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국립현대미술관, 대한제국 황실의 초상: 1880-1989 전시 개최
o 고종, 순종, 명성황후 등 대한제국 황실 원본사진 200여 점 총망라 o 앨리스 루즈벨트에게 선물한 고종 원본 사진 107년 만의 귀환 o 근대기 신매체(New Media)로서의 사진 수용과정 조망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정형민)과 한미사진미술관(관장 송영숙)은 근대 황실 사진의 역사를 총망라한 대한제국 황실의 초상: 1880-1989 전을 개최한다. 국내 외 여러 소장기관의 협력을 바탕으로 대한제국 황실과 관련된 200여 점의 근 현대 원본 사진자료를 망라하며, 11월 16일(금)부터 2013 년 1월 13일(일)까지 58일간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다. 본 전시는 역사적 중요성을 내포한 근 현대 사진자료를 통해 19세기 말-20세기 초 대한제국 황실의 생활상을 살펴보고, 근대기에 최초로 유입된 신매체(New Media)로서 사진 의 초기궤적을 따라간다. 사료적 가치가 높은 원본사진을 통해 근대를 살아간 왕실/황실 인물들의 행적과 역사적 현장을 바라보는 역사 사진전 이며, 동시에 역사를 기록하는 새로운 수단으로서 사진 매체의 수용 과정을 보여주는 사진 역사전 이다. 전시는 국립고궁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 스미소니언미술관 등 국내 외 여러 기관의 협조를 얻어 그동안 각 소장 기관들의 전시나 도서 자료를 통해 소개되었던 주요 원본사진과 사료를 한 자리에 망라했다. 근대 시각문화의 변화를 주도한 사진매체의 초기 역사를 온전히 보여주기 위해 디지털 파일을 통해 대형 이미지로 복제하는 방식은 자제하고, 당대에 제작되고 활용된 원본 프린트를 전시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했다. 대한제국기(1897~1910) 는 일본과 서양 제국주의의 압력 속에서 자주 독립과 근대화라는 이중과제를 짊어지고 고군분투했던 전환기이자 정치적 격변기이다. 이 시기에는 개항과 함께 사진 매체가 최초로 유입되며 시각문화의 근대화가 일어났으며, 이러한 변화는 사진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활용한 대한제국 황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본 전시에서는 우리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황실이 탄생한 대한제국기 를 출발점으로 격동의 역사와 운명을 함께 한 황실 인물들의 삶을 집중 조명한다. 적극적으로 사진을 수용하여 제작 유포한 고종 황제의 모습, 현존 사진들의 진위여부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명성황후 관련 사진 등 중 고등학교 국사교과과정에 수록된 사진의 원본이 공개된다. 또한 한일강제병합으로 사진 재현과 유포의 주체가 일본에 위임되었던 시기 촬영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과 삶의 터전을 일본으로 옮겨야 했던 영친왕, 덕혜옹주등 왕족의 모습과 행적을 담은 사진들은 비극적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대한제국의 마지막 행로를 보여준다. 전시장은 황실 인물의 생활상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사진 및 사료들로 구성된다. 황실의 각종 행사 자료들이 역사적인 해제와 함께 전시되어 대한제국의 인물과 공간, 사건의 입체적 이해를 돕고자 했다. 또한 인화된 사진 뿐 만 아니라 사진첩과 사진엽서, 서적의 도판, 신문 등 다양한 매체들을 전시하여, 19세기 말에 유입된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근대적 시각체계 속에서 제작된 방식과 유통된 맥락을 제시한다. 1
여러 기관에 흩어져 있는 대한제국 관련 자료들이, 대한제국기의 정궁이었던 덕수궁에 모인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13년 말 서울관 개관과 함께 덕수궁미술관을 근대미술 중심의 미술관으로 활성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은 대한제국과 덕수궁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음미하고, 그 의미를 되짚어보는 뜻 깊은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한편, 전시와 연계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이 준비된다. 일반인 및 전문가대상 교육으로는 근대초기사진사(史)부터 오늘날 황실 사진이 갖는 의의에 이르기까지 <황실 사진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한 강연회가 진행된다. 다큐멘트 초상으로서 황실 및 근대 초기 사진의 기법 연구, 원본 사진의 보존 방법 연구, 보도사진으로서 황실 사진의 재조명 등 사진과 역사 사회교과와의 통합교육 교수학습방법론 모색을 위한 교사초청 전시설명회도 열린다. 겨울 방학을 맞은 어린이 및 청소년을 위한 및 감상교육은 2013년 1월 중 운영예정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www.moca.go.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첨부_ 전시 내용 및 구성, 주요 사진 사업개발팀 김윤희 홍보관 Tel 02.2188.6072 이부용 Tel 02.2188.6232 학예연구1팀 이사빈 학예연구사 Tel 02.2188.6242 전시 개요 o 전시명: 대한제국 황실의 초상: 1880-1989 Photographs of the Daehan Imperial Family: 1880-1989 o 주최/기획: 국립현대미술관, 한미사진미술관 o 전시기간: 2012년 11월 16일(금) - 2013년 1월 13일(일) o 전시장소 및 규모: 덕수궁미술관 제 1, 2 전시실 / 사진, 아카이브 등 200여 점 o 작품대여 - 기관: 국립고궁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고려대학교박물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부산시립박물관, 서울대학교 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 스미소니안 미술관(Smithsonian Institute), 미국 보스턴 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 - 개인: 안창모(경기대학교 교수), 이돈수(한국해연구소장), 최규순(단국대학교 교수), 김다연 o 전시해설 일정: 2012.11.17-12.2 11:30, 13:30, 14:30, 16:30 2012.12.4-2013.1.13: 11:30, 12:30, 13:30, 14:30, 15:30, 16:30 * 토/일 10:30, 17:30 추가 o 관람료: 덕수궁: 성인 4,000원, 초중고 무료 다운로드 (작품 이미지) - 웹하드 주소 http://webhard.moca.go.kr - 아이디 mocapr - 암호 0987 - 상단아이콘 [전용탐색기/웹탐색기/백업] 중 [웹탐색기] 클릭 [마이디스크 - 전시홍보] [보도자료]국립현대미술관_한미사진미술관 대한제국 황실의 초상 1880-1989전 개최 2
전시 내용 및 구성, 주요 사진 1부: 대한제국의 탄생에서 한일강제병합까지(1880-1910) 1부는 흥선대원군의 초상으로 시작하여 고종과 명성황후, 순종과 관련된 사진을 통해, 대한제국탄생 직전에서 한일강제병합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1880년에서 1910년까지의 30년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는 임오군란에서 비롯된 대원군의 천진 억류와 을미사변이 야기한 아관파천, 대한제국의 탄생, 그리고 한일강제병합까지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담겨 있다. 특히 사진을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하여 구한말의 불안한 정치적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던 고종의 사진과, 사진 제작의 주체가 완전히 일본으로 넘어간 이후의 순종의 사진은, 대한제국이 쇠락하고 일본의 내정간섭이 본격화되어 한일강제병합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반영한다. 1-1.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 1894년 이전,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으면서 살아 있는 왕의 아버지로 대원군에 봉해지고, 최고의 권력을 휘두른 인물이다. 그는 고종이 성장한 후에도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며느리 명성황후와 대립관계에 있었으며, 끊임없이 재집권을 시도했다. 1882 년에는 임오군란의 난도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가 잠시 정권을 잡았으나 청나라의 힘을 빌린 명성황후의 역습으로 청나라에 납치되기도 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잠시 정권을 잡았으나 곧 축출되었다. 1898 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2. 사진을 좋아한 왕, 고종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12세의 나이로 조선 제26대 왕이 되었다. 15세에 명성황후와 결혼했으며,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내정 간섭을 겪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난 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환궁하여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었다.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밀사 등을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시도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삼은 일본의 협박으로, 1907년 순종에게 왕권을 내주었다. 퇴위 후 이태왕으로 격하되어 덕수궁에서 거처하다 1919년 67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고종은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재위 1867-1912)과 마찬가지로 전통적 초상화에서 초상사진의 시대로 3
이행되는 시기의 첫 황제였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이 사진찍기를 싫어했던 것과는 달리, 고종은 1884년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魯越, 1855~1916)이 처음으로 고종 사진을 촬영할 때부터 사진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이후 1896년 비숍(Isabella Bird Bishop, 1931-1904) 여사가 사진기를 들고 입궐했을 때도 사진기에 관심을 보이면서 적극적으로 촬영에 응해주는 등 기회가 될 때마다 사진기 앞에 포즈를 취했다. 현존하는 고종의 사진은 대부분 조선을 방문하여 고종과 관계를 맺었던 서양인들이 촬영한 것으로, 서양인들이 출판한 조선관련 서적이나 잡지에 실린 경우가 많다. 이는 고종이 사진이라는 새로운 복제 수단을 외교적,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여, 조선이라는 나라와 국왕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고종 사진을 촬영한 미국인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이다. 그는 1883년에 조선에 입국하여 조선의 미국 시찰단인 보빙사 일행의 자문역을 맡았고, 1884년에는 고종과 왕세자 순종을 창경궁에서 이틀에 걸쳐 촬영했다. 그는 자신이 찍은 고종의 사진을 그의 기행문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 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1886, Boston) 속표지 사진으로 실었고, 책 속에는 한성부의 궁궐, 관료, 거리의 풍경 등을 담은 사진 22장을 게재했다. 이번 전시는 1886년에 발행된 책과 그 속에 담긴 사진 이미지들을 선보인다. 퍼시벌 로웰, 조선국왕폐하(고종), 1884, 미국보스턴미술관 소장 1-3. 얼굴 없는 왕비, 명성황후 왕후는 가냘프고 미인이었다... 눈은 차고 날카로워서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왕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녀의 사려 깊은 친절, 특출한 지적 능력, 통역자가 매개했음에도 느껴지는 놀랄만한 말솜씨 등 모두가 그러했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왕뿐 아니라 그 외 많은 사람들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中) 명성황후는 사후에 영의정 자리에 오른 민치록의 외동딸로, 16세에 왕비가 되었다. 타고난 총명함으로 자신의 정치적 영역을 확대하고, 대원군과의 대립관계 속에서 정권을 유지했다. 1894년에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러시아의 도움을 통해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했다. 1895년 새벽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이끄는 낭인들에 의해 경복궁 내 건청궁 옥호루에서 살해되었다. 사망 2년 후에 고종의 황제 즉위를 계기로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그 해 11월 국장으로 홍릉에 안장되었다. 4
명성황후는 현존하는 삽화와 사진이 수많은 진위논란에 휩싸였으며, 아직까지 명성황후임이 분명하게 증명된 사진은 발견되지 않았다. 전시에서는 명성황후의 재현이미지를 둘러싸고 일어난 진위 논쟁을 소개한다. 옥호루 玉壺樓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곳),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1-4. 대한제국의 탄생 무라카미 텐신, 고종과 순종,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1894년 청일전쟁 당시 한 일본신문의 종군사진가로 조선에 왔던 무라카미 텐신(村上天眞)은 처음에는 생영관(生影館)을, 후에는 무라카미사진관(村上寫眞館) 혹은 무라카미천진당(村上天眞堂)을 경영했다. 그는 대원수복과 원수복을 입은 고종과 황태자 순종을 사진 찍어 훗날 자신을 어용(御用) 사진사로 광고하기도 했다.) 을미사변 이후 국왕의 권한과 영향력이 위축된 상황에서 고종은 1896년의 아관파천과 이듬해인 1897 년의 경운궁 환궁을 통해 정치적 돌파구를 모색했다. 고종은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다른 나라와 동등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제국 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1897년에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원구단을 세워 황제즉위식을 올림으로써 대한제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그가 황제로 즉위한 것은 국가상과 군주상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노력이었으며, 이러한 위상변화는 사진을 통해서도 드러난 5
다. 특히 이 시기의 사진에서 고종 황제와 황태자 순종이 대원수 복장을 취한 것은 군통수권자로서의 입지를 확보하고, 근대적 국가의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종과 순종의 초상, 1905, The Alice Roosevelt Longworth Collection of Photographs from the 1905 Taft Mission to Asia, Freer Gallery of Art and Arthur M. Sackler Gallery Archives, Smithsonian Institution, Washington, D.C., Gift of Joanna Sturm 앨리스 루즈벨트가 1966년에 자신의 집에 걸어둔 순종 사진 앞에서 촬영한 사진과 1905년 방문 당시 Washington Times에 게재된 기사 1905년에 촬영된 사진으로 황제를 상징하는 황룡포에 서양식 훈장을 단 채 옥좌에 앉은 고종은 대한제국이 근대의 황제국임을 사진을 통해 선포하고 있다.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그림의 종이 사진틀에 끼워져 있는 이 사진은 1905년에 미국에서 파견된 아시아 순방단의 일원으로 내한한 대통령의 딸 앨리스 루즈벨트(Alice Roosevelt Longworth: 1884-1980)에게 고종이 하사한 사진이다. 고종은 1882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미국의 도움을 기대하고 미국의 '공주'인 앨리스 루즈벨트를 환대했으며 자신과 순종의 사진을 주었다. 그러나 루즈벨트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단은 사실상 미국의 필리핀 통치와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인정하는 내용의 비밀 협약(가쓰라-태프트 협약)을 도쿄에서 체결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한국에 들른 것이었다. 6
1-5. 순종의 즉위와 한일강제병합 순종황제사진, 1909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고종과 메이지왕 ("日韓合邦紀念"), 사진엽서, 부산시립박물관 소장 1-6. 황실장례 고종과 명성황후, 순종의 장례사진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지막 돌파구를 모색하고자 고군분투했던 대한제국 황실 인물들의 노력이 좌절되고, 결국 국권 침탈이라는 결말로 귀결된 시대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앨버트 테일러가 촬영한 고종 장례 사진, 1919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고종은 1919년 1월 22일에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애도기간 중인 3월 1일에 기미독립선언문이 공포되고, 이틀 뒤에 열린 3월 3일 국장을 기점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UPA의 특파원으로 서울에 머물렀던 앨버트 테일러(Albert W. Taylor)는 3.1 기미독립선언문 입수해 전세계에 알 7
렸으며, 고종국장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의 사진은 고종국장행렬을 바라보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어, 당시 고조되던 독립운동의 분위기를 전하려는 시각이 드러난다. 마지막 황제가 선조들의 품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침묵하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은 증오와 절망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3.1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수천 명이 목숨을 잃어서가 아니라 후계자도 남기지 못한 황제의 죽음과 더불어 자유에 대한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메리 테일러(앨버트의 부인), Chain of Amber 중에서 2부: 일제 강점기와 그 이후 (1910-1989) 2부는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강점기를 살아내는 황실 후예들의 삶을 다룬다. 이들은 일본인과 의 결혼을 강요 받거나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가 살았으며, 해방이 된 이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고종의 아들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 그리고 의친왕의 아들 이건과 이우 등의 사진들은 비극적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왕족의 마지막 행로를 보여준다. 영친왕 이은 (1897~1970) 영친왕은 대한제국이 선포되었던 해인 1897년에 고종과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1세가 되던 1907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같은 해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의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졸업했으며, 1920년에 일본황족의 딸 나시모토야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8.15 광복 후 국내 정치 실세들의 반대로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 왕족의 몰락과 더불어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67세가 되던 1963년에 귀국하여 병상생활을 하다 1970년에 7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석조전 실내에서 영친왕 일행, 1911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하정응 기증) 8
이방자여사 (1901~1989) 일본 황족의 딸로 일본이름은 나시모토야 마사코이다. 1920년에 20세의 나이로 영친왕과 결혼해 이진(갓난아기 때 사망)과 이구 두 아들을 낳았다. 1963년에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영친 왕과 함께 귀국했으며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영친왕 부부, 1921, 고궁박물관 소장 (하정응 기증) 덕혜옹주 결혼사진, 1931,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의친왕 이강 (1877~9155) 고종과 궁녀인 귀인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명성황후가 귀인 장씨와 함께 궁 밖으로 내보낸 후, 외갓집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16세에 의화군에 봉해졌고, 17세에 김사준의 딸 김수덕과 결혼했다. 이듬 해에는 보빙대사로 임명되어 일본으로 떠났다. 미국 유학 중이던 24세에 의친왕에 봉해졌으며, 30세에 귀국하여, 일제의 감시 속에서 대한제국 육군부장, 적십자사 총재 등에 임명되었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에는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하며 항일운동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12남 9녀의 자녀를 두었으며, 78세에 별세했다. 덕혜옹주(1912~1989) 덕혜옹주(1912~1989)는 고종과 궁녀인 복녕당 양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이 환갑 때 태어난 덕혜옹주는 고종의 각별한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자랐지만, 고종 승하 후 총독부의 강요로 14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보내졌다. 고종의 빈자리를 대신해 덕혜옹주를 아버지처럼 아껴주던 순종황제가 승하한 후, 덕혜옹주는 19세가 되던 1831년에 일본인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 결혼했다.그러나 결혼 전부터 앓던 조발성 치매증의 악화로 결혼생활을 유지하지 못하고 이혼했으며, 외동딸이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는 등 불행한 삶을 살았다. 해방 이후에도 국내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귀국을 거부당하던 덕혜옹주는 50세가 넘어(1962년) 한국으로 돌아오지만,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1989년 낙선재에서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9
이우 (1912~1945) 의친왕의 아들로 13세에 일본유학을 떠나, 18세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 황족과의 결혼을 강요 받았지만, 24세가 되던 해에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와 결혼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야전 포병학교, 육군포공학교 등을 거쳐, 27세에 야전포병학교 교관이 되었으며, 교도연대 중대장을 겸임하였다. 34세에 히로시마에 발령을 받아 복무하던 중,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사망했다. 이우,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이우, 박찬주, 연대미상,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박찬주 (1914~1995) 박영효의 손녀로, 22세에 이우와 결혼하여 이청과 이종을 낳았다. 남편을 잃은 후, 두 아들과 함께 운현궁에 거처하였다. 37세에 추계학원의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92년에 운현궁을 서울시에 매각하고 서대문구 북아현동의 자택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82세에 사망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흥선대원군 묘역에 남편 이우와 합장되었다. 특별섹션: 왕 앞에 선 사진가들 조선의 사진술 도입과 정착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사진관을 운영한 사진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한국사진사의 여명을 밝힌 사람들이었고 황실과의 인연으로 혹은 촉탁으로 황실 가족의 초상이나 기념사진, 황실의 행사들을 촬영했다. 조선에 사진관이 개설된 것은 1882년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인 거류지에서 일본인 사진관이 영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이어서 일본이나 중국에서 사진을 배운 화가 출신의 조선인들이 사진관을 개업하기 시작한다. 1883년에 황철과 김용원이, 1884년에 고종과 순종을 촬영하게 되는 지운영이 각각 사진관을 개업하면서 조선인에 의한 사진 정착의 길을 여는 듯했다. 그러나 1884년 12월, 갑신정변 당시 사진을 일본의 문물로 본 군중들에 의해 이들의 사진관이 파괴 당함으로써 조선인 사진관은 1907년 김규진이 천연당사진관을 개업할 때까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미국인 퍼시벌 로웰 이후, 왕을 촬영한 어진 사진사 중 그 이름이 밝혀진 사람은 총 네 명이다. 지운영과 김규진 그리고 일본인 촉탁 사진가인 무라카미 텐신과 이와다 카나에가 그들이다. 그들의 모습과 함께 사진 활동의 일부를 소개한다.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