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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 武人執權 初期 民亂의 性格 金 塘 澤* Ⅰ. 머 리 말 Ⅱ. 兩界地方의 民亂 Ⅲ. 南道地方의 民亂 Ⅳ. 奴婢叛亂 Ⅴ. 맺 는 말 Ⅰ. 머리말 高麗의 武人執權期는 民亂이 頻發한 시대였다. 100년의 武人執權 기간동안 80여 개 이 상의 크고 작은, 농민 천민의 亂이 전국을 휩쓸었던 것이다.1) 따라서 이에 대한 해명없이 武人執權期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조차 한다. 武人執權期의 民亂에 대해서는 상당한 분량의 연구가 축적되었다. 당시에 일어난 농민 천민의 亂 모두를 취급한 연구가 있는가 하면,2) 일정한 시기의 民亂만을 다룬 논문도 있 고,3) 또한 개별적인 亂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던 것이다.4) 그 결과 亂의 원인이나 * 全南大學校 歷史敎育科 副敎授. 1) 필자는 단순한 농민들의 소요 정도로 이해되는 것들도 여기에 포함시켰다. 따라서 필자가 제시한 亂의 숫자가 절대적인 것일 수는 없다. 2) 邊太變, 農民 賤民의 亂 ( 한국사 7, 1973). 洪承基, 高麗 武人執權時代의 奴稗叛亂 ( 全海宗紀念史學論叢, 1979 高麗貴族社會와 奴 牌 1983). 3) 旗田巍, 高麗の明宗神宗時代における農民一挨 ( 歷史學硏究 2 4 5, 1934). 尹龍爀, 高麗 對蒙抗爭期의 民亂에 대하여 ( 史叢 30, 1981). 劉璟娥, 高麗 高宗 元宗時代의 民亂의 性格 ( 梨大史苑 22 23, 1988). 4) 邊太變, 离積亂 發生의 社會的 素地 ( 史學硏究 4, 1959 高麗政治制度史硏究, 1971). 旗田巍, 高麗の武人と地方勢力 李義收と慶州 ( 朝鮮歷史論集 上, 1979). 孫弘烈, 忠州 奴軍의 亂과 對蒙抗爭 ( 湖西文化硏究 1, 1981). 金晧東, 高麗 武臣政權下에서의 慶州民의 動態와 新羅復興運動 ( 民族文化論叢 2 3, 1982). 李貞信, 高麗時代 公州 鳴鶴所民의 蜂起에 대한 一硏究 ( 韓國史硏究 61 62, 1988)., 高麗 武臣政權期 晋州民의 抗爭 ( 韓國學報 55, 1989). 金光植, 雲門寺와 金沙彌의 亂 ( 韓國學報 54, 1989). 한편, 金偶坤, 抗蒙戰에 參與한 草賊에 대하여 ( 東洋文化 9, 1979)는 對蒙抗戰에 참여한 叛亂軍에 관해 언급했으며, 金塘澤, 崔氏政權과 國王 ( 高麗武人政權硏究, 1987)에서는 新

- 120 - 國史館論叢 第20輯 경 과, 그리고 의의 등에 관해서 적지 않은 사실들이 밝혀졌다. 武人執權期의 民亂을 연구한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당시 民亂의 원인으로 지방관의 수탈 등으로 인한 농민 생활의 궁핍과 정부의 통치력 이완을 들고 있다. 이는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만으로 武人執權期에 民亂이 빈발했던 이유가 모두 설명되었 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武人執權時代 民亂의 특징을 알려줄 수 있는 원인을 지적하는 것 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농민생활의 궁핍이나 정부의 통치력 이완은 어느 시기의 民亂에도 그 원인으로 지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高麗 武人執權期뿐만 아니라 新羅末이나 朝鮮末 에 일어난 民亂의 원인으로도 열거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설명만을 강조한다면 民亂을 통해 武人執權期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高麗의 武人政權은 100년 동안 지속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民亂을 하나로 묶어 설명 하려 한다면 적지 않은 무리가 뒤따를 것이다. 시기에 따라 그 양상을 달리했을 것이기 때 문이다. 즉 明宗 神宗代의 民亂과 高宗 이후의 그것을 동일하게 취급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武人執權期 가운데서 그 初期라고 할 수 있는 明宗 神宗代의 民亂만을 검 토할 예정이다. 明宗 神宗代의 30여 년은 특히 집중적으로 민란이 발생한 시기였던 것이 다. 民亂을 주도한 인물들에 주목하면서, 그들이 난을 일으킬 수 있었던 시대적인 배경을 밝혀보려는 것이다.5) 그런데 민란은 그 발생지역이나 참여자의 신분에 따라 성격을 달리할 수 있다고 생각되므로, 당시의 민란도 지역이나 신분에 의해 구분해서 살펴보는 것이 논리 적일 듯하다. 즉 농민반란의 경우, 지역을 기준으로 군사적일 특수지역이었던 兩界斗 南道 지방6)을 구분하고, 奴婢叛亂 또한 따로 떼어서 검토하려는 것이다. 본고에서 얻어지는 결론이 明宗 神宗時代에 일어난 반란 모두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으 로 기대하지는 않는다. 당시의 반란 모두를 취급할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 아 닌가 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高麗 武人執權 初期 民亂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 을 것으로 믿는다. Ⅱ. 兩界地方의 民亂 武臣亂 이후 최초의 민란은 北界지방에서 일어났다. 다음의 사료가 그것이다. 羅 高句麗 百濟의 부흥을 표방한 반란을 취급했고, 金南奎, 武臣執權期 兩界 地方勢力의 政治的 動向 ( 高麗兩界地方史硏究, 1989 에서는 兩界에서 일어난 반란을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5) 필자는 武臣政權時代의 軍制를 다루는 과정에서, 당시의 民亂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간략하게 밝 힌 바 있다(金塘澤, 武臣政權時代의 軍制, 高鹿軍制史, 陸軍本部, 1983). 본고는 이를 대폭 보완 수정한 것임을 밝혀둔다. 6) 본고에서 말하는 南道 지방은 편의상 兩界 이외의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다.

- 121 1) 西北面兵馬使인 大將軍 宋有仁이 그만두기를 원하므로 金吾衛大將軍 于學儒로서 대신하였다. 庚寅年(毅宗 24 : 1170) 이후 北人들이 橫恣하여, 昌州人은 그들 守令의 愛妓를 죽여 衙門에 두었고, 成川人은 三登縣을 滅하기로 의논하고 여기에 따르지 않는 자 수 십 인을 죽였으며, 鐵州人은 그들의 官長을 죽이기로 모의하다가 격투 끝에 죽었다. 宋有仁은 이러한 일들을 제 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害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病을 칭하고 바꾸어 줄 것을 청했던 것인데, 于學儒 역시 제어하지 못했다( 高麗史節耍 권 12, 明宗 2년 6월). 昌州人이 그들 守令의 愛妓를 죽였다거나 鐵州人들이 그 官長을 죽일 것을 모의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北界人의 동요는 지방관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兵馬使 가 이를 제어하기는커녕 害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 기세가 대단했던 듯하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불만을 武臣亂 이후에 터뜨렸다는 점이다. 庚寅年 이후 北人이 橫恣했다 는 위의 기록도 이러한 사정을 말해준다. 武臣亂 이후 北界人이 동요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으로는 또한 다음이 있다. 2) 西京留守 兵部尙書 趙位寵이 군사를 일으켜 鄭仲夫 李義方을 토벌할 것을 꾀하였단. 東北兩 界의 여러 城에 微文을 보내어 말하기를 듣건대 서울의 重房에서 의논하기를 근래 北界의 諸 城이 모두 거칠고, 복종하지 않으니 마땅히 가서 토벌해야 한다 하고 군사를 이미 크게 동원하였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주륙을 당하겠는가. 마땅히 각기 兵馬를 규합하여 西京 으로 오라 고 하였다. 이에 B領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호응하였으나, 延州都領 玄單胤과 그 아들 德秀는 (중략) 州의 將校들과 더불어 궁궐을 향하여 절하고, 만세를 부르면서 성문 을 닫고 굳게 지켰다( 高麗史節要 권 12, 明宗 4년 9월). 1) 기록의 庚寅年 이후 北界人이 橫恣했다 는 것이나 위 기록의 근래 北界의 諸城이 모 두 거칠고 복종하지 않는다 는 표현은 결국 같은 의미라고 여겨진다. 위에 보이는 근래 는 곧 武臣亂 이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北界人이 왜 하필 武臣亂 이 후에 동요하기 시작했는가 하는 점이다. 庚寅年 이후 横恣해 진 北界人 이 구체적으로 어떠 한 인물들이었는가에 대한 검토로부터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풀어나가기로 하자. 2)의 사료에서, 趙位寵의 선동에 응한 것은 北界의 40여 성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40 여 성의 都領과 그 휘하의 장교들이었다. 延州都領 玄罩胤과 州의 將校들만이 趙位寵에 게 호응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거칠고 복종하지 않은 北界人 은 곧 諸城의 都領과 將校였고, 따라서 庚寅年 이후 横恣해 진 北界人 역시 그들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는 西北面兵馬使 崔遇淸이 靜州都領 純夫와 郞將 金崇을 斬하였다. 純夫 등이 여러 번 반역을 꾀 하였음에도 국가에서는 姑息策으로 토벌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遇淸이 州人을 꾀어 그를 살해하게 하였다( 高麗史節要 권 12, 明宗 7년 12월 는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실제 그들은 수시로 亂을 기도했던 것이다.7)

- 122 - 國史館論叢 第20輯 都領은 州鎮軍의 최고 지휘관이었다. 여기에는 州鎭軍의 郞將이나 中郞將이 임명되었다.8) 그 휘하에는 中郞將 郞將 등의 장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앙의 武臣과는 다른 존재들이었 다. 그들은 모두 그 지역의 土着人들이었던 것이다.9) 한편 이들의 지휘를 받은 洲鎭軍은 兩 界의 주민들로 구성 되어 있었다. 兩界의 주민들을 兵農一致의 군인이었던 것이다.10) 州鎭軍은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은 것 같지 않다. 土着人 장교로 구성된, 중앙 군과는 별도의 지휘체계를 갖추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그러하다.11) 都領이 兵馬使나 분진 將軍의 지휘를 받은 정도가 고작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따라서 都領이나 將校 등이 州鎭軍 을 동원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兩界人들은 정치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았었다. 이에 관해서는 玄德秀는 延州人이었다. (중략) 후에 吏部郞中을 除拜했는데, 諫官이 邊城人에게 (이 직을) 제수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고 하므로 兵部郎中을 改授했다 (高麗史 권99, 玄德秀傳) 는 기록이 참고 된다. 延州都領 玄罩胤의 아들인 玄德秀는 趙位寵에 가담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토벌에 앞장섰던 인물이다.12) 이 功으로 중앙으로부터 관직을 제수받은 玄德秀였지만 결국은 北界人이라는 사실 때문에 중요한 직책에서는 배제되어야 했던 것이다. 兩界 州鎭軍의 將校들은 중앙의 武班에 비해 경제적으로 낮은 대우를 받았다. 武班의 祿 傳과 州鎭軍 장교의 그것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13) 다음의 표를 참고해 보자. <표>武班과 州鎭將相 將校의 祿棒 비교14)</표> 武班祿 棒 (仁宗朝) 中郞將 攝將軍 120石 郞將 攝中郞將 76石 10斗 別將 攝郞將 46石 10斗 攝別將 33石 5斗 校尉 23石 5斗 險正 16石 10斗 州鎭將相將校祿 (書宗朝) 中郞將 40石 郞將 攝中郞將 33石 攝郞將 20石或 18石 別將 18石 校尉 14石 隊正 9石 7) 武人執權期 兩界에서 일어난 叛亂의 주모자들이 州鎭軍의 都領을 비롯한 將校들이었음은 金南 奎 氏도 지적한 바 있다. 金南奎, 앞의 논문 pp. 126 129. 8) 李基白, 高麗 兩界의 州鎭軍 ( 高麗兵制史硏究, 1968) p. 254. 9) 金南奎, 明宗代 兩界 都領의 性格과 活動 ( 高麗兩界地方史硏究 ) pp.114 115. 10) 李基白, 앞의 논문 pp.264 267. 11) 趙仁成, 高麗 兩界 州鎭의 防戍軍과 州鎮軍 ( 高麗光宗硏究, 1981) pp. l27 128 및 pp. 132 133. 12) 高麗史 권99, 玄德秀傳 참고. 13) 崔貞焕, 高麗 祿捧制의 運營實態와 그 性格 ( 慶北史學 2, 1980) pp.120 121. 14) 이 표는 高麗史 권80, 食貨志 3 祿俸과 崔貞換氏의 위의 논문 p. 121에 실려 있는 州鎭將 相 將祿校祿과 武班祿比較表 를 참고해서 작성한 것이다.

- 123 - 中郞將은 仁宗朝에 제정된 규정에 따르면, 120石의 祿捧을 받았다. 이에 반해 州鎭軍와 中郞將은 겨우 40石을 받는데 그쳤던 것이다. 결국 兩界人은 정치 경제적인 차별 대우를 감수해야 했는데, 이러한 대우에 그들이 만족했을 까닭이 없다. 그들의 중앙정부에 대한 불 만은 常存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州鎭軍이라는 군사력을 배경으 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기회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 소지를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武臣亂은 兩界人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州鎭軍의 都領 이하 장교들을 흥분시키기에 족 한 사건이었다. 그들과 같은 군인들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사실에 그들이 자극받지 않 았을 까닭이 없다. 그들은 武臣亂을 주도한 인물들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 음을 참고해 보자. 李英措의 初名은 寵夫인데 高令郡人이었다. 집안이 寒徹하여 물고기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는 데 邏卒에 뽑히었다. 성품이 잔인하여 禍를 즐겼는데, 鄭仲夫의 亂 당시 李義方과 李高에게 붙어 그 흉포함을 방자히 하였다. (中略) 일찍이 金에 使臣으로 갈 때 沿路에서 재물을 요구하니, 郡 縣이다투어 뇌물을 준 것이 萬이나 되어 추문이 사방에 퍼졌다. 金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네가 지난 빈 義州의 戍卒이었을 적에 州人들이 모두 너를 獸心人이라고 불렀는데, 너희 나라에 사람 이 없어서 너를 高官에 임명하여 사신으로 보냈구나 하면서 이르는 곳마다 업신여겨 꾸짖고 禮로 대접 하지 않았다( 高麗史 권 100, 李英措傳). 李英榗은 武臣亂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출세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義州의 戍卒이었 을 때, 州人들은 그를 獸心人이라고 하여 멸시했다 한다. 그가 義州의 戍卒이었던 시기는 알 수 없다. 戍卒이 글자 그대로 군인을 지칭하는 것인가 아니면 武臣을 그렇게 표현한 것 인가도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義州人들이 默心人이라고 멸시한 인물이 武臣亂 이 후 고위직에 오른 사실을 중국인들이 알고 있었을 정도였다면, 義州人을 비롯한 北界人들 은 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義州人들이 武人政權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 이라는 추측은 매우 자연스러워 진다. 義州人만이 아니라 兩界의 都領들 대부분이 그러했 음은 다음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八關會롤 設하고, 王이 北界의 여러 都領에게 명하여 樂을 구경하게 하였다. 麟州都領 中郎將 子冲이 判闇門事 王桂를 보고 揖만 하고 절하지 않으니 有司가 그 無禮함을 탄핵하여 아뢰었다. 王이 말하기를 邊境의 백성과 함께 즐기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것인데 죄를 주는 것이 옳겠는가 하였다. 有司가 다시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子冲이 처음 本州를 출발할 때 여러 都領에게 말 하기를 국가에서 우리를 부르는 것은 대개 어떠한 뜻이 있을 것이다. 내가 들어가 사소한 일로써 시험하고자 하는데, 만약 나에게 罪를 주면 이는 조정에 사람이 있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는 나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高麗史節要 권 13, 明宗 26년 11월. 위 기록은 武臣亂 직후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武臣亂 이후 北界人의 중앙

- 124 - 國史館論叢 第20輯 정부에 대한 태도를 이해한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子冲을 비롯한 兩界의 都領들은 단순히 중앙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데 그치지 않고, 노골적으로 중앙정부를 무시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武臣亂과 武人政權에 참여한 인물들에 대한 멸시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도 중앙의 武人들과 같은 힘을 갖추고 있으므로, 기회만 주어 지면 정권까지도 장악할 수 있다고 믿었을 런지도 모른다. 趙位寵이 鄭仲夫 李義方의 討滅 을 내세워 起兵하자 岊領 이북의 40여 성이 일시에 호응했다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반영 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武臣亂은 하급 장교들의 주도하에 일반군인들이 적극 참여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 다.15) 따라서 武臣亂 이후 그들의 입지가 크게 강화되었음은 물론이다. 다음의 기록은 이 러한 사정을 전해준다. 重房에서 일을 마련하면 將軍房에서 이를 저지하고, 將軍房에서 議論을 내면 郞將房에서 이를 저지하니 서로 모순되어 政令을 發해도 백성이 따를 바를 알지 못했다( 高麗史 권 101, 宋貯 傳). 上 大將軍의 합의 사항을 將軍들이 저지했고, 將軍들의 결의 사항을 그 아래인 郎將들이 방해했다는 내용이다. 軍이 일관된 지휘체계를 갖추고 있었다면,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 까 닭이 없다. 통수체계가 크게 이완되었음을 알려주는데, 이러한 통수체계의 이완 역시 '兩界 人의 동요를 부채질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 역시 州鎭軍에 편성된 군인이었음을 고려 하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통수체계의 이완은 군인에게 가장 민감한 반응을 불러 일으 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3)-① 滕州人 唐夫 祿升 鄭臣 등이 防戍將軍 蔡允和를 죽였다. 왕은 內侍祗侯 岩存을 보내어 타일렀다. 얼마 안 되어 또 義州分道 尹光輔와 防禦判官 李彥升을 죽이고 趙位寵에게 호 응하였다( 高麗史節要 권 12, 明宗 6년 3월). ② 西北面兵馬使 金君綏가 奏하기를 義州別將 韓恂과 郞將 多智 등이 그곳의 防戍將軍 趙 宣 과 守全인 李棣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元帥를 自稱하고 監倉使와 塞諫을 설치하는 가 하면, 함부로 國倉을 여니 諸城이 이에 향응 하였습니다 고 하였다( 高鹿史節要 권 15, 高宗 6년 10월). 3)-①의 기록에서, 防戌將軍을 살해한 鱗州人은 州鎭軍의 將校들이었다고 생각된다. 3)②의 경우로 미루어 짐작된다. 義州別將이 防戌將軍을 살해했던 것이다. 이는 곧 지휘체계 의 와해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防戍將軍은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따라서 義州 别將에 의한 防戍將軍의 살해는 義州 지 역의 반란을 의미한다. 이처럼 武臣亂 이후에는 州鎭軍의 將校가 防戍將軍을 살해한 경우 15) 金塘澤, 李義旼政權의 性格 ( 高麗武人政權硏究 ) pp.28 30.

- 125 - 가 허다했는데, 이는 武臣亂 이후 군의 통수체계 이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兩界 人의 武人政權에 대한 멸시와 군의 통수체계 이완이 武臣亂 이후 兩界人의 동요를 부추겼 다고 할 수 있다. Ⅲ. 南道地方의 民亂 武臣亂 이후, 그 이름을 알 수 있는 남도지방 최초의 민란은 明宗 5년(1175)에 일어난 石令史의 난이다. 다음은 이 亂에 대한 기록의 거의 전부이다. 等業及第 彭之緒는 承宣 宋智仁과 進士 秦公緒가 몰래 南賊 石令史와 더불어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민다고 참소하였다. 王이 內侍 李存章과 郎將 車若松에게 命하여 雜問케 했는데, 체포 구금된 자가 많았다. 다시 內侍 尹民瞻과 上將軍 崔世輔에게 명하여 按驗케 하여 眞爲를 물론하 고 모두 海島에 流配보냈다. 또 城門을 닫고 대대적으로 음모자를 색출하였다. 大府少卿 李商老 가 참소를 당해 섬에 유배되었는데, 모든 관리들이 그의 억울함을 알았으나 두려워하여 감히 말 하지 못했고, 수일 동안 일을 보지 못할 정도였다( 高麗史節要 권 12, 明宗5년 8월). 여기에서, 彭之緒의 말이 전혀 근거 없는 무고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꼭 承宣 宋智仁 등이 관여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文臣들이 石令史와 연결되었음은 부인하기 어려운 것 이다. 이 사건이 크게 확대된 점이나, 眞偽를 가리지 않고 모두 流配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眞偽를 가리지 않았음을 비난한 것은 石令史와 연결된 자들이 있었음을 암시 해주는 표현으로 이해된다. 石令史가 문신들과 함께 난을 모의했다는 사실은 石令史와 문신들의 불만이 동일한 것이 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런데 당시 文臣들의 불만이 武臣亂이나 그로 인해 성립된 무인정권에서 비롯된 것임을 감안하면, 石令史 역시 무인정권에 대한 정치적 불만에서 난 을 일으켰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궁금한 것은 그가 어떠한 인물이었기에 무인정권에 불 만을 품었을까 하는 점이다. 石令史의 令史 는 이름 아닌, 관직일 가능성이 있다. 高麗史 百官志에 따르면, 令史는 중앙의 관청에 소속된 서리직이었다.16) 그러나 중앙 관청의 서리가 지방에서 난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令史는 지방 관청에 소속된 品官 이하의 관직이 아니었나 추측되는데, 이는 高宗 19년 정월 忠州에서 奴隸가 亂을 일으켰을 때 이들을 지 휘한 인물이 令史 池光守와 僧牛本이었음을 고려하면 그러하다.17) 아무튼 石令史는 지방에 16) 高麗史 권76, 百官志 1 참조.

- 126 - 國史館論叢 第20輯 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18) 문신들이 그와 함께 난을 모의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되는 일이다. 그는 난에 연루된 문신들과 그 이전부터 관계를 맺고 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가 문신들과 무관한 존재였다면, 亡伊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文臣들의 제의를 거절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19) 따라서 石令史를 그 의 난에 연루된 文臣들의 출신 지방 세력가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무리가 없어 보인 다.20) 그는 자신과 연결된 文臣들이 武臣亂 이후 정계에서 소외된 데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한다. 그와 연결된 文臣들의 정치적인 소외는 곧 지방에 있어서 자신 의 주도권 상실과 직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기록은 이러한 사정을 보다 구체적으 로 설명해 줄 것이다. 慶州 李義旼 族人들이 放還됨에 미쳐 州吏와 더불어 틈을 일으켜 싸우고 죽였는데, 義旼의 族 人들이 이기지 못하였다. 그 때 按察使 田元均이 州에 들어와 능히 制御하지 못함으로써 房守 別 將 通引 등이 모두 피살되었다. 元均은 두려워하여 곧 다른 邑으로 피하였다( 高麗史 권21, 神 宗 3년 8월 癸已). 위 기록은 崔忠獻이 李義咬을 제거한 이후, 慶州 지방에서 李義旼 族人들이 어떠한 동태 를 보였는가를 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武臣亂 직후의 기록은 아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武臣亂으로 인한 중앙의 정치적 변화가 지방 세력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알아본다 고 해서 큰 잘못은 없을 것이다. 李義旼 族人들과 싸움을 벌였던 慶州의 州吏 는 州吏 개인이 아닌, 그로 대표되는 그의 族人 모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들과의 싸움에서 李義旼 族人이 이기지 못했다 는 사실로 미루어 그러하다. 그들은 慶州의 또 다른 지방 세력이었다고 생각되는 것이 다.21) 李義收 族人이 그들과 싸움을 벌였던 분명한 이유는 기록에 없다. 그러나 그 시기가 李義旼의 실각 직후였음을 고려할 때, 州吏는 李義旼의 실각을 계기로 그의 族人에 대신하 여 慶州 지방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고, 이에 兩族 사이에 마찰이 빚어졌다고 이해 해서 무리는 없을 것이다. 李義旼 族人과 州吏와의 마찰은 慶州지방의 房守 別將 通引 등이 피살되는 결과를 초래 했다. 더구나 按察使는 이를 제어하기는커녕 두려워하여 다른 邑으로 피해갈 정도였다 한 17) 高麗史節要 권 16, 高宗 19년 정월. 令史 池光守는 投降에 대한 대가로 崔怡로부터 校尉를 제수 받았다. 따라서 지방의 令史職 역시 品官 이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 李貞信, 高麗時代 公州 鳴鶴所民의 蜂起에 대한 一硏究 p. 210. 19) 高麗史節要 권 12, 明宗 6년 9월. 20) 李貞信, 위의 논문 p.209. 21) 旗田巍, 高麗の武人と地方勢力 李義旼と慶州 pp. 488 489.

- 127 - 다. 이제 兩族 사이의 싸움은 그들에게 그치지 않고 慶州지방 전체로 비화된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李義耽 族人의 동요는 이후 慶州지방에서 지속적으로 民亂이 일어나게 된 계기 가 되었던 것이다.22) 결국 石令史의 亂이나 李義旼 族人의 동요를 통해서, 武臣亂 이후 지방에서 주도권을 상 실한 지방 세력가들이 동요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주도권을 상실한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새로운 집권세력의 비호를 받은 인물들이 등장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중앙에서 낙향한 인물들과 지방세력가 간의 갈등도 武臣亂 이후에는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를 참고해 보자. 4) 淸州人이, 州人으로서 京籍을 가지고 退居한 자들과 틈을 일으켜 거의 모두 잡아 죽였다. 그 (퇴거한 자들의) 黨으로서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원수를 갚고자 하여, 王旨를 거짓 꾸며 死士를 모집하여 淸州로 向하였다. (국가에서는) 將軍 韓慶賴를 보내어 쫓아가 말리도록 하 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서울에서 간 사람들이) 淸州人과 싸워 이기지 못하고 죽은 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다( 高麗史節要 권 12, 明宗 8년 3월). 州人으로서 京籍을 가진 자들이 서울에서 淸州로 퇴거한 분명한 이유는 알 수 없다. 武 臣亂으로 인해 중앙에서 그들의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낙향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순 조로워 보인다. 문장의 내용으로 미루어 그들은 수적으로 상당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커다 란 정치적 변화가 없었다면 이처럼 다수의 인물들이 낙향했을 것 같지 않은 것이라 하겠다. 그들은 서울에서의 벼슬을 위해 오래 전에 淸州를 떠났다가, 武臣亂 이후 退居한 자들이 었을 것이다. 그들과 淸州人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된 이유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그러 나 지방에서의 세력 다툼이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들의 퇴거는 이미 淸州 지방에서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자들에게 커다란 위협이었을 것 이며, 따라서 兩者 간의 세력 다툼은 불가피했던 것이 아니었나한다.23) 결국 武臣亂으로 인한 중앙 정치권력의 변화는 지방사회의 세력판도에도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던 것이다. 지방 세력가들의 동요에는 적지 않은 인원이 동원되었던 듯하다. 이에 관해서는 앞의 사 료 4)가 참고 된다. 京籍을 가지고 있으면서 淸州에 退居한 자들의 黨은 死士를 모집하여 淸州人과 전투를 벌였는데, 100여 명이 죽었다는 것이다. 淸州人들이 조직적으로 그들에 대항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조직의 구체적인 형태는 밝히기 어렵지만, 지방 세력가를 중심으로 한 군사조직이었을 것이라는 느낌은 지우기 어렵다. 지방의 鄕吏가 一品軍의 지 휘관을 겸임했음을 감안하면,24) 무리가 아니다. 요컨대 지방 세력가들은 그들이 필요로 했 22) 金暗東, 앞의 논문 p. 263. 23) 李樹健, 高麗後期 支配勢力과 土姓 ( 韓國中世社會史硏究 ). p. 287. 24) 李基白, 高麗 州縣軍考 ( 高麗兵制史硏究 ) p. 224.

- 128 - 國史館論叢 第20輯 을 경우, 지방의 군사조직을 이용할 수 있었다고 이해된다. 경제적인 능력을 갖춘 지방 세력가는 지방의 군인이나 농민을 동원하는데 그다지 큰 어 려움은 겪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음을 검토해 보자. 5)-① 이 때 南賊이 일어났는데, 그 심한 자 金沙彌는 雲門에 웅거하고 孝心은 草田에 웅거하 여, 亡命한 자를 불러 모아 州縣을 標掠하였다. (中略) (李)至純은 탐욕하기 그지없었는 데, 적이 財物이 많다는 말을 듣고 그 재물을 취하려고, 몰래 그들과 서로 연락하며 의 복 양식 신 버선을 주어 賊勢를 도와주자, 賊은 도적질한 금은보화를 주었다( 高麗史節 要 권 13, 明宗 23년 7 월). ② 南路兵馬使가 賊을 密城에서 쳐서 7천여 級을 베었는데, 武器와 牛馬를 얻은 것도 이와 같았다( 高麗史節要 권 13, 明宗 24년 4 월). 金沙彌나 孝心의 財物 가운데는 亂을 일으킨 이후 노략질한 것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 다. 그러나 애초부터 그들이 많은 財物을 보유했을 가능성도 부인하기 어렵다.25) 다수의 亡 命者를 모을 수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그러하다. 孝心의 경우는 7천 이상의 叛軍을 거느렸 던 듯하다. 5)-②의 사료가 이를 알려준다. 비록 과장이 섞여있다 하더라도, 그가 많은 수의 叛軍을 거느렸음은 분명하다. 당시가 유민이 크게 발생 한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무리가 아 니다. 그들에게 식량만 제공할 수 있으면, 누구나 쉽게 그들을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孝心의 亂에 가담하여 처형당한 叛軍 가운데는 軍人이었던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 각된다.26) 처형된 叛軍 모두가 무기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이 이러한 추측을 불러일으킨 다. 고려에서 兵仗器를 소유할 수 있었던 자들은 아무래도 軍人田을 지급받고 무기를 自辨 했던 軍人들이었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후술되겠지만, 당시의 군인들 가운데는 軍에서 이 탈한 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반란에 가담했을 가능성은 큰 것이다. 결국 병력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의 동원이 용이했다는 사실이 武臣亂 이후 지방 세력가들의 동요를 한층 부 추겼다고 할 수 있다. 武人執權期에 南道 지방에서 일어난 民亂의 또 다른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군인들 이 일으킨 난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다음이 그것이다. 25) 金沙彌가 지방 세력가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견해가 일치되고 있다. 金晧東氏는 武臣 亂 이전에 慶州를 장악했던 在地勢力으로(金晧東, 앞의 논문 p.258), 그리고 金光植氏는 雲門 寺의 在家僧으로 淸道의 지방 세력가였다고 이해하였다(金光植, 앞의 논문 pp.153 162). 26) 高麗의 軍人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필자의 견해에 따른 것이다. 필자는 軍人田을 지급받고 武器 를 自辨한 군인 가운데도 지방에 거주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번상하여 중앙의 6衛軍을 구성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金塘澤, 高麗 초기 地方軍의 形成과 構造 高麗 軍制史, 1983). 이는 軍人田을 지급받은 군인들은 모두 居京했을 것이라는 李基白氏의 주장 (李基白, 高麗 京軍考 앞의 책 pp.98 99 및 p.118)과는 다른 것이다.

- 129 6)-① 興王寺의 僧이 重房에 告하기를 寺의 僧 가운데 德水縣人과 더불어 亂을 도모하는 자가 있는데 散員 高子章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고 하니, 重房이 僧과 子章을 잡아 먼 섬으로 유배시킨 후, 몰래 사람을 보내 子章을 江中에 던졌다( 高麗史 권 19, 明宗 8년 정월). ② 처음 全州司錄 陳大有가 자못 淸介함을 믿고 刑罰을 극히 혹독하게 하니, 백성들이 많 이 괴로워하였다. 국가에서 精勇 保藤軍을 보내 官船을 만들게 함에 미쳐, 大有는 上戶 長 李澤民 등과 더불어 督役을 심히 가혹하게 하니, 旗頭 竹同 등 6인이 난을 일으켜 官 奴와 여러 不 逕者를 불러 모아 大有를 山寺에 쫓아 버리고 澤民 등 10여 인의 집을 불 태우니 吏民이 모두 도망하였다( 高麗史 권20, 明宗 12년 3월 庚寅). ③ 慶州의 別抄軍이 永州와 더불어 평소에 틈이 있더니, 이 달에 雲門賊과 符仁 桐華의 兩寺 僧徒를 끌어들여 永州를 공격하였다. 永州人 李克仁과 堅守 등이 精說를 이끌고 城 밖으로 나와 싸우니, 慶州人이 敗走하였다. 崔忠獻이 이를 듣고, 宰相과 諸將을 大観殿에 모아 의 논하여 말하기를 慶州人이 함부로 不義를 행하였고, 이제 또 黨을 모아 이웃 고을을 改伐 하니 마땅히 軍隊를 發해 쳐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高麗史 권21, 神宗 5년 11월). 6)-①에서, 德水縣人의 謀亂을 알고 있었다는 散員 高子章은 실은 亂의 모의에 깊이 관 여한 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重房이 그를 유배시킨 후 사람을 보내 다시 살해한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高子章은 武臣이었다. 따라서 高子章과 함께 난을 모의한 德水 縣人도 군과 관계있는 인물이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군인이 난을 일으켰음을 분명하게 전해주는 기록은 6)-②와 ③이다. 이들이 어떠한 성격 의 군인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27) 그들이 난을 일으키는데 있어 서 군대조직을 이용했을 것이라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앞의 사료 6)-②에 따르면, 旗頭 竹同 등은 督役을 심하게 하는데 반발해서 亂을 일으켰 다 한다. 당시가 무신란 이후였음을 감안하면, 군인들의 이러한 반발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 나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武臣亂은 일반군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일반군인들은 무신란의 성공과 이에 따른 武人政權의 성립에 적지 않게 고 무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처지가 그 이전보다 훨씬 나아질 것으로 기대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力役에 시달려야 했다면, 그들의 불만이 상대적으로 고조되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되는 일이다. 군인들은 力役에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軍人田도 탈점 당했다. 武臣亂 이후에도 그러 했음은, 무릇 州縣에는 각기 京外 兩班 軍人의 家田과 永業田이 있는데,28) 姦點한 吏民이 權要에 의탁 27) 李基白氏는 이들을 中央軍과는 구분되는, 농민으로 구성된 군인으로 이해하였다(李基白, 高麗 州縣軍考 앞의 책 pp.209 220 참조). 필자는 이들 역시 軍人田을 지급받은 군인이었을 것이 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金塘澤, 高麗초기 地方軍의 形成과 構造 참조). 28) 이 부분의 原文은 凡州縣 各有京外兩班軍人 家田 永業田 이다. 필자는 李基白氏의 해석에 高

- 130 - 國史館論叢 第20輯 하고자 하여, 망령되게 閑地라고 稱해서 權要家에 등기해 둔다. 權勢있는 자는 또한 자기의 향田 이라고 稱한다( 高麗史 권78, 食貨志 1 田制 田柴科 明宗 18년 3월 下制曰) 라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여기의 軍人 永業田은 곧 軍人田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집단적으로 力役에 동원된 군인들이 亂을 일으켜 저항했다면, 개인적으로 軍人田을 빼앗 긴 군인들은 어떻게 반항했을까 궁금하다. 그런데 군인은 軍人田을 받기 위해 軍役을 담당 했었다. 즉 軍人田은 군인을 군에 묶어두는 끈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軍人田 을 지급받지 못했다면, 군인이 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군인전을 탈점당한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軍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군에서 이탈한 군인이 어떠한 방법으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해 나갔는가를 알려주는 기록 은 없다. 다만 고려의 군인이 일반농민이 아닌, 軍人을 직업으로 하는 자들이었음을 염두에 두면,29) 다음의 기록은 참고 될 수 있을 것이다. 崔忠獻이 黄州牧守 金俊琚를 죽였다. 처음 忠獻이 俊琚 형제가 반역할 뜻이 있는가 의심하여, 俊据를 眨하여 黄州牧守로 삼고 弟 俊光을 尙州牧守로 삼았다. 俊据는 부임해서 民事는 돌보지 않고 勇士를 모집하여 항상 사냥만 일삼았다. (중략) (神騎指諭) 李動中이 비밀히 俊据를 불러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 때마침 俊光이 安邊府로 移任되니 俊琚가 몰래 그와 통하여 모의하고, 黄 州 民騎勇者를 거느리고 서울에 潜入했다( 高鹿史節要 권 14, 神宗 2년 8월). 여기의 勇士나 繞勇者가 勇力이나 武藝에 뛰어난 자들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 서 군에서 이탈한 군인들이 그 주된 구성분자였을 것이라는 견해는 타당한 것이 아닌가한 다.30) 군인들은 軍에서 이탈한 이후에도 역시 무기를 사용하여 생계를 유지하려 했을 것이 기 때문이다. 군에서 이탈한 군인이 무인들의 쿠데타 기도에 이용되었다면, 그들 스스로가 도적이 되 었거나 지방의 叛亂에 가담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약간 뒤지는 시기의 기록이기 는 하지만, 南京人 仁傑은 용감하고 굳세기가 남보다 뛰어나서 神騎에 屬해 있었는데, 드디어 賊魁가 되 어 南北을 摽掠하였다( 高麗史節要 권 15, 高宗 14년 윤 5월) 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31) 요컨대 군인들의 동요 또한 武人執權初期에 民 麗 州縣軍考 p.219) 따랐는데, 兩班의 家田과 軍人의 永業田 이라 姜晋哲氏의 또 다른 해석 이 있음을 밝혀둔다(姜晋哲, 高麗土地制度史硏究 p. 217). 어느 해석을 따르더라도 京外 軍人이 永業田을 받았음은 부인할 수 없다. 29) 李基白, 高麗 軍班制 下의 軍人 앞의 책 pp. 285 286. 李基白氏는 專門的인 軍人이라는 용 어로써 高麗의 軍人을 설명하였다. 30) 鄭杜熙, 高麗 武臣執權期의 武士集團 ( 韓國學報 8, 1977) pp. 77 83. 31) 金潤坤, 앞의 논문 p. 64.

- 131 - 亂이 많이 발생하게 된 요인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南道지방에는 지방관의 탐학에 항거해서 일어난 농민반란이 상당수였는데, 이와는 달리 지방관의 파견을 요구하고 난을 일으킨 경우도 있었다. 亡伊 亡所伊의 난이 그것이다. 公州의 嗚鶴所民인 亡伊와 亡所伊등이 黨與를 불러 모아 스스로 山行兵馬使라고 칭하고 公州 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高麗史 권 19, 明宗 6년 정월) 亡伊가 鳴鶴所 내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는가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기록은 없 다. 다만 所에 吏가 있었음을 염두에 두면,32) 亡伊가 그러한 존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아무튼 亡伊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亂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난에 참여시켜 줄 것을 요구한 중앙 文臣들의 제의를 그가 거절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그는 鳴鶴所가 縣으로 승격되지 못한데 불만을 품고 亂을 일으켰던 것이 아닌가 한다.33) 그가 亂을 일으 킨 것과 동시에 主縣인 公州를 공격했던 점이나, 그에 대한 회유로 정부가 鳴鶴所를 忠順 縣으로 승격시킨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34) 亡伊 등은 明宗 2년(1272)의 대폭적인 監務 파견에 크게 고무되어 있었던 듯하다. 明宗 2년에는 53개 州縣에 監務가 파견되었던 것이다. 다음을 검토해 보자. 左承宣 李俊儀가 諸州의 任內 53縣에 각기 監務를 두고, 安東 任內 甫州는 太子의 胎를 묻은 곳이므로 縣令으로 올리고, 固城縣에는 尉 一員을 더 둡시다 고 奏하였다. 왕이 群臣에게 의논하 게 하였는데, 俊儀의 지위와 권세가 무겁고 성질 또한 사나웠으므로, 아무도 是非하는 자가 없었 다( 高鹿史 권 19, 明宗 2년 6월). 이러한 監務의 파견은 屬縣이 갈망하는 것이었다. 亡伊가 務 파견을 요구하고 亂을 일 으킨 것만으로 미루어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乾務의 파견으로 屬縣은 主縣으로부터 독립 할 수 있었고 따라서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는 높아졌던 것이다.35) 아울러 그들의 경제적인 부담도 가벼워졌다고 생각된다.36) 한편 국가의 입장에서도 監務 파견은 바람직한 것이었을 것이다.37) 이는 곧 지방에 대한 통제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 구하고 監務 파견은 쉽지 않았다. 모든 屬縣에 일시적으로 監務가 파견되지 못하고, 단계적 으로 屬縣이 철폐되어간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38) 32) 北村秀人, 高鹿時代の 所 制度 朝鮮學報 50, 1969) p.15, pp.32 33. 33) 亡伊 亡所伊는 신분해방을 목적으로 亂을 일으켰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邊太變, 萬種亂 發生 의 社會的 素地, 高麗政治制度史硏究, pp.467 468; 李貞信, 高麗時代 公州 嗚鶴所民 의 蜂起에 대한 一硏究 p. 204). 34) 亡伊 亡所伊亂의 경과에 대해서는 李貞信, 위의 논문 참고. 35) 北村秀人, 앞의 논문 pp. 18 21. 36) 위의 논문 p. 50 참고. 37) 이에 관해서는 元昌愛, 高趣 中 後期 監務堆置와 地方制度의 變遷 ( 淸溪史學 1, 1984) 참고.

- 132 - 國史館論叢 第20輯 屬縣에 乾務가 쉽게 파견될 수 없었던 이유를 이해하는데 다음의 기록은 참고 될 수 있 을 것이다. 7)-① 成州人은 三登縣을 滅하기로 의논하고 여기에 따르지 않는 자 수 십 인을 죽였다( 高 麗史節 要 권 12, 明宗 2년 6월). ② 慶州 別抄軍은 永州와 평소에 사이가 나빴다. 이 달에 雲門賊 및 符仁 桐華 兩寺의 僧 徒를 끌어들여 永州를 공격하였다( 高麗史節耍 권 14, 神宗 5년 10월). 7)-①의 三査縣은 成州의 部曲이었는데, 仁宗 14년 成州로부터 분리 독립했던 곳이 다.39)한편 7)-②의 永州는 慶州의 屬縣이었다가 明宗 2년 監務 설치를 계기로 분리된 지 역이다.40) 成州나 慶州는 그들의 屬縣이었던 지역을 공격했던 셈이다. 三查縣과 永州가 그 들로부터 분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成州와 慶州는 主縣과 屬縣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 하려 한데서 마찰이 빚어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屬縣의 독립, 즉 屬縣에 監務가 파 견되는 것을 主縣의 주민들은 저지하려 했을 것임은 쉽게 짐작된다. 主縣人들 가운데 정치 권력을 장악한 인물들은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屬縣의 독립을 방해했을 법하다. 이는 (鄭)仲夫는 西海道의 郡縣을 (자신의) 貫鄕인 海州에 소속시켰고, (李)義方은 (그의) 外鄕인 金 溝를 (올려) 縣令을 파견하였다( 高麗史 권 128, 鄭仲夫傳) 는 기록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鄭仲夫와 李義方은 정권의 장악과 더불어 자신과 관련 이 있는 지방에 유리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이는 정치인들이 그들 출신 지방의 이해에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主縣 출신의 정치인들은 屬縣이 그들 출신 지방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적극 저지했을 것이다. 武臣亂 직후 53개의 屬縣에 監務 가 파견될 수 있었던 것도 이들 屬縣이 소속되었던 主縣이 정치적인 영향력을 상실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41) 亡伊 등이 亂을 일으킨 鳴鶴所는 公州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明宗 2년에는 公州의 屬縣인 懷德郡과 石城縣에 監務가 설치되어, 公州로부터 독립하였다.42) 이는 곧 公州의 약 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亡伊는 主縣인 公州의 약화와 주위의 屬縣이 郡縣으로 승격 된 사실을 직접 확인했던 셈이다. 따라서 그가 여기에 자극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매 38) 高麗史 권58, 地理志 3 安北都護府 三登縣. 39) 高麗史 권57, 地理志 2 東京留守官慶州永州. 40) 主縣 출신 인물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했을 경우, 屬縣에의 監務 파견이 불가능했다는 점은 元 昌愛氏도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氏는 眷宗代에 南京의 관할지역에 監務가 파견되지 못한 것을 仁州李氏의 정치적 영향력 때문으로 이해하였다(元昌愛, 앞의 논문 p.17). 41) 高麗史 권56, 地理志 1 公州. 42) 所와 主縣의 관계에 관해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所 역시 部曲 등과 마찬가지로 主縣의 管內로 파악된 점으로 미루어, 主縣의 일정한 속박을 받았으리라는 점은 지적해서 좋을 것이다.

- 133 - 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된다. 亡伊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公州를 공격하고, 아울러 監 敦의 파견을 요구했다고 추측된다.43) 지방관의 탐학에 항거해서 일어난 民亂은, 亡伊의 亂과 그 원인은 달랐지만, 亂을 일으 킬 수 있었던 시대적인 배경은 같았다고 생각된다. 그들이 농민이었거나 농민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음의 기록부터 검토해 보자. 8) 有司가 忠州牧使인 前上將軍 鄭元獬를 奏해서 탄핵하니, 制하여 말하기를 (중략) (鄭元癖 가) 지금 또한 改俊하지 않고 不義한 일을 많이 행하며 民을 剝奪함이 더욱 심하다 하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으나 차마 목 베지는 못하겠다. 檢校官으로서 鄕里에 물러가 살게 하 라. 저 忠州民 들이 감히 告訴를 행한 것도 마땅히 징계해야 될 罪이지만, 다만 어리석은 백성이 죽음을 무릅쓰고 호소한 것이니, 그 또한 가엾게 여길 만하다. 有司는 이를 묻지 말 라 고 하였다( 高麗史 節要 권 13, 明宗 20년 9월). 忠州 牧使 鄭元獬의 탐학이 알려지게 된 것은 忠州民의 저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忠州 民은 죽음을 무릅쓰고 그의 탐학을 吿訴했던 것이다. 그런데 鄭元辦는 무인이었다. 이와 더 불어 明宗 16년에 民을 침해한 罪 로 파면된 安東守 李光實과 晋州守 金光允 역시 武人이 었다. 따라서 武臣亂 이후 지방수령의 탐학은 武人의 지방수령 임용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 다.44) 지방수령직 은 文臣만이 임명되었던 관직이었다. 文臣은 이직을 거친 후 중앙의 요직에 임명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45) 따라서 지방수령으로서의 치적은 그들의 승진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그들이 지방수령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잘 알고 있었음은 물 론이다. 이러한 文臣들이 탐학을 일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에 반해, 武臣亂 이후 文臣 으로부터 지방수령직을 빼앗은 무인들은, 지방수령으로서 필요한 소양을 갖추었을 리 없 다.46) 지방수령직을 승진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데 편리한 관직 정도로 이해했을 런지도 모른다. 그들이 文臣 지방수령보다 탐학했을 가능성은 큰 것이다. 그렇다고 武人 지방관의 탐학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농민들의 봉기가 모두 설명되는 것은 아니라. 농민들이 어떻게 이에 항거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 것이다. 다음 은 이와 관련하여 참고 된다. 43) 高麗史節要 권13, 明宗 16년 8월. 44) 高麗史 에도 이러한 견해가 실려 있다. 즉 權敬中은, 武臣亂 이후 지방관의 탐학이 문제된 까 닭은 市井의 屠?占級張의 무리를 지방관에 임명한 때문이라고 하였다( 高麗史節要 권 13, 明 宗 16년 8월). 45) 外寄是東班仕路 故東班必補外 然後得授朝官 ( 高(S史 권75, 選擧志 3 鈴注 選用守令 忠烈王 원년 6월)이라는 기록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46) 李惠玉, 高麗時代의 守命制度硏究 ( 梨大史苑 21, 1985) p. 63.

- 134 - 國史館論叢 第20輯 9)-① 金甫當이 北에서 兵을 일으키자 江南의 州郡이 모두 應한 까닭에 縉紳으로서 外任을 맡 아나간 자들이 모두 害를 입었다( 韓國金石文追補 p. 170, 李文鋒墓誌). ② (李勝章은) 壬辰년에 管城縣尉에 補任되어 나갔다. (중략) 癸已년의 어지러움을 당하여 列郡은 모두 그 令長을 섬멸함으로써 宿宽을 갚았다. 公은 오직 사랑으로 (다스렸기에) 백성들의 추대에 힘입어 그 厄을 면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本邑에 피할 수 있었다( 韓國 金石 全文 中世 下, p. 912, 李勝章墓誌). 明宗 3년, 金甫當의 亂에 호응한 文臣 지방수령들은 대부분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9①), 그런데 그들 가운데 일부는 지방민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지방민들은 金甫當의 亂을 빙자하여 그들의 守令을 살해함으로써 그들의 숙원을 갚았던 것이다(9- ). 武人政權의 묵 인 하에 지방수령을 살해한 셈이다. 따라서 南道 지방의 주민들은 이미 그들의 守令을 살 해한 경험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후일 지방수령의 탐학에 봉기했을 가능성은, 그러 한 경험을 갖지 못했던 지방민들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지방의 민란에 대하여, 초기의 武人政權은 대체로 회유로 대처했었다. 즉 崔忠獻 이전의 무인정권은, 金甫當의 난이나 趙位寵의 난과 같은,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한 반란을 제외하 면, 民亂을 강경하게 진압하기보다는 난을 일으킨 자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려했던 것이다.47) 亡伊를 회유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鳴鶴所를 올려 忠順縣으로 삼았는가 하면, 앞의 史料 8)에서 볼 수 있듯이, 지방관의 탐학에 항거한 忠州民에 대해서는 이를 불문에 붙이는 한편 해당 지방관을 해직시킨 것 등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崔忠獻 이전의 武人政權이 민란에 대해 회유로 일관했던 이유와 관련하여 다음의 사료는 주목된다. 여러 領府의 軍人들이 匿名으로 榜을 붙여 이르기를 侍中 鄭仲夫와 아들 承宣 筠, 그리고 사 위인 僕射 宋有仁이 정권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横恣하였다. 南賊이 일어난 원인도 여기에 있다. 만약 군대를 동원하여 토벌하려면, 반드시 이 무리들을 먼저 제거한 후에야 가능할 것이라 고 하 였다( 高麗史節要 권 12, 明宗 6년 8월). 軍人들이 民亂의 발생 원인을 鄭仲夫政權의 失政에서 찾았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군인 들뿐만 아니라, 鄭仲夫政權에 불만을 품었던 다른 세력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이 러한 상황에서 民亂을 철저하게 토벌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강경한 진압 또 다른 반발을 불러일으킬 소지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李義方이 실각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 나는 趙位寵 亂의 토벌을 위한 대규모의 군사동원에 있었던 것이다.48) 결국 강력한 1 인 47) 民亂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崔忠獻의 執權을 계기로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崔忠獻政權은 회유 보다는 강경한 진압으로 民亂에 대처했던 것이다. 이는 최충헌정권이 그 이전의 武人政權보다 안정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民亂이 新羅復興을 표방하는 등 정권탈취를 목표로 한 데 에 그 원인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48) 安永根, 鄭仲夫政權과 宋有仁 ( 建大史學 7, 1989) p.7.

- 135 - 독재정권을 구축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亂에 대해 강경한 대처보다는 회유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民生 안정에 관한 국왕의 語書가 明宗代에 누차에 걸쳐 반포되었던 이 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49) 정부의 난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민란의 발생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민란을 일으킨 이후의 상황도 고려되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강경한 진압이 뒤따르지 않고, 그들의 요구 가 어느 정도 받아들여진 데에 그들이 고무되었음은 당연한 것이다. 요컨대 金甫當亂 당시 武人政權의 묵인 아래 지방관을 살해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농민들은 정부의 民亂에 대한 회유책에 편승하여 지방관의 탐학에 쉽게 봉기 할 수 있었다고 이해된다. Ⅳ. 奴婢叛亂 高麗 武人執權期의 대표적인 奴牌叛亂이 萬積의 亂이었다는 점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亂의 경과를 알려주는 다음의 기록부터 검토해 보자. (神宗) 元年에 私僮 萬積 등 6人이 北山에서 나무를 하다가 公私奴諫를 불러 모아놓고 모의하 여 말하기를 國家에는 庚癸 이래로 朱紫가 많이 賤謙에서 나왔다. 將相이라고 무슨 씨가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가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라고 어찌 筋骨을 수고로이 하며, 매질 밑에 서 곤욕만을 당하겠는가 하니 奴課들이 그렇게 여겼다. 黄紙 수천 장을 잘라 모두 丁字를 새겨 표지로 삼고 약속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興國寺 步廊에 모여 毬庭으로 나아가 일시에 무리지어 북치고 소리치면 闕內의 宦者들이 반드시 호응할 것이며, 官奴 등도 안에서 죽일 것이다. 우리가 城 中에서 봉기하여 먼저 崔忠獻 등을 죽인 후 각기 그 주인을 살해하고, 賤籍을 불살라 三韓에 賤 人을 없게 하면 公鄕將相은 모두 우리들이 할 수 있다 고 하였다. 기약한 날에 모두 모였으나, 무리가 수백 명도 되지 않으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다시 普濟寺에 모이기로 약속 하고, 令하기를 일을 비밀리에 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절대로 누설하지 말라 고 하였 다. 律學博士 韓忠愈의 家奴인 順貞이 忠念에게 告하고, 忠愈는 忠獻에게 告하였으므로 드디어 萬積 등 100여 명을 붙잡아 江에 던져 버렸다( 高麗史 권 129, 崔忠獻傳). 萬積 등은, 公私奴隷를 모아 놓고 행한, 亂을 선동하는 연설에서, 武臣亂 이후 賤諫 출 신으로서 고위관직에 오른 자들이 많았음을 例로 든 후, 자신들도 때가 오면 그들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였다. 그들은 亂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는 자리에 서도 賤籍을 불사르고 자신들이 公卿將相이 되어보자는 결의를 다졌었다. 따라서 萬積 등 이 亂의 목표로 내세운 것은 신분해방과 정권탈취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권탈취와 49) 明宗 4년 12월 乙卯, 5년 4월 丙寅, 11년 9월 丙子, 16년 윤 7월 乙卯, 18년 3월, 18년 5월 癸卯, 20년 9월 丙辰, 25년 3월 癸已, 26년 3월 己丑日 등에 반포한 詔書의 내용이 高麗史 에 실려 있다.

- 136 - 國史館論叢 第20輯 신분해방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정권을 탈취하면 그들의 신분은 자연스럽게 해방 될 것이며 신분의 해방을 위해서는 그들은 정권을 탈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기 때문 이다.50) 결국 萬積 등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권의 탈취였다고 생각된다. 萬積의 연설이 끝난 뒤, 奴諫들의 봉기를 결의했었다. 그의 주장이 결코 허무맹랑한 것 이 아니었음을 엿볼 수 있다. 萬積을 비롯하여 여기에 참여한 奴諫들은 그들에 의한 정권 의 탈취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노예였던 그들이 어떻게 정권의 탈취를 亂의 목표로 내세울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다. 武臣亂 이후 고관이 賤錄에서 많이 나왔다고 한 萬積의 말은 대체로 사실과 부합되는 것 이었다. 寺婢의 아들인 李義咬이 정권을 장악했는가 하면, 電吏였던 鄭邦佑가 知御史臺事에 올랐고, 玉工의 아들인 曹元正은 棍密院副使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51) 따라서 이러한 분 위기가 노예들로 하여금 정권탈취를 기도하게 했다는 해석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亂에 참여한다는 것은 生死의 여부가 걸린 문제이다. 그들이 느낀 사회 분위기만으 로 목숨이 걸린 亂에 쉽게 가담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이 정권탈취를 내세워 亂을 일으 킨 보다 직접적인 배경은 아무래도 다른 것으로부터 구해야 할 것 같다. 奴諫들은 武人들의 정권쟁탈전에 동원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崔忠獻의 쿠데타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다음의 기록이 그러한 사정을 알려준다. 10)-① (李)義哎이 마침 彌陀山의 別墅에 있었으므로, (崔)忠獻 등이 가서 그를 죽여 市街에 목 을 메달았다. 이 때 (李義政의 아들) 至純은 大將軍이었고 至光은 將軍이었는데, 變을 듣 고는 家僮을 이끌고 길에서 싸웠다. 至純은 忠獻 등을 도와주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스스로 이기지 못할 것을 알고 至光과 함께 도망하였다( 高麗史 권 128, 李義玫傳). ② (前略) (崔)忠傲 등이 市幕에 앉아서 (權)節平 (孫)碩 및 將軍 權允 柳森植 御史中丞 崔赫尹 등을 分捕케 하여 죽였다. 이 때 吉仁은 壽昌宮에 있다가 變이 급함을 듣고 즉 시 將 軍 命光 朴公襲 등과 더불어 武庫의 兵仗器를 마음대로 꺼내어, 禁軍 宦官 奴隷 千餘 명에게 주면서 타이르기를 지금 忠獻이 亂을 일으켜 罪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니 禍가 장차 너희들에게 미칠 것이다. 마땅히 각기 힘을 합하여 큰 功을 세워라 고 하였 다( 高麗史 권 129, 崔忠獻傳). 10)-①의 기록에서, 崔忠獻의 쿠데타에 李義哎의 아들 李至純은 家僵을 이끌고 맞섰다 한다. 그런데 家僅을 동원한 것은 崔忠獻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그에 의한 李 義哎의 제거가 弟 崔忠粹 甥 朴晋材 族人 盧頓崇 등, 그의 인친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감안하면, 여기에 그의 家僅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은 큰 것이다. 이 당시 그는 후일의 都향 과 같은 私兵 조직을 전혀 갖추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52) 10)-②의 기록에 따르면, 上將 50) 邊太變, 萬積亂 發生의 社會的 素地 p. 470, 洪承基, 앞의 논문 p.318. 51) 金塘澤, 앞의 논문 pp. 45 48. 52) 旗田巍, 高麗武人の政權爭奪と私兵の形成 ( 古代東アジア史論集 上, 1978) pp. 381 385.

- 137 - 軍 吉仁은 禁軍 宦官 奴隷 등에게 무기를 주어 崔忠獻과의 一戰을 독려했다 한다. 당시 吉 仁은 壽昌宮 안에 있었던 만큼, 여기의 奴隷는 公奴隷였을 것이다. 그는 宦官이나 奴諫로부 터 군사적 능력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상황이 그만큼 급박했기에 그들을 동원하려 했다고 생각된다. 아무튼 公奴錬가 禁軍 宦官과 함께 정권쟁탈전에 동원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公私奴隷들은 자신들이 정권쟁탈전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아울러 그들 은 武力을 갖추는 것이 곧 정권장악의 지름길이라는 사실도 깨달았을 것이다. 이는 家僅들이 나무하러 가서 東郊에서 隊를 나누어 전투연습을 하였다. 崔忠獻이 사람을 보내 이 들을 잡도록 하였는데, 모두 숨어 버려서 50여 人만 잡아, 고문한 후 강물에 던졌다( 高麗史節 要 권 14, 神宗 6년 4월) 는 기록을 통해서도 짐작된다. 나무하러 간 노예들이 전투연습을 했다는 것은, 그들이 군사 적인 능력의 소유를 열망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당시의 노예들은 군사적인 능력을 무엇 보다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武力만 갖추면 신분적인 열세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그들이 武人들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스스로 정권탈취를 기도해 보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당시의 執權者 崔忠獻도 자신들과 같은 家僵의 힘에 의존해서 집 권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을 런지도 모른다. 요컨대 그들은 승산을 확신했기에 정권탈취를 목표로 亂을 일으켰다고 생각된다. 萬積 등은 자신들이 亂을 일으키면, 宦官들이 안에서 응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萬積의 이러한 기대는 宦官도 그들과 함께 정권쟁탈권에 동원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宦官 역시 자신들의 능력을 믿고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계획에 쉽게 동조할 것으로 萬猜 등은 판단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奴諫들의 반란에 대한 崔忠獻의 대처는 무자비했다. 萬積의 亂에 가담한 100여 人을 색 출해 처단했을 뿐만 아니라, 나무하러 가서 전투연습을 했던 家僮 50여 명을 강물에 던져 죽였다는 것이다. 전투연습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기에 참여한 모든 노예를 강물에 던져 죽였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가 곧 자신의 정권에 대한 도전 이라는 것을 崔忠獻이 몰랐을 리 없다. 崔忠獻은 그들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힘이 자신의 정권에 위협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崔忠獻은 奴諫들의 반란에 무자비하게 대처했을 것이다. 지방의 노비들 가운데는 다른 民亂에 의존해서 亂을 일으킨 자들이 있었다. 密城 官奴가 그들이었다.

- 138 - 國史館論叢 第20輯 密城의 官奴 50여 人이 官의 銀器를 훔쳐가지고 雲門賊에게 투항했다( 高麗史節要 권 14, 神宗 3년 5월). 雲門賊은 雲門山을 근거로 亂을 일으킨 자들을 지칭하는데, 雲門山은 密城과 가까운 지 역으로, 明宗 23년 (1293)에 金沙彌가 반란을 일으켰던 곳이다.53) 위 기록의 雲門賊과 金 沙彌가 어떤 관계인가 분명치는 않다. 金沙彌의 亂은 明宗 23년에 진압되었으므로, 또 다 른 세력이 이곳을 근거로 亂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明宗 23년 이래 지속적으 로 이곳에 叛軍이 웅거했다는 사실은, 이곳이 쉽게 함락되지 않을 지역임을 시사해 준 다.54) 이곳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반정부적 성향이 그만큼 강했을 런지도 모른다. 여기에 투항한 密 城의 官奴들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았다고 생각된다. 叛軍에 가담하는 것이 官 奴로서의 생활보다 나았다 하더라도, 叛軍이 쉽게 진압될 것으로 판단했다면, 투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密城 官奴의 亂은 다른 民亂에 투항할 것을 전제로 일어난 亂이었다고 할 수 있 다. 이는 官奴들이 亂을 일으키고 난 이후의 결과를 사전에 고려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기존의 民亂이 새로운 奴諫叛亂을 유발시킨 셈이다. V. 맺 는 말 지금까지 필자는 亂의 주모자에 주목하면서 武人執權初期, 즉 明宗 神宗 시대에 일어난 민란의 성격을 兩界와 南道 지방, 그리고 奴碑叛亂으로 나누어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다 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兩界에서 난을 주도한 인물들은 대부분 州鎭軍의 都領을 비롯한 將校였다. 土着人으로서 州鎭軍을 지휘한 그들은 정치 경제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었다. 따라서 중앙정부에 대한 불만은 그들에게 常存해 있었는데, 武臣亂은 그들이 불만을 폭발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 었다. 그들은 그들과 다를 바 없는 군인들이 武臣亂으로 인해 정권을 장악한 사실에 크게 고무되어 있었는데, 더구나 武g亂 이후에는 軍의 통수체계마저 이완되어 있었다. 이에 그 들은 州鎭軍을 배경삼아 지방관이나 防戍將軍의 살해를 일삼았던 것이다. 南道 지방에서 民亂을 주도한 인물들 가운데는 지방 세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武臣亂 으로 인해 새로운 지방 세력가에게 지방에서의 주도권을 양도해야 될 처지에 있던 세력가 들이 동요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武臣亂 이후 중앙에서 낙향한 인물들과 지방에서 세력 53) 高麗史節耍 권 13, 明宗 23년 5¾. 54) 金潤坤, 앞의 논문 p.60.

다툼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武臣亂 이후 증가된 流民이 동원되었다. 경제적 능력을 갖춘 지방 세력가는 쉽게 그들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民亂의 또 다른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군인이 일으킨 亂이 적지 않다는 점이 다. 武臣亂 이후에도 軍人田의 탈점이나 군인의 力役 동원은 여전했는데, 군인들이 느끼는 불만은 그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것이었다. 그들은 亂을 일으키거나 軍에서 이탈함으 로써 반항을 꾀했었다. 그런데 軍에서 이탈한 자들은 그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도적이 되거 나 또 다른 반란에 가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武人執權期 동안에는 지방관의 탐학에 항거해서 일어난 民亂이 상당수 있었는가 하면, 지방관의 파견을 요구한 民亂도 있었다. 亡伊 亡所伊의 난이 후자에 해당되는데, 이 난은 武臣亂 직후의 대폭적 인 監務 파견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한편 武人의 지방관 임용은 지방관의 탐학을 초래했다. 이에 항거하여 농민들이 봉기했는데, 여기에는 金甫當의 亂 당 시 지방수령을 살해한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崔忠獻 이전의 武人政權은 이 러한 농민 봉기에 희유로 대처하였다. 당시는 民亂의 원인을 政權의 失政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였으므로 강경한 진압은 불가능했다. 강경한 진압은 또 다른 반발을 불러일으킬 소 지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는 농민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정부의 태도는 民亂의 발생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표적인 奴婢叛亂으로 꼽히는 萬積의 亂은 정권의 탈취를 목표로 내세운 것이었다. 당 시의 公私奴錬들은 武人들의 정권쟁탈전에 동원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武人執權者도 실은 자신들의 힘에 의존하여 권력을 장악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승산을 확신하고 亂을 일으켰던 것이다. 武人들이 奴諫들을 정권쟁탈전에 이용했던 점이 萬積의 亂을 가능 하게 했던 셈이다. 결국 明宗 神宗代에 일어난 民亂의 대부분은 武臣亂의 영향 아래 일어난 것이었다. 武臣 亂은 중앙의 政界뿐만 아니라, 지방에 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쳐 지방사회가 동요하게 된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1990년 한국사연구지원 과제임)