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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발간등록번호 11-1371480-000127-01 대한민국의국방사 : 국가발전과시민형성의국방사연구 연구용역최종보고서 2016. 11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연구개요 > 과제명 대한민국국방사 ( 國防史 ) 주관기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연구기관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연구기관 2016.04-2016.11 < 연구진 > 구분 성명 소속 책임연구원 조성환 경기대학교 연구원 홍선표 독립기념과 연구원 김열수 성신여자대학교 연구원 윤지원 평택대학교 연구원 박민형 국방대학교 연구원 이준구 국방민군사업발전협회 연구원 최영진 중앙대학교 연구원 조성훈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홍태영 국방대학교 연구원 공진성 조선대학교

< 차례 > 서론 7 1. 대한민국임시정부의군사활동과항일무장투쟁의군사 ( 軍史 ) 9 2. 건국 전쟁, 그리고한미동맹 37 3. 탈냉전시기한국군의파병과국제기여 71 4. 한국국방의정치경제적동학 : 자주국방과안보경제 97 5. 한국방위산업의역사 123 6. 전쟁과안보, 국방의영웅 : 한국적전쟁영웅의탄생과시대적변화 155 7. 한국현대사와전쟁영웅 : 희생과기여의스토리 177 8. 근대국민국가, 공화주의적시민과군대 213 9. 한국인과병역 : 시민형성과국민통합의주역 247 결론 273

서 론 조성환 ( 경기대학교 ) 대한민국은 1948년근대적 민주공화국 으로출발하였다. 그러나근대국가수립의대내적역량과조건의미비와, 냉전적대외환경, 즉이차세계대전종전후미소분할점령에따른분단과 6.25전쟁의시련을거쳐야했다. 전쟁의충격을통하여우리는 국방 이나라의독립과국민의안전의물리적기초이며그핵심은방위 (defense) 라는사실을깨달았다. 국방은 국가주권을유지 하고국민 안전의확보 를담당하는근본적기능을가진다. 한국의현대사는국가의안전보장을위해충분한국방력과국방체계를확보하는과정이었고, 이를위해지도자와국민은각고의노력을기울임으로써현재세계 10위권내의강력한국방력을갖춘중견국가가되었다. 한국현대사에서국방체제의구축과발전은대한민국의건국과발전의핵심적기반이자, 국가발전의성과속에서전개되었다. 따라서대한민국국방사는국방부문의체제구축, 국방력의역사적축적을다루되, 협의의전쟁사와군사 ( 軍史 ) 문제에국한되는것이아니라국가발전과국방발전의포괄적, 유기적연계속에서기술되고평가될필요가있다. 이와함께근대국가의주권자이자시민사회의주체인시민의국방참여와국가기여의의미가발전적으로평가되어야한다. 본연구는대한민국의국방사를 국가발전과시민참여의방위사 (defense history) 의차원에서재조명하는연구이다. 이를위해본연구는크게네영역의분석주제로나누어대한민국의국방의역사를탐구하고기술하게될것이다. 첫번째영역은한국현대사의군사사 ( 軍事史 ) 의시대사적정리이다. 모든국가의역사는일정한시대사적구조에따라전개된다. 본연구는한국의국방사를헌정정신에따라임시정부시기의항일투쟁을중심으로한군사 ( 軍史 ), 1948년대한민국수립이후부터 6.25전쟁을거쳐냉전시기, 탈냉전이후의시기로구분하여군사사를서술하였다. 이러한한국국방사의시대구분을통해임시정부를주축으로한항일군사조직과독립투쟁사는대한민국건군의역사적, 군사적원천으로작용하였음을기술할것이고, 1948년대한민국수립에이은건군, 6.25전쟁, 냉전시기한미동맹의군사사가서술될것이며, 탈냉전이후그동안압축적산업발전과민주화를기반으로한대한민국군대의해외파병사가 한국군의세계기여 라는차원에서정리될것이다. - 7 -

두번째영역은국방경제사의차원에서국가경제의발전과국방사의전개를분석하고기술할것이다. 여기에서는먼저, 국가와국방의발전이산업국가의경제력을기반으로전개된다는점을전제로자주국방과중화학공업의연계발전에나타난한국국방의정치경제학적역동성을이론적으로역사적으로서술할것이다. 다음으로, 한국의경제발전과안보수요에따른방위산업의내용과발전사가서술될것이다. 세번째영역은대한민국국방사의대중적의식과국방영웅의평가와기술이다. 여기에서는특히전쟁과국방의영웅의상징에대한국민적의식과평가가분석될것이며특히이들영웅들의희생과국가에대한기여의스토리가정리될것이다. 네번째영역은한국국방사에서의시민적참여와국가 ( 공동체 ) 에대한기여의평가이다. 1948년한국이근대적민주공화국으로성립된후, 국민개병제의헌법규정에따라대한민국의군대는시민 ( 국민 ) 의참여와헌신, 그리고희생에의해국가와국민의안전을보장하였다. 국방의시민참여는민주공화국의시민적주권성과책임성을고양하고공화주의적통합을공고히한신성하고헌신적인노력이었다는것을분석할것이다. 결국본국방사연구는협의의군사사를넘어현대한국의국가 ( 경제 ) 발전과시민참여와연관된유기적관계에서파악하며, 그주된내용은 1) 한국현대사와의전쟁, 동맹, 파병의국방사 : 생존, 방위, 국제기여의국방사, 2) 국방사와한국경제 ( 산업 ) 발전 : 안보경제, 자주국방과방위산업의국방경제사, 3) 한국의국방사에서의영웅의발자취 : 의식과실천의표상, 4) 한국국방과공화주의적시민형성, 국민통합의장정 ( 長征 ): 시민형성 과 국민통합 의국방사를서술하게될것이다. 한반도의특수한지정학적조건은주변에강대국의존재로말미암은험난한민족적역사의전개를가져왔다. 이에전근대시대부터어느시대든지한반도에서의국방문제해결은결코쉬운과업이아니었고대한민국수립이후에도이점은마찬가지라고할수있다. 대한민국건국이후국제관계와정치외교의전개과정에서부터국방사의연원과연관성추출및독자적위상정립에이르기까지를총체적으로조명하여광복70년을기념하여국방사에대한통사적이며거시적인시각을정립될필요가있다. 이는미완의국가과제인통일을추진하는동력이자, 통일한국의강하고통합적인국방력을건설하는데필요한국방사적초석이될것이다. - 8 -

대한민국임시정부의군사활동과항일무장투쟁의군사 ( 軍史 ) 홍선표 ( 독립기념관 ) - 목차 - Ⅰ. 머리말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초기군사활동 1. 국민개병제의채택과군사계획 2. 독립전쟁의선포 3. 윌로스비행학교의설립 Ⅲ. 3 1운동전후간도지역독립군단의편성과항일무장투쟁 1. 독립군단의편성 2. 봉오동 청산리전투의대승 Ⅳ. 독립군단의재정비와통합 1. 독립군단의재정비 2. 3부의성립과통합운동 Ⅴ. 1930년대만주지역독립군의항일무장투쟁 1. 조선혁명군의항일무장투쟁 2. 한국독립군의항일무장투쟁 3. 사회주의세력의항일무장투쟁 Ⅵ. 중국관내지역군사인재의양성 1.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설립 2. 한인특별반의설립과김구의군사인재양성 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한국광복군창설과군사활동 1. 한국광복군창설 2. 연합군과의군사활동과군사계획 3. 한미연합의군사활동 Ⅷ. 맺음말 Ⅰ. 머리말 대한민국국방의역사적근원은해방직후대한민국정부수립직후갑자기탄생 한것이아니다. 대한제국멸망이후아무런지원조차기대할수없는최악의조건 - 9 -

속에악전고투하며끈질기게항일무장투쟁을전개한독립운동가들의강렬한독립운동과독립정신에서찾아야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피흘림이없이는독립도없다 라는구호아래 1920년을독립전쟁의원년으로선포하였다. 이후임시정부는독립전쟁론을한국독립운동방략의최고좌표로설정하고각지, 각계에서강인한항일투쟁을지속하였다. 3 1운동전후만주에는수많은독립군단세력들이편성되어목숨을건항일무장투쟁이전개되었고중국관내에서군사인재양성을위한노력이병행되었다. 각지에서개별적이고분산적으로추진된항일무장투쟁은한국광복군의설립으로귀결되어재정비되었다. 해방때까지한국광복군은대한민국임시정부의국군으로서독립전쟁의근간역할을담당하며군사활동을추진하였다. 본고는대한민국임시정부의군사활동을중심으로일제강점시기만주와중국관내, 그리고미주지역에서전개한항일무장활동을중심으로항일무장투쟁의역사를고찰했다. 해방이전전개된강력한항일무장투쟁의역사에대한고찰은태동기대한민국국방사의근원을재정립하고그정통성을수립하는과업이될것이다.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초기군사활동 1. 국민개병제의채택과군사계획 상해에서설립한임시의정원은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장 을발표하고대한민국임시정부의수립을대외에발표하였다. 대한민국임시헌장 제6조에 대한민국의인민은교육납세급병역의의무가유함 이라하여군대의필요성과함께전국민의병역의무를명문화하였다. 4월 25일공포된 대한민국임시정부장정 에는정부부서안에군무부를두고군무총장은육 해군군정 ( 軍政 ) 에관한사무를장리 ( 掌理 ) 하며육 해군군인군속을통할하고소관급공서 ( 公署 ) 를감독 한다고규정하여 1) 군사의기본조직을편성하였다. 1919년수립당시임정은파리강화회의를위해파견된김규식이열강을상대로활발한외교활동을전개할때여서외교론에치우친독립운동에중점을두고있었다. 1919년 7월 8일내무총장안창호는시정연설에서 가급적군사활동에대한노력을경주할것 이라하였지만 2) 독립운동의방략에서군사의개념과군사활동에대한비중 1) 한시준편, 대한민국임시정부법령집, pp. 88-89. 2) 국사편찬위원회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2( 임정편 Ⅱ), p. 400. - 10 -

은보잘것없었다. 1919년 9월한성정부, 노령정부, 상해정부가통합해탄생한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는 9월 11일대한민국임시헌법을개정, 공포하였고이를토대로 9월 15일통합임시정부수립을대내외에공포하였다. 3) 통합된임시정부는총리제를대통령제로바꾸고행정 6부에서 7부 1국으로변경하였다. 이가운데군사부문의경우정부조직안에군무부를두되대통령의직권으로 육 해군을통솔 하는것으로정했다. 여전히군사활동에대한인식과비중이낮았다. 이것은임정대통령이승만이 1919년 8월구미위원부를설립한이후외교활동에계속역점을두면서나온현상이었다. 1919년 11월 5일법률제2호로공포된 대한민국임시관제 는이전과달리군사분야의역할과활동을더욱강화시켰다. 4) 즉, 임시대통령을원수로한군사최고통솔기관인대본영 ( 大本營 ) 을두었고, 국방과용병 ( 用兵 ) 에관한모든계획을통솔하는참모부와군사에관한임시대통령의자순기관 ( 諮詢機關 ) 인군사참의회 ( 軍事參議會 ) 를두었다. 군무부의조직과직무를 8개조 29개항으로명문화하였다. 군무총장밑에비서 육군 군사 군수 군법 해군의 6개국을두고군문총장으로하여금육 해군군정에관한사무를장리하며육 해군인군속을통할하고소관각관서를감독 하게하였다. 아울러군무부안에육군국과해군국을분리하였고육군국안에 육군비행대에관한사항, 해군국안에 해군비행대에관한사항 을두어육 해군에서각기비행대를운영하는것으로규정하였다.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 18일자로군무총장노백린의명의로군무부령제1호 임시군사주비단제 를비롯해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 대한민국육군임시군구제, 임시육군무관학교조례, 육군사학학칙( 陸軍士學學則 ) 등각종군제관련법령과조례를발표하였다. 이것은향후임정이본격적인독립운동을위해독립전쟁론에무게를두고군사정책을추진하겠다는의지의표명이었다. 이가운데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 는군대의편제와정원 병역 군적 군기와징벌 동원등일반적인군사복무사항과조직, 각급기관과군인의신분등을구체적으로명시함으로써군사제도의기틀을마련하였다. 대한민국육군임시군구제 는만주와노령지역에있는한인들을대상으로삼아군인확보를위한제도적근거를마련한것으로후일만주지역을임정의통치범위안에포함시킬것임을암시하였다. 임정은 임시육군무관학교조례 를근거로 1919년말초급장교양성을위한육군무관학교를설립하였다. 그리하여육군무관학교는 6개월여동안의군사교육을마친 1920년 5월 8일제1기 19명의졸업생을비롯해 1920년 12월 24일제2기 24명등 3) < 개정공포된신헌법 >, 독립신문 1919 년 9 월 16 일자. 4) <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호외 >(1919.11.5),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pp. 15-25. - 11 -

총 43명의졸업생을배출하였다. 5) 1920년 1월 24일임시정부는군무부포고제1호를공포하고 너도나와대한민국의군인이되어이천만남녀는 1인까지조직적, 통일적으로광복군되기를서심 ( 誓心 ) 단행할지어다 하여국민개병제를채택하였다. 국민개병제는 18세이상의남자를군적등록하게하여전국민의병역의무를지우는것이었다. 6) 하지만강제징병을할여건이되어있지않은현실을감안해먼저의용병으로군적에입문하는방침을세웠다. 군적등록업무는 1920년 1월중순부터시작되었으나주대상은상해지역의한인들이 1차대상이었다. 군적등록은강제규정이아닌지원제로시행되어 2월 7일부터본격화하였다. 7) 군적은갑 을종으로구분되었고갑종은매일 1시간씩, 을종은매일 2 시간이상씩군사훈련을받도록규정하였다. 군적에등록한수는갑종 40명, 을종 100여명이었다. 임시정부는 1920년 3월 20일제1회국민군편성식을거행함으로써국민개병을대외에천명하였다. 8) 2. 독립전쟁의선포 통합임정의노동국총판안창호는 1920 년 1 월 3 일과 5 일에걸쳐거행한신년축하 회연설 우리국민이단정코실행할 6 대사 에서 우리가오래기다리던독립전쟁의 시기는금년인가하오. 나는독립전쟁의해가이르는것을기뻐하오 9) 하며 1920 년 을독립전쟁의해로선포하였다. 이어서안창호는독립전쟁을준비할방략으로 1 군사, 2 외교, 3 교육, 4 사 법, 5 재정, 6 통일을 6 대사로간주해대비할것과이를추진하기위해국민개병주 의 ( 國民皆兵主義 ), 국민개납주의 ( 國民皆納主義 ), 국민개업주의 ( 國民皆業主義 ) 를주장하 고이모두가일본과독립전쟁을수행하기위한방편이라하였다. 6 대사에대한연설 에서안창호가특별히군사방면을가장서두에언급한것은임정이향후독립전쟁을 수행하는일에서가장역점을두겠다는의미였다. 임시정부는 1920 년 1 월신년을맞이하여러시아와중국내거주하고있는한인 동포들에게공포한 국무원포고 제 1 호를통해군사활동의방침을대외에천명하였 다. 5) 독립신문 1920 년 6 월 10 일, 1921 년 1 월 1 일. 그러나 2 기이후부터일본의상해프랑스조계당국에대한압력과재정곤란때문에더이상졸업생을배출하지못했다. 6) < 국민개병 >, 독립신문 1920 년 2 월 14 일자. 7) 주요한편저, 안창호일기, 안도산전서, 삼중당, 1963. 8) 독립신문 1920 년 3 월 23 일자. 9) < 우리국민이단정코실행할 6 대사 >(1)(2), 독립신문 1920 년 1 월 8 일 ; 1 월 10 일자. - 12 -

2천만대한민족이일심일체가되어死냐자유냐의독립대전쟁의제1년을작할대한민국 2년의신춘을제하여대한민국임시정부는아독립전쟁의중견이될아중 ( 俄中 : 러시아와중국 ] 양령 ( 兩領 ) 의 2백만동포에게고하노라. ---- 독립전쟁이우리의기정의행동이라하면이에대하여가장중대한책임을부 ( 負 ) 한자누구뇨. 오직애아 ( 愛我 ) 아중 ( 俄中 ) 양령 ( 兩領 ) 의 2백만동포로다. 10) 즉, 만주와러시아지역에사는한인동포를중심으로독립전쟁을전개해나가겠다는방침이었다. 국무총리이동휘는 1920년 3월 2일임시의정원회의 (2.23 3.30) 에서신년도임시정부의시정방침을밝힌자리에서 군사에는독립전쟁을대대적으로개시하여기율적 ( 紀律的 ) 으로진행하여최후승리를득하기까지지구키위하야그방침으로일변으로군사지식을양성하며일변으로양용병 ( 養勇兵 ) 을모집하여가히실행할만한모모지점으로장래의거의예비를뜻하나이다. 차에대하야계획의여하함은기밀에속함으로명언치못하나이다. 11) 라하여의용병을모집해독립전쟁을위한모종의군사활동에착수하였음을암시하였다. 윤기섭 이진산 이유필 김홍서 왕삼덕등 5인은 1920년들어처음가진임시의정원회의 (2.23 3.30) 에서 군사에관한제의안 을제출하고임정은금년안에혈전을개시하고군사기관을만주로이동시킬것을요구하였다. 12) 이러한제안에대해임시의정원은원안을가결시키고만주지역의독립군세력을임정산하로편입시키는작업에착수하였다. 1920년새해에들어독립전쟁의목표속에수립한군사활동에대한세부계획은 1920년 3월 2일임시의정원에서국무총리이동휘가연설한 14개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시정방침 속에반영되었다. 13) 대한민국임시정부시정방침 중군사관계를보면 독 10) < 국무원포고제 1 호 >, 독립신문 1920 년 2 월 5 일자. 11) < 국무총리시정방침연설 >, 독립신문 1920 년 3 월 4 일자. 12) < 군사에관한건의안 >, 독립신문, 1920 년 4 월 3 일자. 13) 이동휘가밝힌임시정부시정방침은 1919 년 11 월 17 일과 12 월 12 일에개최한임시정부국무회의에서 1920 년도정부의 대정방침안 제정을논의하면서안창호, 신익희, 윤현진세사람을대정방침작성위원으로선출하고, 12 월 15 일이들이작성한대정방침을확정하는등일련의과정을통해나온것이다.( 윤대원, < 대한민국임시정부의조직 운영과독립방략의분화 (1919 1930)>, pp. 162-166.) 그런데국회도서관편, 한국민족운동사료 ( 중국편, 1976), 114 쪽에의거 < 대한민국임시정부시정방침 > 의결정시기를 1919 년 9 월 17 일경으로본이연복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군사정책 (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80 주년기념논문집 ( 하 ) ) 15 쪽의글과,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Ⅰ- 상해시기 (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2008) 의 119 쪽주 )55 에서제시한 1919 년 9 월발표설은오류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시정방침 은 1920 년 5 월일제측정보보고에서나오고있으나 1920 년초까지임정에서이루어진각종정책방향을정리한것이다. - 13 -

립운동의최후수단인전쟁을대대적으로개시하여법률적으로진행하고최후의승리 를얻기 위한개전준비작업으로 국외의용병 과 국내의용병 을모집해편성하고 사관학교설립, 작탄대편성, 비행기대편성등을명시하였다. 3. 윌로스비행학교의설립 1916년 12월부터하와이호놀룰루에정착해박용만과함께대조선국민군단의군사운동에참여하고 태평양시사 를발간한노백린은 3 1운동직후각지에서탄생한임시정부와 1919년 9월상해통합임시정부에서도군사분야의총책임자인군무총장에선임되었다. 이렇게된데는구한말시기부터정통무관으로서의풍부한경험으로누구보다독립전쟁을수행하는데적합한인물로보았기때문이었다. 그는군무총장의직임을다하고독립전쟁을준비하기위해 1919년 10월 1일하와이를떠나미국본토순행을시작하였다. 노백린은미국본토순행을통해독립전쟁론을설파하였고재미한인들은이러한그의주장을적극호응하였다. 이런호응속에그는군무총장의명의로 1920년 1월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포고 제1호를공포하고 2천만남녀는일인까지조직적이고통일적으로 光復軍 되기를명세하고결단할것을요구하였다. 그의호소에크게감응한김종림 이재수 신광희등은노백린의군사활동을돕기로결행하고 1920년 2월 20일마침내캘리포니아주윌로스에한인비행학교를설립하였다. 14) 육군무관으로활동한노백린이군사경험이전혀없는비행학교를설립한데는미주한인들의준비된역량이있은때문이었다. 먼저 1919년 5월국내 3 1운동의소식에충격받은한인청년들은독립의대사업을이루기위해새로건설한임시정부에혈성을다해충성할것을맹세하고학술또는군사상의기예를배워독립운동에기여하겠다는취지로샌프란시스코에서청년혈성단을만들었다. 15) 청년혈성단에는한인청년 23명이참여하였는데이가운데이용근 이용선 이초 장병훈 한장호는레드우드비행학교에입학해비행술을배웠고최자남은미해군비행학교에입대하였다. 이들의비행학교입학은독립의대사업을위해군사상의기예를배운다는청년혈성단의취지에따른것이었다. 다음으로미주한인사회가제1차세계대전을계기로새로운군사전술로부상한비 14) 윌로스비행학교의설립과운영에대한선행연구로는홍선표, < 미주한인의군사운동 - 노백린과한인비조종사양성소 >( 미주한인사회와독립운동 1, 박영사, 2013), 홍윤정, < 독립운동과비행사양성 ( 국사관논총 107 집 ), 한우성 장태한, 1920, 대한민국하늘을열다 (21 세기북스, 2013) 등이있다. 15) < 청년혈성단취지서 >, 신한민보 1919 년 5 월 31 일자. - 14 -

행전술을높이평가하고한인들에게비행사되기를장려한점이다. 대한인국민회기관지 신한민보 는사설을통해공군력이야말로근대군사학가운데가장필요한요소중하나이고, 일본의공군력이미약한상태에서지금우리가먼저한인비행사를양성한다면장차독립전쟁에서승리하게될것이라하였다. 16) 1919년 9월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장에취임한윤병구는취임연설에서 청년중자격있는자들을우선비행기제조학과무선전신학, 그리고최근의전술전략을배우도록장려할것과여자들은간호부과를배우도록장려해야할것 17) 임을역설하였다. 이처럼 3 1운동이후고조된독립운동의열기속에미주한인사회에는비행사양성은앞으로독립전쟁을수행하는데없어서는안될최신군사전술이라는인식이팽배하였다. 그리고실제한인청년들은레드우드비행학교를비롯해미국각지의비행학교에입학해활동하였다. 이로보면비행학교를설립하는데필요한인적자원은어느정도구비하고있었던셈이다. 여기에다쌀농사로부를축적한김종림을비롯한북가주지역의한인들은노백린에게비행학교설립에따른재원을지원하겠다고함으로써마침내윌로스에비행학교가설립될수있었다. 비행학교는 2대의비행기를마련하고레드우드비행학교교관브라이언트를초빙하는등본격적인비행훈련에착수하였다. 그리고레드우드를비롯해미국각지의비행학교에서수학한한인비행사들을교관으로활용하였다. 이곳에참가한학생수는 3 월초 24명이었고, 7월비행사양성소개소식때에는 25명정도였다. 노백린은비행기를구입해본격적인비행술을가르칠때까지육상훈련을전담하였다. 그리고 1920년 7월 5일 비행사양성소 의이름으로성대한개소식을거행한후그는상해임정으로복귀하였다. 노백린이상해로떠난후김종림과비행학교관계자들은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총무곽림대를임시감독으로임명해비행사양성소운영의책임을맡겼다. 7월 25일김종림 송덕용 강영문 이재수 신광희등은비행사양성사를만들고향후 2년동안안정적으로비행훈련을할수있도록물질적으로후원하기로하였다. 비행사양성사에참여한대부분은윌로스인근의북가주지역에서쌀농사를하던사람들이었다. 그런데 1920년 10월북가주지역에서발생한대홍수로한인들의쌀농사사업이막대한타격을입었다. 이런연유로그동안후원을아끼지않았던김종림을비롯한비행사양성사회원들은더이상비행훈련비용을지원해줄수없었다. 비행사양성사총재로활동하며비행학교운영의실질적인후원자였던김종림은 1921년 4월박희성의비행기추락소식을담은 청원서 를대한인국민회북미지방총 16) < 한국독립과비행술 >, 신한민보, 1920 년 6 월 4 일자. 17) < 중앙총회장윤병구씨의행정에관한의견 >, 신한민보, 1919 년 9 월 30 일자. - 15 -

회장최진하에게보낸후비행사양성소를폐쇄하였다. 18) 독립전쟁을대비하기위해노백린을중심으로야심차게설립했던비행학교는노백린의상해행이후일어난자연재난으로막을내렸다. 19) 윌로스에한인비행학교를설립하고운영한경험과그영향은대한민국임시정부의군사정책수립시나해방후공군창설면에서중요한역사적성과를남겼다. 첫째, 임정을대표한군무총장노백린의주도와재미한인들의협력과성원속에외부의도움없이순수자력으로비행학교를설립 운영하면서이후임정의군사계획수립에자신감을부여하였다. 둘째, 비행학교설립과운영의실제경험은이후해방이될때까지임시정부가군사정책을수립할때공군건설의꿈을끝까지포기하지않고추진하는원동력으로작용하였다. 셋째, 해방후대한민국공군창설의역사적인기원을만들어주었다. Ⅲ. 3 1 운동전후간도지역독립군단의편성과항일무장투쟁 1. 독립군단의편성 3 1운동이후만주지역에는독립군단의편성이활성화되었다. 만주는서간도와북간도지역이중심활동지였다. 서간도지역은백두산서북쪽압록강을넘어훈강일대와송화강중상류지역을가리키는데집안 통화 관전 임강 장백 무송 안도 흥경현등을포함한다. 북간도는백두산동쪽을두만강을넘어연길 화룡 왕청현을중심으로하고혼춘 돈화 액목 동녕 영안현등을아울러칭한다. 먼저서간도지역의독립군단편성을보면, 경술국치이전부터간도에독립군기지를건설하고자했던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김동삼등은 1911년유하현삼원포에서독립군기지건설에착수하고신흥무관학교를설립하여 1920년 8월까지 2,000여명의졸업생을배출해독립군의근간을만들었다. 황해도의병장이진룡 조맹선 박장호등도만주로이동하여 1919년 4월 15일유하현삼원포에대한독립단을결성하고본격적인항일투쟁을전개하였다. 그외서간도지역에서결성된대표적인독립군단을보면 1919년 3월안동현의대한독립청년단, 11월유하현의서로군정서, 11월관전현의대한청년단연합회, 1920년봄무순현의광정단과회덕현의의성단, 1920년 5월통화 18) < 비행학생도읍시다 >, 신한민보 1921 년 5 월 5 일자. 19) 자연재난으로인한경제적곤란이주된요인이었지만임시감독이었던곽림대가미군사학교입학을위해떠나는등노백린의상해행이후그와같은지도력을발휘할인물이뒷받침되지않은것도주요요인이었다. - 16 -

현합니하의신흥무관학교, 관전현의대한광복군총영등 20여개가된다. 20) 북간도지역에서조직된독립군단은대개 3 1운동전후에집중적으로결성되었다. 즉, 왕청현의대한독립군, 훈춘현의대한신민단, 연길현의대한국민회국민군 의군부 대한의민단 대한의용군사회, 장백현의대한국민단, 안도현의대한정의군정사, 왕청현의북로군정서등 30여개가된다. 간도지역에서형성된 50여개의독립군단의결성은 1920년대초반만주지역항일무장독립운동의근간이되었다. 독립군의전력이크게강화되고항일독립전쟁의분위기가고조되자 1920년초부터독립군의국내진공작전은활발히전개되었다. 1920년의경우연인원 4,643명의독립군이 1,651회에걸쳐국내를진격하여일본경찰서와관공서 37곳을공격하였다. 21) 국내진공작전을통한독립군의활약상은민족지인 동아일보 와조선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 에상세히보도되어국내민족운동진영의항일정신을크게고무시켰다. 독립군의국내진공작전이본격화하자이에대응하기위한일본정규군의국경수비와독립군을탄압을위한군사력은대폭증강되었다. 먼저양측의직접적인충돌은삼둔자전투에서개시되었다. 1920년 6월 4일대한신민단의박승길이지휘하는 30여명의독립군부대가두만강을건너함경북도종성군강양동에진입하여일본헌병순찰소대를격파하고돌아왔다. 그러자일본군남양수비대가 1개중대병력과 10여명의헌병으로추격에나서삼둔자에이르자 6월 6일매복해있던최진동의군무도독부소속독립군은과감한기습공격으로승전을거두었다. 삼둔자전투는처음으로두만강을건너중국영토로진입한일본정규군을격파한독립군의승전보였다. 2. 봉오동 청산리전투의대승 삼둔자전투에서참패를당한일본군 19사단사령부는월강추격대를편성하여독립군섬멸작전을거행하기위해 1920년 6월 7일일본군이봉오동골짜기로진군하였다. 사전에정보를입수한홍범도의대한독립군과최진동의군무도독부는상호연합으로적을섬멸하기로결정하고매복해있다가기습공격을감행해일본군을대파하였다. 독립군부대의무장능력을과소평가한일본군은봉오동전투의참패로독립군의위력을실감하였다. 봉오동전투의성과는조선군사령부의발표와언론의발표가달리나타나지만임시정부군무부의조사에따르면적군은사망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명이고아군은사망 1명, 중경상의부상자 5인으로발표하여독립군의대승 20) 황민호 홍선표, 3 1 운동직후무장투쟁과외교활동, pp. 37 38. 21) 같은책, p. 85. - 17 -

을확인하였다. 정규군이독립군과의전투에서연이어대패했다는소식은일본군에게상당한충격을주었다. 일본군은이에대응하기위해군사력을증강하고본격적인군사작전에돌입하였다. 먼저만주각지의일본영사관에전투경찰병력을증강하여독립군에대한체포와탄압에열을올렸고중국관헌을협박하여독립군토벌을강요하였다. 그리고 1920년 8월에작성한소위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 에의거해직접간도에출병하여독립군토벌을결정하고소위훈춘사건을조작했다. 훈춘사건이란일본의사주를받은중국마적단이 1920년 10월 2일훈춘의민가와일본영사관분관을습격해 13명의일본인과한국인순사 1명을살해하고 30여명에게중경상을입힌사건이다. 이사건을출병의구실을삼은일본정부는 10월 7일간도출병을결의하였다. 그리고 10월 17일을기해군사작전을실행할것임을중국측에일방적으로통고하였다. 간도출병을위해동원된일본군의병력은조선군제19사단을주력부대로하여노령 북만의파견군과관동군등도합 2만여명에달했다. 일본군의규모가대병력인데비해독립군의전세는매우열악했다. 당시독립군세력은김좌진이이끄는북로군정서의경우 600여명의정예병력과 100명정도의보충대병력이었고, 홍범도가이끄는대한독립군은 300 400명정도였다. 그밖에대한국민군 훈춘국민회 대한광복단 대한의민단 신민단등을합해도총 2,000여명정도에불과했다. 전략상절대적인열세인독립군단들은홍범도연합부대와김좌진의북로군정서군을중심으로추격해오는일본군에맞섰다. 청산리독립전쟁은일본군이약 5,000명의병력으로김좌진이이끄는북로군정서를공격하기위해청산리로진격할때김좌진부대가 1920년 10월 21일삼도구청산리백운평골짜기에서기습공격을가한백운평전투를시작으로 10월 26일새벽까지약 6일간 10여차례의크고작은전투를말한다. 독립군은백운평전투에서 200여명의일본군을섬멸한것을시작으로완루구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쉬구 천보산 고동하등에서연이어계속된일본군토벌대와의전투에서대승을거두었다. 독립군의전과기록에대해선기록에따라다르게나타나지만일본군은전사자 1,200명, 부상자 2,100여명이어었고독립군은전사 130여명, 부상 220여명이었다. 봉오동전투와청산리전투는한국의독립군이월등한화력과병력을갖춘일본군과정규전에서거둔성과라는점에서각별한의미가있다. 청산리독립전쟁에서독립군이대승할수있었던배경은일찍부터만주지역에뿌리를내리고정착한한인사회의전폭적인지지와민족역량의결집때문이었다. 이런요인때문에독립군토벌이실패했다고판단한일본군은 1920년 10월부터 12월까지간도지역의무고한한인농민들을살륙하고한인민가와학교그리고교회와각종건물을파괴하고방화하는 경신 - 18 -

참변 을자행하였다. 그이듬해인 5 월말까지도일본군잔류부대에의한만행은계속 되었다. Ⅳ. 독립군단의재정비와통합 1. 독립군단의재정비 청산리전투에서대승을거둔독립군부대는경신참변에의한일본군의압박을피하고장기항전을준비하기위한새로운근거지를찾기위해이동해북만주밀산에서대한독립군단을결성하였다. 이때러시아정세에대한판단을두고김좌진이이끄는북로군정서를비롯한일부독립군단은진로를바꾸어북만지역으로되돌아왔고홍범도 이청천 최진동이이끄는독립군단은볼세비키의지원을기대하고계속북으로이동하여 1921년 3월아무르주의자유시 ( 스보보드니 ) 에도착했다. 독립군단은그곳현지의대한의용군과제휴를모색했으나또다른현지무장단체인고려혁명군은만주에서넘어온병력을자기네세력으로편입시키려하여대한의용군과알력이일어났다. 결국 1921년 6월 28일자유시내의한인무장세력간의대충돌 ( 자유시참변 ) 로독립군이 40여명이전사하고 900여명이체포되는큰피해를입었다. 그결과일부는러시아내한인사회주의세력과협력하거나포로가되어남고나머지는병력을수습하여다시북만지역으로되돌아왔다. 경신참변과자유시참변으로극심한타격을입은만주지역의독립운동세력은흩어진진영을정비하기위한노력에착수했다. 김좌진이이끄는북로군정서는밀산과영안현을중심으로, 구춘선이이끄는대한국민회세력은돈화와액목현을중심으로, 신민단 광복단 한민단등의병력은영고탑 목단강 동녕현등지를중심으로진영을갖추었다. 이들북만지역에흩어져있던독립군단들은통합운동을벌여 1922년 8월대한독립군단을결성했다. 한편남만지역에서새로운활로를모색하고있던대한독립군비단 흥업단 광복단등도통합운동을벌여 1921년말대한국민군단을결성했다.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광한단등도 1922년봄환인현에서남만통일회의를결성하고대한통군부를조직했다. 대한통군부는그해 8월통합하지않은남만의각독립운동단체와군단들을가입시켜대한통의부 ( 大韓統義府 ) 로명칭을바꾸고조직을확장시켰다. - 19 -

2. 3 부의성립과통합운동 경신참변과자유시참변이후흩어졌던재만독립군진영이정비되었다. 하지만 1923년대한통의부내공화주의세력과의병출신의복벽주의세력간의이념대립과군사주도권을둘러싸고알력이일어나 1923년 2월복벽주의계인사들이대한의군부라는별도의군단을설립해분립하였다. 이어서통의부내군사조직인의용군제 1 2 3 5중대와일부세력들은임시정부의기치하에통일되어야한다는선언서를 1924년 5월과 6월에각각발표하고육군주만참의부 ( 일명 참의부 ) 를설립했다. 참의부는임시정부의직속부대로자임하고임정을적극지지하였다. 대한의군부와참의부를설립하며일부세력이이탈하자세력이크게약화된대한통의부는남만지역군소무장독립군단들을통합할것을계획하고서로군정서 광정단등 8개단체의통합으로 1924년 11월 24일정의부 ( 正義府 ) 를결성했다. 1925년 3월 10일북만지역에서는대한독립군단이중심이되어길림성액목현에서부여족통일회의를개최하고북로군정서등각단체가통합에합의, 신민부 ( 新民府 ) 를설립했다. 이로써만주지역의독립군단및제단체들은자체의정비를통해통합단체인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로재편되었다. 참의부는압록강연안의집안현일대, 정의부는남만주의길림성과봉천성일대, 신민부는북만주일대의한인사회를관장하였다. 1925년 6월조선총독부와중국동삼성군벌사이에체결된이른바삼시협정 ( 三矢協定 ) 의체결로만주지역의한인사회가일본과중국군벌양쪽으로부터압박을당하는처지에놓이게되었다. 이러한현상을돌파하고적극적인항일투쟁을모색하기위한방편으로중국관내에서시작된민족유일당운동을 1927년 1월부터착수하였다. 1927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화전현과반석현에서참의부와신민부의대표가사정상참석하지못한가운데정의부를비롯한만주지역 18개단체대표들이모여민족유일당결성을위한회의를개최하였다. 그런데통합방법론을두고이견이통일되지않아회의는성과없이끝났다. 즉, 장차성립될유일당은기존의작은단체들을기초로상호연합하는방침으로조직해야한다는단체본위조직론과기존의군소단체를무시하고철저하게개인위주로결성해야한다는개인본위조직론으로분열되었다. 이에따라단체본위조직론을주장한대표들은전민족유일당협의회 ( 일명 협의회 ) 를, 개인본위조직론을주장한측은전민족유일당촉성회 ( 일명 촉성회 ) 를결성하고분립하였다. 1928년 9월길림에서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통합을위한통합회의를개최하였다. 그러나정의부측의단체중심조직론과참의부 신민부군정파의개인본위조 - 20 -

직론이대립한데다신민부내민정파와군정파의분열, 참의부대표의소환문제등으로동년 11월통합회의가결렬되어재만한인사회는촉성회파와협의파로양분되었다. 통합회의가결렬되자신민부군정파, 참의부주류, 정의부탈퇴파등촉성회파세력들은 1928년 12월혁신의회를조직하였다. 그런데혁신의회를통한민족유일당운동이성과를보지못하자신민부의군정파를대표한김좌진이재만조선무정부주의연맹의무정부주의이념을수용하여 1929년 7월 21일길림성영안현에서한족총연합회를결성하였다. 그런데 1930년 1월김좌진이공산주의자에게피살된후무정부주의자들과민족주의자들간에이념대립이격화되고여기에북만주지역의사회주의세력이확대되자한족총연합회의세력은크게약화되었다. 민족주의세력결집의필요성을절감한홍진 이청천 민무 조경한 황학수등은 1930 년 7월한족총연합회와비밀조직인생육사 ( 生育社 ) 등을모체로하여한국독립당을결성하고북만주일대를관할하였다. 그리고만주사변발발직후적극적인항일무장투쟁을전개하기위해당군사위원장이청천을총사령으로삼고 150여명의병력으로한국독립군을설립했다. 정의부주류와참의부일부, 신민부민정파등협의회파세력들은 1929년 3월통합회의를개최한후 4월 1일국민부결성을결의하였다. 국민부는자체로 3부통합회의를개최하여민족유일당의방편으로 1929년 9월 27일조선혁명당결성을결의하였다. 12월 20일요녕성신빈현에서기존의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개편해조선혁명당을창당하고, 군사조직으로과거정의부소속의부대를흡수해약 300명의병력으로조선혁명군을결성하였다. 조선혁명당은 이당치국 ( 以黨治國 ) 의원칙에따라국민부와조선혁명군을영도하며남만지역을관할하였다. 이에따라정당인조선혁명당과국민부 조선혁명군은불가분의일체관계에서서당 정 군의체제로정비하였다. 그리고남만주지역을중심으로일제주구기관과친일파처단, 의무금징수와군자금모집, 교민보호와독립군모병등의활동을수행하였다. Ⅴ. 1930 년대만주지역독립군의항일무장투쟁 1. 조선혁명군의항일무장투쟁 1930 년대만주지역의항일무장투쟁은 3 부통합운동을통해정비된조선혁명당 - 21 -

산하의조선혁명군, 한국독립당산하의한국독립군, 중국공산당만주성위원회산하의동북인민혁명군 ( 동북항일연군의전신 ) 을중심으로전개되었다. 이들독립군단체의무장투쟁은종래와달리만주사변이후항일의식이고조된중국측과한중연합군을편성해전개되었다. 남만지역을관할한국민부와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에는사회주의자들이일부참여하였다. 그런데그것이불씨가되어 1930년 8월독립운동과행정자치의방법론을둘러싼이념과노선투쟁으로전개되어사회주의세력이이탈하였다. 이에따라조선혁명군은 1930년 10월조선혁명당군사위원장현익철이총사령을겸임한가운데민족주의세력을중심으로정비되었다. 만주사변을거치면서조선혁명군은대일투쟁역량을강화하는데힘을기울였다. 1932년 1월조선혁명당과조선혁명군주요간부들이신빈현하북에서회의하는도중일본경찰과중국보안대의습격을받아대거체포당한사건 ( 신빈사건 ) 이일어났다. 이사건을계기로조직을재정비하여국민부와당중앙집행위원장에고이허, 군사령관에양세봉을각각선임하였다. 조선혁명군사령관에취임한양세봉은군의대오를정비하고 1932년 3월부터대도회 ( 大刀會 ) 세력이이끄는중국의용군과함께요녕농민자위단이라는한중연합의용군을결성하였다. 그런데요녕농민자위단이요녕민중자위군에합류하게되자조선혁명군은요녕민중자위군제11로군으로재편성되었다. 조선혁명군은이연합부대에참가할때 1932년 4월 29일한중연대를위한항일투쟁문제로협상을전개하여장차조선혁명군이국내로진격하여독립전쟁을수행할때중국군이원조한다는협정을체결하였다. 독립전쟁을목표로삼은조선혁명군에게한중연대의협정은큰성과였다. 조선혁명군의한중연합에의한항일투쟁은 1932년 4월과 5월신빈현영릉가를중심으로일본군과만주국군에대한공격에나서 80여명을살상하는하는것을비롯해 10월까지 200여차례나지속하였다. 조선혁명군은연합활동외에단독활동으로도전과를거두었는데 1932년 7월조선혁명군은통화현쾌대무자에서일 만군 30여명을살상하였다. 쾌대무자전투는 1935년 9월에도재개되어일본군 80여명을살상하였다. 그외조선혁명군은압록강이얼어붙은동절기를이용해국내진입작전을개시하였다. 1932년한해에만모두 16차례에걸쳐 101명의대원을국내에침투시켜군자금모집과일제기관의습격, 친일주구처단등을수행하였다. 이같은국내진입작전은 1933년과 34년에도계속되어큰전과를거두었다. 1932년말요녕민중자위군이일본관동군과만주국군의공격으로와해되자조선혁명군은중국의잔여의용군과연합작전을펼치는한편소부대위주의유격전을전개하였다. 1934년에들어일 만군의공격이강화되고동년 9월사령관양세봉이전사하 - 22 -

면서조선혁명군의활동이크게위축되었다. 국민부와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지도부는김활석을신임사령관에임명하여대오를정비하였다. 그리고지도기관으로서기능이크게약화된조선혁명당대신행정조직인국민부와군사조직인조선혁명군의기능을통합한조선혁명군정부를수립하고 1938년 9월 6일김활석과제7단장정광호가체포될때까지항일무장투쟁을전개하였다. 조선혁명당과조선혁명군은국민부와함께당 정 군의형식을갖추어 국민정부 임을자임하며 1930년대후반까지끈질기게투쟁한민족주의항일무장세력으로높이평가된다. 2. 한국독립군의항일무장투쟁 1930년 7월북만주에서결성한한국독립당의군사조직인한국독립군은만주사변이후당군사위원장이청천을총사령을중심으로중국의용군과연대한항일무장투쟁을준비하였다. 그리하여 300 500명의병력으로증강하고 1932년초길림자위군과함께항일무장투쟁을개시하였다. 한중연합에의한한국독립군의전과는전투때마다큰성과를올렸다. 1932년 9 월독립군은한중연합으로쌍성보전투에일본군을패주시키고 2,000여명에이르는만주국군의항복을받아내는대승을거두었다. 일본군의대반격으로길림자위군이와해될지경에이르자한국독립군은 1933년 1월잔존한중국의용군부대와연합하여한중연합토일군을편성하고그해 6월까지경박호전투, 사도하자전투, 동경성전투에서큰전과를거두었다. 그기세를몰아 6월 30일대전자령전투에서일본군수송부대 1,600여명을향해기습공격을감행해청산리대첩에버금가는대승을거두었다. 대격전을통해노획한군수물자는한국독립전쟁사상최대의전리품이었으나전투직후한 중간에내부갈등이폭발하였다. 전리품배분을둘러싼갈등을비롯해친일반공단체인민생단과내통하고있다는음해설등으로한국독립군과중국의용군은결국결별을고하고말았다. 때마침김구가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한인특별반을신설하고교관초빙을의뢰하자 1933년 10월한국독립당과한국독립군지도부는군관학교지원병사들과함께관내로이동함으로써만주지역에서한국독립군의항일무장투쟁은종식되었다. - 23 -

3. 사회주의세력의항일무장투쟁 만주지역에서활동하던한인사회주의자들은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의원칙에따라 1930년조선공산당만주총국을해체하고중국공산당에입당한후항일유격대인적위대를조직해항일무장투쟁을전개하였다. 최초의적위대는 1931년 10월남만주이통에서대장이홍광을비롯한 7명의한인대원들로조직되었다. 만주사변이후중국공산당만주성위원회가항일유격대를기초로 1933년 1월동북인민혁명군을결성하자다수의한인들이간부와병사로참여했다. 동북인민혁명군은 1936년 1월코민테른의반파쇼인민전선의방침에따라동북항일연군으로확대개편되었다. 동북항일연구는 3로 ( 路 ) 와 11군 ( 軍 ) 을두고각군에 3개의사 ( 師 ) 를편제하였다. 이중 2군의경우약 2,000여명의병력가운데한인들이절반을차지했다. 때문에한인들이가장많았던 1군과 2군은사실상한중연합에의한독립군으로볼수있었다. 특히데동북항일연군 1로군 2군제6사의한인들은 1936년 5월대중조직의건설방침에따라조국광복회를결성했다. 조국광복회는일본의통치를전복하고진정한독립적인민정부를실현할것을목표로장백현일대는물론국내의함경도와평안도까지지부조직을확대하여 1937년 1월국내조직인조선민족해방동맹을결성하였다. 그리고국내진공작전을실시하였다. 1937년 6월에감행된국내진공작전은동년 6월 6일자국내일간지가일제히호외를발행할만큼국내한인들에게큰반향을불러일으켰다. 이후동북항일연군는일본군과만주국군의대대적인탄압으로 1940년거의와해지경에이르렀다. 그렇게되자잔존병력은 1940년겨울부터연해주로이동해 1942 년 7월동북항일연군교도려로편제되었다. 교도려는소련군산하국제홍군제88특별여단이라불렀는데전체대원 600여명중한인병력은 150여명이었다. 일제의만주침략으로항일의식이더욱고조된만주지역의독립군은중국측의항일무장세력과연대하거나중국인이주도하는중국공산당조직에개별적으로참가하여항일무장투쟁을전개하였다. 특히조선혁명군세력은 1930년대중반부터이념을달리하는중국공산당만주조직과도연대하여공동항일전선을형성하였다. 항일무장투쟁의방식은대규모정규전방식보다대체로소규모전투방식인유격전을채택함으로써 1940년까지비교적오랫동안투쟁할수있었다. - 24 -

Ⅵ. 중국관내지역군사인재의양성 1.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설립 1919년 11월김원봉에의해길림에서결성된의열단은 1920년대초반의열투쟁의선봉에나섰으나 1925년을고비로의열투쟁일변도의노선을전환하면서중국혁명운동참가를통한군사역량강화를활동과제로삼았다. 1931년 9월만주사변과 1932년 1월상해사변을도발하며일본이중국침략을본격화하자, 김원봉은한 중공동전선형성의객관적조건이갖추어졌다는판단하에중국국민당삼민주의역행사 ( 三民主義力行社 ) 에한중합작의항일운동추진을제의하였다. 중국측이동의하고전폭적인지원을결정하자김원봉은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 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 ) 를남경교외에설립하였다. 이학교는 1932년 10월부터 1935년 9월말까지만 3년동안 3기의교육과정으로 120여명의한인청년을군사간부로육성하였다. 졸업생들은국내 만주 중국관내지역에파견 배치되어전진대 ( 戰進隊 ) 를조직하거나독립전쟁개전시유격전의수행과민중봉기를촉발하는임무를수행했다. 1930년대후반부터중국관내의졸업생들은민족혁명당과조선의용대 ( 朝鮮義勇隊 ) 조선의용군 한국광복군 ( 韓國光復軍 ) 등이결성될때중요한군사자원으로충당되어중견간부로서항일무장투쟁의선봉에나섰다. 2. 한인특별반의설립과김구의군사인재양성 일본의만주침략과상해침공으로중국인의항일의식이팽배해있던차에 1932 년 4 월 29 일홍구공원에서의윤봉길의거는중국국민당남경정부와중국인의마음을감 동시켰다. 그리하여한인애국단을결성한김구의위상은크게제고되었고한국독립운 동에대한중국인들의자세는적극적인관심과지원으로전환되었다. 남경정부는국 민혁명군을비롯해각종정보수집과첩보방면에서한인독립운동가들을활용성을 타진하였다. 22) 중국국민당남경정부는진과부를중심으로진립부 ( 陳立夫 ) 소쟁 ( 蕭錚 ) 공패성 ( 貢沛 誠 ) 등으로하여금김구에대한지원책을준비할것을지시하였다. 남경정부의호의 에따라김구는 1933 년 5 월김구는안공근 엄항섭 박찬익과함께남경의중앙육군군 관학교에서장개석과회담하였다. 23) 회담에서장개석은김구에대해임정의매월생 22) < 顧祝同證言 ; 朝鮮義勇隊의第 3 戰區工作 >,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 중국인사의증언, p. 37. 23) 蕭錚證言 : 중국국민당과김구, 같은책, p. 151. - 25 -

활보조비와활동비명목으로 5,000원의경상비지원, 특별용도의사업비에대한지원, 임정요인의안전문제와사무실마련등에대한지원을약속하였다. 24) 그리고김구는장개석에게군인양성에대한지원을요청했다. 25) 김구의요청에호응한장개석은중국중앙육군관학교내에한인특별반개설을허락하였다. 한인특별반이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낙양분교제2총대제4대대육군군관훈련반제17대 를말한다. 낙양분교는기존 16대까지편성되었는데 17대를새로편성해한인특별반으로삼은것이었다. 김구는이청천 김원봉과연합하여한인특별반을운영하였다. 한인특별반은 1934년 2월 92명이첫입교하였는데이로써김구는남경정부의재정지원과한인특별반의운영을통해항일투쟁의인적, 물적기반을갖추었다. 그러나한인특별반은김구가운영문제를둘러싸고이청천 박찬익등지도부와의견불일치와주도권다툼등으로자파핵심인물을철수시킴으로써 1기생배출을끝으로폐쇄되었다. 김구는낙양분교한인특별반졸업생들과중앙육군군관학교 10 11기한인졸업생을주축으로 1934년 12월하순남경에서한국특무대독립군을결성하였다. 한국특무대독립군은일본의침략세력을무력으로응징하기위한특무활동의군사조직이다. 또한김구는 1935년 2월부터남경에서한국특무대독립군과별도로학생훈련소를설치하였다. 설치목적은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입교할한인청년들을모집해사전예비교육을시키기위함이었다. 이같은김구의군사인재양성활동은항일무장투쟁의역량을확충하였고임시정부내김구의입지를강화해 1940년 9월한국광복군창설의원동력이되었다. 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한국광복군창설과군사활동 1. 한국광복군창설 중경에정착한임시정부는 3당통합으로결성된한국독립당을중심으로결속을강화하는한편독립전쟁에박차를가하기위해독자적인힘으로 1940년 9월 17일한국광복군을창설하였다. 임정은 1919년 12월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 대한민국육군임시군구제, 육군무관학교조례 등군대편성과독립전쟁을위한군사정책을수립하였으나이러한군사정책을본격적으로추진하기시작한것은중일전쟁발발직후였 24) 한상도, 한국독립운동과중국군관학교, p. 309. 25) 백범일지, pp. 355-356. - 26 -

다. 1937년 7월 15일만주에서독립군을조직하여대일항전을전개한바있던유동열 이청천 이복원 현익철 김학규 안공근등을중심으로남경에서군사위원회를발족시켰다. 군사위원회는전시체제에대처하는군사정책과활동계획을수립하기위함이었다. 임정의군사계획은중일전쟁의확대와중국군의총퇴각으로무산되고말았다. 임정은 1939년사천성기강에도착한이래, 군사활동에대한구체적인계획을마련하고실행에옮겼다. 동년 11월국무회의에서독립운동에대한총체적인계획으로 독립운동방략 을결정하였다. 이방략의핵심은군사양성과독립전쟁수행에있었다. 이러한계획에따라한국광복군창설이추진되었다. 광복군창설노력은첫째, 병력모집, 둘째, 재정확보, 셋째, 중국정부의교섭과지원확보로추진되었다. 임정은병력모집을위해조성환을책임자로한군사특파단을조직하여섬서성서안에파견하였다. 재정확보는미주의대한인국민회와동지회, 대한여자애국단등에한국광복군창설소식을알리고, 우리힘으로그기초를세워놓고외인 ( 外人 ) 의힘을빌리자 고하면서재정모금활동을전개했다. 중국내에서군대를편성하기위해서는중국당국의승인과양해가있어야했고, 또재정원조도필요하였다. 중국측과의교섭은한국광복군의편성이중국의항일전쟁에유익하다는취지로추진하고중국의원조를제의하였다. 이러한교섭과제의는중국측의공감을불러일으켰다. 1940년 5월광복군편성계획서인 한국광복군편련계획대강( 韓國光復軍編練計劃大綱 ) 을중국정부에제출하였다. 이것은광복군이중국군과함께연합작전을전개할것임을밝히고광복군편성의인준과재정원조를요청하였다. 그러나중국군사위원회는광복군이중국군과대등한관계일수는없으며, 군사위원회에예속되어명령을받아야한다는방침을통보하였다. 중국군사위원회의예속조치에강력히반발한임정은자력으로창설방침을세웠다. 미주동포들의적극적인성원과지원에힙입어그동안양성해온군사간부들과만주에서독립전쟁을수행했던독립군출신들을중심으로우선총사령부를구성하기로하였다. 이리하여한국독립군을조직해활동한이청천을총사령, 청산리대첩에서활약한이범석을참모장으로한총사령부가구성되었다. 총사령부의구성이완료되자 1940년 9월 15일김구는 한국광복군선언문 을발표하였고, 9월 17일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을거행함으로써역사적인한국광복군을창설하였다. 총사령부의조직은 1940년 10월 9일공포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조직조례 에의해체계화되었다. 조직은지휘통솔을관장하는총사령과그를보좌하는참모장을중심으로 10개처 ( 處 ) 와특무대 헌병대로편제하였다. 총사령부는임시정부주석 ( 主席 ) 의직할하에둔다고하여한국광복군의통수권이임정주석에게있음을명확히하였다. - 27 -

그리고 1919년 9월 20일공포한 대한민국임시관제 중대본영직제를폐지하고군사의최고통수권을가진 대한민국민국임시통수부관제 (1940.11.1) 를제정하였다. 26) 신설된통수부는임정국무위원회의주석이그직권을행사하도록해임정수반을중심으로한일관된군사지휘체계를확립하였다. 이것은한국광복군이대한민국임시정부의국군이라는점을명문화하였음을의미한다. 1941년 11월 28일제정한 한국광복군공약 은무장으로왜적의침탈세력을박멸하기위해주의와사상여하를막론하고한국남녀모두는군인이될의무와권리가있음을밝혀독립전쟁을위해한국인이라면누구나군인이되어야함을공포하였다. 27) 총사령부는성립직후서안으로이전하였다. 서안에는이미 1년전에군사특파단이파견되어군사기지가구축되고있었다. 서안에총사령부가설치되면서한국광복군은본격적인군사활동을시작하였다. 서안총사령부는단위부대편성에착수해제1 제2 제3지대를편성하였다. 1941년 1월 1일서안에서독자활동을하던한국청년전지공작대 ( 韓國靑年戰地工作隊 ) 가편입되면서이들을중심으로제5지대가편제되었다. 이로써한국광복군의조직은총사령부와 4개의지대를갖추게되었다. 한국광복군은창설직후중국측의부단한간섭으로한때자주성에큰흠집을남겼으나조선의용대를흡수하며각지대를확장발전시켰다. 1942년조선의용대의편입으로총사령부에부사령제가신설되었고조선의용대대장인김원봉이부사령에임명되었다. 그리고조선의용대를제1지대로편제하고, 기존의제1 제2 제5지대는통합하여새로제2지대로편성하였다. 김학규를지대장으로한제3지대는처음에는병력없이편제상으로만조직되었다. 그러다 1942년부터안휘성부양 ( 阜陽 ) 을중심으로한초모활동 ( 招募活動 ) 과일본군내한적사병 ( 韓籍士兵 ) 의탈출병을기반으로 1945년 6 월제3지대가정식발족되었다. 그외제3전구공작대, 제9전구공작대, 토교대 ( 土橋隊 ) 등의이름을가진조직이있었다. 1942년부터좌우세력이대한민국임시정부안으로결집되자임정은독립운동중추기관으로서의위상을회복하였다. 이에따라한국광복군은대한민국임시정부의국군이자장차독립될자주국가에서국군의모태로써그위상과위엄을갖추었다. 광복군의주요활동중하나는병력모집이었다. 병력모집은창군계획단계부터그방향이설정되었다. 만주지역의한인장정을비롯하여, 중국대륙과일본군점령지역에이주해있는한인청년들, 그리고일본군으로끌려나온한적사병등을대상으로모집하는것이었다. 그리고모집해온한인청년들을대상으로한국청년훈련반 ( 한청반 ) 과한국광복군훈련반 ( 한광반 ) 을설립해군사교육과훈련을실시하였다. 26) 한시준편, p. 308. 27) 같은책, p. 312. - 28 -

2. 연합군과의군사활동과군사계획 1943년태평양전쟁의전세가미국우위로돌아서고연합군이각지에서항일전을성공적으로수행하자임시정부는중국군뿐만아니라다른연합군과의제휴내지공동작전을통한군사계획을준비하였다. 1943년 10월광복군총사령부의이청천 김원봉 이복원등은새로운군사정책을작성하여제35차임시의정원회의에제출해통과시켰다. 주요내용은중 미 영 소등연합국에군수및경비등의차관을계획하고각종특수군사교육에관한문제를교섭한다는것이었다. 28) 1943년임정은연합군가운데영국군과본격적인공동항일작전을수행하기시작하였다. 1942년겨울부터인도주둔영국군총사령부의공작인원파견요청을수락한조선민족혁명당은최성오와주세민을인도에파견하고있었다. 파견성과에만족한영국군이지속적인파견을요청하자 1943년 5월조선민족혁명당은버마전구영국군총지휘부와군사협정을체결하였다. 그런데협정의체결은조선민족혁명당이주도하였지만조선의용대가 1942년 7월한국광복군제1지대로편입한상황이어서실행은한국광복군총사령부가담당하였다. 그리하여제1지대 2명과제2지대 7명등총 9명을선발해인면전구공작대 ( 印緬戰區工作隊 : 대장한지성 ) 를편성해 1943년 9월인도에파견하였다. 29) 이들은 1944년초부터영국군과일본군이대접전을벌였던임팔 (Imphal) 전투와 1945년에전개된버마총반격전에참여해일본군에상당한심리적충격을줌과동시에영국군의대일작전수행에많은도움을주었다. 30) 이처럼 1942년말부터중국외연합군과의공동작전의필요성을깨닫고실제공동작전을시행한임시정부군무부는 1944년 4월 1일자로 군무부공작계획대강 13개항을제정해새로운군사정책을추진하였다. 31) 주요내용은먼저그동안광복군의자주성을훼손한 한국광복군 9개준승행동준구 을취소하고중국당국과새로운군사협정을체결할것과, 연합군과공동작전을수행하기위한지속적인노력, 국내지하군건립에대한연구계획등을마련하였다. 그리고제8항에 육 해 공군건설에관한것을연구계획할것 임을명시하여지금까지논의해온공군건설문제를본격화하는것으로정했다. 32) 한국광복군은 군무부공작계획대강 을바탕으로실제적인군사작전계획으로 12 개항의 한국광복군건군급작전계획 을수립하였다. 주요방침은다음과같다. 28) 독립운동사 6, 독립군전투사 ( 하 ), p. 487. 29) 추헌수편, 자료한국독립운동 2, 222 223 쪽 ; 한국독립운동자료집 - 조소앙편,4, pp. 182-185. 30) 한시준편, 앞의책, p. 267. 3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6( 임시의정원 Ⅱ), p. 152. 32) < 군무부공작보고서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9 ( 군무부 ), pp. 76-77. - 29 -

1. 한국의완전독립을쟁취하고동아영구한평화를확보하기위하야국내외전체한국동포를동원하야광복군을확대하며속히동맹군과배합작전하야일본제국을격멸할것. 2. 본계획은중 미양방과각별협상하여동의를경한후축차실시함. 33) 국내외한국인동포를동원하여한국광복군을확대하고신속히연합국, 특히중 미와개별협상을갖고합동군사작전을수립해일제를격멸하겠다는것이다. 그동안한국광복군은설립이후중국군사위원회판공청이 1941년 11월 15일자로통보한 한국광복군9개준승행동준구 에의거중국군사위원회에예속되어자주성과자율성을누리지못하였다. 임정은이를바로잡기위해지속적으로중국당국을설득하였고, 그런노력의결실로마침내 1944년 8월 한국광복군9개준승행동준구 를취소시켰다. 이것은한국광복군이비로소군사자주권을회복하였음을의미하였다. 34) 군사자주권의확보는한국광복군이구상하고계획해온연합군즉, 미군과의합동군사작전을실행할수있는여건을제공해주었다. 이에따라 1944년말경한국광복군은자체의비행대조직구상에서한걸음더나아가미군과의합작을통해공군을건설하겠다는계획도수립하였다. 3. 한미연합의군사활동 미일전쟁발발이후미국의대한정책은임정승인문제에대해선여전히불가입장을고수하였지만군사작전면에서한인들을이용할수있다는변화를보였다. 1942년초미국무부는한인전투부대창설을검토하였으나중국전구미군사령관스틸웰 (Joseph Stilwell) 의반대로무산시킨바있었다. 1943년주미외교위원부위원장이승만은미국정부와군부를상대로무기대여와한인전투부대창설등을주장하며활발히외교활동을전개하였다. 그러자미국무부는전투요원이아닌첩보나방첩분야에서한인들을활용할수있다는검토단계로발전시켰다. 1944년 1월주중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미국전략첩보국 ) 본부가있는곤명의미국총영사랭던 (William R. Langdon) 은미 영 중 3국의후원아래 한국국민군 (Korean National Legion) 의창설을권고하는의견서를미국무부정치계획위원회에제출하였다. 35) 그는한인부대를결 33) < 한국광복군건군급작전계획 >(194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1, ( 한국광복군 Ⅱ), 2006, p. 86. 34) 한국광복군 9 개준승행동준구 는 1944 년 8 월에취소되었으나한국광복군이완전한군사자주권을회복한때는 1945 년 4 월 4 일중국측과맺은새로운군사협정인 원조한국광복군판법 에의거 1945 년 5 월 1 일부터시행되었다. 35) McCune to Berle(1944.7.31.),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5( 임정편 Ⅹ), p. 424. - 30 -

성해중국에서훈련시키고미 영 중 3국장교들의지휘를받아운영할것을제안하였다. 그러나미국무부는그의제안을고려하지않았다. 1944년중반태평양지역전황이미국에게급격하게호전되자국무부차관보벌 (Adof A. Berle) 은미국기동부대의작전을지원하는형식으로첩보와파괴활동면에서한인부대를이용할수있는방안여부를조사할것을극동국에지시하였다. 36) 이에미국무부극동국의친한인사맥큔 (G. McCune) 은 OSS가한인들을활용하여첩보및파괴활동이나군사작전을수행할수있다는방안을제시하였다. 37) 그의제안은결과적으로 1945년 5월부터중국에서 OSS가한국광복군과의합동군사훈련인 독수리작전 을수행하는토대가되었다. 임시정부는미국의대한정책변화에대응해 1944년 10월광복군제2지대장이범석을통해중국전구 OSS 비밀첩보과책임자에게한국광복군과의군사합작을제의하며 OSS와본격적으로접촉하였다. 38) 1944년중반부터한반도침투계획을구상해온 OSS 는한인들을대일작전에적극활용하겠다는계획을추진하고있어서 39) 광복군과의접촉을마다하지않았다. OSS는 1945년 2월 24일비밀정보국 (SI) 을통해 독수리작전 ( 안 ) 을만들었다. 40) 이런양측의필요가맞물리면서 1945년 4월부터수차례의회담을거친한국광복군과 OSS는광복군제2지대본부인두곡에한미합동지휘본부를설치하고 독수리작전 을수행하기위한상호공조체제를수립하였다. OSS의군사훈련은훈련책임자사전트 (Clyde B. Sargent) 가 5월 11일두곡에야전사령관으로부임한직후광복군제2지대 ( 지대장이범석 ) 에서시작되었다. 이어서 6월 30일부양에있던제3지대 ( 지대장김학규 ) 에서도한미합작의군사훈련이실시되었다. 이처럼 1944년부터 1945년해방이될때까지임시정부와광복군은미군과마침내 독수리작전 이라는특수군사훈련을공동으로추진하였다. 41) 1945년들어임시정부와한국광복군은한반도침투를위한특수작전인 독수리작전 36) Berle to Grew(1944.7.21), 미국무성한국관계문서 (1941 1944) Ⅳ, p. 322. 37) 한국독립운동사자료 25( 임정편 Ⅹ), p. 423. 38) 이범석의회고에따르면그는 OSS 의본부가있는곤명으로가서미군제 14 항공대장첸놀트 (Claire Lee Chennault; 중국명陳納德 ) 장군에게제 2 지대가대공 ( 對空 ) 활동과첩보활동을돕겠다고제의하였고이를계기로상호교섭이추진되었다고회고하였다.( 이범석, < 광복군 >, 신동아 1969 년 4 월호, p. 198.) 39) 이때 OSS 가중국전구에서수립한한반도침투계획은 독수리작전 (Eagle Project), 화북작전 (North China Project), 불사조작전 (Phoenix Project) 등이었고워싱턴본부에서는 ' 납코작전 (Napko Project)' 을수립하였다. 40) Eagle Project(1945.2.27), 국사편찬위원회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21( 임정편 Ⅵ), pp. 171-172, 335. 41) 한국광복군이미군과합동군사훈련을시도하려는이유에는중국일변도의외교관계에서벗어나미국등연합국과다양한외교관계를확립해연합군의일원으로교전국이되어전후발언권을강화할목적이담겨있었다. - 31 -

이상당한진척을보일때공군건설을위한노력도병행하였다. 임시정부는미국 OSS 와 독수리작전 을교섭하는과정에서 1945년 4월초경 7개항으로된 협정에관한몇가지제안사항 을 OSS측에제출하였다. 그가운데임시정부는 한국항공대 조직문제를언급한뒤 미군측은가능한한중국과미국에서한국전투부대와한국항공대를조직하거나증원하도록한국측을도울것 42) 을요청하였다. 여기서언급된 한국항공대 (Korean aviation units) 는이전부터계획해온임시정부의공군건설계획의일환이었다. 1945년 4월 11일임시정부주석고문이자미군통역으로활동한정환범은 OSS의버드 (Willis H. Bird) 대령에게김구주석 이청천총사령 조소앙외무부장등 3인이웨드마이어 (Albert Wedemeyer) 사령관을접견할수있도록주선해줄것을부탁하였다. 43) 4월 17일주석김구와외무부장조소앙은정환범을대동하고중경주재미군총사령부를방문하였다. 44) 그런데김구와조소앙은웨드마이어총사령관을직접만나지는못하고대신육군준장참모장서리그로스 (Mervin E. Gross) 를접견하였다. 그리고임시정부를대표하여한국의완전독립과아시아에서미국이익의보장, 대일전의최종승리등을위해미군의군사원조와관련한 10가지내용의제안서 미군당국에요청하는군사원조안건에대한개요 를제출하였다. 45) 임정의 10가지제안에대해미군당국은합리적이고실행가능한제안으로판단해가능한범위내에서원조할것임을약속하였다. 당시그로스참모장서리는김구의방문이전인 3월 29일미공군지상구조대가적점령지역을자유롭게왕래할수있도록한국인과만주인약 10명을모집해서안근처에서훈련시킨후야전에투입해줄것을장개석에게요청한바있어서 46) 임시정부의제안을타당하다고보았다. 김구와조소앙은 5월 1일또다시미군총사령부를방문해그로스를접견하였다. 47) 이자리에서두사람은앞으로한미간에군사상접촉을할경우더이상중국군사위원회를거칠필요없이직접한국광복군총사령부와교섭할수있다는내용을담은영문조회 1통을웨드마이어에게전달해줄것을요청하였다. 48) 42) Some Suggestive Points for the Agreement, 한국독립운동사자료 21( 임정편 Ⅵ), 172 쪽. 원문은아래와같다. 4. The American side, shall as far as possible assist the Korean side to organize and / or augment in China and America Korean armed combat forces and Korean aviation units. 43) Bird to William McAfee(1945.4.11), 백범김구전집 제 6 권 ( 대한민국임시정부 Ⅲ), p. 655. 44) < 대한민국임시정부대표단의방문 >(1945.4.17),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2( 한국광복군 Ⅲ), pp. 173 175. 45) 한국독립운동사자료 21( 임정편 Ⅵ), pp. 190-191. 46) < 한인및동북인의공군지상대모집에관한건 >(1945.4.12), 자료한국독립운동 3, p. 385. 47) < 중국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에보낸문건 >(1945.5.1) 자료한국독립운동 1, pp. 427 428. - 32 -

5월 1일은 한국광복군 9개준승행동준구 가취소된후새로운협정인 원조한국광복군판법 이체결, 발효되어한국광복군의지휘권이중국군사위원회에서임시정부로이관되는뜻깊은날이었다. 이런배경속에한미연합의군사작전인 독수리작전 이본격추진하였으나 8월 15일일본의항복으로준비해온임정의군사활동이역사속에묻히게되었다. 하지만독립전쟁을위한항일무장투쟁의역사는해방과동시에종결되지않았다. 해방이후대한민국국방을위한역사적인근원이항일무장투쟁의역사속에서계속흘러나오고있기때문이다. Ⅷ. 맺음말 대한민국은해방직후몇몇정치인들의주도에의해만들어진것이아니라수많은역경과질곡속에전개된한국독립운동과그러한독립운동을가능하게만든강인한독립정신의토대위해탄생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자체의유지도쉽지않은상황에서독립전쟁을선포하고군사정책을수립하며항일독립운동을전개했다. 독립운동의과정속에임정의역할과위상이흔들릴때도많았지만좌우의민족세력을아우르며독립운동의중추기관으로서입지를다졌다. 3 1운동전후만주지역에서결성된독립군단들은최일선에서일본군과직접맞서싸웠다. 독립전쟁을실질적으로실천했던이들독립군단들은열악한군비조건과이념대립의한계속에서 1930년대후반까지지속적이고끈질기게항전했다. 만주지역항일무장투쟁은성공과실패라는관점에서잣대를잴수없는우리민족의강인한독립정신의표상이었다. 대한민국의국군은해방후성립된것처럼보일수있으나대한민국임시정부를비롯해만주와중국관내에서전개된독립군의군사활동과이러한독립군을계승 발전시킨한국광복군에서그기원을찾아야한다. 국방과군사의근원을한국독립운동의역사에서찾는노력은대한민국의근본을설정하고미래발전의좌표를확인하는소중한작업이다. 48) < 한미관계와임정의최근동태 >(1945.5.5), 자료한국독립운동 1, p. 432. - 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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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전쟁, 그리고한미동맹 김열수 ( 성신여자대학교 ) - 목차 - Ⅰ. 서론 Ⅱ. 건국과창군 1. 해방과건국 2. 해방과창군 Ⅲ. 6.25전쟁과한국군 1. 6.25 전쟁의발발 2. 6.25 전쟁의경과 3. 또하나의전쟁 : 휴전회담 Ⅳ. 한미동맹과연합군 1. 한미동맹의체결 2. 한미동맹의변천 3. 한미동맹의제도화 Ⅴ. 결론 I. 서론 이글은 1945년해방이후현재까지창군과정과국군의성장과정을서술하는데그목적이있다. 60여년의역사가짧은지면에담기는관계로중요한국면만이서술될수밖에없다. 크게 3분야로나누어서술할것이다. 제2장에서는건국과창군과정을서술할것이다. 일제강점기동안에도선조들은주권을되찾기위한노력의일환으로임시정부를수립했으며광복군과독립군을조직하여일제에맞서싸웠다. 이들이귀국하여정부수립과창군의씨앗이되었다. 제3장에서는 6.25전쟁과한국군에대해서술할것이다. 6.25전쟁은김일성의의지와스탈린및모택동의지원으로발발했다. 한국군은북한군에비해절대열세의군사력을보유한채 6.25를맞았다. 유엔안보리결의로유엔군이창설되었지만낙동강까지밀렸다. 인천상륙작전으로전세는역전되었고중공군의참전으로전세는재역전 - 37 -

되었다. 결국 2년여의휴전회담을통해정전체제가탄생되었다. 제4장에서는한미동맹체결에의한한미연합군에대해서술할것이다. 안전보장없는정전협정체결은곧한반도의재적화를의미하는것이기에이승만대통령은정전협정의전제조건으로동맹조약체결을주장했다. 이대통령은반공포로까지석방하면서동맹조약체결의의지를보였기에미국은 헌법적절차에따라참전 하는형식으로한국과동맹조약을체결했다. 그이후미국은한국의부흥과한국의군사력건설에지대한공헌을했다. 한국의국력이신장하게되자서서히한국방위의한국화가이루어지게되었다. 지휘체계도변하게되었고방위비도분담하게되었다. 북한의위협이빈번해지고그강도가높아짐에따라다양한분야에서한미동맹의제도화가진전되었다. 한미안보협력체제의구축, 한미연합사령부의창설, 그리고연례적인한미연합및합동연습및훈련등이이런제도화의일부분이다. 한국군의원조인독립군과광복군은보잘것없는무장으로일제와맞서싸웠고, 창군기의국군은전투기와탱크한대없이북한군과맞서싸웠다. 이랬던국군이미군의지원과한국의국력신장으로인해이제재래식군사력만따지면세계 10위안에드는군사강국으로부상했다. 누르면튀어오르고때리면오히려맞서싸웠던광복군과독립군, 그리고탱크한대없이맨손으로북한군탱크와맞섰던창군기의국군이세계속의국군으로성장한것이다. 이제첨단군사력으로무장한국군은한미연합전력을통하여북한의위협을억제하고, 유사시통일대업을성취하는임무를부여받고있다. Ⅱ. 건국과창군 1. 해방과건국 1) 강대국의한반도미래논의 1943년 11월 22일, 이집트의카이로 (Cairo) 에서미국의루스벨트대통령, 중국의장제스총통, 그리고영국의처질수상이만나대일본전쟁수행협력과전후처리문제를논의하였다. 여기에서한반도문제도논의되었는데, 그내용은 현재한국민이노예상태에있음을유의하여앞으로적절한절차에따라한국에게자유와독립을주기로한 것이었다. 1943년 11월 28일, 이란의테헤란 (Teheran) 에서미국의루스벨트대통령, 영국의 - 38 -

처칠수상, 소련의스탈린서기장이회담을열었다. 테헤란회담에서는 3국의전쟁수행협력, 프랑스상륙작전, 이란의독립과주권ㆍ영토의보전, 소련의대일전 ( 對日戰 ) 참가등이결정되었다. 이회담에서루스벨트대통령은한국이완전독립이전에약 40년동안의견습기간이필요함을역설하였다 ( 김계동, 2000: 38). 1945년 2월 4일, 소련흑해연안의얄타 (Yalta) 에서미국 영국 소련의수뇌들이모여독일의패전과그관리에대하여의견을나누었다. 얄타회담에서루스벨트는소련에대해유화적인태도를보였다. 소련이독일과의전쟁에서가장많은희생을치렀고또향후일본과의전쟁에서소련의참전이필요했기때문이다. 이회의에서도한국의신탁통치문제가거론되었다. 루스벨트대통령이한국에대해 20~30년동안의신탁통치가필요함을역설하였다 ( 김계동, 2000: 42). 1945년 7월 26일, 독일의포츠담 (Potsdam) 에서미국의트루먼대통령과영국 중국등 3개국수뇌가만나유럽에서의전후처리문제와태평양전쟁후의대일 ( 對日 ) 처리방침을논의하였다. 소련공산당서기장스탈린도이회담에뒤늦게참가하여일본에게항복을요구하는선언문에서명하였다.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 (Moskva) 에서미국 영국 소련의외상회의가있었다. 이회의에서협의된한국관련내용은다음과같다. 첫째, 한국을완전한독립국으로발전시키기위해임시정부를수립한다. 둘째, 한국임시정부를수립하기위해미국과소련의양군사령부대표로서미-소공동위원회를 2주일이내에구성한다. 셋째, 한국의완전한독립을목표로미국, 소련, 영국, 중국 4개국에의한최고 5년간의신탁통치안을협의한다.( 김학준, 2003: 30-31) 해방전과직후에강대국들의논의를통해결정된것은한반도독립, 임시정부수립, 미소공동위원회구성, 5년간의신탁통치였다. 12월 27일신탁통치안이발표되자남북한의모든단체들이이를반대하는성명을발표했다. 그러나 1946년 1월 2일, 북조선공산당은신탁통치에찬성하는성명을발표했다. 남쪽의조선공산당도중앙위원회명의로신탁통치찬성 ( 찬탁 ) 을선언하였다. 결국미국과소련정부, 남북한의공산주의자들은찬탁대열에섰고남한의우익계열만신탁통치에반대 ( 반탁 ) 했다. 찬탁과반탁을중심으로남북한은물론남한내에서도좌익세력과우익세력간의대결구도가형성되었고이것이해방공간의정치구도를결정지었다. 2) 한반도문제의미 소화 강대국들의정상회담에서북위 38 도선을중심으로남북을분할점령한다는합의는 없었다. 포츠담정상회담때에도소련이대일전에참전하지않고있었기에이문제를 - 39 -

논의할필요도없었다. 그러나소련이대일선전포고를하고전쟁에참전하자미국정부는일본군에대한무장해제담당구역을 38도선으로결정하고이를영국, 중국, 소련에전달했다. 연합군최고사령관인맥아더원수는이를일본의공식항복일인 9월 2일일반명령제1호로공포하였다.( 김학준, 2003: 17-18). 소련은 8월 12일나진항을점령함으로써군사작전을개시하였다. 8월 24일에는약 20여만명의소련군제25군이치스타코프 (Ivan Chistiakov) 대장의지휘하에평양에입성하였다. 이에반해하지 (John Reed Hodge) 중장을사령관으로하는미제24 군단은 9월 8일에야인천에도착했다. 제6, 7, 40사단으로구성된미제24군단의총병력은 72,000명이었다. 이로써 38선을중심으로북에는소련군이남에는미군이진주하게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합의에따라 1946년 2월 6일서울에미소공동위원회가설치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임시정부수립을위한준비작업으로각각점령지역의정치구조를재편성하기시작했다. 소련점령군은 2월 9일, 조만식이통솔하던 5도행정국 대신김일성을위원장으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를중앙통치기구로조직하였다. 23명으로구성된이위원회는점차사법, 경찰, 행정을포함한북한최고의기관이되었다. 미국점령군은 2월 14일, 점령정책에대한자문을구하기위해이승만을의장으로하는대표민주위원회 (Representative Democratic Council) 를구성하였다. 25명의위원들은대부분우익인사들로충원되었다. 1946년 3월 20일, 한국임시정부설립을목적으로아놀드 (A.V.Arnold) 소장과슈티코프 (Terentii Shtykov) 중장을대표로하는제1차미소공동위원회가개최되었다. 1946년 4월 18일, 양대표는임시정부수립에참여할정당추천에합의했다. 그러나소련은반탁운동을주도하는우익단체의임시정부참여를거부했다. 결국아무런합의점도도출하지못한채 5월 8일무기휴회로들어갔다.( 김학준, 2003: 33) 제1차미소공동위원회결렬이후소련은김일성을중심으로한북한정치체제개혁에나섰다. 1947년 2월, 임시인민위원회총회에서 237명으로구성된입법기구인 인민회의 가설립되었고김일성을수장으로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 가구성되어최고집행기관의기능을수행했다. 이와달리남한에서의정치제제정립은혼란의연속이었다. 1946년 7월 22일, 하지중장은 좌우합작위원회 를설립한데이어 8월 24 일에는 90명으로구성되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을설치한다는법령을공포하였다. 90명중 45명은선거를통해선출하고 45명은임명하는것이었다. 10월선거를통해우익진영은 45석중 38석을확보하였다. 그러나하지는임명직 45명중 17명을중도우익인사로, 15명을지방대표중도인사로, 12명을좌익인사로임명하였다. 1946년 12 월 1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이개원되었고의장에김규식이선출되었다. 입법의원 - 40 -

에서제정한법령은미군정장관이동의해야효력을발생시킬수있었다. 1947년 2월행정부의최고책임자인민정장관에안재홍 ( 安在鴻 ) 이취임하였으며, 6월군정법령제 141호에의해 38선이남지역의입법 사법 행정각부문의모든행정기관을 남조선과도정부 라부르게되었다. 이로써 남조선과도정부 가서서히미군정을대체하기시작했다. 1947년 3월, 냉전을알리는독트린이발표되었다. 소련공산주의의팽창정책에대항하기위해트루먼 (H.S. Truman) 대통령의대소봉쇄정책, 즉트루먼독트린이발표된것이다. 그리스와터키가자국내공산주의자들에의해전복될위험에처하게되자미국에게지원을요청하였고미국은공산주의의팽창으로부터자유주의를지켜야한다는외교정책의기본원칙을밝혔다. 트루먼독트린은전세계적으로확대되었고탈냉전직전까지세계질서의핵심원칙이되었다. 이로써남북한은동서독과함께소련의팽창정책과미국의봉쇄정책이충돌하는냉전의최전선이되었다. 이런질서의태동속에서 1947년 5월 21일제2차미소공동위원회가개최되었다. 서울과평양을오가며몇차례회의도열렸다. 남한의정당 사회단체 425개와북한의정당 사회단체 36개와공동회의도개최했다. 그러나양국은신탁통치반대자들의임시정부참여여부를두고첨예한갈등을겪었고결국 7월초결렬되고말았다. 3) 한반도문제의유엔화 제2차미소공동위원회가진전을이룰가능성이없게되자미국은한국에대한신탁통치안을포기하고, 한국문제를국제연합 (UN) 으로이관시키기로했다. 1947년 9월 17일, 미국무장관마샬 (G. C. Marshall) 은 2년동안의미소공동위원회의노력이성과가없었음을평가하면서한국문제를국제연합총회에상정하였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1948년 3월 31일이전에한반도에서총선거를실시하되, 이를감시할유엔한국임시위원단 (UNTCOK: 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을설립하고, 새정부가수립되고나면 90일이내에점령군이동시에철수한다는미국의결의안을 43:0으로통과시켰다. 1948년 1월 12일, 8개국 1) 으로구성된 UNTCOK가서울에서활동을개시했다. 그러나북한은 UNTCOK을받아들이지않았다. 결국 1948년 2월개최된유엔임시총회는 UNTCOK가감시가능한지역에서만총선거를실시할것을결의하였다. 2) 5월 10 1) 최초호주,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우크라이나등 9 개국이었으나우크라이나가불참하였다. 2) 적지않은유엔회원국들이이것이한반도의분단을영구화시키는조치라고하면서반대표를던지거나 ( 호주, 캐나다 ) 기권하였다 ( 남미 3 개국, 스칸디나비아 3 개국 ). - 41 -

일, UNTCOK의감시하에남한에서총선이실시되어 200명의국회의원이선출되었다. 7월 17일제헌국회가헌법을제정하였고 7월 29일이승만이초대대통령으로선출되어 8월 15일대한민국정부가공식적으로출범하였다. 1948년 10월 UNTCOK은국제연합에최종보고서를냈고, 그해 12월 12일파리에서열린제3차국제연합총회는 UNTCOK의감시하에실시된선거에따라수립된대한민국정부는유일한합법정부임을선언하며, 점령국들은가능한한조속히한국으로부터점령군을철수시킬것을권고한다. 는결의안을채택하였다. 2. 해방과창군 1) 창군준비 해방이되자많은군사단체들이우후죽순으로난립하였다. 1945년 11월미군정청에등록된군사단체는 30여개에달했고 ( 육사, 1978: 60) 1946년 1월미군정청에의해해산될때까지이합집산을거듭했다. 광복군출신들은 광복군국내지대 편성을서둘렀고일본군및만주군출신장교들은 조선임시군사위원회 를조직하였으며, 일제에의해강제지원된학병출신들은 조선학병동맹 을결성하였고, 사병출신들은 조선국군준비대 를조직했으며, 일본해군출신들은손원일을중심으로 해사대 를결성하여 해사협회 로발전시켰다. 미군정은난립한군사단체들을해산시켜하나의통일된군사집단을만들필요가있었다. 이에따라미군정은 1945년 11월 13일, 군정법령제28호를발표하여국방사령부를설치하였고초대국방사령관에참페니 (Champeny) 대령을임명하였다. 참페니대령은맥아더사령관으로부터지시받은 25,000명규모의필리핀식경찰예비대 ( 경비대 ) 창설계획을추진하였다. 난립했던군사단체들도 1946년 1월 21일부로해산되었다. 대나무 (Bamboo) 계획으로알려진경비대창설계획은 1946년 1월 15일태릉에제 1연대창설을시작으로 1946년 4월 1일춘천에제8연대로창설함으로써일단창설식은완료되었다. 그러나찬탁과반탁의혼란과경비대가경찰의보조역할이라는한계때문에 1946년말까지충원된인원은 7,000명에불과하였다. 특히이때까지만해도광복군의주력은중국에머물러있었기때문에이들의참여는제한되었고오히려지방군사단체요원들이많이참여하였다 ( 한용원 1992: 398-401). 광복군은그주력이귀국한후인 1947년 11월, 15,000명규모의 육 해 공군출신동지회 를조직하였다. 1945년 11월 14일, 진해기지에서출범한해방병단 ( 海防兵團 ) 은 1946년 1월국방 - 42 -

사령부에편입된직후진해기지에총사령부 ( 사령관손원일참령 ) 를설치하였다. 1946년 6월 15일, 군정법령제86조에따라조선해안경비대로개칭되었다 ( 해군본부, 2008: 35). 1946년 4월 15일, 인천기지가창설되었고 1947년에는목포, 부산, 군산, 포항, 진해기지가창설되었다. 미군정의입장에서보면, 정부가수립되면경비대는향후국군으로발전되어야하는데이를위해서군의간부를길러내는것이중요한과업이아닐수없었다. 이에따라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가설립되었다. 미군정은일본군, 만주군, 광복군출신장교및준사관들을균형있게선발하고자했으나광복군출신들이지원을기피하고또늦게귀국함에따라일본군출신이대종을이루게되었다. 1946년 4월 30일, 군사영어학교가해체되는대신 5월 1일부로경비사관학교가창설되었다. 군사영어학교의교육기간도속성단기였지만경비사관학교의교육기간도 1.5~6개월정도였다. 경비사관학교졸업자는정부수립시까지 6개기총 1,511명이배출되었다 ( 한용원, 1984: 82). 해군도해방병학교와특교대를통하여해군장교를양성했다. 제2차미소공동위원회가결렬되자미군정은점령군의철수에대비하여경비대를 25,000명으로부터 50,000명으로증강시키는계획을입안하였다. 미합참이이를승인하자정부수립될때까지조선경비대는 5개여단 15개연대로성장하였다. 2) 국군의창설 1948 년 7 월 17 일대한민국헌법이공포되고동일날짜부로정부조직법도공포됨으 로써국방부가설치되었다. 8 월 15 일, 정부수립선포와더불어미군정이종식되자 군정시기군사의통할기관이었던통위부 ( 統衛部 ) 3) 의행정이국방부로이양되었다. 1948 년 9 월 1 일, 조선경비대와조선해안경비대는국군으로편입되었고 9 월 5 일부로 명칭도육군, 해군으로바뀌었다. 정부수립과동시에경비사관학교는육군사관학교로바뀌었고 6.25 전쟁이전까지 7 기부터 10 기까지 3,658 명의임관자를배출하였다. 이는경비사관학교시절배출된장 교의약 3 배에달하는숫자이다. 교육기간은짧게는 3 주였고긴것은 1 년이었다. 육군은지속적으로부대를새롭게창설하거나확장했다. 1949 년 6 월, 육군은총 8 개사단, 22 개연대를보유하게되었다. 1949 년 12 월부터군의전문성을향상시키기 3) 1946 년 3 월 29 일, < 군정법령 > 제 64 호로군정청의각국 ( 局 ) 을부 ( 部 ) 로개칭함으로써국방사령부가국방부로승격되었다. 그러나제 1 차미소공동위원회에서소련측은미군정당국이한국임시정부가수립되기도전에일방적으로국방부라는명칭을사용하는데대하여항의를제기하였다. 이에미군정은 6 월 15 일 < 군정법령 > 제 86 호를공포하여국방부를국내경비부로개칭하기로했다. 그러나한국측에서국내경비부대신통위부로개칭하기를원했고미군정은이를수용하였다. - 43 -

위해보병, 포병, 공병, 항공병, 통신병, 헌병등 8개병과를제정하였다. 또한 1950 년 1월까지총 13개의병과학교도설치하였다. 정부수립후해군이보유한함정은대부분소해정이었고변변한함포장비도없었다. 이에해군은 1949년 6월함정건조를위한기금거출위원회를결성하였다. 장병과부인회의적극적호응으로 1949년 10월, 구잠함 ( 驅潛艦 ) 1척을미국으로부터도입했는데이함정은 1950년 4월진해에입항하여백두산함으로명명되었다. 같은해 5월정부예산으로구잠함 3척이추가로구매되었다. 또한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병력 380명으로진해덕산에서창설되었다 ( 해군본부, 2008: 37). 공군은 1949년 10월 1일대통령령제254호로육군으로부터분리되어독립하였다. 분리당시 1,616명의병력과연락기 14대를보유한공군은 1949년 12월 19일수원, 군산, 광주, 대구, 제주등 5개소에기지부대를설치하였다. 공군은애국기헌납운동을벌여 1950년 5월캐나다로부터 T-6형항공기 10대를구입하였다. 1948년 5월항공부대창설시 7명에불과했던장교는 6.25전쟁발발시 242명으로늘어났다. 3) 빨치산토벌과숙군 ( 肅軍 ) 작업 미군정이이념적중립을표방하자, 남한내공산세력은활동에별로제한을받지 않았다. 심지어경비대원을모집하거나군의간부를양성하는기관에서조차모집기 준이엄격하지않았다. 이에따라남조선노동당 ( 남로당 ) 당원들과좌익성향사람들의 군부침투가용이했고이것이세력화되어군내반란으로연결되었다. 경비대내의좌익세력을추출하기위한노력은부대단위로소규모로이루어져왔 다. 그러나군내좌익세력에대한심각성은 1948 년도에발생한제주도 4.3 사건 4) 이 기폭제가되었다. 4.3 사건을계기로무장대원을토벌해야할제주도경비대원이탈영 하여무장대에가담하는사건도발생했다. 심지어 6 월 18 일, 제 9 연대연대장으로부 임했던박진경대령이부하대원에게암살당하는사건까지발생했다. 이에이승만정부는제주도무장대를토벌하기위해여수에주둔중인 14 연대를투 입하기로결정했다. 그러나 10 월 19 일, 14 연대소속의좌익계군인들이중심이되어 제주도출동을거부하고반란을일으켰다. 이들은곧여수 순천의경찰서와관공서등 을휩쓴뒤곧바로광양 곡성 구례 벌교 고흥등전라남도동부 5 개지방을장악하였 다. <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 > 에의한 ' 여수 순천반란사건 ' 이발생한것이다. 4) ' 제주 4 3 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 는제주 4 3 사건을 "1947 년 3 월 1 일경찰의발포사건을기점으로하여, 경찰 서북청년회의탄압에대한저항과남한의단독선거 단독정부반대를기치로 1948 년 4 월 3 일남로당제주도당무장대가무장봉기한이래 1954 년 9 월 21 일한라산금족지역이전면개방될때까지제주도에서발생한무장대와토벌대간의무력충돌과토벌대의진압과정에서수많은주민들이희생당한사건 이라고정의하였다.[ 네이버지식백과 ] 제주 4 3 사건. - 44 -

대구에주둔하던제6연대에서도반란사건이발생했다. 숙군을두려워한좌익혐의자들이 1948년 11월 3일과 12월 6일, 그리고 1949년 1월 30일등 3차례에걸쳐반란을일으켰다. 이사건을계기로대대적인숙청작업이진행되었다. 여순사건을계기로숙군이확대되자군내의좌익세력은탈영하거나반란을일으켜대항했던것이다. 숙군작업은 1949년 3월경일단락되었으며숙청된인원은 1,496명에달했다. 1948년 11월 20일, 이승만정부는 정부파괴를목적으로결사 단체를조직및가입하거나또는정부파괴의목적을가진사항을선전하는것을법으로금지 하는 국가보안법 을제정하였다. 이에합법적으로남한을공산화시키려했던남로당요원들의활동이제약을받게되었다. 공산당이불법화되자수많은당원들이체포되거나또는월북하게되었다. 정부수립이후에도숙군은지속되었다. 특히, 1949년 5월춘천에주둔하던제8연대 1대대장인표무원 ( 表武元 ) 소령과홍천에주둔하던제2대대장강태무 ( 姜太武 ) 소령이자신의휘하대대를이끌고월북하는사건이발생하자또다시강도높은숙군이단행되었다. 숙군작업을통해서 5,000명의군인들이숙청되었는데이로인해 6.25전쟁때국군의와해는방지될수있었다. Ⅲ. 6.25 전쟁과한국군 1. 6.25 전쟁의발발 1) 전쟁의원인 소련의팽창정책과미국트루먼독트린의충돌은세계적차원의냉전을가져왔다. 미국과소련은터키와그리스에서, 베를린에서, 한국의미소공동위원회에서, 그리고유엔에서사사건건충돌하였다. 그러나미소양국은정부수립이후철수한다는유엔총회의결의에의해소련군은 1948년 12월북한에서철수하였으며미군은여순반란사건의영향으로 6개월늦은 1949년 6월한국에서철수하였다. 김일성은집권과동시에남침계획에몰두했다. 그러나남침을위해선소련의전폭적인지원이절대적이었다. 1949년 3월, 김일성은대표단을이끌고소련을방문하여스탈린과면담하였다. 김일성은이자리에서남침에대한승인을요청했다. 그러나스탈린은북한군이남한군에대해확실한우위를확보하지못하고있고, 남한에아직미군이존재하며, 소련과미국사이에아직 38도선분할협정이유효하다는 3가지이 - 45 -

유를들어이를거부하였다 ( 박명림, 1996: 93-97). 그러나김일성은귀국후남침의욕을포기하지않고끊임없이주북한소련대사인슈티코프 (Terenti F. Stykov) 와접촉하면서소련을설득하기위한노력을지속했다. 이에스탈린도 1949년 11월, 슈티코프에게정치, 군사, 국제적관점에서남침을평가하여보고하도록했으나그결과는긍정적이지못했다.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무려한달가까이김일성은박헌영등과함께다시모스크바를방문하여스탈린을설득하였다. 그들이내세운논리는북한은기습공격으로 3일이내에전쟁을끝낼것이며, 남침시 20만명에달하는남한의공산당원들이봉기할것이고, 남한내의빨치산들이북한군을지원할것이며, 미군은참전할시간적여유를갖지못할것이라는 4가지였다 ( 박명림, 1996: 145-150). 결국스탈린은김일성의남침계획을승인하였다. 그가남침반대에서찬성으로돌아선이유는국제정세의중요한변화에서찾을수있다. 우선 1949년 8월, 소련도원자폭탄시험에성공했다. 이로써 1945년이후미국만이가지고있었던절대무기를소련도가지게됨으로써미국이섣불리전쟁에개입하지않을것이라고생각했다. 둘째, 1949년 10월모택동이이끄는중국의공산당이국민당과의내전에서승리했다. 이로인해미국의트루먼독트린에맞서왔던스탈린은공산주의의팽창에크게고무되었으며한반도에서도이것이가능할것으로생각했다. 셋째, 1949년 4월, 미국주도의 12 개국가가서유럽의방위를책임질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를창설하였다. 이로써소련은서방진영과의긴장감이더증폭되었다. 스탈린은이곳에서의긴장을완화시킬필요가있었다. 넷째, 미국은주한미군을철수시켰고또한남한을중요한전략지역으로보지않아남한의군사력건설에소극적이었다. 스탈린은북한에대한경제적 과학적지원을넘어군사력건설을지원해준다면남한에대해상대적으로우월한군사력을가진북한의승리가가능할것으로생각했다. 다섯째, 1950년 1월미국무장관에치슨 (Dean G. Acheson) 이공산화를저지하기위한태평양에서의미국방위선을알류산열도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연결하는선으로정한다고발표했다. 소위말하는애치슨라인이다.( 강성학, 2003: 206) 여기에는한국과대만, 그리고인도차이나반도가제외되어있다. 스탈린은에치슨선언으로인해미국이참전하지않을수도있다고생각했다. 마지막으로, 1950년 2월소련과모택동의중국은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 을체결하였다. 이조약은제국주의의침략을공동으로저지하고, 세계평화를보위하기위한정치군사연맹을결성하며, 양국의경제 문화관계의발전과확고한토대를위해상호지원한다는내용등이명시되어있다. 따라서스탈린은중소동맹조약을체결했기때문에김일성의남침시중국을전쟁에끌어들일수있을것으로생각했다. 이런 6가지내용이약 1-2년사이에변화된국제정세였다. 스탈린은남 - 46 -

침을위한유리한여건이조성되고있다고판단하고김일성의남침계획을승인했다. 남침계획은 3단계로구성되었다. 첫째, 38선으로병력집결. 둘째, 북한의평화통일제의. 셋째, 남한거부시공격개시등이었다. 이런남침계획이순조롭게이뤄지려면소련의지원뿐만아니라중국의지원도필요했다. 단독책임도벗어나고미군이참전할경우의대비도필요했다. 이런연유로스탈린은김일성에게모택동의동의를받도록지시했다. 1950년 5월 13일, 김일성은박헌영등과함께북경으로날아갔다. 스탈린의생각을전달했고결국모택동의동의를받아냈다. 이제남은것은공격개시일자뿐이었다. 1950년 6월 18일김일성은북한군각사단에게정찰명령제1호를하달했으며, 6월 22일소련군사고문단은전투명령제1호를하달하여 6월 23일까지남침을위한준비태세를갖추라고했다 ( 김영호, 2015: 83). 6월 25일북한은남침을개시했다. 6.25전쟁은김일성주도, 소련및중국의지원에의해일어난남침전쟁이었다. 김일성이스탈린을설득하고모택동의동의를받아남침을할수있었던반면, 이승만대통령은그렇지못했다. 오히려북진통일주장이언론에공개됨으로써미국의우려를낳았다. 1949년 10월 7일이승만은 United Press와의인터뷰에서평양을사흘만에점령할자신이있고한만국경선이 38선보다방어하기에수월할것이라고주장하였다. 10월 25일, 신성모국방장관은동경에서맥아더를만난후가진기자간담회에서남한군대는북진준비를완료하고있다고하면서한국정부가뜻대로할수있다면벌써북진을시작했을것이라고했다. 며칠내에평양을점령할수있다고도했다 ( 김계동, 2000: 200). 이승만의북진통일주장에대해미의회는원조액을대폭삭감했고에치슨국무장관은한국을미국의태평양방어선에서제외시키는에치슨라인을발표했다. 이것도모자라미국은 1950년 1월, 미군사고문단장의명의의성명을발표했다. 만약한국군이북진한다면미국은경제및군사원조를중단할것이라는내용이었다. 이승만의정치적지지도하락했다. 1950년 5월 30일치러진제2대국회의원선거에서이승만지지세력은 210석중 49석만을차지함으로써이승만은정치적위기를맞이했다. 북진통일하자는것은말에불과했다. 남한의군사력은북한을공격하기는커녕방어하기도벅찬형편없는군사력만을보유했을뿐이기때문이다. 더군다나한국방어를위해미국을설득하는데도실패했다. 2) 6.25 전쟁당시남북한군사력 전쟁직전남북한의군사력은양적 질적으로큰차이가있었다. 소련은 100 대의야 - 47 -

크 (Yak) 전투기, 70대의폭격기, 10대의정찰기등 180대의군용기와 150대의탱크를북한에게제공했다. 소련은 1945년이후시베리아에서만여명의북한젊은이들에게군사및기술훈련을시켰다. 중국은 1949년 7월부터 6.25전쟁직전까지중국내전에참여했던 5~7만명의조선인부대를북한으로보내주었다. 1949년에는한만국경선부근에배치되어있었던조선인사단중 166사단은북한의제6사단이되었고 164사단은북한의제5사단이되었다. 이들병력만하더라도 3~4만명이었다. 1950년 4월에는중국전역에서항일투쟁에참가했던조선족병사약 12,000명이북한으로귀환했다. 결국이들이전쟁발발당시북한군의약 1/3이상을차지했다. 항일전쟁의경험이있는장병들이북한군의주력이된것이다.( 전쟁기념사업회, 1992: 467-478) 6.25전쟁당시남북한의군사력은다음 < 표 1> 과같다. 전체병력은북한이 20만명인데비해한국은 10만명에불과했다. 북한은전차 242대를보유하고전투기 / 전폭기등 211대를보유한데비해한국은전차한대없었고군용기도연습기 / 연락기 22대가전부였다. 북한의군사력은공격에적절했던반면한국의군사력은방어하기에도부족했다. < 표 1> 6.25 전쟁당시남북한군사력 구분 국군 북한군 병력 ( 육 해 공 해병대포함 ) 103,827명 201,050명 탱크 (T-34) 0 242대 장갑차 27대 54대 주요무기 포 ( 곡사포, 박격포, 대전차포등 ) 1,191문 2,872문 함정 71척 110척 항공기 22대 211대 * 출처 :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5), 6.25 전쟁사 2, pp. 46-47. 2. 6.25 전쟁의경과 1) 집단안보의실현과유엔의역할 에치슨선언에서보듯이미국은한국의전략적가치를낮게평가했다. 미국방부도한국의전략적가치를크게보지않았기때문에한국전에의직접참여를꺼리고있었다. 결국미국은만약한반도에서전쟁이일어나면이를유엔안보리에서다루기로결정했다 ( 김계동, 2000: 219-220). 북한의기습남침이있자트루먼대통령은휴가에서복귀하여긴급국가안보회의 (NSC) 를개최하여한국에대한무기및장비지원, 조 - 48 -

사단파견, 제7함대의대만해협으로이동등참전을결정하는한편이문제를유엔안보리에상정했다. 미국의요청에의해긴급소집된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1950년 6월 25일, 적대행위의즉각중지와북한군의 38선이북으로의즉각철수 를결의 ( 결의안제82호 ) 하였다. 안보리는 6월 29일, 유엔회원국들은대한민국에게무력침공을격퇴하고이지역의국제평화와안전을회복하는데필요한원조를제공할것 을권고하는결의안제 83호를채택하였다. 7월 7일에는결의안제84호를통하여 회원국들이제공하는병력및기타지원을미국이주도하는통합사령관 ( 유엔군사령부 ) 하에두도록권고하고, 미국이통합사령관을임명할것과통합사령부에참전각국의국기와함께유엔기사용권한을부여 하였다. 7월 8일트루먼대통령은미극동군사령관맥아더원수를유엔군총사령관에임명했다. 맥아더원수는도쿄에서유엔군사령부를공식적으로창설하고극동군사령부참모진대부분을유엔군사령부참모로겸임발령했다. 이로써미국주도의유엔군이창설되어유엔회원국들이 6.25전에참전하게되었다. 미국을비롯한 16개국이전투부대를파병하였으며스웨덴등 5개국이야전병원부대등을파병하였고과테말라등 39개국이물자를지원하였다. 5) 이로써유엔창설이후처음으로유엔헌장제7장 42조에의한집단안보가한반도에서실현되었다. 유엔은안보리뿐만아니라총회도중요한역할을수행했다. 사실안보리결의안제 82호, 83호, 84호가통과될때안보리상임이사국인소련은불참했다. 그러나 7월 27 일소련이안보리에복귀하여 8월 1일부터윤번제안보리의장직을맡게되자안보리에서한국전과관련된후속조치를할수없었다. 사실안전보장이사회라는존재자체가유명무실해졌다. 결국미국은다른방법, 즉총회를이용하여 국제평화와안전을유지 하고자했다. 미국은총회가안보리의기능을대체할수있는총회결의안을제안했다. 1950년 11월 3일유엔총회는 52 대 5, 기권 2로 평화를위한단결 (Uniting for Peace) (GAR. 377(V)) 을결의하였다. 그핵심내용은안보리가 평화에대한위협, 평화의파괴또는침략행위 에대하여그기본적인책임을수행하지못하게되면총회는 24시간이내에긴급총회를소집하여국제평화와안전의유지또는회복을위해필요할경우무력사용을포함한집단안보를위해회원국들에게적절한권고를할수있다는것이다 ( 김열수, 2000: 116-117). 총회가유엔안보리를대체하여국제평화와안전유지에관한결의안을통과시키기시작했다. 10월 7일유엔총회는찬성 47, 반대 5, 기권 7로결의안제376(Ⅴ) 호를통 5) 이에대해서는양영조, 6.25 전쟁시유엔을통한각국의지원연구, 국방부, 6.25 전쟁지원국현황연구, 2012 를참고할것. - 49 -

과시켰다. 결의안내용은한국의통일, 독립된민주정부수립과한국내구호와재건의책임을수행하기위해 7개국으로구성된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 (UNCURK: UN Commission on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을설치한다는것이었다. 결국이결의안을근거로유엔군은 38선을넘어북진할수있게되었다. 12월 1일유엔총회는결의안제410(Ⅴ) 호를통해한국부흥계획을추진하기위해유엔한국재건단 (UNKRA: UN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을설치하였다. 1951 년 2월 1일유엔총회는결의안제498(Ⅴ) 호를통하여한국전에개입한중공군의유엔군에대한적대행위중지와한국에서의철수를촉구하였다. 1951년 5월 18일유엔총회는결의안제500(Ⅴ) 호를통하여북한과중국에대한전쟁물자의공급중지를회원국에게권고하였다. 1953년 8월 28일유엔총회는결의안제712(Ⅶ) 호를통하여한국과참전국의영웅적병사들에게경의와조의를표하는동시에유엔의요청에따라처음으로취한집단적조치가성공한데대해만족을표시하였다. 6.25전쟁이발생하자미국은유엔안보리결의를주도하여미국주도의유엔군을창설하여한국전에참전하였다. 또한미국은소련의방해로안보리의기능이제대로이행되지못하자총회결의로써안보리를대신할수있는방법도모색했다. 미국은총회결의를통해 38선을넘어북진할수있는근거를마련했고, 또중공군의철수를촉구하기도했다. 또한미국은총회결의를통해 UNCURK와 UNKRA를설치하여한국의부흥을조직적으로지원해주도록했다. 2) 6.25 전쟁과정 : 4 단계 1950년 6월 25일북한은전전선에걸쳐남침을개시하여불과 3일만에서울을함락했다. 6.25전쟁은낙동강방어선전투, 인천상륙작전, 서울수복, 청천강진격, 1.4 후퇴, 38선재회복, 그리고휴전으로요약되는데크게 4단계로구분될수있다. 제1 단계는 6월 25일북한의기습남침으로부터낙동강전선이형성되어연합군이사활을건방어전투를펼치던시기까지이다. 유엔군은북한군의남진을제대로저지하지못한채 8월 1일에는낙동강선까지후퇴하였다. 북한군이전쟁개시불과한달여만에파죽지세로낙동강선까지남진을계속했던것이다. 낙동강방어선이뚫리면부산은곧바로함락될수밖에없었고전쟁도종료될수밖에없었다. 국가운명이걸린절체절명의낙동강방어선전투에서유엔군은최대의위기를극복하고공세이전의기틀을마련하기위해동분서주했다. 제1단계는북한의남침및공세적남진기라고할수있다. 이를요약하면다음 < 그림 1> 과같다. - 50 -

< 그림 1> 북한의남침및공세적남진기 * 출처 : 국방부, < 한눈에보는 6.25 전쟁바로알기 >, 2015.6.2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7&oid=298&aid=0000161812 ( 검색일 : 2016.9.25.) 제2단계는 9월 15일유엔군이인천상륙작전을실시하여 38선을돌파한후압록강부근인박천-운산-온정리-희천을연하는선까지진격한기간이다. 유엔군사령관인맥아더는북한군의병참선을일거에차단하면서반격의계기를마련할수있는인천상륙작전을단행했다. 상륙작전의성공으로유엔군의사기는충천했고북한군의사기는떨어졌다. 유엔군은 9월 28일서울을수복한데이어 10월 1일 38선을돌파하여북진하기시작했다. 유엔군은 10월 19일평양을탈환하고청천강선으로진출하였다. 10월 24일청천강을확보한유엔군은한 만국경선을향해진격했다. 그러나이때는이미중공군이북한에진입한이후였다. 제2단계는유엔군의인천상륙작전및북진기라고할수있다. 이를요약하면다음 < 그림 2> 와같다. - 51 -

< 그림 2> 유엔군의인천상륙작전및북진기 * 출처 : 국방부, < 한눈에보는 6.25 전쟁바로알기 >, 2015.6.2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7&oid=298&aid=0000161812 ( 검색일 : 2016.9.25.) 제3단계는 1950년 10월 19일팽덕회지휘하의제13병단 26만여명의병력이압록강 3개지점을거쳐입북하여 3차례에걸친공세를통하여평택-삼척선까지진격한기간이다. 중공군의개입으로 6.25전쟁은조 중연합군대유엔군의전쟁으로전환되었다, 중공군의공세는크게 5단계로진행되었다. 제1차공세 (1950.10.25 ~ 11.7) 는 10 월 25일유엔군이박천-운산-온정리-희천을연하는선까지진출하였을때최초로개시되었다. 제2차공세 (1950.11.25.-12.24) 는맥아더유엔군사령관이중공군의참전을간파하지못한채한 만국경선으로크리스마스공세를명령했을때단행되었다. 제2 차공세로유엔군은많은피해를입어철수하기시작했다. 중조 ( 中朝 ) 연합군이 38선을돌파하는제3차공세 (1950.12.31 ~ 1951.1.8.) 를단행하자유엔군은 1951년 1월 4일서울을포기하고평택-삼척선까지철수하였다. 제3단계는중공군의개입및남진기라고할수있다. 이를요약하면다음 < 그림 3> 과같다. - 52 -

< 그림 3> 중공군의개입및남진기 * 출처 : 국방부, < 한눈에보는 6.25 전쟁바로알기 >, 2015.6.2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7&oid=298&aid=0000161812 ( 검색일 : 2016.9.25.) 제4단계는 1951년 1월 25일유엔군이일제히반격작전에나서 38도선일대를회복한기간이다. 유엔군이반격을단행하자중조연합군은제4차공세 (1951.1.27.-4.21) 를단행하였다. 그러나지평리, 원주일대에서많은손실을입었다. 유엔군은그여세를몰아 3월 15일서울을탈환하고 3월말에는 38선을회복하였다. 중조연합군은제5차공세 (1951.4.22.-6.10) 에최대규모의군사력을동원하였다. 그러나중조연합군의공세는유엔군에의해저지당했으며오히려유엔군이반격작전을계속하여 6월 15일문산-철원-김화-화천-간성을잇는지역을점령하였다. 유엔군이 38선을재수복하자소련은 1951년 6월 23일휴전협상을제의하였고, 미국이이제의를받아들여 7월 10 일휴전회담이시작되었다. 2년여의회담끝에 1953년 7월 27일휴전협정이체결되었다. 제4단계는유엔군의 38선재수복및고지쟁탈전기라고할수있다. 이를요약하면다음 < 그림 4> 와같다. - 53 -

< 그림 4> 38 선재수복및고지쟁탈전기 * 출처 : 국방부, < 한눈에보는 6.25 전쟁바로알기 >, 2015.6.2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7&oid=298&aid=0000161812 ( 검색일 : 2016.9.25.) 3. 또하나의전쟁 : 휴전회담 중공군이개입하자유엔총회는 12월 14일전쟁확대를방지하기위해결의안제 384(Ⅴ) 호를통과시켰다. 결의안에의해설치된 정전 3인단 (Three-man Group on Cease-Fire) 의임무는한국에서만족할만한정전의기초를결정하고이를총회에권고하는것이었다. 그러나정전 3인단은노력은 1950년 12월 31일, 중조연합군이제3차공세를취하게됨에따라정전요구에응하지않겠다는중공의의사만확인하고종료되었다. 1951년 6월 29일, 리지웨이연합군최고사령관이휴전회담을제의하자김일성과팽덕회가이에동의하였다.(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1: 96) 1951년 7월 10일국제연합군대표와북한및중공대표가개성에서첫회담을가졌고 10월에는판문점으로 - 54 -

회담장소를옮겼다. 무슨회담이든가장먼저정해야하는것이바로회담의의제이다. 팽팽한줄다리기가이어진후양측은 7월 26일의제및의사일정채택, 군사분계선설정, 휴전감시방법및기구구성, 전쟁포로처리, 관련각국정부에대한건의등 5가지로결정했다. 최초의합의는휴전선에관한것이었다. 1951년 7월 27일부터 11 월 27일까지진행된회담에서양측은당시의전선을경계로휴전선을설정한다는데합의하였고휴전선으로부터각각 2Km의비무장지대를둔다는데합의하였다. 11월 27일부터 1952년 5월 2일까지는휴전감시문제에대해논의하였으며중립국감독국으로체코, 폴란드, 스위스, 스웨덴을선정하였다. 가장어려운회담은 1951년 12월 11일부터 1953년 6월 8일까지진행된포로교환문제였다. 1949년의제네바협정은 전쟁포로는적대행위가끝난후지체없이석방되고송환되어야한다 고명시되어있다. 따라서양측포로를그냥교환하면될것같은데여기에복잡한문제가있었다. 북한이남한을점령했을당시남한의주민들과포로군인들을강제징집하여인민군에편입시켰고, 중공군도과거내전에서포로로잡은국민당장제스군대의군인들을중공군측에강제편입시켰다. 따라서이들은북한이나중공으로의귀환을거부했다. 소위말하는 반공포로 에대한협의가난항을겪게된것이다. 유엔측은자유송환원칙을주장한반면공산측은자동송환원칙을주장함으로써합의에상당한진통이뒤따랐다. 1951년 6월당시북한군포로숫자는 150,420명이었고중공군포로숫자는 21,074명으로써공산군측포로는총 17만명에달했다. 이에반해북한이억류하고있는한국군포로는 7,142명, 미군 3,198명, 영국군 919명, 터키군 234명, 기타 66명등총 11,599명정도였다. 1951년 1월 21일유엔군측은자발적포로교환원칙을제시했다. 회담이공전을거듭하는가운데거제도포로수용소에는두차례에걸쳐친공포로들에의해폭동이발생하기도했다. 1952년 4월유엔군측은포로들에대한개별심사를실시하여 17만명의군인및민간인포로중에서 7만명정도만자발적송환의사를표시했다는것을공산측에알렸다. 이에공산측은격렬히반발했다. 유엔군측은이런반발을무시하고 1952년 7월중순까지약 10,000명의민간인포로를먼저석방하였다. 송환희망및반대인원에대한포로재심사도이루어졌다. 169,938명을재심사한결과송환희망인원은총 83,701명이었으며송환반대인원은총 86,867명이었다. 6) 그러나공산측은 110,000명의송환을요구하였다. 결국 7월 26 일유엔군측은협상장을떠나면서회담을무기연기시켰고북한지역에대한최대규 6) 송환희망인원은북한출신포로 62,169 명, 중국출신포로 6,388 명, 남한출신포로 4,560 명, 남한출신민간인 9,954 명등총 83,071 명이었다. 송환반대인원은북한출신포로 34,373 명, 중국출신포로 14,412 명, 남한출신포로 11,744 명, 남한출신민간인 26,338 명등총 86,867 명이었다. 출처김계동 509 쪽. - 55 -

모의폭격을단행함으로써공산측을압박했다. 그러나큰진전은없었다. 1953넌 3월 5일스탈린이사망하면서휴전협상에돌파구가마련되었다. 부상포로교환을위한협상이성공적으로진행됨에따라 1953년 4월 20일부터실제교환이이루어졌다. 공산측은총 600명의포로를송환하였고유엔군측은총 5,800명의포로를송환하였다 ( 김계동, 530). 이로인해휴전의가능성이커지자이승만정부는이에강하게저항하였다. 그럼에도양측은 6월 8일포로의자발적송환에입각한 중립국송환위원단관련협정 을체결하였다. 이소식이전해지자 10만명가까운한국인들이거리에서북진시위를벌였다. 이승만대통령이 6월 18일 35,000명의반공포로중 27,000명을예고없이석방하자당황한미국은로버트슨 (Walter Robertson) 차관보를한국에특사로급파하였다. 이승만과로버트슨이합의한내용은휴전성립후양국은상호방위조약체결, 경제원조, 정치회담에서성과없을경우한미양국은이회담에서철수, 정치회담개최이전에고위급한미회담개최, 한국군 20개사단으로증강및해공군력증강지원등이었다. 물론이에대해한국은전쟁수행및종결의책임을지고있는유엔사에대한권위인정, 휴전협정준수, 한국군의유엔사령부잔류등에합의했다 ( 김계동, 562, 557). 7월 27일휴전협정이체결되었다. 16만 9천명의포로중 8만 2천명정도를송환하였고 8만 7천명은송환하지않았다. 송환하지않은포로는비전투민간인 37,000 명, 반공포로로석방된 27,000명, 휴전이후미송환된 23,000명등이었다. 유엔군포로 13,000명은거의대부분송환되었다. Ⅳ. 한미동맹과연합군 1. 한미동맹의체결 미국은조기에정전협정을체결하기를원했지만이승만대통령은정전협정체결에격렬하게반대했다. 한국안보에대한아무런보장없이정전협정이체결된다면제2 의 6.25가일어난다는것은불을보듯뻔하기때문이었다. 이승만대통령은미국이정전협정을체결할경우한국은미국의지휘권에서벗어나단독으로북진하겠다는신호를계속보냈다. 이승만대통령이반공포로를석방한이유도정전협정체결전에미국으로부터방위조약체결에대한확실한보장을받기위한조치였다. 결국미국은 1949년 4월에미국, 캐나다와유럽 10개국등 12개국으로구성된 ' 집단방위기구 인 - 56 -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1951년필리핀과체결한미 필상호방위조약, 1951년일본과체결한미 일상호방위조약, 그리고같은해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미국등 3 나라가체결한태평양안전보장조약 (ANZUS) 과같은종류의상호방위조약을한국과체결하지않으면안된다는것을절감하였다. 로버트슨차관보가한미상호방위조약이비준될것이라는미대통령과미국무장관의보증을약속하자이대통령은정전협정을받아들였다. 정전협정서명후인 1953년 9월, 미국의덜레스 (John F. Dulles) 국무장관이방한하여변영태외무장관과한미상호방위조약을가조인하였고그해 10월 1일워싱턴에서서명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4년 1월 5일한국국회에서비준되었고 1월 26일미상원에서도 81:6으로비준되었다. 그러나정식발효는 11월 18일이었다. 이렇게늦어진이유는한국군에대한작전통제권과한국군의규모등에이견때문이었다. 결국유엔군사령부가한국군의단독북진을막을수있는작전통제권을갖는데합의함으로써한미상호방위조약이발효되었다 ( 서주석, 2008:197-198; 홍용표, 2012: 74-74). 1954년 11월 17일에는한미상호방위조약의구체적실행방안인한미합의의사록 7) 이체결되었다. 합의의사록에서한국군에대한유엔군사령부의작전통제가다시한번확인되었고한국군 72만명에이르는군대육성및지원도확인되었다. 1960년대까지미국은매년 3억달러에달하는군사원조를했는데이는당시한국국방비의 87% 에해당하는규모였다. 1957년 7월 1일, 일본에있던유엔군사령부가서울로이전함으로써유엔사의한국화, 즉서울시대가열리게되었다. 이대통령은정전협정이후한국안보의담보를위해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을주장했으나미국의아이젠하워대통령은제2의 6.25전쟁가능성때문에이를주저했다. 결국상호방위조약이 NATO 조약과다르게체결되었다. NATO 조약제5조에는하나의회원국이공격을받을경우모든회원국이공격을받은것으로간주하여함께대응한다 (all for one, one for all) 는자동개입조항이명시되어있다. 그러나한미상호방위조약에는유사시자동개입조항이없다. 조약제3조에는 공통의위험에대처하기위한각자의헌법상의절차에따라행동한다 고명시되어있을뿐이다. 미국이 헌법상의절차 를이유로개입하지않을가능성을열어둔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61년 7월, 자동개입을명문화한북한과중국간에체결된북중상호원조조약과도차이가있다 ( 조성렬, 2004: 21-45). 이런허점에도불구하고한미상호방위조약이지난 60여년이상북한의남침을억제하는데핵심적인역할을했다는점을아무도부인하지못할것이다. 7) 정식명칭은 한국에대한군사및경제원조에관한대한민국과미합중국간의합의의사록 (Agreed Minutes relating to Continued Cooperation in Economic and Military Matters) 이다. - 57 -

2. 한미동맹의변천 1) 주한미군의규모변화 전쟁이끝나자한때 32만명에달했던미군이철수하기시작했다. 1954년 1월부터 1955년 5월까지제9, 10군단사령부, 제40, 45, 3, 25보병사단들이차례로철수했다. 또한제1해병사단도철수했고제5공군사령부도일본으로철수했다. 이로써한국에는제2,7사단, 제7공군사령부만남게되었다. 1969년취임한닉슨 (Richard Nixon) 대통령은베트남전을종결하고자했다. 국제적분쟁에대한개입을회피하고군사적부담을경감시키기위해선새로운독트린이필요했다. 이런목적으로탄생된것이 1969년 7월, 괌에서발표된 괌독트린 이다. 닉슨독트린의핵심은아시아방위책임을일차적으로아시아국가들스스로가지고, 미국은핵우산만을제공함으로써대소봉쇄전략을추구한다는것이었다. 닉슨독트린이발표됨으로써미국은아시아에서총 42,000명의병력을철수하기로결정하고한국으로부터도미7사단 20,000명규모를철수 (1970년후반-1971년 3월 ) 하였다. 한국으로서는 1968년의 1.21사태와울진 삼척에서의무장공비침투사건등을경험한직후여서안보불안감은최고조에달해있었다. 박정희대통령은 6만명규모의주한미군은북한의남침을억제할수있는적정규모이며 5만여명의한국군이베트남전에참가하고있음을상기시키면서국회결의와내각총사퇴불사론까지내밀었지만미군의철군은강행되었다. 미제7사단이철수하자전방철책선임무를담당하던미제2사단도동두천 의정부방향으로이동함으로써한국군이전전선에걸쳐철책선경계임무를담당하게되었다. 주한미군철수를선거공약으로내세운카터 (Jimmy Carter) 가대통령에당선되자철수계획이발표되었다. 향후4-5년이내에 3단계에걸쳐주한미지상군을전부철수한다는계획이었다. 1단계 (1978-1979) 에서는미제2사단의 1개여단과지원병력등 6,000명을철수하고, 2단계에서는보급 지원병력등 9,000명을철수하며, 3단계 (1981-1982) 에서는남은 2개여단과사단본부를철수시키되공군과정보및통신부대는주둔시킨다는것이었다 ( 오관치외, 1990: 59). 한국인들은월남에서의미군철수가월남공산화를가져왔기때문에한국에서도공산화도미노현상이발생할수있다는차원에서범국민적인위기의식을느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철군은강행되는듯했다. 그러나싱글러브 (John K. Singlaub) 주한미 8군참모장이철군정책을반대하고군부및의회마저반대하자카터대통령은주한미군동결조치를발표 (1979.7.20) 함으로써철군은 1개여단규모 3,400명선에서그쳤다. - 58 -

탈냉전으로인해또한번의철군이단행되었다. 1990년 4월미국방부가의회에제출한 동아시아전략구상 (EASE-Ⅰ) 에는향후 10년간 3단계에걸쳐병력을감축할것을제시하고있다. 제1단계 ( 향후 1-3년 ) 는아시아전체주둔병력중에서 14,000-15,000명을감축하되한국에서는지상군 5,000명과공군 2,000명을감축하며, 제2단계 ( 향후 3-5년 ) 는미2사단을재편성하고평시작통권을한국에이양하며, 제 3단계 ( 향후 5-10년 ) 에서는한국방위에있어서한국군이주도적역할을수행하고미군은지원적역할과함께동북아전체에대한균형자역할을수행하며이를위해미군은최소규모로유지한다는것이다 (DoD, 1990: 12-25). 그러나 1993년북핵문제가불거지자철군은 7,000명선에그치게됨으로써 2004년까지 37,000명수준의주한미군이유지되었다. 9.11테러와미국의아프가니스탄전및이라크전으로인해주한미군이다시한번감축되었다. 미국은 12,500명의감축을희망했으나한국은감축규모축소를요구했다. 결국한미협의를통해감축규모는 9000명수준으로결정된대신한국은주한미군의전략적유연성을보장해주었다. 전략적유연성 이란냉전종식후새로운형태의위협에효과적으로대응하기위해세계주준미군을경량화 기동화하여다양한위협에신속대응하도록운용한다는해외주둔미군재배치계획 (GPR) 의일환으로추진되었다 ( 최종철, 2009: 290-300). 이에따라주한미군도더이상북한의남침에대비하는붙박이군이아니라, 분쟁지역에신속하게투입되는신속전개군으로바꾸겠다는것이다. 결국 2006년 1월, 한국은주한미군의전략적유연성을존중하되미국은한국민의의지와관계없이한국이동북아지역분쟁에개입되는일은없을것이라는한국의입장을존중 하는방식으로한미양국은전략적유연성에합의하였다. 현재주한미군은 28,500명규모이다 ( 김열수, 2015: 231-235). 2) 지휘체계의변화 유엔안보리결의안제84호에의해유엔군사령부가창설되자유엔군에대한지휘의단일화가필요했다. 이에이승만대통령도 1950년 7월 14일, 현적대상태가계속되는동안한국육해공군전체에대한지휘권 (command authority) 을맥아더사령관에게위임하는공한 ( 公翰 ) 을보냈다. 이때만해도지휘권, 작전지휘권, 작전통제권등에대한개념이충분히발전하지못했기에이런용어들이큰의미없이교차적으로사용되었다. 8) 8) 지휘권 (command authority) 이란국가주권기능의일부로서자국의군대에대해서행사하는인사, 작전, 군수, 정보등모든분야를총망라한군에대한통수권을의미한다. 작전지휘 (operational - 59 -

작전통제권이란용어가문서상에등장한것은 1954년 11월체결된한미합의의사록이었다. 제2조에 유엔군사령부가대한민국의방위를위한책임을부담하는동안대한민국국군을유엔군사령부의작전통제하에둔다. 라고규정되어있다. 이후한국군에대한유엔군사령부의작전통제권은 1978년한미연합사령부가창설되기전까지계속되었다. 한미연합사가창설됨으로써한국군에대한작전통제권은유엔군사령부로부터연합군사령부로이양되었다. 9) 과거유엔군사령관이일방적으로행사하던작전통제권을한미가연합으로행사하는체제로바뀐것이다. 연합사령부는한미양국의국가통수및군사지휘기구 (National Command and Military Authority: NCMA) 와실무적인최고군령기관인한미군사위원회 (MC) 의통제를받도록되어있다. 한미군사위원회가전략지시와전략지침을발전시켜연합사사령관에게하달하면연합사령관은이에따라한미양국의작전부대를작전통제하는것이다. 1978년 7월한미는군사위원회회의 (MCM) 을통해전략지시제1호를하달함으로써연합군사령부가창설되었다 ( 백종천 김태현 이대우, 1998: 48). 한국군에대한작전통제권이다시한번변하게된것은 1994년이었다. 1994년제 26차연례안보협의회의 (SCM) 와제16차한미군사위원회회의 (MCM) 는평시작전통제권을한국군에이양하는전략지시 2호를연합사령관에게하달하였다. 비록한국합참의장이연합사령관에게위임한연합권한위임사항 (CODA) 이있긴하지만한국합참의장은 1994년 12월 1일부로연합사령관이행사하던한국군에대한평시작통권을행사하게되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이후한국군에대한작전통제를정리해보면다음과같다. 유엔군사령관에의한작전지휘 (1950~1953) 유엔군사령관에의한작전통제 (1954~1977) MC를통한한미연합사령관에의한작전통제 (1978~1993) 합참의장은평시한국군작전통제, 한미연합사령관은전시한국군작전통제 (1994~ ) 로변화되었다 ( 김열수, 2015: 236-240). 이는한국군에대한연합사의작전통제역할이점점 command) 란행정지휘에대한상대적인개념으로써작전에대한전반적인지휘를하나행정및군수에대한책임과권한은없다. 작전통제 (operational control) 란작전계획이나작전명령상에명시된특정임무나과업을수행하기위해지정된부대에임무또는과업부여, 부대의전개및재할당등의권한을말하며여기에는행정및군수, 군기, 내부편성및부대훈련등에관한책임및권한은포함되지않는다. 이에대해서는합동참모본부, 연합합동군사용어사전, 합동참고교범 10-2( 서울 : 합동참모본부, 1998), p. 337을참고할것. 9) 연합사령부는평시에연합권한위임사항 (CODA) 인 (1) 전쟁억제, 방어및정전협정준수를위한한미연합위기관리, (2) 전시작전계획수립, (3) 연합합동교리발전, (4) 한미연합 3군합동훈련및연습의계획과실시, (5) 조기경보를위한한미연합정보관리, (6) C4I 및상호운용성등 6개분야의임무를수행하며, 전시에는한국군과미군등 6 25참전 16개국군대를작전통제하여전시임무를수행하도록되어있다. 한편, 유엔군사령부는미합참으로부터직접통제와지침을받아한반도정전협정의유지및이행과관련된임무만을수행하도록되어있다. 허남성, 평시작전통제권환수경과와향후의대책, 외교, 제33호 (1995년 3월 ), pp. 90-91을참고할것. - 60 -

축소되고한국군의국군에대한작전통제역할이점점확대되고있음을보여주고있다. 2006년 9월, 한미정상은한국군에대한전시작전통제권을 2012년 4월 17일부로국군에게전환하기로합의하였다. 그러나전작권전환합의이후북한의 1, 2차핵실험, 미사일발사, 천안함피격등북한의위협이고조되자한 미정상은 2010년 6월회담을통하여전작권을 2015. 12. 1부로연기하여전환하는데합의하였다. 김정일사망이후에도북한이장거리미사일을발사하고제3차핵실험까지단행하자한미정상은 2014년 4월, 전작권전환재연기에합의하였다. 2014년10월에개최된제46차 SCM을통해양국국방부장관은시한에기초한것이아니라조건에기초한전작권전환에합의하였다. 즉, 연합방위를주도할수있는한국군의연합기획능력, 북한의대량살상무기 (WMD) 에대응할수있는한국군의능력, 그리고한반도를포함한주변안보환경의변화를평가하여그결과에따라전작권을전환한다는것이다. 그러나전작권전환재연기가결국무기한연기라는비판이일었다. 이에국방부는 전작권전환의기준목표시점을킬체인 (Kill Chain) 과한국형미사일방어 (KAMD) 체계사업이끝나는 2023년쯤 으로제시했다. 10) 3) 방위비분담 6.25전쟁후미국은적극적으로한국의군사력증강을지원하였다. 1988년까지미국이한국에제공한무상군원은군원계획 (MAP) 54억 7,000만달러, 국제군사교육훈련 (IMET) 1억 7,000만달러였으며, 유상군원은대외군사판매 (FMS) 50억 5,000만달러, 상용판매 14억 3,000만달러, FMS차관 23억 5,000만달러등이었다 ( 국방부, 2002: 40). 그러나 1980년대미국이재정적자및무역적자가동시에진행되는쌍둥이적자에직면하게되자해외주둔미군의인건비외의주둔비용의일부를분담해줄것을피주둔국에요청하게되었다. 미국은 1987년일본과 < 방위비분담특별협정 > 을체결했고한국은 1991년미국과 < 방위비분담특별협정 > 을체결했다. 이협정은사실후술할주둔국지위협정 (SOFA) 에그근거가있다. SOFA 제2조에는한국은토지와시설등부동산을제공하도록되어있고제5조에는유지경비는미국이부담하도록되어있다. 그러나그동안한국은주둔기지만제공해왔을뿐시설의대부분은미군이자체적으로건설하는등대부분의주둔비용을미국이부담했다. 1991년이후현재까지총 9차례에걸쳐방위비분담을위한협정을체결했다. 한 10) 2014 년 10 월, 워싱턴 DC 에서열린제 46 차한미안보협의회 (SCM) 에서전작권전환재연기가사실상 무기한연기 라는비판에대해국방부류제승정책실장이기자들에게밝힌내용이다. - 61 -

국의방위비분담금결정방식은지출내역이나세부항목을정하지않고총분담금규모를결정한이후, 각지원항목별예산을배분하는소위지표 (Index) 방식을따르고있다. 이방식이채택된이유는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체결당시주한미군의소요를모두충족시켜줄만큼한국의경제수준이높지않았기때문이다. 분담금지원항목은한국인근로자들의인건비, 군사건설, 군수지원등이며근로자인건비를제외한다른항목에대해서는현물로지급하고있다. 물론설계및감리비등은현금으로지급한다. 6.25전쟁이후미국의군사원조에기대어군대를유지하던한국이국력이신장됨에따라주한미군의주둔경비일부를분담하게되었던것이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유효한제9차방위비협정에따르면한국은연평균 1억달러정도의방위비를분담하게된다. 이는주한미군인건비를제외한경비의약 50% 를분담하는규모이다. 연도별방위비분담금과방위비분담금기준은다음 < 그림 5> 와 < 표 1> 와같다. < 그림 5> 연보별방위비분담금추이 < 표 2> 주한미군방위비분담금구성 3. 한미동맹의제도화 1) 주둔군지위협정 (SOFA) 주둔군지위협정은군대의파견국과접수국간에파견국의군대주둔으로말미암아야기되는제반사항을규정하기위해체결된다. 파견국은자국의군인들이민형사상의피해를입지않도록최대한보호하고싶은의욕이있기때문에이런문제를두고접수국과갈등을일으키는경우가많다. 이런연유로미국은 SOFA 체결을꺼렸고한국은이를재촉했다. 3년 10개월간 82차에걸친회의를통해마침내 1966년 7월 - 62 -

SOFA가체결되었고 1967년 2월에발효되었다. 협정의주요내용은군인및군속, 그가족의출입과관리, 관세, 조세, 형사청구권, 민사청구권, 노무조달등이다. 한국의국력이점차강해짐에따라주한미군에게유리했던 SOFA가개정되기시작했다. 1991년 1차개정된내용은주로형사관할권과재판권대상범죄에관한것이었다. 2001년 4월에발효된제2차개정의내용은한국사법주권의강화, 환경보호관련조항신설, 주한미군기지내한국인근로자들의지위강화, 기지내주요시설건축시한국정부와사전협의, 민사소송절차신설등이었다. 이런노력에도불구하고한국은지속적으로 SOFA를재개정할것을요구하고있다. 2) 한미안보협력체제 한미양국은 1968년부터주요안보문제를협의하고해결하기위해양국국방부장관들이매년한미안보협의회의 (SCM) 를개최하고있다. 미정보함푸에블로호피랍사건과북한특수부대김신조일당의청와대습격사건이발단이되었다. SCM은한미양국의안보문제전반에관한정책협의, 동북아및동아시아위협평가및공동대책수립, 군사협력위한의사조정, 한미연합방위력의효율적건설과운용방안등을협의하는기능을수행한다 (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3: 116). 주로서울과워싱턴에서격년제로열리고있는이회의는그산하에정책검토위원회, 안보협력위원회, 군수협력위원회, 방산기술협력위원회, 공동성명위원회등을두고있다. SCM이양국국방부장관사이의회의체라고한다면한미군사위원회회의 (MCM) 는양국합참의장을대표로하여설치된군사기구이다. 한미군사위원회 (MC) 는 1978년창설된한미연합사와직접연관이있다. 군령기구로서연합사에대해전략지시와작전지침을하달해야하는상위기구로서의역할때문이다. 한미군사위원회는한국방위를위해한미양국이발전시킨전략지시와전략지침을한미연합사에하달하게된다. MC는양국의합참의장, 합참의장이지명한각국의대표 1명, 그리고한미연합사령관등 5명으로구성되는 MCM이있고, 한국합참의장과미합참의장이지명하는주한미군선임장교 ( 한미연합군사령관 ) 가수시로모여회의를개최하는상설회의로구분된다. 따라서 MCM은 1978년부터시작되었으나 SCM처럼반드시연 1회개최되는것은아니다. 2011년의경우 MCM은 3차례나개최되었다. - 63 -

3) 한미연합사령부 (ROK/US CFC) 의창설 CFC는다양한요인들이결합되어창설되었다. 한국의국력신장에따른유엔군사령부에대한인식변화, 유엔군사령부를구성하고있던대부분의참전국군인들이본국으로철수하게됨에따라유엔사에는미군만남아있다는점, 카터대통령에의한주한미군감축이전에보완조치필요, 그리고 1975년에통과된제30차유엔총회에서의상반된결의안통과등이원인이되었다. 특히, 제30차유엔총회에서의상반된결의안은한반도는물론국제사회에많은파장을남겼다. 제30차유엔총회에서통과된서방측결의안 (GAR 3390 A) 의핵심은 모든직접관계당사자들이정전협정을대체하고한반도의긴장을완화하며, 항구적평화를보장할새로운약정을위하여교섭시행 정전협정의계속적인준수 유엔군사령부가해체될수있도록조속한시일내에협의시행촉구 등이었다. 이에반해공산측결의안 (GAR 3390 B) 의핵심은 유엔군사령부를해체하고유엔기치아래남한에주둔하는모든외국군철수필요 정전협정을평화협정으로대치하도록촉구 군비축소 등이었다. 이런다양한원인들이배경이되어유엔사를대체하는 CFC가창설되었다. 1977년제10차 SCM에서 CFC 창설에합의했고 1년동안구체적세부계획이작성되었다. 1978년 4월국방부훈령제27호를통하여 연합사창설에따른업무및지휘관계 가규정되었고 7월에개최된제11차 SCM에서한미군사위원회 (MC) 와한미연합군사령부 (CFC) 의임무 기능 조직에대한 < 관련약정 (TOR)> 이승인되었다. 이에따라 MC 본회의에서 CFC의임무와지휘관계를규정한 < 전략지시제1호 > 가하달되었다 ( 류병현, 2007: 69-71). CFC의임무는양국의통합된군사노력으로한국에대한외부의적대행위를억제하고, 억제실패시한국에대한무력공격을분쇄하는데있다. CFC의참모조직은양군이균등하게편성되어있다. CFC예하에는지상, 해군, 공군, 해병, 연합특전사, 연합심리전사등으로편성되어있다. 이로써한미양군에대한작전통제는미군의일방적통제에서공동통제형태로바뀌었다. 4) 한미연합연습 CFC 는한미상호방위조약에근거하여북한의위협에대비한한미연합훈련및연습 을지속적으로발전시켜왔다. 연합훈련및연습은지휘소연습과야외기동훈련으로 대별된다. 지휘소연습에는을지프리덤가디언 (UFG) 연습과키리졸브 (Key Resolve) 연 - 64 -

습등이있고야외기동훈련에는팀스피리트, 독수리훈련등이있다 ( 국방부, 2000: 204). 1954년부터유엔군사령부가주관하던포커스렌즈연습과 1968년 1.21사태이후정부주관으로실시하던을지연습이 1976년에통합되어을지포커스렌즈연습이되었다. 이것이 2008년부터는 UFG라는명칭으로바뀌었다. UFG는정부연습과군사연습이동시에진행된다. 정부차원에서는충무계획을숙달하고군사차원에서는작계 5015의수행절차를숙달한다. 즉. 컴퓨터를통한지휘소연습을통하여연합위기관리및전시전환절차를숙달하고한미연합작전수행능력을향상시키는연습이다. 연합전시증원연습 (RSOI) 이란전시한반도에증원될증원군의수용 (Reception), 대기 (Staging), 전방이동 (Onward movement), 전장으로통합 (Integration) 되는일련의절차와경계등을포함하여, 이를지원하는한국군의전시지원, 상호군수지원, 동원및한국군의전투력복원등을숙달하기위해컴퓨터모의를통해실시하는지휘소연습이다. 1994년부터시행된 RSOI는 2008년부터한국군주도, 미군지원개념으로바뀌면서명칭도키리졸브로바뀌어현재까지시행되고있다. 키리졸브연습은전시지원계획검증및보완, 상호군수지원절차숙달, 연합후방지역조정관의임무수행절차와후방지역의방호절차보완, 해상방호능력과한국군의전투력복원력향상등에그목적을두고있다. 독수리연습 (Foal Eagle) 은한반도에서전쟁억제를위해군사적결의를과시하고, 연합및합동작전태세를완비하기위해매년실시하는연합및합동야외기동훈련이다. 독수리연습은후방지역및특수작전전반에걸친연합작전수행능력을향상시키고민관군통합방위태세를확립하는데그목적이있다. 팀스프리트 (TS) 훈련은연합및합동작전태세완비를위해 1976년부터 1993년까지실시한대규모연합및합동야외기동훈련이다. 1975년베트남공산화이후급변한안보환경이훈련시작의배경이되었다. 이훈련은해가거듭될수록해상및공중훈련, 대화학전훈련등이추가되었고 1988년이후에는쌍방자유기동훈련이진행되었다. 훈련기간도늘어났고훈련참여규모도 20만명이참여하는대규모야외기동훈련으로발전되었다. 그러나북한핵문제가불거지고제네바기본합의가타결되는과정속에서 TS 훈련의보류및폐지등이전제조건이되었다. 1995년이후 TS 훈련은유보되었다. TS 훈련이유보되자야외기동훈련등은독수리연습에포함되게되었다. - 65 -

Ⅴ. 결론 1945년한반도는해방되었다. 그러나일제강점기동안에도대한제국의맥을이어가기위한노력은끊이지않았고해방과독립을향한군사력건설및유지도포기되지않았다. 임시정부가수립되었고광복군과독립군의활동도쉼없이이어졌다. 독립을위해투쟁했던세력들이해방과더불어귀국함에따라이들이정부수립의주체가되었고창군의주체가되었다. 미군정기간동안경찰예비대의역할에머물렀던경비대는정부수립과동시에국군에편입되었다. 개인의이데올로기를무시했던미군정의영향으로좌파성향의인사들이대거군에입대할수있었고이로인해군내반란사건이발생하였다. 정부수립과더불어숙군작업이진행되었고국가보안법이제정되었다. 이런과정속에서좌파성향일부군인들은반란을일으켰고일부는빨치산이되었다. 숙군이어느정도마무리된상태에서 6.25전쟁이발발했다. 6.25전쟁은김일성이기획하고스탈린과모택동이지원하여남침한적화전쟁이었다. 북한군은소련제무기로완전무장했고, 북한군의 1/3은항일투쟁경험이있는전사들로채워졌다. 통일대업이눈앞에펼쳐졌을때중공군이투입되었다. 6.25전쟁이발발했을때한국군은 10만명규모였으나단한대의전투기와단한대의탱크도없었다. 그러나북한은 100대의전투기, 70대의폭격기, 150대의탱크로무장된전투경험이풍부한 20만명규모의막강한군사력을지닌군대였다. 유엔안보리결의에의하여연합군이결성되었지만북한군을막기엔역부족이었다. 그러나인천상륙작전은수세일변도였던연합군을공세작전으로바꾼전환점이되었다. 연합군이압록강까지진격했으나중공군이참전함으로써 1.4후퇴를할수밖에없었다. 이승만대통령의휴전협정반대에도불구하고연합군은 2년여의회담을통해북한군및중공군과정전협정을체결하게되었다. 한국이미국과동맹조약을체결한것은이승만대통령의힘의컸다. 미국은북진통일하겠다는이승만대통령의의지를알고있기에동맹조약체결이부담되었다. 그러나반공포로의석방등을통해동맹조약체결없이정전협정에동의할수없다는대통령의의지를미국이꺾을수는없었다. 동맹조약체결로한국과미국은동맹국이되었고연합군이되었다. 미국은한국의부흥과한국군의군사력건설을적극적으로지원하였다. 냉전의최첨단에한국이위치하고있었기때문이다. 그러나한국의국력이신장되어감에따라한반도방위의한국화가서서히진행되었다. 미국의재정악화와군사정책및전략의변화등으로인해주한미군규모도점차축소되었다. 이로인해지휘체계도변화가 - 66 -

생겼다. 평시작통권전환이이루어졌고전시작통권도조건에따라전환하도록합의되었다. 일방적으로미국의지원을받았던한국이이제는주한미군에대해방위비를분담할정도로달라졌다. 한미동맹의제도화도이루어졌다. 주둔군지위협정이체결되어안정적주둔여건의보장과함께주한미군에대한민형사상의책임이뒤따르도록이를강화했고 SCM과 MCM이라는안보협력체제를만들었으며한미연합사령부를창설함으로써참모부내에미군과한국군이동등하게편성됨으로써작통권을공동으로행사하게되었다. 또한다양한한미연합연습및훈련을주기적으로실시함으로써북한의위협을억제하고유사시이를격퇴하는명실상부한연합군으로발전하고있다. 짧은기간동안한국군은구식소총부대에서첨단정보군으로탈바꿈하고있는것이다. - 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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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partment of Defense(1990), A Strategy for the Asian Pacific Rim: Looking toward the 21 st Century, U.S. DoD. - 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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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냉전시기한국군의파병과국제기여 윤지원 ( 평택대학교 ) - 목차 - Ⅰ. 들어가며 Ⅱ. 한국군의해외파병법령, 절차및조직 Ⅲ. 한국군의해외파병역사와국제기여 Ⅳ. 2016년한국군파병현황 Ⅴ. 파병과국익 Ⅵ. 결어 Ⅰ. 들어가며 한국은 1991년유엔의회원국이된이래분쟁지역의평화유지및민주주의수호, 전지구적안보위협에대한공동대응, 재난구호활동에대하여우리군을파병함으로써국제사회의일원으로서성실한역할을수행해오고있다. 구체적으로 1991년이라크의쿠웨이트침공에대한국제사회의무력응징방침에따라다국적군의일환으로우리국군의료지원단과공군수송단파병을시작으로, 1993년에는소말리아에첫유엔평화유지군 (PKO) 를파병한이래, 2016년까지 43,408명 ( 연인원기준 ) 의 PKO와다국적군을파병하였다. 또한양자군사협력형태로아랍에미리트에 1,101명 ( 연인원기준 ) 과필리핀재건지원을위해 824명을파병하였으며, 2016년 6월시점기준 13개국에 1,118명의우리군부대및장교가파병 ( 파견 ) 되어활동중에있다. 이장에서는탈냉전기이후한국군의파병현황을살펴보고, 우리군의해외파병이국제기여적측면에서어떠한의미와의의를가지는지고찰하고자한다. - 71 -

Ⅱ. 한국군의해외파병법령, 절차및조직 국군은헌법제5조제1항및제60조제2항을근거로하여유엔안보리결의안과국회동의안에따라우리군이필요한지역에군대및인력을파견하고있다. 구체적으로우리헌법은 제5조 1항 : 대한민국은국제평화의유지에노력하고침략적전쟁을부인한다... 제60조 2항 : 국회는선전포고, 국군의외국에의파견또는외국군대의대한민국영역안에서의주류 ( 駐留 ) 에대한동의권을가진다. 고명시하고있다. 이러한헌법정신과국회의동의라는법적기반을바탕으로 1991년냉전해체의시작과함께발발한걸프전에한국은국군의료지원단과공군수송단파병을시작으로, 이후국제평화와분쟁해결을위한국제사회의노력에동참하고자파병의종류 (UN 평화유지군, 다국적군, 군사협력등 ), 분야 ( 의료지원단, 공병부대, 해상작전, 평화유지, 해군 공군수송지원단, 재건팀등 ), 규모 ( 개인, 부대등 ) 등을점차적으로확대해왔다. 하지만해외파병의종류와형태, 규모가다양해짐에따라한국은국회의동의에기반하여이루어져왔던우리국군의해외파병에관한명확하고구체적인법적기반의필요성이대두되었고, 이에따라 2010년 1월, 국제연합평화유지활동에참여할파견부대와참여요원의파견및철수등에관한사항을규정함으로써한국이국제연합평화유지활동에보다신속하고적극적으로참여하여국제평화의유지와조성에기여하고자 국제연합평화유지활동참여에관한법률 (UN PKO법 ) 을제정하게되었다. 하지만 2010년에제정된 UN PKO법 은유엔주도의평화유지활동을목적으로하는파병에대해서만내용과절차를규정하고있어냉전이후다양한목적 ( 지역연합의요청에의한다국적군파병, 재난구호, 인도지원, 국방교류협력등 ) 의수행을위해파병되어온국군의해외파견을제한적으로규정하는데그친다는문제의식에서제 19대국회의송영근의원을대표로 2013년 6월, 국군의해외파견활동참여에관한법률안 이발의되었으나, 19대국회에서입법화되지못하였고자동폐기되었다가, 2016년현재다시국방부에의해입법예고된상태이다. 현재우리군의해외파병업무소관부처는국방부와외교부로이원화되어있다. 평 화유지군으로서유엔의평화유지활동에참여하기위한부대파병은외교부에서담당 하며, 다국적군또는양자군사협력차원의부대파병은국방부에서담당하고있다. 이 - 72 -

때문에유엔평화유지군파병에관한국회동의는외교통상위원회에서, 다국적군및양자군사협력차원의부대파병은국방위원회에서동의안을처리한다. 2010년 UN PKO법 이제정되어유엔의평화유지활동에참여할파견부대와참여요원의파견및철수등에관한사항을규정하고외교부가국회외교통상위원회를통해관련업무를처리하도록정하였으나, 이법은유엔평화유지활동을위한파병에대해서만적용될뿐다국적군및국방교류협력차원의파병에는적용되지않기때문이다 ( 유재익 2012: 22). 1) 파병인력의체계적교육및관련연구를위한연구및교육기관으로 국제평화활동센터 ( 이하 PKO센터 ) 가있다. PKO센터는초기 1995년합동참모대학에 국제평화활동학처 로잠정설립된이후 3년뒤인 1998년정식인가를받았다. 이후참여정부가 2004년 국제 PKO에적극참여할것 임을밝히면서 2004년에는학처가아닌국가급 국제평화활동센터 로격상되어인력이증원되었다 ( 김열수외 2006: 97). 이후지속적인인력증원을통해센터의규모와전문성을확대하였으며, 2010년현재국방대학교산하에 국제평화활동센터 로편제가바뀌어운영되고있다. 2013년 11월에는 PKO센터의교육과정중하나인 유엔참모과정 (UN Staff Officers Course) 에대한유엔공식인증을획득함으로써한국군 PKO 교육의중심기관으로서의역할을다하고있다 ( 전병환 2012: 21). 1) 일본헌법은무력행사를목적으로하는자위대의해외파병을금지하고있기때문에 1990 년까지무력사용여하를불문하고자위대의해외파병을금지하였다. 하지만걸프전당시약 130 억달러의전비를부담하면서도군대를파병하지않는다는비판이일자 1991 년 4 월 6 척의함정을걸프지역에파견하여자위대해외파병금지의관례를깼다. 이후국제사회로부터자위대의 PKO 참가요구가높아지자, 1992 년 6 월, ' 국제평화협력법안 ( 일명 PKO 법안 )' 을통과시켜자위대의해외파병의길을열었고, 이후 1999 년 5 월성립된주변사태법을통해자위대가후방에서미군을지원하는형태로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의작전을가능하게하였고, 2001 년 10 월 테러대책특별조치법 을통해일본은한시적이라는단서를붙여세계모든지역에파병을가능하게하였다 ( 출처 : 다락원 (2005), 자위대의해외파병 ) - 73 -

< 그림 1> 국제평화활동센터조직도 출처 : 국방대학교국제평화활동센터웹사이트, 검색일 : 2016.7.24. 국제평화지원단 ( 온누리부대 ) 은유엔평화유지군혹은다국적군활동에투입될파병장병을대상으로지역의언어, 문화관습등에대한교육을실시, 이들인력의파병, 파병부대의운영과지원을담당하는상설부대이다. 국제평화지원단은과거 제5 공수특전여단 이었으나, 1999년동티모르상록수부대를파견하는과정에서상비체제의부재에따른준비미흡으로활동상의애로를경험하게되면서 해외파병전담상설부대 창설의필요성에대한논의가본격화되면서 2010년 7월에기존의 제5공수특전여단 을 국제평화지원단 으로개편함으로써창설되었다. 국제평화지원단은 UN에서요구하는상비파견부대운용체제를갖추고임무부여시 1개월이내에파견되어유엔평화유지군또는다국적군활동을수행하게될 1,000명규모의부대이다 ( 이신화 2010). Ⅲ. 한국군의해외파병역사와국제기여 2) 1990 년소련의붕괴와함께탈냉전이본격화되는가운데한국군의해외파병은 1991 년걸프전에다국적군의일환으로국군의료지원단과공군수송단을파견하면서 2) 5.3 한국군의해외파병역사와국제기여 는유재익 (2012), < 대한민국평화유지활동 20 년의성과와향후과제 >, << 제 8 회 PKO 발전세미나 >> 와국방대학교 PKO 센터 (2011), < 분쟁해결사 PKO 바로알기 >. 국군인쇄창자료를바탕으로 2016 년까지현황을업데이트하였다. - 74 -

부터이다. 이후 1993 년에 UN 평화유지군으로소말리아에상록수부대를파병하면서 우리군의해외파병이본격화되기시작하였고, 2016 년 6 월시점기준 13 개국에 1,118 명의국군이파병되어활동중에있다. < 표 1> 한국군파병역사 파병국가 부대 병력 ( 연인원 / 명 ) 최초파병 파병종료 구분 베트남 청룡부대 320,000 '64. 9 73.8 양자군사협력 걸프전 국군의료지원단 154 '91.1 91.4 공군수송단 160 '91.2 91.4 다국적군 소말리아 상록수부대 516 '93. 7 94.3 PKO 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 542 '94.8 06.5 PKO 앙골라 상록수부대 600 '95.10 96.12 PKO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3,283 '99.10 03.10 다국적군에서 PKO로전환 ('02.2) 아프가니스탄 해성 / 동의 / 청마 / 다산부대 3,379 '01.12 07.11 다국적군 서희 / 제마부대 1,141 '03.4 04.9 다국적군 이라크자이툰 / 다이만부대 19,032 '04.9 08.12 다국적군 레바논 동명부대 5,111 '07. 7 현재 PKO 소말리아 청해부대 5,188 '09. 3 현재 다국적군 아이티 단비부대 1,425 '10. 2 12.12 PKO 아프가니스탄 오쉬노부대 1,745 '10. 7 14.6 UN 안보리결의제1890호 아랍에미리트 (UAE) 아크부대 1,101 '11. 1 현재 국방협력 남수단 한빛부대 1,132 '13.3 현재 PKO 필리핀 아라우부대 824 '13.12 14.12 재해복구지원 출처 : 국방부웹사이트, 세계속의한국군 : 한국군해외파견약사 (1991 년이후 ), 검색일 : 2016.7.24. 하지만한국군창설이후첫대규모해외파병이자한국의경제발전및안보측면에서중요한의미를가지는베트남전파병을우리군의해외파병논의에서간과하기어렵다는점에서베트남전에대한우리군의파병을간략이살펴본후, 탈냉전기이후의본격적인파병역사와이들파병의국제기여적측면을평가하도록하겠다. 베트남전에대한우리군의파병은미국의요청이있기전인 1961 년박정희대통 령이존 F. 케네디에게먼저제안하면서시작되었으며, 결과적으로 1964 년 9 월첫파 - 75 -

병이있은이후, 총파병누계 32 만명, 파병이최고조에달했던 1968 년당시한국군 의수는 5 만여명으로미국군다음으로많은규모를기록하였다. 이중베트남전쟁기 간동안한국군의전사자는약 5 천여명에달하였고, 1 만 1 천여명이부상을입었다. 베트남전은한국군창설이래국토밖에서치러진첫전투이자최대사상자라는기록을가지며, 한국과미국을비롯한연합군이베트남의공산화를저지하지못했다는점에서국제적측면에서의기여를찾기어렵다. 하지만우리군의베트남전참전은한국의국내적측면에서매우중요한의미를가진다. 즉, 파병의효과로우리군의현대화, 한미방위조약의공고화라는안보적측면에서의이익과, 미국이한국에제공한약 50억불에달하는군사원조가대한민국경제발전의밑거름이되었다는점에서베트남전에대한우리군의파병은한국의경제발전사에있어매우중요한의미를가진다고할수있겠다. 3) 1. PKO 파병과국제기여 평화유지활동 (Peace Keeping Operation, 이하 PKO') 은분쟁지역당사국의동의하에유엔이주도하여평화유지군이나정전감시단을파견하는유엔평화유지활동 (UN Peace Keeping Operation) 과유엔의승인하에지역기구나특정국가주도로이루어지는다국적군평화활동 (Multinational Force Peace Operation) 로구분된다. PKO는 1948년 5월 19일안보리결의제50조에의거설립된유엔예루살렘정전감시단 (UN Truce Supervision Organization) 업무로부터시작되었으며, 유엔안전보장이사회결의에따라유엔사무총장이임명하는사령관의지휘아래이루어진다. 3) 실제로우리군의베트남전파병을전후로하여대한민국국민총생산 (GNP) 은약 5 배가량성장하였다. 파병직전인 1964 년한국의 1 인당 GNP 는 103 달러에불과했지만한국군철수가끝난 1974 년엔 5 배가넘는 541 달러를기록하였다. - 76 -

< 표 2> 한국군 PKO 파병현황 파병국가 부대 병력 ( 연인원 / 명 ) 파병기간 구분 소말리아상록수부대 516 '93. 7~ 94.3 PKO 서부사하라국군의료지원단 542 '94.8~ 06.5 PKO 앙골라상록수부대 600 '95.10~ 96.12 PKO 동티모르상록수부대 3,328 '99.10~ 03.10 다국적군에서 PKO 로전환 ( 02.2) 레바논동명부대 5,111 '07. 7~ 현재 PKO 아이티단비부대 1,425 '10. 2~ 12.12 PKO 남수단한빛부대 1,132 '13.3~ 현재 PKO 소말리아상록수부대 ( 93.7-94.3) 한국군의최초 PKO 활동은 1993년에공병부대인상록수부대를파병하면서시작되었다. 1969년군부쿠데타로시작된소말리아내전이격화되면서 1991년까지 30만명의사망자와 500만명의기아및 100만명의난민이발생하자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소말리아에대한인도적지원과구호활동을전개하기위해안보리결의제 794호에의거미국을중심으로하는 희망회복작전 을전개하면서한국군의파병을요청하였으나우리정부는동작전에대한 200만달러의자금지원만제공하였다. 하지만 희망회복작전 으로소말리아사태가진정국면에접어들면서소말리아국가재건, 난민복귀, 인도지원활동을위한 UNOSOM II(United Nations Operation in Somali II) 작전이전개되었고, 다시금유엔본부는우리정부로하여금파병을요청하게된다. 당시 희망회복작전 에대한파병을거절한바있었던우리정부는더이상이러한유엔의파병요청을거부하기어렵다는판단하에 1993년 7월사상첫 PKO 활동을위한공병부대파병을결정하게되었다. 국회의동의를받아소말리아의수도모가디슈북방 30km 지점에위치한 발라드 에파병된상록수부대는 4) 현지주민들의숙원사업이었던 제너럴다우드 관개수로보수, 지역경찰서재건, 심정개발및급수지원, 의료지원활동등을실시하였다. 또한현지주민들을대상으로하는사랑의학교와기술학교운영, 방직공장재가동사업을전개함으로써한국군최초의인도주의사업이라는평가와함께현지 UNOSOM-Ⅱ사 4) 상록수부대 의명칭은 헐벗고척박한소말리아땅을푸르름이넘치는옥토로바꾸겠다 취지에서비롯되었다. - 77 -

령관으로부터 상록수부대는지역주민들까지같은편으로만드는기술을가졌다 는 극찬을받기도하였다 ( 오흥국외 2011). 서부사하라국군의료지원단 ( 94.8-06.5) 1990년냉전의종식과함께국가간분쟁은감소하였으나, 국가내종족및종교분쟁이증가하면서유엔을중심으로하는평화유지활동의수요가증가하였다. 이에따라한국군의 PKO 파병은소말리아에대한첫파병이있은이후바로이어서서부사하라에국군의료지원단을파병하게되었다. 모로코가서부사하라북부지역에대한서부사하라독립세력과모로코간영유권을분쟁이지속되던가운데양측은 UN의중재에따라국민투표를통해서부사하라의분리독립문제를결정키로하고 1991년정전에합의하였다. 이에 UN은안보리결의제690호를채택하고정전감시임무를수행할 MINURSO(United Nations Mission for the Referendum in Western Sahara) 를설치하고회원국의참여를요청하였다. 이러한가운데서부사하라에대한우리정부의군국의료지원단파병배경은 1991 년걸프전에파병되었던우리군의의료수준을높이평가한유엔이스위스의료지원단이철수하면서이를대신해줄것을요청함에따라이루어졌다. 우리정부는국회의동의를받아 1994년 8월서부사하라 라윤 지역에 542명규모의의료지원단을파병하여유엔요원에대한의료지원, 응급환자조치, 사령부지역에대한방역및수질검사등과같은의료지원활동을실시하였다. 서부사하라에파병된우리국군의료지원단은 2006년 5월철수할때까지연인원 58,000명을진료하였으며, 질병예방을위한적극적인보건의료환경개선과예방활동을실시하였다. 앙골라상록수부대 ( 95.10-96.12) 1988년 12월정부군과반군사이에평화협상이타결되자유엔은안보리결의제 626호를의결하여 UNAVEM(United Nations Angola Verification Mission) I, III를전개하여앙골라정부군과반군간평화협정체결, 정전감시및선거감시임무를수행하였다. 하지만다시 1992년총선결과에대한불복으로재개된내전을종식시키기위한 루사카평화협정 이 1994년 11월체결됨에따라이협정의이행감시를위한 UNAVEM-III 활동이개시되었다. 이에따라우리정부는 200 명규모의공병부대를파견키로결정하고국회의동의를 - 78 -

받아 1995년 10월앙골라 우암보 지역에상록수부대를파병하였다. 앙골라에파병된상록수부대는교량건설, 비행장복구, 도로보수및신설과인도적지원활동을전개하였다. 상록수부대는치피파지역등 8개소의교량, 우암보등 2개소의비행장을복구함으로써유엔 PKO의효과적인작전수행을지원하였다. 또한인도지원활동의일환으로도로보수 (77.1km) 및신설 (1.5km), 희망의샘 으로명명된심정설치, 방역및의료지원, 고아원및성당지원, 사랑의학교와태권도학교운영, 마을회관보수, 영농설명회개최등다양한분야에걸친인도적지원활동을전개함으로써작전지역내앙골라주민들의생활환경개선에기여하였다. 동티모르상록수부대 ( 99.10-03.10) 동티모르에대한상록수부대파병은한국의유엔가입이후최초의전투부대파병이라는의미를가지며, 2003년 10월철수시까지총 8개진, 연인원 3,328명, 유엔평화유지군사령부에참모장교및한국군연락단에연 45명을파병한대규모파병이라는의미를가진다. 1975년인도네시아의州로강제편입된동티모르는 1998년인도네시아하비비대통령의동티모르분리독립주민투표결정에따라 1999년 8월 30일유엔감시하에주민투표를실시한결과 78.5% 가독립에찬성하였다. 하지만민병대가이에불복하여유혈폭력사태를일으킴에따라약대규모난민이발생하고수백명이피살되는사태가발생하였다. 이에유엔은안보리결의안제1264호를채택하여다국적군 UNAMET(United Nations Mission in East Timor) 을구성하였다. 이에우리정부는특전사요원으로구성된 400명규모의보병부대를동티모르라우템지역의다국적군에파병하였다. 상록수부대는해당지역에서치안유지, UN 시설경계등임무로활동을시작하였는데, 치안상태가안정단계에접어들자유엔은안보리결의제1272호를채택하여 UNTAET(United Nations Transitional Administration in East Timor) 를설치하고그동안다국적군의형태로 UNAMET가담당해오던치안유지임무를 UNTAET에이관하였다. 이에따라상록수부대는 2000년 2월다국적군에서유엔 PKO로지위를변경하고책임지역에대한치안유지임무를계속하였다. 동티모르상록수부대는국경선통제, 치안유지, 귀국난민호송등임무를수행하였 다. 또한책임지역순회진료및방역, 이발지원, 영화상영, 농기구정비, 구호품전달 등의기능을통합한 ' 푸른천사 (Blue Angel)' 작전으로주민들의내전으로인한상처치유 - 79 -

와일상적인삶으로의복귀를지원하였다. 그결과현지주민들로부터 다국적군의왕 이라는평가를받았으며, 동티모르구스마웅대통령은 주민을진심으로위하고평화를위해앞장서는한국군에게대해감사한다 는내용의성명을발표하기도하였다. 또한동티모르상록수부대는유엔임시행정기구로부터 PKO 참여국중가장모범적으로임무를수행하는부대 라는평가를받았다. 레바논동명부대 ( 07.7월-현재) 레바논동명부대파병은현재까지지속되고있는유일한 PKO 파병으로써, 12년동안의작전기간을기록한서부사하라에대한 PKO 파병보다는작전기간적측면에서짧다고할수있으나 (2016년 8월현시점 ), 서부사하라 PKO 활동은보병이아닌국군의료지원단이었다는점에서동명부대는보병부대파병규모로서최대파병이자, 최장기간파병이라는의미를가진다. 레바논에대한동명부대파병이현재까지지속되고있는주요원인은레바논내전이다양한이해당사자들간의혼전양상으로치닫고있기때문이다. 레바논은 1958년기독교세력과이슬람교세력이충돌하면서내전이시작되었고, 1972년팔레스타인해방기구 (PLO) 가베이루트로옮긴자이스라엘이이를폭격하면서내전의한당사자가되었다. 이후시리아가 1976년내전수습을명분으로레바논에군대를주둔하자이스라엘도 1978년레바논에군대를주둔하게되었다. 이에따라내전은기독교민병대, 이슬람민병대, 레바논정부군, 시리아군, 이스라엘군이접전을벌이는복잡한국면으로전개되었다. 이에유엔은 1978년 3월안보리결의안제425호와제426호를의결하여 UNIFIL(UN Interim Forces In Lebanon) 을설치하고레바논내이스라엘의군사행동중지와외국군의철수를촉구하였으나, 이후에도내전양상이격화되자유엔은안보리결의안제1701호를의결하여양측의즉각적인휴전과 UNIFIL에대한병력증강을결정하고회원국의기여를촉구하기에이른다. 이에따라우리정부는 2007년 7월 350여명규모의보병부대를레바논 티르 지역에파병하였다. 동명부대는 UNIFIL의서부여단에소속되어책임지역감시정찰, 불법무장세력유입차단, 무기반입통제 감시등의임무를수행하고있으며, 현지주민들을대상으로다양한민사작전을실시함으로써주민들의삶의질향상에기여하고있다. 이러한동명부대의모범적활동을높게평가하고있는유엔과 UNIFIL은동명부대의계속적인주둔을요청하고있으며, 이에따라 2016년현재 PKO 활동을관장하고있는외교부는동명부대파병연장을추진 - 80 -

하고있다. 아이티단비부대 ( 10.2-12.12) 아이티는 1990년직접선거로민간대통령이선출되었으나이후군부쿠데타및선거부정의혹등이불거지면서정권불안정이지속된가운데 2004년정권타도를주장하며반정부무장세력의공세가거세지자동년 2월유엔이지역안정을위해다국적군파견을승인하였고이후 6월에다국적군의임무가유엔의 MINUSTAH(UN Stabilization Mission in Haiti) 으로인계되었다. 이러한가운데 2010년 1월 12일아이티에규모 7.0의강진이발생하여수백만명의이재민이발생하자유엔은아이티의지진피해복구및재건지원을위해안보리결의제1908호를의결하여 MINUSTAH 의병력규모를 6,940에서 8,940명으로확대하고회원국의참여를요청하였다. 이에우리정부는 240명규모의공병대로이루어진단비부대를 2010년 2월아이티 레오간 지역에파병하였다. 단비부대는건물잔해제거, 도로복구, 심정굴착, 하천준설, 의료지원, 방역등의지진피해복구및재건지원활동을전개하였다. 아이티의지진피해복구작업이성공적으로마무리됨에따라단비부대는 2012년 12월임무를종결하고철수하였으며, 신속하고효과적인재난구호활동을전개함으로써지역주민들로부터 레오간의희망 이라는칭송과 Thunder Engcoy'( 번개처럼빠른공병부대 ) 라는평가를받았다. 남수단한빛부대 ('13.3-현재) 수단은영국과이집트의공동통치로부터벗어난후 1955년부터정치 종교적이유로남북간내전을경험하였고두차례의평화협정을거쳐 2011년 7월남수단은수단으로부터독립하였다. 유엔은신생독립국인남수단의재건을지원하기위해유엔 UNMISS(UN Mission in South Sudan) 을설치하고회원국에파병을요청하였다. 우리정부는 2012년 9월국회의동의를얻어 2013년 1월 280여명규모의공병부대인남수단재건지원단 ( 한빛부대 ) 을창설하고 2013년 3월 31일남수단현지로파병하였다. 한빛부대는내전으로황폐화된남수단보르지역에서도로, 비행장, 교량건설및보수등재건지원활동과난민보호식수및의료지원등인도적지원임무를수행하고있다. 이러한가운데남수단에서구호활동을전개중이던한국의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이무장세력에의해위협받는상황에서한빛부대가출동하여재외국민들을무사히구출해냄으로써남수단임무단 (UNMISS) 의성공적인작전사례로기록되기 - 81 -

도하였다. 2. 다국적군파병과국제기여 다국적군평화활동은유엔에의해위임된평화유지활동이외에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중부아프리카경제통화공동체 (CEMAC), 아프리카연합 (AU), 독립국가연합 (CIS), 서부아프리카경제연합 (ECOWAS), 유럽안보협력회의 (CSCE/OSCE), 유럽연합 (EU) 등도포함한다. 다국적군에대한한국군파병은 1991년걸프전파병을시작으로이라크자이툰부대까지총 4개국에 29,054명을파병하였다. < 표 3> 한국군다국적군파병현황 파병국가 걸프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부대 병력 ( 연인원 / 명 ) 파병기간 국군의료지원단 154 '91.1~4 공군수송단 160 '91.2~4 해성 / 동의 / 청마 / 다산부대 구분 다국적군 3,379 '01.12~ 07.11 다국적군 서희 / 제마부대 1,141 '03.4~ 04.9 자이툰 / 다이만부대 19,032 '04.9~ 08.12 다국적군 소말리아청해부대 5,188 '09. 3~ 현재다국적군 걸프전국군의료지원단, 공군수송단 ( 91.1-4) 걸프전파병의특징은유엔안보리승인하에미국이주축이된다국적군의평화강제활동에대한한국군의첫파병이라는의미를가진다. 파병의배경은 1990년 8월 2 일이라크가쿠웨이트를기습침공하여합병함에따라미국을중심으로국제사회가무력응징방침을정함에따라, 우리정부는 6.25 당시국제사회로부터의지원에대한보답, 아랍권국가와의외교 경제협력관계에대한고려를바탕으로파병을결정하였다. 154명으로구성된국군의료지원단은 1991년 1월쿠웨이트의 알누마일리아 지역에파병되어본격적인의료지원활동을전개하여사우디아라비아군 925명, 다국전군 469명, 이라크군포로 156명에대한진료를완수하고동년 4월 10일귀국하였다. 공군수송단 ( 비마부대 ) 은 1991년 2월김해기지에서인원 160명과 C-130 5대로편성되 - 82 -

어 4 월까지 309 회의비행을통해병력 1,350 명과 668 톤의장비와물자를성공적으로 수송하였다. 아프가니스탄해성 / 동의 / 청마 / 다산부대 (( 01.12-07.11) 2001년 9월 11일미국에서항공기테러가발생하자유엔은안보리결의제1368호를의결하여미국의개별적및집단적자위권을인정하였다. 이를근거로아프가니스탄에대한다국적군의 항구적자유작전 (Operation Enduring Freedom) 이시작되자, 우리정부는한 미동맹관계의공고한발전을도모하고자의료지원단 ( 동의부대 ), 해군수송지원단 ( 해성부대 ), 공군수송지원단 ( 청마부대 ), 공병부대 ( 다산부대 ) 를파병하였다. 동의부대는 2002년 2월말파병되어대테러전쟁에참여하는동맹국요원뿐만아니라아프가니스탄군사요원및현지주민에대해서도진료활동을실시하였다. 그결과동의부대는현지주민들로부터 신이내린또하나의축복 이라는찬사를받았으며, 2007년 12월철수할때까지 259,570명의환자를진료하였다. 해성부대는한국형상륙함 (LST) 1척으로구성된해군부대로 2001년 12월부터 2003년 9월까지동맹군에대한병력 장비 물자의해상수송과난민구호물자수송등의임무를수행하였다. 청마부대는 C-130 4대로구성된공군부대로 2001년 12월부터 싱가포르 에서 디에고가르시아 까지정기공수임무와괌에서필리핀또는태국으로의부정기공수임무를수행하였다. 아프간에대한다국적군의활동이후반기에접어들면서 2002년 8월미국이아프가니스탄의재건및바그람기지복구를위해우리공병부대의파병을요청해옴에따라, 우리정부는 2003년 2월 150명규모의다산부대를아프가니스탄바그람기지에파병하였다. 다산부대는토목및건축임무를수행하기위해편성된부대로 2007년 11월임무종료시까지바그람기지개보수활동을성공적으로수행하여 꾸리 ( 한국 ) 넘버원 이라는평가를받았다. 이라크서희, 제마, 자이툰, 다이만부대 ( 04.9-08.12) 2003년 3월, 미 영연합군이 이라크자유작전 (Operation Iraqi Freedom) 으로이라크전이시작되자우리정부는 대량살상무기의확산방지, 한 미동맹관계의중요성등제반요소를감안하여미국의노력을지지해나가는것이우리의국익에부합된다. 는입장아래건설공병지원단 ( 서희부대 ) 과의료지원단 ( 제마부대 ) 을이라크에파병키로결정하였다. - 83 -

2003년 4월파병된서희부대는 300명규모의공병으로 탈릴 공군기지에주둔하면서동맹군기지의기지보강작업을실시, 인근지역학교보수, 관공서보수, IT센터시설보수, 시가지정비등의재건사업과서희기술학교를운영하였다. 제마부대는연합군에대한진료활동과인근지역주민들을대상으로순회진료를실시하였는데, 제마부대는당시이라크에주둔하고있는 17개다국적군부대중유일하게대민진료활동을실시한부대로 1만 5천명의주민환자를진료하였다. 서희부대와제마부대는 2004년 9월자이툰부대가 아르빌 지역에파병됨에따라자이툰부대와합류하였다. 2003년 9월 4일미국이우리정부에 5,000명규모의보병부대를파병해줄것을요청함에따라우리정부는 3,000명규모의평화 재건부대를파병하기로결정하고 2004년 9월 아르빌 지역에자이툰부대를파병하였다. 자이툰부대는동지역의평화정착및재건지원을위해주둔지방호, 장병및교민호송작전을전개하는한편, 현지경찰에장비및물자공급, 공항외곽의치안관련시설의신축 개보수등을지원하였다. 민사작전으로는 그린엔젤작전 을통해인근지역주민들의숙원사업을해결하는한편, 2004년 11월자이툰병원을개원하여현지주민대상의료지원을실시하여연인원 13만명에대한의료지원을실시하였다. 또한새마을운동시범사업을통해지역경제발전에기여함으로써부대활동에대한지역주민의자발적인협조와참여를이끌어내는데기여하였다. 그결과자이툰부대는현지인들로부터 신이내린최고의선물 이라는찬사와바르자니쿠르드총리로부터 자이툰은친구이자쿠르드사회의일원이다 이라는평가를받았다. 소말리아청해부대 ( 09.3월-현재) 오랜내전과인근해역의어획량급감으로소말리아해역인근지역어민들의경제가피폐해짐에따라 2004년부터지방군벌들의비호아래어민들이해적활동을시작하면서소말리아인근해역을통과하는선박들에대한무분별한해적피해가급증하였다. 이에유엔이안보리결의제1838호를채택하여회원국군함과항공기를파견하기로결정함에따라한국도링스헬기 1대와고속단정 3척을탑재한 4,500톤급구축함청해부대를 2009년 3월소말리아아덴만해역에파병하였다. 청해부대는아덴만에서우리선박의무사통항지원을주임무로하면서, 연합해군사와함께 162회에달하는대해적작전도수행하고있다. 특히 2016년 6월부터 10월까지우리해군제독이바레인소재연합해군사예하다국적기동부대인 CTF-151 사령관임무를수행함에따라국 - 84 -

제적으로우리해군의우수성을알리는계기가되었다. 파병실적으로는청해부대는해적의위협에놓인 31척의민간선박을구조하였고, 2,048척의민간선박을해적의위협으로부터호위하였다 (2015년 12월기준 ). 2011년 1월에는 아덴만여명작전 을실시하여소말리아해적에게납치된아국선박인 삼호주얼리 호선박과선원을구출하는한편, 2011년 3월리비아정세불안으로인해우리정부가리비아교민들의철수를결정함에따라청해부대는총 2차에걸쳐리비아교민 37명을몰타와그리스로철수시키는작전을수행하였다. 이처럼청해부대는아국선박보호, 자국민보호는물론국제사회의안보위협에대처하기위한공동노력에적극적으로참여하고있다. 3. 재건지원을위한파병과국제기여 우리군은유엔 PKO와다국적군의일원으로분쟁지역에서의평화유지, 민주화지원, 국제사회의안보위협에대한공동대처등국제사회의노력에적극적으로동참해왔다. 하지만위에서언급한유엔 PKO와다국적군자격이외의파병형태또한존재한다. 아프가니스탄재건지원을위한오쉬노부대와필리핀정부의요청에따른필리핀재해복구지원을위한아라우부대파병이그것이다. 아프가니스탄오쉬노부대 ( 10.7-14.6) 2001년미국주도의 항구적자유작전 으로탈레반정권을붕괴시켰으나이후탈레반의무차별적인테러로아프가니스탄의치안상황이악화되자유엔은안보리결의제 1383호를의결하여국제안보지원군 (ISAF) 을설치하고아프간의안정화및재건활동을지원하였다. 하지만아프간의안정화및재건활동이예상보다지연되자유엔은 2009년안보리결의제1890호를의결하여회원국들에게인력, 장비, 물자등의지원을요청하였다. 다국적군의자격으로 2002년부터 2007년까지동의부대와다산부대를파견하여아프간의재건을지원한우리정부는민간주도의 지방재건팀 (Provincial Reconstruction Team: PRT) 을통해아프간의안정화와재건을지원하기로하고 2010년 7월, 외교부 /KOICA 100명, 경찰 40명으로구성된지방재건팀 (PRT) 을구성하였다. 이에우리군은 PRT의경호및호송, 주둔지방호를위해 350명규모의오쉬노부대를구성하여아프가니스탄 차리카 에파병하였다. 순수파병규모만연인원 1,745명에달한오쉬노부대는 PRT 주둔지경계, PRT 민간요원의외부활동시호송 - 85 -

및경호등의임무를수행하였고, 이러한오쉬노부대의경호, 호송작전아래 PRT 는 보건의료, 직업훈련, 경찰훈련분야를중심으로아프간안정화및재건지원임무를성 공적으로수행한후 2014 년 6 월철수하였다. 필리핀아라우부대 ( 13.12-14.12) 아라우부대는 2013년 11월 8일슈퍼태풍하이옌으로필리핀에대규모재난피해가발생한가운데필리핀정부의요청에따라필리핀타클로반에파병된재난구호부대이다. 아라우 (Araw) 는필리핀현지어로태양, 희망, 날을뜻하며 ' 어둠뒤에태양이온다 ' 는의미를가진다. 전체파병인원 520여명에해군상륙함 2대 ( 성인봉함, 비로봉함 ) 와중형굴삭기등재해복구에필요한장비 19종 30대, 물자 12종 35톤등을탑재한대규모파병으로서, 파병규모로는이라크자이툰부대다음으로큰규모이다. 한편아라우부대는학교 38곳과관공서 18곳등공공시설 67곳을재건하였으며, 군의료진은마을 98곳을방문하여주민 41,000명을진료하였다. 또한중장비직업학교를세워현지중장비기사 490명을양성하기도하였다. 이에필리핀정부는감사의뜻으로아라우부대에민사작전유공훈장을수여하고양국의우호증진에이바지하였다는점을강조하였다. 2014년 12월 23일에공식적인활동을종료하였다. 4. 국방협력을위한파병 2009년 12월한국과아랍에미리트 (UAE) 관계가 포괄적 전략적동반자관계 로격상된가운데이듬해 5월국빈방한한 UAE 왕세자가우리특수부대의우수성을높이평가하고특수부대의파견과훈련협력을공식요청하였다. 아크는기존의 PKO나다국적군에대한파병과다른새로운개념의파병으로양국간의정치경제적관계를바탕으로비분쟁지역에파병된최초의사례이며, 실제로한국의경제적국익창출에크게기여하였으며, 군사외교적측면에서도한국과 UAE간군사협력의기반을공고히한파병으로평가가할수있다. 5) 우리정부는특수부대요원으로구성된 150 명규모의부대파병을결정하고 2011 년 1 월 11 일아부다비주 알아인 에있는특수전학교에아크부대를파병하였다. 아크부 대는한국과 UAE 양자간군사협력으로 UAE 특수전부대에대한교육훈련지원과 5) 경제국익측면에서아크부대파병의효과에대해서는본고의 파병과국익 파트에서다룸. - 86 -

연합훈련및연습임무를수행하고있으며, 유사시우리국민을보호하는임무를수행하고있다. 아크부대는파병을계기로한-UAE간국방교류협력이획기적으로심화 ( 총 80회, 657명 ), UAE군교육훈련체계개선을통한 UAE군선진화와전투력향상에기여하고있다. 이러한아크부대파병의긍정적기여는청해부대 6진이 아덴만여명작전 에서생포한해적포로를국내로이송하는과정에서 UAE의전폭적인지원을받았다는점이다. 또한우리군차원에서는국내에서기상, 훈련장, 민원등으로제한되는고공, 야간강하훈련, 장거리저격사격훈련등을통해우리군의특수작전수행능력을향상시키데기여하고있다. 아울러아크부대는태권도와특공무술시범을통해 UAE에우리의문화를전파하는데기여하고있으며현지교민들과의유대활동과한국을대표하는행사를지원함으로써 UAE 내한국의위상제고에기여하고있다. 우리정부는아크부대파병에대한긍정적평가와 UAE의지속적인추가파병요청에따라 2016년 7 월, 특수전, 고공, 대테러, 해군특수전요원으로구성된 11진 130명을추가파병하였고, 이들은 8개월간임무를수행하게되었는데 11진에는 UAE 파병최초로여성장교두명이포함되었다. Ⅳ. 2016 년한국군파병현황 2016년 6월현재, 우리군의해외파병현황은 < 표 4> 에서알수있는바와같이 PKO 활동을위한부대단위파병으로레바논동명부대, 남수단한빛부대가활동중에있으며, 다국적군활동으로는소말리아청해부대가해적들로부터민간선박을보호하기위한임무를계속하고있다. 또한아랍에미리트에파병된아크부대는 UAE군선진화및한국과 UAE 간군사및경제협력증진에이바지하고있다. - 87 -

< 표 4> 한국군해외파병현황 총 13 개국 1,118 명 ( 16. 6. 17. 시점 ) UN PKO 다국적군평화활동 국방협력 부대단위 개인단위 부대단위 개인단위 부대단위 구 분 현재교대지역최초파병인원주기 레바논동명부대 328 티르 07. 7월남수단한빛부대 293 보르 13. 3월 8개월 인ㆍ파정전감시단 (UNMOGIP) 7 스리나가 94. 11월 남수단임무단 (UNMISS) 7 주바 11. 7월 수단다푸르임무단 (UNAMID) 2 다푸르 09. 6월 레바논평화유지군 (UNIFIL) 4 나쿠라 07. 1월 1년 코트디부아르임무단 (UNOCI) 2 아비장 09. 7월 서부사하라선거감시단 (MINURSO) 4 라윤 09. 7월 소 계 647 소말리아해역청해부대 302 소말리아해역 09. 3월 6개월 바레인연합해군사령부참모장교 14 마나마 08. 1월 지부티 1년 연합합동기동부대 협조장교 2 지부티 09. 3월 (CJTF-HOA) 미국중부사령부 협조단 2 플로리다 01. 11월 1년 미국아프리카사령부 협조장교 1 슈트트가르트 16.3월 1년 소계 321 UAE 아크부대 150 알아인 11. 1 월 8 개월 소계 150 총계 1,118 출처 : 국방부웹사이트, 세계속의한국군 : 한국군해외파견약사 (1991 년이후 ), 검색일 : 2016.7.24. 부대단위파병이외에개인단위파병으로 PKO 활동에 26 명, 다국적군에 19 명의 장교가파견되어국제평화유지활동에참여하고있으며, 파병지역은 < 그림 2> 의지 도와같다. - 88 -

< 그림 2> 한국군해외파병활동지역 ( 16. 6. 17. 시점 ) 출처 : 국방부웹사이트, 세계속의한국군 : 한국군해외파견약사 (1991 년이후 ), 검색일 : 2016.7.24. Ⅴ. 파병과국익 탈냉전이후우리군의해외파병은군사및국익적측면에서간과할수없는긍정적효과를이끌어내는데기여하였다. 우리군의해외파병은군차원에서우리군의군수및전투능력의향상과민사작전능력의향상을통한변화된전쟁패러다임에적응하는기회가되었다. 또한국익적측면에서해외교민의안전및경제적국익창출에의기여와군사협력의활성화로공공외교에기여함으로써국제평화및지구공동의목표실현에기여하였다. 첫째, 우리군의해외파병은군차원에서다양한작전지역을대상으로한활동을통 해군수및민사작전능력향상과군사협력활성화로우리군의전투능력향상에기 여하는한편, 변화하고있는전쟁패러다임의변화에적응할수있는기회가되어 - 89 -

왔다. 앞서살펴본바와같이탈냉전시기우리군은 15 개국이상의육 해 공에서다양 한민사작전을수행하였다. 2016 년이시점에도우리군은 13 개국에서 1,118 명의우 리장병및고위장교들이국제평화유지활동에전념하고있다. 이러한다양한파병경험은우리군의군수지원능력을향상시키는데기여하였다. 한국전쟁이후남북의대치상황이반세기이상지속되면서우리군의작전반경은통상남한에국한될수밖에없었다. 하지만해외파병을통해유사시전쟁의성패를좌우할수있는군수지원능력의향상을도모할수있었다. 지구곳곳에파병된우리군에대한군수물자지원은이동경로, 운반수단등을고려할때상당한어려움이뒤따를수밖에없었고, 파병기한이길어질수록그리고부대교체가빈번하게이루어질수록우리군은군수지원경험및작전계획수립능력을향상시키는계기가되었다. 이라크에파견되었던자이툰부대가대표적인경우라고할수있다. 베트남전쟁이후, 사단급이라는대규모부대로는최초의최장거리파병기록을가지고있는자이툰부대의경험을통해우리군은독자적인군수지원능력과경험을축적할수있었다는평가를받았다 ( 윤영미 2013: 4). 또한, 해외파병경험의축적은전쟁패러다임의변화에신속히대응할수있는계기를마련하였다. 과거혹은국내에서경험하기어려웠던다른형태의위협을미리경험하고이에대한대응전술을수립하고수행함으로써새로운전장환경에서필요로하는독자적작전수행능력향상증진과연합국혹은동맹국과의연합작전수행능력을강화시킬수있었다. 탈냉전이후국가들사이의전면전위험은감소하는반면지역적, 국지적분쟁이증가하고있고, 전장에서비국가행위자의의미가두드러지고있는최근분쟁의특징속에서국경을넘어세계곳곳에서발생하고있는위협들은국가들간의연합과협력을필요로하고있다 ( 윤영미 2013: 4). 전쟁의주체, 전쟁대상, 전장환경등전쟁의패러다임이변화하고있는가운데우리군의해외파병경험은이러한새로운전쟁패러다임을체득하는경험의장이되고있다. 더불어국제평화안보관련고위기구에우리군인사들이대거진출함으로써우리군의작전능력향상은물론이고, 이들고위인사들을통한고급정보및국방네트워크확대라는긍정적기여가가능해졌다. 실제로민병석 UNCRO 단장 ('95.7~'96.1), 한승주 UNFICYP 사무총장특별대표 ('96.5~'97.4), 안충준 UNMOGIP 단장 ('97.3~'98.3), 황진하 UNFICYP 사령관 ('02.1~'03.12), 최영진 UNOCI 사무총장 - 90 -

특별대표 ('07.10~'11.8), 김문화 UNMOGIP 단장 ('08.11~'10.11), 최영범 UNMOGIP 단장 ('12.6~ 14.6) 등이고위직책을수행하였다 ( 유재익 2012: 17). < 표 5> 파병과국익그리고국제기여 출처 : 윤영미, 해외파병패러다임의변화와국익창출, 2012 년 11 월 1 일한국군의해외파병활동과성과 그리고미래, 국회세미나발표논문을재구성 둘째, 우리군의해외파병은국가적차원에서자국민보호및경제적이익제고와 함께공공외교의한축으로국제사회가추구하는국제평화와지구공동의목표실현 에기여함으로써국가위상제고에기여하고있다. 먼저, 2011년 1월, 우리군은 아덴만여명작전 을실시하여소말리아해적에게납치된아국선박인 삼호주얼리 호선박과선원을구출하는한편, 2011년 3월리비아정세불안으로인해리비아교민들의철수를결정이내러짐에따라청해부대는총 2 차에걸쳐리비아교민 37명을몰타와그리스로철수시키는작전을수행하였다. 이처럼청해부대는아국선박보호, 자국민보호는물론국제사회의안보위협에대처하기위한공동노력에적극적으로참여하고있다. 또한아랍에미리트 (UAE) 에대한아크부대의파병은양국간군사우호관계의조성 에기여하였을뿐만아니라, 경제적측면에서도국익창출에기여하고있다. 원전수 주를통해확보한경제적성과이외에도, 한 -UAE 간방산협력확대에도기여하고있 - 91 -

다. UAE군은우리군의군사장비및무기체계에깊은관심을표명해왔고, 실제로아크부대파병이후, 지금까지이루어진방산수출은탄약, 무인항공기통제장비등을포함하여약 467억원에달한다. 이금액은아크부대파병이전 5년동안이루어진 UAE 방산수출총금액의 3배가넘는수치이며, 현재 T-50 훈련기, 소형잠수함, 소해함, 과학화전투훈련시스템 (KCTC : Korea Combat Training Center) 관련수출협의가진행중에있다는점을고려한다면아크부대의파병이가져온경제적국익창출효과는막대하다 ( 윤영미 2013). 또한최근안보경영연구원의조사에따르면경제협력이동반된국방협력 ( 아크부대 ) 은경제협력이동반되지않은국방협력보다약 50% 더수출을촉진한것으로나타났으며, 실제로아크부대와같이경제협력이동반된국방협력을통해한국은 30개의 OECD 수출국과 60개의수입국에대한 2000-2010년까지의평균수출액을기준으로적용했을때 UAE에연간약 14.7억달러의경제적이익창출효과를기대할수있을것으로추정하기도하였다 ( 전세훈 라정주 2013: 12). 해외파병의국가적기여는자국민보호및경제적국익창출에그치는것만아니라공공외교의한수단으로국제평화유지및지구공동의목표실현에기여함으로써국제사회에서한국의위상제고에기여한다는의미를가진다. 공공외교는자국의문화, 관광, 해외원조등소프트파워를통해자국의이미지나국가브랜드를높이는외교수단으로, 평화유지활동 (PKO) 에대한참여는하드파워인군사력을소프트파워적요소로규정되는평화유지, 재건, 인도적지원및개발사업이융합된행위로이해된다. 특히 UN 및지역기구와협력하거나연대하여이루어지는 PKO 활동과최근우리군이참여한아프가니스타오쉬노부대의 지방재건팀 (Provincial Reconstruction Team: PRT) 은우리군이수행한대표적인공공외교사례로서, 우리군의활동이지구촌공동의목표실현에기여함으로써국가적위상제고함과동시에국제사회와의전지구적파트너십형성에기여한활동으로평가할수있다. Ⅵ. 결어 1950년한국전쟁당시국제사회는연합군을파병하여자유민주주의의가치를수호를위한노력과희생을아끼지않았다. 이에한국은베트남전을시작으로국제사회의평화유지, 민주주의수호, 재난구호활동을위한노력에동참하고있으며, 특히 1990 년냉전의해체와함께지역분쟁의성격의빈도가빈번해짐에따라우리정부는이들분쟁지역에대한 PKO, 다국적군파병에있어적극적으로대처하고있다. - 92 -

이러한우리정부의입장과파병지역에서의우리군의눈부신활약의결과파병지역정부, 주민그리고국제사회로부터긍정적인평가를받고있다. 현지주민들의문화를존중하고배려하며주민들이필요로하는활동을효과적으로수행함으로써 다국적군의왕, 신이내린선물, 민사작전의모델 이라는평가를받고있다. 이처럼우리군은파병지역에서의정치적평화유지활동을넘어인도지원및재건지원활동을효과적으로전개함으로써주민들의보다나은삶실현에기여하였다. 또한국제사회의평화유지활동을위한적극적인동참의결과우리군인사들의유엔평화유지활동고위직진출의증가, 분쟁해결을위한국제사회의주요회의에우리나라대표들의참여기회가확대되었고 ( 유재익 2012: 17), 결과적으로탈냉전기이후복잡해진국제관계속에서분쟁국가및전지구적안보와평화유지, 민주주의가치실현을위한국제사회의노력에동참함으로써국제사회의일원으로서성실한역할을다하고있다. 본고에서는탈냉전이후우리군의해외파병을국제기여적측면과국익적측면에서분석하였다. 결론적으로, 탈냉전이후증가한지역분쟁과대규모자연재해로인한인도적참상에대처하기위한국제사회의공동노력에우리군의역할이증가하고있으며, 실제로우리군은그동안의파병현장에서국제사회로부터매우긍정적인평가를받고있다. 하지만 2010년에제정된 UN PKO법 은유엔주도의평화유지활동을목적으로하는파병에대해서만내용과절차를규정하고있어냉전이후다양한목적 ( 지역연합의요청에의한다국적군파병, 재난구호, 인도지원, 국방교류협력등 ) 의수행을위해파병되어온국군의해외파견을제한적으로규정하고있다. 탈냉전기다양한형태의국제분쟁과국제사회에서높아진경제적외교적위상에걸맞는공공외교의수단으로우리군의파병을위해 국군의해외파견활동참여에관한법률안 이조속히제정되어야한다. - 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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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방의정치경제적동학 : 자주국방과안보경제 박민형 ( 국방대학교 ) - 목차 - Ⅰ. 서론 Ⅱ. 자주국방과안보경제 : 이론적논의 1. 안전보장의확보 2. 약소국의능력변화와자주국방 Ⅲ. 한국의자주국방정책분석 1. 한국의자주국방정책개관 2. 박정희정부의자주국방 : 무기체계의국산화 3. 노무현정부의자주국방 : 자위적방위역량구축 IV. 결론 Ⅰ. 서론 대한민국의국방사를연구하기위해서는국방부문의체제구축, 국방력의역사적축적과정, 그리고특히이과정에서이를가능하게했던요인에대한분석은매우중요하다고할수있다. 따라서본장은자주국방 1) 과안보경제 2) 분야에대해논의하고자한다. 왜냐하면현재의국방력건설은국가의제분야특히경제분야와의유기적인관계속에서이루어지기때문이다. 한국의경우도예외는아니다. 1) 자주국방에대한다양한정의가있다. 특히, 조영갑은자주국방을국가의생존을보호하기위한수단을관리, 유지, 조성, 운용하는과정과방법에따라의존적자주국방, 독자적자주국방, 고립적자주국방, 협력적자주국방, 중립적자주국방으로분류하고있다. 하지만본연구에서는한국가가동맹관계속에서독자적영역을넓히는차원에서의의미로자주국방이라는용어를사용한다. 자주국방에대한자세한내용은조영갑 (2007), 한국국방정책의역사적변천과특징정립에관한연구, 군사, 제 64 호참조. 2) 안보경제 와 경제안보 는다른개념이다. 즉, 안보경제 는안보와관련된다양한주제에대하여경제와의상관관계를규명하는연구분야를의미하는반면 경제안보 는국가안보의한분야로써사회안보, 문화안보, 인간안보등과수준을같이한다. 세부적인정의는 국가발전과국민생활을위협하는대내외위협요인들을사전예방하거나적절히관리하고건전한경제구조와성장기반을확립하여적정성장률, 물가안정, 고용안정, 국제수지균형및소득과부의형평성등을유지함으로써국가의생존과번영을보장하고국민들의삶의질을향상시키는국가적노력 이라고할수있다. 국방대학교 (2005), 안보관계용어집, 국방대학교참조. - 97 -

한국의국방력발전의시발점은자주국방의기치를내걸면서라고해도과언이아닐것이다. 즉, 한국국방의역사는빈곤을퇴치하기시작하는한국의경제력과그역사를같이한다. 산업분야에서는이러한자주국방과안보경제를선도한것이바로중화학공업이라할수있다. 따라서한국의자주국방과안보경제및중화학공업에대한연구는한국의국방사연구에있어가장중요한부분이라할수있을것이다. 냉전시대국제정치는국가들에의한군사적대결구도가주요현상이었으나냉전의종식과세계화는국가간의군사적대결보다는다양한분야의복합적질서로의체제변화를가져오고있다. 특히, 급속히진행되고있는세계화는국가들간의상호의존성을증가시켜경제분야의중요성을부각시키고있으며이제경제문제는경제자체만의문제가아닌국가의사활적이익의범주에서도매우큰부분을차지하고있다. 즉, 경제문제는국가안보에직접적인영향을준다고할수있다. 왜냐하면국제사회에서힘과영향력의문제는경제력과직결되기때문이다. 경제력은국력의기본바탕이며경제발전은국가의굳건한안보확립에도지대한영향을준다. 이는경제가쇠락한국가가군사안보적으로패권을유지하는경우가없다는역사적사실이증명해주고있다. 따라서경제와국가안보는불가분의관계에있다고할수있으며경제적성장이굳건한안보를가져오는핵심요인이라고할수있다. 이는국가안보와경제는각각의독립적분야가아니라그연계성이매우강한분야라는것을의미한다. 이러한현상은탈냉전시대는물론냉전시대에도작용했던기본적인원칙이라할수있다. 따라서본장에서는한국의국방사에있어서정치경제적동학을분석하고자한다. 특히, 경제적뒷받침이없으면달성하기어려운자주국방에대한한국군의역사를집중적으로분석할것이다. 잘알려져있다시피한국국방사에는두번의핵심적인자주국방논의가등장한다. 따라서본고는이두번의자주국방논의에대하여구체적인추진배경과이를야기했던요인들을살펴보고, 자주국방이라는정책을추진하는데결정적으로작용한요인을설명할것이다. 이러한과정을진행하기에앞서전체연구의이론적바탕을제공하기위한논의를우선적으로실시하는데이는한국의입장에서한미동맹관계를설명할수있는이론에집중할것이다. - 98 -

Ⅱ. 자주국방과안보경제 : 이론적논의 1. 안전보장의확보 국가안보의문제는 어떠한위협으로부터국가의이익을어떻게지키느냐 하는문제라고할수있다. 그렇다면, 일국이안보를확보하기위한방법에는어떠한것들이있는가? 신현실주의를대표하는케네츠왈츠 (Kenneth Waltz) 는일반적으로국가가안보를확보하는방법을크게두가지로설명하고있다. 자국의능력을향상시키는방법이라고할수있는내적균형 (internal balancing) 과다른국가와의협력관계를통해안보를확보하는외적균형 (external balancing) 이그것이다 (Waltz 1979). 우선, 내적균형은국가경제력의성장, 군사력의증강, 과학기술의발전, 효과적인전략수립등을의미한다고할수있다. 즉, 자국의제분야능력을향상시킴으로써자국의안전을보장하는것이다. 한편, 외적균형은자국의능력증강이외의방법으로안전을보장하는하는방법으로전통적인방법은동맹이라고할수있다. 즉, 2개국이상의국가들이상호안전보장에대한약속을함으로써자국의상대적능력을향상시키는방법이라고할수있다. 그러나최근의국제사회는점차다양화되고위협의양상도다변화되면서이제는어떠한국가도자신의능력만으로안보를보장하는것은어렵게되었다. 즉, 군사적으로최강대국지위에있는국가라하더라도다른국가와의협력없이는자국의안보를보장하기어렵다는것이다. 따라서모든국가들은자국의능력을향상시킴과동시에국가간의동맹이나집단안보체제등다양한안보정책을추진하고있다. 이는이론적으로내적균형과외적균형을동시에추진한다고할수있다. 이런상황속에서각국가간에다양한문제들도발생하고있다. 예를들어동맹관계에서참여국사이에힘의불균형이존재한다면상대적약소국의경우강대국으로부터안보를보장받는대가로자율성을제한받게되는경우가발생한다. 즉, 동맹관계로인한딜레마에봉착하게되는것이다. 이러한딜레마를설명하는가장대표적인이론은 후견-피후견관계 (patron-client state relationship) 이론과 방기와연루의딜레마 (abandonment-entrapment dilemma) 라고할수있다. 우선, 후견-피후견관계이론은약소국과강대국간에이루어지비대칭동맹에서는강대국이약소국의후견인이되어안보적지원을해준다고설명한다. 따라서이관계에서는피후견국은후견국으로부터안보지원을받는대신대외적인정치적, 군사적자율성의위축을감수해야하는딜레마에빠지게된다는것이다. 이이론은이러한딜레마에도불구하고약소국이강대국과의동맹을맺는이유는동맹관계를통해안보 - 99 -

적취약성을감소시키고국제적으로위상을강화할수있기때문이라고설명한다 (Eisenstadt and Roniger 1980). 한편, 강대국과약소국의동맹관계에서약소국은방기와연루의딜레마에봉착하기도한다. 방기는약소국이강대국의지원을필요로할때강대국이명확한안보공약의책임을이행하지않거나군사적지원을제공하지않을때, 심지어는동맹으로부터의탈퇴혹은적국과의협력관계를맺는경우와같이동맹상대국이배반하는것에대한두려움을의미한다. 3) 반면연루란약소국의이해와는상관없거나그중요성이크지않은국제분쟁또는갈등에강대국의이익을위해참가해야하는경우라고할수있다 (Snyder 1984: 466). 이와같은동맹딜레마에봉착한상대적약소국의경우선택은두가지경우로요약할수있다. 첫째, 외교적노력을통해동맹관계를공고히하여상대방으로부터의방기의가능성을줄임으로써외적균형을강화하는것이다. 하지만이럴경우에는방기의가능성은줄어들수있으나연루의가능성은증가할우려가존재한다. 둘째, 자국의국방력을신장시켜스스로자국의안보를지켜나갈수있는능력을향상시키는것이다. 물론이럴경우에는위의경우와반대로연루의가능성은줄어들수있으나방기의가능성이증가할수있다. 즉, 상대적약소국들은어떠한방법을사용하더라도동맹딜레마에봉착하게되는데결국이는약소국들의국방정책은이를극복하기위한과정이라는것을보여준다하겠다. 따라서상대적약소국들이자주국방을추진하는것도동맹딜레마의극복을위한것이라고할수있다. 그렇다면이러한문제가발생한다고해서강대국과의관계를맺고있는약소국들이모두자주국방을추진할수있는것인가? 자주국방을추진하기위해서는어떤요인이가장핵심적으로작용하는가? 이것이중요한문제로남는다. 2. 약소국의능력변화와자주국방 본격적인논의에앞서자주성의의미에대해간략히살펴볼필요가있다. 사전적의미로자주성은 남에게의지함이없이자기힘으로일을처리해가는것 으로정의할수있다. 따라서일반적으로자주성은상대가있는상황에서의미가있다. 상대가없다면의사결정에대한어떠한제약도발생하지않기때문이다. 이를고려했을때국제관계에서의자주성은 한국가가자국의의지에따라정책방향을결정할수있는능력 이라고정의할수있다 (Altfeld 1984: 524; Bennet 1997: 849; Morrow 3) abandonment 에대해 포기 와 방기 라는두가지해석이있다. 포기는어떠한사안에대해전혀행동을취하지않는것을의미하는반면방기는 방관 또는 포기 를포함하는표현으로상황에따라달라질수있다는의미를가지고있다. 따라서저자는후자로표기하였다. - 100 -

2006: 106). 하지만여기서중요한것은상대가있는상황에서완전한자주성을누리는것도거의불가능하다는것이다. 특히상호의존성이증가하고있는현시대에서는더욱그러하다. 따라서국가들이추구하는자주성의확장은국제사회속에서자국의결정력을향상시키는것이지자국이독단적으로모든것을결정하는것을의미하지는않는다. 이러한자주성의개념을바탕으로자주성과안보의관계를살펴보면다음과같다. 안전보장의가장일반적인방법이라할수있는동맹관계에있어서자주성은안보와서로상충하는개념으로사용된다. 특히우리가흔히말하는비대칭동맹관계에서이러한상황은더욱명확하게나타난다. 그렇다면비대칭동맹관계는무엇인가? 비대칭동맹에대한정의는시대와학자에따라다소차이가있다. 제임스모로우 (James D. Morrow) 는동맹의대칭성을설명하기위하여국가들을약소국 (Minor), 강대국 (Major), 초강대국 (Superpower) 으로구분하여같은형태의국가들간의동맹을대칭적관계로, 다른형태의국가들간의관계를비대칭적관계로구분하고있다 (Morrow 1991: 906-907). 하지만이러한구분은모호한면이있다. 특히국가들의국력평가에대한명확한구분이부재한상황에서국가들을세가지의수준으로분류한다는것은쉽지않다. 따라서동맹관계의비대칭성을설명하기위해서는동맹의형성목적을분석할필요가있다. 국가들이동맹을형성하는기본목적은안보라는공공재를확보하는것이다. 하지만강대국과약소국사이에체결된동맹의경우에는이와다를수있다. 즉, 한국가는안보라는목적을가지고동맹을체결하고자하고다른국가는자국의국제사회에서의영향력확대등을목적으로한다면이관계에있어서도동맹관계성립은가능하다. 이럴경우전자의경우가일반적으로약소국일가능성이높으며후자의경우가강대국일가능성이높다. 이렇듯동맹체결국사이에상호다른목적이존재할경우동맹에대한종속성의수준에서차이가발생한다. 일반적으로약소국의목적인안전보장의확보가강대국의목적인영향력확대라는이해관계보다국가존망이라는사활적이익에더깊이관여됨으로써동맹에대한의존성이높아지기때문이다 ( 박민형 2010: 129). 따라서이렇게서로다른목적의교환이이루어지는동맹을비대칭동맹으로정의하는것이더논리적인모순이없다고할수있다. 특히, 냉전시대형성된한미동맹의경우를설명하기위해서는이러한논리가더욱타당하다. 4) 비대칭동맹관계를설명하는데가장많이사용되는동맹이론중하나가바로안보와자주성의상호교환모델 (Autonomy Security Trade-off Model) 이라할수있 4) 이렇게목적의상호교환이이루어지는비대칭동맹은대칭적동맹보다결성되기도쉬우며동맹의수명도평균 30% 정도오래지속되었다는경험적연구도있다. - 101 -

다. 이모델은약소국이강대국과의동맹관계를형성함으로써안보를증진시킬수있으나이에대한대가로정치적자율성을희생하는결과가발생한다는것을설명하고있다. 즉, 이러한동맹관계에서는약소국의강대국에대한안보의존성이약소국의정책결정에대한자주성을제한한다는것이다. < 그림 6-1> 에서보듯이한국가가 S 1 의안보수준과 A 1 의자주성수준을가지고있는 I 1 의상황에있다가자국의자주성을추진하기위해서 A 2 로의이동을추진한다면안보수준은 S 2 점으로하락하는 I 2 상황에놓이게된다는것이이모델의기본적인설명이다. 즉, 안보와자주성은반비례관계라는것이다. < 그림 6-1> 안보와자주성상호교환모델 이러한비대칭동맹을형성시키는요인은여러가지가있을수있으나일반적으로위협에대처할수있는능력, 동맹국으로써의가치, 대안의존재여부등이영향을준다고할수있다 ( 박민형 2010: 130-140). 즉, 위협이존재하나이에대한능력이부족하다면약소국은자국의자주성에대한제한을받아들일수밖에없는것이다. 이주장을역으로살펴보면약소국의능력이증가한다는것은자주성회복을위한유인인될수있다는것을의미한다. 즉, 비대칭동맹내에서약소국의딜레마에직면해왔던국가들이최초동맹의형성시보다자신의능력이향상되어진다면이를어느정도극복하기위해자주국방을추진하게된다는것이다. 이러한자주국방노력을이론적으로설명하면다음과같다. 위에서설명하였듯이안보와자주성상호교환모델은이두가지의재화가반비례관계임을설명한다. 하 - 102 -

지만여기서우리가주목할것은이모델의가정은약소국과강대국의국력을어느한시점에서평가하기때문에상수화시키고있다는것이다. 즉, 약소국과강대국의국력이일정하다고가정하고있는것이다. 하지만이모델에서일국의국력에큰변화가생기게된다면이모델로는동맹관계의변화를설명하는것은제한된다. 우선, 이모델의경우경제학에서말하는무차별곡선을인용한것으로이곡선의기본적의미를살펴볼필요가있다. 무차별곡선은 2가지의재화에대해소비자의효용성 ( 만족 ) 이같은점을연결한선으로그선에서는소비자의만족도는모두같다. 따라서그선상에서이루어지는두재화의조합은소비자에게모두동일한만족도를줌으로써어떠한조합을선택하는지가중요결정사항일뿐이다. 이는물론안보와자주성의재화에대해서도마찬가지이다. 안보와자주성의조합에대해서즉, < 그림 6-1> 에서 I 1 과 I 2 에서의약소국의만족은동일한것이고그들의정책은이중어떠한것을선택하느냐라고할수있다. 하지만여기서우리가주목해야할것은경제학의무차별곡선에서소비자의임금이증가하면이무차별곡선은오른쪽으로이동한다는것이다. 즉, 만족에이르는수준이올라가는것이다. 즉, 소비자의선택이하나의곡선내에서결정되는것이아니라새로운곡선선택의문제로전이되는것이다. 이것을동맹모델에적용해보면, 약소국의능력이증가하면약소국은안보의수준을저하시키지않고자주성을늘리거나, 혹은안보와자주성을모두증가시킬수있는정책을추진할수있음을알수있다. < 그림 6-2> 에서보면약소국은자국의능력이증가함으로써 I 2 또는 I 3 점으로의이동을추구하게되는데 I 2 점은안보수준은그대로유지 (S 1 ) 한채자주성만증가시키는것이며 (A 1 A 2 ) I 3 점은안보도증진시키고 (S 1 S 3 ), 자주성도증가시키는 (A 1 A 3 ) 것이라할수있다 (Park and Chun 2015). - 103 -

< 그림 6-2> 안보와자주성의동시상승모델 다시말해약소국의능력이증가한다면그약소국의정책은두가지재화의단순한조합을통해정책만족도를유지하는것이아니라두재화중어느하나도손실없이만족도를높이는정책을추진하게되는것이다. 이러한과정에서나타나는정책이바로자주국방정책인것이다. Ⅲ. 한국의자주국방정책분석 1. 한국의자주국방정책개관 자주국방이란 자국의국방태세를타국에의존하지않고자주성을가지고자기책임하에실행하는것 ( 김강녕 2003: 196) 또는 외부의침략으로부터국가의기본가치를군사적으로안전하게보위하되, 이를다른나라에의해부당하게통제또는강요됨이없이자국의자조적의지와자립적능력, 자율적행위에기초하여성취및달성하는것 이라정의할수있다 ( 권태영 서주석 1996: 18). 즉, 국방문제에대한자율권을가지고독자적인전략을개발하고이를추구하기위한전력을국가스스로조달할수있는체계라고할수있는것이다. 앞에서언급하였듯한미동맹은전형적인비대칭동맹관계라고할수있다. 따라서상대적약소국인한국은항상동맹딜레마에빠질수밖에없었다. 하지만한국은 1953-104 -

년미국과의동맹을형성한이래눈부신발전을거듭해왔다. 특히경제분야에있어 서는놀라운 기적 이라고일컬어질만큼의성장을해왔다. 이러한경제발전을통한 능력향상은한미동맹관계에있어서좀더자국의목소리를높이고자하는유인으로 작용하였고결국이러한유인은자주국방정책의추진으로나타나게된다. 실제로한국은제 2 장에서논의한것과같이경제적능력의향상으로인해서한미관 계개선을위한노력을지속적으로추진하여왔다. 즉, 한미동맹관계에서한국의자 주성을늘리기위한노력은계속되었다. 이러한경향은대부분의한국정부에서보여 진다. 물론초기이승만정부의경우에는한국의능력이발전이크지않아이러한노 력은많지않았다. 하지만이후정부들에서는이러한노력들을쉽게찾아볼수있 다. 그중노태우정부의경우대통령선거공약으로전시작전통제권전환을제시할 정도로한미관계에있어서한국의역할을확대하고자하는성향을지니고있었다. 당 시한국은 1988 년서울올림픽의성공적개최를바탕으로국가적자긍심이크게성 장하였을뿐만아니라꾸준한경제성장을보이고있었다. 이러한상황으로인해한 국은국제적지위향상은물론한미관계의의존성을줄이고자하는노력을추진하게 되었던것이다 (Wada 2007). 노태우정부는이른바북방외교를추진하였는데이를 통해소련 (1990 년 ), 중국 (1992 년 ) 을포함한동구권공산주의국가들과국교정상화를 이루었다. 이는당시한국이국제사회에서무시할수없는국가로써발전하였고심지 어소련, 중국을포함한공산주의국가들에게도관계개선이필요한국가적위상을 가지게되었다는것을의미하였다. 여기에는특히, 당시경제적능력의발전이가장큰바탕이되었다. 1988 년한국의 경제성장률은 12.4% 에달했는데당시한국은 GNP 기준으로세계 17 위의경제력을 가지고있었다 (Kleiner 2001). 5) 이를바탕으로한국은국방비투자도늘리게되었고 동맹을손상시키지않으면서자주성을증가시키거나혹은동맹의견고성도증가시키 고한국의자주성도늘리는방향으로관계개선을추진하였다. 결국한국은미국의 절대적인의존국에서준독립적국가로 의발전을꾀하였다고평가할수있다 (Hamm 1999: 163). 이후이어진정부들도이러한기조는지속적으로유지되었다. 김영삼정부는 21 세 기선진국으로도약하기위해서세계화정책을추진하였는데, 이과정에서한미관계 의개선도지속되었다. 이에따라김영삼정부는한미관계에있어서한국의역할을 더욱강조하였는데 1994 년에는평시작전통제권이한국군에전환되었던것이대표적 5) 노태우정부당시경제성장률을다음과같다. 연도 1988 1989 1990 1991 1992 경제성장률 (%) 12.4 6.7 9.3 8.4 4.7-105 -

인사례라고할수있다. 1950년 7월전작권이이양된이후 44년만에한국군은평시라는전제조건이있었지만작전권을갖게되었고이를김영삼대통령은 자주국방의새로운전기로제2의창군 이라고평가하기도하였다 ( 국방부 2013: 277). 이후한국군은주도적으로평시경계임무, 초계활동, 부대이동, 군사대비태세강화등을실시할수있었으며특히합참의역할이크게강화되었다. 한편, 김대중정부의경우남북관계의긴장을감소시킴으로써미국에대한의존도를줄이려는노력을실시하였는데대표적인것이햇볕정책의추진이라고할수있다. 또한김대중정부는한미관계에있어서불합리한상황을조정하기위한노력도실시하였는데대표적인것인 2002년연합토지관리계획협정의체결로시작된이른바 연합토지관리계획 (LPP: Land Partnership Plan) 이다. 이를통해한국정부는주한미국기지의통폐합및공여지반환을추진하였다. 이렇듯한국의대부분의정부들은한미관계개선을위해노력하였다. 물론그개선의정도는당시능력의차이에따라다르게나타났다. 하지만이러한활동은모두한미관계에있어서한국의영역을확대하고자하였다는공통점이있다. 그러나이러한정부들이공식적으로자주국방을주장하지는않았다. 지금까지자주국방을공식적으로제기하고추진하였던정부는박정희정부와노무현정부라고할수있다. 물론, 두정부는당시한국의능력향상의수준면이나안보상황면에서다른형태의자주국방을추진하였다. 즉, 그시대의국제적안보환경, 남북한의정세, 국가의능력등의요소들이자주국방정책에영향을주었던것이다. 따라서양정부의자주국방정책에는차이점이있다. 하지만한국의자주국방정책을살펴보기위해서는공식적으로자주국방을제기하였던이두정부에대한집중적분석이필요하다. 따라서자주국방을추진하는데있어바탕이되는요인이경제적성장이라는점을실증적으로입증함으로써자주국방과안보경제와의관계를보여주기위해박정희, 노무현정부가자주국방을추진하게된요인과배경등의주요역사를되짚어보도록하겠다. 1. 박정희정부의자주국방 : 무기체계의국산화 1) 자주국방추진배경 6) 전술하였듯이한미동맹은강대국과약소국간에형성된전형적인비대칭동맹이라 6) 자주국방을추진하게된배경은크게두가지로나누어져연구되고있다. 하나는유신체제를유지및강화시키려는국내적관점이고다른하나는미국의대한방위공약의약화에따른대응이라는국제적관점이다. 본연구는후자의관점에서분석한다. - 106 -

고할수있다. 즉, 한국은미국으로부터일방적인원조를받고있었으며미국은이원조를바탕으로한국에대한영향력을지속적으로유지하였다. 예를들어 1950년대한국에대한국제사회의원조는총 28억달러였는데그중 80% 가넘는 21억달러가미국으로부터의원조였으며 (Levin 2004: 9) 이후에도미국은 < 표 6-1> 에서보듯이한국에대해지속적인원조를실시하였다. < 표 6-1> 미국의대한국원조현황 (1950s-1970s) 단위 : 백만달러 연도 45-54 55-65 66-71 72-75 규모 4,479.2 2,769.4 547.3 9.3 출처 : Robert Castley(1997), Korea s Economic Miracle: The Crucial Role of Japan, London: Macmillan Press, p. 114. 이런상황속에서 1971년박정희대통령은연두기자회견에서 북괴가단독으로무력침공을해왔을때국군단독의힘으로충분히이를제지하고분쇄할수있는힘을빨리갖추어야 한다는주장을밝히면서한국사회의첫번째자주국방론이대두되었다 ( 대통령비서실 1973: 670). 박정희정부가자주국방을추진하는데는여러가지요인이있을수있다. 하지만국방이라는것이기본적으로외부위협에대한대응을목표로하고있다는점을고려할때당시한미동맹이그위협에대한충분한방어수단을제공하지못할수도있다는우려가가장크게작용한요인이라고할수있을것이다. 즉, 당시자주국방은미국의대한국안전보장수준하락우려로인한선택이었던것이다. 따라서이는한국정부의적극적인자주국방의추진이아니라미국의태도변화우려에대한대응적차원의소극적인자주국방의추진이었다고할수있다. < 그림 6-3> 를통해이를설명하면당시안보수준이 S 1 이었다면미국의행동으로인해 S 2 로안보수준이저하될수도있다는우려가결국 A 1 을 A 2 로높이는정책인자주국방을선택하도록하였다는것이다. - 107 -

< 그림 6-3> 박정희정부의자주국방 박정희정부가미국의대한국안전보장에대한우려를가지게된대표적인사건은 1968 년벌어진 1.21 사태, 1969 년발표되어 1970 년미군감축으로이어지는닉슨독 트린이라할수있다. 1968 년 1 월 21 일, 북한의특수부대소속 31 명이청와대습격 과정부요인암살지령을받고, 한국군의복장과수류탄및기관단총으로무장하여수 도권 ( 세검정고개일대 ) 까지잠입하는사건이발생하였다. 이들은최초목표를달성하 는데는실패하였으나도주하는과정에서수류탄을던지고기관단총을난사하는등 무차별적인공격을실시하여한국사회를충격과공포에휩싸이게하였다. 하지만, 북 한특수부대가대통령암살을시도했던이사태에대해미국은별다른반응을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북한의공격적행위에대한남한의보복공격요구를거절하기도하 였다. 한편, 1968 년 1 월 23 일, 미해군정보수집함푸에블로호 (Pueblo) 가북한원산항앞 공해상에서북한으로납치된사건에대해서미국의행동은 1.21 사태때와는사뭇달 랐다. 7) 이사건이발생하자미국정부는즉각국가안보회의를소집하고극동주둔제 5 공군에비상출격대기령을내리는한편항공모함엔터프라이즈호를급파하고 350 대 의전투기를배치하는등의적극적인조치를취하였다. 물론이러한조치는미국과 한국의전략적사고의중심의괴리에서오는결과라고할수있지만, 두사건에대해 서미국의이러한상반된모습은한국정부에게대미불신을불러일으키는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와함께, 닉슨독트린에따른주한미군철수도박정희정부가자주국방을추진 7) 푸에블로호는승무원 83 명 ( 장교 6 명, 사병 75 명, 민간인 2 명 ) 을태우고북한에납치되었다. 납치당시미국은공해상에서납치되었다고주장한반면북한은북한영영을침범하였다고주장하였다. - 108 -

하게하는요인이되었다. 미국대통령닉슨은 1969년 7월 25일괌에서자신의새로운대아시아정책인닉슨독트린을발표하고, 1970년 2월국회에보낸외교교서를통하여닉슨독트린을세계에선포하였다. 그주요내용은미국은동맹국들에게무기와경제원조는제공할수있지만군대는보내줄수없다는것이었으며, 특히, 아시아국가들은미국의존도를줄이고그들의안보문제를독자적으로해결하기바라며미국이또다시월남전과같은사태에말려들지않도록협조해야한다 는것이었다. 8) 이러한닉슨독트린발표는한국에게있어주한미군감축이라는결과를초래하였다. 1970년 3 월 27일윌리엄포터 (William J. Porter) 주한미국대사는주한미군철수계획을일방적으로박정희대통령에게통보하였고이에박대통령은강한불만을표시하였다 ( 조철호 2007:361). 뿐만아니라닉스독트린으로미군의철수가가시화되자한국내야당또한여당과함께 1969년 3월개헌안통과이후 1년간이나중단되었던국회를열어미국의조치에대해우려를표명하였다. 이런것을보았을때한국정부가얼마나이사안을심각하게받아들였는지를알수있다. 하지만결국 1970년 11월 15일미 7사단의기지폐쇄가이루어졌으며미제2사단의재배치도이루어졌다. 9) 이렇듯주한미군철수과정에서의안보불안과미국에대한불신이한국내부에확산되었으며이러한인식은약소국이가지게되는방기의우려를극대화시켰던것이다. 결국이러한상황은박정희정부의자주국방을자극하는핵심요인으로작용하였다고할수있다. 2) 자주국방추진동력 : 빈곤에서의탈피 위에서논의하였듯이박정희정부가자주국방을추진하도록유발한요인은미국의대외정책의변화로인한 방기 우려라고할수있다. 하지만우기가여기서한가지중요하게보아야할것은자주국방을추진하겠다는의지만으로자주국방이추진되지는않는다는것이다. 즉, 이것을뒷받침해줄수있는능력이있어야한다는것이다. 특히, 경제적능력의뒷받침이없다면자주국방자체를추진할수없으며추진한다하더라도그성과는미미할수밖에없다. 8) 닉슨독트린의세부내용은크게 5 가지로정리될수있다. 첫째, 미국은앞으로베트남전쟁과같은군사적개입은피한다. 둘째, 미국은아시아제국과의조약상약속을지키지만, 강대국의핵에의한위협의경우를제외하고는내란이나침략에대하여아시아각국이스스로협력하여그에대처하여야할것이다. 셋째, 미국은태평양국가로서그지역에서중요한역할을계속하지만직접적 군사적인또는정치적인과잉개입은하지않으며자조 ( 自助 ) 의의사를가진아시아국가의자주적행동을지원한다. 넷째, 아시아국가에대한원조는경제중심으로바뀌며미국의과중한부담을피한다. 다섯째, 아시아지역이 5-10 년내에상호안전보장을위한군사기구를만들기를기대한다. 9) 미 7 사단의철수로인해전방서부전선을담당하던제 2 사단은 7 사단이담당하고있던동두천일대로이동하였고미 2 사단이담당하던지역은한국군 1 사단이투입되어판문점을제외한휴전선 155 마일은한국군이담담하게되었다. - 109 -

1961년군사쿠데타를통해정권을획득한박정희대통령은정권초기부터자주적안보체제를확립시키기는어려웠다. 왜냐하면당시한국은자주적역량을갖추지못한상황에서정부가수립됨으로써미국의원조에의존하고있었기때문이다. 즉, 한국은자주국방력을건설하는것이국방정책의기본이었으나경제적, 사회적, 군사적역량의부족으로미국지원에크게의존하고있던상황이었다. 따라서박정희정부는정권초기부터경제성장에모든역량을집중하였다. 당시박정희대통령은근대화를통한경제발전이우선적으로달성되지못한다면안보도보장될수없다는정책적입장을취하고있었다 ( 조영갑, 2007: 276). 10) 이를위해경제기획위원회를설립하여경제개발계획을추진하였고특히, 당시추진되었던경제개발 5개년계획은한국경제의성장에밑바탕이되었다고할수있다. 심지어, 경제발전을위해박정희대통령은엄청난국내의반대에도불구하고일본과의관계를정상화하였으며 11) 그로인해 8 억달러에달하는경제적효과를달성하기도하였다 (Oberdorfer 2001: 34). 뿐만아니라 1970년부터는일본의대한국투자가급증하였고특히기술분야에서한국에많은이익을가져다주기도하였다. < 표 6-2> 1960-70년대한국의외국기술도입현황 시기 일본 미국 1962년-1971년 67 % 23 % 1972년-1981년 66 % 24 % 출처 : Robert Castley(1997), Korea s Economic Miracle: The Crucial Role of Japan, London: Macmillan Press, p. 114. 이렇듯박정희정부는경제개발에집중하였고이러한노력으로인해한국은경제적으로상당한성과를거두기시작하였다. 당시한국의경제성장을두고국제사회에서도기적이라고표현할정도였는데, 세계은행은한국에대해 1965년국민의 40% 이상이극빈자였으나 1980년에는이수치가 10% 미만이되었다 로평가하고있다. (Oberdorfer 2001: 37). < 표 6-3> 은박정희정부시절경제성장을보여주고있다. 60년대후반부터 10% 정도의경제성장률을보이고있으며불과 20년도안되어 1인 10) 1961 년남북한경제력을비교해보면남한의 GDP 는 79 달러인반면북한의 GDP 는 137 달러로북한이남한을앞서고있었다. 11) 한일국교정상화를반대하는대규모시위가 1964 년 6 월 3 일발생하였고이를박정희정부는비상계엄령을선포하여진압하기도하였다. - 110 -

당 GNP 는 17 배이상증가하였다. < 표 6-3> 박정희정부시절경제성장현황 구분 60 62 64 66 68 70 72 74 76 78 경제성장율 (%) 1.1 2.2 9.6 12.7 11.3 7.6 5.3 8.5 13.4 11.0 1 인당 GNP (US $) 79 87 103 125 169 243 318 540 797 1392 출처 : Oh John Kie-Chiang(1999), Korean Politics,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p.62. 이러한경제적성장을바탕으로박정희정부는국방비를증가시키기시작하였다. 자주국방을위해서는경제적지원이필수적이기때문이다. 또한, 방위성금및방위세등을신설하여국방예산의규모를확대하기위하여노력하였다. < 표 6-4> 에서보듯이미국에대한신뢰도가감소하였던 1970년대초중반부터국방비는크게증가하기시작하는데이런추세로인해 1976년부터는한국의국방비가북한을앞지르기시작했다. 이것은그만큼경제적성장이이루어지기시작하였기때문에가능하였으며또한꾸준한국방예산확보가경제성장가능성으로인해가능할것이라는판단때문이기도하였다. 증가된국방예산을바탕으로하여박정희정부는자주국방력을키우기위해다음과같은정책을추진하였다. 박정희대통령은오원철을경제2수석으로임명하여 무기체계의국산화 를위한책임자로임명하였으며, 12) 1970년국방과학연구소 (ADD: gency for Defense Development) 를설립하여무기체계개발은물론군사기술능력확충에노력하였다. 이뿐만아니라박정희정부는 1973년부터전략적기간산업인철강공업, 기계공업, 석유화학공업을비롯한중화학공업을집중육성함으로써국내산업기반의확충은물론방위산업능력확대를위하여노력하였다. 또한 1973년방위사업특별법을통해세금감면및재정지원을실시하여방위산업분야육성을위해노력하였다. 결국이러한노력으로인해 1978년한국은탄도미사일시험발사에성공하였고이것은세계에서 7번째에해당하는성과였다 ( 이기완 2005: 30). 12) 오원철은 1960 년대와 70 년대한국의주요산업정책을입안하고집행하는데주도적역할을담당한인물이었다. 박정희대통령을그를전폭적으로신뢰하여방위산업육성을위한총책임을맡겼다. 그의 공업구조개편론 은박정희대통령이중화학공업에대한집중육성전략의기초가되었으며 1975 년 5 월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와그산하기획단의창설에모티브가되었다. 그자신은 1974 년 2 월부터중화학공업기획단단장을겸임하여한국중화학공업발전에크게기여하였다. - 111 -

< 표 6-4> 박정희정부국방비현황 (1971-1979) 국방비 (10억원 ) 년도증가율총액증가율 (%) 전력투자증가율 (%) 경상운영비 (%) 1971 97.7 30.0 60.0 1972 103.3 5.7 40.0 33.3 60.0 0 1973 181.4 75.6 45.0 12.5 130.0 116.7 1974 294.0 62.1 50.0 11.1 240.0 84.6 1975 349.4 18.8 85.7 71.4 263.7 9.9 1976 699.1 100.1 233.8 172.8 456.3 73.0 1977 917.6 31.3 309.2 32.2 608.4 33.3 1978 1,222.3 33.2 359.8 16.4 826.5 35.8 1979 1,516.2 24.0 465.3 29.3 1,050.8 27.1 출처 : 한국국방비통계 (2007), KIDA. 이와함께 1974년부터는율곡사업이라는방위력개선사업을시작하여군사체계의현대화를추진하였다. 13) 당시율곡사업은조선중기이율곡선생의 10만양병설 을인용하여한국군의자주적인대북억제력을키우겠다는야심찬계획이었다. 박정희정부에서는제1차율곡사업이수행되었는데당시지출된전력투자비는총 3조 6,076 억원이었으며그중에서차관원리금상환액 4,774억원을제외하면실제로전력증강에투자된비용은 3조 1,402억이었다. 14) 이러한투자를바탕으로당시노후장비는대폭교체되었고, 지상기동및화력장비는현대화되었으며항공및방공전력등이강화되어전체적인전력이크게강화되었다 ( 서우석외 2015: 88). 이렇듯박정희정부가방위산업과방위력개선사업에심혈을기울인것은자주국방에대한강한의지의표현이라고할수있으며이러한의지는성장하고있는경제력을바탕으로구현될수있었다. 물론당시자주국방은무기체계국산화를지향하는수준이었지만한국의국방사에있어매우의미있는과정이었다고할수있다. 13) 제 1 차율곡사업은 1974 년부터 1981 년까지시행되었고 2 차율곡사업은 1982 년부터 1986 년까지진행되었다. 그후이사업은방위력개선사업으로명칭이변경되어현재에이르고있다. 14) 군별로는육군에 1 조 3,601 억원 (43.3%), 해군에 4,907 억원 (15.8%), 공군에 6,892 억원 (22%), 공통사업에 5,939 억원 (18.9%) 이사용되었다. - 112 -

3) 소결론 박정희정부는경제개발에역점을두고정부정책을수행하였다. 하지만이런상황속에서일련의안보를위협하는사건들로인해비대칭동맹의약소국이었던한국은강대국인미국의안전보장신뢰도에대한우려를하게되었다. 결국이러한우려로인해박정희정부는자주적인역량을강화하는정책을추진하게되었고이것이바로자주국방이라는형태로나타나게되었던것이다. 즉, 박정희정부는자발적으로자주국방정책을시도했던것이아니라강대국으로부터의 방기 의우려로인해자주국방을추진하였던것이다. 따라서이는자주국방의소극적인형태라고할수있다. 여기서한가지중요한점은박정희정부가자주국방을추진할수있었던가장중요한원동력은바로경제력이라는것이다. 만약 1950년대또는 1960년대에똑같은상황이발생하였다면자주국방정책을추진한다는것은불가능했을것이다. 즉, 경제적뒷받침이없는정책추진은어렵다는것이다. 따라서당시자주국방을추진할수있었던것은빈곤에서벗어나어느정도경제적토대가마련되었기때문에가능하였다고할수있으며이는자주국방과경제력의관계가얼마나밀접한지를보여준다고할수있다. 2. 노무현정부의자주국방 : 자위적방위역량구축 1) 자주국방추진배경 한국의국방정책의첫번째목표는대북억제력확보라고할수있다. 이를위하여한국은자체능력을지속적으로증강시키고한미동맹을통해부족한부분을보완하는정책을꾸준히추진하여왔다. 이런상황속에서노무현정부가자주국방을다시금주장하게된것은한국군주도로충분한대북억제력을확보할수있다는자신감이라고할수있다. 이것이박정희정부와노무현정부가추진한자주국방정책이가장큰차이점이라고할수있다. 즉, 박정희정부시절의자주국방은국가생존을위한결정이라면노무현정부시절의자주국방은국제사회에서의높아진한국의위상에걸맞는군사적능력을가지기위한선택이었다는것이다. 따라서이는박정희정부의자주국방보다는능동적이라고할수있다. 15) 15) 노무현대통령은 자주국방은미국의전략구상변화에따라부득이하게따라가는것이아니라시대적요구에따라추진하는것 이라고언급하였다. 이렇듯노무현정부의자주국방추진은한국정부의의도가다분히반영된것이라고할수있다. 자세한내용은이종석 (2014), 칼날위의평화, 개마고원, 참조. - 113 -

2003년 8월15일노무현대통령은제58주년광복절경축사에서 우리국군은그동한꾸준한성장으로능히나라를지킬만한규모를갖추었음에도불구하고아직독자적인작전수행능력과권한을갖지못하고있다 면서 우리의안보를언제까지미군에의존하려는생각도옳지않다 라고주장하였다. 대통령의이러한주장은다시한번한국사회에자주국방에대한논의를불러일으켰다. 즉, 박정희정부이후한미관계를고려하여암묵적으로사용하지않아왔던자주국방이라는주제가다시금정책의테이블에올라오게된것이다. 물론당시의자주국방은박정희정부의그것과는다르게이른바 협력적자주국방 이라는기치를내걸고있었다. 협력과자주는사뭇상반된의미로사용되는단어이지만당시노무현정부는한미동맹의바탕하에자주성을높인다는목표를보여주었다. 이는제2장에서설명하고있는 < 그림 6-2> 를통해알수있듯이자주성과안보라는두가지재화를동시에증진시키고자했던것이다. 당시국방부가제시한협력적자주국방의개념은이를잘설명하고있다. 협력적자주국방이란국가주권을수호할수있는방위능력을구비하여한국이처한전략적환경속에서안보의주체적당사자가되고자하는국가의지구현의일환으로서, 자위적방위역량의기반위에, 한미동맹및대주변국안보협력을보완적으로병용하여안보목표를달성하고자하는것이다 ( 국방부 2003: 13) 협력적자주국방은크게 4가지전략적가정에서출발한다. 첫째, 북한의전통적위협은줄어들지만비대칭적위협은지속될것이다, 둘째, 북한내급변사태발생으로인한군사적충돌가능성은여전히존재한다, 셋째, 지역내잠재적군사적위협은증가할것이며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의군사적충돌가능성도증가할것이다, 넷째, 테러에대한대응은국제사회에서매우중요한안보적주제로지속될것이며이에따라한국은국제적역할을요구받게될것이다 라는것이다. 당시노무현정부가자주국방을목표로제시한핵심요인에대해서는많은논의가있을수있으나동맹관계의변화측면에서요인을살펴보면미국의전략변화가가장중요한요인중하나라고할수있다. 즉, 한미동맹에서상대적약소국으로써의계속되는우려가주된원인이라할수있다. 당시미국은노무현정부출범직후주한미군감축, 용산기지와미2사단이전등을추진하였다. 따라서노무현정부의자주국방은한미동맹의변화에능동적으로대처할수있는능력을구비하기위한전략적접근의일환이었다고평가할수있다. 이를당시노무현대통령의발언이잘보여주고있다. 2003년 8.15 경축사에서노무현대통령은 미국의안보전략이바뀔때마다한국의국방정책이흔들리고국론이소용돌이치는혼란을반복해서는안된다 고주장하 - 114 -

였다 ( 이종석 2014). 물론당시자주국방에대한논의는전시작전통제권문제와결부되어많은논쟁을불러일으키기도하였다. 16) 하지만노무현정부는자주국방의일환으로전작권을전환함으로써전쟁과평화의갈림길에서전쟁을억제하고한반도의평화를선택할수있는능력을가질수있다고판단하였던것으로보인다 ( 김창수 2015: 52). 그렇다면미국의대외전략이당시어떻게변화하였는지살펴보자. 당시미국의대외전략은 9.11 테러로인해크게변화하였다. 즉, 당시미국부시행정부는국방태세를근본적으로재점검하였는데이러한작업의일환으로대대적인해외주둔미군의역할에대한재조정을실시하기도하였다. 특히, 2003년 5월발표된해외주둔미군기지재배치계획 (GPR: Global Defense Posture Review) 에의하면기지를전략기지 (strategic base), 전진작전기지 (forward operating base), 전진작전지역 (forward operating locations) 등으로구분하였는데한국은이중전진작전기지로분류되었다. 이는영구주둔이아닌순환근무형태로미군이향후주둔할것을시사하는의미가있었다. 미국의이러한전략변화는한국에게있어새로운대비가필요하다는인식을갖게하였고이것은약소국으로써발생할수있는 방기 의우려에기인하였다고할수있다. 즉, 이러한우려가노무현정부로하여금자주국방정책을표방하게하는요인이되었다고할수있다. 이뿐만아니라노무현정부는 연루 에대한우려도하고있었다. 미군의전력변화로주한미군의성격이기동군화된다면이로인해주한미군은분쟁에개입될가능성이높으며, 한국은다양한형태로분쟁에연루가가능할지도모른다는것이다. 노무현정부의 연루 에대한우려가가장잘표출된사건은바로이라크파병문제였다. 당시이라크전쟁은전세계적으로명분이약한전쟁으로평가되고있었는데, 그럼에도불구하고노무현정부는이라크파병을결정하였다. 심지어당시여론도이라크파병을반대하고있었다. < 표 6-5> 에서보듯이당시실시된대부분의여론조사에서과반수이상의국민이이라크파병에대해반대하였다. 이러한경험은노무현정부에게미래에도다른분쟁에연루될수있다는우려를가지게하였다. 이때문에 2005년 3월에있었던공군사관학교졸업식축사에서노무현대통령은 분명한것은우리의의지와관계없이우리국민이동북아시아분쟁에휘말리는일은없으며, 이는어떠한경우에도양보할수없는확고한원칙으로지켜나갈것 임을천명하였다. 결국동맹관계에서발생할수있는이러한상황들은노무현정부가자주국방을추진하도록하는요인으로작용하였다고할수있다. 16) 노무현대통령의작통권에대한인식은 2006 년 8 월 9 일연합뉴스와의인터뷰에잘나타나있다. 작통권이야말로자주국방의핵심이며, 자주국방이야말로자주국가의꽃이다. 남북간긴장완화를위한군사협상을할때도반드시작통권을갖고있어야대화를주도할수있다. - 115 -

< 표 6-5> 이라크파병에대한여론 언론사 찬성 (%) 반대 (%) 중앙일보 (2003.9.16.) 35.5 56.1 KBS (2003.9.20.) 39.3 60.5 MBC (2003.9.20) 42.0 55.0 조선일보 (2003. 9.22.) 36.9 54.7 한계레 (2003. 9.22.) 38.2 57.5 출처 : Bae, Y. I.(2006), The ROK-US Alliance and Autonomy, YS University, p.168. 2) 자주국방추진동력 : 경제강국으로의성장 노무현정부는자주국방력강화를위해우선적으로국방개혁을시행하였다. 특히인력중심으로이루어진군구조를기술집약형군구조로변화시키기위해노력하였다. 이를위해노무현정부는 2005년 9월 13일 국방개혁 2020 이라는전력증강계획을발표하였다. 이계획의핵심은효율적인지휘구조개편, 간부위주병력구조개선, 전투능력향상을위한전력증강등이었다. 즉, 당시국방개혁의핵심은병력은줄이지만최신장비를도입하여대북자주적억제력을향상시키는것이었다. 예를들어, 한국군의최대취약점인정보수집능력보강을위해공중조기경보기, 무인정찰기등감시정찰능력확보, C4I 등지휘통제자산확보, 현무미사일등정밀타격능력확보등이포함되어있었다. 2006년 9월 28일에는육군유도탄사령부가창설되어북한군이보유하고있는재래식전력중가장큰위협중하나인장사장포및스커드미사일에대비하는무기체계인현무미사일, ATACMS 등을배치하였다. 노무현정부가한미동맹에있어서한국의역할을증대시키기위한노력을잘보여주는것이바로주한미군이기존에담당하고있던주요임무를한국군으로전환한것이었다. 노무현정부는미국과합의각서를통해 10대군사임무전환을추진하였는데판문점공동경비구역경비및지원, 대화력전, 후방지역제독작전, 해상대특작부대작전, 공 지사격장관리, 주 야간탐색구조, 근접항공지원통제, 신속지뢰설치, 주보급로통제, 작전기상예보등이었다. - 116 -

< 표 6-6> 10대군사임무전환 임무 최초계획완료시기 ( 년. 월.) ( 년. 월. 일 ) 비고 판문점공동경비구역경비및지원 2003. 11. 2004. 10. 31. 한국군임무수행 대화력전수행본부 2005. 8. 2005. 10. 1. 한국군제3군사령부로전환 후방지역제독작전 2004. 8. 2004. 8. 31. 한국군제2작전사령부로전환 해상대특작부대작전 2006. 8. 2006. 1. 19. 한국공군과공격헬기로임무수행 공 지사격장관리 2005. 5. 2005. 8. 31. 한국공군으로전환 주 야간탐색구조 2006. 8. 2008. 9. 30. 한국공군장비보강후임무전환 근접항공지원통제 2006. 8. 2006. 8. 31. 한국공군서부 ASOC로전환 신속지뢰설치 2005. 8. 2005. 8. 31. 한국군제3군사령부로전환 주보급로통제 2006. 12. 2005. 10. 1. 한국군제2작전사령부로전환 작전기상예보 2006. 12. 2006. 12. 31. 한국공군제736기상대대로전환 출처 : 국방부 (2013), 한미동맹 60년사, 국방부, p. 321. 그렇다면이러한노무현정부가다시금자주국방을추진할수있었던동력은어디에서나왔는가? 노무현정부가협력적자주국방정책을추진하게된결정적원인은한국의힘만으로충분히대북억제능력을갖출수있다고인식하였기때문이다. 이러한인식을갖게되는데가장핵심적인영향을준것은바로경제적능력이라할수있다. 즉, 경제성장으로인한자부심이미국에대한의존성을줄이려는정책으로발현되었다고할수있다. 당시노무현정부는 1974년율곡사업을시작한이후 2003년도까지총 68조 4,488 억원을전력증강분야에투자하였으나아직까지북한을독자적으로억제할수없다는사실에의문을제시하였다. 17) 즉, 북한과의단순한군사력비교가아닌경제를기반으로한종합적인전쟁수행능력을고려했을때당시북한에비해압도적인경제력을지닌남한이북한을충분히억제할수있다는것이었다. 당시한국은세계 10위내외의경제강국이었다. 특히, 이러한경제적격차는국방비격차를수반하기때문에북한억제는충분하다고판단하였다고할수있다. 하지만, 당시노무현정부가추진하고자했던것을모두충족시키기위해서는 5년동안 151조원, 15년이되는 2020년까지 289조원이순수한전력증강에만필요하였으 17) 2002 년한국국방연구원이시행한연구에따르면, 주한미군을제외하고한국군단독의종합전쟁능력을산출해본결과전력지수상으로북한군에비해전차전력은 77%, 포병전력은 52%, 장갑차는 101%, 해상전력은 107%, 수중전력은 40%, 전투기전력은 106.5% 수준으로평가되었다. - 117 -

며여기에경상운영비까지포함하면 691조원이필요한것으로분석되었다. 이를위해서는매년국방비를 10% 이상증가해야된다는결론에이르게되었으며이로인해많은반대에부딪치게되었다. 따라서계획된대로자주국방을추진하는것은사실상어려웠다. 그러나여기서중요한것은노무현정부가이러한계획을추진하게된요인이경제력에대한자신감이바탕이되었다는것이다. 당시한국의경제는세계 11-13위권으로세계적수준이었으며 18) 이러한경제적능력으로인해 < 표 6-7> 에서볼수있듯이남북한의 10년간국방비격차는한국이 5배에서 10배이상지출하고있었다. 또한당시북한군사력에대한평가는경제사정의악화로군장비에대한현대화및최신화를하지못하고있으며에너지부족및외화난으로인해운영능력도감소하고있다는것이주를이루고있었다. 따라서이러한상황은노무현정부에게한미동맹에있어서한국의역할이확대되어도한국이충분히감당할수있다는생각을주게되었다고할수있다. < 표 6-7> 남북한군사비지출비교 단위 : 억달러 구분 북한국방비남한국방비북한공식발표남한국방부추정남한 1991 20.8 51.3 101.9 1992 21.0 55.4 107.7 1993 21.5 56.2 114.8 1994 21.9 57.6 125.3 1995 62.4 143.6 1996 57.8 152.1 1997 47.8 145.5 1998 13.3 47.8 98.6 1999 13.5 47.8 115.6 2000 13.7 50 128.0 2001 14.1 50 119.2 2002 14.9 50 130.8 2003 17.7 50 146.9 출처 : 국방백서 2004, p. 253. 18) 2007 년세계은행자료에따르면 2002 년한국은전세계 GDP 순위에서 11 위를차지하였으며, 2004 년에는 12 위, 2006 년에는 13 위를차지하였다. - 118 -

3) 소결론 노무현정부가 협력적자주국방 을추진하게된배경은 9.11 테러이후미국의전략변화로인해한반도에서미군이철수또는감축하더라도대북억제에문제가없도록하겠다는점이라할수있다. 즉, 이는동맹관계에서의방기의우려가작용했다고볼수있다. 하지만이와함께주한미군의역할변화로인해한국이원치않는분쟁에휘말릴수있는연루의가능성또한중요요인으로작용했다. 특히, 노무현정부의자주국방이박정희정부와구분되는것은미국의변화에대한어쩔수없는선택이아니라한국이적극적으로동맹딜레마를벗어나기위해추진했다는점이다. 또한박정희정부의경우 무기체계의국산화 수준을추진하였다면노무현정부는 자위적방위역량 의강화를위해노력하였다. 이러한목표의차이는당시양정부의경제적능력의차이에서기인하였다고할수있다. 즉, 박정희정부의경우빈곤에서벗어나는수준에있었기때문에무기의국산화추진이당시에추진할수있는수준의정책이었고, 세계적수준의경제수준을가지고있던노무현정부는이보다더나아간목표를제시하게되었던것이다. 본연구에서중요한것은자주국방의성공여부가아니라어떠한배경으로자주국방을추진하였으며어떠한요인이이를가능하게하였는가의문제이다. 따라서노무현정부의경우도협력적자주국방을추진할수있었던것은당시세계적수준으로도약한한국의경제력이바탕이되었다고할수있다. 즉, 경제적능력의비약은자위적대북억제력건설측면에서노무현정부에게그가능성을긍정적으로볼수있도록유도한핵심요인이었다고할수있다. 뿐만아니라이러한경제적능력은미국과의관계에있어서도좀더대등한관계를추진하고자했던동인으로작용하였던것이다. Ⅳ. 결론 21세기에는사상과이념에따른대립과전쟁, 초강대국의핵전쟁과군비경쟁등의가능성이점차줄어들고있는반면세계화, 개방화에따른경제위기와통상분쟁, 산업화와정보화에따른환경파괴및정보전등새로운안보이슈들이부각되고있다. 이는경제와안보가연계되어있다는사실을점차인식하게해주고있다. 이러한시점에서과거한국군의정치경제적역사를되짚어보는것은안보개념의확대에대한이해를넓히는매우의미있는작업이라할수있을것이다. 또한미래대한민국의국 - 119 -

방력건설방향설정에도큰의미가있을것으로사료된다. 즉, 자주국방이기치를내걸고추진해왔던한국의국방발전의과정을살펴보면서당시의경제상황과현재의경제상황을비교함으로써미래한국의국방이나아가야할방향을설정하는데하나의지표가될수있는함의를준다고할수있다. 현시대처럼국제화가진행되고있는상황에서자주국방이란현실적으로정치적수사에불과할수있다. 각국가및지역간상대적의존성이높아짐에따라자국의힘만으로자국의안보를지키는것이불가능하기때문이다. 따라서많은국가들은자국의힘을키우는것과동시에동맹, 다자안보등을통해다층적인안보확보를위해노력한다. 하지만여기서우리가명심해야할것은일국의안보를키우기위해서는우선적으로자국의능력이바탕이되어야한다는것이다. 그렇지않는다면국가주권에대한문제해결시자주적선택이제한된다는것을우리는지난역사를통해직접경험해보았다. 현재한국은세계경제 10위권의대국으로성장하였다. 이러한경제적규모는이에부합하는군사력수준을요구하기도하지만군사력수준을높일수있는바탕이되기도한다. 물론국가의모든예산이국방비에투입될수만은없다. 또한사회가다원화될수록복지등에대한국민적관심이높아져국방예산의확충이어렵기도하다. 하지만, 경제적능력의향상을바탕으로한국의안보를스스로지키기위한노력을해왔던한국의국방사는적정수준의자주적능력이얼마나중요한것인가를잘보여주고있다. - 120 -

참고문헌 권태영 서주석 (1996), 자주국방개념연구, 한국국방연구원. 국방대학교 (2005), 안보관계용어집, 국방대학교국방부 (2003), 자주국방과우리의안보, 국방부. 김강녕 (2003), < 자주국방비젼과국방비적정규모 >, 한국군사, 제17호. 김창수 (2015), < 자주성에대한역사적논의와한국이추구할현대적자주의개념 >, 내일을여는역사, 제3호. 대통령비서실 (1973), 박정희대통령연설집제3집, 대통령비서실. 박민형 (2010). < 한미동맹의비대칭성형성요인과극복전략 >, 국방정책연구, 제26권제3호. 이기완 (2005), 동맹의정치학, 매봉. 이종석 (2014), 칼날위의평화, 개마고원조영갑 (2007), 한국국방정책의역사적변천과특징정립에관한연구, 군사 제 64호. 조철호 (2007). < 박정희의자주국방과핵개발 >, 역사비평. Don Oberdorfer(2001), The Two Koreas: A Contemporary History, London: Warner Books. D. S. Bennett(1997), Testing Alternative Model of Alliance Duration, 1816-1984, American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Vol. 41, No. 3. M. F. Altfeld(1984), The Decision to Ally: A Theory and Test, Western Political Quarterly, Vol. 37. Glenn H. Snyder(1984), The Security Dilemma in Alliance Politics, World Politics, Vol. 36, No.4. Hamm T.Y.(1999), Arming the Two Koreas: State, Capital and Military Power, New York: Routledge. James D. Morrow(1991), Alliances and Asymmetry: An Alternative to the Capability Aggregation Model of Alliance, American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Vol 35, No.4. Kenneth N Waltz(1979), Theory of International Politics, New York: Addison-Wesley. Kleiner Juergen(2001), Korea: A Century of Change. London: World Scientific. - 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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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위산업의역사 이준구 ( 국방민군사업발전협회 ) - 목차 - Ⅰ 한국의국방전략과방위산업발전과정 1. 국방체제정립과방위산업태동 (1948~1973) 2. 율곡사업추진과방위산업정착 (1974~1992) 3. 국가경제의도약과방위산업성장 (1993~2000년이후 ) Ⅱ. 한국의방위산업과국가경제발전 1. 방위산업의민군협력및국제협력 2. 방위산업의국가경제발전기여 Ⅲ. 한국방위산업의미래발전전략 1. 한국방위산업현황및국제적위상 2. 한국국방전략과방위산업발전전략 Ⅰ. 한국의국방전략과방위산업발전과정 1. 국방체제정립과한국방위산업태동 (1948~1973) (1) 건국초기국방전략과국방체제정립 대한민국국방체제는건국과함께 연합국방 ( 聯合國防 ) 이라는국방전략이결정되면서정립되기시작했다. 초대이승만대통령은정부수립및대통령취임후 반공을국시 로하였으며, 초대국무총리겸국방부장관이범석장군은 연합국방 ( 聯合國防 ) 을시책의기본으로삼아강력한지상군육성에중점을둘것을밝혔다. 1) 이범석장군은연합국방을토대로공산주의세력확장에효과적으로대처하기위한군사외교활동으로서 미국을중심으로자유진영의군사역량을규합하고, 전쟁발발시미군의작전협력을받는공동작전 을구상하고, 국군창설을위하여사병제일주의정병육성과사상통일에의한국군이념구현및반공민주정신함양을추진하였다. 2) 이에따라 1) 국방군사연구소 (1995), 1945~1994 국방정책변천사, 국방군사연구소, p. 1. - 123 -

1948 년 11 월 30 일국군조직법이공포되었으며국방부장관과차관, 국방부본부및 각국이설치되었고참모총장과차장을두어육군과해군부대를지휘토록하였으며학 교기관을설립하여양병 ( 養兵 ) 에집중함으로써국군의조직 편성 교육훈련등이제도 화되기시작하였다. 이승만대통령과이범석국방장관은 1948 년국군창설과함께국방전략인연합국 방 3) 구현을위하여미국의군사지원을최대한이끌어내는한편, 주한미군철수를가 능한지연시키는것에노력을집중하였다. 그러나미국은당시한반도전략상황을크 게오판함으로서 4) 주한미군은군사고문단만을남기고 1949 년 6 월 29 일완전히철수 하였으며, 1950 년 1 월 12 일에는미국극동지역방어선에서한반도가제외된다는애 치슨라인이발표되었다. 5) 그리고 1950 년 6 월 25 일북한의전면남침으로인해한국 의연합국방전략은한반도에서전쟁을억제하는것에완전히실패하게되었다. 그러나한국은 1954 년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에성공함으로써새로운국방전략을 추진할수있는기반을마련하게되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 년 10 월 1 일 미양국이정식서명하였고, 1954 년 11 월 18 일조약이공식발효되었다. 1950 년한미 상호방위조약이체결되기까지이승만대통령이추진했던정치및외교, 군사적조치 는한국국방의미래를정확히통찰하고국가통수권자의사명을완수한전략적결단 의결과라고평가할수있다. 그전략적결단과정을보면 1950 년 7 월 14 일 UN 사령 관에게한국군작전지휘권공식이양, 1951 년 7 월 10 일최초휴전회담개성에서개최, 1953 년 4 월 27 일클라크유엔사령관에게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요구 ( 휴전을위한 조건으로공식요구 ) 6), 1953 년 5 월 31 일휴전반대 ( 국토통일을규정하지않는여하한 국제협정도반대선언 ), 1953 년 6 월 3 일한미상호방위조약휴전전체결제의, 1953 년 한국군단독북진성명발표, 6 월 18 일반공포로석방, 7 월 27 일휴전협정체결 ( 한국 서명거부 ), 등대통령으로서할수있는최고의결단을실행하였다. 따라서이승만 정부의연합국방전략은 6.25 전쟁발발로인해전쟁억제에실패하였으나한미상호 방위조약이라는새로운한미동맹체제를구축함으로써미래국방을확고히할수있 는기반을마련할수있었다. 즉, 이승만대통령은국방전략으로연합국방을선택하고 1950 년대전쟁의혼란속에서도국가의모든노력을집중하여한미상호방위조약을 2) 국방부 (1954), 국방부사제 1 집, 국방부, p. 161. 3) 국방부 (1984), 국방사 1945. 8-1950. 6, p. 147. 4) 국방군사연구소 (1995), pp. 59-61. 당시미국방성한반도정보판단은다음과같았다. 1. 국제관계상소련이북한군을남침시킬가능성은없다. 2. 중공군이남한을공격할가능성은전혀없다. 3. 북한의군사력과군장비는남한에비하여열세임으로북한이자기의사로는남침을기도하지못할것이다. 4. 남한군은수에서나장비에있어서북한군에비해우세하다. 5) Dean Acheson(1950. 1. 12.), "Speech on the Far East". 미국무장관애치슨은 1950. 1. 12 일프레스센터연설에서미국극동방위선은일본 - 유규열도 - 필리핀이라고발표하였다. 이발표에의하면일본은반드시방어해야할지역으로, 그리고한국과대만은극동방어선에서제외된지역이었다. 6) 국방부 (1982), 국방사 1950. 6 1961. 5, p. 81. 한 - 124 -

체결함으로서한국을미국의동맹국으로만드는것에성공하였다. 이러한한미동맹은연합국방체제를근간으로한국의산업근대화를성공적으로달성하였고선진국으로발전하는경제기적을이룩할수있었던것으로평가되고있는것이다. 그럼에도국가의통합된조직적인국방정책추진체계는 1960년대중반까지는정립되지못하였으며 1966년에비로서국방기본정책이최초로수립되기에이르렀다. 7) 박정희대통령은 1963년제3공화국을출범시키면서국정목표를 조국근대화와자립경제기반구축 에두었으며, 반공을국시로한, 한미동맹에의한안보강화와수출지향형경제발전및성장 을중점적으로추진하였다. 이를뒷받침하기위한국방정책은첫째한미동맹에기초한미국군사협력증진과한국안전보장체제의강화, 둘째미국의베트남파병요청에따른 1964년파병정책시행, 셋째베트남파병의보상으로한국군현대화계획의추진, 넷째북한의간첩침략및도발대비강화, 다섯째국가경제발전을위한군의국토건설및대민지원사업등을추진하였다. 8) 이와같이박정희대통령은이승만대통령의연합국방과한미동맹의국방전략을이어받아, 이를근간으로한국가경제발전과국군현대화국방정책을체계적으로추진할수있었으며방위산업은이때부터본격적인태동이시작되었다. (2) 한국방위산업의태동 한국의방위산업은박정희대통령이국가전략의핵심목표로베트남전파병을활용한국군현대화를결정함으로써방위산업육성이본격추진되기시작하였다. 박정희대통령은 1964년베트남파병을추진하였으며이를계기로삼아미국지원하에한국군현대화를추진하고있었다. 그러나 1968년 1월 12일북한무장공비청와대습격사건, 1월 23일미국정보군함푸에블로호피랍사건, 11월 2일울진 삼척지구무장공비침투사건, 1969년 4월 15일미국 BC-121기격추사건, 7월닉슨독트린발표와주한미군철수추진등일련의안보위기사태를겪으면서국가안보를미국에만의지한채추진되는 선 ( 先 ) 경제개발, 후 ( 後 ) 자주국방 의정책은근본적인문제가있음을절감하고, 그우선순위를바꿔국방산업육성을위한중공업, 즉자주국방을위한방위산업육성을핵심정책추진과제로채택했던것이다. 9) 박정희대통령은이에따라 1970년 1월 19일국방부연두순시에서방위산업의육성과국방과학기술의연구가시급함을강조하고, 2월 2일에는국방부에방위산업전 7) 국방구사연구소 (1995), pp. 32-35. 8) 국방군사연구소 (1995), p. 128. 9) 서우덕 신인호 장삼열 (2015), 한국방위산업 40 년, 끝없는도전의역사, 한국방위산업학회 ( 플래닛미디어 ), p. 30. - 125 -

담부서를설치할것을지시하였다. 또한 박정희대통령지시에의거 1970년 8월 6 일대통령령제5267호로직제가공포되어국방부예하국방과학연구소가창설되었고, 1972년 12월국방부군수국산하에군수산업육성담당관실을설치하였으며, 1971년 4월착공된 M-16 소총공장건설이 1972년에완공되면서자주국방력배양을위한현대식방위산업이명실공히태동되기시작하였다. 10) 현대국가의방위산업은무기생산기술과전문인력, 이를생산할산업기반, 그리고충분한국방예산이필수적으로요구된다. 1970년대초한국은가내수공업수준으로서세가지어느하나도지원이보장된것은없었다. 이러한근본적인문제를해결하기위해많은시행착오를거치면서, 박정희대통령은 방위산업과중화학공업동시발전전략 을세우고이를직접관리하기위해청와대에방위산업정책직접통제조직 ( 소위 Control-Tower) 을만들게하였다. 1971년 11월 9일경제기획원에서방위산업건설을위한 4대핵공장건설 11) 추진이진척이없다는보고를받은박정희대통령은방위산업육성과중화학공업육성을위한특단의조치로국방과학연구소에번개사업 12) 을추진할것을지시하고청와대에경제제2비서관실을만들도록했다. 1971년 11월 10일에오원철차관보를경제제2비서실수석에임명하고방위산업및중화학공업을건설을관장케했다. 13) 오원철은방위산업과중화학공업동시발전전략을제안한바로그사람이었다. 14) 오원철은 병기도분해하면부품 임으로이러한부품을능력있는중화학민간기업에서만든후지명된기업에서조립하여무기를만들면될것으로판단한것이다. 이러한방침하에박정희대통령의지시로경제2비서관실에서추진한첫번째임무는번개사업과병기개발에대한기본방침을작성하여국방부와국방과학연구소에하달한것이었다. 즉, 예비군 20개사단을경장비화하는데필요한육군기본화기및장비생산을목적으로 1단계로미군무기를모방생산하며, 5개년계획을수립하여방위산업육성을위한연차별계획을중점추진한다는것이골자였다. 15) 이와같이오원철 16) 수석은방위산업추진업무를전담하며그기반을다지는데중 10) 국방군사연구소 (1995), pp. 200-201. 11) 4 대핵공장은주물선 ( 鑄物銑 ) 공장, 특수강공장, 중기계공장, 조선소를말한다. 박정희대통령은 1974 년율곡사업이본격추진되기이전에경제기획원중심으로방위산업육성을위해가장기반이되는 4 대핵심공장건설을추진하였으나기술과자금획득문제로실패하였으며, 이후청와대경제 2 수석비서관실이직접통제하여추진하도록하였다. 12) 번개사업은 1970 년대와 2010 년대두차례진행되었다. 1970 년대번개사업은 71 년과 72 년 2 차에걸친사업이며주로 M2 카빈과 M1 소총, 60mm 박격포, 3.5 인치로켓포, 수류탄, 대전차지뢰등보병의기본병기가대상이었다. 13) 한국방위산업학회 (2015), p. 33. 14) 오원철수석은상공부와청와대에근무하던김광모, 이석표, 권광원, 김병원을국장급 (2 급 ) 청와대비서관으로임명하고최태창을개인비서로임명, 청와대경제제 2 비서관실을조직하였다. 15) 한국방위산업학회 (2015), p. 33. 16) 오원철은 1928 년황해도풍천태생으로 1951 년서울공대화공과를나왔고, 1957 년공군소령으로 - 126 -

추적역할을수행했다. 병기개발기본방침, 방위산업육성, 공업단지조성, 기능인력양성, 각종무기국산화사업등우리나라중화학공업과방위산업발전을위한중요한의사결정이나사업추진은대부분오수석의손을거쳐추진되지않은사안이없었을정도였다. 율곡수석 으로통한그는박정희대통령이 오국보 ( 國寶 ) 라고부를만큼각별히중용되었다. 17) 청와대경제 2비서관실에서하달한 병기개발기본방침 에따라 1973년까지기간동안에총병력은휴전직후와비슷한 63만명을유지하였으며, 방위산업육성에따른전력증강결과육군은 105미리, 8인치, 175미리평사포, 어네스트존등다양한구경의화포가생산되어야전배치되었다. 당시한국군전차는북의 1,680대에비해남이 760대였으며야전포병화기는북이 4,156문에비해남이 2,530문을보유하게되었다. 해군은 1964년전투함 67척에비해 1973년에는고속정 16척이증강배치되었으며, 공군은 F-86전투기중심에서 F-4, F-5등으로획기적인전력증강을달성하게되었다. 그러나 1973년까지한국군의전력은북한군에비해약 2대1의양적, 질적열세를면치못하였으며대북한군전력지수평가결과육군은 58~59%, 해 공군은 40% 수준으로평가되었다. 18) 2. 율곡사업추진과한국방위산업정착 (1974~1994) (1) 율곡사업추진 한국군현대화달성을가능케한율곡사업은 1974년부터공식적으로추진되었다. 박정희대통령이주한미군감축에대비하여추진한 한국군현대화 5개년계획 (1971~1975)' 은획기적인전력증강을가능케하였으나 미국이약속한무상지원 (15억 9,600만달러 ) 이 9억 8,800만달러외에는 FMS차관으로변질되는등자금확보목표에차질을빚고있었다. 1973년 1월박정희대통령은중화학공업화를선언함과동시에우리군의장비현대화계획과방위산업육성을위해획기적인전기를마련하게되었다. 19) 즉, 한국독자적인군전력증강 8개년계획을수립하여추진하였으며이계획명칭은보안을위하여율곡사업으로명명되었다. 율곡사업은당시합동참모본부장겸대간첩대책본부장이었던이병형 20) 장군이최초 전역하여 1961 년상공부화학과장을시작으로공업제 1 국장을거쳐상공부광공전 ( 鑛工電 ) 차관보로근무하다가 1971 년경제제 2 수석비서관으로발탁되었으며, 중화학공업기획단장을역임했다. 17) 한국방위산업학회 (2015), p. 33. 18) 국방군사연구소 (1995). pp. 200-201. 19) 한국방위산업학회 (2015), p. 81. 20) 이병형은 1947 년육사제 4 기로임관하였다. 6 25 전쟁에대대장 ( 제 3 사단 18 연대 1 대대 ) 과연대장 ( 제 7-127 -

발의하였다. 이본부장은 장기적으로우리국가의안보정책에입각한국방목표를수행할군사전략을수립하고우리의힘으로군사력을건설해야한다는뜻을상부에보고하고국제정세, 남북한의군사력, 국내경제문제등을연구정리하여 지휘체제와군사전략 이라는제하의보고서를작성하여 1973년 4월에 을지연습 73 상황시찰차방문하는대통령에게보고했다. 당시국방장관은이보고를매우주저한반면, 이본부장은개인의연구보고로서문제발생시본부장이모든책임을지기로하고 30분동안박정희대통령에게보고했다. 21) 보고후대통령은의욕적이고도고무적인보고에감명을받고 1980년대에는이땅에미군이한사람도없다고가정하고, 합참은독자적인군사전략및전력증강계획을발전시키도록하라 22) 는공식지침을시달했다. 이병형장군의한국군독자군사전략발전을위한대통령보고는율곡사업추진에박차를가하는결정적역할을수행했던것이다. 합동참모본부장이병형중장과합참전략기획국과장임동원대령그리고국장이재전장군은 1974년 2월 25일율곡사업계획을보고하여대통령재가를받았다. 그후 1992년까지계속된율곡사업추진내용을종합해보면다음 표 3-7-1 과같다. 표 3-7-1 율곡사업단계별주요추진내용 구분 1 단계 2 단계 3 단계 기간 74 년 ~81 년 82 년 ~86 년 87 년 ~92 년 중점최소대북방위전력확보방위전력질적향상 F-5전투기기술도입 M-16생산, 고속정건조, 생산, 주요 UH-1H, 500-MD, 야포 장갑차 전차개발, 전력 F-4전투기구매, 호위함 초계함건조 대북전력비율 : 54% 대북전력비율 : 60% 출처 : 김광석, 국방획득정책 ( 서울 : 국방대학교, 2011), pp.33-34. 대북전력조기확보, 미래위협군사력건설한국형장갑차 전차양산, KDX 잠수함 초계함생산, F-16 도입 대북전력비율 : 71% (2) 한국방위산업의정착 국방부는 1974 년부터 1994 년까지율곡사업에총 27 조 8,912 억여원을투입함으로 사단 8 연대 ) 으로참전했다. 휴전이후, 제 1 사단장, 육군본부작전참모부장, 제 5 군단장, 합참참모본부장, 제 2 군사령관등을역임했으며, 전역후전쟁기념관건립사업을주도했다. 전투실상과교훈을정리한명저 大隊長 ( 대대장 ) 을남기고있다. 21) http://kmaaa.or.kr, 육군사관학교총동창회, 2016. 7. 27. 22) 한국방위산업학회 (2015), p. 82. - 128 -

써방위산업을획기적으로육성발전시켰다. 특히박정희정부는청와대비서실중심의대통령직접통제체제, 경제개발계획과통합연계된방위산업동시발전전략, 과학기술인력과전문관료의핵심역할수행등의발전전략을추진함으로써, 국방과학연구소중심의 군과국가산업과과학기술이모두동원된산 학 관 군의체계적인병기개발체계 가갖추어졌다. 제도적으로는방산물자및방산업체지정제도를도입했고이로인한자금융자, 조세감면, 보조금교부, 종업원처우, 계약특례등정부는방산업체육성을위한모든지원체제를정착시켜갔다. 1980년이후전두환정부는방위사업추진정책기관을청와대경제제2수석실에서국방부와상공부로이관하여방위산업은국가전략산업에서국방부중심의정책으로분리축소되었다. 또한방위산업획득정책은국내기술개발중심에서해외기술도입및국산화중심으로전환되었으며국방비가원천적으로감소하면서국방과학연구소규모도대폭축소되었다. 23) 국방비대비국방연구개발비도 1970년대의 3.5% 수준에서 1.2~1.4% 수준으로낮추었다 24) 이러한악조건속에서도 1981년부터는 70년대모방생산에서본격적으로한국형무기연구개발에착수하였으며, 국내방위산업육성을위해완성장비국산화뿐만아니라 1983년부터부품국산화와함께전문화 계열화제도를시행하여방산보호 육성의근간을마련함으로써명실공히방위산업의기반을갖추기시작했다. 1980년대후반노태우정부는방위산업정책목표를 고도정밀무기체계의연구개발기반구축강화, 독자적인무기체계연구개발생산확대, 방산업체의전문화 계열화및첨단생산기술확보 로정하고산 학 연이연계된기술개발정책을발전시켰으며국방과학연구소주도의개발방식에서업체주도개발방식으로개방주체를점차전환하는방향으로추진했다. 25) 이시기에지상전력은한국형전차및장갑차와자주포를양산배치하고, 입체고속기동전에기초한헬기전력대폭보강과해상전력은한국형구축함의지속적인전력화와호위함, 경계함을추가생산배치하고대잠수함작전능력을대폭강화하였으며, 공중전력은 F-16을기술도입작전배치하였다. 기본병기국산화와전차, 항공기, 함정등정밀무기를국산화하는자주국방의기초를확립함으로써방위산업은비교적안정적인발전기반을갖추게되었다. 그러나 1992년말기준대북한전력지수는한국국방연구원분석결과 1986년말 60.4% 에서 71% 롤대폭향상되었으나억제전력으로서는아직도많은보완이필요한것으로나타났다. 26) 방위산업육성에핵심기관은국방과학연구소이며, 이를획기적으로발전시킨인물 23) 김진기 (2011), 한국방위산업발전전략에관한연구, 한국동북아논총 제 583 호, 부경대, p. 123. 24) 한국방위산업학회 (2015), p.211. 25) 한국방위산업학회 (2015), pp. 214-215. 26) 국방부 (1994). p. 47. - 129 -

은 1970년대우리나라최고의과학자로서 1972년 2월국방과학연구소장에취임한심문택박사 27) 이다. 그는 1972년 6월해외과학기술자 12명 ( 미국 11명, 독일 1명 ) 을유치하는데성공하는등국방과학연구소의기틀과국방과학기술발전의토대를마련하였으며대통령으로부터두터운신임을받아 8년동안소장직을수행하면서많은업적을남겼다. 율곡 1단계사업을통해대부분의기본병기를국산화하는데크게기여했으며, 번개사업과백곰미사일개발을성공적으로달성하였고또한홍릉신청사건립, 대전 진해기계창준공, 안흥시험장준공, 국방과학상제도신설, 품질보증단신설등굵직한일들을해냄으로써탁월한능력을인정받았다. 28) 방위산업을정착시키는데큰족적을남긴또하나의인물은군출신과학자한필순 29) 박사이다. 그는국방과학연구소병참물자개발실장을맡아번개사업을통해한국형수류탄 ( 사과형 ) 을개발하였고, 그후낙하산, 방탄헬멧, 발칸포, 방독면, 전투식량등우리군이무장하고있는기본병기와장구류의대부분을국산화하였다. 또한그는군의경계와작전을위해서는레이저무기와야간감시장비가필요하다는것을주장하여 1973년 5월국방과학연구소내에레이저및야시장비연구실을신설하였고, 12월말이산화탄소를이용하여출력 25W의레이저를자체개발하는데성공했다. 1975년가을, 박정희대통령이홍릉레이저실을방문했을때 7m 거리의벽돌을순식간에녹여버리고철판한복판에뻥뻥구멍을뚫는위력시범을보였다. 그리고레이저기술을이용하여전차의레이저사격통제장치, 레이저거리측정기, 야시장비등을개발하여전력화하는등황무지나다름없던한국의무기체계개발능력을개발도상국수준으로끌어올리는큰업적을남겼다. 30) 1970-80년대방위사업정착단계에서미사일개발의주역은이경서 31) 박사였다. 이경서박사는 백곰 개발책임을맡아 1978년 9월사거리 180km의국산미사일 1호 백곰 (K-1) 시험발사에성공하였다. 이어백곰미사일의단점을보완하고관성유도로작동하는현무 (K-2) 미사일개발을추진했다. 관성항법장치는위치를유지시켜주는미사일핵심장치로서개발과정에다음과같은많은어려움을극복해야만했다. 이경 27) 심문택은 1948 년서울대화학과를졸업하고미국인디애나대에서물리학박사학위를취득하였으며,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부소장까지근무하였다. 1979 년박정희대통령이서거후국방과학연구소가축소조정되면서소장직을물러났다. 28) 한국방위산업학회 (2015), p.41. 29) 한필순은 1954 년공군사관학교를졸업하고공사교수로근무하다미국켈리포니아주립대학에서박사학위를취득하였다. 국방과학연구소탄약부장, 유도탄개발부장등을거쳐 1982 년공군대령으로전역한후한국원자력연구소장등을역임하였고한국과학자로서는유일하게프랑스최고 레지옹도뇌르 훈장을받았다. 회고록 수류탄에서원자로까지 를남겼다. 30) 한국방위산업학회 (2015), p.45. 31) 이경서는서울대를졸업하였으며 1959 년도미하여 MIT 공대에서기계공학박사학위를받고 1969 년귀국하여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거쳐국방과학연구소에근무하였다. 1980 년 ADD 조직축소조정시물러났다. - 130 -

서박사는 INS를개발하려면 15년이나걸릴것으로예상되었기때문에 INS구매를위해미국, 영국, 프랑스등안가본곳이없을정도로돌아다녔으나구할수가없었다. 미국이수출금지품목으로강력히통제했기때문이었다. 그런데영국의페란티 (Ferranti) 사를방문했을때 INS기술을판매할의사가있음을알게되었다. 그는지체하지않고그자리에서바로수백만달러에달하는 INS기술에대한구매를결정했다. 그러나문제는미국이었다. 이경서박사는최형섭과기처장관이프랑스상무부장관과핵처리시설의도입을성사시키고도이를알게된미국의압력으로무산된사실을알고있었다. 그는영국이우리에게 INS기술을판매할경우미국에그사실을통보해야하는지를물었다. 페란티사는통보할의무가있다고했다. 그러면최대한늦춰서통보할수있는기간이얼마나되냐고물었다. 6개월이내에통보해야한다는답변이왔다. 그러자이경서박사는페란티사에 2가지조건을걸었다. 첫째는최대한늦추어서 6개월이끝나는시점에미국에통보할것, 둘째는그 6개월기간동안에한국의기술자에게기술이전을완료한다는조건이었다. 그렇게하여국방과학연구소는즉각 20명의연구원을영국으로보내 6개월동안교육을받게하고 INS기술을완전히이전받았다. 32) 최초의미사일을개발하고이의개량을위한주요기술을확보한것이다. 이경서박사의뒤를이어구상회박사가 현무 미사일개발책임을맡아 1985년 9월시험발사에성공하였다. 우리나라 10대명품무기의하나인 K-9 자주포개발에성공한김동수 33) 박사는 K9 자주포개발과수출모든분야에서이뤄내기힘든성과를달성하였다. 그는미국해군대학원박사과정을졸업하고 1991년귀국, 그때부터 ADD 선임연구원으로 K9 자주포체계개발을담당하기시작했다. 1994년부터는 K9 자주포체계통합팀장으로서사거리, 발사속도, 기동력, 생존성, 탄약적재량등자주포개발핵심난제들을성공적으로해결함으로써 1998년 9월독자적인우리기술로사거리 40km의세계최고로평가되는자주포를개발하는데결정적역할을수행했다. 또한 K9자주포의터키수출시에는기술평가단장을맡아 10억달러규모의수출계약을성사시키는데공을세우기도했다. 34) 32) 한국방위산업학회 (2015), pp.137-138. 33) 김동수는육군사관학교 32 기로졸업후서울대학교기계공학과를거쳐미국해군대학원에서운영분석학석사학위를, 캘리포니아대학에서기계공학박사학위를받았다. 2008 년 7 월부터제 5 기술연구본부장겸국방과학연구소국방녹색기술연구기획위원장으로근무하다가 2009 년 8 월 23 일심근경색으로순직하였다. 34) 한국방위산업학회 (2015), p.416. - 131 -

3. 국가경제의도약과방위산업성장 (1993~2000 년대이후 ) (1) IMF 경제위기와정보통신기술발전, 방위산업의위축 김영삼정부는 6공화국이후최초민간출신대통령으로서군에대한통제를강화하면서국방목표를 대북위협에서주변국위협중심 으로변경하고국방비를대폭감소시켰다. 김대중정부는 1998년부터시작된 IMF 위기로마이너스국방비편성을할수밖에없었으며이러한제반부정적요소들은방위산업이위축되는원인을제공했다. 1993년김영삼정부는과거정부주도성장중심에서민간경제안정으로전환하는 신경제 5개년계획 (1993~1997) 을수립하여추진했다. 그러나 1989년부터시작된국가경제위기론은김영삼정부의세계화무역정책과금융분야조기자유화등과맞물려결국 1997년 IMF체제로귀결되었다. 김대중정부에서 1998년 IMF위기가성공적으로조기극복되면서 2000년대에는정보 통신및 IT, 선박, 자동차, 첨단기계공업, 철강등민간기술이비약적으로발전하였으며방위산업에서는이와연계된첨단정밀군사기술이크게발전하였다. 따라서미래위협중심의미사일, 이지스함, 최신초음속항공기, 제4세대전차 장갑차 자주포그리고 NCW 전투가가능한 C4I체계구축등무기체계의한국형독자모델의개발이본격추진가능하게되었다. (2) 1994 년이후대북정책과국방전략충돌 1994년김영삼정부이후민간출신대통령들이집권하면서한국의국가안보전략과국방전략은근본적인변화를맞게되었다. 1988년 7월 7일노태우대통령은 ' 민족자존과통일번영을위한대통령특별선언 ' 35) 을발표했다. 이선언은 1945년남북분단이후지속되어왔던한국의대결중심대북정책을종식하고남북한간의화해와협력정책으로전환을선언한것으로서 1980년대후반부터추진된북한, 중국, 소련에대한북방외교정책추진의시발점을제공한것으로평가되었다. 그러나 7.7 선언은 1990년대한국대북정책의기본방향을대화와협력중심정책으로고착시키는현상을가져옴으로서대북평화통일정책과군사전략이충돌되는문제를발생시켰다. 즉, 한국의대북군사전략은한반도전쟁가능성을증가시키고남북군사대결을조장한다. 고주장하는정치세력이집권하면서대북군사전략은 ( 북한의군사적위협이전혀변하지않았음에도불구하고 ) 대북통일정책의하위전략으로취급되거나심지어무시되 35) 이선언의내용은, 남북동포의상호교류및해외동포의남북자유왕래개방, 이산가족생사확인적극추진, 남북교역문호개방, 비군사물자에대한우방국의북한무역용인, 남북간의대결외교종결, 북한의대미 일관계개선협조등이다. - 132 -

는현상이발생되기시작한것이었다. 36) 김영삼정부는 1993년집권하면서한국의국방전략을 대북위주개념에서대주변국전방위우호협력개념으로 기본방향을전환시켰다. 37) 김영삼정부는문민통제강화를명분으로박정희대통령으로부터노태우대통령까지군출신대통령시대를재평가하면서군수뇌부의완전교체, 하나회축출, 기무사개혁, 12.12와 5.18관련자처벌등의국방개혁을추진했다. 대북화해정책을근간으로한 민족공동체통일방안 의대북정책기조를유지한김영삼정부는 1994년부터국방정책목표를 북한위협대응에서주변국위협대응 으로변경하였던것이다. 그리고그는취임사에서 어느동맹국도민족보다더나을수는없습니다. 어떤이념이나어떤사상도민족보다더큰행복을가져다주지못합니다. 라고하면서김일성과정상회담을공식제안하였으며, 대북정책방향을민족화해와협력중심으로추진할것을선언하였다. 이러한민족중심의대북정책은낭만적민족주의로발전되면서 조금도변하지않은북한의군사적위협이크게감소된것처럼국민들이인식토록하여이를간과하거나무시하는결과를가져오게되었다. 즉, 1994년북한 1차핵위기발생시에김영삼대통령은미국의북한핵개발위협제거를위한어떠한군사적조치에도반대하였으며, 국방부는북한핵개발위협을심각한것으로평가하였음에도이에대한대응전략무기개발이나실질적인군사적조치를전혀강구하지않았다. 국가안보전략의통합차원에서국방부는대화와협상을통한대북정책이실패할경우에대비하여북한핵개발위협대응군사전략을필히동시에발전시켜야했음에도이러한전략은전혀고려되지않았던것이다. 이러한현상은김대중정부와노무현정부에서완전히고착됨으로서국민들은북한위협에대응하는전략무기선택을정면으로반대하는상태까지진행되었으며, 따라서대북통일정책과군사전략의충돌은피할수없는국가안보의심각한문제로등장하게되었다. 따라서군사전략은대북평화통일정책과충돌하면서군사전략본래의기능을제대로발휘할수없었다. 즉, 민족주의에입각한대북정책추진세력은같은민족이라는낭만적개념에사로잡혀남북한교류, 대화와협력으로통일이가능하다는전제하에대북군사전략과무기도입은통일을방해하고전쟁을일으키는반민족반통일전략이며, 북한위협은대북정책을통해자연히감소또는소멸될것이라고주장하였기때문이었다. 1998년김대중정부가집권하면서대북 햇빛정책 을추진함으로서북한을군사적위협인적 ( 敵 ) 이아닌, 대화와협력을넘어지원과통합의대상으로변화시켰으며이러한여건조성의결과로 2000년최초의남북정상회담이개최되 36) 김영삼대통령취임사 (1993. 2. 23.) 37) 국방부 (1994), 국방백서 1994-1995, p. 2. - 133 -

었다. 2002년노무현정부는김대중정부의기본적인대북햇볕정책을이어받아더욱강화된남북화해와협력을위한 평화번영정책 을추진하였다. 그결과 2007년제2 차남북정상회담을개최하였다. 그러나북한은바로햇볕정책을추진했던김대중정부와평화번영정책을추진했던노무현정부기간중에핵을본격개발하였다. 북한은 1997년부터 2003년까지약 70 회의핵기폭장치폭발시험을실시하였다. 그리고 1998년대포동미사일최초발사실험을시행하였다. 이러한북한의핵개발추진정보를당시한국의정보기관들은모두파악하고있었음이국회청문회에서밝혀졌다. 1998년미국은대포동미사일발사직후한국과일본에미국의미사일방어시스템개발에동참해줄것을요구하면서미사일방어법을제정하였으며일본은여기에적극동참했다. 그러나당시김대중정부는전략적실익이없다는이유로미국의요청을 1999년공식거부했다. 북한은그리고 2005년핵보유국을선언하였으며 2006년 10월최초핵실험을강행하였다. 그럼에도노무현정부는 2006년추진한국방개혁2020의북한위협평가에서 북한핵위협은 2020년경감소되거나소멸될것으로평가 하는개혁계획을발표하고추진하였다. 이러한계획은 2008년국방개혁2020으로공식발간되었으며동시에한미연합사해체와한국의전시작전통제권을환수하는계획을추진했다. 그리고 2007년남북정상회담을개최했다. 한편 2006년북한핵실험이강행되었음에도이에대응하는국방전략은검토되지않았다. 전략무기개발은무시되었으며기존무기체계개발계획을보완하여대응하는수준으로국방정책이추진되었다. 이러한현상은 2008년집권한이명박정부와박근혜정부초기까지도사실상계속되었다. 이명박정부는지난 10여년간의소위좌파정권의일방적인북한퍼주기식정책을버리고 상생과공영의대북정책 으로전환하였고특히, 천안함폭침과연평도포격사건을계기로더욱강경한대북정책을추진하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집권말기에는결국대화와협력대북정책검토로되돌아가낭만적민족주의를극복하지못하는현상이반복되었다. 박근혜정부는 2013년집권초기부터 한반도신뢰프로세스 라는대북정책을추진하였으나이는결국남북대화와협력정책을또다른용어로표현한것으로평가되었다. 그리고 2016년 1월 4차핵실험이강행되었으며, 이를계기로박근혜정부는 대화협력중심의대북정책을한반도비핵화를목표로하는군사전략우선의대북정책으로전환을추진하였다. 결론적으로한국의대북정책은 1994년이후북한 4차핵실험이전까지북한의위협은전혀변하지않았음에도불구하고먼미래의평화통일을추구하는남북한의화해 협력정책만을추진하였다. 이러한대북정책은북한을경계및적대대상이아닌지원및협력대상으로전환시킴으로서, 북한을적대대상으로하는군사전략과충돌을피 - 134 -

할수없도록하였다. 이러한낭만적민족주의에입각한대북정책은마치북한군사적위협과핵개발위협을축소소멸시킬수있을것처럼국민들을인식시킴으로서국방전략과정책추진에크나큰혼란을가져오게되었던것이다. 북한을경계및적대대상이아닌지원및협력대상으로한대북정책이국방정책과충돌했던대표적인사례가제1.2차연평해전이었다. 1999년 6월 15일발생한 1차연평해전과 2002년발생한 2차연평해전에서정부의대응과조치는국방전략을무시하고대북정책을우선함으로서 적이도발할때까지는먼저무기사용을금지하는해상교전수칙을지시함 으로서한국해군의선제적대응전략을무력화시키는결과를가져왔다. 그결과제2차연평해전에서많은한국해군장병이전사하였음에도정부는이를축소발표하고유가족을홀대무시함으로써전사한어느부사관가족은 이러한국가를위해서더이상한국에서살수없다. 고하면서미국으로이민가는현상이벌어지기도하였다. 대북정책과국방전략의충돌결과로나타난가장심각한문제는 1994년부터시작된북한핵위기사태에대비하여 2010년까지국방전략과전략무기선택이아예검토조차되지않은문제였다. 한국은 2013년제3차북한핵실험이진행된이후에야북한핵위협에대응하는전략무기개발을추진하였으며 2014년국방백서에최초로 북한핵대응전략무기 라는용어를사용하였다. 대북정책과국방전략충돌결과는 2016년의미하는 4차핵실험이강행되면서북한핵무장이현실화되자 한국군은왜독자대응을위한전략무기하나개발하지못하였는가? 라고모든국민과정치세력들은국방부를비난하고있다. 국방부는북한핵무장대응을위해미국의맞춤형확장억제핵전략적용을시작하였으며미국미사일방어무기체계인사드한국배치를발표하였다. 그러나한국의대화협력중심대북정책추진세력은사드배치가한반도핵전쟁을일으키는원인을제공한다고주장하면서사드배치를적극반대하고있으며, 심지어중국과공조하여미국과한국정부, 심지어한미동맹을비난하는기이한현상을보여주고있다. (3) 북한핵개발과국방전략선택, 방위산업성장 국가는미래국가안보위협을평가하고중대한위협이현실화될가능성이있다고평가될경우대응전략무기개발을추진하게된다. 이러한전략무기개발의선택은미래첨단기술과방위사업발전을좌우하는결정적핵심요인이며, 통상개발기간을고려하여위협이현실화된다고예상되는시기에맞추어약 10-20년전에착수하게된다. 미래전략무기개발은이렇게장기계획에의거하여추진됨으로중 장기국방전략에의거하여획득계획을수립하고예산을편성한다. 따라서이를위해서는위협을평가 - 135 -

한군사지도자들은대통령과정치지도자들과충분히소통하여이들을설득하고위협인식에공감토록함으로써전략무기획득계획을실행하고예산편성과국가자원지원을보장받게된다. 그러나 1994년북한 1차핵위기가발생한이후한국의군사지도자들은이러한안보전략과국방전략선택을추진하지않았다. 그들은북한핵개발위협평가를정확히하였으면서도제1차핵실험이강행된 2006년까지는전략무기개발을전혀고려하지못하였으며, 제3차핵실험이실시된이후에야개발검토에착수하였다. 즉, 이기간중군사지도자들은대화와협력중심의대북정책을주도하는대통령과정치지도자들을설득하지못하였거나그들과충돌하면서까지전략무기개발을추진할용기가없었던것으로추정된다. 따라서 1994년부터북한은핵개발전략을강행하였으나, 한국은북핵위협에대응하는국방전략과전략무기개발을선택하지않았음으로, 방위사업은재래식최신무기개발과도입을통한전력증강수준을벗어나지못했다. 김영삼정부이후박근혜정부까지한국국방예산은 GDP 대비약 2.5% 수준으로크게감소되어고착되어가고있다. 특히김영삼정부는율곡사업비리를대대적으로감사함으로서방위산업이상당히위축되는결과를초래하였으며 율곡사업 이라는용어를없애고 전력증강사업 으로호칭을변경하였다. 이러한김영삼정부의방위산업육성정책은기존방위전력의보완 향상과미래형전력확보를위한기반조성에두고육 해 공군전력의균형발전을도모하게되었다. 김대중정부는 IMF 의국가경제위기속에서도방산육성을위한개혁정책 38) 이추진되었으나대부분재래식무기최신화개발에초점이맞추어졌으며북한핵대응전략무기개발은전혀고려되지않았다. 단지정보기술혁명에맞는독자적인국방연구개발을강화하는정책이추진되었으며이시기에미국의군사혁신 (RMA) 의한국군도입이적극모색되었으나정책선언과기초무기체계의모방수준에그치는결과를초래하였다. 노무현정부는방위사업정책의투명성과효율성강화를목적으로방위사업청을신설하였으나국방부로부터독립된방위사업을추진토록함으로서국방부획득정책과통합을크게저해하는결과를초래하였고, 2015년에는국방중기획득계획을국방부가통합작성하는정책으로전환하게되었다. 노무현정부는국방개혁 2020을추진하여병력집약형국방구조를첨단장비중심의국방체제로전환토록하였으며, 따라서육군병력을 60만에서약 50만으로감소시키는대신자주적전쟁억제능력확충및방위충분성전력기반을구축하는것을목표로독자적인미래네트워크중심전 (NCW) 수행능력을보장하는해 공군중심의전력증강과기술의자주화를위한연구개발및방위산업의기반강화를추진하는데중점을두었다. 이명박정부는전력증강의우선순위를, 현존하는북한 38) 획득실 연구개발관실신설, 분석평가기능강화, 획득의사결정체계간소화, 정보공개확대등이추진되었다. - 136 -

의국지도발과비대칭위협에중점을두고추진하는것으로조정했으나 39) 비대칭위협의정점인북한핵개발에대한대응전략은고려되지않았으며국방예산은오히려노무현정부보다크게감소하는결과를보였다. 이처럼한국의국방전략선택과방위산업은대통령과정치지도자들의대북정책영향력이절대적이었으며, 한국군사지도자들은제목소리들내지못함으로써잘못된국방전략이선택되었고현실화된최대위협인핵및미사일에대한대응과는거리가먼재래식무기중심의전력증강이지속되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1994년이후한국의재래식무기중심방위산업은이기간중에순조롭게추진되어과거미군원에의해지원된육 해 공군의많은장비가도태되고국산화된 K계열장비로완전교체되는방위산업성장이달성될수있었다. 2000년대에는고도정밀무기체계위주의질적인방위력개선에주력하여현대전의합동전투수행과 NCW수행이가능한 감시-정찰-결심-타격 의실시간전투수행체계기반을발전시키고있다. 한국의재래식첨단무기체계는전세계적으로성능을인정받아 K-9자주포터키수출, KT-1 기본훈련기페루수출, FA-50 경공격기인도네시아 필리핀 이라크수출, K-2전차터키수출, 함대함유도탄및발사대콜롬비아수출, 해군군수지원함영국및노르웨이수출, 209톤급잠수함인도네시아수출등많은재래식무기를세계에추출하고있다. 한국의방위산업성장은 1960년대에시작된한국경제기적과발전을같이해온국방분야의또하나의기적으로써, 약 40년만에완전히폐허상태에서세계 10위권의무기수출국가로성장하였다. 그러나북한비대칭전략위협, 즉핵과미사일에대한국방전략과전략무기선택의소홀은방위산업이새로운위기에직면하는문제를발생시키고있었다. Ⅱ. 방위산업과국가경제발전 1. 방위산업의민군협력및국제협력 1974년부터율곡사업이본격추진되면서, 박정희정부는국가경제와방위산업동시발전전략하에중화학공업화를통한방위산업육성전략을추진했다. 따라서국가의군 산 학 연총역량을결집시켜민군협력과국제협력을통해무기를연구개발하고, 특히주한미군기술자료협력을통한역설계, 모방생산, 독자모델개발을통해무기생산능력향상을추구했다. 한국의방위산업은이와같이초기부터국가적인민군협력과 39) 한국방위산업학회 (2015), pp. 215-228. - 137 -

국제협력을통해육성되고발전되었다. 특히부족한기술인력확충을위한민군협력은국 내외거주병기개발전문한국인기술자를적극활용하였으며기술저변확대를위해대학및실업학교에서장학생제도를도입하여병기개발에필요한전문가를대량양성하였고군에입대한기술계졸업생은병기생산기관에취업시켰다. 당시금호공고와공군기술학교는군기술인력충원제도에의해설립된대표적인기술학교이다. 한국은국제협력을통한기술획득을위해미국국방고등연구원 (DARPA: 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 Agency) 고문단을국방과학연구소각개발실에배치하여기술과노하우를배우도록하고미국의군사기술연구소와기술제휴를통해병기를생산하였으며, 1974년이후그역할을넘겨받은주한미군합동군사지원단 (JUSMAK-K) 과협력하여미국으로부터기술자료묶음 (TDP: Tactical Data Package) 을제공받았다. 즉 1970년대의무기설계는영국기술을도입한백곰유도무기를제외하고는모든기술협력은한미동맹을기반으로하는미국의긴밀한지원없이는불가능하였으며한국의대부분무기체계가미군무기를모방할수밖에없었던것은이러한과정에서나타난불가피한현상이었다. 그러나점진적인국내연구개발의확대로독자기술은성장을거듭하여 K2 흑표전차의기술은 2008년터키에수출하는쾌거를올렸다. 오원철청와대경제2수석은 병기도분해하면부품이다. 라는원칙하에병기생산과평시국가산업을병행육성한다는방침을추진하면서군수산업과민수산업의협동생산체제를확립하였고, 1972년 10월 2차방위산업육성회의에서총 29개의방산업체를지정하여병기부품생산에참여토록하였으며, 그후정부의방위산업보호 육성정책하에조직적이고활발한민군협력이이루어지도록하였다. 1980년대부터한국방위산업이독자설계및생산체제로발전되면서정부는 1983년 6월, 국가적으로중복투자를방지하고기술개발을촉진하기위해방위산업전문화 계열화제도를규정화하고 1993년 12월에는국방부와산업자원부공동훈령으로전문화 계열화에관한규정을제정하여방위산업을보호 육성제도를재정비하였다. 1998년 12월항공기등대규모설비가필요한군수전담산업분야에대해서는대기업전담체제를강화하였다. 그결과 2002년기준함정공기부양선등 27개전문화생산품목은한진중공업등 28개전문화업체가그리고 86개계열화품목은 49개계열화업체가생산에참여하게되었다. 그러나방위산업에경쟁체제도입을위해 2008년 12월에방위산업체의전문화 계열화제도를폐지하였다. 이로써 2012년기준방위산업에참여한업체수는총 96개 ( 대기업 27개, 중소기업 69개 ) 가되었으며방위산업을전문으로하는기업은 13 개업체가되었다. 또한주요무기및장비의하부구성품과부분품을공급하는협력업체는약 4,000개이상일것으로추산되고있다. 40) - 138 -

이러한방산업체들가운데한국방위산업을발전시킨선구자는풍산그룹의유찬우 41) 회장이다. 한나라의산업이발전하려면소재산업의발전이선행되어야한다. 는신념하에 1968년부평에우리나라최초의신동 ( 伸銅 ) 구리가공공장을건설하고풍산금속공업주식회사를설립한그는 1973년우리나라최초의방산업체를설립하여경북안강에탄약공장을세웠다. 그리고소구경탄을시작으로하여박격포탄, 대공포탄, 직사포탄을개발하여 1980년대초에는군이사용하는대부분의탄약을국산화하는데성공했다. 풍산은 1975년 M1소총탄약을필리핀에수출하여국내첫방산제품수출업체가되었다. 유찬우회장은제동구세 ( 制銅救世 ) 와자주국방의신념으로시설현대화와첨단기술개발에전념하여 30여년만에세계제일의탄약전문기업을일궈냈으며우리나라를세계적인비철금속강국으로우뚝서게했다. 그리고 1982년부터 1999년까지 18년동안 3~8대한국방위산업진흥회장을맡아방위산업의주춧돌을놓았다. 42) 한국방위산업발전을위한민군및국제협력이정착되기까지한국방위산업진흥회의역할이크게작용했다. 1976년 3월사단법인으로발족하여 1979년 3월개칭한한국방위산업진흥회는방위산업참가업체의대변자역할을목표로출발하여방위사업입찰보증업무와세계주요방산수출을선도하고있으며방산관련정부기관의업무를대행하여한국방위산업의민군및국제협력강화를위한제반정책을선도적으로추진하고있다. 민 군간기술이전의측면에서보면, 1980년대초전두환정부이후추진된 방위산업과국가경제분리발전전략 은민군기술협력의약화를초래하였으나축적된국방기술은 1990년대의중반까지상당부분민간으로이전 (Spin-off) 되기시작하였다. 1995년부터 2006년까지약 86건의국방기술민간이전이추진되었고차량용네비게이션컴퓨터와핸드폰의디지털맵 (Digital Map) 등에광범위하게활용되고있는전산지도정보및도시용 S/W와위성영상지도기술이대표적이전기술이었다. 2007년부터 2013년 7년간민간이전이승인된국방과학기술의수는총 230건에이르며, 기술이전을신청한기업의수도 7년간총 148개업체에이른다. 그리고 2009년부터 2013 년까지에는산업용유공압제어시스템에응용할수있는고성능솔레노이드밸브최적화기술등 154건이민간이전되었다. 43) 40) 한국방위산업학회 (2015), pp.260-267. 41) 서애유성룡의 12 대손으로 1923 년경북청송에서태어났으며 1941 년대구공립직업학교를졸업하였다. 42) 한국방위산업학회 (2015), p. 118. 43) 한국방위산업학회 (2015), pp. 368-371. - 139 -

2. 방위산업의국가경제발전기여효과 방위산업은근본적으로국가경제발전전략과통합되어기획되고추진될수밖에없다. 1760년영국의산업혁명으로촉발된현대방위산업은 1930년대까지국가최고의핵심전략산업이었으며당시의군수산업업체는해당국가의가장규모가큰업체로성장하였다. 당시선진국가의군수산업업체는국가경제를대표하는가장규모가큰기업이었으나제2차세계대전이후세계국가경제의비약적발전과민간기업의대규모자본축적으로기업의민수산업규모가군수산업의규모를크게능가하는현상이발생되었다. 미국의 1970년대정보기술혁명은민간기업규모가혁명적으로증가되는계기를제공하였으며, 1980년대부터민간기업의연구개발에대한집중투자로인해민간기술발전속도는국방기술발전을크게능가하기시작했다. 한국의방위산업은세계경제와민간기업이급속히발전되는 1970-80년대에정착과발전이시작되었으며, 1990년대이후독자발전을위한성장을거듭하고있다. 따라서방위산업의국가경제발전에대한기여정도는 2가지측면으로접근해볼수있다. 첫째, 방위산업의국가경제발전전략에대한기여정도의평가이다. 한국의방위산업은박정희대통령이방위산업과국가경제동시발전전략과중화학공업중심의국가산업육성전략을선택하는데결정적인영향을미쳤다. 방위산업은무기를생산하는산업이기때문에경공업으로는감당할수없다. 국가가방위산업을육성하기위해서는중화학공업육성이불가피하고도필수적임으로중화학공업육성을통한방위산업육성전략을선택할수밖에없었던것이다. 한국산업발전의핵심은 수출제일주의 와 중화학공업입국 이라고볼수있다. 즉공업기반이없는한국에서수출을기반으로하는중화학산업구조를정부주도하에새로구축한것이며, 그것을가능케한초기의전략선택동인 ( 動因 ) 은방위산업건설을위한중화학공업육성에있었다. 44) 자주국방을위한방위산업육성의지가한국의공업입국배태를가능케하였던것이다. 둘째, 방위산업이국가경제발전에미친경제적파급효과에대한기여도평가이다. 한국의국방비는 2015년현재 364억불로평가되었으며이중방위산업에투자되는액수는대체로약 30% 수준이다. 2016년의방위력개선비는약 11조 6,398억원이집행되고있다. 2015년국방과학연구소는 71~ 14 기간중국방연구개발의거시경제효과는연평균국가경제성장율 7.17% 의 33.33% 기여하였으며, 미시경제효과는총투자비 25.4조원에대하여 11.66배인 296.1조원의경제적파급효과를나타낸것으로분석하였다. 45) 그리고국방과학연구소연구개발수행을통한국가경제성장기여도는 44) 한국방위산업학회 (2015), p.79. - 140 -

2.93%(43.4조원 ) 라고발표하였다. 방위산업의구체적범주는무기체계및장비, 물자의국내개발및생산 ( 정비, 수리등포함 ) 과해외도입및기술협력생산을말한다. 방위산업의국가경제적효과분석에관한자료는매우제한적이다. 그럼에도국방과학연구소가분석한자료를기초로한다면방위산업이국가경제발전에기여한정도의기본평가는가능할것이다. 1970년부터 2009년까지 40년간국방연구개발투자누계액은 15조 2,789억원 (2009년기준불변가격으로는 21조 6,921억원 ) 에이른다. 이중방산업체를제외한국방과학연구소연구소의국방연구개발투자누적액은 2009년기준불변가격으로약 16조 652억원이다. 그런데국방과학연구소에서수행한국방연구개발투자의예산절감효과, 전력증대효과, 기술파급효과를추정한결과 BC(Benefit-Cost Ratio) 는 11.66이다. 즉 11.66배의경제적효과를창출했다는뜻이며, 예산절감효과 85.6%, 전력증대효과 13.8%, 기술파급 0.66% 순으로기여한것으로나타났다. 표3-7-2 국방과학연구소산업연관효과와타산업간비교 구 분 생산유발계수 부가가치유발계수 고용창출효과 ADD연구개발 2.113 0.636 8,007( 명 /10억원당 ) 제조업평균 2.073 0.703 8.164 서비스업평균 1.721 0.855 12.629 전산업평균 1.940 0.722 9.789 출처 : 국방과학연구소 (2015), 국방과학연구소 40 년연구개발투자효과, p. 17. 또한 표3-7-2 에서보는바와같이국방과학연구소의국방연구개발투자는산업연관효과측면에서는생산유발계수가 2.113으로다른산업분야에비해매우높은수준이며, 부가가치유발계수는 0.636으로상대적으로낮게나타났다. 이러한특징은국방과학연구소의전체지출중시제비를통해제조업으로파급되는비중이매우크기때문으로분석되고있다. 46) 국방연구개발투자의파급효과는거시적경제효과와미시적경제효과로구분할수있다. 거시적경제효과는총51조원 ( 생산유발효과 23조원, GDP기여도 28조원 ), 고용창출효과는 51만 5,683명으로분석되었다. 그리고국방기술개발로인한민수분야매출유발효과를나타내는국방기술파급효과는 20조 4,700억원으로나타났다. 1971 년 ~2009년기간중국가경제성장에자본이 43%, 국가전체연구개발이 39%, 노동이 18% 기여한것으로분석되었으며, 국방연구개발은국가전체연구개발의 19.4% 로써 45) 국방과학연구소 (2015), 국방과학연구소 45 년 : 연구개발투자효과, 국방과학연구소. 46) 한국방위산업학회 (2015), p.362. - 141 -

국가경제발전기여도는 7.5%(77조 6,000억원 ) 수준으로분석되었다. 47) 1977년 ~2009 년국방연구개발의국가과학기술발전에대한기여도는 13.1% 수준으로나타났다. 국방연구개발투자의미시적경제효과는총 187조원 ( 예산절감효과 162조원, 전력증대효과 23조 8,000억원, 기술파급효과 1조원 ) 으로, 약 16조원의누적국방연구개발비를투자하여 11.66배의투자효과를얻은것으로분석되었다. 예산절감효과는해외에서유사한무기체계를도입하여운용할경우의수명주기비용과국내에서개발하여사용할때의수용주기비용차이를비교할때 162조 3,400억원의예산절감이이루어졌다는의미이고, 전력증대효과는해외도입장비와국내개발장비의성능 ( 전력지수 ) 차이를화폐가치로전환한결과약 23조 6,000억원의경제적효과가발생했다는것이며, 기술파급효과는국방과학연구소가개발한기술중에서약 390개의기술이민수및타방산분야로파급되어약 1조 1,200억원의순부가가치를창출했다는것이다. 48) 한국의방위산업은지난 45년여간국가경제발전에 7.5% 수준을상회하는기여를하였고특히한국의공업입국배태를가능케하였다는점에서국가경제발전에기여한바가매우크다. Ⅲ. 한국방위산업의미래발전전략 1. 한국방위산업현황과국제적위상 (1) 한국방위산업의현황 2014년방사청조사결과에의하면, 한국의방위산업에참여하는기업의수는 2-4 차협력업체를포함하여약 500여개이며소규모부품협력업체까지포함시약 4,000개이상으로추산되고있다. 2011년연간매출액 9억원이상을기준으로조사된업체는약 290개였으며, 이중체계종합업체가 13개 (4.5%), 전문방산업체가 70개 (24.1%), 협력업체가 207개 (71.4%) 이며대기업은 27개 (9.3%) 였다. 2014년현재무기체계의완성장비를생산할수있는방산업체는 59개, 구성품을생산하는방산업체는 36개로서총 95개가방산업체로지정되어있다. 방위산업지정업체의전업도는무기를최종조립완성하여생산하는체계종합업체가 8% 내외수준, 협력업체가 18% 내외수준으로세계 10대상위방산기업의방산전업도 68.1% 와 100대기업의방산전 47) 국방과학연구소 (2015), pp. 8-10. 48) 한국방위산업학회 (2015), pp.362-368. - 142 -

업도 56.2% 에비해서는크게낮은형편이다. 국내제조업대비방위산업이차지하는비중은 표 3-7-3 에서보는바와같으며 2010년기준약 0.83% 이며총매출액은 9 조 3,300억원으로조사되었다. 방위산업총종사자는 2010년기준 25,439명으로써제조업전체종사자의 0.78% 를점유하며방위산업수출액은 2008년최초 10억달러를돌파하여 2011년기준 23.8억달러로, 국내제조업전체수출액의약 0.43% 로써세계 15위내외수준이며, 표 3-7-4 에서보는바와같이 2014년수출액은 36.1억달러로크게증가하였다. 국가전체수출규모에서방위산업수출이차지하는비중은약 4~7% 로, 20% 내외의미국, 25% 내외의영국, 30% 내외의프랑스, 40% 내외의독일, 75% 내외의이스라엘등에비해서는매우저조하다. 표 3-7-3 국내제조업대비방위산업의위상지표항목제조업방위산업비율비고 90여개지정 1,112조 9,865억원약총매출액 9조 3,300억원방산업체 (10인이상기업 ) 0.83% 기준방산업체 :93개(2012 년 317,694개방산전체사업체 7월 ) 약 (10인이상기업 : 협력업체수협력업체 4,200여개 1.35% 58,064개 ) 포함시추정약총종사자 3,269,339명 (2009년) 25,439명 0.78% 약 90여개지정연구원수 178,440명 5,503명 3.08% 방산업체약기준설비투자액 53조 4,074억원 4,400억원 0.82% ( 방산부문 ) 약연구개발비 28조 7,378억원 6,997억원 2.43% 수출액 5,565억달러 23.8억달러약전산업 (2011년통관기준 ) (2011년허가기준 ) 0.43% 수출액기준 출처 : 유형곤외 (2012), 방산수출확대에따른방위산업선진화방안연구, 안보경영연구원, p. 41. 표 3-7-4 방위산업수출액 단위 : 억달러 연도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수출액 10.31 11.66 11.898 23.82 23.5 34.16 36.1 출처 : 한국방위산업학회 (2015), 방위산업 40 년끝없는도전의역사, p. 356. - 143 -

방산수출품목은 K9 자주포, K2 전차기술, 209 급잠수함, 군수지원함, FA-50 경공격 기, KT-1 기본훈련기 (KA-1 전술통제기 ), 함대함유도무기, 그밖의탄약및부품류이며 지역별방산수출현황은 표 3-7-5 와같다. 49) 표 3-7-5 지역별방위산업수출현황 출처 : 방위사업청 (2014. 8.), 2014 방위통계연보, p. 203. 단위 : 백만달러 연도 2009SUS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총수출액 1,165.9 1,187.9 2,381.9 2,352.8 3,415.9 중동 377.1 116.3 109.5 220.4 1,280.1 북미 401.4 487.1 640.6 663.8 1,054.5 아시아 289.3 483.5 1565.7 214.4 570.5 중남미 9.3 14.3 15.3 335.9 176.4 아프리카 11.8 50.8 19.6 47.7 20.5 유럽 76.6 35.9 29.8 870.5 313.9 러시아 /CIS 0.4 0 1.4 0.1 0 (2) 한국방위산업의국제적위상 한국방위산업의국제적위상은다양한각도에서평가되고있다. 클라우제 (1992) 는군사기술혁신역량을기준으로무기공급국가등급을 표 3-7-6 과같이분류하여미국을 1등급,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등대부분선진주요무기생산국가들을 2등급, 그리고한국, 브라질, 이스라엘을 3등급국가로평가하였다. 한편빗트징거와라스카 (Bitzinger, R. and Raska, M) 는클라우제의 1, 2등급을 1등급으로묶고한국을클라우제의분류와동일한수준인 2등급국가로평가하였다. 표 3-7-6 세계방위산업공급국가등급분류 구분 내용 비고 1등급공급자 군사기술을혁신하는나라 냉전시대 : 미국, 소련냉전이후 : 미국 2등급공급자 무기기술및무기시스템을프랑스, 영국, 중국, 독일, 러시아주로생산하거나활용하는나라등 한국, 이스라엘, 인도, 브라질등 3등급공급자 기존의군사기술과군용기자재를 이스라엘은 200년이후복제하거나모방하는나라 2등급으로분류되고있음 4등급수요자 무기를주로구매하는나라 출처 : 조효재역 전지구적변환, 2003, pp.168-169에서재인용. 49) 한국방위산업학회 (2015), pp. 349-359. - 144 -

외국전문가들은한국의방산수준을선진무기모방과응용단계에서독자개발단계로넘어가지못한것으로평가하고있다. 즉, 한국이생산하는전투장비대부분의핵심구성품이나부품그리고정보-IT기술등에의한첨단핵심부품들은대부분직수입부착되고있음을지적하였다. 장원준 (2014) 의 우리나라방위산업현황과발전과제 에따르면방위산업의생산성 (1인당매출액 ), 매출규모, 세계시장점유율, 100대기업의수, 기업의글로벌경쟁력, 연구개발투자, 시장구조 ( 시장집중도 ) 등을기준으로, 한국방위산업을미국의 48.5%, 영국의 58%, 이스라엘의 78% 수준인것으로평가했다. 안영수외 (2014) 의 2013 KIET방위산업통계및경쟁력백서 와장원준 (2014) 의 우리나라방위산업현황과발전과제 에따르면한국방위산업경쟁력은 표 3-7-7 과같이 2013년기준으로최선진국대비가격 82%, 기술 85%, 품질, 88%, 기업경쟁력 77%, 정부경쟁력 72% 수준으로분석되었다. 한국의국방과학기술수준은 2010년기준세계 10위권으로서선진국의약 80% 수준으로분석되었으며주요경쟁력약화요인은 가격측면에서규모의경제미확보, 핵심원자재수입의존, 기술측면에서임무중심의개발사업, 방산 R&D 투자부족, 품질측면에서핵심요소기술부족, 고성능시험평가관련시설및인력부족, ROC 잦은변경, 기영경쟁력측면에서글로벌마케팅능력미확보, 브랜드가치미흡, 정부경쟁력측면에서패키지딜 (Package Deal) 제공능력부족, 수출지원시스템미구축등으로분석되었다. 표 3-7-7 한국방위산업의경쟁력수준 기준 : 최선진국대비 % 연도 가격경쟁력 기술경쟁력 품질경쟁력 기업경쟁력 정부경쟁력 2011년 82 84 87 55 61 2013년 82 85 88 77 72 출처 : 장원준 (2014. 10.), 우리나라방위산업현황과발전과제, 2014 3CK 방산선진화포럼, KIET. 이상의외국전문가들의평가와국내방위산업의국제경쟁력수준및한국의국방 과학기술수준, 수출규모등을종합평가하면한국의방위산업은선진국약 80% 수준의경쟁력을갖춘세계 10 위권내외의국가로분류되고있다. - 145 -

2. 한국군사전략과방위산업발전전략 50) (1) 기술혁명에따른군사혁신과방위산업발전 역사적으로기술혁명은군사전략의혁명적발전을가져왔다. 화약혁명과주물기술발전은소총과대포를개발하게하였고무기변화에따른육상과해상군사전술의변화는중세유럽국가들의군사혁신 (Military Revolution) 51) 을일으키면서해외식민지개발과부의축적을가능하게하였다. 1760년영국의산업혁명이후기계산업은무기대량생산을가능하게했고동시에군사전략발전에혁명을일으키면서 1850년을전후하여현대와같은국가의방위산업 ( 당시군수산업 ) 이등장하기시작했다. 국가방위산업은군함과같은대규모첨단무기생산을가능하게하면서부국강병 ( 富國强兵 ) 을위한국가의핵심전략산업으로등장했다. 냉전후한국의방위산업은전세계선진국가들과함께 1992년부터추진된미국군사혁신 (RMA: Revolution In Military Affairs) 에지배적인영향을받고있다. 특히한국은한미연합작전체제를통해미국군사혁신관련첨단무기체계를도입발전시키고있으며방위산업은이러한발전과정에서직접적인영향을받고있다. 미국군사혁신을사전분석평가한앤드류크레피네비츠 (1994) 는역사적으로성공적인군사혁신은 기술적변화, 시스템발전, 군사력운용의혁신, 군사조직개편적용 의 4개구성요소를중심으로발전패턴이진행된다고제시하였다. 52) 이러한발전패턴은 1990년대이후미국군이선도하고주요선진국에서진행되고있는정보기술혁명에따른군사혁신또는군사변혁 (Military Transformation) 을구성하고있는핵심논리이다. 즉, 군사혁신의핵심성공요인은기술이었으며새로운국방기술이전쟁을통해새로운군사작전개념으로적용발전되면서군사혁신이진행되었다. 군사혁신은기술적변화를군사적으로정확히이해하여무기체계나군사시스템에적용토록발전시키고, 동시에이러한변화가주는의미를전략 전술적으로통찰하여군사작전개념 (Military Operation Concept) 을충분히발전시킨다음이를현장전투에적용하고활용할군사조직을개편하며, 효율적인조직으로발전시켜야비로소독일군의전격전, 이스라엘의 4차에걸친기동전수행결과와같은군사혁신을달성할수있다는것이다. 군사혁 50) 방위산업발전전략은이준구 (2012) 의 한국의군사전략과방위산업, pp. 318-327. 참조 51) 군사혁신이란 Military Revolution 으로서군사혁명을말한다. 이는중세이후기술이혁명적으로발전됨에따른군사전략발전의혁명적변화를의미한다. 화약혁명과산업혁명에따른무기, 전략전술발전이대표적인사례이다. 1990 년대이후미국의정보기술혁명에따른군사전략발전은 RMA(Revolution In Military Affairs) 로호칭한다. 그러나한국에서는군사혁명이라는용어에대한부정적인식문제로인해이를군사혁신으로지칭한다. 52) Andrew F. Krepinevich(1994), "Cavalry to Computer: the Pattern of military revolution", The National Affairs, The National Affairs Inc, p. 5. - 146 -

신을일으킨새로운기술은근본적으로군사영역밖에서개발되었으며예외없이민군협력과국제협력을통해군사기술로도입되었다. 53) 모든발전을주도한핵심요인은결국기술개발이었으며, 따라서국내적으로는민군협력과국가차원의노력통합을통해독자기술개발에집중해야하며, 국제적으로는신기술개발을주도하는선진국가들과의적극적협력체제구축을통해선도기술과의간격을최대한좁히고종국적으로는이들을선도해나갈수있는전략을추진해야할것이다. 선진국가들의과학기술발전전략서는미래국가발전의원동력이첨단과학기술개발에달려있음을분명히하고있다. 그들은국가의모든연구개발능력을통합활용하여중복투자를방지하고, 최소의비용으로최대기술개발을위해국방기술을중심으로국가연구개발이수행되도록함으로써일반산업기술과국방기술개발의동시발전전략을선택하고있다. 따라서한국은 1980년대이후적용하고있는 방위산업과경제발전의분리정책 을 동시발전전략 으로전환하고국방기술중심의통합된국가과학기술발전과민군및국제협력전략을적극추진할때방위산업의발전이극대화될것이다. (2) 군사전략과방위산업발전결정요인 군사전략과방위산업발전에영향을주는국가차원의전략결정요인은크게정치적, 경제적, 군사적분야의 3가지요인으로구분된다. 첫째, 정치적분야의전략결정요인은국가통치리더십, 군과안보에대한국민의식과여론, 안보중심전략문화여부, 안보동맹과방산국제협력대상국가등이다. 국가통치리더십에서한국은 1994년이후정권교체 ( 또는우파정권과좌파정권 ) 가진행되면서상이한안보전략선택이나타나고있어상당한갈등과논쟁의대상이되어왔다. 54) 1980년초부터방위산업정책이경제 방위동시발전전략에서분리발전전략으로변경되었고, 1990년대초이후진보와보수정권이반복교체되면서대북정책은화해와협력중심으로, 국방정책은북한위협우선에서미래주변국위협중심으로변화되었다. 국민여론의경우독일은반군사적이면서도해외전투파병을지지하는강한군사적전통에국민들이공감하는반면, 한국은독일보다약한반군정서이면서도평화유지활동이외에는해외전투파병을허용하지않는모습을보이고있다. 55) 한국의국제협력은냉전종식후미국일변도의국제협력체제에서유럽과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53) Andrew F. Krepinevich(1994). pp. 5-7. 54) 제 2 차세계대전이후안보강국인미국, 영국, 이스라엘에서는모든집권정치세력들의안보에대한의사결정은언제나절대지지로나타나고있다. 55) 국방부 (2010), 국방백서 2010, p. 84, pp. 296-298. - 147 -

등으로외교정책을다변화하여국제외교관계협정을전세계대부분국가와체결하였다. 그러나국방정책과방위산업의기술협력은미국중심의국제협력체제를벗어나지못하고있다. 따라서방위산업정책의국제협력은미국과는더욱성숙한국방무역정책을, 그리고다른선진국들과는새로운군사협력관계를발전시켜방산기술협력을다양화해야한다. 둘째, 경제적전략결정요인으로서국가경제규모 (GDP), 국가기술혁신전략, 국방경쟁체제도입과공정경쟁수준, 민군및국제협력, 국가기술과국방기술의통합된연구수준등이주요요인이다. 국가경제규모에서한국은국가 GDP기준 2012년세계 15위이고무역규모는세계 7위를나타내고있으나방위산업은개발도상국가수준에서정체되고있다. 선진국들은국가기술혁신전략추진으로국내외의모든노력을통합하여범국가적으로국가경제와방위산업기술의동시발전전략을추진하고있는반면, 한국은 1980년초부터분리된발전전략을현재까지유지하고있다. 방위산업과국방정책에서공정경쟁체제를중심으로하는방산정책은 2008년 12월, 전문화 계열화제도를폐지하면서기본경쟁체제는갖추게되었으나아직도 11개종류의방산계약특례를적용하고있어국제경쟁력을강화하기위해서는시장경제측면의제도보완이요구된다. 그리고경쟁체제가공정성을유지하기위해서는한국의부패지수가 45위내외의중 하위권임을고려하여보다투명하고개방적인국방정책으로전환해야한다. 방위산업기술의민군협력과국제협력선진국들은민군협력의통합단계 (Spin-up) 에도달하였으나한국은민군기술이전단계 (Spin-off) 에머물고있다. 국가과학기술연구개발은선진국들이국방기술의통합된연구개발체제를갖추고있는반면한국은 1980년대의민과군의분리된국방연구개발체제를유지하고있다. 국방기술수준면에서한국의국방과학기술수준은 2015년 12월기준세계 9위권으로서선진국의약 80% 수준으로분석되어국가차원의국방기술연구개발체제의통합이요구된다. 셋째, 군사적전략결정요인으로서군사적전통, 독자전쟁수행경험, 국방체제와군사력건설, 국방개혁주체, 외부위협즉응성, 국방관료우수성등이주요요인이다. 군사적전통과국가의전쟁수행경험은선진방위산업발전에결정적요인으로대두되고있다. 특히, 군사적전통은국가통치리더십의안보중심전략문화와군에대한국민신뢰감형성에지대한영향을주고있다. 미국, 영국, 독일, 이스라엘은철저한전쟁수행경험을중심으로군사적전통과국방체제가정립되었다. 이들국가를국방선진국으로만들면서군사적전통을결정한지배적요소는실전성 ( 實戰性 ) 이었다. 실전성은국방개혁을지속적으로가능하게하였으며개방적인국방정책으로국민전체의안보인식을공감하는것에유리하게작용되고있다. 한국의천안함도발과 3차 ~5차핵실험후나타난안보에대한국민인식변화가이를뒷받침한다. 국방체제와군사력건설 - 148 -

의경우전쟁을지속하고있는미국은 1986년합동군으로전환되어현재전구별작전사령부를단일통합군사령부로발전시키고있으며, 이스라엘은 1974년이후통합군에서더욱발전된지역합동작전사령부로변화되고있다. 그러나한국은아직도군정과군령이분리된상태에서통제형합참의장국방체제를적용하고있다. 이러한한국의문제는실전성검증체제와실증적군사제도가정립되지못함에따른군사전문가와국방관료들의실전성부족에서원인을찾아야할것이다. 방위산업의발전은철저히실전성과연결되고그국가의전략 전술과직결되며실전경험에서발전된독자적인신무기는새로운전략 전술이개발되는근본이되고있다. 한국의국방체제와군사제도가선진국에비해크게뒤떨어지는것은모방발전국방체제와독자발전국방체제의차이라고볼수있다. (3) 한국의미래방위산업발전전략 방위산업발전에영향을미치는전략적요인으로앞서살펴본바와같이정치적으로국가통치리더십과국민안보의식, 경제적으로국가경제력규모, 군사적으로실전적군사작전수행능력을고려해볼때향후발전전략추진방향은다음 표 3-7-8 에제시한바와같다. 표 3-7-8 국가방위산업발전전략추진방향 구분정치적요인경제적요인군사적요인 방위산업 경제동시발전 실증적군사제도도입 범정부국방개혁 ( 군사변혁 ) 전략 ( 전투실험, 워게임, 내용 추진 안보중심전략문화구축 국가 국방기술동시발전전략 과학화훈련, 전투참전 ) 합동, 통합군체제조기 국방무역협정추진 ( 미국 개편 등 ) 군정과군령의통합 정치적으로는범정부차원의국방개혁추진, 안보중심전략문화구축등이추진되어야하고, 경제적으로는방위산업과경제동시발전전략, 국가기술과국방기술의동시발전전략, 선진국과의국방무역협정등이추진되어야하며, 군사적으로는독자무기체계개발에근본이되는실증적군사제도도입, 합동또는통합군체제조기개편, 군정과군령의조기통합등이조기추진되어야할것이다. - 149 -

( 가 ) 실전 ( 實戰 ) 중심의군사전략과국방정책추진국방의가장중요한요소는실전중심의군사전략을개발하고이에맞는국방체제를정립하여실전적국방정책을철저하게추진하는것이다. 이를보장하기위해실증적인군사제도를조기에도입함으로써합동군또는통합군의군사전략개발과새로운국방체제로의개혁이가능하다. 따라서실전과동일한과학적훈련체계를조기에확충하고철저한전투실험제도를적용하여야하며, 실제전투에근접한실증을통해독자적인군사전략 전술을개발하고이에부합하는무기체계개발과방위산업육성이보장되도록해야할것이다. 국방개혁은합참중심의합동군으로실질적통합이달성되고, 국방부중심으로군사력건설기능이통합되어실전성과성과중심의효율성을보장하는국방체제가재구축될때비로소선진방위산업발전의기반이완성될수있을것이다. 무엇보다도국방체제의양면인결코분리되어서는안될군정과군령을강제로분리한현행국방체제를군정과군령이통합된새로운국방체제로전환하는것이최우선되어야할것이다. ( 나 ) 국가과학기술과방위산업의동시발전전략국가과학기술은국가의흥망을좌우하는핵심적요소가되었으며이러한기술중에서도핵심기술은첨단국방기술이다. 선진군사강국들은예외없이국가과학기술과방위산업의동시발전전략을추진하고있으며국방기술을중심으로국가기술역량을통합하여국가경제및방위산업발전에성공하고있다. 한국도 1970년대박정희대통령이이러한동시발전전략을채택하여안보와경제의딜레마를성공적으로극복하였다. 따라서 1980년이후분리된국가과학기술과방위산업의발전전략을통합하여국방기술을중심으로국가민 군 산 학의모든연구기관을종합적이고도체계적으로운영하여국가경제와방위산업을동시에발전시켜야할것이다. ( 다 ) 민군협력과국제협력기반의방위산업육성민군협력과국제협력은선진국방과학기술과모든방위산업발전의기본패턴이었다. 그러나한국의방위산업국방정책은아직도여기에미치지못하고있다. 한국의방위산업은독점적수요의공급체제와국방부통제중심의방산정책으로과잉생산설비로인한낮은공장가동율, 중 장기적인한국독자국방기술개발미흡, 해외국방기술에지나친의존, 국방관료들의관료화와비효율적인획득조직및의사결정체계의조직적구조적문제가대두되었다. 56) 따라서공정한방위산업경쟁체제를정립하고, 민군협력과국제협력을전략적으로활용하여방위산업의국가적사업기반을충분히 56) Richard A. Bitzinger(1995). p. 319. - 150 -

확대해야한다. 2012년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발표한민군 R&D협력추진계획은민군융합연구시스템이라고명명되었으나그내용은민군겸용기술개발사업을추가한것외에는과거민군기술이전 (Spin-on/off) 단계를강화된형태였다. 즉, 한국은과거국방정책에서선언적으로끝나는개혁의모습을실제모든국방체제의효율성을검증하고이를통해방위산업과첨단무기의독자생산능력을검증하는체제로혁신시켜야하며, 국가의모든역량을효율적으로통합시키는민군협력체제를발전시켜야할것이다. ( 라 ) 국방무역협정 57) 체결의다각화국방무역협정이란국방분야의필수제한사항을제외한협정국간의국방자유무역협정체제를갖추는것을말한다. 이를통해협정당사국들은기술협력과무기체계의공동개발, 공동생산, 공동판매의강화된국방협력체제를발전시킬수있다. 이러한개념은어느한국가가지속적으로첨단기술을선도적으로개발하면서군사력우세를달성하는것은결코쉽지않다는것이역사의교훈에서비롯되었으며냉전이후국제정치의중요한변화라고할수잇을것이다. 미국을비롯한방산선진국들이동맹국을중심으로공동기술개발과공동생산및판매등의방위산업협력협정을활발히추진하고있는것도이때문이다. 한국은그동안미국과충분한공동연구개발및생산의경험을가지고있다. 더구나세계유일한한 미연합방위체제는한 미국방무역협정을추진해야하는필요-충분조건이되고있으며북한핵무장에직면한한국은중요한전략적효과를얻을수있을것이다. 따라서이러한전략 전술적이점을살릴수있는한 미국방무역협정을체결을제안하고추진해야할것이다. 아울러핵심군사기술을보유한선진우방국들과의협정도체결을추진확대해야한다. 이는한국군이부족한실전적인전쟁경험과교훈을전수받는유일한대안인동시에선진국방기술을획득할수있는좋은기회이다. 그러나군사분야만을접근하는전략보다는국가대국가의신뢰중심으로모든분야를교류하는동맹차원의긴밀한군사협력관계를발전시켜나가는것이더욱바람직할것이다. 57) 미국은 2012 년 12 월부로영국, 호주와세계최초로체결된국방무역협정을비준하여발효시켰다. - 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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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안보, 국방의영웅 : 한국적전쟁영웅의탄생과 시대적변화 최영진 ( 중앙대학교 ) - 목차 - I. 한국전쟁과전쟁영웅 II. 전쟁영화와우상적기억 III. 한국전쟁과 육탄돌격형 전쟁영웅 IV. 경제발전과 산업전사형 전쟁영웅 V. 탈냉전과 회의하는 전쟁영웅 VI. 결론 I. 한국전쟁과전쟁영웅 근대국민국가 (nation-state) 는동질적국민을기반으로하는국가정체성 (national identity) 에기반하고있다. 1) 이질적인사람들이동일한언어와역사를공유함으로써 하나의국민으로서국가정체성을갖게되며, 이를기반으로국가에대한충성과헌신 이가능하다. 그런점에서전쟁의집단기억 (collective memory) 은국가정체성의핵 심적부분이다. 국가존립의 1 차적목적은외부의위협으로부터정치공동체구성원의 생명과재산을보호하는데있는만큼전쟁의기억은국가정체성의내용과성격을결 정한다. 많은국가들의전쟁의기억을통해국가적단결과헌신의계기를마련하는 것도이런까닭에서이다. 이런점에서한국전쟁은대한민국이라는근대국가형성에결정적의미를갖고있 다. 전쟁을통해국가와시민은하나가된다. 전쟁이야말로국가가시민에게목숨을 1) nation-state 을통상 민족국가 라번역하지만여기서는국가와국민간의동질성을강조한다는점에서국민국가란용어를이용한다. 인종적동질성이부각되는민족국가라는표현보다정치적역사적계기를통한국민형성 (nation building) 의중요성을강조할수있기때문이다. 근대국가로서국가형성 (state building) 의가장중요한조건, 혹은과정이국민형성이라는점도유념할필요가있다. - 155 -

요구할수있는유일한경우이며, 이러한극단적예외상황을통해이질적인인간들은운명공동체적결의를공유할수있는것이다. 한국전쟁은대한민국이수립된지채 3 년도되기전에발생한전대미문의사건이었다. 제도적으로나의식적으로나온전한국가의모습을갖추기전에발생한한국전쟁은하나의근대국가로대한민국을구축하는결정적계기가되었다는점을강조할필요가있다. 제도적인차원에서 1950년대한민국은여전히많은것이결여된상태였다. 실질적으로 물리적강제력의독점 이라는막스베버 (M. Weber) 의고전적국가개념에도이르지못한상황에서전쟁을맞이한것이다. 의식적인차원에서도마찬가지였다. 현실적으로국가의존재가구체적으로인식되지않았고, 전통적인삶이계속되고있었다. 자신의삶과구체적으로연결된존재로서국가의식은구축되지않은상태였다. 한국전쟁은국가로서대한민국이안고있던결여된부분들을충분히해결해주었다. 우선전쟁수행을통해하나의온건한국가로서실질적모습을갖추기시작했다. 엄청난인적물적자원을운용하는전쟁수행과정에서적지않은문제점도노출되었지만어느정도국가시스템이작동하기시작했다는점에서중요한의미를갖고있다. 전쟁을통해근대국가가만들어진다 는찰스틸리 (C. Tilly) 의명제는대한민국에대해서도정확히들어맞는다 (Tilly 1990, 23). 더욱중요한점은, 국민의일상적삶에국가의존재가깊이드리워지기시작했다는점이다. 전쟁의화마를피할수있었던지역이나사람은있었겠지만전쟁의영향에서자유로울수있었던국민은존재하지않게되었다. 모든젊은남성들은군대입대하여조국과민족을위해싸워야했다. 설령군입대하지않는여성이나나이든사람들, 심지어어린아이까지전쟁의고통에서자유로울수없었다. 국가의모든인력과자원을총동원해야하는 총력전 (total war) 에서그누구도전쟁의자장에서자유로울수없었다. 바로이런상황에서국가와국민은운명적동질성을확보하게된다. 국가붕괴의절체절명의상황에서국민들은목숨을바쳐나라를구한것이다. 이러한실존적상황보다국가와국민을강하게결합할수있는계기는존재하지않는다. 그런점에서한국전쟁은국민과국가를하나로결합한결정적사건이된것이다. 2) 전쟁을통해근대국가로서대한민국이형성되었다는것은하나의국가로서대한민국이존재하는방식과전쟁이기억하는방식이깊은연관성을가질수밖에없다는것을알수있다. 즉전쟁에대한집단적기억을통해대한민국의국가정체성은형성되는것이다. 이처럼집단적인경험으로인식될수있는전쟁에대한기억은국가및구성원들의정체성형성에중요한역할을하기때문에, 많은국민국가들은전쟁에대 2) 이과정에국가적행위에대한평가나판단은그리중요하지않다. 국가존립의실존적상황에서 충성과배반 사이에결단해야하기때문이다. 이러한예외상황, 즉국민에게국가를위한죽음과죽임을요구할수있는국가의권능에대해서는칼슈미트를참고할수있다. - 156 -

한공식역사에대해특별한의미를부여한다 ( 강선주, 2008). 따라서전쟁은사회속에서다양한형태를통해공유되며, 현재와미래에대한집단적행동에대한가능성을지니는사건으로인식된다. 이러한관점에서보면, 전쟁을현재에기억한다는것은특정한사회적맥락속에서수행하는역사적실천이라고할수있다. 3) 전쟁에대한기억역시다양한방식과계기를통해구체화되는데, 이는기억이사회적전유과정을통해의미를갖게되는것을의미한다. 특히다양한미디어에의한기억의 재현 은전쟁을단순히 다시보여주는것 이아니라, 집단기억과같은형태로공유되고있는그현재의의미를실제적이고구체적인형태로구성하는것이다. 이를통해보다구체적이고생생한국민정체성이형성되는것이다. 중요한것은전쟁에대한집단기억은구체적인인간, 즉군인을통해형성된다는점이다. 집단적기억의주체로서국민은군인을통해전쟁의의미를이해한다. 전쟁상황에등장하는인물들을통해전쟁이우리에게무엇을의미하는지이해하고전쟁이라는결정적계기를통해국민으로서, 한인간으로서 내가무엇을어떻게할것인가? 를결정한다. 실존적상황으로서전쟁은인간에게결단을요구하기때문이다. 무엇이바람직한일이며, 무엇이그렇지올바르지않은일이지를결정해야한다. 이때, 준거 ( 準據 ) 가되는것은인간적사례이다. 준거적인물 (referential person) 이실제인물일수도있고가상의존재일수있다. 우리는이러한존재를전쟁영웅이라부를수있다. 이들의존재를통해전쟁은기억될수있고재현될수있는것이다. 이처럼전쟁은전쟁영웅을통해존재한다. 전투를수행하는구체적인인물의영웅적헌신과투혼을통해전쟁은기억되고상징되기때문이다. 거시적관점에서볼때전쟁은전략과전력으로환원될수있지만결국전쟁은인간의일이다. 인간적결단과실천을통해서만전쟁은수행될수있기때문이다. 따라서전쟁을기억하는방식도 전쟁속의인간, 즉전쟁영웅들을통해서가능하다. 이러한영웅이웅이꼭람보나슈퍼맨같은절대적강자일필요는없다. 한국전쟁과이후역사를통해우리는대한민국을지키기위해고귀한생명을바쳤던많은영웅들을기억할수있다. 이들이영웅이될수있는것은그들이뛰어난전투력을발휘해서가아니다. 오히려실존적인간으로서불안과두려움속에서도조국과전우를위해자신의생명을바칠수있었 3) 이에대해일찍이알박스 (M. Halbwachs) 는 집단기억 (collective memory) 개념을통해기억이사회적맥락속에서사회적가치와합의속에서작동되는산물임을주장하였다 (Halbwachs 1992, 39). 알박스에의하면기억은일종의사회화과정이며, 기억이라는행위의주체는개인일지라도그원초적인기억조차사회적으로형성되는것이다 (Olick 2007, 18~19; 윤미애 2002, 41). 그러므로과거의사건은사회적인기억을통해의미를획득하고, 사회구성원들이공유하는하나의사실이되며, 이러한기억은집단기억이라는관점에서이해될수있는것이다. 이러한맥락에비추어보면, 집단기억이가능하기위해서는공통된시간및공간과같은사회적틀 (framework) 이나공통된시각과공유된입장이필요하며, 그러한 사회문화적관계의특수성 에의해각기억들은재구성되고조합된다 ( 태지호 황인성 2014). - 157 -

던그고귀한정신에있는것이다. 4) 우리가전쟁영웅, 혹은전선을지켰던인간들에게주목해야할이유는바로이러한정신의구현체이기때문이다. 국가다운국가가존립하기위해서는이러한국민들이존재해야하기때문이다. 전쟁, 그리고전쟁영웅에대한집단기억은전쟁을통해만들어진대한민국을기억하는방법이기도하다. 한국전쟁이전쟁이라는예외적상황을통해국민과국가가하나되는역사적계기가만들었다면, 한국전쟁을어떻게기억하고재현하느냐하는문제는목숨바쳐지켜야할국가와희생의주체인국민과의관계를보여주는하나의척도가될수있다. 그리고인식론적차원에서현재의 나 와국가의관계를설정하는중요한준거로작용하게될것이다. 우리가전쟁영웅의재현방식에주목해야할이유는바로여기에있다. 전선을지키는주체로서전쟁영웅을충성과희생의주체로 나 를상정하는것이라며, 우리의전쟁영웅역시 나 로치환될수있고, 우리의기억속에새로운모습으로재현 (representation) 되는전쟁영웅에서나의모습을떠올릴수있기때문이다. 우리의집단기억과다양한매개를통해재현되는전쟁영웅에대한이해가국가와국민의관계를설명하는중요한단서가되는이유이기도하다. 5) II. 전쟁영화와우상적기억 한국전쟁이후전쟁영웅들이어떻게재현되고인식되었는지를살펴보는데영화만큼 적절한매체도없을것이다. 전쟁은여러가지방식으로기록되고재현되었지만, 한국 영화를통해분석하는것이영화에내장된강력한기억과재생의가능성때문이다. 4) 그리스에서는전장에나가전선에서이탈하지않고대형을유지하는것만으로도전사 (warrior) 로서인정받을수있었다. 대열을지킨다는것만으로도목숨을바친것만큼의용기가필요하기때문이다. 엄청난용맹으로큰공을세우거나목숨바쳐희생하지않음에도전선을지켰던많은군인과국민들을전쟁영웅으로인정할수있는것도이러한관점을수용하기때문이다. 5) 지금까지국방사 (History of National Defense) 연구는대부분전쟁사에집중되어왔기때문에전쟁의기억방식에대한관심이많지않았다. 객관적사실의재구성으로서전쟁사와함께전쟁이기억되는방식에대한학문적연구와논의가필요한시점이다. 무엇보다전쟁영웅의기록과상징화방식에대한연구는국방과전쟁에대한국민적인식이어떻게구성되는지를이해하는데큰도움이될것이다. 객관적사건으로전쟁은결국인물로서전쟁영웅에대한이야기를통해국민들가슴에내면화된다. 인물없는전쟁은없으며, 인물에대한기억이전쟁에대한집단기억을구성하기때문이다. 둘째, 역사적사건의재구성으로서전쟁사에대한연구는인물에대한집단기억을통해보완될것이다. 지금까지국방사가전쟁이라는객관적역사의재구성이었다면, 전쟁영웅에대한서사분석은과거의역사가현재어떻게인식되는지를파악할수있을뿐아니라사건사중심의연구의비어있는공간을채워주는효과가있을것이다. 그런점에서전쟁영웅이기록되고상징화되는방식에대한연구는국방사의속살을채워가는중요한의의를갖고있다. 셋째, 전쟁영웅이기록되고상징화되는방식에대한연구가갖고있는방법론적차별성으로인해, 국방사에대한새로운인식과관심을유발시키는계기가될것이다. 집단기억이라는관점에서, 기록과상징화의이중적교직을통해새로운국방사인식의물꼬를틀수있을것이다. - 158 -

간결한서사와강렬한영상, 음악까지결합된영화만큼강력한기억의매개체는존재하지않는다. 그리고적어도 1970년대후반텔레비전이일반화되기전까지영화는한국인들의지배적영상재현장치였다. 텔레비전과각종영상물이범람하는오늘날에도한국영화가 1천만관객시대를열어가는것은대중매체로서영화가갖고있는중요성을말해준다. 영화는기본적으로상업매체이기때문에대중적관심과열망을고려하지않을수없다는점또한고려했다. 대중매체로국가와자본으로부터완전히자유로울수는없겠지만, 상업적성공을추구하는영화의본질상해당시대의대중적관심과요구를반영할수밖에없다. 시대정신과특성을반영하는데매우적합한매체인셈이다. 영화를통해전쟁기억을재현한다는것은다른장르와는구별되는영화적관습을통해전쟁기억을시각적으로경험할수있게한다는것을의미한다. 역사 가영화에재현될때, 영화는역사를정서적이고, 개인적이며, 극적인것으로구성한다 (Rosenstone 1995, 50). 이는영화가상영시간이라는한정된조건아래 상품 의형태로특별한시각적경험을제공하기위해과거사건을특정한이슈중심으로통합하는서사화의전략의불가피한결과이기도한다. 영화서사는특정전쟁에대한모든기억을총체적으로다루지않는다. 영화는전쟁의단편적이미지를통해강력한정서적일체감을자아낸다. 6) 오히려이를통해집단적이고동시적인상태에서강렬한리얼리즘의시각경험을제공하는것이다. 무엇보다어떤과정을통해영화는다른매체보다월등한집단기억의매체가될수있느냐하는점이다. 영화는문자매체등과달리영화에서다루는과거에대한기억은단일하고깊이각인되며광범위한영향력을지닌대중적인매체가될수있는것은제한된배우혹은명백한특징을지닌인격체 ( 캐릭터 ) 에초점을두기때문이다. 즉주인공을중심으로스토리가진행되고관객을주인공이라는인격체를중심으로영화의내용을기억한다는것이다 (Coltheart 1980, 183-228). 우상적기억 (iconic memory) 으로불리는이러한현상은영화관객과주인공캐릭터사이의심리적선망과감정이입에서발생하는강력한정서적일체화에서가능하다 (Stacey, 2013). 이러한우상적기억은영화의소재가현실적일수록더욱강력하게작용한다. 60년 6) 이러한영화와전쟁기억과의관계를 몽타주기억 (montage memory) 으로설명하기도한다 (Marcus 1990, 2-12). 몽타주기억은다양한영상재현을통해제시되는기억의시각적경험그자체가영상기억이라는새로운형태로서사회적기억과연관됨을가리키는개념이다. 이는기억과영상재현과의관계가단순한이미지의배열을넘어서사회구성원들의경험과관련한정서적측면과정치및경제적상황과같은사회적맥락에서기억이추가, 제거그리고조정의과정을거치게됨을의미한다 ( 태지호 2012, 460~461). 그러므로영화가몽타주기억의형태로전쟁기억을구성한다는것은그것의특정서사를위해화면내의여러요소를배치하고, 각화면들이유기적으로연결된다는것을의미한다. 다시말해, 영화는전쟁기억을특정한서사로효과적으로전달하기위해모든예술적혹은감각적요소들을배치하고결합한다는것이다. 동시에이는영화산업그리고이와관련된제도및정치적상황과관련하여특정한형태의사회적서사로제시되는것이다. - 159 -

대까지대부분의한국인에게한국전쟁과분단은구체적인기억에남아있는현재형의사건이었다. 그이후부터 80년대까지도남북대립의현실은당시한국인들의삶을지배했던중요한일상이었다. 북핵무기와사드배치로소란스러운지금도대한민국은북한과군사적경쟁에서자유롭지못하다. 북한과의군사적충돌이일상화된상황에서전쟁영화에서보여주는전쟁영웅의모습은더욱구체성을띠며한국인의가슴속에들어앉게되는것이다. 결국한국전쟁영화의주인공들은한국전쟁과남북대립의구체적담지자로서존재한다. 분단과대립이구체적현실이기때문에영화의주인공들역시매우구체적인존재로인식될수밖에없고, 우상적기억이강렬할수록영화를통해구성된전쟁영웅상은한국인에게더욱강력한각인작용을낳게될것이다. 이런점에서한국전쟁영화에등장하는전쟁영웅이어떤모습으로그려졌는지는해당시대의국민정신을이해하는중요한리트머스시험지가될수있다고본다. 영화가일방적인저술이나연설이나언술이상업적이익을추구하는상품이라는점을감안할때, 어떤다른영역보다국민들의시대정신과인식에부합하도록노력해야하기때문이다. 그렇다면한국전쟁영화에서전쟁영웅들은어떻게그려졌을까. 체계적인정리를위해시대구분이우선필요하다. 한국전쟁과분단을다루고있는한국영화는해당시대의정치적상황과사회적흐름, 특히세대교체와무관할수없을것이다. 이런점을감안할때, 한국전쟁을온몸으로체험한세대가지배적이었던 1950년대와 1960년대을하나로묶는다면, 전후세대가성장했던 1970년대와 1980년대가또다른시기로설정할수있을것이고, 그다음민주화와탈냉전이후의시대상을반영하는 1990년대이후로구분할수있다. III. 한국전쟁과 육탄돌격형 전쟁영웅 한국전쟁이발발하자국가의모든역량은전쟁에투입되었다. 영화계도예외는아니었다. 일부영화인이중심이되어 국방부촬영대 란이름을종군활동을하면서전투상황을기록하기시작했다. 정부에서는 < 국방뉴스 > 를만들어전시상황을전했고, 군과국민들을사기를고양하기위한다큐멘터리영화가제작되었다. 7) 7) 한국전쟁기에나온작품은 < 아름다웠던서울 >(1950, 윤봉춘 ), < 서부전선 >(1950, 윤봉춘 ), < 육군포병학교 >(1951, 방의석 ), < 정의의진격 >(1951, 한형모 ), < 낙동강 >(1952, 전창근 )< 총검은살아있다 >(1953, 조인봉 ) 등인데, 이가운데 < 정의의진격 > 만이필름이남아있어그영상을확인할수있다 < 정의의진격 > 1 부는해방후평화로운서울과달리전쟁준비에몰두하는북한의모습을대조시키는것을시작으로, 전쟁발발과전개과정, 인천상륙작전의성공, 그리고이승만대통령의 10 월 21 일평양방문까지를담고있다. 2 부는 1951 년 1.4 후퇴와서울재수복, 판문점휴전회담의내용을다루고있다 ( 이명 - 160 -

전쟁이끝난직후공비소탕과간첩색출이중요한국방의과제였던점을감안할때일상적영역에서반공투쟁이중요한소재가될수있었다. 8) 여기서주인공들은공산주의의야만적본질을깨닫고자유세계로투항하거나그들과맞서희생적투쟁을전개하고있다. 이시대를대표하는전쟁영화는역시 < 격퇴 > 라할수있다. 9) 이영화는 1953년정전협정직전에김만술소대장이베티고지를탈환하는실화를바탕으로한작품으로 우리는이렇게싸웠다 는부제를달고있다. < 격퇴 > 는오롯이국군의영웅적전투에초점을맞춘영화다. 사건의중심에는고지를사수하기위해죽음을각오하고중공군에맞서육탄전을펼치는부대원들이있다. 영화는소대원들이고지탈환을위해작전을모의하는장면에서전투끝에고지를지켜냄으로써휴전직전이지역을사수하기까지의시간을담고있다. 전장의치열함속에전우들간의일화가극의긴장감을조절하며그들의전투와희생을묘사하고있다. 부상당한상태로전선을연결해부대를구하고죽는박일등병과 중공군을한놈이라도생포하고싶다 며죽어가는장일등병의이야기는죽음을불사하는전우애와애국정신을보여준다. < 격퇴 > 에서가장압도적인장면은고지에서펼쳐지는장렬한육탄전이다. 좁은공간으로한없이밀려드는중공군을오직총검에의지하여섬멸하는국군의모습은적을 격퇴 하는용맹하고거룩한영웅그자체이다. 이장엄한필사의육탄전은 맨주먹, 맨몸 으로적의도발에맞서탱크에몸을던지는희생의형상일뿐아니라, 전투는반드시이기고마는승리에대한의지를표상한다 ( 김미현 2015, 63-64). 소대장은 명예를위해거룩한죽음 을불사하는용맹한전사의대표한다. 오로지그가안타까운것은 적을격멸하여산산히부셔버리지못한것 이다. 여기서영웅의이미지는적을막아내기위해자신의목숨을내던지는육탄돌격형의전사이다. 적 [ 공산주의자 ] 에대한적대감으로무장한전사들은, 자신의희생이필요한 자 2011, 7). < 정의의진격 > 은북한에대한부정적집단기억을최초로영상화했다는데의미가있다. 기록영상의편집을통해북한군의야만성과반민족성을사실적으로증거하면서투쟁의지와내부단결을도모하기위한다큐멘터리다. 학살과처벌과같은적에대한부정적집단기억을역사화함으로써국민통합을획득하려는작업으로이해할수있다. 8) 전후만들어진반공소재의영화들은크게간첩, 빨치산소재의영화로 < 운명의손 >(1954, 한형모 ), < 피아골 >(1955, 이강천 ), < 죽엄의상자 >(1955, 김기홍 ) 등과한국전쟁을배경으로한 < 자유전선 >(1954, 김홍 >, < 북위 41 도 >(1954, 김성민 ), < 불사조의언덕 >(1955, 전창근 ), < 격퇴 >(1956, 이강천 ) 등을들수있다. 이들영화는모두직간접적으로북한과의대립을설정하고있다. < 운명의손 > 은북한여성스파이 ( 마가렛 ) 가자신이사랑하는남자 ( 방첩대대위 ) 를위해대신총에맞아죽는다는내용을담고있다. < 피아골 > 은빨치산의비인도적만행을그린영화로여성대원 ( 애란 ) 이빨치산대장의유혹에냉정하게맞서면서자신이사랑하는남자 ( 철수 ) 를연모하여최후의탈출을감행하는것으로결말짓고있다. < 죽음의상자 > 에서는방첩대원이적의폭탄함을빼돌려빨치산아지트를폭파한후장렬하게전사하는내용을담고있다. 9) 당시로서는군의도움으로실제전투장면을촬영할수있었던몇안되는작품으로필름또한비교적양호한상태로남아있어당시영화수준을알수있는중요한작품이다. 흥행에도크게성공한것으로보도되었다. - 161 -

상황이면, 스스럼없이자신을내던질수있는그런존재로그려지고있다. 베타고지의용사들은말할것도없고, < 운명의손 >(1964, 한형모 ) 이나 < 죽음의상자 >(1965, 김기홍 ) 역시결단의순간에자신을받칠수있는용기로무장한돌격형영웅의일상적형태를보여준것이다. < 격퇴 > 의하위서사 (sub-plot) 로펼쳐지는젊은이강노상사 ( 윤일봉 ) 의가족드라마에도주목할필요가있다. 그는아내와딸의사진을보며휴가갔던한때를회상한다. 이하사의고향은아낙네의절구질, 소끄는농부, 뛰노는아이들이있고, 아내와딸, 어머니가살고있는평화로운공간이다. 아내는옷고름으로눈물을찍으며남편을맞이하고, 마음은늘당신곁에있으니두렵거나적과싸울때는두몸이함께 라생각하라며남편을배웅한다. 딸은아빠의노래라며 무찌르자오랑캐몇천만이냐 와같은군가를부른다. 가족에대한회상장면은젊은이상사를용감한국군으로만들뿐아니라, 떨어뜨린가족사진을찾으러길을되짚어갔다가폭격을피하게되어, 실제로그의목숨을구하는역할을한다. 폭격이쏟아지는전장을가로질러끊어진통신선을연결하러가는용기와희생정신의원천에는그가안심하고싸울수있도록뒷받침해주는아내와가족이있다. 여기서가족은군인이목숨을걸고적과싸워야할이유이자조건이다. 가족의생존과안녕이야말로군인으로서존재이유가된다. 가족의평안함과아내의적극적인지원으로이하사는더욱열심히싸울수있는것이다. 이점에가족은국가와동일시된다. 가족을위하는것과국가를위하는것이다름아닌것이다. 이하사는가족사진을줍기위해지체하다폭탄을피하게되는일화는자신이가족을위해존재할뿐아니라, 가족역시그를지켜주고있다는상호성을발견할수있다. 즉가족 = 국가의등식은가족 = 국가를위한군인이존재할뿐아니라, 궁극적으로가족 = 국가가자신을지켜줄궁극적공동체임을암시해주는것이다. 여기서다른나라에서발견하기어려운한국형전쟁영웅의전형이구축된다. 다른나라어디서나발견되는임전무퇴형전사가가족주의와결합되면서고유한한국형전쟁영웅의전형이탄생한것이다. 군사부일체 ( 君師父一體 ) 라는유교적가르침에서비롯된가족과국가를동일시하는한국인의오랜관념에따라국가는가족의확대된것으로존재하는것이다. 국가를위한것이가족을위한것이고, 가족을위하는일이국가를일로상승하는것이다. < 격퇴 > 는실제사례를중심으로대한민국국군의결사항전정신과가족애를결합하면서한국형전쟁영웅의전형의본질적인부분을완성하고있다. 여기서가족은국가의동질적인것이다. 국가라는추상적존재는가족이라는절대적보존의대상으로인식된다. 사랑하는아내와가족은자신이싸워야할이유이고자신이죽을수있는이 - 162 -

유이기도하듯이국가에대한희생또한정당한것이다. 대한민국을적으로부터수호할수있었던힘은가족을지키는강한남성의용맹함과숭고한희생의결과라는신화를구성함으로써, 이후제작된한국전쟁영화서사 (narrative) 의기원을제시하였다. 결국 < 격퇴 > 는 아군의희생없이적을격퇴시킬수없다 는명제로죽음과희생을명예로운승공의전당에올려놓을뿐아니라, 전방의군인과후방의가족을반공의이념으로묶어낸다. 국군의영웅만들기와희생의가족드라마는 1950년대이후의한국전쟁영화에서충실히반복재생산된원형적형태가되었다. 전쟁은끝났지만여전히전쟁의감성이남아있는상황에서전사에게가장중요한자질은어떤고난과희생을무릅쓰고라도적을격퇴해야하며, 임무를완수할때까지는결코돌아가지않겠다는굳은결의였을것이다. 1960년대한국영화에등장하는대부분의전쟁영웅들은 1950년대육탄돌격형전쟁영웅의이미지에서크게벗어나지않지만, 10) 순교자적이미지가훨씬강조된다는차이를보이고있다. 1960년대개봉된주요전쟁영화로는 <5인의해병 >(1961, 김기덕 ) 이나 < 빨간마후라 >(1964, 신상옥 ) 을기억할수있겠지만흥행이나작품수준을볼때대표작으로거론할수있는작품은역시 < 돌아오지않는해병 >(1963, 이만희 ) 이다. < 돌아오지않는해병 > 은군인들이 LST를통해인천상륙작전을감행하는장면으로시작한다. 분대장을비롯한분대원들은최후의항전을펼치는인민군을격퇴하고건물안으로진입한다. 그들이발견한것은집단적으로처형된양민들의모습이다. 구일병은그속에서여동생숙희의주검을발견하고오열하며포로로잡힌인민군을향해분노와저주를퍼붓는다. 해병대원들의일상적인생활을밝게보여주는중반부는자신들이궁극적으로돌아가야할곳이가족이라는보여준다는점에서가족주의적경향에서결코벗어나지않는다. 11) 후반부에서는중공군과혈전을벌리는해병대의영웅적인모습을생생하게보여주다. 그들은다른부대가후퇴하는동안중공군의진격을막아내야하는막중한임무를부여받게된다. 중공군은압도적화력으로공격하지만번번이실패하고만다. 빗발치는총탄과작열하는포탄속에서도해병대원들을결코흔들리거나물리서지않았기때문이다. 전우의죽음슬퍼하면서도용기와기지를적을물리치며임무를완수 10) 1960 년대한국전쟁을다루는영화도크게늘어났다. 박정희정부의성격에기인한점도있지만, 전반적으로국가체제가안정되어가면서보다체계적으로반공이념을확산시켜야하는정치적필요가작동했을것이다. 1960 년과 1961 년 3 편의전쟁영화가만들어지던것이 1962 년들어 7 편으로늘어났으며, 1965 년에는 15 편까지양산되었다. 1965 년부터대종상영화상에 반공영화 부문수상작을배출한영화사에해외영화수입권한을주는제도변화도큰유인책이되었다 ( 김권호 2006, 90). 11) 영화중반부는전쟁영화라고는믿기힘들정도로밝은웃음과여유를전달한다. 이것은인기코미디언이었던구봉서와영희역을연기하는전영선의존재에의해구축된다. 그들은전투로지친동료병사들에게심리적위안과삶의활력소가되어준다. 더불어순진무구한소녀영희의존재는병사들로하여금두고온가족을회상하게하며, 전쟁이끝나면돌아갈고향을상기시키게한다. - 163 -

게된다. 적의기관총을향해돌격하는것도서슴치않으며, 영웅적인투혼으로끝내 적을물리치게된다. 전투가끝난뒤, 대한민국해병 1 연대 1 대대 3 중대 1 소대 42 명중전사 39 명생 존자 2 명그중 1 명부상 이라는인원보고는그들이얼마나희생적으로싸웠는지를 확인한다. 자신에게부여된임무를완수하기전에는결코돌아오지않는다는결연한 전사의투혼을과시하고있는것이다. 이들해병대원들을더욱아름답게만드는것은이들이보여주는인간적감성이다. 전투를거듭할수록전우들은죽어나가고, 병사들은그런전우들을보며흐느껴운다. 끝까지용맹함을잃지않았던분대장은부하의죽음을전쟁에대한회의를토로하며 괴로워한다. 12) 그러나바로이런감상적인인간적요소로인해우리의전사는적과 달리숭고한인간애를표상하는존재로각인된다. 그들은용감무쌍한전쟁의영웅이 자숭고한인간애의수호자로자리매김하게되는것이다. 결과적으로해병대원들은 인간적이었기에냉혈한적과대립되는영웅으로서의이미지를확보하게되는것이다. 북한과의군사적대치가본질적으로달라지지않고있는상황이기때문에육탄돌격 형전쟁영웅의이미지는결코약해지지않고있다. 그러나단순히싸움만잘하는무 사의이미지가아니라, 가족과전우에대한인간적매력을물씬풍기는, 그리하여그 들을위해자신의목숨을내던질수있는용맹한전사의이미지를우리는공유하고 있는것이다. 여기서한국의전쟁영웅은순교자적이미지를강화한다. 다른부대의안전한퇴로 를확보하기위해자신들이희생해야하는상황에서그들은묵묵히자신의임무를수 행한다. 부하의죽음에애통해하는소대장의절규는순교한이들에대한조사이며, 그들의희생을기억하라는인간적인호소이다. 13) < 돌아오지않는해병 > 은한국영화사에있어주목할만한수작으로꼽힌다. 당시로 12) 전쟁이만들어낸참혹한결과와많은젊은이들이덧없는죽음을맞이해야하는가에대한반전 ( 反戰 ) 의메시지가강하게표출하고있다는분석이많이제기되었다. 전체적으로볼때, 반전의의미보다동료의죽음에대한인간적슬픔을표현한것으로이해하는것이더정확하지않나생각한다. 사실영화마지막부분의회환을담은표현조차도더깊은의미에서영웅의인간적면모를부각시키면서전쟁영웅의숭고함을더욱강화시키는결과를가져오고있다는점에유의할필요가있다. 13) 이러한순교자적표상은 1970 년대초반에제작된 < 낙동강은흐르는가 >(1976, 임권택 ) 에서더욱극적으로표현된다. 이작품은낙동강전선에서북한국의탱크를막기위해육탄돌격을감행했던 10 용사의일화를소재로제작된당시로서는대형블록버스터전쟁영화였다. 영화는적의탱크를막기위해목숨을던져야하는전사들의결연함과함께희생의숭고함을부각시키고있다. 그들의희생을통해보여주고자했던것은전투에서의불가피한죽음이아니다. 전투과정에희생은불가피한것이지만, 불가피하지않은돌격을통해헌신의숭고함을한층고양시키고있는것이다. 이러한희생이순교자의이미지를부각시키고있다고말하는것도, 바로그들의희생이야말로전투의불가피한결과로서가아니라자발적인결의를통해헌신이기때문이다. 순교자적전쟁영웅의탄생은단순히줄거리나네라티브의문제만은아니다. 1970 년대한국영화는영화진흥공사와같은기구를설치하면서보다체계적으로영화제작을지원하며연출이나촬영기법에서시각적감동을이끌어낼수있는실질적인토대를갖추었다. 게다가임권택같은감독의등장으로임권택같은감독의인상적인미장센을통해그들의헌신을더욱감동적으로보여준다. - 164 -

서제법큰스케일의전투장면과실제무기의사용등으로수준높은생생함을전해주었다. 당시서울서만 30만명이관람했으며지금의천만영화에버금가는흥행을거둔작품이라는것을말해준다. 14) 그만큼 < 돌아오지않는해병 > 에서표출된전사의이미지역시전사회적으로광범위하게공유되었을것이다. 이러한영웅의이미지는당시국가와국민간의관계를반영하는것이기도하다. 전쟁이라는예외상황은국민에게목숨을건희생을요구할만큼긴급한것이다. 국가의존재이유는국민의생명과재산을지키는것이지만, 바로그러한이유때문에국민의생명을요구할수있는역설적상황에놓이게되는것이다. 바로이런전시상황에서적을향해육탄돌격할수있는전사의이미지야말로그시대에가장부합하는것이라할수있다. 자신의목숨을던져서라도국가를지켜내야할시대, 한국영화는육탄돌격도마다하지않는전사의한전형을만들어낸것이다. 그러나단지용감한전사로끝나지않는다. 그들이지키고자하는국가는바로가족의확대된형태이며, 국가를지키는것이가족을지키는것이고, 국가를위한헌신은곧가족을위한것으로간주되었다. 국가와가족이동일시되면서육탄돌격형전쟁영웅의헌신은더욱값진것으로묘사되었던것이다. 따라서전형적인한국적전쟁영웅은단순히싸움만잘하는무사의이미지가아니라, 가족과전우에대한인간적매력을물씬풍기는, 그리하여그들을위해자신의목숨을내던질수있는순교자적전사의이미지를공유하고있다. 2000년대만들어진 < 포화속으로 > 나 < 연평해전 > 에서도그러한한국적전쟁영웅의이미지를발견할수있다. IV. 경제발전과 산업전사형 전쟁영웅 1970년대를대표하는영화는 < 월남에서돌아온김상사 >(1971, 이성구 ) 와 < 증언 >(1974, 임권택 ) 을들수있다. < 증언 > 은 1973년영화진흥공사가출범한이후야심작으로제작한한국전쟁영화로, 대규모전투장면을비롯한대형스펙터클을제공하는형식으로개전에서북진에이르는과정을비교적객관적으로보여주고있다. 한국전쟁을경험하지못한전후세대를한국전쟁시기에벌어진북한인민군에의한양민학살과같은잔혹함을말그대로 증언 의방식으로보여주는미덕을갖고있는영화 14) 국내에서해병을소재로한전쟁영화는시기별로차이는있지만꾸준히제작되었다. 특히 1960 년대해병에관한영화가많이만들어진것은 5.16 군사정변이후국시가반공인것과혁명당시중요한역할을했던군이바로해병이었다는점과무관하지않다. 한국전쟁을배경으로해병의무용담을통해반공정신을고취하고자했던것으로보인다. - 165 -

다. 당시거의모든학생들이단체관람했으며이후텔레비전에도자중방송하여 70 년대한국전쟁의대표적영화를인식되고있다. 이작품역시 50년대형성된육탄돌격형전쟁영웅의이미지를계승하고있다는점에서큰차이가없다. 관심을끄는것은 < 월남에서돌아온김상사 > 이다. 우리나라는 1964년부터외과의사와태권도교관부터파병을시작하여다음해부터정식으로청룡부대와맹호부대를파견하면서베트남전쟁에참전하게된다. 1973년월남이패망할때까지약 30여만명이참전하여당시한국사회의가장중요한경험을형성하게된다. 이영화는이전에만들어진베트남전쟁소재의영화와달리전쟁자체를배경으로하지않는다. 영화는주인공창호 ( 신영균 ) 가귀국선을타고한국에도착하는장면으로시작한다. 전선에서막돌아온창호는서울에서호텔을운영하는아버지김대령 ( 정민 ) 을찾아가귀국신고를한다. 이에김대령은 너희들이지켜준덕분에조국은많이변모했다 라며지금부터겪을사회생활도전쟁못지않음을강조한다. 창호는아버지의지시대로호텔도어맨으로사회생활을시작하지만베트남전선에서용감히 베트콩을때려잡던 자신이할일이아니라고생각한다. 창호와함께귀국한근태 ( 이대엽분 ), 용길 ( 박노식분 ), 진영 ( 김희라분 ) 의사정도비슷하다귀국후지방에머물고있던이들은전쟁당시소대선임하사였던창호도볼겸일자리도찾을겸서울로올라온다하지만직업찾기란그리호락호락한게아니었다. 그들은창호의아버지가창호의아버지가운영하는호텔의보일러실에매일술을마시며신세한탄을한다. 어느날그들을한심하게여긴김대령은군대식얼차려를부여한후에 너희들이이나라이사회를짊어진대들보라는사실을잊었는가. 지금부터새로운전투다이나라이사회를위해서무엇을해야할것인가를각자반성을해보란말야 라며훈계를한다. 창호와전우들은전쟁에서베트콩도때려잡았는데사회에적응하지못할건무엇이있겠느냐며새롭게각오를다진다. 그런다음그들은끈끈한전우애를바탕으로사회에진출조국근대화의일꾼으로서새롭게태어난다는줄거리다. 위에서살펴본것처럼 < 월남에서돌아온김상사 > 가취하는서사의흐름은베트남전쟁이가지고있는 조국근대화 함의를떠올리게만든다. 15) 베트남전쟁에돌아온우리의전쟁영웅들이새로운역할과이미지를부여받고있는것이다. 사실이러한이미지가한국사회에가장직접적으로도입된것은향토예비군의창설이다. 16) 싸우면 15) 김우성의연구는박정희정부가공식기억을만들어내는과정에대해서파고든다. 그는의회기록과대통령담화분석을통해정부가베트남전쟁을참전시기 (64년-67년), 수행기 (67년-70년) 와종료기 (70년-73년) 로구분하여호명하고있음을주장한다. 그리고정부는각각의시기를 제2의한국전쟁, 경제적실리와군사적실리, 북한과의체제경쟁을위한기회 로이름짓고있음을지적한다. 동시에주류언론은 반공 과 경제실리 를지속적으로강조하고있었다. 16) 1961년 11월에향토예비군설치법이제정 공포되며탄생했지만한동안유명무실한존재로남아있었 - 166 -

서건설하자 는향토예비군정신은경제와국방이다른것이아님을강조한바있다. 17) 이시기국가의가장중요한과제는경제발전과자주국방을함께지켜간다는것이었다. 이시기는국가는단순히외부의적으로부터국민의생명과재산, 그리고자유를막아주는수동적존재가아니었다. 국민을교육하고시장을형성하고기업을양성하는적극적존재로등장하게하면서국가발전과국민계몽의설계자이자감독으로스스로를자리매김했다. 이러한국가의식의극단적결과는유신체제의등장이다. 이러한국가적요구를반영한것이 < 월남에서돌아온김상사 > 의주제였다. 주인공의아버지는 이나라이사회를위해서무엇을해야할것인가를각자반성을해보라 고질타한다. 베트콩을때려잡던전쟁영웅이이제국가건설의영웅이되어야한다는주문을강하게내포하고있는것이다. 이제전쟁영웅은단순히전투만잘해서는안된다. 더욱중요한것은경제건설에기여할수있는인물이되어야함을강조하고있는것이다. 새로운전쟁영웅의이미지가탄생하는순간이다. 18) 산업전사 ( 戰士 ) 라는말만큼이시대전쟁영웅의이미지를잘표현하는단어도없을것이다. 이러한산업전사형영웅의전형이 2000년대새롭게등장한것이 < 국제시장 >(2014, 윤제균 ) 에서베트남전쟁에기업의상사원으로뛰어든윤덕수 ( 황정민분 ) 의삶을통해서다. 흥남철수로아버지를잃고어린나이에가장이되어자신의책임을감당해왔던그는동생등록금을마련하기위해파독광부로나서게된다. 전쟁같은탄광의막장에서겨우살아돌아왔지만, 국제시장가계를지키기위해다시베트남으로뛰어든다. 민간기술자라했지만전선이따로없는베트남전쟁에서사실상군인과다름없이목숨을걸고싸워야했다. 덕수에게가족을지키기위한일상의삶자체가전쟁이었다. 탄광의막장이나베트남의현장모두목숨을건전쟁터와크게다르지않다. 적어도 1960년대와 70년대를살아왔던이들에게삶자체는덕수의그것과크게다르지않았을것이다. 그렇다고이들이초월적인능력을보유한서구적영웅과는거리가멀다. 일상의삶을근근히 으나 1968 년 1.21 사태와같은해 10 월의울진 - 삼척무장공비침투사건으로필요성이확대되자실질적인으로운용할수있는조직을재구축되었다. 17) < 예비군의노래 > 역시이러한정신을잘드러내고있다. (1 절 ) 어제의용사들이다시뭉쳤다 / 직장마다피가끓어드높은사기 / 총을들고건설하며보람에산다 / 우리는대한의향토예비군 / 나오라붉은무리침략자들아 / 예비군가는길에승리뿐이다. (2 절 ) 반공의투사들이굳게뭉쳤다 / 마을마다힘찬고동메아리소리 / 서로돕는일터에서나라지킨다 / 우리는막강한향토예비군 / 나오라붉은무리침략자들아 / 예비군가는길에승리뿐이다. (3 절 ) 역전의전우들이다시뭉쳤다 / 나라위한일편단심뜨거운핏줄 / 철통같은제 2 전선힘이넘친다 / 우리는무적의향토예비군 / 나오라붉은무리침략자들아 / 예비군가는길에승리뿐이다. 18) 이러한전쟁영웅의이미지를가장잘표현하고있는인물은포항제철을만든박태준 (1927-2011) 이다. 그는육군소장출신이지만경제인으로변신했다. 1968 년포항제철을건립하여 10 년만에연 550 만톤의철강을생산하는세계적기업으로키워냈다. 그에게포항제철을건설하고발전시키는일은 또다른전투 였다. 고이병철삼성회장이그를 군인의氣 ( 기 ) 와기업인의魂 ( 혼 ) 을가진사람이다 이라고표현했듯이, 산업전사형전쟁영웅의표본을남아있다. - 167 -

살아가는우리의아버지, 어머니의모습으로등장한다. 자신들에게가난의업보를물려주지않기위해헌신하는순교자적정신의다가온다. 19) < 월남에서돌아온김상사 > 의베트남참전용사들이나 < 국제시장 > 의덕수모두산업화시대의산업역군의모습이다. 베트남참전용사들에게는새로운산업전쟁에서전사가되길기대하고있다면, 덕수에게는베트남전쟁자체가산업의현장이된다. 파독광부로서삶역시베트남의전쟁터와그리다르지않다. 산업현장이그자제로또다른전선으로이해되었던시절에가족을위해, 국가를위해목숨을건산업전선으로뛰어든이들이그시대의전쟁영웅들이었다. 어떤점에서이들은통상적인전쟁영웅과는거리가멀다. 람보식의초월적인전투력을과시하는것도, 그렇다고용감무쌍한육탄돌격용사도아니다. 그럼에도이들 60, 70년대우리의전쟁영웅으로인식될수있는것은가족과국가를위해전쟁같은산업현장을지켜온전사들이기때문이다. 어떤우월적인존재로서영웅이아니라해당시대가자신들에게부여한가족적, 국가적의무를수행하기위해자신의삶을내던졌던우리들아버지, 어머니이기때문에더욱감동적인것이다. 1960년대와 70년대한민국이라는국가는절대빈곤의탈출과산업화의과제를해결해야했다. 한편에서는 188마일휴전선에서북한과군사적으로대치하고있었지만, 동시에경제발전을이룩해야할상황에서 싸우면서건설하는 산업전사형영웅이요구되었다. 1950년대북한의남침을막아내기위해육탄돌격했던단순한군사적영웅이중시되었다면, 1960년대를넘어들면서산업화를이룩하기위한산업전사들이더욱중요시되었다는것을의미한다. 이러한국가적과제는국가와시민들간의관계역시달라질수밖에없게만들었다. 1950년대국가는시민들에게전선으로달려가가족과국가를위해육탄돌격할것을명령하는존재였다면, 1960년대국가는반공전선을견고히지켜야할뿐만아니라산업화의과제를해결해야했다. 사실상 두개의전쟁 을동시에치루어야했고, 싸우며건설하는 일이당연하게수용되었다. 경제와국방을동시에발전시켜야하는병진발전론이박정희정부의중요한국가목표가되었다. 두개의전쟁을수행하는것이국가의존재이유라고한다면, 결국 싸우며건설 해야하는그전쟁을온몸으로수행해야할당사자는시민인셈이다. 이런상황에서우리의전쟁영웅은단순히 188마일휴전선을지켜내는것으로역할을끝낼수없는것이다. 경제성장의국가적민족적염원을달성하기위해또다른전선으로내달려야했다. 그들이독일탄광의막장으로, 베트남의밀림으로, 그리고중동의사막으로갈수밖에없었던이유도여기에있 19) 덕수의다음과대사는당시힘든삶을이끌왔던작은영웅들의마음을읽게해준다. 나는그래생각한다. 힘든세월에태어나가이힘든세상풍파를우리자식이아니고우리가겪은기참다행이라꼬. - 168 -

다. 국방과함께경제발전도성취해야했던 1960 년대와 70 년대우리의전쟁영웅이 산업전사로표상될수밖에없었던까닭도여기에있는것이다. V. 탈냉전과 회의하는 전쟁영웅 1980년대접어들면한국전쟁을소재로전쟁영화는거의찾아보기힘들다. 일년에한두편제작되었지만대중적으로흥미를끈작품은찾기어렵다. 해외영화수입의특혜도사라졌기때문에현실적유인도사라졌고 < 람보 > 와같은장쾌한스케일의외국영화의범람으로 20) 경쟁력있는한국전쟁영화를만들지못했다. 전쟁영화가빈곤했던더본질적인이유는국가성격과한국전쟁에대한사회적인식이달라지기시작했기때문이다. 70년대를주도해왔던경제와국방의병진발전론은 1980년대들어서면서점차약화되고경제와국방, 경제와정치의분리가강조되기시작했다. 70년대중반이후경제력에서남한이북한을앞서기시작했고, 80년대의경제호황은대한민국으로하여금국방에있어자신감을갖게만들었다. 인구분포에있어서도전후세대가다수를차지하면서한국전쟁의트라우마에서도서서히벗어나고있었다. 그렇다고해도반공이념의규제력이사라진것은아니었기때문에, 정치적으로나사회적으로한국전쟁에대해새로운해석을내놓기에는부담스러운상황이었다. 한국전쟁에대한새로운해석과재현이필요한시점이었지만, 어떻게해야할지에대한사회적계기나합의가마련되지않은상황에서영화는한국전쟁에대해침묵할수밖에없었다. 오랜침묵을깨고나온작품이 < 쉬리 >(1999, 강제규 ) 였다. 한국형블록버스터영화의출발이었다. 그이어한국전쟁과분단을소재로한영화들이천만관객시대를열어갔다. 2000년대한국영화의르네상스는한국전쟁의영화화에서가능했던일이다. 북파공작원얘기를다룬 < 실미도 >(2003, 강우석 ), 뜨거운형제애를주제로했던 < 태극기휘날리며 >(2004, 강제규 ), 남북한병사들의비밀스런만남을담은 < 공동경비구역 JSA>(2000, 박찬욱 ), 남북한군인들간의평화로운공준을그린 < 웰컴투동막골 >(2005, 박광현 ), 포항전투에서학도병의역할을재조명한 < 포화속으로 >(2010, 이재한 ), 그리고전쟁에대한본질적질문을던진 < 고지전 >(2011, 장훈 ) 에이르기까지최근한국전쟁을소재한영화는줄을잊고있다. 최근개봉한 < 연평해전 >(2015, 김학 20) 람보 (1983, 1985, 1988) 나코만도 (1987) 등이대표적이다. 한국전소재의 < 독불장군 >(1987) 이나베트남전쟁을다룬 < 구사일생 >(1984) 등이제작되었지만헐리우드영화의수준낮은복사수준에서벗어나지못했다. 또다른경향은한국전쟁과분단의상처를새롭게바라보는영화가만들어지기시작했다는점이다. 임권택감독의 < 짝코 >(1983) 과 < 길소뜸 >(1985) 이대표적이다. - 169 -

순 ) 이나 < 인천상륙작전 >(2016, 이재한 ) 역시한국전쟁을소재로블록버스터의행진을이어가고있다. 전통적전쟁영웅의이미지 ( 육탄돌격형 ) 에부합하는영화는 < 포화속으로 >(2013), < 연평해전 >(2015), 그리고 < 인천상륙작전 > 처럼있지만, 나머지작품들은하나같이한국전쟁과분단체제에대한새로운시각, 혹은이미지를투사하고있다는데주목할필요가있다. 우선, 분단과남북한의대결을소재로하여한국형블록버스터의전형을제시한 < 쉬리 > 에서는북한체제에대한새로운시선을보여준다. 남한요원유중원 ( 한석규분 ) 는북한의저격수이방희가자신이사랑했던여자이명희 ( 김윤진 ) 이라는것을알게되면서갈등에빠지게된다. 결국총을놓지않는이명희를사살할수밖에없는비극적상황에서벗어날수없지만그녀를향한그의눈길은깊은연민과슬픔으로가득찬다. 남과북이분단되어있는현실에서좌절하게되는비극적사랑을그리고있는것이다. 여기서이명희는한남자를사랑하지만체제의강압에서벗어날수없는비극적존재로그려진다. 그들은한달후결혼까지약속했지만분단체제의견고한사슬에서벗어날수없었다. 결혼은새로운가정의탄생을의미한다는점에서유사 ( 類似 ) 가족적이미지를암시한다. 전통적인한국적전쟁영웅서사에서가족은국가와동일한것으로설정되었다. 가족을위한것이곧국가를위한것이요, 국가를위한헌신이가족을살리는것으로간주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한국영화에서분단은가족의형성을차단하는비극적질곡으로그려진다. 국가체제로서남한과북한은더이상과가족과동질성을확보하지못하고일탈되면서우리의전쟁영웅들은깊은좌절과회의에빠지게되는것이다. 가족과국가의분리혹은대립을극단적으로밀고나간작품이 < 태극기휘날리며 > 다. 강제규감동이 4년후개봉한이작품은한국영화사상처음으로 1천만관객을돌파한기록적인영화다. 서사의주제는형제애다. 형진태 ( 장동건분 ) 는오로지동생 ( 현빈분 ) 을구하기전쟁에뛰어든다. 전쟁의스펙터클은동생을지키기위해헌신하는형의투혼을보여주기위한장치로사용된다. 조국을지키겠다는의지나바람은찾아보기어렵다. 동생이죽은것으로알고북한군에넘어간진태의선택에서극단적행태를발견할수있다. 한등장인물 [ 영만 ] 은 막말로이놈의전쟁누가이기든무슨대수야. 난사상이뭔지모르겠는데, 형제들끼리총질할만큼중요한건가? 라고외치면서국가와체제를외면한다. 여기서전쟁은가족과형제를고난에들게하고장애물에불과하다 ( 김형주 2012, 106). 한국전쟁을소재로했기때문에육탄돌격의투혼과장렬함이화면을수놓고있지만, 더이상국가주의적목표는찾아보기어렵다. 자신의가족과생존을위해뛰어다닐뿐자신이지켜야할조국의깃발은보이지않는다. 이러한경향은 < 웰컴투동막 - 170 -

골 > 과 < 공동경비구역 > 에서더욱심한형태로반복된다. 이두작품은남북한군대가공동체적동질성을발견하는일종의판타지적성격을갖고있다. < 웰컴투동막골 > 이전통적인마을공동체를지향한다면, < 공동경비구역 > 은끈끈한형제애로남북한을묶어낸다. 이러한설정자체는남과북의체제적대립이라는전통적국가주의에서벗어나는것이다. 마을과형제애로표상된민족공동체에서암시하는것은공존과공감의정신이다 ( 김기정 2015). 이러한탈국가주의적메시지가지배하는영화를통해우리의전쟁영웅들은새로운판타지를그리고만들어내고있는것이다. 그나마강한반공의이미지를투사하고있는 < 포화속으로 > 에서도가족과대비될수있는국가의모습은보이지않는다. 나이어린학도병이나라를지키기위해나섰다는것만으로는전통적전쟁영웅의표상을보유하고있다. 영화적설정을통해학보병의애국심과용기는관객들에게감동을불러일으킨다. 그러나이들의애국심이국가를향하고있다고네라티브는찾기어렵다. 이들이전투에열심히참여하게되는계기는조국수호나반공이라기보다친구의죽음과생존을위한투쟁으로읽힌다. 오히려이들을지배하고있는정서는가족주의다. 마지막전투를앞두고한학도병 [ 오장범 ] 이어머니를떠올리는내레이션에서 어머니, 오늘저는죽을지도모릅니다. 저많은적들이우리를살려두고그냥물러갈것같지않으니깐말입니다. 라며애뜻함을불러일으킨다. 마지막순간그들은어머니를소환한다. 그리고묻는다. 전쟁은왜해야하나요? 이복잡하고괴로운심정을어머님께알려드려야내마음이가라앉을것같습니다. 그는어머니로상정되는대답없는조국, 혹은국가에게묻고있는것이다. 전쟁에서국민개인의목숨을요구했던국가는이러한근본적인질문에아무런대답도제시하지못하는것이다 ( 정병기 2013, 449) 전쟁에대한근본적인회의는 < 고지전 > 에서가장구체적인형태로발현된다. 백마고지전투를소재로삼은 < 고지전 > 는치열한전투장면과추리적기법의동원하여긴장감넘치는구성을보여준다. 그러나전쟁영화로서의스펙터클과격렬함은소재로사용될뿐본질적인메시지는수많은생명을빼앗아가는부질없는전쟁에대한노골적인부정이다. 김수혁중위 ( 고수분 ) 의날카로운발언처럼 우리가싸우는것이적이아니라, 전쟁자체 라는인식이깔려있다. 그들은조국을위해싸우는것이아니라, 북괴군을막기위해싸우는것이자신과동료의생명을지키기위해싸우고있는것이다. 그들은적과의내통이라는방식으로국가의공식명령을거부한다. 고지의주인이밤낮으로바뀌는상황에서모종의거래가이루어지도록설정한것이다. < 공동경비구역 > 와남북한병사가달밤에교류하는것과같은판타지다. 전쟁의실존적상황을거부할수없지만, 그속에서새로운공동체 ( 혹은상호의존적거래관계 ) 를만들어갈수 - 171 -

있다는것을보여준다. 남성식이병이부르는 전선야곡 을통해정서적공감을이루어내는것전장의살기 ( 殺氣 ) 를이겨내기위한실존적노력이었을것이다. 현실적공간이이루어질수없는판타지를통해무의미한전쟁으로부터타인과의소통이라는인간적의미를구현하고있는것이다. 그러나이들이살기위해서로를죽여야하는전장의적나라한현실에서자유로울수있는것은아니다. 오히려살기위해더욱참혹한전투를벌려야하는것이다. 2 초 ( 김옥분분의차태경 ) 의저격은동료병사를끌어들이기위한비열한방식이지만어쩔수없는전장의실존인셈이다. 그럼에도서로에대한시선은적대적이지않다. 마지막전투에서기진맥진한강은표중위 ( 신하균분 ) 가 2초를죽이는장면에서그는끝내머리를돌리고만다. < 쉬리 > 에서류중원이이명희에게던졌던눈빛, 그리고 < 공동경비구역 > 에서이수혁병장 ( 이병헌분 ) 이오경필중사 ( 송강화분 ) 에게보냈던눈빛이바로그것이다. 이들의눈빛에는분단과전쟁에대한깊은회의가담겨있다. 21) 그들이지켜야할국가와체제가더이상복종해야할깃발이되지못할때, 무엇을위해싸워야하는지에대한회의는깊어갈수밖에없는것이다. 1999년 < 쉬리 > 이후한국전쟁과분단을소재로한영화는 1980년대까지지배적이었던전통적인한국적전쟁영웅의표상을반복하지않았다. 전쟁의스펙터클속에서육탄돌결의투혼이사라진것은아니지만가족과국가의동일성은균열을내기시작했다. 이제더이상국가는가족과동일한것으로인식되지않고, 오히려가족혹은유사가족 ( 연인, 마을, 전우등 ) 의결합과지속을방해하고제약하는장애물로표상되고있다는것을발견할수있다. 여기서우리의전쟁영웅들은무엇을위해싸워야할지회의하지않을수없다. 분단체제가정당한것이아니라면, 분단체제를구축하는전쟁또한정당성을주장하기어려운것이된다. 전쟁자체가정당한것이아니라면, 이러한상황에서병사들은무엇을위해싸워야할지깊은회의에빠지게마련이다. 전쟁자체에대한회의는전장에서있는병사들에게왜싸워야하는지를설득할수없다. 국가와가족의동일성위에존재했던헌신과희생의의미를발견할수없다면, 그들이싸워야할이유는생존그자체밖에없다. 그들이싸워야할것이적이아니라, 전쟁그자체인이유이다. 따라서국가의깃발이보이지않는곳에서병사들이실존적목표는생존그자체이다 (< 고지전 >). 살아남아야그들이꿈꾸는가족과의재회 (< 태극기휘날리며 >) 와행복한공동체 (< 웰컴투동막골 >) 를그려볼수있다. 이모든것이불가능해졌을때, 즉돌아갈곳이없다고느껴졌을때그들은스스로의삶을포기하는절망적인선택 (< 공 21) 이러한눈빛은 < 라이언일병구하기 >(1998, 스티븐스필버그 ) 에서독일군이칼로미군의가슴을찌르면서그의죽음을끝까지응시하는것과큰대조를보인다. 이독일군은미군이인도적차원에서살려준포로였다는점에서인도적선택에대한부정적이미지를남기고있다. - 172 -

동경비구역 >) 을할수밖에없다. 물론남북한의분단과군사적대립이라는엄중한현실자체가변한것은아니다. 그렇기때문에서해해전이나연평도포격과같은남북한의군사적충돌이발생할때, 다시금순교자적육탄돌격형전쟁영웅의소환이이루어지고있다는것을발견할수있다 (< 서해해전 >, < 인천상륙작전 >). 그러나전반적으로볼때분단체제를구축한한국전쟁은더이상적대적존재로인식되지않고, 궁극적으로공존해야할대상으로간주되기시작했으며, 이를주체적으로구현하는전쟁영웅또한적과의공존을추구하는존재로그려지게되는것이다. 22) 한국전쟁과분단에대한이러한인식의변화는한국사회의정치적, 사회적, 경제적변화를고려하지않고서는이해되지않는부분이다. 1987년 6월민주화항쟁과문민정부의등장, 1990년대사회주의권의붕괴와탈냉전시대의도래는한국전쟁과분단체제에대한근본적인회의가가능하게했다. 회의하는전쟁영웅의이미지가한국전쟁영화를지배하게된배경에는이러한인식의변화가작용하고있다. 이러한변화에는탈냉전적상황에서국가와시민과의관계변화도주목할부분이다. 전통적전쟁영웅은개인 = 가족 = 국가라는일종의삼위일체관계가형성되었다면, 탈냉전시대에는개인과가족은국가로부터이탈하고있는것이다. 국가로부터자율성을확보한개인들은국가와대등한관계를요구하게된다. 더이상국가로부터의일방적인명령에따라움직이는수동적인존재가아니라국가에요구하고국가를비판할수있는주권자적권능을강화한것이다. 국가와가족의동일성이균열을내기시작했다. 가족을매개로국가에대한충성을요구할수있었던과거와달리, 분단국가자체는가족의형성과유지를제약하는질곡으로인식되기시작했던것이다. 탈냉전과민주화는국가의일방적명령이나개인의맹목적헌신은기대할수없다. 개인의발전이곧나라의발전이며, 국가의번영이곧나의번영인시대는이미오래전에사라진것이다. 이제국가를위해개인이나가족이충성하기보다국가가개인과가족을위해어떤역할을수행해야할고민해야하는시대가된것이다. 그런점에서한국의전쟁영화는시대변화에부응하는새로운국가와시민관계의형성을요구하는셈이다. 22) 최근개봉한 < 서부전선 >(2015, 천성일 ) 역시남북한병사가서로싸우기보다탱크를몰고함께집으로귀환하는것으로설정되어있다. 적을격퇴하라는국가적명령보다생존과귀환이라는인간적가치가더욱소중하게인식되고있는시대적상황을반영하는것이다. - 173 -

VI. 결론 본연구는한국전쟁영화에대한분석을통해한국적전쟁영웅의전형이어떻게만들어졌으며, 시대적변화와함께어떻게변화했는지를탐색하는것이다. 이를통해국가와시민과의관계변화를살펴보는것이또다른목표다. 영화를통해시대를재구성하는것은, 역사적사실자체보다영화를통해구성된역사적사건이대중적기억이더깊은영향을준기때문이다. 특히영화는대중적소비를목표로하고있기때문에, 한국전쟁과분단에대한시대정신을반영할수밖에없다. 영화가보여주고자하는시대정신을제대로담아내지못할경우흥행에성공할수없기때문이다. 1950년대한국전쟁영화는가족주의에기반한육탄돌격형전쟁영웅의전형을제시했다. 당시시민들은불법남침한북한군을물리쳐야하는국가적사명을공유하고있었다. < 격퇴 > 는, 김만술중대장과병사들은육탄돌격의용맹함과임전무퇴의결사항전으로적을격퇴한다는서사를담고있다. 이들의무훈에는가족의기대와사랑이깔려있다. 가족과국가는동일시되고가족을지키는일이곧국가를위해싸우는일로간주되기때문이다. 그들의헌신은국가를위한숭고한희생으로그려진다. 1960 년대만들어진 < 돌아오지않는해병 > 과 < 낙동강은흐르는가 > 는이러한순교자적헌신을잘보여준다. 여기서국가는시민에게헌신을요구하는명령하는국가다. 전쟁은시민에게그어떤자율성도보장해주지않는다. 오로지국가의명령에따라전장에나가적을막아내야하는숙명적존재이기때문이다. 전쟁과군사적대치의엄중함은국가를위해순교할수있는, 적을향해육탄돌격할수있는그런전쟁영웅을기대했던것이다. 1970년대전쟁영웅은산업전사의모습을드러낸다. 북한과군사적긴장이사라지지않고있는상황에서절대빈곤으로부터해방이라는국가적과제를달성하기위해온국민이산업전사로변신해야했다. 싸우면서건설 해야하는이중적과제의담지자로전쟁영웅은등장한다. 파독광부나베트남파병용사들에게전쟁과경제발전은분리되는것이아니었다. 북한과의체제경쟁이선포되었던시대, 산업화와경제발전은곧또다른방식의전쟁이었다. < 월남에서돌아온김상사 > 가산업전사로변신해야하는이유이며, 2000년대만들어진 < 국제시장 > 에서가족을위해베트남을달려갔던윤 의모습에서산업전사로변신한전쟁영웅의모습을발견할수있다. 이러한변화는국가의역할이단순히적을막아내는수동적방어를넘어서경제성장의주체로인식되었기때문이다. 1960, 70년대박정희정부가자임했던두가지목표는반공과경제발전이었다. 이러한국가목표는국민들에게두개의전쟁에복무할것을요구했다. 적과맞선분연히육탄돌격할수있어야하지만, 다른한편산업전선 - 174 -

에서경제건설을수행해야할, 말그대로산업전사가되어야했다. 민주화와탈냉전의시대적분위기는냉전과분단체제를새롭게인식하는계기를만들었다. 당연한것으로생각되었던한국전쟁과분단에전통적사유가문제시되고회의하는상황에서우리의전쟁영웅역시예외가아니었다. 오히려훨씬극적인방식으로한국전쟁과분단은재해석되었다. 적으로서북한의존재를부정할수없지만, 격퇴나절멸의대상으로인식하기보다공존과공감의대상으로이해하기시작했다. 우리의전쟁영웅들의눈빛이달라지기시작한것이다. 왜전쟁을해야하는지에대한근본적질문은부질없는전쟁에대한비판과부정으로이어진다. 가족을지켜야할국가는오히려가족의해체를요구하는상황에서그들은전쟁을회의하고새로운길을고민하게된것이다. 그런점에서우리의전쟁영웅은주어진시대를회의하고반성하면서자신을찾아가는, 즉수단적존재가아니라삶의주체로서역사를바라보려는자세가돋보인다. 전쟁이라는거대한압력에속에서여전히헌신적투혼이필요하지만 (< 인천상륙작전 >, < 연평해전 >, < 포화속에서 >), 그럼에도불구하고전쟁과분단자체를회의하고 (< 고지전 >, < 공동경비구역 >), 가족을지키며 (< 태극기휘날리며 >), 그리고더나아가이상적공동체 (< 웰컴투동막골 > 을모색하는것이 21세기전쟁영웅이걸어가는길인것이다. 전쟁과분단이라는구조적힘에대응할수힘은결국우리사회가그만큼구조적강제력에서자유로워졌다는것을의미하며, 국가와국민, 혹은사회와개인들관계에있어질적인변화가있다는점을의미한다. 국가에종속된, 혹은국가발전을위해헌신하는전사의이미지에서벗어나, 자율성과주체성을갖춘전쟁영웅의이미지가들어오고있는것이다. 이러한자율성이국가에대한이탈로간주할필요는없다. 오히려건강한국가는자율적주체들의유기적결합에의해더욱강력해지고더욱견고해지기때문이다. <*> - 175 -

참고문헌 강선주 (2008), < 미국의 20 세기전쟁에대한공식화된기억-세계대전과베트남전쟁을중심으로 >, 미국학논집 40호. 김기정 (2015), < 한국전쟁영화와공감 ( 共感 ) 기획 >, 문화와정치 2권 1호. 김미현 (2015), < 한국반공영화서사 (narrative) 의기원에대한연구 >, 영화연구 63호. 김형주 (2012), < 영화속에나타난전쟁의재현과의미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12 권 11호. 윤미애 (2002), < 매체와문화적기억 >, 독일어문화권연구 11호. 정병기 (2013), < 한국전쟁영화에나타난국가관과전쟁관 : < 포화속으로 > 와 < 고지전 > 을중심으로 >. 국제정치논총 53권 3호. 태지호 황인성 (2014), < 영화에서드러나는한국전쟁에대한집단기억과대중기억만들기 >. 한국언론학보 58권 6호. 태지호 (2012), < 텔레비전다큐멘터리를통한사회적기억제도로서의영상재현에관한연구 >, 한국방송학보 26권 4호. Coltheart, M.(1980), Iconic memory and visible persistence. Perception & psychophysics, Vol. 27, No. 3. Halbwachs, M., & Coser, L. A.(1992), On collective memor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Marcus, G. E.(1990), The modernist sensibility in recent ethnographic writing and the cinematic metaphor of montage, SVA Review, Vol. 6, No. 1. Olick, J. K.(2007), From usable pasts to the return of the repressed. Hedgehog Review, Vol. 9, No. 2. Rosenstone, R. A.(1995), Visions of the past: The challenge of film to our idea of histor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Stacey, J.(2013), Star gazing: Hollywood cinema and female spectatorship. Routledge. Tilly, C.(1992). Coercion, capital, and European states, AD 990-1992. Wiley-Blackwell. - 176 -

한국현대사와전쟁영웅 : 희생과기여의스토리 조성훈 ( 군사편찬연구소 ) - 목차 - I. 문제제기 II. 전쟁영웅대상자범위 1. 대상자규모 2. 6 25전쟁및전후영웅발굴 III. 유형별대표전쟁영웅 1. 전차파괴영웅 2. 적을격퇴시키기위해목숨을던진영웅 3. 특공대영웅 4. 부하와동료를구한영웅살신성인영웅 5. 재일학도의용군출신영웅 6. 첩보전영웅 7. 용병전술이뛰어난지휘관들 8. 경찰영웅 I. 문제제기 광복후자유민주주의와평화를지키기위해수많은군인, 경찰등이젊음과목숨을바쳤다. 6 25전쟁과베트남파병, 정전후북한의수많은도발에맞서자유민주주의와대한민국을수호하기위해몸으로직접실천한국방사영웅의발자취에대한발굴은그들의희생과헌신을기억하려는것이다. 전쟁영웅을기리는일은곧국가의존립과국가정체의방향을제시하는등대와같은역할을한다고본다, 그래서일찍이영국정부는제2차세계대전후 국방의일은전국민의과업 이라는방침을정하고학생들에게교육을강조했다. 1) 북한에서는 1) 조성훈 (2006), 외국군사사연구의조직과활동, 군사편찬연구소, p. 217. - 177 -

1951년 9월부터 10월까지벌어졌던강원도인제군에있는 1211고지전투에참가한 영웅 인이수복을비롯한강호영, 조군실등대표적인전쟁영웅들을내세워생산을독려하거나수령과당에대한충성심을고취시켜, 전쟁영웅은북한주민에게친숙하다. 이들은교과서에서도널리소개되고있다. 2) 우리나라교과과정에서전쟁영웅과관련이있는교육은주로초등학교에서만강조되고있다. 초등학교의교과목인바른생활, 생활의길잡이, 사회과탐구등에서 6 25전쟁, 베트남전쟁, 전후교육훈련가운데일부사례를소개하고있다. 전쟁전개성송악산비둘기고지의 10용사, 바다에서나라를지킨손원일제독, 전쟁시미 8군사령관이었던밴플리트장군, 인천상륙작전을성공시킨맥아더유엔군사령관등이그사례다. 3) 60년대 70년대교과과정에서는국군의베트남파병이진행되고있을무렵에는베트남전선에서자유와평화를지켜주기위하여싸우는우리나라병사들의용감한이야기를소개했다. 국군의베트남파병을앞둔 1965년 10월 4일부하들과함께수류탄투척훈련을하고있을때, 부하중하나가실수로수류탄을잘못던지자순간적으로몸을날려수류탄을덮친강재구중대장의희생정신을수록했다. 또한 1966년 8월 11일, 투이호아해풍작전에서이인호해병대위가동굴속에숨은베트콩을향해수류탄을던졌으나다시되돌아온수류탄을몸으로덮쳐부하들을살리고순국한거룩한희생사례도소개되었다. 4) 1971년판초등학교바른생활교과서에는 1966년 2월공수특전단낙하훈련중동료를구한이원등상사의고귀한희생정신을실었다. 5) 하지만역사교과서에서는전쟁영웅에대해거의다루지않았다. 1990년대문민정부이후에도국정교과서체제아래현대사의비중이높지않아, 6 25전쟁발생배경, 북한도발과전황, 휴전과전후복구, 영향등이간단히서술되는데그쳤다. 그분량도북한정권의수립을포함해서 4면정도였다. 6) 대학의교양서에서도이수준을벗어나지않았으며전쟁결과분단이고착되었다고강조했다. 7) 검인정체제아래에서고등학교한국사교과서에서 6 25전쟁의비중이 6 10면으로늘어나전쟁의배경, 전개과정, 전쟁의영향등과정전협정문, 사상자규모, 학도병편지등이포함되기도했지만, 전쟁시기호국영웅에대해서는전혀소개되지않 2) 김종수 (2008.3), 6.25 전쟁과북한 ' 청년영웅 ', 정신문화연구 31-1, p.178. 3) 손규석 (2012), 현대호국인물의연구동향과전망, 전쟁기념관, 전쟁기념관의 호국인물 선정과운영에대한종합적고찰, 2012.6.22., p.43. 4) 문교부 (1973), 바른생활 5-1. 5) 국민교새교과서이렇게개편, 동아일보 1966.3.5.; 문교부 (1966), 바른생활 6-1. 6) 교육부, 고등학교국사 하, 1996, pp.198-201; 교육인적자원부 (2005), 고등학교국사, p.351; 교육과학기술부, 고등학교국사, 2009, p.125. 7) 변태섭, 한국사통론, 삼영사, 1996;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편, 한국사특강, 서울대출판부, 1990; 김영명, 한국현대정치사, 을유문화, 1999. - 178 -

았다. 한때독립된한국근 현대사교과서에서도전쟁발생배경, 전쟁전개과정, 전쟁의피해및영향등의서술에그쳤다. 8) 그러므로내용이더욱간단한중학교역사교과서에서호국영웅에대한기술은기대할수없는것이당연할것이다. 전쟁의상처로서이산가족과전쟁고아등이강조된다거나포항전투에참전했다가전사한중학교소년병이우근의일기를소개하는데그쳤다. 9) 이는독립운동기지건설을했던이회영, 3 1운동시기유관순열사, 무장독립전쟁주요인물인김좌진 홍범도 양세봉, 의열투쟁의강우규 김상옥 윤봉길 이봉창 김원봉등의주요인물의활동이소개된점과는양적으로질적으로큰차이가난다. 물론이민족지배하의주권을회복하기위한독립운동사는외세로부터국난극복사여서국가차원의존립가치로강조해야하겠지만, 특히 6 25전쟁시국가의존립위기를극복하고자유민주주의가치를수호한공로에대해서도교육할필요가있다. 최근에는전쟁기념관과보훈처등에서매월호국인물과전쟁영웅을선정하여보훈행사를통해희생정신을기억하고넋을기리기위한추모행사가활발하게이루어져전쟁영웅을알리게되었다. 하지만선정된인물의기념행사위주로추진되고있어학생과일반인의관심과참여가부족한실정이다. 따라서영웅들의발자취가전쟁사와장병들의반공정신교육을넘어서서, 조국수호의애국혼으로국민들에게부각시키도록국민이공감할수있는대표적인영웅을발굴하여대한민국국방사에서영웅의의식과실천의표상으로정립할필요가있다. 이들은국권회복운동가와독립운동가와마찬가지로국가안보를수호하려는나라사랑정신의발현자들이다. 본고에서는 6 25전쟁, 베트남파병, 끊임없이계속되는북한의도발속에국민의귀감이되는호국혹은국방영웅을발굴및정리에중점을둘것이다. 이는그들의나라사랑정신을국민들에게알리기위한기초자료가될것이고, 충혼탑이나비건립, 현충일등의추모식, 위문등을넘어서광복이후현대국방사를풍부하게할것이다. 8) 금성사 (2005), 고등학교한국근 현대사, pp.268-275; 법문사 (2004), 고등학교한국근 현대사, pp.258-259; 지학사, 고등학교한국사, 2014, pp..352-356; 비상교육, 고등학교한국사, 2014, pp.354-356; 교학사, 고등학교한국사, 2014, 310-319. 9) 대교, 중학교역사 하, 2011, p.100; 두산동아, 중학교역사 하, 2011, p.106; 천재교과서, 중학교역사 2, 2013, p.79. - 179 -

II. 전쟁영웅대상자범위 1. 대상자규모 6 25전쟁, 파병, 대남도발등에서전장에서싸우는사람은모두영웅이라고할수있을것이다. 10) 이과정에서호국영웅의발굴대상은방대하다. 태극무공훈장은무공에대한최고훈장으로직접참전하여생명의위험을불구하고임무를수행하여비상한무공을세워타장병의귀감이될발군의무훈이있은자에대해수여하고있다. 을지무공훈장은직접참전하여곤란을극복하고중대한임무를수행한자또는군무수행에있어서탁월한능력을발휘한자에대하여이를수여한다. 충무무공훈장은직접참전하여그임무를수행하기위하여헌신분투한자또는군무수행에있어서적극노력봉사하여그공적이다대한자에대하여이를수여한다. 11) 표 1) 과같이창군이래전체무공수훈자가운데 1, 2등급무공훈장인태극과을지무공서훈자규모만으로도 3,000명에이르고있어서 6 25전쟁시기인물을우선선정하되, 널리국민의공감을얻을수있는인물이발굴되어야한다. < 표 1> 무공수훈자규모 ( 국방부, 2013.2) ( 단위 : 명 ) 구분태극을지충무화랑 창군이래전체 319 2,846 19,791 172.418 영웅발굴에있어서, 대부대지휘및작전지도능력이탁월하여전투를승리로이끄는데결정적인역할을한인물, 소부대를지휘하여악조건에서도전투를승리로이끌어공훈이있던인물등을선정하되, 정규전외에빨치산토벌작전등도고려되어야한다. 즉호국영웅들은전쟁전개과정에서정규군장병외에학도의용군, 유격대, 경찰, 민간인등에서선별되어야한다. 또한훈장을받지못한숨어있는영웅의발굴도중요하다. 그런데국민들이꼭기억해야할인물에초점을맞추면알려지지않는인물을새로부각시키기어려운점이있다. 전쟁영웅가운데광복군출신으로대한민국임시정부군무부차장과광복군총사령부참모장을역임한김홍일장군이돋보인다. 그외에도인천상륙작전을기만하기위해 10) 부르스쟈고브스 ( 박혜만역 )(1955), 한국전선의영웅들, 자유신문사. 11) 대통령령제 385 호무공훈장령 1950.10.18., 한국전란 1 년지, p.c62. - 180 -

실시된장사상륙작전의성공적인작전을위해광복군출신으로전술고문을했던전성호대령은불리한교전과정에서 1950년 9월 15일전사했다. 김일환은평북의주출신으로광복군제2지대소위로임명되어섬서성 ( 陜西省 ) 서안 ( 西安 ) 두곡 ( 杜曲 ) 에서약 3년간복무하였으며, 1943년 1월하남성 ( 河南省 ) 방면적구공작 ( 敵區工作 ) 에파견되어활동하다가해방후인 1946년 6월귀국하였다. 귀국후대한민국육군장교로입대한그는 6 25전쟁당시 1950년 11월 31일평남덕천에서전사하였다. 평북선천출신인차약도 ( 車若島 ) 는일제학병으로 1944년 5월 18일일군에강제입대한승영호 노능서와함께중국서주 ( 徐州 ) 교외주둔일본군부대를탈출해, 안휘성임천 ( 臨泉 ) 에서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을찾아훈련을받았다. 동년 10월졸업한그는지대본부에서신참동지의군사훈련과광복군제3지대창설에주역을담당하여활약하였다. 1945년 3월에는잔류학병등과함께지대본부에서편제, 교육, 훈련, 정훈을분담하여제3지대창설의기간장교로서주역할을전개하였다. 광복을맞아귀국한그는 1948년 4월 6일육군사관학교를제5기생으로졸업하고서울지구헌병대헌병대장으로복무중 1950년 6 25전쟁이일어나자동년 6월 28일서울지구신세계전투에서전사하였다. 전공을크게세우지못한무명용사이지만, 6 25전쟁에서삼형제이상전사한가족들도기억할만한대상일것이다. 6 25전쟁의경우에는전국에 34가구인데, 울산이부건 4형제이민건하사, 이태건상병, 이영건상병, 이승건해병중사등처럼, 베트남전참전형제가발생해 4형제가희생했다. 첫째, 둘째, 셋째는 6 2전쟁때희생되어, 이부건과막내이승건은세형들의순국으로병역의무를면제받았지만형들의뜻을이어받기위해백마부대에자원입대해병장으로만기전역했으나, 막내동생인이승건은해병대하사로자원입대해월남전에참전해안타깝게도월남 ' 꽝나이지구전투 ' 에서전사하고말았다. 12) 12) 동아일보 1963.05.30., 1971.6.05-181 -

< 표 2> 호국영웅관련주요연구성과현황 서명주관연도범위인원 ( 명 ) 호국의별 (1 8집) 한국의전쟁영웅들태극무공훈장에빛나는 6 25전쟁영웅잊혀진전쟁영웅 : 신화를남긴부사관들하늘과땅과바다의신화 국방부정훈국 1 9 7 5 84 육본군사연구실 1992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3 육본군사연구실 2004 국가보훈처 2004 6 25전쟁 / 베트남전쟁 ( 무공수훈자 ) 6 25전쟁 / 베트남전쟁 ( 전사자 ) 6 25전쟁 ( 태극무공수훈자 ) 6 2 5 전쟁 ( 부사관 ) 6 25전쟁 ( 태극 / 을지 ) 309 56 60 56 22 국방부정훈국은 1955년전사자가운데대령급이상지휘관에서 15명을선정하여 자유민에게전해다오 1집을발간했다. 13) 이후발간된 호국의별들, 한국의전쟁영웅들, 태극무공훈장에빛나는 6.25전쟁영웅 등기존연구성과를바탕으로태극무공훈자를비롯한수훈자를중심으로선정되었다. 호국영웅을좀더좁혀태극무공수훈자, 전쟁기념관에서선정발표한 이달의호국인물, 보훈처에서발표하는 6 25전쟁영웅 등가운데공통으로선정된인물을고려할수있을것이다. 이들만으로도그대상인원은육군, 해군 ( 해병대포함 ), 공군등 100명이훨씬넘는다. 여기에김일성이스탈린과마오쩌둥의지원을받아일으킨남침전쟁에대해, 유엔헌장정신에나타난것처럼 국제평화와안전을유지하기위하여우리의힘을합하여 대한민국을수호에참여한유엔군가운데미군을비롯한프랑스군, 영국군등의영웅도발굴할수있을것이다. 6 25전쟁은 하나의유엔깃발아래 (under one banner) 6 대륙 21개국에서연인원 194만명이참전한첫전쟁이다. 참전유엔군가운데미군 36,000여명, 영국 1,108명, 터키 891명등모두 41,000명의유엔군이전사하였다. 6 25전쟁에서전사한유엔군들은그들의고향, 친구, 가족을떠나당시제대로알지도못한낯선나라인대한민국의자유를위해값진희생을했다. 한국전쟁중미국의최고훈장인명예훈장을받은장병은공군 4명, 육군 93명, 해병대 42명, 해군 7명등이다. 이외에지휘관으로서인천상륙작전으로전세를역전시 13) 국방부정훈국 (1955), 자유민에게전해다오 제 1 집. - 182 -

킨맥아더유엔군사령관을비롯해, 중공군의공세로서울을다시내주고 37 선까지밀렸던전선을수습하여 38 선까지밀고올라가는리더십을발휘한리지웨이 (Matthew Ridgway) 유엔군사령관, 대전이함락되고낙동강선까지후퇴한상황에서, 낙동강방어선을지켜내반격의토대를마련한워커 (Walton H. Walker) 미 8군사령관, 전쟁중및전후에국군증강에적극적이었던밴플리트장군등도기억해야할영웅들이다. 미군영웅의발굴및정리는전쟁시기와전후북한도발을저지하는과정에서생생한한미동맹사의발자취이기도하지만, 그대상이많아국군중심으로접근했다. 2. 6 25 전쟁및전후영웅발굴 1) 6 25 전쟁단계별영웅 6 25전쟁영웅을선정하는기준으로사병 부사관 위관 영관 장군등계급별, 육해공군해병대등군별, 사단별, 지역별등으로다양하게분류할수있을것이다. 그런데전체국민을대상으로한다면, 사단별, 지역별보다는전쟁전개과정에서국면별영웅을기억하는것이의미가클것이다. 따라서초기전투 ( 한강방어, 춘천전투등 ), 지연전, 낙동강방어작전, 인천상륙및서울수복작전, 북진작전, 유엔군의재반격작전, 그리고고지쟁탈전, 공비토벌작전등으로구분했다. 경찰은전쟁초기부터지연작전에군과함께합동작전을전개하여영월지구, 금강방어작전, 낙동강방어전등지에서참전했으나, 특히인천상륙작전이후빨치산토벌작전에공헌이컸다. 1950년 7월 22일부산에서전투경찰대를편성해, 1951 년에는 8,336회의교전을이듬해에는 3,827회를싸웠다. 14) 호국영웅들은 1등급훈장인태극무공훈장수여자가많고, 이어서을지무공훈장수여자들이다. 경찰의경우는화랑무공수훈자도포함되어있다. 또한김홍일, 임부택, 최용남, 김종오등일부를제외하고대부분전사자이며, 전쟁기념관의호국영웅, 보훈처의전쟁영웅에선정되었다. 민간인가운데중공군참전이후국군과유엔군이철수하는과정에서북한주민 10만여명을군수물자대신에미제10군단아몬드 (Edward Almond) 소장에게철수작전에포함시키도록설득시키는데기여한현봉학의학박사도포함시켰다. 15) 14) 강혜경, 한국전쟁기후방치안유지와경찰, 인문과학연구 30, p.267; 내무부치안국, 경찰 10 년사, 1958, p.433, 472. 15) 현봉학 (1986.1.7.), < 흥남철수작전체험 ( 민간인철수 )>, 군사편찬연구소 HC 610; 스탠리우엔인트라웁 ( 송승종역 )(2015), 장진호전투와흥남철수작전. - 183 -

< 표 3> 대상후보 국면별전투후보 ( 계급, 유공전투, 훈격 ) 기타 초기전투 ( 한강방어, 춘천전투등 ) 지연전낙동강방어전반격전및북진작전중공군공세와후퇴국군및유엔군재반격전고지쟁탈전공비토벌작전 김풍익 ( 중령, 의정부지구, 을지 ) 심일 ( 소령, 춘천전투, 태극 ) 조달진 ( 일병, 홍천전투, 태극 ) 노종해경감, 김해수경감김홍일 ( 소장, 한강전투, 태극무공훈장 ) 이경복 ( 공군소위, 한강전투, 을지 ) 이근석 ( 대령, 수원지구전투, 태극 ) 최용남 ( 해군중령, 대한해협전투, 태극 ) 김용배 ( 소령, 동락리전투, 태극 ) 임부택중령 ( 태극 ) 고종석 ( 해병대일등병조, 통영원문고개전투 ) 허봉익 ( 대위, 안동지구, 태극 ) 김동빈 ( 대령, 다부동, 태극 ) 이명수 ( 일등상사, 영덕지구, 태극 ) 김용식 / 홍재근 ( 일등병, 비학산전투, 태극 ) 홍시욱 ( 하사, 인천상륙작전, 을지 ) 임병래 ( 중위, 인천상륙작전, 을지 ) 조재미 ( 중령, 평양탈환전, 태극 ) 김옥상 ( 일등병, 비호산전투, 태극 ) 현봉학 ( 통역, 흥남철수작전 ) William E. Barber( 해병대대위, 장진호전투, 미명예훈장 ) 리지웨이 ( 미 8군사령관 ) 김경진 ( 소령, 백마고지, 태극 ) 김종오 ( 소장, 백마고지, 태극 ) 강승우소위, 안영권, 오규봉하사 ( 백마고지 ) 김교수 ( 대위, 교암산지구. 태극 ) 고태문 ( 대위, 351고지, 을지 ) 이순호 ( 소령, 1090고지, 을지 ) 안낙규 ( 일등중사, 교암산지구, 태극, 1953.7.) 김만술 ( 소위, 베티고지, 태극 ) 김한준 ( 대위, 425고지 ( 화천 ), 태극 ) 백재덕 ( 상사, 금성샛별고지전투, 태극 ) 최득수 ( 일등중사, 938고지, 태극 ) 라희봉경감 ( 국사봉공비토벌전투, 1952.11) 권영도경사강삼수경위차일혁경감 - 184 -

전투과정에서살신보국의희생정신으로적의공격을격퇴하였으나역부족으로자결을택한장교들이나, 함정이침몰해서대원전원이전사한경우는우선순위에서밀렸다. 또한승전을했음에도불구하고, 3년간의전쟁과정에서대패한지휘관이나전투과정에서초전에전사한경우도제외시켰다. 청년방위대고문이었던안병범대령의경우는군인으로서시민을방치한채철수할수없다고분개하여 1950년 6월 29일세검정부근인왕산에자결하였다. 윤길병육군대위는 1953년 6월 1일, 제12보병사단 37연대 3대대 10중대장으로인제군서화북방 812고지방어전투에참전했다. 그는 1개대대규모의북한군과 5일동안이나치열한공방전을벌이며진지를사수했으나중과부적으로적에게포위되자, 투항을거부하며부하들을안전한곳으로대피시킨후, 자신은적에게포로가되는불명예를피하기위해권총으로자결했다. 그의명예로운죽음을목도한제52연대 2 대대장병들은분격하여마침내동부전선의요충지인 812고지를역습으로탈환했다. 권동찬제2사단 32연대장은가평군북면도대리의한민가에설치된제3대대 CP에서진두지휘하였다. 그러던중적군에게포위되어통신망이단절되고실탄과보급품의부족으로사면초가에몰린연대장은퇴로를확보하기로결심하고 우리에게는아직도체온이남아있고총검이있지않느냐. 우리는우리힘으로달려드는적을무찌르고퇴로를뚫어야만한다 고부대원을독려한후 1951년 1월 1일철수로개척에나섰다. 하지만일부병력을무사히철수시키는데성공했으나, 정작자신은적의포위망을벗어나는데실패하자옥쇄를각오하고적과대항하였다. 중과부적으로더이상지탱하기가어렵다고판단한권동찬중령은 적에게치욕적인포로가되느니차라리죽음을택하겠다 라고결심하고자신의권총을머리로가져가방아쇠를당겼다. 김용호소위도 1952년 11월 1일장단 ( 사천강 ) 지구전투에서 11중대 1소대소대장으로서중공군대규모추계공세에서소대증강 (75명) 으로 33진지를방어하면서적 2 개중대가인해전술로 3차례공격을고수방어진내사격으로격퇴시키고적 115명을사살했다. 하지만진지를방어후소대장외 5명만생존하자, 70여명의소대원을잃은데대한자책감에유서를남기고자결하였다. 1951년 12월25일. 해군 704함 ( 함장이태영 ) 은원산해역에서원산시내와낭성리에있던적들로부터포격을받자전화력을집중, 적의포진지를공격했다. 이튿날폭설과풍랑이심했으나기뢰등을운반하고있다는정보에따라출동, 맹렬한함포사격으로기뢰부설을저지하던중어둠과악천후속에끝내기뢰와접촉, 침몰하고전원전사했다. 유재흥제2군단장으로재임하던 1950년 9월 2일부터 12일까지낙동강전선에서북 - 185 -

한군의 9월공세가개시되어북한군이영천까지침공하였을때, 예하제7사단과제8 사단을지휘하여북한군제15사단의공격을격퇴하고영천을탈환함으로써아군이반격작전으로이행할수있는발판을마련하였다. 그러나그후사창리, 현리전투에서패전으로군단이해체되었을정도여서제외되었다. 개전초기창동전선에서 7사단 1연대장이었던함준호대령은제7사단제1연대장으로서동두천-의정부지구방어를담당하고있던중북한의기습적인전면도발이개시되자수도서울의사수를결의하고전투에임해여밀려오는적전차에대항하다적탄에의해전사함으로써위국헌신의예를들어 1951년 7월 26일태극무공훈장을수여받았다. 국군최초의연대장급전사자였다. 미제34연대장마틴 (Robert R. Martin) 대령은 1950년 7월 8일천안전투에서북한군제4사단, 제6사단, 105기갑사단의남진을저지하기위해접전을벌였다. 이전투에서마틴대령은천안을고수하고자천안시구성동삼거리에서북한군탱크에맞서직접바주카포로공격하다가적의탱크로부터사격을받고현장에서전사했다. 또한호국영웅으로서전체국민들로부터존경을받을수있도록무공훈장수훈자중친일인사로논란이되는경우는제외시켰다. 백선엽제1사단장은 38도선서부일대에서압도적으로우세한적과백병전을전개하여진공을저지하는한편다부동및영천지구에서는적과혈전을거듭한끝에격멸하여총반격의계기를마련하였다. 또한반격작전에서는계속된북진을통해적의수도인평양에선두로입성하여국군의위용을크게선양하는등탁월한전공을수립했다. 2009년민족문제연구소에서발간한친일인명사전에수록된백선엽, 김정렬, 김동하등은친일논란이있으므로선정하지않았다. 경찰에서도최치환경무관은금강방어작전에서태극무공훈장을받았고충무무공훈장 3개, 화랑무공훈장 2개, 미국동성훈장등을수여받았으나, 친일전력이있고부정선거와연루된인물이어서제외시켰다. 2) 베트남전영웅베트남전쟁은단순한내전이아니라베트남의방위는자유주의국가들의공동책임으로한국의제2전선이었다. 전쟁기념관에서호국인물선정을위해서 1992년 4월심의위원회를개최했고, 그후에도군내부에서그동안무공훈장수훈자, 전쟁기념관과보훈처에서선정한전쟁영웅을종합하여선정한 불멸의나라지킴이 주요후보들은다음과같다. 16) 16) 이상일 (2012.6.22), 호국인물의선정가추모사업의추이, 전쟁기념관, pp.9-10; 국방부 (2013.1), 사이버명예전당홈페이지탑재자료. - 186 -

< 표 4> 베트남전영웅후보 구분영웅비고강재구소령 ( 재구상 ), 임동춘대위 ( 동춘상 ), 이상득채명신육군하사, 최범섭중령, 김무석대위, 손태익소령, 송이세호서규대령, 이종세상사 해군 지덕칠중사, 이인호소령, 이학현상병 조정남상병, 조경식소령, 전창우중위 이가운데 1990년대호국인물선정논의시이인호대위와지덕칠하사는 1등급으로분류되었고, 손태익소령은 3등급으로했다. 둑꼬전투 에참전했던수도사단기갑연대제9중대소속의이종세상사, 1972년 4월안케패스전투의임동춘대위등도태극무공수훈자이다. 이인호대위는해병사단소대장 수색중대장등을거친뒤 1965년월남전에참가하였다. 1966년 8월청룡부대가실시한 해풍작전 에대대정보장교로서참가하였다. 이때분대규모병력을이끌고 호아 남쪽에위치한베트콩의동굴수색작전에나섰는데, 선두에서서동굴을수색하던중동굴에숨어있던베트콩이던진수류탄을피할겨를이없자몸으로덮쳐전사하고부하들을구하였다. 그희생정신은전군의귀감으로평가되어태극무공훈장이추서되고, 대위에서소령으로특진되었다. 지덕칠하사는의무부사관으로 1967년 2월청룡부대제1대대 3중대 1소대가추라이부근돈수원투마을에진출했을때, 매복에걸린부상소대원을구출하다가전신에총상을입은채전우를돕다끝내전사한영웅이다. 17) 손태익육군소령은 1967년 6월 21일맹호사단제1연대제1대대제3중대장으로 맹호 9호작전 에참전하였다. 당시 맹호 9호작전 은수도사단이 1967년 12월 17일부터 45일동안베트남중부전략요충지인고보이평야와푸깟산악지대에침투한북베트남공산군을소탕하는작전이었다. 1968년 1월 23일, 아군은 북베트남군일부가곡창지대인답다마을에서식량을약탈하고있다 는첩보를입수하자제 1연대를급파해적 6명을사살하고각종소총을노획하는전과를거두었으나적군은울창한숲을이용하여진지와교통호까지구축하고대전차화기인 B-40 적탄통을발사하며극렬히저항했다. 이때손태익중대장은장갑차에탑승, 선두로나가월맹정규군주력인적 3사단 18연대제9대대를향해맹렬한사격을가하며공격을지휘했다. 그러던중적이투척한 B-40 1발이손태익중대장이타고있던장갑차에명중되었고연료통이폭 17) 8 발의총상가누며전우돕다숨져, 동아일보 1967.4.4., 7 면 ; 국방부 (1975), 호국의별 1, 국방부정훈국, pp. 129-134. - 187 -

파되면서곧화염에휩싸였다. 이로인해장갑차에탑승했던 2명의사병이전신에화상을입고전사했으며, 손태익중대장도심각한화상을입었으나자신의안위보다먼저부하를구하기위해쓰러진통신병과기관총사수와전령을한사람씩밖으로밀어내고, 또화염속에서필사적으로손을더듬어남은두명의병사를찾아밖으로밀어낸후자신은심한전신화상으로후송도중숨지고말았다. 중대장의이러한모습을목도한 3중대는부중대장김영조중위의지휘아래다시결전을벌여적사살 10 명과 B-40 적탄통 1문등을노획하는전과를올리며작전을성공시켰다. 3) 전후남북한대결시기 3년간의치열한전쟁을겪었지만, 1953년 7월 27일 통일없는정전협정의체결 은한국에또하나의시련으로이어졌다. 유럽에서동서냉전은끝났지만세계에서마지막냉전을치르고있는한반도에서는전쟁이후 60년이넘도록남북간군사적긴장과대치상태가지속되고있다. 최근의핵과장거리미사일도발을제외하고도총격또는교전, 무력시위등주요도발사건은 200건이넘는다. 18) 따라서정전후북한의무력도발에맞선대침투작전영웅과이원등상사, 강재구소령등교육훈련중살신성인희생자를포함시킬수있을것이다. 이들은국가안전보장에기여한군인들에게주는보국훈장수훈자로서주로평시에, 대간첩작전에기여한군인들이다. 1968년 1월 21일북한군정찰국 124부대김신조외 30명이청와대를기습할때희생된최규식경무관, 이익수대령은기억해야할대표적인영웅이다. 그후북한의대남침투는대개소규모인원으로침투했다. 김광율대위는제20사단 60연대수색중대장으로북한군무장간첩 3명이전방철책지역으로침투했던 1966년 8월 8일새벽1시쯤소탕작전에서사살된간첩 1명과부상을입은간첩 1명을확인한후도주한나머지 1명을생포하기위해수색전에들어갔다. 작전을지휘하던중은신해있던도주간첩이던진수류탄때문에얼굴에파편상을입은김소령은응급치료도뒤로미루고수색전에집중했다. 포위망을좁혀가며수색한지 5시간여만에적을발견하고투항할것을종용했으나적이사격을가해오자선두에서교전을벌이다총탄에산화했다. 최병연상병은제12사단 51연대수색중대소총수로서 1971년 3월비무장지대 (DMZ) 에침투한무장간첩을소탕하는과정에서적의기습을받아전사했다. 최병연일병의용맹과살신성인에힘입은아군수색조는예상도주로를철저히차단해나머지무장간첩 3명을모두사살했다. 소병민중령은 1968년 11월 3일충남서산에침 18) 조성훈 (2014), 군사분계선과남북한갈등, p.138. - 188 -

투한북한무장공비소탕작전에출동하여부대를지휘하다가전사했다. 최성모해군소령은해군사관학교에 9기로입교해 1955년해군소위로임관했다. 1962년 4월 27일 707함부함장으로동해경비작전수행중부하의월북위협행동을제지하다순직했다. 그날당직사관으로서부하 3명과함께조타실에근무할때, 새벽 1시 45분경조타실에서함교에서근무하던최방순수병이갑자기최소령 ( 당시계급대위 ) 에게권총을겨누며북으로항로를돌리라고위협했다. 믿기지않는돌발상황에서도최대위는침착하고단호하게 총알이무서우면해군이되었겠느냐? 대포를들이대어도조국을배반할수는없다 며최수병을회유하고권총을제지하려는순간최수병이쏜 3발의총탄이그의복부를관통했다. 제2차연평해전에서는윤영하소령은 1996년 3월 1일해군소위임관계봉함갑판사관, 118조기경보전대상황장교, 제천함작전관, 미7함대유학 '01년 1월 2일부로참수리 357 정장으로부임하여 2002년 6월 29일연평도근해임무수행중적함과교전으로현장에서전사했다. 부여경찰서경무과장진희경사는 1995년 10월 24일 14:40경충남부여군석성면정각리태조봉부근에침투한대간첩작전에서희생된영웅이다. 그는무장괴한출현신고를받고동료직원들과긴급히출동하여 16:10경석성면정각리소재 4번국도상에서무장간첩과총격전을벌이다가석성산으로도주하는것을목격하고용감하게추격교전하던중적이쏜총탄을가슴에맞고병원으로긴급히후송하였으나순직했다. 그는현직경찰이선정한 특별히기억에남는순직경찰관 13인가운데한사람이다. 나머지 12명은권영도, 김유연, 김홍조, 나성주, 라희봉, 박영동, 서병철, 안병엽, 장진희, 정종수, 지용호, 차일혁, 최규식등이다. III. 유형별대표전쟁영웅 호국영웅들이전장에서지극한용기, 애국정열과충성심으로벌인혈전사투와용병전술은 19) 후세에영원한교훈이된다. 이들은국민들과늘함께할수있는자랑스러운영웅들이다. 호국영웅들은전장에서역할에따라전차파괴, 적을격퇴시키기위해단신으로목숨을던진사병과지휘관, 특공대, 동료및소대중대등을구하기자신을희생한살신성인영웅, 해상및공중작전을포함한지휘관, 여성, 첩보대등으로구분할수있을것이다. 이때동료의퇴로확보하기위한희생도의미가있지만, 적을격퇴하거나 19) 이선근 (1978), 한민족의국난극복사, 휘문출판사, p.vii. - 189 -

진지탈취와같은영웅적위훈을세운자에대해우선순위를둘수있을것이다. 물론생존영웅도있다. 역사적으로외세의침입이있을때마다이어온유격대활동은 6 25전쟁에도자생적인민간유격대, 국군지원혹은미군지원아래 자유의병 으로서활동을했다. 그러나지리산에서좌익빨치산투쟁을했던 ' 남부군 ' 사령관이현상과같은대표적인인물이부각되지못한아쉬움이있다. 여성영웅도몸은비록여자일망정조국의위기에그대로있을수없다하여참전한여자의용군으로혹은유격대원으로활동했다. 1951년 2월 4일 12시경육군제772 부대제2중대창원지구파견대근무곽용순하사는정훈공작과아울러대적귀순공작차 지구에출동중불의의흉탄에맞아중상을입고마산시주둔수도육군병원에서응급치료중사망했다. 곽하사는대구신명여중에서수학하였다가 6 25사변이발발하자멸공구국의불타는애국일념에서자진여자의용군에지원하여육군제772부대에배치되어활동을하여왔다. 20) 북한에서 1951년강원도법동군의한야전병원에서부상을입은군인들을호송하던중폭격을당해군인들을구하다가죽은안영애나전쟁시기신의주낙원기계공장에서 신포향 이라는여성영웅이전쟁영웅으로선전되고있는것에 ( 김종수 : 2008, p.168) 비추어여성대원들도재평가할수있을것이다. 호국영웅에대한기록은박물관, 기념관등의전시를비롯해그들의대한연구와교육을위한생생한근거자료이다. 예를들면, 병적기록표, 장교자력표, 공적서및훈장부기록, 참전부대전투상보, 정기작전보고서및작전일지, 참전사단사단사및부대역사, 사진, 당시언론기사, 부대원의증언록, 평전등이주요자료이다. 전후생존자의경우는증언록, 녹화된인터뷰등의자료도그들을기억하는데도움이될것이다. 1. 전차파괴영웅 6 25전쟁초기전투에서한대의탱크도없이국군은보병부대의선봉에서운용된북한군탱크에대해대응수단을갖지못해쉽게무너졌다. 개전후 3일만에서울이함락될정도로무참히패배한주요원인은북한군의전차공격때문이었다. 당시국군은전차가한대도없었을뿐만아니라, 대전차방어무기가없었다. 아군의유일한대전차무기인 2.36인치로켓포가쓸모없는것으로판명되자, 전차와싸워본경험이없었던장병들은순식간에전차공포증에휩싸였다. 한강인도교조기폭파배경은적탱크에대해일종의노이로제결과였다. 미군의탱크가지원되기전인초기에 20) 동아일보 1951.2.9. - 190 -

탱크파괴는그만큼높이평가될수있다. 전차파괴영웅인김풍익소령과장세풍대위, 심일소령, 조달진일병, 변규영소 위, 이명수상사등이있다. 이가운데김풍익, 심일, 변규영등은야포, 대전차포, 로 켓포등으로파괴했고, 조달진일병과이명수상사는수류탄으로파괴했다. 포병학교교도대대장인김풍익소령은 1950 년 6 월 26 일의정부북방의축석령에서 제 2 포대장장세풍대위와함께남진하는북한군전차를일반야포로근거리직접조 준사격으로선두전차의궤도를격파하여그공격을지연시킨후두번째전차를조 준하는순간적의포격으로전사했다. 21) 그들은죽음으로전차를파괴했지만, 북한군 의남진을저지시킬수없었다. 1950 년 6 월 25 일오후 2 시쯤춘천 홍천지역을방어하고있던육군제 6 사단 7 연 대의심일중위는 SU-76 자주포 3 대를앞세운북한군을맞아대전차포로최근거리에 공격, 2 대를파괴했다. 그의태극무공훈장공적서에는 적전차의소양강교통과를 허하면아전부대가고립에빠짐을깨닫고자신을희생하여전부대를구출하고용 감한희생정신이용출하여 전차를완전격파했다고기술되고있다. 22) 이러한쾌거는 적의탱크위용에두려워하던장병들에게탱크를파괴할수있다는자신감을갖게했 다. 조달진일병은제 6 사단 19 연대 3 대대소속으로 1950 년 6 월 28 일홍천말고개전 투에서대전차특공대장으로서대원 10 명과함께수류탄으로적전차를공격하여 10 대를파괴및노획하여사단의주력철수에크게기여하였으며동년 7 월 24 일유곡 진남교 ( 경북, 문경 ) 에서대전차특공대장으로또다시적전차 4 대를노획한전공을세 웠다. 이공로로그는전쟁당시을지무공훈장을받았으나, 그의공적이재평가되어 2011 년에태극무공훈장을수여받았다. 조달진일병을비롯한 11 명의특공대는수류탄 2 개와 81 미리박격포탄 1 발씩을지 급받고 6 월 28 일 09:00 경에 2 명 1 개조씩 10-20 미터거리를두고한계리쪽으로 배치한후사체속에서죽은것으로가장하여누워있었다. 적의전차가아군의대전 차포를격파한후포탑을열고특공대앞을지나고있을때, 아군대전차포가적의 선두전차의궤도를명중시켜기동을못하게했다. 이때조달진일병은선두전차의 후미로뛰어올라포탄과수류탄을적전차내부로투척한후뛰어내려정신을잃고 말았다. 동시에다른특공대원은후미의자주포 10 대를공격하여파괴및노획하였으 며도주하는적들은일대에배치되었던아군에의해전부격멸되었다. 이육탄공격 21)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77), 한국전쟁사 1, p.370; 고김풍익일대기, 병학사, 1987; 내젊음조국에포병의발자취, 포병학교, 1963. 22) 그의공적이조작되었다는주장도있으나 (< 北탱크를부순 ' 호국영웅 ' 의불편한진실 >, 조선일보 2016.6.17., A30 면.), 당시제 6 사단미군사고문맥페일 (Thomas D. McPhail) 중령의미은성훈장추천서 (1950.9.1.) 와태극무공훈장공적서, 전투상보등으로그의공적은재확인되었다. - 191 -

으로홍천으로향하던적의공격을지연시켜사단의주력철수에크게기여하였으며침체상태에있던전장병들의사기에활력을불어넣게되었다. 그후 1950년 7월 24일경상북도문경유곡진남교에서대전차특공대장으로또다시적전차 4대를노획하였다. 23) 변규영육군소위는제6사단 19연대 1대대제1중대 3소대장으로 1950년 6월경북화수동전투에서아군의후방을위협하던북한군전차를향해로켓포를발사하여선두전차와뒤따르던전차를파괴한후세번째전차에올라가해치를열고수류탄을던져폭파시키는전공을세웠다. 제3사단 22연대 12중대장이명수이등상사는특공대장으로서 1950년 7월 28일영덕지구전투에서 181고지를재탈환하기위한일환으로특공대를편성하여아군에게가장위협적이었던적전차를격파하기로한사단의계획에따라 12명의특공대원을이끌고적진에침투하여 3대의적전차를파괴시켰다. 이명수상사는소대원 12명으로특공대를편성하여적의활동상황과전차의위치탐색을위하여야음을이용, 적진에침투중수미상의적을발견하고최근거리까지접근하여수류탄투척과소총사격으로제압하고포로 3명을획득심문결과북한군제5 사단 10연대소속과연대본부및적전차 3대위치, 당일암구호를확인후적군복장을착용하고포로를대등침투중적경계병의수차의암호교환, 적경계병을기만하고통과하여은폐되어있는전차를발견, 대원을 3개조로편성하여전차경계병을무성기로살해후전차마다 3 4발씩수류탄을포탑내부에투척하여폭파시키고복귀하였으며이전과로사단의임무수행과사기고양에크게기여하였다. 이러한전공으로그는부사관으로서는건군이래최초로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태극무공훈장을직접수여받았다. 24) 2. 적을격퇴시키기위해목숨을던진영웅 적을격퇴시키기위해목숨을던진수많은소총수및기관총사수, 소 중대장들가운데꼭기억해야될영웅으로는김용하대위, 고태문중위, 이순호대위, 김옥상일등병, 한규택해병대삼등병조 ( 하사 ), 김창학상병, 공군임택순중위등이있다. 제2연대 4중대장인김용하대위는 1950년 7월 14일이화령에서철수시중대의전화기를이화령고개마루까지추진, 진두지휘하여적에게최대의피해를가하면서아군의철수작전을지원중적탄에맞아전사했다. 23) 한국전쟁사 1, 1977, p.269; 육군본부, 특공대장조달진, 1990. 24)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2, 1979, p.581; 한국전쟁의영웅들 1, 육군본부 ; 태극무공훈장전공기 ( 이명수상사 ), 육군본부, 1987. - 192 -

위급한상황으로잔류접촉부대편성하의조직적인저항이불가능하여 4중대장김용하대위는중기관총및포진지를이화령고개마루까지추진하여아군의철수전에적에게최대한의타격을가하기위해진두지휘중적의포탄에맞아전사하였다. 25) 죽음으로임무를완수한김용하중대장의헌신으로연대는성공적으로철수했고문경북방영강일대에서지연전을전개함으로써낙동강최후방어선을형성하는데크게기여했다. 김옥상일등병은 1950년 8월 24일육군에입대하여 6 25전쟁당시제7사단제5연대소속으로 1950년 11월 1일부터 7일까지개천-비호산 ( 飛虎山 ) 부근전투에참전하였다. 1950년 11월 6일사단은적의침공을계속저지하는한편일부병력으로공세로이전하여전날에포기한비호산을다시탈환함으로써위기에직면했던개천지역을방어하는데공헌하였다. 제5연대는 08시에포병의지원을받아공격을전개한다음저항하는 2개중대규모의적을물리치고 535고지에이어비호산의우단을다시탈환하였다. 이때제2대대는우일선대대로동변리에서공격하여신성리지역을점령하였고, 제3대대는좌일선대대로중참에서공격하여 535고지를점령한다음계속비호산우단까지진격하였으며, 제1대대는예비대로동변리지역을점령하고덕천-개천간의주작전로를차단하였다. 이과정에서제5연대소속의김옥상일등병은비호산에서치열한공방전을전개하면서적의전초진지에접근하여정찰임무를수행하던중돌연 1개소대의적병력이출현하자단신으로결사적인육박전을전개, 다수의적을살상하는전과를올리고최후를마쳤다. 정부는그의공로를인정하여 1954년 6월 25일태극무공훈장을수여하였다. 한규택삼등병조 ( 상병 ) 은해병제3대대 11중대화기소대기관총사수로 1950년 11 월평안남도양덕군동양리지구전투에참가하여대대규모의적패잔병들을맞아적탄에관통상을당하는마지막순간까지도기관총사수의책임을완수함으로써중대의위기탈출에크게기여했다. 1950년 11월 20일해병대제3대대 11중대는동양리지구의보급로확보를위해이지역에준동하는적패잔병들의소탕임무를부여받았다. 이때한규택상병 ( 당시계급 ) 을포함한화기소대원들의지원사격과엄호를받으며철수를시도했으나, 소나기처럼퍼붓는적기관총사격으로이마저도여의치않았다. 이에한규택상병은이미적탄에부상을당해유혈이낭자한상황에서도적기관총 2 정을명중시키고, 또다른기관총을격파하려는순간적탄에관통상을입고산화했다. 치명상을입고피를흘리면서도 나에게는아직오른팔이있다 고힘줘외치며주어진 25) 한국전쟁사 2, 1979, p.1010; 호국의별 3 집 1979, p.209. - 193 -

임무를완수하고자했던한상병의투철한희생정신으로 11중대는위기에서벗어나무사히탈출할수있었다. 한상병의투철한희생정신으로아군 11중대는위기에서벗어나무사히철수할수있었다. 고태문중위는강원도고성의 351고지전투에참가해혈전을벌이던중 1952년 11 월 11일현장에서전사하였다. 351고지는김일성이 금강산을빼앗기는한이있어도월비산은확보하라 고중요성을강조한월비산에서동쪽으로 2km 지점에위치하고있었다. 월비산을거점으로그를연하는동쪽능선일대와월비산동쪽 2km 지점의무명고지, 그리고동북쪽의 148고지-187고지는 351고지에서감제되며특히무명고지는 1km의가까운거리에위치함으로써직접적인위협을받았다. 연대는작전대로고지에포화를퍼부은뒤 11월 10일새벽에역습을감행해 351고지를다시탈환하는데성공하였다. 이러한승전에는부여된임무를마지막순간까지완수하려한고태문중위의책임정신과희생정신이깔려있었다. 한편 6 25전쟁당시대한민국해군의유일한전투함 PC 701함은 1950년 6월 26일 00시 30분경대한해협근해에서 600여명의게릴라를싣고남하하는북한의대형수송선박을 4시간여의전투끝에격침시켰다. 이때 701함의조타수인김창학갑판삼등병조는조타실중앙하부가피격되어적포탄의파편에복부내장이파열되는중상을입어조타실바닥이피로붉게물들었음에도끝까지조타키를잡고있었다. 이러한그의공헌으로적선은침몰되어갔다. 김창학삼조의결정적인공헌으로제701함은 4시간여의전투끝에첫해전을승리로장식할수있었다. 공군에서는이경복공군소위는 1948년 9월항공병 2기생으로육군항공에입대했으며 1949년 10월 1일공군이창설되면서공군일등상사로임명되어조종사의임무를수행하던중전쟁을맞았다. 개전 5일만인 6월 30일북한군이한강철교도하작전을위해정찰대를투입하자이경복일등상사는 L-5연락기에급조한폭탄다섯발을싣고한강철교상공정찰을위해출격했다. 적군의치열한대공포사격에피탄된상황에서도저공으로정찰을계속하던이경복일등상사는도하를시도하던적탱크수십대와 2개연대이상의병력을발견, 공군본부에보고한후적탱크를향해폭탄을투하했다. 그러나탱크가폭파되는것을보고기수를틀어다시공격을감행하려는순간, 기체가적대공포에또다시피격당하자전투기와함께적탱크에돌진하며산화했다. 1953년 3월 6일 11시 20분, 고성지구에서분전하고있는육군제5사단에대한근접항공지원임무를부여받은임택순중위는편대장의탈출명령을거부한채적의대공포진지를목표로불타는애기와함께돌입, 자폭하였다. 한편, 생존한영웅도있었다. 백재덕이등상사, 최득수상사, 김한준대위등이다. - 194 -

백재덕이등상사는기갑연대제10중대 3소대 3분대장으로 1953년 5월강원도금성샛별고지전투에참전해서수류탄전과아울러백병전속에서적을격퇴했다. 샛별고지는금성서남쪽약 5.8km에위치한종장 1km 능선의완만한경사를이룬표고 470m의무명고지이다. 그는중공군의거듭된공격에맞서분대원과함께수류탄을투척하여적의공격을저지하였으나수적인우위를바탕으로인해전술로접근해오는적을완전섬멸하기에는역부족이었다. 이전투에서분대장백재덕이등중사는단신으로 10여명의적을사살, 진지를고수하고중대의위기를구하는데결정적인수훈을세웠다. 최득수이등상사는특공대를조직하여북한군에게피탈되었던중동부전선의 938 고지를재탈환하는데결정적으로수훈을세웠다. 1953년 6월 27일 02시 30분제7보병사단 8연대는중공군의인해전술로인해탈취당한 938고지를재탈환하기위해제1 대대를투입하여반격을감행하였으나, 적의증원부대와좌우측방에서맹렬하게집중하고있는적의화력으로인해목적을달성하지못하고 05시 30분에철수하였다. 이에사단은예비대인제3연대를투입하여수류탄전을전개하면서고지탈환을시도하였으나아군의공격저지를위해 10,000여발의포격을가하는적의완강한저항으로희생이늘어가자부득이철수를단행하였다. 6월 30일 02시사단장이 938고지에대한공격명령을제8연대에하달하자제2대대는특공대를조직하여고지를탈환하기로결정하고 30명을 3개조로편성하였다. 특공대는연대가지금까지실시한 3회의역습때마다 938고지남서면의전진진지인일명비석고지에설치된적의자동화기로인해많은어려움을겪고있었으므로, 이를기습 파괴하여역습부대의기동을저해하는요인을미리제거하는데주안을두었다. 03시 30분경특공대제1조장인최득수이등상사는조원들과함께철모대신작업모를쓰고소총대신수류탄 6개씩을분배하여아군의연막탄이적의시계를완전히차단한가운데 938고지능선을따라돌진해나갔다. 이때적은다시포격을집중하기시작하였지만최이등상사는선두에서대원들을이끌었다. 쏟아지는적탄을헤치며적의엄폐호에돌진한최이등상사는수류탄한발을적의기관총안에집어넣어파괴한후, 능선중간지점에서불을뿜어대고있는또다른기관총진지로다가가수류탄을총안에집어넣어격파하였다. 이렇게두개의기관총을격파하고 돌격앞으로! 를외치며대원의선두에서고지정상으로돌진해나갔다. 적진속으로무사히돌진한최이등상사는수류탄을투척하여적의기관총진지를모두격파하고정상까지무사히진격했음을 3발의신호탄으로연대지휘소에알렸다. 신호탄이발사되자대기하고있던제9중대와제10중대가돌격을감행하여 04시 30분에목표를완전점령하였다. 김한준대위는제7사단 8연대 1대대 1중대장으로 1953년 7월 20일부터 22일까지화천북방의 425고지전투에참전하여 1개중대병력으로중공군 1개대대를섬멸하 - 195 -

는대전과를거두었다. 김한준중대장은자신이직접진두지휘를단행하고적과 30야드까지접근하여각소대장과같은위치에서전진육박을강요하였다. 1시간 30분에걸친치열한육박전후에제1중대는적의기도를완전히좌절시키는한편분산되어도주하는적을추격하여섬멸하고 06시에는돌출고지를완전히탈환하였다. 사흘간의격전을펼친결과, 제1대대는적 470명을사살하고 21명을생포하였으며, 60mm 박격포 7문과체코식기관총 22정. 3.5인치로켓포 4문등의대전과를수립하였다. 이로인해제8연대는전체의공방이유리하게진행되었을뿐아니라제2군단지역의방어를공고히하는데크게공헌하였다. 3. 특공대영웅 전략적으로중요한방어작전, 반격작전, 고지쟁탈전등에서불리한전황을특공대로극복하려고했다. 특공대무공영웅들은비학산전투의홍재근 김용식이등병, 형산강도하작전선봉인연제근상사, 개풍지구김형우이등병조, 동양리지구이창환삼등병조, 강승우등백마고지 3용사, 교암산지구안낙규일등중사와김교수대위, 적극산삼현지구오신춘중령등이다. 기계탈환을위한수도사단의총공격으로인해막대한손실을입은북한군제12사단은전사자를남겨둔채일부패잔병을수습하여비학산으로철수하였다. 적은이곳에서 2,000여명의병력을보충받아제12사단및제766부대를재편성하고공격준비에돌입하였다. 제18연대는비학산탈취를위해수차례에걸친공격을시도하였으나실패하고오히려적의야간기습을받아엄청난피해를입고제17연대에게작전권을넘겨주게되었다. 이후북한군제12사단과수도사단제17연대는비학산확보를위해치열한교전을전개하였다. 비학산탈취를위한계속된공격에도불구하고성공적으로작전을이끌지못한데에는북한군제766유격부대가있었다. 제17연대 9중대의홍재근 김용식이등병은특공조를자원해적 766유격부대를습격, 치명타를가한데이어 24일비학산공격작전에서는적자동화기진지를덮쳐군관을비롯한 16명을사살또는생포했다. 김이등병은 9월 19일안강시내정찰중적 6명을사살하는과정에전사했으며, 홍이등병도 2년뒤자교리전투에서백병전을벌이다전사했다. 26) 인천상륙작전이단행된다음날인 1950년 9월 16일, 북한군은이미낙동강전선도처에서동요하기시작한반면에아군은총반격에나서기시작하였다. 이때연제근이등중사의분대는형산교서쪽의장흥동근처의강가에전개되어있었는데, 강폭은 26) 호국항쟁 101 선, 교문사, p.184. - 196 -

100여미터가량되었으나수심은가슴정도에이르러도섭이가능하였다. 1950년 9 월 17일새벽 04시, 어둠이밝기전에적전도하를감행하려는아군에대해적의독전대는강력히저항하였다. 연제근이등중사는분대원들과의견을모은후소대장에게분대의사전도하돌격을간곡히자청하여중대장으로부터기어이허락을받아냈다. 분대는수중포복을거듭하며일보씩전진해나갔다. 무차별총격을가하는적의기관총에의해분대원의절반이희생되었고, 연제근이등중사도왼쪽어깨에관통상을입었지만분대의수중돌진은멈추지않았다. 살아남은최후의결사대 3명과함께대안에당도한연제근이등중사는적의기관총진지를향해수류탄을집어던졌다. 한발, 두발, 그리고세발을던지고난후마침내피를뿌리며쓰러졌다. 연제근이등중사는이처럼강력하던적의기관총진지를기어이파괴한후전사하였다. 이장면을목격한제22연대는총반격을감행하여형산강도하에성공하였다. 1951년 7월 23일개풍지구전투에서, 2개소대로편성된정찰대는개풍군월암리지역으로침투하여정찰임무를수행도중, 적제8사단 2연대 1개대대에포위된몸이되고말았다. 적대병력의포위로정찰대가전멸의위기에처하자적의포위망을뚫고혈로를개척하기위해김형우삼등병조와 5명의대원이결사대를자원했다. 김형우이등병조는대원 5명을인솔하여적전 10야드까지접근하여마지막수류탄을던져적에게 15명의사상자를내게하고적진에돌입하여총개머리판으로적을내려치는육박전을하면서전원이전사하였다. 이에용기백배한해병들은서로격려하면서적에게포로가되어해병대에오명을남기느니차라리죽음을택한다는각오로결사적인반격을거듭하면서혈전하였다. 평안남도양덕군동양리지구전투는아군의원산-평양간연결을차단하려는적의의도가내포되어있으므로매우중요한전투로잘알려지지않은또하나의전선이었다. 1950년 11월 20일, 해병 3대대는대규모적패잔병들이평양 ~ 원산간도로의요충지인동양리일대를장악하려한다는첩보를입수하고이를저지하기위해 11중대를출동시켰다. 이창환삼등병조는제11중대 2소대 2분대장으로작전에참여하여선봉대를자원해선두에서전진했다. 첨병분대임무수행중적의기습적인공격으로중대가위험에처했을시선두에서직접자동소총을지휘하며적에게역충격을가하자, 적의모든화력이이창환삼등병조에집중이되어중대는완전산개충분한방어준비태세를갖추었지만그는손에수류탄을쥔채전사하였다. 강승우중위를비롯한오규봉과안영권일등병은 1952년 10월특공대로백마고지진지를육탄으로확보했다, 강승우소대장은소대지휘를향도에게부탁한후 TNT를갖고적진지를향해포복을시작하였다. 소대장과운명을같이하기로한두병사도뒤를 - 197 -

이어포복을시작하여적진지로접근하였다. 잠시후흙먼지와함께굉음이울려퍼졌다. 필사적으로적진가까이접근한강소위와두병사는 TNT와수류탄을든채돌진하여적의기관총진지를파괴하고현장에서전사하였다. 육탄으로부대의혈로를개척하고산화한이들 백마고지삼용사 의무훈에힘입어아군은총공격을개시하여주봉을탈환하고백마고지전투를승리로장식하였다. 결과적으로국군제9사단은 10월 6일부터중공군제38군의공격을연 10여일간 12차례의쟁탈전을반복하면서 7회나주인이바뀌는혈전을전개한끝에백마고지를확보하였다. 안낙규일등중사는제6사단 19연대 1대대 2중대의작전계로있던 1953년 7월 13 일김화지역의교암산전투에참전하였다. 6.25전쟁의종전이임박하자공산군은금성돌출부탈취를목표로대규모공세를계획하였다. 제19연대 1대대는적의포화가집중하는가운데 바 고지의주진지와 407고지의전투전초진지를확보하여결전태세를갖추었으나, 제5중대와연계를유지하고 407고지에전투전초진지를확보한제2중대가자정무렵부터적 2개대대규모의공격을받아일진일퇴를거듭하고있었다. 중대규모의적공격을포병의화력지원으로격퇴한제2중대는재차대대규모의적이야포및박격포사격의지원아래공격해오자결사적인분전으로수류탄전을감행하였다. 그러나중대장은통신두절과아군피해가증가되는위험한상황하에서 407 고지가피탈되면인접중대및대대가전멸될것으로판단하고적의후방을기습, 공격제대를마비시키기위한특공대를편성하기로결심하였다. 이때스스로특공대를자원한중대작전계안낙규일등중사는 8명의특공대를이끌고 3발의수류탄을투척, 이를폭파하였다. 추진보급소를폭파한대원들은적의공격축선으로파고들었다. 암흑속에서특공대는수류탄을투척하고, 총검을휘두르자적진은혼란상태에빠져들었다. 그러나계속하여대원들을독려하며백병전을벌이던안중사는복부와가슴에적이쏜총탄을맞고그자리에쓰러졌으며, 그이후로더이상움직일수없었다. 이처럼안중사를비롯한특공대의생명을초월한활약과전중대원이전개한백병전및수류탄전으로적은물러갔으나, 마 고지-407고지일대의전투전초진지를돌파하고제2대대정면의 363고지로침공해온적이주저항선을확보한제3중대의우측방을공격함으로써제1중대와제2중대의퇴로가차단될것을우려한연대는노동리로철수하여병력재편성에들어갔다. 김교수대위는흥남공과대학을수료한후월남하여 1951년 8월 18일육군종합학교제32기로육군소위에임관되었으며, 이후각지구전선에참가한후제6사단제2연대제2대대제6중대장으로 1953년 7월교암산전투에임하였다. - 198 -

끊임없이쏘아대는적의포탄으로제6중대의모든진지는완전파괴되었고유선통신망마저두절되었다. 험악한암석만으로형성된극히불리한지형조건에설상가상으로밤에는비까지내리는최악의상황에서수십배에달하는적을맞은제6중대는접전초기부터처절한육박전을전개하였다. 이처럼수십배에달하는대적의내습속에서김대위는침착하게중대의진두에서작전을지휘하였다. 시간이경과할수록적의포화는강도가더해갔고적의병력도급속도로증강되었다. 이때김대위는모든중대원에게최후의순간까지한치도물러나지말고적을무찌르도록격려하며진두지휘하고있었다. 그리고때로는몰려오는적을향해몸소수류탄을투척하며총검을휘두르는등오직진지사수에여념이없었다. 그러나적진으로부터날아든한발의총탄이김대위의복부에명중됨으로써그는현장에서전사하였다. 중대장의죽음은모든중대원의적개심을극도로자극, 좌우에위치한인접부대가이미적에게돌파당한위기속에서도 7~8시간동안을고군분투하게하는원동력이되었다. 김대위를비롯한모든중대원의분전은좌우인접부대가돌파당한위기속에서도 7~8시간동안교암산을고수함으로써각연대및사단등아군의안전한철수에결정적인공헌을하였다. 김교수대위는육군종합학교출신유일한태극무공훈장죽음으로철원평야지켜냈다. 1953년 7월적근산-삼현지구반격전에서, 대대장오신춘중령은제6중대를우일선에, 제5중대를좌일선에내세우고제7중대를대대예비로후속시키는공격대형을갖춘가운데대대 OP를좌일선으로추진시켰다. 이처럼대대 OP를공격제1선까지내세운것은역습임무가연대뿐만아니라사단의신방어선의종심에직접적인영향을주기때문에취해진비상조치였다. 고지를탈취한중공군은이고지에주력하여축차적으로연대이상의병력을투입하여탈취한지하루만에견고한방어진지를급편하고있었다. 예상대로적의포화는격렬했는데, 우일선의제6중대에비해적의주진지를정면에서공격하는접근로를담당한좌일선의제5중대는더욱치열한포격에시달려야만하였다. 따라서고지의 7 부능선에이르기까지많은병력손실이발생할수밖에없었다. 게다가 8부능선을초월하려던제5중대장김길상대위가적자동화기로부터집중사격을받고복부관통상으로그자리에서전사하였다. 이때이장면을목격한대대장오신춘중령은제5중대의전열이와해되기전에즉각적인조치를취해자신이중대를직접지휘하게되었다. 대대부관을비롯한 OP요원들의만류에도불구하고그는고지정상을완전점령하기위해중대의진두에서대열을지휘하였다. 이러한모습에용기를얻은중대원들은죽음을각오하고돌진하여마침내 602고지의전상을점령하였다. 그러나오중령은이때적의포탄이주변에서폭발하면서현 - 199 -

장에서산화하였다. 4. 부하와동료를구한영웅살신성인영웅 1982년 6월 4일강원도홍천군북방면성동리강재구공원에서전후교육훈련중부하의생명을구하기위해터지는수류탄에몸을던져산화한고강재구소령의살신성인비가제막되었다. 27) 이처럼부하와동료를구하고자신을희생한영웅은전쟁시기부터있었다. 1950년 8월 19일해병대는통영상륙작전을감행, 시가지를완전히장악하고적의유일한공격로가될원문고개에대한방어에들어갔다. 이날오후부터 21일야간까지세차례에걸친적의공격을혈전끝에물리쳤다. 지휘관으로서김성은부대장도뛰어났지만, 제7중대의고종석 3조는왼팔에총상을입고도방어를계속, 8월 21일밤의치열한백병전에서 6명의적과대적하다가호안에떨어진수류탄을덮쳐전우를보호하는가운데산화했다. 8월 20일새벽 2시경북한군은밤을틈타다시공격해왔다, 수류탄전끝에진지일부가무너질즈음공군의지원공격으로북한군은물러났지만, 21일다시포사격을하며공격해왔다. 이또한해병대가물리쳤으나, 이후에도원문고개를차지하려는북한군의공격은계속되었다. 북한군은통영지역재진입을위해야음을이용하여역습공격을감행하는등수차례에걸쳐집요하게공격해왔다. 이에맞서, 25일고종석분대장은원문고개전투에서선봉에서백병전까지치르며적 3명을무찌르고도망치는적 6명을사살하는등공을세웠으나끝내자신도부상을당하고말았다. 이때적의방망이수류탄이호에떨어지자 엎드려! 라고외치면서자신의몸으로수류탄을덮쳐분대원들의생명을구하고전사했다. 이를보고중대원들이일제히육박전을감행, 적을물리치고진지를사수했다. 1966년 2월 4일이원등중사는고공침투낙하훈련중에공중에서부하를위기에서건지고스스로는영웅적으로산화했다. 그는공수특전단강하조장으로서교육생을이끌고 C-46수송기에탑승하여한강상공에서고공침투훈련을지도하고있었다. 6명의대원들이차례로강하한후상공 4,500피트의고도에서마지막으로하강하던이중사는바로직전에낙하한대원이균형을잡지못한채무서운속도로회전하며추락하고있는김모중사를발견했다. 낙하산을빨리펴주지않으면추락하여목숨이위태로운위급한상황이었다. 27) 고강재구소령살신성인비제막, 경향신문 1982.6.4. - 200 -

이때이중사는고도로숙달된스카이다이버만이할수있는사선이동의방법으로추락하는대원에게접근하여능숙하게그의낙하산을고쳐산개시켜주었다. 그러나동료를구하고이탈하는순간, 순식간에펼쳐지던동료의낙하산줄에오른팔이부러지면서이미지상에너무접근한상태라낙하산을펼칠최소한의시간을확보하지못한채한강얼음판위로추락하여순직했다. 28) 전명세는함경북도회령군에서태어나, 전쟁전월남해서 1951년갑종 7기로소위로임관한후 1961년항공병과로전과하여 1970년중령으로전역했다. 전역후 KAL 기조종사로근무를시작했다 1971년 1월비행중무장괴한이납북을기도하여기내에수류탄을던지는순간자신의몸으로수류탄을덮쳐승객 60명을구하고순직했다. 정부는일등보국훈장과통일장을추서했다. 1971년 1월 23일오후 1시 6분, 승객 60명승무원 5명을탑승시킨대한항공소속 F-27기는속초비행장을이륙하여서울로향하던중강릉상공에이르렀을때, 범인김상태가폭발물로조종실벽과동체하부를파괴하고조종실로침입하여양손에폭발물을들고월북할것을강요하였다. 당시범인이창밖으로눈을돌려지형을살피는순간, 훈련조종사석에있는전명세는최천일보안관에게신호를재빨리보내보안관이권총을발사, 범인의이마에명중시켰다. 총탄을맞은범인이쓰러지면서양손에들었던폭발물이떨어졌다. 전명세는급한상황에서도몸을날려폭발물및범인을자신의몸으로덮쳐자신의몸으로덮쳐승객 60여명을구출하고순직하였다. 조중훈대한항공사장은 전명세조종사는제2의강재구소령이었다 라고말했다. 29) 권영주중위는강원도인제지역의제3군단 2전차대대 1중대소대장으로근무중이던 1980년 2월 9일 01:00, 야간전투훈련을마치고적외선밀폐조종으로부대로복귀하던중전차가교량밑으로전복사고가나자암혹속에서유독가스에질식한부하 4명을필사적으로전차해치밖으로내보내고자신은불붙은전차와함께산화했다. 그는 ROTC 역사상최초호국인물로선정되었다. 공완택병장은 1989년 4월 6일부대원들과함께경기도포천군이동면소재승진훈련장에서실시된대대급공지합동훈련에지상군으로참가하였다. 오전 10시경개인호에투입되어중대장의신호에따라개인화기와유탄발사기사격을실시하였다. 이후돌격선에도달한가상적을퇴치하기위해방독면을쓴채안전핀을뽑고투척이용이한좌측교통호를따라이동하던중돌부리에걸려넘어지면서수류탄을떨어뜨 28) 이진섭 (1966), 저하늘에내가있다. 29) 전명세조종사는제 2 의姜在求 ( 강재구 ) 소령이었습니다 라고말하는조중훈씨, 동아일보 1971.1.26. - 201 -

리고말았다. 이순간자신은충분히피할수있었음에도인접한개인호에서사격중 인동료들의목숨을구하기위해자신의철모로수류탄을덮고몸으로감싸동료장 병 4 명의목숨을건지고산화하였다. 5. 재일학도의용군출신영웅 낙동강방어선의최동쪽전초지인포항은국군제3사단이맡고있었으며미군병력이진주하기로되어있는요새였다. 낙동강방어전에는펜을총으로바꾸어자진입대한학도병들의무훈이많다. 안동에주둔했던수도사단에종군한제1기생 71생 71명의학도병들은사단의방침에따라현지입대하게되었다. 학도의용군은 6.25전쟁기간중특히, 개전초기국가의위기를극복하기위해학생의신분으로자원입대하여군번과계급을부여받지않은채정규작전을비롯한각종전투행위에가담한자들을의미한다. 즉활동기간은 1950년 6월말부터대통령의복귀령발표시점인 1951년 2월말까지이다. 활동분야는정규전투및작전, 선무공작, 공비토벌, 자경활동등이고, 그규모는 27,500명정도이다. 김용섭을비롯한학도병 70명은포항에서북한군제15사단의대대병력의포위아래혈전을벌여적수백명을사살, 돌격전을벌였다. 71명의학도병가운데 47명은전사하고 10여명이포로가되었으나기적적으로탈출해나왔다. 그결과아군제3사단및포항시내아군부대의철수를위한시간을제공함으로써아군의재편성및반격의기회를제공했다. 이러한학도의용군가운데일본에서자원입대한박두원은나중에공군장교가되었다. 그는 7세가되던해동생과함께일본으로건너간후 1944년 9월에는일본다찌아라이육군비행학교조종과정을졸업하고조종사가되었다. 조국에서전쟁이발발했다는소식을접한그는 1950년 10월재일학도의용군으로자원입대하여부산의육군헌병대에서근무하던중상관들의추천에의해간부후보생 16기로입대하여 1952년 3월 1일공군소위로임관하였다. 임관과동시에공군제1전투비행단제10전투비행전대에배속되어이틀후부터출격을개시한그는적진지폭격및보급로차단작전, 지상군근접지원작전등총 90 회의출격기록을수립하였으나, 1952년 8월 2일금강산지구의적집결지를공격하던중지상포화에피탄되어전사하였다. 그는 5개월간의짧은기간에 89회라는경이적인출격을감행하였으며, 적탱크진지공격과보급로차단작전에서무수한전공을세웠다. 그러나아깝게도그는생전에소원했던 100회출격을못다채우고조국하늘에서산화하였다. 1952년 8월 2일. 연일 - 202 -

계속된출격에도지칠줄모르던박두원중위는동료조종사들과함께 89회째출격에나섰다. 목표는내금강에위치한장안사였다. 그일대는무수한적의자동화기진지가있었고, 동부전선의보급집결지로서중요한요새지였다. 그는공군전투기조종사가되면서부터평소에최소한 100회의출격을희망하였으나목표달성을눈앞에두고 89회를마지막출격으로산화하였다. 6. 첩보전영웅 전쟁중육해공군은물론유격대에서첩보대를운용했다. 이가운데적후방에침투하여적정을수집하여아군작전에기여한 KLO 첩보대원의활동도있지만, 30) 첩보대원의개별공적이분명한인천상륙작전에기여한해군첩보부대의역할에주목했다. 임병래해군중위는사관후보생제9기로해군에입대하여 1950년 4월 20일해군중위로임관하였다. 이후해군첩보부대의창설요원으로많은활동을한그는인천상륙작전을위한특수공작대의조장으로영흥도첩보전에참여하여임무를완수하는과정에서전사하였다. 'X-RAY작전' 으로명명된영흥도첩보작전은당시해군정보국첩보대가인천앞바다에위치한영흥도를거점으로인천에잠입하여수원과서울등지에서인천상륙작전에필요한정보를수집하는것이주임무였다. 총참모장으로부터공작임무를부여받은해군정보국장함명수소령은임무수행에필요한첩보공작요원선발에착수하여비밀리에자신을포함한 17명의요원을선발하였다. 여기에는임병래, 김순기, 장정택중위등정보장교와홍시욱, 김남규, 정성원등정보국소속사병 6명, 그리고민간인 7명이포함되었다. 선발된요원들은장비및물자등제반준비사항의점검이끝나자, 8월 18일 01시에첩보선백구호에승선하여보조선수양산호와함께영흥도로향하였다. 1950년 8월 24일 01시 30분, 밤의적막을가르고영흥도북쪽해안의십리포에닻을내린백구호는민첩한행동으로 17명의대원들을하선시켰다. 영흥도는북한군수중에있었으나, 해군소속의육전중대가상륙작전을감행하여 8월 22일탈환한이후였다. 상륙을끝낸첩보대는즉시영흥도를거점으로첩보공작임무에착수하였으며, 함명수대장은효과적인임무수행을위해대원들을 3개조로편성하였는데, 임병래중위조는인천등지로잠입해정보를수집하는임무를부여받았다. 이에따라임병래중위조는북한군복장과민간인복장등으로위장하고무기와북한화폐를소지한다음덕적도에서징발한범선을타고야음을틈타해안의돌출지점 30) 조성훈 (2003), 한국전쟁의유격전사, pp.561-562. - 203 -

으로상륙, 인천시내로잠입하였다. 인천지방에활동거점을확보하고해안포대의위치와병력배치상황, 인천시내주둔병력의규모와화력등을파악하는공작에착수한첩보팀은가장중요하다고판단되는월미도의해안방어태세를확인하기위해작업인부로가장하고월미도에접근하였다. 그들은북한군관 2명을납치하여월미도의병력규모와해안포대의위치등을확인한후처치하였다. 활동개시 1주일후첩보팀은필요한정보를탐지한후, 1950년 9월 1일영흥도에은밀히상륙한미극동군사령부정보국소속클라크해군대위에게보고하였다. 그리고이정보들은극동군사령부에직접송신되었다. 한편북한군은영흥도에미군이상륙했다는정보를입수하고증강된대대규모의병력으로공격을가해왔다. 클라크대위팀은해군의용대에섬을사수하라는명령을내리고영흥도를탈출하였다. 영흥도에는임병래중위를비롯한해군첩보대원 9명과해군의용대원 30여명등만이남아임병래중위의지휘아래상륙하는적을맞아치열한전투를전개하였다. 이때임병래중위와홍시욱삼등병조가위험을무릅쓰고적의공격을차단함으로써나머지대원들은십리포에정박시킨보트에승선해탈출할수있었으나, 두대원은탈출에실패하고적에게포위되고말았다. 체포될경우첩보공작임무에대한기밀유지가어려울것으로판단한홍시욱삼조가 M1소총으로 6명의적을사살하고마지막남은한발의총탄으로자결하였다. 이장면을목격한임병래중위는 45구경권총으로 3명의적을사살한후권총을자신의이마에대고방아쇠를당겼다. 이때가인천상륙작전을불과 24시간앞둔시점이었다. 31) 7. 용병전술이뛰어난지휘관들 지휘관가운데대부대지휘및작전지도능력이탁월하여전투를승리로이끄는데결정적인역할을한인물은육 해 공군의연대장급이상지휘관이해당될것이다. 한강, 낙동강전선, 평양탈환, 초산진출등에서용병에탁월한지휘관은 1990년대논의당시에생존자를제외하고김홍일중장, 손원일중장, 한신대장, 김용배준장, 유치곤준장등이선정되었다. 32) 광복군출신지휘관김홍일장군은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5일까지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서분산 남하하는아군병력을규합하여혼성수도사단과혼성제7사단등으로재편하여북한군제1군단과 6일간의전투를전개하여한강방어임무를성공적으로완수함으로써국군이전략적으로후퇴하고미지상군이참전할수있는시간을확보하는데 31) 해군본부 (2010), 6 25 전쟁과한국해군작전, pp.236-242. 32) 이상일, 호국인물의선정가추모사업의추이, 전쟁기념관, 2012.6.22., pp.9-10. - 204 -

커다란공헌을했다. 한강방어선전투는 6 25전쟁초기서울이함락된직후인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시흥지구전투사령부 ( 사령관김홍일소장 ) 예하의 4개혼성사단이한강남쪽에방어선을형성하여북한군제1군단예하보병 3개사단및전차 1개여단의한강도하를 6일간이나지연시킨전투이다. 1950년 7월 14일제6사단은문경지역에서적 2개사단과이화령에서대치하고있었으나좌우인접사단의불리한전황으로전선이조정되어병력보충없이적의강력한병력과화력으로불리한상황에처해있었다. 또한조령의제19연대방어진지가와해되어돌출부의이화령진지가위기에처하게되자문경을포기하고점촌으로철수하기에이르렀다. 이때제2연대는이화령에서남하도중적의퇴로차단으로진퇴유곡의어려운상황에있었다. 1950년 7월 14~15일충북충주의이화령에서제2연대는적 1사단을맞아방어와역습작전을펼쳐적 800여명을사살하고장갑차 전차 13대를노획하는전과를올렸으나이내철수하지않으면안되었다. 이때지휘관인함병선대령과최전선에서진두지휘중왼쪽다리에관통상을입었으나굴하지않고계속최전선에서육박을감행하던대대장박노규의역할도컸다. 이후박노규대령은제2사단 31연대장으로서경북일월산일대의공비토벌작전에참가하게되었다. 당시경북산악지대에는북진중인아군에의해퇴로가차단된북한군제10사단이재산 ( 在山 ) 공비와합세하여후방치안을교란하고군의주보급로를차단하려하였다. 1951년 3월 3일연대를지휘하던박노규대령은경북봉화군소천면일월산일대에서아군보급로확보에주력하던중적이압도적인병력으로아군진지를돌파하려하자한손에권총을빼어들고진두지휘를실시, 장병들의사기를진작시켰다. 그러나박노규대령이적진으로돌진하는순간적의흉탄이그의복부를관통한데이어 3발의흉탄이손과복부에명중함으로써현장에서전사하였다. 박대령은항시부하를사랑하며그성품이청렴결백내강외유한장군으로전장병의사표며국군의귀감이라는평을받았다. 정일권총참모장은 그는최고의애국자로서과거 4회에걸친중상에도불구하고부단한충섬심과적개심으로, 백절불굴의투지로항시최전선에서진두지휘하던용장이었다. 많은국군장교중에서도가장그전도가촉망되던부대장으로애석하기짝이없다. 고아쉬워했다. 33) 김동빈대령은전쟁기간중북한군의낙동강도하를저지한해평전투및다부동지구전투는물론육박전을전개해최대의승리를획득한영천전투에서두드러진전과를올렸을뿐만아니라, 유엔군의총반격전이개시된이후평양탈환작전과태천전투, 중공군의공세에대한반격을통해임진강선까지추격 섬멸하는계기가되었던신 - 205 -

벽제지구전투등에서수많은전공을수립했다. 김동빈대령은전쟁발발직후인 7월 2일혼성제2사단참모장으로한강방어전투에참전하였고, 3일만에제5연대장으로전보되었으나한달도못돼다시제11연대장에임명되었다. 당시제11연대장김동빈대령은적의낙동강도하의관문이며아군의낙동강선방어의지형적약점인해평지구의전선을담당하고있었다. 1950년 8월 14일부터 29일까지전개된다부동지구전투에서제11연대는대구방어의최후아성인다부동 207고지, 265고지일대의방어정면을담당하여각대대를요지에배치하고있었다. 8월 14일 17시를기해전차를선두로한약 1개연대규모의적이임수동 201고지에출현하였고, 22시에는환계동에 1개연대, 상림동-장동일대에 1개연대의적이출현하여제2대대진지에맹포격을가하면서공격하였다. 제11연대는 4시간에걸친치열한백병전을감행하여일단격퇴시켰으나, 8월 15일적은야포와직사포의강력한지원아래전차를선두로신주막, 여남동, 유학산, 금곡사에각각 1개연대의병력으로공세를취해오는것을로켓포특공대를선두로각대대가적과일제히육박돌격전을감행하였다. 신주막일대는적의시신과피로산과내를이루었고, 일대는아수라장이되었다. 아군의다부동지구섬멸전성공의제1 보를개척한이전투에서피아의장비우열과병력과중의차이에도불구하고이러한승리를쟁취할수있었던것은연대장김동빈대령의과감한지휘와결사의각오로선전한결과였다. 영천전투는낙동강방어선이돌파되느냐사수하느냐를결정지을만큼중요한전투였다. 유재흥중장은제2군단장으로재임하던 1950년 9월 2일부터 12일까지낙동강전선에서북한군의 9월공세가개시되어북한군이영천까지침공하였을때, 예하제7사단과제8사단을지휘하여북한군제15사단의공격을격퇴하고영천을탈환함으로써아군이반격작전으로이행할수있는발판을마련하였다. 이전투에서제8사단제21연대장김용배대령은연대진지를영천북방에계속유지시켜적 2개연대를견제, 이들연대가증원병력으로차출될수없게하여주력의전진을지연시켰다. 이는수세를공세로전환시키는원동력이되었다. 9월 20일영천전투를계기로반격에들어간제8사단은의성-안동-영주를거쳐단양-양평-동두천으로진격하여 10월 8일마침내 38도선을돌파하였다. 한신수도사단제1연대장은안강-기계전투에서낙동강전선의돌파를기도하는북한군 2개사단을격퇴한후반격전에서성진-북청-길주-어랑천-청진등지의탈환작전을성공적으로수행하였다. 이전투로북한군제12사단의작전은전반적으로큰차질을빚게되었고국군제1군단과수도사단은무릉산-곤제봉-형산강을연하는선에서 - 206 -

새로운방어선을형성할수있는시간적여유를얻게되었다. 또한그는흥남철수작전에서는뛰어난지휘및통솔력으로병력과장비의손실없이질서정연하게철수작전을전개하는역량을발휘했을뿐만아니라동해안의요지인대관령전투에서는 1개사단규모의중공군과사투를벌여격퇴함으로써적의남진을저지하고공세로이전하는데결정적으로공헌했다. 임부택중령은제6사단제7연대장으로서 38도선경계임무에진력하던중 6 25전쟁의발발과함께춘천 홍천지구전투에임하였다. 제7연대장에부임한임부택중령은부대교육훈련과 38선방어진지구축에남다른관심을갖고대대전투훈련을완료하는한편 38선주요접근로에토치카및유개호를구축하고기성진지를보수하였다. 또한소양강변과 164고지일대에방어진지구축작업을시작, 5월하순에완료하였다. 1950년 6월 25일 04시경북한군제2사단은국군제6사단제7연대가담당한춘천북방지역을공격하였다. 그들은제7연대지역을정면으로공격하면서일부병력을북한강계곡으로침투시켜제7연대의퇴로를차단해이를춘천북방에서섬멸시키려하였다. 이에제7연대장임부택중령은북한강계곡의제3대대와소양강북방의제2대대에각각현진지를고수토록지시하고포병은춘천북방산발리와수리봉에저지사격을지향토록지시하였다. 이후통신이두절되자자신이직접상황을파악하기위해소양강건너우두산에연대관측소를추진하였으며, 예비인제1대대를북한강계곡에투입하였다. 이러한연대장의효과적인지휘로제7연대는병력과장비의열세에도불구하고적의집요한공격을격퇴하면서진지를고수하였으며, 포병은화력을집중하여남진하는적에게심대한타격을주었다. 제7연대의성공적인방어는수도권에집중적으로투입된국군주력부대로하여금전열을재정비하게하여한강방어선을형성할수있는시간적인여유를갖는데결정적인공헌을하였다. 이후제7연대는전선의균형유지를위해축차지연전에들어가음성북방의동락리에서이천-장호원-충주축선을따라남진하던북한군제15사단제48연대를기습하여치명적인타격을가하고격퇴함으로써부대원전원이일계급특진하는대승을거두었다. 한편 6 25전쟁이발발할당시백두산함의함장이었던최용남중령은대한해협전투를승리로이끌고인천상륙작전의성공에기여하는등전쟁기간많은활약을하였다. 선명이 백두산 인 PC 701함은대한민국해군이보유한유일한전투함이었다. 전쟁당일 11시경지프를타고달려온통제부사령관김성삼대령은당직사관김종식소위에게 701함장은통제부사령관으로부터 YMS 512정과 518정을인수지휘하여즉시동해안으로출동, 제2정대사령관의협조아래해상경비를강화하고적함을 - 207 -

포착하는대로격침하라 는명령을하달하였다. 701함장최용남중령은비상소집과함께외출장병의귀함지시를내리고출동태세를갖추고거친바다를헤쳐나갔다. 정체불명선박과의거리는약 5마일정도로유지하였다. 백두산함은정지신호를연달아보냈으나반응이없었다. 거리가 3마일정도로좁혀지자괴선박은갑자기동쪽으로선수를돌리더니시꺼먼연기를내뿜으며전속력으로달아나기시작하였다. 최중령은적선이분명하다고판단하였다. 1,000 톤급으로보이는적선은무엇을실었는지워터라인이움푹들어가있었다. 끝없는수평선만펼쳐지는해상에서추격전은 2시간이나계속되었다. 백두산함이위험을무릅쓰고더욱가까이다가가자적은일반상선처럼항해등을켜고항해하며백두산함의시선을속이려하였다. 백두산함은서치라이트를켜선박을살폈다. 선수와선미에 57mm포가백두산함을향해있었으며, 갑판에는수병복을착용한정규해군과육전대로가득차있었다. 701함이해군본부에상황을보고하자적선을나포하라는회신이곧장하달되었다. 그러나영해내로적선을유도하는것이여의치않은상황에서해군본부는적선을격침하라는두번째회신을보내왔다. 26일 0시 30분함장으로부터드디어전투지시를받은포술장유용림중위의우렁찬사격구령과함께주포는불을뿜었다. 포탄은적함의마스트를통과해적함의좌현해상에떨어져물기둥이치솟았다. 급작스런포격을받은적함은급선회를시도했고 701함은거리를더욱좁혔다. 적탄에 701함의조타실중앙하부가명중되었다. 조타수김창학삼조는파편상을입고도끝까지키를집고있었으며, 주포전화수김춘배삼조도마찬가지였다. 701함은 4시간여의치열한포격전끝에수많은상륙병을실은적함을격침시켜첫해전에서승리했다. 공군에서는유치곤공군중장에주목했다. 그는 1949년공군에입대해 1951년 4월 1일공군소위로임관했다. 같은해 10월 11일강릉기지에서 F-51 전투기조종사로첫출격을시작한이래 1953년 5월 30일한국공국역사상유일하게 200회를출격하면서, 수많은전공을세웠다. 특히그는 1952년 1월 15일에평양근교승호리철교폭파작전에서죽음을무릅쓰고 1500피트의초저공비행으로공격을감행하여 UN공군이 500여차례공격으로도파괴하지못한철교를폭파하는수훈을세웠다. 이후평양대폭격작전을비롯하여강원고성의 351 고지탈환작전, 송림제철소폭파작전등한국공군이출격한주요작전에참전해빛나는전공을세움으로써 625 전쟁중에을지무공훈장과충무무공훈장을각 3회, 미공군비행훈장등을받았다. 정전이후에는전후방의각급공군부대전투지휘관을수행하면서공군의전력증강 - 208 -

과발전에이바지하였으며공군제 107 기지단장으로재직중 1965 년 1 월 1 일과로로 순직했다. 8. 경찰영웅 1990년대호국인물심의에서경찰가운데권영도순경과라희봉경감 2인만선정되었다. 34) 이들외에노종해경감과김해수경감을추가했다. 권영도경위는 6 25전쟁기간경상남도경찰청순경으로재직하면서지리산공비토벌작전에참가하여지역내작전을성공적으로수행하였다. 전쟁중경남경찰청관내서하특공대에가담한그는관내산청군국수봉전투에서적게릴라 150명과접전중결사대를조직, 23명의적을사살하고다수의장비를노획하는등큰공을세워 1951년 12월 21일순경으로특채되었다. 1950년 9월, 국군과유엔군의총반격이시작되자미처후퇴하지못하고산악지역에잠복해후방에서국군을교란하던빨치산세력을소탕하기위해벌인지리산일대에서대대적인토벌작전이전개되었다. 9 28서울수복과동시에국군과경찰이합동으로공비토벌작전을수행하였다. 이어산청군과함양군일대에서적게릴라 20명을사살하고 13명을생포하는등 1952년 6월까지지역내게릴라소탕작전에항상선봉에서활약했다. 이후 1952년 7월 13일산청군웅석봉일대에근거지를두고있던 이영희부대 의소탕을위해 1개중대규모의전투경찰대를투입하였으나적의완강한저항으로실패하였다. 이때권영도경위는 5명의특공대를조직하여적의요새를공격하던중 26 세의나이로적탄에맞아전사했다. 라희봉경감은대한민국정부수립이듬해인 1949년 7월 10일전북경찰에임용되어순경으로근무하였다. 전쟁중인 1951년 1월전북순창경찰서쌍치지서장으로부임하여공비토벌작전에참가하던중전사했다. 1950년 9월 15일국군과유엔군의인천상륙작전으로전세가역전되어퇴로가차단되자패잔병과지방잔류좌익빨치산들은덕유산과지리산등에은거하면서후방지역을위협하고교란하기시작하였다. 9 28서울수복과동시에국군과경찰이합동으로공비토벌작전을수행하였다. 순창지역은 1950년 10월경경찰과국군이진입하여일부지역을수복하였으나치안이완전히회복된것은아니었으며, 특히쌍치면을비롯한산간지역은미수복지구로남아군경과빨치산사이의교전이지속되었다. 당시순창군쌍치면, 복흥면, 구림면은해발 200m 이상의산악지대로회문산을중심으로빨치산근거지로활용되었 34) 이상일, 호국인물의선정가추모사업의추이, 전쟁기념관, 2012.6.22., pp.9-10. - 209 -

다. 1951년 1월라희봉경감은순창경찰서쌍치면지서장으로부임되어토벌작전에본격적으로투입되었다. 북한군패잔병과지방잔류공비들이덕유산, 지리산등지에은거하며후방지역을위협, 교란하던 1951년 7월 10일라경감은의용대원 45명을지휘하여, 100여명의공비가은거한순창군쌍치면국사봉일대에대한토벌작전을실시, 공비 9명을사살하는전공을세웠다. 이어그는그해 10월 2일구림면금창골에서수많은공비가침투한다는정보를입수하여, 의용대원 40명을인솔해매복작전을지휘해공비 2명을사살하고소총 3정을노획하기도했다. 매복전술은좌익빨치산토벌작전에대표적인전술이었다. 그러나 1952년 11월20일쌍치면용전리뒷산, 오두봉고지에공비가침투하자경찰 100여명을직접지휘해 항미연대 와 외팔이부대 등약 700여명의공비들과마주쳐치열한전투를전개했다. 이때적이투척한수류탄에중상을입고후송됐으나, 회복하지못한채사흘만에숨졌다. 한편, 노종해경감은내평지서경찰관 9인과북한군제12사단대적해춘천대첩밑거름이되었다. 북한군이춘천지역내평리에들어오자곧내평지서를포위하자, 지서는마을한복판인 46번도로변의약간높은곳에마대로쌓아올려진지를만들고지서장이하전원이죽음을다짐하며완강한저항으로전사하였다. 그는대원들과적 20 여명을사살하는등 1시간에걸친저항으로국군의남쪽주저항선을확보하는시간을갖게함으로춘천방어에크게기여했다. 35) 전쟁당시영월군상동읍소재대한중석상동광업소를경비하고있던강원전투경찰제8대대가영월화력발전소를탈환사수하라는사령부의작전명령에의하여제1중대장김해수경감외 47명의결사대가영월발전소를향해진군중 1950년 7월 8일 14:00 경중동면녹전리에서인민군대부대와조우, 치열하게격전하여적 73명을사살하는전과를올렸다. 그러나김해수중대장등 10명이전사하고, 실종 14명, 부상 4명등의피해를입었다. 이때김해수중대장이전사하자석상익경위가분투했으나역부족으로전사했다. 35) 강원경찰국, 영광의서곡, 1952; 강원순직경찰관대장. -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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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국민국가, 공화주의적시민과군대 홍태영 ( 국방대학교 ) - 목차 - I. 들어가는말 II. 전쟁, 공동체그리고시민 III. 프랑스혁명과공화주의적시민의군대 IV. 유럽근대국민국가와군대 V. 한반도의식민지경험과굴곡된네이션의형성 VI. 한국전쟁과국가건설그리고국민형성 1. 반공국가그리고 반공적 국민 2. 개발국가그리고반공과경제개발의주체로서국민 VII. 결론을대신하여 : 민주적이고공화적인공동체를향하여 I. 들어가는말 한국민주주의의발전과관련하여군은오랫동안부정적인요소를지닌집단으로간주되었다. 해방이후군이주요한정치적행위자로등장하면서부터군은한국정치의중심에있었고, 그러한가운데서민주주의의장애역할을해온것이분명하다. 하지만군이행한정치적역할이라는것과군이한국사회더나아가근대국민국가에서행한역할이라는거시적측면을구분하여살펴볼필요가있다. 즉근대국민국가에서군대는공동체의방위라는임무를수행한다는측면에서공동체의안위와관련한가장중요한존재이며, 동시에병역은시민의권리이자의무라는의미에서시민의형성에중요한축을이루고있다는점을주목해야한다. 서구에서근대국민국가형성에있어서등장했던다양한변수들, 즉봉건제의위기와자본주의의발전이라는경제적요인, 다양한형태의강압과지배의요소, 그로인해발생하였던전쟁, 그리고그것에수반된경제적행위자와강압의전문가라는요인들이존재하였다. 그리고그러한행위자들의활동공간으로서존재하였던제국 (empire), 국가 (state), 도시공동체 (city) 등이경쟁적으로공존하고있었다. 이러한다 - 213 -

양한조건들과요소들의경합과충돌속에서근대국가는서서히주도적인위치를점하면서근대의유일한정치공동체로서위상을확립하였고, 근대국가들의체계로서국제관계가형성되었다. 이과정에서주요한행위자이자동시에주요한변수로등장하는것이 군 ( 軍 ) 이며, 특히그과정은애국주의적시민군의근대적상비군으로의재편과맞물리는과정이기도하다. 근대국가형성에있어서핵심적인두가지과정으로이해되는것은조세권의독점을통한재정의확보와폭력의독점이라는의미에서군사적독점의과정이다. 일반적으로이과정은한편으로자본주의의발전과일정하게결합되어지는과정이며, 다른한편으로물리적강압의독점과정은다수의전쟁을겪으면서이루어지는과정이었다. 서구에서이루어졌던근대적국민국가형성의과정이한반도에서동일하게반복될수는없었다. 한반도에일본그리고서구가진출하면서서구적근대화길에들어서지만, 일제에의한식민지화과정은한반도에서국민국가건설의왜곡을가져올수밖에없었다. 서구에서일어났던근대국민국가형성의과정은동시에민주주의의발전과정이었고또한그구성원인시민들의권리의확장과정이었다. 그러한측면에서서구적인길은한반도와같은후발국가들에게는많은시사점을주는바가있다. 어찌되었든한반도, 특히남한에서근대화의길은서구적국민국가건설을통한자본주의적발전과민주주의의확장의과정으로서선택되고지향되었던길이기때문이다. 이글에서는그러한과정을특히전쟁, 군, 시민등의개념에집중하여살펴보고자한다. 특히서구의역사에서시민의상과관련하여시민군의위상의문제그리고국민통합의이데올로기이자동시에국민형성의이데올로기인공화주의적애국심 (patriotism) 이다양한경로와배경속에서민족주의 (nationalism) 로변환되는과정등의문제를중심으로살펴보고 (II-IV절), 이후한반도, 특히남한에서국민국가건설에서그러한문제들이어떠한변형과해결의과정을거치는지살펴보고자한다 (V-VI절). II. 전쟁, 공동체그리고시민 공동체의방위와관련하여군대와시민의위상은이미플라톤이래정치공동체에서핵심적인쟁점이었다. 그것은바로공동체의안전의문제와결합되어있기때문이다. 플라톤에게있어전사계급은공동체의안위와관련되어있기때문에전문가의영역으로분류하였고, 또한상위계층으로간주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경우시민으로서군대의의무를행하는것은지극히당연한것이었고, 또한필요한것이었다. 이러한전통속에서공화주의자마키아벨리는용병에대한거부와시민군의필요성을강조하였 - 214 -

다. 즉공화국의안정적유지를위해서그리고공화주의적덕목의실현과그것의함양을위해서시민군은절대적으로필요한요소였다. 그리스인들의전투를치열하게만든것은농경지에대한침탈위협이아니라신념, 즉문화적관념이었다. 어느누구도타인에게굴복하거나열등한위치에서지않을것 이라는신념이이들을전쟁터로나가게만들었다 (J. Lynn 2006: 46). 바로그리스인들의평등의식, 독립심, 그리고시민으로서한개인으로서그들이갖고있던강한자긍심이그런전투를만들어낸것이다. 시민으로서공동체에속한다는것은그리스인들에게는중장보병으로서의능력, 즉중장비를한벌을갖출수있는능력을의미하였다 (C. Mossé 2002: 68). 아리스토텔레스역시중장보병의도시를실현가능한가장최상의제도로생각했다. 중세의군대는고대와는다른양상을보였다. 일부도시민병대를제외하면중세의군대는소수의귀족기사들과공민권을갖지못한다수의평민들로이루어져있었다 (J. Lynn 2006: 178). 기사도의핵심을이루는것은용기, 명예, 충성심이었다 (G. Duby 2005: 193-202). 중세에서근대로의이행과정에서기사, 용병, 상인, 전쟁전문가들등전쟁의주요한혹은중심적인행위자가달라져왔는데, 한편으로는군사적폭력의소유자의변화를통한권력의변화를보여준다 (M. Howard 2014). 예를들어봉건제시기기마군은전투의전문가일뿐만아니라사회의지배세력이었다. 기마병이되기위해서는기마전투라는특수한기술을소유해야하며동시에그무장에상당한경제적부담이들어누구든지기마병이될수없는것이었기때문이다 ( 박상섭 1996: 41). 이미고대아테네에서도시민의권리이자의무였던것이공동체의방위와관련한일이었고, 그것은중장보병의장비를갖출수있는남자에한정되었다는점을본다면, 군사적폭력의소유의문제는권력의문제와결합됨을알수있다 (C. Mossé 2002; G. Flynn 2002). 귀족계급출신인장교들이징집병인일반병사들에대해가지고있었던경멸감은귀족계급이향유하던엄청난특권을정당화하는편견에불과했다. 당시귀족들이누리고있던사회적, 경제적정치적특권은그들이국가를위해죽음도불사하는특별한봉사를한다는주장, 즉장교로복무한다는것 - 피로세금을낸다 - 으로정당화되었다. 귀족들은자신들만이용기와왕에대한충성심의기반인명예심을갖고있기때문에장교의지위를차지하는데적합하다고스스로믿고있었다. 근대적국가의형성과정은군사적폭력의독점과정임을보여준다. 그리고그와함께수반되는자본의문제가있다. 전쟁을수행하기위해필요한것이군사적폭력과그것을운용할수있게하는자본이문제였기때문에그두가지요인의작동과흐름이그것을말해주는것이다. 절대왕정이성립할수있었던것은상비군을유지할수있는정도의자본을소유하든지아니면그정도의자본을동원 조세의형태로그리 - 215 -

고그것을위한관료제의확립을통해 - 할수있는힘 - 강압 -을소유할수있어야했다. 그렇게본다면, 자본과강압은일종의원환처럼서로를보증하는관계가될수밖에없었다. 그과정에서 30년전쟁과그결과로체결된베스트팔렌조약은주권국가의개념을정립하였고, 유럽에서국민국가들의체계를공고하는역할을수행하였다. 1) 주권은일정한영토적경계내에서배타적권력을행사할수있게되었고, 그러한국가들의체계로서국제관계가성립되었다. 중세와근대의갈림길에존재하였던절대주의시기에형성된상비군 (standing army) 은평화시에도안정적으로유지되면서등장하였다. 2) 상비군의등장으로중앙집중화된왕권을형성시키는데있어서군사적독점이라는방식을통해근대국가로의길을여는수단이었고, 핵심적역할을수행하였다. 따라서절대주의왕권을견제하고자했던세력들은상비군의유지가시민의자유와부합하지않는다는점을강조하였다. 영국혁명전후에서도볼링브로크, 밀턴등은상비군에대한거부, 시민군에대한의회의통제권을주장하였다 (Q. Skinner 2007: 123-125). 칸트역시자신의 영구평화론 에서 상비군은점차로완전히폐지되어야한다 고주장하였다 (I. Kant 1992). 칸트에따르면상비군은단순히실존하는것만으로도평화에대한상시적인위험요소가된다. 왜냐하면한편으로는그군대는다른군대에대해무장하지않을수없도록끊임없는위협을드러낸다. 다른한편으로는그군대는자신에의존하고있는국가에게전쟁의모험에빠져들어가도록유혹할수있는힘을의식하게한다. 따라서평화를촉진하고자하는자는상시적으로무장을유지하고있는군대를포기해야한다고칸트는주장하였다. 또한미국독립혁명시기에도상비군의위험성에대한논란은끊이지않았다. 특히 1690년대영국의상비군은명백하게영국의자유를위협하는제도로규정되었고그러한사고가그대로식민지에전달되었기때문에그러하였다 (B. Bailyn 1999: 382-384). 따라서결국주전투력은민병대 (militia), 다시말해법의수행을위해특히내외의적과투쟁하기위해위험이있을때만소집되는국민군이었다. 다른한편으로로마이후마키아벨리에이르러다시등장하는공화주의전통에서시민군은시민들로하여금시민적덕성을함양할수있는장이었다. 그리고좋은군주가되기위해가장우선이되는조건은용병이아닌자신의군대를갖추는것이라 1) 최근베스트팔렌조약을기점으로주권에기초한근대적국제관계가성립되었다는견해에대한비판이주류를이루고있다. 이에대한논의는이글의범위를벗어난다. 다만필자역시근대국민국가형성의과정자체가장기적인역사라는점을염두에둔다면, 그것들의체계로서국제관계역시하나의획기적사건을통해성립되었다고보는것은무리가따르리라생각된다. 이에대한자세한논의는김준석 (2012); 전재성 (2009) 등을참조. 2) 프랑스에서첫번째진정한상비군은 1680 년대 150,000 정도를평화시에도유지하면서등장하였다 (J. Lynn 1996: 518). - 216 -

고마키아벨리는단언하였다. 자신과자신의공동체를지키는것이군주의첫번째덕목이라는점을감안할때가장우선시되는것이자신의군대였음은말할나위없다. 루소는유럽의직업적상비군이두가지목적을위해적합할뿐인데 하나는인접국가를공격하여점령하기위해서, 다른하나는자국민을속박하여노예화하기위해서 라고비난했다. 루소는상비군에대한대안으로, 국가의진정한보호자는그국가의구성원들이다. 모든국민은직업으로서가아니라의무에의해서군인으로복무해야한다. 고제시하였다 (J. J. Rousseau 1964a: 1013-1014). 루소는또한 알렉산더대왕의승리나초기로마공화국의승리는조국을위해피를흘릴줄알고조국을결코팔아먹지않을용감한시민들에의해이루어진것 이었으며, 폭군들은정규군을창설하여인민을억압할뿐이라고주장하였다 (J. J. Rousseau 1964b: 268-269). 상비군의위험성과시민군에대한공화주의적애착속에서그대비가뚜렷하게드러난것은프랑스혁명시기였다. 1789년의프랑스혁명은근대국민국가형성의새로운계기가되었다. 그것은주권자로서국민이등장하고국민에의한국가라는민주주의의개념이형성되기시작하였다는점에서그러하였다. 그리고군과관련하여서도고대적인공화주의적시민개념에근거한군이라는개념과새로운근대국가체제에부합하는새로운방식의군이라는개념이경쟁하면서교차하는시점이기도하였다. III. 프랑스혁명과공화주의적시민의군대 프랑스혁명은근대의정치형태를구체적으로만들어내면서실험했던시간이었다. 프랑스혁명은새로운권력주체로국민 (nation) 을형성시켰고그와동시에그것을구성하는시민 (citoyen) 의문제를제기하였다. 시민권및시민의상 ( 像 ) 을둘러싸고다양한문제들과시각의차가존재하였다. 하지만시민권형성에중요한축으로작용하였던것은재산의문제였다. 혁명직후시민의모습은 소유자로서시민 (citoyen propriétaire) 이라는상 ( 像 ) 으로확립되었다. 소유자로서시민 의상과함께중요시되었던것이시민군 (citoyen soldat) 으로서의상이다. 국민방위군 은 1789년 7월 13 일국왕의허가를받고국민의회의요구에의해질서유지를위한목적으로창설되었다. 하지만 국민방위군 은행동하는국민주권으로서, 국왕의절대주의에대항하여새로운힘을현시하였다. 창설다음날바스티유의점령은바로이러한상징적중요성을보이는것이었다. 1790년 12월국민방위군과관련한법령은 투표권을가진적극적시민에한하여구성원이될수있다 고명시하고있었다. 그것은투표권 (droit de vote) 과방위권 (droit de défense) 이동일한형태의사회적함의를나타내는것을의 - 217 -

미하며, 무엇보다도그것의기저에는재산이결정적이었음을의미하는것이었다. 이후혁명의진행과정에서국민군은지속적으로인민의편에가담하면서혁명의성공에결정적인영향을미쳤다. 순수하게부르조아적전망을지녔던국민군이었지만, 인민들의봉기에참여하면서일정한자율권을행사하였고, 그러한과정에서혁명에적극적으로가담하였다. 또한 1789년 8월 4일밤이른바봉건적권리에대한폐지가선언되면서동시에국민군내에서도장교선출에있어서신분차별이철폐되었다. 1792년 4월 20일오스트리아를상대로먼저선전포고가이루어지고혁명전쟁이시작되면서혁명은프랑스만이아닌유럽의문제가되었다. 개전초기이미장교의절반이상이망명하였고, 애국주의적사병혹은민병대와귀족주의적인지휘부와의갈등이있는등군대는혼란상태였고초기의전투에서패배를거듭했다. 하지만초기의이러한패배는오히려시민들의애국주의적열정을불러일으켰다. 3) 7월 11일의회는 조국이위기에처했다 (la patrie en danger) 고선언하였고, 수동적시민역시국민방위군에가입 - 1792년 7월 30일법령에의해 - 할수있게되면서상황은급변하였다. 우선프랑스내부적으로 8월 10일봉기가발생하고공화국의선포와국민공회의소집그리고공포정치로이어진다. 이제국민방위군에가입한모든병사들 - 능동적, 수동적시민을막론하고 - 시민의정치적권리를누릴수있게된다. 조국의방어, 즉모든시민이방위군이되어야한다는것은자신의공동체에속한다는사실즉투표권을행사한다는사실의표현이었다. 이때등장한상뀔로트들은자신들에속한주권을직접적으로행사하기를원하였다. 파리시민들은 시민의어떤특정한계급도조국을수호할배타적권리를독점할수는없다 고선언하였다 (A. Soboul 1984( 上 ): 244에서재인용 ). 애국적시민이된다는것은정치적인권리의행사와동시에군대의의무를통한시민의권리를행사하는것을의미하였다. 적극적시민 과 소극적시민 사이의구분이사라지면서정치적권리에있어서차별이없어지고당연히하층인민들즉상퀼로트들역시국민군에들어올수있게된다. 1793년 8월 23일국민공회는남성, 여성, 노인, 어린이각각의계층이조국에대해해야할임무에대해나열하면서 총동원령 (Levée en masse) 을선포한다. 이제전쟁은국민의전쟁이되었고, 인민의총력전이되었다. 4) 3) 1792 년 4 월 26 일스트라스부르그에서루제드릴르 (Rouget de Lisle) 는국민적이며혁명적인열정을노래한 라인주둔군을위한군가 를작곡하였고, 신성한애국심의대상으로서조국의수호를노래하였다. 이것이국가 ( 國歌 ) 즉라마르세이에즈 (La Marseillaise) 이다. 4) 국민개병군대 popular conscript army 라는새로운형태의군대가국가위임군대를대체했다 (J. Lynn 1996b: 360). 국민개병군대는자국국민들로만병력을충원했고, 이들시민병사는국민과조국을위해헌신한다는신념을갖게되었다. 클라우제비츠는이러한현상을다음과같이묘사한다 : 전혀상상하지못했던전투력이 1793 년에출현했다. 전쟁은돌연히국민적관심사가되었다. 자신을국민으로여기는인구는무려 3 천만명이었다... 프랑스국민이전쟁에참여하게됨에따라정부와군을대신해전체국민의비중이힘의균형을좌우하게되었다. (C. von Clausewitz 1998: 389) 클라우제비츠는애국심이프랑스혁명에의해호리병밖으로불려나온강력한요정이며, 이요정을다시호리병 - 218 -

새로운 군통합법과군편성법 에의해장교와장군들까지도선출되었다. 생-쥐스트 (Saint-Just) 는 군대의특정지휘관을선출하는일은병사들의시민권에속하며, 장군을선출하는일은전체의시민권에속한다. 고선언했다 (A. Soboul 1984( 下 ): 57에서재인용 ). 혁명이급진화되는 1793년이후부터파리시민들은다양한클럽활동을통해직접민주주의를실현하였다. 그와마찬가지로국민군은 병사들의협의회 를만들어유사한경험을하였다 (J. P. Bertaud 1985, 189). 거기에는더이상장교도부사관도병사도없었다. 협의회에서는모두가의견을제시하고토론하는평등한구성원만이존재하였다. 그러한의미에서군대는시민의식의학교로서작동하였다. 이러한군대의기여에대하여생-쥐스트는 우리가승리를얻는것은수와규율만으로되는것이아니라공화주의적정신이군대내에뿌리를내릴때가능합니다. 라고말하면서군대내의애국주의가승리의척도임을강조하였다 (J. P. Bertaud 1985: 199). 당시군대내부에서사용되던암호들을살펴보면흥미롭다. 암호들은고대로마공화국으로부터온것들 덕성, 용기, 승리, 로마, 카토 (Cato), 단일성 (unité), 형제애 (fraternité) 등을비롯하여법률과국민공회에대한복종을의미하는단어등으로이루어졌다. 또한군대내에서다양한연극활동등을통해애국심과공화주의에대한고취가이루어졌다. 또한나라전체의수준에서는자연스럽게시민축제를통하여군대와인민간의연대를강조하였다. 혁명력 2년애국주의적병사의희생을추모하는축제는자코뱅이자신들이지키고자하는원칙의교육목적을위해이루어졌다. 1792 년 4월 15일샤토비유 (Cha teauvieux) 에서이루어진스위스병사들에대한추모축제가그것이다. 프랑스혁명전쟁은프랑스혁명이제기하였던근대적이념들특히자유와평등의문제를유럽각국에전파하는역할을하였다. 또한동시에오히려더욱더중요한의미에서유럽에민족주의시대를열었다. 프랑스의혁명군으로부터공격에대항하여유럽각국은자기나름대로의애국주의적내지는민족주의적동원을이루어냈고, 그것을계기로근대적형태의국민국가형성의길로접어들었다. 5) 프랑스내부에서는혁명과반혁명, 외부적으로는프랑스대부분의유럽다른나라들과대립하면서네이션, 조국, 애국주의등의개념도변화하기시작한다. 하지만이후나폴레옹의전쟁을거치면서이후 19세기의과정은고대이래공화주의 에가둘방법은없다고생각했다. 5) 대표적인예가독일의애국주의혹은민족주의이다. 예나전투에서의패배이후프로이센은굴욕을강요받았고, 그러는가운데서젊은이들은덕성회 (Tugendbunde) 라는反프랑스조직을만들었고, 단순한애국주의를넘어독일민족의대동단결을부르짖는조직들을만들기도하였다. 또한피히테의 독일국민에게고함 은훗날 전쟁론 을쓸클라우제비츠등의젊은장교들에게영향을미쳤다. 프로이센병사들은 국왕 이아니라 조국 을외치게되었다 (G. Fremont-Barnes & T. Fisher 2009: 464-466). - 219 -

적애국주의의문제설정과는단절을이룬다. 1796년보나파르트의이탈리아정책은하나의명백한분기점을이룬다. 개인적야심이정책결정의주된동기로서국민적요구를대신하기에이르렀던것이다 (A. Soboul 1984( 下 ): 168). 이러한변화는그것이군사적승리에뒤따르는위광으로장식되었던만큼더욱위험한것이었다. 애국주의는공화주의적이고휴머니즘적속성을상실했고, 민족주의가나타났다. 이리하여공민정신과혁명적열정은외국에대한경멸감, 군사적영광, 국민적허영심등으로바뀌어갔다. 위대한민족 (Grande Nation) 이라는민족적자만감을불어넣은말은총재정부말기부터유행했다. 시민군은자신의운명을조국 (la Patrie) 과자신을일치시키는전능한지도자의손에맡기게되었다. 1798년 9월 5일의징병에관한주르당법 (loi de Jourdan) 과함께사회의군사화가시작되었다. 주르당법률은강제적인군복무서비스제도를도입하였고, 미혼의 20-25세남성의의무복무를제도화하였다. 군대는서서히국민으로부터분리되기시작하였다. 그리고주르당법률을통한징병제원칙과함께직업적군대즉새로운직업주의가탄생하였다. 나폴레옹군대의징집기한은 6년으로장기복무에따른직업주의가가능하였다. 이제군인들에게서자신과조국혹은국가보다는군대라는조직과의동일시가나타나기시작하였다. 군내부에서의시민교육은더이상진행되지않았다. 이러한변환은징집의방법에있어서도질적인변환을가져왔다. 혁명시기자발적인지원군에크게의존하였다면, 이제나폴레옹은징집을체계적인행정을통해조직적으로이루고자하였다. 이것은근대국가체제에서행정체계의확립과도연관되었다. 나폴레옹은자치적의성격이강한코뮌의지위를약화시키고중앙의행정체계를강화시키기위한수단으로서다시코뮌과도사이에 군혹은구 (arrondissement) 를설치하고 군수나구청장 (sous-préfet) 를두어보다일원적인행정체계를확립하였다. 이러한새로운지방행정체계가등장하는데주요한역할을한것이징병제도였다. 즉보다체계적인징집을위해행정체계를확립하였던것이다 (L. Woloch 1986). 이러한점들을본다면, 근대국가체제의성립에있어서관료제의성립의기반이되는행정체계의성립이국가에의한군사적독점의과정에맞물려있음을알수있다. 징병제가곧인구 (population) 에대한관리와통제의차원에서국민전체에대한전일적인인지의과정과맞물려이루어지고있으며, 동시에그과정은전국토에대한전일적인행정체계의확립과도결합되어있었다. 원칙의측면에서볼때, 이전혁명시기의군대가 덕성의군대 였다면, 나폴레옹의군대는 명예의군대 였다 (J. Lynn 1989). 앞서조국의위기와함께혁명이급진화된시기공화국은시민의덕성을강조하였고, 군대역시덕성스러운시민들의자발적인 - 220 -

지원에의해확대되고힘을가졌다. 하지만그것이사라진상황에서군대를유지하고전쟁을승리로이끌기위한새로운장치가필요하였다. 그래서나폴레옹이새롭게제시한원칙이 명예의군대 였다. 그것은특히병사들에게보상과승진을매개로한사적인이익의자극이었다. 6) 또한능력을발휘한이들에게레종도뇌르 (Légion d'honneur) 라는훈장이주어졌다. 군대는시민권력에대해독립되어갔다. 승리는공화국의승리가아니라자신들의승리였고, 그럴수록보나파트르는더욱부각되었다. 그것은이미 1797년 7월 14일밀라노에서보나파르트를공화국의구원자로묘사하는자발적인행진이이루어지고전쟁영웅으로부각시키면서예고된것이었다. IV. 유럽근대국민국가와군대 명예혁명이후영국은체계적인근대국가의모습을띠기시작하였고, 그것은특히자본주의발전과결합하면서더욱그러하였다. 명예혁명이후보다근본적인 재정혁명 (financial Revolution) 을통해잉글랜드은행을설립하고증권거래소를확립하면서자본주의발전을위한제도적기반을갖추었다. 7) 전쟁및군과관련하여특히영국은산업혁명이후근대국가는이제서서히 영구적인전쟁국가 (permanent war state) 의모습을띠기시작하였다 (M. Mann 1988: 108). 1700년과 1815년의군비지출을비교하면, 물가지수를고려하여 15배 - 물가지수를고려하지않는다면 30배이상 - 증가하였다. 영구적인전쟁국가 란국가의전쟁관련예산이일단증가하고나면전쟁이끝난뒤라도이전수준으로다시떨어지지않는다는것을의미하였다. 이시기국가의재정은대부분에있어서외국과의전쟁에의해지배되었다. 전쟁이직업군인과상비군을증가시켰으며, 이로인해군사비지출은전쟁시에는전비지출로, 이후에는전비에대한빚때문에줄어들지않았다. 사실이러한국가의군사비지출은단순히군사적인이유가아니라그러한군사적모험을필요로했던 18세기이후유럽자본주의의발전과결합되어있다. 즉원료와상품시장을찾으려는유럽자본주의국가들의해양진출과맞물려있다. 해외진출이국가적사업으로체계화되기시작한첫예는근대이후최초의체계적인헤게모니국가를이루었던네덜란드이다 (G. Arrighi 2006). 네덜란드의헤게모니가정점에이른 6) 이시기명예는중세기사에게요구되었던명예와는다른방식으로이해되었다고할수있다. 무엇보다이시기명예는지극히개인적인차원에서의이익의실현이라는맥락으로보아야한다. 7) 영국의명예혁명의진행과성공에작용했던요인들중에는프랑스루이 14 세의정책, 네덜란드오렌지공의선택등의요인들이중요하였다. 영국이명예혁명을거치면서유럽의열강으로진출하기까지유럽열강들의세력관계와전쟁이라는요인은주요하였다. 재정혁명역시전쟁의필요와명예혁명의결과였다 (D. Parker 2009: 154-155). - 221 -

이후하락하기시작한시점은유럽에근대국가체제가성립하기시작한시점과맞물린다. 즉종교전쟁의종결이후베스트팔렌조약이체결된시점은유럽에서새로운헤게모니장악을둘러싸고영국과프랑스가경쟁하는시점이며, 세계적차원에서경쟁이이루어지기시작한시점이다. 따라서국제관계의요인에의한군사력의증대는결정적이다. 즉근대국가의영토적경계가설정되기시작하면서 국민경제 라는경제적경계및군사적경계가동시에형성되기시작한것이다. 물론 19세기자본주의발전을고려한다면, 군사력에기반한국가의공권력의성장이라는측면이존재한다. 즉자본주의의발전에따른노동자운동의성장그리고그에대한국가의개입이라는기능이다. 하지만전반적으로군사력의증대가내적인요인에의해이루어진측면은외부적요인즉외국과의전쟁이라는측면에비교한다면부차적이다 (M. Mann 1988: 110). 그러한의미에서본다면, 군사지상주의 (militarism) 적경향과자본주의와의상관관계가뚜렷하게존재하는것은아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근대국가가기본적으로 16세기말에시작된 군사혁명 (military revolution) 에서출발한다는약간은과장된주장처럼결코무시할수없는부분이다. 산업혁명이가져온효과에따라철도와통신의발달이전쟁방식의변화를가져왔고, 그전개양상을변화시켰기때문이다. 물론나폴레옹의군대가이전과는차별성을갖는다는점에서역사가들이주목하는것처럼 19세기초반에많은변화가있는것은사실이다. 프랑스혁명과이후혁명전쟁은시민전쟁혹은이전의제한전쟁으로부터전면전으로의전환의계기였다. 1792년발미전투가보여주듯이전쟁은국민에대한총동원령과함께시작되었고, 전쟁이전개되면서그것은전면적이고전국민적인것이되었다. 하지만장기적흐름속에서판단한다면, 패러다임의변동이발생한것은오히려 1860년대에있었다고보는것이타당하다. 1860년대의전쟁은분명이전의전쟁과는다른성격을띠었다. 프로이센과오스트리아의전쟁그리고프로이센과프랑스의전쟁이그것들이다. 우선거대한규모의징집을통한군대와산업화를이루기시작하고새롭게국민국가의모습을갖춘나라들간의전쟁이되었으며, 이제총력전 (total warfare) 의시대가열린것이다. 전쟁이사회의중요한업무로서그위치가고양되었고, 사회조직의전반이군사적목적을바탕으로재편되는이른바군사지상주의가등장하였다 ( 박상섭 1996: 231). 프로이센과의전쟁에서패한프랑스역시새로운군사주의적개혁을시도하였다. 프랑스에서는파리코뮌과함께, 국민군에대한두려움으로인해국민군시대의종말을가져왔다. 8) 프레시네 (Freycinet) 와강벳타 (Gambetta) 에의해새로운형태의군대의 8) 나폴레옹시기이후약화된국민방위군은복고왕정시기 1827 년에샤를 10 세에의해해산당하였다. 1830 년 7 월혁명, 1848 년 2 월혁명에다시적극적으로참여하였지만, 1848 년 6 월의노동자봉기때는정규군과함께그들을진압하였다. 제 2 제정시기는다시명목적으로존재하였고, 1870 년 9 월 4 일 - 222 -

모습이만들어진다. 전문화된민간인력 - 의사, 엔지니어등 - 을군에징집하는것이었다. 프랑스는독일군모델을따라 1876년 전쟁학교 (Ecole de guerre)' 를설립하였고, 프레시네가국방장관으로있던시기 (1888-1893) 에참모제도를도입하고군복무기간역시단기로전환하였다 (J. Lynn 1996: 525). 이시기징집의방식도변화를겪었다. 이전에징집의방식이대중의자발성혹은애국주의적감정에기반하여이루어졌다. 그리고징집은평상시에는소극적이다가전시나비상시기에이루어졌다. 하지만이제징집은항상적으로이루어졌으며, 선택적인것이아니라모든국민 - 물론남성시민이지만 - 을포괄하는것으로변화되었다. 따라서군대는일반적으로 2-3년의짧은기간동안전업적인군대가아닌파트타임의예비군개념으로변화되었다 (J. Lynn 1996: 521). 이러한군사적측면의변화가근대국가차원에서고려해보아야할점은더욱더큰것이었다. 프로이센과프랑스의 1870/71년전쟁은프로이센에게는특히의미있는전쟁이었다. 신생제국국민이최초로행한공동의활동이었다. 따라서이전쟁은마치프랑스인들에게나폴레옹 1세의전쟁의했던역할과비교되었다 (O. Dann 1996: 155). 9월 2일나폴레옹 3세의군대가전멸당했던날은프로이센에게는국민축제일 - 세당의날 - 이되었다. 이제프로이센군대는이전쟁을통하여국민적인축성을받게되었으며, 그군대에서복무하는것은이러한제국애국주의 (Reichspatriotismus) 의우선적인확인의장이되었다. 물론총동원을통한총력전이본격화되는것은제1차세계대전이었다. 9) 국민전체가전쟁을위해동원되었고, 국민경제전반이전쟁경제로전환되었다. 국민들을위해전쟁여론의조성즉그것은 애국주의적 동원을위한여론의조성이중요하였다. 당연히 19세기동안형성되었던노동자들의민족주의적감정은극히일부사회주의자들의국제주의적선동에동요되지않았다. 민족주의자들에게군대는자신의조국 (la Patrie) 에대한관념을가장명확하고구체적인표현으로등장한다. 민족주의자들에게조국은 땅과죽은자들 이었다 (M. Winock 1990). 20세기초드레퓌스사건당시극우민족주의자들은비록드레퓌스가진실을말했다하더라도군대라는조직을지키기위해서앞선결정된사실들을번복할수는없다고주장하였다. 무엇보다도조국그리고그구체적인표현으로서군대는불가침의영역이었다. 20세기에이르러군대 공화국의선포와함께다시소집되었다. 이대국민방위군은민중들로부터주로충원되면서시민군으로서성격을명확히하였고, 그것이파리코뮌의동력이되었다 ( 현재열 2000). 9) 19 세기산업화과정을거치면서전세계적으로유럽적인군사모델과국민국가의틀이확산되었다. 이집트나일본은서구적군사모델을그대로모방하기시작하였고 (J. Lynn 1996: 521), 미국은남북전쟁이후부터군사력을키웠으며, 러시아는크리미아전쟁이후국내통합과동시에중앙아시아로서진하기시작하였다 (A. Giddens 1991: 266), 이러한의미에서제 1 차세계대전은전세계를끌어들이는결과를낳았다. - 223 -

는명확히전문화되고전쟁은 산업화 되었다. 더이상용병에의존하지않고대신에전문화된군대제도와장교단의조직화그리고위장전술을전개하기위해서그때까지입었던밝고화려한군복대신에모든계급의병사들에게어두운색깔의군복을입혔으며, 그에따라군대에서예식적인측면은철저하게배제되었다 (A. Giddens 1991: 263). 또한육지, 바다, 하늘에서의군사행동을하나로통합해서전략계획을수립한점등은결국제한전쟁에서전면전쟁으로나아가되었음을의미하였다. 제1차세계대전은제국주의전쟁이면서동시에민족들간의전쟁이었다. V. 한반도의식민지경험과굴곡된네이션의형성 조선에서새로운정치질서의체계로서근대적국가를형성하려는시도는개항과함께시작되었다. 근대적인국민국가의건설은개항과함께서서히중화주의적화이론적국제관에서벗어나만국공법을수용하면서다양한주체들에의해시도되었다. 근대적인국가로의길은조선의마지막왕인고종에의해시도되었다. 1881년친정체제의출범과함께고종은근대국가건설을위한관료체계를형성시키려한다. 1882년의군인들의정변에의한좌절, 1884년급진개화파에의해시도된일본에기댄근대화등을뒤로하면서, 실학이후의동도서기론그리고갑오개혁에서나타난변법론자들을중심으로한갑오개혁과대한제국성립을가져온광무개혁은국왕을중심으로한근대적국가건설의시도였다고볼수있다. 10) 국민국가건설의최초의체계적인시도였던갑오개혁에서주도적인세력은, 일본인고문관들의내정간섭에도불구하고, 조선인개혁관료였다 ( 왕현종 2003: 194). 개혁관료들이구상하였던체제는고종의정치적역할을제한하는 군민공치 의국가체제였고, 그것은장기적으로의회제의도입까지도전망하고있었다. 여기에서 군민공치 는이미박영효, 유길준등에의해영국식입헌군주제형태와유사한정치체제를의미하는것이었다. 하지만이때상정하였던입헌민주주의는 개인의독립 등인민의자율성에대한진지한토론없이 부국강병 의필요에따른것이었으며, 민 은정치적참여는시기상조라고판단되었다 ( 정용화 2004: 6장 ). 사실서구의어떠한정치사적경험에서도근대민주주의의태동기에기존의지배계급에의해인민의적극적인정치참여가용인된경우는없었다. 장기적인전망속에서교육을통한계몽을통해인민의정치적주체로서성장할가능성을인정하였을뿐, 그들의정치적능력은부인되었다. 과거의지배계급그리고새롭게등장한 10) 갑오개혁은개혁관료를중심으로하는 관료내각제 를지향하는근대국가를, 광무개혁은황제권강화를통한근대국가를지향하였다는점에서그주체의상이함에도불구하고근대국가를지향했다고볼수있다 ( 왕현종 2003, 244; 서영희 1997). - 224 -

지배계급의입장에서도 민 혹은인민에게정치적권리의행사를통한권력에의참여를인정한예는찾아볼수없다. 그러기에조선의근대화과정에서신민으로위상설정된다는사실은자연스러운역사적과정이었다. 비록신분제폐지등을통해근대국가의국민으로재편성하려는조치들이취해지지만, 아직까지 민 은 신민 이었지, 시민적주체 로서고려되지않았다. 11) 하지만조선의경우제국주의라는외부적으로강력한변수가존재하고있었다는점을고려해야한다. 12) 근대국가로의전화를시도하던고종이나개화파들에게 민 은항상통치나계몽의대상으로존재하면서주체적역량발휘의길이차단되었다. 이후자생적그리고자주적국민국가형성의길의좌절되고조선이이제일본에의한보호국에이어식민지로전락하게되었다. 이과정에서 민 은지속적으로통치와계몽의대상으로간주되었다. 식민지조선에서문명국으로의길, 국권회복, 독립을위한다양한노력들을주도했던많은지식인들과부르조아들에게 민 은우선동원의대상으로서설정된다 ( 김동택 2004; 박주원 2004) 개화기지식인들에게가장중요한과제는근대적인국민국가를설립하는문제였다. 많은부분한국에서서구의이론이수입되는과정은우선은한국적상황과맥락그리고그필요성으로부터유추될수밖에없다. 한말의지식인들에게가장급하고중요한문제는새로운국민국가의주체로서민족 (nation) 을확립시키는것이었다. 서구에서근대정치의출발점, 즉홉스, 로크의예에서드러나듯이그출발점에는자유로운개인이있었고그로부터개인의자유를보장해줄수있는정치공동체가유추되었다. 하지만조선의경우그순서는반대였다. 서구의정치제도나사회제도를수입하고이식하려는시도들은개인의자유나독립의확정이라는개인주의적자유주의의문제설정이아니라, 근대적국가의성립이우선이었고이후정치적주체로서국민의건설이라는문제설정이이어졌다. 당시의지식인들의문제의식은개항과함께밀려오는서구세력에대항하여가능한빨리서구적제도를도입하고그를통해그들과대등한관계를유지하고나아가그들을능가하는제국주의로발돋음하고자하는것이었다 ( 박노자 2005). 따라서새로운근대적주체로서개인과개인의자유에대한문제설정은이차적이었다. 이것이한국자유주의나아가한국근대정치의원죄가되었다고볼 11) 1894 년신분제가폐지되고반상의구별없는관직등용, 노예제폐지, 인신매매금지, 1896 년 호구조사규칙 을통해근대국가의호구파악방식의도입등이진행된다. 또한근대적교육제도가도입되고국한문혼용이명시된다 ( 왕현종 2003, 289-312). 국문체의도입과함께언어민족주의가개화기의계몽담론속에드러난다. 또한새로운서사양식속에서민족사에대한관심역시증폭된다 ( 권영민 1999; 이승원외 2003). 12) 민주화의변수로서 국제관계 를고려해야한다는뤼시마이어의주장은의미있는지적이다 (D. Rueschemeyer et al. 1997, 123). 하지만서구에서국민국가의형성을통한국제관계의성립시기의국가간의역학과 19 세기말조선이처한국제관계 - 서구가독점자본주의로의전화를통한제국주의적관계를만들어내기시작한시점 - 는분명질적으로상이하다 ( 이혜정 2002). - 225 -

수있다. 따라서현재에이르기까지민족과민족주의에대한 과도한 강조의경향은 지속되고있다. 그러한의미에서한반도에서근대성에대한민족주의의규정력은다 른무엇보다강한것이었다. 13) 유길준, 박영효, 김옥균등의초기개화파의논의에서부터 1905-1910 년사이의자 강운동론, 1910 년대실력양성론과구사상 구관습개혁론, 1920 년대초반의문화운동 론, 1920 년대중반이후 1930 년대초반사이의자치운동으로이어지는민족주의의 논리의저변에깔려있는것은모두 준비론 과 실력양성운동론 이다 ( 윤건차 1987; 박찬승 1992). 즉아직까지조선의인민은주체적능력을갖추지못한계몽의대상에 머물러있다고간주된것이다. 물론독립협회의논의속에서자유민권을주장함으 로써근대적개혁의민중적기반을확대하려는시도나, 안창호등의실력양성론, 인격 수양론등에서개인의독립사상을우선시하는경향이존재하는것이사실이지만, 이 러한논의들역시민족이라는거대주체형성을위해필요한전제조건으로서존재하였 다. 14) 그리고문명화된개인들로구성된민족을통한국가의독립이라는과제가설정 되었다. 서구에서근대국민국가형성과정에서나타난두개의불균등한과정즉, 국가건설과정과국민형성과정이프랑스혁명등과같은특정한계기를통해결합하 면서서로가서로를규정하는관계를설정하였다. 조선의경우국가의건설과정이식 민지화를통해단절되면서, 네이션의형성과정이왜곡되기시작한것이다. 일제시기독립운동을주도한이념들은서구문명론과사회진화론의공유속에서 자연스럽게민족주의를공통의토대로가지고있었다. 15) 많은이데올로기적편차에도 불구하고민족주의는사회주의자나자유주의자들모두에게공유되었다. 16) 이것은또 13) 민족주의와근대성과의관련성에대해서는깊이있는논의와연구가필요하다. 그린필드의경우민족주의를근대성으로규정하기보다는근대성을민족주의가규정하였다고본다 (L. Greenfield 1992: 18). 겔너의경우는민족주의가근대화의과정에어떻게필연적으로작동하였는지를보여준다 (E. Gellner 1983). 그리고많은근대주의적관점역시민족주의와근대성의관계를필연적인것으로보여준다. 물론그차이들은분명하다. 그러한의미에서한반도의역사역시그특수성을보여주는좋은예가될수있다. 14) 한말그리고일제식민지시기조선의부르조아들의허약성속에서부르조아들은독립보다는근대화에우선성을두고있었다. 근대화우선주의는많은부분에서제국주의와동일한논리를전개하도록하였고, 제국주의침략이우리자체의잘못이라는논리로이어졌다 ( 서중석 1995). 15) 개항이후개화파들이그들의급진성여부를떠나공통적으로공유하고있는근거점중의하나가서구의문명론이었다. 서구의문명담론은분명하나의새로운권력관계를형성시키는것이었다. 실학이후동도서기론, 변법론, 그리고애국계몽운동등으로온건개화파그리고개항전부터존재해왔던급진개화파등에의해형성된문명담론은과거주자학을통해이루어진사회질서에대한새로운대안으로서제시된다. 전통적유교는 낡은것이자나쁜것 이었고, 서구문명은 새롭고좋은것 이라는대비를통해조선인들은문명화작업의대상이되었다. 서구문명화로의길만이선택할수있는유일한길로서제시되면서자생적근대화의노력이나 동양적근대 를위한여지는존재하지않았다 ( 길진숙 2004; 히야마히사오 2000). 또한사회진화론역시서구문명론의밑바탕에깔려있었다. 박영효, 윤치호같은개화파자유주의자들은조선의개혁가능성이희박해지자문명화된일본의지배를받는것이낫다고판단하였다 ( 이나미 2001: 75-76). 개화기의자유주의자들이친일적인행위를하고결국일제에의한식민화를받아들이게되는것은서구문명론, 사회진화론등의당연한귀결이었다. 물론그럼에도불구하고신채호와같은항일 ( 抗日 ) 형내셔널리즘은민족주의흐름속에서도구별된다 ( 박찬승 1992: 1 장 ; 쓰키아시다쓰히코 2009). - 226 -

한개화기의연장선상에서도이해될수있다. 일제시기조선에서독립운동을주도했던안창호의경우그의자유주의는민족주의에의해지배된자유주의였다. 17) 도산에게개인개념은철저하게민족에흡입됨으로써개인의자유가실현될수있다고생각하는논리로분석된다. 즉민족의정체성은개인의자유의절대적부분이되고있다 ( 장동진 2005, 50). 18) 일제총독부에의해진행되는근대적인간의형성작업을보자. 일제의작업은식민지통치에적합한인간을만들어내려는작업이었다. 일제에의한식민지화이후국가권력의역할을하는것은식민지총독부였고, 그들에의한자본주의발전과그에적합한식민지인들을만드는작업이진행된다. 일제는식민지통치와함께한반도를일본자본주의에적합한자본주의적길을걷게한다. 그와함께그러한자본주의에적합한인간, 고등교육이아닌초보적인수준의경제적역할을담당한근대적인간을만들어내는것이일본에의해이루어진식민지교육의기본적인방향이다. 이것이주체형성과관련하여이해될수있는 식민지근대 의모습일것이다. 한반도에서근대의모습은주체적인근대의형성을통해이루어진것이아니라일본제국주의에의해방향지워지게된다. 특히 1930년대일본에급속히등장한국가주의는당시조선의지식인들에큰영향을끼쳤다. 1937년중일전쟁이발발하면서일본이파시즘체제에들어서면서식민지조선에대한사상통제, 황민화정책등이본격화되기시작하였다. 1937년 황국신민서사 가제정되었으며, 1938년에는일본어상용과조선어교육폐지조치, 1940년에는창씨개명과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 를제외한모든조선어신문의폐간, 신사참배의강요등이이루어졌다. 1939년친일문인들은조선문인협회를통해친일문학활동을벌였고, 개인주의를비판하면서국가주의, 국민주의를찬양하였다. 이시기이광수는개인이라는완전히독립된개체가없는것처럼완전히보편화된인류도존재하지않는다고주장하고, 우리가현실적으로인식할수있는것은실로민족과국민뿐 이라고보았다 ( 박찬승 2007: 339). 해방과함께네이션에의한민주주의의형성과국가건설의과정의길이열렸다. 제 16) 사회주의문인들역시 민족적공산주의자 로평가될수있으며, 프로문학은잠재적국민문학 으로간주된다 ( 손유경 2012: 64-65). 따라서사회주의와민족주의의배타적대립이라는기존의문학사적구도가허구적임이실제작품분석에서나타나고있다 ( 김성수 2004: 74-78). 17) 물론그역의표현즉자유주의에의해지배된민족주의라는표현도가능하다. 민족주의를 2 차적이데올로기로간주하려는경향의경우오히려자유주의에의해지배된민족주의라는표현이가능하다. 하지만식민지시기의특성상자유주의의실현을위해민족주의를 2 차적으로선택했다기보다는독립이라는민족주의의과제실현을위해자유주의를선택했다고보는것이더타당할수있기때문에 민족주의에의해지배된자유주의 라는표현을사용한다. 18) 반면정 ( 情 ) 적요소에대한강조를통해자아중심적근대적인간관을보였던이광수의경우공적인문제즉국가와민족의문제를부차화하였다. 이광수의문학적기획은 자율적개인만들기 로집약되며, 민족은그러한개인들의집합일뿐이었다 ( 하정일 2009; 한수영 2009). 이광수의자유주의의경우친일적민족개조론으로전환은자연스러운귀결이된다. 오히려이광수그리고자유주의적페미니즘의흐름에있었던나혜석과같은경우가민족문제에대한무관심속에서근대적개인주체에대한관심을기울였고, 그것이서구적인개인주의적자유주의흐름을형성하였다고볼수있다 ( 이상경 1999; 서재원 2005). - 227 -

국주의에대항하는저항적주체와일상의근대적개인이라는분리된과정이민주주의적국가건설의과정속에서결합할가능성이존재하였다. 1945년에서제 1공화국이선언되는 1948년까지 3년동안의시간은한국인들에게는더할나위없는정치의시간이었다. 그것은 수십년간억제뒤를따르는맑은공기 (B. Cumings 1986: 107) 와같은것이었다. 억압받는저항의주체에서민주주의적주체로의전화과정이실험되었다. 전국에걸쳐형성된인민위원회와농민위원회의활동은정치적자유, 무엇보다도그것은근대인스스로가정치적주체로서자신의역할을수행함을의미하는것이었고, 스스로공동체의주인이고자했던경험이었다. 19) 역사가반복되는경우가있듯이아래로부터의정치적실험은다시한번외세의압력에의해제압되었다. 이시기역시 19세기말 20세기초와같이한반도에서의제국주의 ( 혹은외세 ) 의규정력은압도적이다. 비록일제식민지로부터해방되었지만, 냉전질서의과도한무게는한반도내에서반제국주의운동의주체였던민족으로하여금스스로국가의건설과정을주도할수없게만들었다. 해방이후한국전쟁을거치는시기의역사는우선은남한과북한이라는두개로분단된두개의국민국가의형성과정이라는길을걷기시작하는출발점을형성한다. 그것은무엇보다도개항이후근대화의길에접어들면서형성된네이션이스스로하나의국가를형성하기못하고외부세력 냉전시대의개막을통해형성된거대한국제질서의힘 - 에의해두개의분단국가를형성하였다는점이다. 한반도에서두개의국가가성립되는과정에결정적인역할을한것은그간하나의주체로형성된네이션의결정에의한것이아니라외부의힘이었다는점이다. 일본제국주의가패망함으로서근대의길에들어선조선민족이하나의국민국가를형성할수있는기회가주어졌음에도불구하고하나의국민국가로의길에들어서지못한것은개항이후주어졌던기회가일본에의해좌절된것과더불어또하나의기회가무산되었음을의미하는것이다. 분단과함께남한과북한이라는두개의국민국가가성립함으로써한반도의네이션은정치적주체로서자신을구성해나가는과정이단절된다. 그리고남한과북한에서형성된두개의국가는한국전쟁을거치면서결국이데올로기적으로반쪽짜리의국가를형성하게된다. 남한에는 미국식민주주의가부과 된다. 하지만 서구적인민주주의도입의의미는서구역사의민주주의적조건이성숙되지않는상황에서미국적민주주의의부과였다 는의미에서 조숙한민주주의 라는판단하는것은 20세기초반근 19) 이시기가장주목할만한것은건국준비위원회이며, 이후안재홍의신간회계열이탈퇴함으로써범좌파적인성격으로변화해간다. 조선인민공화국으로재편된후각지역에서인민위원회활동들은대중의정치활동이었음에분명하다 (B, Cumings 1986). 이후미군정에의해인공과인민위원회의 진보적대안국가 는 반공국가 로역전된다 ( 정해구 2001: 101-114). - 228 -

대화의초창기에등장했던 준비론 이나 실력양성론 의또다른연장에다름아니다 ( 최장집 1996; 박명림 1996: 116; 박찬표 1997). 오히려문제가되는것은그간에형성된저항적주체로서네이션이스스로자신이선택한정치사회적제도를통해민주주의를형성시키는것이차단되면서외부에의해민주주의가부과되었다는사실이다. 민주주의의형성과정과그것의공고화과정은정치적주체로서설정된 국민 이주체로서의권리를실질적으로행사하고민주적국가권력을성립시켜나가는과정이다. 하지만동시에국가에의해민주적인시민을만들어가는과정이기도하다. 1948년성립된남한의제1공화국이진정으로민주적이고공화적인국가였다면, 아직미성숙한국민을민주적시민으로만들어가는노력이이루어졌을것이다. 하지만결코민주적이지도공화주의적이지도못했던제1공화국의국가권력은민주적시민의양성보다는지배권력의통치대상을만드는데집중하였다. 그리고경찰력과앞세운정권은민주주의적운동에대한억압의역사를만들었다. 냉전질서의압도적인규정력은남한에서그에복무하는이승만정권과식민지역사가제대로청산되지못한가운데서그것의복원과정을거치면서국가권력은내부국민으로부터는어떠한정당성도부여받지못하였다. 하지만그러한국가는지속적으로국민을동원함으로써권력의정당성을확보하기위해노력하였다. 한반도에비록국민국가가형식상성립되었다하더라도그것은국민에의한국가라기보다는국가에의해동원, 통치되는국민이었다는의미에서국가에의한네이션의독점이었다. 제1 공화국의성립은하나의악순환구조가성립하였음을의미하였다. 민주주의적정당성을확보하지못한국가권력은자신의권력의정당성을확보하기위한노력을국민에게서찾은것이아니라외부에서찾게됨으로써국민과국가간의관계가민주주의적관계를통해성립하는것이아니라서로가서로를배척하는관계를성립시킨것이다. 하지만당시의국가권력이외부의냉전질서를통해보장받음으로써끊임없이네이션을억압하는관계를성립시키게된다. VI. 한국전쟁과국가건설그리고국민형성 1. 반공국가그리고 반공적 국민 6.25 전쟁은한반도에서두개의국민국가형성의분명한계기이다. 국가형성의차 원에서도 전쟁이국가를만든다 는틸리의테제가확인될수있으며, 전쟁을계기로 남한에서는 반공적국민 이, 북한에서는 반미적인민 이형성되었다. 20) 명백히남과 - 229 -

북은두개의서로다른정치, 경제적체제를확립하면서독자적인국민국가건설의길에들어선것이다. 반제식민지해방운동을전개하는과정속에서분리되어있었던민족주의세력과사회주의세력이세계적차원에서냉전질서와결합하면서남북의분단이체제간의분리로고착화되었고, 전쟁을그러한분단을고착화시켰던것이다. 남과북의독자적인국민국가건설의길은서로를경쟁적으로의식하면서동시에서로의존재로부터정당성을이끌어내는방식으로적대적으로진행되었다. 제1공화국에서진행된국민형성의과정은기본적으로 반공적국민 의형성이었다. 반공적 국민의형성과정이의미하는것은국민이라는하나의단일한실체혹은단일한정체성을형성시키기위해특정한세력에대한타자화과정을만들어냈다는것이다. 그타자란바로 공산주의자 혹은 좌익 이라불리는세력이었다. 1948년정부수립이후이승만정권은 친일파정국 과 통일정국 을 반공정국 으로전환시키면서정치권력을장악해나가기시작하였다. 이러한전환의계기는우선은 여순사건 을통해형성되어 1949년 극우반공세력의 6월공세, 계엄법제정을거쳐강화되는 국가보안법체제 의성립이다 ( 강성현 2007: 128). 근대국가의특성으로서법치주의의원칙곧법을통한지배의정당화이다. 근대국가는폭력을독점하면서또한정당성을획득하는과정을통해법을통한폭력의행사가이루어진다. 국가보안법이전에 1948년 9월 20일처음으로발의되었던 내란행위특별조치법안 이법제정과정에서수정되어 12월 1일법률제10호로공포되어시행되었다. 1조에서는 국헌을위배하여정부를참칭하거나그에부수하여국가를변란할목적으로결사또는집단을구성한자 에대해처벌한다고규정하면서, 그러한 결사또는집단 은 8.15해방직후소위좌익단체인남조선노동당, 조선노동조합평의회, 민주주의민족전선,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조선교육자협회, 조선민주학생연맹, 전국농민연맹, 남조선민주여성동맹,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조선협동조합중앙연맹, 반일운동자구원회등의결사기타상기결사에가입한가부문의산하단체또는동결사급단체의재건준비와지도하기위한집단 이라고명기하였다. 또한 4조는 본법의죄를범하거나그정을알고서병기, 금품을공급, 약속, 기타의방법으로방조한자는 7년이하의징역에처한다 고적시하면서그위반자의대상을무제한으로확대하였다. 이러한광범위한자의성속에서 1949년 1년동안에 118,621명이검거, 투옥되었고 9-10월사이에 132개정당과사회단체가해산되었다 ( 강성현 2012). 남한내에존재하는공산주의자, 좌익에대한배제의과정은기본적으로한반도의분단으로인한남북의대립, 곧체제의대립에기인한것이다. 공산주의체제로서북 20) 북한에서국민국가건설의과정은이글의범위를벗어난다. 다만 반미적인민 의형성에대해서는한성훈 (2012), 그리고북한에서국가건설의과정은서동만 (2005) 참조. - 230 -

한의존재는대립항으로서남한에존재하는공산주의자가결국체제에반대하는세력임을의미하는것이었고, 그들의제거는남한에서국가건설과정에서불가피한것으로인식되었다. 법률적장치를통한타자로서공산주의자의제거는해방이후국가건설과정에서발생한내란속에서봉기에대한학살을수반하였다. 1946년 10월인민항쟁, 1948년제주 4.3항쟁그리고 1948년 10월여순봉기는미군정기와정부수립과정에서발생한내란이었고그과정에서공산주의자로분류된자들의제거곧학살을수반하였다. 좌우가공존할수있는가능성은전쟁과함께완전히사라졌지만, 이미그에앞서서발생하였던 4.3제주항쟁그리고여순사건은그것의전조였고 반공적국민 이형성되기시작하였다. 전쟁을거치면서남한지역에서도국가건설의과정그리고국민건설의과정이완성된다. 폭력수단의독점이라는측면에서볼때, 해방이후오랜기간동안지하인민위원회활동, 좌익민병대의존재, 군부내부의반란및각지역에서의좌익게릴라활동등이존재하였지만전쟁을거치면서군대와경찰이라는두가지조직으로폭력적수단은독점되어갔다. 반공적 국민의형성과국가건설의과정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는중요한장치이자이데올로기였다. 여순사건당시계엄법, 징발법, 군기보호법등은군대의권한을강화하는법률들이었고, 전시비상사태 라는상황을내세워군이민간사회에대한통제를강화하려고시도한것이었다 ( 김득중 2009: 456-457). 여순사건당시계엄은즉결처분-군법회의로이어졌고, 군은사법권을행사하며국민의생명을좌지우지하였다. 계엄은헌법에규정된국민의기본권을일정정도제한한다고말해지지만, 사실상헌법에서규정된인민주권은어느새실종되며현실에서주권은통치자에게있다는것을분명히알려준다 ( 김득중 2009: 503: C. Schmitt 2010). 여순사건을계기로국가보안법이한달만에국회에급박하게제정되었다. 좌익세력을소탕하기위한국가보안법은 변란행위 가아니라 목적 을가지고있다는것하나만으로처벌될수있다는점을조문화하였다. 국가보안법은 국가를변란할목적 을갖는사람들을광범위하게처벌할수있도록했다는점에서계엄의기본정신을이어받은 평상시의계엄법 이라고할만한것이었다 ( 김득중 2009: 530). 여순사건은체제생존을위한싸움에서내부의적을상정하는계기였다. 이사건을계기로좌익세력에게는분란을일으키는혼란유발세력이자양민을마구학살하는도살자, 악마의이미지가씌어졌다. 이제공산주의자를지칭할때는 빨갱이 이라는용어가널리사용되었다. 빨갱이 란말은짐승만도못한존재, 도덕적으로파탄난비인간적존재, 국민과민족을배신한존재를천하게지칭하게된다 ( 김득중 2009: 560). 비상상황, 군으로대표되는국가권력이사람의생명을좌지우지판단할수있는상황에서주민들은빨갱이가되지않기위해철저하게반공주의자 - 231 -

가되어야했다. 결국빨갱이 = 비국민은죽어도좋은존재였고, 죽지않기위해국민이된다는것은곧반공주의자가된다는것을의미하였다. 여순사건직후 1948년 12월에국가보안법이제정되었고, 군에대한숙청, 공무원숙청, 학생에대한군사훈련, 청년단의통합과정비, 국민반등각종주민감시제도의실시등사회적저항을원천적으로저지하기위한내전의제도화가시작되었다. 한국전쟁발발직후전국에서체계적으로진행된보도연맹학살사건은예외상태적제도에의해 잠재적적 혹은 군사적적 혹은 정치범 으로여겨진사람들이일순간 실질적적 혹은 군사적적 이될수도있다는논리만으로군정보기관과헌병, 경찰등에의해체계적으로학살된사건이었다 ( 김학재 2010: 108). 전쟁기간동안이승만은경찰과군대그리고민간우익준군사단체에게내부의적을제거하라는특권을주었다 ( 문상석 2010: 97). 내부의적은공산당및좌익뿐만아니라이승만에게협력하지않는이들이었다. 한국전쟁초기한국군의급작스런패배로인한후퇴과정에서보도연맹원을처형한것을시작해서서울을수복하고휴전선을넘어북진할때도부역자에대한처형을단행하였다 ( 박명림 1999; 김기진 2006; 김동춘 2006a). 보도연맹원은국민 / 비국민의경계선에매달려있는존재였다 ( 김득중 2009: 482). 국가보안법을통해보도연맹원들을경계선상에두었다면, 전쟁은그들에대한선택을강요하는사건이었다. 즉국민으로의포섭을포기하고보도연맹원을국민으로부터완전히배제하는방향으로나아갔던것이고, 그것은곧그들에대한학살이었다. 북한지역에서는북진이진행된후그지역을점령한서북청년단등우익단체의주도아래학살이진행되기도하였다 ( 한성훈 2012). 전쟁을겪으면서국민들은살아남기위해 반공 을내면화하였다. 국가는국민내부의적을제거함으로써단일한 반공적 국민을만들고자하였다. 한반도에서국민국가형성에서세계사적인냉전과그것의한반도에서의구체화는이데올로기의극단적대립그리고극단적인현실을만들어냈다. 남한지역에서반공주의와반공적국민만들기는북한지역과대립하는체제의형성이라는목적속에서내부적단일성을만들기위한방책이었다. 그과정에서근대국가에서주요한폭력의독점기구인군의조직화는국민만들기의주요한축으로작용하였다. 우선새로운국가건설과정에서징병제는국민만들기과정에서중요한축을형성하였다. 21) 정부수립 21) 일제강점기 1931 년만주사변의발생과함께일본은식민지조선인을전쟁주체로활용할수방안을고민하기시작하였다. 1938 년 2 월 22 일칙멸제 95 호 < 육군특별지원병령 > 을공포하고 1938 년 4 월 3 일부터 육군특별지원병제도 를시행하였다. 식민당국은지원병제를도입함과동시에 조선민족의완전한황국신민화 를표방하면서내선일체정책을적극적으로추진하였다. 1942 년태평양전쟁이본격화되면서각료회의를통해조선에 1944 년부터징집을실행할것을결정하였고, 1942 년 10 월 15 일주민등록제도의전신에해당하는 조선기류령 이라는거주등록제도를실시하고이를바탕으로징병적령자를확정하는기초를삼았다. 일본이총력전체제하에서피식민자의언어와신체를규율하여 제국의병사 를만들어내려던과정은식민지적주체화와종속화를통한제국 - 식민지체제의새로운국민을형성하기위한시도였다 ( 강유인화 2016). - 232 -

이후미군이철수하기시작할무렵국방부는 1949 년 8 월 6 일최초병역법을제정하였 다. 하지만인구에대한파악이이루어지지않은상황인지라 1949 년 9 월호구조사규 정을제정하고 12 월 19 일인구동태조사령을제정하였다. 당시예비병력을확보하기 위해호국군설치를위한긴급조치로병역임시조치령 ( 대통령령제 53 호 1949. 1. 20) 을공포, 시행하였다 ( 김동춘 2006b: 181). 전쟁발발이후부족한병력충원을위해 한국정부는 1950 년 7 월에서야병역법에의한제 2 국민병소집을결정하였지만, 혼란 스러운상황에서제대로집행되지못하고가두소집이나강제모병의형태를띠었다. 이후 1951 년 5 월 25 일병역법이개정 ( 법률제 203 호 ) 되고, 1952 년 9 월 5 일부터제 2 국 민병소집을통해병력을충원하면서전쟁을수행하였다. 이즈음 국민방위군사 건 22) 과같은비참한사건도있었지만, 국가는징집을통해시민권을부여하는측면 도있었다. 징병제실시후다수의농민들은배고픔을해결하기위해군대를택했고, 일부는좌익혐의를벗어버리고 국민 의자격을얻기위해입대하기도하였다 ( 김동춘 2006b: 183). 국가건설, 즉해방이후새로운국가의국가기구의형성과정은식민지적특수성을 그대로반영하였다. 이미남한사회의경우일제식민지의통치구조가많은부분고 스란히유증되어 과대성장 된국가기구를형성하고있었다. 즉조선총독부의행정조 직이미군정에의해큰변동없이 당시일반행정공무원의 78.6% 가일제관료출신 이어졌고, 제 1 공화국최초의정부조직법은외무부와국방부를전면에등장시킨것을 제외하고는대체로미군정시대의기구를그대로 따온 것에불과하였다 ( 서주석 2008: 85-95). 이러한상황에서내전과전쟁은분명국가건설의확고한계기가되었 다. 적을규정하고적을섬멸하기위해폭력은집중화되고독점되어야했고, 그러한 비상 상황은국가기구의특수성을만들어냈다. 여순사건은국가의가장중요한물리 력이군대라는사실을확인시켜준계기였다 ( 김득중 2009: 461). 여순사건의발발원인 이기도하였던군경마찰은군대가숙군을통해반공군대로거듭나면서군의압도적 인우위로정리되었다. 23) 군대내에존재하는좌파세력을제거하고단일한군대조직 을확립하는것은중요한과제였다. 숙군 ( 肅軍 ) 의계기가된것은 1948 년 6 월제주 도 9 연대문상길중위가박진경연대장을사살한사건이었다. 박진경암살을계기로 시작된숙군은군부내좌파를대상으로하면서단독정부, 단독선거반대세력을겨냥 한폭넒은것이었다 ( 김득중 2009: 442). 그리고여순사건은군부내좌익세력이존 재함을공개적으로드러낸계기로숙군이본격화되었다. 군대라는폭력기구가국가에 22) 1950 년 12 월정부는 국민방위군설치법 을제정하고남성 680,350 명을징집하였다지만, 징집병들이진주까지이동하는과정에서상당수가아사, 동사, 행방불명되었고, 반대로고급장교들은거액의국고과물자를착복하였다. 이에 1951 년 4 월 30 일국민방위군은해체되었다. 23) 군대와함께대표적인근대국가의억압기구인경찰의경우, 전쟁초기늘어나다가경찰의업무가후방작전에국한되고군대의규모가늘어나면서전쟁중반이후정체된다 ( 서주석 2008: 237). - 233 -

독점화되는과정은곧통일적인군대로거듭나게되는것이었다. 한국전쟁은군대가 명실상부한국가기구로등장하는계기가된다. 한국군은미군정기에탄생했지만공식적으로정부수립과함께 10 여만명규모의병 력으로구성되어있었다. 한국군출범의모태로미국으로부터무기및장비조달에서 부터군사훈련에이르기까지미국에게전적으로의존할수밖에없는상황이었고, 특 히 1950 년 7 월 14 일부유엔군사령관에게로한국군의작전지휘권이양조치는한국군 증가의배경이자제약요소였다 ( 박정이 2013, 229-230). 24) 본격적인한국군의증강은 1952 년부터시작되었는데, 5 월 15 일최종적으로 20 개사단으로증평안이인가되고 육군의병력상한선이 65 만 5 천명으로늘어났다 ( 서주석 2008, 187). 전쟁을거치면서 한국군은병력규모면에서 6 배이상증가하였으며, 1950 년이후 1953 년까지군사비 의세출비율은 50 년 70.8%, 51 년 63.1%, 52 년 50.4%, 53 년 63.1% 였다 ( 장상환 1999). 군대의급속한확장과정비의과정을거치면서그세력이확장된것은분명하 였다. 하지만유엔군의주둔과유엔군에의한한국군의통수권유지는대한민국이국 민국가로서폭력의독점을상실했다고볼수있음에도불구하고국가폭력수단의독 점을위해필요한자원을외부로부터더많이얻어낼수있기때문에폭력수단의확 대재생산을가져왔고이를기반으로국가내부의사회에대한지배권을더강하게유 지할수있었다는점에서역설적이다 ( 문상석 2010: 102). 이러한이유에서한국에서 군의비대한성장을가져왔고, 그것이한국민주주의성장을더디게한것은분명하 다. 그리고경제적측면, 즉국민국가의주요한축을이루는재정의확보와그것을 위한재정기구의측면에서보았을때제 1 공화국은아직미진한부분이많았다. 무엇 보다도정부수립후 1 억달러, 전쟁기간동안에 5 억달러를원조받았던한국은 1950 년 대나머지기간동안 16 억달러가넘는규모의원조를받는다 ( 서주석 2008: 277). 이것 은정부세입의 50% 이상을차지하는것으로독립된국민국가라는측면에서는불완 전한요소를갖는것이었다. 외국원조에대한과다한의존속에서군사적으로는대 치상황이가져오는비대는기형적인국가의모습을보이는것이었다. 이러한기형적 인국가형태속에서냉전의최전선에존재했던한반도는남북한모두오랜기간민주 주의의부재와독재라는경험을해야했던것이다. 6.25 전쟁을거치면서국가권력에의한폭력의독점과그것의행사를통해 반공적 국민만들기가이루어졌고, 전쟁이종결된후국가권력은다양한사회적망을통한 감 시 와 동원 체제의확립을통해국민만들기를지속하였다. 해방이후 국민정신의함 24) 근대국민국가의형성이라는관점에서볼때 1950 년 7 월 14 일체결된대전협정은한국군대의통수권을대통령이포기하고외국의군대에넘겼다는것은극히불합리한사례이다. 하지만이협정으로대한민국은몇가지이점을가지게되는데, 무엇보다도전비문제에서모든군사장비와전투비용을외국특히미국으로부터동원하였다. 한국전쟁당시전비는당시 540 억달러, 현재달러가치로환산하면 4540 억달러였다 ( 문상석 2010: 100). - 234 -

양과국민재건훈련, 국민경제의재건설 을목표로삼는 국민생활재건운동 이 1947 년 11월이추진되고, 이후 신생활운동, 국산품애용운동, 등등국민의의식주등일상의삶에관련한다양한국민운동이등장하였다. 하지만본격적으로 반공적 국민만들기를위한체계적인, 즉전국의행정조직과대중조직 애국반, 국민반그리고국민회등으로이름으로변신하면서확장되는조직들 에기반한 국민운동 은여순사건이후부터이다. 가장억압적인형태의감시방식은 유숙계 였다. 1949년 7월부터실시된유숙계제도는전주민을대상으로한감시체제의정점을보여준다. 유숙계란유동인구파악을위해외부사람이거주자의집에묵으면반원 ( 세대주 ) 이소속반장에게신고하고반장은유숙인의본적, 현주소, 여행목적, 세대주와의관계등을정해진양식에따라적어파출소에신고하도록한제도를말한다. 유숙계의내용은단순히유동인구를파악하려는것뿐이아니라, 매 10호마다한반을조직하여상호연대책임아래반국가적불순사상의침투를미연에방지 하려는것으로연대책임을통한상호감시와밀고를조장하려는것이었다 ( 김학재 2007: 307). 국가가국민을인정하는또다른중요한방식중의하나는그 / 그녀를주민으로등록하고등록증을발급해주는방식이었다. 전세계에서유일하게존재한다고하는주민등록제도주민등록증은일제강점기 1942년조선기류령에서출발하였고, 1946년 9 월미군정에의해북한의주민증명서제도인공민증에대응하기위해만들어진등록표제도에연원하였다. 남과북은서로의주민정체성을부여하면서합법적인주민을증명하려고하였다. 등록표는모든거주자에게발급되었지만, 1949년빨치산토벌지역에서는새로운주민증, 양민증혹은국민증이발급되었다 ( 김영미 2007: 296). 이것은 공비토벌 과 비민 ( 匪民 ) 분리 라는군사적목적을위해사용되었다. 즉신분증은선량한주민, 즉양민임을입증하는증명서였으며, 주민에대한사상검열을통해 반국가적사상을가진자 는발급대상에서제외하도록하였다. 이러한양민증은한국전쟁과함께전국적으로확대시행되었다. 전시시민증은인민군치하에놓인서울에서피난하지못하고남아있던대다수주민들을대상으로부역혐의자를색출하는작업과결부되어있었다. 전쟁을거치면서국민들은자신이결백하다는것을사상적으로실질적으로증명해야했고반공이라는가치를끊임없이내면화하면서생존해야했다. 전쟁이끝난후에도시, 도민증제도는체계적으로운용되었고, 5.16쿠테타 1년후인 1962년 5월 10일자로주민등록법이공포되었다. 그리고 1968년 1월 21일청와대기습사건과 1월 23일푸에블루호사건을계기로 2월 15일내무부는시도민증제도를폐지하고주민등록법개정법률안을발표하였다. 국민들에게평생불변의일련번호를주어번호로개개인을파악하도록하는주민번호제도와휴대의의무화를내용으로하는것이었다. 이미주민등록증은일상화되어있다. 그것없이내가국민임을증명할방 - 235 -

법이없는듯말이다. 2. 개발국가그리고반공과경제개발의주체로서국민 4.19는국민을주권을찾고자하는민주주의복원의시도였지만그것이가져온혼란은 5.16쿠테타의명분을주었다. 한국전쟁을겪은후급성장한군은제3세계의많은나라들이그러하듯정치적으로중요한행위자였고또다른한편으로통치엘리트의역할을하고있었다. 25) 이러한내부적조건과외부적으로사회적혼란은쿠테타가공공연한비밀속에서이루어지도록만들었고일정한사회적공유점들도존재하였다. 사실쿠테타직후 사상계 의 < 권두언 > 에장준하는 4.19혁명이입헌정치의자유를쟁취하기위한민주주의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부패와무능과무질서와공산주의의책동을타파하고국가의진로를바로잡으려는민족주의적군사혁명이다 라고평가하면서 5.16 쿠테타를받아들이고있다 ( 장규식 2014: 305-306에서재인용 ). 하지만 6.3사태즉한일협정을둘러싸고박정희정권과자유주의세력은대립하게되고이후저항적자유주의세력을형성시킨다. 하지만 < 사상계 > 지식인들로대표되는저항적자유주의세력의반공주의적민주주의에대한관념이나경제적민족주의에기반한민족경제론등에있어서박정희정권과의일정한공유지점이존재하였다 ( 장규식 2014; 김보현 2003). 그러한공유점들은식민지경험으로부터경제적민족주의를통한경제적부흥의필요성, 민족에대한우월성, 그리고전쟁을겪은후공유된반공주의등의결과라고할수있다. 5.16쿠테타를통한박정희정권의임무는근대화라는경제개발의과제였고, 그과제를위해민주주의를유보하고국민을총동원하는체제를만들었다. 박정희정권은효율적인행정기구재편을통해자신의정당성을확보할경제발전에박차를가하고자하였다. 대표적으로경제기획원을설치하여국민경제의효율적운영을위한종합경제계획을추진하였다. 26) 행정기구의재편속에서박정희정부는직업공무원제의도입을추진하여국가공무원제도를 1963년에도입하였다 ( 문상석 2014: 167). 하지만정부기구의재편과더불어박정희정부는지방자치제도를폐지하면서군을지방행정의기초 25) 미국은 1954 년 11 월 17 일체결된한미상호방위조약에의거하여대한군사원조를실시하였고그에따라주로위관급장교들을중심으로한군인들이미국에유학보내졌으며, 도미유학생들을통하여짧은기간미국의군사제도를한국군에이식시켰다. 1960 년까지만여명이넘는장교들이미국유학을하였고, 그것은거의한국군장교의 10% 에해당하는숫자이다. 한국군은 1950 년에다른어느사회집단에비해선진문물을흡수한가장근대화된집단이었다 ( 도진순, 노영기 2004: 65-66). 26) 한국전쟁이끝나고 1955 년 2 월 7 일이승만정권은정부조직법의대대적인개정을통해중앙행정조직을개편하였다. 특히부흥부를설치하여경제기획및조정의업무를맡았고, 부흥부장관이주재흐는부흥위원회, 즉경제장관회의는제 1 공화말기까지경제정책수립의중요한역할을수행하였다 ( 서주석 2008: 135-136). - 236 -

단위로재편하면서중앙집권적행정제도를만들어갔다. 그와함께권력의강화장치로서중앙정보부를창설하여국내외정보수집및수사등막강한권력조직을만들어냈다. 경제개발이라는과제를위한국가기구를정비하고그것을통해국민을총동원했던박정희정권의사전에민주주의라는단어는존재하지않았다 ( 전인권 2006). 민족적 민주주의혹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이름으로민주주의는유예되었고, 경제발전이라는과제를위해그리고 1970년대들어서는자주국방이라는명분의안보와반공을위해국민들은동원되었다. 하지만동시에이러한과정은남한에서국민국가가서서히정착되어가는과정이기도하였다. 동원된국민은서서히민주주의적국민으로성장해갔고, 국가는경제발전과근대화속에서그틀을갖추어갔기때문이다. 박정희정권의경우개발독재라는명칭이말해주듯이경제이데올로기를통해국민을동원했던체제이다. 또한북한의안보위협에대응하여 국민총화론, 총화단결론 을내세웠고, 민족중흥, 조국근대화, 민족적민주주의 등을내세우면서 경제발전 을중심에두는방식으로본격적인민족주의적국민동원을수행하였다. 경제발전을최우선에두면서다른부문즉정치적민주주의의유예의필요성을역설하였다 : 국민대중의생활조건을개선하려는시도와노력이효과를얻기위해서는말할것도없이대개비민주적인비상수단을쓰지않으면아니되기때문에정부가서구에서말하는민중의정부가되기에는거의불가능에가깝다 ( 박정희 1962: 226). 박정희는 민족제일주의 와더불어 경제우선주의 를내세웠다 ( 박정희 1963: 255). 민족제일주의는개인과전체의이익, 즉국가의이익이상반될때 자기를통제하고억제하면서전체와개인의합치점을발견하는것이소위 양식 이요, 이것을민족적견지에서본다면 민족적양심 이라할수있다 고말하는것처럼집단, 전체의우선성그리고집단주의적그리고국가주의적사고를의미하는것이라고할수있다 ( 박정희 1962: 29). 이러한원칙들은경제발전을위한장치라는측면에서경제우선주의의부수적인원칙들이라할것이다. 박정희정권의주요한담론은경제적민족주의의담론이었지만, 그기저에는동시에반공적민족주의담론이작동하고있었다. 27) 따라서두가지축, 반공과경제개발이라는축으로구성된권력의장치를포착할수있다. 예를베트남전쟁에의파병을둘러싼담론은반공주의적담론과경제발전의담론이교차하는좋은예이다. 28) 베트 27) 전재호는박정희시대의담론분석을통해박정희정권이 일면국방, 일면건설 을주장했지만, 국방보다는경제발전의담론을더욱강조했다고보고있지만 ( 전재호 1997: 84-85), 사실그러한비중의차이에대한논의는무의미하다. 결국민족주의적통치성속에서 반공 과 경제발전 이라는두축이작동하고있었다. 28) 가족계획사업역시반공주의와경제적민족주의의연결고리가존재하였다. 인구증가를경제개발의저해요인으로규정하고가족계획사업을경제개발 5 개년계획의일환으로포함시킨것은물론, 적정한인구수준을통해생활수준을향상함으로써북한사회에대한우월성을보여주어야한다는논리가작동하였다 ( 김혜경 2015). - 237 -

남전쟁은해방이후그리고한국전쟁을거치면서강화된국민동원특히반공적국민 의호명이지속되고강화되는계기를만들었다. 한국전쟁을거치면서지주계급의와 해, 반면에아직미진한자본주의경제의발달속에서자본가및노동자계급의미발 달, 전쟁을통해과대성장한군부와국가등은결국국가에의한위로부터의동원을 손쉽게하였다. 베트남전쟁은세계적차원의냉전속에서한국전쟁의경험을재생시 키면서반공이데올로기를강화시키는기제였다. 경제적으로는한국전쟁을통한일본 의부흥을예로들면서베트남전쟁은당시한국의경제발전과맞물려경제적부흥의 기회로서활용되었다. 또한이러한과정에서민족주의는역시중요한이데올로기이자 담론으로활용된다. 박정희는파병을통해한국은 우리자신과전자유세계의안전 을보장하는실로역사적인사명을다하고있는 ( 대통령비서실 1973: 556) 국가가되 었고, 과거남의도움만받아왔던우리의역사는남에게도움을주는새시대에로 전환 (479) 하여그야말로 과거의인종과굴욕의역사에서탈피, 어엿한주권성년국가 로서발전 ( 공보부 1966: 78) 했다고주장한다 ( 윤충로 2012: 290). 29) 1960 년대후반부터시작되어 1970 년대본격적으로등장한자주국방과중화학공업화 정책그리고그것들을뒷받침하는유신은박정희체제를유지시키던반공주의와경제 적민족주의결합의극단적결정체였다. 30) 그것은반공주의와경제적민족주의의결 합이라는노선의연장선에놓여있으며, 1960 년대말의대외적, 대내적여건의변화 그리고박정희의개인적성향과욕심등의결합이낳은산물이라고할수있다. 1968 년 1.21 사태와푸에블로호납치사건등에따른안보위협과미국의대처방식에따른 불안감, 미국의닉슨독트린과미중화해, 그리고미 7 사단의철수등의사건은박정희 로하여금 자주국방 의필요성을제기하였다. 박정희는 자주만이살길이다 라고외 쳤고, 자주국방을위한작업에착수하였다. 1971 년 3 월 27 일 6 만 2 천명의주한미군 병력중 3 분의 1 이완전히철수한날박정희정부는박정희정부는 5 개년군현대화 계획 (1971-1976) 을발표하고미국정부에대해한국안보에대한의무를완수하라고 공개적으로촉구하는특별담화문을발표하였다. 그리고단계적으로자주국방을위한 조치들을실행해나갔다. 이러한자주국방의길은대규모방위산업의건설과그를위 한중화학공업화와맞물려돌아갔다. 박정희는 자주만이살길이다 라는구호를외쳤 고, 그것은 1960 년대경제적민족주의의연장선상에있었음을말하는것이었다. 이제 자주국방과그를위한중화학공업화는민족주의적총동원체제로한국사회를이끌어 가는통로였다. 29) 베트남파병에대해국내의반대는미약하였다. 박정희는자신의측근인차지철을동원하여파병반대여론을만들어미국과의협상카드로활용하고자할정도였다 ( 임대식 2003: 327). 30) 박정희, 오원철, 김정렴의 3 두체제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는정치적간섭과반대를배제하는극단적인국가주의적행태였고, 하면된다 는집단적민족주의와미국으로부터의불간섭고수라는반미감정및반공주의등이결합하였다 ( 김형아 2005: 291-296). - 238 -

하지만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 선언과함께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 을통과시켰다. 이법은대통령의긴급명령에대해서는긴급명령사후승인권으로, 계엄에대해서는계엄해제요구권으로최소하나마견제할수있는의회의견제권한을없애버렸고, 헌법상국민의기본권도심각한수준으로제한한위헌적법률이었다 ( 강성현 2014: 171). 그리고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특별선언, 즉 10월유신 선언을통해국회가해산되고정당및정치활동은중단되었으며, 국무회의는비상국무회의로전환되었다. 항시적인비상사태를선언함으로써 주권적독재 가시작되었다. 유신헌법 53조에따른긴급조치권은국민의자유와권리를잠정적으로정지할수있었으며, 사법적심사의대상이되지않는것이었다. 1974년 1월 8일긴급조치 1호는유신헌법을비판하거나이헌법의개정또는폐지를요구하는모든행위를처벌하는법이었다. 유신정권은민청학련사건, 인민혁명당사건등공안사건을통해끊임없이비상상황임을강조하면서상시화된예외상태를만들어주권적독재를지속하였다. 1979년 10.26과함께박정희정권이무너졌지만, 군부는혼란한상황을틈타다시권력을장악하였다. 여전히정치화된군부의정치개입이이루어진것이다. 광주민주화항쟁을짓밟으면서전두환군부정권은유신의생명을연장하고자했던것이다. 하지만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정권시기통치의대상으로간주되었던국민이 1987년 6 월항쟁을통해실질적으로국민이정치적주체들의집합, 즉국민이민주주의의주체로서국민의권리를실행하기시작하면서한국은민주주의로의이행이이루어진다. 해방이후국가권력에의한 국민만들기 를통해형성된국민이결코 수동적 시민에머물러있지않았다. 제1공화국에의해만들고자했던 수동적 시민은 4.19라는계기속에서자신의모습을찾고자하였다. 제3공화국과유신공화국속에서동원된경제개발의주체로서국민역시동시에저항적인민주주의적주체로서성장해왔던것이다. 이것이한국민주주의의동력이었고, 국민이민주주의적주체로서거듭날수있는계기를스스로만들어내고있었던것이다. 그리고오랫동안한국정치의중심에있으면서민주주의의성취를더디게하였던군은자신의본연의위치로돌아갔다. 정치군인, 정치군대가아닌민주공화국의군대로서자신의위치를찾으려하고있다고할수있다. 1987년 6월을통해한국은국민국가의 ' 일정한 ' 완성을성취하게된다. 여기에서 일정한 완성이라는의미는우선개항이후국민국가건설의길로접어든이래목표했던완전한국민국가의완성은아니라는의미이다. 비록 1945년해방과이후한국전쟁의과정을거치면서분단이고착화되어가고두개의국민국가의길을걷게되었지만, 한반도에서근대적의미의국민의형성은분명 19세기말 20세기초반에서부터시작되었다. 그리고그때형성된국민에근거한하나의국가건설이일본제국주의에의 - 239 -

해좌절되었고, 이후 1945년이래의역사속에서는소련과미국이만들어낸냉전의규정력에의해분단되었다는점을염두해둔다면, 한반도에서국민의자기결정권은정당하게행사되지못했고한반도의국민이원하는하나의국가를이루지못했다는점이다. 따라서진정한국민국가의완성은한국근대사이래형성된하나의국민에의한, 즉통일을통한하나의국가건설이이루어질때이다. 그것은바로한반도의근대사에지속적으로작동하였던제국주의규정력으로부터탈피하여한반도공동체구성원들에의한자기결정권의행사를의미한다. 앞에서지적하였듯이국가의건설과국민의형성이라는두가지과정이결합하게되는매개항은민주주의이다. 즉국민이스스로정치적주체로서국가권력에개입할수있게되는지점이민주화임을의미한다. 민주화이후에비로소국민의국가로서국민국가의의미가성립된다. VII. 결론을대신하여 : 민주적이고공화적인공동체를향하여 이글에서우리는서구의국민국가건설과정을전쟁과군, 시민등의개념을중심으로살펴보고그러한과정에서한반도에서는어떻게변형되고해결되는가를살펴보고자하였다. 한반도에서국민국가형성의과정은개항이후식민지지배기간동안반제국주의의과제에의한네이션의우선성과그에따른개인의미발달혹은네이션속에서개인의배치라는모습을보았다. 그리고해방이후는민주주의적정당성을확보하지못한국가권력에의해네이션이독점되면서이전의역사를가속하였다. 민주주의적주체의확립이라는측면에서장기간동안한반도의역사는저항적주체로서만존재하였고그역시집단적성격이강하였다는것을알수있다. 1987년민주화이후남한사회의민주주의적과제는새롭게드러나고있는대한새로운통합의방식을찾는것이일차적과제로설정될수있다. 이제한국정치는정당체계를통해대의제민주주의의틀을확립해가고있다. 정치를규정하고또한정치가해결해야하는다양한사회적쟁점들이부상하고있다. 민주화이전국가권력이설정한중심의제에의해국민이동원되었다면, 이제국민은주체로서자신의의사와이해관계를표현하고그것들의관계속에서정치가이루어지는체계가될때민주주의는안정적이될수있을것이다. 하지만동시에정치는단일하지않는다양한주체들의표현속에서상생의정치와윤리를모색할수있는공간으로서자신의위치를설정해야한다. 또한통일의문제이다. 한반도에서근대성의형성은자생적길이차단되면서서구적근대성과결합하면서식민지의길을걷게되었다. 이과정에서한반도에서는근대 - 240 -

의공동체로서국민국가를건설하려는수차례의시도에도불구하고지속적으로외부의세력들에의해차단되어왔다. 그러한의미에서한반도에서통일된국민국가의건설은탈식민주의의과제를수행하는것이된다. 31) 이것은단지근대의출발시기에제기되었던한반도에서국민국가의건설을완성한다는의미에서가아니라현재의시점에서남북한인민의자기결정권의행사라는자주의과제이다. 19세기말그리고 1945 년이후두개의시점에서외세의의해한반도인민의자기결정권이억압되었던역사를기억한다면, 이제우리인민의자기결정권을회복하는것이그억압의역사로부터해방되는길일것이다. 19세기말부터네이션은한반도내에거주하는한민족이라는의미로형성되고다양한해방운동의작업들을통해네이션의개념이확립된다. 따라서해방이후두개의국민국가건설의길은자발적선택의결과가아니라외부적결정에의한것이므로 19세기말시작되었던국민국가의건설의과제는결국달성되지못한것이다. 따라서통일을통한하나의국민국가의건설은 19세기말이후한반도에지속적으로결정적인변수로작동하였던제국주의변수에대한극복의의미를지닌다. 통일은단순히감성적차원의문제가아니라탈식민주의의궁극적인최대강령으로서존재한다. 위의두개의과제는탈근대와지구화가쟁점이되고있는현재의시점에서는분리될수없는문제이다. 통일을통한국민국가완성의과제가근대적국민국가의건설이라는과제의종결을의미하지만동시에근대의배타적민족주의의부활을의미하는것이어서는안되기때문이다. 근대국민국가의주체가 국민 이라는단일주체를상정했다면, 이제다양하고획일화되지않는다중적인주체가형성되고있고, 그들에근거한민주주의를사고해야한다. 또한새롭게제기되는 타자 에대한포용을통한열린공동체의모색이라는차원에서통일의문제가사고되어야하는이유가여기에있다. 31) 그러한의미에서한걸음더나아가윤건차는한국에서탈근대 = 탈식민주의의과제를설정하고있으며, 동시에탈민족주의를말하고있다 ( 윤건차 2005). - 2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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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과병역 : 시민형성과국민통합의주역 공진성 ( 조선대학교 ) - 목차 - I. 한국인에게병역은무엇인가 II. 국가, 국민, 시민 : 역사적ㆍ이론적고찰 1. 시민 2. 상상국가 3. 전쟁과국민의형성 III. 근대한국에서의병역의무와시민의성장 1. 6.25 전쟁과국민의탄생 2. 군대를통한근대적주체의형성 3. 공화주의적시민의등장과민주화 4. 병역의위기, 민주주의의위기 IV. 병역은어떻게될것인가 I. 한국인에게병역은무엇인가 이글의목적은병역의의무가한국인에게무엇을의미하 ( 였 ) 는지를밝히는것이다. 국민개병제를실시하고있는한국에서병역의의무는그직접적당사자인남성에게만중요한일이아니라, 그남성을성인으로길러군대에보내는어머니에게도, 그런군복무의경험을가진남성과만나연애하고결혼하는여성에게도중요한일이 ( 었 ) 다. 그런의미에서병역의의무는모든국민에게보편적으로 작용 하고, 다만차별적으로 적용 된다고말할수있겠다. 한국에서병역의의무는남성과여성에게차별적으로적용되면서도남녀모두에게공통적으로중요한영향을끼친다. 그렇기때문에병역은한편으로남녀모두를동일한경험을가진하나의국민으로만들지만, 다른한편으로남녀를차별적경험을가진두국민으로만들기도한다. 과거에남성중심의가족질서를따라사회전체가구성되어있었을때에는남성의군복무만으로도강력한국민통합적기능을했지만, 그런가족적질서가해체되고남녀가더욱평등해진시대에남성에게만적용되는병역 - 247 -

의의무는오히려국민통합을저해하는작용마저하게되었다. 더나아가, 과거부터계속되어온특권층의병역비리와점차증가하는중산층의병역의무이행의지감소는군대의국민통합적기능에커다란도전이되고있다. 이글은국민개병제하에서 ( 남성 ) 국민에게부과되는병역의의무가어떻게한국인을하나의국민으로만들었고, 또어떻게근대적인시민으로만들었는지를살펴보려고한다. 국민개병제라는제도의적용과시민의형성과정을교차시켜이해하려고한다. 구한말부터일제강점기를지나해방과분단후의정부수립시기까지국민개병제가어떻게이해되었고시도되었으며, 어떻게국민과시민의형성에작용하였는지를이론적논의와함께먼저살펴보고, 6.25 전쟁을거치면서군사적대립을통해국민이탄생하고, 군대를통해그국민이근대화와산업화에적합한주체로형성되며, 마침내경제와사회의발전결과로서군대속에서도비판적시민으로서거듭나는과정을분석할것이다. 그리고마지막으로신자유주의적경제개혁의지구적영향속에서민주주의와군대의근간인보편적병역의의무가무너져가는모습을비판적으로고찰할것이다. 지난세기까지군복무에관해서는그것을지나치게국민의의무로서당연하게여겨왔기때문에의무로서의본질에대해서도, 국민으로서누리는권리와의관계에대해서도, 민주주의와사회통합과관련해그것이수행하는기능과역할에대해서도제대로연구가이루어지지않았다. 군복무가모든남성국민의의무여야하는현실에대해서도사람들은사적인자리에서는불만을토로했지만공공연하게문제를삼지는않았다. 남과북이군사적으로대치하고있는특수한상황이과거에군복무를표면적으로는당연시했던것과무관하지않겠지만, 남북의대치상황이여전한데도오늘날많은사람들이군복무의강제성을문제시하는것을보면, 병역의무의수용에관한다른설명이필요해보인다. 이글은그설명의단초를찾기위해한국의현대사속에서병역의의무가어떻게부과되었고, 국민들에게어떤영향을끼쳤으며, 어떻게점점다르게이해되었는지를묘사하고자한다. II. 국가, 국민, 시민 : 역사적ㆍ이론적고찰 1. 시민 시민은무엇인가? 그것은국민과어떻게다른가? 시민 이라는개념의역사를탐색 한박명규에의하면, 한국어에서 시민 ( 市民 ) 은유럽어에서와마찬가지로크게세가 - 248 -

지의미로사용되어왔다. 가장오래된용례는장시 ( 場市 ) 의각종활동에참여하는특수한직역의사람들을일컫는것이다 ( 박명규 2009: 180 이하 ). 서구에서 부르주아 ( 지 ) 가경제적인의미를가지는것과유사하다. 다른용례는근대적인것인데, 이경우의시민은 장사나시장과직접적인관계를갖지않으면서, 오히려정치공동체의자율적인구성원자격을의미하는정치적개념 이다 ( 박명규 2009: 179). 이런의미의 시민 개념은, 시에속한주민을시민이라부르게되었기때문 에, 초기에는 시 라는근대적행정단위의설립을근거로사회적인내용을얻게되었다 ( 박명규 2009: 179). 오늘날 시민 개념은, 시민권을획득한다 는표현에서도드러나듯이, 국민 과비슷한의미로도사용된다. 세번째용례는비교적최근의것이다. 20세기후반에이른바 민주주의의제3의물결 과관련해제기된시민사회론속의시민이다. 이시민은경제적인의미의특정계급을가리키는것도아니고, 하나의정치적ㆍ행정적단위에속한모든구성원을가리키는것도아니다. 이는 1980년대이래한국의현실, [ 곧 ] 시민계층의등장이반영되면서서구의학문체계에서직접시민개념이수용, 재인식, 재적용 된것이다 ( 박명규 2009: 179). 이세번째의미의시민은중요한두가지특징을가지는데, 그하나는국가권력과의관계속에서견제하고저항하고협력한다는것이고, 다른하나는사익에매몰되지않고공적ㆍ보편적이익을추구한다는것이다. 이두가지특징은서로밀접하게연결되어있다. 이동수는시민에관한공동연구의서문에서이와관련해다음과같이적고있다. 시민사회구성원인 시민 (citizen) 은단순히자신의권리와이해관계의주체를의미하는 개인 을의미하지않는다. 시민 은이기적인개인을뛰어넘어타인을지향하며자신의충성심의대상이 이사회를함께살고있는타인들인사람을일컫는다. ( 이동수 2013: 22) 시민은일단분화한 개인 이어야하지만, 계속고립된이기적개인이어서는안된다. 자기의이익과권리를알면서도그것을넘어공동의이익을위해동료인간과협력할수있는존재여야한다. 그러므로시민은미분화한집합적주체인국민과다르고, 분화한후에서로결합하지못하는원자적개인과도다르다. 사람들이자신을고유의구별된존재로서인식하기위해서는어느정도의사회경제적발전이필수적이다. 그런상태에서비로소사람들은사회구성원간의이해관계가서로대립할수있음을알수있게되기때문이다. 문제는이해관계의대립이사회의해체로이어지느냐, 아니면이해관계의다양함과대립가능성을구성원들이서로인정하면서정치적으로그조화를꾀하느냐이다. 그런다양함이존재하는곳이 시민사 - 249 -

회 이고, 그곳에서공동의이익을찾아실천하는존재가 시민 이다. 한국에서의시민 의탄생에관해연구한송호근은이와관련해다음과같이적고있다. 시민사회는경제적분화와정치적분화가서로대응하여제도로정착될때에비로소형성되었다고말할수있고, 경제적분화와정치적분화의제과정에서어떤뚜렷한개별적위치와권한을점하는개인을시민이라고정의할수있다. 시민은그런사회를구성하는주권적, 주체적개인이며, 이해갈등과계급적대립으로 [ 인해 ] 파열하기쉬운사회질서를공적담론과공적기구를통하여유지존속시켜나가는근대적개인이다. 더나아가공익과사익간균형을취할수있는공공정신과도덕을내면화한사람이다. ( 송호근 2013: 20) 공익과사익의균형을추구하기위해서도개인에게는먼저스스로지켜야할 사익 이있어야한다. 그러므로다른무엇보다도우선해재산권이시민권 (citizenship) 의내용을구성하게된다 ( 송호근 2013: 431). 자기자신의신체에대한권리와그로부터비롯하는재산에대한권리를타인이나국가의간섭과침해로부터지키는것이근대적시민권의핵심내용이었음은주지의사실이다. 그래서시민은개인의자유와재산권을침해할수있는국가권력을견제하고, 때로는국가의부당한간섭과침해에맞서저항하지만, 동시에자기의자유와재산권을지키기위해서도국가권력에협력한다. 그런의미에서시민은국가주의적의미의국민, 즉사익보다공익을앞세우고무조건적으로국가에충성하는국민과다르다. 이런근대적주체인시민은어떻게탄생할까? 일반론적으로말하면, 시민은시민사회에서태어난다. 다양한개개인의이해관계가대립하며공존하는곳이바로시민사회이다. 이시민사회는다양한자발적결사체들로이루어져있다. 사람들은경제의발전과분화과정속에서각자의이해관계에따라자발적결사체에속하게되고, 그럼으로써다양한이해관계의대립의현실과조화와협력의필요성을배우게된다. 이런시민과 ( 시민 ) 사회의관계, 또는자발적결사체와 ( 시민 ) 사회의관계에대해, 한국에서의시민의탄생과관련해, 송호근은이렇게적고있다. 자발적결사체속에서사회가태어났고, 사회속에서결사체가만들어졌다. ( 송호근 2013: 18) 그래서송호근은조선 / 한국에서 1894년부터생겨나기시작한자발적결사체가 ( 시민 ) 사회의모체라고주장한다. 그에의하면 자발적결사체는 개인과지역을넘어집단과전체의보편적이해를추구했다는점에서현실적사회를배태한인큐베이터였다. ( 송호근 2013: 18) 좀더일반론적으로이동수는시민을국민이나민중과구분하면서다음과같이설명한다. 수동적인 국민 이나저항적인 민중 을능동적이고창의적인 시민 으로전 - 250 -

환시키기위해서는그들의역량강화 (empowerment) 가필요하며, 이를위한가장좋은방법은바로그들을시민적활동에참여시켜능동적인주체로거듭나게하는것이다. ( 이동수 2013: 24) 개인으로하여금사익과공익의차이를깨닫고양자를조화시킬수있게하는가장좋은방법이공적의미를가진활동에참여하게하는것이라는말이다. 송호근이자발적결사체의등장에주목하는이유도그곳에서개개인이다양한사익과사익들의충돌을경험하고, 그것과는다른공익을이해할수있게되기때문이다. 그래서자발적결사체가 ( 시민 ) 사회의모체라고말하는것이다. 시민과시민사회에관해연구한이동수와송호근을비롯한많은연구자들은민주주의가 ( 국민이나민중이아니라 ) 시민에의해서만제대로유지될수있고, 그런시민이참여적환경속에서만길러질수있음을옳게지적한다. 그러나이두사람을포함한대부분의연구자들은이론적으로나역사적으로 군대 와 병역 이 ( 물론일정한조건하에서 ) 또한그런참여적기구와제도일수있으며실제로한국현대사속에서그런기구와제도로서기능해왔음을간과한다. 그러나시민의공적참여방식가운데군인으로서복무하는것을매우중요하게여겼던루소는 오직시민만군인이되어야하고누구도군인을직업으로삼아서는안된다 고주장했다 ( 슈나이더 2015: 126). 조국의방어가오로지시민의의무여야하며, 자발적병역의무의이행을통해서만개인이온전히시민이될수있다고생각한것이다. 이런병역관을 공화주의적 병역관이라고할수있겠다. 이런공화주의적관점에서이글은한국에서군대와병역이앞에서살펴본것과같은시민의형성에어떤방식으로작용했고기여했는지, 그리고어떤가능성과한계를보였는지를살펴보려고한다. 2. 상상국가 근대로이행하는시기에조선의개혁세력의최고목적은 근대국가건설 이었다 ( 송호근 2013: 17). 근대국가건설이라는목적을다시두가지목표로요약한다면그것은 부국 과 강병 이었다. 일본과서구국가들의제국화와청제국의몰락을지켜보면서구한말의 ( 특히개화파 ) 지식인들은부유하고강한 근대적 국가를만들어야한다고생각했다. 그리고당시의부유하고강한서구근대국가의중요한특징가운데하나가, 그들이보기에는, 국민개병제또는징병제였다. 19세기초에나폴레옹에의해프랑스의군대가국민군대로변하면서주변의다른유럽국가들도대칭적으로그에맞설수있기위해앞을다투어징집을확대실시하였고 ( 박상섭 1996: 189 이하참조 ), 그것이유럽바깥으로의제국주의적팽창으로이어졌기때문에, 소수의직업군인들로이루어진군대가아니라, 국민전체를군대로만드는 강병 이 부국 의수단 - 251 -

이자상징으로여겨졌던것이다. 이때의상황을박노자는다음과같이묘사한다. 그때당국자들은조선군대가새로운세계에서국방의의무는물론대내적인질서유지의의무마저도제대로이행할수없다는것을, 거의 10년마다한차례씩의대형 사건 들을통해서뼈저리게절감할수있었다. 우리의군대가일본에비해서절대적으로열세라는아픈현실에직면하여맺은불평등한강화조약 (1876), 역시일본군함외교로맺어진굴욕적인한성조약 (1885), 조선의군사력만으로는동학을진압할수없다는각오로청나라에파병을요청하여청일전쟁의도화선에불을지핀 1894년 4월 28일이라는숙명적인날, 그리고러일전쟁이란 야수의대결 에서러시아의승리를바랐던고종에게협박으로강요한 1904년 2월 23일의 한일의정서. ( 박노자 2004: 43) 이런역사적배경속에서자연스럽게징병제는 근대담론의핵심영역중의하나 가되었다 ( 박노자 2004: 43). 당시조선의군사적상황이얼마나열악했는지를 1894년여름조선을여행한오스트리아인여행가에른스트폰헤세-바르텍 (Ernst von Hesse-Wartegg) 은자신의여행기에다음과같이기록했다. 조선정부의공식목록에서나는조선의독자적인군대의인원이 120만이라고적혀있는것을발견했다. 그런데오늘날서울이나 아침노을의나라 어느곳에도조선병사는한명도없다. 조선이한명의병사도내보내지않은가운데일본군여단은조선에상륙했다. 도대체 120만명의군인은어디에있었던것일까? 조선의 군제 에따르면사지가건강한모든남자는양반계급에속하지않는한군인의의무를지며, 군인으로등록된다. 이것이바로 120만이라는숫자가나오게 [ 된 ] 배경인데, 군인중 99퍼센트가한번도무기를잡아본적이없으며, 군복을입어본일이없다. 조선의관리들과장교들은뇌물을받기로유명한데 이때문에병사들의명부를작성하는일은아주수지가좋은장사다. 고급관리에게돈을주고하급관리가된사람이병사들의명부를작성하기위해관장구역의도시와마을을매년순시할때면, 얼마를주면이명부에서제외될수있는지가공공연하게거론된다. 대다수의장교들은군제에대해아무지식이없다. 200년동안이나라는평화로웠기때문에야전경험이나전쟁경험을할기회가전혀없었다. 그리고 8년전까지만해도중국으로여행하는것외에는조선인이고국을떠나는일도없었기때문에, 이들은다른나라의군대조직에대해아무지식도없다. ( 헤세-바르텍 2012: 145-151) 이런상황을극복하기위해유럽에서징병제가어떻게운영되고있는지를조사하게 한고종은, 1895 년 1 월 7 일발표한 홍범 14 조 의제 12 조 ( 징병법을적용하여군제 - 252 -

의기초를확정한다 ) 에서도드러나듯이, 징병제지향을분명하게가지고있었다. 그러나병사들에게는물론이고미국인군사고문에게조차봉급을제대로지급하지못할정도의극심한재정난에시달려서그런야심찬개혁을실행할수없었다 ( 박노자 2004: 47). 고종을비롯한친정부적지식인들이징병제를다른무엇보다도 강병 의수단으로만인식했다면, 많은기독교적급진개화파들은, 박노자에의하면, 이미근대여명기인당시에군대를, 특히징병제군대를 진취적이며상무적이며위생적이며복종잘하는근대 국민 의훈육기구 로인식했다 ( 박노자 2004: 50). 징병제군대가근대적국민의형성을위해필요하다는것이당시에이미인식되었다는것이다. ( 시민 ) 사회의성립과관련하여 1894년 ( 갑오년 ) 부터자발적결사체가생겨나기시작했음을지적한송호근은그것이 국가만들기 내지 소멸되는국가구제하기 의임무를띠고탄생 했다고말하면서도, 그자발적결사체가운데상당수가군사적성격을띠고있었음은지적하지않는다. 그러나, 구한말에등장한수많은의병대와그로부터이어져만주에서우후죽순등장한군사조직들 ( 육군군사연구소 2012: 530 이하참조 ) 이야말로 ( 시민 ) 사회의모체가되는자발적결사체였다. 그리고이런군사적성격의자발적결사체들이국가없는시기에, 근대적국가가아직세워지기도전에먼저국민을호명하여훈육하고통합하는기능을수행했다. 근대적국가만들기는당시개혁세력의최고목적이었으며, 이를위해지식인들은 국민 개념을만들어평민을공론장으로불러들였다. 그리고 1905년을사조약에의해황제권이약해지자 ( 유명무실한황제대신에 ) 그 국민을 국가만들기의책임주체로서적극호명하기시작했다. 신민 ( 臣民 ) 이 국민 으로명명된것이다. 그러나송호근에의하면, 1910년일제강점은국민국가로가는현실적가능성을완전히제거해버렸다. 국민호명으로국민이태어나자 [ 곧 ] 국가가사라진것이다. 결국소멸된국가는상상속에서재현되었다. 상상국가 가만들어진것이다. [ 그리하여 ] 호명된국민은상상속으로진입했다. ( 송호근 2013: 17) 이것은해방이전에, 그리고해방이후에도한동안, 조선 / 한국의시민사회에중요한한계를부과했다. 즉시민사회가국가와의대결구도를경험할수없었던것이다. 송호근에의하면시민성은국가권력에대한견제와저항, 협력관계속에서일차적으로유래한다 ( 송호근 2013: 18). 그러나조선에서는 ( 시민사회를구성하는 ) 결사체들이태어나자마자구체제가몰락해버림으로써상상속에존재하는근대적독립국가를구제하고건조하는일이갓태어난결사체들에게오히려일차적과제로서주어진 - 253 -

것이다. 그래서국가권력을견제하고그에맞서저항하는경험을시민사회가제대로할수없었다. 근대이행기조선에서태어난개인, 결사체, 사회는국가와의대결구도를경험하지못한채소멸하는국가를회복해야하는태생적운명을부여받았다. ( 송호근 2013: 18-19) 이런경험의한계는해방후에도이어지는데, 해방후곧맞이하게된분단과전쟁으로인해남한의개인과결사체, 사회는국가권력을견제하고그에맞서저항하는것보다우선해그것을지키기위해협력할것을 ( 또는협력할것만을 ) 요구받았던것이다. 시민사회의이런한계가군대의역할이나성격과관련해서도한계가되었음을주목할필요가있다. 다시해방이전의시기로되돌아가보자. 송호근의표현을빌리면, 국가없는사회에서태어난결사체들은견제와저항대신에 상상국가, 즉상상을통해선취된근대적독립국가를지키는임무를처음부터떠맡게되었다. 그런임무를떠맡은결사체들이군사적지향을띠지않는다면, 그것이오히려이상할것이다. 여러군사단체들이실제로독립을위해결성되기도했고, 1910년이후해외에서독립운동을벌인여러단체들이강령을통해 국권의회복 이후에실시해야할가장시급한일로서 징병제의실시 를주장하기도했다. 예컨대, 상해임시정부초기에이승만대통령은 대통령포고제1호 를통해국민의보편적병역의무를미리규정하기도했다 ( 독립신문 1921년 3월 21일자, 2면 ; 박노자 2004: 54 참조 ). 구한말부터나타난 국민개병 을통한 강병 과 국민형성 의지향은국권을상실한동안에도 상상국가 속에서다양한결사체를통해이어졌다. 1910년을전후하여전국방방곡곡에서등장했던군사적결사체인의병 ( 義兵 ) 들은북상망명하여만주지역에서서서히독립군으로전환해갔다. 그리하여홍범도, 박장호, 이진룡, 김정규전덕원, 백삼규등의의병장들이 1919년 3.1 운동이후독립군단체의지도자로등장했다 ( 육군군사연구소 2012, 531). 이시기에등장한많은무장독립단체들이군사적덕성을 국민 의중요한자질로간주하고훈육한것을박노자를비롯한많은평화주의적지향의학자들은비판한다. 이들이문제시하는여러군사적덕성가운데하나는바로 무조건적복종 이다. 이것이이른바근대적시민이갖춰야할덕성과는다르다는것이다. 그러나당시조선인병사들에게훈련시킨복종이구체제에서의복종이나일제치하에서강요된복종과과연같은것이었을까? 당시에각종군사단체에서조선인들이요구받고훈련받은복종은예속의다른말인봉건적복종이나일제치하에서의복종과분명히다른것이었다. 행여그훈련과정에서강제가있었더라도, 그복종은적어도스스로옳다고판단하여받아들였다는점에서무조건적인복종이나예속과달랐으며, 또한그런점에서 근대적 인의미를가졌다. 그리고 - 254 -

국권을상실한초기에는그군사단체들이임박한 독립전쟁 을위해군인을양성하는것을일차적목적으로삼았지만, 점차시간이지나면서, 물론앞에서언급한바와같이 상상국가 속에서의한계는있지만, 근대적시민 을길러내는기능을부분적으로수행했다. 이때무장단체에가입하는것, 즉군인이되는것은그어떤강제에의한것도아니었고, 국민모두가 공평하게 복무한다는전제하에서만기꺼이응하는의무도아니었고, 복무의대가로그어떤금전적보상을받는것도아니었다. 이런점에서일제시대의해외무장단체들은마키아벨리가옹호한것과같은지극히공화주의적인시민군이었고, 그런것으로서해방후의한국군대나병역의무와관련해일종의규범적모델의역할을해왔다. 3. 전쟁과국민의형성 서구의많은학자들이근대국민국가의역사적등장과정이전쟁과밀접한관계에있음을밝힌바있다 ( 기든스 1991; 틸리 1994; 뮌클러 2012). 유럽에서 30년전쟁끝에체결된 1648년의베스트팔렌조약을상징적기점으로삼는근대국민국가체계는일정한영토와그곳에사는주민들에대한배타적권리를주장하는이른바 주권적 국가들로써구성된다. 이체계는필연적으로사람들을, 이전의제국적질서와다르게, 하나의정치적단위에소속하게하며, 그와동시에다른정치적단위에소속할수없게한다. 이른바 경계인 을허락하지않는것이다. 칼슈미트가예리하게지적한바있듯이, 이근대국민국가체계속에서정치적인것은적과동지를구분하며작동한다 ( 슈미트 2012: 39). 그런데, 슈미트는적의본질이그저낯설고이질적인것에있다고말한다 ( 슈미트 2012: 39). 정치적의미의적에게그것이반드시적이어야하는그어떤비정치적속성이있는것은아니라는뜻이다. 우리는쉽게낯설고이질적인것을도덕적으로악하고, 미학적으로추하고, 경제적으로해로운것과동일시하고, 또그반대로그런비정치적속성들을정치적인의미의적과동일시하곤한다. 그러나슈미트에의하면각각의구별들은독립적인것이어서어느하나의구별로환원될수없다. 오히려슈미트는 동지와적이라는특수한대립을다른구별들로부터분리시켜독립적인것으로서파악할수있는가능성속에이미정치적인것의존재로서의사실성과독립성이나타나 있다고주장한다 ( 슈미트 2012: 40). 국민은이런 우연적 적대속에서생겨난다. 슈미트는적대의이런우연적속성을두고 결단 이라고부른다. 그리고이결단은오로지국민의몫이라고말한다. 국민이정치적인것의영역안에존재하는한 국민자신이적과동지를결정하지않 - 255 -

으면안된다. 여기에국민의정치적실존의본질이있다. ( 슈미트 2012: 67) 달리말 하면, 정치적의미의국민은이런결단을통해서만등장한다. 그러므로슈미트에의하 면, 이러한구별능력이나의지가결여될때국민은정치적인존재이기를멈춘것이다. 만약자신의적이누구인지, 누구에맞서싸워야할지에대해타인의지시를받게된다면이미정치적으로자유로운국민은아니며다른정치체제에편입되거나종속된것이다. ( 슈미트 2012: 67) 이런의미에서, 일제시대에대일선전포고를하거나항일무장투쟁을전개한모든결사체들은스스로정치적구별을함으로써 ( 상상국가속에서 ) 자신들을정치적존재인 국민 으로구성했던것이다. 문제는해방후였다. 해방후의조선인들은아직그런의미의정치적구별을스스로하지못한상태에있었고, 결국타인의의지에의해, 물론부분적으로는자의에의해, 자신의적을결정함으로써각각국민이되었다. 전쟁을통해확립된남과북의두국가는, 물론여전히냉전의규정력이작용했지만, 이제스스로 자신의적이누구인지, 누구에맞서싸워야할지 를결정하게되었다. 그리고그럼으로써그곳에사는사람들은점점자유로운국민이되어갔다. 적과동지를결정한다는것은, 그럼으로써자유로운국민이된다는것은, 동시에스스로무기를들고전쟁을치를태세를갖추는것을의미한다. 그것은그저관념적으로적과동지를결정하는것만을의미하지않는다. 실제로그적에맞서무기를들고, 즉 인간을물리적으로살해하는수단 을들고싸우는것을의미한다 ( 슈미트 2012: 45-46). 하나의국민이된다는것은 물리적살해의현실적가능성 과끊임없이관련을맺는것이다 ( 슈미트 2012: 46). 병역과군대를단순한 노무 ( 勞務 ) 정도로여기는오늘날의일반국민들의생각은이엄혹한현실성을무시하는것이다. 슈미트는이엄혹한정치적현실이 호전적이거나군국주의적인것이아니며, 제국주의적이거나평화주의적인것도아니 라고분명히말한다 ( 슈미트 2012: 46). 즉어떤국민이호전적이거나군국주의적이어서, 또는제국주의적이어서군대를가지는것도아니고, 평화주의적이라고해서군대를가지지않을수있는것도아니라는뜻이다. 스스로그결정의무게를짊어지려고하지않을때, 그국민은평화주의적인것이아니라, 그저다른국민의지배나보호를받게되는것일뿐이다. 만약한국민이정치적생존의노고와위험을두려워한다면, 그때는바로다른국민이 대신에그노고를없애주고 외적에대한보호 와함께정치적지배를떠맡게될것이다. 그때는보호와복종이라는영원한관계에따라보호자가적을규정하게된다. ( 슈미트 - 256 -

2012: 69) 이런의미에서모든국민에게국방의의무를부과하는국민개병제의도입은, 그럼으로써모든국민이군인이되고모든군인이또한국민이되는일은스스로생존하고자하는국민에게필연적이다. 전쟁은독자적인전략적ㆍ전술적규칙과관점을가진다. 다만이러한규칙과관점은모두누가적인지에관한정치적결정이이미내려져있다는것을전제로한다. ( 슈미트 2012: 47) 제2차세계대전종전과함께우리에게는이런정치적결정이이미내려져있었다. 그리고이후에벌어진전쟁에의해그정치적결정은비로소 우리 의것이되었고될수밖에없었다. 현실적인투쟁속에서비로소적과동지라는정치적편가르기의궁극적인귀결이드러나기때문이다. ( 슈미트 2012: 48) 해방과동시에가능성으로서등장했던대립은전쟁을통해비로소현실이되었다. 이대립은 그것을근거로하여인간에게생명을희생하도록요구할수있고, 피를흘리고다른인간을살해하도록강제할수있는의미깊은대립 이었다 ( 슈미트 2012: 48). 전쟁은우리가스스로적과동지를결정하고적에맞서싸울군대를양성할시간적여유를허락하지않았다. 전쟁이부과하는시간적압박속에서한반도의남쪽에수립된정부는계획없이모든국민을전쟁에동원할수밖에없었고, 그렇게동원된국민은전쟁속에서비로소정치적의미의국민이되었다. III. 근대한국에서의병역의무와시민의성장 1. 6.25 전쟁과국민의탄생 대한제국시기부터징병제에대한논의가있었지만, 이것은어디까지나위로부터의논의였다. 아래로부터폭넓게징병제에대한논의가있었던것은아니지만, 국권을찬탈당했을때, 군사적성격의자발적결사체들이곳곳에서등장했다. 그런자발적결사체속에서시민은태어났고, 그런시민들이 상상국가 를지키기위해군사적성격의자발적결사체를이루었다. 그러나전체조선인의수에비하면이들은극히소수에불과했다. 이들대다수가식민지조선에서경험한것은오히려다른것이었다. 중일전쟁이본격적으로전개되자일본은넓어진전장에병력을공급하기위해징병제를전면적으로확대했다. 이때징병의대상은일본인이었다. 그러나전세 ( 戰勢 ) 가급박하게돌아가자일본제국은식민지조선에서도급기야징병제를실시했다. 일제 - 257 -

말기인 1944년에본격적으로시행된징병제는채 2년도안되는짧은기간에 39만여명에달하는조선인을전장으로끌고갔다 ( 임재성 2011: 94). 조선의민중이최초로경험한징병제는외세에의해지극히타율적으로강제된것이었으며, 거의죽을것이확실시되는전쟁에불행하게동원되는것이었다. 이로써조선인 / 한국인에게는징병제에대한부정적기억이남게되었다. 해방후수립된대한민국의제헌헌법은 모든국민은법률의정하는바에의하여국토방위의의무를진다 ( 제30조 ) 고규정함으로써국민개병의원칙을명확히하였다. 이에따라 1949년 8월 6일처음으로 병역법 ( 법률제41호 ) 이공포되었다. 이법의제1 조는 대한민국국민된남자는본법의정하는바에의하여병역에복 ( 服 ) 하는의무를진다 고규정하였고, 제2조는 대한민국국민된여자및본법의정하는바에의하여병역에복하지않는남자는지원에의하여병역에복할수있다 고규정하였다. 이병역법에의거하여이듬해인 1950년 1월첫번째징병검사가실시되었다. 그러나이후에징집은중단되었다. 심지어관련업무를담당하던부서마저해체되었다. 이승만정권이필요이상의병력을소유할경우북한에대한군사행동을벌일우려가있다는판단하에미국이한국군정원을 10만으로동결했기때문이다. ( 임재성 2011: 96) 그러나 6월에전쟁이일어나자아무런준비없이다시징집이시작되었다. 길거리에서마구잡이로징집이실시되었다. 미성년자이더라도그저총이끌리지않을정도만큼만컸으면징집대상이되었다. 한반도에서실시된두차례의강제징집은모두전쟁의긴박한순간에철저히군사적필요에의해이루어졌다. 이것은징병을정치적관점에서이해할수있는가능성을심각하게제한했으며, 또한일반국민들사이에서징집에대한부정적기억을남겼다. 서구와는다른이런한국의역사적경험의차이와그것이가져온정치적제약에관해문승숙은다음과같이적고있다. 한국인들에게는대중군사동원이사회정치적세력화로이어지는역사적경험이전혀없었다. [ 외국의 ] 혁명투쟁이나독립전쟁의역사기록을보면그시기동안평범한남자들이군인이됨으로써시민으로바뀌는것을볼수있다. 그와같이병역의긍정적인유산이있으면군복무가단지피지배자에게강요되는부담이아니라시민의의무라고보는시민공화주의에기초한관점이생길수있다. 일부조선인들이일제강점기에한반도안팎에서무장독립투쟁에적극적으로참여했지만, 남녀대중을동원한독립전쟁을통해독립이이루어진것이아니었다. 일본이항복하고 2차세계대전이끝남으로써생긴부산물처럼해방이주어졌다. 한국의제대군인들과그가족들은 6.25전쟁동안의대중군사동원에대한대가로서전후에후한경제적혜택을받은것이전혀없었다. 이러한역사적경험은 2차대전이후미국제대군인과가족들이받은대우와는매우대조적이다. 대중 - 258 -

군사동원이사회경제적권리를얻는길이되는역사적경험이없다는것은군복무를 단지위험하고강제적인부담, 가능하면피해야하는부정적인것으로보는대중적인인 식을만드는데일조했다. ( 문승숙 2007: 77) 낮은사회경제적발전수준에서갑작스럽게맞게된전쟁과징집은국민들사이에서공화주의적병역관이자리잡는것을어렵게만들었지만, 그런열악한조건속에서도자기를희생하여전체를구하고자한군사적영웅들은나타났다. 영웅의영웅성은바로희생에있다. 그리고이때의희생은강요된것이아니라자발적인것이다. 6.25 전쟁중에동일하게징집된병사들사이에서도비상한희생태세를보인영웅들이있었다. 이들은일제강점기에해외에서군사적활동을벌인영웅들과마찬가지로조국을지키기위해스스로무기를든공화주의적시민이었다. 2. 군대를통한근대적주체의형성 전쟁을통해한반도의남쪽과북쪽에두개의대립하는국민과국가가형성되었고, 군대는이국가의 ( 우선 ) 성인남성을하나의동일한정체성을가진국민으로만드는매우중요한학습의장이었다. 새로태어난어린이들이, 이름자체가의미하는것처럼, 국민학교 를통해동일한정체성을가진국민이될수있었다면, 배움의기회를놓친채이미성인이되어버린사람들은사후적으로나마 군대 를통해무엇인가를배울수있었고국민이될수있었다. 이런의미에서백종천은한국의군대가, 기술적군사학교와전문적군사학교의기능외에도, 국민대중을교육시키는 국민의학교 (school of the nation) 기능을수행했다고말한다 (Baek 1985: 401-402). 근대화초기에사회의일반적인발전수준이매우낮았기때문에상대적으로발전된제도와기관인군대가사회의구성원들을교육시키는역할을떠맡게되었고, 그럼으로써결과적으로사회의전반적인수준을끌어올리는긍정적기능을했다는것이다. 그러나군대를 국민의학교 로만들기위해서도먼저모든국민이그학교에 입학 해야했다. 1960년에입영대상자중병역기피자비율은무려 35% 였다고하는데, 임재성은당시의여러조건들을고려해볼때, 그것이실제보다낮게추산된것일가능성이높으며, 실제로는 입영대상자의절반에가까운사람들이징집을기피했 을것이라고추측한다 ( 임재성 2011: 102). 박정희군사정권은쿠데타를일으킨지한달도되지않은 1961년 6월 9일에내각공고 1호를통해병역의무불이행자자수신고기간을설정했는데, 10일동안무려 24만명이자진신고를했다고한다 ( 임재성 2011: 103). 당시에병역에대한기피가얼마나심했는지, 국민들이병역을어떻게생각했 - 259 -

는지를알수있게해주는대목이다. 병역에대한부정적인인식은, 앞에서이미언급했듯이, 우선일제시대와 6.25 전쟁기의부정적경험과기억에서비롯했다. 그러나그것은또한경제적어려움에서도비롯했다. 국민개병제는병역의의무를모든남성에게부과하는데, 그의무는모든남성에게똑같이무겁게부과될수없었다. 그것은가족의생계를책임져야하는저소득층남성에게훨씬더무거운부담일수밖에없었지만, 이런실질적인차이와불평등이국민개병제의유지를위해간과되었다 ( 문승숙 2007: 74). 국민개병제를실시하기에는국민의정신적준비나동원의기술적능력이모두부족했고, 복무에대한최소한의보상을실시할경제적여건도갖추어져있지않았지만, 많은 ( 남성 ) 국민들은군대에서일정기간을의무적으로복무함으로써점차하나의국민이, 그리고근대적시민이되어갔다. 물론그과정은개인에게매우고통스러운경험이었다. 그러나그것은하나의집단으로서국민이정체성을형성해가는과정에서불가피한일이었고, 또한전근대적인간이근대적인간으로바뀌어갈때필연적으로겪는일이었다. 특히그것이전쟁을수행하는기관인군대에서이루어질때에더집중적일수밖에없었다. 동일한경험을몇십년전에일본의병사들도강제적으로해야했다. 시간개념을가지고있지않던시골의농부가시계에맞춰생활해야했고, 평상시의걸음걸이를버리고다른병사들과똑같은넓이와속도로걸어야했고, 익숙한방언대신에군대식의표준어를사용해야했으며, 양복 ( 洋服 ) 형태의군복과발에맞지않는딱딱한군화를신어야했고, 평소에먹던음식과는다른것을억지로라도먹어야했다 ( 요시다 2005: 34 이하 ). 군대와사회의간격이클수록군대안에서병사들이겪어야하는고통역시클수밖에없다. 이런고통스러운과정을통해사회는군대화하였고, 군대는사회화하였다. 백종천과마찬가지로요시다는 근대적인사회질서나생활양식의형성에군대가커다란역할을해온것 을인정한다 ( 요시다 2005: 67). 그러나이에더해요시다는 근대적인사회질서나생활양식이본래군사적인성격을짙게띤것 이었다고주장한다 ( 요시다 2005: 67). 일본의근대화는후발형근대화국가에서전형적으로나타나듯이, 선진국의경우에 사회질서의형태가군대의형태를규정 한것과다르게, 군대자체가새로운사회질서의창출을위한추진력이되거나군대의형태가거꾸로사회의형태를규정 하는방식으로이루어졌다 ( 요시다 2005: 29). 한국의근대화역시일본의경우와마찬가지로이루어졌다. 한국사회의초기발전과정에서군이가장근대화된부문이었으며, 현대의각종유무형기술들이군을통해서구선진사회로부터수입되어사회에보급되었기때문이다. 그러나홍두승은이런평가가 1960년대까지는적용될수있을지몰라 - 260 -

도, 민간부문이군보다앞서나가기시작한 1970년대이후에는적용되기어렵다고주장한다 ( 홍두승 1996: 45). 군대와사회의관계가역전될때, 사회의근대화와관련한군대의순기능은줄어들수밖에없게된다. 학교 로서의군대의정당성이약해지게되는것이다. 요시다는일본의군대를예로써, 군대와사회의격차가큰경우에, 사회와는다른군대의질서가사회의근대화를어떻게견인하는지를잘보여준다. 병역의의무는일정한연령에이른모든남성에게 징병검사 라는통과의례를제공하며, 병사들은군대에서그전에 ( 아직봉건적인 ) 사회에서경험하지못한 평등주의 와 능력주의 를경험하게된다. 이런평등주의적요소를마루야마마사오는 준데모크라시적인것 이라고일컬었다 ( 요시다 2005: 79). 이평등성은이중적의미를가지는데, 한편으로그것은사회에내재해있는불평등한요소들을무시하고평등화하지만, 다른한편으로그것은개개인의다양성을부정하고억압함으로써사람들을획일화한다 ( 요시다 2005: 83). 그러나사회에아직개인의식과그로인한다양성이충분히성장해있지않을때에는평등주의의부정적측면보다는긍정적측면이두드러지게나타날수밖에없다. 그리고그런시기에는평등한조건속에서능력을제대로인정받을수있는가능성이열려있기때문에군대는오히려민중의지지를받을수있다. 사회경제적으로하위집단에속한남성이군대에서의경험을긍정적으로평가하는경우는대개군대가가진이런평등주의적요소와능력주의적요소의결합에서비롯한다. 1950년대의영웅이전쟁에서자신을희생한군사적영웅이었다면, 1960년대와 1970년대의영웅은자신의몸에맞지않는군인이라는새로운 옷 을억지로껴입고, 그럼으로써고통스럽게자신을근대적주체로훈련시킨평범한국민들이었다. 그렇게근대적주체로거듭난국민들은제대후에다시산업현장에투입되어열악한조건속에서도자신을희생해가며경제발전을위해노력했다. 국가와사회의발전이라는공동의목표를이루기위해사익을뒤로하고자신을희생했다는점에서이들역시영웅이라고하지않을수없다. 많은학자들은이시기의억압적인군대를현대한국사회의원형으로간주하고, 그런군사주의적모델을만주군관학교출신인박정희가한국사회에도입했다고주장한다. 이시기에군대를매개로하여형성된국가주의와군사주의가한국사회전체를군대화하였고, 이과정에서병역의의무는신성시되었으며, 병역에대한이견은허용되지않았다는것이다 ( 권혁범 2004: 62-63). 이런현실을지적하며권혁범은개인의자유와권리, 존엄성이무엇보다우선해존중되어야한다는 근대자유주의적인생각조차한국사회에너무도부족 하다고개탄한다 ( 권혁범 2004: 68). 그러나이런주장은인과관계에대한오해와군대가마치사회의바깥에있는것처럼여기는착오 - 261 -

에서비롯한다. 홍두승은이런오해가군사문화가하나의하위문화로서취급되지않고지배적인문화로서간주되는데에서비롯하며, 그이유가 그간국가의최고통수권자가군을배후세력으로하여집권하게된군장성출신이었고군조직내에서형성된이들의의식과생활양식등이때로는민간사회에결정적인영향을주게 된것에있다고지적한다 ( 홍두승 1996: 46) 홍두승에의하면, 군사문화에관한기존의논의들은양극단으로갈라져이루어져왔는데, 한편에서는군출신의연구자들이그긍정적영향을강조했고, 다른한편에서는민간인연구자들이그부정적영향을강조했다. 그러나공통적으로기존의연구들은군대가사회에끼친영향에초점을맞추었을뿐, 사회가군대에끼친영향은상대적으로소홀히다루었다 ( 홍두승 1996: 47). 권혁범이그결핍을지적한 자유주의적생각 과관련해말하자면, 한국사회일반에자유주의적생각이부족해서군대역시자유주의적이지않았던것이지, 군대가자유주의적이지않아서사회가자유주의적이지않았던것은아니다. 역사적으로특수하게먼저근대화한조직인한국의군대가서구의근대적기술과지식의수입ㆍ보급소로서사회전반의근대화를견인했다고해서, 사회전반의자유주의적발전을위한임무마저군대가짊어져야한다고주장하는것은옳지않다. 1970년대를지나며군대를통해사회전반의근대화가어느정도이루어짐으로써 1980년대이후사회의자유화가진행되어오늘날, 우리가보는바와같이, 군대역시불가피하게자유화하고있는것이현실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병역의의무가신성시되었고국가주의와군사주의가한국사회의지배적인이데올로기가되었다는주장도재고해볼필요가있다. 국민개병제에대한비판적논자들이주장하는바와같이병역의의무가강제되었고, 그것에대한거부나반대가폭력적으로억압되었다면, 과연그것은 신성한 것이었을까? 오히려 신성한국방의의무 라는관념은, 그것에대한거부를폭력적인방식으로처벌해야할정도로, 허약한것이아니었을까? 신성한국방의의무 라는국가주의적이고군사주의적인이데올로기가제대로작동했다면병역의무의기피와거부가그토록많이일어날수없었을것이다. 만약병역의무가불평등하게이행되는현실을두고 신성한국방의의무 관념이순전히기득권층의기만술이라고여긴다면, 그것은프랑스계몽사상의 사제기만론, 즉사제는진실을알고있으면서대중에대한자신의권력을유지하기위해진실을대중으로부터격리시키고은폐한다는주장과비슷한것이된다 ( 뮌클러 2015: 196 참조 ). 그러나이데올로기를, 마르크스가이해한것처럼, 정치적ㆍ사회적행위자들이자기의목표와목적이실현될수있는한계에대해가지는 ( 필연적 ) 자기기만 이라고이해한다면 ( 뮌클러 2015: 195), 신성한국방의의무 와관련한이데올로기는한국사회에서지극히허약했으며지금도여전히허약하다고해야 - 262 -

할것이다. 3. 공화주의적시민의등장과민주화 한국에서의양심적병역거부의역사를연구한임재성은, 한홍구를인용하며, 감옥에가고분신까지하면서군부독재에맞섰던치열한 1980년대의운동권학생들가운데양심적병역거부자가단한명도없었다는사실은한국사회의군사주의가얼마나강력했는가를보여주는것이라고주장한다 ( 임재성 2011: 112). 정말한국의군사주의와국가주의이데올로기가그토록강했던것일까? 사회의경제적수준이높아지고그와함께자유화가진행된상황에서조차여전히위력을떨칠정도로강력한, 그래서체제에맞선좌파대학생들조차도거부할수없는군사주의 / 국가주의이데올로기가있었던것일까? 이미앞에서사회에광범위하게퍼져있는병역기피의지와병역의의무를물리적으로강제해야만하는현실자체가오히려그이데올로기의허약함을증명해준다고설명한바있다. 병역의의무를이행한사람에대한사회전반에퍼져있던조롱, 예컨대혁역복무자를 어둠의자식 으로, 18개월방위병을 사람의아들 또는 바퀴벌레 로부른일은, 그반면에 6개월방위병을 장군의아들 로, 면제자를 신의아들 로부른일은군사주의이데올로기의영향으로도저히설명할수없는현상인것이다. 병역이해방후지금까지일반국민들사이에서지속적으로할수만있다면피하고싶은부담으로여겨졌고징집도이른바 돈있고빽있는 집자식들은빠져나가는불공평한법집행으로여겨졌던반면에, 오히려 1980년대의전투적학생운동은외형적으로군사적형태를띰으로써일제시대부터이어져온공화주의적전통을부활시켰다. 공화주의적전통속에서는군사적인것이결코부정되거나거부되지않는다. 1980년대의학생운동이 군사적 이었던것이단순히사회에만연한군사주의이데올로기의영향력이컸다는증거인것은아니다. 사회주의전통에서도 군사적인것 은매우중요하게여겨졌다. 그런의미에서군사적인것자체를거부하지않았다고해서, 더나아가긍정했다고해서그것을 1960년대이래로군부독재정권이국민에게주입한군사주의의결과라고말할수는없다. 오히려군대와병역의긍정밑에는오래된공화주의적전통, 그리고부분적으로는사회주의적전통이깔려있었다. 유명한공화주의자마키아벨리의영향을깊게받은네덜란드인스피노자는이렇게얘기했다. 신민이공포에사로잡혀무기를들지않는국가는평화의상태에있는것이아니라단 - 263 -

지전쟁이없는상태에있는것이라고말할수있다. 평화는이른바전쟁의부재가아니라정신의힘으로부터솟아나오는덕 (virtus) 이다. 노예로훈련받기위해마치가축떼가이끌리듯인도되는신민들, 그들의수동성에국가의평화가달려있다면, 그런국가는국가라기보다는오히려더적절하게황무지라고부를수있다. (Spinoza, TP, 5/4) 공화주의자들에게중요한것은전쟁이냐아니냐가아니라, 무엇을위한전쟁이냐이다. 공화국의시민들자신을위한것인지, 아니면그어떤군주개인의영광을위한것인지가중요한것이다. 그런의미에서 1980년대의전투적학생운동은맹목적으로군사주의와국가주의이데올로기에투항했던것이아니라, 군사적인것의쓸모를인정하면서다만그것이무엇을위해사용되어야할것인지를물었던것이다. 단순히사적인 양심 을지키기위해서또는사적인 이익 을지키기위해서병역을거부하거나기피하는사람들과다르게 군사적인것 자체를긍정하면서다만병역의의무가정말국가와국민 / 민족을위한것인지를묻고확인하려고했던것이다. 이글의앞부분에서시민의중요한두가지특징으로서시민은국가권력과의관계속에서견제하고저항하고협력하며, 또한사익에매몰되지않고공적ㆍ보편적이익을추구한다고말했다. 정확히이런모습을보여주었던 1980년대의전투적학생운동은시민사회가성장했음을, 그리고공화주의적전통이지속되고있음을보여주었다. 1950년대의영웅이 전쟁영웅 이고, 1960년대와 1970년대의영웅이자신을근대적틀에고통스럽게끼워맞춘 근대화영웅 이고 산업화영웅 이라면, 1980년대와 1990년대의영웅은 비판적영웅 이라고할수있다. 이들은희생을감수하면서까지병역과군대의 공공성 에의문을제기함으로써그것을진정으로공익에부합하게만든사람들이다. 군사독재가이어지면서군대의민주적정당성은심각하게훼손되었고, 군대의정당성에대한의문을억누르기위해군부는더욱시민사회를억압했다. 이런억압을뚫고입대를거부하며, 군대내에서부조리한일들을폭로하며, 부당한명령을거부하며, 그리고심지어군사적형태로독재에맞서싸우며시민들은병역과군대의존재이유를물었다. 이모든사람들은, 병역과관련해사사로운이익을추구한기피자들과다르게, 사익을희생해가며공익이무엇인지, 공공성이무엇인지를물은비판적영웅이었다. 교육수준이높아지고경제적수준이향상되면서사람들은개인의 권리 에눈을뜨게되었고, 자기의권리에대해알게되면서타인의권리와자신의권리와충돌할수있다는가능성과그것을조화시켜야할필요성을점점깨닫게되었다. 경제적발전이이루어지면서사회속에서이해관계가나누어졌고, 서로다른이해관계속에서계급과계층이분화했고, 계급지배의현실도깨닫게되었으며, 때로는그런지배의현실을뒤집어엎으려는모험적시도도나타났지만, 점차계급간의비지배적공존의 - 264 -

필요성이인식되었다. 이런시민사회의성숙의결과로서 1987년에대통령직선제개헌과함께민주화가이루어졌고, 1993년에이른바 문민정부 가들어서면서마침내군부의정치적개입가능성이배제되었고, 1998년에최초의정권교체가이루어지게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분출되었던시민들의공화주의적열정과비판적영웅의면모는 1990년대후반에경제적위기와그로인한신자유주의적개혁의흐름속에서다시표면아래로묻히게되었다. 공익을추구하며광장을가득메웠던시민들은어느새일터로돌아가그저경제적으로추락하지않기위해치열하게경쟁하며각자도생 ( 各自圖生 ) 하는사람들로변하게되었다. 4. 병역의위기, 민주주의의위기 1999년은병역과관련해매우의미심장한해이다. 군가산점제에대해헌법재판소가최종적으로위헌판결을내린것이다. 한편에서많은남성들이분노했지만, 다른한편에서또한많은사람들은남녀평등을향해한국사회가한걸음더나아간것이라고여기며기뻐했다. 정확히무슨일이있었던것일까? 이문제는 1997년외환위기와 1998년김대중정권의등장과밀접하게연결되어있다. 외환위기를겪으면서국내의많은기업들은도산하거나구조조정을해야했다. 이과정에서대량의실업자가양산되었고, 거리에는노숙자들이넘쳐났다. 4년제대학만졸업해도어렵지않게취직하던시대가끝난것이었다. 1980년대의경제적호황속에서늘어난대학정원은오히려대규모대졸실업자를양산했으며, 취직을위한대졸자들간의경쟁은점점치열해져갔다. 조기퇴직과명예퇴직을강요하던사기업을피해취업준비생들은신분이안정적인공무원이되기를점점더바라게되었다. 이런사회경제적상황속에서 7급및 9급공무원선발시험과공기업사원채용시에군필자에게부여되던가산점에대해헌법소원이제기되었고, 1999년에군가산점제도가위헌이라는판결이나온것이다. 엄밀히얘기하면군복무에대해가산점을부여하는제도가위헌이라는판결은남성들의군복무에대한어떤형태의보상도주어져서는안된다는것이아니라, 그저공무원채용시에당시군필자에게부여되던가산점이남녀평등이라는헌법의원칙에어긋날정도로과도하다는것이었다. 그러나이판결로인해 1969년이래유지되던제대군인에대한가산점제도는사라지게되었고, 상대적박탈감을느낀남성들은불만을쏟아내기시작했다. 이런상황속에서 1990년대이후로여성의대학진학률이꾸준히높아진결과로서여성은여전한사회적차별에도불구하고점점더많이경제활동에뛰어들게되었고, 그것이남성들에게는경쟁이격심해지는것으로여겨지게되 - 265 -

었다. 민주주의와평화, 인권을기치로내걸고집권한김대중정권은신자유주의적경제개혁과병행하여사회의자유화와평등화를추진했다. 그리하여이정권에서여성부가최초로태어났으며국가인권위원회도등장하였다. 이런배경속에서오랫동안숨어있던병역에대한부정적인식은수면위로분출되기에이르렀다. 공무원이되는데에도전혀도움이되지않는군복무경력은이제순전히시간낭비에불과한것이되었다. 병역에대한부정적태도는두가지방향으로나타났다. 한편에서사람들은과거와마찬가지로계속해서은밀하게할수있는대로병역을기피하기위해노력했고, 다른한편에서사람들은, 특히그런노력에실패하여병역의의무를불가피하게마친경우, 병역의의무를어떤이유에서건이행하지않은사람들을비난하며공격했다. 그런비난과공격은여성을향하기도했고, 연예인을향하기도했고, 스포츠스타를향하기도했으며, 특권층의자녀들을향하기도했고, 양심적병역거부자들을향하기도했다. 얼핏보기에이런분노와공격은매우정당하고평등주의와민주적심성에뿌리를두고있는듯하지만, 사실그것은상대적박탈감에근거한것이었다. 공적이익의달성을위해기꺼이자기를희생하려는태도와관련된것이아니라, 자기만손해를볼수는없다는손실만회심리와관련된것이었다. 이런상황속에서군대에가는것에대한체념적인식과비하적인식은사회에만연하게되었다. 병역의의무를가능한대로기피하려는노력은 모병제담론 의형태로도나타났다. 군사전략적차원에서모병제를도입하는문제는군현대화와관련해예전부터논의되어왔던것이지만, 이것이대중적수준에서활발히논의되기시작한것이다. 이것은사회의신자유주의적변화와함께개인들의위험기피적성향이매우증가한것과밀접히관련된다. 이는또한경제위기를거치면서일어난사회양극화와관련되는데, 군인이라는직업은물론이고병역이라고하는국민의보편적의무마저, 마치쓰레기를치우는일이그렇다고여겨지듯이, 일정한경제적보상과함께사회의하층민에게전가되어야할일종의 더러운작업 정도로인식되기에이른것이다. 또다른형태의병역기피노력은이민과 원정출산 의형태로나타났다. 이것은병역을기피하는것이아니라, 아예국민됨을기피하는것이었다. 1997년의경제위기이후많은중산층가정이해외로이민을떠났는데, 이를통해그들은미성년자식에게서병역의의무를당당히벗겨줄수있었다. 국내에계속거주하는경우에도적지않은사람들이괌과같이무비자로입국할수있는곳에서자식을출산함으로써미국국적과함께병역면제의혜택을제공하였다. 이들은도대체누구일까? 이들은 60년대에군대에가서병역의의무를마친사람들의아들들일것이며, 70년대에태어나 90년대에대학을다니고병역의의무를마친 - 266 -

사람들일것이다. 그런그들이자식에게서병역의의무를벗겨주기위해기꺼이이민을가고원정출산을한다. 도대체무슨일이벌어진것일까? 그들은, 그리고그들의아버지들은군대에서도대체어떤경험을했기에이런결정을했을까? 신성한국방의의무 는지배계급의기만적구호였고, 억울하게군대에다녀온사람들이자기를위로하기위해, 그리고남을공격하기위해사용하는수단에불과한것인가? 한때묵묵히자신을희생해가며병역의의무를감당하던영웅적남성들은사라지고이제가능한대로병역을기피하고, 안되면편한곳에라도배치받기위해노력하고, 2년이라는시간적손해를국가가어떻게든보상해줘야한다고, 그렇게할수없다면여성도똑같이병역의의무를지게해야한다고주장하는연약한남성들만넘쳐나게되었다. 공공의이익이무엇인지를물으며그것을달성하기위해위험을감수하는시민이아니라, 단지사익이무엇인지를물으며사익을위해최대한위험을기피하는시민이등장한것이다. 이런시민들의모습이독특한방식으로나타난것이 2000년대이후의촛불집회이다. 촛불 은비폭력평화시위를상징한다. 한편으로그것은폭력을쓰지않고도충분히소기의목적을달성할수있는문제와관련해시위를한다는것을의미한다. 광화문광장에몇백만명이모인다고하더라도그냥촛불만들고서있다면, 도로교통이방해되는것외에과연어떤피해가시위의대상에게돌아가고, 그로인해어쩔수없이그시위의대상이애초의결정을바꾸게될까? 여론의흐름을바꾸고, 그로인해정권의정당성에손상이가고, 그럼으로써국정운영에어느정도지장을받을수는있지만, 노동자들의파업이나, 1960년대와 70년대에유럽에서나타났던것과같은, 요인의납치나암살과같은방식으로직접적인피해를입힐수는없다. 그렇기때문에처음에는촛불집회를개최하다가도어느순간에인내력이떨어진시위대의일부가폭력을사용하는일이생긴다. 흥미로운것은이런폭력의충돌순간에앞에서언급한위험기피적시민의모습이시위대와경찰양측에서모두나타난다는것이다. 촛불집회에참여한다수의시민들은그런폭력을감당할수없다. 왜냐하면그리큰위험을예상하지않고참가했기때문이다. 그상징이바로 유모차 이다. 유모차에아이를태우고나올정도로집회에위험이없다고여긴것이고, 그이상의위험이있다면애초에참가할의사가없다는뜻이다. 그러나그런위험을감당할의사가없는것은병역의의무를대신해경찰로서복무하고있는쪽도마찬가지이다. 1980년대와 90년대의시위현장에서쇠파이프와화염병을든대학생들과최루탄과곤봉을든전투경찰이맞붙는현장에서엄살은통하지않았다. 그러나오늘날의촛불집회현장에서시위대와경찰이충돌한후에인터넷공간에서는시위대를비난하는의무경찰의목소리를심심치않게들을수있다. 비록경찰이지만원해서복무하는것이아니라 - 267 -

병역의의무때문에억지로복무하는것이므로시위대의폭력이자신들에게가해지면너무억울하다는것이다. 오늘날의시위현장에서경찰과시위대사이에서는군인과민간인사이를가르며적용되는비대칭적인정의의원칙이좀처럼적용되지않는다. 즉전쟁중에도민간인의피해를최소화하기위해군인은스스로위험을감수해야한다는원칙이경찰과시위대에게는적용되지않는다는것이다. 의무복무를하고있는경찰들은마치자신들도보호받아야하는민간인인것처럼여기며, 자신들을공격한시위대가오히려복면을썼다느니폭력을휘둘렀다느니말하며, 그러니까자신들도관등성명을댈수없고, 즉익명성에숨고, 자신들의피해를최소화하기위해차벽을이용하고물대포를이용할수밖에없다고주장한다. 이런위험기피적시민들이과연군인이될수있을까? 군대를통해서라도다시위험감수적시민으로바뀔수있을까? 그럴수없어보인다. 오늘날대한민국의군대는오히려군대를기피하는사람들의손실기피심리를인정하면서오히려그심리에부응해일단군대에만오면군대안에서최대한손실을기피할수있도록해주겠다며유인하고있다. 그러나그런유인책은그런손실기피심리를긍정함으로써더욱강화할뿐이다. 텔레비전의제공은휴대전화의사용과인터넷사용으로이어지고, 학점취득의기회는학위취득으로이어질것이고, 사병봉급의인상은결국직업화로이어질것이다. 이모든편의의제공을하지말아야한다는뜻이아니라, 복무의동기를더적극적인것으로바꾸지않으면그어떤편의의제공도병사들이겪는상대적손실감을채워줄수없을것이고, 그것은결국의무복무제의붕괴로이어지게될것이라는뜻이다. 우리가오늘날목격하고있는병역의위기는단순히징집제도의위기가아니다. 그것은동시에민주주의의위기를의미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공통의경험과기억을간직한국민을요구하며, 동료시민을평등한존재로여길수있는시민을요구하며, 공적인일에참여할수있는능력과덕을갖춘시민을필요로하기때문이다. 보편적병역의의무는그런의미에서, 비록지난세월동안여성을그의무의이행에서배제함으로써사실상이등국민으로만들어왔고남성들사이에서도불공정하게부과되어왔지만, 한국사회의민주화에커다란기여를했다. 사회의근대화와산업화에문화적으로나기술적으로기여했고, 비판적시민의식의성장에도간접적으로기여했다. 그러나오늘날이보편적병역의의무가신성하게여겨지기는커녕오히려골칫거리처럼여겨지면서민주주의의유지와발전을위한정치문화적토대가함께흔들리고있다. 만약보편적병역의의무가사라진다면, 과연무엇이그기능적등가물로서민주주의를정치문화적으로뒷받침할수있을까? - 268 -

IV. 병역은어떻게될것인가 지금까지이글은구한말에자발적결사체속에서탄생했던시민이일제강점기동안군사적단체들속에서유지되었다가해방과분단, 전쟁을거친후에 1980년이후에등장했다가 2000년대에들어급속하게다시사라져가는과정을군대와관련하여살펴보았다. 이글에서관심을가지고그행방을추적한시민은그저한정치공동체의구성원을의미하지도않고, 시장에서사익을추구하며거래하는시민을의미하지도않는다. 이글의관심대상인시민은오히려고래의공화주의적시민과같은것인데, 그는자신의조국과의관계속에서자발적으로복종하고저항하고협력하는존재이다. 이런시민을 덕이있는 시민이라고부른다. 시민의 덕 (virtus) 은능력을의미한다. 즉 할수있다 는것이다. 할수있다 는것은동시에 하지않을수있다 는것을의미한다. 왜냐하면, 하지않을수없다면, 그것은기계와같이하는것을의미하고, 그런의미에서그것은오히려무능력을의미하기때문이다. 시민에게불복종의능력, 저항의능력이, 그리고또한복종과협력의능력이모두있어야하는이유이다. 이런시민의능력은참여를통해비로소길러진다. 고대부터지금까지모든시민들이참여할수있는가장중요한국가기구는바로군대였다. 정치와행정이비교적소수의탁월한시민에게개방된일이었다면, 군대는그야말로모두에게개방된일이었다. 그리고군대에참여함으로써비로소평민은진정한시민으로거듭날수있었다. 그곳에서시민들은평등을경험할수있었고, 한나라의국민으로서공동의기억과감정을가질수있었다. 한국에서도군대는바로이런평등한경험의공간이었고, 평등한학습의공간이었고, 평등한성장의공간이었다. 그러나오래지속된군부의지배는군대와병역에대한사회의부정적인식을낳았으며, 그결과군대는진정한국민의군대가되지못했다. 근대화초기에사회의발전을주도했던군대는점차사회의발전속도에뒤지게되었고, 급기야병역은오늘날순전히개인에게손해가되는것으로인식되기에이르렀다. 군대는한국인의역사속에서끊임없이새로운유형의영웅을배출했다. 일제시대에해외무장독립단체들에서활동한자기희생적전쟁영웅들은 6.25 전쟁때에도다시등장했다. 1960년대와 70년대의근대화와산업화의시기에는자기자신을군대와공장이라고하는매우익숙하지않은근대적공간에끼워맞추며헌신한많은근대화영웅과산업화영웅이등장했다. 그성과에힘입어 1980년대와 90년대에는한국사회의근대화과정과군대의역할을성찰하며비판하는성숙한시민영웅이등장하기 - 269 -

도했다. 이모든과정에서군대과국민의보편적병역의무는중요한역할을했다. 그러나오늘날군대와병역의의무는위기를맞고있으며, 자기를희생하는영웅은이제, 헐리우드영화속의영웅들처럼, 대중문화적소비상품으로만남게되었다. 시민은사회를구성하는주권적ㆍ주체적개인이다. 시민은사회속의다양한개인들의이해갈등과계급적대립으로인해파열되기쉬운사회질서를공적담론과공적기구를통하여유지존속시켜나아가는근대적개인이다 ( 송호근 2013: 20). 보편적병역의의무는지금위기에처해있다. 이위기를극복하는길은그위기에관해모두함께공적으로논의하고무너져가는제도를복구함으로써대한민국이라고하는민주공화국의질서를유지하고존속시켜나가는것이다. - 2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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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조성환 ( 경기대학교 ) 국가발전과시민참여의포괄적, 구조적맥락에서대한민국의국방사를탐구하고서술한본연구는첫째, 국가발전과국방발전, 시민의국방기여와국가통합의유기적관계에대한포괄적관점을정립하고현대사연구의다양한콘텐츠를구축, 개발하는데기여할것이다. 둘째, 대한민국의국방사의국가발전제부문에기여한인물의사상과활동에대한학술적평가와역사사료의개발과, 전시자료의발굴에도움을줄것이다. 셋째, 국방사분야와연관된제반분야의연계영역과활동도발굴할수있을것이다. 넷째, 학술적연구서의출간을통한대국민계몽, 국방사관련사료수집, 발굴및개발, 그리고전시자료의확보등을통해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현대사연구의활동을심화, 발전시키는데에기여할것이다. 총 8장의세부주제들은아래와같은연구결과로요약될수있다. 첫째, 홍선표박사가수행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군사활동과항일무장투쟁의군사 ( 軍史 ) 는대한민국은해방직후몇몇정치인들의주도에의해만들어진것이아니라수많은역경과질곡속에전개된한국독립운동과그러한독립운동을가능하게만든강인한독립정신의토대위해탄생되었다는전제에서항일투쟁의군사를정리하였다. 이연구는대한민국임시정부가자체의유지도쉽지않은상황에서독립전쟁을선포하고군사정책을수립하며항일독립운동을전개했고, 독립운동의과정속에임정의역할과위상이흔들릴때도많았지만좌우의민족세력을아우르며독립운동의중추기관으로서입지를다졌다는것을상세히서술하였다. 홍박사는 3 1운동전후만주지역에서결성된독립군단들은최일선에서일본군과직접맞서싸웠고, 독립전쟁을실질적으로실천했던이들독립군단들은열악한군비조건과이념대립의한계속에서 1930년대후반까지지속적이고끈질기게항전했다는점을서술했다. 아울러만주지역항일무장투쟁은성공과실패라는관점에서잣대를잴수없는우리민족의강인한독립정신의표상으로정리된다. 한편, 홍박사는해방후성립된대한민국의국군은대한민국임시정부를비롯해만주와중국관내에서전개된독립군의군사활동과이러한독립군을계승 발전시킨한국광복군에서그 - 273 -

기원을찾아야한다고주장하면서국방과군사의근원을한국독립운동의역사에서찾는노력은대한민국의근본을설정하고미래발전의좌표를확인하는소중한작업이라는점을강조했다. 둘째, 김열수교수는 건국 전쟁, 그리고한미동맹 의논제를통해해방과건국시기의대한민국국군의창설의의미를기술하면서 6.25전쟁과한미동맹의국방사를서술하였다. 김교수는대한민국임시정부가주체가되어항일투쟁에진력했던세력들이해방과더불어귀국함에따라이들이정부수립의주체가되었고창군의주체가되었고, 미군정기간동안경찰예비대의역할에머물렀던경비대는정부수립과동시에국군에편입되었음을서술하였다. 이연구에서는미군정시기의반란사건이정부수립과더불어숙군작업이진행되었고숙군이어느정도마무리된상태에서 6.25전쟁이발발한창군직후의한국군의한계와문제점이서술되었다. 김교수는김일성이기획하고스탈린과모택동이지원하여남침한적화전쟁의 6.25전쟁발발초기의한국군과북한군의전력차이함축적으로정리했다. 즉, 북한군은소련제무기로완전무장했고, 북한군의 1/3은항일투쟁경험이있는전사들로채워졌는데비해 6.25전쟁이발발했을때한국군은 10만명규모였으나단한대의전투기와단한대의탱크도없었다는점을강조했다. 김교수는유엔안보리결의에의한연합군의참전, 인천상륙작전을통한전세의역전, 그리고중공군의개입과 1.4후퇴, 소모전적인교착상태와정전협정체결이라는 6.25전쟁의전사 ( 戰史 ) 를국방사의차원에서재평가하였다. 아울러김교수는한국이미국과동맹조약을체결한것은이승만대통령의힘의컸음을적시했다. 이대통령이미국에대한북진통일의사를표명하고반공포로의석방함으로써한국은미국과의동맹조약을체결할수있었다고기술했다. 동맹조약체결로한국과미국은동맹국이되었고연합군이된것임을밝혔다. 김교수는한국과의동맹조약체결이후미국은한국의부흥과한국군의군사력건설을적극적으로지원하였고한국은적극적인산업화를추진하면서국력을신장시켜 한반도방위의한국화 가서서히진행되었음을서술하였다. 이에따라주한미군규모도점차축소, 평시작전통제권전환, 조건에따른전시작전통제권도전환하도록합의한역사적맥락이서술되었다. 김교수는일방적으로미국의지원을받았던한국이이제는주한미군에대해방위비를분담할정도로달라졌고주한미군주둔군협정, SCM과 MCM이라는안보협력체제가정착됨으로써한미동맹의제도화도이루어진한미동맹사의진화를서술했다아울러김교수는한미연합사령부를창설이후의연합작전체계와고양된작전능력으로다양한한미연합연습및훈련을주기적으로실시함으로써북한의위협을억제하고유사시이를격퇴하는명실상부한연합군으로발전하고있음을기술했다. 김교수는짧은기 - 274 -

간동안한국군은한미간의동맹협력으로구식소총부대에서첨단정보군으로탈바꿈하고있다고결론맺었다. 셋째, 윤지원교수는 탈냉전시기한국군의파병과국제기여 라는제목으로산업화와민주화를거처세계의중심국가가된대한민국이탈냉전이라는신국제질서의평화와안전에기여하는한국군의해외파병을서술하였다. 윤교수는 1950년한국전쟁당시국제사회는연합군을파병하여자유민주주의의가치를수호를위한노력과희생을아끼지않았음을적시하고, 한국은베트남전을시작으로국제사회의평화유지, 민주주의수호, 재난구호활동을위한노력에동참하고있음을기술하였다. 특히윤교수는 1990년냉전의해체와함께지역분쟁의성격의빈도가빈번해짐에따라우리정부는이들분쟁지역에대한 PKO, 다국적군파병에있어적극적으로대처하고있음을상세히서술했다. 윤교수는우리군의해외파병에대한정부의적극정책과파병지역에서의우리군의눈부신활약, 그리고파병지역정부, 주민그리고국제사회로부터긍정적인평가를조명했다. 우리군은현지주민들의문화를존중하고배려하며주민들이필요로하는활동을효과적으로수행함으로써 다국적군의왕, 신이내린선물, 민사작전의모델 이라는평가를받고있다. 이처럼우리군은파병지역에서의정치적평화유지활동을넘어인도지원및재건지원활동을효과적으로전개함으로써주민들의보다나은삶실현에기여하였다고평가했다. 윤교수는탈냉전이후우리군의해외파병을국제기여적측면과국익적측면에서분석했다. 윤교수에따르면탈냉전이후증가한지역분쟁과대규모자연재해로인한인도적참상에대처하기위한국제사회의공동노력에우리군의역할이증가하고있으며, 실제로우리군은그동안의파병현장에서국제사회로부터매우긍정적인평가를받고있다고한다. 하지만 2010년에제정된 UN PKO법 은유엔주도의평화유지활동을목적으로하는파병에대해서만내용과절차를규정하고있어냉전이후다양한목적 ( 지역연합의요청에의한다국적군파병, 재난구호, 인도지원, 국방교류협력등 ) 의수행을위해파병되어온국군의해외파견규정이제한적이라고지적되었다. 윤교수는탈냉전기다양한형태의국제분쟁과국제사회에서높아진경제적외교적위상에걸맞는공공외교의수단으로우리군의파병을위해 국군의해외파견활동참여에관한법률안 이조속한제정되어여한다고제안했다. 넷째, 박민형교수는 한국국방의정치경제적동학 : 자주국방과안보경제 라는제목으로한국국방경제의이론과역사를서술하였다. 박교수는안보와경계의상호연계성을전제로한국국방의정치경제적역사를되짚어봄으로써미래대한민국의국방력건설방향을제시했다. 박교수는자주국방이기치를내걸고추진해왔던한국의 - 275 -

국방발전의과정을살펴보고, 당시의경제상황과현재의경제상황을비교함으로써미래한국의국방이나아가야할방향을설정하는데하나의지표가될수있는함의를추출하려했다. 박교수의연구에따르면현시대처럼국제화가진행되고있는상황에서자주국방이란현실적으로정치적수사에불과할수있다. 각국가및지역간상대적의존성이높아짐에따라자국의힘만으로자국의안보를지키는것이불가능하기때문이다. 따라서많은국가들은자국의힘을키우는것과동시에동맹, 다자안보등을통해다층적인안보확보를위해노력한다. 하지만명심해야할것은일국의안보를키우기위해서는우선적으로자국의능력이바탕이되어야한다는것이다. 그렇지않으면국가주권에대한문제해결시자주적선택이제한된다는것을우리는지난역사를통해직접경험해보았다는점이지적되었다. 현재한국은세계경제 10위권의대국으로성장하였다. 박교수는이러한경제규모는이에부합하는군사력수준을요구하기도하지만군사력수준을높일수있는바탕이되기도한다고판단했다. 물론국가의모든예산이국방비에투입될수만은없다. 또한사회가다원화될수록복지등에대한국민적관심이높아져국방예산의확충이어렵기도하다는점도인정했다. 그러나경제적능력의향상을바탕으로한국의안보를스스로지키기위한노력을해왔던한국의국방사는적정수준의자주적능력이얼마나중요한것인가를잘보여주고있다는점을박교수는강조했다. 다섯째, 이준구박사는 한국방위산업의역사 라는제목으로한국방위산업의역사를서술하고민군및국제협력의유기적결합을주장했다. 이박사는방위산업발전에영향을미치는전략적요인으로국가통치리더십과국민안보의식, 경제적으로국가경제력규모, 군사적으로실전적군사작전수행능력을들었다. 이준구박사는일국의방위산업의유기적발전은정치적으로범정부차원의국방개혁추진, 안보중심전략문화구축, 경제적으로방위산업과경제동시발전전략, 국가기술과국방기술의동시발전전략, 선진국과의국방무역협정등의추진, 군사적으로는독자무기체계개발에근본이되는실증적군사제도도입, 합동또는통합군체제조기개편, 군정과군령의조기통합등이조기추진되어야할것을제안했다. 이와함께이박사는방위산업의실효적기획과합리적인추진을위해 실전 ( 實戰 ) 중심의군사전략과국방정책추진 을강조했다. 즉, 방위산업의발전은실전과동일한과학적훈련체계를조기에확충하고철저한전투실험제도를적용을위해실제전투에근접한실증을통해독자적인군사전략 전술을개발하고이에부합하는무기체계개발하는맥락에서이루어진다는것이다. 아울러이박사는방위산업의지속적이고비약적인발전을위해서는국가과학기술과방위산업의동시발전전략이채택되어야한다 - 276 -

고주장했다. 이박사는선진군사강국들이예외없이국가과학기술과방위산업의동시발전전략을추진하고있으며국방기술을중심으로국가기술역량을통합하여국가경제및방위산업발전에성공하고있다는점을들어한국의향후방위산업발전의과학기술역량을강조했다. 한국도 1970년대박정희대통령이이러한동시발전전략을채택하여안보와경제의딜레마를성공적으로극복한방위산업사의창조적역량을이어받아국방기술을중심으로국가민 군 산 학의모든연구기관을종합적이고도체계적으로운영하여국가경제와방위산업을동시에발전시켜야할것이다. 끝으로이박사는한국방위산업의전방위적발전을위해민군협력과국제협력기반의확충을주장하면서다각적인국방무역협정체결을주장했다. 여섯째, 최영진교수는 전쟁과안보, 국방건설의영웅 : 상징과재현의정치사 라는제목으로한국전쟁영화에대한분석을통해한국적전쟁영웅의전형이어떻게만들어졌으며, 시대적변화와함께어떻게변화했는지를탐색하였다. 아울러최교수는이를통해국가와시민과의관계변화를살펴보려고했다. 즉, 최교수는영화를통해시대를재구성함으로써, 역사적사실자체보다영화를통해구성된역사적사건이대중적기억의형성과변화를추적한것이다. 최교수는시대별로변화한전쟁영웅의전형을포착했다. 최교수의분석에따르면 1950년대한국전쟁영화는가족주의에기반한 육탄돌격형전쟁영웅 의전형을, 1960년대에는 순교자적헌신 이특히강조되었고, 1970년대는 산업전사의모습 을보여주고있다고정리했다. 이러한전쟁영웅상의변화는국가와사회의시대사적변화와연관을갖는동시에시민적의식의변화를반영하는것이다. 이러한맥락에서최교수는민주화와탈냉전시대의도래는새로운전쟁영웅의상을설정해나가도록했다고주장한다. 민주화와탈냉전시기의영화에나타난한국의전쟁영웅은한국전쟁과분단은재해석이라는새로운학술적, 지적 ( 知的 ) 분위기가반영되고되었다고평가되었다. 즉, 적으로서북한의존재를부정할수없지만, 격퇴나절멸의대상으로보기보다공존과공감의대상이기도하다는양면성과모순성에대한성찰이반영된다는것이다. 그런점에서우리의전쟁영웅은주어진시대를회의하고반성하면서자신을찾아가는, 즉수단적존재가아니라삶의주체로서역사를바라보려는자세가돋보인다고최교수는평가했다. 이러한측면에서최교수는전쟁과분단이라는구조적힘에대응할수힘은결국우리사회가그만큼구조적강제력에서자유로워졌다는것을의미하며, 국가와국민, 혹은사회와개인들관계에있어질적인변화가있다는점을강조했다. 결국, 최교수는민주화, 탈냉전의성숙된시대의도래와함께전쟁영웅의상이국가에종속된, 혹은국가발전을위해헌신하는전사의이미지에서벗어나, 자율성과주체성을갖춘성찰적전쟁영웅의이미지가들어오고있다고평가하고있다. 최교수는이러한자 - 277 -

율성이국가에대한이탈로간주할필요는없고, 오히려건강한국가는자율적주체들의유기적결합에의해더욱강력해지고더욱견고해진다고판단했다. 일곱째, 조성훈박사는 한국현대사와전쟁영웅 : 희생과기여의스토리 논제를설정하고 6 25전쟁, 베트남파병, 끊임없이계속되는북한의도발속에국민의귀감이되는호국혹은국방영웅을발굴하고정리하였다. 조박사의연구는그들의나라사랑정신을국민들에게알리기위한기초자료가될것이고, 충혼탑이나비건립, 현충일등의추모식, 위문등을넘어서광복이후현대국방사를풍부하게할수있는의미를지닌다. 조박사는전쟁영웅을기리는일이곧국가의존립과국가정체의방향을제시하는등대와같은역할을한다고본다, 그래서일찍이영국정부는제2차세계대전후 국방의일은전국민의과업 이라는방침을정하고학생들에게교육을강조했다. 북한에서는 1951년 9월부터 10월까지벌어졌던강원도인제군에있는 1211고지전투에참가한 영웅 인이수복을비롯한강호영, 조군실등대표적인전쟁영웅들을내세워생산을독려하거나수령과당에대한충성심을고취시켜, 전쟁영웅은북한주민에게친숙하다. 이들은교과서에서도널리소개되고있다. 이러한사례와달리우리나라의역사교과서에서는전쟁영웅에대해거의다루지않았음을비판적으로지적한다. 최교수는 1990년대문민정부이후에도국정교과서체제아래현대사의비중이높지않아, 6 25전쟁발생배경, 북한도발과전황, 휴전과전후복구, 영향등이간단히서술되는데그쳤고, 그분량도북한정권의수립을포함해서 4면정도였으며, 대학의교양서에서도이수준을벗어나지않고있음을지적했다. 조교수는상대적으로체계적으로발굴되고교육되고있는독립운동인사등 호국영웅 에비해미비한전쟁영웅으로상징되는 안보영웅 을체계적으로발굴하고홍보 교육하기위한기초연구를수행하였다. 조교수는전쟁영웅대상상자의범위와기준에대한학술적논의를소개하고 6.25전쟁, 베트남전쟁및여러안보영웅을 8개로유형화하여영웅적기준과행적내용을서술하였다. 조박사는한국의전쟁영웅의유형을, 전차파괴영웅, 적을격퇴시키기위해목숨을던진영웅, 특공대영웅, 부하와동료를구한영웅살신성인영웅, 재일학도의용군출신영웅, 첩보전영웅, 용병전술이뛰어난지휘관들, 경찰영웅등으로분류하고대표적인영웅에대해새로이사료를발굴하고행정의내용을서술하였다. 상당히세분화되어있는조박사의연구는한국현대사에서의전쟁영웅의재조명작업에기여할것이다. 여덟째, 홍태영교수는 근대국민국가, 공화주의적시민과군대 라는제목으로근대국민국가의공화주의적시민의군대참여와국가안보기여에대한이론적논거와경험적의미를제시한다. 홍교수는서구의국민국가건설과정을전쟁과군, 시민등의 - 278 -

개념을중심으로살펴보고그러한과정에서한반도에서는어떻게변형되고해결되는가를살펴보았다. 홍교수는한반도에서국민국가형성의과정은개항이후식민지지배기간동안반제국주의의과제에의한네이션의우선성과그에따른개인의미발달혹은네이션속에서개인의배치라는모습으로평가했다. 그리고해방이후는민주주의적정당성을확보하지못한국가권력에의해네이션이독점되면서이전의역사가재현되었고, 민주주의적주체의확립이라는측면에서장기간동안한반도의역사는저항적주체로서만존재하였고그역시집단적성격이강하였다는것을알수있다고서술했다. 홍교수는민주화이후의한국은민주주의와공화주의적통합의차원에서시민의문제를새로이설정하고있다고진단했다. 즉, 1987년민주화이후남한사회의민주주의적과제는새롭게드러나고있는대한새로운통합의방식을찾는것이일차적과제로설정될수있다는것이다. 이제한국정치는정당체계를통해대의제민주주의의틀을확립해가고있고, 정치를규정하고또한정치가해결해야하는다양한사회적쟁점들이부상하고있다. 민주화이전국가권력이설정한중심의제에의해국민이동원되었다면, 이제국민은주체로서자신의의사와이해관계를표현하고그것들의관계속에서정치가이루어지는체계가될때민주주의는안정적이될수있을것이라고평가했다. 홍교수는또한한국의국방은통일의달성에서국민 ( 시민 ) 의자기결정권이완성되고탈식민주의가완결된다는점을강조하고있다. 홍교수는 19세기말그리고 1945년이후두개의시점에서외세의의해한반도인민의자기결정권이억압되었던역사를기억한다면, 이제우리국민의자기결정권을회복하는것이그억압의역사로부터해방되는길이고대한민국과그안의국방의근대적완성에이르는길일것으로판단했다. 이러한맥락에서홍교수는통일은단순히감성적차원의문제가아니라대한민국이라는주권체의완성이자탈식민주의의궁극적인강령이라고평가했다. 아홉째, 공진성교수는 한국인과병역 : 시민형성과국민통합의주역 이라는논제로시민의군복무에대한공화주의적의미를부여했다. 공교수가관심을가지고그행방을추적한시민은그저한정치공동체의구성원을의미하지도않고, 시장에서사익을추구하며거래하는시민을의미하지도않는다. 공교수의관심대상인시민은오히려고래의공화주의적시민과같은것인데, 그는자신의조국과의관계속에서자발적으로복종하고저항하고협력하는존재이다. 이런시민을 덕이있는 시민이라고부른다. 시민의 덕 (virtus) 은능력을의미한다. 공교수는공동체적주체로서의시민의능력은참여를통해비로소길러진다는것을밝히고, 고대부터지금까지모든시민들이참여할수있는가장중요한국가기구는 - 279 -

바로군대였다는점을분명히했다. 즉, 정치와행정이비교적소수의탁월한시민에게개방된일이었다면, 군대는그야말로모두에게개방된일이었다. 그리고군대에참여함으로써비로소평민은진정한시민으로거듭날수있었다. 그곳에서시민들은평등을경험할수있었고, 한나라의국민으로서공동의기억과감정을가질수있었다. 공교수는한국에서의군대는바로이런평등한경험의공간이었고, 평등한학습의공간이었고, 평등한성장의공간이었다는것을서술하였다. 그러나오래지속된군부의지배는군대와병역에대한사회의부정적인식을낳았으며, 그결과군대는진정한국민의군대가되지못했다는점도지적했다. 그러나공교수는군대는한국인의역사속에서끊임없이새로운유형의영웅을배출했다는점을주목했다. 즉, 일제강점기에해외무장독립단체들에서활동한자기희생적전쟁영웅들은 6.25 전쟁때에도다시등장했다. 1960년대와 70년대의근대화와산업화의시기에는자기자신을군대와공장이라고하는매우익숙하지않은근대적공간에끼워맞추며헌신한많은근대화영웅과산업화영웅이등장했다. 그성과에힘입어 1980년대와 90년대에는한국사회의근대화과정과군대의역할을성찰하며비판하는성숙한시민영웅이등장하기도했다. 이모든과정에서군대과국민의보편적병역의무는중요한역할을했다. 그러나공교수는오늘날군대와병역의의무는위기를맞고있으며, 자기를희생하는영웅은이제, 헐리우드영화속의영웅들처럼, 대중문화적소비상품으로만남게되었다는문제점, 즉, 시민적덕성 의타락을염려하고있다. 이에대해공교수는시민은사회를구성하는주권적ㆍ주체적개인으로, 사회속의다양한개인들의이해갈등과계급적대립으로인해파열되기쉬운사회질서를공적담론과공적기구를통하여유지존속시켜나아가는근대적개인의의미를강조했다. 공교수는보편적병역의의무의위기를지적하면서동시에이위기를극복하는길을제시했다. 공교수는이위기에관해모두함께공적으로논의하고무너져가는제도를복구함으로써대한민국이라고하는민주공화국의질서를유지하고존속시켜나가는 공화주의적시민성 의정립을주장했다. 이상에서요약한본연구는군사사, 국가발전과시민참여, 국방영웅의재발견이라는대한민국국방사연구의새로운접근에해당하여하굴적인의미가부여되고동시에국가, 국방, 시민의유기적결합에의한새로운국방의상을정립하는데도움이될것으로기대한다. 공동연구에는엄밀한논지의일관성을유지하는것이쉽지않다. 그러나본연구는국가발전, 시민참여의포괄적맥락에서대한민국의국방사를재조명 - 280 -

하려는연구목적이유지되는가운데필진들의창의적이고발전적인국방사평가가시 도되었다. 본연구에참여한필진들의연구는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기획의도를더 욱심화시켜보다객관적이고정치한연구로정련될것이다. - 281 -

대한민국의국방사 : 국가발전과시민형성의국방사연구 연구용역최종보고서 대한민국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