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서라대한제국, 대한제국건축을찾다 (3-6) 옛러시아공사관비밀통로의비밀 (06) 파천의길을걷기앞서 필자는앞서 아관파천의길을걷는다 고하였다. 말하자면아직밝혀지지않는사실들이많으니직접그길을찾아보자는것이다. 그렇다면어디서부터걸어볼까? 파천의길을나서기직전고종은어디에있었을까? 많은사람들이민비가무참하게살해당한건청궁 ( 乾淸宮 ) 에기거하고있었으리라고생각치않고있다. 그럴리없다고한다. 그러나고종은거기에있었다. 그곳에기거하면서이른바춘생문사건 ( 春生門事件 ) 을통해탈출을기도하기도했었고, 일본세력, 친일세력의포위와감시속에자신의생명의위험과함께, 살해되어바로옆녹산 ( 鹿山 ) 에서불에태워진민비를비통해해야했다. 그곳에그가있었다. 약 4개월동안. 고종은이같이불안한상황에서조선의군대도믿을수없어외국인에게자신의경비를맡겼다 ( 결국시해사건과정에서입증되었다 ). 그중한사람이러시아건축가알렉세이세레진사바찐 (Aleksey Seredin-Sabatin) 이었으며미국인장군다이 (William McEntyre Dye) 도포함되어있었다. 이제도면을통에서사바찐이본사실을확인해보자. 1) < 그림 1> 낭인들이침입한루트 ( 붉은색점선 ) 와민비를살해한상황을그린경복궁북쪽일대. 신무 문, 집옥재, 건청궁, 향원정과연지, 그리고녹산이그려져있고, 추성문과춘생문도표기되었다. 1) 이도면은일본외무성부설외교사료관에보관중인 [ 한국왕비살해일건제 2 권 ( 韓国王妃殺害一件第 2 冊 )] 에기록된것이다. 시해주범인일본영사미우라고로 ( 三浦梧樓 ) 의후임우찌다사다즈치 ( 內田定槌 ) 가작성하여본국에보고 (1895. 12. 21, 內田定槌機密第 51 号発 1 月 4 日収受, 외동 53 호, 동 212 호등 3 건 ) 한것이다.
< 그림 2> 집옥재와앞마당. 뒤쪽에보이는담장너머가건청궁이다. (2010. 9. 8. 김란기 ) 우선낭인들의침입경로를추적해보자. 위그림 ( 배치도 ) 은당시일본영사우찌다사다즈 치 ( 內田定槌 ) 가외무성에보고한것이다. 시해사건직후에조사하여보고한기록에포함된 것이다. 이그림을통하여추적해보자. 우찌다의보고서에의하면낭인들은 1895년 10월 8일새벽 5시광화문을통해경복궁에침입하였다. 그들은흥례문앞에서서쪽으로꺽어근정전왼쪽회랑바깥쪽을지나경회루서쪽으로돌진했다. 그리고임숙문 ( 臨肅門 ), 신거문 ( 辰居門 ) 을통해광림문 ( 廣臨門 ) 에이르렀고, 그문을통해현재집옥재 ( 集玉齊 ) 의앞마당에도달했다. 곧바로향원정과연지의뒤편에있는건청궁에뛰어들었을것이다. 지금은집옥재앞이넓게비어있다. 그러나당시에는전각과담장으로둘러싸여있었음을 알수있다. 미우라의낭인들은그집옥재앞을지나건청궁의필성문 ( 弼成門 ) 과남행각문 을통하여거침없이왕후가거처하는내궁을겁범 ( 劫犯 ) 했다. < 그림 3> 건청궁의북서쪽. 낭인들은북서쪽담장에통나무와사다리를걸쳐놓고넘어왔다고사바찐 은기술했다.
민비시해현장건청궁옥호루 이제건청궁의도면을보면서낭인들이어떻게민비를살해했는지살펴보자. 필성문과행각문을통해들어온낭인들은장안당 ( 長安堂 ) 앞마당을통하여곤녕합 ( 坤寧閤 ) 으로몰려들어갔고함광문 ( 含光門 ) 을통하여들어온무리도곤녕합으로밀고들어갔다. 우리가알고있는옥호루 ( 玉壺樓 ) 는이곤녕합의맨오른쪽방이다. 도면에표기된바와같이옥호루에서왕비가살해되었다. 이제우리는좀더사실적으로당시상황을알기위하여다른묘사를인용하기로하자. [ 일인들은곧바로왕과왕후의처소로가서몇몇은왕과왕태자및그측근들을붙잡았고, 다른자들은왕후의침실로향했다. 이에궁궐안에있던궁내부대신이경직 ( 李耕稷 ) 이달려와서위험을알렸고왕후와궁녀들이잠자리에서뛰쳐나와달아나려했다. 그런데그순간에살해범들이들이닥치자이경직은왕후를보호하기위한일념에서엉겁결에두팔을벌려왕후앞을가로막고나섰다. 그러나이와같은무의식적인행위가오히려살해범들에게그의등뒤의여인이바로왕후임을알려준결과가되고말았다.] 2) 전세계가식민지쟁탈전의최후의보루로남겨놨던동북아시아의한작은나라에, 그옆의또다른작은나라가식민지주의자들에게재빨리배워, 인접한나라를범접하는순간이었다. 이순간은 500년을이어온한민족이그들의국가체제를결국잠시 (1910-1919) 내어주게될바로그순간이었다. 어찌보면유교적체제가기독교적체제에잠시자리를내어주는순간이었을수있고, 서학 ( 西學 ) 과난학 ( 蘭學 ) 이공존할수없는순간이었을지도모른다. 거의동시대의시간속에서한쪽은서학을맞아들였고다른한쪽은난학을받아들였다. 그러나이들두나라는거의유사하게그것을크게발전시키지못했다. 서학을맞이했던나라에서는자신들의풍토와너무이질적임을알고배척했으나그런풍토도없고의식도없던나라에서는큰이유도없이난학을발전시키지못했다. 서학을천주학과묶어배척한것은아쉽다고해야할까? 러시아가남진정책을취하면서그들의잇속을채우려했지만, 영국이거제도를점령하면서 입맛을다셨더라도, 청이조공국의지위를잃고싶지않은미련을갖고있었다하더라도, 이끔직한도발은그모든것을깨뜨리는결과를가져온것임에틀림없다. 만약러시아가청진항을조차하고, 영국이거제도에기지를세우고, 청이강화도에장터를 열었다면, 누군가꿈꾸던영세중립국의그것을얻었을지모른다. 역사에가정은없다지만가정보다더극한상황은있었다. [ 그리하여이경직은양팔이잘리면서죽었다... 순간왕후는옥호루아래뜰로달아났지만결 국붙잡혀쓰러졌고, 살해범들은왕후의가슴을짓밟으며몇차례나거듭칼로찔렀다. 그리고 실수가없도록용모가비슷한궁녀까지살해했다.] 3) 2) 최문형. < 명성황후시해의진실을밝힌다 >, 지식산업사. 2006.8.15. ( 재인용. 문화재청. 건청궁, < 찬란했던왕조의마지막기억 >. 2007. 10. 18. 81 쪽 )
이쯤에서사바찐이목격하고보고한내용을살펴보자. 동북아시아의질서가갑자기바뀌는순간에그이해당사자중의한축이었던러시아측의기록을살펴보자는것이다. 여기서우리는이문서의신뢰성을확인하기위하여사바찐의기록을영문으로재작성한기록의일부분을우선인용해보자. 사바찐의보고서 < 그림 4> 민비시해전후의옥호루. 뒤에관문각이보이는옛사진. 관문각은사바찐이서울에들어와맨처음지은것으로보이며그시기는 1885년이전이었다. 이건물은 1901년 1월이전에헐려그자재일부는경운궁의다른건물을짓는데쓰였다. ( 시노부쥰페이 ( 信夫淳平 ). < 한반도, 1901> 에수록사진 ) < 그림 5> 고종이 1873년처음지은건청궁이헐리고 (1907-1909) 일제가그자리에조선총독부미술관을지었다 (1939년준공, 1998년철거 ). 지난 2006년문화재청에의해새로복원된건청궁은옛민속박물관을헐어내고지은것이다. 옆사진과동일한위치에서찍은사진 (2010. 9. 8. 김란기 ) [Suddenly, at five o'clock in the morning, we heard gunshots in the western palace grounds. Several Korean soldiers had placed logs and ladders against the palace wall, climbed over it, then penetrated the inner palace wall. At the very first shots, the guard patrols all fled, and most of the other palace guards followed suit. As the soldiers crawled over the wall and unlocked the gates for their co-conspirators,... ] 4) 사바찐의민비시해사건목격기록을국내에최초로공개한 < 신동아 > 는상기의부분을다음과같이전하고있다. 여기서고려될수있는것은 < 신동아 > 의기사가사건당시의경복궁여러전각을감안하여다소구체화하였을개연성이있다. 예를들어서사바찐의보고서에언급되지않았던전각이름을등장시키고있는점등이다. 그러나전체적인내용이크게변경된것은없다. 위내용을 2002년 1월 < 신동아 > 는다음과같이묘사하고있다. [ 새벽 5 시경에춘생문에서조선군무리의큰구호소리와함성이들렸다. 사전에행동을모의한 듯한느낌이들었다. 몇분후에추성문 ( 秋成門 ) 쪽에서총성이들리고, 잠시후담을넘은일 3) 최문형. 같은책. 4) 이글은 <CENTER FOR KOREAN RESEARCH, COLUMBIA UNIVERSITY> 의 Gari Keith Ledyard 교수가 [Imperial Russian Legation, Seoul 1895, Telegram 211, Appendix VI] 를입수하여 1995 년 10 월에영문으로번역하여발표한내용의일부분이다. 필자는앞서사바찐의이름이혼란스럽게불리어지고있는상황을설명하면서이미언급한바있다.
본인폭도들이궁궐경비병에게발포하자, 경비병은무기와군복상의를벗어던져버리고초소를떠나어디론가달아나버렸다. 추성문쪽의총성을신호로춘생문쪽에서도일본인폭도들과조선군훈련대가난입하기시작했으며광화문에서는일본인폭도 5~6명이사다리를타고담을넘었다. 이들은경비병에게몇발의총을발사해궁궐경비병을도주시키고, 일본인교관에게훈련받은조선군훈련대가궁궐안으로쳐들어오도록대문을활짝열어주었다.] 5) < 신동아 > 의이글에서는 폭도들은남쪽의광화문, 동북쪽의춘생문, 서북쪽의추성문등 3 개의문으로침입했다 고하여번역문에구체적인문의이름을넣었다. 그러나후에밝혀진일본측의기록에서광화문한곳으로침입한것으로나타나고있다. 좀더깊은검토가필요하다. 다시사바찐의보고서내용으로돌아간다. [ 새벽 5시궁궐침략이시작되었습니다. 북동쪽대문너머로누군가큰소리 ( 의미심장하게 ) 로연설비슷한것을하고있었습니다.... 궁궐에는원래모두 1500명의군인과 400명의장교들이있었습니다. 그러나 4시경에는 (4시 30분부터 ) 250명 ~ 300명의군인들과장교들이있었습니다. 나머지는모두윗제복을벗어던지고총과탄환을버리고달아났습니다.... 한무리는다이장군을끌어들여길왼쪽으로저희 ( 외국인 ) 가머물던숙소 ( 양관인관문각 ( 觀文閣 ) 인듯 ) 쪽으로달려갔습니다. 저는 300명정도의사람들 ( 군인들 ) 에이끌려 ( 약 60~70걸음 ) 민왕비와조선의하인들이거처하는곳 ( 곤녕합남행각인듯 ) 으로갔습니다. 저를둘러싸고우왕좌왕하는사람들틈에서저는민왕비처소마당에두개의쪽문 ( 청휘문과함광문인듯 ) 옆에서보초를서고있는일본군인 5명과장교 1명을보았습니다. 그리고그곳에는신설조선군인 ( 훈련대 ) 들로이루어진한소대와기모노와양복을입고있는 20 ~ 25명의일본인들이있었습니다... 이일본인이소리를지르면서조선여자들의머리채를잡아끌어창문밖으로 (1.8m되는높이에서 ) 던져버렸습니다.] 6) 위의인용내용은 [ 문화재청. < 건청궁, 찬란했던왕조의마지막기억 >] 에서 [ 이영숙편저. < 명성황후시해사건러시아비밀문서 >] 의사바찐의보고서내용을정리하여수록한것이다. 이미정리하여수록한전자의문헌에제시된사바찐의보고서내용을계속해서쫓아가보자. [ 제가왕비처소 ( 곤녕합 ) 마당에있는동안일본인들에의해창문밖으로던져진여자들의수는 10~12명에달했습니다... 왕이평소에외국인들을접견하는건물 ( 장안당 ) 주위에는 8~10 명의장교들의지휘아래 100~150명정도되는일본군인들이보초를서고있었습니다. 일본군들의수와또그곳에조선고관들이많이서있는것으로봐서저는여기에왕이있었다고생각했습니다. 저는아침 6시에궁궐을나왔습니다. 제가민왕비처소 ( 곤녕합 ) 마당에서궁궐남문 ( 광화문을가리키는듯 ) 까지나오는시간이 10~15분이었던점을고려하면민왕비는 5시 45분, 심지어 5시 50분에도발견되지않았다고볼수있습니다.] 7) 그런데우리는사바찐의보고서가한종류가아님을발견하게된다. 우선차용된위의글들 은좀더길고상세한내용의보고서에서발췌한것이다. 위보고서원문은상당하게길고 사바찐의입장이나당시의생각을자세하게기술한것으로 19 쪽분량이다. 그러나보다간 5) < 신동아 >( 통권 508 호 ). [ 자료발굴 베베르의시해보고서와증언서 ]. 2002 년 1 월. 6) 이영숙편저. < 명성황후시해사건러시아비밀문서 >. 서림재. 2005. 10. 20. 80 쪽. ( 재인용. 문화재청. < 건청궁, 찬란했던왕조의마지막기억 >. 2007. 10. 18. 80 쪽.) 7) 이영숙편저앞책같은쪽. ( 재인용. 문화재청. 앞책같은쪽.)
단하고요약적으로기술한보고서가하나더있다. 이짧은보고서는 5 쪽분량이다. 이두 가지보고서는 < 이영숙편저 > 의저술에모두포함되어있다. 후자의문서기호는 [No.211 첨부 6 서울. 1895] 이다. 그러나전자의보고서는문서기호가없다. < 그림 6> 장안당. 고종이주로외국인들을접견했다. (2010. 9. 8. 김란기 ) < 그림 7> 사바찐필체로추정되는러시아어의 요약된 [5 쪽보고서 ] 의첫머리. < 그림 8> 사바찐필체로추정되는러시아어의 [19 쪽보고서 ] 의첫머리 그렇다면후자문서인 [5 쪽보고서 ] 의주요부분을살펴보자. [ 새벽 5시에갑자기궁궐서쪽에서총성이들려왔고, 조선군인몇명이벽에다통나무와사다리를세워놓고벽을넘어궁궐안으로들어왔습니다. 보초병들은첫번째총소리가나자마자사방으로달아났고, 왕실경호군인들도거의모두그뒤를따랐습니다. 군인들은벽을타고넘어와자신의동지들에게대문을열어주는동안다이 (Dye) 장군은남아있던약간의병사들을집합시킨후궁궐엄호를위해가까스로그들을배치시켰습니다. 그러나남문과북문을통해침입한음모자들이몇차례총을쏘고그다음일제사격을몇번감행하자 - 그들은확실히살인을원하지않았기때문에단지위협하는목적으로위를향하여총을쏘았음 - 왕실경호군인들은각각흩어져서만나는사람마다자기뒤를따르게했습니다....] 8) 위의글에서확인할수있는것은낭인과한국군침입자들 ( 일본군과장교, 근위대, 훈련대 ) 8) 이영숙편저. 앞책. 45 쪽.
이통나무와사다리를건청궁서쪽담장에걸쳐두고그걸타고넘어왔다고하였다. 초기에는그렇게침입하여후에문을열었을것이다. 건청궁을지키는보초병과경호군이있었는데거의모두도망갔다고하였다. 미국공사관소속의다이장군은몇명남지않는보초병과경호군을모아궁궐엄호를위해배치시켰다고했다. 그러 < 그림 9> 건청궁후면서쪽담장과신무문. 건청궁서쪽담장나침입자들은남문과북문을은경복궁북쪽담장으로건청궁의서측을말하는것은아닐통해서도들어왔다고했다. 그까? (2010. 9. 8. 김란기 ) 들은총을쏘아댔으나사람 ( 경비병 ) 을맞추기위해쏜것이아니라경호군을도망치게하기위하여총구를거의하늘을향하여쐈다고했다. 어느기록이맞을까? 슬며시끼어든일본측기록 이와같은상황이전개되기전사바찐은새벽 4시에왕실경호당직 ( 이학균 ) 으로부터궁궐전체가한국군과일본군에의해포위되어있다고보고를받았고그것을확인하였다. 다이장군과함께궁궐의북서문 ( 추성문으로추정 ) 으로가서일본군이정렬해있는것을확인하였다. 또두사람은북동문 ( 춘생문으로추정 ) 으로가서 ( 일본으로부터교육을받은 ) 조선군인들이있는것을확인하였다. < 그림 10> 우치다사다즈치 ( 內田定槌 ) 가작성확인한민비살해의장소와과정. 장안당의후면우측모서리부분 (1번) 으로건물안으로침입하여, 장안당과곤녕합좌측뒤쪽관문각과사이마당에서살해한후 (2번), (3번) 의옥호루방안에시신을옮겼다가, 녹산의남쪽 (4번) 에서불에태웠다고기록하고있다 ( 일본외비무성외교사료관 ). 우측사진은內田定槌. 사바찐과다이는건청궁으로돌아와대책을협의하여했으나당직실 ( 관문각?) 에는이미아 무도없었다고했다. 이런상황에서새벽 5 시에 ( 일본군이정렬해있던 ) 궁궐서쪽에서총성 이나기시작했다고했다.
여기서검토해봐야하는부분이있다. 우리는저위에서 < 신동아 > 가세방향의문으로침입한것으로정리했다고했다. 그것은사바찐이쓴보고서에근거하였기때문이었다. 사바찐의보고서에의하면일본군과조선군이궁궐의북서와북동에각각정렬하고있었다고했다. 그리고최초총소리는궁궐서쪽에서시작했다고했다. 그러나일본측입장에서쓴우치다의보고서는광화문에서만침입한것으로표기하고있 다. 그렇다면일본과조선군을포함한낭인들이과연광화문을통해서만침입을했을까? 어느쪽이맞을까? 사바찐의보고서를더읽어보자. [ 그들중일부는다이 (Dye) 장군이있는대문 (?) 으로돌진했고, 나머지는내가서있는대문으로달려들어나를끌어들인채궁궐안의왕과왕비의처소 ( 곤녕합 ) 를연결하는문 ( 초양문?) 으로달려들었습니다. 왕의처소에도착했을때갑자기총소리가들렸습니다. 사람들은뒤로물러났다가왕과왕비의개인처소를연결하는문 ( 함광문 ) 으로달려갔습니다. 그곳에서나는바로사복을입은일본인몇명이앞뒤로뛰어다니면서마치누군가를찾고있는듯한모습을발견했습니다. 마당한가운데 ( 곤녕합마당 ) 는 40명의조선군인들과일본장교가서있었고, 일본군인 2명씩 2개의문 ( 함광문, 청휘문 ) 옆에서있었는데, 하나는공원으로통하는문 ( 청휘문 ), 다른하나는궁궐내부로통하는문 ( 함광문 ) 이었습니다. 이때누가나를작은목재건물밑으로밀어붙였고, 나는넘어지지않으려고기계적으로옆에있는판을붙잡았습니다. 사람들은나를지나쳐달려가공원에숨었습니다. 나는민왕비의처소에일어난극적인일을밖에서목격한유일한사람이되었습니다.] 사바찐의보고서에서침입자의중심인물들은일본군장교와그의부하몇명으로지목하고있다. 그들이궁녀들을창밖으로집어던지고민비를찾기위해날뛰는모습을묘사했다. 그러나사바찐은어느누구에게도무기를휘둘러살해하는장면은묘사하지않았다. 특히불특정인이총을쏘았다는말은해도특정인이칼을휘두른말은하지않고있다. 그는당시의상황에서특정인 ( 예를들어일본인책임장교등 ) 을거론하지않으면서, 그리고피해자가어떻게살해되었는지에대해구체적묘사를하지않고있다. < 그림 12> 건청궁초양문. 장안당과곤녕합사이의문이다. 낭인들은이문을 통해서도공녕합의옥호루로침입했다. (2010. 9. 8. 김란기 )
음모자들이몇차례총을쏘고그다음일제사격을몇번감행하였다는정도의가해행위를묘사하고있을뿐이다. 그러나그는 나는민왕비의처소에일어난극적인일을밖에서목격한유일한사람이되었습니다 고단언하여그가거의모든것을, 그중에서도 극적인일 을보았음을기술하였다. [( 중략 )... 한무리의일본인들이궁궐이쪽저쪽을샅샅이뒤지기시작했고, 다른무리는민왕비 의방을습격하여창문에붙어서있던여자들에게달려들었습니다. 그들은여자들의머리채를 잡고밖으로질질끌어내어무엇인가를계속추궁했습니다.] 그의이같은절묘한묘사는당시그가처하고있던사정, 언제든자기도일본인들에게살해될수있는사정이내포되어방어적차원에서간접적으로기록했던것으로추측된다. 그러나우치다의보고서에포함된위의두가지도면중하나에는옥호루의방안에 Queen killed here' 라고확실하게기록되어있다. 같은보고서임에도불구하고다른도면에서는민비가관문각과곤녕합사이에서살해되어옥호루로시신을옮겨놨다고했다. 이와같은기술의차이는역사적으로매우중요한의미를가질수도있다. 우치다가시신이옮겨진장소에서살해된것으로규정한것은어떤이유에서일까? < 그림 13> 일본영사우찌다사다즈치 ( 内田定槌 ) 가작성하여본국에보고 (1895. 12. 21, 内田定槌機密 第 51 号発 ) 한기밀문서에포함된민비시해현장조사의건청궁배치도와시해과정. 붉은점선은침입자 들의이동방향.
< 그림 14> 복원된최근의건청궁사진위에사건의현장을표시하였다. 민왕후의시신은곤녕합의옥 호루에안치되었다가녹산에옮겨져불태워졌다. ( 사진 : 문화재청. < 건청궁, 찬란했던왕조의마지막 기억 >.) [ 나는그자리에꼼작도않고선채일본인들이민왕비처소에서저지르는만행을계속주시했습니다. 한궁녀를붙잡아서밖으로끌어낸일본인두명이여자를데리고작은사다리를통해뛰어내렸습니다. 그들은건물에서 30피트 (10m정도) 떨어진곳에서있던나를못알아본듯그냥지나쳐뛰어갔습니다.] 사바찐의보고서기술과우찌다의보고서도면을통합하여분석하였다. 양쪽보고서는입장 도다르고목적도다르지만역사의기록은지워지지않고동북아지형의변동의흔적을간 직하고있다. 건청궁의험난한발자취 ( 계속 ) 본고는미완성으로인용을삼갈것을부탁드립니다. 2010. 9. 12. 김란기 ( 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