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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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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목차


사립대학의발전과사립학교법개정 한국대학교육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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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0의시정에서더민주당후보를선택한유권자중에서 80% 는실제로더민주당후보에게투표하였고, 11% 만이지지후보를바꾸어국민의당후보에게투표하였다. 반면국민의당후보를지지할의향이있었던유권자중에서는 63% 가국민의당후보에게투표하고 22% 는더민주당후보에게투표한것으로집계되었다.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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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나로 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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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학부모신문225호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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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적관점에서개발주의비판하기 사회양극화와개발주의 Ÿ Ÿ 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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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개요

제 53 회서울특별시과학전람회 예선대회작품설명서 본선대회작품설명서 쓰나미의피해를최소화시키는건물과 건물배치에대한탐구 출품번호 S-504 출품분야학생부출품부문지구과학 학교명학년 ( 직위 ) 성명

[ 조사개요 ] 구분 내용 모집단 전국에거주하는만 19 세이상성인남녀 표집틀 유무선전화 RDD 표집방법 지역별, 성별, 연령별기준비례할당추출 표본크기 2,000 명 ( 유선 551 명 (27.55%), 무선 1,449 명 (72.45%)) 표본오차 무작위추출을전제할경우



권고안 : 을 권고한다. 의안 분석 : 회사는 2011년부터 작년까지 4년 연속 순손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회사는 전년과 마찬가지로 배당금을 지급하지 않을 예정이다. 재무제표 작성과 이익잉여금의 처분에 특별한 문제점이 보이지 아니하므로 의안에 대해 을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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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지-교회에관한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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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8 부정선거규탄투쟁과 3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과정 이기훈 목차 1. 6.8 부정선거규탄투쟁의전개 1) 1967년의정치상황과 6.8 부정선거 2) 야당의 6 8부정선거규탄 3) 학원의부정선거규탄투쟁 2. 1969년삼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 1) 1968~1969년의정치상황과박정희정권의삼선개헌 2) 야당과재야의삼선개헌반대투쟁 (1) 1969년전반기야당과재야의삼선개헌반대 (2)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의결성과활동 3) 학생들의삼선개헌반대투쟁 3. 1960년대말민주화운동의특성 < 참고문헌 >

6 8 부정선거규탄투쟁과 3 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과정 171 1. 6.8 부정선거규탄투쟁의전개 1) 1967 년의정치상황과 6.8 부정선거 1965년격렬한반대를무릅쓰고한일수교와청구권문제를마무리한박정희정권은장기집권을위한준비를착착진행하고있었다. 1960년대중반공화당내부에서김종필계의주류와비주류가격렬한주도권다툼을벌였지만, 1965년이후당총재인박정희가주도하는일사분란한체제를구축하고있었다. 물론이것은정당으로서공화당의생명력을약화시키는것이었지만, 군사적효율성을중시했던박정희의입장에서본다면오히려바람직한일이었다. 박정희정권의순항은한편으로는당시야당의분열과무기력덕분이기도했다. 한일협정이비준당시민중당온건파가원내복귀를선언하자강경파들은여기에반발, 집단탈당하여 1966년 3월신한당을창당했다. 이렇게생긴야당의분열은, 1966년이다가고 1967년대통령과국회의원선거가다가오는와중에도여전했다. 1) 민중당과신한당두야당내부에도각각주류와비주류사이에대립이심각했고, 좀더자세히들여다보면또그안에도몇개의파벌들이나뉘어져있는상황이었다. 2) 과거의혁신세력들을중심으로서민호가사회민주당 ( 이후대중당 ) 을창당하였지만, 창당발기인대회의결의문이문제가되어당직자들이구속되는등정권의탄압으로제대로활동조차할수없었다. 그러나 1966년 12월부터민중당과신한당의통합논의가급진전되었다. 양당의비주류인사들을중심으로 < 야당대통령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 > 가결성되었다. 이미민중당은유진오, 신한당은윤보선을대통령후보로선출한상황이었지만민중당이신한당에통합을제의하였고교섭이시작되었다. 이교섭은곧결렬되었지만곧바로 1) 심지연, 2004, 한국정당정치사. 백산서당, 194 쪽 2) < 당리만앞세운야당단일화운동 >, 신동아 1967. 2. 163~164 쪽

172 2007 년현장민주화운동연구종합보고서 1967년 1월 26일윤보선, 유진오, 백낙준, 이범석의당시야권의영수 4사람이회담을가졌고이자리에서통합의큰그림이그려졌다. 이로부터 2주일이지나지않은 1967년 2월 7일민중당과신한당은신민당으로정식통합하였고정권교체의수임정당을자처했다. 통합야당신민당의대통령후보는윤보선이, 당수는유진오가맡았다. 그리고이과정에서재야세력이큰역할을했는데, 이때재야란이범석의族靑계와일부교회세력들이었다. 3) 신민당은창당대회결의문에서 1 우리는다음선거에서기필정권교체를성취시켜민주정치를재건하고민생을도탄에서구한다. 2 우리의승리와목적달성을위해철석같이단결하고봉사에의신념과불굴의용기로써투쟁한다. 3 만일부정선거의경우거기서오는불행한사태발생의모든책임은박정권이져야함을사전에경고한다. 고하였다. 이미이때부터정부여당이획책하는부정선거의조짐이역력했던것이다. 통합야당신민당은 1967년의대통령선거와총선거를치러야했다. 6대대통령선거는 1967년 5월 3일실시되었는데, 대중당후보인서민호가 4월 28일후보직을사퇴하여박정희와윤보선두후보의대결로압축되었다. 야당후보가단일화되기는했지만, 대통령선거에임하는신민당의당조직은그다지효율적으로움직이지못했다. 6대대통령선거에서는 116만표차이로박정희가승리했다. 1967년 5월대통령선거에서박정희의승리가확정되면서정부와여당은한달뒤인총선승리를위해총력을다했다. 공화당은 박대통령일하도록밀어주자공화당 이라는구호를내세웠다. 신민당은대선과달리국회의원총선거에서는야당의단일화효과가적지않을것으로기대했다. 공화당당의장김종필조차도야당이 4개 3) < 통합야당신민당의출범 >, 신동아 1967. 3. 164 쪽

6 8 부정선거규탄투쟁과 3 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과정 173 로분열되어있었던 63년총선거에비해의석이 10여석줄어든 100석정도를예상하고있을정도였다. 4) 그러나박정희정권핵심부는 7대총선을당시 3공화국헌법이규정한대통령의삼선금지조항을철폐하고본격적인장기집권, 영구집권을도모할기회로보았다. 중앙정보부와내무부가직접막대한자금과공무원을동원한선거대책을마련했고, 선거직전국무회의에서대통령과국무총리등국무위원이선거운동을할수있도록선거법시행령을개정하기도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이개정안이공무원의정치적중립을규정한헌법위반이므로부당하다고해석하였지만, 대통령은당총재의자격으로선거유세가가능하다고판단했다. 이로써박정희는자유롭게공화당후보들에대한지원유세를시작했고각지역의개발공약을남발했다. 금권이나관권이동원된부정선거조짐은이미 1966년부터도처에서나타나고있었다. 공화당의선거조직인계나친목회가여는관광행사가 1년전부터계속되었고, 선거전이본격적으로시작하자막걸리선거가노골화되었다. 공화당의연락사무소에는막걸리통과소주병이항상놓여있어누구든지마시도록했다. 경찰서장과군수, 구청장이직접선거운동에참여하여동장과경찰들에게현금과쌀, 밀가루를나눠주며살포하도록독려했다. 5) 500~1,000원의현금이든돈봉투를공공연하게유권자들에게돌리는일이비일비재했다. 6) 1967년 6월 8일선거당일과개표일, 금권 관권 폭력선거는극에달했다. 관권선거가극에달하다보니군수나경찰서장은말할것도없고, 심지어는선거관리위원장이부정선거에나서는경우까지있었다. 막걸리선거니고무신선거니하는정도는어디서나볼수있는현상이라서특별히내세울수조차없을지경이었다. 여수나벌교에서는유권자들이단체로공화당운동원이나공무원들에게여당후보를찍은투표용지를보인다음투표함에넣도록공개투표를하다발각되었고, 개표과정에서야당후보를찍은투표용지를무효표로 4) 심지연, 2004, 위의책, 199 쪽 5) 김영삼, 1967, <1 억이넘는공화당자금 >, 신동아 1967. 7. 70 쪽김옥선, 1967, < 투표소구역에는주점, 깡패 >, 신동아 1967. 7. 71 쪽 6) 김형일, 1967, < 불태워없앤유효표 >, 신동아 1967. 7. 75 쪽

174 2007 년현장민주화운동연구종합보고서 만든피아노표니빈대표니하는것들이무더기로나왔다. 괴한이투표소에난입해야당참관인을강제로밀어내고미리기표를해놓은투표용지를투표함에무더기로쏟아넣기도했다. 부정선거에강력히항의하던야당참관인들이공화당원들에게손찌검을당하고쫓겨나는바람에여당참관인들만참석한가운데개표가진행되기도했다. 경찰들은구경만하고있었다. 7) 이런선거결과공화당이 129석, 신민당 45석, 대중당 1석이라는결과가나왔다. 공화당이전체의석의 74% 를장악하였고, 개헌에필요한의석을 13석초과하게되었다. 부정선거의심각성은선거소송의규모에서도드러난다. 7대총선이후전국 131 개선거구에서모두 266건의선거소송이제기되었다. 1963년 6대총선당시선거소송이 38건이었던것에비하면 7배에달하는규모였으니 8), 박정희정권이 2/3선확보를위해온갖무리수를두었음을알수있다. 이에따라공화당의지도부조차앞으로정국운영을걱정할지경이었다. 2) 야당의 6 8 부정선거규탄 선거다음날 1967년 6월 9일신민당은 6 8선거를 3 15보다더한사상최악의부정선거로규정하고이는민주주의의장송을예고하는것이라며범국민규탄대회등모든수단을동원하여강력히투쟁하기로결정하였다. 9) 6월 9일오전청주, 순천, 곡성, 남원, 안동, 상주, 무안등지방각지에서는수십명내지수백명의신민당원과지지자들이부정선거에항의하는시위와행진을벌이기시작했다. 10) 전라남도보성에서는신민당원들의시위에보성중고등학교학생천여명이참가하기도했다. 11) 7) < 탈선으로얼룩진 6 8 총선 >, < 여수 벌교선공개투표 >, < 신민단참관인을축출 >, < 투표통지표매매 >, 동아일보 1967. 6.8 (7) : < 난장판 >, < 투표소에괴한난입 >, < 환표 >, < 무더기투표 >, 1967. 6. 9 (3) ; < 신민표에인주묻혀무효화 >, 동아일보 1967. 6. 10(7) 8) < 헌정초유의일당국회개원 >, 신동아 1967. 8. 194 쪽 9) < 사상최악의부정선거 >, 동아일보 1967. 6. 9 (1) 10) < 부정규탄데모 >, 동아일보 1967. 6. 9(3) ; < 백여신민당원데모 >, 동아일보 1967. 6. 10(7)

6 8 부정선거규탄투쟁과 3 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과정 175 선거일다음날자연발생적인시위는잦아들었지만학생들이주도하는부정선거규탄대회와시위가일어나면서신민당도규탄투쟁을강화했다. 6월 13일중앙당에서유진오당수와당선자 44명을포함한 100여명의당원들이 부정선거다시하라 는구호를외치며관훈동의신민당사에서광화문중앙청까지시위를벌이다. 경찰기동대에해산되었고 12), 광주 충무 보성 영천 장흥 대구 울산 양평등각지에서신민당원들이민주주의의상여를메고시위를벌이는등부정선거에항의했다. 13) 6월 14일신민당은 6 8 선거무효화투쟁위원회 를구성하여전면재선거를요구하고나섰다. 14) 6월 16일신민당의투위는국민대회와병행하여전국에부정선거조사단을파견했다. 6월 14~15일을전후하여고교생들이시위대열에합류하는등저항이격렬해지자공화당은말썽많은 6개지역의당선자를제명하고박정희대통령도부정선거를개탄하지만냉정을찾아서법의권위를믿어야한다는담화를발표하기에이르렀다. 15) 신민당은 6월 19일당사에서규탄대회를강행하고 6 8총선의무효화를주장했다. 이날집회에는유진오당수, 윤보선, 장준하, 함석헌, 김대중등이연설하였고결의문을발표한뒤가두행진에나섰는데경찰이저지하자격렬한시위가벌어지기도했다. 16) 또당선자들이등원을거부하여 7대국회자체를인정하지않겠다는의사를보였다. 정부와공화당은일단단독국회를개원하기는했으나야당과협상을시작했다. 그리하여대통령이유감을표명하고당차원의선거부정조사특별위원회를구성하겠다고하였다. 결국신민당이공화당과협상을진행하면서부정선거규탄은흐지부지끝나고말았다. 1967년 11월 29일신민당소속의원들은등원하여의원선서를마쳤다. 11) < 천여중고생데모 >, 동아일보 1967. 6. 10 (7) 12) < 신민재선거절규 >, 동아일보 1967. 6. 13 (7) 13) < 지방곳곳에서도 >, 동아일보 1967. 6. 13(7) 14) < 오늘투위를구성 >, 동아일보 1967. 6. 14(1) 15) 동아일보 1967. 6. 16(1) 16) < 신민, 규탄대회강행 >, 동아일보 1967. 6. 20(1) ; < 힘에꺾인부정규탄 >, 동아일보 1967. 6. 20(7)

176 2007 년현장민주화운동연구종합보고서 3) 학원의부정선거규탄투쟁 신민당도부정선거규탄에참가했지만 6 8부정선거규탄투쟁에서중심이되었던것은역시학생운동이었다. 2년뒤삼선개헌반대투쟁에서도그랬지만 67년의 6 8 부정선거규탄투쟁에서도학생들은재야나정치권과특별한연계없이반독재운동을전개하였고, 실제부정선거에대한가장강력한저항이었다. 6 8선거가총체적인부정이라는것을피부로느끼고있었던학생들은 허약한후진국의민중을대변할사명감이있고타협을배제한순수한정의감의발로에서민중의힘을과시하는시위 17) 를벌여야한다고생각했다. 6 8 부정선거에대한첫반응은학내의소규모성토대회였다. 먼저선거다음날인 1967년 6월 9일오후 4시연세대서클 < 한국문제연구회 ( 한문연 )> 가중심이되어광복관 107호실에서성토대회를개최하고 < 온갖부정으로이루어진 6 8총선은무효 > 라고주장했다. 이들은 국민에게고함 이라는선언문을발표하여민권의수호를외치며 6 8 총선을암흑과폭력, 금력으로치러민주주의를타락시킨정부는총책임을져야한다 고하였다. 또더불어부정선거에서당선된입후보자들에게사퇴할것을요구했다. 18) 학교당국에의해 5분정도후해산되기는했으나, 학생운동진영최초의대응이었다. 학생운동진영은 6월 12일경부터본격적인집회와시위로부정선거를규탄하기시작했다. 1967년 6월 12일오전 10시 30분서울대법대생들 500여명은합동강의실에모여긴급학생총회를열었다. 이들은 6 8선거가 우발적, 국부적이아닌전반적 조직적 계획적 지능적부정선거 라고규정하고선언문을낭독했다. 선언문에서이들은 공무원을사병화하고국민을매수, 사기, 협박, 기만함으로써이루어진 17) < 대학악순환의종점은?> 대학신문 1967. 8. 28(3) 좌담회가운데조영래 ( 당시법대 3 학년 ) 의발언. 서울대대학신문사는 67 년 2 학기개강이후교수학생이참여하는좌담회를열었는데이때문리대에서는장영국 ( 사회학과 3 학년 ), 법대에서는조영래가학생대표로참여했다. 18) <9 일부정선거규탄 >, 연세춘추 1967. 6. 12 (1) <6.8 총선규탄 2 백여연세대생 >, 동아일보 1967. 6,. 10(7) 동아일보 에는연세대정치학회학생이라고되어있으나 연세춘추 의기사가더정확하다.

6 8 부정선거규탄투쟁과 3 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과정 177 6 8선거는금력, 탈각, 사기, 폭력, 부정, 관권선거로서빛나는 4.19 정신의모독 이며 정부와여당은 6 8선거가부정선거였음을자인하고국민적재심판을받고즉각사퇴하라 고요구했다. 이들은이결의가관철되지않으면스스로이를관철시키기위해끝까지투쟁할것을결의했다. 학생총회를마치고 12시 20분본격적인거리시위에나선이들은 부정선거다시하라, 7대국회무표다, 민주주의사수하라 등의구호를외치고애국가와 3.1절노래를부르며행진했다. 이화동입구에서경찰에의해저지된이들은우회하여명륜동입구에서경찰과충돌하여 165명이연행되었다. 더이상진출이좌절되자서울법대학생들은다시학교로돌아와항의농성을벌였고연행학생들이석방되자일단농성을풀었다. 19) 또경북대법정대생 30 여명도 6월 12일낮 12시 50분부정선거성토대회를개최했다. 20) 대학당국은학생시위가확산되자무조건임시휴업으로학교문부터닫으려하였다. 서울대학은법대생들의대규모시위직후인 6월 12일오후 4시긴급학장회의를열고 부정에항의하는젊은이들의심정은이해하나학원의질서를보호하고제자들의희생을막기위해 6월 13일부터 17일까지임시휴업을한다고발표했다. 21) 그러나 13일부터시위는대학가에급속히확산되었다. 서울대학생들은학교당국이임시휴업을선언했음에도불구하고 6월 13일부터더격렬한부정선거규탄투쟁을벌였다. 6월 13일 9시휴교조치로학교입구가봉쇄된문리대정문에 300여명의학생이모여학교의휴교조치에항의하기시작하였고, 이들중 50여명이맞은편의대정문에서항의농성을벌였다. 경찰이강제로농성을해산시키자이들은법대구내로진입하여법대생들과합류하였다. 이렇게합류한 200여명의문리대, 법대학생들은곧바로 6 8선거성토대회를열었다. 이자리에서문리대학생회이름으로 <6.8부정선거를통탄한다 > 는제목의성명서가발표되었는데그내용은다음과같다. 19) < 서울법대생들데모 >, 동아일보 1967. 6. 12 (7) < 정치열풍에휩쓸린학원 >, 대학신문 1967. 8. 7 (3) 20) < 경북대법정대생도성토대회열어 >, 동아일보 1967. 6. 12(3) 21) < 서울대 11 개단과대휴업령 >, 동아일보 1967. 6. 13(7)

178 2007 년현장민주화운동연구종합보고서 6.8 부정선거를통탄한다 서울대학교문리대학생회 한국의민주주의여! 너의험난한투쟁의역사는이제는한갓금권과관권의노리개로전락하고말았는가! 막걸리통속에허우적거리는신성한국민의주권, 부정과타락으로일관된정치인의양심이엄청나게도오욕된조국의현실은또다시우리의젊은피로써씻겨져야하는가! 3.15부정선거의끔찍한말로가먼옛날의이야기는아니며, 자유와정의를절규하고쓰러져간 4.19의기수들이쟁취해놓은민주주의의승리도우리는기억하고있다. 그러나오늘민주주의의첩경인공명선거의깃발은권력욕과탐익된반민주지2단의횡포앞에무참히도꺾이었다. 공짜막걸리로비틀거리는주권의식이민족정기의쇄신인가? 유령투표까지동원해야만대중정당이될수있다는것인가? 막대한선거자금을뿌려서국민소득을높이자는것인가? 근대화의신앙이란새로운종교는어디로가버렸는가? 우리의이성도너의그방종한만행을더이상용서할수없도다. 방대한조직과금력으로무장된부정선거주구들을우리는민족의이름으로서슴지않고단두대에올리노라. 여지없이유린당한민주선거의참상을통곡하며정의의힘을조롱하는폭력배의검은심장에우리는차디찬지성의창을던지노라. 친구여! 동포여! 질식하려는한국의민주주의가그대들을부르는소리가들리지않는가? 오너라, 가자. 민주주의확립을위한순교의길로! 1967년 6월 13일 서울대문리대생들과법대생들은함께 < 서울대민주수호투쟁위원회 ( 위원장이현배, 사학과 64)> 를결성하였다. 서울대민주수호투쟁위원회는총학생회가기능을발휘할때까지투쟁의중심이될것이라고선언했으며실제로이후 6 8부정선거규탄투쟁에서중요한역할을수행했다. 오전 11시학교밖으로진출을시도하여경찰과충돌한이들은돌아와서문리대교정에서농성에돌입했다. 서울상대생 250여명도 13일오전 10시휴교령으로교문이닫힌가운데도담을넘어강당에집결하여 6 8부정선거성토대회를열고 1 6 8부정선거에관련된선

6 8 부정선거규탄투쟁과 3 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과정 179 거사범을철저히색출 처단하며 2 학원의정상수업을계속토록보장하라 3 재선거를실시하라 고결의했다. 서울공대생들도 6월 13일오전 9시부터 500여명이참가한가운데기숙사광장에서성토대회를열었으며사대생들도오전 10시부터 200 여명이참가한가운데국민의이름으로타락선거의발본색원을위해투쟁할것을선언하였다. 또이들은정부여당에게부정타락선거를국민에게사죄하며선거를무효화하며책임자를처단할것을요구했다. 서울대농대생 700여명도오전 10시부터강당에서성토대회를열고부정선거를전국적으로무효화하고부정선거관련자들을색출하여엄벌할것을요구했다. 22) 또서울대미대에서도부정선거를규탄하는성토대회가개최되었다. 고려대에서는민권수호투쟁위원회가중심이되어 3,000여명의학생이참가한가운데 6월 13일오전 11시부정선거규탄대회가열렸다. 6 8선거는완전무효 등의구호가스피커를통해흘러나오는가운데교내곳곳에는 사상최악의 6.8부정총선이우리로하여금 4.18을상기케한다 는내용의격문이나붙은가운데 < 弔民主主義 > 라고쓰여진흉장을달고집결한고려대생들은민권수호투쟁위원회를결성하였다. 23) 부정불법선거의표본인 6 8선거의죄악상을규탄하고민권을수호 할것을결의하였다. 고려대민권수호투쟁위원회는선언문에서 공포, 폭력, 금력, 대리공개, 탄압, 기만, 난동등부정선거의기념비가될 6 8 선거를통한압제의사슬이국민대중의신성한기본권마저포박하는차제에우리들민권수호투쟁의대열에포열한진정한민주세력은반민주세력과의선전포고를발하며이대열의전우들은부정선거의원흉이쓰러지고박멸되는순간까지전진을계속할것이다. 우리는빈사지경에서고열을앓고있는조국의민주주의를회생시키고사장내지구타당한민권을되찾고자부정 불법선거의표본인 6 8선거의죄악상을규탄하며자유와정의의종을난타하면서독재정권의압제에대해무제한의장기투쟁을전개할것을엄숙히선언한다 고하였다. 성토대회를마친학생들은가두시위를벌일것을결의하고 22) < 부정선거규탄데모 >, 동아일보 1967. 6. 13(7) 23) < 부정선거규탄데모 >, 동아일보 1967. 6. 13 (7) 윤준하의증언에의하면 64 학번의고광철, 정성원, 윤무한세사람이주도하였고정성원이위원장을맡았다고한다.

180 2007 년현장민주화운동연구종합보고서 <3.1절노래 >, < 구교가 > 를부르며교문으로진출하였고안암동로터리에서경찰과충돌하여투석전을벌이다일단학교로돌아왔다. 이들은강당에다시모여또다시규탄대회를열고오후 1시 25분경다시 부정선거가근대화냐 등의플랭카드를앞세우고학교밖으로진출, 경찰과충돌하였고일부학생들은동대문-청계천-시청앞까지시위를벌이기도했다. 이날시위로 300여명의고대생들이경찰에연행되었고 3명은곤봉과최루탄에부상당해입원하기도했다. 24) 연세대학생들은 13일정오채플을끝낸다음 2,000여명이참가한부정선거규탄대회를열었으며이후 500여명이 막걸리선거왠말이냐 등의구호를외치며신촌으로진출하여시위를벌였다. 성균관대학생 300여명도오전 11시 30분부정선거의무효화와선거책임자단죄를요구하는성토대회를열었다. 이들은오후에서울대문리대 법대생들과가두에서합류하여연좌시위를벌이기도했다. 건국대학생들은오전 10시본부앞에서성토대회를열었고경희대생도 1천여명이참가한부정선거규탄성토대회를열었다. 25) 6월 13일부터고교생들의시위가시작되었다. 13일오전서울대광고교학생 1천여명이 4.19는죽었는가 라는플랭카드를내걸고시위를벌였고보성중고생 600여명도교문을나서시위를벌였다. 26) 고교생들의시위는대학생들만큼조직적이거나지속적이지는않았지만반독재운동의확산에는크게기여했다. 13일시작된고교생의시위는계속확산되어 16일정점에이르게된다. 휴교조치가확산되었어도시위는계속되었다. 6월 14일오전 9시 30분동국대생 1500여명이 6 8부정선거성토대회를개최하여총선무효화와즉각재선거를촉구한다음시위를벌이다경찰과충돌했으며, 경희대생 1,000여명도 14일오전 10시성토대회를연다음스크럼을짜고회기동로터리방면으로진출을시도했다. 한편이들이고대정문에이르자성토대회를열고있던고려대생 600명이합류하여경찰과격렬한투석전을벌였다. 27) 고려대생들은오후 2시 30분당시국립극장앞에서재 24) < 부정선거를규탄 >, 고대신문 1967. 6. 24(3) 25) < 부정선거규탄데모 >, 동아일보 1967. 6. 13(7) 26) < 천명고교생도성토 >, < 중고생 5 백명도 >, 동아일보 1967. 6. 13 (7) 27) < 부정선거규탄데모 >, 동아일보 1967. 6. 14(3)

6 8 부정선거규탄투쟁과 3 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과정 181 집결하였다. 이들은 부정선거다시하라 등의구호를외치며공화당사까지진출하였으나경찰에의해연행해산되었다. 학교로돌아온고려대학생들은오후 7시부터학교강당에서단식농성에들어갔다. 이들은 6월 15일오후 7시 <6 8선거화형식 > 을거행한다음농성을끝내고해산했다. 28) 연대생 2,000여명이오전 11시 40분스크럼을짜고구호를외치며이대입구까지진출하다경찰이최루탄을발사하고곤봉으로구타하여해산시켰으며이와중에 5 명의학생이부상하고 220명이연행되었다. 그외한양대생 1,700여명, 중앙대생 1,500여명, 부산대생 2,800여명도성토대회를열고가두시위를벌였다. 29) 서울대에서는문리대교정에서농성을진행중이던문리대, 법대, 상대생 300여명이 6월 13일밤 < 망국투표함소각식 > 을열고민주주의의교두보인선거의공명성을사수할것을호소했다. 30) 이들은이튿날 6월 14일하루종일간헐적으로시위를벌이면서전국학생 국민 각정당에게보내는호소문과선언문을낭독하였다. 학생들의농성과시위가계속되면서서울대문리대와법대를관할하던동대문경찰서가농성학생들을전원연행할것이라는정보가입수되었고, 학교당국은최문환총장을비롯한교수들이직접학생들에게해산을종용했다. 학생들이응하지않자교직원들이학생을한사람씩직접끌고나가대기중인버스에태워귀가시키기에이르렀다. 31) 6월 14일고교생시위도점점확대되었다. 서울시내에서만성남고, 중앙고, 보성고, 중동고, 서울공고학생들이교정에서부정선거규탄대회를열었고이후학교별로수백명의학생들이가두로진출하여시위를벌였다. 32) 부정선거규탄투쟁이격렬해지면서휴교도확산되었다. 6월 13일고려대와건국대, 성균관대가무기한휴업에들어간데이어 14일오전에는경희대, 동국대, 연세대가무기한휴업, 중앙대 한양대는 11일간, 단국대는 4일간휴업에들어갔다. 33) 28) < 부정선거를규탄 >, 고대신문 1967. 6. 24(3) 29) < 부정선거규탄데모 >, 동아일보 1967. 6. 14(3) 30) < 교정서철야농성 >, 동아일보 1967. 6. 14(3) 31) < 정치열풍에휩쓸린학원 >, 대학신문 1967. 8. 7 (3) 32) < 고교생데모 >, 동아일보 1967. 6. 14(3) 33) <11 개대학교임시휴업 >, 동아일보 1967. 6. 14(3)

182 2007 년현장민주화운동연구종합보고서 15일에는우석대, 서강대, 홍익대, 국민대, 한국신학대, 명지대, 감리교신학대, 인하공대, 수도공대, 조선대가휴업에들어가게되면서 22개대학에휴업령이내려졌다. 서울대당국은 6월 17일까지예정되어있던휴교이후에도시위가완전히잦아들지않을것으로예상되자 6월 19일 당분간 휴교를결정했으며이어 7월 5일단과대학별로조기방학을실시했다. 34) 고교생시위가확산되자고등학교에도휴업령이내려졌다. 문홍주문교부장관은데모가일어나면중고교도휴업할것이라고밝혔고이미 6월 15일 17개중고교가휴업상태에있었다. 35) 시위가대학은물론이고고교로까지확산되자치안당국도강력한처벌을예고했다. 6월 15일치안국은학생시위참가자들을그경중에따라구속할방침을밝혔다. 36) 6월 15일휴교령이내린와중에도규탄투쟁은계속되었다. 연세대생 300여명, 광운전자공대와한국외국어대생 400여명, 가톨릭의대생 300여명, 홍익대생 50여명이가두시위를벌였고, 숙명여대는전교생이대강당에모인가운데부정선거성토대회를열었다. 이날고교생들의시위는훨씬격화되었다. 동성고, 배재고, 양정고, 용산고, 동대문상고, 서울상고, 삼선고교, 청송전기고, 경희고, 한성고, 단국고, 균명고, 중앙고, 대동상고, 용산고, 숭실고, 마포고, 청량리종고, 광운전자공고등 20여개교학생 1만여명이교내에서집회를열고시내로진출하여가두시위를벌였다. 일부는공화당사, 국회의사당, 중앙청부근까지진출하여경찰과투석전을벌이기까지했다. 37) 6월 16일휴교가지속되면서대학생들의시위는줄었지만고교생들의시위는여전했다. 이날경기고 휘문고 중앙고학생 1,000여명이연합해서시민회관앞까지

6 8 부정선거규탄투쟁과 3 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과정 183 약 6,000명의학생들이가두시위를벌였다. 한편휴교중이던서울대학생들도학생총회를위해문리대에모였으나경찰의저지로진입하지못하자이화동입구에서시위를벌이다서울대음대로들어가농성하기시작했다. 이들은경찰이학생의등교를봉쇄하는사태에분개하여부정선거무효화만이아니라학원자유화투쟁도벌여야겠다는의지를보이기도했다. 38) 이날서울신학대생 200여명도성토대회후가두로진출했고, 전국의 28개대학과 129개고교가휴업에들어감으로써정상적인학사일정이중단되다시피했다. 휴교중인가운데서도대학생들의농성이계속되었다. 연세대기독학생회원들이 15~17일간단식구국기도회를열었고한국외대생 150명도 15일밤부정선거화형식을가진뒤 16일까지농성했다. 연세대의대생 160여명은 15일부터 17일까지농성하면서 6 8선거의무효와휴교조치해제를요구했다. 이들은 17일오전 10시세브란스병원앞에서 6 8악성종양절제화형식 을거행하기도했다. 39) 6월 21일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건국대등 5개대학학생대표 10여명이모여 부정부패일소전국학생투쟁위원회 를결성하고부정선거에대한정부의대처를규탄하고적극적이고장기적인투쟁을벌이기로결의했다. 여기에는각대학의투쟁위원회대표들이참가하였는데, 서울대민주수호투위, 고려대민권수호투위, 연세대 6 8부정선거완전무효화투위, 성균관대주권쟁취투위, 건국대부정선거무효화투위등이었다. 이들은 6 8선거는망국적부정선거로, 일부지역적부정선거라는정부의주장은부정을자기합리화하는수단일뿐이라고규정했다. 따라서선거사범을엄단하는것은학생요구의일부이지전부가아니라강조하면서, 정부당국에대학의자유를탄압하지말것을요구했다. 40) 이들은각대학이그때까지산발적으로벌여온 6 8부정선거무효화투쟁을범대학범국민운동으로펼칠것이라천명했다. 곧이어 부정부패일소전국학생투쟁위원회 는각대학학생회장단과공동행동을취하는데합의하였다. 이합의는휴교가해제되어다시등교한 7월 3일서울시내의 38) < 규탄데모닷새 >, 동아일보 1967. 6. 16(3) 39) < 연세대단식사흘 >, 동아일보 1967. 6. 17 (7) 40) < 부정부패일소학생투위구성 >, 동아일보 1967. 6. 21 :< 부정선거를규탄 >, 고대신문 1967. 6. 24(3)

184 2007 년현장민주화운동연구종합보고서 거의모든대학들이공동명의의성명을내고함께시위를진행하는데원동력이되기도했다. 휴교령이내린가운데 6월 27일에는경희대생들이, 29일에는연세대생과중앙대생들이성토대회를열고시위를벌였으며, 6월 30일에는성균관대생들이시위를벌였다. 특히 6월 30일고려대에서 1500명이참가한가운데고려대민주수호투쟁위원회가주최한 6 8부정선거규탄및학원주권수회궐기대회 가열리기도했다 41). 7월 3일서울대등일부를제외한대부분의학교들이휴업을해제하고등교하였다. 그러나학생들은학기말시험일정을거부하고성토대회와시위에나섰다. 이날은부정부패일소전국대학생투위와각대학학생회장단이공동발표한 7 3선언문과결의안을내세우고시위가진행되었다. 42) 이 <7 3선언문 > 은휴교, 조기방학, 연행, 구속등어떤탄압에도투쟁은계속될것임을선언하고, 1 6 8부정선거당선자들은즉각총사퇴하고정부는전면재선거를위한구체적인방안을수립하고 2 학원을상업체나정치의사유물로착각하고있는문교부장관을인책축출할것을요구했다. 43) 이날고려대생 2천명, 연대생 3천명, 경희대생 2천5백명, 동국대생 1천명, 중앙대 4천명, 숭실대 600여명등이성토대회나시위에참가했고, 한국외대, 서울시립농대, j강대, 성균관대, 단국대, 경기대, 홍익대, 숙명여대생들이성토대회를열었다. 또충북대생 200여명도성토대회후시위를벌였다. 44) 휴업을풀자마자극심한시위가시작되자 20개대학이조기방학을실시했다. 이후 7월에는주로지방대학에서반대시위를벌였다. 7월 5일부산대생 2천여명이성토대회를열었던것을비롯해서, 원광대생 300여명부정선거규탄대회개최하고 20여명의학생이단식농성을시작했다. 45) 7월 6일오전에는경북대생 1천여명이부정선거반대시위를벌였고 46), 7월 7일공주사대생 300여명 6.8부정선거규탄대회 41) < 천여고대생규탄데모 >, 동아일보 1967. 6. 30(3) 42) < 기말시험거부대학생데모 >, 동아일보 1967. 7. 3(3) 43) < 주권을말살 >, 동아일보 1967. 7. 3(3) 44) < 충북대생데모 >, 동아일보 1967. 7. 3(3) 45) < 부정선거규탄 동아일보 1967. 7. 8 (3) 46) < 경북대생또데모 >, 동아일보 1967. 7. 6

6 8 부정선거규탄투쟁과 3 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과정 185 를열고공주 4.19 기념탑까지행진했다. 47) 8월말여름방학이끝나고다시학원이문을열자부정선거규탄투쟁도재개되었다. 1967년 8월 21일 2학기개학을맞이한서울대에서는문리대와법대생들이 8월 21일, 상대생들이 8월 22일부정선거규탄을계속했다. 서울법대생 300여명은 8월 21일오전 10시법대합동강의실에서학생총회를열어, 박정희정권의태도가변화하지않았으며부정선거이후사태에아무런진전이없었다고규탄하고 9월초부터다시강력히투쟁할것을결의하는제2선언문을발표했다. 제2선언문은특권세력이대중의경제적파탄위에서확대성장하고있는상황이라고당시를진단하고대학이더이상침묵할수없으며 7대국회를민의의대표기관으로인정할수없다고규정했다. 서울대문리대생들도 8월 21일오전 11시 50분경교내 4 19 기념탑앞에서 100 여명의학생이참여한가운데총회를열었다. 이날문리대학생회가발표한 < 제3 차성명서 > 는조기방학을끝내고돌아온학생들의심정을 민족의靑史에오점을남긴부정을망각하기에는우리의지성은너무도엄정하다. 우리의의사와관계없이시작된오랜방학의무더움속의일상도지났으나이제도어제의불행한잔영을버리지못한채음울한심정으로그리던학원에돌아왔다 고밝히고있다. 문리대학생총회는방학으로중단되었던부정선거규탄투쟁을계속할것을결의하고, 문교부장관에게졸렬한학원탄압을중지할것, 대통령에게과감한단안으로현사태를수습할것을요구하는 5개항의결의사항을채택하였다.

186 2007 년현장민주화운동연구종합보고서 다시시위가일어나 6월이후처음으로학생이제적되는사태가빚어지기도했다. 50) 그러나전반적으로 8월말이후 2학기에접어들면서부정선거규탄투쟁은소강상태에들어갔다. 1967년 9월이후정치권내에서논란은계속되었지만 6 8부정선거를규탄하고반대하는대중적인운동은더이상전개되지않았다. 2. 1969 년삼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 1) 1968~1969 년의정치상황과박정희정권의삼선개헌 3 공화국의헌법제 69 조 3 항은 대통령은 1 차에한하여중임할수있다 고규정 하고있었다. 이조항을고쳐서박정희가 1971 년대통령선거에다시출마할수있 도록하기위해공화당은 1967 년 6.8 부정선거를자행했고, 근 6 개월의파행을겪으 면서도원내 2/3 선을확보할수있었다. 그러나본격적인개헌을추진하려니걸리는 문제들이꽤많았다. 야당과학생들의저항은물론이거니와공화당내에서반발부터 없애야했다. 박정희정권의핵심인중앙정보부장김형욱과비서실장이후락, 그리 고공화당내반김종필세력들은 1968 년내내공화당내정지작업을진행했다. 51) 공화당의백남억, 길재호, 김성곤, 김진만네사람이정책위원장, 사무총장등당내 요직을차지하여이른바 4 인체제 를구축한다음개헌반대세력을약화시키기시작 했다. 먼저 1968 년 5 월국민복지회사건으로김종필측근인김용태의원이제명당했고 여기에반발한김종필은정계은퇴를선언하기도했다. 공화당의개헌추진세력들은 1968 년 12 월말부터본격적으로개헌논의를끄집어냈다. 공화당당의장서리윤치영 은 1968 년 12 월 17 일부산에서기자회견을열고국민이원한다면개헌을단행하겠 50) <6 8 총선부정규탄데모 휴업 방학 >, 대학신문 1967. 12. 4(4) 51) 공화당내비주류 - 반김종필파는대부분영남출신의자유당계정치인들이었다. 김일영, 1999, <1960 년대정치지형변화 - 수출지향형지배연합과발전국가의형성 >, 1960 년대정치사회변동, 백산서당, 347 쪽

6 8 부정선거규탄투쟁과 3 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과정 187 다고하였다. 이어사무총장길재호는 1969년 1월 6일헌법개정문제를신중히검토중이라고밝혔고, 다음날 1월 7일다시윤치영이조국근대화라는지상명령을수행하기위해서는개헌문제를연구해야하며, 민족중흥을위해강력한리더쉽을유지해야하니대통령연임금지조항을철폐해야한다고주장했다. 52) 이어 1월 9일정책위원장백남억이당무회의에서다시삼선개헌의필요성을강조했다. 53) 개헌추진파들은현재의야당은퇴폐한이합집산과이질적세력간의분파다툼으로집권의능력을갖추고있지못하므로신민당에게정권을넘긴다는것은상상할수도없는일이며, 공화당의경우도권력의구조적변화속에서박정희를대체할지도자가부각되지않고있으므로정치적안정과조국근대화를달성하기위해서는반드시집권연장이필요하다고주장했다. 54) 이렇게당일각에서개헌논의를진행하자바로다음날인 1월 10일박정희는연두기자회견에서 임기중에개헌할의사는없으나필요하다면연말에도늦지않을것 이라고하였으며, 55) 2월 4일에는공화당내에서개헌을거론하지말것을지시했다. 그러나 2월말尹致暎공화당의장서리는개헌은정세에따라고정된것이아니라고언명하였으며, 중앙정보부와청와대, 공화당내개헌추진파들은지속적으로개헌작업을추진했다. 이에공화당내개헌반대파들은 1969년 4월 8일신민당이제출한권오병문교부장관해임건의안에찬표를던져가결되도록했다. 이 4.8항명사건이발어지자박정희는주동자를색출하도록강력히지시했고, 4월 15일양순직 예춘호 김달수, 박종태등 5명의의원과 93명의당원이공화당에서제명되었다. 이들을제거한후개헌추진파들은본격적으로반대파의설득작업에들어갔다. 5 월 7일윤치영공화당의장서리는충분한시기를두고개헌문제를검토하겠다고하면서당원을대상으로개헌설문조사를지시했다. 56) 특히반대세력의핵심이던김종필이태도를바꾸어 1969년 6월경부터개헌을설득하고다니면서공화당내반대 52) < 헌법개정연구할수도 - 尹致暎공화의장서리기자회견 >, 조선일보 1969. 1. 8(1) 53) < 개헌논의공식화된느낌 >, 조선일보 1969. 1. 9(2) 54) 송효익, 1969, < 반개헌제체를진단한다 >, 사상계 1969.7 54 쪽 55) < 개헌논의꼭필요하다면연말게해도늦지않을것 - 朴대통령연두회견 >, 조선일보 1969. 1. 11(1) 56) < 개헌공식거론준비 >, 조선일보, 1969.5.8(1)

188 2007 년현장민주화운동연구종합보고서 세력은실질적으로소멸했다. 57) 1969 년 7 월 17 일박정희는제헌절기념치사에서개헌논의는자유권의문제라하 더니, 7 월 25 일에는특별담화를발표하여 1 기왕에거론되고있는개헌문제를통해나와이정부에대한신임을묻는다. 2 개헌안이국민투표에서통과될때에는그것이곧나와이정부에대한국민의신임으로간주한다. 3 개헌안이국민투표에서부결될때에는나와이정부는야당이주장하듯이국민으로부터불신임을받고있는것으로간주하고나와이정부는즉각물러선다. 고하면서여당에게헌법개정안을발의할것을지시했다. 58) 이후정부여당은준비해온개헌안을공식적으로발의하는한편, 야당국회의원중에서도일부를매수하여개헌안에찬성하도록공작을벌이는등개헌안통과를위해수단과방법을가리지않았다. 1969년 7월 28일공화당은당무회의를개최하여개헌안을확정하였는데, 삼선연임을허용하고각료의국회의원겸직을가능하게하였다. 이어 8월 7일윤치영외 121명의국회의원 ( 공화당 108명, 정우회 11명, 신민당 3명 ) 의명의로된개헌안이국회에제출되었다. 2) 야당과재야의삼선개헌반대투쟁 (1) 1969년전반기야당과재야의삼선개헌반대 1969년 1월 13일신민당은개헌안이발의되기전에저지하겠다는계획을수립했고, 이어 1월 14일호헌 5인위원회를구성했다. 3선개헌반대투쟁의방안을마련하기위해구성된호헌 5인위원회는전당대회의장김의택, 중앙상임위원장조영규, 정책위원장정헌주, 사무총장고흥문, 원내총무김영삼으로구성되었다. 이들은개헌안을발의하기전에봉쇄한다는데중점을두고지구당개편대회에서반대유세를 57) 예춘호, 예춘호정치회고록, 그어두움의증인이되어, 94 쪽김일영, 1990, 앞의글, 348 쪽 58) < 박정희대통령삼선개헌에대한특별담화전문 >, 사상계 1967. 7 129 쪽

6 8 부정선거규탄투쟁과 3 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과정 189 집중적으로벌이기로결정했다. 59) 이어 1월 15일신민당유진오총재는당의운명을걸고개헌을저지할것이며사태에따라서는소속국회의원들의총사퇴도불사하겠다고밝히기도했다. 60) 신민당은개헌저지투쟁기구를당내와당외에모두결성하기로했는데당내에는당총재를위원장으로하는 대통령삼선개헌저지투쟁위원회 를구성하였다 61). 한편 1969년 2월 3일 5.16 이후제정된정치활동정화법에묶여정치활동을제한받던바람에재야에머물러있던김상돈, 김영선, 이철승, 윤길중등이 3선개헌반대범국민발기준비위원회 를결성했고 62), 2월 11일에는이들과신민당이단일기구를구성한다는원칙에합의하였다. 신민당은개헌저지기획위원회를구성하고고문에尹潽善 - 朴順天씨추대했으며, 3월 31일연합전선을결성하기로합의했다. 기실신민당과당시의재야인사 (70년대와달리이시기재야인사는종교계나학계의민주화운동지도자라기보다는정치정화법해금인사들이중심이었다.) 들은 1968년 11월부터범투위구성문제를협의해오다이때본격적으로시작했던것이다. 1969년 4월초신민당과재야인사 14명으로개헌저지국민투쟁준비위원회가출범하였다. 63) 그러나실제로범국민투쟁위원회가출범한것은 7월 17일이되어서였다. 이렇게지연된것은위원회내부의입장차이나발기인교섭등의문제도있었지만우선신민당의당내갈등과전당대회가첫째이유였다. 신민당이개헌저지를위한준비를갖추게되는것은 1969년 5월 21일의전당대회부터였다. 이에앞서 5월 17일서울에서개헌저지연설회를처음열기는했다. 그러나, 주류와비주류의대립이하도심했던터라전당대회에서분열을수습하지못하면 제일야당으로서체면을잃고하나의투쟁정당으로서운명에종언을고할뻔한위기 에놓일것이라고까지관측될지경이었다. 개헌이눈앞에다가온상황에서위기를절감한신민당의주류와비주류는자리안배를통해내분의위기는수습했다. 이날전당대회에서당수유진오는개 59) <3 월에호헌유세 >, 동아일보 1969. 1. 16(1) 60) <3 선개헌저지에총력 >, 동아일보 1969. 1. 17(1) 61) < 신민개헌저지이원조직 >, 동아일보 1969. 1. 18 (1) < 개헌저지에이원조직 >, 조선일보 1969. 1. 17(1) 62) < 정치정화법해금인사개헌반대투쟁. 발기위를구성 >, 조선일보 1969. 2. 4 (1) 63) < 신민해금인사 14 명개헌저지준위대표 >, 조선일보 1969.4.5(1)

190 2007 년현장민주화운동연구종합보고서 헌저지가신민당의최대과제라천명했으나 64), 류진산등주류와정일형등비주류등파벌사이의갈등은여전히심각했다. 65) 신민당의전당대회이후정치권은개헌반대운동을본격적으로조직화하기시작했다. 1969년 6월 5일 YMCA 강당에서신민당과재야인사들이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준비위원회 를결성했고, 위원장에김재준목사를선출했다. 그러나 6월 7일부터대학생들이본격적인 3선개헌반대투쟁을격렬하게벌이고있었지만, 정치권은 6월에는별다른움직임을보이지않았다. 6월 28일신민당유진오총재등이개헌이사회불안을조성한다는내용의개헌저지유세를벌였으나, 66)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가출범하기전까지투쟁은지지부진했다. (2)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의결성과활동여러가지어려움을겪은끝에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 이하범투위 ) 는 7 월중순경가동하기시작했다. 1969년 7월 17일제헌절을기해정식으로발기인대회를열어위원장에김재준목사를선출하고윤보선, 유진오, 함석헌, 이재학, 박순천, 장택상, 이희승, 김상돈, 정화암, 임영창등을고문으로추대했다. 67) 또범투위는다음과같은선언문을발표했다.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선언문 68) 우리나라는해방과함께삼팔선을경계로공산독재체제와자유민주체제의세계사적대결의최전선이되었다. 그러므로대한민국이자유민주체체를확립신장시켜야한다는것은우리나라역사뿐아니라자유진영전체가요구하는지상명령이다. ( 중략 ) 우리가외치는반공은반공을위한반공이아니라자유민주체제의확립과신장을위한승공인것이며우리가염원하는통일역시자유민주체제하에서통일인것은우리국민의고귀한불문율이다. 64) < 兪鎭午총재연설문 >, 조선일보 1969. 5. 22(1) 65) < 전열가다듬은신민당전당대회 >, 신동아 1969. 7 66) < 신민당兪眞午총재등부산서저지유세 >, 조선일보 1969. 6. 29 (1) 67) < 범국민투위발기대회 >, 조선일보 1969. 7. 18 (1) 68) 사상계 1969 년 7 월호 132~133 쪽

6 8 부정선거규탄투쟁과 3 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과정 191 六 二五공산침략에대결하여세계자유진영 16개개국의젊은이들과함께우리군민 ( 軍民 ) 이피흘린것도이자유민주의제단이었으며사월혁명의정신도이자유민주에의헌신이었다. 그러므로이땅의자유민주체제의방향을경시, 왜곡, 또는역행하는정권이나운동은결코용납될수없는민족사의이단이다. 박정권 10년의집권기록은어떠한가? 자유민주체제의마비와말살을지향하고있다. 1 학원은세밀한데까지정부의지시에굴종하게되고, 구김살없는민족정기의기수인젊은학생들의바른외침은무장경찰의폭력밑에무자비하게유린되고있고, 국민의자녀교육과인재육성에무리한제재를가하여인물한국의장래를위태롭게하고있다. 2 언론은취재와비판의자유를대폭상실하였고특히정부에대한솔직한비판은거의함구에가까운형편이다. 3 국회는부정선거에의하여선출된절대다수의여당위원과소수의야당위원으로구성되었고정부의시녀화한무력한허수아비로전락하여변칙, 횡포의의사진행등으로민주헌정의미덕을상실한지오래다 4 사회는대체로공법 ( 公法 ) 이집권자의도구로악용되고자금이매수의만능약 ( 萬能藥 ) 으로신봉되는오염기류에덮여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정의가침묵속에감금되고사찰이악의진원지를건드리지못하는실정이므로이제절대권력의절대부패현상이각방면에서드러나고있다. 5 박정권이가장과시하는 < 경제건설 > 은어떠한가? 부패, 의혹및특혜로말미암아중소기업과농촌은거의전적인몰락과정을밟고있다. 소수의특혜기업도속속부실기업화하여도산이속출하는가운데수삼 ( 數三 ) 의정상재벌 ( 政商財閥 ) 이남을지모르나부의과대겸병때문에전국민의원부 ( 怨府 ) 로화하고있다. 고속도로, 고층건물, 공업단지등이견실한경제원리보다도정권연장을위한전시효과를앞세우며무리하게결행되어종내국가경제의파탄을초래하고있으니, 이것은과잉의욕과시행착오정도로눈가림하기에는너무도심각한저주를우리역사에심어놓은경제민주화의역행이다. 이런상황임에도불구하고집권자는자존망대 ( 自尊妄大 ) 하여일인의장기집권을위한삼선개헌을추진하고있다. 만약에이와같은배신과우롱에주권자인국민이묵종한다면그것은자유민주한국의임종을최촉 ( 催促 ) 하는것밖에다른아무의미도없을것이다. ( 중략 ) 박정권은북괴침공의위험을선전한다. 그러나박정권자신이민주국민의충고를무시하고헌정을말살하는삼선개헌을강행하여국론분열과사회의격동을조장한다면그것이야말로북괴의흉계에호기를제공하는것이다. 우리는이제삼선개헌을강행하여자유민주에의반역을기도하는어떤명분이나

192 2007 년현장민주화운동연구종합보고서 위장된강변에도현혹됨이없이헌정이십여년간모든호헌세력들의공통된신념과결단위에서전국민의힘을뭉쳐단호히이에대처하려한다. 집권자에의해서자유민주에의기대가끝내배반당할때, 조국을수호하려는전국민은요원의불길처럼봉기할것이다. 우리는날로그우방을확장시키고있고, 선악의대결과진부 ( 眞否 ) 의결전에서용솟음치는결의를가지고있다. 자유국민의조국은영원하다. 영원한조국을가진국민은용감하다. 전국민이여! 자유민주의헌정수호대열에빠짐없이참여하라. 1969 년 7 월 17 일 투위의발기인은당초이백오십명선이었는데나중에 330명선으로늘어났다. 신민당소속의원 46명전원과발기준비위원 25명, 원로 17명이참여하였고, 나머지는신민당의원외위원장등정치인과각계인사들이참여하였다. 김재준목사는위원장겸운영회의의장이었고, 산하에사무국과기획, 조직, 선전, 청년, 인권, 부녀, 원내위원회를두고서울, 부산과각시도에지방조직을결성하였다. 그러나실제지방에서는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위에가담한정당의지구당은삼선개헌저지투쟁에관해서는범국민투위의지휘를받도록 한다고하여신민당지방조직을이용했다. 69) 신민당은 7월 19일서울에서시작하여 7월 26일에는군산등전국에걸쳐반대유세를시작했다. 신민당은원내 외에서동시에투쟁을전개한다는전략하에원내에서개헌저지선을확보하도록노력하면서개헌안발의자체를차단하고, 원외에서는개헌반대유세를전국적으로전개하려했다. 그런데 1969년 7월 29일에는신민당소속성낙현, 조흥만의원이, 30일에는연주흠의원이 3선개헌을지지하는성명을발표했다. 70) 중앙정보부의개헌공작이성과를거둔것이었는데, 이들개헌지지야당의원들은국민의공분을샀고도처에서 변절의원화형식 이거행되기도했다. 71) 8월 7일개헌안이국회에상정되자신민당의원들은국회에서농성에돌입하였 69) < 改憲陣痛 >, 동아일보 1969. 7. 17 (3) 70) < 신민성낙현 - 조흥만의원 3 선개헌지지를성명 >, 조선일보 1969. 7. 30(1) 71) < 부산신민당원 1 백여명변절의원화형식 >, 조선일보 1969. 8. 1(3)

6 8 부정선거규탄투쟁과 3 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과정 193 고, 동아일보 는 8월 8일자사설에서 개헌주장의동기가결코합치될수없으리라고확신하다 며개헌반대의사를밝혔다. 신민당의원들의농성으로개헌안에대한절차보고가힘들자이효상국회의장은개헌안을정부로직송했고정부는이를공고했다. 한편범투위의전국유세는원래 8월 9일부터시작하려했으나신민당의원들이농성중인탓에늦춰져 8월 16일전주를시작으로개헌반대유세를개시했다. 72) 범투위는전국유세를계속진행하여이리, 김제, 정읍을거쳐 8월 30일에는대구로갔다. 또 8월 31일정태성의원등세사람이광주에서서울로개헌반대도보행진을시작했다. 73) 또서민호의원이신민당과개헌반대투쟁을함께하기로한다음 9월 1일부터통일사회당원 30여명은무기한단식농성에돌입했다. 74) 한편 9월 7일에는신민당소속으로개헌안에찬성한세사람의의원직을박탈하기위해신민당이스스로해산을선언했다. 신민당이조흥만, 연주흠, 성낙현세의원을제명하면이들은무소속으로의원직을유지할수있었다. 따라서신민당은이들세사람을제외한 44명의원전원을제명한다음, 당을해산해버렸다. 이로써소속정당이없어진세의원은자동적으로의원직을박탈당했다. 해산이후신민당소속의원들은임시로신민회라는원내교섭단체를등록했다. 다음날인 9월 8일신민회소속장준하, 이기택, 박영록등국회의원 5명은시청앞에서개헌반대시위를벌였다. 또이날한국기독교연합회도오전에실행위원회를열고삼선개헌반대성명을발표하였다. 75) 범투위는지방에서반대유세를계속했다. 9월 7일에는인천, 광주, 청주에서대규모유세를열었고 76), 김재준범투위위원장은각계에개헌저지투쟁을호소하는메시지를보냈다. 대한변협의일부변호사들이 9월 12일 < 호헌선언문 > 과 < 국회의원 72) < 개헌반대투위오는 9 일부터 >, 조선일보 1969. 7. 29(1) < 반대범민투위전주서첫강연 >, 조선일보 1969. 8. 17(1) 73) < 호헌행진도보천리 >, 동아일보 1969. 9. 1 74) < 통사당원 40 명개헌반대단식투쟁 >, 조선일보 1969. 9. 2(1) < 개헌반대단식농성 >, 동아일보 1969. 9. 1(3) 75) 동아일보 1969. 9. 8 (3) 76) < 개헌날치기경계 >, 동아일보 1969. 9. 8(1)

194 2007 년현장민주화운동연구종합보고서 들에게보내는메시지 > 를발표하여삼선개헌에대한반대의지를표명하였다 77). 그러나개헌안상정이임박하고신민당소속의원들이국회주변에서대기하자집회는줄어들었다. 야당조직에의존한범투위의대정부투쟁은야당의원내투쟁을보조하는역할밖에할수없었던것이다. 1969 9월 9일국회본회의에개헌안이상정되었다. 신민당의원들은본회의장에서농성중이었으나, 9월 14일일요일새벽본회의장이아닌제3별관에서개헌안이날치기로통과되었다. 본회의장에서표결했을때이탈표가생길까두려워한여당은아예별관에서표결을진행했고, 농성에참가하고있던의원 49명은계표가끝난다음에야통고받았다. 78) 신민당은제2의쿠데타이며박정권교체투쟁을벌이겠다고강도높게비판하고 9월 20일재창당집회에서도대통령의하야를권고하였다. 79) 개헌안통과후국민투표까지전국에서반대유세를열기는하였으나국면을전환하기는이미늦었고, 10월 17일개헌안이 77.1% 의투표율과 65.1% 의찬성으로통과되었다. 3) 학생들의삼선개헌반대운동 1964년이후한일협정반대등으로학원은항상민주화운동의중심에서있었고, 1967년에는 6.8부정선거반대시위가치열하게전개되었던바있었다. 당시대학의학기는요즘보다길어 7월중순이후에나여름방학에들어갔다. 그러나 64년, 65년, 67년모두한일회담반대, 부정선거규탄등박정희정권에대항한민주화운동이대학가를휩쓸면서 6월에학생시위가격렬해졌다. 이럴때문교당국은늘조기방학을실시하여학생운동을잠재우려했다. 지방학생들이많고이들이방학기간중마땅히있을곳이없던당시에임시방편이지만효과적인대응책이었던것이다. 80) 이시대대학생들이스스로를일러 6월방학생 이라했던것은이런상황을자조적으로 77) < 변호사 11 명개헌반대성명 >, 동아일보 1969. 9. 12(3) 78) < 개헌안공화전격변칙처리 >, 동아일보 1969. 9. 15(1) 79) < 신민당재창당 >, 동아일보 1969. 9. 20(1) 80) 서중석, 안병욱, 운준하증언

6 8 부정선거규탄투쟁과 3 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과정 195 표현한것이다. 81) 앞서살펴보았듯이 1967년여름방학도역시 6월에시작했었다. 1968년의대학가는이례적으로조용한한해를보냈다. 세계적으로긴장이극도로고조되고진보와보수의갈등이심했던때였지만, 한국의대학가는큰쟁점없이지나가고있었다. 그러나정권내부에서개헌을추진중이었던만큼학생운동세력도 1968년하반기부터는조만간드러날삼선개헌에대해어떻게대응할것인지준비하기시작했다. 1969년상반기까지학생운동내부에서는어차피박정희정권이삼선개헌을추진할것이므로미리그시도를막고나서야한다는입장과, 섣불리나섰다가는정권이공개적으로삼선개헌을언급할수있는빌미만제공할것이니신중해야한다는입장으로나눠있었다. 그러나결국 1969년 6월중순각대학의학생운동세력들이개헌반대시위를벌이면서본격적인삼선개헌반대운동이시작하였다. 우선 1969년 6월 12일서울법대생 300명이합동강의실에서 < 헌정수호법대학생총회 > 를개최하고, 82) 삼선개헌에대한최초의반대선언문을발표하였다. 선언문 83) 독재의망령이새로운위협으로나타나고있다. 집권층의일각에서떠돌던삼선개헌논의는이제조국의헌정질서의앞날을가늠하는중차대한문제로제기되고있다. 정보정치로민중이질식해가고에로문화로민중이눈멀고있는이시점에서, 그리고의회가정부의시녀로전락해버리고언론이거세되어가고있는이시점에서우리대학생은이땅의현실을냉철하게투시하고진정한민의를대변해야할의무를절감한다. 지역적. 사회계층적소득의극심한불균등은조국의장기적경제성장을위협하고있고물량주의, 외자만능주의의경제정책은한국경제의암적요소로비대하고있다. 남발되는화려한정치적구호와하락하는현실의틈바구니에서과대한위기의식 81) <6 月放學生의年代記 >, 대학신문 1966. 2. 27(3) 82) < 헌정수호선언 >, 동아일보 6969. 6. 12 (7) 안택수, 1969, < 학생데모의어제와오늘, 사상계 1969. 7 호에는 500 여명참석 83) 사상계 1969 년 7 월호 141 쪽. 사상계 에는선언문의발표일자가 1969 년 6 월 19 일자로되어있으나, 6 월 19 일에는서울법대에서집회나시위가없었다. 동아일보 1969 년 6 월 12 일자가서울법대생들이발표한선언문의주요내용이라고보도한것과문구가완전히일치하는것으로보아 12 일자선언문이라고보아야할것이다.

196 2007 년현장민주화운동연구종합보고서 의고조와소비문명의조장의틈바구니에서민중은오늘날자기분열의과정을더듬고있다. 파행적인경제구조를타파하고부정과부패를근절시키며조작된민의가진정한민의를지배하는것을시급히중단시키는것이오늘날의과제가아니던가? 국내외로숱한문제를안고있는조국의현실에서집권의연장과권력체제화의강화를획책함은국민의논의를양분하여사회적인혼란을야기할것으로우리는경고한다. 독재자의아집과자기과신은결국일국의운명을파멸의길로이끌수밖에없다는것을역사는증언하고있다. 조국의헌정질서에바쳐진우리선열의피는결코헛될수없다. 조국의헌정질서가일개정당의제물로될수는없으며민주주의로향한전국민의염원이일부소수자의권력욕앞에희생될수도없다. 이제독아를드러내기시작한삼선개헌의음모를반민주적인행위로단정하는데주저치않으며우리는앞으로의사태의변화를계속주시할것이다. 우리는조국의헌정질서를유린하는어떠한반민주적인행위도결코용납하지않을것을선언한다. 1969 년 6 월 12 일 서울대학교법과대학대의원회법과대학학생평의회법과대학학생회 그런데 6월 13일서울법대교수회의가전날학생성토대회주모자들에게근신 3개월의처벌을내리면서법대학생들의삼선개헌반대투쟁은더욱격렬해졌다. 법대학생 300여명은 6월 16일학생총회를열고 1 정부는개헌추진을즉각중지하라 2 언론의자유를보장하라 3 학원사찰을즉각중지하라는등 3개항을결의했고이들중 200여명이오후 4시 30분부터법대도서관열람실에서철야농성에돌입하였다. 다음날인 6월 17일이들은학장과의면담에서성토대회주동자들에대한징계를철회하고, 학원내언론집회의자유를보장하며, 방학까지부당한휴강을하지않겠다는약속을받고난다음자진해산했다. 84)

6 8 부정선거규탄투쟁과 3 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과정 197 6월 17일서울대문리대학생들도삼선개헌반대집회를시작했다. 문리대생 200 여명이 12시 30분 4.19 기념탐앞에서학생총회를열고 3선개헌은명백한민주주의의弔旗이며국가의존립을위태롭게하는반민주적위법행위 이므로 일부공화당원에의해추진되고있는개헌공작 이즉각중단되어야한다고주장했다. 동시에정보정치에의해만연된불신풍조를개탄하고그폐해가가장자유로워야할대학의언론과학술연구마저침식하여대학이위기에처하였다고역설하며지식인과언론인, 그리고대학생모두가개헌반대의기치아래궐기할것을호소하였다. 85) 6월 19일고려대에서법대학생들이개헌반대성토대회를열었다. 고려대법대학생회 ( 학생회장선병덕, 당시행정과 4) 는 500여명이참가한가운데 3선개헌을반대하는호국선언대회를열었다. 이들은선언문에서 1 독재와부정부패의망령인정권연장을위한헌법개정의망상을즉각집어치우라 2 학문의자유와대학의자치를실질적으로보장하기위하여정보정치, 사찰정치를즉각중단하라 3 이상의우리의요구가관철되지않는한우리는피흘려투쟁할것을결의한다 고결의했다. 86) 서울공대생들도삼선개헌반대성토대회를개최했다. 공대생 300여명은오전 9 시 30분교정에서민주주의의수호를다짐하는토론을벌였으며 18일로예정되어

198 2007 년현장민주화운동연구종합보고서 1967년 6 8부정선거규탄투쟁에서는학생들의성토대회나시위기사가비교적상세히보도되었음에반해, 1969년삼선개헌반대투쟁에서는어지간한내용은아예보도되지도않았고보도된다하더라도학생들의선언이나결의내용은상세히보도하지않았다. 89) 1969년 6월 23일서울대문리대는학생회가수업거부를결의한다음제2차학생총회를열고다음과같은반대투쟁선언문을낭독하고전국대학생에게보내는메시지를채택했다. 90) 삼선개헌반대투쟁선언문 우리의민주투쟁사는민족의혈맥을타고면면히흘러오늘에이르렀다. 지금북괴의위협의불안속에서, 삼선개헌의반민주적이고반역사적이며반민족적인파국에로의전개는국민에의반역임과동시에, 공동체의식의폐허위에심화되어온이질복합사회의체제에서, 남미형의악순환수레바퀴에돌아가는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제모순을통하여, 급기야는인간과사회의총체적인파탄에로끌고가려한다. 이제는그들나름대로긍정적인가치부여를한 5개혁명공약 의실천이라던 5.16 군사혁명자체가삼선개헌이라는일부권력의노예들에의해더럽혀진자살행위로인하여한국사에서부정적인존재로화하려하고있다. 보라. 그들은국민통합속에서용솟음치는자유로운민주국가가아니라폭력기구와정보장치에의한관헌주의국가체제로영속적인노예화로몰고가려하지않는가! 우리민주역량의힘찬보루인학생들은반족재투쟁의연장선상에서민주신념에투철한양심적지식층과민주주의의용광로인광범한대중과힘을모아이러한삼선개헌책략을철저히분쇄하는데총력을경주할것이다. 우리는묻노니이러한자기파괴의삼선음모는누구를위한책동인가? 이러한독소를뿌리는삼선개헌음모자들은우리에게무엇을더이상강요하는가? 이러한칼춤추는삼선개헌의종말은누구의피와비극을초래할것인가? 이에문리대학생은다음과같이앞으로의우리의행동방침을천명하고자한다. 89) 안택수, 1969, < 학생데모의어제와오늘 >, 사상계 1969. 7, 150 쪽. 안택수는당시 한국일보 기자였다. 90) 형성편집실, 1969, 앞의글, 24 쪽. 동아일보 1969. 6. 23 (3)

6 8 부정선거규탄투쟁과 3 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과정 199 일. 우리는어떠한압박에도굴하지않고삼선개헌반대를위한투쟁을줄기차게계속한다. 이. 잠재해있는국민의민주역량을민주수호의방향에로전환, 총궐기한다. 삼. 모든민주학생은이삼선개헌반대투쟁대열에집결한다. 1969 년 6 월 서울대학교문리과대학학생회, 대의원회 이날경희대생 500여명과경북대생 200여명도삼선개헌반대성토대회를열었다. 91) 이어 6월 24일에는경기대생 100여명도개헌반대를결의하였다. 92) 학원가의분위기가달아오르기시작하자문교부는방학중학교장의인가없는학생집회를일체금지하겠다는입장을밝혔다. 93) 이때까지학생들의삼선개헌반대운동은주로학내에서성토대회였다. 학생들이본격적으로교외로진출했던것은 6월 27일고려대학교에서부터였다. 고려대에서는윤준하, 이상수등 3학년들이중심이되어범고대민주수호투쟁위원회를조직했다. 고려대민주수호투쟁위원회는 6월 27일 11시 30분부터약 600명의학생들이운집한가운데성토대회를열고학원내자치의보장과법대학생회장징계철회를요구하는선언문을채택한이후가두로진출하여시위를벌였다. 94) 고려대생들의시위는 28일에도계속되었다. 오전 11시 20분대강당에집결한 800여명의고대생들은총학생회장조춘구가제2선언문을낭독한다음모의재판을열고, 이어오후 1시경교수들의만류를뿌리치고 개헌을철회하라 는플랭카드를앞장세우고교문밖으로진출하여안암동로터리에서경찰과충돌하고교내로돌아왔다가오후 2시두번째로교문을나와경찰과투석전을벌였다. 95) 6월 27일에는계명대생 400명여도헌정 91) 안택수, 1969, 앞의글, 151 쪽 < 개헌반대성토 >; <2 백여경북대생도 >, 동아일보 1969. 6, 23(3) 92) 동아일보 1967. 6. 24(7) 93) < 방학중집회금지 >, 동아일보 1967. 6. 25(3) 94) < 삼선개헌반대데모일지 >, 고대신문 1969. 8. 11(3) 윤준하증언에의하면민주수호투쟁위원회위원장은처음에는윤준하였으나곧여기에총학생회장조춘구가참여하면서그가맡게된다.

200 2007 년현장민주화운동연구종합보고서 수호성토대회를열었고, 96) 6월 28일에는대구사회사업대학생들도시위를벌였다. 이무렵부터대학생들은거의매일같이시위를계속했다. 경북대학생들도 6월 29일부터 7월 1일까지연나흘간계속성토대회와가두시위를계속했다. 97) 6월 30 일에는연세대 1,300명이시험을거부하고 3선개헌반대시국선언대회를열고시위를벌였으며, 임시휴교상황에서도연사흘째고려대생 800여명이교문에서연좌시위를벌이고경찰과충돌했고, 경희대생 800여명, 광주사대생 200여명, 홍익대생 300여명도거리로나와시위를벌였다. 98) 이날은경찰이새로운진압장비를선보였다. 페퍼포그라고하는시위진압용가스분사기가고려대생들시위현장에서처음사용되었는데, 이때는차량에탄경찰들이직접분사하는방식으로사용했다. 99) 7월 1일에는연세대학생들이 2000명이참가한가운데세번째 3선개헌반대시국대회를열고거리로나섰다. 또서울대공대생 1,000명과교양과정부학생 500명이함께 3선개헌반대시위를벌였다. 고려대, 경북대, 공주사대, 홍익대, 한국외국어대학생들이시위를벌였다. 7월 2일에는시위에참가한대학의수와규모가훨씬커졌다. 한국외국어대학생 1,000명이 4.19는통탄한다 는플랭카드를앞세우고거리로나섰으며중앙대학생 1,000여명, 동국대학생 1,000여명도가두로진출했다. 연세대, 경북대학생들은전날에이어계속거리에나섰고 7월 2일서울대문리대생들은삼선개헌성토대회를열고 독재체제를획책하는황소帝國화형식 을가졌으며 3선개헌추진세력과어떤피의투쟁도두려워하지않겠다 는의지를표명한 제3선언문 을발표했다. 서울법대생들도성토대회를개최하고전국민에게보내는메시지를채택했는데, 농민 노동자와지식인, 언론인은물론이고여당당원과공무원들에게도민주수호투쟁에호응할것을호소했다. 100) 고려대생들은오후 3시 20분중앙극장앞에서집결한고대생 200여명은을지로와신신백화점까지명동등지에 95) 앞의 < 삼선개헌반대일지 > 및안택수, 1969, 앞의글, 151 쪽 < 고대생또데모 >, 동아일보 1969. 6. 28(7) 96) <4 백계명대생개헌반대성토 >, 동아일보 1969. 6. 27(3) 97) 동아일보 1969. 7. 1(7) 98) 동아일보 1969. 6. 30(3) 99) < 페퍼포그 >, 동아일보 1969. 7. 1(7) 100) < 전국민에게보내는멧세지 >, 사상계 1969 년 7 월호

6 8 부정선거규탄투쟁과 3 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과정 201 서시위를계속하여 100여명이연행되기도했다. 한편이날고등학교학생들도 3선개헌반대에참가하기시작했다. 서울중앙고학생 500여명이 3선개헌반대시위를시도했던것이다. 중앙고는다음날로휴교에들어갔다. 101) 7월 3일경부터시내대학의휴교가시작되었다. 우선 7월 2일서울대교수회의는정상적인수업과시험이불가능하다고보고휴교를결정하면서모든시험을방학후로연기했다. 102) 7월 3일부터실질적으로조기방학에들어간것이었다. 이어 7월 4일부터는휴교가고려대등다른대학으로도확산되었다. 그러나일단고조된시위는쉽게수그러들지않았다. 7월 3일에는전북대생 500 여명, 성균관대학생 1,000여명, 건국대생 1,000여명, 한국외국어대생 150여명, 동국대생 500여명, 숭실대생 300여명, 중앙대생 100명, 우석대생 500여명이시위를벌였다. 시위가격렬해지면서경찰의과잉진압과폭력으로부상을당하는학생도늘어났다. 예를들어우석대생의시위중 40여명이나되는학생들이부상을당했으며연행된학생들을구타하는사례도비일비재했다. 시위가확산되면서자연스럽게다른학교의학생들이거리에서합세해시위를벌이는일도늘어났다. 특히서울대는각단과대학이떨어져있어거의모든시위가따로진행되었는데, 시위가격해지고규모가커지면서자연스럽게가까운다른대학이나단과대학학생들과합류하기도했다. 7월 3일시위에는고려대학생들과서울대사범대학생들이시위과정에서합류하여함께싸웠다. 또 1학년학생들로이루어진교양과정부는공대와인접해있어함께집회를열고시위를벌이는것이보통이었다. 103) 7월 4일까지고려대와경북대학생들은근 1주일씩계속해서시위를벌이고있었다. 고려대생 1,200여명은 황소집단의개헌음모타도 등 7개항의결의문과언론인들에게보내는메시지를채택하고공화당화형식을벌인다음가두시위를벌였다. 건국대는전날에이어 1,000여명이성토대회와시위를벌였고, 한양대 300여명, 서울교대 200여명도시위에참가했다. 104) 연세대의대생 100명은 3선개헌에반 101) 동아일보 1969. 7. 2(3) < 중앙고휴교 >, 동아일보 1969. 7. 3(7) 102) < 서울법 문리대휴교 >, 동아일보 1969. 7. 3(7) 103) 동아일보 1969. 7. 3(7)

202 2007 년현장민주화운동연구종합보고서 대하는 72시간단식투쟁을벌이기도했다. 7월 5일에는건국대생과한양대생이 3선개헌반대시위를벌였다. 105) 7월 7일시위는전국에서벌어졌고경찰의진압도강경했다. 경희대생 700여명이 3선개헌반대성토대회를열고가두시위를벌이고 3일간의단식투쟁에돌입했다. 성균관대학생 700여명, 연세대 700여명도기말시험을거부하고가두시위를벌였다. 특히연세대생들의시위현장에는경찰헬기가공중에서최루탄을투하하여진압을시도하기도했다. 7월 7일전국각대학에는거의휴교령이내렸고고등학교도조기방학에들어갔다. 그러나휴교령이내린상황에도 7월 8일오전부산대학생 400여명이휴교철회와학원사찰중지를외치며교외진출을시도하여경찰과투석전을벌였고부산수산대, 영남대, 계명대학생들도성토대회를열었다. 106) 경희대학생들은 7월 7일부터단식농성을계속하였고가톨릭의대생들도 7월 7일부터 8일까지단식에참가하였다. 107) 대학이휴교에들어가자고등학생들의시위가두드러지게되었다. 시위의기미가보이자많은고등학교들이먼저휴교에들어가기도했지만, 7월 10일대구에서는대구고학생 500여명, 대륜교학생 300여명, 경북고학생 300여명이선언문을낭독하거나교문을박차고나와개헌반대시위를벌였다. 108) 이어 7월 11일에는안동고학생 1,000여명, 계성고학생 1,000여명이개헌반대성토대회를열었고 7월 12일에는김천중고에서천여명이개헌반대성토대회를열었다. 시위가확산되자고등학교도휴교에들어갔고, 7월중순에들어서전국적인반대시위는일단수그러들었다. 그러나방학기간중대학생일부는학교에남아소규모모임을열거나성명을발표하기도했다. 7월 17일서울대문리대학생들이제헌절을맞아제헌절기념개헌반대투쟁대회를열고법정신의수호와시민저항권을확인하면서삼선금지조항이 104) 동아일보 1969. 7. 4(3) 105) 동아일보 1969. 7. 5(7) 106) 동아일보 19969. 7. 8(2) 107) 동아일보 1969. 7. 9(3) 108) 동아일보 1969. 7. 10(7)

6 8 부정선거규탄투쟁과 3 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과정 203 민주헌법의근본적인정신으로규정했던것이대표적인사례였고, 109) 신문에보도되지는않았지만고려대등에서도학교에남아있던학생들이집회를열고투쟁결의를다졌다. 110) 방학기간중삼선개헌반대운동에참여했던학생들에대한징계도진행되었다. 학생회간부, 평소학생운동의주도층, 반대집회에서연설하는등두드러지게활동했던학생들에게자퇴, 무기정학, 유기정학등의처벌이내려졌다. 7월 18일서울대법대교수회의에서법대학생회장박봉규가제적되고안평수는자퇴, 이신범등에게는무기정학처분이내려졌다. 111) 서울대문리대에도학생회장박영은과서원석은자퇴, 최재현, 유홍준, 조학송, 김형관, 강지원, 박승무등은무기정학처분을받았다. 112) 경북대도두명의학생을제적하고 8명을정학처분하였으며고려대는학생회장조춘구가제적되고이원보, 이상수, 윤준하등이무기정학당하는등 16명이징계를당했다. 113) 부산대학생들도 5명이정학을당했고서울교대는주동학생 1명을제적하고둘은정학처분하였다. 114) 고등학생들도마찬가지여서경북고, 안동고, 김천고, 대구고에서주동자로몰린학생들이처벌을당했다. 115) 이에처벌대상학생들이반발했을뿐아니라징계철회가개강이후투쟁의요구사항이되기도했다. 한편방학중고려대, 서울법대등을중심으로대학간의연대투쟁조직을구성하려는시도도있었으나크게확산되지는못했다. 116) 8월말개강이다가오자치열한삼선개헌반대투쟁이다시시작되었다. 고려대생 150여명이 8월 21일호헌학생총회를열었으며연세대호헌투쟁위원회도호헌과징계철회를요구했다. 117) 고려대생들은 8월 25일개강첫날부터비상학생총회를개최 109) 형성편집실, 1969, 앞의글, 25 쪽 ; < 제헌절기념개헌반대투쟁대회 >, 사상계 1969 년 7 월호 110) 2008 년 8 월김영곤선생인터뷰 111) < 박봉규군은제적 >, 동아일보 1969. 7. 21(7) 112) 문리과대학형성편집실, 1969, 형성, 3 권 3 호, 41 쪽 113) <16 명징계 >, 동아일보 1969. 7. 30(3) 114) 동아일보 1969. 7. 26(7) ; 1969. 7. 24(3) 115) < 고교생도처벌 > 동아일보 1969. 8. 4(3) ; < 학생퇴학 > 동아일보 1969. 8., 5(7) 116) 윤준하, 서중석인터뷰 117) 동아일보 1969. 8. 23(7)

204 2007 년현장민주화운동연구종합보고서 하였는데, 전총학생회장조춘구는징계불복을선언했고비상학생총회의장문병순은혈서를썼다. 이들은교문밖으로진출하여경찰과충돌하여 18명의학생이연행되기도했다. 118) 고려대생들은 8월 26일과 27일에도연달아시위를벌였다. 26일에는황소파시즘화형식을열고세차례교외로진출하여격렬한시위를벌였으며학교당국은기말고사를무기한연기하지않을수없었다. 119) 이어 8월 28일 ~29일에는경북대학생 300여명이개헌반대학생총회를열고이틀연이어개헌반대시위를벌였다. 120) 9월 1일이후개강한학교들이늘어나자시위는더욱확산되고격렬해졌다. 서울대의경우 1학기기말시험을 2학기개강이후로연기해두었으나, 학생들은수업과시험을거부하고투쟁을선언했다. 9월 1일문리대학생 300여명은 호헌의깃발아래서 라는플랭카드를들고집결하여개헌음모를규탄하고부당한학생징계의철회와학원의자율적운영을요구하였다. 이들은학생총회가끝난이후가두시위에들어가이화동로터리까지진출했으나페퍼포그차등에밀려다시교내로돌아왔다. 교내로돌아온문리대생들은강당을점거하고자유토론에들어갔으며문리대투쟁위원회를구성하고위원장으로김세균 ( 당시정치학과 4) 을선출했다. 한편학생회는삼선개헌반대운동에대한모든지도권을문리대투위에일임했다. 문리대학생들중 40여명은 9월 2일오후 4까지농성을계속하다해산하였다. 서울상대학생 250여명도강당에모여삼선개헌반대성토대회를개최한다음다섯차례에걸쳐교외로진출하여가두시위를벌였다. 이들은 황소는십년살고조국은영원하다, 삼선개헌 = 백색전제 라고쓴피켓과플랭카드를들고시위에나섰으며경찰과격렬한투석전을벌이기도했다. 경북대생 500여명도이날개헌반대시위를벌였다. 9월 2일서울법대, 공대, 상대생들이시위를연이어시위를벌였고, 서울대교수회의는 9월 1일오후무기휴교를결정했다. 그러나학생들은지속적인투쟁을위한수단을모색했고, 법대생들은도서관에서 9월 1일부터 9월 4일까지철야농성을계속 118) < 개헌반대데모한때교문나서 >, 동아일보 1969. 8. 25(3) 119) 동아일보 1969. 8. 26(7) 120) < 경북대생데모 >, 동아일보 19969. 8. 28(7); < 경북대생또데모 >, 동아일보 1969. 8. 29(3)

6 8 부정선거규탄투쟁과 3 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과정 205 했다. 121) 9월 3일에는연대생 1,000여명, 고대생 300여명, 그리고대전대와영남대에서시위가계속되었고 122) 휴교하지않고있던서울공대생들과교양과정부학생들도 9 월 4일대규모시위를벌였다. 성균관대생들도 500여명도 9월 4일시위를벌였고학교는임시휴강조치를취했다. 123) 9월 5일에는연세대생 1,500여명과계명대, 부산대법대, 전남대의대생들의시위와성토대회가계속되었다. 이후시위는더많은대학으로확산되었다. 9월 8일에는연세대, 계명대, 서울농대, 가톨릭의대, 경희대, 숭실대에서시위가벌어졌고서울사대생들은시위과정에서 90여명이연행되자연행자석방을요구하며농성을벌이기도했다. 124) 9월 9일에는연세대, 한양대, 가톨릭의대, 충남대, 건국대, 서강대에서, 10일에는숭실대, 감리교신학대학, 경희대, 충북대, 동국대, 경북대의대, 서울농대에서시위또는농성이벌어졌다. 9월 11일이미전국의 38개대학이무기휴강중이었으나개헌반대는시위의무풍지대였던여자대학으로까지번졌다. 9월 11일숙명여대생 1,000여명이결의대회를열었고이화여대생들은전교생이검은치마와흰윗도리로복장을통일하고성토대회를열기도했다. 125) 대학이거의휴교에들어가자학생들은학교안에서농성하는방법으로자신들의주장을전하고자했다. 개헌안국회통과를앞두고여야가대치하고있던 1969년 9 월 10일문리대, 법대, 상대, 사대등서울대생 100여명은밤 10시기습적으로법대도서관을점거하고, 126) 수도와전기조차끊긴도서관에서개헌안이통과될때까지농성을계속했다. 고려대생들은교양학부강의실에서 9월 10일부터 13일까지농성했다.

206 2007 년현장민주화운동연구종합보고서 더이상학생들을모으기도어려웠으며많은학생들이징계를받고입영하는바람 에운동을계속하기도어려웠다. 학생운동은새로운투쟁을준비하기시작했다. 3. 1960 년대말민주화운동의특성 6.8 부정선거규탄투쟁과삼선개헌반대투쟁속에서나타난민주화운동의특징을살펴보는것으로맺음말을대신하고자한다. 이시기민주화운동은헌법이보장하는기본권의수호, 즉최소한의민주적헌정질서를유지하는데집중해야했다. 우선무엇보다박정희정권이민주주의의기본틀을파괴하면서장기집권체제를구축하려공세를펼쳤기때문이었다. 그러나또당시민주화운동세력을옥죄고있던반공이데올로기의강력한벽을넘어서서민중생존권을요구하거나평화와통일을위해투쟁할만한주체가형성되지못했기때문이기도했다. 그결과이시기내내민주화운동세력이먼저민주화를위한쟁점을제시하여민중들의권익향상을요구하고나서지못하고, 군사정권이장기집권을위해이러저러한시도를벌일때비로소이것을막기위해나서는수동적인형태로운동이전개될수밖에없었다. 이시기민주화운동의또다른특징중하나는학생운동이차지하는비중이거의절대적이라는점이다. 이시기만이아니라한국민주화운동역사전반이그랬지만 ( 서중석, 1997, 20쪽 ) 이때는 1970년대보다학생운동의비중이더클수밖에없었다. 1970년대저항의또다른축을이루었던재야는이때아직존재하지않았다. 60년대말까지 재야 란말은, 그야말로제도정치외부에있는인물들을가리키는말로쓰였으니여당성향의재야란말도있었다. 야당성향이라하더라도재야라고하면이범석의족청계가중심을이룰정도였으니 70년대종교계와학계를중심으로구성된재야와는크게달랐다. 그러다보니재야와학생의연대도실질적으로는없었다. 또정권에정면으로도전하는노동운동이나농민운동도거의없다시피했으니, 강한국가권력에정면으로도전할사회적역량은학원을제외하고는실질적으로존재하지않았다.

6 8 부정선거규탄투쟁과 3 선개헌반대투쟁의전개과정 207 학생들의민주화운동이어떤특징을가지는가? 우선아직까지학생운동은뚜렷하게내세울만한자기이념을가지고있지못했다. 학생운동의논리적, 정치적한계이기도하지만, 통혁당사건, 동백림사건, 민비연사건등이연속적으로전개되는속에서피할수없는상황이기도했다.( 서중석, 1988, 73쪽 ) 그러나학생운동의이념에서매우중요한변화가있었다. 특히학생들의민주화투쟁자체는우선박정희정권의장기집권을막는것에서시작했지만, 운동을전개하는과정에서 민권, 민생 등민중의기본권, 생존권을계속강조하고있다는점에주목해야한다. 이시기의학생운동은단순히 3선개헌에대한반대만이아니라학원의자율과자유, 언론자유등기본권의보장을강력히요구하기시작했다. 또정치적기본권외에도민중의사회경제적기본권을보장해야한다는의식이확산되었다. 학생들이발표한많은선언문에서 민생 문제의해결이부쩍강조되었던것은이런의식을반영한것이었다. 다음으로학생운동의조직과운동양상을살펴보자. 이시기학생운동은각대학을근거로하여전개되었으며학생운동전반에영향을미치는전국적인조직은없었다. 그만큼중요한투쟁을전개할때운동을선도하는몇몇대학의역할이매우중요했다. 서울에서는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등이, 또지방에서는경북대, 전남대등큰대학에서학생운동이어떻게전개되는지에따라서전반적인운동의추이가좌우되었다. 또학교마다집회나시위를조직하는방식이달라방식의특성이강하게부각되기도했다. 또학교마다차이가조금씩있기는하지만, 전반적으로이시기투쟁과정에서학생회의역할은그다지크지않았다. 실제로군사정권에대한저항을기획하고집회와시위를조직하여투쟁을이끌었던것은당시서클이라고부르던학교내동아리들이었다. 학교마다학생운동에서핵심적인역할을하는몇몇서클들이있었고학교간의연대도실질적으로는이서클들사이의인적연대에기반하고있었다. 그만큼연대조직도강고하지않았다. 간혹학교간연대가시도되기는했으나몇차례만나서대책을논의하거나느슨한공동행동을시도하는데그칠뿐튼튼한조직으로발전하지는못했다. 야당과 재야 도박정희정권에저항하는주요한세력이었다. 그러나앞서언급했

208 2007 년현장민주화운동연구종합보고서 듯이김재준, 함석헌등일부를제외하고이시기재야란 원외 와유사한의미였다. 삼선개헌을이끈범투위도실질적으로는야당조직의외연을확장한것에가깝다. 독자적인투쟁역량이존재하지않았으며학생외에가장격렬하게투쟁했던것은 4.19 6.3 범청년회계열이었는데이중상당수는신민당조직과겹쳤다. 신민당은당내분열과갈등, 인선등으로삼선개헌반대투쟁을적극적으로전개하지못했다. 공화당이먼저논의를꺼내지않은탓도있지만당시야당은일찍부터개헌이시작될것을알면서도학생들이먼저삼선개헌반대운동을격렬하게전개하기전까지별다른활동이없었다. 이후에도학생들의격렬한반대운동에동참하거나적극적으로확대시키고자노력하지는않았다. 야당의반대운동은대학이조기방학에들어간 7월중순에야시작하여, 8월에주로진행되었다. 원내와원외의투쟁을병행한다고는했지만, 기실결사적인항쟁을벌였다고볼수는없었다. 야당은근본적으로선거를축으로하는정치질서안에존재해야했고, 이들의중심목표는이미 1971년의선거였기때문이다. < 참고문헌 > 1. 신문과잡지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국일보, 신동아, 사상계, 형성 2. 저서와논문 강광식, 1999, <1960년대남북관계와통일정책 >, 1960년대대외관계와남북문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편, 백산서당강대민, 2003, 부산지역학생운동사, 국학자료원강준만, 2004, 한국사현대사산책- 1960년대편 3, 4권,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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