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리뷰제 8 권제 1 호 ( 통권 15 호 ), 2018: 225~255 http://dx.doi.org/10.24987/snuacar.2018.08.8.1.225 중국의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활용추이와강화요인 : 청일 중일전쟁을중심으로 * 이중구한국국방연구원안보전략연구센터이글은중국당국에의한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의활용동학을검토하였다. 중국공식매체를통해청일전쟁과중일전쟁의기억이강화되는현상은영유권, 역사문제상의갈등으로인한국내민족주의감정의발로로이해되기도하고, 국내정치과정에의해일어난것으로도상정될수있다. 이글에서는 인민일보 에서청일, 중일전쟁을다루는기사들의추이를기초로중국당국의역사적활용추세를구하고, 그확대추이가일본발외부요인에의해설명되는지, 중국정치의권력강화국면으로설명되는지를실증적으로검토하였다. 그결과는두요인이결합되었을때에적대적대일기억의전략적활용이현저하게나타났음을보여주며, 내부적국내정치요인은적대적대일기억의활용이줄어들기어렵게한다는점과외부적일본요인은적대적대일기억의강화와직접적관련성이작다는점을제시한다. 여론에대한정치적민감성과민족주의여론모두가확대되었을때, 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문제가중국당국에의해적극적으로취급되는것이다. 주제어중일전쟁, 청일전쟁, 중일관계, 중국정치, 중국민족주의 I. 서론 이글에서는 중국정부는어떠한조건에서일본과의적대적인역사를보다강하게활용하는가? 라는질문을던진다. 이러한질문의중요성은동아시아지역의국제정치문화전개방향과관련된다. 특정국가내역사에대한지배적인이해가국제정치문화의전개방향에도영향을미치게된다는점때문이다. 수천년에이르는상호교류의역사를갖는동아시아의각국은적대적질서, 경쟁자적질서, 공동체적질서를모두경험했었다. 그리고이중에서적대적질서에대한 * 본고의발전을위해유익한논평을해주신여러심사위원님들께깊이감사드립니다. 이연구는 2016 년도서울대학교아시아연구소의아시아기초연구사업의지원과 2015 년도대한민국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 (NRF-2015S1A3A2046903) 의지원을받아수행된연구입니다.
226 아시아리뷰제 8 권제 1 호 ( 통권 15 호 ), 2018 기억에초점을맞출때, 그와관련된적대적정체성을국가가획득할수있는것이다. 그러한정체성은국가가자신이가진상대방에대한적대적이미지에따라행동하게함으로써상대방이실제적대자가되도록이끌며홉스적인국제정치문화의등장을추동한다 (Wendt, 1999: 263). 또한, 특정시점에강조되는역사는정책결정자의선호라는중요한정책결정변수에영향을미친다. 현재적으로전략적으로강조되고있는역사와문화는다수의국민과미래의정책결정자들에게내면화됨으로써그들의정치적태도에상당한영향을미치는것이다 (Nogee et al., 1995: 55; Callaghan, 2010: 31-60). 1 이러한점을전제한다면, 일본에대한적대적기억이중국에의해어떻게재생산, 확대되고있는가를이해하는것은동아시아지역질서의미래에대한전망과대처에있어핵심적인사항이다. 중국정부가제시할수있는적대적대일 ( 對日 ) 기억은 19세기 ~20세기의두개전쟁에대한것일수있다. 청일전쟁 (1894~1895) 과중일전쟁 (1937~1945) 이모두중국으로하여금일본에대한양보의손실과정치적단결의필요성을보여주는사례라는것이다. 청일전쟁 [ 혹은갑오전쟁 ( 甲午戰爭 )] 은 1895년 7월 25일중일양국의한반도에대한병력증강과정에서일본의선제공격으로시작되었으며, 중국의한반도에대한전통적영향력포기, 요동반도등의할양, 배상금 2억냥지급등을내용으로한시모노세키조약 [ 또는마관조약 ( 馬關條約 ), 1895. 4. 17] 에의해종결되었다 ( 김용구, 2012). 대만과센카쿠 / 댜오위다오에대한관할권도이때일본에게넘어갔다. 중일전쟁은북경서남부에서훈련중이던일본군이중국군과충돌한사건인 1937년 7월 7일의노구교사건으로시작되어, 1945년에태평양전쟁의종결과함께끝났다. 전쟁초기일본군의남경점령시보급체계가마련되지않고군기위반이방치된일본군에의해서중국민간인들이처참한상황에처한남경학살이발생했다. 그에따라고양된항일민족주의는중국공산당성장의밑거름이되었다. 이두가지전쟁은모두중국정부가자신의정책적입장을정당화하기위해활용하는일본에대한적대적기억이될수있다. 1 한편, 선호형성 (preference formation) 에대한접근성모델 (accessibility Model) 에따르면일 본과의적대적기억의담론은시기적으로강화된것자체만으로도대중의선호에영향을미친다 (Druckman and Lupia, 2000: 8-9).
중국의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활용추이와강화요인 이중구 227 II. 접근방식과연구방법 1. 접근방식 중국이청일전쟁과중일전쟁등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를활용하도록하는요인에대해서는크게두가지시각으로접근할수있다. 하나는중국국내의민족주의여론을확대시키는일본의대중 ( 對中 ), 역사정책등을중국의일본에대한적대적입장강화의원인으로보는시각이며, 다른하나는중국국내의정치과정을청일 중일전쟁의기억을소환하게하는요인으로서주목하는시각이다. 첫번째로, 청일전쟁과중일전쟁의역사가확대재생산되는현상은일본의보통국가화나영토 / 역사문제에대한강경한입장등외부요인에의해촉발되는현상일수있다. 우선, 이들외부적요인은중국국내의민족주의여론을급격히고조시킨결과, 중국당국으로하여금그러한여론을수용, 무마하기위한필요에서청일전쟁과중일전쟁등일본에대한적대적기억을강조하게할수있다. 천안문사태이후중국당국은사회주의이념의약화로인한통치정당성의침식을극복하기위해집중적인애국심교육프로그램을개시했고 (Zhao, 1998: 288-291), 그결과중국국내대중들의민족주의적입장은중국당국이통제하기버거울만큼성장한측면이있다 (Reily, 2011: 37-39). 2000년대에들어서는중국국내여론은외교정책의변수중하나로상정되고있으며, 2000년대후반들어중국의국가적성취에따른자긍심의고취로이러한경향은더욱확대되고있다고논의되는것이다 (Lampton, 2013: 73). 일본과의이해관계충돌로국내민족주의가고조된상황에서중국당국이적극적으로일본의입장을비판하지않는다면, 대중적수준의광범위한민족주의와그에입각한비판에의해잠재적으로정치적정당성이위협받을수있다는지적도존재한다 (Yu, 2012: 201). 뿐만아니라, 중국당국이과거역사를통해국내적으로일본이껄끄러워할중국내의반일민족주의를부추기는조치를하는것은일본에대한협상력제고차원에서이뤄지는것일수도있다. 양면게임 (two-level game) 의분석틀을통해본다면, 국내행위자들을통제할수있는중국과같은권위주의국가의경우받아들일수있는
228 아시아리뷰제 8 권제 1 호 ( 통권 15 호 ), 2018 합의방안 (win-set) 이넓으며, 그결과대외협상에서협상력을국내적이유를들어제고하기어렵다 (Putnam, 1988). 이러한조건에서센카쿠 / 댜오위다오문제에대한여러차례의중일협상을치러본중국은 2005년들어협상력제고를위해민족주의단체의반일활동을이용하는모습을보였다고도평가된다 (Chung, 2007: 62). 이러한외부적접근방식에서중국의청일 중일전쟁역사의선전확대는일본의영유권주장본격화동향에맞춰표출될것으로기대된다. 2010년이후보여지는중국의센카쿠 / 댜오위다오문제에대한한결강경한태도역시주동적인것이라기보다는반응적인것으로이해될수있기때문이다. 물론중국의국력증대를배경으로 핵심이익 개념의적용범위가대만에서신장, 티베트, 그리고센카쿠 / 댜오위다오등으로넓어지고있지만, 중국의 핵심이익 에대한공세적입장은미국, 일본등다른강대국들의도전에대응하기위해서공세적입장이필요하다는논리에의해도출되었다 (Swaine, 2011: 11). 중국의대일희토류수출금지조치와같이해양영유권문제에대한공세적대응이등장한 2010년초까지도중국이생각하는분쟁지역에대한기본전략 ( 협상과상황관리선호, 방위유지 ) 에는근본적인변화가없었던것이다 (Swaine and Fravel, 2011: 14). 2010년대들어와더욱강경해진센카쿠 / 댜오위다오문제에대한중국의입장도선제적이기보다는반응적성격이강했다 ( 이동률, 2015: 66). 두번째로, 중국지도부가청일 중일전쟁의역사적기억을강조하는것은중국국내적요인의결과일수도있다. 중국의권위주의체제에서는당국이국내여론을통제할수있으므로, 중국당국의일본에대한과거사제기는국민의민족주의감정에의해이끌려간결과이기어렵다. 그렇다고중국당국이국면전환등정치적이익을위해공세적으로조장한것이되기도어렵다. 국면전환이론에서는국내정치적위기에처한국가지도자가국제무력분쟁에개입하는등의방식으로대외적위협을이용해지지도의제고를도모하는경향이있다고본다 (Brody, 1984: 45-46). 이러한논리의연장선상에서는외부위협으로서일본의이미지는중국의정치안정에유용한수단이될수도있어보인다. 1937년에시작된중일전쟁은중국인들이민족공동체를인식하는계기가되었으며, 이러한대중적민족주의는그에부응한중국공산당의전국적정당성의기초였던것이다 (Johnson, 1962; 서진영, 1992: 334-335). 그러나선거제도하의국가지도자를전제한
중국의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활용추이와강화요인 이중구 229 이러한국면전환이론을중국에적용하기란곤란하다. 중국의권위주의체제에서는여론의관심을민족주의적갈등이나역사문제로돌려얻는이득이불확실하다. 비록일본에대한적개심이공산당의역사적정당성이나군사력건설정책의정당성을부각하는효과는있지만오히려중국인들의피해의식을자극해더큰소요를야기할수있기때문이다. 따라서일본에대한적대적인역사를중국당국이활용하게하는국내적요인은중국정치특유의과정에서찾아져야할것이다. 전반적으로중국당국은국민들의민족주의감정에끌려가지않지만, 특정한국면에서는국민들이제기하는역사문제를취급할방어적필요를갖는다. 이러한필요성은신지도부의권력강화혹은권력공고화과정에서찾을수있다. 중국의집단지도체제에서는집단지도체제하에서도지도자의영도력이발휘될수있도록구심점인핵심이존재한다. 2 이때문에총서기지위가후임자에게이양되어새지도부가출범된이후에는새지도부가핵심에걸맞은권위와세력을구축하는권력강화과정이적극적인양상으로전개되어왔던것이다 ( 공봉진, 2017; 안치영, 2016; 조영남, 2017a; 조영남, 2017b; 최지영, 2016; 한강우, 2016). 장쩌민 ( 江澤民 ), 후진타오 ( 胡錦濤 ), 시진핑 ( 習近平 ) 시기에모두이러한과정이보여져왔으며 ( 공봉진, 2017: 396), 새로운지도자의권력강화과정은막확보한제도적권력만이아니라군권, 자파세력, 권위등의실질적인권원 ( 權原 ) 을확보하는양상으로이해되었다 ( 공봉진, 2017: 418; 조영남, 2017a: 11-19; 조영남, 2017b: 4-7). 3 그리고이권력강화국면에서중국의지도자는국민의비판에보다민감해질수있다. 비록국민적지지가높다고해서당권을장악할수는없는중국정치에서, 국민의지지는군권, 이념, 파벌에비해덜중요한권력원이라고논의되어왔으나 ( 조영남, 2017a: 12), 당권을확보한최고지도자의추가적인권력강화를위한전략상국민의지지가필요하다. 장쩌민 2 덩샤오핑 ( 鄧小平 ) 은문화대혁명과같은비극을낳은독재정치의부활을방지하기위해중국의집단지도체제를설계했으나, 그것이파생시킬수있는정책결정의지연등의문제를방지하기위해구심점, 즉 핵심 지도자가존재해야한다고보았다. 3 이러한과정이생략되었을때에는신지도부는앞서당, 정, 군에자기세력을포진시켜놓은전임지도자들의영향력을극복할수없고, 결과적으로자기리더십을발휘하기어려운상태에계속놓여있게될것이다.
230 아시아리뷰제 8 권제 1 호 ( 통권 15 호 ), 2018 등이성공적으로권위를제고하고정적을제거할수있게한것으로서가장유효한권력강화전략이반부패운동등의정풍운동이었고 ( 공봉진, 2017: 416; 조영남, 2017a: 30), 이는광범위한사회적지지를바탕으로추진되어야하는것이기때문이다 ( 최지영, 2016: 127). 4 정풍운동을위해국민의지지를조성해야하는지도자는역사, 영토문제에유약하다는사회적비판에민감할수있는것이다. 그렇다면, 권력강화국면의지도자는청일전쟁, 중일전쟁의기억을활용하여자신이역사문제를망각하지않는지도자임을강조해야할필요를지닌다. 5 아울러, 중국의정치과정이대일정책에영향을미친다는점은여러각도에서지적되어왔는데, 권력교체기에정치적장악력과융통성이부족한신지도부는국민적정서를고려하여타협이나온건대응을하기어렵다는것이다 ( 이동률, 2015: 79-81). 다만, 외부적요인을적대적중일관계사활용의강화요인으로상정하는접근방식과내부적요인을강조하는접근방식중에서무엇이옳은지는실증적으로검토될문제이다. 각각의접근방식에의한예측이실제정치현상과배치될때에는각각은설명력을잃게되는것이다. 즉, 내부적요인은뚜렷하지않고외부적요인만명확하게존재할때에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가확대재생산된다면, 이결과는 중국정부는일본의센카쿠 / 댜오위다오문제에대한국내적반발무마혹은협상력제고를위해청일 중일전쟁의역사를활용한다. 는외부적접근방식이설명력을지닌다는점을보여줄것이다. 반면, 외부적요인의존재감은약하나내부적요인은뚜렷하게존재할때에청일전쟁과중일전쟁등과거사를소재로한선전의강도가강화되는현상이나타난다면, 이것은 중국정부는지도부의권력강화과정에서권위에대한비판을예방할필요성으로청일 중일전쟁의역사적기억을다룬다. 는내부적접근방식이타당하다는바를알려주게된다. 나아가, 중국의역사활용에대한실증적검토결과가외부적요인혹은내부 4 이희옥은반부패운동이권력투쟁을위한것으로이해되는경향이있으나, 반부패운동은전면적인개혁심화의목적도띈다고지적했다. 그리고반부패운동의권력기반은국민의지지로부터나온다고도언급했다 ( 이희옥, 2015: 20, 27). 5 이때문에, 중국이발전한오늘날에도지도자는 1930~40년대의역사와함께, 그시대의주역이었던마오쩌둥을전면부정할수없다.
중국의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활용추이와강화요인 이중구 231 적요인중어느하나로설명되지않는복합적결과를보일수도있다. 즉, 중국의적대적대일기억활용이외부적요인과내부적요인중하나만으로는강화되지않지만두요인이동시에존재할때에강화될수있다는것이다. 이러한결과는위에서제시한외부적접근방식이나내부적접근방식의논리중하나만으로는설명되기어렵다. 두가지요인을통합하여적대적역사활용의동학을생각할필요가있다는것이다. 일본요인으로중국국내의민족주의정서가팽창된현상과국내정치요인으로중국지도부의사회여론에대한민감성이확대된현상이결합된결과가적대적역사취급의확대일수있다. 이는중국국내의민족주의여론이당국의입장을변화시킬만큼충분히강하지는않지만, 사회적비판에대한중국정부의민감성이강화된권력강화시기에한해서는역사문제논의에대한정부의대응을이끌어내는역할을할수있음을의미한다. 2. 연구방법 이글에서는 인민일보( 人民日報 ) 에대한기초적인내용분석의방식을통해중국당국이과거의중일전쟁에대한역사적소재를활용하는추세를확인한다. 특정연도에청일전쟁과중일전쟁에관련된주제를다루는기사의빈도가증가한다면, 그해중국당국의일본에대한적대적기억을확대재생산하려는필요가높아진것으로볼수있을것이다. 물론일본과의적대적인기억을소재로하더라도미래지향적견지에서일본에대한포용적 긍정적태도를주문하는기사가있을것이나, 이때에도과거적대관계와충돌에관한기억은재생산된다. 청일전쟁과중일전쟁을테마로하면서도일본과의우호나교류의과거경험을다루는기사는매우보기드물다. 내용분석의분석대상은 인민일보 에게재된청일전쟁과중일전쟁관련기사이다. 인민일보 역시사회주의언론관에입각하여공산당의정책을지지하도록대중을조직, 동원하는선전수단으로서중국공산당의입장과의지를제시하는공식창구이다 ( 최윤규 최용준, 2013: 133). 비록최근중국관영언론의방점이당성 ( 黨性 ) 에서인민성 ( 人民性 ) 으로이동하는추세가있다고하더라도, 중국의선전부문은공산당의입장을지배적인담론으로만들기위한노력을하고있다. 공
232 아시아리뷰제 8 권제 1 호 ( 통권 15 호 ), 2018 산당의입장을정당화하는텍스트를전략적으로생산해내고, 그것을 인민일보, 신화통신, CCTV를통해전달한다 (Cao et al., 2014: 10-11). 나아가그기사들은중국전역의신문과방송에전재 ( 轉載 ) 된다 ( 강현두외, 1998). 물론 환구시보( 环球時報 ) 가민족주의를고무시키는역할을가지고있다는점에서중일관계의역사적소재를보다풍부히다루고있으나, 보다정책성이있는논의는인민일보를통해서야제시된다. 인민일보 는감정적표현을자제하는신문이기에청일 중일전쟁에대한기사가소수에불과하더라도, 그주제의정책적중요성의부침을직접적으로파악하기에는보다적합하다. 분석단위는청일전쟁과중일전쟁에관련된역사적주제이다. 일본에대한적대적기억을다루는기사의주제는청일전쟁과관련된것으로는 청일전쟁 ( 갑오전쟁 )( 일반 ), 센카쿠 / 댜오위다오가일본에넘어가게된계기인 마관조약 이있을수있다. 중일전쟁과관련된주제는 중일전쟁 ( 항일전쟁 )( 일반 ), 7 7 사변, 남경대학살 6 이다. 덧붙여, 덩샤오핑등원로세대의정치적영향력이사라지고국내민 6 남경학살은 1937년 12월부터 1938년 2월까지남경으로진격한일본중지나방면군에의해자행된사건으로, 중국민간인, 투항군인에대한학살사건이다. 당시일본군내의확전론자들은장개석정부가수도천도를발표한이후에도국민당의수도인남경을점령하면장개석을굴복시킬수있다고주장했다. 이러한주장이힘을얻어상해를점령한중지나방면군이남경을점령한다는것을골자로하는군사작전이추진되었다. 이러한작전은병참선이구축되지않은상태에서진행되었으므로, 일본군의식량조달등의과정에서남경근교의무수한민간인이살해, 강간등폭력에일방적으로노출되었다. 남경근교의민간인들은일본군의진군에대해잘숙지하고있지못했기에, 최악의경우에는촌락전부가몰살당하는참극도빚어졌다. 남경학살의가장비참한장면은일본군의남경점령이후에벌어졌다. 남경방어군사령관탕셩지 ( 唐生知 ) 의철수계획이일본군이남경으로진입한당일 (1937년 12월 13일 ) 에야하달되었으며, 심지어피난의관문인남경북문 ( 읍강문 ) 담당인 36사단에는사령관이외의부대통과를실력으로저지하라는명령이내려졌기때문에, 십여만의남경방위군이철수하지못한채남경시내에남겨졌던것이다. 퇴로가아군에의해차단된다수의중국군은전의를상실한채남경시내에남겨졌다. 남경점령후일본군은상당한수에이르는이들중국군을색출하여처형했으며, 이과정에서민간인도재판없이대거처형했다. 무엇보다남경학살당시일본군은남경철수중사로잡힌수만명의중국군병사들역시처형했다. 또한남경을점령한일본군은여성들에게말할수없는고통을주어매일수천명의여성이강간되고심지어살해되었다. 일본군의입성식이후일주일동안만최소 8천여건의강간사건이발생했다고알려져있다. 남경학살시발생한인명피해규모는사건이후적절한조사가행해지지못했기때문에정확히집계되어있지는못하지만, 동경재판에서도남경학살의규모가 20만명에이를것으로추산되었다 ( 도쿠시, 2017 참조 ).
중국의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활용추이와강화요인 이중구 233 족주의여론의정책결정과정에대한영향이상정될수있는시기를다루기위하여, 본연구의연구시기는후진타오지도부의활동이본격적으로시작된 2003 년부터최근까지인 2017년말까지로상정했다. 중국당국이청일 중일전쟁의역사를전략적으로활용하는현상이내부적요인과외부적요인의상호작용일수있음을고려하는것은내부적접근방식과외부적접근방식의통합을모색하게한다. 어떠한정책행위를내부적요인과외부적요인의상호작용결과로상정하는접근방식은브레처 (Michael Brecher) 등의통합작업에서보여져왔다 (Brecher, 1972). 여러변수를체계적으로통합할필요성을강조한브레처는외교정책투입을조작적환경과심리적환경으로폭넓게구분하고, 조작적환경은외부적요인 ( 세계적, 지역적, 양자적수준의상호작용 ) 과내부적요인 ( 정치군사력, 경제력, 정치체제, 엘리트경쟁등 ) 으로구성된다고보았다. 이글에서주요변수로주목하는일본의대중정책은브레처의조작적환경중외부적요인으로, 중국의권력강화과정은조작적환경의내부적요인으로상정할수있을것이다. 이러한통합적접근방식은새로운개념및일반화될가설의도출, 외교정책설명의정교화, 외교정책예측등에기여한다 ( 허드슨, 2009: 277-279). III. 중국의적대적역사활용강화요인 1. 일본요인 후진타오지도부가출범한 2003년부터오늘날에이르는시기를살펴보았을때, 중국의국내반일여론강화를초래할수있는일본측의요인이두드러졌던해는 2005년, 2010년, 그리고 2012년이다. 우선, 2005년에는일본신보수세력의대외정책노선이본격화됨에따라중일간의이해관계충돌지점이대폭확대되었다. 7 앞서서도중일간에는야스쿠니신사참배문제와 2004년부터본격화되 7 손기섭은고이즈미총리등신보수세력의대외정책노선의대표적인내용으로평화헌법개정, 미일동맹강화, 실효적방위력의확충, 안보리상임위진출, 72 년체제 의중일관계탈피등을꼽고
234 아시아리뷰제 8 권제 1 호 ( 통권 15 호 ), 2018 고있던센카쿠 / 댜오위다오열도를둘러싼분쟁이라는쟁점이존재하고있었으나, 2005년에들어서면서일본의유엔안보리상임이사국진출문제와방위정책문제등으로보다넓어지게되었다는것이다. 2005년봄고이즈미 ( 小泉純一郞 ) 내각은유엔안보리의확대방안을통해상임이사국진출을시도했으며, 2004년 12 월발표한방위계획대강개정안에서는성장하고있는중국의군사력이 중대한위협 이될수있다고규정했다 ( 손기섭, 2006: 127-131). 나아가일본문부성은후쇼사 ( 扶桑社 ) 의새로운역사교과서까지승인했다. 이러한일본의대내외정책노선변경징후는중국의강력한반대에직면했다. 중국국내에서도일본의유엔안보리상임위진출반대서명운동을시발점으로북경등주요도시에서대규모반일시위가진행되었다 ( 김성철, 2016: 12). 중국당국은국내대중들의반일감정을자제시키고자노력했으나, 일본발악재가잇따라사태진정이쉽지않았다. 8 2010년에는중국의국력상승에위기감을느낀일본의대응이강경한양상으로표출되었고, 중국의경제보복조치발표가초래되었다. 2010년 9월에는센카쿠 / 댜오위다오열도근해에서중국어선이일본의해양보안청경비선을고의로충돌한사건이발생했다. 일본정부가중국어선의선장을구속하자, 중국은일본측의사과와배상을요구했다. 일본으로의희토류수출을제한하고일본시민 4명을군사시설촬영혐의로억류하는등일본에압력도행사했던것이다 (Rosenbluth, 2011: 51). 유엔에서까지일본의대처를문제시했다. 2010년 9월 23일유엔총회연설에서원자바오총리는주권, 통일, 영토보존과같은핵심이익에대해서는절대로타협할수없다고밝혔던것이다 ( 김성철, 2016). 이에칸나오토내각은중국선박선장을즉시석방하는등사태를조용히수습하기위한조치를진행했다. 덧붙여, 중일간의갈등에대한칸나오토내각의조치에대한일본국민들의평가는부정적이었다. 그해연말에는민주당내각에대한지지율이 있다. 중일관계와관련된 72년체제 란 1972년의중일공동성명, 1979년의중일평화우호조약을기초로성립된중일관계의대강을가리키는것으로서중일간의정치외교정상화, 경제교류긴밀화, 미중일간의외교안보제휴등을지향하는것을내용으로한다 ( 손기섭, 2006: 113). 8 이어 2006년부터중일관계는소강상태에들어갔다. 그해 9월아베총리의취임으로중일간의갈등이완화되었으며, 원자바오총리의방일 (2007. 4), 후진타오주석의방일 (2008. 5) 등으로양국간정치관계가정상화되어갔다고하겠다. 2009년에도동아시아공동체건설, 중일우호협력관계구축을중시하는하토야마내각의출범으로중일간의불협화음이크지않았다 ( 김성철, 2016).
중국의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활용추이와강화요인 이중구 235 약 1/3로급감했던것이다. 자민당도재집권을위해주변국에대한영유권주장관철을집중적으로요구했다. 이러한국면에서 2011년여름자민당의원 3명이독도방문을위해한국에방문하는사건이일어나기도했다. 뿐만아니라, 총선을앞둔 2012년가을부터일본의대중정책은중국과의이해관계충돌을빚는방향으로전개되었다. 무엇보다 2012년 9월에일본정부는센카쿠 / 댜오위다오열도에대한실효적지배를강화하기위한조치를취했다. 2012년 9월에민간인으로부터센카쿠열도의등대를구입했던것이다. 이것은군사위협을수반한중국의강경한대응으로귀결되었다. 그해말중국군항공기가센카쿠 / 댜오위다오상공을비행했으며, 이듬해 1월에는동중국해에서중국해군프리깃함이일본함정에사격관제레이더를조사 ( 照射 ) 하기까지했던것이다 ( 김성철, 2016: 10). 아울러, 2013년이후에도중국에대한견제를추구할것이라는일본의정책은명확했다. 2012년 12월말의총선에서자민당이승리했고, 국가적자존심과힘의회복을대외정책의핵심의제로내건아베 ( 安倍晋三 ) 내각이출범했기때문이다 (Inoguchi, 2013: 101-106). 센카쿠 / 댜오위다오문제에대한아베내각의입장은기존의노다내각의입장과큰차이가없는것으로평가되었다 (Inoguchi, 2014: 104). 2014년에들어서야중일관계는봉합국면으로진입하게될수있었다. 2014년 11월 10월북경 APEC 정상회담에서아베총리와시진핑주석은중일관계의개선을모색하는데합의했다. 이정상회담에서이뤄진해공군간연락메커니즘을구축한다는합의는그이듬해 5월말중일간군사회담에서도재확인되었다 ( 김두승, 2016: 52-53). 2. 국내정치국면 다음으로권위제고의필요성이강한신지도부의권력강화기는후진타오지도부와시진핑지도부의집권 2~3년차인 2004~2007년과 2014~2017년에서찾아볼수있다. 다양한세력이공존하는집단지도체제의특성상, 중국의새로운지도자에게는집권직후부터타세력을약화시켜야하는권력투쟁이불가피하다. 최소한경쟁세력을통제가능한범위로약화시키지않는한, 여러방향에서의견제에의해권력행사에제약을받기때문이다. 특히, 2002년 11월국가주석
236 아시아리뷰제 8 권제 1 호 ( 통권 15 호 ), 2018 에취임한후진타오는장쩌민전주석에게군권을이양받지못하고쩡칭홍 ( 曾庆红 ) 등장쩌민세력 ( 상하이방 ) 의견제를받는가운데임기를시작했다. 당중앙의 핵심 이라고불렸던장쩌민과달리후진타오주석은퇴임시까지도 핵심 칭호를얻지못했다. 후진타오집권초기만해도실질적인최고권력자는장쩌민이었던것이다 ( 공봉진, 2017: 402-403). 먼저, 후진타오가지도자역할을위해권력을집중적으로확대한시기는 2004년부터 2005년사이의시기에해당한다. 이시기에후진타오주석은자신의의제를관철시키기위한노력을했고, 장쩌민주석에게군권을이양받음으로써비로소당, 정, 군을모두장악할수있게되었던것이다. 국가주석에취임한직후부터후진타오주석은반부패정책을통해타세력들을견제했으나, 2004년가을에들어서야권력을확대할수있는단계에진입했다. 2004년 9월에야후진타오주석은장쩌민주석으로부터군권의일부를이양받을수있었던것이다. 그달장쩌민전주석은당중앙군사위주석직을후진타오주석에게넘겨주었다. 이때로부터후진타오의정치적행보는적극적으로변모했는데, 같은달의공산당 16기중앙위원회 4차전체회의 (16기 4중전회 ) 에서자신의통치이념을구성하게될조화사회의개념을처음으로제시했던것이다. 이듬해인 2005년 9 월후진타오주석은국가중앙군사위원회주석직까지장쩌민으로부터넘겨받았다. 이는후진타오주석이비로소군권을공식적으로장악하게되었음을의미했다. 그와함께, 그는자신의통치이념을국가전략에구체적으로반영하는성과를얻고자노력했다. 경제성장보다는지속가능성과평등에무게를두는성격을가진후진타오주석의정책노선이 2005년 10월에열렸던 16기 5중전회에서국민경제및사회발전제11차 5개년계획 (2006~2010, 11차 5개년규획 ) 에반영되었다 (Sach, 2006). 아울러 16기 5중전회에서는후일후진타오의사상적업적으로남겨지는과학적발전관과조화세계구축의구호도제시되었다. 9 이어 2006년과 2007년도후진타오주석의권력강화국면의후반에놓여있 9 이러한후진타오의정책노선은전임자인장쩌민전주석과의노선과는분명한차이점을보였다. 그의정책노선은보다정통주의적이고, 대중영합적이었으며, 외교정책부문에서도미국과의거리 두기를시도했다.
중국의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활용추이와강화요인 이중구 237 었다. 2006년에도후진타오주석의권력강화동향은계속되었다. 후진타오주석은 2006년 9월상하이방의대표적인인사인천량위상하이시당서기를부패혐의로구속함으로써상하이방을추가로약화시켰고, 그다음에는바로다음달에열린 16기 6중전회를통해자신의통치이념을공식적으로제기하는데성공했던것이다. 다만 2007년에들어서서는후진타오주석의권력강화동향은더이상극적인형태로이뤄지지못했다. 그의정치적성과는 2007년 17기전국대표대회에서상무위원을 1석더가져온데불과했던것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후진타오주석은중앙조직부장에자파의리위안차오 ( 李源潮 ) 를, 상하이시장에위안순칭 ( 袁純淸 ) 을앉히면서점진적으로세력을확대할수는있었다. 또한제한적인성과나마 2017년 10월의 17차당대회에서후진타오주석의과학적발전관이지도이념으로반영되었다. 다음으로, 시진핑주석의권력강화노력도국가주석취임후 2년차인 2014 년부터집중적으로이뤄졌다. 시진핑주석은후진타오전지도부에비해권력강화의측면에서유리한고지에서임기를시작했다. 후진타오전주석이당권과군권을동시에시진핑주석에게이양했던것이다. 그러나통상상무위원이맡는직책인국가부주석을공청단파의리위안차오가맡는등후진타오전주석의영향력행사시도가있었고, 이에시진핑도집권초기부터반부패정책을추진하는등다른세력을견제하기위한포석을두었다 ( 공봉진, 2017: 408-409). 특히, 2013 년말부터시진핑주석의권력강화노력은반부패운동을통한여러세력에대한다발적인견제로본격화되었다. 전직상무위원에대한부패혐의조사라는이례적인사건이 2013년 12월에발생했다. 범상하이방에속하는저우융캉 ( 周永康 ) 전상무위원의비리혐의가일반에공개되었던것이다. 또한 2014년 6월 30일에는쉬차이허우당중앙군사위부주석에대한조사착수도발표되었다. 이를통해시진핑의군장악력이크게확대되었는데, 저우융캉과쉬차이허우 ( 徐才厚 ) 에대한조사결정을지지한다는결의를인민해방군각군구가발표했던것이다 ( 조영남, 2015: 141-142). 후진타오전주석의공청단파도 2014년 12월의링지화 ( 令計劃 ) 전통전부장에대한부패혐의조사및면직조치로가시화되었다. 이처럼 2013 년말부터 2014년시진핑의정치행보는범상하이방, 군부, 공청단파를상대로한다발적인권력강화라는특성을보이고있었던것이다.
238 아시아리뷰제 8 권제 1 호 ( 통권 15 호 ), 2018 또한, 2015년에도시진핑주석은자신의권력강화사업을일단락짓기위한노력을지속했다. 그해 6월저우융캉에게무기징역이언도되었고, 5중전회를앞둔 10월에는저우융캉의측근들에대한사법조치도가속화되었던것이다. 가장강력한경쟁세력이었던상하이방을약화시킨결과로, 시진핑은 2015년 10월 26 일부터 29일까지개최되었던 5중전회에서소강사회 ( 小康社會 ) 건설과중고속성장을추구한다는기조를 13차 5개년계획에반영할수있었다. 동시에그는당중앙의 핵심 으로까지호명되었다. 10 2016년에도지속된시진핑주석의권력강화노력은 2017년에는결속수순에접어들었다. 2016년여름시진핑은링지화에대한사법조치를마무리짓고, 11월에는세곳의성급행정단위에서감찰위원회제도를시범실시함으로써국가감찰체제의구축도추진해가기시작했던것이다 ( 공봉진, 2017: 410-414). 이러한권력강화를위한지속적노력은 2017년중국공산당당대회에서시진핑사상이당헌에삽입됨으로써최종적목표에도달했다. IV. 중국의청일전쟁 중일전쟁역사활용추이와동학 1. 청일전쟁에대한활용추이 인민일보 에서청일전쟁을주제로다루는기사는해권확보의중요성, 해군력건설의필요성등을강조하는경향을띄며, 지도부의단결에기초한지도력이필요하다는점을함께강조한다. 역사의활용에있어서는역사적현상과그로부터얻어낼교훈이함께중요하다고볼때, 그기사가정당화하는정책방향이무엇인가에도주목할필요가있다. 그러한고려에서, 청일전쟁의역사적기억이해군건설의필요성이라는교훈과맞닿아있다는점은주목되는부분이다. 10 문화대혁명을초래한강력한독재자의출현을방지하기위해덩샤오핑은집단지도체제를구축했으나, 분할이야기할결정의지체, 통일성의부재와같은단점도예방하기위하여지도부내에단결의구심점이있어야한다고보았다. 덩샤오핑은장쩌민을중심으로후계지도부가단결할것을주문하고, 그러한단결의중심이될장쩌민을 핵심 이라고칭했다 ( 안치영, 2016: 392-394).
중국의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활용추이와강화요인 이중구 239 참고로, 청일전쟁은중국내에서통상 갑오전쟁 ( 甲午戰爭 ) 이라고불린다. 청일전쟁의역사적교훈으로해군건설의필요성을강조하는경향은 2003 년이후의시기중처음으로관련기사가등장한 2004~2005년에도보여졌다. 2004년 7월 18일의웨이하이소재청일전쟁기념관에대한방문기는세계제4 위의북양해군이궤멸되고시모노세키조약의체결로영토할양등의강화조건을받아들여야했던청일전쟁을굴욕적인역사로제시했다. 그로부터이방문기는청일전쟁기념관에대한관리위원회의노력을높이평가하면서국가적해권확보의중요성을강조하는뉘앙스를표출했다. 이기념관이중국의해권의식을높이기위한목적등에서설립되었다고언급한것이다 ( 人民日報 04/07/18). 또한 2005년 8월 9일의한기사역시일본문부성이일본우익의신역사교과를승인한것과관련해그것이청일전쟁의기원과성질을청국의대일본견제에의해촉발된것으로왜곡하고있다고지적하고있다. 이를통해이기사는당시일본의중국위협론도야마가타아리토모 ( 山縣有朋 ) 에의해만들어진허위였다며일본내의중국위협론을비판하고, 청일전쟁시기일본의대중정책은중국의허약함을전제로추진된것이라면서국력강화의필요성을역사적교훈으로제시했다 ( 人民日報 05/08/09). 그림 1에서보듯이청일전쟁을주제로하는기사는 2014년에상대적으로크게확대되었다. 2014년은청일전쟁발발 120주년이되는해이자해군건설이강조된해였으며국내적으로는시진핑으로의단결이강조되던해였다. 특기한것은 2014년청일전쟁주제의기사들은해군력건설의필요성만이아니라정치적지도력의필요성을청일전쟁의교훈으로제시하고있다는점이다. 2014년 7월 24일자의 전쟁과평화의변증법을명심하자 ( 牢記戰爭与和平的辯証法 ) 는청일전쟁 120주년을계기로게재된기사로서청일전쟁은중국근대사의의미깊은기원적사건이라고강조했다 ( 人民日報 14/07/24). 황해전투를계기로중일간의위치가역전된결과, 동아시아질서가다시빚어졌다는것이다. 이글역시 2004~2005년즈음의청일전쟁기사와유사하게청일전쟁패배의교훈을당시중국의허약함에서찾았고, 중국의부흥이라는목표의중요성을강조했다. 그러면서도청일전쟁으로부터얻을수있는정치적함의를강조하는면모를보였다. 중화민족의위대한부흥에다가갈수록압력과위험도커지므로물질적으
240 아시아리뷰제 8 권제 1 호 ( 통권 15 호 ), 2018 4.5 4 3.5 3 2.5 2 1.5 1 0.5 0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청일전쟁 ( 일반 ) 마관조약 그림 1 인민일보 의청일전쟁을주제로하는기사의추이 (2003~2017) 로만이아니라정신적으로도중국이강해져야한다는것이다. 8월 8일의기사역시그연장선에서청일전쟁과같은패배를반복하지않기위해서는지도부내부의전략적의지와단결이중요하다고강조했다. 남경대학의역사학과교수와군사학과교수에의해쓰여진이글은청나라의청일전쟁패배원인을조정내의의견불일치에따라파병이늦어진점등에서찾았고, 이러한일을되풀이하지않기위한단결과결의의중요성을제시했던것이다 ( 人民日報 14/08/08). 8월 24일의청일전쟁 120주년토론회기사에서는청일전쟁의정치적함의와해군력건설의필요가모두다뤄졌다 ( 人民日報 14/08/24). 판찬룽 ( 范長龍 ) 부주석은갑오전쟁의교훈을언급하면서정치적함의에해당할문제인국가정치안전, 국가통일목표, 주권및영토완정문제를거론했고, 우셩리해군사령관은강력한해군건설의필요성을병행강조했던것이다. 덧붙여, 시모노세키조약에대한기사에대해서도별도로주목해볼수있다. 시모노세키조약은센카쿠 / 댜오위다오와대만의할양을내용으로했던조약이기때문에, 그에대한기사는좀더세부적인결론이나교훈을제시하는데활용될수도있기때문이다. 그러나예상과달리시모노세키조약에대한관련기사는 2013년 5월의관련기사가유일했다. 이기사는일본의센카쿠 / 댜오위다오열도에대한영유권주장의타당성을검토하고비판하는것을목적으로한기사였다. 이기사는시모노세키조약에서할양된대만부근도서에는센카쿠 / 댜
중국의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활용추이와강화요인 이중구 241 오위다오가포함되어있지않으며, 심지어중국정부는시모노세키조약을 1941 년에폐기했다는점에서앞으로그에의해일본이접수한팽호열도도중국으로돌아와야할것이라고주장했다. 이로부터시모노세키조약이라는역사적소재는외교적함의도출에한정되어활용되고있음을볼수있다. 2. 중일전쟁에대한활용추이 앞에서 인민일보 의기사내중일전쟁에대한주제를중일전쟁일반, 7.7사변, 남경학살로구분하였다. 그에따라서각각의주제가어떠한교훈으로연결되고있는지를함께살펴봄으로써, 중국의중일전쟁에대한관점을파악하고자한다. 1937년에시작하여 1945년까지진행된중일전쟁은중국내에서는통상 항일전쟁 ( 抗日戰爭 ) 으로불리고있다. 첫번째로, 중일전쟁전반에대한기사는 2005년과 2014~5년에집중적으로등장하였으며, 화평발전의기조와분리되어있지않았다. 마오쩌둥 ( 毛澤東 ) 이래여러지도자들이중일전쟁을중국공산당의승리로규정한바탕에서, 중일전쟁은군사적대비의필요성보다는전후질서의강화발전이나갈등방지를위한건설적노력의필요성이라는교훈과정치적으로결합되어있는것이다. 2005년의예를들면, 2005년 8월 14일에진행된후진타오주석의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참관에대한기사는후주석의역사문제에대한언급을게재했다 ( 人民日報 14/08/15). 이기사는후주석이중일전쟁은중국의위대한승리였으며, 역사를명심하고, 과거를잊지말고, 평화를소중히하며, 미래를창조해야한다 ( 牢記歷史, 不忘過去, 珍愛和平, 開創未來 ). 라는언급을제시했다. 이는중일전쟁으로부터얻어낼교훈의방향을다시한번강조한것으로서, 중국내에반일집회가연속적으로일어나는배경에서도중일전쟁의교훈은후진타오주석이제시한방향에서강조, 재강조되었다. 2005년에잇달아개최되었던중일전쟁승리 60주년토론회, 중일전쟁승리기념대규모문예공연등에대한기사역시 역사를잊지말고미래를창조하자 등의요구에따른정책방향을정당화했으며, 화평발전의노선이지속되고있다는메시지를제시했다 ( 人民日報 05/09/02, 05/09/03).
242 아시아리뷰제 8 권제 1 호 ( 통권 15 호 ), 2018 한편, 2014~2015년의중일전쟁일반관련기사역시이러한경향을보였다. 중일관계가좋지않던 2014년초의남경학살국가추모일에관한기사는남경학살시 30만명의동포가살해되었다는점을강조하면서도, 역사를명심하는목적은그러한비극을다시나타나지않게하려는데있다고제시하고일본의변화를촉구했다 ( 人民日報 14/02/28). 시진핑주석과아베총리의정상회담으로제한적이나마중일관계개선이모색되는배경에서제시된 12월의관련기사는중일전쟁시기사상자및피해자연구총서의발간을소재로하여중국공산당이단독으로항일활동을개시한 1931년부터 1945년간중국이받은피해를설명하고, 고난의역사를되풀이하지않기위한공동의노력을중시한다는입장을밝히고중일관계개선의신국면을열어가야한다는점을강조했다 ( 人民日報 14/12/10). 가장주목되는것으로, 2015년 9월 3일의중일전쟁승리 70주년기념대회의시진핑연설이 9월 4일자 인민일보 에전재되었다. 여기서시진핑은중일전쟁으로인한중국인들의인명피해가 3,500만명에이른다는점이강조됨과함께중국은화평발전노선을견지할것이며군사적팽창을추구하지않을것이라는입장을제시했다 ( 人民日報 15/09/04). 두번째로, 중일전쟁이촉발된 7 7 사변에관한기사의빈도는전반적으로높지않았으며, 중일전쟁일반관련기사의발표추이와달리 2007년에주로발표되었다 ( 그림 2 참조 ). 7 7 사변은그로부터 70주년이되는 2007년에만집중적으로다뤄졌던소재라고도할수있는것이다. 그리고 7 7 사변을소재로제시하는교훈은중국내부가단결하여국가부흥에힘쓸것등일반적요구에집중되어있었다. 일례로 2007년 7월 8일에는 7 7 사변 70주년을맞아베이징, 시안, 션양, 궤이린등각지에서개최된각종의활동이다루어졌다 ( 人民日報 07/07/08). 이기사는유관인사의입을통해 7 7 사변을기념하는의미는국치를잊지않기위한것과중국의발전을위해매진하자는데있다고밝혔다. 세번째로, 남경학살을다루는기사의추이는중일전쟁일반과큰차이가없으며, 기사의교훈혹은함의역시화평발전의기조와충돌하지않았다. 남경학살관련역사를보존하기위한노력, 그러한비극의방지, 일본의책임있는태도에대한촉구등의필요성을남경학살관련기사는그결론으로도출하고있었던것이다. 2005년이전에도일본정치인의실언에대한한국외교부의발언
중국의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활용추이와강화요인 이중구 243 90 80 70 60 50 40 30 20 10 0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중일전쟁 ( 일반 ) 7.7 사변남경학살 그림 2 인민일보 의중일전쟁을주제로하는기사추이 (2003~2017) 을인용하는등중국은일본의정확한역사인식을요구하고있었다. 2005년초에는역사교과서문제가불거짐에따라관련심층취재가게재되었다 ( 人民日報 05/01/21). 일본, 두가지의역사관이대결하고있다 ( 日本, 兩种歷史在較量 ) 라는제목의이기사는후쇼사역사교과서의낮은시장점유율 (0.3%) 과함께가장큰점유율을가진동경출판역사교과서의남경학살관련내용이후쇼사의그것과비교되어제시되었다. 남경학살이국제적으로는남경대학살이라고도불림을주해에명기한동경출판과달리후쇼사역사교과서는남경학살문제에대해서는의문점이많다는점을강조하고있다는것이다. 이어, 이기사는이러한현상을일본의역사교과서부문의동향에주의해야한다는주문정도와연결했다. 일본에대한어떠한강경대응을정당화하는논의가아니었다는것이다. 또한, 그해 6월 10일자 인민일보 의기사역시역사보존의필요성정도를강조하는데그쳤다. 나치의유대인학살에관한자료보다도일본군의점령초기에발생한 1937년남경학살에대한자료가더욱적다는문제를제기하고, 남경학살관련유적은물론항일전쟁일반의유적을보존함으로써피눈물이맺힌역사를자손들이알게해야한다는것이다 ( 人民日報 05/06/10). 다만, 2014년에다시급증한남경학살관련기사는화평발전의기조가중시되어야한다는것을강조하는등과거의연속선상에있으면서도국력강화필요성도정당화하는논의와결합되는다소간의변화도보였다. 2014년에남경
244 아시아리뷰제 8 권제 1 호 ( 통권 15 호 ), 2018 학살관련기사가대폭적으로강화된계기가된사건은 2014년 2월 28일에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남경학살발생일 (12. 13) 을국가적추모일로지정한것이었다 ( 김성철, 2016: 4-5). 2월의한기사는일본의 NHK 경영위원인하쿠다나오키 ( 百田尙樹 ) 가비판을받고있다는것을소재로중국외교부대변인의일본의역사반성촉구발언을소개했다 ( 人民日報 14/02/06). 4월 5일자의기사도남경학살을은폐하려는일본측의동향에대한국제사학계의다양한비판을소개로인류의정의와평화를지키고역사의비극이되풀이되는것을막아야한다며일본측의반성을촉구했다 ( 人民日報 14/04/05). 아베내각이역사를책임지는태도로실질적인조치를취해야한다는말도덧붙였다. 가장주목되는것은남경학살피해자국가추모일지정에따른추모의식을다룬 2014년 12월 14일의기사이다. 시진핑주석등중국공산당중앙, 전국인민대표대회 ( 전인대 ) 상임위원회, 국무원, 전국정치협상회의, 중앙군사위소속지도자들이대거참석한이행사를다루면서, 이기사는남경학살에대한추모로부터인류평화와발전의숭고한사업의의미를기린다고언급하면서중일전쟁에대한기존의정치적해석을재확인했다 ( 人民日報 14/12/14). 또한그때중국이충분히강했다면남경학살이일어나지않았을것이라는언급을통해국력강화의필요성도시사했다. 2016년 12월남경학살피해자추모식에대한기사는남경학살과같은절체절명의위기를극복한것은중국공산당의영도에따라중국국민이단결했기때문에가능했다고강조했다 ( 人民日報 16/12/14). 이처럼일본정부의변화를촉구하는대응방향과함께그외의새로운목표 ( 국력강화, 당성강화 ) 와연결되는약간은열린논의를제시하는데남경학살의역사적기억은활용되어갔다. 3. 적대적역사활용의동학 앞의기술속에서간략히제시한청일전쟁과중일전쟁에대한 인민일보 의기사들의전체적추이를살펴보면, 그림 3과같이나타낼수있다. 이는중국의적대적대일기억활용이보다강하게이루어진시기와그렇지않은시기를파악할수있게해준다. 한걸음더나아가면, 3장에서언급한중국의대내외적조건이이러한전체적
중국의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활용추이와강화요인 이중구 245 120 100 80 60 40 20 0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청일전쟁 ( 일반 ) 마관조약중일전쟁 ( 일반 ) 7.7 사변남경학살 그림 3 인민일보 의청일전쟁및중일전쟁을주제로하는기사추이 (2003~2017) 추이의변화와정말관련이있는지, 있다면어떠한관련이있는지를살펴볼수있다. 이때, 대외적조건은 중국이 72년체제에서미해결사안으로두기를바랬던 센카쿠 / 댜오위다오문제에대한일본의실효적지배강화노력혹은우경화등중국국내의민족주의정서를자극하는일본발요인을말한다. 이러한요인이등장할경우, 중국의국내민족주의여론은확대되고, 중국당국은국내적비판을잠재우기위한목적에서또는그를통해대일협상력을강화하기위한목적에서역사문제를적극적으로제기할수있는것이다. 한편, 중국의국내변수는정치지도자의권위에대한비판을예방하려고하는새로운지도부의권력강화국면이다. 이러한국면에서정치지도자는국내청중들에게자신의권위를인정받으려는위치에서사회적으로확대되는문제를무시하기보다는자신혹은당국이역사문제를원칙적으로다루고있음을보여주고자할수있다는것이다. 이러한요인들의출현여부와중국의적대적대일기억의활용추이간의관계를살펴보기위해양자를함께나타내면, 그결과는표 1과같다. 이러한정리는어떠한요인에의해중국의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의전략적활용이이루어진것인지를설명해준다. 첫째, 일본의대중정책이라는외부적요인만으로는중국이청일전쟁과중일전쟁역사를보다강도높게활용한다고하기어렵다. 표 1에서보듯이 2010년, 2012년, 2013년등대내외요인중외부요인만뚜렷했던시기에, 인민일보 에서청일 중일전쟁이주제로다루는경향은
246 아시아리뷰제 8 권제 1 호 ( 통권 15 호 ), 2018 표 1 중국의적대적대일기억활용에대한영향요인과활용추이 구분 일본의정책에따른중국내부민족주의확대 지도자의권력강화기 청일 중일전쟁활용추이 2003 - - 6 2004-6 2005 90 2006-10 2007-19 2008 - - 1 2009 - - 3 2010-11 2011 - - 7 2012-0 2013-3 2014 102 2015-78 2016-12 2017-27 확대되지않았다. 특히, 2010년의경우, 이러한약한관계는뚜렷하다. 중국이희토류수출금지등일본의굴복을얻어내기위해강경한대응을했던것에비한다면, 역사문제를주제화한 인민일보 기사는 11건에불과하다. 물론, 2010 년센카쿠 / 댜오위다오문제에대한중국측강경대응의배경에는권력투쟁과같은국내적요인이있던것으로논의되기도하지만 ( 아마코, 2014: 115-122), 이는주요한권력투쟁이아니었다. 중국당국내의입장차해외자원확보와국제협조중어디에우선순위를둘것인가라고하는정책문제에한정되어있었던것이다. 둘째, 적대적대일기억활용의고조직후에는권력강화국면이라는내부적요인만으로도청일 중일전쟁역사의활용정도가일정하게유지되는현상이나타났다. 일본발외부요인은약했지만권력강화요인이존재하던시기는 2004년, 2006~2007년, 2015~2017년이었다. 이중에서적대적대일기억의고조가선행되지않은 2004년에는적대적역사의활용이강화되는추세가관찰되지않았으나, 적대적대일기억이높은수준으로활용된시점직후의시기인
중국의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활용추이와강화요인 이중구 247 표 2 중국의적대적대일기억의영향요인과활용정도 구분외부적요인만작용내부적요인만작용 외부, 내부적요인 동시작용 해당연도 2010, 2012, 2013 2004, 2006~2007, 2015~2107 2005, 2014 연평균활용건수 ( 인민일보 ) 4.67 25.3 96 활용정도저중고 2006~2007년과 2015~2017년에는비교적높은수준으로청일전쟁과중일전쟁등적대적역사가 인민일보 에서제시되었다. 내부적요인만작용한시기에는적대적역사의활용정도가직전의고조기보다감소세를보이기는했지만, 내부적요인이존재하지않았던시기보다는높았다는것이다. 이러한추세의뜻은권력강화의내부적요인은앞선시기에고조된적대적역사의활용을일정하게유지시키는역할을수행했다는것이다. 이와같이권력강화요인에따라직전시기의적대적역사활용이중간정도의수준에서유지되는경향은중국당국의적대적대일역사활용이국내여론에대한수세적인대응일가능성을시사한다. 즉, 권력강화국면에서는대내적권위의실추를우려하여지도자가직전의시점에제시한원칙적입장을가급적견지하고있음을강조하는것이다. 셋째, 일본발국내여론악화라는대외적요인과권력강화국면이라는대내적요인이결합될때에는지도자의차이에도불구하고청일 중일전쟁역사의활용정도가대폭확대되는현상이나타났다. 2005년과 2014년이그러한대폭적강화의예이다. 대외적요인과대내적요인이모두존재했던이두해에는청일 중일전쟁에대한활용기사건수가각각 90건, 120건으로최고수준에도달했다. 이는지도자의권력강화국면과중일관계악화에따른민족주의정서의확대가겹쳐졌을때, 중국당국이청일전쟁과중일전쟁등역사적논의를통해대내외정책을더욱적극적으로정당화하는모습을보였다는바를의미한다. 즉, 권력강화기에중국의지도자는중일관계에따른민족주의정서의확대에적극적인방식으로대처했던것이다. 추가적으로, 또하나흥미로운점은중일전쟁에대한논의가최고점에도달한 2005년과 2014~5년의시기를비교할때, 2014~2015년의경우에는남경대학
248 아시아리뷰제 8 권제 1 호 ( 통권 15 호 ), 2018 살에대한기사건수가증가했다는점이다. 기본적으로는이러한내용적변화는 2014년초매년 12월 13일을남경학살피해자국가추모일로지정한전인대의결정과관련되어있다. 남경학살에대한논의는 2014년을기점으로대폭확대되었기때문이다. 남경학살에대한논의는전술했듯이교훈이열린논의로서기존의대일반성촉구는물론, 국내적결집과군사력강화를모두정당화한다. 이점에서남경학살문제에대한논의가중일전쟁담론의비중있는요소로등장한것은대일관계에대한중국당국의선택지를넓혀주는효과를낳을수있다. V. 결론 이글에서는 중국정부는어떠한조건에서일본과의적대적인역사를보다강하게활용하는가? 라는질문에답하기위하여 인민일보 의청일 중일전쟁을주제로한기사의강화추세및논의의내용을살펴보았다. 가장중요한결과는중국의민족주의여론을고조시키는일본의대중정책이라는외부요인, 국내적비판에대한민감성이존재하는권력강화국면이라는내부요인이동시에존재할때에일본에대한적대적인기억의강화가뚜렷이일어난다는점을파악할수있었다는데있다. 다음으로는, 신지도부의권력강화국면등중국내부요인은후진타오, 시진핑시기모두에서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의활용을일정하게유지시키는영향을주었다. 이러한양상은역사활용에있어중국지도자의기본적인동기는권력강화시기의사회적비판과국내민심에대한방어적고려라는점을보여주는것이다. 특기한것은일본변수의외부요인만으로는청일 중일전쟁에대한논의가확대되지않는것으로보인데있다. 일본의정상국가화노력에따른중국사회의반일정서확대와는별개로중국당국의정치적필요가있을때에야중일적대사의공적재생산이이뤄지기시작하는것으로볼수있는것이다. 이러한결과들을종합하면, 중국당국의역사활용은 1차적으로중국국내정치적동기에따라추구되며, 그러한동기가존재하는배경에서 2차적으로중일관계로인해국내반일여론이확대될가능성이있을때보다강화되는것으로볼수있다. 이처럼중국의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활용은대내
중국의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활용추이와강화요인 이중구 249 적차원의중국당국의자기방어적필요를어느정도반영하고있는것으로생각된다. 다음으로, 중국의청일 중일전쟁에대한역사활용동학을검토하는과정에서중국의논의내용과특성을파악할수도있었다. 주목할점은청일전쟁에대한기억은오히려해군력의강화등일반적으로보다갈등적인것으로이해되는정책을정당화하는측면이있으며, 중일전쟁에대한기억은그것이승전으로규정되어있는것에대한것이라는점에서대범한접근을정당화하고있다는점이다. 중일전쟁에대한공식적논의는화평발전을위한미래지향적태도를강조하고, 전후질서속에서일본이과거사문제에서보다책임있는태도를요구하는것이다. 이는상대국에게적역할을부여하는국가적담론이단순히홉스적문화의요소라고볼수만은없으며, 성찰적여유를통해칸트적문화를지향하는내러티브로도기능할수있다는이론적함의를제시한다. 모두적대의역사적기억이라고하더라도, 어떠한테마는청일전쟁에대한중국의기억과같이홉스적대안과결합되고, 다른테마는중일전쟁에대한논의와같이칸트주의적정책방향과연결될수있다는것이다. 아울러, 기존역사해석의결과로역사적테마들과그로부터도출되는교훈들간의관계도상당부분고착화되어있다는점도주목할필요가있다. 동시에전쟁의승패와전쟁기억으로부터의교훈간의상관관계도보여진다. 패전으로끝난것으로평가되는청일전쟁은보다갈등적인대안을, 승전으로규정된중일전쟁은보다포용적인대안을뒷받침하는데활용되고있는것이다. 패전의기억은자국의패배로만들어진지역 국제질서를어떻게바꿔나갈것인가라는문제의식과결부되면서, 현상타파적인입장을도출하는데적절한주제일수있다. 한편, 승전의기억은승전국으로서이익이보장된현재질서를유지 보전하기위한문제의식으로연결되는경향이있다. 비록중일전쟁이후구축된샌프란시스코체제는당초에는중국을배제했었으나, 미중관계개선이후중국은샌프란시스코체제를승전국으로서의지위를향유할수있는체제로보고있는것이다. 그로인해현재동아시아지역질서에대한중국의입장은상당부분현상유지적일수있다. 이점에서, 중국이표면적으로는적대적기억이담긴중일전쟁에대한담론을활발히재생산한다고해도그것이단순히현상타파
250 아시아리뷰제 8 권제 1 호 ( 통권 15 호 ), 2018 적인입장을반영하고있다고보기어려운것이다. 다만, 중일전쟁전반이아니라전투의패배로초래된남경대학살의기억은현재질서에대한만족감과불만사이의복잡한마음을반영하고있을수있다. 남경대학살은일본에대한반성촉구와더불어, 국내적단결, 군사력강화의대응방향을모두정당화하며, 역사문제해결을위한것으로서비폭력적방식에서폭력적방식에이르는폭넓은대안을아우르고있는것이다. 중국의역사활용동학과관련해, 본논문의연구결과는중국의국가지도자가권력을강화하는과정에서일본과의갈등을동시에대면하게되면중국국내대중의역사문제해결요구를거부하기어려운국내적인정투쟁을경험한다는바를함의한다. 권력강화국면에서중국의지도자들은부패를척결하고자신의이념을관철하는엘리트정치의측면에서강력해보일수있으나, 대중정치의맥락에서는오히려취약하다고도할수있는것이다. 이는주변국들이중국지도부의권력강화시기에는중국내부여론의반응을민감히고려하는대중정책을추구해야한다는바를함께시사한다. 실제로시진핑주석의권력강화작업이마무리된이후에는중국대외정책의유연성이다시확대되고있다. 지난수년간중국은일본등주변국과의관계에서완고한입장을표출하였었다. 2013년말동중국해방공식별구역선포를기점으로센카쿠열도를둘러싼영유권분쟁을일본에맞서첨예하게전개했고, 중국국내의반일여론도고조되었다. 하지만, 시진핑주석으로의권력강화작업이마무리된최근에는중일관계의개선도모색되고있다. 2018년 5월일본을 8년만에방문한리커창 ( 李克强 ) 총리는아베총리, 아키히토국왕을면담하고, 중일관계정상화와충돌방지의필요성을강조한것이다. 향후시진핑주석의장기집권이예상됨에따라당분간은중일관계의적대적역사가높은수준으로제기되는국면이다시나타나더라도국내권력강화요인에따라장기화되지는않을것으로전망된다. 물론, 세월이지나새로운지도부가출범한다면, 중일간의상호작용으로촉발된적대적과거역사의확산이제동되기어려운국면이중국정치특유의권력강화과정에따라다시금조성될수있다. 만약그시기의미래중국이현상타파적논의를제시하게된다면, 그논의는남경대학살의강조로부터 19세기
중국의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활용추이와강화요인 이중구 251 말청일전쟁이나치욕의경험이강조되는양상으로전개될수있다. 그러한미래의상황대비해서 19~20세기중국이겪은피해의역사도칸트적, 공동체적정책대안과연결시키기위한역사학적, 철학적논의를지금부터개시해가야할것이다. 끝으로, 이글은역사적기억으로부터얻어지는정책적교훈을중심으로한연구는아니다. 청일전쟁과중일전쟁의역사적테마가 인민일보 에서제시되는추세를중심적으로검토했으므로, 중국당국이그를통해제시하는정책방향의변화까지체계적으로제시하지는못한한계를갖는것이다. 정책연구의관점에서는중국당국이역사적주제로부터정당화하려는정책방향이보다중요할수있다. 이점에서향후연구방향은중일관계의역사에대한논의들속에서제시되는교훈을대립과포용의방향등으로유형화하여, 그로부터중국의정책방향을체계적으로분석해내는것이되어야할것이다. 투고일 : 2017 년 12 월 18 일 심사일 : 2018 년 6 월 7 일 게재확정일 : 2018 년 7 월 30 일 참고문헌 가시하라도쿠시저. 이상복역. 2017. 남경사건. 어문학사. 강현두 주어휑이 허진. 1998. 중국언론에나타난남 북한이미지비교분석연구. 한국언론학보 43(1), 37-75. 공봉진. 2016. 시진핑시대, 중국정치를읽다. 한국학술정보.. 2017. 중국지도자교체시기의권력강화와정치역학. 동북아문화연구 제51 집, 393-424. 김두승. 2016. 아베정권의대중정책과한국 - 견제와타협의이원적접근전략. 한일군사문화연구 제21집, 31-60. 김성철. 2016. 중일관계의갈등과협력 : 안보와경제의연계. 세종연구소. 김흥규. 2014. 시진핑시기중국외교와중일관계분석. 한일군사문화연구 제18집, 3-41. 모리가즈코저. 조진구역. 2006. 중일관계: 전후에서신시대로. 리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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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일본에대한적대적역사활용추이와강화요인 이중구 255 Abstract China s Use of Hostile Memories of Japan and its Influencing Factors: Focusing on the Sino-Japanese War and the Chinese-Japanese War Choongkoo Lee Korea Institute for Defense Analyses This article examines the strategic use of hostile memories of Japan by Chinese authorities. The emergence of memories of the past war with Japan through the Chinese official media may be regarded as an expression of domestic nationalism as a result of conflict with Japan, and it can also be assumed to have been caused by the domestic political process. I examine whether the expansion of articles covering two Sino-Japanese wars in the People s Daily could be explained by external factors of Japan s behaviors and internal factors of unique political processes in China. The result shows that when both factors are combined, the strategic use of hostile memory is significantly increased. This means that when both the political sensitivity to public opinion and nationalist public opinion are expanded, the hostile history issue against Japan is actively handled by Chinese authorities. Keywords Sino-Japanese War (1894-1895), Chinese-Japanese War, Sino- Japanese relations, Chinese domestic politics, Chinese national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