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기술 20 곡성의돌실나이 지정번호 32. 곡성의돌실나이 전라남도곡성군석곡죽산리의삼베짜기. 곡성, 삼베를짜다 다른옷감보다올이굵어숭숭뚫리기때문에바람이잘통하는삼베는한해살이풀인대마의껍질을벗겨서짠옷감이다. 우리나라에서는고대국가시대부터사용하여그역사가오래되었다. 삼베를만드는핵심기술은대마껍질을벗기고갈라쪼갠다음일정한굵기로잇는데, 물레를돌리거나실을날고베틀에얹어짜는것은일반적인베짜기와마찬가지이다. 이렇게길쌈한삼베는지방에따라함경도산을 북포, 경상북도산을 영포, 강원도산을 강포 라하고, 경상북도안동산을 안동포, 전라남도곡성산을 돌실나이 라고불렀다.
돌이많은곳, 곡성 나무그늘이얽혀있으니달빛이더디고, 바람이높은누에지나니네자리가다알맞구나. 만학 ( 萬壑 ) 에뜨는산바람은아침비갠후요, 처마에떨어지는산색은석양때로다. 경치를유련 ( 留連 ) 하기에술이없지않고심정을도야함은시가가장좋도다. 가소롭다. 실행의구기 ( 拘忌 ) 함이몇번이나좋은기약막혔는고 조선시대문인유순 ( 柳洵 ) 의글속에남아있는곡성은백제때욕내군으로불리다신라때옥과군을합하여곡성군이되었다. 지금은곡성군에편입된옥과현 형승 조에 크고높은산들이억누르듯서쪽에자리하고, 큰강은제어하듯동쪽으로흐른다. 라고실려있고, 여지도서 풍속 조에는 곡성의진산은동악산이다. 동악산정상에서면멀리지리산전경이한눈에들어오고옥과의설산, 광주의무등산이지척이다. 라고말하고있다. 산에관련된이야기가많듯전라남도곡성군의석곡면은돌멩이가많은골짜기에서비롯된지명이다. 소백산맥과노령산맥의줄기가뻗쳐있는이곳은서쪽과동쪽에 500m 400m의산지가각각솟아있다. 그사이를보성강의지류가흐르면서, 자갈로분류하기엔입자가큰냇돌이여기저기쌓여있다. 이곡성군석곡면에는삼베를모시와같이가늘게짜는돌실나이가유명하다. 돌실나이 의 돌실 은전남곡성군석곡 ( 石谷 ) 면의옛이름이고, 나이 는 베를짜다 의옛표현인 베를나다 에서파생된말이다. 이곳삼베는궁중에올리는진상품이었기때문에다른곳의삼베보다비싸게팔려나갔다. 하지만근세서양의문물이쏟아져들어오면서가내수공업으로유지되던모든마직물의생산이감소되고그기술의보존조차어려운형편에이르렀다. 이에 1970년 7월 22일곡성의돌실나이는국가무형문화재제32호로지정되었고, 삼베짜기보유자로김점순이인정되었으나별세하였다. 삼베짜기보유자고 ( 故 ) 김점순 사진출처 :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이야기여행 329
삼베, 한가위를밝히다 삼베는 대마 혹은 대마포 라고불렸으며, 한자어로는마 ( 麻 ) 마포 ( 麻布 ) 포 ( 布 ) 라고도한다. 가장오래된마직물은기원전 3000년경의것으로짐작되는고대이집트의고분에서발굴된미라가입은옷으로 아마포 로짜여있다. 또한그곳에서발굴된벽화에는아마의재배 방적 제직에이르는모든기술적절차방법이자세히묘사되어있다. 고대이집트중왕국시대 ( 기원전 2133~1786) 와신왕국시대 ( 기원전 1567~1080) 의유물을살펴보면, 마직바탕에염색한양모사를꿰어엮어서화려한무늬의벽걸이나깔개를이미그때만들어썼던것으로짐작된다. 이이집트의전통적인마직기술이점차지중해문화권으로건너가섬세하고양질의것으로발달하였고, 18세기말면직물이공업화되기까지오랫동안서구가내공업의주축이되었다. 한국또한삼베의역사가매우길어한민족이한반도로이주할때가지고온것으로짐작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에는예 ( 濊 ) 와변 ( 弁 ) 진 ( 辰 ) 에마가있었음이기록되어있으며, 삼국유사 에는가락국에서허왕후의나라인아유타국에포 ( 布 ) 를보낸기록이있다. 그런가하면 삼국사기 에는신라에서베짜기행사를하였다고기록되어있다. 곡성의돌실나이바디꿰기 사진출처 : 국립무형유산원 330 전통기술
6부를두편으로나누고왕녀두사람으로하여금각각두편의여자들을거느리게했다. 그리고 7월 16일부터매일큰부락의광장에모여베짜는내기를하는데을야 ( 乙夜 : 밤 9시-11시 ) 가되어서야하루를마쳤다. 그러다가 8월보름이되면어느쪽이더많은길쌈결과물을내놓았는지를따져내기에진편이술과음식을마련하여이긴편에게대접했다. 음력 8월 15일에행해지는이 가배 ( 嘉俳 ) 는신라의세번째임금인유리왕때부터시작된축제로, 신라의부녀자들과관련된행사였다. 서라벌에서는길쌈내기가끝나면모두모여노래와춤을추며온갖놀이를즐기는데내기에진편의여자한명이먼저일어나춤을추며 회소, 회소 라고노래를부르고, 그소리가하도애절하고단아하여후대사람들이그것으로노래를지어회소곡이라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있다. 한달의가운데, 즉보름을뜻하는가배는이후 가위 로바뀌었고그중에서도 8월 15일은큰가위, 즉 한가위 라고불리게되었다. 가배는이후 악학궤범( 樂學軌範 ) 에실려있는고려시대의노래인 동동( 動動 ) 의 8월노랫말에다시등장한다. 팔월보름날은가배 ( 嘉俳 ) 날이지만님을뫼시고함께지내면서맞을수있다면야오늘이참가배다울텐데 라는구절이나온다. 가배라는말이신라시대이후고려속요에도등장하는것을보면이말은오랫동안지속되었음을알수있다. 더욱이통일신라시대에는저마포와대마포를따로짰으며, 실의밀도가얼마인가에따라마포의등급을매겼는데, 왕족이나귀족은등급이높은저마포 ( 모시 ), 서민은등급이낮은대마포 ( 삼베 ) 로옷을지어입었다고한다. 특히베는까슬까슬해서시원한느낌을주는소재의특성상여름철일상의복으로가장많이사용되었다. 남자의고의, 적삼, 조끼의소재가되었고, 여름철이불, 베갯잇으로사용되었으며, 옷을만들고남은조각으로는조각보를만들었다. 특이한것은이러한삼베가수의와상복으로이용되었다는점이다. 삼베가수의로쓰이는이유는뛰어난수분흡수와증발력, 항균 항독작용때문이라여겨지며, 상복으로이용된것에는마의태자 ( 麻衣太 무형문화재이야기여행 331
김홍도, <길쌈> 조선 18-19세기, 보물 제 527호, 지본채색, 28.0 23.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子)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935년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 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나라를 빼앗기자 망국의 설움을 안고 누런 삼 베로 된 누더기 옷을 입은 채 개골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상(喪)을 당했을 때 삼베옷을 입어 망자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는 상복의 풍습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더불어 삼베는 화폐로도 사용이 되었다. 직물이 화폐로 쓰인 역사 는 매우 오래 되어서, 고구려 신라 고려시대에도 이 포화(布貨) 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포화는 삼베, 무명, 모시, 면주 등 물품화폐로 쓰 인 직물을 통틀어 일컫는 말인데, 주서(周書) 에는 고구려에서 견포 (絹布)로 세금을 부과한 기록이 있으며, 고려사 에도 포백(布帛)을 화 폐로 삼은 기록이 여러 번 나타난다. 한편 조선으로 넘어와서는 해동통보, 은병, 쇄은 등의 고려시대 화 폐들이 제한된 범위 안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태종 8년(1408)에 이 332 전통기술
들은 법적으로 유통이 금지되었다. 이후 쌀과 베가 교환수단으로 다 시 등장하였고, 그중에서도 특히 베가 일반적인 교환수단으로 정착하 였다. 베가 쌀을 제치고 화폐의 대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쌀이 얼마든지 분할 가능해 소액과 고액거래에 모두 사용할 수 있었지만, 풍년이나 흉년에 따라 해마다 그 가치의 변동 폭이 컸기 때문이다. 이 에 비해 베는 상대적으로 가치가 안정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쌀에 비 해 운반성, 저장성에서도 우수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마포(삼베)가 모든 직물을 대표하여 물품화폐로 사 용되었고, 면포(綿布, 무명), 저포(紵布, 모시) 등이 부분적으로 사용 되었다. 하지만 점차로 목화가 널리 보급되면서 면포가 대량 생산됨 에 따라 마포를 대신하게 되었다. 여름철 일상복에서 수의와 상복, 그리고 돈으로도 쓰인 삼베는 심 지어 그림을 그리는 화폭으로도 쓰였다. 비단이 그림을 그리는 화폭 으로 쓰였다는 건 흔히 알려졌다지만 삼베라니, 쉽사리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삼베 또한 비단 못지않게 화폭으로 널리 사 용이 되었다. 삼베에 그림을 그린 영산회괘불탱이 남아있어 현재에도 그 정교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개심사영산회괘불탱> 조선 1772년, 보물 제1264호, 삼베 바탕에 채색, 1010 587, 개심사 소장.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조선 영조 48년(1772)에 그려진 이 그림은 임금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 강을 기원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 주로 붉은색과 녹색을 사용하였고 아 름답고 복잡한 문양에서 매우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비현실적인 신체 비례와 복잡한 문양에서 18세기 후 기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무형문화재 이야기 여행 333
곡성, 삼베를짜다 조선헌종 9 년 (1843) 에간행된홍양호의 이계집 ( 耳溪集 ) 에베짜는 풍속을읊은글이있다. 3월에심은삼을 7월에거두어 5월에실을내어열흘남짓헹궈서부드러운손을놀려가는베를짜내니매미날개인듯엷어서주먹안에드는데아깝게도남쪽상인에다넘겨주고몸에다간거친베로몽당치마두르도다 예로부터베는여인의손에서두번태어난다는말이있다. 첫번째는삼대에서삼껍질을벗기고째고이어베틀에걸어짜는여인의공으로태어나상품, 중품, 하품이되는것이고, 두번째로는여인들이빨고풀먹이고만지고다리는정성으로경쾌한질감의베가만들어진다는것이다. 이렇게베는옷감의특성과사람의성품이어우러져다시태어나는옷감이다. 우리는전통적으로농사일을남정네의일로여긴반면, 바느질과길쌈을여인네가갖추어야할중요한덕목으로꼽아왔다. 길쌈가운데삼을삼는일은매우고되고지루하여남정네들이모를내거나논을맬때두레를조직, 협동작업을하듯이여성들도여럿이모여이야기를나누거나노래를부르며삼을삼았다. 때로는편을갈라서내기를걸기도하였는데, 이를두레삼이라고한다. 두레삼의역사는매우오랜것으로앞서본 삼국사기 의 가배 에서이미찾아볼수있다. 신라제3대임금인유리왕시기두패로나뉜여인들이길쌈경쟁을벌였는데그결과를따져진쪽에서이긴쪽에음식을대접하고이어서춤을베푼것이다. 이러한행사는길쌈의주요부분으로굳어졌다. 조선시대에는 동국여지승람 이나 동국세시기 등에 전국에서지금도행한다 [ 國俗至今行之 ]. 는기록이나타난다. 비단조선시대뿐만이아니다. 두레삼은오늘날에도계속되고있다. 전라남도곡성에서는처녀들이 7월부터두레삼을시작, 8월보름에 334 전통기술
끝낸다음각각쌀과팥을거두어반달모양의떡을빚어부모님께드리고, 남은것을먹으며춤추고노래한다. 이같은풍습이있듯, 곡성에서는여전히제례식방법으로삼베를짠다. 이곳은섬진강과보성강이삼면으로흐르는물맑은지방으로서외부와는번잡한접촉이없어예로부터가내공업으로전해오는베짜기를지속하고있다. 곡성삼베는곱기가또한모시같이청결하여다른길쌈보다더공이많이든다. 포의폭역시옛날그대로 35cm이며한필의길이도 40자의옛규격을그대로지니고있다. 이곳아낙네들은그들의정성을바쳐하나의작품을완성해왔다. 무형문화재이야기여행 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