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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同異) 문제와 결부지어 전문적으로 논증해온 연구 성과는 제한적이다. 이러한 이해구도에 입각하여 주희의 심성론과 수양론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를 통해 주희의 중화신설은 도남학과의 거리를 좁히는데 그 관건이 있었음을 논증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후반부에서 도남학파의 심성수양론에 관한 [도덕]교육학적 시 사점을 논하고자 한다. 이 때 본 논문은 도남학파의 심성수양론이 근본적으로 구성 적, 통합적, 체화적 접근을 시사함을 주장한다. 이러한 시도는 동양윤리의 관점에서 도덕교육 당위성의 이론적 논거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후 도남학파 의 경 공부론이 구체적으로 현대 [도덕]교육에 주는 함의를 마음챙김 과 일용 공 부와 사회적 실천 을 중심으로 논하고자 한다. 2. 선행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 앞에서 언급하였다시피 본 논문은 도남학파의 사상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으 며,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으로는 어떻게 진전 혹은 전변되었는가? 와 주희 사 상의 형성에 도남학파는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의 두 질문에 대해 주로 주목하고 자 한다. 여기서는 그간의 선행연구 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되 본 논문이 천착하고 자 하는 위 두 문제를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첫째, 도남학파의 사상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통시적으로는 어떻게 진전 혹은 전변되었는가? 일반적인 선행연구에 따르면 도남학파의 사상적 특징은 미발 일변 의 담론이라 할 수 있다. 도남학파의 사상적 특색은 미발수행법이라 볼 수 있 다. 도남학은 고요한 가운데 미발의 기상을 체인할 것[靜中體認未發氣象] 을 강조 한다. 즉 양시, 나종언, 이통이란 도남학파의 구성원 모두 이 점을 견지한다. 이러 12) 년 7월 현재 한국에서 도남학(道南學)에 대한 전문연구저서나 박사학위논문은 출간되지 않았다. 국내에서 도남학파를 통시적으로 다룬 논문으로는 延在欽(2005), 이승환(2008), 이천승 (2009), 김승영(2011)이 유일하고, 도남학파 구성원 가운데 양시, 나종언, 이통 개개인에 대한 연 구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양시나 나종언에 대한 연구결과는 찾아볼 수 없고(한국학술지인 용색인 2016-07-31 검색결과), 이통에 관한 연구가 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강신주(2005); 안영상(2005); 佐藤仁(1989); 최복희(1999; 2005)이다. 중국에서는 2권의 전문서적이 출간되었다. 劉京菊(2007), 承落启閩 -道南學派思想硏究 와 姚进生 編(2015)의 道南學派硏究 가 바로 그것 이다. 12) 2016-7 -
한 서술 방식은 우리 학계에서 일반적인 기술이다. 하군우(夏君虞)는 양시는 정호에게 편향되어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불교 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었으며, 고요한 가운데 미발의 기상을 볼 것을 강조한 학통 을 창건하였다. 나종언과 이통은 양시의 행적을 좇아 그것을 발양하였다. 고 서 술한다. 이러한 서술과 비슷하게 진래(陳來)는 다음과 같이 도남학파를 서술한다. 13) 양시로부터 이통에 이르기까지 도남학파는 中庸 의 윤리철학을 대단히 중요하 게 생각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미발이발설을 가장 중시하였다. ( ) 이로 인해 미 발을 체험하는 것 이 양시 문하의 기본 종지가 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나종언에서 이통에 이르기까지 명백히 드러난다. ( ) 그들이 일생 동안 힘쓴 일은 오로지 미 발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14) 이러한 관습적인 서술은 일본 학자에게서도 반복된다. 구스모토 마사쓰구(楠本正 繼)는 양시의 사상은 그 문인인 나종언에게 전해지고 또 나종언의 문인인 이통에 게 전해지면서 정(靜) 사상의 심화라는 특징을 갖게 되었다. 라고 말한다. 또한 스즈키 키츠(鈴木喜一)는 朱子學大系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5) 그[이통]는 의문이 있으면 반드시 정좌하여 [이치를] 체구(體究)해야 한다고 가르 쳤고, 고요함 가운데 中庸 의 이른바 미발의 기상을 체인하게 되면 세상 만사를 처리함에 있어 자연스럽게 절도에 맞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양시 문하에서 서로 전 한 지결인데, 고요함의 공부라 할 것이다. 16) 물론 이러한 서술은 주희를 연구의 중심에 두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가피한 것 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남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연구서적 역시 이러한 서술이 반복된다. 2015년에 중국에서 간행된 道南學派硏究 는 도남학에 관한 가장 최신의 전문적 연구서이다. 이 책에서 양시의 사상적 경향을 다루면서 말하기를 유작, 나종언, 이통이란 맥락에서 서로 전수한 지결은 이른바 미발의 중 을 체득 하는 것이었다. 라고 말한다. 이는 기존의 관점을 되풀이한 것이다. 17) 夏君虞(1976), 宋學槪要, 臺北: 華世出版社, 111쪽. 陳來(1987), 朱熹哲學硏究, 이종란 외 역(2002), 주희의 철학, 서울: 예문서원, 146쪽. 楠本正繼(1964), 宋明時代儒學思想の硏究, 김병화 외 역(2005), 송명유학사상사, 서울: 예문 서원, 227~228쪽. 16) 安岡正篤 編(1976), 朱子學大系- 朱子の先驅(下), 東京: (株)明德出版社, 10~11쪽. 13) 14) 15) - 8 -
이러한 점은 한국의 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양시는 미발의 중(中) 을 구하 는 것을 학문의 중요한 지결로 삼았고, 양시에서부터 나종언과 이통까지의 도 남학맥은 미발시의 체험을 강조 한다. 이러한 특징은 호상학이 이발찰식 을 강 조하는 것을 견주어 볼 때 더욱 두드러진다. 심지어 도남학파는 일상생활을 벗어 나 정적인 수양을 중시 했다. 이러한 견해는 널리 유포되어 있는 형국이다. 호 굉이나 장식이 찰식법을 강조하는 데 비해 양시나 이통이 제기했던 구중법(求中法) 이 이들에게 대비적으로 비추어지져 부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쓰치다 겐지로(土田健次郞)의 입장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양시[도 남학파]에 대한 기존의 이해방식을 반성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8) 19) 20) 21) 22) [일반적으로] 양시에서 나종언 이통으로 정(靜)의 심화가 이야기 되지만, 이것은 양시에 관해서는 그렇게 특징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 ) [양시가 묵식 을 강조한 것 등은] 정문 전체에서 보면 특히 눈에 띄는 정도는 아니다. [이는] 나 종언과 이통의 경향으로부터 회고해 본 논의일 것이다. 23) 그의 주장은 양시의 학문이 정호와 정이의 입장을 모두 수용하고 있으며, 양시의 학문을 고요함 으로 특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쓰치다 겐지로의 견해는 분명 기존의 이해방식에 비해서는 진일보 한 평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양시에 대한 쓰치다 겐지로의 엄밀한 평가도 여전히 도남학=고요함 이 전제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양시의 학문에서 정적 특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관찰결과는 도남학이 정적 특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할 개연성을 갖는다. 그러 姚进生 編(2015), 道南學派硏究, 厦門: 厦門大學出版社, 11쪽. 김승영(2011), 도남학파의 미발수행론 고찰, 동서철학연구, 한국동서철학회, 71쪽. 延在欽(2005), 北宋諸儒關於中和論之簡述, 한국철학논집, 한국철학사연구회, 17, 409쪽. 김제란(2003), 송대 유학에 미친 불교의 영향: 주자학의 성립 과정을 중심으로, 동양철학, 한국동양철학회, 19, 232쪽. 21) 김승영, 연재흠, 김제란과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는 논자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전병욱 (2008:44); 이천승(2009:24); 이승환(2012:12~18;23~25); 장창환(2014:47); 정은해(2014:29~31). 이들 의 주장인 모두 대동소이하다. 22) 도남학:호상학=미발:이발 이란 구분은 인상에 의거한 비평방식 이라 할 수 있다. 일단 호상 학:이발 이란 도식은 호굉(胡宏)에게 부합될 뿐이며, 장식에게는 적용되기 어렵다. 또한 도남학 이 전반적으로 미발수양법을 강조했지만, 단지 미발수양법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본 논문에서 는 도남학이 미발수양법은 물론 이발의 상황을 겨냥했음을 궁극적으로 논증하기로 하고, 호상 학 전반의 심성수양론 탐구는 본 연구자의 추후 과제로 삼고자 한다. 23) 土田健次郞(2002), 道學の形成, 성현창 역(2006), 북송도학사, 서울: 예문서원, 582쪽. 17) 18) 19) 20) -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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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구범위와 방법 본 연구자는 이정과 주희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도남학파 기존에 도외 시했던 사승관계를 중심으로 당시의 도학 담론을 해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의 연구범위는 이정, 양시, 나종언, 이통, 주희사상으로 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범위의 확정은, 그 범주에 대한 역사적 신뢰도와 사상사적 타당성에 대한 검토 가 수반되어야 한다. 일단 宋史 宋元學案 등의 자료를 충분히 검토해보았을 때, 이정, 양시, 나종 언, 이통, 주희에 이르는 사승관계는 역사적 사실이다. 본 논문이 상정하는 연구범 위의 신뢰도 문제는 주지의 인식만으로도 충족되므로 이에 대한 별도의 논증은 하 지 않겠다. 그러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본 논문에서는 본론 부분에서 이들 사 승관계에 관한 몇몇 전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어서 검토해볼 점은 이러한 범주 로도 송 대 사상사를 압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느냐 의 문제이다. 다음의 역사 자료 는 본 연구범위의 사상사적 가치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먼저 원(元) 대의 양유정(楊 維楨)은 순제(順帝)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린다. 26) 도통은 치통(治統)이 있게 하는 바로서 요 임금은 도를 순 임금에게 전해주고, 순 임금은 그것을 우(禹), 탕(湯), 문(文), 무(武), 주공(周公)과 공자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공자께서 세상을 뜨시고 그 전승을 얻지 못한지 백여 년 되었다가 맹자께서 [이를] 전승했습니다. 맹자께서 세상을 뜨시고 또 천 여년 동안 그 전승을 얻지 못했다가, 염계 주돈이와 이정 선생께서 [이를] 전승했습니다. 중립 양씨[楊時]에 이르러 우리 의 도가 남쪽으로 전했고 송 역시 남쪽으로 천도하였습니다. 양씨의 전승이 나예장 과 이연평에게 이어졌다가, 신안의 주자에게 미쳤습니다. 27) 앞에서도 언급했으나 본 논문이 상정하는 도남학의 범주는 양시, 나종언, 이통으로 하되, 그 사상사적 맥락을 구명하기 위해 이정과 주희를 함께 다룬다. 9번 각주 참고. 27) 陶宗儀, 卷3, 輟耕綠 正統辨, 道統者, 治統之所在也. 堯以是傳之舜, 舜以是傳之禹湯文武 周公孔子. 孔子沒, 幾不得其傳百有餘年, 而孟子傳焉. 孟子沒, 又幾不得其傳千有餘年, 而廉洛周程 諸子傳焉. 及乎中立楊氏, 而吾道南矣. 旣而宋亦南渡矣. 楊氏之傳, 爲豫章羅氏, 延平李氏, 及于新 安朱子., 본 자료는 余英時(2012), 朱熹的歷史世界 -宋代士大夫政治文化的硏究, 北京: 三聯書 店, 17쪽에서 재인용함. 이 자료의 본의는 원(元)이 남송의 정통성을 얻었으며, 북방의 요나 금 에 있지 않음을 주장하기 위하여, 도남학의 계보를 논거로 삼았다. 도남학으로 인해 도의 소재 [道統]가 북방이 아닌 남방으로 전해졌고, 이는 권력의 정당성[治統] 역시 남송에 있었음을 함 26) - 12 -
또한 宋元學案 에서 황백가(黃百家)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정이 맹자 이후 전해지지 못했던 도리를 유경(遺經)에서 얻어 천하에 번창하게 하였다. 도리를 심오하게 깨우친 자를 고제(高弟)라 불렀거늘, 유작, 양시, 윤돈, 사 량좌, 여대림이 가장 뛰어났다. [이정의] 사람들 중에서 각기 그 전함을 보자면 오 직 구산(龜山)의 후계에 삼전(三傳)으로 주자가 있어서 [유가의] 도를 빛나게 하여 천하에 비추었으니, 정호께서 나의 도가 남쪽으로 가는구나 라고 자송(自送)한 것 이 앞서 살핀 것이라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28) 위 논자들은 도남학적 전통이 이정과 주희를 매개하는 특징을 갖고 있음을, 일찍 이 간파하였다. 주자적 도통론이 이정과 주희 사이의 시공간을 진공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그 잃어버린 고리는 위의 두 가지 자료가 함의하는 바로 보완할 수 있다. 본 논문이 염두하고 있는 도남학파의 사승관계가 사상사적 이해범주 에 삽입될 때, 정주 리학의 전변 과정을 폭 넓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이 상정하고 있는 연구범위는 남송 시기의 도학의 윤곽을 헤아리는 데 있어 충분히 타당하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이정에서 주희 간의 공백기를 도남학파라는 한 계통으로서 고 찰하겠다. 그러나 본 논문이 상정하고 있는 연구범위와 관련하여, 반드시 숙지해야 할 것이 있다. 본 논문은 이정에서 주희 사이의 사상사적 연속성을 연구해야 한다는 의미에 서 도남학파를 연구범주로 상정하였다. 그러나 이 연구범위 설정이 이정의 학문을 양시의 계파만 전수받았으며, 이정학 혹은 주자 사상이 도남학의 틀 안에서만 고찰 되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본 연구자는 주학을 사상사적 연속 의 각 도에서 이해하기 위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방식이 필요하며, 도남학적 렌즈 역 시 그 접근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어서 본 논문은 다음의 연구관점[혹은 방법]을 택하고자 한다. 29) 의한다. 참고로 양유정은 본래 남송의 핵심지역인 복건[閩] 출신이다. 宋元學案, 卷25, 龜山學案, 百家謹案, 二程得孟子不傳之祕于遺經, 以倡天下. 而升堂奧, 號 稱高弟者. 游楊尹謝呂其最也. 顧諸子各有所傳, 而獨龜山之後, 三傳而有朱子, 使此道大光, 衣被天 下, 則大程道南目送之語, 不可謂非前譏也. 여기서 앞 구절(~號稱高第者)의 출전은 胡安国龟山 先生墓志铭说 이다. 29) 이정-주희 사이 시기에서 호(胡) 씨 가학의 중요성을 부각한 Hans vans Ess(2004)의 연구는, 당 시의 사상적 흐름에 있어 더욱 더 다층적인 이해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28) - 13 -
첫째, 통시적 해석방법 이다. 일반적으로 통시적 관점이라 함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떤 대상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는 방법 을 의미한다. 본 논문이 이정, 양시, 나종언, 이통, 주희의 심성수양론을 역사적 순서[사승관계]에 따라 논의할 때, 통시 적 관점은 이미 전제되어 있다. 물론 통시적 관점은 그간에 주학 연구방법에 있어 시도되어 온 관점이기는 하지만, 그간에는 주희의 사상형성을 인물사(人物史)의 관 점 아래에서 고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사상사적 변화의 문제는 단지 한 명 의 인물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어떤 인물이 새롭게 자득하여 담론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면 사상사적 조류에서 그 연속성을 고찰해보아야 한다. 둘째, 동양학 분야의 대표적 연구방법인 개념 분석방법을 활용한다. 본 논문은 이정에서부터 주희의 심성수양론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데, 그 대상의 양적 수준은 상당하다. 따라서 특정한 개념어를 중심으로 그들의 담론을 분석할 필요성이 제기 된다. 이 때 분석할 개념어는 다음과 같다. 심성론에 있어서는 심(心), 성(性), 미발이발(未發已發) 과 같은 개념어를 분석하여 논한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하여 본론 부분을 성론(性論)과 심론(心論)으로 대별지어 논의하였다. 수양론에 있 어서는 경(敬)이나 격물(格物)과 같이 [도학 담론에서] 특징적인 용어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그러나 몇몇 사상가를 논급함에 있어서는 그 사상가가 제기한 고 유 개념어를 발굴하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면 본원(本源), 묵좌징심(默坐澄心) 등이 그것이다. 셋째, 문헌학적 판본연구법을 사용한다. 양시와 주희의 사상적 변화를 조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당 자료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가 필요하다. 양시의 경우, 본 논 문에서는 龜山先生語錄 에 부기된 연도자료를 근거로 하여 양시의 이론 변화과정 을 추적하였다. 현재 까지 양시의 사상적 변화를 체계적으로 다룬 전문적인 연구는 없다. 그러므로 양시 관련 어록을 문헌학적으로 추적하는 본 논문의 작업은 의미가 적지 않다. 마지막으로, 비교적 관점(comparative perspective) 을 도입한다. 비교는 일정한 기 준에 따라서 상호 간의 동이를 준별하는 것 을 말한다. 본 논문은 도남학파 심성수 양론의 변천을 살펴보고자 하므로 앞선 작업에서 추출한 개념들의 동이를 명백히 30) 30) 주희의 사상변화에 대해서는, 그의 서간(書簡) 자료에 대한 선행연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 다. 호이트 틸만(Hoyt C. Tillman), 진래(陳來) 등을 비롯한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활용하여, 본 논문은 각 사상가 혹은 도남학파의 사상적 전개과정을 탐구한다. -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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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도남학의 사상적 배경 1. 도가 도교와 불교의 심성수양론 본 장에서 연구자는 목적은 당송 시기의 심성수양론을 논하여 도남학파의 건립 의 사상사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이 문제를 논함에 있어 유 불 도 삼교(三敎)의 교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심성 관념의 복잡화, 미발(未發) 체험 등으로 대표되는 도남학의 특징을 선진 유가 영역 안에서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도가 불교와 견줄 때 그 상호공약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이 다. 다만 본 논문의 주제상 도불의 어느 것이 도남학파에 영향을 주었다는 인과관 계를 논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연구자는 본 장에서 도남학파의 몇몇 단 초를 당송 시기 도가 불교에서 탐색해 논의의 지평을 넓히고 동시에 구체화하고 자 한다. 1.1. 불성 佛性 과 도성 道性 ( ) ( ) 송대 유학의 특징은 마음 혹은 본성을 리법으로 여기고, 그것을 수양상의 준거좌 표로 삼는데 있다. 도남학파 역시 자기 심성에 내재되어 있는 본연성을 체인할 것 을 강조했는데, 이는 반드시 심성 그 자체를 리법으로 여기는 담론이 전제되어야 한다. 성즉리 혹은 심즉리 명제가 분명 맹자의 심선(心善) 관념 과 맞닿아 있기는 하지만, 철학적 관념의 리(理) 관념은 선진(先秦) 유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물 론 유학 내부에도 도기(道器) 관념은 존재하였으나, 그것이 당송 시기 이전에 철학 적 담론 으로 구현되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본성론과 연관 되지도 않았다. 31) 32) 33) 이는 서복관(徐復觀)의 中國人性論史 에도 언급되지만, 김병환 교수는 강의 및 여러 저작을 통해 맹자의 인성론 본의가 심선론임을 누차 강조하였다. 32) 마찬가지로 담무참(曇無讖, 385~433)의 涅槃經 한역을 계기로 불성론이 중국에 소개되었다. 涅槃經 은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의 명제를 공표했는데, 이 내용은 世說新 語 의 주(注)에도 언급될 정도로 파급력이 있었다. 석씨(釋氏)가 일체의 중생에게도 모두 불성 이 있다[一切衆生 皆有佛性] 라 하였으니, 다만 지혜를 닦고 번뇌를 단멸시키고 만행(萬行)이 구비되어야만 족히 성불(成佛)할 수 있다(劉義慶 選, 劉孝標注, 世説新語, 卷上之下, 釋氏 31) - 16 -
華嚴經 경문에 이미 자심즉불법(自心卽佛法) 및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이가 없다. 라 언급되었고, 華嚴經 大乘起信論 등이 한역(漢譯)되면서 리법 적 세계관이 중국 대륙에 유행했다. 예를 들면 법장(法藏, 643~712)은 진심(眞心) 개념으로 징관(澄觀, 738~839)은 일심(一心) 개념을 통해 마음이 곧 본연계의 리법 임을 누차 제창했다. 34) 35) 일체 색을 초월한] 진공(眞空)의 제일은 리법계이다. 그 실체를 헤아려본다면 오 직 본심일 뿐이다. [ 36) 규봉 종밀(圭峰 宗密, 780~841)은 리법계의 근원이 본심 에 있음을 명확하게 하 고 있다. 또한 유사하게 大乘止觀法門 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심(眞心)으 로 하여금 범부와 성인이 모두 같게 되고, 심체에는 일체의 법성(法性)이 구비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일체의 법은 모두 마음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나 심 성의 연기는 상(相)의 차별이 없다. 다시 상(相)의 차별이 있기는 하나 오직 한 마 음을 본체로 삼고 본체를 작용으로 삼으므로 실제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라 하였다. 여기에서는 심을 본체로 인식하고 있고, 모든 법상이 심 밖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華嚴經 의 근본정신이라 할 수 있는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이다. 법장은 자성청정원명체(自性淸淨圓明體) 를 설명하기를, 37) 38) 39) 여래장(如來藏) 속의 법성의 본체로서 본디 본성 그 자체로 자족하니 더러운 데 있어도 때 묻지 않고 닦아도 더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의 청정함 經曰, 一切衆生皆有佛性, 但能脩智慧, 㫁煩惱, 萬行具, 足便成佛也. ). 이러한 불성론은 맹자의 성선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선 혹은 성불의 가능성이 본성에 정초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며, 그 이상의 본체론적 의미를 담지하고 있지는 않았다. 33) 본 논문에서의 불교 이해방식은 荒木見悟(1993), 佛敎と儒敎 를 따르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다만 그 논의범주를 다소 확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34) 大方廣佛華嚴經 (10, 688a:18~19), 當知自心即是一切佛菩薩法, 由知自心即佛法故. 則能淨一切 刹, 入一切劫. 35) 위의 책(9, 465:29),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36) 宗密, 註華嚴法界觀門 (45, 684c:20), 眞空第一, 理法界也. 原其實體, 但是本心. 37) 大乘止觀法門 (46, 652b:16~17), 是故但知眞心能與一切凡聖爲體, 心體具一切法性. 38) 위의 책(46, 650b:24~27), 一切法悉是心作. 但以心性縁起不無相別. 雖復相別, 其唯一心爲體. 以 體爲用, 故言實際無處不至. 작자가 분명하지 않은 大乘止觀法門 은 천태종(天台宗)과 연관되 어 있으나, 이 인용문들은 분명 화엄종의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39) 大方廣佛華嚴經 (10, 102a:29~102b:1), 若人欲了知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 17 -
自性淸淨] 이요, 성체는 두루 비추어 그윽한 곳까지도 비추기 때문에 크게 밝음[圓 明] 이다. [ 40) 자성청정 이란 표현은 이미 大般若經 華嚴經 大乘起信論 등에 누차 언급 되었으니, 법장의 이러한 불성론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법장은 [현상의] 성 상(性相)이 있지 않으면 리법계가 되고, 분명히 사상(事相)이 완연하면 사법계이다. 라면서 리법계와 사법계를 분리시켰는데, 자성청정원명체 가 리법계의 본체(本 體)와 연관된다. 화엄교학의 핵심이라 알려지는 4종 법계론은 징관에 의해 대성(大 成)된 것이라 알려져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1) 법계(法界)는 이 [화엄]경 의 현묘한 대요[玄宗]이다. 부사의(不思議)한 법계연기 (緣起法界)를 총괄하여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 ) 첫째는 사법계(事法界) 요, 둘째는 리법계(理法界)요, 셋째는 리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요, 넷째는 사사무 애법계(事事無礙法界)이다. 42) 여기에서 징관은 리(理)와 사(事)를 대별하고 있는데, 일단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 는 리 개념은 무엇을 뜻하는가? 리의 성격[性]은 그저 무분(無分)인데 그치지 않으 므로 일체의 처에 있으면서도 [개별적] 모든 곳 속에 있다. 그저 분(分)인데 그치지 않으므로 늘 하나 속에 있으면서도 일체의 처에 있다. 여기에서 리는 일체에 편 재하면서도 한 개체 속에 담지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즉 리는 보편성과 개체성을 동시에 전제하는데, 일체 법(法; 혹은 事)을 관통하여 보편성을 획득하면서도 각 개 체에 속하면서 그 보편성을 분유(分有)한다[個體性; 差別性]. 즉 리는 사에 대하여 일련의 법칙과 규범으로서 작용하면서도, 각 사물[혹은 법] 사이의 개체성을 확보 한다. 징관은 리와 본성[性]을 다음과 같이 연관한다. 43) 法藏, 修華嚴奧旨妄盡還源觀 (45, 637b:9~12), [( )謂自性清淨圓明體, 然此即是]如來藏中法 性之, 從本已來性自滿足, 處染不垢, 修治不淨, 故云自性清淨. 性體遍照, 無幽不燭, 故曰圓明. 41) 法藏, 華嚴經義海百門 (45, 627b:24~25), 若性相不存, 則爲理法界. 不礙事相宛然, 是事法界. 42) 澄觀, 華嚴法界玄鏡 (45, 672c:10~13), 言法界者, 一經之玄宗, 總以緣起法界不思議為宗故. ( ) 一事法界. 二理法界. 三理事無礙法界. 四事事無礙法界. 43) 澄觀, 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24, 181b:09~11), [謂由上諸義]理性不唯無分. 故在一切處而全 體. 在於一内不唯分故. 常在一中而全在一切處. 리(理) 및 사(事)에 관한 사구(四句)는 본 책의 24, 181a:27~181b:08을 참고하라. 40) - 18 -
리(理)는 이치의 자취[理趣]를 이르니, 도리가 넓은 것이다. 성(性)은 법성(法性)이 니, 심성(心性)이 깊은 것이다. 만약 그 이취(理趣)를 궁구하면, 그 성체(性體)를 발 휘할 수 있다. 지금 이 [화엄]경의 의취(意趣)와 체성(體性)은 모두 궁구(窮究)이다. 여기에서는 周易 說卦 의 말을 빌렸는데, 저들[유가]은 궁리(窮理) 진성(盡性)하 여 천명[命]에 이른다고 하였다. 옛날 성인이 周易 을 성명(性命)을 따르는 이치로 서 지었다. 주(注)에서 말하길 명(命)은 생(生)의 극(極)이니, 궁리(窮理)하면 그 극 을 다할 수 있다. 라 하였으니, 이는 극(極) 자로서 성(性)을 풀이하였으니 성은 극 이다. 만약 그 이치를 궁구하고 그 본성을 여러 번 다하면, 천명에 순응하는 것이 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르길 성명의 이치에 순응한다. 라 하였으나, 여기에서 그 말을 빌렸으나 뜻을 취함은 다르다. 44) 여기에서 징관은 理:性=理趣:法性=道理:心性 의 도식을 활용하고 있다. 리 개념 은 보편적 법칙과 규범으로 작용하면서도, 리가 사(事) 속에 한정되어 동시에 개별 성을 확보한다. 마찬가지로 성(性) 역시 각 인간들의 근기(根機)를 나타내는 개별적 층차의 용어이다. 하지만 그 개체수준의 근기는 단지 사법계(事法界)의 현실성만을 지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본래성을 지향하는 가능성 을 담지한다. 그래서 징관은 성(性)을 법성(法性)이라 칭했으며, 표현은 周易 에서 차용하긴 했으나 수 양론에 있어서 궁리(窮理) 진성(盡性)을 강조하였다. 문: 법계를 이름하길 무엇으로 합니까? [그리고] 법계는 어떤 뜻입니까? 답: 법은 규범[혹은 규칙; 軌持]을 뜻한다. 계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로 사[事]의 관점에서 보면 [현상적] 나뉨을 뜻하니, 사(事)를 따르면 분별되는 이유다. 두 번째는 본성[性]의 뜻으로 리법계를 따르니, 온갖 법성(法性)이 변하지 않는 때문 이다. 이 두 가지가 서로 [간극 없이] 엮이면 리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가 된다. 45) 궁리(窮理) 진성(盡性)을 바탕으로 인과(因果)에 통철하게 되면 리와 성은 상즉 (相卽)하고 원융(圓融)하게 된다[理事無碍]. 위 인용문에서도 보았듯이 징관은 리법 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본성[性] 개념을 활용하였다. 각 개체성은 그 자체로 개체 위의 책(36, 3b:5~12), 理謂理趣, 道理廣也. 性爲法性, 心性深也. 若窮其理趣, 則盡其體性. 今此 經中意趣體性皆窮究也. 此借周易說卦之言, 彼云窮理盡性以至於命. 昔者聖人之作易將以順性命之 理. 注云, 命者, 生之極. 窮理則盡其極也. 卽以極字解性. 性者, 極也. 若窮其理數盡其性能則順於 天命. 故次云以順性命之理, 今借語用之, 取意則别. 이는 窮理盡性徹果該因者 에 대한 해제 중 일부이다. 45) 澄觀, 大華嚴經略策 (36, 707c:9~13), 問何名法界, 法界何義? 答法者軌持爲義. 界者有二義. 一 約事説界即分義, 隨事分別故. 二者性義約理法界, 爲諸法性不變易故. 此二交絡成理事無礙法界. 44) - 19 -
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본성 이란 공통된 리법을 담지한다. 본연적 차원에서 보면 그 본성은 리법을 확보하게 되며, 개체적 차원의 각도에서 보면 그 리법은 본성으 로서 구현된다. 따라서 리법과 본성은 각도의 문제일 뿐 지칭하는 대상은 같은 것 이다. 징관이 성즉리(性卽理) 란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위 인용문의 문맥으로 추 론해보면 징관은 성즉리 명제를 제출한 것이나 다름없다. 리사무애법계 에서는 사(事)는 리(理)를 담지하고, 리는 사에 의거하여 형상된다. 그러므로 리와 사는 어떠한 간극도 없게 되고, 만약 이것이 각 개별적 성 간에도 간극이 없게 된다면 종국의 법계[事事無碍法界]로 나아가게 된다. 여래장자성청정심(如來藏自性淸淨心) 이란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불교, 특히 불 성론에서 성 과 심 은 같은 층차에 위치한다. 청정본각(淸淨本覺)의 경지에 있어서 는 그것이 곧 불성(佛性)이요, 진여심(眞如心)이 되기 때문이다. 종밀은 일체 중생 은 모두 공적진심(空寂眞心) 을 가지고 있다. ( ) [이것을] 불성(佛性)이라 이름 한다. 라 했으며, 화엄학에 정통한 보조 지눌(普照 智訥, 1158~1210)도 마음 밖 에 부처가 없고, 본성 밖에 법(法)이 없다. 라 하였다. 이러한 불성론은 도교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그게 바로 도성(道性) 개념 이다. 도가의 도성 개념은 道敎義樞 道性義 편에 요약되어 있다. 먼저 경문[義]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46) 47) 48) 도성(道性)은 이치가 존재하여 참되이 지극하며 의가 가득하여 모든 일에 통달하 니, 비록 어둡고 고요한 근원이여도 역시 만물을 두루 구비한다. 번뇌의 엎어짐은 잠깐이라도 모든 원인을 얽매이게 한다. 가로막히고 얽매인 것이 사라져 다시 성인 의 과보에 이르게 되면 이것을 일러 도성에 이르렀다고 한다. 太玄經 에서 말하길 도성은 진실로 실하면서도 비어있으니, 공하지 아니하며 공할 수도 없고 또한 공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 도성중생은 모두 스스로 그러함 과 같다. 49) 위 인용문에서 본성은 도 혹은 리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본성은 고요한 근원이 46) 47) 48) 49) 위의 책(36, 707c:13), 事攬理成理由事顯. 宗密, 禪源諸詮集都序 (48, 404b:27~404c:2), 一切衆生皆有空寂眞心, ( ) 名爲佛性. 智訥, 高麗國普照禪師修心訣 (48, 1005c:27~1006a:02), 若言心外有佛, 性外有法. 孟安排, 道敎義樞, 卷8, 道性義第二十九, 道性者, 理存真極, 義實圓通, 雖復冥寂一源, 而 亦備周萬物. 煩惑所覆, 暫滯凡因. 障累若消, 還登聖果, 此其致也. 太玄經云, 言道性者, 即真實空, 非空不空, 亦非不空, 道性眾生, 皆與自然同也. - 20 -
면서도 만물을 두루 할 수 있다. 이러한 도성은 어떤 존재이든지 구유하고 있는 보 편적인 것이다. 일체의 식(識)을 가진 존재에서부터 짐승, 과실나무, 돌에 이르기 까지 모두 도성을 갖추고 있다. 도가 인사들은 불성론을 그대로 담습하지 않고 무식(無識) 존재까지도 도성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불교 교리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은 내용이었다. 본성은 그 자체로 도이다. 물론 혹자는 본성과 도 개념을 흔히 인과관계로 연결 하여 본성을 도의 경지에 이르는 원인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본성과 도 를 나누는 이원적 도식에 반대한다. 본성은 진도(眞道)가 아니며, 진도 역시 본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시하는가? 도성은 청허 와 스스로 그러함으로 체를 삼는다. 다시 말해 도성은 정중(正中), 인연(因緣), 관조(觀照), 지혜(智慧), 무위(無爲)을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도성은 어떤 실체로도 존재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그러함과 진실로 비어 있음이 도성이다. 따라서 도 혹은 성 그 자체가 비어있음 을 개념화한 것에 가 까우므로 있지도 아니하며 없지도 않고, 원인도 아니며 결과도 아니며, 물질로도 있지 않고 정신으로도 있지 아니하며,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는 것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상적인 의미에서 도성은 실재(實在)적인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도성은 물질로도 있지 않고 정신으로도 있지 않지만, 물질이기도 하며 정신이기도 하다. 정신이기 때문에 학습하여야 해서 [도를] 이루어야 하며, 물질이기에 깨진 기 와조각에도 모두 존재한다. 이렇게 되면 도성은 한 주체가 자연무위로 나아갈 수 있는 일종의 실재적 근거가 된다. 이상의 논의를 검토해볼 때, 도교 불교의 본성 개념은 리법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크게 2가지 의미를 갖는다. 먼저 유불도 교섭사의 측면에 서 유가의 인성론에 영향 가능성을 시사한다. 도가가 불가적 논리를 체화하여 도성 50) 51) 52) 53) 54) 55) 위의 권, 一切含識乃至畜生果木石者, 皆有道性也. 무기타니 구니오(麥谷邦夫)는 도성론은 불성론에 영향을 받아 전개되었으나, 무식(無識) 존재에 있어 도성을 인정한 점에 관해선 오히려 도교 교설이 선행한다고 보면서, 도성론의 독자적 전 개가능성을 시사한다. 麥谷邦夫(2017), 道敎敎理思想の形成と展開, 서울대학교 종교문화연 구소 주최 국제심포지엄 학술자료집, 5~6쪽 참조. 52) 孟安排, 道敎義樞, 卷8, 道性義第二十九, 若道定在果, 性定在因, 則性非真道, 真道非性. 53) 위의 권, 道性以清虛自然為體. 54) 위의 권, 自然真空, 即是道性. 55) 위의 권, 不有不無, 不因不果, 不色不心, 無得無失. 50) 51) - 21 -
론으로 불교의 인성론을 대응했듯이, 유가 역시 도불 담론을 자신의 논리로서 수용 할 가능성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먼저 본성 혹은 마음이 준거좌표 이자 수양의 대상으로 설정되었음을 의미하며, 심성을 혼란스럽게 하는 요인을 소 거시키는 수양법을 예견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소절에서 논한다. 2.1. 정 靜 의 수양론 ( ) 불교에서 지관(止觀)은 이미 長阿含經 雜阿含經 등에서 언급되어 근본불교 의 수행방법론으로 정립되었다. 중국불교에서 大乘止觀法門 은 어느 논설보다도 지관 수행법을 명료하게 제시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大乘止觀法門 을 중심으로 지관 수행법을 논하기로 한다. 이른바 지(止)라는 것은 일체의 제법이 예부터 지금까지 자성이 있지 아니하여 생멸이 없음을 앎을 말한다. 그러나 허망한 인연(因緣)으로 있지도 아니하고, 없지 도 않지만[有] 있지도 아니하고[無] 오직 일심(一心)이며, [그 마음의] 체는 분별이 없음을 알아, 이것을 관찰하여 망념이 일지 않게 하여야만 지(止)라 이름할 수 있 다. 56) 지(止; śamatha)는 마음의 본체에 어떠한 분별이 없음을 깨닫기 위해 망념(妄念) 을 소거하는 것을 이른다. 이를 천태교학의 원리에 입각하여 설명하면, 심체(心體; 如來藏)은 염(染)과 정(淨)의 두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염성은 외부 대 상을 실물(實物)로서 의지하면서 분별 집착하게 한다[依他 分別]. 따라서 심체 속의 정성(淨性)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일체의 분별적, 의타적 작용을 헤아려야 한 다. 이것은 외적 대상에 대한 어떠한 의식적 행위를 정지 함으로 가능하다[定]. 다 만 이성(二性; 依他性 分別性)이 없는 것을 실성(實性)으로 삼지 않는데 의타 와 분별은 역시 인간 본성의 하나이므로 그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외물 57) 58) 大乘止觀法門 (46, 642a:6~9), 所言止者, 謂知一切諸法, 從本已來, 性自非有, 不生不滅. 但以虚 妄因縁故, 非有而有.然彼有法, 有即非有. 唯是一心, 體無分別. 作是觀者, 能令妄念不流, 故名爲 止. 57) 위의 책(46, 647b:3), 心體具足染淨二性. 58) 위의 책(46, 658b:18), 不以二性之無, 爲盡實性. 56) - 22 -
을 대함에 있어 일종의 의식 판단 행위 를 중지함으로서, 자연스레 망념이 멸식 되는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止) 수행이 이루어진다면, 정심(淨心)을 체증하고 이치가 융합하여 두 가지의 성[依他性 分別性]이 없어져 중생과 더불어 원융일상(圓融一相)의 몸이 된다. 관(觀; vipassanā)은 지의 과정을 통해 자연스레 그 리법(理法)을 직관하는 것이다. 59) 관(觀)은 [일체법이] 본래 생기지 않기에 지금 소멸할 것도 아니고, 심성(心性) 역 시 연기(緣起)로서 마치 환몽(幻夢)처럼 있음도 아니지만[非有] 없지도 아니한 것 [有]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이라 이름한다. 60) 위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법인(法印)이 간결하게 언급 되어 있다. 지(止) 수행은 판단중지로 인해 현상적 시공간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수행자가 리법을 관통할 수 있는 여지(餘地)를 제공한다. 만약 이 여지 속에서 제 법(諸法)과 자아(自我, ātman)가 자신의 의타성과 분별성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깨닫 는 것이 바로 관이다. 이 때 제법과 자아가 덧없다는 것[空]을 깨달음을 전제로 하 고 있으므로, 관을 가리켜 혜(慧, pañña)라고도 한다. 그래서 般若心經 에서 말하길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오온이 모두 헛됨을 비추어보시고 모든 고액(苦厄)을 넘으셨다. 라 했는데, 이는 시공간 상으로 융화한 것이나 문자 상의 구체적 수양절차는 관(觀) 혜(慧) 피안(彼岸) 이 성립하게 된다. [이러한] 관(觀) 수행이 이루어진다면, 정심(淨心)의 본체가 드러나 게 되고, 법계무애의 용(用)이 자연스레 행해진다. 즉 관 공부는 망심이 전제가 되는 의타 분별의 실체를 단박에 깨치므로, 다시 망념이 생겨날 가능성을 줄여나 가게 된다. 이러한 지관 공부는 일체의 사려분별을 제한함으로 망념됨의 가능성을 봉쇄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분별성이 자제된 시공간에서 리법을 직견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선결되어야 할 것은 외부의 대상사물로 인한 일체의 분별, 의타적 작용 61) 62) 위의 책(46, 661b:20~22), [謂]止行成故, 體證淨心, 理融無二之性. 與諸衆生圓同一相之身. 위의 책(46, 642a:9~11), 所言觀者, 雖知本不生, 今不滅, 而以心性縁起, 不無虚妄世用, 猶如幻夢, 非有而有, 故名爲觀. 61) 般若波羅蜜多心經 (8, 848c:6~7),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 厄. 62) 大乘止觀法門 (46, 661b:25~26), [謂]觀行成故, 淨心體顯. 法界無礙之用自然出生. 59) 60) - 23 -
을 경계하는 것 이다. 마찬가지로 선종(禪宗)에서도 일체의 번뇌가 청정한 심신을 가려 선법을 행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를 위해서 혜능(惠能, 638~713)은 무념(無念) 무상(無 相) 무주(無住) 수양을 강조하였다. 나의 이 법문은 예전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돈점(頓漸)을 모두 세우고, 무념 을 종지로 삼고, 무상(無相)을 요체로 삼고, 무주(無住)를 근본으로 삼았다. 무엇을 무상(無相)이라 명명하느뇨? 무상(無相)은 상(相)을 마주하면서도 상에서 벗어난다. 무념은 생각하면서도 [분별적] 생각이 없다. 무주(無住)는 사람의 본성에 있어 생각 함이 끊이질 않으니 앞생각, 지금 생각, 뒷생각의 생각들이 계속되어 끊어짐이 있지 않아 만약 일념(一念)이라도 단절되면 법신(法身)이 색신(色身)을 벗어나게 되고, 일 체의 법상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일념이라도 머무른다면 생각 역시 머무르게 되고 이것을 일러 [헛됨에] 묶여져 있음[繁縛]이라 한다. 생각들이 머무르지 않는다면, 묶 여져 있음도 없으니, 이 때문에 무주로서 근본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63) 반야삼매를 증오(證悟)하는 것이 무념(無念)이다. 무엇을 무념이라 명명하는가? 무념의 가르침은 일체의 법을 보면서도 일체의 법을 드러내지 않으며, 일체의 처에 두루 하면서도 일체의 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항상 자성(自性)을 청정하게 하 여, 육적(六賊; 六識)이 육문(六門)을 지날 때에 육진(六塵)과 떨어져있지도 않지만 오염되지도 아니한다. [이것을] 과거에서 지금까지 한다면, 반야삼매인 것이다. 자유 자재하여 해탈하면 이를 곧 무념의 수행이라 한다. 64) 무상 과 무념 은 모두 현상계의 제법(諸法)과 형상을 제거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애시 당초 불가능한 것이므로, 수행자의 마음이 내 외적 대상[相]과 제법 에 속박되지 않지 않아야 한다. 육진이란 대상 을 인식함에 있어서도 감관[六門]을 통해 인식[六識]하지만, 그 대상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육진이란 대상을 철 저히 부정한 것이 아니며 대상세계와 감응하면서도 그 대상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六祖壇經 (48, 338c:7~10), 從上已來, 頓漸皆立, 無念無[爲]宗, 無相無[爲]體, 無住[無]爲本, 何明 名 爲相? 無相[者], 於相而離相. 無念者, 於念而不念. 無住者, 爲人本性. 念念不住, 前念念[今]念, 後念, 念[今]念相讀, 無有斷絶. 若一念斷絶, 法身即是離色身. 念念時中, 於一切法上無住, 一念若 住, 念念即住, 名繋縛. 於一切法上, 念念不住, 即無縛也. 以無住爲本. 64) 六祖壇經 (48, 340c:19~23), 悟般若三昧即是無念. 何名無念? 無念法者, 見一切法不著一切法, 遍 一切處不著一切處. 常淨自性, 使六賊從六門走出, 於六塵中不離不染. 來去自由, 即是般若三昧. 自 在解脱, 名無念行. 63) [ ] - 24 -
다. 이러한 것이 선행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대상세계에 대해 일체의 의타심과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수행자의 감각이 대상에 집착하게 된 다면[六識 六塵], 수행자의 주체성[淸淨自性]은 탈락되고 대상에 의한 소외 현상 만 가속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혜능은 대상에 의한 어떠한 집착을 허용하지 말 것 [無念 無相 無住]을 주창하였다. 혜능의 제자인 신회(神會, 670~762)도 혜능의 종지를 이어 무념론을 재창하였다. 그는 정혜(定慧; 止觀)을 설명하길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공(空)하여 있는 바가 없는 것을 정정(正定)이라 이름 한 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공(空)하여 있는 바를 보면, 이름 하여 정혜(正慧)라 한 다. 65) 의념을 짓지 않는 것이 무념(無念)이다. ( ) 오직 의념을 짓지 않으면, 마음에 절로 사물이 없어지게 되고, 물심(物心)이 없어지게 되며 자성(自性)이 공적(空寂)해 진다. 66) 신회는 의념(意念), 즉 작위적인 생각을 하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만약 의념을 짓지 않는다면 공적청정심(空寂淸淨心)을 가리고 있는 물심(物心)이 자연스럽게 없 어지게 된다. 이러한 논설은 송 대 성리학의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관계를 자연스 레 연상하게 된다. 어쨌거나 신회는 법인(法印)이라 할 수 있는 공(空)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공에 집착한다는 것은 진정한 공이 아니라 의념에 불 과한 것이므로, 공(空)을 대하는 태도 역시 무념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신회는 억지로 생각한 내용이 마음에 머물러 공(空) 혹은 정(淨)을 취하려 하거나, 마음을 일으켜 깨달음과 열반을 구하려는 것 등이 허망에 속한다. 라 말한다. 의 념을 일으켜서 공(空) 혹은 정(淨)을 취하는 것은, 공과 정조차도 대상의식으로 고 정시키면서 실체화한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무실체적 공관(空觀)은 나가떨어지고, 인위적이며 작위적인 집착만 남게 된다. 그러므로 공을 취하고 보리정각을 구하는 것은 참된 불법 을 표지하는 듯하지만, 공과 정각이 수행자의 피사체(被寫體)로 대 67) 荷澤大師神會遺集, 卷1(128~129), 念不起, 空無所有, 名正定. 以能見, 念不起空無所有, 名為正 惠. 본 연구자는 호적(胡適)의 荷澤大師神會遺集 의 친필교정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66) 위의 권(101~102), 不作意卽是無念. ( ) 但莫作意, 心自無物. 卽無物心, 自性空寂. 67) 위의 권(102), 所作意住心, 取公取淨, 乃至起心求證菩提涅槃, 並屬虛妄. 65) - 25 -
상화된 것뿐이다. 이러한 망념을 소거하기 위한 마음공부에 있어 신(身) 역시 스탠스를 맞추어나가 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정좌(靜坐)이다. 지의(智顗, 538~597)는 선바라밀(禪波羅蜜) 의 방편으로 5가지의 법(法)을 조절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음식, 잠, 몸, 호흡, 마음이며, 이 가운데 정좌(靜坐; 禪定)는 몸, 호흡, 마음을 함께 조절하는 방법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지의는 십바라밀을 행함에 있어 선정을 유독 찬탄했는데, 그 논점은 선정을 행하는 것이 곧 십바라밀을 성취하고 온갖 행과 일체 법문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정좌에 있어 중요한 것은 몸, 호흡, 마음 중 어느 하나라도 조화가 깨지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적당히 조절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여러 방해 작용이 일어나 선근(善根)이 일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핵심은 선정 에 들기 전에 이미 몸, 호흡, 마음을 조화시킨 뒤 그 삼자의 조화가 선정이 마칠 때까지 쉽게 깨지지 않도록 유지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좌법은 욕계(欲 界)의 즐거움에 비하면 상당히 고난(苦難)한 것이다. 그래서 처음 선정에 들었을 때 생기는 즐거움이란 몸이 텅 빈 것 같고 느낌이 매세하여 마치 없는 것과 같지 만 ( ) 의식(意識)이 상응해 생기는 것으로 깊고 오래 머무른다. 라 하였다. 좌선의 즐거움을 논하는 것은 수행자를 이끌기 위한 방편(方便)이지만, 이러한 방 편적 수준을 넘어선다면 일심(一心)과 삼매(三昧)의 경지로 돌입하게 된다. 선종 계열, 특히 조동종(曹洞宗)에서도 묵조선(黙照禪)의 수양법을 주창했다. 조 동종 이전의 선종에서 좌선 방법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예를 들면 달마 (達摩,?~528?)의 9년 면벽(面壁) 고사가 대표적이다. 지관과 묵조선은 형태적으 로 보면 유사하지만, 굉지(宏智, 1091~1157)가 좌선 우위의 수양론[只管打坐]을 주 68) 69) 70) 71) 72) 智顗 說, 法愼 記錄, 灌頂 整理, 釋禪波羅蜜次第法門 (46, 489b:14~489c:10), 調五法者, 一者調 節飮食, 二者調節眠睡, 三者調身, 四者調氣息, 五者調心. ( ) 第三調身, 第四調息, 第五調心, 此應合用, 不得別説. 但有初中後方法不同, 是則入住出相有異. 次第禪門 의 번역은 장기표 역 주(2010)를 참고했음을 밝힌다. 69) 위의 책(46, 477b:8~9), 行者善修禪故, 即便成就十波羅蜜. 滿足萬行一切法門. 70) 위의 책(46, 489b:21), 若有所不調, 多諸妨難, 善根難發. 71) 위의 책(46, 491b:3~4), 初禪爲失者, 覺身空寂. 受於細樂, 似若無故, ( ) 意識相應久住縁深 [故] ( ) 여기에서 말하는 의식(意識)은 전5식[感官; 目耳鼻舌身]을 일컫는다. 앞의 문장에서 욕계의 즐거움이 오식(五識)과 상응(相應)한다고 밝혔다. 72) 초기 선종의 좌선 전통에 대해서는 김호귀(2001:27~42)를 참고하라. 본 논문에서 선종의 좌선 부분은 김호귀의 견해를 재술하였다. 본래 묵조선(黙照禪)이란 표현은 종고(宗杲, 1091~1157)가 굉지의 좌선 중심의 수행법을 비판하기 위한 용어였다. 그러나 굉지는 그러한 표현을 자신의 표현으로 삼아 아예 默照銘 을 지어 묵조를 선양한다. 68) - 26 -
장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천태종의 지의가 선정을 찬탄하긴 했으나, 조동 종의 굉지는 더 나아가 정좌를 수양론 전면에 노출시켰다. 선화자(禪和子)들아. 일신(一身)은 일신을 깨닫고, 두 눈은 두 눈을 대하고 있으 니, [몸] 가운데 털끝 하나라도 처음과 차이가 없도다. 그러니 늙은 여우의 혀 놀림 과 같이 어찌 다시 의심할 것인가, 다시 좌선하면 술잔에 비친 것이 활의 그림자일 지라. 73) 위 문장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음[悉有佛性]을 언명하고 있다. 따라서 한 수 행자가 겪는 일체의 상황이 모두 깨달음의 표현이 되는데, 굉지의 표현대에 따르면 현성공안(現成公案) 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는 불성이 담지 된 일신(一身) 그 밖에서 별도의 체험을 구할 필요가 없다. 단지 자기 내부에 담재 된 가능성 을 기 반으로 해서, 증획하면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좌선이 요청된다. 표층적, 분별적 의식 속에서 깨달음의 가능성 은 가려지므로, 의식의 저 심층부에서 청정(淸淨) 과 조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굉지가 늙은 여우의 혀 놀림 을 운운한 것은, 다 분히 간화선(看話禪)에 대한 대항의식이다. 그에 따르면 화두공안은 근본적으로 수 행자의 사려, 분별의식을 고취시킨다. 이것은 표층의식의 활동성을 진작시킬 뿐이 며, 의식의 심층에 위치한 본연성 을 놓치게 된다. 인과(因果) 라는 화두에 대해 잘못 대답한 승려가 한순간에 여우가 되어버렸듯이 말이다. 굉지에게 있어 진리의 현현은 굳이 화두를 통할 필요가 없다. 이미 자기에게 구족한 것을 깨달을 뿐이 다. 여기에[나 안에] 청정하고 구족한 깨달음은 눈을 감고 그대로 좌선을 하고 있 으면, [저절로] 비추어져 철저해지고 [번뇌를] 벗어나길 다해 밝음을 체득하고 평온 함을 얻는다. 즉 수행과 깨달음은 외부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청정한 상태로 나 에게 구족되어 있다. 묵조선 전통은 천태교학에 비해 좌선법의 구체적 매뉴얼을 제시하고 있지 않 다. 지굉의 좌선법에 있어서 핵심은 고요함 과 사량함의 차단 에 있다. 그는 진실한 수행은 오직 조용히 앉아[靜坐] 묵묵히 참구[默究]에 있다. 라고 말했고, 74) 75) 76) 宏智, 宏智禪師廣録 (48, 10a:26~28), 禪和子, 一身了一身, 兩眼對兩眼, 箇中絲髮初無間. 老狐 涎盡復何疑, 再坐盤中弓落盞. 74) 위의 책(48, 74a:14~16), 正當具足清淨處, 著得箇眼, 照得徹脱得盡, 體得明踐得穩. 75) 송(宋)에 유학하여 일본 조동종을 창건한 도겐(道元, 1200 1253)의 普勸坐禪儀 를 살펴보면 천태교학의 좌선수행법 조목이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82, 1a:16~1b:6). 73) - 27 -
坐禪箴 에서는 분별하는 사량심이 없는 지(知)는 [어느 것도] 짝하고 기댈 것이 없도다[독존적이도다]. 라 하였다. 이러한 좌선은 육근의 작용을 넘어서서 어디 서나 깨달음의 결과를 맺을 수 있게 하며 ( ) 묵(黙; 坐禪)과 조(照; 깨달음)이 이치상 원융하면 연꽃이 피며 꿈에서 벗어난다. 따라서 좌선의 핵심은 육근의 분 별적 작용을 넘어서 고요함을 통해[靜坐] 본연성을 직견하는 데[三昧] 있다. 수당 시기의 도가 도교 인사들은 불교의 지관(止觀) 수행법에 영향을 받았는데, 다음의 인용문은 도가 공동체 속에서 운영되고 있는 관(觀) 수행법을 명확하게 보 여주고 있다. 77) 마음을 내관(內觀)하여도 그 마음이 없도록 하라. 형체를 외관(外觀)하여도 그 형 체가 없도록 하라. 사물을 원관(遠觀)하여도 그 물체가 없도록 사물을 대하라. 삼자 [心 形 物]를 깨우치면 오롯이 공(空)이 현현한다. 공을 보길 실법으로 여기지 말면 공됨은 무(無)가 된다. [실법으로서] 무 역시 없다 생각하여야 무(無)가 된다. [실법 으로서] 무를 없다 생각해야, [마음이] 담연하여 항상 적연하게 된다. ( ) 이러한 청정함과 같으면 점차 진도(眞道)에 들어갈 것이다. 이미 진도에 들어간 즉, [그것 을] 득도(得道)라 이름 한다. 비록 득도라 이름 하지만, 실제론 얻은 것이 없다. 78) 도가에서 심(心), 형(形), 물(物)은 핵심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虛心, 守形而 忘身, 齊物], 이들 개념들은 모두 대상적 존재이다. 마음, 형체, 사물 모두 한 주체 앞에 대상적 실체로 현현하고, 그 주체가 이것들에 대해 집착한다면 무위(無爲)의 경지는 사라지게 된다. 또한 마음, 형체, 사물을 응대함에 있어 그 대상에 구애받게 되면, 어느새 [인식의] 주체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오히려 대상에 불과하던 심(心), 형(形), 물(物)이 자기 자신의 주체가 되어버리게 된다. 이것은 내외(內外)를 합일하 는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해버린다. 그러므로 대상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하고, 그러 하다면 공(空) 老莊 원문에 거의 언급되지 않던 이 현현하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은 곧 노장의 무(無)를 뜻할 뿐이다. 도가 사상사에서 왕필(王弼)에 의해 도즉무(道卽無) 가 성립되었다면, 위 인용 79) 宏智, 宏智禪師廣録 (48, 73c:14), 眞實做處, 唯靜坐默究. 위의 책(48, 98b:3), 曾無分別之思, 其知無偶而奇. 太上老君說常淸淨妙經, 內觀于心, 心無其心. 外觀于形, 形無其形. 遠觀于物, 無物其物. 三者 旣悟, 惟見于空. 觀空以空, 所空旣無, 無無亦無. 無無其無, 湛然常寂. ( ) 如此淸靜, 漸入眞道. 其入眞道, 名爲得道. 雖名得道, 實無所得. 79) 何晏 集解, 邢昺 疏, 論語注疏, 卷7, 王弼曰, 道者, 無之稱也. 76) 77) 78) - 28 -
문에서는 그 무(無) 역시 전범(典範)으로서 기능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러한 시도가 있다면 무(無)를 존숭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무를 대상적 실체로 추 락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실법으로서] 무 역시 없어야[無無] 하며, 득도(得道) 역 시 진정으로 무(無)에 투철해야만 가능하다. 太上老君了心經 은 노군(老君; 老子) 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無量劫] 동안 관심(觀心) 공부로써 득 도하였네. 이내 허무(虛無)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어찌하여 얻는 바가 있으리오. 라 하였는데, 이 역시 위 인용문을 재창한 것뿐이다. 송 대 이후 문헌인 三論元旨 는 신(神)을 온전한 즉 장생의 근본이요, 기가 묘 령해지면 불사의 근원이다. 라고 전제하고, 도(道) 심(心) 성(性)이 상합(相合)되 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헌에는 도교의 마음 공부론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 다. 80) 81) 마음을 가다듬어 일(一)에 머무르는 것[攝心住一]을 안정(安定) 이라 이름 한다. 욕망과 의념을 일으키지 않고 일(一)조차도 잊는 것[灰心忘一]을 멸정(滅定) 이라 이름 한다. 마음을 깨우치고 진일한 것[悟心真一]을 태정(泰定) 이라 이름 한다. 82) 여기에서 말하는 섭심(攝心), 회심(灰心), 오심(悟心) 은 모두 사려지심을 지양 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섭심 이 사려를 아직 조절하는 수준에 있다면, 회심 은 사려의 완전 소멸을 의미하고, 오심 은 자연스레 도[무위적 경지]와 합일된 상태 를 이른다. 또한 성인께서 말씀하시길 무위(無爲) 로 여러 막힌 것을 깨뜨리고 [이 경지는] 공무(空無)의 경계를 가리키며 미묘(微妙)의 근원과 연관되어 있으니, 이 색이 공하고 집착과 구애의 장애도 없음을 이해한다면 진상(眞常)의 성(性)이 드러날 것이다. 라 하였다. 무위가 수양의 방법론이자 곧 경지로 상정된다. 욕심 과 의념은 지정(至靜)하면서도 청정(淸靜)한 심성을 가리므로, 무욕(無欲) 과 무지 (無智) 를 실천함으로 심체(心體)가 도와 어긋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83) 마음의] 혼란을 종식시키길 고요함[靜]으로 하고, 고요함을 항상 지켜 고요하여 [ 太上老君了心經, 吾從無量劫來觀心得道 乃至虛無 有何所得 三論元旨, 序, 神全乃長生之本 氣妙為不死之源. 위의 책, 義渡記, 夫攝心住一 名為安定. 灰心忘一 名為滅定. 悟心真一 名為泰定. 위의 책, 翠微觀記, 聖人說無為以破眾滯 指空無之境 演微妙之源 了此空色無執滯之妨 則真常之性見矣. 80) 81) 82) 83) - 29 -
도 능히 [온 사물을] 비출 수 있게 된즉 지혜와 본성이 분명해져 망령된 것을 비우 니, 참된 지혜[真智]와 참된 본성[真性]을 갖고 밝게 [도를] 깨우친 자를 지극히 깨 달은 선비[至悟之士] 라 한다. 화(和)하길 안정되게 하고 욕심을 줄이며 질박한 것을 지키고, 귀로 듣지 않되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지 않되 기(氣)로서 듣고, 기로 서 듣지 않되 본성에 부합한다면 사물[을 대함]이 완전하면서도 능히 [내외를] 잊을 수 있고 이치를 잊어버리면서도 [그 이치를] 온전히 할 수 있는 자는 아울러 통하 는 선비[兼通之士] 이다. 84) 마음의 혼란은 욕망과 의념으로 기인하였는데, 그것을 고요함[靜]으로 종식시키 면 진지(真智) 와 진성(真性) 을 갖게 된다. 삿된 의념의 누적은 결코 지혜라 볼 수 없고,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다[無智]. 그러나 무위적 경지에서 온 사물을 관통하 게 되면, 그것은 파편적인 지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메타적(meta ) 위상을 확 보하게 된다. 귀[耳]라는 감관은 불필요한 의념을 수용하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사 람이면 감관 작용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대상적이며 분별적인 의념을 그대로 수용하지 말고 자연적 본성[性]에 의거한다면, 구체적 리사(理事)를 준별하지 않아 도 능히 그것들[理事]에 투철할 수 있게 된다. 마음의 혼란을 소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좌가 요청되었는데, 주지하다시피 莊 子 大宗師 편에서 좌망(坐忘)이 언급된다. 몸을 무너뜨리고 총명함을 물리치면, 즉 형체를 흩뜨리고 지식을 버리면 크게 통하여 하나가 됩니다. 이를 일러 좌망이 라 합니다. 이러한 좌망은 도가 구성원들에게 널리 수용되었는데, 이는 당(唐) 대의 사마승정(司馬承貞, 647~375)의 坐忘論 에서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 는 배움을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편안하게 앉아[安坐], 마음을 수렴하여 경계를 떠나야 한다. 라고 주장하면서, 좌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85) 86) 87) 안으로는 자기 자신도 잊고 밖으로는 우주도 지각할 수 없으나, 오직 도와 그윽 하게 하나가 되어 모든 사려가 없어진 것이다. 88) 위의 책, 義渡記, 夫息亂以靜, 守靜以常, 動而能澄 靜而能照 則綠智綠性而虛妄, 真智真 性而曉了者, 此乃至悟之士也. 夫安其和, 寡其欲 守其樸 無聽之以耳 而聽之以心 無聽之以 心 而聽之以氣 無聽之以氣 而付之以性 於事全而能忘 於理忘而能全者 此則兼通之士也. 85) 莊子 大宗師, 顏回曰墮肢體, 黜聰明, 離形去知, 同於大通, 此謂坐忘. 86) 본 연구자는 사마승조의 정좌론에 대해 任繼愈 主編(1990:262~263)과 肅登福(2013:348~349)을 참조하였음. 87) 司馬承貞, 坐忘論, 收心三, 所以學道之初, 要須安坐, 收心離境. 84) - 30 -
도를 닦고 진실됨을 이루고자 한다면, 먼저 거짓되고 편벽된 행동을 없애고, 바 깥의 일을 모두 끊어, 간사한 마음을 없게 한 연후에 단정하게 앉아[端坐] 바르게 보고, 한 일념이라도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면 바로 그것을 없애어 버리고, 일념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제지하여 [심신을] 평안하고 고요하도록 힘써야 한다. 89) 앉아서 잊게 되는 대상은 외부의 것들을 비롯하여 나의 몸까지 포함된다. 그 런데 앉는 동안 내외부의 대상을 잊는 동시에 도에 합일 될 수 있으려면, 반드시 형체는 마른 나무와 같이하고 마음은 죽은 재와 같이 하여야만 한다. 정좌는 심신의 스탠스를 바꿈으로 몸, 마음, 그리고 감관[六根]이 모두 도와 합일되는 경지 를 이끌고 이것이 지극에 달하면 형과 신이 합일되어 신인(神人)이 된다. 사 마승정은 천태산에서 기거하였는데 坐忘論 의 전반적 논지 역시 천태종의 지관법 을 재술한 듯하다. 그의 坐忘論 은 남송 초기의 증조(曾慥,?~1155)의 道樞 坐忘 편에 그대로 전재되었는데, 이러한 정심좌망(靜心坐忘)의 이론은 도교의 이론과 실천에서 견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아에 구비된 심성이 청정(淸淨) 한 이미지로 은유되고, 사려 개념은 청정한 것 과 대조되어 논리적 이항대립을 완성한다. 그러한 은유적 논리에 따라, 고요함 은 혼란스러움을 떠나 청정함으로 되돌아가는 분명한 상징을 제공한다. 시끄러운 텔레 비전 소리가 내 마음을 요동치게 할 때, 가장 쉬운 방법은 텔레비전을 끄는 것이 다. 불교 및 도교 인사들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불필요한 의념과 사 려를 소거하고자 하였고, 정좌라는 구체적 방법론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불 의 정(靜)적 수양론은 분명 동적 의미를 경시한다는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당송 90) 91) 92) 93) 94) 95) 위의 책, 信敬一, 內不覺其一身, 外不知乎宇宙, 與道冥一, 萬慮皆遺. 위의 책, 坐忘樞翼, 夫欲修道成真, 先去邪僻之行, 外事都絕, 無以干心, 然後端坐, 內觀正覺. 覺一念起, 即須除滅, 隨起隨制, 務令安靜. 90) 전정화(2017), 장자의 인식론과 수양론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윤리교육과 석사학위논문, 90쪽. 91) 司馬承貞, 坐忘論, 泰定六, 形如槁木, 心若死灰, ( ) 이 표현은 莊子 齊物論 에 서 나온다. 92) 위의 책, 得道七, 且身與道同, 則無時而不存. 心與道同, 則無法而不通. 耳則道, 耳無聲而不 聞. 眼則道, 眼無色而不見. 六根洞達, 良由於此. 93) 위의 권, 形神合一, 謂之神人. 94) 任繼愈 主編(1990), 中國道敎史,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263쪽. 95) 牟鐘鑒(1996), 中國道敎, 이봉호 역(2015), 중국 도교사: 신선을 꿈꾼 사람들의 이야기, 서 울: 예문서원, 152쪽. 88) 89) - 31 -
시기의 유가 심성수양론 역시 이러한 도불 담론의 추세와 견주어 보아야 하며, 동 시에 정적 중심 수양론의 문제를 어떻게 유가가 어떻게 극복할지를 살펴보아야 한 다. 2. 당송 시기의 유가 심성수양론 당(唐) 대에 이르면 중국의 사상사적 담론구조는 어느 한 학파에 치우치지 않았 으니 유 불 도 삼교(三敎)가 공존하는 특징을 갖는다. 동한 시기에 유입된 불교 는 수당 시기를 지나면서 천태 화엄 선 정토 사상으로 중국화 되었으며, 도교 역시 내단(內丹) 사상을 진작시키며 민중들에게 어필했다. 도교와 불교가 수당 시 기에 사상사적 종교적 주도권을 얻은 상황에서, 유학자는 자기존립의 위기 를 느 끼면서 이에 응전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한유(韓愈)와 이고(李翶) 등은 고문(古 文)을 통해 유가적 가치의 재발견 을 주장하였지만 자신들의 응전 논리에서 이미 도불의 영향은 지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2.1. 유가의 심성론 전환 여기에서는 유가 내부의 심성론에 국한하여 선진 시기의 심성론의 성격이 당송 시기를 지나면서 어떻게 전환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도교와 불교의 정적(靜的) 담론이 유가의 심성론에도 유입되면서 유가의 성정론(性靜論)의 특징이 부각되게 되었다. 또한 본성과 감정은 합일적으로 이해되었으나 점차 분석적 사고 의 대상이 되어 그 양자를 엄밀하게 분석하였다. 성정론 性靜論 본 절에서 말하고 있는 성정(性靜) 관념은 인간 본성을 고요함과 결부 짓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러한 논의가 당송 시기 이전에 없던 것은 아니다. 道德經 에서 근본[根]으로 돌아가는 것을 정이라 하며, 이를 일러 복명(復命)이라 한다. 라는 2.1.1. ( ) 96) - 32 -
글귀가 언급된다. 道德經 전반에 걸쳐 무(無)나 허(虛) 개념이 표창(表彰)되었는 데, 다만 여기서 근본 이 인간 본성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禮記 樂記 의 사람이 태어날 때 [본래] 정(靜)하니 하늘의 본성[본래 그러한 것]이다. 라는 글 귀는 성정론에 관한 몇몇 단초를 제공한다. 이 구절은 종합적 담론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파편적 언설에 불과하기는 하였으나 淮南子 文子 에도 인용되어, 일정 한 영향력을 가졌다. 당송 시기 이전에 성정(性靜) 관념이 확고하지는 못했으나, 송 대의 후학들이 자신의 성정(性靜) 관념을 논술하는데 있어 분명한 전거(典據)로 활 용되었다. 또한 성정론에 관한 단초를 추가적으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남조(南朝) 시대 주흥사(周興嗣, 469~537)는 千字文 에서 성품을 고요하게 하면 감정이 편안해지며 마음이 동요하면 정신이 피로해진다[性靜情逸 心動神疲]. 라 하였다. 또한 論語 의 주해에서도 성정론과 어느 정도 상응하는 글귀가 보인다. 雍也 편의 인자(仁 者)는 고요[靜]하다. ( ) 인자는 오래 산다[壽]. 에 대한 주석을 살펴보자. 97) 98) 인자는 고요하다. 注 공안국이 말하길 무욕하므로 고요하다. 라 하였다. 인자는 오래 산다. 注 포함이 말하길 성품이 고요하여[性靜] 오래 사는 사람이 많다. 라 하 였다. 99) 하안(何晏, 은 仁者靜 ( ) 仁者壽 을 해제함에 있어, 공안국(孔安國, 156~74 B.C.), 포함(苞咸, 7 B.C.~65 A.D.)의 해석을 조합 인용하였다. 여기에서 포 함이 말한 성정(性靜) 은, 그의 论语章句 가 일실되어 분명한 논증은 어렵지만, 문맥을 살펴보면 인간 본성이 고요하다는 뜻보다는 인자(仁者)의 성품이 고요하다 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품 이 본성[性; 生]과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고, 이 문장은 전체적으로 성정(性靜) 관념에 일정한 영감을 제공한다. 당 (唐) 대 학자인 이고(李翶, 772~841)는 종합적 체계로서 본성 개념을 고요함과 결 부시켰다.?~249) 道德經, 16장, 歸根曰靜, 是謂復命. 禮記, 樂記, 人生而靜, 天之性也. 論語 雍也, 仁者靜, ( ) 仁者壽. 何晏 集解, 邢昺 疏, 論語注疏, 卷6, 仁者靜. 注 孔曰無慾故靜 ( ) 仁者壽. 注 包曰性靜者多 壽考. 96) 97) 98) 99) - 33 -
문: 제가 제대로 알지 못하니, 감히 묻건대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은 무엇을 이 릅니까? 답: 사람은 태어날 때는 [본래] 정(靜)하니, 본래 그러한 본성이다. 성은 하늘의 명이다. 100) 이고는 中庸 의 천명지위성을 해제하면서, 禮記 의 인생이정(人生而靜) 을 원 용한다. 천명지위성에 대한 해석은 곧 성명(性命)의 관계성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를 의미하는데, 여기에서 이고는 성(性)과 명(命) 사이에 고요함[靜]을 산입시켰다. 그 의 논리에 따르면, 자연적 원리와 인간 본성의 양자는 모두 정(靜)이라는 통약가능 성 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정은 천도와 인간 본성을 관통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해석은 그 이전의 中庸 해석과는 다른데, 천명지위성을 해석함에 있어 정현(鄭玄, 172~200)은 오행설(五行說)을, 공영달(孔穎達, 574~648)은 무위자연론(無 爲自然論)을 원용하였으나, 이고와 같이 성과 정(靜)을 연관 짓지는 않았다. 이 고는 論語 의 성상근(性相近) 을 해명할 때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01) 性相近은] 인성이 본래 정(靜)에서 서로 가까웠음을 이른다. [ 102) 성상근 에 대한 공안국, 하안, 황간(皇侃, 488~545)의 해석은 별 특별한 것이 없 다. 사실 이고와 같이 성상근 후원습(後遠習) 의 명제를 통해 성정론(性靜論)을 입론하기에는 상상력 이 요구되는데, 주어(主語)인 성(性)과 술부(述部)의 정(靜) 사 이에는 그 함의의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고는 禮記 의 인생이정(人生而 靜) 을 근거로 하여, 고요함을 매개로 성상근 과 천명지위성 을 연결시켰다. 그리 103) 李翺, 李文公集, 卷18, 復性書中, 曰我未明也, 敢問何謂天命之謂性? 曰人生而靜, 天之 性也. 性者, 天之命也. 본 논문에서 이고에 대한 서술은 정환희(2017c), 이고의 성정론 연 구 를 토대로 하였음. 101) 禮記注疏, 卷52, 天命謂天所命生人者也. 是謂性命. 木神則仁, 金神則義, 火神則禮, 水神則信, 土神則知. ( ) 天命之謂性者, 天本無體, 亦無言語之命, 但人感自然而生有賢愚吉凶, 若天之付 命遣, 使之然. 故云天命. 老子云, 道本無名, 強名之曰道. 但人自然感生, 有柔好惡或仁或義或禮或 知或信, 是天性自然故云謂之性. 앞은 정현의 주(注), 뒤는 공영달의 소(疏). 102) 韓愈 李翺, 論語筆解, 陽貨, 謂人性本相近於靜. 103) 성상근(性相近) 에 대한 하안의 해석으로는 論語注疏 卷17, 공안국과 황간의 해석으로는 論 語義疏 卷9를 참조하였음. 100) - 34 -
고 그가 궁극적 목적으로 삼은 복성(復性) 역시 고요한 상태 를 의미한다. 이러한 이고의 주장은 동시기의 몇몇 문헌자료와 중첩되는데, 대표적으로 시승(詩僧), 교연 (皎然, 730~799)의 强居士傳 을 살펴보자. 사람이 태어남에 본성이 고요하였으나, 욕구함에서 움직임이 있구나. 욕구할만한 것은 우환과 즐김의 씨앗이니, 우환과 즐김은 병의 근원이네. 고로 사람의 그 본성 을 살펴보면 만물의 참됨을 보고, 그 [감정과 욕심의] 동함을 살펴보면 만물의 과오 를 보네. 104) 본래 禮記 의 구절은 인생이정(人生而情) 이지만, 교연은 표현을 살짝 바꾸어 인생성정(人生性靜) 이라 하였다. 이는 禮記 의 문맥을 본성론이란 철학적 담론에 서 논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위의 인용문에 따르면 성정(性靜) 과 정동(情動) 이 대치되면서, 성과 정(情)의 간극이 분명함을 볼 수 있다. 인간 본성을 고요함과 연관 지음은, 실상 동(動)과 정(靜)이라는 이원적 개념을 전제한 것이다. 따라서 성 정(性靜) 관념을 주장한다는 것은 반드시 특정 개념에 대해 동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같이 가야 한다. 그러므로 교연은 본성의 고요함 과 감정과 욕심의 동함 을 대치하면서, 감정과 욕심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이고의 해석은 여러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북송 시기 황명(皇命)을 받아 형 병(邢昺, 932~1010)은 論語 의 성상근 을 다음과 같이 해제한다. 다. 正義 에서 ( ) 본성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품수한 것으로 고요하다. 라 하였 105) 여기에서는 인간 본성에 대한 서술어로서 고요함 이 적시되었는데, 이는 이고 이전의 論語 의 성상근 해석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것이다. 그러므로 형병의 성상근 에 대한 주해는 이고의 주장을 재술(再述)한 것에 그치며, 성정론(性靜論)이 유가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수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육희성(陸希聲,?~905?)은 道德 皎然, 晝上人集, 卷10, 强居士傳, 人生性静而遷乎可欲, 可欲萌乎憂喜, 憂喜者病之原也. 故至人觀其性, 見萬物之真, 觀其動, 見萬物之過. 교연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공성론(空性論)이 지만, 정(靜)이란 격의적 표현을 활용했다. 105) 위의 책, 卷17, 正義曰 ( ) 性謂人所稟受以生而靜者也. 104) - 35 -
經 의 16장[致虛極, 守靜篤 ]을 다음과 같이 주해하였다. 움직임은 고요함 가운데에 있어 성인의 돌아가는 바이다. ( ) 정은 동을 주재 한다. 본성은 감정의 근본이다. 무릇 사람이 태어날 때는 [본래] 정하니, 하늘의 본 성이고,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니 인간의 감정이 된다. 감정이 본성으로 돌아가고 [復] 동함이 정으로 돌아가면, 천리를 얻을 수 있다. ( ) 그러므로 말하길 근본으 로 돌아가는 것을 일러 정(靜)이라 했고, 정함은 명으로 돌아감을 이른다. 106) 여기에서 이고의 고유개념인 복성(復性) 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감정이 본성에 근거하지만, 감정을 대신하여 본성으로 귀결(歸結)해야 한다는 것도 이고 사상의 개요(槪要)이다. 육희성의 道德經 주해는 이고의 문법을 통해서 도가의 허정(虛 靜) 을 논급했다. 북송 법안종(法眼宗)의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 역시 보살은 반드시 미리 마음을 관조(觀照)하여야 한다. 본성은 고요[靜]하여 적연(寂然)하 다. 라 하였는데, 周易 의 적연(寂然)을 들어 인간 본성의 고요함을 강조하였다. 그간 유가의 정(靜)적 담론이 도가 혹은 불가에서 연원했다는 주장이 있어왔으나, 동시에 유가 담론 역시 도가(道家) 불가(佛家)에 다소간의 영향을 준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주돈이는 주정(主靜)을 강조했는데, 太極圖說 에서는 오직 사람 만이 그 빼어남을 얻어 가장 영특하다. 형체가 태어나고 정신이 생겨 지각활동을 하고, 오성이 움직여 선과 악이 나뉘며,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성인은 중정과 인의 로 이를 가늠하고, 정을 위주로 하여(무욕이기 때문에 정하다.) 인간됨의 표준을 세 웠다. 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通書 에서 무욕하면 고요하여 텅 비고 움직임 이 바르게 된다. 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본성과 고요함의 관계는 명백하게 기술 되지는 않았지만, 분명 무욕에 이르면 인간의 본래적 생태인 청정(淸淨)의 본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 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107) 108) 109) 110) 陸希聲, 道德眞經傳, 動在静中者, 聖人之復也. ( ) 静者動之君也. 性者情之根也. 夫人生 而静, 天之性, 感物而動, 人之情. 情復于性, 動復于静, 則天理得矣. ( ) 故曰歸根曰静, 靜曰復 命也. 107) 永明延壽, 宗鏡錄, 卷10, 菩薩先須當心觀照. 本性靜寂. 108) 周惇頤, 周元公集, 卷1, 太極圖說 朱熹解 附, 惟人也 得其秀而最靈. 形既生矣 神發知 矣 五性感動 而善惡分 萬事出矣. 聖人定之以中正仁義 而主靜(無欲故靜), 立人極焉. 본 인용 문과 다음 인용문의 해석은 김병환(2009)의 각주 37; 40번에 의거함. 109) 위의 책, 卷4, 通書 聖學第二十, 無欲則靜虛, 動直. 106) - 36 -
이러한 주돈이의 주정 사상에 대한 후학들의 논의를 장식(張栻, 1133~1180)과 주 희(朱熹)를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자. 태극의 본체는 지정(至靜) 하다. 그윽하게 텅 비어 어떤 조짐이 없되 모든 것을 포용한다. 이른바 지정 이라 한 것은 모두 본체가 이발과 미발에 관통하여 [잠시도] 끊어짐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태극은 움직이지 않을 수 없으니, 동이 극에 달하면 고요하게 되고 정이 극에 달하면 다시 움직이니, 이 때 정은 동에 대비된 것이 다. 111) 주돈이의 태극에 대해 장식은 고요함을 두 가지 차원으로 분리하고 있다. 하나는 태극의 본체를 설명하기 위함이고, 나머지 하나는 동정 운동(運動)의 요소로서 동 (動)과 대비되는 것이다. 장식은 구별의 용이함을 위해 전자의 정(靜)을 지정(至 靜) 으로 칭하였다. 사실 지정(至靜)한 태극의 본체는 무극이태극 에서 무극(無極) 을 의미하고, 이것은 정(靜)이 동(動)과 달리 본체론적 위상을 획득하고 있음을 의 미한다. 그래서 장식은 지정(至靜)은 천성의 본연 순수(純粹) 지선(至善)한 것으 로 태극이 사람에게 보존된 것을 말한다. 라 하였다. 주희도 주돈이의 동정(動靜) 문제를 해명하면서, 정은 본성이 존재하게 되는 바 요, 동(動)은 천명이 행하게 되는 바이다. 라 하였다. 주희의 이러한 설명은 동정 (動靜)의 문제를 체용(體用)론적 구도에서 인식하면서, 종국적으로 본성 관념을 고 요함과 직결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주돈이는 太極圖說 에서 성인은 이것을 정함에 있어 중정(中正)과 인의(仁義)로 하시고, 정(靜)을 주로 하여 인극(人極)을 세우셨도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주돈이의 언급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주희 112) 113) 114) 115) 김병환(2009), 주돈이의 삶과 사상에 미친 불교와 도가 도교의 영향 연구, 중국학보, 한국중국학회, 60, 595쪽. 111) 周惇頤, 周元公集, 卷3, 附諸儒太極類説 南軒文集并語録答, 曰太極之體至靜也. 冲漠無 朕而無不徧該焉. 某所謂至靜, 蓋本體貫乎已發與未發而無間者也. 然太極不能不動, 動極而靜, 靜極 復動, 此靜對動者也. 112) 위의 장, 曰而至靜者, 天性之本然純粹至善, 太極之存乎人者也. 113) 周惇頤, 周元公集, 卷2, 附諸儒太極類説 晦菴文集并語録答問, 靜者, 性之所以立也. 動者, 命之所以行也. 114) 물론 장식이나 주희의 주장은 주정(主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지만, 사실 동정의 포괄은 이 고나 주돈이 역시 강조해왔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115) 周惇頤, 周元公集, 卷1, 太極圖說 朱熹解 附, 聖人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立人極焉. 110) - 37 -
는 다음과 같이 해제하였다. 이는 성인이 동정(動靜)의 덕을 온전히 발휘하지만 항상 고요함에 근본하고 있음 을 말하였다. ( ) 그러나 고요함은 성(誠)으로 돌아가는 것[復]이자 본성의 곧음 [貞]이다. 진실로 이 마음이 적연하고 무욕하여 고요하지 않는다면, 역시 어찌 사물 의 변화와 천하의 움직임에 응대할 수 있으리오! 116) 주희의 이러한 해석이 주돈이의 본의와도 다를 수 있겠으나, 중요한 점은 인간 본성과 고요함이 근친적 개념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주희의 해석 역시 이고의 논리와 전혀 다른 바가 없다. 고요함, 성(誠), 돌아감[復]은 모두 당송 시기의 사상 에서 돌출된 것이다. 이 때 주희는 고요함이 곧 본성의 곧음[貞]이라 주장했는데, 이는 고요함 그 자체를 본성으로 이해하기는 논리적으로 합당하지는 않기 때문으 로 추정된다. 그래서 고요함이 본성 가운데 부분적 속성으로 제한하면서도 성정론 (性靜論)의 요지에 부합하고자 성지정(性之貞) 으로 절충하여 해제하였다. 주학에서 동정(動靜) 의 균형 혹은 겸비가 중요한 문제로 부상되었지만 그럼에 도 주희는 성정론(性靜論)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주희 역시 고요함 을 근원적 본질[本領]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심(心)의 동적 측면을 강 조하는 호상학의 대표주자인 호굉(胡宏, 1104~1161)에게도 보인다. 움직임 가운데 고요함이 놓였으니 이것이 천기(天機)이며, 정의 공부에도 동이 없지 아니하네. 항 상 [마음을] 보존하도록 하면, 마음이 밝아져 만변화가 한 근원으로 돌아간다네. 라 하였는데, 여기에서 동(動)이 비교적 강조된 것은 분명하나 호굉 역시 정 (靜)의 본체론적 위상을 도외 하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성정(性靜) 관념은 조선 시 대 유가 수양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퇴계학파의 담론에서 그러한 특징이 두드러진다. 117) 위의 장, 此言聖人全動靜之德而常本之於靜也. ( ) 然静者誠之復而性之貞也. 苟非此心寂然 無欲而静, 則亦何以酬酢事物之變而一天下之動哉. 117) 胡宏, 五峰集, 卷1(和劉子駒存存室), 動中涵靜是天機, 靜有工夫動不非. 會得存存存底事, 心明萬變一源歸. 116) - 38 -
성정 性情 의 분리 인간 본성과 감정을 명백히 준별하는 것은 정주리학의 기본 입장인데, 이는 사실 당송 시기의 사상사적 담론과 연속선상에 있다. 본래 선진 유학에서는 성정(性情) 관념을 분석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점차 유가 담론 내외에서 심성에 관한 철학적 논변작업이 누적되면서 양자를 분명하게 준별하게 되었다. 이러한 논의를 분명히 하기 위해, 먼저 선진(先秦) 유학에서의 성 정 관념을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성과 정 간의 관계를 고찰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으로는 性自命出 을 꼽을 수 있다. 性自命出 은 사맹(思孟) 시기 중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데, 여기에서 성과 정에 관한 논변이 언급된다. 2.1.2. ( ) 118) 희노애비(喜怒哀悲)의 기(氣)가 성이다. 119) 본성은 명으로부터 나왔고, 명은 하늘에서 내려진 것이다. 도는 정(情)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 정은 본성에서부터 드러난다. [그 도의] 시작은 [사람의] 정과 가까운 것이며 [그 도의] 마무리는 의로움과 가깝다. 120) 위 인용문에서 인간의 성과 정이 근친 혹은 동일 관념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 다. 인정(人情)이 본성으로부터 드러난다는 글귀에서 양자 간의 존재론적 유기성을 확인할 수 있다. 양 개념이 분별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함께 열어두긴 하지만, 희노 애비의 인간감정을 곧 인간 본성으로 동치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싫어함이 성이 다. 라고 언급하는 점을 동시에 고려해보면, 性自命出 의 성과 정 관념은 미분 121) 성 性 과 정 情 자는 동원자(同源字)로 생(生)에서 파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藤堂明保, 하지만 이에 대한 설명이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성정(性情)자 중 성(性)만 금 문(金文)에서 언급되기 때문이다. 갑골문에서 생(生) 자는 자이며, 성과 정 자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금문(金文)에서 가 성(性) 자로 대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정 자는 보 이지 않는다. 周易, 詩經, 今文尙書, 道德經 에도 정(情)이 아예 등장하지 않거나 1회 정 도 등장하며, 論語 에서는 성(性) 관념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 자료로 성 정의 관계를 논하는 것은 상당 부분 한계가 있다. 119) 性自命出, 第一簡, 喜怒哀悲之氣, 性也. 120) 위의 책, 第二簡, [性]自命出, 命自天降. 道始於情, 情生於性. 始者近情, 終者近義. 121) 위의 책, 第三簡, 惡, 性也 본 죽간의 상단이 파손되었고, 문맥을 고찰해보면 이 문장은 본 래 好惡, 性也. 인 듯하다. 118) ( ) ( ) 1963:492~493) - 39 -
화(未分化)된 상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어서 孟子 와 荀子 의 구절을 살펴보 면 다음과 같다. 그 본성[情]대로 한다면 선하게 될 수 있으니, 이것을 일러 [본성이] 선하다고 하 는 것이다. 122) 사람들이 그가 짐승 같은 것을 보고서 그에겐 일찍이 재성이 있은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어찌 사람의 정(情)이겠는가? 123) 그런 즉 사람의 본성을 따르는 것은, 사람의 정(情)에 순응하는 것이다. 124) 먼저 孟子 의 두 인용문은 모두 정(情) 자로 인간 본성을 가리켰다. 그리고 荀子 에서는 성과 정을 동치하여 언급하고 있다. 물론 맹자와 순자가 인간 본성에 관해 주장하는 것이 상이하지만 둘 모두 성과 정에 관한 유기성에 대해서는 부정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성정은 비록 내외(內外)의 다른 것이 있으나, 그 성격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성선을 주장하면 정 역시 선한 것이다. 만약 성악이 라 한다면 정 역시 악한 것이다. 이를 통해 보면 孟子 와 荀子 모두 性自 命出 의 성정관과 연속선상에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한(漢) 대 동중서(董仲舒, 197~104 B.C.)에 이르러 중인(中人)의 본성과 감정이 분 속되었는데, 이러한 성과 정의 분기는 당송 시기의 학자들에게서 분명하게 드러 125) 126) 孟子, 告子上, 乃若其情 則可以為善矣. 모종삼(牟宗三) 등은 여기에서의 정(情)을 실 정으로 이해하나, 주희는 감정 으로 이해한다. 본 연구자도 맹자의 문맥을 고려해볼 때 감정으 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 논거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이 인용문의 뒤 부분에 서 사단지심을 논하고 있다. 둘째, 孟子 의 다른 부분에서 [기품을 의미하는] 재(才 材)와 성 (性)/정(情)이 병치되고 있다. 기품에 대칭되는 개념은 실정보다도 감정 개념에 가깝다 구체적 주장은 정환희(2017b), 본성과 감정의 동이 문제 맹자의 내약기정(乃若其情) 과 후학들의 이해방식을 중심으로, 인문논총,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74(2), 77~80쪽 참조. 123) 孟子, 告子上, 人見其禽獸也 而以為未嘗有才焉者 是豈人之情也哉. Graham, A.C.는 X之情 은 본질적으로 X인 어떤 것 이라 규정한다(김명석, 2008:153). 따라서 맹자의 人之情 역시 사람의 본질적인 것[즉 본성]을 지칭하고 있다고 풀이할 수 있다. 124) 荀子, 性惡, 然則從人之性, 順人之情. 인용문의 앞 구절은 性之好惡喜怒哀樂, 謂之 情. 이므로, 順人之情 에서 정이 감정을 지시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문장에서는 人之情 이 언급되는데, 이 인용문의 문맥은 人之性과 人之情이 근친적임을 암시한다. 125) 徐復觀(2001), 兩漢思想史 第二卷, 上海: 華東師範大學出版社, 248쪽. 126) 동중서는 성(性)과 정(情)을 각각 음양으로 분속하여 자신의 감정론을 전개해내 간다. 우리의 몸에 성, 정이 있는 것은 마치 하늘에 음양이 있는 것과 같다(董仲舒, 春秋繁露, 深察名 號, 身之有性情也, 若天之有陰陽也. ) 동중서는 성과 정을 각각 양과 음에 분속시킴으로 이 122) - 40 -
난다. 먼저 이고부터 살펴보자. 본성과 감정은 서로 의지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만약 본성이 없다면 감정이 생겨 날 곳이 없으니, 감정은 본성으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감정은 감정 자체에서 온 것 이 아니라 본성으로 인하여 감정이 있다. 본성은 본성 자체에서 온 것이 아니라 감 정으로 말미암아 밝아진다. 본성은 하늘의 명이니, 성인은 이것[본성]을 얻어 미혹 되지 않은 자이다. 감정은 본성이 동한 것이니 백성이 이것[감정]에 빠져서 그 근본 [본성]을 알 수 없게 된다. 127) 여기에서 이고는 본성:감정=선함:거짓됨[邪] 의 도식을 제출하면서, 거짓됨의 내 원을 감정으로 지목한다. 이러한 설명방식은 분명 유가의 당초 성정관과는 차이가 있다. 性自命出 에서부터 孟子 荀子 에 이르기까지는 인간의 본성과 감정이 본질적으로는 같은 내용 특징을 갖는 것으로 설정하였으나, 이고는 성정의 특성을 선함과 거짓으로 이원화하였다. 이고는 본성을 근본[本]으로 여기고, 감정이야말로 그 근본을 은닉하는 기제가 된다고 보면서 이 양자를 엄격하게 구별하려 한다. 이 고는 인간의 본성이 모두 선하다고 전제하지만 현실 세계에 있어서는 선한 자와 악한 자를 차이는 분명해 보인다. 다시 말해 본성 관념은 인간 집단 내의 보편성을 전제로 하므로, 그 본성이 모두 선하다고 주장한 이상 [현상적 차원의] 거짓됨이 어디서 내원하게 되었는지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이고는 감정을 가지고 거짓 됨의 소래(所來)를 설명하였다.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은 본성 때문이요, 사람이 그 본성을 미혹하는 것은 정 때문이다. 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 사랑, 증오, 욕구의 일곱 가지 모두가 감 원화하고 있다. 동중서 철학에서 양존음비(陽尊陰卑) 론은 특징적인 논법이다. 동중서에 따르면 음(陰)에 분속된 감정은 부정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동중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크게 부 유하면 교만해지고 크게 빈곤하면 우환이 있으니, 우환하여 도적이 되고 교만하면 난폭해지니, 이는 뭇 사람의 감정이다. 성인이 뭇 사람의 감정에서 그 어지러움의 나옴을 본다( 春秋繁露, 度制, 大富則驕, 大貧則憂. 憂則為盜, 驕則為暴, 此眾人之情也. 聖者則於眾人之情, 見亂之所 從生. ). 여기에서 동중서는 교만과 우환을 감정에서 소래(所來)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동중 서는 대다수 사람[中人]의 본성[質] 속에는 선단과 악단이 있고 선단은 성에서 악단은 정에서 찾았으니, 감정을 부정적으로 여긴 것이다. 127) 李翺, 李文公集, 卷18, 復性書上, 性與情不相無也, 雖然無性則情無所生矣, 是情由性而 生. 情不自情, 因性而情. 性不自性, 由情以明. 性者, 天之命也, 聖人得之而不惑者也. 情者, 性之動 也, 百姓溺之而不能知其本者也. - 41 -
정의 소행이다. 감정이 이미 어두워지면, 본성은 이에 숨겨지는데, [이는] 본성의 과 오라 할 수 없다. 일곱 가지의 감정이 순환하고 교차하므로 본성이 충실해질 수 없 는 것이다. 128) 여기에서 이고는 본성과 감정을 엄격하게 이원화한다. 그는 감정을 본성이 동 (動)한 것으로 보는데, 감정은 외적 대상에 대한 사려(思慮)나 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 사랑, 증오, 욕구를 포괄한다. 그리고 이고에게서 있어서 이 정(情)은 [선 한] 본성을 미혹하게 하는 거짓된 것 이다. 그의 인성론은 性:情=靜:動=善:邪 로 정 리될 수 있고, 이는 정(情)의 제거로 귀결된다. 그는 사려하지 않아야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감정이 생기지 않아야 이내 생각을 바로 할 수 있다. 고 주장하 는데, 그의 복성(復性) 은 망정멸식(妄情滅息) 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장은 이고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북송(北宋) 삼 선생 이자 정 학파(正學派) 의 일원으로 알려진 호원(胡瑗, 993~1059)에게도 유사한 논지가 발견 된다. 129) 130) 131) 대개 본성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질이며, 인의예지신 오상(五常)의 도가 구비되 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품수하면 바른 본성이 된다. 희로애락애오 욕(喜怒哀樂愛惡欲)의 일곱 가지[의 감정]이 있게 된 것은 모두 밖의 사물로부터 유 혹되어 안[內]에서 감정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칠정이] 사악한 감정으로 흘러 간다. 132) 현인과 군자가 사려하는 동안에 조금이라도 불선함이 있다면 일찍 그것[불선]을 준별하여, 과악(過惡)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고 선도(善道)로서 본성을 회복하 李翶, 李文公集, 卷18, 復性書中 人之所以為聖人者, 性也. 人之所以惑其性者, 情也. 喜 怒哀懼愛惡欲, 七者皆情之所為也. 情旣昏, 性斯匿矣. 非性之過也, 七者循環而交來, 故性不能充 也. 129) 다만 이고는 정에는 선한 것도 있고 불선한 것도 있다( 復性書中, 情有善有不善 )고 언 급하기도 한다. 이는 이고가 모든 감정을 불선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함의한다. 李小山 (2009:66)은 이고가 말한 멸정(滅情)에서 정은 오직 망령된 감정(妄情)을 특칭한 것이라 주장한 다. 이러한 설명은 이고 담론 내에 있는 모순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허나 이 러한 주장은 復性書 내에서 이고가 감정을 전칭(全稱)해서 거짓된 것으로 여러 번 규정하 는 점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해명이라 할 수 없다. 130) 李翶, 李文公集, 卷18, 復性書中, 弗思弗慮, 情則不生. 情既不生, 乃為正思. 131) 본 논문에서 호원에 대한 논의는 이원석(2011), 북송대 인성론 연구 를 주로 참고하였음. 132) 胡瑗, 周易口義, 卷1, 乾, 葢性者天生之質, 仁義禮智信五常之道, 无不備具. 故禀之為正 性. 喜怒哀樂愛惡欲七者之來, 皆由物誘於外, 則情見於内, 故流之為邪情. 128) - 42 -
고자 한다[復性]. 오직 성인이 본성[天性]의 온전함을 얻어서 무릇 사려함에 조금의 불선이라도 없으니 [감정이] 발하여도 모두 도에 합치된다. 현인 이하는 그 본성이 오상의 도에 있어서 후하기도 하며 편벽되기도 하니, 정욕(情欲)의 발함이 거짓된 것이 있기도 하며 바른 것이 있기도 하다. 133) 인간 본성은 오상(五常)이 구비되어 있어 바른 것 이 되고, 감정은 그 자체로 사 악한 것은 아니지만 사악한 것의 내원으로 상정된다. 호원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으로서, 수양의 목적으로 상정된다. 이는 이고의 논의와 거의 흡사하다. 이 고와 호원 모두 감정 그 자체는 유선유악한 것[有善有不善; 有邪有正]한 것으로 보 았으나, 그것이 최종적 결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본성과 감정을 택일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분명 악의 내원이 되는 감정을 부정적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 서 호원은 감정으로서 그 본성을 어지럽혀 악으로 이르게 된다면, 일신(一身)이 보존되지 못할 것이다. 라고 경계한다. 134) 무릇 사람의 감정이 안일(安逸)하여 절제하고 금(禁)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절(節)은 사람의 간사한 감정 을 절제하고, 사람의 사욕 을 줄이고, 사람의 잘못된 바 를 막으며, 사람의 거짓된 바 를 끊고자 하는 것으로 ( ) 135) 호원은 최종적으로 감정의 절제 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감정을 본성으로서 제지 하여 감정을 본성으로 대체 할 것을 강조한다. 성인은 천하 백성과 사물을 드러내 이룰 수 있고, 모두 그 이로움을 얻으 면서도 그 올바름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감정을 본성에 맞게 함[性其情]에 있다. ( ) 오직 성인이라야 만물로 하여금 그 이로움을 얻을 수 있게 하고 그 올바름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그 감정을 본성에 맞게 함에 있으니, 외물로 하여금 그것[본성]을 바꾸지 못하게 했다. 그런즉 성인의 감정은 진실로 그 사악하지 않게 되니, 다만 오직 바른 본성으로 그것[감정]을 통제하여, 스스로 사사롭지 않아 천하 와 함께 할 수 있다. ( ) 136) 위의 책, 卷5, 復, 猶賢人君子凡思慮之間, 一有不善則能早辨之, 使過惡不形于外而復其性 于善道. 惟聖人得天性之全, 故凡思慮之間未有一不善 故發而皆中于道. 賢人而下則其性偏于五常 之道有厚有薄, 情欲之發有邪有正. 134) 胡瑗, 周易口義, 卷1, 乾, 是故, 以情而亂其性, 以至流惡之深, 則一身不保. 135) 위의 책, 卷10, 節, 夫人之情, 莫不欲安逸而惡節制之為禁, 此節者, 節人之邪情, 約人之私 欲, 遏人之非, 絶人之偽, ( ) 133) - 43 -
위의 인용문은 감정을 본성에 맞게 함[性其情] 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는 감정에 대한 본성의 우위 를 표창하면서 종국적으로는 감정 그 자체가 본성과 합치되는 경지 를 최종적 경지로 삼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성기정(性其 情) 은 왕필(王弼, 226~249)이 周易註疏 에서 가장 먼저 언급한다. 왕필이 말한 성 기정 은 장자학의 기초적 명제라 할 수 있는 이치로서 감정을 순화하는 것[以理化 情] 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이리화정 을 성즉리(性卽理) 명제와 견주어본다면 자 연스레 본성으로서 감정을 순화하는 것[以性化情] 라는 명제가 도출되고 이는 본 성과 감정 간의 질적 차이를 분명히 한다. 이처럼 이고나 호원과 같은 리학의 선구자들은 악이란 욕심에서 나오고, 또 욕 심은 정에 귀속하여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왕안석(王安石, 1021~1086) 의 저항을 받았는데, 왕안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37) 본성과 감정은 하나이다. 세간의 논자들이 성선정악(性善情惡)이라 말하지만, 이 는 성정의 이름만 알 뿐이지 그것의 실제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다. 희노애락호오 욕(喜怒哀樂好惡欲)이 바깥에 발하지 아니하고 마음 속에 있다면, 그것은 본성이다. 그것이 바깥으로 발하여 행위로서 드러나게 되면 그것이 감정이다. 본성은 감정의 근본이고, 감정은 본성의 작용이니, 그러므로 내가 본성과 감정은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138) 왕안석의 본성 [개념]은 선천적인 본능경향으로서 희노애락호오욕을 포괄한다. 즉 희노애락호오욕이 외부와 감응하지 않아 내부에 보존될 때[體] 그것은 본 성이라 하고, 외부와 감응하게 되어 형상화[用]되면 그것은 감정이다. 따라서 본성 과 감정의 실질적 내용은 같다. 그는 인의예지신의 오상(五常)은 본성 그 자체로 보는 관점을 비판하는데 선악의 문제는 정의 발출되어 이치에 합당할 때[當於 139) 140) 위의 책, 卷1, 乾, ( ) 聖人能生成天下民物, 使皆獲其利而不失其正者, 葢能性其情也. ) 唯聖人則能使萬物得其利而不失其正者, 是能性其情, 不使外物遷之也. 然則聖人之情, 固有 也所以不為之邪者, 但能以正性制之耳, 不私于己而與天下同也. 137) 候外廬 編(1984), 宋明理學史, 박완식 역(1993), 송명리학사 I, 서울: 예문서원, 44쪽. 138) 王安石, 臨川先生文集, 卷67, 性情, 性情一也. 世有論者曰性善情惡, 是徒識性情之名而不 知性情之實也. 喜怒哀樂好惡欲未發於外而存於心, 性也. 喜怒哀樂好惡欲發於外而見於行, 情也. 性 者, 情之本, 情者性之用, 故吾曰性情一也. 139) 刘文波(2004), 王安石伦理思想及其实践研究, 湖南师范大学 博士學位論文, 34쪽. 136) ( - 44 -
理 ]에서야 판별 가능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선악은 후천적인 도덕관습에 합당 한지의 여부에 달린 것이지, 성 그 자체는 선 혹은 악으로 준별될 수 없다. 이 렇게 되면 선:성=악:정 의 이원적 도식은 근본적으로 흔들린다. 호굉(胡宏)의 성정론 역시 왕안석과 유사한 입장을 취한다. 知言 에서 그는 좋 아함과 싫어함은 인간의 본성이다. 라고 주장하는데, 이 문장은 앞에서 살펴본 性自命出 第3簡 성정합일적인 의 문장과 완전히 동일하다. 즉 도덕적 선악은 그 좋아함과 싫어함이 공[理]과 사[己]에 부합하는지의 [후천적] 여부에 달린 것이 다. 이에 대해 호이트 틸만은 생리적인 감성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었다고 여 기면서 ( ) 정과 성을 서로 같은 관념으로 여긴 것 으로 평가한다. 반면에 주희에 의하면 호오는 인간의 본성이 아닌 감정과 연관되는 키워드이다. 그는 본성 에 호오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오로 본성을 개념화할 수는 없 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호굉의 입장에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고, 知 言疑義 에서 호굉의 입장을 곡해하였던 것이다. 이후 사상사 전개에서 [성정분리의 입장을 가진] 주학이 학문적 패권을 획득했 고, 또한 정호나 육상산 역시 심성을 합일하려 했으나 성정을 합일하는 데까지 이 르지는 않은 점을 고려해보면, 왕안석과 호굉의 입장은 당송 시기 이후의 성정분리 현상을 저지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성정 분리현상은 가치론적 측면에서 본성이 우위에 있음을 그 내용으로 하며, 곧 자기 내부의 본연성을 찾고 이를 사회 적으로 확장하여 실천하는 공부법이 도출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소절에서 논 하기로 하자. 141) 142) 143) 144) 145) 146) 2.2. 내성과 외왕 공부론 王安石, 臨川先生文集, 卷68, 原性, 夫太極者, 五行之所由生. 而五行, 非太極也. 性者, 五常之太極也, 而五常不可以謂之性. 141) 위의 책, 性情. 142) 위의 책, 原性, 性不可以善惡言也. 143) 胡宏, 知言, 卷2, 好惡, 性也. 144) 위의 권, 小人好惡以己, 君子好惡以道察乎是. 145) Tillman, Hoyt C.(1992), Confucian Discourse and Chu Hsi's Ascendancy, Hawaii: University of Hawaii Press, 김병환 역(2010), 주희의 사유세계 -주자학의 패권-, 서울: 교육과학사, 43쪽. 146) 朱熹, 朱熹集, 卷72(7:3861), 胡子知言疑義, 熹謂好惡固性之所有, 然直謂之性則不可, 蓋 好惡物也. 즉 주희는 호굉이 성과 호오의 개념적 위계를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고 본다. 140) - 45 -
위 절에서 우리는 유가 심성론이 고요함을 강조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수양론 역 시 이러한 심성론의 변화에 조응하였는데, 예를 들면 이고와 주돈이의 무사(無思) 공부이다. 그들은 감정 혹은 사려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불필요한 감정을 지양하는 공부법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오해하지 않아야 할 점은 이러한 정적 공부 론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경전 공부 혹은 외왕 공부가 도외시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 어느 유학자라 할지라도 내성과 외왕의 양행(兩行) 과제를 철저히 준수하고자 하므로, 당송 시기의 유학 역시 내성과 외왕을 고루 강조했다. 사려미맹과 정좌 당송 시기의 심성론은 고요함과 본연성의 강조로 요약된다. 그런데 성정(性靜) 관념의 특성상 자기본연성은 고요함과 맞물려있는데 이 점은 이고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사려 미맹을 주장했는데, 이는 본연성을 회복하고자 함[復性]이다. 이는 다음의 글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2.2.1. 문: 사람이 혼미함이 오래되었으니, 장차 그 본성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점진적 인 수양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방법을 감히 묻습니다. 답: 사려하지 않아야 감정이 드러나지 않네. 감정이 드러나지 않아야 이내 생각 을 바로 할 수 있네. 생각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사려가 없다는 것일세. 易 에서 말 하길 천하가 어찌 사려하리오? 라 하였고, 또 말하길 사악함을 막고 그 성(誠)함 을 보존한다. 라 하였다. 詩 에서 말하길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어야 한다. 고 하였 네. 문: 그것이 전부입니까? 답: 아직 아니다. 그것은 마음을 재계하는 것뿐이고 아직 고요의 상태에서 벗어 나지 못했다. 정(靜)이 있으면 반드시 동(動)이 있고, 동이 있으면 반드시 정이 있다. 이처럼 정과 동이 그치지 않는 것이 바로 정(情)이다. 易 에 이르길 길흉과 후회, 한탄은 동(動)에서 생긴다고 했듯이 어떻게 본성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문: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 정(靜) 상태에 있을 때 마음에 생각이 없음을 인식함[知心無思]은 재계다. 그 런데 본래에 생각이 없음(本無有思)을 인식하고서 동정 모두를 벗어나 적연부동하 는 상태가 바로 지성(至誠)이다. 그러므로 中庸 에 성(誠)하면 밝아진다 고 했고, 易 에 천하의 모든 운동은 한결같음을 숭상한다 고 했던 것이다. 147) - 46 -
이고는 한사존기성(閑邪存其誠) 과 사무사(思無邪) 의 사(邪) 를 모두 사려 와 같은 의미로 이해했다. 그에게 있어 본성:정(靜)=사려:동(動) 의 관계가 성립하며, 사려는 고요한 본성을 해치는 요인이다. 이고가 말하는 복성(復性) 성(性)의 상태 로 돌아가야 한다 는 것은 고요한 본성을 해치는 요인을 제거하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 인간 본성은 감정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곧 복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감정을 제거하여 그 본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이고는 감정이 일어나지 않아야, 본성이 이에 충만해진다. 라 말하면서, 인간 스스로 의도적 으로 감정 을 소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론은 사려하지 않을 것[弗 慮弗思] 에 모아진다. 주돈이도 이러한 경향을 갖고 있는데 앞에서 주돈이가 太極圖說 에서 주정(主 靜)을 말했고, 通書 에서 무욕(無欲)을 강조했음을 살펴본 바 있다. 이 무욕에 대 해 주돈이는 養心亭說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48) 149) 맹자는 과욕(寡欲)을 말했으나] 나는 마음을 함양하는 것은 욕심을 적게 가지어 마음을 보존하는 데 그치지 말고, [욕심을] 줄여나가 없는 상태에 이르러야 할 것으 로 생각한다. [ 150) 여기에서 주돈이는 맹자의 과욕을 넘어 무욕을 주장한다. 주지하다시피 무욕은 道德經 의 1장에서 언급될 정도 로 노장의 중요한 개념어이다. 맹자는 욕구의 존 재가능성을 일정 부분 인정하여 그것이 도리에 합당할 것을 주장한 반면에, 주돈이 는 더 나아가 욕망의 완전한 소멸[滅 去]을 강조하였다. 마찬가지로 주돈이는 무 151) 李翺, 李文公集, 卷18, 復性書中, 或問曰人之昏也久矣, 將復其性者必有漸也, 敢問其方 曰弗思弗慮, 情則不生. 情既不生, 乃為正思. 正思者, 無慮無思也. 易曰 天下何思何慮. 又曰閑邪存 其誠. 詩曰思無邪 曰已矣乎. 曰未也. 此齋戒其心者也, 猶未離於靜焉. 有靜必有動, 有動必有靜, 動 靜不息, 是乃情也. 易曰吉凶悔吝, 生於動者也. 焉能復其性耶? 曰如之何? 曰方靜之時, 知心無思者, 是齋戒也. 知本無有思, 動靜皆離, 寂然不動者, 是至誠也. 中庸曰誠則明矣. 易曰天下之動, 貞夫一 者也. 148) 李翺, 李文公集, 卷18, 復性書上, 情不作, 性斯充矣. 149) 정환희(2017c), 이고의 성정론 연구, 대동문화연구,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99, 210~216쪽. 150) 周惇頤, 周元公集, 卷6, 養心亭說, 予謂養心不止於寡, 而存耳, 蓋寡焉以至於無. 본 인 용문의 해석 및 養心亭說 논의는 김병환(2009:596)에 의거함. 151) 道德經, 一章, 故常無欲以觀其妙. 147) - 47 -
욕뿐만 아니라 通書 에서 무사(無思)를 논했다. 무사(無思)는 근본이요, 사통(思 通)은 작용이다. ( ) 생각함이 없어도 통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성인이다. 라 고 말한다. 여기에서 그는 사(思)의 근본을 무사라 상정하였는데, 이는 삿된 생각의 소거를 강조했음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준다. 또한 장재 역시 허정의 수양론을 제출하였다. 그는 허는 인의 근원이고 천지 는 허(虛)를 덕으로 삼는다. 지극히 선함은 허이다. 라고 주장하면서, 마음 역시 허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52) 153) 돈후하여 허정함이 사람다움의 근본이다. 154) 허정한 마음을 가진 이후에 마음을 다할 수 있다. 155) 허정한 마음을 가져야만 밖에 메일 것이 없다. 156) 고요함은 선의 근본이고, 허는 고요함의 근본 이라는 점에서 장재의 허심 공 부법은 주돈이의 주정(主靜) 수양법과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마음을 허정하게 한 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157) 고요함 공부에는 [그 규모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인자는 고요하다 는 큰 것이고 고요하여야만 사려할 수 있다 는 것은 작은 것이다. 초학자는 고요함으로서 덕을 익히기 시작해서 그 덕을 이루어야만 이 역시 [진정한] 고요함이라 할 수 있다. 158) 위 표현에서 고요함이 사려와 결부되면 그것은 진정한 고요함 공부라 할 수 없 음을 파악할 수 있다. 고요함을 내재적인 덕으로서 체화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장 周惇頤, 周元公集, 卷4, 通書 思第九, 無思, 本也. 思通 用也. ( ) 無思而無不通, 為聖人. 153) 張載, 張子語錄, 卷中, 虚者仁之原 ( ) 天地以虚爲德, 至善者虚也. 154) 위의 권, 敦厚虚静仁之本. 155) 위의 권, 虛心然後能盡心. 156) 위의 권, 虚心則無外以爲累 157) 위의 권, 静者善之本, 虚者静之本 158) 위의 책, 卷7, 經學理窟 學大原下, 靜有言得大處有小處. 如仁者靜, 大也. 靜而能慮, 小 也. 始學者, 亦要靜以入德, 至成德, 亦只是靜. 152) - 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