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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간물은국방부산하공익재단법인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매월개최되는국방 군사정책포럼에서의논의를참고로작성되었습니다. 일시 장소주관발표토론간사참관 한국군사문제연구원오창환한국군사문제연구원장허남성박사 KIMA 전문연구위원, 국방대명예교수김충남박사 KIMA객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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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요약 > Ⅰ. 국내은행 1 1. 대출태도 1 2. 신용위험 3 3. 대출수요 5 Ⅱ. 비은행금융기관 7 1. 대출태도 7 2. 신용위험 8 3. 대출수요 8 < 붙임 > 2015 년 1/4 분기금융기관대출행태서베이실시개요

1-1) 아직까지도우리나라는 resilience' 이라는용어가적응유연성 ( 권태철, 2002; 김미승, 2002; 박현선, 1998, 1999a, 1999b; 양국선, 2001; 유성경, 2000; 이선아, 2004; 윤미경, 2002; 조혜정, 2002; 장순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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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년 년 1 월 23 일, 국가기록원 - 제 19 회국전철 (1), pp ,

할렐루야10월호.ps, page Normalize ( 할 437호 )

Transcription:

표지와같은면지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PROGRAM 개회식사회정성희 ( 국회입법조사처사회문화조사실장 ) 기조발제개회사환영사환영사 정의화국회의장임성호국회입법조사처장박종면머니투데이대표이사박인규프레시안이사장 발제사회심재철 ( 고려대미디어학부교수 ) 독립신문창간과한국언론의역사 : 사회적역할과독자의인식을중심으로 김영희서울대언론정보연구소책임연구원 한국언론의과제와전망 :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을계기로본역사적성찰 박용규상지대언론광고학부교수 토론사회심재철 ( 고려대미디어학부교수 ) 토론 1: 김사승숭실대언론홍보학과교수토론 2: 서정아머니투데이정치부장 (the300 에디터 ) 토론 3: 전홍기혜프레시안편집국장토론 4: 김여라국회입법조사처입법조사관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CONTENTS 발제 독립신문창간과한국언론의역사 : 사회적역할과독자의인식을중심으로 3 김영희서울대언론정보연구소책임연구원 한국언론의과제와전망 :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을계기로본역사적성찰 31 박용규상지대언론광고학부교수 토론 김사승숭실대언론홍보학과교수 49 서정아머니투데이정치부장 (the300 에디터 ) 51 전홍기혜프레시안편집국장 57 김여라국회입법조사처입법조사관 61

기조발제 이 시대의 가치 있는 언론은 무엇인가? 정의화 국회의장 여러분 반갑습니다. 국회의장 정의화입니다. 한국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 창간 120주년을 맞아 개최되는 기념 세미나를 뜻 깊게 생각합니다. 소중한 자리를 마련해주신 임성호 국회입법조사처장님, 박종면 머니투데이 더300 대표이사님,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님을 비롯한 모든 관계자 여러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에 많은 언론인들께서 참석하셨지만, 언론은 항상 우리의 미래사회를 선도해왔으며 그 중심에는 언론계 여러분들이 계십니다. 이 자리를 빌려 모든 언론인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 을 전합니다. 앞으로도 공정하고 균형 잡힌 여론을 형성해 사회를 통합하고, 사회구성원들에게 새로운 정보 와 즐거움을 제공하는 언론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이 시대의 가치 있는 언론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언론은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하면서 발전해 왔습니다. 신문이 처음 발간되었던 때로부터 시작하여, 각종 다양한 플랫폼을 통한 방송과 1인 미디어 등 새로운 매체가 넘쳐나는 요즘에 이르기까지 언론의 개념, 기능, 그리고 역할은 변화하고 있습니다. 신문이라는 매체가 등장하기 전의 사회에서는 인간 생활이 가족이나 이웃 등으로 제한된 틀 안에서 이루어졌고, 특별하거나 급격한 변화가 적었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이나 이웃 간의 대인 대면 상호작용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물론 근대적 신문이 탄생하기 전에도 대자보 같은 형식의 호소문처럼 백성의 불만이나 저항 을 표시하는 통로가 있었지만, 이를 근대의 신문과 같은 언론과 유사하게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즉, 신문이탄생하기전의이시기는사람과사람간의직접적인대화나서신을통한의견및정보교환의수준이었다면, 점차사회가발전하고복잡해지면서정보가중요한사회가되고, 이러한정보를전달하는매체가생겨나면서언론환경자체가급격하게변화하였습니다. 그러나우리나라최초의신문은이러한정보의전달보다는개화와국민계몽의목적으로출발하였습니다. 새로운사상과문물을받아들이면서동시에국민을계몽시키고자하는뚜렷한목적이있었던것입니다. 1883 년우리나라최초의근대신문인 < 한성순보 > 가일종의 관보 ( 官報 ) 의성격을지녔다면 1896 년 4월 7일우리나라최초의근대적민간신문인 < 독립신문 > 이발간되면서비로소민간언론의시대가시작되었고, 그후로여러종류의신문들이발간되었습니다. 일제의탄압으로민간지가전혀존재하지않았던시련기도있었지만, 어려운가운데서도신문은명맥을이어왔고, 우리사회발전에기여해왔습니다. 최근인터넷신문의등장과언론환경의변화등으로신문산업은많은어려움을겪고있습니다. 인쇄신문의구독률은점차감소하고있고, 인터넷을통해단편적뉴스를손쉽게소비하는것에그치고있습니다. 그러나반대로 SNS 를통해전달되는언론기사를중심으로가상공간에서활발한논의의장도펼쳐지고있습니다. 국민들은더이상언론이일방적으로전달하는기사를무비판적으로받아들이는것이아니라, 충분한토론을통해정확히판단하기를원합니다. 이러한급격한언론환경의변화는이시대언론의역할과책임이매우중요함을시사합니다. 우리가흔히생각하는언론의기능은정보제공, 여론형성, 사회감시, 의제설정등입니다. 그리고언론에게주어지는책임은공익성, 공정성, 균형성, 정확성, 시의성, 사회약자배려등을떠올릴수있을것입니다. 우리언론은주어진사회적책임을다하여오늘날대한민국이있는데크게기여해왔고, 국민들의많은지지와존경을받아왔습니다. 하지만다른한편으로는사회가복잡해지고이해관계가다양해지면서불신의대상이되기도하는것이현실입니다. 이처럼언론이불신을받는이유는여러가지일것입니다. 중립을지키지않고한쪽편만드는극단적편향성, 사실에대한충분한확인없이전달하는부정확성, 이윤추구를최우선으로

하는상업성, 독자의관심을끌기위한선정주의등은언론에대한불신을키우는요인들입니다. 이시대의언론이현재의자유를누릴수있게되기까지언론은통제와탄압의시기등여러풍파를겪었습니다. 언론이본연의사명과역할을다하지않는다면, 국민의외면을받을수밖에없을것입니다. 언론에영향력을미칠수있는요인은매우많습니다. 정부, 기업, 시민단체등각종외부로부터의압력이있을수있고, 내부적으로도언론사조직자체나저널리스트본인으로부터의영향등여러가지가있을수있습니다. 언론의공정성을위해서는외부로부터의부당한압력에단호히맞서는정신이필요합니다. 언론사조직의이윤추구가최우선이되어서는안되겠습니다. 저널리스트자신의경험에국한되어넓은것을보지못하는좁은시각도배제해야할것입니다. 외부적으로든내부적으로든, 또직접적이든간접적이든언론의공정성에영향을미칠수있는요인은반드시차단해야합니다. 언론의자정적인정화노력과자율적인규제가필요한시대입니다. 언론이스스로품격을갖추고가치를높이려는노력이필요합니다. 기술적이고단편적인기사가계속해서쏟아지고있습니다. 동일한기사가제목만바꿔서계속등장하기도합니다. 독자들을현혹하는선정적인기사제목들도많이보입니다. 로봇이작성한것같은기사가아니라, 인간인저널리스트의정성과마음이담긴글을보고싶습니다. 언론의책임을무겁게느껴야할것입니다. 특히 20대총선을앞둔지금, 언론의역할은더없이중요합니다. 각정당과후보자가자신의이익을위해서하나의사실을유리하게바꿔표현할때, 언론은그런표현에휘둘리지않고사실을정확하게전달해야합니다. 물이반이나있다, 혹은 물이반밖에없다 라고말하는정당과후보자들이야기대신, 물이반있다 라는정확한사실을전달하는것, 그래서국민들로하여금사실을바탕으로판단할수있도록돕는것, 그것이바로언론의참역할일것입니다. 언론을바라보는우리들도변해야합니다. 각종다양한미디어에둘러싸여살고있는우리들에게진정으로필요한것은 미디어리터러시 (media literacy) 입니다. * 미디어리터러시 (media literacy) : 미디어를비판적으로읽어내면서다양한형태의메시지를분석하고평가하고의사소통할수있는능력언론이무엇이고, 이사회에서어떠한역할을하고있고, 어떠한방향성을가지고나아가야할지등을우리국민들도함께고민해야합니다. 언론에대해무조건수용하는것이아니라비

판적인시각을갖고바라볼필요가있습니다. 언론을비난하고불신하자는것이아니라, 올바로보자는것입니다. 각종다양한미디어가쏟아지면서, 기술적으로이를모두수용하고따라가기도힘든환경입니다. 언론이라고불리는매체도너무많습니다. 각각의플랫폼을통해전달되는언론마다각각의특징도지니고있습니다. 복잡한언론의홍수속에이를정확하게바라볼수있는시각을기르는교육이필요합니다. 어린이나청소년뿐만아니라성인들도미디어를제대로읽고판단하는것이중요합니다. 국민이언론과함께의제를만들어내고진지한대화를할수있는공론의장이만들어질때우리나라의민주주의도더욱성숙할수있을것입니다. 언론의자유와윤리는서로멀리떨어져있는존재가아니라, 서로맞물려함께굴러가야하는관계에놓여있는가치들입니다. 고난과풍파의오랜시기를거쳐서지금에이른우리의언론이본연의사명을잘감당하는가치있는언론이되기위해서는무엇이필요한지를진지하게고민해보아야할때입니다. 존경하는내외귀빈여러분, 토마스제퍼슨은 언론은인간의정신을계몽하고인간을합리적, 도덕적, 사회적존재로개선하기위한최상의도구이다. 라고했습니다. 언론의양심과지성은사회의정체를막는소금이었고, 사회의발전을이끄는등불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산업화와민주화를동시에실현하는과정에서그랬듯, 선진대한민국, 통일대한민국으로나아가는그길에서우리언론이큰역할을해주시리라믿습니다. 감사합니다.

개회사 안녕하십니까? 국회입법조사처장임성호입니다. 임성호국회입법조사처장 먼저오늘세미나를공동으로주최해주신머니투데이더300 과프레시안, 그리고후원해주신한국언론학회에감사의말씀드립니다. 또한기조발제를맡아주신존경하는정의화의장님과사회를맡아주신심재철교수님 ( 국회입법조사처자문위원 ), 그리고발제자및토론자를비롯한참석해주신모든분들께진심으로감사드립니다. 2016 년 4월 7일은신문의날이자독립신문이창간된지 120 주년이되는날입니다. 오늘세미나는한국최초의민간신문으로, 19세기말한국사회의발전과민중계몽의역할을수행한독립신문의창간 120 주년을기념하며, 동시에이시대언론의사명은무엇이고언론이어떠한역할을수행해야하는지에관하여논의하는뜻깊은자리입니다. 오늘세미나는크게두가지주제로나뉘어진행될예정입니다. 하나는독립신문이우리나라의언론에미친영향과독립신문이래우리나라의언론이걸어온역사적궤적에관한것입니다. 개화와국민계몽이라는역할을수행했던독립신문의의미를살펴보고, 그이후로우리의언론이어떠한사명을다하여왔는지를역사적그리고저널리즘적관점에서고찰해보고자합니다. 다른하나는현재우리가살아가고있는이시대의언론에관한것입니다. 신문, 방송, 인터넷등다양한매체가등장하고언론환경자체가급격하게변하면서, 언론의기능과역할도변화하고있습니다. 언론이본연의공적인기능을하지않고사명과책임을소홀히한다면이사회의발전은없을것이고, 결국은국민들도외면할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이시대언론의사명에대하여다시한번돌아보아야할중요한시기입니다.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을기념하여개최하는이번세미나를통하여이시대언론의진정한사명은무엇이고, 언론은어떠한책임을통해이사회와국민에게기여할것인지에대한진지한논의가있기를바랍니다. 다시한번참석해주신모든분들께감사드리며개회사를마치겠습니다.

환영사 박종면머니투데이대표이사 바쁘신가운데이렇게참석해자리를빛내주셔서진심으로감사드립니다. 이처럼뜻깊은자리에서환영사를할수있게돼무한한영광으로생각합니다. 서재필선생은독립신문창간사에서 " 전국인민을위해무슨일이든대변자가되고, 정부가하는일을백성에게전하고, 백성의정세를정부에알릴것이며부정부패탐관오리등을고발하겠다 " 고천명했습니다. 당시서재필선생이강조한언론의역할은오늘날도크게다르지않을것입니다. 국민들을대변하고, 정부와국민들에게올바른정보를전하며권력을감시하는역할은앞으로도언론들이반드시지켜나가야할의무입니다. 언론에겐이처럼변치않아야할것들이있는반면변해야할것들도있습니다. 공급자중심의구태의연하고천편일률적인기사로는지금과같은뉴미디어시대에더이상사랑을받을수없습니다. 소비자들뿐아니라언론자신을위해서도소비자중심의미디어콘텐츠들을만들어내기위한혁신이필요한때입니다. 혁신은비단콘텐츠의내용이나형식뿐아니라플랫폼차원에서도필요합니다. 종이신문에서인터넷사이트를거쳐이젠모바일애플리케이션을통해가장많은뉴스가소비되는시대가됐습니다. 모바일에서도수많은플랫폼들이새롭게등장하고있습니다. 앞으로언론의미래는새로운플랫폼들을어떻게활용할지에달려있을것입니다. ' 미디어의이해 ' 를쓴마셜맥루한은 " 미디어는인간의확장 " 이라고했습니다. 결국미디어의역할은사람과세상의접점을넓혀주는것입니다. 그일을지금은언론뿐아니라소셜네트워크서비스 (SNS) 들도하고있습니다. 그렇다면앞으로언론고유의역할은무엇일까요? 오늘발제와토론을통해그에대한해답을찾을수있길기대하겠습니다. 치열한토론을통해의미있는결과를얻길기원합니다. 머니투데이도함께고민하고실천하겠습니다. 들어주셔서감사합니다.

환영사 박인규프레시안이사장 엄중한시기, 한국언론의역할과사명을생각해보는소중한자리를마련해주신정의화국회의장과임성호입법조사처장께우선감사의말씀을드립니다. 모두아시다시피 4월 7일은한국최초의민간신문인 < 독립신문 > 이창간된지 120 주년이되는날입니다. 1957 년출범한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이날을 신문의날 로정했습니다. 그러니까오는 7일은독립신문창간 120 주년이자신문의날 60 년째가되는날입니다. 이후저희들은매년 신문의날 을한국언론의현주소를되돌아보고새출발을다짐하는계기로삼아왔습니다. 제가언론계에입문한 1980 년대초에서 90년대까지만해도 4월 7일은, 일요일을빼고는어린이날과함께기자들이쉴수있는유이 ( 唯二 ) 한공휴일이었습니다. 신문의날을기자들의휴일로만든이유는무엇이었을까요? 그날그날의정보전달업무에서한발짝떨어져그동안자신이해온일을찬찬히되돌아보라는뜻으로받아들입니다. 그러나언제부터인가신문의날은기자들의휴일이아니게됐고, 이에따라자성의계기도사라진듯합니다. 제가모두에정의화의장등께감사의뜻을표한것은바로이런이유에서입니다. 실로오랜만에우리언론은지금무엇을하고있는가, 우리사회를위해제대로역할하고있는가를되돌아보는기회를갖게됐기때문입니다. 다시한번진심으로감사드립니다. 엄중한시기입니다. 헬조선 이란말이유행하고, 남북관계는전쟁일보직전에있으며, 대외관계도미일대중국의군사대결속에안팎곱사등이신세입니다. 더큰문제는정치지도자들이현재의위기를위기로인식하지못하고있다는점입니다. 자기파벌의권력늘이기에만골몰하고있습니다. 나라의경영을책임진분들이위기를위기라고인식하지못하고있는것, 이것이바로가장큰위기입니다. 그책임의상당부분은언론에있습니다. 현실의모습을 있는그대로 전하려노력하기보다는특정정파, 특정세력의응원군이되어권력다툼의선봉에나서고있습니다. 지금한국언론의

현실은한마디로말해 풍요속의빈곤 입니다. 독립신문등극소수언론들이국권유지를위해분투했던 19세기말에비해언론사숫자는수천배로늘어났지만진정국민과사회의안녕을위해고민하는언론사는찾아보기힘듭니다. 언론의독립과자율이확보되지못한때문입니다. 물론 1차적책임은언론인자신들에게있습니다. 그러나정치권력과자본권력등우리사회에책임있는세력들의잘못도작지않습니다. 공영방송에대한정부의인사개입과보이지않는보도통제, 이명박정부의이른바 미디어개혁, 5인미만인터넷언론사를강제폐간토록한신문법시행령개정등은언론의독립과자율에대한중대한침해입니다. 흔히언론과대학, 법조와종교는한사회의건강한발전을위해필수적인제도요기관이라고말합니다. 이들기관들이균형잡힌역할을할때사회의발전과국민의안녕이보장된다는것이지요. 제가보기에현재이들기관들은약자의편에서서억강부약 ( 抑强扶弱 ) 하기보다는강자의하수인역할을하고있는것같습니다. 1957 년제1회신문의날표어는 약자의반려 였다고합니다. 신문은약자의편에서서공정하고공평한사회의건설을위해노력해야한다는의미로받아들입니다. 이표어를상기하면서, 오늘이모임이언론의독립과자율을회복해사회발전과인간회복에기여하는첫걸음이되기를기원합니다.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발제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발제 1 독립신문창간과한국언론의역사 : 사회적역할과독자의인식을중심으로 김영희서울대언론정보연구소책임연구원

발제 1. 독립신문창간과한국언론의역사 : 사회적역할과독자의인식을중심으로 독립신문창간과한국언론의역사 : 사회적역할과독자의인식을중심으로 김영희서울대언론정보연구소책임연구원 1. 독립신문창간과발행의역사적의미 우리나라에서근대적인신문이출현한것은 1883 년 10월창간된 < 한성순보 > 에서비롯된다. 그러나 < 한성순보 > 는 1884 년 12월갑신정변으로 < 한성순보 > 를발행하던박문국이화재가나발행이중단되었다. 1886 년 1월 < 한성주보 > 가이어서발행되었으나경영이어려워지면서 1888년 7월 < 한성주보 > 발행도중단되었다. 이후외국인이발행하는신문과잡지는있었으나, 한국인이발행하는신문은한동안존재하지않았다. 그러다가 1896 년 4 월 7일우리나라최초의민간신문 < 독립신문 > 이순한글전용으로창간되었다. 조선시대내내한문사용에익숙해있던우리나라에서한글만사용하는신문이출현한것은그자체만으로도매우획기적인일이었다. < 독립신문 > 은창간당시 4면을격일로주3 회발행했는데, < 그림 > 과같이 1면에지금의사설인논설을배치했고, 2면엔관보, 외국통신 ( 외신 ), 잡보 ( 사회면 ), 3면잡보, 선박출발표, 우체시간표, 광고등을실었다. 제4면은영문판 The Independent 로발행하다가, 1897 년 1월 5일부터영문판을분리해격일간 4면의영자신문을따로발행했다. < 독립신문 > 은 1898 년 7월 1일부터일간으로발행하다가 1899 년 12월 4일정부의압력으로결국폐간되었다. 개화인사서재필이창간한 < 독립신문 > 의발행목적은나라를근대적으로개혁하면서자주독립을위해국민을계몽시키려는것이었다. 이를위해 < 독립신문 > 은논설을통해외국의발전된제도를소개하고, 과학, 의학, 교육, 위생, 생활습관등개선이필요한사회각분야의새로운제도와문물을설명했다. 이와함께국내외의새로운소식들을전했다. < 독립신문 > 은또한 < 독립신문 > 창간직후개화운동을위해서재필이설립을주도한시민사회단체독립협회의기관지역할을하면서, 독립협회가추진하는개화독립운동을보도했다. < 독립신문 > 이창간되던무렵은 1894 년청일전쟁이후러시아를비롯한세계열강과일본 5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의영향력이각축을벌이며나라의이권을쟁탈해가던혼란과급변의시기였다. 이런상황에서 < 독립신문 > 의보도를통해그이전에는일반국민들이제대로알수없었던공공적인문제들을알게되었고, 그문제점이무엇인지알수있었다. 조정의시책, 중앙과지방관리들의잘한일, 잘못한일, 조선의이권을침탈하려는열강의행태등에대해서도알게되었다. < 독립신문 > 의등장은이시기독자들에게우리사회의현실이어떤상황에처해있는지, 왜개화가필요한지, 어떻게개혁되어야하는지에대해새로운자각을갖게한것이다. < 독립신문 > 에서공적인문제에대해지속적인보도와논의가이루어지면서신문이라는매체를매개로한공공영역 (mediated public sphere) 이활성화되기시작했다 ( 김영희, 2009). < 그림 > 독립신문창간호 (1896 년 4 월 7 일 ) < 독립신문 > 의창간호는 2,000 부가발행되었는데, 바로 3,000 부로늘릴만큼독자들의 반응이좋았다 (The Independent, 1896. 4. 9.). 신문을읽는사람들이증가하면서, 신문 6

발제 1. 독립신문창간과한국언론의역사 : 사회적역할과독자의인식을중심으로 이없어서는세상이컴컴하야견딜수없겠다 는사람들이늘어났다 (< 독립신문 >, 1898. 4. 12. 론셜 ). 독자들은 < 독립신문 > 발행이 완고한조선이변하여개명한대한 으로진보하는데중요한매개가된다고생각했다 (< 독립신문 >, 1899. 4. 17. 독립신문 일 ). 그리하여지나는신문팔이들이한글로쓰인신문을팔에끼고거리를다니고있는풍경과사람들이가게에서신문을읽고있는광경은 1897 년이래의우리나라의새로운현상이었다 (Bishop, 1905/1994, 503 쪽 ). 일반국민들이 < 독립신문 > 을읽고신문에대한인식이형성되기시작하면서, 신문기사를마치지배자에대해소송하는것같이알고있었다. 신문을읽은다음에는이웃사람에게도돌려서한장의신문이 200 명의독자를가지게될만큼많은사람들이관심을갖고읽고, 절대적인신뢰를보여주었다 (Mckenzie, 1920/1969, 41-42 쪽 ). 독립협회운동이활발했던 1898 년 1만여명의군중이모인대규모의만민공동회가개최되어공적인문제에대해토론할수있었던것은 < 독립신문 > 이지속적으로독립협회운동을보도함으로써국민을계몽하고각성시킨것이큰영향을미쳤다고말할수있다. 그이전한국사회에서볼수없었던개화된모습이었다. 하지만보수수구파들이개화와개혁을주장하는독립협회운동을불안하게생각하고, 독립협회를강제해산시켰다. < 독립신문 > 발행도사옥반환압력으로 1899 년 12월 4일자를발행하고결국중단되었다. 그러나 < 독립신문 > 출현이후한국사회에근대적인신문제도가정착하고발전해갔다는점에서 < 독립신문 > 창간과발행의역사적의의는매우크다. 이글은이와같은역사적의미를갖는 < 독립신문 > 창간 120 년을기념하면서, 한국신문의역사에대해간단하게개관하고자한다. 여기서는특히정부언론정책의성격, 신문의사회적역할및독자들의신문에대한인식에초점을맞춰살펴볼것이다. 2. 독립신문이후개화기신문의계몽적역할 < 독립신문 > 이사회적으로큰영향을미치자, 이에자극받아독립협회운동에적극참여하던개화지식인들이주도하여 1898 년새로운민간신문 < 일신문 >, < 뎨국신문 >, < 황성신문 > 등이창간되었다. 1899 년 12월 < 독립신문 > 발행은중단되었으나, 다른신문들이계속발행하면서이시기에우리나라에도신문미디어가하나의사회제도로서자리잡게된것이다. 1904 년 2월러일전쟁에서일본이승리하고일본의침략정책이노골적으로전개되면서 7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이에대항하며형성된민족주의적의식이곧애국계몽사상이다. 애국계몽사상가들은국권을회복하기위해서는우리민족의실력양성이시급하다고보고, 사회각부문에서의실력양성을계몽하고지도하는애국계몽운동을활발하게전개했다. 그대표적인분야의하나가언론을통한계몽운동이었다. 국권상실이라는국가적인위기상황에서한국사회를개혁하기위해국민계몽이매우시급하다고인식한때문이었다. 민족진영의 < 대한매일신보 >, < 황성신문 >, < 뎨국신문 >, < 만세보 >, < 대한민보 > 등신문이발행되어애국계몽운동이전국적으로보급되고확산되는데결정적인역할을했다. 특히과감한논조와비판의식으로독자들의호응이높았던 < 대한매일신보 > 는 1908 년 1만부이상을발행하여당시신문가운데서발행부수가가장많아그파급효과가매우컸다. 개화기신문들이만든공공영역을통해신문독자들은서로를잘모르면서도상상의공동체 (imagined community) 로서민족을느끼면서애국계몽운동에참여했다. 애국계몽기에전개된국채보상운동은신문에의해만들어진공공영역을통해제시된의제설정이큰영향을미치면서전국민에게파급된대표적인여론형성사례였다 ( 김영희, 2009). 국채보상운동은개항이후일본에서도입된차관이점점늘어나 1907 년에 1300 만원에이르면서엄청난부담으로정부가더욱일본에의존하게되면서국민들이금연과절약으로국채를상환하여재정적으로주권을회복하고자추진한운동이었다. 이운동은 1907 년 1월 29일대구의한출판사였던광문사가주동이되어제안한것을신문이보도하면서전국민의큰호응속에약 1년간계속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이이렇게전국적인민족운동으로전개될수있었던것은그취지를당시각신문이적극보도하고, 그후신문사가중심이되어의연금을거두었으며, 논설과기사를통해국민의참여를호소함으로써가능했던일이었다. 이운동이전국적으로확산되는성과에놀란통감부의방해공작으로결국실패로끝나고말았다. 단연 ( 斷煙 ) 과절약만으로국채를상환하겠다는점에서처음부터한계가있었으나, 전국각계각층의국민들의애국심을고양시켜애국운동에직접참여했다는점에서의의가컸다. 당시애국계몽운동을적극주도했던신문이없었다면이러한전국적인시민운동이전개되기어려웠을것이다. 신문을접했던신문독자들을중심으로공공적인문제에대해관심을갖게되고, 그러한계몽의식을통해사회운동에직접참여하는사람들이늘어난결과였다. 개화기신문독자들은점차 일신문을보다가몇칠을긏치 각급 여견댈수업 게되었다. 많은국민들이신문을절대적으로신임하면서사람의눈과귀를열어주는수단으로인식했다. 그리하여한독자는 나의속에뭉쳐있난마음이왈닥발하여신문을붓들 8

발제 1. 독립신문창간과한국언론의역사 : 사회적역할과독자의인식을중심으로 고한귀절을보다가전신이떨니고손이떨니더니속에서무삼기운이목을메여올나오며눈에서눈물이쏘다지며가슴이미여지난듯하며신문지일장을모다적시였스니 (< 대한 일신보 > 1908. 3. 7. 3면긔셔 ) 라고신문논설을읽은느낌을표현했다. 제물포에사는 18세의농운이라는한기생이신문을읽게된후많은자극을받고, 기생을그만두고공부를해야겠다고결심하고일본에유학을간다고밝힌긔셔 ( 지금의독자투고 ) 가 < 대한 일신보 > 에실리기도했다. 일제시기언론인으로활동한소설가이광수는민족의식이싹트던청소년기에자신이받은신문의정신적영향을다음과같이설명했다 ( 이광수, 1970, 222쪽 ). 우리는배달을기다리기가급해서신문사에가서직접한장씩사오는일이많았다. 굵다란사호활자로박은모두몇마디안되는신문이었으나, 우리는그것으로우리나라의운명과일아전쟁의전황과세계대세에대한목마름을만족할수가있었다. 더구나유근, 장지연, 박은식등의논설은성경현전과같이애독하였다.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 에서날카로운필진을벌인것은그로부터이삼년후이었다. 이와같이개화기대부분의독자들은신문을절대적으로신뢰하여신문으로부터지식과정보를얻었고, 그렇게접한지식과정보가그들의가치관형성에상당한영향을미치는요인이되었다. 개화기신문이그이전의한국사회에서보통사람들이전혀상상할수없었던새로운자아형성의매개체로등장한것이다. 3. 식민지시기언론정책과언론의사회적역할 1) 조선총독부의언론정책과언론의성격 1910 년우리나라가일본에강제병합된이후 1910 년대이른바무단통치시기는집회, 결사, 표현의자유가철저하게억압되었다. 조선인이발행하는신문도모두강제매수하거나폐간시켜, 조선인의시각에서조선인의입장을대변하는신문을발행할수없었다. 예외적으로경상남도진주에서 1914 년까지 < 경남일보 > 가발행되었으나, 그영향력은매우제한적이었다. 억압받던조선인들에게 3 1 운동이후출현한지하신문과해외에서조선인이발행해유입되던신문들이소통과정보추구욕구를다소나마충족시켜주면서항일독립의식을고취시켰다. 이에조선총독부는합법적으로신문을발행하게하여 3 1 운동으로폭발 9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한민중들의독립열기를가라앉히고, 신문내용을통해민심과여론동향을파악하고자했다. 조선총독부가 3개의민간신문발행을허가하는것으로방침을변경한이유였다. 언론자유의허용이라기보다는일제의통치정책의변화에따른언론정책의전략적변화였다 ( 박용규, 2015). 이렇게해서 1920 년조선인경영의신문으로 < 조선일보 >, < 동아일보 >, < 시사신문 > 이출현했다. 1920 년대는조선인경영신문들이식민통치체제의한계안에서나조선민족의신문의역할로서어느정도충실했다. 조선인경영신문들이독자들의호응속에발행부수를늘리며활동이활발해지자, 조선총독부는 1925 년치안유지법을제정해신문출판물을단속했고, 1928 년치안유지법을개정해통제를강화했다. 1931 년일본이만주를침략한중일전쟁이후더욱철저하게통제하면서 1930 년대신문들의논조는점차위축되어갔다. 총독부가 요즈음조선인경영신문이식민지정책에비교적충실하다 고평가할정도였다. 전쟁이확대되면서 1936 년불온문서임시취체법, 1938 년국가총동원법등으로언론에대한통제가더욱강화되었다. 이에따라조선인발행신문의보도태도는현실에적극타협하는경향을보였다. 그럼에도 1940 년조선인경영신문은전부강제폐간되었다. 이후해방이되기까지총독부기관지인 < 매일신보 > 와 < 경성일보 > 가완전히지배하는언론구조가형성되어조선인의가치관에식민지배질서를내면화하는데큰영향을미쳤다. 2) 식민지시기조선인경영신문의역할평가이와같이식민지시기조선인이경영한신문들은일본의식민지에대한정책적판단과필요에의해출현했고, 그런한계와조건아래에서운영되었다. 그러나 1930 년대후반총독부정책에충실하고, 적극적으로친일적인성격을보였음에도조선총독부는조선인경영신문이라는상징성이부담되어 < 동아일보 > 와 < 조선일보 > 를결국폐간시켰다. 여기서조선인경영신문이라는상징성과관련해두가지사례를주목해보기로한다. 먼저일제식민지시기 < 조선일보 > 와 < 동아일보 > 가 1929 년에시작해 1934 년까지전개한문자보급을중심으로한농촌계몽운동사례이다 ( 김영희, 2013). 일제식민지시기는 1920 년대에보통학교설치가점차늘어났다고하더라도의무교육이시행되지않았기때문에대부분의국민은여전히문맹상태였다. 1930 년도 2천4백4십만명인구가운데 1천5백9십만명이문맹자로문맹율이 77.7% 였다. 두신문이문자보급운동을추진한것은이런실정을개선하기위한사업이었다. 아는것이힘배워야산다 는표어를앞세운 < 조선일보 > 는 한글원본 을, 브나로드운 10

발제 1. 독립신문창간과한국언론의역사 : 사회적역할과독자의인식을중심으로 동으로부른 < 동아일보 > 는 한글공부 와 산수교재 ( 일용계수법 ) 를만들어여름방학을맞아귀향하는학생들에게배포했다. 이들이고향의문맹자들을가르치도록한것이다. 이운동에 1만 4천여명의학생들이자발적으로참여했고, 전국많은지역에서문자보급강의가실시되었다. 두신문은문자보급운동이진행되는동안많은지면을할애하여사업의성과를보도했다. 조선총독부는이운동이큰호응속에전국적으로확대되자, 1935 년부터신문사가주관하는문자강습회를금지시켰다. 한글맞춤법통일안사용보급을명분으로문맹을퇴치하여조선인의역량을키우려는민족운동으로발전하는것을경계한때문이었다. 이때중학생이었던장준하는 3년동안브나로드운동의학생계몽대로활동했다. 이활동으로갖게된신문에대한인식을그는다음과같이언급했다 ( 장준하, 1963, 355~356 쪽 ). 이때부터나는신문을높게보게되었으며인연깊은나의지도자적인대상으로, 아니당시우리온겨레를지도하고있는존재로아주믿어버리게되었다. 실로이무렵나의눈에비친우리나라는비극의나라였으며칠흑장막과같은절망의나라였었다. 이때에모든청년들은거개가이와같은비극과절망속에서자포자기해버리거나아니면겨우일제에붙어호구책으로입신출세의길을노리거나하는것뿐아무런희망과장래의징조는보이지않았다. 그런데오직동아와조선이있었던것이다. 이두신문만이캄캄한우리조국을비춰주던유일한등불이었으며희망이었다. 최소한그때나의눈에는그렇게보였다. 장준하가 1950 년대의대표적인잡지 < 사상계 > 를발행한것은일제식민지시기조선인경영의두신문의사회적역할을인상깊게경험한것이큰영향을미쳤다 ( 김영희, 2012, 68쪽 ). 식민지라는한계에서나마당시조선인경영신문들이긍정적인역할을했고, 독자의신뢰가매우컸음을시사한다. 두번째는 1936 년손기정선수의베를린올림픽마라톤대회우승보도와관련해형성된스포츠민족주의형성사례이다. 1930 년대중반조선총독부는식민지조선에일본의전쟁수행을적극지원하는정책을추진했다. 이에따라물자, 인력등에대한수탈이강도높게시행되었다. 사회지도층인사들은총독부의적극적인회유정책으로대거변절하거나은둔하던시기였다. 일반국민들은식민지체제가장기화하면서희망을잃고, 무기력하게현실을인정하면서수탈체제에하루하루힘들던시기였다. 손기정이 1936 년베를린올림픽마라톤대회에서대회신기록을세우며우승한것은바로그런무렵이었다. 문자보급운동도금지당하고, 언론통제가강화되면서조선인경영신문 11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들의논조가급속하게친일적성격을띄어가던때였다. < 동아일보 > 는 1936 년베를린올림픽에서손기정선수가우승하고, 남승용선수가 3위로동메달을딴소식을당시조선인경영신문가운데가장적극적으로보도하여마라톤에대한국민적인관심을불러일으켰다. 손기정덕분에일어난그신드롬은올림픽과스포츠에대한새로운가치와상징을만들었다. 손기정의베를린올림픽금메달획득소식보도그자체가조선인들에게민족을일깨우는상상의공동체를만든것이다. 천정환은그상황을다음과같이설명했다 ( 천정환, 2010, 76쪽 ). 그랬다. 조선이전세계를이겼다. 조선반도전체가약한달간뜨거운열풍에휩싸였다. 유난히비가많이왔던그해여름조선사람들은수해속에서도노인부터코흘리개까지모두 손기정 을입에달고다녔다. 시상대위에서월계관을쓴머리를숙인채일본국가를들으며묵묵히서있던손기정의모습은 1930 년대조선민족의표상이되었다. 손기정이라는영웅의탄생과신드롬의확산에신문보도가결정적인역할을한것이다. 이렇게해서조선사회에마라톤은민족을하나로묶으며민족주의적의식을크게고취시켰다. 신문이라는미디어를매개로한한국사회의스포츠민족주의의본격출현이었다. 이상의사례들이말해주듯일본의식민치하라는상황에서도당시신문들은정보를전달하고교육, 광고기능면에서일정한역할을수행했다. 또한 1930 년대후반에도친일적논조의한계에서이긴하지만나름대로공적인매개체라는신문으로서의역할을수행했다는측면을함께살펴볼필요가있다. 총독부기관지 < 매일신보 > 와논조의차이가별로없었음에도 < 동아일보 > 와 < 조선일보 > 를굳이폐간한것은전쟁기간물자절약이라는명분을앞세워그와같은제한된역할조차허용하지않으려는조치였다. 4. 정부수립기신문의사회적역할과독자인식 1) 해방과미군정기정파신문들 1945 년 8월 15일일제식민지배로부터해방이되었으나남북한에바로미군과소련군이진주하면서한반도가분단되었다. 남한은미군정청이설치되어통치했다. 미군정은 1945 년 10월 30일신문기타출판물의등록제를규정하여인쇄출판물의발행을자유롭게허용했다. 해방직후부터 1946 년상반기까지진보적성향의신문과좌익계열의신문들이 12

발제 1. 독립신문창간과한국언론의역사 : 사회적역할과독자의인식을중심으로 독자들의호응을받으며언론계를주도했다. 이에미군정은 1946 년부터좌익언론을통제하고, 우익성향의언론을지원하는정책을시행해갔다. 1946 년 5월 29일신문또는정기간행물에대한허가제를규정한군정법령 88호와 1947 년 3월 26일공보부령 1호를발표하여좌익계열의언론을탄압하고, 신규발행을봉쇄한것이다. 이러한조치들로좌익또는진보성향으로평가되던신문들이점차사라지거나중도우익노선으로보도태도를변경했다. 이후한국신문의이데올로기적지형은반공주의, 친자본주의, 친미이데올로기가주류이데올로기가되었다. 일본의식민지배로부터해방이되자많은한국인들은새로운독립국가건설의희망속에자신들의의견을적극표현하고자했고, 새로운소식과정보를듣고싶어했다. 1945 년해방직후에서 1946 년에우후죽순처럼수많은신문, 잡지들이출현하고, 엄청나게많은서적이간행되었던것이이를말해준다. 일제시기극도로억압받았던한국인의커뮤니케이션욕구가한꺼번에분출되는형국이었다. 당시상황을 < 동아일보 > 주필설의식은다음과같이설명했다 ( 소오생, 1946). 신문이쏘다지고잡지가밀린다. 삐라가깔리고포스터가업핀다. 쓰는대로글이되고박히는대로책이된다. 활판과석판이몸부림친다. 사진판, 등사기까지허덕거린다. 이러케하야업는조히가물같이없어진다. 8 15 이후의장관은실로유흥계와쌍벽으로출판계엿다. 조히의소비량으로는아마조선유사이래의처음일것이다. 출판홍수라함이단순한형용이아니오과장이아닐듯싶다. 홍수도터짐즉하리라! 입있어도말을못하였고붓이있어도글을못써온 40년통한이뼈에사무첫거든자유를어든바에야무엇을꺼릴것인가? 인용문이말해주듯서울과지방주요도시에많은신문이출현했다. 서울에 < 조선인민보 >, < 민중일보 >, < 자유신문 >, < 중앙신문 >, < 신조선보 >, < 해방일보 >,< 대동신문 >, < 동신일보 >, < 한성일보 > 등이창간되었고, 1940 년강제폐간되었던 < 조선일보 > 와 < 동아일보 > 가복간되었다. 그러나당시신문들은서울서발행된주요신문들만이 1주일에 6번발간되었고, 나머지는자주정간되어정기적으로발간되지못하고그부수도미미했다. 대부분의신문이타블로이드 2면발행으로대판발행은거의없었다. 신문발행의의욕은컸지만인쇄시설이제대로갖춰진경우가매우드물었고, 만성적인신문용지난에영세한사업규모로자금난에시달리면서신문이정상적으로발행되기어려웠기때문이었다. 그나마서울지역의경우무료로신문을배포하는경우가많아신문을접촉할수있는경우가많았다. 그러나지방특히농촌지역에는통신시설의미비, 지방농촌주민들의전반 13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적인빈곤등으로신문을비롯한미디어보급이매우드물었다. 국민의 70% 이상을차지했던농촌지역주민들은공공문제에대한소식과정보를제때접하지못했다. 한신문을여러사람이돌려읽기도했겠지만농촌인구의 90% 이상이신문접촉이거의없었던실정이었다 ( 김영희, 2009). 이처럼서울을중심으로도시에주로보급된신문에대해당시독자들의인식은매우부정적이었다. 미군정공보당국이 1946 년 3월실시한한조사결과는응답자의 90% 가신문에불만을나타냈다. 신문기사들이매우편파적이며, 서로그내용이일치하지않아모순된경향을보이고, 정치집단을위한선전기관지같은신문들이너무많다는것이다. 당시중도정치인으로평가되던김규식이신문의부정확한보도에유감을표시하면서 사실을왜곡하거나사실을발표하지않고또없는사실을조 ( 造 ) 하여발표하는것은언론기관으로서자격이없는것이라고단언한다. 는담화를발표할정도였다 (< 동아일보 > 1946. 3. 4.). 당시언론전문잡지 < 신문평론 > 이 1947 년 4월신문에대한불평과희망을묻는조사에서한기업간부는다음과같이지적했다 ( 오기영, 1947, 23쪽 ). 뻔연한사실을왜곡하야놋는데는질색할노릇이다. 이래서오늘날조선의신문이대개는유치한선전삐라의영역을버서나지못하고있다. 나는아침에눈을뜨면서신문부터찾든영년의습관을근자에와서고쳐버렸다. 신문을펴노면우선지면에서발견되는것은모략과중상이요편협한주장이요사실의불충실한보도요기껏공정한편이래야우유부단이요결단의직필이없다. 이런것을읽고나면고만불유쾌해서하루종일울적하다. 그래서신문을아침에읽는습관을고칠수밖에없이되었다. 전문가들역시신문기사가허위와왜곡, 과장기사로사실과는전혀다른일종의정략과선전술로서언론계의혼란이극에달한실정이라면서시정을촉구했으나, 개선되지는않았다. 이와같이미군정기많은신문들이정치집단을대변하는정론지역할로독자들로부터비판받았다. 2) 제1공화국이승만정부시기언론의성격과역할미군정에이어 1948 년 8월 15일제1공화국이승만정부가수립되었다, 남북한에각각분단정권이수립된상황이었으므로이승만정부초기언론정책의방향은반공이데올로기를강화하고좌익언론을축출하는것이었다. 1948 년 9월 22일 7개의기사게재금지항목을발표해공산주의성향과진보언론은물론정부에비판적인언론도통제했다 ( 송건호, 14

발제 1. 독립신문창간과한국언론의역사 : 사회적역할과독자의인식을중심으로 1990, 78-79 쪽 ). 1948 년 12월 1일제정된국가보안법과대통령, 국회의원선거법등도효과적인언론통제수단이었다. 이런정책으로 1950 년대한국언론계는진보적민주주의를표방하면서이승만정권을비판하던신문들은정부수립이후점차사라지고이데올로기적으로냉전반공주의를바탕으로한신문들이주류가되었다. 주목되는것은그런통제아래에서상대적으로언론의자유가인정되었다는점이다. 이시기지배이데올로기는냉전자유주의와반공자유주의또는두가지를합한냉전반공자유주의였는데 ( 박명림, 1996, 439~446 쪽 ), 냉전과반공의범위안에서는비교적언론의자유가허용된것이다. 실제토지개혁과친일파문제, 정부정책등에대한보도에서이승만정부입장에비판적인내용들이기사화되었고, 여러차례시도된신문지법제정노력이좌절된것은바로그런정도의비판이가능했던언론자유상황을말해준다 ( 김영희, 2015). 제1 공화국이수립된지 2년도되지않은 1950 년 6월 25일북한의공격으로한국전쟁이발발했다. 전쟁기간 < 조선일보 > 사장방응모, < 한성일보 > 사장안재홍, 일제시기 < 동아일보 > 사장을지낸백관수등과편집국장으로 < 동아일보 > 장인갑, < 경향신문 > 신태익, < 자유신문 > 마태영등주요언론인들이납북되고, 이종린, 신일용, 고영환등이피살되었다 ( 정진석, 2006, 47쪽 ). 언론인들이이런수난을겪으며대부분의신문이더욱극단적인반공논조를보였다. 1950 년대후반신문이남북문제와통일문제에소극적이었던것은한국전쟁기북한이남한을점령했던기간의통치체험으로형성된반북정서가큰이유였다. 1952 년부터주요신문이타블로이드판에서배대판으로판형이확대되고, 1955 년에는 1 일 4면발행되었다. 1956 년부터일부중앙일간지들이조석간제를실시하면서치열하게경쟁했다. 1950 년대언론계는친미, 반공, 보수적성향으로이데올로기적으로는이승만정부와같은입장이면서도보수적인정치세력간의갈등관계로정치적입장에따라구분되었다. 그런데정부에비판적인논조를보여체제내적야당지로평가된 < 동아일보 > 와 < 경향신문 >, 중립비판지였던 < 조선일보 > 와 < 한국일보 > 가독자들의큰호응으로여당지인 < 서울신문 > 이나친여지인 < 연합신문 > 보다발행부수가훨씬많았다. 이신문들은 1950 년대한국역사상처음으로국민이주권자로서정치에참여하는민주주의정치의식의교육과계몽의역할을담당하여여촌야도로상징되는도시의비판적투표성향을가능하게했다. 이신문들은사회교육미디어로서민주주의원리, 선거제도, 투표방법등을소개하고, 주권자로서정치에참여하는방법을설명하는계몽적역할을담당한것이다. 이런역할들로신문이그후 4 19 혁명의중요한동력이되었다. 15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휴전이후전쟁으로산업시설이대부분파괴되면서광고를할기업이드물었다. 광고수입이미미해, 구독료수입이전체신문수입의 70% 이상을차지했다. 이에따라신문편집에서신문의주독자층인도시중산층과젊은지식인들이관심갖는정치기사의비중이높았다. 신문간의경쟁이심해지면서 1950 년대후반정치기사가운데는자극적인흥미위주로취급하는정치의시장화경향또는정치적선정주의의경향이나타났다. 그런부정적인면이있었지만, 중앙의유력일간신문들이반정부적, 반권력적논조를유지할수있었던것은정부를견제하고, 환경을감시하는언론의사회적역할수행이라는점에서긍정적이었다. 3) 4 19 혁명과언론의역할체제내적야당지로정부에비판적이었던신문들은 1950 년대후반절차적민주주의의중요성을강조하면서이승만정부의독재와탄압에저항했다. 1960 년정부통령선거를앞두고이기붕국회의장과경무대주요보좌관등자유당강경파는정부에비판적인언론을통제하는것이정권을유지하는데매우중요하다고인식했다. 정부의실책과부정부패를폭로하는언론을철저하게통제해야선거에서승리하고, 정권을유지하는데유리하다고본것이다. 이를위해 1958 년국가보안법을더욱강력하게개정했고, 정부에비판적이었던 < 경향신문 > 을 1959 년 4월 30일폐간시켰다. 이런탄압속에서도신문들은 1960 년 3월 15일실시하는정부통령선거에노골적으로부정선거를준비한자유당정부의만행을고발하고, 부정선거의실체를보도했다. 이와같이당시신문들이민주화투쟁의구심체로서역할을담당해 4 19 혁명은대학-언론연합 (university-press nexus) 으로불린학생과신문의연대에의해가능했던운동으로설명되기도한다. 4) 제2 공화국시기사이비언론의폐해 1960 년 3월 15일전국적으로노골적인부정선거가실시되었다. 정부가주도한이런만행으로 4 19 혁명이폭발했고, 결국이승만대통령이물러났다. 이어들어선허정과도내각정부는언론에대한간섭과통제정책을바꾸어언론의자유를보장하는정책을채택했다. 1960 년 5월 30일언론관련조항이삭제된국가보안법이국회를통과했다. 또한 6 월 24일신문등및정당등의등록에관한법률을제정해, 정기간행물의허가제를규정했던미군정법령 88호는사실상폐지하고, 등록제를채택했다. 미군정법령 88호는 5 16 16

발제 1. 독립신문창간과한국언론의역사 : 사회적역할과독자의인식을중심으로 이후인 1961 년 12월 30일에정식으로폐기했다. 내각제개헌으로제2공화국장면국무총리체제의민주당정권이수립되었다. 장면정부는과도내각의언론정책을계승했다. 그러나 1960 년당시한국사회는무제한의언론자유를허용할수있을정도로사회의식이나시민의식이성숙하지못했다. 언론계역시언론의사회적책임과윤리의식이너무도부족했다. 우후죽순으로출현한자격미달의사이비언론과사이비기자들이관공서, 기업, 소상공인등을온갖구실로공갈, 협박하는폐해가전국적으로속출한것이다. 1961 년논산삼거리에서 400 명의상인과노동자들이 악덕기자물러가라 는플래카드를들고시위하는사태까지벌어졌다 ( 박권상, 1983, 21쪽 ). 불과수만명인구의논산에 10개의기자단과 200 여명의기자들이진을치고갖은행패를부린때문이었다. 이렇게되자신문에대한독자들의인식이비판적으로변화하게되었다. 5. 산업화시기신문의성격과독자들의인식 1) 5 16 이후박정희정권의언론정책과언론의성격변화 1961년 5 16이후출현한제3공화국정부는경제개발계획을적극추진하면서, 발전커뮤니케이션이론 (development communication) 을근대화를위한미디어정책의이론적배경으로활용했다. 신생독립국가에서국가발전을위해국가정책을홍보하고, 국민을동원하는수단으로미디어를적극활용해야한다는이론이었다. 미디어는의사결정자 (decision maker) 또는교육자로서의역할을수행해서국가의식을강화시키고, 국가정책과필요한기술교육을국민에게전달하는역할을담당하게한것이다. 이런정책을기본으로한박정희군사정부는 1961 년국가재건최고회의포고 11호로일정한시설을확보한경우에만운영하도록하여사이비언론인및언론기관을정비했다. 이어 1962 년 6월언론정책 5개항을발표했다. 언론의사회적책임과언론인의자질향상을강조하면서, 언론이기업으로서독립할수있도록정부가적극지원한다는정책이었다. 이시책은건전한언론기업을육성하고, 언론을정화하고자한점에서긍정적인점이많았으나, 시행과정에서언론을통제하고지배하는수단으로활용되었다. 이와같은정책으로 1960 년대는시장지향적신문산업활동의기초를마련했다. 정부는신문기업에금융세제상으로지원과특혜를주어일반대출금리가 26% 인데, 신문은 18% 로낮춰주었고, 차관융자에서도특혜를주었다 ( 김해식, 1994, 129-130 쪽 ). 또한신문수입 17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용지관세율을인하하고, 국내생산신문용지를시중가보다싸게구입할수있도록했다. 이렇게해서신문이기업으로크게성장해갔다. 그러나정부를견제하고환경을감시하는언론본연의역할은점차약화되기시작했다. 특히 1964 년언론윤리위원회법시행이유보된이후중앙정보부기관원들이주요신문사에상주하고, 비판적인기사를쓴언론인들을연행하는공포분위기로취재보도활동을크게위축시켰다. 다른신문이당하는탄압에침묵하고, 권력을상대로언론인의연행이나구속을항의하는일은생각할수없는분위기가형성되었다. 이런상황에대해한국신문편집인협회최석채회장은 신문은편집인의손에서떠났다. 며다음과같이지적했다 (< 기자협회보 > 1968. 12. 27.). 어째서이런시련이우리에게닥쳐왔는가. 한마디로말하면신문이편집인과기자의손에서떠났기때문이다. 한국의언론은우리가의식하고있는이상으로경영주의손에의해서만움직여지고있다. 따라서우리는이전까지한국언론이전혀경험하지못했던새로운양상의시련에직면하고있는것이다. 1968 년 < 신동아 > 필화사건으로 < 동아일보 > 주필에서물러난천관우는당시언론을연탄가스에중독되었다고평가했다. 그리하여 1969 년 3선개헌이후극도의논조위축으로정권에불리한사건에대해사실보도도제대로하지않고, 축소, 은폐시키는경향마저나타났다. 이에따라독자들의신문에대한불신과비판이커져갔다. 대학생들이동아일보사앞에서언론화형식을거행할정도였다 ( 채백, 2013, 51-52 쪽 ). 1971 년 3월 24일서울대학교법과대학생들 100 여명은교내에서언론을규탄하는성토대회를열고, 일간신문과잡지등을소각하는언론화형식을거행했다. 학생들은교내행사에그치지않고, 3월 26 일오후동아일보사앞에서서울대학교문리대, 법대, 상대학생회장단 10여명이성명서를낭독하고, 언론화형식을시도했다. 학생들은언론화형식선언문에서, 오늘의언론은민중의지표를설정하는지도적기능커녕사실마저보도하지않아보도적기능까지몰각해가고있다. 고비판하면서, 이제권력의주구, 금력의시녀가되어버린너언론을슬퍼하며, 조국에반역하고민족의부름에거역한너언론을민족에대한반역, 조국에대한배신자로규정하여반세기의찬연한전통에한을남긴채전민중의이름으로화형에처하려한다. 고규탄했다 ( 채백, 2013, 52쪽 ). 출동한경찰에의해집회는바로해산되었으나, 대학생들이언론을규탄하기위해화형식을시도했다는사실은당시독자들이신문을얼마나불신하고비판했는지말해준다. 18

발제 1. 독립신문창간과한국언론의역사 : 사회적역할과독자의인식을중심으로 2) 1970 년대유신시기언론통제정책의강화 3선개헌에이어 1972 년 10월간접선거로대통령을선출하는유신체제가수립되었다. 박정희정부는유신체제수립이전부터언론의비판을더욱철저하게봉쇄하고, 통제를강화했다. 이를위해언론을통폐합하여통제구조를단순화시켰다. 또한국가가기자의자격을심사, 허가하는프레스카드제를실시했다. 사이비기자로인한피해를방지하고, 취재의편의를제공한다는명분이었으나. 실제로는기자의동태를파악하면서비판적활동을위축시키기위한상시적감독장치였다. 프레스카드발급으로 1970 년 12월 31일현재 5057 명이던기자가 1972 년말 3187 명으로 1920 명이감원되었다. 또한 1972 년 3월정부각부처의출입기자수도대폭줄이고, 출입기자실역시 47개에서 18개로대폭축소했다. 이런조치들과함께국회와행정부에언론인충원을본격화했다. 언론을통해유신체제수립의불가피성을주장하여유신체제수립에기여한언론인들을유정회국회의원이나각부처공보담당관으로충원하는방법으로보상한것이다. 이시기긴급조치역시언론통제의중요한수단이었다. 1974 년 1월 8일긴급조치 1호와 2호를발표했고, 1975 년까지 9호를발표했다. 유신헌법을부정, 반대, 왜곡또는비방하는일체의행위를금지하고, 이를위반하면법관영장없이체포, 구속,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이하의징역, 이를권유, 선동, 선전, 방송, 보도, 출판, 기타방법으로타인에게알리는행위를금지한것이다. 1) 이처럼언론통제를강화하는한편으로유신체제정당화를위한홍보에언론을적극동원했다. 3) 자유언론실천선언과 < 동아일보 > 광고해약사태이렇게유신시기신문들이기업으로서크게성장했으나, 언론으로서사회현실을감시하고, 비평하는저널리즘기능은대폭약화되었다. 그결과유신체제출현이후유신헌법철폐민주화운동이학계, 재야, 종교계인사들그리고대학생중심으로전국적으로확산되었으나이와관련한기사를지면에서찾기어려웠다. 대학생들의반독재 반체제시위가계속되자, 유신정부는사태를진압하기위해 1974 년 10월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 ( 민청학련 ) 폭력으로정부를전복하기위해전국적인민중봉기를획책했다며 180 명을구속 기소했다. 이과정에서군인들이대학강의실까지들어가대학생들을강제연행하여, 무자비하게폭력을행사하고고문했다. 1) 긴급조치 1, 2, 9 호에대해 2013 년 3 월 21 일헌법재판소재판관 8 명전원일치로위헌결정을내렸다. 19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고문당한학생들이법정에서이런사실들을고발했으나전혀보도되지않았다. 10월 10 일정부가각신문사편집국장을소집하여보도자제협조를요청한때문이었다. 주동자들에게사형과무기징역을언도했다. 구속자가족들이신문사편집국에몰려가무기력한언론을비판하고, 항의했다. 이에일선기자들중심으로극도로위축된언론에대해반성하는움직임이나타나기시작했다. 가장먼저 10월 24일 < 동아일보 > 노조중심으로자유언론실천선언을발표했다 ( 이부영, 1984, 313-320 쪽 ). < 조선일보 > 기자들 150 여명도 10월 24일밤모임을갖고언론자유회복을위한선언문을채택했다. 25일새벽 < 한국일보 > 기자들도자유언론을위한행동지침을채택했다. 그후서울과지방의 31개신문방송통신기자들이자유언론선언에합류하고, 신문사논설위원들기자들의행동을지지하는사설을썼다. 이에야당, 대학생, 종교계에서이런움직임을지지하는성명을발표했고, 외신들도다투어보도했다. 권력의눈치를보는경영진의온갖방해속에도지면이쇄신되어가던 12월 30일 < 동아일보 > 에대한광고해약사태가시작되었다. 2) 1975 년초에들어서면서동아방송도광고가해약되기시작했다. 백지광고사태에대한시민의지지와성원, 국내외각계각층의격려광고가쇄도하면서민주회복과자유언론의열망이번져나가자당황한유신정권은 < 동아일보 > 경영진을압박했다. 결국경영진은유신정권에굴복하고 130 여명의기자, PD, 아나운서를해직시켰다. 광고는다시실렸다. 이후신문들은박정희대통령과정부에불리한것은아예보도하지않거나왜곡해야했다. 이와같이유신시기철저한탄압으로신문은저널리즘미디어로서의사회적역할을제대로수행하지못하고, 유신체제유지와권력유지를위한수단이되었다. 4) 행간을읽는독자와변화의대행자역할이렇게되자신문에대한독자의신뢰가더욱약화되었다. 1979 년 4월 7일신문의날을맞아 < 경향신문 > 이신문에대한인식을묻는인터뷰에서당시서강대신문방송학과최창섭교수는 신문을읽기는하되신문에대한신뢰도가약해졌다. 기사의겉내용보다행간 ( 行間 ) 의의미를찾으려고하는풍조가강해진것은그만큼신문이신뢰도를잃은까닭이다. 여건이그렇겠지만신문간에개성이없다. 중앙지끼리는물론중앙지와지방지사 2) 2008 년 10 월 28 일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 동아일보 > 백지광고사태가중앙정보부의광고주압박으로일어난사건이었음을밝혔다. 1974 년 12 월중앙정보부가광고주들에게강제로서약서를쓰게하는방법으로, 박정희정부에비판적인 < 동아일보 > 에광고를싣지못하게했다는것이다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편 (2009), <2008 년조사보고서 >. 20

발제 1. 독립신문창간과한국언론의역사 : 사회적역할과독자의인식을중심으로 이에도개성이없다. 고응답했다. 소설가박완서도 < 동아일보 > 신문평에서다음과같이 지적했다 (< 동아일보 > 1979. 4. 6. 4.). 신문의 8면을죄다활자로채워져있건만읽기보다는뒤적이게되고읽지도않고읽을거없는것같은허전함을맛보게도된다. 채워지지않는허전함은때로는행간을더듬게도한다. ( 중략 ) 요즈음의신문에서느끼는독자의허전함은결코신문의부피에대해서가아니라기사에대해서임을말해주고싶다. 신문의부피만늘어나고독자가정작알고싶어하는것, 말하고해석해주지못하는것은공연히채워지지않는허전함의부피만크게만들지도모른다. 이처럼독자들이신문의행간을일부러찾아읽으려는것은그래도여전히신문의역할을기대한다는것을말해준다 ( 채백, 2013, 50쪽 ). 극심한통제속에서도양심이있는기자들이무언가단서를남겨놓으리라는기대로독자들이기사에직접적으로나타나있지는않더라도기사를통해나타내려고하는숨은뜻을읽으려고했기때문이다. 이와같이독자들의언론에대한신뢰가약해지긴했으나, 1960~1970 년대산업화단계로들어선한국사회에서미디어의영향력은매우컸다. 1950 년대신문보급이주로서울과도시지역을중심으로보급되었는데, 이기간에신문발행부수가대폭증가해대중화단계로발전했기때문이다. 이기간신문발행부수는 1960 년 80만부수준에서 1970 년 200 만부로신문 1부당인구수 15.7 명으로늘었고, 1980 년에는 540 만부로늘어나, 1부당인구수 6.9 명이되었다. 1970 년대후반 < 조선일보 > 와 < 중앙일보 > 가각각발행부수 100 만부가넘는밀리언페이퍼로성장한것이다 ( 주동황, 2000, 166 쪽 ). 1960~1970 년대미디어가대중적으로보급되면서신문을비롯한미디어들은한국사회가전통적인농업중심사회에서근대산업사회로나아가게하는변화의대행자 (agent of change) 역할을담당했다. 신문은다양한형식의보도를통해독자들이전통적인사농공상의가치관에서공업과상업의가치와필요성을인식하도록이끌었고, 가난한현실을극복할수있다는가능성과희망을갖게하여산업인력으로참여하게한것이다. 그런한편미디어가널리보급되면서미디어를매개로한대중소비문화가본격화하기시작했다. 물질만능의가치관, 절약보다는소비를통해자신을표현하고, 성공과행복을과시하는가치관이사회전반에나타나기시작한것이다. 이에따라상대적박탈감으로사회적으로일탈하는현상도출현했다. 나도잘살수있다는희망과기대를갖고도시산업현장에왔지만잘살기는매우어려운현실에서느끼는좌절의결과였다. 21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5) 제5공화국시기언론, 권력의대행자역할 1980 년들어선제5공화국전두환정권은유신시기보다더철저하게언론을통제했다. 언론의체질을저항체질에서순응체질로변경하여, 언론의타율적협조를자율적협조로바꾸고, 다시자발적협조로전환시키는것을목표로하는정책이었다. 이를위해먼저추진한것이더욱대대적인언론통폐합조치였다. 중앙에 6개신문만남기고, 지방에 1도에 1신문으로통합시킨것이다. 살아남은신문들은통폐합으로조성된독과점구조에서많은특혜를얻게되었다. 신문의수가대폭줄면서언론인에대한강제해직도대대적으로이루어졌다. 1980 년 7월신문협회, 방송협회, 통신협회가 언론계자체정화계획 형식을취했지만, 실제로는신군부의문화공보부를통해서전달받은기준에따라언론인들을대량해고했다. 권력에순응하지않으면언제든지해고당할수있다는인식으로언론인으로하여금자기검열에충실하도록유도한것이다. 신군부는이어효율적인언론통제를위해 1981 년 1월문화공보부에상시적인감독기구인홍보조정실을독립설치했다. 각정보기관이나누어담당하던언론통제창구를홍보조정실로일원화하여보도지침을하달하게한것이다. 보도지침은보도할내용뿐만아니라그형식까지도규제한일종의편집지침이었다. 홍보조정실은 1985 년 10월홍보정책실로확대되었다가, 1987 년 6 10 민주항쟁이후인 1987 년 12월폐지되었다. 제5공화국시기언론보도내용은보도지침을상당히충실하게따랐다. 서울에서발행하는 < 동아일보 >, < 조선일보 >, < 중앙일보 >, < 한국일보 >, < 경향신문 >, < 서울신문 > 6개신문의보도지침이행율은평균 77.8% 였고, 정부기관지성격의 < 서울신문 > 과 < 경향신문 > 두신문의보도지침이행율은 92.9% 로조사되었다 ( 김해식, 1994, 164쪽 ). 이런이행율은 5공시기신문사는보도지침을통해청와대, 안전기획부, 그리고문화공보부의홍보조정실이운영한셈이라고평가할수있을정도였다. 신군부는또한지방주재기자제도를없애고, 연합통신이중앙지에지방뉴스, 지방지에중앙뉴스를독점제공하도록했다. 국제뉴스도연합뉴스가국제통신사의뉴스를받아각언론사에제공했다. 국내외를막론하고오로지 5공정권이전하고싶은뉴스만이유통되게하여국민의눈과귀를막은것이다. 이에따라 1981 년지면이 8면에서 12면으로늘어났으나늘어난지면대부분이연예, 문화, 스포츠, 레저등의내용으로채워지고, 정치, 인권, 민주화운동관련기사는철저히통제되었다. 이렇게보도내용이통제되면서입에서입으로전해지는유언비어가더신뢰를받기도했다. 유언비어를줄인 유비통신 이나경상도사투리 뭐라카더라 ~ 에서나온 카더라통신 이란표현이이때출현했다. 22

발제 1. 독립신문창간과한국언론의역사 : 사회적역할과독자의인식을중심으로 5공정권은여러방법으로언론을통제하는한편으로경제적지원및조세감면의특혜를통해언론경영주와언론노동자를회유했다. 그리하여제3공화국에서 5공화국시기를거치면서몇차례의언론통폐합과정에서살아남은신문사들은국가의통제와특혜를통해거대기업으로성장했다. 거대기업으로성장하면서 5공초기강권적위협으로수동적인권력의대행자 (agent of power) 역할을담당했으나, 점차언론스스로의이익을위해자발적으로권력의대행자역할을수행하면서군부권위주의체제유지를도운것이다. 권력과언론의유착현상또는권력과언론의연합현상이었다. 6) 논조의약화와독자의불신 1982 년 < 동아일보 > 이상하사회부장은이런상황이계속되면서나타난독자의반응을다음과같이썼다. 아무리신문을보아도진상이무엇인지모르겠다. ( 중략 ) 알려야할사실을제대로알리지않는다. 파헤쳐야할실체를가린채어물쩍넘긴다. 비판의소리가모기침만큼이나허약하다. 그래서결국신문의구실을제대로못한다는준엄한채찍의소리가높다. ( 이상하, 1982). 또다른기자도 신문이할일을제대로못해궁금한것을알수가없다며나무라는전화가특히많다. 한독자는갈수록꼭알아야할일이신문에나지않는경우가점점늘어나는것같다. 는의견을전했다고소개했다 ( 이규석, 1984). 언론이제기능을수행하지못하면서출판이부분적으로언론적역할을담당하기도했다. 출판저널리즘은그런과정에서출현한현상이었다. 이렇게되자독자들의신문보도내용에대한불신이더욱심화되어, 신문에대한신뢰도가매우낮았다. 1984 년전국의 3,000 명을대상으로한신문독자조사에서신문일반에대해 못마땅하다 는견해를가진적이있다는응답자가전체의 77% 였는데, 그중 59% 가신문의보도내용을못마땅한대상으로응답했다 ( 한국언론연구원, 1984, 70쪽 ). 1986 년전국 1,200 명을대상으로한조사에서는신문보도의공정성에대해믿거나어느정도믿는다는응답이전체의 29.4% 인데, 별로믿지않거나믿지않는경우는전체의 45.6% 를차지했다 ( 한국언론연구원, 1986, 51쪽 ). 젊은대학생들은신문에대해더욱비판적이었다 ( 박용규, 2007, 208-208 쪽 ). 1984 년고려대학교신문의조사에서학생들은정치기사에대해믿을수없다는비율이전체의 82.9% 였고, 학원관계기사에대해서는 94.2% 가공정하지못하다고응답한것이그한사례이다. 23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6. 민주화이후시기신문과독자의신뢰도 1) 민주화과정에편승한언론 1987 년민주항쟁이후사회각분야에국가의직접적인개입이점차줄어들고, 자율화국면으로나아가면서여론을반영하는매개체로서언론의영향력이크게확대되었다. 민주화가진전될수록모든정책결정과정에국민다수의의사를반영해야하므로정치권은더욱여론에민감하게되었다. 군부의막강한영향력이퇴조한권력공간을 여론을대변한다 는명분으로언론이그자리차지하게되어언론, 언론인이한국사회의가장영향력있는집단가운데하나로부상한것이다. 군부권위주의정권시절, 권력의도구였던언론이점차스스로권력기구로변화한것이다. 여기서주목되는것은언론인스스로의투쟁에의한것이아닌, 민주화물결에편승해서민주화에별로기여한바가많지않은데그어느집단보다민주화의과실을많이차지했다는점이다 ( 양승목, 1996, 123 쪽 ). 다음 < 표 1> 에보듯언론수용자들이언론이민주화를위해주도적인역할을한것이아니라민주화물결에편승했다고인식하는비율이 74.5% 로매우높았다. 언론인들스스로는더욱많은 85.6% 가민주화에편승했다고응답했다. 언론이얼마나제역할을못했는지언론인자신들도인정한셈이다. < 표 1> 민주화과정에서언론의역할에대한인식 응답항목수용자언론인 사회민주화에주도적역할사회민주화물결에편승 303 (25.5%) 886 (74.5%) 103 ( 14.3%) 614 ( 85.6%) 합계 1,189 (100%) 717 (100.0%) 출처 : 한국언론연구원 (1993a, 88 쪽 ; 1993b, 180 쪽, 양승목, 1996, 123 쪽에서재인용 ) 2) 언론의자율성개선과무한경쟁시대신문의신뢰도 1987 년 6 10 민주항쟁이후언론에대한국가의직접적인개입이줄면서언론의자유와자율성이상당부분개선되었다. 먼저유신시기부터시행된프레스카드제가 1987 년 8월폐지되었다. 11월에는문화공보부의홍보정책실을폐지하고, 언론기본법을 정기간행물등록에관한법률 과 방송법 으로분리했다. 이런조치와함께미디어시장을대폭개방했다. 언론시장을독과점체제에서자유경쟁체제로전환하여미디어의다원화를유도한것이다. 그결과종합일간지로 1988 년 5월 < 한겨레신문 > 이창간되었고, 종교재단이운영하는 24

발제 1. 독립신문창간과한국언론의역사 : 사회적역할과독자의인식을중심으로 < 국민일보 >(1988 년 2월 ) 와 < 세계일보 >(1989 년 2월창간 ) 가창간되었고, 지방에도많은신문이새로출현했다. 이렇게미디어시장이개방되자언론사간의경쟁이치열해지기시작했다. 이에따라언론자본은더많은이익을창출하기위해광고주의이해에더영합하게되었다. 주요광고주가소구하는계층, 구매력있는대도시의안정적이고보수적인중산층의기호, 취향및가치관에부응하면서, 그들의소비를자극하는정보제공에더욱관심을보이게되었다. 반면에구매력적은소외계층이나집단의이해와관심사들을신문이다루는사례는점점드물게되었다. 이후한국의언론은여전히정치권력이직간접적으로영향을미치는한편으로, 자본의영향력, 언론경영주와광고주의영향력이더욱강력해지게되었다. 이제신문독자는신문이광고주에게판매하는소비자상품 (audience commodity) 이며, 소비자본주의사회의소비자로서의역할이더중시되고있다. < 표 2> 는신문에대한독자의인식과신뢰도가어떻게변화했는지잘보여준다. 1984 년전국 1,200 명의 18세이상성인수용자를대상으로한조사에서그래도신문이텔레비전에비해더신뢰하는매체였다. 민주항쟁이후에도신문의신뢰도가텔레비전보다훨씬높은 56.2% 로응답되었으나, 1990 년대들어점차낮아져 2002 년에는수용자의 19.2% 만이신문을신뢰한다고응답했다. 이에비해텔레비전은 1990 년대꾸준히높아져 1996 년신문의신뢰도를추월했고, 2000 년에 61.9% 를차지하여신문과의격차가더벌어졌다. 이시기신문은판매경쟁이심해지고, 권력화한보도양태로비판받던때였다 ( 박용규, 2007, 213 쪽 ). 그에비해텔레비전은민주화이후공영성을강화하는프로그램을다수편성하여수용자들이더신뢰하게되었던것으로생각된다. 1984 1988 (6 29 전 ) < 표 2> 신문과 TV 의신뢰도추이 1988 (6 29 후 ) 1990 1992 1996 2000 2002 신문 49.3 52.2 56.2 55.4 46.2 40.8 24.3 19.9 TV 42.6 32.7 31.0 34.7 40.8 49.3 61.9 48.4 출처 : 오수정 (2006). 2006 년수용자의식조사. < 신문과방송 > 432 호 (12 월호 ), 120 쪽. ( 단위 %) 25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7. 언론의사회적역할과한국언론 이상에서개화기 < 독립신문 > 창간의역사적의의를다시검토하고, 한국언론의역사를언론정책, 언론의사회적역할과독자들의인식을중심으로간략하게살펴보았다. 앞에서의논의를바탕으로한국언론의역사에서나타난언론의사회적역할의의미를정리해보기로한다. 이글은특히신문의사회적역할을평가하는데있어긍정적인측면과부정적인측면을함께바라보고평가해야한다는점을주목했다. 앞에서살펴보았듯이 < 독립신문 > 의창간으로한국사회에공적인사회문제에관한정보를제공하고논의하는공공영역이본격적으로출현했다. < 독립신문 > 의창간과발행은신문이라는근대적인사회제도를한국사회에정착시키는데큰영향을미쳤다. < 독립신문 > 발행에자극받아출현한개화기신문들역시개화, 독립을위해독자를계몽하고, 독자들이새로운자아를형성하게한중요한매개체역할을담당한것이다. 식민지시기조선인경영신문들은 1920 년창간이후조선총독부의강력한언론통제아래에서나마조선인신문으로서의역할을담당했다. 1930 년대식민지현실이장기화하면서조선독립의희망과기대가희미해지고, 신문역시친일논조에적극적이되어가던 1936 년손기정선수의마라톤우승보도그자체만으로조선인의긍지를일깨우면서민족주의가확산된것은매우시사적이다. 식민지현실의한계에서도조선인을위한신문으로서중요한역할을수행한것이다. 이시기신문평가에서긍정적인역할과부정적인역할을함께논의해야할이유이다. 해방이후쏟아져나온신문들은 1950 년대까지정파적신문이대부분이었다. 정치적선정주의경향이있는가운데서도독자들의인기를끌며발행부수가훨씬많았던야당지들은정부를강력하게견제하고비판하는역할을수행했다. 4 19 혁명과정에서언론이중요한역할을담당한것은 1950 년대정부비판의전통에서가능했다. 그러나제2 공화국시기무제한의언론자유는사이비언론의횡포가만연하게만들었다. 1960 년대에서 1980 년대군부권위주의정권시절강력한언론통제아래신문은정부와권력에대한견제와비판, 환경감시등기본적인언론의사회적역할수행이매우위축되었다. 1987 년민주화이후언론의자유가크게신장되었으나그대신자본의포로가되어, 사회적역할수행에문제가많은것이현실이다. 한국언론의역사를되돌아볼때, 한국신문이수행한긍정적인역할도많았다고생각된다. 그러나미디어가대중적으로보급되어그영향력이훨씬확대된현대산업화시기이후긍정적인역할들도있었지만, 부정적인영향이매우많았고, 그런양상은현재로이어 26

발제 1. 독립신문창간과한국언론의역사 : 사회적역할과독자의인식을중심으로 지고있다. 오늘날한국의신문들은역사와독자앞에부끄러움을느껴야한다. < 독립신문 > 창간정신을되돌아보면서, 신문들이더이상부끄럽지않은역사를만들기위해신문의본질과존재이유에충실하기위한노력, 공공성과공정성을개선하고강화하려는노력이절실하게요청되고있다. 27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참고문헌 김남석외 (2000). < 한국언론산업의역사와구조 >. 연암사. 김민환 (2005). < 한국언론사 >. 개정판. 나남출판. 김영희 (2009). < 한국사회의미디어출현과수용 : 1880~1980>. 커뮤니케이션북스. 김영희 (2012). 장준하의언론사상연구. < 한국언론정보학보 > 제59호. 68쪽. 김영희 (2013). 계몽과홍보에서수익창출과문화권력으로 : 한국신문문화사업의전개. 박용규 김영희 윤상길외. < 한국신문의사회문화사 >. 한국언론진흥재단, 189-247. 김영희 (2014). 엘리트체육에서대중스포츠까지 : 언론사주최마라톤대회의역사. 채백 김영희 윤상길외.< 언론사문화사업의역사와사회적의미 >. 한국언론진흥재단. 243-283. 김영희 (2015). < 한국전쟁기미디어와사회 >. 커뮤니케이션북스. 김해식 (1994). < 한국언론의사회학 >. 서울 : 나남. 박권상 (1983). < 자유언론의명제 >. 서울 : 전예원. 박명림 (1996). < 한국전쟁의발발과기원 > Ⅱ. 나남출판. 박용규 (2007). 신문의사회문화사. 유선영 박용규 이상길외. < 한국의미디어사회문화사 >. 한국언론재단, 169-226. 박용규 (2015). < 식민지시기언론과언론인 >. 서울 : 소명출판. 소오생 ( 小梧生설의식 ). 3수록 ( 三隨祿 ) 출판홍수. < 동아일보 > 1946. 3. 23. 1. 송건호 (1990). < 한국현대언론사 >. 삼민사. 양승목 (1995). 한국의민주화와언론의성격변화 : 자유언론 의딜레마. 유재천외. < 한국사회변동과언론 >. 서울 : 소화, 93-146. 양승목 (2007). 신뢰도하락과위기의한국언론. 임상원외 5인. < 민주화이후의한국언론 >. 나남. 139-182. 오기영 (1947). 사실에충실하라. < 신문평론 > 창간호 (1947 년 4월 ), 22-23. 오수정 (2006). 2006 년수용자의식조사. < 신문과방송 > 432호 (12월호), 116-123. < 이광수전집 > 7 (1970). 나의고백. 서울 : 삼중당. 이규석. 왜신문에보도않는거요. < 동아일보 >. 1984. 11. 14. 10. 이부영 (1983). 70년대의한국사회와언론. 한국기독료사회문제연구원편. < 언론과사회 >. 서울 : 민중사, 280-349. 이상하. 오늘과내일. < 동아일보 >. 1982. 6. 12. 3. 장준하 (1963). 一市民이읽은 30년간의신문. 고재욱선생화갑기념논총편찬위원회편. < 민족과자유와언론 >. 서울 : 일조각, 351-365. 정진석 (2006). <(6 25 전쟁 ) 拉北 >. 서울 : 기파랑. 주동황 (2000). 신문정책과신문산업의성장 : 1960 년대부터 1980 년대말까지. 김남석외. < 한국언론산업의역사와구조 >. 연암사, 151-246. 진실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편 (2009). <2008 년조사보고서 >. 채백 (2006). < 독립신문연구 >. 서울 : 한나래. 28

발제 1. 독립신문창간과한국언론의역사 : 사회적역할과독자의인식을중심으로 채백 (2013). 계몽의대상에서행동하는독자까지 : 한국신문독자의사회문화사. 박용규 김영희 윤상길외. < 한국신문의사회문화사 >. 한국언론진흥재단, 17-69. 채백 (2015). < 한국언론사 >. 서울 : 컬처룩. 천정환 (2010). < 조선의사나이거든풋뽈을차라 : 스포츠민족주의와식민지근대 >. 개정판. 서울 : 푸른역사. 한국언론연구원 (1984). 제1회전국신문독자여론조사. < 신문과방송 >. 168호 (12월호), 64-73. 한국언론연구원 (1986). 제2회전국신문독자매체접촉양태및신뢰도조사. < 신문과방송 >. 190 호 (10월호 ), 44-57. Bishop, E. B.(1905). Korea and her Neighbours, 이인화옮김 (1994). < 한국과그이웃나라들 >. 서울 : 살림. Mckenzie, Frederick A.(1920). Korea's Fight for Freedom, 이광린역 (1969). < 한국의독립운동 >. 서울 : 일조각.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http://newslibrary.naver.com/ 29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발제 2 한국언론의과제와전망 :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을계기로본역사적성찰 박용규상지대언론광고학부교수

발제 2. 한국언론의과제와전망 :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을계기로본역사적성찰 한국언론의과제와전망 :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을계기로본역사적성찰 박용규상지대언론광고학부교수 1. 언론의위기에대한고민 언론의위기, 특히신문의위기가가속화되는현실에서맞이하는 < 독립신문 > 창간 120 주년은우울하다. 언론의미래를비관하는목소리가높기때문이다. < 한성순보 > 나 < 독립신문 > 창간 100 주년을맞이할때도언론의현실에대한비판적의견이많았지만, 적어도당시에는지금처럼언론의미래에대해비관적전망이많지는않았다. 당시에는비록언론의현실은어렵지만그래도노력하면더나은미래를만들수있으리라는희망이어느정도있었다. 물론언론의위기가우리나라만의문제는아니다. 많은나라에서언론의위기를진단하고대책을찾기위해노력하고있다. 경제적변동과기술적발전속에전통언론인종이신문과지방파방송의위기가심화되고있다. 특히종이신문의위기는생존의위협을느끼는지경에이르렀다. 언론이처한위기는정상적인저널리즘활동을하기어렵게만들정도이다. 우리나라의경우이런문제들이더욱심각한양상을보이고있다. 한국언론의위기는언론산업의위기이며동시에저널리즘의위기이다. 특히신문은산업적인측면에서심각한위기에처해있고, 저널리즘활동에서도신뢰도와영향력을급격히상실해왔다. 종이신문을읽는사람이급격히감소했고, 수입도크게줄어들었다. 신문에대한사람들의불신과비판의목소리도갈수록커지고있다. 인터넷신문의등장이종이신문에게는기회일수도있었으나, 현실에서는위기를초래하는요인이되고말았다. 인터넷신문의급증에대해서도저널리즘의질적하락을가속화시켰다는비판이나왔다. 언론의위기가심화되면서이런언론의위기를염려하고대책을마련하려는시도들도늘어나고있다. 다양한세미나가열리고, 많은논문들이발표되기도했다. 한국언론의위기에대한나름대로의진단과처방이나왔다. 그러나많은사람들이한국언론의위기가심각하다는진단은하지만, 그누구도정작명쾌한대안을제시하지는못하고있다. 실효성이높으면서도실현가능한위기극복방안을찾기가그만큼어렵기때문이다. 33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경제적변동과기술적발전때문에저널리즘의위기가발생했다는것은세계적으로보편적인현상이다 (Alexander, 2015). 그럼에도한국에서언론의위기가더심각하게나타나고있다면, 그이유를단순히경제가더큰어려움을겪었고, 기술발전이더급격히이루어졌다는점에서만찾을수는없다. 역사적으로형성된언론구조의특성때문에한국언론이경제위기를극복하고기술발전을수용하며발전하는데더큰어려움을겪었다는것이다. 한국언론의위기는역사적맥락속에서파악해야만올바른진단을할수있고, 그나마실효성이조금은더있는대안을찾아볼수도있다. 이글에서는신문 ( 오프라인, 온라인 ) 을중심으로언론의위기의내용과해결방안에대해간략히살펴보려고한다. 언론의위기는언론산업의위기와저널리즘의위기를포함하는개념으로사용할것이다. 먼저역사적맥락속에서언론의위기를살펴보고, 다음으로언론의위기의실체와원인을정리하고, 마지막으로언론의위기를극복하기위한과제에대해언급할것이다. 2. 언론위기의역사적맥락 한국언론은개화기에처음등장한이후식민지시기, 권위주위정권시기를거치며탄압과저항의역사를써왔다. 1883 년에 < 한성순보 > 가창간된이후아주짧은기간을제외하고한국언론은대부분의시기를불의한권력의탄압을받으며저항적활동을해왔다는것이다. 1987 년이전까지언론의자유를경험하지못했고, 비판적활동을하던언론인들은신문사를떠나거나훼절의길을걸을수밖에없었다. < 한성순보 > 창간 100 주년을맞이하며 1983 년에쓴글에서최준은한국언론이다음과같은과제를해결해야만발전할수있다고주장했다 ( 최준, 1983, 9-10 쪽 ). 첫째, 필부진언 ( 匹夫盡言 ) 의원칙을누구도방해내지억눌러서는아니된다는것입니다. 19 세기전제군주시대에쟁취한이언론자유의원칙을 20세기후반기부터 21세기에들어서면서더욱그기반을굳게해야되겠습니다. 둘째, 절단형이아닌지속형의언론발전의바탕을또한굳건히쌓아올려야할것입니다. 셋째, 자유와책임이일신동체가된활발한언론유형을확립할것입니다. 책임을완수하기위해서는언론의자유는필수적인것이기때문입니다. 넷째, 고도한직업적훈련을마친언론인만으로서충원돼야할것입니다. 34

발제 2. 한국언론의과제와전망 :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을계기로본역사적성찰 < 한성순보 > 창간 100 주년을맞이한 1883 년이여전히언론의자유가극도로위축된시기였기때문에최준은과거에도이미존재했던 언론자유의원칙 을확고히해야하고, 언론의자유가주어져야언론의책임도다할수있다고주장했던것이다. 또한최준은언론인의자질향상의필요성을제기하며, 고도의직업적훈련 을강조했다. 적어도이시기까지언론의과제는언론자유의획득과언론인의자질향상이었다고할수있다. 박정희정권과전두환정권은언론에대해자유를억압했을뿐만아니라특혜를베풀기도했다 ( 김해식, 1994, 152-175 쪽 ). 특히전두환정권은대량강제해직으로언론인의비판적성향을순치시키고, 보도지침으로보도내용에대한세부적인통제를제도화했다. 또한언론사통폐합으로과점적시장구조를만들어주고, 언론사와언론인에대한각종금융 세제상의특혜를베풀었다. 한국언론은 1980 년대내내정치적통제에숨죽이며, 경제적특혜에힘입어급격히성장했다. 1987 년의 6 29 선언은언론에대한직접적이고가시적인통제가사라지는역사적계기가되었다. 지방주재기자제도의부활, 프레스카드제의폐지, 6년만의증면등이시행되었고, 특히 11월에는 5공화국의언론상황을상징적으로나타내주던언론기본법이폐지되었고 정기간행물의등록등에관한법률 과 방송법 이분리, 제정되다. 또한기관원의상주나보도지침같이취재보도내용에대한직접적인개입도완화되는경향을보였다 ( 김해식, 1994, 176-185 쪽 ). 1987 년이후언론에대한통제가완화되면서동시에언론에대한특혜도크게줄어들었다. 언론사와언론인에대한특혜가은밀하고도선별적인형태로지속되기는했다. 즉, 노태우정권의경제적특혜제공은 정부에협조적이거나기득권을향유하고있는 언론사와언론인에대해선별적으로이루어졌던것이다 ( 윤영철, 1995, 205 쪽 ). 특히언론과언론인에대한선별적특혜제공은, 과거와같이언론이수동적으로받기만하던것이아니라이제는언론에의한적극적인선택의결과로나타나기도했다. 1987 년이후창 복간으로신문들이크게늘어나면서판매경쟁이가열되었다. 이런경쟁속에서도 경쟁적과점구조 를확실히구축하게된신문들에대해 권력화 되었다는평가들이나왔다. 1987 년이후정치와언론과의관계가변화하기시작했다. 일부신문들이정치권력의종속적또는부수적위치에서벗어나정치권력을유도하고통제하는일종의권력으로변했다는지적이나왔다. 즉, 몇몇시장지배적신문들이 민주화과정을밟으면서이전의도구의수준을벗고, 자유화를거쳐, 권력화의단계에도달했다는것이다 ( 조항제, 2001, 22-27 쪽 ). 정치권력의탄압과특혜속에성장해온신문들이이제는오히려정치 35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권력에대해직접적인영향력을행사하게되었던것이다. < 독립신문 > 창간 100 주년을맞이하여 1996 년에쓴글에서유재천은다음과같이주장 했다 ( 유재천, 1996, 28 쪽 ). 독립신문창간 100 주년을맞이하여우리가성찰한바는독립신문을비롯한그시대의신문들이지녔던치열한언론의사명감과엄격하게언론의바른길을걸으려한자세가아닐까한다. 언론의자유는신문사가이윤창출을극대화하려고주어지는것이아니라는인식이필요한시점이다. 또한언론이무소불위의권력기관이되라고언론의자유를보장하는것이아니라는자각도요청되는현실이기도하다. 시대의상황과그에따른필요와요구가다르고, 신문의존재양식을규정하는정치 경제 사회문화적조건이변화했다고할지라도저널리즘의정도는변할수없으며, 그길을걸을때비로소신문의생존이보장될것이라는점을강조하고자한다. 유재천은 1987 년이후언론의자유가주어지면서오히려언론들이제역할을하지못하고 독립신문을비롯한그시대신문들이지녔던치열한언론의사명감과엄격하게바른길을가려한자세 를잃어버렸다고비판했다. 특히언론의자유를보장하자신문사가 이윤창출을극대화 하고, 무소불위의권력기관 이되려고하고있다고주장했다. 언론의자유가주어지면서오히려여러가지부작용이나타나고있다는것이었다. 한국언론은 1883 년에최초의근대신문이등장한이후부터 6 29 선언이나온 1987 년까지 100 년이상의기간동안대부분의시기를언론의자유를제대로보장받지못한상태에서활동했다. 1987 년이후언론의자유가주어졌지만이제는오히려언론의자유를남용하고불공정한경쟁을일삼으면서신문에대한신뢰도가하락했고신문산업의혼란이가중되었다. 1987 년이전까지한국의신문들이언론의자유와책임을조화시키며활동한경험을하지못했고, 자유롭고도공정한경쟁을해본일이없었기때문이다. 1997 년의 IMF 외환위기는산업으로서나저널리즘의차원에서나모두허약한체질의한국언론에게치명타가되었다. 외환위기로인해신문사의경영이어려워지면서많은기자들이정리해고되었고기자들의수가급격히줄어들었다. IMF 를거치면서언론인들이대량해직되었을뿐만아니라임금이체불되거나삭감하는일이빈번하게벌어졌다.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의조사에따르면, 1997 년 11월이후부터 1998 년 4월 30일까지희망퇴직, 명예퇴직, 우대퇴직, 정리해고, 권고사직등으로언론사를떠난실직자들의수가 4,150 명에달했다 ( 강을영, 1999, 28-29 쪽 ). 한국언론연구원의조사에따르면, 1997 년에 4만 36

발제 2. 한국언론의과제와전망 :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을계기로본역사적성찰 2,368 명이던전체언론인이 1998 년에는 4,399 명 (10.4%) 감소한 3만 7,969 명이되었고, 특히신문사는 2만 1,200 명에서 3,899 명 (18.4%) 이줄어든 1만 7,301 명이되었다 ( 한국언론연구원, 1998, 119 쪽 ). 1998 년이후 언론의위기 라는이름을걸고세미나가열리거나논문이발표되는일이빈번해졌다. 1998 년 5월에한국언론연구원이 한국언론의위기와발전방안토론회 를개최했고, 7월에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이 한국언론의위기와발전방안토론회 를열었다. 신문산업의위기가곧저널리즘의위기를초래할것이라는염려가확산되었기때문이다. 2000 년대초까지는 신문의위기 에대해 현재신문산업이다소어려운상황이기하지만, 앞으로개선될여지가있고또개선될조짐이보인다 고하며반론을제기하는언론인들이적지않았다 ( 한국언론재단, 2003, 21-22 쪽 ). 그러나 2000 년대중반이후에는 언론의위기 담론이일상화될정도로위기가더욱심각해졌다 ( 이준웅 최영재, 2005). 3. 한국언론이직면한위기 언론의위기 를거론할때가장먼저떠오르는매체는당연히신문이다. 외환위기로가장큰타격을받았던신문이, 인터넷활용의증가에다시가장큰영향을받았다. 신문의위기극복을위한대토론회보고서 에서는 ' 신문이위기를맞고있다는징후 를다음과같이정리하고있다 ( 한국언론진흥재단, 2010, 13-14 쪽 ). 신문이위기를맞고있다는징후는영상매체선호에의한매체소비행태변화와신문독자의급속한감소, 광고주의이탈에따른경영의어려움, 정보의전문성과심층성의약화에따른저널리즘의위기, 원소스멀티유즈의멀티미디어시대와다양한애플리케이션의디지털매체환경의변화에대한대처미비등다양한측면에서관찰된다. 그어느것하나대응하기에녹록하지않다. 그러나미디어빅뱅으로불리는디지털뉴미디어시대의전개로미디어생태계가패러다임의변화를겪는요동속에서신문은제대로된대응을하지못하고있으며, 어느덧올드미디어로내쳐지고있다. 신문의위기를보여주는가장중요한지표로는흔히구독률과열독률의하락을들고있다. 2015 년구독률은전년도에비해 5.7% 줄어든 14.3% 로나타났고, 열독률은전년대비 5.3% 하락한 25.4% 로나타났다. 1996 년의조사결과에비하면, 구독률은 55.0%, 열독률은 59.8% 감소했다. 구독률과열독률이모두매년 3% 내외정도로급격히하락해왔다. 37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출처 : 한국언론진흥재단 (2015). <2015 언론수용자의식조사 >, 108 쪽. 출처 : 한국언론진흥재단 (2015). <2015 언론수용자의식조사 >, 96 쪽. 구독률과열독률의하락은당연히매출액과당기순이익의감소로이어지고있다. 이미 2000 년대이후신문들의매출액과당기순익은계속감소해왔고, 당기순이익도적자를보는경우가많았다. 경제지를제외하고는대분의신문들이매출액이간신히정체되거나아니면하락하는경험을반복해왔다, 출처 : 한국언론진흥재단 (2015a). <2015 신문사재무분석 >, 9 쪽. 38

발제 2. 한국언론의과제와전망 :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을계기로본역사적성찰 출처 : 한국언론진흥재단 (2015a). <2015 신문사재무분석 >, 13 쪽. 신문이처한위기의원인중에가장주된것이인터넷의이용이라는점에큰이견이없다. 인터넷매체의이용에의한 기능적대체 가신문의구독률과열독률이하락하는데가장큰영향을주었다는것이다. 또한독자들이신문뉴스의가치가낮다고인식하고, 공정성에대해신뢰하지않는다는점도신문의위기를초래하는요인으로지적된다 ( 이준웅 최영재, 2005). 신문을구독하지않는이유가대체로 기능적대체 에있다는것은아래의표를통해서도알수있다. 출처 : 한국언론진흥재단 (2015). <2015 언론수용자의식조사 >, 112 쪽. 종이신문을읽지않는다고해서아예뉴스를접촉하지않는다고단정할수는없다. 2015 년의결합열독률 ( 종이신문과종이신문이발행하는인터넷언론사가운데한가지이상을이용하는이용자의비율 ) 은오히려전년대비 1.5% 늘어난 79.5% 로나타났다. 종이신문을읽는사람은 25.4% 에불과하지만, 종이신문이생산한뉴스를읽는사람은 79.5% 로나타나 ( 한국언론진흥재단, 2015b, 114 쪽 ), 종이신문의위기가곧저널리즘의위기는아니라는주장이나오기도한다. 그러나인터넷을통해뉴스를소비하게되면서건강 취미 / 레저 / 여 39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행 식생활 / 요리 / 살림 스포츠 의복 / 패션등에관한관심도가정치 국제 남북문제 / 통일등 에관한관심도보다높게나타나고있는점도저널리즘의위기의한징후라고할수있다. 출처 : 한국언론진흥재단 (2015). <2015 언론수용자의식조사 >, 169 쪽. 1990 년대이후신문의신뢰도는계속하락해왔고 ( 양승목, 2007), 이런경향은최근까지도계속되고있다. 신뢰도의하락은신문의콘텐츠의질적수준이낮고, 공정하지않다는인식때문이다. 이민웅은한국언론에대해 객관성 공정성과관련된비판, 상업주의와관련된비판, 직업윤리와관련된비판, 변화와지속의역사적흐름을읽는안목의부족에대한비판 등네가지영역으로나누어문제점을지적했다 ( 이민웅, 2003, 94-96 쪽 ). 손석춘도저널리즘위기의실체를 진실의위기 와 공정의위기 로요약해설명하고있다 ( 손석춘, 2006, 53-66 쪽 ). 출처 : 한국언론진흥재단 (2015). <2015 언론수용자의식조사 >, 170 쪽. 40

발제 2. 한국언론의과제와전망 :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을계기로본역사적성찰 한국언론에대한신뢰도의하락은뉴스에대한불만과불신의산물이다. 위의표에서 무책임한보도 나 권력과유착된보도 등을개선할점으로지적한것은, 언론에대한수용자들의비판적인식을잘보여준다. 특히디지털미디어환경이되면서뉴스의질이전반적으로하락한것이수용자들의불만과불신을낳는가장큰요인이되었던것이다. 4. 위기극복을위한한국언론의과제 구독률과열독률이급격히떨어지고있고, 이에따라신문사의매출액과당기순이익도줄어들고있는현실을되돌리기는어렵다. 다시종이신문을구독하고열독하게만드는것이불가능하기때문이다. 인터넷으로라도뉴스를보는사람이아직까지상당한비율을보이고있는것이그나마다행이라는주장도있다. 그러나인터넷신문도수익구조의한계로경영상어려움을겪고있고, 인터넷뉴스의연성화와파편화로저널리즘의질적하락이더가속화된다는비판도있다. 이런현실에서한국언론이처한위기를극복하기위한고민이깊어질수밖에없다. 신문의위기극복을위한대토론회보고서 에서는 5대제안및시행과제로다음과같은내용을제시하고있다 ( 한국언론진흥재단, 2010, 45-72 쪽 ). 1. 뉴스콘텐츠고품격화및맞춤화를위한지원시스템을구축하자. 2. 언론인전문성및공익성강화를위한교육인프라확대가필요하다. 3. 저널리즘현안및미래전략을위한연구프로젝트를집행하자. 4. 언론의윤리의식제고및국민과의소통을강화할수있는방안을마련하자. 5. 독립적이고자율적인 저널리즘센터 의설립과운영방안을모색하자. 위의내용은크게언론인의전문성과윤리의식을높이는방안을마련하고, 콘텐츠의질을향상시킬수있도록지원하고, 저널리즘의미래를위한연구와교육을강화하는등세가지로나눌수있다. 이런주장에는기자의자질과뉴스의품질을높이는것이저널리즘의위기는물론신문산업의위기를극복하는데도반드시필요하다는인식이담겨져있다. < 미디어오늘 > 이창간 20주년을맞이해연재한특집기사에서 저널리즘의복원 을위해다섯가지를제안했다 ( 이정황 김유리 정철운외, 2015, 311-321 쪽 ). 첫째, 뉴스수용자의미디어이용능력을높인다. 둘째, 미디어지형재구조화를통해여론다양성을높인다. 41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셋째, 좋은기사와좋은언론인을위한보상체계를만든다. 넷째, 언론의정파성과권력화를사회적으로견제한다. 다섯째, 기자의전문성과윤리성을제도적으로키워낸다. < 미디어오늘 > 의제안에는, 여론다양성을위한미디어지형재구조화와뉴스수용자의미디어이용능력향상이포함되어있다. 특히, 뉴스수용자의변화없이언론의위기를극복하기힘들다는인식이담겨있는것이위의 대토론회보고서 와다른점이다. 손석춘은저널리즘의위기를극복하기위해서는 저널리즘연구와교육의강화, 저널리즘발전을위한법적기반확보, 신문협회와편집인협회의각성 등세가지가필요하다고주장했다 ( 손석춘, 2006, 66-72 쪽 ). 김승수는 탈저널리즘세계를향하여 필요한과제로 수용자대중의비판적의식과연대, 미디어평의회구성, 미디어공공성의실천 등세가지를들었다 ( 김승수, 2011, 25-27 쪽 ). 이재경은 한국저널리즘의선진화 를위해기사, 기자, 철학등세분야에서추진해야할과제를다음과같이주장했다 ( 이재경, 2013, 385-404 쪽 ). 첫째, 다양한취재원사용등의계량적기준을통해좋은기사의표준을제시하며언론사들이이런기준을지키도록요구하고, 정확성 투명성 공정성등의비계량적또는질적인요소로편집국이나보도국에서기사를제작해내는과정을선진화해야한다. 둘째, 기사를만들어내는기자의역량을극대화하기위해채용방식이나인력운영방식을유연화하고전문화를위한취재및교육제도를구축해야한다. 셋째, 언론을자기의이익을위해사용하려는극심한도구주의를극복하고, 언론이공공의이익을위해기여해야한다는철학을공유해야한다. 언론에대한신뢰도의하락은사회적차원, 언론사조직의차원, 기자개인차원의문제가복합적으로작용된결과이기때문에신뢰도의하락을막기는대단히어렵다 ( 강명구 양승목 엄기열, 2001, 223-225 쪽 ). 양승목은 언론신뢰도제고와관련해제안할수있는실천적방안은대개언론사의조직적차원아니면기자개인의차원의문제 라고주장했다 ( 양승목, 2007, 178 쪽 ). 이런주장과제안들을종합해보면, 언론의위기를극복하거나완화시키기위해서는다음과같은네가지가필요할것이다. 첫째, 언론의다양성을실현하면서도수익성을제고시킬수있는정책을실시해야한다. 둘째, 디지털미디어환경에맞는언론사조직의개혁과역량의재편이이루어져야한다. 셋째, 기자의전문성을높이고윤리의식을강화하여뉴스콘텐츠의질을향상시킨다. 넷째, 수용자들의합리적인비판적인뉴스이용능력을향상시킨다. 경제적이고기술적인급격한변화속에언론은 창조적재건 (creative reconstruction) 42

발제 2. 한국언론의과제와전망 :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을계기로본역사적성찰 을위한노력을해야한다 (Alexander, 2014, pp.24-26). 언론은디지털미디어시대에맞게혁신하면서도 (Küng, 2014/2015) 저널리즘의기본적인원칙들은발전시켜나가려는자세를가져야한다 (Stephens, 2014/2015). 즉, " 디지털생태계에서저널리즘이어떤뉴스생산전략을마련해야할것인가 하는고민에는 저널리즘이내재하고있는본질적요소에대한숙고 가필요하다는것이다 ( 김사승, 2011, 201 쪽 ). 기술적변화에따라기사의스타일과장르, 객관적사실과감정적내용, 기자와일반인의뉴스생산등에서존재하던관습적경계가불분명해지는 포스트모던저널리즘 (postmodern journalism) 시대에언론인들은통합적능력을갖추어야만한다 (Wahl Jorgensen, 2014, pp.279-280). 한편언론인들은 디지털시대에중요한저널리즘가치는정확한팩트에기반을둔공공성 이라는사실도여전히명심해야한다 ( 최민재 양승찬 이강형, 2013, 109-113쪽 ). 5. 언론의위기극복의전망 < 독립신문 > 창간 120 주년을맞이하며, 종이신문의종말을얘기해야할정도로언론의위기가심각하다. 언론이 < 독립신문 > 시절만큼도제역할을못한다는비판이나오기도한다. 종이신문의미래를염려해야하는현실은보편적인것이지만, 120 년전의신문보다도제역할을더못한다는비판이나오는것은특수한현상이다. 한국언론의위기는경제적, 기술적요인뿐만아니라역사적맥락까지고려하며진단을내려야한다. 1987 년이전까지한국언론은자유를전혀누리기못하면서도특혜에힘입어경제적으로는성장했다. 언론의자유와책임을조화시키며활동하거나자유롭고도공정한경쟁을한경험이전혀없었다. 1987 년에언론의자유가주어지고시장논리에따른경쟁이본격화되면서, 언론의정파적활동과과당경쟁으로인해비판을받기시작했다. 언론의자유가주어지면서오히려언론이더심한불신과불만의대상이되는역설이발생했다. 이렇게허약한체질의한국언론은외환위기와인터넷의급격한보급으로심각한타격을입었다. 외환위기가신문산업의기반을흔들었다면, 인터넷을통한뉴스소비의증가는저널리즘의역할을약화시켰다, 한국언론의위기는역사의부정적유산을청산하지못한탓이크다는점에서그만큼극복하기가쉽지않다. 경제적변동과기술적발전이라는요인에대한대응만으로는해결이쉽지않다는것이다. 언론의권력화나자사이기주의는역사적인맥락에서이해할때 43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해결의실마리를찾을수있다. 한국언론의역사에서 언론이공중의신뢰를구현하는기관 이라는저널리즘철학이부재했다는점에주목할필요가있다 ( 이재경, 2013, 400-404쪽 ). 언론의위기가민주주의의위기를초래할것이라는주장은지금한국의현실을들여다보면곧공감하게된다. 한국민주주의의처참한현실에언론이상당한책임을져야한다는것이다. 언론의위기를극복하는것은대단히어렵지만반드시필요한일이다. 산업적인차원의지표에서과거와같은수준을회복하는것은어렵겠지만, 저널리즘차원에서과거보다더좋은결과를얻는것이불가능하지만은않다. 언론의기본적가치를확고히하고, 디지털미디어시대에부응하는혁신을하며, 기자의자질과기사의품질을높여나가는노력이절실하다. 44

발제 2. 한국언론의과제와전망 :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을계기로본역사적성찰 참고문헌 강명구 양승목 엄기열 (2001). < 한국언론의신뢰도 >. 서울 : 한국언론재단. 강을영 (1999). 대량해직, 임금도생활위협할정도. < 신문과방송 > 1999 년 1월호, 28~29 쪽. 김사승 (2011). < 디지털생태계의뉴스생산모델 >. 서울 : 관훈클럽. 김승수 (2011). 한국저널리즘의위기와대안. < 언론과학연구 > 11권 3호, 5-32. 김춘식 (2016). 종이신문소비변화-구독률 열독률은감소 결합열독률 은증가. < 신문과방송 > 2016 년 2월호, 6-11. 김해식 (1994). < 한국언론의사회학 >. 서울 : 나남. 손석춘 (2006). 저널리즘위기의실체와극복방안에관한연구. < 한국언론정보학보 > 36호, 42-77. 양승목 (2007). 신뢰도하락과위기의한국언론. < 민주화이후의한국언론 >(139-182 쪽 ). 서울 : 나남. 유재천 (1996). 독립신문 100년과한국언론의반성. < 관훈저널 > 61호, 9-28. 윤영철 (1995). 사회변동과언론통제. < 한국사회변동과언론 >(181-225 쪽 ). 서울 : 소화출판사. 이민웅 (2003). < 저널리즘 : 위기 변화 지속 >. 서울 : 나남출판. 이재경 (2013). < 한국형저널리즘모델 >. 서울 : 이화출판. 이정환 김유리 정철운외 (2015). < 저널리즘의미래 >. 서울 : 인물과사상사. 이준웅 최영재 (2005). 한국신문위기의원인 : 뉴스매체의기능적대체, 저가치제공, 그리고공정성위기. < 한국언론학보 > 49권 5호, 5-35. 장용호 (1995). 한국신문산업의구조변동. < 한국사회변동과언론 >(5-49 쪽 ). 서울 : 소화출판사. 조항제 (2001). 민주주의와미디어의권력화. < 언론과사회 > 9권 3호, 6-39. 최민재 양승찬 이강형 (2013). < 디지털미디어시대의저널리즘 >. 서울 : 한국언론진흥재단. 최준 (1983). 한국언론 100 년의회고와전망. < 신문학보 > 16집, 5-10. 한국언론연구원 (1998). < 뉴미디어사업동향 / 언론인구추이분석 >. 서울 : 한국언론연구원. 한국언론재단 (2003). < 신문의위기?-진단과처방 >. 서울 : 한국언론재단. 한국언론진흥재단 (2010). < 한국신문의미래전략 >. 서울 : 한국언론진흥재단. 한국언론진흥재단 (2015a). <2015 신문사재무분석 >. 서울 : 한국언론진흥재단. 한국언론진흥재단 (2015b). <2015 언론수용자의식조사 >. 서울 : 한국언론잰흥재단. Alexander, J. C.(2015). The Crisis of Journalism Reconsidered: Cultural Power. Fudan Journal of the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8(1), 9-31. Gordon, J., Rowinski, P., and Stewart, G.(2013). Br(e)aking the News. Oxford: Peter Lang. Küng, L.(2014). Innovators in Digital News. 한운희 나윤희역 (2015). < 디지털뉴스의혁신 >. 서울 : 한국언론진흥재단. Stephens, M.(2014). Beyond News: The Future of Journalism. 김익현역 (2015). < 비욘드뉴스, 지혜의저널리즘 >. 서울 : 커뮤니케이션북스. 45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Wahl Jorgensen, K.(2014). Changing Technologies, Changing Journalistic Epistemologies, In Schreiber, M. & Zimmermann, C., Journalism and Technological Change (pp. 264-283). Frankfurt: Campus Verlag. 46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토론 - 김사승숭실대언론홍보학과교수 - 서정아머니투데이정치부장 (the300 에디터 ) - 전홍기혜프레시안편집국장 - 김여라국회입법조사처입법조사관

토론문 독립신문이후 120 년한국언론에대한반성 김사승숭실대언론홍보학과교수 1. 반성의대상 - 계몽에서도구화로진행 - 민주화를등에업고자유화에서권력으로진행 - 정치권력에대한직접적영향력구축 2. 반성의주체 - 언론사조직차원의반성 - 기자개인차원의반성 3. 반성의방식과방향에대한논의필요 - 언론의권력현상에대한분석의중요성 - 언론의생산권력과소비세력관계의변화를중심으로필요 4. 저널리즘생산과소비관계의변화 시기생산권력소비세력양자관계 독립신문 식자, 지사, 계몽가 - 사회정보가권력층에서일반시민으로확산 : 가게에서신문을읽는광경... 동질적지향성 일제치하조선인경영신문 - 문맹의민초 : 문자강습회동질적지향성 정부수립기 정파지 : 이념과정치권력의선전기관 - 정보욕구의급격한팽창 - 중앙지중심언론에대한불만 이해관계불일치 제 1 공화국 정치지향적뉴스조직권력 - 도시중산층및젊은지식인 : 구독료수입원 - 정치기사중심뉴스소비 관계편향성 49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시기 생산권력 소비세력 양자관계 제2공화국 사이비언론 - 학생-언론연합 갈등관계 박정희정권 경영진, 시장지향적상업언론 - 행간읽기 상이한발전방향 제5공화국 언론통폐합, 시장독과점 신뢰도추락 관계괴리 민주화이후 민주화편승 - 광고상품으로서의독자 관계변질 디지털생태계 경계붕괴 저널리즘본질유지 현실진단간극 50

토론문 새프레임이필요하다 -the300 서정아머니투데이정치부장 (the300 에디터 ) 신문이없어서는세상이컴컴하야견딜수없겠다 (< 독립신문 >, 1898. 4. 12. 론셜 ). 독립신문발행 120 주년을맞아새로생각하게되는글귀입니다. 아침마다문앞에놓인종이신문을받아들며하루를시작했던습관은사라진지오래입니다. 마침영국일간인디펜던트가 3월 26일자로신문인쇄를중단했습니다. 마지막종이신문엔 Stop Press 라는제목의기사가실렸습니다. 인디펜던트소유주인 ESI 미디어는지난달종이신문발행을중단하고온라인서비스만운영한다는방침을밝힌바있습니다. 언제어디서나핸드폰에있는아이콘을눌러실시간뉴스를보는게지금의뉴스소비패턴입니다. 신문이없어컴컴한세상이아니라, 뉴스가너무많아공해가되는세상이됐습니다. 언론에종사하는사람으로서지금처럼혼란의시기는없었을듯합니다. 무엇보다온라인과모바일로뉴스를이용하는플랫폼이바뀌면서언론유통의주도권이포털서비스사로넘어갔습니다. 국내 1위포털서비스업체인네이버의온라인, 모바일시장점유율이 75% 를웃돌고있는상황에서언론사로이용자들을끌이는일은보통어려운일이아닙니다. 또반대로네이버다음등포털에노출만되면뉴스를알릴수도있습니다. 포털의영향력이언론사모두를합친것보다커지면서같은뉴스를여러번쓰는현상과검색어에있는뉴스만작성하는것이일상화됐습니다. 말로는독자들의관심을따라간다고하지만, 엄밀히들여다보면포털에서주로검색되는검색어만따라간다고보는것이맞습니다. 이같은현상조차도최근의일이아닙니다. 포털의존현상은수년째지속심화되고있 51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지만, 국내언론가운데이렇다하게대책을내놓은곳은없습니다. 킬러콘텐츠, 포털에제공하지않는프리미엄뉴스, 데이터베이스구축등으로차별화를시도하고는있으나성공모델로제시하기에는아직부족해보입니다. 미국만해도 2000 년대이후 IT의발전과자본의투자등으로다양한새로운형식의매체가등장했고성공했습니다. 블로거들의매체로출발해최고의방문자수를기록하고있는허핑턴포스트나리스트뉴스를유행시킨버즈피드, 카드뉴스의원조로불리는복스, 새로운정치뉴스폴리티코, 스타통계학자네이트실버가만든 538 등숱한미디어들이생겨났습니다. 특히아마존이워싱턴포스트를인수한뒤저널리즘과기술의결합의모범사례를보여주고있습니다. 디지털기사를라이센스화하거나다양한콘텐츠를제휴해서새로운언론의영역을개척하고있습니다. 이들미국의신생미디어들은올드미디어와는확연히다른, 뉴미디어의새로운전략을강조하고있습니다. 수많은활자보다하나의사진이나비디오가효율적이다 온오프, SNS 등어느미디어에서도통하는메시지를만들어야한다 로컬네트워크시스템으로사람들의일상에스며들어야한다등입니다. 이같은전략은미디어의플랫폼이전천후환경으로바뀐데다, 독자들중밀레니얼 (Millennials, 1980 년대이후출생한 18~34 세연령대 ) 세대가부상하면서기존의뉴스제공방식이효율적이지않기때문입니다. 이제미디어는정보기술과의결합없이는존재하기가힘듭니다. 따라서형식이내용을바꾸고있습니다. 또그러기위해서는기존언론인들만의고민속에서해답을찾을것이아니라, 기술개발자, 각분야의전문가들, SNS 이용자들등다양한네트워크를활용해야합니다. 미디어를생산하고유통하는벽자체가무너졌기때문입니다. 그렇다면형식만바꾸면뉴미디어가될까요? 이전과같은방식으로취재하고생산하는기사를새그릇에담는다고독자의니즈에맞출수있을까요? 머니투데이 the300 은이같은고민속에서탄생했습니다. 52

토론문 왜뜬금없이정치뉴스를? 정치뉴스가새로울게있나 다양한우려와의구심이있었고, 저희들도충분히공감하는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경제분야를주로취재해온머니투데이는경제정책입안의무게중심이상당부분입법부로넘어가있고, 따라서국회의역할을더주목해야한다고판단했습니다. 정치뉴스라고하면누구나식상해할수있지만, 다른관점의정치뉴스 를표방한것입니다. 대한민국국회의원수가 300 명이란데서착안한 the300 은국회의입법과정과그반향, 국민에게필요한정책들의입법화등을세심히관찰하기로했습니다. 이에따라 the300 은슬로건을 내삶을바꾸는정치뉴스 로정했습니다. 또내부적으로 내지갑을지키는정책뉴스 란슬로건도있었습니다. 연말정산파동, 단통법등실제우리경제생활에큰영향을미치는정책들의입법과정에언론이무심했다는것은여기저기서나타났습니다. 정치인들의이합집산, 계파투쟁만이정치뉴스는아닙니다. 우리삶에직접적영향을미치는정책이정치에서탄생합니다. 그동안많은국내언론들이이부분을놓쳤거나무시했다고판단했습니다. 정책국회 로업그레이드하기위해서는언론들의국회감시가제대로이루어져야합니다. 정치인들의계파로뉴스밸류에이션을판단하는색안경을벗고, 정책의틀로보기로했습니다. 그러기위해서는취재시스템을기존매체와다르게바꿨습니다. 정당, 인물중심마크맨이아니라 16개상임위별취재시스템을도입했습니다. 정책입안단계에서부터일반기업, 상장사, 업종, 개인들의삶에미치는영향을분석하고예산배정, 집행과정을집중조명하고있습니다. 이같은네트워크를토대로한취재와기사작성을바탕으로 대한민국법률상, 의원평가 등을도입했습니다. 의원들의입법활동을제대로평가하는것이의회발전에기여를한다고생각해만든제도입니다. 그리고이전에출석률이나발언등에치중해의원을평가하던방식에서벗어나정책능력, 법률의합목적성등품질에대한평가에노력하고있습니다. the300 의형식으로는인터넷사이트 the300.kr 과모바일 m.the300.kr 를터전으로 53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뉴스와함께관련정보를시각화하는데초점을맞추고출발했습니다. 의원정보와입법 진행과정등도모두데이터베이스를직접만들었습니다. 특히매일한가지이슈를깊게파고드는 런치리포트 를만들어이메일로발송하고, 국회관계자, 기업담당자등에게문자서비스도같이하고있습니다. 런치리포트를비롯한시리즈기획기사들을매일생산하는것은고된일이지만, 국회에서자칫휩쓸려버리기쉬운경마식보도를지양하고중심을잡는데필요합니다. 54

토론문 55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물론새로운미디어의새수익원발굴, 유통망확대등은여전히고민입니다. 새로운시작을제대로이어나가기위해서는또다양한시도들이필요한시점입니다. the300 의이야기를장황하게펼쳤습니다. 한국언론계에서보다다양한분야에서깊이있되새로운형식의미디어를시도하는것만이언론의총체적위기를하나씩타개해갈길이라고생각합니다. 56

토론문 2016 년한국에서 독립언론 은생존가능한가? 전홍기혜프레시안편집국장 지난해아카데미작품상을받은영화 < 스포트라이트 > 는미국 5대일간지중하나인 < 보스턴글로브 > 의 2002 년 ' 사제성추행 ' 보도를다룬영화다. 보스턴글로브탐사보도팀인 ' 스포트라이트 ' 팀은한유명신부의아동성추행사건을계기로취재와보도를시작해수십명의사제가아동들을성추행했으며, 이를은폐해왔다는사실을밝혀냈다. 이보도는 2003 년퓰리처상을받았고, " 워터게이트이후최고의보도 " 라는평가를받았다. 당시에도크게주목받았던이보도는 2015 년영화화되면서재평가받고있다. 한국의대중문화에서그려지는기자, 언론의모습은이와는상반된다. 2015 년대중들에게각인된 ' 기자 ' 의이미지는영화 < 내부자들 > 의 ' 조국일보 ' 이강희논설위원의모습이다. 이영화에서기자는정경유착의연결고리, 로비스트이면서동시에자신과스폰서들의이해관계를위해지면을사유화하는모습으로그려진다. 언론은정치권력, 경제권력의이해관계를대변하며이들과함께사회의부정부패를만드는 ' 거악 ' 이다. 2014 년세월호참사때얻은 ' 기레기 ' 라는오명과함께기자, 언론에대한이미지는부정적이기만하다. 최근이런사회적인식을보여주는 ' 웃픈 ' 기사가보도되기도했다. (" 기자라고얘기하자소개팅에도나오지않더라 ", 기자협회보, 2016.3.15) " 장가가고싶어도소개팅이뚝끊겼어요." " 기자란말듣고달라지는표정을보면불편하죠."... 한일간지사회부 6년차 A기자는 " 서로사진을보고소개팅을받기로돼있었는데기자란직업을듣고갑자기나오지않는다고한여성이있었다 " 며 " 친구한테물어봤더니영화보고지레겁을먹은것같다고들었다. 영화가곧현실은아닌데선입견이란게무섭구나싶었다 " 고했다. 기사내용을좀더인용해보자면 ' 박봉. 위험한직업 ' 선입견에영화속부정적이미지덧칠... 배우자감으로부담스러워해... 결혼정보회사등급도하위권... 잦은술자리에불규칙한업무... 가정에충실할수있을까우려... 입사 5년차이하주니어기자들바쁜취재에데이트취소빈번등얘기가나온다. 기자들의열악한노동조건과부정적이미지때문에연애나결혼을하기힘들다는내용이었다. 57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한국과미국의이런상반된언론과기자에대한인식은현실의반영이기도하다. 물론미국도 2015 년퓰리처상의수상자가월세도제대로못내는박봉때문에언론계를떠나 ' 전직기자 ' 신분으로상을받게되는일이발생하기도한다. 하지만복스 (vox), 쿼츠 (Quartz), 버즈피드 (Buzzfeed) 등주목할만한신생매체의등장, 뉴욕타임스, 가디언등기존매체의디지털혁신등변화가새로운시장과수요를창출하고있다. 기술의발전과독자들의수요변화에따라언론산업이 ' 레드오션 ' 이자 ' 블루오션 ' 이된상황은한국과미국동일하다. 하지만기술과자본의결합양상과정도에따라 ' 레드 ' ( 절망 ) 와 ' 블루 '( 희망 ) 의크기는확연한차이를보일수밖에없다. 한국과미국의언론환경의차이, 15년전창간한 < 프레시안 > 의경험등을토대로 2016 년한국사회에서언론이 ' 블루오션 ' 이자 ' 더나은미래 ' 를만들기위한도구가되기위한조건들을따져보고자한다. 1. 언론시장의변화 : 2001 년 < 프레시안 > 의창간당시상황 ( 시장의확장 ) 2009 년종합 편성채널의탄생 ( 경쟁의격화와시장의포화 ) - 오마이뉴스, 프레시안등종합지성격의인터넷매체가창간한시기는 2000 년, 2001 년이었다. 당시 IT산업의빠른성장과벤처기업창업붐에맞물려다수인터넷매체가창간, 기존매체와차별되는새로운형식의보도에기반한새로운매체를선보였다. 인터넷이라는새로운플랫폼에기반한광고시장이열리면서신생매체가자리잡을수있었다. - 네이버, 다음등포털의빠른성장도인터넷매체의성장과독자들의뉴스소비변화에지대한영향을끼쳤다. - 2009 년이명박정부에서통과된미디어법에기반해종합편성채널이탄생했다. 종편은일차적으로방송뿐아니라언론시장전체에큰영향을끼쳤다. 언론시장내경쟁을크게격화시켰고, 이로인해광고시장이일부대기업에크게의존하고있는상황에서광고주와매체관계의역전을추동했다. - 경쟁의부작용 1) 언론공공성의약화사회적, 정치적갈등이증대되면서언론의정치적편향성이커지고있다. 언론운동을통해확보한언론의정치적독립성이정치권력의이해관계와매체간경쟁이치열해지면서훼손되고있는상황이다. 또독자들도자신이지지하는정치 58

토론문 세력에대한보도의방향성을좌지우지하려는경향도커졌다. 이런과정에서무책임한보도도늘어나고있다. 대표적인사례가박원순서울시장의아들병역비리의혹보도라고할수있다. 2) 시장자체가포화상태이므로미국과달리새로운시도에기반한신생언론이자리잡기어렵다. 특히종편을통해새롭게방송에진출한주체가조선, 중앙, 동아등기존신문사라는점에서오히려기득권이강화된측면이크다. 언론산업의자체적인혁신과정화작용이제대로일어나기힘들어졌다고할수있다. - 기술발전의양면 : 포털사이트, SNS 의등장과활성화가언론에는긍정적인영향과부정적인영향을끼치고있다. 긍정적인측면은 ( 기사 ) 콘텐츠유통을활성화하는새로운플랫폼으로기능하고있다는점이다. 반면유통망자체를자신들의영역안에가두면서유통업체가생산업체를잡아먹는상황이발생한다는점에서부정적인영향을끼치고있다. 포털과언론간의수익배분의문제뿐아니라매체가 ' 브랜드가치 ' ( 신뢰 ) 가커지면서얻을수있는실질적인수익을가로막는문제도발생하고있다. 2. 독자의변화 : 뉴스소비행태의변화, ' 독자 ' 라는정체성의변화 - 수동적독자에서능동적소비자로 : 뉴스소비의목적이정보획득이라는단편적인목적이외에공감, 재미등다변화되고있다. 뉴스소비자체가자신의정체성을확인하는행위로인식되고있다. 인터넷을통한뉴스소비를통해가능해진일이다. - 또포털, SNS 를통한뉴스소비는 ' 기사 ' 가단절적으로유통, 소비되도록만들고있다. 그러다보니다른콘텐츠와기사의경계가희미해지고편집자의역할도무의미해지고있다. 특히 SNS 를통한뉴스유통은 ' 친구 ' 가곧편집자가되고있는상황인셈이다. 그러다보니내가읽고싶은뉴스만읽고, 내가읽고싶은방식으로읽는경향성이커지 고있다. 정보의공익성, 신뢰도라는측면보다정보의호감도가중요해지고있다. 기자들 사이에서농담으로 ' 고양이와경쟁해야한다 ' 는자조까지나온다. 59

독립신문창간 120 주년 - 언론의사명과역할을돌아보다 3. 열악해지는현실의타개책은? -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뉴스타파등일부언론이자구책으로 ' 후원자 ' 에기반한수익모델을만들었다. 현재 ' 후원자모델 ' 자체는비교적안정적으로정착했으나, 개별매체가후원을통해지속가능한수익을낸다고보기는어렵다. - 경쟁의격화, 소비재로서의언론인식이증가할수록 독립언론 의창간과지속가능한재생산은실현불가능한목표가될수밖에없다. - 원점으로돌아와언론의공공성확보가결국가장중요한문제라고할수있다. ' 공공재 ' 로서의언론의역할을기대한다면공공의영역에서이를확보해주는것이매우중요하다. 60

토론문 이시대의진정한언론은누구인가? 김여라국회입법조사처입법조사관 1. 들어가며 언론의위기, 특히신문의위기라는말이너무나자연스러운요즘이다. 이러한위기는산업적인측면보다는언론에대한국민의신뢰가무너진데에서오는것이더욱크다. 시대를망라하고언론은어떠한방식으로든여러가지내적ㆍ외적압력을받고이겨내면서세월을버텨왔다. 그렇지만신문을읽는독자의신뢰, 더나아가서는언론에대한국민의신뢰가없어진데에서오는위기는쉽게극복할수있는문제는아니다. 지난 3월 26일영국의일간지인인디펜던트 (The INDEPENDENT) 는 인쇄를멈추다 (STOP PRESS) 라는붉은색제목으로 1면을장식한마지막종이신문을발행하였다. 1986 년창간되어 30년동안이어온종이신문의발행을중단하고온라인서비스만제공하기로한것이다. 종이신문의발행중지와온라인뉴스로의전환은현재의뉴스미디어환경을그대로보여주고있다. 사진출처 : 김희원, [ 편집국에서 ] 종이신문이사라진다면, 한국일보, 2016 년 3 월 29 일자, ( 최근검색일 : 2016. 3. 30) <http://www.hankookilbo.com/v/394a4714ab974756a46adfc990281944>.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