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제 ( 天帝 ) 해모수의흘승골성 ( 訖升骨城 ) 에 관한연구 김진경 국립부경대학교겸임교수 차례 I. 들어가는글 II. 그간의선행연구의문제점 III. 위사 ( 僞史 ) 와진사 ( 眞史 ) 의분별 IV. 고대지명의올바른위치 1. 부여성 2. 졸본부여 ( 고구려 ) 3. 요 ( 遼 ) 남경 ( 南京, 연경 ) 과동경 ( 東京, 고구려요동성 ) 4. 흘승골성 [ 訖升骨城, 대요 ( 大遼 ) 의주 ( 醫州 ) 경계 ] V. 맺는글 국문요약명 ( 明 ) 대의사관 ( 史官 ) 들은 1421~1512년기간중에고대국가의역사적인지명들의위치를북쪽또는동쪽으로변이시키기위하여중국 23사 ( 史 ) 에위사 ( 僞史 ) 를삽입시켰으며, 조선중종 7년 (1512년) 에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가뜯어고쳐졌음을알수있다. 따라서현재의초중고대역사교과서에기술되어있는고대국가들의주요역사적인지명들의위치와강역 ( 疆域 ) 이모두왜곡되어있으며, 본래위치를찾아내기가쉽지않다. 그러나 삼국유사 에따르면, 천제 ( 天帝 ) 해모수 ( 解慕漱 ) 가흘승골성 ( 訖升骨城 ) 에북부여를세웠는데, 부기되어있는주석에흘승 - 1 -
골성의위치는 대요 ( 大遼 ) 의의주 ( 醫州 ) 경계지역 이라고기록되어있다. 또 삼국사기 지리지에따르면, 고기( 古記 ) 를인용하면서주몽이나라를세운졸본지역이 흘승골성 이라고기록되어있다. 따라서중국 23사 ( 史 ) 와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에서위사 ( 僞史 ) 와진사 ( 眞史 ) 를분별해냄으로써, 요 ( 遼 ) 의주 ( 醫州 ) 의본래위치는현재의산서성로성시로추정할수있었으며, 졸본의위치는현하북성정주시인근지역으로추정할수있었다. 또천제 ( 天帝 ) 해모수 ( 解慕漱 ) 가내려온흘승골성 ( 訖升骨城 ) 의위치는현재의산서성좌권 ( 左權 ) 현주변인근지역으로추정할수있었다. 주제어 : 천제 ( 天帝 ), 해모수 ( 解慕漱 ), 흘승골성 ( 訖升骨城 ), 북부여, 의주 ( 醫州 ), 졸본 ( 卒本 ), 고구려현, 조선, 요동, 현도 I. 들어가는글 삼국사기 1) 와 삼국유사 는대한민국의보물중에서도특별한보물이라고말할수있다. 왜냐하면비록고려때쓰인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가조선중종 7년 (1512년) 에뜯어고쳐졌지만, 2) 명 ( 明 ) 대의사관 ( 史 1) 고려사 세가권제 17 인종 23 년 (1145 년 ) 과열전권제 11 에따르면, 김부식이 삼국사 ( 三國史 ) 를편찬하여바쳤다고기록되어있다. 그러나 고려사 지 ( 志 ) 권제 11 에두군데주석 ( 註釋 ) 이부기되어있는데, 삼국사기 ( 三國史記 ) 를인용한다고기록되어있다. 즉, 조선은 고려사 마저뜯어고치면서 고려사 원본 ( 原本 ) 에기록되어있던 삼국사기 ( 三國史記 ) 를 삼국사 ( 三國史 ) 로고쳤으나, 주석으로부기되어있었던 삼국사기 ( 三國史記 ) 는고치지않았음을알수있다. 따라서고려때 (1145 년 ) 김부식이지은 삼국사기 의본래명칭이 삼국사기 였음을알수있으나, 조선중종 7 년 (1512 년 ) 에책명칭을 삼국사 로뜯어고친것으로추론할수있다. 2) 김진경, 고대요수 ( 遼水 ) 의위치비정 ( 比定 ) 에관한연구, 박사학위논문,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2012. 2. - 2 -
官 ) 들이 1421~1512년기간중에중국 23사 ( 史 ) 에임의삽입한위사 ( 僞史 ) 들을분별해낼수있는결정적인근거와논리를제공하고있기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가뜯어고쳐졌음을암시하는원천적인근거는 삼국유사 의발문 ( 跋文 ) 이라고말할수있다. 즉, 임신년 (1512년) 에 삼국유사 의발문 ( 跋文 ) 을쓴경주진병마절제사 ( 慶州鎭兵馬節制使 ) 이계복 ( 李繼福 ) 은 본사( 本史 ) 와 유사( 遺史 ) 가세월이흘러자획이닳아없어져한줄에서읽어낼수있는것이겨우네댓글자뿐이었다. 고하였다. 또 이책이세상에널리퍼지지않아사람들이쉽게구해볼수없었음을알게되어, 지금다시간행하지않는다면, 앞으로실전 ( 失傳 ) 되어동방 ( 東方 ) 의지난일을후학 ( 後學 ) 들이들어서알수없게될까한탄스럽다. 고하였다. 또세월이흘러사서 ( 史書 ) 의자획이달아없어졌으면, 최대한올바르게복간하여널리배포하면될일이다. 따라서발문을쓰면서사서의복간에참여한이들의노고를치하하고, 훌륭한일을수행해낸것에대하여크게축하하며, 역사가널리널리알려지도록기원하면될일이라고볼수있다. 그러나이계복 ( 李繼福 ) 은발문 ( 跋文 ) 에서 아아! 물건이란오래되면반드시없어지기마련이고, 없어지면반드시일어나기마련이니, 일어났다가없어지고없어졌다가일어나는것이당연한이치이다. 라고하였다. 또이계복 ( 李繼福 ) 은 후세 ( 後世 ) 의학자들은이러한이치를알아때로일으켜영원히전할것을후세의학자들에게바란다. 고하였다. 즉, 사서의자획이닳아없어져복간하는데많은애를써야했겠지만, 본사( 本史 ) 와 유사( 遺史 ) 를복간하는심정이예사롭지않음을알아챌수있다. 다시말해서후세의학자들이 일어났다가없어지고없어졌다가일어나는당연한이치 를이해하기를간절히기원하였으며, 때로일으켜영원히전할것 을후세의학자들에게신신당부하였다. - 3 -
따라서본연구원은 삼국유사 발문에서제기하고있는 일어났다가없어지고없어졌다가일어나는당연한이치 가무엇인지를숙고하면서,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가뜯어고쳐졌음을입증할수있는근거를사례로서참고로제시하고, 위사 ( 僞史 ) 와진사 ( 眞史 ) 를분별함으로써,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기록되어있는내용중천제 ( 天帝 ) 해모수 ( 解慕漱 ) 가북부여를건국했다고하는흘승골성 ( 訖升骨城 ) 의본래위치를본논문을통하여추정하고자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따르면, 흘승골성 ( 訖升骨城 ) 의위치는 대요 ( 大遼 ) 의의주 ( 醫州 ) 경계 라고주석이부기되어있으므로, 요 ( 遼 ) 의주 ( 醫州 ) 의본래위치를찾으면, 그인근지역이홀승골성임을알수있게될것이다. II. 그간의선행연구의문제점 후한서 군국지에따르면, 현도가낙양에서동북 4,000리거리에있다 고기록되어있다. 또 후한서 동이열전에서다시 부여는현도에서북쪽으로 1,000리거리에있다 고기록되어있다. 따라서우리나라백성 ( 百姓 ) 들은부여의위치가 [ 그림 1] 에서보는바와같이현재의길림성장춘 ( 長春 ) 시주변일대에있었던줄로알고있었다. 또 신당서 지리지에따르면, 안동도호부가서안에서동북 4,625리, 낙양에서동북 3,820리 라고기록되어있으며, 발해왕성 ( 상경용천부 ) 이안동도호부 ( 양평, 고구려요동성 ) 에서부터동북쪽으로 1,500리거리 에있었다고기록되어있다. 따라서우리는당 ( 唐 ) 이한 ( 漢 ) 의옛양평 ( 요동고성 ) 에두었다는안동도호부의위치가현재의요령성요양 ( 遼陽 ) 시인근지역인줄알고있었으며, 진국 ( 발해 ) 의왕성은현재의길림성하얼빈시아성구 ( 阿城區 ) 인근지역에있었던줄로알고있었다. - 4 -
[ 그림 1] 후한서 에근거한현도와부여 ( 모두위사임 ) 즉, 이제까지당 ( 唐 ) 의안동도호부와진국 ( 발해 ) 왕성 ( 상경용천부 ) 의위치가각각 [ 그림 2] 에서보는바와같이알려져있다. 또 구당서 동이열전 3) 에따르면, 낙랑군이당 ( 唐 ) 의수도장안 ( 長安 ) 에서 5,100리라고기록되어있으며, 신당서 동이열전 4) 에따르면, 낙랑군이당 ( 唐 ) 의장안 ( 長安 ) 에서 5,000리라고기록되어있다. 즉, 구당서 동이열전과 신당서 동이열전의기록이올바르다면, 낙랑은 [ 그림 2] 에서보는바와같이현재의이북평양인근지역에있었어야만할것이다. 3) 권제199 상동이열전 : 高句麗 : 其國都於平壤城, 卽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里. 百濟 : 在京師東六千二百里. 4) 신당서 권제220 동이열전 : 高麗, 本扶餘別種也. 地東跨海距新羅, 南亦跨海距百濟, 西北度遼水與營州接, 北靺鞨. 其君居平壤城, 亦謂長安城, 漢樂浪郡也, 去京師五千里而贏, 隨山屈繚爲, 南涯浿水, 王築宮其左. 又有國內城 漢城, 號別都. 水有大遼 少遼 : 大遼出靺鞨西南山, 南歷安市城, 少遼出遼山西, 亦南流, 有梁水出塞外, 西行與之合. 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號鴨淥水, 歷國內城西, 與鹽難水合, 又西南至安市, 入于海. 而平壤在鴨淥東南, 以巨艫濟人, 因恃以爲塹 - 5 -
[ 그림 2] 안동도호부, 발해상경용천부, 낙랑군등 ( 모두위사임 ) 그러나상기한 후한서, 구당서, 신당서 등의기록은모두위사 ( 僞史 ) 임을알수있다. 5) 왜냐하면명 ( 明 ) 이 15세기초에현재의하북성, 산서성, 산동성, 안휘성, 하남성, 강소성등고려의옛땅을차지하게되자, 명 ( 明 ) 대의사관들이 1421~1512년사이에주요역사적인지명들을북쪽과동쪽으로변이시킨것으로추론할수있기때문이다. 다시말해서명 ( 明 ) 이 1421년에수도를현재의강소성남경시에서현재의북경시로옮겼는데, 고려가망하고명 ( 明 ) 이현재의하북성, 산서성, 산동성, 하남성, 강소성, 안휘성등을차지하게되자비로소수도를옮길수있었으며, 명 ( 明 ) 대의사관들이고대지명들을변이시킬수있었다고볼수있기때문이다. 물론명 ( 明 ) 이 1421년이전에이미고대지명들을북쪽또는동북쪽으로옮길수있었다고도볼수있지만, 최근연구결과에따르면, 명 ( 明 ) 이옛고려땅을차지하게됨으로서비로소명 ( 明 ) 대 5), 고대요수 ( 遼水 ) 의위치비정 ( 比定 ) 에관한연구 박사학위논문,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2012. 2. - 6 -
의사관 ( 史官 ) 들이고대지명의위치를변이시켰다고추론할수있는것이다. 6) 또조선중종 7년 (1512년) 에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를재발간하면서뜯어고쳐졌다고추론할수있는이유는, 삼국의주요역사적인지명들의위치가중국 23사 7) 에삽입되어있는위사 ( 僞史 ) 들에근거하여기술되어있기때문이다. 따라서고대지명의변이 ( 變移 ) 가 1421~1512년기간중에일어 6), 고대요수 ( 遼水 ) 의위치비정 ( 比定 ) 에관한연구, 박사학위논문,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2012. 2. 김진경, 탁록 ( 涿鹿 ) 의위치비정에관한연구, 선도문화 제 13 권,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출판부, 2012. 8. 김진경, 갈석산 ( 碣石山 ) 의위치비정에관한연구, 선도문화 제 15 권,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출판부, 2013. 8. 김진경, 고조선의도읍지, 건국 ( 建國 ) 년도, 국호등에관한고찰, 선도문화 제 16 권,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출판부, 2014. 2. 김진경, 국학의관점에서보는역사교육의문제에관한연구, 선도문화 제 17 권,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출판부, 2014. 8. 김진경, 주 ( 周 ) 무왕의분봉지와기자조선의위치에관한연구, 고조선연구 제 3 호, 고조선학회, 2014. 8. 김진경, 환단고기 의진위 ( 眞僞 ) 에관한고찰 (I), 고조선연구 제 4 호, 고조선학회, 2015. 2. 7) 23( 史 ) : 한 ( 漢 ) 의사마천 ( 司馬遷 ) 이상고로부터한 ( 漢 ) 무제 ( 武帝 ) 때까지기록한 사기 ( 史記 ) 이후, 단대사 ( 斷代史 ) 로서매왕조마다사서 ( 史書 ) 가만들어졌다. 사기 ( 史記 ) 와반고 ( 班固 ) 의 전한서 ( 前漢書 ), 범엽 ( 范曄 ) 의 후한서 ( 後漢書 ), 진수 ( 陳壽 ) 의 삼국지 ( 三國志 ) 를합하여사사 ( 四史 ) 라고부른다. 그이후 진서 ( 晉書 ), 송서 ( 宋書 ), 남제서 ( 南齊書 ), 양서 ( 梁書 ), 진서 ( 陳書 ), 위서 ( 魏書 ), 북제서 ( 北齊書 ), 주서 ( 周書 ), 수서 ( 隋書 ), 신당서 ( 新唐書 ), 신오대사 ( 新五代史 ) 등이편찬되었는데, 남송 ( 南宋 ) 대에 남사 ( 南史 ) 와 북사 ( 北史 ) 를더하여 17 사 ( 史 ) 로총칭되었다. 또원 ( 元 ) 말기에 송사 ( 宋史 ), 요사 ( 遼史 ), 금사 ( 金史 ) 등이편찬되었고명 ( 明 ) 초 원사 ( 元史 ) 가편찬됨으로써, 이들을합하여 21 사 ( 史 ) 라고불렀으며, 청 ( 淸 ) 초만들어진 명사 ( 明史 ) 를합하여 22 사 ( 史 ) 라고하였다. 청 ( 淸 ) 의건륭제 ( 乾隆帝 ) 는 구당서 ( 舊唐書 ) 와 구오대사 ( 舊五代史 ) 를포함시켜 24 사 ( 史 ) 로서궁중의무영전 ( 武英殿 ) 에서인행 ( 印行 ) 하였는데, 총 3,243 권에달한다. 민국초에 신원사 ( 新元史 ) 가정사로추가되어 25 사가되었다. 청 ( 淸 ) 에대해서는민국초에 청사고 ( 淸史稿 ) 가나왔으나아직정사로서인정되지않았다. 따라서명 ( 明 ) 대에의도적으로위사를삽입할수있었던사서는청 ( 淸 ) 대에쓰인 신원사 와 명사 를제외하면 23 사 ( 史 ) 라고부를수있다. - 7 -
났다고추론할수있는것이다. 그런데그간의선행연구들은대부분 삼국사기, 삼국유사, 중국 25사등의사료에위사 ( 僞史 ) 란있을수없다는전제하에추진되었다고볼수있다. 8) 이에따라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진국 ( 발해 ), 고려등우리나라고대국가들의강역 ( 疆域 ) 이모두잘못알려져있다. 더욱이초 중 고 대역사교과서에서우리나라고대국가들의강역 ( 疆域 ) 을현재의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등과현재의우리나라땅에그려놓고조선시대의 꾸며진역사 를교육하고있는실정이다. III. 위사 ( 僞史 ) 와진사 ( 眞史 ) 의분별 삼국사기 지리지제 4 권에따르면, 고구려평양성의위치에관 하여아래와같이기록되어있다. 평양성 ( 平壤城 ) 은지금 ( 고려 ) 의서경 ( 西京 ) 인듯하고, 패수 ( 浿水 ) 는대동강 ( 大同江 ) 이라는것이옳다. 그것을어떻게아는가? 당서 ( 唐書 ) 에 평양성 ( 平壤城 ) 은한 ( 漢 ) 나라의낙랑군 ( 樂浪郡 ) 이다. 산을따라굽이쳐둘러싸서성곽을만들고, 남쪽으로는패수 ( 浿水 ) 물가에닿았다. 고하였고, 또지 ( 志 ) 에서는 등주 ( 登州 ) 의동북쪽바다로나가서, 남쪽으로해안을끼고가면, 패강 ( 貝江 ) 입구초도 ( 椒島 ) 를지나신라 ( 新羅 ) 서북쪽이되었다. 고하였다. 또수나라양제 ( 煬帝 ) 의동정 ( 東征 ) 조서에서는다음과같이기록하였다. 창해도 ( 滄海道 ) 의군대는뱃머리가천리에이어지니, 높은돛은번개달리듯하고큰함정은구름날듯하여패강 ( 浿 8), 현도군고 및 낙랑군고 한국고대사연구, 1985. 수정판신채호, 평양패수고 단제신채호전집 하, 1972. 권오중, 전한시대의요동군 인문연구 17, 1995. 노태돈, 고조선중심지의변천에관한연구 한국사론 23, 1990. 서영수, 고조선의대외관계와강역의변동 동양학 29, 1999. 윤내현, 고조선의위치와강역 한국고대사신론, 1686. - 8 -
江 ) 을가로끊고평양 ( 平壤 ) 으로질러간다. 이로써말하면지금 ( 고려 ) 의대동강 ( 大同江 ) 이패수 ( 浿水 ) 라는것은명백 하니, 서경 ( 西京 ) 이평양 ( 平壤 ) 이라는것도알수있다. 만약상기한 삼국사기 지리지의기록이올바르다면, 고구려평양성의위치는현재의이북평양시인근지역이어야만할것이다. 즉, 현재초 중 고 대역사교과서에실려있는우리나라고대국가들의강역 ( 疆域 ) 이정교하지는못하다고할지라도, 고구려의평양성, 국내성, 요동성등대표적인지명의위치나고대국가의강역 ( 疆域 ) 이크게틀렸다고볼수는없을것이다. 그러나상기한 삼국사기 지리지의기록은위사 ( 僞史 ) 임을입증할수있다. 즉, 현재완질본이남아있는 삼국사기 정덕본은조선중종 7년 (1512년) 에제4차판본을만들면서뜯어고쳐졌음을알수있다. 고대지명의위치비정결론 고구려평양성은현산동성덕주시 고구려마지막수도중경장안성은현하북성압록부탁주시동경 패수는현산동성오경하남경 압록수는현하북성호타하패수 압록수 환도성 부여부 국내성 장안성 상경 요하 압록강 대동강 부여성철리부요수요동성회원부 동평부 평양성 장령부 정리부 [ 그림 3] 고구려와진국 ( 발해 ) 주요지명들의추정위치 - 9 -
또 삼국사기 와중국 23사 ( 史 ) 지리지에삽입되어있는위사 ( 僞史 ) 들을분별하여걷어내고아직남아있는원본 ( 原本 ) 의기록에근거하면, 고구려의평양성, 장안성, 환도성요동성, 부여성등의위치를 [ 그림 3] 에서보는바와같이추정할수있다. 9)10)11) 그런데중국 23( 史 ) 에서지명을변이시키면서지리적으로기준점이되었다고볼수있는지역은현재의북경 ( 北京 ) 시라고말할수있다. 즉, 현재까지알려져있는바에따르면, 춘추전국시대연 ( 燕 ) 의도읍지연도 ( 燕都 ) 가현재의북경시라고알려져있다. 또청 ( 淸 ) 대에작성된 대청광여도 에서찾아보면, 연 ( 燕 ) 의도읍지연도 ( 燕都 ) 가 [ 그림 4] 에서보는바와같이현재의북경시에표기되어있다. [ 그림 4] 대청광여도 에표기되어있는유주, 연경등 ( 위사임 ) 9), 고대요수 ( 遼水 ) 의위치비정 ( 比定 ) 에관한연구 박사학위논문,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2012. 2. 10) 김진경, 조선 600 년간의비밀, 요동 ( 遼東 ) 과부여 ( 夫餘 ), 어드북스, 2013. 1. 10 11) 김진경, 만천년역사의비밀태백과압록, 어드북스, 2014. 6. 20. - 10 -
[ 그림 5] 남경 ( 연경 ) 주변지명배치도 ( 근거 : 요사 지리지제4) 또한 ( 漢 ) 대에유주 ( 幽州 ) 의치소, 수 ( 隋 ) 대의탁군 ( 涿郡 ), 당 ( 唐 ) 대의유주 ( 幽州 ) 대도독부, 요 ( 遼 ) 대의남경 ( 南京 ), 금 ( 金 ) 대의중도 ( 中都 ) 등이모두북경시주변인근지역에있었던것으로알려져있다. 즉, 중국 23사 ( 史 ) 에따르면, 춘추전국시대연 ( 燕 ) 의도읍지연도 ( 燕都 ) 가계 ( 薊 ) 라고불리던지역에있었는데, 한 ( 漢 ) 대의유주, 수 ( 隋 ) 대의탁군, 당 ( 唐 ) 대의유주대도독부, 요 ( 遼 ) 대의남경, 금 ( 金 ) 대의중도등이모두같은지역에있었던것으로기록되어있다. 그러나계 ( 薊 ) 의본래위치는현재까지알려져있는것처럼북경시주변인근지역이아니라, 현재의산서성둔유 ( 屯留 ) 현인근지역에있었음을알수있다. 그근거는 구당서 지리지와 요사 지리지등에서지명의위치가변이 ( 變移 ) 되지않은채기록되어아직남아있는원본 ( 原本 ) 자체의기록들이다. 즉, 요사 지리지에따르면, 남경 ( 南京, 연경 ) 주변지역에있었던 10개지명간의거리와방향을고려하여배치도를그리면 [ 그림 5] 의왼편그림과같다. 또 요사 지리지에서인용하고있는송 ( 宋 ) 왕증 ( 王曾 ) 의상거란사 ( 上契丹事 ) 에근거하여, 웅주 ( 雄州 ) 백구역 ( 白溝驛 ) 에서하 ( 河 ) 를건너유주 ( 幽州 ) 연경 ( 燕京 ) 에도달하는경로 (230리) 를따라각지명의배치관계를그려보면, [ 그림 5] 의오른편그림과같다. 12) 역, 고안, 내수, 용성등은역주 ( 易州 ) 에속한다. - 11 -
[ 그림 6] 유주 ( 산서성둔유현 ) 과로 ( 산서성로성시 ) 추정지역 다시말해서상기한두그림에서남경 ( 연경 ) 과양향이공통지명 이므로왼편그림과오른편그림은같은지역임을알수있다. 그런데 [ 그림 5] 의오른쪽그림아래에표기되어있는하수 ( 河 水 ) 를현재의황하인근지역의강 ( 江 ) 으로보고현대지도에서현 재의황하를따라가며관찰하면, 여러지명들이 [ 그림 5] 와같이 방향과거리에따라배치되어형성된지역을찾을수있다. 즉, 춘추전국시대에연 ( 燕 ) 의수도연도 ( 燕都 ) 는유주 ( 幽州 ) 에있 었는데, 연도 ( 燕都 ) 는계 ( 薊 ) 라고불렸으며, 당 ( 唐 ) 대에는유주대 도독부가있었고, 요 ( 遼 ) 대에는남경 ( 연경 ) 이있었으며, 금 ( 金 ) 대에는중도 ( 中都 ) 가있었던곳으로서그위치는 [ 그림 6] 에서 보는바와같이현재의산서성둔유 ( 屯留 ) 현인근지역임을알수 있다. 12) 요사 ( 遼史 ) 권 40 지리지제 4( 남경 ) : 宋王曾 上契丹事 曰 : 自雄州白溝驛渡河, 四十裏至新城縣, 古督亢亭之地. 又七十裏至涿州. 北渡範水, 劉李河, 六十裏至良鄉縣. 渡盧溝河, 六十裏至幽州, 號燕京. 子城就羅郭西南為之. 正南曰啟夏門, 內有元和殿, 東門曰宣和. 城中坊闬皆有樓. 有閔忠寺, 本唐太宗為征遼陣亡將士所造 ; 又有開泰寺, 魏王耶律漢寧造. 皆遣朝使遊觀. 南門外有於越王廨, 為宴集之所. 門外永平館, 舊名碣石館, 請和後易之. 南即桑乾河. - 12 -
[ 그림 7] 산서성과하북성경계지역 / 계, 양향, 로, 탁, 옹로등그러나유주 ( 남경, 연경, 계현 ) 의위치가 [ 그림 4] 에서보는바와같이현재의북경시로둔갑되어있는실정이다. 그런데유주 ( 남경, 연경, 계현 ) 의위치를 [ 그림 6] 에서보는바와같이현재의산동성둔유현에위치시키면, [ 그림 5] 에나타나는각지명들의위치를 [ 그림 7] 과같이확인할수있다. 즉, 각지명간의거리는당척 (1리 =540m) 으로모두직선거리임을알수있으며, 요사 지리지의기록과정확하게일치한다. 따라서중국 23사와 삼국사 및 삼국유사 등사서에임의삽입되거나바꿔치기되어있는위사 ( 僞史 ) 들을분별해내고, 본래사서의원본에해당하는진사 ( 眞史 ) 들에근거하여역사적지명들의올바른위치를찾아내야만할것이다. IV. 지명의올바른위치 - 13 -
1. 부여성 삼국유사 에따르면, 북부여 에관하여아래와같이기록되어 있다. 고기( 古記 ) 에따르면, 전한서( 前漢書 ) 선제( 宣帝 ) 신작 ( 神爵 ) 3년임술년 ( 서기전 59년 ) 4월 8일에천제 ( 天帝 ) 가오룡거 ( 五龍車 ) 를타고흘승골성 [ 訖升骨城, 대요 ( 大遼 ) 의의주 ( 醫州 ) 경계 ] 으로내려와도읍을세우고왕 ( 王 ) 이라일컬으며, 국호를북부여라고하였다. 스스로이름을해모수 ( 解慕漱 ) 라고하고, 아들을낳아부루 ( 夫婁 ) 라고했는데, 해 ( 解 ) 를성으로삼았다. 왕은이후에상제 ( 上帝 ) 의명에따라동부여로도읍을옮겼다. 동명제 ( 東明帝 ) 가북부여를이어일어나졸본주 ( 卒本州 ) 에도읍을세우고졸본부여라고했으며, 바로고구려의시조이다. 또이어서 삼국유사 에따르면, 동부여 에관하여아래와같 이기록되어있다. 북부여왕해부루의국상아란불의꿈에천제가내려와말하기를, 장차내자손에게이곳에나라를세우도록할것이니, 너는다른데로피해가라. 동해가 ( 東海之濱 ) 에가섭원 ( 迦葉原 ) 이라는곳이있는데, 땅이기름져왕도로삼기에적당하다. 고하였다. 아란불이왕에게권하여도읍을옮기고동부여라고하였다. 한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시조동명성왕 ( 東明聖王 ) 1년 ( 서기전 37년 ) 의기록에따르면, 고구려의시조고주몽이고구려를건국하는과정에관하여기록되어있다. 즉, 고주몽이동부여 ( 東扶餘 ) 에서피신하여엄사수 ( 淹㴲水 ) 를거쳐졸본천 [ 卒本川, 위서 에서 흘승골성 ( 紇升骨城 ) 에이르렀다. 고하였다.] 에이르렀으며, 비류수 ( 沸流水 ) 가에오두막을짓고살았는데, 나라이름을고구려 ( 高句麗 ) 라하였으며, 고 ( 高 ) 씨로성 - 14 -
을삼았다. 고한다. 다시말해서상기한 삼국유사 와 삼국사기 에따르면, 천제 ( 天帝 ) 해모수 ( 解慕漱 ) 가흘승골성 ( 訖升骨城 ) 에북부여를세웠는데, 해부루 ( 解夫婁 ) 가북부여에서왕을하다가가섭원 ( 迦葉原 ) 이란곳으로가서동부여를세웠으며, 고주몽은동부여 ( 東扶餘 ) 에서피신하여졸본천 ( 卒本川 ) 으로가서비류수 ( 沸流水 ) 가에고구려 ( 高句麗 ) 를세웠다. 그런데앞서 II장에서논한바와같이, 만약 후한서 군국지와동이열전의기록이올바르다면, 부여의위치가 [ 그림 1] 에서보는바와같이현재의길림성장춘시주변인근지역이어야만할것이다. 또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기록되어있는 동부여 는중국 23사 ( 史 ) 에기록되어있는 부여 와동일한국가임을알수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기록되어있는 동부여 의왕해부루, 금와, 대소등에관한기록이중국 23사 ( 史 ) 에기록되어있는 부여 와동일하기때문이다. 그러나중국 23사 ( 史 ) 에 부여 에관한기록은있으나, 동부여 또는 북부여 에관한기록은전혀없다. 그런데앞서 II장에서언급한바와같이 후한서 군국지와동이열전에서부여의위치에관한기록은위사 ( 僞史 ) 임을알수있다. 왜냐하면부여의강역 ( 疆域 ) 안에부여성 ( 부여부 ) 이있었다고볼수있는데, 그위치를 [ 그림 8] 에서보는바와같이현재의산서성태원시남쪽인근지역으로추정할수있기때문이다. 13) 즉, 삼국사기 에따르면, 고구려천리장성 ( 千里長城 ) 의길이가 1,000리에달했으며, 동북자부여성동남지해 ( 東北自扶餘城東南至 ) 라고기록되어있는데, 동구절에서 동 ( 東 ) 자가본래 서 ( 西 ) 자였음을알아챌수있기때문이다. 13), 조선 600 년간의비밀요동과부여, 어드북스, 2013. 1. 10. - 15 -
[ 그림 8] 요수와고구려요동성, 당의유주, 영주. 의주등다시말해서고구려연개소문장군이 서북쪽부여성 ( 扶餘城 ) 에서부터동남쪽해 ( 海 ) 까지 장성을쌓았는데, [ 그림 8] 에서보는바와같이장성과부여성의위치를추정할수있다. 특히요수 ( 遼水 ) 가 [ 그림 8] 에서보는바와같이현재의산서성청장하 ( 淸漳河 ) 와탁장하 ( 濁漳河 ) 로추정할수있으며, 당 ( 唐 ) 과고구려는그당시요수 ( 遼水 ) 를국경선으로삼아서로대치하고있었으므로, 고구려는요수주변인근지역에서요수와평행하여천리장성을쌓았던것으로추정할수있다. 14) 따라서천리장성은현재의산서성과하북성남부지역에위치하고있었으며, 그당시해 ( 海 ) 라고불렀던현재의황하에서부터부여성까지 1,000리 ( 당척 ) 라고했으므로, 해 ( 海, 황하 ) 에서부터서북쪽으로 1,000리거리에부여성이있었어야할것이다. 즉, 중국 23사에기록되어있는해 ( 海, 황하 ) 15) 는황해가아니고 14), 고대요수 ( 遼水 ) 의위치비정 ( 比定 ) 에관한연구, 박사학위논문,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2012. 2. 15) 김진경, 갈석산 ( 碣石山 ) 의위치비정 ( 比定 ) 에관한연구, 선도문화 제 15 권,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국학연구원, 2013. 8. - 16 -
황하중류지역이므로, 황하중류에서부터서북쪽으로 1,000리거리에있는지역에부여성이있었음을알수있다. 그런데삼국시대의고황하수로는 [ 그림 8] 에서보는바와같이 1의위치가아니라 2의위치에서흘렀던것으로추정할수있으므로, 2의고황하수로로부터서북쪽 1.000리지점에부여성이있었던것으로추정할수있다. 그런데그당시당척 1리는약 540m이었으며, 굴곡지수가 1.72 5 16) 이었으므로, 실제이동거리 1,000리는직선거리가약 313km 로서, 고황하수로에서부터서북쪽으로직선거리 313km 지점인현재의산서성태원시남쪽주변인근지역에부여성이있었던것으로추정할수있다. 17) 2. 졸본부여 ( 고구려 ) 앞서 1절에서논한바와같이 삼국유사 에따르면, 동명제 ( 東明帝 ) 가북부여를이어일어나졸본주 ( 卒本州 ) 에도읍을세우고졸본부여라고했으며, 바로고구려의시조이다. 라고기록되어있다. 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시조동명성왕 ( 東明聖王 ) 1년 ( 서기전 37년 ) 의기록에따르면, 고주몽이동부여 ( 東扶餘 ) 에서피신하여엄사수 ( 淹㴲水 ) 를거쳐졸본천 [ 卒本川, 위서 에서 흘승골성 ( 紇升骨城 ) 에이르렀다. 고하였다.] 에이르렀으며, 비류수 ( 沸流水 ) 가에오두막을짓고살았는데, 나라이름을고구려 ( 高句麗 ) 라하였으며, 고 ( 高 ) 씨로성을삼았다. 고한다. 즉, 삼국유사 에따르면, 동명성왕이북부여에서왔다고기록되어있으나, 삼국사기 에따르면, 동명성왕 ( 고주몽 ) 이동부여 16) [ 2] 에서보면, 서안과낙양에서요양까지각각실제직선거리는 1.452km 와 1,192km 이다. 즉, 직선거리 1,452km 굴곡지수 x 540m/ 리 = 실제이동거리 4,625 리에서 x= 약 1.725 임을알수있다. 17) 김진경, 조선 600 년간의비밀요동과부여, 어드북스, 2013. 1. 10. 1,000 리 540m/ 리 굴곡지수 1.725= 약 313km(4 백만분의 1 지도에서약 7.8cm) - 17 -
에서왔다고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이던지, 또는 삼국유사 이던지간에동명성왕 ( 고주몽 ) 이나라를세운곳은졸본천 ( 卒本川 ) 과비류수 ( 沸流水 ) 가있는곳으로서졸본주 ( 卒本州 ), 졸본부여, 흘승골성 ( 紇升骨城 ) 등으로불렀으며, 나라이름을고구려라고했음을알수있다. 그런데동명성왕 ( 고주몽 ) 이졸본부여 ( 고구려 ) 를세운지역은 [ 그림 8] 에서보는바와같이환도성과국내성이있었던곳으로추정할수있 [ 그림 9] 신당서 지리지하북도다. 그근거는 신당서 지리지하북도에관한기록과 요사 지리지이다. 즉, 신당서 지리지하북도에따라각지명들의배치관계를그려보면, [ 그림 9] 와같다. 또 요사 지리지에따르면, 녹주 ( 신주 ), 환주, 풍주, 정주등의배치관계가 [ 그림 10] 에서보는바와같다. 즉, 요 ( 遼 ) 대의환주와녹주가고구려의환도와신주였음을알수있으며, 신당서 지리지하북도의기록과일치함을알수있다. 다시말해서 신당서 지리지하북도의기록에서압록 [ 그림 10] 요사 지리지( 녹주 ) - 18 -
강입구를현재의하북성천진시앞바다로설정하면, 방향과거리에따라환도, 신주, 현주등의위치를찾을수있다. 즉, [ 그림 8] 과 [ 그림 11] 에서보는바와같이환도는환도성, 신주는국내성, 현주는고구려마지막수도장안성임을알수있다. 또 [ 그림 10] 과 [ 그림 11] 을비교해보면, 요 ( 遼 ) 대의정주는현재의하북성영구 ( 靈丘 ) 현으로추정할수있다. 즉, 현재의하북성영구 ( 靈丘 ) 현에서흘러나오는현재의하북성당하 ( 唐河 ) 를비류수로추정할수있다. 또현재의하북성호타하를압록수로추정할수있는데, 삼국사기 에기록되어있는엄사수 ( 淹㴲水 ) 로볼수있으며, 현재의하북성사하 ( 沙河 ) 는졸본천 ( 卒本川 ) 으로추정할수있다. 즉, [ 그림 11] 에서보는바와같이졸본천과비류수가있는현재의하북성정주시주변일대에졸본부여 ( 고구려 ) 가건국된것으로추정할수있다. [ 그림 11] 환도성, 국내성, 장안성등 - 19 -
3. 요 ( 遼 ) 남경 ( 南京, 연경 ) 과동경 ( 東京, 고구려요동성 ) 앞서 III장에서논한바와같이요 ( 遼 ) 의남경 ( 南京 ) 은춘추전국시대연 ( 燕 ) 의도읍지였으며, 연경 ( 燕京 ) 이라고도불렸는데, 춘추전국시대에는계 ( 薊 ) 라고불렸던지역이다. 그런데 [ 그림 4] 의 대청광여도 에표기되어있는바와같이요 ( 遼 ) 의남경 ( 南京, 연경 ) 이현재의북경시주변인근지역에있었다면, 해모수가세웠다고하는북부여의위치가현재의북경시동쪽인근지역이어야만할것이다. 왜냐하면앞서 1절에서논한바와같이 삼국유사 에따르면, 해모수가북부여를세운흘승골성의위치가 대요 ( 大遼 ) 의의주 ( 醫州 ) 경계지역 이라고부기되어있기때문이다. 즉, 삼국사기 지리지에따르면, 고려사신이요 ( 遼 ) 동경에서남경 ( 南京 ) 으로가는데동경에서하루이틀가면의주 ( 醫州 ) 에도착하고바로연계 ( 燕薊, 남경 ) 에도착할수있었다 고기록되어있으므로, 요 ( 遼 ) 대의의주 ( 醫州 ) 는요 ( 遼 ) 남경 ( 南京, 연경 ) 의동쪽인근지역으로서현재의북경시동쪽인근지역이어야함을알수있다. [ 그림 12] 요남경과동경의본래위치추정지역 - 20 -
그러나 [ 그림 12] 에서보는바와같이현재까지요 ( 遼 ) 동경으로알려져있는요령성요양 ( 遼陽 ) 시에서요 ( 遼 ) 남경으로알려져있는현재의북경시까지약 1,853리 ( 당척 ) 이다. 즉, 이거리는밤을새우며가장빨리가더라도하루이틀만에갈수있는거리가아니며, 잠을자지않고계속이동하면약 4.1 일이나걸려야하는거리임을알수있다. 18) 왜냐하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영양왕 23년 (612년) 의기록에따르면, 수군 ( 隋軍 ) 이을지문덕장군의계략에걸려걷잡을수없게무너지면서살수 ( 薩水 ) 로부터압록수까지하루낮하룻밤에걸쳐 450리를도망쳐나왔는데, 30만 5천명중에서겨우 2,700명이살아왔다고기록되어있다. 다시말해서그당시하루종일약 24시간에걸쳐최대한이동할수있는거리는 450리 ( 약 243km) 임을알수있는데, 이는현대마라톤정상급선수가달리는속도의약절반 (10km/ 시 ) 에해당하며, 현대정규군보병의이동속도 ( 약 5km/ 시 ) 보다약 2배에해당한다. 따라서현재의요령성요양에서부터현재의북경시인근지역까지약 1,853리 ( 당척 ) 는약 1,000km이므로잠을자지않고이동할경우, 약 4.1일이걸려야하는거리임을알수있다. 그러나앞서 III장에서언급한바와같이요 ( 遼 ) 동경의본래위치는당 ( 唐 ) 이안동도호부를두었다는곳으로서고구려요동성이있었으며, 현재의하북성한단 ( 邯鄲 ) 시광부고성으로추정할수있는데, 그위치는 [ 그림 3] 에서보는바와같다. 19) 또요 ( 遼 ) 남경은 [ 그림 6] 에서보는바와같이현재의산서성둔유 ( 屯留 ) 현인근지역으로추정할수있으므로, 요 ( 遼 ) 동경과남경간의거리는 [ 그림 12] 에서보는바와같이약 500리에해당 18), 만천년역사의비밀태백과압록, 어드북스, 2014. 6. 20. 1,853 리 540m/ 리 굴곡지수 1.725= 약 580km, 당척 1 리 =540m. 지도실측을위해 4 백만분의 1 지도사용. 19) 김진경, 조선 600 년간의비밀, 요동 ( 遼東 ) 과부여 ( 夫餘 ), 어드북스, 2013. 1. 10-21 -
함을알수있다. 즉, 삼국사기 지리지의기록과마찬가지로약 500리는 [ 그림 12] 에서보는바와같이하루이틀만에갈수있는거리임을확인할수있다. 따라서국사교과서에쓰여있는것처럼현재의요령성요양에고구려요동성 [ 당 ( 唐 ) 안동도호부및요 ( 遼 ) 의동경 ] 이있었다거나, 현재의북경에당 ( 唐 ) 대의유주 ( 幽州 ) 대도독부 [ 또는요 ( 遼 ) 의남경 ) 가있었다는현재의학설은명백히오류임을확인할수있다. 또현재의북경 ( 北京 ) 시주변에있는창평, 어양, 안차, 양향, 영청, 무청, 고안, 역, 래수, 용성등의지명들은 [ 그림 5] 에서보는바와같이모두유주 ( 연경, 남경 ) 의주변에있었던지명들로서본래현재의산서성남부지역에있었던지명들이지만, 현재는모두동북방향으로북경시주변지역으로변이되었음을알수있다. 즉, 요 ( 遼 ) 의의주 ( 醫州 ) 는요 ( 遼 ) 남경의본래위치로추정할수있는현재의산서성둔유현의바로동쪽인근지역이었음을알수있으며, [ 그림 6] 에서보는바와같이현재의산서성로성시로추정할수있다. 4. 흘승골성 [ 訖升骨城, 대요 ( 大遼 ) 의의주 ( 醫州 ) 경계 ] 앞서 1절에서논한바와같이 삼국유사 에따르면, 해모수 ( 解慕漱 ) 가내려온흘승골성 ( 訖升骨城 ) 은요 ( 遼 ) 의의주 ( 醫州 ) 경계지역이라고기록되어있다. 그런데앞서 3절에서논한바와같이요 ( 遼 ) 의주 ( 醫州 ) 의본래위치가북경시동쪽인근지역이아니라, 현재의산서성로성시인근지역으로추정할수있었으며, 그위치는 [ 그림 13] 에서보는바와같다. 또앞서 1절에서논한바와같이고구려부여성이현재의산서성태원시남쪽주변인근지역에있었던것으로추정할수있으며, 그위치는 [ 그림 13] 에서보는바와같다. - 22 -
[ 그림 13] 천재해모수의흘승골성추정지역그런데해모수 ( 解慕漱 ) 가내려온흘승골성 ( 訖升骨城 ) 의위치가 [ 그림 13] 에서보는바와같이의주 ( 醫州 ) 의경계지역에있었는데, 부여의위치와비교해볼때, 부여의위치와비교해서흘승골성 ( 訖升骨城 ) 의위치를북부여라고말할수는없다. 즉, 부여성이있었던곳으로추정할수있는현재의산서성태원시남쪽주변인근지역과비교해보면, 해모수 ( 解慕漱 ) 가내려온흘승골성 ( 訖升骨城 ) 이오히려남쪽에위치하고있다. 또 [ 그림 13] 에서보는바와같이압록수는현재의하북성호타하로추정할수있으며, 졸본천은현재의하북성당하로추정할수있는데, 고구려고주몽이졸본부여 ( 고구려 ) 를세운현재의하북성석가장시와정주시주변인근지역에서보면, 부여성은졸본부여의서쪽에위치하고있다. 그런데앞서 1절에서논한바와같이중국 23사동이전에부여에관한기록은있으나 북부여 와 동부여 에관한기록은전혀없으며, 중국 23사동이전에서부여에관한기록은 삼국유사 의 동부여 에관한기록과똑같다. - 23 -
[ 그림 14] 산서성둔유현, 로성시, 좌권현등또 삼국유사 에서 삼국사 의기록을거의그대로인용하면서 부여왕 을 북부여왕 으로고쳐적었음을발견할수있다. 즉, 북부여 와 동부여 는조선중종 7년 (1512년) 에 삼국사 와 삼국유사 를뜯어고치면서부여이전의역사가있었음을의미하기위하여가상으로만들어넣은국호임을알아챌수있다. 그런데천제 ( 天帝 ) 해모수 ( 解慕漱 ) 가내려온흘승골성 [ 訖升骨城, 대요 ( 大遼 ) 의주 ( 醫州 ) 의경계지역 ] 의위치를현재의산동성로성시주변경계지역으로추정할수있으므로, 현재의산동성로성시주변경계지역을 [ 그림 14] 에서보는바와같이북쪽 (A), 동북쪽 (B), 동쪽 (C) 등으로구분해볼수있다. - 24 -
즉, A 지역은현도지역이며, B 지역은요동지역이고, C 지역은조선지역으로추정할수있다. 20)21) 그러나 A, B, C 등 3개지역중에서어느곳이천제 ( 天帝 ) 해모수 ( 解慕漱 ) 가내려온흘승골성인지보다구체적인기록은없다. 그런데앞서 1절에서논한바와같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시조동명성왕 ( 東明聖王 ) 1년 ( 서기전 37년 ) 의기록에따르면, 위서 를인용하면서졸본천 ( 卒本川 ) 이 흘승골성 ( 紇升骨城 ) 이라고주석이부기되어있다. 또 삼국사기 지리지에따르면, 고기( 古記 ) 를인용하면서 홀승골성 ( 紇升骨城 ) 이졸본 ( 卒本 ) 이라고아래와같이기록되어있다. 고기 ( 古記 ) 에서이르기를, 주몽 ( 朱蒙 ) 이부여 ( 扶餘 ) 로부터 난을피해도망하여졸본 ( 卒本 ) 에이르렀다. 고하였으니, 곧홀승 골성 ( 紇升骨城 ) 과졸본 ( 卒本 ) 은같은한곳이다. 즉, 천제 ( 天帝 ) 해모수 ( 解慕漱 ) 가북부여를건국한곳이흘승골성 ( 訖升骨城 ) 이라는곳인데, 주몽이나라를세운졸본지역도흘승골성이라고기록되어있으니, 홀승골성의위치는 [ 그림 13] 에서보는바와같이현재의산서성좌권현주변인근지역으로부터졸본으로추정할수있는현재의하북성정주 ( 定州 ) 시까지이르는지역이었음을알수있다. 또 [ 그림 14] 에서보는바와같이 A, B, C 등 3개지역중에서 B와 C 지역은, 사기 화식열전에따르면, 춘추전국시대연 ( 燕 ) 의동쪽지역으로서예맥조선진번 ( 濊貊朝鮮眞番 ) 지역임을알수있다. 22) 20), 조선 600 년간의비밀, 요동 ( 遼東 ) 과부여 ( 夫餘 ), 어드북스, 2013. 1. 10 21) 김진경, 고조선의도읍지, 건국 ( 建國 ) 년도, 국호등에관한고찰, 선도문화 제 16 권,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출판부, 2014. 2. 22) 김진경, 고조선의도읍지, 건국 ( 建國 ) 년도, 국호등에관한고찰, 선도문화 제 16 권,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출판부, 2014. 2. - 25 -
또 한서 ( 전한서 ) 지리지와 후한서 군국지에따르면, A 지역은요수 ( 遼水, 현재의하북성청장하로추정 ) 가발원하는지역으로서요산 ( 遼山, 현재의양곡산으로추정 ) 이위치하고있는현도고구려현으로추정할수있다. V 맺는글 앞서 I장에서논한바와같이 삼국유사 의발문 ( 跋文 ) 을음미해보면, 그당시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를뜯어고쳐야만했던처절한심정을느낄수있다. 그러나천제 ( 天帝 ) 해모수 ( 解慕漱 ) 가북부여를건국한흘승골성 ( 訖升骨城 ) 이대요 ( 大遼 ) 의의주 ( 醫州 ) 경계라고부기한주석을남겨놓음으로써흘승골성의본래위치를밝힐수있었다. 또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를뜯어고치면서도 대요 ( 大遼 ) 의의주 ( 醫州 ) 경계 라는부기가남아있을수있었던이유는, 명 ( 明 ) 의사관들이 신당서, 요사 등의지리지에위사를삽입시키면서요 ( 遼 ) 의남경과동경등의위치를모두변이시켜놓았기때문에그대로남겨질수있었다고볼수있다. 그러나명 ( 明 ) 대의사관들은 요사 를뜯어고치면서요 ( 遼 ) 남경 ( 유주, 연경 ) 주변지역의여러지명들이상호배치된사항 ([ 그림 5] 참조 ) 을간과함으로써요 ( 遼 ) 남경 ( 연경 ) 이바로현재의산서성둔유 ( 屯留 ) 현이었음이드러나게되었다. 또 [ 그림 12] 에서보는바와같이 삼국사기 지리지에 고려사신이요 ( 遼 ) 동경에서남경 ( 南京 ) 으로가는데, 동경에서하루이틀가면의주 ( 醫州 ) 에도착하고바로연계 ( 燕薊, 남경 ) 에도착할수있었다 는기록이남아있음으로써, 요 ( 遼 ) 의남경과동경의위치가모두변이된것임을거리와이동속도로확인할수있었다. 물론조선의사관들이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를뜯어고치면서후손들이올바른역사를알아낼수있도록의도적으로조치하였다고별도로기록되어있는것은아니지만, 삼국유사 의 - 26 -
발문 ( 跋文 ) 을비롯하여고대국가지명들의본래위치를찾아낼 수있는근거과논리가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의기록곳 곳에심어져있음을알수있다.< 끝 > 참고문헌 삼국사기( 三國史記 ) 삼국유사( 三國遺事 ) 규원사화( 揆園史話 ) 사기( 史記 ) 한서( 漢書 ) 후한서( 後漢書 ) 삼국지( 三國志 ) 진서 ( 晉書 ) 위서( 魏書 ) 수서( 隋書 ) 구당서( 舊唐書 ) 신당서( 新唐書 ) 통전( 通典 ) 요사( 遼史 ) 금사( 金史 ) 흠정만주원류고( 欽定滿洲源流考 ) 대청광여도( 大淸廣輿圖 ) 김진경, 고대요수 ( 遼水 ) 의위치비정 ( 比定 ) 에관한연구, 박사학위논문,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2012. 2. 김진경, 고구려평양성에서바라보는초주 ( 椒州 ) 와해주 ( 海州 ), 어드북스, 2012. 6. 20. 김진경, 조선 600년간의비밀, 요동 ( 遼東 ) 과부여 ( 夫餘 ), 어드북스, 2013. 1. 10 김진경, 만천년역사의비밀태백과압록, 어드북스, 2014. 6. 20. 김진경, 백제 900년의비밀관미와고평, 어드북스, 2015. 4. 29. - 27 -
, 탁록( 涿鹿 ) 의위치비정에관한연구, 선도문화 제13권, 2012. 8. 김진경, 갈석산 ( 碣石山 ) 의위치비정에관한연구, 선도문화 제 15권, 2013. 8. 김진경, 고조선의도읍지, 건국 ( 建國 ) 년도, 국호등에관한고찰, 선도문화 제16권,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출판부, 2014. 2. 김진경, 국학의관점에서보는역사교육의문제에관한연구, 선도문화 제17권,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출판부, 2014. 8. 김진경, 주( 周 ) 무왕의분봉지와기자조선의위치에관한연구, 고조선연구 제3호, 고조선학회, 2014. 8. 김진경, 환단고기 의진위 ( 眞僞 ) 에관한고찰 (I), 선도문화 제 18권,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출판부, 2015. 2. 이병도, 현도군고 및 낙랑군고 한국고대사연구, 1985. 수정판신채호, 평양패수고 단제신채호전집 하, 1972. 권오중, 전한시대의요동군 인문연구 17, 1995. 노태돈, 고조선중심지의변천에관한연구 한국사론 23, 1990. 서영수, 고조선의대외관계와강역의변동 동양학 29, 1999. 윤내현, 고조선의위치와강역 한국고대사신론, 1686. Abstract A Study on the Hulsunggolsung( 訖升骨城 )' of the Heaven( 天帝 ) Haemosu Kim, Jin-Kyoung Ph. D. of National Studies, National Uni. of Pukyong According to the Samgukusa, it is recorded that the Heaven( 天帝 ) Haemosu( 解慕漱 ) had established a North- Buyeo in Hulsunggolsung( 訖升骨城 )' and an annotation is - 28 -
recorded that its location is on the boundary area of Yee-ju( 醫州 ) in the Kitai dynasty. And according to the Samguksa, the solbon( 卒本 ) area where jumong has established a nation is recorded as Hulsunggolsung( 訖升骨城 )'. However it is very difficult to seek the original location of main geographical names, because many distorted history were inserted in the chinese 23 history books in order to remove those location of main geographical names during the year 1421~1512 of the Mung-dynasty, and the Samgukusa and the Samguksa was partially changed in the year 1512 of the Chosun-dynasty. Nevertheless the original location of Yee-ju( 醫州 ) in the Kitai dynasty and solbon( 卒本 ). Namely, it could be presumed that the Hulsunggolsung( 訖升骨城 )' where the Heaven( 天帝 ) Haemosu( 解慕漱 ) had come is on the boundary area of the present Joaguan( 左權 )-hyun in the Sanseo-province. Key-wards : Heaven( 天帝 ), Haemosu( 解慕漱 ), Hulsunggolsung( 訖升骨城 ), North- Buyeo, Yee-ju( 醫州 ), solbon( 卒本 ), Goguryou-hyun, Chosun, Yo-dong, Hyoun-do - 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