙어있고, 문체로보아채희완이쓴것으로추정된다. 438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김순진, 김상태 ( 화가라는직함과발언내용으로미루어보아김봉준이가명으로참여한것으로추정됨 ) 가참여한좌담인데, 이좌담을보면역사학자, 경제학자들과예술운동멤버들의생각의간극이확연히확인된다. 정창렬과정윤형은중세적인농촌공동체처럼경제적기반을가진공동체를이시대에복원하는것은불가능하고, 인간소외등산업사회에대한반성으로전근대사회의공동체를모델로설정한이론이나사회운동은모두실패했다고지적한다. 현대의사회운동에서공동체적관계는저항의힘을모으는방법이자투쟁동원의연줄이었지, 저항의식자체가공동체적삶과관련이있는것은아니며, 개인주의적문화에대한반감으로마을공동체형태에향수를느끼는것은경계할일이라는것이다 ( 정창렬 정윤형 신경림 채희완 김상태 김순진 1983, 10-36). 흥미로운것은, 이러한역사학 경제학자들의지적에대해예술문화운동멤버들이별다른반론을펴지않으면서도여전히공동체의중요성을강조하고있다는점이다. 이들은전근대적인공동체적관계를청산해야하지만 새로운삶의공동체를창조 ( 정창렬외 1983, 31) 해야한다고주장하며, 공동체의원형으로전통민속연희가이루어졌던농촌공동체를계속거론하면서현대의대중문화등의극복을위해공동체문화의회복을강조하고있다. 그래서이좌담은계속삐걱거리는양상을보이고있다. 이런현상은, 예술운동멤버들이주장하는공동체가이론적인타당성을지니기보다는다분히체험적인면에근거한것이기때문에생겨났다고할수있다. 탈춤 마당극을공연하고농민 노동자를만나활동하면서갖게된특정한체험이, 예술운동내부에서공동체라는말로집약되어이시기에이르러확고하게고착됨으로써, 자신들이감동적으로체험한공동체가역사학자 경제학자들이지적하는경제공동체의실현불가능성이나공동체적관계의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439
다양한해악들과는다소무관한것이라고치부해버리고있는것이다. 이들이공동체라는개념을소환하도록한체험은크게두가지라추측된다. 이들의활동은크게공연과비전문인동아리대상의교육 조직화로양분되므로, 공동체라는개념을소환한체험역시이두가지와관련있을것이다. 탈춤이나마당극은관중의집단적이고자발적인참여와이에상응하는연희자의호응이핵심적원리이자특징이며, 연희자와관중이집단화되는강렬한체험을만들어낸다. 그런데집단성과자발성이란공동체의특성이기도하다. 실제로전통연희가지닌관중참여적인성격은, 전근대시대의공동체성원이지닌집단성과자발성에바탕하고있는것이었다. 전근대시대의공동체가사라진현대에탄생한마당극은, 개별화된관중이입장료를지불하며모이는상설공연장이아닌, 학교나직장, 마을등에서함께생활하는관중집단을대상으로하여공연하는경우가많다. 따라서서구근현대연극에바탕을둔여타연극과달리집단화 자발화된관중과주로만나왔으며, 집단성과자발성의정도가약한관중을만날경우에도의도적으로집단성과자발성을비약적으로고양시키는여러방법을쓴다 ( 이영미 1998). 이러한공연을누적적으로경험한이들은, 자신들의활동이공동체성을회복하고고양시키는활동이라고확신했을것이다. 한편, 교회나야학등의동아리에서비전문인들에게극놀이나풍물등을가르치고함께창작한활동은, 구성원의집단성 자발성의고양이지속성을띰으로써이들의조직화와사회의식발전에기여했다. 자신들의교육이유대감의고양뿐아니라실질적인조직화의결실로남는것을경험한이들은, 자신들의활동이 공동체의식, 공동체성 의고양뿐아니라 새로운공동체구성 을가능하게한다는생각을했을수있다. 물론노동자 농민 빈민을대상으로했던이러한조직화와교육을 공동체 440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의회복 혹은 새로운공동체의구성 이라고이야기할수있는지에대해서는의문의여지가있다. 그것들은농민운동 노동운동의발전과정에서언제든지해체되거나재조정되어야하는성질의것이기때문이다. 하지만공동체논의가발전한시기는 1970년대후반부터 1980년대초까지의시기, 즉노동자와농민의조직화수준은매우낮았고, 그나마 1970년대까지의민주노조들이 1980년봄에모조리와해되어대부분의사업장에서노동조합 ( 어용노조를제외하고는 ) 이존재하지않았으며, 농민운동도가톨릭농민회나기독교농민회같은종교조직에근거한농민조직에기대고있던시절이었다. 따라서이시기에는조직화자체가매우중요한성과이고귀한경험이었으며, 이러한조직이향후어떤성격으로발전할지에대해서는아직논의될수준이아니었다. 조직화자체가불온시되었고, 노동자 농민들의심리가위축되어조직화의진척이더뎠던때에, 탈춤 연극 풍물등공연예술교육을통한조직화는상당한성과를보인것이사실이다. 앞절에서언급한류해정과김성진의글, 그리고박인배의 생활연극체험기, 공동창작에대하여 9) 는이시기비전문인대상의교육성과와원칙등을서술한글이며, 이정도의기록이나왔다는것은상당한성과가축적되었음을말해주는것이다. 즉이들은, 공연예술시장에서의활동을넘어서서, 비전문인대상의예술교육, 이를통한조직화와조직강화활동을하고있었고, 이는자신들의활동이 예술 영역을넘어선 문화 영역의일이라는인식이뒷받침되어야가능한것임은말할것도없다. 이러한활동에대한자신들의경험을집약해주는것으로이들은 9) 각각 시와경제 2 집 ( 육문사, 1982) 와연우무대 < 허연개구리 > 공연팸플릿에발표되었으며, 이영미편저, 구술로만나는마당극 3 (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2011) 의 박인배편 에재수록되어있다.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441
공동체 라는말을소환해낸것이다. 특정시기의경험에만기대었을뿐보편타당성의점검이부족했던이시기의공동체논의는, 이후사회운동의발전수준에따라재조정될수밖에없었다. 공연이나예술교육과정에서의집단성 자발성고양의체험은여전했지만, 1985년구로연대투쟁을계기로노동운동의성장이가시화되고발전방향에대한논의가활발해지면서예술운동에서도단순한조직화를넘어선조직의위상이나발전방향까지고려해야하는상황에봉착했고, 따라서자신들이만든모임에대해단순히 공동체의회복 이란단순한말로의미화하기힘들게되었기때문이다. 부정기간행물 공동체문화 도 1986년의 3집에이르면예술운동분야의공동체논의가제거된생활공동체논의로축소되고, 10) 민중문화운동협의회의기관지인 민중문화 에서도창립시기인 1984년에는종종등장하던공동체에대한이야기가 11) 1985년즈음에이르면거의사라진다. 민중문화운동협의회는 1986년한해동안, 문화운동이노동 농민운동과어떤방식의조직적관계를가지는것이옳은가하는문제를놓고열띤토론을벌인결과, 노동자와농민을대상으로한공연과예술교육은자신들의활동영역이지만, 그들조직에대한정치적 조직적지도는자신들의일이아니라각계급 계층운동에서해야하는일이아니라는결론을내었다. 12) 이제공동체란그저정서적유대감등을의미하는 공 10) 공동체문화 3집에는 공동체를어떻게볼것인가 라는특집으로, 신부정호경이쓴 생활공동체란무엇인가, 박재일 정성헌등농민운동가들이참여한좌담 생활공동체운동, 그평가와전망, 그리고민속학자임재해가민속문화를설명한글 마을공동체민속의통합적기능과생산적기능 이수록되어있다. 11) 민중문화 창간호 ( 민중문화운동협의회, 1984.6) 에는송기숙의 선인들의공동체적삶의모습 두레와어촌계, 신용하의 두레공동체와농악의사회사 의요약된글이수록되어있다. 442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동체의식 으로서의미있을뿐임이명확해진셈이다. 이후예술운동의노동 농민대상의예술교육은, 새로운공동체의구성 이아닌 대중문예사업, 연극교육, 풍물교육, 노래교육 등으로지칭되었고, 1990년대까지창작 공연활동과예술교육은예술문화운동의중요한두가지활동축으로서의위상을유지했다. 이렇게 공동체 를둘러싼논의와실천은, 문화 라는말을통해예술의공공성의한영역에대해새롭게눈뜨고, 실천과정에서예술인들이공공적활동을할가장적절한영역이무엇인지를모색해간과정에위치해있다. 3) 민중문화운동협의회의관할범위와그변화공연예술중심의예술문화운동이가진 문화운동 이라는자기정체성은, 1984년협의체적조직으로만든민중문화운동협의회 (1987년이후 민중문화운동연합 으로개칭 ) 의포괄범위에서도나타난다. 1984년 4월에창립한민중문화운동협의회 ( 이하 민문협 ) 는, 대학에총학생회를허용하고반 ( 半 ) 합법수준의이른바 재야단체 를허용했던제5공화국정권의후반기에,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노동자복지협의회에이어세번째로생긴재야단체였고, 예술문화운동의협의체적조직으로서는최초의단체였다. 민문협은마당극운동출신들이주축을이루었지만, 초기에는흥미롭게도문학, 미술, 언론, 출판, 교육, 종교등문화의여러분야를포괄하는모양새를갖추었다. 민문협은의장이없고실행위 12) 1986 년여름수련회에서민문협은민중문화운동을지항하는 ( 전문 ) 지식인의조직이라규정짓게되었다. 따라서전문예술인을 조직대상 으로노동자와농민의기층민중을주 활동대상 으로설정하게된것이다 ( 박인배 1993, 275).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443
원회가의장단의구실을했으며사무국장이업무를총괄하는조직구성을지니고있다. 그런데실행위원회구성을보면, 채희완을제외하고는, 송기숙 ( 소설가 ), 원동석 ( 미술평론가 ), 허병섭 ( 목사 ), 황석영 ( 소설가 ), 김종철 ( 언론인, 문학평론가 ), 여익구 ( 불교인 ), 호인수 ( 신부 ), 김학민 ( 출판인 ), 최민화 ( 청년운동가 ), 채광석 ( 문학평론가 ) 등여타분야의사람들로구성되어있다 ( 민중문화운동협의회 1984). 마당극운동의최고선배인채희완이불과 30대중반의나이였고, 제도권밖에서집단적으로활동하는공연예술분야운동의특성상문학이나미술에비해상대적으로명망가의수가적었으므로, 30대후반이상의다소명망성있는사람들이실행위원회로포진하여조직을보호하고활동을조율하는방식을택하고있었던것이다. 하지만민문협의하부는이와는전혀다른모습이었다. 처음민문협이출범할때에는하부가존재하지않았지만, 이내그동안서울에근거지를두고활동하고있던각분야의예술집단이민문협의소속단체로합류했다. 당시이들을 문화패 혹은 창작소집단 이라불렀는데, 1984 년부터 1986년까지민문협에가입한문화패를열거해보면, 놀이패한두레, 노래모임새벽, 민요연구회, 풍물패터울림, 춤패신, 굿패비나리, 극단천지연등의창작 공연을주활동을하는공연예술모임과, 미술패두렁, 영화패서울영상집단등이었다. 예술분야에서도문학분야에서는민문협에참가하지않았고미술분야는소극적이었는데, 개인단위가아닌집단을통해창작이이루어지고기성예술계의생산 유통구조를과감히벗어날준비가되어있으며, 정치적실천성을강하게발휘할수있는가여부가, 민문협참가를가늠하는요건이었을것이다. 예술영역내에서도장르별특성에따라참가여부가이렇게각양각색이었으니, 그외의교육, 언론, 출판, 교육처럼전혀활동방식이나멤버의성향이다른분야에서민문협에참가하기는거의불가능했을것으로보인다. 444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이처럼민문협에서포괄하지못한분야는, 이후자유실천문인협의회 (1970년대부터이어져온단체로 1984년재창립 ), 민족미술협의회 ( 현실과발언, 임술년, 서울미술공동체등이주축이되고두렁역시가입되어있음, 1985년창립 ),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 ( 이른바대학생과운동권이애독하는도서를주로발행하는진보적출판사들의단체로 1986년출범 ), 민주언론운동협의회 ( 해직기자들이중심이된단체로 1984년창립 ), 민주교육실천협의회 (1985년부정기간행물 민중교육 출간과이관련교사의사법처리를계기로 1986년에창립된단체 ) 로각기별도의협의체를발족한다. 이 5개단체와민문협을합하여 문화 6단체 라불렀고, 이들협의체들은이른바재야단체들이중심이되어움직이는전체민중 민주운동판에문화분야를대표하여활동했다. 13) 그런데이문화 6단체중민문협은, 구성원의나이가가장젊고학생운동경험이많으며집단력도강했고, 또각대학예술분야진보적동아리에대한지원등을통해계속새로운인력을충원받는활동력있는단체였다. 잦은회의나강도높은수련회등을열수있을정도로협의체의응집력이가장강했고, 성명서발표, 시위, 농성, 노동 농민운동지원등집단적인실천활동을가장활발하게펼칠수있었던것이다. 따라서민문협은, 민중 민주운동의연대틀안에서문화분야를대표하는단체의위상을지니고있었는데, 다양한분야의정체성을가진실행위원회가오랫동안유지되었던것은바로이러한민문협이지닌독특한위상과무관하지않다. 이렇게민문협은애초에설립시기의목표와무관하게, 실제로는공연예술창작소집단의단체가되었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자신들의예 13) 예컨대 1987 년 6 월항쟁을전후한시기에이문화 6 단체는공동성명서등을발표했고, 언론에서도 재야 6 개문화단체 로함께서술하고있다 ( 동아일보 1987/04/16).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445
술이문화의한분야이며, 정치영역에서주로활동하는청년운동과학생운동, 노동 농민 빈민운동등과연대하여, 이사회의정치 경제적변화와함께예술문화의변화를이룩하는활동을하고있다는정체성을지니게되었다. 민문협에소속된문화소집단은, 일반적인시위나농성에민문협단위로참가하고, 집회 조직 교육에효용성을지닌작품을적극적으로생산하고종종직접강사를파견하여예술교육활동을전개하였는데, 이로써이들은자신들의예술이예술계내의활동을넘어서서좀더적극적인공공적실천성을발휘함으로써, 사회구성원의일상과의식을변화시킬수있고, 더나아가정치 경제영역의변화에까지적극적으로영향을줄수있다는확신을가졌다고할수있다. 4. 예술 의복귀와예술관의경합 자신들의활동이 예술 임이분명함에도불구하고 예술 이라는말을버리고 문화 란말을채택함으로써, 자신들의예술이삶의양식과사유방식 가치체계라는의미에서의문화의한부분임을드러낸 1970년대 ~ 1980년대의예술문화운동은, 1988년이후예술문화운동조직의분열과갈등과정에서예술관을둘러싼이견을표출한다. 주목할지점은, 민중문화운동연합 ( 민중문화운동협의회가 1987년부터민중문화운동연합으로개칭. 이하 민문연 ) 의공식적논의에서 예술 이라는말과기존의예술분야의구분법이복원되었다는점이다. 이시기에 문화운동 이라지칭되어온운동을 예술운동, 예술문화운동, 문화예술운동, 문예운동, 문학예술운동 등, 예술 이라는 446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말로복원시켜지칭하고자했던경향이, 1988년조직분열과연계된국면에만있었던것은아니었다. 크게보자면, 어떤방식으로든 예 ( 藝 ) 자를넣는방식으로바뀌는것이대세였는데, 이는앞서언급한 1986년민문협의내부논의결과에영향을받은것이었다. 1986년민문협의논의는, 예술문화운동 ( 당시의표현으로는 문화운동 ) 이노동자와농민등기층민중을적극적으로조직하고예술문화운동의성원으로끌어들여야하는가여부에대한논의로, 예술문화운동의조직적정체성과관련된중요한논의였다. 1986년여름수련회의긴토론결과, 예술문화운동은기층민중을대상으로활동 ( 작품의보급과예술교육등 ) 을하되그들을조직하지않는다는결론을도출했다. 즉예술문화운동은전문적예술인들의조직으로, 노동자 농민대상으로는활동만할뿐그들에대한조직행위를하거나조직책임을지지않는다는것이다. 이논쟁을겪고창립네번째해를맞은 1987년부터민문협은 민중문화운동연합 으로이름을바꾸고, 노동운동조직과별개로공단지역인대림동에문화공간 살림마당 을운영하는등노동자대상의활동으로서예술문화운동의정체성에걸맞은활동방식을모색하였다. 민문협 민문연의기관지 민중문화 를살펴보면, 이시기인 1987 년부터 예술 이란말이부쩍늘어남을알수있다. 1987년에처음나온 14호에는 민중문화 의새로운편집방향을간략히설명하고있는데, 전체민주 민중운동의영역속에서문화예술부문의고유한영역을집중적으로담당, 민중문화 예술실천활동의성과를비롯하여대중영화까지를포함하는대중문화 예술에대한올바른관점에입각한비판, 그리고그것에대한민중문화 예술적대안제시 등으로 문화 예술 이라는표현을적극적으로쓰고있다. 이와함께 고통받는민중의삶의양식, 이념, 생활풍속도 은 민중문화 로지칭함으로써, 문화영역안에자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447
신들의주요한실천이 예술 영역임을분명히자각하고표현한것을발견할수있다 ( 민중문화운동연합 1987). 또한 14호, 15호에서는 민중예술의이해 라는특집을수록하여각각의예술영역에대한전문적관심을적극적으로드러내고있다. 이는, 예술문화운동의조직적정체성에대한내부정리를통해, 전문예술인조직으로서의자각을분명히드러내고자한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이후민주주의의진전이이루어지면서합법적인활동영역이넓어졌고, 1988년 3 4월에는전국의진보적연극단체들이모여최초의전국적규모의민간연극제인 전국민족극한마당 을공공지원금없이두달에걸쳐치러내고이성과를바탕으로그해 12월에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 ( 이하 민극협 ) 를발족시킴으로써, 기존예술계와다른장에서의활동을고집하며이른바 문화 운동을이끌어오던마당극단체들이 연극 이라는장르이름아래모이게되었다. 이로써문학과미술에이어연극분야도, 1988년 12월에발족한진보적예술문화운동의전국규모의총연합회인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 이하 민예총 ) 내의장르분과의하나를구성하게되었다. 문화 대신 예술 이란말과연극 음악 춤등서구근대의장르구분법이되살아나고있었던것이다. 물론민극협과민예총의결성은기성예술계의연극협회와예총이존재함을의식한것이었고, 민예총과별개로노동자 농민대상의예술문화활동이나지역내의강도높은투쟁을수행하는단체들은민문연, 광주민중문화운동협의회등별도의조직으로여전히강력한활동을하고있었다. 그러나애써명명에서지워버렸던 예술 이라는말을복원한점은그의미가적지않다할것이다. 이후의예술문화운동에서는 예술 이라는다소불편한말이어떤식으로든사라지지않고자신들의정체성을말해주는말로존재하게된다. 448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이러한큰흐름속에서, 서울 / 중앙의가장앞서가는예술문화운동단체인민문연의 1988년이후의변화는주목할만하다. 예술 이란말과서구근대의장르구분을한층더적극적으로쓰고있기때문이다. 1988 년에창간된민문연의기관지 전망과건설 에수록된 민중문화운동연합강령, 강령해설 등을살펴보면, 단체의이름에묶여어쩔수없이 문화운동 이라는말을쓰고있는 민중문화운동연합강령 과달리, 강령해설 에서는 문화 예술운동 이라는말로바꾸어쓰고있음이뚜렷하다. 또한이전의창작소집단을해체하고 연극분과, 문학분과, 미술분과, 춤분과 식의서구근대의장르구분에따른분과체계로재정비하는조직개편을단행하였다 ( 민중문화운동연합 1988, 55). 흥미로운것은 종합연희 1분과, 종합연희 2분과 의존재인데, 마당극과풍물등서구식장르로구분짓기힘든예술을두개의분과로나누어놓은것이다. 그런데 노래분과 를 음악분과 로명칭을바꾸지않아기존의 노래운동 이란명명을남겨놓은것에비해, 마당극운동 이나 풍물운동 이라는명칭을지워버림으로써이명칭에대한불편함을드러내고있다. 이는 1987년말과 1988년초사이에이루어진민문연의조직분열양상을살펴보아야이해할수있는대목인데, 대통령선거를치르면서민문연이단일한정치노선을표방해야하는가여부를둘러싼논쟁이생겼고, 이과정에서단일하고뚜렷한정치노선과강령을표방하는 ( 이전의민문협 민문연에는강령이존재하지않았다 ) 다소전위적인조직으로서의성격을지니는방향으로결론이내려졌다. 이에대해, 예술문화운동조직이강령이나정치노선을표방하는당적조직의면모를지니는것에반대한사람들이민문연으로부터대거탈퇴를하게된다. 그런데민문연에잔류하여조직의변화를주도한사람들은노래운동멤버와문학인김정환, 연극운동을하면서마당극비판에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449
앞장섰던사람들이었고, 탈퇴한사람들은놀이패한두레, 민요연구회, 풍물패터울림, 그리고마당극운동 2세대였던박인배등주로마당극을중심으로한이른바 1970년대 ~1980년대의소위 문화운동 을주도한세력들이었다. 즉 1970년대전통연희의현대적계승활동으로시작하여 1980년을전후한시기에자신들의명명에서 예술 을제거하고 문화 를옹립함으로써, 예술에대한관점의대대적인변화를성취해온흐름이민문연에서탈퇴하고, 대신전통연희와의관련성이없어마당극운동의활동관행과다소서걱거렸던노래운동이새로운민문연 ( 이를앞의민문연과구별하기위해 5기민문연 이라지칭하고자한다 ) 의중심이된것이다. 이 5기민문연에서부터는전통연희와관련성높은분야가주도해왔던공동체, 신명, 공동창작, 촌극, 대동놀이, 민중주체의창작등의말들이사라지거나비판의대상으로전락한대신, 미학, 사상, 이념, 리얼리즘, 전망등의새로운용어가중요성을띠고부상했다. 이는민중문화운동연합의기관지인 전망과건설 에수록된구성연출분과의 집체극에대하여, 의장의 강령해설 등에서확인할수있는데 ( 이영미 1997, 197-250), 이는 문화 대신 예술 이부상하는현상과같은궤에있다고볼수있다. 1988년의민문연에까지남아있던 문화 예술운동 이라는용어는, 1989년민중문화운동연합이문학이론모임인문학예술연구소와결합하여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 이하 노문연 ) 을결성하여활동하는과정에서점차 문예운동 이라는말로바뀐다. 노문연의기관지인 노동자문화통신 을살펴보면, 1990년의 3호에이르러서는이제 문화 예술 이라는말은거의사라지고 문예 혹은 예술 로대체되어있음을알수있다. 단체이름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과기관지의명칭 노동자문화통신 에서, 혹은노동운동권에서이미관행화된 노동자문화패 라는말에서 문화 란말이남아있기는하지만, 예술분야의글에는거의 문화예술, 450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문화 예술 대신 문예 혹은 예술 이쓰이고있고, 심지어전문예술문화운동창작집단을 문예패 라고까지지칭하고있다 (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편 1990). 문예 는 문화예술 의준말이기도하지만 문학예술 의준말이기도하다. 문예 란말은다양한해석이가능하면서도 문화 란말의노출은피할수있다는점에서, 문화운동 을표방하며이전의예술문화운동을주도했던마당극운동계열흐름을명분상계승을부정하지않는동시에그것과의실제적차별성을드러내기에유리했을것이라추측할수있다. 노문연창립이후, 미학과예술이론은훨씬정교하게정돈되었다. 특히사회주의미학과예술론의전면적수용이눈에띄는데, 이는진보적지식인들사이에서사회주의사상과미학에대한학습수준이높아진것에힘입고, 특히이에대한이론학습에몰두해온문학이론모임인문학예술연구소가조직의한축으로들어온것에기인한측면이크다. 문학예술연구소의멤버들은신승엽 김명환등대학에서문학을전공한석박사급의연구자들이었고, 뒤이어노문연과연대하여기관지에글을수록한미술비평연구회멤버들역시심광현등미술학 미학분야의연구자들이었다. 이는민문연조직분열때에민문연을탈퇴한사람들이, 노동운동의문화사업을담당해온실무자들과결합하여 서울노동자문화예술단체협의회 ( 이하 서노문협 ) 을결성한것과는사뭇대조되는측면이다. 5기민문연에참여하지않고민문연을탈퇴한사람들은, 이전의창작소집단인한두레, 민요연구회, 터울림등을유지하거나이와동일한형태인극단현장등을새로창단하면서주로노동자대상의작품활동과예술교육활동을해왔다. 그리고 1989년여름에이들이, 새로결성된노동자노래단 예울림등의노래패와, 노동운동권의다양한문화활동을해오고있던 서울노련문화부, 구로지역문화공간, 성문밖교회문화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451
부 출신의핵심활동가들을규합하여만든단체가서노문협이었다. 박인배 김애영등 1970년대이래마당극운동을통해노동자 농민대상활동의노하우를축적 계승한사람들과, 여기에김자영 장기호 박혜숙등 1980년대초중반탈춤 마당극패출신으로노동운동단체에들어가문화관련업무를계속하면서기획 조직능력과노동운동계의네트워크를확보한사람들이한단체안에모인셈이었다. 따라서서노문협은 1988년부터 1990년대전반기까지노동운동급성장시기에요구되었던엄청난양의노동자대상의작품 ( 노동연극과노동가요등 ) 과교육등을감당했던핵심적단체의위상을지니게되었다. 5기민문연에뒤이은노문연이이른바 PD 의정치적노선을명확히한것에비해, 서노문협은정파의다양성이나애매함을용인하는조직원칙을고수했고, 이는오히려이들의조직과운신의폭을실용적으로넓혀주었다. 두단체의이런차이는당연히, 이론적정교함과노동자대상활동의실천성양쪽중어느한쪽의강세를보이는식으로나타났다. 흥미로운것은노문연의이론적정교함이마르크시즘미학과예술론에크게기대고있고, 이는작품중심의사고체계를바탕으로하고있었다는점이다. 즉예술이현실세계의반영이므로, 올바른반영을위해서는전형성을중심으로한리얼리즘 ( 이시기노문연은 현실주의 라는용어를썼다 ) 의예술방법이필요하며, 노동해방의전망을지닌당파적현실주의를위해서올바른사상과당파성을견지해야한다는입장을지니고있었다 ( 김성수 서은주 오형엽 2005, 37-85). 이러한예술론은작품과현실세계와의관계를적극적으로설명하고있다는점에서기성예술계에오랫동안뿌리박은순수주의예술관과배치되지만, 다른한편으로는여전히작품외적인생산 유통 소비등의맥락을제거하고작품내적인면에치중한이론이라는점에서기존의예술관과동일하다. 물론이들도비전문인인 452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노동자들의민중창작이전문창작못지않게중요하다는점을인정하는것으로보아유통 수용등작품이위치한콘텍스트에대한고려를하지않는것은아니다 (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편 1990). 그러나마당극운동에비해노동자 농민대상활동의경험이적은데다가마당극에대해비판적태도를보여온노래운동과, 여전히제도권내의유통에의존하는정도가높은문학분야의연구자들이활동의중심에서있는노문연은, 상대적으로작품중심의예술관을강하게드러내기쉬웠고, 이러한작품중심의익숙한예술관을마르크시즘예술론의권위가강고하게버텨주었던것이다. 따라서예술문화운동내에서 10여년이어져온기존예술관으로부터의탈피와예술을문화로이해하는사고방식은, 1980년대말에이르러기존의예술관의새로운도전에직면한셈이었다. 사상성과작품중심적인예술관으로보자면, 비전문인의연극교육의방법론으로제출된극놀이 촌극론은자생적수준에머물고있는사상성낮고예술적으로조야한연극을절대시하는사고로, 작품의리얼리즘적성과가아닌창작주체의신원에매달리는비과학적이고대중추수적인태도로비판받았고, 신명이나공동체의식은범신론적미의식이나봉건적사고방식으로치부되었다 ( 이영미 1997, 197-250). 그러나다른한편으로, 이론구사능력이높은이들이공연예술중심의예술문화운동과결합하여노동자들의예술활동의존재를가까이에서체험함으로써, 예술에서생산 유통 수용의작품외적맥락의중요성을인정하게되었고, 결과적으로예술에대한기존의작품주의적관점도조금씩극복되었다. 한편, 이전의마당극운동으로부터시작된예술문화운동의흐름을유지하며노동자대상활동을하고있던서노문협에서도역시단체이름에서부터 문화예술 이란말을쓰고비전문인대상사업을대중문예사업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453
이라고지칭하는등 예술 이라는용어를복원하고있는양상을드러내었다. 이는이들이 1986년의민문협조직논쟁을함께겪고 1987년의민문연 (4기민문연 ) 에서활동했기때문이었고, 노문연의노력으로예술문화운동내에서예술이라는용어가보수성의벽을넘어섬으로써가능한일이기도했다. 이렇게이시기는, 그간공연예술중심의예술문화운동내에서 예술 이란말을버리고 문화 라는말을채택하는극단적인방식으로이루어졌던예술관에대한변화가, 그이외분야의진보적예술운동분야와의접합을통해충돌하고경합하며뜨겁게소통하고있던때였다고할수있다. 마당극운동의맥락에서보자면기존의예술관의도전을받은셈이지만, 이과정을통해그동안버려두었던예술이라는말을되찾게되었고, 예술의작품외적맥락의중요성과문화로서의예술이해의태도를좀더정교한이론적언어로설명할수있는기회를얻었다는점역시중요한의의로인정되어야한다. 5. 다시 문화 로되돌아와발전한공공적실천성 1992년말의대통령선거로 30여년에걸친군인출신대통령의시대가끝나고, 소련의해체로냉전이종식되는새로운시대를맞았다. 1994년민족예술인총연합이사단법인의형태를갖춤으로써이제예술운동은단순히 재야 에만머무는존재가아니게되었다. 1990년대중반즈음까지 1980년대방식의활동이유지되기는했지만, 대학과노동자중심의활동을해온예술문화운동은학생운동의약화와노동운동의환경변 454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화로말미암아급격히공연과교육의장을상실했고따라서작품의질과긴장감도떨어질수밖에없었다. 1996년음반검열이철폐되는등법이보장하는표현의자유의범위가상당히넓어져, 대중가요에서조차환경문제나교육문제를비판적으로다룰수있는시대가되었다. 그에비해젊은대중들의정치적관심이떨어지고대중문화의영향력은크게높아졌다. 이러한정치 사회 문화적변화는, 진보적지식인들로하여금정치 경제등거시적영역이아닌, 일상과문화같은미시적영역에대한관심을갖게했다. 이흐름을선도한매체는 1992년여름에창간한 문화과학 으로, 이들은기존의구좌파적인마르크시즘이나리얼리즘론과차별화된새로운문화이론을소개하면서 1990년대의달라진한국사회를분석하고자했다. 이들이분석대상으로삼은것은예술을포함한문화였고, 예술역시문화의한부분으로간주하여작품내적측면에만매달리지않았다. 오히려이시각에서도외시되었던생산 유통 소비의전과정과그사회적효용을살핀다는점에서, 1980년대말을뒤흔들었던좌파예술론의예술관보다는오히려 1970년대 ~1980년대마당극운동이지녔던예술관에근접한것이었다. 1994년민예총의기관지계간 민족예술 에수록된 창간특집좌담 은 문화과학 의핵심인영문학교수도정일과미술평론가심광현, 1980년대의예술문화운동의연장선상에서있는공연예술분야평론가이영미, 그리고사회과학적정세분석을해줄사회학전공교수조희연이참가했으며, 여기에서시종 예술 을넘어선 문화 와 문화운동 의중요성에대한강조가이루어졌다 ( 도정일 조희연 이영미 심광현 1994). 1980년대말에 문예 와 예술 에밀려사라졌던 문화 와 문화운동 이란말은이렇게새로운방식으로복귀했다. 주목할만한것은 1990년대의새로운문화론을주도한사람들이다.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455
이들중한그룹은강내희 도정일등영문학을전공한진보적인교수로 1970년대 ~1980년대의민족문학론 리얼리즘론을주창하지않아상대적으로 과거 로부터자유롭고외국의새로운진보적문화이론을빠르게흡수할수있었던사람들이며, 다른한그룹은심광현, 조만영, 이동연등노문연과소속 연대관계를맺고있던사람들, 1987년까지민중문화운동연합의일원으로활동했고사상중심적예술관으로는노문연의입장과크게다르지않으나정치노선이달라 노동해방문학 에서활동한문학평론가이성욱, 그외외국문학전공자박거용과이득재, 노문연의정치노선인 PD파의최고이론가였던사회과학자이진경등이었다. 후자의, 다소청산주의적이라할만큼급격한변신은다소의외일수도있다. 그러나이들의입장에서보자면구좌파적인이론에서신좌파적이론으로옮겨간것이므로그리이상하달것은없다. 단이과정에서이들은이전의인식중심적예술관 ( 예컨대예술의당파성논의처럼 ) 에서벗어나생활양식과상징체계전반인문화로시야를확대하게되었고, 이점은큰변화라보아도좋을것이다. 그러므로이들의문화에대한논의는, 1970년대 ~1980년대의소위 문화운동 의성과계승과는무관한것이었고, 새로운이론과새로운고찰대상이강조되었다. 그러나이면적으로대중문화나일상에대한관심등은, 이들이의식했건안했건마당극운동과노동현장의예술문화운동에서강조해온것들과일맥상통하는측면이있었다. 말하자면이흐름은, 한편으로는 1970년대 ~1980년대의예술문화운동과결별했다는표면적성격아래에, 1980년대말에잠시밀려났던문화중심의예술관의복귀라는또다른이면적의미를지니고있었던셈이다. 문화의중요성을강조하는이두흐름은, 사단법인이되어온갖예술문화운동의경향과흐름이뒤섞이는민예총안에서동거하고있었는 456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데, 이들모두이제새로운예술문화운동이진보적내용을담은작품과정치적민주주의나표현의자유를위한행동에그치는것이아니라, 문화정책분야의새로운대안제시가중요하다는점에동의하고있었다. 김영삼정부출범첫해에민예총은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과공동주최로 새정부의문화예술 교육 방송정책진단 (1993/09/09~09/11) 이라는심포지엄을개최한이후, 민족예술 에종종실리는문화운동의전망과진로에대한글들에는, 달라진문화환경의변화와문민정부의문화정책에대한고찰이빠지지않고거론되었다 ( 박인배 1994). 때마침 1990년문화부가새로생기면서 문화발전 10개년계획 을공표하고문예진흥원내에문화발전연구소를만들어문화정책에대한논의를본격화시켰다. 이른바문민시대를맞아이제문화정책은공론의장에서논의할수있는조건이만들어졌고, 민예총은정부의문화정책에대해꾸준히발언하며민간차원의문화정책논의를주도해갔다. 이제예술문화운동은, 예술가들이주도하는작품활동과비전문인대상예술교육에서, 정책가들이주도하는정책연구와대안제시로점차그중심을옮기는양상이나타났다. 이들의문화정책에대한논의와제시는야당에의한수평적정권교체가이루어진김대중정권직후부터더욱활발해져, 대통령취임식도이루어지기전부터민예총산하문화정책연구소가심포지엄 문화정책은왜필요한가 (1998/01/21) 을열고, 도정일, 정희섭, 박인배, 김혜준이발제를통해새정부의문화정책기본방향에대해제시했다. 또김대중대통령의임기가끝나갈무렵에는민족문학작가회의와공동으로 국민의정부문화정책평가토론회 (2002/09/02) 를주최하여이영진, 정남준, 박인배, 이훈상, 박영정등이발제했다. 이들논자의면면을보면, 박인배 정희섭 박영정은마당극운동과서노문협을거친멤버들이며도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457
정일 심광현등은 문화과학 멤버들이라는점에서, 이두흐름이민예총이라는틀을바탕으로함께문화정책을논의를이끌고있음을알수있다. 또한민예총은산하에문화정책연구소를두고정책논의를전문화하고, 문화과학 멤버중강내희, 심광현, 이동연등은문화개혁시민연대라는독자적인문화단체를설립하고산하에문화사회연구소를두어연구를진행했다는점에서, 이시기이들이예술운동 문화운동에서문화정책연구와비판 대안제시등에얼마나큰힘을기울였는지알수있다. 이러한활동은노무현정부시대에들어서면서더욱적극화되었다. 문화연대주최 참여정부문화정책의개혁과제및대안정책제시를위한공개토론회 (2003.7.2), 민예총주최 참여정부핵심국정과제와문화발전 (2003.11.20) 등토론회를개최하고, 급기야문화관광부의새로운문화정책수립에적극적으로참가하게된다. 이전의문화정책보고서인 문화발전 10개년계획기본개념 (1990), 문화비전 2000 문화의세기가오고있다 (1997) 와는비교할수없을정도로엄청난 700여쪽분량의책자 창의한국 으로발간된노무현정권의문화정책보고서는, 14차에걸친합동회의와공개워크숍, 여러차례의분야별자문회의, 전문가검토회의등을통했다고밝히고있으며, 추진반위원장이성원 ( 문화정책국장 ), 위원으로심광현, 박인배, 이영욱 ( 미술비평연구회출신의미술평론가로당시문화관광정책연구원장 ), 조한기 ( 문화관광부정책보좌관 ) 가, 200 여전문가들로구성된여러태스크포스팀을조율하며정책수립을추진했다 ( 문화관광부 2004b, 695-709). 1990년대부터 2000년대초까지의문화정책의기조변화를보면, 1970 년대 ~1980년대를거치며예술관을바꾸고, 문화전반으로사유를넓히고실천한예술문화운동의멤버들의개입이어떤결과를보여주었는지비교적잘나타난다. 1990년 문화발전10개년계획기본개념 에서는 창 458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조자중심의문화예술에서향수자중심의문화예술로기본정책방향을전환시킨다 ( 문화부 1990, 11) 고밝히고있지만, 세부사업내용에서는여전히창작활성화와전문예술인력양성같은전문예술인중심의정책이앞서있고, 이러한예술성과를문화시설이나프로그램확충을통해일반국민들에게보급하여향수하도록한다는사고를보여주고있다. 14) 특히 문화 정책을이야기하면서도여전히예술중심, 전문예술인중심, 수준높은작품생산중심의사고에서벗어나고있지못하고있었다. 김영삼정부에서도이기조가크게변화하지않지만, 정권말기에내놓은 문화비전 2000 문화의세기가오고있다 를보면다양성, 민주주의적문화, 문화산업등에대한강조가두드러져있음을알수있다. 문화산업에대한강조는외환위기를맞아고부가가치산업으로의전환을강조하던김대중정부시대에는훨씬더강화되었다. 김대중정부는문화예산 1퍼센트라는공약을실현했지만, 문화산업분야에지나치게치중한한계를보여주었다 (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문화정책연구소외 2002). 그에비하자면 창의한국 으로드러난문화정책은, 애초에예술등협의의문화가아닌광의의문화개념에기초하는방향으로정책영역을재편해야함을전제로하고, 모든국민의창의성을양성하여다원적이고역동적인문화국가를만들어야한다는추진목표를제시함으로써 ( 문화관광부 2004a, 32-34), 이전과는전혀다른관점을보여준다. 문화예술교육을통한문화역량강화, 학교체육활성화, 문화활동증진과여가문화, 생활체육활성화, 창의적인청소년문화, 양성평등문화, 문화 14) 노태우정권말에나온 한국의문화정책 에서도 1990 년대이후의문화정책의변화로가장높이평가하는사업이 움직이는미술관, 찾아가는국립극장 같은문화소외지역으로의예술보급과, 예술의해 지정을통한지원사업이다 ( 한국문화예술진흥원문화발전연구소 1992).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459
적인노후생활 등의항목이, 그이전정권들이강조해왔던 문화유산보존 이나 예술의창조적다양성제고, 문화산업의고도화 등의항목보다앞순위에배치되어있다. 즉예술계에서생산한우수한예술작품들을국민에게보급한다는하향식관점을벗어나, 일반국민들의문화창의력과향수능력향상을중시하고이를위해문화예술교육이나학교체육의활성화가중요하다고보는것이다. 국민의 문화권 이라는개념을상정하여, 문화를국민복지의한부분으로간주함을분명히한것이다. 예술정책에서도, 국민의창의성고양을위한 예술교육 과 생활속의예술참여활성화 로보고이를시설확충이나전문인력양성체계화, 예술인에대한처우개선등의문제보다훨씬우선적인문제로본것 15) 도주목할만하다. 이렇게 2000년대초의문화정책은, 예술이단지예술계내의것, 창조적인전문예술인의것, 그들의작품이라는예술관을벗어나, 그사회구성원의가치체계와삶을보여준방식이며, 따라서이러한예술문화를창조하고향유하며살아가는것이국민모두의권리이며복지의한부분이라는 문화로서의예술 의관점을보여주었다. 그리고이는, 한편으로매체의변화와세대의변화등으로인한 1990년대의조건변화에기인하는동시에, 이러한변화에대응할수있는시야를지닌예술문화운동권의대응의산물이라할수있다. 물론이러한로드맵의수립은노무현정권시대초기, 이창동이라는진보적예술인이장관을맡았던시기였기 15) 문화관광부는, 창의한국 과함께, 650 여쪽분량으로예술정책만따로정리한 예술의힘 을별도의책자로발간했다. 이책자에는예술정책의 14 대역점추진과제가정리되어있고, 예술교육, 생활속의예술참여활성화, 예술의공공성제고등이 1 부터 3 까지를차지하고, 이후에장르별예술창작활동지원확대와실험적인예술활동지원이 4, 5 의항목이배치되어있다. 460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때문에가능한것이었고, 로드맵의제시만으로한국사회의예술관과문화관이한꺼번에변화했다고도할수없다. 예술관의차이가빚어내는공공적실천성은, 여전히치열한경합의장속에서유동하고있다. 6. 맺음말 긴호흡으로이시기를보면예술관의변화는아주천천히, 구불구불하게복잡한길을거치며, 그러나분명히나타나고있었다. 1990년대에마치새로운시도처럼이야기되던주민참여의마을벽화나이벤트를겸한공연들을보며, 기시감 ( 旣視感 ) 을느꼈던것은나만이아닐것이다. 공공미술의개념조차생소했던 1970년대 ~1980년대중반에길거리와마을에벽화를그리고, 온학교학생전체가배우로참여하는대대적연극을만들어광주항쟁을기억했던엄청난이벤트의경험은, 1990년대이후예술계바깥에서벌어진새로운예술문화속에서쉽게재확인된다. 예술이라는용어를버리고문화란말에매달린후, 다시예술이란말을주워들어사용하면서예술에대한관점의변화를추동해온긴과정은, 새로운예술관이여전히힘을잃지않고다시살아나는기존의예술관과경합하는한편, 공공의장에서문화로서의예술이어떻게다른모습으로존재할수있는지를실천적으로증명하는과정이었다. 이경합은아직끝나지않은채현재진행형이다. 문화의시대란말이유행한지 20 년이나지난이시점에서, 이미낡은것으로치부되었던 1970년대 ~1980 년대의예술문화운동의명칭을다시살펴보아야하는이유는이것이다. 단, 이논문에서는이렇게명칭변화를야기한관점의변화가어떤 1970 년대, 1980 년대진보적예술운동의다양한명칭과그의미 461
심층적원인에서기인하는지하는점까지는서술하지못했다. 이는, 해당시기예술문화운동의담당자들과이를주도하며적극적으로담론을생산했던사람들을분야별 세대별로구분하여이들간의미세한차이를분석해야가능한일이며, 논리적입장을넘어선예술적취향과욕망등을분석해야하는복잡한문제이기때문이다. 이글하나로이모두를설명하기에는다소무리라고보이며, 이후논의로미루어둘수밖에없다. 참고문헌 김성수 서은주 오형엽. 2005. 문학. 한국예술종합학교한국예술연구소편. 한국현대예술사대계 V. 시공사. 37-149. 김성진. 1983. 우리시대의탈놀이. 고은외. 문학과예술의실천논리. 실천문학사. 104-162. 김정환외. 1986. 문화운동론. 공동체.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편. 1990. 노동자문화통신 3호. 새길. 도정일 조희연 이영미 심광현. 1994. 90년대예술상황과진보적문예운동의전망 ( 계간 민족예술 창간특집좌담. 민족예술 1호. 22-60. 류인렬. 1977. 민중문화운동으로서의연극. 대화 1977년 2월호. 136-147. 류해정. 1982. 우리시대의탈놀이. 실천문학 3호. 263-280.. 1983. 새로운대동놀이를위하여. 백낙청 염무웅편. 한국문학의현단계 II. 창작과비평사. 343-367. 문화관광부. 2004a. 예술의힘. 문화관광부.. 2004b. 창의한국. 문화관광부. 문화부. 1990. 문화발전10개년계획기본개념. 문화부. 462 기억과전망 겨울호 ( 통권 29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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