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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박사학위논문 동무이제마 (1837-1900) 의의학사상과실천 동아시아의학전통의재구성과 천인성명장부의학 의탄생 2014 년 8 월 서울대학교대학원 협동과정과학사및과학철학전공 이기복
東武李濟馬 (1837-1900) 의의학사상과실천 동아시아의학전통의재구성과 天人性命臟腑醫學 의탄생 지도교수임종태 이논문을이학박사학위논문으로제출함 2014 년 4 월 서울대학교대학원 협동과정과학사및과학철학전공 이기복 이기복의박사학위논문을인준함 2014 년 6 월 위 원 장 문중양 ( 인 ) 부위원장 임종태 ( 인 ) 위 원 김영식 ( 인 ) 위 원 신동원 ( 인 ) 위 원 김남일 ( 인 )
< 국문초록 > 이논문은조선후기의유자이자의가였던동무이제마 ( 李濟馬, 1837-1900) 가제시한의학사상과실천을고찰하기위한것이다. 이제마가저술한의서 동의수세보원 ( 東醫壽世保元 ) 이 1901년간행된이후이제마의학이 사상의학 ( 四象醫學 ) 이라는이름의의학전통으로현재까지계승되어오면서한국의학을특징짓는중요한요소가운데하나가되었다. 그간여러연구자들이이제마의학에대해서적지않은연구결과를내놓았지만, 정작이제마의학의의학적내용과역사적성격에대한분석적고찰없이철학적 / 유학적해석이나의학의기술적 / 임상적측면에만주목해왔다. 이제마의학을제대로해명하기위해서는 동의수세보원 이보여주는이제마의학의구조및내용을종합적으로조명하고이제마저술의의도를살피는것이선행되어야한다. 이러한인식하에이논문은크게세부분즉 이제마가그린의학적몸, 이제마가기획한의학사업, 이제마가실행한의학 으로나누어이제마의의학과실천을분석해보고, 여기에서나아가이제마의학이함의하고있는의사학적의미를탐색해보았다. 첫째, 우주와감응하는몸과달리이제마가정식화한의학적몸은인간세상과상호작용하는과정에서생리적활동이추동되고규정되는몸이었다. 동아시아의학전통에서몸에대한논의는우주와감응하는 생태적몸 을중심으로이루어졌다. 이생태적몸은천지, 음양, 오행, 기 ( 氣 ), 천리 ( 天理 ) 등의우주론적장치들에의해규정되며, 건강한몸이란천지의자연스런운행 / 흐름과조화를이루는데있었다. 희노애락감정과몸의상호관계에대해서는오래전부터논의되고있었지만전반적으로생태적몸관념에부속되어있었다. 이에비해이제마는사람이세상을받아들이는방식과세상에자신을표현하는방식을각장부의기능적차이에연동시키고, 이러한인지ㆍ행동패턴에따라장부의대소차이가생겨나사람들의개별성을특징짓는것으로의학적몸을정식화했다. 이에따르면장 - i -
부의생리적작용을추동하는것은천지의타고난기운이아니라주체로서각자가세상을인지하고이에반응하는능동적힘이다. 이런까닭에건강한몸이란타자인자연에조응하는것이아니라자신의이러한개별성즉세상과관계맺는과정에서드러나는스스로의장점을잘살리는데있었다. 이제마는우주가아닌인간세상속에의학적몸을위치시킨것이다. 결국이제마의학의등장은동아시아의학사에서 우주와감응하는몸 혹은 생태적몸 에서 인간세상과작용하는몸 혹은 감정의몸 으로의전화를의미한다. 덧붙여, 근대로의전환기에살았던동아시아의이제마는주체의가치를자각해야함을촉구하는이러한의학적몸이그릴이상적인세상은상대의장점을인정해주고다양성이존중되는사회여야한다고강조했다. 둘째, 이제마가 동의수세보원 의저술을통해이루고자했던바는의학의도통 ( 道統 ) 을잇거나세우고자한것이아니라의약경험이라는새로운준거를들어동아시아의학전통을재구성하려는야심찬학술사업이었다. 이전의사들의인식에따르면, 동아시아의학전통의골자는이미고대의문화성현들에의해갖춰져있었고이후의발전은이들이천명한원칙을전제로이들이아직말하지않은부분을밝히는것이었다. 이런까닭에 황제내경 ( 黃帝內經 ) 과 상한론 ( 傷寒論 ) 등의학경전의지위는확고했고이들의경의본지를잇는학술계보와정통성이중요했다. 동아시아의학전통에대한이러한인식은송대이후유학적관념을의학이론에도입했던유의 ( 儒醫 ) 들에의해서형성되고강화된것이었다. 이에비해이제마는소위의학경전의지위와도통에대한관념을드러내지않고병증약리 ( 病證藥理 ) 라는의약경험을준거로하여동아시아의학전통을이해했다. 이제마는자신이도달한의학적발상과경험을토대로앞선의가들의실천지식즉병증약리를활용하여동아시아의학전통을재구성하고자했으며, 그결과물이 동의수세보원 이었다. 이제마의학이전통적도통이나계보에개의치않고동아시아의학전체를아우르려고했다는점에서, 그리고지역ㆍ시대ㆍ인종ㆍ성별ㆍ분과를넘어세상모든사람들을위한큰 - ii -
의학을지향했다는점에서이제마는 보편의학 을추구했다고볼수있다. 이러한특징은청대의온병학 ( 溫病學 ) 이강한지역적정체성을내세우며등장했고에도시대고방파 ( 古方派 ) 의학이고대정통 상한론 으로의회귀를내세우며발흥한것과비교되는것이다. 셋째, 이제마는의학이론에만머문것이아니라이러한자신의통찰과의제를바탕으로진단 ( 診斷 ), 생리 ( 生理 ), 약리 ( 藥理 ) 가상호유기적으로구조화된의학지식을구축하는데까지나아갔다. 이제마의학의이론적틀은성정의차이즉세상과관계맺는방식의차이를내장기관인장부 ( 臟腑 ) 의형국차이와연결시키는것이었다. 그는자신의경험을고구 ( 考究 ) 하여질병을이러한의학체계에맞도록재분류하고이에따른표준약방을제시하면서실행층위의의학을전면적으로재편했다. 결과적으로이제마의의학체계가보여주는의학실천은 질병 이라는사태를질병현상이나사기 ( 邪氣 ) 가아닌이제마의장부개념을중심으로성정, 병증, 약물을유기적으로결합하여다루는것이었다. 이때병자는질병을구체화하는진단과정에보다직접적으로참여하게되고치유과정에서도병자의능동적의지가부각된다. 주제어 : 이제마, 동의수세보원, 사상의학, 천인성명, 성정, 의학전통의재구 성, 도통, 의약경험, 병증약리, 보편의학, 의원론, 장부의학 학번 : 2005-30958 - iii -
< 목차 > 제1장서론 1 1.1 선행연구검토및문제의식 4 1.2 연구방법및논문구성 12 제2장李濟馬와 東醫壽世保元 23 2.1 이제마의생애와배경 23 2.1.1 이제마의생애 : 이제마의복합적성격 24 2.1.2 이제마의자의식, 그에대한사람들의기억 49 2.2 이제마의저작 57 2.2.1 동의수세보원 ( 東醫壽世保元 ) 57 2.2.2 격치고 ( 格致藁 ) 63 2.2.3 동무유고 ( 東武遺稿 ) 64 2.3 요약및소결 68 제3장李濟馬가그린몸 : 세상에위치한천인성명의몸 70 3.1 동아시아의학전통에서의인체관 71 3.1.1 우주와감응하는몸 71 3.1.2 이제마의비판적시선 80 3.2 천인성명 ( 天人性命 ) 의몸 83 3.2.1 몸의얼개 : 천인성명 ( 天人性命 ) 84 3.2.2 몸의갈래 : 성정 ( 性情 ) 과사상인 ( 四象人 ) 88 3.2.3 몸의확충 : 절세대인 ( 絶世大人 ) 의이상 95 3.2.4 몸의완성 : 애노희락 ( 哀怒喜樂 ) 의생리학 100 3.2.5 주체의자각과다양성의승인 105 3.3 身形臟腑養生醫學에서天人性命臟腑醫學으로 110 3.4 요약및소결 119 - iv -
제4장李濟馬의學術企劃 : 동아시아의학전통의재구성 122 4.1 동아시아의의학전통 : 이천 ( 李梴 ) 의 원도통설( 原道統說 ) 123 4.2 동아시아의학전통의재해석 : 이제마의 의원론( 醫源論 ) 129 4.2.1 의약경험및병증약리중심의의학사 130 4.2.2 동아시아의학의재구조화 140 4.3 수세보원 ( 壽世保元 ) 과보편의학 148 4.3.1 수세보원 ( 壽世保元 ) 148 4.3.2 보편의학 ( 普遍醫學 ) 의추구 150 4.4 요약및소결 158 제5장李濟馬가행한醫學 : 사상인병증약리 161 5.1 질병 ( 疾病 )-처치( 處治 ) 관계망 162 5.1.1 장기 ( 張機 ) 의 상한론 ( 傷寒論 ) 164 5.1.2 황도연 ( 黃度淵 ) 의 방약합편 ( 方藥合編 ) 168 5.2 사상인 ( 四象人 ) 병증약리 ( 病證藥理 ) 의구성 173 5.2.1 병증 ( 病證 ) 의인식 173 5.2.2 방약 ( 方藥 ) 의운용 179 5.2.3 통찰에서지식으로 188 5.3 실행층위의이제마의학 195 5.4 요약및소결 205 < 보론 > 유학과의학의사이 208 A. 이제마의글쓰기방식 209 B. 용어의전용 212 C. 계보의식의부재 216 < 결론 > 224 < 참고문헌 > 229 <Abstract> 247 - v -
< 표차례 > < 표 2-1> 이제마근친들의단명사례 33 < 표 2-2> 이제마의관료행적 44 < 표 2-3> 동의수세보원 판본및서지사항. 59 < 표 2-4> 東醫壽世保元 과 東醫壽世保元四象草本卷 의구성및체제 60 < 표 3-1> 몸의얼개 : 천인성명 ( 天人性命 ) 88 < 표 3-2> 사상인 ( 四象人 ) 의성정 ( 性情 ) 에따른갈래 92 < 표 3-3> 천인성명 ( 天人性命 ) 애노희락 ( 哀怒喜樂 ) 98 < 표 3-4> 천인성명 ( 天人性命 ) 의몸 에서의생리학적구성물들 101 < 표 3-5> 이제마의경험적발상 118 < 표 4-1> 東醫壽世保元 病證論의細目 144 < 표 4-2> 黃帝內經 의三陰三陽經病과이제마의四象人病證 145 < 표 4-3> 傷寒論 의三陰三陽病과이제마의四象人病證 145 < 표 5-1> 동의수세보원 의구성및체제 164 < 표 5-2> 상한론 의병 ( 病 )-증상군( 症狀群 ) 관계망 166 < 표 5-3> 상한론 의증상군 ( 症狀群 )-탕약( 湯藥 ) 관계망의사례 167 < 표 5-4> 方藥合編 活套鍼線 의대분류항목 169 < 표 5-5> 몇가지대분류항목에따른세부병증항목의사례 170 < 표 5-6> 몇가지세부병증에따른해당처방항목의사례 171 < 표 5-7> 처방항목에대한설명사례 172 < 표 5-8> 이제마가그린 질병-처치관계망 175 < 표 5-9> 인체내생리작용을나타내는이제마의용어 181 < 표 5-10> 保健省東武遺稿 東武先師四象藥性嘗驗古歌 184 < 표 5-11> 東醫四象新編 用藥彙分 에서일부발췌한것 194 - vi -
< 그림차례 > < 그림 2-1> 李燮雲 ( 즉李濟馬 ) 의가계도 25 < 그림 3-1> 東醫寶鑑 의 身形臟腑圖 圖像 75 < 그림 3-2> 張顯光의 人身之圖 80 < 그림 3-3> 天人性命범주와四焦부위의연결관계 102 - vii -
제1장 서 론 이 논문은 조선후기 유자(儒者)이자 의가(醫家)인 이제마(李濟馬, 18371900)가 저술한 의학문헌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1894)을 주요 텍스트로 하여 그가 주창한 의학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의사 학적 의미를 탐색하고자 하는 작업이다. 이제마는 조선 말인 19세기 중 반부터 대한제국기까지 활동한 무인(武人)이자 관료였다. 그는 19세기 말에 본향인 함경도 함흥을 중심으로 따르는 문도를 규합하여 자신의 의 학사상과 임상경험을 전수하였으며 동의수세보원 이라는 저술을 통해 자신의 의학체계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로써, 20세기 벽두인 1901년 동의수세보원 이 처음 간행된 이후 20세기 전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 서 오늘날 한국의학을 특징짓는 요소 중 하나로 알려진 사상의학(四象 醫學) 이 이제마와 동의수세보원 에 연원을 두고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이제마와 동의수세보원 이 한국 의학사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 는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의학전통으로서 동의수세보원 에 근거를 둔 의학활동이 현재에도 한국사회에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동의수세보원 은 동의보감, 방약합편 과 더불어 국내에서 가장 많이 출판된 의서로서, 현재까지 알려진바 동의수세보원 과 관련 된 저술들 즉 번역서, 주해서, 임상서적 등이 50여 종을 상회한다. 사상 의학을 실천하는 임상 집단이 존재해 주요한 학파를 이루고 있고, 관련 학회와 대학이 설립ㆍ운영되면서 꾸준히 논문이 산출되고 있다. 게다가 한국사회에서 이제마에 대한 관심은 전문 한의학의 범위를 넘어서 철학, 윤리, 사상사, 의학사 분야 등의 다양한 인문학 분야에서 이제마의 사상 을 다룬 연구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이제마 의학의 성격에 대해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크게는 체 - 1 -
질의학이나 심신의학 혹은 사회의학이라는 용어 및 범주를 동원하여 규 정했다. 먼저, 사상의학은 흔히 알려져 있듯이 사람을 네 가지 유형 곧 태양인(太陽人), 소양인(少陽人), 태음인(太陰人), 소음인(少陰人)으로 나 누어서 치료하는 체질의학(體質醫學) 이라고 말할 수 있다.1) 이는 사 상의학 을 규정하고 있는 백과사전의 다음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사상의학: 사람들을 체질적 특성에 따라 태양ㆍ태음ㆍ소양ㆍ소음의 네 유 형으로 나누고 그에 따라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체질의 학.2) 하지만 단순히 체질의학이라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사람의 개별적 특성에 따라 치료해야 한다는 의설(醫說)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전부터 있 어 왔다.3) 그러므로 이제마 의학에 대한 논의의 핵심은 그것이 단순히 사람의 체질 을 구분한다는 점을 넘어 이제마가 말한 태소음양(太少陰 陽) 사상인(四象人)이 무엇을 기준으로 정의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기 존 동아시아 의학 전통에서 어떤 독특한 의미를 갖는지 탐색하는 데 있 을 것이다. 태소음양 사상인의 개념에는 언뜻 보면 마음 이라는 요소가 개입된 다. 그러기에 흔히 이제마가 주창한 의학을 심신의학(心身醫學) 이라는 관점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즉 이제마는 질병이 심욕(心慾)에 따라 발 생한다고 보고 마음[心]을 다스려 몸을 치유할 수 있다는 의학을 제시했 다고 볼 수 있다.4) 그러나 심신의학을 주장했던 의론(醫論)들 역시 다양 1) 예를 들면 과학사가 洪以燮과 의학사가 金斗鐘은 이제마의 의학을 질병치료에 대한 四型의 체 질적 차이를 둔 醫說로 소개하고 있다. 洪以燮, 朝鮮科學史 (正音社, 1946), 196쪽; 金斗鐘, 韓國醫學史 全 (探求堂, 1966), 462쪽. 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부 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1994]) 사상의학 條. 3) 다음을 일부 참조할 수 있다. 박주홍, 고대 서양의학 체질론과 사상체질론의 형성과정 및 내 용 비교 연구, 의사학 18 (2009), 15-41쪽. 이 논제에 대해서는 동아시아 의학 발달사까지 고려하여 향후 더 깊은 논의가 요구된다. 4) 전국한의과대학 사상의학교실 엮음, 四象醫學 (집문당, 2001), 50쪽; 곽노규, 사상의학으로 고통을 응시하다, 인문의학: 고통! 사람과 세상을 만나다 (휴머니스트그룹, 2008), 58쪽; 이 - 2 -
한 형식으로 동서양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몸 과 마음 의 문제는 서양에 서 육체 와 영혼 이라는 관념을 중심으로 오랜 기간 동안 논쟁의 대상 이 되어 왔다. 동아시아에서는 의학 전통은 물론 불교, 도교, 성리학 등 의 여타 지적 전통에서도 마음[心], 도(道), 리(理) 등 다양한 어휘와 관념을 동원하여 마음과 감정의 역할을 강조하거나 최소한 몸과 마음 사 이의 상호 관련성을 강조해 왔다.5) 그렇다면 이제마가 단순히 심욕을 억제하거나 마음만 잘 쓴다면 육체와 정신이 건강해진다고 주장한 것일 까? 이제마 의학의 특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제마가 어떠한 방식으로 마음과 몸을 구조화했는지, 그리고 이를 경험지식과 엮어서 만 든 실제 임상지식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함께 조명해 보아야 한 다. 마음을 강조하는 의학은 예방의학으로 양생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동 시에 사람의 윤리적 수양 및 실천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심신의학으로서 사상의학은 사회의학(社會醫學) 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6) 백과사 전에 수록된 다음 기사 역시 사회의학이라는 맥락에서 이제마의 사상의 학을 읽고 있다. 본래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그의 의도한 바 예방의학에 치중하였으며 병과 약의 개념을 병리와 약리에 두기 앞서 인간의 윤리적 선의 문제에 핵을 두 었는데, 사람이 어진 것이나 유능한 것을 보고 질투하는 것 같이 큰 병은 없고, 어진 것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기뻐하는 것 같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약은 없다. 라고 말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7) 경록, 이제마의 의학론과 시대적 성격, 의사학 14(2) (2005), 86-87쪽. 5) 동아시아 의학전통에서 情志가 疾病에 미치는 영향은 漢代의 黃帝內經 에서부터 등장하는 주 제였다. Yanhua Zhang, Transforming Emotions with Chinese Medicin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7), III-IV장. 오재근, 기(氣)의 운동으로 살펴보는 마음, 정(情) 황제내경 을 중심으로, 의철학연구 11 (2011), 29-55쪽. 송금원대 儒醫의 등장과 金 元四大醫家의 활동으로 이러한 心身醫學的인 측면은 의학이론에서 한층 더 강화되었다. 心과 心疾의 측면에서 성리학과 동아시아 의학의 관계를 살펴 볼 연구로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조남호, 성리학과 한의학, 동양철학과 한의학 (아카넷, 2005), 284-296쪽. 6) 전국한의과대학 사상의학교실 엮음, 四象醫學, 50쪽. 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부 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1988]) - 3 -
하지만 이제마 이외에도 동아시아의 의인들은 늘 양생과 수양을 강조했 으며, 특히 유의(儒醫) 즉 유학적 배경을 지닌 의사들은 몸과 의학적 실 천의 도덕적 측면을 역설했다. 그러므로 이제마 의학을 제대로 조망하기 위해서는 단지 사회의학 혹은 유의의학(儒醫醫學) 이라는 규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것이 그간 동아시아 의학 전통에서 이해하고 있는 의 학적 몸 및 그 바탕에 깔린 전제와는 어떻게 다른지 충분히 논구해 보아 야 한다. 이 논문은 이제마 의학이 단순히 체질의학, 심신의학, 사회의학이라 는 범주만으로는 충분히 해명될 수 없다고 보고 먼저 이제마 의학의 실 질적인 내용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문제인식에서 출 발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학사상, 장부생리, 실천방식 등을 포함하여 이제마 의학의 전체적인 구조 및 내용을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 다. 따라서 이 논문의 주안점은 이제마가 자신의 의론에서 어떠한 인체 를 상정했으며, 이를 어떠한 방식으로 의학적 실제에 적용했는지 해명하 는 데 모아져 있다. 이제마에 대한 선행연구를 검토해보건대, 이에 대한 충분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1.1 선행연구 검토 및 문제의식 그간 이제마 의학과 관련된 연구는 적지 않게 이루어졌다. 이제마의 생애와 그가 저술한 문헌에 대한 기초적 연구를 제외하면,8) 이제마 의 사상의학 條. 이 기사 안의 東醫壽世保元 인용문은 인간의 윤리적 善 을 우선시해야 한다 는 내용이라기보다는 才能 있는 사람을 認定해주고 選用해야 한다는 의미로 풀어야 한다. 8) 박성식, 東武 李濟馬의 家系와 生涯에 대한 연구, 사상의학회지 8(1) (1996), 17-32쪽; 김 종덕ㆍ이경성ㆍ안상우, 이제마 평전: 허구와 상상을 걷어낸 동무의 참모습 (한국방송출판, 2002); 이경성, 璿源派乘 을 중심으로 살펴본 東武 李濟馬의 生涯 硏究 (원광대학교 박사학 위논문, 2009); 이경성, 東醫壽世保元 版本에 대한 연구, 사상의학체질의학회지 17(3) (2005), 1-11쪽; 한경석ㆍ박성식, 東醫壽世保元 甲午本 의 書誌學的 硏究, 사상체질의학회 지 13(2) (2001), 94-109쪽; 이태규ㆍ김상혁ㆍ이준희ㆍ이수경ㆍ김달래ㆍ고병희, 咸山沙村 東醫壽世保元 甲午舊本 과 詳校懸吐 東醫壽世保元 의 비교 연구, 사상체질의학회지 20(3) - 4 -
학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크게 보아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동의수세보원 의 원론편에 해당하는 논설들을 주요 분석대상으 로 삼아 철학 사상의 관점에서 이제마의 의학을 해명해 보고자 하는 시 도이고, 다른 하나는 동의수세보원 의 임상 실무편을 중심으로 이제마 의학의 기술적이고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연구이다. 먼저, 이제마의 철학적 사유를 중심으로 그의 의학을 탐구한 연구는 이제마 의학에서 철학 또는 유학사상이 차지하는 측면이 크다고 보고 이 제마 의학의 철학적 근거를 찾아내고자 하거나 유교 성리학과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노력했다. 이런 까닭에 이들 논의는 종종 이제마가 유교 성 리학 및 우주론 등 동아시아의 사상적 전통을 어떻게 계승 또는 극복했 는지를 밝히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내용상 서로 중복되는 면이 있지 만 이들 연구를 크게 넷으로 나눠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① 특이한 글쓰기 형식인 사분법적(四分法的) 구조로 전개된 이제마 사상설(四象說) 의 독특함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연구이다.9) 이와 달리 ② 사상설의 이 론적 혹은 의학적 연원을 추적하며 이제마 의학과 이들을 상호 비교하는 연구가 다음이다.10) 여기에서 나아가 ③ 이제마 의학의 사상설을 오행도 식(五行圖式)이나 도서역학(圖書易學)의 구도를 적용하여 직접 풀어보려 (2008), 21-39쪽; 이창일, 하성문고 소장 東武遺稿 에 대하여: 문헌 성립 考定과 2차 삽입 된 <東武自註> 검토를 중심으로, 장서각 제2집 (1999), 131-162쪽; 박성식, 東醫壽世保 元四象草本卷 해제, 박성식 역해, 이제마 원저, 東醫壽世保元 四象草本卷 (집문당, 2005), 13-46쪽. 9) 이을호, 이동무 사상설 논고, 철학연구 7 (1972), 1-24쪽; 김용옥, 발문, 東武 格致藁 附 濟衆新編遺抄 (서울, 1993); 이을호, 사상의학의 철학적 배경, 제3의학 2(2) (1997), 435-443쪽; 금장태, 동무 이제마의 사상, 철학과 현실 14 (1992 가을), 192-202쪽; 최대 우, 이제마 사상설의 철학적 근거, 범한철학 62 (2011 가을), 1-30쪽; 최대우, 東醫壽世 保元 해석의 몇 가지 문제들, 사상체질의학회지 25(3) (2013), 135-144쪽. 10) 이을호, 東武四象說의 經學的 基調, 한국학보 6 (1977), 132-155쪽; 박석준, 이제마 天 機論의 구조(1), 의철학연구 4 (2007), 19-47쪽; 백상룡, 東武 李濟馬의 醫學思想에 대한 연구,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13(1) (2000), 117-145쪽; 방정균, 東武와 淸代의 人性論 비 교, 한국의사학회지 16(1), (2003), 113-136쪽; 박성식, 동무 이제마의 사상의학과 불교 의 영향, 불교학보 57 (2011), 261-293쪽; 정우열, 동무 이제마의 철학과 의학사상, 동 의병리학회지 9 (1994), 153-170쪽; 강효신ㆍ김광중ㆍ박홍식, 李濟馬 四象醫學의 思想的 基 盤에 관한 연구, 동의생리학회지 12(2) (1997), 40-64쪽; 馬伯英ㆍ高晞ㆍ洪中立 (정우열 역), 中外醫學文化交流史 (전파과학사, 1997), 61-62쪽. - 5 -
는 시도도 이루어졌다.11) 마지막으로 ④ 유학의 연장선에서 이제마 의학 을 해석하거나 위치 짓고자 하는 논설들이 선행연구의 많은 부분을 포괄 한다.12) 이러한 연구 경향은 유교 성리학에서 유래한 관념들을 매개로 해서 이제마의 사상이 지니는 윤리학, 정치학, 체육학, 심리학적 함의에 대한 탐색으로까지 확대되기도 한다.13) 이들과 달리 동의수세보원 의 실제편인 병증론을 중심으로 이제마 의학을 탐구한 논문도 다수 존재한다. 이들 연구들 또한 다음의 네 가지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① 이제마가 인용한 전거 의서를 탐색 해 그 특징을 살펴보거나 내용을 상호 비교해 보는 연구이다.14) ② 이제 마의 의학사관이 담겨있는 동의수세보원 의원론(醫源論) 을 다룬 논문 들도 일부 있다.15) 다음으로는 ③ 이제마 의학의 전문적 내용을 다루거 나, 병증이론과 약물이론의 형성과정을 분석하는 연구이다.16) 이 밖에도 11) 한동석, 東醫壽世保元註釋 (誠理會出版社, 1967); 허훈, 동무 이제마의 철학사상 (심산, 2008); 이창일, 동무 이제마 사상의 기본구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석사학위논문, 1996). 12) 이창일, 사상의학, 몸의 철학 마음의 건강 (책세상, 2003); 허훈, 동무 이제마의 철학사상 심성론과 수양론 ; 여인석, 몸의 윤리학: 스피노자와 이제마에 있어 몸의 윤리적 의미에 대 한 고찰, 의사학 7(2) (1998), 179-198쪽; 백유상, 東武 李濟馬의 性情論에 대한 해석: 四 七理氣論辯을 중심으로, 한국철학논집 26 (2009), 215-247쪽; 김윤기, 이제마 철학구조와 몸의 윤리-주희와의 비교를 통해-, 국민윤리연구 제60호 (2005), 23-42쪽; 정복철, 이제 마의 사상철학과 몸의 정치학, 시민정치학회보 5 (2002), 196-220쪽; 성호준, 한국의 儒 醫에 관한 고찰: 許浚ㆍ李濟馬ㆍ李奎晙을 중심으로, 퇴계학 부산연구원 시민문화강좌 17 (2011); 조동욱, 동무 이제마 사단론의 역철학적 고찰, (충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김 만산, 주역의 관점에서 본 사상의학원리(1)-성명론에 관하여-, 동서철학연구 18 (1999), 25-41쪽; 김근호, 東武 李濟馬의 四象論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7); 최 대우, 이제마의 철학 (경인문화사, 2009). 13) 김윤기, 이제마 사상철학의 윤리론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정복철, 조선정치철학의 합례주의 인성담론: 이제마의 사상철학과 몸의 정치학 (경희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2); 오현택, 東武 李濟馬의 身體觀에 관한 연구: 四象論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석 사학위논문, 2002); 김명근, 哀怒喜樂의 심리학: 동무 이제마의 四象心學 (개마고원, 2003); 강용혁, 四象心學 (대성의학사, 2010). 14) 박성식ㆍ송일병, 四象醫學의 醫學的 淵源과 李濟馬 醫學思想에 대한 연구, 사상체질의학회 지 5(1) (1993), 1-33쪽; 이필우ㆍ윤창열, 東醫壽世保元 인용문에 대한 연구, 대전대학 교 한의학연구소 논문집 12(2) (2004), 71-84쪽; 이수경, 東醫壽世保元 太少陰陽人의 病 證論 에 관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15) 강미정ㆍ김지연ㆍ홍선미ㆍ강연석, 朱肱의 의학사상과 李濟馬의 醫源論, 한국한의학연구원 논문집 17(3) (2011), 43-52쪽; 김경요, 李濟馬의 醫學史觀에 대한 考察, 사상체질의학회 지 6(1) (1999), 39-47쪽; 홍성범ㆍ김경요ㆍ홍순용, 東醫壽世保元 醫源論을 중심으로 醫學 史에 관한 연구, 사상의학회지 4(1) (1992), 159-169쪽. - 6 -
④ 세부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논설이나 임상 관련 보고서 도 찾아볼 수 있다.17) 이들 병증론을 탐구한 글들은 많은 경우 기술적이 고 협소한 문제를 다루는 데 그쳐 이제마 의학을 전반적으로 조망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위의 선행연구들이 다루고 있는 내용과 주장은 다양하지만, 그럼에 도 몇 가지 연구 방법론상 중요한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제마 관련 연구가 적지 않게 이루어진 것은 무엇보다도 이제마의 독특 한 사상에 끌렸던 연구자가 많았고 이제마의 의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 는 학회와 학회지가 만들어지면서 이제마 의학을 실천하려는 후학들이 적지 않았음을 반영하는 것이다.18) 그러나 다양한 연구가 산출될 수 있 었던 이유는 이제마가 저술한 텍스트 자체의 특징에서도 찾을 수 있다. 즉 동의수세보원 은 의서임에도 유학에 연원을 둔 용어를 다수 포함하 고 있고, 게다가 이제마는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특유의 문체와 서술 양 식을 채택하면서도 저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서문을 남기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이제마 의학에 대해 다양한, 심지어는 상호 모순되는 해석 16) 곽창규ㆍ손은혜ㆍ이의주ㆍ고병희ㆍ송일병, 四象人 體質病證 중 表病과 裏病의 개념 규정에 대한 연구, 사상체질의학회지 16(1) (2004), 1-11쪽; 한경석, 四象醫學 病證藥理의 形成過 程에 관한 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이수경, 東醫壽世保元 太少陰陽人의 病證論 에 관한 硏究,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황민우, 四象醫學의 病因과 少陰人 少陽人 病理論에 관한 考察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조황성, 四象方 加減法 및 類 型에 對한 假說: 東醫壽世保元, 四象新編 을 중심으로, 사상체질의학회지 23(2) (2011), 139-152쪽; 이광영, 傷寒論과 四象醫學의 病機에 대한 比較硏究: 東醫壽世保元 病證論을 중 심으로, 大韓原典醫史學會誌 11(1) (1998), 676-718쪽. 17)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논문을 들 수 있다. 박병주ㆍ이준희ㆍ이의주ㆍ고병희, 凉膈散火湯의 基源, 變遷過程 및 構成原理, 사상체질의학회지 23(2) (2011), 184-193쪽; 석재화ㆍ함통일 ㆍ황민우ㆍ고병희ㆍ송일병ㆍ이수경, 少陰人 癨亂病證에 대한 考察, 사상체질의학회지 17(2) (2005), 92-98쪽; 김인태, 葛根解肌湯과 淸肺瀉肝湯의 장내세균에 의한 대사활성과 진 통효과에 대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이미숙ㆍ박유경ㆍ배나영, 太陰人 燥 熱證으로 진단한 진행된 파킨슨병 환자 치험례, 사상체질의학회지 25(4) (2013), 442-453 쪽. 18) 李濟馬의 四象醫學을 공부하는 학술모임인 大韓四象醫學會가 1970년에 창립되었고, 이는 1999년 四象體質醫學會로 개명하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학회지인 四象體質醫學會誌 가 1989년 四象醫學會誌 의 이름으로 처음 發行된 이후, 1999년 四象體質醫學會誌 로 이름을 바꿔 현재는 一年에 4회 발간되고 있다. 사상체질의학회 편, 사상체질의학회 40년사 (전주: 사상체질의학회, 2010), 123-129쪽. - 7 -
이 도출되었다. 많은 선행연구들은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지 못 한 채 이 제마의 의도를 다소 자의적으로 해석한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는 연구 방법론상 선행연구들의 문제점을 네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본다. 첫째, 이제마가 사용한 독특한 용어들의 의미를 동의수세보원 의 전체적인 논의 속에서 독해하기 보다는 다른 종류의 텍스트에 등장하는 용어와의 표면적 유사성에만 시선을 둠으로써, 이제마의 의도를 제각각 해석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예를 들면 이제마 의학의 핵심어라고 할 수 있는 사상(四象) 이란 용어는 주역(周易) 에 기원을 둔 용어라 할 수 있으므로 이제마 의학의 연원을 주역 으로 보는 것이다. 의학사가 미키 사카에(三木榮)는 이제마 의학의 원리는 주역 에서 출발하여 음양오행 설(陰陽五行說) 혹은 오운육기설(五運六氣說)과 같은 동양철학적 이론에 토대를 두었던 학설이라고 소개했다. 심지어 그는 이제마의 사상학설이 서양의 사원소설(四元素說)이나 사체액설(四體液說)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주장했다.19) 다른 한편, 이제마는 성(性)과 정(情)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맥락에서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전용(轉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연구자들은 이를 유교 성리학의 맥락에서 읽기도 했다.20) 요컨대, 이상 의 연구들은 이제마 의학의 연원을 주역, 도서역학(圖書易學), 수사학 (洙泗學), 맹자, 대학 혹은 이기성리학(理氣性理學)에서 찾거나, 이제 마 학설을 전래의 오행설, 서양의 사원소설, 불교의 사대설(四大說), 조 선 심성 논쟁의 천기론(天機論) 등과도 연관 지었다.21) 하지만 이제마의 19)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京都: 思文閣出版, 1991[1963]), 258-259쪽. 20) 이를테면 백과사전에는 이제마의 性情論을 다음과 같이 유교의 맥락에서만 소개하고 있다. 사람의 심성(心性)에는 본질적으로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로하게 되는데 이것이 발동하기 이전의 상태를 천부적인 성(性)이라 표현하고, 심성의 희로애락이 이미 발동하게 될 때는 정 (情)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정이 발동되어 장부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 대소허실(大小 虛實)이 이루어진다고 함이 사상체질론(四象體質論)의 요체이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부 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상의학 條. 21) 이을호, 東武四象說의 經學的 基調 ; 이창일, 사상의학, 몸의 철학 마음의 건강, 49쪽; 허 훈, 동무 이제마의 철학사상 ; 조동욱, 동무 이제마 사단론의 역철학적 고찰 ; 김만산, 주역 의 관점에서 본 사상의학원리(2)-사단론에 관하여-, 동서철학연구 20 (2000), 153-176쪽; 김근호, 東武 李濟馬의 四象論에 관한 연구 ; 박석준, 이제마 天機論의 구조(1), 의철학연 구 4 (2007), 19-47쪽; 박성식, 동무 이제마의 사상의학과 불교의 영향 ; 정우열, 동무 이 제마의 철학과 의학사상 ; 馬伯英ㆍ高晞ㆍ洪中立, 中外醫學文化交流史, 61-62쪽; - 8 -
문헌에서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이제 마는 자신의 사상적ㆍ의학적 연원에 대해서 언급이 없을 뿐 아니라, 오 히려 이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둘째, 이제마의 의학을 분석했던 대다수 논의들이 동의수세보원 의 원론편과 실제편을 분리시켜 독해함으로써 이제마 의학의 전체적인 모습 을 잘 드러내지 못했다. 동의수세보원 은 크게 보아 총론 격인 원론편 과 임상 실제를 다룬 병증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두 부분은 일견 글쓰기의 형식과 글의 내용 면에서 상호 이질적으로 보인다. 이런 까닭 에 임상 실무에 관심이 있는 연구자들은 난해해 보이는 원론편을 자신들 의 논의에서 충분히 다루지 않았고, 반대로 이제마의 철학 사상에 관심 이 한정된 연구자들은 기술적인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병증론 실제편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후자의 경우, 특히 동의수세보원 의 병증론에 담긴 글로서 자서(自序)의 역할을 하는 의원론(醫源論) 의 중요성을 인 식하지 못했다. 이들 연구의 다수는 병증론을 논의에서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원론편에 등장하는 용어 및 언술의 유학적 친연성에만 주의함 으로써, 이제마가 인간의 심성(心性)을 중심으로 도덕 주체를 확립하고 자 한 유학적 이상을 의학에서 구현했다고 보았다.22) 하지만 이제마는 자신의 의학적 의제와 그것의 의사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의원론 에서 뚜렷이 밝혔으나, 그에 비해 유학에 대해서는 특정한 문제의식이나 계보 의식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셋째, 이제마의 의학사상에 대한 논의 가운데 일부는 동의수세보 22) 많은 경우 이들 연구는 李濟馬가 儒學의 중요한 개념들(人性, 自然, 道德, 性命, 性情 등)을 형이상학적인 틀(五行, 五運六氣, 朱熹의 理氣說 등)에서 벗어나 몸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해석 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는 결론적으로 李濟馬가 새로운 차 원의 儒學的 道德觀 및 人間觀을 제시하거나 유학적 도덕관을 醫學的으로 전개, 확장, 내재화 혹은 정당화 했다고 주장했다. 최대우, 이제마의 철학 ; 정복철, 이제마의 사상철학과 몸의 정치학 ; 이창일, 사상의학, 몸의 철학 마음의 건강 ; 허훈, 동무 이제마의 철학사상 ; 김윤 기, 이제마 철학구조와 몸의 윤리: 주희와의 비교를 통해 ; 여인석, 몸의 윤리학: 스피노자와 이제마에 있어 몸의 윤리적 의미에 대한 고찰 ; 성호준, 한국의 儒醫에 관한 고찰: 許浚ㆍ李 濟馬ㆍ李奎晙을 중심으로 ; 곽노규, 사상의학으로 고통을 응시하다, 인문의학: 고통! 사람과 세상을 만나다 (휴머니스트그룹, 2008), 42-60쪽. - 9 -
원 의 언설에서 근대성의 맹아 혹은 조선후기 실학적 요소를 탐색하고자 했다. 예를 들면 이제마의 의학사상이 경험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구성 되었으며 오행의 상생상극(相生相剋) 원리를 도외시 했다는 점 등을 들 어 이제마 의학이 지닌 근대성을 주장하거나, 그의 사상이 개신유학(改 新儒學) 및 북학파(北學派)의 영향을 받았음을 논하기도 했다.23) 그와는 정반대로 이제마의 사상이 근대성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평가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판단에는 이제마 의학이 마음을 중시하는 심신의학 이라는 점, 의학이 철학에 종속되는 연역적 사유의 특징을 보인다는 점, 도덕적 인간관을 탈피하지 못 했다는 점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되었다.24) 그러나 이러한 연구 경향은 이제마 자신이 염두에 두지 않았던 근대성이 라는 외재적 분석틀, 또는 역사가가 지닌 현재적 관점을 이제마의 의학 에 투영한 것으로서, 이제마 의학을 동아시아 의학의 전통과 당대의 지 적 맥락에서 유리시킴으로써 이를 제대로 조명하지 못한 채 단순화, 파 편화시킬 위험성을 안고 있다.25) 이제마는 조선의 유자(儒者)이자 의학 자로서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 속에 놓여있었으며 그 스스로도 자신이 구 축한 의학체계를 동아시아 의학의 맥락에 위치 지웠다. 넷째, 이제마를 논하는 또 하나의 접근법은 동의수세보원 의 병증 론을 주로 논의하면서 이제마가 고대의 의학이나 원전(原典)을 제대로 인용하고 이해했는지 평가해 보는 것이다. 동의수세보원 의 병증론에서 인용된 구절은 원전에서 직접 인용했다기보다는 동의보감 에서 재인용 한 것이 많다.26) 이는 이제마가 동의보감 에 수재되어 있는 의학 논설 23) 김근호, 이제마 사상의 실학적 특성, 실학의 철학 (예문서원, 1996), 551-570쪽; 이을호, 동무 사상설의 경학적 기조, 132-155쪽; 송일병, 이제마 철학의 학문적 배경과 사상의학의 성립에 대한 고찰, 원광한의학 2(1) (1992), 15-22쪽; 정복철, 이제마의 사상철학과 몸의 정치학, 196-220쪽; 김달래ㆍ고병희ㆍ송일병, 이제마의 학문적 연원과 사상의학의 형성시기 에 대한 연구, 사상의학회지 2(1) (1990), 1-21쪽; 김종덕ㆍ이경성ㆍ안상우, 이제마 평 전, 328-329쪽; 이경록, 이제마의 의학론과 시대적 성격, 의사학 14(2) (2005), 79-100 쪽. 24) 김근호, 같은 논문, 99쪽. 25) 예컨대 종래의 實學 개념과 관련된 비판적 논의로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한림대학교 한국 학 연구소 편, 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 (푸른역사, 2007). 26) 박성식ㆍ송일병, 四象醫學의 醫學的 淵源과 李濟馬 醫學思想에 대한 연구 ; 이필우ㆍ윤창열, - 10 -
을 가려 뽑아 자신의 의설을 구성했다는 스스로의 언사를 통해서도 직접 확인된다.27) 주지하듯이, 동아시아 의학의 역사는 전통에 대한 재해석을 통한 창조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논의는 이제마 가 원전(原典)을 제대로 인용하지 못했다거나 고대의 황제내경 이나 상한론 같은 의경(醫經)의 본의를 왜곡해서 이해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28) 이와 같은 논의의 문제점은 의자였던 이제마가 과거의 의학전통 을 어떻게 평가했고, 이를 바탕으로 주창해낸 것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실질적 탐구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구 시각은 동아시아 의학의 정수와 오묘한 진리가 존재하며 그것이 고대의 의학경전에 이미 담겨있다고 보는 본질주의적이고 숭고주의적인 시각을 전제함으로써 크 게는 동아시아 의학의 역동성, 작게는 이제마가 시도한 새로운 기획의 의미를 제대로 포착해낼 수 없다. 요컨대 이제마가 동아시아 의학의 요 체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먼저 살피는 것이 순서일 것이 다. 이 논문에서는 이제마가 과거 의학의 우주론적 사유체계에 거리를 두면서 동아시아 의학의 알맹이를 병증약리 즉 의약경험이라고 보았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이제마에 관한 그간의 연구는 여러 성과에도 불구하고 연구방법론상 이러한 문제점들로 인해 이제마 의학의 실제 내용을 충분 히 조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를 동아시아 의학의 전통 속에서 제대 로 위치 짓는 데도 부족했다. 특히 이제마의 의학이 유학에서 유추된 것 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진 결과 그간의 논의는 이제마의 유학 및 철학 사 상에 과도하게 초점이 맞추어졌다. 즉, 그간의 논의들은 의학자로서 이 東醫壽世保元 인용문에 대한 연구, 대전대학교 한의학연구소 논문집 12(2) (2004), 71-84쪽; 이수경, 東醫壽世保元 太少陰陽人의 病證論 에 관한 연구. 27) 因許浚 東醫寶鑑 所載, 摘取張仲景 傷寒論 文及諸家所論, 抄集一通, 別附疑難, 以爲太少陰陽 四象人傷寒時氣表裏病論. 甲午本 東醫壽世保元 少陰人論 卷之二. 28) 윤용섭 편저, 동의수세보원 개착 (BG 북갤러리, 2008); 김중한, 李濟馬의 醫學 범위와 四 象醫學 理論의 문제점에 대한 硏究, 大韓韓醫學原典學會誌 26(1) (2013), 1-15쪽; 박수현 ㆍ정창현ㆍ백유상ㆍ장우창, 東醫壽世保元 引用文 硏究에 적용할 수 있는 方法論에 관한 考 察(1), 大韓韓醫學原典學會誌 25(1) (2012), 117-139쪽; 장우창, 東醫壽世保元 의 三陰 三陽 認識, 大韓韓醫學原典學會誌 23(1) (2010), 303-316쪽. - 11 -
제마의 의제 그리고 이제마의 의학 내용 자체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관심 을 적게 둠으로써 의가(醫家)로서의 이제마를 이해하는 데 성공하지 못 했던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이제마 의학에 미친 유교 성리학의 이론적 영향은 일단 놓아두고 이제마가 구축한 의학을 제대로 살펴보고 전체적 으로 조망해보는 작업에 우선순위를 둘 것이다. 1.2 연구방법 및 논문구성 이 논문은 동의수세보원 에서 이제마가 주창한 의학 특히 그가 제 시한 의학적 몸과 그가 행한 의학적 실천을 전체적으로 조명해 볼 것이 다. 이와 더불어 이제마가 자신의 의설(醫說)을 세상에 내어 실현하고자 했던 목표가 무엇인지 탐구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정치적ㆍ사상적 전환기 였던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등장한 이제마 의학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 지 찾아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이 논문의 연구 질문, 연구 방법 그리고 연구의 의의에 대해서 명료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연구 질문: 이제마 의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제마 의학에서 보이는 유학적 언설 등에 대한 논의를 이제마 의학의 논리구조와는 분별해 보면서 이제 마가 구축한 의학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종래의 연구 질문이 이제마 의학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적절한지에 의문 을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간의 연구들은 이제마 의학이 오행이론을 수용했는가 거부했는가, 동아시아 의학 전통을 계승했는가 극복했는가, 유교 성리학을 의학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는가, 과거 의학을 제대로 이해 했는가, 그 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 학적 연원이나 사승은 어디에 있는 가, 서양의학의 영향은 받았는가, 실학적 요소는 갖추고 있었는가 등을 물었다. 이러한 질문들의 문제는 이제마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견해를 표명하지 않았거나 무관심했다는 데 있다. 이제마는 음양오행의 우주론 - 12 -
적 사변이나 이기심성의 유학적인 논변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논 의를 전개했다. 이제마가 문제로 삼지 않거나 무관심했음에도 그가 오행 학설이나 역철학을 계승했는지 여부를 묻거나 그의 사상적 연원이 무엇 인지 찾으려는 시도가 의미 있는지 의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제마 의 학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한 충분한 논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동아시아 의학 전통이나 유교 성리학의 요체에 대한 견해가 다양한 상황에서, 그 둘의 상호 관계를 논한다는 것이 공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제마의 문제의식과 의도 및 의제를 복원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연구 방법: (1) 이를 위해 우선 이제마의 글쓰기 방식과 그의 계보의식을 검토 하면서 유학과 의학에 대한 이제마의 문제의식을 살필 것이다. 앞서 언 급했듯이 유학에 연원을 둔 용어를 동원하면서도 이를 자기 방식으로 전 용하는 이제마의 글쓰기 양식은 연구자들이 이제마 의학을 제대로 이해 하는 데 장애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제마는 유교 성리학에 대한 문제의 식과 계보의식을 내보이지 않음으로써 연구자들이 이제마의 의도를 자의 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겼다.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문체 및 서술양식 그리고 논변의식이나 계보의식의 부재 등 이제마가 보여준 태도는 익히 알려진 유학적 논제들이 그의 일차적 의제가 아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 다. 이는 이제마의 유학적 언설보다도 이제마가 구축한 의학에 논의를 집중하고 있는 이 논문의 접근방법이 적실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2) 이제마의 글쓰기 방식을 고려하여, 용어의 피상적인 유사성에 주 목하기보다는 용어의 의미가 이제마 논의의 맥락 속에 규정되는 양상에 주의하면서 이제마가 텍스트에서 전체적으로 그리고 있는 구도나 말하고 자 하는 바를 따라가 볼 것이다.29) 그간의 선행 연구는 종종 이제마 텍 29) 이제마가 제시한 의학적 몸의 논리구조나 내용에 좀 더 관심을 둔 글로는 김명근의 책( 哀怒 喜樂의 심리학 )과 곽노규의 소논문( 사상의학으로 고통을 응시하다 )을 들 수 있다. 김명근은 이제마가 말한 哀怒喜樂 性情의 의미를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현대어로 재미나게 풀었다. 곽노 규는 이제마의 사상의학을 고통ㆍ질병과 사회적 감정을 핵심어로 하여 대중을 눈높이로 하여 쉽게 설명했다. 필자는 이들의 연구에서 좋은 영감을 받았다. 이 논문의 제3장 이제마가 그린 몸: 세상에 위치한 天人性命의 몸 은 기본적으로 곽노규의 서술방식과 궤를 같이 하고, 이를 - 13 -
스트의 전체적인 구도를 염두에 두기보다는 용어의 유사성에만 주목하여 이제마의 사상적 연원을 추적해보려 하거나 유학에 대한 이제마의 생각 을 추론, 해석하곤 했다. 특히 동의수세보원 원론편에 해당하는 글은 이제마가 의학적 몸을 정식화하는 논설임에도 그간의 연구는 이제마가 동원한 유학적 용어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에 전제된 유학적 인간관 을 추론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30) (3) 또한 이 논문은 동의수세보원 의 원론편과 실제편을 상호 유기 적으로 분석하여 이제마 의학을 전체적으로 조망해볼 것이다. 특히 의 원론 과 병증론에 드러난 이제마의 의학적 의제를 토대로 원론편과 실제 편의 상호 연관과 그 의미를 되짚어볼 것이다. 그 동안 동의수세보 원 의 원론편과 실제편을 함께 포괄적으로 논의했던 연구는 거의 없었 다. 동의수세보원 의 전체적인 편술의 특징에 주목하지 않음으로써, 동의수세보원 의 원론편(原論篇)과 이어지는 실무 임상편(臨床篇)의 관 계를 충분히 해명하지 못 한 채 둘을 별개의 것으로 남겨둔 것이다. 이 러한 문제의식 아래, 이 글은 텍스트의 중층적인 상호 언명 속에서 이제 마가 그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전체적인 편차와 언술의 배치를 통해 이제마가 하고 싶었던 전언이 무엇인지 읽어 볼 것이다. (4) 이와 함께 이 글은 이제마가 선학의 언설이나 의론(醫論)을 올바 르게 이해했는지 여부보다도 이제마가 이를 어떻게 이해했으며 이를 통 해 무엇을 하려 했고 결국 그가 만들어낸 의학은 무엇인지에 초점을 둘 것이다. 글쓰기 방식이나 지식에 대한 태도를 보건대 이제마는 과거의 지식을 확인하거나 그에 대해 고증학적으로 논술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 았다. 오히려 그는 옛 의학지식인 고방(古方)에서 유용한 경험지식을 취 심화시켜 의학적 몸이 우주가 아닌 인간 세상 속에서 이해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필 것이 다. 30) 이풍용, 東武 李濟馬의 人間觀에 대한 연구 (대전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1); 송일병, 李 濟馬의 儒學的 人間觀과 醫學精神, 1-9쪽; 김병천, 朱熹와 李濟馬의 人間觀 비교 연구 (성 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박은경, 東武 李濟馬의 人間觀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임진희, 東武 李濟馬의 人間觀에 관한 연구: 東醫壽世保元草本卷 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배영순, 이제마의 性命論과 四象의 구조, 대구 사학 91 (2008), 189-218쪽. - 14 -
하여 새로운 의학을 구축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예를 들어 이제마는 내경 보다는 의방(醫方)의 시원이랄 수 있는 상한론 을 자신의 의설의 출발점으로 삼았지만 그럼에도 상한론 을 불완전한 것으로 보았다. 그 에게 의학은 고대의 의학 경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동아시아 의학의 역사 특히 상한론 의 역사는 역대의 의자들이 그 텍 스트를 재해석하고 이를 통해 각자의 상한론 을 구축하는 역사임을 보 여준다.31) 이제마 의학은 이러한 상한론 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흥미로 운 사례이다.32) 연구의 의의: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연구방법을 바탕으로 이제마가 구축한 의학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의사학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은 논점들이 이제마 의학을 해명하는 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우선 이제마는 우주와 감응하는 몸이 아니라 인간 세상과 작용하는 몸으로 의 학적 몸을 상정했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 사람들의 주체적 자각을 촉구 하고 타자의 가치를 존중하는 세상을 전망했다. 또한 종래의 계보/정통 중심의 의학사관이 아닌 의약경험 중심의 의학사관을 견지함으로써 의학 에서 중심-주변 관념을 넘어 보편 의학을 지향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의학실천으로서 이제마 의학은 의료 과정에서 병자(病者)의 주체성을 부 각했다. 이러한 논점들은 앞서 도입부에서 언급한 체질의학, 심신의학, 사회의학이라는 규정만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이제마 의학의 면목을 잘 보여준다. 이 연구는 단지 이제마 의학의 독특함을 강조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마의 의학실천을 전체적으로 탐구해 보고 새로운 논점들을 제시함으로써 조선 후기 의학사에서 이제마 의학이 등장하고 새로운 전 31) Asaf Goldschmidt, Integrating Cold Damage Disorders with Classical Medicine, The Evolution of Chinese Medicine: Song Dynasty, 960-1200, pp. 141-172; 야마다 게이지 지음, 전상운ㆍ이성규 옮김, 임상의학의 성립 상한론(傷寒論), 중국의학은 어떻게 시작되 었는가 (사이언스북스, 2002), 169-199쪽. 32) 李濟馬는 古方 가운데 傷寒論 을 東醫壽世保元 에서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다. 박성식ㆍ송 일병, 四象醫學의 醫學的 淵源과 李濟馬 醫學思想에 대한 연구, 1-33쪽. - 15 -
통으로 수용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단초를 여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간의 연구는 동아시아 의학 전통의 계승이나 비판적 창조라는 관점에 서 이제마 의학을 서술해 왔다. 이러한 서술은 대개 동아시아 의학의 고 유한 정수가 존재한다는 본질주의적인 시각을 전제하고 이를 이제마의 의학과 비교ㆍ평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33) 그러나 전통이란 어떤 집단을 구성할 때 필요한 일종의 제조지침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의 학 전통은 의사 개인이나 의사들의 공동체가 자기 정체성으로 삼고자 자 신들의 의학을 구성하기 위해 선택한 조리법으로서 이는 역사적 우연에 따라 계속 변신하며 다른 조합과 교환 혹은 융합 가능하다.34) 이제마의 사례는 이러한 새로운 의학 전통의 토대를 쌓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이 제마는 동아시아 의학 전통의 경험지식을 토대로 필요한 것을 취사선택 하여 의학체계를 재구축하고 그것에 자신의 경험을 더해서 새로운 의학 을 제창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이제마 의학을 단지 철학이나 이론 층위에 국한하지 않고 이제마의 의학사상과 의학실천을 다루면서 위에서 제시한 논점들을 활용 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이론 층위가 아닌 실행의 층위에서 이제마 의 학을 조망해 보면, 조선 후기 의학사에서 이제마 의학이 평지에서 돌출 한 돌연변이가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실행 층위에서 드러나는 지식에 대한 태도 또는 그에 전제된 의학적 자의식을 논의의 초점으로 삼으면 조선후기 의학의 맥락에서 이제마 의학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 다는 것이다.35) 또한 이제마 의학이 20세기 전반 새로운 의학 전통으로 33) 이러한 본질주의적인 시각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중국의학사 서술방식을 검토한 것으로는 다음 글을 참조할 수 있다. Francesca Bray, Chinese Medicine, in Bynum and Porter (eds.), Companion Encyclopedia of the History of Medicine (London/New York: Routledge, 1997), pp. 728-754; T. J. Hinrichs, New Geographies of Chinese Medicine, Osiris 13 (1998), pp. 287-325. Unschuld는 일찍부터 본질주의적 의학사관에 대 해서 비판했었다. Paul Unschuld, Medicine in China: A History of Ideas, pp. 1-15. 34) Volker Scheid, Currents of Tradition in Chinese Medicine 1626-2006 (Seattle: Eastland Press, 2007), pp. 389-395. 35) 19세기 朝鮮에서 종래의 의학 전통을 바탕으로 자신의 經驗을 엮어 方劑와 本草를 직접 創案 하여 운용하는 醫者들이 나타났고 李濟馬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기복, 의안으로 살펴보는 조선후기의 의학: 실행과정에서 보이는 의학지식에 대한 태도 및 행위를 중심으로, 한국과학 - 16 -
자리매김하는 과정에서 이제마 의학이 지향했던 보편의학의 성격과 달리 당시의 논객들이 이제마의 의학을 오히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수용했다 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36) 이 논문에서 제시한 이러한 논점들은 그간 유의(儒醫)라는 정체성으 로만 설명했던 이제마에 대해서도 좀 더 세밀한 논의로 이어질 수 있게 해준다. 이제마 역시 조선 중기 허준(許浚, 1539-1615), 개항기 황도연 (黃度淵, 1807-1884), 이규준(李圭晙, 1855-1923)과 더불어 조선의 대 표적인 유의이다.37) 유의라는 개념은 넓은 의미로 보면 꽤 많은 의자들 을 포괄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지역과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게다가 유학 및 의학에 대해서 이제마가 지닌 독특한 태도 를 유의라는 용어만으로는 다 포괄할 수 없기 때문에, 유의라는 규정만 으로는 이제마를 충분히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이 논문에서는 이 제마가 내세운 자기정체성, 계보의식의 부재, 의학에서 중심-주변의 문 제에 대한 그의 태도 등을 살펴봄으로써, 중국이나 일본의 유의는 물론 조선의 여타 유의와도 다른 이제마의 특수성을 추적해 볼 것이다. 이제마 의학과 관련된 이러한 논점들은 이제마를 매개로 19세기 후 반 조선 의학을 동아시아 의학사 연구 지형과 연결될 길을 열어줌으로써 동아시아 삼국의 의학사 연구와 이해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상한론, 의학전통, 유의와 관련된 논제는 물론이고 몸 (Body), 학파, 계보, 자의식, 경험지식, 중심-보편 문제 등은 이제마 의 학을 둘러싸고 있는 흥미로운 논제들로 동아시아 의학사 분야의 주요 관 심사이기도 하다. 중국 의학사에서 계보, 유학, 유의 등의 논제는 중국의 학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어였다.38) 사회문화적 조건 사학회지 34(3) (2012), 429-459쪽. 36) 李濟馬 醫學이 지향한 普遍醫學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래 4장에서 다룬다. 20세기 초 四象醫 學의 民族主義的 수용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Shin Dongwon, "Nationalistic" Acceptance of Sasang Medicine, The Review of Korean Studies 9(2) (2006), pp. 143-162. 37) 성호준, 한국의 儒醫에 관한 고찰: 許浚ㆍ李濟馬ㆍ李奎晙을 중심으로 ; 開港期 한국의 韓醫 學을 빛낸 삼대 醫家이자 儒醫로 黃度淵, 李濟馬, 李圭晙을 든다. 김남일, 근현대 한의학 인물 실록 (들녘, 2011), 285-287쪽. - 17 -
이 달랐던 한국과 일본에서는 이러한 관념들이 다른 방식으로 작동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학과 중국의학의 관계 문제이다.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국에 비해서 한국은 주변이었으며 이는 의학 분야도 예외 가 아니었다.39) 한국은 중국의 문화와 지식을 소비만 했었던가?40) 흥미 롭게도 이제마는 당시 중심이었던 청대 의학의 성과와 상관없이 자신의 인식과 경험을 토대로 동아시아 의학 전통을 재구축하고자 했으며 나아 가 국지적 관념을 넘어서는 보편의학을 추구함으로써 중심-주변의 구도 자체를 무위로 만들어 버렸다. 동아시아 의학사에서 한국의 사상의학(四象醫學), 청대 중국의 온병 학(溫病學), 그리고 에도시대 일본의 고방파(古方派) 의학에 대한 비교 연구는 동아시아 의학사에서 흥미를 끄는 연구주제이다. 이에 대한 비교 연구는 이 논문의 연구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지만, 이 논문이 이 과제에 대해 지니는 함의를 언급할 수는 있다. 온병학, 고방파, 사상의학 세 의 학 유파는 18세기 이후에 각각 중국, 일본, 한국에서 새로 등장한 의학 전통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상한론 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의학전통 으로 각각이 보인 계보의식, 유의의 존재형태, 의학에서 보편-특수의 쟁 점, 유학-의학의 관계 등의 측면에서 서로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다. 청 38) Chao, Yüan-ling. The Confucianization of Medicine: The Idea of the Ruyi (Confucian Physician) in Late Imperial China, Medicine and Society in Late Imperial China: A Study of Physician in Suzhou, 1600-1850 (New York: Peter Lang, 2009), pp. 25-52; Angela Ki Che Leung, Medical Learning from the Song to the Ming, in Paul J. Smith and Richard von Glahn (eds.), The Song-Yuan-Ming Transition in Chinese History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3), pp. 374-398; 祝平一, 宋ㆍ明之際的 醫史與儒醫, 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集刊 77(3), (2006), 401-450쪽. 39) 중심-주변의 구도에서 한국과학사 서술에 대한 새로운 문제 제기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 조할 수 있다. 문중양,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 역사학보 189 (2006), 39-72쪽; Soyoung Suh, Herbs of Our Own Kingdom: Layers of the Local in the Materia Medica of Early Chosŏn Korea, Asian Medicine: Tradition and Modernity 4(2) (2008), pp. 395-422. 40) 한국과학사의 중심-주변 구도에서 발생한 중국문제와 한국판 왜-아니(why-not) 질문에 대 해서는 다음 논설을 참조할 수 있다. Yung Sik Kim, Problems and Possibilities in the Study of the History of Korean Science, Osiris 13 (1998), pp. 48-79, 특히 p. 60; 김영 식, 한국 과학사에서 나타나는 중국의 문제, 동아시아 과학의 차이: 서양 과학, 동양 과학, 그리고 한국 과학 (사이언스 북스, 2013), 207-222쪽. - 18 -
대 온병학을 제창한 강남지역의 유의들은 강한 지역적 정체성을 바탕으 로 상한론 을 북방 의학으로 협소화시키면서 이에 견주는 남쪽 지역의 의학인 온병학을 발명 해 내었다. 이와 동시에 이들은 온병학이 황제 내경 등 고대의학의 이법(理法)에 부합함을 천명하며 계보를 앞세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41) 일본의 고방파 역시 유의를 중심으로 사변적인 금 원대 이후의 의학을 배척하며 의학의 본원(本源)인 고대 상한론 으로의 회귀를 강조했다.42) 역시 계보를 중시한 것이다. 이에 비해 조선의 사상 의학은 조선에서도 변방이었던 함경도를 중심으로 등장한 의학전통으로, 보편의학을 지향하면서도 고대의학과는 거리를 두며 특정한 계보의식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의학에서 특별히 중심을 상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 러한 차이점은 몸과 질병에 대한 다른 관념을 낳기도 했다. 세 나라의 사회문화적 조건과 함께 세 의학 전통의 차이점 및 공통점은 향후 동아 시아 의학사의 흥미로운 연구과제이다. 논문 구성: 이 논문은 본문을 배경편(2장), 원론편(3장), 의제편(4장), 실제편(5 장), 네 개의 장과 한 편의 <보론>으로 구성한다. 논문의 핵심을 이루는 원론편, 의제편, 실제편은 우선적으로 이제마 의학의 원리적 구조와 실 질 내용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이에 더해 이제마 의학에 의사학적 의 미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논점을 제시한다. 이와 달리 배경편과 보론편 의 목적은 단정적인 주장을 개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복합적인 인 41) Marta Hanson, Northern Purgatives, Southern Restoratives: Ming Medical Regionalism, Asian Medicine: Tradition and Modernity 2(2) (2006), pp. 115-170; Marta Hanson, Robust Northerners and Delicate Southerners: the Nineteenth Century Invention of a Southern Wenbing Tradition, Positions: East Asia Cultures Critique 6(3) (1998), pp. 515-550. 42) 廖育群 著, 박현국ㆍ김기욱ㆍ이병욱 역, 皇漢醫學을 眺望하다 (청홍, 2010), 117-200쪽. 최 근 국제학술대회에서는 傷寒論 을 중심으로 일본의 古方派 의학과 중국의 傷寒論 전통에 대한 연구발표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어, 곧 좋은 연구결과가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The Eighth International Congress on Traditional Asian Medicine (Sancheong, Korea: September 9-13, 2013); The Association for Asian Studies Annual Conference (San Diego, USA: March 21-24, 2013). - 19 -
물 이제마의 성격과 그의 글쓰기 특징을 논급함으로써 이제마 의학이 왜 19세기 조선에서 등장했는가? 혹은 이제마 의학에서 유학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와 같은 질문들이 갖는 난점을 드러내는 데 있다. 배경편(背景篇)인 제2장 이제마와 동의수세보원 은 본격적인 논 의를 전개하기 위한 사전 작업의 성격을 띠고 있는 장으로, 이제마의 생 애와 저술을 소개한다. 1절 이제마의 생애와 배경 에서는 유자(儒者)이 자 관료(官僚)였으며 변방지역인 함경도 함흥에서 세거했던 의자(醫者) 이제마의 다면적인 사회문화적 입지에 대해서 논의한다. 이제마는 다양 한 사회적 그룹에 속해있으면서도 그의 문화적 정체성과 자의식을 구체 적으로 드러낸 경우는 드물다. 1절에서는 이제마의 학맥이나 사승에 대 해서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으며 이제마가 특정한 범주로 한정짓기 어려 운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지적 유 연성이 증가했던 19세기 조선의 상황에서 이제마의 이러한 복합적 성격 은 이제마의 지적 사유가 자유롭게 전개될 수 있었던 문화적 토양이 되 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절 이제마 관련 저작물 에서는 대표적으로 동 의수세보원, 격치고(格致藁), 동무유고(東武遺稿) 의 서지 정보와 문 헌의 성격을 간략히 알아본다. 특히 이제마가 구축한 의학체계는 한 순 간의 깨달음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경험세계와의 상호작용 과정 속에 서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점도 언급할 것이다. 원론편(原論篇)인 제3장 이제마가 그린 몸: 세상에 위치한 천인성명 의 몸 은 동의수세보원 에서 이제마가 그리고 있는 의학적 몸을 살핀 다. 이제마는 사람을 밝히는 논설[原人篇]이라고 할 수 있는 성명론(性 命論), 사단론(四端論), 확충론(擴充論), 장부론(臟腑論) 과 마감 논설인 광제설(廣濟說) 에서 의학적 몸을 논하고 있다. 이들 논설에 접 근하는 방식은 우선 이들 논설에 등장하는 유학적 관념들과는 일단 거리 를 두면서 이제마가 제시하고 있는 의학적 몸의 골격을 따라가 보는 것 이다. 1절 동아시아 의학 전통에서의 인체관 에서는 이제마가 제시한 의 학적 몸과 비교하기 위해 의서에 투영되어 있는 종래의 의학적 몸을 살 - 20 -
펴본다. 2절 천인성명(天人性命)의 몸 에서는 이와 대비되는 몸으로 이 제마가 제시한 의학적 몸을 전체적으로 조망해 본다. 이 논문에서는 이 제마가 인식하고 정식화한 의학적 몸을 천인성명의 몸 이라고 지칭할 것이다. 전래의 의학적 몸이 우주와 감응하는 몸이었다면 이제마의 천인 성명의 몸은 인간 세상과 작용하는 몸이라고 할 수 있다. 3절 신형장부 (身形臟腑) 양생의학에서 천인성명(天人性命) 장부의학으로 에서는 장부 (臟腑)-성정(性情)을 중심으로 의학을 구조화한 이제마 의학의 논리 구 조와 장부-성정의 상호 긴밀성을 정리해보고 동아시아 의학에서의 이제 마 의학의 의사학적 의미를 조명해 본다. 의제편(議題篇)인 제4장 이제마의 학술 기획: 동아시아 의학의 재구 성 에서는 병증론의 서론 격인 의원론 을 주로 분석하면서, 이제마가 생각한 의학에서의 문제의식과 의학사관을 알아본다. 4장은 결국 유학을 포함하여 의학에 대한 이제마의 태도를 다루는 일이 될 것이다. 1절 동 아시아의 의학 전통: 이천(李梴)의 원도통설(原道統說) 에서는 유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유의들의 일반적인 의학사관을 알아보고, 2절 동 아시아 의학 전통의 재해석: 이제마의 의원론(醫源論) 에서는 이와 비 교되는 이제마의 의학사관을 살펴본다. 이제마는 도통(道統)이 아닌 의 약경험(醫藥經驗)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의학 전통을 이해했으며 이러한 인식 속에서 동아시아 의학을 재구축하려는 원대한 학술기획을 의도했음 을 보일 것이다. 3절 수세보원(壽世保元)과 보편의학 에서는 이러한 이 제마의 의제가 중국 온병학과 일본 고방파와 달리 지역, 시대, 인종을 넘어서는 보편의학을 추구한 것이었음을 짚어볼 것이다. 실제편(實際篇)인 제5장 이제마가 행한 의학: 사상인 병증약리 는 동의수세보원 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 병증론을 살펴보는 장이다. 여 기서는 이제마가 실제로 구축한 의학의 실행지식을 검토한다. 이를 분석 하기 위해서 1절에서는 임상에서의 실무적 지식이랄 수 있는 진단-병증 -약방-본초의 유기적인 상호관계망을 이르는 질병-처치 관계망 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상한론 과 방약합편 을 예로 들어 질병-처치 관계망 - 21 -
을 살펴본다. 2절 사상인 병증약리의 구성 에서는 이제마가 동의수세보 원 병증론에서 구현한 질병-처치 관계망 을 살펴본다. 이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이제마 의학이 이전 동아시아 의학 전통과 어떤 점이 다른지 부각될 것이다. 이와 함께 이제마의 질병-처치 관계망 인 사상인 병증 약리가 일시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드러날 것이다. 3절 실행 층 위의 이제마 의학 은 이제마가 진단하고 처방하는 과정을 전언 및 관련 문헌을 중심으로 재구성해 봄으로써 질병-처치 관계망이 실제로 작동되 는 방식과 실행 층위에서 드러나는 이제마 의학의 특징을 강조할 것이 다. 이 과정에서 의학자이자 의인이었던 이제마의 실제 의학활동 모습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보론>에서는 이제마가 그린 의학적 몸을 추적해 보는 과정 에서 남겨두었던 유학적 언술에 대해서 검토한다. 여기서는 이제마의 글 쓰기 방식, 용어의 자유로운 전용, 계보 의식의 부재 등에 대해서 살펴 보면서, 이제마가 유학적 관념들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드러내지 않고 있 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이는 이제마 의학에서 유학이 갖는 의미를 논 하는 데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제마 의학을 논할 때 그가 주창한 의학적 몸, 그가 구축한 의학적 실질에 좀 더 주목할 필요 가 있음을 의미한다.43) 43) <보론>의 내용은 성격상 선행연구 검토 및 연구방법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서론에 서 다루어야 할 것이지만, 李濟馬가 東醫壽世保元 에서 동원하고 있는 용어들의 의미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이러한 논의를 전개할 수 있다는 기술적인 난점 때문에 논문의 마 지막에 배치했다. - 22 -
제2장 李濟馬와 東醫壽世保元 이 장에서는 조선 말과 이어지는 대한제국기에 활동하였던 이제마(李濟 馬, 1837-1900)의 생애와 그의 저술을 살펴본다. 근대로의 이행기인 19세기 후반에 활동하였던 이제마는 반족(班族), 서자(庶子), 변방인(邊 方人), 무관(武官), 관료(官僚), 유자(儒者), 의인(醫人)이라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사회적 그룹에 속해 있어서 그의 사회문화적 입지를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또한 이제마는 이러한 자신의 사회문화적 환경과 그에 대한 생각을 자신의 저술에서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간 일부 선행연구에서는 이제마를 유학사상가, 개신유학자, 유 의(儒醫), 실학자, 중인층(中人層) 등의 유형적 범주 중 하나에 넣어 파 악함으로써 이제마를 둘러싼 복합적인 사회문화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 지 못했다. 이 글은 이러한 유형론적이고 고립적인 시각을 탈피하여 역 사적 인물로서 이제마의 성격을 여러 층위에서 검토해 봄으로써, 다면적 이고 복합적인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서 존재했던 이제마를 이해하기 위 한 작업이다. 2.1 이제마의 생애와 배경 이제마는 19세기 후반부 조선에서 활동하였던 의자(醫者)이자 스스 로를 동무(東武) 즉 동국(東國)의 무관(武官) 으로 칭한 관료였다. 그는 사상서인 격치고(格致藁) 와 의학서인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을 저술하였으며 유고 문집이라고 할 수 있는 동무유고(東武遺稿) 를 남겼 다. 생애 마지막 저작물이었던 동의수세보원 을 통해 이른바 사상의학 - 23 -
(四象醫學) 을 주창하였고 격치고 를 통해 자신의 지적 사유를 펼쳤다 는 점에서 이제마는 19세기 후반 활동한 의학자이자 사상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마의 생애에 관련된 편린들은 그가 남긴 저술 특히 동무유고 와 같은 유고, 승정원일기 등 관찬 연대기 자료, 선원파승 (璿源派乘) 등 가계보(家系譜), 그리고 20세기 전반기에 채록된 인물전 과 주위 사람들이 남긴 증언에서 찾아볼 수 있다.1) 최근까지 이러한 사 료를 바탕으로 이제마 평전이 출간되기에 이르렀고 이제마 주변의 관련 인물들에 대한 탐색도 일부나마 이루어졌다.2) 2.1.1 이제마의 생애: 이제마의 복합적 성격 ㄱ. 반족(班族) 가문 이제마(李濟馬, 1837-1900)는 1837년 조선의 함경도 함흥(咸興)에 서 전주이씨(全州李氏) 안원대군파(安原大君派)의 19대 후손으로 태어났 다. 조선을 창업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고조할아버지인 목조대 왕(穆祖大王)이 전주에서 관북지역으로 이주한 후 목조의 둘째 아들인 안원대군(安原大君)의 후손들은 15세기 무렵 주로 함경도 함흥 지역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17세기에 과거 응시자격이 서북인(西北人)에게도 주어지자 이들 후손들은 본격적으로 관계 진출을 모색하여 함흥부에서 뿌리를 내일 수 있는 기반을 닦기 시작했고, 17대 후손 이충원(李忠源) 에 이르러서는 관북지역의 명문가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다. 이충원은 1) 李濟馬에 대한 傳記的 정보를 담은 자료로서 광복이전에 토대를 둔 것으로는 생전에 李濟馬를 만났던 李能和(1869-1945)가 전한 人物傳, 문도들이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藏書閣 東武遺 稿 의 追錄, 李濟馬의 동생인 李燮曾의 손자 李鎭胤(1894-1961)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洪淳用의 李濟馬傳, 그리고 李濟馬 집안인 全州李氏 安原大君派 沙村李氏 가문에서 내려오는 族譜인 璿源派乘 등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咸興 출신 天道敎 지도자였던 崔麟 (1878-1958), 문학가였던 崔南善(1890-1957)이 이제마와 관련된 글을 남겼고, 李濟馬 門徒들 과 연결되었던 後學들의 증언도 전해지고 있다. 2) 김종덕ㆍ안상우ㆍ이경성, 이제마 평전: 허구와 상상을 걷어낸 동무의 참모습 (한국방송출판, 2002); 이경성, 璿源派乘을 중심으로 살펴본 東武 李濟馬의 生涯 硏究 (원광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9). - 24 -
이충원 童蒙敎官 이반린 德陵直長 이반구 漣川縣監 이섭하 蔭職司果 이섭관 蔭職司果 이반오 進士 이섭운(이제마) 高原郡守 이섭증 이섭항 이섭태 이섭노 座首 <그림 2-1> 이섭운(즉 이제마)의 가계도.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과거에 응시하지 못 할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근면하고 성실한 생활로 어려운 주변 친족들을 보살필 수 있을 정도로 가문의 경제적 기틀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이충원의 가문은 관계(官界)에도 좀 더 적극적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19세 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전성기를 맞이한 이충원의 집안은 안원대군의 12 대손 이시청(李時靑)을 중시조로 하여 함산(咸山, 함흥의 옛 이름)의 사 촌이씨(沙村李氏) 가문으로 불리며 분파하기에 이르렀다.3) 이충원이 바 로 이제마의 할아버지다. 이제마가 속한 사촌이씨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가늠해보기 위해서 정신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가문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던 이충원과 그 직계자손들을 중심으로 이들의 관직이력을 점검해 본다. 우선 할아버 지 이충원(李忠源, 1777-1849)은 효행으로 정려문(旌閭門)을 하사받았 3) 李忠源은 이때 咸興 읍성에 가까운 沙村으로 주거지를 옮긴 뒤 대저택을 지어 沙村李氏 가문의 터전을 마련했다. 이 문단의 내용은 이경성의 논문에 자세하다. 이경성, 璿源派乘을 중심으로 살펴본 東武 李濟馬의 生涯 硏究, 2장, 9장; 璿源派乘 은 咸山 沙村李氏 가문의 家乘으로 1917년 함경남도 咸興에서 간행되었고 2003년까지 가필되어 전해오다가 李鎭胤(1894-1961) 의 아들인 李聖洙(1926-)에 의해 최근 학계에 알려졌다. - 25 -
으며 사후에는 동몽교관(童蒙敎官, 종9품)을 증직 받고 종4품 조봉대부 (朝奉大夫)에 추증(追贈)되었다. 큰아버지 이반린(李攀鱗, 1803-1853)은 문장에 능해서 북도문장(北道文章)이라 일컬어지며 함경도 관찰사의 천 거[道剡]에 올라 침랑(寢郞)에 제수된 후 목조대왕릉인 덕릉(德陵)의 직 장(直長, 종7품)을 역임하였고, 품계는 종4품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이르 렀다. 또한 함산지(咸山誌) 를 증보하여 함흥부 읍지인 함산지통기(咸 山誌通紀) 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둘째 큰아버지인 이반구(李攀九, 1807-1878)는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의 영(令)을 지내고 의금부도사 (義禁府都事, 종6품)와 연천현감(漣川縣監, 종6품)을 역임했다. 아버지인 이반오(李攀五, 1812-1849)는 1831년 사마양시(司馬兩試)에 등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문재(文才)가 뛰어나 순조 임금으로부터 아마(兒馬) 두 필을 하사받기도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몸이 허약하여 일찍 세상을 떠났다. 사촌 형인 이섭하(李燮夏, 1824-1881) 역시 사마시에 등제한 후 음직(蔭職)으로 사과(司果, 정6품)를 지냈다. 이섭하는 흥선대원군으 로부터 나암(懶巖)이라는 호를 하사받기도 하였는데, 그의 아들 이설규 (李卨珪, 1853-1891)도 1873년 사마시에 합격했을 때 지란(芝蘭)이라 는 호를 흥선대원군으로부터 하사받았다고 한다. 또 다른 사촌 형 이섭 관(李燮觀, 1832-1898) 역시 안릉참봉(安陵參奉, 종9품)을 거쳐 음직(蔭 職)으로 사과(司果)를 지냈다. 이제마의 동생인 이섭노(李燮魯, 1842-1912)는 8년 동안 삼수군(三水郡)에서 유향소(留鄕所)의 좌수(座 首)를 지냈다. 이제마의 장인인 김규형(金奎衡)은 찰방(察訪, 종6품)과 장령(掌令, 정4품)을 거쳐 참의(參議, 정3품)에 이르렀다고 한다. 족보에 이섭운(李燮雲)이란 이름으로 올라있는 이제마(李濟馬)는 1876년 무과에 입격한 후 진해현감(鎭海縣監)과 고원군수(高原郡守)를 지냈다. 이상을 그림으로 간략히 그려보면 <그림 2-1>과 같다. 이상을 참조해 보건대, 19세기 조선의 양반사회가 잔반(殘班), 향반 (鄕班), 벌열(閥閱) 등으로 계층분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제마가 속한 함산의 사촌이씨 가문은 관북지역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위 - 26 -
치에 있었던 반족(班族) 즉 향반으로 파악된다. 이제마와 가까운 친족들 은 음직(蔭職), 사마시, 무과 등을 통하여 관직에 진출하거나 관품을 유 지하고 있었다. 또한 효행(孝行)과 문장(文章)으로 관북지역에서 신망을 얻는 한편 관북지역 학문의 중심인 함흥의 서원(書院)과 향교(鄕校)의 일 에도 참여하며 지역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4) 이제마 자신 도 1897년 수동사(水東社) 장량리(莊粮里) 동몽계(童蒙契)에 권학문을 써 주고 신산사(薪山社) 향약계(鄕約契)에 발문을 달기도 하였다. 그 덕 분에 이제마 사후에 이루어진 추모비 건립에 함흥향교(咸興鄕校)는 가장 많은 재원을 기부했다.5) 도과(道科)를 거친 이제마가 함경도 병마절도사 를 지낸 김기석(金箕錫)의 추천으로 중앙의 관계에 입사(入仕)하고, 1896년 함흥에 민란이 일어나자 이제마가 북로선유사(北路宣諭使)로 제 수된 것도 그의 집안이 관북지역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반영하는 것이었 다. 이제마의 가문은 경제력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전언에 따르면 집안이 부유하여 집에는 서고가 있고 장서가 많았을 뿐 아니라 조부 이충원이 기거했던 사촌(沙村)의 본가에는 거대한 저택이 있었다고 한다.6) 전체적으로 볼 때, 이제마가 속한 사촌이씨 가문은 중앙의 현달 한 고관대작은 아닐지라도 일정한 관직(官職)과 관품(官品)을 유지하면서 서원이나 향교의 향무(鄕務)에도 참여하는 등 관북지역에서 명망 있는 집안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제마와 친분이 있었던 이능화 (李能和, 1869-1943)는 이제마에 대해서 함흥의 망족(望族) 이었다고 기술했다.7) 4) 沙村李氏 가문의 官職 및 孝行에 대해서는 이경성의 논문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경성, 璿源派乘을 중심으로 살펴본 東武 李濟馬의 生涯 硏究, 10장, 특히 144쪽. 5) 藏書閣 東武遺稿 濟衆新編: 水東社莊粮里童蒙契勸學文, 薪山社鄕約契跋文 ; 이경성, 璿源 派乘을 중심으로 살펴본 東武 李濟馬의 生涯 硏究, 176쪽. 6) 先生의 집안이 饒富하여 집에는 書庫가 있고 藏書가 많았는데. 李能和, 李濟馬, 朝鮮日 報社出版部 編, 朝鮮名人傳(二) (京城: 朝鮮日報社出版部, 1939), 341-342쪽; 李濟馬의 동생 李燮曾의 증손자인 李聖洙(1926-)는 2000년 증언하기를, 해방 이전 咸興 沙村 본가에 살았을 때 대궐 같은 큰집 에 기거하였다고 진술했다. 이경성, 璿源派乘을 중심으로 살펴본 東武 李 濟馬의 生涯 硏究, 133-134쪽. 7) 李東武先生者, 全州人, 咸興望族, 世業儒. 李能和, 四象學說人禀性情, 朝鮮佛敎通史 下編, 1067쪽. - 27 -
ㄴ. 서출(庶出) 신분 이제마는 함흥지역의 반족 출신이었지만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이 제마는 고종 임금에게 올린 상소에서 적모(嫡母)라는 표현을 쓰고 있고,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가계보에 형제 서열상 세 번째로 올라있는 등 서출 (庶出)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8) 부친인 이반오가 첫째 부인과 사별한 후 이제마의 생모가 되는 구척(九尺) 장신(長身) 의 경주(慶州) 김씨(金 氏)를 잠시 만나 1837년 이제마를 낳았다고 전한다.9) 출생지는 함흥(咸 興)의 반룡산(盤龍山) 아래 문회서원(文會書院) 인근으로 당시 지명으로 둔지(屯地)이다.10) 출생 후 곧 이제마는 조부인 이충원이 거주하고 있던 함흥 사촌(沙村)의 본가를 거쳐 부친인 이반오가 거주하고 있던 하원천 사(下元川社)의 원곡(元谷)으로 이주하여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11) 사촌 (沙村) 본가에서 90리 정도 떨어진 원곡에서 유아기와 아동기를 보낸 이 제마는 이때 이복남매가 되는 남동생 섭증(燮曾), 섭로(燮魯)와 여동생 둘이 태어나 이들과 같이 지냈다. 13세가 되던 해인 1849년 이제마는 졸지에 부친과 조부를 연이어 잃게 되었다. 이후 세 번째 어머니이자 적 모(嫡母)가 되는 정선(旌善) 전씨(全氏) 밑에서 배다른 동생들과 함께 원 곡에서 성장했다.12) 서출이라는 신분적 제약이 이제마의 성장과정 그리고 이후의 행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이는 이제마가 이와 관 련된 어떤 소회도 자신의 저술에서 남기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20세기 전반기에 등장하는 이제마의 성장기에 관련된 전언들조차도 서로 일치하 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이제마가 서출이라는 신분적 차별대우에 대해서 8) 藏書閣 東武遺稿 鎭撫時上疏 ; 藏書閣 東武遺稿 追錄. 9) 홍순용, (綜說) 東武 李濟馬傳, 대한한의학회지 11 (1964), 4쪽. 이제마의 容貌 역시 九尺 長身으로 氣骨이 장대하고 玉骨仙風의 기품을 지녔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母託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10) 盤龍山은 현재의 東興山을 말하며, 屯地는 현재의 咸鏡南道 咸興市 會上區域 會上洞에 해당한 다. 11) 元谷은 元洞이나 愚谷으로도 불렸으며, 현재 咸鏡南道 新興郡 下元川面 杻上里에 소재한다. 12) 이상 이제마의 출생과 아동기 환경에 대해서는 이경성의 논문이 자세하다. 이경성, 璿源派乘 을 중심으로 살펴본 東武 李濟馬의 生涯 硏究, 20-47쪽. - 28 -
울분을 토했다는 전언이 있다. 이제마가 집안 어른들 앞에서 족보에 올 려주지 않는다며 난동을 부렸다는 것이다.13) 또 다른 전언들은 이제마가 가족의 지원 속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조부 이충원은 이제마를 총애하여 가솔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제마를 적장자(嫡長子)로 인정할 것을 선언하였고 임종 시에는 상당량의 재산을 손자인 이제마에게 미리 배분해 주었다고 한다.14) 이제마가 할아버지 이충원을 중시조로 삼을 것 을 자손들에게 당부했다는 전언들이나,15) 족보에 오른 이름 이섭운(李 燮雲) 보다도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제마(李濟馬) 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행세하였다는 사실도 이러한 정황에 부합한다. 이제마의 적모(嫡母)였던 정선 전씨의 소생인 이복동생들의 자손들도 20세기 초 이제마의 의학이 널리 펼쳐질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16) 또한 20-30대 원곡에서 의 성장 환경과 심리 상태를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는 이제마 자작의 한 시(漢詩)에도 신분적 제약에 따른 정서 이를테면 격정, 울분, 또는 그에 대한 초극, 승화의 증거들이 드러나지 않는다.17) 정치ㆍ사회적 변동이 심하였던 19세기 말 조선이라는 사회의 특수성 을 고려해 볼 때, 서류(庶類) 즉 서자 출신이라는 요인만 가지고 이제마 를 단순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조선초기의 서얼금고법 (庶孽禁錮法)과 한품서용법(限品敍用法)에서 유래한 서얼(庶孼)에 대한 제도적인 차별은 17-18세기를 거쳐 점차 서얼 허통로가 확대되면서 완 화되었다. 입현무방(立賢無方) 을 내세운 서얼 및 일부 허통론자(許通論 者)들의 계속되는 요구 속에서 1823년 계미절목(癸未節目)이 제정된 이 후 19세기 후반 중앙 관계(官界)의 청요직(淸要職)과 문괴무선(文槐武宣) 에 대한 관로가 소통됨으로써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서얼층에 대한 차 13) 이제마의 생애와 사상의학 이론에 관한 대담, 최대우 역해, 동의수세보원 역해: 원리편 (경인문화사, 2012), 274-275쪽. 증언자는 中國 延邊 龍井中醫院에서 재직하였던 孫永錫으로, 李濟馬의 제자인 崔謙鏞과 학술적 인연이 있었던 四象醫學 연구자 金九翊의 弟子이다. 14) 홍순용, (綜說) 東武 李濟馬傳, 4쪽. 15) 같은 글, 4쪽. 16) 이경성, 璿源派乘 을 중심으로 살펴본 東武 李濟馬의 生涯 硏究, 67-69쪽. 17) 노일선, 李濟馬의 東武遺稿에 나타난 漢詩 연구, 사상체질의학회지 11(2) (1999), 39-50 쪽. - 29 -
대가 상당 부분 해소되어 갔다.18) 향촌사회에서는 청직(淸職)과 향임(鄕 任)을 둘러싸고 양반과의 갈등이 존재하였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향촌 의 실질적인 권력기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가계(家系)의 승계 및 재산의 분배와 관련된 가계상속 문제들에서도 점차 적서간 차별이 개선 되고 있었다.19) 이제마는 이와 같이 서얼에 대한 사회적 제약이 완화되 어가는 19세기 중후반에 성장하고 활동하였다. 서출이라는 사회적 조건 이 이제마의 삶과 의학사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관련된 상충된 일화나 전언들 외에 좀 더 직접적인 사료 가 필요하지만, 이제마는 이에 대해서 자신의 소회를 언급한 적이 없다. ㄷ. 수학(修學) 및 주유(周遊) 이제마가 성장하며 수학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학문적 사승관계를 이 루었고 어떠한 지적 편력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 지고 있다. 먼저 수학기(修學期) 이제마의 사승관계를 살펴본다. 전언에 따르면 성장기 때 이제마는 조부 이충원과 북도문장(北道文章)으로 알려 진 백부 이반린(李攀鱗)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고 하며, 가승(家乘)에 의 하면 원곡(元谷)에서 생활할 때 문풍(文風)으로 이름난 위씨(魏氏) 가문 의 위종면(魏鍾冕)을 사부로 모신 것으로 보인다.20) 이와 함께 이제마가 학습에 두각을 나타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주목되는 것은 이들 초기의 학문적 스승이 특정한 사상적ㆍ학문적 기풍보다는 문장으로 알려 져 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부 이충원과 백부 이반린은 각각 효행과 문장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고, 위종면(魏鍾冕) 역시 문과 합격 자를 배출한 관품 있는 집안의 인물로 문사(文詞)가 화려해 4대문장(四 代文章)으로 불렸다고 한다.21) 이제마가 학문을 익혔던 수학기에 영향을 18) 배재홍, 조선시대 庶孼 差待論과 通用論, 복현사림 21(1) (1998), 1025-1046쪽; 이지영, 조선후기 庶孼의 差待 철폐 운동과 그 지위의 변화 (한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5-30 쪽. 19) 이지영, 조선후기 庶孼의 差待 철폐 운동과 그 지위의 변화, 31-47쪽; 배재홍, 조선후기 향촌사회에서 庶蘖의 존재양태와 鄕戰, 복현사림 15(1) (1992), 39-67쪽. 20) 이경성, 璿源派乘을 중심으로 살펴본 東武 李濟馬의 生涯 硏究, 49-50쪽. - 30 -
미쳤던 주변 인물들은 유학(儒學) 혹은 경사(經史)보다는 주로 효행(孝 行)과 문장(文章)으로 알려져 있어서 성장기의 이제마는 특정한 학맥이 나 사상적 경사(傾斜)에서 다소 자유로웠던 셈이다. 이제마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어린 나이에 잃고 조선 팔도와 만주 ㆍ연해주 등 세상을 편력하며 견문을 넓히기도 했다.22) 이 시기의 이야 기 가운데는 이제마의 지적 취향이나 학문적인 연원을 알려주는 것처럼 보이는 일화들이 몇 가지 있어서, 이를 근거로 그의 사상의학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추론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먼저 당시 이제마가 주역(周易) 등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다고 전하면서 이제마의 사상학설(四象學說) 이 유학계의 큰 발명이었다고 평가하는가 하면,23) 이제마가 함흥 해변가 의 어느 암자에 있던 불승(佛僧)으로부터 의학을 배우고는 중국까지 그 를 찾아가 공부하였다는 전문(傳聞)을 증언하기도 한다.24) 또 다른 기담 일화에 따르면, 이제마가 주자(朱子)가 나와서 유교가 망했다 는 말을 자주 하였는데 고우(故友)였던 삼수(三水)의 유림학자 안혼재(安渾齋) 앞 에서 주자가 세상을 망하게 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고 한다.25) 이제마는 함경도 함흥(咸興)의 유학자인 운암(芸菴) 한석지(韓錫地, 1709-1791)의 글을 도중에 우연히 발견하고는 그를 조선의 제일인자 로 높이 평가하 며 마음의 종주로 삼았다고 전하기도 한다.26) 이 외에도 전라도 장성(長 城)의 유학자인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만나 자주 왕 래했다는 등의 기록도 보인다.27) 21) 같은 글, 49-50쪽. 22) 藏書閣 東武遺稿 에 수록되어 있는 各道風俗 및 일종의 기행문인 遊蹟 에는 젊은 시절 (36세) 이제마의 踐歷과 行蹟의 단편들이 담겨 있다. 23) 李能和, 高麗末世 儒風始起, 朝鮮佛敎通史 下編 (京城: 新文館, 1918년), 1063쪽; 李能和, 四象學說人稟性情, 1067쪽. 24) 박성식, 東武 李濟馬의 四象醫學과 佛敎의 影響, 불교학보 제57집 (2011), 273쪽; 최대우 역해, 이제마의 생애와 사상의학 이론에 관한 대담, 동의수세보원 역해: 원리편, 275-276 쪽. 25) 金秉濟, 痛快無雙奇人篇, 四象醫學의 元祖, 近代奇人 李濟馬先生, -奇人篇其四-, 別乾坤 4(5) (1929년 8월 1일), 19쪽. 安渾齋는 渾齋集 (1909)의 주인공인 關北의 학자 安敎翼 (1824-1896)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26) 이능화, 四象學說人稟性情, 1067쪽; 홍순용, (綜說) 東武 李濟馬傳, 5쪽. 27) 같은 논문, 5쪽; 최대우 역해, 이제마의 생애와 사상의학 이론에 관한 대담, 동의수세보원 - 31 -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전언들이,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이제마의 학 문적 연원과 사상의 근원을 찾고자 하는 시도들이 이제마의 사유체계 자 체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일화 이상의 수준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사료만 가 지고 볼 때 이제마의 학문적 연원이나 특정한 사상적 계보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자신의 문제의식과 의제를 그나마 명확히 언급하고 있 는 의학 문헌에서조차 이제마는 자신의 지적 발상을 다만 어쩌다가 얻 었다 고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28) 이는 이제마가 스스로를 어떤 특정 계 보에 위치시키는 데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수학기(修學期) 및 주유기(周遊期)의 이제마에 대한 사료들은 그가 지닌 특정한 사상적 친화성이나 학문적 기반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이제마 가 집안의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넓게 독서할 수 있었고 세상을 편력 하며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다양한 지적 체험을 얻었다는 정도를 알려 준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제마의 학문을 염두에 둔 듯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이제마의 학문이 삼교(三敎)의 구류(九 流)에 방급(旁及)치 아니한 곳이 없다 고 평가하기도 했다.29) ㄹ. 괴질(怪疾)과 병고(病苦) 당대는 괴질 콜레라가 처음으로 출현한 시기였으며 이제마도 주변의 친족들이 여러 질환으로 이른 나이에 사망하는 것을 지켜보았다.30) 19 세기에는 국제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콜레라가 창궐하였다. 조선에서도 1821-22년 처음으로 괴질이 대유행하면서 수십만 명이 사 망하였고 이어서 1858년, 1859년, 1862년, 1886년에 몇 차례 더 유행 역해: 원리편, 277-278쪽; 한상모 외, 동의학개론 (여강출판사, 1993[1964]), 773-774쪽. 28) 余生於醫藥經驗五六千載後, 因前人之述, 偶得四象人臟腑性理, 著得一書名曰壽世保元. 東醫 壽世保元 醫源論. 29) 崔南善 撰, 五. 李東武, 時文讀本 卷之四 (京城: 新文館, 1918), 189쪽. 30) 19세기에 등장한 용어 怪疾 이나 콜레라 에 대한 논의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신동원, 괴질, 호열자로 명명되다, 호환, 마마, 천연두: 병의 일상 개념사 (돌베개, 2013), 145-159쪽. - 32 -
이섭운[이제마]의 친족 사망시 나이 및 연도 조부 이충원 초취 利川徐氏 22세, 1799년 백부 이반린 재취 金海金氏 20세, 1832년 부친 이반오 초취 全州金氏 25세, 1835년 부친 이반오 재취 全州金氏 29세, 1844년 본인 이섭운 초취 慶州金氏 22세, 1859년 종형 이섭하 재취 東萊鄭氏 21세, 1864년 동생 이섭증 초취 淸州韓氏 26세, 1863년 동생 이섭증 장남 李蓍珪 19세, 1875년 <표 2-1> 이제마 근친들의 단명 사례. 이제마의 가계보를 분석 한 선행논문(이경성, 선원파승을 중심으로 살펴본 동무 이제마의 생애 연구, 39쪽)을 일부 참조하고 보완했다. 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31) 청일전쟁 후 1895년에도 괴질이 퍼져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제마가 북로선유위원(北路宣諭委員)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었던 함흥 민란이 촉발된 것도 1895년 함흥부에서 콜레라로 인하여 2700여명 이상의 많은 군민들이 사망한 사실과도 무관치 않 다.32) 이제마의 저술 동의수세보원 에도 괴질(怪疾)에서 비롯한 증상으 로 추정되는 병증들과 온역(瘟疫) 등을 여럿 다루고 있다. 또한 눈에 띄 는 것은 이제마의 근친들, 특히 여성들이 젊은 나이에 여럿 사망하였다 는 사실이다.<표 2-1 참조> 이런 까닭에 부친인 이반오(李攀五)가 부인 을 네 명이나 맞이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제마 자신도 세 번이나 혼인하 였다. 이렇듯 괴질, 병고, 단명이라는 삶의 실존 문제들에 이제마는 가까 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이 이제마가 의학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 은 있으나 그가 주위에서 경험한 이러한 질병과 죽음의 현실은 그만의 31) 김두종, 韓國醫學史: 全 (탐구당, 1981), 369-371쪽; 신동원, 한국근대보건의료사 (한울 아카데미, 1997), 118-119쪽. 32) 같은 책, 164쪽; 이경성, 璿源派乘을 중심으로 살펴본 東武 李濟馬의 生涯 硏究, 153쪽. - 33 -
특수한 사정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경상도 선산(善山)의 양반 노상추(盧 尙樞, 1746-1829)의 일기에서도 비슷한 사정을 확인해 볼 수 있다.33) 노상추 일가의 남성들이 재혼과 삼혼으로 이어지는 것은 가계를 이어야 한다는 절박함과 함께 요절한 부인과의 사별이 주요한 원인이었다고 한 다. 또한 족보와 호적 그리고 일기를 상호 비교해 보면 족보와 호적에 이름이 올라 있지 않거나 혹은 이름조차 없었던 아이들이 여럿 등장하는 것도 엿볼 수 있다. 이제마의 친족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듯이 전통시대에 죽음은 삶의 일부였다. 근친의 요절과 함께 역병 역시 이제 마가 의학을 선택하는 데 어떤 계기를 주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 다. 동한(東漢)의 장기(張機, 150-219 CE)가 역병으로 인해 많은 친족 들이 죽는 것을 목도하고는 급성 전염병을 다루는 의서 상한론(傷寒 論) 을 지었다지만 이제마에게서는 적어도 그러한 진술을 찾아볼 수 없 다.34) 도리어 이제마는 괴질이나 부인과 혹은 소아과 등 자신의 친족이 겪은 질병을 다루는 분과 의학을 탐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의학을 추구하였다.35) 어쩌면 이제마가 의학과 만나게 된 실마리는 친족의 죽음 과 같은 환경의 자극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건강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나온 것일 수도 있다.36) ㅁ. 관북(關北) 출신(出身) 이제마를 결정짓는 또 하나의 사회적 조건은 그가 조선의 변방인 관 북(關北)지역 즉 함경도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제마는 관북지역의 중심 인 함흥(咸興)에 삶의 터전을 두고 있었고 지역 주변 인물들의 후원으로 33) 문숙자, 무관이 남긴 68년의 생애사: 노상추 일기,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 일기로 본 조선 (글항아리, 2013), 300-306쪽; 문숙자, 조선후기 양반의 일상과 가족내외의 남녀관계: 盧尙樞의 日記 를 중심으로, 고문서연구 28 (2006), 215-218쪽. 34) 傷寒雜病論 傷寒雜病論序. 漢나라 말기 張機의 傷寒論 은 李濟馬의 東醫壽世保元 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문헌이다. 35) 이는 아래 제4장에서 자세히 다룬다. 36) 李濟馬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解㑊과 噎膈ㆍ反胃라는 질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였으나 자신 이 太陽人이라는 판단에 따라 이를 性情의 관점에서 다스려서 夭折을 면할 수 있었다고 진술 했다. 東醫壽世保元 太陽人內觸小腸病論. - 34 -
동의수세보원 의 출간이라는 학술사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제마 의학의 정수가 담겨있는 동의수세보원 은 함흥의 율동계(栗洞契) 문인 (門人)들에 의해서 출판되어 세상에 전해졌으며, 이제마는 발문에서 자 신이 북방의 함흥 출신임을 명확히 드러내었다.37) 이제마는 고종 임금에 게 올리는 상소에서 북방 출신 고독단신(孤獨單身)의 처지에 외람되게 도 폐하의 일월(日月)과 하해(河海)와 같은 은택 을 입었다며, 관직에 처 음 입문할 때의 자신의 사정을 아뢰기도 했다.38) 이제마의 이 글에서, 변방 출신이었던 초사자(初仕者)가 느낄 수 있는 사회적 고립감을 엿볼 수 있다. 서북인 즉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은 지리적, 문화적, 종족적 이질성 때문에 중앙으로부터 경원시되어 조선초기부터 지역적 차별과 함께 신분 적 차별을 받아왔다. 이는 서북의 지역사회가 비교적 수평적이고 유동적 인 신분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유향(儒鄕)의 구별이 상대적으로 엄격하지 않았기에 사족(士族)이 존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39)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갖는 서북 지역민들은 중앙정부의 사민정책과 지방관의 파견, 양란 이후 북방지역 문인에 대한 등용, 무과를 중심으로 한 실제 과거합격자 수의 증가, 그리고 영조ㆍ정조대 탕평정책의 영향 등의 요인 으로 일부가 중앙의 관직에 진출하기도 했으나 이들에게 문ㆍ무반 청현 요직(淸顯要職)으로의 관로는 조선후기까지도 여전히 제한되어 있었 다.40) 조선 후기에 서북지역의 술사 혹은 유랑지식인들은 정감록(鄭鑑 錄) 을 은밀히 유포하며 중앙정부의 권위에 도전했고,41) 저항적인 지식 인과 장사층(壯士層) 일부는 19세기 초 홍경래(洪景來)의 난에 참여하기 도 했다.42) 서북의 문인들이 다른 지역에서는 사례를 찾을 수 없는 지역 37) 大韓光武五年辛丑六月日, 咸興郡栗洞契新刊, 門人 金永寬ㆍ韓稷淵ㆍ宋賢秀ㆍ韓昌淵ㆍ崔謙鏞 ㆍ魏俊赫ㆍ李燮垣. 東醫壽世保元 (初版) 四象人辨證論 ; 光緖甲午四月十三日, 咸興李濟馬, 畢書于漢南山中. 東醫壽世保元 四象人辨證論. 38) 臣以北方孤蹤, 猥蒙陛下日月河海之澤,. 藏書閣 東武遺稿 鎭撫時上疏. 39) 장유승, 朝鮮後期 西北地域 文人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93-106쪽. 40) 정해득, 朝鮮後期 關北儒林의 形成과 動向, 경기사학 2 (1998), 73-103, 특히 75-88쪽. 41) 백승종, 18세기 전반 서북지역에서 출현한 鄭鑑錄, 역사학보 164 (1999), 99-124쪽. 42) 오수창, 朝鮮後期 平安道 社會發展 硏究 (일조각, 2002), 3장 19세기 초 평안도 사회세력 - 35 -
의 독자적인 시문선집인 관북시선(關北詩選) 과 서경시화(西京詩 話) 를 편찬하기도 했던 것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지역의 자의식을 반 영하는 것이었다.4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북지역민의 지역적 정서와 자의식은 그 지역 내부에서도 지역적 편차를 보이는 등 훨씬 복합적이었다. 이를테면 관서 지방이 풍부한 인적ㆍ물적 자원에 힘입어 중앙정부에 적대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마가 속해 있었던 관북지역은 조선왕실의 발상지 라는 귀속의식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중앙정부에 유화적이었다.44) 이러한 복합적인 지역 정서와 정체성을 계승해 나가는 가운데, 서북의 지식인들 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정치적 전환기에 실력양성론을 내세워 강학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어서 자강개혁론, 문명개화론을 주도함으로써 근대 전환기에 서북인들의 위상을 고양하는 결과를 낳았다.45) 20세기 초 서북지역의 문인들은 변방지역의 소외의식에서 벗어나 보 편주의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46) 지역의 정체성이라는 관점 에서 볼 때, 정치사회적 차별을 받아왔던 서북지역 문인들이 지역성을 탈피하여 보편성을 지향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주지하듯이, 일제 강점기 한국 근대문학의 성립에 기여한 주요 문인들과 미국 유학생 가운 데는 서북지역 특히 평안도 출신들이 많았다.47) 배타적 폐쇄주의로 환원 되기 쉬운 중앙집권적 획일성의 폐단을 일찌감치 체험한 서북지역에서 출생하고 성장했던 이들 문인들은 근대적 전환기를 차별과 배제를 재생 산하지 않는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할 기회로 보았다. 1920년대 이들의 민족주의 문화운동은 그들을 차별했던 국가 권력에 대한 동경 또는 그 의 대두. 洪景來의 亂과 지역의 정체성과 연관이 있다는 연구도 있다. 아래 서평 참조. 오수 창, 홍경래의 난, 폭넓은 시각과 수많은 논쟁거리, 역사비평 83 (2008), 424-431쪽. 43) 장유승, 朝鮮後期 西北地域 文人 硏究, 175-203쪽. 44) 장유승, 조선 후기 서북 지역 문인 집단의 성격: 평안도와 함경도의 지역 정체성의 차이를 중심으로, 진단학보 101 (2006), 410-421쪽. 45) 장유승, 朝鮮後期 西北地域 文人 硏究, 69-85, 204-244쪽. 46) 이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조할 수 있다. 정주아, 한국 근대 서북문인의 로컬리티와 보편 지향성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47) 같은 논문, 231쪽. - 36 -
권력을 탈환 하려 하기보다는 보편주의에 기반을 둔 새로운 범영토적 이상국가의 건설 에 관심을 두었다.48) 이런 까닭에 서북인의 공동체 이 상주의는 무장투쟁론이 아닌 실력양성론에 토대를 두었다. 이와 유사하게, 관북 출신이었던 이제마 역시 지역적 특수성을 강조 하기보다는 이를 넘어서는 보편의학을 추구했다. 그는 과거 의학으로의 회귀나 기존 의학 전통에 대한 비판보다는 새로운 의학 건설에 좀 더 관 심을 두었을 뿐 아니라, 그 새로운 의학은 지역의학이 아닌 동아시아 의 학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의학을 지향했다. 제4장에서 자세히 논하겠지 만, 이러한 특징은 동시대 중국의 사례와도 비교된다. 19세기 청대 강남 지역 유의(儒醫)들이 강한 지역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상한론(傷寒論) 중심의 북방의학에 대비되는 온병학(溫病學) 을 천명했던 것과 달리,49) 19세기 조선 북변의 이제마는 지역의학이나 자주의학을 내세우기보다는 오히려 보편의학을 지향했다. ㅂ. 무관(武官) 입신(立身) 이제마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사회적 조건은 그가 무인(武人)으로 입신하여 무관(武官)으로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문사층과 무 사층의 경계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흐렸고 정책적으로 무업(武 業)이 장려되었던 북방 변경지역의 특수한 환경에 놓여 있던 이제마는 무관으로 사환(仕宦)의 길을 선택했다. 1876년 4월 이제마는 비교적 늦 은 나이인 40세에 함경도 도과(道科) 별시무과(別試武科)에 응시하여 합 격한 후, 서울에 올라와 수문장(守門將)을 지내며 하급 관료로서 생활했 다. 50세 이후 이제마는 무신(武臣)들이 주로 부임했던 연변(沿邊) 지역 48) 같은 논문, 248-249쪽. 정주아는 1920년대 文藝誌인 朝鮮文壇 과 修養同友會의 기관지였던 東光 의 기사를 분석해 보고 西北 邊方人들의 이러한 보편의 지향과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열 망을 읽었다. 같은 논문, 4장 변방인의 보편지향성과 탈-로컬(beyond-local)의 자아상, 187-247쪽. 49) Marta Hanson, Northern Purgatives, Southern Restoratives: Ming Medical Regionalism ; Marta Hanson, Robust Northerners and Delicate Southerners: the Nineteenth Century Invention of a Southern Wenbing Tradition, - 37 -
의 지방관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바로 경상도 진해(鎭海)의 현감(縣監)과 함경도 고원(高原)의 군수(郡守)를 지냈던 것이다. 사상서로 분류할 수 있는 격치고(格致藁) 에서조차 동무(東武) 즉 동국(東國)의 무변(武 弁) 이라는 뜻을 갖는 자호(自號)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19세기 후반 상무지향(尙武之鄕) 북변 출신이었던 이제마는 무 인(武人)이라는 자의식과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50) 그러나 문무 양반이 모두 지배계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제도 적으로 숭문경무(崇文輕武) 즉 문반 우위의 정책을 고수하였다. 무과 는 특수한 사정에 따라서는 평민은 물론이고 하천민까지도 응시하는 것 이 현실적으로 가능했을 뿐 아니라,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를 거치지 않는 직부전시(直赴殿試)가 확산되고, 선발인원도 수천 명을 상회하는 경우가 있어서 만과(萬科) 라고 불리기도 했다.51) 자리에 비해 급제자 의 수가 과도하게 많았기 때문에 품계가 있는 관직을 받지 못한 채 평생 선달(先達)로만 지내거나 한미한 직임에 만족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과시험에 합격한 출신(出身) 들이 입사(入仕)하기 위해서는 대개 서울 에 기거하며 권세가를 드나들면서 각종 시사(試射)와 시재(試才)에 참여 하여 관직에 천거될 수 있는 기회를 엿보아야 했다.52) 여기에는 가문 및 인적 네트워크가 중요하게 작용했다.53)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무관 노상 추가 선천(宣薦)을 거쳐 정조(正祖)에 의해 평안도 삭주부사(朔州府使)로 발탁될 수 있었던 것도 그나마 그의 문지(門地)가 높았기 때문이었다.54) 무과에 대한 이러한 인식 속에서 조선 후기의 무신(武臣)이었던 권필칭 (權必稱,?-1784)이나 앞서 언급한 무관(武官) 노상추의 경우 스스로에 50) 東武, 姓李, 出身爲東國武弁, 故號曰東武(諱濟馬, 字懋平). 格致藁 反誠箴. 51) 정해은, 조선후기 무과급제자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2), 17-78쪽. 52) 정해은, 조선후기 무신의 중앙 관료생활 연구: 盧尙樞日記 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43 (2008), 311-317쪽. 53) 이를테면 文官의 都堂錄에 해당하는 宣薦에 들기 위해서는 소속된 家門의 門閥이 가장 중요 했다. 門地가 높아도 평안도ㆍ함경도 출신과 庶孼은 이런 경우에서 제외되었다. 정해은, 조선 후기 무과급제자연구, 179-198쪽, 특히 184-187쪽. 이는 萬科라 불렸던 武科가 仕宦路로서 작동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54) 정해은, 조선후기 무신의 중앙 관료생활 연구: 盧尙樞日記 를 중심으로, 317-319쪽. - 38 -
대해 무반(武班)보다는 양반(兩班)이라는 정체성을 앞세우곤 했다.55) ㅅ. 문객(門客) 생활 무과에 급제한 후 세거지인 변방의 함흥을 떠나 가족과 함께 상경한 이제마는 입신과정에서 무변(武弁)으로서 또 다른 삶의 과정을 밟았다. 당시 무신의 최고반열에 있었던 장신(將臣) 김기석(金箕錫, 1828-1890) 의 지우(知遇)를 얻어 문객(門客)이나 겸인(傔人)으로 활동하며 관로를 모색한 것이다.56)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기도 했던 김기석의 천거를 받아 1876년 무과에 급제한 후 무위소(武衛所)의 군관으로 입위(入衛)할 수 있었고,57) 춘당대시(春塘臺試) 등 시사(試射)에도 참여하며 기회를 엿 보다가 마침내 1880년 초사직(初仕職)으로 수문장(守門將)을 제수 받았 다.58) 1881년에는 새로 설립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군무사(軍務 司)의 참모관(參謀官)을 맡기도 했다. 1896년 이제마가 올린 진무시상 소(鎭撫時上疏) 의 다음 진술로 보건대 이후의 관직생활에서도 고관 김 기석이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臣)이 북방 출신 고독단신(孤獨單身)의 처지에 외 람되게도 폐하의 일월(日月)과 하해(河海)와 같은 은택을 입어 병자 (1876)년에 무위별선군관(武衛別選軍官)으로 입위(入衛)하였고 병술 55) 정해은, 조선후기 무과급제자연구, 87-88쪽; 정해은, 조선후기 무신의 중앙 관료생활 연 구: 盧尙樞日記 를 중심으로, 296-300쪽. 56) 李濟馬는 金箕錫과 親交가 두터워 항상 그의 집에 留宿하였다고 전한다. 홍순용, (綜說) 東武 李濟馬傳, 6쪽. 57) 李能和, 李濟馬, 342쪽; 丙子年以武衛別選軍官入衛, 丙戌年除授鎭海縣監. 藏書閣 東武遺 稿 鎭撫時上疏 ; 金箕錫이 창설 때부터 참여한 武衛所 는 1874년 高宗이 親政에 임하면서 궁정수비를 목적으로 만든 宿衛軍이었는데 각 軍營에서 우수한 軍卒을 차출하여 충원함으로써 병력 1200여 명을 거느린 强軍이 되었다. 총책임자인 武衛都統使는 禁衛營ㆍ御營廳ㆍ訓鍊都監 등 3영의 提調를 겸하면서 龍虎營과 摠戎廳까지 통솔하는 실질적인 漢城府의 치안 책임자였으 며, 武衛所는 수도의 全軍務에 관여하는 軍營이 되어 앞으로 있을 國王 중심의 중앙집권적 軍 制改革을 위한 중추적 존재의 위상을 부여받았다. 서울特別市史編纂委員會 編著, 서울六百年 史 제3권 (서울특별시, 1979), 378-379쪽. 58) 日省錄 高宗16年 4月3日; 이경성, 璿源派乘을 중심으로 살펴본 東武 李濟馬의 生涯 硏究, 102쪽. - 39 -
(1886)년에는 진해(鎭海)의 현감(縣監)에 제수되었습니다. 매번 전(前) 무 위도총사(武衛都統使) 김기석(金箕錫)의 지우(知遇)를 받아 여러 차례 위 로 통할 수 있었습니다. 경인(1890)년에 신(臣)이 체임(遞任)되어 상경하 였더니 김기석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에 도성 안에 5년 동안 체류하면서도 아랫사람의 사정을 위로 통할 방도가 없었습니다.59) 김기석(金箕錫)은 장신(將臣) 반열의 무인가문(武人家門) 출신으로 당시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포도대장(捕盜大將), 무위도총사(武衛都統使), 어 영대장(御營大將),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 등을 지냈으며, 이어 병 조판서(兵曹判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60) 장 신(將臣) 김기석을 정점으로 하는 서울의 관료 네트워크에 변방 출신 이 제마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선후기 유학사상사의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박은식(朴殷植, 1859-1925)과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의 사례는 이러한 이제마의 사정을 일부분 예시해 준다. 연구에 따르면, 관서 출신의 학자였던 박은 식(朴殷植)은 세도가 민병석(閔丙奭)이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부터 막객으로 활동하며 관서지방의 실천적인 성리학과 서울을 거점으로 하는 59) 伏以臣以北方孤蹤, 猥蒙陛下日月河海之澤, 丙子年以武衛別選軍官入衛, 丙戌年除授鎭海縣監. 每爲前武衛都統使金箕錫所知遇, 屢屢上達矣. 庚寅年臣遞任上京, 則金箕錫已卒, 逗留都下五年, 而下情無由上達. 藏書閣 東武遺稿 鎭撫時上疏. 東醫壽世保元 을 비롯하여 이 논문에 등장 하는 문헌은 대부분 우리말 번역서가 있으며 이를 참조하였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필요에 따라 직접 수정하여 우리말로 옮겼다. 60) 본관이 光山인 金箕錫(1828-1890)은 將臣으로 登壇錄 에 오를 정도로 잘 알려진 대표적인 武人家 인물이다. 아버지는 忠淸道 兵馬節度使를 지낸 贈崇祿大夫 金相順이다. 1845년 武科에 급제한 후 宣傳官(1847), 承政院承旨(1864), 鴻山縣監ㆍ金川郡守, 北兵使(1870), 御營大將 (1876), 刑曹判書(1876)를 거쳐 1877년에는 摠戎使ㆍ武衛都統使ㆍ統制使ㆍ禁衛大將ㆍ江華府 留守 등을 역임하였다. 壬午軍亂(1882) 이후에는 三軍府의 知三軍府事를 맡고, 水原府留守 (1884), 兵曹判書(1885), 海防領使(1886), 判義禁府事(1887), 春川府留守(1888) 등을 지냈다. 시호는 貞武이다.(참고: 登壇錄, 武威登選錄, 承政院日記, 備邊司謄錄 등); 金箕錫은 1876년부터 1885년까지 7차례 4년 이상 捕盜大將職을 맡기도 하였는데, 捕盜大將들은 閔氏戚 族과 함께 당시 최고의 국정집행기구인 內務府에도 참여하여 실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甲申政 變(1884) 이후 捕盜廳은 고종의 친위세력 역할을 하면서 수구적 권력의 핵심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박은숙, 開港期(1976-1894) 捕盜廳의 運營과 漢城府民의 動態, 서울학연구 5 (1995), 147-154쪽. - 40 -
경화학계(京華學界)의 포괄적인 주자학을 겸비할 수 있었고, 영남에서 사림파의 성리학을 겸비하고 있었던 장지연(張志淵) 역시 서울에서 경화 거족 민영규(閔泳奎)의 문객으로 활동하며 박학(博學)의 학풍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61) 그 과정에서 이들은 하급 관인(官人)으로 입신하며 대한제 국기 유학의 역동적인 변화과정 속에서 자강사상을 쌓아갈 수 있었던 것 이다. 이제마도 서울에서 경화학계의 주자학과 국제적인 분위기를 익혔 을 가능성이 있지만, 언론인으로서 많은 논설을 남긴 박은식, 장지연과 달리 자신의 지적 사유의 연원이나 그 변화 양상을 알려주는 흔적을 충 분히 남기고 있지 않다. 결국, 1870년대 중반부터 10여 년 이상 서울에서의 문객 생활에서 이제마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경험을 했고 어떠한 사상적 영향을 받았는 지 아직까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아마도 1870-80년대 장신 김기석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료 네트워크의 성격과 조선정부의 군사정책 등이 밝 혀지면 이제마의 사상적 연원에 대한 어떤 단서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 다. 하지만 이제마는 대장 김기석과의 연결고리 이상으로 특정한 정치 적, 사상적 집단에 깊이 관여한 것 같지는 않다. 위의 상소문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제마는 김기석이 사망한 후에는 그 연결고리가 끊어졌다고 말 하고 있다. 이제마의 문객 시절에 관해 전해지는 한 가지 일화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에 따르면 이제마는 고종(高宗) 임금 앞에서나 김의정(金 議政)으로 불리는 고관 앞에서나 상대의 의중을 헤아리며 화법의 묘를 살리기보다는 직설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개진함으로써 그들과의 관계를 발전적으로 진전시키지 못 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62) 용모가 호상 (虎象)인 이제마는 퉁명스러운 말씨에 순 함경도 사투리를 쓰며 예의범 절을 도외시하는 성격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배척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고 전해지기도 한다.63) 이러한 이야기들은 기본적으로 이제마의 대범함 61) 노관범, 대한제국기 朴殷植과 張志淵의 自强思想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134-169, 191-200쪽. 62) 李能和, 李濟馬, 342쪽; 홍순용, (綜說) 東武 李濟馬傳, 6쪽; 여기서 金議政은 議政府議政 을 지낸 金炳始(1832-1898)로 추정된다. 김종덕 외, 이제마 평전, 128쪽. - 41 -
을 강조하려는 전기성 일화의 성격이 짙지만, 특정한 사회문화적 정체성 이나 집단에 몰입하지 않는 그의 태도를 동시에 보여주기도 한다. ㅇ. 관료(官僚) 행적(行蹟) 이제마는 40대에 하급 무관을 거쳐 50대 초반에는 경상도 진해(鎭 海)의 현감(縣監)을 지냈고 62세에 함경도 고원(高原)의 군수(郡守)를 끝 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64)<표 2-2 참조> 서류(庶類)이자 변방 출신이 었던 무부(武夫)가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관직이 군수(郡 守)까지 이른 것을 보면 관운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65) 이제마가 관료로서 서울과 지방에서 활동할 때는 19세기 후반으로 개항(開港), 임 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 갑오개혁(甲午改革), 을미사변(乙 未事變), 청일전쟁(淸日戰爭), 아관파천(俄館播遷) 등 조선에 큰 변화가 닥치던 격동기였다. 이 당시 이제마의 생각을 일부 읽어 볼 수 있는 자 료가 있다. 관료이자 지방관으로서 이제마의 일부 행적과 그의 시국관 및 시무 책은 그의 유고집인 동무유고 에서 단편적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40대 군무사의 참모관 시절 정세탐문의 일환으로 일본인과 문답한 글들이 전 해지는데 외국인에게 동아시아 3국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비치기 도 하였다.66) 50대 이후에는 목민관으로서 올바른 관리의 등용, 과감한 세금 탕감, 공평한 조세 등을 요구하거나, 무사(武士)의 입장에서 부국강 병책으로 후당총(後瞠銃)을 도입하자는 안을 비롯한 기타 양병안(養兵案) 63) 홍순용, (綜說) 東武 李濟馬傳(二), 17쪽. 64) 李濟馬의 관직 이력에 대해서는 이경성의 학위논문이 자세하다. 이경성, 璿源派乘 을 중심 으로 살펴본 東武 李濟馬의 生涯 硏究, 98-130쪽. 65) 조선시대 文科에 급제한 庶孼 출신들은 흔히 외관직인 縣監(종6품), 察訪(종6품), 郡守(종4품) 를 많이 지냈다. 높이 올라간 경우 實職인 牧使(정3품)까지 확인된다. 손혜리, 과거를 통해 본 조선후기 서얼가의 學知생성과 家學의 성립: 昌寧 成氏 桑谷公派의 경우, 대동한문학 38 (2013), 178-180쪽; 배재홍, 조선후기 서얼 과거합격자의 成分과 官歷, 조선사연구 2 (1993), 216쪽. 李濟馬가 역임한 縣監과 郡守職은 經世를 실현할 수 있는 높은 직임은 아니었 지만 이제마가 邊方출신에 庶出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게다가 官運으로 따지자면 李濟馬의 가까운 친족 가운데 그가 제일 좋았다고 볼 수 있다. 66) 藏書閣 東武遺稿 辛巳五月元山港問答-又次日問答. - 42 -
나 이 시 기71) 관 직 이 력 1세 1837년 3월 生 40세 1876년 4월 咸鏡道 道科 別試武科 合格 40세 1876년 漢城府 武衛所 別選軍官 44세 1880년 11월 守門將廳 守門將(종9품/종6품): 初仕 45세 1881년 2월 統理機務衙門 軍務司 參謀官 45세 1881년 4월 副司果(종6품) 51-53세 1887년 2월 1889년 7월 慶尙道 鎭海縣監(종6품) 52세 1888년 7월 僉知中樞府事(정3품) (1894년 7월) (甲午更張: 官制改革) 60세 1896년 3월 北路宣諭委員(三品) 61-62세 1897년 4월 1898년 4월 咸鏡道 高原郡守(奏任官 五等 三品) 64세 1900년 9월 卒 <표 2-2> 이제마의 관료 행적. 이경성의 논문( 璿源派乘을 中心으로 살 펴본 東武 李濟馬의 生涯 硏究, 128-129쪽)을 참조해서 재구성했다. 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도 하였다.67) 특히 현안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방 법으로 현명한 재상[賢相]과 훌륭한 장군[良將]를 등용하는 것이 시무의 핵심이라는 점을 역설하였다.68) 이제마의 정치적 입장을 이야기할 만큼 사료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급진적 개화파와 보수적 수구파를 동시에 비 판하는 글을 찾아볼 수 있다.69) 단발령과 을미사변(乙未事變)을 계기로 67) 藏書閣 東武遺稿 陳情 ; 上大臣書(金炳始) ; 薪山社鄕約契跋文(孝悌論). 68) 藏書閣 東武遺稿 上大臣書(金炳始). 69) 藏書閣 東武遺稿 答中川祐順書 ; 鎭撫時上疏. - 43 -
1897년 함흥에서 민란이 발생했을 때, 당시 이제마는 거상시묘(居喪侍 墓) 중이었음에도 함흥 군민들의 요청에 응하여 주모자를 하옥하고 함흥 부(咸興府)를 장악함으로써 병란(兵亂)을 미리 막기도 하였다.70) 이제마의 시국관과 행적은 19세기 말 복잡한 정치사회적 역학관계의 맥락에 처해 형성된 것으로 이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이분법적인 틀을 적용하여 분석하거나 특정 유형에 넣어 이해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 1870년대 개항 이후 근대 이행기 지식인들의 사상적 스펙트럼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형론적인 분석틀, 이를테면, 주리(主理) 대 주기(主 氣), 유학(儒學) 대 서학(西學), 보수(保守) 대 개혁(改革), 수구(守舊) 대 개화(開化), 전통(傳統) 대 근대(近代), 허학(虛學) 대 실학(實學), 거의 (擧義) 대 거수(去守), 위정척사(衛正斥邪), 동도서기(東道西器), 문명개화 (文明開化), 대원군파(大院君派), 고종왕당파(高宗王黨派), 민씨척족파(閔 氏戚族派), 친중(親中), 친일(親日), 친러[親露] 등의 단순 구도 하에서 설명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당시 역사적 사건의 다면적 맥락에 대한 세밀 한 분석이 요구된다.72) 특히 이제마와 같이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닌 인 물에 대해서는 다른 분석틀이 필요하다. 이제마는 효행이나 존심양성(存 心養性) 등 원시유학을 강조함으로써 보수성을 보이면서도 주자학과는 거리를 둠으로써 개혁적이기도 했으며, 정국운영의 부조리를 비판하면서 도 실제 지방관을 역임했고, 단발령과 을미사변의 배후세력을 강력히 비 난하면서도 다가올 참화를 막기 위해서 거의(擧義)를 내세운 반란세력을 무혈로 진정시켰다. 70) 李濟馬는 喪中임에도 군민들의 요청에 의해 주모자인 崔文煥을 下獄했다. 이후 조선정부에서 는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李濟馬를 北路宣諭委員에 위임했다. 咸興民亂과 이제마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이 다루고 있다. 이경성, 璿源派乘 을 중심으로 살펴본 東武 李濟 馬의 生涯 硏究, 149-174쪽; 이창일 역주, 이제마 저, 東武遺稿: 동무 이제마가 남긴 글 (청계, 1999), 179-187쪽; 박성식, 東武 李濟馬와 崔文煥의 亂, 사상의학회지 9(2) (1997), 39-55쪽. 71) 建陽元年인 1896년 1월 1일 이후는 曆法이 바뀜에 따라 陽曆으로 표기한 것이다. 72) 이를테면, 官僚이자 儒者로서 李濟馬는 국법수호를 강경하게 지지하는 原則主義者에 가까웠으 며 堯舜과 孔孟의 道에 부합하는 세상을 이상적인 大同社會로 보았다. 즉 그는 개인의 도덕적 완성이 이상사회로 나아가는데 핵심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이창일도 언급하 였다. 이창일, 사상의학, 몸의 철학 마음의 건강, 23-26쪽. - 44 -
이제마의 의학실천과 의학사상을 이해하려는 이 논문의 목적에서 볼 때, 이제마의 정치적ㆍ사상적 입장과 관련하여 다음 두 가지는 주목할 만하다. 우선 이제마에게 있어 당시 조선의 정치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 한 하나의 방책은 현상(賢相)과 양장(良將)의 등용 즉 능력에 따라 사람 을 적재적소에 쓰는 것이었다. 이제마는 개인의 능력과 장점이 잘 펼쳐 질 수 있는 사회를 꿈꾸고 있었다. 이는 동의수세보원 광제설(廣濟 說) 에 등장하는 호현요선(好賢樂善)은 인간세상의 대약(大藥)이고 투현 질능(妬賢嫉能)은 인간세상 만병의 근원 이라는 말과도 공명하는데, 이 를 통해 이제마가 구상한 의학적 몸과 이를 토대로 상향식으로 완성될 이상적인 세상의 모습이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73) 또 하나는 이제마가 함흥민란과 같은 사회정치적 혼란기에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 서는 것보다는 지역 군민들의 안전과 삶의 현실을 더 중시함으로 써 상중임에도 공무에 참여하여 관군, 반군, 원산항의 일본군 사이에 군 사적 충돌을 방지했다는 점이다. 이때 이제마는 상소를 통해 자신의 이 러한 의도를 고종 임금에게 분명히 아뢰었으며,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 었던 함흥의 지역민들은 이제마의 사후에 그를 기리는 추사대(追思臺)를 건립하기도 했다. ㅈ. 유자(儒者)의 길 이제마는 넓은 의미에서 유자(儒者)로 분류할 수 있다. 그는 반족(班 族) 가문에서 출생하였고 수학기에 경사(經史) 및 사장(詞章)을 포함하여 글을 익힌 독서인(讀書人)이었으며 거자(擧子)로서 예비관료였다. 과거시 험을 거쳐 입사(入仕)한 후에는 지방의 수령(守令)으로서 목민관의 직임 을 수행하고 시무책을 올리는 등 경국제민(經國濟民)을 실현코자 하였 다. 향촌에서는 동몽계(童蒙契)에 권학문을 지어주며 심화(心火)를 다스 려 장수(長壽)할 것과 지행(知行)에서 중도(中道)를 지켜 위선(爲善)할 것을 강조하거나, 향약계(鄕約契)의 발문을 편술하며 효행(孝行)을 장려 73) 이에 대해서는 아래 제3장에서 자세히 다룬다. - 45 -
하고 공맹(孔孟)의 정신을 선양했다. 또한 사상가로서 유략(儒略) 을 포 함하여 격치고(格致藁) 를 저술하기도 했다. 이능화가 소개하고 있듯이, 함흥의 망족(望族)이었던 이제마에게 있어서 그의 세업(世業)은 유(儒) 였던 것이다.7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마에게는 전형적인 유학자와는 다른 면모가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제마의 집안은 효행(孝行)과 문장(文章)으 로 알려져 있었지만 특정한 사상적ㆍ정치적 색깔을 띠고 있지 않았다. 이제마가 자식들에게 남긴 계훈(戒訓)인 교자평생잠(敎子平生箴) 에는 유학자라면 일반적으로 언급하는 유학의 덕목이나 철리(哲理)에 대한 언 급은 거의 없다. 그 대신 이제마 사유의 토대가 되는 폐비간신(肺脾肝 腎)과 애노희락(哀怒喜樂)을 논급하며 애노희락의 감정과 주색(酒色)의 절제 여부에 따라 장수 및 요절이 뒤따를 것이라는 가르침이 주를 이룬 다.75) 동시대의 여러 유학자들 이를테면 전우(田愚, 1841-1922), 이승 희(李承熙, 1847-1916),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장지연(張志淵, 1864-1921), 김찬식(金燦植, 1866-1942), 장윤상(張允相, 1868-1946) 등과 비교해보아도 이제마에게서는 유학의 사승관계나 사상적 계보를 찾 아보기 힘들다.76) 20세기 초반 장지연(張志淵)과 현상윤(玄相允)의 저술 을 비롯하여 최근까지 저술된 대표적인 조선유학 통사에서 이제마의 이 름이 보이지 않는 것도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77) 74) 李能和, 四象學說人禀性情, 1067쪽. 75) 藏書閣 東武遺稿 敎子平生箴. 예를 들어 長男 勇 (李龍海)과 차남 謹 (李龍水)에게 이르 는 訓戒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勇 戒急喜之心, 則脾陽壯健, 而疾病不生; 謹 戒急哀之心, 則腎陰充足, 而疾病不生. 脾弱之人, 喜屢而不喜亦屢, 喜不喜, 皆脾受傷而弱也. 盖旣喜而又繼以 不喜, 則傷脾, 又旣喜而又繼以不喜, 則又傷脾. 如此再三次旣喜而又再三次不喜, 則又再三次傷脾. 如此千百番旣喜而又千百番不喜, 則又千百番傷脾. 以慾心而喜者, 急喜而必傷; 以義心而喜者, 緩 喜而不傷. 凡人皆然. 이러한 내용이 戒訓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나마 儒學에 관계된 것은 다 음 忠孝 한 구절에 그친다. 淫爲諸惡首, 孝爲百行源, 酒爲亡身物, 忠爲濟衆寶. 76) 금장태, (증보판) 한국근대의 유학사상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268-398쪽. 77)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朝鮮儒學通史가 있다. 張志淵, 朝鮮儒敎淵源 (京城: 匯東書館, 1922); 玄相允, 朝鮮儒學史 (서울: 民衆書館, 1949); 정진석ㆍ정성철ㆍ김창원, 조선철학사 상권 (평양: 과학원출판사, 1962); 배종호, 한국유교사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74); 최봉익, 조선철학 사상사 연구: 고대-근세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75); 류승국, 한국의 유교 (서 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6); 이병도, 한국유학사 (아세아문화사, 1987); 최영성, 한국유 - 46 -
20세기 초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한 서북지역의 문인이나 유학자의 문헌 을 조사ㆍ취합하는 과정에서도 이제마는 빠져있다.78) 더 주목되는 것은 이제마 스스로도 유학자로서의 자의식과 문제의식 을 거의 표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79) 조선 후기의 문식 있는 지식인 은 누구나가 유자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사상사적으로 유자의 스펙트 럼은 꽤 넓은 편이다. 이런 까닭에 자신의 사상적 계보를 유학에 잇대고 자신의 문제의식이 유학의 범주에 있음을 스스로 밝히는 것 또한 당사자 를 유학자로 분류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준거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 만 이제마는 유학에서의 논쟁점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의 사유를 펼치고 있으며, 자신의 사상적 논제에 대해서 남을 설득 하고자 하는 열의 또한 보이고 있지 않다.80) 이제마는 자신의 사유체계 를 통상적인 유학이나 성리학의 범주에 담기보다는 자기 나름의 좀 더 큰 그림 위에 세우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의수세보원 을 비롯해서 격치고 와 같은 텍스트를 유학이라는 틀 속에서 이해해 보고자 하는 선행 연구자들에 의해서 이제마의 사상적 지향과 연원에 대한 엇갈린 해 석들이 나오는 것 또한 이제마의 이러한 지적 태도 및 이에 따른 글쓰기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ㅊ. 의인(醫人)의 성취 이제마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축은 그가 의학을 업으로 하 는 의자(醫者)였다는 점이다. 이제마가 언제 어떠한 이유로 의학에 입문 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무관으로 사환(仕宦)의 길을 걷 기 이전부터 의학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공명(功名)에 뜻을 둔 교사상사 전5권 (아세아문화사, 1994-1997); 한국철학사상사연구회 편, 논쟁으로 보는 한국 철학 (예문서원, 1995); 한국사상사연구회 편, 조선유학의 학파들 (예문서원, 1996); 朱红星 ㆍ李洪淳ㆍ朱七星, 朝鲜哲学思想史 (延边: 延边人民出版社, 1989). 78) 朝鮮史編修會는 1923년부터 1930년까지 7차에 걸쳐 西北地域의 고문헌을 수집하였다. 장유 승, 朝鮮後期 西北地域 文人 硏究, 259-263쪽. 79) 이러한 이제마의 태도와 글쓰기 방식에 대해서는 아래 3.3절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80) 李濟馬는 格致藁 의 첫머리[序文]에서 자신의 글이 세상에서 正行하는 것이 아닌 단지 旁行 하는 것이라고 했다. - 47 -
유생들이 여러 가지 사정에 따라 거자(擧子)의 길을 접고 지역에서 의업 (醫業)에 입문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이제마는 이와 달랐다. 이제마 는 무관으로 나가기 전 39세가 되는 을해(1875)년에 이미 의자로서 의 학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다.81) 어떤 연구자는 이보다 앞서 23세부터 의 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보기도 한다.82) 이제마가 46세가 되는 임오 (1882)년에는 이미 사상인(四象人)의 심욕(心慾)과 성정(性情)에 대한 체 계가 어느 정도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83) 관직에 나아가기 전부터 의약 경험이 있었던 이제마는 지방관으로서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간간이 의학 활동에 종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고원 군수 시절에 이미 약국(藥局) 즉 의원(醫院)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던 정황이 보인다.84) 이제마는 자신 의 의학사상과 의학경험을 담아 1894년에 동의수세보원 을 저술하였으 며, 함흥에 50칸 크기의 ㄷ자 형태의 보원약국(保元藥局) 이라는 의국 (醫局)을 세워 의학을 실천하고 따르는 문도를 이끌기도 했다.85) 개초 (改草)와 증산(增刪) 과정을 거친 동의수세보원 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1901년 문도들에 의해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의학으로 일가를 이루었던 이제마는 의학을 업(業)으로 삼고 있었다 는 점에서 일반적인 유의(儒醫)와 달랐고 잡과를 거쳐 중앙의료의 의관 으로 활동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인층(中人層) 의원과도 사정이 달랐 다. 유학자이면서 의학활동을 했던 조선의 유의(儒醫)들은 일반적으로 유자(儒者)임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의학을 생업으로는 내세우지 않 거나, 아니면 지방으로 물러나 조용히 의학을 탐구하거나 의업에 종사했 다.86) 이에 비해 19세기 후반 개항기에 활동했던 이제마는 의학을 업으 81) 嘗治少陽人傷寒發狂譫語證, 時則乙亥年淸明節候也. 東醫壽世保元 少陽人脾受寒表寒病論. 82) 한상모 외, 동의학개론, 773쪽. 83) 藏書閣 東武遺稿 敎子平生箴(壬午四月十八日). 84) 甲午ㆍ戊戌問答, 藏書閣 東武遺稿, 335-336쪽; 治瘇核方文, 保健省 東武遺稿 (해동의 학사, 1999), 117-118쪽. 85) 이경성, 璿源派乘 을 중심으로 살펴본 東武 李濟馬의 生涯 硏究, 170쪽. 86) 이를테면 近畿 지역 출신의 丁若鏞(1762-1836), 전라도 光州의 張泰慶(1809-1887), 전라도 海南의 曺澤承(1841-1907) 등을 이러한 儒醫의 사례로 들 수 있다. 신동원, 유의(儒醫)의 길: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 다산학 10 (2007), 171-224쪽; 박상영ㆍ이정화ㆍ권오민ㆍ안상우, - 48 -
로 삼았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 의학 전통에서 자신이 세운 의학의 의미 를 적극적으로 표방하며 새로운 의학 전통을 세우고자 했다. 한편 조선 후기 의학의 한 축인 중앙의 기술관이었던 의관들은 문무 사대부 양반층 으로부터 자신들의 문화적 입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기 술직 중인 네트워크를 활용해 의업을 세전(世傳)하고 있었다. 이들 중인 층 의관들과 달리, 이제마는 서출이었지만 양반의 반열에 속해 있었고 중앙의 의료체계가 아닌 주로 변방의 사적인 의료영역에서 활동했다. 20 세기 초에 이제마의 의학이 이단으로 경원시되었던 것은 그의 의학사상 과 의학실행이 생소한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제마가 유학과 의학의 정통 계보에서 빗겨나 있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2.1.2 이제마의 자의식, 그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 ㅋ. 비문(碑文), 추록(追錄), 서문(序文)에서 본 이제마 이제마가 이루어낸 의학적 성과는 단지 이제마 혼자만의 성취가 아 니라 주변 인물들의 성원과 염원이 담겨있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마는 함흥을 근거지로 하여 성장하였으며 주유기에 만주, 연해주를 포함하여 팔도 전국을 유람했고, 40대 이후 사환기에는 주로 서울, 경상도(진해ㆍ 진주), 함경도(함흥ㆍ고원) 등에서 활동했다. 이때 이제마의 문하에 출입 하는 인사가 적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는데,87) 현재까지 알려진 사료에 따르면 이제마의 주변 인물들은 주로 혈연과 지연으로 이어진 함경도 함 흥지역 출신에 집중되어 있다. 대개는 함경도 지역의 혈연집단과 문도들 愚岑 張泰慶 生涯 硏究, 한국의사학회지 24(1) (2011), 57-62쪽; 오준호ㆍ박상영, 海南 의 儒醫 曺澤承ㆍ曺秉侯 父子 연구, 호남문화연구 52 (2012), 137-162쪽. 좀 더 후기로 내려와 근대 초까지 활동하였던 경상도 迎日의 李圭晙(1855-1923)은 유학적 이상을 의학에 접목시켜 실현하고자 노력한 儒學者이자 醫學者로 적극적인 의미의 儒醫였다. 권오민, 石谷 李圭晙의 人間觀과 醫學論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李圭晙과 달리 儒學의 사 상적 系譜에 속하지 않았던 李濟馬는 유학사상에서 훨씬 자유로웠다. 87) 崔麟, 自敍傳, 如菴文集 上 (如菴先生文集編纂委員會, 1971), 163쪽. - 49 -
이다. 이들은 이제마 사후에 율동계(栗洞契)와 보원계(保元契)를 조직하 여 이제마의 주요 저술인 동의수세보원 과 격치고 를 간행하였고 이 제마의 유고와 필사본도 유통시키면서 이제마의 텍스트와 의학을 널리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제마를 기리는 추사대(追思臺) 건립에는 이제마의 문도 외에 지역의 여러 인사들이 폭넓게 참여했다. 이들 주변 인물들의 성향과 구체적인 사회활동은 자료의 제한으로 아직까지 충분히 드러나진 않았지만, 이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우선 이 제마를 성원하는 데는 친인척들도 한몫했다. 이를테면 율동계의 계원이 자 문인으로 함흥에서 동의수세보원 을 출간하였던 한창연(韓昌淵)과 그의 사촌인 한직연(韓稷淵) 그리고 북경(北京)에서 같은 책을 출간했던 보원계의 한병무(韓秉武)는 이제마의 친인척이었다.88) 한창연은 이제마 의 이복 누이동생의 아들로 관직을 역임하였고 한병무는 한직연의 아들 이었다. 다른 한편, 문도 가운데 이제마의 의발을 물려받은 것으로 알 려진 최겸용(崔謙鏞)은 의업을 이어갔다고 알려져 있으며, 1940년대 이 제마의 저술을 정리하여 출판을 기획한 한두정(韓斗正)은 유림학자였고, 율동계 계원 송현수(宋賢秀)는 사업에 몸담았다고 한다. 이렇듯 이들 친 족과 문인(門人)들 가운데는 의업(醫業)을 이었던 사람도 있지만, 관직으 로 나가거나 사업가로 변신한 사람도 있어서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이 제마의 뜻을 성원해 주었음을 잘 보여준다.89) 이는 1902년 함흥에 추사 대(追思臺)를 건립할 때 기금을 출연했던 지역인사들의 면면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함흥읍성 주변의 향교(鄕校)와 몇 개의 지역단위인 사(社)에 서 비용을 보탠 것 외에도, 위로는 군수(郡守)부터 아래로는 말단의 관 리까지, 지역의 거부(巨富)에서 작은 상점의 주인까지, 훗날 항일운동에 투신한 인물부터 친일파로 변신한 인사까지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으로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이 추사대(追思臺) 건립에 참여했다.90) 88) 이경성, 璿源派乘 을 중심으로 살펴본 東武 李濟馬의 生涯 硏究, 67-68쪽. 89) 같은 글, 65-72, 177-180쪽. 90) 1902년 前高原郡守李公濟馬追思臺 의 건립에 기금 535兩을 出捐한 주체는 인물 이름이 135명, 향교 및 주변의 지역 이름이 세 군데가 등장한다. 이경성은 추적 가능한 인물 25명을 - 50 -
이때의 추사대(追思臺) 비문(碑文)을 살펴보면 이제마에 대한 당시 지역민들의 정서와 기대를 읽을 수 있다. 병신(1896)년 봄에 동도(東道)에서 온 사람이 말하길, 최문환(崔文煥)이 라는 자가 칙명을 받든다 사칭하여 허세로 떠벌리며 의병을 일으켰다. 느닷 없이 관아로 난입해 조정에서 보낸 관리를 살해하고는 도당을 결성하고 군 병을 모집하며 민심을 선동하고 있다 하였다. 이 소문이 서울과 원산항에 퍼져 바야흐로 군대를 파병하려고 하니, 앞으로 닥칠 화를 가늠할 수 없었 다. 참으로 양자 모두가 공멸할 염려가 있을 뿐이었다. 군민들이 크게 놀라 공(公)을 찾아가서 모시자 공이 말하길, 선향(先鄕)에 이러한 큰 어려움이 있는데 거상(居喪) 중이라 하여 사양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개연히 산을 내려와 최문환의 추종자를 잡아 적의 내부 상황을 알아내어 뭇 사람들 의 걱정을 풀어주었다. 곧 죄인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으며 재가를 기다리 며 서울에 보고하고 원산항에 알려 외국 군대의 출동을 막아 마침내 아무 탈이 없었다. 군민들이 서로 기뻐하며 말하길, 공(公)은 지금 우리를 살렸 으니 우리들의 부모이시다 하였다. 임인(1902)년에 이르러 서쪽 제방에 비석을 세우고 그 사정을 기록했다. 아! 백성들이 공(公)을 사모하는 마음 이 공이 세상을 떠났어도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으니, 아름다운 공(公)의 행 동과 한결같은 백성의 성품을 볼 수 있도다. 공(公)은 함흥 사람으로 경세 제민(經世濟民)의 방략이 있어 백성들이 크게 쓸 수 있도록 발하여 책을 지 었으니 격치고(格致藁) 와 수세보원(壽世保元) 등 편술이 세상에서 행 용(行用)되고 있다. 광무6년 임인(1902) 음력 4월 상순, 전 주사(主事) 김 면필(金勉弼)이 삼가 적고 청주(淸州) 양보연(楊普淵)이 삼가 쓰다.91) 분석하여 그들의 行蹟을 일부나마 찾아보았다. 이경성, 璿源派乘 을 중심으로 살펴본 東武 李濟馬의 生涯 硏究, 174-184쪽. 91) 粤在丙申春, 有從東道來者曰: 崔文煥, 假稱奉勅, 虛張擧義, 猝入府中, 戕害命官, 結黨募軍, 煽 動衆心. 此說聞流于京師及元港, 方欲派兵, 禍將不測, 實有俱焚之慮耳. 郡人大驚往迎公, 公曰: 桑梓之鄕, 有此大難, 不可以衰經辭也. 慨然下山, 拿其從者, 以取輸情, 俾釋群疑. 斯得罪人府犴, 待裁報京, 照港止其外兵, 遂以無事. 郡人相慶曰: 公今活我, 維我父母. 至壬寅琢珉于西堤, 記其 事. 噫! 民之思公, 不以其沒而少弛, 可見公應之懿而民性之彛也. 公咸興人, 有經濟之略, 民售大用, 發以爲書, 有 格致藁 ㆍ 壽世保元 等篇行于世. 光武六年壬寅肇夏上澣, 前主事金勉弼謹記, 淸州 楊普淵謹書. 藏書閣 東武遺稿 前高原郡守李公濟馬追思臺. - 51 -
함흥 지역에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전운이 감돌 때, 지역의 군민들이 거 상(居喪) 중이었던 이제마를 찾아가서 참화가 발생하지 않도록 풍전등화 (風前燈火)의 난국을 수습해 줄 것을 청하였다. 함흥은 풍패지향(豊沛之 鄕)으로 전주이씨 조선왕가의 고향이자 같은 전주이씨 이제마 집안의 선 영(先塋)이 있는 곳이었고, 이런 까닭에 이제마는 시묘(侍墓) 중이었음에 도 불구하고 개입을 결정한 것이다.92) 지역민들이 이제마를 찾아간 것은 이제마가 수령을 역임한 무관이었고 함흥에 터전을 둔 전주이씨 가문이 라는 점과 함께 그의 가문이 관북지역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한 것이 라고 볼 수 있다. 이제마를 두고 자신들의 어버이라며 칭했던 지역민들 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방략을 갖고 있던 이제마가 백성을 위해 이를 책으로 내었고 이 저술이 세상에 보급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추사비(追思碑)에서 이제마와 가까이 있었던 문도들만이 아니라 지 역의 보다 다양한 인물들의 정서를 엿볼 수 있다면, 이제마 문인들의 글 에서는 이제마에 대한 강한 믿음과 동시에 안타까움을 읽을 수 있다. 동무유고 에 담겨 전해져 오는 추록(追錄) 은 하늘이 낸 재주를 갖추 고 있었던 이제마가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다만 그의 저술만이 세상에서 행용(行用)되고 있을 뿐이라는 아쉬움을 전하고 있다.93) 또한 이제마의 문인이었던 한교연(韓敎淵)이 1914년 동의수세보원 에 붙인 서문에는 이제마와 동의수세보원 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감회와 여망을 적고 있 다. 전체적으로 동의수세보원 이라는 책은 그 입론이 비록 간략하지만 마음을 다스리고 병을 다스리는 대요를 함께 갖추고 있어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 92) 咸鏡道 咸興은 太祖 李成桂와 함께 4대조가 터전을 닦은 조선 왕실의 고향이다. 함흥에는 太 祖의 4대 선조의 능 가운데 德安陵, 義陵, 定和陵이 소재한 곳이며 李成桂가 살았던 咸興本宮 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국립중앙박물관 편, 조선을 일으킨 땅, 함흥 (국립중앙박물관, 2010). 93) 先生自幼聰明絶倫, 聲聞夙著. 嗚呼! 先生以天縱之質, 繼開之學, 値氣數艱險, 旣不得用, 退而著書, 惟 東醫壽世保元 ㆍ 格致藁, 行于世云. 藏書閣 東武遺稿 追錄. 追錄 은 李濟馬 의 門人들이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 52 -
다. 그러니 세상에 미친 공덕과 은택을 따지자면 어찌 십삼경(十三經)과 신 농(神農)ㆍ황제(黃帝) 및 요(堯)ㆍ순(舜)ㆍ우(禹) 삼세의 책에서 그칠 뿐 이겠는가? 선생께서는 지혜로운 성인의 자질을 갖추고 동국(東國) 조선 말 기에 나셨으나 끝내 지우(知遇)를 얻지 못해 성인의 대도(大道)를 펼치지 못하신 까닭에 세상에 내보인 공덕과 은택이 다만 이 책에 그쳤도다. 그러 나 만약 천하의 사람 하나하나가 한결같이 이 가르침을 따른다면 머지않아 사람들이 억만년이 다하도록 헤아릴 수 없는 대강(大康) 세계의 복록을 길 이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삼가 이 책이 단지 동국 의학[東 醫]의 술서(術書)일 뿐이라고 말하며 선생은 병을 잘 다스리는 그저 동국 의 의사[東醫]일 뿐이라고 잘 못 알지 말지어다. 이 책 속에서 대강(大康) 세계의 도를 정세하게 궁구한다면 하늘나라[天國]가 다른 데 있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94) 여기에서 한교연은 동의수세보원 의 가치와 효용을 십삼경(十三經)이나 고대 성인(聖人)이 다스리던 시대의 성경(聖經)에 견주고 있다. 그가 보 기에 동의수세보원 은 무량(無量)의 대강(大康) 세계 복록을 누릴 수 있게 해주고 하늘나라[天國]를 여기에서 이룰 수 있게 해주는 대강(大 康) 세계의 도(道)가 담겨있는 서책이었으며, 따라서 이제마는 단순히 병 을 잘 고치는 동국(東國)의 의사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이제마의 문하 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한교연은 이제마와 그의 저술 동의수세보 원 을 통해서 대강(大康) 세계의 이상향이 구현되길 바랐던 것이다. 이 제마보다 한 세대 아래로 이제마와 안면이 있었던 이능화(李能和) 역시 이제마를 성인(聖人)에 준하는 인물로 기렸다.95) 이제마에 대해 주위 사 람들이 품은 이러한 염원과 기억은 20세기 전반까지도 사람들에 의해 94) 槩 東醫壽世保元 之書, 則其立言雖簡, 而治心治病之大要兼以易知, 則究其功澤于世者, 豈止於 十三經及炎軒三世之書而已哉? 先生以聖智之姿, 生於東國季世, 而老竟不遇, 不能行聖人之大道, 故其公世之功澤, 雖止于此書. 而若使天下之人人一遵此訓, 則亦可以立將來人極于萬億年而永享无 量大康福矣. 讀此書者, 愼莫但謂東醫之術書而錯認先生是眞治病之東醫, 精究大康之道于書中, 則 可覺天國不在於別處矣. 韓敎淵, 東醫壽世保元序, 東醫壽世保元 4판 (1914년). 95) 嗚呼, 東武子, 其殆聖者乎! 李能和, 四象學說人禀性情, 1067쪽. - 53 -
종종 재생되곤 했다.96) ㅌ. 이제마의 자의식과 지적 유연성 이와 같은 사람들의 염원과 기억은 이제마의 자의식과 공명하는 것 이기도 했다. 달리 말하면, 이제마는 자신이 도달한 지적인 인식에 대해 강한 자부심과 함께 일종의 종교적 열정을 품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제 마는 격치고 에서 자신의 사유방식에 이르게 된 경위를 성인(聖人)과의 교감을 통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옛적에 성인께서 두터운 정분으로 나에게 이르셨고 내가 성인을 그리 워하매 마침내 지금에 이르렀다.97) 또한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 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발문에 다음의 내용을 첨가하기도 하였다. 이 책이 비록 요즘 사람의 손에서 나왔지만 실로 오랜 세월 의가(醫家)의 전통에서 보기 드문 귀한 책이다. 이 책은 고금(古今)의 시비를 도맡고 의 약(醫藥)의 중심축을 결정할 것이로니 비록 한 글자일지라도 잘 못 쓰면 글 을 지은 사람에게 커다란 누가 될 것이다.98) 여기서 이제마는 심혈을 기울여 자신이 지은 동의수세보원 이 의학의 96) 일찍 祖父와 父親을 여의고 세상을 周遊하며(崔益翰, 李濟馬先生의 立志遊覽, 東亞日報 1940년5월14일-15일) 학문을 익힌 바가 三敎九流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거나, 縮地法을 쓴 다고 사람들이 알고 있다거나(朴奭彦, 東武公의 逸話, 대한한의학회지 35 (1971), 7쪽), 大 厦將傾에 一木難支의 심정으로 守令시절 狂客노릇만 했다고 말하거나(金秉濟, 近代奇人 李濟 馬先生, 19쪽), 혹은 陰宅風水에 대한 식견을 보여주는 일화(홍순용, 東武 李濟馬傳(二), 18 쪽) 등등이 그것이다. 97) 在昔聖人이 至情告我하시니 我思聖人하야 遂至于今호라(止). 格致藁 遺藁抄. 98) 此書雖出今人之手, 實是千古醫家稀罕之書. 此書任古今之是非, 決醫藥之樞軸. 雖一字誤書, 則 爲作文者之大累. 四象人辨證論 東醫壽世保元 7판 (1940). 이 내용은 1901년 東醫壽世保 元 을 처음 印刊할 때 빠진 부분으로 1941년 7판을 낼 때 복원되었다. - 54 -
준거틀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자신이 구축한 의학에 대한 이제마의 자부심은 문도였던 최겸용(崔謙鏞), 김영관(金永寬), 한두정(韓斗正) 등 여러 제자에 의해 구 전(口傳)되어 온 다음의 언사에서도 드러난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오장육부의 허실(虛實)이 있고 사람마다 각기 체질이 같지 않다. 이 때문에 약을 쓰고 음식을 먹고 생활하는 것도 당연히 이에 따라 서로 부합해야한다. 이 참된 이치는 내가 옛 사람들이 전해 준 저술에 근거하여 내 자신이 실천하여 경험하고 연구해서 발견한 것이다. 내 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 후에 사람들이 사상의학을 널리 사용하게 되는 시대가 반드시 도래할 것이다.99) 이 글에는 입으로 전해져 오는 말을 현대 중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 제마가 쓰지 않았던 용어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앞의 인용문에서와 마찬 가지로 동의수세보원 을 중심으로 하는 자신의 의학체계가 머지않은 장래에 의학의 주류가 되리라는 이제마의 확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 다.100) 이제마의 이와 같은 자의식은 관북 지역민들의 염원이라는 관점에서 도 읽을 수 있지만, 지적 유연성을 특징으로 하는 19세기 조선의 문화적 배경에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 19세기 조선은 종교에 대한 심 적이고 지적인 태도의 변화가 눈에 띄는 시기였다. 18세기말 이후 서양 의 천주교가 유입되었고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불교 사찰은 조선후기까 지 계속 증가하였으며 특히 19세기말에는 새로운 종교인 동학(東學)이 99) 人有天稟五臟六腑之虛實, 因人人體質不同. 因此用藥飮食生活也應該跟着相應. 這個眞理, 是余 根據古人傳下來的著述, 通過本人的實踐經驗和硏究而發現的, 我去世一百年之后, 人們廣泛地使用 四象醫學的時代必將到來. 최대우 역해, 동의수세보원 역해: 원리편, 288쪽. 이 인용문은 원 래 李濟馬의 여러 제자들로부터 전해오던 것을 門徒 崔謙鏞에서 金九翊을 거쳐 孫永錫이 중국 어로 채록하고 정리한 것이다. 孫永錫, 四象藥物方劑大典 : 朝鮮民族醫學眞髓 (대전: 전통의 학연구소, 2003), 123쪽. 100) 물론 이 傳言은 李濟馬의 주변인물들이 이제마의 의학체계가 널리 퍼지리라는 기대와 염원 을 李濟馬의 豫知力을 빌어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 55 -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19세기는 유(儒)ㆍ불(佛)ㆍ도(道) 삼교가 상호 수 렴하는 사상적 경향을 보이는 때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선한 이는 복 (福)을 받고 악한 이는 화(禍)를 입게 된다 는 복선화음(福善禍淫) 과 같은 비(非) 성리학적 관념들이 19세기에 와서는 유학자 심대윤(沈大允, 1806-1872)의 복리전서(福利全書) 를 매개로 하여 유학적 맥락에서 수용되고 있었다.101) 또한 이때는 유교개혁사상이 일어나고 최제우(崔濟 愚, 1824-1864), 전봉준(全琫準, 1855-1895), 김항(金恒, 1826-1898) 등 넓은 의미의 중인층의 주도하에 여러 신흥 종교가 발흥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정부의 개화정책을 통해 서양과학이 소개되는 등 지적인 유연 성과 역동성이 증가한 시기였다.102) 앞 절에서 살폈듯이 이제마는 복합 적인 사회문화적 정체성을 갖고 있었으며, 이런 까닭에 그는 종래의 사 상과 입장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로써 지적인 변혁기였던 19세기 조선의 이제마는 관북 지역민들의 성원 속에서 자신의 사유를 구상화할 수 있었다. 이제마가 이와 같이 19세기 조선의 사상적ㆍ문화적 환경 속에서 성 장하고 활동하였지만 그렇다고 이제마의 의학이 이를 통해 만족할 만큼 해명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화적 영향 이외에 이제 마의 의학에 미친 이론적 요인에 대한 구체적 단서가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제마의 사상적ㆍ실천적 내용 및 지향성이 이들 지 식인 및 종교인과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마는 자신의 지적 사유가 동아시아의 문화적 토양에서 이루어졌음을 언명하면서도 구 체적인 학적 연원이나 자기 의학 사상의 발견의 맥락에 대해서는 특별히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제마 의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도 동의수세보원 이라는 문헌 자체에 대한 분석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101) CHO Sungsan, Discourse on BokseonHwaeum 福善禍淫 in Nineteenth-Century Joseon: Sim Daeyun's BongniJeonseo 福利全書, The Second Templeton International Conference: Science and Religion in East Asia (Seoul National University, 12-14 December 2013), pp. 329-343. 102) 금장태, (증보판) 한국근대의 유학사상, 81-112, 144-234쪽. 금장태는 李濟馬를 넓은 의 미의 중인층 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 56 -
한다. 이로써 이제마의 지향성은 무엇이었는지, 이제마의 사상이나 의학 의 내용이 무엇이고 종래의 의학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그리고 이후 지성사 및 의학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등에 대한 탐색이 가능 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제3장부터는 19세기 조선의 문화적 맥락 속에 서 이제마의 문제의식과 지적 태도를 함께 고려하면서 이제마의 텍스트 에 대한 내재적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그에 앞서 우선 이제마가 저술한 텍스트의 성격과 서지학적 정보를 간단히 정리해본다. 2.2 이제마의 저작 2.2.1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이제마의 의학이 집약되어 있는 대표적인 저작물이 바로 동의수세 보원(東醫壽世保元) (1894)이다. 이 책은 이제마가 사망한 다음 해인 1901년 이제마의 문인들이 중심이 된 율동계(栗洞契)에 의해서 함흥에 서 목활자본으로 처음 출판되었다. 이제마 자신이 쓴 발문(跋文)에 따르 면 그는 1893년 7월 13일부터 밤낮으로 생각하고 헤아려 잠시도 쉬지 않고 저술에 몰두하여 9개월 후인 1894년 4월 13일 서울 남산[漢南山 中]에서 집필을 마쳤다고 한다.103) 이어지는 간기(刊記)에서는 이제마가 집필을 마친 후 1895년 함흥으로 하향하여 1900년 사망할 때까지 이를 개초(改草)하였다고 전한다.104) 초판 발행 이후 광복 전까지 함흥(咸興), 서울[京城], 북경[北平]에서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동의수세보원 이 출판되었다.105) <표 2-3 참조>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 은 허준(許浚, 103) 此書, 自癸巳七月十三日始作, 晝思夜度, 無頃刻休息, 至于翌年甲午四月十三日. 光緖甲 午四月十三日, 咸興李濟馬, 畢書于漢南山中. 東醫壽世保元 四象人辨證論. 104) 嗚呼! 公甲午畢書後, 乙未下鄕, 至于庚子, 因本改草. 大韓光武五年辛丑六月 日, 咸興郡 栗洞契新刊. 門人 金永寬ㆍ韓稷淵ㆍ宋賢秀ㆍ韓昌淵ㆍ崔謙鏞ㆍ魏俊赫ㆍ李燮垣. 東醫壽世保 元 (초판) 四象人辨證論. 105) 사상체질의학회 편, 사상체질의학회 40년사, 9-11쪽; 이경성, 東醫壽世保元 版本에 대 - 57 -
初版本 再版本 發行日字 發行者 發行地 發行所 1901년 6월 栗洞契 咸興郡 栗洞契 1911년 9월 崔冕甲 商店 高敬必藥鋪 咸興 金重瑞商店 李增模商店 三版本 1913년 7월 金容俊 京城 普及書館 四版本 1914년 2월 金容俊 京城 普及書館 五版本 1921년 7월 金容俊 京城府 博文書館 六版本 1936년12월 七版本 1941년 4월 韓秉武 等 保元契 北平 咸興府 四 象 辨 證醫 學硏究社 金重瑞方 版; 面行字數 木活字本 10行22字 鉛印本 10行22字 新鉛活字本 13行34字 新鉛活字本 12行23字 新鉛活字本 13行35字 鉛印本 石版本 12行25字 <표 2-3> 동의수세보원 판본 및 서지사항. 1539-1615)의 동의보감(東醫寶鑑) 및 황도연(黃度淵, 1807-1884)의 방약합편(方藥合編) 과 더불어 조선의 의서 가운데 가장 많이 간행된 문헌이기도 하다.106) 가장 최근의 것인 7번째 간본 역시 이제마의 제자 였던 한두정(韓斗正)이 보원계(保元契)를 주축으로 이제마의 저술을 정리 한 연구, 사상의학체질의학회지 17(3) (2005), 1-11, 특히 5-9쪽. 106) 신동원, 조선사람 허준 (한겨레신문사, 2001), 220-229쪽; 장문선, 동의보감 이 중국의 학에 미친 영향, 구암학보 3 (1993), 30-32쪽; 김성수, 동의보감(東醫寶鑑), 17세기 동아 시아 의학의 전형, (서울대학교 HK문명사업연구단, 2008), 11쪽; 박경련, 東醫寶鑑 의 書誌 學的 硏究 (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73-102쪽; 김형태ㆍ윤창열, 方藥合編 에 대 한 연구, 대한원전의사학회지 5(0) (1991), 151-199, 특히 174-181쪽. 方藥合編 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는 다음 글을 참조할 것. 김남일, 의서와 학파의 형성, 연세대학교 의학사연구 소 편, 한의학, 식민지를 앓다 (아카넷, 2008), 174-176쪽; 東醫壽世保元 역시 光復 이전 7차례에 걸친 刊行本이 광복 이후에도 다시 간행되기도 하였다. 7판본은 1963년과 1972년 이 차에 걸쳐 尹完重이 謄本하여 보급시켰으며, 5판본은 1985년 이후 杏林出版社가 원본 그대로 인쇄하여 간행하였고, 초판본은 1998년에는 四象醫學會가, 2001년에는 韓國韓醫學硏究院이 영 인본 형식으로 다시 출간하였다. 이와 더불어 최근까지 출판된 東醫壽世保元 飜譯 및 註解書 형태의 관련 문헌이 대략 50여 편을 넘어선다. - 58 -
하고 출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1941년 함흥에서 동의수세보원 을 상 교현토(詳校懸吐)하고 편명(篇名)ㆍ조문수(條文數)가 기재되어 있는 목록 (目錄)과 보유방(補遺方) 등을 추가하여 발행한 것이다. 이들 일곱 가지 판본은 상호간에 몇몇 글자의 출입이 있을 뿐 기본적으로 초간본을 새로 조판하여 펴낸 것으로 모두 같은 책이라고 볼 수 있다.107) 일견 특이해 보이는 동의수세보원 의 편차(編次)와 편명(篇名)은 이 제마의 의학세계를 잘 보여준다. 이제마는 원론편(原論篇)에 해당하는 성명론(性命論), 사단론(四端論), 확충론(擴充論), 장부론(臟腑論) 으로 권일(卷一)을 채우고, 실제편(實際篇)에 해당하는 권이(卷二)부터는 임상논설의 범례이자 서문(序文) 격인 의원론(醫源論)과 이를 이어 태소 음양 사상인 즉 소음인, 소양인, 태음인, 태양인의 순서로 병증(病證)과 약방(藥方)을 다룬 임상논설을 배치하고 있다. 마지막 권사(卷四)에 임상 편인 병증약리(病證藥理)를 다룬 논설과 함께 광제설(廣濟說) 즉 세상 을 널리 구제하는 논설을 두어 이 책을 마감함으로써 자신이 의서를 저 술한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부록에 해당하는 사상인변증론 (四象人辨證論) 을 말미에 덧붙여 동의수세보원 을 끝내고 있다. 대략 적으로 보자면, 원론편에서는 사람의 몸에 대한 이제마의 구상을 엿볼 수 있으며 의원론 에서는 동아시아 의학을 보는 이제마의 관점과 태도 를 읽을 수 있고 실제편인 병증약리 의론에서는 이제마가 경험하여 얻은 의학지식을 추적해 볼 수 있다.<표 2-4 참조> 의도적인지 알 수는 없지 만 이제마는 자서(自序)를 남기고 있지 않다.108) 4판본과 5판본에는 이 제마의 문인이었던 한교연(韓敎淵)이 쓴 서문이 첨가되기도 하였으나 두 루 교정한 7판본에는 서문 없이 원래 체제대로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제 107) 이 글에서 東醫壽世保元 으로 인용하는 경우는 1901년 초판본 東醫壽世保元 (2001년 한 국한의학연구원 간행 영인본)과 1941년 7판본인 詳校懸吐 東醫壽世保元 (1972년 尹完重 再 版謄本)을 함께 참조한 것으로, 판본 간 글자의 차이가 나는 경우에만 그때마다 각주에서 언급 한다. 108) 李濟馬는 1894년 東醫壽世保元 을 끝마쳤을 때는 물론 1895년부터 1900년까지 改草하는 과정에서도 序文을 남에게 구하거나 스스로 쓰지도 않은 듯하다. 다듬고 고치는 중에 醫源論 을 수정하여 증보하였음에도 自序는 남기지 않았다. - 59 -
구성 및 체제 東醫壽世保元 編次 東醫壽世保元四象草本卷 編次 性命論 原論篇: 原人 四端論 卷之一 原人: 이제마가 그린 몸 擴充論 제1통 제5통 臟腑論 議題篇: 醫史 이제마의 문제의식 醫源論 少陰人腎受熱表熱病論 少陰人胃受寒裏寒病論 經驗藥方; 新定藥方 卷之二 病變: 少陽人脾受寒表寒病論 제1통 제6통 少陽人胃受熱裏熱病論 實際篇: 知識 이제마가 행한 의학 經驗藥方; 新定藥方 太陰人胃脘受寒表寒病論 太陰人肝受熱裏熱病論 經驗藥方; 新定藥方 太陽人外感腰脊病論 卷之三 藥方: 제1통 제5통 太陽人內觸小腸病論 經驗藥方; 新定藥方 結語篇: 濟衆 이제마가 꿈꾼 세상 附篇: 診斷要綱 廣濟說 四象人辨證論 <표 2-4> 東醫壽世保元 과 구성 및 체제 마의 저술 목적은 동의수세보원 의 구성 및 체제를 통해서, 그리고 지 식에 대한 관점과 자신의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의원론 과 자발(自 跋)을 통해서 읽을 수 있다. 이상 1901년 신축년에 간인된 것을 저본으로 하는 신축본(辛丑本) 동의수세보원 을 이야기했지만 이보다 앞서 1894년 갑오년에 이제마가 1차로 집필을 끝낸 갑오본(甲午本) 동의수세보원 도 알려져 있다. 하 - 60 -
나는 함산(咸山) 사촌(沙村) 필사본이다. 이는 함주군 천서면에 있는 이 제마의 장남 이용해(李龍海, 1859-1922)의 집안에서 권축장(卷軸裝) 형 태로 보관하고 있었던 갑오본 동의수세보원 원형을 이제마의 종손이 자 보원계 계원인 이진윤(李鎭胤, 1894-1961)의 주도하에 한민갑(韓敏 甲)이 1940년 7월에 초록한 것이다.109) 한민갑은 동의수세보원 활자 본과 대조ㆍ비교하여 필요한 부분을 초록ㆍ필사하였고, 이것이 이진윤의 집에서 보관되어 오다가 그의 아들 이성수(李聖洙)가 2000년 학계에 공 개했다.110) 학계에서는 그 발굴 정황과 필사본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이 함산 사촌 필사본이 이제마의 갑오본 동의수세보원 원형과 대체로 같 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111) 이 동의수세보원 갑오본 은 (신축본) 동의수세보원 이전의 이제마 저술로 볼 수 있어서, 이 둘을 비교함으 로써 1894년 초고를 완성한 이후 이제마의 의약경험이 깊어지면서 그의 의학이 조정되고 정교화 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 료이다.112) 또 하나는 비슷한 시기인 1940년 12월에 대전부(大田府) 석 남촌(石南村)에서 등서(謄書)한 대전 석남촌 필사본이다.113) 이 문헌은 함산 사촌 필사본과 구성이나 내용면에서 대부분 같아서, 이제마의 의학 109) 歲庚辰七月二日韓敏甲筆, 東醫壽世保元 甲午本 筆寫記. 이 필사본은 1894년 저술을 甲 午本[舊本], 改草한 결과물인 1900년 원고를 庚子本[新本], 이들 甲午本과 庚子本을 바탕으로 門人들이 1901년 처음 印刊한 것을 辛丑本[印本]이라고 구별하면서, 辛丑本과 다른 甲午本 부 분을 謄寫하여 抄錄한 것이다. 篇名과 각 條文數를 기록한 目錄도 갖추고 있다. 內題는 東醫 壽世保元 甲午本 이나, 表題는 咸山沙村 東醫壽世保元 甲午舊本 으로 기재되어 있다. 110) 이경성, 甲午本 東醫壽世保元 의 체계에 대한 고찰, 한국한의학연구원논문집 6(1) (2000), 16쪽; 안상우, 새로 공개된 四象醫學 자료 5종의 史料 가치, 한국한의학연구원논문 집 7(1) (2001), 3쪽. 111) 한경석ㆍ박성식, 東醫壽世保元 甲午本 의 書誌學的 硏究, 94-109쪽. 112) 이하의 논의에서 東醫壽世保元 甲午本 은 이 咸山沙村 필사본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다; 동의수세보원 갑오본 과 (신축본) 동의수세보원 과의 비교연구도 진행되었다. 이태규ㆍ김상 혁ㆍ이준희ㆍ이수경ㆍ김달래ㆍ고병희, 咸山沙村 東醫壽世保元 甲午舊本 과 詳校懸吐 東醫壽 世保元 의 비교 연구, 21-39쪽. 한경석ㆍ박성식, 東醫壽世保元 甲午本 의 藥方에 관한 硏 究, 사상체질의학회지 13(2) (2001), 74-93쪽. 이경성, 甲午本 東醫壽世保元 의 체계에 대한 고찰, 한국한의학연구원논문집 6(1) (2000), 13-27쪽; 김명균ㆍ김만우ㆍ한진수ㆍ박성 식, 甲午本과 辛丑本에서 仲景의안의 인식 변화에 따른 병증론 연구, 대한한의정보학회지 10(1) (2004), 47-56쪽. 113) 時庚辰臘月朔謄書于大田府石南村, 東醫壽世保元 舊本 筆寫記. 석남촌 필사본의 表題는 東醫壽世保元 舊本 이다. - 61 -
을 공부하는 후학이나 문도가 관련 문헌들을 필사하며 서로 돌려 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제마의 의학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필사 형태로 유통되었던 또 하나의 문헌이 있는데 바로 동의수세보원 사상초본권(東 醫壽世保元四象草本卷) 이다. 대략 1882년에서 1893년 사이에 저술된 것으로 추론되는 이 문헌은 관련 연구 결과에 따라 이제마의 저작물로 보고 있다.114) 율동계 계원이자 이제마의 문인이었던 최겸용(崔謙鏞)은 이제마의 지필묵을 전수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평소 사상의학에 관 심을 갖고 연구하던 만주의 김구익(金九翊, 1880-1969)이 1936년 함흥 의 최겸용을 찾아가 3-4개월 동안 사사받고 동의수세보원 사상초본권 등 사상의학관련 저술을 탐독하며 필사해 가지고 갔다고 한다.115) 1951 년 정서(正書) 과정을 한 번 더 거친 이 동의수세보원 사상초본권 은 김구익의 제자로 연변 용정중의원(龍井中醫院)에 재직하고 있었던 손영 석(孫永錫)에 의해 1984년 외부로 전해지게 된 것이다. 이 책은 1985년 연변조선족자치주 민족의약연구소에서 조의학(朝醫學) 을 발간할 때 부 록으로 사상의학초본권(四象醫學草本卷) 이란 표제를 달고 활자화되기 도 하였다.116) 이 저작물 역시 동의수세보원 이전의 이제마의 착상을 읽을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117) 그 구성으로 권일(卷一)에 사람을 밝 히는 원인(原人)편을, 권이(卷二)에는 양생법과 질병 특성을 논하는 병변 (病變)편을, 권삼(卷三)에는 약물 처방을 다루는 약방(藥方)편을 두고 있 다.118)<표 2-4 참조> 이제마의 의학은 말년의 작품인 동의수세보원 에 잘 집약되어 있지 만, 그 이전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동의수세보원 갑오본 및 동의수세 114) 이수경ㆍ송일병, 東醫壽世保元四象草本卷 의 서지학적 연구, 사상체질의학회지 11(1) (1999), 63-77쪽; 박성식, 東醫壽世保元四象草本卷 해제, 박성식 역해, 東醫壽世保元 四 象草本卷, 19-29쪽. 115) 최대우 역해, 동의수세보원 역해: 원리편, 272-273쪽. 116) 박성식, 東醫壽世保元四象草本卷 해제, 東醫壽世保元 四象草本卷, 13-15쪽. 117) 옥윤영ㆍ김경요, 四象醫學草本卷 과 東醫壽世保元 初版本의 비교를 통한 사상 방제의 변천 과정에 대한 연구, 사상체질의학회지 12(2) (2000), 43-55쪽. 118) 박성식, 東醫壽世保元四象草本卷 해제, 東醫壽世保元 四象草本卷, 36-46쪽. - 62 -
보원 사상초본권 에서도 이제마 의학의 초기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분석 에 따르면, 이제마의 의학적 통찰이 의학의 실천지식으로 구상화되는 과 정은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10여 년 이상 점진적인 변화과 정을 겪으며 이제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속된 것을 알 수 있다.119) 이제마 의학이 밟아 온 이러한 변화 과정은 이제마가 자신이 깨달은 의 학적 통찰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졌을지라도 이를 체계화된 실제 지식으 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가 현실 세계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의학적 경험과 분석 작업이 요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 다. 2.2.2 격치고(格致藁) 동의수세보원 이외에 이제마의 저작물로 또 하나 꼽을 수 있는 것 은 격치고(格致藁) 이다. 격치고 에는 두 가지 원고가 존재한다. 하나 는 1930년 강제모(姜齊模)라는 사람이 필사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제마의 수제자였던 한두정(韓斗正)이 편집과 발행을 맡아 1940년 함 흥에서 처음으로 출판한 것이다. 둘 사이에는 부록편의 유무 여부를 빼 면 몇몇 글자의 출입이 보이는 정도인데, 필사본보다도 한두정이 교정하 여 간행한 격치고 를 선본으로 보고 있다.120) 이 간행본 격치고 의 본 문은 크게 3개의 논설 즉 유략(儒略), 반성잠(反誠箴), 독행편(獨行 篇) 으로 편제되어 있고 부록편으로 제중신편(濟衆新編) 과 유고초(遺 藁抄) 가 첨부되어 있다. 이제마가 남긴 발문에 따르면 책을 저술한 시 기는 1880년부터 1893년까지이며, 44세 때 유략 을 쓰기 시작하여 57 세에 반성잠 을 탈고함으로써 격치고 를 완성하였다. 격치고 에는 격 물치지(格物致知) 즉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이제마의 지적 사유가 119) 李濟馬 醫學이 변화되는 과정 일부는 아래 5.2절에서 다시 자세히 다룬다. 120) 박대식, 格致藁 해제, 이제마 지음, 박대식 역주, 格致藁: 사상의학적 인간학 (청계출 판사, 2000), 19-20쪽. - 63 -
담겨 있다. 격치고 에서 이제마가 동원하는 용어는 주로 사서(四書)에서 연유 한 것들이 많은데, 흥미롭게도 이제마는 이와 관련된 개념을 조술(祖述) 하거나 논변(論辯)하기보다는 뚜렷한 문제제기 없이 자신의 생각을 자신 의 글쓰기 방식으로 전개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121) 2.2.3 동무유고(東武遺稿) 이제마의 주요 저작물인 동의수세보원 과 격치고 이외에 지인들 이 유고를 모아 문집형태로 정리하여 내려온 문헌이 있는데 바로 동무 유고 이다.122) 동무유고 라는 동일한 표제를 갖는 전혀 다른 문헌이 둘 존재하는데, 하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필사본 장서각 동무유고 이다.123) 이제마가 세상을 떠난 시기를 전후하여 취합 된 이제마의 원고는 문인이나 후손에게 소유된 채로 사람들에게 회람되 거나 필사되어 유포되다가, 1940-41년 이제마의 저작에 대한 대대적인 간행사업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아마도 이제마의 수제자였던 한두정(韓 斗正)에 의해 문집초고본이 제작되었고 이것이 장서각에 입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24) 여기에는 이삼십 대에 쓴 시부(詩賦), 연해주 지방 을 여행하고 쓴 기행문인 유적(遊蹟), 아들에게 준 계훈인 교자평생 잠(敎子平生箴), 이제마 생애를 후인이 요약한 추록(追錄), 이제마를 121) 이러한 특징은 일부 논의에서 몇 번 거론되었다. 구덕모ㆍ강효신, 格致藁 에 나타난 李濟 馬의 醫哲學 背景 硏究, 濟韓東醫學術院 論文集 2(1) (1997), 19-70쪽; 東醫壽世保元 原 論篇도 이러한 서술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이제마의 태도와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아래 3.3절에서 자세히 논의한다. 122) 1918년 李能和는 李濟馬가 東醫壽世保元, 格致藁 외에도 東武遺稿 를 저술하였다고 전하였다. 著有 東武遺稿 ㆍ 格致藁 ㆍ 東醫壽世保元 等書, 李能和, 四象學說人禀性情, 1067쪽. 123) 表題는 東武遺稿 로 되어 있지만, 다른 東武遺稿 와 구별하기 위해서 이 논문에서는 藏 書閣 東武遺稿 라고 표기한다. 최근 번역본이 나왔다. 이제마 지음, 이창일 역주, 東武遺稿: 동무 이제마가 남긴 글 (청계, 1999). 124) 이창일, 하성문고 소장 東武遺稿 에 대하여: 문헌 성립 考定과 2차 삽입된 <東武自註> 검 토를 중심으로, 장서각 제2집 (1999), 131-139쪽. - 64 -
기리는 추모비문인 전고원군수 이공제마 추사대(前高原郡守李公濟馬追 思臺), 임금께 올리는 상소문인 진무시상소(鎭撫時上疏), 총리대신 김 병시(金炳始, 1832-1898)에게 올리는 상대신서(上大臣書), 고원군수 시절 쓴 신산사 향약계 발문(薪山社鄕約契跋文), 수동사 장량리 동몽 계(童蒙契)의 권학문인 제중신편(濟衆新編), 일본인과의 문답을 기록한 신사오월 원산항 문답(辛巳五月元山港問答) 등이 수재되어 있다.125) 이들 자료는 이제마의 생애와 정황을 살필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북한 보건성에서 펴낸 보건성 동무유고 이다.126) 이 유고는 이제마가 남긴 원고를 후에 제자들이 편찬한 것으로서 수사본 (手寫本)으로 전해오다가 1966년 7월 북한 보건성 동의간부양성소 사상 반 명의로 등사판(謄寫版)으로 간행된 것이다.127) 보건성 동무유고 는 상하 두 개의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편에는 각 사상인별 약성가(藥性 歌)를 실어 놓은 동무선사 사상약성 상험고가(東武先師四象藥性嘗驗古 歌) 가 있고, 여기에 선사약성설가(先師藥性說歌) 가 부기되어 있다. 하 편에는 사상(四象)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글인 사상요목(四象要目), 사 상인별 적합한 음식물을 기술한 사상인 식물류(四象人食物類), 사상인 별 약재를 분류한 사상인 약재류(四象人藥材類), 그리고 몇 가지 병증 에 대한 이론과 치료경험을 실은 치종핵방문(治瘇核方文), 김봉순 간 병치간론(金鳳舜癎病治癎論), 사장지담약(四臟之痰藥) 등과 기타 총 론(總論) 및 잡고(雜藁) 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이 자료가 흥미로운 것은 이제마가 본초(本草)와 약방(藥方)을 어떻게 운영하였는지 추적해 볼 수 있는 단서인 선사약성설가(先師藥性說歌) 와 사상인 약재류 를 125) 이에 대한 개략적 내용은 동무유고 해제를 참고할 수 있다. 이창일, 동무유고 해제, 東武遺稿: 동무 이제마가 남긴 글, 27-42쪽. 126) 이 자료 역시 표제는 東武遺稿 라고 되어 있으나 이 논문에서는 保健省 東武遺稿 라고 표 기한다. 북한에서 번역된 것이 최근 남한에서도 출간되었다. 이제마 저, 량병무ㆍ차광석 역, 東武遺稿 (서울: 해동의학사, 1999). 127) 解題: 東武遺稿 에 대하여, 이제마 저, 량병무ㆍ차광석 역, 東武遺稿, 3쪽; 東武遺 稿 의 존재는 앞서 보았듯이 문헌상 李能和가 1918년 朝鮮佛敎通史 제일 먼저 언급하였고 1941년 李泰浩는 東醫四象診療醫典 (京城: 杏林書院, 1941)에 四象人別 藥性歌를 수록하였 는데 그 출전을 東武遺稿 라고 밝히고 있다. - 65 -
비롯한 약성가를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다.128) 이에 비해 동의수세보 원 에는 본초의 약성이나 처방을 구성하는 원리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기록하고 있지 않다. 대략 이들 약성가는 이제마가 동의수세보원 을 집 필하기 전, 나이 50대 중반이었을 1889년에서 1893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보건성 동무유고 는 방제(方劑)와 약물에 대 한 이제마의 초기 생각을 담고 있는 유용한 문헌이다.129) 이제마 사후에 출간된 동의수세보원 을 중심으로 이제마 의학이 후 학들에 의해 연구되면서 이와 관련된 문헌들이 생산ㆍ유통되어 왔고, 이 제마 의학은 20세기 초반 사상의학(四象醫學) 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 며 현재까지도 새로운 의학전통을 만들어 가고 있다.130) 앞서 동의수세 보원 갑오구본, 동의수세보원 사상초본권, 동무유고 약성가 의 사례 에서 일부 볼 수 있듯이, 이제마의 사후에는 이제마의 문인이나 후학들 이 이제마의 유고 및 관련 자료들을 필사하고 회람하면서 연구하였고, 20세기 초중반에는 자신들의 경험으로 이를 보완한 내용을 책으로 출판 하기도 하였다.131)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텍스트 동의수세보원 을 번역하거나 주해하는 형식의 서적이 등장하였고, 동의수세보원 을 원용 하여 사상적 차원이나 학술적 차원 혹은 임상적 관점에서 사상의학을 풀 128) 비슷한 형식의 藥性歌가 東醫四象診療醫典 (京城: 杏林書院, 1941)를 비롯하여 사상의학 관련 몇몇 서적에도 收載되어 있는데 대부분 出典을 東武遺稿 라 밝히고 있다. 保健省 東武 遺稿 의 藥性歌에는 이들 문헌에 없는 새로운 내용도 포함하고 있으며 내용을 볼 때 原形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이제마 저, 량병무ㆍ차광석 역, 東武遺稿, 4쪽; 박성식, 東武 遺稿 藥性歌 에 대한 연구, 사상체질의학회지 13(2) (2001), 9, 27쪽. 129) 박성식, 東武遺稿 藥性歌 에 대한 연구, 사상체질의학회지 13(2) (2001), 8-27쪽. 130) 이와 관련해서 신동원은 담론적 차원에서 사상의학이 20세기 전반에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탐구했다. Shin Dongwon, "Nationalistic" Acceptance of Sasang Medicine. 131) 元持常, 東醫四象新編 (京城:: 文友社, 1929); 李敏鳳, 金匱秘方 (京城: 中央印書館, 1936); 李泰浩 편, 東醫四象診療醫典 (京城:: 杏林書院, 1941); 金聖培, (家庭醫典)東洋醫學 要論 (서울: 新敎出版社, 1955); 朴炳吉 편, 東醫四象錦囊寶訣 (서울: 杏林書院, 1961); 李 道耕 역편, 李濟馬 원저, (家庭必備) 四象要覽 (圓佛敎圓光社, 1964); 廉泰煥 편저, 東醫四 象處方集 (서울: 大韓漢方醫學會, 1967); 天德山人 편, 東武遺稿四象金櫃秘方 (서울: 杏林書 院, 1971); 尹吉榮, 四象體質醫學論 (서울: 明寶出版社, 1973); 尹吉榮, 四象醫方活套 (한 얼문고, 1973); 權英植, 四象方藥合編 (서울: 杏林書院, 1973); 朴寅商 편저, 東醫四象要訣 (서울: 癸丑文化社, 1974); 朴奭彦 역편, 東醫四象大典 (서울: 醫道韓國社, 1977). - 66 -
어보고자 하는 사상서 및 의학서적도 계속 산출되고 있다.132) 한편, 이 러한 지적 관심은 학술단체의 구성으로도 결집되었는데, 1945년의 사상 의약보급회(四象醫藥普及會)를 토대로 하여 1970년 서울에서는 학술단 체인 대한사상의학회(大韓四象醫學會)가 창립되었다.133) 이 학회는 1999년 사상체질의학회(四象體質醫學會)로 이름을 바꿔 현재까지 이어 져 오고 있다.134) 132) 이를테면 출간된 책이나 강의록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제마, 동의수세보원 (평양: 의학출판사, 1964); 韓東錫 註釋, 東醫壽世保元註釋 (서울: 誠理會出版社, 1967); 李乙浩ㆍ洪 淳用, 四象醫學原論: 原名 東醫壽世保元 (서울: 壽文社, 1973); 이민수 역, 이제마 저, 동의 수세보원 (을유문화사, 1975); 李家源, 東醫壽世保元 (서울: 瑞文堂, 1975); 송일병, 四象 原論 (경희대한의과대학 사상의학교실, 1978); 延邊朝鮮族自治州民族醫藥硏究所 편, 朝醫學 (延邊: 延邊朝鮮族自治洲民族醫藥硏究所, 1985); 李濟馬, 東醫壽世保元 (吉林省: 延邊大學出 版社, 1988); 최승훈 역, 이제마 저, Longevity & Life Preservation in Oriental Medicine (경희대학교출판국, 1996); 손병욱, 사상의학의 이해 (행림출판사, 1997); 김주, (四象醫藥) 性理臨床論 (대성문화사, 1998); 유주열, 동의사상의학 강좌 (대성문화사, 1998); 김형태, 동의수세보원 강의 (정담, 1999); 신홍일 주해, 동의수세보원 주해 (대성의학사, 2000); 강 주봉, 상한론 사상의학 강좌 (경무출판사, 2001); 김창민ㆍ류순섭, (이제마) 사상체질의학 (아카데미서적, 2002); 동의학연구소 역, 이제마 저, (원문대역) 동의수세보원 (여강출판사, 2002); 孫永錫, 四象藥物方劑大典 : 朝鮮民族醫學眞髓 (대전: 전통의학연구소, 2003); 한동 석, 동의수세보원 주석 (대원출판사, 2005); 최문태, 동의수세보원 해설 상ㆍ하 (초락당, 2007); 주석원, 8체질 의학의 원리 (통나무, 2007); 정원조, 사상의학의 새 연구: 이론편 (푸른사상사, 2010); 추만호 강의, 이제마 원저, (강의) 동의수세보원 (창해, 2008); 라경찬 편저, 이제마 원저, 동의수세보원 발몽 (의성당, 2007); 박용규, 이제마 원저, (立體陰陽五行 으로 풀이한) 東醫壽世保元 譯解 (리북스커뮤니티, 2009); 유주열, 새로 쓴 사상의학 (물고 기숲[대성의학사], 2013[2007]); 김용옥 강의, 한영목 정리, 동의수세보원 강의 (도올서원, 1994); 김주, 사상의학 통해 (강의록); 송일병, 사상의학 강의록 (강의록). 133) 四象醫學을 공부하는 모임은 北韓이나 中國에도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남일, 의 서와 학파의 형성, 연세대학교 의학사연구소 엮음, 한의학, 식민지를 앓다 (아카넷, 2008), 179-180쪽. 134) 사상체질의학회 편, 사상체질의학회 40년사, 2-66쪽. 이 책에 수록된 회원명부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사상체질의학회의 회원수는 772명에 이른다. 연감에 따르면 2010년를 기준 으로 면허를 받은 한의사 수는 1만 9132명이다. 보건복지부, 2011 보건복지통계연보 제57 호 (보건복지부, 2011). 정회원으로 가입한 회원수만 따지면 전체 한의사 수 가운데 4% 정도 에 해당되지만 실제로 사상의학을 임상에 활용하는 비율은 훨씬 높다고 볼 수 있다. 조사에 따 르면 전국 한방의료기관 가운데서 사상의학을 포함한 체질의료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는 의료기 관은 50%을 넘는다고 보고되었다. 김효정ㆍ이시우ㆍ김종열, 체질의료 서비스산업의 현황파악 을 위한 조사연구: 전국 한방의료기관을 중심으로, 사상체질의학회지 18(3) (2006), 166-174쪽. 최근에는 사상의학을 임상에 활용하는 한국의 의료현장에 의료 인류학자가 참여 하여 현지관찰연구를 수행하기도 했다. Kim Taewoo. Medicine without the Medical Gaze: Theory, Practice and Phenomenology in Korean Medicine (Ph.D. Dissertation,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Buffalo, 2010); 김태우, 한의학 진단의 현상학과 근대적 시선 생경하게 하기, 한국문화인류학 45(3) (2012), 199-231쪽. - 67 -
2.3 요약 및 소결 이상에서 볼 때 서양과의 접촉이 전면화한 19세기 중후반 조선에서 성장하고 활동하였던 역사적 인물 이제마(1837-1900)의 사회문화적 성 격은 다소 중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때는 정치사회적으로 세도기와 개 화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유교적 사유체계가 과학 및 기독교를 앞세운 서양의 문명과 대접전하는 격동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제 마를 규정하는 여타 사회문화적 조건은 겉으로 보이는 유자(儒者)나 의 가(醫家)의 모습보다도 훨씬 다면적이고 복합적이다. 그는 향촌에서 영 향력이 있었던 반족 출신이지만 그 출신지역은 변방인 관북지역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는 서출이라는 신분적 제약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 다. 또한 그는 관료로 입신하였지만 문관이 아닌 무관으로 벼슬길에 나 갔다. 지방의 수령을 지내긴 했지만 정책을 입안하고 이를 추진해 볼 수 있는 고위 관직에는 오르지 못 한 채 사상서 격치고 와 의학서 동의 수세보원 두 권의 책을 남겼다. 이 저술은 그간의 동아시아 지적 전통 과는 다소 이질적으로 보이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책에 담겨있는 이제마의 사상과 의학을 제대로 해명하기 위해서 는 이제마의 독특한 사회문화적 환경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돌출적인 사상을 내세운 사람 중에는 사회적 주변인이 많았지만 이제마는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요한 집안 출신으로 지 방관을 지내기도 한 인물이었다. 서자로 태어났다는 한계성과 관북지역 민에 대한 차별담론 그리고 무반이라는 정체성 등이 이제마의 의학사상 의 형성과 어떠한 연관관계가 있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이는 기본적 으로 서로 상반된 내용을 담고 전해오는 전기적 일화들 외에는 이제마의 삶과 생각을 알려주는 사료적 기반이 취약할 뿐 아니라 이제마가 이에 대한 자신의 소회나 정황을 거의 드러내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마는 서울에서 무신 김기석의 관료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었지만 여기에도 깊이 발을 들인 흔적이 없으며 유교의 학승에도 관심을 보이지 - 68 -
않았다. 그는 자신의 지적 사유의 연원이나 학맥에 대해서 분명히 언명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특정의 유형적 범주를 염두에 두고 이제마의 사 회문화적 환경이나 사상적 연원을 찾아보고자 하는 시도들은 이제마의 의학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이제마의 복합적이 고 중간자적인 입장이 지성사적으로 비등기였던 19세기에 이제마의 지 적 유연성을 높여주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마의 사상과 의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제마 의 이러한 다면성을 고려하면서도 동의수세보원 을 비롯한 이제마의 주요 텍스트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분 석은 기본적으로 이제마 의학이 무엇이며, 종래의 의학전통과는 무엇이 다른지, 그리고 그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심층적 탐색의 선행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러한 방향의 연 구는 동의수세보원 에 대해서만 그것도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 이 제마의 동의수세보원 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연구는 아직까지 없었다. 이제마의 문제의식과 사회문화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텍스트에서 이제마 가 말하고자 했던 전체적인 그림을 찾고자 하는 것이 이어지는 장에서 논의할 내용이다. 이제마가 남긴 저술로는 동의수세보원, 동의수세보 원 갑오본, 동의수세보원 사상초본권, 격치고, 장서각 동무유고, 보건성 동무유고 등이 있는데, 이어지는 장부터는 주요 텍스트인 동 의수세보원 을 중심으로 이제마의 의학을 분석한다. - 69 -
제3장 李濟馬가 그린 몸 세상에 위치한 天人性命의 몸 제3장에서는 이제마가 그린 몸 이라는 논제 아래 이제마가 그린 의학 적 몸과 이와 관련된 그의 사유를 분석한다. 이를 위해서 동의수세보원 (東醫壽世保元) 의 병증론(病證論)을 제외한 부분, 즉 원론(原論) 격에 해당하는 성명론(性命論), 사단론(四端論), 확충론(擴充論), 장부 론(臟腑論) 마무리를 장식하는 광제설(廣濟說) 및 사상인변증론(四象 人辨證論) 일부를 분석할 것이다. 제2장에서 언급했듯이, 원론 부분은 원인(原人) 즉 사람을 밝히는 글로서 이제마가 구상한 의학적 몸을 제 시하고 있고, 마감 편술(篇述)에 해당하는 광제설(廣濟說) 은 이제마가 자신의 의학을 통해 구현될 이상 사회에 대한 기대를 표명하고 있다. 이 제마가 구상한 의학적 몸의 관념을 탐색하기 위해 이 장에서는 다음의 순서로 논의를 전개한다. 먼저 1절에서는 이제마가 생각했던 의학적 몸 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로, 당시 동아시아 의학이 상정하고 있는 몸에 대 한 일반적 인식을 알아본다. 2절에서는 이에 대비하여 이제마가 실제로 그리고 있는 몸이 무엇인지, 주로 동의수세보원 원론편의 논의를 따라 가며 살펴본다. 3절에서는 이제마가 정식화(定式化)한 의학적 몸 이 함 의하고 있는 의학사 및 지성사적 의미를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양생의학 에서 장부(臟腑)-성정(性情) 중심의 의학으로 의학적 인식이 바뀌는 역 사적 과정에서 찾아볼 것이다. 이 장의 목표는 동의수세보원 에서 이제마가 정식화하고 있는 의학 적 몸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제마의 유학적 언술을 분석하는 데 초점을 두지는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제마의 의학사상은 유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이제마가 기본적으로 원론편에서 - 70 -
유학적 언설과 용어를 많이 사용한 데서 연유한다. 이런 까닭에 원론편 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그간의 선행연구는 철학이나 유학의 관점에서 이제마의 인간관을 주로 탐색했다.1) 이와 달리 이 글은 이제마가 동의 수세보원 에서 정식화하고 있는 의학적 몸에 초점을 두고 그가 그린 의 학적 몸의 골격을 주로 추적할 것이다. 동의수세보원 의 전체적인 구조 와 이제마의 글쓰기 방식을 고려할 때 이러한 접근 방식이 오히려 이제 마의 의도에 더 부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2) 3.1 동아시아 의학 전통에서의 인체 3.1.1 우주와 감응하는 몸 전국(戰國)시대 말 그리고 진한(秦漢) 제국시대 초의 의학적 관념을 담고 있는 사기(史記) (ca. 86 BCE)의 편작ㆍ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 을 분석해 보면 의학의 원리 혹은 의학적 몸에 대한 몇 가지 관념들이 공존했음을 알 수 있다. 인류학자 쉬(Elisabeth Hsu)는 이를 공간의 몸 (the architectural body), 감정의 몸(the sentimental body), 생태 적 몸(the body ecologic) 이라고 불렀다.3) 공간의 몸 이란 가로막을 중심으로 인체를 상하(上下)로 나누어 보는 관념으로 심(心)과 간(肝)이 이들 상하 부위를 지칭하는 용어였다고 한다. 이에 비해 감정의 몸 은 1) 이창일, 사상의학, 몸의 철학 마음의 건강 ; 허훈, 동무 이제마의 철학사상 ; 최대우, 이제마 의 철학 ; 여인석, 몸의 윤리학: 스피노자와 이제마에 있어 몸의 윤리적 의미에 대한 고찰 ; 김윤기, 이제마 철학구조와 몸의 윤리 ; 정복철, 이제마의 사상철학과 몸의 정치학 ; 조동욱, 東武 李濟馬 四端論의 易哲學的 고찰 ; 김만산, 周易의 관점에서 본 사상의학원리 ; 이병채, 동무 이제마 사상의학의 철학적 의의 ; 송일병, 李濟馬의 儒學的 人間觀과 醫學精神 ; 김병 천, 朱熹와 李濟馬의 人間觀 비교 연구 ; 박은경, 東武 李濟馬의 人間觀에 관한 연구. 다만 곽노규와 김명근이 몸 을 중심으로 원론편을 다루기 시작했다. 김명근, 哀怒喜樂의 심리학: 동무 이제마의 四象心學 ; 곽노규, 사상의학으로 고통을 응시하다. 2) 이에 대해서는 <보론> 유학과 의학의 사이 를 참조할 것. 3) Elisabeth Hsu, Pulse Diagnosis in Early Chinese Medicine: The Telling Touch, pp. 29-44. - 71 -
인체를 상하가 아닌 내외, 즉 밖에서 보이는 외물의 형(形)과 보이지 않 는 내면의 기(氣)로 이루어진 동심원 구조로 보는 인식하에 감정의 편착 이나 도덕적 타락이 질병을 발생시킨다는 관념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때 창공(倉公, 2C초 BCE) 같은 의사들은 제후(諸侯) 및 조신(朝臣)들의 질 병을 진단하기 위해서 감정이 자리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장부와 연관 된 내면의 기(氣)를 읽어내는 절맥(切脈)법을 발전시켰다.4) 이는 장부(臟 腑)가 의학적 대상으로 인지될 수 있었고 기(氣)는 장부에서 유래한, 맥 (脈)을 흐르는 그 무엇이 되었음을 시사한다.5) 원래 기(氣)란 우주를 채 우고 흐르는 것으로 외부 환경과 인체가 감응할 수 있는 매개체이기도 했다. 기(氣)에 대한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인체가 지역의 풍토나 기후, 시간 및 계절의 변화 등의 요소에 상응한다는 관념을 담고 있는 것이 생태적 몸 의 관념이다. 이러한 몸의 관념들은 황제내경 으로 대표되는 한대(漢代) 의학 고 전의 성립기에 생태적 몸 의 관념을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이 시기에 양생서의 용어 및 관념들이 의학 전통에 적극 유입되었고,6) 기(氣), 음 양(陰陽), 오행(五行) 등의 우주론적 설명 도구를 동원하여 의학적 몸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동아시아 의학 전통의 원형이 마련되었다.7) 이후로 오지(五志: 怒 喜 思 憂 恐), 오상(五常: 仁 義 禮 智 信), 또는 칠정(七情: 喜 怒 哀 樂 愛 惡 慾; 喜 怒 憂 思 悲 恐 驚) 등이 오장(五藏: 肝 心 脾 肺 腎)과 함께 오행의 원리로 묶여 이해됨으로써 감정의 몸 은 생태적 몸 에 종속되었다.8) 금원대(金元代) 유의(儒醫)들의 등장 이후 심욕(心 4) 같은 책, pp. 45-46. 5) Elisabeth Hsu, Pulse Diagnostics in the Western Han: How Mai and Qi Determine Bing, in Elisabeth Hsu (ed.), Innovation in Chinese Medicin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p. 51-91. 6) Vivienne Lo, The Influence of Nurturing Life Culture on the Development of Western Han Acumoxa Therapy, in Elisabeth Hsu (ed.), Innovation in Chinese Medicin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p. 19-50. 7) Geoffrey Lloyd and Nathan Sivin, The Way and the Word : Science and Medicine in early China and Greece (Yale University Press, 2002), pp. 253-271; Paul Unschuld, Medicine in China: A History of Ideas, pp. 51-100. 8) Elisabeth Hsu, Pulse Diagnosis in Early Chinese Medicine: The Telling Touch, p. 360; - 72 -
慾), 상화(相火), 군화(君火), 명문(命門), 역(易), 태극(太極), 천리(天理) 등 성리학적 논제들이 의학이론에 영향을 주기도 했으나,9) 전통 시대 동아시아 의학에서 몸의 관념은 주로 우주와 감응하는 몸 을 그 중심축 에 두고 있었다. 이러한 의학적 관념은 명대(明代)의 의서인 의학정전 (醫學正傳) (1515), 의학입문(醫學入門) (1575), 만병회춘(萬病回春) (1587), 그리고 조선 중기의 종합의서인 동의보감(東醫寶鑑) (1613)에 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를 살았던 이제마에게 있어서 당대의 의학 은 바로 이러한 고방(古方)을 뜻했다.10) 이 가운데 의학입문 과 동의보감 은 의학정전, 만병회춘 과 함 께 조선의 의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종합의서로,11) 이제마가 동의수 세보원(東醫壽世保元) 의원론(醫源論) 과 병증약리(病證藥理) 각론에 서 직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전적(典籍)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에 와 서는 의학입문 으로 이학(理學)의 이치를 습득하고 동의보감 을 중심 으로 임상을 실천하는 풍토가 정착되었으며, 특히 의학입문 은 의과고 시 과목의 하나로 채택되기도 했다.12) 조선 후기에 활동했던 이제마가 동의보감 의 저자 허준(許浚)을 의가의 공업을 논할 때 수위(首位)로 치고 의학입문 의 저자 이천(李梴)을 다음으로 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두 문헌은 이제마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의서이다.13) 여기서는 이제 마가 제시한 몸의 관념을 이해하기 위해, 그 비교 준거로서 의학입 문 과 동의보감 에서 그리고 있는 의학적 몸을 살핀다. 이들 의서는 천지(天地), 역(易), 음양(陰陽), 오행(五行)의 관념에 의 해 직조된 우주론적 틀 속에 의학적 몸을 위치 짓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천(李梴)은 의학입문(醫學入門) 을 태초(太初), 역(易), 마음[心], 리(理) 가노우 요시미츠, 몸으로 본 중국 사상, 203-216쪽. 9) 조남호, 성리학과 한의학, 271-301쪽. 10) 東醫壽世保元 醫源論. 11)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자가출판, 1962), 306쪽; 1966), 264쪽. 12) 김남일, 의서와 학파의 형성, 181-183쪽. 13) 東醫壽世保元 醫源論. - 73 - 金斗鐘, 韓國醫學史 全 (探求堂,
ㆍ기(氣), 천지음양(天地陰陽) 그리고 경락(經絡)의 상관체계를 서술하고 있는 선천도설(先天圖說) 과 천지인물기후도설(天地人物氣候圖說) 로 시작한다. 책의 첫 면을 커다란 동그라미로 선천도(先天圖)라 장식하고 는 다음과 같이 언술(言述)한다. 선천도설(先天圖說): 역(易)을 배운 다음에야 가히 의(醫)를 말할 수 있건 만, 획[卦]에서 배우거나 효(爻)에서 배운다는 것은 아니다. 한번 살펴보건 대, 마음[心]에 과연 획[卦]이 있는가? 효(爻)가 있는가? 단지 원리(元理) ㆍ원기(元氣)는 혼연 합치되어 그 사이에 빈틈이 없을 뿐이다. 천(天)을 낳 고, 지(地)를 낳고, 인(人)을 낳고, 물(物)을 낳는 것은, 모두 이 조화(造 化)가 주인이 되어 말미암은 것이다. 양생(養生)을 추구하는 자가 이를 깨 치면 자연히 분노를 경계하고 욕심을 제어하여 수(水)와 화(火)가 서로 오 고가 화평을 이루고, 사람을 구제하려는 자가 이를 깨치면 자연히 사정(事 情)을 분변하여 치방(治方)을 세울 수 있으니 고질병이 단번에 낫는다. 둥 그런 원을 책의 머리에 두는 것은 글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책을 펴 면 숙연해지도록 하며 지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쉬워도 음미하여 깨닫는 바 가 있도록 편의를 두었을 따름이다. 더불어 감히 말하건대, 복희씨(伏羲氏) 의 마음자리를 깨닫고자 힘썼기에 헌원씨(軒轅氏)와 기백(岐伯)의 정미로 운 뜻을 슬쩍 엿보았도다! 이에 설(說)하는 것이다. 14) 사람의 온갖 질병은 모두 수(水)와 화(火)가 오고가지 못해서 생긴다. 그래 서 후천의 감(坎)과 리(離)로 이를 이어 놓았다. 혈(血)은 수(水)에 속하고 기(氣)는 화(火)에 속하니 혈(血)은 음(陰)이오 기(氣)는 양(陽)이다. 리 (離) 가운데는 비어서 진음(眞陰)이 이에 있고, 감(坎) 가운데는 가득하여 진양(眞陽)이 이에 머문다. 음(陰)ㆍ양(陽)ㆍ허(虛)ㆍ실(實)의 작동기제가 의학의 길에 있어서 알아야 할 바의 태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다.15) 14) 원문에는 離卦인 와 坎卦인 가 상하로 배치되어 본문의 가운데에 삽입되어 있다. 15) 醫學入門 先天圖說 學 易 而後, 可以言醫, 非學乎畵也學乎爻也. 試觀之, 心果有畵乎? 果有 爻乎? 元理ㆍ元氣渾合無間而己. 生天ㆍ生地ㆍ生人ㆍ生物, 皆由此造化以爲之主也. 頤生者知此, - 74 -
질병에 선행하여 사람의 몸을 앞세운 것으로 알려진 허준의 동의보 감 에서도 이런 관념을 볼 수 있다. 천지(天地) 우주와 감응하는 소우주 (小宇宙)로서의 몸의 구체적인 모습은 동의보감 의 첫 내용을 장식하는 내경편(內景篇) 의 신형장부도(身形藏府圖) 에서 잘 드러난다.16) 신형 장부도 는 도상과 두 개의 의설로 구성되어 있다. 신형장부도(身形藏府圖): 손진인[孫眞人: 孫思邈]이 말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람을 가장 고귀 한 존재로 친다.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본받은 것이고, 발이 모난 것은 땅을 본받은 것이다. 하늘 에는 사시(四時)가 있고, 사람에게는 사지(四肢) 가 있다. 하늘에는 오행(五行)이 있고, 사람에게는 오장(五臟)이 있다. 하늘에는 육극(六極)이 있고 사람에게는 육부(六腑)가 있다. 하늘에는 팔풍(八 風)이 있고 사람에게는 여덟 관절이 있다. 하늘에 는 아홉 별이 있고 사람에게는 아홉 구멍이 있다. 하늘에는 십이시(十二時)가 있고 사람에게는 십이 경맥(十二經脈)이 있다. 하늘에는 이십사기(二十 四氣)가 있고 사람에게는 이십사수(二十四兪)가 있다. 하늘에는 삼백육십오 도수(度數)가 있고 사 람에게는 삼백육십오 뼈마디가 있다. 하늘에는 해 <그림 3-1> 東醫寶鑑 의 와 달이 있고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다. 하늘에는 身形臟腑圖 圖像 낮과 밤이 있고 사람에게는 깨고 잠자는 것이 있 다. 하늘에는 우레와 번개가 있고 사람에게는 기쁨 과 성냄이 있다. 하늘에 비와 이슬이 있고 사람에게는 콧물과 눈물이 있다. 則自然懲忿窒慾而水火交泰; 濟人者知此, 則自然辨物居方而沈痾頓復. 圈之於首, 以便不識字者, 開卷肅然, 至簡至易而玩之有趣耳. 敢曰, 且於羲皇心地上著力, 以竊軒岐之微意哉! 是爲說. 人之百病, 皆由水火不交. 故以後天坎離繼之. 血屬水 氣屬火, 血陰而氣陽也. 離中虛 眞陰存焉, 坎 中滿 眞陽寓焉. 陰ㆍ陽ㆍ虛ㆍ實之機, 醫道思過半矣. 16) 東醫寶鑑 과 이전 醫書와의 人體觀 차이점에 대해서는 같은 글; 김호, 허준의 동의보감 연 구, 175-196쪽을 참조. - 75 -
하늘에는 음(陰)과 양(陽)이 있고 사람에게는 추위와 더위가 있다. 땅에는 샘과 물이 있고 사람에게는 혈(血)과 맥(脈)이 있다. 땅에 풀과 나무가 있 고 사람에게는 털과 머리카락이 있다. 땅에 금석(金石)이 있고 사람에게는 치아가 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사대(四大)와 오상(五常)을 받아 임시로 화 합하여 형(形)을 이룬 것이다. 주단계[朱丹溪: 朱震亨]가 말했다. 무릇 사람의 형(形)에 있어서, 키가 큰 것이 작은 것에 미치지 못하고, 몸집이 큰 것이 작은 것에 미치지 못하고, 살진 것이 마른 것에 미치지 못한다. 사람의 색(色)에 있어서는, 허연 것이 까뭇한 것에 미치지 못하고, 여린 빛이 창창한 빛에 미치지 못하고, 얇은 것 이 두터운 것만 못하다. 그런데다가 살진 사람은 습(濕)이 많고, 마른 사람 은 화(火)가 많으며, 흰 사람은 폐(肺)의 기운이 허하고, 검은 사람은 신 (腎)의 기운이 족하다. [사람에 따라] 형(形)과 색(色)이 애초에 다르고 장 부(藏府) 역시 같지 않으니, 밖에 드러난 증(證)이 비록 같을 지라도 치료 하는 방법은 아득히 다르다. 17) 손사막(孫思邈, 581-682)의 말을 인용한 앞부분은 인간의 몸이 천지(天 地)와 상응하여 형성된 소우주(小宇宙)임을 주장한다. 도상(圖像)은 동 의보감 의 편제에서도 보여주고 있는 내(內) 외(外) 즉 형(形) 기(氣)로서 의 몸을 시각화하면서도 두뇌[泥丸宮]와 척추[玉枕關ㆍ轆轤關ㆍ尾閭關] 를 부각시킴으로써 이곳을 순환하는 정(精) 기(氣)의 흐름과 신(神)의 활 동을 강조하고 있다.18) 요컨대 허준은 사람의 몸이 천지(天地)의 빼어난 기운을 받아 음양(陰陽) 두 기운의 작용에 따라 생겨나며 그렇기 때문에 정(精) 기(氣) 신(神)의 수련이 중요하다고 역설한 것이다.19) 이어지는 주 17) 東醫寶鑑 身形ㆍ身形臟腑圖 孫眞人曰: 天地之內 以人爲貴. 頭圓象天 足方象地. 天有四時 人有四肢. 天有五行 人有五藏. 天有六極 人有六府. 天有八風 人有八節. 天有九星 人有九竅. 天 有十二時 人有十二經脉. 天有二十四氣 人有二十四兪. 天有三百六十五度 人有三百六十五骨節. 天 有日月 人有眼目. 天有晝夜 人有寤寐. 天有雷電 人有喜怒. 天有雨露 人有涕泣. 天有陰陽 人有寒 熱. 地有泉水 人有血脉. 地有草木 人有毛髮. 地有金石 人有牙齒. 皆稟四大五常 假合成形. 朱丹 溪曰: 凡人之形, 長不及短, 大不及小, 肥不及瘦; 人之色, 白不及黑, 嫩不及蒼, 薄不及厚. 而況肥 人濕多, 瘦人火多, 白者肺氣虛, 黑者腎氣足. 形色旣殊, 藏府亦異, 外證雖同, 治法逈別. 18) 이 점 역시 東醫寶鑑 만의 특징이다. 신동원, 養生學과 醫學을 一統한 許浚의 身形臟腑 養 生醫學 ; 김호,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 (일지사, 2000), 183-188쪽. - 76 -
진형(朱震亨, 1282-1358)의 인용문은 질병을 다룸에 있어서 몸의 개체 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함을 강조한 것으로 질병 증상이 같더라도 외형과 장부의 특성에 따라 치법이 달라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허준은 역대의 방 에서 의학의 도통을 논할 때에도 주진형의 전통을 강하게 부각시켰 다.20) 이렇듯 동의보감 이 여타 의서와 달리 몸의 양생과 개체성에 좀 더 방점을 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허준이 이를 위해 제시한 수양 의 방법과 체질의 관념은 역시 천인상응(天人相應)의 관점에서 우주론적 이고 환경생태적인 기(氣)의 작용과 활동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인체의 생리적 기전과 그 근거를 천지(天地)에서 유 래한 기(氣)와의 상응성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먼저 인간의 존재 및 형성 원리는 의학입문 선천도설, 동의보감 신형장부도 등 에서 볼 수 있듯이 천지자연의 우주론적 장치들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인체의 생리작용을 설명하는 핵심 도구는 기(氣)이다. 기(氣)는 정(精)과 신(神)의 바탕으로서 인체의 근원적인 요소들인 정(精) 기(氣) 신(神)이 작동하는 토대이기도 하다.21) 우주론적 원리에 의해 선천적 형기(形氣) 를 갖춘 후 신간(腎間)의 동기(動氣)에 근원을 둔 기(氣)는 지(地)/곡식 (穀食)에서 유래하는 후천(後天)의 기(氣)로 보충된다.22) 위기(衛氣)와 영 기(營氣)로 나뉜 이들 기(氣)는 우주의 운행 원리에 따라 몸 안팎을 운행 하며 여타 생리적 대사물로 전화하기도 한다.23) 이런 까닭에 건강한 신 체 및 마음이란 기본적으로 운기(運氣), 사시(四時), 사방(四方), 팔풍(八 風), 음양(陰陽) 등 외부 자연환경에 순응하거나 이들과 조화를 이룰 때 19) 東醫寶鑑 身形ㆍ丹田有三 悟眞篇註 曰: 人之一身, 禀天地之秀氣而有生, 託陰陽陶鑄而成 形. 故一身之中, 以精ㆍ氣ㆍ神爲主. 神生於氣, 氣生於精. 故修眞之士, 若執己身而修之, 無過煉治 精ㆍ氣ㆍ神三物已. 20) 신동원, 醫學의 道統과 새 醫書의 과제 (근간). 출간 예정인 원고를 보여주시며 논문이 잘 다 듬어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과학기술원 신동원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21) 東醫寶鑑 氣ㆍ氣爲精神之根蒂. 22) 東醫寶鑑 身形ㆍ形氣之始, 胎孕之始, 四大成形 ; 氣ㆍ生氣之原, 氣生於穀 ; 內傷ㆍ 水穀之精化陰陽行營衛. 23) 東醫寶鑑 氣ㆍ衛氣行度, 營衛異行. 결국 생태적 몸 에서 臟腑의 작동은 우주[天地]의 끊임없는 運行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 77 -
얻게 되며, 반대로 안과 밖에서 유래한 기(氣)가 천지음양의 순리와 어 긋날 때 질병이 발생한다.24) 그러므로 수양 섭생의 기본은 마음을 비우 고 천기(天機)에 부합함으로써 천인(天人) 및 내외(內外)가 상부(相符)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25) 정(精) 기(氣) 신(神)을 온전케 하기 위한 도인 (導引), 토납(吐納), 반운(搬運), 복식(服食) 혹은 환정양뇌(還精養腦) 등 의 양성법(養性法)을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다.26) 희 노 사 비 공(喜怒思憂 恐)의 오지(五志) 역시 오장과 함께 오행(五行)의 우주론적 원리에 부합 하는 것이 중요했다.27) 이러한 의학적 몸은 조선 후기에 유학자들에게 널리 수용되어 유학 적 관념과도 결합했다. 의학입문, 동의보감 등의 의학문헌은 조선의 의인(醫人)들은 물론 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이와 관련된 인 신(人身) 도상들이 전해지고 있다. 17세기의 유학자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은 역학도설(易學圖說) 에 사람의 몸에 대한 도상 인신지 도(人身之圖) 를 남겼다. 그는 의학적 인간론을 성리학적 틀 내에 수용 하여 재해석하고자 하였다. 그의 인체관은 리(理), 기(氣), 질(質), 음양 (陰陽), 강약(强弱), 역(易)의 원리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기화론(氣化論) 을 성리학적 심성론(心性論)과 결합한 것이었다.28) 장현광의 도상에서는 천지(天地), 음양(陰陽), 호흡(呼吸), 경맥(經脈), 수화(水火), 기혈(氣血), 오장(五臟), 육부(六腑), 칠정(七情), 사단(四端), 오성(五性) 등으로 인체 를 표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그림 3-2 참조> 도상의 좌우에 호 흡의 도수와 경맥이 운행하는 길이를 기록하여 우주론적 기(氣)와 감응 함을 나타내고 있다. 머리가 둥근 것은 천(天)을 본뜬 것이고 발이 네모 난 것은 지(地)를 본뜬 것이라든지 다섯 손가락 마디에 12개월의 숫자 24) 東醫寶鑑 身形ㆍ四氣調神, 四時節宣, 四方異宜, 氣爲諸病 ; 오재근, 건강개념에 대한 한의학적 검토: 黃帝內經 을 중심으로 (대전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53-60쪽. 25) 東醫寶鑑 身形ㆍ論上古天眞, 以道療病, 虛心合道, 人心合天機. 26) 東醫寶鑑 氣ㆍ氣爲呼吸之根源 ; 身形ㆍ搬運服食, 按摩導引, 還丹內煉法. 27) 東醫寶鑑 神ㆍ五志相勝爲治. 28) 김성수, 朝鮮時代 醫療體系와 東醫寶鑑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158-163쪽; 김성수, 16-17세기 朝鮮 儒學者들의 人體에 대한 利害, 한국의사학회지 20(2) (2007), 60-63쪽. - 78 -
<그림 3-2> 張顯光(1554-1637)의 易學圖說 人身 에 수 록되어 있는 人身之圖 가, 그리고 손가락의 굴곡 및 혈(穴)에 365 주천도수(周天度數)의 숫자 가 대응되어 있다고 말함으로써 천지우주와 상응하는 인체를 그렸다. 인 체의 구성요소인 기혈육골(氣血肉骨)을 화수토석(火水土石)에 귀속시키 기도 했다. 장현광은 복부의 좌우에 오장(五臟)ㆍ육부(六腑)를 배치하고 그 사이에 혼신의백지(魂神意魄志) 오장(五藏)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오성(五性) 그리고 사단(四端) 및 칠정(七情)을 배치함으로써 의학적 몸 과 성리학의 심성론을 결합시켰다. 조선 유학자들의 문집에서 이런 종류 의 도상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이제마 역시 이러한 도상의 형식을 염두에 둔 듯 비슷한 형태로 의학적 몸을 도식화했다.29) 29) 東醫壽世保元 에 실제로 圖像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 7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